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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다음 날.

이른 아침부터 언론이고 인터넷이고 할 것 없이 전국이 떠들썩했다.

[오늘 아침, 대한민국 이능차원관리 협회가 기자회견을 열어 조직 해체를 공식적으로 발표했습니다.]

[이두식 협회장은 민영화 시장에서 비영리 기구로는 지속적인 토벌이 힘들 것이라 판단, 보다 안정적인 운영을 위하여 카르마 코퍼레이션과의 병합을 결정했다고 밝혔습니다.]

[김준우 대표는 이번 합병을 기회 삼아 국내는 물론 해외 토벌 시장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 갈 것이라 다짐하며....]

온갖 매체들이 해당 소식을 전하기에 바빴다.

나를 포함한 수많은 이름이 실시간 검색어에 도배되기 시작했다.

당연히 인터넷 반응도 굉장히 뜨거웠다.

― 이…이게 머선 일이고…?

― 뭐임??? 그럼 이제 협회는 없어지는 거임?

└ ㄴㄴ없어진다기보단 그냥 이름만 바꾼 거 같은데

└ 그게 결국 없어진 거지;; 독립 기구가 기업한테 조직을 통째로 넘겨준 건데;;;

― 와 살다살다 협회가 사라지는 걸 보네;;

― 근데 진짜 이래도 되는 거 맞음?? 요즘 세상에 협회 없는 나라는 저쪽 윗동네밖에 없지 않나?

└ 민영화되고 나서 카르마가 협회 역할 다 해줬는데 이제 와서 없어진다고 별로 달라질 건ㅋㅋㅋ

└ ㅇㅇ 다른 기업도 아니고 카르마잖아 협회 없어도 충분함

― 그럼 이제 국내 토벌권은 거의 다 김준우가 관리하는 건가?

└ ㅇㅇ 다른 토벌 기업이 나오지 않는 한 그럴 듯

└ 나오긴 할까? 어떤 정신 나간 놈이 협회까지 흡수한 카르마랑 경쟁하려고 하겠음ㅋㅋㅋㅋ

― 와 씨 김준우가 ㄹㅇ로 대한민국 다 먹었네ㅋㅋㅋㅋ

└ 차라리 잘 됐음 한 명이 딱 중심 잡는 게 낫지ㅇㅇ

└ 솔직히 다른 놈이 독점했다고 하면 불안했을 텐데 '그'라면 뭐~

└ ㄹㅇㅋㅋ 든든하잖어~

인터넷에서 나는, 청소부로 시작해 불과 1년 만에 전국 토벌 시장은 물론 한국 협회까지 모조리 집어삼킨 미친놈으로 통하고 있었다.

다행히 대부분 긍정적인 반응이었다.

물론 심심치 않게 비판적인 의견이 있긴 했다.

그중 토벌 시장을 독점해 국민의 안전을 담보로 돈 놀음을 하면 어쩔 거냐는 의견이 가장 대표적이다.

뭐, 그 밑으로 '김알못'이라는 댓글이 도배되는 바람에 금방 지워지긴 했지만....

아무튼, 온갖 언론과 기사에서도 카르마 코퍼레이션의 인력, 협회의 시스템 그리고 한별 그룹의 자본이 합쳐져 괴물이나 다름없는 조직이 만들어졌다고 떠들어댔다.

실제로 그 기세가 먹혀든 건지 토벌 시장이 다시금 정상화된 지 일주일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토벌 기업은 등장하지 않았다.

'지금 추세로 보면 앞으로도 안 나올 것 같긴 한데.'

이러니저러니 해도 다시 예전처럼 하나의 조직이 한국 토벌 시장의 중심에 서게 됐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전에는 그 조직의 우두머리가 협회장이었지만 지금은....

"어이구 김 대표! 아니, 아니지. 협회장이라고 해야 하나?"

"...."

나라는 거겠지.

"제발 평범하게 불러주시죠."

"하하하! 누구보다 평범하지 못한 놈이, 호칭만은 평범하고 싶나 보네."

박인범 전 협회장이 호쾌한 웃음을 터트리며 사무실로 들어왔다.

사실 협회의 공식 발표가 있기 전, 그에게 귀띔을 해줬다.

누가 뭐래도 지금의 협회는 그가 혈혈단신으로 세운 것이 아닌가.

협회가 해체한다면 아무리 은퇴를 했다고 해도 그에게 먼저 알리는 것이 최소한의 예의라 생각했다.

뭐, 소식을 전하면서도 상당히 못마땅해할 줄 알았지만... 의외로 그는 이 결과를 만족스럽게 여겼다.

"뭐, 아무튼 축하하네. 기어이 내 자리를 이어받는구먼."

그가 건넨 악수를 떨떠름한 표정으로 받았다.

"아직 축하받을 일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사실상 크게 달라진 것도 없고요."

"그게 무슨 소리냐. 엄연히 한국 토벌 시장의 정점에 섰는데. 그것도 기업가로서 말이야. 오히려 협회장이 된 것보다 더 대단한 거지."

과장된 표현을 섞으며 추켜세워줬지만, 원해서 받은 자리도 아닌지라 기쁜 마음은 없었다.

오히려 귀찮은 걸 떠맡아서 찜찜하다고 해야 하나.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냐? 조직 시스템이나 그런 거 말이야."

박인범 전 협회장이 마주 앉으며 물었다.

"전반적인 시스템은 기존 협회의 것을 그대로 유지할 생각입니다. 뭐, 기획과 세부적인 사항들은 제 방식대로 하겠지만요."

"음. 각 부서 담당 인사는?"

"생각해 둔 사람들이 있습니다. 누구보다 잘해줄 겁니다."

"더할 나위 없군."

그가 씨익 웃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내 어깨를 툭 치며 목소리를 높였다.

"어깨 좀 펴라. 이렇게 좋은 날에 왜 그리 축 처져 있어."

"...이번 합병 때문에 조금 돌아가게 생겨서 말이죠."

"뭐, 제2의 국제 협회 건 말이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협회 이름을 달고 진행하는 거랑 기업 이름을 달고 하는 건 큰 차이가 있으니까요. 아무리 해외 지부 사업을 벌인다 한들 결국 비즈니스일 뿐이지, 국제기구로써 인정받을 순 없을 겁니다."

"글쎄다. 그것도 누가 하느냐에 따라 다르지 않을까 싶은데."

"…예?"

"청소부로 입사한 지 고작 1년 만에 자네는 대통령한테 인정을 받았어. 아니, 대한민국 모두에게 인정을 받았지."

"그게 그렇게 대단한 겁니까?"

"야 인마! 만약 서민철이가 협회를 흡수해서 전국 토벌권을 독점하겠다고 했어 봐! 사람들이 지금처럼 박수 치며 가만히 냅뒀겠냐?!"

"...."

그것참 단번에 와 닿는 가정이네.

"아무튼, 국제 협회 건도 지금에서 발전하면 되는 거야."

박인범 전 협회장이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카르마 코퍼레이션을 국제기구로 인정받으려 애쓸 필요 없이, 자네만 국제 사회에서 인정을 받으면 나머진 알아서 따라올 거라는 소리지."

"그건… 너무 어렵군요."

"무슨 소린가. 지금처럼만 하면 되는데."

"...예?"

"...음?"

뭐야.

지금 같은 상황을 생각하는 거 맞겠지?

뭔가 약간 핀트가 어긋난 것 같은데.

그도 뭔가 이상한 걸 느낀 모양이지만, 이젠 그러려니 하는 태도로 넘겨 버렸다.

"아무튼, 너무 걱정하지 말고 자네 마음대로 해봐. 이젠 방해할 사람도 없으니까."

"알겠습니다."

대화를 마치고 그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사무실을 나서자마자 곧바로 다른 사람들이 들어왔다.

"오랜만입니다, 대표님!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가장 먼저 편 팀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뒤를 따라 김민주, 한유빈 그리고 이아영과 하성일이 모습을 드러냈다.

"축하드려요. 선생님."

"아니, 이젠 협회장님이라 불러야 하나?"

"따지고 보면 협회는 아니니까... 그럼 회장님?"

"회장님은 너무 늙어 보이지 않아요?"

각자 한마디씩 내뱉으며 농담을 주고받았다.

"뭐, 호칭은 각자 편한 대로 하시고...."

더 소란스러워지기 전에 맥을 끊곤 곧바로 본론으로 넘어갔다.

이들을 부른 건 다름 아닌 나다.

"여러분들을 부른 이유는 앞으로의 인사이동 건에 대해 공지할 사항이 있어서입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모두의 얼굴이 사뭇 진지해졌다.

준비해둔 서류를 확인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리의 전신은 엄연히 협회니까 조직 구성은 기존과 동일하게 하려고 합니다. 먼저 이아영 씨."

"네."

"앞으로 지원팀과 더불어 이클립스 운영 총괄을 맡아주십시오."

그녀가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한유빈 씨는 던전 청소팀을 비롯해 특수 작전 기획 총괄을 맡아주시고요."

"알았어요."

"아, 그리고 부산물 처리 시설들 계약 관리랑 발주 관리도 해주시고. 또 연수원 청소 파트 교육도 맡아주십시오. 혹시 인원 모자라면 작전 파트 교육도 지원해주시고요."

"...XX."

아주 이젠 대놓고 욕을 하네.

물론 그녀의 도발에 반응하는 건 하수다.

가볍게 무시하고 다음으로 넘어갔다.

"편 팀장님은 이전처럼 계속 통제팀을 맡아주십시오. 그리고 하성일 씨는 해외 지부 사업 총괄을 부탁드립니다."

"알겠습니다!"

"맡겨주십쇼."

"그리고 김민주, 너는...."

이윽고 마지막 순서.

어딘가 긴장한 듯 보이는 그녀를 향해 말했다.

"넌 이제부터 카르마 코퍼레이션의 작전 본부장이다. 앞으로 국내 모든 토벌은 네가 담당해."

"...네?"

"할 수 있지?"

"…네, 네! 열심히 하겠습니다!"

바로 서며 우렁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뭐, 저 정도 되는 녀석을 아직까지 작전팀장이나 시키고 있었던 게 오히려 낭비라면 낭비였지.

이걸로 기본 세팅은 끝났다.

함께 새로운 협회를 이끌어 갈 인재는 현재 상황에서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우리 목표는 1년 안에 국제 토벌 기구로 인정받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생각이지만..., 한 가지는 주의해주셨으면 합니다."

현재 상황 자체는 순조롭지만, 경계할 게 아예 없는 건 아니다.

내 경험상 가장 끈질기고 지독한 녀석.

아무리 높은 자리에 있어도, 아무리 대단한 명성을 가져도 단 한 번에 상황을 밑바닥까지 처박을 수 있는 유일한 녀석.

"'업보'에 꼬투리 잡힐 만한 짓은 하지 마십시오."

"...."

"...."

모두가 뭔가 잘못 들었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더 설명해 줄 생각은 없었다.

'업보'란 것을 설명한다고 아는 것도 아니고.

이 정도면 경고로썬 충분하고 잘 알아들을 거라 생각한다.

"뭣들 하고 있습니까. 할 이야기는 끝났으니 가서 일들 하세요."

***

"자네도 참 자네야."

종로 어딘가 작은 카페.

박인범과 이두식.

각각 1대, 2대 협회장을 위임했던 두 남자가 소소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등 떠밀려 협회장이 된 것도 억울할 만한데, 이제 좀 괜찮아질 만하니까 다른 놈한테 조직을 통째로 넘겨줄 줄이야."

"하하, 제가 선택할 수 있는 건 그것밖엔 없었습니다."

"아쉽진 않나?"

"전혀요."

이두식이 즉답했다.

"애초에 원해서 협회장이 된 것도 아니잖습니까. 까놓고 말해서 협회가 어떻게 되든, 토벌만 안정적으로 할 수 있으면 그만이고요."

"그렇긴 하지."

"무엇보다... 형님도 염두에 두고 계시지 않았습니까. 언젠간 김준우, 그놈한테 협회를 물려줄 거라고."

"...맞아."

"뭐, 지금이 그때인 거죠."

박인범은 커피를 홀짝이며 미소를 지었다.

그리곤 잠시 천장을 바라보며 넋두리를 뱉었다.

"난 가끔 김준우 그놈이 헌터가 됐으면 어땠을까 싶어."

"실력 있는 놈이니 국내 탑 랭킹은 금방 달성하지 않았겠습니까."

"아니, 국내가 아니라 세계 랭킹에서도 꿀리지 않았을 거다. 뭐, 내가 그놈 능력을 다 아는 건 아니지만, 잘만 한다면 국내 최초 S랭크... 아니, 세계 랭킹 1위도 노려볼 만하지 않았을까."

"에이, 랭킹 1위로 되겠습니까? 한 SSS랭크 쯤 달성했다고 칩시다."

"야 인마, 아무리 그래도 그건 너무 갔지."

"어차피 상상인데 뭐 어떻습니까."

이두식이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쯧, 뭐 아무튼 그놈이라면 헌터고 청소부고 가리지 않고 모두에게 존경받는 헌터가 됐을 텐데."

"지금도 그러고 있지 않습니까."

"…하하, 듣고 보니 그렇군."

물론 이들이 김준우가 실제로 SSS랭크의 헌터였으며, 실제로는 모두에게 경멸받는 헌터였다는 사실을 알 리가 없었다.

"그래서 말인데, 자네는 김준우 그놈 어떻게 생각하나?"

"예? 방금 다 말하지 않았습니까."

"아니, 아니. 사위로서 말이야."

풉―.

이두식의 입에 들어갔던 차가 사방으로 튀었다.

"가, 갑자기 그게 뭔 개... 아, 아니, 무슨 뚱딴지같은 말씀입니까?"

"아니, 듣자 하니 아영이랑 허구한 날 붙어 다닌다면서. 비슷한 또래 남녀가 그렇게 붙어 있으면 뭔 일이 나도 안 나겠냐?"

아니면 이미 났을 수도 있고.

나지막하게 중얼거린 혼잣말이 이두식의 귀에도 들어간 모양이다.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파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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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이능운용대책 자문회의.

조현민 대통령을 포함해 여러 인사가 자리한 가운데, 각종 이능 운용에 관련한 정책들과 향후 토벌 방향에 대한 의견들이 계속해서 오가고 있었다.

"...그럼 청소년 헌터 육성 지원금은 다음 분기부터 12% 감축하겠습니다."

여태까지 나온 자문을 종합해서 조현민 대통령이 마무리를 지으며 말했다.

"또 다른 의견 없으십니까?"

"저... 카르마는 어떻게 할 생각이신가요?"

그때, 미래민주당의 성현숙 당대표가 기다렸다는 듯 물었다.

조현민 대통령은 그 질문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요. 우리가 원하는 대로 잘됐는데. 이전과 다르게 너무 몸집을 키운다 싶으면 우리 쪽에서 제재할 수도 있고요."

"물론 이전 협회보다야 저희가 개입하기 쉬워지긴 했지만...."

그녀가 말끝을 흐렸다.

조현민 대통령은 그제야 그녀가 걱정하는 게 카르마 코퍼레이션 전체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김준우 대표가 걱정입니까?"

"...네. 한 개인이 가진 영향력이 너무 크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영향력인지가 중요하겠죠. 지금까지는 선한 영향력이었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지금까지는요."

성현숙 당대표의 말에 조현민 대통령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게 무슨 뜻인가요?"

"믿기지 않을 만큼 대단한 청년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겠죠. 하지만 앞으로도 그럴 거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

대통령이 대답을 아끼자, 그녀가 곧바로 말을 이었다.

"무엇보다 너무 젊은 나이에 큰 힘을 가지게 된 것도 걱정입니다. 지금이야 몰라도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처럼, 5년, 10년이 지나면 분명 다른 것에 눈독을 들일 겁니다."

조현민 대통령은 속으로 헛웃음을 터트렸다.

5년, 10년 일이 본인이랑 무슨 상관인가.

당장 1, 2년 뒤도 보장하기 어려운 게 이쪽 바닥인데.

"사실… 저도 성현숙 당대표님 의견에 동의합니다."

"다른 쪽이면 몰라도 토벌은 국민의 목숨과 직결되는 분야이지 않습니까."

"어느 정도의 브레이크는 필요할 것 같습니다. 나중을 위해서라도요."

이내 눈치를 보고 있던 다른 인사들도 우려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조현민 대통령은 잠시 고민하던 끝에 성현숙 당 대표를 향해 물었다.

"그래서, 뭘 어떻게 하자는 겁니까?"

"지금 김준우는 너무 많은 국민에게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아니… 비판적인 시각이 전혀 없다고 보는 게 정확하겠죠."

"그런데요?"

"그 인식을… 조금만 떨어뜨리는 게 어떻습니까?"

조현민 대통령은 실소가 새어 나오는 걸 손으로 황급히 가렸다.

사실 김준우 대표가 영향력이 크든 말든, 저들과는 크게 상관이 없다.

그래봤자 아직 중견 기업 수준의 대표일 뿐이고… 하나의 산업을 독점했다곤 하지만 그건 이전 협회도 마찬가지였으니까.

무엇보다 협회와 병합한 지 한 달이 되어 가는데도, 매일 같이 사건‧사고가 터지던 이전과 다르게 아무런 문제 없이 잘해주고 있지 않은가.

나중 일을 불안해할 순 있어도, 굳이 지금 당장 견제할 것까진 없다.

그럼에도 저리 나오는 이유는 딱 봐도 하나다.

김준우가 혹시 정치권에 발을 들일 때를 대비해 조금이라도 공신력을 떨어트리려는 거다.

조현민 대통령이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글쎄요...."

그는 생각이 조금 달랐다.

만약 그가 정치권에 발을 들인다면 그건 그때 가서의 일이다.

정치 바닥이야, 오늘의 적이 내일의 친구가 되는 게 하루 이틀 일도 아니고.

'아무리 봐도 정치에는 관심이 없어 보이긴 하지만....'

그는 이내 결론을 내렸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명백하게 불필요하단 의사를 전달했다.

회의에 참석한 인사들은 더 이상의 말을 아낄 수밖에 없었다.

***

회의가 끝난 직후, 성현숙 당대표는 수행 차량에 탑승하자마자 한숨부터 내뱉었다.

"…‧잘 안 되셨습니까?"

"씨알도 안 먹히더라. 어지간히도 예뻐하고 있는 것 같아."

성현숙 당대표는 씁쓸한 표정으로 혀를 찼다.

현재 김준우는 사람들 사이에서 거의 신격화되고 있다.

그는 자선 사업가가 아니다. 엄연히 이익을 목적으로 하는 기업의 대표고, 그런 자가 하나의 산업을 독점했다는 건 분명히 좋은 현상은 아니다.

그런데도 국민들은 그가 토벌 산업을 독점한 것에 불만이 아닌, 안심을 표하고 있다.

만약 김준우가 뚜렷한 정치 성향을 가지고 있다면 손을 잡고 우리에게 유리한 쪽으로 그의 명성을 이용할 수도 있겠지만....

이쪽에서 계속 러브콜을 보내고 있지만, 깡그리 무시하고 있는 걸 보면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공이다.

강대한 적만큼 무서운 것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파악이 안 되는 상대다.

어느 편에 붙을지 모를 저 거물이, 만약 여태까지의 여론을 바탕으로 정계에 진출하려고 한다면… 가늠할 수 없는 혼란이 찾아올 것이다.

최악의 경우, 바른통합당에 붙어서 서울 지역구 후보로 나올 수도 있다.

'...사실상 이길 수가 없는 싸움인데.'

자칫하면 두 눈 시퍼렇게 뜬 채로 서울 주요 지역구를 통째로 바통당 놈들에게 넘겨줘야 할지도 모른다.

어떻게든 대중에게 조금이라도 김준우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키워줄 필요가 있다.

아니, 그런 논리적인 시각이 아니라 그가 어떤 행동을 하던 일단 반대를 하고 나설 집단이 필요하다.

그럼 김준우가 뭘 하든 자연히 브레이크가 걸릴 거다.

'편 가르기를 해볼까....'

머릿속으로 적당한 방법을 찾아보던 성현숙 당대표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말이야... 요즘 일본 지부가 이상하게 조용한데, 혹시 무슨 일 있나?"

"예? 그, 글쎄요. 별다른 소식은 없습니다."

뜬금없는 질문에 보좌관은 퍽 당황스러운 듯했다.

"맨날 지들 언론에 우리 협회 깎아내리고 이상한 책도 내고 하더니만, 어째 요즘 들어 조용해서 말이야."

"애초에 일본이 국제 협회에 가입한 이유 중의 하나가 우리를 의식해서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실제로 반한 프레임도 국제 협회 가입하고 나서 꽤나 심해졌고요. 그런데 최근에 본부 관련된 이슈가 하도 터지고 있으니...."

"지들 잘 나갈 땐 한창 떵떵거리다가, 어째 분위기가 심상치 않으니 입 다물고 있다는 거네."

"뭐… 애당초 국제 협회 본부랑 사이도 그리 좋은 편은 아니잖습니까."

"흐음...."

성현숙 당대표가 턱을 쓰다듬으며 신음했다.

그것도 잠시, 좋은 생각이 떠오른 듯 보좌관을 향해 물었다.

"박 실장, 혹시 정치부 쪽에 아는 기자들 좀 있어?"

"예, 몇 명 있습니다."

"그럼 그쪽 통해서 찌라시를 좀 흘려줄까?"

성현숙 당대표가 미소를 흘리며 말했다.

그래.

또 편 가르기엔 '한일전'만 한 게 없지.

***

카르마 코퍼레이션 서울 본부, 대표이사실.

전 협회가 사용하던 건물을 이름만 바꾼 그곳에서 나는 연신 하품을 쏟아냈다.

"어째 생각했던 것보다 할 게 없네...."

아니, 할 게 없다기보단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내가 굳이 나서지 않아도 알아서 잘 돌아가고 있으니까.

각 부서를 전문가들에게 맡겼으니, 할 일이라곤 사실상 작전 기획밖에 할 게 없었는데... 그마저도 김민주가 작전 본부장이 되어 도맡아 하고 있다.

사실 그 녀석이 실력에 맞지 않게 꽤나 소극적인 성격인지라 조금은 걱정했는데.... 뭐, 아직까진 잘 하고 있는 것 같다.

작전 본부장이 되고 나서 다들 무서워졌다고 하는 걸 보면.

'원래 그래야 하는 자리이기도 하고.'

김민주의 기획과 지휘 스타일이 나와 똑같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그거야 뭐 당연하다.

애초에 그 녀석이 처음 작전팀장을 달았을 때부터 지휘와 기획을 나한테 배웠으니까.

아무튼, 김민주가 이끄는 작전 본부는 꽤나 잘 굴러가고 있다.

그 밖에도 이아영 지원 본부장, 한유빈 기획 본부장 등. 모두가 제 맡은 바 일을 잘 해내고 있다.

특히나 가장 만족스러운 건, 하성일 해외사업본부장.

나를 대신해서 전 세계 독립 협회를 돌아다니며 지부 사업을 도맡았다.

그동안의 영업 노하우가 빛을 발하는 건지 뛰어난 실적을 올리고 있었다.

뭐, 누가 뭐래도 한별 상사의 전 사장이지 않은가.

모르긴 몰라도 기본 이상을 해줄 거라 예상했다.

'무엇보다 국제 협회 놈들도 조용하니 더할 나위 없고....'

이렇게 대놓고 움직이고 있지만, 국제 협회 쪽에선 아직 별다른 움직임이 없다.

그놈들 성격상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 참 이상한 일이다.

뭐, 때를 기다리고 있다거나 아니면 다른 일에 정신이 팔려 있는 거겠지.

어쨌든 이래저래 상황이 좋다.

이대로만 가면, 어쩌면 1년 안에 국제 협회 지부 수를 따라잡을 수도....

"대표님."

긍정 회로를 돌리고 있던 그때, 하성일 해외사업본부장이 사무실로 들어왔다.

"아, 본부장님. 중동으로 출장 가셨던 거 아니었습니까?"

"어제 막 귀국했습니다."

"어떻게 계약은 잘 됐습니까?"

"아직 진행단계이긴 한데… 일단 반응은 좋습니다. 조만간 키르기스스탄과 우즈베키스탄 쪽 독립협회는 인수할 수 있을 겁니다."

"역시 믿고 맡기길 잘했군요."

"하하하! 제가 칭찬에 약한 건 또 어찌 아시고."

하 본부장이 멋쩍은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인다.

하지만 이내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저, 사실 그것 때문에 온 건 아니고...."

"예?"

그가 목소리를 팍 낮춘다.

뭐지? 또 뭘 물어왔길래 표정이 저리 비장한 건가.

"그… 일본 지부가 조만간 국제 협회를 탈퇴한다는 찌라시가 돌고 있습니다."

"...예?!"

생각지도 못한 소식에 미간이 좁아졌다.

그간 조용했던 곳에서 갑자기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출처가 어딥니까?"

"정치부 기자가 귀띔해준 겁니다."

"정치부...?"

예상치도 못한 출처에 눈이 가늘어졌다.

뭔가 일부러 뿌리는 것 같은 느낌인데.

아니나 다를까, 하 본부장도 같은 생각이라는 듯 입을 열었다.

"찌라시에 움직이는 건 너무 도박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저도 좀 냄새가 나긴 하는데.... 일본 지부라면 생각을 좀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흐음...."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아닌 게 아니라, 일본 지부는 확실히 구미가 당기는 곳이다.

그들이 가진 강점이라면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단연코 최고 강점은 자본도, 인력도 아니다.

'하라무라 가문....'

일본 지부에 속한 가문이지만 국제 협회에도 영향력을 행사할 만큼 유명한 집단이다.

만약 일본 지부와 함께 그 가문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면 국제 협회를 제어할 수단을 가질 수 있을지 모른다.

"어떻게, 미리 준비를 좀 해둘까요?"

하성일 본부장도 그걸 염두에 둔 듯, 조심스레 물었다.

만약 국제 협회를 탈퇴한다는 찌라시가 진짜라면, 지금부터 준비해야 한다.

탈퇴 직후 혼란스러워질 때를 노려야지, 만약 독립협회로서 자리를 잡아버리면 그땐 늦는다.

지금부터 이것저것 지원을 퍼주면서 간을 본다면 확률이 꽤 높겠지만....

'만약 저게 근거도 없는 찌라시에 불과하다면....'

그냥 일본에다가 간이고 쓸개고 다 퍼주는 꼴이 되겠지.

잘못하면 역풍을 맞아 괜한 빌미만 제공하게 될지도 모른다.

"일단 정보가 확실한지부터 알아볼 필요가 있겠군요."

"어떻게요?"

"뭐, 별수 있겠습니까. 직접 가봐야죠."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가야지 않겠는가.

"쓰읍, 저희가 여태까지 일본 지부랑 교류가 없어서 건수도 없이 가는 건 좀 속 보이지 않을까요?"

"건수야 만들면 그만이죠."

내가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자, 그 또한 따라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저도 동행하고 싶지만… 아직 중동 쪽 일이 안 끝나서...."

"괜찮습니다. 그쪽 일이 먼저죠."

"이아영 본부장님과 가실 겁니까?"

"아뇨. 그 사람 요즘 너무 바빠서 이런 일로 건드리기엔 좀 미안하군요."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결정을 내렸다.

"마침 적당한 사람이 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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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헌터 협회 소속, 일본 도쿄 지부.

"본부에 대한 국제 사회의 시각이 점점 안 좋아지고 있습니다. 물론 이전 조사에서 큰 문제가 발견되진 않았으니 활동하는 데 지장은 없겠습니다만...."

히나 보좌관이 지부장에게 보고하던 중 말끝을 흐렸다.

쇼이치 지부장이 전혀 듣지 않고 있었던 탓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굳이 보고하지 않아도 모두 알고 있는 내용이 아닌가.

한국과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국가 전체를 카르텔로 규정했다는 건 그 사안이 매우 심각하다는 뜻이다.

애초에 장난이나 사소한 오해로 내릴 리 없는 규정이니 말이다.

그런데 '양측 간 오해'가 있었다며 카르텔 규정 일주일 만에 입장을 철회했다.

국제 협회에 대한 시각이 안 좋아지는 건 당연한 일이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쇼이치 지부장은 이마를 짚었다.

국제 협회의 평판이 떨어지는 건 이번 번복 사태 때문만이 아니다.

불과 며칠 전에 아프리카 지부 통합 사건으로 구설에 휘말려 전수 조사까지 들어가지 않았던가.

결과적으로 증거가 없다고 수사가 종료되긴 했지만, 국제 협회의 위치를 감안했을 때 이런 이슈가 자꾸 일어나는 건 좋지 않다.

'아니, 사실 국제 사회가 본부를 어떻게 보든 우리랑은 상관없긴 한데....'

어쨌든 썩어도 준치라고 했던가.

평판이 떨어지는 것 정도로 문제가 됐으면 그렇게 커질 수도 없었다.

설령 문제가 된다고 한들 각 지부에까지 피해가 갈 리도 없고.

중요한 건 국제 사회의 시선이 아니라… 각 국가의 국내 시선이다.

아니,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일본 협회에 있어 하라무라 가문의 시선이겠지.

하라무라 가문.

과거만 해도 작은 공방을 운영하는 대장장이 가문이었지만, 한 소문이 퍼지면서 슬금슬금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그들이 만든 검이 몬스터를 상대로 특별한 힘을 발휘한다는 소문이었다.

뭐, 이 나라에선 오래전부터 요도니, 명도니 하는 소문이야 늘 있었지만, 이건 실제 사례가 존재했다.

몇 년 전, 레드 등급 던전에서 토벌대가 전멸하는 사고가 있었다.

그때 하라무라 공방제 검을 가지고 있던 C급 헌터가 홀로 보스를 쓰러트렸다.

이 사건은 삽시간에 일본 전역으로 퍼졌고, 하라무라 가문은 한순간에 명가로 도약했다.

이후 일본 내에 모든 검사가 하라무라 공방의 검을 찾기 시작했다.

심지어 검사 클래스가 아닌 헌터들도 검을 쓰는 기현상까지 생겨났다.

그들의 명성은 결국 국제 협회까지 퍼지며, 본부 쪽에서 먼저 인수합병을 제안하기에 이르렀다.

다시 말해, 하라무라 가문이 일본 협회의 국제 협회 가입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이다.

무엇보다 국제 협회 소속이 된 직후, 5대 공방장인 그놈은 검 외에 다른 무기도 제작하기 시작했다.

창, 둔기, 활, 트랜스폼 웨폰… 심지어는 총기까지.

국제 협회의 헌터 또한 너도나도 하라무라제 무기를 찾게 되었다.

암시장에선 하라무라제 검 하나가 수백억 원에 팔린다는 이야기까지 있을 정도였다.

이렇게 하라무라제 무기의 수요가 전 세계적으로 어마어마하다 보니, 그들의 영향력은 국내를 넘어 국제 협회마저 쥐고 흔드는 수준이 되었다.

그런 가문이 최근 국제 협회의 행보를 탐탁지 않게 보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그냥 변덕인지도 모르겠다.

이런저런 이슈가 터진 이후로는 아무 이유 없이 무기 수주를 거부하고 있으니....

'진작 기강을 잡아놨어야 했는데....'

이전에도 바로잡을 시점은 분명 있었지만, 지금에 와선 어쩔 도리가 없었다.

하라무라 가문이 가진 영향력은 한 지부가 어찌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국내뿐만 아니라 전 세계 국제 협회 소속 헌터들은 여전히 그들의 무기를 찾고 있는데, 이렇게 갑자기 등을 돌려버리면....

지부는 망한다.

최악의 경우, 국제 협회에서 손절할지도 모른다.

"공방에는 찾아가 봤어?"

"회견을 요청했지만, 만나주질 않습니다."

"대체 원하는 게 뭐래? 이유라도 좀 알려주던가. 아무 말도 없이 잠수 타 버리면 우리보고 어쩌라는 거야!"

쇼이치 지부장은 결국 참다못해 목소리를 높였다.

하라무라 가문과 국제 협회 본부 사이에 낀 입장인 만큼 지금의 상황은 매우 곤란했다.

"직접적인 말은 없지만, 눈치를 보아하니 국제 협회에서 탈퇴하길 바라는 게 아닐지.... 그 가문, 예전부터 신뢰를 중요시하지 않았습니까. 더는 신뢰하지 못하겠다는 뜻일 수도...."

히나 보좌관이 조심스레 덧붙였다.

쇼이치 지부장 또한 같은 생각이었다.

워낙 보수적인 가문이니, 사실 그거 외엔 생각할 수가 없다.

"만약 국제 협회에서 탈퇴하면 우리에게 붙어줄 것 같냐?"

"그건 잘 모르겠지만, 탈퇴하지 않으면 이대로 영영 등을 돌릴 수도 있습니다."

"빌어먹을...."

쇼이치 지부장은 넥타이를 풀어 재꼈다.

하라무라 가문과 국제 협회를 등에 업은 지도 벌써 몇 년이 지났다.

든든한 지원 덕에 전 세계 협회 중 규모 면에서 5위에 들 정도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이를 기반으로 아직도 독립 협회를 유지하고 있는 한국 협회를 그토록 신나게 까댔는데....

든든한 지원자 중 하나를 버리고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모르긴 몰라도 어떤 식으로든 다른 한쪽의 보복을 각오해야 한다.

"...잠깐."

그때, 불현듯 쇼이치 지부장의 머릿속에 번뜻 묘안이 스쳤다.

"생각해 보니까... 하라무라 가문이 특별한 게 아니라, 그놈들이 가지고 있는 공법이 특별한 거 아닌가?"

"네, 네…?"

"공법만 있으면 만드는 사람은 딱히 상관없는 거 아니냐는 거지."

"...."

히나 보좌관은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차린 것이다.

"오히려 잘 됐어. 어떻게 해서든 공법만 손에 넣으면, 하라무라 가문을 내칠 수 있어. 언제까지 그 근본도 없는 가문 눈치만 볼 순 없지."

"그럼 국제 협회 탈퇴는...."

쇼이치 지부장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수단 방법 가리지 말고, 그놈들 공법을 뺏어올 생각이나 하자고."

***

"...시간 있냐고요?"

"예."

한창 업무 중이던 한유빈 기획 본부장이 도끼눈을 뜨고 나를 쏘아봤다.

"왜, 또 시간 있으면 토벌 지원이나 나가라고요?"

"...."

왜 이렇게 날이 서 있는 거지.

오늘 기분이 안 좋나?

"이번에 일본 지부에 출장 갈 건데, 같이 갈 수 있냐고 물어보는 겁니다."

"...?"

"그래서 시간 됩니까, 안 됩니까?"

"아, 그… 정말이에요? 저랑 같이 가는 거...."

"그럼 뭐 이걸로 장난치겠습니까. 시간 없으니까 빨리 일정이나 확인하고 대답이나 주시죠."

"자, 잠깐만요!"

한유빈 본부장은 이내 퍽 당황한 듯 서류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그리곤 얼마 지나지 않아 고개를 끄덕였다.

"...될 것 같아요. 다음 달까진 특수 작전도 없고."

"잘됐군요. 그럼 내일모레 출국할 예정이니 준비해주세요."

"그런데… 왜 하필 저예요? 아영 씨랑 민주 씨는 어쩌고."

"둘은 필수 인원이지 않습니까."

"...전 아니라는 거예요?"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겁니다, 비교적. 애초에 그쪽, 미국 지부에서 일하기 전에 일본 지부에서 몇 년 있었다면서요."

"몇 개월이에요. 지부 간 협력 사업 때문에 잠깐 파견 갔다 온 게 다예요."

"어쨌든 일한 적은 있었다는 거 아닙니까."

"그렇긴 하죠."

말꼬리 잡고 늘어지는 게 도통 성가신 게 아니다.

무서워서 뭔 말을 못 하겠네.

"그래서, 일본에는 왜 가는 건데요?"

"일단 지원 사업 계약이 명목이긴 합니다만...."

"명목 말고 진짜 목적은요?"

"일본 지부가 국제 협회를 탈퇴할 거라는 찌라시가 돌고 있습니다. 그걸 확인하려고 가는 겁니다."

한유빈 본부장의 눈빛이 사뭇 진지해지더니 턱을 한차례 쓰다듬었다.

"아마 무작정 지원 계약 건으로 찾아가면 무조건 거절당할 거예요. 알잖아요. 게네들 자존심 드럽게 센 거."

"어차피 상관없잖습니까. 진짜 계약하러 가는 것도 아니고, 탈퇴할 건지 안 할 건지만 알아보러 가는 건데."

"그걸 계약도 안 하는 사람한테 알려줄 이유는 없죠. 외부인한테 티를 낼 놈들은 더더욱 아니고요."

"...."

듣고 보니 그러네.

"그럼 뭐, 좋은 생각이라도 있습니까?"

"지부를 바로 공략하는 게 아니라, 그 주변부터 접근해야 할 거예요."

"예를 들면?"

"흐음...."

그녀가 생각에 잠기길 잠시.

"하라무라 공방부터 시작해보죠?"

꽤나 그럴싸한 해답을 내놓았다.

"유명한 공방이잖아요. 재료 수출 계약 건으로 접근하면 이야기는 나눠볼 수 있을 거예요. 운 좋으면 지부 상황도 알아낼 수 있을 거고요."

티는 내지 않았지만… 실로 괜찮은 접근이다.

맨날 잡일만 시켜서 새삼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전 국제 협회 소속 작전팀장이라는 게 괜히 있는 경력은 아닌가 보군.

"좋습니다. 그럼 그렇게 하는 거로 하고, 출국 준비부터 합시다. 혹시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해 주시고요."

"알았어요."

이야기를 마치고 사무실을 빠져나오면서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아닌 게 아니라, 생각보다 일이 잘 풀릴 것 같은 조짐이었다.

***

도쿄 근교, 사이타마현.

하라무라 공방 앞.

"...."

"...."

우린 굳게 닫힌 공방의 문을 바라보며 잠시 침묵하고 말았다.

문 앞에 붙은 종이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지부 관계자 출입금지, 수주 계약 건 일절 사절]

"...뭡니까? 이게."

"영업을... 안 한다는 뜻인 거 같은데요."

"그걸 몰라서 물어본 것 같습니까?"

"...."

뭐?

공방에 접근이 어쩌고 어째?

'이 인간을 믿은 내 잘못이지....'

한숨을 푹 내쉬며 등을 돌렸다.

마침 길거리를 지나가는 한 중년 여성이 있길래 붙잡곤 물었다.

"저… 실례합니다. 말씀 좀 여쭤도 될까요?"

"예? 뭔가요?"

"다른 게 아니라, 여기 언제부터 문 닫은 건가요?"

"아 하라무라 씨? 며칠 됐죠."

중년 여성은 당시의 상황을 상기하는 듯, 눈을 위로 뜬 채 말을 이었다.

"한 일주일 전쯤인가? 요 앞에서 웬 사람들이랑 막 싸우시더라고요. 시비라도 걸린 줄 알았는데, 보니까 지부 관계자들 같았어요."

"지부와 마찰이 있었다는 건가요?"

"나야 모르죠. 듣자 하니 공법을 사겠다느니 했던 것 같은데. 뭐, 하라무라 씨가 팔 리가 없겠죠."

그녀가 어깨를 으쓱인다.

지부 사람들이 공법을 사겠다고 찾아왔다?

뭔가 일이 있긴 있는 모양이네.

"그럼 지금 하라무라 씨는 어디에 계신가요? 혹시 자택 주소나...."

"글쎄요. 저도 그것까진 모르겠는데...."

"알겠습니다. 실례 많았습니다."

"호호, 아니에요."

여성은 그 말을 끝으로 가던 길을 재촉했다.

"...."

"...."

또다시 찾아온 침묵.

나는 고개를 털며 입을 열었다.

"어쩔 수 없죠. 원래 계획대로 갑시다."

"지부에 직접 알아보려고요?"

"그것밖에 더 있습니까."

죽치고 있어봤자 아무런 소득도 없지 않은가.

이럴 바엔 정면 돌파라도 해보는 수밖에.

'무엇보다... 둘 사이에 뭔 일이 있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그렇게 다시 발걸음을 옮기려고 하던 그때였다.

"저...."

"...?"

웬 젊은 남자가 자전거를 끌고 쭈뼛거리며 우리에게 다가왔다.

"호, 혹시 하라무라 씨 손님이신가요…?"

나와 한유빈은 잠시 서로 눈을 맞췄다.

"네."

"네, 맞아요."

마치 처음부터 정해둔 것처럼 동시에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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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라무라 공방.

5대째 이어져 온 하라무라 가문의 전통이자, 현재 국제 협회 헌터들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는 브랜드.

하지만 공방 내부는 큰 명성에 어울리지 않게 꽤나 소박하고 작았다.

'아무리 봐도 그냥 평범한 공방인데....'

어쩌다 전 세계 헌터들이 찾는 명품이 된 건지 참으로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뭐, C급 헌터가 하라무라제 무기로 레드 등급 던전을 홀로 토벌했다는 이야기야 나도 듣긴 했다만....

회귀 전, 이미 하라무라 가문의 실체에 대해 알고 있던 나로서는 그저 실소를 뱉었다.

"스승님이 공방에 안 나오신 지 좀 되셨거든요. 혹시 의뢰 맡기신 게 있다면 제가 찾아드릴게요. 혹시 성함이...."

자신을 잇시키라 소개한 그 젊은 남자는 우리를 손님용 테이블로 안내하며 말했다.

물론 손님인 척했을 뿐이라 손을 저으며 둘러댔다.

"아, 괜찮습니다. 나중에 하라무라 씨한테서 직접 받겠습니다. 중요한 물건이라. 하하."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직접 받으시려면 꽤 오래 걸릴 수도 있는데...."

"예예, 상관없습니다. 것보다… 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곧바로 화제를 돌리며 본론으로 들어갔다.

"잇시키 씨는 하라무라 씨와 어떤 관계십니까?"

"관계랄까… 그냥 하라무라 씨 밑에서 배우고 있는 견습생입니다."

"공방에서 일하신 지는 얼마나 되셨죠?"

"1년 조금 넘어가네요. 뭐, 아직까지 잡일만 하고 있지만요."

잇시키가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그럼… 공방과 지부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혹시 아십니까?"

내 물음에 그가 퍽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지금 지부가 저희 공방에 꽤 화가 많이 나 있는 상태에요. 스승님이 며칠 전부터 일방적으로 모든 무기 수주를 거절하셨거든요."

"...일방적으로? 왜죠?"

"이유는 저도 몰라요. 근데 워낙 신뢰를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분이라... 아마 국제 협회 본부를 더는 믿지 못하셔서 그런 게 아닐까 싶네요."

"흐음...."

그런 이유라면 납득은 된다.

특히나 오래전부터 가업을 이어오는 장인들이라면 관계라든지 신뢰라든지, 그런 부분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들이 왕왕 있으니까.

'이런저런 구설에 오르는 걸 보고 환멸을 느꼈다고 한다면야 말은 되는데....'

과연 정말 그런 이유만으로 공방을 버리고 잠수를 탔을까?

글쎄다.

하라무라 가문의 명성이 사실이라면 몰라도....

"뭐, 말씀은 안 하셨지만 아마 스승님은 일본이 국제 협회에서 탈퇴하길 바라시는 것 같아요."

"따지자면 무언의 시위 같은 거군요."

"그렇게 볼 수 있겠네요."

잇시키가 좋은 표현이라고 생각한 건지, 실실 웃었다.

뭐, 탈퇴 찌라시가 괜히 나온 건 아니구만.

하라무라 가문이 이렇게 일방적으로 나온다면 일본 지부로서는 꽤나 골치가 아플 것이다.

아마 국제 협회와 하라무라 가문,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겠지만 그 어느 쪽의 손도 선뜻 들어주진 못하겠지.

국제 협회를 선택하자니 하라무라라는 어마어마한 브랜드가 떨어져 나갈 것이고, 하라무라를 선택하자니 국제 협회에서 등을 돌려야 할 테니까.

무엇보다 항상 번듯한 겉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하는 그들의 성격상, 국제 협회 탈퇴는 죽으라는 소리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지부와 대화를 나눠보진 않으셨습니까. 그런 사항이라면 최소한 협의는 해볼 만했을 텐데요."

"안 그래도 지부 사람들이 몇 번 공방에 찾아오긴 했지만 할 이야기 없다면서 모두 돌려보내셨어요. 워낙 외골수 같은 분이라."

"그렇군요."

똥고집이라는 걸 좋게도 포장하고 있네.

이건 오히려 지부가 불쌍한 수준이다.

대화를 나눠볼 여지도 없이 이렇게 일방적으로 결정을 내버리면 어떻게 하는가.

"지부도 포기했는지 어째 한동안 잠잠하다 했는데.... 며칠 전부터 다른 목적으로 찾아오더라고요."

"그건 들었습니다. 무기 공법 사겠다고 했다면서요?"

"네, 맞아요. 당연히 스승님은 엄청 화를 내셨죠. 몇 대 째 내려온 공법을 돈으로 사겠다고 하는 거냐고....

말끝을 흐리더니, 이내 조심스레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게 몇 번 쫓아내고 나니까, 그다음부턴 다른 사람들이 오기 시작했어요."

"다른 사람들?"

"네, 네. 그... 야쿠자 같은...."

"야쿠자? 설마 지부가 보낸 겁니까?"

"뭐, 정황상 그렇지 않을까요."

"허...."

재밌네?

명색이 국제 협회 소속 지부가 뒷조직이랑 손을 잡고 겁박으로 나온 건가.

"처음엔 협박만 하는 정도였는데… 갈수록 심해지고 있어요. 스승님이 공방에 안 나오게 된 것도 그때부터였고요."

"공법은 끝까지 내놓으실 생각이 없으시군요."

"당연하죠! 그걸 내놓으면 하라무라 공방의 대가 끊기는 거나 마찬가지잖아요!"

...견습생이라면서 꽤나 격하게 반응하네.

하긴, 하라무라 공방이 없어지면 본인도 일자리를 잃는 셈이니 당연한 건가.

"그나저나 그렇게 극단적으로 하라무라 가문의 공법을 노린다는 건... 공법만 뺏고 가문과 연을 끊겠다는 뜻 아니에요?"

그때 잠자코 듣고 있던 한유빈이 넌지시 물었다.

나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하라무라의 브랜드와 국제 협회 지부의 타이틀을 둘 다 버리지 못하겠다는 거겠죠. 어찌 됐건 결과적으론 국제 협회를 탈퇴할 생각이 없다는 거고."

"그렇겠죠."

결론에 도달했다.

일본 지부는 국제 협회를 탈퇴하지 않는다.

적어도 현재 그럴 의지는 없다.

뭐, 이걸로 필요한 정보는 얻었다.

애초에 일본 지부 입장을 알아보기 위해 온 거니까.

이렇게 되면 당연히 일본 지부 사업은 손을 떼는 게 맞겠지.

"하 본부장님한테도 알려줘야겠군요. 그럼 이제 슬슬 돌아갑시다."

자리에서 일어나자 잇시키가 곧바로 따라 일어났다.

"버, 벌써 가시는 건가요?"

"예, 뭐… 더 있어봤자 하라무라 씨를 만날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요. 혹시 더 하실 말씀 있으신가요?"

"아, 아뇨 그건 아닌데... 조금 있으면 그 사람들이 올 시간이라...."

그는 꽤나 불안한 표정으로 시계를 확인했다.

마침 그때였다.

"어이, 하라무라 씨. 오늘은 계시나?"

"오늘도 안 계시면 우리도 좀 곤란한데~."

기다렸다는 듯, 껄렁한 복장의 남자 세 명이 공방으로 들이닥쳤다.

딱 보니 잇시키가 말했던 그 야쿠자들인 것 같았다.

'시간까지 맞춰 오는 걸 보면 참 성실한 놈들이네....'

그래서 그렇게 불안해했던 건가.

"엥? 오늘은 손님이 계시네?"

"뭐야, 그럼 하라무라 씨도 있다는 거 아니야?"

"아, 아뇨! 이분들도 스승님이 안 계셔서 돌아가려던 참이었어요! 아무 관계도 없는...."

"어이, 형씨. 하라무라 씨 지금 어디 있어?"

남자는 잇시키의 말을 듣지도 않곤 나를 위아래로 훑으며 물었다.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글쎄요. 저도 알고 싶군요."

쾅―!!

그러자 다짜고짜 주먹으로 문을 내리친다.

"어이, 지금 얕보는 거야?!"

"우리가 누군지 알아? 타치바나 구미 동강회 소속이라고!"

"...."

뭐 어쩌라는 거야.

거의 10년 전에나 볼 겁박 수준에 하마터면 웃음이 튀어나올 뻔했지만....

저들은 나름 진지해 보였기에 애써 참았다.

"좋은 말로 할 때 당장 그 인간 데려와!"

"혹시 저 안에 있나? 어이! 하라무라 씨!! 오늘은 얼굴 좀 봅시다!"

"공방 다 박살 내기 전에 빨랑 나오쇼!!"

쾅, 콰작―!!

그들은 막무가내로 공방 안을 헤집기 시작했다.

무미건조하게 바라보고 있자니, 그들 중 한 명이 또다시 시비를 걸어왔다.

"형씨. 진짜 하라무라 씨 어디 있는지 몰라?"

"예. 저도 멀리서 찾아왔는데, 못 뵈고 가는 게 참 아쉽군요."

"에이씨, 그럼 그냥 가던 길 가쇼."

남자가 상대하기도 귀찮다는 손을 휘젓는다.

뭐, 굳이 발끈할 이유도 없었기에 그들을 가로질러 공박 밖으로 나섰다.

'생각보다 일이 좀 큰가 보네....'

진짜로 야쿠자까지 끌어들였을 줄이야.

이쪽 지역을 관리하는 야쿠자들이라면 괜히 엮여봤자 좋을 게 없다.

뭐, 애초에 우리랑 상관도 없는 일이고.

이럴 땐 그냥 못 본 척 조용히 빠져주는 게 상책이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난 말이야. 다짜고짜 깽판 치는 놈들을 보면...."

뚝, 뚜둑―.

뒤에서 소름 끼치는 음성이 들렸다.

'아, 맞다....'

뒤늦게 깨달았다.

동행한 인간이 다른 누구도 아닌 한유빈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존나게 부러워."

[고유 스킬 : 하이패닉 버서커]

깽판 치러 왔다가 하필 만난 게 한유빈이라니.

쟤네들도 참 재수가 없네.

***

"왜 이렇게 사람이 다혈질입니까?"

"...."

"잘못하다가 꼬투리 잡혀서 차질 생기면 그쪽이 책임질 겁니까?"

"...일반인을 상대로 겁박을 하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어요."

"참 나, 그냥 사람 패고 싶었던 거 아니고요?"

"...."

뭐야, 왜 대답이 없어.

설마 진짜야?

'미치겠네....'

옅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가로저었다.

가지런히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세 남자를 바라봤다.

성한 곳이 없는 몰골들.

조금 전의 껄렁한 모습들은 어디 가고 아주 공손한 자세들이 아닐 수 없다.

심지어 한 명은 아예 훌쩍이고 있다.

그래 뭐… 벌어진 일을 어쩌겠는가.

이왕 이렇게 된 거, 한 번 더 확인하는 셈 치지 뭐.

"당신들, 어디서 보냈습니까?"

"...."

"...."

슬쩍 물었지만, 예상대로 대답은 없었다.

"한유빈 씨? 이 친구들이 아직 좀 부족하나 봅니다. 조금 더 손을...."

"크, 큰형님께서 보냈습니다!"

"저흰 말단이라 시키는 대로 하는 것뿐입니다!"

"하, 한 번만 용서해주십쇼!"

그제야 대답에서부터 사과까지 조건반사처럼 튀어나온다.

물론 그 무엇도 내가 원하던 대답은 아니다.

"큰형님이 시킨 걸 누가 모릅니까? 그 형님한테 의뢰를 맡긴 게 누구냐고?"

"...."

"...."

아니 이 새끼들은 툭 하면 입을 닫네.

어쩔 수 없지.

이 방법까진 안 쓰려고 했는데.

"한유빈 씨, 공방 문 좀 잠가주세요."

"잇시키 씨는 내보낼까요?"

"그래야겠습니다. 충격받으실 수도 있으니. 아 그리고 거기 렌치랑 해머 있습니까?"

"앞치마도 필요해요?"

"예."

곧바로 쩔그럭 소리를 내며 공방의 온갖 도구들이 내 앞에 놓였다.

"어떻게... 팔부터 하는 게 좋겠습니까, 아니면 다리부터 하는 게 좋겠습니까?"

"시작부터 너무 잔인하잖아요. 우리가 깡패도 아니고."

한유빈이 치를 떨었다.

"가볍게 손톱부터 하죠."

그녀가 씨익 미소를 짓자, 남자들의 몸이 바들바들 떨리기 시작했다.

사실 이미 무슨 대답이 나올지는 알고 있다.

잇시키의 말대로라면 정황상 지부에서 의뢰한 게 뻔하지 않은가.

다만 거액의 사업이 걸린 일이니 그저 확실히 하고 싶을 뿐이었다.

"그, 그게 말입니다...."

그때 한 녀석이 입을 뗐다.

"하라무라 씨가 의뢰했습니다."

"...예?"

"...뭐?!"

그리고 골 때리는 대답이 돌아왔다.

"하, 하라무라 씨가 공법을 요구하는 척 깽판을 쳐달라고...."

"허, 허허허...."

시발.

이러면 완전히 나가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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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

남자의 말을 듣자마자 한유빈이 다짜고짜 그의 뺨을 후려쳤다.

"지금 우리보고 그걸 믿으라고? 거짓말하지 말고 똑바로 대답해."

"거, 거짓말 아닙니다! 저, 정말로 하라무라 씨가 직접 의뢰한 일…!"

"하여간, 좋게 말해선 들어 처먹질 않는다니까."

그녀가 다시금 주먹을 들어 올린 그때였다.

"잠깐만요."

내가 곧바로 나서서 제지했다.

그녀는 의아한 표정이었지만, 나 또한 생각을 정리하고 있던 터라 대답해줄 여유는 없었다.

'잠수를 탄 공방의 주인이 자신의 공법을 뺏어달라고 직접 의뢰까지 넣었다라....'

얼핏 들으면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하지만 만약 하라무라 가문의 실체가 내가 알고 있는 대로라면....

"뭐… 아주 없을 법한 소리는 아니군요."

"뭐예요? 설마 저놈들 말을 믿는 거예요?!"

한유빈이 기가 차다는 듯 쏘아붙였다.

"믿고 자시고, 저 사람들이 거짓말할 이유가 뭐가 있겠습니까?"

"왜겠어요! 사실 지부가 의뢰했다는 걸 숨기려고...."

"그랬다면 조금 더 그럴싸하게 둘러댔겠죠. 뭐하러 누가 들어도 이상한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

한유빈은 순간 말문이 막힌 듯 입을 닫았다.

그녀도 그제야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그리고 오히려 우리한텐 좋은 소식입니다."

이내 나는 잇시키의 눈치를 살피며 한국어로 말을 이었다.

"이거 잘하면… 하라무라 가문, 우리가 먹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네?"

한유빈의 눈썹이 물결쳤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일본 지부를 인수해야 하라무라 가문을 끌어들이든 말든 할 거 아니에요. 근데 일본 지부가 국제 협회를 탈퇴할 생각이 없는 이상 인수는...."

"우리가 일본 지부를 인수하려고 한 건, 하라무라 가문의 영향력을 흡수할 수 있다는 게 첫 번째 이유였습니다. 나머지는 전부 부수적인 요소였죠."

"...그런데요?"

"어차피 지부와 하라무라 가문 사이가 틀어진 이상, 일본 지부를 인수한다고 해도 그 목적은 이루지 못할 겁니다. 알맹이 없는 껍데기를 거금을 주고 가져올 필요는 없죠."

"그럼 하라무라 가문을 손에 넣을 수도 있다는 건 무슨...?"

"순서를 바꾸자는 겁니다."

내가 말하자 한유빈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일본 지부를 인수해서 하라무라 가문의 영향력을 흡수하는 게 아니라, 하라무라 가문을 먼저 손에 넣고 그걸 빌미로 일본 지부를 국제 협회에서 탈퇴시키자는 거죠."

"...네?"

"만약 인수에 실패한다고 해도 어쨌든 하라무라 가문은 우리 손에 들어온 이후일 테니, 이러나저러나 초기의 목적은 이룰 수 있을 겁니다."

"...."

갑자기 스케일이 커져 버려 당황한 건지, 한유빈이 살짝 주춤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뭐…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어요? 일이 너무 커지는 거 같은데. 사실 인수를 안 해도 우린 딱히 손해 볼 게 없잖아요."

"그렇긴 합니다. 우리가 정말 돈벌이를 위해서 사업을 하려는 거였다면 말이죠."

당연하겠지만, 나는 이 사업으로 돈을 벌려는 게 아니다.

그저 국제 협회를 무너뜨리고, 그 자리에 올라서려는 것뿐.

하라무라 가문은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너무나도 좋은 도구다.

미심쩍은 찌라시를 굳이 확인하러 온 건 도구를 잘 사용하기 위해서일 뿐이지.

물론 도저히 하라무라 가문을 손에 넣을 방법이 없었다면 깔끔하게 포기했을 거다.

이미 해외 지부 사업에서 꽤나 성과를 올리고 있는 와중에 안 되는 걸 억지로 밀어붙이다간 이도 저도 안 되는 꼴이 될 테니까.

"그런데 뭐… 일말의 방법이 남아 있다면 시도는 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가능한 거죠?"

"가능할 겁니다."

무릎을 꿇고 있는 세 남자를 바라보며 모두가 알아들을 수 있게 일본어로 말했다.

"우리가 지부보다 먼저 하라무라 씨를 찾는다면."

"...."

"...."

당황스러워하는 남자들.

내가 뭘 요구하는 건지 단번에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내놓을 수 있는 답은 정해져 있었다.

"저, 저흰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하라무라 씨가 의뢰했다는 것도 전해 들은 거지, 저희와 직접 이야기를 나눈 것도 아니고…."

아니나 다를까, 곧바로 변명부터 쏟아낸다.

뭐, 이해한다. 일반인을 상대로 깽판이나 치는 말단들이 뭘 알겠는가.

"당신들한텐 기대도 안 했습니다. 알아도 당신들 큰형님이 알겠죠."

"마, 맞습니다!"

"큰형님만 알고 있는 사항이고, 저흰 정말 아무것도…!"

"그러니 당신들 사무소로 안내하세요. 제가 직접 큰형님한테 물어볼 테니."

세 남자의 눈이 동시에 벌어졌다.

어딘가 일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모양이었다.

"저...."

이윽고 남자 한 명이 조심스레 입을 뗐다.

"주, 죽을 수도 있어요."

"...하하, 큰형님을 생각해서 하는 말이라면 걱정 마시죠."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거야.

"죽이진 않을 거니까."

"...."

"...."

뭐, 하는 거 봐서 결정하겠지만.

***

같은 시각, 쇼이치 지부장에게도 최근 하라무라 공방에 대한 소식이 전달됐다.

"타치바나 구미 동강회 소속 조직원들이 하라무라를 찾고 있답니다."

히나 보좌관의 보고에 쇼이치 지부장의 얼굴이 대번에 구겨졌다.

"뭐…? 그쪽이 왜?"

"자세힌 모르겠지만, 하루가 멀다 하고 공방에 찾아가서 행패를 부리고 있답니다. 아무래도 다른 사람이 의뢰한 것 같습니다."

"의뢰? 또 누가 공법을 찾고 있다는 소리야?"

"정황상 그런 것 같습니다."

다른 놈이 공법을 찾고 있다니.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이번 일에 대해 알고 있는 게 지부 말고 또 누가 있다고?

"혹시 우리 쪽 직원들이 의뢰한 거 아니야?"

"아뇨. 이번 일에 대해 알고 있는 직원들을 상대로 조사해봤는데, 우리 쪽에서 한 의뢰는 확실히 아닙니다."

"그럼 대체 어떤 새끼가...."

쇼이치 지부장이 주먹을 꾸욱 쥐었다.

며칠 전 공법을 사겠다고 공방을 찾아간 이후로 갑자기 종적을 감춰버렸다.

현재 지부에서도 자체적으로 하라무라를 찾는 중이었다.

협박하든 협상하든, 어쨌든 그를 만나야 뭘 해도 할 수 있을 테니까.

물론 이쪽도 해야 할 업무가 있으니 쓸 수 있는 인원에 한계는 있었지만, 그가 일본 바닥에 붙어 있는 한은 독 안에 든 쥐 신세였다.

결과적으로 그를 찾는 건 시간문제일 테니 딱히 급할 건 없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방해꾼이 끼어들 줄이야....'

경쟁자가 끼어버린다면 계획에 차질이 생긴다.

무엇보다 타치바나 구미라면 도쿄 주변을 꽉 잡고 있는 놈들이 아닌가.

최근 자격이 정지된 헌터들을 대거 영입했다는 소식도 있는 걸 보면... 마음만 먹는다면 사람 하나 찾는 건 일도 아닐 것이다.

대체 본인들 외에 또 누가 공법을 노리고 있는 건지는 몰라도 만약 공법이 그놈들 손에 들어가 버린다면, 지부는 하라무라라는 브랜드를 영영 잃게 될지도 모른다.

"이렇게 된 이상 조용히 진행하긴 글렀군."

이윽고 쇼이치 지부장이 넌지시 입을 열었다.

"어쩔 수 없지. 우리도 사람을 푸는 수밖에."

"사람이라면...?"

"왜 그, 저번에 새로 배정된 현장직 놈들 있잖아."

"밸런스팀 말씀이십니까?"

쇼이치 지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사람 하나 찾겠다고 그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건...."

"그럼 이대로 하라무라가 엄한 놈에게 넘어가는 걸 구경만 하고 있을까?"

"그건...."

히나 보좌관이 말끝을 흐렸다.

물론 쇼이치 지부장 또한 그들의 악명을 잘 알고 있었기에 불안하긴 매한가지였지만… 어쩌겠는가.

국제 협회 지부라는 타이틀과 하라무라라는 브랜드, 그 어느 것 하나 포기할 수 없는 상황인데.

그러니 무슨 일이 있어도 지부가 먼저 찾아야 한다.

그 과정에서 몇 명쯤 죽어 나가는 것 정도는 감수해야겠지.

***

타치바나 구미 동강회 사이타마현 본부.

세 남자의 안내를 받아 도착한 동강회 회장의 사무실은 영화에서 보던 전통적인 분위기와는 사뭇 달랐다.

'그냥 평범한 회사 사무실이네....'

물론 그 주변을 지키고 있는 놈들은 하나같이 평범하지 않은 생김새였지만.

"뭐야?"

그때 동강회의 회장이 나와 한유빈을 훑으며 입을 열었다.

행동대원처럼 날카로운 눈빛은 아니지만,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위압감을 주는 카리스마가 있었다.

이윽고 우리를 데려온 남자가 날 대신해 먼저 말을 꺼냈다.

"이, 이분들이 형님을 뵙고 싶다고 하셔서...."

"이분들?"

쾅―!

갑자기 테이블을 냅다 걷어차는 회장.

"지금 내 앞에서 누굴 높이는 거야?!"

"죄, 죄송합니다!!"

곧바로 세 남자의 허리가 90도로 휘었다.

그것도 잠시, 회장은 이내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보아하니 외국인 같은데, 나한텐 무슨 볼일이지? 돈 빌리러 온 거면 돌아가. 우린 외국인 상대론 영업 안 하니까."

"하라무라 씨를 찾고 있습니다."

"...!"

스릉―

본론을 꺼내자 주변에 있던 덩치들이 난데없이 칼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동시에.

촤악―!

"으아아악!!"

우리를 데려온 남자 중 한 명을 그대로 베어버렸다.

살벌하네, 시발.

"입단속조차 못 하는 놈들은 필요 없어."

이윽고 쓰러진 남자를 사무실 밖으로 질질 끌고 나갔다.

운 좋게 살아남은 두 명은 사시나무 떨듯 발발 떠는 중이었다.

"너, 뭐냐? 지부 놈이냐?"

회장이 나를 향해 물었다.

"아뇨. 그저 하라무라 씨를 만나러 온 외국인입니다. 당신이라면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해서 찾아왔습니다."

"죽을 수도 있다는 소리는 못 들었고?"

"들었습니다."

"그런데도 여길 기어 왔다는 거지…?"

콱―!

이내 단도를 꺼내 테이블 위로 찍어 내렸다.

그리곤 눈을 부라리며 나를 노려보길 잠시.

"너 이쪽 사람이냐?'

"아뇨. 평범한 사업가입니다."

"씨팔, 무슨 사업가가 눈빛이...."

알 수 없는 말을 흘리더니, 갑자기 혼자 웃음을 터트린다.

어느 것 하나 제정신인 놈들이 없네.

"하라무라를 찾으러 왔다고?"

"예. 알고 계십니까?"

"알고 있지. 알고는 있는데… 미안하지만, 알려 줄 수는 없어."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유가 있습니까?"

"나랑 오랜 친구거든. 자신을 숨겨달라고 부탁했으니 들어줘야지."

"오랜 친구라… 그럼 하라무라 씨에 대해서도 잘 알고 계시나요?"

"당연. 그놈 궁둥이에 점이 몇 개 있는지도 알고 있지. 크흐흐."

또다시 실없는 소리를 하며 혼자 웃음을 흘린다.

"그럼...."

그런 그를 향해 상체를 숙이며 넌지시 입을 열었다.

"하라무라 씨가 특별한 무기를 만든다는 소문이... 거짓말이라는 것도 알고 계시겠군요."

"...?!"

"...에?"

"...하?"

말하기 무섭게 한유빈을 포함한 주변에 있던 모두에게서 충격에 젖은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

하지만 그들과 다르게 두목은 도리어 조용해졌다.

차갑게 굳은 표정.

조금 전 농담을 던지던 양아치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실로 위압감이 느껴지는 분위기 속에서 한참을 침묵하던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저 두 놈… 데려가서 죽여."

그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나와 한유빈을 향해 다가오는 행동대원들.

"뭐, 그럴 줄 알고 저도 챙겨온 게 있습니다."

조심스레 자리에서 일어나며 주머니에서 챙겨온 것을 꺼내 들었다.

플라스틱으로 만든 장난감 칼이었다.

"요 앞 기념품 가게에서 팔길래 하나 사 왔습니다."

"너 이 새끼, 지금 우릴 얕보는…!"

"얕보는 걸 다행으로 아시죠."

[습득 스킬 : 극초식 - 어검술]

"최소한 죽이진 않는다는 소리니까."

칼에서 시퍼런 섬광이 번쩍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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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민주당 대표 사무실.

"김준우 대표가 엊그제 일본으로 출국했다고 합니다."

성현숙 당대표의 보좌관이 소식을 전했다.

그녀는 대수롭지 않게 펜을 굴리며 대답했다.

"그래? 찌라시가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해 보러 갔나 보네."

"그런 것 같습니다."

"미끼를 물긴 물었구나."

성현숙 당대표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뭐, 최근 일본 지부와 하라무라 가문 사이가 틀어졌다는 이야기만 듣고 퍼트린 찌라시지만, 모르긴 몰라도 일본 지부가 국제 협회를 탈퇴할 리는 없다.

그리고 김 대표가 지부에 집적 찾아갔다고 해도 그놈들이 그걸 알려줄 리도 없겠지.

물론 다른 데서 정보를 찾기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릴 테고.

'두 발로 신나게 뛰어다니라고. 뭐, 그런다고 확인은 힘들겠지만.'

결국, 김준우 대표는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일본 지부를 깔끔하게 포기하거나, 혹은 탈퇴설이 확인될 때까지 일본 지부와 우호 관계를 맺으며 상황을 지켜보거나 말이다.

"박 실장이라면 김 대표가 무슨 선택을 할 것 같아?"

"글쎄요. 워낙 예측하기 힘든 사람이라...."

"난 어느 정도 예상이 돼."

"…네, 네?"

"돈이 목적인 놈들은 사실 생각하는 게 다 거기서 거기 거든. 김 대표는... 무조건 상황을 지켜볼 거야."

성현숙 당 대표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결과를 내놓았다.

"일본 지부와 우호 관계를 맺으면 두 가지 메리트가 있어. 첫 번째는 만약 그들이 정말 국제 협회를 탈퇴했을 때 그간의 관계를 빌미로 숟가락을 얹을 수 있다는 거."

"김 대표가 그거 하나에 도박을 걸진 않을 것 같은데요."

"그렇겠지. 그런데 일본 지부가 끝까지 탈퇴하지 않아도 딱히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야."

"...하라무라 가문 때문에 그렇습니까?"

"맞아. 그게 두 번째 메리트지."

굳이 인수까지 가지 않아도 우호 관계를 유지하면 하라무라 가문의 영향력에도 무임승차할 수 있다.

사업가의 입장에선 무시할 수 없는 메리트다.

물론 현재 일본 지부와 하라무라 가문 사이가 조금 틀어졌다곤 하지만, 그것도 결국 시간이 자연스럽게 해결해줄 문제다.

일본 지부 입장에선 국제적인 브랜드인 하라무라를 놓칠 수 없을 테고, 하라무라 가문은 본인들의 주 고객인 국제 협회를 포기할 수 없을 테니까.

그러니 카르마 코퍼레이션은 반드시 일본 지부에 붙는다.

그리곤 콩고물 하나 떨어질 때까지 계속 굽신거리며 간이고 쓸개고 다 빼다 주려고 하겠지.

그때, 기사 몇 줄 내주면 이쪽이 원하는 방향으로 여론이 움직일 것이다.

'뭐, 국가 감정은 기업 이미지에 너무 치명적이니까....'

한국을 대표하는 카르마 코퍼레이션이 일본 지부에 붙었다는 소식 하나만으로 여론이 극단적으로 양분화될 거다.

대다수 국민이 그들의 행보를 비난할 게 뻔하다.

더 나아가 앞으로는 무슨 일을 해도 '친일 기업'이라는 꼬리표처럼 늘 따라붙겠지.

'모르긴 몰라도 이전처럼 설치긴 힘들 거야.'

그거면 충분하다.

일방적인 비난으로 평판을 깎고 영향력을 약화시키면 되는 거다.

"그런데… 김 대표가 그걸 고려하지 않았을 리 없었을 텐데요. 그런 리스크를 감안할 만큼 하라무라 가문이 대단한 겁니까?"

"당연하지. 그만한 가치가 있어, 그 가문은. 앞으로도 그럴 거고."

성현숙 당 대표가 미소를 지었다.

"어쨌든 김 대표는 일본 지부에 붙을 수밖에 없어. 뭐, 하라무라 가문에 대한 소문이 거짓말이 아닌 이상."

별다른 뜻 없이 흘린 말이었지만.

그녀는 그게 사실인지 꿈에도 몰랐다.

***

"끄으으...."

"으윽…!"

신음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왔다.

사이타마현 도심가에 위치한 타지바나 구미 동강회 본부.

회장을 제외한 모든 행동대원이 난장판이 된 사무실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뭐, 뭐야…!"

회장은 뒤늦게 무언가 잘못된 걸 깨달았다.

바짝 굳은 얼굴로 겨우 입을 열었다.

"너, 너 대체 뭐야! 다른 조직에서 보낸 놈이냐?"

"사업가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우릴 건드렸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알아? 타치바나 구미 전체를 상대로 전쟁이라도 벌이겠다는 거냐...!"

"스읍,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닐 텐데요."

장난감 칼로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다가갔다.

"그 천하의 하라무라 가문이 사실 다 만들어진 거짓이었다는 거, 지부가 알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지금 날 협박하는 거냐?"

"예. 협박하는 겁니다. 그러니 빨리 하라무라 씨를 데려오세요. 그쪽 오랜 친구라면서요. 어떤 게 더 친구분을 위한 일인지 정도는 아실 거라 생각합니다."

"...."

그는 날 쏘아보고 있었지만, 눈빛에 고민의 기색이 역력했다.

"대답하기 싫으시면 어쩔 수 없군요. 이 사실은 제가 직접 지부에다가...."

"그것만은 참아주게!"

그때였다.

사무실 문을 벌컥 열고 한 중년의 남성이 들이닥쳤다.

"류, 류헤이?! 숨어 있으라고 했잖나!"

"보아하니 다 알고 온 것 같은데... 더는 숨은들 무슨 의미가 있겠어."

다짜고짜 사무실에 난입한 불룩한 배의 남성이 천천히 다가왔다.

하라무라 류헤이.

하라무라 가문의 5대 공방장이자, 현 하라무라 가문의 가주.

드디어 그가 모습을 드러냈다.

"처음부터 여기 숨어 계셨나 보군요."

"아무리 지부 놈들이라고 해도 여기엔 함부로 못 들어오니까. 뭐, 설마 다른 녀석이 쳐들어올 거라곤 생각도 못 했지만."

그는 먼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하라무라 류헤이라고 하네."

"카르마 코퍼레이션 대표, 김준우라고 합니다."

"카르마라면... 최근 한국 협회와 합병했다는 그...?"

"맞습니다."

"허! 영광이군. 그 유명인이 나를 직접 찾아오다니."

"제가 더 영광이죠. 선대에 이어 하라무라 가문을 전 세계적으로 유행시킨 장본인이 아니십니까."

"...."

언뜻 보면 으레 하는 칭찬으로 보인다.

하지만 실상을 아는 사람에겐 명백히 비꼬는 말이었다.

"...이렇게 들킬 줄은 몰랐군. 그것도 외국 기업의 대표한테."

하라무가 한 방 먹었다는 듯 반응했다.

"그래서, 대체 어떻게 안 건가?"

"딱 보면 척이지, 뭘 이유를 묻고 그러십니까?"

어물쩍 대답을 회피했다.

설명할 수 있는 이유가 아니었다.

그저 회귀 전에 거짓말이라는 게 들통났기에 알고 있을 뿐이다.

당시 하라무라의 진술을 떠올리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처음부터 속일 생각으로 시작한 건 아니었겠죠. 식칼이나 만들던 선대가 이능운용무기로 처음 방향을 틀었을 때 홍보를 위해 조금 과장된 마케팅을 하는 정도였겠죠."

"...."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특수한 공법이다, 다른 공장형 무기랑은 다르다, 등등. 실제로는 공장에서 나오는 B급 무기보다 못한 퀄리티였는 데도 말이죠."

"아버지가 그런 부분엔 소질이 있으셨지."

"네. 실제로 어느 정도는 먹혔죠? 입소문도 타고, 다른 지방에서 찾는 사람도 생기고. 뭐, 그때까지만 해도 마냥 좋아하셨겠지만...."

여기서 문제가 터져버린다.

C급 헌터가 하라무라 제 무기로 레드 등급 던전 보스를 잡아 버린 것이다.

상식적으로 C급 헌터가 정말 무기 하나 때문에 레드 등급 보스를 쓰러트렸다는 건 말이 안 된다.

그건 그저 우연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일본의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다.

사람은 사실을 믿는 게 아니다.

믿고 싶은 사실을 믿는 거다.

"선대가 했던 과장된 마케팅에 더해져서 순식간에 유명세를 탔죠. 뭐, 특수한 힘이 깃든 무기라느니 하면서 말입니다."

"...맞네."

"일이 너무 커지고 있다는 걸 자각했을 땐, 이미 국제 협회에까지 그 소문이 퍼진 후였겠죠."

이 시점에서 부자의 반응이 엇갈린다.

겁을 먹고 이제라도 수습하려고 했던 선대와 이걸 기회로 더 많은 돈을 벌려고 한 자식.

하지만 오래가지 않아 선대가 사망하면서 공방장을 물려받은 자식은, 이때다 싶어 그 거짓 소문에 본격적으로 편승하기로 마음먹는다.

칼이나 만들던 공방에서 되지도 않는 이능운용 무기를 찍어내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실제 성능은 당연히 C랭크 이하 수준이었겠지만.

"여태까지 들키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외국인들이 가진 일본에 대한 환상 때문이었겠죠. 당신은 그걸 교묘하게 이용한 거고요."

"...."

그의 고개가 점차 떨어졌다.

설마하니 국제 협회 소속의 헌터들이 무기 성능이 떨어진다는 걸 몰랐겠는가.

당연히 도저히 무기로 쓸 수 없는 수준이었기에 하라무라 공방에 클레임을 넣었을 것이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이라는 건....

'우리가 만든 무기는 자격을 갖춘 자만이 그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이딴 되지도 않는 정신력에 입각한 답변이었다.

이것만으로도 기가 찰 노릇인데, 보다 더 어이가 없는 건 국제 협회 헌터라는 놈들이 그걸 정말로 믿었다는 사실에 있다.

"정말 멍청하기 그지없는 놈들이죠. 그렇지 않습니까?"

"...."

별다른 생각 없이 한유빈에게 동의를 구했지만, 어째 그녀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뭡니까, 그 표정?"

"아, 아니, 아무것도...."

"설마 그쪽도 샀습니까?"

"...미국 지부에 있을 때 워낙 유명하다고 해서."

"...."

세상에.

그 멍청이가 내 옆에 있을 줄이야.

"근데 뭐… 소문처럼 특별한 효과는 없었고, 사실상 부적으로...."

"...."

"...충격이네요."

변명을 늘어뜨리던 한유빈이 결국 고개를 떨어트렸다.

뭐, 따지고 보면 그녀도 피해자인 셈이니 뭐라 그럴 것까진 없지만.

암튼 다시금 본론으로 돌아와 하라무라를 향해 물었다.

"그나저나 제가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왜 갑자기 납품을 거절하신 겁니까? 이제 와서 들킬까 봐 무서웠습니까?"

"국제 협회에 대한 이슈가 하루가 멀다고 터지고 있지 않은가. 이젠 발을 뺄 때라고 생각했네."

"지부가 그걸 잠자코 봐줄 거라 생각한 건 아니시죠?"

"당연히 찾아올 거라고 예상은 했네.... 하지만 설마하니 공법을 사겠다고 나올 줄은 몰랐네."

하라무라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공법을 넘겨줄 순 없었을 것이다.

아니, 애초에 줄 수 있는 공법이 없었다.

모든 게 거짓말이었으니까.

하지만 끝까지 버티다간 오히려 의심을 받을 게 뻔했겠지. 그래서 친구에게 부탁한 걸 거고.

차라리 공법을 빼앗겼다고 하면 지부로서도 더는 어떻게 할 수 없을 테니까.

"근데 뭐, 이미 저한테 들킨 이상. 더는 숨길 수 없을 겁니다."

"그렇겠지...."

대충 이야기는 됐다.

이제부터가 진짜 본론이다.

"뭐, 너무 걱정하지 마시죠. 제가 협박이나 하려고 하라무라 씨를 찾은 것도 아니니까. 오히려 그 반대죠."

"...뭐?"

"저흰 조만간 일본 지부를 강제로 국제 협회에서 탈퇴시킬 생각입니다."

하라무라와 동강회 회장의 눈이 동시에 커졌다.

"만약 하라무라 씨가 거기에 동참해주신다면...."

나는 작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하라무라 가문의 그 소문, 제가 사실로 만들어드리겠습니다."

지금 그가 가장 원하는 걸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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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무슨 소리인가?"

하라무라 류헤이는 본인이 뭘 들은 건지 이해하지 못했다는 반응이었다.

"말씀드린 그대롭니다. 당신의 거짓말, 진실로 만들어 드리겠다는 겁니다."

"...."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적막이 가라앉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하라무라는 복잡해 보이는 표정을 지었다.

"잘나가는 기업의 대표님이 나를 도와주겠다니.... 고맙기는 하다만, 대체 왜…?"

"고마워하실 필요 없습니다. 도와주겠다는 게 아니니까."

"어, 뭐?"

"제가 뭐가 아쉬워서 당신 거짓말까지 덮어주려고 하겠습니까. 그저 당신의 거짓말이 들키지 않는 편이 제게도 이득이 되니까, 움직이겠다는 말입니다."

설마 내가 아무 이유도 없이 남의 나라 가문 문제까지 끼어들 거라 생각한 건가.

그렇게 생각했다면 염치가 없어도 너무 없는데.

거짓말이 들통나버리면 당연히 하라무라 가문의 국제 협회에 뻗친 영향력도 한순간에 잃어버릴 것이다.

하라무라 가문이 패가망신하는 거야 정해진 수순이겠지만.

뭐, 그들이 망하는 거야 내 알 바는 아니고.

난 그저 국제 협회에 대항할 수 있는 무기를 잃어버리고 싶지 않을 뿐이다.

이건 도와주려는 손길이 아니다.

낭떠러지에 몰린 그에게 목숨값을 받고 손을 내밀어주는 거지.

"저희는 하라무라 가문의 영향력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마침 일본 지부가 국제 협회를 탈퇴할 수도 있다는 소문을 듣고, 혹시나 인수를 진행할 수 있을까 해서 찾아온 건데. 보아하니 그럴 수 있는 상황은 아니더군요."

"어림도 없겠지. 애초에 국제 협회를 탈퇴할 생각이었으면 굳이 나한테 공법을 사러 오지도 않았을 거고."

"맞습니다. 근데 뭐, 오히려 잘 됐습니다. 굳이 지부를 인수하지 않아도 목표는 이룰 수 있을 것 같군요."

"...."

하라무라의 표정이 점점 굳어갔다.

잠시 생각을 정리하는 듯하더니 이내 그가 물었다.

"그러니까 자네 말은... 나를 도와주는 대가로 한국과 손을 잡으라는 건가?"

"글쎄요. 제가 한국을 대표해서 온 것도 아니니 그건 너무 거창하군요. 그냥 저하고만 손을 잡는다고 생각해주시죠."

"그래서, 뭘 어떻게 도와주겠다는 건가? 듣자 하니 카르마 코퍼레이션에서 최근에 최대 규모의 연구소를 설립했다던데. 거기 공법이라도 알려주려고?"

"하라무라 씨, 착각하시면 곤란합니다."

아직도 본인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건가?

지금 누구한테 부탁할 처지가 아닐 텐데.

'심지어 이클립스를 노린다고?'

사람이 정도라는 게 있어야지. 어디서 주제도 모르고....

"저흰 당신이 내뱉은 거짓말을 진실로 포장해주려는 거지, 당신이 정말 특별한 무기를 만들 수 있게 해 주려는 게 아닙니다."

"...."

"말씀드렸듯, 당신은 여태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국제 협회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가문으로 남아 있기만 하면 됩니다. 당신이 무슨 무기를 만들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니죠."

그제야 하라무라는 본인을 도와주려는 게 아니라는 걸 실감한 모양이었다.

그는 퍽 씁쓸한 표정으로 물었다.

"내가… 뭘 어떻게 하면 되는 건가?"

"뭘 딱히 하실 필요는 없고. 아마 지금쯤이면 지부도 당신을 찾는 데 혈안이 되어 있을 겁니다. 놈들의 성격상, 꽤나 극단적으로 나올 수도 있으니까요. 괜히 다치지 마시고 일단은 지부장을 만나십시오."

"…뭐?"

그의 눈썹이 꿈틀거린다.

"지부를 내 발로 걸어 들어가라 이건가? 그놈들이 대놓고 공법을 요구하면 어떡하라고...."

"그럼 대충 둘러대세요. 저도 타이밍 맞춰서 지부로 갈 테니까."

"그, 그게 무슨... 대체 뭘 하겠다는 건가?"

"하아. 하라무라 씨."

참 답답한 사람이군,

본인 명줄 늘려주겠다는데, 뭘 자꾸 꼬치꼬치 캐묻는가.

"그냥 입 닫고 제가 시키는 대로만 하세요. 여기서 패가망신하고 싶지 않으시면."

"...."

"어쨌든 전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괜히 험한 꼴 보지 말고 지부로 가세요."

그 말을 끝으로 난 한유빈을 데리고 사무실을 벗어났다.

"아영 씨 마음을 좀 알겠네."

한유빈이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갑자기 그게 뭔 소립니까?"

"답답해 죽겠다고요! 뭘 알고 있었으면 미리 얘기라도 좀 해주던가. 무슨 생각인지 말도 안 해주고 끌고만 다닐 거면 난 왜 데리고 왔대?!"

"...."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화살이 날아들었다.

'...이아영 본부장이랑 다닐 땐 한 번도 못 들어본 말인데. 하긴, 이아영이랑은 정반대인 사람이니까.'

물론 이아영 또한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궁금해하기는 한다.

하지만 그녀는 굳이 대답해 주지 않아도 어쨌든 따라와 준다.

자신에게 말을 하지 않는다는 건, 자신은 몰라도 되는 일이라는 걸 알고 있는 사람이니까.

좋게 말하면 자신의 역할을 알고 있는 거고, 나쁘게 말하면 너무 맹목적인 거겠지.

하지만 한유빈은 그런 성격이 아니다.

이아영과 다르게 옆에서 묵묵히 지원해주는 스타일이 아닌, 앞에서 이끄는 성격에 가깝다.

그래서 본인 스스로가 납득 못 하면 움직이지 않는다.

앞에서 이끄는 사람 입장에서는 귀찮긴 해도, 그게 나쁘게만 볼 순 없다.

반대로 말하면, 본인이 납득만 한다면 그게 무슨 일이 됐건 완벽하게 처리하는 사람이니까.

귀찮긴 해도 어쩔 수 없지.

"미안합니다. 이번엔 좀 급해서 말을 못 했습니다. 뭐, 앞으로는 주의하도록 하죠."

"아, 어? 네, 네...."

설마 사과를 받을 줄은 몰랐는지, 오히려 본인이 더 당황스러워한다.

참 나, 본인이 원하는 대로 해주겠다는데 반응이 뭐 저래.

"아무튼, 그래서 어떻게 하라무라 가문의 거짓말을 진실로 만들겠다는 거예요?"

화제를 전환하듯 한유빈이 넌지시 물었다.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 대답했다.

"하라무라 씨한테는 지부장을 만나서 대충 둘러대라고 했지만, 사실 무조건 들킬 수밖에 없을 겁니다. 공법에 눈이 돌아간 놈들인데 협박이든 협상이든 하려고 들 테니까요."

"그, 그럼 위험한 거 아니에요? 지부에 거짓말인 걸 들켜버리면..."

"일본의 유명한 속담 중에, 거짓말도 100번을 하면 사실이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게 한·일 양국의 과거사 문제로 번져 이래저래 말이 많긴 했지만, 일본인이 어떤 사람인가 이해할 때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그런 놈들이, 하라무라 가문의 소문이 거짓말인 걸 알았다고 해서 국제 협회 본부에 이실직고라도 할 것 같습니까?"

"...아."

한유빈은 그제야 내 말을 이해한 듯했다.

"어떻게서든 숨기려 할 겁니다. 지부가 알아서 진실로 만들어줄 거라는 소리죠."

나는 먼저 걸음을 옮기며 말을 이었다.

"우린 그저 거기에 불을 좀 붙여주면 됩니다."

***

카르마 코퍼레이션 대표가 사무실을 나선 지 얼마 안 된 시각.

회장의 사무실에는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아 있었다.

"설마 놈들 말을 믿는 건 아니지?"

"...."

회장이 물었지만 하라무라는 대답이 없었다.

"저건 그냥 협박하는 거야, 이 자식아! 저놈이랑 손을 잡았다간 평생 약점 잡혀서 살 거라고!"

"그럼 뭐 여기서 다 이실직고하고 패가망신하라고?"

"아,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잘 숨어다니면 되지 않겠냐는 거지."

"언제까지? 1년? 2년? 아니면 죽을 때까지?"

"...."

"너도 알잖아. 우리 아들놈 이번에 도쿄대 들어간 거. 어미 없이 컸는데도 그렇게 똑 부러진 놈이 됐다고. 최소한 아들놈 결혼식에는 갈 수 있어야 하지 않겠냐."

하라무라는 이미 결정을 내린 모양이었다.

"…·어쩔 수 없지."

그렇게 자리에서 일어나던 참이었다.

쾅―!

"혀, 형님!!"

한 조직원이 문을 부서져라 열어젖히며 다급하게 회장을 찾았다.

"뭐, 뭐야. 무슨 일인데?"

"본부에 웬 놈이 침입했습니다! 형님을 찾고 있는 것 같은데, 막을 수가 없습니다! 벌써 밑에 있는 놈들은 다 당했습니다!"

"...뭐라고?"

"이, 일단 피하셔야 합니다!! 제가 시간을 끌 테니 어서…!"

탕―!

돌연 뒤에서 들려 온 총성과 함께 조직원이 바닥에 푹 쓰러졌다.

"여기 계셨네요."

한 젊은 남자가 어색한 일본어를 구사하며 사무실에 들어섰다.

회장과 하라무라의 몸이 바짝 얼어붙었다.

"지부장님이 아주 눈에 불을 켜고 찾고 계십니다, 하라무라 씨. 이제 고집 그만 피우시고 갑시다."

젊은 남자가 싸늘한 시선으로 바라보자 하라무라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안 그래도 가려고 했네. 그러니 총은 내려두고...."

두 손을 들며 남자에게 다가가려던 순간.

"이, 이 자식…! 지금 여기가 어딘 줄 알고!"

가만히 두고 볼 수 없던 회장이 곧바로 단도를 꺼내 들었다.

[고유 스킬 : 염라]

쿡―!!

"...커헉!"

물론 명을 재촉하는 짓일 뿐이었다.

난데없이 회장의 가슴에서 비석이 솟아올랐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고개가 풀썩 떨어졌다.

"...."

하라무라는 바들바들 떨리는 눈으로 그 광경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이내 젊은 남자의 무미건조한 표정이 시야에 들어왔다.

놈을 본 순간 하라무라는 직감했다.

녀석은 자신들과는 전혀 다른 세계에 사는 인간이라는 것을.

***

"간만입니다. 하라무라 선생님."

기어이 쇼이치 지부장과 하라무라 료헤이가 일본 지부에서 얼굴을 마주했다.

"이, 이보게.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지 않나. 나 하나 찾겠다고 사람까지 죽이다니...."

하라무라는 여전히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쇼이치 지부장은 눈곱만큼도 신경 쓰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시다시피 지부를 키운 건 선생님입니다."

의례적인 이야기로 대화의 포문을 열었다.

"그런데 갑작스레 소통을 끊으시니, 운영이 곤란해진 걸 떠나서 너무나 안타깝더군요. 그간 누구보다 신뢰가 쌓였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죠. 저로선 이렇게밖에 할 수 없었습니다."

"…·하고 싶은 말이 뭔가."

"선생님이 왜 갑작스레 연락을 끊은 건지 잘은 모르겠지만…·. 저흰 아직까지 선생님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

"다시 수주를 받을 생각이 없으시다면 공법이라도 팔아주십시오. 가격은 섭섭지 않게 쳐 드리겠습니다."

"거절하겠네."

"백억 엔."

"...?!"

"그래도 싫으십니까?"

고작 한 가문의 공법에 백억 엔은 말도 안 되는 가격이었다.

다른 사람 같았으면 당연히 받아들였을 조건이겠지만... 하라무라는 그럴 수 없었다.

내준다면 거짓말이라는 게 들통난다.

애초에 가문의 공법이라고 할 만한 것도 없으니까.

애써 대답을 아끼고 있자, 쇼이치 지부장의 시선이 하라무라를 데리고 온 젊은 남자에게 향했다.

"황 대리님. 하나만 더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말씀하시죠."

"이번에 하라무라 선생의 아드님이 도쿄대에 입학했다고 합니다. 이름은 마사토. 경제학부 1학년에 재학 중이라는데, 여기로 데리고 와주십시오."

쇼이치 지부장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젊은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사무실을 나섰다.

"자, 잠깐! 대체 뭘 하려고…!"

좋지 않은 일임을 직감한 하라무라가 기겁하고 나섰다.

"너, 시발! 마사토한테 손끝이라도 대면 내가 죽여버릴 거야!! 당장 그만둬!! 그만두라고!!"

"하라무라 선생님."

벌떡 일어나 난동을 부리는 하라무라에게 쇼이치 지부장이 목소리를 낮춰 입을 열었다.

"지금 제가 정중하게 부탁하고 있지 않습니까. 아니면 아드님 목을 여기에 가져다 놔야, 제 제안을 들어 처먹을 생각이 좀 나실까요?"

"...!"

그의 낯빛에 그늘이 드리웠다.

이내 현실을 외면하듯 눈을 질끈 감았다.

더는 안 된다.

마사토까지 걸린 이상 이젠 버틸 수 없다.

결국, 하라무라는 바들바들 떨리는 입술을 억지로 열었다.

"...거짓말이다."

"예?"

"다 거짓말이라고! 특수 무기니, 공법이니 그딴 건 처음부터 없었어!"

쇼이치 지부장의 눈썹이 크게 꿈틀거렸다.

"그게 무슨 개소립니까. 그럼 C급이 레드 등급 토벌한 건...."

"나도 몰라 시발! 우연이었겠지! 애초에 민간 길드가 팔고 남은 하급 부산물 들여와서 겉보기에만 그럴싸하게 만든 것들이야!"

"...."

"공법이고 나발이고 처음부터 그런 건 없었어. 이제 됐나?! 알아들었으면 제발 마사토는 건들지 마!"

거의 절규하듯 소리쳤지만, 이미 쇼이치 지부장의 귀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이게 지금 무슨....'

여태까지 다 거짓말이었다고?

처음부터 뭔가 이상하다고는 생각했지만....

아니,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만약 이 사실이 본부 귀에 들어가게 되면, 일이 걷잡을 수 없게 커진다.

하라무라 공방이라는 브랜드를 잃는 것은 물론, 당연히 하라무라 공방과 국제 협회 사이에서 계약 책임을 맡았던 본인도 책임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랬다간 여태까지 쌓아온 일본 지부의 영향력도 모두 잃어버린다.

'안 되지. 그것만큼은 절대 안 돼.'

쇼이치 지부장이 이를 빠득 씹으며 머리를 굴리던 그때였다.

똑똑―.

"저, 지부장님...."

히나 보좌관이 그를 찾았다.

"뭐야? 지금 바쁜 거 안 보여?!"

"그게… 지금 지부에 카르마 코퍼레이션 대표가 찾아왔습니다."

"...뭐? 그놈들이 갑자기 왜?"

"다른 건 아니고...."

방금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 알 턱이 없는 히나 보좌관은 굉장히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하라무라 공방과 무기 수주 계약을 진행하고 싶다고 합니다."

"...."

물론 쇼이치 지부장에겐 청천벽력이나 다름없는 소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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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급히 처리해야 할 업무가 있어서요."

일본 지부, 접견실에서 기다리고 있길 10분쯤.

쇼이치 지부장이 이마의 땀을 닦으며 뒤늦게 모습을 보였다.

"괜찮습니다. 불쑥 찾아뵌 건 저희 쪽이니."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불쾌할 정도로 친절한 말투에 나도 모르게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우리가 동강회 본부를 다녀간 이후에 웬 괴한에게 본부가 털렸다는 소식을 잇시키가 전해 주었다.

뒤늦게 현장을 찾았지만, 회장을 포함한 대부분 조직원이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하라무라 류헤이는 그 자리에 없었다.

'정황상 이놈들이 유력한데....'

아마 하라무라는 일본 지부에 붙잡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미 하라무라 공방을 둘러싼 거짓에 대해서도 털어놨을 거다.

그러니까 이 새낀 지금, 공법 하나를 뺏으려고 수십 명을 죽여 놓고도 사람 좋은 척 뻔뻔하게 연기를 하는 것이다.

"카르마 코퍼레이션 대표님께서 연락도 없이 여기엔 어쩐 일로...."

대답을 아끼고 있자니, 쇼이치 지부장이 조심스레 물었다.

이미 알고 있으면서 뭘 또 새삼스레 물어보는지....

서류를 꺼내 내밀었다.

"보좌관에게 전해드렸다시피, 하라무라 공방과의 무기 수주 계약을 진행하고 싶습니다."

"...."

동시에 어두워지는 그의 낯빛.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아, 아뇨. 문제는 무슨. 다만 공방과 직접 계약을 하셔도 될 텐데 왜 굳이 저희 쪽으로...."

"하라무라 공방과의 계약은 일본 지부가 맡고 있지 않습니까. 물론 직접 계약을 할 수도 있지만, 물량이 물량인지라 지부를 통해서 하는 게 맞지 않나 싶군요."

"...그, 그러시군요."

쇼이치 지부장이 애써 미소를 지었다.

그 틈을 타서 슬쩍 떠봤다.

"하라무라 공방의 무기가 굉장히 특별하다고 들었습니다. 솔직히 처음엔 뜬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만. 뭐, 믿을 만한 물건이니까 국제 협회 헌터들에게도 인기가 많은 거겠죠?"

"하, 하하… 그럼요."

"토벌 기업 입장에서 그런 대단한 물건을 안 가져올 수가 없죠. 계약서를 읽어보시면 아시겠지만, 조건은 굉장히 좋을 겁니다. 어떻게, 긍정적으로 검토가 가능할까요?"

"...."

누가 봐도 곤란하다는 표정이다.

아무렴.

모를 때야 문제가 안 됐지만, 다 알아버린 지금은 꽤나 곤란할 거다.

자칫 하라무라 공방의 진실을 우리에게 들킬 위험이 있을 수 있다.

아무리 좋은 조건이어도 무턱대고 계약을 맺긴 힘들겠지.

여기선 어떻게든 계약을 무르려고 들 것이다.

"그... 말씀은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일단 하라무라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눠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아, 그런가요. 마침 잘 됐군요. 저도 만나 뵙고 싶었는데 말이죠."

"네?"

"하라무라 씨도 불러서 같이 상의하시죠."

"...."

좋게좋게 빠져나갈 생각이겠지만.

어림도 없지, 이 새끼야.

"하, 하하... 제가 말씀을 안 드렸군요. 사실 하라무라 선생님이 최근 잠시 작업을 중지하신 상태입니다. 연락도 잘 안 되고요."

"음? 작업을 중지하시다뇨. 어째서...?"

모른 척 묻자, 쇼이치 지부장이 과장되게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난처하다는 태도를 보였다.

"자세한 사정은 저희도 잘.... 아무튼 현 상황으로는 계약은 힘들 것 같습니다. 다음에 다시 찾아와주시면...."

"아, 아이고. 제가 눈치가 없었군요. 그런 사정이 있었다면 진작 말씀해 주시지 그랬습니까."

안주머니에서 다른 서류를 하나 더 꺼내 내밀었다.

"이번에 제가 추진하고 있는 청소년 헌터 육성 재단입니다."

"...그걸 왜 저한테?"

"에이, 왜 그러십니까. 지부장님께서도 이걸 말씀하신 거 아닙니까."

나는 서류를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렸다.

손가락 끝에는 [청소년 헌터 육성 재단 관리 책임 위임자]라고 일본어로 쓰인 제목이 있었다.

"이 재단을 넘겨드리겠습니다. 물론 실질적인 운영은 저희가 맡을 거고, 지부장님은 회계 관리만 해주시면 됩니다. 저희 쪽에서 매달 재단으로 지원금을 넣어 드릴 테니, 사용처는 지부장님 마음대로 하시면 됩니다."

"지금... 리베이트를 제안하시는 겁니까?"

"그걸 원하신 거 아니었습니까? 아, 혹시 걸릴까 봐 불안하신 거라면 걱정 마십시오. 이래 봬도 한국에서 이쪽 바닥으로 절 건드릴 수 있는 사람은 없으니 말이죠."

"...."

자, 미끼는 던졌다.

이 계약을 진행하면 본인 주머니로 넘어가는 돈만 최소 수십억이다.

과연 이걸 안 받고 배길 수 있을까.

'...뭐, 이놈들한테 이렇게까지 해주는 건 솔직히 배 아프긴 한데.'

쓰게 입맛을 다셨다.

뭘 얻기 위해선 대가가 있는 건 알지만, 상대가 일본 지부라는 사실만으로도 그리 기분 좋은 일은 아니다.

애국자는 아닌데, 이 새끼들이 그간 해온 일을 생각하면 좋게 보긴 힘드니까.

고민하길 잠시.

서류를 뚫어져라 보던 쇼이치 지부장이 이내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제가 하라무라 선생님을 설득해서 진행해보도록 하죠."

"감사합니다."

그래, 거절하기엔 큰 액수지.

악수를 주고받는 거로 일단 거래를 마쳤다.

"아, 그런데… 혹시 무기 시범 테스트를 좀 해볼 수 있겠습니까? 아, 물론 제가 지부와 공방을 못 믿어서 그러는 건 절대 아니고. 일단 절차상 확인은 필요할 것 같아서요."

"...."

잠시 당황한 눈치였지만, 금세 미소를 지으며 그가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날짜는 언제로 하시겠습니까?"

"일주일 뒤에 가능하겠습니까."

"준비해 두겠습니다. 테스트는 저희 쪽에 연구실이 있으니...."

"그것보다 추후 실전 상황도 고려해서 적당한 던전 하나를 골라 진행하도록 합시다."

"...알겠습니다."

끝났다.

저놈은 스스로를 궁지에 몰아넣었다.

이제부턴 저 욕심쟁이가 어떻게 해서든 하라무라의 거짓말을 진실로 만들어 줄 것이다.

전국에 유명한 도공들을 모아서라도 어떻게든 하라무라 공방이 지닌 네임드를 유지하려고 하겠지.

이걸로 첫 단추는 끼웠다.

나머진 하라무라 가문을 완전히 우리 쪽으로 끌어들이는 것만 남았다.

뭐, 계약서를 받은 이상, 그것도 저쪽이 알아서 해줄 테지만.

하라무라 가문의 진실은 안 이상 일본 지부는 국제 협회를 상대로 무기 수주를 줄일 수밖에 없다.

떨어지는 질을 끌어올리는 데 필요한 투자를 생각하면 그 거래는 이득이 전혀 없을 테니까.

즉시 문제를 바로 잡지 못하는 이상, 앞으로 점차 수주를 줄여 이 일을 묻으려고 들 거다.

한편 우리와의 계약에선 그럴 수 없다.

이미 받기로 한 리베이트 때문이라도 좋든 싫든 무기 공급은 유지해야겠지.

그럼 자연히 일본 지부가 투자해 성장한 하라무라 공방의 성과물은 우리 것이 된 거나 마찬가지다.

그 이후부턴 우리 입맛대로 적당히 공방을 이용할 수 있겠지.

'뭐, 일본 지부 인수는....'

앞으로 일이 돌아가는 걸 보고 결정해도 될 것 같다.

아직은 각이 안 보이기도 하고.

"그럼 먼저 일어나보겠습니다. 오늘 좋은 거래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오히려 이렇게까지 빚을 갚으려 하다니, 역시 한국은 은혜를 아는 나라군요."

"빚?"

묘한 이야기에 눈매를 좁히고 쳐다보자 쇼이치 지부장이 자랑스레 말했다.

"아시다시피, 던전이 처음 등장했을 때 일본 지부가 어려워하던 한국을 도와주지 않았습니까."

"...?"

지금 그게 뭔 개소리야.

"입은 빼뚤어졌어도 말은 똑바로 하라 했습니다. 그게 도와준 거라고요? 지원 명분으로 한국 토벌권을 꿀꺽하려던 게 아니고요?"

"하하, 그게 뭐 그리 중요합니까. 저희 덕분에 한국이 초기 토벌 인프라를 얼마나 빨리 구축할 수 있었는가 생각해 보십시오."

"...."

이 새끼 봐라?

"그러니까 그게 다 우리를 위해서 그런 거다?"

"당연한 거 아닙니까. 과정이야 어쨌건 결과적으로 한국은 성장했고, 그 바탕에 저희가 있었다는 건 분명한 사실인데."

"하, 하하하...."

내가 시발, 일하러 와서 이런 개소리를 들을 줄은 상상도 못 했네.

"그때 토벌대 명목으로 모집해 끌고 간 민간인 수백 명이 허무하게 죽어 나갔는데, 잘도 그런 말을 하시는군요."

"무슨 소립니까. 그들이 자원한 겁니다."

"야 이, 개…!"

옆에서 듣고 있던 한유빈이 먼저 폭발했다.

그 맘에는 공감하지만 난 그녀를 제지했다.

"...그 말 책임지실 수 있습니까?"

"책임이라니. 전 정치인이 아닙니다."

"아무래도 여기서 할 이야기는 아닌 것 같군요."

눈에 핏기가 올라왔지만, 여기선 넘어갈 수밖에 없다.

거래가 다 끝난 마당에 초를 칠 순 없잖아.

기회는 이번만이 아니니까.

"알겠습니다. 그럼 일주일 뒤에 뵙도록 하죠."

"알겠...."

쇼이치 지부장의 대답도 다 듣지 않고 재빨리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안 그랬으면 뭐라도 사달이 났을 거거든.

"저 개새끼가 진짜! 대표님! 이거 계속 진행해야 해요?! 나 저 새끼 얼굴 한 번 더 보면 가만히 못 있을 것 같은데?"

"...."

한유빈이 참아왔던 울화를 터트렸다.

나도 화가 많이 났지만, 발화점이 낮은 그녀는 이미 한계였을 거다. 좀만 더 머물렀다면 어떤 식으로든 일이 터졌겠지.

순수하게 분노를 터뜨리는 점이 솔직해서 좋긴 한데, 이럴 때는 참 귀찮단 말이지.

잠시 생각하는 사이, 내 핸드폰이 울렸다.

「대, 대표님!」

전화를 받자, 하성일 본부장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그러십니까?"

「일본 지부 건, 손 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예?"

이건 또 뭔 소리야.

「지금 이쪽에 우리가 일본 지부에 붙었다는 기사가 퍼지고 있습니다!」

"그게 무슨… 기사가 어떻게 벌써 납니까?"

「아무래도 미래민주당 쪽에서 처음부터 작정하고 기다렸던 것 같습니다. 근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예전에 일본 지부와 있었던 일도 그렇고.... 여론이 너무 안 좋게 흘러가고 있습니다.」

"...."

난 곧바로 인터넷을 열어 확인했다.

└카르마가 일본 지부한테 붙었다고?

└아 이건 좀....

└오냐오냐 해주니까 선 씨게 넘네? 일본 지부가 우리한테 뭔 짓을 했는지 모르나?

└다 알고도 돈 때문에 붙은 거면 ㄹㅇ 좀 아닌데;;

└그동안 김준우 무조건 지지했는데, 이번엔 진짜 커버 못 치겠다.

└아니 사업가가 뭔 독립운동가임? 이윤추구가 우선 목표인 게 기업인데 뭔 애국심을 바라냐ㅋㅋㅋ

└야 ㅅㅂ 그래도 도의라는 게 있지.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그 지랄한 일본 놈들한테 붙는 게 말이 되냐?

아니나 다를까, 여론은 심각하게 부정적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여기서 더 진행하면 저희 입장이 곤란해집니다. 여당 쪽에선 벌써 토벌권 독점을 제지해야 한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고요. 자칫하면 진짜 큰일 날 수도....」

설마 이러길 기다리고 있었던 건가.

'너무 짜인 대로 탁탁 흘러가는 느낌인데, 기분 탓일 리는 없고.'

옅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래.

처음부터 찌라시는 여론을 만들기 위한 미끼였다.

난 그것도 모르고 보기 좋게 걸려든 거다.

'시발 진짜....'

반박 기사를 내는 건 어렵지 않다.

하지만 그러면 일본 지부와의 계약은 물 건너간다.

쇼이치 지부장의 그 개소리를 듣고도 참은 게 무색해진다.

'그렇다고 대응하지 않으면... 매국 기업이라는 오명이 따라붙겠지.'

시민들에 대한 신뢰도 떨어질 거고, 힘들게 얻어 낸 독점 토벌권도 흔들릴 수 있다.

어쩌면 그게 마음에 안 들어서 이번 일을 벌인 걸지도 모른다.

'쯧, 일이 꼬이네....'

하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빈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지부와 붙어먹은 게 논란이라면… 그걸 해결할 방법은 하나뿐이다.

「일단은 저희 쪽에서 당장 반박 기사를 낼 테니까, 대표님은 빨리 귀국하셔서....」

"아뇨."

「네, 네?」

"반박 기사, 기자회견, 입장표명, 아무것도 하지 말고, 일단 침묵합시다."

「네?! 그랬다간 정말 걷잡을 수가…!」

"일본 지부, 우리가 인수하겠습니다."

「...!」

그래.

여기서 일본 지부를 통째로 빼앗는다면 모든 게 해결된다.

「...가능하겠습니까?」

"방법이 없잖습니까. 당연히 가능해야죠."

「...알겠습니다. 그럼 대표님만 믿고,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전화를 끊자 한유빈이 걱정스레 입을 열었다.

"뭘 어떻게 할 생각이에요?"

"일단...."

잠시 머릿속을 정리하고 입을 열었다.

"사람부터 좀 모아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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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어먹을, 받지 말 걸 그랬나...."

김준우 대표가 돌아간 후, 쇼이치 지부장은 머리를 쥐어뜯었다.

김 대표가 내민 리베이트에 혹해서 거래를 받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대책이 없던 까닭이었다.

게다가 시범 테스트까지 요청하다니.

이 정도 규모 계약에서 그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만, 덕분에 이쪽만 곤란해졌다.

전해 듣자 하니 저 김준우라는 인간, 촉이 장난이 아니라는 모양이다.

실제로 만나 보니 그 말이 사실인 듯했다.

아마 시범 테스트는 어떻게 눈속임으로 넘긴다고 해도, 이후에 무기를 직접 받아본다면 뭔가 이상하다는 걸 단번에 눈치챌 것이다.

사실 국제 협회 헌터들에게서도 몇 번 컴플레인이 들어오긴 했다.

하지만 하라무라 공방에서 자격을 갖춘 자만이 힘을 발휘할 수 있다며 넘겨버렸다.

일본에 대한 환상이 있는 서양인들은 그걸 철석같이 믿었기에 지금까진 별다른 문제가 없었지만....

한국은 다르다.

정신론 같은 게 통할 상대가 아니다.

기본적으로 일본에 적대적인 놈들이라 조금만 이상하다 싶으면 반드시 물고 늘어질 것이다.

이상하게 일본과 관련된 일이라면 전 국민이 들고일어나지 않는가.

이번 역시 무기를 써본 적 없는 일반인들까지도 미친 듯이 달려들 게 뻔하다.

'하여간 100년 전이고 지금이고 달라진 게 없는 놈들이라니까....'

쇼이치 지부장은 그 이해할 수 없는 국민 의식에 혀를 찼다.

뭐, 사실 한국인들이 빽빽거리든 말든 귀 막고 무시하면 그만이다.

실제로 외교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우리를 건드릴 수도 없으면서 그저 말로만 지껄일 뿐이니까.

다만, 카르마 코퍼레이션이 그들 맨 앞에 있다면 거슬린다.

한국 협회를 흡수하면서 민영화된 토벌권을 독점한 아시아 최대의 토벌 기업이자 독립 협회.

심지어 최근에는 해외 곳곳에 지부까지 두면서 몸집이 무시무시하게 커졌다.

카르텔 지정이라는 극단의 조처를 내렸던 본부가 일주일 만에 입장을 철회할 정도의 영향력.

이건 무시할 수가 없다.

이런 놈들에게 명분을 줬다가는 그걸 가지고 뭔 일을 벌일지 모른다.

'이제 와서 계약을 엎을 수도 없고.'

어떻게 해야 문제없이 넘길 수 있을까.

한참을 머리를 싸맨 채 고민하던 쇼이치 지부장은, 이내 방법을 찾지 못한 채 지원팀 비품 창고로 걸음을 옮겼다.

굳게 잠가둔 창고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결박된 하라무라와 다시 마주했다.

"선생님."

"...."

"그 특별한 무기, 혹시 진짜로 만들 수는 없겠습니까?"

쇼이치 지부장의 막무가내 요청에 하라무라는 고개를 저었다.

"진짜로 만들 수 있었으면 내가 왜 이 고생을 했겠나. 애초에 말도 안 되잖나. 자격을 갖춘 자에게 특별한 힘을 주는 무기라니, 무슨 영화도 아니고…!"

"방금 카르마 코퍼레이션 대표가 하라무라 공방과 수주 계약을 하고 싶다고 찾아왔습니다."

"...뭐?"

하라무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여기저기 퍼진 소문 때문에 그놈들도 탐이 나는 건지, 꽤나 거액을 제안하더군요."

"설마… 받아들인 건가?"

"네."

"뭐, 뭐?! 거짓말인 걸 알면서 왜 그걸…!"

"압니다. 눈치 빠른 족속들이라 금방 눈치채겠죠. 심지어 의심도 많아서 시범 테스트까지 요청하더군요."

쇼이치 지부장의 눈빛에 날이 시퍼렇게 섰다.

"그러니까 이렇게 부탁하는 거 아닙니까. 한 번이라도 좋으니까 진짜로 좀 만들어 달라고."

"...."

하라무라는 고개를 떨어트렸다.

"...난 못하네."

떨리는 목소리에 실린 대답에 쇼이치 지부장이 깊은 한숨을 쏟아 냈다.

"공법을 가진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진짜로 무기를 만들 수도 없고...."

"...."

"제가 선생님을 살려 둘 이유가 있을까요?"

"...!"

하라무라의 얼굴에 공포가 자리했다.

어깨가 크게 떨리기 시작하는 그를 보면서 쇼이치 지부장은 미소를 지으며 다독였다.

"겁먹지 마세요. 지금 당장 어떻게 한다는 건 아니니까."

쇼이치 지부장은 결국 최후의 수단을 꺼내 들었다.

"그럼 이건 어떻겠습니까?"

"무슨…?"

"일단 시범 테스트는 저희 쪽에서 어떻게든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후에 거래가 진행되면… 선생님께선 카르마의 무리한 요구에 버티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겁니다."

그래, 이것밖엔 방법이 없다.

일단 거래만 진행되면 어쨌든 이쪽이 얻을 수 있는 건 모두 얻는다.

이후에 하라무라가 카르마를 언급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면, 국제 협회는 물론 전 세계적으로 공분을 사게 되겠지.

하라무라 가문의 소문이 거짓말이었다는 것도 묻을 수 있는 동시에, 카르마에 모든 책임을 떠넘길 수 있다.

혹여 카르마가 나중에 진실을 알게 되더라도 방법이 없다.

이미 진실을 알고 있는 자는 죽었고, 본인들이 그 책임을 지게 된 이상 누구도 그 말을 믿어 주진 않을 거다. 한낱 변명으로 치부되겠지.

"...뭐, 뭐?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소린가?!"

물론 당사자는 납득할 수 없겠지만.

"당연히 값은 후하게 쳐 드리겠습니다. 아드님 학비도 전액 지원해드리고, 졸업하면 저희 지부에서 일할 수 있게 신경 써드리죠."

"이, 이런 법이 어디 있나! 사람들이 알면 가만히 안 있을…!"

"선생님."

쇼이치 지부장이 그의 말을 끊었다.

"선생님이 죽고 나면 말할 사람이 없을 텐데,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

"그리고 말입니다. 여태까지 저희를 상대로 그런 거짓말을 해오셨으면, 마무리가 이렇게 될 거라는 각오 정도는 하셨어야죠."

하라무라의 눈빛에서 생기가 빠져나갔다.

그동안 자신이 했던 거짓말이 기어이 자신의 목을 조여 오는 걸 느꼈다.

"아무튼, 시범 테스트 때까지는 불편하시더라도 이곳에서 지내시지요. 끼니는 제때 챙겨드릴 테니."

쇼이치 지부장은 그 말을 뒤로하곤 비품 창고를 빠져나왔다.

"공법은 받아내셨습니까?"

밸런스팀 소속 일본 파트, 현장직.

타치바나 구미 동강회를 박살 내고 하라무라를 데려온 남자와 곧바로 마주했다.

저자는 아직 공법이 거짓인 걸 모른다.

만약 사실을 들킨다면 본부에 다이렉트로 보고를 넣겠지.

쇼이치 지부장은 애써 침착하게 대답했다.

"지독한 놈이군요. 그깟 공법이 뭐라고 입을 열지 않는 건지."

"저한테 맡겨 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아, 아닙니다. 저희 일은 저희가 해야죠."

어물쩍 넘어가자 남자는 어깨를 으쓱였다.

"뭐, 알겠습니다. 그럼 전 이만 돌아갈 테니 필요한 게 있으면 연락해주십시오."

그렇게 그가 등을 돌리려는데, 쇼이치 지부장이 그 등을 향해 입을 열었다.

"저… 혹시 카르마 코퍼레이션에 대해 잘 알고 계십니까?"

"...예?"

"전에 한국 파트장이셨다고 들었습니다. 그쪽 대표가 저희에게 거래를 요청했는데, 좀 알고 있는 게 있으면...."

갑자기 남자의 표정이 굳었다.

"혹시 김준우 대표가 왔다 갔습니까?"

"예, 예."

"뭔가 이상한 점이 있었습니까? 가령 과하다 싶을 만큼 큰 액수를 제안했다거나."

"아, 네 맞습니다. 그걸 어떻게...."

그 순간, 남자가 피식 실소를 뱉었다.

"당신, X됐네."

"네, 네? 그게 무슨…!"

쇼이치가 다급하게 되물었지만, 남자는 더 듣지도 않고 자리를 떴다.

***

"오, 사무실이 꽤 널찍하군요."

히가시 구미 본부.

일본 언론과 엔터테인먼트 분야를 꽉 잡은 거대 조직의 사무실로 들어서며 솔직한 감상을 내뱉었다.

"뭐야? 너 누구야. 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

히가시 회장이 눈을 가늘게 뜨며 소리쳤다.

"그건 알 거 없고. 지금 시간부로 히가시 구미는 제가 맡을 생각인데, 어떻게 곱게 넘겨주실 생각이 있으십니까?"

"...하!"

히가시 회장이 헛웃음을 뱉었다.

"너, 혹시 그 새끼냐? 최근에 전국 조직들을 개박살 내고 있다는?"

"벌써 소문이 여기까지 났습니까?"

"이봐, 우린 그 머저리 새끼들이랑 달라. 여기까지 기어들어 온 이상 곱게 죽진 못할 거다."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제가 일주일 동안 9개 조직을 만났는데, 다들 똑같은 말을 하더군요. 혹시 대본이라도 있는 겁니까?"

"하, 이 미친놈이!"

그 순간, 사무실에 모여 있던 부하들이 나를 둘러쌌다.

"숨만 붙여놔. 마무리는 내가 할 테니까."

[고유 스킬 : 비스트 - 고릴라]

[고유 스킬 : 맹호쌍검]

쾅―!

스윽, 스으으윽―!

회장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스킬이 맹렬하게 쏟아졌다.

'자격이 정지된 이능력자들을 고용한 건가?'

시대에 발맞춰 가려는 노력이 보기 좋네.

쏟아지는 스킬들을 피하면서 뒤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내 역할은 어디까지나 시선 끌기에 불과하다.

"뭐 하고 있습니까? 후딱 안 끝내고."

"하아...."

깊은 한숨 소리와 동시에 스킬이 발동됐다.

[고유 스킬 : 하이패닉 버서커]

스으으으―.

한유빈은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움직였다.

몸 주변에 붉은 기운이 스멀스멀 올라오며 스킬의 효과가 자리를 잡는다.

빠각―.

"...?"

"...?!"

한 방에 제일 앞에 있던 놈의 턱이 돌아갔다.

보이지도 않는 공격에 조직원들이 순간 당황했지만....

퍽, 퍼억―.

빠악―!

콰직, 쾅―!!

"...으억, 어억."

"끄으으...."

"어버, 어버버...."

이변은 없었다.

30초도 채 되지 않은 시간.

이 공간 안에서 날뛰던 모든 조직원이 자신의 턱을 부여잡으며 주저앉았다.

"...."

히가시 회장은 그 짧은 순간 구석에 몸을 숨겼다.

거참, 상황 파악 하나는 빠르네.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너, 넘겨 드리겠습니다! 사, 살려만 주십쇼!!"

"...."

아직도 말도 안 했는데 그는 바닥에 넙죽 엎드린다.

...태세 전환도 빠르네.

뭐, 어쨌든 이걸로 여기도 마무리됐다.

"대충 준비는 됐군요. 수고 많았습니다."

"그런데 본인이 더 세면서 왜 나만 시켜요?"

"누가 하든 무슨 상관입니까. 그리고 뭐, 그쪽한테도 기념이지 않습니까."

사무실을 슥 훑었다.

"일본 전역의 야쿠자 조직을 통합시킨 장본인이 됐는데."

"...별로 안 기쁜데."

참 나, 뭘 모르네.

도쿄에 요시오미 구미, 오사카에 다케다 구미, 교토에 오니즈카 구미 그리고 지금 나고야에 히가시 구미까지.

정치, 언론, 경제를 포함해 일본 대부분 분야에 뿌리내리고 있는 거대 조직들을 모두 손에 넣지 않았는가.

이건 다시 말해 일본 전역을 손에 넣었다는 거나 다름이 없는 소리다.

그것도 단 두 명....

아니지, 단 한 명이서.

"그래서… 지부를 인수하는데, 깡패들 통합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어요?"

"...."

아니, 그걸 이제 와서 물어보는 건가?

그럼 일주일 동안 이유도 모르고 수백 명을 패고 다닌 거라고?

...그냥 즐긴 거구만.

하여간 어떤 의미로 보면 무시무시하다니까.

"국제 협회 본부가 일본 지부를 잡고 있는 이유가 뭔 것 같습니까?"

대뜸 묻자 한유빈이 잠시 고민하던 끝에 입을 열었다.

"경제력, 연구시설, 하라무라 가문 정도?"

"뭐, 틀린 말은 아니지만. 진짜 이유는 일본 지부를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 동아시아를 견제할 수 있다는 겁니다."

"네?"

"중국, 한국을 포함해서 주변국이 모두 독립 협회입니다. 물론 지금이야 다들 잘 나가고 있지만, 독립 협회에는 분명히 한계가 있죠."

"국제 협회 지부들처럼 다른 협회와 교류하기 힘들다는 거요?"

"오...!"

생각지도 못한 정답에 나는 작게 감탄했다.

이럴 때 보면 머리는 꽤 쓰는 것 같은데....

"맞습니다. 그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는 이상, 독립 협회가 몸집을 키우긴 거의 불가능하죠. 그래서 우리가 해외 지부 사업에 열을 올리는 거기도 하고요."

"그게 일본 지부랑 무슨 상관이에요?"

"만약 내부에서 처리하기 힘든 던전이 출현하기라도 하면, 반드시 주변국에 도움을 청할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일본 지부는 동아시아 독립 협회들의 최후의 보루라는 거죠."

그제야 한유빈이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눈치를 볼 수밖에 없겠네요."

"그것만으로 일본 지부는 국제 협회에 꼭 필요한 존재입니다. 그저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독립 협회가 멋대로 몸집을 키울 수 없게 하는 브레이크가 되어주니까요."

나는 손가락을 치켜세우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만약 일본 지부가 더 이상 그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게 되면 어떨까요?"

"본부가 일본 지부를 가지고 있을 이유가 없어진다?"

"그렇죠."

"그럴싸하긴 한데... 그게 말처럼 쉽게 될까요?"

"그래서 일주일 동안 이 고생을 한 거 아닙니까."

시선을 아래로 던졌다.

"어떻게, 저희를 좀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

히가시 회장은 잠시 주춤하다가 이내 고개를 땅에 처박았다.

"뭐든 시켜만 주십시오! 목숨을 걸고 하겠습니다."

"...."

과하다 과해.

원래 이쪽 사람들은 다 이런가?

나도 모르게 고개를 젓고 있던 그때, 하성일 본부장에게서 일주일 만에 전화가 걸려왔다.

"예. 본부장님."

「대표님.... 지금 여당에서 토벌권 제한에 대한 법안을 상정했습니다.」

"...."

「아마 내일 발표가 날 것 같습니다. 지금 여론으로 봤을 땐 통과될 확률이 높습니다.」

"알겠습니다. 저희도 되도록 빨리 준비하겠습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모쪼록 빨리 진행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전화를 끊고는 한유빈에게 말했다.

"이제 슬슬 갑시다."

계약 마무리하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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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외곽에 위치한 한 던전 앞.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먼저 도착해 있던 쇼이치 지부장이 악수를 건넸다.

"오랜만입니다. 잘 지내셨습니까?"

"큰 거래를 앞두고 있는데 잘 못 지낼 리가 있겠습니까. 하하."

"그거 다행이군요."

"그나저나… 오늘은 비서분과 같이 오지 않으신 겁니까?"

쇼이치 지부장이 내 옆을 힐끔거리며 묻는다.

보아하니 한유빈을 이야기하는 듯하다.

"네. 다른 일이 있어서 오늘 테스트에는 부득이하게 참여하지 못하게 됐습니다."

"그렇군요. 뭐 일반인이 던전에 들어가기엔 조금 위험하기도 하니까요."

"...."

진짜 되는 대로 지껄이네.

그 일반인이 일본 전역 야쿠자를 통일했다고 하면 까무러치겠군.

"그나저나, 생각보다 사람이 많군요."

"안전이 최우선이니까요. 혹시 몰라서 작전팀과 같이 진행할 예정입니다. 밖에선 통제팀 직원들이 항시 대기하고 있을 거고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 모인 사람들을 슥 훑었다.

장비를 점검하는 헌터들 사이로, 한구석에서 쭈뼛거리고 있는 하라무라 류헤이가 눈에 들어왔다.

'몰골을 보니 대충 감이 오네.'

일주일 동안 꽤나 호되게도 당한 모양이다.

뭐, 자업자득이다.

다른 상대도 아니고, 일본 지부와 국제 협회를 상대로 거짓말을 했으니 저 정도 값은 치러야겠지.

아무튼, 그건 그거고.

"저, 혹시 하라무라 선생님이신가요?"

"예, 예…? 아, 네...."

"김준우라고 합니다.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처음 만나는 척 다가가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하라무라는 퍽 당황스러운 듯 시선을 가만히 두지 못했지만, 애써 모른 척을 맞춰주었다.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난 슬며시 하라무라에게 바짝 붙어 들릴락 말락 한 목소리로 물었다.

"테스트는 눈속임이네. 이후에 거래가 진행되면 내가 자네를 끌어안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거로 만들 생각이야."

"...그렇군요."

"이 거래, 받지 말게. 나한테도 그렇고 자네한테도 좋을 게 하나 없어."

"그건 힘들 것 같습니다."

나는 싱긋 미소를 지었다.

"저도 나름 궁지에 몰려 있는 터라."

"...."

"뭐, 너무 걱정 마십시오. 일주일 동안 놀고 있던 건 아니니까요."

그 말을 뒤로하고 원래 자리로 복귀했다.

쇼이치 지부장이 대뜸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하라무라 선생님과 구면이신가요?"

"음? 아뇨."

"그런 것치곤 꽤 긴밀한 대화를 나누시는 것 같던데...."

"그렇게 보였습니까? 별 이야기 안 했습니다."

쇼이치 지부장은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이내 테스트 진행을 위해 설명을 시작했다.

"일단 테스트는 이곳, 오렌지 등급의 동굴형 던전에서 진행할 생각입니다. 보스는 설귀, 고스트 타입 몬스터입니다."

"물리 공격은 안 통하겠군요."

"잘 알고 계시는군요. 상성에 맞춰 진행하면 테스트에 의미가 없어 이렇게 준비했습니다."

그는 가져온 슈트케이스를 열었다.

안에서 꺼낸 무기는 날이 시퍼렇게 서 있는 장도였다.

"하라무라 선생님께서 이번 테스트를 위해 특별히 준비해주신 무기입니다. 하라무라 공방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오오타치(大太刀) 라인의 10번째 무구, 십수반월경(十獸半月經)입니다."

"호오...."

참 나, 뭔 이름이 그리 거창해.

어디서 외형만 그럴싸하게 만든 장난감 칼일 게 뻔한데.

"마지막으로 이번 테스트에 참여해줄 헌터입니다. 고레다! 이리 와서 인사드려."

쇼이치 지부장은 한 남자를 내 앞으로 불러 세워 인사시켰다.

"고레다입니다. 클래스는 검사, 랭크는 C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고레다는 자신감이 넘치는 목소리로 악수를 건넸다.

나는 그의 손을 잡는 순간, 이상한 점을 단번에 파악했다.

이 새끼....

약지와 소지 아랫마디에 굳은살이 없다.

'검을 쥐는 놈이라면 당연히 있어야 하는 건데.'

헛웃음을 뱉으며 그를 빠르게 살폈다.

기본적인 근력 운동을 한 몸이지만, 상체와 비교해 하체의 근육이 덜 발달해 있다.

이건 토벌에서 그다지 움직임이 많지 않은 포지션이라는 뜻이다.

목숨을 걸고 끊임없이 움직여야 하는 검사 클래스가 이 상태라면 C랭크는커녕, 진작 관짝에 들어가 있어야 하는데.

게다가 잦은 포션 복용으로 인해 변색된 입술.

손등과 얼굴에 남은 마력 리바운드의 흔적.

이놈이 검사 클래스라고?

김민주가 들으면 거품을 물겠군.

'딱 봐도 A랭크 수준의 마법사 클래스네....'

검사 클래스인 척하면서, 특별한 무기라는 걸 어필하겠다?

머저리 같은 놈들, 차라리 귀신을 속여라.

"저, 준비되셨으면 진행해도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고레다와 작전팀을 필두로 우리는 던전으로 들어섰다.

***

「테스트 시작. 준비한 대로 진행해주십시오.」

문자를 확인한 한유빈은 옅은 한숨을 뱉었다.

'하여간… 여기까지 와서도 잡일은 다 나한테 시킨다니까.'

그렇게 중얼거리기도 잠시, 그녀는 앞에 있는 남자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히가시 구미는 뉴스에 전해준 내용을 뿌리고, 고레다 구미는 정치인들한테 압력 넣어. 오니즈카 구미는 인터넷 여론을 맡고. 나머지는 밑에 놈들 풀어서 시위 주도 시작해."

"알겠습니다."

"네."

각 조직의 우두머리였던 이들이 머리를 조아렸다.

물론 해당 지시는 모두 사전에 김준우가 준비해 둔 내용이었다.

각 분야를 주름잡고 있는 조직을 이용해서 일본 지부의 가치를 떨어트리는 것.

그리고 그 내용은....

'최근 몇 년간, 일본 지부는 하라무라 류헤이를 협박하여 국제 협회를 상대로 가짜 무기를 유통시켰다.'

지역 언론을 잡은 이들이 그 내용을 보도하고, 정치권에 개입하고 있는 이들은 발맞춰 책임 회피성 꼬리 자르기를 제안.

마지막으로 일본 지부로 인해 국제 협회로부터 보복을 당할 수도 있다는 공포를 일반 시민들에게 심어준다.

테스트가 끝날 때쯤이면, 일본 지부는 자국민에게 완전히 버려져 모든 영향력을 잃은 뒤겠지.

한유빈은 커다란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럼… 다들 슬슬 움직이자."

"네! 누님!!"

한자리에 모인 수백 명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일본 전역의 굵직한 야쿠자 조직이 통합되면서 만들어진 신 세력.

하부 조직원까지 모두 합쳐 수십만 명이 넘는 그 세력의 우두머리가 된 한유빈은....

'...어쩌다 이렇게까지 됐냐.'

상당히 부담스럽기 그지없었다.

***

"하압!"

쾅―!!

테스트를 진행하고 있는 고레다가 우렁찬 기합과 함께 검을 휘둘렀다.

엉성하기 짝이 없는 자세.

그럼에도 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력한 마법이 몬스터를 차례차례 쓰러트려 갔다.

"어떻습니까. 소문대로 엄청나지 않습니까?"

"...."

쇼이치 지부장이 물었지만, 딱히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쇼에 가까운 허접한 눈속임에 대체 무슨 감상평을 바라는 건지 참.

"뭐… 성능은 확실한데, 원래 이렇게 원할 때마다 무기의 힘을 끌어낼 수 있는 겁니까? 제가 알기론 자격이 된 사람한테만 힘을 준다고 그러던데요."

"...고레다는 자격이 있는 헌터니까요."

"그것참 편리하군요."

내가 담담하게 말하자 쇼이치 지부장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들킬까 봐 노심초사하는 것 같은데, 그럴 거면 좀 더 잘 준비하던가.

이게 뭐야, 이게.

'차라리 절체절명의 순간에만 쓰는 거로 하던가...,'

허접한 모습에 어이없어하는 사이, 어느샌가 우린 보스 방 앞에 도착했다.

근처에 다가갔을 뿐인데도 엄청난 한기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때, 쇼이치 지부장이 슬쩍 물었다.

"아무래도 보스는 좀 위험하니, 밖에서 기다리시는 게 어떻습니까?"

"아뇨. 이왕 여기까지 온 거 끝까지 보고 싶군요."

"…알겠습니다."

보스 방에선 쇼를 하기 힘들 것 같으니 그렇겠지.

물론 어림도 없지만.

모두가 보스 방으로 들어섰다.

사아아아―!!

거센 눈보라가 몰아치기 시작했다.

설귀였다.

나 또한 처음 마주하는 몬스터다.

보아하니 호락호락한 상대는 아니다.

'이거… 고생깨나 하겠군.'

아니나 다를까, 줄곧 자신감이 넘치던 고레다 또한 이번만큼은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검을 쥔 손이 조금씩 떨려오는 것이 보였다.

너무 과하게 긴장한 탓인지, 결국 고레다가 실수를 저질렀다.

[고유 스킬 : 볼케이노]

쿠구구궁―!!

내가 보는 앞에서 마법 스킬을 써버린 것이다.

"...!"

동시에 쇼이치 지부장이 크게 당황했다.

곧바로 내 눈치를 살핀다.

내가 별다른 반응이 없자, 들키지 않았다고 생각했는지 곧바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고는 성급하게 대원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자, 작전팀도 같이 토벌 진행하자. "

"네!"

뒤따라온 작전팀이 전투태세를 취했다.

[고유 스킬 : 썬더 피스트]

[고유 스킬 : 폭주 - 천년광기]

[고유 스킬 : 사자소생(死者甦生)]

파지직―!

쾅, 콰광―!!

퍼버버벙―!!

이윽고 시작된 전투.

팔짱을 낀 채 그들의 토벌을 지켜보았다.

일단 구색은 제대로 갖추고 있나 보네.

"그래서, 이 거래가 성사되면 하라무라 씨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토벌이 진행되는 가운데 쇼이치 지부장을 향해 넌지시 물었다.

"...그게 무슨?"

"저희가 계약을 한다고 해도 어차피 거래가 진행되면 들킬 게 뻔하지 않습니까. 저 무기가 거짓말이라는 걸."

"...!"

그의 눈썹이 크게 요동쳤다.

"받을 거 다 받으면 하라무라 씨를 자살로 몰고 가실 생각입니까? 뭐, 카르마의 무리한 요구를 감당할 수 없다는 유서 하나만 준비해 두면 딱이긴 하겠군요."

"당신 지금...."

"하라무라 가문의 소문이 거짓이었다는 것도 영영 묻을 수 있고, 저희한테 책임을 전가할 수도 있으니 일석이조 아닙니까?"

"...."

그의 눈빛이 점점 날카로워졌다.

아니, 살기를 품었다.

"다 알면서 우리를 떠본 겁니까…?"

"떠본 건 아닙니다. 정말로 계약을 진행하려고 했으니까요."

나는 그를 향해 돌아서며 말을 이었다.

"당신이 그때 개소리만 하지 않았으면."

"...뭐?"

"기억도 못 하는 거 보니까 더 말할 필요도 없겠군요."

맞은 놈은 기억해도 때린 놈은 기억 못 한다는 게 정말이었군.

"그래서? 대체 뭘 원하는 거죠? 사과라도 하라는 겁니까?"

"설마요. 돈도 안 되는 사과 들어봐야, 얻다 쓴다고."

애초에 사과할 생각이었으면 진즉에 했겠지.

돈이 드는 것도 아니고.

"일본 지부, 저한테 넘기십시오."

"하, 이런 미친놈을 봤나...."

본론을 꺼내 들자 쇼이치 지부장이 피식 웃음을 뱉었다.

"지금 일본에서 일본 지부를 협박하는 겁니까? 뭐, 하라무라 가문의 소문은 거짓이라고 언론에 제보라도 하게요? 일본 지부는 곧 일본 그 자체입니다. 일본이 미쳤다고 우리에 대해서 안 좋은 소식을 낼 것 같습니까?"

"하하, 하하하!"

"...?"

"최근에 뒷세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시나 보군요."

쇼이치 지부장이 의아한 표정을 지은 순간.

그의 핸드폰이 울렸다.

「지, 지부장님! 지금 전 언론에서 저희가 가짜 무기 유통을 주도했다고 보도하고 있습니다!」

"...뭐?!"

「인터넷에선 국제 협회에 보복당할 수도 있다는 공포감이 조성되고 있어요! 사람들은 보복당하기 전에 지부를 퇴출해야 한다고 하고 있고…!」

"국회는?! 그 새끼들한테 처먹인 돈이 얼만데, 가만히 있진 않을 거 아니야!"

「국회에서도... 꼬리를 자르려는 것 같습니다.」

"...."

쇼이치 지부장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이내 내 멱살을 붙잡으며 소리쳤다.

"너, 너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이미 벌어진 마당에 그게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이 새끼가 감히 국제 협회 지부를 상대로 개수작을…!"

"국제 협회 지부라... 글쎄요. 이 던전에서 나가는 순간 당신은 구속될 겁니다. 지부는 온갖 지원이 끊길 거고, 토벌에 수많은 제약이 생기겠죠. 근데 뭐 그런 것보다...."

더 걱정할 게 있지 않아?

"이빨 다 빠진 지부를, 국제 협회가 계속 붙들고 있을 것 같습니까?"

"...."

"지금이라도 일본 지부, 저한테 넘기십시오. 저희가 성심성의껏 도와드리겠습니다."

씨익 미소를 지었다.

"일본 지부가 한국을 도와줬던 것처럼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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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와준다고? 이따위 개수작을 부려놓고 도와준다고?!"

쇼이치 지부장의 목소리가 점점 격양됐다.

"물론 강요하는 건 아닙니다. 선택은 지부장님이 하셔야죠. 다만, 선택의 여지가 많이 없을 겁니다."

지금 언론에 뿌려진 내용은 하라무라 공방이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이 아니다.

일본 지부가 국제 협회를 상대로 돈을 벌기 위해 하라무라를 협박하여 가짜 무기를 찍어냈다는 내용이지.

뭐, 당연히 내가 지어낸 거짓말이다.

어찌 보면 일본 지부도 하라무라에게 속은 피해자나 마찬가지지만... 내가 말하지 않았던가.

거짓말도 100번을 하면 진실이 된다고.

국제 협회는 자신들을 속여 온 일본 지부에 분명 어떤 방식으로든 조치를 취할 것이다.

물론 그게 일본 지부에 국한된 조치일지, 아니면 일본 전체에 영향을 끼칠 만한 조치일지는 모른다.

어찌 됐건 국회를 포함한 일본 시민들은 당연히 지부 때문에 엄한 꼴을 당하고 싶진 않겠지.

무엇보다 한유빈의 지휘 아래 언론과 인터넷, 그리고 정치인들을 이용하여 보복을 당할 수도 있다는 공포감을 조성 중이지 않은가.

국회에서도 지부를 내쳐야 한다는 반응이 나오고 있는 이상, 이대로 내버려두면 일본 지부는 일본과 국제 협회 모두에게서 버려진다.

지부는 이빨이 다 빠진 채 간신히 숨만 붙어 있겠지.

당연히 책임자인 쇼이치 지부장은 중징계를 피하지 못할 거다.

하라무라와 국제 협회.

일본 지부는 둘 모두 손에 넣으려다 모두 잃는 상황에 놓인 거다.

그리고 이 상황을 뒤집으려면... 두 가지 방법밖엔 없다.

첫 번째는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하라무라 공방의 진실을 밝힌다.

당연히 하라무라라는 브랜드는 잃게 되겠지만, 최소한 양쪽 모두에게 버림받는 상황은 피할 수 있을 테지.

쇼이치 지부장도 같은 생각을 한 건지, 다시 핸드폰을 들어 소리쳤다.

"지금 당장 반박 기사 내! 우리가 주도한 게 아니라 애초에 하라무라 가문이 거짓말을 한 거라고! 우리도 속은 것뿐이라고 각 방송국에...."

「이, 이미 시도하고 있는데... 연락을 안 받습니다.」

"...뭐?"

물론 이제 와서 이실직고하도록 내버려둘 순 없지.

미안하지만, 하라무라 가문은 여전히 영향력 있는 브랜드로 남아 있어야 한다고.

「아, 아무래도 방송국이랑 언론사에 누군가 압력을 넣고 있는 것 같습니다.」

"시발 대체 누가! 대체 어떤 새끼들이 우리를 상대로 그딴 짓을 해!"

「최근 일본 전역의 야쿠자 조직이 통합됐다던데, 그들 짓이 아닐지....」

"...!"

한유빈을 필두로 한 그 거대 세력이 이미 모든 매체를 통제했다.

당연히 이제 와서 지부가 끼어들 틈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이렇게 첫 번째 방법은 무용지물이 됐다.

그럼 남은 방법은 하나다.

"일본 지부는 저희가 어떻게든 해결해볼 테니, 일단은 저희한테 맡기시고 지부장님은 먼저 피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뭐…?"

"일본 지부, 저희한테 넘기시라고요."

책임자 자리를 떠넘기고, 챙길 수 있는 걸 모두 챙긴 후 혼자라도 내빼는 것.

"이번 계약금이랑 제가 넘겨드린 재단, 그 두 개면 어디 경치 좋은 곳에서 평생은 먹고사실 수 있을 겁니다. 뭐, 상황이 어느 정도 해결되면 그때 다시 부르도록 하죠."

"그걸 지금 나보고 믿으라고 하는 소린가?!"

"안 믿으시면 어쩌실 겁니까? 모든 책임 다 뒤집어쓰고 감옥에 가시는 것보단 나을 것 같은데요."

쇼이치 지부장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고민하는 그를 위해 쐐기를 박아넣었다.

"지부장님, 이건 모두 일본 지부를 위한 일입니다. 생각해보시죠. 어차피 이대로라면 일본 지부는 몰락합니다. 싸지른 똥을 우리가 대신 치워주겠다는데, 대체 뭘 고민하시는 겁니까?"

"...."

"시간이 얼마 없습니다, 지부장님."

서류 한 장을 쇼이치 지부장에게 내밀었다.

일본 지부 최고 책임 권한을 위임한다는 내용이었다.

"자, 여기에 서명만 하시면 됩니다."

"...."

펜을 건네받은 쇼이치 지부장의 손이 벌벌 떨려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빌어먹을… 빌어먹을…!"

욕지거리를 뱉으면서도 그는 결국 서류에 서명을 휘갈겼다.

"너 시발, 두고 봐! 나 없는 동안 조금이라도 허튼짓하면 가만 안 놔둘 거야!"

"예예, 나가시는 길을 저쪽입니다."

아직 한창 전투가 진행되는 이곳에서, 쇼이치 지부장은 끝내 등을 돌렸다.

쾅, 콰광―!

퍼버벙―!

"계속 밀어붙여!!"

"한기가 너무 심해서 접근이 불가능합니다!"

"어차피 먹히지도 않을 공격이면 아예 시도하지 마!"

방금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도 모른 채, 작전팀은 여전히 분투 중이었다.

'쯧, 오래도 걸리네.'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보스 방 한가운데로 걸어가며 큰 목소리로 말했다.

"잠깐, 긴급한 공지사항이 있습니다. 잠시 멈추시죠."

"...?"

"뭐, 뭡니까?"

"여긴 위험하니까 어서 뒤로 빠져요!"

참 나.

고스트 타입 하나 두고 아주 꼴값들을 떨고 있네.

"자, 시간이 없으니까 빠르게 설명하겠습니다. 현재 시간부로 쇼이치 지부장님께서 저에게 일본 지부의 모든 책임 권한을 위임하셨습니다."

"...?"

"...뭐?"

"뭐, 그렇다고 국제 협회 소속도 아닌 제가 지부장이 되는 건 아니고. 지부장님이 자리를 비우신 동안 책임 대리 정도로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뒤늦게 뭔가 이상한 걸 눈치챈 모양이다.

작전팀이 전투를 멈추고 날 바라봤다.

한눈팔 시간이 있나 몰라.

"뭣들 하십니까. 알아들으셨으면 토벌 계속 진행하세요."

"...하, 하하하."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지부장님이 권한을 위임했다고? 그럴 리가...."

그들은 헛웃음을 뱉으며 한마디씩 거들었다.

뭐, 당연한 반응이다.

토벌 중에 갑자기 책임자가 바뀌었다고 하면 누구든 당황하겠지.

다만....

"자, 잠깐... 지부장님이 안 보이는데?"

"뭐?!"

"방금까지 여기 계셨잖아!"

"당신, 지부장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지부장님 어디 있어!"

멍청한 놈들.

지금 상황에 뭐가 더 급한 건지 모르는 건가.

끼이이이익―.

쾅―!!!

전투 중이라는 걸 망각한 그들을 향해 설귀의 공격이 날아들었다.

'알아서 하게 내버려두면 하루 웬종일 걸리겠네....'

이제부터 바쁘게 움직여야 하는데 여기서 시간을 버릴 순 없지.

"제대로 안 할 거면 나오시죠."

"뭐, 뭐…?"

"지금 이게 장난으로 보이는…!"

[고유스킬 : 마왕 - 독재자]

[시전자의 상념에 따라 일회용 스킬을 제작합니다.]

[스킬 제작 중]

[스킬 제작이 완료되었습니다]

구구구구구―.

[제작 스킬 : 팔열지옥]

설귀의 발밑에 시뻘건 용암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끼야아아악―!!!

억겁의 시간이 지나도 꺼지지 않는 지옥불.

죽은 자를 심판하는 팔열지옥의 불길이 솟아오르자 설귀는 귀를 찢는 비명을 질러댔다.

"어, 어…?"

"뭐, 뭐야...?"

토벌 시작 후 첫 유효타를 내가 먹인 게 믿을 수가 없었는지, 다들 벙찐 표정들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슈우우우우―!

엄청난 한기를 내뿜으며 설귀가 화염을 벗어나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이윽고 거센 눈보라가 몰아쳤다.

푸슉, 푸슉―!

눈 대신 칼날처럼 날카로운 얼음 결정들이 미친 듯이 흩날렸다.

'쯧, 성가시긴 하네.'

방어 자세를 취하며, 테스트 인원이었던 고레다를 향해 다가갔다.

"야! 검 줘봐."

"어, 어? 그, 그거…!"

고레다가 들고 있던 십수반… 뭐시기를 뺏어 들었다.

무기를 빼앗기자 고레다가 당황했다.

뭐, 본인도 가짜라는 걸 알고 있으니 당연한 반응이겠지만.

[스킬 제작 중.]

[스킬 제작이 완료되었습니다.]

[해당 제작 스킬이 S랭크 이상으로 판단되었습니다.]

[S랭크 스킬의 안전장치 해제 시퀀스를 시작합니다.]

지이이잉―.

검을 쥔 그 순간, 거친 바람이 검신을 중심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발동 조건 확인 중.]

[시전자 본인 확인.]

[시전자의 랭크 확인.]

[전투 상태 확인.]

[고유 스킬 - 마왕 활성화 상태 확인.]

[클래스 각성]

[고유 클래스 : 마검사]

[발동 조건이 확인되었습니다.]

[해당 스킬의 안전장치가 해제되었습니다.]

[스킬 사용에 주의하십시오.]

[제작 스킬 : 팔열업화도]

스윽―.

가볍게 검을 휘둘렀다.

콰과과과광―!!

직격한 거대한 화염은 거센 한기에도 꺼지지 않은 채 빠르게 설귀를 태워 갔다.

"...."

"...."

더 이상의 공격은 필요 없었다.

비명을 지르는 설귀를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길 잠시, 보스 방에 휘몰아쳤던 눈보라가 멎었다.

보스가 쓰러졌지만, 작전팀은 여전히 그 자리에 얼어붙은 채였다.

음? 눈보라는 그쳤는데 왜 얼어있는 챈데?

"...뭐, 뭐야!"

"저, 저거 가짜 아니었어?!"

"하라무라 가문의 소문은 거짓말이었다면서."

"분명 지부장님이 그랬는데...."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저희들끼리 중얼거린다.

뭐, 어쨌든 이걸로 무기 테스트도 끝났네.

"자, 마무리된 것 같으니 나갑시다. 할 일이 많아요. 이제부터 굉장히 바쁠 겁니다."

"...."

"...."

대답은 없었지만, 모두 고분고분 던전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

같은 시각, 여의도에서 열린 국회 인사청문회.

"카르마 코퍼레이션이 일본 지부와 거액의 계약을 체결했다는 게 사실입니까?"

한 의원이 던진 질문에 하성일 본부장은 곧바로 대답했다.

"사실입니다. 하지만 저희가 계약을 체결한 건 일본 지부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일본 지부가 과거 우리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벌써 잊으신 거예요?"

"아닙니다. 저희 또한 일본 지부의 만행을 기억하고 있으며, 이번 거래는 결코 그들과 손을 잡으려는 게...."

"국민을 지켜야 할 토벌 기업이 돈에 눈이 멀어 국민을 짓밟았던 일본 지부와 손을 잡는 게 말이 됩니까?"

"이런 기업이 토벌권을 독점하고 있다는 게 가당키나 하다고 생각하세요?"

미래민주당 의원들의 정해진 질문들이 하성일 본부장의 말을 끊고 계속해서 날아들었다.

그들은 처음부터 대답을 들을 생각 따윈 없었다.

'후, 이 꼰대 놈들....'

하성일 본부장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떨어트렸다.

국가 감정을 걸고넘어지고 있지만, 사실 저들이 정말 애국자여서 하는 말들은 아니다.

그저 카르마 코퍼레이션과 김준우 대표가 대중의 무조건적인 신임을 받고 있는 걸 깎아내릴 수단이 필요할 뿐이다.

그러니 아무리 설득을 하려고 해도 저들은 들어먹을 생각이 없다.

그저 저들이 바라는 대답은 다 인정하고 죄송합니다, 그 한마디일 뿐이다.

'그래야 우리가 정말 잘못한 거로 몰아갈 수 있을 테니까....'

하성일 본부장은 미간을 구겼다.

김준우 대표를 대신해서 불려 나왔지만, 어쨌든 본인이 책임자인 이상 뭐든 해야 했다.

최악의 경우, 어렵게 얻은 토벌권을 토해내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하성일 본부장님."

그때 미래민주당 대표이자 일본 지부 찌라시를 퍼트린 원흉, 성현숙 의원이 입을 열었다.

"네… 말씀하십시오."

"여기 보니까 최근에 일본 지부장에게 카르마 코퍼레이션이 추진하고 있던 청소년 헌터 육성 재단을 넘겼다고 되어있군요."

"...?"

"일본 지부와 손을 잡으려는 게 아니라면, 이건 어떻게 설명하실 건가요? 아무리 봐도 이건 대가성 뇌물로밖에는 안 보이는데 말이죠."

"...."

하성일 본부장은 그 질문만큼은 대답할 수가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본인도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어떻게… 카르마 코퍼레이션에 압수수색 한번 들어갈까요?"

"...."

빌어먹을.

이러면 답이 없는데.

하성일 본부장은 입술을 꽉 깨물던 끝에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 순간.

"대, 대표님!"

성현숙 당대표의 보좌관이 다급하게 그녀를 찾았다.

그리곤 방금 들어온 소식을 전달했다.

"김준우 대표가... 방금 일본 지부의 책임 권한을 위임받았답니다."

"...?"

순간 얼어붙은 의원들.

"뭐…?"

"…뭐, 뭐?!"

"뭐가 어쩌고 어째?!"

반 박자 늦게 반응이 오기 시작했다.

의원들은 각자 다급히 어디론가 전화를 걸어 그 내용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표정들을 보아하니 사실인 모양이었다.

'하… 진짜 간 떨리게 하시네요.'

그제야 하성일 본부장은 안도의 한숨과 함께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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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지부랑 손잡았다고?

└어림도 없지ㅋㅋㅋ

└바로 먹어버리기~

└아니 대체 국제 협회 지부를 어떻게 먹은 거냐??

└ㅁㄹ 내부 고발 터지니까 지부장이 바로 책임 권한 위임하고 튀었다던데?

└갓준우 선생님… 몇 수 앞을 내다보신 겁니까....

└아니, 친일 기업이라고 대차게 까댈 땐 언제고 이제 와서 태세전환 오지네;;

└ㄹㅇ구역질난다ㅋㅋㅋ

└아니 국회에서 먼저 몰고 갔자너;;;

└근데 미민당에서 기사 터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청문회 연 거 좀 오바 아님? 자작나무 타는 냄새 나만 남?

└ㅇㅇ;; 그쪽에서 작정하고 여론 몰고 가서 견제하려고 한 듯;;;

└본인들보다 지지율 높아서 똥줄 탔나봄ㅋㅋㅋ

댓글을 확인하던 하성일 본부장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김준우 대표가 일본 지부의 책임 권한을 위임받았다는 기사가 터지자마자 여론은 순식간에 기울었다.

정말이지 다행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덕분에 청문회 또한 흐지부지됐으니까.

일본 지부와의 유착관계를 명분 삼아 토벌권 독점을 견제하기 위한 자리였는데, 유착관계는커녕 아예 일본 지부를 먹어버렸으니 더는 걸고넘어질 명분이 없었으니까.

"대체 거기서 뭔 짓을 하는 걸까요...."

그때, 옆에서 같이 기사를 확인하고 있던 이아영 본부장이 넌지시 중얼거렸다.

"글쎄요. 대표님 생각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하성일 본부장은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애초에 국제 협회를 탈퇴한 것도 아닌데, 책임 권한을 위임받다니요. 이거 괜찮은 거 맞아요? 나중에 문제 생길 거 같은데?"

"뭐, 형식적으로 문제는 없습니다. 따지고 보면 지부장이 된 게 아니라, 지부장 대리 권한을 수행할 뿐이니까요. 물론 국제 협회가 그걸 좋게 볼 리는 없지만... 대표님이 알아서 잘 마무리 하지 않겠습니까."

"...."

여전히 이아영 본부장은 퍽 불안한 표정이었다.

그렇게 생각에 잠겨 있길 잠시.

"...불안해서 안 되겠어요."

이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마무리는 제가 좀 도와줘야겠어요. 뭔 짓을 한 건지 확인도 좀 할 겸."

"...예?"

"일본으로 갈 거라고요. 지금 당장."

하성일 본부장은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원래 저렇게 행동력이 좋은 사람이었나?

대표님은 대체 저런 사람을 그동안 어떻게 부려 먹고 다닌 거지?

그런 생각이 들기도 잠시.

그래, 뭐 본인이 하겠다는데 어쩌겠는가.

"...알겠습니다. 조심해서 다녀오시죠."

"무슨 소리예요. 하 본부장님도 같이 가셔야죠."

"...?"

***

"이거… 정말 괜찮은 거 맞아요?"

일본 지부, 지부장실.

불과 몇 시간 전에 주인이 바뀐 그 사무실에서 한유빈이 걱정스레 물었다.

"불안합니까?"

"엄밀히 따지면 완전히 인수한 게 아니잖아요. 책임 권한을 위임받았다고 해도 국제 협회가 대표님을 지부장이 되도록 내버려 두지도 않을 거고...."

"당연히 그 꼴은 못 보겠죠."

담담하게 대답하자 한유빈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럼 의미 없는 거 아니에요?"

"글쎄요. 꼭 그렇지만도 않을 겁니다. 우린 이제 이번 사태에 대한 책임을 통감하고 국제 협회에서 탈퇴할 거라는 입장을 발표할 거니까요."

"...국제 협회가 탈퇴를 받아들여 줄까요?"

"말했잖습니까. 일본 지부가 가치가 없어지면 미련 없이 손을 놓을 거라고. 그리고 무엇보다...."

한유빈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그쪽도 말하지 않았습니까. 국제 협회도 제가 지부장이 되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거라고."

"아...."

"이대로 두면 저는 공식적으로 국제 협회에 소속된 지부장의 권한을 갖게 될 겁니다. 당연히 본부는 제가 본인들의 영역에 침범하는 걸 원하지 않겠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탈퇴 요청을 받아들일 거다…?"

"그럴 수밖에 없을 겁니다. 물론 이러나저러나 일본 지부가 저한테 넘어오는 건 막을 수 없겠지만... 본인들의 지부를 가져가는 것보다, 그냥 독립 협회 하나 쥐여 주는 게 차라리 나을 테니까요."

"흐음...."

한유빈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앞으로도 대표님이 계속 일본 지부를 관리할 거예요?"

"제가 그럴 시간이 어디 있습니까. 당연히 다른 사람을 책임자로 앉힐 생각입니다."

"누굴요?"

"뭐, 그야...."

나는 사무실 구석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곳에서 여전히 주춤거리고 있는 하라무라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하라무라 씨가 맡아주셔야겠죠."

"...어, 어?"

하라무라 류헤이는 상상도 못 한 이야기에 크게 당황했다.

"지, 진심인가?! 나한테 책임자 자리를 맡기겠다고?!"

"제가 이런 거로 농담이나 할 사람으로 보이십니까?"

"아, 아니 그건 아니다만. 대체 왜? 따지고 보면 이번 일의 원흉이 아닌가. 나한테 어째서 그런 과분한 자리를...."

"착각하시면 곤란합니다, 하라무라 씨."

세상에 공짜는 없다.

"이 자리는 선물이 아닙니다. 앞으로 일본에서는 한국으로 넘어간 지부를 맹렬히 비난할 거고, 국제 협회는 눈 뜨고 빼앗긴 지부를 어떻게 해서든 되찾기 위해 온갖 압박을 넣을 겁니다."

"...."

"다시 말해 제가 하라무라 씨에게 맡기려는 건, 그 모든 걸 감내해야 하는 자리입니다. 번지르르한 권력자의 자리가 아니라요."

그의 얼굴에 살짝 그늘이 드리웠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그는 겸허한 태도를 취했다.

"뭐, 그동안 거짓말한 대가라고 생각하지. 알겠네."

"그렇게 말씀하시니 다행이군요."

원하는 대답을 듣고 기지개를 켰다.

이걸로 대충 마무리는 됐다.

그동안 질이 떨어지는 무기를 유통한 것에 대한 책임은 모두 쇼이치 지부장에게 뒤집어씌웠다.

거기에 더해 시범 테스트 결과가 지부 소속 헌터들 사이에서 빠르게 퍼져나가며, 진짜 하라무라가 만든 무기는 소문대로 특별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기정사실화됐다.

거짓말에 거짓말이 더해지니, 하라무라 가문의 소문은 기어이 진실이 되었다.

앞으로도 그들의 영향력은 계속 유지되겠지.

'거기에 일본 지부까지 손에 넣었으니....'

더할 나위가 없다.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나저나… 조금 아쉽긴 하네요."

한유빈이 퍽 가라앉은 목소리로 재차 입을 열었다.

"뭐가 말입니까?"

"쇼이치 지부장 말이에요. 아무리 거짓말을 뒤집어씌웠다고 해도... 결국 우리 돈으로 평생 잘 먹고 잘살 거 아니에요."

"아, 계약금이랑 재단 말입니까?"

"네. 뭐, 그 인간을 내쫓으려면 어쩔 수 없긴 했지만,그렇긴 해도 좀 아니꼽긴 하네요."

"그거라면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겁니다. 그거 다 텅 빈 껍데기니까."

"...네?"

누구 좋으라고 그 새끼한테 정말 그 거액을 주겠는가.

처음 쇼이치 지부장에게 제시한 계약금은 1억 달러.

우리 돈으로 약 1,100억에 달하는 금액이었다.

하지만 실제 그에게 쥐여 준 금액은 1억 볼리바르.

베네수엘라 화폐로 지급한 그 금액은 현재 환율로 약... 126원.

그러게 아무리 급하다고 해도 확인을 제대로 했어야지.

애초에 자세히 확인하지 못하게 정신없이 몰아붙인 거긴 하지만.

"사탕 하나 못 사 먹는 돈으로 뭐 얼마나 잘 먹고 잘살겠습니까."

"...."

지금 뭘 들은 건가 싶은 표정이네.

"그, 그럼 청소년 헌터 육성 재단은요? 그건 정말 우리 쪽에서 추진하려고 했던 거잖아요."

"엥, 못 들었습니까? 그거 엎어졌습니다."

"네, 네? 왜요?!"

아... 이아영 본부장이 도맡아서 추진한 사업이라 저쪽 귀에까지 안 들어갔나 보군.

"사업 추진하려면 청소년 헌터 수련원이 꼭 필요했는데, 마침 경주 쪽에 지으려고 땅을 사놨었거든요."

"근데요?"

"웬걸, 그 자리에서 유적지가 발굴됐지 뭡니까."

"...."

"뭐, 덕분에 제대로 추진도 못 하고 빚만 수십억입니다. 조만간 추징이 있을 텐데. 뭐, 쇼이치 지부장이 그것도 모르고 덥석 받아버렸으니 우리야 감사하죠."

126원 플러스 수십억짜리 빚이라니.

뭐, 아무리 봐도 노후를 편하게 보내기는 글렀다.

"대표님."

미묘한 미소를 흘리고 있던 그때, 히나 보좌관이 사무실로 들어섰다.

"지금 지부 앞에로 대표님을 만나겠다고 찾아온 사람들이 있는데, 혹시 예정이 잡혀 있나요?"

"음? 아뇨. 미팅 예정은 없는데."

최소한 우리가 입장 발표를 하기 전까진 그 누구도 들여보내지 말라고 해놨다.

혹시라도 국제 협회 놈들이 찾아온다면 일이 꼬일 테니까.

그런데 솔직히 그쪽에서 직접 나를 만나러 올 것 같지도 않았는데....

대체 누구지?

"일단은 저희 쪽에서 출입을 막고 있긴 합니다만. 쉽게 물러가질 않고 있습니다."

"신원 파악은 했습니까?"

"네. 카르마 코퍼레이션 지원본부장이라고 합니다. 어떻게, 힘을 써서라도 돌려보낼까요?"

"...."

아니, 시벌 나랑 같은 소속이면 들여 보내줘야지 그걸 막고 있어?!

'하여간 융통성이라곤…!'

곧바로 사무실을 뛰쳐나와 1층으로 향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이, 이거 안 놔?! 나 대표님이랑 같은 소속이라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을 거야?!"

"어허, 그래도 안 된다고!"

"이 여자, 진짜 뭔 힘이…!"

"야! 그냥 들어서 밖에다 던져 버려!"

임시 보안팀으로 고용한 야쿠자들과 부대끼며 실랑이를 벌이고 있다.

그 뒤론 땀을 뻘뻘 흘리며 어떻게든 설득을 해보려는 하성일 본부장까지 보였다.

'...개판도 이런 개판이 없네.'

고개를 떨어트리며 한숨을 내쉬는 순간.

"야! 너희들 지금 뭐 하는 거야!"

한유빈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이아영과 야쿠자들의 시선이 동시에 그녀에게 쏠렸다.

"유빈 씨?! 아니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이 깡패들은 또 뭐고…!"

"안녕하십니까, 누님!"

"안녕하십니까!"

"...?"

야쿠자들이 일제히 동작을 멈추고 한유빈을 향해 허리를 90도로 숙였다.

그 광경을 본 이아영의 동공이 크게 벌어졌다.

"수상한 사람을 들여보내지 말랬지, 누가 내 동료까지 막으라고 했어!"

"…아! 도, 동료분이셨습니까?"

"죄, 죄송합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누님!!"

이내 이아영을 향해 허리를 숙인다.

저건 또 무슨 꼴값들이냐.

"미안해요. 나쁜 애들은 아닌데. 그… 생각이 좀 짧은 애들이라...."

"...."

이아영은 여전히 벙찐 표정이었다.

그리곤 한유빈과 나를 가만히 번갈아 보던 끝에 입을 열었다.

"대체 여기서 뭔 짓을 하고 다닌 거예요…?"

***

도쿄 어딘가, 인적이 드문 골목길.

쇼이치 지부장의 지시대로 하라무라 류헤이를 납치했던 밸런스팀 소속의 남자.

새로이 개편된 밸런스팀의 일본 파트장 황동휘가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는 김준우와 가장 가까이, 그리고 가장 오래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대규모 물갈이에서 가까스로 제외될 수 있었다.

살려줬다는 것만으로도 천운인데, 거기에 다시 현장 투입이라니.

이번만큼은 실수 없이 일을 진행하리라 마음먹기도 잠시.

'시발 대체 이게 무슨....'

그가 배정받은 지 정확히 한 달 만에 일본 지부가 공중분해 됐다.

그것도 또다시 김준우에 의해서.

가만히 있을 수 없다고 판단한 그는 곧바로 밸런스 팀장, 노아에게 전화를 걸었다.

"예, 팀장님. 지금 일본 지부가...."

「나도 알아. 본부도 지금 그것 때문에 난리가 났어.」

"어떻게 할까요? 보아하니 이번 일 마무리 때문에 꽤나 정신이 팔린 모양인데, 작업이라도 한번 시도해...."

「아니.」

노아 팀장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내버려 둬.」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눈 뜨고 지부를 빼앗겼는데…!"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인데. 주제넘게 본부 일에 끼어들지 말고 넌 시키는 것만 해.」

"...."

「경고하는데, 분명히 내버려 두라고 했다. 김준우 털끝 하나 건드렸다간 넌 나한테 죽어.」

뚝, 전화가 일방적으로 끊겼다.

"뭐야...."

말도 안 된다.

밸런스 팀장이라는 놈이 이걸 그냥 내버려 둔다고?

다른 생각이 있는 건가?

아니면....

둘 사이에 뭔가가 있나…?

167

167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요?"

국제 헌터 협회 본부.

웨슬리 사무총장이 노아 밸런스 팀장을 앞에 두고 입을 열었다.

노아 팀장은 잠시 대답을 아끼다가 입을 열었다.

"김준우 대표가 일본 내에서 여론을 조작한 모양입니다. 쇼이치 지부장은 책임을 지지 않으려 급하게 권한을 떠넘기고 도주했고요. 아마 처음부터 다 계획된 게 아닌가...."

"저도 그 정도는 압니다. 뭐, 그대로 있으면 우리한테든 아니면 일본에 책임을 물어야 했을 테니 이해는 합니다만. 제가 묻는 건 그런 게 아니라...."

그 순간, 웨슬리 사무총장의 날카로운 눈빛이 한 남자에게 향했다.

"그렇게 혼자 살려고 멋대로 지부를 넘겨버린 당신이, 대체 무슨 낯짝으로 여길 찾아왔냐는 겁니다. 쇼이치 지부장님."

"…아, 아닙니다!"

바닥에 바짝 엎드려 있던 쇼이치 지부장이 다급하게 고개를 저었다.

"호, 혼자 살려고 했다뇨! 절대 사실이 아닙니다. 전 김준우 대표가 저희 지부를 도와준다는 말을 믿고 책임 권한을 위임한 것뿐입니다."

"그 말을 믿었다고요? 도와준다는 명분으로 한국 협회를 집어삼키려고 했던 분이?"

"...."

"그리고 말입니다. 듣자 하니 권한을 넘기는 조건으로 계약금에 리베이트까지 챙겼다던데, 그건 어떻게 설명하실 건가요?"

날카로운 지적에 쇼이치 지부장의 어깨가 움찔했다.

그 모습을 본 웨슬리 사무총장이 알 만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가짜였군요?"

"...!"

"받아 챙긴 돈으로 어디 경치 좋은 데서 편하게 먹고살려고 했는데, 나중에 보니 손에 들린 게 돈이 아니라 휴짓조각이었다.... 그렇게 속았다는 걸 알고 나서야 나한테 도움을 청하려고 찾아왔다. 이거 아닙니까, 지금?"

"그, 그런 게 아니라...."

쇼이치 지부장의 목소리가 점점 기어들어 갔다.

웨슬리 사무총장은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설마 자신이 모를 줄 알았다고 생각한 건가.

"하, 한 번만 다시 기회를 주십시오! 애초에 이건 불공정 거래였으니, 사무총장님 선에서 권한 위임을 철회할 수 있지 않습니까! 김준우 대표를 끌어내리고 저에게 다시 맡겨주신다면…!"

"제가 왜 그래야 하죠?"

"...네?"

너무나 단호한 거절에 쇼이치 지부장의 동공이 순간 흔들렸다.

"이미 당신 덕분에 일본 지부는 국제적으로 회복할 수 없는 망신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지부를 계속 유지한다고 하면, 주변 국가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

"설령 당신이 복귀한다고 해도 한국과 중국에 어떤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을 게 뻔한데, 제가 왜 당신을 복귀시켜야 하는 거죠?"

"그, 그렇다고 멀쩡한 지부를 김준우, 그놈한테 빼앗기는 건 본부로서도 큰 손해 아닙니까…!"

"뭐, 그건 맞습니다. 두 눈 시퍼렇게 뜬 채로 지부를 빼앗긴 건 너무나 큰 손해지만...."

웨슬리 사무총장은 여전히 바닥에 엎드려 있는 쇼이치 지부장에게 다가가 말을 이었다.

"이젠 일본 지부를 계속 가지고 있는 게 더 손해인 것 같군요."

"...."

"이미 탈퇴 절차는 진행 중입니다. 일본 지부는 이제 카르마 코퍼레이션 산하가 되겠죠. 물론 김 대표가 당신을 다시 부를 일도 없을 거고요."

쇼이치 지부장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것뿐이라면 다행이었다.

그에겐 더욱 가혹한 마지막이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뭐, 그건 그렇고.... 쇼이치 지부장님은 멋대로 우리 지부를 팔아버린 책임을 지셔야겠죠."

웨슬리 사무총장이 담담하게 말했다.

아무렴, 지부를 홀랑 넘겨버리고 제 발로 기어들어 온 파렴치한 놈을 가만히 둘 순 없었다.

"우리가 향후 10년 동안 일본 지부로부터 벌어들일 수 있었던 추정 수익을 배상하셔야겠습니다. 물론 조금 감면해 드릴 생각이니, 너무 걱정하진 마세요."

"어, 얼마나...."

"통 크게 50% 감면해서... 2조만 배상하시면 됩니다."

"예, 예…?!"

상상을 초월하는 액수에 쇼이치 지부장의 심장이 쿵 떨어졌다.

"2조라뇨?! 그, 그런 말도 안 되는...!"

"물론 쇼이치 지부장님 개인이 부담할 수 있는 액수는 아니죠. 그런데 뭐, 듣자 하니 아드님이 꽤 큰 중소기업의 대표라면서요?"

웨슬리 사무총장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아드님 회사에서 벌어들이는 수익 전부를 저희에게 보내시면 됩니다. 그래도 모자랄 것 같긴 한데. 당신 손주… 안 되면 증손주까지 열심히 벌면 어떻게든 되지 않겠습니까?"

"...."

"어쨌든 앞으로 당신 아래 3대가 버는 모든 재산은 전부 저한테 바친다고 생각하세요. 이건 그 계약서니까, 서명하고 가시고요."

"아, 안 됩니다…! 이건 너무 하지 않습니까!"

사형선고, 아니 어쩌면 죽는 것보다 더욱 끔찍한 계약서 내용에, 쇼이치 지부장은 최후의 발악을 했다.

"제발 한 번만… 한 번만 살려주십쇼. 제가 어떻게든 책임지고 해결하겠습니다."

"제가 언제 죽인다고 했습니까? 살려드린다고 하지 않았나요?"

"이, 이건 죽으라는 것밖엔...."

"그래서, 서명을 못 하시겠다는 겁니까?"

"제발 한 번만 자비를...."

쇼이치 지부장은 기어이 두 손을 모으고 삭삭 빌기 시작했다.

물론 그런 어쭙잖은 짓이 먹힐 상대가 아니었다.

"그럼 뭐, 지부장님에게 맞춰서 저도 동양식으로 갈 수밖에 없겠군요."

"…예, 예?"

"노아 팀장님, 쇼이치 씨 엄지 하나 잘라서 지장으로 찍어주십쇼."

"...알겠습니다."

이윽고 쇼이치 지부장 앞에 노아 팀장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자, 잠깐…!"

그가 단말마를 뱉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무총장실에서 끔찍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

하네다 공항.

출국 시간이 얼마 남지 않는 시각.

이아영과 하성일 본부장이 일본 지부에 남아 아직 해결해야 할 내부적인 문제를 맡아주기로 했기에, 오늘 한국으로 돌아가는 건 나와 한유빈뿐이었다.

"참 나...."

그런 우리를 배웅하러 온 이아영 본부장은 여전히 기가 차다는 듯 한숨을 뱉었다.

"한 명은 찌라시 확인하러 간다더니 일본 지부를 인수하질 않나, 한 명은 일본 전역 야쿠자 세력을 통일하질 않나...."

"결과적으로 다 잘되지 않았습니까. 국제 협회에서도 별말 없이 탈퇴 요청을 받아들여 줬고요."

"흥, 일은 당신이 다 벌이고 마무리는 제가 해야 하는 거, 좀 웃기지 않아요?"

"...마무리는 본인이 하겠다고 여기까지 찾아온 거 아닙니까?"

어이가 없네.

누가 보면 내가 떠넘긴 줄 알겠어.

"말이 그렇다는 거죠, 말이."

이아영 본부장은 할 말이 없다는 듯 대충 얼버무렸다.

"뭐, 아무튼 모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혹시 문제 생기면 바로 연락주시고요."

"여긴 걱정하지 말고 본사 일에만 신경 써요. 대표님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일이 얼마나 많이 쌓였는데요. 귀국하자마자 출근해야 할걸요?"

"...듣던 중 개 같은 소리군요."

시벌, 난 대체 언제 쉬어보냐.

"그럼 조심히 돌아가십시오, 대표님. 도착하시면 연락 주시고요."

"알겠습니다. 그럼 두 분 다 조금만 더 수고해 주세요."

하성일 본부장 또한 악수를 건네며 우리를 배웅했다.

수속을 모두 마치고, 비행기에 올라 이륙을 기다리고 있던 그때였다.

"한유빈 씨, 뭐 하나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하던 생각을 정리하고 내가 넌지시 입을 열었다.

"뭔데요?"

"다른 게 아니라, 미국 지부에 있었을 때 그쪽 친구분 일 말입니다."

"...."

말을 꺼내기 무섭게 그녀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화가 난 건 아닌 듯했고, 그저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조금 당황한 모양이었다.

"그건 왜요…?"

"혹시 미국 지부에서 그런 비슷한 일이 또 있었습니까?"

"...?"

질문의 의도를 모르겠다는 반응.

때문에 내 쪽에서 먼저 본론을 꺼내 들었다.

"3년 전쯤인가, 미국 지부 소속의 청소부가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제가 알기론 당시 청소부가 투입된 던전은 저위험도 등급이라 목숨을 잃을 만한 요소가 없었다고 하던데… 혹시 그 사고에 대해서 아는 게 있습니까?"

"아… 그거라면 들어본 적은 있는데, 그건 갑자기 왜요?"

"누구랑 거래를 좀 하기로 해서."

현 PB 코퍼레이션 밸런스 팀장이자 세계 랭킹 1위의 헌터랑 말이지.

물론 그것까지 말할 필요는 없겠지만.

대충 얼버무리자 한유빈은 뭔가 떨떠름한 듯했지만, 그럼에도 대답을 해주었다.

"저도 들어본 적이 있는 거지, 자세하겐 몰라요. 이름이... 소피아 웨스턴 우드였나, 아마 그럴 거예요. 그 왜 세계 랭킹 1위 있잖아요. 그 인간이랑 성이 같아서 기억하고 있죠."

보아하니 그 인간의 친여동생이라는 건 모르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진짜 작업 중 사고를 당한 게 맞습니까?"

"그게… 확실하진 않아요."

"확실하지 않다니, 그게 무슨 소립니까?"

"설명하기 좀 어려운데...."

그녀는 잠시 생각을 정리하더니 다시금 설명을 이어갔다.

"이건 저도 들은 건데, 통제팀 직원 말에 의하면 당시 별다른 사항 없이 청소 완료 보고가 올라왔었대요. 그러니까 작업이 끝날 때까진 아무 일도 없었다는 거죠."

"...?"

뭔 소리야 그게.

작업에 문제가 없었는데, 작업 중 사고를 당했다?

"청소 작업은 문제없이 끝났는데, 그 이후에 갑자기 사고가 발생해서 목숨을 잃었다는 겁니까?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거기까진 저도 모르죠. 다만 청소 완료 보고가 올라온 직후에 국제 협회 본부 직원들이 해당 던전으로 찾아갔고, 그들 말로는 소피아는 던전에서 나오지 않았다고 해요."

"아니, 그게 무슨...."

본부가 직접 던전에 행차했다고?

대체 왜?

"같이 있던 청소팀 동료들은요? 그 사람들은 뭔가 알고 있을 거 아닙니까."

"물론 지부에서 그 사람들 대상으로 조사는 했죠. 그런데 다들 겁에 잔뜩 질려서 조사할 상태가 아니었다고 하더라고요. 뭔진 몰라도 충격을 많이 받은 것 같아요."

안타까운 일이라는 듯 혀를 차곤 다시 말을 이었다.

"아무튼, 그 동료들도 머지않아서 다 그만뒀어요. 그 뒤로 뭐 하고 지내는지는 알 턱이 없고요."

"...그렇군요."

"대답이 좀 됐어요?"

"아뇨."

"...?"

"결국,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본인도 모른다는 거 아닙니까.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듣지 말 걸 그랬습니다. 괜히 머리만 더 아프네."

"...."

반 농담으로 한 말이었는데, 한유빈의 눈에 살기가 드리웠다.

불끈 쥔 주먹이 떨려오는 걸 보고는, 나는 곧바로 애써 모른 척 시선을 돌렸다.

사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머릿속에선 대강 그림이 그려졌다.

아무 문제 없이 진행된 청소 작업.

그 직후 직접 던전을 찾은 본부 직원.

의문의 실종. 입을 닫은 동료들.

이것들로 유추해봤을 때 생각해볼 수 있는 건....

'청소 작업 중에 던전에서 뭔가가 나왔다?'

뱅크 아이템?

아니, 지부가 획득한 뱅크 아이템을 굳이 직접 찾으러 갈 리가 없다.

직접 찾으러 갈 만큼 중요한 거라면....

모르겠군.

저 정도 단서로 거기까지 알아내면 그게 귀신이지.

뭐, 시간이 나면 자세히 알아봐야겠군.

그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대체 던전에서 뭐가 나온 건지.

나는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며 좌석 등받이에 몸을 쭉 기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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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

"하아...."

일본에서 돌아온 지 고작 3일째.

굵직한 걸 하나 해결했으니 심적으로 여유로울 만도 한데....

한숨이 절로 길게 나온다.

일이 너무 많다.

많아도 너무 많다.

이아영 본부장이 언질을 주긴 했지만, 설마하니 고작 일주일 자리 비웠다고 이 정도로 밀려 있을 줄이야.

게다가 대부분 해외 사업 기획 검토나 이번 분기 옐로우 등급 이상 던전 토벌 기획 같은, 대충 넘길 수 없는 업무들뿐이다.

거기에 최근 일본 지부의 운영 책임 권한을 위임받은 것 때문에 관련 내용으로 기자회견 준비까지 해야 했다.

무엇보다 이아영, 하성일 본부장이 아직까지 일본에서 돌아오지 않은 탓에 그들에게 넘어가야 할 업무까지 죄다 내게 오고 있다.

'설마 이래서 일부러 일본 지부에 남겠다고 한 건 아니겠지…?'

묘한 배신감에 눈썹이 꿈틀거리기도 잠시.

등받이에 몸을 푹 기댔다.

'쯧, 차라리 청소만 할 때가 좋았어....'

몸은 힘들어도 청소에만 집중하면 됐었으니까.

반평생을 던전에서 보낸 내가 해본 적도 없는 서류 결재나 하고 있으니... 머리가 아프다 못해 돌이 될 지경이다.

물론 그때로 돌아가라고 한다면 단호하게 거절하겠지만.

'하아, 어떻게… 해도 해도 끝이 없냐.'

답답한 마음에 책상에 쌓인 서류를 괜히 뒤적거리던 그때였다.

눈길을 끄는 서류 하나를 발견했다.

'사내 건의 사항…?'

급 흥미가 생겨 빼 들었다.

건의 사항은 나에게까지 올 리가 없는 서류였던 까닭이다.

원래 사내 건의 사항은 지원 본부에서 일괄적으로 처리한다.

당연히 해당 업무 담당자는 이아영 본부장, 아니면 지원 본부 직원들이 맡는다.

어지간히 큰 건이 아니고서야 나에게까지는 오지 않는다.

아무래도 그녀가 자리에 없으니 돌고 돌다 여기까지 온 모양이었다.

'어디 보자....'

서류를 펼쳐보니 청소팀에서 올라온 건의 사항이었다.

천천히 내용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시험 기간엔 뉴스마저 그렇게 재밌을 수가 없다고 했던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모든 내용을 검토한 후 서류를 덮으며 잠시 턱을 쓰다듬었다.

이런 일이 있었군.

뭐, 이쪽으로 신경을 못 쓴 지 꽤 됐으니....

물론 내가 직접 처리할 만한 내용은 단연 아니다. 그냥 지원 본부에 넘겨버려도 그만이긴 한데, 그럼에도 고민에 빠졌다.

그렇게 책상 위에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끝에.

'기분 전환 좀 하고 올까.'

그래, 직원들의 고충을 직접 덜어주는 것도 대표의 의무가 아닌가.

무릇 참된 리더라면 이런 작은 부분까지 돌볼 줄 알아야겠지.

아무튼, 그런 이유다.

일하기 싫어서 농땡이 피우려는 건 절대 아니고.

***

"아니, 대체 언제까지 이래야 한답니까?!"

청소 2팀 소속, 김동혁이 격양된 목소리를 냈다.

그러자 2팀장, 배해갑이 곧바로 대꾸했다.

"그걸 왜 나한테 따져, 인마. 일단 건의 사항 올렸으니까 기다려보자고."

"그거 위에서 들어주긴 해요? 요즘 뭐 일본 지부다 뭐다 해서 해외 쪽으로만 신경 팔려있는데?"

"야 인마, 언제 안 들어준 적 있냐. 최소한 담당자라도 내려보내 주겠지."

"하아, 그게 언젠 줄 알고 기다립니까."

김동혁이 못마땅하다는 듯 머리를 헝클이자, 배해갑 팀장은 미간을 찌푸렸다.

당연히 팀장에게 따박따박 말대답하는 게 좋게 보일 리는 없었지만, 이번 일로 팀원들이 무척 고생하고 있는 걸 다 알고 있는 마당에 면박을 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들이 요즘 들어 이토록 신경이 날카로워진 이유는, 다름 아닌 임시 보관소 때문이었다.

사체 임시 보관소.

청소팀이 작업을 끝낸 사체를 잠시 보관해두기 위해 도심 곳곳에 설치한 기관이다.

몬스터 타입과 이름, 그리고 특이 사항을 적어 놓고 사체를 분류해 놓으면, 매일 밤 담당 운반 업체가 그것을 수거해 인근 부산물 처리 시설에 조달한다.

물론 작업과 동시에 운반이 가능하다면 굳이 사체를 보관할 필요가 없겠지만, 개별 운반하면 인적, 물적으로 손해가 커 현실적으로 힘든 일이다.

과거 한국 협회에서부터 써오던 방식이었고, 협회와 합병한 카르마 코퍼레이션 또한 같은 방식을 고수해오고 있다.

그런데 최근, 엄청난 부자 동네로 유명한 지역에 있는 19구역 임시 보관소에 대해 컴플레인이 들어왔다.

근처 아파트 단지에서 악취와 정서적 문제로 임시 보관소 폐쇄를 요청한 것이다.

사실 말이 안 되는 요청이었다.

당연히 시민들의 정서적 안정을 위해 임시 보관소는 무조건 지하에 설치했고, 악취나 가스 누출과 같은 문제가 일어나지 않도록 철저하게 관리하고 있으니까.

처음엔 대화로 잘 풀어보려 했지만, 워낙에 강경히 반발하고 나선 탓에 결국 19구역 임시 보관소는 폐쇄됐다.

문제는 그다음부터였다.

해당 구역의 보관소가 사라졌으니, 어쩔 수 없이 사체를 다른 구역의 보관소로 옮겨야 했다.

기존에는 보관소에서 밤마다 한 번 수거를 해갔으니 눈에 잘 띄지 않았겠지만.

이젠 낮이고 밤이고, 작업 때마다 사체를 옮겨야 했으니 그만큼 사람들의 눈에 띄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덕분에 또다시 컴플레인.

아이들의 정서에 악영향을 끼친다는 이유로 학교, 아파트 근방에선 사체 운반을 규제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진짜 해도 해도 너무합니다. 우리가 뭐 동네방네 사체 자랑이라도 했답니까?! 안 보이게 비닐도 잘 씌우고 했는데, 이렇게 나오는 건 진짜…!"

"그게 진짜 애들 때문이겠냐. 그냥 본인들 생활 구역에 몬스터 사체가 돌아다니는 게 싫은 거지."

배해갑 팀장이 혀를 찼다.

이것도 안 된다, 저것도 안 된다 하니 그들은 어쩔 수 없이 해당 지역에서 작업을 마치면 다른 보관소까지 최대한 먼 거리로 돌아가야 했다.

사실 거기까진 그저 귀찮다 뿐이지, 별다른 문제는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하고 조금 불편한 건 감수하려고 했다.

몬스터 사체를 동네에서 완전히 몰아냈다는 소식이 다른 아파트 단지에 들어가기 전까진.

덕분에 이 동네 저 동네에서 보관소 폐쇄 요청이 쏟아지고 있는 판국이다.

청소 1팀장인 한상혁과 청소과장 문소연도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 꽤나 노력하고 있는 듯했지만, 아직 별다른 소식이 없는 걸 보면 잘 안 되고 있는 모양이었다.

결국, 참다못해 배해갑 팀장이 나서서 사내 건의 사항을 올린 상황.

물론 상부에서 이런 자잘한 일까지 신경 써주리라곤 장담할 수 없지만.

'쯧, 하여간 이기적인 놈들....'

배해갑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옆에 데면데면 서 있던 젊은 남자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범진이, 너한텐 미안하게 됐다. 입사한 지 한 달도 안 됐는데 들어오자마자 고생만 하네."

"아, 아닙니다. 저보다 선배님들이 더 고생이시죠. 저는 괜찮습니다."

청소 2팀의 신입, 우범진 사원이 바짝 긴장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렇게 말해주니, 마음이 좀 편해지네. 클클."

"팀장님도 참… 그냥 하는 소리잖아요. 그럼 새파랗게 젊은 신입이 팀장한테 힘들다고 하겠어요?"

김동혁이 고개를 저었다.

"아무튼, 이거 솔직히 우리 선에서 해결할 문제도 아닌데 대체 윗분들은 뭘 하는 건지...."

"에휴, 높으신 분들이 이런 거 신경이나 쓰겠냐. 토벌이나 해외 사업 같은 중요한 일만 하기에도 바쁠 텐데."

"그래도 이건 아니잖습니까. 뭐, 우리 대표도 청소부 출신이었다면서요? 그럼 더 신경 써줘야지, 이게 뭐야."

김동혁이 패기인지 객기인지 모를 말을 내뱉었다.

"그냥 제가 직접 대표님 만나보고 올까요? 똑 부러지게 한마디 할 수 있는데!"

"됐다, 새끼야. 담당자 오면 내가 잘 얘기해볼 테니까, 허튼소리 말고 구경이나 해."

"믿습니다? 높은 분이라고 막 괜찮다, 할 만하다 그러시면 안 돼요?"

"이런 일에 높은 사람이 내려오겠냐? 끽해야 지원 본부 쪽 놈이겠지. 그리고 높은 분이면 뭐! 대표가 와도 단단히 일러줄 거니까 걱정을 하질 마!"

배해갑 팀장이 주먹으로 가슴을 탕탕 치며 호언장담을 했다.

그리고 그때, 사무실에 전화가 울렸다.

"범진아, 전화 좀 받아봐."

"네, 네."

팀장의 지시에 전화를 받은 우범진은 몇 번 네네, 하더니 금세 통화를 끝냈다.

"뭐야? 누구야?"

"어… 담당자분이라는데... 지금 건의 사항 확인차 오신다고 하네요."

"아 그래? 마침 잘됐네."

배해갑 팀장은 팔을 걷어붙이며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오래가진 않았다.

똑똑―.

노크와 함께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임시 보관소 관련해서 문제가 있다고 해서 왔습니다. 팀장님 계십니까?"

"...어?"

"...아?"

배해갑 팀장과 김동혁 대리는 담당자를 보자마자,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김준우.

그들이 소속된 회사의 최고 책임자.

농담처럼 말한 카르마 코퍼레이션의 대표가, 진짜로 직접 행차한 것이다.

"아까 대표가 와도 단단히 일러준다고 하셨죠?"

"너 아까 직접 찾아가서 담판 짓고 온다고 하지 않았냐?"

"...."

"...."

둘은 서로 중얼거리다 이내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닫았다.

빌어먹을.

진짜 대표가 내려올 줄 누가 알았겠냐고.

***

"...."

"...."

청소 2팀 사무실.

자세한 사항을 듣기 위해 배해갑 팀장을 포함해 몇 명의 직원들과 대면하고 있는 상황.

그런데.

'왜 아무도 말을 안 해…?'

어째 몇 분째 입을 여는 놈이 없다.

입에다 본드라도 발랐나?

사람 불러 놓고 아무 말도 안 할 거면 건의 사항은 왜 올린 거야.

결국, 참다못한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건의하신 내용은 자세히 검토했습니다. 이곳저곳에서 임시 보관소 폐쇄 요청을 하고 있다고요?"

"예, 예, 예… 그렇습니다."

"작업하는데, 꽤나 불편하시겠군요."

"아, 아닙니다. 할 만합니다."

"...?"

할 만하다고?

그러면 건의 사항은 왜 올렸어?

'아니 그것보다… 전혀 할 만한 상황이 아닌데?'

이래 봬도 청소부 출신이다.

임시 보관소가 줄어들면 어떻게 되는지 모를 리가 없지 않은가.

"정말 괜찮으신 거 맞습니까?"

"그… 예, 예. 괜찮습니다."

배해갑 팀장이 어물쩍 대답하자, 옆에 있던 김동혁 대리가 곧바로 그를 쏘아본다.

왜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옅은 한숨과 함께 다시 말을 이었다.

"제가 대표라고 눈치 보지 마시고 편히 말씀해주십시오. 분명히 애로사항이 있으니까 건의를 하신 거 아닙니까?'

"...."

"...."

눈치 보지 말고 말하라는 데도 입을 열질 않는다.

징하다, 징해.

내가 뭐 잡아먹나?

대체 왜들 저러는....

"임시 보관소 이용이 어려워지면서 몬스터 사체 보관 및 작업 일정 전체가 힘들어지고 있습니다."

"...?"

"...?!"

그 순간, 옆에서 잠자코 있던 젊은 남자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낯익은 얼굴이 아닌 걸 보니 신입인 듯하다.

"야, 야…!"

"너, 너 인마…!"

그와 동시에 무슨 폭탄이라도 터트린 것처럼 질겁하는 팀장과 대리.

하지만 신입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이대로라면 하루 평균 가능한 작업량이 기존 대비 40% 이상 감소할 수 있습니다. 임시 보관소 폐쇄뿐만 아니라, 사체를 운반할 수 있는 도로까지 제한시키고 있어 문제가 생각보다 심각합니다. 때문에 보다 근본적인 해결을 위해선 상부의 개입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

신입이 말을 마치자 옆에 앉은 두 남자가 바짝 긴장하기 시작했다.

가만히 신입을 바라보다가 피식 미소를 지었다.

새끼, 간만에 쓸 만한 놈이 들어왔네?

"알겠습니다. 당분간 제가 청소팀과 동행하면서 직접 해결책을 모색해보겠습니다."

"…예, 예?!"

"대, 대표님이 저희랑 같이 일을 하시겠다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물론 세 분이 불편하지만 않다면요."

"아, 아유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저희야 영광이죠. 다만...."

배 팀장은 손사래를 치더니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동행하시기에 저희 일정이 조금 힘들 수도...."

"하, 하하하. 걱정 마시죠."

조금 힘들어?

참 나, 어이가 없어서.

나 땐 말이야, 닷새 연속으로 '운 나쁜 날'이어도 3시간 자고 주말에 출근하고 그랬어.

"저 이래 봬도 1년 전엔 별명이 귀신 들린 빗자루였습니다."

물론 거짓말이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사무실에 틀어박혀서 서류 작업이나 하는 건 이젠 지겨운걸.

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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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구, 어딘가.

방금 막 토벌이 완료된 던전 앞에서, 나와 청소 2팀원들은 작업에 들어가기에 앞서 장비를 체크하는 중이었다.

분주하게 작업 준비를 하는 팀원들 사이에서, 나는 그들이 가져온 장비를 뒤적거리며 딴생각에 빠져 있었다.

'이 방호복 내가 청소팀일 때 쓰던 건데 이걸 왜 아직까지 쓰고 있어…?'

심지어 방독면과 기타 청소 장비들도 모두 옛날 것이다. 그마저도 여분이 충분하지 않은지, 며칠 동안 똑같은 장비로 작업을 한 모양이다.

냄새며 얼룩이며, 아주 개판이네.

"어, 어…? 대, 대표님은 안 들어가셔도 됩니다. 작업은 저희끼리 할 테니 여기서 기다리시는 게...."

내가 장비를 만지작거리고 있자, 배 팀장이 화들짝 놀라며 나를 말렸다.

"아뇨. 동행하겠다고 했는데, 정작 작업을 안 하면 너무 염치없지 않습니까."

"마, 말씀은 감사한데… 대표님이 쓰기엔 장비도 더럽고...."

"말이 나와서 말인데, 왜 아직도 이런 장비를 쓰고 있습니까? 분명 최근 던전 관리부에 예산 편성도 해줬는데…?"

던전 관리부.

이번에 협회와 합병하면서 내가 새롭게 만든 부서다.

이전 협회에선 작전, 지원, 통제, 청소팀이 모두 이능운용부에 소속되어 있었지만, 그 때문에 비교적 힘이 약한 청소팀은 매번 다른 팀에게 간섭을 당하지 않았던가.

그것을 막기 위해선 토벌 팀과 비토벌 팀을 따로 나눌 필요가 있었다.

나는 기존 청소팀을 이능운용부에서 빼서 아예 새로운 부서를 편성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기획 본부 소속의 던전 관리부.

책임자는 박근태 부장.

그 밑에 문소연 청소과장.

청소과 아래에는 던전 투입 파트인 청소팀과 후속 관리 파트인 부산물 처리팀으로 나누었다.

이렇게 아예 지휘 체계가 다르면 이전처럼 작전팀이 청소팀에게 함부로 간섭하는 일도 없을 거고, 보다 체계적인 작업이 가능하겠지.

...라고 생각했는데.

간섭은 둘째치고 예산이 공중분해 될 줄이야.

'설마 박근태 부장이 삥땅 쳤을 리는 없고....'

이해가 안 가는데.

"그, 그게...."

배 팀장은 여전히 나에게 말하기 껄끄러운 건지 자꾸만 말끝을 흐렸다.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우범진 사원을 바라봤다.

"이번 일로 임시 보관소를 이용하지 못하게 되면서 사설 유통 업체를 고용하다 보니, 장비 교체가 힘들어졌다고 알고 있습니다."

역시나 청산유수다.

"무엇보다 컴플레인을 걸고 있는 몇몇 아파트 단지에서 정신적 피해 보상 명목으로 합의금을 요구하기도 해서... 그쪽으로도 지출이 큰 모양입니다."

"대단하군요. 신입이라면서 어떻게 그렇게 자세히 알고 있습니까?"

"모두 선배님들이 말씀해주신 내용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배 팀장과 김 대리를 바라본다.

'새끼, 볼수록 마음에 드네.'

흡족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것도 잠시.

피 같은 회사 예산이 엉뚱한 곳으로 새고 있네.

죽 쒀서 개 주고 있는 꼴이 아닌가.

'이건 어떻게든 해야겠는데....'

일단 어느 부분이 어떻게 문제인지는 자세히 알아볼 필요가 있으니.

"뭐, 알겠습니다. 일단 작업부터 들어가시죠. 더 지체하면 위험해질 테니."

"예, 예? 대표님도 들어가시려는 겁니까?"

"그럼 저 혼자 밖에서 뭐 합니까. 사람 많으면 작업도 빨리하고 좋죠."

"아… 그, 그래도...."

"걱정 마세요. 방해될 정도는 아닐 테니까."

나는 서둘러 방호복을 착용했다.

예산 편성을 했는데도 이런 장비를 쓰고 있는 게 어이가 없긴 했지만, 사실 내가 청소팀일 때에 비하면 이 정도는 깨끗한 편이지.

"그럼 다들 타이머 맞추시고, 준비되셨으면 들어갑시다."

내가 먼저 던전으로 들어섰다.

***

"아니, 그래서 우리 동네에 있는 임시 보관소는 대체 언제 폐쇄할 거예요?"

기획 본부, 던전 관리부.

접견실에서 박근태 부장에게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중년 여성은 플래티넘 파크 단지의 부녀회장, 강순복이었다.

박근태 부장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 주만 벌써 몇 명째인가.

마음 같아선 호통쳐서 돌려보내고 싶지만, 독립 기구였던 협회와 다르게 엄연한 기업인 카르마 코퍼레이션은 시민들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가 없다.

자칫하다간 저번처럼 여론이 악화하거나, 혹은 또다시 정부에서 견제가 들어올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박근태 부장은 다른 이들에게도 했던 말을 또다시 할 수밖에 없었다.

"양해를 좀 해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지금 12구역 임시 보관소는 선생님 단지에서 꽤나 거리도 있고, 무엇보다 해당 보관소는 저희에게 너무나 중요한 곳이라...."

"아니, 제가 뭐 그쪽 일하는 거 방해하려고 이래요? 보관소 길목에 초등학교 있는 거 알죠? 낮이고 밤이고 사체를 실은 트럭이 왔다 갔다 하는데, 우리 애들이 그걸 보면 정서적으로 얼마나 안 좋을지 생각해보셨어요?"

"저희 쪽에서도 그 점을 인지하고 최대한 잘 봉인해서 운반하고 있습니다."

조금 강경한 투로 설명하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아시다시피 원래는 보관소에서 하루에 한 번, 밤에만 운반합니다. 그런데 요즘 보관소 이용 제한 요청이 너무 많아서, 어쩔 수 없이 다른 보관소를 이용하기 위해 부득이하게 낮에도 운반할 수밖에...."

"그건 그쪽이 어떻게든 해야지! 아무튼, 우리 동네 보관소도 당장 폐쇄해요. 안 그럼 진짜 정신적 피해로 고소할 거예요!"

하지만 그녀는 곧바로 박근태 부장의 말을 자르며 고함을 질렀다.

"...빠른 시일 내에 대책을 마련해보겠습니다."

결국, 박근태 부장은 또다시 그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벌써 몇 번째 똑같은 레퍼토리, 똑같은 결과.

이번 부녀회장 또한 자신이 승리했다는 듯, 퍽 만족스러운 얼굴로 사무실을 벗어났다.

그와 동시에 박근태 부장은 깊은 한숨을 몰아쉬었다.

"오늘도 왔다 갔어요?"

그때, 문소연 청소과장이 사무실로 들어왔다.

"엉. 12구역 보관소까지 폐쇄해달라더라."

"네?! 거긴 절대 안 돼요! 이제 강남 쪽에서 이용할 수 있는 보관소가 거기 하나뿐인데 거기까지 막아버리면...."

"나도 알지. 거기도 막혀버리면 이제 아예 다른 구까지 넘어가서 보관해야 하는데... 그러면 일정이 너무 꼬여버리고.'

박근태 부장의 대답에 문소연 과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보다 작업 하나 끝날 때마다 다른 구까지 운반하게 되면 팀원들 휴식 시간도 없는 거나 마찬가지고요."

"그렇지...."

"어떻게 하시게요…?"

그녀가 묻자 박근태 부장이 고개를 저었다.

"뭐 어쩌겠냐. 저번처럼 지원금 쥐여 주고 폐쇄만이라도 막아야지."

"예산 남아있어요?"

"간당간당해."

"청소팀 장비 교체해야 하는데...."

"으으! 미치겄다, 진짜!"

쌓여만 가는 문제에 박근태 부장이 머리를 쥐어뜯었다.

"준우 씨… 아니, 대표님한테 얘기해보는 게 어때요?"

"요즘 해외 사업으로 바쁜 사람한테 이런 것까지 어떻게 얘기하냐."

"...하긴."

"그래도 이번에 청소 2팀이 건의를 넣어서 담당자 내려왔다니까 기다려보자. 뭐, 어떻게든 해결해주지 않겠냐?"

"글쎄요. 대표님이 내려오는 게 아닌 이상 힘들 것 같은데...."

"하아...."

박근태 팀장은 대답을 아꼈다.

그 또한 문소연 과장과 같은 생각인 까닭이었다.

물론 이번 일이 아예 작업 자체가 불가능할 만큼 큰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모든 직원이 큰 불편을 겪고 있는 이상, 근본적인 해결 방안을 찾아야 한다.

다만....

'어떻게 해야 할지 감도 안 잡히네.'

본인들 선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걸, 본인들이 더욱 잘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