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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과 적응 (4)

마법학부라고 해서 마법에 대해서만 배우는 건 아니었다.

수업으로 듣는 과목 중에는 기본적인 교양 학문도 있었는데, 역사 역시 그중 하나였다.

"지금으로부터 약 30년 전, 마왕의 탄생과 함께 올테로어의 마족들이 대대적인 침공을 일으켰습니다."

나는 책상에 턱을 괸 채 수업을 담당한 조교수의 말을 들었다.

이번 역사 수업의 주제는 다름이 아닌 마족에 대한 것이었다.

"마족의 첫 목표는 그들의 영역과 바로 인접하여 붙어있는 세인테아 제국 연합이었습니다. 마족들의 사악하고 강대한 힘 앞에 인류는 빠르게 수세에 몰렸습니다. 하지만 그 전례 없는 위기 속에서 인류를 구원한 인물이 있었습니다. 그게 누구인가요?"

어린아이라도 모를 수가 없는 질문. 몇몇 학생들이 대답했다.

"그래요. 용사 에인델 님이십니다. 신께서 내리신 성검의 힘으로 용사님은 세인테아에 침공한 마족들을 처단하셨고, 역공에까지 나서 끝내 마족들의 왕인 마왕을 봉인시키는 데에 성공합니다. 전쟁이 끝난 뒤 대륙의 세력 구도는 빠르게······."

이미 라사의 세계관을 줄줄이 꿰고 있는 내가 흥미롭게 들을 만한 내용은 아니었다.

교양이라 그런지 세세한 사건들은 없이 큰 줄기만 가르치고 있는 까닭도 있었다.

"에스카, 실제로 용사님 만나본 적 있어?"

"뭐? 그야 있을 리가 없잖아."

"랜, 너는?"

카앤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나도 없어."

"그래? 한 번 만나보고 싶네.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다."

그 말에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용사는 과연 언제쯤 자신의 정체를 녀석에게 밝히게 될까.

쓸데없는 말을 하는 건 그닥 좋지 않겠지만, 나는 문득 궁금해져서 슬며시 물었다.

"카앤."

"응?"

"만약에 말이야, 네가 용사처럼 이 세상을 구할 운명을 타고났다면 너는 어쩔 거야?"

카앤도 에스카도 그게 뭔 뜬금없는 소리냐는 눈으로 날 쳐다봤다.

"뭔 소리야, 그게?"

"아니, 그냥 한번 가정해보는 거야. 네 모든 걸 희생해서 세상을 구해야 한다면 너는 어쩔까 싶어서."

"랜, 너도 좀 독특한 구석이 있구나······."

에스카의 반응이야 아무래도 좋고, 카앤은 질문에 의외로 진지하게 고민하는 기색이었다.

꽤 한참이나 고민하던 그녀가 대답했다.

"잘 모르겠는데? 감이 안 와. 실제로 처해봐야 알 것 같네."

"······."

"그러는 랜, 너는 어쩔 건데?"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글쎄, 내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영웅이 되고 싶진 않아. 죽으면 다 무슨 소용이야."

***

헨릿 반의 두 번째 대인 전투 수업은 첫 수업과 다르지 않았다.

"자, 지원자는 나서라."

가온 교수의 말에 한 학생이 곧바로 훈련장의 한가운데로 나왔다.

바이온 렉시오, 검술학부 신입생 대표.

그가 가장 먼저 나서자 나서는 학생들은 아무도 없었다.

누가 나서나 눈치만 보는 학생들을 가온 교수가 한심하다는 눈길로 둘러봤다.

별 수 없이 그녀가 상대를 고르려는데, 바이온이 입을 열었다.

"교수님, 제가 상대를 지목해도 괜찮겠습니까?"

"음?"

바이온의 시선이 향한 곳은 바로 리곤이 서있는 쪽이었다.

그에 가온 교수는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벌써 호승심을 가졌었나? 그렇지 않아도 조만간 두 사람을 붙여볼 생각이기는 했었다.

'어느 쪽이 이길지야 뻔하다만······.'

가온 교수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누굴 지목할 거지?"

"리곤입니다."

"리곤, 나오도록."

리곤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바이온의 맞은편으로 걸어나왔다.

대련이 시작하기 전에 그에게 바이온이 말을 걸었다.

"처음부터 전력을 다해라, 리곤."

"응?"

"방심 따윌 하다가 시시하게 대련이 끝나질 않길 바란다."

바이온이 나이에 맞지 않는 엄숙한 기세로 검을 치켜들었다.

리곤도 옅게 웃으며 자세를 잡고서 말했다.

"걱정 마. 그럴 일은 없어."

대련이 시작하자마자 바이온이 살벌한 기세로 돌진했다.

리곤은 정수리를 쪼갤 듯 내리쳐오는 검격을 피할까 막을까 고민하다가, 막기로 했다.

한 손으로 검을 들어올리는 리곤의 모습에 바이온의 눈가가 꿈틀했다. 이전 수업에서의 자신의 괴력을 보고도 이런 식으로 나오다니.

'방심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이대로 상대의 자세를 완전히 무너뜨릴 생각으로 바이온은 내려치기에 전력을 다했다.

쩡!

굉음과 함께 바이온의 검이 우뚝 멈추었다.

"······!"

바이온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맞물린 검을 바라봤다.

자세가 무너지기는 커녕, 리곤은 미동 하나 없이 전력을 다한 공격을 완벽하게 막아냈다.

아무리 힘을 줘도 한 손으로 쥐고 있는 리곤의 검은 조금도 밀려나지가 않았다.

단순한 힘으로는 또래의 상대에게 밀려본 적이 없는 바이온에게 있어 그것은 큰 충격이었다.

"너 힘이 장난 아니네. 손이 다 저릿하다."

검을 쳐낸 리곤이 반격을 시작했다.

다리를 노려오는 검격에 바이온이 곧장 자세를 잡고 방어했다.

하단에서 다시금 맞물린 검. 리곤은 그 상태 그대로 한 발짝 나서며 맞물린 검을 자신 쪽으로 끌어당기려 했다.

하마터면 검을 놓칠 뻔한 바이온은 검을 거두며 뒤로 물러섰다.

주도권은 순식간에 리곤에게로 넘어갔다.

그 뒤로도 바이온은 연신 뒤로 물러나며 매섭게 날아드는 검격을 막아냈다.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별다른 자세도 잡지 않고 가볍게 휘두르는 검격이 왜 이렇게 무거운지.

'강하다.'

처음 리곤의 대련을 봤을 때, 바이온은 생각했었다.

아마 1학년 학생들 중에는 저 녀석만이 자신의 맞수가 될 수 있을 거라고.

하지만 착각이었다.

상대는 자신보다 강하다. 바이온은 그 사실을 금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힘으로 충분히 찍어누를 수 있음에도, 리곤이 오직 검술만으로 승부를 보려고 하고 있다는 걸 바이온은 알았다. 그조차도 전력을 다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이대로면 결과는 뻔했다.

바이온은 이를 꽉 깨물고서 검날에 마력을 응축시켰다.

승패는 아무래도 좋다. 이 녀석에게는 전력을 다해서 부딪혀보고 싶었다.

"······?"

바이온의 검날에 일렁거리는 검기를 보고 리곤은 뒤로 물러섰다. 지켜보는 학생들 또한 웅성거렸다.

1학년 신입생이 기사들이나 사용하는 검기라니, 보통의 학생들에게는 까마득한 일이었으니까.

리곤은 가온 교수가 서있는 쪽을 바라봤다.

검기까지 써도 되는 건가 싶어서 본 거였는데, 그녀는 대련을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너도 검기를 사용해라, 리곤!'

바이온이 검기를 두른 검을 휘둘렀다. 평범한 검으로 검기를 막는다면 부러질 것이다.

하지만 리곤은 검기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공격을 피하지도 않았다.

두 검날이 닿는 순간, 리곤은 검날을 기울여 바이온의 검을 매끄럽게 흘려냈다.

바이온의 검이 허무하게 바닥을 내리쳤고, 그 사이에 리곤의 검은 그의 목에 닿아있었다.

"아, 아깝네. 반쯤 성공인가."

리곤의 중얼거림에 넋을 놓고 있던 바이온의 리곤의 검을 바라봤다.

흘려내기가 완전하지는 않았는지 검날의 이가 박살나고 금이 가있었다.

"허······."

검자루에 손을 올리고 있던 가온 교수도 어처구니없는 눈으로 그런 리곤을 바라봤다.

리곤이 정면에서 바이온의 공격을 막으려고 했을 때, 그녀는 깜짝 놀라서 나서려고 했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검기를 두른 검을 맨 검으로 흘려내려고 하다니. 심지어 그걸 또 성공시켰다.

훈련용 가검이 아니라 더 내구도가 높은 검이었다면 검도 멀쩡했을 것이다.

'터무니없는 녀석이야.'

가온 교수가 헛웃음을 흘리며 선언했다.

"대련 종료. 리곤의 승리다."

"교수님, 근데 검이 부러지기 직전인데······."

"신경 쓰지 마라. 대련 중의 모든 사고는 학생에게 책임이 없으니까."

설마 자신이 물어내야 싶었던 리곤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자리로 돌아가기 전에 바이온이 리곤에게 물었다.

"왜 굳이 검기를 사용하지 않고 막았지?"

"응?"

"네 실력이라면 나를 얼마든지 압도할 수 있었다. 내게 모욕감을 주고 싶었나?"

리곤이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뭔 소리야, 그게. 그냥 할 수 있겠다 싶어서 시험해본 건데."

"······대련 결과가 시험 성적에 포함된다는 걸 잊었나? 고작 그런 이유로 도박을 했다고?"

"난 성적 별로 신경 안 쓰는데? 너랑 대련은 그래도 제법 즐거웠어. 그게 전부야."

그 말에 바이온은 빤히 리곤을 바라보다가, 저벅저벅 다가가서 손을 내밀었다.

"바이온 렉시오다."

"어, 아는데······."

"나도 네 이름은 안다, 리곤."

리곤은 특이한 녀석이다 생각하며 악수를 받았다.

***

오전 수업이 끝나고 식당으로 향하자 누군가와 함께 있는 리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어쩐지 낯이 익은 얼굴과 거대한 덩치에 나는 상대가 누구인지를 금세 떠올릴 수 있었다.

'분명 신입생 대표였던······.'

리곤이 다른 친구와 어울리는 건 본 적 없었는데.

카앤과 에스카도 의아하게 바라봤다.

"저 덩치는 뭐야? 교복 입은 거 보니까 학생 맞지?"

리곤도 우리를 발견하고서 손을 흔들었다.

"얘는 누구야, 리곤?"

"반 친구야. 같이 점심을 먹고 싶다고 하는데, 상관없지?"

카앤이 오오, 하고 탄성을 뱉었다.

"물론 상관없지. 그보다 리곤한테도 드디어 친구가 생긴 건가?"

남학생이 우리를 슥 둘러보고는 입을 열었다.

"바이온 렉시오다. 너희는 전부 마법학부 학생들인가?"

"응, 맞아."

"의외군."

검술학부면서 친구는 전부 마법학부 학생들인 게 의외라는 거겠지.

어쨌든 그렇게 식사 자리에 새로운 인원이 추가됐다.

자리에 둘러앉아 식사를 하며 우리는 바이온과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렇게 해서 나는 리곤에게 패배했다. 좋은 목표점이 될 것 같아서 리곤과는 친해지고 싶다고 생각했다."

"흐응, 그렇구나. 근데 너는 리곤이 안 껄끄러워? 리곤이 칼데릭 출신인 걸 모르는 건 아니지?"

"출신이 무슨 상관이지? 그딴 건 아무래도 좋다."

"고맙긴 한데, 반 애들이 날 피하는 건 알잖아? 나랑 어울리면 너까지 피할 수도 있다고, 바이온."

그에 바이온이 눈을 깜빡였다.

"딱히 상관없다. 나도 다른 친구는 하나도 없으니. 리곤 말고는 죄다 시시한 녀석들뿐이고."

그 말에 카앤이 웃음을 터뜨렸다.

"야, 너 마음에 든다. 앞으로 친하게 지내자."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는데, 문득 모두의 시선이 한쪽으로 향했다.

식당 한편에서 몇몇 학생들이 소란을 피우고 있었는데, 그중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레아였다.

"야, 사과 안 할 거야? 너 때문에 옷에 다 튀었잖아!"

레아와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상대는 1학년이 아니라 상급생이었다.

척 보니 지나가다가 부딪혀서 옷에 음식이 튄 걸로 시비가 붙은 모양이었다.

그녀는 상급생 둘을 상대로도 대수롭지 않다는 기색이었다.

"저는 가만히 있었고, 부딪혀온 건 선배님들입니다. 제가 사과할 이유가 있나요?"

"근데 이 싸가지없는 게 진짜······."

그녀의 차가운 시선에 상급생들은 더 뭐라 못하고, 욕만 몇 마디 더 뱉어내다가 물러섰다.

주위의 학생들이 그 광경을 보며 떠들었다.

"쟤 신입생 아니야? 3학년들이 왜 저렇게 쫄아서 물러나?"

"너 쟤가 누군지 모르냐? 레아 헤리윈이잖아."

에스카가 슬며시 바이온에게 물었다.

"저기, 바이온. 너는 검술학부 신입생 대표가 맞지?"

"그렇다."

"그럼 레아와도 아는 사이야? 입학식에서 함께 강단에 섰었잖아."

"아는 사이긴 하지. 가문끼리 교류도 있고. 하지만 딱히 친하지는 않다."

바이온이 뒷말을 덧붙였다.

"저 녀석도 내 목표점이다. 리곤 말고 비슷한 나이의 상대에게 패배한 건 저 녀석이 유일하다."

카앤이 흥미롭다는 기색으로 껴들었다.

"그래? 쟤 우리랑 같은 반이야. 수업 때 보니까 강하긴 하더라."

"그렇겠지."

식사를 하는 동안 그렇게 시답잖은 이야기를 주제로 떠들었다.

아카데미 생활 내내 넷이서만 어울리게 될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멤버가 한 명 더 늘어날 듯했다.

수업과 적응 (5)

몬스터 탐구는 이름 그대로 몬스터에 대해서 배우는 수업이었다.

몬스터들의 특성, 습성, 약점 등을 배우고, 쓰러뜨리는 방법에 대해서 배우는 거라 할 수 있었다.

이전 수업들까지는 교실에서 이론으로만 배웠지만 오늘은 실습이라고 담당 교수가 예고했다.

조교수의 안내에 따라 이동한 곳은 본관 건물의 지하에 위치한 넓은 공동 같은 장소였다.

"뭔가 으스스하네. 갑자기 어디서 몬스터라도 튀어나오는 거 아니야?"

"으, 설마."

카앤이 주위를 둘러보며 중얼거리자 에스카가 불안한 듯 몸을 움츠렸다.

확실히 수업 장소치고는 음산한 분위기였기에 다른 학생들도 긴장한 기색이었다.

엘폰의 지하 공간에 대해선 이미 알고 있는 바가 있었다.

이곳은 지상의 탁 트인 공간에서 하기에 위험하거나 난감한 연구들을 하는 장소라고 들었다.

예를 들어서 몬스터들을 상대로 한 생체 실험, 혹은 테이밍 마법 같은 것들 말이다.

오늘 몬스터 탐구 수업이 바로 이런 곳에서 진행되는 이유였다.

몬스터를 가둔 거대한 짐마차들이 아카데미 안으로 들어오는 걸 몇 번 본 적은 했었는데, 전부 이곳 지하에 가둬놓고 사육하는 모양이었다.

곧 담당 교수가 도착했다.

"그럼 이동해볼까요? 첫 실습이고, 오늘은 어디까지나 견학 같은 느낌이니 너무 긴장들하지 마세요."

교수의 안내에 따라서 길게 펼쳐진 지하 복도를 걸었다.

마법 결계가 펼쳐진 관문을 통과하자 곧 죄수들을 가둬놓는 지하 감옥 같은 공간이 나타났다.

철창 너머에 갇혀있는 몬스터를 본 학생들이 작게 탄성을 터뜨렸다.

'고블린인가.'

처음으로 보게 된 몬스터는 고블린이었다. 가장 흔하고 약한 몬스터 중 하나.

교수는 경비에게 양해를 구하고 학생들이 몬스터를 가까이서 구경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견학이라는 게 이런 말이었나. 동물원 구경이라도 하는 느낌이다.

"와, 진짜 엄청 못생겼네."

"저기 저 녀석 봐봐. 구석에 혼자서 머리 박고 있는데?"

캬아악!

그때 몇몇 고블린들이 괴성과 함께 철창으로 달려들어 몸을 부딪혀왔다.

킥킥대며 구경하던 몇몇 학생들이 깜짝 놀라 철창에서 물러났다.

달려든 고블린이 놀란 학생들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놀리듯 킬킬 웃었다.

얼굴이 시뻘개진 학생들을 보며 교수가 말했다.

"고블린은 약하지만 영악해서 사람을 도발하고 농락할 줄도 알죠. 말했었죠? 아무리 약한 몬스터라도 방심은 금물이라고. 야생에서 고블린을 만난다면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항상 냉정을 유지해야 할 겁니다."

빠직!

철창 주위에 일어난 스파크에 고블린들이 화들짝 놀라서 다시 구석으로 도망쳤다.

손을 거둔 교수가 다음 구역으로 학생들을 이동시켰다.

구경하게 된 몬스터들 중에는 이론 수업에서 배운 몬스터들도 있었고, 아닌 몬스터들도 있었다.

나는 근처에서 걷고 있는 카앤을 슬쩍 쳐다봤다.

다른 학생들과 달리 그녀는 의외로 몬스터 구경이 지루한 기색이었다.

원래 살던 산맥에서 몬스터라면 질리도록 마주쳐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슬슬 수업의 막바지에 다다른 장소는 지금까지 지나왔던 관문들과는 거대한 관문이었다.

"여기서 마지막 몬스터를 보고 수업을 마치도록 할 겁니다."

마법 결계의 마력이 유별나게 센 걸로 보아 제법 강한 몬스터들이 갇혀있는 건가 싶었다.

그리고 그 예상은 맞았다.

[Lv. 46]

그르르르.

철창 너머, 어둠 속에서 섬뜩하게 빛나는 붉은 안광.

마치 거인을 연상케 하는 거대한 인간형 몬스터.

'쾨이트인가.'

나는 놈의 특징인 회색 피부를 보고 곧바로 정체를 알아챘다.

놈이 뿜어내는 살기에 몇몇 학생들이 몸을 떠는 게 보였다.

몬스터의 야성은 보통 짐승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학생들이 이런 살기에 익숙할 리가 없으니, 아무리 감옥에 갇혀있는 무력한 몬스터라고 해도 움츠러들 만했다.

"저번 수업에서 잠깐 이야기했던 몬스터인 '쾨이트'입니다. 이명으로 마법사 사냥꾼이라고도 불리죠."

쾨이트, 마법사 사냥꾼.

놈이 마법사 사냥꾼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유별나게 높은 마력 저항력 때문이었다.

웬만한 수준의 마법사들은 놈에게 자그마한 생채기조차 낼 수 없다고 했던가.

'그래봤자 40레벨대 몬스터지만.'

그나저나 엘폰은 이렇게 큰 놈까지 포획해와서 실험체로 쓰는 건가. 어지간하다 싶었다.

그때 교수가 묘한 미소를 짓더니 갑작스러운 이야기를 했다.

"이대로 실습을 끝내기엔 모두들 아쉽지 않나요? 마지막으로 하나 재밌는 게임을 해볼까요?"

······게임?

"설명했다시피 쾨이트는 마법사 사냥꾼이라 불리는 몬스터인 만큼 마력에 굉장한 저항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혹시 이 쾨이트에게 상처를 입힐 자신이 있는 학생 없나요? 만약 아주 조금이라도 상처를 입히는 데에 성공한다면 내 수업에 바로 A+ 성적을 주도록 하죠. 학기 시험과 앞으로 남아있는 수업들과는 무관하게요."

그 파격적인 말에 학생들이 웅성거렸다.

몬스터 탐구 수업은 이제 고작 3번째 수업일 뿐이었다. 그런데 바로 최고 등급의 성적을 주겠다니?

철컹.

교수가 시원스레 철창의 문을 개봉하며 말했다.

"도전해볼 학생 있나요? 기회는 한 번을 줄게요. 도전할 학생은 철창 안으로 들어가서 쾨이트에게 자유롭게 마법을 펼쳐보도록 하세요."

하지만 선뜻 나서는 이는 없었다.

아무리 구속되어있는 몬스터라고 해도, 또 위험한 상황이 발생하면 교수가 나서겠지만, 저런 괴물을 상대로 정면에서 공격 마법을 펼칠 엄두가 쉽게 날 리 없었으니까.

"한번 해볼까?"

물론 카앤은 예외였다.

턱을 긁적이며 중얼거리는 모습에서는 긴장감이나 두려움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다른 지원자가 안 나오면 그녀가 나서지 않을까 싶었는데······.

"제, 제가 할게요."

의외의 인물이 그보다 먼저 손을 들어올렸다.

카앤도 놀란 기색으로 에스카를 돌아봤다. 손을 들어올린 사람은 바로 에스카였다.

에스카가 이런 일에 능동적으로 나서는 성격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A+ 성적이 그만큼 탐이 났나?

"야, 에스카. 무리하는 건 아니야?"

"괜찮아. 한번 해볼게."

크게 심호흡을 한 에스카가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철창 안쪽으로 걸어들어갔다.

쾨이트와 가까이 마주하고 선 그녀의 모습은 마치 사자 앞의 생쥐나 다름이 없었다.

"어때? 성공할 것 같아?"

"그럴 리가 있나. 쟤 마법 실력은 반에서 최하위잖아."

주위에서 비웃으며 떠드는 학생들을 카앤이 매섭게 노려봤다. 녀석들이 움찔 놀라서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에스카의 수준으로 저만한 레벨의 몬스터에게 타격을 입힐 수 있을 리는 없었으니.

"하아, 하아······."

막상 가까이 마주하고 서자 느껴지는 압력이 장난 아닌지, 에스카의 호흡이 다시 거칠어졌다.

그녀는 간신히 마력을 끌어올려 마법을 펼쳤다.

허공에 피어오른 불덩이가 쾨이트의 머리 쪽을 향해서 날아갔다.

'눈을 노리는군.'

눈이라면 외피와 달리 연약할 테고, 거의 유일한 약점이었으니 노려볼 만하긴 했지만······.

크릉!

그러나 고개를 거세게 뒤흔든 쾨이트가 날아든 불덩이를 손쉽게 소멸시켰다.

상처 하나 없이 화만 잔뜩 난 놈이 엉거주춤 서있는 에스카를 향해서 입을 쩍 벌리고 포효했다.

"꺄악······!"

에스카가 두 손으로 귀를 막고 바닥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덜덜 떠는 그녀에게 교수가 다가가서 일으켜주었다.

"도전 정신은 좋았어요. 하지만 그 정도 위력으로는 쾨이트에게 생채기 하나 내지 못한답니다."

그렇게 완전히 혼이 빠져서 철창 밖으로 나온 에스카였다.

카앤이 그런 그녀를 다독여주었다.

"괜찮아, 에스카?"

"으응, 괜찮아······."

방금의 포효에 다른 학생들도 완전히 질린 기색이었다.

아무리 성적이 탐난다고 해도 이대로면 더 도전하려는 학생은 없지 않을까 싶었다.

"하겠습니다."

그런데 그때, 누군가 또 손을 들었다. 레아였다.

철창으로 걸어들어간 레아가 차분한 기세로 쾨이트의 앞에 섰다.

방금 전 공격으로 놈은 더욱 흉폭해진 기세였지만 그녀는 조금도 주눅들지 않은 모습이었다.

나는 조금 흥미로운 기색으로 그 광경을 지켜봤다.

그녀라면 과연 타격을 입힐 수 있을까? 에스카처럼 눈을 노리려고 할까?

그녀가 곧바로 손을 뻗더니, 쾨이트를 향해서 마법을 펼쳤다.

콰아앙!

광선처럼 쏘아져나간 마력포에 적중당한 쾨이트가 고통에 찬 괴성을 내질렀다.

매캐한 연기와 함께 쾨이트의 가슴팍에서는 피가 줄줄 흘러나오고 있었다.

너무나 간단한 성공. 그것도 약점을 노린 것도 아닌 완벽한 타격이었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 광경을 바라봤다. 저건 그냥 단순한 마력포가 아니라······.

크오오오!

상처를 입은 쾨이트가 격하게 날뛰려고 하자 레아가 움찔 놀라서 다시 마법을 펼치려고 했다.

하지만 그 전에 교수가 나섰다.

넓게 퍼져나간 교수의 마력이 쾨이트의 전신을 감싸고 억눌렀다.

쾨이트를 진정시킨 뒤, 교수가 짝짝 박수를 치며 감탄안 어조로 말했다.

"대단해요, 레아 헤리윈 학생. 이렇게 간단히 성공해버릴 줄은 몰랐는데."

다른 학생들도 경외와 부러움에 찬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런 와중에 카앤이 아쉽다는 듯 중얼거렸다.

"아, 내가 먼저 하려 했는데."

문득 카앤의 옆에 서있는 에스카의 표정이 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조금 어두워진 낯빛으로 입술을 꽉 깨문 채 레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

저녁 시간대에는 식사 뒤에 간간이 공용 훈련장에서 연습을 하기도 했다.

원래는 넷이서 했지만 최근에는 멤버가 추가되어 바이온도 종종 함께 어울렸다.

"카앤, 랜. 너희는 마법사답지 않게 몸이 제대로 단련되어 있군. 설마 체술도 익힌 건가?"

"응."

"너희는 다들 신기한 녀석들이야. 리곤도 검술뿐 아니라 마법도 익히고 있다고 들었다."

"너도 이참에 마법 좀 배워보는 게 어때? 바이온."

"쓸데없다. 내게는 육체와 검 한 자루면 충분하다."

바이온은 딱딱한 면이 있었지만 성격이 나쁜 녀석은 아니었다.

성격까지 생김새 그대로 전사답다고 해야 되나.

"먼저들 가. 난 혼자서 조금만 더 하다 가려고."

"그래? 알겠어."

훈련을 끝낸 뒤, 내 말에 애들이 먼저 훈련장에서 떠났다.

더 훈련하겠다는 건 핑계였다. 도서관에 숨겨진 신비가 생성됐는지 확인을 안 한 지도 꽤 오래되서, 그걸 확인하러 가기 위해서였다.

잠시 주저앉아서 쉬다가 슬슬 밖으로 나가려고 일어서는데······.

'······?'

훈련장에 학생 한 명이 들어오는 게 보였다.

다름이 아니라 레아였다.

늦은 시간이었고, 그녀와는 한 번도 훈련장에서 마주친 적이 없었기에 의외였다.

'왜 굳이 공용 훈련장에 왔지.'

마법학부와 검술학부는 훈련장도 따로 나뉘어서 마련되어있었다.

학부별 훈련장이 시설은 더 좋았지만 이쪽은 리곤이 있어서 공용 훈련장에 온 거였고.

공용 훈련장이 더 넓어서 그런가, 아니면 사람이 더 없어서 그런가?

눈이 마주쳤지만 레아는 이쪽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훈련장 한편에 자리를 잡고 섰다.

막 떠나려던 나는 잠시 더 남아있기로 했다.

쟤는 마법 연습을 어떻게 할까 문득 호기심이 들어서였다.

레아가 펼친 마법은 간단한 빙결 마법이었다. 허공에 새하얀 냉기가 뭉쳐졌다.

나는 그 광경을 보며 무언가 묘하다는 걸 느끼다가, 이내 이질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저번의 그건가?'

저번에 몬스터 탐구 실습에서 그녀가 쾨이트를 상대로 선보였던 마력포.

그것도 봤을 때 묘하다고 생각하긴 했었다. 그건 분명 평범하게 마법을 펼친 것과 달랐으니까.

잠시 그녀를 더 관찰하던 나는 이내 원리를 짐작할 수 있었다.

"아······ 설마 술식을 응용한 건가?"

그렇게 중얼거렸는데, 레아가 갑자기 마법을 거두고 이쪽을 홱 돌아봤다. 왜인지 놀란 기색으로.

갑자기 나는 왜 쳐다보나 싶은데 이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온 그녀가 대뜸 말을 걸어왔다.

"방금 뭐라고 했어?"

"······뭐?"

"방금 뭐라고 했냐고."

그 거리에서 혼잣말이 들렸나? 귀도 좋네.

'근데 왜 이러는 거야.'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대답했다.

"네 방금 마법, 술식을 응용해서 위력을 증폭시킨 게 아닌가 싶어서. 저번 몬스터 탐구 실습 때처럼."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았는데?"

"어떻겠냐니······ 그냥 보이니까 안 건데."

나는 그렇게 말하고서 그녀가 이렇게 반응하는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런가. 보통은 그냥 봐서는 눈치채지 못하려나?

초감각을 가진 나는 마력의 흐름을 세세하게 하나하나 파악할 수도 있다.

또 최근에는 마법을 공부하며 마법적 지식도 나름 많이 늘어난 상태였다.

그래서 그녀의 마법이 전개 도중 어느 순간 갑자기 위력이 증폭한 게 마력 조작의 결과만은 아닌 것 같아서, 자연스레 술식과 연관지어 원리를 짐작한 것이고.

레아는 잠시 날 노려보듯 바라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눈썰미는 제법 좋네. 맞아. 술식에서 마법의 위력을 담당하는 요소만 정확히 파악해서 변형한 거야."

"그렇구나."

그런 식으로도 마법의 위력을 늘리는 게 가능하군.

학생 수준에서 사용할 만한 기술은 아니다 싶었다.

"······."

잠시 침묵이 흘렀다.

레아는 어째서인지 계속 내 앞에 서있었다. 더 할말이 있나?

내가 빤히 쳐다보자 그녀는 그제서야 몸을 돌려 제자리로 돌아갔다.

'술식의 변형이라.'

나는 한번 화염 마법을 펼쳐봤다.

물론 변형의 원리를 적용하는 건 감도 전혀 못 잡고 실패했다.

어떤 식으로 변형해야 하는지는 고사하고, 나는 아직 내 술식의 정확한 구성조차 모른다.

레아야 자신의 술식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기에 가능한 거고 내게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나는 마법을 거두고 시선을 돌렸다.

이쪽을 계속 힐끔거리던 레아가 새삼 실망한 표정을 짓고서 고개를 돌리는 모습이 보였다.

'뭔데, 쟤는.'

이상한 녀석이다 생각하며 나는 그만 훈련장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곧장 공용 도서관으로 향해서 신비를 확인했다. 여전히 신비는 없었다.

수업과 적응 (6)

대인 전투는 마법학부 수업들 중 자유롭게 마법을 펼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수업이었다.

학생들끼리 대련을 하거나 교수가 직접 학생들을 상대하며 지도하는 게 대인 전투 수업의 방식이었다.

엘폰에 입학하고 어느새 한 달 정도의 시간이 훌쩍 흘렀다.

오늘 있을 대인 전투 수업은 평소와 달랐다.

바로 검술학부 학생들과 함께 교류 수업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아, 저기 리곤하고 바이온 있다."

카앤이 맞은편에 서있는 검술학부 학생들 중 두 사람을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그에 리곤도 웃으면서 이쪽에 눈인사를 건넸다.

우연찮게도 우리와 처음으로 교류수업을 하게 된 검술학부 반은 바로 리곤이 속한 반이었다.

"너희들은 지금까지의 수업에서 마법사와 마법사의 전투에 대해 배웠다. 그럼 마법사와 전사의 전투는 어떻게 다르다고 생각하나?"

본격적으로 수업을 시작하기 전, 로켈 교수가 여느 때처럼 설명을 시작했다.

"마법사와 마법사의 전투는 대체로 고정된 자리에서의 전투다. 체술도 익힌 마법사가 아니고서야 이리저리 몸을 움직여가며 상대의 마법을 피할 재주는 없지. 그렇기에 마법전은 기본적으로 회피라는 선택지 없이 공격과 방어의 패턴이 전부다. 오로지 마력과 마법의 정교함, 심리전으로 상대의 공격 마법은 막고, 자신의 공격은 상대의 방어 마법을 뚫고 적중시키는 게 마법전의 핵심이다."

굳이 따지자면 그렇긴 하겠군.

나는 교수의 설명을 적당히 흥미롭게 들었다.

"하지만 마법사와 전사 간의 전투는 다르다. 너희는 고정된 대상이 아닌, 쉬지 않고 움직이는 대상에게 거리를 좁히게 두지 않으면서 마법을 적중시켜야 한다. 그렇기에 요구되는 능력 요소의 중요도 또한 마법전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을 것이다. 오늘 수업에서 직접 그 차이를 겪어보도록."

설명을 끝낸 로켈 교수가 검술학부 학생들이 있는 쪽을 돌아봤다.

허리춤에 손을 올린 채 기다리고 있던 검술학부의 교수가 씩 웃으며 말했다.

"끝나셨습니까? 그럼 바로 시작할까요?"

긴 말은 필요 없이 대련은 곧바로 시작되었다.

처음 순서로 나선 학생들이 훈련장 한가운데에 마주 보고 섰다. 양쪽 다 긴장한 기색이었다.

"대련 시작."

교수의 시작 선언과 함께, 마법사 학생이 먼저 신속하게 마법을 펼쳤다.

상대는 좀 방심하고 있었는지 날아든 충격파 마법을 못 피하고 그대로 적중당해서 바닥을 굴렀다.

하지만 곧장 벌떡 일어나서 발빠르게 측면으로 움직이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평소라면 마법이 적중한 순간 끝이었겠지만, 이건 마법사끼리의 전투가 아니었기에 교수들은 대련을 중단시키지 않았다. 체술을 익힌 이의 몸은 가벼운 마법 한 대 맞았다고 리타이어될 만큼 무르지 않았으니.

검술학부 학생은 작은 마법 정도는 맞아도 상관없다는 듯 과감한 스탠스로 간격을 파고들 기회를 노렸는데, 우리반 학생은 그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좀처럼 감을 잡지 못하는 기색이었다.

함부로 마법을 날리면 상대가 버티거나 피한 다음 순식간에 파고들 테니까.

결국 그 대치 상황에서 조바심을 못 견딘 우리반 학생이 다시금 마법을 전개했다.

검술학부 학생은 옆으로 몸을 굴러 아슬아슬하게 공격을 피한 다음 빠르게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검격이 방어막과 충돌하며 굉음이 울려퍼졌다. 거기서부터 우리반 학생은 패닉에 빠진 기색이었다.

"왜 저리 답답하게 막고만 있어? 빨리 반격하든가 해야지."

그 광경을 보며 카앤이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닐 것이었다.

계속해서 공격을 허용하면 방어막이 무너질 테고, 그렇다고 방어를 유지하는 데만 신경을 기울이면 반격할 틈이 없는 상황.

물론 상대보다 역량이 뛰어나다면 얼마든지 반격할 여유가 있겠지만, 레벨로 보아 두 사람의 실력에는 큰 차이가 없었다.

검사를 상대로 지척까지 거리를 준 시점에서 마법사에게는 이미 크게 불리한 상황이었다.

"그만. 대련 종료다."

결국 방어막이 박살나기 직전까지 가서야 교수가 대련을 중단시켰다.

그렇게 첫 대련은 검술학부 학생 쪽의 승리였다.

나는 내 차례가 되면 어떻게 대련을 끌어갈까 생각해봤다.

'결국에는 간격을 유지하면서 마법을 적중시키면 되는 건데.'

어차피 서로가 경험은 부족하다.

빠르게 움직이는 대상을 맞히는 것에는 마법학부 학생들도 익숙하지 않겠지만, 검술학부 학생들 또한 마법의 변칙성에 익숙할 리가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최대한 다양한 마법을 펼치면서 집중력을 흐뜨러뜨리면 되지 않을까.

몇몇 학생들이 더 대련을 펼치고 내 차례는 금방 다가왔다.

5번의 대련 중 한 번을 제외하고 모두 검술학부 학생들이 승리했다.

카앤이 옆에서 내 어깨를 툭 두드렸다.

"랜, 이겨야 돼. 계속 지기만 하면 리곤한테 자존심 상한다고."

진지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하는 카앤을 보며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이런 걸 보면 애는 애군.

내 상대로 나온 학생은 20레벨 초반 대의 제법 실력 있는 학생이었다.

앞에 자기반 학생들도 대부분 이겨서 그런지 상당히 자신만만한 기색이었다.

대련이 시작함과 동시에 기세 좋게 돌진해오는 상대를 향해, 나는 마법을 펼쳤다.

번쩍!

섬광 마법이 터지며 시야를 환하게 가렸다. 상대는 순간 멈칫했지만 그 정도가 전부였다.

물론 큰 효과를 기대하고 펼친 마법도 아니었다.

이어 곧바로 다음 마법을 전개했다. 상대의 발치를 노리고 자잘한 빙결 마법들을 분산시켜 날렸다.

나는 일부러 큰 마력을 사용하지 않았다. 빠르게 자잘한 마법들만 날리며 거리를 좁히게 두지 않았다.

좀처럼 생각대로 되지 않는지 상대는 약이 오른 기색이었지만 침착함을 잃지는 않았다.

이대로 내 마력이 바닥나기를 기다리는지 굳이 무리하지 않고 회피에만 집중했는데, 물론 저렇게 나올 것까지도 생각은 했다.

약한 마법만 날린 이유는 상대를 무의식 중에 방심시키기 위함이기도 했다.

내 마력 출력의 최대치를 모르는 상대에게 강력한 기습 한 방을 날리기 위해서.

내 마법 실력은 잘 쳐줘도 평균이지만, 마력의 총량만큼은 학년에서도 최상위권이었으니까.

쩌저적!

살짝 빗나간 냉기 마법이 바닥 일대를 얼리며 상대의 다리까지 얼려버렸다.

마법이 이렇게 넓은 범위까지 퍼질 줄은 몰랐는지 순간적으로 발이 묶인 상대는 당황했다.

나는 이어서 허공에 화염구를 보란 듯이 피어올렸다. 상대가 얼빠진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멈추지 않고 공격했다면 결과는 뻔한 것이었기에, 교수가 곧바로 대련을 중단시켰다.

"대련 종료."

물론 승리는 내 차지였다.

"훌륭했다. 전사를 상대하는 마법사의 정석을 보여준 대련이었다."

로켈 교수가 드물게 칭찬을 건넸다.

반대로 상대는 검술학부 교수에게 독설을 듣다가 터덜터덜 제자리로 돌아갔다.

"잘했어, 랜! 역시 해줄 줄 알았어!"

자리로 돌아온 나는 신나서 들러붙어오는 카앤을 떼냈다.

그나저나 나도 꽤 능숙해지기는 했나?

이제 마법을 펼칠 때 느껴졌던 어색함이나 이질감은 거의 없다.

마법에는 재능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연습하니 조금씩이라도 실력이 늘기는 하는 건가.

다음으로는 마침 카앤의 차레였다.

카앤은 예상대로 가볍게 상대를 압도하고 승리했다.

카앤에게 부족한 점이라 하면 익힌 마법의 다양성 정도였는데, 고작 한 달 만에 그 약점마저도 많이 사라져서 그녀의 마법실력은 이제 반에서도 상위권이었다.

대련은 계속되었다. 에스카는 예상대로 졌고 바이온은 승리했다.

그리고 거의 수업의 막바지가 되서야 리곤의 차례가 왔는데······.

"와, 설마 했는데 진짜 저 둘이 붙네."

나는 훈련장 한가운데로 나선 두 사람을 바라봤다. 리곤, 그리고 레아.

학생들 사이에는 왜인지 묘한 긴장감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럴 만도 했다. 학년에서도 가장 유명인사라고 할 수 있는 두 사람이었으니까.

마법학부 신입생 1위와 검술학부 신입생 1위, 둘의 대련은 그런 매치와 다름이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레아 헤리윈이 이기겠지."

재밌는 건 리곤이 칼데릭 출신이라 그런지, 검술학부 학생들마저도 리곤이 아니라 레아가 이기길 바라는 분위기였다는 것이다.

물론 나는 이왕이면 리곤이 이기기를 바랐다.

레벨로만 따지면 레아 쪽이 미세하게 높았기에 결과는 모르는 일이었지만.

레아는 평소와 다름없는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상대가 누구든 전혀 관심 없다는 듯.

그리고 그건 리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럼······ 대련 시작."

교수의 선언과 함께 대련이 시작되었다.

선공은 레아의 몫이었다. 전격 마법이 넓은 범위로 그물처럼 퍼지며 리곤을 덮쳤다.

리곤은 자세를 낮춘 채 옆으로 피했다가 빠르게 방향을 바꿔 돌진했다.

리곤의 움직임은 굉장히 빨랐으나, 레아의 대처는 그 이상으로 신속했다.

이번엔 채찍처럼 길게 늘어진 속박 마법이 팔다리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눈 깜짝할 사이 한 차례 공방이 끝났다. 별 수 없이 뒤로 물러난 리곤은 조금 놀란 기색이었다.

제자리에서 툭툭 뛰며 레아를 빤히 쳐다보다가, 이내 입가에 옅은 웃음을 걸고 다시 몸을 움직였다.

카가가가각!

무더기로 날아드는 마력의 칼날을 리곤이 피하지 않고 전부 검으로 산산조각 쳐냈다.

어느새 리곤의 검에는 선명한 검기가 맺힌 상태였는데, 자신의 마법이 간단히 막히자 레아의 표정이 조금 찌푸려졌다.

두 사람의 대결은 상상 이상으로 치열한 양상으로 흘러갔다.

리곤은 굳이 마법을 피하려 하지 않고 막을 수 있는 마법은 전부 정면에서 막으며 거리를 좁혔고, 레아는 점점 마법의 강도를 올렸다.

기어코 리곤이 접근하자 레아는 과감히 지근거리에서 충격파를 떠드려 도로 거리를 벌려버렸다.

공중에서 몇 바퀴 돌다가 바닥에 착지한 리곤은 별 데미지도 없는지 다시 그녀를 향해 달려들었다.

이미 학생 수준이라고는 할 수 없는 수준 높은 공방에 학생들이 넋을 놓고 지켜봤다.

리곤을 좀처럼 떨쳐내기가 힘든지, 레아가 드물게 굳은 표정으로 입술을 깨무는 모습이 보였다.

이대로는 리곤의 체력보다도 레아의 마력이 바닥나는 게 빠를 것 같은 상황.

그때 레아의 마력이 범상치 않은 성질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오?'

구슬처럼 작은 보랏빛의 구체 3개가 그녀의 주위에 떠올랐다.

저건 학생들이 일반적으로 배우는 공용 마법 같은 게 아니다.

리곤은 그에 별달리 반응하지 않고 계속해서 돌진했는데, 그때 자색구에서 반응이 일어났다.

번쩍!

마치 유도 미사일처럼 자색구에서 뿜어져나온 광선이 기이하게 휘어지며 리곤의 전신을 노렸다.

간발의 차로 몸을 던져 직격을 피한 리곤이었지만, 하나는 스쳤는지 팔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리곤은 상당히 놀랐는지 휘둥그레 눈을 뜬 채였다.

'저게 무슨 마법이냐.'

뭐, 헤리윈 가문의 비전 마법 같은 건가?

아무리 레아가 뛰어나다고 해도, 저만한 밀도의 마력을 그녀의 역량으로 다 제어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그녀가 전부 제어하는 게 아니라고 한다면 마법의 성질 자체가 그런 거겠지. 꽤나 살벌한 마법이었다.

"인정할게. 너는 강해."

여전히 주위에 자색구들을 띄운 채 레아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대련은 내 승리야. 이 마법까지 사용하면 적당히는 안 되니까, 패배를 인정해."

확실히 저런 걸 정통으로 맞았다가는 조금 다치는 정도로는 안 끝날 것이다.

로켈 교수를 보니 그도 그만 대련을 중단시켜야 겠다고 여기는 기색이었으나······.

"너도 엄청 강하긴 하네."

리곤이 드물게 높아진 언성으로 말했다.

입가에 환한 웃음을 지은 채 피를 닦아내며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너무 오만한 거 아냐? 공격 한 번 스쳤다고 그렇게 말하는 건."

레아의 표정이 차갑게 일그러졌다.

로켈 교수가 조금 난감한 눈길로 검술학부 교수에게 눈짓을 했다.

그러나 팔짱을 끼고 서있던 그녀는 눈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직 괜찮지 않겠습니까, 로켈 교수님. 사고가 나기 전에는 확실히 막아주실 수 있으시면서."

로켈 교수는 성가시다는 듯 혀를 찼지만 결국 대련을 중단시키지는 않았다.

지이잉!

세 줄기의 자색 광선이 다시금 리곤을 노리고 쏘아졌다.

리곤은 이건 막을 수 없다 생각했는지 몸을 이리저리 비틀며 회피하기 바빴다.

점점 가속이 붙는 리곤의 움직임을 레아가 바쁘게 눈으로 쫓았다. 광선은 어지럽게 휘어지며 끈질기게 리곤을 추적했다.

이대로면 여전히 불리한 쪽은 리곤처럼 보였지만······.

처억.

갑자기 동작을 멈춘 리곤이 우뚝 검을 위로 치켜들었다. 완전히 공격에 자신을 노출시킨 채.

그에 레아도 한순간 멈칫했다.

"뭐 하자는 거야. 포기?"

"설마. 이대로면 힘들 것 같아서 도박 좀 해보려고."

리곤이 발을 굴렀다. 그와 동시에 레아도 리곤을 향해 광선을 일제히 쏘아냈다.

그리고 그 다음 순간, 리곤이 검이 유려한 경로를 그리며 광선들을 모조리 빗겨 쳐냈다.

빗겨 쳐낸 광선들은 한순간 레아의 제어에서 벗어났고, 그 틈은 거리가 좁혀지기 충분한 시간이었다.

콰앙!

리곤의 검이 광선 마법을 제어하며 약해진 레아의 방어막을 단숨에 박살냈다.

레아가 파르르 떨리는 눈으로 자신의 목에 겨누어진, 반쯤 부서진 검날을 바라봤다.

"내가 이겼네."

"······."

그렇게 말한 리곤이 숨을 돌리며 검을 거두었다.

불리했던 형세를 뒤집고 대련은 결국 리곤의 승리였다.

설마 광선을 전부 빗겨 쳐낼 줄이야.

나도 검술을 익혔기에 저게 현재 리곤의 수준에서 얼마나 터무니없는 짓인지 잘 알았다.

과연 아셸이 자신 이상의 천재라고 칭한 재능다웠다.

"······졌어? 내가?"

여전히 제자리에 우두커니 선 레아가 멍하니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자기 실력에 자부심이 대단해 보였으니 전력을 다했음에도 패배한 것에 충격인 모양이었다.

수업과 적응 (7)

로켈 교수는 집무실에 앉아 검술학부의 가온 교수가 건네준 계획서를 훑어보고 있었다.

무슨 계획서냐고 하냐면, 어느새 훌쩍 다가온 학기 시험에 관련한 것이었다.

"······흠."

의자에 등을 파묻은 로켈 교수가 묘한 표정으로 팔짱을 꼈다.

저번에 붙잡혀서 대충 듣기는 했는데, 솔직히 제법 재밌는 구상이라는 생각은 들었다.

시험 방식이 꽤 과격하고, 이것저것 준비할 것들도 많겠지만, 이 정도면 위원회에 소리를 들을 정도는 아니고······.

"어떠십니까, 로켈 교수님? 역시 어렵겠죠?"

계획서를 전달해온 조교수가 어색하게 웃으며 물었다.

"아니, 생각보다 괜찮군. 좀 더 고민해봐야겠네."

"······예? 정말이십니까?"

"무슨 문제가 있나?"

"아, 아닙니다. 그럼 가온 교수님께는 그렇게 전달드리겠습니다."

"됐네. 굳이 수고할 필요 없네. 내가 나중에 직접 말하지."

철컥.

집무실에서 나온 조교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로켈 교수는 가온 교수를 별종이라며 상대하길 꺼려하지만, 그가 근처에서 보기에 두 사람은 제법 성격이 잘 맞았다. 이런 걸 보면 말이다.

진심으로 신입생들한테 그런 인정사정없는 시험을 치루게 하려는 건가?

"이번 1학년들은 고생 좀 하겠네······."

조교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걸음을 옮겼다.

***

입학한 지 3달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별다른 사건 없이 아카데미에서의 시간은 느리면서도 빠르게 흘러갔다.

"어디 갔다 온 거야, 랜?"

"잠깐 도서관에. 찾는 책이 있어서."

수업이 다 끝난 뒤 늦은 오후.

나와 리곤과 바이온은 함께 기숙사 건물 근처에 위치한 야외 테이블로 향했다.

저녁 식사 전에는 약속처럼 그곳에 모여서 잡담을 떠는 게 평소 일과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복도를 걷는데, 맞은편에서 레아가 걸어오고 있었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리곤이 스스럼없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

"안녕."

"······."

그에 레아는 별다른 대꾸 없이 고개만 한 번 끄덕이고 지나쳐갔다.

우리도 마저 가던 길을 가는데, 느껴지는 시선에 나는 뒤쪽으로 슬쩍 고개를 돌렸다.

이쪽을 힐끔거리던 레아가 움찔 놀라서 아닌 척 홱 고개를 돌리는 모습이 보였다.

빠른 걸음으로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쟤는 대체 뭘 하고 싶은 건가 싶었다.

"왜 그래?"

"아냐."

저번의 교류 수업 뒤부터, 어쩌다 리곤을 마주칠 때마다 레아의 태도는 묘했다. 리곤을 의식하는 게 눈에 확실히 보였기 때문이다.

같은 반에서도 그녀가 다른 학생들과 조금이라도 어울리려 하는 건 본 적이 없었는데 말이다.

이유라면 물론 리곤과의 대련이 원인이겠지.

처음에는 패배한 게 분해서 적의를 비치는 건가 싶었는데, 딱히 그런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오히려 반대인 것 같기도 하고.'

뭐라도 말을 걸고 싶은데 눈치만 보다가 못하는 느낌.

설마 리곤에게 해를 끼치려는 게 아니라면야 알 바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목적지에 도착하자 먼저 자리에 앉아있는 카앤과 에스카의 모습이 보였다.

"왔냐?"

카앤이 손을 흐느적거리며 흔들었다. 우리는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이런저런 시답잖은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때웠다.

"그래서 말이야, 이번 휴일에는 같이 외출할 거지? 에스카."

"음······ 미안. 시험 얼마 안 남았잖아. 그때까지는 좀 공부에만 집중하고 싶어서."

"에이이······."

카앤이 불만스러운 기색으로 테이블에 몸을 쭉 늘어뜨렸다.

에스카가 그런 그녀의 어깨에 양손을 얹고서 달래듯 주물거렸다.

방금 말대로 요즘 에스카는 공부하기 바쁜지 카앤과 별로 어울려주지 않는 모양이었다.

"너희는 좀 어때? 리곤, 바이온. 시험 준비 잘하고 있어?"

"나? 나는 딱히 준비 같은 건 따로 안 하는데······."

"나도 마찬가지다."

학기 시험.

명칭 그대로 학기말에 보는 시험이다.

엘폰의 교육 과정은 한 학년에 두 학기가 나눠 존재하고, 학기말에 한 번씩 큰 시험을 치루는데, 대충 기말고사 같은 거라고 할 수 있었다. 지구로 따지면.

나는 팔짱을 낀 채 의자에 등을 기댔다.

이제 학기 시험까지 2주 조금 넘게 남았다.

남일이 아니라 내게도 좀 걱정인 부분이 있었다.

다른 과목들은 그렇다 쳐도, 마법 이론만큼은 아직까지도 막막하기 그지없었기 때문이다.

성적이야 아무래도 상관은 없지만 유급하거나 퇴학당하지 않을 정도의 점수는 받아야 하는데.

'이론이 진짜 성가시단 말이지······.'

어렵다고 해서 그동안 이론 공부에 손을 놓고 있었던 건 아니었다.

나름대로 열심히 했지만 여전히 수업 내용 따라가는 것만 해도 벅찰 뿐이지.

여기가 현대 지구도 아니고, 모르겠는 건 바로 인터넷에 서칭할 수 있는 편한 세계가 아니었다.

자료는 부족하기 그지없고, 그조차도 일일이 찾는 수고를 해야 하니 여러모로 빡셀 수밖에 없었다.

이 상태면 이론 시험 성적은 어떻게 될지 알 수가 없었기에 약간의 위기감은 느끼고 있었다.

'누가 일대일 과외처럼 붙어서 가르쳐주면 좋겠네.'

답답하게 막혔던 부분들만 시험 전에 한 번이라도 싹 정리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말이다.

그렇다고 카앤이나 에스카에게 부탁하기는 무리였다. 둘도 썩 이론이 뛰어난 편은 아니었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던 중에, 순간 내 머릿속에 한 사람이 스쳐지나갔다.

친분은 전혀 없지만 실력만큼은 학년에서도 가장 뛰어날 한 학생이.

"······."

한번 얘기나 해볼까?

명분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레아와 나는 일단 이론 수업에서 같은 조였으니까.

그리고······.

"응? 왜?"

리곤을 빤히 쳐다보자 녀석이 의아한 얼굴을 했다.

나는 고개를 젓고서 말했다.

"아니, 이번 휴일에는 외출이 아니라 다같이 도서관에서 공부라도 하는 게 어떤가 해서."

"도서관에서?"

"어. 리곤 너도 이론 과목은 있잖아? 공통 교양도 있고."

"오, 그럼 그럴까? 그것도 뭔가 색다르니 좋네."

카앤이 금세 들뜬 기색으로 맞장구를 쳤다.

리곤과 바이온도 아무래도 좋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

하루가 지나고, 오전의 마법 이론 수업 시간.

"······뭐?"

수업이 막 끝난 뒤 내가 꺼낸 이야기에 레아를 포함한 조원들이 제각각의 표정들을 지었다.

"이제 곧 학기 시험이잖아? 그러니까 휴일에 다같이 모여서 공부라도 하는 게 어떤가 싶어서."

두 조원이 떨떠름한 기색으로 자연스레 레아부터 쳐다봤다.

나는 왜 그런 반응을 보이는지 이해했다.

평소 대놓고 주위에 철벽을 치고 다니는 그녀가 스터디 모임 같은 걸 한다고 할 리가 없었으니까.

"누구 좋으라고 그런 시간 낭비를 내가 해야 하는데?"

그리고 레아의 반응은 예상대로였다.

나는 차분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수업도 지금까지 조별로 진행했으니 시험도 조별 방식일 확률이 높으니까. 그러면 함께 공부를 하면서 정보와 의견을 주고받는 편이 성적에 조금이라도 더 유리하지 않을까?"

레아가 눈쌀을 찌푸린 채 뭐라고 대꾸를 하려 했다.

하지만 그 전에 내가 말을 덧붙였다.

"이번 휴일에 친구들하고 도서관에 모여서 공부하기로 했거든. 근데 알다시피 내가 이론이 약하잖아? 그래서 너희들도 같이 하면 어떨까 싶어서 한번 물어본 거야. 내키지 않으면 별 수 없지만."

그렇게 말하며 레아의 반응을 슬쩍 살피니, 순간 멈칫하는 게 느껴졌다.

그녀는 잠시 동안 말이 없더니 이내 무뚝뚝하게 물었다.

"언제, 얼마나 할 건데?"

그 말에 조원들이 놀란 기색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나도 속으로 조금 놀랐다.

'이게 진짜 되네.'

리곤을 미끼로 하면 꼬드길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꺼낸 이야기였는데 말이다.

"정오쯤부터 시작해서 대충 저녁 시간까지. 어때?"

레아는 별말 없이 고개만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곧장 교실 밖으로 떠났다.

다른 두 조원에게로 시선을 옮기자 녀석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의외네. 쟤가 저렇게 순순히 한다고 할 줄은 몰랐는데······."

"그러게. 랜, 너 레아랑 좀 친해?"

그럴 리가 있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딱히."

***

휴일이 되고, 약속대로 도서관에서 모임이 이루어졌다.

카앤과 애들한테는 추가 멤버가 있을 거라고 진작에 양해를 구했다.

"의외네. 너랑 한자리에서 공부하게 될 줄은 몰랐다, 야."

카앤이 먼저 자리를 잡고 앉아있던 레아에게 툭 말을 건넸다.

레아는 카앤을 한 번 흘겨보고는 읽고 있던 서적으로 도로 시선을 돌렸다.

자리는 어쩌다 보니 나를 기준으로 형성되었다.

왼편에는 이론 수업 조원들이, 그리고 오른편에는 카앤과 에스카와 바이온이 앉아서 공부를 시작했다.

"레아, 여기 이 부분이 이해가 안 되서 그러는데······."

나는 본래 목적대로 막혔던 부분들을 레아에게 하나둘씩 은근히 물어봤다.

그녀는 못마땅한 기색을 풍겼지만 일단 가르쳐주기는 했다. 생각한 것보다도 훨씬 성의껏.

'아, 이런 식으로 푸는 거였구나.'

그리고 그건 확실히 큰 도움이 되었다.

나는 그녀에게 배운 내용들을 정리하며 이론 공부에 박차를 가했다.

과열된 머리를 식히기 위해 잠깐 혼자서 가지는 쉬는 시간.

나는 양옆에 앉은 리곤과 레아를 번갈아 봤다.

'얘는 분명 리곤 때문에 온 걸 텐데······.'

그런 것치고 레아는 리곤에게 시선도 두지 않은 채 공부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두 사람이 나눈 말이라고는 아까 처음에 만났을 때 인사가 전부다.

보고 있자니 좀 답답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레아에게 고맙기도 했기에 나는 분위기를 살폈다.

리곤은 역사책을 쥐고 피곤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이고 있었다.

리곤에게 슬쩍 말을 걸었다.

"역사? 공통 교양 공부야?"

"응."

"근데 얼굴이 왜 그래. 뭐 막히는 거 있어?"

"아니, 그냥. 수업에서 배운 거랑 자료랑 내용이 좀 다른 것 같아서. 헷갈리네."

"그럼 레아한테 한번 물어봐. 아마 역사도 잘 알걸."

내 말에 리곤이 레아를 쳐다봤다.

레아도 펜을 우뚝 멈추고 '허?' 이런 표정으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눈치를 보던 리곤이 이내 넉살 좋게 웃으며 그녀에게 물었다.

"좀 가르쳐줄 수 있을까?"

"······뭐가 헷갈린다는 건데?"

"그러니까, 제국력 321년에 있었다는 제하크 참변 말인데······."

리곤이 책을 들고 일어나서 그녀의 옆으로 이동해 앉았다.

레아는 날 가르쳐줄 때와는 달리 별 못마땅한 기색 없이 리곤에게 설명해주었다.

나는 잠시 그 광경을 지켜보다가 신경 끄고 내 공부에 집중했다.

공부에 집중하니 어느새 시간은 해가 저물 즈음이 다 되었다.

카앤이 기지개를 켜며 앓는 소리를 냈다.

"아, 배고프네. 이쯤 끝내고 저녁 먹으러 가자."

슬슬 자리를 정리하는 분위기가 되었기에 나도 책을 덮고 필기를 정리했다.

"너희도 저녁 같이 먹을 거지?"

"어? 뭐, 그럴까."

카앤이 레아를 포함한 이론 조원들에게 물었다.

두 사람은 그러겠다고 대답했지만 레아는 무시하고 자리에서 떠나려고 했다.

카앤이 그런 그녀를 보고 물었다.

"야, 레아. 어디가? 같이 밥 먹자니까."

그에 레아가 성가시다는 투로 대답했다.

"뭘 친한 척 굴고 있어? 난 됐으니까 귀찮게 하지 마."

"뭐?"

카앤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넌 방금까지 같이 잘 어울려놓고 왜 그러냐?"

"어울린 게 아니라 시험 대비를 한 것뿐이야. 성적 때문에."

"뭐, 그게 그거 아닌가······?"

카앤이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물었다.

"아니, 예전부터 궁금했던 건데 말이야, 넌 왜 그렇게 혼자서만 다니려고 하냐? 다 같이 어울리면 재밌고 좋잖아. 그렇게 아무랑도 친하게 안 지내면 재미없지 않아?"

카앤에게 악의는 없겠지만 기분 나쁠 법도 한 말인데, 레아는 여전히 무표정했다.

"어울린다는 건 수준이 맞는 사람들끼리나 할 수 있는 거야."

"수준? 마법 실력 말하는 거야, 아니면 네 가문을 말하는 거야? 대체 왜 그런 걸 따지는데?"

레아가 한층 차가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전부 하찮은 놈들밖에 없으니까. 내게 열등감을 품고 질투하는 놈, 콩고물 떨어지길 바라며 같잖은 아부나 떠는 놈, 그냥 멍청해서 짜증나는 놈. 내가 왜 굳이 인내해가며 그런 것들과 어울려야 하는 건데?"

······무슨 급발진이지?

나는 쟤가 갑자기 왜 저러나 싶어 가만히 지켜봤다.

카앤이 마음에 안 든다는 얼굴로 말했다.

"난 너한테 열등감도 없고, 아부 떨 생각도 없는데?"

"그럼 그냥 멍청한 놈인가 보네. 이제 그만 말 걸래?"

그때 리곤이 끼어들었다. 드물게 싸늘한 목소리로.

"말이 심하잖아. 꼭 그런 식으로 말해야겠어?"

레아가 움찔 놀라며 리곤을 쳐다봤다.

입술을 깨문 그녀가 이내 조소를 흘리고서 몸을 돌렸다.

"너도 그만한 재능을 타고나서 친구놀이에 시간이나 허비하지 마. 지금은 아니더라도, 어차피 결국은 다 내가 말한 대로 될 테니까."

"······."

"아, 그리고 널 확실히 앞섰다는 확신이 들면 다시 결투를 신청할 거야. 그때까지 기다려. 이 말을 하고 싶었는데 좀처럼 기회를 못 잡았네."

레아는 그렇게 말하고서 성큼성큼 떠나갔다.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카앤이 황당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하여튼 진짜 이상한 녀석이네······."

동감이었다.

학기 시험 (1)

시간이 흘러 학기 시험의 날이 다가왔다.

식당에서 아침 식사를 하는데 주위 학생들의 분위기가 평소와는 사뭇 다르게 느껴졌다.

"학기 시험은 엄청 중요해서 그래. 한 학기에 세 과목 이상 낙제는 무조건 퇴학이라고 알고 있어. 신입생도 예외는 없이."

"그래? 거 되게 빡빡하네."

에스카의 설명에 카앤은 그렇게 대꾸하고는 다시 밥을 먹기 바빴다.

카앤이든 리곤이든 시험날이라고 해서 별 생각은 없어 보였다. 바이온도 마찬가지고.

반면 에스카만 한눈에 봐도 긴장한 기색이 가득했는데, 식욕도 별로 없는지 식사도 반 이상을 남겼다.

"그만 먹게? 든든하게 먹어야 되는 거 아니야, 에스카?"

"아냐. 괜히 속만 안 좋아질 것 같아서."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곧바로 교실로 이동했다.

학기 시험은 총 사흘에 걸쳐서 진행되며, 시험 방식은 과목마다 천차만별 다르다고 들었다.

그리고 오늘의 첫 시험 과목인 마법 이론은 기존 교실에서 그대로 진행될 거라고 공지됐었다.

"간격을 두고 자리를 띄어서 앉도록 하세요."

시간이 되고, 조교수가 반으로 들어오자마자 학생들에게 말했다.

시험 감독관은 교수가 아니라 조교수가 맡아서 진행하는 모양이었다.

마법 이론은 기본적으로 완전한 필기 과목이었기에 시험도 필기였다.

그보다 그동안 수업을 조별로 진행해서 시험 방식도 그럴 줄 알았는데, 개별 시험이었다.

'잘하면 얹혀갈 수 있겠거니 했는데.'

아쉽게도 마법 이론 시험은 완전히 내 개인 역량에 달리게 됐다.

뭐, 낙제점만 피하면 상관은 없지만······ 설마 진짜 낙제되진 않겠지? 나름 열심히 했는데.

아까 에스카가 말했던 대로 엘폰의 규정은 상당히 빡셌다. 3과목 이상 아웃이면 얄짤없이 바로 퇴학.

그래도 나는 크게 염려는 안 했다.

마법 이론은 내가 가장 약한 과목일 뿐이었고, 다른 과목들은 적어도 평균은 했으니까.

설마 진짜 낙제점을 받아도 퇴학까지는 안 가겠지. 아마도.

"시험을 시작하겠습니다."

조교수의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학생들이 일제히 시험지를 펼치는 소리가 울렸다.

이어진 정적 속에서 나도 차분히 시험지를 펼쳤다.

시험은 의외로 순조로운 편이었다.

조금이라도 막히는 문제들은 바로 지나치고, 풀 만한 문제들부터 전부 풀고 나니 3분의 1은 풀었다.

시간이 끝날 때까지 나는 몇 문제를 더 푸는 데에 성공하고 시험을 마쳤다.

아예 손도 못 대겠는 문제들도 많았지만 이 정도면 기대 이상으로 상당히 만족스러웠다.

확실히 저번의 모임이 큰 도움이 되기는 했다. 아니면 반의 반타작도 못했을지도.

"아, 완전 망했네."

"뭐가 이렇게 어려워? 수업에 나온 것만 낸다더니."

"그러게. 마지막 문제는 진짜 풀라고 낸 건가."

시험이 끝나고 학생들의 투정과 탄식 소리가 교실을 채웠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다가, 마침 옆을 지나가는 레아를 보고서 말을 건넸다.

"야, 레아."

"······?"

"네가 저번에 집어서 가르쳐줬던 부분들이 많이 나왔네."

"그래서 뭐?"

"고맙다고. 덕분에 괜찮게 봤어."

감사 인사에도 그녀는 쯧 혀만 차고서 가던 길을 가버렸다. 하여간 성격 참.

나는 카앤에게 다가가서 물었다.

"어때. 좀 잘 봤어?"

"그럭저럭? 세 문제인가 빼고 일단 다 풀기는 했어."

카앤도 나에 비해선 이론 공부는 잘하는 편이긴 했다.

나는 에스카에게도 물어볼까 했다가, 얼굴 표정을 보고 관두었다.

"에스카, 넌 어때?"

"으응, 그냥 뭐······."

근데 나 대신 카앤이 툭 물었다.

카앤은 이런 부분에서 평소에 눈치가 좋은 편은 아니었다.

나는 슬쩍 대화 주제를 돌리고 두 사람과 함께 교실을 나섰다.

좀 쉰 다음에는 곧바로 다음 시험이었다.

***

가장 염려했던 마법 이론은 무사히 넘겼고, 다른 과목들 역시 그럭저럭 괜찮게 봤다.

대부분의 실기 시험에서 압도적인 실력을 뽐낸 건 역시 레아였고, 카앤도 상당했다.

사흘에 걸친 학기 시험 마지막 날.

마지막 시험 과목은 바로 대인 전투였다.

"하, 시험도 이걸로 드디어 끝이네."

"근데 무슨 시험이길래 훈련장은 놔두고 지하에서 본다는 거야? 지하에도 훈련장이 있었나?"

"아는 선배한테 들었는데, 로켈 교수 시험이면 진짜 각오해야 될 거라고 하던데······."

시험장으로 이동하는 길에 주위 학생 무리가 떠드는 소리였다.

대인 전투 시험을 볼 시험장은 평소 수업을 진행하던 훈련장이 아니라, 엘폰의 지하였다. 몬스터 탐구 수업을 했던 지하 장소와는 다른 구역의.

대체 뭔 시험이길래 지하에서 본다는 건지는 나도 좀 궁금하긴 했다.

심지어 교류 수업 때처럼 검술학부 반과 공동 시험을 치룬다고 공지했기에 더더욱.

"평범하게 대련을 치루는 건 아무래도 아닌 것 같지? 리곤."

"그러게."

공동 시험을 치루는 검술학부 반은 다름이 아니라 리곤의 헨릿 반이었기에, 다같이 이동하고 있었다.

나는 리곤과 카앤이 떠드는 소리를 흘려들으며 주위의 석벽을 둘러봤다.

'여기 지하는 얼마나 넓은 거야?'

어스름한 지하 통로를 지나 도착한 시험장은 넓은 공동 같은 장소였다.

그곳에서 먼저 기다리고 있던 조교수들이 학생들을 두 그룹으로 나눠서 정렬시켰다.

카앤과 에스카와 바이온은 모두 나와 같은 그룹이었고, 리곤만 다른 그룹이 되었다.

나는 그 광경을 보며 생각했다. 설마 팀전 같은 건가? 대인 전투인데?

그렇게 학생들을 모두 나눈 다음에는 무언가를 나눠주기 시작했다. 팔찌였다.

"팔찌를 모두 손목에 착용해주세요. 곧 교수님께서 오셔서 시험 방식을 설명하실 겁니다."

뜬금없이 웬 팔찌?

"뭐지? 마력이 느껴지는데?"

카앤이 받은 팔찌를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그 말대로 팔찌는 단순한 물건은 아니고 마도구였다. 무슨 용도인지는 아직 모르겠다만.

그리고 상대 그룹과는 팔찌의 색이 달랐기에 팀을 구분하는 목적도 있는 건가 싶었다.

어쨌든 말한 대로 팔찌를 차고 기다리고 있자니, 곧 로켈 교수와 검술학부의 교수가 도착했다.

조교수가 마지막으로 인원 체크를 마친 뒤, 로켈 교수가 마법으로 목소리를 확성하여 입을 열었다.

"이곳은 어떤 목적으로 엘폰의 초기에 설계됐다가, 흐지부지되어 지금은 별 용도 없이 방치되고 있는 지하 공간이다. 이번 학기의 대인 전투 시험은 이곳에서 진행될 것이다. 지금부터 시험 방식을 설명하겠다."

교수가 조교수들이 있는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자 조교수 한 명이 나서서 두 교수에게 우리처럼 팔찌를 하나씩 나눠주었다.

로켈 교수는 그 팔찌를 손목에 차고서 계속 말을 이었다.

"이 공동은 지하 공간의 중심이고, 보시다시피 동서남북으로 총 네 개의 통로가 있다. 너희들이 이곳까지 지나온 길이 동쪽 통로다."

"······."

"시험 방식은 간단하다. 시험이 시작하면 나와 여기 검술학부의 가온 교수는 남쪽과 북쪽 통로 끝으로 각각 이동할 것이다. 너희들은 방금 나눠받은 팔찌의 색대로 팀을 나눠서, 나나 가온 교수 중 한 사람에게서라도 팔찌를 빼앗으면 된다."

······응?

그 말에 학생들이 웅성거렸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교수를 상대로 팔찌를 뺏으라니, 터무니없는 소리였으니까.

"물론 충분히 가능한 수준에서 조건과 제약이 걸릴 테니 안심하도록. 또한 말했다시피 너희는 개인이 아닌 팀이다. 가능한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도 상관없다. 그렇게 얻은 교수의 팔찌를 들고 서쪽 통로 끝에 위치한 공동까지 이동한다면, 해당 팀 전원에게는 기여도와 상관없이 적어도 B+ 이상의 성적이 보장될 것이다."

"······!"

교수의 마지막 말에 학생들이 다시 한 번 술렁였다.

"교수의 팔찌를 뺏는 것 외에 다른 상대의 팔찌를 뺏는 것도 가능하다. 상대의 팔찌를 빼앗아서 서쪽 통로로 이동하는 것 또한 낙제를 피할 수 있는 방법이다. 물론 시험은 상대평가이기에 빼앗은 팔찌의 수가 많을수록 높은 성적을 받게 될 것이다. 시험이 종료될 때까지 하나의 팔찌도 얻지 못하거나, 팔찌를 잃어 탈락한 이는 어떠한 예외도 없이 낙제다."

시험은 총 두 시간 동안 진행. 한쪽 팀의 인원이 모두 탈락하더라도 시험은 그 즉시 종료.

그리고 교수의 팔찌를 얻어 점수 보장을 받을 수 있는 팀은 한 팀뿐이다.

두 팔찌를 얻더라도 먼저 서쪽 통로로 이동한 팀만이 혜택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시험이 뭐 이리 과격해?'

서로의 팔찌 뺏기라니. 이런 식의 시험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 안 했는데.

어쨌든 로켈 교수가 설명한 시험의 룰은 대충 그 정도였다.

"설명한 것 외의 제한된 규칙은 아무것도 없다. 그럼 최선을 다해보도록."

로켈 교수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설명을 마치고서 예고했던 대로 가온 교수와 자리를 떴다.

"5분 뒤에 시험을 시작하겠습니다. 그때까지 전투는 금지며, 이동은 지금부터 가능합니다."

엉거주춤 서있는 학생들에게 한 조교수가 말했다.

그리고 조교수들은 통로 곳곳에 공처럼 생긴 마도구들을 띄워서 흩어 보내기 시작했다. 아마 시험 진행 상황을 놓치지 않고 보기 위한 옵저버 마법일 것이다.

한편 당황한 학생들은 상대 팀의 눈치를 보며 거리를 벌리기 시작했다.

'허.'

나는 좀 어처구니가 없어서 헛웃음을 흘렸다.

이 대인 전투 시험은 지금까지 봤던 실기 과목들과는 완전히 방식이 달랐다.

실전이나 다름없는 팀 전투라니, 진짜 갓 입한한 신입생들한테 이런 시험도 보게 하는 건가?

"재미는 있겠는데, 리곤하고 팀이 갈라져서 아쉽네. 다같이 같은 팀이면 좋았을 텐데."

카앤이 반대 팀에 서있는 리곤하고 에스카를 바라보며 입맛을 다셨다.

어색한 정적 가운데 같은 팀 누군가의 중얼거림이 들렸다.

"······미친 거 아니야? 왜 저쪽 팀에 저 둘이 다 껴있는데?"

두 사람이 누굴 의미하는지야 명확했다. 리곤하고 레아.

각 학부 수석인 두 사람이 같은 팀으로 묶인 건 내가 생각하기에도 의아한 밸런스이기는 했다.

그 대신에 다른 상위권 학생들은 이쪽 팀이 더 많은 것 같기는 한데······.

"······다들 내 얘기를 들어볼래?!"

그때 누군가가 크게 소리쳤다.

나와 같은 팀의 학생이었는데, 자연스럽게 그에게로 시선이 몰렸다.

"당장 우리끼리 싸워봐야 좋을 건 하나도 없어. 그게 바로 교수님들이 원하는 걸 거야. 다들 들었잖아? 팔찌를 빼앗기면 그 즉시 탈락이야. 만약 팀이 이긴다고 해도 낙제점을 받는 사람들이 수두룩 나올 수 있는 거라고. 모두 여기에 동의해?"

"······."

"하지만 교수님의 팔찌를 얻으면 적어도 한 팀은 모두 낙제점을 피할 수 있어. 그리고 두 팀이 힘을 합쳐서 교수님을 상대하면 안 된다는 룰은 없었어. 그렇죠, 조교수님?"

"네, 맞습니다."

근처에 서있던 조교수 한 명이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들었지? 그러니까 일단 힘을 합쳐서 교수님들 팔찌부터 뺏자. 모두가 힘을 합치면 쉽게 해낼 수 있을 거야. 양팀 전원이 한 번에 몰려가는 건 아마 교수님들도 예상하지 못할걸? 그렇게 교수님 팔찌부터 쉽게 확보하고, 싸움은 그 다음에 하든지 하는 거야. 어때?"

제법 깔끔한 상황 정리였다.

그의 말대로 학생들끼리 싸워봐야 얻을 수 있는 이익은 교수의 팔찌를 뺏는 것보다 적다.

그렇다면 힘을 합쳐 교수의 팔찌부터 얻고, 싸움은 그 다음으로 미루자는 의견.

학생들은 대체로 동의하는 분위기였다. 일단 싸움은 가급적 피하고 싶다는 심리도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학생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두 사람에게로 향했는데, 레아와 리곤이었다.

레아는 자신에게 몰린 시선에 인상을 찌푸리고는 말했다.

"왜 날 봐? 난 어차피 교수님 팔찌를 뺏을 생각이었으니까 멋대로들 해."

그녀가 먼저 북쪽의 통로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로켈 교수가 이동한 쪽이었다.

리곤이 그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말했다.

"그럼 일단 그렇게 해볼까? 다들 가자."

그렇게 결정이 났다.

양팀의 학생들은 다함께 로켈 교수가 있는 북쪽 통로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학기 시험 (2)

"야, 어떻게 될 것 같냐?"

내 앞에서 나란히 걸어가는 같은 팀 학생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리 그 로켈 교수님이라도 이렇게 몰려가면 당황할 것 같지 않아?"

"그보다 교수님 팔찌를 얻은 다음이 문제야. 완전히 난장판이 될 것 같은데······."

분위기를 보면, 이미 교수에게서 팔찌를 얻는 건 기정 사실인 듯한 분위기였다.

이만한 수가 몰려가면 교수라도 당연히 감당하지 못할 거라 생각하는 거겠지.

그런데 정말 교수가 학생들이 합심하는 전개 하나 예상하지 못했을까.

'그렇게 쉽게 풀릴 것 같진 않은데 말이야.'

모두가 우르르 몰려가서 다다른 통로 끝에는, 로켈 교수가 우두커니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흐음."

공동 입구로 모여든 학생들을 둘러본 로켈 교수가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그런가. 나름 합리적인 판단을 했군."

나는 그의 표정을 보고 확신했다. 로켈 교수는 이런 경우 역시 상정하고 있었다.

"서로 다른 팀끼리 협력하면 안 된다는 룰은 없었습니다. 그러니 문제는 없지 않습니까, 교수님?"

주도자인 학생이 나서서 그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교수의 입가에 옅은 웃음을 띄워졌다.

"물론 문제 없다."

그리고는 그가 갑자기 허공에 손을 그었다.

그러자 바닥에 선 하나가 교수와 학생들 사이를 경계로 주욱 그어졌다.

학생들의 의문 어린 시선이 모인 가운데, 교수가 말했다.

"규칙은 간단하다. 방법을 불문하고 가장 먼저 이 선을 넘어오는 데 성공한 학생에게 팔찌를 주겠다."

선?

교수가 제시한 팔찌를 얻는 방법은 너무도 간단했다.

너무 간단해서 당황한 학생들이 서로의 눈치를 보는 가운데, 한 학생이 먼저 뛰어나갔다.

콰앙!

그리고 몇 걸음 나아가지도 못하고서 공중에 붕 뜨더니 거하게 바닥을 굴렀다.

충격파 마법으로 간단히 학생들 튕겨낸 교수가 마저 말을 이었다.

"물론 쉽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나는 세 종류의 마법만을 펼칠 것이다. 최선을 다해보도록."

그 말이 끝나자마자 다음으로 행동에 나선 이는 레아였다.

머리카락이 솟구칠 정도로 전력으로 마력을 끌어올린 그녀가 교수를 향해 전격 마법을 쏘아냈다.

빠지지직!

기세 좋게 뻗어나간 벼락은 교수가 방어막에 간단히 막혔다.

나는 그녀의 생각을 짐작했다.

'세 종류의 마법 제한 카운트부터 빨리 소모시키려는 건가.'

어떤 마법을 펼칠지 알면 그에 맞춰서 대응할 수 있을 테니까.

충격파 마법과 역장 마법을 펼쳤으니, 이제 남은 마법은 한 가지밖에 없다.

퍼어엉!

그때 학생들이 한 번에 선을 향해서 뛰어들었지만, 다시금 교수가 날린 충격파에 모조리 튕겨나갔다.

위력을 조절했기에 그래도 튕겨나간 학생들은 금방 일어났지만, 선 근처에도 다가간 이는 없었다.

몇 번의 시도가 간단히 수포로 돌아가자 누군가가 외쳤다.

"마법사들이 뒤에서 마법으로 엄호해줘! 방어하는 사이에 넓게 퍼져서 한 번에 뛰어들면 돼!"

그래. 그게 최선이긴 하겠지.

나도 가만히 있지만은 않고 적당히 공격 마법을 날렸다.

그러는 사이 타이밍을 보던 검술학부 학생들이 다시 한 번 돌진했다. 그러나······.

펑! 퍼엉!

교수는 날아드는 마법들을 전부 방어하면서도 달려드는 학생들을 하나하나 튕겨냈다.

학생들의 합공은 교수의 정신을 조금도 분산시키지 못했다.

"여전히 머릿수로만 밀어붙이고 있을 뿐이다. 전략을 짜도록."

그 압도적인 격의 차이에 학생들이 질린 표정으로 교수를 바라봤다.

난 조금 어이가 없었다. 설마 얘들 진심으로 숫자로 밀어붙이면 교수라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나?

물론 교수는 지금도 봐줄 만큼 봐주고 있었다.

정말 제대로 막아낼 생각이면 아예 역장을 넓게 펼쳐서 접근 자체를 차단할 수도 있었으니까.

"뭐야, 이거. 그냥 불가능한 거잖아······."

하지만 학생들은 의지가 꺾였는지, 더는 누구도 선에 다가가려고 시도하지 않았다.

그 다음으로 찾아온 것은 묘한 정적이었다.

양팀 간의 협력은 우선 교수를 쓰러뜨린다는 목표 하에 이뤄진 것이다. 근데 그게 가능하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면······.

"······."

학생들은 도로 팀대로 갈라져서 서로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한심한 눈길로 바라보던 로켈 교수가 마법을 펼쳤다.

콰과과과광!

무차별적인 충격파 폭격에 학생들이 비명을 지르며 하나둘씩 공동 밖으로 빠져나갔다.

***

그렇게 교수의 팔찌 얻기는 실패로 끝나고, 공동을 빠져나온 학생들은 흐지부지 흩어져버렸다.

"휴우, 쉽지 않겠네."

카앤이 머리칼에 묻은 흙먼지를 털어내며 물었다.

에스카는 침음을 흘렸고,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어떻게 할지야 나야 아무래도 좋았다. 적당히 다른 팀 학생의 팔찌를 얻어서 시험을 끝내도 되고.

"그보다 리곤은?"

"상대 팀이잖아. 왜 찾아?"

"아니, 그래도 그냥 같이 다니면 안 되나?"

"되겠냐. 걔는 혼자 알아서 하게 둬. 그래서 이제 어쩔래?"

그때 바이온이 입을 열었다.

"다른 놈들 팔찌에는 관심 없다. 나는 교수님의 팔찌를 얻어서 시험을 통과하고 싶다."

카앤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렇긴 해. 그럼 좀 쉬다 다시 가볼까?"

"로켈 교수님이 아니라 가온 교수님의 팔찌 말이다."

"가온······ 아, 검술학부 교수님 쪽? 왜?"

"같은 검사니까. 교수님과 검대 검으로 전력으로 부딪혀보고 싶다."

평소에도 마법엔 일말의 관심도 없는 바이온다운 이유였다.

카앤이 웃음을 터뜨리고서 말했다.

"뭐, 나는 어느 쪽이든 상관없어. 그럼 이번엔 가온 교수님한테 도전하러 가볼까?"

역시 이렇게 되나?

그때 에스카가 껴들어서 말했다.

"저기, 카앤. 그냥 상대 팀 학생의 팔찌를 얻는 편이 안전하지 않겠어?"

"에이, 그러면 시시하잖아?"

"시시한 게 문제가 아니라, 이건 시험······."

"괜찮아, 괜찮아. 그깟 성적이 뭐가 중요해? 어떻게든 교수님을 이겨보자고. 다 같이 힘을 합쳐셔."

"······."

에스카가 왜인지 그늘진 낯으로 고개를 끄덕였으나, 카앤은 눈치채지 못하고 마냥 들뜬 기색이었다.

카앤이 힘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자, 그럼 가자!"

***

한편, 또 한 명 여전히 교수의 팔찌를 노리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통로 벽면에 기대서서 생각에 잠겨있던 레아는 인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헉."

넷이서 몰려다니던 상대 팀의 학생들이 레아를 발견하고서 걸음을 멈췄다.

레아는 귀찮은 표정으로 도로 시선을 돌렸다. 가던 길이나 가라는 듯.

하지만 그 반응을 보고서 학생들은 눈치를 보다가 저들끼리 수근거렸다.

"야, 한번 해볼까? 혼자잖아."

그녀는 누군가에게는 선망의 대상이었지만, 누군가에게는 질투의 대상이기도 했다.

평소 다른 학생들을 대하는 태도가 좋지도 않았으니 그에 못마땅한 이들도 당연히 있기 마련이었다.

"저 반응 봐봐. 아까 분명 마력을 많이 써서 싸움을 피하고 싶어하는 거야."

그들은 이내 당당하게 레아에게로 다가갔다.

"너무 우릴 무시하는 거 아니야? 레아 헤리윈. 넌 지금 혼자······."

쾅!

레아가 손을 휘젓자 가장 앞에 서있던 학생이 그대로 꼴사납게 튕겨나갔다.

나머지 학생들이 다급히 마법을 펼치려고 했지만, 그조차도 그녀의 두 번째 마법보다 느렸다.

"짜증나게 굴지 마. 니들 팔찌는 필요도 없어."

사이좋게 바닥을 구르던 학생들이 창백해진 표정으로 비틀비틀 일어섰다.

레아가 그걸 한심하다는 듯 보다가 말했다.

"그보다 같은 팀의 팔찌라고 뺏으면 안 된다는 룰은 없었는데, 그렇게 몰려다녀도 돼?"

그 말에 움찔 놀란 학생들이 서로를 쳐다봤다.

레아는 코웃음을 치고서 고개를 돌렸다.

반대쪽 통로에서 이번엔 다른 학생들이 걸어오고 있었다.

"쟤도 참 성격 나쁘다니까. 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

그녀는 인상을 찌푸렸다. 카앤이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우리도 딱히 너랑 싸울 생각 없어. 가온 교수님한테 도전하러 가는 길이라서."

"어쩌라고."

"그냥 그렇다고. 말하는 거 보니까 너도 교수님 팔찌 노리는 거 아니냐? 힘내라."

레아는 통로 저편으로 사라지는 카앤 무리를 바라보다가 쯧 혀를 찼다.

이내 시답잖은 것들에 신경을 끄고 그녀는 도로 상념에 잠겼다.

'불가능하지 않아. 방법이 있을 거야.'

해낼 수도 없는 시험을 교수들이 마련했을 리가 없다.

로켈 교수는 머릿수로 밀어붙일 게 아니라 전략을 짜라고 했다. 그러니 분명 무언가 방법이 있을 터.

검술학부와 합동 시험을 치루는 것도 별다른 이유가 없는 게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 로켈 교수의 수업을 생각하면, 그는 언제나 합당한 근거가 있는 언행을 하는 자였으니까.

또 몸을 움직여서 선을 넘어야 한다는 방식부터가 마법사에게는 치명적으로 불리했다.

그러니 어쩌면 검술학부 학생들과 협동하는 데에 팔찌를 얻을 수 있는 해답이 있는 게 아닐까.

"······."

협동.

순간 레아의 머릿속에 한 사람이 스쳐갔으나, 이내 한숨을 쉬고서 지워버렸다.

역시 팀 따위는 필요 없었다. 언제나 그랬듯 혼자서도 충분히 해낼 수 있다.

한참 동안 생각을 이어가던 레아는 다시 로켈 교수가 있는 통로로 이동했다.

"아까는 우르르 몰려오더니, 이번엔 한 명인가?"

뒷짐을 진 채 서있던 로켈 교수가 그녀를 보고서 웃음을 흘렸다.

레아는 대꾸하지 않고 곧장 마력을 끌어올렸다. 마력구가 방어막을 강타했다.

콰앙!

물론 로켈 교수의 방어막에는 자그마한 금 하나 생기지 않았다.

레아는 그 광경을 보며 발을 할 걸음 앞으로 옮겼다.

그녀가 생각하기에, 돌파구라고 할 만한 방법은 아무리 생각해도 하나뿐이었다.

교수의 신경을 분산시키는 방식으로는 안 된다. 방어막을 뚫고 교수를 직접 타격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아까도 두 방식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모든 학생들이 몰려들어서도 실패한 걸 아무리 그녀라도 혼자서 해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녀는 교수와 자신 사이의 수준 차이를 잘 알고 있었다.

로켈 교수가 학생들을 다치게 할 살상 마법을 펼칠 리도 없지만, 마음만 먹으면 굳이 그런 방법이 아니더라도 아예 역장 마법을 넓게 펼쳐서 선에 접근 자체를 차단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는 않았어.'

로켈 교수는 오직 날아드는 마법을 막을 때에만 방어막을 펼쳤다.

그가 선으로 달려드는 학생들을 막아낸 방식은 충격파 마법 하나뿐이었다.

그러니, 어떠한 잔재주도 없이 정면에서 교수의 마법을 막으면서 전진한다.

가장 정답 같지 않은 그것이 어쩌면 정답일 것이다. 머릿수가 아닌 개인의 역량만에 기댄 방법.

물론 아무리 교수가 봐주고 있다고 해도, 순수한 마력 대결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을 리는 없다.

하지만 막는다는 게 정면에서 정직하게 방어 마법을 펼치는 것만을 의미하는 건 아니었다.

콰과곽!

레아는 역장 마법을 반구 형태로 좁게 펼쳐 드릴처럼 회전시켰다.

충격파 마법은 그 회전력에 흩어져 사방으로 튕겨나갔다. 로켈 교수가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

분산시켜도 이 정도 위력인가?

레아는 호흡을 고르고 다시 움직였다.

로켈 교수가 재차 충격파를 날렸고, 레아 역시 똑같이 방어했다.

하지만 이번엔 방금 전보다 강력한 위력이었다. 그녀의 방어막은 충격파를 완전히 못 막고 금이 갔다.

"으······."

레아는 비틀거리다가 가까스로 중심을 바로잡았다.

선까지 남은 거리는 이제 열 걸음 정도. 한 번 더 막을 수 있을까?

레아는 입술을 꽉 깨문 채 걸음을 내딛었다. 그리고 교수의 마법이 날아들었다.

콰아앙!

방어막은 결국 충격파를 막아내지 못하고 산산히 박살났다.

상쇄시키지 못한 충격에 뒤로 튕겨나간 레아는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다가 멈췄다.

그녀가 아찔한 정신을 추스르며 몸을 일으키려던 때였다.

"······!"

공동 입구 쪽에서 기습적으로 날아든 마법이 그녀를 노렸다. 교수의 마법이 아니었다.

차마 막아낼 여력이 없던 그녀가 공격에 그대로 노출된 순간이었다.

텅!

갑작스레 뛰어든 신형이 날아들던 마력구를 튕겨냈다.

레아는 징 울리는 머리를 붙잡고서 끼어든 사람을 바라봤다. 다름이 아니라 리곤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건 너무 비겁하지. 안 그래?"

리곤이 검을 붕붕 돌리며 입구 쪽에 숨어있는 학생에게 말했다.

학생은 낭패라는 표정으로 다급히 몸을 돌려 도망쳤다.

레아는 멍하니 리곤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몸을 돌린 리곤이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괜찮아?"

"······."

그녀는 인상을 찌푸린 채, 손을 잡지 않고 혼자서 일어났다.

리곤은 딱히 무안하지도 않다는 듯 내민 손을 거두었다.

"도와줬는데 고맙다고도 안 하네."

"도와달라고 한 적 없어."

"아, 그래."

리곤이 로켈 교수를 힐끗 바라보고서 말했다.

"그건 그렇고 나도 교수님 팔찌를 노리고 있거든. 근데 다시 와보니까 네가 먼저 싸우고 있더라."

"······그래서?"

"그래서가 아니라, 내 생각에 이건 검술학부하고 마법학부가 협동해야 되는 시험인 것 같거든. 그래서 안 그래도 누구 같이 힘을 합칠 사람 없나 찾고 있기도 했어."

레아가 눈을 크게 떴다. 리곤의 생각이 자신이 했던 생각과 똑같았기 때문이다.

리곤이 그녀를 바라보며 씩 웃었다.

"그러니까 어때. 혼자서 하지 말고, 한번 같이 해볼래?"

학기 시험 (3)

함께 힘을 합치자는 제안.

레아는 생각했다. 저번의 일이 있었는데도 리곤이 용케도 자신을 스스럼없이 대한다고.

'······내 능력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뿐이겠지. 교수의 팔찌를 얻으려면.'

물론 다른 것들은 제쳐두고, 힘을 합치자는 건 그녀에게도 기꺼운 이야기긴 했다.

방금 교수를 혼자 상대하면서 역시 쉽지 않겠다고 다시 한 번 깨달은 참이었고.

"좋아."

레아는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

좋은 말이 스스로 찾아왔다면 계속 혼자를 고집할 이유는 없다.

그저 시험을 위한 협력.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면 될 뿐이었다.

그녀가 바로 협력 제안을 받아들이자 리곤은 조금 의외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어, 진짜? 바로 받아들일 줄은 몰랐네."

"잡담은 됐어. 뭐라도 생각한 전략이 있는지부터 말해."

리곤이 어깨를 으쓱였다.

"딱히 없는데. 왠지 잔머리 안 굴리고 정직하게 부딪히는 게 최선일 것 같기도 하고."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냥 감? 나 그래도 감은 제법 좋은 편이야."

무성의한 말에 레아의 눈빛이 불만스럽게 변했다. 그녀 역시 같은 결론을 도출하긴 했지만.

"너야말로 너네 반 담임 교수님이잖아. 뭐라도 약점 아는 건 없어?"

"알 리가 있겠어?"

"농담이야. 아무튼 일단 해보자. 한번 교수님이 어떻게 나오는지 보면서 대처해보자고."

레아가 마력을 가다듬고서 말했다.

"당장은 충격파 마법만 날아들 거야. 그 점 생각하고 움직여. 뒤에서 마법으로 지원할게."

고개를 끄덕인 리곤이 로켈 교수 쪽으로 몸을 돌리고 자세를 잡았다.

콰앙!

발을 떼기 무섭게 날아든 교수의 충격파 마법.

곧장 옆쪽으로 회피한 리곤은 머뭇거리지 않고 돌진했다.

충격파가 연달아 날아들었다. 리곤은 점점 속도를 붙이며 그것들을 모조리 피했다.

충격파 마법은 검으로 막기도 베어내기도 애매한 축에 속하는 마법이다. 때문에 몸으로 받아내서 버틸 게 아닌 이상에야 최선의 선택지는 회피였다.

그리고, 레아 역시 그에 맞춰서 리곤을 지원할 방법을 선택했다.

움직이는 대상에게 사방을 뒤덮는 방식으로 방어 마법을 펼쳐줄 수는 없었고, 마주 공격 마법을 날려서 충격파를 막는 것도 각도상 애매했다.

'그렇다면······.'

그녀의 주위에 떠오른 면 형태의 역장 마법들이 리곤의 주위를 향해서 날아들었다.

쾅! 콰과과광!

연달은 폭음이 공동에 몰아쳤다.

레아가 생성한 역장들은 리곤의 움직임을 쫓아 주위에 떠다니며 충격파 마법을 최대한 방어했다.

위력을 완전히 상쇄하지는 못하고 약화시키는 정도가 전부였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리곤도 레아의 역장을 최대한 활용하는 방향으로 기민하게 움직였다.

'호오······.'

그 광경을 보며 로켈 교수는 속으로 작게 감탄했다.

보통 두 사람이 힘을 합친다고 해서 그 결과과 온전히 일 더하기 일이 되지는 않는 법이다.

더군다나 저런 방식은 서로 합을 맞춰본 적도 없는 두 사람이 행하기엔 부적합한 전략.

그야 역장의 거리가 너무 멀면 방어의 의미가 없어지고, 너무 가까우면 움직임에 오히려 방해가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서로의 생각을 읽고 있는 것처럼 거의 완벽하게 합을 맞추고 있었다.

"······."

그걸 느끼고 있는 건 레아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리곤이 움직이는 경로에 충격파가 날아들었다. 그가 자세를 낮춰 측면으로 피했다.

이어서 날아든 큰 충격파를 레아의 역장이 막아서며 산산히 박살났다.

리곤은 당연하다는 듯 일말의 머뭇거림도 없이 남은 여파를 몸으로 받아내며 앞으로 전진했다.

'어떻게?'

레아는 이해할 수 없었다.

리곤이 어째서 자신의 능력을 저렇게까지 믿고 과감히 행동할 수 있는 건지.

하지만 그 덕분에 선까지의 거리는 조금씩 착실하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더 빨라지지 않는다. 이제 속도를 안 높이는 건가?'

점점 속도가 붙던 로켈 교수의 마법 공세는 어느 순간부턴 더 가속하지 않았다.

이내 속도감에 적응을 마친 리곤은 좀 더 과감하게 나섰다. 선까지의 거리가 빠르게 가까워졌다.

뒤쪽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며 레아는 교수의 반응에 온 신경을 기울였다.

확실히 둘이서 힘을 합치니 돌파구가 훨씬 수월하게 보였다.

이대로면 교수가 갑자기 출력을 높이지 않는 이상 선을 통과할 수 있을 것이었다. 다만······.

'아직 하나가 더 남았어.'

로켈 교수는 이 시험에서 세 종류의 마법만을 사용하겠다고 말했었다.

충격파 마법과 역장 마법은 사용했으니, 남은 마법은 하나. 그걸 아직까지 사용하지 않았다.

'하나가 더 남았지. 슬슬 올 때가 됐는데······.'

리곤 또한 그 사실을 계속해서 염두에 두고 있었다.

선까지 남은 거리는 이제 고작 열 걸음 정도. 교수가 무슨 마법을 사용할까?

살상력이 높은 위험한 마법들은 제외하고, 움직임을 제한하는 계열의 마법일 확률이 높다. 빙결 마법? 아니면 속박류 마법?

방심하지 않고 한 번의 대응만 잘 한다면 선을 통과할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

바로 옆쪽의 허공에 물결처럼 일어난 파문.

리곤은 곧바로 거리를 벌리려 했으나 늦었다.

갑작스럽게 발생한 인력에 리곤의 몸은 파문의 중심지로 강하게 이끌렸다.

중심을 완전히 잃은 그에게로 이어서 충격파 마법이 날아들었고, 속절없이 뒤쪽으로 튕겨나갔다.

벌떡 몸을 일으킨 리곤이 황당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뭐야, 방금 건?"

"······."

레아 역시도 눈매를 좁힌 채 파문이 사라진 자리를 바라봤다.

주위 대상을 끌어당기는 파문? 흡인 마법의 일종인가?

세상에는 수많은 비주류 마법과 고유 마법들이 존재했다. 그녀라고 모든 마법을 아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무슨 마법인지는 정확히 몰라도 로켈 교수의 의도는 이걸로 명백해진 듯했다.

'충격파 마법과 반대 개념의 마법이야.'

즉, 로켈 교수는 밀어내고 끌어당기는 힘만을 사용해서 선까지의 접근을 막겠다는 것이었다.

"주위의 사물을 끌어당기는 마력체를 생성하는 마법 같은데. 무슨 마법인지 알아, 레아?"

"몰라. 하지만 이제 새롭게 나올 마법은 없어. 몸 상태는?"

리곤이 팔을 휘휘 돌리며 대답했다.

"아직 쌩쌩해. 너야말로 벌써 지친 건 아니지?"

"웃기는 소리."

"좋아. 그럼 다시 가볼까."

즐겁다는 듯 입꼬리를 올린 리곤이 자세를 잡았다.

"잠깐, 교수님의 마법을 모두 파악했으니까 제대로 전략을······."

레아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리곤의 몸이 튀어나갔다.

레아는 혀를 차며 마력을 끌어올렸다.

리곤의 간단하게 생각했다. 방금은 그저 어떤 마법이 튀어나올지 몰랐기에 대처가 늦은 것뿐이다.

끌어당기는 마법이라면, 마법이 전개되기 전에 발빠르게 범위 밖으로 벗어나면 그만이지 않은가?

하지만 그게 안일한 생각이라는 걸 깨닫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엇······."

또다시 파문에 끌어당겨진 리곤은 똑같은 연계에 뒤쪽으로 튕겨나갔다.

레아는 주위를 둘러보며 눈매를 좁혔다.

'······이런 식이면 피할 수가 없어.'

로켈 교수는 공동 전체에 어느새 마력을 넓게 퍼뜨린 상태였다.

이러면 마력의 흐름을 읽고 허공에 파문이 발생할 타이밍을 잡기가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레아는 약간 자존심이 상하는 걸 느꼈다.

마력의 출력, 제어 능력, 전개 속도, 교수는 모든 요소를 자신들의 수준에 맞춰주고 있었다.

그런데 모든 조건이 같은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숙련도의 차이가 이렇게까지 난단 말인가?

'내가 무언가 해야 돼.'

이 이상 리곤의 능력에 기대해볼 수는 없다.

마법사인 자신이 어떤 식으로든 교수의 마법을 막아야만 했다.

하지만 정체도 모르는 마법을 어떻게 막아야 하지?

저 인력은 중간의 장애물까지 뚫고 리곤을 끌어당겼기에 역장의 방어도 소용이 없었다.

그렇다고 파문 자체를 타격하기엔 그녀도 리곤처럼 파문이 발생하는 타이밍을 읽지 힘들 뿐더러, 까딱 잘못했다간 파문에 말려든 리곤을 맞혀버릴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레아."

리곤의 목소리에 레아는 그에게 시선을 옮겼다.

"역장 마법을 최대한 내 몸에 가까이 붙여."

"······뭐?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지금보다 더 간격을 좁혔다가는 정말 움직임에 방해만 될 것이었다.

그보다 지금은 저 끌어당기는 마법이 문제인 건데, 역장 간격을 좁혀서 어쩌자고?

"생각이 있으니까 일단 내 말대로 해줘. 네 제어 능력을 믿는다."

챙그랑.

바닥에 검까지 내던진 리곤이 다시금 몸을 날렸다.

어차피 피하기만 할 거면 검은 방해만 될 뿐, 조금이라도 몸을 가볍게 하기 위함이었다.

레아는 입술을 깨물고서 역장들을 제어했다. 리곤의 요구대로 최대한 그의 몸에 가까이 붙여서.

그녀는 집중력을 한계치까지 끌어올린 채 어지럽게 움직이는 리곤의 주위로 역장들을 제어했다.

그녀의 제어 능력이 뛰어난 것도 있었지만, 리곤은 용케도 역장에 부딪히지 않고 경이로운 움직임을 선보이며 돌진했다.

그리고 여지없이 나타난 파문이 리곤의 몸을 끌어당긴 순간이었다.

"······!"

순간, 레아는 직감적으로 리곤의 의도를 이해하고 리곤과 파문 사이의 역장을 최대한 고정시켰다.

오히려 파문 쪽으로 뛰어든 리곤이 역장을 발판 삼아서 그 반동으로 거리를 벌렸다.

그대로 파문의 간격에서 벗어난 리곤은 중심을 되찾고 곧장 선을 향해서 전력질주했다.

남은 거리는 고작 다섯 걸음 정도.

이번에 파문이 나타난 지점은 머리 바로 위였다. 리곤의 몸이 위쪽으로 이끌렸다.

이대로면 무방비하게 공중에 뜬 몸에 곧바로 충격파가 날아들 건 뻔한 일.

하지만 리곤은 저항하지 않고 몸을 빙글 돌리며 남은 여력을 다리에 모조리 집중시켰다.

믿었기 때문이다. 레아가 곧바로 역장을 자신의 위쪽으로 움직일 거라고.

슈우우!

그리고 그 기대대로, 리곤의 위로 역장이 늦지 않은 타이밍에 날아들었다.

리곤은 역장을 박차고 다시 지면으로 내려섰다.

마지막으로 날아든 충격파를 간발의 차로 피하며, 선 너머로 몸을 던졌다.

리곤은 땅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다가 몸을 일으켰고, 레아는 거칠게 호흡을 골랐다.

요란스럽던 공동에 적막이 내려앉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로켈 교수에게로 모였다.

로켈 교수는 뻗은 손을 거두고서 입가에 옅은 웃음을 띄웠다.

"성공이다."

설마 두 사람이서 통과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다만······.

정말 장래가 기대되는 터무니없는 학생들이었다.

손목의 팔찌를 풀러 리곤에게 건네준 그는 곧바로 공동 바깥으로 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 모두 수고했다. 서쪽 통로 끝으로 이동하면 시험은 종료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리곤은 레아에게 시선을 옮겼다.

레아는 지칠 대로 지쳤는지 비틀거리다가 바닥에 주저앉은 상태였다.

마력도 마력이지만, 리곤의 움직임에 맞춰 다수의 역장들을 일일이 제어한 건 아무리 그녀라도 상당한 정신력 소모를 일으켰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에게 다가가서 리곤이 손을 뻗었다.

"괜찮아?"

"······."

레아는 주저앉은 채 리곤이 뻗은 손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학기 시험 (4)

친구.

그것은 지금의 레아 헤리윈에게 있어서는 생소해진 단어였다.

지금보다 더 어렸을 적에는 그런 그녀에게도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상대가 있었다. 한 명은.

일찍이 천재로서 촉망받은 그녀였기에, 어렸을 적부터 마탑에 방문하며 여러 명망 높은 마법사들에게 가르침을 받기도 했었다.

유리. 소녀는 그런 와중에 만나게 된 마탑의 견습 마법사였다.

나이도 비슷했던 둘은 우연한 첫 만남 이후로 금세 친한 친구가 되었다.

10살. 당시 레아에게 있어 유리는 처음으로 생긴 친구였다.

'내 주변에는 좀처럼 대화가 통하는 녀석이 없다니까. 딱히 친구라고 할 만한 녀석도 하나도 없어.'

'하여간 그렇게 짜증들이 나나봐. 자기보다 더 뛰어난 사람이 눈가에 얼쩡거리는 게.'

'그래서 너랑 만나게 된 건 정말로 행운이야. 레아, 너라면 날 이해할 수 있지?'

유리는 마탑의 고위 마법사의 제자였고, 또한 뛰어난 재능으로 기대를 받는 유망주였다.

레아는 유리가 입버릇처럼 내뱉곤 하는 말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

생각이 다르다. 보는 관점이 다르다. 상대에게 허울없이 손을 뻗기도 쉽지 않고, 그것은 상대 또한 마찬가지다.

가문, 배경, 재능, 타고난 것의 차이가 너무 큰 상대와 친해진다는 건 그런 일이었으니까.

유리는 레아를 조금도 어렵게 대하지 않았다. 그래서 레아도 누구보다 그런 유리를 좋아했다.

공부를 핑계로 마탑에 방문하는 빈도와 시간도 부쩍 늘렸다.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거나, 함께 마법 실험을 하거나, 그녀와 어울리며 즐거운 경험들을 쌓았다.

하지만 어느샌가부터 레아는 유리가 조금씩 자신을 피한다는 걸 느꼈다.

급한 일이 있다든지, 몸이 좋지 않다든지, 그런 자잘한 핑계들로 말이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날의 일이 일어났다.

오랜만에 유리가 마법 실험을 하자고 이야기를 꺼내왔다. 다만, 다른 마법사들은 없이 단둘이.

평소 실험을 할 때는 항상 유리의 스승이 감독으로 함께였다.

어린 견습 마법사에 불과한 유리에게 실험을 마음대로 행할 권리는 당연히 없었다. 위험했으니까.

레아는 나름 성실한 성격인 유리가 이상한 제안을 한다고 생각했지만, 어쨌든 흔쾌히 수락했다.

간만에 유리가 먼저 꺼낸 말이었고, 다른 마법사들 몰래 일을 벌이는 건 재밌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레아는 유리에게 부탁을 받았다. 먼저 실험실로 가서 필요한 기구와 재료들을 준비해달라고.

들뜬 마음으로 실험 준비를 하던 레아가 그걸 발견한 건 우연이었다.

섞여선 안 될 위험한 성분의 재료 둘이 보관함 안에 교묘하게 섞여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부주의하게 꺼내려 들더라면 아마 실험실 전체가 불바다가 되었을 것이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킨 레아는 하나의 섬뜩한 가정을 떠올렸다.

처음은 말도 안 되는 일이라며 부정했다. 하지만 생각하면 할수록 정황은 너무도 명백했다.

레아는 약속 시간이 한참 지나도록 실험실에 오지 않는 유리를 찾아갔다.

분명 오해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마주하자마자 그녀가 지은 표정을 보고 레아는 직감할 수 있었다.

'······왜 그런 거야?'

왜 날 죽이려 한 거야?

차마 그렇게는 못 물었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잡아떼는 유리에게 레아는 싸늘하게 한마디 한마디를 이어갔다.

증거들을 하나씩 조목조목 따지고, 있었던 일을 그녀의 스승에게 모두 고할 거란 말까지 나오고 나서야 유리는 참담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울었다.

'너는 눈치도 없어? 이래서 너랑 더 어울리기가 싫었어······.'

'다 너 때문이야. 네가 마탑에 온 다음부터 스승님은 항상 나랑 널 비교했어! 네가 제자였어야 했다고!'

유리는 뛰어난 재능을 가진 마법사였다. 하지만 레아는 그녀 이상의 천재였다.

단지 그딴 이유였다.

'레아, 너랑 친구가 된 건 불행 중의 불행이야.'

바닥에 주저앉아서 제정신이 아닌 사람처럼 소리치는 유리에게, 레아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뒤로 다시는 마탑을 찾지 않았다.

조금 시간이 흐른 후에야 하나의 소식을 전해들었을 뿐이다. 유리가 마법 범죄로 처벌됐다는.

마탑의 탑주가 직접 가문으로 사과를 전하러 찾아오기도 했다.

그날의 일을 레아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결국 어떻게든 밝혀진 모양이었다.

레아는 한참 동안이나 머리가 깨질 것 같은 두통을 겪었다.

고작 열등감 때문에 자신을 죽이려 든, 가장 친했던 친구의 저주 같은 말들에 억눌리며.

그녀가 끝내 내린 결론은 간단했다.

앞으로 친구 따윈 필요 없다. 열등한 놈들에게 구태여 맞춰 어울리려 할 필요도 없다.

그를 기점으로 그녀의 인격과 사고관은 크게 변했고, 계속해서 그런 방식으로 살아왔다.

그리고 다시 현재에 이르러······.

"괜찮아?"

레아는 자신의 눈앞에 뻗어진 손을 쳐다봤다.

리곤. 칼데릭 출신. 처음으로 제대로 된 패배라는 걸 안겨준 또래.

교류 수업에서 그에게 대련을 패배했을 때, 레아가 겪은 감정은 딱히 분함이나 좌절이 아니었다.

곱씹어서 생각해보면 그건 안도감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자신만큼, 자신 이상으로 뛰어난 천재가 있기는 있었다는 안도감.

자연스럽게 호기심이 생겼다. 그래서 말이라도 걸어보고 싶었지만 살아온 성격상 쉽지는 않았다.

리곤은 자신과 달리 아무렇지 않게 주위 친구들과 어울릴 줄 아는 인간이었다.

그것에 욱해서 험한 말들을 퍼부었을 때에는 뒤늦게 후회하기도 했다.

가시지 않은 전투의 고양감과, 여러 감정들이 뒤섞여 오묘한 기분이었다.

레아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을 뻔했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혼자 일어날 수 있어."

레아는 몸을 일으키려다가 다리가 풀려서 도로 주저앉고 말았다.

가벼운 탈진 현상이었다. 한계점까지 마법을 펼쳤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녀는 인상을 찌푸린 채 한숨을 내쉬었다.

"팔찌 가지고 먼저 가. 난 당장 못 움직이니까."

이제 서쪽 통로로 이동하기만 하면 시험은 끝이다. 굳이 함께 이동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리곤은 그런 레아를 멀뚱히 쳐다보더니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회복되면 같이 가자."

"······뭐?"

"그새 또 다른 학생이 와서 공격하면 어쩌게? 교수님은 이겼어도 탈락하면 성적 깎일 수도 있잖아."

레아는 리곤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어서 잠시 할 말을 잃었다가, 물었다.

"시험은 상대평가야. 내 성적이 떨어지면 너한테는 이득이잖아?"

"난 성적 별로 신경 안 써."

"······애당초 성적 때문에 나한테 협력하자고 제안했던 거잖아."

"뭐? 아닌데."

"왜 시치미를 떼는 거지? 착한 척이라도 하고 싶어? 성적이 목적인 것도 아니면 굳이 싫어하는 상대를 도와줄 이유가 없잖아."

리곤이 조금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싫어해? 내가 널? 왜?"

"내가 네 친구를 욕했으니까······."

"야, 그게 언젯적 일인데? 카앤도 그렇고 나도 별로 신경 안 써."

"······."

"난 네가 나쁜 녀석이라곤 생각 안 해. 공부도 잘 알려줬고. 그때 그 말들도 딱히 진심은 아니었잖아?"

그 반응에 레아는 괜히 혼자 바보가 된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솔직히 그녀는 리곤이 싫지 않았다. 오히려 반대라면 반대였다.

단지 그렇다고 지금껏 몇 년 동안 몸에 배어온 태도가 한순간에 바뀌진 않을 뿐이었다.

그래서 자신을 나쁘게 생각 안 한다는 리곤의 말에 내심 안심하면서도, 퉁명스러운 대꾸가 나왔다.

"네가 뭘 안다고. 나에 대해 아는 척하지 마."

"그럼 아니야? 설마 진짜 진심이었어? 하여튼 귀족이란 것들은 다 똑같지, 그놈의 권위의식은."

갑작스러운 험언에 레아는 순간 당황해서 말까지 더듬었다.

"뭐? 나, 나는······."

하지만 웃음 섞인 리곤의 표정을 뒤늦게 보고 자신을 놀린 거란 사실을 깨달았다.

레아는 얼굴까지 붉게 물들인 채 그를 노려봤다.

"어, 왜 그래? 아는 척하지 말라더니. 막상 이렇게 말하면 섭섭해할 거면서."

"······한마디만 더 지껄여봐. 마법을 날릴 테니까."

"내가 맞아줄 리가 없잖아, 하하. 알겠으니까 이제 회복에 집중해."

고개를 홱 돌려버린 레아는 정좌를 한 채 눈을 감았다.

몸도 정신도 피곤하고, 리곤은 짜증났지만, 어째서인지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

"어디 보자, 네 명? 우르르 몰려오는 걸 기대했는데."

어스름한 공동 한가운데 우두커니 주저앉아있는 여인.

남쪽 통로 끝에 다다라 가온 교수와 마주하자마자 들려온 말이었다.

"우르르 몰려가는 작전은 이미 로켈 교수님한테 했다가 실패했는데요?"

카앤의 대꾸에 가온 교수가 눈웃음을 지었다.

"그러냐? 뭐, 그랬겠지. 그런데도 너희들은 고작 넷이서 나한테 온 거고?"

"네."

"어째서지? 로켈 교수님보다 내가 더 만만해 보였나?"

"아뇨, 그건 여기 있는 얘 때문인데."

카앤이 옆에 있는 바이온을 가리켰다.

어느새 검을 뽑아든 바이온이 한층 무거워진 기세로 칼끝을 가온 교수에게 겨누었다.

"대인 전투 수업 때도 가온 교수님께서는 직접 저희를 상대해주신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아하, 그런 건가? 바이온 너는 덩치는 산만해서 호승심도 남다른 녀석이긴 했지."

교수는 바이온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는 듯 잠시 웃다가, 몸을 일으켰다.

"패기는 좋다. 근데 패기가 성적까지 책임져주지는 않는다. 싸우다 팔찌가 부서져서 전부 낙제를 받게 돼도 원망하진 마라."

이내 가온 교수가 주위 바닥에 마력으로 이루어진 원을 그렸다. 반경 몇 미터 정도 되는.

"규칙은 간단하다. 나는 이 영역 안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않을 거다. 검이든 손이든 발이든, 어떻게든 내 몸에 조금이라도 닿거나 스치는 데 성공한다면 팔찌를 주마."

로켈 교수와는 다르지만, 마찬가지로 듣기에는 무척 쉬워 보이는 룰이었다.

"물론 영역 밖으로 날 몰아내는 데 성공해도 너희들의 승리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설명을 마친 가온 교수가 준비가 되면 들어오라는 듯 팔짱을 끼고 섰다.

"바이온, 생각한 작전 있어? 로켈 교수님이랑 마찬가지로 쉬울 리가 없는데."

카앤의 물음에 바이온이 대답했다.

"잔재주가 통할 상대가 아니다. 전력으로, 정면에서 정직하게 부딪힌다."

"하긴, 주변에 숨을 곳도 없고. 그 방법밖엔 없나?"

바이온이 먼저 교수를 향해 뛰어들었다.

동시에 가온 교수가 검을 뽑아들었고, 두 검날이 맞물리며 요란한 소리가 울려퍼졌다.

나나 카앤, 그리고 에스카는 자연스럽게 후방에서 지원 마법을 준비했다.

[Lv. 68]

가온 교수의 레벨은 로켈 교수보다도 조금 더 높은 정도였다.

그동안 아카데미에서 봐온 교수들 중에서도 그녀는 손에 꼽을 정도로 높은 레벨을 지니고 있었다.

거의 70레벨에 육박하는 상대를 평균 20레벨대 몇 명이서 상대할 방법?

당연히 없다. 옷깃을 스치는 것조차도 원래 같으면 불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가온 교수 역시 로켈 교수처럼 수준을 조절할 테고, 교수를 이길 방법이라고 하면 그 틈을 파고드는 것뿐일 터였다.

하지만 전투가 진행되면 될수록 그닥 가능성이 안 보였다.

바이온은 가온 교수로 제법 선전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냥 보기에 그럴 뿐이었다.

가온 교수는 그 좁은 영역 안에서 바이온을 상대해주며 마법까지 모조리 막고 피했다. 아주 여유롭게.

체력전으로 가면 먼저 지치는 쪽은 당연히 우리였기에 이런 방식으로는 답이 없었다.

"카앤, 계속 마법만 쓸 거야?"

나는 카앤에게 물었다. 그녀의 특기는 마법보다 체술이다.

마법으로 지원하기보다 바이온에게 직접 가세하는 편이 훨씬 가능성이 있을 텐데.

"난 마법학부잖아! 마법만으로 승부를 봐야지."

"시험에 그런 규칙은 없었는데. 별로 상관없지 않나?"

"규칙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그러고 싶다니까!"

카앤은 마력을 전력까지 끌어올려서 교수에게 마법을 퍼붓고 있었다.

평소 수업 때는 이렇게 전력을 낼 기회가 별로 없었으니 꽤 신난 모양이었다.

체감상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슬슬 바이온도 카앤도 지쳐서 헉헉거리기 시작했다.

- 1팀, 마이크 루벨란 탈락. 모든 행동을 멈추고 제자리에서 대기하십시오.

- 2팀, 헨스 드레이크 탈락, 모든 행동을 멈추고 제자리에서 대기하십시오.

- 1팀, 루디 웨스터 탈락······.

도중에는 안내 방송처럼 계속해서 탈락한 학생들의 이름도 확성 마법으로 들려왔다.

그보다 이제 시간은 얼마나 남은 거지?

- 시험 종료 30분 전입니다.

마침 타이밍 좋게 남은 시험 시간이 들려왔다.

'30분이면 별로 안 남았는데.'

이대로 계속 교수한테 도전하고 있으면 죄다 낙제를 피하지 못할 것이다.

물론 카앤이나 바이온은 안내 방송은 신경도 안 쓰고 교수에게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

"시간이 얼마 안 남았는데, 계속 여기서 이러고 있을 거냐? 이제 남은 학생들도 별로 없을 텐데 그러다간 정말로 낙제될 거다. 아니면 너희들끼리 싸우던가."

가온 교수의 웃음 섞인 말에 호흡을 고르던 카앤이 물었다.

"우리는 같은 팀인데 우리끼리 왜 싸워요?"

"같은 팀의 팔찌라고 뺏으면 안 된다는 룰은 없었는데? 성적을 챙기려면 동료 등에 칼이라도 꽂아야지."

놀리는 듯한 짓궂은 말이었다. 카앤이 어이없다는 듯 대꾸했다.

"그렇게 이간질하셔도 저희는 절대로 그럴 일 없거든요."

"그래? 그것 참 돈독한 우정이구나."

"그리고 아직 안 끝났어요. 30분 안에 교수님을 쓰러뜨리면 되는 거잖아요."

"허, 참. 아직도 될 거라고 생각하냐?"

"당연하죠. 그리고 낙제된다고 해도 별로 상관없어요."

애초에 카앤에게 성적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녀석은 그저 이 상황이 즐거운 듯했다.

카앤이 한편의 바닥에 주저앉아있는 에스카에게 다가가서 손을 뻗었다.

에스카는 다른 애들에 비해 마력량이 떨어졌기에 가장 빨리 지칠 수밖에 없었다.

"괜찮아, 에스카? 지쳤어?"

"······아니, 괜찮아."

"아, 그리고 랜! 나한테 생각이 있는데, 우리 지금부터는······."

쩡!

그녀의 말을 끊고 자그마한 충격음이 울려퍼졌다.

나도, 다시 전투를 준비하던 바이온도 놀라서 두 사람을 쳐다봤다.

나는 두 눈으로 보고도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 싶었다.

에스카가 충격파 마법을 쏘아냈다. 카앤이 뻗은 손을 향해서, 그녀의 팔찌를 노리고.

"아······."

간발의 차로 뻗었던 손을 거둔 카앤이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에스카를 바라봤다.

"······방금 뭐 한 거야, 에스카?"

학기 시험 (5)

에스카의 마리올즈 가문은 제국의 동부 지방에 위치한 가문이다.

보유한 영지라고는 작은 마을 몇 개가 전부인 작고 약소한 소귀족 가문.

장녀인 그녀가 엘폰 아카데미에 입학하게 된 건 미약하게나마 마법에 재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족과 가신들의 기대, 그리고 가문의 장래를 짊어지고 엘폰에 입학했다.

하지만 새로운 환경과 사람들에 들뜬 마음도 처음 몇 주뿐이었다. 현실은 막막했다.

차고 넘치도록 굴러다니는 인재들 사이에서, 그녀 자신의 재능은 정말 별 볼 일 없는 것이었다는 걸 깨닫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노력한다면 어떻게든 될 거야. 남들보다 좀 뒤쳐지더라도 엘폰을 졸업하기만 하면······.'

엘폰을 졸업하기만 하면 낮은 직위라도 황궁 소속의 마법사가 될 수 있다.

그렇게만 되면 장래가 보장된 건 말할 것도 없는 일. 가문의 부흥도 꿈같은 일이 아니었다.

자신의 입학을 위해 가문이 상당한 부담을 떠안았다는 걸 에스카는 모르지 않았다.

성과를 가지고 돌아가야만 그 빚들 또한 모두 갚을 수 있다. 결코 기대를 저버릴 수는 없었다.

입학한 뒤 처음으로 중요한 시험을 치루는 날이 되었다.

남들보다 부족한 건 잘 알았다. 그래서 밤잠도 줄여가며 최선을 다해 준비했지만, 하필 운까지 없었다.

실기 유형의 시험들은 당연히 평균 이하, 그리고 너무 긴장했는지 그나마 자신있던 이론 시험까지 마지막에 정답 체크를 잘못해서 아마 낙제일 것이었다.

다른 과목이 2개만 더 낙제점이더라도 퇴학은 피할 수 없다.

마지막 시험인 대인 전투까지 망쳐버린다면 결과는 더 볼 것도 없을 것이었다.

그래서 처음에 팀별 시험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내심 안도했었다.

실력이 뒤떨어지는 그녀에겐 혼자보단 팀별 시험이 훨씬 유리했다. 게다가 카앤도 같은 팀이 되었다.

스스로가 좀 혐오스럽긴 했지만 카앤에게 얹혀간다면 어떻게든 최악은 피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방금 뭐 한 거야, 에스카?"

에스카는 저도 모르게 뻗었던 손을 화들짝 놀라며 거두었다.

카앤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동그랗게 커진 눈으로.

랜도, 바이온도 모두 하던 걸 멈추고 놀란 표정으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 아니야. 이건."

뭐라고 말해아 하지?

한순간의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변명이 아니다. 정말 그럴 의도가 아니었다.

시간도 얼마 안 남아서 조급한데, 교수가 갑자기 이상한 소리를 해서······.

"······."

하지만 이내 다 무슨 소용이 있나 싶어서, 에스카는 이를 꽉 깨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앤, 내가 분명히 말했잖아."

"······어?"

"이건 시험이라고! 재미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야!"

평소의 차분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큰소리를 버럭 지르는 그녀를 카앤은 멍하니 바라봤다.

"그래, 물론 너는 아무래도 좋겠지. 넌 뛰어나니까! 적당히 본 다른 시험들도 전부 평균 이상의 성적은 받았을 테니까! 하지만 나는 아니야. 다른 과목들은 얼마나 낙제가 나올지 몰라. 이것까지 낙제를 받으면 정말 퇴학당할지도 몰라. 그런데도 너는······."

에스카는 말을 하다 말고 자조적인 웃음을 흘렸다. 그녀의 눈가에서 눈물이 흘려내렸다.

"미안. 진짜 한심한 소리를 했네."

"······."

"그렇게 간절하면 너희한테 안 빌붙고, 혼자 흩어져서 다른 학생 팔찌를 얻어내면 될 걸. 그럴 자신도 실력도 없는 주제에······."

뚜둑.

손목으로 손을 가져간 에스카가 자신의 팔찌를 뜯어냈다.

멍하니 서있던 카앤은 차마 말릴 틈도 없이 뒤늦게 허공에 손만 뻗었다.

- 1팀, 에스카 마리올즈 탈락. 모든 행동을 멈추고 제자리에서 대기하십시오.

"미안해, 카앤."

"야, 에스카······."

"산에서 내려와 처음 생긴 친구가 나라고 했었지. 이렇게 망쳐버려서, 정말 미안해."

곧 공동의 입구로 조교수 한 명이 나타났다.

조교수는 에스카에게 가까이 다가가다가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는지 교수를 쳐다봤다.

"저, 가온 교수님······?"

"아, 별 거 아니니까 데려가게."

한쪽에서 실소를 흘리고 있던 가온 교수가 휘휘 손짓했다.

조교수가 에스카를 데리고 공동 밖으로 빠져나갈 때까지도 누구 하나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

***

나는 두 사람이 사라진 공동 입구를 바라봤다.

설마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이야.

시험 첫날부터 에스카의 상태가 어째 계속 불안정해 보이긴 했었는데, 이건 참······.

'개판이네.'

그야말로 개판이었다.

카앤은 충격이 큰 건지 굳은 듯 서서 여전히 미동도 없었다.

바이온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교수도 가만히 서서 우리를 지켜보기만 했다.

숨 막히는 분위기 속에 나도 카앤이 입을 먼저 열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다시금 확성 마법이 울려왔다.

- 2팀이 로켈 교수의 팔찌를 얻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서쪽 통로로 이동하십시오.

······로켈 교수의 팔찌? 누가 성공했다고?

자연스럽게 리곤과 레아, 두 사람이 머릿속에 스쳤다. 그럴 만한 학생이 있다면 둘뿐이었으니까.

어쨌든 상대 팀이 먼저 교수의 팔찌를 얻었다면 지금까지의 수고도 다 무의미해진 셈이었다.

"아쉽게 됐구나. 저쪽이 먼저 해낸 모양이다."

가온 교수가 헛기침을 하고서 입을 열었다.

그녀도 지금 상황이 상당히 머쓱한 기색이었다. 농처럼 내뱉은 말에 정말 팀이 분열나버렸으니까.

나는 카앤을 바라봤다. 그제야 푹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올린 카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고서 그녀가 처음으로 내뱉은 말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랜, 바이온. 빨리 하자."

"······뭐? 뭘?"

"시간이 없잖아. 빨리 가온 교수님 팔찌를 얻어야 돼."

이 와중에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나도 바이온도 영문을 알 수 없어서 서로를 쳐다봤다. 그런데······.

"에스카가 낙제를 피하려면 이제 이 방법밖에 없잖아."

이어진 말에 놀라서 순간 할 말을 잃었다.

확실히 교수의 팔찌를 얻으면 팀 전체에 성적이 보장된다고 하긴 했었다.

그러면 탈락한 사람이라도 낙제점을 피할 수 있겠지. 근데 그게 문제가 아니라.

"······계속하겠다고? 에스카 녀석을 위해서?"

바이온이 카앤의 태도가 이해가 되지 않는 듯 말했다.

에스카는 카앤의 팔찌를 부수려고 했다. 가장 친한 친구에게 배신을 당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큰 충격을 받은 건 줄 알았는데, 대체 무슨 생각이지?

"그래. 내가 너무 무신경했어. 친구는 신경도 안 쓰고 신나서 멋대로만 행동했어."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뭐가 어쨌든 에스카가 네 팔찌를 부수려고 했어. 그런데도 화가 안 나?"

"딱히 화는 안 나. 마음이 좀 안 좋을 뿐이야."

"······."

"왜 그렇게들 쳐다봐. 내가 이상한 거야, 랜?"

잠시 에스카와 가만히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새삼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성검의 계승자인 건 단지 검과 마법에 대한 뛰어난 자질 때문만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이상한 건 아니야."

나는 그렇게 대꾸하고서 가온 교수에게 시선을 옮겼다.

"근데 남아있는 시간이 없잖아, 카앤. 상대 팀은 이미 교수의 팔찌를 얻었어."

상대가 서쪽 통로로 이동하기만 하면 시험은 그대로 끝이었다.

뒤늦게 가온 교수의 팔찌를 얻어봐야 한 팀만이 성적 어드밴티지를 얻을 수 있다고 했었으니까.

"그건 해봐야 아는 거지. 반드시 해낸다."

그럼에도 카앤은 여전히 포기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카앤이 앞으로 나섰다. 이제 마법만 사용하며 고집 부릴 생각도 없는 듯 보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바이온이 자신의 검을 그녀에게 던져주었다.

"네가 써라, 카앤."

"너는?"

"난 맨손으로 충분해. 그리고 널 다시봤다."

바이온도 에스카의 옆에 나란히 서서 가온 교수를 바라봤다.

가온 교수는 상황이 재밌다는 듯 입가에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래서, 계속하겠다는 거냐? 결국 내 팔찌를 얻어도 너희가 상대보다는 느릴 텐데."

카앤이 검을 늘어뜨리듯 쥐고 자세를 낮췄다.

"교수님 때문에 우정에 금이 갈 뻔했는데, 그냥 져줄 생각은 없으시죠?"

"그건 미안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럴 수는 없지. 시험이니까."

파악!

카앤이 뛰어들었다. 마력을 한껏 끌어올린 폭발적인 속도였다.

가온 교수가 피했고, 카앤은 집요하게 쫓았다. 두 검이 빠르게 부딪히고, 좁은 원의 테두리를 따라 두 사람이 빙글빙글 돌았다.

교수가 놀라움이 섞인 목소리로 웃으며 소리쳤다.

"마법학부 학생이 무슨······! 이런 실력으로 뒤에서 마법이나 날리고 있었던 거냐!"

마찬가지로 놀란 기색으로 상황을 지켜보던 바이온도 이내 원 안으로 난입했다.

녀석은 검이 없었기에 맨손을 그대로 교수를 향해 과감하게 휘둘렀다.

나는 그게 마구잡이식 공격이 아니라 전략이라는 걸 깨달았다.

교수 입장에서는 검을 휘둘러 학생의 팔을 베어버릴 수도 없을 테니, 오히려 맨손으로 덤벼드는 게 검보다 까다로울 것 같기도 했다.

"곰 같은 놈이 여우처럼 싸우기는!"

물론 교수는 여전히 팔찌를 쉽게 내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칼등에 후려맞고 튕겨나간 바이온이 바닥을 굴렀다. 카앤은 그 틈에 교수의 사각을 노렸지만 보기 좋게 실패했다.

카앤은 남은 마력을 모조리 짜내며 한계까지 움직이고 있었다. 바이온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와중에 나는 고민하며 그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카앤은 필사적이었지만, 솔직히 내게는 에스카의 사정이 그리 중요한 게 아니었다.

굳이 불필요한 짓을 해서 교수에게 승리를 거둘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하지만······.

퍼억!

결과는 그렇게 내가 신경이 팔려있던 사이, 순식간에 났다.

검까지 놓치고 거하게 튕겨나간 카앤이 그대로 바닥에 대자로 뻗었다.

우뚝 움직임을 멈춘 가온 교수가 자신의 팔을 내려다봤다. 소매가 미세하게 베여있었다.

교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는지 벙찐 기색으로 탄식만 내뱉었다.

숨이 넘어가라 헉헉거리던 카앤이 고개를 들고서 간신히 말을 내뱉었다.

"팔찌······ 주세요."

"방금 그 검식은 뭐냐? 어디서 배운 거지?"

"아는 언니한테요. 빨리 팔찌 주세요."

······아는 언니가 설마 용사 말하는 건가?

검집에 검을 넣은 가온 교수가 손목의 팔찌를 풀어 카앤에게 던져주었다.

"어처구니없군. 너 같은 녀석이 대체 왜 마법학부로 입학한 거냐?"

카앤은 그 말이 들리지도 않는 듯 팔찌부터 챙기고 있었다.

가온 교수는 헛웃음을 짓고는 입구 방향으로 걸음을 돌렸다.

"카앤이라고 했지. 나중에 다시 보자꾸나."

리곤 말고도 한 명이 더 있었군. 교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이내 공동 바깥으로 사라졌다.

팔찌를 들고 비틀비틀 일어나던 카앤이 다리가 풀렸는지 도로 주저앉았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왜인지 웃음이 나와서 웃었다.

그냥, 다른 누군가를 위해 저렇게까지 필사적인 사람의 모습이 보기 나쁘진 않았다.

바이온도 진작에 뻗어서 다른 한편에서 드러누운 채였다.

나는 낑낑거리는 카앤에게 다가갔다.

"야, 랜······."

"카앤, 쉬고 있어. 나머지는 나한테 맡겨라."

그녀가 쥐고 있던 팔찌를 낚아채들고, 몸을 일으켰다.

"늦었을지도 모르지만, 안 늦었으면 어떻게든 해볼 테니까."

***

- 1팀이 가온 교수의 팔찌를 얻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서쪽 통로로 이동하십시오.

휴식을 마친 뒤 서쪽 통로를 따라 움직이던 리곤과 레아, 두 사람의 귀에 확성 마법이 울려퍼졌다.

"저쪽 팀도 성공했나 본데? 설마 카앤 네인가?"

리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레아는 들고 있던 팔찌를 리곤에게 건네주었다.

"네가 들고 먼저 가. 난 여기서 오는 상대를 막아야겠어."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우리가 훨씬 빠를 텐데."

"토 달지 말고 내 말대로 해줄래? 이게 당연한 판단이야. 난 방심 따위 안 해."

발이 더 빠른 리곤이 팔찌를 운반하고, 레아가 상대를 방해한다. 물론 최선의 판단이기는 했다.

"혹시 네가 탈락하면······."

"그러니까 네가 책임지고 확실히 도착점으로 가라는 거잖아. 가, 빨리."

리곤은 별로 내키지 않았지만 그녀의 말대로 하기로 했다. 어차피 고집을 부릴 것 같았기에.

"알겠어. 그럼 먼저 간다."

리곤이 떠나고, 홀로 남은 레아는 우두커니 서서 지나온 통로 저편을 응시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누군가가 이쪽으로 달려오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그녀는 눈매를 좁힌 채 가까워지는 사람의 형체를 바라봤다. 그리고 곧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랜?'

리곤의 말대로 가온 교수의 팔찌를 얻은 건 그 녀석들인 모양이었다.

가온 교수 쪽이 로켈 교수보다 쉬웠나? 아니면 바이온의 활약인가?

자신들도 그렇게 고전했는데 어떻게 해낸 건가 싶었지만, 레아는 곧 신경을 끄고 손을 뻗었다.

어쨌든 별 것도 아닌 녀석 한 명뿐이라면 문제는 없었다. 남은 여력으로도 상대하기에 충분했다.

자신의 모습을 보고도 랜은 멈추지도 않고 계속해서 달려왔다.

레아는 코웃음을 치며 충격파 마법을 쏘려고 했다. 근데 저쪽에서 먼저 마법을 펼쳤다.

번쩍!

통로를 밝게 비춘 섬광에 그녀는 눈을 마력으로 보호했다.

예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지. 이딴 건 쓸데없는 잔재주라는 걸 아직도 모르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며 랜의 기척을 감지하려는 순간이었다.

"······!"

갑작스레 바로 옆을 지나쳐가는 기척에 레아는 화들짝 놀라서 몸의 중심을 잃을 뻔했다.

섬광이 가시고, 다시 돌아온 시야에 랜은 어느새 자신을 지나쳐서 뛰어가고 있었다.

레아는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떻게······?"

섬광이 터지기 전까지 서른 걸음도 넘는 간격이었다.

그 먼 거리를 기척을 느낄 새도 없이 한순간에 좁히고, 지나쳤다고? 나를?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마법을 펼치려 했지만 그는 이미 저멀리 멀어진 채였다.

그녀는 유령에 홀린 표정으로 멍하니 그 뒷모습을 바라봤다.

***

서쪽 통로 끝의 도착점을 향해 뛰어가던 리곤은 뒤에서 누군가 따라오는 기척을 느꼈다.

'뭐지? 레아가 뚫렸나?'

리곤은 더 속도를 높여서 달렸다.

의외의 상황이었지만 어쨌든 앞선 건 이쪽이었기에 먼저 도착하면 그만이었다.

곧 리곤의 눈에 공동의 입구가 들어왔다. 도착점을 구분해놓은 것처럼 마력으로 그어진 선도 있었다.

뒤에 쫓아오는 상대와의 거리는 여전히 멀었다. 그대로 질주해서 도착선을 넘으려는 순간이었다.

"······?!"

갑작스레 허공에서 솟은 듯 도착선 너머에 나타난 사람의 모습에, 리곤은 흠칫 놀라서 발을 멈추었다.

자세히 보니 아는 사람이었다. 리곤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랜?"

머쓱한 웃음을 지으며, 랜이 손에 들린 교수의 팔찌를 들어올렸다.

"미안, 리곤. 우리가 이겼어."

성검 (1)

나는 봉투에 밀봉되어 기숙사 방 앞으로 도착한 성적서를 확인했다.

'한 과목 낙제인가.'

나름 괜찮게 봤다고 생각했는데 이론은 결국 낙제였다.

내심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점수를 보니 한 문제만 더 맞혔어도 통과였을 텐데.

나는 성적서를 도로 봉투에 집어넣고서 창밖을 바라보다가, 이내 바깥으로 나섰다.

학기 시험이 끝나고 며칠이 흘렀다.

이제부터는 약 두 달 가까이 휴학기 기간이었기에 수업도 없었다. 한마디로 방학이었다.

'벌써 반 년이 지났나.'

반 년이 지났는데 여전히 진전은 없이 제자리걸음이다.

처음의 의도대로 카앤 주위의 인간관계가 만들어지긴 했다. 문제는 그게 전부라는 것이었다.

무언가 사건이 일어나야 하는데, 역시 이 아카데미라는 공간에서 성검의 계승 조건을 만족시킬 만한 극적인 이벤트를 기대하기는 무리였다.

대인 전투 시험에서 있었던 일로 혹시나 싶어 용사에게 연락은 해봤지만, 성검에 변화는 없다고 했다.

뭔가 좀 다른 대안이 필요한 시점일까?

달리 마땅한 수가 없더라도 이대로 시간만 낭비하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인데······.

'용사를 만나면 다시 의논해봐야겠네.'

용사와는 학기가 끝나는 시점에 한 번 만나기로 했었다.

아셸도 그간 군주성에 별일은 없었나 보고를 위해서 함께 찾아올 것이고.

"랜! 어디 가냐?"

등 뒤에서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카앤이 여느 때처럼 실실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들고 있었다.

"잠깐 도서관에. 너는?"

"난 그냥 저녁 먹을 때까지 산책 중."

"성적 나왔던데 기숙사로 가봐. 아마 방문 앞에 도착했을 걸."

"어, 그래? 넌 뭐 어떻게 나왔어?"

"아깝게 이론 한 과목 낙제됐더라."

"흐응, 그러냐."

카앤이 묘한 표정을 짓다가 몸을 돌렸다.

"나도 확인해봐야겠네. 그럼 먼저 간다. 이따 저녁 때 보자."

에스카가 잘 나와야 할 텐데. 그렇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카앤이 기숙사 쪽으로 멀어져갔다.

대인 전투 시험에서 그런 일이 있고, 에스카와는 곧장 바로 화해한 카앤이었다.

화해랄 것도 없이 한쪽은 울며불며 사과하고 한쪽은 괜찮다고 달래준 게 전부였지만.

아직 분위기가 어색한 건 별 수 없었지만 그거야 시간이 해결해줄 문제였다.

이내 공용 도서관으로 이동한 나는 의외의 광경을 마주했다.

리곤과 레아, 두 사람이 한쪽 책장에 나란히 서서 조곤조곤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나를 발견한 리곤이 인사를 건네왔다.

"어, 랜."

"도서관에는 웬일이야? 아까 훈련장에 간다더니."

"훈련 끝내고 온 거야. 딱히 할 일도 없으니까 책이라도 읽을까 해서."

나는 레아를 힐끗 바라봤다.

태연한 리곤과 달리, 그녀는 수상한 짓이라도 하다 걸린 사람처럼 움찔 놀란 기색이었다.

"근데 의외의 조합이네."

"응? 하하, 그런가? 우연히 마주쳐서 얘기 좀 나누던 중이었어."

"아, 아까 바이온이 너 찾더라. 그리고 방에 학기 시험 성적서 도착했어."

"그래? 내 것도 몰래 본 건 아니지?"

"내가 왜."

"농담이야. 그럼 먼저 가볼게."

나와 레아에게 손을 흔들며 리곤은 도서관 밖으로 나갔다.

나도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레아가 날 불러 붙잡았다.

"공간 계열의 마법이라고 들었어. 네가 시험에서 썼던 마법."

나는 도로 멈춰서서 그녀를 돌아봤다.

"리곤한테 들었어."

"어, 그래."

저번의 대인 전투 시험에서, 카앤이 애쓴 것을 위해 나는 별 수 없이 공간 도약을 사용했었다.

정말 필요한 상황이 아니면 아카데미 내에서 본래 능력을 사용할 생각은 없었지만 말이다.

문제가 안 발생하진 않았다. 시험장 곳곳에 마법 옵저버가 많이 있었으니까.

다 감수하고 한 일이긴 했지만, 어쨌든 그래서 그제는 로켈 교수에게도 불려가서 이야기를 나눴다.

로켈 교수에게는 공간계열의 내 고유 마법이라고 둘러댔다. 가장 편리한 핑계였다.

고유 마법이라는 건 기존의 마법과 체계가 완전히 다른 영역이고, 옵저버로 잠깐 봤다고 그게 마법이 아니라는 걸 알아차렸을 리도 없으니까.

'적당히 넘어가서 다행이긴 했지.'

교수가 일일이 캐묻지 않은 건 아마 내가 교장의 추천으로 입학한 것으로 됐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어쨌든 직접 능력을 목격한 리곤에게도 그렇게 둘러댔다. 고유 마법이라고.

레아도 그걸 리곤에게 들은 모양이었다. 방금 나누고 있던 이야기가 그거였나?

레아가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짜증나네. 그동안 그렇게 사람을 기만하면서 속으로는 비웃고 있었어?"

"······뭔 소리야?"

"네가 그 마법을 대련 수업에서 사용한 적은 없었잖아. 내 배후를 그렇게 쉽게 잡을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면서도 적당적당히 했다는 거 아니야?"

그래서 뭐 어쩌라는 거지.

그동안 자기를 적당히 상대했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상한 건가?

"네가 그렇게 말할 게 아니지 않나?"

"뭐?"

"너도 리곤 빼고 전력을 다한 적은 없었잖아. 나도 그렇고, 다른 애들도 그렇고. 서로 똑같네."

"나는 전력을 안 다해도 충분히 이길 수 있으니까 그렇고! 너는······."

"내가 왜 대련이나 이기자고 내 고유 마법을 수업에서 내보여야 되는데. 당연한 상식이잖아."

반박이 궁색한지 말없는 레아를 향해, 나는 손을 휘휘 흔들며 몸을 돌렸다.

"근데 너 리곤이랑은 언제 그렇게 친해졌냐?"

"······뭐, 뭐?!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니야. 교수도 같이 상대하고, 단둘이 이야기도 나누고 있고."

"아니라고!"

몰리는 주위 시선에 레아는 날 노려보다가 도망치듯 떠나버렸다.

참 낯선 반응을 보여주네. 진짜 리곤한테 마음이라도 있나?

이내 시답잖은 생각은 끄고 내 볼일을 보러 움직였다.

매주 공용 도서관에 방문하며 신비가 생겼나 확인하는 건 지난 반 년간 해온 루틴이었다.

주위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별 생각 없이 책장의 숨겨진 자리를 살펴보는데······.

"······!"

깜짝 놀라서 반사적으로 주위를 한 번 더 둘러봤다.

어두운 구석에서 밝은 빛을 내고 있는 문양, 신비.

'드디어 나타났군.'

나는 최대한 조용히 책장을 밀어내고, 신비의 문양을 향해서 곧장 손을 뻗었다.

한순간 밝은 빛을 뿜어내며 흩어진 문양이 팔을 타고 몸으로 흡수되었다.

잠시 미약한 전율감에 잠겨서 멍하니 있는데,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기! 무슨 일이에요?"

나는 서둘러 복도 쪽으로 나와서 이쪽으로 다가오는 사서에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마법서를 읽는데, 마력만 조금 제어해보려다가 실수로 섬광 마법을······."

그에 사서가 긴장 풀린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고서 쏘아붙이듯 말했다.

"훈련장 외의 교내에서 마법 사용은 엄금인 거 몰라요? 1학년이죠?"

"네, 정말 죄송합니다."

"따라와서 이름하고 담당 교수님 적어요."

깐깐한 사서의 요구를 모두 수행하고 나서야 나는 도서관 밖으로 나왔다.

나중에 벌점이 부과되겠지만 그게 지금 중요한 건 아니었다.

이번에 얻은 신비의 명칭은 진혼 강림.

죽은 대상의 혼을 내 육체에 받아들여, 그 대상의 능력을 빌릴 수 있는 능력이다.

'게임에서는 대상의 스킬을 랜덤으로 뺏어서 일정 시간 동안 쓸 수 있는 능력이었는데······.'

지금껏 내가 얻어온 신비들의 능력은 모두 게임과 다소 차이가 있었고,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신비를 얻는 순간 나는 자연스럽게 어떤 식으로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인지 알 수 있었다.

'이런 식으로 달라졌나.'

이 세계에서의 진혼 강림은 일회성이나 다름없는 신비였다.

단 한 번, 단 한 명의 대상에게만 사용할 수 있다.

당연히 대상의 영혼은 아직 소멸하지 않고 현실세계에 남아있어야 하며, 제한 시간 또한 있었다.

그리고 어디까지나 힘을 빌리는 것이기에 대상의 허락 없이는 신비를 쓸 수 없다는 제약도 존재했다.

하지만 그런 패널티들에도 불구하고 능력 자체는 굉장히 강력한 신비긴 했다.

왜냐면, 리턴 또한 랜던 스킬 탈취라는 게임의 설정과 달리 엄청났으니까.

'혼을 받아들인 대상의 생전 능력을 모두 고스란히 사용할 수 있다.'

만약 내가 대군주의 혼을 받아들이면 그녀의 마법적 능력과 육체 능력, 종족 특질을 제한 시간 동안은 모두 사용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다만, 능력은 강력해도 쓸 수 있는 조건이 여러모로 까다롭다는 게 문제일 뿐이다.

얻기 전에도 애매한 신비라고는 생각했었는데, 이런 식이라면 오히려 더 애매해진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보다야 낫지만.'

어쨌든 초재생, 부동 장막, 공간 도약에 이어 얻게 된 4번째 신비였다.

***

며칠의 시간이 더 흐르고, 정식으로 휴학기가 시작됨과 함께 외출이 완전히 허가되었다.

나는 용사와 아셸을 만나기 위해 아카데미 밖으로 나와 약속 지점으로 이동했다.

도시 대로변에 위치한 한 여관을 찾아들어가서 2층 복도 끝에 위치한 방문을 슬며시 두드렸다.

철컥.

문을 열어준 이는 낯선 여인이었다. 그녀의 머리 위 레벨을 슬쩍 쳐다봤다.

이전에 봤을 때와 외관을 다르게 바꾼 용사였다.

나는 아무말 없이 방 안으로 들어갔다.

한쪽 테이블에는 또 다른 사람이 앉아있었는데,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 숙여 인사했다.

금발이라니, 아셸까지도 외관을 좀 바꿨나? 조심해서 나쁠 건 없긴 하지만.

이내 용사가 마력으로 소리를 차단하는 막을 방 주위에 펼쳤다.

나는 아셸의 맞은편에 앉았다.

오랜만이라면 오랜만의 재회였기에 꽤나 반가운 마음으로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다, 아셸. 오느라 수고 많았다."

"예, 론 님.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군주성에 별다른 일은 없었나?"

"평소대로입니다. 특별한 일은 없었습니다."

나는 시선을 돌려 용사와도 눈인사를 주고받았다.

그녀와는 평소에도 마도구로 꾸준히 연락을 주고받았기에 항상 서로의 근황은 파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말씀하셨던 대로 얼마 전에 암영이 군주성으로 찾아왔었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암영은 이맘때 찾아와서 수집한 정보를 보고하기로 되어있었다.

나는 자리를 비우고 있을 수밖에 없었기에 아셸에게도 미리 언질하여 맡겨둔 부분이었다.

"뭐라도 성과가 있다던가?"

"예, 목표로 의심되는 인물의 과거 흔적을 찾았다고 합니다."

별 기대하지 않고 있었던 나는 조금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 적은 정보로 정말 찾아낸 건가?

"자세한 정보는 여기에 모두 정리되어있다고 했습니다."

나는 아셸이 품에서 꺼내든 두루마리 종이를 받아들고 펼쳤다. 그리고 찬찬히 읽어내려갔다.

'······세인테아 황실 소속의 암대?'

암영이 조사해온 정보를 요약하자면 이러했다.

과거에 세인테아에 황실의 더러운 일들을 처리하는 비밀 조직이 있었고, 그 대원들은 어느 사건을 계기로 모두 토사구팽당했다.

그중 살아남은 대원 하나가 내가 언급한 인물로 추정된다는 것이었다.

빙의의 신비를 가진, 멀지 않은 미래에 세인테아 수도를 테러할 바로 그놈.

내가 아는 지식과 종이에 적힌 정보들을 비교하며, 나는 상당히 신뢰성 있는 추측이라고 판단했다.

"암영이 따로 남긴 말은 있나?"

"조사한 정보를 토대로 계속해서 추적해보겠다고 했습니다."

어쨌든 이게 전부 사실이라면 암영이 놈의 꼬리를 붙잡는 것도 기대해볼 만했다.

정보지를 품에 집어넣은 뒤, 옆쪽에 서있는 용사에게 물었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지. 중요하게 해야 할 말이 있다는 건?"

내 물음에 용사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다름이 아니라 내 몸 상태에 관한 이야기다."

"······몸 상태라고 하면?"

"7군주 그대에게는 면목이 없지만, 나는 다시 당분간 성동에서 회복에 전념해야 할 것 같다."

그 말에 나도 모르게 작은 탄식을 내뱉었다.

다시 성동으로 돌아간다니, 그 말은 즉 용사의 몸상태가 더 악화됐다는 뜻이었으니까.

"상태가 많이 좋지 않나?"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렇군. 상당히 좋지 않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원마와 또 충돌이 있기라도 했나?"

"그런 건 아니다."

용사가 고개를 저었다.

"과거에 마왕을 봉인하며, 내 몸에는 마왕의 힘의 잔재가 남아있다. 그것이 나를 계속해서 좀먹고 있다는 건 그대도 알고 있었지."

"알고 있다."

"아무래도 마왕의 부활이 멀지 않은 듯하다. 몸속의 놈의 기운이 근래 심상치 않게 격동하고 있어."

"······!"

나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많이 남아있지 않다는 건 나도 잘 알고 있었지만······.

"멀지 않았다고 하면, 정확히 얼마나 남았다는 거지?"

"알 수 없다. 몇 년 뒤가 될 수도 있고, 당장 내일이 될 수도 있다. 그렇기에 위험하다는 것이다."

언제 부활하더라도 이상하지 않다는 건가.

게임의 스토리대로면 마왕은 몇 년 뒤에나 부활해야 정상이다.

이건 무언가 상황이 변화한 건가, 아니면 본래의 흐름대로 흘러가고 있는 건가? 난 확신할 수 없었다.

"성검에게선 무언가 내려온 계시가 없나?"

"없다."

용사가 고개를 저었다.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답답하네.'

불쑥 날 짜증나게 만드는 사실은, 여전히 나는 아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내게는 명확하게 제시된 동기가 없다.

만약 성검의 계승을 성공하고, 마왕을 쓰러뜨린다면, 그 다음은?

나는 어째서 게임 속의 세계에 빙의한 거지?

모든 게 끝나면 본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기는 한 건가, 아니면 영원히 이곳에서 살아야 하는가.

침묵하고 있던 용사가 허공에 성검을 소환했다.

"미안하다. 성검이 내게 무언가를 알려준 건 계승자에 관한 것 이후로 여전히 한 번도······."

번쩍!

그때 갑작스레 성검에서 강렬한 빛이 터져나왔다.

동시에 나는 정신이 한순간 현실에서 아득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

뭐야?

뭔 일이 일어난 거지? 용사가 뭘 한 건가?

다시 의식과 시야가 돌아왔을 때, 내 눈앞에 펼쳐진 건 방금까지 있던 방안의 풍경이 아니었다.

사방이 새하얀 순백의 공간.

사람의 형체를 띤 거대한 존재가 주저앉은 날 내려다보고 있다.

나는 전신이 압도되는 느낌에 쭈뼛거리다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설마?

"······당신은?"

마치 신과도 그 존재가 대답했다.

- 성검이다. 잠시 이야기를 나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