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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화

-그간 일본은 자원의 불모지로서 해외 자원에 전적으로 의지해 왔습니다.

일본 정부 대변인이 기자들을 보며 말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닙니다! 섬나라인 일본에게 있어서 가장 풍요로운 자원인 바다가 바로 그 해답이었죠. 해저 밑에 지구가 수만 혹은 수십만년, 어쩌면 더 오랜 기간 축적하고 쌓아 온 해저광물, 이 해저광물을 캐내는 데 우리는 드디어 성공했습니다!

정부 대변인이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것도 우리 일본이 그간 바라고 또 바라 왔던 희토류를 말입니다!

일본 기자들 역시 흥분한 표정으로 정부 대변인의 발표를 계속해서 지켜본다.

그 후로 계속해서 희토류가 얼마나 귀한 자원이고 이게 일본에게 있어서 얼마나 큰 의미인지를 강조하며, 동시에 이걸 성사시키기까지 정부가 얼마나 고생했는지를 떠벌떠벌 이야기하는 대변인.

그렇게 한참을 이어진 자랑 시간이 끝나자 대변인이 말했다.

-이제 질문 받겠습니다.

그러자 한 기자가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이번 희토류 채굴을 세론 개발과 공동으로 추진했다는데, 사실입니까?

-맞습니다. 세론 개발이 채굴을 담당하고 일본이 정련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계약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그러자 대변인이 잠시 침묵하더니 말했다.

-계약에 대해선 차후 정리가 모두 끝나면 개별 공지 하도록 하겠습니다. 다음 질문.

뭔가 대변인이 언급을 꺼리는 듯한 모습에 이번엔 다른 기자가 손을 들며 말했다.

-방사능으로 인한 환경문제는 어떻게 됩니까.

-그건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해저 희토류는 함량이 높고 방사능이 적은 데다, 이미 우리 정부는 그에 대한 대비를 모두 해 두고 정련을 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국민 여러분 모두 안심하셔도 좋습니다.

그 후로도 계속해서 세론과의 계약 세부 내용을 제외한 나머지 질문에 대해서는 친절하게 답해 주는 대변인.

그렇게 대충 질의가 끝나자 대변인이 말했다.

-질문은 여기까지만 받겠습니다. 앞으로 우리 일본 정부는 희토류 생산량을 더욱 확대하여 자급자족은 물론, 세계에 희토류를 적극적으로 공급하여 현재 첨단화로 인한 희토류 공급 부족을 완화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대변인의 인사를 끝으로 종료된 일본 정부의 공식 기자회견.

그렇게 일본 정부의 기자회견을 실시간으로 지켜보던 남자가 리모컨을 집어 던지며 말했다.

"한지혁 이 개자식이!"

그 남자는 바로 중국 공산당 상무부 부장인 유룽치.

"다른 것도 아니고 희토류를 건드려!?"

상무부는 한국의 산업통상자원부와 비슷한 정부 부처로, 방금 일본의 공식 기자회견에서 언급한 희토류는 물론 중국에서 생산되는 모든 자원과 무역 등을 총괄하는 부처였다.

당연히 그런 부처의 최고 책임자인 유룽치 입장에서 일본의 기자회견은 그야말로 악몽이나 다름없었다.

한참을 씩씩거리던 유룽치는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젠장."

공산당과 연결되어 있는 중국 최대 아연 채굴 기업인 화령광업의 요청을 받아 한국산 구리와 아연에 고관세를 부가했던 유룽치.

중국은 세계 최대의 아연과 구리 제련소를 보유한 나라이기에 세론이 알아서 길 거라 생각했는데, 가격 인하를 단행하고 생산량 증가를 발표하더니 이제는 아예 희토류까지 채굴한단다.

"이건 구리, 아연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인데."

당의 주도하에 방사능으로 인한 환경오염도 감수하며 적극적으로 희토류 생산을 늘려 온 중국.

당연히 돈도 돈이지만, 목적은 당연하게도 희토류라는 희귀 자원을 독점적으로 공급한다는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산유국들이 석유를 무기로 삼듯 중국 역시 희토류를 전략자원 삼아 중국의 성장을 경계하는 나라들에게 휘두르기 위해서.

덕분에 미국과 호주가 열심히 희토류 생산을 늘렸음에도 여전히 점유율 83퍼센트를 유지하며 압도적인 생산량을 자랑해 왔는데, 갑자기 세론이 튀어나오다니.

유룽치가 부하 직원을 보며 말했다.

"알아 왔어?"

그러자 해저 희토류 자료를 조사하라 지시받은 부하직원이 말했다.

"그게··· 해저 희토류는 함유량이 백 배가 넘을 걸로 추정되고, 방사능도 적어 정련이 훨씬 수월하다고 합니다."

"경제성이 있다?"

"그렇습니다."

"생산량은."

"그건 해저 채굴용 스켈레톤이 얼마나 투입되냐에 달렸는데, 지금 일본 정부가 적극적으로 해저 채굴선을 늘리려 하고 있고 세론도 자체 조선소가 있어 매달 6척씩 배를 건조하고 있는지라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늘어날 걸로 추측됩니다."

이미 고작 수십 척의 배로 구리와 아연 세계 점유율 6퍼센트를 달성한 세론이다.

당연히 시간이 지나면 희토류의 생산량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며 중국의 점유율을 깎아 먹을 게 확실시되는 상황.

"도대체 그딴 각성자가 왜 한국에 나와서!"

지금 이 모든 문제를 야기한 것은 바로 한지혁과 그의 스켈레톤들이다.

중국의 신발 산업을 야금야금 빼 가고 SR 전자를 세워 중국에 투자하던 회사들을 한국으로 흡수한 것도 스켈레톤 때문이고, 이번 해저 자원 개발도 전부 스켈레톤과 한지혁이 있기에 가능한 일.

그야말로 산업 전반에 걸쳐 어마어마한 시너지 효과를 내고 있는 스켈레톤과 한지혁이었다.

"SS급이라고?"

"예."

그런데 심지어 무력까지 강하다니.

"돌아 버리겠군."

SS급이 사회에 미치는 파급력이 대단하기는 하지만, 한지혁은 그중에서도 그야말로 독보적이었다.

능력을 활용해 사업을 하는 각성자들이 있기는 하지만 한지혁의 능력은 현대 산업구조에 있어서 그야말로 치트키 수준이었으니까.

유룽치가 싸늘한 표정으로 말했다.

"제거해야 하나."

지금 문제가 되는 건 한지혁의 능력인 스켈레톤 소환.

그 말인즉 한지혁을 제거하면 지금 하고 있는 모든 고민거리가 깔끔하게 사라진다는 의미였다.

한지혁이 죽는 순간 스켈레톤들도 전부 사라져 버릴 테니까.

하지만 유룽치가 이 사실을 잘 알면서도 처리를 고민하는 건 그로 인한 후폭풍 때문이었다.

"놈이 S급만 되었어도 바로 처리했을 텐데."

한국에 6명뿐인 SS급이자 현재 희토류로 많은 주목을 받고 있는 한지혁.

그런 한지혁이 갑자기 석연치 않은 이유로 사망하면 당연히 모든 나라들은 중국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아무리 공산당이 막 나간다고는 하지만 이미 많은 주목을 받고 있는 한지혁을 무작정 죽이는 것은 분명 부담이었다.

게다가 죽이는 것 자체도 문제다.

본인도 SS급인 데다 S급 경호용 스켈레톤이 있을지 모르니 확실한 처리를 위해선 최소 2명 이상의 SS급이 나서야 하는 상황.

당연히 그 과정에서 전투가 벌어질 거고, 어쩌면 한국의 다른 SS급들이 개입해 처리에 실패할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처리에 성공해도 문제고 실패해도 문제이며, 그렇다고 내버려 둘 수도 없는 상황.

한지혁은 그야말로 중국에게 있어서 백해무익한 암 덩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고민하던 유룽치가 말했다.

"세론이 중국에서 가장 많이 수입해 가는 품목이 뭐지?"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당장 암살을 시도하는 건 무리수라는 판단에 다른 카드를 찾아 나선 유룽치.

마음 같아선 한한령 때처럼 한국에 제재를 가해 압박을 하고 싶지만, 그때야 중국의 안보라는 확실한 이유가 있었지만 이번엔 희토류를 꼭 중국만 생산해야 한다는 법이 있는 것도 아니니 명분이 약하다.

결국 유룽치가 할 수 있는 건 세론에 피해를 입힐 만한 품목을 정해 수출을 금지하는 것뿐.

"세론 신발에서 면화 원단을 많이 수입해 갑니다."

"그것 말고는?"

"나머지는 딱히 없습니다. 최근 들어 세론이 중국의 수입 물량을 극단적으로 줄이고 있어서······."

한지혁의 탈중국화 결정에 따라 중국에 대한 의존도를 지속적으로 줄여 온 세론 그룹.

그렇기에 이제 중국에 남은 카드는 면화뿐이었다.

"그것밖에 없어?"

"예."

"이런 젠장."

희토류라는 전략자원에 대한 대응책이 면화뿐이라니.

결국 유룽치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일단 그거라도 중단해. 이유는 국내 공급 부족."

*

"세론 그룹은 한국의 축복 같습니다. 하하."

이진영 청장의 말에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뭘요."

"미국도 실패한 희토류 자급자족을 이렇게 성공해 내다니. 덕분에 한국 기업들 모두 환영하고 있습니다."

이미 한한령을 통해 한국에 제재를 가한 적이 있는 중국.

그런 중국에게 전적으로 희토류를 의지해야 하니 기업들 입장에서 얼마나 불안했겠나.

그런데 세론이 그걸 해결해 주었으니 환영할 만하지.

"아직 자급자족할 정도는 아니잖아요?"

이진영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차피 시간문제 아닙니까."

"그건 그렇죠."

희토류에 대한 일본의 집착은 어마어마해서 거의 폭주하듯 배를 구해다 바치고 있었으니까.

"그나저나 중국이 면화 수출을 중단했던데··· 세론 신발은 괜찮습니까?"

세계에서 가장 많은 면화를 생산하는 중국의 수출 중단 결정.

당연하게도 그 이유는 세론이었다.

하지만 상관없다.

"걱정 마세요, 이미 재고 물량만 6개월 치가 있고 수입 루트도 다양화해 뒀으니까."

탈중국화를 결정하고 그간 꾸준히 중국의 의존도를 줄임과 동시에 중국이 꺼내 들 만한 패로 뭐가 있는지 계속 확인해 온 나다.

당연히 세론의 핵심 계열사인 세론 신발의 면화가 그 대상이 되리라는 것쯤은 진작부터 파악하고 있었지.

"중국이 세계 최대 면화 생산국이긴 하지만 인도도 그에 못지않고 미국도 제법 많이 생산하니 문제없어요."

물론 그렇다고 해서 피해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이후가 문젠데······. 세론 신발이 최근 톱급 메이커들이랑 계약하며 확장 중이거든요. 그래서 앞으로 더 많은 면화가 필요한데, 이게 미국과 인도 물량만으로 감당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인도와 미국의 면화 생산량은 확실히 대단하다.

하지만 이 물량들 모두 임자가 있다는 게 문제다.

면화에 대한 수요가 있으니 그간 면화를 키워 온 걸 텐데, 갑자기 세론이 나타나서 무작정 그 물량을 가로챌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그렇기에 그동안 탈중국을 외치면서도 면화만큼은 중국 의존도를 한 번에 줄일 수 없었지.

"현상 유지 정도는 가능한데 더 이상 확장은 당분간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럼 미국 정부에 부탁해 보는 건 어떻습니까. 미국이 지금 일본에서 희토류를 생산하는 걸 매우 반기고 있는 상황이니 면화 생산량을 올려 달라고 하면 들어줄 것도 같은데요."

"그럼 좋기는 한데··· 뭔가 마음에 안 드네요. 광물은 자급자족이 될 것 같은데 결국 면화는 다른 나라에 의존해야 하는 꼴이니."

해저광물로 재미를 보고 나니 뭔가 성에 차지 않는다.

직접 키워야 내 마음대로 할 것 아닌가.

그러자 이진영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것만큼은 저도 도와드릴 방법이 없군요."

좁아 터진 것도 모자라서 산까지 많아 농사를 하기엔 최악의 조건을 지닌 한국.

"땅이 부족하네요, 땅이."

그렇다고 바다 밑에서 면화 농사를 지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아. 어디 남는 땅 없나."

땅만 있으면 스켈레톤 쫙 뿌려서 대규모로 농사지어 버리는 거다.

그럼 그때부터는 진짜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부 스스로 생산해 판매하는 자급자족이 가능해질 텐데.

하지만 지금 상황에선 꿈같은 소리지.

그때 이진영이 잠시 멈칫하더니 말했다.

"남는··· 땅 말입니까."

"예, 남는 땅. 어? 설마 아는 땅 있으십니까?"

그러자 잠시 고민하던 이진영이 말했다.

"떠오르는 게 있기는 한데······."

"오오! 어딘가요?"

"아시겠지만 게이트는 일정 시간이 지나면 몬스터를 토해 내며 사라집니다. 한국이야 대응 체계를 갖추고 체계적으로 처리하지만··· 그렇지 못한 나라들이 있지요. 특히 국토는 넓은데 인구는 적고 가난한 나라들."

게이트에서 튀어나온 몬스터를 모두 처리하지 못한다고?

그럼 몬스터들이 여기저기에서 돌아다닌다는 말이잖아?

"물론 국제 각성자 연맹에서 그런 나라들에 각성자들을 파견해서 도움을 주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완전히 처리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특히 불안정 게이트가 나타나면 각성자들이 도착하기도 전에 몬스터들이 이미 사방으로 흩어지죠. 그런 식으로 처리하지 못한 몬스터들이 자리에 눌러앉아 버려진 땅들이 있습니다."

"그거 완벽한데요?"

몬스터로 인해 버려진 땅들.

당연히 일반인들은 죽음의 위협에 접근조차 못 하겠지만, 나에겐 전혀 문제될 게 없다.

어차피 내 일꾼은 죽어도 상관없는 스케레톤들이고, 몬스터가 나와 봐야 내 스켈레톤 제작에 필요한 재료가 될 뿐이니까.

게다가 그런 식으로 버려진 땅이라면 가격도 쌀 것 아니야!

"어딘가요, 거기가?"

"아프리카입니다."

"아프리카? 거기 사막 아니에요?"

"그건 북아프리카고, 중앙아프리카는 다릅니다. 중앙아프리카는 수자원도 풍부하고 땅도 기름집니다. 다만 농사지어 보겠다고 각성자를 대규모로 투입할 만한 국가나 사람이 없어서 그간 방치되었던 것뿐이죠. 그것도······."

이진영도 슬슬 기대가 되는지 입꼬리를 씰룩거리며 말했다.

"한국과 북한을 합친 것보다 더 거대한 대평원이 말입니다."

이거다.

몬스터가 돌아다니며 방치되고 버려진 옥토.

이거라면 대규모로 농사짓기 딱이잖아!

가격도 쌀 거고!

"그 정도면 면화만 생산할 게 아니라 오만 잡가지 걸 다 키워도 되겠는데?"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말했다.

"청장님, 바로 연결 좀 해 주세요. 우리 이제 광물 대국으로 가는 길은 열렸으니 농업 대국도 한번 가 봅시다."

56화

"이야."

비행기에서 내려다본 아프리카의 대평원의 크기는 그야말로 어마어마했다.

끝없이 펼쳐져 있는 평원은 하늘에서 내려다보아도 끝이 보이지 않을 수준.

그때 함께 동행한 농학자가 말했다.

"중앙아프리카 공화국의 대평원은 3급 농지로 분류됩니다."

"3급이요? 그럼 1급이랑 2급도 있다는 건가요?"

생각보다 별론데?

그러자 내 실망한 기색을 읽었는지 농학자가 웃으며 말했다.

"참고로 9급지까지 있으니 3급지면 상급지에 해당합니다. 애초에 아프리카 사람들이 가난하고 굶주리는 이유는 땅이 나빠서가 아니라 치안과 정치가 불안정하기 때문이니까요."

"오오! 그래요? 한국은 어떤가요."

"···한국은 대부분 5급지에서 7급지 사이입니다."

역시 자원의 저주를 받은 땅답다.

"저 넓은 땅이 전부 한국보다 비옥하다는 말이죠?"

"맞습니다. 그것도 한국 전체 면적보다 넓은 땅이 말이죠."

"여기서 면화 키울 수 있나요?"

"애초에 면화는 열대성 식물입니다. 그래서 중국과 인도 모두 따듯한 지역에서 면화를 기르죠."

완벽하다.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해.

그때 대 평원에서 생명체 무리가 지나가는 모습이 보인다.

"동물···이 아니네?"

그것은 바로 몬스터.

툴칸이라 불리는 하급 맹수형 몬스터였다.

그때 툴칸이 대평원을 거닐던 사슴을 공격해 잡아먹기 시작한다.

"저거 완전 생태계 파괴종이잖아?"

나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래서 외래종은 전부 박멸해야 돼. 걱정 마. 조금만 기다리면 내가 전부 박살내줄 테니까."

"헬로! 미스터 한!"

공항에 도착하자 곧바로 대통령 궁까지 안내 받으며 만나게 된 중앙 아프리카 공화국 대통령 치아마카.

듣자 하니 20년째 대통령직을 유지한 독재자라고 하는데 중앙 아프리카 자체가 워낙 가난한 나라라 다들 관심이 없는데다 특별히 악행이라 할만한 걸 저지르지는 않아서 그럭저럭 지금까지 잘 유지해왔다고 한다.

'뭐. 그거야 내 알 바 아니지.'

지금 나에게 중요한 건 중앙 아프리카 공화국에 버려진 거대한 옥토뿐.

중앙 아프리카 공화국은 땅 크기가 남한의 6배에 이르는 반면 인구는 남한의 10분의 1도 안 되는 500만 수준에 불과해 그 넓은 땅을 모두 사수할 수 없어 실질적으로 중앙 아프리카 정부가 통제하고 있는 땅은 인구가 밀집되어 있는 수도와 그 인근에 불과했다.

다시 말해 수도 인근을 제외하면 나머지 모두 내가 농토로 개간해도 상관없는 지역이라는 말.

나는 치아마카 대통령과 악수를 하며 말했다.

"헬로."

그렇게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자 치아마카가 옆에 있는 남자를 가리키며 무어라 말했고 그 말을 통역사가 통역해주었다.

"중앙 아프리카 최고의 각성자인 다간이라 한답니다."

내가 알기로 중앙 아프리카에는 SS급이 단 한 명도 없다.

정확히 말해서 있기는 했는데 미국으로 스카우트되어 지금은 미국인이 되었지.

그 말은 저 남자가 S급이라는 뜻.

나는 다간과 가볍게 목례를 하고 오면서 궁금했던 점을 물었다.

"비행기에서 보니까 몬스터들이 제법 많은 거 같은데 이쪽은 안전한가요?"

"몬스터들이 처음 게이트에서 나왔을 땐 사방 팔방 돌아다니지만 그러다 시간이 지나면 마음에 드는 장소에 눌러앉아 영역화를 한다고 합니다. 거기에 몬스터들끼리도 서로 사냥을 하기 때문에 몬스터의 수도 유지가 되고 있고요. 그래서 이쪽에 생기는 게이트를 잘 처리하고 가끔 넘어오는 몬스터만 막아내면 크게 위험할 일은 없답니다."

그러니까 저 대초원에 몬스터들이 나름의 생태계를 꾸리며 살아가고 있다는 말이네.

물론 내가 왔으니 다 옛날 이야기가 되겠지만.

뭐 잡담은 이 정도면 됐고 바로 본론으로 갈까?

나는 느긋한 표정으로 말했다.

"크게 위험할 일이 없다는 건 그래도 위험한 일이 있기는 하다는 거죠? 하지만 이젠 안심하셔도 됩니다. 사전에 이야기를 들으셨겠지만 중앙 아프리카의 땅을 개간해서 농업을 좀 하고 싶습니다. 당연히 몬스터 청소도 동시에 진행할 거고요."

그러자 치아마카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환영한다고 합니다. SS급인 한 회장님이 그 땅의 몬스터들을 처리하면 국민들이 더욱 마음 놓고 생활할 수 있을 거라고 합니다."

당연히 환영해야지.

그 동안 완전히 손 놓고 있던 땅이 돌아오는 셈인데.

거기에다 세론이 대규모로 농사를 지으며 수출을 하면 세금도 어마어마하게 걷을 수 있을 거고.

모르긴 몰라도 지금 중앙 아프리카 공화국 상황이라면 전체 GDP의 절반도 넘게 나오지 않을까?

그때 치아마카가 갑자기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데 말씀하신 땅 매매는 좀 곤란하다고 합니다."

"왜요?"

"그 넓은 땅을 한 회사에 모두 매각하는 건 사실상 나라의 일부를 넘기는 꼴이나 다름없다고 합니다."

뭐래.

어차피 없던 취급 받던 땅이었잖아.

"그러니 임대를 하는 게 어떻겠냐고 합니다. 1헥타르당 1년에 1달러만 받겠다고 합니다."

1헥타르가 3,000평 정도인데 그걸 1년에 1달러만 받는다면 확실히 어마어마하게 저렴한 금액이다.

하지만 그건 죽 쒀서 개주는 꼴이잖아.

"그럼 내가 몬스터 청소 해주고 개간까지 해서 개발한 땅을 중앙 아프리카에서 다 먹겠다는 겁니까?"

"대신 임대 기간을 60년 보장하겠다고 합니다."

"60년이든 600년이든 내 것도 아닌 땅을 왜 내가 고생해가면서 몬스터 청소해야 합니까?"

내가 왜 남 좋은 일을 해야 돼?

내가 좋은 사람이어야 하는 건 딱 내 은퇴 예정지인 한국뿐이다.

"무조건 매입. 매입 가격은 헥타르당 10달러."

내가 현재 중앙 아프리카에 매입을 제안한 평원의 크기는 무려 2천만 헥타르.

자그마치 북한과 남한을 모두 합친 면적에 달하는 땅이었다.

"그럼 2억달러네요. 이 정도는 계약서에 도장 찍는 순간 바로 송금해드리겠습니다."

한국 돈으로 2천억이 조금 넘는 금액.

이 정도면 세론 신발 한달 매출의 반도 안 되는 수준이니 투자할 만하지.

"어차피 노는 땅이잖아요. 제가 개간하면 안전해질 거고 세수도 확 늘어날 텐데 그냥 쉽게 쉽게 가시죠?"

게다가 이 금액이 나한테는 별거 아니지만 중앙 아프리카에게 있어서는 어마어마하게 큰 금액이다.

중앙 아프리카 공화국이 500만 국민에게서 가져가는 1년 세수가 고작해야 6천억원 수준.

한 국가의 1년 세수가 세론 그룹 계열사 하나 매출만도 못할 정도로 중앙 아프리카 공화국은 정말 찢어지게 가난한 나라다.

그런 상황에서 버린 땅을 팔아 2천억을 챙길 수 있다면 절대 나쁜 이야기가 아니잖아?

"거기에 추가로 경호용 스켈레톤을 서비스로 제공해드리죠."

무려 경호 서비스.

자국 최강의 각성자를 끼고 회의에 올만큼 안전에 대해 민감한 독재자에게 있어서 이보다 탐나는 서비스가 또 있을까.

치아마카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소문으로만 들었던 그 경호용 스켈레톤을 말하는 거냐고 합니다."

"예. 그것도 심지어 A급으로 3개 정도 제공해드리겠습니다."

물론 이 서비스는 마냥 치아마카 좋으라고 제공하는 것이 아니었다.

갑자기 권력자가 뒤바뀌면 기존 권력자가 했던 정책도 뒤집힐게 뻔하잖아?

심지어 여기는 정치와 치안이 불안하기로 유명한 아프리카고.

기껏 개간했는데 혁명군이나 반군이 치아마카를 밀어낸 다음 독재자가 추진한 사업은 무효라며 난리를 치면 법을 준수하는 내 입장에서 매우 곤란하단 말이지.

"아! 그리고 제가 스켈레톤을 이용해 뭔가 하려는 건 아닙니다. 스켈레톤이 보호 대상을 공격하면 제 신뢰도가 뭐가 되겠어요. 게다가 제 입장에서도 대통령이 건재한 게 유리해서 말이죠."

내 말에 치아마카가 잠시 고민하더니 말했다.

"그 조건이라면 받아들이겠답니다."

그렇지.

이렇게 좋은 서비스도 제공해준다는데 어떻게 거부해.

"그대신 금액 지불을 이렇게 하는 건 어떻냐고 합니다. 매입가를 헥타르당 8달러로 계산하고 나머지 차익 2달러는 별도의 계좌에 넣는 식으로."

이 새끼가 나름 독재자 치고 평이 좋다고 하더니 그 와중에 비자금 만들 생각부터 하네.

목돈 생기면 말이야 그렇지 않아도 가난한 국민들 구제할 생각을 해야지 쯧쯧.

나는 손가락을 흔들며 말했다.

"놉! 나는 흙탕물엔 손 안 담급니다."

고작 이런 일 때문에 내 은퇴 라이프에 오점이 생기면 곤란하지.

"그냥 편하게 좀 하자구요. 자꾸 이러시면 저 남수단으로 갑니다?"

원래 내가 고른 후보지는 남수단과 중앙 아프리카 공화국 이렇게 두 개였다.

하지만 남수단은 바다까지 연결된 도로 인프라가 최악이라서 제외했는데 자꾸 귀찮게 이런 식으로 하면 그까짓 길 그냥 내가 깔아버리지 뭐.

내 엄포에 결국 한참을 고민하던 치아마카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겠다고 합니다. 지금 말한 조건 모두 받아들이겠답니다."

"오케이!"

나는 미리 준비해둔 계약서를 내밀며 말했다.

"자. 여기 도장 찍으시면 바로 계좌 입금 갑니다."

"아아!"

양팔을 뻗어 광활한 대평원을 만끽하는 나.

"이게 다 내 땅이라는 거지?"

도저히 끝이 보이지도 않을 만큼 거대한 평야가 전부 내 땅이다.

방 한 칸 없던 삶을 살던 내가 한반도 전체 면적과 비슷한 크기의 땅을 가지게 되다니.

광물과는 다른 의미로 든든하다고 해야 하나.

역시 사람은 부동산이 있어야 해.

물론.

"키엑?"

몬스터라는 불법 침입자가 있기는 하지만.

뼈를 날려 몬스터를 단번에 처리한 나는 땅을 만지고 있는 농학자를 보며 말했다.

"어때요? 개간 할만 합니까?"

"강이 바로 인근이라 수로를 끌어오기도 편하고 땅도 상당히 비옥합니다. 다만 워낙 오래 방치되어 잡초부터 쓸모 없는 것들이 많은 게 문제인데···"

"어떻게 해야 하나요?"

"일단 개간의 기본은 땅을 뒤엎는 겁니다. 깊숙한 곳의 땅일수록 더 많은 양분을 머금고 있으니까요."

"얼마나 깊게 하면 됩니까?"

"깊으면 깊을수록 좋습니다. 아. 그리고 큰 돌 같은 것도 골라내야 합니다. 그런 다음 비료를 뿌려서 농사하기 좋게 땅을 가꾸어야 하죠. 하아."

농학자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그나저나 이 넓은 땅을 전부 개간하려면 어마어마하게 시간이 들어갈 거 같군요."

"어차피 땅도 넓은데 대충 적당히 키우면 안됩니까? 꼭 땅마다 최고 조건으로 만들어서 키울 거 있나요. 평당 생산량이 떨어지는 거 감수하고 그냥 땅 크기로 밀어붙이면 될 거 같은데."

내 말에 멍하니 있던 농학자가 말했다.

"그것도 방법은 방법이겠군요."

"좋았어. 아무튼 땅을 최대한 깊게 뒤엎고 돌을 골라내야 한다 이 말이죠?"

"맞습니다."

"동시에 몬스터도 처리해야 하고?"

"예."

나는 통역사에게 말했다.

"같이 온 공무원한테 내 땅에 사람 사는지 좀 물어 봐줘요."

물론 사방에 몬스터가 있는 이 땅에 사람이 살까 싶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잖아?

통역사가 정부 공무원과 이야기를 하더니 말했다.

"당연히 아무도 없다고 합니다."

"굿굿. 그럼 몬스터 수준은?"

"가장 강한 건 A급이라 합니다. 거기에 새로운 A급 게이트가 나타나도 기존 A급과 영역 다툼을 벌이기에 개체수는 늘 비슷하게 유지되고 있다 합니다."

말 그대로 몬스터 생태계구나.

자연스럽게 개체수 조절까지 되는 진짜 생태계.

"S급은 없습니까?"

"아직까진 없는 걸로 압니다."

"그럼 별거 아니네요."

딱 예상한 수준이다.

이 땅이 버려진 건 인류가 약하기 때문이 아니라 굳이 이 땅을 힘들게 수복해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니까.

애초에 중앙 아프리카의 게이트 관리 능력 부족으로 버려진 건데 지금 있는 몬스터를 모두 소탕해봐야 무슨 소용인가.

어차피 다시 똑같아질 텐데.

그렇다면 각성자를 대규모로 배치해서 빈틈없이 관리해야 하는데 아무것도 없는 이런 불모지에 계속 있고 싶어할 각성자가 있을 리도 없고.

거기에 수도권 인근만 잘 관리하면 넘어오는 몬스터도 소수라니 그냥 그런 가보다 하고 살던 거지.

하지만 나는 다르다.

나는 이 땅이 필요하고 동시에 이런 불모지에서도 군말 없이 24시간 쉬지 않고 몬스터를 때려잡을 언데드 군단이 있으니까.

즉 이 땅이야 말로 나에게 최적화된 곳이란 말이다.

나는 바로 아공간을 열어 예비용으로 만들어둔 대형 해저 채굴용 스켈레톤을 소환했다.

일꾼 스켈레톤과 다르게 해저에서 수압을 견디고 물을 해치며 움직이기 위해 제법 수준 높게 만든 대형 스켈레톤.

"보자. 땅을 뒤엎으려면 장비가 있어야겠지? 갈퀴를 역방향으로 그리고 옆으로 길게."

그렇게 순식간에 뼈로 폭 20m에 달하는 역방향 갈퀴를 만들어낸 나.

나는 곧바로 대형 스켈레톤에 각종 마법진을 추가하기 시작했다.

"계속해서 직진하다가 10km쯤에서 돌아가지고 이번엔 파둔 땅 옆 라인 따라서 쭈욱 밀면···오케이! 자. 한번 해봐."

내 말에 대형 스켈레톤이 역방향 갈퀴를 땅에 박더니 천천히 앞으로 전진한다.

그러자 역방향 갈퀴 사이사이로 흙들이 부셔지며 뒤집어지는 땅들.

"어때요? 이 정도면."

그 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던 농학자가 말했다.

"이. 이 정도면 충분합니다."

"아. 돌도 골라야 한다고 했죠?"

이번엔 아공간에서 일꾼 스켈레톤과 운반형 스켈레톤을 꺼내 바로 마법진을 추가한다.

"크기가 큰 돌 골라서···운반형에 싣고 꽉 차면 이쪽에 와서 버리고. 끝!"

그러자 계속 땅을 헤집으며 전진하는 대형 스켈레톤 뒤에 붙어 헤집어진 땅의 돌들을 골라내는 스켈레톤들.

"이제 마지막으로 호위용 스켈레톤을 소환해서 동행 시키면? 완성!"

공격 제한을 해제한 호위용 스켈레톤의 보호를 받으며 자동으로 땅을 개간하기 시작한 스켈레톤 부대.

이제 이 스켈레톤 부대는 24시간 쉬지 않고 땅을 개간함과 동시에 달려드는 몬스터를 알아서 처리할거다.

나는 몸을 돌려 농학자를 보며 말했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서 쉬죠?"

"예?"

"이제 저놈들이 알아서 무한대로 땅 개간할거에요. 물론 저놈들만 놓은 건 테스트 용이라 그런 거고 앞으로 별 문제 없으면 저런 부대들 수십 개 만들어서 풀어 놓으려고요."

땅을 개간함과 동시에 몬스터도 처리하는 일석이조의 부대.

물론 어디까지나 즉석에서 만든 만큼 예기지 못한 상황이 발생할 수 있으니 며칠은 두고 봐야지.

"그런 다음 개간 완료된 땅에 먼저 농사 지으면 끝! 그러는 사이에도 저놈들은 계속해서 쉬지 않고 개간하며 몬스터들을 청소할거니까요."

농학자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개간이 이렇게 쉬운 거였나···보통 크레인 동원해서 하루 종일 땅만 파고 사람 써서 돌 골라내야 되는데···"

"아직 적응이 안되셔서 그런가 보구나. 세론은 원래 이래요."

당분간 세론이랑 계속 일해야 하는데 적응해야지.

나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자! 갑시다. 치아마카 대통령이 파티 열어준다니 아프리카 파티 한번 즐겨보자고요."

"으아!!"

나는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잘 잤다!"

치아마카 대통령이 주최한 파티에서 실컷 마시고 놀다 늦게까지 늘어지게 잠을 잔 나.

나는 눈을 비비며 말했다.

"아프리카도 제법 놀만하네."

확실히 대통령이 주최한 파티라 그런지 음식도 맛있고 각종 볼거리도 풍부했다.

"나중에 은퇴하면 이쪽에도 별장 하나 세우자."

내 땅도 있겠다 이 정도면 가끔 색다르게 놀고 싶을 때 올만하겠어.

"아. 그러고 보니 개간 부대."

어제 저녁 식사를 막 시작할 때쯤 땅을 갈던 스켈레톤의 역방향 갈퀴가 거대한 암석에 걸려 전진을 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했었다.

그래서 내가 직접 통제해 그 돌은 패스하고 계속 개간하게 했었지.

"다음엔 자동으로 큰 돌 있으면 피해가도록 해야겠어."

돌들이야 나중에 뽑아내거나 박살내면 그만이니까.

"일 잘하고 있나."

그렇게 눈을 감고 개간 부대의 선두인 대형 스켈레톤의 통제권을 가져오려는 순간.

"···어?"

대형 스켈레톤과 연결이 안 된다.

"뭐야."

연이어 다른 스켈레톤과도 연결을 시도했으나 모두 끊어진 연결.

"어?"

나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설마 당한 거야?"

연결이 안 되는 걸 확인하자마자 개간지로 날아온 내가 발견한 것은 처참하게 박살 난 스켈레톤의 뼈들이었다.

나는 뼈를 확인하며 말했다.

"완전 개 박살 났네."

가장 강한 개체가 A급이고 A급은 대부분 개별로 활동하기에 호위용으로 A급 2개를 포함해 모두 20여개의 전투 스켈레톤을 배치해두었다.

이 정도면 아무리 대 몬스터 알고리즘이 부실하다지만 기본 능력이 능력인 만큼 A급 몬스터 한 마리쯤 처리하는 건 일도 아니니까.

그래서 안심하고 파티를 즐긴 건데 설마 하루 만에 모두 완파될 줄이야.

"설마 S급 몬스터도 있는 거야? A급 밖에 없다고 한 거 아닙니까?"

그러자 공무원이 쩔쩔매며 통역사에게 말했다.

"지금까지 발견된 건 정말로 A급 뿐이라 합니다."

발견된 건 A급 뿐이다라는 건 다시 말해 발견되지 않은 S급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

나는 잠시 고민하다 이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거 내가 너무 쉽게 생각한 거 같네."

이곳은 무려 지구에 정착한 몬스터들이 만들어낸 하나의 생태계.

당연히 이 거대한 생태계를 밀어낼 때는 그에 따른 반작용이 있는 법이지.

나는 박살 난 뼈를 바닥에 던지고 아공간을 열며 말했다.

"이거 옛날 추억 돋게 만드는데?"

개간 부대를 만들어서 로봇 청소기처럼 틀어놓고 달려드는 몬스터만 처리하면 될 거라 생각했는데 내가 너무 안일했다.

지금 이 땅에 필요한 것은 바로 적극적인 대규모 박멸.

"청소와 개간을 동시에 할게 아니라 청소가 먼저였어."

내 아공간에서 그간 쌓아둔 전투용 스켈레톤들이 계속해 쏟아지며 동시에 내 뒤로 대오를 갖추고 늘어선다.

지구로 돌아온 이후 재건에 들어간 언데드 군단의 첫 총 출격.

"내가 제일 잘하는 게 뭔지 보여줄게."

나는 앞으로 한걸음 내딛고 히죽 웃으며 말했다.

"가자. 얘들아. 전쟁이다."

57화

"크릉···"

오늘도 즐겁게 사냥을 마치고 보금자리로 돌아온 몬스터.

몬스터는 이곳이 너무나도 좋았다.

자신이 나고 자란 그곳은 전부 자신과 비슷한 수준의 몬스터들만 존재했기에 하루하루가 생존을 위한 치열한 다툼이었지만 이곳은 아니었으니까.

끝없이 드넓은 평원엔 자신보다 약한 몬스터들과 그런 몬스터보다도 못한 괴상한 생물체가 많아 먹이가 부족할 일이 없는 이곳은 그야말로 몬스터에게 있어서 최고의 장소.

그렇게 배부른 상태로 드러누운 몬스터가 갑자기 눈을 뜨며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한 방향을 응시했다.

"크르르르르!!"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자신의 영역으로 들어온 것을 느낀 것이었다.

오랜만에 영역을 침범당한 몬스터는 그야말로 분노했다.

감히 내 영역을 침범하다니.

단숨에 침입자를 향해서 달려간 몬스터.

하지만 몬스터는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크륵?"

사냥해서 먹고 남은 뼈들은 그야말로 죽음 그 자체.

그런데 그 죽음이 걸어 다니고 있는 게 아닌가.

거기에 그 뼈는 혼자가 아니었다.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뼈들이 계속해서 앞으로 전진하고 또 전진하는 상황.

분명 단 한 번도 본적이 없는 광경이지만 자신의 영역을 침범당했는데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법.

몬스터는 뼈들을 향해 달려들어 앞발을 휘둘렀다.

빠각!

몬스터의 힘이 실린 앞발에 그대로 허리가 꺾이며 박살 난 뼈.

그러자 몬스터가 자신감이 실린 표정으로 울부짖었다.

"쿠워!!"

수가 많아 보여 잠시 당황했지만, 이 뼈들 역시 마찬가지로 자신보다 한없이 나약한 존재.

이런 나약한 존재 따위는 아무리 수가 많아도 자신의 상대가 아니라 확신한 거다.

그런데 그 순간 갑자기 뼈들이 사방으로 흩어진다.

자신의 강함에 두려움을 느낀 거라 생각한 몬스터가 달려드려는 순간.

쿵!

큰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하늘로 뛰어오르더니 순식간에 몬스터의 옆에 착지한다.

그리고 그 순간 몬스터는 느꼈다.

방금 처리한 뼈들과 비슷한 외형을 지녔지만 지금 자신의 옆에 떨어진 뼈는 방금 뼈들과 격이 다른 존재라는 걸.

위기를 느낀 몬스터는 바로 달려들어 앞발이 아니라 자신의 주무기인 주둥이로 뼈의 몸통을 물었다.

하지만.

"크릉?"

앞발과는 비교조차 안 되게 강력한 자신의 주둥이 이빨이 뼈의 몸에 박히지도 않는 게 아닌가.

그렇게 몬스터가 당황해하는 사이 갑자기 손을 들어 올린 뼈.

그리곤 뼈가 손을 내리찍었고 그것이 몬스터가 살아생전 본 마지막 광경이었다.

"A급 한 마리 추가."

방금 전 죽인 놈은 A급 몬스터.

F급 스켈레톤을 한 번에 박살 내길래 바로 S급 스켈레톤을 투입해서 처리했지.

"깔끔하네."

언데드 군단의 첫 출격.

당연하게도 언데드 군단이 지나간 길에는 몬스터의 사체만이 가득했다.

애초에 전쟁이라 말하긴 했지만, 몬스터들이 수천 단위로 군집해서 달려드는 게 아닌 이상 내 지휘를 받는 언데드 군단의 상대가 될 리 없으니까.

그렇게 진군하고 또 진군하며 주변 몬스터들을 싸그리 청소해나가는 언데드 군단.

하지만 솔직히 성에 차지는 않는다.

그간 틈틈이 언데드들을 만들어 왔지만, 그 수는 고작해야 3천 정도.

이 정도 숫자로 한국 국토를 넘는 크기의 땅을 전부 청소하기에는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릴 테니까.

"예전 같으면 이 정도 면적이야 순식간에 훅 훑고 지나갔을 텐데."

과거 내가 부리던 50만 언데드 군단을 생각하면 3천 정도는 한 줌에 불과하니까.

"뭐. 지금 당장은 어쩔 수 없지."

일단 언데드 군단을 이용해 이 일대를 전부 청소한 다음 청소가 완료된 지역 외곽에 순찰팀을 배치해 안전을 확보하고 다시 개간 부대를 가동시킨다.

어차피 몬스터들은 자신의 영역을 잘 안 벗어난다니 그 정도면 충분하겠지.

"근데 좀 이상하단 말이야."

분명 규모는 성에 안 차도 아직까진 아주 순조롭다.

문제는 순조로워도 너무 순조롭다는 거.

지금까지 청소하면서 A급 스켈레톤 2개가 포함된 개간 부대를 작살낼 만한 그 어떤 몬스터들도 없었단 말이지.

방금 죽인 놈처럼 지금까지 처리한 대부분의 A급 몬스터는 단독 활동을 하고 있기에 개간 부대의 상대가 될 리 없고 S급 몬스터 역시 단 한 마리도 발견하지 못했다.

"아직 못 발견 한 건가?"

나는 잠시 고민하다 말했다.

"딱 5일만 더 해보자."

열흘에 걸친 몬스터 청소 작전.

그 결과 대평원 전체에 비하면 극히 일부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상당한 크기의 땅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끝까지 찾아내지 못한 S급 몬스터.

"어떡하지?"

여기서 더 넓게 청소를 해봐야 현재 내가 보유한 언데드 군단만으론 안전을 유지하기 힘들 텐데.

나는 고민하다 언데드 군단의 진군을 멈추며 말했다.

"일단 여기까지만 하자."

S급 몬스터를 처리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이 구역은 이제 깨끗해졌다.

그렇다면 안전 구역 외곽에 순찰대를 무더기로 배치해 몬스터의 침입만 막으면 끝.

설사 S급이 침입을 시도한다고 해도 S급 스켈레톤들을 대기시켜두었다가 순찰대가 당할 거 같을 때 보내면 자동으로 처리될 거 아니야.

완벽하지는 않지만 이 정도면 그럭저럭 나쁘지 않지.

이래 봬도 그룹의 회장인데 언제까지 여기에만 매달려있을 수는 없잖아.

"좋아. 개간 부대 재가동이다."

알고리즘을 보강한 개간 부대에 이번엔 A급 하나를 포함해 10개의 호위용 스켈레톤을 붙인 나.

어차피 청소가 완료되어 안전 구역 내엔 고작해야 운 좋게 살아남은 소수의 몬스터가 전부일 테니 호위 규모를 절반으로 줄인 건데 내 예상대로 개간 부대는 더이상 몬스터의 습격을 받지 않았다.

그렇게 개간 부대가 순조롭게 운용되자 개간 부대를 10개로 늘려 마지막 테스트를 하고 있었는데···

"또!?"

또다시 내가 자고 있던 새벽 시간에 박살 난 개간 부대.

그것도 심지어 3개 부대나 박살 났다.

나는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말했다.

"카메라는 어딨습니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번 개간 부대들에 블랙박스용 카메라를 달아둔 나.

"도대체 어떤 놈인지 면상이나 한번 봅시다."

잡아 죽여버릴라니까.

그런데 함께 온 직원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카메라가 완전히 박살 났습니다."

"뭐라고요? SD 카드는?"

"일단 찾고는 있는데 SD 카드는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습니다."

"아나. 미치겠네!!"

청소도 다 끝냈고 외곽에 스켈레톤도 순찰 돌리고 있잖아!!

어떻게 딱 개간 부대만 골라서 공격하는 거냐고!

"설마 하늘?"

비행형 몬스터인가?

땅을 헤집으며 다니는 개간 부대니까 하늘에서도 눈에 잘 띌 거 아니야.

"아니면 땅속인가?"

땅을 헤집는 진동에 반응하는 몬스터?

일단 떠오르는 건 이거 2개뿐인데.

"와. 사람 환장하게 만드는구나."

이러면 계획이 완전히 어긋나는데.

원래 내 계획은 1달 안에 내가 없어도 개간이 자동으로 굴러가게 세팅을 해둔 다음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다음 개간이 어느 정도 되면 다시 와서 현재 세론 교육 센터에서 연구 중인 농사 알고리즘을 추가한 스켈레톤을 뿌려 자동으로 농사를 하게 만들 생각이었는데 이런 식이면 내가 한국으로 돌아갈 수가 없잖아!

부서진 스켈레톤을 복구할 수 있는 건 나뿐이니까.

나는 잠시 고민하다 싸늘한 표정으로 말했다.

"설마 사람?"

이쯤 되니 몬스터가 아니라 사람의 소행이 아닌지 의심될 정도다.

깨끗하게 청소한 구역에서 개간 부대만 골라 공격하는 게 말이나 되냐 이거야.

심지어 스켈레톤은 그렇다 치고 카메라 SD 카드까지 없어졌다니 더욱 의심된다.

"중국 놈들이 열받아서 나 방해하려고 그러는 거라는 게 오히려 신빙성 있는데. 젠장."

만약 정말 중국 놈들이 작정하고 방해하는 거라면 이 개간 사업은 지금이라도 접는 게 맞다.

내가 중앙아프리카에 상주하거나 혹은 모든 개간 부대에 S급 스켈레톤을 무더기로 배치하지 않는 이상 계속되는 중국 놈들의 공격을 모두 막아내고 그 피해를 복구한다는 건 불가능하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냥 넘어갈 수는 없지.

"잡는다. 이 개자식들."

나야 스켈레톤 만들며 들어간 돈만 피해를 보는 거지만 놈들은 사람 각성자를 투입할 수밖에 없지 않나.

그렇다면 이 방해꾼 놈들을 잡아서 모조리 처리해주는 거다.

아무리 중국이라 한들 공산당에 적극적으로 협조하며 이런 파괴 공작까지 기꺼이 해줄 S급 이상의 고위 각성자가 무한하지는 않을 거 아니야.

최소한 내가 피해입은 것보다는 그 이상으로 복수해줘야지.

나는 비릿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겸사겸사 사체도 보충하고."

어차피 비밀공작을 위해 투입된 각성자인 만큼 정상적인 루트로 이곳에 오지는 않았을 거 아닌가.

그럼 갑자기 사라져도 실종 처리 말고 중국이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어.

물론 그렇게 사람으로 스켈레톤을 만들면 인권이니 뭐니 해서 지랄발광할 게 뻔하니 만들어둔 다음 아공간에 처박아 뒀다 필요할 때만 몰래 꺼내서 사용하면 그만.

아무튼 아직 사람의 소행이라 확신할 수는 없지만, 비행 몬스터가 개간 부대만 골라 공격한다는 가설보다야 이쪽이 훨씬 신빙성 있으니 일단 사람의 소행으로 간주하고 움직인다.

"그나저나 이놈들을 어떻게 잡지?"

놈들은 내가 잠든 새벽 시간을 골라 공격을 감행하고 있다.

그 말은 도청이 되었든 사람을 매수했든 내가 확실히 잠들었다는 걸 확인할 수단이 있다는 뜻.

여기서 어설프게 그 방법이 뭔지 들쑤시고 다니는 건 하책이다.

자신들을 찾는다는 걸 놈들이 눈치채면 완전히 숨어버린 다음 내가 한국으로 돌아간 다음을 노릴지도 모르니까.

"놈들의 목적은 내 개간 사업을 방해하는 거잖아. 그렇다면 놈들이 가장 탐낼만한 뭔가를 미끼로 던져야지."

나는 잠시 고민하다 피식 웃으며 말했다.

"좋아. 그럼 물량으로 간다."

야심한 새벽.

두 남자가 복면을 쓰고 대평원을 가로지르며 말했다.

"이제는 좀 위험하지 않을까."

"이번까지는 괜찮을 거야. 아직은 몬스터의 소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어. 그러니까 이런 극단적인 방법을 내놨겠지."

개간 부대가 또다시 박살 나자 한지혁이 들고 온 방법은 말 그대로 물량 공세였다.

호위 부대와 돌을 고르는 스켈레톤도 없이 오직 땅을 헤집는 대형 스켈레톤만 수백 개를 투입한 거다.

몬스터에게 박살이 나든 말든 대형 스켈레톤을 무차별로 투입해 개간을 밀어붙이겠다는 뜻이었다.

"이번에 확실하게 알려줘야 해. 수백 개를 뿌려도 감당이 안 된다는 걸."

"호위 부대 없는 거 확실해?"

"확실해. 이미 전부 확인했어. 한지혁이 잠든 것도 확인했고. 설사 놈이 몰래 신호 장치를 설치해놨다 해도 수도 호텔에서 여기까지 날아오는데 최소 30분 이상은 걸리는 데다 어차피 놈이 방을 나서는 순간 바로 연락이 올 거야. 그러니 우리는 안심하고 최대한 많은 대형 스켈레톤을 처리하는 데 집중하면 돼."

"좋아. 대신 이번 일만 마무리되면 당분간은 조용히 있는 거야. 그러다 놈이 한국으로 돌아간 다음 다시 본격적으로 움직이자고."

"알겠어."

그렇게 한참을 달려 드디어 개간지에 도착한 두 남자.

"나는 이쪽 방향으로 가면서 보이는 대로 다 박살 낼게. 너는 이쪽으로 가. 카메라 있으면 무조건 떼서 저장장치 제거하고."

"걱정 마. 벌써 3번째인데 설마 실수할라고."

"시작하자."

그렇게 방향을 나누어 달리기 시작한 남자.

그때 남자의 눈에 한 대형 스켈레톤이 역방향 갈퀴를 들고 땅을 파헤치는 모습이 보였다.

바로 대형 스켈레톤에 다가가 주먹을 휘두른 남자.

그 남자의 주먹에 박살이 난 대형 스켈레톤이 그대로 무너져 내린다.

"카메라는 어디 있지?"

잠시 대형 스켈레톤의 잔해를 뒤지며 카메라를 찾은 남자.

남자가 이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번엔 아예 카메라도 없군."

정말로 부서지든 말든 물량으로 밀어붙이겠다는 한지혁의 의지가 확실하게 느껴진다.

"안심하고 박살 내도 되겠어."

그렇게 박살 난 스켈레톤을 시작으로 대형 스켈레톤을 발견하는 족족 모조리 처리해나가는 남자.

남자가 또 다른 대형 스켈레톤을 처리하며 말했다.

"30개. 좋아. 앞으로 70개만 더 박살 낸다."

그럼 두 명이 합쳐서 200개니 아무리 한지혁이라 한들 바로 이 피해를 복구하지는 못할 거라 생각한 남자.

그때 또 다른 대형 스켈레톤을 향해 달려가는데 갑자기 그 대형 스켈레톤이 그 자리에 멈추어 선다.

"음?"

공격을 받든 말든 묵묵히 역갈퀴만 미는 대형 스켈레톤이 처음으로 보인 이상 반응.

남자가 당황해하던 그때 대형 스켈레톤이 남자를 향해 몸을 돌린다.

그러더니 갑자기 스켈레톤에서 흘러나오는 한지혁의 목소리.

-역시 복면을 쓰고 있네. 뭐. 그 정돈 예상했지.

한국말이기에 무슨 말인지는 모르지만 남자는 한지혁이 자신들을 이미 파악했다는 걸 바로 눈치챘다.

"젠장. 바로 도망을···"

-아. 맞다. 한국말 못 알아듣지? 헤이. 유 알 인 더 트랩.

어색하기 그지없는 한지혁의 영어 발음.

하지만 남자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도는 바로 알아차렸다.

"트랩? 함정?"

그리고 그 순간.

갑자기 대형 스켈레톤이 사방팔방에 파헤쳐놓은 땅속에서 스켈레톤들이 무더기로 일어나기 시작한다.

"이. 이게 도대체."

그렇게 단 1초 만에 남자와 대형 스켈레톤을 중심으로 포위진을 형성한 스켈레톤 부대.

-원 다우전드 스켈레톤 윌 테이크 유. 유 켄트 런.

"1천?!"

그러는 사이 점점 더 포위망을 좁혀오는 1천 개의 전투형 스켈레톤들.

그때 대형 스켈레톤에서 흥겨운 한지혁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에···그러니까. 에이씨. 영어 졸라 어렵네. 다 까먹은 지가 언젠데. 야. 거기서 우리 애들이랑 안면 트고 사이좋게 놀고 있어. 이제 걔네랑 너네랑 한집 식구 될 거니까. 아공간에 너네 자리 비워뒀다고. 그러니 조금만 기다려. 지금 바로 간다.

58화

내가 만든 함정은 간단했다.

안전 구역 외곽을 지키는 최소한의 스켈레톤을 남겨 두고 나머지 스켈레톤을 전부 특정 지역에 숨겨 둔 다음 대형 스켈레톤을 왕창 배치해서 습격자가 나타날 경우 대형 스켈레톤을 희생해 특정 지역으로 유도하는 방식.

놈들은 몰랐겠지만 첫 대형 스켈레톤이 박살 나는 순간 그 대형 스켈레톤 근처의 다른 대형 스켈레톤 중 함정 방향의 대형 스켈레톤을 제외한 나머지는 전부 바닥에 납작 업드리도록 알고리즘을 짜 두었지.

당연히 눈에 잘 보이는 대형 스켈레톤을 계속 박살 내며 함정으로 자연스레 유도된 습격자.

"그나저나 둘밖에 없는 게 의외네."

내가 이런 함정을 기획한 이유는 놈들을 확실하게 잡기 위해서였다.

놈들이 몇 명인지 그리고 전력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기에 어설프게 개간 부대에 S급 호위용 붙이는 것만으로는 100퍼센트 잡을 수 있다란 확신이 없었으니까.

그런데 막상 잡고 나니 고작 두 명이란 게 좀 의외다.

거기에 보아하니 SS급도 아닌 S급 정도로 보이던데.

"아무튼 뭐, 심문해 보면 알겠지."

내가 이래 봬도 고문에 제법 일가견이 있단 말이지.

통각을 강제로 활성화하고 거기에 환영 마법을 곁들여 주면 겉으로 봐선 아무런 상처도 없지만 극한에 달하는 고통을 느끼게 해 줄 수 있다.

여태까지 이 고문을 당하고도 끝까지 버틴 놈은 정말 손에 꼽을 정도니 두 명 중에 최소 한 놈은 알아서 술술 불지 않겠어?

그렇게 방해꾼 놈들을 고문할 생각에 들뜬 마음으로 한참을 날아간 끝에 드디어 보이기 시작한 스켈레톤들.

"훗차."

스켈레톤들에게 제압당해 옴짝달싹 못 하는 놈들 앞에 사뿐히 내려온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반가워, 친구들. 헬로. 헬로."

건방진 중국 놈들.

스켈레톤이 되어서 나한테 영원히 봉사하라고.

"아. 그 전에 면상이나 좀 보자."

어느 길드의 누구인지 확인해서 그 길드 놈들도 내 블랙리스트에 올려 둬야지.

그렇게 다가가 복면을 확 벗긴 그 순간.

"어?"

당연히 황인종이 나올 줄 알았는데, 복면 속 남자는 흑인이었다.

그것도 완전히 새까만 진짜 아프리카 본토 사람.

"뭐야. 중국인 아니었어?"

이어서 옆에 있는 남자의 복면도 벗겼는데 이놈도 흑인이다.

나는 핸드폰 라이트를 켜서 놈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누구냐. 어디서 많이 본 얼굴··· 아!"

떠올랐다.

이놈이 누군지.

"다간!?"

습격자는 바로 치아마카 대통령이 중앙아프리카 최고의 각성자라며 소개를 했던 바로 그 다간이었다.

*

원래는 고문하여 정보를 캐낸 다음 바로 죽여서 데스 나이트로 만들려 했는데, 치아마카 대통령과 연관된 중앙아프리카 현지 사람이 나오니 일단 묶어서 대통령궁으로 데려간 나.

"자기는 절대 그런 지시를 한 적이 없다고 합니다."

치아마카 대통령이 당황한 표정으로 손사래를 치며 계속 부정한다.

"개간 제안을 수락한 게 자신인데 왜 방해를 하겠냐 합니다."

그래.

나도 그게 이상해서 얌전히 찾아온 거다.

원래 처음엔 대통령의 지시로 벌인 일이라 생각해 언데드 군단을 이끌고 대통령궁으로 진격하려 했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대통령은 이런 일을 벌일 동기가 없단 말이지.

그래서 일단 확인부터 할 생각으로 삼자대면을 시킨 건데··· 정말 아닌가?

"게다가 이렇게 한 회장님을 적대할 생각이었으면 스켈레톤들의 경호를 받아들였을 리가 없지 않냐고 합니다."

그건 그렇지.

세상에 자신의 안전을 적에게 맡겨 두는 사람은 없으니까.

"정말 아니라 이거죠."

"정말이라고 합니다. 이럴 거였으면 개간 제안 자체를 거절했지, 굳이 이곳으로 끌어들여 SS급 각성자를 적으로 돌리겠냐고 합니다."

확실히 그간 보여준 치아마카의 행동은 날 뒤통수치려는 사람이라곤 생각하기 어려운 게 사실.

그때 치아마카가 다간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뭐라고 말한다.

"뭐라는 겁니까."

"다간에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건지 빨리 말하라 재촉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침묵을 지키던 다간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중국의 협박을 받아 어쩔 수 없이 했다고 합니다."

"중국의 협박? 흐음."

나와 중국의 관계는 유명하니 그럴듯한 이유다.

게다가 동양인이 거의 없다시피 한 중앙아프리카공화국이다 보니 중국 입장에서 자국의 각성자를 보내는 게 부담일 수밖에 없지.

그러니 현지 각성자를 협박해 이용한다는 건데······.

"이건 좀 이해가 안 되는데?"

아무리 SS급이 아닌 S급이라지만 나름 한 나라의 최강 각성자가 고작 협박 몇 번 받은 거로 바로 뒤통수를 친다는 게 말이 되나?

게다가 협박을 받아 내 사업을 방해한 놈들이 고작 질문 몇 마디에 이렇게 전부 술술 분다고?

이럴 거면 그냥 애초에 협박받은 시점에서 나한테 그냥 말했어야지.

그때 치아마카가 대노한 표정으로 말했다.

"정식으로 중국에 항의하겠다고 합니다. 아무리 중국이 대국이라지만 이건 경우가 아니지 않냐며 화를 내고 있습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 말했다.

"정말 대통령님이 지시한 게 아니라면 제가 잠시 이놈들을 심문해도 되겠냐 물어보세요. 아무리 봐도 다른 이유가 더 있는 거 같단 말이죠."

통역이 내 말을 전달하자 치아마카가 흠칫하며 말했다.

"설마 고문을 하려는 거냐 말씀하십니다."

"설득이죠. 다만 약간의 강제성이 포함된?"

그러자 치아마카가 내 눈치를 보며 주저하더니 통역과 나를 끌고 옆방으로 가서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이 둘이 자국에 둘밖에 없는 S급인데 사정을 좀 봐주시면 안 되냐고 합니다."

뭐?

둘밖에?

그럼 저 둘이 중앙아프리카 S급 각성자의 전부라는 거야?

아.

그래서 저렇게 계속 눈치를 보던 거구나.

이들에게 문제가 생기면 찢어지게 가난한 중앙아프리카는 이들의 공백을 메울 능력이 없으니까.

나는 잠시 고민하다 말했다.

"그럼 이렇게 하죠. 저 둘에게 상처 하나 없이 심문하겠습니다. 그리고 정말 중국의 협박 때문이고 대통령님이 지시한 게 아니라면 대통령님께 A급 스켈레톤 2개를 추가로 배치해 드림과 동시에 저 두 분도 중국으로부터 제가 보호해 드리죠."

이러면 됐지?

만약 이렇게까지 말했는데도 계속 말리면 그냥 치아마카도 한통속인 걸로 판단하고 움직인다.

하지만 다행히 한참을 고민하던 치아마카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겠다고 합니다."

진작 그랬어야지.

그렇게 치아마카와 합의를 본 나는 다시 놈들이 있는 방으로 이동해 두 놈의 어깨에 팔을 걸치고 말했다.

"자, 가자고. 우리 서로 심도 있는 대화를 좀 나눠 볼까?"

*

강제로 활성화된 통각으로 인해 살아생전 처음 느껴 보는 부위의 고통까지 모두 겪자 고통에 몸부림치며 울부짖던 놈들이 사실대로 모든 걸 실토하기 시작했다.

"혁명을 준비 중이었다고?"

알고 보니 이놈들은 원래 정부 전복을 준비하고 있었단다.

둘뿐인 S급이 힘을 합치면 이런 독재 정권 하나 무너트리는 건 일도 아니라는 판단하에.

그래서 일단 치아마카의 환심을 사기 위해 다간이 먼저 접근했고, 그렇게 정부의 주요 인사들과 상황을 파악한 다음 내부와 외부에서 순식간에 전복할 계획이었는데··· 그때 갑자기 등장한 게 나였단다.

"한 회장님께서 치아마카 대통령이 건재한 게 유리하다 말씀하신 것도 모자라 A급 경호용 스켈레톤 3개를 배치한 탓에 매우 곤란했다고 합니다."

개간으로 치아마카와 연을 맺은 SS급 각성자가 거슬렸다는 말이네.

심지어 자신의 소환수까지 배치해서 보호해주니 혁명을 꿈꾸는 놈들 입장에서 말 그대로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겠지.

"근데 갑자기 중국은 왜 언급한 건데?"

나랑 사이가 나빠서?

그러자 다간이 몸을 바들바들 떨며 말했다.

"그때 알 수 없는 누군가로부터 연락을 받았다고 합니다. 몬스터로 인해 개간 사업이 방해를 받으면 귀찮은 걸 싫어하는 한 회장님 특성상 흥미를 잃고 다른 나라로 눈을 돌릴 확률이 높다고요."

"알 수 없는 누군가. 그게 중국이다?"

"한 회장님과 사이가 나쁜 건 중국뿐이니 그렇게 추정하고 있었답니다."

그럼 이놈들, 혁명을 숨기기 위해서 확실하지도 않은 걸 핑곗거리로 삼았다는 거잖아?

하지만 뭐··· 내가 생각해도 중국일 확률이 90퍼센트 이상이긴 하지만.

그나저나 중국 놈들, 아프리카에 관심이 많다더니 정보력이 상당한데?

치아마카도 모르고 있던 혁명은 어떻게 알고 접근한 거야?

아무튼 이제야 전부 이해가 되네.

어쩐지 아무리 청소해도 S급 몬스터가 안 나오더라니.

"그럼 정말로 치아마카는 관련이 없단 소리잖아. 이거 좀 달래줘야겠는데?"

그때 다간이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통역사가 당황해하며 말했다.

"어······"

"왜요. 뭐랍니까?"

살짝 내 눈치를 본 통역사가 말했다.

"차라리 자신과 손을 잡고 독재자 치아마카를 몰아내자고 합니다. 치아마카만 몰아내면 기존 계약보다 오히려 더 유리하게 해 주겠다고 합니다."

"흠?"

이런 상황에서 딜을 건다?

"이미 독재자의 30년 횡포에 국민들이 신음하고 있답니다. 이때 한 회장님이 구원자가 되면 모두가 환영할 거라며······."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자기는 착한 혁명 세력이고 치아마카는 나쁜 놈이라 이거죠?"

"맞습니다."

"쯧쯧. 딜을 걸려면 사고를 치기 전에 걸어 보든가."

늦어도 이미 너무 늦었다고.

게다가 이제 와서 선악 구도로 해 봤자 내가 설득이 될 것 같아?

"전해 주세요, 내 눈엔 치아마카보다 너네가 더 나쁜 놈 같다고."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정말로 자신들은 국민을 위해서 나선 거라 합니다."

"국민을 위한다는 놈들이 중앙아프리카공화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투자 사업에 찬물을 끼얹어?"

개간으로 어마어마한 농경 단지가 들어서면 거기서 나오는 농작물을 수출하며 나오는 세금만으로도 기존 중앙아프리카 세수쯤은 아득히 넘어설 거다.

물론 치아마카가 그 세수에서 일부를 빼내 비자금으로 축적할 게 뻔하긴 하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중앙아프리카공화국 입장에서 이 개간 사업은 나라 발전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사업.

그런데 이놈들은 자신들의 혁명 성공을 위해 이 사업을 파토내려 했다.

만약 진짜 국민만을 위해 혁명을 꿈꿨다면 최소한 이 사업은 건드리지 말고 다른 방법을 찾았어야지.

"게다가 말이야."

나는 다간에게로 몸을 숙이며 말했다.

"내 입장에선 오히려 너네가 없는 편이 훨씬 좋아. 왜인 줄 알아? 유일한 S급인 너네가 없으면 치아마카 대통령이 누구에게 의지하겠어?"

치아마카가 둘뿐인 S급을 최대한 감싸려했지만 지금은 완전히 상황이 달라졌단 말이지.

애초에 감싸려 한 것도 이들이 존재해야 자신의 안전이 더욱 보장받는다 생각해 그런 건데, 알고 보니 이들이 자신을 축출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제 치아마카가 자신의 안위를 의지할 수 있는 건 나뿐이다.

최소한 나는 치아마카가 계속 자리에 있기를 원하는 사람이니까.

치아마카 입장에서 믿지 못할 각성자들을 옆에 두느니 확실한 사업 파트너 관계만 유지하면 안전까지 책임져 주는 내가 더 믿음직스럽지 않을까?

"아. 지금 내가 한 말 치아마카 대통령에게 그대로 전해도 좋아. 내가 치아마카를 지킬 생각이 있다는 의지 표명이나 다름없으니까."

나는 히죽 웃으며 말했다.

"아무튼 덕분에 고생 좀 했어. 좋은 곳으로 가라고."

*

모든 사실을 전해 들은 치아마카는 바로 다간과 그의 동료를 국가 전복 혐의로 재판에 넘겼다.

당연히 재판을 진행하는 법관 역시 치아마카가 심은 사람이니 결과는 불 보듯 뻔한 상황.

"정말 감사하다고 합니다."

"뭘요. 당연히 도와드려야죠. 중앙아프리카가 안정이 돼야 제 사업도 순탄할 것 아닙니까."

치아마카가 이들의 공백을 걱정하기에 내가 나서서 먼저 S급 스켈레톤 3개를 제안했지.

모두가 나에게 S급 스켈레톤이 있을지도 모른다 추측하긴 했어도 공식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게 이번이 처음이라 아깝긴 하지만, 대신 중앙아프리카공화국이 절대 내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될 테니 이 정도는 투자할 만하다.

"평소에는 경호로 쓰시다가 S급 각성자가 필요한 게이트가 나오면 투입하세요. 아. 그리고 혹시 이걸로도 안되겠다 싶으면 바로 헬기 타서 개간지로 도주하시면 됩니다. 거기에 제가 스켈레톤 잔뜩 배치해 뒀거든요."

거기에 개간지가 치아마카에게 있어서 안전 벙커의 역할까지 하니 더욱더 완벽하다.

"한 회장님을 만난 건 정말 신이 주신 축복이라 합니다."

"뭘 또 그렇게까지."

그때 치아마카가 싸늘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나저나 S급 각성자 사체는 필요 없으시냐고 합니다."

그 두 놈의 사체를 주겠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저는 사람의 사체는 절대 건드리지 않아서요. 해 본 적도 없고."

아무도 모르는 사체라면 거리낌 없이 썼겠지만 지금 이 상황은 아는 사람이 너무 많잖아?

게다가 지금이야 치아마카가 분노해서 저렇게 말하지만, 막상 내가 저 둘을 언데드로 만들어서 부리고 다니면 나에 대해 거부감을 느낄 확률이 백 퍼센트다.

세론에서도 그랬으니까.

동시에 내가 사람을 언데드로 만들었다는 약점을 치아마카에게 쥐여 주는 꼴이니 이건 득보다 실이 훨씬 많다.

뭐, SS급이라면 조금 무리를 해서라도 확보하려 했을 텐데, S급은 아깝긴 하지만 대체재가 있으니 일단 패스.

"그것보다는 따로 제가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

나는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중앙아프리카에 동양인은 들이지 않는 게 어떨까요."

고작 S급 2명에게 이 정도로 휘둘렸는데, 중국이 작정하고 나서면 이 개간 사업은 매우 힘들어질 게 뻔하다.

그러니 아예 입국 자체를 차단해야지.

어차피 중앙아프리카는 관광업이 거의 활성화가 안 되어 있는 나라라 큰 부담도 없으니 더욱 안성맞춤.

이렇게 되면 중국 입장에서 각성자들을 함부로 투입하기 어려워질 거다.

그렇다면 유일한 방법은 다른 나라로 우회해서 침입해야 하는데 땅덩이가 한국의 6배가 넘는 중앙아프리카는 결코 작은 나라가 아닌 데다, 각성자도 사람이라 식량 같은 걸 보급해야 하는데 그게 가능한 건 오직 중앙아프리카의 수도와 그 인근뿐.

당연히 허가받지 않은 동양인이 나타나면 티가 확 날 테니 중국 각성자를 잡아 내기에 이만한 방법이 없지.

"아시다시피 중국이 혁명 세력의 편을 들고 조언을 해 주지 않았습니까? 언제 또 이런 일이 발생할지 모르니 미연에 차단해야지요. 중국이 다른 나라로 위장해 들어올 확률도 있으니 동양인은 그냥 국적을 불문하고 모두 거절하는 겁니다."

중국이 확실하다는 보장은 없지만 그냥 그런걸로 밀어붙인다.

내 말에 치아마카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겠다고 합니다. 앞으로 동양인에 대한 비자 발급을 전면 중단 하고 오직 한 회장님과 한 회장님의 허가를 받은 사람에게만 비자를 발급하겠다 합니다."

그렇지.

말 잘듣네.

착하다, 착해.

그래야 내가 앞으로도 지켜 주지.

나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치아마카 대통령님, 우리 앞으로도 잘해 봅시다. 그동안 했던 것처럼만 하세요, 괜히 너무 심한 짓 했다가 나까지 같이 욕먹게 하지 말고. 가늘고 길게 보자고요. 아셨죠?"

*

"싹이 자랐습니다."

농학자의 말에 나는 감격한 표정으로 말했다.

"드디어구나."

혁명 사건이 마무리되고 한국을 오가며 개간 사업을 추진해 온 나.

그리고 마침내 드디어 그 결실이 맺어졌다.

수로를 파고 개간을 해서 헤집어진 땅에 교육 연구 센터에서 고안한 농사 알고리즘을 적용하여 목화씨를 뿌린 게 드디어 피어난 거다.

"스켈레톤들은 문제없던가요?"

"아주 잘합니다. 24시간 무한히 일을 하다 보니 잡초가 자랄 틈조차 주지 않을 정도니까요."

잡초 제거는 노동력이 많이 필요한 농사일의 중요 일거리 중 하나.

그런데 스켈레톤은 쉬지 않고 밭을 돌아다니며 잡초란 잡초는 보이는 족족 제거해 버리니 얼마나 완벽한가.

"거기에 비옥한 옥토의 양분을 잘 받으니 성장 속도도 빠릅니다."

"수확까지 얼마나 걸립니까?"

"이제 막 싹이 나왔으니 대충 20주 정도면 수확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럼 140일? 크!"

그 정도면 배에 실어서 한국으로 운송하는 시간을 고려해도 면화 재고가 소진되기 전에 충분히 공급이 가능하다.

"참고로 여기는 열대지방이라 면화를 365일 계속 키울 수 있습니다."

"더 좋네요."

365일 24시간 쉬지 않고 굴리는 거야말로 언데드의 기본 미덕이니까.

"여기에 면화씨로 면화유를 추출하면 부가 수익도 올릴 수 있으니 더욱 완벽하죠."

"기름? 면화씨로도 기름을 만듭니까? 처음 들어 보는데?"

"만듭니다. 그것도 세계에서 2번째로 많이 쓰는 식용류 재료이지요. 다만 잘 안 알려진 이유가 이게 보통 다른 기름에 혼합해서 유통되는 경우가 많아 그런 겁니다."

면화는 진짜 버리는 게 하나도 없구나.

나는 흐믓한 표정으로 말했다.

"좋네요. 아, 그리고 다른 작물들은 어떻습니까?"

이 넓은 땅에 면화만 심기는 좀 그러니 테스트를 겸해서 온갖 작물들을 심어 봤지.

"다들 나쁘지 않습니다."

"그거 잘 확인해 주세요. 나중에 면화가 아니라 다른 걸 생산해야 할 수도 있으니까요."

옥수수, 대두 등등 팔아서 돈될 만한 작물은 넘치고 넘쳤으니까.

"아무튼 드디어 완전히 탈중국 했네요."

이제 세론은 중국으로부터 그 어떠한 제재를 받아도 끄떡없다.

왜?

전부 자급자족하는 시스템을 구축했으니까.

한마디로 이제부터 내가 마음 놓고 중국을 패도 중국은 마땅히 대응할 수단이 없다는 말.

물론 중국이 작정하고 다른 품목 수출을 제한하며 한국을 괴롭힐지도 모르지만··· 그때는 또 세론이 나서면 되지.

그렇게 한국이 점점 더 세론을 의지하면 의지할수록 세론의 힘은 강해지니까.

그렇다면 중국에게 이제 남은 카드는 은밀한 무력뿐.

나는 히죽 웃으며 말했다.

"괜히 농장이나 건드리지 말고 암살자나 보내 줬으면 좋겠는데."

기왕이면 SS급으로.

그거야말로 나한테 있어서 최고의 선물이니까.

아무튼 중국의 선물은 나중의 기쁨으로 남겨 두고 지금은 일단 사업에 집중한다.

"자. 이제 방해물도 없겠다, 계속 쭉쭉 달려 볼까?"

59화

"흥흥흥."

그야말로 평화로운 나날들.

모든 사업이 전부 순탄 그 자체다.

세론 렌탈은 그야말로 스켈레톤이 부족해 건설사들이 어떻게든 스켈레톤을 하나라도 더 많이 확보하기 위해 경쟁을 펼치고 있고, SR 전자는 계속해서 협력사를 늘려 가며 매출 역시 가파르게 오르고 있었다.

세론 개발은 뭐, 배가 늘어나는 족족 매출이 껑충껑충 뛰어오르니 말할 것도 없고.

유일하게 문제가 됐던 게 중국의 수출 중단으로 잘 성장해 오던 세론 신발의 성장세가 주춤하는 것뿐이었는데, 그것도 해결되었으니 그야말로 문제될 게 하나도 없는 상황.

"이제 진짜 대기업이네."

그것도 애매하게 걸쳐 있는 대기업이 아닌 추정 연 매출만 25조가 넘는 진짜 대기업 말이다.

심지어 이것도 이번 달 기준으로 산정된 매출일 뿐, 세론은 연 단위가 아니라 매달 성장하고 있으니 이 실제 연 매출은 훨씬 더 나올 게 분명했다.

덕분에 증권사에서 상장을 하면 무조건 수십조 이상 벌어들일 수 있다며 나를 설득하려 하지만, 내가 미쳤다고 세론을 상장하겠어?

"이 정도면 재계 20위 안에는 들겠지?"

상장되지 않아 사람들이 재미 삼아 올리는 재계 순위 안에는 없지만, 그 재계 순위 리스트의 20위가 딱 연 매출 20조 정도이니 얼추 그 정도 될 거다.

물론 이런 순위는 의미가 없다.

세론은 지금도 미친 듯이 크고 있으니까.

"그나저나 중국 놈들이 조용하네."

중앙아프리카에서의 방해 공작이 실패했으니 뭔가 다른 수작을 부릴 거라 생각했는데, 아직까진 잠잠하다.

내심 SS급 각성자 암살자를 기대했는데 조금 실망스러운 상황.

"SS급이면 진짜 쓸 만할 텐데."

아마 그 정도면 언데드 군단의 5대 결전 병기와의 싸움에서도 큰 도움이 되겠지.

"근데 언데드 군단 나오기는 하는 건가?"

그 사건 이후로 유격단을 제외하면 단 한 번도 언데드 군단은 나타나지 않았다.

관련 뉴스는 물론 언데드 관련 정보라면 하나도 빠짐없이 수집한 데다, 심지어 그걸로도 모자라 게이트 관리청의 이진영 청장에게도 내가 언데드 몬스터에 관심이 많아서 그러니 지금까지 전 세계에 나온 언데드 몬스터 정보를 달라고도 했는데 그렇게 받은 정보 리스트에도 언데드 군단이 없는 건 마찬가지.

이쯤 되니 진짜 언데드 군단이 나오기는 하는 건가 의심이 될 정도다.

"설마 유격단 하나만 운 나쁘게 게이트와 동화된 거고 나머지는 아닌 것 아니야?"

그런 거라면 나 진짜 바로 은퇴 각인데.

이미 세론 그룹에서 벌어들이는 돈만으로도 세론에서 챙겨 왔지만 사라진 내 은퇴 자금을 뛰어넘었으니까.

"은퇴, 얼마나 행복할까."

그렇게 입꼬리를 씰룩거리며 단꿈에 젖어 있던 나는 이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하아. 그래도 준비는 해야지."

이러다 갑자기 게이트 하나에서 언데드 군단 나머지 전원이 우르르 튀어나올지도 모르잖아.

"열심히 돈 벌자. 그래도 나름 재미있잖아."

언데드 군단을 키우는 것과는 다른 사업만의 재미.

"일하자, 일. 이번에 면화 들어오면 원단 만들어서 세론 신발에 공급한 다음······."

그렇게 마음을 다잡고 일을 시작한 순간.

"회장님! 회장님!"

평소 정중하게 노크를 하면서 들어오는 김덕배가 얼마나 흥분했는지 얼굴이 새빨개진 채로 얼굴에 한가득 웃음을 띠며 뛰쳐 들어온다.

"대어입니다! 대어! 대어가 걸렸습니다!"

SR 전자 협력사 제안인가?

그런데 뭐 얼마나 큰 대어이길래 저러는 거야?

"무슨 회사길래 그럽니까?"

하도 많은 협력사를 상대하다 보니 이제 수천억짜리 중견 기업 가지고는 콧방귀도 안 뀌는 김덕배가 저렇게 흥분할 정도면 덩치가 상당한가 본데?

"미국의 씨웨이입니다!"

"씨웨이?"

"세계 최대의 하드디스크 제조업체 말입니다!"

그렇게 말하면 내가 감이 잘 안 와서.

"매출이 얼만데요"

"15조가 넘습니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말했다.

"어서 모시세요, 극진히."

*

SR 전자가 협력사를 받아들인 이래 최대의 대어인 씨웨이.

비록 세론 그룹이 25조 매출을 자랑하기는 하지만 그거야 모든 계열사 매출을 다 합쳤을 때 그 정도인 거고, 씨웨이는 오직 하드디스크 하나만 만들기에 단일 회사로 보자면 씨웨이는 세론 그룹의 그 어떤 계열사보다도 큰 기업이었다.

그리고 그런 씨웨이와 세론의 만남은······.

"Thank you, Mr. Han."

"땡큐. 땡큐."

아주 성공적이었다.

몇 차례에 걸친 협상 끝에 세론과 협력하여 중국에 있는 공장을 대체할 새로운 공장을 한국에 만들기로 합의한 씨웨이.

그렇게 최종 계약을 마치고 씨웨이 쪽 사람이 나가자 나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역시 대기업이구나! 금액 단위가 완전히 다르네!"

현재 씨웨이가 대체하려는 중국 공장은 하드디스크 최종 조립을 하는 핵심 공장으로, 여기서 발생하는 매출만 수조 원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규모였다.

"역시 원자재 뚫어 두길 잘했어."

그런 씨웨이가 한국을 선택하게 된 이유는 스켈레톤을 24시간을 굴려도 추가 수당이 없는 극강의 가성비도 있지만, 원자재의 영향도 컸단다.

세론 개발 덕분에 금속 가격이 다른 나라에 비해 싸고 공급도 안정적이니 가격경쟁력을 높일 수 있겠다는 판단하에 세론과 접촉한 씨웨이.

그때 옆에 앉아 있던 이진영 청장이 말했다.

"정말 큰 성과입니다. 저 정도 대기업을 한국에 유치하다니."

"오랜만이죠? 한국에 해외 대기업이 직접 투자하며 들어온 건."

"모르긴 몰라도 수십 년 만일 겁니다."

"다 청장님이 옆에서 잘 도와주신 덕분이죠, 뭐."

이진영 청장이 세론과 씨웨이의 협상 테이블에 함께한 건 당연하게도 내 요청 때문이었다.

씨웨이는 투자 규모가 큰 만큼 세제 혜택 등 많은 양보를 얻어 내고 싶어 했고, 이건 내가 직접 해 줄 수 있는 일이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바로 이진영 청장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이진영이 관련 부처와 연락을 취해 잘 조율해 주어 성공적으로 씨웨이와의 협상을 마무리한 나.

그때 잠시 침묵하던 이진영 청장이 말했다.

"···그나저나 이렇게 매번 저한테만 연락하실 겁니까? 이건 관리청 업무도 아닌 데다 저도 상당히 바쁜 사람인데요."

"새로운 일 벌일 때는 연락하라면서요."

그간 세론이 무차별로 치고 나간 덕에 힘들었다며.

그래서 앞으로 미리미리 연락해 준다니까 좋아할 땐 언제고.

"그건 한 회장님의 능력과 관련된 일일 때를 이야기한 거지, 이런 사업 관련 이야기를 말한 게 아니었습니다."

"이것도 능력의 일종이죠, 내 스켈레톤이 앞으로 씨웨이 공장에서 일할 텐데."

"그런 식으로 따지면 세론과 관련된 모든 업무를 관리청이 담당해야 한다는 소리나 다름없는데요."

"에이. 좋게 좋게 가자고요. 이진영 청장님이 편하니까 그런 거지."

"그간 한국에 해 주신 일이 많아 제가 웬만하면 전부 해 드렸는데··· 저도 이번에 고생 엄청 했습니다. 각 부처들 사이에 껴서 얼마나 난감했는지 아십니까?"

씨웨이에게 어디까지 혜택을 줘야 하는지부터 기존 기업들과의 형평성 문제와 환경 등 조율해야 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니까.

원래라면 내가 사이에 끼어서 조율을 해야 했겠지만, 그걸 이진영에게 떠넘긴 셈이었다.

당연하게도 이건 다분히 내가 의도한 바였다.

아무렴 나 대신 귀찮은 일을 해 줄 사람이 떡하니 버티고 있는데 내가 굳이 나설 필요는 없잖아?

"대신 앞으로 정부에 잘 협력할게요."

"···이제 이런 일로 연락 안 한다는 말은 끝까지 안 하시는군요."

안 하지.

앞으로 필요하면 무한정 써먹을 생각인데.

"후우. 알겠습니다."

그래.

포기하면 편하다고.

"대신 적당히만 좀 부탁드립니다. 저도 제 일이라는 게 있어서."

"오케이. 오케이."

나는 씨웨이와 체결한 계약서를 흡족스러운 얼굴로 바라보며 말했다.

"아무튼 간에 중국 참 고마운 존재 아닙니까? 이렇게 잊을 만하면 선물을 주고."

스켈레톤의 인건비와 저렴한 원자재가 한국을 선택한 이유라면 씨웨이가 중국 탈출을 결심한 이유는 바로 미중 갈등이었다.

미국과 중국의 갈등이 점점 고조됨에 따라 씨웨이는 중국의 반미 정서에 부담을 느꼈고, 그렇지 않아도 늘어나는 인건비에 고민하던 와중 세론이라는 중국의 상위 호환 대체재가 나타나니 바로 갈아탄 거지.

"그나저나 씨웨이가 미중 갈등에 부담을 느꼈으면 다른 미국 기업들도 마찬가지일 텐데······."

어쩌면 이건 기회 아닐까?

탈중국을 모색하는 미국과 서방 기업들을 한국으로 끌어들일 절호의 기회.

"이 기회에 중국에 있는 미국이랑 서방 쪽 대기업들 공장 싹 한국으로 끌어들이면··· 어마어마하겠는데요."

이진영도 기대가 되는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거 말로만 들어도 흥이 나는군요."

"그런데 그러려면 정부가 더욱 팍팍 밀어줘야 되는 것 아닙니까? 거 세제 혜택도 좀 팍팍 주고 그렇게 떡밥을 던져야 물고기가 모이지. 중국은 보조금부터 온갖 걸 다 지원해 주던데요."

이런 기회가 왔을 땐 적극적으로 움직여 줘야 하는 법.

그러자 이진영이 난색을 표하며 말했다.

"정부라고 해서 모든 걸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이것 참, 국익을 실현하겠다는데 너무들 하시네."

하지만 뭐, 정부의 도움은 어디까지나 플러스 알파일 뿐이고 메인은 세론이니까.

미국이랑 중국이 투닥거리는 사이 그 틈을 이용해 내가 모조리 빼앗아 온다.

"아. 그리고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는 건데, 정치인들 중 일부에서 스켈레톤을 노동자로 보고 소득세를 부과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이건 또 갑자기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야.

"소득세요? 스켈레톤이 월급을 받는 것도 아닌데 무슨 소득셉니까?"

"각각의 스켈레톤들이 일해서 번 돈을 수입으로 보자는 겁니다."

"이런 미친. 그게 무슨 수입입니까? 그냥 세론에서 벌어들인 돈이지. 아니, 지금 세론 덕분에 자원도 자급자족하고 있는 상황에서 세금? 세에금?!"

"물론 어디까지나 일부의 의견에 불과하니 당장 무슨 일이 벌어지지는 않을 겁니다. 그러니 진정하시죠."

"혹시 중국 놈들 사주받은 것 아닙니까? 그게 아니면 어떻게 자국 기업 경쟁력 깎아 먹는 소리를 해요?"

"그건 아닐 겁니다. 이 이야기가 처음 나온 건 아니라서 말이죠. 사실 세론이 기존 규제망을 벗어난 채 사업을 하고 있는 것은 사실 아닙니까."

"그건··· 그렇죠."

노동자가 스켈레톤이다 보니 노동법 적용도 안 되고 세법 적용도 안 되는 등, 규제로 발목을 잡힌 다른 기업들과 다르게 세론은 말 그대로 규제 무풍 지역이었지.

"그런 차원에서 나온 이야기입니다. 꼭 소득세를 걷어야 한다기보단 사람 노동자를 쓰는 다른 기업들에 비해 세론만 과도하게 유리한 현 제도를 손봐야 한다는 의미죠. 다만 그동안은 세론이 워낙 한국에 도움이 되는 사업을 많이 한 데다 여섯 번째 SS급 각성자라는 호감 이미지 덕분에 잠잠했던 건데······."

이진영이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는 세론이 보통 덩치가 아니지 않습니까."

이미지도 좋고 국익에 도움이 되니 침묵했지만 덩치가 너무 커지자 뭐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니냐 이런 말이 나왔다는 거네.

이렇게 들으니 대충 어떤 생각에서 그런 말을 했는지 이해는 가지만 기분이 좋지는 않다.

미국과 서방 대기업들을 한국으로 끌어들일 이런 절호의 기회에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규제를 운운하다니.

"···중앙아프리카공화국이었으면 이런 소리 나오기도 전에 대통령이 알아서 했을 텐데."

"예?"

"아닙니다. 그냥 혼잣말."

"아무튼 너무 신경 쓰지는 않으셔도 됩니다. 이게 국회에서 비준될 가능성은 거의 없으니까요. 세론의 이미지가 워낙 좋지 않습니까. 괜히 건드렸다 역풍을 맞을 수도 있으니 쉽게 건드리지는 못할 겁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일단은 알겠습니다. 도와주셔서 감사했으니 조만간 밥 한번 사죠."

"저야 감사하지요. 그럼."

그렇게 이진영이 회의실 밖으로 나가자 나는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정치권이라. 이거 가만히 두고만 볼 일이 아닌 것 같은데."

*

"확실히 이제는 정치 쪽에 뭔가 손을 쓰긴 써야겠어."

이진영 말처럼 세론 그룹 정도의 덩치가 되면 정치권과 연관이 안 되려야 안 될 수가 없다.

게다가 소득세인지 뭔지가 통과될 확률이 거의 없다고는 하지만, 인기를 먹고사는 정치인의 특성상 말도 안 되는 허무맹랑한 법안이 갑자기 통과되는 일도 심심치 않게 일어나고는 하지 않나.

"최소한 내 편은 아니어도 나를 건들지는 못하게 만들어야 할 것 아니야."

중앙아프리카공화국처럼 완전히 나한테 꼼짝 못 하게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그 정도면 재벌과 정치인의 결탁이라며 난리가 날 게 분명하니까.

하지만 최소한 함부로 나를 건들지는 못하게 만들도록 관리를 할 필요성은 충분했다.

"지금이라도 정치인들이랑 두루두루 좀 친하게 지내 볼까?"

하지만 이제 와서 갑자기 알랑방구를 뀌는 건 내 자존심이 용납하지 못한단 말이지.

나는 잠시 고민하다 눈을 빛내며 말했다.

"차라리 하나 골라서 키워?"

지금까지 내가 군산을 중심으로 쌓아 올린 영향력은 어마어마하다.

군산시 공단을 협력사로 꽉 채운 것도 모자라 군산시 경계의 다른 지역에까지 진출하며 말 그대로 이 일대의 경제를 멱살 잡고 끌고 가고 있는 게 바로 세론이니까.

여기에 더해 씨웨이 같은 대기업도 유치하였으며, 또 다른 미국과 서방의 대기업을 줄줄이 유치하면 그 영향력은 더욱 극대화되겠지.

아무렴 있는 힘을 그냥 방치하는 건 너무 아깝잖아?

기왕 대기업 유치하는 김에 그걸 이용해서 정치인도 하나 키우면 깔끔하겠네.

"그래, 이럴 때 쓰려고 지금까지 몰빵 해 온 거잖아."

쌓아 올린 영향력을 이용해 정치인을 키워 나를 대신해 정계에서 싸우도록 만드는 거다.

나는 달력을 보며 말했다.

"마침 조금 있으면 지방선거네."

지방자치단체의 장과 시의원을 뽑는 지방선거.

비록 국회처럼 입법 권한은 없지만 내가 윤호창 시장과 담판을 지어 많은 양보를 얻어 냈던 것처럼 지방자치단체장은 그 지역에서 사업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상당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자리지.

여기에 내가 밀어주기로 정한 사람을 꽂아 넣는 거다.

"그런 다음 그 사람을 중심으로 점점 정치권에 영향력을 넓혀 가면?"

그렇게 새로운 정당이 되었든 아니면 기존 정당 내 파벌이 되었든 새로운 정치 세력을 내 영향력으로 만들어 내면 나와 세론 그룹에 어마어마한 도움이 되겠지.

사업적으로든 중국과의 갈등 문제든 간에.

"좋아. 한 놈 잡아서 확실하게 밀어준다. 근데 누구로 해 주지?"

이미 확실하게 정계에 자리를 잡은 사람은 안 된다.

많은 걸 가진 사람은 아쉬움도 덜한 법이니까.

그러니 내 도움을 간절히 원하는 사람.

동시에 내 도움이 없으면 안 되는 사람을 찾는 거다.

그때 내 머릿속에 떠오른 한 사람.

나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역시 아는 사람이 제일이지."

*

"어서오세요, 한 회장님. 하하!"

군산시장 윤호창이 나를 반갑게 맡아 주며 말했다.

"요즘 도통 얼굴 뵙기가 힘듭니다."

"많이 바빠서요."

"하하. 그렇습니까. 사실 저도 요즘 경선 준비 중으로 바쁩니다."

당내에서 후보자들과 경쟁하여 최종 후보를 결정하는 경선.

"군산시장에 다시 도전하시는 겁니까?"

"예."

윤호창이 흐믓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직 속단하기에 이르긴 하지만 회장님 덕분에 저에 대한 군산 시민의 평가가 상당히 좋아서 말이죠. 무난히 승리할 것 같습니다."

윤호창.

내가 처음 만난 정치인이자 동시에 정치 경력으로 내세울 만한 거라곤 시의원 한 번과 현재 시장직이 전부인 사람이었다.

딱 내가 밀어주기 적당한 인물.

조사를 해 보니 특별히 문제될 만한 일을 저지른 적도 없고 범죄라 해 봐야 속도위반이 전부니 이 정도면 정치인치고 아주 깨끗한 편이라 할 만하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동안 윤 시장님이 군산시를 위해 노력한 걸 모두가 알아주는 거겠죠."

"그게 어디 뭐 저 혼자 힘이겠습니까. 하하."

"그런데 그 노력을 군산에만 한정하는 건 좀 아깝지 않을까요."

"···예?"

윤호창을 밀어주어 군산시장이 아니라 더 윗급인 전북도지사로 만든다.

나는 느긋한 표정으로 말했다.

"혹시 시장이 아니라 도지사는 관심 없으십니까?"

60화

윤호창이 처음 정계에 입문하며 목표로 삼은 건 당연히 대통령이었다.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되어 자신이 직접 정부를 이끄는 건 모든 정치인들의 꿈이었으니까.

그렇게 국회의원의 보좌관을 시작으로 정계에서 경력을 쌓고 시의원을 거쳐 군산시장에 당선된 윤호창.

처음 군산시장이 되었을 때 윤호창은 그야말로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군산시를 잘 이끈 다음 도지사가 되거나 국회의원이 되어 점점 경력을 쌓으면 언젠가는 대통령이 될 수 있을 거라 믿으며.

하지만 군산시장의 자리는 독이 든 성배였다.

윤호창 취임 직후 KM 자동차 공장이 문을 닫으며 군산시의 상황이 악화일로를 걷게 된 거다.

당연하게도 그 원망은 시장인 윤호창에게 쏟아질 수밖에.

그렇게 모진 세월을 겪으며 윤호창은 점점 대통령에 대한 꿈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라면 무능한 시장으로 낙인찍힌 채 정계에서 조용히 사라지게 될 처지였으니까.

그런데 그때 등장한 게 바로 한지혁의 세론이었다.

세론이 빠르게 KM 자동차의 빈자리를 채워 나가는 것은 물론 조선소까지 부활시키며 말 그대로 군산을 먹여 살리기 시작한 거다.

덕분에 인구가 계속 유출되던 군산은 오히려 외부 사람들이 유입되며 인구가 증가하기 시작하였고, 이제는 오히려 새로운 전성기를 맞이했다 평가받는 상황.

그제야 윤호창은 마음을 놓고 정계 생활을 이어 갈 수 있겠다 확신했지만, 윤호창의 꿈은 이미 쪼그라든 지 오래였다.

더 높은 자리에 오르겠다는 야망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 만족하는 수준으로.

애초에 군산시가 되살아난 건 자신의 능력이 아닌 세론의 힘 덕분이었으니까.

그런데 그 세론의 한지혁 회장이 자신에게 도지사를 권한다.

"도, 도지사요?"

"예, 전라북도 도지사. 대한민국에 9개뿐인 도의 장이 되는 겁니다. 저는 윤호창 시장님 정도면 충분히 그럴 만한 능력이 있다고 보는데."

한지혁의 말에 윤호창은 당장이라도 알았다는 말이 목구멍 끝까지 튀어나올 것 같았지만 필사적으로 참았다.

아직은 한지혁이 무슨 의도로 이런 말을 자신에게 한 건지 알 수 없으니까.

"제가 감히 도지사가 될 수 있겠습니까? 지금 도지사로 유력한 후보는 현 도지사이자 3선 국회의원을 지내신 김대오 지사님이신데."

그러자 한지혁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지금 중요한 건 윤 시장님께서 도지사가 될 의지가 있는가 아닐까요. 제가 아무 생각도 없이 이 자리까지 나온 건 아닐 것 아닙니까."

"그 말은··· 지지 선언을 해 주신다는 말씀이십니까?"

만약 한지혁이 지지 선언을 해 준다면 충분히 해볼 만하다.

세론 그룹과 협력사들이 즐비한 군산시와 인근 도시의 당원들 표만 끌어들여도 상당한 수준이니까.

"지지 선언은 좀 그렇네요. 솔직히 저는 좌파 우파 이런 건 별로 관심이 없는 데다, 사업하는 사람이 어설프게 한쪽 편을 들었다간 반대 당파에 공격을 당할 수도 있잖아요?"

재벌은 그저 돈이 많을 뿐, 일반인이기에 지지 선언을 하는 것 자체는 아무 문제도 없다.

하지만 그로 인한 후폭풍 때문에 모두들 몸을 사리는 것뿐.

두 거대 정당이 양분하고 있는 한국 정치 구도에서 한쪽 편을 든다는 건 나머지 편을 적으로 돌린다는 이야기였으니까.

"하지만 도와드릴 수는 있지요. 예를 들어··· 저를 설득해 군산시에 세론 본사와 협력사를 유치하도록 한 그 실력을 이용해서 말이죠."

그걸 과연 설득이라고 할 수 있을까.

사실상 세론이 제안한 걸 그대로 수용한 게 전부였는데.

하지만 그 사실을 그 누구보다 잘 아는 한지혁이 정말 아무 의미 없이 저 이야기를 했을 리가 없지 않나.

"세론이 최근 씨웨이랑 계약한 건 알고 계시죠? 이번에 계약이 완전 타결 돼서 조만간 부지 선정을 해야 합니다. 원래는 군산시 근처 도시 중 아무 곳에나 하려고 했는데······."

윤호창이 한지혁의 말을 받으며 말했다.

"도지사 경선 후보가 된 제가 전북 내 다른 도시로 부지를 선정하도록 회장님을 설득할 수도 있겠군요, 지역의 균등한 발전을 위해서."

"정확합니다."

수도권과 경남권에 비해 경제력으로 보나 인구로 보나 열세인 전북은 늘 대기업 진출을 목말라 했다.

그런데 자신이 한지혁 회장을 설득해 씨웨이의 부지를 군산이 아닌 전북 지역 내 다른 도시에 유치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면?

자세한 내막을 모르는 사람들은 윤호창이 마치 자신들의 지역 경제를 활성화해 줄 인재처럼 느끼게 되겠지.

지금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한 군산시처럼 말이다.

윤호창이 전북의 도지사가 되면 다른 도시들도 군산처럼 될 수 있다.

이 얼마나 선거 프레임으로 쓰기 좋은 말인가.

윤호창은 본능적으로 느꼈다.

이건 무조건 먹힐 거라고.

"어떻습니까?"

만약 그러다 떨어지면 시장 자리도 잃는 게 아니냐는 말이 튀어나올 뻔했지만, 윤호창은 간신히 참아 냈다.

선거라는 건 원래 변수의 연속이기에 결과는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으니까.

하지만 이것만은 확실했다.

이 기회가 자신에게 마지막으로 주어진 더 높은 곳으로 갈 수 있는 유일한 사다리라는 걸.

한참을 고민하던 윤호창이 말했다.

"회장님은 무엇을 얻게 되십니까?"

"좋은 친구를 얻겠지요."

많은 것이 함축된 대답.

하지만 윤호창은 그 내면에 깔려 있는 내용을 정확하게 인지했다.

"약속드리겠습니다. 영원한 좋은 친구가 생길 거라는 걸요."

"오케이. 그럼 하는 겁니까?"

윤호창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예. 해 보겠습니다. 아니, 하겠습니다."

*

전북은 야당의 텃밭이라 경선에서 이기기만 하면 자동으로 당선된다는 말이 있을 정도.

그렇기에 모두들 경선에서 승리하기 위해 칼을 갈았지만, 전북 내 두 자리만큼은 이미 임자가 있다는 이야기가 당내에서 돌고 있었다.

그건 바로 군산시와 전북도지사.

군산시는 세론의 성장과 함께 전성기를 누리고 있으니 기존 시장에 대한 지지세가 강했고, 전북도지사 역시 세론이 점점 주변으로 영역을 확장해 나간 덕에 나쁘지 않은 평을 듣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갑자기 이변이 생겼다.

바로 그 임자가 있는 자리 중 하나를 누군가가 박차고 나와 또 다른 임자에게 도전한 것이다.

그것은 바로 윤호창.

"윤 시장."

김대오 전북지사가 윤호창에게 말했다.

"이거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시장 당선이 거의 확정적인데."

"시장으로 나가면 그렇겠지요. 하지만 저는 시장이 아니라 더 큰 물에서 제 능력을 발휘하고 싶습니다."

"능력? 뭐, 군산시 다 망쳐 놓을 뻔한 거? 지금이야 세론 덕에 군산시가 일어섰지만, 자네 임기 때 KM 공장이 철수한 걸 벌써 기억에서 지웠나?"

"정확히 제가 부임하고 한 달 만에 일어난 일입니다. 그건 제 책임이라 할 수 없죠."

"그럼 수습은 제대로 했어? 사실상 세론 없었으면 군산시는 그냥 나락이었어. 그런데 그걸 능력으로 포장한다? 윤 시장 의외로 상당히 뻔뻔하네?"

김대오의 말에 윤호창이 당당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 세론을 군산시에 유치한 게 바로 접니다. 제가 한지혁 회장님을 설득해서 그렇게 한 거죠."

그러자 김대오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거 기가 차서 말도 안 나오는군. 설득을 했다고? 자네가?"

"예. 어디로 갈지 고민하고 있던 한지혁 회장님을 제가 설득했습니다. 그리고 그 후로도 세론이 계속 군산시 발전에 기여하도록 유도했죠."

"혹시 정신이 회까닥하기라도 한 건가?"

김대오가 윤호창을 바라보며 말했다.

"지금이라도 안 늦었어. 도지사 경선에 참가하겠다는 것 취소하고, 시장으로 만족해."

"한번 뱉은 말을 번복할 생각 없습니다."

그러자 김대오가 버럭하며 말했다.

"정말 나랑 한번 해보겠다 이거야? 나 김대오야!"

"압니다."

"군산에서 인기 좀 얻었다고 뵈는 게 없나 보지? 좋아. 어디 한번 해보자고. 도지사는 고사하고 그 알량한 시장 자리도 모두 잃게 될 테니까."

그렇게 김대오가 자리를 박차고 나가자 잠시 침묵하던 윤호창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예, 회장님. 방금 나갔습니다."

-뭐라던가요?

"절 비웃더군요."

-그럼 보여 주세요, 절대 비웃을 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말씀하시는 대로 전부 이루어지도록 해 드리죠.

천군만마만큼이나 든든한 말.

"물론입니다."

그렇게 통화를 마친 윤호창이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

"반드시 이긴다. 반드시."

*

전북도지사 경선 후보로 출마한 사람은 모두 5명.

그중 3명은 후보 타이틀이라도 얻어 보려 출마한 사람들이기에 사실상 도지사 경선은 김대오와 윤호창 이렇게 이파전으로 진행되었다.

당내에서 조사한 지지율은 무려 김대오 75퍼센트에 윤호창 25퍼센트.

그나마 군산에서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있기에 25퍼센트라도 가져왔지만, 그 격차는 어마어마했다.

선거운동 기간이 짧은 경선 특성상 이 정도면 거의 윤호창의 패배가 확실시되는 상황.

하지만 윤호창이 비장의 카드를 꺼내 들자 상황이 반전되기 시작했다.

"처음 한지혁 회장, 아니 당시엔 대표였군요. 처음 만났을 당시 한지혁 대표는 협력사들의 공장 부지 선정을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제가 나서서 설득했습니다. 군산시가 바로 당신이 생각하는 답이다. 군산시는 세론이 활약하기에 충분한 잠재력이 있는 도시라고!"

윤호창이 당원들을 향해 말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한지혁 대표는 군산과 아무런 연고도 없던 사람이었으니까. 한지혁 대표는 당시 세론 신발이 있던 경기도를 염두에 두고 있었기에 계속해서 거절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계속해서 연락을 취했고 군산시의 비전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리고······."

윤호창이 큰소리로 외쳤다.

"세론은 군산시에 자리를 잡았고 현재 군산시는 유례가 없는 성장을 했습니다. 물론 이게 전부 온전히 저 혼자 이뤄 낸 일이라곤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제가 한지혁 대표를 설득하기 위해 했던 노력만큼은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자부합니다!"

가만히 앉아 있다 세론이란 행운을 들이켠 게 아니라 자신의 처절한 노력 끝에 얻어 낸 결과라 강조하고 또 강조하는 윤호창.

"하지만 그렇게 군산시가 성장해 나가니 다른 게 마음에 걸렸습니다. 바로 군산시가 아닌 다른 도시들이죠. 군산시는 이렇게 성장하고 있는데, 다른 도시들이 느꼈을 역차별과 지역 불균형, 얼마나 답답했을까요. 그렇기에 저는 결심했습니다. 군산시만을 위한 시장이 아닌 군산시를 포함한 전라북도 전체를 위하는 도지사가 되기로!"

윤호창이 당당한 표정으로 외쳤다.

"그런 의미에서 저 윤호창이! 세론을 설득해 최근 화제가 된 씨웨이를 군산이 아닌 전주의 공단에 유치하도록 만들겠습니다!"

수십 년 만에 해외의 대기업이 한국에 대한 직접 투자를 결정하며 화제를 모은 씨웨이.

그 씨웨이를 전북 인구의 3분의 1이 거주하고 있으며 동시에 김대오를 국회의원으로 3선이나 당선시킨 김대오의 텃밭 전주에 유치하도록 만들겠다는 선포에 전주 출신 당원들이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저게 정말이야?"

"그러면 대박인데?"

대기업이라 할 만한 회사가 거의 전무하다시피 한 전주에 외국계 대기업 공장이 들어온다니.

그러자 한 김대오의 지지자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원래 선거 때만 되면 서로 어느 대기업 공장 유치하겠다 어쩌겠다 공약 걸고는 하잖아. 그런데 그중에서 지켜진 게 몇 개나 돼. 그런 공약들 다 지켜졌으면 사성 공장이 아마 한국에만 수십 개는 있어야 할걸?"

"군산시에 세론 유치한 것도 본인이 설득해서 그런 거라고 하잖아."

"그걸 어떻게 믿고? 게다가 설사 그게 진짜라 해도 이제 한지혁 정도면 시장이랑 비빌 레벨은 아니지 않아? 뭐가 아쉬워서 윤호창 말대로 하겠어."

그렇게 당원들이 수군거리든 말든 윤호창은 꿋꿋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나중에 한지혁 회장이 군산시를 최종 부지로 낙점하면서 했던 말이 기억나는군요. 윤호창 시장처럼 질긴 사람은 처음 봤다고. 그때의 그 마음가짐 그대로, 반드시 전라북도 전체의 성장을 위해 발휘하겠습니다! 제가 전북을 위해 일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십시오! 저에게 기회를 주신다면 반드시 성공해 보이겠습니다!"

그렇게 유세를 마치고 떠나간 윤호창.

"흠··· 저 정도로 디테일 하게 말한 걸 보면 진짜인 것 같기도 하고······."

"진짜인 것 같기는 뭐가 진짜인 것 같아? 그냥 운 좋게 한지혁이 군산을 골라 들어간 거지."

"그런가?"

그렇게 긴가민가하며 끝난 유호창의 씨웨이 전주 유치 유세.

하지만 그로부터 일주일 후 그들에게 들려온 뉴스.

뉴스의 내용은 바로 씨웨이를 정말로 전주에 유치하는 것이 확정되었다는 것이었다.

*

"축하드립니다."

내 말에 유호창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전부 한 회장님 덕분입니다."

이제는 상당히 공손한 자세로 나를 대하는 윤호창.

당연히 그래야지.

이번 발표 한 방에 75 대 25에서 60 대 40으로 15퍼센트나 지지율을 끌어올렸는데.

"일부러 부지 확정 발표를 좀 당겼으니 이 정도 효과는 있어 줘야죠."

원래 씨웨이의 부지 확정 발표는 경선 이후로 예정되어 있었다.

아무려면 경선 이후 공약을 지키는 모습이 보기가 더 좋을 테니까.

그런데 생각보다 당원들이 요지부동이었기에 충격요법을 주기 위해 아직 경선이 끝나지도 않은 상황에서 부지 확정을 발표해 버린 나.

물론 이렇게 되면 씨웨이라는 카드를 미리 써 버린 셈이기에 오히려 선정되지 못한 지역은 불만을 가질 수도 있지만, 다행히 그 전에 새로운 카드들이 또다시 내 손에 들어왔단 말이지.

"로열 인터내셔널. 영국 기업인데 씨웨이보다는 못합니다. 대충 5조 원 정도?"

최근 급속도로 협상이 진행되어 이제 계약서에 사인을 하고 최종 발표만 남은 영국 기업 로열 인터내셔널.

생활용품을 만드는 회사인데 유럽에서 제법 유명한 브랜드라나 뭐래나.

"거기에 3개가 더 있는데, 여기는 좀 약할 겁니다. 1조가 안 되는 회사들이라서요."

내 말에 윤호창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 정도만 해도 충분합니다."

"이틀 내로 계약 회사들 발표한 다음 부지는 미정이라고 언론사에 뿌릴 테니 알아서 잘 써먹으세요."

"미리 골라서 말씀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이러다 제가 회장님 마음에 들지 않는 지역 유치 약속을 해 버릴지도 모를 것 같아서······."

"그건 그렇겠네. 그럼 제가 각 회사별로 후보군 몇 개 집어서 알려 줄 테니까 그중에서 유 후보자님한테 유리한 위치 골라서 유세에 활용하세요."

"감사합니다, 회장님."

"뭘요, 다 서로 좋자고 하는 건데."

애초에 군산 공단이 가득 차 버려서 주변으로 확장을 해야 하는 상황.

즉, 내 입장에서 이건 어차피 해야 할 일로 생색내는 수준이라는 거다.

그러니 겸사겸사 이걸 이용해 윤호창을 밀어주어 도지사로 만들면 완벽하지.

도지사는 도시 기획권부터 공공 기관장의 인사권 등 전라북도에 한해서 상당한 권한을 가지고 있으니까.

윤호창이 전북도지사로 당선되면 도시 기획권을 이용해 세론과 협력사에 특화된 산업 공단을 만들어도 되고, 아니면 특별 지역으로 선정하여 혜택을 받을 수도 있는 등 그야말로 할 수 있는 일이 무궁무진하다.

"자. 진짜로 전주에 씨웨이를 유치했으니 이제 사람들도 진지하게 유 후보님의 공약을 받아들일 겁니다. 이게 무슨 의미인지는 잘 아시죠?"

"제 말에 신빙성이 생겼다는 뜻입니다."

"정확합니다."

말로만 하는 공약 수준이 아니라 아예 당선이 되기도 전에 공약을 실천해 버린 수준.

물론 그중 원래 계획되어 있던 걸 마치 설득한 걸로 위장한 것 아니냐 하는 사람도 생기겠지만, 상관없다.

그런 사람보다는 혹시나 하는 생각에 유호창 쪽으로 기우는 사람의 수가 더 많을 테니까.

"50퍼센트만 넘으면 됩니다. 이렇게 밀어줬는데 50퍼센트도 못 넘지는 않겠죠?"

윤호창이 확신에 찬 표정으로 말했다.

"물론입니다. 자신 있습니다."

오케이.

일단 중요한 이야기는 이 정도면 된 것 같고······.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나저나, 제가 시장님처럼 질긴 사람은 처음 봤다 말했다고요?"

그러자 윤호창이 어색한 표정으로 말했다.

"유세를 하다 보니 흥분해서 저도 모르게······."

사전에 이야기된 내용이 아님에도 마치 진짜 있었던 일인 것처럼 실감 나게 이야기하던 윤호창.

"아닙니다. 잘했어요. 그러니까 더 진짜 같던데."

"하하. 이해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 말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살 좀 더 붙여 볼까요? 이미 씨웨이 부지가 확정 났으니 그 과정에 있었던 스토리를 더하는 거죠. 그렇지 않아도 씨웨이 부지 선정 관련해서 인터뷰 요청이 계속 오던데."

내 말에 윤호창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그래 주시면 정말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어떻게 말해야 그럴싸할까요."

그러자 잠시 고민하던 윤호창이 말했다.

"일단 절대 예정되어 있던 부지가 아니라 강조한 다음······."

그렇게 내가 인터뷰할 내용에 대해 이야기하는 윤호창.

역시 정치인은 정치인이구나.

그냥 입만 열면 그럴싸한 거짓말이 술술 나오네.

"오케이. 그런 식이면 정치 편향 논란도 없고 나쁘지 않겠네."

"감사합니다."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럼 나도 연기 좀 해 볼까요."

61화

"안녕하십니까. 전북 일보 김 기자입니다."

"반갑습니다."

"그럼 바로 인터뷰 진행하겠습니다. 최근 씨웨이 부지가 전주로 선택됐는데, 이유가 무엇인지요."

"우선 저는 부지를 씨웨이에게 추천을 해 줄 뿐이지, 제가 직접 부지를 선정하지는 않는다는 걸 먼저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물론 당연하게도 뻘소리다.

애초에 합작회사를 만들기 싫어서 고안한 게 협업사 시스템이기에 사실상 나와 씨웨이는 동업 관계.

거기에다 스켈레톤이 없으면 애초에 공장이 돌아갈 수 없으니 부지 선정에 있어서 내 발언권은 절대적이었으니까.

막말로 내가 저기는 스켈레톤 배치하기 싫고 저기가 좋아라고 우기면 그만이라는 거다.

그럼에도 굳이 나는 추천만 할 뿐이다라 말한 이유는 내가 적극적으로 개입한 게 아니라는 걸 보여 주기 위함.

당연하게도 이건 윤호창이 이렇게 말하는 게 좋겠다 알려 준 거였다.

"전주는 전북에서 가장 인적 인프라가 풍부한 도시입니다. 하지만 주변에 대기업이라 할 만한 기업이 없어 젊은 사람들이 계속 수도권으로 유출되고 있죠. 이때 외국계 대기업 공장이 들어오면 큰 시너지 효과가 날 거라 생각해서 추천했습니다."

"단순히 그것뿐인가요. 김대오 현 지사가 유세를 한 지 일주일 만에 부지로 확정되는 건 너무 이상하다며 세론에서 이미 부지를 선정해 두고 그걸 윤호창 후보자에게 알려 준 거다라고 주장하던데요."

나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제가 미리 선정해 두고 그걸 알려 줬다고요? 제가 왜 그런 짓을 합니까?"

"윤호창 후보자를 도와주기 위해서 그런 거라고 하던데요."

"그러니까 제가 왜요, 저는 정치랑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인데. 물론 윤호창 후보자와 인연이 있기는 하지만, 그거야 세론이 군산시에 있어서 일적으로 생긴 인연이지 사적인 관계는 전혀 없습니다. 다만······."

"다만?"

"윤호창 후보자가 저녁마다 찾아와서 씨웨이가 전주에 어울리는 이유를 끝도 없이 설명하여 부지 선정에 영향이 간 건 사실입니다. 실제로도 잘 어울렸고요."

"그럼 일주일 만에 발표하신 이유는 뭡니까? 때문에 정치 개입 논란이 일었는데요."

"저는 각성자지만 그 이전에 사업가입니다. 괜찮은 부지를 찾았으면 한시라도 빨리 공장을 만들어야 사업을 키울 것 아닙니까. 그래서 별생각 없이 부지를 발표한 건데, 이게 정치 개입으로 번질 줄은 몰랐습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외국계 대기업 부지 발표를 경선 이후로 미룰 생각입니다."

기자가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설마 씨웨이 말고 또 다른 외국계 대기업도 있다는 말입니까?"

"있지요. 조만간 발표할 예정이고 지금 이야기 중인 것도 있고."

윤호창이 설득을 한 건 맞지만 내 결정은 정치적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다 말하며 그 와중에 은근슬쩍 앞으로도 비슷한 상황이 더 있을지 모른다는 걸 흘린다.

또한 앞으로 경선 이후에나 부지 발표를 하겠다 말하여 윤호창이 운신하기 편하도록 만드는 게 이번 인터뷰의 목적.

이걸로 윤호창의 능력이 검증되었으며, 동시에 앞으로 얼마든지 공약을 남발할 수 있게 되니까.

"아. 그리고 기사 쓸 때 이것도 꼭 강조해 주시죠. 저는 특정 후보나 정당을 지지하지 않으며 어디까지나 사업적 타당성만 고려한다고."

애초에 사업적으로 타당성이 있는 부지의 후보만 골라서 윤호창에게 건네주었으니 이것도 나중에 전부 선정이 되고 나면 뒷말 나올 일이 없지.

"알겠습니다."

"그럼 인터뷰는 이걸로 끝인가요?"

"아. 기왕 한 김에 다른 것도 질문을 좀 드려도 되겠습니까?"

오늘은 서비스 좀 하지, 뭐.

"하시죠."

"최근 세론 개발의 희토류 생산량이 늘어나며 일본과 합쳐 세계 점유율 6퍼센트를 달성······."

*

인터뷰가 나가자 윤호창의 지지율이 계속해서 오르기 시작한다.

그도 그럴 게, 윤호창이 정말로 나를 설득하는 데 성공했으며 앞으로 계속 새로운 외국계 대기업이 들어온다고 하니 혹시 우리 지역에도? 하는 마음이 생긴 거지.

당연하게도 윤호창은 이걸 적극적으로 이용하기 시작했다.

전북 방방 곳곳을 돌아다니며 대기업 유치 약속을 이용해 지지율을 계속해서 끌어올린 윤호창.

상황이 이렇게 되자 김대오가 당황하긴 했나 보다.

"한 회장님, 정말 윤호창을 밀어주시는 게 아닙니까?"

아예 이렇게 날 직접 찾아오다니.

"아닌데요. 제가 언제 정치인이랑 친하게 지내는 걸 보셨나요."

"그럼 어째서······."

"어째서라기엔 고작해야 씨웨이 부지 발표 하나 그냥 아무 생각 없이 한 것밖에 없는데요."

"큭!"

하지만 그 하나가 치명적이겠지.

실제로 윤호창의 말이 이루어진 덕분에 그의 공약에 대해 사람들이 기대감을 품기 시작했으니까.

본인의 말에 기대가 실린다는 건 정치인에게 있어서 어마어마한 힘.

"저도 이렇게 상황이 번질 줄은 몰랐네요. 대신 인터뷰에서도 밝혔지만 앞으로 부지 발표는 경선 이후로 미루겠습니다."

"···정말 관련이 없으시다면 작은 도움 하나만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무슨 부탁인데요."

"씨웨이 부지 선정, 변경 가능하겠습니까?"

윤호창의 신뢰도에 타격을 주겠다?

미안하지만 그건 안 되지.

"발표를 번복하라고요?"

"대신 제가 도지사로 다시 당선되면 세론과 적극 협력하여 외국계 기업이 편안하게 사업을 할 수 있는 무역 특구를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윤호창이 당선되면 도지사의 도시 기획권을 이용해 만드려던 게 그거지.

만약 뭐··· 내가 진짜 아무 생각 없고 윤호창과 관련이 없었다면 나쁘지 않네 하면서 수락할 만한 제안이지만, 지금은 아니잖아?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씨웨이에서 고른 거긴 하지만 공식적으로 발표한 건 우리 세론인데, 이걸 번복하는 건 저희 그룹 신뢰도에 악영향을 줄 겁니다."

"이해합니다. 하지만 부탁드리겠습니다."

김대오가 이를 갈며 말했다.

"차라리 본선거에서 여당 후보에게 패하는 건 상관없습니다. 그거야 당의 지지율 문제니까. 하지만 다른 것도 아니고 당에서 내보낼 후보를 정하는 당내 경선에서 윤호창 같은 신출내기에게 패한다면 그간 제가 당에서 구축해 온 기반 자체가 흔들릴지도 모릅니다."

도지사를 할 정도면 대부분 당에서 발언권도 크고 나름 힘도 있는 전국구급 정치인이다.

그런데 이런 전국구급 정치인이 경쟁 당과의 선거도 아닌 당내 후보 선출에서 고작 시장 한 번과 시의원 한 번 해 본 신출내기 윤호창에게 패배한다?

이건 굴욕의 차원을 넘어서 그간 당에서 구축해 온 기반 자체가 박살 날지도 모를 만큼 충격적인 사건.

결국 정치인은 인기를 먹고사는데 인기가 떨어진 정치인을 믿고 따를 사람들은 없으니까.

"부탁드리겠습니다, 한 회장님."

"음······."

나는 잠시 고민하는 척을 하다 말했다.

"죄송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안 되겠네요. 그러면 또 정치 개입 논란 터질 것 아닙니까. 세론이 정치에 영향을 받아 가며 사업을 한다? 저는 이런 소리 듣고 싶지 않네요."

하지만 그건 다시 말해 신출내기인 윤호창이 전국구급인 김대오를 이겨서 도지사가 되면 단숨에 떠오르는 다크호스가 된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게 정확히 내가 원하는 바고.

그래야 윤호창이 내 말이라면 설설 길 것 아니야.

윤호창의 정치 기반을 만들고 유지해 주는 게 바로 나니까.

"한 회장님!"

나는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저는 진짜 정치랑 엮이기 싫거든요. 제가 이번에 부지 선정 했다가 김대오 지사님이 의혹 제기 해서 얼마나 곤란했는데요. 그러니 그냥 안 엮이렵니다."

"그건 제가 죄송했습니다. 하지만 그럼 애초에 한 회장님이 윤호창 이야기를 안 들어주셨으면 되는 것 아닙니까?"

"그걸 또 들어줬다고 표현을 하시네. 그럼 김대오 지사님도 윤호창 후보자가 씨웨이를 왜 전주에 유치해야 하는지에 대해 논문 수준으로 서류를 만들어 온 것처럼 씨웨이가 왜 전주에 있으면 안 되는지 이유를 찾아오세요. 저는 사업가니까 타당한 이유가 있다면 얼마든지 철회하겠습니다."

물론 당연하게도 그런 논문 수준의 서류는 없지만.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김대오.

"가 보겠습니다."

"네. 조심히 가세요."

그렇게 성과 없이 돌아간 김대오.

"정치인은 역시 하루살이야."

유명하며 잘나가다가 몰락하기도 하고, 아니면 갑자기 하루아침에 벼락 스타가 되기도 하고.

정확히 지금 궁지에 몰린 김대오와 반대로 지지율이 계속 오르고 있는 윤호창이 딱 그 꼴이다.

하지만 돈과 힘은 영원하단 말이지.

"자. 이제 결과를 기다려 볼까?"

*

전북 사방팔방을 돌아다니며 각 지역마다 외국계 대기업 유치를 공약으로 내건 윤호창.

김대오는 그에 맞서 그간의 정치 경력과 안정성 그리고 마찬가지로 윤호창처럼 외국계 대기업 유치를 공약으로 내걸었다.

당연히 나와는 사전에 협의된 적 없는 뻥 카드였지만 당원들은 내부 사정을 모르니 다시 김대오에게 지지를 보내는 사람들도 나타났다.

하지만 그런 김대오에게 없는 것은 바로 진짜 유치에 성공한 실적.

윤호창은 전주에 씨웨이 유치를 약속했고 그것을 실천했으며, 동시에 그걸 내가 인터뷰로 맞다고 확인까지 해 주었으니 상대가 될 리가 있나.

"축하드립니다, 윤호창 도지사님."

그러자 윤호창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도지사라니요. 아직 본선이 남았는데요."

"솔직히 전북은 경선이 본선이잖아요."

여러 당에서 경선을 통해 각자의 후보를 선출하고 그렇게 선출된 후보끼리 맞붙는 게 진짜 선거지만, 전북은 워낙 야당 지지세가 강한 곳이라 경선에서 선출되면 사실상 100퍼센트 도지사 당선이 확정된 거나 다름없었다.

나는 윤호창을 바라보며 말했다.

"기분이 어떠십니까?"

"솔직히 날아갈 것 같습니다. 저와는 이제 연이 없는 자리라 생각했는데."

윤호창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한 회장님."

"별말씀을. 열심히 해 보세요, 앞으로도 세론은 전북을 팍팍 밀어줄 테니까. 그러니 전북도지사 자리는 절대 빼앗기면 안됩니다."

기껏 도지사로 만들어 놨는데 엉뚱한 놈에게 자리를 빼앗기면 곤란하잖아.

"물론입니다."

"게다가 혹시 압니까? 나중에 이 경력 살려서 더 높은 곳으로 갈지."

지금이야 세론이 전북만 간신히 커버하는 수준이지만, 앞으로 세론은 점점 더 커질 거니까.

그때면 아마 대한민국 전체가 영향권 안에 들어오지 않을까?

그 정도면 도지사 그 이상도 노려 볼 만하잖아?

"더··· 높은 곳?"

"그냥 그렇다고요. 너무 설레발 치지는 맙시다, 우리."

"알겠습니다."

"남은 선거 잘 치르시고요."

"물론입니다."

나는 윤호창과 악수를 하며 말했다.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좋은 친구."

*

예상대로 본선거에서 호창은 경쟁 당의 후보를 가볍게 누르고 전북도지사에 당선되었다.

그렇게 당선되자마자 곧바로 전북에 무역 특구를 만들자고 먼저 정부에 제안하는 등 공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윤호창.

"적극적인 게 아주 마음에 들어."

그래.

그렇게 무역 특구 만들어서 혜택 팍팍 줘 가지고 협력사들 더 많이 끌어들이자고.

"자. 이제 정치 쪽은 윤호창만 밀어주면 되겠지."

김대오를 상대로 승리하며 순식간에 야당의 다크호스로 떠오른 윤호창.

사그라들었던 정치 욕심이 다시 발동되었으니 이제 윤호창은 자기 스스로를 위해서라도 적극적으로 당내에 기반을 쌓아 갈 거다.

"역시 정치는 정치인에게 맡기는 게 최고야."

내 입김을 강하게 받은 윤호창이 정치판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나는 그냥 열심히 돈이나 벌고.

얼마나 좋아?

"아. 맞다."

나는 비서실에서 나에게 전해 준 편지들을 펼쳐 읽어 보았다.

"회장님, 감사합니다. 다리를 다쳐 더 이상 일을 하지 못하던 제가 세론 렌탈에 취업해 조종사로서 일하게 된 것은 전부 회장님 덕분입니다."

공사 현장에서 일하다 하반신을 다쳐 일을 못 하게 됐던 사람이 다리를 쓸 필요가 없는 조종사로 취업하며 다시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며 고마워하는 내용.

나는 흐믓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런 긍정적인 효과도 있네."

제법 기분 좋은데?

아무렴 나도 사람인데 이런 진심 어린 편지를 받고 어떻게 기분이 안 좋을 수가 있겠어.

나는 계속해서 다른 편지도 확인해 보았다.

"오. 목돈이 필요해 노가다를 하려고 했지만 여자는 안 받아 준다 해 절망하던 와중 건설용 스켈레톤 덕분에 일을 하고 있다고?"

장애를 가졌거나 여자처럼 힘이 약한 사람도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일을 할 수 있게 해 주는 무인 조종 스켈레톤.

이런 걸 노리고 만든 건 아니지만 제법 마음에 드네.

"약자용 스켈레톤 한번 만들어 봐?"

기분이 좋으니 돈 안 되는 일에도 흥미가 생긴다.

"하반신 불구자가 입으면 거동을 도와주는 거동 보조 착용형 스켈레톤. 이건 가능할 것 같은데."

가끔은 착한 일도 좀 하고 살아야지.

그래야 내 이미지도 더 좋아질 것 아니야.

"오! 거기다 휠체어 변형 기능 이런 걸 넣으면 괜찮겠는데?"

물론 당연하게도 귀찮음에 찌든 내가 이렇게 너그러이 다른 사람을 생각할 수 있는 이유는 이 일에 필요한 알고리즘을 내가 만들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었다.

나는 핸드폰으로 백상호 센터장에게 문자를 날렸다.

"장애인 보조해 줄 스켈레톤 연구할 것."

이러면 알아서 연구해 오겠지.

그러면 나는 그걸 적용한 스켈레톤을 약자들에게 저렴한 비용으로 빌려주거나 아니면 정부에 요청해서 약자용 스켈레톤에 대한 국가보조금을 지원 받을 수 있게 하는 거다.

이러면 칭찬도 듣고 나도 기분 좋으니 완벽하지.

물론 뭐, 이걸 해 봐야 돈이 얼마나 벌리겠냐마는, 애초에 이건 내 선심성 사업이니까.

"이건 뭐 거의 기계네, 기계."

말 그대로 약자들이 직접 조종해서 사용하는 기계.

물론 아예 모든 걸 케어해 주는 간호용 스켈레톤을 만들어 자동 알고리즘을 적용할 수도 있긴 하지만, 그럼 요양사들 일자리가 위험할 수 있으니 딱 이 정도가 적당하다.

"좋아. 그럼 이걸 만들어서··· 어? 잠깐만. 기계?"

스켈레톤들은 정확히 노동자와 기계의 중간 포지션이었다.

사람처럼 디테일 한 작업이 가능하지만, 동시에 기계처럼 같은 동작을 무한정 반복하는 게 바로 스켈레톤이었으니까.

그리고 난 이걸 이용해 노동력이 많이 드는 사업을 적극적으로 밀어 왔지.

하지만 이건 다시 말하자면 중간 포지션인 스켈레톤은 노동자가 될 수도 있지만 동시에 기계가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자동차 공장의 자동화 설비, 이건 전부 기계잖아."

자동차 공장뿐만 아니다.

기계를 이용한 자동화 설비는 인건비가 올라가며 점점 그 비중이 높아져 가고 있었으니까.

"노동자가 아니라 기계의 영역으로 한번 가 봐?"

정확히 말해서 로봇.

예를 들어 자동차 공장에 문을 조립하는 자동화 로봇 대신 뼈로 만들어진 스켈레톤을 놓는 거다.

이것들은 이미 인간의 영역이 아니기에 일자리 논란도 없을뿐더러 스켈레톤 하나하나에 세금을 부가하자는 미친 소리에서도 자유로울 것 아닌가.

"게다가 그런 로봇이나 기계들은 가격도 더럽게 비싸잖아."

한 대당 억대는 우습게 넘어가는 게 그 로봇들이니까.

거기에 공장마다 만드는 제품과 공정이 모두 다르기에 그 공장에 최적화된 자동화 로봇을 주문해야 하는데, 이렇게 되면 그 로봇은 오직 그 공장에서만 쓸 수 있어 범용성이 극히 제한적이다.

당연히 그런 만큼 중장비처럼 빌리는 건 말도 안 되고, 대당 억대가 넘는 돈을 전부 주고 사야 한단 말이지.

하지만 스켈레톤은 언제든 알고리즘을 수정하거나 아니면 해체해서 다시 만들면 그만이니 그 제한에서 자유롭기에 판매가 아닌 렌탈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오호?"

사업을 키우거나 새로 할 때 가장 돈이 많이 드는 것이 바로 자동화 공정.

그런데 이때 저렴하고 효율 좋은 스켈레톤을 자동화 로봇보다 훨씬 싼 가격에 파는 것이 아니라 빌려주면?

기업들 입장에서 가장 부담이 되는 자동화 설비 가격을 압도적으로 아낄 수 있으니 이거야말로 윈윈 아닌가.

"기계와 로봇은 종류도 많고 각 공장마다 하는 일이 워낙 다양해서 하나하나 조율해 줘야 하는 게 문제긴 한데, 그거야 백 센터장이랑 강사들 갈아 넣으면 되고."

물론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할 필요는 있다.

이러다가 로봇을 대체할 스켈레톤과 노동자를 대체할 스켈레톤의 경계가 모호해질 수 있으니까.

그간 사람의 손이 필요했던 작업을 스켈레톤으로 대체한 다음 노동자가 아니라 자동화 기계를 들여다 놓은 거라고 우길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럼 일단 인간의 힘과 속도를 벗어나는 수준의 일을 해 주는 걸 로봇용 스켈레톤으로 구분하자."

이러면 일단 문제는 없겠지.

나는 눈을 빛내며 말했다.

"그래. 이제 로봇 산업이 아니라 스켈레톤 산업으로 간다."

62화

시대 자동차 그룹은 재계 서열 3위이자 한국의 자동차 시장을 장악한 회사였다.

하지만 최근 내연 자동차의 시대가 저물어가고 전기 자동차가 부상하며 큰 기회이자 동시에 도전을 하게 된 시대 자동차 그룹의 주찬영 회장은 고민이 많았다.

"자금 조달이 쉽지 않겠어."

내연 기관 자동차 제작에 초점이 맞춰진 기존 시대 자동차의 공장은 급변하는 상황 속에 애물단지로 전락했다.

여전히 내연 자동차 수요가 있기에 공장을 멈춰 세울 수도 없고 그렇다고 언젠가는 사라질 내연 기관 자동차를 계속 붙들고 있을 수도 없는 일.

그렇기에 주찬영 회장은 큰 결단을 내렸다.

전기 자동차를 위한 새로운 대규모 공장을 만들기로.

그러기 위해서 가장 먼저 생각한 게 바로 자동화 로봇이었다.

한국에서 손꼽히는 대기업답게 직원 하나하나의 인건비가 워낙 높아 늘 자동화 공정 확충을 원해왔지만 기존 공장은 직원들의 결사 반대로 인해 지지부진한 상황.

그러니 새로운 공장은 아예 처음부터 자동화 로봇의 비중을 최대한 높일 생각이었는데 이게 비용이 만만치가 않다.

"미국에만 15조. 한국에 50조."

미국과 한국에 각각 새로운 자동화 로봇 시스템이 완비된 주찬영 회장이 원하는 규모의 새로운 공장을 만드는데 들어가는 추정 금액이었다.

물론 한번에 전부 쏟아 붓는 것이 아니라 5년에 걸쳐 투자될 금액이었지만 아무리 재계 3위의 공룡 기업이라 해도 매해 십조 원이 넘는 돈을 투자한다는 건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금융권의 도움을 받고 채권을 발행해 자금을 조달하려 했는데 최근 세계적으로 금리가 오르며 그에 대한 이자 부담이 만만치 않았다.

"65조원 중 30조를 빌린다면 이자만 한 해에 거의 2조원이 나갈 텐데···"

아무리 돈 많은 재벌 회장이라 해도 이자 아까운 건 똑같으니까.

이럴 거면 차라리 투자 규모를 줄여서 이자를 아끼는 쪽이 나은 거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

"이럴 때마다 스켈레톤이 너무 아쉽단 말이지."

지금 자동화 시스템을 도입하려는 이유가 어떻게든 인건비를 절약하기 위해서인데 세론은 그런 부분에서 완전히 자유로우니까.

주찬영 회장이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한 회장이 스켈레톤만 빌려주면 완벽하겠지만···그럴 리 없겠지."

일자리 강탈 우려가 있는 업종은 아예 손도 대지 않을 정도로 한지혁이 일자리에 얼마나 민감한지는 이미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유명하니까.

"일단 고민을 더 해보자. 아직은 시간 있으니까."

그렇게 신규 공장 관련 일을 마무리하려던 그때.

비서실에서 내선 전화가 걸려온다.

"무슨 일이죠."

-회장님. 세론 한지혁 회장님께서 연락이 왔습니다.

"한 회장이?"

-스켈레톤 관련해서 회장님과 이야기를 좀 나누고 싶다고 하시는데요.

"스켈레톤?"

설마 직원을 대체할 스켈레톤을 빌려주려는 건가 하는 기대가 살짝 생겼지만 이내 그럴 리 없음을 다시 상기한 주찬영이 말했다.

"뭐지? 설마 시대 건설 때문에 그런가?"

시대 자동차 그룹의 계열사 중 하나인 시대 건설 역시 세론 렌탈의 건설용 스켈레톤 단골 고객이었으니까.

-그게 아니라 스켈레톤 자동화 시스템을 말씀하시던데요.

자동화 시스템을 언급하자 바로 미팅을 추진한 주찬배 회장.

나는 그런 주찬배 회장에게 길게 끌 것 없다며 바로 자동차 공장으로 가서 보여주겠다 제안했고 그렇게 주찬배 회장과 함께 도착한 시대 자동차 공장.

나는 거기에 설치되어 있는 로봇을 살펴보았다.

"이야. 티비에서만 보던걸 실물로 보내."

팔만 있는 형태의 로봇이 움직이며 문짝도 붙이고 용접도 하며 자동차를 만들어간다.

나는 눈을 빛내며 말했다.

"과학 기술의 발전이 참 눈부셔. 저런 것도 만들어내고."

그러자 옆에 있던 백상호 센터장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회장님이 그런 말씀을 하시면 안 되는 거 아닙니까? 사람들은 스켈레톤을 더 신기해하던데."

"그런가."

나는 문과 출신이라 이쪽에 대해선 하나도 모른다고.

"아무튼 그건 그렇고 구현 가능하겠습니까?"

내 말에 백상호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 정도는 일도 아니죠. 만들어만 주십시오."

"오케이."

나는 곧바로 아공간에서 뼈를 꺼내 즉석에서 대형 스켈레톤의 팔만 만들어낸 다음 바닥에 뼈를 깔아 지지대를 만들어 고정시켰다.

"추가로 이쪽에 작게 보조용 팔 하나 더 달아주시면 됩니다. 대형 스켈레톤 팔이 문을 잡고 있으면 이 예비용 팔이 용접을 하는 방식이죠."

백상호의 말대로 대형 스켈레톤 팔뚝에 보조용 팔을 하나 더 만든 나.

"됐습니까?"

"예. 그런 다음엔···"

그렇게 형태가 완성되자 백상호가 로봇의 동작을 살피고는 대형 스켈레톤의 각종 관절 부위를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에 A87 명령어 넣어주시고 여기는 C117 여기는···"

지금 백상호가 말하는 영어와 숫자는 그간 백상호와 강사진들이 정립해온 알고리즘 명령어들의 명칭이었다.

예를 들어 A87은 상하좌우로 조절이 가능하며 동시에 프로그래머가 스켈레톤 콘솔로 조종이 가능하게 구현하는 명령어 이런 식으로 말이다.

그렇게 백상호와 강사진들의 거듭된 연구로 점점 학문으로서 모습을 갖춰가는 스켈레톤 알고리즘 덕분에 내 일도 점점 편해졌지.

그저 백상호와 강사진들이 해달라는 대로 해주기만 하면 끝이니까.

내가 마법진을 열어 백상호가 말한 명령어를 입력해주자 백상호가 자기 소유의 콘솔을 꺼내더니 미세 조종을 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이쪽으로 움직이고···스탑. 그런 다음 손가락 끝에 용접기가 있다 가정하고 이렇게 움직이면···끝!"

그렇게 간단히 완성시킨 로봇용 스켈레톤.

그 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던 주찬배가 말했다.

"이걸로 끝이라고요?"

백상호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예. 이제 이 작동버튼을 누르면 됩니다. 한번 눌러보시겠습니까?"

그 말에 주찬배가 콘솔에 달린 버튼을 꾹 누른다.

그러자 백상호의 말처럼 옆에 있는 기계처럼 움직이기 시작한 거대 스켈레톤 팔.

물론 관절간의 길이가 달라 로봇과 완전히 일치하는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지만 결과물은 같았다.

백상호가 계속해서 같은 동작을 반복하는 거대 스켈레톤 팔을 툭툭 치며 말했다.

"여기에 달린 보조용 팔에 용접 장치만 설치하면 이 기계와 완전히 똑같이 일을 처리할 수 있습니다. 물론 미세 공정율을 올리기 위해 세부 조율은 더 필요하지만요."

"···이렇게 순식간에 로봇과 같은 기능을 하는 팔을 만들어내다니."

주찬배가 백상호를 바라보며 말했다.

"혹시 시대 자동차로 올 생각 없으십니까?"

그러자 백상호라 흠칫하더니 이내 손을 저으며 말했다.

"저는 세론에 영원히 묶인 몸이라서요. 그래도 회장님에게 그런 소리를 들으니 솔직히 영광입니다."

나는 백상호를 툭툭 치며 말했다.

"축하 드려요. 스카우트 제의도 받으시고."

"···어차피 제가 배운 것들은 회장님이 없으면 아무 의미도 없잖습니까."

그러니까 안심하고 장난친 거지.

나는 주찬배를 보며 말했다.

"자. 저희 센터장은 그만 탐내시고 어떻습니까? 이 스켈레톤 팔. 아니 스켈레톤 로봇."

"순식간에 설치가 가능하고 하는 일도 똑같으니 문제는 역시 가격이죠. 얼마에 파실 생각이십니까?"

"그전에 저 로봇팔 저건 얼마짜린가요?"

내 말에 주찬배가 비서를 보며 말했다.

"얼마지?"

그러자 여기저기 연락을 해본 비서가 말했다.

"10년전 1억 5천에 일본에서 수입해온 거라고 합니다."

나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10년전에 1억 5천이었으면 지금은 더 비싸단 소리네요?"

"현재는 최신기종을 2억에 팔고 있습니다."

"와우."

생각보다 더 비싼데?

아무래도 조금의 오차도 있어선 안 되는 작업이기에 그만큼 비싼 로봇을 쓰는 거 같았다.

"거기에 유지비도 있을 거 아닙니까. 고장 나면 고쳐야 될 거고 주기적으로 점검도 해줘야 할거고."

"···그렇습니다."

완벽하다.

나는 주찬배에게 말했다.

"이거 한달 임대료 3백. 어떻습니까?"

"파는 게 아니라 렌탈이란 말입니까?"

"예. 대신 유지 보수도 전부 저희가 해드리고요."

내 말에 주찬배의 동공이 잠시 흔들린다.

하지만 이내 평점심을 되찾은 주찬배가 말했다.

"그 가격이면 오히려 스켈레톤이 더 비싼 거 아닙니까? 한달 300에 10년이면 3억 6천인데다 기간이 길어지면 가격차이는 더 벌어질 텐데요."

"원래 렌탈이란 게 그런 거잖습니까. 대신 초기 투자비용을 극단적으로 줄일 수 있죠. 세상에 자기 돈만으로 사업하는 사람은 없으니 은행 이자랑 이런 거 저런 거 고려하면 오히려 이쪽이 나을걸요?"

로봇은 1,000개만 설치해도 1,700억인데 내 스켈레톤은 한 달에 30억만 내면 되니까.

"게다가 생산량이 감소해서 일을 오래 쉬어야 할거 같다? 그럼 렌탈 취소하세요. 저희는 약정 같은 거 없거든요. 그러다 뭐 다시 필요하면 다시 신청하시고. 그럼 바로 복구해드리죠."

분명 렌탈 비용전체를 놓고 보면 스켈레톤이 오히려 비싸다.

대략 5년 정도만 되어도 로봇의 가격을 역전할 정도니까.

하지만.

'그 가격이면 대출 없이 그룹 자금만으로도 공장을 만들 수 있어.'

현재 자동화 설비에 투자될 금액이 40조고 그 중 스켈레톤으로 대체할 로봇을 대충 30조원 어치라 잡으면 한해 이자만 2조원.

여기에 1년 렌탈비가 6조원이니 사실상 1년에 4조원만 지불하면 되는 셈이다.

아니면 렌탈로 남게 된 수십 조의 여유 자금을 다른 곳에 투자해 이익을 창출해내도 되고.

'심지어 원하면 언제든 렌탈을 취소 하거나 다시 신청할 수 있다니.'

사업가에게 있어서 가장 두려운 건 예상하지 못한 변수인데 이런 식이면 그런 변수에 얼마든지 유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그것도 방금 보여준 것처럼 주문에서 제작과 설치까지 수개월이 걸리는 로봇과 다르게 그 자리에서 바로.

'거기에다 로봇은 연식이 흐르면 흐를수록 유지비용이 높아져.'

아무리 잘 관리해줘도 세월 앞에는 장사 없는 법.

당연히 비싸게 사온 로봇임에도 시간이 흐르면 잔 고장이 점점 늘어나기 마련이며 심할 경우 고칠 수 없는 고장으로 인해 새로운 기계를 사다가 대체해야 하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지금 공장에서 기계 유지 보수비용만 한 해에 수천억이 소모되고 있잖아. 심지어 신규 공장은 규모가 규모인 만큼 그 비용이 더 늘어날 거고.'

그런데 스켈레톤은 그에 대한 걱정이 전혀 없다.

애초에 소유권이 세론에 있는 만큼 유지 보수에 대한 책임도 세론에게 있으니까.

'초기 투자금을 아낄 수 있는데다 유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고 심지어 유지보수도 알아서 해준다? 심지어 전기세도 안 나가고?'

결국 결정을 내린 주찬배가 말했다.

"조용한 곳으로 가서 좀 더 자세히 이야기를 나눠봅시다. 한 회장."

주찬배가 어떻게든 가격을 깎으려 했지만 나는 단호했다.

최소한 그 정도 가격은 되어야 나도 마력 써가며 유지해주지.

결국 시대 자동차에서 내연 기관 라인 일부를 전기차 전용 라인으로 바꾸는 사업에 세론 렌탈이 참여하여 테스트를 해보고 그 다음 최종 결정을 내리기로 결정한 주찬배.

대신 팔 모양은 너무 볼품없으니 최대한 로봇과 비슷한 외향으로 제작하는 조건이긴 하지만 돈만 된다면이야 그 정도 쯤은 아무것도 아니지.

"뭐. 테스트 해보나 마나 아니겠어?"

여기에 아낀 돈을 다른데 투자해 수익을 낼 수 있는데 굳이 생돈 전부 박아가며 공장을 만들고 싶을까?

이건 아파트 사면서 대출 없이 전액 현금으로 사겠다는 것과 다를 바 없는 행동이다.

그 사이 오를 아파트 값과 대출 받아 아낀 돈으로 주식을 하든 뭐를 하든 투자로 생길 추가 수익도 생각해야지.

아니면 뭐 아낀 돈으로 빌라 사서 월세를 받아도 되고.

비유가 너무 서민적이었나?

아무튼.

"크. 시대 자동차 공장에 스켈레톤 쫙 깔리면 볼만하겠네."

로봇이 아닌 스켈레톤 팔이 차를 조립하는 공장과 그걸 옆에서 보조하는 사람 직원.

이 얼마나 완벽한 조합인가.

나는 백상호를 보며 말했다.

"알고리즘 준비는 어때요?"

"순조롭습니다. 애초에 말이 좋아 로봇이지 저희가 평소 해오던 일이랑 별반 다를 바 없으니까요."

그건 그렇지.

이번 것만 해도 그냥 바닥에 대형 스켈레톤 팔만 박아 넣은 수준이었으니까.

하지만 뭐 어때.

돈만 잘 벌리면 되지.

"그나저나 회장님. 앞으로 로봇 산업을 대체하시겠다고요."

"예."

"그럼 로봇에 대해 잘아는 사람한테 조언을 좀 구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조언을 구하자고?

"굳이요?"

지금도 잘 하고 있는데.

"수많은 과학자들이 지금도 로봇에 대해 연구를 하고 있지 않습니까? 당연히 그 중엔 기술력 부족으로 실현하지 못한 로봇들도 있을 거고요. 그런걸 파악해서 스켈레톤으로 구현하면 나쁘지 않을 거 같아서 말입니다."

오!

그거 좋은 아이디어다.

로봇을 연구하며 그간 사람들이 축적해온 아이디어를 스켈레톤으로 구현한다?

"그거 좋네요. 근데 그걸 그렇게 쉽게 알려줄까요?"

"그거야 뭐. 하기 나름 아니겠습니까? 아이디어에 대한 비용을 지불해도 되고 아니면 아예 이쪽으로 전향시켜도 되고요."

"이야. 백 센터장님 오늘 아이디어가 막 샘솟나 봅니다?"

로봇 연구자들을 스켈레톤 연구자로 전향시키면 부족한 연구 인력 충원도 되고 그들이 가진 노하우도 활용할 수 있으니 일석이조.

"오케이. 한번 추진해보죠."

한국의 유명 사립대 로봇 공학과 교수 이도진.

한국에서 로봇과 관련해서 가장 높은 명성을 지닌 사람이라기에 바로 연락했지.

기왕이면 최고인 사람이 좋을 거 아니야.

다행히 흔쾌히 만나준 이도진 교수.

"로봇에 대해 알고 싶으시다고요?"

"예. 로봇이 어디까지 발전했는지 그리고 로봇이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 등등이 궁금해서요."

"경쟁자에 대해 파악이라도 하시겠다는 말씀 같군요. 스켈레톤은 로봇과 매우 흡사하니까."

역시 머리 좋은 사람답게 단번에 내 의도를 파악한 이도진.

"그건 저보고 제 밥그릇을 제 손으로 던지라는 말이나 다름없는데···"

"돈은 넉넉히 지불하겠습니다. 좋은 뭔가가 있으면 로열티를 드릴 생각도 있고요."

그러자 침묵하던 이도진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돈 때문에 한 말이 아니라서요. 새로운 시대의 흐름에 엎어질 밥그릇은 지켜봤자 의미가 없는 법이죠."

스켈레톤을 새로운 시대의 흐름에 비유한 이도진.

영입각인가?

"그리고 사실 저는 스켈레톤이 모든 로봇을 대체하지는 못할 거라 생각해서 말입니다. 앞으로 로봇 산업이 발전하면 전세계에 수천 만개. 아니 수억 개가 넘는 로봇이 필요할 텐데 아무리 한 회장님이라 해도 그 정도까지 불가능할거라 생각해서요."

그건 그렇지.

내가 세론에서 50만 언데드 군단을 이끌고 있을 때도 여유가 있었고 심지어 지금 만드는 일꾼 스켈레톤은 마력 소모도 적어 그 몇 배도 가능하다 생각하고는 있지만 아무리 나라도 그렇게 많은 스켈레톤을 만들고 유지하는 건 불가능하다.

나는 입맛을 다시며 생각했다.

'영입은 안되겠네.'

그때 이도진이 태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무튼 로봇에 대해 알고 싶으시다라···좋습니다. 알려드리죠. 대신 제 질문 몇 가지만 대답해주신다면요."

"말씀하시죠."

"저는 예전부터 늘 궁금했습니다. 세론은 왜 일자리에 그렇게 민감할까."

전혀 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나는 잠시 침묵하며 말했다.

"당연히 민감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스켈레톤이 일자리를 빼앗았다며 난리칠 텐데."

"방금도 말했듯 시대의 흐름에 엎어질 밥그릇은 지켜본들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세론이 일자리를 지켜준다? 그럼 결국 언젠가는 로봇이 그 일자리를 빼앗게 될 겁니다. 들어는 보셨을 겁니다. AI와 로봇의 4차 혁명으로 일자리들이 사라질 거라는 이야기는."

"그 로봇을 지금 스켈레톤으로 대체하려는 거 아닙니까."

내 말에 이도진이 태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결국 일자리 침탈 염려에 세론은 정확히 딱 로봇의 역할만 빼앗을 거 아닙니까."

"그렇···죠?"

"그럼 밀려난 로봇은 다시 또 다른 종류의 사람 일자리를 빼앗을 뿐입니다. 결국 늦건 빠르건 마찬가지라는 거죠. 그럼 그때 가서 다시 또 로봇을 스켈레톤으로 대체하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어···이런 대화는 예상 못했는데.

"저는 로봇 공학자지만 동시에 로봇으로 변화할 미래 역시 연구하는 학자입니다. 로봇으로 모든 산업이 대체된 미래. 어떨 거 같습니까?"

"난리가 나겠죠. 일자리가 사라질 테니."

그래서 지금까지 일자리에 민감하게 반응했던 거고.

그런데 이도진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분명 일자리는 사라질 겁니다. 하지만 반대로 전에 없던 새로운 일자리가 생겨나겠죠. 예를 들어 세론의 조종사와 프로그래머들. 그것들이 원래 있던 직업입니까?"

나는 멍한 표정으로 말했다.

"없었죠."

"바로 그겁니다. 일자리는 분명 사라질 겁니다. 하지만 세상의 흐름은 늘 새로운 돌파구를 만들기 마련이죠. 산업화 시대 때 기계가 사람의 일자리를 모두 빼앗아갈 거라며 난리를 쳤지만 그들이 모두 일자리를 잃었나요? 아닙니다. 기계의 등장과 함께 새로운 일자리가 생겨났고 모두들 그에 적응했죠."

새로운 일자리가 생겨난다고?

그게 가능해?

애초에 인건비 아끼려고 스켈레톤을 쓰는 건데?

"저는 이것 또한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물론 당연히 그 과정에서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지 못해 도태되는 사람이 나올 겁니다. 하지만 반대로 기회를 잡아 올라가는 사람도 등장하겠죠. 그게 바로 세상의 이치니까."

"새로운 일자리라···"

"예를 들어 로봇의 경우 로봇이 일자리를 빼앗아 가지만 동시에 로봇을 만들어야 하며 관리해야 하는 일자리가 생길 수 있겠군요."

"이건 좀 경우가 다르지 않습니까. 애초에 스켈레톤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저뿐인데."

"예를 드는 것뿐입니다. 저 역시 미래는 알 수 없으니까요. 하지만 그 새로운 돌파구를 찾을 수만 있다면···"

이도진이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지금 세론을 얽매고 있는 일자리 침탈이란 한계를 돌파하여 더 위로 도약할 수 있지 않을까.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63화

원래는 로봇 관련 정보를 얻고 겸사 겸사 인재를 빼올 생각이었는데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를 듣고 나니 뭔가 멍해진다.

"빈자리를 대체할 새로운 일자리가 생겨난다고?"

뭔가 머리 좋은 사람이 한 말이라 그런지 너무 그럴싸하게 들린다.

하지만 만약 저 말만 믿고 무차별로 스켈레톤을 뿌렸다가 새로운 일자리가 안 생겨나면?

그럼 내가 그간 평온한 은퇴를 위해 해온 노력이 완전히 물거품이 되는 셈.

"세론이랑 협력사 모두 사람 직원 비율이 3퍼센트 수준이잖아."

아무리 생각해도 이걸로 스켈레톤이 빼앗은 일자리만큼 채우는 게 가능할 리가 없단 말이지.

"프로그래머를 늘려? 아니면 조종사?"

그렇게 계속해서 생각해봤지만 아무리 떠올려봐도 이것만으론 부족하다.

평소 같으면 귀찮아! 그냥 살래! 하면서 때려 쳤을 텐데 묘하게 이도진이 마지막에 했던 말이 머릿속을 맴돈다.

"새로운 돌파구를 찾으면 일자리 침탈이란 한계를 돌파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라."

지금까지 세론은 남들 눈엔 미친듯한 성장을 해온 것처럼 보이겠지만 사실 극도로 절제하며 움직이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그건 좋은 사람으로서 은퇴를 하기 위해 한국 사람의 일자리가 겹치지 않는 산업만 키워왔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걸 돌파할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렇게만 된다면.

그렇게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돌파구를 찾을 수만 있다면 세론은 그야말로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성장할거다.

"세상의 흐름이라···"

이도진은 말했다.

세상의 흐름에 따라 돌파구는 자연스럽게 만들어진다고.

"정말 그럴까? 진짜 무조건 미친 듯이 스켈레톤을 만들면 새로운 일자리가 생겨서 모두 적응한다고?"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닌데.

"아오. 그냥 로봇 정보 들으러 간 건데 갑자기 이게 뭐야."

잠시 침묵하던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말했다.

"일단 패스."

물론 정말 이도진의 말대로 변화가 있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 변화가 기대 이하라면?

그리고 그 원망이 나에게로 쏟아진다면?

내가 평생을 꿈꿔온 평화로운 은퇴는 그걸로 끝이다.

"일단 하던 일이나 열심히 하자."

팔의 외형이 아니라 기계처럼 만들어진 스켈레톤 로봇이 자동으로 자동차를 만들어간다.

문을 붙이고 용접을 하고.

정해진 모델만을 만들기에 한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하게 일을 수행해내는 스켈레톤 로봇.

"하하. 이거 정말 대단합니다. 한 회장."

주찬배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로봇보다도 더 로봇 같아요."

"만족하셨다니 다행입니다."

그러자 주찬배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뭔가 기운이 없어 보이는데 괜찮으십니까?"

"아. 예."

일이나 하기로 마음먹었지만 여전히 이도진의 말이 잊혀지질 않는다.

만약 정말 가능하다면 세론의 무한 도약도 꿈은 아니니까.

당연히 세론이 무한 도약할수록 언데드 군단의 재건은 빨라지고 내 은퇴 역시 빨라지겠지.

그때 주찬배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나저나 혹시나 해서 말인데 일꾼 스켈레톤도 배치가 가능하겠습니까? 여기야 기존 라인을 뜯어 고친 거니 기존 직원들이 있지만 신규 공장은 말 그대로 신규 공장이라 일자리 침해 우려도 없지 않습니까."

어떻게든 인건비를 한 푼이라도 아껴보려는 너무나도 당연한 사업가의 마인드.

이런 사업가들이 즐비한 세상에서 정말 자연스럽게 새로운 일자리들이 나올까?

"회장님."

"예."

"혹시나. 정말 만약에 제가 일꾼 스켈레톤 배치를 거절해서 사람직원을 고용하셨어요. 그런데 갑자기 그 일을 대신해줄 로봇이 개발되어 나온다면···쓰실 겁니까?"

그러자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하는 주찬배.

"당연히 씁니다."

"직원들이 모두 잘릴 텐데?"

"자르지야 않죠. 천천히 규모를 줄일 뿐인 거지. 갑자기 대량 해고를 할 수는 없으니까요."

대량 해고를 할 수 없기에 안 할 뿐 할 수 있다면 그 자리에서 바로 모든 직원을 로봇으로 교체하겠다는 의미.

"정말 의미가 없구나."

"예?"

이도진은 내가 아무리 로봇의 역할만을 빼앗아 봤자 결국 로봇은 점차 사람을 대체할거고 그 로봇 역할을 다시 스켈레톤이 빼앗는 게 무슨 의미가 있냐고 했다.

물론 그렇게까지 기술이 개발되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결국 언젠가는 도래할 미래라는 말.

"그럼 그렇게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은 어디로 갈까요."

"어디로든 가겠지요. 결국 새로운 일자리는 생겨나기 마련이니까."

이도진과 똑같은 반응.

"물론 재교육 과정이 필요하겠지만요."

"재교육?"

"새로운 일자리가 생기면 그에 대한 교육이 동반되어야 할거 아닙니까."

프로그래머와 조종사들이 그랬지.

말 그대로 재교육이었으니까.

"그걸 어느 정도는 지원해줘야겠죠. 그래야 민심을 달랠 수 있으니."

그걸로 충분할까?

로봇이야 그럴 수 있지만 스켈레톤은 상황이 전혀 다른 거 같은데.

그렇게 내가 생각에 잠겨있자 주찬배가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오늘 한 회장 컨디션이 영 별로인 거 같으니 오늘은 여기까지 하는 걸로 합시다."

"알겠습니다."

"아무튼 스켈레톤 아주 마음에 들어요. 유지 보수 신경 안 써도 되고 초기투자비용도 확 줄일 수있고. 거기에 전기까지 안 쓰니 이보다 좋을 수 있습니까."

···전기?

"잠깐만요. 전기?"

"예. 솔직히 저희 시대 자동차 정도되면 한해 전기세만해도 어마어마한 수준이라서 말이죠."

"전기···전기? 흐름?"

나는 눈을 번쩍 뜨며 말했다.

"아! 흐름! 흐름이 문제였어!"

주찬배에게 양해를 구하고 곧바로 돌아온 나는 노트를 꺼내 여러 가지를 적기 시작했다.

"회사, 시장, 사람."

모든 산업은 원형의 사이클로 돌아간다.

회사는 제품을 만들어서 시장에 팔고 시장은 그 물건을 사서 사람에게 판다.

그리고 그 사람은 그 물건을 사기 위해 다시 회사에서 일하고.

물론 이건 모든걸 함축하여 일차원적으로 그렸을 때 이런 거지만 기본 틀은 변하지 않는다.

"로봇은 전기가 필요해. 전기는 발전소에서 만들고. 그리고 발전소는 기름을 이용해 전기를 만들지. 그리고 이 기름은 사람이 기계를 이용해 땅에서 파 올리는 거고."

그리고 이 사람은 로봇이 만든 제품을 회사에서 일하여 번 돈으로 사겠지.

즉 방향과 횟수는 다르지만 사람과 사회는 모두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거다.

단 한번의 끊김도 없이.

"그래서 자연스러운 흐름이라고 한 거야."

회사에서 모든 직원을 해고하고 로봇을 이용해 아무리 저렴하게 물건을 만들면 뭐하나 그걸 사줄 사람이 없는데.

당연히 이 사이클은 이 연결고리들 중 누구 하나가 강제로 끊는다 해서 끊어지는 사이클이 아니라는 거다.

사람이 로봇으로 대체돼?

그럼 결과는 둘 중에 하나다.

팔 대상이 없어진 회사가 망하거나 사람이 먼저 포기하거나.

그렇게 한쪽이 변화에 도태되어 사라지면 사회의 싸이클은 다시 또 자연스럽게 새로운 연결고리를 찾아 이어진다.

이게 바로 이도진이 말한 자연스러운 흐름인 거다.

하지만.

나는 이 회사에 세론을 대입하고 말했다.

"세론은 이 사이클이 끊어져있어."

로봇으로 사람을 대체해도 결국 로봇을 만들 회사와 그 회사의 직원들이 필요하고 로봇을 구동시킬 전기가 필요하다.

당연히 이렇게 연결된 사이클이 자연스러운 흐름을 발생시키는 거고.

하지만 세론은 전혀 상황이 다르다.

"스켈레톤이 로봇이라면 뼈를 가져다 파는 각성자들이 로봇 회사 역할인 거야."

여기까진 그래도 연결이 되어 있다.

하지만 그 다음이 문제였다.

"마력. 마력은 말 그대로 이 사이클에서 완전히 벗어난 존재야."

스켈레톤을 만들고 구동시키는 마력은 말 그대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거 어떤 것과도 접점이 없다.

물론 마력이 부족하여 정수를 사다가 쓰기는 하지만 그건 고위급 언데드를 만들 때나 그런 거고 평소 일꾼 스켈레톤들을 유지시키는 건 오로지 내 마력에 절대적으로 의지하고 있지.

즉 세론은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연결된 이 사회에서 홀로 한쪽 연결이 끊어져있는 이레귤러이고 이 이레귤러로 인해 생기는 부작용을 해외의 일자리와 산업을 빼앗아오는 방식을 통해 해외에 전가시키고 있었던 거다.

"만약 이 마력을 어떻게든 이 사이클에 포함시킨다면? 그럼 이도진 교수가 말한 자연스러운 흐름이 만들어질지도 몰라."

모든 게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사이클.

이 사이클에 마력을 포함시키면 내가 그간 고민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어떻게?"

이걸 무슨 수로 사이클에 포함시키지?

잠시 고민하던 나는 한가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사람이라면 모두 마력을 가지고 있잖아."

마력은 말 그대로 생명의 원천.

일반인이라 해도 미량의 마력은 누구나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마력은 자연 복원력이 있어 일정량이 소모돼도 계속해서 조금씩 회복하지.

"이걸 이용할 수 있지 않을까?"

세론에 있을 때 나에게 제공해준 마정석이 너무 부담되어 제국에서 한가지 실험을 한적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일반인들이 가지고 있는 미량의 마력을 수천 명 단위로 끌어 모아 인공 마정석을 만드는 것.

하지만 이 실험은 실패하고 말았지.

실패한 이유는 두 가지다.

첫 번째로 세론의 사람들은 모두 마력을 키워야 강해진다는 걸 잘 알고 있기에 설사 일반인이라 해도 자신의 마력을 빼앗아가는 거에 거부감을 느꼈으니까.

물론 인류가 멸망위기에 치달은 상황이라면 그깟 거부감이 문제겠냐 만은 그때쯤이면 내 언데드 군단이 본격적으로 활약하며 마왕군을 밀어붙이던 시기.

당장의 위기감이 어느 정도 해소된 상황에서 자신의 마력을 순순히 건네줄 사람이 있을 리가 없었지.

당연히 제국 역시 이 사실을 알기에 어느 정도 보상안을 준비했지만 이건 자연스럽게 두 번째 실패 요인으로 작용했다.

그것은 바로 제국이 준비한 보상안이 말 그대로 형편없었던 것.

애초에 돈을 아끼려고 일반인의 마나를 모아 사용한다는 발상을 내놓은 거니 보상안이 형편없을 수밖에 없었고 이건 자연스럽게 거부감과 더해져 일반인들의 반발을 불러왔다.

그렇게 일반인들이 반발을 하자 인공 마정석 계획은 조용히 사라졌지.

하지만 지구는 상황이 다르다.

"지구 사람들은 마력을 키워야 된다는 개념 자체가 없잖아."

각성을 통해 능력을 얻는 건 어디까지나 노력이 아닌 운의 개념으로 보는 게 바로 지구의 사람들이다.

물론 SS급이 마력을 아우라라 부르며 통제하고는 있기에 존재 자체는 알려져 있으나 이걸 강화할 방법이나 해야 할 이유가 없는 이상 지구의 일반 사람들에게 있어서 마력은 아무런 의미가 없지.

여기에 더해 지구의 마력은 비싸기까지 하다.

"F급 몬스터 정수 하나가 500만원씩 하잖아."

처음엔 세론의 마정석도 이렇게 비쌌나 하며 긴가 민가 했지만 계속 정수를 사보니 확실히 깨달았다.

지구의 정수는 같은 마력량 대비 세론보다 압도적으로 비싸다는 걸.

S급 스켈레톤 하나 만드는데 정수가 수백 개씩 사용되는데 세론의 마정석은 열 개면 충분했단 말이지.

"사람들의 마력을 모아 인공 마정석을 만드는 대가로 돈을 지불하면?"

그럼 끊어져있던 마력의 연결 고리가 일반인들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사람들은 마력을 제공하여 돈을 벌고 나는 그 마력을 이용해 스켈레톤을 만들고 유지하는 식으로 말이다.

말 그대로 나도 좋고 사람들도 좋은 완벽한 사이클 그 자체.

그때 내 눈에 모든 마력을 소진하여 빛을 잃은 몬스터의 정수가 보였다.

나는 텅빈 정수를 들어올리며 말했다.

"인공 마정석이라···해볼까?"

회장실로 긴급 호출하자 도착한 김덕배를 비롯한 내 측근들.

"지금부터 중요한 실험을 하나 할겁니다."

나는 마력 흡수 마법진을 새겨 넣은 정수를 꺼내 김덕배에게 내밀었다.

"이거 받아보세요. 참고로 무언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도 그냥 얌전히 계셔야 합니다. 그냥 저항하지 말아야 한다고 해야 하나."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저도 설명하기 좀 어렵네요. 일단 한번 해보세요."

그렇게 내가 건넨 정수를 받아 든 김덕배.

"음?"

김덕배가 잠시 고개를 갸웃갸웃 하더니 말했다.

"느낌이 묘한데요."

마력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더라도 몸에서 무언가가 강제로 빠져나가는데 이상함조차 느끼지 못할 리가 없지.

그때 김덕배가 축 처진 얼굴을 하더니 말했다.

"···뭔가 기력이 쇠해지는 느낌인데."

그와 동시에 김덕배가 가지고 있던 마력의 일부가 정수로 전달된다.

"정말로 갑자기 피곤한데 이게 도대체 뭡니까?"

"원래 그런 거에요. 제가 실험 하려고 좀 세게 했거든요. 자. 이어서 다음."

그러자 이번에 받아 든 강찬수도 같은 말을 한다.

"피곤하긴 한데···못 참을 정도는 아닌 거 같습니다."

나이가 있는 김덕배와 달리 젊고 건장한 강찬수는 마력을 흡수했음에도 금방 적응한다.

이어서 백상호까지 모두 테스트를 해보고 다시 정수를 받아 든 나.

나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성공이다."

사람들의 마력을 흡수하는데 성공했다.

물론 테스트는 이게 끝이 아니었다.

어떤 사람들의 마력 보유량이 많은지 그리고 자연회복력이 얼마나 되는지도 확인해야 하니까.

이렇게 측근들을 대상으로 1차 테스트를 마친 다음 공단의 협력사 직원들을 대상으로 2차 테스트를 진행한다.

얼마 정도의 돈이 적당한지 그리고 사람들에게 거부감은 없는지 등등을 말이다.

그렇게 모든 테스트가 마무리 되고 본격적으로 마력을 돈 주고 사 모으면?

"안정적으로 마력을 공급 받을 수 있어."

그렇지 않아도 공급이 부족한 정수라 조금만 내가 무리해서 돈을 주고 사 모으면 가격이 순식간에 폭등해 골치가 아팠는데 이거라면 가격 변동이 거의 없을 거 아닌가.

또한 사람들 역시 어차피 회복될 마력을 돈 주고 팔아 돈을 벌면 비록 직접 고용은 아니지만 세론에서 벌어들인 이득을 일부 공유하게 되는 셈.

"자연스러운 흐름. 한번 만들어보자."

64화

"아으. 집에 가자."

퇴근한 김혜은이 회사를 나서는데 공단 길에 세론의 현수막이 붙어있는 작은 가판대와 사람이 보인다.

"어?"

세론 협력사에 취업하여 일하고 있던 김혜은이기에 호기심이 생겨 가판대로 다가가 말했다.

"세론에서 뭐 하는 건가요?"

가판대에 있던 남자가 친절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희 회장님께서 이번에 새로 시작한 사업을 테스트 중입니다."

"테스트?"

"예. 저도 정확한 건 모르는데 사람들에게 에너지원을 돈 주고 사 모으는 거라네요. 여기 이 정수에 잠깐 손을 올리면 약간의 피로도와 함께 에너지가 소량 흡수됩니다. 그럼 저희는 그 대가로 돈을 드리고요."

에너지가 흡수된다는 말에 거부감을 느낀 김혜은이 말했다.

"몸에 해로운 거 아닌가요?"

"그건 절대 아니랍니다. 아무려면 저희 회장님이 사람들에게 해가 되는걸 하시겠습니까?"

일자리 문제에 대해 과민할 정도로 반응하며 평판을 관리하는 한지혁은 이미 유명했으니까.

"게다가 딱 적정량만 흡수해서 하루만 지나면 바로 복구되는 수준이랍니다."

"하루면 바로 복구된다고요? 흠."

"저도 해봤는데 약간 피곤해지는 거 빼면 크게 변화는 없었습니다. 게다가 이 테스트는 이미 저희 회사 사장단 사장님들도 모두 참여했고요."

한지혁의 측근인 세론 그룹 사장들까지 모두 참여했다니 조금 안심한 김혜은이 말했다.

"한번 해 볼까요. 그렇지 않아도 세론에는 늘 감사해하고 있어서."

"그럼 감사하죠. 우선 과용을 방지하기 위해 카드 등록부터 하겠습니다."

그렇게 간단한 절차를 거친 다음 카드를 리더기에 긁은 남자가 모니터를 가리키며 말했다.

"보이시죠? 그 동안 테스트에 참여한 횟수와 오늘 했는지 여부가 모두 나옵니다. 이제 손을 올려보세요."

"네."

그렇게 순순히 정수 위에 손을 올린 김혜은.

그러자 남자의 말처럼 갑자기 피로감이 약간 몰려온다.

"진짜네. 좀 피곤해지네요."

"그렇죠? 근데 조금 지나면 적응해서 괜찮아지고 잠 한숨 자면 바로 괜찮아집니다."

"그래요?"

그때 남자가 계산기를 열더니 김은혜에게 돈을 건넨다.

"자. 여기 오늘 매입분에 대한 돈 7,000원입니다."

큰 돈은 아니지만 요즘 같은 고물가 시대에 잠깐 손 한번 올리고 한끼 식사비용이 나온다니.

김혜은이 돈을 받으며 말했다.

"아직 쌩쌩한데 한번 더 해봐도 되나요?"

"그건 절대 안됩니다. 회장님이 과용은 몸에 해로울 수 있다 하셔서요."

"그렇구나. 그럼 내일 또 오면 되죠?"

그렇게 매일 퇴근하는 길에 가판대에 들려 에너지를 파는 게 일상이 된 김혜은.

"생각보다 쏠쏠하단 말이야."

주말을 빼고 1주일에 3만 5천원씩 용돈이 생기는 기분.

이쯤 되니 오히려 쉬고 있는 주말에 에너지를 팔지 못하는 게 아쉬울 정도다.

"한달 내내 팔면 21만원이잖아."

그저 잠깐 들리는 것 만으로도 한 달에 21만원 공돈이 생기는 셈.

"어?"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늘 그랬던 것처럼 가판대로 향하는데 가판대에 늘어져있는 사람의 줄이 어마어마하다.

"줄이 점점 길어지네."

처음엔 거부감 때문에 거부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나 주변에서 하나 둘 쏠쏠한 용돈벌이 하는 걸 보며 결국 동참한 사람들.

덕분에 짧은 시간에 용돈을 버는 개념으로 시작한 일이지만 줄 서는 게 일이 되었다.

"그래도 금방 줄어드니까."

등록된 카드를 긁어 오늘 에너지를 팔았는지 확인하고 잠깐 손을 올리는 게 전부이니 줄은 길지만 소화 속도가 상당한 가판대.

그렇게 줄을 서서 기다리다 드디어 자기 차례가 온 김은혜가 자연스럽게 카드를 긁어 확인을 한다음 정수에 손을 올린다.

"여기 7천원입니다."

김혜은이 돈을 받아 들며 말했다.

"그나저나 가판대 늘려야 되는 거 아니에요? 사람 점점 늘어나는데."

"그렇지 않아도 이번 주에 테스트를 종료하고 늘리기로 했습니다. 아! 설치 장소 추천 받고 있는데 혹시 괜찮은 곳 있을까요."

그러자 김혜은 머릿속에 떠오른 건 바로 자신과 가족들이 살고 있는 아파트.

"나이 제한도 있나요?"

"지금은 성인까지만 받는데 앞으로 안전성이 완전히 검증되면 고등학생까지는 늘릴 거라고 합니다."

"그럼 우리 남편이랑 애들 둘까지 하면 한 달에 84만원?"

이렇게 생각하니 용돈 정도로 생각한 게 결코 작은 돈이 아니라는 걸 깨닫는다.

거기에 지금은 은퇴하고 근처 아파트 단지에 살고 있는 엄마 아빠도 생각이 난다.

국민연금만으로 생활이 힘들다며 토로하시기에 늘 용돈을 드리고 있었는데 이거라면 두분 합쳐서 매달 42만원이 생기는 셈 아닌가.

"저희 아파트. 그러니까···"

"회장님. 반응이 아주 뜨겁습니다."

자기들이 사는 장소에 가판대 설치를 추천하는 사람들.

당연하게도 목적은 매일 에너지를 파는 거지.

기왕이면 자기 전에 피로도 한번 올리고 자면 잠도 더 잘 올 테니까.

동시에 매일 돈도 벌 수 있고.

"게다가 가판대가 부족하다 보니 재미있는 상황도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재미있는 상황이요?"

김덕배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가판대에서 먼 위치에 사는 사람들을 버스로 실어다 날라주며 그날 번 돈의 일부를 받는 장사가 성업 중입니다."

"아."

이거구나.

이게 이도진이 말한 자연스러운 흐름에서 발생하는 새로운 일자리의 탄생.

그저 끊겨진 마력의 연결고리를 사회와 접목했을 뿐인데 그러자마자 사람들은 그에 맞춰 새로운 방식으로 생활을 전환해 나간다.

"···신기하네."

사람들은 세론에 마력을 팔아 돈을 벌고 세론은 그 마력으로 스켈레톤을 만들어 일을 시키고 유지한다.

그리고 그렇게 만든 상품을 사람들이 매입하고.

게다가 그 과정에서 방금 김덕배가 말해준 것처럼 그전엔 존재하지도 않던 가판대 운송업까지 등장한다.

나는 창가를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어쩌면 스켈레톤과 사람의 완전한 공생이 가능할지도 모르겠어.'

만약 이게 진짜 완벽히 작동 한다면···그간 세론을 얽매고 있던 족쇄는 완전히 풀어진다.

모두가 행복한 방향으로 말이다.

나는 고개를 돌려 김덕배에게 말했다.

"적극적으로 늘리세요. 일단은 군산시 전체를 목표로."

"알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거동이 힘든 사람도 있겠군요."

에너지를 파는 건 거동이 힘들고 가난한 사람에게 더욱 필요한 것일 테니까.

"그런 사람들을 위한 방문 기사도 모집···아."

바로 새로운 일자리가 또 생겼다.

나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재미있네."

그간 내가 공생이랍시고 해왔던 건 그저 눈 가리고 아웅에 불과했다.

이거야 말로 진정한 인간과 스켈레톤의 공생.

나는 히죽 웃으며 말했다.

"제대로 해봅시다. 나도 이 흐름이 어디까지 흘러갈지 궁금하니까."

군산시 전체로 퍼져나간 에너지 매입 가판대.

이미 공단을 통해 그 존재를 알고 있던 군산시 사람들은 환호했다.

사람 한 명당 약간의 피로감만 감수하면 매달 21만원이 공짜로 생기는 셈인데 이걸 누가 거부하겠나.

거기에다 세론에 대한 호감이 극에 달한 군산시인 만큼 모두들 큰 거부감 없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생활화된다.

그러자 그 가판대로 인해 변화가 생겨난다.

사람들이 가판대로 매일 몰려들자 그 일대에 그들을 대상으로 한 상권이 형성되었으며 사람들을 데려다 주는 운송업과 방문 기사들이 점점 늘어간다.

상황이 이쯤 되자 이제는 아예 영업을 원하는 사람들까지 나타났다.

"영업을 하겠다고요?"

"이동식 가판대를 만들어주면 군산시가 아닌 다른 곳을 다니며 수수료를 받고 사람들에게서 에너지를 사 모으겠답니다."

"푸하!"

원래는 세론에서 자체적으로 가판대를 설치해 운영할 생각이었지만 어쩌면 오히려 이쪽이 효율적이겠다.

굳이 가판대 관리를 하지 않아도 수수료를 받는 사람들이 알아서 마력을 모아올 테니까.

어차피 마력을 사주는 건 세론뿐이니 중간 탈취 걱정도 없고.

"그렇게 하라고 하세요."

게다가 나는 지금 인류와 스켈레톤의 공존을 두고 거대한 실험을 하는 중 아닌가.

자연스러운 흐름이란 게 어디까지 작동할지.

그럼 내가 개입할게 아니라 흐름에 몸을 맡기고 변화를 지켜보는 게 우선이지.

"대신 무분별하게 여러 번씩 사용할지도 모르니 대비는 해두고요."

"그럼 이동식 에너지 매입 가판대에 안전장치를 만들어두겠습니다. 등록 카드를 긁어서 오늘 하루 에너지 판매를 하지 않은 사람만 정수를 만질 수 있도록."

"그거 좋군요."

"그리고 등록 카드 말이 나와서 그런데 카드사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카드사?

"저희 등록 카드를 자사 카드와 연동시켜 직접 현금을 주는 게 아니라 적립해주는 방식이 어떻겠냐고 합니다."

군산시의 사람들에게 세론이 주는 금액만 하루 평균 15억원에 한 달이면 450억.

돈이 이 정도로 몰리는데 카드사에서 안 나서는 게 이상하지.

"이 또한 자연스러운 흐름인 거지. 미팅 잡아서 진행하세요. 그렇게 하는 게 현금 주는 것보다 훨씬 편하겠네. 아. 그럼 카드사랑 영업 사원 연결시켜서 수수료 부과 시스템도 확정해주고요."

"알겠습니다."

"다른 거 또 있나요?"

그렇게 에너지 매입과 관련된 내용을 보고해나가는 김덕배.

그리고 그런 변화의 내용을 들을 때마다 점점 더 흥이 난다.

그간 내가 억지로 공생이라며 만들어온 불완전한 변화가 아닌 말 그대로 사람들 스스로 자신들이 원해서 만들어낸 자연스러운 흐름이었으니까.

"···해서 그렇지 않아도 골치덩어리였던 공중 전화 박스를 활용하는 건 어떻냐는 의견이 나왔습니다."

핸드폰이 보편화되며 사실상 퇴물이 된 공중 전화 박스.

애초에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장소에 설치된 것이 공중 전화 박스이니 에너지 매입 사업에 완전 딱 이었다.

"그거 좋네요. 그럼 무인으로?"

"예."

"하긴. 지금이야 테스트라 직원을 쓰긴 했지만 완전히 정착되면 굳이 사람을 쓸 이유가 없지. 어차피 영업 사원에게 안전장치 구상된 거 주기로 했으니 그거랑 같이 연동해서 만들면 되겠네요. 군산시처럼 시민들의 합의가 된 곳은 아예 에너지 매입 박스를 설치하고 아닌 곳은 영업 사원을 통해 진행하세요."

영업 사원이 돌아다니며 에너지 매입에 대한 거부감을 줄여주고 그렇게 지역 주민들의 암묵적인 합의가 되면 아예 매입 박스를 설치하는 방식.

"알겠습니다."

"더 보고할게 있나요?"

그러자 갑자기 김덕배가 내 눈치를 보더니 말했다.

"그게 최근 에너지 매입이 이슈가 되며 군산시처럼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도 많지만 부정적인 반응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부정적인 반응이라."

"에너지를 계속 빼앗기면 미라처럼 말라버린다는 등 별의별 해괴한 소문이 도는 듯합니다."

그럴 만하지.

사람들 입장에서 이건 전혀 검증되지 않은 완전히 새로운 것이니까.

하지만 이 또한 새로운 연결고리가 생기며 발생하는 변화의 일부.

결국 이것도 흐름에 따라 사라질 거다.

그렇지만 이건 세론 그룹의 이미지가 달린 문제니 가만 내버려둘 수는 없지.

"우 길드장님 초청해서 실험 진행하세요. 우 길드장은 에너지. 그러니까 아우라를 느낄 수 있으니까."

SS급인 우도현이 직접 마력의 변화를 느껴보게 한 다음 그 결과를 영상으로 만들어서 배포한다.

"거기에 왜 에너지를 매입하는지 내용도 포함하세요. 스켈레톤을 만들고 유지하는데 내 힘만으론 부족하다. 그러니 사람들의 에너지를 매입해 만들고 유지한다고."

"그걸로도 진정이 안되면 어떻게 할까요. 이러다간 정치권이 움직일 수도 있는데."

인체에 무해함이 검증되지 않은 에너지 매입.

김덕배의 말처럼 정치권이 움직여 에너지 매입 자체를 막아 세울지도 모른다.

"잘됐네요. 이 기회에 인맥 전부 써먹어보죠."

이럴 때 쓰려고 키운 게 윤호창 도지사 아닌가.

"윤 도지사한테 내가 좀 보자고 연락 주세요."

영상 속 우도현이 직접 에너지도 팔아보고 다른 사람의 에너지가 팔리는 걸 관찰한다.

그리곤 말한다.

-분명 아우라를 빨아들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극 소량이군요. 이 정도라면 세론의 말대로 하루 정도면 전부 회복하고도 남을 겁니다. 오히려 지금보다 1.5배는 더 빨아들여도 무방할거 같은데요.

그러자 세론 그룹 관계자가 말했다.

-사람마다 에너지량의 차이가 있어 최소한으로 잡은 거라 합니다.

-그렇군요. 하긴. 아우라에 있어서 컨트롤이든 뭐든 한 회장님을 능가할만한 사람은 없을 테니. 이 정도면 사람에게 완전히 무해할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렇게 이야기가 끝나자 이번엔 김덕배가 직접 영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세론 그룹의 김덕배입니다. 그간 한지혁 회장님은 스켈레톤을 만들어 새로운 길을 개척해 왔습니다. 하지만 회장님의 힘만으론 한계가 있었죠. 그래서 고안해낸 것이 바로 이 에너지 매입입니다. 에너지 매입을 통해 스켈레톤을 만들고 유지하는 방식이죠. 물론 여러분들의 걱정은 압니다. 하지만 저희는 철저한 실험을 통해 이것이 결코 인체에 유해하지 않다는 것을···

한참을 이어진 김덕배의 설명.

그리고 김덕배의 설명이 끝나자 영상 또한 마무리 되었다.

그러자 영상이 틀어진 티비 옆에 서있던 윤호창이 기자들을 향해 말했다.

"이게 지금 세론이 공개한 실험 홍보 영상입니다. 저는 여기서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느꼈습니다. 이 에너지라는 건 생소하지만 사람이라면 모두가 가지고 있는 공평한 자원 아닙니까. 이 자원을 현금화시킨다? 저는 이거야 말로 혁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윤호창이 당당한 표정으로 말했다.

"능력의 고하 없이 모두가 누릴 수 있는 평등한 복지. 어쩌면 이게 에너지 판매의 진정한 일면이 아닐까요. 정부조차도 모든 사람에게 무상으로 매달 21만원을 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 에너지 매입은 가능하죠. 저는 이걸로 모든 한국 국민의 생활수준이 한 단계 더 위로 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먼저 제안합니다."

윤호창이 기자들의 플래시를 받으며 외쳤다.

"전북을 에너지 매입 특구로 지정하여 이 가능성을 확인해볼 것을 말입니다!"

그때 한 기자가 외쳤다.

"만약 그러다 모든 전북 시민들의 몸에서 이상 현상이 나타나면 어떡합니까."

"저는 그럴 일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당장 저부터도 매일 에너지를 팔고 있고요. 게다가 특구로 지정했다고 해서 무조건 전북 시민 모두가 참여를 강제 받는 건 아닙니다. 팔지 말지는 개인의 판단에 맡겨야죠. 그럼에도 특구를 언급한 건 이 혁명이 될지도 모를 사업의 앞길은 막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에 그런 겁니다."

"하지만···"

계속해서 기자가 태클을 걸려고 하자 윤호창이 말을 끊으며 말했다.

"아무튼 저는 이 혁명으로 인해 대한민국 모두가 공평하게 이 혜택을 누리길 소망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적당히 마무리를 해버린 윤호창.

윤호창은 기자회견을 마치고 나와 각 기관의 장들에게 말했다.

"문제 생기지 않도록 알아서들 처리해요."

그러자 한 기관장이 걱정스럽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데 정말 괜찮은 거 맞을까요. 도지사님."

"괜찮습니다. 제가 확신합니다."

이미 한지혁에게 모든 내용을 전해들은 윤호창이기에 거침없었다.

정말 한지혁의 말대로라면 이 사업은 모든 전북 도민들에게 매달 21만원을 꽂아주는 말 그대로 혜택이나 다름없으니까.

그리고 이 부작용 이슈만 사라지면 가장 먼저 혜택을 받은 전북 도민들은 전폭적으로 이번 결정을 내린 자신을 더욱 지지하겠지.

"자! 바로 움직이세요! 빨리 정착을 시켜야 우리 도민들이 혜택을 볼 거 아닙니까!"

65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