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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혼신의 힘을 다한 망나니 연기는 엄청난 파급력으로 성 안을 휩쓸었다.

하인들을 우르르 이끌고 복도를 거닐고 다니니 눈에 안 띌 수가 없던 것이다. 와중에 내 방에서 있던 일이 퍼지니 일부러 눈 딱 감고 유리병 다 부수는 연기를 한 보람이 있었다.

특히 소문을 들은 하인들끼리 열 띈 대화를 나누느라 발소리를 못 듣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들려오는 외침들이 내 평판을 짐작케 해줬다.

그래도 마냥 나쁜 평가만 돌아다니는 건 아니었다.

"공자님이 미치셨습니다! 들으셨습니까?!"

"듣다마다. 종을 들고 짤랑일 때마다 웃어야 한다며? 세상에."

"그게 다가 아니야. 무시무시한 건 아예 발랑 드러누워서 포복절도할 때까지 종을 계속 흔드신대. 어디 가지도 않으시고 멀뚱히 내려다 보시면서 짤랑거리기만 하신단 거야...!"

"맙소사!!!"

사람들 사이선 유리병 깨부순 것보다 내가 일으킨 웃음 혁명에 관한 이야기가 더 많이 나돌았다. 확실히 중세인들 입장에선 세계관이 무너지는 듯한 엄청난 충격이었을 테지.

하지만 나는 발전된 문명에서 온 현대인이다. 내게는 의무가 없지만, 저들의 삶을 보다 낫게 해주고 싶은 선의가 있었다. 이제 나는 혹독한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을 위한 웃음 전도사였다.

소리가 들린 쪽은 꺾이는 복도 너머.

그리로 모습을 드러내자 방금 전까지 심각하게 떠들던 사람들의 표정이 시시각각 굳어간다. 유일한 예외는 날 등지고 있어 바로 보지 못한 하인 하나가 전부였다. 그는 한숨을 토해내며 옛 추억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공자님께서 그러시는 이유야 짐작하지만..."

"..."

"뭐야, 다들 왜 그래?"

"고, 공자님."

"뭐?"

나는 품 속에 손을 집어넣으며 비장한 각오를 굳혔다. 세상에 웃음을 가져다줄, 회색빛 세상에 색채를 가져올 웃음 전도사 행차시다.

짤랑짤랑.

잠시 후, 나는 배꼽을 부둥켜안고 땅바닥을 굴러다니며 하하호호 웃는 하인들을 뒤로 한 채 내 방으로 향했다. 참 보람찬 일이다. 요즘 일과가 이렇게 뿌듯할 수 있나 싶다.

그래도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도 있어야 한다고, 하인들도 즐거운 시간에서 벗어나 현실로 돌아갈 차례였다. 섭섭하고 아쉽지만 우리 충성심 강한 하인들과 잠깐동안 이별할 순간이 왔다.

나는 방문 앞에서 우뚝 멈춰선 뒤 하인들을 둘러봤다. 확실히 요즘 자주 웃어서 그런지 다들 입꼬리가 올라가있다. 내가 일으킨 작지만 커다란 변화. 나는 벅차오르는 감동을 느끼며 내심 눈물을 훔쳤다.

"요 근래 다들 웃음이 부쩍 늘었구나."

"그렇습니다, 공자님!"

"이게 다 공자님 덕분입니다!"

왠지 모르게 이빨을 악문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핏대 선 목을 봐라. 저들이 기운을 되찾은 증거가 여기에 있었다. 웃음 치료의 선한 영향력에 나도 함께 웃을 뻔했다.

"너희의 충성심이 이리도 강하거늘 의심했다니. 나 자신이 한심하다. 내 너희에게 너무 매몰차게 굴었어."

"공자님..."

"아닙니다, 공자님!"

내 망나니 연기에 어울려 주느라 무척 고달팠을 텐데 다들 웃어줘서 다행이다.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나는 이들을 위해 충분한 기회를 내어주기로 다짐했다.

"하여 기회를 주겠다. 내 수도원행에 함께 할 하인들을 모집한다."

""....""

"심사숙고할 일이니 당장 답하지 않아도 좋다. 다들 할 일들 있을 테니 돌아가거라. 힘들면 다시 찾아오고. 내 꼭 다시 웃게 해주마."

"아닙니다! 감사했습니다, 공자님!"

웃음으로 힘을 얻은 하인들은 말그대로 쏜살같이 흩어졌다. 수십 명은 족히 되던 무리가 텅텅 비어버릴 정도로 말이다. 내 방문이 멋대로 열린 건 이 때였다.

에드위나가 휑하게 비어버린 복도를 몇 번 둘러보더니 무뚝뚝한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공자님. 정말 미치신 건 아니리라 믿습니다."

충식한 시녀답게 모시는 주군을 띄우는 방법을 잘 안다. 하지만 이런 무지성 칭찬은 듣기 좋아도 너무 쑥쓰러웠다. 나는 손사래치며 에드위나의 올려치기를 싹둑 컷했다.

"너무 띄워주지 말거라. 내 부족함은 내가 잘 안다. 망나니짓을 한다 했어도 다른 이가 보기엔 어딘가 엉성하고 어쩐지 상냥하게 느껴졌을 거다. 선천적으로 나와는 맞지 않는 역할이었어."

"..."

에드위나는 말하기보다 입을 다물고 시선을 살짝 돌리길 택했다. 순간 아차싶었다. 부하의 아첨을 너무 매몰차게 컷했나 싶어서 말이다. 그래, 에드위나가 느끼기에 진짜 같았으면 됐다.

나는 방 안으로 들어가 상의를 훌훌 벗어 던진 뒤에야 비로소 만족할 수 있었다.

"어쨌든 덕분에 시간을 많이도 벌었으니 곧 아버지께서 날 부르시겠지."

"안 그래도 공자님께서 오시기 전에 사람이 한 명 왔었습니다. 시간이 나는 대로 집무실로 오라는 호출이더군요."

"오."

벗어 던진 옷을 다시 입을 차례다. 귀족은 내 집이라고 팬티 차림으로 다닐 수 없는 고독한 존재. 나는 다시 귀족으로서의 체면을 차려야만 했다.

"근데 에드위나."

"예, 공자님."

"왜 손으로 눈을 가리면서 손가락은 벌려놓는 거야?"

"...손에 땀이 찰 수 있어서입니다."

뭐, 귀족이라고 옷차림 좀 똑바로 하라 잔소리 안할 거면 됐다. 나는 옷매무새를 정리한 뒤 자신감있는 태도로 방문 앞에 섰다.

"가자, 에드위나. 아버지를 뵈러 갈 것이다."

***

누구나 어리숙하고 모자란 연기를 보며 쉽게 짐작했겠지만, 내 망나니 연기는 단순히 의절당할 명분을 꾀하려는 게 아니었다.

망나니짓으로 주변의 이목을 끈 건 애설튼 공왕에게 시간을 벌어주기 위한 행동이었다. 유바스가 꾸민 음모를 완전히 어그러트리고 그 주도권을 탈취하기 위한 일환으로써 말이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갈 무렵, 애설튼 공왕의 집무실은 주홍빛 노을에 적셔져 있었다. 그것만으로 인상이 확 바뀌었다. 물론 애설튼 공왕의 뒤에 시립해있는 인물 때문도 있을 것이다.

물에 젖은 미역처럼 곱슬거리며 이마를 가린 앞머리에 삐죽이는 수염을 지닌 음침한 인상의 사내였다. 어디 은둔하고 살아갈 법한 모습에서 유일하게 확 들어온 부분은 바로 눈빛.

흔들리는 촛불처럼 위태롭게 이글거리는 열기를 감춘 눈동자가 날 바라보고 있었다. 나도 그를 훑어봤듯이 말이다. 애설튼 공왕은 우리 둘의 시선 교환을 눈치채고 사이를 중재해줬다.

"이번 수색을 지휘한 첩보관 오버트다. 네 의견을 굉장히 긍정적으로 평가해준 가신이기도 하지."

열두 살배기 아이의 의견을 곧이곧대로 들은 이유가 달리 있던 모양이다. 오버트는 아직 어린 나이인 내게 목례함으로써 넘치고도 남을 예의를 보여줬다.

"...반갑습니다. 공자님."

"감사합니다, 오버트 경. 꼬마의 억측을 귀담아 들어주신 관대함에 기쁨을 감추기 힘들군요."

"...아뇨. 그렇지 않습니다. ...공자님의 염려는 저도 심중에나마 품고 있던 가능성. 다만 구체적인 방법을 알기 어려워 추측으로만 남겼을 뿐입니다. ...설마 그렇게까지 악독한 술수를 쓸 줄도 몰랐습니다."

서로 공치사는 이 정도면 됐다. 오버트는 애설튼 공왕을 아무 말 없이 바라봤다. 오버트는 공왕이 고개를 끄덕인 뒤에야 입을 열어 자세한 정황을 말해줬다.

"...공자님이 시간을 끌어주신 덕분에 하인들의 숙소를 비밀리에 점검할 수 있었습니다."

오버트는 품 속에서 꽉꽉 들어찬 돈주머니를 꺼내들었다. 바느질 자국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주머니였다.

"덕분에 확보한, 출처가 의심스러운 금화들입니다."

우리 하인들을 위한 감옥행 티켓이 죄다 매진되고 만 것이다.



9. 금화는 진실을 싣고



누구나 내 조잡한 망나니 연기를 보고 금방 짐작했을 것이다.

무언가 달리 꿍꿍이가 있노라고 말이다. 실제로 사람들의 짐작대로였다. 나는 단순히 가문에서 쫓겨날 이유를 만들려고 망나니 연기를 한 게 아니었다.

그 시발점은 내가 망나니 연기를 시작하기 전, 이 몸의 아버지 애설튼 공왕과 독대했을 때의 일이다. 애설튼 공왕이 유바스가 꾸민 음모의 진상을 듣고 충격에 빠졌을 즈음이었다.

나는 심각한 걱정에 빠진 애설튼 공왕에게 형세를 뒤엎을 방법을 하나 헌책했다. 유바스가 꾸민 계획을 역이용해 파혼을 주도한 뒤 그들을 대신해 우리가 교회의 비호를 얻자.

이것은 애설튼 공왕과 나, 우리 둘 모두 윈윈하는 전략이었다. 내가 교회에 몸을 담아 교황의 측근으로 거듭나면 애설튼 공왕은 교회와 지역 귀족 사회 간의 중재자 역할을 맡게 된다.

어차피 삼남이라 분할상속 받아도 떨거지 땅이나 받을 거, 그냥 편하게 성직자로 가서 적당히 부패한 삶을 사는 쪽이 더 낫다. 귀족도 돈이 있어야 귀족인 법이다.

걱정이 있다면 교회가 받아들이냐 마느냐 정도지만 유바스와의 분열을 생각하면 가능성이 높았다.

이 근방에서 영향력을 확대하기 원하는 교황도 내가 지닌 정치적 가치, 예컨데 지역 귀족과의 혈연임에도 성직에 몸을 담으려 한다는 특징을 눈여겨볼 터. 유바스를 대신할 세력을 찾는 교회에게도 무척 좋은 이야기였다.

당연히 모두가 이 계획을 좋아할 순 없었다. 대놓고 싫어할 놈이 이미 있었으니까. 유바스. 유바스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내 축출과 성직행을 저지하려 들 것이다.

그리고 짐작컨데... 유바스의 '저지'란 게 뭐 외교적 압박이나 무력시위 같이 신사적이고 여린 수단일 리 없었다. 나는 그 방법이 뭔지 어렴풋이, 아니. 확실히 짐작할 수 있었다.

일찍이 음모를 꾸밀 땐 항상 플랜 B를 준비해야 한다 말한 바 있다. 그럼 탁란된 아이로 상속권을 주장하려는 계획에서 플랜 B가 뭐겠는가. 나는 애설튼 공왕에게 내가 깨달은 사실을 담담히 전달했다.

"하지만 아버지, 제가 말씀드린 계획엔 치명적인 변수가 하나 존재합니다."

"변수? 변수라고?"

애설튼 공왕은 여전히 혼란스러운 기색이었다. 확실히 이런 부분에서 부족한 게 보인다. 애설튼 공왕은 가족에게 자상하고 자긍심 갖춘 귀족답게 중세 상위 1% 혐성들이 얼마나 추잡하게 굴 수 있는지 알지 못했다.

나는 탄식 섞인 숨소리를 내뱉는 공왕을 바라보며 나름의 추측을 꺼내들었다.

"교회의 비호를 얻어 세력을 확장하던 유바스가 교회의 힘을 모를 리 없을 터. 몰랐더라도 지금쯤이면 알았을 겁니다. 그 힘을 다른 자가 쥐려 한다면 어찌 나오겠습니까. 하물며 찬탈의 대계가 어그러지기까지 한다면?"

"...전쟁을 일으킨단 소리냐?"

무력시위로 혼담을 강제한 유바스이니 이번에도 군대를 일으킬 것이다. 애설튼 공왕은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쥐어짜듯 그리 말했다. 생각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생각하기 싫다는 느낌이었다.

어쩌면 애설튼 공왕은 이미 답을 알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너무 충격적인 답안이라 무의식적으로 외면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계책을 헌책한 신하로서 내가 짐작한 바를 알릴 의무가 있었다.

"제가 유바스를 모욕하고 내 자식이 아니라며 부인했지만 혼인이 이뤄진 뒤에 나온 아이입니다. 거기에 열두 살이면 통정했을 수도 있는 나이. 우기기엔 충분하지요. 그들의 입장에서 저는 쓸모를 다했습니다."

"..."

"이제 와서 망나니짓을 해봤자입니다. 가문에서 축출하자는 의견이 주를 이루기 전에 논란 있을 지언정 상속권만큼은 보전해야 한다. 혹은 교회에 투신해 유바스를 대신할 세력을 키우도록 놔두어선 안 된다."

여기까지 말하니 애설튼 공왕도 더 이상 동요를 감추지 못했다. 애설튼 공왕은 창백하게 질린 안색으로 이쪽을 바라보며 쇳소리 섞인 신음을 흘려댔다.

"나르바."

"암살에 대비해야 합니다, 아버지."

애설튼 공왕의 앓는 모습이 안타깝지만 사실은 말해야 했다. 유바스는 자객을 준비할 것이다.

첫 번째 목표는 내가 될 테고.

설마 암살까지... 라고 생각한다면 이미 걸어다니는 시체다. 유바스가 꾸민 음모가 실행에서 엉성한 점이 몇 군데 보이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계획 자체는 굉장히 복잡하고 치밀한 편이었다.

굳이 삼남을 노린 부분부터 그랬다.

장남이 무탈하게 장성해 후계구도가 안정된 곳에선 삼남까지 신경쓰는 경우가 드물다. 혹시 모를 예비로 차남을 교육할 순 있어도 삼남까지 그러진 않았다. 후계자한테 경쟁자 하나 만들어주는 꼴이니 말이다.

이런 이유로 삼남은 비교적 느슨하게 관리받는다. 위로 줄줄이 죽지 않는 이상 상속받을 일도 적으니 당연한 일이다. 조금 격에 안 맞는 결혼이 권장될 때도 있다. 외척을 끌어들여 후계자의 자리를 노리는 걸 막기 위해서다.

그런데 삼남이 물려받게 되면 외척 입장에선 로또 터지는 거다.

이 새끼가 뭐 배운 게 있어야 왕 노릇을 하지, 얼 타가지고 왕좌에 앉은 채로 신하들 바라보더니 그래서 이제 뭐함? 이렇게 묻는다 생각해봐라. 외척들이 아이고 우리 사위 힘든 거 우리가 대신해줄게~ 하면서 다 해먹는 거다.

그리고 우리 중세 판타지 전략 인생 시뮬레이션 게임, 판타지 모나크에서 로또 터지기만 기다리는 건 하수 중의 하수. 말 그대로 하수도나 할 법한 짓이었다.

진정한 일류는 기회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보통 그 기회란 건 칼로 사람을 찌를 때 생겨나기 마련이었다. 내가 염려하는 게 바로 이 부분이다.

유바스의 치밀함을 고려하면 이미 내통하고 있을 세작들이 한둘이 아닐 것이다. 어쩌면 교회와 동맹이었을 적부터 미리 쥐구멍을 파놓았을지도 모른다.

약간 바퀴벌레랑 비슷하다.

어쩌다 새벽에 그림자 속에서 움직이는 검은 물체를 봤다. 때려잡겠다고 손에 집히는 대로 들고 나왔지만 이미 사라진 뒤다. 있는 건 분명한데 어떻게 찾아내야 할지 막막한 상황.

딱 지금이 그랬다.

이럴 때 필요한 게 발상의 전환이다. 때려잡으려 하니까 못 잡는 거다. 빈대를 잡으려고 초가삼간 다 불태운다는 말은, 반대로 초가삼간 다 불태우면 빈대는 잡는다는 말이기도 했다.

나는 이 말을 내세우며 애설튼 공왕을 설득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만 했다.

"하인들을 의심하자는 말이냐. 이 곳에서 충직하게 일해온 자들을."

"충직한 자는 믿음을 요구받을 때 아무 말 없이 드러냅니다. 아버지, 유바스의 암살은 생각보다 훨씬 현실적입니다. 당장 유바스가 절 죽인다 치면 우리 가문도 의심받을 겁니다."

"의심받는다고? 우리가?"

"혼담을 내켜하지 않는 티를 계속 내던 와중에 아들이 망나니짓을 하니 기회를 잡고 주살했다. 그런 뜬 소문이 퍼질 경우 사위의 무고한 죽음에 대해 좌시하지 않겠다며 유바스의 개입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이게 내가 추측한 유바스의 플랜 B다.

가문에서 내가 축출당해 수도원으로 쫓겨나더라도, 도중에 내가 죽으면 자연스럽게 우리 가문 쪽에도 의심하는 시선이 쏠리기 마련이었다. 이쯤 되면 진흙탕 싸움이다. 사람들은 진실이 아니라 여론을 따라 움직일 것이다.

그리고 진흙탕 싸움에서 더 유리한 쪽은 주먹이 더 강한 놈이었다.

하지만 주먹이 더 강하다고 항상 이기는 건 아니다.

"그 전에 수를 써야 합니다."

때로는, 더 지저분한 쪽이 이긴다.

***

이것이 산모의 뺨을 후려치자마자 애설튼 공왕에게 불려간 독대의 뒷부분.

대충 내 망나니 짓이 어째서 필요했는지에 대한 배경이다. 어쨌든 산모와 아기를 둘러싸고 불투명한 진실이 거론되는 와중이었다. 그런데 출처를 알 수 없는 의심쩍은 금화가 하인들 숙소에서 발견된 것이다.

얼핏 보면 이어지지 않는 별개의 사건이지만 상상력 풍부한 사람들은 벌써 뇌내 그래픽카드를 붕붕 돌리는 중이었다. 항상 내 곁을 보좌하는 당당한 느낌의 시녀, 땋은 머리의 에드위나도 마찬가지였다.

에드위나는 복도에서 굴비처럼 엮여 터덜터덜 걸어가는 하인들 행렬을 구경하며 미간을 살짝 좁혔다. 삼엄한 눈빛으로 창대를 움켜쥔 병사들이 아니었다면 진즉에 다가가 꼬치꼬치 캐물었을 기세로 말이다.

"대체 누가 금화를 받은 건지 모르겠습니다. 저기 머리가 살짝 벗겨진 자가 연금술사에게 발모약을 주문하고자 했던 것일까요? 아니면 남편을 두고 좋아하는 사내가 생겨 이것저것 챙겨준다는 저 아주머니가?"

"에드위나, 그렇게 궁금하느냐?"

에드위나의 호기심 가득한 모습이 기특해서 물어봤다. 그러자 에드위나가 이쪽을 향해 무뚝뚝한 표정으로 고개를 홱 돌리더니 계속 끄덕여댔다.

"예. 정말 궁금합니다."

우리 에드위나가 표정이 저래서 문제지, 알고 보면 정말 솔직한 시녀다. 괜히 배배 꼬면서 못 알아먹으면 심통 부리는 놈들보다야 훨씬 낫다. 나는 에드위나의 호기심을 높이 사서 기회를 주기로 했다.

"그럼 조금 있다 첩보관 오버트 경과 함께 저들을 심문할 예정인데 함께 하겠느냐?"

즉시 문답을 주고받을 수 있는 최고의 자리를 권해줬건만 반응이 석연찮다. 에드위나는 정말 뭐라 말하기 어려운 눈빛으로 날 바라보다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아뇨."

"에드위나, 의외로 판을 깔아주면 잘 못하는 성격이로구나."

"...."

뭐, 본인이 내키지 않는다는데 억지로 강권할 생각은 없다. 나는 중세 호러 어트랙션으로 향하는 하인들의 뒷모습을 눈으로 배웅한 뒤 검지로 복도 한 구석을 가리켰다.

은빛 사슬갑옷에 두 눈을 부릅뜬 병사들이 칼자루 위로 손을 얹어놓은 덕분에 몹시 안전한 곳이었다.

"그럼 에드위나, 잠시 저기에 머물고 있거라. 하인들을 심문하고 난 뒤 보자꾸나."

"예? ...저기가 설마 병사들이 칼자루 위에 손 얹어놓은, 저 쪽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나는 우리 에드위나를 믿는데 말야."

이건 진심이다. 에드위나는 우리 가문을 배신할 감정적 부채나 동기가 전혀 없다. 하물며 에드위나가 모시는 주군은 아랫사람들을 지극히 아끼고 보살피는 나다.

나는 에드위나가 결코 배신하지 않으리라 믿고 있었다. 비록 초가삼간 다 불태우자 말했지만 어찌 에드위나가 초가삼간 정도겠는가. 충복인 에드위나를 의심해야 한다는 사실이 내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렇지만 첩보관이신 오버트 경의 판단이 그러하니 어쩔 수가 있나. 저 독방에 보내주신다는 거 복도로 끝내줬으니 에드위나도 내 마음을 이해해줄 거다.

"우리 첩보관님 생각이 나랑 다르시대. 지금 모든 하인들을 싹 다 점검하신다니까 얌전히 곁에 머물고 있거라. 변소 가고 싶으면 병사들에게 따로 말하면 되고, 또..."

"가겠습니다, 감옥!"

누구보다 에드위나의 무고를 믿었던 나로선 정말 황당무계한 발언이었다. 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에드위나를 빤히 쳐다봤다.

"네가 감옥을 왜 가?"

때로 믿음은 사람을 감화시킨다. 에드위나의 무고를 믿는 내 진심도 마찬가지였다. 에드위나는 살짝 눈물이 글썽이는 눈동자로 날 바라보다 벅차오르는 울음을 감추기 위해 아랫입술을 오므렸다.

"곤자니믈 겨테서 모히고 시쓰니다아..."

"나 참. 그런 건 따로 안 말해도 된다. 우리 사이에 무슨 그런 말이 필요하다고."

역시 사람이 남는 재산이다. 에드위나의 충직한 모습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나는 화살보다 날카로운 시선으로 이쪽을, 정확히는 에드위나를 노려보는 병사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들었지? 나중에 첩보관께 말씀드려라."

이제 가도 좋다는 말을 좀 돌려말하니 거절하는 답변이 돌아왔다. 병사 서넛이 일제히 면목 없다는 듯 고개를 떨구며 주먹으로 가슴을 쳤다.

"공자님, 저희의 임무는 공자님을 무사히 호위하는 것입니다. 오버트 경과 합류하실 때까지 저희는 공자님 곁을 떠날 수 없습니다. ...특히 의심받는 대상이 함께 있을 경우 말입니다."

"너희의 입장도 난처해지겠구나. 좋다. 날 호위하거라."

이제 보니 그냥 돌려보냈다간 줄창 내리갈굼 당할 팔자들이었다. 나는 그들의 입장을 헤아려 호위하는 걸 허락해줬다. 그러고서야 감옥으로 발을 옮기려는데, 어쩐지 에드위나가 새하얗게 질린 상태였다.

"공, 공자님."

"왜 그러느냐?"

"...만일 아까, 제가 저 병사들 곁으로 갔다면."

뭐 큰 일 생긴 줄 알았는데 난 또 뭐라고. 에드위나는 걱정이 너무 많아서 탈이다. 나는 에드위나가 안심할 수 있도록 입꼬리를 살짝 올려 웃는 상을 지어보였다.

"안심하거라. 몰라도 된다. 이제 너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

그 즈음, 내 곁으로 모여든 병사들은 이미 칼자루 위에서 손을 내려놓은지 한참이었다. 나는 우락부락한 병사들과 하얗게 질린 채 자꾸 시선을 땅으로 내리꽂는 에드위나를 쭉 훑어본 뒤 말했다.

"가자. 오버트 경이 우릴 기다리실 거다."

***

중세 호러 어트랙션인 감옥에는 수많은 태그들이 붙어있다. 그 중에는 사람들이 쉽게 간과하는 부분까지 있었다.

심지어 중세틱 판타지 전략 게임, 판타지 모나크를 수천 시간동안 즐긴 나조차 까먹을 만큼 말이다. #고어보다 훨씬 중요한 태그. 그건 #비위생 #더러움이었다.

나는 감옥에 들어서자마자 진동하는 찌린내와 차마 말하기 힘든 꾸릉내에 인상을 팍 찡그릴 수밖에 없었다. 현지 중세인들조차 견디기 힘든지 인상을 찡그릴 정도다.

나는 옷소매로 코와 입을 가린 채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어댔다. 그야말로 천외천. 내가 깔끔한 중세틱 이세계 귀족 계층이라 정말로 다행이다. 여기서 더 머물다간 냄새가 밸 것 같아 황급히 현지 가이드를 찾았다.

다행히 내가 온다는 소식이 이미 퍼진 건지, 오버트 경이 준비해둔 간수가 끌어올린 셔츠자락으로 입가를 가리고서 다가오는 중이었다.

"공자님을 뵙습니다. 마침 자신이 뇌물을 받았다 실토한 자가 나온 참입니다."

"그래?"

"오버트 경이 거기 계십니다. 그리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간수는 최대한 정성스럽게 이 곳이 뭐하는 곳인지 설명해줬다. 나는 간수가 지닌 프로의식을 존중해 그 설명을 고스란히 들어줬지만...

범죄자 인권 챙겨준다는 현대 감옥도 시설마다 천차만별이다. 하물며 중세 비슷한 이세계인 이 곳의 감옥은 어떻겠는가. 나는 창살 너머로 바글바글 우겨넣어진 사람들을 보며 혀를 찼다.

"이번 일을 빨리 끝낼 이유가 생겼군. 간수, 그대의 이야기는 몹시 즐거웠다. 다만 좀 더 발걸음을 재촉해야겠구나. 무고한 자들이 있을 지도 모르니 말이다."

"과연...! 알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오버트 경에게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칭찬 한 마디가 몹시 고픈 직종이었나 보다. 간수는 눈에 띄게 밝아진 얼굴로 어깨를 으쓱이며 차디찬 감옥 복도를 성큼성큼 지나갔다. 이윽고 그 끝에 보인 건 창살이 아니라 통짜 쇠로 만든 듯한 육중한 철문이었다.

간수는 핏줄이 울긋불긋 솟아난 팔뚝으로 철문을 열어젖히며 씨익 웃어보였다.

"오버트 경, 공자님이십니다!"

무슨 방인가 했더니 고문실이었나 보다. 안쪽으로 들어서자마자 불쾌한 냄새가 가득했다. 피비린내 베이스에 찌린내와 암내를 잔뜩 뒤섞은 듯 질척이는 공기였다.

비위 약한 사람은 바로 토악질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버트 경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날 바라보며 절도 있게 목례해왔다.

"심약한 자라 금방 실토했습니다."

"저, 접니다. 제가 그랬습니다...! 그러니 제발!!!"

의자에 묶인 사내는 머리가 살짝 벗겨진 자. 에드위나가 말하기로 연금술사에게 발모약을 사고 싶어한다던 하인이었다. 그가 눈물 콧물 줄줄 흘리며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다.

과연 심약하다는 말대로인가 보다. 아직 손톱을 으깬다거나 손톱 밑에 바늘을 꽂는다던가, 아니면 아가미 호흡할 때까지 물에 담가준다던가 따위의 고문을 한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딱 시작해볼까~ 하던 참에 자기가 죄를 저질렀노라 자백한 셈이다. 나는 이 불쌍한 사내를 바라보며 혀를 찼다.

"네 결백을 내가 아는데 감히 거짓으로 자백하는 게냐?"

"?"

발모약 구매예정자의 얼굴에서 공포와 체념이 사라진다. 대신 황당함과 의문만이 가득 차올랐다. 그건 곁에 머물던 에드위나도 마찬가지였나 보다.

"공자님, 저 자가 무고하다는 걸 어찌 아신 겁니까?"

"그야."

나는 첩보관 오버트 경과 시선을 마주쳤다. 오버트 경은 말해도 된다며 고개를 끄덕여줬고 말이다. 그제서야 잠깐 머뭇거리던 내 입이 뒷말을 이었다.

"금화를 우리가 저들 짐꾸러미 속에 넣은 거니 알 수밖에 없지."

하인들 중에 간첩이 숨어있다. 그걸 일일이 파악하다간 시기를 놓치고 만다.

-특단의 대책이란, 바로 이럴 때 쓰는 것이다.



10. 친구한테 배웠어요



사람들이 어떤 사건을 볼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게 뭘까.

누군가는 감동적인 교훈이라 말하고 누군가는 진실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회사에서 일할 적 마주친 마케팅 부서 소속 팀원은 이렇게 말했다.

'스토리만 가지곤 안 돼. 각각의 사건과 요소를 이어주는 스토리텔링, 극적인 연출에 담긴 은은한 어필이 고객들의 니이즈를 자극할 수 있다고.'

그는 연봉 협상 때 경영진 상대로 어필하는데 실패했지만, 적어도 내게는 아주 깊은 인상을 남겨줬다. 아직도 그가 남긴 말이 선명히 떠오른다. 대학교 강의 때 대충 흘려들은 말을 비로소 체득한 셈이다.

사건이 제각각 따로 떨어져 있으면 단순한 나열에 불과하다. 별개의 사건들을 하나로 이을 때 비로소 '스토리'가 된다. 각자 떨어진 사건들을 어떻게 잇느냐가 바로 '스토리텔링'.

이 스토리텔링의 기법에 암시가 있었다. 때로는 진실과 수많은 근거를 내세우는 구구절절한 설명문보다 인간의 상상력이 더 커다란 확신을 품게 만든다. 내 악우, 목사 아들 놈은 이런 현상을 보며 조소하곤 했다.

'진실은 또 다른 진실에 반박 당하지만 믿음은 반대될 지언정 반박 당하지 않는다.'

'뭐?'

'굳건한 신앙이 강한 이유야.'

'지랄 말고 잔치국수에 MSG 좀 더 쳐라. 맛이 뭐 이리 밍밍해.'

진실을 따르는 이는 설득할 수 있으나 믿음을 따르는 자는 설득할 수 없다는 말을 목사 아들 놈답게 풀이한 거다. 물론 당시의 나는 교회에서 주는 잔치국수를 호로록 마시며 이 새끼가 또 선문답을 늘어놓는구나 하고 넘겼었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녀석은 준비된 목사였다.

언젠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을 교회 운영을 생각하며 철저한 이성과 논리로 무장한 채 감성에 호소하는 법을 깨우친 것이다. 만일 내가 왕이나 귀족이 될 줄 알았다면 이 금싸라기 같은 말들에 좀 더 귀 기울였을 텐데 말이다.

그리고 지금, 나는 이 미개하고 야만적인 중세틱 이세계에서 만류귀종이란 말을 깨우쳤다.

진정한 비의는 분야를 막론하고 어디서나 쓰일 수 있는 법이다. 설령 말랑말랑한 현대에서 비롯됐다 한들 이 혹독한 중세틱 이세계와 접목 가능할 정도로.

이게 내가 하인들 짐꾸러미에 금화를 집어넣은 이유라 말하자 곧 반발하는 목소리가 돌아왔다.

"아니! 그런 뜬구름 잡는 소리가 어딨습니까!!!"

납득하지 못한 자는 의자에 가죽끈으로 묶인 채로 이리저리 날뛰는 사내였다. 최근 벗겨지는 머리가 걱정돼 연금술사한테 발모약을 사고 싶어한다던 하인 말이다. 그는 내 설명이 몹시 불만족스럽다며 클레임을 걸어오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수학 문제를 풀이하기보다 답안지부터 베끼던 날 보는 거 같아 묘한 동질감을 느껴 마저 설명해주려던 찰나. 곁에서 잠자코 듣던 첩보관 오버트 경이 먼저 입을 열었다.

"...첫 번째는 공자님의 아내되시는 미리암 오른 유바스. 그녀가 회임하고 출산한 아이에게 석연찮은 구석이 있음을 세상에 알리고자 하심이다. 출생과 관련된 소문을 대외적으로 공론화할 수 없는 입장에서 의심쩍은 정황이 나오는 것만으로도 생각할 줄 아는 사람들에게 상당한 암시를 줄 수 있기 때문이지."

계책학 일타 강사 오버트 경은 자기 이마를 가린 미역머리를 손으로 만지작대며 조곤조곤 설명해줬다. 물론 문맹 하인이 저걸 다 이해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이 불운한 하인은 대충 성내에서 떠돌던 소문을 떠올리며 알아서 납득했다. 그렇다고 억울함이 다 가시는 건 아닌 듯, 오버트 경과 날 돌아보며 눈물을 질질 흘리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없는 죄를 뒤집어 씌웁니까?! 진짜 무서웠다고요!!!"

그러더니 엉엉 곡소리 내가며 물이란 물을 다 쏟아낸다. 이게 연기라면 나는 평생 사람을 믿지 못하고 살 것이다. 오버트 경도 나랑 생각이 비슷했던 모양인지 이쪽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이 자의 얕은 생각과 심약함은 간자로 삼기 부적절합니다. 회유는 쉽지만 실토하는 것도 빨라 접근했다 쳐도 중요한 정보는 알려주지 않았을 겁니다. 이 이상의 심문은 가치가 없습니다."

"하긴. 생각할 줄 아는 놈이면 설명을 요구하지 않았겠지."

생각은 좀 짧은데 대신 직감이 뛰어난 모양이다. 하인은 나랑 오버트 경이 나누는 대화를 듣자마자 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올렸다.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 아래로 충혈된 눈동자가 이리저리 구르고 있었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오버트 경은 이번에도 짜증내는 기색 하나 없이 또박또박 설명해줬다. 하인이 알아듣든 말든 그 요구에 응해주겠다는 배려 깊은 마음씨 덕분이다. 한숨 한 번 내쉬긴 했는데, 딱히 하인 때문은 아니었다.

한참 만지작대던 앞머리가 영 맘에 들지 않는지 옆으로 쓸어넘긴 탓이다. 물에 젖은 미역처럼 축 늘어진 앞머리는 아무리 만지작대도 소용없었다.

마치 하인에게 전부 설명해봤자 아무 소용 없듯이 말이다.

"...두 번째는 없는 죄가 아니라서다. 성내에 간자가 있음은 분명하나 그 윤곽을 드러내기는 커녕 제지하기도 쉽지 않은 상황에서 적에게 경고할 필요가 있었다."

상황을 눈치챈 건 눈앞의 하인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었다. 날 호위하러 따라온 병사들과 에드위나의 분위기가 시시각각 굳어갔다. 병사들 중 일부는 눈을 질끈 감았고, 에드위나는 어느샌가 내 등 뒤에 딱 달라붙어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세 번째는."

이윽고 오버트 경이 마지막 말을 이으려던 순간.

"그만."

나는 손을 들어올리며 오버트 경의 발언을 가로막았다. 딱히 오버트 경에게 면박을 주기 위함이 아니다. 오히려 저 불운한 하인과 아무 죄없는 병사들, 거기에 충성심 강한 에드위나를 살리기 위한 조치였다.

유일하게 눈치 못 챈 건 불운한 하인 뿐이었다. 위기가 닥쳐오는 건 아는데 무슨 위기인지는 모른다라. 저걸 특화됐다 해야 하는지, 아니면 둔감하다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나는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오버트 경을 향해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최대한 예의를 갖췄다.

"오버트 경, 저 정도 연기라면 한 번 당해주는 쪽이 맞지 않겠습니까. 심문이 필요없다 판단하셨음에도 확인하시려는 철저함에는 탄복했습니다만."

"공자님."

"이 참에 철저히 정리하고픈 오버트 경의 열정과 의지에 거듭 감사드립니다. 허나 염려하시는 바는 이해해도 시간이 촉박합니다. 부디 재고해 주십시오."

잠깐동안의 시선 교환은 오버트 경의 양보로 끝났다. 그는 괜히 망토의 버클을 만지작대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약간 쑥쓰러워하는 목소리와 함께 말이다.

"...확실히 그렇습니다. 제가 눈앞의 일에 눈이 멀어 중요한 부분을 자칫 놓칠 뻔 했군요. 공자님의 주의에 감사드립니다."

"이 일에 경중이 어딨겠습니까. 다만 시한이 정해진 일이냐의 차이일 뿐, 모두 중한 일이었습니다."

"그리 말씀해주시니 감격스러울 따름입니다."

우리 열정적인 첩보관 오버트 경과 나는 훈훈한 담화를 주고받으며 분위기를 꽤나 누그러트렸다. 병사들과 에드위나가 조심스럽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사이, 불운한 하인은 여전히 주변을 둘러보며 물음표를 띄우고 있었다.

"어? 어?"

오버트 경의 차가운 얼굴에 처음으로 표정이 생겨났다. 저 불운한 하인이 어지간히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눈썹을 뒤튼 것이다. 사나운 짐승이 사냥감을 눈앞에 두고 기세를 끌어올릴 때처럼 으르렁대기까지 했다.

"...공자님께 감사드려라. 방금 공자님이 말리시지 않으셨다면."

"됐습니다, 오버트 경."

기껏 풀어놓은 분위기가 다시 경직될 판이다. 나는 오버트 경을 뜯어 말리면서 저 하인을 향해 미소를 보여줬다. 모르는 게 약이라더니 딱 그 말대로다.

"지금처럼 아무 것도 이해하려 하지 말고 주어진 일에만 충실히 살면 문제 생길 일은 없을 게다."

"어... 감사,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넌 합격이다."

"예?"

"이름이 어찌 되느냐?"

"개, 개울가의 존. 존이라고 불러주십쇼!"

냉혹한 첩보관 오버트 경이 저 하인에게 이유를 줄줄이 읊은 까닭이 뭐겠는가.

애시당초 고문실에 입실한 순간부터 생존 확률이 0에 수렴한다. 아까 오버트 경이 이유를 말한 건 자신이 원하는 대답이 이러하니, 비슷하게 답할 때까지 아주 초상내주겠단 말을 좀 길게 말한 거였다.

안 그래도 머리가 벗겨져 슬픈 사람한테 기왕 벗겨진 거 머리가죽까지 벗자 말하는 건 지나친 처사다. 그렇다고 이대로 돌려보낸다 한들 제대로 된 구직 활동을 할 수 있을까?

낙인 이론이란 말이 있다. 한 번 감옥 갔다 돌아온 사람은 알게 모르게 사람들의 편협한 시선을 견뎌내야 한다는 이론이다. 참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이 순진하고 무고한 사내, 개울가의 존이 건강한 삶을 이어나가길 원했다. 해서 절대 거절하지 못할 관대한 제안을 건네주기로 마음 먹었다.

"개울가의 존."

"예, 옙!"

"너는 나와 함께 수도원으로 간다."

마음 같아선 에드위나를 데려가고 싶다만... 아쉽게도 수도원은 금녀의 구역이다. 수녀원이 금남의 구역이듯이 말이다. 그래서 어떻게 믿을 만한 인재를 조달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나날이었다.

그런데 하늘이 점지해준 것마냥 수도원까지 날 충직하게 보필해줄 하인, 우리 개울가의 존이 뚝 떨어진 셈이다. 나는 딱히 신앙을 가진 건 아니지만 확신할 수 있었다.

이건 운명이라고.

"....자, 잘못 들었습니다요."

그리고 때때로 운명은 개인의 저항을 받는다.

이 순간, 존은 생애 가장 찬란히 빛날 영웅적인 의지로 운명에 맞섰다. 안타까운 부분이 있다면 이 곳이 영웅들을 초주검으로 만들어놓는 중세 전문가들의 작업장이란 사실이다.

존이 띄운 영웅적인 기상에 감탄할 새도 없었다. 핏자국 눌어붙은 벽에 기댄 채 조용히 때를 기다리고 있던 간수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집게 하나를 집어들었다.

"어디 보자. 이빨 썩은 게 얼마나 있나 볼까~."

멀쩡한 이빨도 깨부신 뒤 상했다며 뽑아낼 법한 무지막지한 기세.

존은 집게를 깔짝이며 마른 입술을 혀로 핥짝이는 간수를 보자마자 황급히 고개를 돌려 이쪽을 바라봤다.

"공자님! 수도원까지 안락하게 모시겠습니다!!!"

***

애설튼 공왕의 심복이자 첩보관이신 오버트 경과 나는 꽤나 궁합이 잘 맞는 사이였다.

하지만 궁합이 아무리 좋아도 한 번은 부딪히기 마련이다. 오버트 경은 고문실에서 빠져나오자 마자 시선을 반대쪽으로 돌린 채 입을 열었다.

"...계책을 꾸미셨다면 잔혹하게 구실 줄도 알아야 합니다. 다른 이들이 내막을 안다면 공자님더러 미쳤다 말할 겁니다."

나는 오버트 경이 하는 말을 확실히 이해했다. 한 명의 무고한 자를 구하기보다 한 명의 범죄자를 색출해내는 게 중요한 시대다. 아홉 명의 무고한 죽음을 방관하는 한이 있어도 한 놈을 족친다.

참 미개하고 야만적인 발상인데... 빈대 잡자고 초가삼간 불태우자 말한 놈이 나였다. 자연스레 저 말에 궁색해질 수밖에 없었다. 특히 내 목숨이 달린 일이라 더더욱 그랬고.

-만일 내가 감성에만 호소하는 낭만충이었다면 그랬을 거다. 나는 소심하게 불평을 드러내는 오버트 경을 달래주고자 생각 보따리를 함께 공유해줬다.

"당연하지 않은 일들이 의문을 자아내고 그 의문이 상상력을 자극하는 법. 이는 유바스에게 보여주기 위한 조치입니다."

앞서 말한 스토리텔링, 암시의 기법이다. 이건 생각을 배배 꼬길 좋아하는 모략꾼한테 아주 치명적인 방법이었다. 생각해보자. 고문으로 줄초상나는 게 당연한 상황에서 그러지 않았다.

단순히 그거 뿐이라면 안 들켰나 보다, 하고 넘어갈 수 있겠지만.

"별 다른 고문 없이 심문이 간단히 끝난 뒤에 우리가 움직입니다. 저희야 진실이 어떻든 이미 결론을 내려놓고 움직일 뿐이지만, 워낙 많은 일들이 짧은 시간 내에 일어나 정보를 가려내야 하는 저들 입장에선 달리 보일 겁니다."

"...설마."

첩자란 건 결국 신뢰관계로 유지되는 존재다. 첩자에게 이런이런 이유가 있으니 믿을 만하다는 전제 하에 기능한다. 달리 말해 이 전제를 툭툭 건드린다면 적을 움츠러들게 만들 수 있었다.

"적을 물리치는 가장 쉬운 방법."

음모를 꾸미는 데 중요한 건 신속함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차분히 시간을 들여 곰곰히 생각해보면 어딘가 어긋나는 부분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기꾼 놈들이 온갖 해괴한 용어를 섞어가며 이해를 방해하는 거랑 비슷한 이유였다. 사람 속이는 일이란 공통점이 있다 보니 이 곳에서의 계책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것저것 있겠지만, 수월함만 논한다면 그들 스스로 무기를 내려놓게 만드는 것 아니겠습니까?"

진실과 근거로 판단할 시간을 주지 않고 상상력으로 확신하게끔 유도한다. 이게 핵심이다. ...주제에 맞지 않게 너무 주절댔나 싶다. 다행히 오버트 경은 불쾌감을 드러내기보다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공자님의 식견. 깊이 새겨들었습니다."

내가 모시는 주군의 아들이라고 얼굴에 너무 금칠해준다. 이런 아첨, 나쁘진 않은데 민망해서 볼이 빨개진다. 나는 손사래치면서 오버트 경의 칭찬을 받아들였다.

"그리 띄워주시니 괜히 민망스럽습니다. 다음은 오버트 경에게 맡겨야 하는데 말입니다."

"물론입니다. ...공자님의 계책에 누를 끼치는 일 없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하하하! 자, 그럼 털러 가볼까요."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더니 내가 딱 그 꼴이다. 나는 환한 웃음을 감추지 못한 채 감옥을 성큼성큼 벗어나며 뒷말을 이었다.

"진짜 뇌물로 주어진 금화를 찾으러 말입니다."

11. 여행 준비



금화를 털러 가자고 말하긴 했지만 내가 직접 거리로 행차하는 일은 없었다.

당연한 이치다. 유바스가 지목한 암살 목표 1순위가 나일 텐데 성 바깥으로 나가면 진짜 큰일난다. 내가 살던 시대를 인간 세상 평균으로 생각하는 어리석음을 범할 순 없었다.

여기가 밤 중에 편의점 다녀도 무사한 치안강국 대한민국도 아니고, 훤한 대낮에 오솔길 좀 걷고 있으면 무허가 톨게이트 직원들이 녹슨 칼끝을 들이미는 곳이다.

따라서 모든 사정을 알고 있는 애설튼 공왕과 나, 첩보관 오버트 경 모두 같은 결론을 내렸다. 내 외부 활동을 최대한 줄여야 한다고 말이다. 금화를 추적하는 일을 오버트 경이 전담하게 된 까닭이었다.

물론 방 안에 틀어박혔다 해서 까막눈에 귀머거리가 된 건 아니었다. 명목상의 근신 처분이 내려진 이후, 에드위나가 바깥을 오가며 소식을 계속 전해줬기 때문이다.

감옥에 다녀올 때만 해도 겁 먹은 햄스터마냥 오들오들 떨던 에드위나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하루가 지나자 침착함을 되찾더니 이틀째 되던 날부터 본래의 무심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나흘째 되는 오늘. 에드위나는 쇄골을 타고 흘러내리는 땋은 머리를 자랑스럽게 드러내며 자신감 가득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오버트 경께서 맡으신 일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벌써 환전상들 여럿을 혼쭐내시면서 불법적으로 얻은 이익을 국고에 환수하셨답니다."

나는 오버트 경의 놀라운 행동력에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비록 오버트 경이 눈앞에 있는 건 아니지만, 내가 느낀 이 감동을 조금이라도 전하고 싶은 마음에 박수치기까지 했다.

"역시 오버트 경이야. 판을 깔아주면 알아서 다 해주시리라 믿었다니까."

애설튼 공왕이 괜히 첩보관이란 지위를 맡긴 게 아니다. 오버트 경은 이것저것 신경 쓰느라 주의가 분산되는 경우가 있어서 그렇지, 뜨거운 열정과 꼼꼼한 완벽주의자 성향을 갖춘 사내였다.

뭐부터 하라고 딱딱 정해주면 맡은 역할 이상을 해낼 수 있는 인재란 소리다. 불과 사나흘 만에 이번 계획의 핵심인 환전상들을 족치고 있다는 게 증거였다.

이런 기쁜 순간에 축배를 드는 게 맞겠지만... 나는 탁상 위에 올려진 목제 잔을 보며 아쉬움에 입맛을 다실 수밖에 없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조악한 솜씨의 유리잔을 쓰던 입장에서 낙차가 더 크게 느껴졌다.

"에드위나. 그런데 왜 내 잔이 목제로 바뀐 게냐?"

"공자님도 아시다시피."

에드위나는 눈을 지그시 감더니 나긋나긋한 목소리에 냉혹한 진실을 담아냈다.

"공자님이 쓰시던 유리잔은 저번 소동 때 깨져버렸습니다. 하여 공왕 전하께서 당분간은 목제 잔을 쓰라 하셨습니다."

"..."

"...하지만 제가 모시는 주군은 전하가 아니라 공자님입니다. 공자님께서 제가 궁금해하는 이야기를 들려주신다면 시녀로서 조금 당돌하게 굴 예정입니다."

나는 에드위나의 발언을 곰곰히 곱씹다가 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일반적인 하녀들과는 확실히 다르다. 에드위나는 모르쇠하며 고개 돌리기보다 심장이 두근대도 일단 눈 떠보고 훔쳐보는 부류의 사람이었다.

나는 이 호기심 많은 시녀를 위해 기꺼이 입을 열어주기로 했다. 어차피 에드위나는 내 사람이다. 비밀을 공유하는 사람은 적을수록 좋다지만, 너무 신비주의를 고수하면 내 편을 만들 수도 없었다.

"뭘 그 정도 가지고. 좋다. 이번 계획은 전적으로 환전상들, 보다 정확히 말해 적들의 자금줄을 끊기 위한 모략이었다."

"하인들에게 행패 부리고 그들의 숙소에 몰래 금화를 집어넣은 게 말입니까?"

"그리 말하니 꼭 핑계대는 것처럼 들리지 않느냐."

누가 들으면 망나니 새끼가 지 패악질에 아무 이유나 갖다 붙이는 줄 알겠다.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 어감이란 게 괜히 중요한 요소가 아니다. 나는 에드위나가 지닌 사소한 오해와 편견을 바로 잡고자 조곤조곤 설명해줬다.

"에드위나. 왜 하필 금화인 줄 아느냐?"

"사람들이 금을 좋아하는 데에 이유가 있을까요. 굳이 말하자면... 무척 귀하기 때문이리라 생각합니다."

"그래. 금화는 무척 귀하지. 그래서 가치가 굉장히 높은 귀금속이다. 막상 실생활에 쓰이기 어려울 정도로 말이다."

"예?"

확실히 이런 부분은 생각하지 않으면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든다. 에드위나의 대답은 멍청하고 배운 게 없어서가 아니라 딱히 생각해본 적 없었기 때문에 나온 반응이었다.

막상 생각해보면 별 거 없는 이야기다. 판타지 화폐 국룰 쿠퍼, 실버, 골드를 생각해보자. 쿠퍼와 실버는 소액 화폐고 골드는 가치 높은 화폐로서 4인 가족 1달 생활비라는 국룰이 매겨져 있다.

이를 현대식으로 대충 치환해보면 구리는 동전이고 은은 대략 1천원에서 1만원 사이, 금은 그 이상의 가치를 지닌 화폐다. 5만원권 지폐라 여기면 된다.

환전상들을 족친 건 바로 이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물건들 가치는 금화 한 개와 견줄 만큼 보배롭지 않다. 오히려 금화를 받는 쪽에서 내줄 물건이 없어질 정도지. 은화도 가치가 높아 일부러 작게 만들거나 구리를 섞어 쓰는 마당에 금화를 주면 어찌 되겠느냐?"

"아...!"

여기까지 말하니 에드위나도 무슨 말을 하는지 금방 눈치챘다. 금화란 건 생각보다 실생활과 거리 있는 화폐다.

궁금하면 어디 편의점이나 국밥집 같은 데 들어가서 하나 시켜먹은 뒤 5만원권을 지불해보면 답 나온다. 이 귀한 화폐를 주시다니 하면서 감사해하는 사람이 드물 것이다. 반대로 잔돈 거슬러주기 싫다며 거절하는 곳이 더 많다.

결국 5만원권을 폭 넓게 쓰고 싶다면 소액 화폐로 바꾸는 쪽이 훨씬 유리하다. 중세틱 이세계 화폐들도 마찬가지였다. 금화를 신줏단지 모시듯이 쟁여놓을 거 아니면 환전상을 찾아갈 수밖에 없다.

이 점이 제일 중요했다. 금화는 실생활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면서도 가치가 높아 은닉과 휴대가 간편한 화폐다. 금화를 미끼 삼아 회유하는 입장에선 도중에 들킬 위험을 줄이고 실질적인 경제력은 제대로 주지 않아 포섭된 자가 계속 자신을 의존하게 만들 수 있었다.

은화 꾸러미는 무게도 많이 나가고 시중에 풀리면 눈에 확 띄는 데다 자기 영지에서도 써야 하니까 금화로 회유하는 것이다. 환전상들은 우리 영주 망하든 말든 알 빠임? 하면서 포섭된 간첩들 등골을 쪽쪽 빨아먹을 테고 말이다.

이 기묘한 상생 경제를 부수는 방법은 환전상들을 족칠 강력한 명분을 쌓는 것.

미리암의 출산과 거의 동시에 하인들에게 누명을 씌운 건 사람들에게 성내에서 뭔가 엄청난 일이 일어났다는 암시를 주어 알아서 기게 만드는 빌드업이었다.

"핵심은 금화를 받아봤자 쓸모가 없게 만들면 된다. 오버트 경이 환전상들 상대로 다소 억지까지 부려가며 초강경 대응하는 건 앞으로 불법적인 환전 행위를 삼가하라는 경고다. 이중장부 따위로 감추다가 들통나면 간단히 끝내지 않을 거란 인식을 심어주기 위함이지."

"..."

"혼란을 빚어낼 단서들은 이미 수도 없이 던져놨다. 유바스는 내가 제 여식에게 저지른 모욕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파악하느라 바쁜 와중일 게다. 거기에 출처 모를 금화가 발견된 직후 졸속으로 끝난 심문에 환전상들을 향한 갑작스런 공격에 이르기까지."

나는 여기까지 말한 뒤 잠깐 뜸을 들이며 슬쩍 에드위나를 바라봤다. 에드위나는 어느새 양손을 모아 입가를 가린 채 두 눈을 초롱초롱 반짝이고 있었다. 나와 함께 이곳저곳 다니며 들은 게 많다보니 금방 이해한 모양이다.

나는 에드위나를 향해 웃음을 흘리면서 목제 잔을 집어들었다.

"유바스를 자극해 수위 높은 행동을 유도함과 동시에 이 곳에 뿌리내렸을 세작들까지 위축시킨다. 다소의 위험 부담은 있겠지만, 짧은 시간동안이나마 이쪽이 주도권을 확실히 쥘 수 있는 방법이지 않겠느냐."

"..."

"에드위나, 이야기가 만족스러웠다면 유리잔으로 바꿔다오."

에드위나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내가 건넨 나무 잔을 받아들었다. 내가 진짜 망나니가 아니란 사실에 감격한 모양이다. 나는 가까스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사람들 괴롭히길 좋아해서 이러지 않았다는 사실을 이해했다면 충분하다. 나는 조금 멍한 눈빛으로 입을 살짝 벌린 채 물러서는 에드위나를 보며 한 가지 더 부탁했다.

"그리고 갈 때 개울가의 존을 불러 수도원행을 준비하라 전해주고."

***

충직한 시녀 에드위나가 내 생활을 전반적으로 보필해준다면, 새로운 인연인 개울가의 존은 뛰어난 열정으로 맡은 바 소임을 다했다.

근신 처분이 떨어진 날 위해 본인이 직접 찾아와 무슨 물건을 마련했는지 목록을 주르륵 읊어댄 것이다. 어찌나 강렬한 충심인지, 내가 따로 말하지 않은 물건들까지 마차 안에 꽉꽉 우겨넣으려 들었다.

"일레니풋의 수도원에서 양조한 포도주가 담긴 술통 두 개와 이를 담을 투명한 유리잔에 먹기 좋게 굳힌 꿀 한 통, 소금에 절였다 한 번 씻어 염기를 덜어낸 말린 고기 세 덩이에 수프에 넣어 입맛을 돋궈줄 산채까지 싹 다 마련해놨습니다."

"아니, 그렇게까지 넣을 필요는 없는데."

"그리고 혹여 가시는 길에 무료하실까 염려해 간단한 악기를 다루고자 맹연습 중입니다!!!"

필사적이기까지 한 그 모습에 이쪽이 더 당황했다. 개울가의 존. 고문실에서 본 심약한 모습은 어디 가고 근면성실한 일벌레로 탈바꿈해 있었다. 조금 당혹스럽긴 하지만 일에 열심인 사람이 미울 리 있겠는가.

나는 개울가의 존을 향해 관대한 미소를 지어줬다. 충분히 노력했다는 걸 알았다는 의미로 말이다.

"하하하, 내가 하인들을 불러다 시킨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인 모양이구나."

"....."

"날 붙잡아줬으면 하는 마음으로 일부러 심술을 부린 거다. 너희의 진심을 안 지금으로선 필요가 없고. 준비한 것들은 마음 고생했을 다른 하인들과 함께 나누어도 좋다. 정 걱정된다면 내 이름으로 주는 하사품이라 여기거라."

그제서야 쇳덩이보다 더 단단하게 굳어있던 존의 얼굴 위로 표정이란 게 생겨났다. 당연히 기쁨과 환희로 가득 찬 웃음을 지을 줄 알았는데, 존은 의외로 경악으로 가득 차 두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고, 공자님. 정... 말이십니까?"

"그럼. 그런데 정작 가장 필요한 물건은 챙기지 않았더구나."

"말씀해주시면 즉시 준비하겠습니다!"

내 말을 듣자마자 안심한 모양이다. 존은 침착함을 되찾고 어딘가 달관한 모습으로 고개를 연신 끄덕여댔다. 일에 열심인 사람을 너무 오래 붙잡을 수야 없지.

나는 딱 거두절미하고 본론만 꺼내들었다.

"석궁과 화살 좀 넉넉하게 챙겨두거라. 악기 말고 석궁 장전하는 연습을 해두고."

"예?"

"가는 길에 적적하지 않게 사냥하면서 가야지. 안 그러느냐?"

"그... 제가 쏩니까?"

확실하지 않은 부분을 명확히 하려는 부분이 보기 좋다. 나는 존이 머금은 의문을 단박에 해소시켜 줬다.

"쏘는 건 내가. 장전은 네가. 사냥에도 분담이 필요한 법 아니겠느냐."

"...."

12. 상담시간



애설튼 공왕은 가정과 국정을 돌봄에 있어 모자람 없는 사내였다.

좋아하지 않을 순 있어도 미워하기 힘든 사람. 이것이 애설튼 공왕을 향한 평가다. 비록 사랑하던 아내가 막내를 낳은 뒤부터 시름시름 앓다 숨을 거뒀지만, 그 원망이 막내를 향하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막내 아들을 아내가 남긴 유산으로 여겨 밝은 유년기를 보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다. 막내는 이 헌신적인 노력을 알아보기라도 한 듯 아무 걱정없이 건강하게 자라났고 말이다.

애설튼 공왕은 평화로운 치세동안 군주로서 맡은 바를 다하며 부끄럼없는 삶을 살았노라 자부했다. 지금까지는 그렇게 생각할 수 있었다. 만일 유바스가 숭악한 이빨을 드러내지 않았다면 앞으로도 쭉 그랬을 것이다.

교회의 비호를 등에 업고 가파르게 성장한 유바스는 이제 애설튼 공왕의 선조들이 꾸려온 포위스 공국을 노리는 중이었다. 이것이 평소 같았으면 생각조차 안 했을 결단을 거듭 내린 이유였다.

선조들의 유산을 자기 대에서 끊을 수 없다는 막중한 사명감이, 유바스의 치졸하고 끔찍한 계략에 대한 반감이 애설튼 공왕을 밀어붙였다. 마음 속 한 켠에 꽁꽁 틀어박힌 수치심이 나오지 못하도록 말이다.

그러나 애설튼 공왕이 애써 외면한 진실을 꺼내드는 자가 있었다.

"결국 우리가 저들에게 굴복하는 모양새 아닙니까?"

근래 들어 성내에서 가장 뜨거운 문제를 놓고 준비해둔 결론을 내린 순간, 한 사내가 반발하는 기색을 곧이곧대로 드러낸 것이다. 감히 가주의 권위를 의심하는 행동이었으나 누구도 지적하지 못했다.

애설튼 공왕의 결단에 반대한 자가 다른 누구도 아닌 그 자식이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애설튼 공왕의 기사적인 면모를 고스란히 물려받은 차남이었다.

테르베어 오른 스트레고스 글레리오 포위스.

어깨에 살짝 닿을 정도로 기른 검정 머리에 호리호리한 매처럼 번득이는 눈빛. 매서운 콧날과 뾰족한 턱, 짙은 수염에 펑퍼짐한 옷 위로도 탄탄한 근육이 드러날만큼 강인한 육체를 지닌 자.

"승마만 해도 무섭다며 엉엉 울던 동생이 드디어 자기가 사내란 걸 자각했습니다. 그 정도로 심한 모욕을 당했는데도 가만히 있었으면 오히려 제가 혼쭐을 냈을 겁니다."

그리고 아무리 화가 났어도 산모 뺨을 후려치는 건 좀... 이라며 성내의 모두가 쉬쉬한 나르바의 기행을 유일하게 호의적으로 평가한 인물이었다. 알현실에 모인 애설튼 공왕의 가신들이 덜컥 눈살을 찌푸릴 정도로 말이다.

다들 직접 말로 꺼낼 자신이 없을 뿐, 차남 테르베어의 변론이 도를 지나쳤다 느끼고 있었다. 나르바를 동정하는 자들도 나르바가 저지르는 온갖 패악질까지 좋게 봐주지 못한 것이다.

몇몇은 아예 테르베어의 눈길을 피해 자기들끼리 시선을 마주치며 속닥이기까지 했다. 애설튼 공왕은 이 묘한 분위기를 전부 눈에 담아둔 뒤에야 테르베어의 도전에 응했다.

애설튼 공왕은 권좌의 팔걸이를 슥슥 문지르며 입을 열었다.

"그것이 약탈자들을 막으라는 중임을 방기하면서까지 돌아온 까닭이냐?"

"약자를 수호하고 무고한 자들을 대변하라. 누구도 들어주지 않는 동생의 억울함을 대변하고자 왔습니다."

차남 테르베어는 외모 그대로 기사의 길을 걷는 자식이었다. 일찍부터 작위를 승계받을 준비를 마치고 영지 곳곳을 시찰 중인 장남과 달리 무예와 전쟁에만 관심을 보였고.

덕분에 후계구도는 몹시 안정적이었다. 테르베어는 형처럼 사느니 그냥 형의 기사로 살겠노라며 자신의 권리를 상당 부분 양보하기까지 했다. 그 때는 막상 대견하고 고맙게만 느껴졌는데...

애설튼 공왕은 찌꺼기로 꽉꽉 틀어막힌 유리병을 보는 듯한 답답함을 느끼며 두 눈을 질끔 감아버렸다.

'네 동생이 하자고 한 일이란 말이다!'

특출난 무예 실력과 편향된 관심 덕분에 강물을 거슬러 올라오는 약탈자를 격퇴하라는 중임을 맡긴 거까진 좋았다. 나머지 부분이 죄다 기준미달이어도 괜찮으리라 여겼었다.

설사 장남이 예기지 못한 일로 죽는다 해도 가신단이 충분히 보필할 수 있으리라 믿으면서. ...실수였다. 테르베어는 싸움만 줄창 하느라 애설튼 공왕이 어째서 이런 결정을 내렸는지에 대한 고찰과 이해가 전혀 없었다.

그리고 기사도와 가족애에 심취한 테르베어는 가슴 아픈 비극을 겪은 동생을 연민하며 서슬퍼런 분노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아버지인 애설튼 공왕을 마냥 비난할 수 없으니 곁에서 함께 한 가신단을 노린 것이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압니다. 나르바가 성내에서 하인들 상대로 화풀이한다는 소문이 자자하단 것쯤은 저도 들었습니다."

테르베어는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탄탄하게 다듬어진 검지로 가신들을 하나하나 가리키며 실핏줄 도드라진 눈동자로 흘겨봤다. 그 무시무시한 시선이 꽂힐 때마다 가신들은 슬그머니 고개를 숙였다.

정작 테르베어는 그 모습이 더 마음에 들지 않은 듯 이빨까지 살짝 드러내며 으르렁댔다.

"하지만 제가 볼 땐 사내임을 자각한 아이가 여전히 힘 없는 자기자신에게 한탄하며 닥쳐온 비극을 함께 슬퍼해달라 우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테, 테르베어 경. 나르바 공자님의 소문을 들으시고도 그리 말씀하신단 말입니까?"

"곁에 있다는 사람들이 모두 이리 말하며 거리를 벌리니 원. 그러니 나르바가 고독함에 몸부림치며 더더욱 비틀린 길로 가는 거 아니겠습니까! 사내는 소리내서 울지 못합니다! 이럴 때 곁에서 함께 해줘야 비로소 마음으로 우는 겁니다!"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도 소신있던 발언은 우렁찬 외침에 짓밟히고 말았다. 테르베어는 목이 꽉 막힌 사람처럼 주먹으로 가슴을 쾅쾅 쳐대며 탄식으로 가득 찬 한숨을 내뱉어댔다.

가신들은 스리슬쩍 고개를 치켜올리며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참 많은 말을 담아둔 표정들이었다. 몇몇은 아예 표정으로 천박한 언사를 드러내기까지 했다.

'진짜 지랄을 해요.'

포위스 공국과 애설튼 공왕이 자랑하는 뛰어난 기사 테르베어.

그는 떨어지는 낙엽만 봐도 괜시리 눈시울이 붉어지는, 갱년기 중장년층보다 훨씬 충만한 감수성을 지닌 사내였다. 남들이 다 욕하기 바쁜 동생의 외로움을 지레짐작해 스스로 수호자를 자처할 정도로 말이다.

애설튼 공왕은 알현실에서 방방 날뛰는 테르베어를 보며 지끈거리는 두통을 느꼈다. 사랑하는 막내 아들이 자처했다곤 하나 의절해야 한다는 사실이 가슴아픈 와중에 차남이란 게 저러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다.

애설튼 공왕은 왼손으로 이마를 짚고서 어지러움을 느끼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테르베어. 네 말에도 일리가 있음을 인정하마. 다만 나르바도 그동안 생각한 바가 없는 게 아니다. 마음을 정리하고 유바스의 여식과 독대 중이니, 끝나는 대로 나르바를 만나보도록 하거라."

"아버... 전하! 역시 제 간언을 듣고 금방 알아주시리라 믿었습니다!!!"

테르베어는 감격한 목소리로 알현실 전체를 가득 채웠다. 애설튼 공왕은 그저 좋다는 듯이 고개만 계속 끄덕여댔고 말이다. 알현실 분위기가 이 이상 냉각되지 않은 건 애설튼 공왕이 통치자로서 쌓아올린 지혜가 빛을 발한 덕분이었다.

보기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리는 난제를 해결하는 가장 손 쉬운 방법.

'나르바, 네가 꾀한 일이니 부디 네가 마무리 지어다오.'

그것은 떠넘기기였다.

***

내가 수도원행을 준비하며 절대 빼먹지 않기로 한 일이 하나 있었다. 바로 오늘이 그걸 하는 날이었고.

미리암 오른 유바스. 대략 7개월동안 법적으로 나와 부부관계였던 여인을 만나러 가는 길은 무겁기 짝이 없었다. 내가 지나간다고 수군대며 자리를 피하는 사람들 때문은 아니었다.

나한테 착 달라붙어서 전동 안마기처럼 부우우웅 떨어대는 사내, 존 때문이었다. 개울가의 존은 내 옷자락을 붙잡고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기괴한 신음을 뱉곤 했다.

"히에에엑! 고, 공자님! 시선입니다! 시선이 느껴집니다!!!"

"안심하거라. 그림이다."

"히끼야아악! 창문 바깥에 새들이 저희를 보고 있습니다!!"

"사람도 널 보고 있단다."

"누, 누가 말입니까?!"

나는 굳이 소리내어 답하기보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존과 시선을 마주쳤다. 사람을 진정시킬 땐 눈을 마주치는 게 몹시 중요하다고 어디선가 줏어들었기 때문이다.

흔히 출처 모를 정보들은 헛소리로 끝나는 경우가 많은데 이번은 아니었나보다. 개울가의 존은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침착함을 되찾았다. 붙들고 있던 내 옷자락을 놓고 자세를 고쳐잡을 정도로 말이다.

"죄송... 죄송합니다, 공자님. 제가 가장 두려워할 존재를 잊어먹고 있었습니다."

"응?"

약간 석연찮은 구석이 있긴 한데 냉정을 되찾았으면 됐다. 안 그래도 조용히 앞서가던 에드위나의 기세가 달라지던 참이었다. 백색소음이 들려오는 침묵을 즐길 법한 인상의 에드위나다.

소란스럽게 구는 존이 신경에 거슬린 게 틀림없었다. 이윽고 간신히 찾아온 침묵 속에서 발소리만 울려퍼지길 한참. 에드위나는 목적지 앞에서 비장한 결의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미리암님, 부군이십니다. 독대를 요청하고 계십니다."

똑똑똑. 선명한 노크 소리가 고요한 복도를 가른다. 하지만 방문 너머론 어떤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미리암의 무반응에 가장 호들갑을 떤 건 역시나 개울가의 존이었다.

"함께 침상에 들지 않으신지 일곱 달이니 매정하다 느끼실 만하지 않을까요?"

"..."

우리 존이 머리가 붙어있는 까닭은 아마 붙어있어도 괜찮아서일 것이다. 나는 불길한 상상을 하느라 바빠 죽을 와중이었다. 설마 유바스가 플랜 C로 넘어갔나? 설마 그렇게까지 미친 놈이라고?

...생각해보니 딸을 임신시킨 시점에서 미친 놈이긴 한데. 가능성이 현실로 다가온 이상 가만히 있을 순 없었다. 나는 문앞에 우두커니 서 있는 에드위나를 향해 지시했다.

"에드위나. 반응이 없다면 병사들을 불러와라. 여차하면 문을 부수고 들어간다."

플랜 A가 좀 돌고 돌아 찬탈을 꾀하는 거라면 플랜 B는 날 죽여서 상속권을 보전하는 것이다. 그런데 상속권을 보전받기도 어렵다면 최후의 수단, 플랜 C를 꺼내들 수 있었다.

전쟁을 회피하려는 유바스의 행동을 볼 때 쉽게 택하지 않을 방법이지만... 암살자의 칼끝을 내가 아닌 미리암에게로 돌려 전쟁의 명분을 조작한다는 선택을 아주 안 할 놈도 아니었다.

다행스럽게도 그건 아닌가보다.

굳게 닫혀있던 방문이 가볍게 열린 탓이다. 그리고 열린 문틈으로 눈송이같은 새하얀 머리칼에 포근한 적갈색 눈동자를 갖춘 나긋나긋한 인상의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미 사정을 짐작하신 공자님께서 이 곳을 찾아오실 줄 몰랐습니다."

미리암 오른 유바스.

에드위나가 문을 두드리며 말할 땐 아무 반응도 없던 그녀가 내 말에 반응한 것이다. 개울가의 존은 소문으로만 접한 미리암의 미모를 보고 눈에 힘이 풀려버렸다.

하지만 아직 안심하기에 이르렀다. 어쩌면 이것이 유바스가 준비한 최후의 수단일지도 모르니 당연한 일이다. 나는 에드위나와 존을 한 번씩 둘러본 뒤 손을 들어 따라오길 멈추라 지시했다.

"만일 해가 창틀에 닿을 때까지 나오지 못할 경우 즉시 병사들을 불러라. 허나 도중에 누구도 이 안으로 접근해선 안 된다. 너희도 거리를 벌려 감히 내 대화를 훔쳐들으려 하지 말거라."

"물론입니다, 공자님!"

존이 다른 건 몰라도 시키는 건 무척 잘했다. 지시가 내려지자마자 즉시 뒷걸음질쳐서 거리를 벌린 걸 보면 말이다. 에드위나도 모시는 주군의 마음을 알아주기론 우열을 가릴 수 없었다.

에드위나는 심지어 주군인 나를 걱정해주기까지 했다. 절도있는 발걸음으로 물러서다 이쪽을 돌아보며 근심걱정 가득한 눈길을 보내온 것이다.

"공자님, 설마 이제 와서 미리암님의 미모에 감정을 느끼신 겁니까?"

"감정이야 처음부터 느꼈지."

"공... 자님."

미리암이 유바스가 준비한 암살자가 아닐까 하는 두려움. 그걸 입에 담자 의미를 눈치챈 에드위나가 아랫입술을 오므렸다. 사지일지 모르는 곳으로 주군을 보내야만 하는 수하로서 수치심을 느낀 게 분명하다.

나는 에드위나를 격려하고자 자신만만한 미소를 띄워줬다.

"이후의 일은 네게 달려있다."

"...예, 공자님. 반드시. 시키신 대로 하겠습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나는 흔쾌히 등을 돌렸다. 미리암과 그 자식이 머무는 방 안으로 말이다. 미리암은 처음 봤을 때보다 초췌해진 안색으로 제 방 안을 손짓하며 힘없는 웃음을 짓고 있었다.

"이미 다 짐작하신 거 아닌가요?"



13. 계책 반사



대우받지 못하는 삶은 몹시 고달프다. 고립된 처지에서 느껴지는 외로움은 귀족이라 해도 결코 피해갈 수 없었다.

미리암 오른 유바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방은 붉게 물든 단풍 낙엽이 겹겹이 쌓인 가을처럼 감상적이고 쓸쓸한 분위기였다. 폭 좁은 창문 탓에 채광도 힘들어 구석진 곳은 으슬해보이기까지 했다.

저 구석진 그늘 아래 놓인 상자 안에는 엉성한 바느질 솜씨로 짜낸 유아용 옷이 재봉 도구와 뒤섞인 채 담겨져 있었다. 변변찮은 가구 하나 찾아보기 힘든 방이다. 특기할 사항이 있다면 아기 침대다.

그나마 햇빛이 잘 드는 곳에 아기 침대가 놓여 있었다. 아기는 한참동안 칭얼대다 잠든 듯 조그마한 손에 다듬어진 나무 토막을 쥐고서 쌕쌕이는 숨소리를 내는 중이었다.

잠깐동안 어색한 침묵이 감돈 후, 미리암은 조심스럽게 아기 침대로 다가가 배꼽 위로 양손을 가지런히 모았다. 그녀는 귀족의 예법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하지만 포근한 적갈색 눈동자조차 품어주지 못한 피로의 기색이 짙게 드러나고 있었다.

나는 그 이유를 금방 짐작해냈다.

미리암은 본인의 의지야 어떻든 우리 가문의 적으로서 왔다. 우리는 그녀를 경계했고 그녀와 함께 온 시종들은 공조할 가능성을 염려해 일찌감치 격리됐다. 의지할 사람 한 명 없이 사방에서 밀려오는 적개심에 노출된 셈이다.

결국 미리암은 냉대 속에서 고립되어 지금껏 안하던 일들을 해내야만 했다. 아주 간단한 바느질부터 시작해 아기를 돌보는 일까지 말이다. 이것이 옅은 화장과 웃음 지으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붉게 달아오른 눈시울과 짠내어린 눈물자국을 감추지 못한 이유였다.

처음 왔을 때만 해도 꼬마 부군이라며 짖궂은 호칭을 택하던 미리암이 공손하게 '공자님'이라 부르는 까닭이기도 했다. 여유가 사라지니 남은 건 체념 뿐이다. 미리암은 피곤에 찌든 얼굴로 희미한 미소를 띄우며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공자님께서 절 찾아오실 만한 이유가 없으실 텐데요."

그러나 추락했어도 귀족은 귀족인 법이다. 미리암은 공손한 태도에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했어도 그 안에 깃든 자존심까지 잃진 않았다. 무척 굳센 심지를 지닌 여자다.

나는 굳이 정면으로 부딪히기보다 조금 돌아갈 필요성을 느꼈다.

"미리암, 그대가 나한테 올 이유도 없었지. 그 잘난 유바스의 야망이 아니었다면 말야."

"...도발하러 오신 거라면 돌아가세요, 공자님. 저는 이미 모든 걸 잃은 몸이니 지킬 명예도 없습니다."

이게 아닌가? 미리암의 눈썹이 조금 꿈틀거린다. 하지만 그 이상의 반응은 보여주지 않았다. 여기서 더 찔러볼까, 아니면 잠시 분위기를 누그러트릴까.

고민 끝에 택한 방법은 후자였다.

"아이 이름은 정했나?"

"..."

"달리 필요한 건 없고? 아이를 돌보는 게 쉬운 일은 아닐텐데."

"...정말 왜 오신 건가요?"

미리암의 눈빛은 죽어가는 짐승이 뿜어내는 마지막 기세처럼 보였다. 아직 환한 낮인데도 불구하고 형형하게 빛날 정도로 말이다. 나는 그런 미리암을 한동안 아무 말 없이 바라보다 원하는 답을 돌려줬다.

"미리암 오른 유바스. 당초의 계획이 실패한 지금 네가 뭘 꾀하는지는 모른다. 살고 싶어하는지 죽고 싶어하는지도 몰라. 알고 싶지도 않다."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미모에 홀려 멋대로 확신하고 결론 내리는 어리석음을 범할 생각 따위 없었다. 유바스가 꾸민 계책을 미리암이 헌책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야망과 탐욕이란 그런 것이다. 여인의 몸으로도 권세를 누리겠노라며 온갖 어려움을 감내하는 여걸들이 있음을 알기에 방심하지 않았다. 물론 사람의 측은지심, 감성을 자극하는 건 상냥한 미모와 구슬픈 처지에 놓인 미리암이 더 잘한다.

하지만 실리를 내세워 상대를 구슬리고 윽박지르는 건 내가 더 잘할 자신이 있었다.

"단지 네게도 이로운 제안을 건넬 뿐이다."

"이롭다? ...제게?"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에 뜸을 들였다. 우선 현실성있는 미래를 거론하는 것부터 시작하기로 다짐했다. 비언어적 표현에도 공을 들였다.

손동작은 크고 부드럽게. 미소는 최대한 자신감 있게. 눈동자는 흔들리지 않도록 단호하고 굳세게.

"지금 네게 남은 미래는 별로 밝지 않다는 걸 알아라. 머리 밀고 수녀원에 입회해 평생을 수절하며 살아가는 게 그나마 차선이겠구나."

"수녀원 입회가 차선이면, 공자님이 생각하시는 최악은 뭔가요?"

눈동자는 때로 말보다 더 많은 걸 말해준다. 누가 봐도 궁지에 몰린 건 미리암이었다. 그러나 체념으로 가린 눈빛 가장 깊숙한 곳에 반짝이는 무언가. 결코 사그라들지 않은 불꽃이 날 겨냥하고 있었다.

나는 그 불길한 불꽃에 정면으로 맞섰다.

"최악은 날 죽이겠다고 설치는 쪽이겠지. 성공해도 죽고 실패해도 죽는다. 아이의 목숨도 장담할 수 없다. 네 가문인 유바스도 군대를 동원해야 하니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다."

"..."

"한 명의 목숨으로 전쟁을 막겠다 해도 비난받을 결정이다. 헌데 한 명을 죽여 수천 수만을 사지로 몰겠다 하면 어느 누가 이해하고 옹호하겠느냐. 대의도 없고 정의도 없으며 실리도 없다. 그래서 최악이다."

초췌하기만 하던 미리암의 얼굴 위로 짙은 수심이 드리워진다. 감정을 나누어 담을 공간 하나 없는 이 쓸쓸한 방에서 그녀가 유일하게 바라볼 수 있던 건 편안히 잠든 아기 뿐이었다.

지금이 쐐기 박을 순간이다. 나는 가식적인 미소를 싹 지운 채 뒷짐 지고서 미리암을 바라봤다.

"미리암, 네 아버지가 네게 준 짐을 내려놓아라."

미리암은 바로 답해오지 않았다. 이해한다. 평생을 믿고 따라온 가족과 눈 부라리는 시댁 사이서 선택하는 건 당연히 어려운 일이었다. 미리암이 다시 입을 연 건 조금 시간이 지난 뒤, 슬슬 내 다리에 쥐가 나나 싶을 때였다.

"아직."

"응?"

"아직 제게 이롭다는 제안이 뭔지 못 들었습니다. 공자님."

미리암은 여전히 제 아이를 내려다보는 중이었다. 나는 그 모습에 실실 웃음을 흘리며 기꺼이 답해줬다.

"그 아이, 내 핏줄은 아니지만 유바스의 핏줄임은 확실할 터."

판타지 모나크에는 [임신한 딸을 시집보내 탁란시켜 땅 권리를 주장한다]는 계책이 있다고 말했었다.

우리 컴퓨터 속 중세 가주들의 열띈 토론을 거치며 보완되기까지 한 인외비도의 길 말이다. 실제로 이 계책은 싱글 플레이에서 AI 상대로 몹시 강력한 위력을 발휘했다.

슬슬 AI 상대하는 게 싱겁다며 멀티 플레이로 넘어온 사람들조차 심심찮게 당할 정도였다. 어찌나 파급력이 강했던지 유저간 결혼 동맹이 뜸해지기까지 했다.

그러나 누군가는 이런 지랄맞은 계략 속에서도 기회를 엿봤다.

탁란 계책이 결과적으로 사장된 건 상상도 못한 단점이 있어서였다. 땅주인의 상속권자들을 싹 다 죽여 물려받는다는 이 무시무시한 계략의 헛점.

"미리암, 너와 그 아이에게 유바스를 주마."

-누군가 울분을 터트리는 대신 생각을 바꿨다.

[내 가족이 죽는 것보다 상대 가족 죽이는 속도가 더 빠르면 역으로 내가 상대 땅 먹을 수 있는 거 아님?] 하고 말이다.

물론 생각만 하고 그쳤다면 단순한 뇌피셜로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이 획기적인 방법을 떠올린 유저는 생각만 하지 않고 실제로 행동에 나섰다. 그 결과, 간악한 술수를 부려 쉽게 땅 먹으려던 유저는 순식간에 멸문의 화를 입었다.

후계자들이 줄줄이 죽어나가는 바람에 역으로 시집 보낸 딸이 상속받게 된 것이다.

이쯤 되면 우기는 쪽이 뒤바뀐다. 네 씨 아니라고 말해도 아무튼 내 씨임, 아무튼 내가 가슴으로 낳았노라며 우겨대니 별 도리가 없었다. 그대로 모든 영지를 빼앗기며 게임오버.

들키지 않아도 일단 내 가족 중 하나가 죽는 순간 네 가족도 다 죽인다면서 동귀어진하려 드니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아예 너한테 주느니 다른 유저한테 준다면서 상속법을 바꿔버리는 경우도 허다했고.

이 치명적인 실패가 알려진 이후 탁란 계책은 사실상 컨셉용 예능용 플레이로 전락해버렸다. 들이는 품에 비해 짊어져야 할 리스크가 워낙 컸던 탓이다.

참 별 거 아닌 방법인데, 정작 생각이 여기까지 닿기가 어려운 방법이다. 모두들 이 말도 안 되는 잔인함에 경악하면서도 알뜰히 잘 써먹었다. 유저간 결혼 동맹이 다시 성행하게 된 이유였다.

수 틀린다 싶으면 서로 담가버리니 그냥 포기하고 상부상조하길 택한 것이다. 컴퓨터 게임에 몰입한 사람들도 처음 들었을 땐 혀를 내둘렀는데 현지인은 어떻겠는가.

미리암은 두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배꼽 위에 가지런히 모아놨던 양손을 들어올려 입가를 가려버렸다. 그것도 와들와들 떨기 시작하면서 말이다.

"정말. 정말 무시무시한 발상이십니다."

근데 이건 좀 억울했다. 유바스가 하려던 게 일가족 몰살인데 나더러 무시무시하다 하니 좀... 아니. 많이 억울하다. 내 말에 날이 선 건 이 때문이었다.

"왜. 우리 가족을 상대론 괜찮다가 막상 그 칼끝이 너희를 향하니 얼마나 흉험한 계획이었는지 이제서야 깨달았나?"

그래도 부끄러운 줄은 아는 모양이다. 미리암은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고개를 떨군 채 다시는 나와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나는 손등이 보이도록 오른손을 내밀며 힘껏 오만한 자세를 꾸며냈다.

"어차피 네가 유바스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은 내 제안 뿐이다. 권세 없는 여인의 삶이 어떤지는 지금 느끼고 있을 테지. 택하거라. 유바스의 여식으로 살다 죽을 건지."

"..."

"아니면 유바스의 주인으로 돌아갈 건지 말이다."

미리암은 참 많은 걸 느끼고 있었다. 비록 고개를 숙여 표정을 볼 순 없었지만, 미약하게 흔들리는 머리카락과 어깨만 봐도 묵직한 감정을 쌓았다는 게 보였다. 그러고 얼마 안 가 요란한 쇳소리가 바닥을 두드렸다.

시선을 아래로 내리자 단검과 불길한 색채가 담긴 유리병이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플랜 C. 예상대로다. 미리암은 유바스가 혹시 모를 사태에 맞서 준비해둔 최후의 자객이었다.

미리암은 나를 죽이거나 혹은 자결하거나. 이도 저도 아니면 아이를 죽여 전쟁의 도화선을 당길 존재로 안배된 것이다. 그런 미리암이 무릎꿇고 기어와 내 손에 입을 맞추고 있었다.

"미리암 오른 유바스. 내가 합당한 힘과 지위를 갖출 때까지 조용히 은거하며 살아라. 필요할 때 부르겠다."

"뜻대로, 뜻대로 하겠습니다. 주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