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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화. 초감각(1)

타로스는 며칠 동안 랭턴 공작의 영지에 머물면서 앞으로 벌어질 상황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했다.

그중 가장 심도 있게 다룬 부분이 바로 전쟁과 그 이후에 벌어질 일들이었다.

우선 전쟁은 승리를 가정하고 이야기했다.

랭턴 공작을 비롯한 그의 가신들이나 기사단의 수뇌부들은 결코 율리우스 왕국과의 전쟁에서 패하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이는 오만이 아닌 통계로 본 확신에 가까운 사실이었다.

율리우스 왕국이 이렇게 성장한 것은 그들이 잘해서가 아니라 오직 황제의 태업 때문이었다.

황제가 태업을 끝냈으니 율리우스 왕국이 계속 성장하는 꼴을 볼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다만, 전쟁 이후가 문제다.

전쟁이 끝나고 제국 영토의 50%에 이르는 광대한 영역을 얻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그때부터는 피 튀기는 정치적 수가 오갈 것이며, 영지전이 벌어지고 나라가 개판이 될 상황이 올 수도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 시점이 오면 필요한 것이 바로 친위 쿠데타다.

황권을 하나로 모으기 위한 한 수.

랭턴 공작은 적극적인 지지를 표명하였고, 이를 위한 문서까지 황제에게 전해 주었다. 이른바 완전한 충성이다.

돌아가는 순간까지도 랭턴 공작은 황제에 대한 충심을 표했다.

"폐하! 부디 강녕하시기 바라옵니다!"

"내년에 보지."

"예! 그때까지 강군 육성에 힘쓰고 있겠사옵니다!"

랭턴은 영지군과 중앙군의 차이가 크다는 사실을 이번 알키서스 산맥 토벌로 깨달았다.

여기에 더하여 마탑까지 얻은 황제이기에 결코 자신이 뛰어넘을 수가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 같았다.

황제의 모습이 사라지는 그 순간까지 그는 무릎을 꿇은 채로 머리를 조아렸다.

타로스는 흡족하게 웃었다.

드래곤의 사체는 분해되어 무구로 탈바꿈하고 있었고, 드래곤 레어에서 발견된 여러 가지 산물로 국고가 채워졌으며, 마법사들의 충성까지 더욱 이끌어 낼 수 있었으니까.

황제의 어가는 곧 란투스 자작령으로 이동하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병력 전체가 란투스 자작령에 들어간다는 의미는 아니다.

란투스 자작의 족속들은 황가에 충성하지 않았으니 병력은 스쳐 갈 뿐이다. 그리고 타로스는 따로 움직일 계획이었다.

타로스가 란투스 자작령에 공식적인 방문을 하지 않으려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초감각.'

어가 안에서 타로스는 시종일관 그 생각에 매몰되어 있었다.

황권의 강화도 중요하였지만, 제국의 가치관을 생각하면 육체적인 강함 역시 배제할 수 없었다.

원칙상 황위는 제국에서 가장 강한 자에게 돌아가기 마련이었으니까.

결국 개인의 힘이 강해지는 것도 황권 강화를 위한 길이라 말할 수 있었다.

온갖 괴물 같은 실력자들이 득실거리는 제국에서 약한 모습을 보인다면 바로 뜯어 먹히고 만다. 황가는 바로 무너지는 것이다.

그러니 반드시 초감각이 필요했다.

공식적으로 란투스 자작령에 들어가 신화를 얻기 위하여 움직이면 이를 수상하게 여긴 란투스 자작이 따로 움직일 가능성이 있었다.

물론 란투스 자작이 의심을 품고 미행하여 신화를 차지할 가능성은 지극히 낮다. 그저 만전을 기할 뿐이다.

똑똑.

"들라."

"폐하, 신 레인 자작이옵니다."

"무슨 일인가?"

타로스는 무심한 눈으로 정보부 수장을 바라봤다.

아무리 정보부가 다운그레이드되었다고 해도 여전히 제국 최고의 정보 단체다. 다만, 그 눈이 제국 전체에 미치지 못할 뿐이다.

제도 브론티아와 그 주변 영지들, 그리고 황제의 어가를 호종하고 수상한 점을 찾아내는 것은 레인 자작보다 뛰어난 자가 없었다.

"모험가 무리와 용병 무리가 어가를 뒤따르고 있사옵니다. 이를 어찌 처리해야 할지 명령을 받고자 합니다."

"모험가와 용병의 무리라. 그들이 왜 쫓아오고 있다고 보나?"

"폐하께서는 이번 알키서스 산맥 전투로 많은 용병단을 고용했었사옵니다. 보수도 넉넉하고 공을 세운 자들을 후대하였으니, 이를 바라고 쫓아오는 것 같습니다."

"그런가."

좋지 않다.

용병단이나 모험가들이나 눈치 하나는 귀신같은 작자들이었다.

보통 그들은 덜떨어진 집단으로 표현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타로스가 이곳에서 직접 보니 상당한 능력을 갖춘 전문가들이었다.

수색과 전투, 추격 등에 능하였으며 위험한 일에도 거리낌 없이 뛰어들었다.

용병단은 그나마 전투에 특화되어 있었지만, 모험가들은 트레저 헌터나 현상금 사냥 등을 겸하여 오히려 뒤따르면 더 위험하다. 타로스의 뒤를 쫓다가 신화를 얻게 되면 상당히 난감해진다.

"그렇다고 그들을 쫓아내는 것은 무리지. 그냥 두어라."

"황명을 받드옵니다."

타로스는 그들을 그냥 내버려 두기로 했다. 어차피 따로 움직이기로 결정했으니까.

지금은 혹시나 하는 기대로 타로스를 따르는 것이었지만, 강제로 떨어뜨려 놓는다면 더 큰 기대를 품을 수 있었다.

제국 곳곳의 귀족들이 정보부를 가동하여 황제에게 시선을 집중하고 있었고, 용병단이나 모험가들까지 황제의 행차에 관심을 기울인다.

초감각을 얻어야 하는 타로스의 입장에서 보면 썩 좋은 상황은 아니다.

애초에 유물과 신화는 타로스가 독점해야 한다. 그 누구도 도전할 수 없는 위엄을 보여야 하는 것이다.

내년 봄이면 전쟁이 시작되기에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시간도 많지 않았다.

생각을 마친 타로스는 기사단장을 호출했다.

믿음직한 중년 기사가 들어와 부복했다.

"충! 신 로빈슨, 폐하의 부르심에 대령하였사옵니다."

"로빈슨 경, 오늘 밤에 따로 소수의 인원만 추려 란투스 영지로 향할 것이다."

"순방을 준비할까요?"

"아니. 비밀이 엄수되어야 하는 사안이다. 최정예 기사 서른 정도만 추려라."

"존명!"

황제가 잠행을 하겠다고 말한 것이었지만, 로빈슨 단장은 어떠한 사견도 달지 않았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황제가 대륙 최강자라는 인식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드래곤조차 한 방에 보내 버리는 인물이 위험에 빠질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로빈슨은 그저 황제를 수행할 기사들을 추리라는 명령으로 알아들었다. 잠행을 할 것이니 용병단이나 상단으로 위장하는 것이 가장 좋았다.

다만, 한 가지 걸리는 점이 있었다.

기사들은 황제에게 절대적으로 충성하는 존재들이었고, 이건 타로스가 그리 설정하였기에 변함없이 유지될 것이다.

귀족들이 충성을 하지 않는다고 해도 기사들의 충심은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새롭게 들어온 기사들은 그렇지 않았다.

이에 타로스는 해가 떨어지고 숙영지가 꾸려지자 세실리아를 은밀하게 불렀다.

이미 타로스는 잠행을 나갈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세실리아가 눈에 이채를 띠며 마차로 들어왔다.

"야밤에 경을 부른 이유를 짐작하겠나?"

"잠행 때문이라 사료되옵니다."

"짐이 경을 믿어도 되겠나?"

"예?"

"분명히 랭턴 공작은 짐에게 충성을 바치기로 맹세하였지. 그러나 군주가 신하에게 모든 면을 보일 수는 없는 법이다. 짐을 위하여 가문에까지 비밀을 지킬 수 있는지 묻고 있는 것이다. 꼭 이번 일이 아니더라도 앞으로 짐과 경만 알아야 할 일들이 많아지겠지."

"...."

세실리아는 잠시 머뭇거렸다.

분명히 그녀는 정치적인 목적으로 황제를 호위하는 기사가 되었다. 모든 것은 오직 가문을 위한 일이었다.

그러나 황제가 바라는 것은 절대적인 충성이었다. 필요에 따라서는 가문조차 등질 수 있는지에 대한.

"마음의 준비가 되었다면 한 시간 후, 군영 밖으로 잠행을 나갈 채비를 하여 나오라. 하나 경이 가문을 생각하는 마음도 이해하기에 오지 않는다고 해도 질책하지 않을 것이다."

세실리아는 무겁게 고개를 숙였다.

어둠이 깊게 내린 밤.

오늘 밤은 중앙군과 떨어지기에 최적의 날이다.

우선 타로스는 떠나기 전에 군대의 지휘권을 궁정 후작이자 수석 마법사인 리카드로에게 맡겼다.

전쟁 중이라면 문제가 있는 인선이지만, 목표는 그저 제도를 향하여 진군하는 것뿐이었기에 가장 직위가 높은 리카드로에게 맡겼다.

진군 중에는 황제의 어가도 함께 움직인다.

그들을 보내 놓고 타로스는 소수의 인원으로 잠행을 나가고자 하였다.

군영 밖으로 나오자 정확하게 명령을 받은 대로 로빈슨 단장이 30명의 최정예 기사들을 이끌고 있었다.

그들은 기사단 정복을 벗고 용병들이 걸치는 무구들을 대충 입은 채 대기하고 있었다.

복장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지만, 그 질서 정연함이 조금 문제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용병답게 행동해야 한다."

"존명!"

각 잡힌 모습에 혀를 한 번 찬 타로스는 한 마법사와 마주했다.

허름한 로브를 입은 그랑카인 후작이 나타났다.

"결국 쫓아오기로 했나."

"클클, 이러한 모험에 참여하지 않는 것은 마법사로서 실격이 아니겠습니까?"

그랑카인이 씩 웃었다.

마탑을 믿어도 될까?

상관을 없을 것 같다는 판단이 들었다.

이미 충성을 맹세한 그랑카인은 충실하게 황제를 따를 것이 분명하다. 비록 성질이 조금 괴팍한 것이 흠이었지만, 끝까지 황제를 위하여 항쟁하였던 노마법사였으니까.

타로스가 설정했기에 잘 알고 있었다.

리카드로 후작과 쌍벽을 이루는 대마도사가 함께한다면 호위는 튼튼해지고, 여러 가지 편의까지 함께 챙길 수 있었다.

이제 남은 사람은 세실리아 한 명이다.

레베카가 조금 걱정스럽게 말했다.

"폐하, 아무래도 세실리아 경은 가문과 완전히 연을 끊을 인물은 아닌 것 같습니다. 또한 이번 잠행이 비밀리에 진행되어야 한다면 더욱 무리가 아닐지요?"

"이건 시험이지."

"예?"

"앞으로도 짐의 칼로 사용해도 되는지 말이다. 이번 잠행만 아니라면 딱히 랭턴 공작에게 숨길 일은 없기도 하고."

타로스는 알고 싶은 것이다.

세실리아는 항상 타로스의 곁에서 호위를 할 것이기에 필요하다면 가문을 버릴 정도로 충성심이 강한 것인지를 말이다.

저벅저벅.

어둠을 뚫고 한 여검객이 변장을 마치고 합류했다.

금발벽안의 미인 검객.

꽤나 시선이 모이겠지만 상관없었다. 외모가 뛰어난 여자들이 험한 일을 하는 것도 이곳 세계관에서는 그다지 희귀한 일도 아니었으니까.

그녀는 타로스의 발치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쿵!

"제게 있어 폐하는 등불이십니다. 부디 제 앞길을 인도해 주시기를 청하나이다."

긴장되는 순간.

황제의 입이 열렸다.

"허한다."

여전히 무심한 타로스의 말이었으나 이것이 세실리아를 인정하는 울림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었다.

#제18화. 초감각(2)

새벽에 출발한 일행은 이른 아침이 되어 란투스 자작령의 광산 도시 자벤에 입성했다.

신분증을 위조하는 일은 굳이 황제인 타로스가 나서지 않더라도 기사단장의 선에서도 충분히 가능했다.

약간은 촌스럽지만 블랙 용병단이라는 이름으로 위장한 일행들은 도시 경비대와 마주하였다.

이런 산골 벽지까지 황제의 얼굴이 알려지기란 어려운 일이었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었기에 타로스는 검은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었고, 용병단으로 위장한 기사들도 죄다 검은 색 무구들을 입고 있었기에 블랙 용병단이라는 아명은 퍽 어울려 보였다.

다만, 아무리 용병단으로 위장하여도 기사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는 로빈슨 단장의 위엄까지 사라지지는 않았다.

"길을 터라. 우리는 알키서스 산맥에서 곧장 오는 길이니라."

"하! 이거 웃기는 놈들이네? 우리가 여기서 경비나 서고 있다고 해서 만만해 보이더냐? 예의를 갖춰 똑바로 말해 봐라."

험악한 인상의 병사가 인상을 썼다.

당연히 이런 대우를 받아 본 적이 없던 로빈슨 단장이 역정을 냈다.

"뭣이! 지금 제국의 백성을 핍박하는 것이냐!"

"뭐야, 이 새끼들은? 용병 나부랭이들이 감히 제국의 군인을 협박해!?"

"허허허! 이거 죄송하게 됐습니다."

그때, 슥 그랑카인이 끼어들었다.

그는 권위적인 마탑의 마법사라고는 볼 수 없을 정도로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은화 몇 닢을 경비병에게 쥐여 주었다.

"크, 크흠."

"이해를 해 주시구려. 우리 단장이 정신에 병마가 깊어 자꾸 헛소리를 지껄여 대지 뭔가."

"흥, 정신병에 걸렸다는 거요?"

약간의 뇌물을 받아먹은 병사의 얼굴이 다소 풀렸다.

로빈슨 단장은 역정을 내려 하였으나 바로 타로스가 나서서 제지했다. 당연히 로빈슨은 깨갱하며 물러났다.

"이번에 알키서스 산맥에서 있던 일은 들으셨나?"

"황제 폐하께서 드래곤을 토벌해 버렸다는 이야기?"

"드래곤 피어에 맞았더니 머리가 이상해졌지. 한마디로 맛이 갔네. 그러니 배려 깊은 병사께서 이해해 주시게."

"쳇, 그렇다면 할 수 없는 일이지."

로빈슨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물들었지만, 감히 황제가 제지를 하고 있는 마당에 더는 나설 수가 없었다.

하지만 도시 안으로 들어서자 그랑카인과 로빈슨 단장 사이에 시비가 생겼다.

"그랑카인 님! 어찌하여 저를 정신병자 취급하신 겁니까?"

"자네는 지금까지 쭉 엘리트로 살아왔기에 사회생활 경험이 부족하네. 아예 대놓고 기사라고 광고를 하지 그러나? 우리는 지금 무지렁이 용병으로 위장한 거라네. 감히 용병과 병사가 같은 위치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그게 이것과 같소? 용병도 백성이오. 영지를 지키는 병사라면 백성을 사려하는 존재이거늘."

"이런 샌님이 다 있나."

"둘 다 그만해라."

그랑카인과 로빈슨 단장이 머리를 조아렸다.

타로스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애초에 엘리트 집단인 기사들에게 용병 흉내가 쉬울 리가 없었다. 뼛속까지 기사도가 머리에 박혀 있었기 때문이다.

"내, 누누이 말하지만 이번 잠행은 비밀로 행해져야 한다. 그랑카인 후작의 말대로 우리는 그저 백성일 뿐이니라. 영지의 녹을 먹는 병사와 같을 리가."

"황공하옵니다."

"말투도 고쳐라."

"예, 공자님."

타로스는 돈 많은 상인의 철부지 도련님으로 위장했고, 나머지는 호위를 위한 용병들이다. 그러한 컨셉이었으니 차라리 걸걸한 용병을 흉내 내는 것이 나았다. 그렇게 절도 있는 것이 아니라.

또한 용병들은 병사와 마주하면 웬만하면 돈을 주고 해결하는 편이었다. 권위적으로 군다는 것 자체가 감옥으로 끌려가고 싶어 환장했다는 뜻이다.

작은 소란이 있었지만, 돈의 힘으로 그럭저럭 무마됐고 타로스는 여관을 찾기 위해 움직였다.

새벽 내내 달려왔더니 다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고 있는 지경이다.

"저기 여관에서 식사 후에 모험가 길드로 가도록 하지."

"존...명.... 허험, 알겠습니다, 도련님."

기사들은 도저히 적응을 못 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있어 황제는 신과 같은 존재였다. 도련님이라고 말하니 당최 입이 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기에 타로스는 차라리 입이라도 닫고 있으라고 주문했다.

[정령이 머무는 정원]

광산 도시와 제법 어울리는 여관이다.

대부분의 식당들은 여관과 겸업하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타로스는 도시를 돌아다니다가 가장 깔끔하고 고급스러워 보이는 여관을 찾았다.

새롭게 개장한 곳인지 낡은 목조 주택 특유의 냄새는 나지 않았고, 산뜻한 목재 향이 은은하게 감돌았다.

그 안에는 주향도 함께 섞여 있었다.

어젯밤에 술판이 벌어졌다는 것을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딸랑딸랑.

30여 명의 사람들이 밀고 들어오자 사람들의 시선이 모였지만, 나름대로 타로스에게 신신당부를 받은 기사들은 조금 어설프지만 껄렁껄렁하게 자리를 잡고 앉았다.

다시 고개를 돌리려던 용병들은 여기사들에게 시선을 꽂았다.

"이햐, 이런 산골에 웬 쭉빵이래?"

"가만히 쳐다보지만 말고 가서 말이라도 걸어 보든가."

"휘익! 아가씨, 여기 와서 한잔합시다!"

"푸하하! 그런 빈약한 사내들 말고 진짜 남자와 어울려야지, 그냥 우리 용병단으로 오지 그래?!"

"...."

사람들의 시선이 모일 거라고는 생각했다.

당장 세실리아와 레베카만 해도 상상 이상의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여기에 더하여 황실 기사단 대부분은 엘리트 집단이었고, 귀족가 혈통인 경우가 많았다.

요즘 세상에 실력만 있다면 남녀를 가리지 않았기에 유독 외모적으로는 황실 기사단이 튀는 것은 맞다. 아무리 위장을 했어도 말이다.

식당에서 해장술(?)을 마시던 용병들이 추파를 던지자 몇몇 기사들이 검을 잡았지만, 타로스가 눈을 한 번 부라리니 그냥 주저앉았다.

세상 밖으로 나왔다고 해도 황제는 철저하게 갑의 위치였다.

물론.

용병들의 노골적인 눈빛이 여기사들의 몸을 쭉 훑으니 그녀들은 죽을 맛이었다.

한주먹도 안 되는 놈들이 깝죽거리는 꼴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타로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여관으로 다니기는 글렀구나. 단장은 오전에 식료품 상점에 들러 넉넉하게 식량을 준비하라."

"예, 도련님."

일행들은 빠르게 식사를 마쳤다.

이곳 광산 도시는 그 특성상 자주 몬스터를 토벌해야 했고, 의뢰를 받기 위한 용병들로 항상 붐볐다.

하루 먹고 하루 사는 것이 특기인 용병들이었으니, 아무에게나 추파를 던지는 것은 흔한 일상이었다.

타로스가 그리 설정했으니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일정 수준의 선만 넘지 않으면 그냥 좋게 지나가는 편이 좋다.

괜히 일이 터지면 시간만 늦어진다. 기왕 이렇게 잠행을 나왔으니 하나의 신화만 얻는 것이 아니라 유물을 비롯하여 몇 가지를 챙겨 가려 했다. 그러니 상황들을 무사히 넘기는 것이 중요했다.

하지만 세상사가 그리 쉽게 흘러가지만은 않았다.

한눈에 보아도 거하게 취한 용병 두 명이 하필이면 세실리아에게 접근하였다.

일행들 중에서 유난히도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는 그녀였다. 괜히 랭턴 공작이 황제를 유혹하기 위하여 막내딸을 황실 기사단에 꽂아 넣은 것이 아니다.

달리 말하자면 황제조차 혹한다는 의미였다.

"꺼억! 아가씨, 이런 샌님 말고 우리하고 놀자니까?"

"...."

세실리아는 인내심을 발휘한다.

타로스의 곁은 여전히 레베카와 세실리아가 호위한다. 당연히 그녀의 곁에는 타로스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용병은 그녀의 어깨에 손까지 얹었다.

"이런 놈은 힘도 못 쓰잖아? 내가 천국의 맛을 보여 줄 테니 가자고!"

"저런 미친놈!"

차자자장!

타로스의 명령이 있었지만 감히 황제가 모욕을 당한 상황이었다.

기사도가 뼛속까지 박힌 황실 기사들에게 있어 이건 참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이번에는 그랑카인 후작도 말릴 수가 없는 것 같았다.

세실리아는 타로스를 바라봤다.

"도련님, 죽여도 될까요?"

"이햐, 돈 많은 샌님이었어? 하하하! 돈이면 다 되는 세상 같지? 아니라고. 한 번 남자 맛을 보면."

꽈직!

결국 세실리아는 더 이상 듣지 못하고 용병의 얼굴을 날려 버렸다.

끄아아악!

당연히 상대가 되지 않았다. 용병의 레벨은 겨우 50대에 불과하였으니까.

일이 좀 더 험악해졌다.

타로스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거 어디서 많이 보던 상황인데.'

모험을 하다 보면 나오는 흔해 빠진 일상적인 일이다.

그냥 적당히 넘어가야 할까?

아니다. 여기서 약한 모습을 보이면 더욱 귀찮게 파리가 꼬인다.

한 번 정도는 실력 행사를 할 필요도 있었다.

"세실리아가 모두 처리한다."

"예!"

"끄으, 결국 넘기기로 한 거지?"

몇몇 용병들이 더 모여들었다. 아마 방금 전에 쓰러진 용병의 동료들인 것 같았다.

해장술을 한 채 해롱거리는 놈들은 당연히 세실리아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퍼억!

"켁!"

빠아악!

"아아악!"

그녀는 검집으로만 내려쳤지만, 순식간에 다섯 명의 용병들이 바닥을 뒹굴었다.

순식간에 해결 완료다.

1층에서 술을 마시거나 식사를 하던 용병들은 자신들의 눈을 의심하였다.

술을 마셨다지만 나름 중급의 용병 다섯을 여자가 순식간에 처리하는 것을 보니 보통은 아니었다 싶은 것이다.

타로스는 더 일이 커지기 전에 모험가 길드에 들르기로 했다.

여기사들에게 남장을 시키든지 해야겠다고 다짐하면서 말이다.

"가지."

여기사들은 최대한 외모를 가리거나 남장을 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아무래도 이런 시골에 어울리지는 않는 외모들이었으니 괜히 날파리가 꼬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식료품점에 들러 최대한의 식량과 산을 오르기 위한 물건들도 시장에서 구매하였다.

간단하게 배낭을 꾸려 장박을 할 준비도 마쳤다.

렌 산맥에 들어가면 며칠이나 신화를 찾아 헤매야 할지 모른다. 그러니 모포도 있어야 하고 간편하게 조리할 수 있는 도구들도 있어야 했다.

항상 지휘자의 입장에 있던 기사들에게는 당혹스러운 일이겠지만, 그들에게는 황제가 함께하고 있었다.

심지어 타로스도 배낭을 짊어지는데, 기사들이 군소리를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준비를 마치고 찾은 곳이 바로 모험가 길드 자벤 지부.

게시판에는 지질구레한 의뢰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잃어버린 개를 찾는다는 의뢰부터 시작해서 잡다한 심부름에 이르기까지. 제법 굵직한 의뢰들도 있었지만, 거의 직업 소개소 수준이었다.

초반에 유저들이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 이런 식으로 시장 바닥을 형성할 줄은 타로스도 몰랐다.

게시판에 자질구레하게 적힌 글들은 사소한 의뢰들이었고, 고액의 의뢰는 따로 받는다.

로빈슨 단장이 카운터에 의뢰를 하였다. 물론 쩌렁쩌렁한 외침이었다.

"렌 산맥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하는 길잡이가 필요하다. 의뢰비는 100골드. 성공 보수로 200골드다."

"제가 자벤 토박이입니다! 제 앞마당입지요!"

"저요! 렌 산맥이라면 나뭇잎 개수까지 알고 있어요!"

"제가 전문가입니다!"

난리 법석이 됐다.

개나 소나 의뢰를 맡겠다고 난리였다. 로빈슨 단장이 제시한 금액이 겨우 길잡이 안내치고는 너무 후했기 때문이다.

로빈슨 단장이 누구를 지목해야 할지 난감해하고 있을 때, 타로스가 나섰다.

"저 사람으로 하지."

제이나 LV. 85

네임드 [추격자]

타로스가 이곳을 찾은 또 다른 이유이기도 했다.

#제19화. 초감각(3)

가만히 앉아 의뢰 목록을 살피고 있던 제이나는 흠칫 놀란 표정이었지만, 별다른 말은 없었다.

'그래, 그렇게 설정했지.'

많은 인물들이 타로스의 손을 거쳤다.

물론 그 이상의 인물들이 부하 직원들의 손에서 탄생하였지만, 제이나는 성장 배경부터 최후까지 타로스가 편집을 했다.

제국이 아닌 로하임 출신.

내전으로 인한 가족의 몰살과 자국 왕가에 대한 분노로 차근차근 복수심을 키운 것, 어쌔신부터 시작하여 용병, 모험가 등을 전전하며 동료를 모아 복수를 기다린다는 설정까지.

특히나 추격과 암살에 특화되어 있었으며 매복과 함정도 범상치 않은 수준이었다.

타로스의 입장에서 보면 인재의 육성보다 완성된 인재를 수집하는 것이 더 난이도가 낮다. 당장 전쟁이 터지는 시점에서라면 몇 개월간의 육성은 그리 큰 의미가 없는 시간이기도 했다.

이런 세세한 배경을 알고 있는 타로스의 입장과는 다르게 제이나는 정말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녀의 얼굴에 약간의 당혹감이 스쳐 가다가 곧 표정이 사라졌다.

"그대의 이름은?"

"제이나 마이젠."

"의뢰를 받아들이겠나?"

"...."

그녀는 잠시 물끄러미 타로스를 바라봤다.

하지만 무너지지 않는 이성을 패시브로 가지고 있는 타로스에게서는 어떠한 감정도 읽어 낼 수 없다.

조금 황당한 일이었지만, 의뢰금이 꽤나 높았다.

지금 시절의 제이나는 군자금을 모으고 있는 중이었고, 돈이 되는 일이라면 닥치는 대로 했다. 그 덕분에 A급 모험가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쳐도 상당한 돈임은 확실했다.

"거부할 이유가 없군요."

"좋아. 여기 의뢰서다."

의뢰서는 공증이 되어 있었다.

거절을 하려면 지금 해야 한다. 그녀가 의뢰서에 수결을 하고 나면 도저히 불가항력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성실히 수행을 해야 할 의무가 생긴다.

마법적인 처리까지 되어 있었기에 추적이 가능하며, 만약 선금을 떼어 먹거나 의뢰 중 도주한다면 자동으로 모험가 자격은 박탈된다.

돈이 필요한 제이나는 망설임 없이 사인을 했다.

타로스는 내심 희미하게 웃었다.

일단 그녀와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은 벌었다.

제이나에 대해 일거수일투족을 알고 있는 타로스에게는 영입하기가 비교적 쉬운 인재라는 뜻이었다.

몇 가지 해프닝이 있기는 했지만, 정체를 들키지 않고 렌 산맥에 오를 수 있었다.

산맥 초입부는 광맥이 존재하며, 주기적으로 몬스터를 토벌하는 곳이었으므로 지금까지 단 한 마리의 몬스터도 나타나지 않았다.

길도 잘 닦여 있었으며, 안전한 지역이라고 표시가 된 곳으로는 끊임없이 광부들이 오갔다.

이런 상황이었으니 기사들도 다소 긴장을 풀고 등산하는 마음으로 산을 올랐다.

레베카와 세실리아는 후방을 경계하는 임무를 맡았다. 평소라면 그녀들이 황제를 최측근에서 호위하지만, 여기까지 나와서 그럴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다. 최측근 호위는 지금 로빈슨 단장이 수행하는 중이다.

안전 지역을 벗어나는 것만 해도 몇 시간이다.

지루하게 산을 타고 있는 중이었으므로 세실리아는 레베카에게 약간의 잡담을 걸었다.

"조금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뭐가?"

"왜 저 여자인지요?"

"신경 쓰여?"

"그, 그럴 리가요."

"신경이 쓰이겠지. 하지만 걱정 안 해도 돼."

"어째서인가요?"

"폐하의 안목은 유별난 데가 있으시기 때문이지."

"폐하의 안목이라...."

레베카의 말에 세실리아는 알 듯 말 듯 한 표정을 지었다.

분명히 황제는 적재적소에 인재를 배치하는 능력이 있었다. 또한 어떻게든 인재를 끌어들일 수 있는 방법도 알고 있었다.

최근의 경우만 해도 마탑이 그랬으며, 세실리아 본인조차 황제의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충성을 맹세하지 않았던가.

여러모로 신기한 사람이었다.

툭.

레베카가 그녀의 어깨를 살짝 쳤다.

"폐하를 유혹해야겠다는 생각은 버리는 편이 좋아. 그분은 어떤 유혹에도 굴하지 않는 분이거든. 오히려 유혹은 독이 될 수 있음을 명심해라. 선배로서 하는 충고야."

"아, 예."

"봐. 그럴 줄 알았지. 폐하를 유혹할 생각이었잖아?"

"...!"

세실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본심을 드러냈고, 레베카는 그녀를 바라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제이나는 추격술의 대가다.

은신, 추격, 암살에 특화되어 있었기에 플레이어의 입장에서 보면 정말 극악한 네임드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런 괴물이 아군이 된다면?

이보다 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안전 지역을 지났으나 그녀는 거침없이 안내를 했다. 그것도 몬스터들이 지나다니지 않는 구역만 골라서 말이다.

타로스가 제이나에게 준 단서는 하나뿐이었다.

[발광하는 나무를 지키는 뱀.]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두 가지 단서일 수도 있겠다.

하나는 발광하는 나무, 그리고 뱀이었으니까.

타로스는 제이나에게 이런 장소를 아냐고 물었고,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안내를 시작했다.

위험 지역에 접어들고 몇 시간이 흐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한 번도 몬스터와 맞닥뜨리지 않았다.

물론 몬스터 따위야 나타나도 쓸어버리면 된다.

무려 30명의 황궁 기사단이라면 어지간한 용병단 수백도 박살 내 버릴 수 있는 숫자였다.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니, 슬슬 잘 곳을 찾아야 했다.

"제이나 양, 안전 구역이 있소?"

로빈슨의 말에 그녀는 말없이 절벽 아래를 가리켰다.

움푹 들어간 지형의 절벽이었기에 하늘에서 뭔가 떨어질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됐고, 입구 하나만 잘 틀어막으면 끝이다.

"도련님께서 직접 지목한 모험가답군."

기사들은 흡족해했다.

사실 금역에 들어서기 전까지만 해도 기사들은 왜 황제가 제이나는 콕 집어서 지정했는지 알지 못했다.

정말로 그냥 예쁘장하기에 지목한 것이 아닌가 싶었던 거다. 하지만 금역이 시작되자 생각이 바뀌었다.

금역은 괜히 금역으로 불리는 것이 아니다. 자잘한 몬스터는 물론이고 재수가 없으면 보스 몬스터와도 마주친다.

이 정도 실력과 인원을 갖춘 단체가 몬스터로 골골거리지는 않겠지만, 싸우다 보면 시간이 가고 재수 없게 다치는 경우도 있다. 그런 귀찮음을 모두 걸러 낸 그녀였으니 더 대단하게 보이는 것이다.

어둠이 더욱 짙게 깔렸다.

"그랑카인."

"예, 도련님."

"주변에 알람 마법과 트랩을 설치해라."

"바로 가겠습니다."

한눈에 보아도 범상치 않아 보이는 마법사가 움직이자 제이나가 한동안 그랑카인에게 시선을 뒀다.

그러나 그녀가 보기에 범상한 사람은 여기서 한 명도 없었다.

도대체 정체가 궁금할 지경이었으나 의뢰인이 정체를 밝히지 않는다면 굳이 캐물을 필요가 없었다. 그것이 불문율이기도 했고.

화르륵!

모닥불이 곳곳에 피워졌고, 여기저기서 고기가 노릇하게 익어 갔다.

마침 그랑카인도 돌아와 잘 익은 고기를 뜯었는데, 제이나는 조금 황당한 표정이었다.

"의뢰인님, 한 말씀만 올립니다."

"해라."

"이곳은 금역입니다."

"그래서?"

"불을 피우는 것까지는 좋지만, 이렇게 고기 냄새를 풍기시면 필경 몬스터를 불러들일 겁니다."

"그렇다고 육포나 씹을 수는 없는 노릇이지."

"제 말은...."

"먹어라. 별일 일어나지 않는다."

"...예."

타로스의 말에 제이나는 입을 다물었다.

어리석은 사람들처럼 보이지만 그만한 힘이 있기 때문이라고 여겼다. 금역에서 이런 미친 짓을 하는 사람들이 몇이나 될까만, 그들은 개의치 않았다.

콰광!

"꾸에에엑!"

마법이 춤을 췄다.

그랑카인 후작은 부비 트랩이 아니라 아예 이곳을 요새화시켰다. 몬스터가 선을 넘기만 해도 바로 마법이 발동됐다.

몇 번이나 마법이 터져 나갔지만 사람들은 신경 쓰지 않았다.

술도 한 모금씩 마셨다.

사실, 여기서 술을 마신다고 취하는 사람도 없었다. 그러니 자유롭게 술을 마시게 한 것인데, 이 역시 제이나가 이해 못 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런 와중에 타로스의 한마디가 그녀에게 훅 치고 들어갔다.

"제국은 곧 전쟁에 돌입하지. 율리우스 왕국과 말이야."

"...들었습니다."

"그대는 제국의 다음 목표가 어디라고 생각하나?"

"제국의 다음 목표라.... 그걸 일개 모험가가 알 수 있을 리 없죠."

"로하임이다."

"...!"

제이나의 동공에 지진이 일어났다.

로하임.

그녀가 원수처럼 생각하는 왕국이자 복수를 위하여 칼날을 갈고 있던 제이나의 입장에서는 매우 놀라운 일이었다.

겨우 이틀 만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제이나가 이틀 동안 생각한 것은 이들의 정체였다.

조심해서 안내한다고는 했지만, 두 번이나 몬스터 떼와 마주하였다.

하지만 그때마다 몇몇 용병들이 출전하여 죄다 쓸어버렸다.

중형 몬스터이건, 대형 몬스터이건 상관없었다.

모두 몇 명에 의하여 박살 났고, 보스 몬스터로 보이는 놈들은 중년의 전사가 단 일합에 검을 휘둘러 죽여 버린 적도 있었다.

바보가 아니고서야 이 집단이 보통의 용병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었다.

이 정도 힘을 가진 용병단이라면 세상에 이름을 떨쳤어야 한다. 아니, 용병왕이 움직이는 용병대도 이 정도는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 있는 남자.

단 한 번도 힘을 보인 적은 없었지만, 이 괴물 같은 무력의 소유자들은 남자의 말을 하늘처럼 따랐다.

지금껏 어떤 의문도 품지 않았다. 오직 명령과 복명만 있을 뿐이었다.

도대체 이런 집단을 무엇이라 표현해야 할까?

"여깁니다."

제이나는 복잡한 생각은 집어치우고 의뢰인에게 목적지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목적지까지는 겨우 300미터 지점.

언덕 위에서 내려다보니 거대한 뱀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일명 맹독 스네이크라고 불리는 놈이며, 이 산맥에서 가장 위험한 네임드였다.

제이나조차 몇 번이나 저놈에게 죽을 뻔했다.

"너희들에게는 아직 무리일 것이다."

"하오나, 한 번 부딪쳐 보고 싶습니다."

이들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전사인 로빈슨이 외쳤다.

의뢰인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일합도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만, 그렇게 원한다면."

의뢰인은 마법사에게 턱짓을 했고, 마법사는 온갖 버프를 중년 남자에게 걸어 주었다.

로빈슨은 기세 좋게 이동하여 맹독 스네이크와 결전을 벌였다.

콰과과광!

숲이 떠나갈 정도로 굉음이 연신 울려 퍼졌다.

딱 열 합이다.

맹독 스네이크는 괜히 이 지역 최악의 몬스터라고 불리는 것이 아니다. 그만한 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열 합을 버틴 것도 저 남자가 어마어마한 괴물이라는 사실을 단적으로 증명하는 예였다.

의뢰인은 혀를 차며 손짓했다.

"그대의 상대가 아니다."

"화, 황공하옵니다."

"황공?"

천천히 맹독 스네이크에 접근하는 의뢰인을 보며 제이나의 눈동자가 확장되기 시작했다.

#제20화. 초감각(4)

콰과과광!

타로스는 가볍게 거대한 뱀의 몸통박치기를 막아 냈다.

투명한 막에 머리를 박은 놈은 오히려 나가떨어졌다. 본인의 힘에 카운터를 맞은 거다.

'이미 끝난 상황이군.'

타로스의 입가가 살짝 씰룩거렸다. 보는 사람들은 확인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하마터면 마력을 심지 못할 뻔했다. 직접 터치는 하지 못하는 이상 원격으로 마력을 심어야 했는데, 보스 몬스터 중에서는 실드로 항상 몸을 둘러싸고 있는 놈들이 있었다.

맹독 스네이크는 그런 종류 중 하나였고, 싸움을 위하여 마력을 발출하지 않고는 절대 실드가 깨지지 않는다. 놈보다 높은 레벨의 기사라면 모르겠지만 현재로서는 어렵다.

로빈슨 단장이 몇 합에 불과하였지만, 맹독 스네이크와 싸우는 바람에 마력을 심을 수 있게 되었다.

놀라고 있는 제이나의 얼굴이 보였다.

아마도 곧 있으면 놀라는 얼굴이 경악으로 바뀔 것이다. 머지않았다.

맹독 스네이크는 정신을 차리고 다시 달려들었다.

타로스는 한 번 더 앱솔루트 배리어를 쳤다.

쾅! 쾅! 쾅!

이 멍청한 독사는 미친 듯이 실드를 두드리다가 또 나가떨어진다.

어떻게든 뚫으려 하였지만, 그건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앱솔루트 배리어는 어쩌면 창조의 영역일지도 모른다. 어떠한 방법으로도 뚫을 수 없으니까.

"싱거운 놈이군."

쉬쉬식!

영물에 가까운 놈이니 타로스의 말을 알아들었을지도 모르겠다.

악에 받쳐 미친 듯이 쇄도하는 모습을 보니 타로스마저 위압감을 느낄 정도였다.

그러나 놈에게는 이미 마력이 스며들어 있었다. 어떤 식으로든 타로스를 타격할 수 없다는 뜻이다.

"이만 죽어라."

쿠아아아앙!

-끼에에엑!

산맥 전체로 피어가 울려 퍼졌다.

새들이 날아오르고 몬스터들이 사방으로 물러났다.

동시에 놈은 분해됐다.

파워드 킬은 드래곤도 분해해 버렸다. 이 정도의 네임드 몬스터야 버티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

'이 정도면 신살도 가능할지 모르겠는데.'

신들이 있다면 그조차 창조된 존재들이니 타로스가 죽일 수 있을지 모른다. 지상계에 모습을 드러낼지는 미지수였지만.

후둑. 후두두둑.

방금 전까지 거대한 뱀이었던 것들의 잔해가 떨어진다.

"...."

침묵이 흐르는 순간이었다.

모두가 경악스럽게 황제를 바라보고 있었다. 몇 번을 보아도 도저히 이해 불가의 영역이었기 때문이다.

침묵을 깨고 타로스의 입이 열렸다.

"로빈슨 단장."

"예, 예!"

척!

로빈슨이 부복했다.

"놈의 잔해를 사용할 수 있겠나?"

"최대한 수습하여 무구로 만들 수 있는 방안을 찾아보겠사옵니다!"

"좋아. 입구를 지켜라."

"존명!"

당연하게도 누구 하나 타로스의 말을 거스를 생각은 하지 못했다.

저벅저벅.

타로스는 특이한 힘이 흐르고 있는 나무 밑동으로 들어갔다.

나무 밑동은 일종의 던전이었다. 다만 던전 안에 가디언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밖을 지키고 있었을 뿐이다.

밑동 아래에는 좌우로 천사와 악마를 형상화한 석상들이 쭉 늘어서 있었고, 신마대전 당시의 상황을 그대로 재현해 놓은 벽화들이 음각되어 있다.

신학자들이 본다면 대단한 의미를 부여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애초에 기획 의도는 그런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유저들에게 뭔가 있어 보이게 하기 위하여 이런 식으로 기획된 것뿐이다.

그 밖에 룬어들이 빼곡하게 쓰여 있었으니, 마법사들과 신학자들이 함께 들어와 연구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타로스의 관심 밖이다.

그는 오직 오목한 책상 위에 펼쳐진 마법서만 보았다.

알 수 없는 언어였지만, 진실의 눈으로 해독이 됐다.

[초감각 마법서[패시브]]

화르르륵!

들고 온 횃불로 마법서를 태워 버린다.

스아아아!

마법서에서 흘러나온 빛이 타로스의 머릿속으로 들어가 아로새겨진다.

그 순간, 타로스는 초감각을 사용하는 방법을 습득했다.

굳이 관조를 하거나 실험하지 않아도 초감각을 자연스럽게 사용할 수 있게 됐다.

정신을 집중하자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느낌이 들었다.

일렁거리는 횃불은 슬로 모션처럼 흘러갔고, 옷깃은 매우 느리고 선명하게 펄럭인다.

초감각을 풀자 다시 시계가 똑바로 흐른다.

어느 정도 정신력 소모는 있었지만, 이것이 마력을 소모한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타로스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초감각을 얻었으니 이제 초공간 이동만 얻으면 된다.

어마어마한 속도로 고속 이동을 하는 신화급 스킬을 얻게 된다면 타로스를 상대할 수 있는 적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던전 밖.

황제가 들어가고 10분이 흘렀다.

기사들은 그 자리에 앉아 휴식을 취했다.

제이나의 곁으로 레베카가 주저앉았다.

"과연, 그분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 것 같군요."

"...."

"당신, 평범한 모험가는 아니군요?"

제이나는 온통 던전으로 들어간 남자에게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도대체 그는 누구인가 하는 물음.

도저히 그 사내가 황제라고는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 다만, 뭔가 대단한 인간이라고는 여기고 있는 중이다.

"그분은 누구신지요?"

"그건 그분께서 스스로 밝히셔야 알 수 있는 일이겠죠."

"저에게 바라시는 것이 있는 것 같군요."

"알고 계실 텐데요?"

제이나의 입술이 살짝 씹혔다.

맹독 스네이크를 단숨에 죽여 버린 괴물이라면.

모든 공격을 무위로 돌려놓고 이 정도의 전사들을 보유하고 있는 세력이라면.

어쩌면 로하임을 무너뜨릴 수 있지 않을까?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저런 압도적인 강함이라면 제후 중 하나는 아닐까 추측하고 있었다.

제국은 강함이 전부인 세상이다.

강자가 모든 것을 가지는 이 세상에서 저런 압도적인 강함을 가진 자가 제후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제후 중에서 저 정도로 강한 사람이 몇이나 될까?

'고위급 귀족인가.'

그녀는 고개를 흔들었다.

고위급 귀족도 저렇게 강할 수는 없다.

제이나의 눈이 부릅떠졌다.

"서, 설마 황제 폐하는...?"

"글쎄요?"

몸이 떨려 왔다.

하지만 그가 황제라면 도대체 이곳은 어쩐 일일까?

그녀가 엄청난 충격으로 몸을 떨고 있을 때, 황제로 짐작되는 남자가 걸어 나왔다.

"그랑카인 후작."

"예, 폐하!"

"...!?"

남자가 후작이라는 노인을 이름으로 불렀다.

그러자 그가 즉시 부복했다.

제이나의 예상이 확정되는 순간이었다.

"그랑카인 후작이라니...."

그랑카인 후작은 얼마 전에 마탑에서 궁정 후작으로 임명되었다.

그러한 사실이 아직 퍼지지 않았지만, 대충 제이나는 그랑카인이 누구인지 알아봤다. 동명이인이라고 생각했는데, 정말로 마탑주였을 줄이야.

거기에 단장이라는 자도 그렇다.

"황실 기사단장 로빈슨 자작...."

아귀가 딱딱 맞아떨어졌다.

무심하고 권태로운 표정의 남자는 황제가 확실했다.

300년을 살아왔다는 불멸의 왕.

봄에는 율리우스 왕국과 전쟁까지 예정되어 있는 상태다. 당연히 승리할 것이라고 여기고 있었으며, 그 이후에는 로하임을 치겠다고 어제 말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제이나는 복수를 위해 살아왔다.

그런 황제가 제이나를 지목했다.

그녀의 눈이 황제에게 고정됐다. 동공에서는 끊임없는 지진이 일어났다.

"이 안쪽은 던전이다. 고대에 작성된 룬어들이 가득하지. 한 번 보겠나?"

"영광스러운 일이옵니다!"

"다들 들어오도록."

"존명!"

기사들도 후다닥 뛰어 들어갔다. 그리고 제이나가 그 뒤를 따랐다.

'이건... 기회일까?'

던전 안으로 들어온 사람들은 기사들이 대다수였으나 이 신기한 광경은 넋을 놓고 바라봤다.

나무에서 뿜어져 나오는 힘이 신성력이었을까?

그게 뭔지는 타로스도 알 수 없었다.

"그랑카인 후작."

"예, 폐하!"

"어떤가? 마법적인 가치가 있겠나?"

"그건 연구를 해 보아야 할 것 같사옵니다! 이 정도로 고대 룬어가 빼곡하게 박혀 있는 모습은 처음인지라."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는 흥분하고 있었다.

어쩌면 대단한 발견을 할지 모른다는 흥분 말이다.

다만, 이걸 오늘 전부 발굴하고 필사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조사를 완료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한 달 이상의 시간이 필요했다.

이제 그랑카인은 궁정 후작이었고 업무도 보아야 한다.

던전의 발굴은 궁정 마법사들이 맡아서 해야 한다는 소리다. 그러자면 이곳을 보호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어쩌면 행적이 드러날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이런 중요한 유적을 잃을 수는 없지.'

"황궁에 연락하여 란투스 자작에게 공문을 하달하라고 일러라."

"어떤 내용입니까?"

"금역을 지배하던 지배자가 죽었고 그곳에서 던전이 발견되었으니, 궁정 마법사들이 도착하기 전까지 병력을 보내 보호하라고."

"존명!"

란투스 자작령.

비록 귀족파에 속해 있다지만 광산 도시 몇 개를 가지고 있는 란투스 자작은 그저 그런 제국의 중소 귀족에 불과했다.

제후에도 급이 있었고, 란투스는 간신히 자작 위에 오른 영주였기에 이런 산골 벽지에 영지를 받은 것이다.

그런 그에게 내려온 황제의 명령.

금역의 지배자인 맹독 스네이크가 죽었으니, 놈이 지키던 던전에 병력을 급파하여 궁정 마법사들이 올 때까지 보호하라는 것이었다.

최근 들어 다시 움직이며 파격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는 황제였다.

얼마 전에는 직접 움직여 드래곤을 단숨에 죽여 버리기도 했다. 게다가 중립파의 거두이자 제국의 2인자인 랭턴 공작이 충성을 맹세했다.

뿐만이 아니라 마탑의 마탑주 역시 작위를 받았고, 궁정 마법사가 되었다.

이런 황제의 명령을 거부한다는 선택지는 있을 수 없었다.

이번 전쟁에서 좋은 땅을 할당받기 위해서라도 잘 보일 필요가 있었다. 해서, 그는 병력을 급파했다.

그리고 오늘로 이틀째.

마법 통신으로 연락이 왔다.

-보고 드립니다! 도착을 해서 보니 정말로 맹독 스네이크가 죽어 있었고, 던전이 발견되었습니다!

"그 괴물이 죽었다고!?"

-그, 그렇습니다.

"허어,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잘은 모르겠지만 단숨에 터져 죽은 것 같습니다.

영지의 마법사는 그렇게 보고해 왔다.

오죽하면 산맥 일부분을 모조리 금역으로 지정했을까. 그건 바로 맹독 스네이크 때문이었다. 어떤 방법으로도 죽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놈이 단숨에 터져 죽었다?

란투스 자작의 눈이 커졌다.

"설마 폐하께서 다녀가신 건가."

#제21화. 요동치는 정세(1)

타로스는 이번 잠행에서 가장 중요한 여정을 시작했다.

이제 초감각은 얻었고, 초공간 이동 스킬만 얻을 수 있다면 일단 기본은 완성하는 셈이 된다.

어떠한 사태가 벌어진다 해도 죽지 않을 정도는 될 것이며, 강자존의 법칙이 지배하는 제국에서 황권이 박탈당할 일은 없어진다.

게다가 타로스는 불사의 존재가 아니던가.

어떤 강대한 적이라고 해도 100년 이상 사는 경우는 없을 테니, 결국에는 타로스가 최후의 승리자가 될 것이다.

최대한 비밀리에 움직일 필요가 있었지만 이미 란투스 자작령에 공문을 내렸으니 몇몇 귀족들은 알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그런 대단한 유적이 타로스의 손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신학이든 마법이든 뭔가 발견될 가능성이 높았으니까.

이제 타로스는 라이너스 후작가로 이동 중이다. 그곳에 초공간 이동이 존재하였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동안 타로스는 맹독 스네이크를 잡고 얻은 스탯을 분배했다.

[체력: 60(+5) 힘: 60(+10) 민첩: 45(+5) 마력 56(+20)]

레벨은 5개가 올랐고, 총 20개의 스탯을 얻었다. 앞으로 얻을 유물들의 최소한 요구 수치를 맞추기 위하여 민첩과 마력에 10개씩 투자했다.

좀 더 몸이 가벼워지고, 몸속에서 요동치는 마력이 증가하는 것을 느꼈다.

"폐하."

지금은 저녁 무렵.

야영을 해야 했고, 야영장이 꾸려지는 동안 생각에 잠겨 있었는데 레베카가 타로스를 일깨웠다.

그는 가만히 눈을 떴다.

"준비가 끝났사옵니다."

"가지."

타로스에게도 수련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물론 불멸왕이라고 불리는 존재의 수련이 평범할 리는 없었다.

너른 공터.

목적지까지 말을 타고 이동하고 있었으나 행군 속도가 그리 빠른 편은 아니었다.

어차피 황제가 없어도 전쟁은 착착 준비되고 있는 중이었고, 원래부터 태업을 일삼았던지라 대부분의 일들은 재상부에서 처리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황제는 느긋하게 여행을 하는 기분으로 영토 순방을 하는 중이라고 생각됐다. 물론 던전을 탐험하고 뭔가를 찾는 움직임을 보였지만, 기사들은 황제가 무엇을 하든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나 황제의 수련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세계 최강의 존재인 황제가 수련을 한다니.

벌써부터 기사들은 과연 이러한 수련을 황제가 정말로 해낼 수 있는지에 대해 관심을 모았다.

"이보게, 도대체 폐하께서 무엇을 하려 하심인가?"

그랑카인이 한창 준비 중에 있는 로빈슨 단장을 바라보며 레베카에게 물었다.

그녀는 담담하게 말했다.

"일종의 동체 시력을 강화하는 수련으로 보입니다."

"동체 시력? 폐하께 그런 수련이 필요하기는 한가?"

"글쎄요. 폐하께서 원하시니 저희는 준비할 뿐이죠."

"동체 시력 강화라고 치지. 그런데 웬 화살을 쏘려고 하는 건가?"

"화살을 쏘아 보낼 때 폐하께서 화살촉을 보시고, 그곳에 적힌 숫자를 맞히는 연습입니다."

"...."

화살에 적힌 숫자를 보는 것.

아까까지만 해도 그랑카인은 화살대에 적힌 글자를 맞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도 곡선을 그리며 부드럽게 날아가는 화살에 대해서다.

하지만 지금 황제가 하려는 건 화살에 마력을 담아 빛과 같이 쏘아지는 화살의 촉에 쓰인 글자를 맞히는 수련이라고 한다.

애초에 기사단장이 쏘는 화살이 보이기나 할까.

궤적을 쫓는 것만 해도 힘든 일이다. 그런데 화살촉에 적힌 숫자를 본다? 이게 말이 되는 일인가?

"허어, 그런 일이 가능할 리가 있나."

"폐하라면 가능한 일로 보입니다."

"그건 아무리 폐하라도...."

불멸왕의 수련은 인간의 상상을 뛰어넘고 있었다.

드래곤이라고 해도 가능할까 하는 수련이다. 하기야 그런 드래곤조차 황제에게 단숨에 찢겨 죽었으니 뭔가 가능할 거라는 기대가 들기는 했다.

저벅저벅.

황제는 특유의 무심한 얼굴로 걸어 나왔다.

더욱 그에게 기대가 모이는 순간이었다.

로빈슨 단장이 말했다.

"폐하, 마나를 싣사옵니까?"

"최대한."

"조, 존명."

꽈드드드득!

어마어마한 탄성을 가진 대궁이 울부짖었다.

활이 부러질 듯이 휘어지고 어마어마한 마력이 스며든다.

굳이 마법사가 아니더라도 마나를 다루는 자들이라면 모두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마나를 다루지 못하는 자는 없다.

어느 순간.

피융!

콰아아앙!

숲의 일정 부분이 박살 나며 폭발을 일으켰다.

웬만한 사람들은 화살의 궤적도 읽지 못했다. 너무 빨라서 그냥 뭔가 지나갔다고만 느꼈을 뿐이다.

황제가 슬쩍 웃었다. 아니, 사람들은 그가 웃었다고 느꼈다.

"3이로군."

"허!"

"말도 안 되는...."

이해 불가의 상황.

황제는 인간이 도전할 수 없는 수련을 하고 있었다.

타로스는 화살촉의 숫자를 두 자리로 바꾸었다.

이번에는 기사들도 고개를 내저었다.

인간의 시력에는 한계가 있었다.

좀 더 과학적으로 접근하면 인간이 1초에 인식할 수 있는 프레임은 60이다. 1초에 60장의 장면을 인식할 수 있다는 뜻이다.

훈련을 한다면 인식할 수 있는 프레임은 좀 더 높아지며, 동체 시력을 갖게 되기도 하지만 어디까지나 인체 구조적인 한계가 있었다.

마나를 사용한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과연 타로스가 굉장한 육체를 타고났을까? 결코 아니다. 오히려 동체 시력은 여기 있는 그 누구보다 떨어졌다.

타로스가 인식할 수 있는 사물의 프레임은 기껏해야 60~70 정도.

그저 초감각이 있기에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뿐이다.

피융!

로빈슨 단장이 화살을 날리는 순간 초감각을 사용한다.

주변의 모든 것이 느리게 흘러간다. 사람들의 움직임도 멎은 것같이 느껴졌고 바람까지 움직임을 멈춘 듯하다.

그러나 그 와중에 화살이 이동하고 있었다. 이는 마치 총탄을 보는 것과 같았다.

화살이 지나가자 타로스는 안력을 집중했다.

'35'

쿠아아앙!

초감각을 풀자 또다시 숲 언저리가 박살 났다.

다시 사람들의 시선이 타로스에게 집중되었다.

"35다."

"와아아아!"

기사들 사이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분명히 타로스는 숫자가 새겨지는 순간을 보지 못했다. 오직 그걸 새긴 기사들만 알고 있었다.

하지만 타로스는 정확하게 짚어 냈다.

이제 이 정도로는 타로스의 성에 차지 않았다.

"숫자를 좀 더 작게 적든가, 촉끝에 적도록 해라."

"조, 존명!"

아직 수련은 끝나지 않았다.

타닥타닥.

잠자리가 준비되었고 식사도 마쳤다.

알람 마법까지 완벽하게 설치되었기에 이곳에서 하루 묵고 내일 아침이 되면 다시 이동할 것이다.

타로스는 오늘의 수련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중이었다.

결과적으로 보면 화살촉 끝에 작게 숫자를 적어 넣어도 충분히 볼 수 있었다.

초감각이라는 것이 단순히 시간만 느리게 흐르게 하는 것만이 아니라 시력 자체도 독수리 이상으로 보정하는 것 같았다.

처음 이곳에 떨어졌을 때를 생각하면 상상도 할 수 없는 발전이었다.

그 때문에 조금 아쉽다.

로빈슨 단장이 좀 더 활 쏘는 실력이 뛰어났다면 어떨까.

기본적으로 기사들은 궁술에 능하였지만, 그게 특기는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기마술이나 검술, 창술이 특기다.

"폐하."

타로스는 아름다운 미성에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일단 타로스를 쫓아다니기로 마음먹은 제이나였다.

의심이 많은 그녀였기에 지금 당장은 충성을 맹세하지 않았지만, 타로스의 행적과 실력 행사를 확인하면 반드시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 수 있다고 여겼다.

"무슨 일인가."

"폐하께서는 인간이 아니신가요?"

"그렇게 보였나."

"제 눈에는 그리 보였사옵니다."

"그럴 수도 있지. 인간이라면 이미 250년 전에 죽었어야 하니."

타로스는 여전히 권태로운 연기를 했다.

대륙 통일이라는 목표가 있다고 하여도 세월에 마모된 감정은 금방 복원되는 것이 아니다. 타로스가 가진 가장 큰 특징이 바로 권태로움이었다. 무엇을 해도 감정을 드러내는 일이 없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인간이 맞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기에 인간의 황제를 하고 있다. 짐이 인간이 아니었다면 인간의 황제를 하고 있겠나?"

많은 눈이 타로스에게 향했다.

인간이기에 인간을 위해 군림한다.

즉, 다른 종족의 왕위는 거저 준다고 해도 벗어 던질 것이라는 뜻과 같았다.

"그러하시다면 백성을 위하여 평화를 추구하심입니까?"

"백성이라. 그보다는 인간을 위할 뿐이지."

"그렇습니까."

과연 타로스다운 대답이었다.

사람들은 타로스가 황위에는 크게 욕심이 없다는 것을 알아챘다. 아니, 세상만사 관심 있는 것이 드물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타로스가 움직이는 이유가 무엇인가.

제이나는 그것을 알고 싶어 했고, 타로스는 답을 했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어 갈 뿐."

그녀의 눈에 이채가 흘렀다.

그런 모습을 보며 타로스는 피식 웃었다.

"감히 그런 질문을 하다니, 무엄하기 그지없군."

"죄송합니다. 그저 폐하의 본심을 알아야 하기에."

"어째서인가?"

"폐하의 목적과 제가 추구하는 목적이 맞아야 목숨을 걸 수 있습니다."

"답은 얻었나."

"폐하의 칼이 되겠나이다."

"...."

제이나의 영입.

기사들은 이미 그녀의 능력에 대해서는 대충 알고 있었다.

그녀가 영입된다면 황제는 정보부와는 다른 성격을 가진 제2의 정보부를 운용할 수 있다.

정보만 취급하는 것이 아니라 추격과 암살을 전문으로 하는 집단이 탄생하는 것이다.

일종의 특수 부대였다.

"제2정보부 수장을 맡아라."

다음 날 오전.

일행은 숙영지를 벗어나 이동했다.

여전히 목적지는 라이너스 후작가다.

앞으로 이틀 정도만 더 가면 도착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타로스는 절대 서두르지 않았다.

어차피 여기서 체력이 가장 모자라는 사람이 타로스였기에 괜히 급하게 이동하여 밑천을 드러낼 이유는 없다.

여전히 타로스는 무심하였으나 세상을 유람하는 돈 많은 상인처럼 보이기도 했다.

황제의 행동에는 의문을 가질 수가 없다. 여행을 하는 건지, 국토 순례를 하는 건지 그건 알 수 없었지만 그저 기사들은 황제를 수행할 뿐이었다.

달리는 도중에 뒤쪽이 소란스러워졌다.

"폐하! 일단의 무리들이 접근하고 있습니다!"

진군을 멈추고 기사들은 타로스를 보호하는 진영으로 방진을 이룬다. 그리고 최후방에는 그랑카인 후작이 마법을 준비했다.

저 멀리서 어디선가 많이 본 적이 있던 인물이 달려오고 있었다.

모든 귀족들이 모였던 콜로세움 경기장이나 황제의 궁에서 회의를 할 때에도 말석이기는 했지만, 당당히 제후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젊은 자작이다.

란투스 자작은 50미터 떨어진 곳에 말을 멈추고 달려와 무릎을 꿇었다.

"폐하! 신 란투스, 폐하를 호종하기 위하여 이곳에 찾아왔습니다!"

"호종이라."

"그저 수행을 허락해 주시옵소서!"

귀족파에 있던 란투스 자작이다.

이번 기회에 노선을 갈아탈 모양이었는데, 타로스로서는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물론, 뭔가 핑계는 있어야 했다.

"란투스 자작, 경의 특기는 활쏘기였지."

"예? 아, 물론입니다!"

흔치 않은 특기다.

"경은 짐의 수련을 도와라."

#제22화. 요동치는 정세(2)

비옥한 평야를 끼고 발달한 영지 아젠타.

스론 아젠타 남작은 제후들 중에서는 그나마 비옥한 토지를 가지고 있어 소출이 높았지만, 남작이라는 한계는 벗어나지 못했다.

제국에는 워낙에 쟁쟁한 강자들이 많았다.

오직 실력만으로 권력의 유지가 가능한 곳이 제국이기에, 지금보다 강해질 수 없다면 승작은 불가능했다.

그 탓에 아젠타 남작은 주변 제후들의 끊임없는 견제를 받아야만 했다.

대표적인 중립 귀족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이제 슬슬 한계에 직면했다. 그건 바로 중립파의 거두인 랭턴 공작의 이적 때문이었다.

랭턴 공작은 황제가 드래곤을 일격에 쳐 죽이는 광경을 보는 순간, 도저히 뛰어넘을 수 없는 산이라는 것을 느끼고 황가에 충성을 맹세하였다.

그 덕분에 많은 중립 파벌의 귀족들이 황제파로 돌아서는 중이다.

나름대로 황제는 영토 순방 때문에 비밀리에 이동하고 있었으나, 황가의 명령이 란투스 자작가에 내려진 순간부터 많은 제후들은 황제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제후들의 정보망은 제국 전체에 깔려 있었다.

황제의 움직임이라면 주시하는 것이 맞았고, 아젠타 남작도 정보 단체들에 돈을 뿌려 그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그리고 오늘, 황제가 곧 있으면 영지로 들어온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폐하께서 오전 내로 칸트리로 들어선다고?"

"그, 그렇습니다."

"어디서 나온 정보인가?"

"바론 영지의 정보 길드에서 거액을 들여 구매한 정보입니다."

불멸왕의 행차.

물론 공식적인 건 아니다. 감찰을 온 건지, 그저 국토를 순방하는 것인지 목적은 정확하지 않았다.

황제는 드래곤과 맹독 스네이크를 죽였다. 어쩌면 제국 내 존재하는 불가사의한 위협을 직접 처단하려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느 순간부터 갑자기 각성하여 정무를 돌보기 시작한 황제는 제국에 가장 큰 위협이 되는 드래곤을 박살 냈으니 아마도 제후들이 처리하지 못하는 제국 내의 존재를 전쟁 전에 제거하려 한다는 의견이 가장 합당했다.

황제가 이동하는 길마다 정세가 요동쳤다.

서서히 황제에게 추가 기우는 느낌이 들었다. 귀족이라면 누구라도 정세에 민감하였고 권력 유지를 위해서는 강한 쪽에 붙는 것이 가장 현명한 처세였다.

아직 결정은 못 했지만, 그렇다고 황제에게 밉보여 좋을 것이 하나도 없다.

"지금부터 비상사태를 선포한다. 그 어떤 일이 있어도 폐하의 행차에 방해가 되거나 영지가 책잡힐 일은 없어야 한다."

"예!"

기사단장은 굳이 긴장을 숨기지 않고 외쳤다.

전형적인 농촌 도시 칸트리.

농촌에 도시가 있다는 것이 현대인의 상식으로는 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은 동서양을 막론하는 고대의 진리다.

제국 내에서도 손꼽히는 비옥한 토지를 가진 아젠타 영지라면 농업을 중심으로 하여 도시가 발달하는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영지가 소화할 수 없을 정도의 소출이 발생하면 곡식을 수매하려는 상인들로 들끓었고, 자연히 도시가 발달한다.

비옥한 토지에는 날파리가 꼬이기 마련이니, 도적들을 막기 위한 성채가 지어지며 군대가 주둔한다.

이런저런 이유로 도시가 발달하게 되는 것이다.

다만, 상업 도시 만큼이나 어마어마한 인구 유동이 있는 건 아니었다.

도시라고는 해도 성채가 있다는 것을 제외하면 마을이 발전한 형태에 불과하다.

"추수가 한창이로군."

"재작년에 비한다면 처참한 수준이라고 합니다."

레베카가 타로스의 말에 지식을 꺼냈다.

황금빛 벌판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지만, 2년 동안의 가뭄으로 곡식의 낱알이 적었다.

저수지들이 곳곳에 보이기는 했지만, 그마저도 말라 버렸고 먼 곳에서 물을 끌어와야 한다. 아마 이곳에 심어진 곡식들이 밀이 아닌 쌀이었다면 죄다 망했을 것이다.

도시로 들어가자 곳곳에서 탈곡하는 소리들이 들렸다.

상인들이 오가고 있었지만 그 역시 숫자가 대폭 줄었다고 한다.

그래도 아젠타는 사정이 나은 편이다. 아예 구휼미를 풀어야 구제가 될 정도로 농사가 망한 지역이 태반이었으니까.

타로스는 한창 탈곡 중인 농부를 찾았다.

얼마 전에 파격적인 세제 개혁을 단행하였으니 실질적으로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알아보기 위해서다.

"그게.... 행정관님이라굽쇼?"

"그렇다."

로빈슨 단장은 농부에게 은화를 하나 쥐여 주었다.

단숨에 농부의 눈이 커졌다.

이제 농부도 대화를 할 준비가 됐다.

타로스 앞에 농부가 구부정한 자세로 섰다.

"올해의 작황은 어떠한가."

"예.... 그게."

"사실대로 말해도 된다. 너를 벌주려 함이 아니다. 그저 알고 싶을 뿐."

"에헴, 그것이.... 작년도 가뭄이었는데 이 정도는 아니었습죠. 하온데 올해는 정말 농사가 망했습니다."

"소출이 반 이하인가?"

"예, 예."

"이번에 황제께서 세금을 감했다는 이야기는 들었나?"

"아, 물론입지요! 그 덕분에 살 만합니다. 원래는 모든 소출을 세금으로 바쳐야 할 판이었는데, 나라님이 세금을 감해 주시는 바람에 굶은 사람들은 없는 실정입니다요."

"그런가."

"곳곳에서 폐하를 칭송하는 소리가 자자합지요."

"알겠다."

농부는 연신 허리를 굽히며 사라졌다.

순수하게 민심만 생각하면 세제 개편은 효과적이었다.

수탈이 일어나지 않더라도 2년 연속 흉작이 들었다면 굶어 죽는 자들이 속출했어야 한다.

하지만 타로스는 지금까지 이어 온 세제를 혁파해 버렸고, 그마저도 올해에는 감면을 해 주었다.

이런 조치가 아니었다면 민란까지 일어났을지도 모른다.

귀족들은 타로스가 드래곤을 죽여 버린 이후로 입을 닫고 있었으니, 전쟁 전까지는 별다른 문제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여겼다.

타로스는 몸을 돌렸다.

"여관으로 간다."

일주일 내내 풍찬노숙을 했기에 기사들의 상태는 개판이었다.

거의 씻지도 못하고 식량도 떨어져 가기에 육포를 씹으며 달려왔다.

기사가 되기 전이라면 몰라도 황실 기사단에 속한 이후에는 이렇게 험한 대우는 받지 않았던 그들이다.

하지만 황제도 똑같이 노숙하고 육포를 씹었다. 그러니 기사들이 감히 불만을 제기할 수는 없다.

어쨌든.

기사들의 사기를 위해서라도 하루는 씻고 푹 쉬어야 했다.

도시에서 그나마 가장 좋은 여관을 찾았고, 타로스는 휴식을 선언했다.

"오늘은 마음껏 먹고 마시며 씻는다. 그리고 내일 아침에 출발한다."

"와아아아!"

기사들은 진심 어린 표정으로 기뻐했다.

노숙도 하루 이틀이지 일주일이나 이어지다 보면 멀쩡한 사람도 노숙자처럼 행색이 추레해진다.

한마디로 오늘 하루는 부대 정비를 하고자 함이니 도시를 돌아다니건 뭘 하건 자유라는 뜻이다.

타로스는 여기에 덧붙였다.

"호위는 레베카와 세실리아만으로 충분하다. 그나마도 2교대로 해라."

"네!"

씻고 싶은 것은 여기사들이 더 간절했기에 레베카와 세실리아도 굳이 거절하지 않았다.

드래곤도 죽이는 황제였는데, 이런 도시에서 무슨 변고가 일어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타로스의 명령이 떨어지자 기사들은 본격적으로 여관의 식재료를 거덜 내기 시작했다.

원래 군인은 많이 먹는다. 그만큼 많이 움직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쉬지 않고 말을 타고 온 기사들이라면 혼자 5인분도 먹어 치울 수 있다.

그렇게 어마어마하게 먹어 대는 통에 여관 주인은 불안에 떨었고, 중간 정산을 해 주어야 했다.

한참 먹고 마시자 기사들은 어느새 긴장이 조금 풀어졌다.

남장을 하고 있는 여기사들도 잠시 흐트러졌는데, 여관에 있던 용병들이 그걸 캐치하고 시비를 걸어왔다.

"하하하! 영지의 미인들이 여기 다 모여 있었구나!"

"클클! 아가씨들! 이런 샌님들 말고 우리랑 노는 것이...."

쾅!

용병들이 몇 마디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웬 군대가 출동했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고, 당사자들인 여기사들도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다.

경비대는 바로 용병들을 체포했다.

"이놈들! 도시에 소란을 일으킨 죄로 구금하겠다!"

"뭐, 뭐라는...."

퍽!

"켁!"

경비대는 용병들을 무지막지하게 진압했다.

경비대장이 주변에 눈을 부라리며 외쳤다.

"도시에서 소란을 일으킨 범죄자들은 체포될 것이니, 모두 명심하라!"

"...."

그러고는 순식간에 여관을 빠져나갔다.

몇몇 기사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게 대체 뭐지?"

"어.... 경비대가 이렇게 일 처리가 빨랐나?"

아니다. 분명히 아젠타 남작이 황제의 행차를 알아낸 것이다.

"마저 먹도록 해라."

"예, 공자님!"

밤새 타로스는 밖에서 수상한 자들이 여관을 둘러싸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때마다 신경을 끄라고 일렀다. 영주가 나름대로 성의를 보이는 중이었으니까.

아침이 되어 보급을 위해 상점에 들렀을 때, 상인은 과도한 친절을 보이며 물건을 헐값에 판매했다.

기사들의 주머니를 노리는 소매치기들은 사전에 검거됐으며, 거리는 하루 사이에 더 깨끗해졌다.

아젠타 남작은 황제가 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잠행이라는 것도 짐작했다.

이런 눈치는 타로스를 흡족하게 했다.

유적이 발견되는 바람에 행적이 노출된 것이지만 이것도 나쁘지 않았다. 타로스가 끝까지 잠행을 고집하는 이상 대놓고 쫓아다니지는 않을 테니까.

이런 행동은 영지를 나오는 순간까지 계속됐다.

경비병들은 타로스 일행을 발견하자마자 몸을 빳빳하게 굳히며 부동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아무래도 기사가 경비병으로 위장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타로스는 무심한 얼굴로 경비병 앞에 섰다.

눈앞의 남자는 남작령의 기사단장일 가능성이 높았다.

"허, 허험! 지나가십시오."

"고생하는군."

"여, 영광.... 아니 당연한 일이오."

경비병의 얼굴엔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나왔다.

여기서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목이 열 개라도 남아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타로스는 경비병에게 금화 몇 닢을 챙겨 주었다.

"뇌, 뇌물은 받을 수 없소!"

"받아라."

"아, 예...."

경비병은 공손하게 금화를 받아 들었다.

타로스를 수행하는 기사들은 간신히 웃음을 참고 있었다. 위장을 한다고는 했는데 상당히 어설펐기 때문이다.

"영주에게 메시지를 전해 주겠나?"

"말씀하십시오!"

경비병은 우렁차게 말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이게 뭔 일인가 싶어 했지만, 귀족 가문의 도련님이라도 왔나 싶어 눈길만 한 번 주고 말았다.

타로스는 지나가는 투로 툭 내뱉고 돌아섰다.

"노선을 바꾸고자 한다면 서둘러라 전해라."

#제23화. 초공간 이동(1)

비릿한 물 내음이 풍겼다.

타로스 일행은 라이너스 후작가에 진입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폐하! 저기 성채가 보입니다!"

"다 왔군."

아젠타 남작령에서 다시 일주일이 흐르고 나서야 항구 도시 리튼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 시간을 거의 노숙으로 보냈기에 일행들의 행색은 다시 남루해졌다.

여기서 한 가지, 기사들이 감탄을 마지않는 것은 바로 황제의 행동이었다.

그 누구보다 호화롭게 살아왔으며, 그 세월이 300년 정도 되다 보면 전혀 노숙이 어울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두두두두!

일단의 무리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선두에서 무리를 지휘하는 자는 바로 라이너스 후작이었다. 그러나 어디서 주워들었는지 매우 남루해 보이는 용병들의 무장이었고, 그 숫자도 겨우 스물이다. 황제가 공식 방문을 한 건 아니라는 사실을 안 것이다.

라이너스 후작은 대표적인 황제파 인물.

그는 100미터 앞에 말을 세우고 달려왔다.

쿵!

그러고는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황제 폐하를 뵙사옵니다!"

"라이너스 후작, 잘 지냈나?"

"황제 폐하의 은혜가 온 제국에 미치는데 그 누가 설치겠사옵니까? 모든 것은 폐하의 은덕입니다."

타로스는 레베카를 바라봤다.

그녀는 라이너스 후작가의 차녀다. 애초에 랭턴 공작과 비슷한 목적으로 황제의 호위로 심어졌다.

지금은 절대적으로 타로스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있는 상태이며, 그녀는 진즉부터 가문에서 분리되었다.

"그래, 아버지와 해후하지 그러나?"

"아닙니다."

세실리아와는 다르게 오래 전부터 노선을 확실하게 정한 그녀였다. 황제에 대한 충성심도 대단했고.

그저 부녀(父女)는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살짝 끄덕일 뿐이다.

"나름 조심한다고 하였는데, 어느덧 제국 전체에 소문이 다 난 것 같군."

"허허허, 긍정적으로 해석하면 그만큼 제국의 정보가 발달했다는 뜻이 아니겠사옵니까?"

맞다.

아무리 타로스가 조심을 한다고 해도 땅과 하늘에도 눈과 귀가 있다고 보는 것이 맞았다.

타로스는 후작의 몸을 일으켰다.

"황공하옵니다."

그러면서도 라이너스는 안절부절못하였는데 타로스로서는 그 이유를 물을 수밖에 없었다.

"왜 그러나?"

"도저히 풍찬노숙을 하는 폐하의 모습을 생각하기가 황망하여 그렇사옵니다. 제국의 백성들을 위하여 악을 처단하고 계신다는 소문은 들었사옵니다."

"그렇게 소문이 났군."

"예, 드래곤을 죽이고 맹독 스네이크를 죽이신 것까지, 제국 전체가 폐하께 이목을 집중하고 있습니다."

"쯧, 결국 잠행은 불가능한 것이었나."

"긍정적인 면도 있습니다. 은근히 소문이 퍼지면서 폐하에 대한 칭송이 자자하니 말입니다. 더욱이 금번에 실행한 세제 개혁이 실질적으로 백성들의 삶을 개선시키면서 시너지를 내고 있사옵니다."

타로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긍정적인 효과다.

그저 지금까지 일급 기밀을 운운하였던 것은 바로 초감각과 초공간 이동 때문이었다. 두 신화를 완벽하게 얻어야만 그럭저럭 앞일을 헤쳐 나갈 수 있었다.

신화들을 제외하면 유물은 누가 강탈하려 한다고 해도 다시 찾을 수 있었다. 신화는 스킬이었기에 한 번 빼앗기면 찾아올 수 없으므로 신중을 기하는 것이다.

"폐하, 신이 연회를 준비하려 하였으나 그 깊으신 뜻을 헤아릴 수가 없어 그저 식사 준비만 했습니다."

"잘했다. 어디까지나 짐은 잠행을 하는 중이다. 그렇다면 끝까지 그렇게 가야지."

"물론입니다."

이제 와서 공식적인 행차를 하면 그 꼴이 우습게 된다.

제국 전체가 주시하고 있다는 것이 조금 민망한 일이 되었지만, 타로스는 원래부터 타인들의 시선은 신경 쓰지 않는 인물이었다.

"그럼 가지."

브론티아를 제외한다면 제국 중부에서 가장 발달한 도시가 눈에 들어온다.

서부의 패자인 랭턴 공작의 영지만큼은 아니었지만, 화려하게 들어선 건물들과 50미터 이상의 성채는 보는 이들로 하여금 대단한 위압감을 갖게 했다.

성문으로 다가가자 경비병들은 그저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어디까지나 황제가 잠행을 하고 있다는 말을 전해 들은 것이다.

도시는 그래도 활기찼다.

흉작이 들었지만, 상업 도시들은 타격이 농업 도시 만큼은 아니었다.

더욱이 전쟁이 준비되며 외국에서 수도 없이 많은 물자들이 들어와 쌓이고 있었으므로 오히려 작년이나 재작년보다 더욱 많은 인원들로 붐볐다.

그런 모습을 눈에 담고 있던 황제가 후작에게 물었다.

"최근 제국의 정세는 어떻던가."

"폐하께서 행차하기 시작하시니 모두가 숨을 죽였고, 중립파에서는 어떻게든 폐하와 선을 대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사옵니다. 신에게도 연결을 부탁한다는 청탁이 수없이 들어오고 있는 실정이지요."

"그랬던가."

"이는 당연한 일이옵니다. 폐하께서 회한의 세월들을 딛고 일어나셨으니, 제국은 그 뜻을 받들어야 하는 것이지요."

워낙에 황가에 충성심이 깊은 라이너스 후작이었기에 타로스를 띄워 주는 감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꽤 고무적인 성과다.

물론 황제의 휘하에 들고자 하는 자들이 진정으로 충성심이 있어 그러는 것은 아닐 것이다. 라이너스처럼 마음 깊이 충성하는 자들이 드물 뿐이었지, 원래 제국 자체가 강자에게 복속되는 경향이 있었다.

지금까지는 황제가 태업을 일삼는 바람에 내부가 엉망이 되었을 뿐이다.

타로스가 움직이고 힘을 증명하니, 다시금 정계가 요동칠 수밖에 없었다.

"최대한 끌어들이도록 하라."

"충성심이 증명되지 않은 자들이 있사옵니다."

"충성심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군주가 신하에게 도리를 다할 때 얻을 수 있는 것이지. 짐이 도리를 다하고자 한다면 충성심은 자연스럽게 해결될 문제다."

"과연... 폐하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바로 진행하겠사옵니다."

정복 사업 이후에는 더욱 세력화가 고착될 것이다.

전쟁이 벌어지면 명백한 적이 생기고 황제가 친정하면 모든 귀족들이 황제의 명령을 받는다.

지휘 체계는 단일화가 될 것이며 황권은 강화될 수밖에 없었다.

친정의 효과는 이런 황권의 강화를 노리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다가 비명횡사하는 왕들이 역사적으로 꽤 많았지만, 타로스가 초공간 이동만 얻게 된다면 최소한 죽을 일은 사라질 것이다.

영주성으로 들어서자 우렁찬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기사들이 무릎을 꿇고 부복했다.

애초에 라이너스 후작 자체가 황가에 절대적인 충성을 바치는 자들이다. 그 주인에 그 기사들이라고 그들이라고 다를 바는 없었다.

타로스는 이번 잠행에서 가장 마음이 편해짐을 느꼈다.

"후작, 좀 씻고 식사를 했으면 하는데."

"물론입니다! 뭣들 하나? 폐하를 목욕탕으로 모셔라!"

"네!"

시종들이 총총걸음으로 달려왔다.

타로스는 그동안의 묵은 때를 벗기기로 했다.

후작의 집무실.

라이너스는 오랜만에 딸과 마주했다.

이미 5년 전부터 황제를 지근거리에서 호위하였던 그녀다. 처음에는 정치적인 목적이었으나 진심으로 황제를 따르게 된 그녀.

아마 그것은 황가에 대한 충심이 뼈에 새겨져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후작이 딸에게 물었다.

"그래, 오랜 시간 폐하를 보필하니 어떻던가?"

"소문과는 다르셨습니다."

"어떻게?"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강하시고 백성들을 사랑하십니다."

"허허허, 그래. 제국에서 강함보다 더한 미덕은 없지. 애민이야 항상 가지고 계셨던 마음이시고."

"아버님께는 죄송스러운 말씀이지만 이미 저는 가문을 떠났습니다. 서운해 마시길."

"허허허! 잘했구나!"

라이너스는 오히려 딸을 자랑스러워했다.

절대적인 충성이 무엇인지 라이너스도 잘 알고 있었다. 본인도 그랬으니까.

오직 황제의 칼이 되겠다는 맹세였으며, 그 어떤 적이라도 쳐 죽이고 목숨을 바치겠다고 했다.

라이너스는 그 이상의 것을 묻지 않았다.

"폐하를 잘 보필하도록 해라."

"하지만 그분과 연인 관계가 될 수 있을지는...."

"괜찮다. 굳이 황후가 되지 않는다고 해도 네가 황가에 봉사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지금 시점에서는 그리 중요한 일도 아니고."

"감사합니다."

"슬슬 가자꾸나. 폐하께서 나오실 때가 됐다."

"네, 아버님."

지금까지 노숙에 여관을 전전해 왔다.

그러니 기사들이나 타로스나 이만한 산해진미는 실로 오랜만에 구경하는 것이었다.

라이너스 후작이 허리를 굽혔다.

"많이 준비하지는 못했사옵니다."

"무얼. 육포를 씹는 것에 비할까. 모두 많이 들거라."

"존명!"

전투적인 식사가 시작됐다.

타로스는 그래도 황제의 체면이 있었기에 품위를 지키며 먹었다.

기사들도 그러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지만, 워낙 용병처럼 여행을 해서인지 그게 쉽게 지켜지지는 않았다.

어느 정도 식사를 마치자 후작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폐하, 하온데 제국 내에서 돌고 있는 소문이 사실이옵니까?"

"어떤 소문 말인가."

"폐하께서 전쟁 전에 최대한 제국 내의 네임드 보스들을 쓸어버리려 한다는 사실 말입니다."

"일부는 그렇지."

후작은 황제가 제후들조차 처리하지 못할 괴물들을 처리하고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괜히 전쟁에 나섰다가 후방이 불안해진다면 그보다 위험한 일은 없었으니까. 그렇기에 최대한 강력한 보스 몬스터를 사냥해서 위협을 줄여 놓는다는 것.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지만, 예전의 타로스는 이 당연한 일을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신의 영지에 오신 이유도."

"후작, 경의 영지가 가장 위험해 보인다."

"크흠, 그것은."

"에쉬드는 망자의 왕으로 불리지. 찾았는가?"

"외람되오나 몇 번이나 원정을 나갔었사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에쉬드는 찾지 못했지요."

"왜 그렇게 생각하나?"

"에쉬드는 대군을 보면 자취를 감추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렇다."

망자의 왕 에쉬드.

후작령 북쪽 아령 산맥은 에쉬드의 영토나 다름없었다.

영지마다 금역이라고 지정된 것에는 저런 괴물들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에쉬드는 구울 킹으로도 불렸으나, 지능을 갖추고 있는 언데드였다.

불리하다 싶으면 도주한다. 그러다가 다시 자신이 유리해지면 공격한다. 이러한 패턴의 반복이었기에 라이너스 후작은 어느 순간 포기를 해 버렸다.

그렇다고 소수로 에쉬드를 상대할 수 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라이너스 본인조차 에쉬드와의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이번에 처리하지."

"그것이 가능할지...."

"짐이 직접 간다."

"그, 그런 황망한...."

"제후만 둘에 로빈슨 경도 있지. 잡지 못할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란투스 자작이 일어나 허리를 굽혔다.

신궁이라고도 불리는 란투스 자작이 함께한다면 좀 더 일이 쉬울 것이다. 여기에 비밀 병기 제이나도 있었다.

에쉬드를 놓치는 경우라면 상처를 입은 경우를 생각할 수 있었다. 그리고 상처를 입었다면 결코 제이나가 놓치지 않을 것이다.

"허허허, 모험가들처럼 파티를 구성하는 것이로군요!"

"그렇다고 봐야지."

"벌써 기대가 되옵니다."

황제가 나서서 해결할 수 없는 일은 없다.

그야말로 언데드 밭으로 알아서 걸어 들어가는 격이었지만, 황제가 함께하는 이상 패배한다는 건 있을 수가 없었다.

타로스는 드림 팀을 구성했다.

"짐과 두 제후, 기사단장, 그랑카인 후작, 제이나와 세실리아, 레베카만 간다."

이제 드디어 초공간 이동 스킬을 얻을 때가 됐다.

#제24화. 초공간 이동(2)

금역이 금역인 이유는 반드시 존재한다.

이곳 아령 산맥은 전역에서 죽음이 감도는 곳이다.

대낮에도 검고 탁한 먹구름들이 잔뜩 끼어 있어 어두웠으며, 곳곳에 존재하는 묘지들에서는 툭하면 언데드 몬스터들을 쏟아 냈다.

죽여도, 죽여도 계속해서 조립되는 스켈레톤은 아예 태워 버려야 했으며, 강화된 좀비라고 보아도 좋은 구울은 느리지만 강력한 파괴력을 선사했다.

한 개체, 한 개체를 놓고 보면 그다지 위협적이지 않았지만 떼로 몰려들면 진땀을 빼야 하기도 했다.

그런 대규모 몬스터 웨이브 때문에 마법사를 데려온 것이기도 했다.

그것도 전 대륙에서 손에 꼽아 주는 마탑의 탑주 출신의 그랑카인 후작을 말이다.

"지옥의 겁화. 파이어 필드!"

콰드드드드득!

-끼에에에엑!

사방 수십 미터가 화염에 휩싸이며 거대한 회오리 구름을 만들어 냈다.

마치 원자 폭탄에 맞은 형상처럼 버섯 모양의 화염이 치솟았는데, 사정권 안에 존재하는 모든 언데드들이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가며 시커멓게 타 죽었다.

세실리아가 한마디를 툭 내뱉었다.

"마치 세상에 종말이 도래한 듯하군요."

"정확하게 보았구나. 이곳은 죽은 땅이다. 이미 종말이 도래한 지 오래지."

혹자는 대륙을 인간이 완벽하게 정복했다 말하겠지만,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이 세상에는 마경으로 불리는 위험 지역들과 독지대로 불리는 죽음의 늪, 혹한의 빙하라 불리는 북극, 죽음의 대사막으로 불리는 사막 지대가 존재한다.

인간은 도저히 살아갈 수 없을 정도의 환경이었으나 각종 맹수들과 몬스터들이 우글거리는 지대가 꽤 있었다.

이는 플레이어의 시련을 위하여 기획된 곳이었으나, 이 세상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도대체 왜 생겨났는지 이해 불가의 금역으로 통했다.

이곳 아령 산맥도 마찬가지였다.

완전한 죽음으로 뒤덮여 도저히 지배할 만한 가치가 없었으며, 위협을 없앤답시고 수차례나 파병을 하였으나 성과가 거의 없었다.

결국 금역으로 지정하고 성벽을 두르는 것이 최선책이었다.

시커멓게 죽은 땅에는 사체들이 즐비했다.

"아무래도 점심을 제시간에 먹기에는 글렀군."

"그렇사옵니다, 폐하."

"다른 곳을 찾도록 하지."

서걱!

푸확!

세실리아가 갑자기 튀어나온 구울의 목을 검기로 날려 버렸다.

내심 놀라기는 했지만, 타로스는 그 특유의 권태로움을 계속해서 유지하고 있었다.

언데드의 숫자가 너무 많다는 것이 문제였지만, 그렇다고 전진하지 못할 지경은 아니었다.

이곳에 모인 자들은 제국의 강자들이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특히나 마법사의 존재는 어떤 대량의 몬스터를 만나더라도 든든할 정도다.

그 말인즉, 아직까지는 타로스가 직접 검을 들 일이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벌써 3일 내내 금역을 헤집고 다녔다.

금역의 보스인 에쉬드는 산맥 중심부에 서식한다.

데스 나이트 두 기를 호위로 사용하며 불리할 때에는 도망쳤다가 기회를 엿보아 기습을 하기도 하는 까다로운 보스다.

이번에 얻을 신화는 에쉬드의 몸에 내장되어 있었다.

즉, 죽이고 난 이후에 핵을 찾아 스킬을 흡수해야 했다. 그러니 에쉬드를 찾기 전까지는 절대 이곳을 나가지 않을 작정이었다.

겨우 맞이한 점심 식사 시간.

타닥타닥.

모닥불이 타들어 간다.

다들 썩은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고 분위기는 우중충했다.

물론 절망적인 상황이라 그런 것은 아니었고, 숲 자체가 마이너스적인 기운을 발출하기에 그런 것이다.

"짐 때문에 고생이 많군."

"아니옵니다. 영광스러운 시간이옵니다."

라이너스 후작이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골수까지 황가에 대한 충성으로 가득 차 있는 라이너스 후작은 그리 말했지만 다른 사람들의 표정은 썩 좋은 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황제가 직접 함께하고 있었기에, 티를 내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타로스는 이번 원정의 중요성에 대해 다시 한번 이야기했다.

"제국 내에서 다른 보스는 몰라도 에쉬드는 반드시 처리를 하고 전쟁에 나서야 한다. 놈에게는 다른 몬스터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지능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스스로 언데드를 불려 나갈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에쉬드는 상황에 따라서는 재앙급의 몬스터였다.

지금이야 성벽 안에 갇혀 있기에 밖으로 진출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만약 한 영지가 먹히게 되면 그 안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들은 언데드로 변한다.

이를 두고 대륙에서는 언데드 사태라는 표현도 썼다. 언데드 몬스터에게는 전염력이 있었고 순식간에 수많은 군대로 불어나기도 했으니까.

그러한 위협은 사전에 차단한다.

만약 이번에 에쉬드를 처치하지 못하면 몇 년 안에 후작령은 정말로 멸망한다. 그렇게 기획되었기에 필연적으로 일어날 일이다.

그걸 알고 있는 타로스의 입장에서는 굳이 스킬이 아니더라도 에쉬드를 처리해야 했다.

'라이너스와 그랑카인이 아니었으면 힘들 뻔했군.'

그 둘은 누구보다 앞서서 적들을 처리했다.

라이너스의 온몸이 썩은 피로 도배되어 있는 것은 그런 이유였다.

잠시 시간이 나자 타로스가 입을 열었다.

"아마 200년 전이었을 것이다."

"...."

사람들의 시선이 타로스에게 쏠렸다.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는 제국의 흑역사. 이건 타로스 황제의 흑역사이기도 했다.

"8대 라이너스 후작은 매우 용맹한 기사였지. 그 당시에는 후작이 아닌 자작으로 기억한다."

라이너스 후작과 레베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있는 사람들 중 누구보다 가문의 역사에 정통한 자들이었다. 물론 그것이 세상을 창조한 타로스 만큼은 아니었다.

"200년 전, 라이너스 가문이 흔들렸던 적이 있었다. 이곳 금역의 토벌이 끝난 직후에 일어난 일이었다."

타로스는 담담하게 그때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실제로 그 일을 겪었던 사람처럼 아련하게 말이다.

200년 전, 라이너스 가문에 역병이 돌았는데, 그것이 언데드 사태 때문이라는 사실을 황제는 알아차렸다.

중앙군 3만과 영지군 2만이 모여 대규모 원정에 나섰고, 완전히 영지는 평정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후 몇 달이 지나지 않아 언데드 사태가 재발했고, 라이너스 가문은 거의 멸문할 뻔했다.

"그때, 가문을 끝까지 지켜 낸 사람이 바로 8대 라이너스 가주이다. 그로 인하여 제국 전역으로 사태가 번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자작가는 후작가가 됐지."

라이너스 후작과 레베카의 눈에 자부심이 어렸다.

제국을 구해 낸 공으로 지금의 위치까지 왔다.

"자작을 후작으로 올리기 위하여 짐의 비기 하나를 전수했다. 그것이 바로 후작가에서 대대로 이어져 내려오는 스톰 스워드다. 다행히 가문 대대로 검술에 재능이 있어 아직까지 가문이 무너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재발 당시에 데몬 리치를 죽였으나 오랜 시간이 흘러 이제는 에쉬드가 자리를 잡게 되었구나."

사람들의 눈이 반짝였다.

원정대는 제국을 구하기 위하여 이곳에 왔음을 설파한 것이다.

황제가 보기에도 에쉬드는 위험한 존재였기에 이번 참에 뿌리를 뽑으려 하는 것으로 보였다.

"전쟁이 시작되면 후방에 신경을 쓸 수 없다. 이것이 짐이 여기까지 온 이유이다."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라이너스 후작은 감격에 몸을 떨었다.

순전한 거짓말이었지만, 충성심이 골수까지 박혀 있는 라이너스 후작은 눈물까지 쏟을 기세다.

'잡은 고기에 밥을 주지 않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도 없지.'

굳이 역사를 꺼낸 것은 정치적인 수이기도 하다.

사람은 있을 때 잘해야 한다. 조금이라도 의심의 싹을 틔우게 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레베카는 오직 타로스 개인을 위하여 충성하였으나, 황제는 라이너스 후작가가 충신임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었다.

이로 인하여 레베카와 라이너스 후작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있는 것이다.

대충 식사를 마쳤다. 그냥 꾸역꾸역 음식물을 쑤셔 넣는 수준이었지만 나름 운치 있는 이야기도 했고 말이다.

"다시 출발한다."

금역을 들쑤시고 다닌 지 일주일이 흘렀다.

이제는 방향 감각조차 흐릿해지고 있었다. 제이나가 아니었다면 진즉에 포기했을 것이다.

타로스는 금역의 중심부에 들어왔다고 느꼈다.

더욱 짙은 어둠이 내렸고, 일행들은 이제 희미한 빛에 의지한 채 전진을 해야만 했다.

기온은 급격하게 떨어졌다.

11월이라고는 해도 이렇게 빨리 얼음이 얼지는 않는다.

수통의 물은 녹이지 않으면 먹지 못할 수준이 됐다.

에쉬드는 주변을 빙결시키는 고유 스킬을 보유하고 있다. 그러니 충분히 지금의 추위가 에쉬드 등장의 전조 증상임을 이야기할 수 있었다.

"이제 곧 도착한다."

"드디어!"

일행은 감격에 젖었다.

드디어 이 지긋지긋한 일이 끝난다는 뜻이었다.

끝내 일행은 에쉬드의 서식지에 도착했다.

거대한 동굴이 입을 쩍 벌리고 있었으며 그 앞은 너른 공터였다.

무덤들이 즐비하게 깔려 있음은 물론이고, 기분 나쁜 끈적끈적한 공기가 흘렀다.

나무들은 모조리 죽어 있었으며, 그들이 도착하자 무덤에서 수많은 언데드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어리석은 인간들아! 재물이 되어라!

"에쉬드입니다!"

"드디어 나왔는가."

에쉬드는 무려 인간의 언어까지 구사하고 있었다.

쿠구구구!

임팩트 효과인 것인지 하늘이 떨어 울었으며, 구울들이 하늘을 향하여 괴성을 질러 댔다.

-꾸에에엑!

-끼에에엑!

고막이 찢어질 정도의 소리가 분지를 가득 채웠다.

에쉬드는 도망가지 않았다.

군대가 쳐들어온 것도 아니고 척 봐도 모험가들이 들어온 것 같은 모습이었다. 게다가 오랜 수색으로 행색이 초라하기까지 하였으니 더욱 만만하게 보았을 것이다.

그 자체가 에쉬드의 실책이기도 하였지만.

타로스는 데스 나이트 두 기와 에쉬드를 번갈아 보았다.

'라이너스 후작이 데스 나이트들을 처리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수많은 언데드들은 그랑카인이 처리를 하고, 세실리아와 레베카는 나를 보조하게 해야겠군.'

계획이 세워졌다.

세실리아와 레베카가 보조를 하게 한 것은 에쉬드의 온몸을 둘러싸고 있는 실드 때문이었다.

어떻게든 틈을 만들어야 마력을 박을 테니까.

데스 나이트 LV. 91

어둠의 기사

에쉬드 LV. 97

망자의 왕

과연 네임드 몬스터다운 레벨이다.

스르릉.

타로스는 정말 오랜만에 검을 뽑았다.

그 누구도 황제가 패배할 거라는 걱정은 하지 않았다. 드래곤까지 죽여 버리는 황제가 죽는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 일이었으니까.

스스슷!

"저, 무슨!?"

에쉬드가 어마어마한 속도로 타로스에게 쇄도하였다. 일행들이 타로스를 호위할 틈이 없을 정도의 속도였다.

타로스는 이것이 초공간 이동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놈의 특수 능력이었다.

주변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앱솔루트 배리어의 발현과 에쉬드의 공격이 시작된 것은 거의 동시였다.

콰앙!

에쉬드의 눈에 이채가 흘렀다.

다 썩어 문드러진 후, 차갑게 얼어 버린 눈동자가 떨렸다.

지능이라는 것이 있는 놈이기에 도주할지 말지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틈을 놓칠 타로스가 아니었다.

시간이 축 늘어진 듯 느리게 흘렀다.

초감각의 발현이었다.

#제25화. 초공간 이동(3)

일행들의 얼굴에 경악이 떠올랐다.

데스 나이트를 상대하기 위하여 움직이던 라이너스 후작도, 언데드 몬스터들을 처리하던 그랑카인과 로빈슨 단장까지.

설마하니 에쉬드가 이렇게까지 빠르게 움직여 황제를 노릴 것이라고는 누구도 예상치 못했다.

특히나 함께 움직이기로 사전에 명령을 받은 세실리아와 레베카의 놀람은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다.

일촉즉발의 상황.

감히 몬스터 따위가 고귀한 황제의 몸에 손을 대기 직전이었다.

그녀들은 급하게 움직여 보려 하였으나 몸이 따라가지 않는 상태였다.

콰앙!

에쉬드의 공격은 간단하게 막혔다.

"아...!"

모든 이가 가슴을 쓸어내린다.

옥체가 상한다는 가정은 할 수도 없는 것이었으나 조금이라도 상처를 입는다면 삼족이 멸해도 할 말이 없는 중죄였다.

호종을 하지 않는다면 모르겠지만 이미 지근거리에 두 명이나 호위가 붙어 있었으니까.

그들은 보았다.

에쉬드의 표정이 일그러지며 수많은 생각이 스쳐 가는 것을.

놈은 본능적으로 자신이 불리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이다.

기껏해야 모험가 무리였기에 간단하게 처리한 후에 언데드 군단에 합류시킬 수 있다고 확신하였으리라.

보통의 경우라면 에쉬드의 판단이 맞다. 문제는 황제라는 존재 그 자체였다.

당혹감을 느낀 에쉬드가 본능적으로 위협을 느끼고 물려나려 할 때였다.

"죽어라."

황제의 싸늘한 한마디가 들렸다.

쿠아아앙!

그의 손에서 오색의 찬란한 빛이 쏟아졌다.

지금까지 황제는 손짓 하나로 모든 적을 죽여 왔다.

주제도 모르고 도전해 왔던 라이톤 공작이 그러했고, 한때 제국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광룡 카이너스가 그러했으며, 도저히 상식 불가의 강함을 가진 네임드 보스들이 그러했다.

하지만 지금, 황제는 검강 비슷한 무언가를 쏘아 냈다.

'저것이 검강이 맞기는 한가?'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스톰 스워드를 익힌 라이너스 후작조차 저것의 정체를 알 수 없었다. 지독할 정도로 강렬한 죽음의 기운과 파괴력이 느껴졌다.

오색의 찬연한 빛은 가로세로 10m 정도 안의 모든 것을 '삭제'하였다.

퍼어어엉!

에쉬드의 몸통이 완전히 분해되어 허공에서 비산했다.

그 피해는 데스 나이트 두 기도 함께 받았다. 고속 이동을 하던 그대로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후두두둑.

뒤늦게 잔해들이 떨어졌다.

라이너스 후작은 물론이고 모든 일행들은 그 충격에 말을 잊었다.

황제는 겪으면 겪을수록 경악스러운 존재였다. 도저히 인간의 상식으로는 재단조차 할 수 없는.

곧 라이너스 후작은 그들 가문의 비전 검술이 누구로부터 비롯되었는지 깨달았다.

"폐하!"

골수까지 황가에 대한 충성심으로 뭉쳐 있는 라이너스 후작은 감격에 몸을 떨었다. 자신의 가문이 얼마나 대단한 검술을 보유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을 황제가 직접 하사해 주었다는 것에 대한 감동이었다.

저벅저벅.

모두의 몸이 굳어 있을 때, 황제가 움직였다.

보스는 물론이고 그 호위들인 데스 나이트들까지 완전히 박살 난 상황이었고, 극렬한 어둠의 기운이 물러나고 언데드를 유지하던 마력이 사라지면서 모든 적들은 자연으로 돌아갔다.

이른바 턴 언데드(Turn Undead)다.

황제는 빛을 잃어버린 마석을 주워 들었다.

"언데드의 왕이라더니, 핵조차 썩어 버린 건가."

타로스는 드디어 초공간 이동을 얻었다.

마력조차 심지 못하는 존재인 에쉬드를 이렇게 쉽게 죽여 버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파워드 킬이 가지고 있는 또 하나의 기능 때문이었다.

일직선 10m 내 모든 사물을 파괴한다.

어떤 적이라도 10m 안에 들어오기만 하면 즉사한다.

이는 세상의 모든 법칙을 무시하는 공격이었다.

에쉬드의 실책은 단 하나였으나 그것이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세상을 어지럽힐 언데드의 왕이 허무하게 무너져 버렸다.

타로스는 새롭게 새겨진 스킬을 고찰했다.

초공간 이동[패시브]

자연의 법칙을 무시하며 이동한다.

신화급의 스킬들은 대부분이 자연의 법칙을 무시했다.

물리 법칙과 마나 법칙, 신성력의 법칙마저 역행하는 말도 안 되는 스킬들이 꽤 있다.

그중 최고봉은 즉사기와 절대 방어기였으나 초공간 이동도 만만치는 않다.

이로써 타로스는 그럭저럭 기본기를 갖출 수 있게 되었다.

제국은 불안전하였고 전쟁 이후에도 많은 문제들이 발생할 수 있었지만, 최소한 제후들 중에서는 타로스를 쉽게 죽일 수 있는 자는 없다.

타로스는 무심한 얼굴로 말했다.

"복귀한다."

한때 제국을 매우 곤란한 지경으로 몰아넣었던 언데드 사태.

이곳 금역, 통칭 죽음의 땅으로도 불리던 아령 산맥은 이제 정화되었다. 최소한 언데드 사태가 번져 나갈 사태는 예방한 것이다.

황제는 산맥 중턱에서 쉬어 갈 것을 명했다.

세실리아와 레베카가 식사를 준비하는 동안 타로스는 에쉬드를 죽이고 얻은 스탯을 분배하기로 했다.

'5업이라.'

에쉬드의 레벨은 분명히 97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벨이 5개밖에 오르지 않았다는 것은 이제 타로스도 폭렙을 할 때는 지났다는 뜻이다.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어쩔 수가 없다. 애초에 '포비아 킹덤'에서 레벨 업은 어려운 일이었으니까.

플레이 타임을 길게 잡은 것도 원인이겠지만, 게임 속에서는 몇 년의 흐름이 겨우 30분 안에 끝나기도 한다. 그러니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타로스의 입장에서는 레벨 업이 매우 더디게 느껴진다.

그렇기에 더욱 신중하게 분배해야 한다.

보너스 스탯은 20개.

타로스는 앞으로 얻을 유물까지 생각하여 분배를 마쳤다.

[체력: 60(+33) 힘: 60(+28) 민첩: 60(+23) 마력 61(+39)]

다음에 얻을 유물이 민첩과 깊은 관련이 있었기에 민첩을 60에 맞추었고, 나머지는 마력에 밀어 넣었다.

이렇게 되니 스탯이 평균 60에 맞춰졌다.

이제 어떤 유물을 얻더라도 스탯 제한 때문에 사용할 수 없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분배를 만족스럽게 마치고 나서 타로스는 라이너스 후작에게 물었다.

"후작, 에쉬드는 죽였지만 아직도 자연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는 망자들이 있다. 이를 처리해라."

"예! 바로 군대를 일으키겠사옵니다. 1만의 병력을 동원하고 용병 3천을 고용하여 다 쓸어버리도록 하겠습니다."

타로스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만하면 라이너스 후작가에서의 볼일은 끝났다.

휘이잉.

삭풍이 불고 있었다.

이제 곧 12월.

제국에 본격적인 겨울이 닥칠 것이다.

타로스는 남쪽으로 이동하기로 결정하고, 라이너스 후작과 헤어지기로 했다.

어디까지나 지금 황제는 잠행을 하고 있는 중이었으므로 거창하게 배웅은 하지 못하였지만, 영지 기사단이 후작령의 경계까지 함께 나왔다.

헤어지기 전에 라이너스 후작은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폐하! 부디 강녕하시기를 바라옵니다!"

"곧 만날 것이다."

타로스는 레베카를 바라봤다.

그래도 아버지와 헤어지는데 인사를 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뜻이었다.

타로스가 강권하지 않았다면 이 답이 없는 부녀는 그저 그렇게 헤어졌을 것이다.

레베카는 어쩔 수가 없다는 듯, 꾹 다물고 있던 입을 열었다.

"아버님, 봄에 뵙겠습니다."

"오냐, 폐하를 보필하도록 해라."

"예."

"...."

부녀의 대화는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참으로 무뚝뚝한 사이가 아닐 수 없다.

30인의 기사들은 다시 합류하였고, 로빈슨 단장은 슬쩍 타로스에게 물었다.

"폐하, 이제 어디로 향합니까?"

"대사막으로 간다."

12월 초.

제국 중부에서 출발한 일행들은 남부로 쭉 남하하여 대사막 입구를 앞에 두고 있었다.

이제 하루만 더 가면 대사막으로 향하기 전의 마지막 영지이자 남부 국경선인 그란달 남작령에 도착한다.

일행들은 그곳에서 하루 정도 쉬면서 보급을 하고 대사막으로 향할 예정이었다.

대사막까지 잠행을 완료하고 나면 더 이상은 이런 식으로 나다닐 수 없다. 전쟁을 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번 잠행에서 얻을 것은 두 가지.

하나는 바로 신화 '스모크'였고, 또 하나는 '유목민의 인장'이다.

스모크는 한마디로 연기처럼 사라지는 것을 뜻하였으나 정확하게 말하면 짧은 공간을 뛰어넘는 '블랭크'를 말한다.

많은 게임에서 블랭크와 순간 이동은 마법사들이 당연히 사용하는 것으로 그러졌지만 포비아 킹덤은 그렇지 않다.

애초에 공간을 도약한다는 자체가 밸런스를 해치는 행위다.

장거리 도약과 같은 순간 이동이 아무렇지도 않게 활성화되면 무역이 붕괴하고, 전쟁의 양상도 매우 단순해지는 등 여러 가지 문제를 발생시킨다.

짧은 공간을 뛰어넘는 블랭크도 마찬가지다.

전투 중에 공간을 도약하여 상대방의 머리 위에 나타난다거나 등 뒤에 나타나서 찌르게 되면 난이도는 확 떨어진다.

그 때문에 이러한 기술은 오직 소수만 가질 수 있도록 설정되었다.

두 번째는 대사막의 유목민 호루루 부족이 가진 유물 '유목민의 인장'이다.

유목민의 인장은 후반까지 사용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스킬이 자체적으로 붙어 있었다.

바로 기마술.

기마술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았지만, 전쟁에 나서면 결코 그렇지 않다.

기마술이 완벽해야만 말을 타는 도중 활을 쏘는 것이 가능하였으며, 말 위에서 안정적으로 전투를 벌일 수 있었다.

많은 역사서에 등장하는 명장들은 말에서 돌격하며 자유롭게 일기토를 벌이는 광경들이 묘사되었지만, 실제로는 상당히 힘든 일이다.

말 위에서는 펼칠 수 있는 기술에 한계가 있었으며, 땅 위에서 딛는 것보다는 훨씬 움직임이 단순화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승마 따위는 전문적으로 수련한 적이 없는 타로스에게 있어 기마술은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이 두 가지를 얻기 위하여 타로스는 대사막으로 향하고자 하였다.

두두두두!

일행들은 본격적으로 사막 지형에 접어들었다.

동시에 날씨가 급변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주변의 풍경이 한겨울을 연상케 하였지만, 사막 지형에 접어들자 무더위가 내려앉은 것이다.

더위를 먹기 싫다면 이쯤에서 환복을 하고 사막에 적응할 준비를 해야 한다.

"잠시 쉬어 간다."

"말을 멈추라!"

그래도 아직까지는 곳곳에 야자수들도 있고, 드문드문 오아시스도 있었다.

일행들은 오아시스에서 잠시 정비를 했다.

"폐하,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말해라."

"대사막에는 어떤 목적으로 가는 건지요?"

제이나였다.

지금까지 일행들은 도대체 왜 황제가 하필이면 대사막으로 가려는지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명령이기에 따랐을 뿐.

그녀뿐만이 아니라 모두가 궁금해했던 문제이기에 시선이 황제에게 집중되었다.

타로스는 무심하게 한마디를 툭 내뱉을 뿐이었다.

"자이언트 스콜피온을 잡는다."

#제26화. 대사막(1)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 건조한 공기.

도저히 12월 초라고는 볼 수 없을 정도의 날씨다.

대사막은 대륙 3대 금역으로 통하였고, 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자살 행위로 여겨졌다.

그 안에 도사리고 있는 보스는 일명 사막의 왕이라고도 불리는 자이언트 스콜피온이다. 사실 대사막의 악명은 그놈이 만들어 냈다고 해도 무방하다.

사막의 골칫거리인 자이언트 스콜피온을 잡아 제국의 후방을 튼튼히 한다.

신화 스킬과 함께 호루루 부족이 가지고 있는 유물까지 노리기 위하여 이번 일정을 소화하고 있는 것이다.

일행들은 오아시스에서 충분히 휴식을 취했다.

수통에 물을 채우고 말들에게도 건초를 충분히 먹였다. 그나마 말을 타고 횡단할 수 있는 것은 아직 제국의 영토였기에 가능한 일이다.

사막에도 관도가 깔려 있었으며, 금역의 몬스터들을 최전방에서 막아 내는 영지까지는 통행이 원활해야 했으니까.

"폐하, 수련 준비가 끝났사옵니다."

이동하는 틈틈이 타로스는 수련을 쌓았다.

하루에 기껏해야 20분 정도의 수련이었지만 이러한 시간이 쌓이다 보니 발전을 이루었다.

동체 시력의 강화는 란투스 자작이 합류하면서 더욱 난이도가 높아졌고, 바로 어제, 화살촉 끝의 숫자를 완벽하게 인식하게 되었다.

이제 수련은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타로스가 수련을 위하여 나오자 기사들이 몰려들었다.

웅성웅성.

"오늘도 시력 강화를 하시려나?"

"그렇지 않을까? 폐하께서는 이미 무적이시니 시력 강화 이외에는 무언가 더 할 수 없을 것 같은데."

기사들은 그렇게 여겼다.

에쉬드를 처지하고 여행을 시작하면서 하루도 쉬지 않고 타로스는 수련을 쌓아 왔다.

제국 최고의 궁술을 가진 란투스 자작이 쏘는 활을 인식한다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이로 인하여 타로스는 초감각을 다루는 법을 완벽하게 터득하게 되었다.

이제는 초공간 이동에 대해서도 고찰을 해 보아야 한다.

타로스는 란투스 자작과 나란히 섰다.

"...?"

기사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대체 타로스가 지금 무슨 일을 하려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폐하, 오늘은 다른 수련을 하시옵니까?"

"수련의 목적은 다르다. 그러나 경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표적에 활을 쏘면 된다."

"음.... 알겠습니다."

사람들은 황제의 수련 목적이 무엇인지 궁금해하였으나 더 이상은 묻지 않았다.

황제의 말에 반박하는 것도 불충이었지만, 곧 있으면 그 목적이 무엇인지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꽈드드득!

란투스 자작이 거대한 대궁을 들었다.

활은 비명을 내며 휘어지고 활줄은 팽팽하게 당겨졌다.

명색이 제국 최고의 궁사인 란투스 자작의 활은 당연히 평범한 물건이 아니었다.

대륙에 몇 개 없는 대궁 계열 유물이었으며 자체적으로 마력을 발산한다. 또한 그 속도가 무지막지했다.

처음에는 기사단장인 로빈슨조차 그 궤적을 쫓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타로스가 수련을 진행하면서 기사들은 어떻게든 화살의 궤적을 쫓기 위하여 노력하였고, 이제는 그럭저럭 궤적을 확인할 정도는 되었다.

그야말로 빛과 같은 속도를 가진 화살.

퉁!

마력이 모이자 화살에서 빛이 났다.

그 순간, 타로스는 초감각을 활성화하였다.

주변이 느려지고 시간이 축 늘어졌다.

여기에 더하여 초공간 이동까지 활성화시켰다.

얼마 전에 알게 된 사실이었지만, 초감각과 초공간은 시너지 효과가 있었다. 초감각을 켠 상태로 초공간 이동을 사용하는 것이 조금이라도 더 빠르게 이동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쐐애액!

화살을 따라 타로스가 움직이자, 곧이어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사람들의 눈에는 화살과 타로스의 몸이 동시에 사라지는 것처럼 보였다.

화살이 야자수를 꿰뚫고 폭발을 일으키는 순간, 타로스는 그 옆에 서서 잔해들을 막아 내고 있었다.

콰아아앙!

"...!"

모두의 눈에 경악이 어렸다.

끊임없이 흔들리는 눈동자.

지금까지 황제는 직접 이렇게 빨리 움직인 적이 없었다. 그 전에 모든 적을 죽여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 그들은 황제의 진면목을 봤다.

도저히 그의 움직임을 쫓을 수가 없었다.

저벅저벅.

타로스는 다시 제자리로 걸어왔다.

그 순간까지도 기사들은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상식을 뛰어넘는 수련.

하지만 정작 타로스는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비록 그것이 눈을 살짝 가늘게 뜬 정도의 변화였지만, 오랫동안 황제를 수행한 기사들은 그 차이를 인식했다.

"다시 간다."

"예, 옛!"

콰드드드득!

란투스 자작이 기겁하며 다시 대궁의 시위를 당겼다.

두두두두!

일단의 무리들이 대사막을 향하여 착실하게 나아가고 있었다.

관도는 제법 잘 관리가 되고 있었고, 곳곳에 상인들과 마주하기도 했다.

비록 대사막은 공포의 대상이 될지언정 제국 내 영토는 안전하다는 뜻이었다.

사막에 들어선 자들은 모두 하얀 천으로 몸을 돌돌 말았다. 그리하지 않으면 더위를 먹거나 체온 조절에 실패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만나는 상인들마다 일행의 중무장 상태를 보며 매우 당황스러워했다. 웬 미친 인간들이 죽고 싶어 발악하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그저 그들은 일행들을 보호하는 대마도사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기에 사소한(?) 오해를 했을 뿐이다.

"단장, 도대체 아까 폐하의 수련은."

"놀랐소?"

"당연히 놀라지. 기겁을 했다니까."

란투스 자작은 아직도 떨리는 가슴을 주체하지 못했다.

어떻게 인간이 화살보다 빠르게 이동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것도 제국 최고의 궁사가 쏜 화살을 쫓으며 말이다.

괜히 란투스 자작의 별명이 빛의 궁사라고 불리는 것이 아니다.

유물의 영향으로 화살에서 빛이 나고 정말로 빛과 같은 속도로 쏘아지기에 그런 별명이 붙은 것이다.

어느 정도 화살의 속도가 떨어진 이후라면 모르겠지만, 처음 활이 쏘아진 이후 백 미터 정도는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빨랐다.

단순히 동체 시력 강화를 위한 수련까지는 그러려니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인간의 상식을 뒤집어엎는 수련이었다.

화살촉을 보는 것을 뛰어넘어 아예 그 궤적을 쫓아 이동한 것이다.

"폐하를 이해하려 하는 것 자체가 불충이오."

"그거야 알지. 그런데 과연 폐하께서 인간인지에 대해서는."

"인간이 맞소."

"확신할 수 있어?"

"물론이오."

인간이기에 인간의 황제를 영위한다.

제이나가 질문을 던졌을 때 정확하게 황제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내가 줄 하나는 아주 잘 잡았어."

"그걸 이제야 깨달았다니. 폐하께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도록 하시오."

"그건 당연하지."

란투스 자작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만약 계속해서 귀족파에 있었다면 전쟁 이후에 바로 숙청됐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저런 힘을 가진 황제가 움직인다면?

백만 대군이 깔려 있다고 해도 돌파하여 제후의 목을 따는 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닐 것이다.

제국 남부 국경선이자 대사막 초입에 접어드는 마지막 영지 그란달 남작령.

타로스가 잠행 중이라는 사실이 오지 중의 오지라고 불리는 그란달 남작령까지 전달된 모양이다.

텔레포트는 설정상 막아 놨다고 해도 마법 통신까지는 배제하지 않았기에 소문이 나는 속도도 빨랐다.

그란달 남작은 황제파에 속해 있는 귀족으로 비교적 타 제후들에 비해서는 약체로 불린다.

그란달 LV. 90

제국 남부의 제후

그런 그란달이라고 해도 제후는 제후다.

기사급은 뛰어넘었으며 레벨은 90.

약체라고 불리는 것도 어디까지나 제후들의 기준인 것이었지, 홀로 적진으로 쳐들어가 적장의 목을 딸 정도는 됐다.

그런 제후였으나 행동은 꽤나 가벼워 보였다.

"폐하아아아!"

저 멀리서 일단의 무리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그란달 남작이 1개 기사단을 이끌고 마중을 나왔다.

황제가 잠행 중이라는 사실이 여기까지 퍼져 나름대로 위장을 한답시고 용병처럼 입었는데, 저 정도면 용병이 아니라 비적이라고 봐도 무방할 지경이었다.

100미터 앞에서 하마한 그들은 모래바람을 맞으며 달려와 넙죽 엎드렸다.

"아이고, 폐하! 이런 오지를 방문해 주시니 만대의 광영이옵니다!"

"그란달 남작, 간만이로군. 전쟁 준비는 잘하고 있나?"

"헤헤, 물론입지요. 어떻게든 전력을 끌어모아 1만의 정병을 끌고 참전하겠습니다!"

제후 사이에서는 최약체(?)로 평가받는 그였기에 몸을 낮추는 것이 꽤나 습관이 되었다.

특히나 황제가 직접 방문을 하였으니 거의 땅으로 머리를 뚫고 들어갈 기세다.

나름대로 영지에서는 강렬한 카리스마로 통치한다고 하는데, 이런 모습을 보면 도저히 상상이 되지 않는다.

"가지."

"신이 직접 모시겠사옵니다."

황실 기사단까지 포함하여 무려 140명에 이르는 대인원이 상업 도시 바젠에 접어들었다.

그란달 남작성은 이곳 바젠에 우뚝 솟아 있었다.

원래 영지의 수도는 영토의 중심에 있어야 정상이지만, 대사막에서는 심심치 않게 대규모 몬스터들이 북진하여 제국을 침범하였으므로 최후방에 안전하게 영주성을 구축하였다.

황제 일행이 들어오자 경비병들이 화들짝 놀라 경례를 올렸다.

"추, 추웅!"

"남작, 짐은 잠행 중이다."

"헉! 황공하옵니다."

그란달 남작이 경비병으로 위장하고 있는 기사에게 빠르게 쇄도하더니 머리통을 후려갈겼다.

퍼억!

"컥!"

"이런 멍청한 놈아! 내가 그리도 주의를 주었건만!"

"시, 시정하겠습니다!"

"...."

정문의 경비병이 머리통을 맞으면서 욕을 먹고 있었다.

그러니 성문을 통행하는 상인들이나 백성들은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어 몰려들고 있었다.

"그만해라."

"죄, 죄송합니다!"

타로스의 말에 그란달 남작은 바짝 군기가 든 채로 몸이 굳었다.

그란달은 정치의 귀재라고도 불린다.

원래부터 황제파이기도 하였지만, 최근 보이고 있는 황제의 행적 때문이라도 더욱 충성스러운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한바탕 해프닝이 일어난 후에 일행들은 바젠에 입성했다.

척! 척! 척!

바젠에는 경비병들이 줄 맞춰 제식을 보이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이는 단순한 경비병이 아니라 주의를 단단하게 받은 영지의 병사들이 순찰을 하고 있다는 뜻으로도 받아들일 수 있었다.

경비병들이 황제 일행을 발견하자 어색하게 소리를 쳤다.

"크흠! 순찰을 강화하라! 오늘 귀빈께서 오신다!"

"예!"

그란달 남작보다 상급자인 란투스 자작은 이런 영지의 꼴을 보더니 혀를 찼다.

"아이고, 화상아. 아예 폐하께서 오셨다고 광고를 해라. 쯧쯧."

"헤헤, 죄송합니다. 그래도 안전제일이 아니겠습니까?"

이제 황제의 잠행은 소문이 나다 못해서 제국 전체로 그 행적이 퍼지고 있었으니, 과연 이걸 잠행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어차피 이번 방문을 마지막으로 환궁할 생각을 하고 있었고, 대사막으로 들어가는 미친놈들은 많지 않았으니 타로스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문제라면 컨셉을 유지하는 정도라고 할까. 이제 와서 공식 방문을 운운하면 그것도 웃긴 일이었으니까.

"모험가 길드로 간다."

"헤헴, 폐하, 길잡이를 구하시는 것이라면 소신이 자신 있습니다."

"경이?"

"나름대로 직접 대사막으로 군대를 이끄니 지리는 빠삭합니다요."

"대사막을 횡단한 적도 있나?"

"회, 횡단이요?"

그란달 남작은 식은땀을 흘렸다.

대사막을 횡단한다?

그건 미친 짓이다.

대사막은 온갖 몬스터들로 득실거렸고, 초입부만 넘겨도 도저히 인간이 서 있을 수조차 없을 정도의 괴물들이 우글거렸다.

제국이 더 이상 남쪽으로 진출을 하지 못하는 이유도 이런 대사막이 완전히 군대를 차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사막 중심으로 가면 기후는 '따위'라고 불러도 될 만큼이나 강력한 몬스터가 즐비했다.

괜히 대륙 3대 금역일까.

이런 상황에서 황제는 지금 대사막 횡단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 그런 자가 있을지는 의문이 듭니다만...."

"짐은 대사막의 최대 골칫거리인 자이언트 스콜피온을 잡으려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실력 있는 모험가가 필요한 것이지."

'겸사겸사 인재도 구하고.'

타로스는 기왕 잠행을 나온 김에 인재들을 최대한 쓸어 담고자 했다.

#제27화. 대사막(2)

모험가 길드 그란달 지부.

금역이 인접한 지역은 언제나 모험가 길드와 용병 길드가 성행을 한다.

가장 큰 이유로는 영지 내부나 상인들의 의뢰 때문이다.

금역에는 항상 몬스터나 마물들이 넘쳐났으므로 주기적으로 토벌을 한다고 해도 그 비용이 감당이 되지 않는다.

제후의 입장에서는 모험가나 용병들에게 의뢰를 해 놓으면 치안이 안정되는 면이 있었고, 그들이 의뢰를 나갔다가 죽으면 의뢰비를 지불할 필요가 없었기에 이러한 방법을 선호했다.

그란달 남작령이 그다지 발달한 영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모험가 길드가 붐비는 것은 이러한 이유였다.

수많은 모험가들이 건물을 들락거렸다.

바깥의 게시판은 말할 것도 없고, 안쪽은 대기표를 뽑아야 할 만큼이나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역시 큰 의뢰를 맡기는 경우에는 그런 대기표를 뽑지 않아도 된다.

무엇보다.

모험가 길드의 간부들은 영주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또한 황제가 어디로 움직이는지 경로를 계산하고 있었고, 은근히 타로스의 얼굴은 정보를 다루는 자들에게는 잘 알려진 편이었다.

이미 타로스의 행차는 곳곳에 소문이 났다. 무늬만 잠행이지.

그만큼 대파란을 일으키며 제국 내부를 휘젓고 다녔으니, 오히려 알려지지 않는 것이 이상한 일이다.

지부장이 헐레벌떡 나타나 일행을 맞았다.

"아이고, 의뢰인님! 어서 오십시오!"

또다시 한 편의 희극이 펼쳐졌다.

황제는 잠행을 하고 있는 중이었으므로 철저하게 그 사실을 숨긴다, 라는 콘셉트.

지부장은 타로스가 황제임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의뢰인이라고 치켜세워 주었다.

모험가 길드 내부에 정적이 흘렀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제는 황제의 특징을 알아보았다.

권태로운 표정과 무심한 얼굴. 여기에 기사들이 확실한 일행들까지.

"그대가 지부장인가?"

"예, 예. 저희 지부를 방문해 주셔서 영광입니다요."

"의뢰를 하려 한다."

"어떤 의뢰라도 받아들이겠습니다!"

"대사막을 손바닥 보듯 하는 길잡이를 구한다. 의뢰금은 1만 골드다."

"...!"

어마어마한 금액에 장내가 술렁거렸다.

그러나 누구도 감히 나서지 못했다.

의뢰금이 상상을 초월하는 만큼이나 위험한 일임이 확실하였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타로스의 의뢰는 상상을 초월했다.

"의뢰의 목표는 대사막의 횡단이다. 정확하게는 대사막 중심부에 도달하는 것이지. 맡을 자가 있는가."

"크흠."

"어찌 대사막을...."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의뢰였다.

대사막은 단순한 금역이 아니다. 무려 대륙 3대 금역으로 통하는 곳이었고, 설사 사막의 원주민이라고 해도 정해진 구역을 제외하면 절대 함부로 나다니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목숨을 잃기 십상이었다.

온갖 몬스터와 마수로 우글거리지만 그중에서 가장 심각한 피해를 주는 존재는 바로 다크 웜이다.

길이 30미터. 때로는 무리를 지어 다니며 레벨은 90에 이른다.

영주가 직접 나서야 한 마리를 간신히 처리할 지경이었기에 모험가들은 토벌 지역으로 지정된 구역만 돌아다녔다.

한참의 시간이 흘러도 임무를 수행할 모험가는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단 한 사람만이 고민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이제 막 모험가가 된 것처럼 보이는 젊은 모험가였다. 갓 성인이나 되었을까.

척!

고민하던 젊은 모험가가 손을 번쩍 들었다.

말끔한 인상에 매우 잘생긴 청년이었다. 물론 신이 빚은 완벽한 외모의 타로스에는 비하지 못하겠지만 그만큼 인상적인 얼굴이었다.

타로스는 그가 누군지 잘 알고 있었다.

'미래의 대상인 라몬 베이커스.'

대상인 베이커스 가문의 막내였으며 후계자 경쟁에서 밀려나 소수의 인원만 이끌고 상행을 나선 상태다.

물론 상계는 애송이가 발을 들일 만큼 만만한 곳이 아니었고, 순식간에 개털이 되어 모험가로 전락했다.

상행에 필요한 종잣돈이 필요한 라몬이라면 분명히 의뢰를 받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대의 이름은?"

"라몬이라고 합니다!"

"이런 일을 하기에는 지나치게 젊어 보이는데."

"아닙니다. 직접 대사막을 횡단해 본 적은 없지만, 저의 가문에서는 비교적 안전하게 대사막 횡단이 가능한 루트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그대의 가문이라."

"저는 라몬 베이커스라고 합니다."

"오오!"

그에게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몰렸다.

제국 최대 상단을 운영하는 베이커스 가문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타로스는 무심하게 라몬을 바라봤다.

"따라나서라."

라몬은 휘하의 상인들과 함께였다.

물론 그들 역시 빈털터리였기에 모험가로 전직(?)을 한 상태다.

언젠가는 종잣돈을 모아 다시금 상행을 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중이었다.

험한 일을 해야 많은 돈을 받는다는 것을 알기에 대사막에서 나오는 의뢰를 수행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있어 1만 골드라면 한 방에 엄청난 자금을 벌어들일 수 있는 기회였다.

[달이 머무는 대지]

이름이 인상적인 여관에서 일행은 다시 모였다.

오늘은 늦어 대사막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오랜 시간 여행을 해 왔기에 하루 정도는 푹 쉬고, 물자를 보충할 시간을 가져야 하기도 했다.

여전히 타로스는 잠행을 표방하고 있었고, 여관을 고집했다.

덕분에 그란달 역시 이곳에 낄 수밖에 없었고, 바깥에는 경비병들이 철저하게 감시를 하고 있었다.

식사를 하고 맥주를 마셨다.

보리가 나지 않는 그란달 영지였지만 맥주 맛은 일품이다.

타로스는 500cc를 단숨에 들이켠 후 라몬에게 물었다.

"그대는 두렵지 않은가."

"그래야 합니까?"

"대사막은 모험가들에게 공포의 대명사일 터. 목숨을 걸어야 한다."

"폐하와 함께하는데 별일이라도 있으려고요."

"오호."

기사들의 눈동자가 커졌다.

하지만 그들 역시 반쯤은 포기했다.

처음에는 잠행으로 시작하였지만, 이제 황제의 행보가 곳곳에 소문이 나 있었다. 모르는 게 이상할 지경이다.

이리저리 난리가 난 상태였지만 타로스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이미 구할 것은 다 구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황실 기사단도 함께하고, 제후들께서도 가시는데 차라리 다른 의뢰보다 낫죠."

"똑똑하군."

"상계에서 살아남으려면 눈치가 빨라야 하거든요."

라몬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홀로서기를 위하여 험한 일도 마다하지 않는 젊은이.

지금이야 가진 돈이 다 털려서 제국을 떠돌아다니고 있었지만 스토리가 중반까지만 흘러가도 그는 대상인으로 성장한다.

그때가 되어 제국 상단을 이끌라고 해 봤자 영입하기가 힘들다. 하지만 지금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이번 의뢰는 반드시 수행되어야 한다. 그 이후에 네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주어지지."

"폐하의 선택지라니.... 벌써부터 기대가 되네요."

"하나는 1만 골드만 받고, 다시 대륙을 떠돌아다니는 것."

"두 번째는...."

"둘째는 제국 상단으로 들어오는 것."

"제가... 제국 상단에 말입니까?"

"성과제이니 승진이 빠를 것이다. 더욱이 지금은 전쟁을 앞두고 있지. 좋은 경험이 될 터."

"으음."

라몬의 입에서 침음이 흘렀다.

지금의 상황에서 갑은 타로스였다.

라몬이 만약 전자를 선택하면 조금 아쉽지만 다른 인재를 찾아서 영입하면 된다. 하지만 라몬에게 두 번 다신 없을 기회였다.

제국 상단을 운영한다?

곧 있으면 제국은 국토가 50%나 넓어진다. 그리고 전쟁은 끊이지 않을 것이다.

국토가 넓어지면 제국 상단의 규모도 확장된다. 어마어마한 자금이 오가는 것은 덤이다.

"한 번 생각해 보도록."

제안과 동시에 라몬은 생각에 잠겼다.

밤이 되자 기온이 급격하게 떨어졌다.

낮까지만 해도 숨이 턱턱 막힐 정도로 건조하고 더웠지만, 밤이 되자 공기는 빠르게 식었다.

이건 사막이 가지고 있는 특징이라고 봐야 한다.

공기는 더 좋아진 느낌이라 타로스는 여관의 정원을 산책하고 있었다.

"폐하."

그란달이 허리를 숙이며 다가왔다.

순간적으로 검을 뽑으려 하였던 레베카가 다시 검집에 검을 집어넣는다.

"무슨 일이냐."

"긴히 드릴 말씀이 있사옵니다."

"할 말이 있으면 하거라."

"다름이 아니라.... 이번 기회에 대사막을 토벌하였으면 하옵니다. 영지군을 동원하길 청하옵니다."

그란달 남작은 매우 진지한 얼굴이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간신배 같은 표정이더니, 이렇게 진중해졌다.

하긴, 귀족이 가면을 쓰는 것이야 흔한 일이다. 기분이 나쁠 이유도 없다.

그보다는 토벌에 대해 생각해 봤다.

"잠행이 아니라 공식적인 행차로 토벌을 원하는 것이로군."

"곧 전쟁이옵니다. 저는 1만의 병력으로 원정하는 것도 힘이 드옵니다. 폐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면 안심하고 전쟁을 수행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일리가 있군."

라몬은 다시금 허리를 굽혔다.

어차피 가는 길에 모든 몬스터를 때려잡으려 했다. 다크 웜이고 뭐고 그냥 다 쓸어버리면 그뿐이다.

제후가 둘, 기사단장과 황실 기사단, 그리고 대마도사까지 함께하고 있었고, 최악이라고 해도 타로스가 나서면 해결된다.

영주라면 이런 기회를 놓치면 안 된다.

그란달은 황실에 충성하는 황제파 인물로, 국경을 맡은 만큼이나 신경을 써 주긴 해야 한다.

"짐의 잠행도 여기까지인 듯하구나."

"헤헤, 감사드립니다!"

"경은 영지로 돌아가 병력을 준비하라. 내일 오전까지 준비할 수 있겠느냐?"

"물론입지요. 그렇지 않아도 군사 훈련을 하고 있었죠."

"가라."

척!

그란달은 군례를 취했다.

타로스는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날 아침.

영지가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영지 내 군사들이 움직이며 물자를 실었고, 낙타를 준비하는 등 대사막 원정 준비를 했다.

영지민들은 아직 토벌 시즌도 아닌데 군대가 1만이나 출병을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런 가운데 소문이 돌았다.

황제가 소수의 인원을 이끌고 입성하였다는 것.

드래곤을 죽이고 여러 마경의 네임드 보스들을 죽여 후방을 든든하게 만들었다.

그런 황제가 대사막 최대의 골칫거리인 자이언트 스콜피온을 처리하기 위하여 방문한 것이다.

황제가 제국 내의 문제를 뿌리 뽑기 위해 잠행하고 있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져 있는 상태였기에 그리 큰 충격은 없었다.

해가 뜰 무렵부터 영지민들이 밖으로 삼삼오오 나왔다.

병사들은 최후방에서 출발하여 대로를 가로지르고 있었고, 그 뒤에 화려한 백마를 탄 황제가 등장했다.

"황제 폐하이시다!"

"와아아아!"

황제를 본 백성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세제를 혁파하여 민심을 잡은 황제는 백성들에게 있어 더 이상 공포의 대상이 아니었다.

#제28화. 대사막(3)

황제의 뒤를 백성들이 따랐다.

이 진귀한 광경에 그란달은 혀를 내둘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태업을 일삼던 황제다.

수십만에 이르던 중앙군은 15만까지 축소되었고, 기사단도 겨우 3개만 남아서 명맥을 유지했다.

흉작만 들었다 하면 황제에 대한 원성이 자자하였는데, 세제 개혁을 단행하였다는 이유만으로 이렇게 인기가 높아지는 것을 그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휘유, 폐하의 인기가 대단하네요."

"쯧쯧, 그야 당연한 일 아닌가."

현자이자 대마도사로 불리는 그랑카인 후작이 혀를 찼다.

"어째서요?"

"백성들의 마음은 갈대와 같은 것이지. 얼마 전까지 폐하를 원망했다 하여도 지금은 살 만하지 않은가. 자신들의 바람이 이루어졌다고 여기는 탓이지."

"이해가 잘...."

"보게. 세제 개혁이 단행됐지. 그건 앞으로도 혜택을 볼 수 있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오랜 염원이 이루어졌고, 앞으로도 세제가 꾸준히 유지된다면 인기가 떨어질 일이 없다는 뜻인가요?"

"이제야 머리가 좀 깨이는가? 게다가 폐하께서는 제국의 식량난을 해결하시고자 칼을 뽑았네. 인기가 없을 수 없지."

"헤헤, 그런 거였군요."

그제야 그란달은 인기의 이유를 깨달았다.

백성을 위하는 애민 정신이 직접 생활에 영향을 미치자 지지율이 높아진 것이다.

제후들이야 두려움 때문에 황제에게 대놓고 불만을 표시하지 못하였고, 황제는 그런 두려움을 이용한다.

실로 대단한 정치적인 수다.

영지를 빠져나가 1만의 병력이 사열했다.

나름 몬스터들과 혈투를 벌이던 병사들이었기에 타 영지의 병력보다 정예하다. 실전이 시도 때도 없이 벌어지니 그렇다.

저벅저벅.

"...."

황제는 천천히 성벽을 올랐다.

빛보다 빠르게 움직인다는 말을 들었는데, 저렇게 움직이는 것은 원래 황제의 성격 자체가 느긋하다는 뜻이었다.

성벽 위로 올라간 황제는 병사들과 백성들을 굽어보았다.

"지금까지 고생했다. 자이언트 스콜피온과 다크 웜들은 사라질 것이다."

"와아아아아!"

백성들은 물론이고 병사들까지 환호성을 내질렀다.

대사막의 공포는 자이언트 스콜피온과 다크 웜들 때문이다. 그 밖의 몬스터들은 그다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황제는 영지의 문제점을 뿌리 뽑아 버릴 것을 선언했다.

대사막으로 진군을 시작했다.

1만에 달하는 병력이 토벌을 시작하자 몬스터들이 대사막 중심부 쪽으로 사정없이 밀려났다.

그 이유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우선 마법사 전력이 압도적이었다.

영지의 마법사들도 있었지만, 대규모 웨이브마다 그랑카인 후작이 연계 마법으로 죄다 쓸어버리니 몬스터들이 버틸 수가 없었던 거다.

여기에 더하여 제후가 둘이나 참전했다.

란투스 자작이 활을 들면 웬만한 몬스터들이 죄다 죽어 나갔고, 그란달도 레벨이 90이나 되었기에 직접 전선에서 검을 휘둘렀다.

3일을 진군하여 토벌지 경계 지역에 이르렀다.

다시금 이곳에서 웨이브급의 몬스터들과 마주하였는데 거대 전갈들을 그란달이 거침없이 쓸어버리고 있었다.

'제후는 제후인가.'

제후들 중에서는 최약체라지만 그 역시 괴물급의 인물이었다.

전투 자체를 즐기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사막 지형을 미친 듯이 헤집으며 거대 전갈의 머리를 박살 내 놓았다.

병사들은 이런 전투가 익숙한지 방패로 공격을 막고 창을 내질러 몬스터의 급소를 단숨에 꿰뚫었다.

그러고 보니 병사들의 레벨도 타 영지보다 높았다.

라키우스 LV. 65

그란달 영지군 십인장

십인장급의 병사 레벨이 65다.

영지 기사들의 레벨은 평균 80으로, 조금만 더 높으면 황실 기사에 지원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아무래도 이건 지속적인 토벌로 경험치를 획득했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크하하하! 다 죽어라!"

쿠아아앙!

검강들이 이리저리 뿌려졌다.

미친 듯이 검을 휘두르던 그란달의 전투가 멈춘 것은 몬스터들이 죄다 물러났을 때였다.

그는 온몸이 거대 전갈의 체액으로 뒤덮인 채로 보고했다.

"폐하! 적들을 몰아냈습니다!"

"더 깊숙이 진군한다."

"예! 폐하의 명령이다! 진격의 나팔을 불어라!"

뿌우!

군대 전체가 자신감이 넘쳐흐른다.

이런 최악의 기후에서도 전투력을 발휘하는 걸 보니, 곧 있을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우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 드는 타로스였다.

거침없는 진격.

영지군은 일주일이나 미친 듯이 진격했다.

지금까지는 타로스가 직접 나설 필요가 없었다.

이 정도 전력이면 웬만한 영지는 죄다 쓸어버릴 수 있었고, 군사력이 약한 소국이라면 수도를 최단 시간 내에 함락시킬 수 있을 정도였다.

병사들의 말에 따르면 이것이 지금까지 진격한 거리 중 최장이라고 한다.

라몬의 안내를 받으며 진격하길 일주일 만에 척후병이 위협적인 보고를 해 왔다.

"폐하! 다크 웜 20마리가 빠르게 다가오고 있는 중입니다!"

"20마리가 확실한가?"

"예! 확실합니다!"

웅성웅성.

주변이 술렁거렸다.

다크 웜 20마리.

개체 하나하나의 레벨이 90에 이르렀고, 이는 그란달 남작과 같은 수준이다.

그란달이 일정 거리를 넘어서면 진격을 멈추었던 것도 이 다크 웜의 존재 때문이었다.

길이가 30미터에 달하는 놈들이 떼로 몰려다니면 아무리 병력이 많아도 무용지물이다. 도저히 승리할 수가 없었다.

"폐하! 퇴각해야 하옵니다!"

그란달 남작이 다급하게 말했다.

그러나 수뇌부 누구도 퇴각을 논하지는 않는다.

드래곤조차 죽여 버린 타로스가 다크 웜 20마리 정도에 당할 것이라 여기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랑카인 후작이 그에게 호통을 쳤다.

"자네, 지금 뭐 하는 짓인가! 폐하께서는 드래곤조차 어찌할 수 없는 무적의 존재시네. 고작(?) 다크 웜 20마리에 당하실 것 같은가!"

"아니 그게.... 다크 웜은 하나하나가 제후급에 달하는 놈들이거든요. 그런 놈들이 20마리라면...."

날씨가 덥기도 했지만 긴장 때문인지 그란달의 이마에서 땀이 주르륵 흘러 턱에 괴였다.

다크 웜은 대량 살상이 가능한 존재다.

거대한 덩치만큼이나 엄청난 먹성을 자랑하였고, 만약 병사들 사이로 파고들면 그야말로 군대 자체가 풍비박산이 난다.

군대를 잃은 제후는 그저 뜯어 먹기 좋은 먹잇감에 불과했다. 이러한 사실을 알기에 타로스는 그랑카인을 만류했다.

"그만해라. 제후의 입장에서 보면 결정이 쉽지 않은 일이지."

"하오나 이 무지한 녀석이...."

"그란달 남작은 여기서 군대를 잃으면 모든 것을 잃고 말지. 전쟁에 나설 밑천이니."

"제 생각이 짧았사옵니다."

그랑카인이 물러났다.

쿠구구구구!

그사이, 대지가 진동하고 있었다.

저 멀리 다크 웜이 모습을 보이고 있었는데, 가로 지름이 무려 3미터다. 길이는 30미터가 넘었다.

그런 괴물들이 떼를 지어 몰려오니 병사들의 사기는 크게 떨어지고 그란달은 더욱 위축되었다.

"모두 물러나라. 최대한 후방으로 물러나고 짐의 명령을 기다리도록."

"황명을 받드옵니다!"

"다들 일정 거리를 벌려라!"

어차피 저런 속도로 달려온다면 지금 퇴각한다고 해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오히려 각개 격파당하여 모조리 잡아먹히고 말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은 황제를 믿는 수밖에 없다.

타로스는 나름대로 계산을 했다.

'초공간 이동으로 헤집으며 사방으로 파워드 킬을 네 방 정도 뿌려야겠다.'

지금 타로스의 마력은 1,000.

파워드 킬 여섯 번과 앱솔루트 배리어 두 번을 사용할 수 있는 마력이다.

파워드 킬은 10m 내의 적을 모조리 분쇄하는 효과가 있었다.

그 말은 다크 웜이 아무리 길어도 닿기만 하면 온몸이 분해된다는 뜻이었다.

다행히 놈들은 촘촘하게 몇 덩어리를 이루어 오고 있었다. 정확하게만 뿌리면 한 번에 네 마리씩도 처리할 수 있었다.

혹시나 놈들이 다 죽지 않는다 해도 여분으로 두 방은 사용할 수 있었으니, 충분히 척살할 수 있을 거라는 계산이 나온다.

콰과과과!

천지가 뒤집히는 광경이었다.

타로스는 담담하게 서 있었으나 파도와 같이 밀려드는 괴물들의 모습에 조금은 위축되는 것을 느꼈다.

'가까이서 보니 장난이 아니로군.'

하지만 타로스는 뒤로 물러나지 않았다.

두려움은 불굴의 의지가 잡아 주고 있었다.

-꾸에에엑!

-끼에에엑!

지옥의 굼벵이들이 떼로 몰려드는 느낌.

사막의 모래들은 미친 듯이 요동쳤고, 한 지역 전체가 꿈틀거리며 무간지옥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타로스는 다크 웜들 사이로 뛰어 들어갔다.

황제가 다크 웜들에게 쇄도했다. 빛과 같은 속도로.

기사들이나 레벨이 높은 병사들도 제대로 볼 수가 없을 정도의 움직임이었다. 그나마 제후들은 황제의 움직임을 알아보았다.

그란달은 황제가 빛과 같이 움직이자 눈을 부릅떴다.

"지금 움직이신 건...."

"내 말하지 않았나. 폐하께서는 내가 쏜 화살을 쫓아갈 정도로 빠르시다."

"와, 이야기만 들었는데 직접 보니."

"어떤가?"

"황제께서는 황제이실 수밖에 없군요."

강함을 최고로 치는 제국에서 그란달의 평가는 극찬이었다.

인간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빠름.

황제는 다크 웜들의 중심으로 이동하더니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오색의 찬연한 빛을 뿌렸다.

쿠아아아앙!

"...!"

순간 이동을 한 것처럼 잔상만 남기며 이동한 황제는 몇 마리씩 다크 웜을 사냥하기 시작했다.

이어지는 경악스러운 장면.

수십 미터에 이르는 다크 웜들이 통째로 박살 나 터져 나갔다.

후둑. 후두두둑.

동시에 사막 위에 녹색의 피들이 떨어져 웅덩이를 이루었다가 모래 속으로 흡수되었다.

벌써 열 마리 이상이 터져서 고깃덩어리가 되었다.

말도 안 될 정도로 빠르게 다크 웜들이 정리되자 그란달은 지금 꿈속에 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제가 지금 보고 있는 장면이 무엇입니까?"

"폐하의 행차이시지."

"아니, 인간에게는 한계가 있는 법인데, 저렇게...."

"허무한가?"

"그럼요. 지금까지 다크 웜을 두려워한 세월이 수십 년입니다. 그런데 저런 식으로 처리될 수 있다는 사실은 처음 알았습니다."

"폐하께서 움직이셔서 해결되지 않는 난제는 존재하지 않는다."

란투스의 심장이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아니, 그 광경을 보고 있던 모든 사람들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숨이 가빠 오고 눈이 충혈된다.

이건 저만큼 대단한 사람을 따르고 있다는 자부심이다.

도파민이 뇌에서 미친 듯이 분비되었다.

콰아아아앙!

결국 모든 다크 웜들은 육편 조각이 되어 떨어져 내렸다.

꽤 잔인한 장면이었지만, 죽음을 일상처럼 보고 살아온 군인들에게 있어서는 그 무엇보다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그 가운데 황제는 오연하게 서 있었다.

병사들이 무릎을 꿇고 군례를 올렸다.

"황제 폐하 만세!"

"황제 폐하께 영광을!"

#제29화. 대사막(4)

타로스의 심장도 뛰고 있었다.

실전에서 초공간 이동을 쓴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어마어마한 덩치를 가진 놈들이 타로스를 집어삼키려 하였을 때, 순간적이지만 위압감을 느꼈다. 태어나서 그런 광경은 겪어 본 적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스킬의 영향 때문인지 마음은 차분해졌고 차례대로 파워드 킬을 뿌려 한 방에 정리했다.

아마도 타로스의 마력이 낮았다면 군대는 전멸을 당했을지도 모른다.

흥분은 빠르게 가라앉았다.

병사들은 광분하며 만세를 외쳐 대고 있었으며, 두 제후들도 마찬가지였다.

대마도사인 그랑카인 후작 역시 다소 흥분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타로스가 보인 힘은 확실하게 각인되었다.

저벅저벅.

그리고 천천히 타로스는 걸어왔다.

겨우 2업밖에 하지 못하였다고 한탄하면서.

'더욱 짜졌군.'

앞으로 레벨 업이 힘들어질 것이라고는 예상했었다. 그러나 이 정도까지일 줄은 몰랐다.

대사막의 네임드 보스인 자이언트 스콜피온을 잡는다고 해도 1업에서 2업 정도가 한계이지 않을까 싶다.

타로스는 이번에 얻은 보너스 스탯을 체력에 몰아넣었다.

"폐하...?"

그는 그랑카인 후작 앞에 섰다.

영지의 마법사들과 그랑카인의 시선이 황제에게 몰렸다.

"핵을 추출할 수 있겠느냐."

"그것이... 해 보겠사옵니다."

황제의 명령에 마법사들은 다소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매우 처참했다.

수십 미터가 넘는 괴물 20마리가 갈기갈기 찢겨 있었으니까. 일부의 핵은 완전히 파괴되었을 것이며, 일부의 핵은 모래 속으로 파묻히기도 했다.

그렇다고는 해도.

다크 웜의 핵이라면 고가에 거래될 것이 확실하다. 마법사들이라면 실험에 사용할 수도 있었으며, 마도구를 제작하는데 쓰일 수도 있다.

잠시 진격은 멈추었고, 마법사들은 팔을 걷어붙였다.

군대의 보급은 넉넉했으므로 급하게 진격해야 할 이유가 없다. 그보다는 고가의 핵을 추출하는 편이 이익이었다.

사막에 어둠이 내렸다.

오후 내내 마법사들은 고대 유적을 발굴하듯 모래를 샅샅이 뒤졌고, 결국에는 10개의 핵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중 4개는 반파, 2개는 중파, 4개만이 온전했다.

추산 가치는 대략 150만 골드.

웬만한 영지의 한 해 운영 자금이 500만에서 1,000만 골드인 것을 생각하면 어마어마한 가치라고 할 수 있었다.

마법사들의 발굴이 끝나는 시점에서 척후병이 돌아와 군대를 오아시스로 인도하였다.

발견된 오아시스는 사막 한가운데에 형성된 것이라고는 할 수 없을 정도의 크기였으며, 나름 대사막의 지리에 통달한 아몬은 대단한 발견이라며 호들갑을 떨었다.

"폐하께서는 새로운 실크 로드를 개척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실크 로드라."

"저희 상인들 사이에서는 대사막을 가로지르는 길을 실크 로드라 하죠. 남부의 특산품이 비단이니까요."

대사막의 상행 로는 개척하기가 지극히 어렵다.

상행에 성공한다면 막대한 이익을 남길 수 있었으나, 실패한다면 모든 것을 잃는다.

대사막으로 상행을 나가는 행위는 목숨을 건 도박에 가까웠고, 수많은 상단들이 사막 위에서 목숨을 잃었다.

라몬이 속한 베이커스 가문에서 대사막의 지도를 제작하였지만 이 역시도 비교적 덜 위험한 지역만 표시되었을 뿐이라고 한다.

라몬이 말을 이었다.

"대사막의 문제라면 들끓는 몬스터들이겠지만, 역시 오아시스의 부족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생명과 직결된 문제이기 때문이죠. 몬스터들이야 마주치지 않을 수 있지만 오아시스가 없으면 말라 죽고 맙니다."

"몬스터도 물을 마시기 때문일 테지."

"정확한 분석이시군요."

"그나마 몇 개 있지도 않은 오아시스도 몬스터가 점령하였으니, 대사막을 횡단하는 행위는 가문의 사활까지 걸어야 하는 지독한 상행이었을 터."

"예, 맞습니다."

"남부 대륙과 교역을 하면 어떤 품목들을 거래하나?"

"비단과 향신료, 상아, 도자기, 금과 은 등입니다. 제국에서는 보석과 마법 스크롤, 마도구, 질 좋은 무구 등을 가져다가 팔죠. 실로 막대한 이문이 남는다고 들었사옵니다."

"남부 대륙의 문명 수준이 그다지 발달하지 않은 모양이군."

"문명 수준은 모르겠지만 군사학적으로는 꽤 뒤처진 것으로 보입니다."

타로스는 흥미로운 표정이었다.

원작에서 대륙 남부는 아예 등장하지 않는다.

가끔 상인들이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상행을 한다고만 설정하였을 뿐, 게임 내에서 중요한 스토리는 하나도 등장하지 않았다.

타로스가 황제가 아닌 게임 속의 플레이어였다면 결코 남부로 눈을 돌리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황제이기에 관심을 갖는다.

"만약 짐이 대사막을 개발한다면 어찌 되겠나?"

"대, 대사막을 말씀입니까!?"

"그렇다."

"그, 그리된다면 개척 시대가 열릴 것으로 예상됩니다. 완전히 대사막이 정벌되고 오아시스를 따라 도시가 축조된다면 상인들이 몰리고 순식간에 부를 쌓을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추후 남부 대륙을 정벌할 수 있는 교두보가 되지 않을까요?"

"그래, 그렇지."

두 제후들과 기사들은 눈을 반짝였다.

대충 이야기만 들어도 부유한 지역이 대륙 남부였다. 그에 비하여 군사력은 미약하기 짝이 없다.

강철로 재련한 무구가 없어 극히 일부라도 제국에서 수입하여 쓰는 형편이었고, 마법은 아예 발달하지 않은 것 같다.

그렇다면.

제국의 칼날은 언젠가 대륙 남부로 향한다.

다만, 약간의 문제를 라몬이 지적했다.

"대사막을 개발하는 일은 그 인력도 인력이지만 막대한 자본이 투입되는 일이죠. 사막에 관도를 깔고 곳곳에 초소를 배치하며 순찰하여야 합니다. 대규모 몬스터 웨이브를 방어하기 위하여 군사 도시 성격을 가진 영지도 필요할 것이며, 최소한 5만 이상의 병력이 상시 주둔해야 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꽤나 통찰력이 있군."

"미천한 상인의 생각일 뿐입지요."

"그란달 남작."

"넵, 폐하!"

그란달이 호명 즉시 타로스의 눈앞에 부복하였다.

만약 대사막 개척 시대가 시작되면 가장 이익을 볼 자가 바로 그란달이었다.

대사막 최전선이며 전진 기지 성격의 도시들을 보유하고 있었으니, 막대한 물자가 그란달 영지를 타고 흐를 것이다.

그에 따른 이익은 측정 불가다.

"경이 알아봐라. 척후를 보내 토벌할 지역들을 선정하고, 자력으로 할 수 있다면 토벌하도록 하라."

"황명에 따르옵니다!"

"몇 년에 걸쳐 제국의 적들을 격파하고 흡수한 후 대사막으로 눈을 돌릴 것이니."

대략적인 계획이 이 자리에서 수립되었다.

제후들은 물론 모든 사람들이 진지하게 경청하였다.

황권은 강력해지는 중이었고, 전쟁이 끝나면 절정에 이를 것이다. 그렇다면 황제의 의지에 따라 대사막 개척이 시작될 것은 자명했다.

군주의 말에는 허언이 없음을 모두가 알고 있기에 사막에서 운치 있게 대화를 나누는 지금의 순간들이 미래에는 실현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대사막 위험지에 들어선 지 일주일.

그동안 1만의 군대는 수많은 몬스터들을 격파했다.

거대 개미굴을 청소하였고, 바실리스크의 둥지를 습격하여 박살을 냈다. 하피의 거주 구역에 쳐들어가 완전히 쓸어 내기도 했다.

1만의 군대가 쓰러지지 않고 버티고 있는 것은 워낙에 제후들과 기사들의 실력이 출중하기도 했지만, 사냥을 하여 나온 정수들과 부산물을 분배하겠다는 황제의 선언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번 원정에 참여한 병사들은 이대로 무사히 귀환하기만 해도 상당한 돈을 만질 수 있을 것이다.

대사막을 돌아다니다 보니 모르던 정보들을 알게 된 것도 큰 이익이었다.

생각보다 대사막에는 오아시스들이 많았다.

신기하게도 숲이 조성되다가 만 곳도 있었고, 그 주변에 야생 동물들이 살기도 했다. 식량을 최대한 아끼면서 자급자족을 하였기에 아직까지는 무리 없이 버티고 있었다.

다시 일주일이 흐르고 나서야 대사막 중심부로 추정되는 곳에 도착했다.

사방이 모래 언덕으로 둘러싸인 곳에 형성되어 있는 분지.

분지에는 숲이 형성되어 있었으며, 땅은 꽤나 비옥해 보였다.

호수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의 거대한 오아시스가 중앙에 자리 잡고 있었고, 대사막과는 다르게 선선한 바람까지 불었다.

언덕 위에서 분지를 내려다보던 라몬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저깁니다! 분명합니다."

"자이언트 스콜피온이 서식하는 곳이 맞나?"

"오래전 문명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저 거대한 피라미드를 보십시오."

타로스의 눈이 피라미드로 돌아간다.

뜬금없이 대사막 중심부에 피라미드가 있다?

이런 비옥한 땅이 대사막 중심에 있는 것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이곳에서 유일하게 타로스만 이해했다.

'내가 설정하기는 했지만 신비롭기는 하군.'

이는 자연적인 법칙을 무시하는 지형이었다.

오직 설정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창조주인 기획자가 애초에 기획을 그리하였기에 이곳에 거대한 오아시스와 숲, 비교적 선선한 기후가 존재할 수 있었다.

이집트 문명 비슷한 유적지들까지.

심지어 스핑크스가 존재한다는 것은 이 지역이 그저 타로스의 입맛에 따라 기획된 곳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제 곧 자이언트 스콜피온이 모습을 드러내겠는데.'

네임드 보스들은 마력에 반응한다.

적이라고 생각되는 모험가들이 등장하기만 해도 미리 나와서 대기하는 성향을 보인다.

지금처럼 말이다.

쿵! 쿠구구궁!

약간 진동이 일어나며 모래 언덕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거대한 피라미드에서 상상도 못 할 정도의 덩치를 가진 자이언트 스콜피온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키가 족히 30미터는 되었고, 몸체의 길이는 50미터가 넘었다.

하늘로 치솟은 꼬리에서는 뇌전이 흐르고 있었으며, 인간의 몸체와 전갈의 몸통을 가졌다.

양손에는 삼지창을 쥐었을 뿐만 아니라 천 마리 이상의 거대 전갈들이 모습을 드러내 우글거렸다.

타로스는 놈의 레벨을 확인했다.

자이언트 스콜피온 LV. 98

대사막의 왕

아주 짧고 강렬한 설명이다.

놈은 대사막의 왕으로 군림하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정벌된 적이 없었다.

설정상으로는 이곳의 문명이 자이언트 스콜피온 때문에 멸망하였고, 수천 년을 살아오며 힘을 축적해 왔다.

병사들은 물론이고 모든 사람들이 자이언트 스콜피온을 바라보며 압도되었다.

"뭐 저런 괴물이...."

제후들은 혀를 내둘렀다.

란투스 자작이나 그란달 남작이나 도대체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러나 기사단장이나 기사들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드래곤에 비한다면 어린애나 다름없군요."

"...!"

로빈슨의 말에 제후들은 눈을 크게 떴다.

그러고 보니 황제는 드래곤을 죽였다. 그것도 현신을 한 상태로 완전히 박살 내 오체를 분시해 버렸다.

그런 황제라면, 틀림없이 죽일 수 있다.

타로스는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저 녀석만 처리하면 비단길이 열린다는 말이군."

#제30화. 대사막(5)

고대 유적지 피라미드 근처에서 서식하고 있던 몬스터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그 숫자는 점차적으로 불어나 이제는 2천 마리에 다다르고 있었다.

이에 타로스는 무턱대고 쳐들어가는 것은 여러 가지 문제를 발생시킨다고 봤다.

즉석에서 근처 지도가 제작되었다.

레인저 출신의 척후병을 풀어 상세 군사 지도가 만들어졌고, 수뇌부는 이를 가지고 작전 회의를 했다.

촤륵!

지휘부 막사 안에서 타로스는 상세 지도를 폈다.

"거대한 분지의 형태이며, 출구는 두 개다. 깎아지른 절벽이 사방을 둘러싸고 있다. 외부에서 내부를 공격하기에는 꽤나 쉽게 되어 있구나."

"점령하고 나면 절벽에 축조하여야 도시의 기능을 할 것 같사옵니다."

"경이 정확하게 보았다."

란투스 자작은 이런 식으로 성벽을 축조한 경험들이 많았다.

그의 영지는 광산 도시였으며, 일부는 노천 광산도 존재한다.

광산을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는 해당 도시의 문제점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였다.

아직 점령조차 하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점령 이후를 고려하고 있었다.

"피라미드는 추후 손을 보아 영주성이나 내성으로 활용할 수 있을 것 같사옵니다. 또한 버려진 성터들이 다수 존재하니, 재건은 어려운 일이 아닌 줄 아옵니다."

"최대한 성터나 건물들에 타격을 주지 않는 방향으로 적들을 상대하되, 전멸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정벌이 문제가 아니다.

타로스는 근처 몬스터가 모두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한 번에 쓸어버리기로 작정했다.

외부 성터가 무너져 있는 이상 바깥에서 내부를 공격하기에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모조리 척살한다.

그래야만 그란달 남작의 부담이 덜어질 것이며, 추후 막대한 자금을 투입하여 도시를 재건할 때에도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출입구는 두 개.

몬스터들이 절벽을 타고 올라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병력을 효율적으로 배치한다.

타로스는 나무를 깎아 만든 말들을 배치시켰다.

"로빈슨 단장."

"예, 폐하."

"경이 제1군을 이끌고 동쪽 출구를 막는다. 황실 기사단 30명 중 15명과 남작령의 기사 50명, 병력 2천으로 철저하게 막아라."

"존명!"

"그란달 남작."

"넵, 폐하!"

"경은 황실 기사단 10명과 영지의 기사 30명, 그리고 병력 1천으로 동쪽 입구를 막아라. 할 수 있겠나?"

"맡겨만 주시면 무조건 막겠습니다!"

남작에게 이 정도 병력만 준 것은 서쪽보다 동쪽의 입구가 좁았기 때문이다.

다만, 이리되면 병목 현상이 일어날 수 있었으므로 동쪽 절벽 위에 다수의 궁병을 배치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6천의 병력을 남은 기사들이 지휘하여 분지를 포위한다. 분명히 절벽을 타고 올라오는 몬스터들이 있을 것 같다는 판단에서다.

"그랑카인 후작."

"하명하십시오."

"경은 마법사단으로 연환계 마법을 사용, 중앙을 타격한다. 단, 그것은 짐이 자이언트 스콜피온을 죽이고 난 이후가 되어야 한다."

"폐하께서 빠져나오실 시간은 어느 정도로 계산해야 하겠습니까?"

"바로 사용해라."

"가, 가능하시겠사옵니까?"

"짐은 죽지 않는다."

"크흠.... 알겠사옵니다."

모두에게 명령을 하달하였고 이제 실행만 남았다.

아직 해가 중천에 떠 있는 시각.

지금도 사막의 몬스터들이 모여들고 있었기에 적들이 완전히 전투 준비를 마친 후에 쳐들어갈 것이다.

몇 시간 정도는 여유가 있었기에 병사들에게는 간편식을 나누어 주고 전투를 준비하라 명령을 내렸다.

쉬쉬쉬식!

키룩! 키루루룩!

절벽 위의 위장 막사.

척후병은 전진 배치되었고, 간간이 기사들이 순찰을 했다.

모래에 반쯤 파묻혀 있는 막사는 누가 봐도 위장 색을 띠고 있었다. 멀리서 이것을 확인하는 건 불가능했다.

제1 척후 조장 윌리스는 침을 꼴깍 삼키며 분지를 주시하고 있었다.

어느덧 몬스터의 숫자는 2천이 넘어갔고, 무려 3천을 헤아리고 있는 중이다. 사막의 몬스터들이 죄다 몰려드는 모양새다.

그 종류도 가지각색이었다.

거대 스콜피온은 물론이고 거대 개미, 하피, 바실리스크, 맹독사, 리자드맨까지.

이 정도면 대규모 토벌을 넘어서는 수준이었다.

"조장님, 저거 토벌이 가능이나 하겠습니까?"

"당연하지."

"병력이 너무 모자란 것 같은데요?"

보통 1만의 병력이 동원되면 수백에서 천 마리 정도의 몬스터를 각개 격파한다.

이건 지금까지 바뀌지 않은 대원칙이다. 그러나 황제는 몬스터를 차곡차곡 모아 단숨에 쓸어버리겠다고 천명했다.

윌리스는 일주일 전, 황제가 다크 웜을 쓸어버렸던 기억을 떠올렸다.

"폐하께서 계시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작전이지."

"드래곤을 단번에 쓸어버리셨다는 소문이 있던데."

"황실 기사님들이 이야기를 했지. 드래곤 브레스를 막은 후에 단숨에 조각내 버리셨다고."

"인간이 가능한 일이기는 합니까?"

"대륙 최강자이시고, 300년이나 수련을 하셨는데 가능하지."

황제가 요즘 들어 선정을 베풀다 보니 일반 병사들도 황제를 지지하게 되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황제가 방탕에 빠져 산다드니, 매일 처녀들을 잡아 고문을 한다느니 하는 소문이 돌았지만, 인식이 개선되자 그 시간 동안 제국의 위협을 몰아내기 위하여 수련을 쌓았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는 드래곤을 격파해 버린 이후에 만들어진 소문이다.

일반적으로 제국에 위협이 되는 드래곤을 개인이 죽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것도 단숨에 피해 없이 죽이려면 얼마나 수련을 쌓아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황제는 그 일을 해냈다.

제국의 인구가 반 토막이 날 것을 우려한 황제가 모든 시선을 무시한 채 수련을 쌓았고, 이제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것이 정론이다.

그런 황제라면.

윌리스의 눈이 빛났다.

"작전은 절대 실패하지 않아."

그들은 영지군이었지만 황제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었다.

오직 황제가 움직이는 것은 제국의 위협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것이라고 믿었다.

타로스는 결코 여유를 잃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서는 타깃이 작은 것이 문제였지, 저렇게 무식하게 덩치가 큰 놈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타깃이 크다는 것은 대충 때려도 박살 낼 수 있다는 뜻이다. 10미터 내로만 접근하면 드래곤이나 다크 웜이 그랬던 것처럼 터져 죽을 것이 뻔했다.

무엇보다 타로스에게는 초공간 이동이 있었다.

빛과 같은 속도로 움직일 수 있기에 순식간에 사막의 왕에게 접근할 수 있을 것이며, 손쉽게 터뜨릴 수 있다고 여겼다.

그 이후 마법이 떨어진다.

마법이 떨어지는 데까지 시간이 꽤 걸릴 것이니 그 안에 빠져나오면 된다. 그리고 분지를 빠져나가려 하는 몬스터들을 쓸어 낸다.

작전이 성공한다면.

추후 대사막은 개발될 것이고, 남부 대륙과 교역을 시작하며 종국에는 남부 대륙 정벌의 전초 기지로 삼을 수 있다.

타로스의 입장에서는 미지의 땅을 탐사하는 것이었으나 분명 풍부한 산물이 존재하는 땅이라고 설정하였으니, 막대한 부를 끌어올 수 있을 것이다.

"폐하."

비스듬하게 누워 생각에 잠겨 있는 타로스에게 로빈슨 단장이 보고를 해 왔다.

"말하라."

"몬스터들의 이동이 끝났사옵니다."

"숫자는?"

"대략 3천으로 추산되옵니다."

"전투를 준비하라."

"존명!"

운명의 시간이다.

더 이상 몬스터의 이동이 없는 것으로 보아 사막 중부에 서식하고 있던 놈들은 죄다 자이언트 스콜피온의 곁으로 간 것 같았다.

1만의 병력이 도열하였으며 그들의 사이를 타로스가 걸었다.

"...."

타로스가 지나가는 길마다 병사들이 조용히 군례를 올렸다.

아직 작전 전이었기에 소음에 신경을 쓸 필요가 있었다.

휘이이잉.

모래바람이 한차례 불었으나 병사들은 몸을 빳빳하게 세운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기사들도, 제후들도 마찬가지다.

타로스는 주변을 쭉 한 번 훑어봤다.

"제군들의 주머니는 두둑해질 것이다. 적들을 모조리 주살하게 된다면 그란달 영지에도 도움이 되는 일이니 최선을 다하라."

척!

1만의 병력이 일치단결하여 왼쪽 가슴을 때리는 모습을 보였다.

그들의 행동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황제와 대사막을 정벌하는 대역사를 함께 이루었다는 자부심이다.

"각 지휘관들은 부대를 은밀하게 지휘하여 해당 구역으로 간다. 마법사들은 바로 연환계 마법을 준비할 것이며, 모든 준비가 완료되는 순간 짐이 사막의 왕을 처리한다."

이미 작전은 미리 하달했다.

브리핑도 몇 시간이나 진행하여 병사들이 숙지할 수 있게 하였다.

몬스터가 수천이나 되다 보니 군사 작전이 됐다.

오늘의 전투를 통하여 타로스는 병사들의 실질적인 전투력을 눈에 담을 작정이었다. 전쟁이 터지고 나면 혼자서 모든 적들을 쓸어버릴 수는 없을 테니까.

스륵. 스르륵.

명령을 받은 병력이 은밀하게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각자의 구역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자리 잡는다. 아직까지 절벽 위로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전투는 신호가 온 후에 시작된다.

타로스는 초감각을 일으켜 각 병력이 제대로 자리를 잡았는지 보았다.

작전대로 모든 병력들은 자신들의 자리에서 대기 중이다.

"신호해라."

"존명!"

뿌우~!

호각 소리가 길게 울려 퍼졌다.

-감히 인간들이 신성한 땅에 발을 들이는가!

자이언트 스콜피온이 인간들의 기척을 감지하고 외쳤다.

피어가 섞여 있었으나 병사들은 굳건하게 창검을 잡고 자신들의 자리를 지켰다.

타로스가 놈을 죽여 버릴 것이라는 사실을 알기에 지나친 긴장감은 없어 보였다.

쐐애액!

타로스는 가타부타 말도 없이 빠르게 절벽을 타고 내려가 자이언트 스콜피온에게 쇄도하였다.

이동하는데 걸린 시간은 불과 3초.

빛과 같이 이동하기에 그의 몸은 마치 마력을 머금은 화살 같았다.

"와아아아!"

병사들은 환호성을 내질렀다.

기사들을 제외하면 타로스의 움직임은 그저 한줄기 빛으로 보였다. 그리고 바로 자이언트 스콜피온의 머리 위에 나타난 것이다.

타로스는 착지한 후에 앱솔루트 배리어를 쳤다.

예상대로 온갖 공격들이 쏟아졌다.

놈의 머리 위에서 바로 파워드 킬을 사용할 수도 있었지만, 각이 나오지 않아 먼저 착지를 하고 본 것이다.

뇌전과 화염, 석화 마법이 동시에 퍼부어졌으며, 거대한 삼지창이 타로스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콰아아앙!

콰르르르릉!

어마어마한 공격이었다.

도저히 피할 틈도 없어 보였다.

타로스는 놈이 공격하는 모습을 초감각을 발현하여 느리게 보았는데, 한 치의 틈이 없을 정도로 쏟아붓고 있었다.

갖은 공격을 쏟아 내더니 놈은 거대한 꼬리의 끝으로 타로스를 찍어 내렸다.

콰아아앙!

후두두둑!

거대한 충격파가 사방으로 번졌고, 그 주변에 존재하던 몬스터들은 죄다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꽈드득!

놈의 꼬리가 제풀에 꺾였다. 어마어마한 힘으로 반파가 되고 만 것이다.

타로스가 자이언트 스콜피온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사막의 왕? 병신이 따로 없구나."

#제31화. 대사막(6)

역사에 길이 남을 전투가 진행되고 있는 현장.

절벽 위에서 전투를 준비하고 있던 레베카와 병사들은 그 광경을 눈에 담으며 몸을 떨었다.

분명히 자이언트 스콜피온의 공격은 일개 인간이 막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제국에서 황제를 제외하면 저런 괴물을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하기는 할까.

그녀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마 불가능할 것이다.

"레베카 기사님?"

"응?"

"곧 전투가 시작됩니다."

십인장 계급을 달고 있는 여병사가 그녀의 주의를 일깨워 주었다.

도저히 병사를 하고 있을 얼굴선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병사의 눈에는 힘이 들어가 있었고, 이는 타국과 다른 가장 큰 차이점이라 할 것이다.

황제부터 시작해서 일개 병사에 이르기까지.

제국은 절대 평범하지 않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는다.

제국은 남녀평등이 기저에 깔린 사회를 구현했다.

능력만 있다면 누구라도 고위층 인사가 될 수 있었다. 다만, 제국에서 능력이란 무력을 말하는 것이었으므로 귀족이 되고자 한다면 검을 잡는 것보다는 마법봉을 잡는 것이 더 나을 뿐이다.

물론 마법사가 되는 것도 쉬운 길은 아니었기에 이 순간에도 수많은 여병사들이 기사가 되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레베카를 수행하는 병사도 그런 부류 중 하나였다.

"제군은 어떻게 보나?"

"예?"

"몇 번을 보아도 불가능한 일을 수행하시는 폐하이시다."

"...놀라운 일이죠. 지금까지 수련을 하고 있었음이 틀림없으십니다. 어떤 소리가 들려와도 수련에 집중할 수 있다는 것은 폐하의 정신력이 범인을 뛰어넘었다는 뜻이 아닐까요?"

"그래, 그럴 테지."

사실, 5년 동안 그녀가 본 황제는 나태의 표본이었다.

모든 일을 귀찮아했고 심지어는 하고 싶은 일도 없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어느 순간 각성하고 천년 제국을 선언했다.

전쟁을 통하여 평화를 실현하겠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그런 발언을 했다면 비웃었겠지만, 대륙 최강자의 뜻이었기에 숭고하게 비쳐졌다.

꽈직!

잠깐 한눈을 파는 사이, 공격을 퍼붓고 있던 자이언트 스콜피온의 꼬리가 박살 났다.

한눈에 봐도 자이언트 스콜피온의 표정은 당혹스러워 보였다.

그리고 어느 순간.

쿠아아아앙!

모든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는 화려한 원소 폭발이 사방을 휩쓸었다.

보는 이들의 눈길을 사로잡는 찬연한 폭발.

"몇 번을 보아도 질리지 않는데."

후두두둑!

분해된 자이언트 스콜피온의 잔해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네임드 보스가 죽은 것을 확인하자 마법사들은 타로스의 명령을 충실하게 수행했다.

절벽 위에서 어마어마한 마력의 파동이 느껴졌다.

초감각을 발현하니 마력이 마법진을 중심으로 요동치는 것이 보였다. 마나는 세상의 근원이었으며 마력을 다루는 자들의 눈에는 푸르게 보인다.

푸른빛은 회오리치며 마법진으로 빨려 들어가 발광하였고, 그 막대한 마력을 그랑카인 후작이 인도하였다.

마나가 성형되는 과정이 보였다.

그랑카인은 뇌전의 원소를 극대화시켜 가공하였으며, 체인 라이트닝을 형성하였다.

빠지지직!

하늘을 뒤덮는 뇌전.

타로스에게는 마력의 여유가 있었으므로 앱솔루트 배리어를 치고 그 광경을 두 눈에 담았다.

콰르르르르릉!

하늘을 보니 거미줄이 떨어지는 형상이었다.

새하얀 뇌전의 기운이 천지를 뒤덮으며 작렬하였고, 몰려 있던 몬스터들은 강렬한 전압에 의하여 몸이 터져 나갔다.

그 이후 2차로 마력이 모이기 시작했다.

"폐하!"

배리어가 사라지자 그랑카인 후작의 목소리가 황제의 귓가에 닿았다.

팟!

타로스는 초공간 이동을 사용하여 순식간에 현장을 빠져나갔다.

그랑카인의 곁이었다.

노마법사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는 얼굴이다. 인간이라면 이렇게 빨리 돌아올 수 없었기에.

"집중하라."

"존명!"

이번에는 그나마 남아 있는 놈들을 청소하기 위하여 파이어 스톰을 캐스팅한다.

최대한 유적지를 피하여, 그리고 놈들이 적절하게 모여 있는 곳으로 연환계 마법을 쏘았다.

콰과과광!

화려한 폭발과 함께 화염 폭풍이 일어났다.

회오리바람이 화염을 머금고 요동쳤으며, 그 안으로 몬스터들이 빨려 들어가 타 죽기 시작하였다.

이쯤 되자 몬스터들이 발광을 하며 빠져나가기 위하여 움직였다.

그러나 몬스터들은 입구와 출구를 꽉 틀어막고 있는 기사와 병사들에 의해 척살 당했다.

인간들의 전쟁에서도 좁은 입구를 막아서면 족히 3배 이상의 병력은 막아 낼 수 있었다. 심지어 몬스터임에야 손쉬운 사냥감일 뿐이다.

이 멍청한 놈들은 입구와 출구로 몰려가면서 병목 현상을 일으켰고, 서로를 밟고 올라서며 발광했다.

그 위로 마법사들이 자유 공격을 시작했다.

궁병들은 화살을 쐈고, 미리 준비한 기름을 붓고 불을 질렀다.

화르르륵!

-끼에에에엑!

비명이 메아리쳤다.

일부 몬스터들이 절벽 위로 기어올라 왔으나 그곳마저 살길은 아니었다.

병사들이 창을 꼬나 쥐고 그대로 찍어 내렸다.

퍽퍽!

푸확!

체액이 튀었다.

이 완벽한 조화로움에 병사들의 사기도 충천하였다.

황제께서 전리품 분배를 약속하였기에 목숨을 걸었다.

일개 군주도 아닌 황제가 직접 천명한 일이라면 제국이 멸망하기 전에는 반드시 이루어진다.

"한 마리라도 더 죽여라!"

"와아아아!"

전세는 완전히 이쪽으로 기울었다.

타로스는 준비된 의자에 앉아 감상을 시작하였다.

태양이 모래 언덕 끝에 걸릴 무렵.

고대 유적지의 옛 성터에는 몬스터의 사체가 즐비했다.

단 한 마리도 이곳에서 살아서 나가지 못했다.

마지막 한 마리가 죽어 나갔을 때, 병사들은 승리의 함성을 질렀다.

"폐하! 보고 드립니다!"

각 부대의 장들이 피해 상황을 보고했다.

사망 56명에 부상자 400명가량.

이 정도면 대승이다.

군대는 다시 도열하기 시작했다.

타로스는 퍼포먼스를 위해서라도 죽어 간 장병들을 위하여 간단하게 의식을 치른 후 묻었다.

그들을 데리고 대사막을 빠져나가기에는 무리가 있었기에 화장을 하고 양지 바른 곳에 묘비를 세울 수밖에 없었다.

이 정도면 대략적인 사후 처리는 끝났다.

널브러져 있는 몬스터들을 정리하는 일이 남았지만, 곧 해가 떨어질 것이었으므로 이곳에서 하루 야영을 하고 내일 정리하기로 결정했다.

다만 타로스가 할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는 이곳에 온 목적을 이루어야 했다.

거대한 피라미드 앞.

지구에서의 피라미드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세계 7대 불가사의로 불리며, 도대체 어떤 식으로 축조하였는지, 그 역할이 정확하게 무엇이었는지 밝히지 못하였다.

그러나 최근 연구 결과에 따르면 피라미드는 막대한 양의 전하를 응집시키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

즉, 그 시대부터 전기를 사용하였다는 것.

이는 과학자들이 밝혀 낸 사실이었지만, 기획 당시에는 그저 미스터리한 건축물로 설정을 했었다. 아마 건물 내부의 구조는 실제 피라미드에 비하여 단순할 것이다.

타로스는 피라미드 앞에 기사들을 세웠다.

"이곳을 지켜라."

"존명!"

항명은 용납되지 않는다.

황제의 명령에 의문을 갖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기에 기사들과 수뇌들은 그저 피라미드 앞에서 접근을 막았다.

화르륵.

타로스는 횃불에 불을 붙이고 전진했다.

다소 음침해 보이기까지 하는 복도를 지나 거대한 공동에 이르렀다.

이곳은 마력으로 유지되는 공간이다.

실제로는 피라미드가 전기를 응집시키는 역할을 했겠지만, 타로스의 설정은 이곳이 마나를 응집시킨다는 점이었다.

응집된 마력은 수천 년간 거대한 피라미드를 지탱하였다.

마력이 일렁거리며 빛을 스스로 만들어 낸다. 어떠한 캐스팅도 없이 마나의 충돌로 일어난 현상이다.

피라미드 안에는 관들이 안치되어 있었다. 타로스의 기억이 맞는다면 관 안에는 고대 문명의 왕들이 미라 형태로 잠들어 있을 것이다.

한쪽에는 보물들도 쌓여 있었는데, 대부분이 금 세공품이다.

마법서는 제1대 국왕으로 보이는 미라의 무덤 안에 들어 있었다.

황금의 가면을 쓴 미라가 마법서를 쥐고 있었다.

스모크

최대 10m의 공간을 도약한다.

MP 소모: 30

다소 아쉬운 점이 있다면 스모크라고 불리는 블랭크는 패시브 스킬이 아니라는 것이다.

마력도 30이나 소모되었기에 무제한으로 펼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는 해도.

초감각과 초공간 이동, 스모크를 조합하여 사용하면 결코 이길 수 없는 적에게 도망칠 수 있다. 최소한 목숨은 확보할 수 있는 것이다.

타로스가 알기로 드래곤보다 강한 존재는 대륙에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제국 내에서 실각할 우려는 거의 사라졌다고 볼 수 있었다.

화르르륵!

마법서를 태우자 특유의 마나가 흘러나와 타로스의 머리로 스며들었다.

그 순간, 어떻게 스킬을 사용해야 하는지 깨달았다. 또한 그 응용 방법에 대해서도 바다와 같은 지식이 밀려들었다.

이로써 대사막에 온 첫 번째 목적은 달성했다.

타로스는 피라미드를 나왔다.

"폐하."

입구를 지키던 기사들과 제후들, 그리고 마법사들이 허리를 굽혔다.

"이곳 피라미드는 고대 왕들의 무덤이었다. 꽤 진귀한 물건들이 많으니 경들이 쓸어 담도록 해라."

"존명!"

물건 대부분은 황가에 귀속되고, 일부가 제후들에게 분배될 테지만 이들에게 있어 그건 상관없는 문제로 보였다.

고대 왕가의 무덤에는 어떤 물건들이 들어 있을 것인가.

호기심을 가득 안은 존재들이 피라미드를 탐사하기 시작했다.

다음 날 아침.

어제 미루어 두었던 사후 처리가 시작됐다.

유적 탐사대는 어제 새벽까지 피라미드를 샅샅이 뒤졌고, 각종 유물들을 긁어냈다. 여기서 유물이라는 건 마법이 걸린 아이템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그저 역사적인 사료가 담긴 옛 문명의 잔재들이다.

고대 문명에는 마법과 신학이 배제되어 있었는지 그에 대한 기록은 없었지만, 과학은 제법 발달했던 사회다.

특히나 도형량과 전기에 대해 연구한 자료들, 그리고 각종 건축법에 대하여 기술한 고서적들이 다수 출토됐다.

이 자료들은 제국의 학자들이 심도 있게 연구하여 실용화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 알아보게 될 것이다.

몬스터의 부산물들은 빠르게 정리하여 정수와 가죽 등을 추출하였고, 나머지 필요 없는 것들은 화장시켜 버렸다.

이제 대사막의 중심을 토벌함으로써 중대한 고비는 넘겼다.

앞으로 지속적으로 군대를 보내 토벌을 하고, 전쟁이 끝나면 본격적으로 대사막을 개발할 수 있는 토대가 될 것이다.

타로스는 수뇌부를 모아 다음 계획을 발표했다.

"12월까지는 대사막을 돌아다니며 몬스터를 토벌한다."

그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대사막을 개발하지 않을 생각이면 모르겠지만, 목표가 확실해졌으니 최대한 오아시스 쪽의 몬스터들은 토벌해야 한다.

대사막에는 실크 로드를 따라 도시들이 건설될 것이다.

종국에는 대륙 남부를 정벌할 근거지로 삼는다.

이런 웅대한 계획에 제후들은 벌써부터 관심을 기울였다. 남부 정벌에 동원될 수 있다면 거기서 분배받는 전리품이 막대할 것이기 때문이다.

타로스도 1월에는 환궁해서 정무를 보아야 했기에 기간을 못 박고는 사막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정확하게는 두 번째 목적을 이루기 위함이었으며, 최대한 척후를 멀리 보내 호루루 부족이 있는 곳을 파악하려 애썼다.

그리고 12월 중순 무렵.

호루루 부족이 제 발로 찾아왔다.

#제32화. 호루루 부족(1)

척후병들에 의하여 호루루 부족이 탐지된 것은 한창 개미굴을 소탕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몬스터들의 굴을 소탕할 때에는 항상 그에 맞는 작전을 짰고, 완벽하게 박멸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시간은 좀 걸리더라도 놈들이 빠져나가지 못하게 해야 추후 대사막을 관리하기가 편했다. 근원을 없애 버리는 것이다.

대사막에는 생각보다 많은 몬스터 부족들이 서식하고 있었다.

중앙의 고대 유적지처럼 초지가 형성된 곳도 있었고, 바위가 산을 이루는 곳에 굴을 파고 서식하는 놈들도 있었다.

대사막에 들어온 지 한 달이 흘렀으며, 두 번이나 남작령으로부터 보급을 받아야 했다.

그 과정에서 타로스는 약속대로 몬스터들의 부산물을 처리하여 병사들에게 지급하였다.

어차피 그란달 영지의 병사들은 토벌에 동원되는 존재들이었는데, 제법 두둑하게 보상금까지 받으니 원정을 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며칠 전, 말을 탄 기마 전사들이 따라붙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타로스도 그들이 타고 다니는 말들을 한 번 본 적이 있었는데, 사막의 기후에 적합하도록 말발굽이 넓었다.

다리도 두꺼웠고 키는 작았으며 털은 거의 없었다.

말이라는 동물은 원래부터 털이 없었지만, 거의 민숭민숭한 모습이 꽤 충격적이었다.

어쨌든.

놈들이 며칠 전부터 몰래 쫓아다녔기에 기분이 상한 그란달 남작은 놈들을 죽여 버리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폐하, 놈들을 처리할 수 있도록 황명을 내려 주십시오!"

"굳이 그럴 필요 있겠느냐."

"대화를 원한다면 사람이라도 보내야 하는데, 벌써 3일째이옵니다. 아무래도 꼬리를 달고 다니는 것이 마뜩지 않아서 말입니다."

그란달답지 않은 진중함이다.

제후들 사이에서야 최약체로 평가를 받지만, 원래 그란달은 호전적인 성미를 가지고 있었다.

이런 척박한 땅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휘하 병력과 기사들을 휘어잡지 않으면 통치가 어려워서 그렇다.

성질 같아서는 확 다 쓸어버리고 싶다는 뜻이다.

하지만 타로스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쓸모가 많은 부족이었기에 처음부터 마찰을 빚는 것은 그리 좋지 않다는 판단에서다.

"그냥 두거라. 사막에도 길잡이가 필요한 법이니. 무슨 피해를 준 것도 아니지 않느냐."

"그건... 맞는 말씀이군요. 헤헤."

게임 자체를 기획한 타로스는 그들에 얽힌 비사나 황제의 과거와 이어지는 비사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특히나 이들의 선조와 황제는 연관이 깊었다.

사막의 길잡이로 고용하고, 가능하다면 이들 부족 전체를 끌어안아 실크 로드 건설의 역군으로 활용한다.

첫 단추를 잘 꿰어야 휘하로 거둘 수 있는 법.

가능하면 접근할 때까지 기다렸다.

그들이 접근해 온 것은 철수까지 고작 일주일을 남겨 둔 때였다.

"폐하! 백기를 든 사자가 접근합니다!"

두두두두!

과연 기마 민족일까.

푹푹 다리가 빠지는 사막에서 말을 탄 기병이 달려왔다. 등에는 백기를 달고서 말이다.

온몸이 흰 베일로 싸여 있었으며, 눈만 내놓고 있는 전형적인 사막 민족의 모습이다.

사자는 황제에게까지 안내되었다.

놈은 어설픈 제국어로 말했다.

"우리 족장, 당신들의 왕을 만난다."

"이놈! 예의를 갖추어라! 이분은 제국의 황제 폐하시다."

"당신, 족장 만난다."

"...."

애초에 언어가 다른 그들이었다.

그 와중에 제국어를 구사하는 것이 대단한 일이다.

타로스가 피식 웃으며 그들의 언어로 답해 주었다.

"안내해라."

"어, 어떻게?"

"짐은 400년을 살아왔노라. 이 세상의 모든 언어를 구사한다."

"시, 신기한 일이군. 정말로 당신이 사막 너머 제국의 황제인가?"

"이미 보았을 터. 짐은 사막의 왕을 죽였다. 그걸 보고 쫓아온 것이 아니던가."

"...맞다."

사자는 순순히 인정했다.

그러면서도 놀람의 빛을 지우지 못한다.

호루루 부족은 오랫동안 제국과 교류를 끊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로스가 그들의 언어를 구사하는 것에 퍽 놀란 모양이다.

타로스의 뒤로 기사단이 뒤따랐다.

과거와 연결하는 데만 성공하면 그들을 충분히 설득할 수 있었지만, 황제의 위엄은 보여야 했기에 기사단을 대동했다.

사막 한복판에 게르가 설치되어 있었다.

애초에 '포비아 킹덤'의 설정은 지구의 문화를 짬뽕으로 뒤섞어 놓았기에 이런 일도 가능하다.

게르 주변으로 흰 베일로 몸을 휘감은 호위병들이 눈을 부라리고 있었다.

타로스는 그들의 레벨을 확인한다.

람투스 LV. 80

호루루 부족장 호위

기사급의 전력이다.

황실 기사단에는 약간 못 미치는 레벨이지만, 저 정도면 이런 오만함을 보이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게르 안으로 들어가자 투박한 모양의 의자가 몇 개 놓여 있었고, 하피의 가죽으로 만든 의자에 거대한 덩치를 가진 남자가 타로스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온몸을 기하학적인 타투로 휘감고 있는 호루루 부족의 족장.

나이는 40대 중반 정도나 됐을까.

사막에서 살다 보면 보기보다 겉늙었다는 건 감안해야 한다.

그렇다고 해도 저런 얼굴은 이해 불가다.

'분명히 호루루 부족장을 20대 초반으로 설정한 것으로 아는데. 악마의 저주에 원기가 빨린 것이 저렇게 적용됐나.'

한마디로 더럽게 삭았다.

인상도 더러웠고, 당장이라도 전투를 벌일 기세다.

바바 LV. 88

호루루 부족장

레벨은 그리 높지 않다.

타로스가 세계관 전체의 설정이었고, 중요 인물들은 직접 설정했었지만, 대사막 부족장의 레벨까지 기억하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다. 워낙에 기획 초반에 설정을 끝냈으니까.

그런 주제에 어마어마한 기세를 가지고 있었다.

저 정도면 그란달 남작이 충분히 처리할 정도의 실력일 것이다.

"나, 호루루 족장."

역시나 놈도 어설픈 제국어로 말했다.

타로스는 호루루 부족의 언어로 맞받아쳐 주었다.

"짐은 제국의 황제 타로스다."

"어떻게...?"

가뜩이나 더러운 인상이 더욱 찌푸려졌다.

시비를 거는 건지, 놀라는 건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그란달이 당장 칼을 뽑아 죽일 기세였다.

"이놈! 제국의 황제 폐하께 예를 갖추라!"

"내가 왜?"

"너와는 급이 다른...."

"됐다. 이놈들은 제국의 신민이 아니니 예를 갖추라고 강요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문화와 언어조차 다르지 않느냐."

"황공하옵니다."

타로스는 놈의 맞은편에 털썩 주저앉았다.

"짐을 부른 이유가 무엇이냐."

"귀하가 왕을 죽였는가."

"그 어설픈 전갈 놈을 말하는 거로군."

"...그놈은 사막의 왕이다."

"짐에게는 귀여운 전갈일 뿐이었지."

"제안을 하려 한다. 받아 주겠나?"

"그야 네놈이 어떤 제안을 하느냐에 따라 달렸지."

"그 땅은 오래 전부터 우리 호루루 부족이 차지했었다. 그러다가 사막의 왕이라는 그 전갈이 나타나면서 나라가 멸망했지. 그러니 우리에게 권리가 있다."

"나라가 멸망해? 개소리도 적당히 해라. 이거 슬슬 기분이 나빠지려 하는데. 네놈들은 수백 년 동안 대사막을 떠돌지 않았느냐."

"폐하, 무슨 일이시옵니까?"

기사들이 타로스에게 물었다.

굳이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었기에 타로스는 들은 그대로 제후들과 기사들에게 알려 주었다.

곧바로 그란달이 길길이 날뛰었다.

"이런 미친놈! 대사막은 제국의 영토다! 너희들이 무슨 권리로 그런 망상 같은 주장을 하느냐!"

"그 땅, 우리 거."

"하! 그보다는 네놈들을 모조리 죽여 버리면 될 것 같은데?"

그란달은 역정을 냈다.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것을 보니 적잖게 혈압이 오른 모양이다.

뼈가 빠지게 정벌을 해 놓았더니 그 땅의 권리를 주장한다. 기사들도 말은 하지 않고 있었지만 내심은 그냥 다 죽여 버리는 것이 낫다고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타로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원작의 황제와 깊은 연관이 있기도 하였지만, 놈들에게 받아 낼 것도 있다.

바로 유목민의 인장.

타로스에게 '완벽한 기마'를 선사할 아이템이다. 지금 유물이 느껴지지 않는 것을 보니 부족 어딘가에 보관되어 있을 것이다.

톡. 톡. 톡.

어떻게 해야 이들을 끌어안는 것은 물론 유물을 뜯어낼 수 있을까.

이들보다 사막에 대해 잘 아는 자들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휘하로 끌어들이면 추후 대사막을 개발하기가 수월해진다.

그나마 일행 중에서 가장 침착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던 그랑카인 후작이 그에게 물었다.

"한 가지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어떤 방법?"

"폐하의 품으로 들어오거라. 제국의 신민이 된다면 폐하께서 그 땅을 허락하실지 모를 일이지."

"안 돼. 우리는 자긍심 높은 민족. 누군가의 가랑이로 들어가지 않아."

어설픈 제국어였다. 듣기에 따라서는 상대방을 농락한다고 느낄 수도 있는.

결국 그랑카인 후작도 폭발했다.

"이런 비루먹은 망아지 새끼가!? 폐하! 신에게 명령을 내려 주신다면 당장 이놈들의 부족으로 달려가 죄다 태워 버리겠사옵니다!"

도저히 말이 통하지 않는 놈들이다.

당연히 타로스에게는 대안이 있었다. 직접 기획하고 이 세상을 창조하였으니 황제와 이들 선조와 이어진 비사를 꿰뚫고 있었다.

다만, 이들에게 과거의 인연이 먹혀 들어갈 것인가.

'이런 놈들은 전통을 중시하지. 여기에 답이 있다.'

자존심 하나로 먹고 사는 놈들이다.

이미 죽음을 각오했다고 해야 하나. 아니,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봐야 한다.

"쯧, 짐과 함께한 가브엘도 이따위로 막 나가지는 않았다. 그러나 오랜 시간 사막을 떠돌다 보니 정신 줄까지 모래바람에 날려 버린 모양이로군."

"...!"

바바의 눈동자가 부릅떠졌다.

가브엘.

무려 400년 전의 인물이다.

타로스가 황제가 되기도 전의 일이었다. 설정상으로는 그 당시 타로스는 대륙을 떠돌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니 타로스의 행적에 대해서는 누구도 알지 못하는 셈이다. 그저 타로스 본인만 알고 있을 뿐.

지금 세상에 세세한 기록이 남아 있을 수도 없으니 확인할 수 있는 방법도 없다.

그르릉!

바바가 거대한 도끼를 들었다.

"선조를 모욕하지 마라!"

"네 조상과 짐이 우정을 쌓지 않았다면 어찌하여 그대들의 언어를 알고 있을 것이며, 위대한 선조의 이름까지 알고 있겠는가."

"그건.... 그런데."

'살짝 모자란 놈이군.'

타로스는 확신했다.

뭐 이렇게 단순한 놈이 있나 싶을 정도로 간단하게 인정했다.

물론 타로스의 말에 허점은 없었다. 400년 전 인물이 아니고서야 부족의 역사를 알 수 있을 리가 없었으니까.

공식적으로 300년 동안 한 번도 호루루 부족과는 접점이 없었다. 그러니 타로스의 말에는 더욱 설득력이 있었다.

"가브엘의 친분에 따라 그대 부족에 깃들어 있는 저주를 정화시켜 주겠노라. 그대들은 무려 300년 동안 어려움을 겪고 있을 터."

"어, 어떻게!?"

놈은 더욱 놀랐다.

호루루 부족은 심각한 문제를 겪고 있었고, 그걸 타로스가 완전히 간파한 것이다. 다만 타로스는 당하고는 못 사는 성격이었기에 한 가지는 짚고 넘어가기로 했다.

"네 선조와의 친분으로 돕기는 하겠으나 모래바람에 날려 버린 정신 줄은 다시금 잡아야겠다. 자고로 미친개에게는 몽둥이가 약이라고 하였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