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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TO 61

제51화

가주가 눈썹을 꿈틀했다.

[널 위해 하는 제안이다.]

"알고 있습니다."

[어린 마음에 과욕을 부리려는 거냐?]

크리스는 고개를 저었다.

솔직히 말해 재능을 믿는 것도 있지만, 더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과욕이 아닙니다. 되든, 안 되든 반드시 해내야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암흑 마가를 위해서라도요."

노르디언의 얼굴이 굳었다.

[그게 무슨 말이지?]

"외람되지만, 먼저 하나 여쭙겠습니다. 다른 이야기이긴 하지만… 가주님께서는 당금의 암흑 마가가 왜 이전의 전성기의 힘을 잃고 약세를 보이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옆의 메리안이 숨을 들이켰다.

가세의 약화.

사실이었다.

과거 암흑 마가는 마도 12 명문가 중에서도 손꼽는 저력을 지니고 있었다.

천외천이라 불리는 신비, 사령까지는 아니더라도 파괴, 흑요, 저주 등과 어깨를 나란히 했었다.

하지만 조금씩 조금씩 힘이 줄어들더니 지금은 12 명문가 중에서 상대적 약체로 평가되고 있었다.

감히 가주의 면전에서 그 이야기를 하다니.

[이유가 있다는 거냐?]

노르디언이 싸늘히 되물었다.

분위기가 급속도로 얼어붙었다.

살이 에일 정도로.

그럼에도 크리스는 시선을 거두지 않고 똑바로 말하였다.

"네, 원래는 몰랐습니다만, 방금 가주님과 대화를 하고는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말해보아라.]

"바로 가주님 때문입니다."

[!!]

그 폭탄 발언에 조마조마하게 크리스를 보던 메리안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사이먼도 마찬가지였다.

미친놈을 보듯 크리스를 보았다.

[지금… 뭐라고 했느냐?]

두근, 심장이 뛰었다.

어떤 기세의 압박도 없었다.

그저 가만히 물었을 뿐이다.

그럼에도 영혼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하지만 크리스는 물러서지 않았다.

'내가 틀린 말을 하는 건 아니니까.'

무엇보다 메리안이 충고하지 않았는가?

이번 기회에 가주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한다고.

그러니, 더욱 거침없는 발언을 하는 거다.

가주의 마음을 완벽히 사로잡기 위해.

비록 지금은 분노할지라도, 결국 자신의 말이 옳았음을 알게 될 테니까.

"제 말에 진노하셨다면, 송구합니다. 하지만 잠시만 제 설명을 들어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차분한 응대에 노르디언은 입을 다물었다.

무언의 승낙이었다.

"암흑 마가는 과거에 비해 훨씬 거대해졌습니다. 이전과 비할 바 없이 번영하였지요. 이는 모두 가주님의 은덕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다른 마인들은 암흑 마가가 예전만 못하다고 합니다."

아이러니한 이야기.

노르디언은 암흑 마가를 번영으로 이끌었다.

과거보다 훨씬 세력이 커졌고, 까마득한 물질적인 부도 이루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세인들은 암흑 마가가 약해졌다고 한다.

그 이유는 단 하나.

"절대자의 부족 때문입니다."

[!!]

"노가주님 이후로 단 한 명의 8성 마인도 등장하지 못하고 있지요. 7성 마인조차 단 두 명일 뿐입니다."

가문의 힘을 평가하는 잣대는 많다.

휘하 세력, 부, 영향력, 영토 등등.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을 무시하는 단 하나의 요소가 있었다.

바로 절대자들.

최소 7성 이상.

인간의 몸으로 이적을 일으킬 수 있는 경지.

이들이 바로 가문의 힘을 좌우한다.

세력이 커다라면 무엇 하는가?

단 한 명의 절대자에게 짓밟힐 텐데.

단적인 예가 사혈의 마왕이다.

훗날 사혈의 마왕이 암흑 마가를 침공했을 때.

그때, 노르디언은 이미 '모종의 사건'으로 사망한 뒤여서, 나머지 이들이 모여 사혈의 마왕에 맞섰다.

암흑 마가 측은 1만이 넘는 마인이.

반면, 사혈의 마왕은 단 한 명이었다.

그리고 연합에까지 소문이 진동한 유명한 회전이 벌어졌다.

1만이 넘는 암흑 마가의 마인들이 사혈의 마왕에게 돌진했다.

하지만… 그 수많은 마인들은 그녀의 손끝 하나 건드리지 못했다.

그 뒤 벌어진 건 참혹한 학살.

암흑 마가는 그녀의 자비로 간신히 멸문을 피할 수 있었을 뿐이다.

이후 그녀의 개로 전락했다.

'암흑 마가에는 8성뿐 아니라, 7성의 숫자도 부족하지. 단 두 명뿐이니까.'

반면, 6성은 많다.

다른 곳보다 훨씬 많다.

이것도 기이했다.

이제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바로 한계를 스스로 정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한계를 정하지 않았다면, 암흑 마가의 모습은 지금과 달랐을 겁니다."

만약, 성흑식 때 성흑을 제한하지 않았다면.

아니, 얼토당토않은 공정한 경쟁으로 성흑을 나눠 가지게 하는 것 따위 때려치우고 최고의 강자가 성흑을 독식할 수 있게 하였다면 어땠을까?

'솔직히 이런 대단한 힘을 모두가 얻을 필요는 없잖아?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인 격인데.'

크리스는 자신의 몸에 휘도는 암흑 마기를 보며 생각했다.

이건 누구나 다룰 수 있는 힘이 아니다.

분수에 맞지 않는 놈들이 익혀봤자, 체격에 맞지 않은 무기를 억지로 휘두르는 격이었다. 오히려 역효과.

크리스가 생각하기에 암흑 마기는 오로지 소수의 극히 뛰어난 이들만을 위한 힘이었다.

[....]

크리스가 던진 말에 장내가 고요해졌다.

충격을 받은 거다.

가주는 한참이나 침묵하다가 말하였다.

[네 말은 문제가 있다. 만약 제한을 두지 않았다가, 분수에 맞지 않은 성흑을 흡수해 벽에 막혀 좌절하게 된다면? 그런 경우가 수도 없을 거다.]

옳은 말이었다.

수없는 이가 낙오하게 될 거다.

하지만.

"음, 물론 그건 안타까운 일이겠지요. 하지만 가문의 입장에서 솔직하게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말하여라.]

"못난 놈들이 낙오한들 무슨 상관입니까? 어차피 그 정도 수준밖에 안 되는 것들일 뿐인데. 못난 머저리들보다 비록 숫자는 적더라도 시련을 극복한 절대의 강자가 가문에 더 큰 도움이 될 겁니다."

[!!]

모두가 놀란 얼굴을 하였다.

하지만 크리스는 태연히 생각했다.

'틀린 이야기는 아니잖아?'

그리고.

가주가 웃음을 흘렸다.

[큭큭.]

뜻밖의 반응.

불쾌한 반응이 아니었다.

노르디언은 크리스의 말에 실제로 한 방 얻어맞은 듯한 느낌을 받았다.

'낙오자는 필요 없다, 라. 틀린 말은 아니군.'

비정한 이야기지만, 마도는 강자존.

마도가 추구하는 가치를 정확히 꿰뚫는 발언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크리스티앙의 말에 동의한 건 아니다.

크리스가 방금 한 말은 지극히 현실성이 떨어졌으니까.

극한의 벽을 뛰어넘는 초인. 말은 쉽다. 하지만 그럴 수 있는 이는 선택받은 극소수일 뿐이다.

그걸 잘 알기에 노르디언은 7할 이상의 성흑을 흡수하지 말라고 명한 거다.

[네 이야기는 잘 알겠다. 하지만 어떤 그럴싸한 이야기라도 증명해낼 수 없다면, 허황한 헛소리에 그칠 뿐. 넌 과연 스스로 네 이야기를 증명할 수 있겠느냐?]

크리스는 주저하지 않고 답했다.

"물론입니다."

[흥.]

가주는 등을 돌렸다.

[후회하지 말아라.]

파앗!

시야가 변하였다.

환술이 펼쳐진 거다.

메리안과 사이먼의 모습은 사라졌다. 가주의 모습도 사라졌다.

크리스는 홀로 울창한 수림에 덩그러니 놓이게 되었다.

[암흑 마기의 전수를 시작하겠다. 첫 번째 과제를 내겠다.]

보이지 않는 아득한 멀리서 가주가 보낸 음성이 들려왔다.

[살아남아라.]

* ? ?* ? ?*

살아남아라.

그 말의 의미는 곧바로 알 수 있었다.

파앗!

빛이 번뜩였던 거다.

사각에서 튀어나온 공격!

크리스는 본능적으로 몸을 비틀어 간신히 그 공격을 회피해냈다.

커다란 바위 피부의 도마뱀 마수가 혀를 날름거리며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4마급 마수인 바위 도마뱀. 교습 시작부터 화끈한데?'

크리스의 경지가 아직 2성인 것을 생각하면 절대로 이기기 불가능한 상대였다.

'연합의 힘을 사용하는 건 불가능하고.'

그때, 또 섬뜩한 소리가 들렸다.

크르르.

이번엔 집채만 한 곰이 나타났다.

단순히 큰 게 아니다.

머리는 두 개. 팔은 네 개.

같은 등급의 4마급 마수인 트윈 헤드 베어였다!

문제는 한 마리가 아니란 거다.

두 마리가 동시에 나타났다.

총 세 마리의 4마급 마수.

이 정도면 연합의 힘을 사용하더라도 정면 대결로 이기는 건 절대로 불가능했다.

'혹시 내가 한 말에 열 받아서 지도를 빌미로 날 죽이려는 속셈인 건 아니겠지?'

그런 의심이 들 정도로.

파앗!

도마뱀이 쏜 침이 날아들었다.

화살보다 빠른 속도.

간신히 회피하니 침에 맞은 나무가 썩어 들어갔다.

만약, 피하지 못했다면 크리스의 몸이 저 꼴이 되었을 거다.

'장난이 아니군.'

노가주의 의도가 무엇이든, 확실한 게 있었다.

아차, 하면 여기서 죽을 거라는 거다.

- 가르침에 친절한 분은 아니시다.

메리안의 말뜻이 이해되었다.

쿵, 쿵.

트윈 헤드 베어가 크리스티앙에게 다가왔다.

4마급 마수답게 머리도 영민해 서로 포위망을 짜듯 크리스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조금씩 거리를 좁혔다.

그 뒤에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바위 도마뱀까지.

절체절명의 위기였지만, 크리스는 씨익 미소를 지었다.

'이것 재밌는데?'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생각.

'무언가 답이 있겠지.'

이게 실전 상황이었다면, 가슴이 떨렸겠지만, 지도 교습이다.

설마 노가주가 답 없는 과제를 내지는 않았을 거다.

그리고 그 답은 분명 암흑 마공과 연관이 있을 거다.

'답을 찾지 못한다면, 죽겠지만.'

파앗!

콰앙!

아슬아슬하게 트윈 헤드 베어의 공격을 피하며 크리스티앙이 암흑 마기를 끌어 올렸다.

'한번 해보자고!'

* ? ?* ? ?*

조금 전 크리스티앙과 대화를 나누었던 연무장.

노가주와 메리안이 대화를 나누었다.

"또 그 과제입니까?"

[그래.]

메리안이 질린 얼굴을 하였다.

'또 악취미를.'

노르디언.

최강의 마인이지만, 솔직히 스승으로서 좋은 이는 아니었다.

아니, 도리어 최악이었다.

눈높이가 턱없이 높은 건 당연했고, 가르침의 방식이 굉장히 혹독했다.

메리안의 형제 중 노르디언의 가르침을 받다가 중상을 입지 않은 이가 없을 정도.

사자가 절벽에 새끼를 굴리는 것과 비슷한 스타일의 교육이었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그러면서 가르침의 효율이 썩 좋지도 않지.'

혹독한 시련을 극복해도, 뭔가를 얻어내기가 어려웠다.

이유는?

솔직히 말해서.

'…가주님께서는 가르침에 재능이 부족하셔.'

그나마 체면을 고려해 부족하다고 한 거지, 최악이었다.

강하다고 꼭 좋은 스승인 건 아니니까.

그런 면이 가장 잘 드러나는 게 지금 크리스가 치르는 과제였다.

그녀와 형제들도 다 한 번씩 경험한 과제.

[극한의 상황에서 생존하기 위해 발버둥 치다 보면 암흑 마기의 본질을 더욱 강하게 느낄 수 있을 거다.]

"...."

메리안은 잠시 침묵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가주님.'

형제 중 단 한 명도 저 과제를 통해 성과를 얻은 이가 없었다.

애초에 말이 되지 않는다.

극한으로 몰린 상황에서 암흑 마기의 본질을 통찰하라는 건데, 그게 어떻게 된다는 말인가?

[저 마수들에게서 생존하려면 암흑 마기를 바닥까지 쥐어짜야 한다. 자연스레 암흑 마기의 본질과 마주할 수 있게 되는 거지.]

전혀 납득 가지 않는 이야기.

하지만 메리안은 잠자코 있었다.

'크게 다치지만 않길 바랄 뿐이군.'

제52화

그나마 한 가지 다행인 건, 과제에 출몰하는 마수의 민첩성이 비교적 낮다는 거다.

마수의 등급은 능력의 종합을 고려해서 결정되는데, 저 마수들은 강하긴 하지만, 다른 4마급과 비교해 행동력이 굼뜬 편이어서 작정하고 피하려고 마음먹으면 버티는 게 가능하긴 했다.

물론, 간신히 피하는 게 고작이고, 아차 실수하는 순간 치명상을 입게 되겠지만 말이다.

'역시 잘 피하긴 하는군.'

영상구를 통해 크리스가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요리조리 아슬아슬하게 잘 피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확실히 재능이 있긴 하구나. 움직임이 다른 아이들과는 전혀 달라.]

노르디언도 살짝 감탄한 음성.

[하지만 지나치게 영리하군. 마수의 움직임을 모조리 예측해 회피하고 있어. 극한에 몰려야 암흑 마기의 본질을 더욱 강하게 느낄 수 있을 텐데.]

노르디언이 이 과제를 통해서 바라는 건 하나였다.

본격적인 가르침을 내리기 전, 극한의 상황에서 암흑 마기의 본질을 직접 몸으로 체험하기를 원하는 거였다.

처음 암흑 마공에 입문하기 직전, 암흑 마기의 본질을 느껴보는 건 보물과도 같은 경험이 되니까.

'암흑 마기는 위대한 힘. 만약, 암흑 마기의 본질을 완벽하게 통찰해 활용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저 마수들을 쓰러뜨릴 수도 있지.'

물론, 그건 아주 상급의 기예였다.

암흑 마가의 일반적인 이들은 평생을 가도 깨닫지 못하기도 하는 고절한 기예.

노르디언은 그런 상승의 길로 가는 기초를 닦아주기 위해 이런 과제를 낸 거다.

'하지만 저래서야. 암흑 마기의 본질을 느끼기는커녕….'

그렇게 못마땅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났다.

쿠웅!

트윈 헤드 베어 한 마리가 쓰러진 거다.

"!!"

[?!]

메리안과 노르디언은 눈을 크게 떴다.

난데없이 일어난 일.

"혹시 가주님께서 손을 쓰신 겁니까?"

[…아니다.]

"그런데 어째서?"

노르디언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지금 방금 자신이 본 장면을 믿지 못하고 수정구를 뚫어지라 보고 있었다.

'방금 그건…? 아니야. 그럴 리가?'

트윈 헤드 베어가 쓰러지기 전, 크리스티앙의 손이 트윈 헤드 베어의 등을 가볍게 건드렸다.

공격도 뭣도 아닌, 터치.

그런데 트윈 헤드 베어가 쓰러졌다.

단 하나.

노르디언은 저런 식의 현상이 일어나게 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말도 안 됐다.

아직 암흑 마공에 입문하지도 않은 놈이 그런 일을 해낼 수 있을 리가?

하지만 그때.

쿠웅!

또 굉음이 울렸다.

두 번째 트윈 헤드 베어가 쓰러진 거다.

장내가 고요해졌다.

이번엔 메리안도 알아보았다.

"가주님… 설마, 방금 저건?"

[....]

침묵에 빠진 노르디언 대신, 옆에 조용히 있던 사이먼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가주님이 즐겨 사용하시던 그 기술 같군요. '암흑… 절명'이었나?"

"...."

아니다.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노르디언이 보기에도 방금 크리스티앙이 사용한 기술은 '암흑 절명'이 맞았다.

암흑 마기의 본질을 느껴보라고 해놨더니, 지금 크리스는 수십 단계를 뛰어넘어 상급 기예까지 사용해버린 거다!

심지어 놀랄 일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연이어 크리스가 벌이는 일을 본 메리안은 가주 옆인 것도 잊고 한마디 하였다.

"…미친?"

* ? ?* ? ?*

'역시, 노가주. 명성대로야. 훌륭한 가르침이야.'

크리스는 속으로 감탄하였다.

처음, 상대하기 어려운 마수들이 출몰했을 때만 해도 고개를 갸웃했다.

왜 이런 과제를 내는 거지?

위험하기만 한 것 같은데?

하지만 역시 아니었다.

노르디언은 암흑 마가 최강의 마인답게 딱 적절한 과제를 내준 거다.

'암흑 마기를 이용해 저 마수들을 쓰러뜨리란 거였어!'

그런 과제 아니다.

하지만 크리스는 그렇게 오해하였다.

가능해 보였으니까.

'내가 저 마수들보다 우월한 건 단 하나. 암흑 마기를 가지고 있다는 것뿐이야.'

그렇다면, 암흑 마기를 무기로 사용해야만 했다.

그게 과제의 답일 거다.

…전혀 그런 거 아니었지만, 크리스는 오해하고는 스스로 해답을 찾았다.

'암흑 마기의 성질은 완벽한 어둠. 그리고 지배야.'

노르디언이 한 가지 모르고 있었던 건, 크리스가 이미 암흑 마기의 본질을 완벽히 통찰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지식적인 깨달음이 아니다.

성흑을 10할 흡수하면서 몸에 본능적으로 각인된 거다.

'어둠과 지배의 성질. 그걸 어떻게 무기로?'

답을 도출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마수도 어둠을 품고 있다.

그 어둠을 굴복시켜야 했다.

'쉽진 않겠군. 그래도 저 마수들을 상대로는 가능하겠는데?'

크리스는 노르디언의 배려(?)에 감탄했다.

지금 나타난 마수들은 강력한 힘과 물리적 방어력을 지닌 대신, 민첩성이 낮고 마기 저항력이 약한 편이었다.

원래는 크리스를 물리적으로 극한으로 밀어붙이기 위한 선정이었지만, 도리어 암흑 마기를 활용해보기 딱 좋은 대상이 되었다.

처음엔 잘 안 되었다.

어떤 식으로 해야 상대의 마기를 지배할 수 있는 건지 잘 감이 잡히지 않았다.

누구도 가르쳐준 적 없으니까.

하지만 크리스는 어렴풋이 홀로 실마리를 찾아갔다.

'암흑 마기를 일시적으로 놓아주는 거야. 멋대로 날뛸 수 있게.'

암흑 마기는 스스로 다른 마기를 지배하려는 성질이 있었다.

하지만 인위적으로 그 지배력을 발휘하려 하면 잘 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찰나, 통제력을 놓는 거다.

암흑 마기가 스스로 날뛸 수 있게.

물론 거기서 그치면 안 되었다.

암흑 마기가 지나치게 날뛰면 상대 마기도 강한 반발력을 일으키며 도리어 지배력을 잃게 된다.

암흑 마기가 지배력을 발휘한 순간, 곧바로 다시 통제권을 가지고 와 조절해야 자신의 뜻대로 상대의 마기를 움직일 수 있었다.

곡예와 같은 일.

하지만 몇 번 시도해보니 감이 오기 시작했다.

'상대 마수의 코어 전체를 지배할 필요는 없어. 핵심 장기의 혈맥으로 향하는 마수의 마기만 지배해 통제하는 거야.'

이를테면 심장. 아니면, 뇌로 향하는 마기를 지배해 잠깐만 장기의 움직임을 멈추게 하면 된다.

그러면 소량의 마기만으로 상대를 쓰러뜨릴 수 있는 거다.

과연, 예상대로 트윈 헤드 베어는 의식을 잃고 쿠웅 하고 쓰러졌다.

'이거 암흑 마기 훈련으로 최고인데?'

크리스는 감탄했다.

실제로 다른 마인에게 활용하기는 쉽지 않은 기술이었다.

이 곰탱이처럼 얌전히 당하고 있지는 않을 테니까.

하지만 이렇게 물리적 힘은 강대하지만, 행동이 굼뜨고 마기 저항력이 낮은 마수를 상대로는 강력한 한 수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암흑 마기를 다루는 훈련으로 최고였다.

'역시 가주. 암흑 마기를 훈련해 보라는 의도로 이런 과제를 내었구나. 다음은 바위 도마뱀.'

말처럼 바위 피부를 가진 도마뱀이었다.

마법적으로나 무기를 통해서나 외부의 물리적인 공격으로는 타격을 주는 게 거의 불가능했지만.

'이것도 암흑 마기로 쓰러트리란 거겠지. 어떻게 하면 될까?'

단순히 급소를 향하는 마기를 지배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트윈 헤드 베어와 다르게 장기의 구조가 달랐다.

심장도 세 개. 심지어 그것도 돌로 만들어진 심장이었다. 쉽게 멈추지 않는다.

'그렇다면.'

크리스티앙은 눈빛을 빛냈다.

바위 도마뱀의 사각으로 접근했다.

다시,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 ? ?* ? ?*

"...."

[....]

메리안과 노르디언은 침묵하였다.

'…지금 내가 제대로 보고 있는 게 맞는 건가?'

메리안이 황당한 얼굴로 생각했다.

노르디언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었지만,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뻔했다.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으니까.

사이먼이 어깨를 으쓱하며 즐거운 음성으로 말하였다.

"호오? 저건 응용 버전인데요? 단순히 일부 장기의 기능을 일시적으로 멈추게 하는 게 아니라, 마기의 흐름을 방해해 몸 전체에 광범위한 타격을 주는."

그러니까.

크리스티앙이 방금 해낸 일은 이러했다.

바위 도마뱀의 혈맥에 흐르는 마기의 흐름을 일시적으로 '멈추게' 했다.

어떻게?

아무리 암흑 마기라도 상대 마기의 흐름 전체를 지배하는 건 불가능한데?

크리스는 도도히 흐르는 마기의 중간중간을 찰나 지배해 마디마디 '끊었다'.

마차들이 일렬로 줄지어 달리고 있는데, 중간중간의 마차들을 멈추게 한 거다.

멈춘 마차의 숫자는 많지 않았다.

하지만 크리스는 교묘히 연속적인 배열로 흐름을 끊어버렸다.

앞의 마기의 혼란에 이어 곧바로 뒤의 마기에도 혼란이 오게.

그런 식으로 마기의 행렬 전체가 셧다운 되도록.

"…메리안, 네가 가르쳐 주었느냐?"

"…아니요."

"…하긴. 저게 배운다고 되는 건 아니지."

암흑 마기를 처음 얻은 직후에는 제대로 몸 안에서 움직이는 것도 힘든 법이다.

그래서 암흑 마공이 있는 거고.

그런데 저 모습은 뭐란 말인가?

'…마치 손발을 다루는 것 같잖아.'

메리안은 침을 꿀꺽 삼켰다.

심지어, 크리스티앙의 미친 모습은 시간이 흐를수록 진화하고 있었다.

뒤이어 미리 노르디언이 정해놓은 대로 똑같은 종류의 마수들이 출현했는데, 마치 암흑 마기를 다루는 걸 연습이라도 하듯 신이 나서 쓰러뜨리기 시작했다.

거듭할수록 처음보다 빠르고, 효율적인 움직임으로.

"저래서야 암흑 마공을 배울 필요도 없는 것 아닙니까?"

암흑 마공은 암흑 마기를 다루기 위한 마공.

사이먼이 싱글 웃으며 물었다.

"훨씬 암흑 마기를 잘 다루는 것 같은데요?"

"...."

정적이 흘렀다.

신이 나서 마수들을 쓰러뜨리고 있는 크리스의 모습만 영상에 비쳤다.

한참이나 지난 후.

노르디언이 느릿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과제는 끝이다.]

그와 동시에 어둠과 함께 크리스티앙이 다시 연무장으로 소환되었다.

크리스는 잠시 어리둥절해하다 노르디언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좋은 과제를 내주신 가주님께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작은 성취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 인사를 들은 노르디언의 표정은 뭐랄까.

뭔가 괴상한 무언가를 보는 듯한 표정이었다.

메리안은 이해했다.

본인도 비슷한 얼굴일 테니까.

가문의 후예가 대단한 모습을 보였으니, 기뻐해야 마땅한데… 지나치게 대단해서일까? 당혹스럽다는 마음이 먼저 들었다.

'…난 저 과제를 하면서 죽을 뻔했는데.'

크리스는 그런 둘의 반응에 고개를 갸웃했다. 사이먼만 쿡쿡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고 있었다.

"가주님?"

[…그래. 네 모습은 봤다. 생각보다… 잘 해냈다.]

"과찬입니다. 가주님께서 내어준 과제가 훌륭한 덕분이었습니다."

노르디언은 다시 침묵했다.

극한의 상황을 경험하라고 했더니, 도리어 마수들을 농락한 손자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노르디언 본인이 과거로 돌아가도 크리스가 해낸 것 같은 일을 해내지는 못할 거다.

'…정말 천재라는 건가.'

노르디언은 인정하기로 했다.

저 천둥벌거숭이 손자의 재능이 자신의 예상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것을.

그렇게 생각하자, 순간 노르디언의 가슴이 두근 뛰었다.

저런 핏줄을 얼마나 기다려 왔던가?

다른 자식들과 손자, 손녀들.

자신의 혈육이지만, 모두 기준 미달이었다.

어떤 기대도 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저 재능이라면, 어쩌면 정말로 그의 '숙원'을 이루어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노르디언은 얼굴을 굳혔다.

'이제 겨우 걸음마 단계일 뿐.'

제53화

'오만하게 하는 건 금물이다.'

뛰어난 재능은 때로는 독이 되기도 한다.

자만하면 그렇다.

노르디언은 크리스티앙에게 절대 그런 일이 생기지 않게 하도록 마음먹었다.

일부러 싸늘한 어조로 말하였다.

[이제 본격적인 암흑 마공의 전수를 시작하겠다. 자만하지 말고, 내 가르침을 똑바로 따라오도록.]

"네, 알겠습니다."

드디어 고대하던 순간이었다.

크리스티앙은 집중하였다.

[잘 들어라. 이게 암흑 마공의 구결이니.]

외부인인 사이먼은 눈치껏 사라졌다.

노르디언이 구결을 말하였다.

그저 읊는 것일 뿐인데, 수 시간이 넘게 걸리는 길고 긴 구결.

"다 외웠느냐?"

마기의 혈맥 흐름, 마법적 술식 등이 결합한 복잡 난해한 구결을 단 한 번 들은 것만으로 외웠냐니.

하지만 크리스티앙은 태연히 답했다.

"네, 외웠습니다."

노르디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외웠을 거라고는 예상하긴 했다.

노르디언도 과거 어린 시절 한 번에 구결을 외웠으니까.

그런데.

크리스티앙이 생각지도 못한 물음을 하였다.

"죄송하지만… 한 가지만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구결의 내용이 일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처음 듣는 구결이니, 이해가 가지 않는 게 당연하다. 너 스스로 궁구해보고 질문은 나중에….]

"아니, 그게 아니라, 말씀해주신 구결의 흐름이 다른 부분과 맞지 않는 부분이 있어서, 혹시 제가 구결의 내용을 잘못 들은 것인지 확인하려는 겁니다."

[!!]

노르디언의 얼굴이 굳었다.

'어떻게 알았지?'

그의 악취미 또 하나.

바로 구결 일부를 잘못 알려주는 거다.

더욱 익히기 어렵게.

왜 그런 괴짜 같은 짓을 하느냐고?

'당장은 비효율적이어도, 힘겹게 암흑 마기를 운용하다 보면 기초를 다지는 데 도움이 되니까.'

그런데 단 한 번 구결을 듣고 틀린 부분이 있다는 것을 눈치챈 거다.

소름 끼치는 오성이 아닐 수 없었다.

노르디언은 놀람을 감추려 딱딱한 어조로 답했다.

[기초를 다지기 위해 일부 변주를 준 부분이 있다. 완벽한 구결은 네 기초가 확실히 닦인 후 알려줄 예정이다.]

노르디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보아라.]

손을 뻗었다.

화신체인 어린 소년의 작은 손에서 칠흑과 같은 마기가 피어올랐다.

마기를 체외로 배출해 만드는 검인 '흑검'이었다.

3성의 경지부터 사용할 수 있는 힘.

8성 마인인 노르디언에게는 하잘것없는 힘이었다.

하지만 노르디언이 사용하는 흑검은 다른 이들의 것과는 궤가 달랐다.

단순히 마기의 힘이 강한 게 아니었다.

무언가 설명할 수 없는, 아직 크리스로서도 이해할 수 없는 묘리가 담겨 있었다.

[이게 암흑 마공을 통해 펼치는 일검이다.]

휘익.

가벼운 휘두름이었다.

어떤 강한 기세도 담기지 않은.

실제로 별다른 효과도 없었다.

그저 바람을 잘랐을 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크리스는 등줄기에 쫘악 소름이 돋았다.

마치 별이 명멸하는 듯한 아찔한 충격이었다.

'방금.'

한 번의 휘두름에 무수히 많은 어둠이 담겨 있었다.

적, 흑, 혈, 황, 청, 회 등등.

노르디언의 일검은 파괴였으며, 죽음이었고, 저주였고, 독이었으며, 환영이었고, 그 모든 걸 담은 아득한 어둠이었다.

모든 어둠을 지배하는 암흑 마기.

그 암흑 마기를 다루는 암흑 마공의 힘이었다.

한편, 노르디언은 크리스티앙의 놀란 얼굴을 보며 되레 더욱 놀랐다.

'허. 이걸 알아봤다고?'

원래 아는 만큼 보인다.

방금 노르디언이 펼친 검의 진의를 알아볼 이가 암흑 마가에서 몇 명이나 될까?

노르디언은 다시금 다짐했다.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안 되겠군. 더욱 어려운 지도가 필요하겠어.'

쉽게 쌓은 탑은 쉽게 무너진다.

바닥에서부터 역경을 극복하며 성장해야 결국 대성할 수 있다는 게 노르디언의 교육관이었다.

'일단, 암흑 마공의 어려움을 깨닫게 해주는 게 먼저겠군.'

무수히 많은 종류의 어둠을 자신의 속성처럼 다루어야 하기에 암흑 마공의 난이도는 상상을 초월한다.

보통은 하나하나 옆에서 지도하는 게 원칙이지만.

"한 달간의 시간을 주겠다. 방금 내가 보여준 시범을 바탕으로 구결을 스스로 연마해 보도록. 보름 뒤 어느 정도 성취를 이루었는지 확인해 보겠다."

그러고는 훌쩍 사라졌다.

옆에 있던 메리안이 당황하는 걸 보아서 일반적인 상황은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이것도 무언가 뜻이 있겠지.'

크리스는 또 속으로 생각했다.

불친절해 보이긴 하지만, 노르디언이 설마 아무런 의도 없이 이러지는 않을 거다.

처음에 냈던 과제처럼 무언가 깊은 속뜻이 숨어 있을 게 분명했다.

…전혀 그런 것 아니었지만, 크리스티앙은 노르디언이 무언가 또 의도한 게 있다고 오해하였다.

'해보자.'

참고로, 노르디언의 발상에는 한 가지 문제점이 있었다.

지금껏 크리스는 무언가를 익힐 때 대부분 혼자 익혔다는 거다.

누군가의 지도를 받은 적은 거의 없었다.

즉, 이런 상황이 매우 익숙했다.

아니, 애초에 제대로 된 구결조차 모르고 익혔을 때가 많았으니, 지금은 굉장히 친절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었다.

크리스는 눈을 감고는 암흑 마공의 구결을 궁구했다.

동시에 아까 노르디언이 보여준 일검을 떠올렸다.

모든 어둠을 품고 있는 진정한 어둠.

시간이 순식간에 흘렀다.

* ? ?* ? ?*

한 달이 지났다.

"시간이 되었군."

"…네, 가주님."

"이 정도면 암흑 마공의 난해함을 깨달았겠지."

"...."

메리안은 침묵했다.

그건 확실했다.

암흑 마공은 누군가의 지도 없이 익힐 수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다만,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지.'

메리안은 속으로 생각했다.

어려움 속에서 이리저리 좌절을 겪으며 익혀야 끝내 높은 성취를 이룰 수 있다는 노르디언의 교육관.

정말 구세대적인 발상이 아닐 수 없었다.

크리스티앙은 한 달 동안 시간만 낭비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메리안, 내 방식이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거냐?"

"…아닙니다."

"클클, 아니긴. 생각이 다 보이거늘. 하지만 크리스티앙, 그놈에게는 꼭 필요한 과정이다."

노르디언은 설명을 이어갔다.

"놈은 성흑을 9할 이상 흡수했어. 성의 경지가 올라갈 때마다 커다란 벽을 마주하게 될 거다. 그러니, 미리 단단한 기초를 쌓는 게 중요하다. 나중에 무너지지 않도록."

"...."

"놈에게 중요한 건 속도가 아니야. 느리더라도 확실하게 한 단계, 한 단계 계단을 밟아나가는 게 중요하다."

메리안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크리스티앙은 공자 시험을 치르는 중입니다. 공자 자격을 얻으려면 3개월 안에 3성에 도달해야 합니다."

"그건 무리다. 3개월 안에 3성이라니. 놈의 암흑 마기의 순도를 고려할 때 절대로 불가능한 이야기야."

노르디언은 딱 잘라 답했다.

크리스티앙의 지금 성취가 2성 상.

아무리 그가 천재라도 성흑을 9할 이상 흡수했으니 3성이 될 때까지 최소 2년 이상은 걸리게 될 거라고 노르디언은 짐작했다.

무엇보다 공자 시험 따위가 뭐라고?

그딴 것보다는 기초를 확실히 쌓는 게 훨씬 중요했다.

"슬슬 가보자."

노르디언은 다시 어린 소년 화신체의 몸에 강림했다.

훌쩍 공간을 뛰어넘어 크리스티앙이 있는 연무장으로 들어갔는데.

[!!]

"!!"

노르디언과 메리안은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찢어질 듯 경악해.

생각지도 못했던.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한 탓이다.

크리스티앙은 허공에 검을 휘두르고 있었는데, 칠흑의 마기에 휩싸인 검을 들고 있었다.

'흑검(黑劍)'이었다.

3성의 마인들만이 사용 가능한 힘.

"너… 크리스티앙? 지금? 설마 3성의 경지에?"

메리안이 경악한 어조로 물었고, 크리스티앙이 고개를 돌리고는 노르디언에게 환한 얼굴로 말하였다.

"감사합니다, 가주님."

[…감사하다고?]

"가주님 덕분에 3성의 벽을 예상보다 빠르게 뛰어넘을 수 있었습니다."

[…뭐?]

크리스는 진정 감사하다는 음성이었다.

"저를 깨우쳐 주시려고 일부러 틀린 구결을 알려주신 것 아닙니까?"

[....]

노르디언은 입을 다물었다.

저놈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크리스티앙의 헛소리(?)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구결뿐이 아닙니다. 시범을 보여주셨던 일검. 3성에 도달하기 위한 깨달음을 보여주신 것 아닙니까?"

아니다.

그때 노르디언이 보여준 시범과 3성의 경지의 깨달음은 전혀 상관이 없었다.

애초에 흑검을 만드는 것과 일검에 모든 속성의 어둠을 담는 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하지만 크리스는 전혀 이해 가지 않는 이야기를 계속해서 지껄였다.

"가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3성의 벽이 굉장히 높았습니다. 하지만 가주님께서 내려주신 가르침에서 해답을 얻어 예상보다 빠르게 벽을 넘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노르디언이 대관절 무슨 가르침을 내렸단 말인가?

크리스는 지난 한 달을 떠올렸다.

처음에는 쉽지 않았다.

확실히 최상급의 마공답게 혼자 익히는 게 녹록지 않았다.

특히 중간중간 섞인 잘못된 구결이 익히는 걸 방해했다.

마치 골탕이라도 먹이려는 듯한 구결.

하지만 크리스는 그 구결들에 집중하였다.

'아무런 이유 없이 이런 구결들을 넣었을 리가 없어. 분명 무언가 내게 도움을 주려는 의도가 있는 구결들일 거야.'

노가주가 섞은 구결들은 암흑 마기의 흐름을 순탄치 않게 하고 있었다.

왜, 이런 짓을 했을까?

어떤 의도로?

거기에 노가주가 보여주었던 시범을 떠올렸다.

검 하나에 모든 속성의 어둠이 담겨 있는 모습.

그러자 답(?)이 보이기 시작했다.

'중요한 건, 암흑 마기를 다스리는 효율이 아니야. 다소 느리더라도 모든 속성의 암흑을 자신의 것으로 품는 과정이 필요해.'

그러니까, 물을 마시다 체할까 마시는 잔에 잎을 띄운 것처럼.

단순히 암흑 마기를 다루는 걸 익히는 데 급급하지 말고, 어둠 자체를 받아들이는 거에 집중하라는 노가주의 뜻인 거다.

크리스티앙은 노가주의 뜻에 따랐다.

암흑 마공은 결국 여러 속성의 어둠을 다루는 힘.

구결을 되뇌며, 하나하나의 뜻에 집중했다.

그렇게 얼마나 반복한 후일까?

번뜩 하나의 깨달음이 뇌리를 관통했다.

모든 종류의 어둠이 하나의 궤도로 놓이는 듯한 상념.

노르디언처럼 모든 어둠을 일검에 담을 수 있게 된 건 당연히 아니다.

그저 막연한 상념을 느꼈을 뿐이다.

하지만 그 순간 크리스의 경지가 한 단계 도약했다.

1성은 마기를 몸에 축적하는 단계.

2성은 마기를 체외로 발출하는 단계.

3성은 마기를 외부에서 유형화하는 단계였다.

따라서 각 경지마다 요구하는 깨달음이 달랐다.

3성의 마기란 '무형'의 기운을 체외에서 형태를 갖춘 '유형'으로 만들어야 한다.

빛의 파동을 고체 같은 형태로 고정하는 것과 비슷한 일.

즉, 일반적인 원리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이런 일을 해내려면 기존의 마기에 관한 관념을 깨부수고 지각을 새롭게 정립 후 마기를 다른 관점에서 다룰 수 있어야만 한다.

단, 이게 암흑 마기의 순도가 높아질수록 훨씬 어려워진다. 순수한 어둠은 그만큼 다루기 어려우니까.

일반적인 이들은 '어렴풋한' 깨달음만으로도 흑검을 만드는 데 성공할 수 있지만, 암흑 마기의 순도가 높다면 보다 완벽한 관점의 재정립이 필요했다.

10할 순도를 지닌 크리스의 경우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런데 노르디언이 던지고 간 실마리를 통해 깨달음을 얻은 순간, 마기를 다루는 관점이 완벽하게 재정립되었다.

제54화

장님이 코끼리 만지듯 어렴풋한 더듬음이 아닌, 확신에 찬 깨달음.

그 순간, 크리스는 알게 되었다.

자신이 3성의 경지에 올랐음을.

"가주님 덕분입니다. 아니었다면, 이렇게 빠르게 3성의 경지에 오르지는 못했을 겁니다."

크리스티앙은 진심으로 말했다.

노르디언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오래… 그러니까 최소 두세 달은 더 걸렸을 거다.

[....]

노르디언은 할 말을 찾지 못하고 한참이나 침묵했다.

근 10년 이래 가장 당혹스러운 상황이었다.

결국, 노르디언이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이것뿐이었다.

[…이제 본격적인 지도를 시작하겠다.]

"…지도요?"

크리스티앙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 정도면 됐지, 뭘 더 가르친단 말인가?

[구결을 익힌 것일 뿐이니, 제대로 암흑 마공을 운용하는 방법을 배워야 할 것 아니냐?]

"아."

당연한 과정이었다.

구결만 덜렁 던져주는 가르침은 가르침이라고 할 수 없었다.

한편, 노르디언은 그런 크리스티앙을 보며 살짝 후회했다.

'괜히 혼자 구결을 익히게 했어. 뛰어나도 설마 저렇게 뛰어날 줄은.'

설마, 혼자서 암흑 마공의 구결을 익히는 데 성공할 줄은 몰랐다.

문제는 구결을 혼자 익히는 데 성공했다는 거다.

제대로 된 지도 없이 혼자 익혔으니 괜히 잘못된 버릇이나 구결을 제대로 해석하지 못하고 있는 부분이 무수히 생겼을 거다.

'잘못된 부분은 완벽하게 고치게 해야 해.'

그런데.

"암흑 마공을 펼쳐보아라."

크리스티앙이 암흑 마공을 펼쳤다.

그 모습을 본 순간, 노르디언은 또 한 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

'틀린… 부분이 없어?'

아니, 없는 건 아니었다.

노르디언이 일부러 잘못 알려준 구결.

그 부분을 노르디언이 알려준 구결과 다르게 펼쳤다.

문제는 이게 나쁜 변화가 아니란 거다.

'…훨씬 효율적으로 바꾸었잖아. 구결을 혼자 뜯어고쳤다고?'

"가주님께서 내주신 과제대로 구결을 제 나름대로 바꾸어 보았습니다."

[…과제?]

"과제 아니었습니까?"

크리스티앙은 또 해괴한 이야기를 하였다.

잘못된 구결을 알려준 게, 응용해서 뜯어고쳐 보라는 것인 줄 알았다는 소리!

노르디언은 또 입을 꾹 다물었다.

도대체 저놈 앞에서 몇 번째 할 말을 찾지 못해 입을 닫는 건지 모르겠다.

'구결을 멋대로 고치다니. 어떤 문제가 생길 줄 알고.'

구결 하나하나는 마공 전체와 연결된다.

따라서 구결이 조금만 잘못되어도 마공에 치명적인 문제를 유발할 수 있다.

하지만 뭐라고 할 수도 없었다.

크리스가 바꾼 구결에 어떤 문제도 찾아볼 수가 없었던 거다.

아니, 문제가 없는 정도가 아니었다.

'…기존의 것보다도 오히려 나아 보이지 않는가?'

명가에서 수백 년에 걸쳐 내려온 구결보다 저 어린아이가 뚝딱 고친 구결이 더 나아 보인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그럼에도 8성 마인인 노르디언이 보기에 크리스가 바꾼 구절은 별다른 단점이 보이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

'…천고의 천재가 손댄) 악보를 보는 것 같군.'

연륜이 쌓인 명장의 손길은 아니다.

대신, 기존의 궤를 번뜩 뛰어넘는 발상이 담겨 있었다.

물론, 쉽게 판단할 내용은 아니다.

심법의 구결은 단순히 당장 마기를 다루는 효용성을 넘어 향후 경지가 올라갔을 때의 영향도 복합적으로 고려해야 하니까.

하지만 훗날 경지가 올라갔을 때도 크리스가 손댄 부분이 안 좋은 영향을 끼칠 것 같지는 않았다.

'…도대체.'

노르디언은 침음을 삼켰다.

저 아이의 재능이 넘침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천재?

고작 그런 수준이 아니었다.

도대체 몇 번이나 놀라는 건지.

불가해한 괴물이었다.

노르디언 본인도 천재였지만, 아예 궤가 달랐다.

두 가지 감정이 동시에 들었다.

처음에는, 두근 떨리는 마음.

저런 아이를 얼마나 오랫동안 기다려 왔는가?

하지만 동시에 드는 감정은 찬물을 뒤집어쓴 듯한 경계감이었다.

'제대로 이끌어야 해.'

무려 수명을 늘리는 역천의 마도까지 사용해가며 기나긴 기다림 끝에 만난 한 줄기 희망이었다.

절대 헛되이 꺾이게 할 수 없었다.

'확실히 가르쳐야겠어.'

원래 노르디언이 크리스티앙에게 직접 가르침을 내리기로 한 것은 반쯤은 흥미 때문이었다.

성흑을 9할 이상 흡수했다니, 과연 얼마나 뛰어난 그릇인지 보고 싶었던 거다.

하지만 마음가짐이 바뀌었다.

진심으로 제대로 가르침을 내리기로.

…물론, 이건 딱히 크리스에게 좋은 일은 아니었다.

노르디언은 구세대적인 교육관을 가진 데다 가르침에 재능이 없는 최악의 스승이었으니까.

고생은 고생대로 시키며 이해하기 어려운 가르침을 내리고 이걸 왜 모르지? 하는 식이었다.

노르디언은 심지어 이런 다짐까지 하였다.

'수련의 난이도를 예상했던 것보다 대폭 올려야겠어.'

원래도 극악한데, 도대체 뭘 어떻게 더 올린다는 건지.

그래도 다행인 건, 크리스가 최고의 제자란 거다.

어떤 거지 같은 가르침도 찰떡같이 받아먹는.

[각오하여라. 앞으로 내가 내릴 가르침은 절대 녹록지 않을 테니.]

"힘들수록 저야 도리어 감사하지요."

[무슨 말이냐?]

"어떤 어려움이든 모두 가주님께서 절 위해 준비한 안배임을 믿고 있습니다."

크리스티앙은 진심으로 답했다.

앞선 두 번의 가르침(?)으로 이미 노르디언을 향한 신뢰를 굳게 가지게 된 크리스티앙이었다.

차갑고, 독사 같은 속마음을 지니고 있을지라도 노르디언이 베푸는 가르침은 진짜였다.

과거 이런 순수한 가르침을 경험해본 적이 거의 없는 크리스는 솔직히 노르디언이 고맙기도 하였다.

'물론, 내가 가문에 보탬이 되기를 원해서 가르침을 내리는 거겠지만. 그래도 고맙긴 하네.'

그런 크리스티앙의 반응에 노르디언은 코웃음을 쳤다.

[말은 잘하는구나. 하지만 본격적으로 수련이 시작하면 후회하게 될 거다. 그때는 후회해도 늦다.]

"괜찮습니다. 가주님의 가르침을 믿습니다."

[흥. 과연, 어떨지 보자꾸나.]

잠시 노르디언과 크리스의 시선이 허공에서 강렬하게 마주쳤다.

그렇게.

최악의 스승과 최고의 제자가 만나게 되었다.

결과는?

끝없는 경악의 향연이었다.

* ? ?* ? ?*

추가로 두 달의 시간이 지났다.

그러니까, 랑함 후작과 내기한 후 석 달이 된 거다.

"약속한 기일이 거의 되었군."

랑함 후작이 달력을 보았다.

딱 하루 남았다.

"크리스티앙은?"

"여전히 수련 중이라고 합니다."

"가주님과?"

"…아마, 그런 것으로 추정됩니다."

랑함 후작은 인상을 지그시 찌푸렸다.

크리스티앙이 가주에게 가르침을 받고 있는 건, 랑함 후작을 비롯한 극히 일부만 알고 있었다.

다만, 랑함 후작은 크게 신경은 쓰지 않았다.

'하필 아버지께 가르침을 받다니 안됐군.'

랑함 후작도 가주에게 가르침을 받아봤다.

고생만 하고 어떤 성취도 얻지 못했다. 시간 낭비였다고 단언할 수 있었다.

안 그래도 빠듯한 3개월 시간을 가주의 가르침을 받으며 낭비하고 있다니.

놈도 참 재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참고로, 크리스티앙의 성취는 아직 랑함 후작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놈에게는 차라리 이게 나은 것일 수도 있겠군. 지금 탈락하면 두 번째 시험을 치르지 않아도 될 테니.'

크리스가 치를 두 번째 공자 시험.

당연히 만만한 게 아니었다.

아니, 랑함 후작은 시험을 빌미로 크리스티앙을 제거할 계획이었다.

단순히 악감정 때문만은 아니다.

'암흑 마가를 위해서 희생자가 필요하니. 놈 정도면 딱 적당하겠지.'

마침, 밖에서 보고가 들려왔다.

"각하, 후암 공작가에서 사절이 도착할 예정입니다."

랑함 후작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후암 공작가.

'극독(劇毒) 마가'의 가문명이었다.

인접한 곳에 자리한 앙숙인 경쟁자.

랑함 후작은 크리스티앙을 공자 시험을 빌미로 극독 마가와의 분쟁에서 희생시킬 계획이었다.

암흑 마가의 이득을 위해.

* ? ?* ? ?*

끼익.

수련장의 문이 열리더니, 크리스가 밖으로 나왔다.

'바깥은 오랜만.'

크리스는 기지개를 켰다.

그런 그는 이전과 어딘지 달라 보였다.

한층 더 깊어진 눈동자.

갓 발걸음을 걸친 '3성 진(眞)'의 경지를 넘어 완연한 3성의 경지에 도달한 거다.

정확히 따지면 3성 하의 끝에 도달한 수준이었다.

고작 두 달 만에 중(中)의 경지 코앞까지 닿다니. 말도 안 되는 속도였다.

[…작은 성취를 얻었다고 자만하지 말아라. 넌 이제 갓 걸음마를 뗐을 뿐이니.]

노르디언이 무겁게 이야기하였다.

싸늘한 기세가 느껴지는 음성이었지만, 크리스티앙은 도리어 씨익 웃었다.

지난 두 달간, 노르디언은 자만하지 말라는 이야기만 끝없이 하였다.

왜?

뭘 가르쳐도 잘하니, 그것 말고 해줄 이야기가 없었던 거다.

'가주님도 내 천재성에 조금 놀란 것 같지?'

가문의 위엄 넘치는 존장답게 딱히 놀람을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하지만 보이지 않아도 대충 느껴지지 않는가?

나중에는 노르디언이 표정 관리를 하려는 게 보일 지경이어서 웃음이 나오는 걸 간신히 참았다.

크리스는 노르디언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간, 가르침에 감사합니다."

진심이었다.

정말 큰 도움이 되었다.

무엇보다, 이렇게 오로지 자신의 성장을 바라며 가르침을 내려주는 이를 만난 적이 거의 없었기에 크리스는 노르디언이 고마웠다.

'이런 게… 스승일까?'

감히 가주를 스승이라고 부르지는 못하겠지만 말이다.

크리스의 인사에 담긴 진심을 느낀 건지, 노르디언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착각하지 말아라. 널 특별히 여겨 가르침을 내린 건 아니니.]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감사합니다."

노르디언은 못마땅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쓸데없는 이야기는 그만하고 가보거라.]

"네, 알겠습니다."

멀어지는 크리스티앙의 모습을 보며 메리안이 말했다.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대단하긴. 이제 걸음마 단계일 뿐인데.]

투덜거렸지만, 그 말이 진심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지난 두 달간. 노르디언이 저 아이에게 얼마나 경악했는지는 옆에 있던 메리안이 잘 알고 있었다.

"…도와주지는 않으실 겁니까?"

[뭘?]

"...."

메리안은 침묵했다.

이제, 크리스티앙은 가문의 온갖 견제에 직면하게 될 거다.

채 창공에 날아오르지 못하고 꺾이게 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런 시련 따위 이겨내지 못하면 애초에 그것밖에 안 되는 놈이겠지.]

"…가주님."

[무엇보다.]

노르디언은 무심하게 말했다.

[마음에 안 들긴 하지만, 놈은 내 제자다. 그 정도 시련도 이겨내지 못하면 내 제자의 자격이 없지.]

메리안은 눈을 크게 떴다.

제자.

지금껏 노르디언이 가르침을 내린 이는 많았다.

하지만 노르디언이 직접 저런 표현을 쓰는 건 처음이었다.

크리스는 모르고 있었지만, 노르디언도 크리스를 자신의 제자로 여긴 것이다.

* ? ?* ? ?*

'얼른 랑함 후작에게 보고하고 늘어져야겠다. 오랜만에 뒹굴거려야겠어.'

그는 원래 게으른 천재 유형.

지난 석 달간 쉬지 않고 빡세게 굴렀더니 지쳤다.

두 번째 시험이 바로 시작되지는 않을 테니, 그때까지는 띵까띵까 침대에서 뒹굴거리며 휴식을 취할 생각이었다.

생각난 김에 시종에게 물어 술 저장고에 들러서 비싼 술을 몇 병 챙겼다.

'이제 진저에일 싫어!'

술을 마시려는 건 아니다.

고지식 유령 하녀인 마리가 허락하지 않을 테니 그냥 마시지는 못하고 알코올 기운을 날려 무알코올로 마실 예정이었다.

한바탕 늘어져 쉴 생각만 잔뜩 하고 있는데 처음 듣는 음성이 들려왔다.

"크리스티앙?"

"??"

처음 보는 소녀였다.

제55화

길게 늘어진 진청의 머리칼, 에메랄드빛 눈동자.

대단히 아름다운 외모.

인상은 지적인 느낌이었는데, 단 올라간 눈초리 때문에 자존심이 강해 보였다. 도도한 매력이 흘렀다.

'누구지? 암흑 마가 사람은 아닌데?'

크리스는 의아한 얼굴을 했다.

보통 소녀는 아닌 것 같았다.

'3성의 경지야.'

이제 십 대 중후반 정도로 보였는데, 경지가 굉장히 깊었다.

그냥 3성이 아닌, 무려 3성 상의 경지였다.

나이를 생각하면 어마어마하게 높은 경지.

신분도 가벼운 게 아닌 것 같았다.

소녀의 뒤로 마인들이 서 있었다. 모두 상당한 기세의 마인들.

암흑 마가의 정예 마인들과 비교해도 못하지 않은 기세들이었다.

그런데 소녀는 이상하게 크리스티앙을 알고 있는 듯한 눈치였다.

"날 아나?"

"…널 아냐고? 하."

소녀가 확 눈매를 찌푸렸다.

분노한 반응.

소녀뿐이 아니다.

소녀의 뒤에 서 있는 마인들도 크리스티앙에게 노한 기세를 뿜었다.

"나한테 그딴 모욕을 주어놓고…."

"...??"

그러니까, 이전 '크리스티앙' 시절에 안면이 있던 소녀인 것 같다.

하지만 크리스로서는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아니, 잠깐."

크리스가 뭐라고 말을 하려고 하였지만, 상대측 마인 한 명이 말을 끊었다.

힐끗 크리스를 향한 경멸 어린 시선은 덤이다.

"공녀님, 그냥 가시지요. 저딴 쓰레기를 신경 쓸 필요 없으십니다."

"…그래."

소녀는 깊게 숨을 내쉬고는 감정을 가다듬었다.

그러고는 크리스가 손에 쥔 술병들을 보며 비웃음을 지었다.

마치 혐오스러운 벌레를 보듯.

"대낮부터 술이라. 넌 여전하구나."

"…아니, 그러니까, 이건. 잠깐."

크리스가 뭐라고 하였지만, 듣지 않았다.

그와는 더는 한 마디도 나누고 싶지 않다는 듯 냉랭한 얼굴로 사라져 버렸다.

"...."

크리스는 황당한 얼굴을 하였다.

갑자기 이게 무슨 봉변?

심지어 그는 알코올 기운을 날려서 마시려고 했는데, 억울하기 그지없었다.

'…뭐 하는 놈이야.'

하지만 소녀의 정체를 들은 크리스는 소녀가 왜 자신에게 저런 반응을 보였는지 알게 되었다.

충분히 저런 반응이 나올 만한 이유가 있었다.

"극독 마가의 마리사 공녀이십니다."

소동을 본 하플링 집사가 소녀의 정체를 설명해 주었다.

마리사.

낯설면서 익숙한 이름.

몇 번 그 이름을 되뇌다가 기억이 난 크리스의 눈이 커졌다.

"…내 약혼녀?"

"정확히는 전(前) 약혼녀이시지요."

하플링 집사가 딱 잘라 교정해 주었다.

"마리사 공녀께서는 도련님께서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이셨음에도 계속 파혼을 미루며 기다려 주셨지만, 결국, 얼마 전 도련님께서 극심한 모욕을 주어 파혼당하지 않으셨습니까?"

* ? ?* ? ?*

극독 마가의 공녀, 마리사는 이를 바득 갈았다.

'빌어먹을 놈.'

아까 보았던 크리스티앙의 모습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괜찮으십니까, 공녀님?"

"…괜찮아."

아니, 솔직히 괜찮지 않았다.

과거, 크리스티앙이 어린 시절. 그러니까 그가 망나니가 되기 전 멀쩡할 때.

마리사도 꼬맹이 어린 시절.

크리스티앙은 마리사의 설익은 첫사랑이었다.

가문 간의 교류 자리에서 만난 그에게 한눈에 마음을 뺏겼다.

양 가문의 화친을 위해 정략 약혼을 맺게 되었을 때도 방에 들어가 만드라고라 인형을 두드리며 얼마나 좋아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이후 크리스티앙은 변했다.

끊이지 않고 들려오는 그의 안 좋은 소문에 가문의 어른들은 파혼을 이야기했지만, 마리사는 거절하였다.

어린 시절의 방황이라고 생각하고 기다리기로 한 거다.

하지만 그와 다시 만났을 때, 그는 그녀에게 참을 수 없는 모욕을 주었다.

긴 기다림은 비참한 상처로 끝났다.

그런 주제에.

[날 아나?]

그녀 따위 기억도 안 난다는 음성.

인간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단 말인가?

"…공녀님."

"…정말 괜찮아."

마리사는 길게 숨을 들이마셨다.

지금 그녀는 암흑 마가에 사적으로 온 게 아니었다.

극독 마가의 의견을 대표하러 온 사절이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공녀."

암흑 마가의 고위 마인이 그녀를 이끌었고, 곧 그녀는 한 인물과 마주하게 되었다.

가주 대리, 랑함 후작이었다.

* ? ?* ? ?*

"금번에 중립지대에 발견된 유물의 소유권 문제에 대해 논하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그래, 극독 마가 측에서는 어쩔 예정이지? 지난번에 발견된 유물은 극독 마가 측에서 가져갔으니, 이번에 발견된 유물은 양보할 예정인가?"

"그럴 수는 없겠지요."

마도 제국은 다섯 개의 구역으로 이루어져 있다.

마황이 다스리는 중앙의 직할령.

그리고 동서남북의 네 개의 마도 왕국.

암흑 마가와 극독 마가는 그중 청류의 마왕 휘하의 남방 마도국에 속해 있다.

같은 왕국 안에 있으니 가깝지 않냐고?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남방 마도국은 외부의 적과 싸울 때는 협력한다.

아닐 때는?

서로 싸운다.

둘은 서로 국지적인 충돌을 가장 많이 벌이는 상대였다.

이유는 많았다.

서로의 이권 때문에.

자존심 때문에.

그냥 싸우고 싶어서.

두 가문은 툭하면 싸워댔다.

그런데 얼마 전 골치 아픈 일이 일어났다.

양 가문의 중립지대에 '유물'이 나타난 것.

먼저 발견한 극독 마가가 가져갔다.

암흑 마가 측에서 항의했지만, 극독 마가 측에서 들을 리가 만무했다.

암흑 마가 쪽에서 속이 쓰렸던 사건이다.

그냥 그렇게 끝날 사안이었는데, 얼마 전 또 곤란한 이변이 일어났다.

중립지대에서 또 하나의 유물이 발견된 거다.

"도의상 이번 유물은 우리 암흑 마가 쪽의 소유가 맞는 게 아닌가 싶은데."

"우리 양 가문 간에 도의라니. 어울리지 않는 말씀을 하는군요. 암흑 마가가 반대 입장이어도 양보하셨을 건가요?"

랑함 후작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절대로.

양보했을 리가 없다.

두 유물 모두 독점하려고 했을 테지.

"그래서, 공평하게 먼저 유물을 발견한 이가 소유권을 갖자는 건가?"

유물은 아직 정확한 위치가 확인되지 않고 있었다.

"네, 단. 탐사대는 20명 이하. 3성 이하의 마인으로 하였으면 합니다."

"양 가문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서인가?"

만약 양 가문의 주력이 피를 흘리게 되면 대규모 분쟁으로 이어지는 게 불가피하다.

그러니, 저런 제안을 하는 거다.

"네, 우리가 서로 큰 피를 흘릴 경우, 다른 적들만 이롭게 할 뿐이니까요. 최근, '사왕성'의 정세도 심상치 않고요."

두 가문은 적이 많았다.

가깝게는 같은 남방 마도국 안의 '파괴 마가'.

밖으로는 크루세이드 연합의 '골드 크로스'.

옆으로는 사령, 혈검, 저주 마가의 연합체인 '사왕성(邪王成)'의 동방 마도국.

두 가문이 서로 티격태격하면서도 선을 넘지 않는 이유였다.

참고로, 마도 제국의 지배자 '마황'은 휘하의 각 마도국 간의 전쟁에 일절 개입하지 않는다. 그뿐 아니라, 어떤 일에도 나서는 일이 거의 없었다.

마치 방관이라도 하듯. 아니, 어쩌면 서로 간의 분쟁을 조장이라도 하듯.

"그래, 조건을 수락하지."

"정말입니까?"

마리사는 놀란 눈을 하였다.

지난번 유물을 극독 마가에서 가져갔으니, 암흑 마가에서 이번에는 자신에게 유리하게 억지를 부릴 거로 예상했던 거다.

"대신, 추가 조건이 하나 있다. 만약, 극독 마가 측에서 약조를 어길 경우, 이번 유물은 물론 얼마 전 발견한 유물의 소유권까지 우리 암흑 마가가 가져가겠다."

"약조를 어긴다는 말씀은?"

"비열한 수로 우리 쪽 탐사대를 방해한다거나 하면 말이지. 함정과 암기는 극독 마가의 장기이니까."

마리사의 얼굴이 굳었다.

"그럴 일은 없습니다."

"그러면 상관없겠지. 추가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협상은 없다."

마리사는 인상을 찌푸렸다.

무언가 석연찮았다.

하지만 어느 정도 양보는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무엇보다 랑함 후작이 말한 일은 일어날 리가 없었다.

"알겠습니다. 추가 조건을 수락하겠습니다."

"극독 마가 측 탐사대는 공녀가 직접 이끌 건가?"

"네, 그럴 예정입니다."

마리사는 다부진 얼굴로 답했다.

그녀가 직접 탐사대를 이끌 거니, 랑함 후작이 이야기한 일은 일어날 리가 없었다.

"그렇군. 명성이 높은 소만독(少萬毒)의 위용을 볼 수 있겠군. 기대하지."

"그러면, 이만."

인사를 한 후 마리사는 사라졌다.

랑함 후작은 차가운 금속 철제 안경을 어루만졌다.

앞에 놓인 체스판을 바라보았다.

하얀 말을 쓰러뜨리며 말하였다.

"마리사."

이번엔 검은 말.

"쥬피엔."

암흑 마가의 2공녀.

마지막으로 다른 검은 말을 쓰러뜨렸다.

"크리스티앙."

이들 세 명이 이번에 그의 계획에 희생될 이들이었다.

* ? ?* ? ?*

"여기, 흑검입니다."

크리스의 흑검을 본 랑함 후작은 가타부타 말을 하지 않았다.

크리스는 씨익 웃었다.

"첫 번째 시험은 합격이지요?"

"…그래. 두 번째 시험을 이야기하겠다."

랑함 후작은 중립지대의 유물 이야기를 하였다.

"중립지대에서 유물을 찾으란 말입니까?"

"그래, 유물을 찾는 데 충분한 공을 세우면 너에게 공자의 자격을 주겠다."

크리스는 의아한 얼굴을 했다.

뜻밖에 어렵지 않은 임무.

목숨이 위험한 임무를 내릴 것이라 예상했는데?

물론 중립지대는 위험한 곳이다.

온갖 마물이 출현하는 곳.

현재 크리스의 성취로는 자칫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그래도 예상보다는 훨씬 온건한 임무였다.

'아니야. 이건 분명히 위험한 임무야.'

본능적인 위기감이 경고음을 울렸다.

이 임무에는 겉으로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있었다.

하지만 크리스티앙은 티 내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네, 알겠습니다. 저 혼자 하면 되는 겁니까?"

"아니, 혼자서는 불가능하지. 넌 2공녀 쥬피엔이 이끄는 부대에 속하게 될 거다."

2공녀의 지시를 따르라는 이야기.

썩 달갑지 않은 사실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휘하에 마인을 둘 수 있는 건 공자가 된 이후부터이니까.

"원래 이 임무는 로인이 맡아야 할 임무이다. 하지만 네게 대신 맡기는 거니 반드시 최선을 다해 성과를 내도록."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곧 출발해야 하니, 준비하고 있어라."

밖으로 나온 크리스는 인상을 찌푸렸다.

'중립지대의 유물이라. 무슨 사건이지?'

어둠의 수다쟁이 덕분에 마도 제국에서 있었던 어지간한 굵직한 사건은 대충 알고 있는 크리스였다.

하지만 이 사건은 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어둠의 수다쟁이가 이야기할 만한 사건은 아니었던 건가?'

그러던 순간.

번뜩 하나의 의문이 떠올랐다.

- 원래 이 임무는 로인이 맡아야 할 임무이다.

'그러고 보니 로인은 기존 역사에서는 어떻게 되지?'

원래 이번에 공자가 되어야 할 이는 크리스가 아니라, 로인이었다.

크리스만 아니었다면 무난히 공자가 되었을 거다.

'하지만 로인에 대해서 전혀 들어본 적이 없어. 왜?'

명가의 공자임에도 크리스는 로인에 대해 전혀 들어본 적이 없다.

그 이유는 하나다.

죽었다는 거다.

그것도 빠르게. 어떤 명성도 떨치지 못하고.

왜 죽었을까?

크리스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며 진실을 추측하였다.

'…이 임무로 죽게 되는 건 아닐까?'

제56화

크리스는 침을 꿀꺽 삼켰다.

'잠깐, 이 임무.'

그제야 어둠의 수다쟁이가 말해준 내용이 떠올랐다.

이야기한 적이 없는 게 아니었다.

워낙 커다란 사건이라 이 임무와 결부 지어 생각하기 어려웠던 거다.

- 크리스, 너는 대륙력 975년에 일어난 사건 중 가장 중요한 사건이 무엇이라 생각해?

975년은 지금이다.

1차 대전(大戰)이 일어나기 5년 전.

'어둠의 수다쟁이'는 흑요 마가 출신의 구미호답게 꼬리를 요망하게 흔들며 말하였다.

- 다가올 폭풍을 예감한 걸까? 대륙에는 온갖 굵직한 사건들이 일어나기 시작해. 혈검 마가의 정변, 골드 크로스의 별의 타락 사건, 카른 제국 황태자의 실각 등. 하지만 난 더 중요한 사건이 있었다고 생각해.

- 뭔데?

- 듣고 싶으면, 꼬리 쓰다듬어줘.

- …싫은데? 어차피 네가 떠들고 싶어서 한 이야기잖아.

- 으응. 으응. 그래도 쓰다듬어줘, 쓰담해줘~! 크리스 손길 좋단 말이야!

크리스가 싫은 표정으로 꼬리를 쓰다듬자, 어둠의 수다쟁이가 까르르 웃고는 말했다.

- 악마의 에뮬릿 사건.

- …그건 뭐야?

- 암흑 마가와 극독 마가 사이에 있었던, 외부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유물 쟁탈 분쟁이야. 사실 당시로서는 별것 아닌 사건이었어.

크리스의 손길이 편안한 걸까? 어둠의 수다쟁이가 하품하였다.

- 유물 탐사 도중 암흑 마가 쪽의 부대가 몰살당하고, 극독 마가 쪽도 대가를 치르느라 큰 피를 흘리긴 했지만, 그 정도야 뭐. 중요한 건, 이 사건이 추후 커다란 나비효과를 불러온다는 거야.

- 어떤?

- 몇 년 뒤. 이 사건 때문에 암흑 마가의 노가주가 죽음을 맞게 돼. 아들인 랑함 후작의 손에.

어둠의 수다쟁이가 나른한 얼굴로 말하였다.

- 이 사건이 아니었다면. 그래서 노가주 노르디언이 생존해 있었다면, 사혈의 마왕이 그렇게나 손쉽게 암흑 마가를 손에 넣지는 못했겠지. 결과적으로 멸망의 시대가 더욱 빠르게 도래하는 결과가 되었어.

"!!"

크리스의 눈이 번뜩 뜨였다.

그 사건이 분명했다!

'막아야 해.'

이건 단순한 유물 쟁탈전이 아니었다.

랑함 후작의 음모였다.

랑함 후작은 크리스를 비롯한 이들을 희생시킨 후 그걸 빌미로 자신의 목적을 이룰 생각이었다.

훗날 치명적 파국을 가져올 목적을.

'어떻게 하지?'

크리스는 고민했다.

일단, 임무는 참가해야 했다. 직접 뛰어들어야 음모를 파토 낼 수 있었다.

'문제는 현재 내 능력으로 가능하지 않다는 건데.'

그는 이제 고작 3성의 경지였다.

어마어마하게 빠른 성취였지만, 진정한 강자들이 보기에는 어린애 같은 수준일 뿐이었다.

'그래도…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

크리스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랑함 후작은 알까?

자신이 희생양으로 삼으려 한 크리스가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크리스는 계획을 짰다.

'일단 준비를 하자. 바깥에 나가야 해.'

암흑 마가 안에서 준비를 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무슨 핑계로 바깥에 나가지?'

크리스는 멈칫하였다.

아무런 이유 없이 갑자기 저택 밖으로 나간다, 라. 랑함 후작의 눈길을 끌 것이다.

그가 준비하는 내용을 절대 들켜서는 안 되었다.

'의심받지 않고 밖으로 나갈 방법을 찾아야 해.'

그때, 가라앉은 음성이 들려왔다.

"너."

고개를 돌리니, 지난번 한 번 본 얼굴이 있었다.

싸늘한 인상의 소녀.

2공녀 쥬피엔이었다!

"절 부르셨습니까?"

"…그래."

'얘는 왜 아는 척이야?' 크리스는 어리둥절하였다.

그냥 부른 것도 아니었다.

적개심 가득한 눈빛으로 크리스를 노려보고 있었다.

'눈빛은 또 왜 저래? 아, 로인 때문인가?'

로인과 쥬피엔이 각별한 남매라는 건 들었다.

성흑식에서 한 톨의 암흑 마기도 얻지 못한 직계는 더는 직계로 대우받지 못한다.

크리스 때문에 아끼는 동생의 신세를 망치게 되었으니 저런 반응인 것이다.

'흐음. 로인 놈도 잘한 건 없는 것 같은데.'

애초에 크리스에게 시비를 먼저 건 게 로인 아닌가?

솔직히 그런 꼴이 되어도 싼 놈이었다.

크리스의 말투도 자연스레 곱지 않게 나갔다.

"무슨 일입니까?"

"…무슨 일이냐고?"

쥬피엔이 눈매를 찡그렸다.

"난 네가 싫어. 당장 뭉개버리고 싶을 만큼."

"...."

"하지만 같은 임무를 맡았으니, 지금은 참겠어. 대신, 넌 내 명령에 따라. 지금 이 순간부터 명령 불복종은 용납하지 않겠어."

크리스는 피식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귀엽네.'

2공녀 쥬피엔은 동안이었다.

십 대 후반이지만, 훨씬 어려 보였다.

표정도 무표정한 게 걸어 다니는 인형 같았다.

그래서인지, 저리 분위기를 잡아도 별반 위협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진짜 귀엽다는 건 아니지만.'

크리스는 문득 한 가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명령을 따르라, 라. 싫은데요?"

"…뭐?"

"공녀께서 제 상급자이긴 합니다만, 글쎄요."

크리스는 어깨를 들썩하였다.

그러고는 한껏 재수 없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공녀께서 과연 제게 명령을 내릴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군요."

"!!"

쥬피엔 공녀의 얼굴에 한기가 내려앉았다.

원래도 인형같이 무표정한 얼굴이 더더욱 싸늘해졌다.

"…너."

하지만 크리스는 거기서 도발을 멈추지 않았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 못난 머저리 로인 놈의 누이시면… 공녀님의 수준도 안 봐도 뻔할 것 같은데요."

"!!"

쥬피엔이 그를 매섭게 노려보더니.

차앙!

검을 꺼내 들었다.

"…그 말 당장 취소해."

"로인 놈이 병신 머저리인 건 사실인데, 뭘 취소하란 건지요? 아, 같은 형제라고 눈이 머셔서 모르나? 나한테 얻어맞을 때 질질 짜는 모습이 참 볼만했는데. 도리어 동생 교육을 잘못시킨 공녀님이 저에게 사과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쥬피엔의 주위 공기가 한없이 내려갔다.

"…너 후회할 거야."

"글쎄요? 과연?"

"…각오해."

그녀가 쥔 검에서 흑검이 피어올랐다.

마기의 안정적인 유형화.

그녀의 경지가 최소 3성 중(中) 이상임을 알려주는 모습이었다.

파앗! 흑검이 크리스에게 날아들었다.

하지만.

크리스가 손을 뻗었다.

날아오는 흑검을 향해.

"!!"

쥬피엔이 이마를 찡그렸다.

'뭐야?'

그냥 검이 아니라, 마기가 유형화된 흑검이다.

손에 닿는 순간, 베이는 수준이 아니라 손바닥이 터져 잘려 나갈 거다.

하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인형 같은 외모와 다르게 그녀도 마인이었다.

어리석은 행동으로 다친다면, 그건 크리스의 책임이었다. 손속을 봐줄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크리스가 상상도 못 한 일을 하였다.

"역시, 머저리 놈의 누나라서 그런지 별것 없는 것 같군요."

그의 손바닥이 그녀의 검 옆을 스쳤다.

닿지는 않았다.

찰나의 간격을 둔, 아슬아슬한 거리.

닿을락 말락 미끄러지며 크리스의 손바닥이 그녀의 검을 스치고 지나가는 순간이었다.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

단단히 유형화되어 있던 쥬피엔의 흑검이 파르르 흔들렸던 거다!

마치 원래의 마기의 형태로 돌아가려는 듯.

크리스가 암흑 마기의 지배력을 발휘해 그녀의 마기를 뒤흔든 거다!

'역시 이런 식으로도 사용할 수 있네?'

크리스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될 것 같아 해봤는데, 역시 잘 되었다.

크리스는 다시 움직였다.

쥬피엔은 왈칵 코어가 진탕하는 느낌에 순간적으로 우뚝 멈추었는데, 아직 해체되지 않은 그녀의 흑검에 손을 뻗었다.

아까와 같이 지배력을 발휘했고,

파앗!

흑검이 완전히 해체되었다!

물론, 단순히 지배력만 이용한 건 아니다.

쥬피엔의 성취는 크리스보다 높다. 그러니, 지배력만으로 이런 일을 해내는 건 한계가 있었다.

대신, 크리스는 흑검의 '구조적' 약점을 노렸다.

마기가 흑검으로 유형화하려면 중간중간 기둥 같은 핵을 이루어야 한다. 그 기둥처럼 지탱하는 부위를 정확히 파악해내 지배력으로 간섭한 것이다.

마치 묘기와 같은 일.

"…어떻게?"

쥬피엔의 안색이 하얘졌다.

크리스만큼은 아니지만, 그녀도 암흑 마가의 뛰어난 인재.

크리스가 어떤 미친 일을 해낸 건지 눈치챈 거다.

'말도 안 돼.'

하지만 멍하니 있을 때가 아니었다.

크리스가 반격하였다.

손이 그녀의 목으로 향했다.

뒤로 회피하려 하였지만, 턱 몸이 멈추어 섰다.

크리스가 '속박' 흑마법을 건 거다.

'감히.'

흑마법은 크리스만 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쥬피엔은 검술 못지않게 흑마법을 깊게 익혔다.

그녀는 연속적으로 무려 세 개의 흑마법을 펼쳤다.

크리스의 흑마법에서 벗어나는 '저주 해방'.

크리스의 동작을 멈추게 하는 '순간 마비'.

동시에 크리스의 손이 썩어 들어가게 하는 '녹슨 피부'의 파괴 흑마법까지.

전문 흑마법사가 봐도 감탄이 나올 연계 흑마법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흑마법들이 실제로 구현하여 현실에 작용하기 직전이었다.

파앗!

그녀의 흑마법이 동시에 취소되었다.

크리스 때문이었다.

크리스가 그녀의 흑마법에 간섭한 거다.

이건 지배력을 사용한 게 아니었다.

마주 흑마법을 써서 그녀의 흑마법을 구현 단계에서 취소해버린 거다.

상대보다 마법적 이해도가 아득히 높으면서, 연산력이 어마어마하게 빠른 전문 마법사나 해낼 수 있는 기예였다.

이런 일을 육체적 공방을 나누면서 해내다니?

'뭐, 마검사의 허접한 마법 따위에 간섭하는 거야 간단하지.'

분류하자면, 쥬피엔은 검과 마법을 함께 익힌 마검사.

아무리 높은 수준으로 흑마법을 익혔다고 해도, 전문 흑마법사에 비해서는 마법의 조예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반면, 크리스는 그런 한계가 없었다.

검은 검대로, 마법은 마법대로 최고의 수준으로 익힐 수 있었다.

턱.

크리스의 손이 그녀의 목덜미에 닿았다.

진 거다.

생각지도 못하게.

"너… 너."

쥬피엔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평소 표정 변화가 별로 없는 그녀치고는 굉장히 격한 반응. 그만큼 놀란 거다.

그녀뿐이 아니다. 주변에서 둘의 싸움을 지켜보던 마인들도 경악한 눈빛을 보냈다.

쥬피엔 공녀와의 정면 대결에서 크리스티앙이 승리하다니?

크리스는 보란 듯 피식 재수 없게 비웃음을 지었다.

"이렇게 형편없다니. 제가 굳이 공녀님의 말을 들을 필요는 없을 것 같군요."

"!!"

쥬피엔의 얼굴이 붉어졌다.

하지만 한마디도 할 수가 없었다.

졌으니까.

물론 쥬피엔도 변명할 말은 있었다.

지금 그녀는 전력을 다한 게 아니었다. 무언가를 해보기도 전에 허를 찔러 당했으니까.

그녀의 장기인 환술과 검을 결합한 환검술(幻劍術)은 사용해 보지도 못했다.

만약, 처음부터 전력을 다했다면 이렇게 쉽게 무릎 꿇지는 않았을 거다.

하지만 진 건 진 거다.

"임무는 알아서 할 테니, 앞으로 절 간섭하려 하지 마십시오. 쓸데없이 찾으려고 하지도 말고요. 성에 며칠 나갔다 올 테니."

"…성에? 무슨 일로?"

크리스는 태연하게 말하였다.

"놀다가 올 겁니다."

"!!"

"임무 나가면 고생할 테니, 출발하기 전까지 잔뜩 놀고 와야지요."

크리스가 생각해낸 밖으로 나갈 핑계.

망나니짓이었다.

그는 원래 망나니였으니, 잘 어울리리라.

제57화

암흑 마가의 가문명은 배런 공작가.

성의 이름도 배런 성이었다.

암흑 마가가 통치하는 성답게 굉장히 커다란 성이었다.

'랑함 후작의 계획을 파토 낼 준비를 하려면, 일단 돈이 필요한데.'

크리스는 팔짱을 꼈다.

그냥 돈이 아니라, 어마어마한 거금이 필요했다.

'뭐, 상관없겠지. 돈이야 다른 사람한테 구하면 되니까.'

세상에는 돈 많은 사람이 많으니, 그들의 주머니를 털어먹으면 될 일이었다.

일단, 본격적으로 노는 것부터 하기로 하였다.

배런 성은 향락도 잘 발달하여 있었다.

"술을 가져와!"

"하, 하지만?"

"허어! 내가 누구인지 모르나? 암흑 마가의 핏줄 크리스티앙 반 배런 님이시다! 곧 공자가 될! 당장 술을 내오지 못해?"

크리스는 열심히 망나니 흉내를 내었다.

은근히 적성에 잘 맞았다.

'이왕 노는 것, 제대로 놀아야지.'

딱히 미행의 눈길은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배런 성은 암흑 마가의 본거지. 만약, 그가 조금이라도 수상한 행동을 할 시 랑함 후작에게 곧바로 보고될 거다.

'흥청망청 놀아야 아무도 의심 못 할 거야.'

사실, 그건 반쯤 핑계.

그냥 놀고 싶었다.

'이럴 때 아니면 언제 놀아. 팔자에도 없이 맨날 수련, 수련! 내가 바란 건 금수저 귀족가 백수의 삶이었는데! 놀고 싶다고!'

실컷 놀아 재꼈다.

단, 술은 빼고.

역시나 술에 고지식한 마인들.

암흑 마가의 위세를 내세워 협박해도 술은 절대 주지 않았다. 이전 '크리스티앙'은 어떻게 술을 구해다 마셨는지 모르겠다.

어쩔 수 없이 진저에일을 손에 들고 놀았다.

'젠장, 진저에일 싫어! 생강 주스 지겨워!'

술 빼고는 망나니처럼 놀았다.

어찌나 신나게 놀았는지, 이런 소리가 들려왔다.

"역시 망나니."

"변했다고 하지 않으셨나? 성흑식 때 어마어마한 성흑을 흡수했다고 하던데."

"몰라. 변한 줄 알았는데, 똑같군. 망나니 천성이 어디 가지 않나 봐."

여기저기서 혀를 차는 소리.

크리스는 희미하게 입꼬리를 들어 올리고는 더욱더 열심히 노는 거에 집중했다.

'이렇게 펑펑 놀 기회가 쉽게 오는 게 아니라고?!'

제일 좋아하는 건 역시 카드놀이.

완전히 몰입해 게임 하였다.

"저 도련님 또 잃었어!"

"말려야 하는 것 아니야?!"

크리스는 더욱 흥분하여 외쳤다.

"1만 루페 더!"

게임장의 관리인이 곤란한 얼굴을 했다.

"도련님, 이미 10만 루페를 빚지셨습니다. 이제 그만하는 게 어떠신지요?"

"이봐! 내가 누구인지 몰라? 나 크리스야. 암흑 마가의 공자가 될 크리스! 그런데 겨우! 10만 루페 가지고 그러는 건가?! 1만 루페 더!"

금세 또 1만 루페를 잃었다.

그러기를 몇 번 더 반복.

크리스가 게임장에 진 빚이 20만 루페가 넘게 되었다.

점점 게임장의 분위기가 얼음장처럼 변하였다.

"저거… 이제 정말 말려야 하는 것 아니야?"

"…그러게."

"저 새끼들은 눈치도 없나. 왜 자꾸 이기는 거야. 무슨 해코지를 당하려고."

아무리 망나니라도 배런 성을 쓰는 암흑 마가의 핏줄이다.

그런데 한자리에서 20만 루페나 털어먹다니?

이건 선을 넘었다.

하지만 막상 가장 초조한 건 게임장의 관리인이었다.

'지금 뭐하는 거야? 왜 계속 이기는 거야?!'

게임장의 관리인은 딜러에게 죽일 듯한 시선을 보냈다.

암흑 마가의 마인이 놀러 오면 적당히 잃어주는 게 관례였다.

그런데 가문의 기둥을 뽑을 것처럼 털어먹고 있으니 사색이 안 될 수가 없었다.

'목이 뽑혀 죽고 싶어?'

그런데 딜러도 창백한 안색으로 신호를 보냈다.

[이, 이상해요. 이기고 싶지 않은데 계속 패가 이상하게 나와요.]

카드놀이는 확률 게임이다.

그러니 사기도박이라도 하지 않는 한 이렇게 계속해서 한쪽이 연속으로 이기는 건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미쳤다고 암흑 마가의 인물에게 사기를 치겠는가?

무엇보다 이곳 '루돌프' 게임장은 마도 제국의 거대 상단 루돌프에서 직접 운영하는 곳으로 절대 손님에게 사기를 치지 않는다.

문제는 점점 의심하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다는 거였다.

"뭐야, 진짜 사기라도 치는 것 아니야?"

"허어, 연속 5 배열? 저렇게 패가 나오는 게 가능한가? 저 패가 나올 확률이 17만분의 1의 확률인데."

"방금에는 홀짝 8 배열이었는데? 그 드문 패들이 연속으로 두 번 나온다고? 저 두 패가 연속으로 나올 확률은 8억분의 1 확률이잖아?"

다시 크리스가 2만 루페를 잃었다.

잔뜩 흥분해 있던 크리스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무언가 이상한데. 패가 왜 이렇지?"

한마디 한 순간 게임장의 관리인은 허겁지겁 무릎을 꿇었다.

"오, 오해입니다!!"

"우리는 절대 사기를 치지 않았습니다!"

게임장 모두가 사색이 되어 고개를 조아렸다.

"그러면, 왜? 내가 병신이라서 이렇게 졌다는 건가?"

"저, 절대 아닙니다!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모르지만, 죄송합니다! 제발 노여움을 거두어 주십시오!"

게임장의 관리인들은 자신들이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면서 용서를 구했다.

'음, 조금 미안하네.'

크리스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런 이상한 결과가 나온 이유는 하나였다.

크리스가 사기를 친 거다.

자신이 지도록.

왜?

누명을 씌우기 위해.

'뭐, 저 직원들은 잘못한 게 없지만, 루돌프 상단은 죄가 많으니까.'

유명한 상단이다.

이름을 보자, 잭팟을 외쳤을 정도로.

이전 삶 때 깊은 연이 있었다.

"도, 도련님께서 지신 빚도 모두 없던 것으로 하겠습니다! 아니, 위로금도 드리겠습니다!"

"날 보고 돈 몇 푼이나 먹고 떨어지라는 건가?"

"그, 그런 건 절대 아닙니다!!"

"책임자를 데려와."

"…네?"

크리스가 차갑게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이런 큰 잘못을 저질러 놓고는 대충 넘어가려는 건 아니겠지? 너희 책임자에게 직접 죄를 묻겠다."

* ? ?* ? ?*

게임장과 연결된 호텔의 최상층 VVIP룸으로 안내받았다.

"자, 잠시만 기다려 주시면 지부장님이 올 겁니다."

"늦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내 인내심은 깊지 않으니."

"며, 명심하겠습니다!"

게임장의 관리인이 부리나케 사라졌다.

크리스는 푹신한 최고급 소파에 다리를 꼬아 앉았다.

"루돌프 상단답군. 하나같이 모두 최고급이야."

크리스는 씨익 미소를 지었다.

"털어먹어도 티도 나지 않겠어."

너무한 것 아니냐고?

천만에.

루돌프 상단은 이전 삶, 연이 깊었다.

주로 안 좋은 쪽으로.

'상단주한테 많이도 당했지.'

크리스는 인상을 지그시 찌푸렸다.

대단한 상인이었다.

크리스가 몇 번이나 뒤통수를 맞았을 정도.

'물론 나중에는 몇 배로 갚아주긴 했지만.'

사실 그 정도 수준이 아니라 완전히 호구로 만들었다.

거의 그의 돈주머니가 되었다.

- 언제까지 날 뜯어먹을 거야, 이 나쁜 놈아!!

- 세상이 멸망할 때까지?

고래고래 외치던 상단주의 음성이 메아리처럼 들리는 것 같았다.

정말 세상이 멸망할 때까지 털어먹었지만, 크리스는 여전히 과거의 앙금을 풀지 않았다.

그는 좀생이. 한번 뒤통수를 맞았다면 영원히 잊지 않는다.

'이렇게 또 만나게 된 것도 인연인데, 다시 내 호구로 만들어 주어야지.'

마침, 그렇지 않아도 개인적인 돈주머니가 필요하다고 느끼던 참인데 잘되었다.

'일단, 한잔하고.'

고풍스러운 유리병에 담긴 술을 잔에 따랐다.

다들 고지식하게 굴어 술이 고파 급히 한잔했는데,

'…젠장, 진저에일이었잖아. 이 빌어먹을 놈들.'

크리스가 미성년이라고 진저에일을 가져다 놓은 거다!

와락 인상을 찌푸리는데, 문이 열렸다.

대단한 미청년이 등장했다.

"암흑 마가의 명성 높은 크리스티앙 반 배런 카자르 도련님을 뵙습니다. 루돌프 상단의 상단주 루비드라고 합니다."

크리스는 잠시 살짝 놀란 얼굴을 하였다.

뜻밖에 상단주가 등장해서?

아니, 그런 이유가 아니다.

'이것 봐라.'

그가 아는 루돌프 상단의 주인은 여인이었다.

하지만 지금 등장한 이는 남자였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재미있네.'

이미 상단주의 '비밀'을 알고 있는 크리스티앙은 지그시 미소를 지었다.

본인을 상단주라고 소개한 루비드의 이목구비가 들어왔다.

짙은 갈색 머리칼, 푸른 눈.

호감형의 밝은 인상.

얼굴선이 여려 중성적인 느낌이 강한 미청년이었다. 얼핏 보면 여인으로 보일 정도로.

흥미로운 얼굴로 잔에 담긴 진저에일을 털어 넣었다.

"그래, 이야기는 들었겠지?"

"네, 솔직히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겠습니다. 도련님께 사기 카드 게임이라니. 당황스럽습니다."

"그래서, 너희의 잘못이 아니라고?"

"네, 결단코 아닙니다. 하지만 귀한 분께서 기분이 상하셨으니, 저희의 책임이 완전히 없다고 할 수도 없겠지요."

상단주 루비드는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사죄의 의미로 도련님께서 게임장에서 지신 빚은 모두 무효로 하겠습니다. 거기에 약소하지만, 선물을 받아 주십시오."

봉투를 여니, 루돌프 코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원하시는 물건이 있다면, 저희 상단에 말씀해 주십시오. 어떤 물건이든 원가에 구해 오겠습니다."

루돌프 상단은 경매장을 운영한다.

따라서 온갖 진귀한 물건을 쉽게 구할 수 있었다.

"흐음, 필요한 걸 지금 이야기해도 되겠는가?"

"말씀하십시오."

"루이나."

"…네?"

"루이나란 여인을 구해와."

순간, 상단주의 얼굴에 실선이 갔다.

상단주는 거짓말처럼 다시 미소를 지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루이나란 여인이 누구인지 알 텐데?"

"그야… 압니다. 연합 쪽의 유명한 상인 아닙니까?"

집시 루이나.

'디어 상단'을 운영하는 연합의 손꼽히는 거상이었다.

"아무리 우리 상단이라도 연합의 상단주를 데려올 수는…."

"정말 불가능한가?"

크리스가 빤히 물었다.

상단주의 얼굴을 바라보며.

정확히는 여인이라고 해도 믿을 여린 중성적인 얼굴선을 바라보며.

"난 가능할 것 같은데."

"!!"

크리스의 어조에서 무언가를 느낀 걸까?

루비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주춤 뒷걸음질 친 루비드는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무,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군요."

"모르겠다고? 그러면 루비드가 아니라, 이런 이름으로 부르면 알겠나?"

크리스가 짙은 음성으로 말했다.

"루이나 상단주."

"!!"

"잘도 위장했군. 성유물의 힘인가?"

그렇다.

눈앞의 이는 루비드이자, 루이나인 이.

정확히는 남장 여자로 이중 신분이었다.

마도 쪽에서는 루돌프 상단의 상단주로.

연합 쪽에서는 디어 상단의 상단주로.

순간, 루비드, 아니, 루이나의 표정이 형형색색으로 변하였다.

크리스가 모든 걸 알고 있단 걸 깨닫고는 창백함, 경악, 위기감이 촤라락 스쳐 지나갔고, 마지막으로는 살심이 떠올랐다.

죽여 입을 막으려는 건지, 루이나의 손이 품 안으로 향하는 찰나.

"그거 꺼내면 너 죽어."

"!!"

"믿지 못하겠으면, 도박해 보든지."

찰나, 루이나의 얼굴에 미칠 듯한 고민이 스쳐 지나갔다.

크리스의 얼굴을 보며 입술을 질끈 깨물었고, 결국.

"…어떻게 안 거죠?"

백기를 들었다.

파앗!

노이즈가 끼는 것 같은 잔상과 함께 외양이 변하였다.

제58화

당찬 느낌의 아름다운 여인.

크리스가 익히 아는 루이나의 얼굴이었다.

'당연히 알지. 이전 삶 인연이 얼마인데.'

원래 연합 쪽 상단의 루이나와 마도 상단의 루비드가 동일 인물인 건 절대 비밀인 일이었다.

양 세력 간의 관계를 생각하면 당연한 일.

크리스조차 멸망의 시대 중반부에 가서야 두 인물이 동일인인 걸 알게 되었다.

"내가 천재라서."

"…뭐라고요?"

"정보가 밝을 텐데, 듣지 않았나? 내가 천고의 천재라는 것."

크리스가 재수 없는 말투로 말했다.

"유물의 위장 효과가 어설퍼 간파해 보았지. 위장 효과를 꿰뚫어 진실한 얼굴을 보니 루이나란 연합의 상인과 같은 얼굴이더군."

"마, 말도 안 되는…! 그런 일이 가능할 리가?"

루이나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외쳤다.

당연했다.

루이나가 외모를 숨기기 위해 사용한 건, '천(千)의 가면'이란 이름의 성유물.

성좌의 힘이 깃든 이 유물은 아무리 경지가 높아도 변장을 간파하지 못하게 하는 절대적인 힘을 지니고 있었다.

크리스도 당연히 꿰뚫어보지 못했지만, 태연히 거짓말했다.

"말하지 않았나? 내가 천재라고. 빤히 보이는 걸 어떻게 하나?"

"...."

루이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어쨌든, 이유야 중요한 게 아니다.

"…절 어떻게 하실 거죠?"

"글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면 재밌을 것 같다는 생각은 드는군."

"후회하실 겁니다."

루이나의 눈빛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루이나는 평범한 인간이다.

하지만 믿는 구석이 있는 것 같았다.

'온갖 유물로 덕지덕지 무장하고 있을 테니.'

루돌프 상단은 경매장을 운영한다.

디어 상단도 마찬가지다.

세상 음지의 모든 보물을 유통하고 있으니 호신용 유물도 잔뜩 가지고 있었다.

기상천외한 힘을 지닌 유물을 사용하면 크리스도 감당하기 어렵겠지만,

"말했지? 안에 든 거 꺼내면 후회할 거라고."

"!!"

"넌 죽어."

루이나가 이를 악물었다.

그녀는 크리스티앙의 눈빛을 마주 보며 갈등했다.

'도대체.'

듣긴 들었다.

암흑 마가의 망나니가 변해 최근 들어 대단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앞으로 주목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고.

하지만 그래 봤자 고작 3성이다.

나이를 고려하면 대단한 성취이긴 하지만 그녀가 들고 있는 유물의 위력을 당해낼 리가 없을 텐데.

왜 저 건방진 놈의 경고를 무시할 수가 없는 걸까?

유물을 꺼내는 순간, 돌이킬 수 없는 참사가 일어날 것만 같았다.

결국, 그녀는 자신의 직감을 따랐다.

무엇보다.

"장난은 하지 말아 주십시오."

"흐음?"

"어차피 정체를 밝힐 생각은 없지 않나요?"

"무슨 근거로 그렇게 이야기하는 거지?"

"만약, 그럴 생각이었다면, 이렇게 번거로운 일까지 벌이며 저와 만남을 가지려고 하지 않았을 테니까요. 저와 거래하고 싶은 게 있는 것 아닌가요?"

루이나가 한결 안정된 얼굴로 똑바로 말했다.

"제게 원하는 게 있는 이상, 도련님께서도 절 함부로 무너뜨리진 못하겠죠."

크리스는 속으로 휘파람을 불었다.

역시, 루이나.

왕년에 그의 뒤통수를 친 여자답게 만만하지 않았다.

실제로 그는 루돌프 상단을 몰락시킬 수 없었다.

'이런 대단한 호구를 어디서 또 찾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니까.'

돈 많은 상단은 많다.

하지만 연합과 마도를 넘나들며 막대한 정보력을 구축한 건 루이나의 상단이 유일했다.

거기에 거대 음지 경매장을 통해 수많은 보물을 손에 넣을 수 있는 수완까지.

앞으로의 계획을 위해서는 루이나의 상단이 지닌 힘이 반드시 필요했다.

'문제는 쉽게 호구로 만들긴 어렵다는 건데.'

하지만 어렵다는 거지 불가능하다는 건 아니다.

그는 루이나의 약점을 알고 있으니까.

[내 등골을 언제까지 뜯으려는 거야?!]

메아리처럼 들리던 루이나의 외침을 떠올리며 크리스는 씨익 웃었다.

"그래, 네게 바라는 게 있다."

"무언가요?"

"돈."

"…네?"

"그리고 네가 가진 다양한 보물들."

루이나의 얼굴에 황당함이 번졌다.

상인에게 대놓고 돈과 보물을 달라니, 미친놈인가? 하는 얼굴이었다.

"따르지 않으면 어떻게 하실 거죠?"

"뭐, 협박할 생각은 없어. 내가 원하는 건 거래이니. 대가를 주지."

"무슨 대가입니까?"

크리스는 자신을 가리켰다.

"내게 돈을 바칠 기회."

"…네?"

"대신, 난 너의 뒷배가 되어주지."

"...."

루이나는 침묵했다.

'…뭐지, 이 미친놈은.'

솔직한 마음이었다.

물론, 권력자가 상인의 뒷돈을 받으며 뒷배가 되는 건 흔한 일이다.

루이나도 온갖 권력자와 연을 맺고 있었고.

하지만 크리스티앙은 그럴 만한 위치가 아니었다.

'망나니라더니. 사리 판별을 못 하는군.'

그녀는 최대한 좋은 말로 달래었다.

"죄송하지만, 전 이미 좋은 후원자분들을 많이 모시고 있습니다. 만약 돈이 필요하신 거면, 조건 없이 어느 정도는 드릴 테니…."

용돈이나 받고 떨어져라, 라고 말하고 있는데, 크리스가 뜻밖의 이야기를 하였다.

"그 많은 후원자 중 네 상단을 살려줄 수 있는 이는 없겠지."

루이나의 얼굴이 싹 굳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상인이면 알 텐데? 대륙의 정세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이대로라면 전쟁이 벌어지는 건 시간문제일 터."

"...."

"마도는 마도끼리, 연합은 연합끼리. 그리고 결국 마도 제국과 연합 간의 대전이 일어날 거다."

실제로 일어날 일이다.

결과는 파국.

그리고 루이나는 양 세력 간에 발을 뻗치고 있는 대상인으로서 그런 조짐을 느끼고 있긴 했다.

"그런 전쟁이 일어나면, 너희 상단이 어떤 꼴이 될지는 뻔한 일이겠지."

루이나는 연합과 마도 양쪽에 상단을 두고 서로 거래를 하며 막대한 이익을 올리고 있었다.

주력 품목은 귀금속, 진귀한 보물들.

연합의 보물을 마도 쪽으로.

마도의 보물을 연합 쪽으로 옮기며 부를 쌓고 있었다.

하지만 전쟁이 일어나는 순간, 그런 거래는 완전히 끊기게 될 거다.

아니, 그런 게 문제가 아니다.

자칫하면 연합과 마도 양쪽에 적으로 몰려 상단의 재산은 몰수당하고 그녀는 화형대에 오르게 될 거다.

"…비약입니다."

"비약? 사왕성의 분위기를 알 텐데, 잘도 낙관하는군. 네 목숨과 전 재산이 걸린 일인데, 참 속 편해서 좋겠어."

루이나는 잠시 침묵했다.

혈검, 사령, 저주 마가가 한데 모여 있는 사왕성.

당장에라도 터지기 일보 직전의 상태인 건 알고 있었다.

"지금 상황에서 네가 할 수 있는 대비는 하나겠지. 최대한 빨리 연합과 마도, 둘 중 한 곳의 상단을 정리하고 서로 연결되었던 흔적을 지우는 것. 그러면 전쟁이 벌어져도 최악의 상황은 피할 수 있을 거다."

"...."

루이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런 일을 하면 손해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실제로 원래 역사에서도 그녀는 어느 쪽의 상단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목숨을 건 줄타기를 했다.

어느 쪽에라도 정체가 들키면 곧바로 화형행일 텐데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왜?

그녀는 지독한 돈벌레였으니까.

돈을 잃을 바에는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지독한 돈 욕심.

그리고 그게 바로 크리스가 노리는 그녀의 약점이었다.

"싫다면, 방법은 하나이지. 전쟁을 막는 것."

크리스는 약을 치기 시작했다.

"…도련님께서 전쟁을 막을 수 있다고요?"

"그래, 가능하다."

"…어떻게 말입니까?"

루이나는 헛웃음을 흘리며 물었지만, 크리스가 간단하게 답했다.

"우리 암흑 마가와 극독 마가의 충돌을 막으면 된다."

"!!"

"우리 남방 마도국이 굳건히 버티고 있다면, 사왕성은 감히 전쟁을 일으킬 생각을 못 할 테니까."

루이나의 표정이 변하였다.

그녀는 국제 정세에 빠삭한 상인.

크리스의 말을 알아들은 거다.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사왕성이 연합과 전쟁을 일으키려면 암흑 마가가 있는 남방 마도국의 협조가 필요해.'

그래서 원래 역사에서는 사혈의 마왕이 이끄는 사왕성은 연합과 전쟁을 일으키기 전에 남방 마도국을 복속시킨다.

마침, 앞으로 벌어질 온갖 사건으로 약해질 대로 약해져 있던 남방 마도국은 사왕성의 침략을 버티지 못하고 허무하게 무릎 꿇는다.

그리고 벌어지는 게 연합과의 1차 대전.

"이번에 우리 가문과 극독 마가와의 유물 쟁탈전 이야기를 들었겠지?"

"들었습니다. 하지만 양 가문 간의 충돌을 막으려고 전력을 제한하기로 했다고…."

"그 말을 믿나? 순진하군. 반드시 많은 피가 흐를 거다. 그리고 이 사건은 양 가문의 사이가 벌어지는 데 결정적인 원인이 될 거다."

"...."

"난 두 가문의 사이가 벌어지는 걸 막기 위해 이 유물 쟁탈전을 피해 없이 끝내려고 한다. 우리 두 가문이 싸워서 피를 흘리면 사왕성에 전쟁을 일으킬 빌미를 줄 테니까."

"그런데 돈과 보물이 필요하다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말 그대로다. 이번 유물 쟁탈전에 있을 참사를 막기 위해서는 준비를 해야 하는데, 돈과 보물이 필요해."

크리스는 말했다.

"묻겠다. 날 후원할 생각이 드는가?"

"...."

루이나의 얼굴이 고뇌에 빠졌다.

솔직히 가능성에 불과할 뿐인 이야기다.

이번 사건이 빌미가 되어 정말 암흑 마가와 극독 마가가 분쟁을 일으킬지.

그래서 사왕성에 전쟁을 일으킬 빌미를 줄지.

결국 마도와 연합 간의 전쟁이 일어날지.

그렇게 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지만.

- 잘도 낙관하는군. 네 목숨과 전 재산이 걸린 일인데, 참 속 편해서 좋겠어.

만약, 저 도련님의 이야기대로 일이 진행되면?

가능성이 제로가 아니라는 게 문제다.

최악의 경우, 그녀는 모든 걸 잃을 수도 있다.

'안 돼!! 내가 어떻게 모은 돈인데.'

전쟁이 일어나, 장사를 못 하게 되고, 거기에 전 재산을 몰수당하는 상상까지 하자 루이나의 눈이 컴컴해졌다.

양측에 변절자로 몰려 화형당하는 건 두렵지 않다.

하지만 돈을 잃는 건 절대 참을 수 없었다.

'뭐, 어떤 선택을 할지 뻔하지.'

크리스는 여유로운 마음으로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과거에도 비슷한 상황이었으니까.

크리스는 한때 거대 집단을 이끈 적이 있었다. 그때 자금을 댄 게 루이나였다.

왜?

자기 돈을 지키기 위해.

그녀가 용사 일행의 돈주머니가 되어 자금을 후원한 것도 마찬가지의 이유였다.

돈을 너무나 사랑하는 그녀는 그 돈을 지키기 위해 펑펑 그들을 도와줄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도 똑같다.

돈에 병적인 집착을 하는 그녀가 크리스의 경고를 그냥 넘어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결국,

"…정말 이번 유물 쟁탈전에 그런 위험이 있는 겁니까?"

"그래, 확실하다."

루이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습니다. 도련님의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크리스는 씨익 미소를 지었다.

"잘 생각했다. 그런데 값이 조금 비쌀 거야."

"비싸다면?"

"준비할 게 있는데, 하나같이 가격이 만만하지 않거든."

"…얼마나 필요하기에 그렇습니까?"

"가격은 나도 정확히 모르겠고. 필요한 물품들을 말해주겠네."

크리스는 준비 품목들을 일러주었다.

하나하나 말할수록 루이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갔고.

결국, 외마디 비명을 토하였다.

"미친?"

제59화

참고로, 크리스가 이야기한 준비 물품들의 가격을 모두 합치면 다음 금액과 같다.

100만 루페.

배런 성같이 커다란 성에서도 저택을 몇 채는 살 수 있는 금액이었다.

* ? ?* ? ?*

루이나는 크리스가 이야기한 물품들을 곧바로 준비해 주었다.

경매장의 주인답게 전광석화 같은 속도였다.

루이나는 이를 갈며 말했다.

"…만약 이번 쟁탈전에서 큰 참사가 일어날 거라는 이야기가 사실이 아니면, 금액을 전부 청구할 겁니다!"

크리스는 어깨를 으쓱했다.

'뭘 이 정도로 그러나. 이제 시작일 뿐인데.'

루이나는 상상도 못 하고 있겠지만, 둘의 인연은 이제 시작된 것일 뿐이었다.

앞으로 그녀는 착실히 그의 돈주머니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망하지 않으려면.

'억울해하지는 말라고. 세금 같은 거니까.'

원래 자신을 지켜주는 군대에 세금을 내듯.

크리스가 앞으로 할 일들은 그녀의 상단을 지켜주는 일이 될 테니, 정당한 대가를 치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나저나 해야 할 일이 많긴 하구나.'

크리스는 앞으로 일어날 사건들을 떠올렸다.

골드 크로스의 끔찍한 참사.

극독 마가와 암흑 마가와의 분쟁.

진녹의 변.

노가주의 사망.

파괴 마가의 폭주.

청류의 마왕의 음모 등등.

당장 남방 마도국에서 몇 년 안에 일어날 일들이었다. 굵직굵직한 것만 꼽아도 이렇다.

이 일들을 모조리 막아야 사왕성에 맞서 1차 대전이 일어나는 걸 막을 수 있었다.

최악은 이게 끝이 아니란 거다.

결국, 그가 마도 제국의 정점에 이르러야 했다.

'헤유, 내가 도대체 왜 이런 고생을.'

갑자기 막막해져 한숨이 팍 나왔다.

'원래 용사가 해야 했을 고생인데! 도대체 왜 내가 대신 회귀한 거냐고?! 망할.'

생각할수록 바득 화가 났다.

'억울하게 나 혼자만 뺑이 칠 수는 없지. 언젠가 반드시 용사 일행 모두 다시 만나 죽도록 부려먹어 주겠어.'

아직은 마도 제국 안에서만 활동하고 있지만.

연합 쪽에서도 해야 할 일이 많이 있었다.

그때, 에반을 비롯한 용사 일행들을 찾아서 부려먹을 생각이었다.

특히 용사 에반!

최고로 부려먹을 1순위 후보였다.

'만나기만 해봐라. 악독 사장처럼 부려먹어 주마.'

한가한 생각은 여기까지.

저택으로 돌아가니 날카로운 기세의 마인들이 도열해 있었다.

숫자는 30명.

선두에는 익숙한 싸늘한 인상의 소녀, 쥬피엔이 서 있었다.

중립지대로 향하려는 탐사대였다.

"...."

쥬피엔이 말없이 그를 노려보았다.

뭐 하다 이제 온 거냐는 눈빛.

"아아, 실컷 놀다 보니 늦었네요."

건들건들한 대응에 쥬피엔 옆의 마인들이 인상을 찌푸렸다.

중요한 임무를 앞두고 성에서 실컷 놀다 온 크리스가 곱게 보일 리가 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크리스는 피식하고는 찍 하품하였다.

"너무 실컷 놀았나, 피곤하네. 전 보급품 마차에서 자면서 따라가겠습니다. 상관없죠?"

"!!"

그 미친 소리에 마인들이 눈을 부라렸다.

쥬피엔의 눈빛도 더욱 매서워졌다.

"아니, 도련님. 아무리 그래도 그건…."

그때, 쥬피엔이 손을 들었다.

"됐어."

"하지만 공녀님?"

"저놈이 저러든 말든, 그냥 신경 쓰지 마."

쥬피엔이 싸늘하게 말했다.

사실 일전 짧은 결투 이후 쥬피엔은 살짝 크리스티앙을 다시 보았다.

대단한 재능, 실력이었으니까.

물론, 그녀가 장기인 환검술을 제대로 썼다면, 그렇게 허무하게 패하지는 않았을 거다. 그래도 인정할 건 인정해야 했다.

동생과 악연이 있긴 했지만, 쥬피엔은 로인만큼 앞뒤 가리지 못하는 최악은 아니었다. 강자를 알아볼 줄은 알았다.

그런데 임무에 나갈 준비를 하는 동안, 내내 성에서 망나니처럼 놀다가 와서 또 저런 태도라니.

혐오감이 다시금 불타올랐다.

'저런 놈은 본가의 공자가 될 자격이 없어.'

쥬피엔은 크리스티앙을 방치하기로 했다.

어차피 임무에 성실하게 임하지 않아 공을 세우지 못하면, 크리스티앙 본인만 손해였으니까.

"…출발."

쥬피엔이 읊조렸고, 말이 달렸다.

보급품이 담긴 마차도 달리기 시작했고, 크리스는 마차에 누운 채 지그시 미소를 지었다.

'누워서 가니 편하네.'

크리스는 속으로 생각했다.

'물론 앞으로는 고생이겠지만.'

단순히 편해지려는 이유로 짐마차에 누운 건 아니었다.

이유가 있었다.

'다들 나한테 고마운 줄 알라고.'

원래 이 탐사대는 몰살당할 운명이다.

그 참사를 막기 위해서는 모두의 허를 찔러야 했다. 아군마저 속여야 했다.

작전의 시작이었다.

* ? ?* ? ?*

암흑 마가는 방대한 영역을 다스리고 있었다.

극독 마가도 마찬가지였다.

어지간한 소국 이상의 규모였다.

서로 국경처럼 구역을 나누고 있었는데, 문제는 숲이나, 마경, 산악 지대같이 정확히 영역을 구별하기 어려운 곳이 있어 서로의 소유를 주장하며 충돌이 벌어지고는 하였다.

피해가 누적되자 그런 지역을 중립지대로 선포하였다.

이번에 유물이 나타난 곳은 그런 중립지대 중 한 곳인 비스킨 산맥이었다.

높은 수준의 마물이 출몰하는 마경.

목적지에 가까워지자, 쥬피엔이 경고하였다.

"개별 행동은 절대 금물. 최소 세 명 이상 조를 짜."

4마급 이상의 강력한 마물들이 나타날 때도 많아 내린 명령이었다.

"네, 알겠습니다, 공녀님!"

"그런데 크리스티앙 도련님의 조는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쥬피엔은 지그시 눈매를 찡그렸다.

크리스티앙은 여전히 짐마차에 누워 있었다.

"…저딴 쓰레기 놈은 내버려둬."

그렇게 탐사 준비를 하고 있을 때였다.

저 멀리 앞에서 말 구름이 피어올랐다.

흑빛이 감도는 진청의 옷을 입은 마인들이었다!

"극독 마가의 마인들입니다!"

선두에서 지적인 도도한 인상의 소녀, 극독 마가의 공녀 마리사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약속 시각에 맞추어 왔군요. 마리사라고 해요."

"난 쥬피엔."

"룰은 들었을 거로 생각해요."

유물은 성좌와 악마의 힘이 깃든 물건이다. 각각 성유물, 마유물이라고 한다.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어 한 번 출현할 때마다 피바람이 불고는 했다.

최악은 지금처럼 거대 세력 간의 경계선에 출현하는 경우다.

단순히 유물이 탐나는 걸 넘어 서로 간의 자존심의 문제가 된다. 전쟁에 가까운 출혈이 일어나는 경우도 흔했다.

원래라면 이번 경우도 그런 사태가 벌어질 뻔했지만, 서로 쓸데없는 출혈을 막기 위해 시합 같은 경쟁을 하기로 한 거다.

단, 추후 어떤 잡음도 일어나지 않게 하려고 완벽히 공정한 룰을 정했다.

"탐사 중 함정을 파거나 고의로 상대를 습격하는 건 금지예요."

마인답지 않게 지나치게 공명정대한(?) 규정.

하지만 마인이니 도리어 이런 규정이 필요했다.

아니라면 양측 모두 유물을 찾기보다는 서로를 죽이려 드는 데 집중할 거다.

"그래."

"…말이 짧으시군요."

"우리 적 아니야? 말 올려줘?"

"…아니. 그럴 필요 없지."

마리사는 깔끔하게 자신도 말을 낮추었다.

"그러면 이만."

돌아가려는데, 마리사가 잠시 머뭇거렸다.

마리사는 잠시 암흑 마가 쪽 마인들을 둘러보았다. 마치 누군가를 찾듯이.

그때, 마침 크리스티앙이 짐마차에서 부스스 일어나 하품을 찍 하였다.

누가 봐도 자다 일어난 한심한 모습.

마리사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다가.

"…흥."

마리사는 극독 마가의 인물들과 자신의 진영 쪽으로 돌아갔다.

이제 경쟁의 시작이었다.

쥬피엔은 암흑 마가 마인들에게 말했다.

"탐사를 시작할 거야. 내 말에 잘 따라."

쥬피엔은 지시를 내렸다.

각자 조를 이루어 일정 범위 이상 벗어나지 않고, 감당 불가한 마물을 만나면 바로 구조를 요청하도록.

유물이 마경 어디에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저 이 산맥 어딘가에 출현했다는 사실만 '감지'했을 뿐이다.

따라서 무턱대고 급하게 움직여서 될 게 아니다.

괜히 조급함을 부렸다가 희생자만 생긴다.

무엇보다 섣불리 움직이기에는 이곳 마경이 너무 넓고, 위험했다.

차분히 구역을 정해 하나하나 샅샅이 뒤지는 게 정석이었다.

그런데 짐마차에서 일어난 크리스티앙이 하품을 찍 하며 쥬피엔에게 다가왔다.

"전 따로 다녀도 되겠습니까?"

"…뭐?"

"그런 식으로 굼벵이처럼 움직여서 어느 세월에 산맥을 뒤지겠습니까?"

쥬피엔의 눈썹이 꿈틀하였다.

원래도 크리스티앙에 대해 감정이 안 좋은 그녀다.

그런데 첫 만남부터 지금까지 끝없이 그녀의 감정을 건드리고 있었다.

"…너 정말."

"답답해서 그럽니다. 공녀님의 느림보 같은 지시에 따르다가 유물을 놓치면 큰일이니까요."

분노한 쥬피엔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하지만 쥬피엔은 이전처럼 검을 내밀지는 않았다.

임무를 앞두고 자중지란을 일으키는 건 현명하지 않으니까, 인내한 거다.

"네 마음대로 해. 단."

쥬피엔은 싸늘하게 말했다.

"강력한 마물을 만나도 구조를 바라진 말아."

마치 쓰레기를 바라보는 듯한 눈빛.

크리스는 어깨를 으쓱했다.

'완전히 미움받아 버렸네. 아, 원래도 미움받고 있었으니 상관없나?'

도리어 더 좋았다.

그의 '작전'을 위해서는 모두의 시야에서 벗어나 완전히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어야 했다.

"잘됐군요. 이건 그러면 필요 없으니 놓고 가겠습니다."

크리스는 작은 수정구 하나를 바닥에 던졌다.

위기 상황이 벌어질 걸 대비해 서로 간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는 마도구인데, 벗어던진 거다.

이제 쥬피엔을 비롯한 탐사대는 크리스의 위치를 추적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면 수고하십시오."

파앗!

크리스는 홀로 산맥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저, 저 미친놈…? 저래도 되는 건가? 이곳 마경이 얼마나 위험한 곳인데?"

"시체로 돌아오는 것 아니야?"

마인들이 웅성거렸다.

쥬피엔도 갈등이 되었다.

크리스티앙을 저렇게 놔둬도 되는지.

하지만 이미 크리스티앙은 산맥 안쪽으로 사라진 뒤였다.

쥬피엔은 입술을 꾹 깨물고 크리스티앙이 사라진 방향을 노려보았다.

* ? ?* ? ? *

하지만 크리스티앙은 전혀 위험을 겪지 않았다.

'마물을 왜 마주쳐? 피해 다니면 되지.'

용사 일행과 세상의 온갖 마경을 다녀본 크리스였다.

대충 마수들이 어떤 습성을 지니고 있는지, 어떻게 하면 마물과의 조우를 피할 수 있는지 빠삭하게 알고 있었다.

특히 이곳은 양 가문의 중립지대.

어떤 마수가 출몰하는지 빠삭하게 조사되어 있었으니, 피하는 거야 간단했다.

'빨리 움직여야 해. 안 그러면 늦어.'

이미 랑함 후작의 음모는 시작된 상태였다.

서둘러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데, 뜻밖의 인물을 조우했다.

"…크리스티앙."

마리사였다!

그녀가 눈을 크게 뜨고 크리스를 보았다.

'이런.'

급한데, 반갑지 않은 인물을 만났다.

'전 약혼녀면, 이제는 상관없는 남이지. 신경 쓰지 말고 무시하자.'

말 섞지 않고 갈 길 가려는데 뜻밖의 일이 일어났다.

파앗!

검은 독이 날아든 거다!

크리스가 향하던 방향으로.

급히 발걸음을 멈추었고, 지직, 극독이 바닥을 녹였다.

"…무슨 짓이지?"

"너와 할 이야기가 있어."

크리스는 인상을 찌푸렸다.

우연히 만난 게 아니다.

마리사가 일부러 그를 찾아왔다는 걸 눈치챘다.

'왜 이래?'

제60화

그를 해치려는 건 아닌 것 같았다.

방금 공격도 살수가 아니라, 발걸음을 멈추기 위해 바닥에 뿌린 거였다.

어쨌든 성가신 일.

"말해봐."

"…내게 사과할 생각 없어?"

"...."

"난 네가 내게 저질렀던 모욕을 아직도 참을 수가 없어."

크리스는 침묵했다.

'크리스티앙, 이놈은 도대체 무슨 대형 잘못을 저질렀던 거야.'

소녀의 에메랄드 눈동자가 잔뜩 독기를 품고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보통 가벼운 원한이 아닌 눈빛.

'바쁜데, 적당히 사과하고 넘어가야 하나. 내가 저지른 잘못은 아니긴 하지만.'

그런데 크리스는 한 가지 생각이 퍼뜩 떠올랐다.

'잠깐, 마리사라면 이번에 누명을 써서 희생당할 운명이잖아.'

이번 탐사 때 암흑 마가의 탐사대는 몰살당한다.

그때 누명을 쓰는 게 마리사다.

그녀는 양손이 잘리고 양 눈, 혀가 뽑히게 된다.

'뭐, 어떻게 되든 내가 신경 쓸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앞으로 진행될 암흑 마가와 극독 마가와의 사건들을 생각하면, 극독 마가의 중요 인물 중 한 명에게 빚을 지게 해 자신의 호구로 만들어 놓으면 좋으리라.

그러기 위해서 크리스는 말했다.

귀를 후비며 최대한 성의 없는 태도로.

"사과. 됐나?"

"...."

마리사의 얼굴이 빨개졌다.

"넌… 정말 최악이구나."

"사과해 달라고 해서 사과해준 건데? 뭘 더 구질구질하게 이야기해 달라는 건지 모르겠군. 우리는 이미 서로 끝난 사이인데 혹시 아직도 약혼 사이라 착각하는 거 아니야? 그나저나."

크리스는 싸늘하게 웃었다.

"날 너무 얕본 것 아닌가?"

"…뭐?"

"겁도 없이 혼자 날 찾아오다니. 널 여기서 쓰러뜨리면 이번 탐사는 우리 쪽의 승리겠지."

마리사의 얼굴이 변했다.

지금 크리스는 여기서 그녀를 제압하겠다는 거였다!

'제압해 놓으면 누명을 쓸 일도 없겠지.'

이번 탐사 때 마리사의 무죄를 입증할 방법은 간단했다.

알리바이를 만들면 된다.

어떻게?

제압해서 꽁꽁 묶어 가둬놓으면 된다.

크리스는 나름대로 큰마음으로 하는 배려였지만, 마리사는 분노하여 파르르 몸을 떨었다.

그러다 하, 웃음을 흘렸다.

"그래, 지금 우린 적이지. 후회하게 해주겠어."

마리사의 보석 같은 에메랄드 빛 눈동자가 서늘하게 반짝였다.

"지난번 내게 저질렀던 모욕까지 말이야."

지지직.

그녀의 몸에서 독기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한 종류의 빛깔이 아니었다.

총천연색이 어지럽게 피어올랐다. 그만큼 다루는 독기의 종류가 많은 거다.

'소만독(小萬毒)이라 불릴 만하군.'

크리스는 속으로 휘파람을 불었다.

수없는 독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어 붙여진 별명이다.

서녀로 태어났음에도, 직계로 인정받고 유력한 차세대가 된 이유.

"마지막으로 네게 기회를 줄게."

그녀의 에메랄드 눈동자의 빛깔이 변하였다.

찰나 탁한 붉은색으로, 백색으로, 그리고 검은색으로, 또한 녹색으로.

끌어올리는 독기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눈빛.

"지금에라도 내게 무릎 꿇고 사과해. 안 그러면 넌 내 독물에 한 줌 핏물로 변하게 될 거야."

섬뜩한 경고.

크리스는 귀를 다시 후적 팔 뿐이었다.

"말 많네. 극독 마가는 입으로 싸우나? 입만 시끄러운 연합 놈들 같군."

"!!"

마리사의 얼굴이 표독해졌다.

파앗!

그녀의 손에서 마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냥 마기가 아니었다. 진청색의 마기는 곧 희뿌연 안개로 변하였다.

무형의 마기를 독으로 변환하는 경지, '마독(魔毒)'이었다!

3성 이상에 이르러야 사용 가능한 흑검에 대칭하는 경지.

마리사의 공격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이어서 주머니에서 작은 유리병들을 꺼냈다.

역시 독극물들이었다.

그것도 보통 독극물들이 아니었다.

하나같이 극독으로 꼽히는 독들.

아직 그녀의 경지로는 여러 개의 독을 한꺼번에 마독으로 구현하는 게 어려워 암기술로 던지는 거다.

파창!

그녀가 던진 유리병은 허공에서 깨져 기체로 변해 그대로 크리스를 덮쳤다.

크리스는 무려 다섯 종류 이상의 독에 휩싸이게 되었다.

마리사는 냉랭히 말하였다.

"이제 너는 지옥과 같은 고통을 겪게 될 거야."

마리사가 사용한 독들은 곧바로 즉사하는 종류는 아니었다.

대신, 시간을 두어 끔찍한 고통에서 몸부림치다가 천천히 죽음에 이르게 하는 잔혹한 독들이었다.

하나도 아니라, 무려 다섯 종류의 독에 당했으니, 크리스는 차마 상상할 수도 없는 끔찍한 고통을 겪게 되리라.

"당장 내게 사과해. 그러면 해약을 줄 테니."

"…사과, 라. 싫은데?"

여전한 대답.

마리사는 와락 인상을 찌푸렸다.

"당장 사과해! 안 그러면 넌 죽게 될 거야!!"

"글쎄. 그럴 것 같지는 않은데?"

"허세를 부려봐야…!!"

그때, 독의 연무가 걷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드러난 크리스의 모습에 마리사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땅바닥을 구르며 고통스러워하고 있어야 했는데, 전혀 그런 기색 없이 멀쩡했다.

태연한 척하는 게 아니다.

독이 전혀 먹히지 않았다!

"어, 어째서?"

"아… 그게."

크리스는 피식 웃었다.

"해약을 미리 만들어 먹었거든."

"마, 말도 안 되는!!"

한 종류도 아니고 무려 다섯 종류의 독이었다.

그리고 극독 마가의 비전 독의 해약을 어떻게 구해서 미리 먹는단 말인가?

"만병통치약이라고 들어봤어?"

"뭐, 뭐?"

"비슷하게 무슨 독에든 듣는 만독 해독약 같은 걸 한 번 만들어 봤는데, 잘 듣네?"

말도 안 되는 해명.

하지만 반쯤 사실이었다.

'의념이 담긴 독도 아니고, 이런 물리적인 독의 해약을 만드는 거야 간단하지.'

극독 마가의 독은 여러 경지로 나뉜다.

'물리적' 성질의 독.

'마법적'인 효과가 깃든 독.

'의념'이 깃든 독.

'이적'을 일으키는 독.

그중 마리사가 만든 독은 물리 독이었다.

물리 독 중에서 가장 높은 수준에 속하는 독이었지만, 크리스가 보기에는 어린애 같은 수준이었다.

당연했다.

"내가 사실 의술에도 일가견이 있거든."

과거.

크리스는 수많은 직업을 가졌다.

용사의 전 동료이기도 했고.

거대 집단을 이끄는 수장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의 수많은 직함 중 이런 게 있었다.

의사.

아니, 정확히 말하자.

그냥 의사가 아니었다.

그의 의술은 지극히 뛰어났다. 신의라 불리며, 성자라고 추앙받기도 했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원래는 그저 평범한 명의 수준이었지만, 멸망의 시대 때 이어진 하나의 기연으로 그는 독보적인 의술을 지니게 되었다.

수많은 의술 명가 중 최고로 꼽히는 곳이자, 연합 7대 명가 중 하나.

또한, 극독 마가의 천적이라 불리던 가문.

'의선(醫仙) 명가'의 마지막 제자이자, 27대 문주.

그게 크리스의 과거 직함 중 하나였다.

* ? ?* ? ?*

- 넌 진짜 미친놈이야.

과거, 용사 일행에게 숱하게 들었던 소리.

용사 일행뿐이 아니다.

크리스를 아는 모든 이들이 그의 재능을 보고 저렇게 이야기하였다. 정말 미친 재능이었으니까.

- 네가 검술이나, 마법을 익혔다면, 세상의 운명은 크게 달라졌을 텐데.

그들은 숱하게 한탄했다.

하지만 크리스는 불행히도 검술, 마법을 익히지 않았다.

얄궂은 우연은 아니었다.

크리스는 사정상 검술과 마법을 익혀서는 절대 '안 되었다'.

그가 검술과 마법을 익혔다면, 크리스가 태어났던 원래 가문이 가만히 있지 않았을 거다. 무조건 척살했을 거다.

덕분에 크리스는 검술과 마법에는 일부러 눈과 귀를 닫고 살았다.

'거지 같은 핏줄.'

크리스는 피식 실소했다.

사실 과거 크리스는 누구보다 귀한 혈통을 타고났다.

온 대륙을 통틀어도 그보다 귀한 혈통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하지만 오히려 저주 같은 혈통이었다. 거지 같게도.

대신, 그는 수많은 잡기를 익혔다.

딱히 의도한 건 아니었다.

뒷골목을 떠돌다 어쩌다 보니 배우게 되었다.

남들이 하는 양을 어깨너머로 지켜보기만 해도 그는 금세 전문가 이상의 솜씨를 발휘했으니까.

의술은 그중 하나였다.

의술은 다른 잡기보다는 깊게 익혔다.

'사람을 치료하는 일은 돈이 되니까.'

나름대로 번듯하게 대우받으며 살 수 있는 직업이었다. 누구의 견제도 받지 않으면서.

만약, 1차 대전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는 아예 의사로 자리 잡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사혈의 마왕이 일으킨 1차 대전은 그의 인생을 끔찍한 격랑으로 밀어 넣었다.

수없는 일을 겪었고, 그러다가 우연한 인연을 만났다.

- …미친. 하, 왜 너 같은 놈을 이제야 만나게 된 거야. 이제 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의선 명가의 단 하나 남은 생존자.

의선 명가는 한때 연합 7대 명가라 불리며, 온 세상 사람의 존경을 한 몸에 받던 가문이었지만, 사혈의 마왕의 살육을 피할 수는 없었다.

26대 문주였던 그녀는 크리스와 만났을 당시 살날이 많이 남지 않은 상태였다.

실제로 그녀는 크리스와 만난 후 딱 일주일 후 죽음을 맞았다.

그녀는 크리스에게 짐 아닌, 짐을 맡겼다.

[…이제 네가 의선 명가의 27대 문주야.]

의선 명가의 비기가 담긴 서책을 건네준 것.

완전품은 아니었다.

원본은 총 45권이었는데, 멸문당할 때 유실되어 그중 크리스가 받은 건 15권밖에 되지 않았다.

3분의 1도 되지 않는 분량.

심지어 비기를 가르쳐줄 스승도 없었다.

일주일간 그녀는 시름시름 앓으며 사경을 헤매느라 거의 어떤 가르침도 내려주지 못했으니까. 모두 독학해야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크리스는 이 악조건 속에서도 대단한 능력을 얻게 되었다.

'의선 명가의 고유 치유력인 의선 기공을 얻는 건 실패했지만.'

대신, 그가 얻은 건 의술적 지식.

크리스는 대륙 최고의 의술 지식을 가지게 되었다.

극독 마가의 독?

아무리 마리사가 소만독이라 불리며 뛰어나다고 해도 결국 물리적인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수준의 독이다.

얼마든지 해독할 수 있었다.

단, 물리적 수준의 독에 한해서라지만, 거의 만독 해독약 수준의 해약을 만든 거라 재료를 마련하는 게 어마어마하게 비싸긴 했다. 그 문제는 돈주머니 루이나를 털어 어렵지 않게 해결했다.

"마, 말도 안 되는…."

크리스는 힐끗 시선을 내렸다.

마리사가 주술적 밧줄에 꽁꽁 묶여 제압되어 있었다.

'…충격이 컸나 보군.'

장기인 독이 먹히지 않으니 결투의 승패야 뻔했다.

물론 극독 마가가 지닌 힘은 독만이 아니다.

대륙 최고 수준의 암기술 또한 지니고 있었지만, 크리스를 상대하기에는 무리였다.

"무, 무슨 수를 쓴 거냐?!"

"음, 별것 없는데?"

크리스는 마리사의 짐을 뒤지며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어차피 물리 독의 원리는 크게 자극성, 마비성, 신경성, 출혈성, 과민성, 부식성, 괴사성 등등을 벗어나지 않잖아. 그러니 각각의 원리 모두에 한꺼번에 길항작용(antagonist)을 하는 해약을 만들면 간단하지."

마리사는 멍한 얼굴을 하였다.

저 미친놈이 지금 뭐라고 하는 건가?

'그런 일이 가능하다고?'

인간의 신체 생리학적으로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실제로 의선 명가의 비기에도 크리스가 쓴 해약의 내용은 없었다.

의선 명가의 비기를 참고해 크리스가 새롭게 창조해낸 해약이었다.

제61화

'물리 독의 종류가 얼마나 많은데, 일일이 해독약을 따로 만들어 가지고 다니기 귀찮잖아. 그래서 만들었지.'

경악으로 벙어리가 된 듯 입을 다문 마리사를 놔두고 크리스는 열심히 짐을 뒤졌고, 이윽고 원하던 물건을 찾았다.

투명한 구슬.

동료에게 자신의 위치를 알려주는 위치 신호 마도구였다.

이렇게 일행과 떨어져 행동할 때 필수적인 마도구.

"…뭘 하려는 거지?"

크리스는 빙글 웃었다.

"이걸로 내가 극독 마가의 마인들에게 잘못된 신호를 보내면 어떻게 될까?"

"!!"

마리사가 으르렁거리며 경고했다.

"허튼수작을 부릴 생각은 마. 조금이라도 잘못 건드리는 순간, 그 마도구는 자폭하게 될 테니."

위치 신호 마도구는 기본적으로 보안이 가장 중요했다.

만약 본인을 제압한 적이 마도구로 동료들에게 잘못된 신호를 보내면, 동료들은 큰 위험에 처하게 될 테니까.

따라서 조금이라도 마력 패턴이 잘못 입력되었을 시 자폭하게 된다.

그 위력은 최소 4성급 파괴 마법 이상.

"넌 시체도 남기지 못하게 될 거야."

크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었다.

코앞에서 그런 강력한 파괴 마법이 터지면, 아무리 크리스라도 무사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안 터지게 하면 되지."

"…뭐?"

마리사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크리스가 마력을 주입한 거다!

"이 미친놈이?!"

마리사는 눈을 질끈 감았다.

마도구가 자폭하면 크리스만 큰일 나는 게 아니다. 옆에 있던 마리사도 같이 휘말린다.

곧 온몸을 덮칠 충격에 이를 악물고 있는데, 이상했다.

조용했다.

"...??"

마리사는 조심히 눈을 떴고, 또다시 눈을 찢어지라 뜰 수밖에 없었다.

크리스가 또 미친 짓을 하고 있었다.

"이런 패턴인 건가? 발신 부분 회로의 보안은 어떻게 되는 거지? 나선형의 뒤쪽이 보안의 핵인가?"

마치 장난감을 가지고 놀듯 이리저리 마도구에 마기를 집어넣어 반응시키고 있었다.

그런데 어떤 거부 반응도 없었다.

"어, 어떻게?"

크리스와 만난 후 도대체 몇 번째일지 모르는 질문.

크리스는 다시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별것 없는데? 마도구가 내 마력을 인식하지 못하게 하면 되지."

"...."

그러니까, 그게 어떻게 된다는 말인가?

코앞에서 눈 뜨고 보고 있는데, 안 보이게 하면 된다는 말과 같았다.

"아, 됐군."

딸깍, 소리와 함께 마도구의 보안이 해제되었다.

그러자 연달아 신호가 울렸다.

녹색 경보.

마리사의 안전을 확인하는 물음이었다.

만약, 시간 안에 답이 돌아오지 않으면 극독 마가의 마인들이 마리사를 구하러 올 것이다.

"극독 마가의 신호 암호 코드 뭐야?"

"…내가 알려줄 것 같으냐?"

마도구의 보안을 해체하는 것으로 끝이 아니다.

보통 이런 마도구로 신호를 보낼 때는 열 개 이상의 패턴을 조합하여 암호로 보낸다.

"뭐, 알려주지 않아도 알아낼 방법이야 있지."

태연한 이야기에 마리사는 긴장하였다.

'설마, 날 고문하려고?'

가장 쉬운 방법이었다.

그녀가 크리스 입장이라도 같은 방법을 택했을 거다.

만약, 대장인 그녀의 마도구로 잘못된 신호를 보내면 극독 마가 탐사대는 지리멸렬하게 될 테니.

'빌어먹을 놈.'

마리사는 꽉 주먹을 움켜쥐었다.

하지만 탓할 수 없었다.

지금 그녀와 크리스는 적이니까.

크리스에게 고문당할 거로 생각하자, 이유를 알 수 없는 울컥함이 치밀어 올라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정말 거지 같았다.

뭐가 거지 같은 건지 그녀도 정확히 모르지만, 최악이었다.

'왜 난 저딴 놈이랑 약혼해서.'

"얼른 해."

"뭘?"

"고문할 거면, 얼른 하라고!"

"…무슨 말 하는 거야."

"뭐?"

"집중해야 하는데, 조용히 좀 해줄래? 아, 됐다."

마리사가 멍하니 눈을 끔뻑거리는데, 크리스가 툭툭 마도구로 신호를 보냈다.

극독 마가 고유의 암호 부호를 조합해서.

"...."

"어떻게 한 건지 또 궁금해? 이건… 음. 그냥, 천재라서 했어. 어차피 알아도 못 따라 할 테니 너무 궁금해하지 마."

정확히 말하면, 마도구를 해킹해 마력 흔적을 찾아 암호를 유추한 거지만, 설명해주기 귀찮아 크리스는 대충 말했다.

크리스는 특유의 재수 없는 표정으로 피식 웃었다.

"그러면 이만 가본다. 아, 혹시나 말하지만, 주박을 풀 생각은 하지 마. 네 수준으로는 아무리 용을 써도 절대 못 풀 테니."

그러고는 뒤도 안 보고 사라졌다.

덩그러니 묶여 혼자 남게 된 마리사는 멍한 얼굴을 하였다.

한참이나 그가 사라진 흔적을 보다가 한마디 말을 하였다.

"…이 나쁜 놈."

* ? ?* ? ?*

크리스는 빠르게 움직였다.

'시간을 너무 썼어.'

하지만 소득이 없었던 건 아니다.

일단, 마리사에게 빚을 지게 했다.

지금이야 그를 욕하겠지만, 나중에 모든 일이 끝나면, 크리스 덕분에 자신이 목숨을 건졌음을 알게 되리라.

'앞으로 극독 마가와는 얽힐 일이 많으니. 이걸 빌미로 호구로 만들어야지.'

그뿐이 아니다.

위치 신호 마도구.

마리사는 극독 마가 탐사대의 대장이다.

이 마도구만 있으면 거짓 명령을 내릴 수 있었다.

'일단 절벽을 기어 내려가 탐사하라고 명령하고. 다음은 늪지대를 파헤쳐 바닥을 뒤지라고 해야지. 방해 안 되게 끝없이 헛고생시켜 주겠어.'

크리스는 사악하게 웃었다.

그뿐이 아니다.

'계속 고생시키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써먹어야지.'

크리스는 자신의 '작전'의 대미에 극독 마가의 전력을 이용하기로 하였다.

극독 마가의 탐사대는 영문도 모른 채 크리스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게 될 거다.

'이제 유물을 빼돌려야 해.'

크리스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이번에 발견되는 유물은 사실 위력 자체가 대단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활용하기에 따라 어마어마한 기적을 일으키는 게 가능했다.

랑함 후작은 2년이 넘는 연구 끝에 유물의 활용 방안을 알아냈고, 암흑 마가에 끔찍한 참사가 일어났다.

그 사건으로 노가주 노르디언은 죽음을 맞게 된다.

'절대 그렇게 둘 수 없어.'

노가주 노르디언은 앞으로 진행될 미래를 대비해 반드시 살아 있어야 했다.

그리고 크리스 본인을 위해서도 유물을 반드시 얻어야 했다.

'난 이 유물의 힘을 제대로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니까. 문제는 유물이 어디에 있냐인데.'

유물이 출현하는 경로는 두 가지다.

첫째는 이전부터 숨겨져 있던 경우.

둘째는 새롭게 하늘에서 떨어지는 경우다.

'하늘에서 떨어진다'는 표현은 비유가 아니다.

게헨나나 천계에서 툭 하고 지상에 던지는 거다. 애초에 유물은 악마나 성좌가 자신의 힘을 깃들게 해 만든 물건이니까.

마치 지상의 미물들이 자신의 유물을 두고 다투는 걸 보고 즐기기라도 하듯 악마와 성좌들은 주기적으로 유물을 세상에 출현시켰다.

'대략적으로 어디 근처인지 듣기는 들었는데.'

산맥의 서북쪽.

하지만 이것도 광대한 영역이었다.

혼자 뒤져서는 몇 날 며칠이 걸려도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다 방법이 있지.'

일단, 산맥의 서북쪽 방면으로 향했다.

중간중간 마리사의 위치 신호 마도구로 극독 마가 탐사대에 이상한 명령을 내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니, 마리사 님은 왜 자꾸 이런 곳을 탐사하라고 하는 거지?"

"마리사 님의 명령인데 다 뜻이 있지 않으시겠나?"

"하긴. 마리사 님이니까."

극독 마가 탐사대는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마리사가 보내는 신호 명령에 따랐다.

그리고 크리스는 서북쪽에 도착한 후, 뜻밖의 행동을 하였다.

바닥을 살피고, 수풀의 풀이 꺾인 흔적들을 살폈다.

유물을 찾으려는 행동이 아니었다.

"빙고."

크리스는 지그시 미소를 지었다.

미세한.

사람이 지나간 흔적이었다.

전문적인 추적대가 아니면 알아보지 못할 흔적이지만, 확실했다.

'사람이 살 일 없는 마경의 깊은 곳인데, 이런 흔적이 남아 있을 이유야 뻔하지.'

크리스는 흔적을 따라 조심히 발걸음을 옮겼다.

검술 명가 그림자들의 비기를 사용하자, 그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졌다.

그렇게 얼마나 이동한 후일까?

놀라운 광경을 마주하게 되었다.

"암흑 마가 놈들은 아직인가?"

"네, 아직입니다."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지 모르겠군. 굼벵이 같은 놈들. 어서 암흑 마가 놈들이 이 유물을 가져가야 하는데."

가면을 쓴 두 명의 마인이 있었다!

체형을 봤을 때 한 명은 여인. 한 명은 남자로 보였는데, 어디 쪽의 마인인지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독 기운. 극독 마가의 놈들.'

그것도 보통 수준의 마인이 아니었다.

남자는 4성.

여인은 무려 5성으로 보였다.

다만, 남자가 신분이 더 높은지 여인에게 하대하였다.

"지겹군. 이 몸이 이딴 두더지 놀이나 하고 있어야 한다니. 젠장. 마리사, 그 빌어먹을 년 때문에."

많은 것을 알 수 있게 해주는 내뱉음이었다.

'남자는 극독 마가의 직계야. 아마… 공자 중 한 명이겠군.'

앞에 5성 여인은 남자를 따르는 수하 같았다.

그런데 극독 마가의 고위 인물들이 왜 이런 곳에 있는 걸까?

크리스는 속으로 답을 말하였다.

'랑함 후작과 손을 잡은 놈들이겠지.'

그렇다.

이 음모는 랑함 후작 단독으로 꾸민 게 아니었다.

극독 마가 내에서도 협력자가 있었다.

아마, 후계 다툼의 경쟁자인 마리사를 몰락시키기 위해 손을 잡았으리라.

그 짐작을 확인시켜 주듯 남자가 시커먼 음성으로 말하였다.

"그래도 어쩔 수 없지. 이번 일만 끝나면, 마리사 그 재수 없는 년의 얼굴을 볼 일은 없을 테니, 참아야겠지."

"...."

"계획은 잘 숙지하고 있겠지? 암흑 마가의 쥬피엔 공녀가 유물을 가져가면 함정으로 유인해 몰살시키는 거다. 마리사의 짓이란 증거는 반드시 남기고."

랑함 후작이 짠 계획의 전모였다.

극독 마가의 비열한 수작에 암흑 마가의 탐사대가 몰살당하게 한다.

희생자 중에는 배런가의 핏줄인 쥬피엔과 크리스도 포함되어 있었으니, 가볍게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

랑함 후작은 탐사대의 희생을 빌미로 자신이 원하는 대가를 얻어낸다.

이번 탐사 때 발견되는 유물, '성좌의 휘장'은 물론, 지난번에 극독 마가가 발견한 유물, '황혼의 에뮬릿'까지 대가로 요구해 받아낸 거다.

'하나도 줄 수 없지.'

저 눈앞에 있는 성좌의 휘장 먼저 빼돌려야 했다.

마침, 극독 마가의 가면 남자가 말했다.

"그나저나 이 유물은 어떤 유물인지 모르겠군. 성유물 계통인 것 같은데. 봉인을 먼저 열어볼 수도 없고."

유물이 최초로 발견될 때는 봉인의 형태로 숨겨져 있다.

"내가 가질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무엇이든 상관없겠지. 난 마리사, 그년만 처리하면 되니까. 너는 슬슬 가서 함정을 파놓도록."

"존명."

5성 여인은 훌쩍 사라졌다.

가면 남자 홀로 남게 되자 크리스는 몸을 낮추었다.

'기회야.'

솔직히 5성 여인이 계속 있다면 크리스는 어떤 수작도 부리지 못할 거다.

하지만 남자는 달랐다.

남자의 경지는 4성.

그리고… 크리스의 경지도 4성이었다. '성휘'의 경지로서.

'정면으로 싸워도 내가 이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