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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은 십 년 동안 하나도 안 변했네."

민시준은 혼자만 늙어 버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물론 '늙었다'라는 표현보다는 어른이 되었다는 게 맞지만.

그러나 시우는 옛날과 비교해 하나도 변한 게 없었다.

방부제 외모라는 게 이런 걸 뜻하는 것인가. 이제는 오히려 시우가 동생으로 보일 정도다.

"십 년이 아니라 백 년이야."

"혹시 불로불사··· 뭐 그런 거 아니지?"

"퍽이나. 제자들 때문에 늙어 죽겠다."

사실 힐러들은 생명 에너지를 다루는 만큼 노화가 더디다.

〈신성 아가페 종단〉의 성녀 아리아는 벌써 십오 년 가까이 한결같은 외모를 고수할 정도.

게다가 시우 역시 손에 꼽힐 정도로 강한 힐 능력을 갖춘 헌터였으니.

노화가 더디다 못해 기어간다고 표현해도 무리가 아니다.

시우는 픽 웃으며 동생이 사 온 옷을 훑어봤다.

이제는 세계적인 부자가 되어 버린 민시준에게 옷 따위는 넘쳐났지만, 문제는 사이즈였다.

조금 더 다부지고, 키도 크고, 탄탄한 몸매인 시우에게 동생의 옷은 너무 타이트했다.

따라서 민시준은 다른 비서와 동행해 시우에게 필요할 것 같은 옷과 생활용품 따위를 한가득 사 왔다.

가격 따위는 생각하지도 않고 가장 좋아 보이는 옷들을 백화점에서 긁어 오다시피 한 것이다.

"이, 이만큼을 사는 겁니까?"라고 묻는 비서에게 "확실히 부족하겠죠?"라며 옷을 더 골라 담은 민시준.

시준에게 형은 부모님 대신이었다.

일찍 돌아가신 부모님을 대신해 시준을 업어 키운 형.

심지어 공부를 잘했던 형은 고등학교마저 중퇴하고 바로 헌터의 삶으로 뛰어들었다.

하나밖에 없는 동생을 먹여 살리기 위함이었다.

더불어 집에 쌓인 빚을 갚기 위함이기도 했고.

민시준은 과거 형의 뒷모습이 떠올라 울컥, 목구멍을 비집고 뭔가가 나오는 것을 느꼈다.

자신의 스승이자 부모와 같은 형이 사라졌을 때, 그가 느낀 감정은 상실감 그 이상이었다.

'이제부터 형은 내가 지킬 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류지환이 됐건 최대수가 됐건 반드시 지켜 낸다.'

그의 머릿속에서 몇 사람의 얼굴이 번개처럼 스쳐 지났다.

형의 복귀를 달가워하지 않을 놈들.

옷을 대충 입은 시우가 거울을 보더니 말을 건다.

"너 혹시 HMCS에 연줄 좀 있냐?"

"HMCS? 거기는 갑자기 왜?"

어젯밤 시우는 십 년간 무엇이 변했는지를 컴퓨터로 대강 훑어봤다.

물론 디테일하게 다 살필 순 없었지만, 대강 어떤 흐름이 있었는지는 파악할 수 있었다.

제4계 마왕의 패배.

당시 주축이 되었던 헌터들의 승승장구.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1세대 헌터.

1.5세대를 이은 2세대 S급의 출현.

7명의 S급 헌터가 세운 7개의 길드.

최대수의 대선 출마.

「검색어 : 헌터 살인 사건」

그러다 우연히 발견한 기관.

〈HMCS(헌터 특수 수사대)〉.

경찰력으로는 수사하기 어렵거나, 범죄의 질이 너무 나쁜 비각성 범죄자, 그리고 각성한 모든 범죄자에 대한 수사권 및 체포권을 가진 집단.

모든 나라마다 하나씩 존재하는 기구이며, 국가에 속한 기관이 아닌 별도의 국제기구로 분류된다.

쉽게 말해 헌터 범죄의 최전선에서 뛰는 기관.

"왜기는. 들어가게."

자신의 제자였던 정민준.

그를 지켜 주진 못했지만, 적어도 죽인 놈의 낯짝 정도는 직접 봐야 직성이 풀릴 테니까.

"그곳에 끈이 없는 건 아니지만··· 솔직히 거기는 다른 사람의 입김이 더 강한 곳이라서. 이예지 헌터라고, 같은 S급인데 2세대 헌터야. 현 [서리혼 길드] 수장이기도 하고."

이예지라.

시우는 기억을 더듬었다.

어제 인터넷을 하면서 얼핏 얼굴을 본 것 같다.

이쁘장하게 생긴 여우 인상이었지 아마.

별명, 차가운 나이팅게일.

봉사도 많이 하고, HMCS를 통해 헌터 범죄자를 척결하거나, 길드에서 기부도 많이 하는 편이어서 대중들에게 인기도 좋다.

그런데 워낙 도도한 이미지 때문에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사람은 아니다.

"내가 추천서는 써 줄 수 있어. 애초에 보수가 적어 헌터들이 기를 쓰고 들어가려 하는 곳은 아니지만··· 절차가 복잡한 것보단 낫지."

"그래. 추천서든 뭐든 써 줘 봐. 어차피 낙하산인데 끗발이 있는 빽이면 더 좋지."

시우는 속 모를 미소를 지었다.

뭔가 꿍꿍이가 있거나 안 좋은 생각을 할 때 흔히 보이는 미소였다.

"형 혹시 조사가 필요한 거면 차라리 [제국]에 있는 정보팀에게 부탁해 볼게. 괜히 그곳에 들어갔다가 위험해지면 어떡하려고?"

민시준은 HMCS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누구를 상대하는지 대강 들은 바가 있다.

헌터 등록을 하지 않은 각성자들은 대개 범죄의 유혹을 벗어나지 못하고 어둠에서 살게 된다.

S급 헌터인 이예지마저도 죽을뻔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을 정도니, 그 위험도란 상상 이상의 것.

그러나 시우는 단순히 정보를 얻으려 HMCS에 발을 담그려는 게 아니었다.

수사권, 기소권을 비롯한 어마어마한 권력들.

"아서라. 난 내 일 남한테 못 맡겨."

"형, 헌터가 하는 건 '전투'지만, 걔들이 하는 건 '살인'이야."

"내가 지는 거 봤어?"

못 봤다. 그래서 더 두렵다.

십 년이란 시간은 결코 짧은 게 아니었기에.

과연 형의 전투 감각이 지금 시대에도 통용이 될 것인가.

"알았어. 그리고 이게 오늘 신문에 나온 최대수야."

시우는 신문을 받아들었다. 굵은 헤드라인이 눈에 선하게 들어온다.

"대통령 최대수라."

시우는 그에 대한 옛 기억을 떠올렸다.

190이 넘는 키에 거대한 근육질을 가진 최고의 전투형 헌터.

금강역사라는 별명답게 몬스터가 나오는 지역을 초토화하는 어마어마한 전투력.

투신 최대수.

그랬던 그가 지금은 대통령이 되었다.

심지어,

「대한민국 헌터 랭킹 1 위, 유일한 SS급 헌터」라는 타이틀을 얻은 채 말이다.

"재밌네."

"···응?"

"대통령이건 뭐건 나랑은 상관없어. 내 일에 방해만 되지 않으면."

"아니, 생각을 해 봐. 형이 돌아온 걸 알게 되면 그 자식이 가만히 있겠어?"

"시준아."

시우는 자신의 동생을 자애롭게 바라봤다.

그의 유일한 혈육이자 마음 약한 동생.

그 때문에 지구에 돌아온 것이다.

동생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기 위해.

"그놈은 내가 안 찾아가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 거야."

쿠구구구구.

시우의 몸에서 서늘한 기운이 바늘처럼 찔러 나온다.

그 서슬푸른 살기에 민시준은 피부가 저릿저릿함을 느꼈다.

마나를 개방한 게 아니었음에도, 민시준은 시우의 격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그 새끼가 제명으로 살다 뒈지고 싶다면 말이지."

시우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간다.

조금 전과는 다른 살기 어린 미소.

'아, 생각났다.'

민시준은 형의 살기를 통해 과거 그의 별명을 떠올렸다.

헌터끼리의 싸움이 잦았던, 위계질서가 하나도 없어 약육강식의 법칙으로 굴러가던 초창기 헌터계.

변변한 길드도 없어 모든 것들이 힘의 논리로 정해지던 1세대.

그런 마귀굴에서 끔찍한 악명을 떨쳤던 이름.

광견, 미친개 시우.

민시준은 형의 눈빛에서 과거 그의 모습을 스치듯 볼 수 있었다.

***

"단장님. [제국] 민시준 헌터에게서 문서가 하나 왔습니다."

"그래? 웬일이지."

[서리혼 길드]의 수장이자 HMCS의 관리자급인 S급 헌터 이예지.

그녀는 비서가 건넨 서류 봉투를 찢어 문서를 확인했다.

눈으로 대충 문서를 훑은 이예지는 다시 볼 것도 없이 파쇄기에 문서를 밀어 넣었다.

드드드득

비서는 갈려 나가는 문서를 보며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저··· 안 좋은 내용인가요?"

"응? 아냐. 누구 좀 꽂아 달라고, 청탁이네."

"처, 청탁이요? [제국 길드] 민시준 단장님이??"

평소 을곧고 고지식한 성격의 민시준이 이런 부탁을 할 것이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그러나 이예지의 표정은 무덤덤 그 자체였으니.

"그러게. 이 사람도 그런 걸 부탁할 때가 있네."

그저 슬쩍 지나가는 웃음이 전부였다.

비서는 이예지의 반응이나, 민시준의 청탁이나 매한가지로 놀라워 말을 잇지 못했다.

"아 참. HMCS 강북지부 팀장님 오늘 스케줄 있으셨나?"

"확인해 보겠습니다. 연락 달라고 할까요?"

"네, 그렇게 해 주세요."

고개를 숙이고 나가는 비서.

이예지는 잠시 펜대를 놀리다가 피식 웃었다.

그녀처럼 무표정으로 깐깐하게 살아가는 민시준이 누군가를 부탁하다니.

"알다가도 모를 사람이라니까."

***

HMCS 강북지부 팀장 황정구는 아침부터 똥 씹은 얼굴이다.

그는 정치하곤 거리가 먼 타입이라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성격도 괴팍한 탓에 HMCS 팀원들은 그의 눈치를 살피며 조용히 일하는 척을 했다.

"이 씨발···!"

쾅!!!

결국 폭발한 그가 테이블을 내리쳤다.

쩍 하니 갈라진 나무 테이블이 바닥에 쿵 떨어진다.

삽시간에 얼어붙은 사무실 공기.

"티, 팀장님. 왜 그러세요?"

참다못한 부팀장이 다가가 묻는다.

부팀장이지만, 그는 황정구 같은 전투 헌터가 아니기에 그를 막을 힘이 없다.

"이년은 가끔 사람을 빡치게 한다니까."

"누구··· 말씀이십니까?"

"누구긴 누구야. 이예지 그 X년이지."

그 도발적인 욕에 부팀장은 기겁을 했다.

그리곤 행여 누가 들었을까 싶어 재빨리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팀장··· 아니, 정구 형! 우리 이예지 관리자님 욕은 안 하기로 했잖아. 솔직히 형 같은 성격에 팀장 소리 들으며 온전한 일자리 갖고 사는 것도 다 이예지 헌터 덕분인데."

"내가 다른 건 다 참아도 내 팀원 관리는 내가 알아서 하겠다고 했는데, 이년이 오늘 낙하산을 하나 꽂겠다잖아. 씨발 뒈질라고."

노지식은 "형이 싸우면 질 텐데."라는 말을 간신히 삼켰다.

이예지는 당당한 S급 헌터였고, 황정구는 A급 헌터였으니.

단순한 계급으로 따지자면 이예지는 사자, 황정구는 표범쯤 되지 않을까 싶다.

"아무튼, 신입 오면 존나게 갈구고 부려 먹어. 알았어? 낙하산이라고 봐주고 어쩌고 하기만 해 봐. 다 뒤집어엎어서 이예지 년 앞에다 패대기쳐 버릴 테니까."

똑똑.

"저, 팀장님. 신입이라는 사람이 왔는데요."

황정구의 낯빛이 변한다.

사냥감을 발견한 맹수의 그것처럼 독이 오른 표정이다.

그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향했다.

다들 신입이 들어온단 말을 처음 들은 덕분에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야, 비켜! 비켜!! 나와!!"

황정구는 그 무리를 제치고 앞으로 갔다.

그곳엔 오늘 들어오기로 한 신입이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건방진 자세로 서 있었다.

"이 씨발럼이. 여기가 네 집 안방이냐? 주머니에서 손 안 빼!!"

황정구가 살기 가득한 표정으로 외쳤다.

그 위압 가득한 태도에 주변에 모여 있던 팀원들도 적잖이 당황한 얼굴을 했다.

이런 기분의 황정구는 아무도 말릴 수 없기 때문.

"씨발, 낯짝도 어리게 생긴 새끼가, 낙하산 타고 왔다고 뻐기냐? 낙하산 타고 절벽 아래로 떨어트려 주랴?"

기어이 황정구는 상대의 멱살을 틀어쥐고 벽에 쾅 하고 밀쳤다.

그에게서 흘러나온 기운에 주변 공기가 무거워졌다.

A급 헌터 정도면 마나를 쓰지 않아도 격이란 게 있기 마련.

모두가 숨죽인 채 그 둘의 상황을 지켜보기만 했다.

아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이 개새끼, 표정 하나 안 바뀌는 것 좀 봐? 내가 너 낙하산이라고 못 칠 것 같아? 낙하산을 꽂든 뭘 하든, 팀원은 내 소관이라고!!!"

그 쩌렁쩌렁한 외침이 통한 것일까.

상대가 슬며시 주머니에서 손을 뺀다.

그 모습을 본 황정구가 미소를 짓는 순간, 상대의 입에서 의외의 말이 흘러나온다.

"누군가 했더니. 너 병구냐?"

"······뭐??"

황정구는 당황했다.

자신의 본명은 부팀장도 모르는 건데.

"나야."

"······."

"나라고. 손모가지 자르기 전에 손 치워."

"무슨··· 어···? 어??"

"치워, 씨발아."

낙하산의 목소리가 섬뜩한 칼날처럼 들린다.

황정구의 본능이 비명을 지른다.

아.

이 목소리.

이 얼굴.

이 눈빛.

그리고 이 압박감.

틀림없다.

광견······!!

〈9화〉

귀찮으니까 다 죽어라

황정구는 열중쉬어 자세로 고개를 푹 숙였다.

차마 고개를 들 자신이 없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그 '광견'의 멱살을 조금 전 움켜쥔 그였다.

만약 광견이 칼을 들고 있었다면···.

'아마 내 손은 애저녁에 잘려 나가서 땅바닥에 뒹굴고 있겠지.'

황정구는 손바닥에 흐르는 땀을 엉덩이에 슬쩍 닦아 냈다.

앞에 마주하고 있는 것만 해도 모든 정신력이 빠져나가는 기분이다.

무려 십 년도 더 전에 마주쳤던 '미친개 시우.'

그러나 그의 무용담이나 활동들은 말단에 불과했던 황정구의 귀에까지 빠짐없이 입력됐고.

결국, 십여 년 전.

1세대와 1.5세대 헌터들에게 건드리면 안 되는 세 명의 정상급 헌터가 탄생하게 됐다.

투신 최대수

검귀 도경후

광견 민시우

1.5세대 헌터였던 황정구는 나름 살아남고자 여러 선배들의 뒤치다꺼리를 하며 실력을 키워 왔는데, 최대수, 도경후, 민시우는 너무도 막강한 위치여서 감히 말을 건 적도 없었다.

딱 한 번.

레이드를 했을 때 황정구가 커다란 부상을 입은 적이 있었다.

심장 근처에 박힌 화살.

모두가 곧 죽을 거라 예상하고 체념하고 있던 순간.

터벅터벅.

민시우가 느긋하게 걸어왔다.

그는 화살대를 잡더니 손을 상처 부위에 대고 거침없이 화살을 뽑아 버렸다.

으직, 이상한 소리와 함께 살을 헤집고 뽑혀 나오는 화살촉.

그 미친 짓거리에 몇몇 헌터들이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피가 분수처럼 쏟아지고 곧 절명할 거라 예상했는데.

"어···?"

시우의 손에서 빛살이 튀어나오더니 황정구의 상처가 순식간에 아물었다.

파티에 있던 힐러들도 다 포기하고, 좋은 포션도 없어서 모두가 손을 놓았던 그였는데.

단 1초.

화살을 뽑고, 술식을 개방해서 치료.

그게 다였다.

황정구는 자신의 상처를 더듬었다.

화살이 박히기 전보다 상태가 좋아진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아, 그게, 저, 가, 감사···."

"이름이 뭐냐."

무뚝뚝하고 시린 목소리.

시우는 그의 눈빛만큼이나 선선한 음성으로 물었다.

"저 화, 화, 황병구입니다! 가, 감사합니다! 미, 민시우 헌터님."

시우는 황정구의 얼굴을 손으로 툭툭 쳤다.

충분히 기분 나쁠 만한 행동이었지만, 황정구는 그렇게 느끼지 않았다.

마치 귀여운 동생을 보듯 친근한 태도라 느낀 것이다.

"힘내라. 새꺄."

그러고는 거대 몬스터를 향해 귀찮다는 듯 움직였던 민시우.

황정구에게는 그 기억이 시우를 가장 가까이에서 봤던 마지막 모습이었다.

물론 시우의 전투 장면이나, 다른 헌터와의 싸움 장면도 몇 번 목격하긴 했다.

그 악귀 같은 모습이 지금의 황정구를 시우 앞에서 개처럼 벌벌 떨게 만든 것이다.

***

황정구는 허리를 반으로 접은 채 시우를 자신의 사무실로 모셔 왔다.

"병구야."

"예?? 예, 예!!!!"

한 층이 떠나가도록 울려 퍼지는 대답 소리.

"나 귀 안 먹었다."

"예!!!! 아, 아, 죄, 죄송합니다."

황정구는 허리를 90도로 꺾어서 사죄했다.

마치 폴더 폰의 그것처럼 잘 접힌 허리였다.

[이놈, 날 알아보고 나한테 절한다. 마음에 든다. 먹지 않고 살려 준다.]

지금 황정구의 개인 사무실에는 둘만 있었고, 다른 팀원들은 일하는 척 두 귀만 쫑긋 세운 채 사무실에 온 신경을 쓰는 중이었다.

'도대체 저 남자가 누구길래 천하의 황정구 팀장님이 쩔쩔매지???'

황정구는 S급 헌터인 이예지 앞에서도 고개를 쉽게 숙이지 않는 남자였다.

나름 1.5세대 헌터라는 자부심.

게다가 초창기 무법지대를 겪지 않은 2세대 헌터들이, 그의 눈에는 조금 못마땅하게 보인 탓이다.

이예지나 최성일은 그런 것에 개의치 않아 조용히 넘어갔지만, 류지환과는 큰 마찰이 일어날 뻔하기도 했을 정도.

그럼에도 꼿꼿하게 자신의 무거움을 과시했던 사람인데.

"죄, 죄송합니다!!!"

사무실에 들려오는 큰 소리에 HMCS 팀원들은 화들짝 놀랐다.

궁금해서 미칠 것만 같았다.

천하의 황정구를 말단 다루듯 하는 저 젊은 신입은 누구란 말인가.

"병구야."

"예!!! 미, 미, 미, 미, 미, 민시우 헌터님."

"그래. 내 이름 아네."

"외모가 그, 그, 그, 그때랑 하, 하, 하나도 변함이 없으셔서···."

황정구는 고개를 들어 흘끔 시우의 얼굴을 다시 확인했다.

십여 년 전, 자신의 상처를 치유해 줬던 민시우의 얼굴이 지금 눈앞에 그대로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지?? 무슨 뱀파이어야, 뭐야?!! 어떻게, 어떻게 얼굴이 그때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어!!! 세월은 나 혼자 다 처먹었나?'

분명 눈앞의 남자는 미친개 민시우가 맞았다.

이 압박감, 1세대 헌터만이 뿜어낼 수 있는 저릿저릿한 기운. 게다가 느긋하고 서슬 푸른 눈빛까지.

마치 십여 년의 세월을 거슬러 그때의 시우를 직접 대면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나저나 느닷없이 여기는 어떻게···?'

그리고 가장 중요한 사실은 민시우가 실종됐었단 사실이다.

제4계 마왕과 벌였던 첨예한 전투.

민시우와 제자들이 합심해서 싸워 겨우 이겼지만, 상대의 기술로 그는 이 '세상'에서 사라졌었다.

여기까지가 밝혀진 공식적인 전말.

"미, 민시우 헌터님."

"왜."

꿀꺽.

황정구는 입 안에 침이 바싹바싹 말라가는 것을 느꼈다.

어떻게 말해야 화를 입지 않고 공손히 물을 수 있을까.

광견의 성질을 건드려 피떡이 됐었던 예전 헌터들의 몰골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났다.

"노, 노여워하지 마시고 그저 구, 궁금해서 여쭙는 거니, 부디 역정을 내지 말아 주一."

"야."

"예, 예!"

"닥치고 그냥 말해."

시우는 혀를 쯧 하고 찼다.

무슨 솥에다가 밥 짓는 것도 아니고 답답하게 뜸이란 뜸은 죄다 들이고 있다.

그러나 시우의 핀잔을 들은 황정구는 혼돈의 상태에 빠졌다.

닥치고 말하라니??

닥치라는 것인가, 말하라는 것인가.

그렇게 우물쭈물하고 있는데 시우의 핀잔이 다시 날아든다.

"말하라고."

"아, 예, 예! 그게一 실종 상태로 알고 있는데 갑자기 나타나셔서 말입니다. 그리고 돌아오셨다는 소문도 들은 적이 없는데··· 대체 어디로 갔다가 언제 오신 겁니까?"

순진한 질문이군.

시우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착한 놈이란 건 본능적으로 알겠다.

하지만 미주알고주알 모든 일의 전황을 말해 주고 싶지는 않다.

"병구야."

"예? 예!"

"누굴 좀 찾고 있다."

"누구를··· 말씀이십니까?"

도대체 광견이라 불린 자가 찾고 있는 사람이란 누구일까.

황정구는 다른 사람이 들을세라 속삭이듯 물었다.

'모르긴 몰라도 광견이 찾을 정도면 평범한 사람은 아니겠지.'

"글쎄. 찾아봐야지."

"??"

황정구는 자신이 무슨 소리를 들은 것인지 감조차 오질 않았다.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을 무슨 수로 찾는단 말인가.

"그러니까 앞으로 네가 날 도와라."

"여, 여부가 있겠습니까! 민시우 헌터님이 명하시기만 하면 모든 부하를 동원해서라도 즉시 행하도록 하겠습니다!"

황정구는 그런 의문을 지운 채 대답부터 하고 봤다.

어차피 민시우는 오늘부로 이곳에 소속된 자였다.

싫든 좋든 앞으로 매일 보게 될 텐데, 공연히 그의 심기를 거슬러 명을 재촉하고픈 생각은 없었다.

"아, 그리고."

"네!!!"

"이 근처에 맛있는 치킨집이 어디 있냐?"

"네???"

***

"오늘부터 HMCS에 새로 들어오신 신입, 민시우 님이라고 한다. 앞으로 필요한 모든 것들을 알려 드리고, 선배로서 깍듯하게 새로운 신입을 대할 수 있도록 하자. 낙하一 아니, 이예지 헌터의 추천으로 들어오신 분이니, 공채가 아니라고 너무 질투하지 말도록."

"네······???"

팀원들은 황정구의 희한한 존대에 어리둥절했다.

물론 처음 그의 반응을 보자면 민시우란 신입은 여간 대단한 게 아닐 것이다.

어떤 관계인지, 어떤 과거가 얽혀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굳이 황정구가 말하지 않아도 아무도 저 신입을 괴롭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병구야."

"그一 제, 제가 개명해서 지금은 정구입니다."

"······."

"아닙니다! 편하신 대로 불러 주십쇼!!"

황정구가 허리를 숙였다.

팀원들은 그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뜨악했다. 그러나 그 누구도 티를 내지 않았다.

나중에 황정구가 뭐라 할지 몰랐으므로.

"여기에 데이터베이스 관리하는 애가 누구냐."

"아, 김승아라고 있습니다. 김승아!!"

"네, 네!"

갑작스러운 호출에 김승아는 자료를 보다 말고 후다닥 뛰어갔다.

"여기 신입 민시우 헌터님께서 요구하시는 자료나 필요한 정보를 즉각 즉각 찾아 드리도록 해. 다른 모든 일보다도 가장 최우선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라고 생각해라. 이예지 관리자보다도 말이야. 알았어?"

"예?? 아, 아, 알겠습니다."

김승아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황정구를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돌려 옆에 있던 민시우에게 향했다.

시우는 황정구가 뭔 말을 하든 표정 변화가 없었다.

한껏 귀찮아 아무것도 신경 쓰기 싫다는 권태감.

"따라와ㅡ 세요."

김승아는 신입에게 반말을 했다가, 살기 어린 눈빛을 한 황정구를 바라보고 높임말로 바꿨다.

자신의 자리로 간 그녀는 옆자리에 있던 의자를 끌고 와 시우가 앉을 수 있도록 해 줬다.

"뭘 찾으시는데요?"

"20년 동안 죽은 헌터들의 정보."

"네??"

"왜?"

그러고 보니 이 남자, 당연하다는 듯 반말을 하네.

하지만 김승아는 기분 나쁜 티는 내지 않았다.

저 멀리서 황정구가 눈을 부라리며 김승아를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게 너무 방대한 양이기도 하고, 자연사 같은 일반적인 사망자에 대한 정보는 저희한테 있는 게 아니라서 헌터 협회에 따로 요청을 보내야 하거든요."

"그래? 말을 정정하지. 20년 동안 '살해당한' 헌터들의 정보다."

"아! 그거라면 할 수 있겠네요. 혹시 몬스터에게 살해당한 경우도 포함인가요?"

시우는 잠시 고민했다.

모든 경우의 수를 고려할 것인가. 아니면 최대한 일반적인 경우만 확인해 볼 것인가.

몬스터를 조종하거나 몬스터를 소환하는 스킬도 있다.

혹은 몬스터의 외형을 빌릴 수 있는 스킬도 있고.

"몬스터는 빼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게이트 안에서 나오지 못해 사망 처리된 경우는 어떻게 할까요?"

"흠."

이런 식으로 하나하나 경우의 수를 상정하면 끝도 없이 늘어날 게 뻔한데.

물론 게이트 안에서도 심심치 않게 살인이 일어나고는 했다.

게이트가 닫히면 시체마저 증발하니, 증거도 남지 않아 초창기에는 수많은 헌터들이 다른 헌터들에게 살해당했었다.

물론 대부분은 합리적인 추론에 따른 거고 심증만 있는 거지만.

"쉽게 하지. HMCS에서 '살인'이라고 인정한 케이스만 보여 줘. 그리고 현재 잡히지 않은 헌터 살인자들에 대한 리스트도."

시우는 해당 리스트를 김승아의 도움으로 자신의 핸드폰에 넣었다.

정민준을 죽인 살인자가 진작에 잡혔거나, 아니면 죽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민준이가 살해당한 게 확실하다면, 그놈은 전문적인 프로일 확률이 높고, 그렇다면 과거나 근래에까지 살인을 해 왔을 것이다.

일단 시작은 이놈을 찾는 것부터다.

"팀장님. 경찰에서 S.O.S 왔는데 출동할까요?"

"무슨 일인데?"

황정구에게 급히 다가온 팀원이 스마트폰을 내밀었다.

"각성자 위주로 모인 조폭들 간의 영역 싸움이랍니다."

"그 정도는 경찰에서 해결할 수 있잖아?"

경찰에도 각성자 범죄 대응팀이 있다.

HMCS에 비해 규모나 능력이 부족할 뿐, 웬만한 대응은 충분히 할 수 있을 정도다.

"그중 하나가 케르베로스랍니다."

"제기랄, 그 제대로 미친놈들?"

〈케르베로스〉. 강남에서 새롭게 뜨는 조직 이름이다.

그런데 하는 짓이 동네 깡패와는 격이 다르다.

무기 밀매, 마약, 청부살인, 마정석 탈취, 심지어는 헌터의 인신매매 의혹도 불거지고 있다.

그냥 이빨 드러낸 개가 아니라 미친개라는 소리.

확실히 일반 경찰로는 감당키 어려운 놈들이다.

"오케이. 우리가 간다고 해. 흠! 흠! 저一 미, 민시우 헌터님. 사건 들어왔는데 혹시 시험 삼아서 견학 가 보시겠습니까?"

"그러지, 뭐."

***

쾅!

조직 〈케르베로스〉의 행동대장 '강호'는 상대 조직 〈무혈사신〉이 운영하는 나이트클럽에 쳐들어갔다.

이미 케르베로스 조직원들이 먼저 침입한 터라 바닥에는 피와 사람이 나뒹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스킬을 발동했다.

물리적 데미지를 줄여 주는 근접 전투형의 방어 스킬.

앞으로 20분 동안은 웬만한 타격에 상처 하나 나지 않을 것이다.

"이 개자식들!!"

누군가 쇠 파이프를 들고 강호를 향해 휘둘렀다.

퍼억!

"아프잖아, 이 빌어먹을 새끼야."

머리를 후려쳤는데, 강호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그저 악당처럼 소름 끼치는 미소만 지을 뿐.

"너, 케르베로스 방패··· 컥!!"

"낄낄. 내 이름이 여기까지 퍼졌구만."

강호는 상대의 목을 움켜쥐었다.

끅끅거리며 호흡을 하지 못한다.

얼굴이 빨갛다 못해 거무죽죽해진 상대를 옆으로 내팽개친다.

"하하하! 다 엎어! 오늘부터 여기는 케르베로스의 영역一!"

콰아아앙!

벽이 부서지는 것 같은 소음이 나이트클럽 내부를 울린다.

마치 폭탄이라도 터진 듯한 굉음.

싸움질하던 모두의 몸이 멈춘다.

광기의 미소를 흩뿌리며 즐거워하던 강호도 뒤를 돌았다.

이건 헌터의 짓이 아닐 것이다.

이만한 스킬을 지닌 헌터가 올 리는 없으니.

아마 군대나······."

"야."

자욱하게 피어오른 먼지 사이에서 웬 목소리가 튀어 오른다.

"너 뭐야."

강호가 눈을 찌푸리고 물었다.

상대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터벅터벅 걸음 소리가 다가온다.

이런 상황에서도 상당히 느긋해 보이는 움직임.

그는 한숨을 푹 내쉬더니 성가시다는 듯 말했다.

"귀찮으니까 그냥다 죽어라."

〈10화〉

방패와 칼

"뭐??"

강호는 자신이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이런 말을 최근에 들어 본 적이 있었던가.

그는 조직 생활을 7년간 해 왔다.

B급 헌터로 2년 정도 살았던 강호.

그러나 모든 공이 상급 헌터에게 몰리고, 자신은 늘 찬밥신세가 되자 과감히 헌터를 그만뒀다.

몇 달을 방황했던 그에게 여러 업체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다.

그중에 지금의 조직 〈케르베로스〉의 대외적 기업도 있었던 것.

한동안은 몬스터가 아닌 사람과의 싸움이 어색했다.

몬스터를 패거나 죽이는 건 합법이지만, 사람의 경우는 달랐으니까.

그러나 그것도 점차 무뎌져 갔다.

나쁜 짓도 반복하다 보면 무감각해지기 마련.

물리적 타격이 거의 먹히지 않는 강호의 능력은 곧 모든 조직에 전해지게 됐다.

사람을 수십여 명 불구로 만들고, 또 그만큼을 죽였더니 악명이 저절로 올라갔다.

덕분에 그의 조직은 날개 단 호랑이처럼 강남을 씹어 삼키기 시작했다.

몇 년 전부터는 강호에게 덤비는 사람이 아무도 없게 되었을 정도.

그는 케르베로스의 방패가 되어 두목의 곁을 바로 옆에서 지키는 행동대장이 되었다.

B급 헌터도 전투 타입이면 조직에서 충분히 먹힌다는 것을 보여 준 산증인.

그런 그에게 웬 놈이 "귀찮으니까 다 죽어라."라고 말한 것이다.

"하, 이거 미치겠네. 너 내가 누군지 모르냐?"

강호는 어두컴컴한 복도를 걸어 상대에게 다가갔다.

어깨에 잔뜩 힘이 실린 걸음걸이다.

상대의 얼굴을 확인하려 했지만, 그의 뒤에서부터 풍겨오는 흙먼지에 보이지 않았다.

벽을 통째로 부순 것 같다.

"이 시발놈이 폭탄으로 입구를 조져 놨네. 너 뭐야? 군대야? 아니면 짭새? 뭐 하는 새낀데 신성한 영업장에 들어와서 지랄이야, 지랄이!"

"아니. HMCS인데."

느긋하고 느적느적한 태도.

이 살기 가득한 공간에 혼자만 섞이지 않는다.

강호는 상대방의 여유에 오히려 독기가 올라 격한 반응을 보였다.

"HMCS? 그럼 황정구 정도는 와야 하는 거 아니냐? 너 같은 새끼는 내가 본 적이 없는데, 여기 각성자가 몇이나 있는지 모르고 온 거야? 나 B급 헌터야, B급 헌터!!"

강호는 처음 HMCS란 말에 흠칫했다.

그러나 HMCS에서 견제할 만한 사람은 황정구 외에 두셋 정도.

나머지는 전투 헌터가 아니거나, 전투 헌터여도 급이 낮은 놈들이었다.

따라서 눈앞에 있는 이 녀석은 별거 아닌 떨거지란 말씀.

이런 일련의 생각이 머릿속에 섬광처럼 스쳤다.

그러자 강호의 어깨에 자연스럽게 힘이 들어갔다.

HMCS고 나발이고 천하의 강호를 건드리면 좆 된다는 걸 보여 줄 절호의 기회.

"너 씨발, B급 전투 헌터가 얼마나 센지 모르지? 반만 뒈질지, 아예 뒈질지 여기서 정해라."

"거, 새끼 더럽게 시끄럽네."

"후자다 이거지."

시우의 말이 끝나는 순간.

강호의 주먹이 바람을 가르며 시우의 복부를 가격했다.

뻐어억!

시우의 몸이 꺾이며 뒤로 넘어졌다.

그 위에 올라탄 강호가 전투 헌터의 모든 감각을 동원해 시우의 면상과 상체를 주먹으로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하나하나에 힘이 실린 주먹이었다.

뻑! 뻐억! 빡! 빡!

사방으로 피가 튄다.

피를 본 강호의 눈이 번들거리며 자제가 되지 않는 듯 주먹이 쉬지를 않는다.

"형, 형님! 그러다 죽겠습니다!"

"허억, 허억, 허억, 이 씨발놈이! 허억, 허억!"

강호는 자신을 말린 부하 덕분에 뒤늦게 이성을 되찾을 수 있었다.

카악一 퉤!

강호는 바닥에 침을 뱉었다.

스트레스는 풀었지만 찝찝하다.

자신의 상의 슈트를 정리한 그는 다시 싸움이 있는 장소로 걸음을 옮겼다.

아직 처리해야 할 〈무혈사신〉 놈들이 많이 남아 있다.

"야."

뒤에서 들린 목소리가 그의 뒷덜미를 잡아챈다.

다 죽어 가는 목소리가 아니다.

처음과 똑같이 분명한 음성. 강호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믿기지 않았기에, 몸이 제대로 반응하지 못했다.

그곳엔 피는 묻어 있을지언정, 상처 하나 없는 남자가 서 있었다.

"다 때렸냐?"

"···너 뭐야? 좀비야??"

"이제 내 차례지?"

시우는 입 안에 고인 핏물을 바닥에 뱉었다.

입꼬리가 올라간다.

[식량아, 이 스킬 맛있다. 나쁘지 않아 보인다.]

[스킬: 전신갑주]

-등급 : B

-내용 : 스킬이 발동되면 전신을 보호하는 무형의 갑주가 형성된다. 시전자의 마나에 따라 유지시간이 달라진다. 일반적인 물리 공격은 30%, 마력 공격은 10% 만큼 방어율이 올라간다.

B급 스킬이라.

"정구야, 내 말 들리냐."

시우는 무전기 인이어를 누르며 말했다.

— 네, 들립니다!!

"얘들, 내가 다 죽여도 되지?"

그 살벌한 문장에 황정구가 잠시 말을 멈췄다.

- 법적으로는 문제없습니다. 각성 범죄자에 한해서는 HMCS가 즉결처분의 권한을 가지고 있거든요.

"알았다."

오랜만에 스위치 좀 넣어볼까.

시우는 단전에서 마나를 뽑아내 공회전시켰다.

엔진이 돌아가듯 몸에서 마나가 솟구쳐 전신을 휘감는다.

그 끝 간 데 없는 활력이 시우의 근육을 파고들며 몸을 후끈하게 덥힌다.

팔에 둘러지는 옅은 마나의 갑옷.

그러나 그 견고함이나 짜임새는 결코 쉽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으니.

웬만한 하이 랭커가 아니고서는 이런 미세한 마력 컨트롤은 불가능에 가깝다.

보통은 단전에서 뽑아낸 마나로 신체 강화하기에도 바쁘기 마련이니까.

"뭐야, 이 새끼. 소리친 것 치곤 뿜어내는 마력이 형편없는데?"

C급 정도가 되면 어렴풋이라도 상대의 마력 크기를 가늠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강호가 느낀 시우의 마력은 고작해야 D급에서 C급 사이.

아주 옅게 흘러나오는 마력이 그의 눈에는 우습기 짝이 없었다.

"큭큭큭. 귀여운 새끼. 상처가 어떻게 나았는지는 모르겠다만, 지가 갖고 있는 마나량이 얼만지, 상대가 얼마나 강한지조차 파악 못 하는 햇병아리군."

강호는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이런 멍청한 초보 헌터를 조지는 것도 기쁨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강호 자신도 선배들에게 신고식이라며 얼마나 많이 맞았던가.

"넌 내가 직접 세례 해 준다. 각오一"

"지랄하네."

시우의 주먹이 섬전처럼 뻗어 나간다.

콰아앙!

강호의 턱이 돌아가며 벽에 쿵, 소리와 함께 부딪친다.

강호는 천장과 바닥이 뒤집히며 머리와 속이 진탕 섞이는 것을 느꼈다.

'어? 어? 이게 뭐야??'

그는 물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벌려진 입에서 피가 주르륵 흘러내린다.

입 안이 칼로 쑤신 것처럼 날카로운 통증으로 가득하다.

"너 최근에 처맞은 적 없지?"

강호의 머리끄덩이가 잡혔다.

시우의 까드득, 쥔 오른손이 강호의 시야에 들어온다.

조금 전에는 물주먹처럼 보이던 게, 지금은 단단한 쇳덩이로 보이는 착각이 든다.

"묻잖아."

쇳덩이가 얼굴에 내리꽂힌다.

뻐어억!

"말을 해."

뻐어어억!!

"대답 안 해?"

빠아아악!!

"야."

버억!!!

"씨발놈이."

한대, 한대.

주먹이 꽂힐 때마다 강호의 정신이 흐릿해졌다.

단순히 꽂히는 게 아니라, 얼굴이 뜯겨 나가는 듯한 격통과 함께였다.

'나, 나, 분명 스, 스킬, 썼는··· 데.'

그는 물리 방어율과 마력 방어율을 올려 주는 자신의 주 스킬을 썼다, 확실하게.

그러나 시우의 주먹은 그런 게 높아진 것 따윈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강호의 면상을 해머처럼 후려갈겼다.

"어? 기절했네."

피가 뚝뚝 떨어지는 시우의 주먹.

그 아래 고개를 축 늘어뜨리고 몸을 움찔거리는 강호.

시우는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그러더니 강호의 얼굴에 손을 갖다 댄다.

우ㅡ웅.

순간 술식과 함께 치료 계열을 상징하는 금색 마법진이 생성됐다.

한 개의 원에 문자가 18개나 들어간 고급 기술.

뿜어지는 빛살과 함께 상처가 아물었다.

순식간이다.

[힘은 좁밥인데 치료 스킬 하나만큼은 식량이가 쵝오시다.]

"그렇긴 하지."

시우는 싱긋 웃었다.

아주 행복해 보이는 표정이다.

그리곤 주먹을 들어 다시 강호의 얼굴을 후려갈겼다.

뻐어어억!!!

"끄어어억!! 어억!! 억!!"

기절했던 강호는 갑작스러운 격통에 깨어났다.

조금 전 겪었던 일이 꿈처럼 느껴졌던 탓일까.

강호는 지금 눈앞의 상황을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마치 꿈속의 꿈 같은 느낌.

"······어??"

"그거 좀 처맞았다고 기절하면 안 되지."

다시 주먹을 들어 올리던 시우.

그는 누군가 다가오자 고개를 돌렸다.

상대편을 제압한 강호의 부하들이 제각기 무기를 들고 시우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형님!! 이 개 같은 새끼가!"

"야!! 뭐 하고 있어! 저 새끼 조져!!"

"이 씨발놈이!!"

시우는 강호의 머리끄덩이를 세차게 밀쳤다.

쿵!!

벽에 부딪힌 머리에서 거센소리가 울린다.

강호는 뒷머리에서 피를 쏟으며 다시 눈을 감았다.

[식량아. 여기 맛있는 스킬 없다. 너보다 더 맛없는 애들이다. 내 새끼손가락으로 쟤들 다 죽인다.]

그나저나 짜증이 나긴 나네.

이렇게 떼 거지로 덤비면 쪽팔리지도 않나.

"다구리 너희들이 먼저 깠으니까 비겁하다 하지 마라."

시우는 손가락 관절을 꺾었다.

뚜두둑 소리가 기분 좋게 들린다.

"내가 원딜 넣는다!"

[불꽃의 춤]

뱀처럼 흐물거리는 불꽃이 아가리를 벌리고 쏘아진다. 시우는 모기 잡듯 손바닥을 휘둘렀다.

파앙一!

파공음이 들리며 불꽃이 사라졌다.

"매, 맨손으로···??"

"야, 맨손이겠냐! 아이템이나 스킬을 썼겠지!"

연이어 화살이 날아오고, 근처까지 달려온 놈들이 무기를 휘두른다.

시우는 그 모든 공격을 피해냈다.

십수 명의 장정이 죽이려는 마음으로 펼친 공격이건만, 그 모든 공세는 종이 한 장 차이로 시우의 몸을 비켜 갔다.

"다 비켜!!"

[화살 비]

공중에서 수십 발의 화살이 시우를 향해 쏟아져 내린다.

원거리 딜러의 스킬 공격!

촤자자자작!

바닥에 내리꽂히는 화살 비가 순식간에 시우가 있던 자리를 벌집으로 만든다.

한발 한발의 위력 자체는 낮지만, 수십 발이 한 번에 꽂히게 된다면 무시 못 할 위력이 되는 법.

"하하하! 저 새끼 뒈졌다, 이제."

"누가?"

"어?"

콰직!!

[화살 비]를 썼던 조직원의 머리가 우측 90도로 꺾인다. 그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즉사했다.

"너 이 개새끼, 어떻게···?"

누군가 읊조리듯 묻는다.

어떻게 저 화살 세례 속에서 빠져나왔느냐는 질문.

시우는 이 상황에서도 그런 게 정말 궁금할 수 있는지, 어이가 없었다.

병신들 아니랄까 봐.

"뭘 어떻게야. 존나 빨리 피하면 되지."

시우의 신형이 앞으로 쏘아진다.

손바닥 아래 뼈로 때리는 장타가 놈의 턱을 후려친다.

퍼거억!!

상대의 목이 뒤로 꺾이며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난다.

무릎이 땅에 닿더니 앞으로 고꾸라진다.

머리가 제멋대로 흔들거린다.

삽시간에 두 명이 명을 달리했다.

그것도 두 번의 가벼운 공격으로.

"뭐야··· 저 새끼 어떤 새끼인데 이 지랄이야! 씨발 무혈사신 행동대장인가?!!"

"행동대장 놈 아까 죽었잖아. 무혈사신에 이딴 놈 있다는 소리 들어 본 적 없는데."

"그럼 뭐야. 무혈사신이랑 케르베로스랑 붙여놓고 남은 놈 치겠다는, 다른 조직의 수작이라도 된다는 거야?"

조직원들은 시우의 강함에 선뜻 덤비지 못하고 자기들끼리 급하게 이야기를 나눴다.

아무리 강하더라도 강호 선에서 처리가 가능할 줄 알았다.

괜히 강호가 케르베로스의 방패라고 불린 게 아니었으니까.

웬만한 B급은 그의 선에서 커버가 가능했던 것이다.

콰드득!

다른 조직원의 턱이 돌아가며 목에서 괴상한 소리가 난다.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쏠린다.

순식간이다.

분명 꽤 떨어진 거리였는데.

"야, 잘 좀 해 봐. 씨발, 재미없게."

시우는 눈썹을 찌푸리며 짜증을 냈다.

요 며칠 대인전을 몇 번 치렀는데 괜찮다 싶은 놈이 한 명도 없다.

차라리 이계에서 드래곤이랑 한 판 붙는 게 훨씬 낫지.

"이 개새끼가!!"

츠츠츠츳

강호 다음으로 세다는 지켄이 스킬을 발동했다.

지켄의 주먹에서 기다란 발톱 같은 게 자라났다.

영화에 나오는 울X린 처럼 날카롭고 뾰족한 무엇이다.

시우를 향해 휘둘렀다. 붕一 붕一 소리가 나며 벽과 바닥에 흉터가 남았다.

무기라.

"나도 좀 써볼까."

시우는 허리춤에 있던 단도를 빼 들었다.

전에 싸웠던 C급 헌터 놈의 것을 가져다 시우가 손질한 것이다.

번뜩이는 날이 상대의 손톱에 맞부딪친다.

"하하! 검이랑 함께 썰어 주마!!"

지켄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의 스킬인 [육참도]는 일반 쇠의 경도를 뛰어넘는 단단함을 자랑했다.

사시미 든 조폭들에게 가장 큰 효과를 발휘했던 스킬!

서一거一억

시우의 몸과 지켄의 몸이 서로를 지나친다.

결말을 예고하듯 울려 퍼지는 소름 끼치는 소리.

지켄의 입꼬리가 씨익 올라간다.

그의 당당한 표정에 조직원들의 표정에 기쁨이 번졌다.

"역시!! 우리 조직의 넘버 쓰리인 지켄 형님!!"

"형님! 이렇게 쉽게 죽이시면 저희는 뭘 합니까!"

지켄은 히죽히죽 웃었다.

그의 얼굴에 기다란 빨간 선이 생기며 피가 뚝뚝 흘러내렸다.

"혀, 형님?"

"베이셨나 봅니다!"

그 같은 걱정에도 불구하고.

지켄의 머리 절반이 스르륵 땅으로 떨어졌다.

〈11화〉

죽이는 자

투욱.

쿨렁, 쿨렁.

지켄의 남은 하관에서 피가 콸콸 쏟아진다.

그 그로테스크한 장면에 모든 사람이 오싹함을 느낀다.

"히, 히이이익!!"

"우웨에엑!"

시우는 단도에 묻은 피를 지켄의 옷에 슥, 슥, 닦아 냈다.

이래서 검은 편하다. 뒤처리도 깔끔하고.

"이제 넷 남았다."

그의 눈에서 서늘한 살기가 검날처럼 번져 흘렀다.

"도, 도망쳐!!"

"이 씨발!"

살아남은 자들이 냅다 출구를 향해 발을 놀렸다. 그들은 속으로 되뇌었다.

'저건 사람도 아니고 괴물도 아니야! 살아 있는 악마 그 자체다!'

[역시 좁밥이다. 싸우다 도망치는 거 전사의 수치다. 우리 종족은 저런 놈들 없다. 너네 종족 다 저 모양이다.]

"시끄러."

시우는 피식 웃었다.

그는 신발 앞코를 바닥에 툭툭 쳤다.

단전의 마나가 그의 다리 근육 사이를 파고들며 에너지를 뿜어냈다.

시우의 신형이 사라지며,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나이트클럽 내부에 흘렀다.

휘ㅡㅡㅡ이ㅡㅡㅡ잉

퍼거억!

스거어억!

콰드득!

연이어 들리는 오싹한 소리.

달리던 조직원들의 목이 하나씩 따이며 피 분수가 일었다.

그것도 거의 같은 순간에 벌어진 일.

"허억, 허억, 흐윽!"

제일 앞서 뛰어가던 조직 막내가 다리를 접질리며 바닥에 넘어졌다.

쿠당탕.

그가 넘어지고 난 뒤, 뭔가가 바닥에 쓰러지는 소리가 났다.

그는 덜덜 떨리는 얼굴로 뒤를 돌았다.

서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혀, 형님들······?"

"없어."

그의 옆으로 시우가 섰다.

막내는 한숨도, 한탄도 아닌 이상한 숨을 쉬었다.

바람 빠진 풍선처럼 기이한 소리.

나름 큰돈을 벌고자 마음먹고 들어와서 했던 조직 생활.

2년간 시다 짓을 하고, 불과 얼마 전에야 정직원이 되어 배지를 달게 되었다.

E급 각성자인 그로서는 헌터를 해 봤자 마나석을 채굴하거나, 몬스터 사체를 운반하는 일이 전부.

꿈은 화려한데 현실은 시궁창인 셈.

그래서 제 능력껏 크게 달려보고자 들어왔던 곳이 케르베로스였다.

이대로 5년, 10년만 하면 정직원 중에서 꽤 높은 간부가 될 줄 알았는데, 고작 이런 곳에서···.

"야."

"······?"

"현실은 소설이랑 달라."

"사ㅡ!"

스거억.

막내는 휘청거리더니 바닥에 몸을 뉘었다.

핏물이 그의 등을 적셔나갔다.

이따금 몸이 꿈틀거린다.

시우는 검에 묻은 피를 닦고 다시 검집에 넣었다.

터벅, 터벅.

그는 기절한 강호를 향해 몸을 숙였다.

우ㅡ웅

금빛 찬란한 섬광이 강호의 머리를 에워싼다.

또다시 상처가 아문다.

일반 힐러는 상상조차 하기 힘든 속도와 완성도.

시우는 발로 놈의 머리를 걷어찼다.

거센소리가 발끝과 머리통에서 튕겨 나왔다.

"끄아아악!! 뭐, 뭐야!!"

"야."

강호는 그 목소리에 흠칫, 몸이 굳었다.

본능적으로 몸이 떨려 온다.

마치 호랑이 포효 소리에 강아지의 몸이 굳듯, 아주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그으으··· 아아아···."

"뭐라는 거야, 병신이."

강호는 입에서 침까지 질질 흘렸다.

지금까지 맞아서 흘린 피에 침이 섞이며 끈적하게 옷을 적셔 갔다.

시우는 강호의 복부를 발로 걷어찼다.

B급 헌터인 강호의 시선으로 채 따라잡지 못할 엄청난 속도였다.

뻐어어억!

"커··· 어··· 억!!"

강호는 숨을 쉬지 못하겠다는 듯 배를 움켜쥐고 새우처럼 바닥에 뒹굴었다.

"얼른 일어나. 반 죽여 버리기 전에."

"그어··· 아···."

그 섬뜩한 협박에 강호는 눈물과 콧물을 질질 흘리며 일어났다.

숨이 쉬어지지 않는 게 복부를 맞아서인지, 아니면 이자의 무시무시한 압박감 때문인지 구분이 되질 않는다.

게이트 등급이 바뀌어서 예상치 못한 몬스터가 나왔을 때도, 다른 헌터와 시비가 붙어 목숨을 건 싸움을 했을 때도, 상대 조직과의 전쟁에서 혼자 남았을 때도.

이렇게 공포스럽진 않았다.

이 자는 완벽한 포식자.

완벽한 괴이.

'나는 그저 먹잇감이다.'

강호는 한 마리의 새끼 임팔라처럼 다리를 후들거렸다.

"내가 왜 이렇게 할까?"

시우는 차갑고 냉랭한 눈짓으로 물었다.

평온한 말투도 그가 말하면 절대 일반적으로 들리지 않았다.

"그··· 모, 모르겠, 스, 습니···."

"너 처음에 나 몇 대 때렸냐."

"예······??"

강호는 그게 무슨 질문이냐는 듯 시우를 쳐다봤다.

그걸 세고 때리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스물세 대."

시우는 또박또박하게 한 글자 한 글자 정성 들여 말했다.

"내가 스물세 대 너한테 처맞았다고."

"······예."

"그러니까 너도 나한테 그만큼 맞아야지."

"예????"

시우는 언제나 받은 대로 돌려주는 걸 원칙으로 했다.

지난번에 만났던 새끼들은 시준이가 등장하는 바람에 똑같이 해 주질 못했지만, 지금은 느긋하게 기브 앤 테이크를 해 줄 수 있는 상황.

"그럼 시작한다."

"자, 자, 잠깐ㅡ 커어억!"

뻐억! 뻐어억!

시우는 다시 주먹으로 강호의 몸을 내려치기 시작했다.

주먹이 아니라 흉기로 내리치는 것처럼 둔탁한 타격음이 났다.

강호는 손을 들어 막기도 하고, 가드를 올리기도 했다. 하지만 막으려 올린 손만 주먹에 박살 날 뿐이었다.

"크허어억! 끄어억!! 제, 제발, 사, 살려ㅡ."

"걱정 마. 치료해 주잖아. 혀 잘리기 싫으면 아가리 여물어라."

"끄으윽! 윽! 어억!!"

***

시우는 숨을 골랐다.

몸이 개운하다.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듯 속이 뻥 뚫린 기분이다.

정확히 스물세 대를 때리고 멈췄다.

강호는 바닥에 누워 토사물과 피, 온갖 분비물에 몸을 섞은 채 누워 있다.

여덟 번.

놈의 상처를 여덟 번 치료했다.

자고로 여덟은 강호가 기절한 횟수와도 같다.

막판으로 갈수록 시우는 마력을 조금씩 늘려 가격했다.

그래 봐야 진심 어린 공격에는 터무니없이 못 미쳤지만.

"맷집 키우면 좋잖아."

이러면서 펀치 한 번에 강호의 허벅지를 터뜨리거나 카프 킥 한 대에 정강이뼈를 으스러뜨리고는 했다.

일반 힐러라면 꿈조차 꿀 수 없을 능력으로.

강호의 혈관과 근육, 세포 따위를 모두 회복시킨 뒤에 말이다.

그러고는 다시 기절시킬 때까지 두들겨 패기를 반복.

마지막 스물세 대가 끝나자 시우는 강호의 머리끄덩이를 잡고 출구로 향했다.

이번에는 치료하지 않은 채였다.

놈은 사지를 부들부들 떨면서도 저항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그럴 힘도 없을뿐더러 이미 멘탈 자체가 갈가리 찢겨 나갔기 때문.

"미, 민시우 헌터님! 괜찮으십니까?"

황정구가 뛰어와 물었다.

그를 비롯한 HMCS 팀원 네댓 명이 서성이다 몰려왔다.

모두 시우의 지시로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것.

보통 이런 상황에는 탱커와 근접 딜러, 원거리 딜러, C.C 서포터 혹은 힐러가 한 조가 되어 들어가는 게 일반적인데.

시우가 자기 혼자 가겠다며 황정구에게 명령(?)을 내린 탓에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것이다.

"자, 두목급 한 명."

시우는 강호의 머리채를 잡고 휙 하고 던졌다.

황정구 앞에 철퍼덕 떨어진 강호는 그 어떤 움직임도 없었다.

"죽··· 었습니까?"

"아냐. '걔'는 살았어."

황정구는 눈짓으로 다른 팀원들에게 안으로 들어가 확인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잠시 뒤 나온 팀원들.

그들의 안색은 희멀겋게 질려 있었다.

"저희가 가지고 있는 조직 리스트를 보고 추정해 본 결과, 무혈사신 쪽은 중상자만 있으나 케르베로스 쪽은 사망자만 일곱입니다."

"뭐? 이놈도 케르베로스 맞지? 방패인가 뭔가 하는 놈이라고 얼핏 본 것 같아."

"맞습니다. 거기 행동대장이라서 넘버 투예요."

팀원의 말에 황정구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범죄자 리스트에 나와 있는 강호는 B급 헌터.

조직에서 제법 구른 놈이기도 하고, 다른 조직원들도 각성자란 것을 참고하면 상황 자체가 순탄한 건 아니었을 거다.

'더군다나 이 자식 스킬이 대인전에서 좋다고 알려져 있지.'

몬스터전에서 위력을 더하는 스킬이 있는가 하면, 대인전에서 위력을 보이는 스킬이 있다.

강호의 스킬은 대인전에서 효율이 더 좋은 케이스.

'하기야, 상대가 민시우인데 대인전이고 나발이고 뭔 소용이겠어.'

황정구는 혀를 차며 강호의 아픔에 동정을 표했다.

"다 죽였는데 상관없지?"

물에 적신 수건으로 피를 닦아 낸 시우가 묻는다.

다른 팀원들이 서로 눈치를 보더니 황정구를 바라본다.

"기본적으로는 체포가 우선이지만··· 제압이 불가능하거나, 상대에게 부상을 입었을 경우엔 사살해도 좋습니다. 이건 세계 HMCS 공통 사항입니다."

"그래? 그럼 나 부상 보이지? 여기 증거물로 피."

시우는 피가 묻은 수건을 다른 팀원에게 건넸다.

"나 중상이었어."

"···예."

어련하시겠습니까. 차마 뱉지 못한 말이다.

"오늘 사건 더 있어?"

"아니요, 없습니다."

"그래, 그럼 나 볼일 보러 간다. 괜찮지?"

"아, 잠시만! 장착했던 바디캠은 잘 찍혔습니까?"

바디캠.

〈HMCS 국제본부〉에서 요원들의 안전 및 범죄의 증거확보를 위해 새롭게 실시한 제도였다.

현재는 시범운영인 단계였고, 황정구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시우에게도 장착해 달라 부탁한 것이다.

"그거 깜빡하고 안 켰는데."

시우의 천연덕스러운 대답에 황정구는 바디캠을 떼려다 말고 손을 거뒀다.

"괘, 괜찮습니다! 혹시 다음에 전투를 하시게 되면 꼭! 바디캠부터 켜시기 바랍니다. 저희가 뒤처리는 다 할 테니 살펴 들어가십쇼. 내일 뵙겠습니다!"

"오냐."

황정구가 90도로 인사를 하자, 다른 팀원들도 엉거주춤 고개를 숙이고 신입에게 인사했다.

"팀장님, 도대체 저 신입이 누구길래···."

"묻지 마라. 그냥 심기만 거스르지 마."

황정구는 애꿎은 강호의 뒤통수를 때리며 차에 실었다.

***

홍콩.

갑자기 생성된 B급 게이트 안, 수십의 헌터들이 몬스터와 혈투를 벌이고 있었다.

홍콩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든다는 [적광 길드]

.

그 가운데서도 유독 움직임이 돋보이는 한 사람. 새빨갛게 물들인 머리를 뒤로 질끈 묶은 거구의 사내.

그의 오른 주먹부터 팔꿈치까지 감싼 푸른 갑옷이 유달리 눈에 띄었다.

점차 푸른 열기가 더해지는 갑옷.

"다들 떨어져."

거구의 사내가 탁한 목소리를 내뱉더니 오른 주먹을 크게 휘둘렀다.

쿠가가가!

시퍼런 발톱이 대지를 휘갈기듯, 수십의 몬스터들이 흔적조차 사라지고야 말았다.

"역시! 1조 단장님이십니다!"

"단장님 덕분에 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으하하! 이 기세를 몰아서 모두 쓸어 버리자!!"

사기가 살아난 [적광 길드]의 헌터들이 앞으로 내달렸다.

그 모습을 무심하게 바라보는 거구의 사내, 거트.

그는 빨갛게 흩날리는 자신의 머리를 쓸어 올리며 머리를 다시 묶었다.

이마에 난 기다란 흉터가 드러난다.

"저, 단장님··· 한국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한국에서?"

게이트 밖에서 [적광 길드]의 헌터가 들어오더니 거트에게 소식을 알렸다.

거트는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 그대로 성큼성큼 밖으로 향했다.

"급한 소식이 맞겠지?"

어지간히 중요한 일이 아닌 이상, 게이트 안에서 레이드를 뛰고 있는 헌터를 불러내지는 않는다.

목숨이 오가는 현장에서는 당연히 지켜 줘야 할 룰.

"그게···."

말단 헌터는 별다른 대꾸도 하지 못한 채 전화기만 거트에게 건넸다.

"전화 바꿨습니다."

-거트 헌터 맞습니까?

처음 듣는 목소리다.

"그렇습니다."

거트는 낯선 이의 전화에 표정이 더 굳었다.

-혹시 지켄 씨의 형제 되시는 분 맞습니까?

"······네."

거트는 오랜만에 듣는 형의 이름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같은 각성자면서도 범죄의 길을 택한 지켄.

등급이 그리 높지 않은 지켄이 범죄에 손을 뻗은 건 다름이 아니었다.

동생인 거트와 다른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택한 악수.

실제로 지켄은 가족을 다 먹여 살렸다.

그 후 거트가 각성을 하게 되면서 거트는 형에게 길드에서 함께 일하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지켄은 거절했다.

이미 자신은 너무 멀리 와버렸다며, 거트 너만이라도 훌륭한 헌터의 길을 걸으라고 말이다.

형의 소식은 간간이 들려왔다.

차마 웃으며 듣기엔 끔찍한 내용뿐이었다.

조직 케르베로스는 그만큼 악랄하기 그지없는 놈들만 모인 곳이었으니.

차라리 자신과 함께 있으면 좋은 대접을 받으면서 편하게 헌터 생활을 했을 텐데.

- 이런 소식 전해드려서 죄송합니다. 지켄 씨가 사망하셨습니다. 현재 유일한 가족으로···.

그는 수화기 너머에서 들리는 말을 토씨 하나 빠트리지 않고 귀담아 들었다.

악다문 턱이 씰룩였다.

거트는 전화기를 말단 헌터에게 도로 건넸다.

이제껏 보아왔던 그의 표정 중에서도 가장 차갑고 무시무시한 얼굴에 말단 직원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저벅. 저벅.

"다, 단장님? 레, 레이드 아직 안 끝났는데요?"

게이트로 돌아가지 않고 다른 방향으로 걷는 거트에게 직원이 후다닥 뛰어가 물었다.

"길드장님께는 따로 보고하겠다."

"무엇을 말입니까?"

"나는 오늘 한국으로 간다."

"예?? 지, 지금이요? 무슨 일 때문이신데 그렇게 급히?"

거트는 갑옷이 덧씌워진 자신의 손바닥을 바라보다 이내 주먹을 꽉 쥐고는 낮게 읊조렸다.

"사람 피를 묻히러 간다."

〈12화〉

장물아비

"홍콩의 [적광 길드] 소속 A급 헌터 '거트'가 방한했다. 필요한 부분들 안내해 주고 허튼짓하지 못하게 옆에서 감시해."

〈대한민국 헌터 중앙 협회〉는 아침부터 분주했다.

보통 급이 높은 헌터의 방문 시에는 게이트의 클리어나 길드의 계약처럼 좋은 목적인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거트의 경우엔 악재.

혈육, 그것도 범죄자로 살았던 형의 죽음.

자칫 잘못하다간 형의 죽음과 얽힌 자를 찾아가 싸우려 할지도 모른다.

물론 헌터가 다른 사람을 살해하게 되면 그 처벌이 결코 가볍지 않다.

지각이 있는 헌터라면 형의 죽음만 애도하고 떠나는 게 당연지사.

"그런데 거트··· 엄청 성깔 있는 놈이라더라. 머리 빨갛게 염색한 게 몬스터 피를 하도 뒤집어써서라잖아. 분명 조용히 넘어가지 않을 텐데··· 아, 누가 죽였다고 했지?"

"그게, HMCS 서울 강북지부 소속 헌터입니다. 황정구 헌터 팀 막내라던데요."

"씨발, 황정구도 성격 개차반인데. 막내 감싼다고 황정구랑 부딪치면 곤란하니까 거트한테 HMCS라고 확실히 못 박아 둬. 제아무리 게이트의 왕이라도 HMCS 헌터는 피해야지."

HMCS는 다른 표현으로 헌터계의 검찰이자 경찰이었다.

상대가 아무리 원수라 할지라도 검찰과 싸우는 사람은 없듯이, 헌터 역시도 어지간해서는 HMCS와 엮이려 하지 않았다.

HMCS 기관의 실질적 위력이 강한 것과 HMCS 내에 좋은 헌터가 많지 않다는 것은 별개의 내용.

강한 헌터가 별로 없는 이유는 간단하게 말해서 길드의 복지와 월급, 대우가 훨씬 좋아서였다.

거트를 마중 갔던 헌터 협회 소속은 그를 데리고 목적지로 안내했다.

대한민국 국과수, '헌터 법의학부'

"이쪽입니다."

국과수 직원의 안내에 거트는 저벅저벅 걸음을 옮겼다.

그의 얼굴은 차가운 대리석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시신 보여 드리겠습니다."

영안실 냉동고에서 꺼낸 지켄의 모습은 그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끔찍했다.

"아······."

거트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가 사랑했던 형의 머리, 그곳에 꿰맨 흔적이 있었다.

단순히 찢어진 상흔을 붙인 게 아니다.

"잠시 애도할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국과수 직원은 헌터 협회 직원과 함께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차가운 기운이 감도는 영안실 안.

거트는 형의 딱딱해진 손을 조용히 잡았다.

넘어진 그를 항상 잡아 일으켜 주던 형.

가족을 위해 더러운 피를 묻히면서도 앓는 소리 하나 내지 않았던 가족의 기둥.

그랬던 기둥이 지금은 차게 식어 누워 있다.

거트는 형의 뺨을 어루만졌다.

못 본 사이 많이 수척해졌다.

차갑다, 빌어먹게도.

형과 하는 몇 년 만의 재회가 이렇게 될 줄이야.

거트의 잇새로 피가 맺힌다.

마나를 뻗치지 않기 위해 속으로 꾹꾹 눌러 담는다.

형이 조직에 들어간다 했을 때 막았어야 했는데.

아니면 차라리 홍콩으로 오라고 했어야 했는데.

두서없는 후회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형은 범죄자였다.

자신도 가끔 상대하곤 하는 각성 범죄자였다.

그러나,

형이었다.

세상에 남은 유일한 혈육이었다.

형의 죽음에 대한 부채, 자신에 대한 질타, 상대에 대한 증오.

그 모든 것들이 뒤섞이며 알 수 없는 감정을 자아냈다.

오직 분노가, 살의가, 그의 가슴팍을 찢고 두 눈을 핏빛으로 물들였다.

그는 감정을 씹어 삼킨 뒤 서늘한 눈빛으로 어딘가에 전화를 걸었다.

"그래, 도착했다."

목소리에 울음과 분노가 잔뜩 뒤섞였다.

진득한 뭔가를 토해 내는 것처럼 거트는 형의 얼굴을 보며 짓씹듯 말했다.

"사냥감을 확보해라. 심장은 내가 직접 찢는다."

***

"민준이 물건 남은 거좀 줘 봐."

시우의 말에 민시준은 잠시 머뭇거렸다.

"형은 민준이 형 마나가 담긴 물건이 필요한 거지?"

헌터의 마나가 담긴 물건은 생각보다 많은 정보를 담고 있다.

헌터의 지문이라 불리는 마나의 코드, 계열, 심지어는 마력의 세기나 실력마저도 유추가 가능할 정도.

물론 그 마나를 해독할 정도로 뛰어난 실력자가 봤을 때의 이야기지만.

"그게··· 민준이 형이 살해당하고 다다음 날인가. 유류품 거두러 갔더니 집이 이미 털렸더라고."

"집이 털려?"

예상치 못한 전개인데.

"어. 싹 다 털어 갔어. 마나가 깃든 물건은 아무것도 남지 않았고, 노트북이나 가전제품, 심지어 역사책 같은 것도 다 가져갔더라고."

정민준은 고고학자였다.

그에게 있어 연구 자료는 목숨만큼이나 귀한 것.

노트북이나 개인 연구서는 남아 있기를 바랐는데.

"털렸을 때 찍어 놓은 사진 있지? 줘 봐."

민시준은 그 당시 증거로 찍어 둔 사진을 시우에게 보여 줬다.

시우는 여러 각도로 찍힌 사진을 하나하나 차근차근 살펴 나갔다.

흐음.

"민준이 형을 살해한 범인이 특정 물건이나 증거를 없애기 위해 가져간 게 아닐까 싶어. 그 당시 수사했던 헌터들도 그리 말하더라."

시우는 고개를 저었다.

"이거 그냥 빈집털이야."

"왜??"

"방을 보면 모든 공간이 다 어질러져 있지? 특정 물건을 찾기 위해선 이렇게 무턱대고 하지 않아. 오히려 헷갈릴 수 있으니까."

"그렇다면 증거를 없애기 위해서라면?"

"이러면 범인의 증거가 남을 확률이 더 높아 보이는데. 증거를 없애기 가장 좋은 방법이 뭔지 알아?"

"······?"

"방화."

사람을 죽여 놓고 시체는 감쪽같이 없앤 범인이 특정 물건이나 증거를 찾는답시고 이렇게 어지른다?

범행 수법이 맞지 않는다.

너무 노골적인 짓이니까.

'나 물건 때문에 사람 죽였어요.'라고 떠드는 꼴이니.

이건 백 퍼센트 도둑질이다.

"넌 모를 수도 있는데, 의외로 죽은 헌터들 집만 골라서 털어 가는 놈들이 있더라. 값나가는 물건이나 돈이 많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지."

이번에 HMCS에서 일하면서 배웠다.

그런데 범행 질은 나쁘지만, 강력범이라 하기는 모호해서 HMCS보다는 경찰 쪽에서 수사하는 모양이었다.

"장물아비 몇 놈 족치면 나올지도 몰라."

과연 몇 년 전에 털어 간 민준이의 물건이 남아 있을까 싶기는 하지만, 장물은 훔쳐 놓고 처리하는 데 의외로 몇 년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하니까.

"형이 원하면 우리 직원들 몇 명 붙여 줄 테니까 말만 해. 내 직속이라 마음껏 써도 괜찮아."

"됐다. 걔들은 나처럼 직권남용 못 하잖아."

HMCS 들어온 이유가 뭐 때문인데.

***

좀도둑 한센은 뭐 빠지게 뛰었다.

폐가 터질 것 같고 다리가 빠질 것 같다.

그래도 뛰었다.

발목이 욱신거려서 주저앉고 싶다.

씨발, 도망치다 부딪친 보도블록 턱에 엄지발톱도 깨진 것 같고.

신발 속이 축축하다.

피겠지, 분명히 피다.

'염병할!! 왜 갑자기 나를 쫓고 지랄이야, 지랄이!!'

그는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재수가 없었다.

그저 아지트 입구 근처에 누가 있길래 말을 건 것뿐이다.

여기는 어떻게 알고 왔는지, 누구 소개로 온 건지, 목적이 뭔지, 통행료가 필요하니까 몇 푼 내놓아야 한다는, 뻔한 말들.

그런데 상대가 다짜고짜 주먹을 날렸다.

덕분에 그의 파트너는 바닥에 널브러졌다.

입가에 피를 줄줄 흘린 채 말이다.

한센은 다른 아지트로 향하는 입구로 부리나케 뛰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저놈은 미친놈이야!!'

이미 눈이 맛이 갔다.

게다가 혼잣말을 자꾸 중얼거리기까지 한다.

보이지 않는 친구한테 말을 걸듯 객식구가 어쩌고 하면서 말이다.

이제 한 블록만 더 뛰면 다른 아지트가 나온다.

"으윽!!"

기어이 부딪친 발이 문제를 일으킨다.

한센은 바닥에 몇 바퀴나 굴러 골목 벽에 부딪히고야 말았다.

더럽게 아프다.

"으윽··· 제기랄."

"다 뛰었냐."

그때 건조한 목소리가 들린다.

한센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목소리의 진원지를 살폈다.

놈이었다.

"씨바아알···."

"다 뛰었냐고."

남자는 무미건조한 눈으로 한센을 내려봤다.

어떠한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눈.

하다못해 뱀도 쥐를 볼 때는 먹잇감이라는 생각 정도는 하고 바라본다.

하지만 남자의 눈에서는 그 어떤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너 이 개새끼 내가 누군 줄ㅡ 크허억!"

한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남자의 발이 한센의 복부를 걷어찼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한센의 몸이 나뒹군다.

한센은 배를 부여잡고 좌우로 데굴데굴 굴렀다.

"네가 누군데?"

남자의 말이 칼처럼 한센의 가슴을 찔러온다.

"쿨럭! 미, 미안! 미안! 나, 나는 그냥 삥이나 뜯으려고··· 정말 아, 아무것도 모르ㅡ 크으읍!!"

뻐억, 소리가 한센의 턱을 뒤흔든다.

눈으로 좆을 수도 없는 속도로 남자의 발이 직격한 탓이다.

한센은 바닥에 새우처럼 누워 입을 감싸 쥐었다.

이빨이 몇 개 나갔는지 피가 손바닥을 적신다.

"일어나."

사나운 명령. 한센은 잘 훈련된 병사처럼 재깍 일어났다.

"물건들 모아 놓은 곳 있지? 거기로 가."

"예··· 예?"

뻐억!!

주먹이 한센의 배에 묵직하게 꽂혔다.

그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나 두 번 말하는 거 싫어하거든. 다시 물으면 아가리에 볼링공을 쑤셔 박는다."

한센은 눈물, 콧물, 침, 피가 줄줄 흐르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재수 옴 붙었다.

그는 남자를 끌고 아지트로 향했다.

삐삐삐삐.

입구에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간다.

철문이 열리며 안쪽에 고급스럽게 장식된 문 하나가 보였다.

그 앞에 있던 문지기가 한센을 보고 반갑게 인사한다.

"어이, 웬일이야? 이 시간에. 옆에 있는 저치는 누구고? 보스가 모르는 사람 데려온 거 알면 싫어할 텐데? 응? 뭐야, 얼굴이 피투성이잖아!"

"아··· 이 시람은···."

"나? 시우야."

"뭐?"

시우의 말에 문지기가 되물었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하는 표정.

뻑!!

문지기가 쓰러졌다.

"가."

시우는 한센에게 턱짓했다.

내부는 전혀 예상치 못할 정도로 깔끔하고 으리으리했다.

이런 허름한 건물 안에 이런 시설이 있으리라곤 그 누구도 몰랐을 것이다.

고급 호텔의 로비를 연상케 하는 분위기.

한센은 가장 안쪽에 있는 문을 향해 다가가다 시우를 흘끔 바라봤다.

긴장도 불안함도 전혀 없는 표정.

'미친 약쟁이 새끼!'

한센은 문을 벌컥 열었다.

그곳엔 십여 명의 사람들이 포커를 하며 즐겁게 웃고 떠들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돈이 산처럼 쌓여 있었고, 개중에는 금은보화도 상당했다.

"응? 뭐야, 네가 여기는 웬일이냐."

시가를 물고 있는 턱수염의 남자가 물었다.

"보, 보스!! 사, 살려 주십쇼!"

한센은 입가에 피를 질질 흘리며 보스 옆으로 뛰어갔다.

"뭐, 뭐야! 뒤에 저 새낀 뭐고!"

보스가 손가락으로 날 선 눈빛의 남자를 가리키며 물었다.

시우는 그 손길을 무시하고 좌중을 슥, 훑어봤다.

"각성자들 여럿이고. 훔친 장물들로 불법 도박까지. 이거 뭐, 빼박이구만."

"뭐?! 뭐라고 하는 거야! 야, 저 새끼 조져!"

시우는 피식 웃더니 손가락을 뒤로 꺾었다.

두둑, 소리가 기분 좋게 울린다.

"오랜만에 스킬 하나 쓸까."

[어떤 스킬 필요하냐? 치킨 한 마리에 빌려준다.]

"치킨 한 마리? 꽤 비싸네. [쇼크웨이브]."

[스킬 [쇼크웨이브] 발동]

시우의 손바닥에 흰색의 원이 생성되며 아홉 개의 문자가 빛을 뿜어냈다.

눈부시도록 저릿한 섬전.

그 마법진을 중심으로 엄청난 마력 파동이 원형으로 솟구쳐 뻗는다.

파ㅡㅡㅡ앙!!

무형의 충격파가 방안을 휩쓸었다.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과 테이블, 의자, 장식품 등이 벽에 날아가 처박혔다.

고작 단 한 번의 스킬로 십여 명의 장정이 나가떨어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목숨을 앗아갈 정도로 강하게 쓰진 않았다.

"그으으윽··· 너, 너 뭐야!"

보스가 비틀거리며 시우에게 윽박질렀다.

몹시 분에 찬 표정이다.

"나 HMCS."

"뭐, 뭐??"

시우의 말에 보스는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원했던 말과는 한참 거리가 먼 대답이다.

"여기 각성자들이 장물아비 하는 곳이지?"

시우는 보석 하나를 주워 들며 물었다.

"우, 웃기지 마!! 아무리 HMCS라도 신고나 영장도 없이 다짜고짜 쳐들어온다는 게 말이나 돼!! 이 정부의 사냥개 같은 새끼들아!"

"어, 돼."

된다.

각성 범죄자에 한해선 국가, 나아가서는 전 세계 모두 무관용·엄정 처벌을 원칙으로 한다.

다만 엄청난 특권과 혜택이 있음에도 HMCS에 고위 능력자가 없는 이유는 대부분 길드에 들어가 헌터를 하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명예만 있다 뿐이지, 위험한 데다가 실질적으로 큰돈이 되는 직업도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시우가 HMCS에 들어간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다.

첫째는 각성 범죄자에 대한 전투 및 사살의 허용.

현장에서 적발되거나 신고가 접수된 이후엔 바로 무력으로 제압이 가능했다.

둘째는 직급을 막론한 모든 헌터에 대한 검사 이상의 기소권과 수사권의 발휘.

이 직급이란 상대가 세계적인 랭커이든, 거대 길드의 길드장이든, 나아가서는 한 나라의 대통령이든 관계가 없다는 뜻이다.

"장물 다 꺼내. 뒈지기 싫으면."

그러니 이딴 장물아비 두목 따위는 시우가 다 벗겨 먹어도 상관없었다.

애초에 HMCS라는 직권을 이용하기 위해 들어온 거였으니까.

시우는 콧수염 남자의 안내에 따라 뒷방으로 갔다.

그곳엔 엄청난 양의 금은보화와 명화 및 조각품 같은 예술품도 즐비했다.

"씨발, 그러고 보니 최근에 웬 미친놈이 나타나서 장물아비만 싹 조진다고 하더니, 그게 너였구나! 라이벌들 사라져서 좋아했더니만··· 다 갖고 지옥으로 꺼져!"

"난 하나면 찾으면 돼."

"뭐???"

서울, 경기 지역에 있는 장물아비들을 벌써 몇 팀이나 조졌는지.

뜬금없는 성과에 황정구만 맨날 어리둥절했다.

시우는 자신의 마력을 얇은 거미줄처럼 만들어 사방에 퍼뜨렸다.

꽤 넓은 공간이었음에도 그의 마력은 빈틈없이 채워졌다.

그리고 그곳에서 아주 익숙한 마력의 흔적 하나를 찾을 수 있었다.

낯익은 누군가의 손길처럼 그리움이 마나를 타고 그에게 전해져 온다.

시우는 구석 바닥에 떨어져 있는 물건 하나를 집어 들었다.

"드디어 하나 찾았다."

자물쇠로 잠겨 있는 정민준의 책이었다.

〈13화〉

흑천락

시우는 더러운 골목 입구에 섰다. 절로 인상이 찌푸려진다.

여전하네.

온갖 천막들과 판자들이 지저분하게 얼기설기 모여 있는 곳.

바닥엔 깨진 술병들과 담배꽁초, 용도 모를 주사기가 듬성듬성 떨어져 있고, 온갖 퀴퀴한 냄새가 오감을 들쑤시며 다가온다.

[···나 여기 싫다. 안 들어간다. 돼지우리도 여기에 비하면 왕궁이다.]

"어쩔수 없어."

능력에 관한 한 모든 것들이 교환되는 곳.

음지의 기술과 기이한 이능들이 허락된 유일한 장소.

'흑천락'.

일반적인 스킬 속성에서 벗어난 [이능계] 능력을 가진 자들의 집합소다.

시우는 예전과 크게 바뀌지 않았으면서도, 자잘한 위치나 길목이 달라진 것을 의식하며 걸었다.

"더럽게들 노려보네."

길에 널브러져 있는 놈들과 천막 안에 있는 자들을 통해 역겨운 시선들이 몸에 엉켜 온다.

그것도 한둘이 아니다.

단순한 시선이 아닌 능력을 사용한 끈적한 관찰.

짜증 나게.

상대의 스킬과 강함을 나름대로 재보는 것이리라.

시우는 저도 모르게 서늘한 눈빛을 지었다.

물리적으로나 마나적으로 피해를 본 게 아님에도 신경에 거슬린다.

하지만 이곳은 일종의 전투 중립지역.

싸우고픈 자들은 이곳을 벗어난 후에 싸워야 했다.

만약 규율을 어길 시에는 '흑천락' 전체를 적으로 돌려야만 한다.

[기분 나쁜 곳이다! 그런데 맛있게 생긴 능력 너무 많다! 아니, 맛있다기보다는 궁금한 맛이다! 불량 식품 같다!]

시우는 목표한 곳으로 성큼성큼 걸었다.

누구 하나 끌고 나가서 반쯤 죽이기 전에, 얼른 이 더러운 시선을 떨쳐 내야 했다.

"변함이 없군."

그는 가장 구석에 있는 새까만 천막 앞에 섰다.

인골의 다양한 부위가 천막을 다채롭게 수놓은 괴기한 곳이었다.

[여기 뭐냐. 느낌 이상하다. 저거 진짜 너희 종족 뼈냐? 너처럼 칙칙하다.]

"천막 주인의 성격으로는 진짜일걸."

시우는 천막을 젖히고 안으로 들어갔다.

어두침침한 실내엔 향초 냄새가 가득했고, 사방엔 인형을 비롯한 불길한 잡동사니가 늘어져 있었다.

"오랜만이네요, 당신."

맑고 높은 아름다운 목소리가 들려온다.

"여전하네."

시우는 묻지도 않고 빈 의자에 털썩 앉았다.

어둠 속에서 상대의 모습이 점차 드러난다.

"모습도 여전하고. 무명."

이런 천막에 있을 법한 외모로 보이지 않는 여인.

오뚝한 콧날과 깊고 푸른 눈망울, 칠흑 같은 긴 머리의 절세 미녀가 시우를 바라보며 희게 웃었다.

그 한 송이 검은 꽃과도 같은 여인의 미소가 천막 속을 환히 밝히는 듯했다.

참 안 어울린단 말이지.

아니, 오히려 흑천락의 십두령 중 하나답다고 해야 할까.

흑천락의 모든 전권을 쥔 열 명의 대주술사.

그중 한 명이 눈앞에 앉은 무명이었다.

"십 년 만인가요? 보고 싶었답니다."

무명은 하늘하늘한 검은 드레스를 단정히 여미며 시우를 향해 고개를 살짝 숙였다.

"됐어, 우리 사이에. 오늘은 일 때문에 온 거야."

시우는 정민준의 마나가 담긴 책을 오래된 나무 탁자 위에 올렸다.

자물쇠로 굳게 닫힌 책은 당사자의 마나가 아니면 풀리지 않게 되어 있었다.

"그렇군요. 이것 또한 제가 즐기는 바니까요."

무명은 테이블 아래에서 은으로 된 잔 하나와 검 하나를 꺼내 올렸다.

둘 다 기이하게 생긴 뱀이 양각으로 새겨진 모양이었다.

"매개는 뭔지 아시죠."

"그럼."

시우는 왼팔을 내밀더니 소매를 위로 올렸다.

[이 암컷 기분 나쁘다. 그런데 뭐 하는 거냐? 손 씻냐? 우리 뭐 먹냐?]

그러더니 그는 검을 들어 자신의 팔을 서슴없이 내리그었다.

스윽ㅡ 하는 소리와 함께 피가 줄줄 흐르며 잔에 떨어진다.

[뭐, 뭔 지랄이냐? 너 미쳤냐? 자해는 나쁜 것이다! 너 죽으면 나한테 죽는다!!]

새빨간 핏물이 손을 타고 끝없이 흘러내린다.

피가 잔의 2/3 지점을 넘자, 양각으로 새겨진 뱀의 눈이 빛나기 시작한다.

"이 정도면 충분하답니다. 지혈하시죠."

무명은 흰 천을 시우에게 건넸다.

시우는 말없이 천을 받아들더니 먼저 힐 능력으로 자신의 팔부터 치료했다.

금빛 문양이 펼쳐지며 칼에 베인 상처가 순식간에 수복된다.

"여전하시네요, 그 아름다운 재생은."

무명은 재미난 걸 봤다는 듯 입꼬리를 위로 올렸다.

"뭐, 새삼스럽게. 얼른 추출이나 해 줘."

시우의 타박 아닌 타박에 무명은 큭큭 웃더니 잔을 들어 올렸다.

킁킁.

"여전히 좋은 냄새군요. 마치 잘 익은 포도주를 연상케 하네요. 이런 향취가 나는 피는 흔치 않죠"

그 멋쩍은 칭찬에 시우는 입을 열려다 말았다.

뭐, 욕한 것도 아니고.

"당신의 피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요."

무명은 망설이지 않고 잔을 입으로 가져다 댔다.

[으엑! 무슨 짓이냐! 뱉어라! 저 암컷이 네 피를 마셨다!!]

꿀꺽. 꿀꺽. 꿀꺽.

무명의 식도를 타고 시우의 피가 게걸스레 넘어간다.

물을 마시는 것처럼 태연한 행동.

남은 한 방울까지 다 마신 무명은 잔을 내려놓았다.

입가에 묻은 피를 혀로 날름 핥는다.

"도대체 십 년간 뭘 하신 거죠? 핏속에 깃든 생명력이 입 안에서 춤을 추는 것 같네요 대체, 대체 인간의 피에서 어떻게 이런 맛이···."

무명은 천하진미를 맛본 미식가처럼 격양된 얼굴로 외쳤다.

"얼른 일이나 좀 하지."

시우는 객쩍다는 듯 그녀의 감상을 다른 곳으로 옮기려 했다.

무명은 손으로 인을 맺더니 테이블 위에 마나로 무언가를 그려 나갔다.

슥ㅡ슥ㅡ

그려진 술식은 이내 획이 복잡한 마법진이 되었다.

그녀는 그 중앙에 시우가 가져온 책을 놓더니 마력을 마법진에 흘려 넣었다.

쿠우웅!!

검붉은 마법진이 테이블 위에서 길길이 날뛴다.

검고 아득한 아우라가 거침없이 뿜어져 나온다.

그 솟구치는 힘에 방에 있던 것들이 사방으로 나뒹군다.

[으악!! 이 암컷 스킬 이상하다! 내 취향 아니다! 얼른 나가라 식량!]

뱀의 가닥처럼 솟구치던 마력은 이내 책을 휘감더니 그 속으로 파고들었다.

책이 무섭도록 요동친다.

무명은 떨리는 책에 입술을 가까이 가져갔다.

스ㅡ읍

책에 담겨 있던 푸른 마나가 그녀의 촉촉한 입술을 비집고 들어간다.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마치 동화책에 나오는 아름다운 마녀가 푸른 마법을 탐식하는 기분.

기다란 입김처럼 마나의 꼬리가 길게 늘어진다.

입술을 뗀 후에도 푸른 기운은 한참이나 그녀의 입술 주위를 맴돌다 천천히 들어갔다.

그녀는 소화시키듯 눈을 감고 그 기운을 몸 안에 흘려 넣었다.

"칼 좀 주실래요?"

시우는 자신의 팔을 베었던 칼을 그녀에게 주었다.

무명은 칼을 받아 들더니 시우처럼 똑같이 자신의 팔을 그었다.

[이 미친 암컷 수컷들이 오늘 왜 이러냐?!?!]

그러나 시우처럼 새빨간 피를 흘려낼 것 같았던 그녀의 상처에서는, 푸른 마나가 방울져서 떨어졌다.

무명은 작은 유리병에 액화된 마나를 흘려 담았다.

새파란 물이 은은하게 빛난다.

책에서 추출한 마나였다.

에스프레소 한잔 정도의 양이나 찼을까.

그녀는 뚜껑을 가져와 덮더니 자신의 마법으로 밀봉까지 마무리했다.

"여기 있어요."

이제는 마나가 아니라 피가 흐르는 팔로 시우에게 '물건'을 건넨다.

"고맙군."

시우는 한 손으로는 '액상 마나'를 받고, 다른 한 손으로는 재빨리 그녀의 상처를 힐로 재생시켰다.

"어머나, 설레게 왜 이러죠?"

"서비스야."

시우는 품에서 현금을 다발로 꺼내 그녀 앞에 두었다.

"십 년간 가격이 올랐으려나?"

"괜찮아요, 덕분에 맛있는 피를 맛보았으니까."

"그래, 그럼. 다음에 또 오지."

시우는 픽 웃으며 천막을 젖히고 밖으로 나갔다.

***

[대체 무슨 짓이었냐?]

"뭐가?"

[방금 그곳에서의 일 말이다. 그 미친 암컷은 무엇이고 방금 일어났던 일들은 무엇이냐는 말이다.]

프레는 뭔가 삐친 것처럼 뾰로통한 어투로 물었다.

자기에게 의논하지 않아서 그런 건가.

시우는 볼을 긁적이다 입을 열었다.

"그 책에는 내 제자였던 민준이라는 아이의 마나가 담겨 있어. 일종의 보안용으로 간단한 술식을 담아놓은 거지. 같은 마나 코드가 아니면 그 책은 절대 열리지 않아."

[그렇다면 마법을 해제해 그 책을 읽으려 한 것인 게로군.]

"땡."

[뭐, 뭐라?! 방금 네가 그러지 않았냐! 같은 마나 코드가 아니면 책을 읽을 수 없다고. 그래서 그 책을 읽기 위해 마나를 추출해 해제시킨 게 아니냐?]

"책을 읽는 건 부수적인 일. 즉, 덤이고. 내가 원했던 건 그 책 안에 담겨 있던 마나 그 자체였어."

시우는 무명이 추출한 액상 마나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스킬이나 마법으로 구현된 마나를 다시 원래의 순수한 마나로 돌려내는 일은 간단한 게 아니다.

아니, 불가능에 가까운 일.

예를 들어 완성된 마법을 카레에 비유한다고 치자.

사람들은 다 만든 카레에서 당근, 감자, 고기 따위를 구분 지어서 따로 담을 수 있다.

이것이 마법의 해체다.

하지만 그 구분 된 재료들을 다시 원래의 분말 카레, 식재료, 물로 돌려놓을 수는 없다.

이것이 마법의 마나 회귀.

그야말로 자연의 순리에 어긋나는 일이다.

하지만 그런 불가능을 가능케 한 요인은 무명이라는 엄청난 마나를 가진 그릇, 금기를 깨트린 주술, 그리고 피라는 매개체가 조화를 이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능계] 각성자들은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그 능력 때문에 경계의 대상이 되고는 했다.

[그럼 그 마나를 가지고 무얼 할 거냐?]

"그건 너도 알 텐데."

시우는 원하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이곳은 어디냐. 생물이 사는 기척이 전혀 없다.]

"없겠지. 폐쇄된 곳인데."

'고대 역사 연구소'

민준이가 살해당한 장소.

동생 시준이가 소유한 곳이지만, 민준이가 죽은 뒤로는 그냥 폐쇄한 뒤 어떤 용도로도 쓰지 않았다고 한다.

동생도 민준이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으리라.

시우를 주축으로 모인 제자들이었으나 그들의 관계는 형제 그 이상이었다.

민시준, 강여화, 샤오롱, 그리고 정민준.

"···들어가자."

괜한 옛 생각에 감정이 출렁인다.

100년간 많이 닳고 닳았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제자들을 생각하면 이유 모를 감정이 고개를 내민다.

실내는 빼곡한 먼지와 곰팡내로 숨쉬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먼지가 풀풀 피어올랐다.

시우는 마나를 가볍게 운용해 먼지가 걸러지도록 만들었다.

그는 책이 어수선하게 늘어진 책상 앞에 섰다.

책 위에도, 책상 위에도 세월이 먼지처럼 쌓여 있었다.

"···여기다."

시우의 시선이 어딘가로 향하더니 곧 멈췄다.

책상 뒤편으로 보이는 거무죽죽한 얼룩.

살해 현장.

시우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서 무얼 하는 것이냐.]

프레는 시우의 가라앉은 기분을 눈치채고 조심히 물었다.

"그날의 기억을 훔쳐봐야지."

[아.]

프레는 그 말뜻을 이해했다.

시우는 무명이 추출해 준 유리병의 봉인을 해제하고 뚜껑을 연 채 손바닥에 올려놨다.

[시작할까?]

"어."

[스킬 [마나의 유념]]

쿠웅!

손바닥 위에 우윳빛 서클이 생기며 수십의 획이 종횡무진 그어진다.

그 서클의 중심부로부터 열두 글자가 빠르게 새겨지더니 이윽고 눈부신 빛살을 흩뿌린다.

출렁.

그 마법진 중앙에 놓여 있던 유리병 속 마나가 부글부글 끓기 시작한다.

푸슈ㅡ욱

허공을 향해 솟구치듯 뿜어져 나온 마나액.

하지만 시우는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그 마나를 뚫어져라 응시하기만 했다.

분수처럼 쏟아져 흘러넘치던 마나액은 이윽고 공중에서 천천히 응집하더니 한 형상을 구축했다.

정민준의 모습이었다.

인상파의 그림처럼 그가 마지막 순간 겪었을 일들이 마나로 덧칠해져 표현되었다.

"혼자 있는 게 아니야."

책상에 있던 정민준은 연구소에 들어온 누군가를 보며 따지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상대의 모습이 흐릿했다.

마치 모자이크를 한 것처럼 알아보기 힘들다.

이건 CCTV 같은 게 아니라 정민준의 감정이 녹아든 마나를 구현한 것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결국, 상대가 움직이고 정민준이 자신의 스킬을 펼쳐 맞대응한다.

표현되는 마나의 움직임이 거칠었다.

"···강했네, 상대가."

정민준은 절대 약한 헌터가 아니었다.

샤오롱이나 강여화에 비하면 약한 축에 속했지만, 그도 시우의 제자.

쓰러진 정민준의 눈으로 상대의 모습이 보인다.

이윽고 몸을 숙여 정민준을 향해 씩 웃는 암살자.

정민준이 입을 껌뻑인다.

[마나의 유념]은 소리는 들리지 않기에, 대신 시각을 잔뜩 열어 정민준의 입 모양을 관찰했다.

"V···I···P의 명령이냐."

시우는 그 입술을 천천히 따라 읽었다.

정민준의 마나가 점점 흐릿해진다.

적을 형상화한 마나가 점점 뾰족해진다.

죽음의 순간 느꼈을 그의 감정.

그리고.

정민준의 질문을 들은 상대방이 대답한다.

마지막 찰나, 얼굴이 순간적으로 드러난다.

시우는 그 입술 역시도 차근차근 따라 읽었다.

"아니, 더 위다."

〈14화〉

초대받지 않은 손님

정민준의 과거를 보여 주던 마나의 형상이 찢어질 듯 사방으로 흩어졌다.

시우는 다시 유리병 안으로 모여드는 마나를 보며 중얼거렸다.

"VIP, 그보다 더 위라."

[VIP가 뭐냐. 치킨 이름이냐?]

"손님이나 귀빈. 혹은 중요한 사람, 특별히 대해 줘야 하는 사람을 뜻하는 말이긴 한데."

어디에 속했느냐에 따라 가리키는 대상이 달라지겠지.

민준이가 연구소 말고 속해 있는 곳이 있나?

연구소에서 VIP를 지칭할 사람이 있을 것 같지는 않은데.

시우는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물론 정민준을 죽인 범인은 'VIP보다 더 위'에서 시킨 명령이라고 했다.

최종 명령권자는 'VIP보다 더 위'인 존재.

[손님? 귀빈? 중요한 사람? 그게 누구냐. 치킨 주는 사람이냐? 그런 거냐? 나한테는 중요한 사람이다.]

얜 뭐 기승전 치킨이야.

그런데 보통 VIP라고 하면 그놈이 제일 윗사람일 텐데.

VVIP··· 그런 게 따로 있는 조직인가.

됐다, 범인을 잡아서 물어보면 될 일이니까.

시우는 마지막 찰나의 순간 보았던 범인의 얼굴을 또렷이 기억해 냈다.

저도 모를 살의가 속에서부터 회오리친다.

범죄자라면 분명 HMCS 데이터베이스에 있을 것이다.

만약 없다면 다른 방법을 쓰면 되고.

[그런데 밖에 이상한 놈들이 있다.]

"······."

시우는 프레의 말에 재빨리 마력을 펼쳐 영역을 넓혔다.

빛이 쏘아지듯 아주 빠른 속도로 확장되는 그의 공간.

시우는 눈을 감고 마력에 감지되는 것들을 느꼈다.

"하."

실소가 흘러 나온다.

아닌 게 아니라 일곱 명의 각성자가 그를 포위하며 다가오고 있었다.

모두 마력을 운용한 상태.

단순 정탐이 아닌 목적과 의도가 분명하단 소리.

[뭐냐, 이것들은?]

프레는 뚱한 목소리로 물었다.

위기의식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태도.

"글쎄."

하지만 시우 역시도 귀찮단 어투인 건 마찬가지.

두둑.

그는 손가락 관절을 꺾었다.

기분 좋은 소리가 들린다.

"물어보면 알겠지."

시우의 눈이 서늘한 빛을 내뿜었다.

***

[적광 길드]의 암행부.

그곳의 조장을 맡은 류옌팡은 기분이 몹시 더러웠다.

한국이라는 먼 나라에까지 와서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거트 이 개자식! 고작 한 놈을 죽이자고 암행부 일곱을 불러내다니. 길드장이 아끼는 자식만 아니었어도! 게다가 목표 대상은 저게 또 뭐야?'

두 번째로 기분이 더러운 이유는 목표 타깃 때문이다.

그는 탐탁지 않은 얼굴로 거트가 점찍은 대상을 멀찌감치서 관찰했다.

강한 헌터는 얼굴만 봐도 아는 법이다.

하지만 상대에게선 그 어떤 느낌이나 전율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수 중의 하수.

'거트 놈의 형을 죽였다고 해서 기대했는데, 순 운이었나 보군. 아니면 거트 형이라는 자가 하급 각성자였든지. 어쨌든 HMCS라는 딱지 외에는 별 볼 일 없는 놈이다.'

그럼에도 암행부 일곱을 부른 조치는 1조 단장인 거트의 분노에 기인한 것일 터.

'목표를 쥐잡듯이 몰아서 고통스럽게 죽이려 하는 것이겠지. 고작 저딴 놈을 경계해서 일곱이나 부른 건 아닌 것 같고.'

류옌팡은 혀를 끌끌 찼다.

약해 빠진 적이 불쌍하게 느껴진 탓이다.

거트의 잔인한 성미로 미루어 짐작건대, 죽여달라고 빌기 전까지는 죽지도 못할 게 분명했다.

"류, 준비 다 끝났다. 명령만 내리면 돼."

부조장이 다가오더니 조장인 류옌팡에게 보고했다.

"다 잠복했어?"

"연구소를 기준으로 둥글게 잠복했다. 각기 다른 입구로 들어가도록 대기 시켜놨어."

"수고했어. 거트 단장에게 물어보고 실행하도록 하지."

류옌팡은 고개를 끄덕인 뒤에 곧바로 거트에게 전화를 걸었다.

- 나다.

"예, 단장님. 안에 들어간 걸 확인했습니다."

- 놈은 혼자인가?

"그렇습니다. 폐건물로 보이는 곳이고, 탐지 스킬을 사용해 본 결과 안에는 타깃 혼자만 있습니다."

- 잡아 놓을 수 있겠나?

류옌팡은 잠시 숨을 고르고 내뱉었다. 마나로 안광이 번뜩인다.

"우리를 부른 시점에서 답은 나온 것 아니겠습니까."

- 알았다. 한국 헌터 협회 놈들을 따돌리고 가겠다.

무뚝뚝하지만 단호한 거트의 대답.

삑. 통화가 끊겼다.

종료음이 귀에 선명하다.

류옌팡은 고개를 들었다.

반달이 구름 너머로 설핏 고개를 내비친다.

하늘은 홍콩이든 한국이든 똑같군.

그는 복면을 조심스레 뒤집어썼다.

"거트 단장의 명령이 떨어졌다. 적의 손발을 묶어놓는다."

부조장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순식간에 모습을 감췄다.

1분 정도가 지났을 무렵. 준비가 갖춰진 것을 깨달은 류옌팡은 걸음을 옮겼다.

단전에서 흘러나오는 마력이 그의 전신을 물들였다. 마나를 활용한 육체강화.

B+급 헌터의 강인한 신체에 마나가 덧대어지며 더욱 단단하고 파괴력 짙은 육체로 재탄생됐다.

그는 흘러넘치는 기운을 어서 발산하고픈 생각에 손가락이 근질거렸다.

'고대 역사 연구소'

낡아빠진 현판이 비스듬하게 기울어진 입구.

류옌팡은 수신호로 다른 조직원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일제히 각기 다른 방향으로 쳐들어가 포위하려는 속셈.

셋.

둘.

하나.

콰앙!

챙그랑!

동시에 일곱 방향에서 일곱 개의 형상이 솟구치듯 안으로 들이쳤다.

다행히 연구소 주위로는 아무것도 없었기에 가능한 침입.

류옌팡은 당당하게 정문을 까부수고 성큼성큼 발을 내디뎠다.

'허둥지둥 당황할 놈의 모습이 그려지는군. 바닥에 오줌이나 지리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조용히 쥐도 새도 모르게 처리하는 일이 있는가 하면, 이렇게 요란한 방식으로 상대의 혼을 쏙 빼놓는 방법도 있다.

목적에 따라 다른 것인데, 이번 타깃은 암살이 아니라 기선제압 후 거트에게 양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류옌팡은 먼지가 피어오르는 어둠을 날카로운 눈으로 훑었다.

연구소 안은 오래된 탓에 불이 들어오지 않았고, 대신 돔으로 된 천장에서 투과된 달빛이 내부를 어슴푸레 밝히고 있었다.

잔뜩 겁먹고 바닥에 주저앉아 있을 놈을 상상한 류옌팡은 기분이 고조되는 것을 느꼈다.

덜덜 떠는 놈을 고스란히 거트에게 넘겨주는 방법도 있지만, 류옌팡의 생각은 달랐다.

'우리를 개고생시킨 값은 받아 내야지. 이깟 일에 한국까지 오게 했으니 말이야.'

정신이 무너지기 전까지 실컷 가지고 놀다가 거트가 올 때쯤 포션으로 상처를 대충 지혈하고 건네줄 것이다.

붙잡는 데 저항이 심해서 조금 혼을 냈다고 하면 거트도 뭐라 하지 못할 터.

'게다가 거트도 죽이려고 놈을 원하는 건데. 우리가 손 좀 댔다고 해서 잔소리하진 않겠지.'

정문을 부수고 놈이 있는 곳까지 걷는 데 2~3초나 걸렸을까.

류옌팡은 잔뜩 득의양양한 얼굴로 놈을 마주하려 했다.

"······뭐야."

하지만 그런 기대는 와장창 깨지고야 말았으니.

놈은 태연하게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것도 한쪽 팔로 턱까지 괸 채로.

"정신이 나가 버린 건가."

류옌팡은 중얼거렸다.

튜토리얼 탑에서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애송이라더니, 사태 파악을 못 하는 것도 유분수지.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런 건방진 표정을 보려 한 게 아니었다.

감히 자신을 상대로 말이다.

"야."

그때 타깃이 입을 열었다.

"네가 여기 대장이냐?"

류옌팡은 입술을 비틀었다. 헛웃음이 나왔다.

"그렇다면?"

"내가 오늘 기분이 구리거든. 이대로면 다 죽일 것 같은데··· 솔직히 그러기도 귀찮아서 말이지. 옵션을 두 개 줄게. 죽을래, 꺼질래?"

놈은 한껏 가라앉은 눈매로 귀찮은 듯 물었다.

얼굴에는 특유의 권태가 가득했고, 표정은 시리도록 차가웠다.

류옌팡은 알 수 있었다.

저 목소리엔 허풍도, 과장도, 거짓도 없다는 것을.

진심으로 하는 경고.

고작 하급 각성자 따위가 말이다.

'아가리 잘못 놀린 걸 후회하게 해 주마.'

류옌팡은 허리춤에 찬 단도를 몰래 매만지며 타깃의 주의를 끌었다.

"어린놈의 새끼가 각성 한번 했다고 천지 분간 못 하고 입을 놀리는군. 두 가지 옵션이 다 마음에 안 드는데ㅡ 세 번째 옵션은 어떤가? 네놈의 혓바닥에 칼을 쑤셔 박는 옵션 말이야!"

그러고는 번개 같은 속도로 단도를 쏘아 던졌다.

퍽!

빈 의자에 처박히는 검.

"사라졌··· 스킬인가?"

조직원 중 한 명이 중얼거렸다.

"그럼 첫 번째 옵션을 선택한 거로 알지."

순간적으로 들리는 얼음장 같은 목소리.

퍼거걱!

조직원이 고개를 돌리려는 찰나, 목뼈가 으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시야가 까맣게 물들었다.

순식간에 생겨 버린 첫 사망자.

"젠장! 웨이신!! 네 뒤에 있다!"

류옌팡은 다급하게 외치며 스킬을 사용했다.

양손에서 마법진이 생성되더니 붉은 쇠사슬이 촤르륵ㅡ 소리와 함께 시우에게 솟구치며 발사됐다.

"이 개자식!"

웨이신은 [이형계]의 특성답게 온몸에 가시를 세웠다.

수백 개의 가시가 성게의 그것처럼 돋아나더니 시우를 향해 쏘아져 나갔다.

퍼버벅!

"커억···."

하지만 시우는 다른 암살자의 몸을 방패 삼아 그 가시를 전부 막아 냈다.

가시를 실컷 처맞은 암살자는 몸을 바들바들 떨더니 축 늘어졌다.

"린웨이!!! 이 찢어 죽일 놈이!"

류옌팡은 순식간에 두 명이나 죽자 피가 거꾸로 뒤집혔다.

이런 전력 손실은 감히 예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쾅! 쾅! 쾅!

분노에 찬 쇠사슬이 연구소의 벽을 갉아먹으며 시우를 옭아맬 듯 뱀처럼 움직였다.

"내가 할게!"

다른 암살자가 스킬을 발동시켰다.

"[화염구]!"

거대한 불길이 입에서 화염 방사기처럼 쏟아져 나왔다.

모든 걸 녹여낼 듯한 열기가 시우를 향해 거침없이 타올랐다.

시우는 다른 공격을 피해 요리조리 몸을 피하다가, 화염을 보더니 자리에 우뚝 섰다.

"재밌네? 마력으로 뜨자 이거지?"

그리곤 손 하나를 내밀었다.

[저딴 하급 화염 마법에 지지 마라.]

손바닥 주위로 거대한 마법진이 생성되며 수십의 획이 서클을 가로지른다.

연이어 아홉 개의 문자가 새파란 빛으로 물들더니 서늘한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이, 이건···!"

"[아이스 스톰]"

쩌저저저저적!!

시우를 중심으로 맹렬한 냉기가 회오리쳤다.

그가 딛고 있던 바닥부터 책상, 의자, 기둥, 심지어는 속박하려던 사슬까지 순식간에 찬 서리가 끼며 얼어붙었다.

[이 정도는 되어야 스킬인 것이다.]

"저 새끼 마법사란 말 없었잖아?! 힐러라며!!"

류옌팡이 탐지형 헌터를 향해 쏘아붙이듯 물었다.

휘몰아치는 냉기에 얼굴 살갗이 찢겨나가는 기분이다.

"힐러 맞지. 지금은 냉찜질 시간이고."

시우는 한쪽 입꼬리를 을리며 히죽 웃었다.

[식량아, 너 기뻐 보인다. 변태다.]

시우를 집어삼킬 것 같던 불길과 그의 빙결 마법이 중앙에서 맞부딪친다.

두 마법의 격돌로 엄청난 섬광이 터져 나오며 충격파가 일대를 뒤흔들었다.

"크으으윽!!"

화염 스킬을 쓰던 암살자는 얼굴이 새빨개지도록 단전에서 마나를 있는 대로 끌어다 썼다.

파즈즈즈즛!

'말도 안 돼··· 빙결 마법은 절대 내 화염 마법을 이길 수가 없을 텐데?? 대체 이 자식은 뭐야!'

그는 마나가 바닥나는 걸 실시간으로 느끼고 있었다.

단전이 찢어질 것 같았다.

그래도 공격을 멈출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마나가 텅 비는 순간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우리란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조금 속도를 올릴까? 환자가 힘들어 보이는데."

시우는 마력의 강도를 살짝 더 높였다.

단전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나량을 약간 더한 것뿐이다.

쩌저저저··· 쩌엉!

엄청난 냉기가 마법진에서 귀신의 숨결처럼 흐르며 주위 온도를 캄캄한 어둠과 같이 만들었다.

암살자들은 자신의 시야를 어지럽히고 살갗을 에는 한기에 덜덜 떨며 어찌할 바를 몰랐고,

파즈즈즈··· 쩌저저저적!

"크어어억, 어어, 허어억."

점차 쪼그라드는 화염을 바라보던 암살자는 자신의 손과 입, 발가락이 서서히 얼어붙는 광경을 바라만 봐야 했다.

"이 정도면 될까?"

시우는 마법을 거두고 사위를 일별했다.

살아남은 다섯의 암살자들은 시우를 향한 채 반쯤 얼어붙은 몸으로 달달 떨며 서 있었다.

"이제 한 사람당 질문을 딱 하나씩 할 거야."

시우는 가장 가까이에 있던 화염술사를 향해 갔다.

"조직 이름은?"

"······."

"시간 초과."

퍼ㅡ엉!!

산산조각이 나는 머리.

사방으로 쏟아지는 파편.

얼어붙은 몸이 기우뚱하더니 쿵, 하며 옆으로 쓰러졌다.

시우는 다음 암살자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서슬푸른 안광이 어둠 속에서 달빛을 머금은 채 미소 짓고 있었다.

"으, 으지 므!!! 으지 믈르그!!"

입술이 얼어붙은 암살자가 필사적으로 소리쳤다.

그 소리를 들은 시우는,

씩ㅡ 입꼬리를 올리며 즐거워했다.

그리곤 한쪽 손을 들어 올렸다.

이윽고 퍼ㅡ어엉! 소리와 함께 터져 나갈 줄 알았던 머리는,

"으··· 으? 드, 든증님!"

누군가의 마력으로 살아남았다.

"네가 내형을 죽인 놈이냐?"

입구에서 살기 어린 시선 하나가 거센 마력을 숨기지 않은 채 다가왔다.

"······"

시우는 자신의 공격을 처음으로 막은 상대를 향해 눈길을 돌렸다.

타오를 듯 붉은 머리가 달빛 아래서 선연히 모습을 드러냈다.

〈15화〉

오리지녈 기술

시우와 암살자가 막 만났을 무렵.

"거트 헌터. 이곳이 묵을 숙소입니다."

〈한국 헌터 협회〉 직원의 안내에 거트는 외국인 헌터 전용 게스트하우스에 도착했다.

말이 게스트하우스지 초고급 주상 복합 오피스텔에 가까운 건물이었다.

거트는 삼엄한 경비를 둘러보더니 물었다.

"외출은 가능한가?"

"아뇨. 내일 출국 시까지 외출은 불가능합니다. 주상 복합이라 안에 필요한 것들이 다 있어서 외출하지 않아도 불편한 건 없으실 겁니다. 혹시 따로 원하는 게 있다면 직원한테 말씀하시면 되고요."

"만약 무단으로 외출하게 되면?"

거트의 물음에 헌터 협회 직원은 쓴웃음을 지었다.

너무 노골적인 도발이 아닌가.

"그 즉시 〈한국 헌터 협회〉 소속 상급 헌터들이 출동합니다. 필요하다면 스킬을 통한 제압을 하게 되고, 이후 가장 빠른 비행기로 강제 추방됩니다. 또한, 헌터 국제법에 의거 상당한 금액의 벌금과 헌터로서의 징계를 받게 될 겁니다."

아주 차갑고 이론적인 대답.

A급 헌터를 앞에 두고도 표현에 거침이 없다.

거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저 안에는 무수히 많은 CCTV와 감시 인력이 있을 것이다.

아무리 A급 헌터인 자신이라 해도 그 모든 것들을 피해 건물 밖으로 나올 수는 없는 노릇.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라 피곤하군."

"네?"

"외출 가능한 시간은 지금뿐인가."

"······막아!!"

뭔가를 느낀 헌터의 몸이 반응하기도 전ㅡ

뻐억!

그보다 더 빨리 움직인 것은 거트의 당수였다.

"젠장!!"

뒤에 대기하고 있던 헌터들이 달려들었다.

그들 모두 B급과 B+급이었지만, 전투에 특화된 헌터는 아니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거트는 한국을 방문한 일종의 반갑지 않은 손님. 따라서 굳이 A급의 전투 헌터를 경호원으로 붙이지 않은 것이었다.

"반응이 느리군."

거트는 침착하게 자신의 스킬을 발동시켰다.

마력을 권갑에 응축시키자 푸른 빛줄기가 섬전을 뿌리기 시작한다.

"피, 피해!!"

그의 스킬을 알아본 협회 헌터 중 한 명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거트의 파괴력 짙은 스킬은 전투 헌터들 사이에서도 유명한 기술.

만약 무방비 상태에서 직격으로 맞는다면 치명상 정도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늦었다."

그러나 거트의 스킬이 발동하는 게 조금 더 빨랐고,

콰가가가가!

가공할 푸른 마력이 대지를 깨부수며 사방을 할퀴고 타고 왔던 자동차를 반파시켰다.

수류탄이 터졌다고 해도 믿을 정도의 상흔.

게스트하우스 쪽에서 웅성거림이 들려온다.

거트는 쓰러진 한국 헌터 협회 사람들을 둘러봤다.

다행히도 일어나서 다시 덤비는 자는 없었다.

"미안하다."

그는 류옌팡이 보낸 GPS 위치를 확인한 뒤 발을 움직였다.

'다리에 마나를 싣고 달리면 15분쯤 걸리겠군.'

파바바바바박!!

어두컴컴한 달빛 아래 힘차게 내달리는 그의 모습은 한 마리 들짐승을 연상케 했다.

거트는 터질 것 같은 살기를 꾹꾹 억누른 채 시우의 얼굴만 떠올렸다.

외교적 결례가 될 것은 물론, 차후 자신의 헌터 생활에 지장이 있을지도 모를 일을 하면서까지 이런 사태를 벌이는 이유.

복수심.

'기다려라. 형의 마지막처럼 네 두개골을 천천히 갈라서 쪼개 주마.'

그는 타오르는 마음을 갈무리하며 발에 더 큰 힘을 실었다.

붉은 머리가 바람에 마구 나부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