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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그리움이 닿는 곳

일년.

그리고 십 년.

그럼에도 백 년.

때가 잔뜩 끼어 움직이기를 멈춘 기계처럼, 녹슬어 굳은 기억을 조금씩 움직여 본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시우는 자신의 머릿속을 깨끗이 닦아 냈다.

꽤 오랜 시간 과거를 보지 않고 살았다. 아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는 눈앞의 살풍경을 힐끔 바라봤다.

두 개의 달이 떠 있는 사막.

조각조각 널브러진 수백 구의 사체.

핏물을 잔뜩 머금은 모래알.

건조하게 불어오는 바람까지.

마지막을 장식하기에 너무도 좋은 장소이지 않은가.

숨을 들이켠다.

조용히 내쉰다.

코끝이 모래 때문에 까슬까슬하다.

[식량아, 조심해라. 기운이 느껴진다.]

"알고 있어."

시우는 무심하게 대꾸했다.

콰아앙!

대답이 끝나는 찰나, 지축을 뒤흔드는 엄청난 굉음이 울린다.

시우는 예상했다는 듯 몸을 굴려 피했다.

땅에서 솟구치는 붉은 칼날.

그러나 한 개가 아니다.

콰아아아앙! 콰아아앙! 쾅!!

잇달아 수십 자루의 칼날이 하늘을 찌를 듯 솟구쳐 올랐다.

하나하나가 빌딩 한 채와 맞먹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크기.

콰아앙! 쿠과아아앙!

인근 지형이 반파되며 모래 알갱이가 거침없이 비산했다.

휘날리는 모래바람 덕에 시야가 뿌옇다.

시우는 몸을 바쁘게 움직였다.

쥐가 건드린 덫이 발동하듯, 시우가 있던 자리마다 칼날이 끔찍하게 치솟았기 때문이다.

[저놈, 공격에 마법을 섞었다.]

게다가 칼날에 스친 시신들이 화르륵, 타오르기까지 했다.

닿기만 해도 타 죽을 정도로 격한 불길이다.

단순히 파괴력만 갖춘 공격이 아니라 염화 마법이 함유된 멸살격.

상대를 죽이겠다는 일념이 있어야만 가능한 수단들이다.

[식량아, 죽으면 안 된다. 넌 내가 먹어야 한다.]

"할 수 있으면 그러시든가!"

그 엄청난 맹공을, 시우는 간발의 차로 모두 피해냈다.

불길이 닿거나 칼날에 스친 흔적조차 없다.

콰앙!

마지막 칼날이 사라진 뒤, 시우는 멀찍이 서서 다음 공격이 오는 것을 차분히 기다렸다.

바람이 분다.

적막이 흐른다.

『제법이군.』

어디선가 들리는 이질적인 음성.

시우의 시선이 소리를 향해 따라갔다.

그곳엔 달빛을 머금은 거대한 존재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흉포한 외형.

검은 날개와 조각처럼 단단한 비늘.

큼지막하게 맞물린 이빨.

그리고 공룡의 얼굴을 닮은 머리.

고대의 신화적 존재.

마룡이었다.

그 격이 다른 존재는 날개를 느릿하게 펄럭이며 공중에서 천천히 내려왔다.

서슬 푸른 시선이 시우에게 닿는다.

찔러 죽일 것처럼 매서운 기세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벌레에게 느끼는 하찮은 분노에 가까웠다.

마치 '웬 날벌레가 눈앞에서 성가시게 하는군.' 같은 모습.

하지만 그에 비해 시우는 무감정에 가까웠다.

「필멸자여.」

"왜 불러."

『나는 그대의 조상이 태어나기 이전부터 이곳에 둥지를 틀고 살던 존재이니라. 네가 누구를 상대하고 있다고 생각하느냐. 그대 앞에 있는 존재가 무어라 여기는 것이냐.』

근엄한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사막에 메아리친다.

왕의 그것처럼 표현에 거침이 없다.

『대답해 보거라. 내가 무엇이라 여기느냐.』

"글쎄."

시우는 뚱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머리를 긁적이더니 나른한 말투로 대답을 이었다.

"존나 큰 도마뱀?"

「······감히!」

꽈앙!!!

전광석화 같은 일격.

시우가 서 있던 자리에 꼬리가 채찍처럼 휘둘러졌다.

평범한 사람의 눈으로는 웬 폭발이 일어날 줄로만 알 것이다.

인간 따위가 지고의 존재에게 함부로 행동하다니 .

"몸은 산만 한데, 심보는 도마뱀 좆처럼 작네."

마룡은 흠칫, 고개를 돌린다.

죽었을 거라 여겼던 시우가 자신의 옆에서 히죽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성보단 본능에 충실한 탓일까.

마룡은 판단하기에 앞서 다시 공격할 태세를 갖췄다.

[식량아, 내가 도와줄 수 있다.]

시우는 자신의 내면에서 들리는 음성에 피식 웃음을 흘렸다.

"객식구. 아직은 나 혼자서 가능해."

시우는 날아오는 마룡의 공격을 보고는 자신의 마나를 폭발적으로 운용했다.

키이一잉!

마치 스포츠카의 엔진이 돌아가듯, 그의 마나맥에서 엄청난 기운이 공회전하며 기운을 뿜어 대기 시작했다.

시우는 자신의 근육 구석구석에 마나를 주입시키곤 곧장 땅을 박차고 올랐다.

마룡의 공격이 다시 솟구쳐 들어갔다.

오색빛깔의 마법이 공중을 수놓으며 시우를 향해 내달렸다.

쿠구구구구구!

하늘을 찢어발길 듯한 폭음과 지축을 파괴하는 마나의 맹공이 펼쳐졌다.

그 모든 마법이 시우의 강인한 육체에 막혀 무위로 돌아간다.

시우는 마룡의 몸체에 다다라 마나를 가득 실은 공격을 내질렀다.

마룡 또한 그 공격을 마냥 지켜보지 않고 마법을 내갈겼다.

쩌一엉!!!

서로의 공격이 부딪치며 어마어마한 파공음이 울려 퍼진다.

엄청난 격돌에 사막의 지형이 틀어지고 모래 폭풍이 휘몰아친다.

이어서 땅이 갈라지고 충격파에 바위산이 가루가 된다.

치열한 공방이 수십 합을 넘어선다.

그 끔찍한 공방전을 견디다 못한 마룡이 결심한 듯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검은 보석 같던 육체는 시우의 공격으로 흉물스럽게 찢어지고 피를 흘려대고 있었다.

『어리석은 필멸자여, 너를 영겁의 무(無)로 돌려놓겠다. 이것은 위대한 존재를 거스른 형벌이니라.』

일순 주위의 마나가 진공상태처럼 마룡을 향해 급격히 빨려들었다.

마나를 보지 못하는 비각성자조차 알아차릴 만큼 어마어마한 양이었다.

놈의 날카로운 이빨 사이로 자연의 마나가 회오리처럼 뭉쳐진다.

검붉은 색의 마나 덩어리가 점차 압축되며 조금씩 부풀어 오른다.

[식량아, 함께해서 더러웠고 다시는 만나지 말자.]

"좀 닥치라고."

시우는 단전을 활짝 열어 있는 대로 마나를 뽑아낸 다음, 마나를 얇게 펴 육체 위에 층층이 쌓아 올렸다.

그러고는 몸을 틀어 방어 자세를 취했다.

지이잉一

쿠워어어어!!

마룡이 공격을 토해 낸다.

진정한 용만이 구사할 수 있는 최대의 비기, 자연의 마나 그 자체라 여겨지는 [용의 숨결]이 한 인간에게 무차별적으로 난사된다.

콰과과과가가가가가가!

천지가 요동친다.

거대한 붉은 섬전이 일대에 퍼지며 삽시간에 온 천지를 초토화했다.

말 그대로 흔적도 없이 산화된 사막.

『크허억··· 이게 대체 얼마 만에 쓴 기술인지···.』

사위가 먼지처럼 조용해진다.

마룡은 숨을 헐떡였다.

자신의 모든 공력을 소모했기에, 그는 만족했으며 힘들어했다.

그는 초토화된 주위를 둘러본 뒤에 자신의 공격이 가닿은 바위산으로 날아갔다.

공격이 그곳에서 멈췄고, 희미한 인기척 또한 그곳에서만 났기 때문.

마룡은 날갯짓에도 힘이 부치는지 조금 휘청이며 그곳에 당도했다.

『아직 숨어 뭍어 있다니. 대단하다, 필멸자여.』

마룡은 정말 놀란 것처럼 말했다.

[용의 숨결]을 받고도 살아 있는 존재는 다른 용을 제외하고 처음이었다.

시우는 바위산 아래 피 칠갑한 채로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가는 숨을 쉬며 배에 손을 얹은 채다.

구멍이 뻥 뚫린 복부에선 쉼 없이 피가 뿜어지고 있었다.

얼마 남지 않은 모습이다.

이대로는 5분도 살아 있지 못할 터.

마룡은 그런 그가 대단하다는 듯, 그러면서도 승자의 위엄을 잃지 않고 시우를 마주했다.

『할 말이 있는가?』

"내가······ 쿨럭! 집에······ 가야 하거든. 그런데 집이······ 멀어."

시우는 입에서 핏물을 질질 흘리며 가쁜 호흡을 유지한 채 이야기를 시작했다.

"정말 궁금한데······ 쿨럭! 그게······ 너한테 있냐."

곧 숨이 끊어질 것 같은 목소리에 마룡은 푸드덕대던 날개를 접었다.

『집이라. 확실히 네놈의 모습은 이곳의 필멸자들과 결이 다르군. 차원 이동을 말하는 것이라면 내게 있다.』

"용마다 다 있는 게 아니라······ 너한테만 있는 거야?"

『내 심장의 고유마법이 차원에 관련된 것이니 다른 동족에게는 없겠지.』

시우는 피식 웃더니 고개를 뒤로 젖혔다.

아주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그의 두 눈은 맑은 밤하늘을 보고 있다.

"내가 그거 찾으려고······ 얼마나 굴렀는지 알아?"

그 물음에는 자조가 섞여 있다.

눈앞의 상대에게 묻는 것이 아닌, 스스로 되묻는 씁쓸한 회상.

"자그마치 백 년이야, 백 년. 이 빌어먹을 이계에서."

그는 헌터였다.

제4계 마왕을 제자들과 때려눕힌 것까지는 좋았다.

마왕을 상대로 인간이 벌인 최초의 승리였으니까.

그런데 그 마왕이란 놈이 아티팩트를 하나 지니고 있었는데, 그게 상대를 다른 차원으로 보내는 젠장맞을 카운터 능력이었던 거다.

마왕을 쓰러뜨린 일등공신이자 파티의 리더였던 시우는, 그렇게 다른 차원의 세상으로 오게 됐다.

그 후로는 피 튀기는 삶의 연속이었다.

생존을 위한 살육이었고, 목표를 위한 전투의 반복이었다.

배신과 모략이 그림자처럼 함께했으며, 그 끝은 처절한 복수뿐이었으니.

살고자 했다.

살아남고자 했다.

기약도 희망도 없는 영겁과도 같은 시간 속.

그를 붙잡아 준 단 하나의 희망.

단 하나의 목표.

집으로 돌아가는 것.

그리고 그 집으로 돌아갈 유일한 방법이란 용이 가지고 있는 '차원의 구슬'을 먹는 것뿐이었으니.

그 길이 녹록하지 않았으리란 건 불 보듯 뻔한 일.

『백 년간 헛고생하느라 수고가 많았구나. 대신 고통스럽지 않게 죽여 주마.』

마룡은 어서 이 전투를 매듭짓고 싶었다.

수천 년을 살아온 그에게 시우와 같은 강자는 손에 꼽힐 정도로 적었다.

고작 인간 따위가 말이다.

이번에는 마룡조차 위험하다고 느끼는 순간이 더러 있을 만큼 아슬아슬했다.

고로 후환은 없애는 게 지혜로운 법.

그 어떤 존재보다도 이기적이고 오만한 용족.

따라서 그 판단은 틀린 게 아니었다.

"어쩐지······ 다른 용들 건 먹어도 소용이 없더라."

다만 마룡은 잘못된 판단을 한 가지 범했다.

『그게 무슨 말이냐.』

죽어 가는 남자가 평범한 데미지 딜러였을 거라는 착각 말이다.

우ㅡ웅.

시우의 양손에 마법진이 떠오른다.

금빛 찬란한 문양이 빛나더니, 이윽고 더 강한 빛을 뿜어 대기 시작한다.

피가 멈춘다.

내장이 상처 이전으로 회복된다.

상처가 세포 단위로 수복된다.

혈색이 돌며 마나의 흐름이 정상화된다.

이 모든 과정이 1초도 되지 않는 순간에 벌어졌다.

『이······ 말도 안 되는!!』

마룡조차도 생전 처음 보는 광경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일반적인 힐러라고 한다면 고작해야 상처를 대강 막고 지혈하는 정도가 보통.

근육과 내장까지 파고든 상처는 함부로 손을 대지 않는 게 정상이다.

자칫 잘못하다간 근육과 내장기관 및 혈관 따위가 기형적으로 서로 엉겨 붙는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자는 그 믿기지 않는 행태를 태연히 행했다.

그것도 순식간에.

"내가좀 특별해서 말이지."

이성 대신 본능이 앞섰던 마룡은, 이번에는 그렇지 못했다.

찰나의 방심과 경악이 부른 악수.

콰드득!

미처 몸을 빼내지 못한 고귀한 존재는 끓어오르는 격통에 사지를 바르르 떨었다.

시우의 주먹이 번개같이 마룡의 중심부를 꿰뚫은 것이다.

손끝으로 느껴지는 단단한 무언가가 뜨겁게 맹렬히 움직인다.

마룡은 두 눈을 크게 뜬 채 움직이지 못했다.

입에서 주르륵 피가 흘러내린다.

시우는 히죽, 웃었다.

차가운 미소였다.

"심장, 내가 갖고 간다."

『······!!』

푸욱.

마룡의 심장이 통째로 뜯겨 나온다.

거대한 거체가 기우뚱하더니 쿵, 하며 옆으로 쓰러진다.

수천 년을 살아온 지고의 존재치고는 너무도 허무한 최후.

그러나 시우는 그곳에 눈길 하나 주지 않고 오로지 손에 들린 심장만 바라본다.

마룡의 심장은 우리가 흔히 보는 심장과 모습이 상이했다.

거대한 보석처럼 빛나는 마나의 정수, 핵.

시우는 아득히 먼 곳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드디어 돌아간다."

[나도 간다.]

"닥치라고, 프레."

내가 살았던, 동생과 제자들이 있던.

지구로.

〈2화〉

귀환

울창한 숲.

빽빽한 수림이 파도처럼 펼쳐진 곳에 웬 남자가 쓰러져 있다.

남자는 한참을 죽은 듯 미동도 하지 않더니 순간 낮은 신음을 흘리며 몸을 뒤척였다.

"음······."

시우는 간신히 눈을 떴다.

입술이 마르고 목이 텁텁했다.

심한 몸살에 걸렸다 깨어난 사람처럼 뻐근하게 아려 오는 몸.

마법으로 아주 먼 이동을 했을 때 흔히 나타나는 부작용 중 하나였다.

"아 골이야······.'

자리에서 일어난다.

주위를 둘러본다.

낯설면서 낯익은.

그러니까 이곳이 지구인 것 같으면서도 아닌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하긴 꼭 서울에 떨어지란 법은 없으니.

수풀이 너무 무성해서 한국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굳이 따지자면 타국의 열대 우림 같다고나 할까.

지구에 도착한 거기만 하면 되는데.

우선 주변을 살펴보기로 했다.

살아 있는 생명체를 본다면 알게 되겠지. 지구에 있는 생물인지, 아닌지.

그가 있던 곳에는 지구와 비슷한 생물이 많았다.

그러나 '비슷'할 뿐 같지는 않았다.

의사소통이 가능한 종족도 있었다.

사람과 무척 흡사한. 마치 엘프나 드워프 같은 이종처럼 말이다.

다만 눈이 세 개라든가, 피부가 파랗다든가, 키가 3m라든가, 팔이 네 개라든가 하는 식이었다.

가끔은 몬스터가 더 친근한 모습일 때도 있었다.

그나저나 얘는 왜 조용해.

"야, 객식구."

시우는 자신의 몸속에 있는 녀석을 향해 불렀다.

100년간 함께 동고동락한 사이라 그런지, 이제는 웬만한 친구 이상으로 느껴지는 놈.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시끄럽던 녀석이 조용하니까 괜히 불안하다.

설마하니 나만 온 건 아니겠지···?

[왜 부르냐 식량아.]

어린아이 같은 천진난만한 목소리.

멀쩡하네.

"하도 약골이라 오는 도중에 뒈졌나 싶어서."

[나 식량보다 강하다. 식량은 기절했지만 나는 기절 안 했다. 식량 반 정도 죽었었다.]

아, 예. 그러세요.

나는 녀석의 자랑질에 대꾸하지 않고 주위를 살피며 마나를 감지했다.

흐음.

확실히 주변에 분포된 마나량이나 마나의 흐름이 이계에 있을 때와는 다르다.

지구가 이랬었나? 100년 전이라 기억이 나야 말이지.

시우는 터벅터벅 걸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온몸을 두들겨 맞은 것 같아 웬만하면 자리에 누워 쉬고 싶었다.

그러나 어딘지도 모를 곳에서 마음 놓고 쉴 수도 없는 노릇이니.

하다못해 다른 이계인지, 아니면 지구인지 정도는 알고 누워도 늦지 않을 터.

숲은 생각 이상으로 방대했다.

대충 사위를 훑어도 보이는 건 나무뿐.

높이 올라가서 보지 않는 한 규모를 짐작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숲이 원래 이래?"

그런데 이상했다.

생명체가 하나 나올 법도 한데 보이는 게 없다.

보통 이 정도 규모의 숲이면 하다못해 작은 산짐승이라도 보여야 하는데.

너무 조용하잖아.

심지어 새 지저귀는 소리조차도 없다.

이건 마치··· 게이트 안에 들어온 느낌과 비슷하다.

[식량아, 네 마나가 이상하다. 내 밥 너무 적다.]

그때 객식구가 뚱딴지같은 소리를 내뱉는다.

"뭔 소리야."

[너 마나 부족하다. 식량 가치 없다. 너 먹어 버린다.]

시우는 그 소리를 듣고 잠시 생각에 빠졌다.

그러고는 자리에 서서 자신의 마력을 점검했다.

흔히 단전이라 불리는 곳에서 거대한 에너지로 존재하는 마나.

그리고 그 마나를 몸 전체에 흘려 구체적인 힘으로 변환시킨 것이 마력.

막 깨어났을 당시엔 단순히 차원 이동으로 인한 부작용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몸이 안 좋은 거고, 그래서 마나의 흐름이 원활하지 않은 거라고.

설마하니 '또' 이런 일이 생길 줄이야.

시우는 미간을 찌푸렸다.

"아, 15··· 아니 20% 정도다."

[뭐가 말이냐?]

"내 컨디션. 신체 능력, 마력, 마나량 등등 다 포함해서."

그는 귀찮은 듯 혀를 찼다.

사실 이런 일이 시우에게는 처음이 아니었다.

지구에서 이계로 날아가게 되었을 때도 이것과 같은 현상이 있었으니까.

[20%면 너 개약골이다. 나 좁밥이랑 안 논다.]

"닥쳐, 미친놈아."

시우는 심드렁한 말투로 대꾸한 뒤 머리를 대충 쓸어 올렸다. 지난번과 같은 일이 또 있을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는데.

그때는 100%가 되기까지 몇십 년이 걸렸더라.

"짜증 나네."

[좁밥, 걱정마라. 내가 지켜 준다. 네 마나량 적어도 내 능력이면 싸워서 다 바를 수 있다. 엉아가 너 지켜 준다.]

"그것도 마나가 있어야 쓰지 멍청아."

[아.]

그래도 한번 경험해 봐서 어떻게 컨디션이 돌아오는지는 대강 알고 있다.

시우가 대단한 귀차니즘이라 그럴 뿐.

시우는 자신의 마나를 최대한 넓게 퍼뜨려 주위를 감지했다.

일종의 마나 레이더 같은 기술.

"뭔가 살아 있는 게 느껴지는데."

보통의 헌터라면 마나 소모량이 어마어마한 탓에 쉽게 쓰지 못하거나 좁은 반경으로만 써야 하는 능력이었다.

하지만 시우는 아니다.

애초에 최소한의 출력으로 마력을 운용하여 미세한 컨트롤이 가능한 헌터였으니.

그는 마나 움직임에 굉장히 민감한 체질이었고, 마력 조절과 세세한 술식 전개는 모든 헌터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능력 있으면 먹는다! 배고프다!]

시우는 생명체가 느껴지는 곳으로 내달렸다.

얼마나 달렸을까.

그곳엔 대형견 정도 크기의 두더지를 닮은 듯한 괴물이 있었다.

'이게 지구 게이트에 있던 몬스터였나.'

시우는 가물가물한 기억을 끄집어내려 애썼다.

아무리 기억력이 좋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100년이 지난 일, 그것도 하찮은 몬스터까지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쿠기기기!

몬스터는 시우를 발견하자마자 먹잇감이라 여겼는지 무서운 속도록 뛰어왔다.

[가라, 식량몬! 몸통 박치기!]

"너 월세방에서 쫓겨나고 싶냐?"

시우는 주먹을 쥐었다.

그리고 달려오는 몬스터를 향해 위에서 아래로 망치질하듯 주먹을 휘둘렀다.

투과아아악!

- 끄익!

몬스터는 머리가 터져 나가며 흙바닥에 깊숙이 처박혔다.

시우는 피가 뚝뚝 흘러내리는 주먹과 자신의 옷을 번갈아 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아, 젠장. 피 튀겼잖아."

[개약골인 줄 알았는데 조금은 강하다. 「좁밥은 개약골에서 약골로 진화했습니다.」]

"이 미친놈이."

시우는 자신의 몸을 때릴 수도 없어서 핏대 선 얼굴로 가슴팍을 노려보기만 했다.

이 또라이 같은 놈.

나중에 몸에서 나오기만 해라. 죽빵부터 갈기고 시작한다.

덕분에 이계에서 심심하진 않았지만, 인내심도 많이 늘었다.

얼른 이놈을 퇴마하든가 해야지.

시우는 손에 묻은 피를 나뭇잎으로 대충 닦아 냈다.

그때 웬 소리가 들린다.

멀리서부터 수풀을 헤치며 다가오는 움직임.

아주 빠르고, 급한 몸짓이다.

"야, 객식구. 어디서 소리 들리지 않냐?"

[소리? 들린다. 뭔가 다가오고 있다.]

시우는 다리에 힘을 줬다.

뭔가가 다가오는 방향으로 몸의 온 신경을 집중한다.

그의 컨디션치고는 엄청 빠른 대처였다.

몬스터만 봐서는 지구인지 아닌지 긴가민가한데.

조금 더 확실히 구분할 수 있는 생물체가 없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바스락 바스락.

소리의 주인공이 튀어나온다.

시우는 자신의 앞을 스치고 지나는 생물을 멀거니 쳐다만 봤다.

집중하고 있었음에도 아무 반응을 할 수 없었다.

[어?]

왜냐하면,

사······람?

무려 100년 만에 보는 정상적인 인류였다.

피부도 멀쩡하고, 날개나 뿔도 없고, 팔도 2개다. 눈도 2개고.

게다가 뒤통수에 이상한 입 같은 것도 달려 있지 않다.

사람이다!

뛰어간 사람이 이쁘고 몸매가 좋다는 것에는 반응이 바로 오지 않았다.

이종족인지 아닌지의 구분부터 한 시우.

안도감이 차오르며 머릿속이 맑아지는 게 느껴진다.

제대로 도착한 게 맞네.

그는 순수하게 기뻐했다. 자그마치 100년이다.

기쁘다는 말로도 다 표현하지 못할 정도의 행복감이 전신을 휘감았다.

그런데 다른 생명체도 곧바로 튀어나온다.

팔도 많고 생긴 것도 이상하다.

이건 낯이 익은데. 이종족인가?

그는 앞서 뛰어간 사람과 뒤에 따라오는 존재의 인과관계를 유추했다.

이종족··· 인간한테 구애하는 중인가?

하지만 지나갔던 여자의 표정으로 보면 썩 좋은 상황은 아닌 듯한데.

"정지."

시우는 파리를 잡듯 손바닥을 가볍게 휘둘렀다.

퍼一억!

뒤따라가던 몬스터의 머리통이 잘 익은 토마토처럼 터져 나간다.

그는 자신의 손바닥과 옷을 보며 조금 전과 비슷한 감상을 내뱉었다.

"씨발, 피 튀었네."

그는 옷에 튄 피를 대충 털어 내고는 시선을 돌렸다.

자리에 넘어진 여성이 자신을 보고 무척 놀라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사람이다.

"하아. 확실히 지구가 좋기는 좋네."

[식량아! 너랑 똑같이 생겼다. 내가 있던 곳에서 못 본 종족이다.]

이세계의 미인은 아무리 이쁘다 하더라도 그의 심란한 마음을 달래 주기엔 거리가 멀었다.

생각해 보라, 피부가 파랗고 눈이 세 개인 김X희라니.

그에 반해 지금 눈앞에 있는 여성은 정상적인(?) 신체 구조에, 이쁘기까지 하다.

시우는 노곤한 표정으로 여성에게 다가갔다.

그는 가장 먼저 필요한 질문을 건넸다.

"여기가 지구 맞아?"

"네······ 예???"

얼결에 질문에 답했던 여자는 놀란 나머지 다시금 되물었다.

미친놈인가. 아니면 엄청 미친놈인가.

백번 양보해서 '장소'를 물어본다고 하면 "강남역이 어딘가요."라든가 "XX백화점에 가려면 어떻게 하나요." 같은 걸 물어보지, "지구 맞아?"를 물어보지는 않는다.

잠시 미친놈을 바라보던 여자, 신지수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나 고민했다.

키도 크고 생긴 것도 나름 준수한 것이 이상한 놈 같지는 않아 보이는데.

목숨을 구해 준 남자다.

그러나 그녀는 고마움보다는 당혹스러움에 쉬이 다가가지 못했다.

"지금 이곳이 한국인 것도 맞고?"

"네? 네? 아, 네. 하, 하, 한국이죠."

신지수는 더듬거리며 답했다.

"연도는?"

"어··· 2037년이요···."

"좋아하는 음식은?"

"네? 치킨··· 삼겹살··· 곱창?"

[음식? 지금 음식 이야기했다. 나 배고프다. 나도 먹고 싶다.]

"한국이 맞네."

시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다른 차원으로 빨려 들어간 게 2027년이니 정확히 10년이 지난 셈이다.

사실 이만큼이나 시간이 지났을 줄은 몰랐지만, 100년이 안 지난 게 어디인가.

"지금 대통령 이름은?"

시우는 궁금한 질문을 하나 더 던졌다.

"지금 대통령은 최대수인데······."

신지수는 눈앞의 남자가 잘생긴 미친놈이라 내적 갈등을 겪는 중이었다.

경계해야 하는지, 불쌍하게 봐야 하는지.

그런데 최대수란 이름을 들은 남자의 표정이 처음으로 조금 찌푸려진다.

"최대수? 설마 눈깔 하나 없는 근육 덩어리?"

"네?? 네, 맞기는 한데."

신지수의 대답에 시우는 피식, 조소를 흘렸다.

설마하니 최대수가 대통령이 됐을 줄이야.

우습기가 그지없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더니, 그 변한 모습을 직접 확인해 봐야 직성이 풀릴 듯하다.

시우는 발을 옮기려다 멈칫했다.

길을 몰랐으니까.

"그나저나 여기는 밖이야, 안이야?"

그는 아까부터 마력을 뿌리며 이곳이 어딘지를 파악하려 했다. 그런데 느낌이 이상했다.

안도, 바깥도 아닌 희한한 마나 벽에 가로막혀 기운이 더는 뻗어 나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마치 드래곤 때문에 갇혀 있던 아공간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여기는 튜토리얼의 탑이라고··· 몇 년 전에 갑자기 생긴 건물이에요."

이어지는 신지수의 설명.

시우는 팔짱을 낀 채 가만히 듣기만 했다.

"그러니까. 나가고 싶으면 탑을 클리어해라?"

"네. 그러면 각성을 할 수 있고, 스킬을 얻을 수 있어요. 각성 등급에 따라 좋은 길드에 들어갈 수도 있고."

"뭐. 내려가는 것보다 올라가는 게 내 성미에 맞긴 하지."

시우는 이 공간에서 가장 강한 기운이 흐르는 곳으로 몸을 틀었다. 보스 몹이거나, 다음 층으로 이어지는 공간일 터.

"여기 나가려면 보통 얼마나 걸린다고?"

"우수하면 최소 6주, 보통은 8주 정도 걸린다고 봐야 해요."

"제일 빠른 기록은?"

"어··· 예외긴 하지만 3주였나?"

천재 헌터 류지환, 그가 세운 신기록.

일반적인 기록보다 세 배는 빨리 끊은 그의 레코드.

보통 총 6~8주의 기간을 소모하는 등반을 그는 3주 만에 끊고 나왔다.

"그렇군. 3주라."

시우는 목을 꺾었다. 우두둑, 소리가 기분 좋게 난다.

그는 느긋하게 걸음을 옮기며 주먹을 가만히 쥐었다.

차원 이동의 부작용으로 마나의 흐름이나 몸의 움직임이 둔하다.

컨디션이 제대로 돌아오지 않았으니,

기한을 좀 넉넉히 잡아야겠다.

"그렇다면 난 5일로 하지."

[엉아가 도와준다.]

〈3화〉

저조한 컨디션

"그럼 다른 세상··· 뭐 흔히 우리가 이계라고 부르는 곳에 다녀오신 거라고요?"

"어."

시우는 앞서 걸으며 나뭇가지 따위를 꺾어 냈다.

산지가 가파르고 길이 따로 없어서 걷기가 무척 힘든 험지였다.

신지수는 자신의 앞에서 길을 만들어주며 걸어가는 시우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이내 후다닥 쫓아갔다.

'생각보다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처음에는 몬스터를 한 방에 때려잡는 괴물이라 생각했고, 얼굴을 보고는 살짝 설레기도 했으며, 대화를 나눈 뒤에는 미친 사람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은···

'정체가 뭐지?'

신지수는 숨을 작게 헐떡이며 말을 이었다.

"그 만약 그 말이 진짜라면, 이계라는 곳에서 대체 얼마 동안이나 계신 건데요?"

"100년."

"네? 배, 백 년이요? 말도 안 돼! 지금 딱 봐도 저랑 엇비슷한 또래로 보이는데, 장난치시는 거죠?"

"내가 굳이 너한테 장난칠 이유는 없고. 그나저나 너 언제까지 날 따라올 거야?"

같이 탑을 등반했던 아카데미 동료들이 몬스터의 급습으로 뿔뿔이 흩어졌다고 한다.

덕분에 혼자 몬스터에게 쫓기던 그녀를 시우가 구해 준 것이었고.

"살려 줬으면 내 역할은 끝난 것 같은데."

헌터를 지망한다면 각자도생을 하는 건 당연지사.

신지수는 그의 말에 잊고 있던 사실 하나를 떠올렸다.

"모든 일에는 그만한 값을 치러라."

일종의 헌터계 강령이었다.

그녀는 잠시 고민하더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혹할 만한 내용을 제시했다.

"만약에 나가면 돈 드리도록 할게요! 저희 집 나쁘지 않게 살거든요. 한 3억 어때요?"

"나 돈 필요 없어."

잠깐의 고민도 없는 대답에 신지수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이렇게 단번에 거절을 당할 줄이야.

"금액 올려도··· 필요 없으세요?"

"어."

말도 안 돼.

설마 원하는 게 돈이 아니라,

"그, 그러면 혹시 제 몸에 관심이···?"

시우는 입매를 비틀었다. 정말 불쾌하다는 표정.

"나 눈 높아."

"뭐··· 제··· 아니··· 그··· 하!!"

신지수는 말대꾸하려다가 하도 어이가 없는 탓에 말문이 막혀 버렸다.

아이돌 준비생까지 했던 그녀였다.

외모와 몸매 하나만큼은 어디 가서 빠지지 않았고, 지금도 프로 헌터들의 구애를 꾸준히 받는 몸.

그런데 다른 이유도 아니라 눈이 높다는 이유로 거절하다니.

신지수는 두고 보자는 듯 시우를 향해 눈을 흘겼다가 곰곰 생각을 정리해 그에게 이득이 되는 부분을 꺼냈다.

"좋아요. 아까 말씀하신 '객식구'가 사실이라면, 제가 각성한 능력이 좋다는 전제하에 제 능력을 빌려드리도록 할게요. 언제든지 원할 때 말씀하세요."

시우는 간략하게나마 그녀에게 '객식구'에 대해서 말을 해 준 터였다.

100년 만에 처음 만난 사람이다. 심심했고, 누군가와 대화가 하고 싶었다.

게다가 그녀가 안다고 크게 달라질 건 없었기 때문.

누가 그녀의 말을 믿을 것이며, 혹 믿는다 하더라도 어쩔 것인가.

[능력 많을수록 좋다. 암컷 하나 살려주고 능력 얻으면 나쁘지 않은 장사다.]

그렇긴 하지. 애초에 보험을 들어 두는 게 나쁜 건 아니니까.

그리고 길도 잘 모르는 나보다는 길눈이 밝은 사람이 있는 게 더 낫기도 하고.

시우는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신지수는 활짝 웃더니 그 손을 마주 잡았다.

***

'튜토리얼의 탑'

이곳은 신입 헌터들이 필수로 들어가야 하는 관문이다.

탑을 클리어하면 새로운 능력을 각성할 수 있어서 헌터를 지망하는 이들은 모두 들어가고는 했다.

물론 탑을 들어가지 않아도 능력을 각성할 수는 있다.

애초에 '튜토리얼의 탑'이란 곳이 생긴 게 오래되지 않았으니까.

1세대 헌터들은 이런 탑의 각성을 빌리지 않고도 스스로 능력을 얻은 대표적인 케이스였다.

그리고 그런 1세대 헌터 중 한 명인 시우는, 눈앞의 몬스터를 보며 한숨을 쉬고 있었다.

트롤 타이거.

가공할 파괴력을 소유한 데다가 특유의 잔혹함 덕분에 악명이 자자한 놈.

'튜토리얼의 탑'을 공략했던 수많은 선배 헌터들이 헌터 지망생을 교육할 때 하는 말이 있었다.

"트롤 타이거는 상대하지 마."

물론 놈들보다 강한 몬스터는 다음 층에도 많았다.

하지만 트롤 타이거를 기피하는 이유는 강함보다 괴팍한 그들의 성미에 있었으니.

놈들은 먹잇감을 발견하면 한 번에 죽이는 게 아니라 고통스럽게 가지고 놀다가 죽이는 끔찍한 취미가 있었다.

살가죽이 다 벗겨지고 내장을 흘리며 죽어 가는 동료를 본 헌터들은, 때문에 트롤 타이거를 '튜토리얼의 탑' 최고 위험 대상 중 하나로 선정할 수밖에 없었다.

"저··· 어··· 도, 도, 도망가야 해요···."

시우의 뒤에 서 있던 신지수가 속삭이듯 외쳤다.

다급함과 두려움이 뒤섞인 목소리.

시우는 고개를 살짝 돌려 그녀의 얼굴을 확인했다. 핏기가 없을 정도로 겁에 질려 있는 얼굴이었다.

"왜?"

"트, 트를 타이거··· 반드시 도망가야 할 몬스터예요."

"왜 도망을 가?"

"왜, 왜라뇨! 그렇게 교육을 받는단 말이에요. 저 무섭게 생긴 외형을 보면 모르시겠어요?!"

[맞다. 저런 거 맛없다. 먹으면 배탈 난다. 나 미식가라 맛있는 거 먹고 싶다. 이 암컷 말 들어라.]

"너는 닥··· 아무튼 기다려."

시우는 내면의 목소리에 욕을 내뱉으려다 신지수를 의식하고는 말을 바꿨다.

100년간 객식구와 둘만 떠들며 살았더니, 다른 사람이 섞인 대화는 익숙하지 않다.

그는 터벅터벅 걸어 트를 타이거 무리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 크어엉

트롤 타이거 한 마리가 시우를 향해 이를 드러냈다.

트롤의 흉측함을 닮은 얼굴이 기묘하게 일그러져 갔다.

[일주일간 밖에다 내놓은 썩은 음식 같이 생겼다.]

시우는 그 말에 큭큭 대며 웃었다.

"오랜만에 생각이 일치할 때가 있네."

그리고 마나를 옅게 뿜어 두 주먹에 두른 뒤 뒷발에 힘을 줘 팍, 하고 놈의 앞까지 뛰었다.

트롤 타이거는 갑작스럽게 자신의 앞에 나타난 시우를 보고 화들짝 놀라 뒤로 주춤 물러섰다.

예상치 못한 움직임에 공격할 타이밍을 놓친 것이다.

그 찰나를 놓치지 않고 시우의 주먹이 놈의 턱에 내리꽂혔다.

빠가아아악!

트롤 타이거의 턱이 으깨지며 놈의 눈알이 돌아가더니 그대로 바닥에 무너져 내렸다.

쿵!

시우의 눈빛이 곧바로 다른 트롤 타이거에게 향했다.

그의 신형이 다시 한번 빛살처럼 움직이며 다른 놈의 옆구리를 어퍼컷으로 올려 찍었다.

뻐어어억!!

- 크르으그?

트롤 타이거는 입에서 피와 거품이 부글부글 섞여 흘러내리더니 몇 초 지나지 않아 쓰러져 죽었다.

그리고 놈이 채 죽기도 전에 그의 주먹은 다른 적의 두개골을 부수는 중이었다.

호두 깨지는 소리가 나며 머리가 터져 나가는 몬스터.

시우는 쯧, 하고 혀를 찼다.

그는 차갑고 느릿한 말투로 내뱉듯 말했다.

"씨발, 피 튀었네."

[나 이거 안 먹는다. 식량아, 너 다 먹어라.]

시우는 그 말을 무시하고는 다시 느릿하게 신지수에게 걸어갔다. 그녀는 멍한 눈빛으로 시우의 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튜토리얼 탑에 오르는 헌터 지망생이 트를 타이거를 한 방에, 그것도 세 마리를 1분도 되지 않아 죽인다?

이건 있을 수도 없고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 천재라 일컬어지는 류지환도 이 정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정말 이계에 있다가 온 사람이란 거야, 뭐야? 어떻게 지망생이 이렇게 강할 수가 있지?'

시우는 아까와는 또 달라진 그녀의 시선을 받으며 퉁명스레 물었다.

"뭐?"

"네? 아, 아니에요. 너, 너무 강하셔서···."

[강하다? 이 암컷 좁밥 보고 강하다고 했다. 내 강함을 보면 이런 말 하지 못한다. 얼른 내가 더 강하다고 설명해라, 좁밥.]

시우는 미간을 좀 찌푸리다가 내면의 소리를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그런데 도망가라는 '교육'을 받는다고?"

"튜토리얼 탑에 대한 공략집이나 아카데미에서 그렇게 가르쳐 주거든요··· '어떤 몬스터는 싸우지 마라, 도망쳐라.'라고."

신지수는 조심스러운 투로 대꾸했다.

솔직히 설명하는 그녀 입장에서도 뭔가 찝찝한 부분이기는 했다.

시우는 그 말을 듣더니 비릿한 웃음을 흘리며 조소하듯 읊었다.

"요즘 헌터질 하기 편해졌네. 몬스터를 두고 도망도 가고 말야."

"그럼 어떻게 해요, 그런 강한 적이 나타나면."

시우는 무심한 눈빛으로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뭘 어떻게 해. 노오오오력을 해야지."

***

똑똑.

"들어오세요."

문이 열리고 다부진 인상의 남자가 들어왔다.

그는 의자에 앉아 있는 남성을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부르셨습니까, 단장님."

"응. 잠깐만요."

민시준.

국내 3대 길드인 [제국 길드]의 수장이자, 대한민국 헌터 랭킹 9위에 빛나는 S급 헌터.

길드 사업의 필요성이 떠오르면서 그가 설립한 [제국 길드]는 명실공히 대한민국을 떠받치는 하나의 국력이 되었고,

이제는 좋은 길드의 유무가 선진국의 척도가 되는 시기까지 도래했다.

민시준은 수행비서인 윤승규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서류를 마저 읽었다.

얼마나 흘렀을까.

민시준이 질문을 던진다.

"다음 졸업생들은 언제쯤 나오나요?"

"마지막으로 들어간 게 5주 전이니, 앞으로 한 달 안에 나올 것 같습니다."

그가 한 질문은 '튜토리얼의 탑'에 관한 내용이었다.

각 길드는 튜토리얼 탑에서 나온 인재를 차지하기 위해 엄청난 인력과 자본을 소모했는데,

잘 뽑은 인재 하나가 연간 수백억을 벌어들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A급 헌터라도 얻는 날에는 길드의 격 자체가 조금 올라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

헌터는 많지만, 고급 인력에 준하는 헌터는 그리 많지 않은 탓이다.

따라서 좋은 인재 발굴에 모두 혈안이 된 상태.

민시준 또한 길드를 튼튼히 해 줄 헌터 영입에 관심이 많았다.

이미 헌터로 활동하고 있는 자들을 다른 길드에서 스카웃 해 오는 것도 좋지만,

제일 쉬운 방법은 이제 막 튜토리얼 탑에서 나온 자들을 데려오는 것.

특히 [제국 길드]의 명함을 내밀면 열 명 중 대여섯 명은 이미 계약해 놓은 곳이 있다 치더라도 민시준 아래로 들어오고는 했다.

몇년 전까지는 말이다.

"6주 차에 나오면 무조건 데려오세요. 그게 '최소 기준'이니."

"알겠습니다. 긴 경우엔 10주가 넘기도 하니까요. 우선 6주 차부터는 대기하면서 나오는 순서대로 스카우트를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현재 [백골 길드]와 [서리혼 길드]에서 인재 영입을 적극적으로 하시는 건 아시죠. 이제 B급 이하의 헌터 숫자는 비슷해졌습니다. A급도 아슬아슬하고요."

민시준의 텁텁한 말에 윤승규는 그저 고개만 숙였다.

본인 탓이 아니건만, 측근에서 모시고 있는 만큼 책임감을 통감하기 때문이었다.

사실 5년 전만 하더라도 [제국 길드]는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명실상부 최고의 길드였다.

그 위세는 누구도 따라올 수 없었고, 그렇기에 대한민국의 입지를 올린 길드라 칭함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달라졌다.

최대수.

그가 국회의원 시절부터 소수 길드의 발전을 꾀한다며 은근슬쩍 [제국 길드]의 발목을 잡는 법안을 계속해서 주장해 왔었고, 대통령이 된 지금은 대놓고 다른 길드를 추켜세우는 중이었다.

'빌어먹을 자식.'

대한민국에서 10명 밖에 없는 S급 헌터이자, 대형 길드의 수장인 민시준조차 최대수에게는 함부로 들이댈 수 없었다.

그는 억제할 수 없는 괴물이었으니까.

'본모습을 모르니 인간들이 대통령으로 세웠지.'

민시준은 입술을 짓씹었다.

그 끝없는 욕심을 알아봤던 사람이 떠오른 탓이다.

최대수를 유일하게 제지할 수 있었던 헌터.

'형.'

띠리리링.

윤승규의 핸드폰이 갑작스럽게 울린다.

잠시 민시준의 눈치를 보던 그는 받으라는 손짓에 뒤돌아서 전화를 받았다.

"무슨 일이야. 응. 응. 뭐? 그렇다면 조금 빨리 나온 거 아냐? 그게 무슨······ 자, 잠깐! 확실하게 알아보고 연락한 거 맞아?! 그래, 우선 상황 수습하고 있어. 금방 갈 테니까."

"무슨 일이죠?"

웬만해서는 당황하지 않는 윤승규였다.

민시준의 의아한 눈으로 그를 보며 물었다.

어디서 대규모 게이트라도 터진 게 아닌 이상 저렇게 놀랄 일이 없을 텐데.

"저一 튜토리얼 탑 출구로 사람이 나왔다고 합니다."

"그래요? 전 기수가 이번에 8주 차였던 것 같은데. 나쁘지 않네요."

"그런데 저번 기수의 멤버가 아니랍니다."

"···저저번 기수인 겁니까? 11, 12주차 정도는 되었을 텐데."

그러나 윤승규는 잠시 망설이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

"이해가 안 되는군요. 그럼 대체 누가···?"

"그게···."

민시준의 말에 윤승규는 머뭇거렸다.

"출입자 명단에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 소란을 일으키고 있다고···."

명단에는 없지만, 튜토리얼 탑은 정복하고 나왔다··· 라.

민시준은 짧은 생각을 끝마친 뒤 자켓을 챙겼다.

그의 짧은 머리가 흔들리며 선 고운 미남형 얼굴이 드러났다.

"직접 가서 보죠."

〈4화〉

각성자

"아, 짜증나게. 피 좀 안 튀면 안 되나."

시우는 상의에 튄 피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느긋하며 여유가 넘치는 태도.

얼굴에 떠오른 감정은 매너리즘 그 자체였고, 말투는 나긋나긋하다.

그러나 옆에서 모든 과정을 지켜본 신지수는 입을 가리고 놀랄 수밖에 없었다.

튜토리얼 탑에 들어오기 전, 그녀도 실제 몬스터를 본 적이 있었고, 헌터 튜브에 올라온 사냥 영상도 숱하게 봐 왔었다.

모두 치열한 접전과 목숨 건 전투가 오갔던 현장이다.

피와 살점이 튀고, 적의 공격에 목숨이 오락가락하며 끈질긴 투쟁 끝에 승리를 얻어 내거나, 혹은 아쉽게 패배하거나.

압도적인 격차가 간혹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건···!!

'이 사람은 도대체 뭐야??'

그들이 있는 곳은 튜토리얼 탑의 끝, 최종 보스 방이었다.

그리고 그 보스는 등장과 함께 배에 구멍이 뚫려 구석에 처박혀 죽었다.

마치 엑스트라 1처럼 말이다.

가벼운 잽, 으로 추정되는 한 번의 주먹질.

그게 다였다.

신지수는 놀람을 감추지 못하고 시우와 죽은 보스 몬스터를 번갈아 쳐다봤다.

"이, 이제 컨디션 제대로 다 돌아오셨나 봐요?"

"글쎄. 한 25% 돌아온 것 같은데."

시우는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확실히 싸우니까 좀 더 빨리 회복되는 것 같네.

그는 몸속을 타고 흐르는 마나의 빠르기에 집중하다가, 느닷없이 느껴지는 강력한 마나에 전투 태세를 갖췄다.

"아! 튜토리얼이 끝인가 봐요!"

신지수가 기쁜 듯이 외쳤다.

그러고 보니 마나에 적의가 느껴지지 않는다.

시우는 싸우려 긴장한 몸을 이완시키고 마나에 몸을 맡겼다.

천장에서부터 시작된 밝은 빛살이 그들을 향해 내리쬔다. 눈부신 빛이 아니라, 따스한 빛이다.

시우는 눈을 잠시 감았다가 떴다.

머릿속에서 목소리가 메아리친다.

「튜토리얼 종료.」

「능력치 계산 및 스킬 적합도를 분석합니다.」

···

···

「추정 불가.」

피식 새어 나오는 웃음을, 시우는 막지 않았다.

지이잉一

게이트가 생성되며 탑의 출구가 드러난다.

시우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성큼성큼 문을 향해 나아갔다.

드디어, 서울이다.

***

튜토리얼의 출구를 관리하는 〈대한민국 헌터 중앙 협회〉, 그곳에 소속된 김철원은 멍하니 졸다 화들짝 깼다.

갑자기 게이트가 생성된 것.

'이번 기수는 나쁘지 않은가 보네.'

보통은 8주, 늦으면 10주가 지나야 한 기수가 나오는 식이었고, 이번에 나올 차례인 기수는 이제 8주가 조금 넘은 차였다.

'류지환 같은 천재가 아닌 이상, 그다음 기수가 나올 수는 없으니. 아니면 11주 차인 기수가 나올 수도 있겠군.'

간혹 우연히 살아남아서 뒤늦게 빠져나오는 자들이 있었다.

물론 그럴 경우는 대개 각성 등급이 낮아 좋은 길드에 들어갈 수 없지만 말이다.

"기록을 빨리 깰수록, 안에서의 활약이 많을수록, 몬스터를 손쉽게 제압할수록 좋은 평가를 얻는다."

추측에 가까운 말이지만, 그럼에도 대부분의 헌터는 이 말에 동의하는 편이었다.

보통 안에서 많은 활약을 한 헌터가 높은 등급으로 각성하는 것이 대부분이었으니까.

김철원은 엉거주춤 일어나 각성자를 맞이할 준비를 했다.

필요한 응급조치 포션과 의료용품들.

심지어는 제세동기를 비롯한 각종 위급 상황용 품목도 한쪽에 비치되어 있다.

보스 몬스터를 처리하고 온 지망생들은 대부분 초주검이 되어 나왔고, 응급치료를 제때 받지 못해 나오자마자 죽는 경우가 생겨 협회 측에서 마련한 조치.

'류지환 같은 천재가 아닌 이상 치료가 필요하지.'

10년 전 초기 헌터계를 주름잡았던 1세대 헌터.

그들과 접점이 있던 1.5세대 헌터의 뒤를 이은 2세대 헌터의 등장.

그 시발점이 바로 류지환이었다.

위이잉一

게이트에서 소리가 들린다.

김철원은 피를 닦아 낼 수건 뭉치와 소독약을 들고 대기했다.

아마 30초 후 이곳은 전쟁터의 의무실과도 맞먹는 현장으로 변할 것이다.

뚜벅, 뚜벅.

게이트에서 한 남자가 걸어 나온다.

'잠ㄲㅡ!"

김철원은 수건과 소독약을 들이밀려다 자기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남자의 눈빛이, 그 날카로운 눈초리가 김철원의 움직임을 저지시킨 것이다.

"어··· 어···?"

김철원은 당황했다.

남자의 몸에 피가 묻어 있긴 했다.

그러나 수많은 상처를 치료해 본 그의 경험상, 그 피는 남자의 피가 아닌 것으로 보였다.

아무 멀쩡한 겉모습.

"뭐야?"

남자가 묻는다.

차갑지만 느긋한 목소리.

김철원은 엉거주춤 서서 할 말을 떠올렸다.

보통 자신을 보고 '뭐야?'라고 묻는 사람은 없었으니까.

심지어 김철원도 나름 헌터 출신이었다.

지금 므I 각성한 후배가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란 소리.

그럼에도 그는 말을 골라야 했다.

헌터로서의 본능이 시킨 것이다.

조심하라고.

"아이참, 같이 좀 가자고 하면 어디가 덧나요? 며칠 내내 혼자서 말도 없이 가 버리시네···."

"움직이면 그냥 따라오면 되잖아. 내가 손잡고 에스코트해 주길 원해?"

"아, 그, 그런 게 아니라! 그냥 가자고 말이라도 해 달라는 소리죠."

"너는 뒤따라오는 들개한테도 어디 가는지 말하고 다니냐?"

"드, 들개······??"

뒤이어 게이트에서 웬 여자가 따라 나온다.

이쁘게 생긴 게 낯이 익다.

김철원은 출입한 지망생 명부에서 그 여자의 얼굴이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가, 각성하신 분들 맞죠?"

김철원이 여성에게 다가가 물었다.

"네? 네, 맞아요! 저희 방금 보스 몬스터 처리하고 나오는 길이에요."

"그렇구나. 그, 그런데 이쪽은······."

"나도 같이."

김철원은 상대의 반말에 순간 울컥했다.

각성하고 나왔다면 저 여자와 같은 지망생이란 소리인데.

아무리 선후배가 아니라 등급을 따지는 곳이라 하더라도 이건 너무한 경우가 아닌가.

"출입자 명부에서 못 봤는데."

이제는 김철원도 말을 놓으며 상대에게 따지듯 물었다.

오히려 이럴 때일수록 강하게 나가야 만만하게 보지 않는 법.

"출입자 명부를 안 썼으니까."

"···???"

"?"

"입구로 안 들어갔는데 어떻게 출구로 나와?"

"내가 눈 뜨니까 거기더라고."

김철원은 한숨을 쉬었다.

이제 후배로서 귀여워해 주는 것도 여기까지다.

그는 긴급 버튼을 눌렀다.

달칵, 소리와 함께 건물에서 사이렌 소리가 울려 퍼진다.

"야. 너 스킬이 얼마나 좋은 게 떴는지 모르겠는데. 선배 알기를 너무 좆으로 아는 거 아니냐? 아무리 급이 먼저라고는 해도, 선배한테 예의는 보여야 할 거 아냐, 이 버르장머리 없는 자식아!"

김철원이 자신의 마나를 방출하며 쩌렁쩌렁하게 외쳤다.

벽력같은 호통.

그 기합에 신지수는 뒷걸음질 칠 수밖에 없었다.

몬스터를 상대할 때와는 다른 압박감이 신지수에게 전해졌다.

조금 전까지 유순하게 보이던 남자가, 지금은 육중한 기운을 사방에 퍼뜨리며 위압감을 보일 수 있다니.

이게 바로 프로 헌터의 역량인가.

그렇게 떠드는 사이 호출을 받은 경비대가 순식간에 도착했다.

모두 E등급 이상이었고, 개중에는 D등급도 있었다.

보통은 불순한 목적의 외부인 처리가 목적인 그들.

이렇게 게이트에서 막 나온 각성자를 상대한 적은 그들로서도 오랜만이다.

"뭡니까, 김철원 씨."

경비대 2조장 D급 헌터가 물었다.

대체 무슨 일이길래 긴급하게 비상 버튼까지 눌러 자기를 불렀는지 따지는 모양새다.

"오셨습니까, 2조장님. 다름이 아니라 이번에 게이트에서 나온 놈이 있는데, 출입 명부에 없어서 말입니다."

김철원의 말에 2조장은 눈썹을 찌푸렸다.

그는 싸늘한 말투로 대꾸했다.

"출입 명부에 없다고요? 그게 말이나 됩니까?"

"호, 혹시나 해서 비상 버튼을 누른 뒤 잽싸게 훑어봤는데, 적어도 4개월 내에서는 없었습니다. 정말입니다! 그리고 제가 물어봤을 때 제대로 대답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2조장은 한숨을 쉬었다.

대충 예상되는 시나리오가 몇 개 떠올랐다.

"게이트에서 나온 신입. 혹시 변장이나 위장 관련된 스킬을 얻어서 장난치는 거라면 이쯤에서 그만둬라. 더 나가면 장난이 아니라 큰 징계로 끝나게 될 거다."

그나마 가능성이 가장 많은 건 역시 '스킬'이다.

예전에도 몇 차례 이런 적이 있었다.

변신 스킬을 얻은 놈이 다른 사람으로 변장해서 까불다 크게 혼난 적이.

그런 상황에 대비한 장비와 아이템까지 도입해 놨지만, 우선은 말로 설득하는 게 먼저다.

그러나 그의 말을 들은 시우는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사람의 울화통을 터지게 만드는 그 얼굴에, 2조장은 이빨을 으드득 씹을 수밖에 없었다.

이제 막 각성한 놈 따위가 현직 헌터를 상대로 선을 넘다니.

"야. 애송이. 내 말이 말 같지 않냐? 빌딩 바닥에 대가리부터 꽂아 주랴?"

그 모습에 시우는 처음으로 미소를 지었다.

아주 옅지만, 냉소 가득한 미소로 말이다.

"요즘 헌터판 아주 좋아졌네. 경고도 하고."

"······뭐?! 너 지금 뭐라고 했어? 이 새끼야!"

"헌터라면서 혓바닥으로 싸우나?"

"하하, 이 병아리 새끼가."

이마에 실핏줄이 도드라지도록 분노한 2조장은 이 하룻강아지를 어떻게 요리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다.

잘못해서 죽이기라도 하면 어떡하지.

살인은 막겠다는 일념 하나로 분을 참던 그에게, 시우는 빙글빙글 웃으며 대답했다.

"덤벼. 죽지 않게 발라 줄 테니까."

"이 개새끼가一!!"

2조장과 함께 있던 경비대 모두가 총알처럼 튀어 나갔다.

자신의 상사가 무시당해서 분노가 쌓이고 쌓였기에, 그들의 움직임에는 거침이 없었다.

시우는 목을 꺾어 우두둑 소리를 냈다.

기분 좋은 느낌이다. 이 얼마 만에 느끼는 대인전이란 말인가.

무려 100년 만에 진짜 '사람'과 싸우는 거다.

몸속을 타고 도는 마력을 공회전시킨다.

모터가 돌아가듯 그의 근육과 마나맥이 꿀렁거리며 움직인다.

몬스터와 싸울 때하곤 전혀 다른 감각.

나쁘지 않군.

발을 박찼다.

시우를 치려고 덤벼들던 자들의 공격이 허공을 가른다.

개중엔 중심을 잃어 바닥에 뒹구는 자도 있다.

2조장은 재빨리 구둣발로 대리석 바닥을 찍어 속도를 줄였다.

"크윽!!"

'은신 스킬이 있는 놈일 줄이야!'

경비대는 갑자기 사라진 놈의 스킬이 은신이라 판단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제 막 튜토리얼을 거치고 나온 놈이 현직 헌터의 눈을 속일 리 만무했으니 말이다.

'제기랄 하필이면 오늘따라 탐색형 헌터가 없어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갑자기 뻐어억, 하는 소리가 공간을 울렸다.

옆에 있던 동료의 몸이 종잇장처럼 나부끼며 저 멀리 날아가 처박히고 있었다.

미처 판단할 틈도 없이, 이번에는 다른 동료가, 뒤이어 또 다른 동료가.

대리석 바닥과 벽이 부서지며 그들의 몸이 구겨지듯 그곳에 담겨 쓰러졌다.

"미친··· 은신 스킬 헌터가 이런 힘이 있다고?"

2조장은 경악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이건 불가능한 일이다.

"내가 언제 은신 스킬이라고 했지?"

순간 시우의 신형이 그의 앞에 드러났다.

조금은 재밌다는 듯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표정이다.

"은신이 아니라면 어떻게 모습이一!"

"빨리 움직이면 되잖아."

시우의 몸이 사라졌다가 이번에는 2조장 뒤에 나타났다.

1초도 지나지 않은 순간에 벌어진 일이다.

'이, 이 새낀··· 도대체 뭐야? 지금 각성한 헌터가 이럴 리 없어.'

그는 주춤주춤 뒷걸음질 치며 시우를 두려운 눈으로 바라봤다.

조금 전 패기 넘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말이다.

"그나저나 너도 벌을 받아야지."

"무, 무슨 말을···."

"네 동료들처럼 딱밤 처맞으라고."

"딱··· 그게 설마 딱밤이라고??"

시우는 가운뎃손가락을 엄지로 쥐더니 그의 이마에 순식간에 딱밤을 날렸다.

경쾌한 소리가 울린다.

빠아아악!

—쿠웅

한참을 날아가 뒷벽에 처박힌 그의 모습을 본 시우는, 자기가 벌여 놓은 난장판을 주욱 둘러본 뒤 남 일처럼 중얼거렸다.

"딱밤으로 쳐도 피가 튀네. 드럽게."

그리고 사라졌다.

***

연락을 받자마자 바로 달려온 민시준과 윤승규.

그러나 호화로운 호텔을 연상케 했던 출구는 이미 엉망이 되어 있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윤승규는 담당자를 호출했다.

그러나 담당자인 김철원 역시 딱밤을 맞고 구석에 쓰러져 있는 상태였고, 경비대 중에서는 아무도 멀쩡한 사람이 없었다.

"이 상황을 이제 막 탑에서 나온 자가 했단 말씀입니까?"

민시준의 질문에 윤승규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도 이런 보고는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저, 저기···."

그때였다.

누군가 그들을 향해 조심스럽게 말을 건 것은.

"누구시죠?"

민시준이 경계하며 물었다.

"아, 이번에 탑에서 나온 사람인데요. 제 일행이 이렇게 해 놔서···."

"그게 당신 일행이라고요? 누굽니까! 당사자는 어디 있고?"

"일행은 일행인데, 저도 잘 모르는 사람이라···."

"단장님! CCTV 화면 확보했습니다."

민시준은 윤승규가 내민 핸드폰 화면을 확인했다.

상대는 고작 한 명.

그리고 이쪽은 다섯이 넘는 숫자.

그러나 5:1이란 결투는 고릴라 한 마리와 개미 다섯 마리의 싸움이라 해도 부족했다.

압도적인 강함.

그 속에서 민시준은 볼 수 있었다.

느긋한 표정으로 터벅터벅 건물 밖으로 나가는 남자의 모습을.

그 여유롭고 태만한 몸짓을.

미치도록 그리워했던 누군가와 닮은 그를.

민시준은 자기도 모르게 액정 속 그의 얼굴에 손을 대며 중얼거렸다.

"시우 형······?"

〈5화〉

먹다

시간은 잠시 거슬러 시우가 게이트에서 나왔을 무렵.

"형···이라고요?"

윤승규의 질문. 그러나 민시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십 년이 흘렀다.

제4계 마왕을 향해 공격을 감행했던 파티.

쓰러진 적.

죽어 가던 마왕이 뿌린 빛살에 사라진 형.

민시준과 형의 제자들은 백방으로 시우의 행방을 살피려 했으나, 끝내 찾지 못했다.

흔적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세계 헌터 협회〉에 실종 의뢰를 내고, 전 세계에 있는 친한 헌터들에게 백방으로 수소문까지 했건만.

그 모든 노력을 포기한 게 5년 전.

그런 형이 작은 액정 속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하세요."

"네?"

바람에 꺼질 듯 희멀건 목소리.

윤승규는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몇 년간 민시준의 옆에서 그를 보좌했지만, 이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수배 내리고. [제국 길드]에 있는 모든 사람을 총동원해서라도 찾으시라고요. 절대, 절대 붙으려 하지 말고 민시준의 사람이라고 하면서 데려오세요. 얼른!!"

윤승규가 자리를 뜨자, 민시준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과연 형이 어디로 갔을까.

어디에 있다 왔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한국에 없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있었다면 진작 자기를 찾아왔겠지.

그렇다면, 만약 십 년 만에 한국에 온 것이라면, 그는 어딜 먼저 갈 것인가.

"저···."

신지수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죄송합니다. 아직도 계신지 몰랐군요."

"아, 아니에요. 제가 도움이 되어 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민시준은 물끄러미 신지수의 모습을 바라봤다.

착하고 어진 사람이라는 게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그 일행, 그러니까 저희 형이랑 함께 보스를 끝마치고 나온 겁니까?"

"맞아요. 사실 제가 한 건 아무것도 없고 다 그분이 한 거긴 한데··· 어쨌든 같이 각성해서 나온 건 맞아요."

"그렇군요. 예상보다 빨리 나왔을 테니 스킬도 괜찮은 걸 얻으셨겠네요."

"이게 좋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A등급 스킬이 나오기는 했어요."

신지수는 겸연쩍은 얼굴로 대답했다.

"A등급이라."

민시준은 본능적으로 계산기를 두드렸다.

'A등급. 아직 최종 검사는 하지 않았다지만, 미리 잡아 두는 게 좋겠지. 최소한 B급 헌터가 될 소지는 있으니까.'

헌터의 급은 스킬과 종합적인 능력치를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A등급 스킬만 있어도 S급 헌터가 될 수 있고, 반대로 S등급 스킬이 있다 하더라도 A급 헌터가 될 수 있는 법.

하지만 보통은 A등급 스킬이면 A급 헌터가 되고, S등급 스킬이면 S급 헌터가 되고는 했다.

"저희 형 덕분에 나오셨다니 이야기가 편하겠군요. 저는 [제국 길드] 민시준입니다. 계약 조건 최대한 맞춰 드릴 테니, 저희랑 계약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민시준은 자신의 명함을 건넸다.

그 느닷없는 제안에 신지수는 꿈이라도 꾸는 표정을 지었다.

모든 헌터들의 염원이라 여겨지는 헵타그램 중 하나 [제국 길드]에서, 그것도 영업부 직원이 아닌 민시준이 직접 명함을 건네주다니.

"네? 제, 제, 제국이랑요? 정말요? 이거 정말이죠? 그래 주신다면 저야 당연히 가문의 영광이一."

"너무 방식이 양아치시네."

순간 다른 음성이 끼어든다.

동네 건달의 그것과도 같은 껄렁껄렁한 목소리.

민시준은 그 갑작스러움에도 놀라지 않았다.

무표정한 얼굴로 목소리의 주인공을 쳐다봤다.

하얗게 물들인 머리와 검은색 슈트와 묘한 조화를 이루는 귀공자 스타일의 남자.

그 모습은 민시준으로서는 아무리 봐도 익숙해지질 않았다.

그 누구도 헌터로 보지 못할 외모.

"류지환 헌터. 말씀 좀 가려서 하시죠."

"아一 이거. 죄송하게 됐수다. 선배님한테 제가 너무 솔직하게 말을 했네요. 알다시피 제가 앞뒤가 똑같은 성격이라서."

"그러게요. 똥물도 위아래가 있다는데, 생각 좀 하고 말하셔야죠. 개념 없이."

"하하하. 그렇게 하겠수다. 선. 배. 님."

류지환은 한쪽 입꼬리만 일그러트려 올려서 대꾸했다.

둘은 서로에 대한 살기와 분노를 감추지 않았다.

실처럼 팽팽하게 당겨진 공기.

어떤 한 명이 마나를 갈무리하지 못하는 순간, 끔찍한 혈투가 시작될 것이다.

두 S급의 대결이란 건 단순히 치고 박고 싸우는 게 아니라 그 일대에 경보를 내려야 할 정도의 사건.

신지수는 호흡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공기가 층층이 무거워진다.

마치 거대한 호랑이와 용이 마주한 듯한 모습에, 그녀는 절로 눈물이 고였다.

"이거一 선수를 빼앗겼네요."

이때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어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다.

터질 듯 부풀던 공기가 순식간에 가라앉으며 시선이 분산된다.

"···최성일 헌터."

S급 헌터인 류지환에 이은 또 다른 S급 헌터의 등장.

그러나 류지환과는 악연이 있는 최성일인지라, 민시준에게는 나쁘지 않은 상대였다.

류지환과 민시준은 감정을 추슬렀다.

아무리 헌터법이 일반법보다 위에 있다고는 하더라도, 두 S급이 아무렇게나 싸워도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악연이기에 나온 자연스러운 감정 표출이었을 뿐.

"다들 협회의 연락을 받고 오셨나 봅니다."

최성일의 말에 둘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나머지 넷은 이런 일에 관심이 없으니. 우리 셋이 이야기를 끝내면 될 것 같군요."

7인의 S급 헌터가 세운 최강의 일곱 길드.

그중 셋이 이곳에 모인 것이었다.

"누가 제일 먼저 왔죠?"

"제가 먼저 왔습니다."

"역시 [제국]의 민시준 헌터가 제일 빨랐나 보군요. 그다음이 [금강]의 류지환 헌터고."

"네. [백사자]의 최성일 헌터가 마지막이십니다."

최성일은 주변을 빙 둘러본 뒤에 언뜻 이해되지 않는단 얼굴을 했다.

"두 분이 싸운 것 치고는 뭔가 이상하네요. 건물이 부서지지 않은 건 둘째치고, 경비대만 당한 걸 보니 두 분의 짓은 아닌 것 같은데. 설마 이게 협회에서 말한 '명부에 없는 각성자'가 한 짓이란 겁니까?"

최성일의 지적에 류지환은 어깨를 으쓱했다.

"딱 보니까 성격 꽤나 더러운 새끼겠구먼. 나오자마자 이 지랄병을 떠는 걸 보니 말야."

"그러게요. 누군지는 몰라도 얼른 찾아야겠군요. 이만한 스킬을 각성했다는 건 그만큼 고급 인력이 될 수도 있다는 걸 뜻하는데. 두 분 앞에서 솔직히 말하자면··· 탐나네요."

"큭큭. 먼저 찾는 놈이 임자로 할까, 그럼? 누구처럼 혼자서 날름 처먹으려다가 배탈 날까 봐 고민하고 있었는데."

류지환의 노골적인 비아냥에도 민시준은 무표정으로 일관했다.

사실 그가 가장 하기 어려운 것 중 하나가 포커페이스였다.

민시준은 원체 감정 표현에 솔직한 자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길드라는 거대한 사업을 운영하면서 가장 필요로 했던 게 감정의 절제였고, 따라서 그는 자신의 감정을 하나하나 잘라 내어 갔다.

민시준은 포커페이스를 지을 때마다 떠오르는 웃음이 있었다.

평생을 한결같은 얼굴로 살아온 남자.

아무리 힘들어도, 아무리 아파도 늘 피식거리며 웃기만 했던 바보 같은 사람.

형.

"그럼 우선 각자 찾아보도록 하죠. 아마 멀리 가진 못했을 겁니다. 그리고 저기 있는 여성분은 명함 하나씩 주고 스스로 고르라고 하죠. 부담스러우실 테니."

"상관없수다. 걍 알아서들 하는 거로 하죠. 그럼 먼저 가겠수다. 선. 배. 님."

"잘 가시죠. 입 더러운 후배님."

"카악一 퉤!"

류지환은 그를 지그시 노려봤다.

'언젠가는 그 잘난 낯짝을 깔아 뭉개 주마. 민시준.'

***

시우는 밖으로 나왔다.

고작 10년일 텐데. 서울은 그가 알던 곳과 선연히 다른 느낌을 전해 주었다.

하긴.

그 10년의 세월은 이계라는 곳에서 지낸 100년의 공백이 압축된 시간일 터.

낯선 것을 넘어서 전혀 새로운 곳에 당도한 느낌이다.

시우는 그가 알던 지구와 지금의 지구가 다른 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식량아, 여기가 네가 살던 곳이냐? 너 같이 생긴 것들이 너무 많다. 정신없다. 다 먹고 싶다.]

"후."

이제는 오히려 내면에서 울리는 이 목소리가 더 낯이 익다.

과거의 기억을 되찾기 위해 보낸 시간이건만, 아이러니하게도 이제는 과거도 그도 달라져 있음을 느낀다.

차라리 이계가 더 정감 간다고 한다면··· 여기에 올 이유는 없어지는 걸까.

분명 기억에는 있는데, 문제는 기억에만 있다.

그 어떤 감정이나 추억에도 남아 있지 않은 지구의 모습.

시우는 변한 게 서울의 풍경인지, 아니면 자신의 마음인지 알 수 없었다.

마치 무인도에 갇혀 수십 년간 홀로 생활하던 조난자가 하루아침에 서울 한복판에 떨궈진 기분.

[너 왜 똥 먹은 표정이냐. 오고 싶다고 지랄할 땐 언제고. 네 얼굴이 꼭 식어 빠진 고기처럼 맛없게 생겼다.]

이 미친놈이.

시우는 잠시 스쳤던 공허 대신에 분노가 화르륵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 자식 덕분에 우울증은 걸리지 않았다.

분노 조절 장애가 생겼다면 모를까.

"야. 너 치킨 처먹고 싶다고 했지.*

시우는 무심한 말투로 물었다.

[치킨! 우리 치킨 먹는 거냐? 나도 드디어 치느님 영접하는 것이다.]

시우가 이계에 있을 적, 밥을 먹을 때마다 '객식구'에게 한국에서 먹었던 음식에 대해 열거하고는 했다.

"이딴 건 고기가 아냐. 불판에서 지글지글 익어 가는 삼겹살 정도는 돼야 고기지."

"야. 치킨을 어디 이딴 육포 같은 질긴 고기랑 비교를 해. 치킨은 입에 넣는 순간 녹아."

"한우라고 있어. 꽃등심이나 제비추리 구워서 먹으면 넌 다른 고기는 입에 맞지 않게 될 거다."

이런 식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많은 언급을 했던 음식, 치킨.

눈에 보이는 모든 것에 대한 감정이 변했다고 한다면.

과연 냄새나 맛과 같은 것은 어떨까.

시험해 보면 되지.

그는 눈에 띄는 치킨집을 찾아 들어갔다.

띠리링.

"어서 오세요!"

문이 열림과 동시에 밝은 목소리가 시우의 입장을 반겼다. 아직 시간이 시간인지라 홀에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시우는 빈자리에 앉아 메뉴판을 펼쳤다.

그가 있었을 적에는 기껏해야 양념과 후라이드, 간장 정도가 전부였는데.

도대체 이게 무슨 맛이야.

생전 처음 보는 이름에다가 비주얼도 일반적인 통닭과는 다르다.

치킨 전문점이 아니라 치킨 레스토랑에 들어온 착각마저 든다.

"주문 도와드릴까요?"

귀여운 인상의 직원이 다가와 묻는다.

시우는 잠시 고민하더니 엄숙한 표정으로 메뉴판 구석에 있는 글자를 가리켰다.

"양념 반, 후라이드 반으로."

"네, 알겠습니다! 맛있게 해서 갖다 드릴게요!"

그녀는 곧바로 뼈를 담을 통과 치킨 무, 과자를 가져다 테이블 위에 올려놨다.

잠시 뒤.

"주문하신 양념 반, 후라이드 반 나왔습니다. 맛있게 드세요."

직원은 시우를 향해 싱긋 웃어 보이고는 사라졌다.

하아.

[나 치느님 본다. 치느님 피처럼 붉고 암벽처럼 단단하게 생겼다. 마치 스톤 골렘과 파이어 골렘 같다. 우람하게 생기셨다.]

시우는 먼저 냄새를 맡았다.

기름에 튀긴 닭 냄새가 양념과 함께 후각 세포를 찌릿하게 자극했다.

그 냄새가 주는 고양감이 시우의 날 선 신경을 서서히 가라앉혔다.

잊고 있었던, 그러나 잊을 수 없었던 냄새.

"마치 엊그제 맡았던 기분이네."

콧속 신경세포가 기억과 감정을 담당하는 변연계에 신호를 보낸 탓일까.

시우는 마른 스펀지에 물을 빨아들이듯 치킨과 관련된 기억 하나를 순식간에 떠올렸다.

힘든 알바를 끝내고 돌아가는 퇴근길.

통닭 한 마리를 사 가면 유난히 반가운 얼굴로 그를 반기던 사람.

'너 형이 보고 싶었던 거야, 아니면 통닭이 보고 싶었던 거야?'

'둘 다!!'

시준이, 내 동생.

지금은 얼마나 더 컸으려나.

[주접 그만 떨고 음식 내놔라. 다 식는다.]

이 개같은 놈이 진짜···.

시우는 자신의 감상을 방해한 놈을 향해 인상을 쓰고는 손을 가져다 치킨에 댔다.

[맛없으면 너 죽인다.]

"닥치고 처먹어."

시우의 손끝에서 새까만 기운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더니 치킨 조각 하나를 순식간에 집어삼켰다.

소리조차 없는 기민한 움직임.

"어때?"

[······나는 내 모든 생을 손해 보고 살았다.]

시우는 피식 웃었다.

그는 닭 다리 하나를 가져다 자신의 그릇에 놓고는 조심스럽게 한입 베어 물었다.

우물우물.

아, 욕이 나오려 하네.

시우는 두 눈을 감고 천천히 그 맛을 음미했다.

맛의 소용돌이, 맛의 폭풍, 맛의 회오리가 그의 미각을 각개격파하고 있었다. 침샘이 찌릿하며 엄청난 양의 침이 물밀듯 흘러넘쳤다.

미쳐 버리겠다.

100년간 내가 먹었던 것들은 대체 무엇?

[이건 치느님 아니라 치왕, 치대왕, 치황제, 이런 이름으로 물러야 한다. 우리가 죽였던 드래곤보다 치느님이 더 위대하다.]

"내가 말했지? 맛있을 거라고."

[알았으니 어, 얼른 더 내놔라! 너 혼자 다 처먹지 말아라! 남은 것은 다 내 것이다!]

"내 돈이야. 미친놈아."

시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양념치킨에 손을 가져다 댔다.

이번엔 순식간에 세 조각이 사라졌다.

"야, 너 혼자 다 처먹냐?"

[오오, 만약 치킨을 먹기 위해 개종을 해야 한다면, 난 오늘부터 치느교로 개종하겠다. 나 너 따라서 이곳에 오길 잘했다.]

"그래, 그래야지."

[처음에 지구로 간다고 했을 땐, 웬 병신같은 생각인가 싶어서 싸우다 함께 죽으려 했다. 그때 안 죽길 잘했다.]

하, 꼭 쓸데없이 2절을 붙여요.

시우는 치킨을 다 먹고는 계산을 하고 밖으로 나섰다.

참고로 계산은 신지수에게 계약금 명목으로 받은 십만 원으로 했다.

[이제 어디로 가는 것이냐.]

"어디긴."

시우는 먼 곳을 바라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 음색은 치킨을 먹을 때하곤 달리 씁슬한 느낌이 가득 묻어 있었다.

"집이지."

〈6화〉

제자들

"이야기는 잘되셨습니까."

류지환의 측근인 여진식이 다가와 담배를 건넸다.

"진식아."

"네."

"[금강]에서 C급이랑 D급 싹 모아다가 조 짜서 돌려라. 사람 하나 찾자."

"누구를 말씀입니까."

류지환은 담배를 깊숙이 빨아들였다.

폐부 끝까지 차오른 니코틴이 그의 머릿속과 혈관을 주무르는 듯했다.

후우—

'얼핏 듣기는 했는데, 확인은 해봐야 아는 거겠지.'

뿜어지는 담배 연기가 건물 귀퉁이를 흔들어놓고 사라진다.

그는 자신이 들었던 대화를 다시 떠올렸다.

스치듯이 지나갔던 단어들이 앞뒤를 서로 짜 맞춘다.

류지환은 히죽 웃었다.

그 새끼 꼴 받게 만들 생각에 절로 웃음이 새어 나온 것이다.

"민시준이 새끼 가족."

***

"여전하네."

시우는 반쯤 허물어진 폐가 앞에 섰다.

거미줄이 쳐있고, 곳곳에는 낙서와 깨진 술병들이 나뒹굴었다.

온갖 쓰레기와 담배꽁초도 마당에 빼곡했다.

동네 애들이 놀고는 그냥 버려두고 간 모양이다.

시우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퀴퀴한 먼지 냄새와 곰팡내가 피어올랐다.

그는 살짝 인상을 찌푸리고는 천천히 거실과 주방을 둘러봤다.

지금이라도 맛있는 된장찌개를 보글보글 끓이며 시우를 부를 것만 같다.

얼른 들어오라고, 밥 먹고 놀라고. 그를 보며 환한 미소를 짓는 부모님, 아직은 어린 그의 동생.

그런데 그 얼굴이 희미하다.

정말 미치도록 그립고, 딱 한 번만 만지고 껴안을 수 있다면 목숨이라도 내놓을 수 있는데.

그런 분들인데.

얼굴이 흐릿하다.

망각은 신의 선물이라 했던가.

그에게는 저주였다.

100년이란 실타래가 그의 온몸을 칭칭 휘감아 아무것도 보지도, 듣지도, 맡지도, 먹지도, 만지지도 못하게 막는 것만 같다.

추억이 덕지덕지 묻은 곳에서, 시우는 떠오르지 않는 얼굴을 끝끝내 손에 움켜쥔 채 밖으로 나왔다.

공터로 걸음을 옮겼다.

이곳에서 시우는 동생 시준과 공놀이를 하고는 했다.

가끔 옆집 무서운 할아버지 집으로 공이 넘어가면, 서로 가기 싫어서 가위바위보를 하고는 했었지.

그는 옛 생각에 슬며시 웃음이 났다.

100년의 시간. 그 속에서 벌어지는 끝없는 혈투.

인간으로서의 감각이 무뎌지고, 나라는 존재가 시간에 치여 점점 닳고 닳아지는 게 느껴진 순간.

아이러니하게도 그를 잡아 일으킨 것 역시 오로지 기억이라는 도구 하나였다.

동생에 대한 기억.

제자들에 대한 기억.

그에게 기억은 추억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뼈아픈 미련으로 되어 갔다.

그래도 괜찮았다.

그 덕분에 100년을 버틸 수 있었기에.

[너희 집 쓸쓸하다. 차라리 내가 있던 곳에서 우리가 살던 곳이 더 따뜻해 보인다.]

뭐 이 녀석 덕택도 있고.

시우는 흘러가버린 시간에 대한 미련을 버리기 위해 이곳에 왔다.

지난 일은 지난 일이다.

"이제는 또 발을 내디뎌야지. 뒤를 쳐다보는 건 한 번이면 족하니까."

[난 발 없다. 네가 걸어라.]

"알았다, 객식구."

그는 픽 웃었다.

저 티 없고 철없는 말투가 그를 얼마나 채찍질했던가.

슬슬 애들을 찾아볼까.

10년간 다들 건강하게 잘 지냈는지 모르겠네.

시준이도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적의를 가진 마력이 전방에서부터 그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앞에서 마력이 느껴진다. 건방지다.]

시우는 마력을 조금 꺼내 천천히 운용했다.

헌터끼리의 싸움은 마력 싸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마나는 언제든지 항상 가동할 수 있게끔 마력으로 준비해놔야 한다.

"찾았습니다!!"

"이 새끼 찾기 존나 힘드네. 야! 다들 이쪽으로 모이라고 해!"

누군가의 외침을 시작으로 여러 명이 달려온다.

시우는 뚱한 표정으로 그들이 다 모일 때까지 얌전히 기다렸다.

"네가 오늘 튜토리얼 출구에서 지랄했던 새끼냐?"

대장 격으로 보이는 놈이 앞으로 나서며 묻는다.

"너 찾는답시고 우리가 얼마나 뺑끼쳤는지 알아? 이 미친 새끼는 왜 그곳에서 발광하고 지랄이야. 각성하니까 막 날아갈 것 같든? 다 네 세상이야?"

그 뭣 같은 비아냥과 욕설에도 시우는 권태 가득한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상대의 기량과 역량이 이미 보였기 때문이다.

진짜 헌터라면.

진짜 투사라면.

저렇게 입으로 떠드는 게 아니지.

"이 새낀 아가리에 금칠을 했나. 너 나 누군지 몰라? 나 [금강] C급 헌터 변학문이야! 금강이라고 금강!!"

겁박하듯이 외치는 소리.

시우는 한숨이 나왔다.

"금강인지 금강산인지 내 알 바 아니고. 뭔 볼일인데?"

"뭐?! 이 미친 새끼가! 그 지랄을 떨어놓고 곱게 넘어갈 줄 알았냐? 넌 선배들한테 단단히 찍혔어, 내 말 알아들어?!"

시우는 그 말에 웃음이 새어 나왔다.

"웃어?"

변학문은 어이없다는 눈으로 시우를 노려봤다.

미치지 않고서야 C급 헌터를 상대로 이제 막 각성한 놈이 까불다니.

시우는 입꼬리를 길게 늘리며 나른한 눈빛으로 말했다.

"나 때는 이런 충고가 없었거든. 요새 헌터들은 헌터가 아니라 중학교 체육부인가 봐? 친절하게 충고도 하러 와주고 말야."

"이 개새끼가!"

변학문은 마력을 개방했다.

쿠웅, 하는 느낌과 함께 가시처럼 그의 살기가 쏟아져 나간다.

분명 저 멀리 있던 변학문이 시우가 눈을 한 번 깜빡하는 동안에 앞으로 다가왔다.

퍼억!

시우의 얼굴에 직격하는 스트레이트 펀치.

멀찌감치 나가떨어지는 모습을 본 변학문은 씩씩거리며 화를 삭였다.

시우는 그러거나 말거나 바닥에 누워 눈앞의 메시지를 확인했다.

+

[스킬 : 전광석화]

-등급 : C

-내용 : 순간 가속으로 몸의 속도가 2배 이상 빨라진다. 체력과 신체구조만 버틸 수 있다면 그것보다 더 빨리 움직일 수도 있다.

+

"어때? 먹고 싶어?"

[지구에 와서 처음 먹는 스킬이다. 먹어보고 싶다.]

"오케이."

시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변학문은 시우의 모습을 보며 이상한 위화감을 느꼈다.

분명 자신이 스킬을 사용해서 있는 힘껏 안면에 펀치를 날렸다.

얼굴이 뭉개져도 이상하지 않을 힘이다.

헌터의 신체능력은 각성 등급에 따라 올라간다.

따라서 C급 헌터인 그의 신체능력은 일반인의 몇 배는 될 터.

이제 각성한 시우 같은 말단이 아무렇지 않게 버틸 수 있을 만한 게 아니란 소리다.

"너 뭐야? 대체 무슨 스킬을 얻었길래 그렇게 멀쩡해?"

시우는 한쪽 입꼬리를 비틀었다.

그의 신형이 사라졌다.

변학문은 너무 놀라 황급히 뒷걸음질 쳤다.

뭔가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

"세상 좋아졌어. 헌터가 뒷걸음질도 치고"

순간 그의 뒤에서 들리는 서늘한 목소리.

이제 막 각성한 헌터가 내뿜을 수 있는 기운이 아니다.

"너, 너, 나 건들면 금강에서 널 가만두지一"

"금강이든 백두든 와서 다 덤비라고 해. 잘근잘근 씹어서 뼈째 삼켜 주지."

시우의 미소가 사라지기도 전, 그의 주먹이 변학문의 왼쪽 얼굴에 해머처럼 휘둘러졌다.

미처 확인할 수도, 피할 수도 없을 만큼 빠르고 강한 펀치.

콰과과광!

변학문의 몸이 담벼락에 부딪히며 엄청난 소음과 먼지가 흩날렸다.

그 놀랍도록 빠르게 일어난 사태에 변학문과 함께 온 동료들은 멍하니 섰기만 했다.

그 틈에서 홀로 빛나는 시우의 시퍼런 안광.

자, 그렴 해볼까.

"[먹어라, 프레데터]"

시우가 손을 내밀자 검은 마나가 순식간에 변학문의 몸을 집어삼켰다.

그의 몸 아래에 커다란 검은 마법진이 형성되며 어둠이 새까맣게 빛나기 시작했다.

"하, 지구에서도 먹히네."

[「스킬 추출 성공」]

+

[프레데터]

▶스킬 이름 : [전광석화]

▷스킬 등급 : C

▶스킬 내용 : 순간 가속으로 몸의 속도가 2배 이상 빨라진다.

***

변학문은 짧은 순간 지난 생이 주마등처럼 스치는 것을 느꼈다.

'난 끝이다···.'

번개같이 눈앞에 다가온 시우의 주먹은, 단순한 주먹이 아니라 포식자의 이빨처럼 거대해 보였다.

빠아아악!

변학문은 담벼락 하나를 허물고 날아가 처박혔다.

그 엄청난 공격에 근처에 있던 일행들도 주춤주춤 간격을 벌렸다.

단순한 신출내기가 아님을 감지한 것이다.

피어오르는 흙먼지.

그 속에서 나온 시우의 모습은 백전노장처럼 여유로워 보였다.

"주먹에 피 묻었잖아."

그 서슬 푸른 목소리에 몇몇 헌터들이 흠칫 몸을 떨었다.

시우는 마나를 미세하게 조정해 가장 효율적으로 신체를 강화시켜 싸우곤 했다.

닭 잡는 데 소 잡는 칼을 쓸 수는 없지 않은가.

물론 지금은 컨디션이나 마나량, 마력, 체력, 근력과 같은 모든 것들이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다.

전성기 때로 돌아가 싸우려면 시간 꽤 걸리겠군.

그럼에도 시우는 전혀 긴장하지 않았다.

그저 찬찬히 몸의 상태를 살피며 미래를 예측할 뿐이었다.

마나의 총량보다는 1의 마나를 쓰더라도 확실하게 컨트롤하여 쓰는 게 제일 중요하단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시우는 지구에 있었을 때와 한 가지 부분이 더 달랐다.

프레데터, 객식구의 진명.

프레데터는 이계로 가서 만나게 된 존재였다.

[능력 먹어서 좋다. 그런데 치킨보다 맛없다.]

평소엔 시우의 몸에 머물며 치킨이 아닌 그의 마나를 먹고 살고 있다.

그러다 시우가 적을 쓰러트리면 상대의 스킬을 추출했고, 시우는 그렇게 얻은 스킬을 사용할 수 있었다.

이형이자, 이능의 존재.

뭐, 일종의 공생 관계다.

시우는 마나를 공급해서 놈을 살게 해주고, 놈은 시우에게 적의 스킬을 사용할 수 있게 도와주고.

"프레. 지금 얻은 스킬 좀 써보자."

[알았다, 식량아.]

물론 스킬을 발동하는 데 필요한 마나는 시우의 몫이었다.

프레데터는 자신이 새로 추출한 스킬을 발동했다.

소량의 마나가 사라지며 다른 감각이 전신에 퍼져나간다.

손가락부터 발가락까지 미약한 전기가 흘러나간다.

몸의 활력이 솟구치며 귓속으로 심장박동이 울린다.

두근두근. 두근두근.

확실히 급이 낮은 스킬이라도 스킬은 스킬이네.

기분이 달라지는 걸 보면.

시우는 손가락 관절을 꺾었다.

뚝, 뚝, 끊어지는 마디 소리가 기분을 고양시켰다.

"친절들 하네. 상대가 준비 다 할 때까지 시간도 주고. 어디 양로원에서 나왔어?"

시우의 비아냥.

"크윽! 다들 뭐해!! 한꺼번에 덮쳐!"

또 다른 C급 헌터가 그를 향해 단도를 빼 들었다.

몬스터 외에 사람에게 사용해 보는 것은 처음이지만, 지금은 체면이고 뭐고 따질 겨를이 아니다.

단도의 예리한 날이 빛나며 시우의 목덜미를 향해 날아간다.

붕ㅡ 붕ㅡ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어른거린다.

시우는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공격을 피해내며 상대의 어깨와 발을 관찰했다.

대개 모든 공격은 저것만 파악해도 충분히 피해낼 수 있는 법이었다.

"이 빌어먹을!!"

가슴팍을 향해 찔러오는 검날.

쯧, 이성을 잃었네.

더는 제압을 위한 공격이 아니다. 노골적인 살상용 공격.

시우는 몸을 틀어 겨드랑이 아래로 공격을 흘려 냈다.

당연히 찔렀을 거라 예상했는지, C급 헌터는 자신의 칼이 허공을 가르자 몸의 균형을 잃고 비틀댔다.

이때다.

거리가 좁혀진 상대를 향해 시우가 카프 킥을 날린다.

빠아아악!

상대의 몸이 공중으로 뜨더니 360도 돌아 바닥에 떨어진다.

이 모든 광경이 시우의 눈에는 슬로 모션처럼 보였다.

아무래도 스킬의 영향인 모양.

시우는 무턱대고 내지르는 공격을 싫어했다.

모든 건 효율성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마나의 운용도, 스킬의 사용도, 전투도 마찬가지다.

단 한 번의 타격을 하더라도 실리를 추구해야 한다는 게 그만의 공략법이었다.

+

[스킬 : 급소 찌르기]

-등급 : C+

-내용 : 스킬이 발동되면 상대방의 급소를 향해 몸이 자동 반응을 한다. 무기를 들고 있다면 효율이 더 좋은 편.

+

급소 찌르기라.

꼭 상대에게 맞지 않더라도 일정 시간 대치하면 정보를 파악할 수 있었다.

맞았을 때의 장점은 파악 속도가 훨씬 빠르다는 것.

"커어억! 끄억!!"

놈은 다리를 뭍잡더 니 눈을 까뒤집었다.

다리뼈가 아작이 났을 거다. 한동안 고생 좀 하겠지.

시우는 발악하는 놈을 지나쳐 단도를 집어 들었다.

오랜만에 느끼는 감촉이다.

길이도 적당히 길고, 도신 한쪽에만 날이 서 있어 보기에도 매끈해 보인다.

시우는 잠시 옛 생각에 빠졌다.

그는 소싯적에 검을 많이 사용하는 편이었다.

장검이나 투 핸드 소드같이 거추장스러운 검이 아닌, 이렇게 소담하고 휘두르기 편한 검 말이다.

왜 검을 사용했냐고?

주먹으로 치면 형체가 남아나질 않으니까.

검은 피도 덜 튀고. 깔끔하지.

그는 손가락으로 날을 훑었다.

관리를 제대로 안 했는지 날이 서 있지가 않다. 검 쓰는 놈이 날도 안 갈고.

"이거 내가 쓴다."

그는 단도를 오른손에 쥐고 남은 자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맨주먹으로도 C급 헌터 두 명을 쓰러트린 사람이다.

하물며 검까지 들었으니 무얼 못할까.

그 흉흉한 기세에 아무도 덤벼들지 못한다.

도망가지 않은 것만 해도 큰 용기를 발휘한 거다.

"안 오면 내가 간다?"

비릿한 웃음이 입꼬리에 피어난다.

발을 박찬다.

검날이 번뜩인다.

그 서슬 푸른 투심을 잠재운 건 외마디 외침이었다.

"혀어어어엉!!!!"

단도 날이 적의 오른팔 오금에서 멈췄다.

찰나의 순간이다.

0.5cm쯤 들어간 탓에 피가 주르륵 흘러내린다.

조금이라도 늦게 반응했다면, 놈의 오른팔은 그대로 잘려나갔을 것이다.

침묵이 인다.

시선이 한곳으로 쏠린다.

모두가 얼음처럼 굳어버린 순간.

갑작스레 개입한 외부인만이 자연스럽게 다가갔다.

"시우 형······."

시우는 단도 날을 빼서 상대와 마주했다.

그의 눈에서 이제껏 볼 수 없던 미묘한 감정이 가득 차올랐다.

잔잔한 호수에 커다란 파문이 일듯, 묵직한 무언가가 가슴을 세차게 두들기는 기분이었다.

"시준아."

"진짜 형이네······."

민시준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이건 변환 마법이라거나 닮은 사람이라거나 위장이 아니라는 것을.

그는 형을 찾아주는 사람에게 어마어마한 보상금을 주기로 했었다.

덕분에 숱한 사기와 가짜를 마주해야만 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찾아온 거짓된 소식에 그는 수없이 좌절하고, 또 그만큼 아파했다.

그랬는데.

눈앞의 남자를 마주한 순간,

그 오랜 시간 퇴적되어온 통증이 한순간에 아무는 기분이다.

민시준은 몇 년 만에 포커페이스를 풀고 얼굴을 찡그렸다.

두 눈에 맺힌 것들이 점점 차올라 형의 얼굴을 흐릿하게 만든다.

곧 넘쳐 흘러버릴 것 같은 감정이 그를 휘감는다.

꽈악.

그때 시우가 다가와 그를 말없이 껴안았다.

"오랜만이다."

덤덤하면서 다정한 목소리.

민시준은 형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다.

십 년의 시간이 눈에서 흘러 떨어진다.

〈7화〉

수수께끼

"그러니까 금강에서 그렇게 시켰다, 이거지?"

민시준의 물음에 윤승규가 고개를 끄덕였다.

시우와 대치했던 놈들을 잡아 족쳐 정보를 얻어 낸 것이다.

너무도 쉽게 불어 버린 정보는 이러했다.

[금강 길드] 류지환의 긴급 소집.

"오늘 튜토리얼 탑 출구에서 나온 각성자를 잡아서 끌고 와라. 민시준과 닮은 놈일 것이다. 저항한다면 반 죽여도 좋다."

"류지환 그 개자식···!"

민시준의 이빨에서 으득 소리가 난다.

최성일과 이야기할 땐 필요한 인재가 어쩌고 하더니.

실상은 민시준에게 중요한 사람인 걸 뻔히 알고 했던 행동이었다.

그 비열한 뱀 같은 놈은 다른 사람의 불행마저도 먹잇감으로 삼아 제 배 속을 채울 생각뿐이다.

"어떻게 할까요?"

민시준은 고민에 빠졌다.

형이 살아 돌아온 것을 공표한다면 어마어마한 파장이 날지도 모른다.

'류지환은 둘째 치더라도 최대수가 알게 된다면···.'

과연 그 사람이 얌전히 형의 귀환을 반길 것인가?

그럴 리 없지. 살수라도 안 보내면 다행이게.

민시준은 스스로에게 화가 났다.

척박한 환경에서 자타공인 대한민국 최고의 [제국 길드]를 일구어 낸 그였다.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대형길드이건만.

이렇게 키웠음에도 최대수의 위치와 권력은 그가 따라가기 벅찰 정도로 높아만 갔다.

괴물을 잡기 위해선 괴물이 되어야만 하는 것인가.

이런 상념들이 그의 지친 육신을 주박처럼 꽁꽁 묶었다.

'한동안은 형의 존재를 숨겨야겠어. 형이 얼마나 강한지는 누구보다도 내가 더 잘 알지만··· 최대수는 권력마저도 등에 업은 놈이니, 섣불리 공개했다간 오히려 공격을 당할지도 몰라.'

민시준은 결론을 내렸다.

자신의 형과 같은 1세대 최고의 헌터이자 대한민국 삼존三尊 중 하나.

그 엄청난 경험과 괴물 같은 강함이 대통령의 자리까지 만들었으니 말해 무엇할까.

'우선은 형에게 물어보자. 어떻게 하길 원하는지.'

민시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급한 일 처리 때문에 형은 잠시 휴게실에서 경호원들과 있는 중이었다.

모처럼 만난 형인데 이게 무슨 꼴인지.

"우선 [백사자]에는 각성자를 찾아서 문제를 해결했다는 정도로만 말씀하시고. 류지환 쪽 [금강]에는 아무런 말도 하지 마세요."

"[금강]에서 먼저 연락이 오면 뭐라고 해야 할까요?"

"아마 연락 안 올 겁니다. 무슨 의도가 있었는지를 들킨 마당에 섣불리 연락해서 들쑤시진 않겠죠. 그래도 만약 연락이 오면 이 사진들이랑 음성 파일 보내세요."

민시준은 형을 덮쳤던 [금강 길드]의 C급과 D급 헌터들이 무릎 꿇고 손들고 있는 사진을 보여 주며 말했다.

혹시나 해서 미리 찍어 둔 것들이다.

"네이브 실검 1위 하고 싶지 않으면 서로 좋게 좋게 가자는 말도 덧붙이고요."

"알겠습니다."

민시준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려다 멈칫했다.

형에 대해 가까이서 지켜본 그 여자가 생각난 것이다.

"그리고 튜토리얼에서 나온 각성자. 최대한 저희 쪽으로 올 수 있게끔 조치해 주세요. 아무래도 곁에 두는 게 안전할 것 같으니까."

***

"야, 너네 집 좋다."

동생의 집에 들어간 시우는 진심 어린 감탄을 했다.

으리으리한 대리석 바닥에 축구를 해도 될 만큼 널따란 거실, 고풍스러운 장식품들과 서울의 야경이 내려다보이는 멋진 전경까지.

옛날 영화나 TV에서만 보던 부잣집의 모습 그 자체였다.

이 모든 것을 그 누구의 도움도 없이 동생 혼자 일궈 냈다고 생각하니, 시우는 괜한 뿌듯함에 입꼬리가 올라갔다.

[끄아아아! 여기 너무 높다! 무너지면 다 죽는다! 얼른 나가라 식량! 옛날처럼 굴을 파고 들어가라!!!]

안에서 꽥꽥거리는 객식구의 비명을 무시한 채 시우는 집구경을 마저 했다.

"고생 많았겠네. 우리 동생 혼자 집 사느라고. 수고했다."

"아냐, 내가 뭘··· 다 형한테 배운 기술로 번 건데."

시우의 멋쩍은 칭찬에도 민시준은 기분이 날아갈 듯했다.

이 세상에서 그가 가장 인정받고 싶었던 대상이다.

애초에 이 집도 형과 함께 살 것을 가정하고 구매한 것이고.

'퇴근하고 매일 혼자 쓸쓸히 캔맥주에 컵라면이나 먹었었는데.'

민시준은 차오르는 눈물을 억지로 집어삼키며 미소 지었다.

형이 있는 집이라니.

이 모습을 얼마나 상상했던가.

자그마치 10년이다, 10년.

민시준은 애써 괜찮은 척 형에게 말을 걸었다.

"형 배고플 텐데 저녁부터 먹자. 형이 최근에 뭘 좋아하는지 몰라서一 그냥 이것저것 골라 왔어. 먹고 싶은 것만 먹고 맛없으면 굳이 안 먹어도 돼. 무리해서 먹지 마, 형."

민시준은 익숙한 듯 식탁 위에 음식들을 늘어놓았다.

세 종류의 치킨과 김치찌개, 찐만두, 곱창, 보쌈, 족발, 초밥, 육회, 사이다, 콜라, 여러 가지 맛 아이스크림까지.

[식량아, 이게 다 뭐냐. 난 오늘 천국에 있는 것이다. 저 수컷 너랑 닮았지만 너보다 훨씬 낫다. 너보다 서열 높다.]

둘이 먹는 식사란 걸 알고 사 온 건지, 아니면 뷔페처럼 먹으라고 사 온 건지.

그리 좁지도 않은 식탁이건만, 음식으로 꽉 차서 밥그릇 놓을 공간조차 부족했다.

"내 배 터뜨려 죽이려고?"

시우는 차려진 음식을 보며 피식 웃었다. 전부 그가 좋아했던 음식들이다.

시간이 흘렀어도 형의 식성을 잊지 않고 음식을 사 온 동생의 마음에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불과 낮에만 하더라도 낯선 서울의 모습에 이질감을 느꼈었는데.

이래서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건가.

동생과 함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보이지 않는 끈끈한 애착 같은 것이 마음속에서 흘러넘치는 기분이다.

"형, 얼른 앉아. 음식 식겠다."

"그래. 고맙다."

시우는 시준의 맞은편에 앉았다.

동생의 얼굴은 못 본 사이에 조금 달라져 있었다.

늘 해사하게 웃던 녀석은 시종일관 무표정을 지었고, 어린애 같던 얼굴도 이제는 좀 어른스러워졌다.

고작 십 년의 변화가 이럴진대.

나는 그전과 얼마나 달라져 있을까.

문득 든 궁금함.

그러나 시우는 그 생각을 길게 이어가지 않았다.

지금은 현재에 집중하자.

그리고 현재는··· 음식이지.

젓가락을 들었다. 치킨은 낮에 먹었으니, 가장 맛있어 보이는 참치 뱃살 초밥부터 입에 넣었다.

[마, 맛있냐? 맛있냐? 치, 치느님 보다 맛있는 것이냐?]

우물···.

씹는 순간, 마치 머릿속에서 종이 치는 기분이다. 시우는 홀린 듯이 다음 음식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래, 이 맛이지. 이게 음식이지.

이계의 음식은 소죽이나 개밥 같은 느낌에 가까워 식욕이 생길 틈이 없었다. 혹은 말똥이나 썩은 달걀이랑 비교해도 무방하고.

시우는 젓가락질을 멈추지 않았다.

매콤한 곱창을 가져다 먹고, 고소한 육회를 한 젓가락 집어서 먹고, 육즙이 가득한 만두를 들어 한입 베어 물었다.

[나, 나도 한 입만··· 누구 입은 입이고, 누구 입은 주둥아리인 것이냐! 프레데터도 생명이야, 생명!]

"와ㅡ 진짜 맛있다."

"그래? 정말? 정말 맛있는 거지?"

"어. 장난 아닌데? 이렇게 맛있는 음식은··· 언제 먹었는지 기억도 안 난다."

물론 낮에 먹은 치킨은 빼고.

"다행이다. 형 입맛이 변했으면 어쩌나 하고 걱정했거든."

동생 시준은 환하게 웃으며 한시름 놓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처음으로 시준의 얼굴에서 예전 웃음이 보이는 듯했다.

시우는 그 모습에 동생의 마음이 기특하게 느껴졌다.

이계에서 자신을 챙겨줬던 유일한 존재는 프레데터밖에 없었으니까 말이다.

"고맙다."

"······응."

민시준은 형이 먹는 모습을 보며 묻고 싶었던 수많은 질문을 꾹꾹 눌러 담았다.

먼저 물어봐야 하나. 아니면 형이 말해 줄 때까지 기다려야 하나.

그 같은 고민이 얼마나 지났을까.

젓가락을 내려놓은 시우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내가 사라지고 십 년 정도 지났다며?"

"맞아. 형은 도대체 어디에 있다가 이제 나타난 거야?"

시우는 잠시 천장의 형광등을 바라봤다.

마왕을 처치한 날, 자신을 덮쳐 왔던 그 빛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시우는 동생에게 자신이 겪었던 일을 가감 없이, 그러나 최대한 담백하게 차근차근 풀어 설명했다.

이계에 떨어졌고, 프레데터를 만나 스킬을 추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계의 종족들과 오랜 세월을 싸우며 결국 그 지역의 패자가 되었고.

계속 차원 이동에 관한 정보를 파헤쳤으며, 프레데터로 능력을 흡수하기 위해 이계의 온 지역을 두루 헤맸다.

드래곤에게만 있다는 정보를 얻은 뒤에는 드래곤을 찾아다녀 전투를 벌였고, 마침내 아홉 번째 드래곤을 쓰러트려 차원 이동으로 지구에 귀환하게 되었다.

[하하. 가소로운 놈들이었다. 감히 이 몸을 상대로 덤비다니. 물론 식량 혼자서는 힘들어 보여 내가 능력을 빌려줘 이길 수 있었다. 나한테 감사하거라.]

몇 시간에 걸친 이야기가 끝났다.

민시준은 형의 말에 어떤 말을 해야 할지 감이 오질 않았다.

아마 보통 사람이 들었다면 "구라 치지 마."라고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준은 형의 성격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이건 모두 사실이다.

"당장 무슨 말을 해 줄 필요는 없어."

시우는 이해한다는 듯 동생을 향해 가볍게 웃어 보였다. 직접 겪은 당사자도 믿기 힘든 내용이다.

하물며 5년 10년도 아닌 100년간 겪은 일이다.

몇 시간 들었다고 해서 그 사건들이 사실로 와닿을 리는 만무한 일.

"형의 말을 믿지 못하는 게 아니라··· 그냥 상상이 안 되는 것들이라."

"알아, 인마."

시우는 육회를 한 입 집어 먹었다. 오래 말을 했더니 다시 배가 꺼지는 기분이다.

그는 우물거리며 무심한 말투로 물었다.

"최대수가 대통령이라며?"

오히려 질문을 들게 될 줄 몰랐던 시준은 잠시 입술을 달싹였다.

"어떻게 알았어?"

"탑 안에서. 내가 있던 곳이랑 몇 년이나 다른 건지 조사하다가 우연찮게 대통령이 누군지 물었거든."

"그랬구나··· 형 많이 놀랐겠네. 하필이면 그놈이 대통령이 돼서."

"놀라기는. 우스울 따름이지."

"정말 미안해. 내가 막았어야 했는데, 생각보다 쉽지 않더라."

시우는 컵에 따라진 맥주를 들이켰다. 술도 이계보다 지구가 훨씬 낫다.

거기는 말 오줌이나 술이나 맛이 거기서 거기였다. 물론 말 오줌을 먹어 본 건 아니지만.

차가운 컵에 따라진 맥주는 단숨에 시우의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시원하다, 식도도 머리도.

"여러 사정이 있었겠지. 너나, 다른 애들이나."

시우는 무덤덤한 투로 안심시켰다.

빈말을 하지 않는 그였기에, 민시준은 그 문장에 담긴 깊은 뜻을 한 번에 헤아릴 수 있었다.

"형이 있었으면, 만약 그랬다면 다 달라졌을 거야."

그 깊은 자조에 시우는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헛된 위로는 듣는 이에게나, 전하는 이에게나 아무런 득이 되지 못하니까.

"그나저나 너 길드 단장이라며. 형 없이도 잘했다."

그냥 길드도 아닌, 국내 굴지의 길드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헵타그램 중 하나, [제국 길드].

게다가 보유한 던전이나 게이트도 어마어마했고, 민시준의 사업 수완도 좋아 마정석을 가공한 아이템도 상당히 큰 매출을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거대한 길드이자 잘 나가는 아이템 공방. 거기에 딸린 수많은 헌터 인력들과 엄청난 자본.

최대수가 군침 흘릴 만하네.

시우는 단번에 최대수의 속내가 눈에 보일 듯 훤하게 느껴졌다.

어떤 의미로는 참 한결같은 놈이야.

"그래서 말인데, 형은 앞으로 어떻게 하고 싶어? 내 생각엔 형 컨디션도 다 안 돌아왔다고 하니까, 컨디션 돌아올 때까지만이라도 어디 별장에서 휴식을 취하는 게 좋을 것 같거든."

"왜? 최대수 때문에?"

민시준의 의도를 단번에 간파한 시우가 역으로 질문했다.

"···눈치챈 것 같으니까 돌려 말하지 않을게. 형이 얼마나 강한지는 누구보다도 내가 더 잘 알아. 하지만 최대수는··· 옛날의 놈과는 차원이 달라! 못해도 2년, 아니 1년 만이라도 준비를 해 놓자."

그는 동생의 얼굴을 살폈다. 필사적이다.

시우도 대충은 신지수를 통해 들은 게 있었다.

최대수가 얼마나 괴물인지에 대해서.

"시준아."

"···응."

"형이 알아서 할게. 걱정 마."

그러나 겁나지 않는다.

괴물은 최대수 혼자만 된 게 아니다.

시우는 맥주를 다시 따르며 말을 이었다.

사실 그가 가장 궁금했던 내용은 지금부터였다.

"그나저나 애들은?"

"애들?"

"제자들."

시우는 미묘하게 변한 민시준의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우리 다 떨어져 살아. 연락도 안 한 지 좀 됐어."

"그렇구나. 다들 건강하지?"

민시준은 잠깐 숨을 들이켰다가 조용히 내쉬었다. 많은 의미가 담긴 깊은 날숨이었다.

"우선 샤오롱은 자기 고향으로 갔어."

"샤오롱은 그럴 것 같더라. 여화는?"

"강여화는······ 최대수 쪽으로 돌아섰고."

흠, 이건 좀 의외네.

시우는 입에 남은 맥주 맛이 쓰게 느껴졌다. 다른 누구도 아닌 여화가 그럴 줄이야.

"민준이는?"

이번에는 대답이 상당히 느리다.

시우는 자신의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뜸을 들이는 동생의 모습을 바라봤다.

그렇게 대답을 고르고 고른 시준이 입을 열었다.

"죽었어."

······.

침묵.

시우는 예상치 못한 연이은 대답에 감정이 출렁이는 것을 느꼈다.

"죽어? 누구한테?"

민시준은 고개를 도리질했다.

그 힘겨운 도리질에 시우는 마음이 뻐근해져 왔다.

"사체가 있으면 알 수 있잖아."

시우의 말에 민시준은 혓바닥으로 말라버린 입술을 적셨다.

"그게··· 사체가 없어."

〈8화〉

헌터 특수 수사대

달빛이 든다.

은빛 서늘함이 몸을 훑고 아파트 옥상에 고요히 흘러내린다.

찬 바람도 불지 않건만. 몸이 시리다.

"후우."

시우는 편의점에서 사 온 담배를 들었다 놓기를 반복했다.

100년을 기다려 온 결과가 이렇다.

그대로 있기를 바랐던 것들은 흩어지고.

변하기를 바랐던 것들은 더욱 견고하고.

시우는 담배를 입에 물었다. 불은 붙이지 않았다.

"알량한 시간이군."

백 년이 아니라 딱 50년만 있다가 왔다면. 그랬다면 변할 수 있었을까.

괜한 잡념이 머릿속에 담배 연기처럼 뒤엉킨다.

고향에 간 샤오롱이야 둘째 치자.

백번 양보해서 강여화의 행보도 이해가 간다 치자.

그러나 정민준의 죽음은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스승보다 먼저 죽는 제자가 어디 있냐.

썩을 놈.

시우는 난간에 머리를 기댔다.

서늘한 감촉이 이마를 식힌다.

도수 높은 안경을 쓰곤 옆에서 헤실헤실 웃던 민준이.

그 구김 없는 웃음이 거대한 시간을 뚫고 와 시우의 눈 속에 보석처럼 박힌다.

한숨을 내쉰다.

[왜 어울리지 않게 청승이냐.]

내면에서 프레의 맑고 고운 목소리가 울린다.

친한 친구가 어깨를 툭 치듯, 가볍고 깊은 손길이다.

"그냥. 생각보다 많이 변해서."

[세상은 다 변한다. 사람도 변하고, 음식도 변하고, 땅도 변하고, 하늘도 변한다. 변하지 않는 건 없다. 변하지 않길 바라는 자만 멍청한 거다.]

"······."

프레는 차분하게 자신의 생각을 읊어 나갔다.

그 조곤조곤한 음성에 보이지 않는 상처가 묻어 있는 듯하다.

[불멸의 내 종족도 마찬가지다. 가족들, 친구들 많았는데 다 없어졌다. 이제 나 혼자다. 다 변한다.]

100년 이상을 산 시우보다 몇 배는 더 살았을 존재.

시우는 프레가 겪었을 일들이 자신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었다.

'이 세상에 나만이 유일한 인간이라면.'

그것에서 오는 외로움은 시우도 충분히 겪었던 거다.

이계에서 미치도록 느꼈던 감정이니까.

[······그러니까 너는 변하지 마라. 가만 안 둔다.]

이상한 결론이다.

모든 것들은 변할 수밖에 없다면서.

변하지 않길 바라는 자만 멍청한 거라면서.

그런데 나보고 변하지 말라니?

시우는 뜬금없는 프레의 엄포에 잠시 멍한 얼굴을 했다.

그리고 그 마음을 충분히 헤아릴 수 있었다.

그럼에도 믿고 싶은 거라면. 다시 한번 더 멍청한 자가 되고 싶은 거라면.

"그래, 안 변할게. 죽는 한이 있어도 변하지 않을게. 그러니까 너도 변하지 마라."

[알았다.]

옅은 미소가 번졌다.

시우는 옥상 난간에 새 담배를 올려 둔 채 먼 곳을 응시했다.

구름 속에 달이 숨는다.

"···너 다 피워라, 인마."

제자의 죽음.

지구에 와서 해야 할 일이 생긴 순간이다.

시우는 주먹을 꽉 쥐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