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신들의 투기장 (2)
카오틱의 숫자는 20명 남짓.
혼자서 상대하기에는 명백히 많은 숫자다. 여기가 6층인 것을 감안한다면, 저들 하나하나가 진현우와 비슷한 레벨에 도달했을 터.
'여기서 적들이 얼마나 더 올지 모른다.'
저 정도 인원이 서로 협력해서 진현우를 노리고 있다. 누군가의 사주를 받았다는 것.
다른 방에 있는 카오틱들도 상황을 파악한다면 곧바로 지원하러 올 가능성이 있다.
힘을 아끼면서 싸워야 한다.
'그렇다면.'
부서진 검이 허공을 갈랐다.
해일이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공간이 갈라지면서 수많은 검기가 쏘아졌다.
하지만 카오틱들도 이미 예측하고 있었다.
"막을 생각은 하지 마라!"
"피해!"
진현우의 해일은 많이 노출되었다.
워낙 화려하게 날뛴 탓에 그의 모습을 기록한 동영상들이 이리저리 돌아다닌 탓이었다.
해일을 막는 것은 위험하다는 걸 이미 알고 있는 카오틱들은 회피하는 것을 선택했다.
'그래 주면 나야 고맙지.'
그 대가로 카오틱들이 흩어졌다.
진현우는 다시금 허공을 베었다. 또다시 해일을 쓰는 것인가? 긴장하던 카오틱들의 사각지대에서 날카로운 검기가 튀어나왔다.
- 서걱!
"끅?!"
검기가 카오틱 둘의 목을 베어 냈다.
오직 해일만 의식하고 있었기에 사각에서 검기가 날아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 한 상황.
둘은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절명했다.
'지금.'
진현우는 땅을 박찼다.
동시에 그가 소환한 늑대들이 선두에 있던 카오틱들의 발목을 흉폭하게 물어뜯었다.
"크윽! 늑대 따위가!"
"조심해!"
그들의 시선이 늑대에게 쏠린 순간, 격하게 회전하는 도끼가 그들을 뒤에서 강타했다.
적중한 부위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끄아아아악!"
"허억!"
진현우는 고통스러워하는 카오틱들의 바로 코앞까지 도달했다. 놈들은 그가 곧바로 공격해 올 거라 생각하고 방어 태세를 취했다.
하지만 그건 무의미한 행동이었다.
"쿠후훗! 달콤한 꿈을 보여 주겠느니라."
"...!"
어차피 진현우는 공격할 생각이 없었으니.
대신 그의 어깨에 있던 미호가 카오틱들을 매혹했다. 그 눈동자에 당한 숫자는 총 셋.
"우아아아아!"
"끄르륵...?!"
"매혹! 빌어먹을, 매혹이다!"
"그런 스킬을 저놈이 어떻게 쓰는 거야!"
놈들이 아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6층까지 온 놈들답게 눈치가 빠르다. 아군이 무엇에 당했는지 금방 알아채 버렸다.
하나, 알아챈다고 해서 무슨 의미가 있을까.
"정신이 무너지는 경험은 어떻느냐?"
입가를 가리며 웃던 미호의 눈이 빛났다.
요사스럽게 빛나던 눈동자를 본 카오틱들은 순간 정신이 무너지는 듯한 감각을 받았다.
그리고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지는 것도.
"으, 으으... 크아아아아!"
"뭐, 뭐야! 이놈도 매혹에... 우아악?!"
"아냐. 저놈들은 매혹에 당한 게 아냐. 대체...!"
광란.
미호의 눈동자를 본 카오틱들은 광란에 빠졌고, 주변의 아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광란에 빠진 카오틱은 평소보다 능력치가 더욱 강화되어서 막기가 버거울 정도였다.
"미호, 매혹한 놈들을 시켜서 지원군을 부르라고 해. 아마 연락 수단이 있을 거다."
"흠, 알겠느니라."
진현우가 오는 걸 노리고 입장한 놈들이다.
서로 연락할 수 있게끔 수단을 갖추고 있을 거라고 예상했고, 그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매혹당한 카오틱이 수정구를 들었다.
"여기는, 카를로스. 타깃을 찾았다. 지금 우리가 있는 위치를 보냈다. 빨리, 지원을...."
- 뭐? 목표를 찾았나?
"그래, 찾았다. 서둘러라. 밀리고 있다!"
- 위치를 확인했다. 지금 바로 가지.
얼마나 지났을까.
진현우가 있던 방은 네 방향에 각각 거대한 문이 있었다. 그 문이 열렸고, 다른 방에 있던 카오틱들이 사방에서 밀려들었다.
"아군인가!"
"미첼! 저놈이다! 저놈을 죽여!"
카오틱들의 얼굴에 안도의 기색이 어렸다.
꼼짝없이 모조리 당하나 싶었는데 지원군이 와 줬으니, 저들과 협력해서 싸운다면....
"이 정도 숫자면 써도 되겠군."
"뭐?"
하지만 그게 진현우가 노리던 것이었다.
그에게서 새하얀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그 기운은 방 한가운데로 모였고, 그 덩치를 빠르게 부풀려 가면서 형체를 갖추기 시작했다.
거대한 비룡의 형체를.
"저, 저건...."
"저게, 뭐야...?"
천둥 비룡.
5층에서 압도적인 위용을 자랑했던 거대한 비룡이, 지금 콜로세움에 현현하고 있었다.
어디선가 환호성이 터지는 것이 들렸다.
비룡을 본 카오틱들은 넋을 잃었다.
- 크르르르....
영혼 동물은 하나씩 고유한 스킬을 가진다.
천둥 비룡이 가진 스킬은.
- 크으... 키하아아아아!
"뭐, 뭐, 으하아악?!"
브레스였다.
놈의 입에 샛노란 전류가 맺혔다. 그리고 카오틱들이 반응할 새도 없이 전류를 토해 냈다.
- 파지지지지직!
"끄으...?!"
"흐, 으으으아아!"
강력한 뇌전이 카오틱들을 덮쳤다.
브레스의 선상에 있었던 카오틱들은 온몸이 불탄 채 쓰러졌고, 그 반경에 있던 카오틱들은 흩어지는 전류에 순간적으로 마비되었다.
'환검.'
진현우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가 손에서 놓은 부서진 검이 수십여 개의 환검으로 분열했고, 마비된 적들을 덮쳤다.
그리고 마지막.
- 쿠우웅!
진현우는 깃발을 땅에 내리꽂았다.
폭군의 영역이 형성되면서, 죽은 카오틱들이 사자로 부활해 동료였던 이들을 덮쳤다.
투기장이 순식간에 아비규환이 되었다.
"이, 이익! 진현우... 이 새끼가아아!"
"말했잖아, 너희가 나하고 갇힌 거라고."
상황은 완전히 뒤집혔다.
카오틱들은 어떻게든 진현우에게 접근하려고 했지만 언데드들의 벽에 가로막혔다.
그런 놈들을 천둥 비룡이 사냥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빌어먹을 새끼들이, 날 무시해?!"
"신이 나와 함께하신다! 돌격!"
플레이어들도 방으로 몰려들었다.
대기실에서 봤던 랭커, 성기사와 검사. 알젠드라가 플레이어들을 이끌었고, 중국계의 검사, 리쉬엔이 단신으로 돌진했다.
'좋아. 이 정도면 다 정리됐고.'
거센 환호성이 들렸다.
그리고 눈앞에 메시지가 나타났다.
- 신들이 당신의 활약에 주목합니다.
- 관객들이 당신에게 환호를 보냅니다.
진현우는 무심한 눈으로 메시지를 봤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다가, 무언가가 자신을 관찰하고 있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사냥꾼의 감각이 뭔가를 경고하고 있었다.
'저건....'
곁눈질로 감각이 경고하는 곳을 봤다.
반투명해서 눈으로 인지하기 힘든 수정구들이 곳곳에 떠 있는 것이 보였다.
아마도 녹화용 수정구.
'내가 싸우는 걸 녹화하고 있었던 건가?'
진현우는 수정구를 못 본 척 시선을 돌렸다.
'카오틱들이 연합해서 나를 노렸다. 그리고 누군가가 내가 싸우는 걸 녹화했다.'
배후에 누군가가 있다.
아마도 둘 다 같은 놈일 것이다. 진현우는 그림자 속에 잠겨 있는 셰이드를 불렀다.
'셰이드, 수정구들이 움직이면 추적해라.'
- 시이이이....
셰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수많은 카오틱이 일방적으로 학살당하는 가운데, 첫 번째 투기장이 끝나 가고 있었다.
* * *
전투는 얼마 지나지 않아 끝났다.
살아남은 플레이어들은 생존에 기뻐하다가 아직 투기장이 끝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서로를 보는 눈빛이 묘해졌다.
"...."
"...."
기묘한 적막이 흘렀다.
이 방으로 온 카오틱들은 모두 죽었다. 하지만 플레이어들은 여전히 남아 있고, 3분의 1의 인원수만 남기에는 아직 멀었다.
플레이어들끼리 싸워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끼리 싸우는 건 그렇다 치더라도....'
'저 한국인을 이길 수가 있나?'
모두의 시선이 진현우를 향했다.
카오틱으로 만들어진 다수의 언데드, 그리고 거대한 천둥 비룡까지 수족으로 부리는 자.
상대하기에는 너무 까다로운 적이다.
"자, 그럼 이제 서로 죽여라."
"예?"
그런데 불쑥, 진현우가 그런 말을 꺼냈다.
모두의 표정이 멍해졌다.
"저는 여기서 가만히 지켜볼 테니까 서로 싸우시면 됩니다. 3분의 1만 남을 때까지."
"...너는 안 싸우겠다는 건가?"
알젠드라가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녀는 진현우가 소환한 언데드, 그리고 그것들을 소환한 진현우가 못마땅한 눈치였다.
"제가 끼어도 되기는 하는데...."
진현우는 자신의 뒤를 돌아봤다.
수많은 언데드가 그를 지키듯 서 있었다.
"그러면 좀, 밸런스가 안 맞지 않겠어요?"
"...."
너무도 분한 말이었지만, 플레이어들은 그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저 남자가 끼면 상대할 방법이 없다.
물론 알젠드라는 그 말을 부정하려 했다.
"하, 사악한 언...."
"단장님, 잠깐. 귀를...."
하지만 그녀의 곁에 있던 부하가 뭔가 충고를 했고, 알젠드라는 그걸 받아들였다.
그녀가 한 발자국 물러났다.
"좋다, 네 말대로 하지. 살인귀, 너는?"
"저놈은 벨 맛이 있는 놈인 것 같군. 신의 은총을 받은 다음에 내 손으로 직접 베겠다."
수많은 검을 가진 검사, 리쉬엔이 말했다.
다른 플레이어들도 진현우를 상대할 바에는 자기들끼리 싸우는 게 낫다는 결론을 내렸다.
다시금 잠깐의 정적이 흘렀고.
"우아아아아!"
"X발, 죽어! 난 지금 3수째라고!"
"나는 5수째다, 이 X새끼야!"
투기장에 또 한 번의 전투가 펼쳐졌다.
그 모습을 떨어진 곳에서 지켜보던 진현우는 천둥 비룡을 이용해 자신의 모습을 감췄다.
그리고 때마침 셰이드가 돌아왔다.
- 수정구의... 위치를 파악했다....
"좋아, 지금 바로 가 봐야겠군."
진현우는 조용히 방을 나섰다.
* * *
콜로세움에 있는 수많은 방.
그중의 하나, 일부 플레이어들과 수많은 카오틱이 불타고 녹아내린 방이 있었다.
그 중심부에 마법사, 휴즈가 서 있었다.
"시시한 놈들이군. 흠, 어디...."
그는 손짓을 하며 뭔가를 불러들였다. 그 손아귀에 반투명한 수정구들이 들어왔다.
수정구에 촬영된 장면은 진현우가 싸우는 장면이었다. 그걸 본 휴즈가 혀를 찼다.
"유신, 그 한국인이 다른 플레이어한테 왜 관심을 가지나 했더니. 이 정도였나?"
제우스 길드는 휴즈가 이번 콜로세움에 참가한다는 것을 알고 비밀리에 접근해 왔다.
그가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걸면서.
왜 그러나 했더니, 이제야 알 것 같았다.
"흠, 라이벌을 경계하는 것인가. 하여튼, 동양인들의 경쟁심이란. 협력할 줄은 몰라."
휴즈는 피식 웃었다.
"한심한 짓이군. 뭐, 나는...."
"뭘 그리 열심히 찍고 계시나?"
"...!"
등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
휴즈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비상시를 대비해서 영창해 놓는 마법을 발동시켰다.
그에게서 강력한 독이 뿜어져 나왔다. 접촉하는 것만으로도 상대를 중독시키는 맹독.
'어떤 놈인지는 몰라도 겁이 없는 놈이군.'
휴즈는 독 마법의 달인이었다.
독 내성조차도 뚫을 정도의 맹독. 그게 그를 78위의 랭커로 만들어 준 원동력이었다.
이 독이라면 어떤 놈이든....
"물었잖아, 뭘 그리 열심히 찍느냐고."
"무슨?!"
휴즈가 경악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 눈에 진현우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맹독에 당했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멀쩡했다.
"내 독을, 어떻게?"
"독? 아, 이 연기 말인가? 미안한데, 내가 독에는 좀 내성이 있는 편이라서 말이야."
"말도 안 돼. 내 독은 내성을... 커억!"
진현우가 휴즈의 목을 낚아챘다.
강력한 악력이 목을 힘껏 조르고 있었다. 그에 저항하듯 휴즈에게서 독이 뿜어져 나왔고, 그 독이 목을 조르던 진현우의 손을 잠식했다.
하지만 무의미했다.
'마, 말도 안 돼. 내 독이...!'
독이 통하지 않는다, 조금도.
진현우는 휴즈가 손에 쥔 수정구를 거칠게 빼앗더니, 안에 든 내용물을 확인했다.
"아무래도 내가 싸우는 걸 찍은 거 같은데."
"아, 아니. 이건...."
"뭐, 어디 사이트에라도 올리려고? 그럴 리는 없겠지, 78위의 랭커나 되시는 분께서."
진현우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어렸다.
"누구한테 보여 주려고 찍은 건가?"
"큭, 크으으윽! 동양인 따위가!"
위험하다.
이 상황은 지극히도 위험하다.
휴즈는 비상시를 대비해 준비해 둔 아이템을 이용해 곧바로 여기를 벗어나려고 했다.
하나 한발 늦었다.
- 서걱!
"...!"
네 번의 참격이 휴즈를 덮쳤다.
그 참격들이 노린 것은 그의 사지였다.
"헉, 히익! 히아아아악!"
순식간에 사지를 잃은 휴즈가 처절한 비명을 토해 냈다. 보통 후방에서 안전하게 싸울 마법사가 사지를 잃을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는 고통에 대한 내성이 약했다.
"뭐, 물어본다고 해도 말해 주지 않겠지."
진현우의 어깨에서 미호가 나타났다. 녀석은 휴즈를 보고는 입가를 가리며 웃었다.
"그래도 결국 대답하게 될 거야."
미호의 눈빛이 요사스럽게 빛났다.
157화
신성의 파편
진현우는 휴즈를 통해 정보를 얻어 냈다.
그렇게 얻어 낸 정보는, 어떻게 보면 예상 밖이었고 어떻게 보면 이미 예상한 정보였다.
"제우스 길드 그리고 유신이 시킨 건가."
진현우가 어떤 식으로 싸우는지, 가진 전력이 어느 정도인지 파악하고 싶었다고 한다.
단순히 들리는 얘기로 파악하는 게 아니라 영상을 통해서 확실하게 알 수 있게끔.
"끄으윽, 어렵지 않은, 일이라 생각했다."
"그렇겠지. 이 정도 수정구들을 다루는 건 네 수준에서는 어려운 일도 아닐 테니까."
"...."
거기에다가 매력적인 보상까지 준다고 하니, 일종의 소일거리 삼아서 한 것이리라.
그게 이렇게 될 줄은 몰랐겠지.
"좋아. 나하고 얘기했던 건 모두 잊어라. 이 수정구들도 마찬가지다. 알겠어?"
"...알겠다."
휴즈가 멍한 눈으로 대답했다.
사지에서 흘러나오는 피 때문에 이미 과다 출혈로 죽기 직전이다. 진현우는 검을 높이 들어 올렸고, 휴즈의 목을 베어 냈다.
'다음 층에서 만날 것 같다는 느낌이 드네.'
6층에서는 죽더라도 페널티 없이 부활한 채로 탑 바깥으로 나갈 수 있다.
휴즈 정도의 랭커라면 다음에 다시 도전해서, 큰 무리 없이 7층에 오를 수 있을 터.
'만약에 만난다면 그때는....'
확실히 처리해야겠지.
그렇게 진현우가 휴즈의 목을 베어 낸 순간, 투기장에서 거대한 함성이 울려 퍼졌다.
그리고 거대한 뿔피리 소리도.
- 승리한 검투사들에게 축복을.
- 50명의 생존자만이 남은 것을 확인했습니다. 잠시 후, 생존자들을 신들의 전장으로 전송합니다. 시야를 조심하십시오.
무미건조한 안내 목소리가 들리고, 그다음으로 찬란한 빛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
빛이 사라졌을 때, 진현우는 백색의 공간에 와 있었다. 처음에 왔던 대기실과 비슷한 곳.
차이가 있다면.
- 신들이 여러분의 전투를 지켜봤습니다. 조각상으로 다가가 신의 선택을 받으십시오.
거대한 조각상이 있다는 것.
강력한 신성이 느껴지는 조각상이었다. 온갖 신의 힘이 저 조각상에 담겨 있었다.
진현우는 주변을 둘러봤다. 이 방에 다른 플레이어는 없었다. 있는 건 오직 그뿐이었다.
"신이라."
진현우는 작게 코웃음을 쳤다.
세계의 탑에는 신이라는 존재들이 있다. 그것도 한둘이 아니라, 생각보다 꽤 많다.
신들은 초월적인 힘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추정인 이유는 간단했다.
'신이라는 놈들이 뭐 하는 게 있어야지.'
그렇다.
이 탑에는 신이라는 초월적인 존재가 있지만, 그들이 하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가끔 나타나서 신도들에게 나타나서 퀘스트를 내리고 값진 보상을 주는 게 고작.
직접적으로 힘을 쓰는 일은 없다.
'세상이 멸망했을 때도 그랬지.'
탑 공략이 불가능에 가까워졌을 때도.
세상의 멸망이 코앞까지 닥쳤을 때도, 신들은 신자들의 부름에는 답하지 않았다.
그 전까지는 답하던 이들이, 그때에만.
'딱히 힘을 빌리고 싶지는 않은데....'
이번 층에 한해서니까.
진현우는 조각상에 다가갔다. 그가 조각상에 손을 올리자 메시지가 나타났다.
강렬한 신성이 몸에 흡수되는 게 느껴졌다.
- 모든 신이 당신의 전투에 감탄했습니다.
- 모든 신이 당신을 선택하기를 바랍니다.
- 원하는 신을 선택하십시오.
그리고 기나긴 목록이 나타났다.
이 투기장을 지켜보고 있던 신들의 목록이었다. 그중에는 익숙한 신도 있었다.
'오크들이 섬기는 신이었던가.'
옛날에 진현우에게 전장에 핀 꽃이라는 전설급 아이템을 선물로 줬던 신이었다.
나름 내적인 친분이 있기는 하지만.
'이것보다 다른 신이 낫겠지.'
강력한 버프를 주는 신이 누가 있었더라.
진현우는 기억에 남는 신들을 확인했다. 전쟁의 신, 살육의 신, 사냥의 신....
매력적인 신들의 이름이 보였다.
"흠, 누구로 하는 게...."
"인간, 인간. 네 몸이 빛나고 있느니라."
"엉? 이 조각상에 손대서 그런 거겠지."
"그런 것이냐? 으음, 근데... 뭔가 이상하구나. 그런 것치고는 너무 빛나는 것 같구나."
미호가 귀찮게 굴었다.
녀석의 물음에 자신의 몸을 확인한 진현우는 깜짝 놀랐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의 몸이 형광등처럼 빛나고 있었으니까.
"뭐야, 이건? 나 왜 이렇게 빛나냐?"
"그걸 나한테 물어본다고 알겠느냐? 으으으음! 눈이 너무 아프구나! 저리 좀 가거라!"
"가길 어딜 가? 네가 눈을 가리든가. 아니, 그게 아니지. 이건... 나도 처음 겪는 일인데?"
6층은 전생에도 공략한 적이 있는 곳이다.
그때도 조각상에 손을 댔었고, 신의 선택을 받았었다. 전쟁의 신이었던가. 그때는 조각상에 손댔을 때 잠깐 빛이 난 걸로 끝이었다.
'신들이 다 선택해서 그런가? 아니, 아냐.'
이건, 뭔가 다르다.
진현우는 몸에서 느껴지는 감각에 집중했다. 자신의 몸이 뭔가를 흡수하고 있었다.
'이건... 뭐지?'
진현우의 몸 안에 그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리고 그 무언가가, 눈앞의 조각상이 가진 신성을 탐욕스레 흡수하고 있었다.
귓가에 소리가 들렸다.
- 쿵, 쿠웅! 끼리릭!
거친 심장의 박동 소리.
그리고 무언가가 작동하는 듯한 소리. 내면에 잠들어 있던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었다.
잠시 후, 메시지가 나타났다.
- 당신의 내면에 있는 큐브가 활성화됩니다. 잠들어 있던 빛이 활동하기 시작합니다....
"엉?"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메시지가.
진현우가 방 안을 뒤덮을 정도로 강렬한 빛을 내뿜었다. 또다시, 메시지가 이어졌다.
- 신들의 잔해가 당신을 선택했습니다. 이 선택은 거절할 수 없습니다.
"...누구세요?"
빛이 사그라들었다.
눈앞에 있던 조각상이 가지고 있던 강렬한 신성이 사라진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신성은, 진현우의 몸 안에 있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내가... 흡수했다는 건가?'
이 조각상에 담긴 신성을?
이해할 수 없는 일투성이었다.
- 당신은 신들의 잔해의 선택을 받아들였습니다. 특성, '신성의 파편'이 생성되었습니다.
"아니, 진짜 뭐냐고."
화룡점정을 장식하는 메시지에 진현우를 이마를 짚었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졌다.
* * *
예상치 못한 일이 생겼다.
진현우는 완전히 빛을 잃은 조각상을 멍하니 바라봤다가 특성의 설명을 확인했다.
· 신성의 파편 (C)
- 멸망했던 세계의 신들이 마지막으로 담았던 희망이 당신의 몸 안에 깃들었다.
이 신성은 아직 완전하지 않으며, 완성되지 않았다. 하지만 필요한 순간 당신에게 새로운 길을 밝히며, 예상치 못한 기적을 일으킨다.
당신은 이 탑의 등불이 되어야만 한다.
이 특성은 특수한 방법으로만 승급한다.
신성이란 특성의 설명이었다.
모호하기 그지없다. 이게 구체적으로 무슨 특성인지, 어떤 힘을 가졌는지도 알 수 없다.
특성을 강화할 방법도 나와 있지 않았다.
'신성력인가? 아니, 그딴 힘이 아니야.'
사제나 성기사는 신성력을 가진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신을 믿음으로써, 신이 가진 신성력을 빌려서 쓰는 것이다.
실제로 능력치 이름도 '신성력'이다.
하나 이건 다르다. 빌려서 쓰는 게 아니다.
'신성, 그 자체.'
신이 가지고 있는 신성한 힘. 그 자체가 진현우의 몸 깊숙한 곳에서 태동하고 있었다.
아직 완성되지 않았고 파편에 불과하지만, 분명히 그 자리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는 침음성을 흘렸다.
"큐브 그리고 빛...."
진현우를 과거로 회귀시킨 매개체.
탑에서도 몇 없는 '신화급' 아이템. 이 등급의 아이템은 하나같이 초월적인 힘을 지녔다.
과거로 회귀시킬 정도니 말할 것도 없다.
'그게 다가 아니었단 말인가?'
세상이 멸망하고, 큐브가 가동되었을 때.
진현우는 큐브 안에 담긴 빛을 보았다. 그 빛은 그를 삼켰고 이내 과거로 회귀시켰다.
그걸로 큐브의 역할은 끝이라 생각했다.
'멸망했던 세계의 신들의 잔해... 그게 큐브 안에 담긴 빛의 정체라는 거야, 뭐야?'
진현우가 빛에 삼켜졌을 때 신들의 잔해인지 뭔지 하는 것이 몸 안에 깃든 것이고.
여태까지 잠들어 있던 잔해는 조각상에 담긴, 신들이 담아 놓은 신성에 반응해 깨어났다.
그리고 그 신성들을 흡수한 것이다.
"이 탑의 등불이 되어야만 한다...."
묘한 글귀였다.
머리가 복잡해졌다. 하지만 지금 고민한다고 해서 뭐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었다.
정보가 부족하다.
'일단 신성력 같은 느낌으로 써야겠어.'
진현우는 광휘를 사용했다.
몸 깊숙한 곳에 있는 신성이 반응하면서 강력한 신성력을 일으켰다. 그 신성력이 일으킨 광휘가 엄청난 빛으로 사방을 뒤덮었다.
"우캬아아앗! 눈이 아프구나!"
"뭐야, 있었냐?"
"아까부터 있었느니라! 혼자 헛소리를 하길래 미쳤는가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미치긴 누가 미쳐. 미칠 것 같긴 한데."
진현우는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구체적인 사용법은 모르겠지만, 신성 계통의 스킬을 강화하는 기능을 가진 건 알겠다.
강화하는 정도가 좀 지나친 것 같긴 한데.
'이거면 생각보다 유용하게 쓸 수 있겠어.'
어쨌든 나쁘지 않은 보상이다.
문제는.
"야, 그래서 버프는?"
신들에게 선택받았을 때 얻을 수 있는 강력한 버프가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
'설마 신성이라는 특성만 주고 끝이냐?'
진현우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어이가 없는 상황이었지만 어쩔 수 없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라도 싸우는 수밖에.
- 당신은 신의 선택을 받았습니다.
- 대기실로 귀환합니다.
신의 선택은 받았지만 버프는 없는 상태로, 진현우는 플레이어 대기실로 귀환했다.
* * *
대기실에는 많은 플레이어가 모여 있었다.
좋은 신의 선택을 받은 이들의 얼굴은 밝았고, 그 반대인 이들은 표정이 몹시 어두웠다.
"좋은 신은 골랐나?"
"나한테 뭐 선택지가 있나. 동물의 신 말고는 선택한 신이 없더군. 그 신을 골랐지."
"허, 안 좋은 버프를 주는 신이잖나."
"나도 알아. 그러는 너는?"
"난 사냥의 신을...."
플레이어들은 어떤 신에게 선택받았고, 무슨 버프를 받았는지 얘기하느라 바빴다.
진현우는 그 모습을 무심히 지켜봤다.
- 쿠후훗. 시무룩하구나, 인간.
살랑거리는 꼬리가 진현우의 얼굴을 간지럽혔다. 미호가 재밌다는 듯이 웃고 있었다.
누구는 좋은 신의 버프를 받았다고 기뻐하는데, 자신은 어떤 버프도 받지 못한 상황.
"저 사람은 더 좋은 버프를 받았겠지?"
"그렇지 않을까? 1차 투기장에서 했던 걸 보면 신들의 선택은 다 받았을 텐데...."
"자기가 고르는 상황이군. 부럽네."
"...."
사람들은 진현우가 좋은 버프를 받았을 거라 생각했기에 더 환장할 것 같았다.
거기에다가 생존한 랭커, 알젠드라와 리쉬엔이 경계하는 눈빛을 보내기까지.
'다른 놈들은 상관없는데, 저놈들을 상대로 신의 버프 없이 싸우는 건 조금....'
힘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현우는 혀를 찼다. 그때, 대기실에 커다란 경고음이 울리더니 메마른 목소리가 들렸다.
- 신의 선택을 받은 것을 축하드립니다.
- 여러분은 자격을 증명했습니다. 잠시 뒤에 열릴 두 번째 투기장을 대비하십시오.
- 50명의 플레이어는 두 진영으로 나뉘어 두 개의 탑이 있는 투기장으로 소환됩니다. 자신의 진영의 탑을 수호하고, 상대방 진영의 탑을 파괴하여 승리를 쟁취하십시오.
두 번째 투기장은 일종의 공방전이었다.
자신의 진영에 있는 탑을 수호하면서, 상대방 진영에 있는 탑을 파괴하면 이기는 방식.
알젠드라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훗, 내게 딱 어울리는 전장이군."
아무래도 자신이 넘치는 모양이다.
그걸 가만히 바라보던 진현우는 따가운 시선을 느꼈다. 대기실의 구석에 있던 사이코패스 살인마, 리쉬엔이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주 탐욕스러운 눈빛으로.
- 인기가 많아서 좋겠구나, 인간.
"그래, 나도 정말 기쁘다."
진현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158화
리쉬엔
운이 좋다면 알젠드라, 리쉬엔과 같은 팀에 배정될 수도 있을 것이다.
진현우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럴 리가 없지."
- 과분한 꿈을 꿨구나.
당연하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알젠드라와 리쉬엔은 상대 팀으로 배정되었다. 진현우는 자신의 팀을 돌아봤다.
랭커급의 플레이어는 없다. 다 고만고만한 플레이어들. 그리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휴즈를 미리 처리해 두길 잘했네.'
만약에 살려 뒀다면 그놈도 상대 팀에 배정되지 않았을까? 그런 확신이 들었다.
진현우는 주변을 둘러봤다.
'탑 공방전.'
보이는 것은 드넓은 전장. 신전의 폐허처럼 생긴 곳이다. 그리고 북쪽과 남쪽의 끝에 거대한 탑이 상징물처럼 솟구친 게 보였다.
가운데를 거대한 장벽이 막고 있었다.
"저 탑을 파괴하라, 이건데."
"일단 다 같이 모여서 얘기나 해 봅시다."
"시작하려면 아직 10분 정도 남았나?"
두 번째 투기장에 소환되었지만, 전투가 시작되려면 아직 10분 정도의 시간이 남았다.
진현우와 24명의 플레이어는 한데 모였다.
"가장 경계해야 할 상대는 누구지?"
"말할 것도 없지 않나? 알젠드라와 리쉬엔이겠지. 그중에서도 알젠드라가 문제야."
"알젠드라...."
플레이어들이 인상을 찌푸렸다.
"성기사인데 특이한 스킬을 가지고 있어. 빛으로 된 기사단을 소환하는 스킬이지. 그 여자를 랭커로 만들어 준 스킬이기도 하고."
"전쟁에서 그렇게 강하다던데."
"어. 숙련도가 높아서 소환할 수 있는 숫자도 많은 데다가 개체 하나하나가 강하니까."
이번 투기장에 딱 맞는 능력이었다.
25대 25로 싸우는 전장에서 추가로 아군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스킬인 셈이니까.
또 하나는 리쉬엔.
"그놈은 일대일에도 능하고 다인전에도 능하다더군. 검을 더럽게 많이 들고 다니는 놈인데, 이기어검 느낌으로 쓴다고 들었다."
"이기어검? 그게 가능한 거였어?"
"스킬이 있으면 못 할 것도 없지. 소문으로 들은 거다만, 리쉬엔은 히든 클래스라더군."
다른 플레이어라고 무시할 수는 없다.
어쨌든 6층까지 올라온 이들이니까. 이 시기의 탑 공략의 최전선에 이른 자들이다.
진현우는 생각에 잠겼다.
"리쉬엔은 아마 날 노릴 거야."
"그쪽을? 아, 아까부터 널 엄청 노려보고 있긴 하더군. 그놈이 강한 놈을 좋아하거든."
"별로 기쁘지는 않은데.... 알젠드라는 스킬의 특성상 가장 선두에 나서겠지."
기사단을 소환하는 능력인 데다가 본인도 성기사. 최전선에 나서서 싸울 것이다.
힘 싸움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으니 굳이 무리할 이유도 없다. 인원은 저쪽이 우세니까.
'탁 트인 곳이라서 기습이 효과적이진 않아. 아군이든, 적이든 그렇게 생각하고 있겠지.'
그 인식을 역으로 이용해야 한다.
"알젠드라와 리쉬엔은 나 혼자서 상대하지. 탑을 지킬 최소한의 인원만 남겨 두고 나머지는 저쪽 탑을 기습하는 걸로 합시다."
"진심으로 하는 소리인가? 뭐야, 신들한테 엄청 좋은 버프라도 얻어서 이러는 건가?"
"그건...."
진현우는 할 말을 잃었다.
버프는 개뿔이. 하지만 플레이어들은 그리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대단한 버프를 얻었다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그, 그럼 괜히 하는 소리겠어?"
"오호, 어디서 나오는 자신감인가 했더니."
"무슨 버프인지 기대되는군."
진현우는 셰이드를 일으켰다.
각인의 힘으로 강화된 셰이드라면 이 인원을 삼킨 채로 이동하는 것도 가능하다.
기습하는 용도로 쓸 수 있다는 것이다.
"이걸로 허수아비를 만들 거다. 거기 다섯 명, 여기 서 보세요. 그림자가 잘 나오게끔."
"이거면 되나?"
"셰이드."
플레이어들의 뒤에 있던 그림자가 솟구쳤다. 그들과 비슷한 형상을 한 그림자들.
이것들을 허수아비로 쓸 것이다.
"멀리서 보면 사람인지 아닌지 구분이 잘 안 될 거야. 탑을 지키고 있는 척하면서 저쪽 탑을 기습하지. 시선은 내가 끌 테니까."
"네가 조금이라도 밀리면 탑은 부서질 거다. 게다가 이 정도의 정령이면 마력 소모도 클 텐데.... 감당할 수는 있는 거냐?"
"못 하면 못 한다고 했겠지. 가능해."
진현우는 탄생의 꽃을 꺼냈다.
이번 전투에서 이걸 다 쓰는 건 아까운 짓이지만, 꽃잎을 한 장 쓰는 것 정도는 괜찮다.
'저번처럼 만개를 쓰는 건 미친 짓이고.'
이번에도 그런 짓을 했다가는 진짜 죽는다.
대신에 꽃잎으로 마력 포션을 하나 만들기로 했다. 그 정도면 이번 전투에서 유용하게 쓸 것이다. 재료는 이미 주머니에 다 있으니.
'버프가 없으면 만들어야지.'
이걸로 어느 정도 보충하는 수밖에.
진현우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빠르게 계획 짜고 움직입시다."
"미치겠군. 이렇게 움직이는 게 맞나?"
"하, 실패해 봤자 쫓겨나기밖에 더 하나. 일단 저 친구가 하자는 대로 한번 해보자고."
일행은 빠르게 계획을 구상했다.
* * *
- 모든 시간이 경과했습니다. 두 번째 투기장, 탑 공방전을 시작합니다. 상대방의 탑을 먼저 파괴하는 진영이 승리합니다.
- 당신의 진영은 청탑입니다. 상대 진영의 적탑을 파괴하고 승리를 쟁취하십시오.
- 두 번째 투기장의 경우, 패배해도 목숨을 잃지는 않으나 큰 페널티가 주어집니다. 이 페널티는 일정 기간 동안 유지됩니다.
목소리가 들렸다.
전장의 한복판을 막고 있던 거대한 장벽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 너머에서 한 무리의 플레이어들이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가장 선두에 있는 것은 알젠드라.
"흠...."
맞은편을 본 그녀의 표정이 묘해졌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맞은편에 서 있는 것은 진현우 혼자. 다른 이들은 없었으니까.
"혼자서 우리를 상대하겠다는 건가?"
"나머지는 탑을 지키고 있는 것 같은데요."
"자신감을 넘어서 오만하기 그지없군. 아니면 그만큼 강한 버프를 얻었다는 건가...."
알젠드라는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
다수의 플레이어가 탑을 지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진현우 혼자 나와 있는 상황.
"적당히 상대하다가 도망칠 생각일지도 모른다. 전력을 확인하려는 걸 수도 있어."
"그럼 어떻게 할 겁니까? 리쉬엔을...."
"아니, 그 중국인은 놔둬라. 믿을 수가 없는 놈이야. 그걸 떠나서라도 저놈들이 뭔 짓을 할지 모르니 예비 전력으로 놔둬야 한다."
탑의 방비는 충분히 갖춰 뒀다.
리쉬엔도 근처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 여차하면 진현우를 상대하기 위해 올 터.
'저 무리에서 가장 까다로운 건 진현우다.'
개인의 무력도 뛰어나면서, 까다로운 소환물들도 다룰 수 있는 묘한 플레이어.
저놈만 처리하면 승리한 거나 마찬가지다.
마침 잡기 좋은 곳에 나왔으니.
"비룡을 소환하겠지. 한번 시험해 볼까."
알젠드라의 말대로, 저 너머에서 가만히 서 있던 진현우가 마력을 일으켰다.
지상에 거대한 형체가 나타났다.
천둥 비룡. 일렁이는 뇌전을 전신에 휘감은 비룡이 알젠드라와 플레이어들을 노려봤다.
- 파지지직!
그 입에 뇌전이 모였다.
천둥 비룡이 거세게 포효하며 알젠드라를 향해 브레스를 내뿜었다. 일직선으로 쏘아지는 뇌전의 숨결이 알젠드라를 덮쳤다.
"흥!"
알젠드라가 방패를 내세웠다.
빛으로 이루어진 여러 겹의 장막이 들이닥치는 뇌전의 숨결과 맞부딪쳤다.
장막이 거세게 흔들렸다.
"이 정도는...!"
몇 겹의 장막이 깨졌다.
하지만 파괴되지는 않았다. 천둥 비룡이 내뿜은 브레스는 끝내 알젠드라의 장막을 파괴하지 못한 채 사그라들고 말았다.
"진현우! 천둥 비룡이 있다면 혼자서 우리를 상대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나!"
천둥 비룡이 날개를 펼치며 날아올랐다.
드높은 공중에서 일방적으로 공격하겠다는 생각. 알젠드라는 그 얕은 생각을 비웃었다.
"빛이여!"
알젠드라가 신성한 빛을 일으켰다.
그녀에게서 나온 거대한 빛의 구체가 드높은 곳까지 올라갔고, 하늘을 밝게 밝혔다.
- 콰아아앙!
이윽고 천상에서부터 수많은 빛의 기둥이 쏟아졌다. 지상에 닿은 빛의 기둥은 그 형체를 바꾸었다. 거대한 기사들의 형태로.
- 쿠우우웅!
땅이 크게 울렸다.
무릎을 굽힌 기사들이 고개를 들었다. 그들의 등 뒤에서 거대한 날개가 펼쳐졌다.
그 광경을 본 진현우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건...."
"신께서 내게 내려 주신 선물이지."
알젠드라가 가진 스킬, 평범한 성기사였던 그녀를 랭커로 만들어 준 빛의 기사단.
놈들이 투기장의 전장에 강림했다.
"악을 멸하리라!"
그 숫자만 해도 수십.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은 알젠드라가 검을 내질렀고, 빛의 기사단이 일제히 움직였다.
그중 절반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빛의 기사들은 순식간에 천둥 비룡의 곁에 도달했다.
"하찮은 짐승을 떨어트려라!"
사방에서 천둥 비룡을 공격하는 기사들.
알젠드라는 손을 크게 젖혔다. 그 손아귀에 빛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창이 쥐어졌다.
"천벌을!"
- 캬아아아아악!
내지른 창이 하늘로 솟구쳤다.
단번에 천둥 비룡의 몸을 꿰뚫는 창. 디버프가 부여되면서 놈의 움직임이 굼떠졌다.
알젠드라는 코웃음을 쳤다.
'천둥 비룡. 강한 몬스터다만, 저놈이 소환한 것은 일반적인 천둥 비룡보다 약하다.'
첫 번째 투기장에서 카오틱들을 상대로 날뛰는 것을 보고 확신할 수 있었다.
천둥 비룡은 알젠드라가 게이트에서 목격한 적이 있는 몬스터였기 때문이었다.
그때에 비하면 위용이 한참 부족했다.
'저 정도면 빛의 기사들로 처리할 수 있다.'
그럼 남은 것은 하나뿐.
지상에 있던 빛의 기사들도 일제히 진현우를 향해 돌진했다. 진현우는 적들이 다가오는 것을 보면서, 미리 준비해 뒀던 약을 먹었다.
- '엘프 비전의 약'을 복용했습니다. 짧은 시간 모든 능력치가 소폭 강화됩니다. 마력의 최대량과 재생 속도가 크게 증가합니다.
신의 은총에 비하면 한참 부족하지만, 지금의 진현우에게는 충분한 버프였다.
그는 마력을 일으키며 타이밍을 쟀다. 그런데 그 순간,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 ...!
- .... ...!
"뭐야, 이것들. 왜 이래?"
진현우에게 돌진하던 빛의 기사단이 갑자기 걸음을 멈춘 것이었다. 놈들을 상대하려던 진현우도, 놈들을 소환한 알젠드라도 당황했다.
그녀가 황급히 외쳤다.
"뭣들 하는 것이냐! 빛의 신, 루를 거스르는 악을 당장 물리치란 말이다!"
- ....
빛의 기사들이 진현우를 유심히 바라봤다.
놈들의 빛으로 된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마치 믿을 수 없는 것을 보기라도 한 것처럼.
그걸 본 순간 진현우도 깨달았다.
'신성의 파편 때문인가?'
진현우의 몸 안에 있는 신성의 파편을 느낀 탓에 빛의 기사단이 혼란에 빠진 것이다.
무엇보다도 강렬한 신성이 느껴질 테니, 순간 그를 적으로 여길 수가 없게 된 것이다.
'기회로군.'
빛의 기사단이 걸음을 멈췄다.
알젠드라가 놈들에게 역정을 내고 있었다. 놈들이 정신을 차리기 전에 움직여야 한다.
넘칠 듯한 마력이 움직였다.
- 화아아악!
- ...!
빛의 기사단의 발밑에 마법진이 그려졌다.
냉기로 이루어진 마법진. 놈들이 반응할 새도 없이 마법진에서 눈보라가 솟구쳤다.
눈보라가 빛의 기사들을 얼렸다.
- 크르르....
짐승이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에 반응할 새도 없이, 마법진에서 거대한 늑대의 머리가 솟구치며 기사들을 삼켰다.
카드득! 그들의 몸이 짓이기는 소리가 났다.
- 맛이 없군. 다음에는 맛있는 걸 다오.
"저, 저건...!"
늑대의 대정령, 펜리스.
온몸이 얼음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늑대가 빛의 기사단을 보면서 으르렁거렸다.
놈의 포효가 전장을 가득 울렸다.
"큭, 으으윽!"
"마, 마력이...!"
그 포효가 멀리 떨어진 알젠드라를 비롯한 플레이어들의 마력을 순간 흐트러트렸다.
알젠드라가 경악했다.
'대정령을 소환한다고? 말도 안 돼!'
화련조차도 고위 등급의 정령을 소환하는 게 고작이다. 그런데 대정령을 소환하다니.
그것도 천둥 비룡을 소환한 상태로.
- 화아아아악!
지독한 눈보라가 사방을 뒤덮었다.
펜리스가 일으킨 눈보라였다. 순식간에 사방이 눈으로 뒤덮였다. 알젠드라와 플레이어들의 몸에 냉기로 인한 디버프가 부여됐다.
- 카아앙!
"크으윽!"
눈보라 사이에서 날아드는 검기.
검기가 닿는 것과 동시에 돌진해 오는 진현우를 보면서 알젠드라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 전투, 혼자서는 쉽지 않다.
"리쉬엔!"
그녀는 황급히 지원군을 불렀다.
근방에서 이 전투를 지켜보고 있을 남자를.
159화
신성
휘몰아치는 눈보라 속.
격렬한 검합이 오가고 있었다. 알젠드라는 숨을 쉴 틈도 없이 검격을 막아 내고 있었다.
'이놈, 공격이...!'
빠르다. 그리고 종잡을 수가 없다.
정면에서 들이닥치는 칼날. 그걸 겨우 막아 내면 허벅지를 노리고 도끼가 날아들었다.
날아드는 도끼를 가까스로 방패로 쳐 내니, 이번에는 칼날이 갑자기 사복검으로 변했다.
"끄흐으윽!"
사복검이 그녀의 등을 깊숙이 찔렀다.
알젠드라는 속으로 욕을 내뱉으면서 방패를 앞으로 내질렀다. 방패에 빠른 속도로 신성력이 모였고, 그렇게 모인 신성력이 폭발했다.
- 퍼어어엉!
방패 형태로 쏘아진 신성력이 진현우를 강타했다. 그의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알젠드라가 메이스를 높이 들었다.
"신이시여, 제게 힘... 아악!"
자신을 강화하는 버프를 쓰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진현우는 그리 놔둘 생각이 없었다.
거대한 얼음이 그녀의 등을 강타했다. 다른 플레이어를 사냥하던 펜리스의 마법이었다.
"크, 헉...!"
삽시간에 달려든 진현우의 무릎이 알젠드라의 턱을 강타했다. 크게 휘청거리는 몸.
어느새 나타난 마창이 그의 손에 쥐어졌고, 휘청거리던 알젠드라의 복부를 꿰뚫었다.
"허억!"
대악마, 헬만의 마창.
마창에 깃든 지독한 마기가 알젠드라의 복부를 파고들었고 상처를 부식시켰다.
그녀의 몸이 디버프로 둔화되었다.
"지원군이 왔나."
"뭐...?"
진현우는 알젠드라의 복부를 걷어찼다. 그리고 곧바로 신성한 방패를 펼쳤다.
저 멀리서 여섯 자루의 검이 쏘아졌다.
제각기 다른 종류의 검이 놀라운 속도로 쇄도하더니 진현우의 방패를 크게 베어 냈다.
- 카드드드득!
"리쉬엔!"
방패를 꿰뚫은 검들이 진현우를 노렸다.
하지만 그게 닿는 일은 없었다. 그보다 먼저 진현우가 섬광을 이용해서 검들을 피했다.
쉬리릭! 검들이 주인에게로 돌아왔다.
"알젠드라, 혼자서 가능하다 하지 않았나?"
"큭, 그건...!"
산발이 된 머리, 검은 장포를 입은 남자. 리쉬엔이 알젠드라에게 비웃음을 보냈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뒤로 물러나서 회복이나 해라."
"...시간을, 끌어 줘."
알젠드라는 그 호의를 거절하지 않았다.
재빨리 물러난 그녀는 기도를 올리면서 상처를 치료하려 했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 여기 사냥감들은 아무런 맛도 안 나는군.
"대정령...!"
사냥을 끝마친 펜리스가 알젠드라를 노렸다. 허나 그녀를 도와줄 수 있는 이는 없었다.
리쉬엔은 진현우를 정면에서 노려봤다.
"첫 번째 투기장에서부터 싸우고 싶었다, 진현우. 네 이름이 굉장히 유명하더군."
"그래?"
"유명한 놈을 한번 썰어 보고 싶었거든. 크흐흐, 게다가 한국이라. 더 마음에 들어!"
리쉬엔의 곁에 수많은 검이 집결했다.
금방이라도 쏘아질 것만 같았지만, 진현우는 리쉬엔이 모은 검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알젠드라, 리쉬엔. 둘 다 모였네."
"뭐?"
진현우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어렸다.
그가 쏘아 낸 마창이 하늘 높은 곳까지 치솟았다. 그리고 어디선가 거대한 괴성이 들렸다.
"천둥 비룡! 탑을 공격해라!"
- 키아아아아아!
천둥 비룡의 포효였다.
눈보라 너머로 거대한 비룡이 나아가는 것이 보였다. 그걸 본 알젠드라가 기함했다.
"설마!"
순식간에 상대 진영의 탑, 적탑까지 도달한 천둥 비룡이 잠깐 지상에 안착했다.
탑으로 인해 만들어진 거대한 그림자. 거기서 한 무리의 플레이어들이 솟구쳤다.
"처음부터 이걸 노린 거였나!"
플레이어들을 등에 태운 천둥 비룡이 탑의 정상까지 도달했다. 놈의 입에 뇌전이 모였다.
"저, 적이다!"
"미친, 저기서 왜 나오는 거야!"
- 콰르르르르!
적들이 대응하려고 했지만, 그보다 먼저 천둥 비룡의 브레스가 탑 위를 덮쳤다.
무시할 수 없는 공격. 적들은 황급히 브레스를 방어했고, 아군이 그 틈에 뛰어내렸다.
"다 죽여!"
"너희는 가서 코어부터 부숴! 빨리!"
탑을 파괴하는 방법은 하나.
정상에 있는 코어를 파괴하는 것이다. 그걸 파괴하면 탑이 알아서 붕괴한다.
아군은 천둥 비룡을 앞세운 채 적들을 상대했고, 일부는 코어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놈들은 어디서 나온 거야!"
"탑을 지키고 있던 게 아니었나?!"
"아니, 잠깐...!"
적들은 맞은편의 탑을 확인했다.
청탑을 지키던 이들의 몸이 녹아내리는 것이 보였다. 그림자로 된 허수아비들이었다.
화아악! 눈보라가 더욱 격해졌다.
"속았나!"
"빌어먹을, 처음부터… 아아악!"
청탑을 돌아본 알젠드라의 복부를 거대한 발톱이 깊숙이 할퀴었다.
그녀는 바닥을 나뒹굴면서 경악했다.
'대정령에 어둠의 정령, 게다가 천둥 비룡 같은 소환물까지... 동시에 다룬다고?'
불가능한 일이다.
몸에 마력의 샘이라도 들어 있는 게 아니고서야 이 정도면 마력이 고갈될 수밖에 없다.
알젠드라는 황급히 리쉬엔을 돌아봤다.
"누구든 탑을! 리쉬엔!"
"흠."
탑이 파괴되면 끝장이다.
알젠드라는 본인이 진현우를 막는 동안 리쉬엔이 탑에 있는 적들을 처리해 주길 바랐다.
하지만 불가능한 일이다.
"나도 그러고는 싶다만."
거세게 휘몰아치는 눈이 뭉치기 시작했다.
그렇게 뭉친 눈은 얼음이 되었고, 곧 거대한 벽이 되어서 진현우 주변을 단단히 감쌌다.
빠져나가지 못하게 막은 것이다.
"크흐흐, 이미 늦었어!"
"저 미친놈이!"
리쉬엔이 광소를 터트리며 돌진했다.
여섯 자루의 검이 그를 뒤따랐다. 그는 그중에서 기다란 태도를 잡으면서 팔을 젖혔다.
태도가 벼락처럼 진현우의 목에 쇄도했다.
- 카아앙!
쉽게 막을 수 있는 공격.
하지만 리쉬엔의 목적은 공격을 성공시키는 게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시선을 돌리는 것.
태도가 밀려나는 순간, 그의 주변에 있던 검들이 일제히 진현우를 향해서 쏘아졌다.
"여섯 자루면 적지 않나?"
진현우는 검을 손에서 놓았다.
분열한 환검이 날아드는 리쉬엔의 검들과 충돌했다. 그리고 두 주먹을 움켜쥐면서, 한 줄기 섬광처럼 리쉬엔의 코앞까지 도달했다.
"듣던 대로 재주가 많은 놈이군!"
태도가 진현우의 머리로 떨어졌다.
그는 들이닥치는 칼날을 주먹으로 쳐내면서 진각을 밟았다. 꽈아앙! 순식간에 내지른 주먹이 리쉬엔의 복부를 크게 강타했다.
그의 몸이 요란스럽게 밀려났다.
'일부러 빗맞은 건가.'
주먹에 느껴지는 촉감이 가볍다.
진현우는 손아귀를 펼쳐 도끼를 소환하면서 땅을 박찼다. 높이 도약한 그의 도끼가 리쉬엔을 내리찍었고, 강한 충격파가 일어났다.
- 카드드득! 카아앙!
"하!"
공격을 막아낸 태도가 부러졌다.
리쉬엔의 왼손이 허리춤에 매달린 검으로 향했다. 그리고 순식간에 발도하면서, 인지할 수 없는 속도로 진현우의 목을 노렸다.
그 공격을 갑옷의 방어막이 튕겨 냈다.
"잔재주를...!"
진현우의 연격이 이어졌다.
주먹이 리쉬엔의 안면을 노렸다. 그게 막히자 곧바로 놈의 무릎을 있는 힘껏 걷어찼다.
순간 굽혀지는 리쉬엔의 몸. 그 목덜미를 붙잡고, 안면을 무릎으로 강하게 올려 찍었다.
"크하악!"
리쉬엔의 코에서 피가 왈칵 쏟아졌다.
그는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면서 검을 크게 휘둘렀다. 그 검에서 기습적으로 쏘아지는 검기가 진현우의 가슴께를 노리고 쏘아졌다.
교차한 두 주먹이 검기를 막아 냈다.
"흐으읍!"
리쉬엔은 앞으로 낮게, 그러면서도 빠르게 뛰면서 손에 쥔 검을 힘껏 젖혔다.
그 검에 마력이 짙게 어렸다.
- 콰르르르르!
그리고 검을 휘둘렀다.
발을 지면에 고정하면서, 연속적으로 검을 휘두르며 숨 쉴 틈 없는 연격을 퍼부었다.
그 검격들이 수많은 검기를 일으켰다.
"...!"
일제히 진현우를 노리는 검기들.
하지만 그게 그에게 닿는 일은 없었다. 어느새 되돌아온 부서진 검이 흐르는 강물처럼 움직이면서 쏟아지는 검기들을 흘려 냈다.
"하!"
부서진 검이 허공을 갈랐다.
리쉬엔의 사각지대에 공간이 갈라지면서, 그 사이로 거대한 검기가 쏘아졌다.
그의 발달한 감각이 공격을 감지했다. 리쉬엔은 급하게 몸을 틀면서 검기를 피했다.
- 쿠우우웅!
하나 그걸로 큰 틈이 생겼다.
진현우의 도끼가 땅을 내리쳤다. 주변의 땅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렸다.
중심을 잃고 위태롭게 흔들리는 리쉬엔. 어느새 나타난 환검들이 그를 노렸다.
'이놈...!'
리쉬엔의 곁으로 여섯 자루의 검이 모였다.
그 검들이 그를 중심으로 격하게 회전하면서, 그를 노리는 환검들을 쉴 새 없이 막아 냈다.
진현우가 그를 향해 돌진했다.
- 카아앙!
맞부딪치는 도끼와 검.
치열한 합이 이어졌다. 리쉬엔도, 진현우도 숨을 쉴 겨를도 없이 무기를 맞부딪쳤다.
공방은 끝없이 이어질 것만 같았다.
'미호.'
그 공방을 먼저 깬 것은 진현우였다.
그의 어깨에서 나타난 미호의 두 눈동자가 요사스럽게 빛났다. 강력한 마안이 리쉬엔의 정신을 파고들었고 환각이 보이게끔 했다.
"환각인가! 하지만...!"
리쉬엔은 환각을 대비해 뒀다.
강력한 마안이지만, 그에게는 아주 잠깐의 환각을 비추는 게 고작이었다.
하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새 스킬을 시험하기 좋은 장소군.'
한 줄기 섬광이 번쩍였다.
순식간에 리쉬엔의 코앞까지 들이닥친 진현우는 땅을 짓누르며 강하게 진각을 밟았다.
그리고 주먹을 크게 젖혔다.
'이 스킬, 본 적이 있다.'
그걸 본 리쉬엔의 눈빛이 번뜩였다.
파쇄권. 진현우가 이미 몇 번이고 썼던 스킬이다. 리쉬엔도 저 스킬의 존재를 알고 있다.
그 위력도 대강이나마 짐작이 갔다.
'저 정도면 충분히 막을 수 있다.'
리쉬엔은 빠르게 판단했다.
마침 곁에는 여섯 자루의 검이 모두 모인 상황. 이걸로 공격을 막아 내고 곧바로 반격한다.
진현우의 마력이 움직였다.
- 휘이이이이!
방출되는 마력.
그 마력들은 낯선 기운으로 바뀌었다. 백색과 황색이 뒤섞인 찬란한 기운으로.
진현우의 주먹이 그 기운들을 흡수했고, 주먹을 중심으로 거센 회오리가 일어났다.
'조금 달라졌나? 아니, 그래도....'
리쉬엔의 발달한 감각이 판단했다.
상대방을 얕보는 것이 아니다. 강력한 스킬이고, 적지 않은 피해를 입힐 것이다.
달라졌으나 막을 수 있는 공격이다. 그의 특성은 잘못된 판단을 내린 적이 없었다.
'곧바로 반격한다.'
여섯 자루의 검을 겹쳐서 방어막을 형성했다. 그리고 몇 자루의 검을 더 만들어 낸 후, 일부 검들을 시야의 사각으로 빼돌렸다.
공격을 막자마자 반격하려는 속셈이었다.
실제로 리쉬엔의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막히면 바로 유수로 공격을....'
진현우는 성멸권을 내지르면서, 이 공격이 막혔을 때의 대처법을 생각하고 있었다.
찰나의 순간.
바로 그때, 메시지가 나타났다.
- 신들의 투기장의 효과로 '신성의 파편 (B)'이 아주 잠깐 원래의 힘을 되찾습니다.
- 멸권의 위력이 대폭 강화됩니다.
내면에 있는 무언가가 반응했다.
진현우의 주먹에 어린 신성한 기운이 강렬한 빛을 내뿜었다. 마치 별이 마지막 순간에 일으키는 초신성이라도 보는 것처럼.
"이, 이건...."
리쉬엔의 표정이 아연해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막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의 감각이 막을 수 없다고 경고했다.
순식간에 갑자기 위력이 증폭되었다.
"말도 안 돼."
여섯 자루의 검으로 세운 방어막.
성멸권이 방어막을 강타했다. 아니, 강타했다는 말은 다소 어폐가 있다고 봐야 했다.
닿는 순간, 여섯 자루의 검이 사라졌으니까.
"무, 무슨!"
성멸권에 닿은 검들이 순식간에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사태에 리쉬엔은 경악했고, 그 몸이 떨렸다.
성멸권이 리쉬엔의 복부를 강타했다.
"컥...!"
황금빛 광채가 사방으로 퍼졌다.
주먹에 어린 신성이 한데 응축되었다.
순식간에 점으로 변한, 한계치까지 응축한 신성이 해방되면서 거대한 폭풍을 일으켰다.
- 콰아아아아!
"크아아아아악!"
거세게 회오리치는 신성의 폭풍.
그에 닿은 리쉬엔의 장포가, 검들이 소멸하고 신성이 그 몸을 갈기갈기 찢어 버렸다.
이윽고 그 폭풍이 사그라들었을 때.
"으, 크허억...."
남은 것은 없었다.
더는 리쉬엔이라고 부르기 힘들 정도로 난도질된 형체만이 땅에 널브러져 있을 뿐.
그걸로 끝이었다.
160화
부서진 대륙 (1)
리쉬엔은 죽었다.
일련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알젠드라는 예상치 못한 사태에 할 말을 잃었다.
랭커 둘을 혼자서 죽인 상황에 놀라서?
그것도 있었지만, 더 큰 이유가 따로 있다.
'저 스킬은 대체....'
조금 전에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본 스킬의 위력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어서였다.
거기서 느껴지는 강렬한 신성도.
알젠드라 본인이 섬기는 신에게 힘을 받았을 때 느꼈던 것과 비슷한 신성이 느껴졌다.
"너, 너는... 누구냐?"
"뭐?"
진현우는 알젠드라 앞에 섰다.
그녀는 이미 펜리스에 의해 제압된 상태였다. 그녀의 질문에 그는 인상을 찌푸렸다.
"이미 알면서 뭘 물어보는 거야?"
콰직!
검이 알젠드라의 심장을 찔렀다.
잠시 후, 그녀의 몸이 흐릿해지면서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이곳은 죽더라도 부활하는 곳.
탑 바깥에서 부활해서 나타날 것이다.
'여기 페널티가 꽤 셌던 걸로 기억하는데.'
목소리가 괜히 경고한 게 아니다.
능력치에 스킬 랭크 같은 것들까지 크게 감소하기 때문에, 리쉬엔이든 알젠드라든 한동안은 플레이어로 활동하기 힘들 것이다.
"좋아, 그럼...."
- 저쪽도 거의 끝나 가는 것 같군. 나는 이제 돌아가겠다. 너도 더는 못 버틸 것 같으니.
"어, 고생했다."
진현우는 저 너머의 적탑을 봤다.
적탑에서의 전투도 끝나 가고 있었다.
서로 인원수는 비등한 상태. 거기에 아군에는 천둥 비룡이라는 전력이 추가됐으니 적들로서는 버틸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끄어억...!"
"이놈이 마지막이다! 코어는?!"
"거의 다 파괴했다! 모여서 때려 부숴!"
마지막으로 남은 적을 처리한 아군은 모여서 코어를 일제히 공격하기 시작했다.
코어는 얼마 버티지 못했고.
- 콰르르르르!
"빨리 비룡에 올라타! 무너진다!"
이윽고 적탑이 무너져 내렸다.
아군이 코어를 파괴한 덕이었다. 그들을 태운 천둥 비룡이 하늘을 날아 지상에 도달했다.
"끝났군."
도미노처럼 무너져 내리는 탑.
이번 층이 끝났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 * *
정확하게 말하자면 6층, 신들의 투기장은 아직 끝난 상황이 아니었다.
한 번의 투기장이 더 있다.
하지만 큰 의미가 없는 투기장이었다.
- 승리한 것을 축하드립니다.
- 두 번째 투기장에서 승리한 용사분들에게는 다음 층으로 나아갈 권한이 주어집니다.
- 세 번째 투기장은 두 번째 투기장을 통과한 용사들끼리 싸워서 승자를 가리는 곳입니다. 승자에게는 특별한 보상이 주어집니다.
- 하지만, 기권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세 번째 투기장은 일종의 보너스였다.
다음 층으로 가고 싶다면 여기서 끝내고 가도 된다. 만약에 아이템을 얻고 싶다면 세 번째 투기장까지 남아서 하고 가면 된다.
살아남은 플레이어는 25명.
"...."
"...."
플레이어들은 서로 눈치를 봤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진현우를 흘깃 보더니,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손을 들었다.
"나는 기권하겠소."
"나도. 승산도 없는데 뭐 하러 싸워?"
"도저히 이길 자신이 없다."
진현우를 제외한 나머지 24명의 플레이어는 모두 세 번째 투기장을 기권했다.
이들은 진현우 개인이 가진 무력이 어느 정도이고, 어떤 소환물을 다루는지 봤다.
싸운다고 한들 이길 수가 없는 상대였다.
- 1명을 제외한 나머지 용사들이 기권했습니다. 세 번째 투기장의 승자가 가려졌습니다.
- 진현우, 축하드립니다.
- 승자에게 보상이 주어집니다.
"...."
촌스러운 팡파르 소리가 들렸다.
진현우의 얼굴이 떨떠름해졌다. 뭐 한 것도 없이 승자가 됐으니 기쁠 것도 없었다.
허공에서 새하얀 상자가 내려왔고, 진현우는 그걸 받아서 주머니에 따로 챙겨 뒀다.
-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6층의 시련을 극복하고 세 번째 투기장에서 승리할 것.
- 보상으로 영웅 등급 칭호 [투기장의 용사 (효과: 모든 능력치 +10, 다수의 적을 상대할 때 신체 능력 강화 小)]를 획득했습니다.
업적 보상도 하나 들어왔다.
투기장의 용사. 여러 적을 상대하는 일이 워낙 많으니 꽤 도움이 되겠다 싶었다.
- 7층으로 향하는 문이 열렸습니다.
- 또한 7층을 통과한 플레이어들을 위한 사냥터, '천상의 수련장'이 개방됩니다. 원한다면 이곳에서 충분한 경험을 쌓을 수 있습니다.
- 그럼, 안내를 종료합니다.
그 말을 끝으로 목소리가 사라졌다.
저 너머에 포탈이 열렸다. 플레이어들이 하나둘씩 사라졌고, 진현우도 포탈로 들어섰다.
그러자 넓은 섬이 나타났다.
하늘에 떠 있는 섬.
- 여기서 떨어지면 죽을 수도 있겠구나.
"왜, 던져 줄까?"
- 흥! 나는 날 수 있느니라!
이 섬에는 별다른 퀘스트가 없다.
여러 개의 구역이 있고, 그 구역에서 몬스터들이 꾸준히 나타나는 지극히 단순한 구조.
던전도 몇 구역 있다.
'여기 한계 레벨이 100이었으니까.'
레벨 100까지는 여기서 올려야 한다.
다음 층을 생각한다면, 레벨은 최대한 올릴 수 있는 데까지 올리고 가는 게 맞으니까.
"아그니스 통제가 약해졌다더니 사실이군."
곁을 지나가던 남자가 말하는 게 들렸다.
"원래는 아그니스를 비롯한 몇몇 길드가 통제하던 곳이었던가? 요즘 좀 덜하긴 해."
"음, 아그니스가 왜 그러는지는 모르겠는데… 덕분에 다른 길드도 통제를 멈췄지."
"이걸 운이 좋다고 해야 하나."
남자들이 서로 대화를 나누며 걸어갔다.
원래는 천상의 수련장에 있는 좋은 던전이나 사냥터를, 길드들이 통제하고 있었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누가 막거나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행위가 더 성행했었다.
아그니스가 그 대표적인 길드였고.
- 네 명령을 잘 듣는구나, 그 여자.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나쁘지 않은 결과다.
어쨌든 자신에게 이득으로 돌아왔으니.
"좋아, 한동안 사냥만 계속해 볼까."
진현우는 몬스터 사냥에 나섰다.
* * *
천상의 수련장에서의 사냥은 단조로웠다.
자리를 잡고 사냥하다가, 몬스터를 다 사냥하면 다른 곳으로 옮겨서 또 사냥하는 나날.
그렇게 일주일의 시간이 지났다.
[진현우]
· 레벨: 100
· 클래스: 웨펀 마스터
· 칭호: 투기장의 용사
· 근력: 301 (+40) · 민첩: 273 (+40)
· 체력: 275 (+45) · 마력: 203 (+32)
· 마기: 105
마침내 6층의 한계 레벨인 100에 도달했다.
꽤 상징적인 숫자였다. 레벨 100에 도달하면 새로운 직업 특성과 스킬이 생기기 때문.
웨펀 마스터는 스킬을 익힐 수가 없는 클래스였으니, 직업 특성 하나가 생성되었다.
그리고 기존의 직업 특성이 강화됐다.
· 신묘한 기교 (A): 기술을 더욱 효과적이면서 파괴적으로 쓸 수 있는 방법을 깨달았다. 무기를 이용한 스킬의 위력이 50% 상승하며, 마력 소모량이 20% 감소한다.
· 재능 개화 (A): 신체에 잠재된 재능을 꽤 개화했다. 모든 능력치가 +30 상승하며, 레벨 업 시 얻는 능력치가 1포인트 증가한다.
능력치가 이상할 정도로 높다 싶더라니, 재능 개화의 등급이 오른 덕분이었다.
게다가 신묘한 기교라는 특성까지.
'스킬 대미지라, 좋네.'
언제, 어느 상황이든 좋은 특성이다.
진현우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상태창을 껐다. 이제 필요한 레벨은 모두 채웠다.
남은 것은 상위 층으로 올라가는 것뿐.
'그 전에 잠깐 지구를 좀 들를까.'
하나 확인하고 싶은 게 있다.
진현우는 탑 바깥으로 나갔다. 그리고 탑의 입구에 있는 표지판을 유심히 바라봤다.
침식률이 적힌 표지판이었다.
- 침식률: 71%.
침식률은 특이한 성질이 하나 있다.
높아질수록 올라가는 속도가 빨라진다는 점이다. 50% 아래에서 오르는 속도와 그 위에서부터 오르는 속도는 차원이 다르다.
'71%면 좀 위험한데.'
아마 지구에 여러 이변이 생겼을 것이다.
실제로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진현우는 한국으로 돌아간 뒤, TV로 뉴스를 확인했다.
- 아시다시피 침식률이 70%를 돌파했습니다. 그로 인해 전 세계에서 이변이 계속해서 발생하고 있는 상황인데요. 김혜정 리포터.
- 예, 여긴 상록수 공원입니다. 어제 게이트가 나타났다가 플레이어들이 공략해서 사라진 곳입니다. 그런데 오늘 똑같은 장소, 똑같은 위치에서 다시 게이트가 나타났습니다.
- 이런 적은 처음이죠?
- 네, 맞습니다. 게이트가 나타났던 지역에, 하루 만에 또 게이트가 나타난 건 처음입니다.
화면에 공원의 모습이 보였다.
연이어서 게이트가 나타나 완전히 황폐해진 공원. 다른 나라들도 상황은 비슷했다.
- 일본의 나고야시는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게이트 사태로 일대가 마비된 상태입니다.
-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상황입니다. 바다에서 해양 몬스터들이 밀려들고 있습니다. 미국의 플레이어가 집결해서 막고 있으나....
- 안전지대로 지정되었던 일부 지역은 곧 안전지대가 해제된다는 경고가 나타났습니다.
일본, 미국, 중국, 프랑스, 어느 나라든.
침식률이 70%를 넘은 순간부터 부쩍 늘어나기 시작한 게이트로 고통받는 중이었다.
모두 탑 공략이 멈췄기 때문이었다.
- 플레이어들은 대체 뭘 하는 겁니까!
- 7층이 내분과 전쟁으로 엉망이라는 얘기는 들었습니다. 단합이 안 된다고 하던데요.
- 어떻게든 해야죠. 국가 차원에서 플레이어들을 강제로 소집해서 뭐든 해야 합니다.
플레이어들을 규탄하는 여론도 생기는 상황. 그걸 지켜보던 진현우는 혀를 찼다.
"익숙한 광경이로구만."
세상이 망해 가고 있다.
사실 전생에서도 있었던 일이다. 그때도 탑 공략이 7층에서 지지부진했었으니까.
어느 정도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다.
'여러 길드에, 여러 나라가 뒤섞였으니.'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곳이었다.
애초에 첫 단추부터 잘못 끼우기도 했고. 그 원흉이 제우스 길드라는 게 문제였지만.
'전생에서는 윤서희를 중심으로 뭉쳐서 큰 피해를 감수하고 공략했었던가.'
이게 생각보다 스노우 볼이 컸다.
7층에서 큰 피해를 입은 탓에 나중에 대전쟁이 일어났을 때 제 힘을 못 썼었으니까.
뭐가 됐든.
'7층은 전생 때보다 빨리 공략해야 한다.'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진현우는 휴대폰을 들었다.
'샬럿과 하이드를 불러야겠군.'
그 둘이 필요하다.
* * *
그로부터 며칠 뒤.
진현우는 샬럿과 하이드 그리고 하이드의 동료들과 함께 세계의 탑 앞에 서 있었다.
"이렇게 빠르게 7층으로 가게 될 줄이야."
하이드가 혀를 내둘렀다.
그와 샬럿은 진현우와 별개로 탑을 오르고 있었다. 진현우는 그런 둘을 불러서 일반적인 속도보다 훨씬 빠르게 탑을 등반했다.
둘의 도움이 필요해서였다.
"7층 공략이 이렇게 안될 줄은 몰랐어."
"흠, 네메시스에서 다른 나라와 협력해서 뭔가를 한다던데, 잘 안되는 모양이더군."
"근데...."
하이드의 동료들이 진현우를 흘깃 봤다.
"저희가 간다고 뭐가 달라질까요?"
"모르죠."
진현우는 탑의 문 앞에 섰다.
이 인원으로 7층에 간다고 해서 뭐가 달라질까. 아무도 모른다. 그래도 해야 한다.
그게 자신이 과거로 온 이유니까.
"뭐든 해 보면 달라질 겁니다. 갑시다."
쿠우웅!
탑의 거대한 문이 열렸다.
- 7층: 부서진 대륙으로 향합니다.
- 입장 가능 레벨: Lv.100~Lv.140.
백색으로 물든 시야. 뒤틀리는 감각.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왔을 때, 기이하고도 묘한 풍경이 진현우와 일행을 반겼다.
161화
부서진 대륙 (2)
가장 먼저 보인 것은 하늘이었다.
산산이 부서지고, 조각난 하늘. 그 조각들 사이로 우주 같은 풍경이 얼핏 보였다.
지상도 마찬가지였다.
"기괴한 광경이군."
넓은 대륙이 펼쳐져 있다.
대륙도 하늘과 별반 다를 것 없이 여러 조각으로 쪼개져 있다. 그 조각 사이의 틈에는 하늘과 마찬가지로 우주 같은 풍경이 보였다.
쪼개진 대륙의 조각들은 모두 달랐다.
어디는 동양풍이었고, 어디는 판타지풍이었으며, 또 어떤 곳은 지하 동굴 같기도 했다.
'여러 배경의 대륙이 혼합된 곳.'
그것이 부서진 대륙이다.
각 조각마다 온갖 배경을 가진 대륙의 지역이 있고, 그게 한 대륙에 모여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큰 특징이 있다.
- 부서진 대륙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 이 대륙은 여러 대륙의 지역이 뒤섞인 곳입니다.
- 여러분은 부서진 대륙에 있는 점령지들을 차지할 수 있습니다. 각 점령지는 특산품을 생성합니다. 이걸 판매하여 '차원 골드'를 얻을 수 있으며, 다양한 것을 구매할 수 있습니다.
- 상위 층으로 올라가고 싶다면 '차원 파괴자'라는 플로어 보스를 격파하십시오. 하지만.
목소리가 길게 늘어졌다.
- 차원 파괴자는 특수한 방법을 이용해야지만 격파할 수 있습니다. 그 방법은, 이 대륙의 모두가 단합해야지만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게 부서진 대륙의 기믹이다.
점령지를 점령해서 특산품을 얻을 수 있고, 그걸 판매해서 차원 골드를 얻을 수 있다.
그런 식으로 힘을 쌓아서 플레이어들끼리 단합하고 '차원 파괴자'를 죽이는 것.
그게 상위 층으로 올라가는 방법이다.
'근데 뭐, 그게 쉽게 될 리가 없지.'
온갖 나라, 온갖 플레이어들이 뒤섞인 상황인데 그게 되겠는가. 거기에 카오틱의 명령을 받는 배신자들도 분명히 있을 텐데.
7층은 개판이 될 수밖에 없다.
"음, 저건...."
"현우야, 저기서 싸우고 있는데."
"플레이어들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저 너머에서 두 무리가 싸우는 게 보였다.
한 무리는 갑옷을 갖춰 입은 기사들이었고, 다른 한 무리는 장포 따위를 입은 이들이었다.
두 무리가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
"차원 골드로 산 병사들이야."
"샀다고? 아, 그래. 그런 기믹이 있다 했지."
"그게 무슨 말이에요?"
"7층에서만 얻을 수 있는 차원 골드로 병사나 여러 아이템을 살 수 있다고 들었다. 그렇게 산 병사들로 점령전을 벌이는 거겠지."
병사들의 뒤에 플레이어들도 보였다.
진현우가 보기에는 무의미한 소모전으로밖에 안 보였지만, 누가 신경이나 쓰겠는가.
특산품이 있는 이상 차원 골드는 계속 모일 것이고, 병사들은 계속 살 수 있을 테니까.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점령지를 하나 점령하는 것이다.
특산품이 필요하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걸로 고용할 수 있는 병사들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 전에.
"누가 온다."
진현우는 고개를 돌렸다.
지금 그들이 있는 곳은 7층의 시작 지점. 그들을 제외한 다른 신규 플레이어들도 있었다.
그리고 그들을 노리는 세력도 있었다.
"신입인가? 오, 이번에는 좀 많군."
"...."
수많은 병사들이 밀려들었다.
그 뒤에 있는 것은 플레이어들. 스킨헤드에, 인상이 굉장히 험상궂은 서양인들이었다.
그들이 킬킬거리면서 웃었다.
"좋아, 오자마자 정신이 없겠지만 잘 들어라. 우리는 오블라카 연맹이다. 서쪽의 점령지들을 여럿 지배하고 있는 연합체지."
"우리가 점령지는 많은데 인력이 부족해서 말이야. 특산품을 캘 인력을 모집하고 있다."
오블라카. 아마도 러시아 쪽 플레이어다.
그들이 손짓하자, 병사들이 흩어지면서 막 7층에 들어선 플레이어들을 포위했다.
"그러니까 선택권을 주마. 얌전히 우리를 따라와서 노가다를 뛰든가, 아니면 죽어라."
"현우야, 저거 선택권 맞아?"
"맞겠냐? 그냥 강요하는 거지."
7층에는 NPC들이 없다.
있는 거라곤 플레이어들과 몬스터들뿐. 시작 지점을 관리할 이들도 없을 수밖에 없다.
게다가 한창 전쟁까지 벌이고 있으니, 몇몇 세력이 대놓고 저런 짓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가만히 있을 리는 없을 테고. 어쩔 건가?"
"기다려 봐."
이런 일이 있을 거라는 건 짐작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지원군을 미리 불러 뒀었는데.
'슬슬 올 때도 되지 않았나?'
진현우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땅이 울렸다.
수많은 말이 달리는 소리. 모두의 시선이 소리가 들린 곳, 동쪽으로 향했다. 거기에서 어떤 무리가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고 있었다.
"큭, 저놈들은...."
"제기랄! 병사들 다시 불러들여!"
오브라카의 길드원들이 황급히 방벽을 세웠다. 그리고 시야를 가리던 먼지가 가라앉았다.
한 무리의 기사들과 플레이어들이 보였다.
"이 새끼들이, 아직도 버릇을 못 고쳤나?"
"저리 꺼져! 이 러시아 새끼들아!"
"빌어먹을, 임호석. 저놈이 여긴 왜!"
한국의 플레이어들이었다.
그들 사이에는 곰처럼 거대하면서 근육으로 가득 찬 몸을 가진 중년의 남성이 있었다.
임호석 한국의 5대 길드 중 하나인 사자심의 길드장. 진현우가 부른 지원군이었다.
'임호석을 보낼 줄은 몰랐는데.'
정확히 말하자면 윤서희가 보낸 거긴 하다.
자신은 누구든 좋으니 지원군을 보내라고만 했으니까. 임호석을 보낼 줄은 몰랐다.
임호석이 무식하게 큰 해머를 빼 들었다.
"시작 지점에서 양아치 짓 하지 말자고 협약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새 잊었나? 엉?"
"하! 여기서 협약을 지키는 놈이 있나?"
"그건 내 알 바가 아니고."
임호석이 오브라카의 길드원들에게 해머를 겨누었다. 엄청난 무게를 지닌 해머였는데, 한 손으로 드는 모습이 놀라울 정도였다.
"아까 선택권을 준다고 했었나? 우리도 똑같이 선택권을 주지. 여기서 꺼지든가, 아니면 계속 양아치 짓을 하다가 뒈지든가."
"이 새끼가...!"
"정확하게 10초 주마. 10, 9, 8...."
임호석이 조용히 숫자를 셌다.
그의 곁에 있던 기사들과 플레이어들이 전투태세를 취했다. 오브라카 연합은 저들에 비해서 숫자도, 전투력도 부족한 상황.
'망할, 상위권 랭커가 여긴 왜!'
'어쩔 수 없군. 지금은 물러나야겠어.'
'다음에 만나면 반드시....'
오브라카 연합은 빠르게 판단을 내렸다.
일단 여기서 달아나고 연합에게 보고한다. 그 뒤에 복수할 기회를 찾으면 된다.
"물러난다!"
오브라카 연합이 물러나기 시작했다.
병사들도, 연합의 플레이어들도 진현우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들은 오직 임호석과 사자심 길드만을 경계하면서 물러나고 있었다.
"...."
"...."
임호석과 진현우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가 눈동자를 움직이며 신호를 보냈다. 진현우는 부서진 검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그리고 검을 손에서 놓았다.
- 콰르르르르!
이윽고 환검이 펼쳐졌다.
순식간에 나타난 수많은 검이 허공을 가로지르면서, 물러나던 오브라카 연합을 덮쳤다.
그게 신호였다.
"크아아아악!"
"좋아. 다 죽여라! 한 놈도 살려 두지 마라!"
사자심 길드와 그 휘하의 기사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오브라카 연합에게 돌진했다.
연합은 예상치 못한 기습을 당한 상태.
"뭐, 뭐야!"
"그냥 보내 준다고 하지 않았었나!"
"7층에서 그걸 믿었나? 순진한 놈들이군!"
일방적인 전투가 펼쳐졌다.
진현우와 하이드, 샬럿도 전투에 동참했고, 전투는 얼마 지나지 않아 끝났다.
오브라카 연합의 일원이 모두 쓰러졌다.
"끄, 으으윽... 비겁한, 놈들...."
"시작 지점을 덮친 놈들이 할 소린가?"
"아, 안 돼. 사, 살려...!"
적들이 목숨을 구걸했지만, 무의미했다.
피가 사방에 튀었다. 적대 세력인 오브라카 연합의 일원을 굳이 살려 둘 이유가 없었다.
임호석이 진현우에게 다가왔다.
"눈치가 빨라서 좋군."
"그냥 보낼 것 같지는 않아서요."
"음. 오브라카는 우리를 적대시하는 연합이라서 말이야. 여기서 살려서 보내는 것보다는 죽이는 게 나아. 나중에 귀찮아지거든."
해머에 묻은 피를 털어 내면서 씨익 웃는 임호석의 모습은 굉장히 기묘했다.
그가 진현우의 상태를 살폈다.
"괜찮나?"
"예. 제때 와 주셔서 다행입니다."
"근처에 머무르면서 지켜보고 있었지. 요즘 유명한 플레이어를 직접 봐서 영광이군."
진현우는 임호석이 내민 손을 맞잡았다.
근육으로 가득 찬 손이었다. 그는 진현우와 그 일행들을 데리고 온 말에 타게끔 했다.
"우리 연맹이 있는 곳으로 가려면 시간이 좀 걸릴 거다. 말에 타는 게 편할 거야."
"잘 타겠습니다."
철갑으로 무장한 말이 땅을 내달렸다.
풍경이 빠르게 바뀌었다. 부서진 대륙에 있는 여러 점령지의 풍경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싸우는 병사들의 모습도.
"상황은 어떻습니까?"
"뭐, 보다시피지. 바깥 세상은 망해 가는데 여전히 단합하지 못하고 싸우고 있어. 차원 파괴자를 죽일 방법도 전혀 못 찾아냈고."
"차원 파괴자...."
임호석이 저 너머를 바라봤다.
부서진 대륙의 정중앙 부분에 수많은 빛의 기둥이 모여서 만들어진 장막이 보였다.
"저기가 7층의 플로어 보스, 차원 파괴자가 있는 곳이다. 들어가려면 특정 특산품을 조합해서 만든 아이템이 필요하지."
"차원 파괴자를 죽이려면 또 특산품들을 조합한 아이템들이 필요할 거고요."
"그래. 문제는 그게 뭔지 모른다는 거다."
임호석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장막을 없앨 방법은 알아냈다. 몇몇 나라의 세력들이 격파하려고 시도도 했었지. 뭐, 하나같이 결과는 참혹했다만...."
"죽여도 부활하던가요?"
"아니, 애초에 죽이지도 못했다. 부활하는 모습도 못 봤다더군, 너무 강해서."
그 뒤로는 차원 파괴자를 공략하려고 들어가는 플레이어들도 없어졌다는 모양이다.
진현우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야 조합 아이템으로 약화시켜야 잡을 수 있는 플로어 보스니까 그렇지.'
생각보다 상황이 더 좋지 않았다.
문뜩 전생의 윤서희는 정보도 없이 이 상황을 어떻게 극복했는가 의구심이 들었다.
"오브라카 연맹이었던가요? 다른 나라는 뭉쳐서 움직이는 거 같던데, 우린 어떻습니까?"
"그것도... 엉망이지."
임호석이 쓰게 웃었다.
"네 말대로다. 다른 나라는 길드 하나를 중심으로 뭉쳐서 세력을 형성했다. 그 나라에서 가장 강한 길드를 중심으로 해서 말이야. 우리나라로 치자면 제우스 길드겠지."
그래서 한국의 플레이어들이 처음 7층에 도달했을 때 제우스를 중심으로 뭉치려 했다.
문제는.
"그 제우스가 중심이 되는 걸 거부했다. 제우스 산하의 길드만을 데리고 따로 세력을 형성했지. 우리는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됐고."
구심점이 되어야 할 제우스 길드가 산하 길드들을 데리고 따로 세력을 차린 상황.
그것만으로도 한국에게는 치명적이었다.
전력이 어마어마하게 깎이는 셈이니까.
"그 뒤부터는 뭐, 엉망이었지. 구심점을 잃은 길드들은 모두 흩어졌다. 그나마 네메시스가 힘을 써서 세력을 만들기는 했는데...."
"타국에 비하면 한참 부족하다."
"그렇지."
임호석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안다. 이제 막 여기에 온 플레이어나, 바깥의 사람들이 보면 한심해 보이겠지. 세상이 망해가는데 아무것도 못 하는 얼간이들."
7층의 플레이어들이라고 위기감을 느끼지 않은 건 아니었다. 나름의 노력을 하긴 했다.
"여러 연합의 수장을 모아서 회의를 열고 다양한 노력을 했다만... 그럴 때마다 일이 생기더군. 너도 알다시피 배신자가 많지 않나."
"카오틱에게 협력하는 놈들 말이죠."
"그래. 그러면서 많은 사고가 생겼고 서로 의심만 쌓이게 됐다. 이제 와서는... 후우. 협력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는 상황이지."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웠고, 잘못 끼운 단추를 외부의 수작 때문에 바로 할 수도 없었다.
진현우는 속으로 혀를 찼다.
'7층의 기믹이 최악이긴 하지.'
플레이어 간의 단합이 필요한 층.
그게 가능하기에는 너무 멀리 왔다.
'그럼 강압적인 방법을 쓰는 수밖에.'
진현우는 고개를 들었다.
저 너머, 동양풍의 요새가 보였다. 앞을 걸어가던 임호석이 요새를 가리켰다.
"미르 연맹의 점령지에 온 걸 환영한다."
네메시스가 중심이 되어서 만들어진 한국의 연맹, 미르 연맹의 본거지가 있는 점령지였다.
162화
화해
- 점령지 '낭천'으로 진입합니다.
미르 연맹의 본거지 역할을 하는 점령지의 이름은 '낭천'이었다. 동양의 건축 양식으로 지어진 요새가 인상적인 점령지.
신기하게도 노을이 지는 것처럼 점령지 전체가 노을빛으로 물든 곳이었다.
"병사들이 꽤 많군요."
"음. 무술을 쓸 줄 아는 차원 병사들이다."
성벽은 석궁을 쥔 병사들이 지켰다.
척 보기에도 오랜 수련으로 단련된 몸. 저런 이들을 차원 골드만 주면 고용할 수 있다.
"여기 지하에는 특산품이 있지. 허락된 일부 인원만이 진입해서 캘 수 있게끔 했다."
"저한테 말해도 되는 겁니까?"
"왜, 배신이라도 할 건가?"
임호석이 진현우를 서늘하게 바라봤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윤서희가 넌 믿을 수 있을 거라더군. 뭘 보고 믿을 수 있는 건지는 모르겠다만, 그 여자가 그리 말할 정도면 나도 믿어야겠지."
"그거참, 고맙다고 해야 할지."
넓은 요새 내부는 네메시스와 다른 길드의 플레이어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차원 병사들도.
"저기서 기다리고 있을 거다."
임호석이 점령지의 중심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커다란 궁궐이 세워져 있었다.
곁에 있던 샬럿이 감탄했다.
"와오, 사극 드라마 보는 느낌?"
- 흐흠, 뭔가 고향을 보는 기분이로구나.
진현우는 궁궐에 들어섰다.
조금 더 안으로 들어가자 넓은 접견실이 나타났다. 다른 곳의 모습을 비춰 주는 여러 통신구가 있는 방에, 윤서희가 서 있었다.
그녀가 진현우의 존재를 인지했다.
"왔군요. 기다렸습니다."
"오랜만입니다. 회의 중이셨습니까?"
"예. 조금 일이 있어서...."
윤서희를 비롯한 여러 플레이어가 보였다.
일부는 네메시스의 간부였고, 일부는 미르 연맹에 합류한 길드의 길드장들이었다.
진현우와 샬럿, 하이드는 의자에 앉았다.
"...."
윤서희는 말없이 진현우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한숨 섞인 웃음을 터트렸다.
"한심한 일이군요. 얼마 전만 해도 신인이었던 당신이 올라올 때까지 7층을 공략도 못 했으니. 얼굴을 들 수가 없을 정도예요."
신인으로 영입하려고 했던 남자였는데 어느새 자신과 같은 층에 도달해 버렸다.
그가 빠르게 올라온 것도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최전선의 공략이 늦은 탓이 컸다.
"바깥 여론이 안 좋던데요."
"저희를 규탄하고 있겠죠? 압니다."
모를 리가 없다.
알고 있음에도 해결할 방법이 마땅치 않다는 게 문제였지. 윤서희는 손가락을 튕겼다.
접견실에는 7층의 여러 장소를 비추는 수정구가 있었는데, 그중 하나의 화면이 바뀌었다.
"방벽이군요."
"예. 이미 들어서 알겠죠? 여기 플로어 보스인 차원 파괴자가 갇힌 곳입니다. 몇 달 전에 저 방벽을 해제하는 방법을 알아냈죠."
"던전에서 제조법을 찾아냈거든."
임호석이 덧붙였다.
7층에는 점령지 외에도 여러 던전이 있었다. 필요한 아이템의 제조법을 알아내려면 그런 던전들을 반드시 공략해야만 한다.
"저 방벽을 해제하는 아이템을 만드는 데 막대한 특산품이 들어갔어요. 쌓아 뒀던 두 달 치의 특산품이 한 번에 날아갈 정도였죠. 특산품을 가진 세력이 큰 결심을 하고 바쳤었어요."
윤서희가 다시금 손가락을 튕겼다.
수정구의 화면이 한 번 더 바뀌었다. 완전히 폐허가 된 점령지의 모습이 새로이 나타났다.
"그래서, 그 특산품을 바친 세력은 어떻게 됐을까요? 지금은 멸망하고 없어졌습니다. 기회를 엿보던 다른 세력이 공격했었거든요."
"이유는... 말할 것도 없겠군요."
두 달 치의 특산품을 허망하게 날렸으니, 다른 세력보다 차원 골드가 한참 뒤처질 터.
7층에서 차원 골드가 뒤처진다는 것은, 동시에 병력이 부족해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모두 그 모습을 봤어요. 그러니 특산품을 꽉 움켜쥐고 놔주려고 하지를 않죠. 자칫 잘못했다가는 자기들도 저렇게 될 테니까."
윤서희라고 다를 건 없었다.
자신이 잘못된 판단을 내리는 순간, 연맹에 있는 모든 플레이어가 죽을 수도 있으니까.
그녀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또 하나의 문제는 어떤 특산품이 필요한지 저희도 구체적으로 알지 못한다는 점이겠죠."
"유저들도 모르더군. 7층은 게임에서 해 본 적이 없다던가. 방벽을 해제하는 아이템처럼 제조법을 입수해야 알 것 같은데...."
"근처의 던전은 다 탐험해 봤지만 없더군요. 아마 다른 점령지를 찾아봐야 할 거 같아요."
그게 쉬울 리가 없다.
진현우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7층의 지도를 볼 수 있을까요?"
"얼마든지."
윤서희가 7층의 지도를 건넸다.
어디에 어느 세력이 있는지도 자세히 적힌 지도였다. 진현우는 기억을 더듬었다.
'필요한 제조법은 셋.'
세 개의 던전을 탐험해야 한다.
하나는 미국이 만든 연합의 점령지에 있었고, 하나는 카오틱들의 점령지에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은 하나는....
'제우스 길드의 세력권에 있군.'
한숨이 절로 나오는 위치였다.
셋 다 규모가 있는 세력이니까 던전 탐험은 열심히 했을 터. 제조법을 가지고 있을 확률이 높다. 미국은 가지고 있었던 기억이 난다.
'카오틱은 빼앗으면 될 일인데....'
문제는 제우스 길드였다.
"제우스 길드가 협력을 해 줍니까?"
"천만에요. 어떤 특산품을 가졌는지도 공유하지 않아요. 자기들끼리만 움직이면서 주변 세력을 공격하고, 점령지를 뺏고 있죠."
"가장 이해가 안 가는 놈들이다."
임호석이 인상을 찌푸렸다.
"뭘 하려는 건지 모르겠어. 세상이 저 지경이 된 걸 모르는 것도 아닐 테고. 이 상황에서도 저런 짓을 하고 있다는 건...."
"꼭 탑을 오르는 걸 방해하는 것 같군요."
"...."
장내에 침묵이 감돌았다.
윤서희도, 임호석도. 다른 이들도 그 말을 꺼낸 진현우를 놀란 눈으로 바라봤다.
하나 그들도 내심 품고 있던 생각이었다.
'탑을 오르는 걸 방해한다라.'
그게 사실이라면 뭔가 목적이 있을 터.
진현우는 인상을 찌푸리며 지도를 봤다. 지금 당장 제조법 하나를 입수할 방법이 있다.
"카오틱 세력이 근처에 있군요."
"자기들을 아발란치라고 자칭하는 놈들입니다. 저희보다 더 위층에서 활동하는 카오틱들이 내려와서 세력을 구축했다고 하더군요."
"더 위층에서요? 그게 가능한가요?"
샬럿이 놀라서 물었다.
아직 7층이 공략되지 않은 상황인데 카오틱들은 더 높은 층까지 도달했다니.
믿기 힘든 이야기였다.
"여기보다 더 높은 층에 카오틱과 마인을 위한 층들이 있다더군요. 일정 레벨에 특수한 방법으로 입장하는 곳인데, 거기서 세력을 구축했다고 하더군요. 본거지 같은 느낌이죠."
"마인은 층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는다더군. 대적자와 계약한 자들은 탑의 규칙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게 아닌가 추측하고 있다."
접견실에 있는 이들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진현우도 이미 알고 있는 정보였다. 그리고 저 정보 말고도 추가적인 정보 역시도.
'일부 층은 아직 플레이어가 등반하지 못한 곳임에도 카오틱은 활동할 수 있다.'
그래서 탑을 등반하다 보면 만전의 준비를 마친 카오틱과 싸워야 하는 때도 있었다.
그게 가능한 이유는 하나.
'카오틱은 힘을 대가로 대적자와 계약을 맺은 이들. 대적자와 계약을 맺은 순간부터, 카오틱들은 탑의 주민으로 간주된다.'
지구의 사람으로 여겨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렇기에 카오틱들이 탑을 등반하더라도 침식률에는 어떠한 영향도 주지 못한다.
탑의 규칙을 어느 정도 무시할 수 있는 것도 그들이 탑의 주민으로 여겨지기에 가능한 일.
하이드가 팔짱을 끼며 입을 열었다.
"이 카오틱들을 어떻게든 처리해야겠군."
"두 번째로 시급한 문제긴 하다. 우리와 인접한 곳에 자리를 잡았는데, 매번 하이에나처럼 우리가 틈을 보이기를 기다리고 있거든."
"틈만 보이면 공격할 생각이겠군요."
"그래. 실제로도 그랬었다. 몇 번 카오틱 세력 탓에 위험한 일을 겪었던 적이 있었지."
임호석이 혀를 찼다.
하지만 카오틱은 어디까지나 두 번째로 시급한 문제. 가장 시급한 문제가 있었다.
"가장 큰 문제는, 아그니스입니다."
다시금 화면이 바뀌었다.
커다란 화면에 차원 병사들이 보였다. 타오를 것 같은 적색의 로브를 입은 마도사단.
그들은 저 너머에서 한 무리의 병사들이 걸어오는 것을 확인하더니 모습을 감췄다.
잠시 후.
- 콰아아앙!
온갖 마법이 건너편의 병사들을 강타했다.
대응할 틈도 없이 쏟아진 마법에 병사들이 큰 피해를 입었다. 마도사단이 모습을 감추고 퍼부은 마법이었으니 대응할 수 있을 리가.
"물러난다!"
병사들의 피해를 확인한 마도사단은 그 즉시 마법을 이용해서 뒤로 물러났다.
쫓을 틈도 없을 정도로 재빨랐다.
윤서희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저희가 움직이려고 할 때마다 저런 식으로 병력을 갉아먹고 있습니다. 요새는 안 건드리고, 집요하게 병사들만 공격하더군요."
"차원 골드를 갉아먹으려는 셈이겠지."
"참, 음침하다고 해야 하나...."
진현우는 이마를 짚었다.
'사이가 얼마나 안 좋은 거야?'
전생에도 얼핏 듣기는 했다. 대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이미 죽었던 인물이니까.
실제로 만날 일도 거의 없었다.
"아그니스는 저희 연맹 근처에 별개의 세력을 구축했습니다. 동맹인 길드들과 연합해서 만든 세력이죠. 저희와 적대 관계고요."
"화련이...."
"그 여자가 절 싫어해요. 우스운 얘기지만, 저도 그렇고요. 물론 이런 상황이니 제 사적인 감정을 앞세울 수는 없는 노릇이죠."
윤서희는 머리가 아픈 듯 인상을 찌푸렸다.
"몇 번이고 대화를 하려고 했는데...."
"응하지 않았다, 이겁니까?"
"그렇게 됐네요."
실내에 침묵이 감돌았다.
진현우도 마찬가지였다. 7층의 상황이 어지럽기 그지없어서 말이 안 나올 지경이었다.
윤서희가 가까스로 말을 꺼냈다.
"바로 근처에 적대 세력이 둘이나 있는 셈이니, 발이 묶여서 움직일 방법이 없습니다. 빈틈을 보이면 둘 다 공격해 올 테니까요."
미르 연맹이 방어에만 몰두한 이유였다.
아그니스 그리고 카오틱. 두 세력 다 무시할 수 없는 힘을 가지고 있는 상황이니까.
틈을 보이면 물어뜯길 수밖에 없다.
"두 세력 중에 하나만 어떻게든 처리하면 지금보다 상황이 훨씬 괜찮아지겠군요."
"그렇습니다. 문제는...."
"그럼 이번 기회에 화해나 하시죠."
"...네?"
진현우가 불쑥 그런 말을 꺼냈다.
너무나도 쉬운 일을 말하는 것처럼, 갑자기.
"그, 제 말 제대로 이해하셨나요?"
"이해했습니다. 아그니스, 화련과 악연이 있어서 싸우는 중이라는 거 아닙니까? 제가 자리를 마련해 드릴 테니 화해하시면 되겠네요."
"그게 말처럼...."
윤서희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그 아그니스에, 그 화련이다. 윤서희와 네메시스를 적으로 여기는 이들인데 쉽게 화해하려고 하겠는가.
화해를 주도하는 게 진현우라는 것도 그렇다. 그가 화련과 무슨 친분이 있다고.
"같이 아그니스 길드로 갑시다."
"아니, 잠깐... 진심으로 하는 소리예요?"
진현우는 성큼성큼 궁궐을 나섰다.
샬럿과 하이드가 그 뒤를 따랐고 윤서희와 나머지는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기, 길드장님, 어떻게 하실 겁니까?"
"자칫 잘못했다가는 아그니스와 전면전을 벌이게 될 수도 있습니다. 안 가는 게...."
"정말, 머리가 아프군요."
윤서희는 골이 울리는 걸 느꼈다.
머리가 아프다. 진현우의 행동은 너무 갑작스럽고 설명이 없어서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뭔가 생각이 있어서 저러는 거겠죠."
"허, 윤서희 길드장. 진심인가?"
"그럼 빈말로 하는 말이겠어요?"
윤서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7층까지 수많은 이변을 일으키면서 올라온 남자다. 분명 무슨 생각이 있을 터.
진현우에게 기대를 걸어 보기로 했다.
"갑시다."
먼저 나서는 윤서희.
다른 이들이 그녀를 마지못해 뒤따랐다.
* * *
그로부터 몇 시간 뒤.
"이게 무슨...."
윤서희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눈앞의 광경을 보고 있으려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도무지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으니까.
"미안하게 됐어, 윤서희."
사과를 하고 있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그 화련이.
그 개차반 같은, 망나니 같은 여자가!
"...뭐라고요? 그러니까, 어어."
"내 말을 못 들었니? 아니면 또 듣고 싶어서 그러는 거니? 미안하게 됐다구, 내가."
"지금, 저한테 사과를 한 겁니까?"
"그렇게 됐네."
화련이 시큰둥하게 말했다.
윤서희와 임호석, 함께 따라온 미르 연맹의 모든 이가 그녀를 믿을 수 없다는 듯 봤다.
심지어는 아그니스의 길드원들도 그랬다.
"화, 화련 님, 이게 갑자기 무슨...."
"유, 윤서희한테 사과라니요. 평소에 길드장님이 그리 싫어하던 여자 아니었습니까?"
"아 씨, 나도 사과하고 싶어서 하는 게...."
"화련 씨."
화련이 당황한 길드원들한테 짜증을 터트리려는 찰나, 나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진현우의 목소리였다.
그녀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미안해, 진심이야."
"...."
윤서희는 입을 벙긋거렸다.
그 모습을 보던 진현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애새끼들 화해시키는 것도 아니고.'
이게 뭐 하는 짓인지.
그런 생각이 불쑥 들었다.
163화
뭔가 잘못됐다
네메시스와 아그니스.
길드가 만들어지고 난 뒤부터 오랫동안 반목해 왔던 두 길드는 서로를 어색하게 봤다.
그 중심에는 화련과 윤서희가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뭐가요?"
"저 화련이 왜 저러는 거냐고요."
윤서희가 진현우의 옆구리를 찔렀다.
"할타릿산에서 친분이 좀 생겼거든요. 거기서 제가 화련의 직업 퀘스트를 도와줬었죠."
"그래. 음, 큰… 도움이 됐어. 맞아."
"그렇죠?"
"...."
직업 퀘스트 하나 도와줬다고 저 화련이 저렇게 순해지는 게… 말이 되는 일인가?
윤서희는 심한 두통을 느꼈다.
"화련, 당신이 한 사과의 진정성은 일단 둘째 치고, 정말로 괜찮겠어요? 당신 쪽 연합에서도 분명히 반발 같은 게 일어날 텐데요."
"상관없어. 어차피 말이 많았으니까."
"말이 많았다고요?"
화련은 더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무슨 뜻인지는 알 것 같았다.
'바깥 상황이 저렇게 안 좋은데 플레이어들끼리 싸우는 게 맞냐고 얘기가 오갔겠지.'
누구는 네메시스와 손을 잡아야 한다고 했을 테고, 누구는 그러면 안 된다고 했을 터.
진현우의 눈빛이 서늘하게 빛났다.
'계속 싸우자고 한 놈들을 알아 둬야겠군.'
카오틱, 아발란치와 내통하는 놈들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걸 감안해서라도, 놈들이 상황을 눈치채기 전에 최대한 빨리 움직여야 한다.
진현우는 주변을 돌아봤다.
"화련, 병력은 어느 정도로 데리고 왔지?"
"윤서희, 저년이… 아니, 크흠! 저쪽에서 병사들을 대규모로 데리고 왔다고 해서 점령지를 지킬 놈들만 놔두고 다 데리고 왔어."
"잘됐네."
진현우는 고개를 돌렸다. 저 너머, 카오틱 세력인 아발란치의 점령지가 있는 곳으로.
"지금 바로 칩시다."
"예?"
윤서희가 놀라서 되물었다.
진현우가 확인시켜 주듯 또박또박 말했다.
"지금 치자고요, 아발란치 점령지를."
* * *
아발란치가 보유한 점령지는 총 다섯.
7층에 있는 다양한 세력 중에서도 많은 점령지를 차지한 편이라고 볼 수 있다. 7층의 점령지 숫자가 그리 많지는 않기 때문이었다.
진현우는 저 멀리 보이는 점령지를 봤다.
- 점령지, '도시 르망'을 발견했습니다.
"르망? 이름이 꽤 예쁜 곳이네."
"말 그대로 도시군. 바깥의 성벽은 다소 개조한 것 같다만… 저걸 칠 생각인가?"
르망은 그 이름대로 도시였다.
중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도시. 차이가 있다면 외곽의 성벽을 크게 강화했다는 것.
그 성벽 위를 지키는 병사들이 보였다. 그리고 주변을 순찰하고 있는 병사들 역시도.
진현우는 고개를 내저었다.
"치는 건 맞는데, 점령할 생각은 없어. 그냥 어그로만 끌다가 빠지면 돼. 간단하지?"
"그게 간단해?"
"미친 짓을 태연스럽게 제안하는군."
샬럿과 하이드가 혀를 내둘렀다.
그 뒤에 있던 하이드의 동료들도 마찬가지였다. 모두 크게 내키지는 않는 눈치였다.
르망은 아발란치 세력의 중심부에 있는 점령지. 꽤 경계가 삼엄한 걸, 셰이드의 은신을 통해서 어찌저찌 돌파해서 여기까지 왔다.
"먹히기만 하면 되긴 하는데...."
"쉽지 않을 거다."
진현우가 맡은 역할은 간단했다.
적들의 시선을 끌어서, 아발란치의 점령지들에 있는 병사들을 여기로 유인하는 것.
"아그니스, 미르가 각자 포인트에서 대기하고 있어. 신호를 보내면 움직일 거야."
"안 위험하겠어? 여기 7층이야, 현우야."
"위험하겠지."
7층은 현시점에서 탑 공략의 최전선이다.
여기 있는 플레이어들이나 카오틱 중에는 130레벨에 도달한 이들도 있을 터. 그런 이들은 진현우도 우습게 볼 상대가 아니었다.
확실하게 이길 자신은 없지만.
'어그로는 충분히 끌 수 있지.'
가진 스킬을 잘 활용하면 가능하다.
진현우는 마창을 움켜쥐었다. 창에 깃든 지독한 마기가 그의 팔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원래라면 잠식이 심해지기 전에 쓰고 집어넣었겠지만,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다.
- 보유한 마기 능력치가 마창의 잠식 효과를 일정 수준까지 저항합니다.
마기 능력치가 어느 정도 올라서였다.
물론 완전히 저항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래도 마창의 옵션, 잠식이 가진 대미지와 능력치 증가 효과를 대강 누릴 수는 있는 정도.
팔이 잠식될수록 힘은 강해진다.
'바로 성을 노릴 필요는 없다.'
이 일대에는 순찰 목적으로 돌아다니는 병사가 많았다. 그게 진현우의 목표였다.
그는 팔을 힘껏 젖혔다.
"좋아, 벌집을 한번 들쑤셔 볼까."
"난 이게 잘하는 짓인지 모르겠어...."
마창이 마기와 마력을 탐욕스럽게 집어삼켰다. 마창이 내뿜는 악의가 더더욱 짙어졌다.
진현우는 크게 숨을 삼켰다.
- 콰아아앙!
그리고 투척.
쏘아지는 마창이 수십 갈래로 분열되었다. 순찰을 돌던 병사들이 인지하기도 전에, 수많은 마창이 하늘에서 빗물처럼 쏟아졌다.
"으아아아악?!"
"기, 기습! 적이다!"
병사들의 절반이 순식간에 죽었다.
샬럿이 한숨을 내쉬면서 기도했고, 진현우를 포함한 이들에게 강한 축복이 들어왔다.
진현우는 무릎을 구부렸다.
"하이드."
"적들을 여기로 유인해 오지."
진현우가 적들에게 돌진하는 것과 동시에 하이드를 비롯한 일행이 흩어졌다.
그는 순식간에 적들 앞에 도달했다.
"저, 저놈! 진현우잖아!"
"뭐야, 병사 말고 카오틱도 있었나?"
차원 병사들만 순찰을 도는 줄 알았는데, 그 무리에 카오틱들도 섞여 있었다.
진현우의 얼굴에 반가움이 묻어났다.
"미호."
- 알고 있느니라.
모두가 경악한 눈으로 진현우를 노려보는 가운데, 미호의 마안이 힘을 발휘했다.
병사들의 눈빛이 몽롱해졌다.
"너희들, 뭘 보는… 크허억?!"
"우, 우아아아악!"
환각에 빠진 병사들이 카오틱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진현우는 놈들이 당황하는 틈을 노려 돌진했고, 적들을 단번에 휩쓸었다.
카오틱 하나가 황급히 수정구를 들었다.
- 인간, 저놈이 동료들한테 알리려는 것 같다만. 막지 않아도 괜찮겠느냐?
"놔둬."
그게 오히려 원하는 거니까.
카오틱은 인근에 있던 점령지에 지원 요청을 보냈다. 진현우는 카오틱들보다는 최대한 차원 병사들 위주로 노리면서 싸웠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허, 정말로 혼자서 여기까지 왔다고?"
아발란치의 지원군이 도착했다.
60명 남짓한 지원군. 그들은 혼자 있는 진현우를 황당함 가득한 눈빛으로 봤다.
선두에 있던 남자가 앞으로 나섰다.
"주변에서 떠받들어 주니 혼자서 점령지를 빼앗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건가?"
"...."
진현우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남자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면서 곁에 있는 카오틱들에게 작은 목소리로 경고했다.
"르망을 노리고 수작을 부리는 것일 수도 있다. 아니면 미쳤든가. 주변 점령지에 최대한 지원을 요청하고, 르망에 있는 놈들에게도 경계 레벨을 최대치까지 올리라고 전해라."
"예."
뭐가 됐든 7층까지 올라온 놈이다.
남자는 진현우가 미쳤다기보다는 수작질을 부리고 있을 확률이 높다고 판단했다.
"뭘 꾸미는지는 모르겠다만."
남자에게서 짙은 마기가 흘러나왔다.
그 마기가 인간의 육체를 순식간에 변화시켰다. 인간의 범주를 벗어난 괴물의 영역으로.
바로 마인의 모습으로.
"뭐야, 마인이었어?"
진현우가 반갑다는 듯이 웃었다.
보통의 플레이어라면 꺼리다 못해서 싸우기를 피했을 난적이 바로 마인이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가장 반가운 상대였다.
"영약이 제 발로 와 주다니, 운이 좋군."
"영약? 무슨 헛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군."
마인은 코웃음을 쳤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진현우는 마인에게 있어 굉장히 매력적인 먹이였다.
'저놈을 여기서 죽일 수만 있다면.'
마인의 큰 적을 제거할 수 있고, 저놈을 고깝게 여기던 대적자도 크게 기뻐할 터.
죽일 수 있다면 지금이 최적의 기회다.
"진현우, 너는 여기서 죽는다."
지금쯤이면 다른 점령지들에도 진현우에 대한 소식이 전해졌을 것이다. 그 병력들을 모두 활용해서, 저놈을 여기서 죽여야 한다.
마인이 격한 마기를 내뿜었다.
진현우는 거대한 깃발을 손에 쥐었다.
"할 수 있으면 해 보든가."
- 쿠우웅!
땅에 꽂히는 깃발.
짙은 사기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 사기에 닿은 시체들이 언데드가 되어 되살아났고, 지저에서부터 언데드 부대가 기어 나왔다.
그들이 카오틱과 병사들을 덮쳤다.
"하찮은 짓을!"
"하찮은지 어떤지는...."
진현우는 셰이드가 지키는 샬럿을 봤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신성력을 일으켰다.
하늘 높은 곳으로 빛의 기둥이 솟구쳤다.
"무슨!"
"해 보면 알겠지!"
화련과 윤서희에게 보내는 신호.
마인과 진현우가 격돌했다. 그리고 다른 곳에서 대기하던 이들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미르 연맹의 서쪽에는 카오틱의 세력인 아발란치의 점령지들이 있었다.
점령지의 요새, 성벽 위에서 병사와 카오틱들이 미르 연맹이 있는 곳을 감시했다.
빈틈이 보이거든 공격하기 위해서였다.
"저 머저리들, 오늘도 열심히 싸우는군."
저 멀리서 두 무리가 싸우는 게 보였다.
마법사단을 주축으로 한 아그니스 연합의 병사와 그들을 상대하는 미르 연맹의 병사들.
아발란치의 카오틱들은 코웃음을 쳤다.
"아그니스 쪽 연합하고 미르 연맹이 싸우는 모양인데? 하여튼, 얼간이 같은 놈들."
"흐, 우리야 고마운 일이지. 자기들끼리 알아서 전력을 깎아 먹고 있으니까 말이야."
"그야 그렇지. 상층부에 보고할까?"
"어. 그쪽에서 판단하겠지."
저 멍청이들이 자기들끼리 싸우고 있다.
너무도 흔한 일. 자주 있었던 일이기에 아발란치의 카오틱들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지금은 저걸 신경 쓸 때도 아니었다.
"뭐? 진현우? 혼자서 공격해 왔다고?"
"예. 아르반 님이 지원 요청을...."
"혼자인데 지원 요청을? 아니, 그게 아니지. 혼자니까 더더욱 경계하는 것인가."
진현우의 악명은 카오틱과 마인 사이에서도 유명했다. 마인 아르반이 그를 경계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정도였다.
"좋아. 지원군을 보내라, 지금 당장!"
"예!"
아발란치의 다른 점령지에서 르망을 돕기 위해 지원군을 보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지원군들이 멀리 떨어졌을 때, 하늘에 갑자기 빛의 기둥이 솟구쳤다.
정확히 르망이 있는 방향이었다.
"지원군을 보내는 판단이 맞았던 것 같군. 르망을 노리고 뭔가를 꾸미는 모양이야."
"네. 그나저나 저놈들은...."
카오틱은 불현듯 이상함을 느꼈다.
저 너머에서 싸우고 있는 얼간이들의 숫자가 갑자기 줄어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분 탓인가? 아니, 기분 탓은 아니었다.
"이건...!"
성벽 아래, 한 무리의 마법사들이 보였다.
마법으로 모습을 감췄다가 나타난 이들. 순식간에 발현한 마법이 성벽 위를 덮쳤다.
지독한 냉기가 성벽 위를 뒤덮었다.
- 화아아아악!
"흐, 어어어...!"
병사들의 팔과 다리가 순식간에 얼었다.
카오틱이라고 다를 건 없었다. 갑작스러운 냉기에 그들이 당황하고 있는 사이, 성벽 아래에서 희끄무레한 형체가 불쑥 튀어나왔다.
화려한 적발을 가진 형체.
"안녕?"
"...!"
화련의 적발이 흩날렸다.
그와 함께 피어오르는 불꽃의 마력. 격렬한 화염이 얼어붙은 병사들을 휩쓸었다.
그녀가 손가락을 튕기자 화염이 솟구치더니 성벽 위를 뒤덮는 화염 벽을 만들어 냈다.
"크아아아악!"
"뜨, 뜨거워… 아아아!"
화염 벽이 성벽 위의 적을 불태우고, 아래에서 뒤늦게 달려오던 적들을 막았다.
화련이 뒤를 보면서 소리쳤다.
"야, 멧돼지! 진입해서 다 죽여!"
"멧돼지라니, 한참 어린 게 건방지게!"
콰아아앙!
요새의 성문에서 굉음이 들렸다.
임호석이 휘두른 해머가 자아낸 굉음이었다. 붉은 기운을 머금은 해머가 정확하게 일격에 성문을 고물로 만들어 버렸다.
"안으로 진입해라!"
"들어가! 들어가! 마인이 나타나면 크게 외쳐라! 놈들은 두 길드장님이 상대할 테니!"
- 와아아아아!
뒤따르는 길드원과 병사들.
동양풍의 검을 찬 병사들이 사방으로 흩어지면서 적 병사들을 베어 냈다.
아발란치의 카오틱과 병사들이 막으려고 했지만, 숫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지원군을 보낸 탓이었다.
"이, 이게 대체 무슨...."
"저놈들이 왜 협력하고 있는 거야?!"
상황을 본 카오틱들이 경악했다.
견원지간이라서 결코 손을 못 잡을 것만 같았던 두 세력이 협력하고 있는 모습이라니.
그리고 그 순간, 카오틱들은 깨달았다.
'뭔가 잘못됐다.'
일이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음을.
164화
점령지
"공격! 공격해라!"
아그니스가 점령지를 탈환하는 동안, 다른 점령지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윤서희는 연맹의 병사들을 이끌고 아발란치의 또다른 점령지를 공격하는 중이었다.
"지하 유적… 적 병사들을 조심해라! 지하나 벽에서 기습해 오는 놈들이다!"
"예!"
깊은 지하에 있는 점령지였다.
평소에는 공격할 엄두도 못 내는 곳이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전황은 일방적이기 그지없었다.
"다 죽여!"
"이 새끼들, 우리가 못 건드리는 줄 알고 설쳐 댔었지! 한 놈도 남기지 말고 죽여라!"
"커허억...!"
아발란치는 꾸준히 미르를 공격해 왔다.
아그니스라는 존재가 있는 한 미르가 대대적인 반격은 하지 못할 거라는 걸 알아서였다.
하지만 지금은 아그니스가 동맹이 된 상태.
뒤를 공격당할 걱정은 할 필요가 없어졌다. 거기에다가 진현우가 적들의 지원군을 끌어들인 덕분에 지하 유적의 방비가 약해진 상황.
"이렇게 쉬운 일을...."
윤서희가 이마를 감쌌다.
아그니스와 아발란치. 두 세력 때문에 평소에 얼마나 골머리를 썩이고 있었던가.
그게 이렇게 허망하게 해결될 줄이야.
'도대체 무슨 마법을 부린 거지?'
윤서희는 화련을 떠올렸다.
그 망나니 같은 여자가 누군가의 제안에 따르는 모습은 처음 봤다.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부길드장의 배신 때문에 더 거칠어졌었는데.
'도무지 알 수가 없네.'
윤서희는 고개를 내저었다.
바로 그때였다.
"길드장님! 마인입니다!"
"드디어 나타났군요."
유적의 중심부에서 마인이 뛰쳐나왔다. 놈의 얼굴에도 경악이 어린 것이 보였다.
윤서희는 창을 쥐었다.
"익숙한 얼굴이네요. 평소에 우리 점령지를 자주 공격하던 마인인 것 같은데, 맞나?"
"이 망할 년이! 무슨 짓을 한 거냐!"
"나도 몰라요."
"뭐?"
윤서희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나도 모른다고. 이 상황을 설명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오히려 내가 묻고 싶어."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냐고.
윤서희가 창을 지상에 내리꽂았다. 그러자 그 지점을 중심으로 새하얀 기운이 사방으로 흩어지더니, 거대한 결계를 전개했다.
"큭, 으윽?!"
결계에 갇힌 마인은 가진 힘이 약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 결계가 가진 디버프였다.
그리고 마인 주변의 공간이 갈라지더니, 그 사이로 수많은 강철 갑옷이 나타났다.
쿠우웅! 땅이 크게 진동했다.
"안 돼, 이건...!"
마인은 저 갑옷이 뭔지 알고 있었다.
아무도 착용하지 않은 텅 빈 전신 갑옷. 그런데 투구에서 붉은 안광이 나타나더니, 분명히 텅 비어 있을 갑옷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갑옷들이 마인에게 무기를 겨누었다.
- 강철의 지배자.
윤서희가 가진 히든 클래스였다.
그녀가 다른 플레이어보다 앞설 수 있게끔 해 준, 전장에서 큰 힘을 발휘하는 클래스.
아군과 적군에게 영향을 미치는 특수한 결계들을 펼치며, 오직 강철로만 이루어진 군대를 소환하는 스킬을 가진 클래스였다.
"크으으아아악!"
"이 점령지를 빠르게 점령하고, 최소한의 수비 병력만 남긴 뒤 르망으로 갑니다. 진현우, 그 남자가 죽기 전에 도와야 해요."
"알겠습니다, 길드장님."
강철 군단에게 공격당하는 마인이 처절한 비명을 내질렀다. 윤서희는 거기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천장을 바라봤다.
아마 진현우가 싸우고 있을 곳을.
* * *
점령지, 도시 르망 인근.
그곳에서는 격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빌어먹을, 언데드들이!"
"죽지 마라! 죽을 것 같으면 빠져! 시체를 곧바로 언데드로 되살리는 스킬이다!"
"크아아아악!"
광범위하게 펼쳐진 영역.
지저에서 기어 나온 폭군의 언데드들이 아발란치의 병사들을 덮쳤다. 그 과정에서 생긴 시체들은 언데드가 되어 합류했다.
진현우의 영역 선포도 숙련도가 꽤 올라간 상태였기에 영역의 범위도 무척 넓었다.
"큭, 으으음...!"
부하들을 지원해야 할 마인, 아르반은 진현우에게 완전히 손발이 묶인 상태였다.
마인은 들이닥치는 검기를 가까스로 회피하면서, 회피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경악했다.
'아래층에 간 놈들이 왜 당했나 했더니!'
마인의 사각에 있는 공간이 갈라졌다. 그 사이로 피할 수 없는 검기가 쏘아졌다.
이건 막을 수밖에 없다. 갑피가 돋아난 두 손을 교차해서 검기를 막으려고 했다.
그렇게 검기와 두 손이 교차한 순간.
"말도 안 돼!"
마인의 두 손이 단번에 베였다.
플레이어의 검기 따위는 가볍게 막아 낼 수 있는데도 진현우의 검기는 뭔가 달랐다.
막을 수 없고, 본능적인 거부감이 느껴졌다.
저 검과 상대해서는 안 된다는 거부감이.
"피하면 네 부하가 죽는다!"
"이, 이,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놈이!"
진현우의 검이 수많은 검기를 내뿜었다.
노리는 것은 마인. 하지만 궤적이 교묘해서, 마인이 피하면 뒤에 있는 부하들이 당한다.
평소 같았다면 부하가 죽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망할! 컥, 크흐으윽!"
마인이 피해서 아군 중 누군가가 죽는다?
그랬다간 아군은 언데드가 되어 버린다. 적군의 병사만 늘려 주는 꼴이 된다는 것이었다.
'제기랄! 공격할 수가 없잖아!'
공격했다가는 틈을 보이게 된다.
마인은 이를 악물며 공격을 막았다. 그럼에도 다 막지 못해서 검기가 부하들을 덮쳤다.
"지원군은! 지원군은 언제 오는 거냐!"
"지, 지금! 지금 도착했습니다!"
"드디어!"
마인의 얼굴이 밝아졌다.
다른 점령지의 지원군까지 도착했으면 상황은 달라진다. 그는 큰 목소리로 외쳤다.
"이 영역 안으로 들어오지 말라고 전해라! 최대한 원거리에서 공격하라고 해!"
"예!"
마인은 지금이 기회라 판단했다.
여태까지 방어에만 치중하던 것을, 태세를 바꾸어 적극적으로 공격에 나서기 시작했다.
그리고 원거리에서 포화가 쏟아졌다.
- 인간.
"나도 알아."
오히려 진현우에게는 잘된 일이었다.
신묘하게 움직이는 칼날. 쏟아지던 포화가 흐르는 강물에 휩쓸리는 것처럼 움직였다.
진현우는 적들이 퍼붓는 원거리 공격을 흘리고, 곁에 있던 카오틱들에게 되돌려 줬다.
- 콰아아앙!
"미친! 아, 안 돼! 공격을 멈춰라!"
"저게 무슨, 곡예야?"
지켜보던 이들이 경악했다.
지원군은 결국 원거리 공격을 포기하고 가까이 와서 아군을 도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마인이 그랬던 것처럼, 지원군이 도착한 순간 진현우의 움직임도 바뀌었다.
- 카드드드득!
철저하게 시선만 끄는 방식으로.
거리를 벌리면서 원거리 계통의 스킬로 차원 병사들을 죽이고, 그렇게 죽은 병사들을 영역 선포를 이용해서 언데드로 되살렸다.
마인의 공격은 흘리기만 했다.
"이 망할 놈이, 미꾸라지처럼!"
미호도 진현우를 지원했다.
매혹과 마안. 두 스킬은 적들에게 큰 혼란을 일으키기에 최적화된 스킬이었다.
마인은 이를 악물었다.
'뭔가 이상하다. 이건 시간을 끌려는 움직임이지 않은가. 도대체 뭘 노리고?'
마인은 주변을 돌아봤다.
정확히 말하자면, 도우러 온 지원군을. 그걸 본 순간 머릿속으로 한 가지 생각이 스쳤다.
"설마! 아무나! 다른 점령지에 연락해서 상황을 확인해라! 어쩌면, 이건...."
유인책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의 생각은 정확히 적중했다.
"아, 아르반 님! 다른, 다른 점령지가!"
다른 점령지에 황급히 연락한 카오틱이 떨리는 목소리로 비보를 전했다.
마인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지저의 유적과 할다릭성을 빼앗겼습니다. 아그니스와 미르 연맹이… 협력했다고...."
"...!"
있을 수 없는 일투성이였다.
혼자서 시간을 끌겠다는 미친 생각을 한 놈이 있다는 것도. 서로를 원수처럼 여기던 아그니스와 미르 연맹이 협력했다는 것도.
그리고.
"저, 적들의 원군이...."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저 너머, 아발란치의 지원군이 왔던 방향에서 거대한 군세가 다가오는 게 보였다.
아그니스와 미르 연맹. 두 점령지를 빼앗고, 마지막 점령지를 빼앗기 위해 온 것이었다.
"샬럿!"
"신이시여!"
하늘에서 신성한 빛이 쏟아졌다.
그 빛을 받은 아군에게는 강한 버프가, 마인에게는 강력한 디버프가 주어졌다.
성녀, 샬럿이 쓴 스킬의 힘이었다.
어느새 다가온 그녀가 진현우의 옆에 섰다.
- 서걱!
"크으윽!"
마인은 쏘아지는 검기를 가까스로 회피하면서, 다가오는 적들의 군세를 바라봤다.
그리고 느꼈다.
"이건... 너무 늦었어."
대처하기에는 이미 늦었다고.
강렬한 빛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
* * *
전투는 일방적이었다.
합류한 플레이어들은 카오틱들을 일방적으로 몰아붙였다. 마인 역시 진현우와 샬럿의 협공을 받으면서 허망하게 쓰러졌다.
남은 것은 르망뿐.
"이, 이런 미친...."
르망에 남은 병사들이 경악했다.
보이는 것은 해일처럼 몰려드는 언데드들. 그리고 저 너머에서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아그니스와 미르 연맹의 병사들.
수많은 적이 르망을 노리고 있었다.
"다, 다른 점령지들은! 지원은!"
"여, 연락이 닿지 않아. 아마도...."
"죄다, 저놈들한테 당했다고?"
마인의 처참한 시체가 보였다.
아발란치의 본진에 지원을 요청했지만, 도착하려면 아직 많은 시간이 필요한 상황.
희망은 없었다.
- 콰아아앙!
무너지는 성문.
수많은 군세가 밀고 들어왔다.
르망에 남은 이들은 제대로 된 저항도 하지 못했고, 얼마 못 가 전투가 끝났다.
- 점령지, '도시 르망'을 빼앗았습니다.
- 점령지, '지저의 유적'을 빼앗았습니다.
- 점령지, '할다릭성'을 빼앗았습니다.
르망의 심층부에는 코어가 있었다.
마력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결정체. 그걸 점령하자 도시 르망의 점령권이 들어왔다.
- 마인, 아르반을 죽였습니다. 마핵의 효과로 마인에게서 마기를 흡수합니다.
- 마기가 20만큼 상승했습니다.
- 레벨이 상승했습니다.
- 레벨이....
여러 메시지가 보였다.
진현우는 길게 숨을 내뱉었다.
- 빠르게 움직이길 잘했구나, 인간.
"어. 바로 안 움직였으면 힘들었을 거야."
최대한 빠르게 움직여야 한다.
놈들이 아그니스와 미르 연맹이 힘을 합쳤다는 것을 눈치채기 전에 최대한 쳐야 한다.
'분명히 첩자가 있을 테니까.'
아그니스든, 미르 연맹이든.
내부에 카오틱과 협력하는 놈들이 분명히 있을 것이라는 판단으로 한 행동이었다.
결과는 아주 효과적이었다.
"아발란치의 점령지 셋을 하루 만에 점령했다… 이런 게 가능할 줄은 몰랐는데요."
"슬슬 전리품을 나눌 때가 되지 않았나?"
"당신은, 이제 전투가 끝났는데...."
화련과 윤서희가 싸우면서 들어왔다.
카오틱이 가지고 있던 점령지 중 세 개를 순식간에 빼앗은 상황. 진현우가 이 점령지들을 혼자서 독차지하는 건 말이 안 된다.
애초에 관리할 수도 없고.
"지저의 유적은 제가 갖겠습니다. 나머지 둘은 서로 의논해서 누가 가질지 정하시고."
"유적? 아, 그 지하에 있는 곳."
"공격을 방어하기에 적합한 점령지죠. 제 개인적으로도 그곳을 추천하고 싶었습니다."
화련과 윤서희는 크게 반대하지 않았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세 점령지들을 빼앗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건 진현우였으니.
"이제 남은 점령지는 둘이군요."
아발란치가 가진 점령지 셋을 빼앗았다.
남은 건 둘.
"하나는 여기서 떨어진 곳에 있어서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겁니다. 문제는...."
"남은 하나가 놈들의 본진이야. 이번에 했던 것처럼 쉽게 공략할 수는 없을걸."
"일단."
진현우는 샬럿과 하이드를 봤다.
"각자 점령지를 점검하고 얘기합시다."
우선 점령지부터 확인한 다음에, 남은 점령지를 공략할 방법을 강구할 생각이었다.
진현우는 걸음을 옮겼다.
165화
절벽 위의 성채
지저의 유적.
말 그대로 지하에 있는 유적이었다.
깊은 지하에 도시라고 생각해도 될 정도로 크고 넓은 유적이 자리 잡고 있었다.
"더럽게 넓네."
"너무 조용해서 기분 나쁘지 않아?"
"흠, 머물 곳은 많겠군."
샬럿과 하이드는 주변을 둘러봤다.
유적은 이름 모를 신을 모시는 곳이었는지, 곳곳에 숭배물 비슷한 것이 있었다.
건물의 생김새도 신전과 비슷했다.
"으으응, 내 안에 깃든 신성력이 빨리 이 유적에서 나가라고 말하고 있어...."
"좀 참아."
진현우는 점령지의 상황을 파악했다.
간단하게 시스템창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점령지: 지저의 유적]
- 소유주: 진현우.
- 보유한 차원 병사 0/300.
- 보유한 차원 골드 1,000,000.
- 보유한 일꾼 0/50.
- 특산품: 고대의 광석. (보유량 300)
- 어딘지 모를 차원의 지저에 봉인되어 있던 유적이다. 입구와 통로가 좁아 방어에 적합하며, 특수한 병사들을 소환할 수 있다.
생각보다 보유한 차원 골드가 많았다.
여길 점령하고 있던 아발란치가 비축해 뒀던 거겠지만, 다른 사람의 손에 쓰이게 됐다.
- 샬럿, 하이드, 임유진, 엘리, 아키라, ..., ..., ...를 아군으로 지정했습니다.
일단 가장 먼저 하이드를 비롯한 이들을 아군으로 등록했다. 아군으로 등록되면 소유주의 허락 없이는 코어를 건드릴 수 없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한 조치였다.
- 보유한 고대의 광석을 모두 판매합니다.
- 차원 골드 450,000를 획득했습니다.
이 점령지에서 생산하는 특산품은 '고대의 광석'이라는 것이었다. 카오틱들이 보관해 둔 것들이 있어서 그것들을 모조리 팔아 버렸다.
그러자 꽤 묵직한 차원 골드가 들어왔다.
- 오, 이게 차원 골드라는 것이냐?
유적에는 넓은 창고가 있었다.
거기에 수많은 금화가 있는 게 보였다. 반투명한 것이, 굉장히 묘하게 생긴 금화였다.
'일단 병사들부터 고용해야겠지.'
차원 병사를 무한히 고용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각 점령지마다 최대 고용 숫자가 있다.
이게 뜻하는 것은 간단했다.
'가능한 많은 점령지를 차지해서, 최대한 많은 차원 병사를 소환해서 싸워야 한다.'
그게 아니면 특수한 차원 병사를 소환해서, 그 특성을 최대한 이용해서 싸우든가.
'어디....'
점령지의 소유주가 되면 특수한 기능이 생긴다. 상점을 이용할 수 있는 기능이다.
진현우는 상점을 열었다.
눈앞에 기나긴 카탈로그가 나타났다.
- 유적 은둔자 (5,000G).
- 유적의 뱀 (3,000G).
- 일꾼: 개미 (2,000G).
- 마력 깃든 가죽, 고품질의 마력석, 미노타우로스의 뿔, 와이번의 심장....
- 무작위 영웅 등급 재료.
- 갱신까지 필요한 시간: 95:00.
위의 셋은 차원 골드로 살 수 있고, 밑의 재료들은 고대의 광석으로 살 수 있었다.
목록을 본 진현우는 혀를 찼다.
'귀한 재료들이 한가득이네.'
여기 있는 세력들이 눈이 돌아갈 만도 하다.
거기에 이 점령지의 특산품인 고대의 광석도 일종의 재료였다. 차원 골드로 바꾸는 용도만이 아니라 아이템을 만드는 데도 쓸 수 있다.
진현우는 우선 일꾼들부터 고용했다.
- 일꾼: 개미를 50마리 고용했습니다.
- 차원 골드를 100,000만큼 사용했습니다.
창고에 있던 차원 골드의 일부가 사라졌다.
그리고 마력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결정체, 코어 근처에 수많은 빛무리가 나타났다.
그 빛무리들이 개미의 형상으로 바뀌었다.
"흐이이익...."
- 지, 징그러워.
말 그대로 개미였다.
그런데 덩치가 사람보다 더 큰 개미.
놈들은 진현우를 흘깃 보더니 지하로 향했다. 어디로 가나 싶어서 놈들을 따라가 봤다.
- 카아앙! 캉!
"아, 여기가 광석이 나오는 곳인가."
개미들이 도착한 건 유적 아래의 동굴.
신비롭게 빛나는 광석들이 있는 곳이었다. 개미들은 앞발을 이용해서 광석들을 캐냈다.
가만히 지켜봤는데, 일하는 게 성실하다. 조금의 쉬는 시간도 없이 계속 일하고 있었다.
"개미와 베짱이...."
"통했네? 나도 그 생각 하고 있었어."
샬럿이 킥킥거리며 웃었다.
열심히 일하는 개미, 그걸 지켜보고 있는 플레이어들. 구도가 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현우는 일꾼들을 고용해서 지하에 있는 특산품을 캐게끔 한 뒤, 병사들을 봤다.
'유적 은둔자, 유적의 뱀. 이 점령지에서 고용할 수 있는 병사는 이 둘인가.'
소환할 수 있는 차원 병사의 종류는 각 점령지마다 다르다. 그리고 여기, 유적에서 살 수 있는 병사들은 꽤 특이한 편이었다.
좋게 말해서 특이한 거고, 사실 애매했다.
아니, 안 좋다.
- 유적 은둔자 (5,000G).
- 지하와 벽으로 녹아드는 재주를 가진 은둔자들이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적들을 기습하는 데 능하지만, 정면에서 싸우는 건 약하다. 또한 밝은 곳에서 싸울 때 약해진다.
- 보유 능력 1: 다이브 (지하나 벽으로 들어가서 일정 시간 이동할 수 있다.)
- 보유 능력 2: 빛 혐오 (어두운 곳에서 싸울 때 능력치가 강화되지만, 지상의 밝은 곳에서 싸울 경우 능력치가 감소한다.)
- 유적의 뱀 (3,000G).
- 오랫동안 유적에서 살아온 뱀. 작고 약하며, 또한 느리다. 하지만 웬만한 적에게는 치명상을 입힐 수 있는 독니를 가졌다.
- 보유 능력 1: 독니 (적중할 경우 대상에게 맹독을 주입하는 독니를 가졌다.)
유적의 뱀과 유적 은둔자.
진현우는 둘 다 하나씩 구매했다. 그러자 눈앞에 두 종류의 차원 병사가 나타났다.
- 한입에 먹으면 맛있게 생겼구나.
"흠, 조금... 기분 나쁘게 생겼군."
엇갈린 반응이 돌아왔다.
미호가 본 것은 유적의 뱀이었다. 손바닥보다 작은 뱀. 굉장히 작은 주제에 움직임도 느리다. 하지만 그 이빨만큼은 날카로웠다.
하이드는 유적 은둔자를 보고 있었다.
'외계인처럼 생겼네.'
몸에 털은 하나도 없고 매끈매끈하다.
오랫동안 못 본 탓에 눈도 퇴화한 것처럼 보였다. 보는 것만으로도 불쾌해지는 외형.
가진 능력도 애매한 편이었다.
'빛 혐오라....'
빛 혐오라는 능력이 치명적이었다.
유적을 방어하는 데에는 유리한 능력이지만, 어딘가를 공격할 때는 취약해지는 능력.
하지만 이걸 살릴 방법이 있다.
"셰이드를 써야겠군."
방법이 떠올랐다.
진현우는 가진 골드를 모두 써서 병사들을 고용한 후, 뒤에 있던 일행들을 돌아봤다.
지금부터 빠르게 움직여야 한다.
그는 동료들에게 뭘 할 것인지 설명했다.
* * *
아발란치의 본진.
처음 7층에 도착한 카오틱들이 최초로 차지했던 점령지, '절벽 위의 성채'.
3개의 점령지를 순식간에 빼앗겼다는 소식은 절벽 위의 성채에도 전해졌다.
"점령지 셋을 하루 만에 뺏겼다고?"
"무슨 말도 안 되는... 아그니스와 미르 연맹 그놈들이 어떻게 협력했다는 거야?"
"아무리 예상치 못한 협력이었다고 해도 그렇지, 점령지 셋을 뺏기는 게 말이 되나!"
카오틱의 간부들이 분통을 터트렸다.
점령지를 빼앗고 아그니스와 미르 연맹을 화해시킨 게 진현우란 소식에 더 분노했다.
"또 그놈이냐? 또!"
"망할 놈이...!"
진현우. 최근 카오틱과 마인들 사이에서 큰 악명을 떨치고 있는 이름이었다.
아발란치의 카오틱들은 치를 떨었다.
"변절자들한테서 계속 정보를 보내라고 해! 놈들이 점령지 셋을 뺏은 것에서 멈출 리가 없다. 분명히 이 성채도 뺏으려고 할 거다."
"예, 알겠습니다."
이 정보들을 전해 준 건 변절자들이었다.
아그니스와 미르 연맹 내부의 변절자들. 그들을 이용해서 필요한 정보들을 얻어야 한다.
그래야 대처할 수 있을 테니까.
"그래서, 그분은 뭘 하고 계신 거지?"
"대적자님과 대화하고 있다고 하던데."
"흠, 무슨 대화를 하고 있는 건지...."
간부들은 성채 중심을 바라봤다.
코어가 있는 곳. 바로 그곳에 특이한 형태의 제단이 만들어져 있었다. 그 제단 위에 검은 불덩어리 같은 것이 일렁거리고 있었다.
- 그렇군. 그 인간이 여기까지 도달했다? 흥미롭지만, 크게 놀랍지는 않구나.
"...."
제단 앞에 남성이 부복하고 있었다.
난잡하게 기른 장발이 인상적인 맹인.
아발란치를 이끌면서 카오틱 랭킹 16위에 해당하는 남자, 시젠이라는 카오틱이었다.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 시간은 충분히 벌었다. 굳이 그 인간에게 더 많은 전과를 챙겨 줄 필요는 없겠지.
"그럼, 대계를 위해서 불필요한 희생은 없게끔 하겠습니다. 전력들은 빼 둬야겠군요."
검은 불덩어리가 크게 타올랐다.
만족스러운 대답이라는 뜻이었다.
- 하지만... 그래.
부복하던 시젠이 조심스레 고개를 들었다.
- 그 인간이 가지고 있는 조각은 탐이 나는군. 죽일 기회가 생긴다면 죽여도 좋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주인님."
제단 위에는 자그마한 조각이 있었다.
웨펀 마스터의 조각이었다. 7층에 있던 것을 시젠이 발견하여 제단에 바친 것이었다.
제단이 내뿜는 불길한 빛이 조각을 뒤덮었다. 조각에 담겨 있던 힘이 어디론가 사라졌다.
남은 것은 힘을 잃은 조각뿐.
- 좋다, 시젠. 네가 구해 온 조각은 나를 만족시켰도다. 그 대가가 주어질 것이다....
검은 기운이 시젠에게 깃들었다.
시젠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강렬한 힘이 내면에서부터 차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 내 기대를 저버리지 마라.
"예, 주인님."
화르륵!
검은 불덩어리가 사라졌다. 오랫동안 부복하고 있던 시젠도 그제야 몸을 일으켰다.
그는 느릿하게 일어나 창문으로 향했다.
두 눈이 보이지 않는 맹인이었지만, 그의 마음속의 눈이 창문 너머의 풍경을 보여 줬다.
"점령지 셋을 빼앗았다... 흠."
절벽 위의 성채.
이 점령지는 그 이름대로 드높은 절벽 위에 지어진 성채였다. 지형적인 특성 덕분에 쉽게 공격할 수 없는 천혜의 요새이기도 했다.
높은 절벽에, 성채로 가는 길목은 하나.
그 길목은 카오틱과 병사들이 지키고 있었다. 그렇다고 절벽을 기어서 올라간다? 그것도 불가능했다. 온갖 함정이 설치되어 있으니.
절벽을 계속 주시하는 이들도 있었다.
'이 성채는 그렇게 쉽지 않을 거다.'
과감하고 빠르게 움직여서 점령지 셋을 빼앗은 진현우였지만, 여기서는 그럴 수 없다.
여긴 침입자가 도달할 수 없는 곳이니까.
시젠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침식률은 70%를 넘었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곧 모두가 알게 되겠지.'
변절자들과 협력해서 만들어 냈던 플레이어 사이의 내분. 그걸로 벌어 왔던 시간.
높아진 침식률까지.
모두가 하나의 대계를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제 곧, 그 대계가 시작될 것이다.
"기대되는군."
절벽 아래를 보면서 시젠은 웃었다.
그렇게 시젠이 곧 시작될 대계에 대한 기대감으로 미소를 감추지 못하고 있을 때.
- 스으으으!
성채가 있는 절벽.
절벽 아래에는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드높은 절벽이 자아내는 그림자였다.
그런 그림자가 꿈틀거리더니, 검은 형체의 남자를 비롯한 한 무리의 병사가 솟구쳤다.
"좋아, 여기까지는 쉽게 왔네."
진현우와 병사들이었다.
셰이드의 힘으로 그림자와 동화된 그들의 모습은 육안으로 분간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 대가로 마력이 녹아내리고 있었지만.
"이건 상상도 못 했을 거다."
진현우와 병사들이 그림자로 녹아들었다. 그림자는 절벽을 타고 위로 올라갔다.
바로 성채를 향해서.
166화
한밤중의 서커스
부서진 대륙에도 밤은 있다.
날씨가 굉장히 변덕스럽고 일반적인 날씨와는 다르기는 하지만, 일단 밤이라는 게 있다.
두 개의 달이 떠 있는 어두운 밤.
밤은 그림자를 만들어 낸다.
"오늘 밤도 조용하군."
"아 씨, 재수 없게. 불길한 말 좀 하지 마라."
"왜? 그냥 조용하다고 한 건데."
"그런 말이 씨가 된다고."
절벽 위의 성채.
그곳에 있는 높이 솟은 탑에 특수한 장치가 설치되어 있었다. 성채에 침입하는 외부인을 감지할 수 있게끔 해 주는 장치였다.
그 장치 주변을 카오틱들이 지키고 있었다.
"이 장치가 쓸모가 있기는 한 거냐? 작동되는 거 맞지? 작동되는 걸 본 적이 있어야지."
"성채에 침입한 놈이 여태껏 없었잖아. 다 절벽에서 기웃거리다가 처맞고 뒤졌으니까."
"흠, 마력석만 잡아먹는 거 같은데...."
카오틱들이 장치를 보며 투덜거렸다.
사이렌처럼 시끄러운 소리를 낸다고 하는데 들은 적이 없으니. 장치를 지키던 카오틱들은 서로 투덜거리면서 지겨운 시간을 보냈다.
그때, 그들의 앞에 무언가가 나타났다.
"응?"
- 쿠후훗.
미호였다.
요사스럽게 빛나는 마안이 카오틱들의 마음을 휘어잡았다. 침입자를 감지한 장치가 발동하기 전에, 카오틱이 장치를 꺼 버렸다.
- 너희는 일이 끝날 때까지 잠들거라.
"음, 으으음...."
카오틱들이 기절한 듯이 잠들었다.
미호는 영체가 되어 인적이 드문 지상으로 내려갔고, 그림자에서 진현우가 솟구쳤다.
"잘했어."
- 흥, 나한테 맡기면 식은 죽 먹기이니라.
"좋아. 그럼 죽 좀 더 먹어라. 가서 일해."
- 죽 먹다가 배가 터지게 생겼구나....
그림자를 타고 성채 내부까지 잠입한 진현우는 몸을 숨겼다. 그리고 영체 상태의 미호를 이용해서 성채 내부의 구조를 확인했다.
어디에 뭐가 있고, 누가 있는지.
- 여기가 숙소인 것 같더구나. 많은 인간이 교대로 나오는 걸 봤다. 자는 것도 봤고.
"그럼 아마 숙소가 맞겠지. 음...."
- 빠르게 움직이는 게 낫지 않겠느냐? 마력을 다 썼다가는 싸우기 힘들 것이니라.
진현우는 인상을 찌푸렸다.
셰이드가 만들어 낸 그림자로 유적 은둔자와 유적의 뱀들을 모조리 삼킨 상태였다.
셰이드의 그림자는 많은 물체를 삼킬수록 더 많은 마력을 소모하게 된다. 당연하지만, 그 부담은 모두 진현우에게로 전가되었다.
'샬럿한테 버프를 받고 와서 다행이지.'
성녀가 가진 버프 스킬 중에는 스킬의 마력 소모량을 줄여 주는 것도 있었다.
그 덕분에 아직은 버틸 수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 탄생의 꽃도 남아 있다.
"쉬면서 빠르게 회복하는 수밖에."
- 흠, 그게 네 생각이라면야.
진현우는 성채의 구조를 봤다.
병영과 창고. 그리고 곳곳에 있는 방어용 병기가 보였다. 하나같이 강력한 위력을 지닌 것들이었는데, 그 숫자도 몹시 많았다.
"아주 작정을 했군."
높은 절벽 위에 지어진 천혜의 요새이면서 이 정도의 방어용 병기까지 갖추다니.
단체로는 절대로 접근할 수 없을 정도다.
그러니 이것부터 처리해야 한다.
- 인간 하나를 매혹해서 정보를 캐냈다. 방어용 병기들은 모두 마력석을 동력원으로 쓴다고 하더구나. 그것들을 창고에 보관한다나.
"마력석을... 경계가 삼엄하겠는데."
- 그렇겠지. 이곳의 특산품이 마력석이라서 무한하게 캘 수 있다고 하더구나.
이 많은 병기를 어떻게 쓰나 했더니.
진현우는 혀를 찼다. 그리고 구조를 마저 확인한 후, 그림자에서 병사 일부를 꺼냈다.
수많은 유적의 뱀이 그림자에서 솟구쳤다.
- 시이이익.
- 으음, 이놈들이 도움이 되겠느냐?
유적의 뱀이 혀를 날름거렸다.
놀라울 정도로 작고 움직임도 느리다.
사실상 제대로 된 병사의 역할은 못 한다고 봐도 무방하다. 정면에서 마주치면 뱀이 공격하기 전에 먼저 처리하면 되는 거니까.
하지만 깊은 밤이라면.
'그리고 움직일 필요가 없다면....'
유적의 뱀을 활용할 방법이 있다.
진현우는 셰이드를 이용해서 뱀들이 잘 보이지 않게끔 한 뒤, 성채의 특정 위치에 놔뒀다.
그리고 유적 은둔자들을 모두 빼냈다.
"여기서 대기하다가 내가 신호를 보내면 성벽 위로 올라가. 폭발이 터지면 그게 신호다. 그 뒤에는 내가 미리 말했던 대로 움직여."
"키이익."
유적 은둔자들이 기이한 소리를 냈다.
깊은 밤이 되었지만 성채 내부는 꽤 밝은 편이었다. 하지만 그만큼의 그림자도 존재했다.
진현우는 은신한 채 창고로 향했다.
- 저기가 창고이니라, 인간.
"흠."
삼엄한 경계에 놓인 창고.
카오틱과 병사들이 창고를 지키고 있었다. 근처에 온갖 장치도 설치된 것이 보였다.
저 안에는 수많은 마력석이 보관되어 있다. 강한 마력을 품은, 질 좋은 마력석들이.
'질 좋은 마력석을 파괴하면 안에 있던 마력이 해방된다. 잘하면 폭탄처럼 쓸 수 있어.'
진현우가 노리는 것은 그것이었다.
저 창고의 마력석들을 폭발시켜 방어용 병기의 동력원을 제거하면서, 동시에 성채 내부의 이목이 이곳으로 확 쏠리게끔 하는 것.
'파괴하는 게 어렵기는 한데....'
질 좋은 마력석은 내구도가 뛰어나다.
그걸 파괴하려면 보통 힘으로는 힘들다. 하나 지금의 진현우에게는 그럴 방법이 있었다.
진현우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셰이드, 병사들은?"
- 시이이이... 전부... 네가 말한 자리로....
"그럼 슬슬 시작해도 되겠네."
주먹에 신성한 기운이 어렸다.
주변의 어둠을 가득 밝히는 빛. 창고를 지키던 이들이 그 빛을 눈치채기도 전에, 진현우의 신형은 한 줄기 섬광이 되어 쏘아졌다.
순식간에 창고의 문까지 도달한 신형.
"뭣!"
"치, 침입...!"
카오틱들이 비명을 내지르려던 순간.
주먹에 어려 있던 신성한 기운이 해방되면서 창고를 덮쳤다. 그리고 거대한 폭풍을 일으키며, 창고 내부에 있던 마력석을 집어삼켰다.
강력한 힘이 마력석들을 파괴했다.
- 키이이이잉!
"아, 안 돼!"
마력석들에 봉인되어 있던 마력이 풀려났다.
숨이 답답해질 정도로 짙은 마력이 퍼졌다. 곧 이어질 사태를 짐작한 카오틱이 절규했고.
- 콰아아아아앙!
엄청난 폭발이 성채를 뒤흔들었다.
* * *
- 콰아아아아앙!
창고를 중심으로 강력한 폭발이 터졌다.
땅이 뒤흔들리고, 창고 인근의 지형이 완전히 짓뭉개질 정도의 위력을 가진 폭발이었다.
성채에 있던 모든 이가 기상했다.
"뭐, 뭐야?! 폭발?"
"창고! 창고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미친, 시젠 님한테 빨리 보고해!"
굉음을 들은 카오틱들이 뛰쳐나왔다.
병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저 너머에서 솟구친 불길을 본 이들이 황급히 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걸 기다리는 놈들이 있었다.
- 쉬이이익!
"...!"
똬리를 틀고 있던 유적의 뱀들이었다.
빛이 들어오지 않는 그림자. 그곳에서 모습을 감추고 있던 뱀들의 독니가 먹이를 노렸다.
푸욱! 독니가 적들의 몸을 꿰뚫었다.
"배, 뱀? 이건...."
"흐으, 끄으으윽!"
맹독이 순식간에 전신으로 퍼졌다.
워낙 큰 폭발이라 땅을 살펴보는 이가 없었기에 누구도 대응하지 못했다. 맹독에 중독된 이들이 쓰러진 채 처절한 신음을 토했다.
"유적의 뱀이 여긴 왜 있는 거야!"
"조심해서 움직여! 뱀부터 죽이라고!"
창고에서 일어난 대폭발.
그리고 곳곳에 숨어 있는 유적의 뱀까지.
카오틱과 병사들은 갑작스러운 사태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유적 은둔자들이 움직였다.
"키이이이."
유적 은둔자들이 벽으로 녹아들었다.
이 병사들이 가진 특성, 다이브의 효과였다. 그렇게 벽으로 잠수한 유적 은둔자들은 성벽 위로 올라갔고, 주변의 상황을 살폈다.
성벽에는 많은 병사가 있었다. 하지만 모두 갑작스러운 사태에 성채 내부를 보는 상황.
- 키이이익.
- 키이이.
유적 은둔자들은 자신들만이 알 수 있는 소리로 소통한 뒤, 곧바로 행동에 나섰다.
기괴한 신형이 적들의 등 뒤에서 솟구쳤다.
그들이 손에 쥔 단검이 서늘하게 빛났다.
- 푸우욱!
"꺽...!"
단검이 병사의 목을 찔렀다.
뒤이어서 또 다른 단검이 심장을 찔렀고, 병사는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하고 절명했다.
똑같은 일이 성벽 곳곳에서 벌어졌다.
"제길, 도대체 뭔 일이 일어난 거야?"
"사고인가? 아니면...."
워낙 큰 폭발이었기에 성벽 위의 상황을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유적 은둔자들은 그 틈을 이용해서 빠르게 목표로 향했다.
"키이이."
성벽 위에는 온갖 방어용 병기가 있었다.
종류는 크게 둘. 하나는 성채로 오는 유일한 길목을 방어하는 용도의 병기들. 그리고 하나는 절벽 아래를 경계하기 위한 병기들이었다.
진현우가 처리하라고 말한 것들이었다.
"키이이익!"
전자는 상관없다. 은둔자들은 미리 받은 명령대로, 후자의 병기들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누군가가 성벽에서 벌어진 살육을 눈치챘다.
"시, 시체! 침입자다!"
"누가 성벽에 침입했다! 다 죽었어!"
하지만 이미 늦었다.
파괴는 다 끝난 상황. 목적을 달성한 유적 은둔자들은 다시금 땅으로 잠수했다.
성벽 위의 상황을 본 카오틱들이 경악했다.
"방어용 병기들이 멈췄어!"
"성문 쪽을 주시해라! 적들이 몰려들 수도 있다! 방어용 병기들을 최대한 빨리 복구해!"
"마력석이 박살 났는데 뭘 복구하라고!"
정신을 차릴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일련의 상황을 지켜보던 카오틱의 간부가 역정을 냈다.
"침착해라, 이 머저리들아! 너희는 가서 성채에 침입한 놈들을 추적해! 그리고 지원을 불러서 성벽 위의 인원을 보충해라. 어서!"
"예, 예!"
"그리고 절벽도! 아니, 됐다. 움직여!"
카오틱의 간부는 절벽도 경계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스스로 가능성이 낮다고 생각했다.
저 높은 절벽을 오를 수 있는 병사는 없다.
적들은 성채로 오는 유일한 길목으로 올 것이다. 성벽 위를 기습해서 제압한 것도....
- 키아아아아아!
"...!"
바로 그때, 소리가 들렸다.
절벽 아래에서 들리는 괴물의 포효. 그 포효가 엄청난 속도로 성채에 가까워졌다.
카오틱들이 반응할 시간도 없었다.
이윽고, 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 파지지지직!
"크아아악?!"
"흐, 흐으으으!"
천둥 비룡.
놈이 토해 낸 뇌전이 성벽 위의 적들을 감전시켰다. 카오틱들은 천둥 비룡의 모습에, 또 놈의 등에 올라탄 이들을 보고 경악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유, 윤서희. 거기에 임호석...!"
"화련, 저년이!"
여러 랭커가 그 등에 타 있었으니까.
경악한 그들에게 격렬한 화염이 돌아왔다.
하늘에서부터 쏟아지는 수많은 화염구가 성벽과 지상을 뒤덮었다. 동시에 천둥 비룡에서 뛰어내린 임호석이 해머를 높이 들어 올렸다.
- 콰아아앙!
"흐으읍!"
해머가 성벽을 내리쳤다.
그러자 성벽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리더니, 바닥에서 돌이 솟구쳐 적들을 덮쳤다.
임호석은 적들 사이에 몸을 내던졌다.
그 뒤를 윤서희와 샬럿, 여러 랭커가 따랐다.
"최대한 빠르게 핵심 지점만 타격하고 병사들을 부를 겁니다. 샬럿, 제 곁에 있으세요."
"네."
사방으로 펼쳐지는 거대한 영역.
그리고 샬럿의 버프가 랭커들을, 영역에서 나타나는 강철로 된 군단을 강화했다.
"아발란치는 오늘, 끝납니다."
"가서 다 죽여!"
혼란스러운 성채에 랭커들이 난입했다.
그렇게 성채 곳곳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와중에, 이상할 정도로 조용한 곳이 있었다.
성채의 중심부, 제단이 있는 곳.
"...."
성채의 상황을 지켜보던 시젠은 등을 돌렸다. 여기를 탈출하려는 몸짓처럼 보였다.
그런 그에게 누군가 말을 걸었다.
"어딜 그렇게 급히 가시나?"
시젠의 몸이 굳었다.
고개를 돌릴 필요도 없었다. 시력을 잃은 대신에 발달한 감각이 후방의 존재를 인지했다.
"진현우."
진현우가 시젠의 등 뒤에 섰다.
부서진 검이 서늘한 검기를 일으켰다.
167화
변수
제단에 적막감이 감돌았다.
진현우와 시젠은 거대한 제단을 가운데에 둔 채, 서로를 말없이 노려보고 있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시젠이었다.
"빠르군. 여기까지는 어떻게 온 거지? 침입자를 감지할 수 있는 장치를 설치해 뒀는데."
"영체를 이용해서."
"영체? 흠...."
시젠이 그제야 알겠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점령지에 설치된 감지 장치는 어디까지나 생명체를 감지하는 것. 영체라면 감지할 수가 없다. 그걸 이용한 거라면 납득할 수 있었다.
어떻게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역시, 재주가 많은 놈이군. 주인님께서 너를 빨리 죽이고 싶어 하는 이유를 알겠어."
"날 죽이고 싶어 하는 놈이 한둘이어야지."
"...."
시젠은 말없이 빙긋 웃었다.
맹인이기에 눈은 뜨고 있지 않다. 하지만 진현우는 그가 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곁에 있던 미호가 중얼거렸다.
- 인간, 저 눈먼 놈 말이다. 기분 나쁠 정도로 침착하지 않느냐? 뭔가 불길하구나.
'자기 실력에 자신이 있거나, 아니면 여기서 벗어날 방법이 있거나. 둘 다일 수도 있겠지.'
그때, 시젠이 고개를 돌렸다.
놈의 얼굴이 정확히 미호를 향했다.
"네가 말한 영체가 그것인가?"
- 흐이이익?!
기분 탓이 아니었다.
시젠은 미호의 존재를 알아챘다. 그 사실에 기겁한 미호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펫? 흠, 놀랍군. 수준 높은 영물인 것 같은데, 그런 놈을 펫으로 길들일 줄이야."
- 이, 인가안! 저놈 기분 나빠!
"특이한 눈을 가졌나 본데."
시젠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 대신 허공에 손을 뻗었다. 그러자 그 손에 풍압이 모이더니, 형체 없는 검이 생겼다.
바람으로 만들어진 보이지 않는 검.
"주인님에게 방해가 되는 널 여기서 죽이는 것도 좋겠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다."
시젠이 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거센 풍압이 방 전체로 퍼졌다. 한 치 앞을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강한 바람이었다.
진현우의 몸이 밀리기 시작했다.
"조만간 또 만나게 될 것이다."
- 쉬이이익!
마력이 빨려 들어가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장치가 작동하는 소리도. 진현우는 두 눈을 부릅떴다. 시젠의 곁에 엄청난 양의 마력이 모이더니 포탈을 형성하는 것이 보였다.
"왜 저렇게 여유가 있나 했더니."
도망칠 준비를 해 뒀을 줄이야.
시젠의 얼굴에는 여유로운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이대로 그냥 보내 줘도 무방하긴 하지만.
"빈정이 상한단 말이지."
진현우는 시간을 계산했다.
부서진 검을 가진 그이기에 가능한 잔재주가 있다. 시젠은 순식간에 형성된 포탈에 몸을 내던졌다. 그 몸이 발끝부터 흐려지기 시작했다.
'지금.'
진현우가 쥔 부서진 검이 시퍼런 검기를 흘렸다. 그는 망설임 없이 허공을 베었다.
앞은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거센 바람 때문에 검기를 올바르게 날리기도 힘들다.
하지만 상관없다.
- 서걱!
"...!"
물속을 헤엄치는 것과 같은 검기는 그런 제약 따위는 가볍게 무시할 수 있으니까.
공간을 넘은 검격이 포탈을 베었다.
그러자 부서진 검의 옵션, 탐식의 검이 발동하면서 포탈의 마력을 탐욕스레 흡수했다.
"마, 말도 안 돼!"
지금 시젠은 포탈에 진입한 상황.
그 몸은 절반 가까이 사라졌다. 그런데 진현우의 검이 포탈의 마력을 흡수해 버렸고.
- 콰드드득!
"크아아아악!"
그건 치명적인 사태를 일으켰다.
동력원인 마력을 상당수 잃은 포탈이 불안정해졌다. 포탈이 종잇장처럼 마구잡이로 구겨졌고, 시젠의 팔다리도 덩달아 구겨졌다.
처절한 비명이 제단을 가득 울렸다.
"안 돼, 커헉! 이대로는...!"
"멍청하기는. 대놓고 포탈을 써? 이런 일을 당할 수도 있다는 건 생각도 못 했나?"
"으아아아아!"
포탈이 시젠의 몸을 완전히 삼켰다.
마력이 불안정해지긴 했지만 포탈의 발동이 아예 멈출 정도로 흡수하지는 못했다.
포탈은 시젠을 전이시킬 것이다.
"잘 가라. 어디로 갈지는 모르겠다만."
"...!"
원래 설정해 뒀던 위치가 아닌, 시젠도, 진현우도,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위치로.
시젠의 핏발 선 눈이 진현우를 응시했다.
그 입에서 핏물이 쏟아졌고.
- 화아아악!
포탈과 함께 시젠이 사라졌다.
완전히 짓이겨진 팔다리를 남겨 둔 채로.
"잘난 주인이 이건 안 가르쳐 줬나 보군."
- 흐, 흐아아... 너무 잔인하구나....
핏물을 본 미호가 눈을 가렸다.
그걸 본 진현우는 되레 코웃음을 쳤다. 수많은 인간을 잡아먹은 요물이 잔인하다니.
"포탈 덕분에 마력도 채우고 잘됐네."
- 쿠후웅.... 그런데 인간, 저 팔다리를 놓고 간 인간 말이다. 나중에 또 만날 수도 있는 것 아니냐? 상처를 치료해서 돌아온다든가.
"그럴 수도 있겠지. 근데...."
진현우는 짓이겨진 팔다리를 봤다.
"아무리 카오틱이라도 결손 부위를 회복하는 건 어려워. 회복해도 예전 같지는 않을걸."
의수와 의족을 썼던 진현우이기에 잘 안다.
신체 부위가 남아 있으면 붙여서 치료하면 되는데, 아예 날아가 버리면 어쩔 방법이 없다.
만약 이러고도 돌아와서 앞을 막는다면.
'그때는 완전히 죽이면 될 일이지.'
진현우는 등을 돌리려고 하다가, 시젠의 손이 무언가를 꽉 움켜쥐고 있는 걸 봤다.
보이지 않는 뭔가를 쥐고 있다.
"음, 이건...."
- 검인 것 같구나. 아닌가?
보이지 않는 검이었다.
아까 시젠이 쓰던 형체가 없는 검이 아닐까 싶었다. 풍압을 일으키던 검.
진현우는 검을 더듬어 뭔지 확인했다.
[스사노오 (영웅)]
- 설명: 바람의 신이 자신의 신도에게 내렸던 검이다. 매서운 바람의 힘이 느껴진다.
원래는 더 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검이지만, 신도가 아닌 이가 쥐었기에 힘이 약해졌다.
- 착용 제한: 신에게 인정 받은 자.
- 효과: 바람의 가호, 거센 바람, 해방.
* 바람의 가호: 특수한 가호로, 주인이 아닌 자에게는 검의 형상이 보이지 않는다.
* 거센 바람: 강하게 압축된 바람이 검을 휘감고 있다. 검이 놀라울 정도로 튼튼해지며, 엄청난 예기를 자랑한다.
* 해방: 압축된 바람을 해방시킨다.
설명을 보니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원래는 전설 등급이었던 거 같은데.'
옵션도 이것보다 더 좋았을 것이다.
아마 시젠이 특수한 퀘스트를 깨서 얻은 검이 아닌가 싶었다. 자신은 그 퀘스트를 깬 것도 아니었으니 검이 제 성능을 낼 수 있을 리가.
- 어떻게 할 것이냐?
"어쩌긴 뭘 어째."
진현우는 부서진 검을 내밀었다.
"먹어야지. 건방지게 날 거부해?"
용서할 수 없다.
부서진 검의 옵션, 천변이 발동했다. 스사노오가 바람을 내뿜으며 저항했지만 무의미했다.
- 부서진 검이 스사노오를 흡수했습니다. 천변이 스사노오의 형상을 기억합니다.
이걸로 기억한 형상은 둘.
사복검과 스사노오. 진현우는 부서진 검의 형상을 스사노오로 한번 바꿔 봤다.
"오, 검이 이렇게 생겼었구만."
그러자 검의 형상이 보였다.
시젠이 일본인이라서 그런지 일본에서 으레 볼 법한 형상을 갖춘 기다란 검이었다.
진현우는 미호에게 검을 보여 줬다.
"보이냐?"
- 안 보이느니라. 흐익! 들이대지 말거라! 휘두르지 말거라! 내가 베이지 않느냐!
"안 보인다니 잘됐네."
- 뭐가 잘됐다는 것이냐!
검이 보이지 않는다.
이 옵션은 꽤 유용하게 쓸 수 있을 것이다. 진현우는 부서진 검을 아공간에 넣었다.
"좋아, 그럼...."
진현우는 제단을 확인했다.
거기에 익숙한 조각이 있는 것이 보였다.
"요즘 칭호가 왜 잠잠하나 했더니.'
웨펀 마스터의 조각이었다.
요즘 들어서 계승자 칭호가 조각의 위치를 안 알려 준다 싶더라니, 선수를 뺏긴 모양이다.
진현우는 조각을 쥐었다. 안에 담겨 있었을 강력한 힘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멍청하긴."
하지만 상관없다.
이 조각에는 여전히 사념이 남아 있으니까.
원래 조각이 가지고 있었던 힘을 완전히 복구하지는 못하겠지만, 어느 정도는 가능할 터.
'일단은 나중에.'
지금은 감정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진현우는 바깥을 바라봤다. 플레이어 측의 랭커들이 카오틱들을 상대로 분전하는 상황.
저 너머, 절벽 위의 성채로 오는 유일한 길목에서 플레이어들이 몰려오는 것이 보였다.
- 도와주러 가야겠구나.
"그래야지."
진현우는 땅을 박찼다.
가장 먼저 이 성채부터 점령해야 한다.
* * *
- 점령지, '절벽 위의 성채'를 빼앗았습니다.
- 레벨이 상승했습니다.
- 레벨이....
전투는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카오틱들은 성채의 수장이었던 시젠을 잃은 상황. 거기에다가 기습을 당하면서 성채의 핵심 방어 시설들이 무력화되기까지 했다.
버티려야 버틸 수가 없었다.
"이 비열한 놈들이...."
"크허억!"
살아남은 카오틱들은 많지 않았다.
그들 중 신분이 높은 이들만 심문용 포로로 놔두고, 나머지는 모조리 처형해 버렸다.
살려 둬 봤자 후환만 될 뿐이다.
"생각보다 싱겁게 끝났군요."
"음. 잘됐다고 해야겠지. 근데...."
윤서희와 임호석이 그리 말했다.
전투가 끝나고, 플레이어 측의 핵심 인물들은 성채 중심부의 제단에 모두 모였다.
당연하지만 그중에 진현우도 있었다.
"아발란치의 수장, 시젠. 그놈이 널 보자마자 도망치려고 했다는 게 사실이냐?"
"예. 처음부터 도망칠 생각이었던 것 같습니다. 탈출용 포탈을 준비해 뒀더라고요."
"그 포탈을 당신이 망가트렸고요."
윤서희가 시젠의 팔다리를 흘깃 봤다.
사방에 흩뿌려진 핏물이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대강이나마 짐작할 수 있게 했다.
"흥, 좀 이상하지 않나?"
얘기를 가만히 듣던 화련이 불쑥 말했다.
그녀는 자신의 손톱을 다듬고 있었다.
"그 카오틱 새끼 말이야. 왜 여길 지킬 생각도 안 하고 도망친 걸까? 본거지일 텐데. 여길 잃으면 7층의 카오틱은 와해되는 거잖니."
"...."
모두가 침묵했다.
진현우의 기습이 있었기에 성채를 공략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아발란치의 수장인 시젠이 보였던 행보는 이상했다.
기습에 당했다고 바로 본거지를 버린다니.
"이제 여기는 필요가 없는 것처럼."
진현우에게는 그렇게 느껴졌다.
절벽 위의 성채가, 시젠에게는 목숨을 걸고 지킬 필요가 없을 정도로 가치가 떨어졌다.
그럼 왜 가치가 떨어졌을까?
'여기를 지킬 필요가 없어졌다. 게다가 그놈, 가기 전에 조만간 또 만날 거라 했지.'
진현우와 시젠이 만나게 될 일이 생긴다.
여기를 지킬 필요가 없어졌다는 건, 다르게 말하자면 여기서 할 일은 이미 끝났다는 것.
그리고 또 하나.
'침식률.'
이 시기에 침식률이 70%를 넘은 것은 전생에는 없었던 일이다. 그때는 70%가 되기 전에 네메시스가 총대를 멨던 걸로 기억한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는 다르다.
'잠깐만, 이거... 짚이는 게 있는데.'
침식률이 의미하는 것은 간단하다.
탑과 지구와의 경계가 흐려졌다는 것. 탑이 그만큼 지구를 더 많이 침식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건, 대적자에게 기회가 된다.
'침식률이 높아졌을 때 대적자가 지구를 침공했던 적이 전생에 몇 번 있었지.'
지구 곳곳에 쇠사슬이 달린 거대한 쐐기가 꽂히더니, 거기서 카오틱과 마인이 쏟아졌다.
인류에게 엄청난 피해를 입힌 사건이었다.
그걸 주도한 것은 당연히 대적자들이었고.
'먼 미래의 일이라서 잊고 있었는데.'
어쩌면.
"앞당겨진 걸지도 모르겠군."
'진현우'라는 변수 때문에.
몇 개의 단서가 합쳐지면서 해답이 나왔다.
시젠을 비롯한 아발란치는 침식률을 높이기 위해 여기서 플레이어들을 방해하고 있었다.
'이제 목표한 침식률을 달성했으니, 7층의 점령지를 다 잃든 말든 상관이 없는 거지.'
주목적은 이미 달성했으니까.
진현우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귀찮은 일이 생길 것 같은 예감이 드네.'
확신에 가까운 예감이 들었다.
168화
기억
점령지, 절벽 위의 성채를 빼앗았다.
소유권은 진현우에게로 돌아갔다. 근데 그 과정이 그에게는 썩 유쾌한 과정은 아니었다.
"연합을 새로 만들죠."
"그래. 네가 구심점이 되면 될 거 같군."
"제가요? 뭐 그런 귀찮...."
그 얘기를 들은 진현우는 인상을 구겼다.
윤서희가 제안한 것은 간단했다. 미르 연맹과 아그니스의 연합을 합치자는 제안이었다.
"확실한 구심점이 필요해요. 7층에는 우리 말고도 한국의 길드가 몇 개 더 있거든요. 그런 길드들을 끌어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아웃로우 같은 길드 말이야. 우리와 같은 5대 길드지. 추혼은 정보를 팔면서 사는 놈이라서 7층에서는 별 활동을 안 하고 있어."
"추혼은 뭐, 필요 없지 않나?"
화련이 시큰둥하게 말했다.
그러더니 그녀와 마찬가지로 시큰둥한 표정을 하고 있는 진현우를 가리켰다.
"간단하게 생각해. 내가 새로 수장이 된다고 쳐. 네메시스 쪽에서 가만히 있을까?"
"흠, 가만히 있을 리가 없죠."
"역으로 저 여자가 우리 위에 선다고 하면? 그러면 우리 쪽 애들도 가만있지 않을 거야."
두 수장이 극적으로 화해한 덕분에 협력하고 있긴 하지만, 두 조직은 앙숙 관계다.
서로가 위에 서는 걸 받아들일 리가 없다.
"게다가 우리도 떨어져 나간 인원이 좀 많거든. 내가 저년, 아, 아니. 윤서희하고 협력하는 거에 불만을 가진 놈들이 좀 있어서."
"저년... 당신도 불만이 있는 거 아닌가요?"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
화련이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윤서희에게 사과하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주인인 진현우의 명령이 있었기에 한 것.
본심이 아니었으니 불만이 있을 수밖에.
"그래서 네가 적합하다는 거야. 길드도 없고, 7층에 오자마자 한 것들이 있으니까."
"반발이 아예 없지는 않겠지. 근데 뭐, 그 정도는 우리가 알아서 억누를 수 있을 거다."
"이미 정해진 거군요."
진현우는 한숨을 삼켰다.
피할 수 없으면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렇게 하죠."
딱히 거절할 이유가 없기도 했다.
* * *
강행군이 끝났다.
아발란치에게 남은 점령지는 하나. 하지만 그것도 놈들이 포기하고 떠나 버렸다.
"버리고 갔다고요?"
"예. 어제 정찰을 가 봤더니 텅텅 비어 있더라고요. 일단 기회다 싶어서 점령해 뒀습니다."
"흠, 이해가 안 가는 선택은 아니긴 한데."
본거지까지 뺏긴 상황에서 버틴다고 뭘 하겠는가. 그냥 개죽음만 당할 뿐이지.
현명한 선택이긴 했다.
"별다른 함정은 없어 보입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내부를 살피고 진입하겠습니다."
"그렇게 하세요."
어쨌든, 아발란치의 점령지를 모두 먹었다.
윤서희는 한동안 점령지들을 관리하면서 휴식을 취하자고 했고, 모두가 동의했다.
진현우는 샬럿과 함께 성채 내부를 살폈다.
"현우야, 아무것도 없는 거 같은데?"
"음...."
목적은 하나였다.
제조법을 찾는 것. 다른 카오틱들의 점령지도 살펴봤지만, 제조법은 찾을 수 없었다.
여기에 있거나, 아니면 던전에 있거나.
가능하면 전자이기를 바랐다.
"찾았다."
다행히도 전자였다.
성채에서 시젠이 쓰던 방에 제조법이 있었다. 차원 파괴자를 약화시킬 물건의 제조법.
진현우는 제조법을 아공간에 챙겨 뒀다.
"그거야?"
"어. 재료는 지금 우리가 가진 점령지에서 충당할 수 있을 것 같네. 남은 건...."
"미국이 만든 연합에 있다고 했었지?"
진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이 골든 이글이라고 했던가."
"응, 맞아. 그 사람이라면 내가 알아. 2층에 있을 때 수경 언니하고 같이 파티로 활동했었던 적이 있거든. 아마 연락처가 있을 건데."
"연락처라...."
윤서희 말로는 골든 이글에게 몇 번 접촉했던 적이 있지만 상대해 주지 않았다고 했다.
세력이 약해서라는 이유라고 했던가.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연락해서 한번 만나자고 해 줘. 쓸데없는 세력 다툼으로 낭비할 시간도 없으니까."
"알았어. 언니한테 말해 볼게."
전투 없이 해결할 수 있다면 베스트다.
그리고 어디까지나 짐작이지만.
'제우스 쪽도 쉽게 풀릴 것 같단 말이지.'
제우스의 행보는 굉장히 이상하다.
오랫동안 탑에서 활동해 왔던 진현우의 경험으로 미루어 보면, 카오틱과 연관이 있을 확률이 높다. 전원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상층부는.
'아발란치가 목적을 달성해서 7층에서 발을 뗀 상황이니까, 아마 제우스 쪽도 그러겠지.'
카오틱과 제우스의 목적이 같다는 가정이 붙지만, 진현우는 그럴 가능성이 높다고 봤다.
일단 부딪쳐 봐야 알 일이기는 하다.
'어느 쪽이든 빠른 시일 내에 처리해야 돼.'
제우스든, 유신이든.
진현우는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원래는 시젠이 쓰던 방을 그가 대신 쓰고 있었다. 방에 들어온 그는 손바닥을 펼쳤다.
거기서 힘을 잃은 조각이 튀어나왔다.
"여기에 무슨 기억이 담겼나...."
- 뭘 하려는 것이냐?
"넌 가서 자라."
진현우는 미호를 침대에 대강 던져 뒀다.
그러곤 조각에 남은 기억을 읽었다.
'기억 감정.'
시야가 백색으로 물들었다. 잠시 후, 새하얀 시야 너머로 폐허가 된 세상의 모습이 보였다.
지금 그가 있는 7층처럼 부서진 세상이.
- 오랫동안 쥐새끼처럼 숨은 채 탑을 돌아다니셨더군. 찾느라 꽤 고생했소, 스승.
- ....
그 세상에 두 남자가 서 있었다.
한 명은 진현우가 알고 있는 선대였으며, 다른 한 명은 형상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정확히 말하면, 전생에서 본 듯한 기분.
어쩌면 그건 기분 탓이 아닐지도 모른다.
- 그자의 제안을 거절했다고 들었소.
그 목소리마저도 익숙했다. 진현우가 기억을 더듬는 동안, 선대와 남자의 대화가 이어졌다.
- 그럼 그 제안을 받아들이라는 것이냐?
- 못 받아들일 이유는 또 없지 않소.
- 미친 소리를. 그자의 끄나풀이 되라는 제안을 못 받아들일 이유가 없다고? 그게 뭘 뜻하는 것인지 네놈도 잘 알고 있지 않느냐.
선대가 코웃음을 쳤다.
- 난 그럴 수 없다.
- 당신은 그렇겠지만, 난 아니오. 그래서 당신 대신 내가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지.
- 네놈....
흐릿한 형상의 남자가 주변을 돌아봤다.
산산이 부서진 세상을 그 눈에 담았다. 한때는 수많은 사람이 살던, 아름다운 세상이었다.
지금은 멸망하여 모든 것이 파괴됐지만.
- 나는 이 세상을 포기할 수 없소.
- 헛소리를. 본심을 말해라, 우둔한 제자야. 네 속에 감춰진 본심은 그게 아니지 않느냐.
- 흠, 그럼 뭐라고 생각하시오?
잠깐의 적막이 흘렀다.
서늘한 눈동자가 남자를 주시했다. 그 속마음까지 훤히 꿰뚫는 것 같은 눈동자가.
- 네 탐욕! 세상 따위는 관심도 없지 않느냐. 무의 극한을 보고 싶은 것뿐. '대적자'라는 제안을 받아들인 것도 그를 위해서겠지.
그 말에 남자의 입가가 뒤틀렸다.
어두운 얼굴에 기괴한 미소가 떠올랐다.
- 그자가 당신을 죽이라고 날 보냈소. 당신은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거든.... 새로 얻은 힘을 시험할 좋은 기회이기도 하지.
남자가 천천히 검을 빼 들었다.
그 모습을 본 선대가 한탄을 금치 못했다.
- 사람을 보는 눈이 없었군. 내 옹이구멍 같은 눈을 뽑아 버리고 싶은 심정이다, 제자야.
- 그럼, 내가 직접 뽑아 드리지!
서로 맞부딪치는 무기.
그 순간, 검이 부딪쳤다고는 믿기 힘든 굉음과 함께 엄청난 기의 폭발이 사방을 뒤덮었다.
진현우의 시야가 백색으로 물들었다.
- 기억 감정의 효과로 부서진 조각이 원래 가지고 있었던 힘의 일부를 되찾았습니다. 하지만 모든 힘을 되찾지는 못했습니다.
다시 시야가 원래대로 돌아왔을 때, 진현우는 기억 속 세상이 아닌 현실로 와 있었다.
그는 두 눈을 껌뻑거렸다.
"이건 또 뭔 개소리야?"
"왜 갑자기 화가 그리 난 것이냐?"
"아니, 끄으응...."
진현우의 인상이 확 구겨졌다.
어느새 인간 형태로 바뀐 채로 침대를 뒹굴거리던 미호가 놀란 눈으로 쳐다봤다.
너무 많은 정보가 한 번에 들어왔다.
'잠깐만, 잠깐만 정리해 보자.'
진현우는 침대에 앉아서 생각을 정리했다.
몇 가지 핵심적인 정보를 알게 됐다.
1. 멸망한 세상에서 선대와 대면하고 있던 남자는 아마도 대적자다.
2. 선대는 대적자의 스승이었다.
3. 선대는 '누군가'에게 제안을 받았으나 거절했고, 그 이유로 대적자의 공격을 받았다.
진현우는 침음성을 흘렸다.
그리고 다시금 기억을 더듬으면서, 조금 전에 들은 남자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들은 적이 있는 목소리다. 어디서? 언제?
- 무월이 죽었는가.
떠올랐다.
3층에서 만났던 마인, 무월. 놈이 죽었을 때 그 몸을 제물로 삼아서 강림했었던 대적자.
또한 전생에서도 들은 적이 있던 목소리.
다소 다르기는 하다. 그 목소리는 훨씬 끔찍했었으니까. 하지만 분명 비슷한 목소리였다.
'높은 확률로 멸망의 목도자다.'
선대가 만난 대적자의 정체였다.
진현우는 다시금 정보를 정리했다.
- 선대는 멸망의 목도자의 스승이었다. 그리고 제안을 거절한 탓에 놈에게 공격당했다.
"거참, 대단한 제자를 두셨군."
그런 소리가 절로 나왔다.
그 제안이라는 게 뭔지는 간단했다.
'대적자가 되라는 제안.'
자세한 사정은 모르겠지만, 선대는 대적자가 될 수 있었으나 거절한 모양이다.
그렇게 생긴 빈 자리를 멸망의 목도자가 차지했고, 그를 대신해 대적자가 된 것.
하지만 여전히 의구심은 남아 있었다.
'그자는 누구지?'
선대에게 제안을 한 자.
진현우는 전생의 기억을 더듬었지만 마땅히 떠오르는 인물은 없었다.
그나마 짐작할 수 있는 것이라면.
'이 탑에 대적자에게 힘을 줄 수 있을 정도로 초월적인 존재가 또 있는 모양인데.'
그걸 파악하기에는 정보가 부족하다.
결국 필요한 것은 정보다. 어차피 조만간 카오틱에 마인, 대적자와 부딪칠 것 같으니.
'그때 정보를 캐내는 수밖에.'
진현우는 알아낸 정보를 머릿속에 새겨 뒀다. 그리고 눈앞에 나타난 메시지를 봤다.
- 부서진 검이 조각을 흡수했습니다. 검이 강화되기에는 보유한 힘이 부족합니다.
- 웨펀 마스터의 비급을 읽었습니다. 안에 담긴 깨달음이 머릿속에 새겨집니다....
- 제5식: 유성 (S, Lv.1)을 익혔습니다.
· 제5식: 유성 (S, Lv.1): 그 기세는 쏟아지는 유성과도 같이, 하늘을 향해 한 발의 화살을 쏘아 낸다. 그 화살은 수많은 화살로 분열해 지상으로 쏟아지며, 큰 폭발을 일으킨다.
스킬을 본 진현우의 눈동자가 커졌다.
'검이 아니라 활 스킬이잖아?'
클래스 이름은 웨펀 마스터면서 검 스킬만 주구장창 익히길래 뭔가 했더니.
예상치 못한 스킬이라서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나쁘지 않다.
'실피르로 쏘면 꽤 유용하겠네.'
진현우는 메시지를 껐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순간.
- 충분한 조각을 찾아냈습니다. 100레벨을 돌파했습니다. 필요한 조건을 충족했습니다.
- 2차 전직 퀘스트를 시작합니다.
"응?"
전혀 예상치 못한 메시지가 나왔다.
169화
메사이어
2차 전직.
게임, 브로큰 월드에서는 100레벨을 넘으면 2차 전직의 기회가 주어졌다.
보통은 특정 퀘스트를 깨야 하는데, 이 퀘스트가 나오는 레벨이 제각기 달랐다.
'이 시기에 나오는 거면 꽤 빠른데.'
100레벨은 확실히 빠른 편이다.
조각을 갖춰야 한다는 번거로운 조건이 있어서 그런지 퀘스트가 생각보다 빨리 나왔다.
그리고 퀘스트창이 나타났다.
[자격의 증명.]
· 난이도: S+.
· 설명: 충분한 숫자의 카오틱과 마인들을 죽이고, 대적자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혀라.
· 보상: 상위 클래스로 전직.
퀘스트창을 본 진현우는 할 말을 잃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건 또 뭔...."
난이도 S+.
척 봐도 더럽게 어려운 퀘스트였으니까.
충분한 숫자의 카오틱과 마인을 죽여서 대적자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히라니.
그게 가능한 일....
'응? 되겠는데?'
조만간 있을 거라고 추정되는 대침공.
그때 제대로 활약한다면 바로 달성할 수 있다. 수많은 카오틱과 마인이 공격해 올 테니까.
진현우는 입가를 매만졌다.
'분명히 큰 위기기는 해. 하지만.'
동시에 큰 기회이기도 했다.
퀘스트를 깨는 것도 그렇고, 카오틱과 마인 쪽의 전력을 크게 꺾을 수 있는 기회기도 하다.
어디까지나 막을 수 있다면.
'쉽지는 않겠지만 가능성이 없는 건 아냐.'
전생에 대침공이 일어났을 때에는 플레이어들끼리 아예 단합이 되지 않은 상태였다.
게다가 여러 길드가 멸망했던 상황.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7층에서 결성한 연합을 바깥까지 유지할 수만 있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진현우는 눈가를 매만졌다.
새 연합의 수장 자리를 맡아 달라는 제안을 처음 들었을 때는 더없이 귀찮았었는데.
지금은 그 제안이 더없이 반갑게 느껴졌다.
"사람이 참, 간사하기 그지없네."
진현우는 쓰게 웃었다.
뭐가 됐든, 이건 좋은 기회다. 그리고 그에게는 이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었다.
조금도.
* * *
바로 다음 날.
아그니스와 네메시스 그리고 여러 길드를 포함한 새로운 연합체가 만들어졌다.
제우스를 제외한 다른 5대 길드와 여러 곳에 흩어진 한국 길드를 합친 연합이었다.
여러 길드장과 간부들이 모인 가운데, 윤서희는 가장 중요한 것을 진현우에게 물었다.
"연합의 이름은 뭘로 하겠습니까?"
"아, 미르를 계속 쓰자는 소리는 하지 마라. 저쪽 여자가 미르 하면 아주 치를 떨거든."
"귀찮은데 그냥 미르로 할 것이지."
임호석이 화련을 가리키며 말했다.
미르라는 이름을 유지하면 아그니스가 합병되는 것 같은 구도라서 마음에 안 들 터.
새로운 이름을 지을 수밖에 없다.
'이름이라....'
무슨 이름을 지을까.
고민하던 찰나, 바로 이름이 떠올랐다.
"메사이어로 합시다."
"메사... 뭐라고요? 진심으로요?"
"구원자? 너무 요란스러운 이름 아닌가?"
반응은 안 좋았다.
진현우도 작게 신음했다. 전생에서 백승현이 지었던 이름이다. 사실 그때의 진현우도 너무 요란스러운 이름 아니냐고 반대했었다.
메사이어, 구원자라니.
"아, 오래 쓸 이름도 아닌데 그냥 메사이어로 합시다. 7층을 구원한다. 좋잖아요."
"아니, 뭐 본인이 원한다면야...."
"반대할 생각은 없기는 한데...."
길드장과 간부들이 서로 얼굴을 마주 봤다.
유일하게 찬성하는 것은 샬럿이었다.
"난 좋다고 생각해, 현우야. 툭하면 성녀라고 불리는 내 기분을 너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메사이어의 수장, 진현우. 멋지네."
"그런 취향이었습니까?"
"흠, 그렇다면야 이해 못 할 것도 없지."
"...."
진현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이름으로 해도 상관없긴 한데, 그래도 메사이어로 하고 싶었다. 진현우에게는 무엇보다도 의미가 깊은 이름이었으니까.
어쨌든.
"메사이어로 해, 그냥. 주인... 아니, 저 남자가 하고 싶다는데 막을 필요는 없잖아."
"방금 주인이라고 안 했습니까?"
"뭔 소리야. 귀가 먹었니?"
연합의 이름은 메사이어로 결정됐다.
그리고 다시금 시간이 흘렀고, 잠깐 탑 바깥으로 나갔던 샬럿이 한 가지 소식을 가져왔다.
"골든 이글이 만나겠대. 대신에 장소는 자기가 정하겠다는데, 어떡해? 받아들일까?"
"받아들여야지."
골든 이글이 만나자는 제안을 수락했다는 소식. 당연하지만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들이 제시한 회담 장소는 메사이어 연합과 골든 이글의 점령지 사이에 있는 곳이었다.
"...."
"...."
드넓은 황무지.
부서진 세계의 틈이 사방에 나 있는 곳에서 두 무리가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골든 이글 그리고 메사이어.
"서로 인원이 조촐하군요."
"골든 이글 쪽에서 내건 조건이었으니까."
서로 인원은 적게 대동했다.
하지만 하나같이 랭커에 속하는 전력이었기에 서로 얕볼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20명 남짓 있는 골든 이글. 그 가장 선두에는 유독 가냘픈 체격의 남자가 서 있었다.
"콜록, 진현우. 맞습니까?"
"예. 얼마 전에 메사이어 연합의 수장 자리를 맡았습니다. 그쪽은...."
"데이비드 로버츠. 쿠훅! 죄송합니다. 사정이 좀 있어서. 골든 이글을 이끌고 있습니다."
데이비드 로버츠.
골든 이글의 수장이었다. 그는 어딘가 불편한지 연신 기침을 내뱉고 있었다.
진현우는 그 이유를 알고 있다.
'저 남자가 가진 클래스 때문이었지.'
지금은 저렇게 비리비리해 보이지만 전투 때가 되면 거구의 근육질 남자로 변한다.
꽤 특수한 클래스였던 걸로 기억한다.
"크흠, 카학! 으, 죄송합니다. 얼마 전에 유명한 루키라는 소리를 들었던 것 같은데, 연합의 수장까지 될 줄은 생각도 못 했습니다."
"예... 일단 피부터 좀 닦으시죠."
"아, 이건 신경 쓰지 마시고."
데이비드가 입에서 토한 피를 슥슥 닦았다.
"샬럿에게서 어떤 제안인지 미리 들었습니다. 쿨럭, 협력 관계를 맺고 싶다고...."
"그리고 제조법을 공유하고 싶습니다."
진현우와 데이비드의 시선이 마주쳤다.
탐색하는 듯한 눈빛. 먼저 움직인 것은 진현우였다. 그는 품속에서 종이를 한 장 꺼냈다.
"그게 당신이 가진 제조법입니까?"
"예. 필요한 특산품은 저희 점령지들에 있습니다. 지금 필요한 양을 모으는 중이고요."
"그렇군요. 콜록!"
잠깐 고민하던 데이비드도 종이를 꺼냈다.
"우리가 가진 제조법입니다. S등급의 던전을 공략해서 얻은 것이죠. 엄청난 피해를 입었지만, 그럴 가치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데이비드는 제조법을 집어넣었다.
"원한다면, 이걸 공유할 생각이 있습니다. 쿨럭! 하지만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뭐죠?"
"당신이 남은 제조법을 모두 입수한다면, 우리 역시 이 제조법을 공유하겠습니다."
진현우는 팔짱을 낀 채 생각에 잠겼다.
무리한 제안인가? 아니었다. 어차피 모든 제조법이 모이지 않는 이상, 골든 이글이 가진 제조법만 얻어 봤자 별 의미도 없는 상황.
"몇 개의 제조법이 필요한지 아십니까?"
"다른 길드는 모르겠지만, 저희는 압니다. 총 세 개의 제조법이 필요하다는 것을요."
"그럼 그게 어디 있는지는?"
"모릅니다. 다만...."
데이비드가 말을 흐렸다.
진현우는 그가 뭘 말하려는지 알았다.
"제우스 길드."
"예. 커헉! 그럴 확률이 높습니다. 신빙성이 낮기는 하지만 그런 정보도 얻었고요."
데이비드의 추측으로는 그러했다.
지금 남은 세력 중에서는 제우스 길드 말고는 제조법을 가지고 있을 만한 세력이 없다.
실제로도 그랬다.
"더는 지체할 시간이 없습니다. 우리도 정부 쪽에서 엄청난 압박이 들어오거든요. 어떻게든 7층을 공략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미국도 상황이 많이 안 좋나 보군요."
"쿨럭, 우리 미국은 땅이 넓습니다. 게이트가 나타나는 범위도 넓죠. 곡창지대 쪽에서 엄청난 피해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미국은 땅덩어리가 넓고 인구가 많은 만큼 많은 숫자의 플레이어를 보유하고 있다.
전생에서도 가장 늦게 붕괴한 국가였다.
"하지만 제우스 길드가 순순히 내줄 리가 없겠지요. 콜록! 그런 의미에서, 두 연합이 동맹을 맺고 제우스 길드를...."
"압박하자?"
데이비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우스 길드를 압박해서, 전쟁이 일어날 것을 감수해서라도 제조법을 얻어 내야 한다.
하지만 진현우의 생각은 달랐다.
"우선 대화부터 해 보죠."
"대화? 우리도 여러 번 해 봤지만...."
"아뇨, 이번에는 다를 겁니다."
진현우는 확신을 갖고 말했다.
데이비드로서는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곁에서 얘기를 들던 임호석도 마찬가지였다.
"유신, 그놈이? 허, 글쎄. 대화가 통할 놈이 아니다. 굉장히 오만하고 자기만 아는 놈이거든. 그런 놈하고 대화가 통할 리가 있나."
"차라리 힘으로 뺏는 게 안 낫겠습니까? 이 정도 규모의 두 연합이 뭉쳤으니...."
다른 이들도 생각은 비슷했다.
어차피 대화는 통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힘을 이용해서 제조법을 뺏어야 한다.
"대화가 안 통하면 그렇게 하죠."
"으음, 도대체 뭔 생각인지 모르겠다만."
"좋습니다. 안 그래도 시급한 상황이니 피를 흘리지 않고 끝내면 그것도 좋죠. 쿨럭!"
데이비드가 피를 토하며 수락했다.
"골든 이글이 옛날에 썼던 연락 수단이 있습니다. 그걸로 회담을 요청해 보겠습니다."
"잘되면 좋기야 하겠지만...."
"흥, 그렇게 될까?"
모두의 표정은 시큰둥했다.
* * *
그리고 이틀이 지난 뒤.
"좋다. 너희한테 넘기지."
제우스 길드가 보낸 사절이 가지고 온 수정구에서 유신의 얼굴이 나타났다.
그가 한 말이 모두를 경악시켰다.
"뭐라고요?"
"이 사절에게 제조법을 맡겼다. 부족한 특산품이 있다면 그것도 넘기지. 원한다면."
"...그러니까, 어. 진심이냐?"
이틀 전만 해도 시큰둥한 얼굴이었던 이들이 경악한 얼굴로 수정구를 바라봤다.
믿을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모든 대화를 거절하고 독단적으로 움직이던 제우스 길드의 태도가 이렇게 바뀌다니.
"더 말할 필요는 없을 것 같군. 끊지."
유신은 냉담하게 통신을 끊었다.
묵직한 침묵이 감돌았다. 모두 할 말을 잃은 가운데, 진현우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 네 생각대로 됐구나, 인간.
'이렇게 될 줄 알았으니까.'
진현우의 예측대로 흘러간 셈이었다.
제우스, 거기서 유신이 카오틱과 내통하고 있다면. 둘이 같은 목표를 갖고 있다면.
아발란치의 수장이었던 시젠이 목적을 달성하고 도망치려고 했던 것처럼, 유신도 목표를 달성했으니 7층 공략을 방해할 이유가 없다.
'그러니 제조법을 그냥 넘겨주는 거지.'
더 가지고 있다가는 자신들도 여러 가지 의미로 큰 손해를 보게 될 테니까.
목표를 달성한 상황에서 불필요한 손해를 볼 이유가 없다. 그게 이유였다.
그리고 또 하나, 확실해진 것은.
'제우스, 아니. 적어도 유신, 저놈은 카오틱이나 마인과 어떤 연결 고리가 있다.'
그게 확실해졌다.
그리고 아마도.
'지구에 대침공이 벌어질 때, 제우스 길드도 어떤 식으로든 행동할 거다. 분명히.'
진현우의 눈이 서늘하게 빛났다.
하지만 지금은 그걸 신경 쓸 때가 아니다.
제조법을 다 모았다. 이제 필요한 특산품을 모으고, 최대한의 차원 병사를 모아야 한다.
"플로어 보스 공략을 준비하죠."
이제 때가 됐다.
이 지긋지긋한 7층을 끝낼 때가.
170화
거인
"괜찮으시겠습니까?"
"뭘 말이지?"
부서진 대륙의 북부.
가장 많은 점령지를 소유한 제우스 길드. 그 본거지에서 유신은 바깥을 바라보고 있었다.
공허하기 그지없는 풍경을.
"제조법 말입니다. 두 세력이 힘을 합치긴 했지만, 저희 길드라면 충분히...."
"대항할 수 있지. 다만 그럴 필요가 있나?"
"필요가 없다는 말씀이십니까?"
부하의 물음에 유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내 목적은 달성했다.'
목표한 침식률은 달성한 상태.
굳이 여기서 적들과 싸우면서 세력을 깎아 먹을 이유가 없다. 앞으로도 이익을 창출해 줄 점령지를 빼앗길 위험을 짊어질 이유도 없다.
지금 상황에서 제조법은 말 그대로 계륵.
넘겨줘도 무방한 상황이었다.
"병력은?"
"말씀하신 대로, 탑 바깥으로...."
"무리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지켜보기만 하면 돼. 그게 우리가 맡은 역할이니까."
유신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대적자의 솜씨를 볼 때가 됐군."
* * *
아발란치, 골든 이글 그리고 제우스.
세력 셋이 가지고 있던 제조법을 모두 획득했다. 진현우는 눈앞의 제조법을 확인했다.
- 제조법: 균형의 천칭.
- 제조법: 구속의 사슬.
- 제조법: 세상의 염원.
특이한 이름을 가진 제조법들이었다.
제각기 특수한 상황에서 쓸 수 있는 아이템들. 이걸 만드려면 막대한 특산품이 필요하다.
'나머지는 다 가지고 있는데.'
대부분의 특산품은 메사이어와 골든 이글이 보유한 점령지들에 있었다.
하지만 일부는 다른 세력에게 있었다.
바로 오블라카 연맹에게.
"비, 빌어먹을 놈들이!"
"두 세력이 한 번에 공격해 온다고?!"
그 사실을 깨달은 진현우가 선택한 방법은 간단했다. 협력해서 오블라카를 치는 것.
오블라카 연맹은 무력하게 밀렸다.
애초에 러시아는 미국이나 한국에 비해 랭커급 플레이어가 부족했던 상황이었다.
버틸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이 새끼들, 노예를 이런 식으로 썼었군."
오블라카 연맹은 지하 광산에 일꾼 외에도 엄청난 숫자의 플레이어를 가둬 두고 있었다.
강제로 노역시키려고 납치한 것이었다.
"고,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몇 달 동안 여기서 갇혀 있었는지...."
진현우가 겪었던 것처럼, 처음 부서진 대륙에 도착하자마자 오블라카에게 납치됐을 터.
오랜 시간 동안 노역을 겪었을 것이다.
메사이어와 골든 이글은 그들을 모두 구조한 후, 회복시킨 뒤에 탑 바깥으로 내보냈다.
"바깥 세상에 알려지면 난리가 나겠군."
"이걸 신경 쓸 여력이나 있을까요? 세상도 엉망이고, 러시아도 힘 상당수를 잃었는데."
"흠, 하긴. 오블라카가 박살 났으니."
안 그래도 러시아는 다른 국가에 비해 보유한 랭커의 숫자가 적은 편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오블라카가 박살 나고, 안 그래도 적은 랭커들이 더 줄어든 상황.
러시아도 정신을 차리기 힘들 것이다.
"진현우, 이제 뭘 하면 되겠나?"
"차원 파괴자하고 싸웠다가 멸망했다는 세력 말입니다. 혹시 남은 정보가 있습니까? 차원 파괴자가 어떤 패턴을 보였다든가."
"저희가 아는 패턴은 하나뿐이에요."
윤서희가 인상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처음에 차원 파괴자가 나타날 때 엄청난 숫자의 병력을 데리고 나타난다는 것."
"그게 처음 차원 파괴자와 싸웠던 세력이 본 유일한 패턴이다. 병력에 휩쓸려서 아무것도 못 했거든. 반은 죽고, 반은 도망쳤지."
"그렇게 도망친 자들도 뭐...."
기회를 노리던 하이에나들한테 사냥당했다.
처참한 말로였다. 메사이어나 골든 이글도 그 세력처럼 되지 말라는 보장은 전혀 없었다.
"이쪽도 도박이군요."
"실패하면 다 같이 죽는 도박이지. 7층에는 아직 정신을 못 차린 놈들이 많거든."
임호석이 쓰게 웃었다.
큰 세력 둘이 정리되었지만, 아직 7층에는 여러 나라의 세력이 존재하고 있다.
틈을 보이면 언제든 공격해 올 것이다.
"제조법에 쓸 특산품만 남겨 두고 나머지는 다 병사들을 고용하는 데 써야겠군요."
"그래야겠지."
시간은 그리 많지 않다.
이러는 동안에도 침식률은 계속 올라가고 있었으니. 일단은 할 수 있는 데까지는 버티면서 차원 병사들을 끌어모으기로 했다.
그리고 그날 밤.
- 인간, 그 상자는 무엇이냐?
"뭐긴 뭐야. 아래층에서 얻은 거지."
절벽 위의 성채에 있는 방.
진현우는 6층에서 얻었던 상자를 꺼냈다.
놀라울 정도로 새하얀 상자. 전생에서도 받은 적이 있어서 내용물이 뭔지는 예측이 됐다.
망설일 것 없이 바로 상자를 개봉했다.
[용맹의 증거 (전설)]
· 설명: 신들의 투기장에서 가장 뛰어난 전사임을 증명한 이에게 주어지는 선물이다. 내면에 강력한 힘이 깃들어 있는 게 느껴진다.
· 옵션: 용맹의 증거, 귀속.
* 용맹의 증거: 사용할 경우, 한 가지 능력치를 큰 폭으로 상승시킨다. 또한 원하는 스킬 하나의 숙련도를 크게 상승시킨다.
* 귀속: 획득자 외에는 사용할 수 없다.
능력치와 스킬을 동시에 강화해 주는 아이템이었다. 진현우는 생각에 잠겼다.
뭘 강화할 것인가.
"근력 그리고 영역 선포."
결론은 빠르게 나왔다.
진현우는 용맹의 증거를 사용했다. 내면에 깃든 강한 힘이 스며드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분명한 변화를 느꼈다.
- 용맹의 증거를 사용했습니다.
- 근력이 50만큼 상승했습니다. 영역 선포의 숙련도가 7단계 상승했습니다.
화아악!
진현우에게서 강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 캬아아악! 빛! 이 망할 놈의 빛!
미호가 고통스러워하는 게 들렸다. 진현우는 가볍게 무시하고, 변화를 확인했다.
가장 먼저 상태창.
[진현우]
· 레벨: 120
· 클래스: 웨펀 마스터
· 칭호: 투기장의 용사
· 근력: 371 (+40) · 민첩: 293 (+40)
· 체력: 295 (+45) · 마력: 203 (+32)
· 마기: 125
근력이 큰 폭으로 상승한 게 보였다.
실제로 신체에서 더 강한 힘이 느껴지고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 스킬, 영역 선포.
· 영역 선포 (S, Lv.10): 폭군의 영역을 전개한다. 폭군을 섬기던 언데드 부대를 소환하며, 이를 목도한 적들의 능력치가 감소한다. 영역 안에서 죽은 적은 언데드로 부활한다.
* 3일에 한 번 사용 가능하다.
* Lv.5: 폭군의 영역 범위가 한층 더 넓어지며 지속 시간이 더욱 길어진다.
* Lv.10: 더 강한 정예 언데드를 소환하며, 언데드로 부활한 적들이 강해진다.
영역 선포의 쿨타임이 절반이 넘게 줄어들었고, 그밖에도 여러 부분이 강화되었다.
진현우는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스킬도 많지만 그중에서 전황을 바꿀 정도의 스킬이라면 영역 선포뿐이었다.
- 우우우, 눈이, 눈이 아프니라....
미호가 눈을 감싸며 칭얼거렸다.
진현우는 창문 밖을 봤다. 성채 내부에 엄청난 숫자의 특산품들이 들어오는 게 보였다.
제조법들을 쓰는 데 필요한 특산품들이다.
'여기서 실패하면 끝장인가.'
지금은 눈치를 보면서 숙이고 있는 여러 세력이 메사이어와 골든 이글을 노릴 것이다.
높은 확률로 제우스도. 실패하면 그리된다.
"실패하지 않으면 될 일이지."
진현우는 바깥으로 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필요한 모든 특산품이 모였다. 그는 세 장의 제조법을 꺼냈다.
모두가 그를 쳐다보는 가운데 제조법을 썼다. 그러자 특산품들이 제각기 빛을 내뿜으면서 녹아내렸고, 제조법으로 빨려 들어왔다.
- 특산품을 소모하여 균형의 천칭, 구속의 사슬, 세상의 염원을 제작합니다.
- 필요한 시간: 38:00.
특산품으로 꽉 차 있던 성채가 텅 비었다.
사람들이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특산품이 있던 곳을 봤다. 진현우는 특산품들을 모조리 흡수한 제조법을 다시 아공간에 집어넣었다.
"38시간 뒤에 움직입니다."
이제 7층을 끝낼 때가 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