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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낯설지 않은

추하민은 처음 민시우를 본 순간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느적지근하고 권태로워 보이는 표정부터 건방져 보이는 행동까지.

자신의 스승이 떠오른 탓이다.

비록 반년도 채 배우지 못한 스승이긴 하나, 그가 지금 이 자리까지 있게 해 준 고마운 은사임엔 틀림없는 사실.

'스승님은 규격 외였었지.'

추하민에게 가르침을 전해 준 헌터는 사실상 괴물 그 자체였다.

그의 등에 새긴 아수라의 형상은 스승의 전투로부터 영감을 받아 참고하여 그린 것이었다.

대중들은 그의 싸움 방식과 아수라의 신형이 흡사하다고 생각했겠지만, 추하민은 스승에 비하자면 자신 따위는 아수라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처음 본 민시우에게서 스승의 권태로움이 엿보인 것이다.

순간적으로 든 그 생각이 추하민의 짜증을 유발했다.

'저런 허접쓰레기에게서 내가 스승의 모습을··· 기도 안 차네, 씨발.'

게다가 실제로 확인한 민시우의 상태는 마력량도 형편없었다.

A급은커녕 B급의 격도 제대로 견디지 못할 수준 낮은 잠재력.

'거트한테 비빌 능력치고는 허접해 보이는데. 고작해야 D급? 많아야 C급 정도의 마나나 되려나.'

추하민은 냉철한 이성을 돌렸다.

석연치 않은 구석이 너무 많았다.

'이 새끼, HMCS에서 조미료 친 것 같은데.'

반반하게 생긴 신입 하나를 데려다 새로운 전투 헌터랍시고 HMCS에서 포장한 게 분명하다.

실제로 거트를 잡은 건 다른 외부 헌터의 짓이 틀림없고.

'이딴 교육 이벤트도 뻔하지. 어쩐지 백건호 정도 되는 양반이 직접 나섰다 했는데··· 이놈이 HMCS 얼굴마담이라 이거지?'

능력 있는 헌터라면 그만한 대가를 주는 길드를 택하는 게 당연지사.

HMCS 같은 조직에 들어가고 싶은 각성자는 손에 꼽힌다.

미국이나 러시아, 영국, 독일, 일본 같은 경우엔 HMCS라도 그만한 혜택과 복지를 지원해 준다.

하나 대한민국은 말단 공무원 봉급밖에 되지 않는 게 현실.

'관찰만 하라 했지만, 한 번 질러 봐?'

생각이 맞다면 저놈은 절대 도발에 응하지 않을 것이다.

A+급 헌터 셋을 보고도 건들건들한 태도를 유지한다는 것 자체가 제대로 된 '격'을 경험하지 못한 초심자란 증거.

"에이 씨발, 이래 갖고 오늘 안에 토끼 하나 잡겠어? HMCS에서 언제부터 남 가르쳤다고."

"어허이~ 진정해. 다들 오늘 처음 배우는 거잖아."

일부러 들으란 듯 거침없이 소리쳤다.

옆에 있던 석태지가 만류하자 추하민은 오히려 더 큰 목소리로 녀석을 향해 욕을 내뱉었다.

"보니까 지도 튜토리얼 탑에서 얼마 전에 나왔더구만 누가 누굴 가르쳐. 아직 랭킹 측정도 안 해서 등급도 없는 새끼인데!"

드디어 놈의 고개가 돌아간다.

추하민은 히죽 웃었다.

눈이 마주친 순간 입을 뻥긋거리며 도발을 날렸다.

보통 이 정도 되면 실력이 부족한 헌터라도 성질에 못 이겨 발끈하기 마련이다.

헌터로서의 자존심이란 게 있으니까.

하지만 녀석은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나더니 다른 쪽으로 가 버렸다.

"씨발··· 쫄아서 토끼네."

의심이 확신이 되는 순간, 추하민은 한 걸음 더 내딛기로 했다.

'어디 좆같은 삼류 헌터 따위가 1급 길드원을 교육하려고 들어 건방지게.'

격 차이를 보여 주마.

꼬투리를 잡자마자 들고 있던 나뭇가지를 힘껏 내던졌다.

민시우는 나뭇가지가 날아오는 것도 몰랐는지 엉거주춤 서 있기만 했다.

"보자 보자 하니까 막 기어오르네. 씨발, 존심 상하게."

추하민은 기회를 잡았다.

이 정도까지 했는데 물러난다면 그건 그것대로 HMCS의 수치가 될 터.

먼저 도발을 날리고 비매너 짓을 한 건 자신이니 한동안 구설에 오르긴 하겠지만, 뭐 어떤가.

어차피 착한 헌터 이미지도 아니었는데.

오히려 최근 잘 나간다는 HMCS 헌터를 피떡으로 만들면 악명과 함께 몸값이 올라갈 것이다.

'거품은 빼라고 있는 거지.'

나뭇가지를 던진 게 효과가 있었던 것일까.

민시우가 몸을 움직이려 한다.

추하민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스승이 늘 하던 말이 있었다.

- 전투는 주먹이 다가 아니야. 멘탈과 감정을 헤집어 놓는 게 더 중요하지.

- 도발은 최대한 빡이 치게 해라. 상대가 이성적으로 판단하지 못하는 단계면 성공한 거다.

- 눈 마주치면 욕부터 갈겨.

언제나 경전처럼 머릿속에서 되풀이되는 스승의 가르침.

추하민은 민시우의 멘탈이 흔들렸다고 확신했다.

한 번도 상대해 본 적 없을 상위 격의 헌터. 그리고 수많은 인파 앞에서의 대인전.

그 어느 것 하나 민시우란 놈에게 익숙한 것은 없을 터.

추하민은 단전에서 마나를 끌어 올렸다.

뱃속으로 기분 좋은 파도가 들이치듯 선선한 감각이 온몸을 타고 돌기 시작했다.

마나가 들이찬 근육이 꿈틀거리며 주체못한 힘들이 피부 바깥으로 일렁일렁 피어올랐다.

"넌 끝났어. 이 새끼야!"

추하민은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멍청하게 다가오던 민시우를 향해 주먹을 휘두른다.

바람이 스치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내뻗은 라이트 훅이 상대방에게 묵직이 내리꽂힌다.

손가락을 타고 기분 좋은 타격음이 울려 퍼진다.

뻐어어어어억!

"무, 무슨 소리야?"

"뭐 터졌나?"

"이런 던전에 터질 게 뭐가 있다고 터져. 누가 폭발 관련된 마법 쓴 거 아니야?"

그들이 싸우는 사실을 알지 못했던 사람들조차 소리의 근원지를 찾으려 시선을 돌렸다.

그만큼 일반적으로 사람을 때려서 날 수 있는 소리가 아닌 굉음이 울린 것.

'정확하게 꽂혀 들어갔다.'

추하민은 먼지가 풀풀 피어오르는 곳을 보며 미소 지었다.

이제 실시간 뉴스에 뜰 것이다.

[백사자 길드] 아수라에게 한방에 나가떨어진 HMCS의 라이징 스타라며 말이다.

"그러게 HMCS 따위가 적당히 나댔어야지. 치료비는 나중에 내가 보내···."

그러나 비웃음 가득한 그의 말은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먼지가 가라앉은 곳 너머, 민시우가 팔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며 멀쩡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너··· 어떻게···?"

"그딴 물주먹 맞고 쓰러지는 새끼도 있냐?"

추하민은 알 수 있었다.

놈의 말이 허풍이 아니란 것을.

민시우는 정말 노골적으로 지루하단 눈빛을 하고 있었다.

'분명 손끝으로 정확히 들어간 감각이 있었는데.'

게다가 그냥 맨주먹도 아닌 마력을 실은 주먹.

물론 100% 전력을 다해 휘두른 것은 아니었다.

만약 진심으로 내갈긴다면 녀석의 몸이 으깬 토마토처럼 터져 버렸을지도 모를 일이므로 강약을 조절한 것.

'그렇지만 가볍게 막을 수준도 아니었다.'

추하민은 눈빛을 달리했다.

녀석이 무슨 술수를 썼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A+급 헌터의 일격을 맞고도 멀쩡할 정도의 기술이 있다는 것만큼은 확실해졌다.

"야, 저기 싸움 붙었다."

"헐ㅡ 저기 아수라 아냐?"

"맞네 아수라! 근데 오늘 교육 담당자랑 왜 싸우는 거야?"

"말려야 하지 않냐? 아수라한테 걸리면 뒈지는 걸 텐데···."

"미친 새까, 네가 말릴래?"

그때 소란을 들은 사람들이 우르르고 몰려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누구 하나 선뜻 그들의 싸움을 제지하진 못했다.

"뭐 해? 안 들어와? 내가 갈까?"

민시우가 껄렁껄렁한 목소리로 물었다.

표정부터 말투, 태도에 이르기까지 긴장한 기색이라곤 전혀 없는 모습이다.

'이 새끼, 사람들 몰려왔다고 내가 벌인 판을 접을 줄 아나? 그깟 이미지 때문에?'

추하민은 어금니를 까드득 깨물었다.

기가 찼다.

[백사자]라는 이름과 더불어 '아수라'라는 아명에 저놈이 똥칠하는 기분이 들었다.

"크크··· 미치겠군. 삼류 HMCS 따위한테 이딴 말이나 듣고."

대충 뼈나 몇 개 분지르고 끝내려 했는데, 녀석이 선을 넘었다.

추하민은 마력을 더 빠르게 운용했다.

이제 누군가 달려들어 말려도 늦었다.

뼈 한두 개로는 이 거지 같은 기분을 털어 낼 수 없을 것 같다.

"하급 헌터 새끼, 골통이 빠개져야 정신을 차리지."

"물주먹 갖고 해 볼 수 있으면 하고."

추하민의 도발에 민시우는 건성으로 대꾸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신경 쓰지 않는다는 일관된 귀찮음이었다.

오히려 도발을 당하고 있는 것이 본인이란 사실을 추하민은 모르고 있었다.

그저 상대의 반응이 본인의 예상과는 달리 돌아가자 거기에서 오는 짜증이 눈을 가린 것이다.

"원망하려면 네 새끼 혓바닥을 원망해라."

단전에서 솟아난 마력이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전신을 휘감고 시퍼런 아지랑이를 피워 올린다.

추하민의 안광이 번뜩인다.

다리에 힘을 주자 땅바닥이 움푹 파이며 지반에 미약한 진동이 인다.

팡ㅡㅡ!

신형이 총알처럼 튕겨 나간다.

조금 전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빠르기로 주먹이 날아간다.

그러나 주먹은 민시우의 몸을 스치고 허무하게 허공을 갈랐다.

"이 개자식!"

추하민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피어오르던 마력의 색이 짙어졌다.

다시금 주먹을 내질렀다.

마치 프로 복서의 그것처럼 주먹이 쉬지 않고 민시우의 몸을 가격해 나갔다.

쾅! 퍼억! 퍽! 콰아앙!

등골이 오싹해질 굉음과 함께 공격의 잔재가 사위를 칼바람처럼 할퀴었다.

캉! 콰가가! 우두둑!

지반이 튀어 오르고 나무가 부러진다.

상대방에게 전해지지 못한 잔류 마력이 사방으로 튀어 오른 탓이다.

어지간한 몬스터라면 이런 공격에 반격조차 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절명했을 것이다.

근접 헌터의 딜은 매섭고 빠르며 한 방 한 방의 위력이 어마어마하기 때문이다.

추하민은 발로 민시우의 복부를 걷어찼다.

뻐어어어억ㅡㅡ 쿠웅!

채찍이 휘둘러진 것 같은 소리와 함께 민시우의 몸이 저 먼 곳으로 나가떨어졌다.

"이 개새끼가··· 진작 나자빠졌으면 이렇게까지 안 했잖아."

추하민은 흘러내린 땀방울을 훔치며 바닥에 침을 뱉었다.

죽진 않았겠지만 죽을 만큼 아플 거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너··· 뭐야?"

민시우가 다시 아무렇지도 않은 모습으로 일어났다.

먼지만 조금 묻었을 뿐이지 생채기 하나 없는 모습이었다.

"물주먹ㅡ 이게 전력이야?"

민시우가 피식 웃는다.

저건 도발이다.

추하민은 알 수 있었다.

전력을 다해 보라는 상대의 얄팍한 세 치 혀다.

그런데 넘어가지 않을 수가 없는 도발이다.

"하··· HMCS에서 장례식 하나 치르겠네."

추하민은 자신의 상의를 찢어 벗어 던졌다.

시뻘건 아수라 문신이 그의 끓어오르는 분노처럼 모습을 드러냈다.

"너는 오늘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었다."

그는 마력을 힘껏 몸으로 돌리며 한 손에 마법진을 형성했다.

붉은 마법진 속 아홉 개의 문자가 섬광을 뿜으며 그의 전신에 무형의 갑옷을 입혔다.

[아수라 : 금강난무]

추하민은 마치 갑옷을 입은 장수의 형상을 하고 몸을 박찼다.

단순한 돌진이거늘, 일대에 나무가 꺾이고 지반이 터지며 상위 '격'의 기세가 고스란히 새겨졌다.

"크아아아아!!"

마력이 듬뿍 담긴 주먹이 민시우에게 짓쳐들어왔다.

가히 상대를 죽이겠다는 일념이 담긴 공격.

ㅡㅡㅡ쿠웅!! 콰아아앙!!

거대한 충격파가 생기며 일대에 바람기둥이 일었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거센 바람에 눈을 감은 채 튀어 오르는 돌가루와 먼지에 몸을 방어했다.

후두두둑.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위가 조용해진다.

바닥에 떨어지는 돌 부스러기 소리와 매캐한 먼지가 차츰 가라앉는다.

사람들은 긴장한 얼굴도 추하민의 강격이 내리꽂힌 현장을 바라봤다.

분명 죽었을 것이다.

죽지 못했다면 오히려 고통스럽게 괴로워하고 있을 것이다.

아마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것이다.

온갖 추측과 걱정, 그리고 약간의 호기심을 가진 시선들이 아직 먼지가 풀풀 날리는 현장의 중심을 응시했다.

그곳엔 역시나 한 사람의 실루엣이 느긋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엔 다른 한 사람이 형편없이 널브러져 있었다.

"야, 저기 봐···."

"저거 씨발 설마?"

"미친··· 이거 실화냐."

사람들이 목격한 것은 아수라의 추락이었다.

***

시우는 추하민을 죽이려 했다.

설령 죽이진 않더라도 반병신 정도로는 만들려 했다.

오늘은 황정구나 HMCS라는 기관에 예의를 갖춰 몇 번 참았으나, 일반적으로 그는 걸려 오는 시비에 참고 넘어가는 성격이 아니었다.

'하반신을 불구로 만들까. 아니면 양팔을 접어 버릴까.'

이런 고민을 하는 찰나에 추하민이 스킬을 발동하며 마지막 강공을 펼쳐 왔다.

그런데 그 스킬이란 게 시우의 눈에 상당히 낯이 익었다.

'어라? 저거···.'

[뭐냐, 안 죽이냐?]

'어. 그건 나중에 해도 돼.'

시우는 마력을 얇게 펼쳐 전신을 밀도 높게 여러 겹으로 둘러쌌다.

그리고 새빨간 마법진을 양손에 형성했다.

각각 열두 개의 문자가 찬란한 빛을 내뿜으며 그의 몸에 검붉은 전신갑주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아수라: 흑갑혈무파광랑]

그의 손끝에서 발한 마력의 일권이 허공에서 섬광을 쏟아 냈다.

〈20화〉

낯설지 않은2

촤ㅡㅡ앙!

양손에 펼쳐진 광원의 법진.

그것은 곧 수백 갈래의 빛살로 잘게 쪼개져 시우의 전신을 회오리처럼 휘감았다.

이윽고 빛무리는 게임에서나 볼법한 검붉은 갑주로 화하며 그의 몸을 빈틈없이 감쌌다.

추하민의 그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모습.

"······!!"

A급 이상이 넘어가는 헌터들의 전투는 초 단위를 넘어 밀리초에 근접하는 경우가 많다.

마치 슬로 모션처럼 모든 사물의 움직임이 느려지는 것이다.

현재 추하민이 보는 경지가 그러했다.

그는 민시우의 스킬을 보며 경악을 금치 못한 채 상대의 몸을 둘러싼 방어구를 재빠르게 훑었다.

이음새 하나 보이지 않는 검붉은 갑주.

자신의 것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스킬의 형상.

'이런 씨발ㅡ 말도 안 되는···!'

정말 찰나였다.

다른 이들에게는 1초도 되지 않는 시간이었을 터.

그러나 추하민은 그 짧은 시간 속에서 상대와 자신의 격차를 무의식적으로 가늠할 수 있었다.

마치 스승을 대할 때와 비슷한,

아니, 그것과 비교할 수 없는 먹먹한 느낌의 아우라가 본능적으로 피부를 뚫고 들어온다.

"크아아아아아!!"

추하민은 괴성과 함께 주먹을 내질렀다.

마치 두려움을 뿌리치듯이 토해 낸 거친 울부짖음이었다.

카가가가가가!!

마력을 듬뿍 머금은 공격이 시퍼런 살기를 드러내며 사방을 찢고 나아갔다.

베어 먹혀 스러지는 나무,

굉음과 함께 으깨지는 바위,

그대로 움푹 꺼져 들어가는 지반.

추하민은 자신했다.

적어도 상대의 기세는 꺾을 것이라고.

저 갑주를 온전히 파괴하긴 어렵겠지만 적어도 성치는 않을 것이라고.

그렇게 믿었는데.

"지랄하네."

짧은 욕설과 함께 민시우가 주먹을 휘둘렀다.

파아아아앙!

그는 스킬을 쓴 게 아니었다.

추하민이 쏘아 낸 강격을 그저 마력을 옅게 두른 주먹으로 쳐서 상쇄한 것이다.

[금강난무]로 두른 공격이 단순한 주먹에 격파당했다.

추하민은 이 상황을 받아들이려 했지만,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어······."

"다 했지, 물주먹?"

"자, 잠깐!"

"주먹질은 이렇게 하는 거다."

추하민은 뒷걸음질 치려 했다.

그러나 시우가 재빨리 몸 안쪽으로 거리를 좁혔고, 곧 검붉은 갑주가 추하민의 옆구리를 격하게 파고들었다.

뻐어어어어억!

"ㄲ······ 끄어억!"

옆구리를 가격당한 추하민의 몸이 옆으로 꺾였다.

[아수라 : 금강난무]는 기본적으로 갑주의 형태기 때문에 방어력이 비약적으로 올라가는 기술.

따라서 지금껏 이 기술을 쓴 후로 커다란 고통을 겪을 일은 흔치 않았다.

"커, 커헉!"

그는 옆구리를 맹수에게 물어뜯긴 건 아닌가 하는 불같은 통증에 숨조차 쉴 수 없었다.

갈비뼈가 두 대, 아니 세 대 이상은 부러진 것 같다.

"야. 누가 쉬래?"

"그마ㅡㅡ!"

빠아아아아악!

"······!!"

불꽃처럼 내리꽂힌 주먹이 다시금 추하민의 몸을 비틀거리게 만들었다.

울컥.

뱃속에서 토해진 무언가가 입 밖으로 쏟아졌다. 피 맛이 돌고 정신이 빙그르르 돈다.

철벽을 자랑하던 갑옷은 주먹 두 번에 사방으로 금이 가 버렸다.

추하민은 사고 회로가 정지되는 것을 느꼈다. 더는 버틸 수 없다.

그는 양쪽 옆구리를 두 손으로 감싼 채 입을 뻐끔거렸다.

자신의 이미지고 나발이고 따질 겨를이 아니었다.

여기서 멈춰야 했다. 그게 불가능하면 도망이라도 쳐야 했다.

'씨발 이러다 뒤진다, 정말··· 대체 저 새끼 정체가 뭐야?'

잠자는 사자가 아니라 드래곤을 깨운 격.

단언컨대 이 실력은 D급도 C급도 아니었다.

A+급인 자신을 이만큼 누를 정도면 [백사자]의 최고 간부들과 견주어도 전혀 밀리지 않을 것이다.

저런 미친 괴물이 어디 있다가 느닷없이 HMCS로 들어갔단 말인가.

"우, 우리 여기서···."

"야 너 발로도 한 대 때렸지?"

"······아."

추하민은 말을 잇지 못했다.

슈욱ㅡㅡ 콰아아아아앙!!

허공에서 수직으로 떨어지는 내려찍기에 정신을 잃고 말았으니까.

***

갑주는 너덜너덜했다.

금이 간 달고나처럼 부스러기가 떨어졌고, 직접적으로 공격을 받은 곳은 뻥 뚫려 있었다.

풀풀 피어오르는 흙먼지에 시우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 스킬을 쓴 지가 하도 오래되어 나름 위력을 조절한다고 해서 마력을 절제한 것인데도 이 모양이다.

'하긴 이 스킬 써서 던전 보스몹 때려잡고 그랬었지.'

[좁밥, 이 기술 뭐냐? 너 멋있는 척하지 마라. 재수 없다.]

'안 했어, 미친놈아.'

[그래 봐야 너 좁밥이다. 뭐, 쟤보다는 조금 강했다. 그래도 나한테는 한 입 거리밖에 안 된다. 근데 우리 치킨 언제 먹냐?]

시우는 인사불성이 되어 쓰러진 추하민 곁에 다가갔다.

그리고 금빛 마법진을 연성하여 놈의 몸에 힐을 쏟아 냈다.

"요즘 애들은 패기가 없어요. 야, 일어나."

뻐억!

"크어어억!"

발로 걷어찬 추하민의 머리가 돌아가며 비명이 토해졌다.

먼지가 걷힌 주위로 헌터들의 시선이 모여들었다.

다들 어떻게 된 일인지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시우와 추하민을 번갈아 바라봤다.

"저게 지금··· 쓰러져 있는 게 아수라야??"

"씨발 이거 실화냐."

"저 강사 랭커야? 오늘 처음 봤는데?"

"저 사람이 그거잖아···. 얼마 전에 거트 잡았다는."

"그거 구라 아녔어?"

시우는 그러거나 말거나 누워 있는 추하민의 배에 걸터앉았다.

"무, 무슨······."

"주먹 교육. 해 준다고 했잖아."

"아니, 아닙니ㅡ!"

"이 꽉 깨물어. 혓바닥 잘린다."

뻐어어억!

거친 파열음과 함께 추하민의 입과 코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기절했는지 미동도 없다.

시우는 다시 놈에게 힐을 쏟았다.

"으윽··· 자, 잠깐!"

"피 때문에 미끄러우니까 입 닫아."

"이 씨발!"

뻐어어억ㅡ

"야, 너 깼지? 기절한 척하다 걸리면 뒈진다."

"자, 잠깐만요! 제가, 제가 잘못했···!"

"어, 안 돼."

뻐어어어억!

그러기를 수차례.

바닥엔 흥건하게 고인 핏물과 흉측한 살점 따위가 널브러져 있었다.

그러나 누구도 시우를 만류하지 못했다.

만류할 수 없었다.

그것은 감독관으로 따라온 석태지와 야마토도 마찬가지였다.

"······."

"······."

추하민은 그들과 같은 A+ 등급이었지만, 순수 전투력으로 따지자면 그들보다 강한 헌터라 말할 수 있었다.

그런 자를 어린애 다루듯 유린하고 있는데 그 누가 막을 수 있을까.

그리고 둘 다 궁금하긴 마찬가지였다.

과연 이 HMCS의 헌터는 얼만큼 강한 것일까. 거트를 이겼다는 소문이 사실일까.

"하."

시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추하민의 목을 지르밟았다.

"커······ 걱······."

적당히 힘을 준 까닭에 놈의 목에선 바람 빠지는 쇳소리만 쉭쉭거렸다.

대체 이놈을 어떻게 처리할까.

"내가 너 죽여도 무죄인 거 아냐?"

HMCS를 상대로 싸움을 걸었다.

헌터의 공격은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정당방위의 기준과 다르다.

시우의 칼날 같은 질문에 추하민의 표정이 급속도로 어두워졌다.

단순히 상대방이 강했기 때문이 아니다.

시우의 눈빛.

추하민은 자신의 목을 짓밟고 있는 자의 차갑고 건조한 눈빛을 마주했다.

이자는 진심이다.

이 수많은 인파 앞에서 내 목을 밟아 부러트려도 태연자약하게 걸어서 나갈 놈이다.

그런 생각이 들자 등허리에서 땀이 축축이 흘러나왔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헌터 생활.

그러나 괴물이 아닌 인간에게 죽음의 공포를 느껴 본 적은 처음, 아니 두 번째였다.

"제, 제가··· 겨, 경솔했··· 커억···!"

"마음 같아선 팔다리 하나씩 뽑아다 오크 밥으로 던지고 싶은데. 내가 요즘 건실한 이미지라서 말이야."

시우는 칼날처럼 벼린 표정으로 추하민을 내려다봤다.

마치 포식자가 배부른 탓에 갓 잡은 사냥물을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는 것 같은 눈빛.

"뭐 하나 물어보자."

"뭐, 뭘 말씀···입니까?"

"스킬, 네가 독자적으로 만든 거냐?"

"아, 아닙니다··· 스, 스승에게 배운 것입니다."

"네 스승이 누군데."

추하민은 입을 다물고 눈치를 살폈다.

이 남자의 질문 의도를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3."

"네?"

"2."

"어, 어?"

"1."

"중, 중국!"

"···중국 뭐?"

"〈흑수선〉의 수령··· 샤오롱입니다."

***

그날 오후.

HMCS 계정으로 한 편의 영상이 업로드됐다.

얼굴은 모자이크, 음성은 변조되어 누군지 분명하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피떡이 되어 가는 헌터를 유추하기 시작했다.

- 멍탐정코난 : 저거 시발 백사자 아수라자나

- 검신 : 지랄하네 아수라 아니거든?

- F급고인물 : └병시나 기술 안 보임?? 눈깔 퇴화함?

- 무림천마 : 딱 봐도 비슷해 보이는 헌터 데려다가 아수라인 척 싸운 거자나 들추들아

- oo : └그딴 짓을 hmcs에서 왜해 시발

- 헌터헌터 : 우리형 친구 동생의 여친의 오빠가 hmcs 교육 듣고 왔는데 거기서 아수라랑 교육관이랑 한판 했대

- 랭커1위 : └그정도면 걍 모르는 사이 아니냐

이처럼 사람들은 각자 들은 정보를 토대로 영상에 댓글을 달았다.

아수라가 맞다는 말부터 HMCS에서 조작했다는 의견, 혹은 다른 길드에서 [백사자]를 깎아내리기 위해 사주했단 대댓글까지.

추측과 억측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삽시간에 사람들 사이에서 퍼져 나갔다.

그러나 정작 시끄러워야 할 당사자들은 그 어떤 행동도 보이지 않고 말을 아꼈다.

HMCS의 한국지부 지사장인 백건호는 느긋하게 커피 향을 맡았다.

늘 마시는 커피였건만, 오늘따라 맛이 더 좋은 기분이었다.

그렇게 한 모금을 더 마시는데 앞에서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커피가 입맛에 안 맞으십니까?"

백건호는 상대방에게 웃으며 물었다. 여유가 듬뿍 묻은 승자의 미소.

"···괜찮습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백사자]의 수장인 최성일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최대한 티를 내지 않으려 했으나, 그의 얼굴엔 수치심과 약간의 굴욕, 그리고 납득하기 어려운 의문이 가득했다.

"요청하신 대로 HMCS 헌터 튜브에 올린 영상엔 모자이크와 음성 변조를 해 놨습니다. 내부적으로 입단속도 하고 있고요."

"감사합니다."

최성일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했다.

그는 백건호를 통해 무편집 영상을 본 터였다.

추하민이 졌다.

단순한 전투 헌터도 아닌 [백사자 길드]의 돌격 조장이자 길드 내 손꼽히는 근접 전투 헌터인 '아수라'.

급이 낮은 것도 아니다.

심지어 A+ 급이다.

'그런 헌터를 장난감 다루듯이 갖고 놀았다. [아수라 : 금강난무]를 썼는데 상처 하나 내지 못했고.'

최성일도 그 기술을 받아 본 적이 있다.

그는 대한민국 최고의 탱커 중 하나였고, 직접 부하 헌터들과 대련하며 그들의 실력을 키워 왔다.

그런 최성일이었기에 추하민의 기술이 어떤지는 누구보다 잘 알았다.

'나조차도 태연히 받아넘길 수 있는 기술이 아닌데.'

대체 그 신입 HMCS 헌터는 누구란 말인가.

"저희 채널에 올라오는 댓글은 최대한 막고 있는데 무작정 다 지우면 티가 날까 봐 조절하는 중입니다."

"괜찮습니다. 나머지는 저희 길드 직원들을 시켜서 적당히 다른 방향으로 유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군요. 영상 자체를 올리지 않으려고는 했는데, 아시다시피 HMCS가 이제 막 커지고 있는 중이라서."

백건호는 어깨를 으쓱 올리며 겸연쩍다는 듯 웃었다.

최성일 입장에선 이만큼 막은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여겼다.

만약 영상 속 추하민의 얼굴이 그대로 드러난다면 [백사자]의 주가는 곤두박질칠 것이며, 아래에 있는 길드들이 [백사자]를 물어뜯을 게 뻔했기 때문이다.

'그래, 이게 베스트다. 어차피 우리 쪽에서 먼저 건든 것이니. 거기다 길드도 아닌 HMCS면 양호하지.'

최성일은 다 식은 커피 잔을 만지작거리며 영상 속 인물에 대해 생각했다.

'아직 다른 길드에선 그자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다. 이걸 빌미로 끈을 하나 만들어서 우리 쪽으로 데려올 수 있다면···?'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추하민의 일 따윈 큰 문제가 아니란 생각마저 들었다.

"그나저나 추하민을 쓰러트린 헌터는 누구입니까?"

"음ㅡ 저희 쪽 새로운 다크호스죠. 신입인데 어지간한 베테랑들보다 낫더군요."

"혹시 잠깐 인사라도 할 수 있을까요? 저희 때문에 공연히 문제에 휘말린 것 같아서 직접 사과라도 하고 싶은데."

백건호는 최성일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의 속내가 여실히 보이는 듯했다.

"아닙니다, 한 길드의 길드장님이 직접 사과하실 일은 아니죠."

"괜찮습니다. 저희 길드로 피해를 봤다면 길드장이 머리를 숙일 수도 있어야 하니까요."

그러나 백건호의 거절에도 최성일은 물러서지 않았다.

만약 데려올 수만 있다면 추하민이 받는 금액에 두 배, 아니 다섯 배도 아깝지 않다.

"하하. 그 친구도 이번 싸움으로 적잖이 눈치받고 있을 텐데 좀 봐주시죠. 대형 길드의 길드장이 보자고 하면 긴장되지 않겠습니까."

말 같지도 않은 변명.

그러나 을인 최성일 입장에선 더 우기기에 무리가 있었다.

"···알겠습니다, 지부장님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그 대신 추하민을 보내 사과하는 건 허락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러죠. 대신에 당사자가 거부할 수도 있습니다."

최성일은 합의의 악수를 나눈 뒤 문밖을 나섰다.

'우선은 한발 물러나 주지. 그러나 포기하진 않는다.'

〈21화〉

계략

대형 모니터를 바라보는 한 남자.

그는 초점 잃은 눈으로 모니터 속 영상을 응시했다.

그곳엔 A+급 헌터인 아수라 추하민이 장난감처럼 가볍게 짓밟히는 모습이 흐르고 있었다.

"미치겠네."

영상이 끝남과 동시에 한탄이 터진다.

[제국 길드]의 수장이자 현 대한민국 헌터 랭킹 9위인 민시준.

'한국의 대마도사'라 불리는 그였지만, 이런 문제는 아직 버겁게만 느껴졌다.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 올렸다.

"···하아."

요즘 늘어나는 고민 덕인지 한숨이 자주 나온다.

한숨의 원인은 다른 게 아니었다.

그의 형, 민시우.

조용히 지내길 바랐던 그의 마음과는 달리, 형인 시우는 그러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어 보였다.

아니, 드러내고 싶어 안달인 사람도 이렇게까지 하진 않았으리라.

수십여 명의 사람이 모인 곳에서, 그것도 최대 길드 중 하나인 [백사자]의 돌격대장 A+급 헌터를 쥐어패다니.

이런 일은 HMCS 한국지부 역사에서도 처음 있는 사건일 것이다.

"형··· 제발··· 이건 아니잖아."

차라리 시우가 동생이었으면. 그랬다면 다루기가 조금은 편했을까.

드르륵. 드르륵.

휠을 내려 댓글창을 확인했다.

거기엔 신입 HMCS 헌터에 대한 온갖 추측과 루머가 뒤섞여 있었고, 민시우에 대한 정보가 살짝씩 섞인 내용도 있었다.

물론 10년 전 실종된 민시준의 형이란 정보까지 퍼진 건 아니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관심이 쏠린다면 민시우에 대한 진실이 드러나는 것도 시간문제.

"아무래도 안 되겠어. 답답해서 죽을 바엔 말을 해야지."

그날 저녁.

시준은 형이 좋아할 것 같은 음식을 바리바리 사 들고 귀가했다.

"···잔치해?"

상다리가 휘어질 정도로 많은 음식이 테이블에 깔리자 시우는 동생과 음식을 번갈아 봤다.

[이, 이게 다 뭐냐! 천국이 여기인 것이다!]

둘이서 먹는 정도가 아니라 열댓 명이 같이 먹어도 부족함이 없을 양이다.

"형, 식기 전에 먹자!"

"어··· 그래."

[다 먹지 말고 내 몫도 남겨라! 다 먹으면 죽인다, 식량! 기필코 죽인다!!]

시우는 음식을 먹으면서 동생의 안색을 살폈다.

기분 좋은 일이 있어서 사 온 것 같진 않았다.

"무슨 일 있어?"

순간 동생의 마나 파장이 미묘하게 흔들리는 게 느껴졌다.

이것은 어지간한 관찰력이나 마나 컨트롤로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백 년 이상의 마력 운용을 통해 깨달은 민시우만의 고유한 경지.

그는 마나의 파장 변화를 통해 상대의 감정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시준의 파장으로 느낄 수 있는 건,

'불안과 초조.'

시준은 어색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아냐, 일은 무슨."

"있는 것 같은데? 말해 얼른."

"에이~ 아니라니까. 아무 일도 없다니까 그러네."

"형한테 구라 치다 걸리면 '무한대련' 일주일인 거 알지?"

"어?? 그건 예, 옛날 규칙이잖아!"

얼굴이 백지장처럼 새하얗게 질린 시준, 불현듯 주마등처럼 예전 일들이 그의 눈앞을 스치기 시작했다.

팔다리가 부러지고 갈비뼈가 으스러져도 '죽기 전까지' 이어지는 겨루기.

차라리 던전에 혼자 들어갔다 오는 게 나을 거라는 제자들의 탄원은 결코 농담이 아니었다.

"무한대련은 선 넘었지 진짜! 이제 형한테 배우는 것도 아닌데!"

그러나 시우는 두툼한 참치회를 입으로 가져가며 태연히 대꾸했다.

"꼬우면 네가 형 해."

"······."

"형 할래?"

"아뇨···."

시우는 음식을 다 먹은 뒤에 물어볼까 했지만, 동생이 먹는 둥 마는 둥 하는 모습을 보니 차마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분명 자신과 연관이 있는 일임엔 틀림없을 것이다.

시준이 성격상 본인의 일을 형에게까지 내색하진 않을 테니.

"그······ 형이 기분 나쁘게 듣지 않았으면 좋겠어."

보통 이렇게 말하면 기분 나쁜 소리를 한다는 뜻일 거다.

"뭔데."

"얼마 전에 민준이 형 연구실에서 거트랑 싸운 거, 형 맞지?"

시우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감추려 한 일이 아니었기에, 그의 태도엔 숨기려는 기색 따윈 조금도 없었다.

사실 이 문제를 동생이 화두로 꺼낸 것은 처음이었다.

'시준이 정도의 위치라면 내게 묻지 않고도 HMCS나 다른 정보 제공자를 통해서 충분히 다 들었겠지.'

그럼에도 시우에게 다시 물어본다는 건 형에 대한 존중 차원일 것이다.

"그러면 [백사자] 추하민도 형이 그런 거고?"

"그게 누군데."

[닭 다리 하나는 남기는 것이다! 으아!!]

시우는 정말로 몰라서 되물었다.

HMCS를 하다 보니 때려잡은 놈들이 너무 많아 이름을 외우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매일 한두 놈씩 잡아 처넣다 보면 이름 같은 건 쉽게 잊기 마련이기도 하고.

"HMCS에서 길드 신입들 상대로 교육했을 때 감독관이었던 A+급 헌터··· 형이 최근에 쥐어팬 사람."

"어ㅡ 등에 이상한 문신 있던 새끼?"

나중에 황정구가 사색이 되어 뭔 사자가 어쩌고 아수라가 저쩌고 했던 것 같긴 하다.

민준이 연구실에서 싸웠던 거트라는 놈보다는 조금 더 강했지만, 그래 봐야 시우 입장에선 오십보백보.

'하지만 나쁘진 않았지. 스승이 녀석이라 그런가.'

그래도 근래 만났던 헌터 중에서는 스킬 활용이 제일 괜찮았던 놈이긴 했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제자의 제자라 이쁜 구석이 조금은 있는 것 같다.

반 죽이려다 참은 것도 그 때문이고.

"형이 알고 그런 건 아니겠지만··· 이번에는 너무 갔어! [백사자 길드] 길드장은 우리나라 8위의 랭커야!"

"랭커?"

그런 개념도 생겼구나.

시우가 헌터를 하던 시절에는 누가 더 강하고 약하고를 따져 '순위'를 매기지 않았다.

철저하게 대중의 인식과 인지도로 추측되었을 뿐.

대한민국 8위면 꽤 강하긴 하겠네.

"물론 최성일 헌터가 해코지할 사람은 아니긴 한데, 어쨌든 몸을 좀 사릴 필요는 있지 않을까···?"

"흠."

시우는 동생이 말하지 않은 뒷말을 유추하며 맥주를 들이켰다.

쌉싸름한 맛과 옅은 과일 향이 입 안을 휘감고 사라진다.

최대수 때문이군.

이계로 사라진 뒤 십 년. 그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 구체적으로 알아내지는 않았다.

자질구레하게 물어보지도 않았고.

다만 일국의 대통령이 된 최대수의 모습과 뿔뿔이 흩어져 버린 제자들, 그리고 자신이 돌아왔음에도 다른 이들의 눈치를 살피는 동생의 반응을 보며 어림짐작만 할 뿐이다.

'그만큼 최대수가 보여 준 것들이 많았단 소리겠지.'

그 욕심 많은 근육 덩어리가 대통령까지 됐다는데 뭔들 노리지 못했을까.

시우는 십 년간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받았을 시준이를 생각했다.

홀로 자리를 지켜 길드를 세우는 것도 쉽지 않았을 테지.

이쯤에서 한 발짝 양보하는 게 시준이를 위한 일이란 판단이 들었다.

이렇게 해서 본인의 마음이 편해진다면야.

"그래, 걱정된다고 하니 주의하긴 할게."

"······정말?"

"어, 주의는 할게."

시우는 큰마음을 먹을 사람처럼 말했다.

동생에게 한 약속이니 지키긴 할 거다.

주의해야지.

주의만 해야지.

[이제 그만 처먹고 나한테 다 넘겨라, 식량!!]

시우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시준이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모처럼 편안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

인천에 있는 각성자 교도소.

운동장에서 자유 시간을 만끽하고 있는 재소자들 사이, 한 무리가 벤치에 누워 있는 남자에게 다가갔다.

그들이 둘러싼 남자는 입소한 지 채 두 달도 되지 않은 신입.

그러나 그 신입은 두 달 중 절반 이상을 독방에서 지냈다.

이 교도소에 들어오자마자 다른 재소자와 싸움이 붙었기 때문이다.

아니, 싸움이 붙었다기보다는 일방적으로 두들겨 팬 것에 가깝지만.

"야."

"······"

"야 신입 씨바랄댕아. 귓구멍 뚫어 주는 스킬이라도 써 주랴? 얼른 눈깔 안 떠?"

무리에 선 남자 중 머리를 빡빡 깎은 죄수가 인상을 버럭 썼다.

"···뭔데?"

신입 재소자는 실눈을 치켜뜨며 물었다.

일어나기도 귀찮다는 듯 벤치에서 꼼짝도 하지 않은 채였다.

"너 밖에서 좀 유명한가 보더라? 이명이 새끼 몽크였나?"

"'Серый волк (세리 볼크)다, 븅신아. 넌 뭔데?"

볼크는 입가에 그어진 자신의 흉터를 움직이며 말했다.

마치 커다란 늑대에게 할퀴어진 듯 선명한 흉터였다.

"난 이 교도소의 한 축을 담당하는 거한웅이다. 그래, 맞아 셰리 볼크랬지. 이명은 늑대인 놈이 무리 생활을 그렇게 하면 안 되지."

"뭐가 문제인데?"

2m가 넘는 커다란 덩치의 거한웅은 볼크의 맞은편 벤치에 앉으며 혀를 찼다.

"너한테 지난달에 맞아서 병실로 옮겨진 애가 우리 막내거든. 여기 빵에서 우리 패밀리가 조금 잘 나가는데, 너 때문에 가오에 스크래치가 어마어마하게 갔잖냐."

교도소에는 수많은 무리가 존재했고, 대부분은 특정 파벌에 몸을 담고 있었다.

어딘가에 소속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곳이기 때문.

거한웅이 말한 '패밀리'의 개념이 바로 그러했다.

"그래서 나더러 뭐 어쩌라고?"

"어쩌긴. 우리도 조직의 위신이 있는데 그냥 넘어갈 수는 없고. 피에는 피로 복수해야지."

볼크는 한숨을 푹 내쉬더니 벤치에서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 작은 몸짓에 주위에 있던 자들이 움찔하며 경계 태세를 취했다.

"피에는 피라. 나쁘지 않네."

"너무 섭섭하게는 생각하지 말라고. 죽이진 않을 테니까."

"그런데 나도 하달받은 명령이 있어서 말야. 그것부터 먼저 해야겠는데."

"명령···?"

거한웅의 의문이 채 끝나기도 전, 볼크의 맨발이 쏘아지며 거한웅의 목을 꿰뚫었다.

"크어억!"

"발가락도 잘 단련하면 훌륭한 무기가 되거든."

"이 개자식이!!"

"죽여!!"

볼크를 둘러싸고 있던 거한웅의 부하들이 그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하지만 볼크는 가볍게 몸을 비틀어 그 모든 공격을 피함과 동시에 손가락을 날카롭게 세워 그들의 급소를 찔렀다.

푸욱! 푹! 푹!

"커헉···!"

"쿨럭!!"

공방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거한웅의 부하들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볼크의 공격을 허용했다.

각성자 교도소에 있는 재소자들은 모두 마나와 능력을 봉인 당한 상태.

그 잘난 신체 강화나 마력 운용도 모두 못 쓰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 볼크가 사용한 것은 순수한 그의 육체 능력이었다.

"훈련도 안 한 몸으로 덤비면 안 되지."

볼크는 목구멍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 가는 거한웅을 보곤 중얼거렸다.

각성자들은 대개 자신의 스킬과 강해진 신체만을 믿고 싸우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이렇게 능력이 봉인 당한 상태에서도 과거의 경험만을 가지고 덤벼드는 것이다.

"나도 이렇게 사고 치고 싶지는 않았는데 위에서 하라니까 해야지. 별수 있나? 패밀리인데."

볼크는 거한웅의 뺨을 툭툭 때리곤 다시 벤치에 누웠다.

저 멀리서 교도관들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교도소 안에서 문제를 일으켜라."

'이 정도면 충분히 문제가 됐겠지.'

***

"셰리 볼크, 본명은 기재가 안 되어 있네?"

"버려서 없습니다."

교도소장은 볼크의 얼굴을 흘낏 바라봤다.

각성자의 능력을 억누르는 봉인구가 있었는데도 두 명이 죽고 세 명이 중상을 입었다.

이건 단순히 독방에 가둬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자네는 우리 교도소보다 한층 강화된 곳으로 가게 될 걸세. 여기서 얌전히 지냈으면 서로 다 좋았을 텐데··· 고생을 사서 하는구먼."

"괜찮습니다."

교도소장은 짧은 한숨과 함께 이감 문서에 서명했다.

"여기 있는 자네 짐은 우리가 싸서 따로 보내 주겠네. 차량이 준비되어 있으니 이대로 곧장 가면 될 걸세."

볼크는 교도관의 안내에 따라 차량에 탑승했다.

일반적인 호송차란 느낌보다는 특수한 목적으로 제작된 차량 같았다.

"차 존나게 넓네."

그는 수갑과 족쇄가 채워진 손발을 조금씩 움직이며 차에 올랐다.

엄중한 경비가 함께할 것이라 예상했지만, 운전석과 조수석에 앉은 기본 인원을 제외하고는 호송 공간 안에 딸랑 한 명이 더 있을 뿐이었다.

"뭐야. 내 감시역으로는 당신이 끝이야? 아무리 수갑 채워 놨다지만 존심 상하네, 이거."

볼크는 맞은편에 앉은 남자를 향해 볼멘소리를 내뱉었다.

마나와 능력이 봉인된 상태로 다섯 명을 쓰러트린 범죄자인데, 감시자가 단 한 명이라니.

뭔가 무시 받는 기분이 든 것이다.

"형씨, 내가 이감되는 곳 교도관이야?"

"아니."

"그럼 어디 다른 곳에서 나오셨나 보네. 실력이 어지간히 있나 봐? 내 이름 듣고도 혼자 감시하러 나온 거 보면."

"······."

"재미없는 형씨네. 어디 길드야?"

"난 길드에서 나온 거 아닌데."

볼크는 입가에 그어진 흉터를 긁적였다.

보나 마나 대형 길드에 의뢰해서 전투형 헌터를 붙여 놨다 생각했는데.

"길드가 아니면 어디서 나왔는데?"

볼크에 끝없는 질문을 듣던 남자는 귀찮은 표정으로 나른하게 대꾸했다.

"HMCS."

〈22화〉

탈출

"HMCS···?"

볼크는 의아했다.

물론 각성 범죄자를 수사하고 잡아들이는 일은 HMCS의 관할이 맞다.

그러나 강력범을 잡아들이고 직접 맞닥트리는 일은 길드의 수주를 통해 대부분 이뤄지는 판국이었다.

근래 들어서는 몬스터가 아닌, 각성 범죄자를 대상으로 한 일종의 '사설탐정' 같은 길드들이 생기는 추세이기도 했고.

다른 이유는 아니었다.

HMCS에 실력 좋은 헌터가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볼크 자신도 HMCS가 길드를 통해 의뢰해서 잡힌 것이었으니 충분히 의아해하는 것도 당연했다.

"대형 길드가 아니라 HMCS 따위에서 호송차 감시관을 보냈다고? 그것도 한 명만?"

"어."

귀찮다는 듯이 툭 내뱉는 짧은 단답.

볼크는 맞은편에 앉은 감시관을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자신을 이렇게 개무시하는 자를 최근 언제 보았던가.

교도소에서 그가 죽인 이들은 자신을 무시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셰리 볼크(회색 늑대)'라는 이름에 덤벼든 일종의 도전자들이었지.

"너 내가 누군지 아냐?"

"이감되는 새끼."

볼크는 사실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진 범죄자는 아니었다.

헌터 중에서도 뒷세계에 있는 자들이나 수사기관에서만 알았는데, 이유는 그가 특수 범죄자였기 때문.

"하··· 씨발 미쳐 버리겠네. 이젠 별 좆밥들한테도 무시당하는구나."

볼크는 뒤통수를 의자에 툭 기대며 혀를 찼다.

대형 길드 전투원도 아니고 고작 HMCS에서 나온 얼굴도 모를 하바리 따위한테 욕을 처먹다니.

하다못해 황정구, 성창원, 공길, 구효민 이런 HMCS 네임드 급이면 모를까.

"너 입사한 지 얼마나 됐냐."

"글쎄. 몇 달?"

"···신입이라고?"

"어."

이제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것 같다.

볼크는 작은 쪽창으로 바깥을 바라봤다.

차가 도심지를 빠져나가 점점 외진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인천 교도소에서 강원도 교도소로 이감이라.

'목적이 감빵을 옮기는 게 아니었군.'

상부에서 하달되는 명령은 가끔 이렇게 불친절할 때가 있었다.

어쩐지 아무것도 모르는 애송이 한 명을 감시관으로 붙여 놨다 했더니.

"애꿎은 관 하나만 늘게 생겼군."

"······."

"누구 관인지 안 궁금하냐?"

"어."

HMCS에서 나온 헌터는 볼크를 짜증스럽단 눈으로 바라봤다.

말 좀 그만 걸라는 기색이 역력했기에 볼크는 속으로 어이가 없었다.

'이 미친놈은 HMCS에서 교육도 안 시켰나?'

아무리 능력을 봉인 당한 상태라 하더라도 사람을 수없이 죽여 온 범죄자와 단둘이 있는 상황이다.

정상적인 헌터라 한다면 만발의 준비를 하고 경계 태세를 유지한 채 호송을 했을 텐데.

"넌 내가 왜 수감 됐는지, 뭐 때문에 이감되는지 알고는 있냐?"

"몰라, 이 새까."

싸가지가 정말 밥맛이다.

볼크는 울컥하며 짜증이 솟구치는 게 느껴졌다.

본인도 한 싸가지 한다고 생각했는데, 맞은편에 앉은 놈은 더했다.

"넌 씨발, 국가기관에서 일한다는 새끼가 사전 조사도 안 하고 나오냐?"

"어."

"파일이든 자료든 뭐 가져온 거 없어? 너 내가 누군지 진짜 몰라? 나 볼크야, 볼크! 셰리 볼크!"

"모른다고. 병신아."

"이 시발놈이···."

그때였다.

어디선가 날카로운 파열음이 터지며 창밖으로 섬광이 일었다.

슈ㅡㅡ욱 콰아아앙!!

호송차가 굉음과 함께 뒷바퀴 채 위로 솟구쳤다.

전면 쪽에 커다란 충격이 가해진 듯했다.

거대한 압력이 내부를 뒤흔들고 차가 롤러코스터처럼 공중으로 치솟았다.

볼크는 본능적으로 차량의 손잡이를 꽉 잡았다.

그와 동시에 맞은편에 앉은 HMCS 호송관의 관자놀이를 발로 걷어찼다.

찰나의 순간보다도 더 짧은 시간 속에서, 볼크는 발끝에 전해지는 타격감을 느낄 수 있었다.

쿠우우웅!!

십여 미터를 솟구쳐 날아간 호송차는 천장부터 바닥에 굴러떨어졌다.

박살 난 파편과 깨진 유리가 사방으로 뒹굴었다.

볼크는 반쯤 구겨져 부서진 뒷문을 발로 걷어찼다.

미리 마음의 준비를 했는데도 온몸이 욱신거린다.

그는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닦으며 욕부터 내뱉었다.

"씨발, 미친 늙은이가! 나까지 잡아 죽일 일 있어?"

"끌끌. 천하의 셰리 볼크가 이런 일로 뒤지면 섭섭해서 안 되지."

나무 위에서 작은 노인 하나가 툭, 하고 내려왔다.

새까만 도복을 입은 노인은 기다란 지팡이를 짚으며 낮은 웃음을 흘렸다.

볼크는 노인을 보더니 잠시 으르렁거리다가 양손을 내밀었다.

"영감, 쓸데없는 소리 그만 지껄이고 이거나 얼른 풀어."

"네 녀석도 봉인구가 끼워져 있으니 새끼강아지처럼 순한 맛이 있구먼, 흐흐."

"에이 썅ㅡ 영감, 오늘 관짝 하나 새로 짜 줘?"

"소갈머리하고는 쯧쯧. 그나저나 이건 내가 풀기 어렵겠는데. 요즘 마나 공학은 옛날하고 다르군. 꼬마!"

노인이 부르자 나무 뒤에 있던 젊은 남자 하나가 슬그머니 모습을 드러냈다.

왜소한 체격의 그는 복면을 매만지며 노인을 노려봤다.

"꼬마라 부르지 말라니까···."

"끌끌끌. 꼬마가 싫으면 뭐라고 불러 줄까. 젖비린내라고 불러 주랴?"

"망할 노인네."

볼크에게 다가간 꼬마는 도구를 꺼내 능숙하게 봉인구를 해제했다.

절그럭 소리를 내며 봉인구가 땅에 떨어지자 볼크는 손목을 휘휘 돌렸다.

마력의 길목을 막던 이물감이 사라지자 찌릿한 통증과 함께 마나가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그나마 하급 교도소라 봉인구를 착용한 것이지, 중급으로 갔으면 아예 칩을 박아 빼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답답해 뒤지는 줄 알았네."

"끌끌. 고작 며칠 차 놓고 새끼강아지처럼 낑낑대기는."

"이 영감탱이가 미쳤나 진짜. 며칠이 아니라 몇 달이었어! 오랜만에 한 번 지랄 같이 놀아 볼까?"

"아서라. 강아지 때렸다고 동물 학대로 고소당하고 싶지 않다."

"이 씨발, 늙은이가 진짜 뒈질라고!"

그렇게 볼크와 영감이 투닥거리고 있는데 꼬마가 손을 쓱 올리며 무언가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기···."

"뭔데?"

"살아 있어."

"뭐?"

볼크는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경황이 없어 확인 사살을 하진 않았다.

그러나 자신처럼 미리 대비하지 않고 그만한 충격을 받았으면 최소 중상은 입었을 터인데.

거기다 무방비한 상태로 급소를 맞지 않았던가.

"저게 씨발··· 어떻게 된 거지."

하지만 망가진 호송차에서 나온 남자는 너무도 멀쩡한 모습이었다.

그는 먼지라도 털어 내는 것처럼 옷을 툭툭 털어 정리하며 볼크와 노인 쪽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끌끌. 생각보다 몸뚱이가 튼튼한 놈이 감시관이었나 보구먼. 신입으로 한 놈만 태워 달라고 했을 텐데."

"분명히 발로 대가리를 깠는데."

"강아지 발길질에 죽는 헌터도 있다더냐?"

"이 씨발 늙은이가··· 관자놀이를 제대로 찍었다고. 게다가 마나를 운용한다는 느낌도 없었단 말야."

"흐음ㅡ 둘 중 하나겠군. 네 녀석 실력이 물러 터졌든지, 아니면 저놈이 생각보다 튼튼하든지. 어찌 됐든 괜한 살생을 하게 생겼구먼."

노인은 고개를 갸웃하면서 가래 끓는 소리로 웃었다.

***

시우는 차가 전복되는 순간 자신의 바디캠을 껐다.

상대가 탈출하려 했다는 정황 증거만 찍어 놓으면 될 거다.

적어도 어떻게 도망쳤는지는 보고를 해야 할 테니까.

그는 차량 밖으로 나와 태연한 얼굴로 볼크에게 말했다.

"감시관을 향한 공격과 호송 차량에서의 탈주 및 각성 범죄자의 봉인구 해제. HMCS 헌터의 권한에 의거 탈옥으로 간주."

"······뭐?"

그리고 동료로 보이는 자들에게도 똑같은 경고를 날렸다.

"수감자의 탈주를 돕고 거기다 호송 차량을 폭파시킨 것으로 추정. 마력이 있는 것으로 보아 각성자로 판단, HMCS 헌터의 권한에 의거 현행범으로 간주."

그가 한마디 한마디 할 때마다 볼크의 인상이 일그러졌다.

옆에 선 노인은 재밌다는 얼굴을 했고, 꼬마는 무표정을 지었다.

마지막 한마디,

"모두 즉결 처분한다."

이 말을 끝으로 분위기가 달라졌다.

시우는 단전에서 마나를 분출해 몸 구석구석에 불어 넣었다.

마치 소방호스로 물이 쏘아지듯, 격렬한 마력의 흐름이 전신을 휘감았다.

[쟤들 마나 많이 갖고 있다. 스킬 맛있을 것 같다.]

"끌끌끌. 성급한 애송이로군. HMCS에서 신입을 잘 골라 뽑은 모양이야. 우리 쪽 젊은 애들보다 나은걸. 어이, 꼬마."

"알고 있어. [십두사]."

꼬마의 열 손가락으로 마력이 응집되었다.

보랏빛으로 물든 마력은 이내 살아 있는 뱀처럼 아가리를 벌리며 쏘아져 나갔다.

- 쉬이이익ㅡㅡ

열 가닥의 마력 줄기가 제각각 시우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는 전광석화처럼 찔러 오는 공격을 종이 한 장 차이로 피하며 다른 한쪽으로는 적들을 살폈다.

'간 보고 있네.'

그들은 시우의 역량을 살피기라도 하는 것처럼 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순간, 피했던 공격이 방향을 틀며 재차 시우를 향했다.

"끌끌. 그건 따돌릴 게 아니라 파훼해야 하는 거라네. 경험치가 부족한 자의 어리석은 판단이었어."

"경험치 부족이라."

시우의 손에 갈색 마법진이 순식간에 생성됐다.

12개의 문자가 빛을 뿌리자 그 주위로 칼날 같은 돌기둥이 수십여 개 솟구쳤다.

쿠구구구구구구!

돌기둥이 꿰뚫은 [십두사]의 마력은 죽어 가는 뱀처럼 펄떡이더니 이내 마나화되어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그 말도 안 되는 스킬 구현 속도에 모두 넋을 잃는 순간, 시우의 신형이 사라졌다.

"···허!!"

그 반응을 가장 먼저 알아챈 건 노인이었다.

그는 좋지 않은 시력 대신 마력을 감지하는 일에 능했고, 시우에게서 나오던 미세한 마력이 사라지자 바로 반응한 것이었다.

노인의 양손이 파란색과 노란색으로 물들었다.

- 파즈즈즈···!

각각의 마법진이 거대하게 펼쳐지며 시우의 마력이 다가오는 곳을 향해 섬전이 번개처럼 날아갔다.

콰과과과과과과!

지반이 으깨지고 나무가 뒤틀려 부러진다.

광범위하게 휘몰아친 마력 태풍에 넓은 지대가 순식간에 뒤집혔다.

풀풀 피어나는 흙먼지 사이,

"생긴 거 답지 않게 날렵한 놈이로고."

노인이 자글자글한 미소를 띠며 수염을 쓰다듬었다.

어느새 공격 범위에서 벗어난 시우를 향해 칭찬 아닌 칭찬을 한 것.

"더블 캐스팅이라. 늙은이가 나이를 헛먹진 않았네."

시우는 시우대로 조금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성질이 다른 스킬을 동시에 구현하는 건, 왼손과 오른손으로 각기 다른 나라의 말을 필기하는 것과도 같았다.

그만큼 섬세하면서 어려운 작업인 셈.

"끌끌끌. 애송이 입 놀리는 게 영 버릇이 없구먼. 여기 있는 새끼강아지랑 비슷한 싸가지야."

"이 영감탱이가 미쳤나!"

"하지만 그 실력 갖고 '우리'를 상대하기엔 부족할 텐데. 미래가 창창한 놈이지만 어쩔 수 없지. 이 자리에서 싹을 정리하는 수밖에."

노인이 지팡이를 땅으로 찍었다.

투ㅡㅡㅡ웅!

지맥에 마력을 쑤셔 넣자 거대한 진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스킬을 사용할 때 나타나는 룬 문자와는 확연히 다른 문양.

[이건 무엇이냐? 처음 보는 기술이다! 마력 느낌이 다르다!]

"평범한 지팡이가 아니라 주구였군."

시우는 발밑으로 펼쳐지는 기운에 집중하며 거리를 벌리려 했다.

그냥 마법이나 좀 쓸 줄 아는 각성 범죄자인 줄 알았더니만,

생각보다 기술이 좋다.

"끌끌. 이미 늦었다, 애송아."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시우의 몸이 휘청이더니 무릎이 저절로 꺾였다.

쿠웅!

온몸에 무거운 납이 칭칭 감긴 것처럼 땅으로 꺼져 들어가는 압력이 사방에서 그를 짓눌러 왔다.

무릎이 땅에 처박히고 두 손바닥이 몸을 간신히 지탱한다.

방심하는 순간 온몸이 찌그러진 캔처럼 압사할 것이란 예감이 들었다.

"이 중력 진은 한 명을 묶기 위해 쓰이는 기술이 아니네. 보통은 스무 명 이상이 있어야 쓰는 기술이거늘. 단가 안 맞는 장사로고."

주구는 능력이 뛰어난 아이템인 대신, 일회성에 가까운 도구였다.

제작자가 각인한 주술에 마력을 실으면 해당 진이 발현되는 것.

문제는 제작하는 과정에서 꽤 거금이 든다는 사실이었다.

"돌아가면 위에다 비용 청구를 해야겠네. 새끼강아지 하나 구출하자고 투자한 기술치고는 과해."

"에이 씨발! 그게 내 탓이야?"

"끌끌. 그나저나 아쉽군. 차라리 우리 조직에 들어오는 게 능력을 올리는 데는 훨씬 좋을 터인데."

"너··· 아니, 너희들은 어디소속이지!"

보이지 않는 압력 때문에 땅바닥에 몸을 처박은 채 시우가 물었다.

노인은 대답하지 않은 채 물끄러미 시우를 바라보다 이내 볼크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죽을 땐 죽더라도 왜 죽는지는 알아야지."

볼크는 담배 하나를 꺼내 불며 연기를 후욱, 뱉었다.

"우리는 〈베스티아(BESTIA)〉. 헌터 전문 킬러다."

〈23화〉

하나의 질문

"헌터··· 전문 킬러?"

"킬러란 말은 알잖아? 단지 대상이 일반인이 아니라 헌터일 뿐인 거지. 여기 있는 영감탱이도 나름 유명한 프로야. 저 꼬마는 신입이고."

볼크는 가족 소개를 하는 사람처럼 태연한 얼굴로 대답했다.

하지만 그들은 가족처럼 낯간지러운 사이는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같은 조직원으로서의 '식구' 개념일 뿐.

"끌끌끌. 오늘은 새끼강아지치고 말이 많구먼. 적 앞에서 설명회도 하시고."

"에이 씨발, 어차피 죽일 건데 무슨 말이든 하면 어때."

"알았으니까 가서 마무리 지어라. 나는 주구 때문에 아무것도 못 한다."

볼크는 꼬마를 잠시 노려봤다.

그러나 꼬마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씨발, 내가 해야 할 일이군."

볼크는 진 위에서 짓눌리고 있는 시우를 향해 다가갔다.

듣기로 이 주구는 어마어마한 중력을 구현해 상대를 구속하고 전투 불능 상태로 만드는 기술이라 한다.

몇 번의 전투를 함께 해 본 결과, 저 기술에서 빠져나온 적은 본 적이 없었다.

"진 위로 직접 가 보는 건 처음인데··· 썩을 영감, 이거 나한테까지 데미지 오는 거 아니지?"

"쯧 처음 진이 형성될 때 있던 생명체에만 반응하니 걱정 말거라! 강아지 새끼도 아니고."

볼크는 씨발 개발 소리를 투덜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벌레처럼 쪼그라져 있는 모습을 보자니 호송차 안에서 싸가지 없이 말대꾸하던 놈이 맞나 싶은 생각마저 든다.

"내가 그래서 누구 관인지 안 궁금하냐고 물었지? 혓바닥 잘못 놀리면 뒤진다는 게 이런 거다."

볼크는 마력을 열었다.

"마지막으로 할 말 없고?"

보통은 유언이라기보다는 살려 달라 비는 게 일반적이다.

그렇다고 살려 주는 일은 없지만 말이다.

"······정민준이란 헌터를 아나?"

"몰라. 그게 누군데? 내가 알아야 해?"

별 희한한 질문도 있구나, 하는 생각으로 볼크는 마력을 모았다.

대가리는 따서 차 위에 올려놔야지, 하는 생각이었다.

그럴 생각이었는데.

시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것도 너무나 가뿐하게.

"······어?"

"대답 들었으면 됐다. 이제 일 해야지."

조금 전까지 중력과 압력에 몸을 못 가누던 녀석이 맞는 것인가.

볼크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잠깐 사고가 정지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시우는 그를 흘끗 바라보더니 발을 박찼다.

모든 이에게서 시우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퍽.

단출하고 짧은 타격음이 울렸다.

그소리를 '인식'한 건 노인이었다.

분명 중력의 주술에 걸려 쓰러졌던 시우였다.

보통 저기에 걸리면 그 누구도 허락 없이 일어나지 못한다.

마력을 해제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주구를 만드는 장인, 술식을 입력하는 술자, 거기에 마력을 입혀 시전한 자신까지.

총 세 명의 합공이라 여겨도 좋을 기술이다.

그런데 방금까지 바닥을 구르며 내려찍는 압력에 옴짝달싹 못 하던 녀석이 사라졌다.

정말 찰나의 순간.

빨아들인 담배 연기가 아직 폐를 휘돌고 있을 정도의 편각.

콰득.

다시 소리가 들린다.

뒤늦게 시선이 닿은 곳, 꼬마의 몸에 피 분수가 일어나며 몸이 불꽃처럼 스러졌다.

그 흔한 단말마조차 없는 죽음이었다.

잘린 목에서 피가 솟구치며 바닥을 흥건히 적신다.

"이, 이 개새끼가ㅡ!!"

볼크의 끓어오르는 분노가 마력과 뒤섞이며 터질 듯 분출됐다.

전신을 훑고 바늘처럼 날카롭게 세를 떨친 마력들이 몸을 감싸며 거대한 기운으로 뒤바뀐다.

- 카드드드

볼크의 근육과 골격이 뒤틀리더니 빵처럼 부풀어 오르며 점차 커다랗게 변하기 시작했다.

[베어볼프]

[저놈 모습이 변했다! 끄악! 고기가 질기게 생겼다!!]

'[이형계] 각성자는 흔하지 않은데.'

2m가 훌쩍 넘는 체구에 터질 듯 꿈틀대는 근육, 기다랗게 자란 회색 털과 날카로운 손톱까지.

볼크의 늑대를 닮은 얼굴이 분노로 꿈틀거렸다.

"크아아아아아아!!"

반인반수형 늑대 인간이 시우를 향해 양팔을 벌리고 뛰어들었다.

각력마저 달라진 것인지, 몸짓이 맹수의 그것처럼 날쌨다.

까드득.

칼날처럼 벼린 손톱에 붉은색 마력이 모인다.

열 손가락 가득 실린 마력이 시우가 서 있는 곳을 할퀴듯 쏘아져 나갔다.

콰가가가가가가!!

거대한 짐승이 찢어발긴 것 같은 흉이 새겨지며 공간에 짙은 파열음이 일어났다.

그러나 볼크는 야성의 직감으로 시우가 맞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크르르르르! 쥐새끼 같은 놈!"

"볼크ㅡㅡ! 숙여라!!"

그때, 노인의 일갈이 들렸다.

또 다른 주구인 국궁을 꺼내 마력을 힘껏 때려 박은 뒤 시우가 피한 곳으로 활을 날리려는 것이었다.

벌써 두 번째 주구의 사용이다.

한 사람을 처리하기 위한 방편으로는 너무도 과한 지출이다.

그러나 어쩔 수 없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중력 주구를 사용한 것을 아깝다 여긴 것은 맞다.

남는 거 없는 장사라며 투덜대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도 꼬마가 죽기 전까지 이야기.

엄청난 대결 끝에 죽은 것도 아니다. 그냥 느닷없이 목이 따였다.

늘 마력의 움직임을 주시하는 노인 본인조차도 알아채지 못한 속도였다.

값비싼 주구를 쓰느니 마느니 할 처지가 아니다.

노인은 오만한 자신을 질타했다.

그래서 두 번째 주구를 재빨리 꺼냈다.

끼익ㅡ 투웅!

노인의 손가락에서 활시위가 떨어졌다.

거대한 뱀의 신,

[뇌벽섬: 마후라가]

악신 마후라가가 전격을 몸에 두른 채 벼락처럼 날아갔다.

스치는 공간마다 번쩍거리는 뇌력이 사방을 난도질하며 거친 파공성을 일으켰다.

"크흑···."

노인은 한꺼번에 마력을 소진해 텅 비어 버린 자신의 단전을 느끼며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애초에 이 주구는 마지막 공격이란 마음으로 부적처럼 가지고 다니던 것이었다.

그러나 시우가 중력구에서 벗어나 동료를 죽이는 그 짧은 찰나, 노인은 이성을 압도하는 공포가 자신을 짓누르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죽여야 한다!!'

파지지지지ㅡㅡ

뇌전으로 이루어진 마후라가의 형상이 흉측한 입을 벌리며 시우에게 날아왔다.

피하기엔 너무 빠르고, 그냥 맞기엔 데미지가 클 듯하다.

이게 만약 스킬이었다면 마력이 운용되고 마법진이 형성되는 과정이 있었을 터.

그러나 주구로 날린 것이기에 저런 과정이 생략되어 공격 속도가 빠른 것이었다.

시우는 눈앞에서 번쩍이는 강격을 보며 잠시 고민했다.

'스킬을 쓸까··· 아니면 버티고 힐을 할까.'

마치 주마등이 스치듯 현 상황을 적절히 타개할 방법들이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처럼 돌아갔다.

그리고 그는 가장 간단하면서 탁월한 방법을 택하기로 했다.

단전에서 마력을 힘껏 뽑아낸다.

이계에서 돌아온 뒤 이제껏 해 본 적 없는 속도로 마력이 흘러넘친다.

전신으로 마력이 질주하며 선선하고 뻐근한 감각이 느껴진다.

시우는 그렇게 쏟아 낸 마력을 오른손에 그러모았다.

스킬을 발현해서 막는다면 시간이 조금 촉박할 것이었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한 가지.

순수한 마력의 힘.

시우는 주먹을 쥐었다.

단전에서 뽑아낸 마력들이 그의 오른손에 새파란 건틀릿처럼 단단하게 씌워진다.

어깨와 팔을 뒤로 젖혔다.

정말 단출한 준비과정이었다.

마후라가의 입이 벌어지며 섬찟한 기운이 시우를 향해 양팔을 벌리고 날아왔다.

마력과 술식으로 구현된 뱀의 신 마후라가.

천룡팔부 중 악신의 뱀이 적을 멸하기 위해 주구에서 끔찍한 마력으로 드러난 것이다.

- 크아아아아아아!!!

수백 마리의 뱀이 울부짖는 것과도 같은 소름 끼치는 비명.

양손에 든 거대한 무구까지.

모골이 송연해지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시우는 차분하게 자신의 오른손만 들었다.

무기도 없는 빈손이었다.

'스킬을 발현한 것도 아니고, 주구가 있는 것도 아닌데 무슨 짓을···?'

노인은 의구심을 거두지 못하고 상황을 파악하려 했다.

시우는 그저 손을 들었을 뿐이다.

그때 마후라가가 뇌력이 담긴 무기를 휘둘렀다.

저릿저릿한 마력이 공간을 가르고 적을 개미처럼 짓누르기 위해 들이닥쳤다.

- 파지·지·지·지·지·지·!!

시우는 몸을 틀었다.

공격이 종이 한 장 차이로 그를 비껴갔다.

뇌력이 스친 어깨가 찢어졌다.

시우는 주먹을 힘껏 내질렀다.

팟ㅡㅡㅡㅡ쿠와아아아아아!!!!

당연히 마후라가의 전격이 시우를 구워삶아 버릴 것 같았는데, 그 섬찟한 뇌력이 상대의 모든 걸 태워버리고 창을 꽂아 놓을 것 같았는데.

눈앞에 드러난 장면은 노인의 예상 범위를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

주먹을 내지르는 기합이 끝난 순간,

마후라가의 일그러진 얼굴이 퍼걱, 날아갔다.

그 뒤에 마후라가의 몸통과 사지가 믹서기로 갈아낸 듯 제멋대로 터지며 공중에 흩어졌다.

"이, 이럴 수가··· 마, 마후라가가···."

그러나 그 끔찍한 마력파는 마후라가를 곤죽으로 만든 것에 멈추지 않았다.

주구의 시전자를 향해 매섭게 날아간 것이다.

콰가가가가가가···!!

노인은 다른 주구를 찾으려 보자기를 뒤적였다.

그러나 시간이 없었다.

순수한 마력 덩어리인 저 공격엔 그 어떤 스킬도, 살의도, 속임수도 없었다.

오직 파괴하겠다는 일념만 가득한 강공.

노인은 이제 끝났단 사실을 알았다.

'건드리지 말아야 할 것을 건드렸군.'

마후라가를 단 한 줌의 고깃덩어리로 만든 마력파가 발리스타의 격발처럼 노인을 향해 달려왔다.

그는 눈을 감았다.

퍼ㅡㅡ억!!!

노인의 일곱 구멍에서 핏물이 왈칵 흘러내리며 몸이 앞으로 기울었다.

···털썩.

언덕 위로 바람이 불며 정적이 흘렀다.

"이제 너 하나 남았네."

시우는 굳어 버 린 볼크를 향해 말했다.

볼크는 반인반수의 형태를 유지한 채 마후라가가 나타난 뒤부터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

"주구 아이템을 두 개나 파훼하고··· 너 이 개새끼··· 정체가 뭐야?"

"HMCS 호송관."

시우는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사실 틀린 말도 아니었으니까.

"하, 그래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그러나 그 대답에 볼크는 이를 까드득 물었다.

동료애가 있거나 복수심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었다.

킬러로서 무시당했다는 기분,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무력감 같은 것이 자존심을 긁으며 분노로 치환됐기 때문이었다.

"같이 뒤지는 한이 있더라도 너는 반드시 찢어 죽인다!!"

"꿈도 야무지군."

볼크는 단전에서 마력을 닥치는 대로 그러모았다.

이미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마나가 들어차 있었으나, 개의치 않고 꾸역꾸역 밀어 넣었다.

근육이 뻐근하게 아려오며 동시에 주체할 수 없는 힘이 끓어올랐다.

그는 발톱을 날카롭게 세워 시우를 향해 야생늑대처럼 달려들었다.

"크르르르! [그림자 군무]"

볼크의 주위로 마법진이 그려지며 검은색 늑대 다섯 마리가 이빨을 드러냈다.

늑대들은 그림자처럼 새까맣게 으르렁대더니 이내 시우를 물어 죽일 기세로 돌진했다.

"강아지 다섯 마리라."

시우는 놀란 기색이 없었다.

그 태연자약한 모습이, 볼크의 심기를 더욱 거슬리게 했다.

"씨발 HMCS 따위가!!!"

분노에 찬 회색늑대가 날카로운 이빨을 적에게 겨눴다.

곧이어 검은 늑대 다섯 마리도 함께 뛰어들었다.

모든 분노가 한 사람에게 쏟아진다.

손가락보다도 더 큰 이빨이 시우의 목에 가닿는 순간,

"[삭풍 : 천 개의 바람]"

칼날 같은 바람이 그 모든 적들을 갈가리 찢어 버렸다.

***

시우는 노인의 한쪽 팔을 붙잡고 질질 끌고 왔다.

그의 숨통은 끊어지지 않았다.

마후라가의 마력을 짐작하고 받아친 공격이었기에, 노인에게 치명상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시우는 볼크 옆에 그를 던지듯 눕혔다.

볼크는 온몸에서 피를 흘리며 간신히 뜬 눈으로 시우를 노려봤다.

마지막으로 당한 공격은 감히 피할 수조차 없을 정도였다.

"뭘 야려."

시우는 손바닥을 펼쳐 마법진을 연성했다.

두 손에 금빛 문자가 아로새겨지며 노인과 볼크의 상처가 아물기 시작했다.

단순한 상처 봉합이 아닌 재생.

"이게 대체 무슨 짓······."

볼크는 다시 한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말을 잇지 못했다.

"물어볼 게 있어서. 그냥 보내면 내가 일부러 풀어 준 의미가 없잖아."

그는 시우가 말한 의미를 뒤늦게 이해했다.

애초에 습격을 당할 것도, 호송차에서 탈출할 것도 상대는 모두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그 모든 일을 방관했던 건 지금 이 순간을 위해서.

이 HMCS 헌터는 자신이 상대방을 다 제압하고 이 질문을 할 수 있을 거란 자신이 있었던 거다.

시우는 안주머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그건 정민준의 마지막 기억을 들춰 볼 때, 어렴풋이 나타났던 암살자의 얼굴을 스킬로 인쇄한 사진.

"너, 이 새끼 알지?"

〈24화〉

옛날과 오늘은 같다

끌어다 놓은 볼크를 보며, 시우는 상황부터 간략하게 설명했다.

"어떤 새끼가 내 제자를 죽였거든. 근데 추적하고 조사하기가 더럽게 어렵더라고."

그는 쪼그려 앉아 자신의 팔을 무릎에 올렸다.

누워서 상반신만 일으킨 볼크와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서였다.

"알고 보니 헌터 전문 킬러란 게 생겼다네. 나 때는 그딴 게 없었는데."

['라떼는' 이런 말 쓰면 꼰대다! 신지수가 그랬다! 식량 100살 넘은 개꼰대다!]

시우가 이계로 가기 전까지는 각성자 킬러란 게 따로 없었다.

전문 킬러라기보단, 마음에 안 드는 헌터를 게이트 안에서 싸워 죽이거나 각성 능력으로 대놓고 범죄를 저지르는 녀석들이 있었을 뿐이다.

그땐 각성자나 헌터에 대한 법이 없었고, 오로지 힘의 규율로만 시스템이 돌아갔다.

이계로 가 있는 10년 사이에 각성자에 대한 체계와 법이 생기고 직업이 세분화된 것이다.

"아무튼 어찌저찌 얼굴은 따 놨는데, 이 상판을 아는 새끼가 없네."

"그래서···? 살려 줬으니 대신 동료의 이름을 팔아라, 씨발 뭐 이런 건가?"

"비슷하지."

볼크는 너무도 뻔한 시우의 대답에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소년 만화에 나오는 클리셰도 아니고. 상처를 치료해 주고 목숨을 살려 줬다는 것으로 감동하길 바라는 건가.

"큭큭. 나를 너무 물로 봤네. 목숨 하나 건진 값으로 동료의 이름을 댈 거라 생각한 거야? 내가 씨발, 셰리 볼크인데 값싼 동정으로 존심은 안 넘기지."

시우는 머리를 긁적였다.

상대가 거래 내용을 잘못 이해하고 있었지만, 굳이 정정해 주진 않았다.

어차피 거절하면 겪게 될 일이니까.

그는 품 안에 있던 사진을 꺼내 들어 보였다.

"이게 뭔···."

순간 볼크의 감정이 목소리처럼 미묘하게 흔들렸다는 것을, 시우는 마나의 파장 변화로 알 수 있었다.

"너, 이 새끼 알지?"

"처음 보는 얼굴인데ㅡ 우리 조직원 중에는 없어. 킬러도 조직이 많으니 어디 다른 곳 소속이겠지."

"그래··· 모른다 이거지?"

"안타깝게 그리됐네. 형씨네가 더 뺑이를 쳐 봐. HMCS 정보력 좋을 거 아냐."

시우는 쭈그려 앉은 채 볼크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마나 파장이 볼크의 심리를 대변하듯 물결처럼 요동치고 있었다.

"나는 재밌는 특성이 하나 있거든."

"······뭔데?"

시우의 입가에서 미소가 천천히 사라졌다.

"거짓말을 가려내."

볼크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마치 도망치려다 걸린 토끼를 바라보는 맹수처럼, 시우는 먹잇감의 하찮은 발악을 좌시하지 않았다.

볼크는 당황한 듯 목소리를 높였다.

"뭐, 뭔 개같은 소리야? 누가 구라를 쳤다고? 씨발, 모르는 걸 모른다고 하지! 너 감지형 헌터도 아니잖아!!"

"거짓말하면 너처럼 혀가 길어지더라고."

"이 씨발새ㄲㅡ!"

콰드드득.

볼크의 외마디 욕설이 무언가에 끊기고야 말았다.

보이지 않는 손놀림.

뒤늦게 솟구치는 피.

불에 지진 듯 달아오르는 통증.

"ㄲㅡㅡ 어어어어어억ㅡㅡ!!"

볼크는 뜯겨 나간 자신의 턱을 만지며 비명을 질렀다.

아래턱이 통째로 사라져 피가 온몸으로 쏟아지고 있었다.

무기로 잘라 내거나 스킬을 쓴 게 아니었다.

손가락 몇 개로 곰이 '할퀴듯' 턱을 찢은 것이다.

일반적인 악력으로는 사람의 턱을 찰흙처럼 떼어 내지 못한다.

스킬이 있든가, 아니면 마법이 인챈트된 장갑을 끼든가.

그것도 아니면 마력을 손에 그러모아 힘껏 휘두르면 모를까.

그러나 시우가 사용한 건 마나도 두르지 않은, 순수한 손아귀 힘.

"어어어어어ㄱ······!!!"

볼크는 끔찍한 격통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흘러내리는 핏물만 손으로 받아 냈다.

그때 시우가 상대의 턱으로 손을 가져다 대려 했다.

볼크는 화들짝 놀라며 본능적으로 공격 자세를 취했다.

그사이에도 잘린 턱에선 피가 꿀렁꿀렁 쏟아지고 있었다.

개처럼 덜덜 떠는 상대를 보며, 시우는 나지막하고 차갑게 내뱉었다.

"앉아."

주언이나 언령이 아니었음에도 볼크는 그 말을 거스르지 못한 채 바들바들 무릎을 꿇었다.

시우는 코 밑, 너덜너덜한 부분에 손을 가져다 댔다.

금빛 섬광이 불길처럼 터져 나왔다.

그 샛노란 섬전이 눈부시게 빛나며 12개의 문자가 원을 따라 빙그르르 돌았다.

그 따스하고 포근한 온기가 볼크의 턱을 삽시간에 감쌌다.

우우우웅ㅡ

"어, 어으으으어?"

그리고 헌터 상식으로는 도저히 말이 안 되는, 단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일이 발생했다.

지혈이나 간단한 봉합이 아닌 상처의 재생.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수많은 힐러들을 만나고 치유사들을 만났지만 이런 경우는 결단코 없었다.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랭커 힐러들이라면 가능할까.

볼크는 씻기듯 날아간 통증에 할 말을 잃었다.

목덜미부터 바짓단까지 축축하게 적셔진 피가 거짓말 같았다.

그는 자신의 턱을 어루만졌다.

아주 멀쩡했다.

"아가리가 새로 생겼으니 대답을 해야지."

또다시 들려오는 무미건조한 음성.

시우의 협박 아닌 협박에 몰크는 침을 꿀꺽 삼켰다.

진실을 말하지 않으면 격통이 반복될 것이다.

그러나 목구멍까지 올라왔던 말은 뇌를 거치며 새로운 대답을 만들어 냈다.

"저, 정말 모르는 얼굴이야! 생전 처음 보는 상판이라니까! 이런 판국에 내가 구라를 치겠냐고!!"

"그래?"

시우의 허리춤에 있던 칼날이 번뜩이며 순식간에 볼트의 오른팔이 양단됐다.

피가 콸콸 쏟아지며 토할 것 같은 비명이 땅에 쏟아졌다.

"끄아아아아악!! 씨바ㅡㅡㅡ알!! 개새끼야!!"

시우는 울부짖는 상대를 보면서도 서릿발 같은 눈빛을 지우지 않았다.

일백 년간 반복된 전투가 감정을 앗아간 탓일까.

아니면 제자에 관한 복수심으로 이성이 마비된 탓일까.

모르겠다, 지금은.

주사위가 발길에 차이고 채여 각진 것들이 마모되듯, 시우의 마음과 감정도 잦은 핏물에 잠겨 제 형태를 잃어 갔다.

지금은 목표를 위해 달릴 뿐이다.

"닥쳐."

들려오는 비명이 귀에 시끄럽다.

시우는 녀석의 잘린 팔에 칼을 쑤셔 박았다.

콰드으으윽!!!

"끄허··· 어어··· 허억··· 어억···!!!"

볼크는 침을 질질 흘리며 이마를 땅바닥에 박았다.

고통으로 뇌가 짓이겨지는 것 같았다.

마력이 있다면 신체를 강화해 통증이라도 덜 느꼈을 텐지만, 기절했다 일어났을 땐 이미 단전이 텅 빈 상태였다.

"다시 묻는다. 사진, 이름."

시우가 차갑게 질문을 던졌다.

그 음성은 더 이상 사람의 목소리처럼 들리지 않았다.

'아··· 악마···.'

제정신이 아니다.

미친놈이다.

사람의 탈을 쓴 야차다.

대답을 다시 회피한다면 더 큰 고통이 반복될 것이다.

"아가리가 안 벌어져?"

대답이 늦어지자 시우는 박혀 있는 칼날 손잡이에 주먹질을 했다.

뻐어억!

"크학!!! 끄으그으으으··· 으··· 씨바아알···."

볼크는 바닥에 나뒹굴었다.

태어나 처음 느껴보는 끔찍한 통증이었다.

차라리 곱게 죽여 주는 게 더 나을 성싶었다.

그는 입에서 침을 질질 흘리며 고민에 빠졌다.

동료에 대한 정보와 조직에 대한 정보는 절대 넘겨선 안 된다.

인의 때문이 아니다.

룰이라거나 매너에 대한 얘기도 아니다.

엄중한 규율.

조직에 들어갈 때 「침묵의 서약」이란 걸 작성하게 되는데, 이게 단순한 서약서가 아닌 게 문제다.

자그마치 S급 스킬로 구현된 마법 맹약.

방법 자체는 간단하다.

서명한 뒤에 각자 자신의 마나를 종이에 투사한다.

그리고 종이에 새 오더가 적히면 목표물을 처리한다.

그러나 서약의 내용을 어기게 되면 마나를 감지해 해당 조직원이 죽여야 할 '타깃'으로 변경된다.

여기서 '사진 속 인물'에 대한 정보를 발설하면 그 즉시 볼크의 서약서는 붉게 변하고 [1 급 타깃]으로 지정될 것이다.

볼크는 양자택일의 기로에 섰음을 깨달았다.

'씨발!!! 불면 조직에서 죽이러 올 테고, 안 불면 이 미친놈한테 죽어라 고문당할 텐데···.'

마치 총과 칼을 두고 "뭐로 죽을래?" 하며 사신이 질문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머릿속에서 고민을 반복하는 찰나,

"으윽··· 어떻게 된 겐가···."

노인이 고개를 저으며 정신을 차렸다.

그는 자신의 몸 상태를 잠깐 살피더니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입을 벌렸다가 도로 다물었다.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려 했지만, 쉽게 가늠하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시우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사진을 다시 꺼내 노인에게 내밀었다.

"영감, 이 새끼 알아?"

"······자넨 대체 누구인가."

질문을 던졌더니 다른 질문이 돌아왔네.

시우는 한숨을 푹 쉬며 볼크의 팔에 박혀 있던 칼을 순식간에 빼 버렸다.

"크으으아아아악!! 씨바아알!! 말이라도 하라고!!"

자지러지는 비명이 들렸건만, 시우는 그쪽에 신경조차 쓰지 않고 칼을 빙빙 돌렸다.

칼끝에 매달린 피가 뚝뚝 떨어졌다.

이 노인네는 그렇게 호락호락해 보이지 않는데.

어딜 쑤셔야 입을 열려나.

눈알을 도려낼까.

아니면 혓바닥이 나을까.

스킬 몇 개를 합쳐서 머리만 남겨 둘까.

그런 것들을 머릿속에서 계산하고 있는데,

"야··· 이 쌰아앙······ 아까처럼 치료부터······ 씨발좀 !"

말하는 중간마다 고통에 이를 악문 볼크가, 멀쩡한 손으로 시우의 바짓단을 잡고 늘어졌다.

시우는 노인을 쳐다봤다.

마력을 감지했다.

노인은 주구를 무리하게 쓴 탓에 몸에 잠재된 마나가 텅 빈 상태였다.

'도망가면 1초 안에 잡아다 팔다리부터 자르자.'

그렇게 판단한 뒤 볼크의 오른팔을 주워 잘린 부위에 대충 고정시켰다.

스킬을 시전하자 마법진이 찬란한 빛을 내뿜었다.

잘린 부위에 금빛 광명이 촘촘히 스며들며 술식을 구현하기 시작했다.

뼈와 근육, 혈관, 신경, 따위가 서로 이어지더니 절단면이 지우개로 지운 것처럼 사라졌다.

시우가 손바닥을 떼자 볼크는 숨을 헐떡이며 팔을 움직여 보았다.

애초에 잘린 적이 없던 것처럼 팔은 자연스레 움직임을 구사했다.

"고급 치유··· 아니, 재생이라니?"

노인은 신화 속 무언가를 본 듯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금빛 마법진, 열두 개의 문자, 그리고 단순 치료나 봉합이 아닌 원래 상태로의 복원.

이건 신기에 가까운 능력이다.

대한민국 땅에 이런 각성자가 있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다.

만약 저런 회복술사가 있다는 게 알려지면 그 어느 기관과 조직에서도 방관하지 않을 것이다.

'억만금, 아니 이런 능력이면 대형 길드에서 S급 헌터 이상의 대우를 해 줄 터. 한데 이런 자가 어째서 HMCS 따위에?'

시우는 칼자루를 노인에게 겨눴다.

도축을 하듯 머릿속으로 자연스레 시뮬레이션이 그려졌다.

서로가 각기 다른 생각을 할 때, 노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왜 자네 정도의 실력가가 HMCS에 있는 것인가? 애초에 그런 능력은 숨긴다고 숨길 수 있는 게 아니거늘···."

"이 마당에 별게 다 궁금한가 보군."

"끌끌. 이 바닥에 오래 뒹굴다 보면 남들 이상으로 아는 게 많은 법일세··· 그런데 자네 같은 능력은 처음 보는구먼."

"오래 뒹굴었는데 처음 봤다고?"

시우는 피식 웃었다.

"네놈도 회복술사면 당연히 알지 않겠느냐. 너 같이 고급 회복 스킬을 쓸 수 있는 사람이 한국에 거의 없다는 것을."

"회복술사? 누가?"

"끌끌. 어린놈이 말장난하는군. 당연히 네놈······."

"나 회복술사 아닌데."

노인은 눈을 끔뻑거렸다. 그는 시우만큼은 아닐지라도 연륜을 통해 상대의 거짓 정도는 추려 낼 수 있었다.

그리고 시우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무어냐. 네놈이 전설의 생령술사라도 된다던!"

"잘 아네."

자신의 비아냥에 뻔뻔히 대답하는 시우를 보며, 노인은 헛웃음을 짓다 살짝 노기를 띠었다.

"웃기지 말거라! 지금 조금 강하다고 하여 함부로 전설을 빙자해서는 아니 되느니. 진정한 생령술사는 십여 년 전 '그' 뿐이다. 네놈 같은 애송이가 함부로 떠들어도 될 게 아니야!"

노인의 말에 시우는 다시 한번 피식 웃었다.

그는 칼을 땅바닥에 푹 꽂아놓고는 노인의 얼굴을 응시했다.

"그 생령술사라는 사람 직접 본 적은 있어?"

"끌끌. 내가 이 바닥에 몇 년이나 있었을 것 같은가. '삼존'이 있다는 걸 아는 자도 몇 없을 터인데, 나는 그 셋을 다 보았지."

"삼존이란 말 오랜만에 듣네. 넌 아냐?"

"···씨발 내가 그딴 걸 어떻게 알아. 뭐? 삼 좆??"

"흠."

시우는 볼크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그의 머리통을 낚아채듯 잡았다.

반사적으로 뿌리치려 했지만, 시우의 아귀힘이 볼크의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어 팔을 붙잡고 버둥거릴 수밖에 없었다.

"이 씨발!!! 또 무슨 개짓거리를 하려고!! 얼른 놔!! 모른댔잖아!!"

"여전히 주둥아리가 살아 있네. [라이프 스틸]"

"이 개새ㄲㅡ 끼히이어어··· 흐거어어어억··· 어억······."

볼크의 호흡이 메말라 가며 온몸이 미라처럼 야위어 갔다.

20대의 건장한 청년이 순식간에 늙어 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생기가 빠져나간 것이다.

시우는 반쯤 죽어 가는 놈을 보다가 손을 뗐다.

숨이 꼴딱꼴딱 넘어가는 모양이었지만 죽진 않을 것이다.

어차피 원하는 정보를 얻기 전까진 죽고 싶어도 죽지 않게 할 테지만.

"이제 영감 차례인데."

그 냉기 서린 말투와 표정을 보며 노인은 '소름이 끼친다'는 뜻을 이해했다.

시우의 눈빛은 어둠의 세계에 있는 각성자나 킬러의 그것과는 달랐다.

그것은 마치ㅡ

"아······."

감정이 결여된 맹수의 눈빛.

노인은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턱이 제멋대로 딱딱 부딪쳤다.

거대한 뱀 앞에 놓인 쥐처럼 본능적인 공포가 밀려왔다.

이 감정, 이 광경, 이 폭력을 느껴 본 적이 있었다.

거스를 수 없는 순수 악을 먼발치서 바라본 적이 있었다.

노인의 과거와 현실이 오버랩된다.

십여 년 전,

생령술사이자 대한민국 삼존 중 하나이며, 모든 악명을 가볍게 얹고 살았던 최강의 괴물.

투신 최대수, 검귀 도경후와 어깨를 나란히 하던,

"과, 광······ 광견 민시우! !"

〈25화〉

권위의 역전

노인은 무릎을 꿇었다.

그 자세엔 거짓이나 속임수가 없었다.

말 그대로 절대적인 복종.

최대수가 대통령이 되어 민시우에 대한 자료를 다 말소한 지금, 자신의 얼굴을 알아보는 헌터가 있을 줄은 몰랐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얼굴은 못 알아보고 기술을 알아본 것이지만.

"광··· 민시우 님, 저 하룻강아지가 죽은 것이 아니라면 혹시 살려 주시면 아니 되겠습니까?"

노인은 머리를 땅에 조아리며 죽어 가는 볼크를 부탁했다.

"이 늙은이의 작은 바람입니다. 당신의 존귀한 능력에서 손톱만 한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그래, 고개 들어."

그 태도가 마음에 들기도 하고, 어차피 죽이려는 마음도 없었기 때문에 시우는 그를 다시 회복시켰다.

[라이프 스틸]로 강탈한 생명력을 다시 집어넣는다.

살집이 다시 차오르며 얼굴의 혈색이 돌기 시작한다.

죽어 가는 것 같던 숨소리가 점차 편안해진다.

그렇게 미라에서 본래 모습으로 돌아오는 순간,

"······커······ 커헉!"

볼크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기침과 함께 일어났다.

희미하고 뿌옇던 시야가 선명해졌다.

그는 노인과 시우를 번갈아 바라봤다.

"대체··· 누구길래 영감이······."

그는 노인을 향해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노인은 조직에서도 꽤 높은 간부급에 가까웠다.

비록 같은 조직원이긴 해도, 음지에 오래 머물며 1세대 헌터로서 살아온 그의 강함을 모두가 존중한 덕이다.

조직의 관리자들도 노인에겐 나름 예를 갖추며 대했고, 건방을 좀 떨긴 했어도 볼크 같은 안하무인조차 노인의 명령에는 순순히 따랐다.

'삼 좆이 뭐길래 시발···.'

노인은 시우의 다음 명을 기다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무릎 꿇은 채 공손히 있었다.

"이 새끼."

시우가 다시 사진을 들어 보였다.

"본 적 있어?"

노인은 물끄러미 응시하더니 침을 꿀꺽 삼켰다.

긴장할 때 나타나는 몸의 신호.

미세한 마력의 꿀렁거림.

시우는 노인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런데 그 모습을 흘깃거리던 볼크가 옆에서 중재하듯 참견했다.

"저기···요. 우리 진짜 모른다니까···요. 뒷세계 조직이 한두 개가 있는 것도 아니고."

선을 넘기 바로 전이다.

"······."

시우는 호흡을 골랐다.

그 모습을 오해한 볼크가 말을 덧붙였다.

"그런 낯짝 여기저기 널렸어요. 몇 번이나 댁한테 죽을 뻔하고도 설마 내가 구라를 치겠습니까. 이 영감님도 모르······."

선을 조금 넘었다.

"야."

날짐승의 낮은 으르렁거림.

예기 가득한 시퍼런 안광.

바람도 불지 않건만 풀과 나무가 우수수 흔들리며 두려움에 몸을 떤다.

공기의 흐름과 온도가 뒤바뀌며, 처음으로, 시우에게서 미약한 살기가 터져 나왔다.

그러나 그 기세는 다른 헌터들과는 격과 급이 다른 것이었으니.

송곳처럼 찔러오는 압박에 그들은 숨도 쉴 수 없었다.

"너한테 볼일 없으니까."

얼굴 피부가 벗겨지는 것처럼 얼얼했다.

"아가리 닥쳐."

볼크는 생전 처음 느껴보는 묵직한 기운에 눈물과 침을 질질 흘렸다.

능력도, 스킬도, 마력도 아닌 단순한 살기.

"사지를 찢어 개밥으로 던져 버리기 전에."

볼크는 볼썽사나워진 얼굴로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의 마음속에선 조직의 두려움과 시우에 대한 두려움이 비등비등했었다.

오히려 조직의 타깃이 되는 것보단, 이 남자에게 계속 거짓을 고백해서 살아남는 게 더 낫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래서 일부러 영감의 편에 서서 말을 대신 한 것이었는데, 그것은 크나큰 오산이자 실수였다.

단지 0.5초 정도 느꼈던 살기로 인해 모든 기준이 뒤바뀌었다.

"어이, 영감."

"예."

"기회는 한 번이다."

노인의 이마에 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예."

생사여탈권(生死與奪權).

"거짓은 권하지 않는다.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몸이 되고 싶지 않다면."

시우의 말에 한 치의 고민이나 연민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한마디의 대답으로 자신과 볼크의 목숨이 달라질 것이다.

"누구냐."

노인은 두 눈을 감았다.

조직에 몸담은 지 어언 15년.

그는 그 15년 동안 단 한 번도 조직을 팔아 본 적이 없었다.

오히려 배신자를 찾아가 처리하는 히트맨의 역할을 해 왔었다.

그러나,

그 긴 세월조차,

죽음을 아우르는 공포를 이기진 못했다.

'하물며.'

대한민국 헌터계의 거목,

'삼존'에 대한 굴복이었다.

같은 1세대로써 존경해 마지않던 존재.

노인은 본능에 끌리는 대로,

"사진 속 인물은 저희 조직원입니다. 〈베스티아〉의 사수귀 중 하나인···."

시우에게 진실을 털어놓으며,

"'Black mamba'라고 합니다."

자신의 가슴 속에 벅차오르는 경외심을 마음껏 느꼈다.

"블랙맘바라······."

아프리카 독사의 이름.

시우는 그 이명을 마음으로 곱씹었다.

드디어 제자의 죽음에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사수귀는 뭐야?"

"현재 〈베스티아〉 조직에서 가장 실력 좋은 네 명의 킬러를 뜻합니다. 저나 저 하룻강아지보다는 강한 놈들입죠."

물론 강하겠지. 그러니 민준이가 당했을 테고.

"그래서 그 뱀 새끼는 어디 있지?"

당장 찢어 죽이러 갈 것 같은 모습에 노인은 고개를 저었다.

"절대 거짓이 아니라, 저희는 서로의 위치를 알지 못합니다."

"그럼 못 찾는다는 건가?"

"먼저 찾으러 '가는 것'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는 것'은 가능하지요."

"······회담이 있구나?"

노인은 눈을 크게 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2년에 한 번 열리는 조직 회담입니다."

"날짜는?"

"1주 뒤입니다."

"장소는?"

시우의 질문에 노인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마치 무언가를 결심한 것 같은 모습이었다.

"장소를 말씀드릴 터이니 한 가지 청이 있습니다."

"뭔데. 들어 보고 결정한다."

시우는 쓸데없는 말은 애초에 하지 말라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저희는 어차피 비밀을 발설한 대가로 죽을 목숨입니다. 「침묵의 서약」이라는 걸 통해 조직에서도 이미 타깃이 되었을 터."

"······"

"저희를 종자로 받아들여 주시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노인의 말은 조금 의외였다.

조직의 누군가는 죽이지 말라는 둥 헛소리를 할 줄 알았더니.

시우는 턱에 손을 대고 잠시 고심에 빠졌다.

이들이 조직에 쫓겨 죽임을 당하는 것은 사실 알 바가 아니었다.

그러나 회담이 시작되기 전에 잡혀서도 안 됐다.

그걸 고려하자면 당분간 데리고 다니는 게 나쁘지 않을 것 같기도 하고.

"좋아. 받아들이지."

시우는 마지못해 허락한다는 듯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진범을 잡을 수만 있다면, 그 어떤 것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감사합니다! 삼존께 폐가 되지 않도록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너는 할 마음 있는 거지?"

시우는 아직도 떨고 있는 볼크를 보며 물었다.

"저, 저는······."

"한다고 하거라. 이 썩을 하룻강아지야! 방금 우리 목숨이 건져진 것을 모르겠느냐!!"

노인의 윽박에 볼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엎드려 절받기지만 하면 됐고."

"만약 부족하시다면 저희들이 「마나의 맹세」라도 하겠습니다."

마나의 맹세.

침묵의 서약과 비슷하지만, 스킬로 하는 것이 아닌 자신의 마나에 대고 하는 맹세이다.

그만큼 효과도 좋지만 리스크도 커서 어지간해선 하지 않는 방법.

마나에 대한 맹세를 어기게 되면 마나에게 거부당해 단전이 막혀 버리게 된다.

"아니, 그런 식으로 구속하고 싶지는 않다. 그것보다 영감 이름은?"

"저는 적귀라 합니다. 바라건대, 주인의 눈과 귀가 되겠습니다."

노인, 즉, 적귀는 벅차오르는 감동과 강자를 보았다는 설렘에 온몸이 떨렸다.

그만큼 1세대 헌터에게 있어 민시우의 존재는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저, 저는··· 셰리 볼크···."

"알아 인마."

시우는 볼크의 머리를 탁, 때리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멀리서 사이렌 소리와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들리기 시작한다.

호송 차량이 오지 않자 교도소 측에서 신고한 모양이다.

이제 저쪽을 마무리해야겠군.

"이제부터 적귀와 볼크, 너희는 내 수족이자 내 보호 아래다. 내게 바친 너희 목숨은 이제부터 내 것이다."

조직이 없애러 온다 할지라도 자신이 보호해 주겠다는 일종의 주종 서약.

그런 말을 내뱉을 수 있는 자는 오로지 그 같은 강함을 유지한 존재뿐이다.

적귀와 볼크는 한쪽 무릎을 꿇으며 대답했다.

"예, 그리하겠습니다!"

"예, 그리···하겠습니다."

시우는 그들을 바라보다 곧 다음 수를 머릿속으로 그려 내었다.

***

황정구는 눈물 흘릴 것 같은 얼굴로 쌓인 서류를 훑었다.

그저 윗선의 지시로 HMCS 직원 하나를 보냈을 뿐이다.

마침 민시우가 간다고 요청했고, 당연히 걱정할 게 없으리라 판단했다.

해서 마음을 놓고 주말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교도소에서 전화가 왔다.

- 호송차에 있던 죄수가 도망쳤습니다. 전투 흔적도 크고 조사할 것도 많아서 와 보셔야겠는데요.

설마 광견이 탔는데 그럴 리가.

에이, 말도 안 되지.

그렇게 도착한 교도소 부소장실엔 민시우가 매우 '멀쩡한 모습'으로 있었다.

"어, 도망치려는 거 붙잡고 싸우다 내가 졌어. 개처맞았네."

민시우는 팔짱을 낀 채 당당히 말했다.

교도소 부소장도, 옆에서 감사를 진행하던 교도소 직원도, 현재 수사를 담당하는 수사관도, 그 모습을 보며 서류를 작성하던 황정구도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거짓말을 할 거면 차라리 진정성 있게라도 하지.

이건 속일 생각조차 없는 뻔뻔 그 자체였다.

"그··· 바디캠 녹화는 왜 안 하셨는지···?"

"망가졌던데."

"······확인해 보니 멀쩡하던데요?"

"그래? 그렇다면 미안."

"······."

황정구는 포기한 듯 찬물을 들이켰다.

예전에 끊었던 담배가 생각났다.

광견인 걸 알고 그에게 따질 수 있는 헌터가 세상에 어딨단 말인가.

참자, 참아. 참을 인(忍) 세 번이면 살인도 면한다는데.

"야. 너희 쪽에서 놓쳤는데 너무 책임감 없이 말하는 거 아냐?"

그러나 교도소 부소장의 생각은 달랐나 보다.

"똥을 쌌으면 치울 줄도 알아야지, 호송관이 죄수를 놓치는 게 말이나 되냐고! 그 새끼가 얼마나 위험한 놈인지 알기나 해?"

그는 테이블을 쳐 가며 열을 올렸다.

'이런 병신들 때문에 소장 진급 못 하기만 해 봐라.'

부소장은 자기 교도소 측의 잘못은 최대한 줄이고, 모든 실수와 책임과 죄수의 도망을 HMCS 측에 떠넘길 요량이었다.

"어이, 황정구 팀장. 우리가 한두 해 알고 지낸 사이도 아니고. 이런 시시껄렁한 것 가지고 계속 말싸움 해야 돼?!"

"아닙니다. 샅샅이 수색해서 어떻게 된 일인지, 어디로 갔는지 파악하도록 하겠습니다."

"요즘 HMCS 물이 올랐다더니 어쩌니 하면서 약을 팔아먹을 때부터 알아봤어. 씻팔 백건호 이 양반이 갑자기 왜 그러나 했는데. 써 보니 아주 엉망이구먼."

시우는 부소장이란 자를 무감정한 얼굴로 응시했다.

부패한 권력자의 전형적인 안하무인과 아랫사람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꼬리 자르기 형식의 술수.

예전이나 지금이나, 시우는 이런 자들을 극도로 경멸했다.

정작 할 수 있는 건 떠들 줄만 아는 아가리뿐.

그들이 손수 나서 무언가를 해결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봐야 했다.

"너 요즘 잘나가는 신입 HMCS 헌터 새끼지?"

부소장은 사소한 건수라도 상관없었다.

"하필 카메라가 망가져? 다 놓친 것 같으니 꺼 놨겠지. 개새야."

자고로 이득은 윗사람이, 책임은 아랫사람이 지는 법.

"걔가 따로 조직이 있는 것 같아서 그거 알아보려고 이감을 준비시킨 건데, 하필이면 너 같은 띨띨이가 일을 맡아서는."

부소장은 자신의 말에 대꾸조차 못 하는 신입을 보며 혀를 찼다.

이제 이 새끼가 다 뒤집어쓰는 거다.

어차피 '그쪽'에서는 신입 헌터 한 명 정도만 호송관으로 하길 바랐다.

시우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깊이 묻었다.

말석에 앉아 있음에도 그의 태도는 자못 시건방지며 당당했다.

"정구야."

"예, 선배님."

얼마 전부터 황정구는 시우를 '선배'라 부르기 시작했다.

직급이 낮은사람에게 존대하려니 떠오르는 호칭이 '형'이랑 '선배'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보통 죄수 이감하는데 호송관 몇 명이나 붙냐."

"기본적으로 넷에서 다섯 명은 붙어서 갑니다. 특히 상위 교도소로 이감되는 경우엔 최대 열 명까지도 붙습니다."

"근데 왜 볼크는 운전하는 놈 빼고 딸랑 나 하나였지?"

"그렇게 요청이 왔습니다··· 이 교도소에서."

"그렇다는데?"

시우의 한겨울 서릿발 같은 눈매가 부소장의 전신을 훑었다.

그저 시선이었을 뿐이거늘.

부소장은 구렁이가 자신의 몸을 감싸는 것 같은 살기를 느꼈다.

"뭐··· 뭐, 그래서 어쩌라고! 애, 애초에 그깟 놈 하나 놓친 네 잘못 아닌가?!"

그는 당황한 나머지 시우가 반말하는 것도 신경 쓰지 못했다.

시우는 다리를 꼬아 테이블 위에 발을 올렸다.

"조금 전에는 '그 새끼가 얼마나 위험한 놈인지 알기나 해?'라고 하지 않았나."

"그··· 그건···. 어쨌든 책임 소재는 분명히ㅡ!"

"볼크 말로는."

시우가 말을 끊었다.

"암살 조직에서 교도소 윗선에 로비를 했다던데."

그의 표정은

"호송관을 '한 명'으로 할 것이라는."

그 어느 때보다 냉랭했으며,

"하여 HMCS에서는."

조소가 가득했다.

"도망친 죄수와 교도소에 대한 진상 조사를 하려 하는데."

부소장은 들고 있던 컵을 덜덜 떨었다.

이게, 이게 아닌데.

"어떠신가?"

〈26화〉

조우

달빛이 어둠을 걷어 내고 창문에 출렁이는 저녁.

시우는 거실에 앉아 마력을 회전시켰다.

단전에서부터 심장으로, 심장에서 머리로, 머리에서 두 팔로, 두 팔에서 두 다리로.

마나가 흐르는 길인 마맥을 타고 온몸에 뿌리처럼 마력이 뻗어 나간다.

서늘하면서 따스하고, 청량하면서 꽉 막힌 감응이 피부에 닿는 촉감처럼 선연히 느껴진다.

마치 풀잎에 맺힌 이슬이 똑똑 떨어지듯,

팔에 놓은 링거가 한 방울씩 흘러 들어오듯.

극도로 섬세한 제어력을 통해 컨트롤되는 마력 입자들.

전 세계를 통틀어도 이만큼 세밀한 운용을 할 수 있는 자는 손에 꼽힐 것이다.

숨을 고르고,

후우ㅡ

천천히 내쉰다.

시우는 아주 가느다란 실을 뽑아내듯 마력을 촘촘히 흘리다가 이내 다시 되감아 단전에 쓸어 담았다.

몸 상태가 처음보단 많이 좋아졌군.

시우는 입꼬리를 올렸다.

처음 지구에 돌아왔을 때보다 몸의 컨디션이나 마력 운용력이 훨씬 상승했다.

아직 100%가 되려면 멀었지만··· 이제 한 50% 되었을까.

그만한 힘이 필요한 적은 아직까지 없었으니.

[그래 봐야 좁밥이다.]

"······."

[얼른 치느님이나 바치거라, 허접아.]

"좀 닥쳐."

띵동.

초인종이 울린다.

이 집에 손님도 오나.

시우는 터벅터벅 현관으로 향했다.

혹시 침입자?

하긴 침입자라면 애초에 초인종도 안 눌렀겠지만.

벌컥.

"넌 뭐냐."

"안녕하십니까."

문을 연 곳에는 뜻밖의 인물이 있었다.

일일 강사 때 개같이 처맞았던 A+급 헌터.

[백사자]의 추하민.

"왜? 한판 뜨려고?"

시우는 바로 용건부터 물었다.

아니, 본인이 생각한 용건을 물은 것이다.

"아, 아닙니다!"

반말에서 경어로 바뀐 말투.

추하민은 바로 손사래 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냐. 들어와라."

그의 손에 들린 과일바구니를 보아하니 사과하러 온 것 같다.

듣자 하니 HMCS와 [백사자 길드] 간 원만한 합의가 이뤄졌다고 하기도 했고.

백건호가 황정구를 통해서 '굳이 만나 줄 필요는 없다.'라고 했지만, 어차피 정치적 문제는 별 관심이 없는 부분.

시우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몸은 다 나았냐."

"예! 거의 다 나았습니다."

쥐어팰 때, 대충 치료하면서 패긴 했으나 깔끔하게 재생시켜 주진 않았다.

개긴 대가다.

[좁밥, 너보다 더 좁밥이 맛있어 보이는 과일 가져왔다. 나에게 바쳐라.]

"그래서. 용건은?"

"우선 저희 길드장인 최성일 헌터님이 가 보라고 했습니다. 꼭 사죄드리라고 하시면서."

추하민은 무릎 꿇고 두 주먹을 바닥에 대며 절하듯 몸을 숙였다.

무슨 야쿠자도 아니고.

"그리고?"

"예??"

"네가 '우선'이라며. 그럼 다음 용건도 있다는 거 아니냐."

"아······."

그는 자세를 풀지 않았다.

사실 사죄보다는 지금 말하려는 용건 때문에 저런 행동을 취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시우의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저를··· 제자로 키워 주십시오!"

[얼른 과일을 바치거라!]

"······."

하, 짜증 나.

저번에 종자로 거둬들인 애들도 귀찮아 죽겠는데. 얘는 또 뭐야.

시우의 노골적인 시선을 느낀 탓인지, 추하민은 필사적으로 본인을 어필하기 시작했다.

길드가 어쩌고, 자기 부하가 저쩌고, 최성일이 뭐라며 주절주절.

"ㅡ따라서 저를 제자로 받아 주신다면 후회시키지 않고 최선을 다해 스승님께 충성을ㅡ."

"야, 닥쳐."

"···옙."

대충 요약하자면 시우의 강함에 반했고, 평생 스승으로 섬기며 살고 싶다는 말.

주종과 제자는 또 다르기에, 어찌 보면 충분히 거절하고 내쫓아도 괜찮은 상황이었다.

좋은 기억이 있는 것도 아니고.

서로 싸움박질(일방적인 주먹질에 가깝지만)한 사이에 예의 차릴 필요도 없고.

그러나 시우는 모든 상황을 고려하며 계산기를 두드렸다.

단순한 손익이 아닌 훗날을 위한 예측.

"흐음."

게다가 자신에게 싸구려 도발을 해 오던 모습과 현재 모습이 사뭇 달랐다.

그때는 과장된 마력 파장이 흘러나왔는데, 지금은 차분하고 안정된 마력 파장이 나오고 있다.

말인즉, 단순하고 저돌적인 모습은 페이크라는 것.

실제 성격은 머리 좀 굴릴 줄 알고 신중한 편인 것 같은데.

"너 싸움 좀 하냐?"

"예??"

난데없는 질문에 추하민은 눈을 깜빡였다.

자신한테 그런 질문을 한 사람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예, 그··· [백사자]의 아수라라고 하면 한국에선 어느 정도 알아줍니다만···."

"그래? 왜?"

"A+급 헌터입니다··· 나름."

이런 말도 처음 듣는다.

아니, 예전에 들어 본 적이 있긴 하다.

"네 전(前) 스승은 뭐라든."

샤오롱에게.

"가능성은 있지만, 최강이 되진 못할 거라고 하셨습니다. 너무 약하다고요."

"지금도 연락하냐?"

"현재는 아닙니다. 수년 전에 한 11개월 정도만 배웠고, 그 뒤에 사부님은 중국으로 가셨습니다."

"거의 일 년을 배운 게 그 모양이야?"

"예···. 그리고 말씀 중에 죄송한데··· 제 사부님하곤 사이가 어떻게 되십니까?"

추하민은 참다 참다 결국 가장 궁금했던 질문을 던졌다.

샤오롱의 이름을 언급했을 때 눈빛이 달라지던 시우의 표정을 잊지 못했기 때문이다.

"무슨 사이."

"헌터님이 [아수라 : 금강난무]와 비슷한 기술을 쓰시는 걸 보면 스승님과 사형이나 사제가 되시는 것 같은데···."

"샤오롱이 본인 스승에 대해선 뭐라 하든?"

시우는 입꼬리를 슬쩍 올리며 되물었다.

추하민은 되레 받은 질문에 곰곰이 생각하더니 떠오른 몇 안 되는 기억을 말했다.

"그냥 엄청난 괴물이었다고 했습니다. 최대수와 싸워 살아남은 유일한 사람이라고 하는데, 그건 좀 과장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도경후도 한 수 접는다고 하는 최대수 아닙니까."

"그래? 도경후가?"

최대수가 확실히 입지를 굳히긴 했네.

정말 그만큼 강해진 건지, 언론 플레이를 잘한 건지.

"저는 강한 전투 헌터에 대한 존경심이 있습니다. 부디 시우 헌터님 제자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그래라."

"제발 부탁ㅡ 예??"

"그러라고."

시우는 손쉽게 받아들였다.

그놈이 가능성 있다고 했으니 나도 한번 봐야지.

그리고 이번 '일'을 위해선 인원이 조금 필요하기도 하다.

"대신에 나하고 일 하나 하자."

"알겠습니다! 그럼 이제 사숙(사부의 사제)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아니지."

시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추하민이 가져온 과일을 하나 건넸다.

"사숙이 아니라 사조(사부의 사부)다."

***

시간은 흘러 회담의 날.

정오의 햇살이 쏟아지는 가운데, 시우는 약속장소에 모인 자신의 '협력자'들을 보았다.

적귀 영감, 볼크, 추하민 그리고 황정구.

넷은 서로의 얼굴을 처음 마주하는 것인지 약간 어색한 얼굴이었다.

특히 황정구는 이 멤버가 너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어울리는 구석이라고는 단 하나도 없다.

그는 시우에게 다가가 귓속말로 물었다.

"서, 선배님?? 저거 도망쳤던 볼크 아닙니까?? 저 노인분은 또 누구고요? 아니, 게다가 [백사자] 추하민은 선배님이 팼던 애잖습니까. 이게 다 뭡니까?"

[다 내 부하 좁밥들인 거다!]

"······그냥 같이 한다는 것만 알고 있어."

시우는 마지막 멤버로 황정구를 데려왔다.

자기 뒤치다꺼리하느라 미안하기도 하고.

큰 건수 하나 물려서 인지도도 올려 주고.

들킬 일은 없지만, 혹여나 외부에서 알게 되면 면피가 필요했다.

'사망자'가 꽤 나올 텐데, 시우 독단으로 일을 했다고 하기보단 팀장의 명령으로 했다는 게 그럴싸할 테니까.

"주인님. 회담까지 30분 정도 남았습니다. 회담이 시작되고 30분 뒤에 저희도 들어가면 될 것 같습니다."

"그래, 그러도록 하지. 계획에 대한 건 적귀 영감이 알려 주도록 해."

"사조님은 저희랑 같이 안 있으십니까?"

시우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추하민이 물었다.

"어, 난 잠깐 볼일이 있어서. 시간 안에 올게."

***

청와대 대통령집무실.

'거한'이란 표현이 아깝지 않은 한 사내가 위엄있는 모습으로 앉아 있다.

남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키.

성인 남성 세 명을 합친 것 같은 굵은 몸통.

한쪽 눈에 씌워진 검은 안대와 곳곳에 난 흉터.

마치 아프리카 대륙의 야생 바바리 사자를 연상케 하는 단단한 육체.

"처리해야 할 일이 많군. 가서 전부 죽여 버리면 안 되겠지."

그르렁거리는 듯한 굵은 음성.

고목나무 뿌리처럼 두툼한 손가락 사이로 만년필이 위태롭게 잉크를 흘려 냈다.

슥ㅡ슥ㅡ

빠각.

"어이쿠. 펜이 또 부러졌네. 힘 조절이 이렇게 안 돼서야."

1세대 삼존 중 하나이자,

현 대한민국 헌터 랭킹 1위이며,

대한민국에 하나밖에 없는 SS급 헌터,

투신 최대수.

그는 희끗거리는 긴 머리를 뒤로 쓸어넘기며 20L짜리 정수기 물통을 텀블러처럼 들어 마셨다.

벌컥벌컥, 벌컥.

쿵.

"하. 물컵이 좀 작군. 점심때 먹은 돼지 한 마리가 짰나."

최대수는 순식간에 비워진 물통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날도 좋은데 드라이브나 다녀올까.

대통령 짓도 따분하구만.

그때 수행 비서와 경호팀이 벌컥 문을 열고 들어왔다.

어지간해선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각하, 죄송합니다! 정문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뭔데."

"현재 집무실을 향해 침입자가 쳐들어오고 있다고 합니다! 얼른 대피하셔야 합니다!"

최대수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런 대낮에? 몇 명인가?"

"그게 하, 한 명이라고 합니다."

비서의 대답에 절로 비웃음이 흘렀다.

최대수는 정장 재킷을 벗어 의자 등받이에 걸고, 넥타이와 시계를 풀어 책상에 올려놨다.

와이셔츠를 찢고 나올 것 같은 탄탄한 근육이 그의 분노를 대변하는 듯했다.

"이거··· 업무 스트레스를 이렇게 푸는군."

"가, 각하?!"

"패 죽일지 찢어 죽일지는 면상을 보고 정해야겠어."

살벌한 기운이 점점 공간을 채워 나간다.

마치 붉고 탁한 기운이 칼날처럼 짓쳐오는 기분이다.

경호원들과 비서는 순간적으로 호흡이 가빠지는 것을 느꼈다.

그때,

콰아아아!

대통령 집무실 문이 과자처럼 부서지며 사방으로 파편이 튀었다.

최대수는 느긋한 자세로 소매를 풀어 걷었다.

대통령으로서의 여유가 아닌, 하이 랭커 헌터로서의 여유.

경호원들은 일제히 마력을 운용해 자신의 스킬을 펼치려 했다.

그들 모두 A급 이상의 기량을 가진 뛰어난 헌터들.

각각의 마법진이 꽃처럼 만개하며 뭉쳐진 마력들이 침입자를 향해 직격할 준비를 한다.

뚜벅.

침입자가 한걸음 움직였다.

"멈춰!!! 한 발짝만 더 다가오면 즉각 사살한다!!"

"······."

"너 이 새끼! IZIZ 헌터 테러 단체냐? 아니면 목적이 뭐야!"

경호팀장은 당장에라도 스킬을 발동할 것처럼 고래고래 외쳤다.

곧 범람할 것 같은 마력을 억지로 누른 채 상대를 노려보며 말이다.

그러나 침입자는 경호팀장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예전에 비해 날파리들이 많이 늘었네. 성공했나 봐."

대통령을 보더니 조소하듯 비웃을 뿐이었다.

"마지막으로 묻겠다!!! 목적이 뭐야!!"

"너희들 대가리."

"준비이이이이!!"

밀리세컨드 단위의 싸움이 시간을 엿가락처럼 늘어트린다.

먼지가 흩날리는 모습까지 슬로 모션처럼 눈에 들어온다.

파즈··· 즈즛···!

사람을 즉사시킬 몇몇의 스킬이 구현되며, 색색의 섬전과 함께 뿜어져 나간다.

모두의 시선이 번개처럼 뻗어가는 스킬로 향해 있다.

침입자는 받아칠 준비조차 하지 못하고 이 자리에서 즉사할 터였다.

"하ㅡ."

그 순간,

권태 가득한 음성이,

"꺼져."

짧은 욕설과 뒤섞이며,

폭발적인 마력과 함께,

빛처럼 쏘아져 나갔다.

꾀ㅡㅡㅡㅡ아아아앙!!

집무실 한쪽 벽이 통째로 무너졌다.

바닥이 깨져 나가고 천장에 금이 갔다.

깨진 창문으로 바람이 들어온다.

충격을 보호하는 아티팩트가 설치된 곳인데도 이 모양이다.

거대한 돌풍이 휘몰아친 자리엔, 뿜어내지 못한 마력이 역류해 피를 토한 경호원들이 쓰러져 있었다.

최대수는 그 침입자를 보며 눈도 감지 못했다.

분명 사라졌었다.

그리고 마력조차 찾지 못했다.

수많은 전문 헌터들을 고용해 추적했으나, 아무도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렇게 사라졌던 자신의 유일한 숙적.

세상에 단 하나뿐인 유일한 걸림돌.

광견.

민시우.

"하나만 묻자."

시우의 몸에서 광포한 기운이 솟구친다.

최대수도 가만있지 않고 주먹을 까드득 쥐었다.

그 격류에 대리석 책상이 반으로 으깨진다.

"크흐흐. 뭘 말이냐."

"VIP가 너냐?"

〈27화〉

진입

서릿발 같은 살기가 집무실을 할퀴고 사위의 여백을 불꽃처럼 장악했다.

최대수는 오랜만에 느껴 보는 기세에 기쁜 듯 웃음 지었다.

옛 전장에서의 그리운 감각이다.

흥분으로 콸콸 솟구치는 아드레날린과 도파민.

10년간 느끼기 어려웠던, 죽음에 성큼 다가간 압박.

그 짜릿한 쾌감에 심장이 고동친다.

"오랜만이군, 민시우."

"그러게, 최대수."

서로를 노려보는 눈빛에서 상대에 대한 적의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숨 막힐 듯한 정적이 고요한 빙벽처럼 둘 사이를 가른다.

차갑고, 서늘하다.

잔잔한 격의 흐름이 날카롭게 공기를 찌른다.

최대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는 손가락을 하나씩 헤아리더니 짐짓 비웃음을 머금었다.

"어디 보자. 사망한 지 햇수로 10, 11년 정도 됐나? 아니지. 돌아왔으니 행방불명이라 해야겠네."

"고마운걸. 대통령 표 조작하는데 분주했을 분이 그딴 것도 세어 주고."

시우의 이죽거림에 최대수는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얼굴에 새겨진 수많은 흉터가 뻘겋게 물든다.

"크크크. 그런데 희한하군. 분명 '이 세상'에 없다고 추적 헌터들이 그랬었는데 말이야. 그 자식들이 거짓말을 한 건가, 아니면ㅡ."

"내가 '저세상'에 있었기 때문인가 보지."

"그렇군, 저세상이라. 그럼 그곳에서 꼬랑지 처박고 쭉 살지 여긴 어떻게 다시 왔을까."

최대수는 손끝으로 자신의 집무실 바닥을 쿡쿡 가리키며 물었다.

"글쎄. 내가 돌아오는데 네 허락을 받아야 하나?"

"······그건 아니지. 저승에서 살아올 줄 알았으면 환영식이라도 준비할 걸 그랬군."

"고맙지만 사양하지. 내가 개밥은 먹지 않아서."

침묵이 흘렀다.

피아노 줄처럼 팽팽히 당겨진 긴장감이 곧 끊어질 듯했다.

누구 하나가 약간의 마력을 움직이기만 해도 전투가 시작될 것 같은 아슬함.

숨 막히는 적막이 그들 사이에서 찐득하니 흘러내렸다.

뚜벅.

"그나저나."

한 걸음 디딘 구둣발. 굵고 허스키한 음성.

최대수가 먼저 적막을 깨트렸다.

"넌 얼굴에 나이가 안 묻었군. 10년이 지났다는 게 믿기질 않을 정도야. 능력으로 다른 사람을 빨아먹고 다녀서 그런가."

"글쎄. 네 좆같은 상판대기를 안 봐서 그런 것 같은데."

시우의 차가운 이죽거림.

"크흐흐흐. 좋군, 아주 좋아. 그 망할 주둥아리는 여전하구먼. 따분하던 차에 잘 됐어."

최대수는 함박웃음을 보이며 자신의 마력을 끌어 올렸다.

콰드드드득!

뿜어진 마력이 전신을 활주하며 심장 박동과 혈류량을 증폭시킨다.

발을 딛고 있던 지반이 아이스크림처럼 으깨지고, 그 기세에 공간이 팽창하듯 어그러진다.

당대 최고의 괴물, 전투의 신이라 불린 자가 자신의 격 중 일부를 해방한 것이다.

시우 역시 가만히 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단전에서 뽑아 올린 마력이 순식간에 근육 곳곳에 퍼지며 새파란 질주를 했다.

아직 50% 정도밖에 회복되지 않은 컨디션이지만, 시우는 전투 헌터로서의 본능을 아끼지 않았다.

쩌적··· 쩌저저적···!!

막대한 두 격이 서로 격돌한다.

허공에 보이지 않는 기류가 부딪히고 마력의 강세가 둘 사이를 에워싼다.

공간에 균열이 가듯, 시우와 최대수 사이에 형성된 보이지 않는 파열이 대기를 짓이겼다.

둘 다 맹수의 이빨을 들이밀듯 한 치의 양보도 없다.

"크하하핫! 미친개 어디 안 갔구만!"

"지랄. 대가리 빠개 줄까?"

"할 수 있다면! 크흐흐흐. 대신 네 모가지도 비틀어 뽑아 광화문에 걸어 주지!"

그렇게 두 막대한 격의 파동이 부딪히려는 순간,

"가, 각하!!"

"움직이지 마!!"

"괜찮으십니까?!"

일런의 소란이 몰려들며 열댓이 넘는 사람들이 총과 헌터 전용 무기를 들고 시우를 에워쌌다.

과연, 이라고 해야 하나. 역시, 라고 해야 하나.

그 뻔한 움직임에 시우는 한숨이 나왔다.

요즘 전투 헌터의 기량이 이만큼이나 떨어졌단 말인가.

나 같으면 먼저 힘줄을 다 끊어 놓고 혀를 깨물지 못하게 입 안에 수건을 욱여넣었을 텐데.

헌터 싸움에 경고?

"병신들 놀고 있네."

"뭐??"

쿠ㅡㅡ웅!

흐릿하던 관념이 구체적인 틀을 갖추며 술식을 전개하고, 마력이 그 흐름과 기호를 따라 알맞게 채워진다.

시우 주위로 원과 직선, 삼각형, 사각형, 별 모양의 도형이 수백 개 이상 생겨나 광채를 흩부린다.

"이, 이게 무슨ㅡ!!"

"제압ㅡ!"

그러나 경호원의 문장이 채 완성되기도 전,

크허어······.

허으윽······.

그들은 마른 나뭇잎처럼 생기를 잃고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비유가 아닌 문자 그대로 몸이 말라 가는 상황.

시우가 술식을 전개하고 고작 1초 만에 열댓의 인원이 전부 나뒹굴게 된 것이다.

최대수는 그 모습에 혀를 찼다.

"빌어먹을, 죽이진 마라. 저래 보여도 나라 녹 먹고 사는 경호원들이야."

"요즘 헌터 수준이 바닥으로 떨어졌네. 우리 때였으면 진작 뒈졌겠는데."

"크흐흐. 요즘은 그때를 1세대라 부르지. 차원이 다르니까. 그건 그렇고 이 새끼들 때문에 흥이 식어 버렸군."

최대수는 콧잔등을 찡그렸다.

모처럼 몸이나 풀려 했던 그는 분위기가 달라지자 기세를 거뒀다.

시우 또한 마력을 해제했다.

어차피 죽이려고 온 건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그거 하나 물어보려고 직접 행차하신 건가?"

최대수는 서랍에서 시가 하나를 꺼내 헤드 끝을 잘라 내고 불을 붙였다.

시가의 끝이 분홍색으로 타들어 가며 재로 바뀌었다.

시가의 바닐라와 견과류 향이 바람을 타고 시우에게로 향했다.

"다시 제대로 묻지."

"······"

"민준이, 네가 시켜서 죽였냐."

최대수는 시가를 힘껏 빨아들였다.

타오르는 연기가 그의 눈빛을 미묘하게 가렸다.

"아니, 내가시키지 않았다."

시우는 그에게서 나오는 마력을 한참 전부터 지켜보고 있었다.

마력 파장이 은은하게 물결치며 같은 형상을 유지했다.

거짓말은··· 아니군.

물론 최대수란 인간을 100% 믿는 건 아니었지만, 최소한 그가 시킨 것은 아니란 게 분명해졌다.

"그래. 아니라면 됐다."

시우는 발을 돌려 〈베스티아〉가 모이는 회담 장소로 가려 했다.

너무 늦으면 다른 일행들이 곤란할 터이니.

그런데 최대수의 목소리가 그의 발을 붙잡았다.

"크흐흐. 민시우, 나는 이제 예전의 내가 아니다. 어디서 굴러먹다 왔는진 모르겠지만, 10년 전의 나를 생각하면 안 될 거다."

"별로 궁금하진 않지만··· 뭐가 달라졌지?"

시우는 정말 관심 없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너나 도경후와는 달리 나는 SS급이니까. 대한민국 최고의 하이 랭커라고. '벽'을 뛰어넘었다 이거야."

"내가 대한민국 1위다. 네가 아니라."

"······."

"······그래. 너 많이 해 먹어라."

시우는 기도 안 찬다는 듯이 대꾸했다.

그리고 몸을 돌려 밖으로 향했다.

최대수를 찾아온 이유는 그가 진범일 가능성은 낮지만 확인해 보기 위함이었다.

또한 시우의 존재를 드러냄으로써 최대수의 시선을 자신에게 돌리기 위한 것도 포함.

아마 시준이에게 더는 허튼짓하지 못할 것이다.

이제는 블랙맘바라는 녀석한테 물어볼 차례.

"민시우."

이번에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뒤통수가 얼얼해질 정도로 느껴지는 분노.

"난 아직도 이 '잃어버린 눈'을 기억하고 있다."

최대수는 자신의 가죽 안대를 툭툭 쳤다.

마치 시우를 향한 열등감, 분노, 질투 같은 것들이 그 안에서 응어리진 것 같았다.

그 문장을 뒤로하고, 시우는 말없이 창문을 넘어 사라졌다.

그리고

"가, 각하! 대체 무슨일이···!"

수십의 군인들이 총을 들고 다급히 들어왔다.

그들은 반파된 집무실과 쓰러져 있는 수십의 경호원들을 보며 당황한 얼굴을 했다.

최대수는 남은 시가를 빨아들인 뒤 비웃듯 내뱉었다.

"전우의 방문이다. 괜찮으니 뒤처리나 하도록."

1세대 시절 칼날처럼 날카롭던 민시우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각이 다 닳아 손톱도 못 깎을 만큼 무뎌진 놈이 나타났다.

가장 우려했던 상황이건만.

불행 중 다행으로 그의 기세는 꺾여 있었다.

솔직히 얼굴을 보자마자 주먹이라도 먼저 날아올 줄 알았다.

그런데 광견이 대화를 나누다니.

'큭큭큭, 이거 재밌게 됐군. 나중에 자리를 마련할 테니 원 없이 처맞아 보라고. 대한민국에 내 이름 석 자를 박아 주지.'

최대수는 확신에 찬 표정으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

***

시우는 작전이 시작되기 전에 돌아왔다.

마력을 다리에 때려 박고 뛴 덕분에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도착하고 보니 적귀, 볼크, 추하민, 황정구는 각기 다른 자세로 마력을 운용하며 몸을 풀고 있었다.

시우의 모습을 본 그들은 눈치껏 일어나 들어갈 태세를 했다.

"그럼 계획대로 들어간다. 출입구는 총 다섯. 각자 하나씩 맡아서 들어가고, 감당하기 어려운 상대가 나타나거나 '블랙맘바'라는 놈이 나타나면 나한테 무전 치도록. 이상."

간단한 임무 지침을 내리고,

시우의 손짓에 그들은 각자 맡은 곳으로 몸을 움직였다.

우두둑.

시우는 자신의 목을 꺾었다.

뻐근함이 조금 풀렸다.

조금 전 최대수와 마주하며 곳곳에 흘렸던 마력들이 아직도 몸속에서 곤두서 있는 게 느껴졌다.

호흡과 함께 그것들을 가지런히 순환시켰다.

선선한 감각이 신경 하나하나를 타고 몸을 각성시키는 듯했다.

시우는 터벅터벅 걸어 숨겨진 문 앞에 섰다.

적귀 영감 말에 따르면 이 장소는 일종의 지하 동굴이었고, 회담은 내부 공동에서 진행된다고 했다.

"오랜만에 스위치 좀 넣을까."

봐줄 필요도 없을뿐더러 일말의 동정도 가지 않는 놈들이다.

저들의 비즈니스가 사람 죽이는 일인 것처럼,

시우의 비즈니스는 저런 놈들을 죽이는 것이다.

끼이익.

문을 열고 걸음을 옮겼다.

미약한 불빛이 듬성듬성 이어진 널따란 동굴.

저 멀리서 인기척이 느껴진다.

마력을 흩뿌리지 않아도 그들이 거친 살기를 내뿜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시우는 망설이지 않고 달렸다.

그의 몸놀림은 섬전처럼 동굴을 가로질렀다.

회담의 경비를 맡고 있었을 말단 킬러들은 입구 쪽에서 바람이 들어온다는 걸 깨달았고,

고개를 돌림과 동시에ㅡ

빠가악!!

시우의 발길질에 한 놈의 머리가 수박처럼 쪼개졌다.

두 번째 놈은 무언가 움직이고 있다는 걸 뒤늦게 알아차렸지만,

"어···!!"

콰지익!!

뒤돌려차기에 목뼈가 과자처럼 바스러졌다.

시우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다시 내달렸다.

그가 지나간 곳엔 아득한 파열음과 어리숙한 범죄자들의 단말마가 바람처럼 남겨졌다.

가장 경비가 삼엄하다는 제3 입구.

때문에 시우가 들어가겠다고 자청한 곳이었다.

이 탁하고 어두운 곳을 지나면 베스티아 놈들이 나올 터.

그러나 순간,

콰아앙!!

바닥이 어그러지며 돌 부스러기가 튀어 올랐다.

하지만 이미 드넓게 마력을 펼치고 있던 시우는 진작 걸음을 멈춰 세웠다.

저 멀리서부터 광대한 마력이 땅속을 헤집고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웬 쥐새끼가 들어왔군."

거대한 체형의 남자가 어둠 속에서 이를 드러냈다.

온몸을 까만 갑옷으로 둘러싼 남자는 거친 마력을 풀풀 피워 댔다.

방금까지 보던 조무래기와는 사뭇 다른 위압이다.

"사지를 결박하고 내장을 꺼내 줄까, 아니면 전신의 뼈를 다 가루로 만들어 줄까."

남자의 비웃음이 미약한 등불에 엇비친다.

시우는 작은 한숨을 내쉬며 손가락을 까딱였다.

"그냥 와, 좆밥아."

***

중앙 공동의 회의장.

공동 천장에 달린 초록색 마력 램프가 서늘한 분위기를 비추고 있다.

거대한 원형 테이블과 그것을 둘러싼 열 개의 의자.

그리고 자리에 앉은 여덟 명의 사람들.

그들은 각자 로브를 뒤집어쓴 채로 느긋하게 회의가 진행되길 기다리고 있었다.

"히히, 모임은 다 참석했네. 설마하니 지난번처럼 다섯 명만 나오는 줄 알았거든."

울버린이 작고 앙증맞은 몸을 움직이며 입을 열었다.

"멍청, 멍청아. 적귀랑 볼크가 없잖아."

"어차피 배신한 놈들이다. 인원에 넣는 것조차 불결하지."

각각 호크아이와 퓨마의 말.

"그런데 그들은 왜 배신한 거래? 볼크도 열심이었고 적귀도 중견 간부였잖아. 단장 빼고는 터치하는 사람도 없었는데 말야."

호저는 턱을 괴더니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그만."

묵직하고 걸걸한 음성이 다른 대화를 내리누른다.

사수귀 중 하나인 티그르였다.

"배신자에 대한 언급은 금한다."

그의 말에 조잘조잘 떠들던 이들이 입을 꾹 다물었다.

굳이 사수귀의 비위를 상하게 해서 좋을 게 없었으니 말이다.

끼ㅡ익

그때 공동 안쪽의 문이 열리며 단장인 크로우가 들어왔다.

크로우는 새까만 로브를 펄럭이며 테이블을 향해 뚜벅뚜벅 걸음을 옮겼다.

일순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모였다.

"오랜만이네, 다들."

크로우는 미성의 목소리로 반갑게 인사했다.

등장하는 것만으로도 공기의 흐름이 뒤바뀌는 듯했다.

부드러운 목소리와는 대조적으로 동공 전체에 느껴지는 그의 압박감.

크로우는 자리에 앉더니 빈 의자 두 개에서 시선을 멈췄다.

적귀와 볼크.

조직을 위해 많은 피를 묻혔던 그들이 갑자기 배신한 이유가 무엇일까.

그 끝은 죽음뿐이란 것을 알 터인데.

단장을 바라보는 사수귀들의 표정에서 은근한 분노가 느껴진다.

티그르, 그리즐리, 앨리게이터, 블랙맘바.

크로우는 자조 섞인 웃음을 지었다.

"자, 배신한 것들의 목을 누가 따올지 가위바위보나 할까?"

해맑고 티 없는 목소리.

그런데 그 음성을 비집고,

퉁! 또르르륵···.

무언가가 원형 테이블 위로 떨어졌다.

"이건 뭐ㅡ."

파아아아앙!!

강렬한 빛살이 공동을 흠뻑 물들였다.

〈28화〉

베스티아

그러한 밝은 광채 사이로 수백여 개의 날카로운 형상이 총탄처럼 튀어 나간다.

마정석을 가공해 만든 일종의 마력 수류탄.

HMCS만 독자적으로 쓸 수 있는 가공 무기였다.

콰과과과곽!

그리고 이름만큼이나 위력 또한 만만치 않았다.

반사적으로 몸을 피하거나 마력을 둘러쓴 이들이 있는 반면, 속수무책으로 몸을 노출한 자들도 있었다.

호저는 눈알을 뚫고 간 파편에 즉사.

퓨마는 팔로 막은 탓에 큰 부상을 입었다.

"빌어먹을!"

"우선 마력으로 몸을 감싸!"

뒤늦게 다들 방비하려는 찰나,

투콰아앙!!

어디선가 날아온 연이은 공격에 티그르와 울버린의 몸이 날아갔다.

큰 위력은 아니었어도 혼동을 주기엔 충분한 타격.

"못 봐주겠군."

그때 사수귀 중 하나인 그리즐리가 마력을 부풀렸다.

곰처럼 거대한 몸뚱어리에서 마법 술식이 배열되며 스킬이 형성된다.

쩌적!

동굴 표면의 돌덩이들이 뭉텅이로 떨어져 나오더니 침입자들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각이 진 돌은 그냥 맞기만 해도 꽤 위력적으로 생겼다.

게다가 마력까지 둘러쓴 것들이기에 직격으로 맞는다면 단순히 아프다는 것으로 끝나진 않을 터.

"흐압!"

하지만 누군가의 기합과 함께 돌들은 갈 방향을 잃고 사방에 아무렇게나 꽂혔다.

그리즐리는 사나운 얼굴을 찌푸리며 이를 갈았다.

스킬 자체는 별 볼 일 없어도 위력까지 낮춰 볼 기술은 아니었다.

그런 스킬의 궤도를 전부 틀어 버릴 정도의 [염동] 능력이라면···.

"황정구인가."

HMCS 서울지부의 한 축을 담당하는 A급 전투 헌터.

스킬이 아닌 [염동]이라는 기술 하나로 수많은 범죄자를 소탕한 노련한 사냥꾼.

황정구는 완전 무장한 자세로 놈들을 노려봤다.

양손에는 팔뚝 길이의 헌터 나이프까지 든 채로 말이다.

"흐햐햐햣! 저게 소문으로 듣던 황정구란 말이지!"

사수귀인 앨리게이터가 기쁜 듯 손톱을 세웠다.

"비켜, 악어 새꺄!"

그때 티그르가 로브를 벗어던지며 인상을 구긴 채 다가왔다.

짧은 갈색 머리의 날카로운 인상.

"흐햐! 황정구한테 처맞고 날아갔었냐?!"

앨리게이터의 빈정거림에 티그르는 죽일 듯이 그를 노려보았다.

"···황정구가 아니라 그 옆에 있는 자식이다!"

"흐햐햐? 옆에?"

"멍청, 멍청아! 황정구 옆에 한 명 더 있잖아!"

어두침침한 탓에 앨리게이터가 못 알아보자 호크아이가 타박하듯 말했다.

"과연. 황정구랑 비슷한 격이 느껴진다."

그리즐리의 동의가 이어지고.

티그르는 단전에서 마력을 뽑아 올리며 단장을 바라봤다.

"다 죽여도 되지?"

"음~ 그래야 하지 않을까."

크로우의 웃음기 섞인 대답.

베스티아의 핵심 전력들이 침입자를 향해 공격을 개시했다.

***

황정구는 공동 회의장에 제일 먼저 도착했다.

그가 지나왔던 길에 경비가 별로 없던 것도 있지만, 오랜만에 전력을 발휘한 덕분이기도 했다.

장비를 통해 문 너머를 분석한 결과 이미 꽤 많은 인원이 모여 있었다.

혼자서는 감당하기 어렵다.

같이 있던 적귀나 볼크만 하더라도 꽤 강한 편임을 알 수 있었는데, 그들보다 강하다는 사수귀는 하나하나가 괴물일 터.

그는 우선 인원이 모이기를 기다렸다.

'한 명 정도 더 오면 좋을 텐데. 어그로가 끌리는 볼크나 추하민으로.'

적귀 영감은 강하긴 하지만 황정구와 포지션이 비슷한 서포터 역할이라 같이 들어가긴 애매했다.

민시우는 좋지만···.

'선배님 옆에서 내가 보조를 맞출 수 있을까.'

이런 걱정이 먼저 들었다.

게다가 민시우가 들어간 입구는 다른 곳보다 세 배는 더 기다란 곳이라고 한다.

아마 다른 이들보다는 더 늦게 도착할 듯싶었다.

그러던 찰나 황정구의 뒤에서 누군가 인기척을 냈다.

황정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추하민.

[백사자 길드]의 아수라.

일대일로 붙으면 자신조차 이길 수 있을지 모르는 전투의 귀재.

"다른 사람들은 아직 안 왔나?"

추하민의 물음에 황정구는 고개를 저었다.

"사조님은 괜찮으실 테고. 다음 계획은 뭐야?"

"일단 우리끼리라도 들어가려 하는데··· 자네 생각은 어때?"

수상함을 느끼고 놈들이 대응하기 전, 지금 같은 상황에서 적진을 휘저어야 효과가 있다.

헌터 싸움은 1초의 방심으로도 많은 것들이 달라지기 마런이다.

베스티아는 개개인이 너무 강한 탓에 뭉쳐지지 않는 눈송이와 같은 조직.

약간의 힘만 가해도 와해시킬 수 있다.

황정구는 자신의 능력이라면 시우가 오기 전까지 충분히 판을 흔들고 놈들을 잡아 놓을 수 있으리라 믿었다.

"큭큭큭."

추하민은 황정구 말에 숨죽여 웃었다.

"나와 같은 생각이군. 우리끼리 먼저 하지."

상대의 긍정에 작전은 곧바로 진행되었다.

황정구는 군용 백팩에 넣어 온 마력 수류탄을 꺼냈다.

사실 이런 소규모 인원을 상대로 하는 무기는 아니다.

대테러 진압 같은 용도에 쓰이는 마석공학의 정수.

그러나 놈들은 테러 단체와 맞먹는 힘을 가지고 있다.

마음 같아선 두세 개 정도 터뜨리고 싶지만, 이 한 개도 팀장이라는 권한 덕분에 가지고 나온 것.

황정구는 자신의 주특기인 [염동]을 사용해 살짝 열린 틈 사이로 마력 수류탄을 이동시켰다.

정확히 테이블 한가운데서 터지는 섬광과 공격용 마력.

그들은 곧장 문을 박차고 들어가 눈에 띄는 적들을 공격했다.

그 타격에 두 명의 적이 날아갔다.

'젠장, 꼴랑 하나 죽었군.'

황정구는 테이블을 보고 혀를 찼다.

폭탄 하나면 어지간한 각성 범죄자 열댓 명은 중상이나 사망에 이르기 마련이다.

그런데 놈들은 대부분 가벼운 경상에 그치고 말았다.

"흐햐햐 먼저 잡는 놈이 임자!"

"이 시발 악어 새끼가!"

앨리게이터가 먼저 발을 박찼고, 이어서 티그르가 뒤따르듯 움직였다.

"지하에서 노는 쥐새끼들이 HMCS 상대로 미쳤군."

황정구는 자신의 품에서 8개의 쇠구슬을 꺼냈다.

[염동]으로 각기 다르게 쇄도하는 구슬을 필두로, 황정구는 헌터 나이프를 든 채 앨리게이터와 맞섰다.

카아앙!

나이프와 두꺼운 손톱이 맞물리며 격한 마찰음이 울린다.

황정구는 쇠구슬을 뒤에 있는 퓨마에게 날렸다.

저 중에서 가장 부상이 심한 놈처럼 보였기 때문.

"감히 나를 뭐로 보고!!"

퓨마는 허리춤에 있던 팔시온을 꺼내 쇄도하는 구슬을 쳐냈다.

순식간에 세 개의 구슬이 목표를 잃었다.

그러나 그는 반격까지 할 수 없었다. [염동]이 어찌나 강한지, 손끝에 전해지는 묵직함이 생각 이상이었다.

"큭큭. 내 상대는 너인가."

추하민은 전신에 흐르는 마력을 피부에 덧씌웠다.

문자의 배열 속에 붉은 마법진이 복합적 형상을 구체화시키고,

[아수라 : 금강난무]

무형의 갑주가 점차 드러나더니 곧 형체를 띠었다.

시우의 가르침 덕에 더욱 견고해진 금강난무.

추하민은 자신을 향해 맹렬히 달려오는 티그르에게 주먹을 휘둘렀다.

파아아아앙!

가히 무술의 경지에 다다른 권술가가 뻗은 주먹처럼, 추하민의 주먹은 소리보다 빨리 적의 가슴팍에 꽂혔다.

"크아아아아악!!"

그러나 티그르는 온몸으로 있는 힘껏 마력을 내뿜더니 그 주먹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아니, 충격을 흡수했다고 해야 하나.

"과연! 꽤 괜찮은 공격이군!"

티그르는 핏줄이 불거진 목을 천천히 돌리며 웃었다.

"···사수귀는 다르다 이건가."

"히히. 당연한 소리를 하네."

그때 추하민 곁에서 들리는 앳된 목소리.

흠칫하며 가드를 올렸는데,

투콰아아앙!

그보다 먼저 상대의 공격이 추하민의 옆구리를 가격했다.

뻐근한 느낌이 엄습한다.

추하민은 본능적으로 재빨리 물러났다.

"뭐냐, 울버린. 내 먹이에 손대지 마라."

"그렇지만 단장이 얼른 끝내라고 하는걸. 히히."

그녀가 들고 있는 건 본인보다도 커다란 워 해머.

금강난무를 둘렀음에도 옆구리에 시큰함이 느껴질 정도의 충격.

간단히 끝날 싸움 같지는 않다.

한편, 황정구는 나이프 두 개를 [염동]으로 띄워 총 네 개의 나이프로 앨리게이터와 맞섰다.

"흐햐햐햐! 내 손톱을 막으려면 네 개로도 벅찰 텐데!"

다부진 떡대의 앨리게이터가 미친듯이 팔을 휘두른다.

그때마다 황정구의 나이프에선 금속 파열음과 불꽃이 튀었다.

단 한 순간의 방심이 죽음으로 직결될 터였다.

"거, 괴물 새끼가 말이 많네!"

앨리게이터의 팔이 크게 돌자 황정구는 틈을 노려 [염동]을 가득 실은 나이프를 쏘아 던졌다.

채앵!

그러나 [염동]으로 날린 나이프는 무언가에 막혀 허무하게 공중을 빙글빙글 돌았다.

"멍청 멍청아! 보면서 뛰어들어야지!"

호크아이가 저 멀리서 잔소리처럼 종알댔다.

그녀의 손에는 기다란 활이 들려있었다.

"흐햐햣! 병아리가 도움이 될 때도 있군."

"후우··· 2 대 1은 좀 비겁하지 않냐."

사냥감을 유인해 가까스로 치명상을 유도했는데 허무하게 막혔다.

이런 기회는 다시 오기 힘든데.

"흐햐햐햐! 그리즐리와 블랙맘바가 끼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사해라! 사수귀가 누구를 상대로 함께 덤빈 역사는 없거든!"

"그거참, 다행이네!"

황정구는 단전에서 마력을 쏟아 냈다.

시간을 끌수록 불리해지는 건 자신과 추하민이었다.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

타다닥!

곧이어 공중에서 내리꽂듯이 두 나이프를 수직으로 휘두르는 황정구.

앨리게이터의 날카로운 손톱이 그 속격을 막아내고,

"멍청 멍청이!"

호크아이의 화살이 마력을 머금은 채 공기를 가른다.

피이잉ㅡ

황정구의 허벅지를 뜯어먹을 것 같은 화살.

"어??"

그러나 그 공격은 웬 손에 가로막혔다.

"흐햐햣. 이거 이거 새끼 늑대가 나타났구만."

"뭐래, 씨발."

회색 늑대, 셰리 볼크가 자신의 옛 동료들을 보며 이를 드러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