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돌아오니까 좋네. (3)
바네사는 지셀을 보자마자 다시 통곡하기 시작했다.
"죄송해요. 흐어엉. 제가 건물을 다 부수고 룬스톤을 잔뜩 날리고 영지에 큰 손해를 끼쳐서.... 으어엉."
"괜찮아,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다친 사람도 없으니까 정말 괜찮아. 하하하하."
지셀은 여전히 기분 좋게 웃었다. 지금 영지에 6서클 마법사가 생겼는데 그까짓 건물이 대수인가?
6서클 마법사를 영입하려면 이딴 건물 수백 채를 지어 줘도 부족하다.
그쯤 되는 실력자들은 돈만으로는 유혹할 수 없었다.
역시 적염의 마탑 역사상 최고의 재능이라 생각했던 자신의 눈이 틀리지 않았다.
"흐어엉, 아니에요. 영지도 가난하고 돈도 없어서 다들 힘들게 사는데.... 한 푼이라도 아껴서 영지에 도움이 되어야 하는데.... 이제 저 밥도 하루에 한 끼만 먹을게요.... 흐어어엉."
바네사의 말이 이어질수록 지셀의 웃음이 흐려졌다.
"아니, 이제 그 정도로 가난하진 않아."
"제가 평생 빨래라도 열심히 해서 꼭 갚을게요. 흐어어엉...."
"아니, 네가 빨래를 하면 그게 더 손해야."
정론이었지만, 그녀에게는 '네가 빨래를 하면 빨랫감도 망가진다'라는 말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역시 그렇죠? 저 같은 건 죽어야 해요. 죽여 주세요. 으어어엉."
지셀은 한숨을 내쉬었다. 바네사는 다 좋은데 이 바닥까지 떨어진 자존감과 소심함이 문제였다.
워낙 무시당하고 힘들게 살아와서 그런지 작은 실수에도 무척 민감하다고나 할까?
벨린다 같은 성격이었으면 '내가 6서클인데 이까짓 건물이 무슨 대수예욧! 돈이나 더 내놔욧!' 이러면서 도도하게 굴었을 텐데.
하기야.... 이번에 친 사고는 예전처럼 허드렛일이나 하는 신분이었다면 평생을 일해도 못 갚을 만한 큰일이었으니,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이해는 갔다.
눈물 콧물 쭉쭉 빼면서 계속 죄송하다는 말만 반복하는 그녀를 지셀이 일으켜 세웠다.
"정말 괜찮다니까. 그보다 벌써 6서클에 오르다니 대단해. 그게 나한테 더 큰 도움이야. 연구실은 새로 지어 줄 테니 너는 돈 걱정하지 말고 계속 수련에만 집중해. 그게 제일 중요하니까. 알았지?"
"흐어엉, 영주님!"
부드러운 목소리로 내려온 칭찬에 바네사는 감격의 눈물을 떨구며 지셀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몇 번 그녀의 어깨를 토닥이던 지셀은 살짝 몸을 떼고 그녀를 훑어보았다.
햇빛을 언제 본 건지 창백한 얼굴에 묻은 시커먼 검댕이 유독 눈에 띄었다.
옷에도 여기저기 때가 진 것이, 그녀가 방구석에 틀어박혀 연구와 수련에만 매진했다는 티가 확 났다.
퀴퀴한 냄새가 눈에 보이는 것 같은 기분에 지셀이 억지 미소를 지으며 바네사의 어깨를 두드렸다.
"...수련도 좋은데 이제 6서클도 되었으니 좀 씻고, 산책도 좀 하고."
"네, 네, 넵!"
그제야 제 몰골을 깨닫고 바네사가 부끄러워하며 후다닥 뒤로 물러났다.
지셀은 로웰을 돌아보며 말했다.
"연구실은 더 튼튼하고 넓게 새로 짓도록 해. 큰 공터에 마법을 사용할 더미도 마련해 두고."
"알겠습니다. 여기 터가 잘 잡혔으니 여기에 다시...."
그러자 지셀이 로웰의 어깨에 팔을 걸치고 속삭였다.
"멀리, 멀리 지어. 영주성에서 더 떨어트려서, 주변에 사람도 없고 안전한 곳으로. 무슨 말인지 알겠지?"
"...네."
로웰의 확답을 듣고 나서야 지셀은 다른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바네사가 6서클인 사실은 당분간 비밀로 하도록 해. 소문나서 좋을 건 없으니까."
모두가 넋이 나간 채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재능이 있다고 해도 벌써 6서클의 경지에 오를 줄이야.
주변의 측근들은 놀라면서도 지셀의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영지민들은 모두 멀찍이 떨어져서 제대로 대화를 듣지 못했으니 비밀 유지 또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건 정말 비밀로 해야 해.'
'대영주들이나 거느리는 6서클 마법사가 생기다니.'
'남들이 모르는 강력한 카드다!'
6서클 마법사는 극히 드물다. 평생 마법에 매진해도 6서클은커녕 5서클에도 이르지 못하고 죽는 자가 부지기수다.
일단 오르기만 하면 대영주들의 전속 마법사는 당연하고 마탑의 탑주 자리까지도 넘볼 수 있는 경지다.
비록 바네사는 마력이 부족한 반쪽짜리 6서클이지만, 그것도 활용하기 나름이다.
아마 멋모르고 시비를 거는 놈은 기습적으로 강력한 불맛을 보게 될 것이다.
사람들의 입을 단속시키고 정리를 하는 와중에 알포이와 마법사들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불났어? 불 어떻게 됐어? 무슨 다른 마법도 시전 됐던 거 같은데?"
호들갑을 떠는 알포이에게 지셀이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여, 알포이 오랜만이다. 일 잘하고 있었지?"
"으.... 영주님 오셨습니까...."
알포이가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몸을 피하자 지셀이 로웰에게 물었다.
"마법사들한테 시킨 일은 잘되고 있었나?"
로웰은 마법사들을 힐끔 쳐다보더니 고자질을 시작했다.
"크흠, 갈수록 속도가 늦어져서 일정을 제대로 맞추지 못했습니다."
"그래?"
알포이는 허겁지겁 손을 저으며 외쳤다.
"아니야! 열심히 했어! 그냥 몸이 좀 안 좋았을 뿐입니다!"
"괜찮아. 사람이 힘들면 좀 쉴 수도 있지."
"어...? 정말?"
지셀은 정말 괜찮다는 듯 상냥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쉬었던 만큼 더 열심히 하면 되지. 앞으로 할 일이 아주 많거든."
알포이는 갑자기 밀려오는 불안한 예감에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저 영주가 그냥 이렇게 넘어갈 사람이 아닌데?
거기다 할 일이 아주 많다는 말도 매우 수상하다.
설마 지금 하고 있는 공사들 말고 또 뭐 시킬 게 있다는 건가?
지셀은 불안해하는 마법사들을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각오들 하라고."
* * *
지셀은 영주성으로 돌아가기 전에 용병들의 주둔지부터 찾아갔다.
"대공자님, 돌아오셨군요!"
용병들을 교육하고 있던 란돌프는 무척이나 반색하며 지셀을 맞이했다.
그의 곁에는 퍼거스가 반가운 웃음을 지으며 서 있었다.
"허허, 도련님. 잘 다녀오셨습니까?"
지셀은 깜짝 놀라며 답했다.
"아니, 내가 펜리스 영지에서는 편하게 쉬고 있으라고 했잖아. 왜 주둔지까지 왔어?"
"기사단장님을 도와드리고 있었지요."
건강 문제로 페르디움에서 요양하고 있던 퍼거스는, 란돌프가 펜리스 영지로 올 때 함께 왔다.
체력이 따라 주지 않아 직접 훈련에 참여하지는 못했지만, 나이에 어울리는 지혜를 활용해 용병들의 훈련에 상당한 도움을 주었다.
지셀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걱정스럽게 말했다.
"그래도 당분간 쉬고 있어. 죽으면 부활하기 쉽지 않다고 몇 번이나 말했잖아."
"허허, 괜찮습니다. 도련님 덕분에 많이 좋아졌습니다."
그간 지셀이 자주 페르디움에 들러 약을 챙겨 준 덕분에, 퍼거스도 전생에 비해 건강이 많이 좋아진 상태였다.
하지만 아직 지셀의 성에는 차지 않았다.
'더 쉬었으면 좋겠는데.'
지셀이 몇 번이고 설득했지만 늙은 기사는 고집을 쉬이 꺾지 않았다. 지셀은 한숨을 내쉬고는 란돌프에게 늦은 인사를 건넸다.
"잘 지내셨습니까?"
"잘 지내긴요! 이 꼴통 놈들은 사람이 아닙니다."
란돌프는 지셀의 말이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욕을 하기 시작했다. 그의 낯빛은 거무죽죽하게 죽어 있었다.
군기가 잡혀 있는 병사와 기사들만 상대하다가 용병들을 맡으니 아주 죽을 맛이었다.
용병들은 제대로 말을 듣지 않는 건 기본이고 기본 상식 자체가 결여된 놈들이 많았다.
지셀이 휘어잡았기에 일단 따랐던 거지 태생이 그른 놈들이었다.
전술 훈련을 해 봐도 지셀이 훈련시킨 돌격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었다.
"도대체 이런 놈들을 데리고 어떻게 전쟁을 치르신 겁니까?"
"왜요? 문제가 많습니까?"
"많은 정도가 아닙니다! 최소한의 군기도 안 잡힌 놈들입니다!"
군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상관의 명령에 잘 따르는 것이다. 목표를 수행하기 위해 하나가 되어 움직이는 것이 군인의 미덕이었다.
하지만 용병들은 하나같이 제멋대로 굴며, 서로 자신들이 아는 게 옳다고 우기기 바빴다. 지금껏 무사히 살아남았다는 것 자체가 그들이 옳다는 증거라고 여기는 것이다.
"꼭 필요한 기본 지식은 어떻게든 욱여넣었지만, 더는 무리입니다. 아, 진짜 죄다 죽이고 싶어."
란돌프는 머리가 아픈 듯 미간을 꾹꾹 누르며 고개를 저었다.
그의 하소연이 끝나기도 전에 용병들이 우르르 나와 지셀을 반갑게 맞이했다.
"살았다! 영주님이 왔다!"
"아, 지겨웠단 말입니다!"
가만 보니 죄다 몸 곳곳에 멍이 들어 있었다.
너무 말을 안 들으니 란돌프가 쥐어박으면서 가르친 결과였다.
"아무튼 말씀하신 건 얼추 가르쳤으니 전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란돌프는 치를 떨며 빨리 돌아가겠다고 강경하게 주장했다.
지셀은 조금 아쉬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에이, 이왕 맡은 거 좀 더 맡아 달라고 하려고 했더니.... 이제부터는 내가 알아서 해야겠네.'
그래도 확인해 보니 기본적인 제식과 최소한의 군사적 지식은 가르쳐 놓았다.
새로 모집한 병사들의 기초 훈련 상태도 나쁘지 않았다.
솔직히 이 정도면 제일 귀찮은 부분은 란돌프가 다 처리해 준 것이 맞았다.
"아무튼 고생하셨습니다. 제가 대가는 섭섭지 않게 드리겠습니다."
지셀의 말에 란돌프는 제법 자랑스러워하며 답했다.
"글을 모르는 놈들도 조금 가르쳐 놨습니다."
글은 퍼거스가 가르치긴 했지만, 란돌프는 자기가 가르친 것처럼 말하면서도 양심에 거리낌이 없었다. 어쨌든 교육 시간 분배는 란돌프의 소관이니 아예 틀린 말도 아니긴 했다.
"그거 잘됐군요. 최소한 글은 알아야 하니까요."
지셀은 용병들에게 글도 꼭 가르쳐 놓으라고 란돌프를 붙잡고 당부했었다.
아무리 명령대로 움직이는 군인이라도 최소한 읽고 쓸 줄은 알아야 더 폭넓은 작전을 수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전에 글을 모르는 용병들에게 글을 가르쳐 주겠다고 약속했던 것도 있었고.
몰려나온 용병 중에서 '오줌싸개 고든'이 자랑스럽게 말했다.
"저도 이제 글도 잘 쓰고 다 읽을 수 있습니다!"
언제나 글을 몰라 계약에 손해를 봤던 고든으로서는 자랑스러워할 만했다.
"오, 그래? 축하한다. 이제 계약서도 혼자 읽을 수 있나?"
지셀이 웃으며 묻자 고든은 바지춤에서 작은 책을 하나 꺼내며 흔들었다.
"그럼요! 지금은 여기에 저만의 글을 쓰고 있습니다!"
"그래? 소설이라도 쓰는 건가. 내용이 궁금한데, 좀 보여 줄 수 있어?"
글을 얼마나 잘 익혔는지 궁금해서 물어보자 고든이 고개를 저었다.
"안 됩니다. 이건 아무도 보여 주지 않을 거예요."
"뭐, 그래라."
지셀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지만 고든 옆에 있던 용병은 그렇지 않았다.
"아니, 그거 도대체 뭔데. 영주님도 궁금하시다는데 한번 보자. 매일 몰래 뭘 쓰고 있는 건데?"
"아, 됐다고. 안 보여 줄 거라고."
"좀 보자니까."
옆에 있던 용병이 고든의 팔을 잡고 책을 뺏으려 했다.
물론 근육으로 가득한 고든이 쉽게 뺏길 리가 없었다.
둘이 다투기 시작하자 그게 재미있어 보였는지 몇몇 용병들이 끼어들었다.
"아씨! 놓으라니까! 너희 다 죽는다!"
힘이 센 고든도 대여섯 명이 달라붙자 더 버틸 수가 없었다.
어떻게든 못 보게 하려 발버둥을 쳤지만 뺏기기 일보 직전이었다.
"으아아!"
고든은 괴성을 지르며 팔을 마구 휘젓다가 책을 놓치고 말았다.
툭.
책이 떨어진 곳은 공교롭게도 지셀의 코앞이었다.
호기심이 생긴 지셀은 책을 들어 아무 곳이나 펼쳐 보았다.
[4월 2일 날씨 말금]
오늘도 기사단장 란돌푸가 나한테 일해라 절해라 잔소리를 한다. 정말 사생활 치매가 심각하다.
내 실력도 일치얼짱하고 있는데 계속 잔소리를 하니 진짜 더 이상은 한개다.
곱셈 추위가 와서 추운데 자꾸 눈을 부랄이고 훌련을 하라고 화낸다.
어디서 수박 겁탈기로 배워 와서 자꾸 뭘 가르치려고 한다. 역시 스승 삶기 좋은 인물은 아니다.
내 장례 희망은 훌륭한 기사가 되는 거시지만 저런 골이 따분한 성격의 사람은 되지 않을 거시다....
오늘의 일기 끗.
탁.
지셀은 바로 책을 덮고 눈을 감았다.
남의 일기장을 계속 읽을 수는 없었다.
사생활 침해인지 사생활 치매인지 어쨌든 거기에 해당하는 행동이다.
'그래도 글공부를 하긴 했네.'
맞춤법에 심각한 문제가 있어 보였지만 이 정도라도 읽고 쓰게 된 게 어디인가?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예전 상태와 비교하면 이 정도도 대단한 거다.
묘한 감상에 젖어 있을 때, 어느새 용병들을 무지막지하게 때려눕힌 고든이 허겁지겁 다가왔다.
"돌려주세요!"
"어, 그래.... 여기."
지셀은 순순히 일기장을 건네주었다.
"읽으셨죠?"
"...아니."
"읽으셨잖아요! 남의 일기장을 읽는 게 어디 있어요!"
"...미안하다."
고든은 여전히 울상을 지으며 일기장을 급히 바지춤에 다시 넣었다.
란돌프의 눈치를 힐끔힐끔 보는 게 욕을 잔뜩 적어서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그 모습이 웃기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해서, 지셀은 모른 척 말머리를 돌렸다.
고든이 저 정도로 익혔으면 나머지는 확인할 필요 없겠지.
"다른 곳도 확인하도록 하지."
임시 책임자였던 로웰이 앞장서서 영지 곳곳을 안내했다.
영지민들이 거주할 집들과 기반 시설 등이 확연하게 늘어나 있었다.
여전히 공사가 끝나지 않은 건물도 많았지만, 영지 개발은 단기간에 끝나는 일이 아니니 익숙해져야만 했다.
"좋아, 일단 이후 공사 계획은 성에 가서 다시 회의하도록 하지. 이제 가장 중요한 곳으로 가 보자."
지셀의 말에 일행들은 다시 외성을 빠져나왔다.
가장 앞장서 달리던 로웰은 목적지에 도착하자 감격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정말... 말씀하신 대로 됐습니다."
그간 자리를 비우고 있던 지셀의 측근들은 눈앞의 광경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우, 우와... 장난 아니네?"
"예상은 했지만... 이 정도로...."
"직접 봐도 믿을 수가 없네요."
다들 눈을 비비며 보이는 게 진짜가 맞는지 재차 확인했다.
넘실거리는 황금빛 물결.
사람의 키보다 더 큰, 누구도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거대한 밀들이 온 땅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152화 상황이 좀 불편하지? (1)
모두가 한동안 말없이 밀밭을 바라보았다.
싹이 자라는 건 수도로 가기 전에 이미 확인했다.
하지만 이렇게 너른 밭이 가득 찬 광경을 보자, 지셀이 얼마나 대단한 일을 했는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
게다가 지금은 수확기도 아닌데 저리도 반짝이는 황금빛이라니. 기존의 밀과는 다른 엄청난 성장 속도였다.
지셀은 밀 상태를 꼼꼼히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곧 수확할 수 있겠군."
아직 완전히 익지 않아 살짝 푸른색을 띠고 있는 밀 이삭도 남아 있었지만, 대체로 당장 수확을 해도 문제없는 수준이었다.
로웰이 마주 웃으며 답했다.
"네, 곧 1차 수확을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미 준비는 마쳤습니다."
"좋아, 영지민들에게는 아낌없이 나눠 주도록. 할 일이 많으니 밥은 든든하게 먹여야지."
"이 정도면 영지민들에게 다 나눠 주고도 남습니다. 내년까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게다가 몇 달 뒤에 다시 수확할 수 있으니 몇 년은 문제없을 겁니다."
자신만만한 로웰의 말에 지셀이 피식 웃었다.
"비축할 생각 말고 배불리 먹일 생각만 해라. 경작지도 지금보다 몇 배로 늘려야 할 테니까."
"네? 왜요?"
"그런 게 있다. 성으로 돌아가서 말해 주지."
지셀이 말머리를 돌리며 클로드에게 말했다.
"클로드, 바로 가신들을 소집하도록. 전체적인 상황도 설명하고, 미흡한 부분과 앞으로 진행할 일에 관해서도 이야기해야겠다."
"알겠습니다."
로웰이 총관 대리를 맡긴 했지만 미진한 일들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아직 영주와 총관만큼 권위가 강하지 않기 때문이다.
성으로 돌아가는 길에 클로드가 로웰에게 살짝 물었다.
"헤이, 브로. 형이 말한 건 챙겨 놨어?"
지셀과 클로드가 수도로 가 있는 동안 상단과의 거래도 로웰이 맡게 되었다.
클로드는 이참에 가격 좀 깎는 척하면서 몇 골드라도 좀 챙겨 놓으라고 신신당부하고 떠났었다.
하지만 로웰은 클로드의 질문에 곤란해하며 답했다.
"아, 그런 못된 짓을 어떻게 합니까?"
"아니, 너 나쁜 놈이잖아! 예전에 영지도 엄청나게 착취하고 그랬으면서 왜 이제 와서 착한 척이야? 갑자기 정의롭게 살고 싶어졌어?"
"저 이제 그런 짓 안 한다니까요? 예전에 그거도 다 전 영주가 시켜서 할 수 없이 했던 겁니다."
"와, 내가 나쁜 놈이었네. 내가 나쁜 놈이야! 20년 무급인데 살짝 용돈 좀 챙기겠다는 게 그렇게 나쁜 짓인 줄은 몰랐네!"
"...."
로웰은 그냥 무시하고 대답하지 않았다. 이놈이랑은 말싸움해 봤자 손해다.
그러자 클로드는 한숨을 푹 쉬더니 차분하게 말했다.
"그래 뭐... 그래도 그동안 열심히 일하고 수고한 거 같으니 상이라도 줘야지."
대꾸하지 않고 버티던 로웰이 상이라는 말에 혹해서 돌아보고 말았다.
"무슨 상이요?"
클로드가 히죽 웃으며 주먹을 들었다.
"치명상."
퍼억!
"아악! 왜 때려요!"
클로드가 어깨를 때리자 로웰이 깜짝 놀라며 방어 자세를 취했다. 교과서 같은 자세였다.
다만 그 자세를 취하다 클로드의 턱을 팔로 쳐 버린 것이 문제였다.
"악! 쳤어? 너 이거 하극상이야!"
"엇? 죄송합니다. 저도 상 하나 드린 셈 치면 안 될까요?"
"되겠냐! 너 이리 와. 죽었어."
두 사람이 씩씩거리며 허공에 주먹을 휘둘렀다.
바람에 펄럭이는 종이 인형 같은 모양새에 구경하던 벨린다가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둘 다 싸움도 못 하면서 저게 뭐 하는 짓이람?"
뒤에서 티격태격하는 목소리를 듣고 지셀은 웃고 말았다.
영지에서나 느낄 수 있는 이런 왁자지껄하고 편한 분위기가 좋았다.
* * *
가신들이 모두 모여, 오랜만에 돌아온 영주에게 각자가 맡았던 업무의 진척 사항을 보고했다.
가장 먼저 총관 대리를 맡았던 로웰이 말했다.
"밀이 다 자랐으니 앞으로 식량 수급은 문제없이 진행될 예정입니다. 예상되는 수확량이 엄청나서 상단에서 사 오고 있는 곡물은 양을 점점 줄여 나갈 예정입니다."
로웰이 말을 마치자 가신들의 얼굴에도 뿌듯한 기색이 역력했다.
얼마 안 되는 영지민들조차 제대로 먹여 살리지 못했던 영지였다.
그렇게 가난했던 영지가 지금은 남부럽지 않을 정도로 식량을 확보하게 되었다.
가만히 듣고 있던 벨린다가 고개를 기우뚱하며 물었다.
"그럼 그게 어느 정도란 얘기예요?"
"이번 수확량만 해도 북부의 다른 영지 몇 개는 합쳐야 비슷한 수확량이 나올 정도입니다."
"에이, 북부의 다른 영지는 다 가난하잖아요? 경작지도 별로 없어서 다들 식량을 수입하는 형편인데, 그런 영지들 더해 봐야 얼마나 된다고."
펜리스뿐만 아니라 북부의 다른 영지도 형편이 그다지 좋지는 않다. 레이폴드 영지가 이례적으로 잘 사는 편이었다.
북부의 영지들은 농사보다는 산과 숲, 강의 자원들을 이용해 근근이 살아가고 있었다.
벨린다가 그런 부분을 지적하자 로웰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조금 더 피부에 와닿게 설명해 주었다.
"조금만 더 경작지를 늘리면 대영지인 레이폴드에 버금갈 겁니다. 아직 총 수확량 자체는 조금 부족하지만.... 단위 면적 생산량에 따른 인구 부양력은 아마 저희가 왕국에서 최고일 겁니다."
"오...."
그 말에 벨린다가 눈을 크게 뜨고 감탄했다.
아멜리아의 아버지가 다스리는 레이폴드 영지에는 북부에서 가장 큰 평원이 자리하고 있다.
레이폴드는 거기에서 생산되는 엄청난 식량 덕분에 대영지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인구는 10분의 1도 안 되는 펜리스 영지의 수확량이 레이폴드 영지의 식량 생산량과 비교될 정도라니!
아직 그쪽 생산량보다는 부족하다고는 하지만 그거야 영토의 크기가 작으니 어쩔 수 없는 문제였다.
벨린다는 이제야 한시름을 놓고 어깨에서 힘을 뺐다.
'아유, 우리 도련님이 정말 장한 일을 했어. 정말 어떻게 이런 걸 알고 있었을까?'
그간 지셀을 지켜보며 내내 마음을 졸이고 살아왔다.
그가 벌인 일들이 전부 성공하긴 했지만, 따지고 보면 뭐 하나 정상적인 게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식량 문제도 해결됐고 화장품으로 돈도 꾸준히 벌고 있으니 또 이상한 일을 벌이지는 않을 터였다. 걱정은 끝이었다.
'펜리스는 쭈욱 이대로 발전하기만 해도 될 거고. 페르디움까지 물려받으면 우리 도련님도 대영주가 될 수 있겠지? 아아, 돌아가신 우리 마님이 보시면 얼마나 좋아할까? 제가 이렇게 도련님을 잘 키웠어요. 호호호.'
벨린다뿐만 아니라 다른 가신들도 다들 조금씩 마음을 놓았다.
지금이야 아직 사업이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해 관리하느라 바쁘지만, 시간이 지나면 큰 걱정 없이 살 수 있을 거 같았다.
하지만 안도하던 가신들은 이어진 지셀의 말에 당황하고 말았다.
"뭔 소리야? 식량 수입을 왜 줄여? 내가 충분하다고 할 때까지 계속 사 두라고 했잖아?"
지셀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타박하자 로웰이 깜짝 놀라며 반박했다.
"네? 지금 충분한데요? 이번에 지원받은 것까지 치면 절대 부족할 리가 없습니다. 이번에 수확하면 오히려 엄청 많이 남을 겁니다."
"아니야, 내가 안 충분해. 그러니까 쉬지 말고 계속 사 와. 내가 그만하라고 할 때까지."
"아, 알겠습니다."
단호한 명령에 로웰이 난처해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식량을 미친 듯이 긁어모으는 이유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든든하게 쌓아 두는 것도 나쁘지 않으니 일단은 넘어갈 생각이었다.
썩을 정도로 과하게 쌓인다 싶으면 그때 말려도 늦지 않는다.
가신들도 그와 비슷한 생각을 하며 서로 눈짓했다.
지셀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추가 거주지 건설 작업은 어떻게 되고 있지?"
로웰은 알포이와 마법사들을 힐끗 바라보고는 답했다.
"일정이 약간 늦어지긴 했지만 앞으로 한 달 이내에 끝날 예정입니다. 기존 마을에 연결된 도로와 수로의 정비는 최우선으로 끝냈습니다."
"사고는 없었고?"
"네, 용병들이 조를 나눠 순찰하고 있어서 치안 유지에도 문제는 없었습니다."
영지민들의 수도 많지 않을뿐더러, 다들 이전의 생활고를 다시 겪고 싶지는 않은 터라 조심스럽게 주변 눈치를 보며 살고 있다.
사고를 칠 만한 놈은 이웃 주민들이 알아서 관리하고 있을 정도였다. 그러니 사고를 치고 싶어도 못 친다.
"다른 문제는 없나?"
"영지민들의 생활 수준을 끌어올려야 하는데 아직은 부족한 점이 많다는 것 정도일까요. 급한 대로 상단에서 생필품을 구매하려고 조율하는 중이었습니다. 병원과 도서관 등의 복지 시설도 전문 인력을 초빙해서 점차 수를 늘려갈 계획입니다."
식량과 거주지만 마련해 줬다고 끝이 아니다. 이제부터는 삶의 질을 올릴 수 있는 물건과 시설들이 필요했다.
로웰은 그래도 문제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이번에 영주님이 보급품을 많이 받아 오셨으니 당분간은 큰 문제가 없을 겁니다. 아무래도 이건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는 부분이니까요."
영지 상황 전반에 관한 보고가 끝나자, 가신들도 앞다투어 자신이 맡고 있던 일에 대해 상세하게 보고하기 시작했다.
"룬스톤이 조금 들기는 했지만.... 목초지를 유지하는 데도 별문제 없었습니다. 곧 말들을 사육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공방과 곡물 창고, 제빵소 등도 거의 완공되었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각 마을에 공무를 볼 수 있는 관청도 지었습니다."
가신들은 신이 나서 떠들었다.
회생할 수 없다고 여겨졌던 영지가 점점 살아나고 있었다.
이제 겨우 다른 영지와 비슷한 수준으로 구색을 갖추게 되었을 뿐이지만 가신들은 그것만으로도 만족했다.
모든 보고가 끝나고 나서도 지셀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만 몇 번 끄덕였다.
"그래, 최소한의 모양새는 갖춰진 것 같군."
다른 이들에게는 지금까지의 변화만으로도 기적이었지만 지셀이 보기에는 전혀 만족스럽지 않았다.
다들 그럴듯하게 포장해서 말하고 있지만, 실상 그들이 손댄 건 영주성이 있는 도시와 그 인근의 마을 몇 개가 전부다.
기반 시설이라고 해도 사람이 사는 데 꼭 필요한 시설만 최소한으로 갖춘 정도였다.
이제야 겨우 사람 사는 꼴 비슷해졌다는 뜻이다.
'부족해. 한참 부족하다. 이래서는 얼마 버티지도 못할 거야.'
객관적으로 보면 펜리스 영지는 여전히 작고 가난하고 귀여운 영지일 뿐이다.
굳이 장점을 따지자면 마법을 이용해서 식량 수급률을 높였다는 것 정도?
다른 사람들은 이전 모습과 비교하며 만족하는 모양이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이제부터는 지셀 자신이 제시하는 목표에 맞춰 모두가 한마음으로 움직여야 했다.
"다들 수고했다. 앞으로의 계획을 얘기하기 전에 먼저 수도에서 얻은 성과를 공유하겠다."
그렇지 않아도 지셀이 엄청난 재물을 가지고 돌아온 걸 모두가 확인한 뒤였다.
사람들은 그간 고생한 데 대한 치하와 보상을 기대하는 눈빛으로 지셀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브랜포드 후작님이 후견인이 되어 주시기로 했다. 나와 아버지 또한 친왕파의 일원이 됐으니 그리 알고 있도록."
"오오오!"
예상치 못했던 희소식에 가신들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브랜포드 후작은 이런 시골에까지 널리 알려질 정도로 권세가 강력한 귀족이다.
그런 자가 영주의 후견인을 자처한다면 이제 북부에서 펜리스 영지를 함부로 건드릴 자는 없을 터였다.
페르디움처럼 주변 영지에서 공격해 올까 봐 영지가 발전할수록 걱정이 커졌던 가신들에게는 참으로 기쁜 소식이었다.
"...또한 브랜포드 후작 영애께서 30만 골드를 화장품 사업에 투자해 주셨다. 화장품 또한 수도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으니 곧 왕국 전역으로 뻗어 나갈 거다."
"오오오!"
그게 끝이 아니라는 듯 지셀이 말을 이었다.
"곧 인구가 대규모로 펜리스 영지에 이주할 것이다. 친왕파에서 우리 영지를 위해 지원해 준 사람들이다."
"오오오!"
가신들은 연이은 희소식에 감탄하기 바빴다.
세수와 군사력의 기반이 되는 만큼, 영지에서 가장 중요한 자원은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인구는 중요한 만큼, 단기간에 쉬이 늘릴 수도 없는 자원이었다.
'그런 자원을 대규모로 지원받았다니!'
가신 중 하나가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면 이주민이 얼마나 들어오게 됩니까?"
"최소 5만 이상이다."
"아하하하, 정말 그랬으면 좋겠네요."
가신들은 지셀이 평소처럼 농담하는 줄 알고 웃으며 받아쳤다. 진담이라고 믿기에는 너무 많은 수였다.
하지만 지셀도, 클로드와 벨린다도 웃음기 없이 무덤덤한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농담을 하는 것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가신 중 하나가 좋지 않은 예감을 느끼고 식은땀을 흘리며 지셀에게 말했다.
"그, 그.... 5만 명이라는 말씀이 진짜입니까? 그건 말도 안 됩니다."
"뭐가 말이 안 되는데?"
"지금 우리 영지는 그렇게 많은 인원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한 번에 다 들어오는 게 아니니 괜찮아. 몇천 단위로 나눠서 들어올 거다."
"그, 그래도 감당할 수 없습니다. 당장 그들이 지낼 집도 없고 식량도 부족할 겁니다."
지셀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는 말이네. 그러면 이제 앞으로 뭘 해야 할지 알겠지?"
가신들이 영주를 말려 보라는 듯 클로드를 바라보았다.
자신에게 시선이 집중되자 클로드는 괜히 헛기침을 하며 앞으로 나섰다.
"모두 갑작스러운 소식에 많이 놀라셨죠? 그 마음 잘 압니다.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입니다. 저도 뭐 어떻게 막을 수가 없어요."
남의 일처럼 말하는 클로드를 보며 사람들은 같은 생각을 떠올렸다.
'영지의 총관이라는 놈이 왜 저렇게 태평하지?'
사람들이 눈총을 주거나 말거나 클로드는 어깨를 한번 으쓱인 뒤 말을 이었다.
"뭐, 지금과 다를 거 없습니다. 규모만 조금... 많이 커졌을 뿐이죠. 지금처럼 집을 새로 짓고 경작지를 늘리고... 복지 시설들도 더 짓고... 이거 말고 뭐 더 있겠습니까? 그렇죠?"
클로드가 동의를 구하듯이 지셀을 돌아보았다.
지셀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건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 그거하고 같이 진행해야 할 일도 있다."
"네? 그게 뭔데요? 이거 말고 뭐 또 할 게 있습니까?"
"그래, 전쟁을 준비해야 해."
그 말에 사람들의 표정이 기괴해졌다.
153화 상황이 좀 불편하지? (2)
클로드가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한번 파더니 다시 물었다.
"전쟁이요? 그 막 칼하고 방패 들고 떼지어서 싸우는 그거 말하는 거 맞아요?"
"그래, 그거. 슬슬 전쟁 준비를 시작할 때가 됐어. 아, 물론 영지 개발도 쉬지 않고 해야 하고. 최대한 빠르게. 알지? 우리한테는 시간이 별로 없거든."
클로드는 어이가 없어 입만 뻐끔거렸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전쟁 준비가 무슨 애들 소꿉장난도 아니고, 영지 개발과 전쟁 준비를 어떻게 동시에 한단 말인가?
그래도 갑자기 왜 이런 정신 나간 소리를 하는지 물어는 봐야 했다.
"갑자기 뜬금없이 웬 전쟁 준비예요? 시간은 왜 없는데요?"
지셀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아,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미래를 다 안다고 했다가는 진짜 미친놈 취급을 받을 게 뻔했다.
그러니 하나씩 화두를 던지며 관심을 유도하는 수밖에 없었다.
먼저 가장 가깝고 확실한 위험부터.
"다들 알다시피, 데스몬드 백작이 우리를 노리고 있다."
그 말에 가신들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이곳에 있는 자들도 페르디움에서 일어났던 전쟁의 전후 사정은 대충 알고 있다.
대영주인 데스몬드 백작과 척진 상황이니 걱정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전쟁 이후에 영지에 합류한 클로드는 걱정하는 기색 없이 고개를 저었다.
"저도 그 생각을 했었습니다만, 지금은 사정이 조금 달라졌습니다."
"무슨 사정?"
"우리는 이제 친왕파 소속입니다. 온전한 전력일 때도 치기가 부담스러울 텐데 반 토막이 난 전력으로 시비를 걸겠어요? 그건 진짜 말도 안 됩니다."
클로드가 열변을 토해 낼수록 가신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친왕파를 믿고, 데스몬드 백작이 전력을 복구하는 동안 이쪽도 힘을 기르면 된다는 희망이 급격히 퍼져 나갔다.
하지만 지셀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만약에 데스몬드 백작이 친왕파를 무시하고 지금 당장 남은 전력을 모아서 쳐들어오면 우리가 막을 수 있나?"
클로드는 찝찝한 표정으로 답했다.
"못... 막겠죠?"
전에도 지셀이 함정을 깔아 둔 덕에 이겼을 뿐이다. 똑같은 수가 두 번 통할 리가 없으니 다시 싸우면 필패다.
애초에 전력의 차이를 따지면 애와 어른의 싸움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지, 못 막지. 그런데 그쪽에서 미친 척 쳐들어오면 어떻게 할 거야?"
클로드는 당당하게 답했다.
"이쪽으로 쳐들어오려면 영지에 남은 병력을 모조리 긁어모아야 할 텐데, 그러면 다른 대영주인 레이폴드 백작이 그 뒤를 치겠죠. 데스몬드 백작은 그걸 모를 정도로 바보가 아닙니다. 그러니 우리도 전력을 키울 시간이 충분합니다."
클로드의 판단은 논리적이긴 했다.
데스몬드 백작이 무리해서 전쟁을 일으키면 욕심 많은 레이폴드 백작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건 겉으로 드러난 모양일 뿐이다. 아직 클로드는 진짜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모른다.
지셀은 팔짱을 끼고 가신들을 쓱 둘러보았다.
"뭐, 거기 관해서는 또 내가 할 말이 있지. 로웰, 그거 가져와라."
눈치를 보던 로웰은 부리나케 서류 뭉치를 하나 가지고 왔다.
지셀은 서류를 클로드에게 넘기며 말했다.
"수도로 떠나기 전에 로웰에게 데스몬드의 동향에 대해 알아보라고 시켜 놓고 갔지. 확인해 봐."
클로드는 빠르게 서류를 확인했다.
아직 펜리스 영지의 정보 수집 능력으로는 상세한 상황을 알기 어려웠다.
로웰이 가져온 서류들도 데스몬드를 드나드는 상단과 일반 주민들의 소문을 위주로 수집한 정보들이었다.
하지만 그 정도만으로도 데스몬드의 움직임을 파악하기엔 충분했다.
움직임이 너무나도 노골적이었으니까.
"대규모 징집과 훈련.... 약초를 대량 구매.... 활과 화살.... 자유 기사들 모집...."
데스몬드의 자금 흐름은 이상한 부분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특히 눈에 띄는 부분이 있었다.
펜리스와 데스몬드 사이에 있는 카발디 백작령에서 철광석을 대량으로 사들이고 있다는 정보였다.
"철광석을 이렇게나 많이?"
카발디 백작령의 철광석은 질이 좋기로 유명하다. 그렇기에 일종의 전략 자원 취급을 받아 돈이 있어도 쉽게 구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런 귀한 자원이 데스몬드 쪽에 엄청나게 흘러 들어가고 있었다.
"도대체 왜 이렇게 많이...."
클로드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전쟁 준비에 가장 중요한 물자는 식량과 병기다. 그리고 철광석은 그중 병기를 만들고 보수하는 데 필요한 필수 자원이다.
부족해진 전력을 다시 채운다기에는 너무나 과한 양이었다.
다른 조치들도 과하긴 마찬가지였다. 자금과 인력을 이렇게 쏟아부으면 영지를 제대로 운영하기 어려울 터였다.
"진짜... 전쟁을 하겠다고?"
전쟁을 준비하는 건 분명하다. 목표가 어디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방심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이미 데스몬드와는 원한을 맺은 상태니, 목표가 이곳이 될 확률도 매우 높았다.
점차 굳어져 가는 클로드의 얼굴을 확인하고 지셀이 물었다.
"어때? 상황이 좀 불편하지?"
클로드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셀이 친왕파에 합류했다고는 해도, 전쟁이 벌어지자마자 지원군이 오기는 어렵다.
그리고 친왕파의 지원만 믿고 있을 수도 없다. 일단 미친 척 여기를 쓸어 버리고 그 뒤에 협상에 나선다면 친왕파도 손쓰기가 어려우니까.
"그렇군요. 정말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말에 다른 사람들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도대체 이 망할 놈의 영지는 하루가 멀다 하고 안 좋은 일이 생긴다.
'아이고, 차라리 망하는 게 속이 편하겠다. 망해야 이런 꼴을 안 당하지!'
우울해하는 사람들을 보고 지셀은 내심 혀를 찼다. 이래서야 전쟁도 하기 전에 지고 들어가는 꼴이지 않은가.
그런 우울한 분위기 속에서도 클로드만은 굴하지 않고 의견을 내었다.
"이주민들이 곧 들어올 텐데, 그 전에 최대한 영지를 안정시켜야 합니다. 한정된 자금과 인력으로 전쟁 준비를 병행하면 개발이 늦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비록 지금은 지셀에게 받은 은혜와 노예 계약으로 펜리스에 묶여 있기는 하지만, 그도 본래는 아카데미에서 학문을 쌓던 사람이다.
장래 학자가 되든 정치가가 되든, 명성과 업적을 세울 기회를 놓치는 건 아카데미 출신이 할 짓이 아니었다.
그런 클로드에게 펜리스 영지는 평생을 살아갈 터전인 동시에 스스로의 야망을 이룰 수 있는 수단이기도 했다.
'아무것도 없던 이 영지를 대영지로 만든다면.... 역사에 이름을 남길 수 있다.'
그렇기에 클로드는 진심으로 펜리스 영지에 득이 될 방법을 고민했다.
"브랜포드 후작가의 병사들을 이곳에 주둔시키는 건 어떻습니까? 수는 적어도 상관없습니다. 브랜포드 후작의 영역이라고 내보이는 게 중요하니까요. 그렇게 하면 데스몬드 백작도 쉽게 이곳을 칠 수 없을 겁니다."
클로드가 내놓은 묘책에 가신들은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브랜포드 후작의 병사들이 이곳에 주둔한다면 전쟁을 억제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었다.
그의 병사가 주둔하고 있는 곳을 친다는 건 브랜포드 후작을 직접 공격하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클로드가 말을 이었다.
"타 영주의 군대를 영지에 주둔시키는 건 굴욕적인 일이지만, 브랜포드 후작님은 예외죠. 영주님의 후견인이시니 명분도 충분하고 명예에도 그다지 흠이 되지 않을 겁니다."
다른 사람들도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보니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어 보였다.
큰 손해 없이 안전도 보장되고 영지 개발에만 온전히 힘을 쓸 수 있을 테니까.
평소에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던 벨린다와 카오르까지도 이번에는 동의하는 듯 입을 다물었다.
지셀은 모두를 둘러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아마 다른 영주들이 나와 같은 상황이라면 클로드의 말을 따르겠지.'
가장 상식적이며 가장 부담도 적고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으니까.
문제는 데스몬드의 뒤에 왕국에서 가장 강력한 델파인 공작가가 있다는 점이다.
'언제까지 숨겨 둘 수는 없겠지.'
그간 쓸데없는 불안을 키우지 않으려고 숨겨 왔지만, 이제는 그럴 수가 없었다.
이제부터는 더 큰 목표를 향해 하나가 되어 달려가야 한다. 설사 믿지 않더라도 최소한의 위기의식과 의심 정도는 심어 줘야 했다.
생각을 정리한 지셀은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데스몬드 백작은 혼자가 아니다."
"아, 네. 그분 결혼하셨더라고요. 백작 부인이 미인이라고 소문이 자자하던데. 역시 사람은 권력이 있고 봐야 한다니까요."
"...그게 아니라. 데스몬드 뒤에는 델파인 공작이 있다. 데스몬드의 뜻이 곧 델파인 공작가의 뜻이라는 얘기지."
헛소리를 지껄이던 클로드와 옆에서 듣고 있던 가신들의 안색이 시퍼레졌다.
델파인 공작, 그 이름을 입에 올리기도 두려울 정도로 잔인무도한 왕국 최고의 권력자.
지셀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 영지는 이미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가신들이 깜짝 놀라며 외쳤다.
"설마요! 북부의 대영주씩이나 되는 자가 뭐가 아쉬워서 남부 공작가에 굽히고 들어간단 말입니까?"
"혹시 그렇게 생각하는 증거라도 있으신 겁니까?"
지셀이 어떻게 설득해야 하나 고민하던 그때, 클로드가 무언가 깨달은 듯 멍해진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어.... 그런데 영주님 말이 사실일 수도 있겠네요. 공작가 대신 자유롭게 움직일 말로서 데스몬드 백작이 중립 귀족인 척하고 있다면...."
지셀은 화색을 띠고 얼른 맞장구쳤다.
"그래, 너 말이 좀 통한다? 그게 델파인 공작가가 아주 오래전부터 준비해 온 노림수야. 이야, 이거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고민했는데. 역시 많이 배운 놈답다."
클로드는 순간 소름이 끼쳐 다시 서류를 훑어보았다.
카발디 백작은 공작가의 파벌에 속한 귀족이다.
아무리 데스몬드가 중립을 표방하고 있다지만, 같은 파벌도 아닌 영지에 철광석을 이렇게 대량으로 파는 건 말이 안 된다.
거기다 이 정도 양.... 정가로 샀다면 아무리 잘 사는 영지라도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정말 공작가가 뒤에서 데스몬드를 지원하고 있다는 말인가?'
만약 데스몬드 백작 뒤에 정말 공작가가 있다면, 브랜포드 후작의 병력을 주둔시켜도 큰 소용이 없을 것이다.
차후 공작가가 끼어들어 적당한 명분과 보상으로 중재를 한다면 친왕파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테니까.
아직 이곳은 친왕파에서 공작가와의 전쟁을 감수하고 지켜 줄 만큼 중요한 영지가 아니다.
"믿기 힘들지만... 사실이라면 당장은 우리 스스로 몸을 지킬 수밖에 없겠군요."
확실하지 않다. 믿기도 힘들다. 하지만 그런 위험 또한 배제할 수는 없었다.
클로드의 말에 가신들의 낯빛은 더욱더 시커멓게 죽어 갔다.
지셀은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해 부러 활기차게 말했다.
"자, 공작가가 어쩌고 하는 건 지금 당장은 중요하지 않고. 곧 데스몬드와 싸워야 하는 게 문제야. 전쟁을 피할 수 없다는 건 다들 이해했지? 그럼 이제 막을 방법을 생각해 보자."
다들 아무런 말이 없었다. 기사는커녕 병사도 거의 없는 펜리스 영지가 어떻게 데스몬드를 막는단 말인가?
클로드가 모두를 대표해서 물었다.
"영주님이 예상하시는 시기는 언제입니까?"
"데스몬드 백작이 움직이는 건 최소 6개월 이상은 걸리겠지. 어쨌든 페르디움에서 나한테 된통 당한 건 사실이니까. 전력을 정비하려면 그래도 시간이 좀 필요할 거야."
병력을 잃은 것도 문제이지만, 페르디움 쪽 일이 꼬인 만큼 아멜리아의 반란에 더 신경 쓸 게 분명하다.
그리고 지셀이 알기로는 몇 달 뒤에 아주 골치 아픈 일이 생길 테니, 6개월 뒤에도 바로 움직이기는 힘들 것이다.
하지만 굳이 이런 걸 얘기해서 사람들의 긴장을 풀어 줄 필요는 없었다.
6개월이라는 말을 들은 클로드가 갑자기 소심하게 지셀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고작 반년 준비해서는 전쟁에서 이길 수 없을 겁니다. 신병 훈련도 안 끝날걸요?"
"그래서?"
"데스몬드 백작이 친왕파까지 무시하고 전쟁을 일으킨다면... 도망가시죠."
"뭐?"
지셀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잠자코 있던 벨린다가 나섰다.
"전쟁이 일어나면 도망가는 게 좋다는 말에는 동의해요. 하지만 지금은 굳이 그럴 필요 없어요."
다들 의아해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방금 영주도 총관도 전쟁이 일어날 것 같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도망갈 필요가 없다니?
시선이 집중되자 벨린다는 도도하게 콧대를 세운 채 말했다.
"그냥 데스몬드 백작인지 아몬드 백작인지 목만 따면 문제없는 거 아니에요? 제가 그런 거 잘해요. 금방 끝내고 올게요."
벨린다가 어떤 마음으로 말하는지 알기에 지셀은 마음이 조금 짠했다.
상대가 평범한 귀족이라면 별문제 없이 암살에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녀의 실력도 매우 뛰어난 편이었으니까.
하지만 대영주인 데스몬드 백작은 다르다.
삼엄한 경비를 갖춘 영주성에서 그를 찾는 거 자체가 쉽지 않은 일이다.
운 좋게 찾아 죽이는 데 성공하더라도 성에서 빠져나오기는 더욱 어렵다.
벨린다 정도의 실력자라도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때로는 암살이 가장 효과적이고 빠른 방법이지만.... 너무 위험해서 안 돼."
"참나, 저 혼자라면 힘들 수도 있겠죠. 하지만 카오르와 용병들이 같이 가면 성공할 수 있어요."
영지 개발이든 전쟁 준비든 남 일이라는 듯 하품이나 하며 듣고 있던 카오르가 화들짝 놀라 뭔 소리냐는 표정을 지었다.
"뭐? 나? 내가 왜?"
"당신이 용병들 몇 명 데리고 영주성 앞에서 난리를 피우세요. 당신들한테 시선이 집중될 동안 제가 백작 목을 깔끔하게 따고 올 테니까요."
"미쳤어? 우리보고 거기서 죽으라는 거잖아!"
"당신네 목숨으로 전쟁을 막을 수 있다면 그건 값진 희생이라고요! 당신 싸움 좋아하잖아!"
"그런 개죽음 싸움은 하기 싫거든?"
"싸움이 다 똑같지! 뭘 따지는데!"
"아! 너나 가라고!"
둘이 투덕대고 싸우는 사이 이번에는 길리언이 비장한 얼굴로 나섰다.
"영주님, 전쟁을 피할 수 없다면 저에게 용병들을 당분간 맡겨 주십시오. 제가 전쟁 시기를 최대한 늦춰 보겠습니다. 그사이 전력을 최대한 확충하고 친왕파에 도움을 요청하십시오."
"어떻게 하려고?"
"전쟁 물자를 공급하는 상단들을 습격할 겁니다. 일차적으로는 물자 공급이 막히니 준비도 늦어질 거고, 저를 잡기 위해 인력을 빼면 또 그만큼 준비가 늦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저에게 맡겨 주십시오."
그 말에 지셀은 빙긋 웃었다.
저런 방법은 전생에 자신도 즐겨 쓰곤 했다. 누가 용병 출신 아니랄까 봐 이런 면은 참 비슷했다.
"그 방법도 나쁘진 않지만.... 그렇게 되면 길리언이 산적 취급을 당하게 될 거야. 나를 섬기는 사람에게 그런 악명이 붙게 할 생각은 없어."
지셀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두 사람이 영지를 생각하는 마음은 잘 알겠지만.... 마음만 받아 두지."
이유야 서로 다르지만, 어쨌든 벨린다와 길리언 둘 다 자신의 목숨을 아끼지 않고 영지를 위해 움직이려 했다. 그 점은 치하할 만했다.
두 사람과 다르게 별생각이 없어 보이는 카오르에게 지셀이 물었다.
"카오르는 다른 의견 없어?"
"그냥 쳐들어오면 나가서 싸우면 되는 거 아닙니까? 제가 제일 앞장서죠. 대신 수당 더 주셔야 합니다."
"어휴, 이 든든한 새끼."
당당하고 단순한 태도에 지셀이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싸움을 피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이는 네 사람을 보고 클로드가 다시 물었다.
"진짜 도망가실 생각 없으십니까?"
"없지."
"에휴, 내 팔자가 그렇지. 그러면 지금부터 모든 자원을 총동원해서 축성을 준비하는 게 나을 거 같습니다."
"축성이라.... 수성전으로 가자는 건가?"
"그렇습니다. 우리 영지의 가장 큰 이점은 식량 생산량이 어마어마하게 많다는 겁니다. 요새 수준으로 성을 쌓아 놓고 농성하면 친왕파의 지원군이 올 때까지는 충분히 버틸 수 있을 겁니다."
길리언이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성을 쌓더라도 어느 정도 전투 인원은 있어야 할 텐데, 병력이 부족하지 않겠습니까?"
"당장 부족한 병사와 기사는 페르디움에 요청하면 됩니다. 징집병들도 좀 더 굴려 보고요. 다들 죽기 싫으면 어떻게든 해야죠."
가신들도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나온 의견 중에서 가장 안전하고 현실적인 방안이었다.
지셀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일단은 그렇게 하지. 언제든 적의 공격에 대응할 수 있게 지금부터 물자를 비축해 두도록."
겉으로는 클로드의 의견을 받아들인 것처럼 보였지만, 그의 속마음은 전혀 달랐다.
'다들 어느 정도 긴장감은 생긴 거 같네. 당분간은 이 정도 분위기로 끌고 가야겠어.'
클로드의 의견은 현 상황에서 가장 현실적이고 확실한 대응 방법이긴 했다.
하지만 공작가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적의 상상을 뛰어넘는, 적이 절대 예측할 수도 없는 방법을 찾아 움직여야 했다.
어차피 어떤 방법을 쓰든 실패하면 결국 죽는다. 그렇다면 조금이라도 성공할 가능성을 키우는 것만이 유일한 살길이었다.
'이번에는 내가 먼저 움직여 주지.'
지셀은 적을 가만히 기다려 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곧 좋은 기회가 온다. 그 틈을 타 데스몬드 백작에게 제대로 한 방 먹여 주고 아주 큰 손해를 입힐 생각이었다.
154화 상황이 좀 불편하지? (3)
지셀은 그런 속내를 감추고 싱긋 웃으며 모두를 둘러보았다.
"또 다른 의견 있는 사람? 없지?"
"예에...."
"그래. 그럼 이제 다들 각자 뭘 해야 하는지 알 거야. 특히 마법사들은 쉬지 않고 움직여야 한다. 다른 시설도 중요하지만 경작지를 늘리면서 수로와 저수조를 확장하는 작업이 제일 중요해."
해야 할 일이 너무나도 많았다.
우선 이주민들이 자리 잡을 수 있도록 거주지를 만들고 다양한 시설과 공방들을 추가해야 한다.
그러면서 병장기와 전쟁에 필요한 물자들도 쉬지 않고 만들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식량 확보.
아직은 상인들에게서 계속 사들이고는 있지만, 공급이 언제 끊길지 모른다.
이주민을 받아서 곧 인구가 급격히 늘어날 예정이니, 장기전에 대비하려면 경작지를 대규모로 늘려서 미친 듯이 식량을 뽑아내야 했다.
모두의 낯빛이 우중충해졌다.
'필요한 게 한둘이 아닌데 언제 다 만든단 말인가?'
'게다가 전쟁 준비까지 동시에 해야 한다니, 이게 영지냐....'
'그런데 죽기 싫으면 해야 해. 미치겠네.'
상대가 다른 귀족이라면 몰라도, 이미 지셀에게 한 번 얻어터진 데스몬드 백작이다.
그에게 지기라도 하면 분명 영지는 쑥대밭이 되고, 펜리스와 페르디움의 가신들은 죄다 목이 날아갈 것이다.
정말 하기 싫지만, 죽기 싫으면 할 수밖에 없었다.
하나같이 우거지상을 짓고 있는 가신 중에서도 가장 안색이 안 좋은 사람은 알포이였다.
'뭐, 뭐부터 해야 하는 거지? 할 게 너무 많잖아!'
영주가 없는 동안 좀 설렁설렁 지낸 터라 일이 좀 많이 밀려 있었다.
밀알은 곧 수확할 종자를 사용하면 되니, 마나 집속진을 새로 만들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토지에 쓸 룬스톤은 경작지가 늘어나는 속도에 맞춰 대량으로 만들어야 한다.
마법사들 전부가 쉬지 않고 마법진을 새겨야 겨우 필요한 분량을 채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마법사들이 할 일은 그것뿐만이 아니다. 다른 공사들에도 끌려다녀야 한다.
'각오하라는 게 이런 뜻이었구나. 미리미리 일 좀 끝내 놓을걸. 난 죽었다.'
살인적인 작업량을 확인하고 알포이와 마법사들은 절망했다.
어떻게든 도망가고 싶은데 도망갈 용기조차 나지 않았다.
마법사들의 표정을 본 지셀은 피식 웃더니 바네사에게 당부했다.
"바네사."
"네, 넵!"
"당분간은 연구보다는 알포이를 도와서 작업에 전념하도록 해. 일이 많기는 한데.... 괜찮지?"
"그럼요! 맡겨만 주세요!"
다른 마법사들과 다르게 바네사는 주먹까지 불끈 쥐며 호기롭게 외쳤다.
언제나 지셀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 하는 그녀가 이런 일들을 마다할 리 없었다.
게다가 6서클의 경지에 올랐으니 바네사가 작업에 전념한다면 속도가 훨씬 더 빨라질 것이다.
"좋아, 아주 믿음직해."
지셀은 이왕 말이 나온 김에 다른 사람들에게 맡긴 임무도 확인해 두기로 했다.
가장 먼저 로웰에게 물었다.
"내가 전에 사람들 찾아오라고 한 건 어떻게 진행되고 있지?"
"영주님이 명령을 내리셨을 때 바로 사람을 보냈으니 앞으로 한 달 정도면 데려올 수 있는 사람은 다 데려올 거 같습니다."
"그래. 그 사람들 도착하는 대로 나한테 바로바로 얘기하고, 첩자들도 더 양성해서 주변 정보를 빼놓지 말고 수집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정보 관련 부분까지 강조한 지셀은 이번엔 길리언을 바라보았다.
"앞으로도 용병들을 활용하려면 개개인의 무력도 중요해. 당분간은 훈련할 때 각자 실력을 상승시키는 데 중점을 두도록."
"알겠습니다."
길리언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이런 얌전한 태도는 지셀에게만 보이는 것이고, 훈련할 때는 용병들을 아주 죽어라 굴려 댈 것이다.
지셀은 카오르를 돌아보며 물었다.
"용병 훈련을 길리언이 진행하면 카오르는 할 일이 없겠는데. 뭐 따로 특별히 하고 싶은 거 있어?"
카오르는 고개를 들고 당당하게 말했다.
"절대 없습니다."
"...."
너무 당당하게 나오니 순간 지셀도 할 말을 잃었다.
지셀은 잠깐 혀를 차고는 카오르에게 말했다.
"용병들은 절반씩 돌아가면서 훈련을 진행한다. 카오르는 당분간 훈련에 참여하지 않는 용병들을 데리고 치안을 유지하는 데 계속 신경 쓰도록. 아직 영지에 병사들이 부족하니까."
"네, 뭐.... 그렇게 하죠."
카오르는 무척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떨떠름한 이유는 별거 아니다.
그냥 그는 싸우는 것 말고 다른 일은 하기 싫어할 뿐이다.
그래서 지셀은 카오르에게 강제로 일을 할당했다. 안 그러면 어디 구석에서 술이나 마시고 놀 텐데, 그 꼴은 절대 못 본다.
"자, 그리고 벨린다는...."
"사람들이 작업과 훈련에만 전념할 수 있게 챙겨 주면 되겠죠? 생활에 불편함 느끼지 않도록 잘 지원해 볼게요."
"크, 역시 벨린다야. 어쩌면 내 마음을 그렇게 잘 알아?"
"제가 모르면 누가 도련님 마음을 알겠어요? 호호호."
능청스러운 그녀의 말에 지셀도 피식 웃고 말았다.
사람들이 먹을 것과 입을 것은 물론이거니와 부상자를 치료하고 관리하는 것까지, 누군가는 끊임없이 신경을 써 줘야 한다.
벨린다는 그런 일에 이골이 난 사람이니 충분히 잘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지셀은 모두를 둘러보며 다시 한번 더 강조했다.
"잊지 마라. 제대로 준비하지 않으면 정말 다 죽는다. 언제든지 싸울 수 있게 대비해야 한다."
"알겠습니다."
대전에 있던 모든 사람이 고개를 숙이며 영주의 명을 받들었다.
지셀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앞으로 일이 진행되는 상태에 따라서 변동 사항이 있을지도 모르겠군. 필요하면 따로 지시를 내릴 테니 평소에는 클로드가 총괄해서 움직이도록."
지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클로드가 가신들에게 손짓했다.
"자, 어차피 해야 할 일 빨리합시다. 각자 할 일은 대충 다 알죠? 최대한 빨리 세부 계획을 세워서 가져오세요."
곧 이주민들이 몰려 들어올 텐데 머뭇거렸다간 부담만 더 커질 것이다.
클로드의 재촉에 떠밀려 가신들이 우르르 밖으로 나갔다.
지셀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앞으로 전쟁이 일어날 거라고, 대비해 둬야 한다고 분명하게 경고했다.
이래도 못 알아듣고 준비를 게을리한다?
데스몬드 백작이 와서 여기 있는 사람 다 때려죽여도 할 말 없는 거다.
* * *
다들 미친 듯이 일에 파묻혀서 지내는 만큼, 영지는 예전보다 훨씬 바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펜리스 영지에 안 바쁜 사람이 없지만 역시 그중에서 가장 바쁜 건 클로드라 할 수 있었다.
영지 개발의 총책임자로서 모든 업무를 총괄해야 하니 잠잘 시간도 부족할 정도였다.
상단과 만나기 위해 웬디와 함께 마차를 타고 이동하던 중에 클로드가 고개를 숙이고 중얼거렸다.
"아아, 죽겠다. 도망가고 싶어. 이렇게 쥐어짜이느니 데스몬드 백작한테 죽는 게 차라리 낫지 않을까? 이건 좀 아닌 거 같아. 나와 함께 죽어 주지 않을래?"
"...."
클로드의 헛소리에 웬디는 대꾸도 하지 않았다.
솔직히 한 대 쥐어박고 싶기는 한데, 막상 클로드의 몰골을 보면 그러기도 쉽지 않았다.
눈 밑이 거무죽죽해진 지는 오래되었고, 요 며칠 사이에 살도 쪽 빠져서 스켈레톤이 형님이라고 부르겠다 싶을 정도였다.
그런 상태에서도 저놈의 주둥이는 도무지 쉴 줄을 몰랐다.
"죽기 싫어서 일하는 건데, 일하다가 죽을 거 같아. 그렇다고 영주님한테 따질 수도 없고."
클로드는 너무 많은 일에 치여 정신이 나갈 것 같을 때마다 지셀을 찾았다. 다시 한번 도망가자고 설득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지셀도 인부들을 데리고 화장품 설비를 대량으로 추가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수도에 있는 로잘린에게 화장품도 새로 보내야 하고 지부를 설립할 준비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에휴, 다른 영주들처럼 놀기나 하면 우리도 적당히 눈치 보면서 일할 텐데. 보면 은근히 일 중독자라니까? 우리 영주님 솔직히 일 따위는 안 하게 생겼는데. 그렇지 않아?"
"모르겠습니다."
"혹시 영주님이 그냥 착각한 게 아닐까? 아니면 그냥 일을 빨리 처리하고 싶어서 별거 아닌 일을 크게 과장한 거지. 원래 뭣도 모르는 사람들이 그러잖아. 어때? 내 말 맞는 거 같지? 그냥 열심히 일하는 영주라는 자기 모습에 취한 거야. 그렇지 않아?"
"모르겠습니다."
"넌 꼭 너한테 불리한 거 같으면 모르겠다고 하더라? 맨날 몰라요, 몰라요, 모르겠습니다. 야, 사회생활 참 잘하네."
"...."
웬디는 아예 대답하기를 포기했다.
그러자 클로드는 갑자기 괴상한 표정을 지으며 웬디를 흉내 냈다.
"에, 몰라요. 에, 몰라요. 으어, 몰라요."
'...아, 진짜 애새끼도 아니고.'
저런 표정을 지으며 말한 적은 절대 없다.
유치찬란하게 깐족거리는 클로드를 노려보다 웬디는 그냥 고개를 돌렸다.
저 주둥이는 상대할수록 이쪽만 손해니까 그냥 무시하는 게 최고다.
클로드도 사실 지금 상황이 매우 촉박하고 위험한 건 안다.
하지만 일이 너무 힘드니 이렇게라도 헛소리를 하며 푸는 것이다.
일하면서 윗사람 흉을 보는 건 고금을 막론한 스트레스 해소법이었으니까.
덜컹, 덜컹!
신나게 달리던 마차가 흔들거리자 투덜거리는 대상이 바로 바뀌었다.
"어후, 이 고물 마차는 언제 바꿔. 진짜 이놈의 영지는 마음에 드는 게 하나도 없다니까. 아, 나도 명품 마차 갖고 싶다. 나 같은 사람은 그런 걸 타고 다녀야 하는데."
"...."
클로드의 투덜거림을 배경음 삼아 마차는 영지 경계로 이동했다.
시간이 없는 와중에도 굳이 여기까지 나온 이유는 단순했다. 영지 봉쇄 정책 때문에 상단들이 성안까지 들어올 수 없기 때문이다.
약속 장소에 도착한 클로드는 바로 상단 사람과 거래를 시작했다.
"자자, 저 바쁜 거 아시죠? 빨리빨리 확인부터 합시다."
보통 대규모 거래를 할 시에는 서로 안부도 묻고 차도 한잔 마시고 시작하는 게 관례다.
하지만 언제나 시간이 촉박한 클로드의 입장에서는 그런 여유마저도 사치였다.
상대방도 그간의 경험을 통해 펜리스 영지의 상황을 대충 파악하고 있기에 크게 개의치는 않았다.
상단이 가져온 물건들을 확인한 클로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수량도 문제없고 품질도 나쁘지 않군요. 다음에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하하, 당연하지요. 이렇게 대량으로 구매해 주시는데 제가 어찌 소홀히 하겠습니까."
물건을 가져온 상인도 호탕하게 웃으며 답했다.
가격도 예전에 조율을 끝낸 상태라 거래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는 거래지만 둘의 내심은 달랐다.
'영주님이 이놈들은 조심하라고 했지? 얌체 같은 놈들 치고는 거래를 참 깔끔하게 한단 말이야.'
'후, 아가씨가 이놈들은 조심하라고 했는데. 대량 거래만 아니었어도.... 그런데 가짜 금화도 안 쓰고 별문제 없는 거 같은데? 뭐가 문제인 거지?'
이번에 거래를 진행한 상단은 바로 아멜리아가 거느린 악티움 상단이었다.
악티움 상단은 요새 북부에서 제법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품질 좋은 상품을 기반으로 계약을 철저하게 지키면서 신용도를 높여 덩치를 빠르게 키우고 있었다.
'으음, 아직은 자재가 많이 필요하니까.... 당분간은 이놈들과 거래할 수밖에.'
'으음, 아직은 자금이 많이 필요하니까.... 당분간은 이놈들과 거래할 수밖에.'
우습게도 양쪽 다 서로를 적대하면서도 서로가 필요해서 모른 척 거래를 진행하고 있었다.
지셀과 아멜리아도 그 사실을 알지만, 굳이 막지는 않았다.
막아 봐야 자신도 손해였으니까.
서로 싫어하면서도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면에서 두 사람은 무척 닮은꼴이었다.
그렇게 무사히 거래가 끝나나 했는데 상인이 조금 곤란해하며 입을 뗐다.
"저기, 총관님. 죄송한 말씀이지만 다음 거래 때는 물건들 가격이 조금 오를 거 같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가격이 오르다니요."
"요새 식량이며 원자재 가격이 많이 올라서요. 저희도 참 물건 구하기가 힘들어서...."
그러자 클로드는 의심스럽다는 눈빛으로 상인을 흘겨보았다.
'어쩐지 영주님이 이놈들 조심하라고 하더라니.... 슬슬 바가지를 씌우려고 떡밥을 뿌리는 건가?'
이런 나쁜 놈들한테는 확실하게 따져야 손해를 안 본다.
"아니, 저희가 지금 대규모 공사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는데... 이렇게 갑자기 가격을 올린다고요? 설마 노린 겁니까? 이런 식으로 나오면 곤란한데요."
"그게 아니라...."
"우리 영주님 뒤에 누가 있는지 아시죠? 아, 내 입으로 말하기 좀 곤란하고 부끄러운데. 혹시 브랜포드 후작님이라고 아시나 몰라?"
브랜포드 후작은 지셀의 후견인이다. 하지만 클로드는 그가 마치 자신의 후견인인 양 툭하면 후작의 이름을 써먹었다.
루타니아 왕국에서 브랜포드 후작의 이름을 가장 많이 팔고 다니는 사람은 아마 클로드일 것이다.
클로드가 진상 손님의 기운을 끌어올리자 상인이 다급하게 손을 저었다.
"어이쿠,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런 거 아닙니다. 저희는 이윤도 거의 안 붙이고 최저가로 갖다 드리는 거 아시잖습니까. 솔직히 그 가격으로는 인건비 벌기도 힘들어요. 그냥 요새 물량들이 점점 부족해져서 그럽니다."
우리가 파는 가격이 최저가다, 인건비가 부족하다는 말은 언제나 상인들이 입에 달고 사는 말이었다. 클로드는 그런 말에 넘어갈 사람이 아니다.
"아니, 그러면 지금까지 잘만 공급되던 물건들이 갑자기 왜 부족해지는 건데요?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그 물음에 상인은 어처구니없어하며 답했다.
"왜 부족하긴요.... 펜리스 영지에서 아예 싹 다 긁어 가지 않았습니까?"
"아하, 그러네."
클로드는 이제야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대규모 공사를 시작한 지 벌써 한 달째다.
그동안 펜리스 영지는 북부에서 활동하는 모든 상단과 거래하며 필요한 물건을 쉴 새 없이 구매했다.
문제가 있다면, 북부 지역은 다른 지역보다 자원 유통량이 적다는 점이다. 그러니 점점 자재를 수급하는 데 차질이 생기고 있었다.
"끙, 미리 대책을 좀 세워 놔야겠네."
가뜩이나 할 일도 많고 시간도 부족한데 자재 수급까지 늦어지면 큰 문제다.
고민하던 클로드에게 영지의 행정관 하나가 급하게 달려와 보고했다.
"총관님! 총관님, 큰일 났습니다!"
"응? 뭐가?"
행정관은 클로드 앞에 서 있는 상인의 눈치를 힐끔 보더니 귓속말을 건넸다.
"목재 비축분이 거의 바닥났습니다. 어떻게 하죠? 이 상태로는 당장 내일부터 공사를 진행할 수 없을 겁니다."
"뭐? 벌써?"
거주지를 만드는 데 들어가는 자재 중에서 가장 많이 필요한 품목이 바로 목재였다.
땔감을 비롯해 각종 가구와 도구, 울타리와 목책, 심지어 화살과 창대를 만드는 데까지 목재가 쓰이다 보니 가장 빨리 바닥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하, 젠장. 어떻게 하지?'
클로드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뒤가 없는 것처럼 나무를 베어 낸 탓에 이미 펜리스 영지 안에 있는 숲과 산은 거의 사라졌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나무는 성장 속도가 느리니만큼 적당히 수량을 통제하며 벌목했어야 하지만, 지금 펜리스 영지는 그런 여유를 부릴 상황이 아니었다.
상단을 통해 꾸준히 사들이기는 했지만, 그것도 한계는 있었다.
'젠장, 지금 당장 주문을 넣어도 북부에 있는 상단들의 규모로는 우리한테 필요한 물량을 감당할 수가 없을 텐데. 다른 지역의 상단을 알아보려고 해도 시간이 드는 건 마찬가지고.'
클로드는 당장 뾰족한 방안이 생각나지 않아 입술만 잘근잘근 짓씹었다.
그때, 멀리서 병사 하나가 허겁지겁 달려와 말했다.
"총관님, 도착했습니다."
"도착했다니, 뭐가 왔다는 거야?"
뜬금없는 병사의 말에 클로드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따로 산 게 없는데 뭐가 도착했다는 말인가?
그러자 병사는 그걸 왜 모르냐는 표정으로 답했다.
"말씀하신 이주민들이 곧 도착한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거주지는커녕 거주지를 지을 목재도 없는데, 수천에 달하는 이주민들이 곧 몰려올 거란다.
클로드는 이마를 감싸 쥐고 중얼거렸다.
"아, 좆 됐다...."
아주 큰 문제가 생겨 버렸다.
155화 이 몸이 해결하겠다. (1)
이주민이 생각보다 빨리 오긴 했지만 예측하지 못한 상황은 아니었다.
어차피 수천 명이 지낼 거주지를 한두 달 내로 지을 수는 없다.
한동안은 임시로 천막이라도 세워 주고 인력을 동원해 공사를 빠르게 진행할 예정이었다.
당장 먹고살 곳은 마련해 줘야 일을 시킬 게 아닌가?
문제는 목재가 부족해서 공사가 언제 끝날지, 아니, 시작은 할 수 있는지도 불확실하다는 것.
거주지를 만드는 작업이 늦어질수록 사람들의 생활은 엉망이 될 게 뻔했다.
머리를 벅벅 긁던 클로드가 애절한 눈빛으로 웬디에게 물었다.
"어떻게 하지?"
"...진짜 모르겠습니다."
"너 진짜 모를 때는 진짜라고 하는구나?"
"...."
총관인 클로드도 모르는데 웬디라고 뾰족한 방법이 생각날 리가 없다.
보좌라고는 해도 그녀가 맡은 일은 클로드를 호위하는 것이 주였으니까.
고민하던 클로드는 한숨을 내쉬며 생각을 떨쳐 냈다.
지금은 고민할 시간도 아까웠다. 빨리 거래부터 마무리하고 다음 업무를 쳐 내야 했다.
"가격은 나중에 다시 얘기합시다. 그것 말고 다른 문제는 없죠?"
클로드의 물음에 상인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아직 큰 문제는 없습니다만... 계속 이렇게 대량으로 구매하시면 결국 문제가 생길 겁니다."
"무슨 문제요?"
"펜리스에서 너무 많은 돈을 뿌리고 있습니다. 북부 물가가 점점 요동치고 있어요. 돈을 버는 저 같은 사람들에게야 좋은 일이지만 그만큼 피해 보는 사람들도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북부는 애초에 척박한 지역이다.
그런데 그나마 눈곱만큼 있는 자원들을 펜리스 영지에서 전부 쓸어 가고 있으니 가격이 오르는 건 당연하거니와, 공급 물량이 아예 씨가 마르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었다.
"으음... 너무 많이 샀나? 그렇지만 다 필요해서 산 건데 말이죠. 앞으로도 계속 사야 하는데?"
"지금 사들이시는 것들이 대부분 원재료 아닙니까? 그걸 펜리스에서 다 빨아들이고 있으니, 아무래도 다른 사업을 하는 사람들에게 불만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귀족들이요. 아시죠?"
클로드도 상인이 무슨 말을 하는지 충분히 이해했다.
무지막지한 지셀의 정책 때문에 엄청난 돈이 북부에 풀리고 있었다. 돈을 뿌리는 수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상단들이야 오랜만에 큰 손님을 받아서 입이 귀밑까지 찢어지겠지만 모든 사람이 그렇지는 않다.
가난한 영지의 농노들이야 누가 뭘 사고팔든 신경 쓰지 않겠지만, 경제 활동에 깊이 발을 들인 귀족들은 배알이 꼴리는 상황이리라.
클로드는 고개를 몇 번 끄덕였다.
"귀족들은 우리 영주님이 진짜 보기 싫겠죠. 사실 저도 보기 싫은.... 크흠흠, 이건 못 들은 걸로 합시다."
"어차피 대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아닌 이상 물가고 뭐고 체감도 잘 못 합니다. 문제는 다른 영주들과 귀족들인 거죠."
어디서 천둥벌거숭이 같은 애송이 영주가 나타나서 북부의 시장을 엉망으로 헤집으며 물건들을 쓸어 가고 있다.
다른 때 같으면 담합을 해서라도 그놈의 발목을 잡거나 그놈에게 손해를 입혔을 것이다.
그런데 그 애송이 영주 뒤에 브랜포드 후작이 있다네? 그러니 귀족들은 차마 방해도 못 하고 구경만 해야 하는 실정이었다.
얼마나 부럽고 속이 쓰릴까? 아마 지셀이 손아귀에 쥔 것들을 모조리 뺏고 싶어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을 것이다.
상황을 충분히 이해한 클로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상인에게 마지막 거래를 시도했다.
"염두에 두겠습니다. 또 다른 문제는 없죠? 그러면.... 1골드만 깎읍시다."
"네?"
"1골드만 깎아 주세요."
상인은 황당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이미 가격에 관해서는 예전에 만났을 때 협상을 끝냈다. 게다가 이미 대금도 다 치르지 않았던가.
'깎아 달라는 말은 보통 돈을 주기 전에 하지 않나?'
상인은 전혀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건 클로드의 마지막 양심이었다.
돈을 덜 주고 자기 주머니에 남겨 두면 영지의 자금을 횡령한 거지만.... 일단 돈을 줬다가 돌려받으면 개평을 받은 셈 칠 수 있으니까.
그래서 굳이 거래가 끝난 뒤에 이렇게 질척거리는 것이다.
"우리가 뭐 거래 한 두 번 한 사이도 아니고, 다음에도 또 할 건데! 1골드만 깎읍시다."
"...."
상인은 의심 어린 눈빛으로 클로드를 바라보았다.
깎아 달라는 시점도 이상하지만, 액수도 이상하다. 100골드도 아니고 1골드만 깎아 달라니?
한 영지의 총관이 달라는 뇌물치고는 액수가 너무 적어서 오히려 더 수상했다.
'이게 무슨 속셈이지? 아멜리아 아가씨에게 보고를 해야 하나?'
아무리 고민해도 상인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클로드가 이름만 총관이지 사실상 노예 처지라는 걸 모르니 정답이 나올 리가 없었다.
그가 1골드만 달라고 하는 데에는 어떠한 수작도 노림수도 없었다. 그저 순수한 욕망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다.
상인이 말도 없이 가만히 있자 무안해진 클로드가 괜히 재촉했다.
"아, 1골드도 못 깎아 줘요? 진짜 우리 사이에 이럴 겁니까? 다음에 우리랑 거래 안 할 거예요?"
"아, 예... 그 정도야 해 드릴 순 있죠."
결국 상인은 생각하기를 포기하고 제 주머니에서 1골드를 꺼내 주었다.
클로드는 희희낙락하며 돈을 받아 외투 주머니에 넣었다.
"아휴, 감사합니다. 그럼 다음에 또 봅시다. 다음에는 좋은 술도 한잔하면 좋겠네요. 우리 영지에는 영 맛 좋은 술이 없어서."
그러니까 좋은 술을 하나 가져오라는 뜻이다.
상인도 그 뜻을 알아듣고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지금은 '고객님'이니 잘 보여야 한다.
"아, 예.... 좋은 걸로 하나 구해 오지요.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네, 살펴 가세요. 멀리 안 나갑니다."
상인은 해맑게 인사하는 클로드에게 어색하게 웃어 주고는 말머리를 돌렸다.
'아멜리아 아가씨가 왜 이놈들을 싫어하는지 조금 알 거 같다.'
액수가 이상할 정도로 작은 건 이해가 안 가지만, 아무튼 갑질에는 도가 튼 놈이었다. 총관도 이럴진대 그 영주란 놈은 얼마나 꼴통일까?
북부를 통틀어 손꼽히는 망나니이니 아마 직접 보면 클로드보다 더 속이 터지는 인간이리라.
'아가씨한테 파혼까지 당한 걸 보면 알 만하지. 그런데 대체 1골드는 무슨 의미일까? 아가씨에게 보내는 신호 같은 걸까?'
상인은 이걸 보고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끙끙대고 고민하며 펜리스를 떠났다.
그를 지켜보던 클로드는 상인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자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후후, 영주님이 저놈들은 적이라고 했으니 1골드 정도는 뺏어도 괜찮겠지."
자신은 지금 적에게서 1골드를 뺏은 것이다.
이것도 나름의 전적이라면 전적이다.
클로드는 기분 좋게 외투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오랜만에 '진짜 내 돈'을 만져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얼라?"
그런데 주머니에서 돈이 잡히지 않는다.
혹시 착각했나 싶어서 여기저기 다 뒤져 봐도 나오지 않았다.
"으헉! 뭐야? 내 돈 어디 갔어!"
바닥에 떨어졌나 싶어 샅샅이 살펴봤지만, 전혀 보이지 않았다.
클로드는 한참을 찾다가 결국 포기하고 하늘을 보며 외쳤다.
"으아아아아! 왜 나 클로드는 행복할 수가 없어!"
'에휴.'
절규하는 클로드를 보며 웬디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조용히 영지의 공금 상자로 다가가 금화 하나를 넣으려다 멈칫했다.
웬디는 여전히 빽빽대는 클로드를 보고 한숨을 내쉬더니 그를 불렀다.
"총관님, 여기 금화 하나가 떨어져 있네요."
"어? 진짜? 찾았어? 이게 왜 거기에 있지? 금화에 발이 달렸나? 으헤헤헤, 찾았다."
클로드는 희희낙락해서는 웬디에게 뛰어가 금화를 받았다.
돈을 다시 주머니에 소중히 챙겨 넣는 그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도 행복해 보였다.
* * *
펜리스 영지에 사는 사람들은 영지로 꾸역꾸역 몰려오는 이주민들을 보며 모두 같은 생각을 했다.
'거지들인가?'
꾀죄죄한 겉모습과 우울한 표정을 보면 이주민이 아니라 피난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다들 제대로 못 먹고 살았는지 비쩍 말라 있었다. 심지어 병자들까지 섞여 있는 거 같았다.
가신들은 몰려드는 이주민들을 보며 혀를 찼다.
'상태를 보아하니 당장 일도 시키지 못하겠구나. 이거 돈만 나가게 생겼다.'
'사람이 늘어나는 건 좋은데.... 사람도 사람 나름이지. 어디서 저런 사람들만 얻어 온 거지? 혹시 영주님이 사기당한 거 아닌가?'
가신들뿐만이 아니다. 기존에 이곳에 살고 있던 영지민들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이주민들을 바라보았다.
텃세를 부리려는 게 아니라, 그간 어렵게 살아오며 몸에 밴 본능 같은 것이었다.
갑자기 사람들이 잔뜩 늘어나니 치안 상태와 식량 조달 상태가 걱정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오직 지셀만이 이주민들을 보며 별다른 감정을 내보이지 않았다.
상태가 안 좋은 사람들을 보낼 줄 알고 있었으니까.
'멀쩡한 사람들을 쉽게 내어 줄 리가 없지.'
아무리 지셀을 지원해 주기로 결정되었다 해도, 인구는 영지 운영의 근간이자 영주들의 가장 큰 재산이다.
귀족들 욕심이 얼마나 큰데 그런 걸 그냥 내주겠는가?
제대로 된 기술자나 건장한 사람들을 보내 줄 리가 없었다.
그들은 빈민 구제란 명목으로 가난하고 살기 힘든 사람들만 잔뜩 모아서 보내 주었다. 이 기회에 빈민가를 싹 청소한 것이다.
그 외에 세금을 제대로 못 내는 마을이나 화전민들, 소소한 범죄자들도 죄다 끌어모았다.
보낸 뒤의 일은 걱정하지 않았다.
애초에 지원해 주기로 했던 브리반트 영지는 인구만 적을 뿐 돈이 많았고, 적염의 마탑이 있었으니까.
시간이야 좀 걸리겠지만, 알아서 잘 챙겨 먹일 거라 생각한 것이다.
이주민들을 살펴보던 지셀은 옆에 있던 로웰에게 말했다.
"로웰, 바로 인구 조사를 시작해. 우선 일할 수 있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들을 분류해라. 아픈 자들은 벨린다에게 말해 치료를 시작하고, 건강한 애들은 뽑아서 길리언에게 보내. 당장 치안 유지에 쓸 인력이 부족할 거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첩자들은.... 아니다. 당장 저기에선 찾을 수도 없겠군. 어차피 안 내보내면 그만이니까."
분명 다른 영지의 첩자들이 저 무리에 끼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왕국 전역에서 모여든 사람들 사이에서 첩자를 골라내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가뜩이나 바쁜데 그런 데 힘을 쏟을 수는 없었다.
애초에 첩자가 들어오는 건 완벽하게 막을 수도 없다. 그냥 밖으로 안 내보는 게 최고다.
"클로드는 어디에 있지?"
"상단과 거래를 하러 갔습니다. 곧 도착할 겁니다."
"오는 대로 이주민들에게 식량 분배부터 확실히 하라고 해. 아마 배가 많이 고플 거다."
"알겠습니다. 일단 임시 거주지로 모두 데려가겠습니다."
거주지를 만드는 작업이 끝나지 않았으니 다들 당분간 천막에서 살아야 한다.
소동을 방지하기 위해 용병들까지 모두 투입되어 이주민들을 통제했다.
하지만 예상외로 별다른 소요는 일어나지 않았다.
다들 생소한 곳에 와 불안해서 그런지 지시에도 잘 따르는 편이었다.
자리를 비운 클로드 대신 로웰이 이주민들을 이끌고 임시 거주지로 갔다.
"여기가 너희들이 당분간 지낼 곳이다.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좀 기다리도록. 거주지는 최대한 빨리 마련해 주도록 하겠다. 식량은 매일 배급할 테니 걱정할 필요 없다."
이주민들은 눈앞에 서 있는 수많은 천막을 바라보았다.
로웰은 얼굴이 조금 벌게졌다.
이 사람들은 어쨌든 지셀의 요청에 따라 강제로 이주를 당한 사람들이다. 당연히 새로 살게 될 곳이 어떨지 기대감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정작 이들을 부른 펜리스에서는 살 곳도 제대로 마련하지 못해 천막에서 지내라고 해야 하니.... 창피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로웰의 예상과는 다르게 이주민들의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
"와, 천막이 깨끗하잖아? 전에 살던 곳보다 나은데?"
"집이야 뭐 비만 피할 수 있으면 되는 거 아닌가. 안 굶는 게 더 중요하지."
"식량도 매일 준대요. 이제 안 굶어도 돼요. 근데 믿어도 되나?"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를 들은 로웰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그냥.... 진짜 거지들만 싹 모아서 보냈구나.'
요새 좀 살 만해지니 깜빡하고 있었는데, 펜리스 영지도 얼마 전까지는 사람들이 숱하게 죽어 나갈 정도로 살기 어려운 곳이었다.
그때를 떠올리니 새삼 이들의 마음이 이해되었다.
'지금은 먹을 것만 챙겨 줘도 행복하겠지.'
로웰은 속으로 혀를 차며 사람들을 분류하고 천막을 배정했다.
한편, 집무실로 돌아가던 지셀에게 클로드가 허겁지겁 찾아왔다.
"영주님, 문제가 생겼습니다!"
지셀은 인상을 찡그렸다. 가뜩이나 일이 넘쳐 머리가 복잡한데 또 일이 늘 모양이었다.
"또 왜. 너는 맨날 뭐가 그렇게 문제야?"
"지금은 진짜 문제입니다."
"뭔데?"
"목재가 다 떨어졌습니다. 이러다가는 거주지 공사뿐만 아니라 모든 일정에 차질이 생길 겁니다."
그 말에 지셀의 표정도 심각해졌다.
애초에 영지 내에서 생산되는 양만으로는 부족할 것을 고려해서 상단을 통해서도 구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문제가 생각보다 빨리 터져 버렸다.
"아, 진짜 거지 같은 영지네. 돈을 그렇게나 쏟아부어도 문제가 줄어들지를 않아."
"영지 전역에서 공사가 진행되다 보니 자재가 너무 빠르게 소모되고 있습니다. 영지에서 확보하는 것도, 상단에서 구매하는 것도 한계입니다. 돈도 돈이지만, 시간이 문제입니다."
돈이야 더 들어도 상관없다. 여차하면 화장품을 핑계로 로잘린에게서 더 뜯어오면 되니까.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시간이 더 걸린다는 건, 사람들의 목숨과 직결된 문제다.
잠깐 고민을 하던 지셀은 뭔가 생각났다는 듯이 아, 하고 탄성을 흘렸다.
"당장 목재를 대량으로 구할 방법이 있어! 돈도 안 들어!"
"네? 어디서요? 어떻게 대량으로 구해요? 돈은 왜 안 든다는 겁니까?"
"페르디움으로 가면 돼."
"페르디움이라면.... 마수의 숲에서 구하시려고요? 초입만 벌목해도 몬스터들과 맹수들이 튀어나올 텐데요!"
기겁하는 클로드를 보고 지셀이 혀를 찼다.
"당연히 그건 아니지. 지금 바쁜데 마수의 숲을 언제 다시 토벌해? 그건 나중에 해야지."
"그러면 어떻게.... 서, 설마?"
지셀은 씨익 웃으며 말했다.
"부족하면 그쪽 숲하고 산이라도 털어야지. 페르디움하고 우리 영지는 운명 공동체니까. 안 그래?"
156화 이 몸이 해결하겠다. (2)
페르디움의 총관 호메른은 오랜만에 우아한 티타임을 즐기고 있었다.
"평화롭구나."
작금의 페르디움은 역대 최고로 평화로운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즈발터와 란돌프는 북방 요새로 출정을 나갔다. 너무 오래 비워 두면 야만인들이 그 틈을 노리고 쳐들어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북방 요새로 출정하는 것은 병사들에게도, 그들을 이끄는 지휘관들에게도 고난이었다. 영지가 가난한 탓에 목숨을 걸고 야만인들과 싸우다 온 사람들은 제대로 먹지도, 쉬지도 못했다.
제대로 된 보급도 없이 빈손으로 요새로 돌아가는 사람들의 낯빛은 항상 거무죽죽하게 죽어 있었다.
하지만 이번 출정은 지금까지와 달랐다.
식량부터 장비까지 모든 게 충분했기에 요새로 향하는 사람들도 안색이 밝았다.
'매년 이렇게 지원을 받을 수 있다니, 정말 좋구나.'
지셀에게 받은 룬스톤으로 겨우 숨을 돌린 지 얼마나 지났다고 왕실에서도 지원을 받았다.
비록 페르디움에서는 그 지원금의 절반밖에 못 받았지만, 항상 가난에 허덕이는 처지에서는 그것만으로도 감지덕지했다.
재무관인 알버트는 돈 계산을 하는 즐거움에 빠져 집무실 밖으로 나오지도 않을 정도였다.
'참, 대공자가 이렇게까지 해낼 줄이야. 내가 너무 미워만 한 거 같구나.'
호메른은 지셀이 어렸을 때를 떠올리며 감회에 젖었다.
지셀은 평생을 함께하기로 한 의형제의 아들이자 영지의 후계자였다. 친조카보다 더 조카 같은 아이였다.
그렇기에 지셀이 어렸을 때부터 사랑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지셀이 영지의 후계자답지 않게 망나니처럼 사고만 치고 다니니, 예뻐했던 마음도 싹 사라져 버렸다.
그리도 아끼던 아이를 어느 순간부터 끔찍하게 싫어하고 미워했다.
'그래, 워낙 비범한 아이라 그랬을 거야. 우리가 이해를 못 한 거지. 이렇게 영지를 위하는 마음이 크고, 능력이 출중할 줄 알았으면 누가 미워했겠어? 욕심은 좀 많은 거 같지만, 그것도 다 아직 젊어서 그런 거지.'
호메른의 마음속에 가득 찬 미움이, 봄 햇살을 받은 눈처럼 사르르 녹기 시작했다.
아직 지셀의 전부가 마음에 드는 건 아니다. 하는 짓 하나하나가 너무 위험하고 아슬아슬하다.
하지만 결과만 놓고 본다면 잘 풀린 셈이다.
룬스톤과 왕실 지원금까지 얻고 나서야 겨우 다른 영지와 비슷한 수준이 되긴 했지만, 어쨌든 페르디움은 점점 더 형편이 나아지고 있었다.
'그래, 부족한 부분이야 앞으로 잘 가르치고 이끌면 되겠지. 어른의 역할은 그런 거 아니겠는가? 아직 젊어서 혈기가 넘치는 걸 테니까.'
호메른은 인자하게 웃으며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옛날 생각이 새록새록 떠오르기 시작했다.
지셀을 훌륭한 후계자이자 영주로 만들기 위해 교육하던 나날들이 말이다.
지금부터라도 다시 그렇게 이끌어 주면 된다.
그 지랄 맞은 성격만 고치면 훌륭한 영주가 될 것이다.
'어차피 페르디움 영지를 이어받을 사람이니까. 우리 다시 잘 지내보자꾸나. 지셀.'
미움이 점점 사라지니 마음도 더없이 평화로워졌다.
'이렇게 평화로운데 왜 그간 모르고 살았을까? 미워하면 내 마음도 아픈 것을.'
깨달음을 얻은 호메른은 지셀에 대한 기대와 애틋함을 마음속에 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슬슬 영지 시찰을 나가야 할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오늘은 동쪽 마을부터 둘러보겠다."
호메른의 명에 기사와 병사들이 바로 채비를 마쳤다.
영주 대리는 책임이 무거운 자리다. 영주가 자리를 비운 만큼 더욱더 신경 써서 영지를 돌봐야 한다.
하지만 지금의 페르디움에 걱정할 일이 있긴 할까? 마음이 편할 수밖에 없었다.
호메른은 말을 타고 가면서도 한껏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정말 평화롭구나. 구름 하나 없이 맑은 하늘, 눈부신 햇살, 지저귀는 새들, 나무가 다 없어져 버린 숲.... 아니, 저게 뭐야? 저거 왜 저래? 나무 다 어디 갔어?"
동쪽 마을로 가는 길에 작긴 하지만 숲 하나가 분명히 있었다.
그런데 지금 보니 나무들이 전부 베여 밑동만 남아 있었다.
호메른은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 이게 무슨 일이냐? 숲이 왜 저렇게 됐어? 내가 지금 헛것을 보는 건 아니지? 이, 일단 빨리 가 보자!"
가까이 다가갈수록 환상이 아니라 실제 상황이라는 게 확실해졌다. 숲은 정말 무지막지하게 초토화되어 있었다.
"숲지기! 숲지기는 어디 갔느냐! 이게 무슨 일이냐! 무슨 일이냐고!"
호메른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자 숲을 관리하는 자가 잽싸게 나타났다.
"초, 총관님 오셨습니까."
"이게 무슨 일이냐! 누가 감히 이렇게 베어 갔단 말이냐! 당장 고하지 못할까!"
어떤 영지든 숲을 함부로 훼손하는 것은 중범죄로 취급한다.
특히 북부같이 척박한 지역에서는, 숲과 산의 자원에 기대어 사는 경향이 크기에 더 민감하게 관리하는 편이다.
안 그러면 가뜩이나 부족한 영지의 재정에 큰 타격이 올 테니까.
페르디움에서도 숲에 함부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따로 사람을 붙여 관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누가 이렇게 간도 큰 짓을 저질렀단 말인가!
숲지기는 바닥에 넙죽 엎드리며 바로 범인을 말해 주었다.
"대공자님이 와서 다 쓸어 갔습니다!"
"뭐? 대공자가? 그놈이 자기 영지 두고 왜 여기 나무를 베 가?"
"대공자님 영지에 목재가 부족해서 좀 빌려 가겠다고...."
"억, 어억!"
호메른은 갑자기 혈압이 올라 목뒤를 붙잡고 비틀거렸다.
'역시 그 새끼는 정상이 아니야.'
아무리 아버지의 영지라고는 해도, 목재가 부족하다고 다른 영지를 털어 가다니!
당장 잡아서 주리를 틀어야 했다.
"이, 이 미친놈은 어디 있느냐! 어디 있냐고!"
그러자 숲지기가 슬그머니 일어나 손가락으로 한 곳을 가리켰다.
"저기 열심히 도망가고 있는뎁쇼."
과연 저 멀리 목재를 잔뜩 실은, 엄청난 수의 수레들을 끌고 가는 무리가 보였다.
도망가는 주제에 뭐가 그렇게 당당한지 펜리스의 깃발까지 펄럭이면서 말이다.
"자, 잡아.... 당장 저놈 잡아아아아아아!"
그 말을 끝으로 호메른은 코피를 흘리며 기절해 버렸다.
혈압이 너무 올라 몸이 견디지 못한 것이다.
의식을 잃으며 호메른은 생각했다.
'다시 잘해 보기는 개뿔....'
미워, 너무 미워 죽겠어!
그렇게 페르디움의 숲 하나가 지셀에게 완전히 털리고 말았다.
* * *
"우, 우와. 저게 다 뭐야?"
영지민들은 줄줄이 들어오는 수레들을 보고 넋이 나갔다.
그렇지 않아도 목재가 다 떨어져 공사가 늦어진다는 소식은 다들 알고 있었다.
아무리 영주가 돈이 많아도 이번에는 힘들겠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도 기가 막히게 해결한 것이다.
목재가 들어온다는 소식에 허겁지겁 달려온 클로드도 그 광경을 보고 넋이 나갔다.
'양이 어마어마하잖아? 거의 작은 숲 하나 정도는 밀어 온 거 같은데? 형편도 안 좋은 페르디움에서 이렇게 많은 목재를 선뜻 내줄 리는 없고....'
털어 온다고 호기롭게 나가더니 진짜로 털어 온 게 분명했다.
'와, 진짜 뒤가 없는 사람이구나. 저 인간하고 계속 어울리면 나도 제명에 못 죽겠다.'
아무리 급하고 중요하다 해도 이렇게 상식 밖의 일을 벌이다니!
나중에 페르디움에서 따지고 들 게 분명했다.
잠깐 앞일을 걱정하던 클로드는 곧 무언가를 깨닫고 환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지. 우리 덕분에 왕실에서 지원도 받고 있는 건데 이 정도는 괜찮잖아? 서로 돕고 삽시다. 호메른 총관님.'
클로드는 그냥 마음 편히 지내기로 했다. 이미 벌어진 일로 고민해 봐야 소용없으니까.
반면 영지민들 사이에는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영주님이 아버지의 영지를 털어 왔다는데?"
"지금 페르디움 백작님이 북방으로 출정을 나갔다더라. 그래서 아직 모르는 거래."
"쯧쯧, 나중에 큰 사달이 나겠구먼. 부자지간에 전쟁까지 나는 거 아닌지 몰라."
영주가 이 동네 소문난 불효자라는 건 익히 들어 왔지만, 설마 아버지의 영지를 털어 올 줄은 정말 몰랐다.
다들 불안해하며 별일이 없기만 바라고 있었다.
클로드는 낯빛이 어두워진 영지민들을 다독여 작업을 재개했다.
"자자, 멈춰 있던 작업을 재개한다. 인부들 다시 소집해."
자원이 부족해 공사가 중단되었던 탓에 일정이 많이 미뤄졌다.
다시 인부들을 모집하고 공사를 재개한대도 이미 날아간 시간은 돌아오지 않는다.
게다가 집을 짓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최대한 간단하게 짓는다 해도 생활에 꼭 필요한 부엌이나 화장실 같은 시설은 다 들어가야 했다.
시간을 단축하는 데도 한계가 있다는 뜻이다.
공사 현황을 심각하게 지켜보던 클로드가 결국 지셀을 찾아갔다.
"문제가 있습니다."
"아, 이번에는 또 뭐! 너는 맨날 뭐가 그렇게 문제야? 일부러 문제를 만들어 오는 거 아냐?"
"제가 만드는 건 아닌데요."
"문제가 아닌 걸 문제라고 생각하는 게 진짜 문제가 아닐까?"
"하, 영주님이 항상 현실과 거리가 먼 계획을 짜니까 문제가 생기는 거 아닙니까?"
분통을 터뜨리는 클로드에게 지셀이 혀를 차며 물었다.
"문제가 뭔데? 목재도 구해 왔는데 이번엔 뭐가 부족해?"
"시간이요."
"그건 원래도 부족했던 건데 뭘 또 새삼스럽게 문제래?"
"그거하곤 다른 문제라니까요. 아무래도 거주지 만드는 작업은 도저히 일정을 못 맞출 거 같습니다."
"왜?"
"지어야 할 집이 너무 많습니다. 여러 마을에서 동시에 공사를 진행해야 하잖아요. 인부들도 최대한 모집해 봤지만, 여전히 인력이 부족합니다."
그 말에 지셀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지금 몰려온 사람만 수천 명이다. 노약자나 병자들을 제외한다 해도 꽤 수가 많을 텐데, 인력이 부족하다는 건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인력이 왜 부족해? 사람 엄청 많은데?"
"제대로 된 기술자와 목수들이 부족합니다. 집이 뭐 아무렇게나 벽돌 갖다 붙인다고 뚝딱 나오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음, 그러니까 힘쓸 사람은 많은데 어디다 힘을 쓸지 지시할 사람이 적다는 거지?"
"네, 그러니까 지금은 인부들을 더 추가해도 의미가 없습니다. 담당자 혼자서 수십 채씩 맡아 볼 수가 없으니까요."
그렇다고 기술자 없이 인부들만 데리고 지을 수도 없었다. 빈민들이 대충 짓고 살았던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할 테니까.
그런 집은 비바람만 불어도 무너져 버릴 것이다. 괜히 자재만 낭비하는 꼴이다.
"음...."
지셀도 팔짱을 끼고 고민에 잠겼다.
인부를 아무리 많이 투입해도 집을 지을 줄 모르면 소용이 없다.
더 효율적인 작업 방식이 필요했다. 담당자 한 명이 지금보다 더 많은 집을 맡을 수 있게 말이다.
잠시 고민하던 지셀이 혼자서 중얼거렸다.
"아, 방법이 하나 있긴 있는데...."
"네?"
"으음, 집은 그렇게 안 하려고 했는데. 어쩌면 그게 나을지도...."
"네? 뭐가요?"
"별수 없지. 거주지부터 안정시켜야 다른 일을 할 수 있는 법이니까. 거주지 문제는 이 몸이 해결하겠다."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드는 지셀에게 클로드가 물었다.
"영주님... 설마 집도 지을 줄 아세요? 그런 기술은 또 언제 배우셨어요?"
"옛날에 건설 쪽에 몸담은 적이 있거든. 그래도 짓는 것보다 부수는 걸 더 잘하긴 해."
클로드는 영주가 또 허풍을 친다고 생각했다. 페르디움 망나니의 소문이 근방에 자자한데 건설 쪽에 몸담기는 뭘 몸담았다는 말인가?
"...영주님 한 분이 작업에 참여하신다고 집이 막 늘어나진 않을 텐데요."
"생각난 게 있어서 해 보려고. 시범 마을을 하나 지정해서 직접 진행해 봐야겠다. 건축가들하고 목수들 죄다 불러. 너도 따라와라."
클로드는 우거지상이 되어 지셀을 따라나섰다.
이번에는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짓을 벌일지 걱정부터 앞섰다.
지셀의 소집령이 전해지자 각 구역의 공사를 감독하고 책임지는 실무진들이 모두 모였다.
사람들을 둘러보며 지셀은 자신만만하게 외쳤다.
"더 많은 인부를 투입해 빨리 지을 수 있고, 더 많은 사람을 수용할 수 있는 건축 방법을 알려 주겠다!"
"오오!"
모두가 기대에 찬 눈빛으로 지셀을 바라보았다.
방법이 조금 이상하기는 해도 영주는 어떻게든 문제를 해결해 왔다.
특히나 농사와 화장품은 아예 세상에 없던 기술을 선보인, 어마어마한 업적이었다.
그런 영주가 알려 주는 새로운 건축 방법이라니! 기대가 안 되려야 안 될 수가 없었다.
초롱초롱한 사람들의 눈빛을 보며 지셀이 자신만만하게 외쳤다.
"집을 아주 크게 지으면 되잖아!"
"...."
기대로 빛나던 사람들의 얼굴이 순식간에 무표정해졌다. 차갑게 굳은 시선들을 마주하고 지셀은 잽싸게 말을 정정했다.
"어떤 집인지 직접 보여 주지. 이제부터 내가 작업을 지휘하겠다!"
그는 전생에서 봤던, 새로운 개념의 집을 떠올리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157화 이 몸이 해결하겠다. (3)
용병은 돈만 주면 시키는 대로 다 하는 사람들이다.
전생에 지셀도 싸움질 말고 다른 의뢰를 많이 받았다.
축성 작업이나 요새 건축은 당연하거니와, 전쟁 때 일손이 모자라면 간이 막사 건설 작업까지 맡아 했다.
'내가 용병왕 칭호를 안 받았으면 건설왕이라 불렸을 몸이라고.'
처음에는 뭣도 모르고 힘이나 썼지만, 비슷한 의뢰를 계속 받다 보니 건축, 토목 공사의 기초 지식 정도는 체득하게 되었다.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병력이 휴식할 수 있는 거점과 거주지도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나서는, 공사 현장에 일부러 찾아가 배우기도 했다.
실전에서 배운 지식이 있기에 작업을 지휘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인부들부터 잔뜩 모아 와라. 많이 붙어야 빨리 끝난다."
하지만 사람들은 지셀이 그런 지식을 쌓은 것을 모른다.
그들이 보기에 지셀은 전문가도 아닌 주제에 제멋대로 나서는 천둥벌거숭이에 불과했다.
그래도 반대할 수는 없었다. 영주가 하겠다는 일을 누가 함부로 막겠는가.
곧 대규모 인부들이 모여들었고 지셀은 전생의 기억을 더듬어 작업 내용을 지시했다.
"자, 먼저 기반부터 다지고 뼈대를 작업한다!"
지셀의 말에 인부들은 바쁘게 움직였다.
영주가 직접 나서서 하는 일이니 감히 농땡이를 피울 수도 없었다.
정신없이 시키는 대로 하다 보니 뭔가 그럴듯한 골조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기술자들은 작업을 하면서도 쑥덕거렸다.
"영주님이 뭔가 알긴 아는 거 같은데...."
"그런데 이게 뭐지? 그냥 저택을 짓는 거 아닌가?"
"구역을 나눈 거 보니 그냥 큰 방을 여러 개 만들고 여러 사람을 몰아넣겠다는 거 같은데?"
저택이나 병역 막사처럼 구역을 나누고 사람들을 다 몰아넣으면 거주지 문제가 해결되긴 할 것이다.
사람들에게 나눠 줄 만한 집은 아니지만, 시간이 촉박하니 그런 방법을 쓰는 것도 나쁘진 않았다.
하지만 그걸 굳이 영주가 지휘할 필요가 있을까?
결국 목수 한 명이 손을 들고 물었다.
"영주님, 큰 막사를 지으실 거면 이 뒤로는 저희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굳이 이런 험한 일에 직접 나서실 필요는 없습니다."
"아니, 아니야. 그런 집이 아니다. 사람들을 한 곳에 다 몰아넣으면 그게 무슨 집이야? 그냥 돼지우리지."
그러자 다른 자가 손을 들고 물었다.
"지금 만드시는 게 귀족들의 저택처럼 방이 많은 주택 아닙니까?"
이번에도 지셀은 고개를 저었다.
"비슷하지만 좀 다르다. 뭐 정말 급하면 그렇게라도 해야겠지만, 아직은 그래도 여유가 있으니까. 이럴 때 처음부터 제대로 만들어 둬야지."
사람들이 궁금하다는 표정을 짓자 지셀은 픽 웃음을 터트렸다.
"뭐, 간단히 설명해 주마. 어느 정도 개념은 알아야 잘 따라올 테니까. 지금 만드는 건 튼튼하고 아주 큰 건물 안에 여러 채의 집이 들어가 있는 구조다."
"집안에 집이 또 있어요? 그냥 작은 집을 여러 개 붙인 거 아닙니까?"
땅이 부족한 도시에서는 그런 식으로 저택을 바짝 붙여 짓기도 한다.
지셀이 제시한 것은 기존에 없던 개념이라 사람들이 상상할 수 있는 것은 그 정도였다.
"그게 아니고, 큰 건물 안에 다시 작은 집들이 여러 개 있는 구조야. 공동 주택이라는 거지."
"그런 집이... 있습니까?"
지셀은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래, 이제 여기에 그런 집이 생길 거다."
전생에 재앙이 대륙을 덮친 뒤, 살아남은 자들이 모여들며 많은 도시가 요새화되었다.
요새 안이라는 한정적인 공간 안에서 많은 사람이 함께 지내려면 공간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활용해야 했다.
이에 따라 나온 개념이 바로 공동 주택이었다. 하나의 높고 큰 건물 안에 가구별로 독립된 주거 구역을 할당하는 것이다.
지셀이 반복해서 설명했지만, 사람들은 영문 모를 표정만 지었다. 알고 나면 쉬운데 사고의 한계를 깨지 못해서 생기는 문제였다.
"표정들을 보니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 모양이네."
지셀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역시 현시대에 없는 개념을 설명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러면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다. 언제나처럼 직접 보여 주는 수밖에.
"자, 잡담은 여기까지. 모르겠으면 그냥 내가 지시하는 대로만 최선을 다해 만들어라. 결과물을 보면 이해가 될 거다."
설명을 끝낸 지셀은 다시 작업에 전념했다.
공사는 금세 궤도에 올랐다. 영주 한 사람이 끼어들었을 뿐인데 속도가 몰라보게 빨라졌다.
일단 인부들이 지셀의 눈치를 보느라 농땡이를 피우지 않아서 그렇기도 했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따로 있었다.
"아자!"
콰직! 콰지직!
지셀이 기합을 한번 내지르며 도끼질을 할 때마다 매끈한 목재가 튀어나왔다.
몇 사람이 달라붙어 다듬어야 할 목재를 눈 깜빡할 사이에 혼자서 만들어 내니 다들 놀라 자빠졌다.
"와... 영주님 검술이 뛰어나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도끼질도 어마어마하네."
"이게 말이 돼? 무슨 사람이 도끼를 저렇게 휘둘러? 팔 몇 번 휘두르니 판자가 턱 나오네?"
그뿐만이 아니다. 못 같은 건 한 줌씩 집어서 뿌리는 것만으로 동시에 박아 버렸고, 부숴야 할 건 망치질 한 번에 다 박살을 내 버렸다.
진흙을 말리는 등 시간이 걸리는 작업은 마법사들까지 끌고 와서 순식간에 끝내 버렸다.
이러니 다른 사람들은 지셀의 작업 속도를 쫓아가기에 바빴다.
일단 시키는 걸 끝내는 게 우선이었으니 무언가를 궁금해할 여유조차 없었다.
"헉헉, 지금 우리가 집을 짓고 있는 건 맞아?"
"속도가 미쳤어. 뭔가 조립하는 느낌이 들긴 하는데...."
물론 지셀이 무작정 되는대로 짓고 있는 건 아니었다.
전생의 구조와 형태를 가져오더라도 현재 영지에서 쓸 수 있는 기술 수준과 자원 보유량에 맞춰 설계를 바꿔야 했다.
지셀은 자신을 보좌하는 기술자들에게 끊임없이 공동 주택의 개념을 알려 주고, 철저한 분업을 통해 그것을 현실에 구현했다.
기술자들에게 조언을 얻기도 하고 기술자들을 갈구기도 하면서 인간답게 사는 데 필요한 요소를 모두 집어넣었다.
"조리용 화로는 따로 만들고 난방은 벽난로로 할 거야. 층마다 연기가 나가는 통로를 따로 만들고 위에 굴뚝을 여러 개 세우면 연기가 샐 걱정도 없지."
"화장실은 배수관을 만들어서 물을 부으면 큰 구덩이로 모이게 만들어야 해."
"이거는 이렇게.... 저거는 저렇게...."
시간이 갈수록 사람들은 지셀이 무엇을 만드는지 어렴풋이 깨닫게 되었다.
"역시 백번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 한번 보여 주는 게 최고지?"
지셀의 말에 사람들은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뭘 만드는지도 모르고 정말 하라는 대로 한 것뿐인데, 뭔가 그럴듯한 건물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중간중간 구경하러 오는 클로드의 표정도 점점 이상해졌다.
'뭐야? 진짜야? 진짜 집을 짓는 거야?'
클로드는 지셀이 처음 나설 때만 해도 영주가 마음대로 설치다가 문제가 생길 거라고 확신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말리지 않았던 이유는 단순했다.
한 번쯤 패배를 겪어 봐야 사람이 겸손해지고 자숙을 하는 법이니까.
그런데 그의 예상과는 다르게 진짜 '집 같은 무언가'가 지어지고 있었다.
게다가 건설 속도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빨랐다. 경작지 작업을 하던 마법사들까지 죄다 멱살 잡혀 끌려왔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고작 나흘 만에 지셀이 말한 '공동 주택'이란 것이 완공되었다.
무려 층마다 4개의 집이 모여 있는 3층짜리 건물이었다.
"흠, 이 정도면 그럭저럭 쓸 만하겠네."
지셀이 거대한 망치를 어깨에 걸치고 흐뭇한 미소를 지은 채로 완성된 건물을 바라보았다.
급하게 만들었기에 장식 따위는 전혀 없고 투박하기만 했다. 하지만 기존의 양식과는 전혀 다른 모양의 건물이 크고 단단하게 서 있으니, 그 투박함마저도 든든하게 느껴졌다.
지셀과 같이 작업에 참여한 사람들도 멍하니 공동 주택을 바라보았다. 드디어 영주가 말한 개념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게 된 것이다.
"어... 이게 진짜로 되는 거였다니."
"영주님은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신 거지?"
자신들도 같이 만들었지만, 여전히 실감이 나지 않았다.
클로드는 넋이 나간 표정으로 지셀에게 물었다
"허, 이런 건 어떻게 생각하신 겁니까?"
"뭐... 자꾸 작업이 늦어지니 가장 빠르고 효과적인 방법이 뭘까 찾아본 거다."
지셀은 짐짓 거드름을 피우며 말했지만, 사실 이런 공동 주택은 전생에 아주 흔한 건물이었다.
오히려 그때는 마법을 활용해서 지금 만든 집보다 훨씬 더 관리하기도 쉽고 살기도 쾌적했다.
층마다 더 많은 집이 들어가고, 층수도 높은 것은 무려 7층이나 될 정도로 발전했었다.
물론 귀족이나 고위층들은 여전히 저택에서 지내고, 평민들만 공동 주택에서 살긴 했지만 말이다.
지셀은 기술자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이런 식으로 지으면 거주지 공사도 더 빨리 끝낼 수 있겠지?"
한 명이 감독할 수 있는 건물 수에 한계가 있다면, 건물 안에 들어갈 사람 수를 늘리면 된다는 논리였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작은 집 두세 개 정도를 지을 시간이면 이 건물 하나를 지을 수 있으니까.
"네, 이렇게 하면 엄청나게 시간을 단축할 수가 있습니다. 10채만 지어도 무려 120가구가 들어갈 수 있으니까요."
"좋아. 인부들은 지금보다 더 지원해 줄 테니 최대한 속도를 내도록."
"알겠습니다!"
기술자들은 경외심 가득한 눈빛으로 지셀을 보며 크게 외쳤다.
공사가 이루어지는 동안 상세한 도면도 따로 작성해 두었기에 똑같이 짓는 데는 아무 문제 없었다.
이 공동 주택이 얼마나 대단한 건지는 지셀보다 오히려 기술자들이 더 실감하고 있었다.
뜯어보면 뜯어볼수록, 공동 주택이야말로 현 상황에 가장 적합한 작업 방식이자 주택 양식의 혁명이라는 결론만 나왔다.
단지 집에 대한 고정 관념을 조금 비틀었을 뿐인데 이런 결과물이 나올 줄이야!
기술자들이 삼삼오오 모여 서로 호들갑을 떠는 모습을 보고 클로드는 더 이상 생각을 하지 않기로 했다.
'그래, 내가 착각했지. 저 인간을 보통 사람처럼 생각하면 안 됐는데.'
떨떠름한 표정을 짓는 클로드에게 지셀이 타박하듯 말을 건넸다.
"뭐 해? 정신 안 차리냐. 이제 작업 속도가 빨라질 테니 인부들을 대량으로 붙여 줘."
"아, 알겠습니다. 바로 인부들을 추가로 모집하는 공고를 내겠습니다."
클로드의 대답에 지셀이 황당한 소리를 들었다는 듯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렇게 해서 언제 일을 끝마쳐? 좀 빠르게 팍팍 치고 나가자고. 우리 지금 시간 없잖아?"
"네? 뭘 어떻게 하자는 말씀이신지...."
"이주민들 말이야. 며칠간 잘 먹이고 잘 재웠지?"
"네, 병자들이 좀 남아 있긴 하겠지만 대부분은 이제 체력을 회복했을 겁니다."
그러자 지셀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이제부터는 모집이 아니라 징집이다. 움직일 수 있는 자는 죄다 끌고 와. 공짜 밥은 여기까지다."
* * *
그간 편하게 지내던 이주민들은 징집 명령이 떨어지자 드디어 올 게 왔다고 생각했다.
공짜로 무언가를 주는 영주는 이 시대에 절대 존재하지 않는다고 굳게 믿는 사람들에게는 당연한 소식이었다. 징집 소식을 듣고 오히려 안심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렇기에 반항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들 그저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의욕 없이 소집에 응했을 뿐.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이주민들은 전부 거주지 공사와 경작지 개간 작업에 강제로 투입되었다.
영혼 없이 일하던 그들은 '공동 주택'에 입주하기 시작하면서 눈빛이 달라졌다.
"진짜였어? 천막이 아니라 진짜 집을 준다고? 거짓말인 줄 알았는데!"
"공동 주택이라길래 다 같이 막사에서 사는 줄 알았는데.... 이거 엄청나잖아!"
"내 집 마련.... 이렇게 쉬운 거였어?"
이주민들 대부분은 빈민가에서 반강제로 쫓겨난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살던 집이라고 해 봐야 다 쓰러져가는 폐가, 비만 겨우 피할 수 있는 낡은 천막, 대충 판자로 얼기설기 올려놓은 구조물 정도였다.
없이 태어나서 배운 것도 없으니, 서럽고 힘들어도 그게 당연한 줄 알고 살았다.
하지만 이곳은 다르다. 열심히 일을 하니 큰 보상이 돌아왔다.
말로는 여럿이 같이 사는 주택이라고 하지만 허름한 오두막보다 훨씬 크고 깨끗했으며, 가족별로 거주 구역도 확실히 나뉘어 있었다.
빈민으로 살아온 이들에게는 어마어마한 선물이었다.
"처음에는 너무 싫었는데 안 왔으면 인생 손해 볼 뻔했다니까?"
"여기 영주님이 통이 아주 커! 오기를 정말 잘했어! 없던 충성심도 절로 생기네."
"쫓겨나서 왔으면서 뭘 오기를 잘해? 그래도 쫓겨난 게 행운이긴 하네."
사람 취급 못 받고 살던 이들에게 펜리스 영지는 일생일대의 기회를 쥘 수 있는 땅이었다.
예전처럼 돌아가고 싶지 않은 빈민들은 전력을 다해 공사에 협조했다.
덕분에 공사는 이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고된 일을 하면서도 다들 즐거워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지셀은 흡족한 미소를 띠었다.
"영지를 위해 이렇게 한마음으로 움직이다니. 이런 사기와 열정이라면 못할 게 없겠어."
클로드 또한 그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이군요. 저 정도로 의욕이 넘친다면 다른 공사들도 더 빨리 끝날 겁니다."
"좋은 일이지. 앞으로 전쟁에 대비해서 더욱더 바쁘게 움직여야 하는데 말이야."
전쟁이라는 말에 클로드의 낯빛이 조금 어두워졌다.
158화 이 몸이 해결하겠다. (4)
사람들은 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니까 이렇게들 열심히 움직이는 거였다.
만약 대영주인 데스몬드 백작과 싸워야 한다는 걸 지금이라도 알게 된다면 집이고 뭐고 다 내던지고 도망갈 것이다.
하지만 자기 집을 갖고 생활이 안정되고 나면 사람들의 반응도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그때는 자기 재산을 지키고 싶어 할 거야. 다른 영지에서는 우리 영주님처럼 잘 대해 주지 않을 테니까. 펜리스 영지를 지키려고 싸울 수밖에 없겠지. ...설마 그걸 노린 건 아니겠지?'
지셀이 그런 걸 노리고 시작한 건 아니다. 그저 영지 발전에 필요했기 때문에 진행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런 행동들이 겹쳐 의외로 좋은 결과를 냈다.
클로드는 감탄 반, 의심 반 섞인 눈빛으로 지셀을 뜯어보다 걱정 어린 말을 내뱉었다.
"일단 당장 목재 문제는 해결됐지만.... 몇 달 뒤면 또 비슷한 문제가 생길 겁니다. 목재 말고 다른 자재들도 점점 부족해지고 있어요."
"그래도 당장 작업에 필요한 양은 확보됐잖아. 다른 건 또 구해 오면 되지. 목재 말고 부족한 게 뭐가 있지?"
"당연히 철이죠. 여기저기에 들어가니까요. 일단 전쟁 준비가 시급하니 대부분 병장기를 만드는 데 쓰고 있습니다만... 영지민들의 생활용품이나 건물을 만드는 용도로 떼어 둔 분량은 벌써 바닥을 보이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철광석은 확보하기 어렵겠지?"
"네, 돈이 있어도 구하기 힘든 게 철광석이니까요. 북부에서 유통되는 수량 대부분을 카발디 백작이 통제하고 있다 보니...."
지셀은 몇 번 고개를 끄덕이고는 중얼거렸다.
"그래, 슬슬 다음 단계로 갈 준비를 해야겠네."
"네? 무슨 준비요? 지금도 이것저것 준비하느라 바빠 죽겠는데 뭘 또 준비해요?"
클로드가 기겁하며 묻자 지셀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없으면 구해 와야지. 특히 철은 전쟁에 필수 자원이니까."
"나무야 페르디움에서 베어 왔다지만, 철광석은 어떻게 구해 오시게요? 거기도 철광산은 없잖아요."
"괜찮아, 나한테 다 계획이 있어. 조만간 얘기해 줄게."
"아, 계획이요.... 네, 그러시겠죠."
클로드는 진절머리가 난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지셀에게는 언제나 계획이 있었다.
그 계획이라는 게 남들이 보면 정말 이상하고 말도 안 되는 비상식적인 것이라 문제였다.
'제발 이번에는 목숨을 거는 계획이 아니게 해 주세요. 우리 영주님이 상식적인 사람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클로드는 속으로 여신께 열심히 빌었다.
* * *
영지가 바쁘게 돌아가는 동안, 지셀이 찾던 전생의 수하들이 하나둘씩 도착하기 시작했다.
용병, 병사, 도축업자, 사형 집행인, 사냥꾼.... 직업도 특기도 가지각색이었다.
형편이 안 좋아 험한 일을 하던 이들은 클로드의 고용 제의를 흔쾌히 수락했다.
영주가 좋은 보수와 안정적인 일자리를 보장하는데 안 가는 게 이상했다.
새로 들어온 사람들의 명단을 훑어보던 클로드가 지셀에게 살짝 물었다.
"주신 정보가 전부 다 맞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상당히 들어맞았다더라고요. 어떻게 이 사람들 위치하고 신상 명세를 아신 겁니까? 다들 영주님이 누군지도 전혀 모르던데요."
클로드는 진심으로 궁금했다. 시골에만 처박혀 사는 귀족 도련님이 대체 어떻게 다른 왕국의 도축업자를 알고 있단 말인가.
하지만 클로드가 여러 번 물어도 지셀은 속 시원한 대답을 내놓지 않았다.
"뭐, 어쩌다 보니 알게 된 거야."
전생에 알았다고 솔직히 말해 봐야 어차피 믿지도 않을 테니 지셀은 매번 두리뭉실하게 넘어갔다.
이러니 클로드의 의심은 더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더 이상한 점은 그 사람들이 올 때마다 지셀이 무척이나 반가워했다는 점이다.
마치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친구를 보는 것처럼 말이다.
이번에 들어온 사람들을 맞이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왔구나! 정말 반갑다! 보고 싶었어!"
도착한 사람들은 영주의 과한 환대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좋은 조건에 나름대로 기대감을 품고 온 건 사실이지만, 처음 만나는 영주가 이렇게까지 반가워하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떨떠름한 사람들의 반응을 볼 때마다 지셀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었다.
'어이없어할 거 아는데, 너무 반가워서 참을 수가 없네.'
전생에나 서로 사선을 넘나들며 친해졌지, 지금은 생판 남이다.
하지만 지셀이 언제 남의 시선에 신경 썼던가? 좋은 건 좋은 거라고 합리화하며 반가운 감정을 여과 없이 표현했다.
지셀 옆에서 미친놈 보는 듯 경멸 어린 표정을 짓고 있던 클로드가 말했다.
"이걸로 마지막이군요. 명단에 적어 주신 128명 중에, 여기까지 오겠다고 수락한 사람들은 92명입니다."
"정말 더 올 사람은 없나?"
"네, 아예 못 찾았거나, 찾았어도 안 오겠다고 거부한 사람들은 어쩔 수 없으니까요."
"그래.... 전부 다 못 데려와서 아쉽긴 하네."
"이 정도만 해도 기적입니다. 영주님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이 이 먼 곳까지 온 건 다들 사정이 어려웠기 때문이죠. 도대체 어떻게 이렇게 힘든 사람들만 쏙 골랐습니까?"
클로드는 진심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대부분은 약간의 돈만 줘도 고민 없이 고향을 떠나올 정도였다.
이 사람들을 어떻게 알았는지도 궁금했지만, 어쩌면 이렇게 죄다 형편이 안 좋을 수가 있는지도 신기했다.
지셀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사는 게 쉽지 않으니 다들 그렇게 목숨 걸고 살았던 거지."
"네?"
"그런 게 있다. 더 올 사람 없으면 모두 불러 봐. 한 번 더 봐야겠다."
"알겠습니다."
금세 소집된 사람들을 보고 지셀은 감격에 겨운 표정을 지었다.
일부나마 이렇게 모여 있으니, 마치 전생의 용병단을 보는 것만 같았다.
한 명 한 명 볼 때와는 사뭇 느낌이 달랐다.
이렇게 보고 있자니 가슴 속에서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이 울컥 치밀어올랐다.
'너희들과 다시 함께할 수 있다니....'
용병왕이라 칭송받긴 했지만, 지셀이 거느렸던 용병들 모두가 충성스럽고 의리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오히려 용병들의 특성상 거칠고 지저분한 녀석들이 대다수였다.
그렇기에 명단을 작성할 때도 심혈을 기울였다.
기억이 나는 수하 중에서도 추리고 추려 최종적으로 뽑은 자들.
바로 지셀이 마지막까지 생사를 함께했던, 진짜 '동료'라 부를 수 있는 자들이었다.
용병 주제에 돈보다 의리를 택한 한심한 녀석들.
죽음을 앞에 두고도 도망가지 않았던 화끈한 녀석들.
마지막 전투에서 다 같이 죽어 버리고 말았지만....
이들이 있었기에 자신은 복수를 꿈꿀 수 있었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지셀은 천천히 다가가 그들을 한 명씩 안아 주며 말했다.
"미안하다."
사람들은 당황했다. 저 영주는 처음 왔을 때부터 이상하게 굴더니, 사람들을 다 불러 놓고 또 알 수 없는 말을 하고 있다.
'이 영지.... 괜찮은 건가?'
사람들이 불안해하거나 말거나 지셀은 한 명 한 명 꼭 안아 주며 사과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이들에게 고마운 만큼 미안함도 컸다.
자신을 돕다가 목숨을 잃어서가 아니다. 죽음은 용병으로 사는 이상 언제나 각오해야 하는 일이다.
중요한 건 어떻게 죽느냐다.
'우리는 실패했었다.'
미안한 것은 단 하나. 복수심에 불타 제대로 된 판단을 하지 못하고 조급하게 전쟁을 진행했던 것뿐이다.
대륙을 질타했던 최강의 용병단은 지셀의 조급함에 휘말려 전멸하고 말았다.
'미안하다.'
이들의 용맹과 긍지는 적들의 비웃음거리로 전락하고 지셀의 용병단은 그 어떤 명예로운 흔적도, 이름도 남기지 못했다.
남은 것은 패배자라는 낙인과 조롱뿐.
물론 지금은 일어나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그들을 이끌었던 자로서, 덧없이 스러져간 그 시절의 동료들에게 꼭 사과를 건네고 싶었다.
용병들의 왕으로서 이들에게 건네는 마지막 사과였다.
그리고 이건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다짐이기도 했다.
'두 번의 패배는 없을 테니까.'
그래, 이제 그런 실패는 없다.
이들은 전생보다 더 빠르게 강해질 것이고 그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될 것이다.
자신이 반드시 그렇게 만들 것이다.
지셀은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람들을 보며 픽 웃었다.
잠시 옛 생각에 감정이 북받쳐 올랐지만, 감상에 빠지는 건 여기까지다.
빠르게 마음을 정리한 지셀은 사람들에게 앞으로 그들이 해야 할 일과 얻을 수 있는 혜택 등을 얘기해 주었다.
"자세한 얘기는 미리 다 들었을 것이다. 너희들에게 약속한 대로 높은 보수를 보장하고, 주거지도 마련해 주겠다."
힘들게 살아왔기에 안정적인 일자리를 누구보다 원하는 사람들이었다.
이주민들과 달리 이들은 모두 펜리스의 상비군으로 고용이 되었다.
데려올 때부터 다른 영지보다 훨씬 좋은 대우를 약속한 만큼, 다들 기대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지셀은 대략적인 설명을 끝내고 그들을 담당할 자들을 소개해 주었다.
"총관인 클로드는 먼저 만나 봤으니 알 테고... 이쪽은 길리언이다. 앞으로 너희들의 훈련을 맡을 교관이지."
길리언은 소개해 준 지셀에게 살짝 고개를 숙이고는 앞으로 나와 사람들을 휙 둘러보았다.
'하나같이 피 냄새가 진동을 하는구나.'
그는 긴장감을 감추며 내심 혀를 찼다.
눈앞에 있는 자들은 기존의 용병들과 근본적으로 분위기가 달랐다.
이들은 미친개 소리를 듣는 광견단보다도 거친, 굶주린 짐승에 가까운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피곤해지겠군.'
이런 놈들을 휘어잡고 따르게 하려면 한동안은 무수한 폭력과 기 싸움을 벌여야 할 것이다.
지셀은 연달아 다른 수하들도 소개해 주었다.
"이쪽은 벨린다. 성의 집사장이다. 너희들의 생활과 편의를 책임질 사람이니 불편한 게 있으면 언제든 말을 하도록."
"잘 부탁드려요. 아휴, 다들 한가락 하게 생겼네."
길리언과 달리 벨린다는 사나운 기세를 마주하고도 싱글벙글 웃었다.
그녀로서는 지셀 대신 싸워 주고 힘써 줄 사람들이 많이 늘어났으니 나쁠 게 없었다.
"그리고 이쪽은 카오르. 용병이고, 일단은 영지의 치안을 맡고 있는 친구다."
카오르는 건들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렇게 끝나면 좋았겠지만, 그도 길리언과 비슷한 느낌을 받은 게 문제였다.
평소에도 지랄 같은 성격을 자랑하던 그의 입에서 좋은 소리가 나올 리가 없었다.
"이 동네 미친개가 나다. 사고 치지 말고 알아서 눈 잘 깔고 다녀라. 불만 있으면 언제든지 덤비고. 아주 작살을 내 줄 테니까."
도발적인 발언에 바로 분위기가 싸하게 가라앉았다.
길리언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고 벨린다는 창피하다는 듯이 한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모인 이들도 다들 거칠게 살아오며 쓴맛 신맛 다 본 사람들이다.
영주 앞이라 바로 반발하지는 않았지만, 그들도 기분이 나쁜 것을 숨기지 않고 험악한 기세를 피워 올렸다.
찌릿한 살기가 주변에 감돌자 카오르가 헛웃음을 지었다.
"어처구니가 없네. 당장 해보겠다고? 그래, 처음 만나면 서열 정리를 해야지. 덤벼, 이 새끼들아. 누가 먼저 할래?"
카오르도 살기를 내뿜으며 앞으로 나섰다.
용병들의 세계에서 서열은 오직 힘으로 결정된다. 카오르가 용병인 걸 안 이상 다른 이들도 거칠 게 없었다.
덩치도 좋고 인상도 더러운 몇 명이 앞으로 나서며 지셀에게 물었다.
"오자마자 싸우는 건 좀 민망하긴 한데... 한번 해봐도 되겠습니까?"
"허락만 하시면 저희끼리 순번을 정하겠습니다."
"혹시 이기면 저놈이랑 자리 바꿔 주십니까?"
만만치 않은 반응에 카오르도 사납게 웃었다. 요새 몸이 근질근질했는데 아주 좋은 전개다.
이럴 때는 기선 제압이 중요하다. 몇 놈 늘씬하게 두들겨 패면 다들 알아서 바짝 엎드릴 것이다.
"어이, 대장 영주님. 어차피 교육이 필요하잖습니까. 제가 알아서 확실하게 교육 좀 시키겠습니다. 맡겨 주시죠?"
카오르의 말에 분위기는 더 과열되었다.
가장 먼저 나섰던 남자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며 먼저 입을 열었다.
"오자마자 사람 죽여도 괜찮은 건지 모르겠네."
"너처럼 주제도 모르고 덤비는 애들이 먼저 죽어 나가더라. 너 마나는 쓸 줄 알고 개기는 거지? 약한 놈 괴롭히기 싫은데 말이야."
카오르가 건들거리며 말했다.
마나를 쓸 줄 아는 자는 대부분이 기사다. 그리고 그런 실력이 있었으면 여기에 올 리가 없다.
한 마디로 기선 제압에 들어간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오히려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마나 없으면 싸움질 못 하나? 너 용병이라며? 그럼 마나 없이 '모리아나의 인정'으로 싸우면 되겠네. 아주 코앞에서 갈기갈기 찢어 줄게. 무서우면 지금이라도 도망가라."
"이 새끼가...."
카오르가 인상을 구겼다. 그 이름을 들으니 지셀에게 실컷 얻어터졌던 아픈 기억이 떠올랐던 것이다.
두 사람은 서로 바짝 얼굴을 들이대며 살기를 줄기줄기 내뿜었다.
지셀의 허락만 떨어진다면 당장이라도 검을 뽑아 들 판이었다.
옆에서 보고 있던 길리언은 살기가 뿜어져 나오자 인상을 확 찡그렸다.
"이놈들이 감히 영주님 앞에서...."
아무리 막 나가는 놈들이라지만 영주 앞에서 함부로 살기를 내뿜다니.
지셀이 항상 털털하게 넘어가서 그렇지, 무척이나 무례한 행동들이었다.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었다. 죄다 훈련장으로 끌고 가서 버릇을 고쳐 줘야 한다.
"네놈들 당장 나를 따라...."
길리언이 나서려던 찰나, 가만히 있던 벨린다가 갑자기 발작을 일으켰다.
"으아아아! 이제 도저히 못 참아! 우리가 무슨 산적 패거리야? 왜 보자마자 싸움박질부터 하는데!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야 할 거 아니야! 이 진심으로 형편없는 것들아!"
그녀가 그간 참고 참아 왔던 분노가 불꽃처럼 쏟아졌다.
159화 먼저 때리는 게 낫다니까? (1)
풀풀 흩날리던 살기는 온데간데없어지고 주위에는 어색한 침묵만이 맴돌았다.
벨린다는 새로 온 사람들을 노려보며 말했다.
"당신들 뭐예요? 오자마자 쫓겨나고 싶어요? 지금 우리 영지가 우습게 보여요?"
"아, 아니... 그게 아니고요."
"아니긴 뭐가 아니야! 아주 칼춤이라도 한번 출 판이었잖아! 쫓아내는 게 아니라 그냥 다 감옥에 가둬 줄까?"
벨린다는 더 이상 참지 않기로 했다. 아무리 봐도 이 개판인 영지에는 기강을 잡는 사람이 있어야 했다.
애초에 성의 집사장은 살림만 챙기는 자리가 아니라, 귀족들의 의전부터 사람들의 예법까지 총괄하는 자리였다.
그녀는 그간 쓰지 않았던 권한을 마음껏 휘두르기로 결심했다.
"뭐 해요? 얼른 자리로 돌아가지 않고. 혼나 보고 싶어서 그래요?"
벨린다의 협박에 예비 상비군들은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뒤로 물러섰다.
성의 집사장이면 영주의 최측근이라고 할 만한 위치다. 아직 적응도 못 했는데 벌써 눈 밖에 나서 좋을 건 없었다.
벨린다는 학생을 혼내는 교사처럼 깐깐하게 그들을 노려보며 경고를 날렸다.
"앞으로 영주님 앞에서 예의 없이 굴면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알겠어요? 서로 간에도 최소한의 예의는 지키고 사세요."
"넵! 알겠습니다!"
우렁찬 대답에 카오르가 낄낄거렸다. 벨린다가 자신을 편들어 준 거 같으니 어깨가 한껏 올라간 것이다.
"이것 봐, 다들 그렇게 꼬리 말고 얌전히 구니까 얼마나 보기 좋아. 앞으로도 그렇게...."
말이 끝나기도 전에 벨린다가 그를 휙 돌아보며 외쳤다.
"야! 넌 뭔데 맨날 여기저기 시비를 걸고 다녀? 니가 그렇게 싸움을 잘해? 나랑 먼저 붙어 볼래? 내가 볼 때 너 완전 좆밥이거든?"
"어, 아니, 너, 갑자기, 왜, 말을, 그렇게."
카오르는 순간 당황했다. 그녀와 항상 티격태격하긴 했지만, 그녀가 저 정도로 격하게 화를 내는 건 처음 봤다.
그래서 평소처럼 대거리할 타이밍을 놓쳐 버렸다.
거기다, 벨린다가 집사장이라는 위치를 내세우면 계약 용병인 그로서는 맞대응하기가 어렵다.
당혹감과 억울함에 입만 뻐끔거리는 카오르를 보며, 지셀과 클로드도 눈만 껌뻑거렸다.
평소에 화를 잘 안 내던 사람이 화를 내니까 무섭긴 한데....
'아, 재미있었을 텐데.'
지셀은 내심 아쉬워하며 속으로 혀를 찼다. 이미 머릿속에서는 대진표까지 짜고 있었는데 분위기가 파악 죽어 버렸다.
이번에 찾아온 자들은 대부분 한 성질 하는 놈들이라, 어차피 한 번은 기강을 잡아야 했다.
가만히 내버려 둬도 길리언이 알아서 정리하겠지만, 자기들이 먼저 나서서 하겠다는데 굳이 말릴 필요도 없었다.
벨린다는 입맛을 다시는 지셀을 바라보며 물었다.
"영주님은 표정이 또 왜 그러실까요? 아쉬워하시는 거 같은데요."
"아니? 하나도 아쉽지 않은데? 그냥 뭐, 굳이 막을 필요까지야 있나 싶어서. 서열 정리라는 게...."
"서열 정리는 길리언 아저씨가 훈련할 때 알아서 처리할 텐데요. 제가 그런 것도 모르겠어요?"
"어.... 그렇지. 길리언이 다 알아서 하겠지."
벨린다가 눈을 가늘게 뜨고 지셀을 흘겨보았다.
"설마 이미 자리 깔고 대진표도 짜고 총관이랑 구경하면서 내기도 하고... 그럴 생각은 아니었죠?"
"그럴 리가. 언제나 말하지만 나는 비폭력 평화주의자라고."
"휴우, 우리도 제발 평범하게 살았으면 좋겠네요. 일 바쁘니까 먼저 가 볼게요. 그리고 다들, 조심해요. 내가 지켜보고 있을 거니까."
벨린다는 한숨을 내쉬며 몇 번 고개를 젓다가 이내 자리를 떠 버렸다.
그녀가 떠나자 주위에는 또다시 어색한 침묵만이 맴돌았다.
"크흠."
"크으음."
"큼큼."
다들 괜히 헛기침만 하며 서로의 눈치를 봤다.
벨린다에게 선수를 뺏긴 길리언도 팔짱을 끼고 모른 척하고 있었다.
클로드가 지셀의 귓가에 조용히 속삭였다.
"조금 아쉽군요. 이번에는 한 5년 정도 걸어보려고 했는데 말이죠."
"아, 노예 계약 기간을 늘릴 기회였는데 아쉽네."
"기간이 줄어들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걸 잘못 말씀하신 거죠? 어쨌든 집사장이 저렇게 화내는 건 처음 보는 거 같네요. 원래 저렇게 무서웠나요?"
"아, 옛날부터 화나면 무섭긴 했지. 저게 끝이 아니야. 저기서 더 열 받으면 칼 나와. 그다음은 독이고."
"어휴, 조심해야겠네요."
"선만 안 넘으면 돼."
클로드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의아한 점을 깨닫고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선만 안 넘으면 된다면서, 영주님은 다음 단계가 칼하고 독인 걸 어떻게 아십니까?"
"그러게, 어떻게 알게 됐을까."
지셀은 아련한 표정을 지으며 옛 추억을 더듬다가 번뜩 표정을 바꾸었다.
"그나저나, 슬슬 다음 일을 시작해야겠다."
"네? 다음 일이라뇨? 지금도 일 엄청 많아서 다들 죽기 직전인데 또 무슨 일이요!"
클로드가 기겁하며 반발했다. 여기서 일을 더 벌이면 진짜 다 죽는다.
그래도 지셀은 상냥하게 웃으며 답했다.
"걱정하지 마. 이번 일은 네가 손댈 부분이 거의 없으니까."
"정말이죠? 여기서 일 더 안 주는 겁니다?"
"아, 진짜 의심도 더럽게 많네. 걱정하지 말라니까. 내가 너한테 무리하게 일 시킨 적이 있어? 없잖아?"
'와, 저 뻔뻔한 거 보소.'
클로드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속마음을 표정에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지셀을 바라보았다.
이게 무리하는 게 아니면 뭐가 무리하는 걸까?
그가 과로사하고 나서야 '무리였구나, 미안하다' 할 것만 같았다.
클로드는 더 따지려다가 일단은 참았다.
괜히 심기를 건드렸다가 일을 더 얹으면 곤란하니까.
"예, 뭐 그렇다고 치죠. 그런데 다음은 무슨 일인데요?"
"철광석 구할 준비. 그거 부족하다며."
"...어떻게 구하시려고요?"
"다 계획이 있지. 알려 줄 테니까 회의 준비나 해."
자신만만하게 대답하는 지셀을 보고 클로드는 오히려 더 불안해졌다.
* * *
뭐든 급하게 준비하다 보면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
펜리스처럼 아무것도 없는 영지에서는 자원 수급부터가 큰 문제였다.
특히나 철광석은 돈이 있어도 대량으로 구하기가 무척이나 힘든 자원이다 보니 더더욱 문젯거리였다.
하지만 지셀은 걱정하지 않았다. 아주 오래전부터 철광석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셀은 가신들이 모두 모이자 다짜고짜 결론부터 말했다.
"카발디 백작령을 친다."
오랜만에 나온 미친 소리에 사람들은 멀뚱멀뚱 눈만 깜빡거렸다.
분명 부족한 자원 수급에 관한 회의라고 들었는데 갑자기 엉뚱한 얘기가 나오니 그럴 만도 했다.
카발디 백작은 대표적인 공작파의 일원으로, 그의 영지는 북부 최대의 철광석 생산지로 꼽히곤 했다. 그리고 백작은 데스몬드에 열심히 철광석을 공급해 주는 중이기도 했다.
클로드는 고개를 몇 번 좌우로 꺾으며 귀를 후비고는 다시 물었다.
"이거, 철광석을 어떻게 수급할지에 관한 회의 아니었나요?"
"맞아. 그러니까 카발디 백작령을 친다고."
이놈의 영주는 또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클로드는 심호흡을 한번 하며 화를 가라앉혔다.
지금 영지를 개발하는 것과 동시에 데스몬드 백작의 공격을 막기 위한 준비도 하고 있다.
막고 버티는 데만도 목숨을 걸어야 하는 판에 먼저 전쟁을 일으키겠다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지.
애초에 카발디 백작령은 함부로 공격할 수도 없는 곳이고, 설사 공격한다 해도 이길 수도 없었다.
"영주님? 결론이 너무 갑작스러운데 이유 좀 설명해 주시면 안 될까요?"
지셀은 자기 말을 이해한 사람이 없다는 걸 깨닫고는 설명을 시작했다.
어쨌든 모두 같은 목표를 향해 한마음이 되어 움직여야 한다. 말 몇 마디 더 하는 수고 정도는 얼마든지 해 줄 수 있었다.
"카발디 영지에서 지금 철광석을 데스몬드에만 공급하고 있잖아. 우리한테는 거의 팔지도 않고."
"그렇죠.... 설마, 데스몬드 편을 든 게 아니꼬워서 거길 친다는 말인가요?"
"아니꼬운 걸로 전쟁을 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지셀이 한심해하는 눈빛으로 클로드를 바라보았다.
'당신 수준에 맞춰서 얘기한 거잖아!'
클로드는 억울해하면서도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우리가 거기를 뺏으면 어떻게 되겠냐. 데스몬드 쪽은 철광석의 수입이 끊기고 우리는 철광석이 엄청나게 많아지겠지? 적의 성장을 늦추고 우리가 빠르게 성장할 수 있는 훌륭한 전략인 거지."
"그러니까.... 결국은 그냥 우리한테 부족한 철광석을 뺏으려고 공격한다는 말 아닙니까."
"뭐, 크게 보면 그렇긴 하지."
'당신은 강도입니까?'
클로드는 어질어질해지는 머리를 붙잡고 휘청거리다 겨우 바로 섰다.
철광석이 없으니까 철광석 많은 곳을 친다니, 단순하면서도 굉장한 논리였다.
적의 성장을 늦추고 아군의 성장을 빠르게 할 수 있다면 당연히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렇게 한답시고 적도 아닌 제삼자를 때리는 건 미친놈이나 떠올릴 법한 발상이다.
"영주님, 제발 좀 상식적으로 놀면 안 될까요? 카발디 백작은 지금 우리와 아무런 관계가 없잖아요. 그런 사람을 공격할 순 없습니다."
"당장 눈앞에 있는 위협은 아니지. 하지만 결국 카발디 백작도 우리 적이야."
"왜요? 그가 공작가 파벌에 속한 사람이라서요? 정말 공작가가 데스몬드의 뒤에서 우리를 공격한 거라는 증거는 없잖아요."
"뒤에 있으니까 믿어. 카발디 백작은 데스몬드 백작과 함께 우리를 칠 거야. 그러니 미리 적도 하나 줄여 놓고 겸사겸사 철광석도 먹자는 거지."
미래를 아는 지셀에게는 당연한 일이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황당한 얘기일 뿐이었다.
클로드는 다리를 덜덜 떨며 한 자리에서 몇 번 왔다 갔다 하더니 말했다.
"아니, 생각을 좀 해 보자고요. 영주님하고 싸운 적이 있기는커녕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 있어요. 근데 걔가 미래에 영주님을 때릴 거니까, 맞기 전에 먼저 패겠다고요? 이게 말이 됩니까!"
"그렇게 말하니까 좀 이상해 보이긴 하는데, 사실인 걸 어떡하냐."
"영주님 혹시 인성에 문제 있으세요?"
클로드가 참지 못하고 지셀의 인성을 언급했다. 그러자 벨린다가 버럭 외쳤다.
"왜 우리 도련님 기를 죽이고 그래요! 우리 도련님이 얼마나 심성 곱고 착한 사람인데!"
"아니, 들어 봐! 지금 이상한 거 정말 모르겠어?"
"우리 도련님은 원래 마음에 안 들면 일단 치워 놓고 생각하는 사람이었어요!"
"아까는 심성 곱고 착한 사람이라며! 아니, 원래 그런 성격이었으면 가르쳐서 바꿔 놨어야지! 도대체 어떻게 교육을 한 거야?"
"남의 교육 방식에 참견하는 건 대단히 큰 무례라는 거 몰라요?"
"모를래, 모르고 싶어."
둘의 언성이 높아지자 지셀이 그들을 말리며 말했다.
"솔직히 마음에 안 들어서 패는 건 아니...라고는 못 하겠지만, 꼭 그 때문만은 아니야. 클로드, 정보를 보고도 정말 못 믿겠어? 카발디 백작이 지금 엄청난 양의 철광석을 데스몬드에 공급하고 있잖아? 최소한 둘은 확실하게 한 패라는 뜻이지."
클로드도 그것 때문에 데스몬드의 뒤에 공작가가 있는 게 아닌지 의심하고 있긴 했다.
둘이 같은 편이 아니라면 그 정도로 밀어줄 리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영지전을 거는 건 그런 심증만으로 시도하기에는 너무나도 위험한 일이었다.
클로드는 아이를 달래는 듯한 어조로 다시 말했다.
"영주님, 무슨 뜻으로 하시는 말씀인지는 압니다. 그런데.... 카발디 백작은 공작가의 파벌에 속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먼저 카발디 백작을 치면 데스몬드 백작과 상관없이 정말 확실하게 공작가의 적이 되는 거라고요! 아직 친왕파와 공작파도 대놓고 칼부림을 하진 않습니다!"
"이미 공작가하고 우리는 적이야. 우리 거기에 관해서는 합의한 거 아니었어?"
"아직은 겉으로 티는 안 나잖아요! 대놓고 공격할 빌미를 주지는 말자니까요? 공작가에서 직접 나서면 어떻게 수습하시려고요!"
지셀은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어차피 걔들하고도 싸워야 하는데 뭐 하러 그런 걸 신경 써? 그런 건 일단 그때 가서 고민해도 돼."
"...."
"자, 내가 아주 쉽게 설명해 줄게. 클로드 네가 싸움을 한다고 쳐."
"저는 품격 있는 학자라서 싸움 같은 거 안 합니다."
"어쨌든 한다고 쳐. 네가 먼저 맞는 거랑 먼저 때리는 거랑 뭐가 더 유리함?"
"그야.... 먼저 때리는 게 유리하겠죠.... 선빵 필승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 그러니까 지금도 카발디한테 먼저 맞는 것보다는 우리가 먼저 때리는 게 더 낫지 않겠어? 아무리 생각해도 이게 낫다니까?"
'드디어 완전히 미쳤구나!'
전쟁을 애들 동네 싸움처럼 취급하는 무지막지한 말에, 클로드가 얼이 빠진 표정을 지어 버렸다.
그가 욕을 할까 말까 입을 달싹이던 참에 지셀이 말을 이었다.
"앞으로 전쟁을 계속하려면 철광석을 안정적으로 수급해야 한다. 무조건 카발디 백작령을 차지해야 해. 데스몬드 백작은 설마 우리가 먼저 그곳을 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할 거야. 준비가 안 돼 있을 거란 얘기지."
데스몬드 백작은 현재 아멜리아의 반란에 가장 많은 신경을 쓰고 있다. 그다음 순위는 얼마 남지 않은 북부 영주들을 회유하고 북부를 장악하는 일이었다.
펜리스 따위는 언제든 기회만 되면 치워 버릴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지셀이 먼저 전쟁을 일으킬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을 터였다.
그렇기에 지셀은 현재 상황과 다가올 기회를 적극적으로 이용할 생각이었다.
'아주 잠깐의 틈일 뿐이다. 이렇게 좋은 기회를 절대 놓쳐서는 안 돼. 지금 철광석을 확보하지 못하면 장기전이 힘들어진다.'
아멜리아 덕분에 시간을 버는 것도 얼마 남지 않았다.
레이폴드 백작령을 손아귀에 넣는 순간, 데스몬드 백작은 바로 목표를 펜리스 영지로 바꿀 테니까.
하지만 이건 심증으로도 설명할 방법이 없어서 그냥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부족해지는 설득력은 그냥 우기는 걸로 때웠다.
클로드는 힘 빠진 표정으로 말했다.
"영주님, 데스몬드 백작 하나 상대하기에도 무척 위험한 상황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위험을 더 키울 필요가 있습니까? 자칫 잘못하다가는 정말 다 죽을 겁니다."
"알고 있어. 한 번만 실수해도 다 죽겠지. 우리만이 아니라 아버지 영지의 사람들까지 전부 말이야."
"그런데도 꼭 카발디를 치셔야겠습니까?"
처연하게까지 들리는 클로드의 목소리에 벨린다와 길리언도 조심스럽게 말을 얹었다.
"도련님, 총관이 평소에 좀 이상하긴 하지만 지금은 맞는 말 하는 거 같거든요? 그냥 안 하시면 안 될까요?"
"영주님, 총관의 말이 맞습니다. 지금 상황에서 공작가까지 대놓고 적으로 돌리는 건 너무 위험합니다."
가신들도 한마음 한뜻이 되어 말했다.
"일단은 데스몬드를 막는 데만 주력하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조금 늦어지더라도 철광석은 다른 지역에서 구해 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모두가 반대함에도 지셀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래도 해야 해. 지금부터 준비하지 않으면 기회를 놓치게 된다."
클로드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수성 준비와 영지 개발만으로도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
그런데 그걸로도 모자라 선제공격을 하겠다니.
지금 펜리스 영지는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영주님의 뜻은 잘 알겠습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다른 문제가 있습니다."
"뭔데?"
"패러 가는 건 그렇다 쳐도, 정말 이길 수 있을까요? 전력의 차이가 너무 큰데요?"
카발디 백작령도 북부의 영지답게 부족한 부분이 많았지만, 그걸 다 돈으로 메꿀 수 있을 정도로 부유했다. 거기다 특별한 게 한 가지 더 있었다.
"다른 건 몰라도 병사들의 무장은 카발디가 북부에서 최고 수준일 겁니다."
철광석이 나는 지역에서 제련 기술이 발달하는 건 당연한 이치다.
그 덕분에 카발디 백작령은 병사들에게까지 질 좋은 장비를 지급하기로 유명했다.
그런 곳을 지금의 전력으로 어떻게 이긴단 말인가?
클로드의 물음에 지셀이 황당하다는 듯 말했다.
"나 못 믿어?"
사람들은 대답하지 않고 살짝 눈을 피했다.
160화 먼저 때리는 게 낫다니까? (2)
"이것 봐라? 아무튼 요즘 사람들은 믿음이 없어, 믿음이."
떨떠름한 주변의 반응에 지셀은 혀를 찬 뒤 말을 이었다.
"난 내가 지휘한 전쟁에서 단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다."
상당히 오만한 말이었다. 어떠한 명장도 그런 말을 감히 꺼내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지셀은 한 치의 부끄러움도 없었다. 용병왕의 칭호를 받은 뒤 정말 단 한 번도 전쟁에서 패배한 적이 없었으니까.
마지막 전쟁에서 목숨을 잃긴 했지만, 그건 과거로 돌아왔으니 무효다.
자신만만한 지셀의 말에 벨린다가 손으로 입을 가리고 풋 웃었다.
'아유, 우리 도련님 귀여워라. 전쟁 딱 한 번 해 보고서는.... 뭐, 이겼으니 틀린 말은 아니네.'
다른 사람들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 1전 1승 0패니까 어쨌든 거짓말은 아니다.
아니꼽긴 하지만, 어쨌든 지셀의 공식적인 전쟁 승률은 100%였다.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눈치챈 지셀은 입맛을 다셨다.
'아, 이거 진짠데. 나 백전백승인데 믿지를 않네.'
클로드는 잠시 애잔한 눈으로 지셀을 바라보다 말했다.
"영주님이 싸움은 좀 하신다는 얘기는 몇 번 들었습니다. 그런데 혼자 쳐들어가실 건 아니지 않습니까? 이주민 중에서 전투가 가능한 사람들을 죄다 뽑아도 천 명이 넘지 않을 겁니다."
말이야 수천 명이 들어왔다고 하지만, 노약자들을 제외한다면 실제로 싸울 수 있는 인원은 얼마 되지 않는다.
클로드가 말한 천 명도 예상 최대치일 뿐이었다.
"그들을 다 병사로 삼는다 해도, 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한 상태로는 오합지졸일 뿐입니다. 그런 병력으로 어떻게 전쟁을 합니까?"
"확실히, 아무리 내가 강해도 그런 병력으로는 조금 힘들긴 하겠지. 못 이길 건 없지만.... 굳이 희생을 많이 낼 필요도 없으니까."
"예, 제 말이 그 말입니다. 그러니까 전쟁은 다음 기회에...."
"아니지. 부족한 병력은 내가 알아서 구해 올게. 그리고 지금 우리한테 있는 전력을 수천 명과 맞먹을 정도로 강하게 키우면 되잖아?"
말도 안 되는 소리에 클로드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게 가능하면 다른 영주들이 왜 병력을 늘리는 데 혈안이 되어 있겠는가.
특히나 지금처럼 시간이 촉박한 상황에서는, 아무리 훈련을 열심히 해도 강해지는 데 한계가 있었다.
그가 반박하려고 입을 열기 직전, 지셀의 심드렁한 목소리가 먼저 울려 퍼졌다.
"펜리스 기사단을 창설한다."
모여 있던 가신들은 순간 자기가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의심하며 눈만 껌뻑거렸다.
기사가 한 명도 없는데 기사단을 창설한다니, 그간 들은 개소리 중에서도 가장 참신한 개소리였다.
기사란 무엇인가?
전쟁의 판도를 뒤바꿀 수 있는 일종의 전투 병기였다.
각 진영에 기사가 얼마나 있고 얼마나 수준이 높냐에 따라 전쟁의 승패가 갈리곤 했다.
그런 기사들이 최소 수십은 모여야 기사단이라는 이름을 달 수 있었다.
그렇기에 '기사단'은 영지의 저력을 과시하는 수단이자 무력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가 되었다.
그런데 전쟁 준비를 하자던 지셀이 갑자기 기사단이라는 말을 내뱉으니, 다들 어안이 벙벙해질 만도 했다.
'아니, 개나 소나 모아 놓고 이름만 붙인다고 기사단이 되는 줄 아는 건가?'
'최소한 마나는 다룰 줄 알아야 기사로 인정받는데, 우리 영지에 그런 사람이 몇이나 있다고. 영주님이 그걸 모를 리가 없을 텐데?'
기사단은 보통 백작령 이상 되는 대영지에서나 운영하고, 대부분의 영지에는 기사단이 존재하지 않는다.
보통은 그저 소수의 기사들만이 영주를 보필할 뿐이었다. 남작령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기사는 무척 고급 전력이기에 돈이 많다고 쉽게 구할 수도 없을뿐더러, 그 전력을 유지하는 비용도 만만치가 않기 때문이다.
당연히 펜리스에도 정식으로 기사 서임을 받은 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클로드는 황당한 기색을 감추지 않고 말했다.
"기사가 없는데 기사단을 어떻게 만들어요?"
"그러니까 이제부터 만들어야지. 지금 있는 용병들과 이번에 합류한 자들을 전부 기사로 만든다. 물론 용병들은 원하는 자들만 새로 계약하고, 기사 서임도 시켜야겠지."
"기사를... 만든다고요?"
"그래, 두 달이면 충분히 만들 수 있어."
'기사가 무슨 제빵소에서 찍어 내는 빵도 아니고....'
마나를 제대로 쓸 줄도 모르는 이들을 어떻게 두 달 안에 기사로 키운단 말인가?
"아니, 최하급 기사라도 최소한 마나를 다뤄야 기사로 인정받는 건데.... 어? 설마?"
클로드의 머릿속에, 예전에 엄청난 비용을 들여 만들었던 마나 집속진이 떠올랐다.
당시엔 괴물 밀알을 만드는 데 쓰긴 했지만, 그건 원래 기사들을 수련시키는 데 쓰는 물건이었다.
지셀은 이제야 깨달았냐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마나야 강제로 익히게 하면 돼. 높은 수준으로 올라가는 게 어려운 거지, 최하급 기사 정도면 빨리 키울 수 있거든. 내가 직접 마나 연공법도 가르쳐 줄 생각이다."
"안 돼요!"
그때, 벨린다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지셀의 말을 끊었다.
지셀은 깜짝 놀라 되물었다.
"어우, 깜짝이야. 왜?"
"페르디움 가문의 마나 연공법을 가르치려는 거잖아요!"
그녀가 알기로 지셀이 익힌 마나 연공법은 페르디움 가문의 것밖에 없다.
가문의 연공법은 함부로 유출하면 안 되는 것이 이 시대의 상식.
하지만 지셀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그럴 생각인데, 그게 뭐 어때서? 기사를 만들려면 당연히 마나 연공법이 필요하잖아."
"그건 가문의 비전이잖아요! 왜 비전이라고 하겠어요!"
마나 연공법은 가문의 일원이거나, 가주의 허락을 받은 자가 아니면 누구도 배울 수도 없다. 다른 사람에게 유출할 수도 없다.
마나 연공법이야말로 가문과 영지의 무력과 권력을 유지하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셀은 쓸데없는 명예니, 권력이니 하는 것에 관심이 없었다.
위기가 코앞인데 그런 걸 핑계로 아끼다가 다 죽으면 말짱 헛일이다.
"가문의 비전이라도 필요하면 다 써먹어야지. 당장 강력한 전력을 만들어야 하잖아?"
"그래도 그 연공법은 페르디움 가문의 것이라고요. 함부로 유출하면 안 되는 건 잘 아시잖아요?"
"어차피 방계 쪽으로도, 아니면 개인적으로 들인 제자를 통해서도 조금씩 흘러나가고 있잖아. 뭘 새삼.... 애초에 요즘 기사들이 다 귀족인 것도 아니고. 걔들도 어느 가문 연공법 훔쳐 배운 거 아니겠어?"
"그, 그거랑은 다르죠! 그건 소수라고요!"
마탑에서 하듯이 스승과 제자 사이에서 연공법 전수가 이루어질 때도 있고, 재능있는 자라면 평민에게도 충성 서약과 비밀 서약을 받고 알려 주기도 한다.
철저한 비밀 엄수를 조건으로 걸어도 시간이 지나면 조금씩 퍼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셀처럼 대놓고 뿌리는 건 전혀 다른 얘기였다.
"도대체 가문의 비전을 동시에 수백 명에게 알려 주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여기."
"...."
너무나도 당당한 지셀의 태도에 말문이 막혀 벨린다는 허탈한 한숨만 흘렸다.
'어렸을 때는 참 쪼잔해서 걱정이었는데, 통이 커져도 너무 커진 거 아니야?'
당황하던 벨린다의 눈에 한 사람이 들어왔다.
바로 있는 듯 없는 듯 언제나 지셀의 뒤를 지키는 퍼거스였다.
퍼거스의 공식 직함은 무려 영주의 호위 기사였다.
물론 실제로 호위 업무는 다른 사람이 맡고 있지만, 그래도 퍼거스는 영지의 어른으로 대접받고 있었다.
애초에 그에게 함부로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영주가 매일 직접 마나까지 돌려 주며 건강을 챙길 정도로 아끼는 사람에게 누가 시비를 걸겠는가.
지금도 퍼거스는 대전에서 지셀의 옆에 앉아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벨린다는 잽싸게 퍼거스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그도 페르디움을 오래 섬겨 왔던 사람이니 분명 반대할 것이다.
"영감님! 도련님 좀 말려 봐요! 가문의 연공법을 막 뿌린다잖아요!"
하지만 퍼거스는 벨린다의 기대를 무참히 배신했다.
"허허, 우리 도련님 하고 싶은 거 다 하세요."
퍼거스는 지셀이 뭘 하든 그저 흐뭇했다.
지셀이 영주가 되어 영지를 운영하는 것도 예쁘고, 영지를 위해 이렇게 사람들을 모아서 회의를 하는 것도 예뻐 보였다.
그 모습을 본 벨린다는 확실히 깨달았다.
'글렀어! 저건 늦둥이 손자 보는 할아버지의 미소잖아! 도련님이 수염을 죄다 뽑아도 예쁘다고 할 단계에 이르렀어!'
물론 전쟁을 벌이는 것만큼은 퍼거스도 반대했다.
"하지만 도련님, 전쟁은 조금 더 신중하게 생각하셔야 합니다. 위험한 일입니다."
지셀은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며 고개만 대충 끄덕였다.
그러자 퍼거스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어렸을 때부터 봤기에 지셀이 저럴 때는 말을 죽어도 안 듣는 걸 알기 때문이다.
퍼거스의 지원을 받고 지셀이 더욱 의기양양하게 어깨를 폈다.
벨린다는 다른 논리로 공격을 시도했다.
"비밀 서약을 받고 가르친다고 쳐요. 그걸 익히는 게 쉽진 않잖아요? 적어도 몇 년은 수련해야 하는데, 어떻게 두 달 만에 마나를 익히고 사용해요?"
정론이었다. 안타깝게도 마나 연공법은 알려준다고 쉽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마나는 누구에게나 영향을 미치고 누구나 극소량이라도 지니고 있지만, 그걸 느끼고 제어하는 건 재능과 노력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셀은 그것도 문제없다는 식으로 말했다.
"괜찮아. 내가 개량하면 돼. 바네사처럼 강제로 익히게 하면 되니까."
"마나 연공법을 강제로... 익히게 한다고요?"
"그래. 아버지와 페르디움의 기사들도 내가 개량한 것을 익히게 될 거야. 페르디움 가문의 마나 연공법은 이제 버린다. 그거 생각보다 별로거든. 가문의 선조들한테는 좀 미안하지만."
벨린다는 자기도 모르게 이마를 짚었다.
'아, 미쳐 버리겠네. 그게 말이 되냐고!'
지셀의 뜻은 이해했다. 법도며 명예며 따져 봐야 죽으면 소용없다는 것도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이건 가능성의 문제였다. 두 달 안에 수백 명이 기사급으로 마나를 다루게 한다고?
고금을 막론하고 그런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거기다 오랜 시간 북부의 최전방을 지켜 온 가문의 마나 연공법을 비하하는 것도 모자라 개량까지 하겠단다.
그냥 개량하는 것도 아니고, 짝퉁을 만든 뒤에 원본을 없애 버리겠다니!
"도련님이 마나 연공법을 다 뜯어고치겠다고요? 잘못하면 큰일 나요. 그건 엄청난 천재나 할 수 있는 일이라고요!"
왜 유명한 마나 연공법의 창시자가 전부 희대의 천재나 영웅들이겠는가.
마나 연공법은 최소 수십, 수백 년을 내려오며 완성된 수련법이기에, 그 정도 천재가 아니고서야 누구도 함부로 건드릴 수 없기 때문이다.
자칫 잘못된 연공법을 익히면 폐인이 되거나 죽을 수도 있다.
"왜? 나 어렸을 때는 나더러 막 천재라고 몇 번이나 칭찬했었잖아?"
"그건 도련님이...!"
벨린다는 말을 하려다가 퍼뜩 멈췄다. 사람들 앞에서 이 얘기를 할 수는 없었다.
'그건 도련님이 처음으로 바지에 오줌을 안 쌌을 때 자신감을 얻으라고 과장한 거란 말이에요!'
지셀은 걱정하는 벨린다를 보고 어깨를 으쓱했다.
'걱정할 필요가 전혀 없는데 말이지.'
전생에 그는 대륙에서 가장 강하다는 일곱 명 중의 하나였다.
인간을 초월하는 경지에 올랐었고, 수도 없이 마나 연공법을 뜯어고쳐 수하들에게 던져 줬었다.
"걱정하지 마. 바네사가 마나를 느낄 때도 내가 도와줬던 거 알잖아. 내가 잘 개량할 수 있다니까? 나 못 믿어?"
확신 어린 어조에 벨린다는 순간 설득당할 뻔했다.
'하긴, 도련님의 마나 연공법은.... 비슷한 면이 있긴 하지만, 분명 페르디움 가문의 것과는 달랐지.'
믿어야 하나 고민하던 벨린다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마구 저었다.
원래 나쁜 남자들이 제일 많이 하는 말이 '나 못 믿어?'였으니까.
"그거랑 이거는 완전히 다르거든요?"
바네사는 마나만 없었을 뿐이지 마탑에서 몇 년은 수련한 천재였다.
마나에 관해서는 쥐뿔도 모르는 용병들을 가르치는 것과는 상황이 전혀 달랐다.
'도련님이 마나 운용 능력이 뛰어나고 특별한 재주가 있는 건 알겠지만.... 이번 건 진짜 말이 안 돼. 지금은 자기 능력에 취한 거야. 하는 일마다 결과가 좋으니 미쳐 버린 거라고!'
세상에 기사가 무슨 빵도 아니고 두 달 만에 찍어 내겠다니!
그게 가능했으면 이미 페르디움은 지셀이 태어나기도 전에 왕국을 차지했을 것이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클로드가 냉큼 끼어들었다.
"영주님, 생각해 보세요. 우리는 지금 엄청나게 급한 상황에 부닥쳤고, 할 일이 많습니다. 애초에 데스몬드 백작과의 전쟁 얘기도 영주님이 먼저 꺼내셨잖아요. 그렇죠?"
"그런데?"
"전쟁 준비도 하고 영지 개발도 하려면 돈이 엄청나게 들겠죠?"
"어마어마하게 들겠지. 번 돈부터 앞으로 벌 돈까지 다 써도 모자랄걸?"
"그런데 그 비싼 룬스톤을 안 팔고 마나 집속진에 쓰는 게 말이 됩니까! 두 달 만에 기사들을 뽑아내지 못하면 돈도 시간도 날리는 거라고요!"
클로드는 필사적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그간 영주가 보인 성과도 인정하고, 출처를 알 수 없는 신비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까지는 인정한다.
그러니 이번 한 번만 더 믿어 봐도 되지 않겠냐고?
'웃기는 소리! 한 번만 실수해도 다 죽는다!'
자기 목숨이 걸린 일인데, 비상식적인 제안에 그렇게 쉽게 동의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지금부터 돈 한 푼도 허투루 쓰지 않고 준비를 잘해도 전쟁에서 버틸 수 있을까 말까 한 상황이다.
상대는 북부의 최강 자리를 놓고 다투는 데스몬드 백작이었으니까.
두 달의 기간과 어마어마한 자금을 날릴지도 모르는 지셀의 계획에는 절대 찬성할 수 없었다.
"만약에 실패하면 더 위험해지는 거라고요! 제발 상식적으로 준비하면 안 될까요?"
클로드의 외침에 동의하듯 다른 사람들도 간절한 눈빛으로 지셀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지셀은 심드렁하게 우길 뿐이었다.
"된다니까? 나한테는 그게 상식이라니까? 내가 언제 헛소리하는 거 봤어? 나 그런 사람 아니야."
순간 모두의 시선이 지셀에게 집중되며 주위에 적막이 흘렀다.
이 영지에서 헛소리를 제일 잘하는 사람을 꼽으라면 단연 영주가 최고일 것이다.
다행히 결과가 좋게 나오긴 했지만, 어쨌든 헛소리라는 건 변하지 않는다.
사람들의 시선을 느낀 지셀이 다시 한 마디 중얼거렸다.
"어이가 없네."
161화 먼저 때리는 게 낫다니까?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