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주술 인형, 반다이크
우지끈―!
"...."
키메라 한 마리가 날아와 딛고 서 있는 나무 기둥에 처박혔다.
나무가 부스스 내려앉자, 주변 나무 쪽으로 발을 박찼다. 높은 나뭇가지에 안착한 뒤 다시 전투를 내려다봤다.
"하, 징글징글하네."
질린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풀 한 포기 없는 마른 대지는 키메라들로 득실득실 차 있었다.
연구실 입구인 절벽 틈새와 다소 떨어진 드넓은 공터.
붉은 괴물은 그 중심에서 포위당한 채 광기에 찬 육탄전을 펼치고 있었다. 그런데 죽이고 또 죽여도 키메라는 줄어드는 것보다 오히려 더 많아졌다.
"도대체 몇 마리나 데려온 거야?"
얼추 7~8천 정도로 예상했는데 아니었다.
전투 중에도 새로운 키메라 떼가 끝도 없이 나타났다.
라웁 숲 전역에 퍼트린 키메라들이 뒤늦게 도착해 합류한 것인데, 그 수가 예상보다 훨씬 많았다.
거대 키메라도 스무 마리 이상 눈에 띄었다.
'견제했는데도 이 정도라고?'
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도미닉의 전력을 살펴보니, 세운 계획이 이 자리까지 도달한 건 엄청난 행운이 따랐다는 것을 깨달았다.
만약 도미닉의 군단이 하루만 더 일찍 도착해 연구실 전력과 합류했더라면?
'도르네프도 나도 위험했다.'
아니 도르네프는 몰라도, 난 무조건 죽었다. 지금쯤 키메라 배 속에서 소화되고 있을지도.
단 하루 차이로 목숨을 부지했다는 것에 가슴을 쓸어내리며 다시 전투를 지켜봤다.
"단시간에 끝날 것 같지 않네."
전투의 흐름은 붉은 괴물의 일방적인 학살로 흘러가고 있었지만, 이건 전초전에 불과했다.
달려드는 키메라는 소형뿐이었고, 거대 키메라는 아직 움직이지도 않았다.
딱 봐도 괴물의 전력을 파악하기 위해 키메라들을 제물로 던지는 모습인데, 도미닉과 아레나가 움직여야 진짜 승부가 결정될 것이다.
'이 근처에 숨어서 간을 보고 있겠지.'
두 사람의 위치는 아직 파악하지 못했다. 주변에 두 사람이 자리하고 있을 걸 생각하면 심장이 쫄리긴 한데, 관심사가 붉은 괴물에 집중되고 있는 이상, 내게 큰 위협은 없을 것으로 판단했다.
도미닉이 반응하기 전까진 괜찮다는 뜻.
그렇다는 건,
"쥐새끼부터 찾아야겠지?"
펜리가 헤어지기 전에 내게 귀띔해준 내용이 있었다.
[인간들의 군대는 없었지만, 악취 나는 쥐새끼 한 마리가 숨어 있더라고.]
[악취 나는 쥐새끼?]
[쓸데없이 나 부르지 말라고 알려주는 거야.]
[그걸 왜 이제야 알려주는 겁니까?]
[쥐새끼가 우리 쪽엔 관심이 없는 것 같았거든.]
연구실 위치를 정확히 알고 있고, 우리에게 관심이 없는 존재.
'그리고 부정한 기운을 품은 자.'
엘프에게 '악취'란 부정한 기운을 의미했다.
흑주술사일 확률이 높다는 건데, 그 힌트까지 주어지자 그 악취 나는 쥐새끼가 누구의 지시로 움직였는지 알 것 같았다.
'학살자가 보낸 놈이겠지.'
학살자는 회귀자인 만큼 도미닉의 정보에 빠삭했다. 도미닉의 연구 일지를 확보하기 위해 쥐새끼를 보낸 것이 분명했다.
연구 일지는 내 손에 있으니 이미 실패한 임무지만, 난 쥐새끼를 먼저 사냥해야 했다.
'눈앞의 상황이 카멜의 귀에 들어가면 곤란하거든.'
난 웅크린 채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콰앙―! 쾅― 콰아앙―!
야구공처럼 날아오는 키메라들이 눈에 들어왔다. 나무와 바위, 바닥에 매섭게 처박히며 뭉개지는 키메라들.
마치 포탄 같아서 나도 여러 번 회피하며 움직인 상황이었다.
과연 나만 그럴까?
나뭇잎 사이에서 한동안 죽은 듯이 주변을 눈여겨봤다.
잠시 후, 쿠쿵―! 소리가 터지며 키메라들이 건너편 넝쿨 더미를 휩쓸자, 난 두 눈을 반짝였다.
검은 그림자가 순간 솟구쳤다 사라졌다.
'찾았다.'
단검을 슬며시 움켜쥔 뒤 크룩스의 걸음걸이를 이용해 나무 위를 타고 걸었다.
나뭇가지 사이 밑으로 꿈틀대는 로브 자락이 시야에 잡혔다.
다시 넝쿨로 조용히 숨어든 녀석.
짙은 녹색 로브로 숲을 보호색 삼아 주변을 기웃거리고 있었는데, 절벽 틈새 쪽으로 향하는 듯 보였다.
기회를 봐서 연구실 쪽으로 진입하려는 모습.
'움직이기 전에 정리해야겠네.'
난 쥐새끼의 바로 머리 위 나뭇가지에 기대어 잠시 대기했다. 은밀히 접근을 시도했는데,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상대는 흑주술사일 확률이 높았다.
암습에 취약하단 뜻이었고, 난 먹잇감을 포착한 맹수처럼 이빨을 숨긴 채 기회를 기다렸다.
잠시 후,
그어어어어어어―!
"...!"
붉은 괴물이 키메라들을 움켜잡고 몽둥이처럼 휘두르더니 이리저리 던지기 시작했다. 키메라로 키메라를 공격하는 것인데, 그 때문에 수백의 키메라들이 일시에 튕겨 나와 숲으로 떨어졌다.
재차 포탄처럼 날아오는 키메라들.
키메라들이 넝쿨 쪽으로 굴러떨어지자, 쥐새끼가 움직였다.
솟구친 검은 그림자.
'지금!'
난 단검을 잡고 밑으로 몸을 던졌다.
"잡았다."
내 목소리에 쥐새끼가 반응을 보였다.
허공에 뜬 놈이 고개를 쳐든 순간,
푹―!
인챈트를 덧댄 날카로운 단검이 놈의 이마를 깊숙이 찔렀다. 정확히 뇌를 관통한 공격이었다.
완벽한 암습.
"됐...!"
성공을 확신하며 쾌재를 외쳤는데, 불현듯 등골이 서늘해졌다.
단검이 안 뽑힌다?
난 주저 없이 단검을 놓고 몸을 비틀었다.
놈의 로브가 거칠게 펄럭였다. 지독한 바람과 함께 느껴지는 섬뜩한 살기.
난 본능적으로 왼팔을 들어 머리를 보호했다.
콰아아앙―!
"…커억!"
머릿속이 진탕되는 충격이다.
해머로 처맞은 것 같았다.
그대로 바닥에 처박혀 몇 바퀴를 굴렀다.
뇌진탕이 이런 느낌인가.
귀에서 삐― 소리가 울리며 어질어질했다. 다급히 고개를 털고 일어나려는데, 휘청이며 다시 쓰러졌다.
'미친, 부러졌다….'
왼쪽 손목을 들어 올렸는데 축 늘어진 채 힘이 안 들어갔다.
손목에는 칼이 준 팔찌가 있었다.
폭탄 벌레 붐을 봉인시키는 마법 아이템 겸 가드로도 사용할 수 있는 방어구였다.
검도 튕겨내는 팔찌였는데, 손목이 충격으로 부러진 것이다.
'시발, 인간 맞아?'
늘어진 왼팔을 놔두고 오른손으로 다급히 석궁을 집어 들었다.
머리가 뚫리고도 움직인다.
카멜, 이 새끼가 연구 일지의 가치가 가치인 만큼 진짜 괴물 새끼를 보냈다.
다급히 거리를 벌리고 석궁을 겨누었는데, 쥐새끼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놈이 일어나자 내 고개도 따라 올라갔다.
"쥐새끼치곤... 더럽게 크네?"
크다.
웅크리고 있을 땐 몰랐는데, 서서 보니 덩치가 보통 사람보다 머리 서너 개 정도 더 컸다.
2미터는 가볍게 넘을 것 같은데?
저 덩치가 주술사라고?
육체 하드웨어가 딱 봐도 무식한 기사잖아.
짧게 혀를 차며 욕설을 내뱉고 있는데, 놈이 두 팔을 벌린 채 매섭게 돌격해왔다.
저 손에 잡힌 순간 뒈진다.
민첩하게 뒤로 스텝을 밟으며 방아쇠를 당겼다. 이 석궁은 크룩스 단장의 것으로 한 번 장전하면 세 발의 볼트를 속사할 수 있었다.
투투퉁―!
세 발의 볼트에는 관통을 극대화한 인챈트가 실려 있었다. 당연히 놈의 하체를 깔끔하게 관통했는데, 짓쳐 오는 속도가 전혀 줄지 않았다.
노리고 쏜 것인데, 안 먹힌다.
"빌어먹을! 대체 뭐 하는 새끼...!"
다급히 몸을 비틀어 주먹을 피했다.
콰아아앙―!
천으로 감긴 거대한 주먹이 바닥을 내리꽂자, 대지가 푹 파이며 흙먼지가 튀어 올랐다.
맞았으면 찰흙처럼 짓뭉개졌을 거다.
쿵쾅쿵쾅하는 심장을 부여잡고 놈의 시야 앞에 문양을 터트렸다.
번쩍―!
기습적인 눈 부심을 이용한 것인데, 예상치 못한 현상이 눈앞에서 펼쳐졌다.
빛에 노출된 놈의 천이 삽시간에 검게 물들더니 천천히 회복되기 시작했다.
잠시 멈칫했을 뿐 주먹이 재차 날아오자 냉큼 머리를 숙이고 데굴데굴 굴렀다. 주먹에 맞은 나무가 뿌리째 뽑혀 나갔다.
시발, 주먹 한 방 한 방이 무슨 필살기도 아니고.
'이 새끼 정체가 뭐야?!'
이를 악다문 나는 바닥을 밟고 튀어 오르며 단검을 투척했다. 이번엔 몸을 노리지 않았다.
내가 노린 건 펄럭이는 로브 자락.
단검이 로브를 휘감고 통과한 순간, 로브 자락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그리고 드러난 눈앞의 상대.
어둠 속에 비친 쥐새끼의 모습에 난 헛웃음을 흘렸다.
"...주술 인형, 반다이크?"
처음 맞닥뜨린 상대였지만, 특징이 확실해서 마주한 순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전신을 두른 새하얀 천.
온몸 여기저기 새겨진 붉은 인주 자국.
그리고 날 노려보는 시뻘건 눈동자까지.
주술사 렌구아가 부리는 주술 인형이 분명했다. 즉, 렌구아 그 늙은이가 저 썩은 눈깔로 지금 나를 관찰하고 있다는 뜻도 됐다.
렌구아는 날 고문한 늙은이라 내 얼굴을 알고 있었다.
조심스레 입가를 매만지며 얼굴을 두른 천을 살짝 추켜올렸다.
기습에 실패할 것을 대비해 천으로 얼굴을 가렸는데 안 가렸으면 큰일 날 뻔했다.
몸을 더 사려야 했다.
주술 인형이 미친 멧돼지처럼 돌진해오자, 거리를 후다닥 벌리며 문양을 터트렸다.
역시나, 잘못 본 게 아니었다.
움찔―
천이 검게 물들 때는 잠시 멈칫하던 인형이 색이 복구되자 재차 돌격해왔다. 문양에 분명 거부 반응을 보였는데, 몸에 두른 천 조각이 문양의 힘을 상쇄시키는 것 같았다.
'렌구아 정도의 짬밥이면 능력을 막아내는 수단도 있겠지.'
반다이크는 흑주술로 움직이는 주술 인형이다.
형체가 없으니 물리력도 안 먹힌다.
처음부터 공략 방법이 틀려먹었다.
'팔이 완전히 맛이 갔네.'
한 손으로 장전은 무리라 석궁을 버리고 마지막 남은 단검을 움켜쥐었다. 고민한 것도 잠시, 단검에 새하얀 백광이 물들기 시작했다.
내가 인챈트 할 수 있는 속성은 두 가지다.
인챈트의 기본 속성인 관통.
그리고 최근에 얻게 된 고유 속성, 성력(聖力).
무질서를 바로잡는 힘.
성력은 정화(淨化)의 성격을 띤 고대 문양의 성질과 닮았다. 아니, 경험해 볼수록 결이 똑같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주인의 고유 속성에 따라 각인된 문양의 능력이 달라진다면 세이렌의 비명이 다른 능력으로 변한 것도 설명이 되지.'
성력은 흑주술에게도 상성이 좋았다.
저 빌어먹을 천이 간접적으로 빛을 상쇄한다면 강제로 쑤셔 넣으면 된다.
반다이크가 자세를 낮추고 돌격해온 순간, 난 냅다 단검을 투척했다.
애초에 물리력을 보고 던진 것이 아니었다.
단검이 반다이크의 어깨에 푹― 박혀 들었다. 단검에 담긴 백광이 반다이크의 몸에 스르륵 스며들었다.
그리고,
크웨웨웨웨웩―!
반다이크에게 소름 끼치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천이 검게 그을리더니 놈이 한쪽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먹힌다!
난 이를 악물고 앞으로 튀어 나갔다.
세 걸음을 앞뒀을 때, 놈이 고개를 퍼뜩 쳐들곤 손을 빠르게 뻗어왔다.
그 손을 피해 허공으로 날아오른 나는 냅다 놈의 이마에 박힌 단검을 움켜쥐었다.
"뒈져―!!"
번쩍―!
성력을 단검에 쏟아부었다.
괴성이 터지며 반다이크의 이마가 눈 부시게 빛나기 시작했다.
반다이크를 두른 천이 검게 그을리며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반다이크의 얼굴이 드러났는데, 소름 끼치게도 아무것도 없었다.
잠시 후, 천이 재 가루처럼 흩어지자, 대지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흙먼지만 휑하니 나뒹굴었다.
주술 인형을 소멸시키는 데 성공한 것이다.
크오오오오―!
"…진짜 어질어질하다."
바닥에 대(大)자로 뻗어 쉬고 싶었는데, 주변 상황이 워낙 개 같아서 편히 쉴 수도 없었다.
비틀거리듯 일어나 장비들을 챙기고 가장 큰 나무 뒤로 피신했다. 가방에서 포션을 꺼내 응급처치에 들어갔다.
포션에 닿은 손목이 시큰거렸다.
통증이 찐하게 올라오자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욕설을 내뱉었다.
"렌구아, 이 망할 늙은이는 멀쩡하겠지?"
반다이크로 인해 내 존재가 렌구아에게 알려졌다. 그 말은 즉, 학살자도 곧 내 존재를 알게 된다는 뜻이고, 이건 좋은 신호가 아니었다.
얼굴은 못 봤을 테지만, 성력이 알려졌다.
성력은 혼돈과 파괴, 무질서에 천적인 능력.
그 삼박자를 모두 갖춘 주술사들의 둥지에겐 무척 위협적인 존재로 각인될 것이다.
설마, 더미로 뿌린 '그'까지 생각이 닿진 않겠지?
'고유 능력을 하루빨리 확인해야 해.'
펜리가 그림자 속성을 갖고 그림자 주술을 부리듯, 나 또한 성력으로 고유 능력을 펼칠 수 있었다.
하지만 발동 조건이 워낙 까다로워서 확인이 힘들었다.
도미닉이라면 그 조건에 부합할 테니, 이참에 고유 능력을 확인해볼 생각이었다.
제대로 된 전투가 벌어지려면 아직 시간이 남았기에 몸을 추스르며 시간을 보냈다.
주변이 완연한 어둠으로 물들었다.
하지만 광기는 여전했고, 숲이 뱉어내는 피비린내는 점점 짙어졌다.
이윽고, 그 광기가 절정으로 치달았을 때,
크어어어어어어어어어―!
붉은 괴물의 또 다른 울부짖음이 터져 나왔다.
소리가 전과 달랐다.
당황과 분노가 담겨 있다.
콰아앙―!
"...!"
큰 폭발음에 고개를 돌리니, 붉은 괴물이 바닥에 처박힌 채 쭉 밀려나는 광경이 펼쳐졌다.
처음으로 괴물이 당한 모습이 눈에 담겼다.
난 자리를 털고 빠르게 움직였다.
도미닉이 움직였다.
64화 생명의 징표
샛노란 달빛 아래, 전투가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달빛이 강한 날이라 시야 확보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콰아앙!
크어어어어어―!!!
괴성과 함께 붉은 괴물의 머리가 쾅! 쾅! 터지더니 연신 휘청이며 밀려났다.
사체로 쌓아 올린 무덤 위로 가볍게 착지한 작은 존재.
아니, 작은 괴물.
아레나 후아튼이 공격을 시작했다.
주먹을 움켜쥔 아레나의 육신은 보랏빛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그 주변에 도미닉이 책을 허공에 띄운 채 그녀에게 주문을 외우고 있었는데, 일종의 강화 버프처럼 보였다.
도미닉의 손짓 한 번에 거대 키메라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거대 키메라들은 붉은 괴물의 팔다리를 붙들고 늘어졌다. 십수 마리가 집요하게 들러붙으니 붉은 괴물의 덩치가 압도적이어도 쉽사리 움직이지 못했다.
봉쇄된 틈을 이용해 아레나가 괴물의 머리 위로 올라가 깍지를 끼고 매섭게 내리찍었다.
쾅! 쾅! 쾅―!
"...!"
폭탄이 터진 것 같았다.
붉은 괴물은 움찔움찔 몸을 떨며 울부짖었다.
머리를 이루던 붉은 혹은 움푹 파였고, 일부가 터지며 시뻘건 피를 쏟아냈다.
'공격이 먹힌다?'
난 눈가를 가늘게 뜬 채 붉은 괴물을 자세히 살폈다.
불사자의 심장 때문인지 붉은 괴물의 상처는 빠르게 아물었지만, 상처투성이가 된 흔적은 남아 있었다. 키메라 떼와 사투를 빚으며 생긴 상처가 분명했다.
'나와 펜리, 도르네프의 공격에는 작은 생채기조차 나지 않았어.'
그런데 키메라들의 공격, 특히 아레나의 공격에는 큰 대미지를 받은 모습이었다. 이유를 고민해보니 답은 의외로 쉽게 나왔다.
저들이 지닌 한 가지 공통점.
'마석?'
마석을 동력 원천으로 움직이는 존재들.
마석의 기운만이 괴물에게 타격을 줄 수 있는 거라면?
전투를 지켜보면서 가설은 점점 확신으로 변해갔다.
오직 키메라만이 저 붉은 괴물을 사냥할 수 있었다. 새로운 사실을 깨닫자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만약 괴물이 숲을 벗어나 바깥으로 나간다면 누가 막지?'
펜리나 도르네프 같은 강자도 괴물을 막아낼 수 없으니, 토바른 지역은 쑥대밭이 될 것이다.
눈앞의 재앙 덩어리를 몰라봤다니,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이번만큼은 스토리대로 흘러가야 해.'
설마 도미닉을 응원할 날이 올지 몰랐다.
물론, 큰 걱정은 들지 않았다.
이 전투는 무조건 도미닉이 이긴다.
긴장할 시기는 그 이후였다.
붉은 괴물이 쓰러진 직후 말이다.
카아아악―!!
도미닉의 손짓 한 번에 키메라들이 반응을 보였다.
지휘를 받는 키메라들은 마치 잘 훈련된 병사들 같았다.
거대 키메라를 중심으로 키메라 무리가 연계를 이루며 붉은 괴물을 강하게 압박해 나갔다. 그 틈으로 아레나가 치명타를 입혔는데, 그때마다 붉은 괴물은 휘청이며 비명을 질러댔다.
다만, 승부는 쉽사리 결착 나지 않았다.
미믹의 맷집을 보면 알듯이 불사자의 심장을 지닌 존재는 상처 회복이 빠르고 지치지 않았다.
붉은 괴물은 피투성이가 된 채 발광하며 도미닉에게 달려들었다. 키메라 떼를 부리는 존재를 눈치챈 듯 보였다.
키메라들은 온몸을 내던지며 도미닉을 보호했고, 아레나는 괴물을 죽이기 위해 움직였다.
오직 살의만 담긴 지독한 전투.
대지가 묽은 피로 샘물을 이루고, 숲은 저주받은 땅처럼 파괴되었다.
"후―"
그 광경에 잠시 압도되어 멍을 때리고 있던 나는 호흡을 고르곤 움직일 준비를 했다.
밤새 이어진 처절하고 기나긴 사투.
끝이 보이지 않던 전투에 변화가 생겼다.
붉은 괴물의 움직임이 시간이 지날수록 눈에 띄게 둔해졌다.
늘어나는 상처에 비해 회복이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다.
역시 다굴에는 장사 없는 건가?
조심스레 숲을 끼고 전장 주변을 돌았다.
넝쿨 사이로 고개를 빼꼼 내미니 붉은 괴물을 한눈에 담을 정도까지 다다랐다.
도미닉의 옆모습이 어렴풋이 보일 정도.
잠시 거리를 재던 나는 고개를 가로젓고는 엎드렸다. 엉망이 된 넝쿨을 헤집고 전장 중심으로 기어가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도미닉과의 거리는 대략 300미터 정도.
머릿속에 그린 계획을 시뮬레이션해 봤다.
내가 노리는 건 완벽한 기습이다.
이 거리에선 힘들다.
더 접근해야 했다.
난 엄폐물을 찾아 피로 흥건한 바닥을 기기 시작했다.
"우욱!"
지독한 피비린내만 참는다면 엄폐물들은 차고 넘쳤다.
대지를 가득 메운 키메라들의 사체.
크고 작은 언덕처럼 너부러진 처참한 사체들 사이를 엉금엉금 기어갔다.
철퍽― 철퍽―
'…미치겠네.'
온몸이 삽시간에 붉게 물들고, 닿은 곳마다 누구 것인지 모르는 살점이 짓이겨졌다.
미끌미끌하고 질척거리는 감촉.
지옥의 풍경을 떠올리라면 눈앞의 장면을 떠올리면 될 것 같았다.
250미터.
200미터.
그리고 150미터.
이때부턴 더는 나아가지 않고 몸을 웅크린 채 상황을 살폈다.
크아아앙―!
크오오오!
"귀 떨어지겠네."
귀를 틀어막고 사체 사이로 몸을 파묻었다.
이 이상 접근하면 전투에 휩쓸릴 위험이 있었다.
반다이크에게 당한 왼쪽 손목을 천천히 돌려봤다. 아려오는 통증이 느껴졌지만, 부드럽게 움직이는 것을 보니 부러진 상처는 치료된 듯 보였다.
'벌레가 살짝 걱정되긴 한데.'
충격에 혹여나 터져버릴까 봐 걱정이 됐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을 몸속에 넣고 다니는 불안감이 이런 건가?
이 벌레 새끼도 얼른 치워버려야 하는데.
투덜거리며 가방을 뒤졌는데 포션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이전 전투로 다 써버린 것이다.
병이 있었는데 꺼내 보니 텅 비어 있었다.
빈 병을 보며 요정의 눈물을 떠올렸다.
좀 남겨뒀으면 진짜 든든했을 텐데, 수천 명의 생사가 걸린 일이라 아낄 상황이 아니었다.
'이따가 포션 셔틀(?)을 부르면 되니까.'
가방에서 단검과 석궁을 꺼내 정비한 후 도미닉에게 집중했다.
안경을 고쳐 쓰는 옆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점잖아 보이는 학자풍의 외관, 영락없이 학교 선생님의 이미지인데 이따금 미소 짓는 표정을 볼 때마다 섬뜩함이 올라왔다.
붉은 괴물을 향한 눈동자에 짙은 광기가 느껴졌다.
그 앞에 둥둥 떠오른 큼지막한 책.
그 책에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난 단검을 양손에 움켜쥐고 타이밍을 쟀다.
하늘을 바라보니 달빛이 옅어지고 숲이 만든 지평선으로 붉은 색감이 서서히 올라왔다.
밤샘 전투의 끝을 알리듯 동이 트기 시작한다.
시뻘건 태양이 피로 물든 전장을 비췄다.
그 눈 부심 때문일까.
"...!"
쿵―!
주변을 매섭게 휩쓸던 붉은 괴물이 발을 헛디디며 나자빠졌다.
곧장 일어나려고 했지만 허우적거릴 뿐 계속 손발을 헛디디며 엎어졌다. 바닥에 쌓인 사체들과 흥건한 핏물이 이를 방해하는 것 같았다.
도미닉은 눈앞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키에에엑!
카아아악!!!!
키메라들이 개미 떼처럼 괴물의 몸에 올라타기 시작했다.
키메라들이 노리는 건 오직 하나.
불타오르는 심장이었다.
거대, 소형 가릴 것 없이 모든 키메라가 가슴 쪽을 향해 이빨을 들이밀자, 붉은 괴물의 가슴에 달린 거대한 입이 쩍 벌어지며 방어에 나섰다.
콰작― 콰자작―!
거대한 입이 아작아작 씹힐 때마다 키메라들이 허공에서 찢겨나갔다.
도미닉은 멈추지 않았다.
키메라들을 계속해서 입으로 쏟아부었다.
삼키고 뱉고, 삼키고 뱉고.
벌어진 입으로 백 마리, 천 마리가 미친 듯이 파고들었다.
그우우우우―!
가슴에 달린 입이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안에 든 키메라가 너무 많아 뱉어내지도, 씹지도 못했다. 입마저 무력화됐을 때, 아레나가 움직였다.
푹―!
"...!"
입 안에 뭉쳐진 키메라들 속으로 아레나가 비집고 들어갔다.
잠시 후, 붉은 괴물이 고통으로 몸부림쳤다.
거대한 입이 어느 순간 벌어지기 시작했고, 속에 든 키메라들이 바닥으로 우수수 쏟아졌다. 그럼에도 입은 더욱 크게 벌어졌다. 아니 찢어졌다.
결국,
크아아악―!
입이 걸레짝처럼 찢어져 버렸다.
그 안에서 피를 뒤집어쓴 작은 소녀가 심장을 움켜쥔 채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보석을 닮은 아름다운 심장.
그 심장과 연결된 핏줄을 툭툭 뜯어내자,
쿠웅―
붉은 괴물은 끈 떨어진 인형처럼 축 늘어졌다.
심장을 빼앗기자, 붉은 괴물의 피부가 빠르게 부패하기 시작했다. 거대한 몸체는 순식간에 진물이 되어 녹아서 없어졌다.
아레나는 높다란 시체 언덕 꼭대기에서 몸을 일으켰다.
새벽녘에 떠오른 태양 아래, 심장을 움켜쥐고 있는 어린 소녀.
기괴하면서 섬뜩한 장면이었다.
그 모습에 도미닉의 입가가 쭉 찢어졌다.
드디어 손에 넣었다!
도미닉이 책을 덮고 언덕 앞으로 발걸음을 옮기려는 순간이었다.
우우우웅―!
"...!"
대기가 짙게 떨리기 시작했다.
도미닉의 눈동자가 부릅떠졌다.
저 높이 심장이 울고 있다.
동시에 심장에서 흘러나오는 핏빛.
그 빛이 아레나를 붉게 물들이자, 그녀가 심장을 삼키기 위해 천천히 입을 벌렸다.
도미닉은 다급히 책을 펼쳐 들었다.
"아, 안 돼!"
처음으로 도미닉의 목소리에 당황이 깃들었다.
도미닉이 주문을 외우자, 아레나의 몸이 핏빛과 보랏빛으로 물들며 물감처럼 섞이다가 흩어지길 반복했다. 두 빛이 서로를 공격하며 힘겨루기를 하는 모습.
심장을 입으로 가져간 그녀의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잠시 후, 책과 씨름하던 도미닉이 입술을 깨물곤 외쳤다.
"버려!"
아레나는 움찔하며 심장을 놓쳤다.
심장은 떨어지지 않고, 허공에 두둥 떠올랐다. 그 모습을 뒤로한 채 아레나는 황급히 도미닉 곁으로 돌아왔다.
도미닉은 당혹스런 표정으로 허공에 뜬 심장을 살폈다.
조금 전 아레나를 조종하려고 했던 것처럼 심장에서 흘러나오는 빛이 주변에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그 빛은 자신이 사용한 보랏빛과 비슷한 기운을 담고 있었다.
아니, 애초에 책의 능력은 미믹에게 얻은 것이니, 그 본질의 힘은 저 심장의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설마."
움찔움찔―
핏빛에 노출된 키메라들이 멈칫멈칫하며 도미닉의 지시를 거부했다. 잠시 후 하나둘 도미닉을 향해 몸을 돌리곤 이빨을 들이밀기 시작했다.
통제권 일부를 심장에게 빼앗겼다.
예상치 못한 반격에 책을 움켜쥔 도미닉의 얼굴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크아아아아악!
크웨웨웨!
키메라 군단이 절반으로 쪼개졌다.
그들은 서로를 향해 이빨을 들이밀며 공격을 시작했다.
거대 키메라들도 마찬가지.
통제권을 사이에 둔 도미닉과 심장 사이에 혼돈의 전투가 시작됐다.
"왔다."
그 모습에 난 고개를 끄덕이곤 주변을 살폈다.
키메라 군단에게 엄청난 피해를 안겨준 혼란이 극에 달했던 시기.
'그리고 도미닉을 제거할 유일한 타이밍.'
타이밍이 만들어지자, 난 눈을 살며시 감고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댔다.
시원한 감촉이 느껴진다.
이마에 주술 문양이 떠오르더니 은은한 빛이 흘러나왔다.
펜리 체이서가 남긴 맹약의 낙인.
생명의 징표.
난 주저 없이 징표의 힘을 발현시키고 펜리의 이미지를 떠올렸다.
자신을 떠올리며 이름을 부르라고 했지?
어떤 이미지가 나으려나?
이 여자의 이미지라면... 이거밖에 없지.
"펜리 체이서."
이름을 읊조린 순간, 새벽 햇살에 비춘 내 그림자가 꿀렁이더니 검은 신형을 토해냈다.
나타난 검은 신형을 내려다보며 난 헛웃음을 흘렸다.
"기가 막히게 딱 맞네."
내가 떠올렸던 그녀의 이미지.
시시덕거리며 황금을 세고 있는 펜리가 보였다.
65화 도미닉 후아튼
"…응?"
황금에 취해 있던 펜리.
그런 그녀가 두 눈을 끔뻑이곤 주변을 둘러봤다. 눈앞에 수북이 쌓여 있던 금화가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렸다.
곁에 있던 도르네프는 어디 가고, 핏덩어리가 된 사체들만 눈에 밟혔다.
닳고 닳은 그녀조차 거부감이 드는 지옥 같은 풍경.
그러다 나를 발견하곤 미간을 좁혔는데, 온통 피로 물든 나를 보며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확인차 물었다.
"아니지?"
"맞을 겁니다."
"실수로 날 부른 거라면…."
"그럴 리가요."
"전혀 죽을 것처럼 안 보이는데?"
"죽은 다음에는 부를 수가 없잖아요. 자, 받아요."
난 그녀에게 스크롤 하나를 던졌다.
흰나비 떼가 소환되는 환상 스크롤.
베네타의 마법 상점에서 구매한 것으로 아레나와 마주쳤을 때를 대비한 것이었다.
이 스크롤을 펜리에게 건넨 이유는 하나였다. 그녀의 상대가 아레나일 확률이 99.9%였으니까.
아레나는 흰나비에 지독한 트라우마를 지니고 있었다. 괴물이 된 상태에서도 경직된 반응을 보일 정도로.
펜리라면 그 틈을 절대 놓치지 않을 것이다.
설명을 들은 그녀의 눈썹이 와락 구겨졌다. 왜 이딴 걸 주냐는 무언의 눈빛.
"위험하면 사용하시라고요."
"뭔 개소리야?"
"곧 알게 될 겁니다."
"...흠."
나를 잠시 올려다본 펜리가 천천히 기지개를 켜며 일어나자, 난 그녀와 거리를 빠르게 벌렸다.
저 포즈가 누군가를 패려고 할 때의 동작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가 눈가를 가늘게 뜨며 물었다.
"어디 가?"
"그 스크롤 진짜 최악의 순간에만 쓰세요."
"헛소리 그만하고 이리 오지?"
"아, 포션 있으면 빨리 던져주세요."
"뭐?"
"저 죽기 전에요. 그럼!"
내가 후다닥 앞으로 달려 나가자, 그녀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내 머리채를 확 잡으려고 했지만, 내가 더 빨랐다.
"앞! 앞! 앞이요!"
"이게 진짜 죽으려고...."
살짝 비켜선 내 몸뚱이 너머의 장면이 그녀의 눈동자에 담겼다.
땡그랑―
순간 손에 한가득 쥐어진 금화들이 우수수 굴러떨어졌다. 소중한 금화를 잠시 잊을 정도로 그녀에겐 당혹스런 장면이었다.
키에에에에엑―!
쿠아아악!
펜리는 두 눈을 몇 차례 깜빡이곤 현 상황을 이해하려고 했다.
"전부 미쳐 날뛰고 있네…?"
이 표현이 딱 맞았다.
전방의 한가운데, 엄청난 수의 키메라들이 서로를 향해 물어뜯고, 던지고, 뒤엉켜 굴러다니고 있었다.
혼돈 속의 전장.
휘말린 순간 갈가리 찢겨 죽을 것 같은 지옥의 구렁텅이 같았다.
문제는 그 구렁텅이 속으로 저 빌어먹을 녀석이 몸을 날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펜리는 다급히 손바닥을 살폈다.
"이...."
손바닥에 징표의 문양이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맹약이 발동됐다는 신호.
"이 미친 새끼가…."
펜리는 정신을 퍼뜩 차리곤 아서 뒤를 쫓기 시작했다.
생명의 징표를 사용한 녀석의 표정이 너무 평온하기도 했고, 솔직히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일생일대 가장 많은 황금을 산더미처럼 쌓아두고 꿈에 부푼 것이 조금 전이었다.
그 타이밍에 자신을 소환하고 이렇게 엿을 먹인다고?
징표가 발동된 이상, 징표자가 눈앞에서 죽으면 엄청난 페널티를 받게 된다.
이젠 저 뒤통수가 원수처럼 보였다. 하지만 펜리는 살심보단 실리를 따졌다.
"빌어먹을 새끼, 받아!"
펜리는 품에서 병을 꺼내 힘껏 던졌다. 오직 그녀만 사용하는 특제 포션. 단검을 던져 등에 꽂고 싶었지만, 저놈은 이 자리에서 무조건 살아남아야 했다.
"감사!"
"뭔 감사야? 이 새끼가…."
포션 셔틀… 뭐시기를 외치며 다시 내달리는 녀석.
주술로 놈을 옭아맬까 고민했지만, 녀석은 이미 난장판 중심으로 들어가 버렸다.
키메라들의 시선이 녀석에게 쏠렸다. 이질적인 존재를 감지하곤 앞다투어 아가리를 쩍 벌린 채 아서를 노리기 시작했다.
번쩍―!
황금빛이 시야를 집어삼켰다.
눈 부신 빛을 마주 보며 펜리는 양손에 크로우를 소환했다.
욕설을 내뱉으며 빛 사이에서 아서의 흔적을 쫓았다.
멈추지 않고 더욱 속도를 붙여 전장의 중심부로 내달리는 녀석이 보인다. 그 끝에 도미닉이 있었다.
모든 과정을 살핀 펜리가 헛웃음을 흘리곤 크로우를 빠르게 교차했다.
"뒤통수 제대로 맞았네."
목숨이 경각에 달려서 징표를 사용한 것이 아니라, 애초에 목적을 가지고 징표를 사용했던 것이었다. 설마, 처음부터 이럴 작정으로 징표를 요구한 것이었나?
'말도 안 되지.'
첫 만남부터 지금 상황까지 예측하고 움직였다는 건데, 그건 자신이 아니라 자신의 할아비가 와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목적이 뭔지 모르겠지만, 이번 한 번만 당해준다.'
눈앞의 목적을 위해 하나뿐인 징표를 사용한 녀석이다.
방해했다간 무슨 헛짓거리를 할지 모르니, 당장은 도와주는 척 달래다가 살려서 데려가는 게 맞았다.
그녀의 눈동자가 검게 물들었다.
그림자 주술의 발동 신호.
펜리의 몸이 그녀의 그림자 속으로 빠르게 스며들었다.
아서를 향해 짓쳐오는 섬뜩한 살기가 느껴진다. 엄청난 속도로 주먹을 내지르는 작은 괴물.
도르네프가 몇 차례 긴장하며 경고했던 아레나 후아튼이 분명했다.
저대로 두면 무조건 죽는다.
펜리는 그대로 그림자를 타고 징표자, 아서 클레이튼의 뒤를 순식간에 잡았다.
교차한 크로우를 때리는 매서운 주먹.
쾅―!
거친 폭발이 아서를 중심으로 터져 나왔다.
* * *
"…헉!"
눈앞이 번쩍이며 큰 폭음이 터졌다. 거친 바람에 머리카락이 볼썽사납게 흔들렸다.
멈춰 선 작은 주먹.
세 뼘 거리에서 교차한 크로우에 막혔다.
'미, 미친, 언제?!'
머리가 부서질 뻔했다는 사실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키메라들은 접근하다가도 빛에 노출된 순간 비명을 지르며 물러나는데, 저 작은 괴물은 퍼트린 빛에 반응도 없이 엄청난 속도로 돌진해 왔다.
아니,
치이이익―
빛에 피부가 그을리고 있음에도 별 상관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소녀의 무표정이 저렇게 무서워도 돼?
'골로 갈 뻔했네.'
역시 자신의 판단이 옳았다.
계획의 마지막 퍼즐.
시선을 돌리니, 펜리가 굳은 얼굴로 아레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주먹에 시선을 떼지 않은 채 그녀가 작게 중얼거렸다.
"넌 오늘 내가 무조건 살린다. 대신 나중에 내 손으로 죽여버릴 거야."
"…하하하."
미운털이 제대로 박힌 것 같지?
의도한 대로 펜리 앞에서 일단 질렀는데 다행히 먹혀들었다.
후환은 별로 두렵지 않았다.
'욕심쟁이 엘프의 화를 풀어줄 방법이야 이미 생각해 둔 바가 있거든.'
눈빛만 교환한 채 난 펜리와 거리를 벌렸다.
등을 돌리고 전력으로 언덕을 오르려는데, 섬뜩한 살기가 느껴졌다.
아레나가 내 뒤를 잡기 위해 재차 움직이려는 모습이다. 날 제거하라 지시받은 모양인데, 난 무시하고 달렸다.
펜리가 무조건 살려준다고 했으니 어떻게든 살려줄 거다.
"어딜!"
바닥이 어둡게 물들더니 수십 개의 그림자 손들이 아레나를 옭아맸다. 움직임을 봉쇄한 후 펜리가 크로우를 겨누며 달려들었다.
"네가 그렇게 세다며? 난쟁이 말이 사실인지 어디 볼까?"
"...."
콰앙―! 쾅!
귀가 터질 것 같은 폭음이 연달아 귀를 때렸다.
두 사람이 제대로 붙은 모양인데,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난 도미닉이 있는 방향을 올려다보며 내달렸다.
피와 살점으로 올려진 거대한 언덕 위에는 도미닉 외에 짙은 존재감을 흘리는 레토니칼스의 심장이 자리하고 있었다.
도미닉은 그 심장에 접근하기 위해 언덕을 오르는 중이었다.
그 앞길을 방해하기 위해 뒤엉켜 싸우는 키메라들이 보인다.
천천히 심장과 거리를 좁히는 도미닉.
그 광경을 끝으로 난 언덕 초입 앞에 멈춰 섰다.
후―
길게 호흡을 내뱉으며 거친 숨을 갈무리했다. 고개를 들고 언덕을 향해 손을 뻗었다.
도미닉의 뒷모습이 보인다.
손만 뻗으면 놈에게 닿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저 너머의 심장까지도.
'드디어 여기까지 왔다.'
여러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처음 라웁 숲에 떨어져 감옥에 갇혔을 때만 해도 생존만 하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학살자도 포기한 힘, 레토니칼스의 심장.
백 개의 심장 이벤트는 애초에 도전이 불가능한 챕터라 생각했다.
하지만 칼 일행을 만나고, 문양의 힘을 각성하면서 혹시나 하는 기대감이 피어올랐고, 펜리와 인연이 닿으면서 해볼 만한 도박으로 바뀌었다.
운도 무척 따랐다고 생각했다.
'여기까진 내 예상대로 흘러갔어.'
붉은 괴물은 예상대로 도미닉에게 제거당했고, 심장은 마지막까지 큰 혼란을 불러왔다.
키메라 떼는 고대 문양으로, 아레나 후아튼은 펜리를 소환해 견제했다.
이제 마지막.
팔다리가 떨어진 도미닉이 남았다.
'도미닉은 내가 맡는다.'
도미닉이 심장에 닿기 전에 그를 제거해야 했다.
다른 이들은 절대 도미닉을 죽일 수 없었다.
도미닉을 제거할 방법을 아는 이는 오직 자신뿐. 학살자조차 알지 못하는 도미닉의 약점을 파고들어야 했다.
소설 '악당들이 강해지면 벌어지는 일'의 메인 악당 중 하나, 도미닉 후아튼.
이길 수 있으려나.
솔직히 두렵다.
하지만,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겠냐."
소설 속 엑스트라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면 이곳까지 오지도 않았다.
소설의 끝은 파멸로 정해져 있고, 그 세상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결국 대가를 지불하고 강해져야 했다.
고유 능력을 잠시 떠올린 나는 도미닉을 올려다봤다.
끔찍한 몰골로 겹겹이 쌓인 사체들이 보인다. 도미닉까지 이어진 사체 언덕, 그 위를 잠시 올려다본 나는 사체들을 짓밟고 질주하기 시작했다.
내가 접근하자, 키메라들이 달려들었다.
번쩍―
문양을 소환하며 몸 상태를 빠르게 체크했다. 부러진 손목이 살짝 불편한 것 빼곤 움직이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키메라들이 주춤 물러나자, 그 사이를 거침없이 뚫고 올라갔다.
거리가 삽시간에 좁혀지자 도미닉의 시선이 느껴졌다.
키메라로 막을 수 없다고 판단했는지 오르는 것을 멈추고 내 쪽으로 몸을 틀었다.
도미닉의 반응에 난 접근을 멈추고 거리를 살짝 벌렸다. 그러곤 도미닉을 응시하며 능력 발현을 기다렸다.
"...."
"...."
잠시간의 침묵.
나는 눈썹을 찡그리곤 욕설을 내뱉었다. 눈을 수차례 깜빡이고, 비벼봐도 내가 기대했던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빌어먹을, 한 번쯤은 쉽게 가면 안 되냐?'
내 고유 능력.
예상대로라면 도미닉과 마주한 순간 능력이 발현되어야 하는데,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분명 신명(神名)의 주인이 됐을 텐데?'
신명(神名)의 주인.
악이든 선이든 세상에 변화를 불러올 운명을 타고난 자들.
내 고유 능력은 그런 신명의 주인들과 마주쳤을 때 조건부로 발현된다.
내 능력이 잘못됐을 리 없으니, 결론은 하나였다.
'도미닉이 신명을 얻지 못했다?'
붉은 괴물을 쓰러트리는 과정에서 도미닉은 신명을 받게 되는데, 그 신명이 바로 '백(百) 개의 심장'이었다.
근데 얻지 못했다는 건, 내 개입으로 운명이 틀어졌다는 뜻이었다. 이러면 고유 능력 없이 내가 가진 힘으로 도미닉을 제거해야 하는데,
'충분히 가능해.'
판단이 선 순간 단검을 겨누고 질주를 시작했다.
3성의 마나를 모조리 태우며 전력을 뽑아냈다.
도미닉과의 거리, 30미터.
키에에엑!
거대 키메라 두 마리가 사납게 다가왔다. 다른 키메라들과 달리 몸에서 보랏빛이 흘러나왔는데, 황금빛을 뚫고 날 공격해 왔다.
저 보랏빛으로 문양의 빛을 상쇄시킨 건가?
거대 키메라 두 마리라면 무척 버거운 상대였지만, 전면전이 아니라 회피가 목적이라면 할 만했다.
콰앙―! 쾅! 쾅!
울퉁불퉁한 언덕 사이를 재빠르게 움직이며 그들의 공격을 피해냈다. 굳이 내가 싸울 필요 없이 시간만 끌면 되었다.
군단의 분열로 저들을 견제할 이들이 차고 넘쳤기 때문이다.
역시나, 주변 키메라들이 몰려와 얽혀들면서 두 키메라를 맹렬히 물어뜯기 시작했다.
나를 공격하고 싶어도, 붙들려서 다가오지 못하는 상황.
난 그들 사이를 잽싸게 뚫고 나왔다.
10미터.
도미닉의 표정이 선명히 보일 정도까지 접근했다.
도미닉과 1:1 상황이 만들어졌다.
"미치광이!"
내 외침에 도미닉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난 도미닉을 향해 단검을 투척했다.
66화 도미닉 후아튼(2)
캉―!
허공에 불꽃이 튀며 단검이 튕겨 나왔다. 미간을 정확히 노렸는데, 허공에 생성된 보랏빛 배리어에 막힌 것이다.
잠시간의 대치, 도미닉은 안경을 고쳐 올리곤 고저 없는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누구십니까?"
"네 안식을 간절히 바라는 사람?"
"전 당신을 모릅니다만, 이유가 궁금하군요."
"넌 몰라서 사람들을 잡아다가 실험체로 썼냐? 이유 따윈 없어. 그냥 죽어."
도미닉은 허공에 책을 펼쳤다.
내 주변에서 흘러나오는 황금빛을 잠시 응시하던 그가 나지막이 경고를 날렸다.
"이대로 돌아간다면 붙잡지 않겠습니다."
"미치광이가 몸을 사리다니, 저 심장이 어지간히 신경 쓰이나 봐?"
"...."
"그건 곤란해. 내 목적은 애초에 네 목숨이 아니거든."
내가 심장을 바라보자, 도미닉의 뺨이 씰룩거렸다. 눈길을 주는 것만으로도 감정을 드러낼 만큼 심장에 대한 집착이 대단해 보였다.
"주인이 정해진 심장입니다."
"그게 바로 나야."
역린을 건드린 것인지, 도미닉의 표정이 곧장 사납게 변했다.
"하찮은 피조물 따위가…."
"가식 덩어리 새끼. 이제야 본모습이 나오네."
"인간 따위가 저 힘을 감당할 수 있으리라 보나?"
"그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난 달라!"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광기에 찬 확신을 드러내는 모습.
염원하던 순간을 내가 부정하고 있으니 열받은 모양인데, 너도 똑같거든?
도미닉이 심장을 완벽히 통제할 수 있었다면 챕터1의 주인공은 학살자가 아니라 도미닉이 됐을 것이다. 토바른 지역을 집어삼키고, 엘레토르 성곽 너머에 자리한 대공에게 복수를 시도할 수 있었을 테지.
하지만 도미닉은 아레나를 각성시키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녀를 완벽히 통제하는 데는 실패했다.
'폭주한 아레나의 광역기에 갈가리 찢겨나갔지.'
딸이란 존재에게 잔혹하게 살해당한 비참한 최후.
수천수만의 목숨을 유린한 악당에게 어울리는 죽음인데, 내가 나선 이상 그 일은 벌어지지 않을 거다.
'그 전에 죽을 테니까.'
쿠우웅―!
"이크!"
주변에서 벌어지는 격렬한 전투로 바닥이 거칠게 출렁이자, 난 서둘러 공격에 들어갔다.
키메라 대 키메라.
아레나 대 펜리.
지금은 팽팽하게 전투가 대치 중이지만, 도미닉이 심장에게 빼앗긴 통제권을 찾아오면 상황은 순식간에 뒤집힌다.
그 전에 승부를 보든지, 견제하든지 해야 했다.
"어리석은!"
도미닉이 책에 손을 대자, 허공에 뜬 책이 붉은빛을 토해냈다. 그 빛에 노출된 주변 키메라들이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광기의 빛.
마석에 담긴 광기의 부작용을 증폭시킨 빛이었는데, 그 광기를 먹어 치우고 3성에 오른 내게 통할 리가 있나?
번쩍―
고대 문양이 붉은빛을 서서히 밀어내기 시작했다.
남은 단검은 두 개.
그중 하나를 다시 투척했다.
아무 기운도 실리지 않은 평범한 단검.
이번에도 배리어에 무력하게 튕겨 나가자 도미닉은 단검에 신경 쓰지 않고, 내게 붉은빛을 집중적으로 퍼부었다.
잠시 후, 도미닉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스치기만 해도 미쳐버리는 저주의 빛이 놈에겐 안 먹혔다. 키메라조차 지시를 내려도 물러나 버린다.
능력이 전혀 먹히지 않는 상대.
그의 뇌리에 '천적'이란 단어가 떠올랐다.
'어디서 나타난 놈이지?'
하늘에서 뚝 떨어진 듯 나타났는데, 하필 가장 중요한 타이밍에 일을 망치려 들었다.
위기감을 느낀 도미닉이 하늘 위로 손을 뻗었다.
퍼엉―!
"...?"
허공에서 폭발음이 터지더니 주변에 검은 비가 쏟아졌다.
피하기에는 범위가 너무 넓었다.
검은 비가 몸에 닿자 내 표정은 빠르게 굳어졌다.
'키메라 체액?'
키메라 배 속을 경험해 봤기에 체액에 대해 모를 수가 없었다.
미믹을 사냥하기 위해 준비한 것을 나한테 써먹은 건가?
'이건 골치 아픈데.'
체액은 성력으로 상쇄할 수 없었다. 마비 증상이 찾아오기 전에 상황을 끝낼 수 있을까?
검은 비를 뚫고 도미닉 앞에서 투척 자세를 잡았다.
마지막 단검.
그 모습에 도미닉이 같잖다는 표정으로 배리어를 생성했다. 체액에 노출됐으니, 버티기만 해도 상황이 끝날 것이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이를 지그시 깨물곤 단검을 던졌다.
도미닉은 마법사이지만, 마탑의 마법사처럼 대인 전투에 능한 인물이 아니었다.
연구에만 목적을 둔 마법이 대부분이라, 앞서 보인 능력처럼 고대 지식을 바탕으로 한 공격이 전부였다. 그랬기에 그는 항시 강력한 키메라들을 곁에 달고 다녔다.
하지만 지금 도미닉 주변에는 아레나도 키메라도 없었다.
그 말은 즉,
콰작―!
"...!"
눈앞의 배리어만 파괴하면 충분히 제거 가능하다는 뜻이었다.
두 번의 투척 페이크로 방심을 부르고, 세 번째에 진짜 이빨을 드러냈다.
번쩍―!
인챈트가 실린 단검이 배리어에 박혀 들었다.
부여된 속성은 성력.
예상대로 보랏빛 배리어는 성력에 취약한 모습을 보였다.
박힌 단검이 백광을 뿌리자, 배리어가 거칠게 꿀렁이며 단검을 뱉어내려고 했다.
빠르게 주먹을 움켜쥐고 단검 끝을 겨누었다. 주먹이 새하얗게 물들고,
콰아앙―!
전력으로 단검 끝을 후려치자, 배리어가 흔들리더니, 이내 종잇장처럼 깨졌다.
당황한 듯 두 눈을 부릅뜬 도미닉. 무방비가 된 그를 향해 석궁을 겨누었다.
"잡았다."
"...."
코앞에서 석궁을 겨누었는데, 도미닉의 반응이 미적지근했다.
처음으로 위험에 노출됐을 텐데, 위협받은 표정이 아니다.
난 그 이유를 잘 안다.
그를 겨냥하던 석궁은 내 시선을 따라 이동하더니 허공에 뜬 책을 겨누었다.
그 모습에 도미닉의 얼굴에 균열이 생겼다.
"아, 안 돼!"
"돼."
투투퉁―!
성력이 깃든 세 발의 볼트가 두꺼운 책 표면을 꿰뚫었다. 꿰뚫린 책이 부르르 떨리더니 바닥에 툭 떨어졌다. 뚫린 구멍들 사이에서 핏물이 울컥 흘러나오더니, 바람 빠진 풍선처럼 책이 쪼그라들기 시작했다.
끄아아아악―!!!!
도미닉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쭈글쭈글해진 책을 앞에 둔 채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도미닉이 보인다.
난 바닥에 떨어진 단검을 낚아채곤 그를 향해 벼락처럼 질주했다.
시체 바닥 위를 구르는 도미닉.
단검이 울음을 토해내며 백광으로 물들었고, 곧 비틀비틀 일어나는 도미닉의 턱으로 쇄도했다.
조금의 틈도 주지 않았다.
푹―!
"...컥!"
턱 밑으로 단검을 끝까지 밀어 넣고, 도미닉을 거칠게 자빠트렸다. 그러곤 한 손으로 박힌 검 자루를 붙잡고 다른 손으로 도미닉의 머리채를 움켜잡았다.
핏줄이 선 도미닉의 눈동자.
놈이 날 노려보며 손을 허우적거리자, 내 양손이 무참히 교차하며 도미닉의 목을 기괴한 각도로 꺾어버렸다.
우두둑―
목이 반쯤 뜯겨나갔다.
그것도 모자라 턱에서 단검을 뽑은 뒤 심장에 다시 박아 넣었다. 그 위로 성력을 퍼붓자 경련을 일으키던 도미닉이 이내 축 늘어졌다.
세 호흡 정도 안에 일어난 일.
눈 깜짝할 새에 도미닉을 처리했다.
후―
그제야 막힌 숨을 토해내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보랏빛 재 가루가 허공에 흩날리자, 책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책이 있던 자리엔 그을음만 남아 있었다. 재 가루가 되어 사라진 모양.
도미닉의 숨겨진 약점이 바로 책이었다.
'책은 도미닉의 심장으로 만들어진 것이니까.'
쓰러트린 도미닉이 키메라란 뜻이고, 본체는 따로 있다는 의미였다. 책이 멀쩡히 존재하는 한, 그는 죽지 않았다.
한마디로 책만 없애면 되는 일인데, 이게 쉬운 일이냐.
'불가능에 가깝지.'
수만에 이르는 키메라 떼를 뚫고, 호위로 있는 아레나를 물리친 후, 도미닉의 능력까지 파훼해야 했다.
"그래도 결국 해냈네."
도미닉이 죽어서일까.
주변 분위기가 갑자기 어수선해졌다. 키메라들이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무차별적으로 주변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통제권이 풀려서 벌어진 일인데, 더 혼란스러워지기 전에 심장을 손에 넣어야 했다.
서둘러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응?"
순간, 불길한 감각이 온몸을 짓눌렀다.
갑자기 왜 이러지?
본능적으로 심장이 자리한 언덕을 올려다봤다.
막 동이 튼 하늘.
그런데 하늘을 비추는 햇살이 다른 빛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더 짙고 붉은 핏빛.
심장에서 흘러나오는 빛이 강렬하게 퍼지며 키메라 떼를 빠르게 집어삼켰다.
키아아아아악―!
키메라들의 움직임이 이상해졌다.
무차별적으로 움직이던 키메라들이 어느 순간부터 군집을 이루듯 뭉치기 시작했다. 분열하던 키메라들이 통일된 움직임을 보인다.
"이, 이런 빌어먹을!"
상황을 깨닫자 다급함이 올라왔다.
도미닉이 죽자, 심장이 그 빈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예측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
바로 견제자의 부재.
도미닉의 제거만 생각했지, 도미닉의 부재 시 심장의 영향력이 어디까지 뻗칠지는 생각한 바가 없었다.
스토리에 전혀 없던 내용이니 당연했다.
'그럼 아레나는?!'
아레나의 통제권이 심장에게 넘어갔다. 다급히 고개를 돌려 아레나 쪽 상황을 살폈다.
멀찍이서 펜리가 움직이는 게 보인다. 상황이 변하자 다급하게 내 쪽으로 오는 모습인데, 표정이 이상했다.
왜 저렇게 다급하게 날 바라보고 있는 거지?
"위험해!"
펜리의 외침이 터진 그 순간,
푹―
"…커억!"
아랫배에서 지진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밑을 내려다보니 피 묻은 손이 배를 뚫고 나와 있었다.
이 손은... 아레나의 것이 아니다.
더 크고 투박했다.
"도, 도미닉?"
비틀거리며 고개를 돌리니, 목이 기괴하게 꺾인 도미닉이 초점 없는 눈으로 멍하니 서 있었다.
동시에 바닥의 사체들이 하나둘 움직이며 내게 기어왔다.
보는 것만으로 소름 돋는 광경.
"…미친."
설마 죽은 키메라들까지 조종할 수 있는 건가?
심장의 영향력이 내 예측을 완전히 벗어났다.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
근데, 몸이 어느 순간 움직여지지 않았다.
'…체액.'
엎친 데 덮친 것처럼 마비 증상이 찾아왔다.
굳어 버린 몸 위로 도미닉의 손이 흐느적흐느적 움직였다. 심장에 박힌 단검을 뽑아내고 내 목을 노렸다.
"시, 시발… 쿨럭!"
죽는다.
이를 악물고 도미닉을 노려본 순간, 내 그림자가 꿀렁이며 펜리를 토해냈다.
"제길!"
스가가가각―!
욕설과 함께 날카로운 바람 소리가 들렸다.
흩날리는 황금빛 머리카락이 시야를 가렸고, 머리카락이 천천히 내려앉았을 때 수십 조각으로 잘린 도미닉의 사체가 눈에 들어왔다.
기어오던 사체들마저 모조리 찢어버린 그녀가 다급히 날 바닥에 눕혔다.
상처를 살핀 펜리의 표정이 와락 구겨졌다.
"하, 약해빠진 새끼."
배에 주먹만 한 구멍이 생겼다.
핏물이 쉴 새 없이 솟구치는데 치사량을 넘어간 것 같았다.
"쓰지도 못할 포션을 왜 달라고 한 거야?"
그녀는 내 품을 뒤져 자신이 준 포션을 찾은 뒤 상처에 들이부었다. 상처가 빠르게 아물며 나아진 듯 보였지만, 출혈이 멈추지 않았다.
"너, 독까지 당한 거냐? 마비독 때문에 피가 안 멈춰."
손가락에 힘이 빠진다.
호흡은 가빠지고, 얼굴도 새파랗게 질렸다.
당장 죽을 듯 상태가 나빠지자, 펜리의 표정이 처음으로 심각하게 굳어졌다.
그 순간,
우우웅―!
"...!"
내 가슴에서 은은한 빛이 흘러나왔다.
펜리는 가슴에 달린 검은 브로치에 집중했다. 욕심났던 보석이라 한눈에 그 물건이 뭔지 알 수 있었다.
베네타의 보물로 불리는 다크 로즈(Dark Rose).
도르네프가 몇 달간 공을 들여 제작한 축복받은 장신구였다. 그 축복이 상처를 감싸며 내 목숨을 잠시나마 붙잡고 있었다.
67화 신명 사냥꾼
흐릿한 의식 속으로 펜리의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목숨 줄이 간당간당해. 네가 뒈지는 건 나도 피하고 싶거든?"
"…쿨럭!"
"자살 구경시켜주려고 날 부르진 않았을 거고. 살 방법을 말해봐."
"시, 심장을 손에 넣어야…."
"심장?"
펜리의 고개가 빠르게 돌아갔다.
사체들로 쌓아 올린 언덕 꼭대기.
그 위에 둥둥 떠 있는 심장이 이질적인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잠시 후, 심장 곁으로 작은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조금 전까지 펜리를 고생시켰던 괴물 같은 년.
아레나 후아튼.
그녀의 손에 심장이 들려졌다.
"빌어먹을, 저 괴물과 또 싸우라고?"
펜리는 미간을 와락 구겼다.
아레나를 향한 도르네프의 경고는 거짓이 아니었다.
무시무시한 반사신경과 괴력.
더 위협적인 건 목숨을 도외시하는 반격이다. 고통을 느끼지 못하고 저돌적으로 달려드니 대인전에 강한 펜리조차 긴장하기 일쑤였다.
목숨을 장담할 수 없는 부담스러운 상대란 뜻.
문제는 지금부터였다.
펜리는 주변을 둘러보며 이를 살짝 깨물었다.
상대는 이제 저 작은 괴물만이 아니었다.
크르르르르―
"간만에 살 떨리네."
군집을 이룬 엄청난 수의 키메라들이 자신과 아레나 주변으로 빠르게 몰리고 있었다.
완벽한 고립.
펜리는 헛웃음을 삼키곤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키메라들까지 하나로 뭉친 상황에서 아레나까지 상대하는 건 개죽음이나 다름없었다.
'녀석을 데리고 튀어야 하나?'
녀석의 상태를 보니, 높은 확률로 도시에 도착하기 전에 죽을 것 같았다.
그럼 징표의 페널티를 받게 되는데, 그 손해는 솔직히 어떤 것으로도 메꿀 수가 없었다.
"하지만 싸워도 죽어."
자신이 빠지면 이 녀석 혼자 남게 되는데, 결국 키메라들에게 죽을 거다.
뭘 선택해도 녀석의 죽음을 막을 수 없다면 살 확률이 높은 것을 선택해야 했다.
베네타에 도착할 때까지만 숨이 붙어 있으면 어떻게든 살릴 수 있다.
"목숨 줄이 질기길 빈다."
판단을 내리고, 아서를 부축한 채 그림자 주술을 발동하려고 했다.
그런데,
"...?"
펜리의 표정이 당혹스럽게 변했다. 밑을 둘러보니 조금 전까지 보이던 그림자가 사라졌다.
그녀는 주변 환경이 미묘하게 변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바닥에 깔린 사체들 사이에서 음울한 빛들이 흘러나왔는데, 그 빛무리가 서서히 짙어지며 그림자 생성을 막고 있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펜리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아레나를 응시했다.
아니, 그녀가 한 짓이 아니다.
어느 정도 눈치만 있어도 그녀는 지시를 받은 인형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럼 어떤 존재가 그녀를 움직이고, 지금의 상황을 만드는 것일까.
아마 저 심장일 것이다.
"도미닉은 죽었으니까."
직접 도미닉의 시체를 조각냈으니 모를 수가 없었다.
그럼 심장에게 의지가 존재한다는 말인데, 무슨 짓을 하려는 거지?
순간, 아레나가 이상 행동을 보이기 시작했다. 손에 쥔 심장을 천천히 입으로 가져간다.
"…아니지?"
펜리의 부정도 잠시, 아레나가 작은 입으로 심장을 꿀꺽 삼켰다.
두근―!
잠시 후, 그녀의 몸에서 붉은 파동과 함께 심장 박동 소리가 흘러나왔다.
메아리처럼 퍼지는 심장 소리가 주변을 가득 채웠다.
그 소리에 반응하듯 주변을 채우던 음울한 빛들이 하늘로 솟구치며 아레나에게 스며들었다.
아레나를 중심으로 붉게 물드는 빛무리.
무언가 벌어지고 있다.
꺼림칙한 느낌에 펜리는 아서를 둘러업고 고립의 빈틈을 찾았다. 키메라들이 미동 없이 아레나 쪽을 올려다보는 상황이라, 지금이 탈출의 적기라 판단했다.
"자, 잠시만…."
"뭐가 잠시만이야. 진짜 뒈지고 싶냐? 입 열 힘이 있으면 능력이나 펼쳐."
"...."
그 뒤로 말이 없어진 녀석은 아레나가 서 있는 방향으로 힘겹게 손을 뻗었다.
손바닥 위로 은은하게 흘러나오는 백광.
정말 능력을 사용하려고?
녀석이 뭔가를 본 듯 작게 읊조리더니, 이내 힘겹게 한마디를 내뱉었다.
"…사냥하겠다."
"뭐?"
죽어가던 녀석이 갑자기 사냥 타령이라니, 무슨 헛소리인가 했는데,
우우우우우우웅―!!!!
대답이 끝나기 무섭게 펜리 주변으로 새하얀 아지랑이가 흘러나왔다.
아니, 아지랑이의 주인은 자신이 아니었다.
그녀는 눈가를 좁히며 업혀 있는 아서를 바라봤다.
아서의 몸 위로 수백 개의 아지랑이가 뻗어 나오고 있었다. 아지랑이들은 더욱 짙어졌고, 이내 겹겹이 뭉치며 큰 물결을 이루기 시작했다.
"이게 뭐야?"
혼잣말처럼 던진 그 질문에,
"일단 내려주시죠."
내가 대답했다.
* * *
악당들이 강해지면 벌어지는 일.
이 소설의 스토리를 대부분 알고 있지만, 늘 변수를 염두에 뒀다.
한두 번 당해봤어야지.
그런데 이번 건은 변수를 아득히 넘어버린 최악의 상황이 돼버렸다.
도미닉을 제거하는 데 성공했는데, 보상이라 생각했던 심장에게 뒤통수를 맞은 상황이라니.
'여기까진가?'
죽음을 인지하며 두려움에 떨고 있는데, 옅어진 의식 사이로 꿈틀거리는 감각을 느꼈다.
폐부 깊숙한 곳에서 무언가가 올라오는 듯했다.
익숙한 기운, 성력이었다.
성력이 말을 걸어왔다.
물론, 성력의 목소리가 실제로 들린 건 아니었다.
감각을 두들겨 전한다고 해야 하나?
성력이 한 존재를 의식하며 묻고 있었다.
'저 존재'를 사냥할 거냐고.
사냥?
사냥이란 단어에 고유 능력이 떠올랐다.
저 존재, 아레나 후아튼이 사냥감이라고?
생각지 못한 대상이었지만, 죽음을 앞에 둔 상황에서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난 고개를 끄덕였고, 몸에 신비한 변화가 찾아왔다.
"…신명 사냥꾼."
각성한 고유 능력을 나직이 중얼거리며 몸의 변화를 살폈다.
정신이 또렷해지며, 축 늘어졌던 근육들이 새로운 자극에 꿈틀거렸다.
가쁜 호흡이 삽시간에 안정되었고, 온몸에 감각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힘겹게 눈꺼풀을 뜨니, 펜리가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으로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비가 풀렸네? 상처도 빠르게 아무는 중이고."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펜리가 아니었다면 이미 몇 차례 죽고도 남았을 것이다.
천천히 몸을 일으켰는데, 상태가 나쁘지 않았다. 배에 난 상처는 지금도 심각했지만, 출혈이 멈췄다. 혈색도 빠르게 회복되고 있었다. 마비독이 풀리면서 특제 포션 효과가 돌고 있는 덕도 있지만, 포션 때문만이 아니었다.
'모든 능력이 눈에 띄게 올라갔다.'
신체 능력, 마나량, 전투 감각, 회복 속도 등.
전투와 관련된 모든 능력이 뻥튀기된 듯 올라갔다.
지금이라면 한 단계 위인 4성과도 비벼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우월적인 능력 강화.
사냥꾼으로 각성했을 때의 능력 중 하나였다.
"몸 상태는?"
"움직일 수 있습니다."
"감사하다고 했지? 그럼 이제부터 내 말대로 해."
"그건 힘들 것 같습니다."
"내가 뭐라고 할 줄 알고?"
"길을 뚫으라 하시겠죠."
"그래서 안 가겠다고?"
"못 가는 겁니다."
포위 사이에서 틈을 찾던 펜리는 이내 멈칫하더니 사나운 눈빛으로 날 노려봤다.
"너, 지금 말도 안 되는 환경에서 날 부른 거 알고 있지? 여긴 네 급으로 올 곳이 아니었어."
"당신이 없었으면 애초에 도전도 안 했을 겁니다."
"미친놈. 이미 많이 봐줬어. 그러니 심장은 포기해."
"눈치채셨습니까?"
"숨이 꼴깍 넘어가는데도 심장에서 눈을 떼지 못했으니까."
"이젠 포기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습니다. 일이 너무 커졌거든요."
"뭐?"
"여기서 저걸 못 막으면 토바른 전체가 피로 물들 겁니다."
난 아레나 후아튼을 올려다보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아레나의 머리 뒤에 후광처럼 검은 오오라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저 오오라는 오직 내 눈에만 보이는 현상이었다.
오오라 주변으로 몇 안 되는 문장들이 떠다녔는데, 고대 룬어로 보였다. 다만, 처음 보는 문자임에도 난 그 의미를 해석할 수 있었다.
신명 사냥꾼의 능력 중 하나.
신명을 볼 수 있는 사냥꾼의 개안(開眼).
[아레나 후아튼 – 불사자 레토니칼스의 분신체(50%)]
[극한까지 개조된 키메라 육체]
[백(百) 개의 심장]
신명의 목록이 눈동자에 담겼다.
도미닉 대신 아레나가 신명의 주인이 되었다. 아니, 정확히 심장이 신명을 받았다는 게 정확했다.
지금 아레나의 몸을 차지하고 있는 건 레토니칼스의 심장이었으니까.
도미닉은 레토니칼스의 심장을 통제할 고대 지식을 연구하고 익힌 악당이었다. 계승자의 조건을 갖춘 유일한 존재.
그 유일한 계승자가 죽어버렸으니, 심장이 폭주하며 스스로 존재를 만들고 있는 것이었다.
이걸 잡을 수 있으려나?
순간, 룬어가 바뀌었다.
[아레나 후아튼 – 불사자 레토니칼스의 분신체(55%)]
'55%?'
분신체의 완성도가 50%에서 55%로 순식간에 올라갔다.
아레나의 몸으로 빠르게 흡수되고 있는 음울한 빛무리가 보인다.
사체들의 빛무리인데, 죽은 키메라들 속에 남아 있는 마석의 힘을 뽑아 흡수하는 것 같았다.
분신체의 완성도가 100%가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절대 좋은 꼴 못 보겠지.'
분신체라지만, 그 대상이 무려 불사자 레토니칼스다. 악이든 선이든 계승자의 신기는 하나같이 절대자들과 인연으로 이어져 있었다.
그중 불사자는 악(惡) 그 자체로 알려진 존재.
전에 변이됐던 붉은 괴물과는 비교도 안 될 엄청난 재앙이 탄생할 수도 있었다.
무조건 막아야 했다.
퍽―
"...!"
내 투지를 읽은 것인지, 펜리가 내 뒷덜미를 기습적으로 후려쳤다.
기절한 뒤 끌고 갈 생각이었나 본데, 육체 능력이 올라가면서 충격을 버텨내자, 그녀가 살짝 당황스런 표정을 지었다.
"…맷집이 갑자기 세졌네?"
"도와준 김에 확실히 도와주시죠."
"뭘 도와줘. 이미 살려준 횟수만 따져도 넌 몸 팔아서 나한테 돈 갚아야 해."
역시나 씨알도 안 먹힌다.
[아레나 후아튼 – 불사자 레토니칼스의 분신체(60%)]
벌써 60%다.
올라가는 속도를 보니, 뻗대는 그녀를 설득하기엔 상황이 급박했다. 눈앞의 존재를 제거하려면 미완성 단계인 지금밖에 없었다.
역시 어쩔 수 없나?
"신세는 나중에 꼭 갚겠습니다."
"안 갚아도... 어디 가!"
그대로 키메라 떼 머리 위로 뛰어올랐다. 뒤를 돌아보니 역시나 욕설을 퍼부으며 쫓아오는 펜리가 보였다.
페널티를 받지 않으려면 날 살려서 데려가야 하니 죽을 맛일 거다.
오늘 사건을 계기로 학을 떼며 생명의 징표를 없앨지도 모르지.
"악당도 울고 갈 새끼! 나중에 죽여버릴 거야!"
"...."
저 분노를 나중에 감당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지금 생각하는 건 사치지.'
당장은 눈앞의 일에 집중해야 했다.
사방을 둘러봤다.
여길 봐도, 저길 봐도 새까맣게 모여든 키메라 떼뿐이다.
어느새 공터를 꽉 채워서 라웁 숲 너머까지 넘어갈 정도라, 검은 바다 위에 있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내 몸에서 흘러나오는 빛무리의 아지랑이 때문일까.
허공에 떠오르자, 수천수만의 눈깔들이 날 올려다봤다.
키에에엑!
카아아아악!
내 존재를 의식한 키메라들이 이빨을 드리우며 살기를 드러냈다.
그건 아레나도 마찬가지.
입술을 혀로 핥으며 노려보는데 날 먹잇감으로 인지한 것 같았다.
난 언덕 위에 우뚝 선 아레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고대 문양이 번뜩이며 반짝이기 시작했다. 문양에 응축된 기운이 전과 달랐다.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기운이 넘쳐흘렀다.
우우웅―!!
한계치까지 문양에 마나를 쏟아부으며 아레나를 향해 미소를 날렸다.
이를 드러낸 사나운 미소.
일단 목표가 정해지면 사냥을 시작해야 한다.
신명 사냥꾼.
"사냥감은 내가 아니라 네놈들이야."
번쩍―!
나를 중심으로 황금빛 파동이 허공을 찢으며 퍼져나갔다.
68화 신명 사냥꾼(2)
키메라 떼 중심에서 터진 눈 부신 빛의 파동.
각성한 능력 때문인지 문양의 범위는 평상시 빛 범위를 훨씬 웃돌았다. 그렇다고 빛이 키메라 떼를 전부 삼켰다는 건 아니었다.
전체의 절반의 절반도 안 되는 범위.
하지만 그 정도면 충분했다.
캬아아아아악!
끄에에!
이빨을 내밀던 키메라들이 고통에 고개를 돌리곤 비명을 질러댔다.
빛에 노출되자 하나같이 발광하며 몸부림쳤는데, 중심에서 터진 빛이라 노출된 수가 셀 수 없이 많았다.
빛과 멀어지기 위해 몸을 돌린 키메라들은 주변 키메라들을 거칠게 밀어냈다.
사방에서 넘어지고, 뒹구는 키메라들.
주변은 난장판이 되었고, 혼돈에 빠진 그 자리를 다른 키메라들이 짓밟고 지나갔다.
온몸이 으스러지고 피가 튀는 장면들이 줄줄이 연출됐다.
문양이 만들어낸 패닉 효과는 곧 연쇄 반응을 일으켰다.
쿠쿠쿠쿵―!
밀려나는 키메라 떼에 사체 언덕들이 함께 쓸려나갔다.
키메라 떼가 사체들과 뒤섞여 바닥을 뒹굴었다.
그물로 노획한 수천 마리의 고기 떼를 한 번에 쏟아내는 장면 같았다.
예상을 뛰어넘은 결과에 난 혀를 내두르며 문양을 갈무리했다.
"이 정도면 거의 사기 수준인데."
고대 문양이 인간에게도 먹혔다면 만능 치트키나 다름없는 힘인데, 키메라에게 한정인 게 아쉬웠다.
'무한정으로 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충만했던 마나가 한순간에 허해졌다. 가진 문양의 힘을 한계치까지 뽑아내니, 마나 소모가 극심했다.
바닥에 착지한 후 마나를 회복시키며 주변을 둘러봤다.
엉망진창이 된 주변.
키메라 대부분을 문양의 힘으로 무력화시켰다.
움직이는 상대는 거대 키메라 무리와 아레나 후아튼뿐.
역시 강력한 존재들은 문양에 대한 면역이 다른 이들보다 강했다.
주변을 살핀 나는 주저 없이 한 방향으로 몸을 틀고 앞으로 튀어 나갔다.
저 너머 무너진 언덕 사이에 검은 오오라가 넘실거리는 게 보인다.
오오라를 이정표 삼아 정확히 그녀를 찾아냈다.
'타격이 없는 건 아닌데….'
아레나의 피부가 빛으로 새빨갛게 그을렸다. 문제는 회복 속도였다. 마치 물감을 바르듯 피부가 순식간에 복구되고 있었다.
"재생 속도가 미쳤네."
신명 목록에 뜬 '백(百) 개의 심장' 효과일 것이다.
[아레나 후아튼 – 불사자 레토니칼스의 분신체(70%)]
완성도가 금세 70%를 돌파했다.
지금도 아레나 육신으로 음울한 빛무리가 쉴 새 없이 흡수되고 있었다.
끝도 없이 펼쳐진 사체들을 보니, 분신체의 완성을 물리적으로 막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제거 말곤 답이 없는 상황.
그녀 앞으로 한 발 더 내디뎠을 때 당황으로 흠칫했다. 두 눈을 깜빡인 순간 아레나가 사라졌다.
"큭!"
살기에 본능적으로 몸을 틀었다. 확장된 전투 감각이 아니었다면 눈치채지 못할 엄청난 속도였다.
부웅―!
핏빛을 띤 작은 주먹이 옆구리를 스쳐 허공을 꿰뚫었다.
바람이 터지는 충격파가 주변을 휩쓴다. 저 괴력은 인간의 육신이 버틸 수 있는 성질이 아니다.
내 몸빵으론 한 방만 허용해도 게임 오버. 재차 붙으려고 하자, 다급히 문양을 터트렸다.
다행이라면 심장이 차지한 아레나의 육신이 키메라란 것이었다. 문양은 키메라에게 천적인 능력.
황금빛이 주변 공간을 채우자 그녀가 주춤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것도 잠시, 타오르는 피부만큼 회복 속도도 빠르자, 그대로 빛을 뚫고 돌격해왔다.
이를 악물고 다음 회피를 준비하려는데, 내 뒷덜미를 펜리가 낚아채더니 뒤로 냅다 던졌다.
"미친 새끼, 죽을 거면 내 손에 죽어."
동시에 아레나의 주먹이 번뜩이자, 펜리가 크로우를 뻗었다.
카카카카카캉―!
눈부신 공방이 오갔다.
주변을 휘돌고 있는 두 인영은 벼락같이 움직이며 서로의 목숨을 노렸다. 그 속도가 너무 빨라 눈이 아닌 감각으로 잡아내야 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더니...."
가슴이 서늘하게 식었다.
펜리와 싸우는 아레나를 코앞에서 지켜보니, 실력 차이가 피부로 와닿았다.
각성을 통해 나름 강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이기기는커녕 잠깐 버티기도 힘들어 보였다.
불사자의 심장을 품은 아레나는 그만큼 강했다.
"...큭!"
쇳소리와 함께 펜리가 신음을 흘리며 내 곁으로 돌아왔다. 자세를 잡은 그녀의 표정엔 낭패가 서려 있었다. 어깨와 허벅지에 진득한 핏물이 흘러나왔다. 손가락에 잡아 뜯긴 흔적.
"저 괴물이랑은 부딪칠수록 손해야."
아레나도 가슴에 큰 상처를 입었는데 순식간에 아물었다.
회복력에서 차이가 너무 크다.
아레나가 움직이자, 거대 키메라들도 우르르 몰려들었다.
난 다급히 문양을 소환해 거대 키메라를 물렸다.
하지만 아레나는 한 걸음 한 걸음 빛 사이로 빠르게 좁혀오고 있었다.
펜리의 말이 옳다.
이 싸움을 길게 끌고 가는 건 죽음을 의미했다.
"지금이라도 안 늦었어. 튀자."
그녀의 표정엔 아직 여유가 있었다. 그림자 주술을 쓸 수 없어도 포위망이 뚫린 이상 몸을 뺄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시기라는 게 있다. 지금이 아니면 절대 수습할 수 없는 타이밍 말이다.
"여기서 제거해야 합니다."
"못 이겨. 너도 봤잖아?"
"다를 겁니다. 제가 도와주면."
"네깟 놈이 어떻게?"
"주변부터 막으세요."
"뭐, 인마?"
대답 대신 나는 허공에 손을 뻗고는 모든 마나를 한곳에 쏟아부었다. 몸 위로 흘러나오던 빛무리가 활 형태를 띠며 뭉치기 시작했다.
마치 새하얀 눈덩이를 뭉쳐 만든 장궁 같았다. 허공에 뜬 장궁을 움켜잡고 천천히 시위를 잡아당겼다.
문양이 빛을 잃자, 그 틈을 노리고 거대 키메라들이 매섭게 달려들었다.
집중 공격을 받게 되자, 펜리는 욕설을 내뱉으며 크로우로 주변을 지켰다.
다행이라면 아레나가 발걸음을 멈췄다는 거?
무엇을 느낀 것인지, 그녀의 시선이 날 응시했다.
마주 보는 대신 난 그녀의 후광에 집중했다.
검은색 오오라, 그 위를 떠도는 룬의 향연.
'신명.'
[아레나 후아튼 – 불사자 레토니칼스의 분신체(80%)]
[극한까지 개조된 키메라 육체]
[백(百) 개의 심장]
신명 목록이 눈동자에 박혔다.
분신체 완성도 80%.
완성을 무조건 막아야 한다.
어느새 내 손가락 끝에는 신비로운 화살이 잡혀 있었다.
'극한까지 개조된 키메라 육체.'
신명 목록 중 하나를 나직이 중얼거린 뒤 활시위를 가볍게 놓았다.
퉁―!
빗살처럼 사라진 화살.
그 화살을 쫓으며 펜리에게 외쳤다.
"쳐요! 이번이 마지막입니다!"
"빌어먹을, 진짜 마지막이야. 수틀리면 이제 버리고 갈 거라고!"
경고를 날린 펜리가 키메라들을 밀어내고 앞으로 질주를 시작하자, 나도 그녀 뒤를 빠르게 쫓았다.
허공을 가르고 사라지는 화살이 보인다.
한 줄기의 빛처럼 화살은 그녀의 후광을 벼락처럼 꿰뚫었다.
[극한까지 개조된 키메라 육체]
후광이 관통당한 순간 목록 하나가 잿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벌어진 눈앞의 변화.
마주 달려오던 아레나가 크게 휘청이더니 바닥에 쿵― 쓰러졌다.
바로 일어났지만, 몸에 이상이 생겼는지 중심을 잡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그 틈을 놓칠 펜리가 아니었다.
"죽어!"
벼락처럼 파고든 뒤 아레나를 향해 검은 발톱을 휘둘렀다.
평상시라면 주먹으로 반격을 해왔을 텐데, 아레나는 양팔을 교차해 크로우를 막았다.
갑작스러운 방어 태세 전환.
부딪친 순간 펜리의 눈이 반짝였다.
놈이 갑자기 약해졌다.
그 뒤로 전투 양상은 일방적으로 흘러갔다.
작은 육신 위로 끔찍한 자상들이 삽시간에 새겨지더니, 이어지는 공격에도 무력하게 밀리는 모습이 연출됐다.
둔해진 몸짓, 약화된 힘.
아레나는 아슬아슬하게 펜리의 공격을 버텨냈다. 방어와 회피를 하며 버티기에 들어간 모습.
크로우가 움직일 때마다 진득한 핏물이 대지를 붉게 적셨지만, 그녀는 쉽사리 쓰러지지 않았다.
베이고 잘린 흔적들이 삽시간에 아무는 모습에 펜리는 헛웃음을 흘렸다.
"트롤 저리 가라 할 년이네."
[백(百) 개의 심장].
트롤도 울고 갈 엄청난 재생력 때문에 그녀를 단시간에 죽일 수가 없었다.
"…심장을, 심장을 노려요!"
"보고도 몰라? 심장 위치나 알려주고 말해."
심장이 있을 법한 위치를 수차례 찔러봤지만, 반응이 없었다.
완벽히 제압한 후 심장을 노려야 할 것 같은데, 거대 키메라들 때문에 제압이 쉽지가 않았다.
중요한 순간마다 몸을 던지며 아레나를 보호하는 키메라들.
크로우에 갈가리 찢겨 나가고 있지만, 덩치도 크고 수가 많아 쉽사리 뚫기가 힘들었다.
"귀찮은 것들! 어떻게 좀 해봐!"
"…무리예요."
난 이를 악물곤 거친 숨을 내쉬었다.
펜리를 돕고 싶지만, 화살이 사라진 후부터 쉽게 움직일 수 없었다. 성력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벅찼기 때문이다.
신명 목록의 일부를 봉인시키는 능력.
'신명의 화살'을 유지하기 위한 성력 소모가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내 능력이 모자란 탓이었다.
'빌어먹을, 서둘러야 하는데….'
펜리의 실력이라면 거대 키메라들을 충분히 정리할 수 있다.
문제는 전부 처리하기엔 수가 많다는 거다. 안타깝게도 시간은 우리 편이 아니었다.
[아레나 후아튼 – 불사자 레토니칼스의 분신체(90%)]
분신체의 완성도가 지척에 다다랐다. 시간이 없었다. 아레나가 분신체라는 새로운 존재로 변이된다면 단둘이선 절대 죽일 수 없었다.
[...95%]
시간을 재보니, 이대로는 실패할 것 같았다.
머리를 빠르게 굴렸다.
아레나와 심장을 당장 분리해야 하는데, 심장의 위치를 모른다.
환상 스크롤을 터트리고 집중 공격을 한다면?
아니, 이미 집중 공격 중인데도 질긴 육체와 재생력 때문에 제압이 안 되는 상황이다.
지금 공격을 능가하는 한 방이 필요했다.
'일격에 막대한 충격을 줘서 아레나 육신 자체를 갈가리 찢어버려야 해.'
내가 가진 능력 중에 그 정도로 강력한 것이 있나?
있긴 있다.
그래서 절로 인상이 구겨졌다.
이건 진짜 못 하겠는데....
[...97%]
그런데, 절대로 피하고 싶은 그 방법만이 유일한 해결책으로 보였다.
"시발, 이건 너무 가혹하지 않냐?!"
누구한테 하소연하는지 모르겠다. 봉인 효과를 거둬들인 나는 아레나를 향해 질주하기 시작했다.
사냥꾼의 능력 대신 고대 문양을 발동시켰다.
빛무리가 반원을 그리며 아레나와 그 주변 모두를 집어삼켰다. 키메라들이 비명을 지르며 물러나기 시작했다.
반대로 봉인이 풀리면서 힘을 되찾은 아레나가 펜리에게 매섭게 달려들었다.
"…큭! 야, 뭐 하는 짓이야!"
"터트려요, 그거!"
"뭘 터트…."
"스크롤!"
잠시 말을 흐리던 펜리가 품에서 스크롤을 꺼내더니 아레나 쪽을 겨눴다.
환상 스크롤.
매서운 기세로 달려드는 주먹이 보이자, 펜리는 그대로 스크롤을 쭉 찢었다.
69화 내 능력을 믿을 뿐이다
찢어진 스크롤 사이로 공간을 삼키는 날갯짓 소리가 흘러나왔다.
파파파파파파파파팟―!
허공에 새하얀 장관이 펼쳐졌다.
흰빛으로 이뤄진 나비들이 주변 풍경을 빛내며 사방으로 날아올랐다.
가파른 절벽을 에워쌀 정도로 엄청난 수의 나비 떼가 소환됐다.
축제에서나 보던 아름답고 몽환적인 장면.
모든 것이 나비 떼에 삼켜졌다.
멈칫―
펜리를 몰아치던 아레나의 움직임이 느려지더니 무표정한 아레나의 동공이 빠르게 확장됐다.
눈동자에 가득 비친 흰나비 떼.
온몸이 흰나비에 둘러싸이자 그녀의 움직임이 돌처럼 굳었다.
죽음으로도 잊지 못한 트라우마가 불러온 찰나의 경직.
난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어지러운 나비 떼를 뚫고 아레나의 등 뒤로 왼팔을 뻗었다. 거칠게 그녀를 휘감고 품으로 잡아당겼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감촉, 생기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는 피부다.
"꼬맹아, 이만 끝내자."
내 목소리에 아레나가 반응을 보였다.
감정이 말라비틀어진 눈동자로 날 응시한다.
클라크 대공에 의해, 부모에 의해 죽어서도 유린당한 작은 괴물.
불운한 그녀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한 가지뿐이다.
딸칵―
"고통은 없을 거야. 나만 더럽게 아프겠지."
벗어 던진 팔찌를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사람을 숙주로 신호에 맞춰 폭발하는 변태 같은 벌레, 붐(boom).
붐을 봉인한 팔찌를 여기서 풀게 될 줄이야.
'이젠 못 먹어도 고다.'
도망치고 포기하기엔 너무 멀리 왔다. 그나마 다행인 건 생명 보험이 존재한다는 거다.
휘몰아치는 나비 떼 사이에서 펜리와 눈을 마주쳤다.
표정을 보니 내 돌발 행동에 아주 당황한 눈치였다.
네가 걜 왜 안고 지랄이야?
이런 눈빛인데, 그냥 어색한 미소로 답을 해줬다.
이번에도 잘 부탁해.
헛생각도 잠시, 지독한 고통에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으드득―!
경직이 서서히 풀리며 아레나가 휘감은 내 왼팔을 잡아 뜯으려고 했다.
뼈가 으스러지고 팔이 뽑힐 것 같은 고통을 참으며 난 붐을 깨우기 시작했다.
"…망할 년, 불쌍한 거 취소다."
[팔은 날아가겠지만, 위력은 보증하지. 웬만한 녀석들은 다 죽을걸?]
붐(boom)으로부터 살아남은 칼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붐을 터트려도 정신만 차리면 살 수 있다. 물론, 조건이 필요했다.
'정신 줄 놓치면 골로 간다.'
내 목표는 레토니칼스의 심장을 얻는 것이지, 아레나를 죽이는 게 아니었다.
부서진 그녀의 육체가 회복되기 전에 심장을 뽑아내야 한다.
그 후에는….
다음을 떠올리려는 순간, 손목에 잠들어 있던 붐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아레나 후아튼 – 불사자 레토니칼스의 분신체(97%)]
'어, 어서!'
신경 다발이 가닥가닥 끊어지는 것 같다. 팔이 터져나갈 것 같은 두려움.
난 이를 까득 물곤 정신을 바짝 차렸다.
영문도 모른 채 떨어진 이 개같은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여러 가지 능력을 얻었다.
그리고 그중 내가 가장 신뢰하고 의지하는 능력은 고대 문양도 성력도 신명 사냥꾼도 아니었다.
'정신 방벽.'
소설 속 인물이 아닌 '진짜' 나란 존재에게 부여된 특수 능력.
내 능력을 믿을 뿐이다.
[...98%]
[...99%]
"시, 시발."
콰아아아아아아앙―!!!
온 세상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 * *
인적이 드문 으슥한 뒷골목.
카멜은 굳은 얼굴로 어두컴컴한 골목 사이를 거닐고 있었다. 곁을 지키는 이들은 기사 단장 리옹과 주술사 렌구아가 전부였다.
조용한 발자국 사이로 카멜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렌구아, 아직 멀었나?"
"곧 도착합니다. 그런데 어찌 그런 누추한 장소로...."
"묻지 말고 안내해라."
"알겠습니다."
렌구아는 고개를 숙이곤 앞장을 섰다. 길잡이 역할을 맡았지만, 렌구아는 지금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소멸로 인해 망가진 주술 인형의 기억을 복구하는 작업 중에 갑자기 끌려왔기 때문이다.
'블라이어로 돌아가신다고 했는데, 어찌 다시 돌아오신 거지?'
자신의 주인은 잭과 하우엘 형제를 포섭하고 반강제로 끌려온 상단주들과 곡물 계약을 마무리한 후 곧장 에토르 영지를 떠났다.
자신은 에토르의 마석 작업을 마무리하기 위해 남았는데, 돌연 주군이 다시 돌아와 자신을 호출하더니 크룩스의 아지트로 안내하라는 것이 아닌가.
주인은 절대 즉흥적으로 움직이는 인물이 아니었기에 그 이유가 궁금했다.
'보고서에 어떤 내용이 적혀 있었길래….'
사건의 발단은 한 장의 보고서였다.
'주술사들의 둥지'에서 보내온 것이니, 암살 조직 크룩스와 관련된 내용일 터였다.
평상시에는 자신에게 먼저 도착했을 보고서가 떠나는 주군께 긴급으로 전달됐다.
내용이 '특급'이란 의미.
주군이 극도로 경계하는 '그'의 흔적이 발견됐다면 오늘 길들인 잭과 하우엘 형제도 동행했을 것이다.
하지만 사냥개들은 블라이어로 먼저 보내진 상태. 그럼 '그'와는 상관없는 내용이란 예측이 나왔다.
질문을 통해 궁금증을 해결하고 싶었지만, 주군의 표정이 무겁다 보니 눈치가 보였다.
렌구아는 일단 크룩스의 아지트로 주군을 안내하는 데 집중했다.
자신과 리옹만 대동하고 움직인 이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곳입니다."
카멜 일행은 골목 구석에 있는 낡은 건물 앞에 섰다.
간판에는 정보 길드를 뜻하는 표식과 이름이 적혀 있었는데, 크룩스의 마스터가 머무는 비밀 아지트였다.
"마스터를 끌고 나올까요?"
렌구아는 큰 고민 없이 마스터를 언급했다.
주술사들의 둥지를 통해 이미 크룩스의 전력에 대해 알 만큼 알고 있었다.
자신이나 리옹, 둘 중 한 명만 움직여도 충분하다 판단했다.
하지만 그 물음에 카멜은 피식 웃더니 방향을 틀었다.
"내가 마스터 따위를 보려고 직접 나선 줄 아나?"
"…그럼?"
"근처에 볼일이 있다."
카멜은 크룩스의 비밀 거점을 지나쳐 주변에 자리한 허름한 여관 앞에 멈춰 섰다.
카멜은 여관을 잠시 응시했다.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한달음에 이곳으로 달려온 이유.
특급으로 보내온 보고서에 적혀 있는 단 한 줄의 내용 때문이었다.
[크룩스를 찾아온 손님이 확인됐는데, 그 손님 이름이....]
'아케인이라니.'
크룩스에서 '그'의 흔적을 찾던 중 전혀 예상치 못했던 아케인이란 이름이 튀어나왔다.
이름만 같을 뿐 다른 사람일지도 모르지만, 이름을 알게 된 이상 무조건 확인이 필요했다.
1층에서 흘러나오는 흐릿한 불빛.
카멜은 불빛을 따라 여관 문을 박차고 안으로 들어갔다.
1층 식당에선 손님들이 식사와 술을 즐기고 있었다.
왁자지껄한 분위기.
그 작은 소란 사이로 젊은 귀공자가 검은 망토를 두른 채 입구에서 모습을 드러내자 사람들은 하나둘 침묵하기 시작했다.
바라보는 것만 해도 가슴을 옥죄는 압박감이 느껴졌다.
시선조차 마주 보기 힘들었다.
뒤이어 리옹마저 나타나자 사람들은 눈치를 보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날카로운 인상의 푸른 갑주의 기사.
뒷골목에서 기사와 엮이면 죽는다는 격언대로 움직인 것인데, 사실 기사보단 저 귀공자의 존재감 탓이 더 컸다.
더 있다간 질식해 죽을 것만 같았다.
새파랗게 질린 여관 주인만 자리를 지키는 가운데, 카멜의 시선이 식당 한 곳에 머물렀다.
모두가 떠난 테이블에 홀로 앉아 있는 이, 허름한 로브를 걸친 그는 등을 보인 채 테이블에 올려진 술잔을 조용히 기울이고 있었다.
카멜 일행의 등장에도 별다른 관심이 없는 듯 보였다.
"저자에 대해 알고 있나?"
카멜의 물음에 주인은 화들짝 놀라곤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푸, 푼돈을 받고 점을 봐주는 점성술사입니다."
"이름을 알고 있나?"
"그게... 모, 모릅니다! 자신을 그저 점성술사라고만 소개해서…."
"얼마나 머물렀지?"
"석 달 정도…? 그 이상일 수도 있습니다. 건너편 건물에도 자주 오갔던 터라…."
카멜은 주인에게 점성술사에 대한 여러 가지 것들을 자세히 물었다. 주군의 태도에 리옹과 렌구아는 의문이 들었다.
점성술사를 직접 잡아다가 물어보면 될 것을 굳이 주인에게 묻는 이유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잠시 후, 카멜은 점성술사에게 다가간 뒤 테이블 위에 금화 한 닢을 올려놨다.
"점괘를 보고 싶은데."
"보다시피 영업을 끝내고 한잔 마시는 중입니다."
"금화가 부족한가?"
"술에 취하면 점괘가 잘 안 맞아서 말이죠. 낼 아침에 다시 찾아오십시오."
사내의 태도에 카멜은 눈을 반짝였다. 용아의 망토를 걸쳤음에도 전혀 개의치 않는 반응이다. 되려 사내의 무시에 리옹이 발끈하며 앞으로 나서려고 하자 카멜이 이를 저지했다.
카멜은 테이블 반대편에 앉은 뒤 황금 주머니를 그 앞에 올려놨다. 보기만 해도 엄청난 양의 금화가 담긴 주머니였다.
"그럼 점괘 대신 얼굴 구경이나 하고 가지. 구경값이다."
"남자를 좋아하는 관상은 아닌 듯한데…."
"어떡할 거지?"
"단순한 흥밋거리치곤 대가가 지나치군요. 당신이 찾는 사람이 아니면 절 죽일 생각입니까?"
남은 잔을 비운 사내가 리옹을 바라보며 묻자, 카멜은 그 빈 잔에 술을 채우며 피식 웃었다.
"죽여? '계시(啓示)'를 받드는 존재를 적으로 삼을 만큼 내가 멍청해 보이나?"
"...."
카멜의 말에 아케인은 술잔을 받아 조용히 들이켰다. 별다른 반응이 없는 모습이다. 오히려 경악한 사람은 곁에 있던 렌구아였다.
아케인? 그 아케인이라고?
계시를 통해 신명(神名)의 신비에 가장 밀접하게 다가간 인물.
오르도르 숲의 마녀와 함께 절대 적으로 두면 안 되는 인물로 꼽히는 이였다.
'아케인이 왜 크룩스 같은 하찮은 조직의 손님으로….'
그것도 진짜 이름을 드러내고 말이다.
의문이 들었지만, 답을 굳이 고민하지 않았다.
아케인은 계시를 받고 움직이는 인물이다. 계시의 뜻을 한낱 인간 따위가 어찌 이해할 수 있을까.
"이상하군요. 이름을 드러내도 저를 찾아올 귀한 인연은 점괘에 없었는데."
"내가 별것 아니라는 건가?"
"흠, 그럴 리가요. 그래서 이상하다는 겁니다."
아케인은 둘러쓴 로브를 천천히 벗었다.
긴 백발이 허공에 흩날렸다.
새하얀 피부를 지닌 젊은 미남자였다. 왼쪽 귀에 푸른 사파이어가 박힌 귀걸이를 착용하고 있었는데, 백발과 어우러져 무척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겼다.
아케인은 가느다란 눈매로 카멜을 잠시 응시한 뒤 고개를 살짝 숙였다.
"'신명의 주인'이시면 귀한 분이 맞으니까요."
"...!"
아케인의 말에 카멜 뒤에 서 있던 두 사람이 움찔했다.
주군이 앞에 있어 티를 내지 못했지만, 반응을 보니 주군이 신명의 주인인지 몰랐다는 반응이었다.
"내가 신명의 주인인가?"
"모르셨습니까?"
"확인을 받은 건 처음이니까."
카멜의 표정을 보니, 모르는 눈치는 아니었다. 아케인은 귀걸이를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었다.
"저와 당신은 인연의 연결고리가 무척 약합니다. 아직은 저를 만날 운명이 아니라는 뜻이지요."
"나도 알아. 내가 당신을 찾아오게 된 것은 '그' 때문이다. '그'가 날 이곳으로 이끌었지."
"'그'?"
"그대가 맹신하는 운명이란 것을 가볍게 비틀어버린 놈이지. 지금처럼."
'그'가 아니었다면 크룩스를 조사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고, 크룩스 손님으로 와 있는 아케인의 존재도 몰랐을 것이다.
귀걸이를 만지작거리던 아케인의 손짓이 멈칫했다.
카멜의 이야기를 듣고 생각이 많아진 표정이었다. 안 그래도 계시가 애매하게 어긋나서 크룩스에 계속 머물고 있던 참이었다.
'계시'대로 죽었어야 할 인물의 생사가 불투명해지더니, 그 인물과 관련된 점괘가 뿌연 벽처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던 차에 인연의 연결고리에 없던 신명의 주인이 찾아와 '그'란 존재를 언급하며 경고를 한다?
잠시 고민하던 아케인이 카멜에게 물었다.
"'그'란 사람도 신명의 주인입니까?"
70화 신명의 빛
아케인의 물음에 카멜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그'는 신명의 주인일까?
"신명의 주인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이상한 답이군요."
"'그'라 의심 가는 녀석의 신명 목록을 알고 있다."
"...."
이어진 카멜의 답에 아케인의 몸이 앞으로 기울어졌다. 가느다란 눈매가 날카롭게 변했다.
"당신에게 신명의 내용을 발설한 어리석은 이가 누굽니까?"
"광의의 예언자."
아케인은 안타까운 듯 짧게 혀를 찼다.
신명의 빛을 본 자가 신명의 내용을 함부로 발설하면 저주를 받게 된다.
광의의 예언자도 신명의 빛에 무척 밝은 인물로 꼽히는 자였다.
클라크 대공에게 끌려다니며 능력을 팔고 다니더니, 결국 이렇게 망가지는가 싶었다.
"신명 목록이 뭡니까?"
"맨입으로 말하긴 그런데, 거래하지."
"주인장, 잘 마셨습니다."
아케인은 테이블 위에 동전을 올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련 없이 돌아서는 모습에 카멜은 미간을 좁히곤 그를 막아섰다.
"거래 내용조차 듣지 않을 건가?"
"우리 사이에 거래는 이것뿐일 텐데요."
아케인은 금화 주머니를 흔들고는 품에 넣었다. 얼굴을 보여주는 것으로 당신과 거래가 끝났음을 알려주는 행동이었다.
"'그'에게 관심이 있었던 거 아닌가?"
"당신의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알 방법이 제겐 없습니다."
"없는 신명 목록을 만들 순 없지."
"원하는 게 그 신명 목록을 지닌 주인의 정보 아닙니까?"
"그렇다."
"전 광의의 예언자와 달리 저주를 두려워해서 말이죠. '그'가 확실치 않은 단계에서 굳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있을까요?"
"작은 힌트라도 상관없다."
"듣고도 제가 알려드리지 못한다면요?"
"그게 무슨 뜻이지?"
"신명의 주인들에 대해 제가 모든 것을 알고 있으리라 생각지 마십시오."
등을 돌린 아케인이 발걸음을 옮기자, 그 앞을 리옹이 막아섰다.
검을 뽑으려는 행동에 렌구아가 황급히 리옹을 저지했다.
아케인의 무력은 신비로 가려져 있다. 제압에 실패한다면 그 뒷일을 감당키 어려웠다.
아케인은 회유하거나, 억압이 통할 상대가 아니었다.
카멜도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리옹에게 물러나라 신호를 보냈다.
자신이 이곳에 찾아온 이유는 그 말대로 '세이렌의 찬가'를 지닌 인물의 힌트를 얻기 위함이었다.
문제는 아케인이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신명을 발설하고도 저주로부터 자유로운 존재니까.'
어떤 방법으로 저주를 상쇄시키는지 알 수 없지만, 아케인은 신명의 내용을 타인에게 발설해도 저주를 회피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죽일 수 없다면 되도록 적이 되어선 안 된다. 그는 신명의 주인들에 대해 누구보다 많은 정보를 지니고 있고, 발설할 수 있는 존재였으니까.
"원하는 게 있나?"
"거래를 원한다면 정보가 먼저입니다."
"세이렌의 찬가(Siren's Hymn). 그리고 가장 최근에 신명을 각성한 존재라는 것."
카멜은 고민 없이 광의의 예언자에게 얻은 정보를 풀었다.
어차피 이 단서로는 '그'를 찾을 한계가 명확했기에 한발 물러난 것이다.
신명 목록을 들은 아케인은 세이렌의 찬가를 나직이 중얼거리며 한동안 제자리에 서 있었다.
귀걸이를 만지작거리며 눈을 감은 모습인데, 감정을 읽기가 힘들었다.
잠시 후, 아케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가장 최근에 각성한 존재는 아닌 것 같군요."
"혹시 근래에 또 다른 이가 각성했나?"
"당신이 찾아오기 직전 새로운 주인이 탄생했습니다."
새로운 신명의 주인.
카멜은 그 주인을 짐작한 듯 다시 물었다.
"위치를 알 수 있나? 그대라면 대략적인 위치를 알 수 있을 텐데."
각성 장소가 가까운 탓에 아케인도 대략적인 장소를 특정할 수 있었다. 그만큼 특정 범위가 넓은 장소였기 때문이다. 받은 정보가 있었기에 아케인은 굳이 이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라웁 숲."
"…라웁 숲."
광범위한 장소지만, 카멜에게 그 단서 하나면 충분했다.
도미닉 후아튼이 자리한 곳.
지금쯤 각성할 시기이기도 했다.
라웁 숲을 중얼거리며 렌구아를 바라보자, 렌구아가 송구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연구 일지를 회수하는 임무에 실패한 데다가 라웁 숲 정보를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주술 인형마저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곧 복구될 주술 인형의 기억에 중요한 단서가 있길 바랄 뿐이었다.
아케인의 눈에는 무엇이 보이는 것일까. 잠시 허공을 응시하던 그가 불현듯 말을 이었다.
"이자군요. '세이렌의 찬가'를 지닌 신명의 주인이."
그 말에 카멜의 두 눈이 번뜩였다. '그'에게 다가갈 가장 중요한 단서가 나왔다.
하지만 아케인의 입에서 나온 정보는 예상과 달랐다.
[XX XXXX ― 균열 속의 은둔자]
[X XX XX]
[세이렌의 찬가(Siren's Hymn)]
"이름은 모릅니다. 제가 알려드릴 수 있는 건 '신명'뿐입니다."
"…이름을 모른다고?"
"모릅니다. 읽을 수 없습니다."
"...."
읽지 못한다.
광의의 예언자에게 들었던 말을 아케인에게 듣게 될 줄은 몰랐다.
아케인조차 전부 알지 못하는 신명이라니, 도대체 어떤 놈이길래 이토록 베일에 싸인 것일까.
다만, 아케인의 표정이 생각보다 평온했다. 이런 일이 익숙한 것일까?
"혹시 자주 일어나는 일인가?"
"희귀한 경우입니다. 다만, 읽지 못한 내용에 크게 얽매이는 편이 아닙니다. 시기의 차이일 뿐 언제고 전부 밝혀지니까요"
"그자의 신명이 뭐지?"
"그 전에 당신의 신명 목록을 열람하고 싶군요."
카멜은 미간을 좁힌 채 물었다.
"내 신명 목록? 내가 각성할 때 신명의 빛으로 봤을 텐데?"
"지금 상황처럼 당신 또한 각성 시 읽지 못하는 목록이 존재했습니다. 전 그 내용을 알고 싶습니다."
"그걸 알 수 있다고?"
"당신이 허락해준다면."
처음 듣는 얘기다.
문득 카멜도 자신의 신명이 궁금해졌다. 회귀 전과 회귀 후의 자신의 인생은 확실히 달라졌기 때문이다.
"내 신명 정보를 이 자리에서 공유하고 싶다."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열람을 허락하시겠습니까?"
"허락한다."
순간, 아케인의 귀걸이에서 푸른빛이 흘러나오더니 카멜에게 쏟아졌다.
그 강렬한 빛에 시선을 돌린 것도 잠시, 카멜의 머리에 붉은 후광이 생기더니 글자가 적히듯 몇 가지 잔상이 떠다니기 시작했다.
[카멜 블레이저 – 두 길을 걷는 탐욕 군주(시간(時))]
[통제 위의 카리스마]
[영혼을 꿰뚫는 통찰력]
카멜의 신명 정보가 아케인의 시야에 박히듯 들어왔다.
아케인이 읽지 못했던 카멜의 신명 정보는 고유 속성이었다.
바로 '시간(時)'.
속성이 시간이라니, 무척 희귀한 속성을 지닌 이였다.
시간 속성은 어떤 힘을 발휘하는 것일까.
서로가 만날 운명이 아닌데도 지금 만난 것처럼 운명을 거스르는 것과 관련 있을까.
아케인은 '그'보다 먼저 눈앞의 사내에게 호기심이 생겼다. 관심을 두고 지켜볼 가치가 있는 자였다.
확인한 신명 정보를 카멜에게 쪽지로 전달해준 뒤 아케인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광의의 예언자처럼 되고 싶지 않다면 혼자 보는 걸 추천드립니다."
내용을 읽은 카멜은 그대로 쪽지를 목구멍으로 삼킨 뒤 아케인을 바라봤다.
"이제 거래 성립인가?"
"그자의 신명을 알고 싶으십니까?"
카멜이 고개를 끄덕이자, 아케인은 허공에 시선을 두었다.
그의 입이 천천히 열린다.
"그자의 신명은 '균열 속의 은둔....'"
아케인의 말이 막 끝맺음을 하려는 때였다.
번쩍―!!!
"...!"
1층 식당이 눈 부신 빛으로 밝아졌다. 빛의 진원지는 두 군데였다.
하나는 아케인의 귀걸이.
귀걸이에 달린 사파이어가 엄청난 빛을 토해냈다.
그 빛과 공명하듯 반응하는 또 다른 빛.
그 빛은 전혀 예상치 못한 인물에게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렌구아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의 구슬을 앞으로 내밀었다.
"주, 주군!"
구슬에서 눈 부신 빛이 번뜩이고 있었다. 렌구아는 이미 이 빛의 정체를 한 차례 목격한 바가 있었다. 전(前)대 기사 단장인 록터 펠리스가 주군께 충성 맹세를 했던 그날, 자신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찾아온 한 줄기의 빛 말이다.
"시, 신명의 빛입니다!!!!"
구슬에 신명의 문자가 새겨지기 시작했다. 렌구아는 자신에게 찾아온 두 번째 신명에 흥분하며 구슬을 노려봤다.
저번에는 아무것도 읽지 못했다. 이번에는 다를 것이라 확신했고, 인형 소멸로 추락한 자신의 가치를 다시 주군께 증명할 절호의 기회였다.
그런데,
"빌어먹을…!"
[XX XXXX – XX XX XXX]
[X XX XX]
[XXXX XX]
이번에도 전혀 읽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렌구아는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문자를 읽을 순 없었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이 신명의 주인.
전에 자신이 받은 신명의 주인과 동일인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또다시 신명이 나타난 거지?
그때였다.
"...헉!"
[XX XXXX – XX XXX(X)]
[X XX XX]
[XXXX XX]
[XXXXXX XX]
갑자기 문자가 늘어나더니, 신명의 내용이 바뀌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어떤 변화가 나타났길래, 신명의 빛이 재차 나타날 정도일까.
이 의문을 해소해줄 존재가 떠올랐다.
렌구아의 시선이 아케인에게 향했다.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터진 신명의 빛.
아마 자신과 같은 것을 보고 있으리라.
신명의 신비에 가장 밀접해 있는 이는 이 신명의 빛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전부 읽었을까?
미치도록 궁금했지만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주군과 마주할 때도 여유롭게 반응하던 아케인의 표정이 더할 나위 없이 굳어있었으니까.
[XX XXXX― 균열 속의 은둔자]
[X XX XX]
[세이렌의 찬가(Siren's Hymn)]
분명 조금 전까지 봤던 신명의 내용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신명의 빛이 재차 나타난 것일까.
게다가 이 빛무리.
너무나도 눈 부시다.
처음 벌어진 상황에 의문이 든 것도 잠시,
"...!!"
아케인의 눈동자가 서서히 경악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문자가 늘어나며 신명이 실시간으로 변화하고 있었다.
[XX XXXX ― 신명 사냥꾼(X)]
[X XX XX]
[세이렌의 찬가(Siren's Hymn)]
[XXXXXX 심장]
"…이게 무슨!"
신명의 신비에 가장 밀접해 있는 인물, 운명의 아케인.
그조차도 처음 경험해보는 현상이 눈앞에서 펼쳐졌다.
계시를 통해 운명처럼 정해지는 신명은 절대 변할 수가 없다. 아니, 그렇게 확신하고 살아왔다.
그런데 '균열 속의 은둔자'란 신명이 눈앞에서 실시간으로 변하고 있었다. 그리고 완성된 새로운 신명은,
'신명 사냥꾼...?'
새로운 신명을 마주 본 순간 아케인은 가슴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신명 사냥꾼이라니, 신명의 주인들이라면 무척 위협적으로 느낄만한 신명이었다.
순간 카멜이 했던 말이 떠오른 건 왜일까?
[그대가 맹신하는 운명이란 것을 가볍게 비틀어버린 놈이지. 지금처럼.]
꺼림칙한 느낌이 들었다.
71화 신명의 빛(2)
아케인의 시선이 카멜에게 향했다.
조금 전 드러난 신명의 주인공을 확인하기 위해 자신을 찾아온 인물.
그가 자신을 찾아와 '그'를 언급한 순간 이 같은 사건이 벌어진 게 과연 우연일까.
"얘기를 끝까지 듣지 못했다. 그자의 신명이 뭐지?"
"...."
조금 전 렌구아와 빠르게 귓속말을 주고받은 카멜은 아케인의 침묵에 눈을 반짝였다.
렌구아는 신명을 읽지 못했다. 하지만 신명의 내용이 변했다는 건 알고 있었다.
"신명 목록이 바뀌었으니, 다시 이야기해야겠지. 안 그런가?"
"…'그'는 어떤 사람입니까?"
되려 '그'에 대해 묻고 있는 아케인의 반응에 카멜은 확신했다.
조금 전, 렌구아가 본 신명의 빛은 세이렌의 찬가를 지닌 주인의 것이 분명했다.
불변의 법칙이라 불리는 신명마저 변화시키는 존재다.
'놈이야. 놈밖에 없어.'
신명의 주인이 더욱 '그'일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내가 아는 '그'에 대해 알려주지. 이번에도 거래를 거절할 텐가?"
"...."
카멜의 물음에 아케인은 전과 달리 의자에 천천히 앉았다.
아케인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그'에 대한 관심이 흥미를 넘어 눈빛에 짙은 경계를 담고 있었다.
[영혼을 꿰뚫는 통찰력]
카멜의 뇌리에 자신의 신명 목록이 스쳐 지나갔다.
불현듯 떠오른 생각이 이 신명의 영향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카멜의 머리가 빠르게 굴러가기 시작했다.
생각지 못했던 인물을 곁에 둘 기회가 생긴 것 같았다. 그래서 가장 큰 미끼를 던졌다.
"'그'를 잡을 수 있는 계획이 내게 있다. 함께할 텐가?"
"'그'를 잡으면 어찌할 생각입니까?"
카멜은 이를 드러내며 사납게 웃었다.
굳이 물어볼 필요 없을 것 같았다.
"전 '그'와 만나고 싶을 뿐입니다."
"자리를 마련해주지."
아케인은 잠시 고민했지만, 제안을 거절하려고 했다.
자신은 '계시(啓示)'를 받드는 존재.
계시 없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데,
"...!"
아케인의 귀걸이가 일순간 부르르 떨리더니, 그의 눈동자가 푸른 벼락처럼 번뜩였다. 찰나의 변화였기에 카멜 일행이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다.
잠시 후, 아케인은 표정을 고치곤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한시적인 동행이라면 허락하겠습니다."
한시적인 동행.
언제든 곁을 떠날 수 있다는 말이었지만, 상대가 운명의 아케인이라면 잠시 곁에 두는 것만으로도 환영이었다.
아케인이 지닌 신명의 정보와 자신의 회귀 경험이 합쳐진다면?
세상의 흐름을 엿볼 수 있는 존재들이 뭉쳤다. 그 파급력을 떠올리자, 절로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카멜은 손을 내밀었고, 두 사람은 손을 마주 잡았다.
운명의 아케인과 학살자 카멜.
'그'란 존재를 사이에 둔 임시적 동맹이 만들어진 순간이었다.
* * *
쿠쿠쿠쿠쿠쿵―!
라웁 숲 전체가 흔들렸다.
한때 도미닉의 연구소로 불리던 절벽이 붉은 괴물의 난동으로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다가 결국, 폭발의 여진에 무너져 내렸다.
수많은 돌무더기가 한바탕 숲을 휩쓸었다.
숲 한가운데서 흡사 산사태가 일어난 것처럼 보였다.
붉은 대지에 즐비하게 널린 수천 마리의 키메라의 시신도, 거대한 붉은 괴물도, 도미닉의 시신도 흙더미 아래로 파묻혔다.
피어나는 짙은 먼지가 주변 시야를 뿌옇게 가렸다. 잠시 후, 그 연기 사이를 뚫고 한 인영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콜록! 콜록! 이런 시부랄!"
흙먼지를 뒤집어쓴 펜리가 거친 기침을 토해냈다. 그녀의 몰골은 진흙을 뒤집어쓴 것처럼 엉망진창이었는데, 멀리서 보면 다크 엘프인지 모를 정도였다.
잔해들을 거칠게 헤치고 평평한 바닥에 선 그녀는 안고 있던 존재들을 내려놨다.
조심스러운 손길과 달리 펜리는 사내를 내려놓으며 사납게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1만 골드 새끼가 다크 엘프 잡네. 시발, 이제부터 검은 장미 의뢰금에 1만 골드짜리는 없어. 무조건 2만 골드부터 시작이다."
아서 클레이튼.
베네타에서 1만 골드 의뢰로 엮인 인연 때문에 녀석의 말을 귀담아들었다가 여기까지 왔다.
태어나서 이토록 자신을 개고생시킨 존재가 있었던가. 눈앞의 사내를 살리기 위해 정말이지 먼지 나도록 구른 것 같았다.
맹약만 아니라면 진즉 버리고 왔을 것이다. 아니 눈앞에서 죽도록 패버렸을지도.
하지만 사나운 눈빛과 달리 아서를 만지는 두 손은 아이를 다루듯 조심스러웠다. 그래서 더 억울하고 분했다.
징표자의 문양이 살아있는 한, 절대 죽어선 안 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뒈지면 반칙인 거 알지? 무조건 버텨라."
아서의 몸 상태는 솔직히 죽었다고 표현하는 게 정확할 만큼 처참했다.
도미닉에게 당한 아랫배 관통만 해도 무시무시한 치명상인데, 날아간 왼팔부터 시작해 왼쪽 옆구리와 양쪽 허벅지는 뼈가 드러날 정도로 파여 있었다.
전투에 쐐기를 박은 대폭발의 참극이었는데, 그 폭발의 원인은 그녀도 잘 알지 못했다.
다행이라면 망가진 육체가 빠르게 회복되고 있다는 점이었다.
출혈은 진즉 멈췄고, 살이 돋아나는 게 보인다고 해야 하나?
혀를 내두를 정도의 빠른 재생력이었다.
조금 전 자신이 녀석의 입에 욱여넣은 심장과 눈앞의 현상이 관련 있을 것이다.
[저, 절 살리고 싶지 않습니까?]
온몸이 피투성이였다.
끔찍한 몰골로 생명이 꺼져가던 녀석이 움켜잡고 있는 작은 소녀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 아이가 삼킨 심장이 필요합니다.]
펜리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생명의 징표.
그 징표가 살아있는 한, 펜리의 최우선 목적은 눈앞의 녀석을 살리는 것이었다.
펜리는 갈가리 찢긴 아레나의 육체에서 심장을 찾아 뜯어냈고, 아서에게 주저 없이 먹였다.
그 결과가 바로 눈앞의 상황이었다. 아서의 혈색이 서서히 회복되고 있었다.
펜리는 바위에 걸터앉은 채 곰방대를 물었다.
길게 빨았다가 후― 뱉어내니 긴장이 풀리는 게 느껴졌다.
하늘을 바라보니,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인생에서 가장 길고 고되고 엿 같은 하루란 생각이 들었다.
곰방대를 털며 아서 곁에 축 늘어진 아레나 후아튼의 시신을 응시했다.
온몸 곳곳이 찢기고, 심장마저 뜯긴 참혹한 몰골이다.
굳이 함께 데려온 이유는 저 작은 괴물이 죽어서도 녀석을 부둥켜안고 끝까지 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끝까지 자신을 개고생시키는 망할 녀석.
펜리는 빠르게 계산기를 두드렸다.
'손해지. 아주 손해야.'
큰 도움을 받았기에 생명의 징표를 녀석에게 줬다지만, 이 녀석의 경우는 선을 좀 많이 넘었다. 한 번이 아니라 최소 열 번은 살려준 것 같았다. 그때마다 자신은 눈물 쏙 빠지게 굴러다녔다.
이건 무조건 추가 요금을 받아야 한다. 그것도 아주아주 많이.
"저 물건이면 충분할 것 같은데, 선불 겸해서 지금 가져올까?"
펜리의 반짝이는 시선이 흑요석이 박힌 다크 로즈(dark rose)에 닿아있었다. 아서의 가슴팍에 달려 있었는데, 몰래 떼어내려다가 빛을 머금는 것을 보고 일단 놔뒀다.
축복 효과가 유지되는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펜리는 다크 로즈에서 시선을 떼며 입맛을 다셨다. 검은 장미로 세공된 탓에 유독 더 탐이 났다. 원래 자신의 것 같은데, 왠지 빼앗긴 기분이랄까?
"어설프게 입 닦으려고 하면 각오해야 할 거야."
그땐 골수까지 쭉쭉 짜서 값을 받아낼 생각이었다.
다만 우려가 되는 건, 녀석이 깨어난 후의 정신 상태였다.
과연 눈을 떴을 때 그는 아서일까, 아니면 또 다른 존재일까.
심장에게 먹힌 존재들을 봐왔기에 대비를 해야 했다.
자신의 손으로 징표자를 죽여야 하는 상황이 펼쳐질지도 몰랐으니까.
펜리가 생각하는 가장 최악의 상황이었다.
'생각해보니, 징표자가 날 죽이려고 하면 손을 쓸 수가 없잖아? 맹약을 손 좀 봐야겠어. 아니, 이참에 없애버릴까?'
시달린 것을 생각하니, 없애는 것도 한 방법일 것 같았다.
이런저런 상황에 고민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펜리 주변으로 호리호리한 그림자들이 벼락처럼 내려앉았다.
스물에 달하는 복면인들이 그녀를 둘러싼 상황. 펜리는 그들을 둘러보곤 한심한 듯 혀를 찼다.
검은 장미들이었다.
"내가 사라진 지가 언제인데 이제 얼굴을 들이미는 거야? 내 몰골 안 보여?"
"…죄송합니다."
"기껏 키워놨더니 돈값을 못 하네. 돈값을!"
장미들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있자, 펜리는 그들의 얼굴에 연기를 길게 뿜는 것으로 상황을 마무리했다.
갑작스럽게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니, 검은 장미들이라도 쉽게 자신을 찾기 어려웠을 것이다. 아니, 찾아온 것 자체를 칭찬해야 하나?
저 녀석을 업고 가기 귀찮았는데 잘됐다 싶었다. 그런데 순간 펜리의 표정에 긴장감이 서렸다. 수하들을 보자 중요한 것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돈은? 돈은 챙겼지? 그렇지?"
"침대 위에 뿌려놓으신 금화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전부 수거해서 푸른 장미로 옮기는 중입니다."
"침대 밑도 찾아봤고?"
"네."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것마저 잘못됐다면 저 녀석을 정말 잘근잘근 씹었을지도 모른다.
"저 녀석을 옮겨."
"함께 있는 시신은 어찌할까요?"
펜리는 곰방대를 물곤 잠시 작은 괴물을 바라봤다.
"태워버려."
주변을 찬찬히 둘러보니, 전장의 흔적이 무너진 흙더미에 모조리 파묻혀 버렸다.
이젠 누구도 이곳에서 어떤 처절한 전투가 벌어졌고, 어떤 기적이 벌어졌는지 모를 것이다.
산 자는 산 자대로 살아나가고, 죽은 자는 이곳에 묻히는 게 맞았다.
"알겠습니다."
잠시 후, 검은 연기가 타올랐다.
검은 장미들은 타오르는 작은 시신을 뒤로했고, 아서를 업은 채 빠르게 사라졌다.
아서가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며 펜리는 가죽 가방을 가볍게 둘러멨다.
녀석의 가방을 혹시나 해서 챙겼다. 이것도 물론 추가 요금이 붙을 것이다.
그녀는 마지막까지 남아 펼쳐진 잔해들을 둘러봤다.
홀로 서 있는 장소엔 공허한 바람만 불어닥쳤다. 타다 남은 소녀의 재 가루만 허공을 떠다닌다. 검게 그을린, 이젠 흔적조차 사라진 바닥을 응시하며 펜리는 작게 중얼거렸다.
아서 녀석이 기절하기 직전 작은 괴물에게 속삭였던 말.
"다음 생엔 인간 말고 꽃으로 태어나라."
도미닉 후아튼의 역작이라 불리던 백(百) 개의 심장, 아레나 후아튼의 최후였다.
* * *
오르도르 숲.
마녀들의 마지막 안식처라 불리며, 인간들의 발길을 거부하는 폐쇄적인 장소. 그렇다고 인간 냄새가 전혀 없는 삭막한 숲은 아니었다.
인간의 발길이 끊어졌기에 오히려 평화롭고 조용한 공간이었다.
그 고즈넉한 숲에 작은 소란이 일어났다.
"리, 릴리!"
"아악! 밀지 마!"
문이 부서지듯 펑퍼짐한 로브를 걸친 여인들이 우르르 그녀의 방으로 몰려들었다. 우당탕! 구르고 넘어지는 마녀들의 손에는 지팡이, 구슬, 장신구 등등 눈 부신 빛을 머금은 오브제(objet)들이 쥐어져 있었다.
신명의 빛.
상급 마녀 '도르타'들의 설레발에 릴리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몇 달 전의 광경이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역시나,
"우, 우리 중에 내용을 해석한 이가 한 명도 없어!"
"단 한 글자도!"
"릴리라면…!"
똑같은 상황이 펼쳐졌다.
어떻게 대사까지 똑같을 수가 있지? 릴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자신의 큰 거울을 바라봤다.
거울에서 은은하게 흘러나오는 빛.
[아서 클레이튼 ― 신명 사냥꾼(성(Divine))]
[제3의 정신 방벽]
[세이렌의 찬가(Siren's Hymn)]
[레토니칼스의 심장(R.H)]
거울 위로 막 변화를 끝낸 신명의 내용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도 아주 정확하게.
72화 오르도르의 숲
"시끄럽다고!"
전과 달라진 상황이 있다면 릴리의 반응이었다. 그녀는 전처럼 거울을 보고 놀라는 모습 대신 양손을 허리에 올리고 마녀들 앞에 섰다.
최대한 화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빵빵해진 양 볼은 귀여움만 불러왔다.
"...귀여워."
안 먹힌다....
되려 마녀들이 릴리의 표정에 헤죽거리며 놀리는 듯 손가락을 까닥거리자, 릴리가 빽― 소리를 질렀다.
"나, 나가!"
"아이고, 고막이야. 릴리, 너 저번에 분명…."
"모른다고! 몰라!"
"…자, 잠깐만!"
어디서 나타났는지 빗자루들이 마녀들을 포위하곤 투닥투닥 매타작을 시작했다.
처음에 버티던 마녀들은 이내 두둥실 날아오는 큰 솥단지를 보곤 질겁하며 도망갔다.
마녀들을 내쫓은 릴리는 손을 탁탁 털어내곤 큰 거울 앞에 다시 섰다. 그러곤 몰래 했던 것처럼 다시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하, 나도 이해가 안 된다고."
마녀들 앞에선 평상시처럼 행동했지만, 사실 그녀는 저번 때보다 더욱 놀란 상태였다.
신명을 보는 자들 사이에선 암묵적인 규칙이 존재했다.
신명의 목록은 변할 수 있어도, 한 번 점지된 '신명'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
그런데 '균열 속의 은둔자'가 눈앞에서 새로운 신명으로 탈피했다.
탈피가 맞을 것이다.
그토록 눈 부신 빛은 처음이었으니까.
오래도록 이어진 규칙이 깨진 것이다.
신명의 빛을 보는 자라면 지금쯤 난리가 났을 것이다.
'아케인이 똥줄 좀 타겠는데?'
아케인은 그 누구보다 신명의 규칙을 신봉하던 자였다. 신명을 계시로부터 나오는 신의 말씀이라 여기던 자였으니 혼란스러울 것이다.
신이 말을 번복한 것이었으니까.
"헹, 쌤통이다."
자신과 아케인은 신명을 정의하는 방향이 완전히 달랐다. 오늘 사건을 계기로 그녀는 자신의 정의가 더 옳았다는 것을 확신했다.
그래서일까.
그녀는 거울 속에 비친 신명의 주인에게 무척 큰 호기심을 느꼈다.
세상에 커다란 파문을 가져온 존재.
누굴까?
그리고 왜 마녀 중 유독 자신의 눈에만 저 신명의 내용이 보이는 것일까.
"아서 클레이튼, 인간일까? 아, 누군지 진짜 궁금하네."
그녀는 거울 위 점지가 사라질 때까지 멍하니 거울을 응시했다.
턱을 괴며 고민하는 표정인데, 거울에 비친 자신의 표정이 무척 낯설게 느껴졌다.
생각해보니 살면서 고민이란 것을 해본 적이 없었던 것 같았다.
큰 고민은 도르타들이, 자잘한 고민은 그 제자들이 모두 해주었으니 고민의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살아왔다.
그런 만큼 지금 고민은 릴리에게 아주 큰 결심이었다.
"그래, 한번 해보는 거야!"
궁금한 것을 절대 못 참는 성격이었다.
지금까지 궁금한 것들은 도르타들이 해결해줬지만, 이번만큼은 힘들어 보였다.
그럼, 이 궁금증을 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직접 만나보면 알겠지!"
고민은 짧았다.
결심이 선 순간 그녀는 화장대를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일단 귀여운 강아지가 박힌 토트백을 꺼내 그 안에 화장품과 향수를 쓸어 넣었다.
미용에 관심이 많은 자신을 위해 마녀들이 선물해 준 것인데, 바깥세상에서 구할 수 없는 것들이라 1순위로 챙겨야 했다.
빗과 머리띠, 장신구들을 종류별로 챙긴 그녀는 거울 앞에 앉아 꽃단장을 시작했다.
허리까지 내려온 찰랑거리는 흑발.
큰 빗으로 머리를 가지런히 빗던 그녀가 홀린 듯 거울 앞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투명하고 새하얗다.
그리고 작고 귀엽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볼 때마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이뻐!"
거울을 보고 자화자찬하는 건 그녀의 중요한 취미 중 하나였다.
이쁜 리본으로 단장을 마친 그녀는 거울 위에 손을 대었다. 펑―! 소리와 함께 큰 거울이 손거울 크기로 변했다.
토트백에 손거울을 챙긴 그녀는 오두막을 씩씩하게 걸어 나왔다.
마을 숲은 오늘도 평화로웠다.
릴리는 마을 숲 중심에 수백 년 먹은 거대한 나무로 향했다.
나무 밑동 그늘진 공간에 흔들의자를 놓고 낮잠을 즐기는 마녀가 있었는데, 릴리는 그 뒤로 몰래 다가가 의자를 장난스레 흔들었다.
잠을 방해받은 마녀가 귀찮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쭈글쭈글한 손등과 얼굴, 이 숲에서 나이가 가장 많다는 장로 마녀였다. 장로는 릴리가 왜 자신을 귀찮게 구는지 잘 알고 있었다.
"…요것아, 또 뭐가 궁금한 것이냐?"
"장로 할머니! 숲 바깥으로 나가면 가장 필요한 게 뭐야?"
"숲 바깥? 돈이 필요하겠지."
"돈? 얼마나 필요한데?"
"많을수록 좋지."
"난 돈이 없는데?"
"릴리는 필요 없어. 어딜 가든 도르타들이 붙을 테니까."
장로는 대충 대답하곤 다시 눈을 감았다. 기분 좋은 바람이 부는 날이었다. 이 시간을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그 옆에 선 릴리는 메모장을 꺼내 방금 한 대화를 꾹꾹 눌러 적었다.
돈이다. 돈이 필요했다.
그리고 돈은 많을수록 좋았다.
금붙이를 자랑하던 마녀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중에는 장로 할머니 것도 있었다. 아무래도 큼지막한 보따리를 챙겨야 할 것 같았다.
릴리가 사라지고 잠시 후, 잠이 든 장로가 흠칫 떨며 몸을 웅크렸다.
앞날을 예견한 것일까.
마치 악몽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꾸루― 꾸루―
오르도르 숲은 밤이 일찍 찾아왔다.
마녀들이 모두 잠든 야심한 밤, 숲과 어우러진 오두막 마을에는 풀벌레 우는 소리만 들렸다.
그 어둠 사이로 검은 그림자가 불쑥 튀어나왔다.
한 오두막에서 몰래 총총 걸어 나오는 가녀린 인영. 모자에 달린 긴 챙이 흔들리며 시야를 방해하자, 릴리는 챙을 위로 접어 올렸다.
"끙, 무겁네."
몸뚱이보다 두 배나 큰 봇짐이었다.
주술로 마녀들을 재우고 금붙이와 보석들을 닥치는 대로 긁어모았다. 만만한 마녀들 위주로 마을을 한 바퀴 쭉 돌았는데, 금붙이를 챙기면서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난 거지였어!'
돈 한 푼 없고 받기만 하는 이들을 거지라고 했던 걸 들었다.
릴리는 말없이 토트백 안을 들여다봤다. 금붙이는 없고, 전부 받은 것들뿐이다. 거지가 맞는 것 같았다.
하지만 괜찮았다.
이젠 마을에서 가장 돈이 많은 마녀가 됐으니까.
뭔가 큰 사람이 된 것 같아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마을을 벗어났다.
마을 숲 중심부는 여느 숲과 똑같았다.
하지만 중심부와 멀어질수록 숲 분위기가 달라졌다. 뿌연 안개가 시야를 가렸고, 나부끼는 바람은 을씨년스러웠다.
우우우우―
이상한 소리도 들려왔다.
큰 나무들로 빽빽이 찬 풍경에 들어섰는데, 나무들 사이로 희끄무레한 존재들이 배회하고 있었다.
숲의 망령으로 망령들은 오르도르 숲 바깥 지역을 배회하며 침입자들을 공격했다.
일명 유령의 숲(haunted forest).
오르도르 숲의 결계 중 하나로 마녀들은 1년에 한 번씩 큰 의식을 통해 유령의 숲을 유지하고 있었다.
끝 모를 망령들이 인간 냄새를 맡고 릴리에게 모여들었다.
오싹한 광경.
하지만 릴리가 하품을 하며 손을 휘휘 내젓자 망령들은 괴성을 흘리며 뿔뿔이 흩어졌다. 그녀를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숲 끝자락에 다다르자 확 트인 너른 들판이 펼쳐졌다. 다만, 들판 풍경이 살짝 일그러져 보였는데, 숲을 보호하는 대결계 때문이었다.
마녀들만 드나드는 결계 출구에 도착하자, 릴리를 반기는 작은 존재가 있었다.
작은 체구의 귀여운 강아지.
릴리의 토트백에 그려진 검은 털의 강아지와 똑 닮았다. 시바견을 닮은 쫑긋한 두 귀와 탐스러운 꼬리, 날렵해 보이는 몸을 지닌 강아지였다.
강아지는 출구 앞에 몸을 웅크린 채 잠을 자고 있었다.
릴리는 그 강아지 앞에 쭈그리고 앉아 풀때기로 코를 간질였다. 코를 움찔하던 강아지가 눈을 사납게 뜨며 으르렁거리자, 릴리는 강아지 얼굴에 손을 내밀며 활짝 웃었다.
"댕댕! 잘 있었어?!"
댕댕은 손 냄새를 킁킁 맡고는 그녀를 왕! 덮쳤다. 볼을 할짝거리며 꼬리를 휙휙 흔들어대는 것이, 릴리를 알아보고 격한 반가움을 표하는 것 같았다.
놀아달라는 댕댕의 애교에 릴리는 목적을 잊고 댕댕과 숲 주변을 뛰어놀며 시간을 보냈다. 이따금 댕댕을 안고 둥근 달을 향해 높이 던지기도 했는데, 댕댕의 정체를 알고 있는 마녀들이 봤다면 놀라 자빠졌을 것이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았더니, 밤이 지나갔다. 어둠이 서서히 걷히자, 릴리는 손뼉을 탁― 치곤 현실을 자각했다.
"장로 할멈이 깨기 전에 도망쳐야 해!"
릴리는 봇짐을 짊어지곤 댕댕의 머리를 토닥토닥 두드렸다.
"댕댕, 숲 잘 지키고 있어. 나갔다 올게!"
"멍!"
"그치? 댕댕이 봐도 짐이 너무 많지? 뭐? 도와준다고? 이렇게?"
릴리는 봇짐을 풀어 댕댕 앞에 내놓았다. 시선 교환으로 댕댕과 의사소통을 하는 모습이었다.
휘황찬란한 금붙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댕댕은 살짝 눈치를 보더니, 금붙이들을 흡― 빨아들였다.
댕댕의 덩치가 봇짐보다 한참 작았는데도, 봇짐에 든 모든 내용물을 삼키곤 릴리 앞에 앉아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같이 데려가 달라는 몸짓 같았다.
"아, 댕댕한테는 아공간이 있었지. 흠, 어쩐다. 널 데려가면 장로 할멈이 화낼 텐데."
하지만 릴리는 걸어 다니는 가방을 포기할 수 없었다. 같이 다니면 편할 것 같았다. 혼자 다니는 것보다 심심할 것 같지도 않고.
"멍!"
"그치? 큰 문제 없겠지? 결계 의식도 마무리됐잖아. 1년은 안전하겠지?"
"멍!"
"2년도 우습다고?"
강아지(?)에게 설득당한 그녀는 결국 댕댕에게 손을 내밀었다.
"우리 저 멀리 산책이나 하러 갈까?"
"멍!"
"뭐? 뼈다귀를 챙겨야 한다고? 묻어둔 데가 어딘데?"
사이좋게 룰루랄라 주변 땅을 파헤치며 돌아다닌 것도 잠시, 여인과 강아지는 동이 트는 오르도르의 숲을 뒤로한 채 숲에서 사라졌다.
* * *
"내, 내 금반지가!"
"우아앙! 보석함이 없어졌어."
"감히, 누가 내 금니를…!"
"스, 습격이다!"
날이 밝고 여느 때처럼 평화로워야 할 오르도르 숲이 발칵 뒤집혔다.
1년에 한 번 모일까 말까 한 대표 도르타들이 오두막에 모여들었다.
각 계파의 수장을 맡은 이들로, 그들은 마녀 사회에서 원로라 부를 수 있는 핵심 전력이었다.
마녀들이 이리 긴급하게 모인 이유는 하나였다.
릴리가 사라졌다!
장로, 메데이아는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을 느끼며 이마를 꾹꾹 눌렀다.
그녀의 오두막으로 도르타들이 모인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한 가지는 그녀가 오르도르 숲을 관장하는 장로 신분이었고, 다른 하나는 릴리를 본 마지막 마녀였기 때문이다.
"돈 되는 건 다 털어갔다고?"
"…네. 누굴까요? 릴리에게 그런 몹쓸 짓을 알려준 마녀가."
"그 마녀를 찾아서 중징계를 내려야 합니다!"
"당장 가서 잡아 오...!"
"지, 지금 그런 것을 따질 때인가?! 릴리가 사라졌어!"
장로 메데이아는 황급히 식탁을 쾅쾅거리며 본론으로 들어갔다.
릴리의 행동에 원인을 제공한 마녀가 바로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어째 꿈자리가 사납더라니.
메데이아는 또 말이 나오기 전에 릴리와 함께 사라진 숲의 파수꾼, 케로스를 언급했다.
얼핏 보면 귀여운 강아지로 보이지만, 파수꾼 케로스는 절대 일반적인 존재가 아닌 만큼 도르타들의 관심을 돌리기 충분했다.
금붙이를 가지고 간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릴리와 파수꾼, 이 두 존재가 바깥세상으로 나갔다는 게 중요했다. 겉모습과 달리 두 존재는 움직이는 폭탄 덩어리나 마찬가지였다.
도르타들이 릴리의 보호자 역할을 맡았던 이유였는데, 지금은 그 보호자조차 없는 상황이다.
심각성을 인지하자 마녀들은 머리를 부여잡고 신음을 삼켰다.
"이제 좀 악명이 잊히나 싶었는데…."
"큰일이군요. 마녀사냥이 또다시 재현되는 건 아닐는지…."
10년간 잠잠했던 마녀의 악명이 또다시 불거질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73화 마녀와 강아지
도르타들은 곧장 대책에 들어갔다.
"북쪽 숲으로 심부름꾼들을 더 보내야 합니다."
한 도르타의 의견에 장로 메데이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심부름꾼은 마녀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은 실력자를 뜻했다.
릴리와 케로스.
숲을 지키는 핵심 전력이 자리를 비웠으니, 북쪽의 감시 인원을 더 늘려야 했다.
오르도르 숲 북쪽은 대공 베르센 클라크의 영토와 닿아 있었다.
마녀사냥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마법사 집단.
숲 전력이 약화된 것을 알게 된다면 무슨 수작을 부릴 게 분명했다.
결계가 유지되는 1년 정도는 안전하겠지만, 릴리가 자리를 얼마나 비울지 모르니, 사전에 대비해야 했다.
"근데, 릴리는 왜 숲을 떠난 걸까요? 혼자 움직이는 걸 무척 싫어하는 아이인데."
"마녀의 진리에 이유가 필요할까."
마녀의 진리.
마녀의 행동에는 이유가 있다는 뜻이었다.
"엉뚱하고 고집스럽지만, 우리를 부모로 여기던 아이야. 말 잘 듣던 아이가 불현듯 떠난 데에는 이유가 있겠지."
"마녀들을 붙여야 할까요?"
"줄곧 숲을 지키던 파수꾼이 그녀를 따라갔어. 그녀를 중심으로 어떤 운명이 점지(點指)된 거야. 지켜만 보고 모른 척하는 게 맞아."
메데이아는 마녀 중 가장 오래 산 만큼 지혜롭고 경륜이 깊었다. 도르타들은 그녀의 의견을 따르기로 했다.
"그럼 실력 좋은 심부름꾼을 보내 멀리서 지켜보게만 하겠습니다."
마법사들이 움직일 수 있으니, 도르타들은 숲을 떠날 수 없었다. 이곳은 마녀들의 최후의 안식처. 절대 잃어선 안 됐다.
다시 금붙이 얘기가 나오려고 하자, 메데이아는 피곤하다는 핑계로 도르타들을 내쫓았다.
홀로 남은 자리, 그녀는 텅 비어버린 보석함을 내려놓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많을수록 좋다고 했더니, 아끼던 금가락지며 보석이며 돈이 될 만한 건 모조리 긁어갔다. 안 그래도 많은 주름이 하루 새 더 늘어난 것 같았다.
괘씸했지만, 한편으로 걱정이 되었다.
"큰일이 없어야 할 텐데…."
어린 시절 '마녀 대학살(witch slaughter)'을 경험한 릴리는 도르타의 손길 없이는 잠을 잘 자지 못했다.
해맑은 심성 안에 날카로운 비수를 품고 있는 아이.
보호자 없이 릴리가 바깥으로 나간 적은 처음이었다.
그녀의 눈부신 미모와 금붙이는 인간들의 탐욕을 부르기 충분했고, 그 탐욕이 많은 피를 부를까 우려되었다.
오르도르 숲의 마녀, 릴리 베이스.
숲에는 수많은 마녀가 존재하지만, 사람들은 오르도르 숲 하면 릴리 베이스를 떠올렸다.
역사상 가장 뛰어난 잠재력을 지닌 마녀. 한창 성장 중임에도 도르타와 비견되는 실력을 지녔다.
모든 도르타가 릴리의 부모를 자처하는 이유가 뭐겠는가.
전 마녀들의 계파를 잇는 전무후무한 대(大)마녀란 뜻이었다.
세상이 그녀를 두려워하는 이유였다.
텅 빈 보석함에 미련을 버린 메데이아는 창가로 걸어가 하늘을 올려다봤다.
번뜩이던 예지가 이번만큼은 안개에 낀 듯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굳이 앞날을 몰라도 어떻게 흘러갈지는 예측할 수 있었다.
"두 맹수 새끼들이 숲 밖으로 풀려났으니, 한바탕 시끄러워지겠구나."
특히, 파수꾼 케로스.
그 괴물이 본모습을 드러낸다면 그 지역이 큰 충격으로 출렁댈 것이다.
지하세계를 지키는 지옥의 파수견, 세 개의 머리를 지닌 케르베로스(Kerberos).
케로스는 그 케르베로스의 새끼였으니 말이다.
* * *
"댕댕, 맛있어?"
"멍!"
"흠…."
릴리는 뼈다귀를 물고 씹는 댕댕을 잠시 응시했다. 딱 봐도 너무 맛나게 먹는 모습이다.
꼬르륵―
배 속이 요동치자 릴리는 일단 뼈다귀를 잡고 댕댕처럼 물고 씹었다. 그러곤 울상을 지었다.
"…맛없어."
"멍!"
"귀한 건 알겠는데, 맛없다고."
숲속으로 뼈다귀를 휙 던지자, 댕댕은 배신당한 표정으로 릴리를 올려다보곤 후다닥 숲속으로 사라졌다.
그녀는 쭈그리고 앉아 땅에 좋아하는 음식들을 그렸다.
숲에서 나온 지 반나절밖에 안 됐는데 벌써 큰 위기가 찾아왔다.
배고픔을 생각지 못한 것이다.
때가 되면 마녀들이 식사를 가져왔으니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장로 할머니가 마녀가 아니라 공주처럼 산다고 타박을 하곤 했는데, 정말 그렇게 살았나 싶었다.
"힝, 배고파."
홀로 나와보니 자신이 얼마나 편하게 살았는지 알 것 같았다.
다시 숲으로 돌아갈까.
잠시 갈등하고 있는데, 눈앞에 툭― 하고 무언가가 떨어졌다. 핏물 묻은 고깃덩어리였다. 그 짧은 순간 댕댕이가 사냥을 해온 모양이었다.
혀를 헥헥거리며 칭찬을 바라는 모습인데, 그녀는 마냥 좋아할 순 없었다.
"댕댕아, 날것을 먹으면 배탈 난다고."
"멍!"
"넌 괜찮아도, 난 아니야."
그것도 잠시, 댕댕이 입을 벌리자 입에서 검은 불이 훅― 뿜어져 나왔다. 고기와 함께 바닥이 새까맣게 타며 연기가 타올랐다.
"...."
릴리가 익은 고기를 살짝 집어 들었는데, 겉은 바싹, 속은 촉촉이 아닌 겉은 바짝 타고 속은 핏물이 배어 나오자 다시 울상을 지었다.
장로가 거짓말을 했다. 돈이 많으면 뭐든 할 수 있다고 했는데, 이곳에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일단 인적이 없어서 돈을 쓸 곳이 없었다.
토바른 지역과 맞닿은 경계 같은데, 나무 꼭대기에서 주변을 둘러봐도 성곽은커녕 그림자도 안 보였다.
주술을 쓸까 고민했지만, 주술을 감지하고 도르타들이 찾아올 수 있는 거리라 꾹 참고 있었다.
엘레토르 성곽까지 걸어서 얼마나 더 걸릴지 모르는 상황.
턱을 괸 채 엉망으로 구워진 고기를 잠시 바라보던 그녀는 결심한 듯 탄 고기를 집어 들었다.
배고픈 건 익숙지 않아서 힘들었다.
한숨을 내쉬며 검게 탄 껍질을 벗기려는데, 댕댕이 귀를 쫑긋하더니 고개를 휙 돌렸다.
"댕댕, 뭐야?"
"멍."
"사람?"
잠시 후, 댕댕의 시선이 닿은 곳에서 중저음의 사내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자? 개도 한 마리 있고."
"내가 뭐라고 했어. 연기가 피어오른다고 했잖아."
"월척이었으면 좋겠는데."
사냥꾼 복장을 한 사내들이 우거진 넝쿨 사이로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머릿수가 열 명으로 상당했다.
그들의 무장은 활을 포함해 다양한 장비들로 구색을 갖췄는데, 기세를 보니 상당한 실력자들로 보였다.
릴리는 악취에 인상을 찡그리곤 코를 틀어막았다. 피 냄새가 지독한 인간들이었다.
다짜고짜 릴리에게 성큼 다가온 사내들은 그녀의 챙을 거칠게 들췄다.
"...!"
흘러내리는 흑발, 그 사이로 드러난 백옥 같은 미모에 사냥꾼들은 멈칫했다. 잠시간의 침묵, 곧 그들의 얼굴 위로 흥분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이거 신이 도우신 날인가?"
"월척이 아니라 고래가 잡혔어. 크크크."
노예 사냥꾼으로 활동하면서, 아니 태어나서 처음 보는 엄청난 미녀였다. 그녀의 얼굴을 살펴보며 남은 사냥꾼들이 한마디씩 했다.
"...잘 팔면 인생 끝나겠는데?"
"노예 상인에게 팔면 골드로 천 단위, 아니 만 단위는 받겠어."
"근데 복장이… 마녀 아니야?"
"마녀 복장을 한 년이겠지. 숲으로 도망치려면 마녀 행세라도 해야 생존 확률이 올라가니까."
"용케 마녀 복장을 구했네."
"도망치는 귀족이 뭘 못 구하겠어."
노예 사냥꾼들은 현재 오르도르 숲으로 도망치려는 귀족들을 추적하고 있었다.
전부 블라이어의 귀족들로, 카멜 성주를 적대하는 핵심 귀족들이었다. 전(前)대 기사 단장이었던 록터 펠리스의 세력을 숙청 중이었는데, 구석까지 내몰린 귀족들이 도망칠 곳이 마땅치 않자, 엘레토르 성곽을 넘은 것이었다.
카멜은 군대를 보내는 대신, 노예 사냥꾼들을 고용해 척살을 지시했다.
"딱 봐도 귀족이지? 블라이어 출신 영애인가? 이 정도 미모면 소문이 났을 텐데?"
"뭔 상관이야. 척살령이 떨어졌는데, 목만 가져가면 되는 거 아니야?"
"그 카멜이란 성주도 멍청한 놈이네. 이 정도 미인이면 취할 것이지, 왜 모조리 죽이는 거야?"
"그 덕에 우리에게 기회가 왔잖아."
사냥꾼들은 눈빛을 주고받곤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릴리를 본 사냥꾼들의 눈동자엔 끈적한 욕정이 담겨 있었다.
사내라면 참을 수 없는 매혹적인 아름다움.
이미 잡은 먹잇감을 어떻게 요리하든 그건 사냥꾼 마음이었다.
"아, 첫 만남부터 더럽네."
릴리는 저 시선들에 익숙했다.
10년 전 마녀 대학살 당시에도 수없이 느껴본 역겨움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표정이 서늘하게 굳기 시작했다.
잠시 후, 사냥꾼들이 그녀를 에워싸자, 릴리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혹시 먹을 거 있나요?"
"굶주렸나 보지? 먹을 게 필요해?"
"네. 많이 필요해요."
"먹을 거야 원 없이 줄 수 있지. 우리가 시키는 대로만 한다면?"
"내가 뭘 하면 되죠?"
"그 펑퍼짐한 로브부터 벗어. 몸매를 볼 수가 없잖아?"
사냥꾼들이 조롱을 날리며 낄낄 웃자, 릴리는 모자를 꾹 눌러쓰곤 나직이 입을 열었다. 더는 말을 섞는 게 무의미했다.
"케로스."
"멍!"
"태우진 말아. 음식이 타면 곤란하니까."
그녀의 말이 끝나자, 작은 강아지가 폴짝 뛰더니 사냥꾼 무리를 향해 달려왔다.
사냥꾼들은 달려오는 강아지를 보며 배를 잡고 웃었다. 일부는 활을 꺼내 시위를 당겼고, 사냥꾼의 리더는 히죽 웃으며 바지춤을 풀었다.
"미친년에겐 약이 최고지."
바지를 훌렁 벗어 던지며 여인에게 다가갔다. 자신들밖에 없으니 알몸이든 뭐든 상관없다는 표정이었다.
낄낄거리며 남은 속옷마저 벗으려고 하는데, 주변 분위기가 이상해졌다.
웃음이 갑자기 뚝 멈췄다.
이상함에 동료들을 돌아보니, 사냥꾼들이 새파랗게 질린 채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뭐야?"
시선을 다시 돌리자, 거대한 그림자가 그를 삽시간에 집어삼켰다. 그의 시선이 서서히 위를 향했다. 동시에 경악으로 물드는 눈동자.
"무, 뭐!?"
검은 털 괴물?
거기까지 생각이 떠올랐을 때,
콰직―!
거대한 발이 그를 짓밟으며 지나갔다. 그에게 남은 건 짓이겨진 핏덩어리뿐이었다. 학살이 시작됐다.
"…괴물! 아아악!!!"
"사, 살려줘!"
인적 없는 숲에 비명이 메아리처럼 터져 나왔다.
릴리는 비명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첫 번째로 죽은 사냥꾼의 시신은 무시하고 그 주변에 떨어진 배낭만 챙겼다.
끔찍한 시신의 모습에도, 눈앞에서 죽어 나가는 사냥꾼의 몰골에도 그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약하면 죽는다.
죽으면 빼앗긴다.
빼앗기지 않으려면 강해져야 한다.
강해지려면 죽이고 빼앗아야 한다.
릴리가 마녀 대학살 때 얻은 배움이고, 마녀가 이 세계에서 살아남은 법이었다.
착한 마녀, 멍청한 마녀는 용서할 수 있지만, 약한 마녀는 용서할 수 없었다. 10년 전에 그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강해지려면 죽음과 친해져야 했다.
지금처럼.
비명이 뚝 멈추자 물건을 챙기던 릴리가 허리를 꼿꼿이 폈다.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시신들이 주변에 널브러져 있었다. 거대한 족적과 함께 밟혀 죽은 흔적.
생존자는 없었다.
"댕댕."
릴리의 부름에 저 멀리 숲에서 작은 강아지가 튀어나왔다. 댕댕이 다리 사이로 다가와 얼굴을 비비자, 릴리는 그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얼른 튀자, 할머니가 우리를 잡으러 올지도 몰라."
"멍!"
"그치? 할머니는 너도 무섭지? 자, 입 벌려."
릴리는 댕댕의 입 속으로 주운 배낭들을 욱여넣고는 사냥꾼들이 나타난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입엔 달콤한 쿠키가 물려 있었는데, 사냥꾼의 배낭에서 막 꺼낸 것으로 보였다. 단것이 들어가니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
"멍!"
"안 돼. 넌 뼈다귀가 있잖아. 쿠키는 내 거라고. …뭐? 삐지겠다고? 음, 그럼 도시에 도착하면 먹고 싶은 거 사줄게. 어디로 가냐고?"
댕댕을 응시하며 혼잣말을 중얼거린 것도 잠시, 릴리는 저 너머 지평선 위로 흐릿하게 비춘 드넓은 성곽을 응시했다.
엘레토르 성곽이다.
그녀는 성곽을 가리키며 외쳤다.
"블라이어! 블라이어로 갈 거야!"
블라이어를 떠올린 이유는 하나였다.
그녀가 아는 도시는 조금 전 사냥꾼들에게 들은 블라이어가 전부였으니까.
그렇게 한 마녀와 강아지가 토바른 지역에 발을 들였다.
74화 꿈이었다
'…뭐야.'
난 눈앞의 상황을 멍하니 응시했다.
눈을 뜨니 상황 파악이 안 된다고 해야 하나? 이거 무슨 상황인 거지?
'설마... 꿈?'
맞다. 꿈이었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자, 현실이 아님을 바로 눈치챘다.
어둑한 막사 안, 학살자 카멜이 코앞에서도 날 인지하지 못했고,
[도네콜린트, 적군에게 공포가 뭔지 보여줘라.]
[비명이 전장을 뒤덮을 겁니다. 기대하셔도 좋을 겁니다.]
내 손에 죽은 흑주술사 도네콜린트가 카멜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있었기 때문이다. 손등에 새겨진 도네콜린트의 고대 문양, 세이렌의 비명을 보자 더욱 확신이 들었다.
저 문양의 주인은 나다.
이건 꿈이 맞았다.
그런데 꿈이 너무 생생했다.
설마 죽은 건가?
가능성이 있었다. 아레나를 고기 방패로 삼아 붐(Boom)을 터트렸는데, 그녀의 육신이 작다 보니, 폭발에 휩쓸리면서 팔다리가 완전히 아작 났다.
펜리가 내게 레토니칼스의 심장을 먹였다면 살 확률이 있겠지만, 이곳에선 확인이 불가능했다.
일단 내 육신이 안 보였거든.
학살자에게 예를 표한 도네콜린트가 등을 돌리곤 나를 그대로 통과했는데, 마치 존재감 없는 유령이 된 것 같았다.
난 홀린 듯 도네콜린트의 뒤를 따라 바깥으로 나갔다.
둥― 둥― 둥―
새벽안개가 자욱한 병영에 묵직한 북소리가 울려 퍼졌다.
눈부신 보름달 아래임에도 짙은 안개 덕에 병영 분위기는 을씨년스러웠다.
근데, 병사들은 어디 간 거지?
병영치곤 너무 조용했다.
그때, 안개 너머로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끄아아아악!"
"모조리 죽여라!"
동시에 긴박한 외침과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알고 보니, 전쟁터 한복판이었다.
도네콜린트는 십여 명의 복면인을 대동한 채 비명이 터진 안개 속으로 빠르게 사라졌다.
그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
[비명이 전장을 뒤덮을 겁니다.]
막사에서 도네콜린트가 내뱉었던 말이 떠올랐다. 그 대사를 곱씹으며, 난 안개를 허겁지겁 헤치고 도네콜린트를 쫓았다.
'지금 이 상황....'
눈앞의 상황, 대사, 분위기에서 소설 '악당들이 강해지면 벌어지는 일'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학살자에게 영입된 도네콜린트의 첫 전투 장면.
한때 소설에 푹 빠져 이따금 상상해보던 주요 장면이기도 했다.
메인이벤트, 백(百) 개의 심장 하이라이트 내용이자, 카멜이 날개를 펴고 비상을 시작했던 사건.
'베네타의 몰락.'
걷던 발걸음이 점점 빨라지더니, 이내 난 전력 질주를 하고 있었다.
마음이 급해졌다.
거친 뜀박질 사이로 안개가 서서히 걷혔다. 뿌연 시야가 사라졌고, 선명해진 눈앞에 처절하고 잔혹한 전쟁터가 펼쳐졌다.
제자리에 선 채 타오르는 붉은 화마(火魔)를 멍하니 올려다봤다.
드워프들의 오랜 손길로 쌓아 올린 아름다운 성벽. 이종들의 도시, 베네타.
성벽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불을 끄기 위해 다양한 이종들이 성벽 위를 미친 듯이 뛰어다녔다. 하지만 이내 쏟아지는 불비에 비명과 함께 불타오르며 사라졌다.
주술사들의 둥지.
그들이 펼친 지옥불에 베네타가 무너지고 있었다.
뜨겁다.
그리고 역겹다.
…이게 꿈이라고?
꿈이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생생했다.
고개를 돌리니, 말을 탄 카멜이 친위대를 이끌고 나타났다.
메마른 표정으로 전장을 천천히 둘러보던 학살자 카멜.
카멜의 등장에 도네콜린트가 뒤엉킨 전장 안에서 오른손을 천천히 추켜들었다.
번쩍―!
고대 문양이 섬뜩한 빛을 토해냈다.
불결하고 끈적한 빛무리.
동시에 두 귀로 흘러오는 주술적 비명이 전장을 집어삼켰다.
끼아아아아아아악―
세이렌의 비명이 전장을 강타했다.
성문을 지키던 용병들과 이종 군대가 환각에 걸려 아군에게 창칼을 겨누기 시작했다. 성벽 방어선이 삽시간에 무너졌고, 블라이어 기사단을 막아내며 악착같이 버티던 드워프 기사단이 퇴로가 막히면서 포위당해 섬멸당했다.
베네타의 기사 단장, 나토네의 머리가 리옹의 검에 떨어졌다.
[주, 주술사를 죽여!]
베네타의 남은 기사들이 도네콜린트를 죽이기 위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들도 곧 도네콜린트 주변에 은신해 있던 암살자들의 손에 죽임을 당했다.
도네콜린트 곁을 호위하는 암살자 부대. 그 앞에선 외팔이 사내가 지휘하는 장면이 시야에 잡혔다.
칼 바스타인.
스토리상 흘러갔던 악당 조력자 칼의 모습에 난 신음을 삼켰다.
내가 만들어낸 새로운 스토리가 아닌, 본래 소설의 내용대로 흘러가는 장면.
베네타의 성문은 결국 무너졌고, 블라이어의 전 병력이 성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난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더는 볼 필요도 없었다.
안쪽 병력은 이미 몰살 직전일 테니까.
베네타의 성안은 이미 폐허나 다름없었다. 모든 건물이 무너져 내렸고, 성주인 도르네프도 상처투성이에 기력을 다했다.
혹한의 망치는 부러졌고, 갑주는 찢겨 나간 채 주저앉아 있었다.
그를 돕던 조직, 검은 장미도 마찬가지.
검은 장미들의 시체가 성 한가운데 잔뜩 널브러져 있었다. 그 중심에 멍하니 서 있는 펜리.
블라이어가 도착하기 전에 대부분의 전력이 몰살당한 흔적이었다.
그 엄청난 피해를 안고 얻은 건, 단 한 구의 시체였다.
절뚝거리며 선 펜리는 한 손에 든 아레나 후아튼의 머리를 움켜잡곤 이를 바드득 갈았다.
백(百) 개의 심장.
이 끔찍한 괴물이 베네타의 대부분을 집어삼키는 동안, 블라이어가 기습적으로 쳐들어왔다.
아레나 후아튼을 죽이는 데 성공했지만, 모든 것을 잃었다.
막을 수 없다.
반파된 갑주를 벗어 던진 도르네프는 암담한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봤다.
죽은 샤르바딘의 복수는 성공했지만, 그 끝은 파멸이었다.
[베네타의 군주를 내 앞에 꿇려라.]
담담히 명하는 카멜의 지시에 리옹이, 렌구아가, 칼이, 각자 세력을 이끌고 돌격해왔다.
"도망쳐! 멍청이들아! 못 이긴다고!"
난 도르네프와 펜리 곁에서 도망치라고 외쳤다. 하지만 이건 내 바람일 뿐이다. 상황은 스토리대로 흘러갈 뿐이었다.
[도망쳐라. 암고양이. 넌 혼자가 아니잖아?]
[닥쳐, 이 난쟁이 새끼야. 이젠 거시기마저 쪼그라든 거냐?]
[베네타의 역사가 곧 파묻혀 사라질 거다. 그때 네가 잘하는 걸 하면 돼. 도망치는 것.]
주인 잃은 할버드를 움켜쥔 도르네프가 남은 이들을 데리고 적들을 막아섰다.
콰아아아아앙―!!!!
큰 폭발이 터지며 도르네프 주변이 불바다가 되었다.
주술사들의 둥지.
렌구아가 중심이 되어 발악하는 상대를 향해 엄청난 화력을 퍼부었다. 순식간에 도르네프의 잔여 병력이 갈려 나갔다.
검게 탄 시신들이 즐비한 가운데, 리옹과 칼이 도르네프를 압박하며 그 육신을 난자하기 시작했다.
쿠쿠쿵―
큰 지진이 일어나고, 베네타의 성이 땅속으로 푹 꺼지며 내려앉기 시작했다.
도르네프는 손수 베네타의 모든 역사를 무너트렸다. 이제 베네타의 영광을 기억하는 건 살아남은 자들뿐이다.
[펜리 체이서!]
도르네프의 울부짖는 외침에 펜리의 신형이 그림자 아래로 빠르게 스며들었다.
피가 날 정도로 움켜쥔 두 손, 잔뜩 일그러진 얼굴. 그리고 슬픈 눈동자.
고개를 푹 숙이며 사라진 펜리의 도주를 끝으로 베네타의 저항이 마무리되었다.
[수고했다.]
첫 전투를 성공리에 끝내고 데뷔한 도네콜린트는 학살자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잠시 후, 처참한 몰골로 포박되어 끌려온 도르네프가 카멜 앞에 꿇려졌다.
[비, 비겁한...!]
스걱―
한 번의 손짓.
리옹의 검에 목이 날아가는 도르네프가 보였다.
베네타의 몰락.
1년에 걸쳐 벌어진 메인이벤트, '백(百) 개의 심장' 마지막 장면이었다.
난 처형 광경 앞에 서서 가슴을 움켜잡았다.
이것도 작은 인연이라고.
시리도록 아프다.
도르네프의 죽음, 베네타의 사람들이 몰살당한 것에 슬픔을 느끼는 것일까.
끓어오르는 분노에 카멜을 사납게 노려봤다.
그런데,
"...!"
카멜이 말 위에서 날 노려보고 있었다. 검을 꺼내 든 그가 날 겨누며 사납게 웃었다.
이를 드러낸 명백한 살의(殺意).
[다음은 너다. 아서 클레이튼.]
* * *
"커헉!"
막혔던 숨을 터트리며 벌떡 일어났다.
거친 숨을 내쉬며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뚝뚝 흘러내리는 식은땀이 조금 전 악몽을 다시금 상기시켜줬다.
다음은 나라고?
스토리대로 잘 흘러가다가 마지막에 왜 지랄인 건데.
"...."
문득 든 생각에 조심스레 왼팔을 들어 올렸다.
왼팔이 붙어 있다.
그러자 더 욕심이 생겼다.
제발... 다음은 나라고 했다고.
잠시 두 눈을 감았다가 눈을 살며시 뜨며 오른손을 살폈다.
"아...."
손등에 선명히 새겨진 고대 문양을 난 멍하니 바라봤다.
잠시 후 씁쓸히 웃으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괜한 기대였나.
혹여나 그동안의 일이 진짜 꿈이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내가 태어난 곳, 내가 살았던 곳으로 돌아간 것 아닐까 하고 말이다.
그러나 여전히 난 새로운 세상에서 여행 중이었고, 날 데려온 존재는 아직 날 돌려보낼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그나저나...."
여긴 어딜까?
방 내부가 무척 화려했다. 내가 누워 있는 침대만 해도 킹사이즈 세 배 크기에, 이불 감촉 또한 남달랐다.
돈지랄이 상당했을 거 같은데.
일단 침대를 나와 몸을 살폈다. 기절하기 직전 내 몸 상태를 떠올려봤다. 왼팔은 당연히 날아가고, 다른 부위도 뼈가 드러날 정도로 찢겨 나갔다.
'좀비 그 자체였는데.'
내가 살아날 방법은 그 당시 한 가지뿐이었다.
레토니칼스의 심장을 얻는 것.
"펜리가 성공한 건가?"
성공했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 내가 멀쩡히 이곳에 서 있는 것이겠지.
생명 보험 하나는 확실히 들었다고 생각했다.
심장에 손을 얹어봤는데, 특별한 변화는 느껴지지 않았다. 별다른 것이 없는 느낌인데, 이건 펜리를 만나보고 물어봐야 할 것 같았다.
"아니, 좀 많이 변한 것 같기도 하고."
일어나니 나신이었다.
눈앞에 비친 거대한 거울이 나를 반겼다. 알몸 자태에 난 어색하게 손을 흔들어봤다.
거울 속의 내가 손을 흔든다.
확실히 내가 맞단 말이지.
옅은 브론즈 머리카락.
눈매는 매섭게 휘어졌지만, 백금색의 밝은 눈동자가 매서운 느낌을 부드럽게 희석해줬다.
심장의 영향인지 피부가 아이 피부처럼 투명했는데, 탄탄한 몸과는 잘 안 어울렸다.
꼭 자이언트 베이비 같잖아?
그 덕에 여자 여럿 울릴 것 같은 외모가 됐다.
변화한 외모가 신기해서 거울 앞에서 이런저런 포즈를 잡아봤다.
이렇게 말끔한 모습으로 내 외모를 살펴본 적이 있었던가?
살아남느라, 그딴 거 살펴볼 여유가 없었다.
쨍그랑―
잠시 후, 무언가 깨지는 소리에 뒤를 돌아봤다. 열린 문 사이로 수수한 복장을 한 엘프가 무척 당황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음식을 가져오다가 내 알몸 쇼를 보곤 쟁반을 떨어트린 모양인데, 어째 익숙한 얼굴이었다.
푸른 눈동자에 금발의 미녀 엘프.
난 이불로 몸을 가리며 멋쩍게 그녀를 반겼다.
"엘프 넬라. 오랜만이네요."
"…이제야 의식이 돌아왔군요."
"제가 오래 잠들어 있었습니까?"
"오래됐죠."
한숨을 내쉬며 넬라는 종업원을 불러 주변을 치우게 하곤 음식을 새로 내오게 했다.
그녀는 곧장 창가로 걸어가 커튼을 걷어냈다.
쨍쨍한 햇살이 통창을 통해 스며들고, 바깥 풍경이 내 시야에 들어왔다.
조금 전 꿈에서 봤던 불타는 성을 보고 와서일까.
저 멀리, 도르네프가 머무는 영주성이 눈에 담기자, 감흥이 새로웠다.
[베네타의 역사가 곧 파묻혀 사라질 거다.]
눈앞의 베네타는 여전히 건재했다.
그것도 아주 찬란하게.
75화 시발, 탄 맞았다.
"3개월?"
"네. 3개월이요."
허겁지겁 빵을 집어 먹던 난 멈칫하곤 넬라를 바라봤다.
무려 3개월 동안 의식이 없었다고?
접시 위에 빵을 슬며시 내려놓고 이불을 들어 몸을 살폈다.
헛기침 소리가 들렸지만, 지금 그런 거 신경 쓸 때인가?
적재적소에 자리 잡은 단단한 근육, 영양 크림을 듬뿍 바른 것 같은 탄력 있는 피부까지.
이게 3개월 굶은 몸이라고?
"정말 아무것도 안 먹었습니까? 몸이 이런데?"
"네."
"입으로 음식을 넣어줬다든가…."
"그런 일은 결단코 없었습니다."
넬라가 미간을 찡그리곤 단호히 고개를 젓자, 난 어색한 미소를 짓고는 빵을 입에 물었다.
아니면 아닌 거지. 왜 그렇게 질색하는 건데?
'오랫동안 굶어도 멀쩡한 몸이라….'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지만, 이곳 자체가 원래 상식 밖의 세상이니 깊게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원인만 파악하면 되는데, 아무래도 심장의 영향이 아닐까 싶었다.
물론, 한 가지를 꼭 확인해야 했다.
바로 심장의 유무.
내가 그 소유자인지 말이다.
"펜리 님을 만나고 싶은데요."
"마스터는 지금 베네타에 없어요."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사건이 있긴 한데... 아직은 말씀드릴 수 없군요."
"그럼, 그녀가 떠나기 전에 내게 남긴 말 같은 거 없습니까? 분명 있을 텐데."
"잠시만요. 쪽지가 있어요."
넬라는 품에서 작은 쪽지를 꺼냈다. 쪽지를 건네받으며 난 넬라의 복장을 유심히 살폈다.
첫 만남 때는 노출이 심한 원피스를 입었는데, 지금은 수수하고 편한 차림이었다. 마치 잠옷 같달까.
부스스한 금발을 큰 리본으로 마무리했는데, 붉은 리본을 보자 문득 의문이 들었다.
"빨간 리본이네요."
"그런데요?"
"혹시 릴리 베이스를 좋아해요?"
"...."
릴리 베이스.
오르도르 숲의 마녀가 언급되자, 넬라는 잠시 멈칫했을 뿐, 침묵한 채 날 가만히 응시했다.
싫다고 하지 않은 걸 보니 마녀 릴리에게 호감이 있는 것 같았다.
"그 리본 유명하잖아요."
인간과 달리 이종족은 릴리 베이스를 동경 혹은 좋아해서 릴리의 상징인 붉은 리본을 자주 달고 다닌다고 알고 있었다.
"근데, 푸른 장미 콘셉트에 변화가 생긴 겁니까? 섹시에서 친근한 여동생 콘셉트로 바뀐 거 같은데."
"이건 영업 전 복장이에요. 오해 마시길."
이젠 눈초리까지 싸늘해졌다.
살짝 경계하는 눈초리인데 정확한 이유를 모르겠다.
입맛을 다시며 펜리가 남기고 간 쪽지를 읽어봤다.
[네 말대로 먹였다.]
[목 깨끗이 씻고 기다려라.]
"…망할."
심장의 유무는 바로 알 수 있었다.
펜리가 내 부탁대로 레토니칼스의 심장을 먹인 것 같았다. 그럼 장기간 굶어도 멀쩡했던 이유가 설명된다.
레토니칼스의 심장은 불사자의 심장으로 그 소유자는 생존에 관해서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했다.
굶주림에 대한 저항도 그 능력 중 하나일 것이다. 다른 능력은 차차 알아가면 될 일이고, 문제는 쪽지에 적힌 다음 문구였다.
목 깨끗이 씻고 기다리라니.
성격 더러운 여자의 말이라 더 살벌했다.
"그녀가 혹시 제게 많이 화났습니까?"
"글쎄요. 가끔 아서 님이 코를 골면 무기를 꺼내시곤 했습니다."
"...."
번뜩이는 크로우가 떠오르자 마른침이 넘어갔다.
이거 눈치 봐서 튀어야겠는데?
펜리의 살기가 여기까지 느껴졌다.
하지만 그런 걱정도 곧 잊혔다.
간소한 애피타이저가 끝나고 종업원들이 음식이 든 접시를 한가득 가져오자, 뭐에 홀린 듯 손이 움직였다.
조금 전까진 별다른 느낌이 없었는데, 고기가 배 속으로 들어가자, 두 눈동자에 핏기가 서리며 짙은 고양감이 올라왔다.
두근―
심장이 뛴다.
머리가 더 많은 음식을 원하고, 갈구했다. 식욕이 터진 느낌이랄까.
이성의 끈마저 끊어진 기분이었다.
"...응?"
정신을 차렸을 땐 넬라는 자리에 없고, 미모의 엘프 종업원 셋이 곁에서 바삐 시중을 들고 있었다.
"무, 뭐야?"
식탁 옆에 산더미처럼 쌓인 빈 접시를 보며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양손에 쥐어진 큼지막한 고깃덩어리.
설마 내가 다 먹은 건 아니겠지?
기억의 필름이 살짝 끊어졌다가 돌아온 것 같았다. 기억이 전혀 나질 않았다.
정말 이성의 끈을 놓고 먹었다.
이게 정상일까?
그럴 리가. 그럼 원인은 하나였다.
일단 고깃덩어리를 마저 다 먹고 심장을 만지작거렸다.
'골칫덩어리가 하나 더 늘어난 것 같은데.'
레토니칼스의 심장을 얻으면서 몸에 큰 변화가 생긴 것 같았다.
인간의 몸이되, 인간과 거리가 있는 육체. 그리고 정신까지.
얻는 게 뭔지, 대가가 뭔지, 잃은 게 뭔지 우선적으로 파악이 필요해 보였다.
"다 드셨습니까?"
"아, 네."
"그럼 여기...."
"이게 뭡니까?"
"계산서입니다."
이쁜 엘프 종업원이 생글 웃으며 종이를 내밀었는데, 종이엔 금액이 적혀 있었다.
258골드.
음식값이었다.
두 눈을 끔뻑이곤 종업원을 올려다보니 더 밝게 미소로 답하는 그녀가 보였다.
"…전부 제가 시킨 겁니까?"
"물어봐도 대답이 없으셔서 넬라 님이 대신 주문하고 나가셨습니다."
'…이년이!'
입꼬리를 올리며 떠나는 넬라가 떠오르는 건 왜일까.
잠시 깜빡하고 있었다.
이곳은 푸른 장미, 방심하면 영혼까지 털리는 악마의 소굴이란 것을 말이다.
"오, 외상 됩니까?"
"그건 넬라 님께 여쭤봐야 합니다. 그럼 나머지 추가 요금도 외상으로 처리할까요?"
"...나머지 추가 요금?"
"VIP룸에서 숙박하신 요금이 밀려있습니다. 모두 3달 치입니다."
"...."
"소지품 보관료도 있는데, 찾으시려면 추가로 요금을 더 지불하셔야 합니다."
'타짜2' 하이라이트 영상을 보면 탄 맞는 주인공이 나온다.
그때 주인공이 상대 타짜에게 고스톱으로 탄 맞아서 신장이 털렸었지?
탄 맞아서 골로 갔다고.
그래, 맞다.
시발, 탄 맞았다.
* * *
"시부랄 놈들, 도둑놈들, 사채업자도 울고 갈 놈들!"
11800골드.
쌓인 계산서를 내밀며 푸른 장미가 내게 청구한 금액이었다. 무슨 VIP숙소가 하룻밤에 100골드나 하냐고.
세 달 치 숙박료를 계산하니 무려 9천 골드가 나왔다.
더 억울한 건 VIP숙소에서 머문 기억이 반나절도 안 된다는 것이었다. 난 오늘 아침에서야 VIP숙소에 머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어쩐지 방 안에 돈지랄이 남다르더라니.
이 정도면 펜리 년에게 사기당한 거나 다름없었다.
강력히 따지려고 넬라를 찾아갔는데 불편한 손님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넬라의 접견실에 함께 있던 검은 장미들.
펜리에게 무슨 언질을 들었는지 내가 돈 얘기를 꺼내자 무기를 꺼내며 날 노려보기 시작했다.
무효를 외치면 바로 칼이 날아올 것 같은 분위기.
설마, 이것까지 계산한 건가.
펜리 이 무서운 년….
"…그래, 이 정도면 싸게 먹힌 거지."
펜리에게 구함을 받은 목숨값치곤 저렴한 편이라며 스스로 위안 삼았다.
11800골드.
역시나 가슴이 쓰린 건 어쩔 수 없었다. 접견실을 도망치듯 나온 후 계단을 내려왔다.
당장 돈을 벌 궁리부터 해야 할 것 같았다. 다행인 건 가진 능력이 있어서 못 갚을 금액은 아니라는 거다.
별것 아니라는 생각이 들자, 마음에 여유가 생겼다.
건물 안은 영업 전인지 한산했다.
5층부터 1층까지 내려오며 눈이 돌아갈 만한 예쁜 엘프들과 마주쳤다. 여긴 눈이 즐거워서 좋긴 하네.
"개인 훈련장이 마련되어 있다고 했지?"
혹시 이것도 돈 받는 거 아니야?
우려와 달리 VIP숙소 손님에겐 무료로 제공하고 있었다.
당장 확인하고픈 게 있었기에 프런트에 서 있는 남자 엘프에게 개인 훈련장을 요청했다.
푸른 장미 건물 주변에는 수많은 창고가 즐비했는데, 그 창고 일부를 개인 훈련장으로 쓰는 것 같았다.
엘프가 한 창고로 날 안내하곤 공손히 물었다.
"VIP고객에겐 시중을 들어줄 아리따운 종업원들을 보내드리고 있습니다. 수련에 필요한 편의 물품도 제공하고 있는데 불러올까요?"
"아뇨. 됐습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당연히 괜찮죠."
푸른 장미는 겉으로는 술과 웃음을 파는 살롱 업소의 형태를 띠지만, 본질은 검은 장미의 정보 조직이나 다름없었다.
훈련실에 시중을 붙인다는 건, 그 사람의 능력이나 실력을 파악하려는 목적이 더 클 것이다.
내 실력이야 이곳 마스터가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으니 굳이 숨길 필요는 없지만, 불필요한 노출은 피하고 싶었다.
안내자가 물러가고, 텅 빈 훈련소에 나만 남았다.
작은 놀이터 넓이에 장비들이 좌판처럼 장식된 간소한 훈련장이었다. 각종 무기에 강철 갑옷까지 구색은 다 맞춰진 장소라 혼자 수련하기엔 안성맞춤이었다.
후―
짧게 호흡을 내뱉은 나는 일단 달리기 시작했다.
그것도 전력 질주로.
* * *
아침 햇살로 가득 찼던 훈련장에 어둑한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했다.
해가 진다.
수련장 안이 어두컴컴해서 시야가 보이지 않았을 때, 그제야 난 비로소 달리는 걸 멈췄다.
"헉, 헉, 헉…."
거친 호흡을 뱉어내며 램프를 찾았다. 철그럭 철그럭 움직일 때마다 귀에 걸리는 쇠 긁는 소리가 들렸다.
온몸이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다.
램프에 빛이 들어오자, 내 모습이 램프 유리에 비쳐 보였다.
두꺼운 갑주를 걸친 모습.
"…와, 이 미친 체력 보소."
설마 했는데, 진짜 해냈다.
강철 갑옷을 걸치고 순수 체력으로 점심부터 저녁까지 한 번도 멈추지 않고 달리는 데 성공한 것이다.
전력 질주는 무리였지만, 속도 조절을 하면 밤새 달리는 것도 가능할 것 같았다.
스스로의 체력에 질렸다는 표정을 지으며 무거운 갑주를 낑낑거리며 벗어 던졌다.
살 것 같다.
난 대(大)자로 누워 호흡을 골랐다.
금세 안정되어가는 호흡.
난 체력보단 이 회복력에 놀라는 중이었다.
"체력전에선 지려고 해도 질 수가 없겠네."
그뿐만이 아니었다.
갑주가 헐거운 탓에 뛸 때마다 이음매에 피부가 찢기고 멍이 들었다.
근데 몸은 피투성인데 상처가 말끔히 아물어 있었다.
생존에 특화된 재생과 회복 능력.
살아남는 것이 목표인 내겐 최고의 힘이나 다름없었다.
주인공인 카멜조차 기피했던 메인이벤트, 백(百) 개의 심장.
불가능에 가까운 미션인 만큼, 보상은 확실했다.
대박이다.
목숨을 걸었던 것이 안 아까울 만큼.
'하지만 부작용도 분명 있겠지?'
직접 두 눈으로 지켜봤기에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크리스탈 미믹, 붉은 괴물, 그리고 아레나 후아튼까지.
레토니칼스의 심장이 머문 숙주의 말로는 죽음이었다. 그리고 알게 모르게 심장의 통제를 받았다.
이런 부작용을 경계했기에 붐(Boom)을 터트릴 때 의식을 잃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는데, 폭발 강도가 예상치를 벗어나서 의식이 날아갔다.
"다행히 잠식을 당하는 건 피한 거 같은데."
정신 방벽을 계산에 깔고 벌인 도박이기도 했다.
도박에 성공했을 때의 이득이 이렇듯 엄청났으니까.
하지만 조금 전 식사를 할 때 잠시나마 이성을 잃은 것을 보면 완벽히 부작용을 피했다고 볼 순 없었다. 다음에도 이와 똑같은 반응이 나타난다면 심각하게 고민해볼 일이었다.
'가진 능력 안에서 해결하는 것이 가장 좋은데.'
머릿속으로 내가 지닌 능력들을 나열해봤다.
정신 방벽.
인챈트.
고대 문양.
성력과 신명 사냥꾼.
그리고 레토니칼스의 심장까지.
모처럼 여유가 생겼을 때 한 가지씩 테스트해보며 몸 상태를 살펴봐야 할 것 같았다.
3개월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으니까.
창밖을 바라보니, 구름이 잔뜩 낀 밤이라 달빛이 보이지 않았다.
램프에 핀 작은 불꽃에 의지해야 하는 어두운 밤.
출렁이는 불꽃을 잠시 감상하고 있는데, 뒤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기분 나쁜 밤이네요."
푸른 장미의 주인, 넬라가 날 찾아왔다.
76화 혈맹을 제안해요
넬라가 들어온 입구 사이로 시끌벅적한 소리가 흘러 들어왔다.
아, 그러고 보니 밤이 됐지?
푸른 장미의 영업이 시작된 모양이었다. 오늘도 아리따운 꽃을 꺾어보려는 남정네들이 문전성시를 이룬 것 같았다.
물론, 내 눈에는 피를 빨리러 온 호구들로 보였지만 말이다.
그나저나 왜 찾아온 걸까? 접견실에서 쫓아낸 지 반나절도 안 지난 거 같은데.
"개인 훈련 중입니다만? 매너 모르십니까?"
"바람이나 쐴 겸 찾아왔어요."
"바람을 쐬면 막 찾아올 수 있는 그런 곳입니까? 이곳이?"
"돈 갚기 싫으세요?"
"갚아야죠. 이리 들어오시죠."
난 램프가 올려진 식탁 옆 의자를 손수 털어주곤 미소로 그녀를 맞이했다.
돈이 권력이고 깡패인 더러운 세상.
"제 얼굴이 보고 싶어서 오신 겁니까?"
"당연히 아니죠."
"손님도 많을 시간에 무슨 용건입니까?"
"막 의식을 차린 분이 훈련장에서 상식 밖의 행동을 보여서요. 살펴보러 왔어요."
"상식 밖의 행동?"
"갑주를 입고 온종일 뜀박질만 한다고."
"...그게 수상한 겁니까?"
"정상인이 할 행동은 아니니까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확인차 방문했어요."
"무슨 확인 말입니까?"
은은한 불빛 아래 넬라가 날 빤히 바라봤다. 아침과 달리 꽃처럼 치장한 그녀가 날 쳐다보고 있으니 기분이 묘하긴 했는데, 저 눈빛, 왠지 모르게 꺼림칙했다.
"잠식으로 괴물이 됐는지 안 됐는지."
"...."
"안타깝게도 정상이네요. 제법 준비를 많이 했는데."
넬라가 살짝 손짓하자, 지붕 전체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사방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시발, 몇이나 있었던 거야?
더 무서운 건 내 기감에 안 걸렸다는 거다.
뛰어난 검은 장미들이 있었다는 것이고, 내가 오기 전부터 이미 지붕에 은신 중이었다는 소리였다.
"…무, 뭡니까?"
"심장에 잠식된 괴물로 판단되면 조직 전체를 동원해 제거하라는 마스터의 지시예요."
"저를 감시한 겁니까?"
"당신이 장미들의 눈 아래 있는 거죠. 여기가 어디라고 생각하세요?"
어디긴 어디야.
검은 장미 본진이지.
"하하하...."
어째 아침부터 날 예민하게 살피더니, 그런 무시무시한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야?
물론, 펜리의 판단은 이해했다. 심장의 주인은 하나같이 이지를 상실한 괴물들이었으니까. 어찌 보면 내가 예외적이라 볼 수 있었다.
이상하리만큼 확신이 있었거든.
"보다시피 정상입니다."
"알아요."
"저 살았습니까?"
"아쉽지만 그렇게 됐네요."
"아쉽다라, 뼈가 있네요?"
"아까 말하지 않았나요? 기분 나쁜 밤이라고."
"그게 저랑 무슨 상관 있습니까?"
내 물음에 넬라는 살포시 웃고는 다리를 살짝 꼬았다. 갈라진 원피스 사이로 아찔한 각선미가 드러났다.
원피스가 퇴색되어 보이는 우윳빛 피부. 게다가 하필 은은한 불빛 아래다.
이러니 남정네들이 정신을 못 차리지.
아침에 본 수수한 엘프와 같은 엘프인지 헷갈릴 정도로 도발적인 행동이었다. 이래서 여자는 변신의 동물이라 하는 건가.
"상관있죠. 오늘은 구름이 많이 낀 '그림자가 없는 밤'이잖아요."
넬라의 답에 난 뺨을 긁적였다.
진짜 뼈가 있는 대답이었다.
'그림자가 없는 밤'은 그림자 주술이 봉인되는 펜리의 약점을 우회해서 표현한 것이었으니까.
눈빛을 보니 떠보는 게 아니었다.
내가 그림자 주술을 알고 있다고 확신하는 것 같았다.
마스터의 약점을 알고 있는 존재로 인지했다는 건데… 그녀의 분위기가 VIP룸과 접견실에서 봤던 것과 다른 느낌인 이유를 알겠다.
단순한 마담뚜가 아닌 검은 장미의 일원으로 날 바라보는 것이다.
"그녀에게 들었습니까?"
"마스터가 누굴 구해서 아지트로 데려온 건 처음이었거든요. 그래서 집요하게 물었죠."
"어디까지 들었습니까?"
"생명의 징표, 전투 그리고 구출까지."
라웁 숲 사건에 대해 빠짐없이 다 들었다는 말이었다.
펜리가 숨김없이 다 말했다는 건, 넬라의 지위가 조직 내에서 상당하다는 것을 뜻했다.
확실히 몇 차례 부딪쳐 보니 보통 여인은 아닌 것 같았다.
아름다운 미모, 그 안에 무서운 비수를 담고 있다고 해야 하나?
가시 돋친 장미란 표현이 잘 어울리는 여자였다.
'눈만 뜨면 긴장의 연속이네.'
죽을 고비 끝에 좀 살만하다고 생각했는데, 설마 사형수의 마지막 만찬은 아니겠지?
"알려진 약점 아니었습니까?"
"마스터가 그 말을 들었다면 당신 목을 두 바퀴 정도 돌렸겠네요. 마스터는 지금껏 모든 의뢰를 홀로 수행했어요. 능력을 최대한 숨기기 위해서 말이죠."
그러고 보니 샤르바딘 의뢰 때도 혼자 움직였었다.
나와 함께 움직인 게 이례적이란 뜻인데, 상황이 그만큼 급박하긴 했나 보다.
지금까진 그림자 능력을 잘 숨긴 모양인데, 제단에서 크리스탈 미믹을 상대할 때 많은 드워프들 앞에 능력을 노출시켰다.
그 미친 미믹 새끼가 좀 버텨야지.
"저 때문에 약점이 노출됐다는 겁니까?"
"당신이 계획의 주동자라고 들었거든요."
"뭐, 틀린 말은 아닌데… 그래서 절 원망하시는 겁니까?"
"원망은 안 해요. 반대급부로 조직의 5년 치 예산을 도르네프에게 받게 됐거든요. 한마디로 돈방석에 앉았죠."
"뽀찌 같은 거 없습니까?"
"살려드렸잖아요."
독한 년.
있는 것들이 더했다.
그런데, 뽀찌란 단어를 어떻게 알지?
"그럼, 왜 제게 그 말을 꺼낸 겁니까? 그림자 없는 밤 말입니다."
"한 가지 제안을 하려고요."
"제안?"
"마스터의 능력에 대해 함구해 줄 것."
"이미 노출이 됐다고…."
"드워프들이라면 괜찮아요. 봐도 모를 것이라고 했으니까. 문제는 당신이죠. 마스터와 등을 맞대고 마스터의 전력을 지켜본 존재."
아레나 후아튼과 싸웠을 때를 말한 것 같았다.
하긴 그때 펜리가 똥줄 타면서 밑천을 전부 드러내긴 했지. 아레나가 좀 세야지.
근데, 등을 맞대기보단 내가 거의 업혀 다녔다.
날 구하느라 발에 땀 나도록 뛰어다녔는데, 말하기 쪽팔렸는지 넬라에겐 돌려 말한 것 같았다.
"저도 염치라는 게 있어서요. 제 생명의 은인인데 발목을 잡고 싶진 않습니다. 마스터의 능력은 무덤까지 가지고 가겠습니다."
"전 인간을 신뢰하지 않아요. 아니, 모든 엘프가 그렇게 생각하죠."
"원하는 게 뭡니까?"
"당신께 혈맹을 제안해요."
"…혈맹? 진심입니까?"
"네."
혈맹.
피로 맺은 연합체란 뜻인데.
엘프가 말하는 혈맹은 인간이 생각하는 혈맹과 달랐다.
인간이야 혈맹이든, 혈족이든 제 살길 힘들면 배신을 밥 먹듯이 하지만 엘프는 아니었다.
목숨을 걸어야 한다.
괜히 펜리가 날 살리려고 그 개고생을 자처한 게 아니었다.
엘프가 내뱉은 맹약은 그만큼 구속력이 강력했다.
언령에 특화된 종족의 비애랄까.
"전 인간입니다만, 당신들이 신뢰하지 못하는."
"알아요. 인간은 우리와 다르게 배신을 잘하죠."
"그런데 혈맹 제안? 저랑 말장난하자는 겁니까?"
"전 거짓말을 못 해요."
"이유가 뭡니까? 이미 여러 차례 배신당한 경험이 있으실 텐데?"
"...."
엘프들이 좋아서 술을 팔고, 웃음을 팔고 다니겠는가?
전부 생존을 위해서였다.
숲을 잃었고, 터전을 잃었기에 엘프들은 돈이 필요했다.
그 터전을 망가트린 주범이 누구였을까.
인간이다.
정확히 세상의 큰 주축을 담당하는 마법사 집단 말이다.
"설마 그녀도 허락한 겁니까?"
"제 개인적인 제안입니다. 하지만 마스터도 결국 허락할 수밖에 없을 거예요. 곧 진실과 마주하게 될 테니까."
"진실?"
내 의문에 넬라는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내게서 뭘 봤길래 이런 무리수를 두는 거지?
도통 그녀의 생각을 파악하기 힘들었다. 목 깨끗이 씻고 기다리란 쪽지를 보지 못한 건가?
제법 오랜 시간의 침묵.
먼저 침묵을 깬 건 넬라였다.
그녀는 기지개를 쭉 켜곤 의자에서 일어나 내게 천천히 다가왔다.
"베네타에서 가장 귀가 밝은 사람이 누군지 아나요?"
"넬라 당신이겠죠."
푸른 장미에는 수많은 정보가 모여든다. 그 주인이 바로 넬라고.
"맞아요. 자랑은 아니지만 토바른 지역 전체를 봐도 손꼽을 정도로 귀가 밝은 편이죠. 당신이 의식이 없었던 3개월 동안 많은 일이 일어났어요."
3개월.
나도 그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무척 궁금했다.
특히, 카멜 블레이저.
그 녀석의 행보가 가장 궁금했다.
"그중 가장 큰 관심사는 근래에 각성한 신명의 주인들이죠."
"신명의 주인들?"
미간이 확 좁혀졌다.
주인들?
왜 여러 명이지?
스토리 흐름대로라면 백 개의 심장 각성 이후로 한동안은 신명의 각성이 없었을 텐데?
"…혹시 몇 명인지 압니까?"
넬라는 내 앞에 멈춰 선 후 다섯 손가락을 폈다.
다, 다섯? 아니지?
"각성한 신명의 주인은 모두 다섯 명이에요."
하지만 넬라의 쐐기에 난 헛웃음을 흘렸다.
이건 말이 안 되는데?
"그중 한 명은 죽었고, 다른 한 명은 온통 베일에 감춰졌어요. 정체가 드러난 이들은 남은 셋인데 토바른 내에선 유명 인사들이죠."
"...."
난 말없이 넬라를 바라봤다.
나머지 셋의 정보를 알고 있다?
신명은 정보를 통해 함부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무려 '신명'이다. 발설하면 저주를 받는.
"혹시 정보를 샀습니까?"
"아직이에요."
"당신, 설마 신을 받드는 자입니까?"
"놀란 표정이네요. 신을 받드는 자는 그리 희귀한 직업이 아니잖아요. 물론, 나름 신명을 잘 보는 편이라 다른 자들보단 차별점이 있지만."
그녀는 신명을 받는 자가 맞았다.
엘프라면 뛰어난 정령사 혹은 신녀, 이 둘 중 하나일 것이다.
마법사는 신명으로부터 배척되는 게 이 바닥의 규칙이었으니까.
엘프 넬라.
비중이 있는 인물 같은데, 기억에 없는 인물이었다.
'부각되기 전에 죽었다는 건데.'
백 개의 심장이 베네타를 휩쓸었을 때 희생당했던 모양이었다.
넬라란 인물에 대해 관심이 생겼다. 물론, 호감과 아주 거리가 먼 관심이었다.
"죽은 신명의 주인은 아레나 후아튼이에요."
"…말해도 됩니까?"
"신명의 생사는 신을 받드는 자라면 누구나 확인할 수 있고, 죽은 신명의 주인은 이 세상에 어떠한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어요. 괜찮아요."
한 명은 파악했다.
그리고 내가 알던 신명의 주인이기도 했다.
도미닉 후아튼 대신 각성하게 된 아레나 후아튼.
나머지 네 명이 누군지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내가 미래를 바꿈으로써 무려 넷이나 각성했다는 거다.
"혈맹을 맺는다면 신명의 주인 중 세 명에 대해서는 알려줄 수 있어요."
"그게 가능합니까?"
"마스터가 돌아오면 알려 줄 거예요. 그 정보를 얻기 위해 자리를 비운 거니까."
혈맹이면 가능하다라.
잠만, 그러고 보니 이 혈맹….
'내가 거부할 이유가 없잖아?'
엘프와의 혈맹은 인간인 내겐 너무나도 유리한 맹약이었다.
저쪽이 내게 발목 잡힐 확률이 훨씬 높았다.
수틀리면 배신할 가능성이 있는 나와 달리, 저들은 아니었으니까.
검은 장미는 계산이 아주 철저한 조직이다.
왜 이렇게까지 손해를 보며 날 잡으려는 거지?
그 답은 넬라가 알고 있고, 펜리가 돌아와야 그 답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신명과 정보.
난 펜리가 향한 곳이 어딘지 알 것 같았다.
블랙마켓(black market).
힘과 권력을 지닌 자들이 수단을 위해 암묵적으로 인정한 암거래 시장.
신명의 주인에 대해 직접적으로 알고 싶다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이기도 했다.
블랙마켓에는 돈을 받고 신명을 알려주는 일종의 액받이, '저주받은 노예'들이 있었으니까.
"제안에 대한 답은 결심이 서는 대로 알려주세요."
넬라는 꾸벅 고개를 숙인 후 훈련장을 벗어났다.
그녀가 나간 문 사이로 새까만 암흑이 펼쳐졌다.
진짜 그림자 하나 없는 구름 낀 밤이다.
펜리가 가장 싫어하는 밤 말이다.
77화 우린 블랙마켓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