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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화. 산 그 자체

"뭐…?"

잘됐다는 말에 진선미가 눈썹을 찡그렸다.

대놓고 너도 곧 친구들 곁으로 보내 준다고 말한 진선미.

진선미가 원하는 반응은 겁에 질려 살려달라며 비는 모습이었을 것이다.

영화든 현실이든 자주 등장하는 캐릭터 유형.

내가 너 같은 애들을 좀 안단다.

"너 같은 애들이 있더라고. 내가 찐 싸이코다 를 보여주고 싶어서인지 깨발랄한 척하는 애들 말이야."

"이 새끼가 미쳤나, 뭐라는 거야?"

"잘 들어 이년아. 사람들은 널 무서워하는 게 아니야. 지금 자기가 놓인 상황 때문에 겁에 질리는 거지. 너 같은 게 그렇게 진성 싸이코인 척을 해서 무서워하는 게 아니라고."

진선미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무언가를 말하려는 순간.

"으흑…!"

다시 한번 이초희가 참던 울음을 뱉어냈다.

"넌 좀 조용히 해봐 이년…."

옆에서 우는 이초희가 거슬린 건지 진선미가 손을 치켜올렸다.

쩌억!

우다탕!

----!!

그 자세 그대로 날아가 데굴데굴 굴러가는 진선미.

처음부터 너무 세게 때렸나.

나도 모르게 그런 진선미의 뺨을 있는 힘껏 갈겨버렸다.

어디까지 굴러가나 했는데 진선미는 어느새 문진국의 옆까지 도달해있었다.

"어? 뭐… 뭐야."

이런 경우가 처음인지 여기저기서 낄낄대던 자리에 정적이 찾아왔다.

아마 지금까지는 다 살려달라고 빌었으면 빌었지 왕언니 뻘로 보이는 진선미의 뺨을 갈긴 사람은 없었던 듯했다.

"이 미친 새끼가!"

옆에 있던 윤명구가 무언가를 꺼내기 위해 주머니로 손을 집어넣었다.

이 새끼가 있었지.

세상 착한 인상을 하고 사람 등쳐먹는 놈이었기에 더 나쁜 새끼였다.

괘씸한 놈.

푸욱!

뭘 꺼내려고 한 지는 모르겠지만 기다려 줄 생각은 없었다.

그대로 식탁에 있던 포크를 들어 윤명구의 손과 허벅지를 연결 시켜줬다.

"끄아악!" 

"계속 넣고 있어, 사기꾼 새끼."

자리에서 일어나며 앞에 있던 이초희를 뒤로 당겨왔다.

"…!"

쩔었다.

본능적으로 한 행동이었지만 내가 생각해도 멋있는 것 같았다.

행동 하나만으로 내가 지켜주겠다는 강력한 어필을 한 것과 마찬가지인 셈.

영화나 드라마였다면 심쿵 포인트가 아니겠는가.

"으… 으."

뺨을 얻어맞고 날아갔던 진선미가 고개를 들었다.

아직도 자기가 맞았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 듯했다.

저렇단 말이야.

어째선지 자기는 안 처맞을 거라 생각하며 대드는 놈들이 꼭 한 명씩 있었다.

저런 애들은 쥐어패야 한다니까.

조금 전 뺨을 올려붙인 건 참 잘한 행동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뭐해 이 새끼들아! 당장 안 죽이고!"

스윽.

"…!!"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는 진선미 앞으로 문진국의 손이 내밀어졌다.

문진국이 뭐라 한 것도 아닌데 고개를 숙이며 입술을 깨무는 진선미.

저 저 깨갱거리는 거 보소.

"10급 형씨, 어디서 힘 좀 꽤 썼나 봐?"

드륵.

자리에서 일어난 문진국이 조소를 머금었다.

"그 여자 전에 왔던 대학생들도 그랬거든. 능력 하나씩 가지고 데몬도 상대해보고 해서 그런지 자신감이 넘치더라고."

문진국이 엄지를 세워 자신의 목을 그어 보였다.

"그런데 다 뒤졌어, 왜? 키키킥!"

갑자기 웃음을 터뜨린 문진국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댔다.

"사람을 못 죽이더라고. 지들이 뒤질 위험에 처했는데 좀 약한 척하고 살려달라니까 알겠다며 등이나 보이고 말이야, 크큭."

고개를 든 문진국이 날 응시했다.

너 정도는 뻔히 보인다는 건방진 눈빛이었다.

"형씨도 사람 죽여본 적 없지?"

뜨끔.

어떻게 알았지?

"거 사람 죽이는 거, 아무나 하는 게 아니야. 그러니까 형씨도 버둥거리지 말고."

부스럭.

문진국이 한참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 사이.

뒤에서는 윤명구가 무언가를 든 채 슬금슬금 일어나고 있었다.

사람을 죽인다라.

확실히 문진국의 말대로 난 사람을 죽여본 적이 없었다.

죽여보긴커녕 사람과 싸워보지도 못한 상태.

확실히 데몬이랑 사람은 다르긴 하지.

문진국이 저런 말을 뱉는 이유도 알 것 같았다.

보통의 사람은 다른 사람을 해치거나 상처 입히는데 본능적인 거부감과 죄책감을 느낀다.

그러다 보니 상대방이 아무리 짐승 같은 놈이라도 생명을 뺏어야 하는 순간이 오면 망설이거나 주춤거리게 되는 것.

음.

"사람 죽여본 적이 없긴 한데."

씨익.

예상대로라는 듯 미소를 그리는 문진국.

슬금.

쐐에엑.

날카로운 무언가가 목으로 날아들었다.

"앞으로 안 죽일 거라고 생각 한 적은 없어."

"뭐…?"

[잭 더 리퍼]

한 손으로 이초희의 눈을 가리며 반대 손에 있는 면도칼을 뒤로 뻗어냈다.

서걱.

"!"

찰나의 순간에 벌어진 일에 다시 한번 무거운 정적이 찾아왔다.

나에게 칼을 휘두르던 윤명구는 목을 감싼 채 자리에 멈춰 서 있었다.

"영화보면 불살주의니 뭐니 하면서 자기를 해하려는 놈들까지 용서해주는 히어로들 있잖아."

씨익.

당황하고 있는 문진국과 패거리들을 향해 소름 끼치는 미소를 그려주었다.

"제일 싫어하거든."

푸화악!

뒤에서 붉은 핏방울이 솟구쳐 올랐다.

* * *

윤명구의 목에서 피가 뿜어지고 몇 분 후.

'시… 시발. 저거 뭐야.'

문진국이 입을 벌린 채 조금씩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끄아악!"

푹! 푹! 서걱!

분명 국가 소속 10급 헌터라고 했었다.

9급도 아닌 10급.

동네 코흘리개나 칠순이 넘어간 노인들도 할 수 있는 급수였다.

'저게… 10급이라고?'

믿기지 않았다.

손에 시뻘건 면도칼이 생겨남과 동시에 시작된 학살극.

백운은 웃옷을 벗어 이초희의 머리에 덮은 뒤 면도칼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사… 살려…!"

스걱.

"끄르륵."

문진국의 패거리에도 전투에 특화된 능력자들이 있었다.

교도소에서도 한 끗발 날렸던 싸움꾼도 있었다.

하지만, 누가 됐든 지금은 모두가 평등했다. 

면도칼을 들고 있는 백운에겐 갓난아이처럼 아무것도 못 한 채 썰리고 있는 패거리들.

꿀꺽.

마른침이 넘어갔다.

이런 기분은 처음이었다.

항상 반대편 입장에 서 있었기에 눈앞에 있는 인간의 공포와 비명을 즐기기만 했었다.

"자… 잠깐만. 내가 잘못…!"

푹.

"꺽!"

엉금엉금 뒤로 물러나던 진선미에게 면도칼이 날아들었다.

'아… 악마다.'

악마라는 단어 말고는 눈앞에 있는 남자를 설명할 길이 없었다.

다른 이보다 몇 박자는 빠른 움직임 때문이 아니었다.

면도칼이 지나가는 곳마다 솟아오르는 새빨간 피의 분수.

백운은 그런 상황이 익숙하다는 듯 새빨간 피를 뒤집어쓰면서도 조금의 표정 변화조차 없었다.

사람을 한 번도 죽여보지 않았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수십의 사람을 죽여온 자신조차 첫 살인을 하기까지는 많은 망설임과 시도가 있었는데.

저렇게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살아있는 사람의 목을 긋다니 말이 안 됐다.

"후우…."

진선미를 마지막으로 백운이 한숨을 내쉬었다.

5분?

아니다.

3분도 걸리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 낄낄거리며 숨 쉬던 열댓 명의 패거리가 지금은 빨갛게 물들어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뚝. 뚝. 뚝.

"!!"

그리고 잠시 후, 다가오기 시작했다.

저벅.

온몸에 칠해진 피엔 아랑곳 않는, 진짜 악마가.

* * *

"너 뭐냐, 그 표정."

어이가 없었다.

바지에 오줌을 지린 채 바닥에 엎어져 있는 문진국.

이 인간이 정녕 조금 전까지 그렇게 기세등등하게 말하던 인간이 맞나 의심이 들었다.

"무서워서 그런 거면 양심 참 없다, 너도."

탁! 하고 맥이 풀리는 것 같았다.

너무나 자신만만하고 확신에 찬 말투에 나도 마지막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있었다.

내가 모르는 강한 능력을 가지고 있을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어이가 없다, 어이가 없어.

하지만, 저 표정을 보니 아닌 것 같았다.

순식간이긴 했지만 패거리들이 다 죽을 동안에도 문진국은 그저 오줌이나 뽑아내고 있었다.

천천히 걸어 문진국에게 다가갔다.

"자… 잠깐! 잠깐만!!"

문진국이 허겁지겁 손을 내저었다.

설마.

"설마 살려달라고 하려는 건 아니지?"

아무리 미치광이 살인마라고 해도 최소한의 양심은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다른 죄 없는 사람들은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죽였으면서 말이다.

"나… 날 죽이면 안 돼!"

이건 또 무슨 개소리지?

살려달라는 것도 아니고 죽이면 안 된다니.

"나랑 거래한 데몬! 내가 죽으면 그 거래가 끝나! 그럼 너네도 끝이라고!"

아까 데몬과 거래를 했다느니 마느니 하더니 그건 사실인 모양이었다.

신기한 능력일세.

잘 어울리는 능력이기도 하고.

사람을 아무렇지도 않게 죽이는 싸이코패스 살인마에게 딱인 능력이었다.

"이… 이제 비용을 지불해야 할 시간이야!"

"아니 근데 이 새끼가 아직도 비용 타령을 하고 있네."

"진짜야! 당장 비용을 지불하지 않으면 거래가 깨질 거라고!"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진 않았다.

혹시 모르니 이야기를 조금 더 들어본 후 죽여도 늦지 않을 것 같았다.

"기회 줄 테니까 얘기해 봐."

스윽!

물어보기 무섭게 문진국이 손을 들어 이초희를 가리켰다.

"당신이랑 내가 살려면 당장 살아있는 인간을 비용으로 지불해야 돼!"

"…."

괜한 걸 물은 듯했다.

말할 기회를 주자마자 저런 소리를 지껄이다니.

"불합격."

핏.

면도칼이 붉은빛을 내며 문진국의 손목을 스쳐 지나갔다.

"어?"

순식간에 지나간 면도칼에 문진국이 눈을 꿈뻑였다.

워낙 순간이라 무슨 일이 일어난 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푸확!

"끄아아아!"

솟구친 피와 함께 문진국의 몸이 뒤로 넘어갔다.

"으아악! 살려줘!! 제발 살려줘!"

문진국이 뒹굴며 소리를 질러댔지만 무의미한 짓이었다.

"근처에 아무도 없잖아. 뭐하러 그렇게 소리를 질러."

그런 문진국을 뒤로하고 이초희에게 다가갔다.

뒤덮어진 옷을 끌어안고 귀를 막은 채 덜덜 떨고 있는 이초희.

이초희가 놀라지 않도록 낮은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전 초희 님 아버지 부탁으로 온 사람이에요."

"!!"

아버지란 단어에 옷 너머로 놀라는 게 느껴졌다.

스윽.

옷 밑으로 받아왔던 사진을 밀어 넣었다.

조금이지만 떨림이 줄어들고 있는 이초희.

조금만 더 진정이 되면 데리고 내려가면 될 것 같았다.

우르르릉.

…?

이초희가 진정되기를 기다리고 있을 때.

발아래로 정체불명의 진동이 울려왔다.

지진인가?

"끄… 끄르…. 다… 다 죽었어… 이제."

숨이 끊어지고 있는 문진국이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쿠쿠쿠궁!!

서 있기조차 힘든 진동에 이초희를 챙겨 주변을 살폈다.

어디냐!

뭘 하길래 이런 진동이 생기는 건지 모르겠지만. 

땅이 이 정도로 울릴 정도라면 분명 거대한 크기의 데몬이었다.

우르르르르릉!!

그렇게 두리번거리며 문진국과 계약했다던 데몬을 찾고 있을 때.

이런.

데몬이 보이지 않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어어어어--!!

무언가의 울음소리가 귀를 찢을 듯이 울려 퍼졌다.

정확히는 산 전체에 메아리처럼 퍼지고 있었다.

- 그리고 저 산, 저거 원래 없었어.

오르기 전에 만났던 할머니의 말이 떠올랐다.

그땐 무슨 말인가 했었는데.

꿀꺽.

말 그대로였네.

본능적으로 깨달아버린 사실에 천천히 고개를 내렸다.

이 산이….

으득.

데몬이다.

47화. 마운티거

곡성의 어느 경찰서.

"으으! 지겹다 지겨워!"

순경 김수찬이 기지개를 켜며 밖으로 걸어 나왔다.

끝나지 않는 당직 근무.

거의 퐁당퐁당 하루건너 하루 당직이었다.

"하아. 난 왜 여기로 오게 된 걸까."

한숨이 절로 나왔다.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여기로 배치되었단 말인가.

멋있는 제복을 입고 서울에서의 도시 라이프를 꿈꿨었는데.

후릅.

"이거라도 있으니까 사는 거지."

믹스 두 개가 들어가 무척이나 달달한 커피.

당직 중에 마시는 이 커피마저 없었다면 아마 우울증에 걸렸을 것이다.

"사방이 그냥 다 산이네 산이야."

앞에도 산, 뒤에도 산, 옆에도…?

"어?"

옆에도 산이 있어야 했다.

그리고 산이 있긴 있는데 무언가 이상했다.

미묘하지만 위치가 바뀐 듯한 느낌.

"뭐… 뭐지? 새벽도 아닌데 잠이 덜 깼나."

구우우우우우----!!

김수찬이 스스로를 의심하려는 찰나.

엄청난 굉음이 울려 퍼졌다.

"으… 어!"

잘못 본 게 아니었다.

산이 움직이고 있었다.

"뭐야! 무슨 소리야!"

퇴근 준비를 하다 말고 뛰쳐나온 이경장.

굳어 있는 김수찬의 눈을 따라간 이경장의 입이 벌려졌다.

"저게 뭐야?"

"어… 어떡하죠? 이경장님."

꿀꺽.

침을 삼키며 심호흡을 한 이경장이 몸을 돌렸다.

"뭘 어떡해!! 군이든 국가 헌터든 빨리 연락 돌려!!"

* * * 

이런 샹.

갑자기 죽어있는 문진국이 다르게 보였다.

무슨 얼빠진 데몬이 저런 놈이랑 거래를 했나 했는데 마운티거라니.

소식주의여서 가능한 건가.

엄청난 몸집을 자랑하지만 멈춰있는 마운티거에게 필요한 건 최소한의 양분이었다.

보통은 산으로 착각하고 올라온 등산객을 먹이로 삼는다고 들었는데 이곳 곡성은 사람의 발길이 끊긴 장소였고, 가능하다면 움직이는 걸 싫어하는 마운티거의 특성상 편안한 식사를 제공받기 위해 문진국과 계약을 한 것 같았다. 

하이라이트 제조기 새끼.

지금까지 발견된 데몬들 중에서도 손에 꼽는 크기를 자랑하는 마운티거.

크기가 거대한 만큼 헌터와 싸울 땐 항상 장관을 연출하던 녀석이었다.

이걸 어쩐다.

별다른 공격 능력이 있다거나 움직임이 빠른 건 아니지만.

문제는 크기였다.

아무 능력이 없어도 크기가 작은 산과 맞먹다 보니 걸음만 걸어도 재해 수준이었다.

"꺄악! 대… 대체 무슨 일이!"

쿠구구구---!

마운티거가 서서히 일어나고 있는 건지 지대가 점점 높아지고 있었다.

지금 서 있는 곳이 마운티거의 어느 부위인지를 모르니 일단 피하고 봐야 했다.

"초희 님, 괜찮으시죠? 내려갈 거예요."

"네… 네!"

다행이라면 이초희의 멘탈이 멀쩡하다는 것이었다.

문진국과 진선미가 있을 땐 죽을 거라는 공포 때문에 울음을 터뜨렸지만, 지금은 또렷한 눈으로 내 말을 잘 알아듣고 있는 상태였다.

쿠우…!

"어… 어떻게 내려가죠?"

마운티거가 일어나며 경사는 가팔라지고 있었다. 

산의 지형 역시 바뀌기 시작해 길을 알아보기 힘든 상태.

어쩔 수 없구만.

조금 더 여유로울 때 첫 개시를 하고 싶었는데.

살아 움직이는 산에서 이초희를 데리고 평범하게 하산한다는 건 불가능했다.

잘 부탁한다.

[비전 수리검]

* * *

곡성으로 출발하기 전날.

사찰에서 얼마 안 떨어진 숲속으로 향했다.

꿀잠 좀 자려고 했더니.

광산에서 피렌조와 싸운 뒤. 

오랜만에 마음이 편한 오늘이었다.

밤바람도 선선하겠다 각 잡고 사찰에서 늘어지게 자볼 생각이었는데 실패하고 말았다.

비전 수리검.

낮에 무기고에 넣은 수리검이 계속해서 머리에 떠올랐다.

당장 누가 날 잡아먹는 것도 아니기에 급할 게 없는데도 이상한 일이었다.

얼른 써보고 자자.

"후우웁."

시원한 산바람을 들이켠 뒤.

[비전 수리검]

무기고에서 수리검을 꺼내 들었다.

가만히 들고만 있는데도 거대한 수리검의 묵직한 무게가 느껴졌다.

가운데 일자로 된 손잡이를 중심으로 네 방향으로 뻗어 있는 곧은 삼각형의 날.

무게 봐라.

회귀 전 TV에서 봤을 때도 겁나 무겁겠구나 했었는데.

직접 들어보니 수리검은 예상했던 것보다 두세 배는 더 묵직했다.

그냥 팔 힘만으로 계속 던지는 건 무리겠는데.

그만큼 무거웠다.

대충 팔만으로 던지다간 탈골이 되어도 이상하지 않은 무게.

힘 자체는 늘어나지 않는 건가?

잭 더 리퍼나 유탈라스 같은 경우엔 신체의 능력 역시 함께 증폭됐었는데 지금은 아닌 것 같았다.

수리검이 크다곤 하나 이 정도까지 무겁게 느껴지다니.

작은 크기의 표창 던지기까지는 아니더라도 별 힘을 들이지 않고 던질 수 있을거라 생각했는데 너무 욕심이었나 보다.

어떻게 던져야 잘 던졌다고 소문이 나려나.

잠시 고민하던 찰나, 올림픽 종목 중 하나인 투포환을 떠올렸다.

엄청난 무게의 쇠공을 원심력으로 내던지는 스포츠였다.

그렇게 여러 바퀴 돌 필요까진 없다.

슥.

수리검을 든 팔을 내린 뒤 무게를 느낀 뒤 발을 내디디며 몸을 회전시켰다.

회전을 하자 수리검에 힘이 실리는 게 느껴졌다.

이대로 힘을 잘 살려서.

던진다.

회전력이 실린 수리검을 앞으로 냅다 집어 던졌다.

후우웅!!

응?

예상보다 엄청난 소리를 내며 수리검이 전방으로 나아갔다.

쿠직!

경로에 놓여 있는 것들을 가르는 건 기본이었다.

드드… 쿵.

드드… 쿵.

경로에 있던 나무들이 몇 그루 쓰러지고.

쾅!!

암벽에 도달한 수리검에서 굉음이 터져 나왔다.

쾅… 요?

소리를 듣고 지켜보고 있음에도 믿기지 않았다.

잘못 생각했네.

수리검을 꺼내며 몸의 힘은 전혀 늘어나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경로에 있던 나무는 물론이고 도착지점에 있던 암벽을 완전히 박살 내버린 수리검.

이런 효과가 날 정도로 세게 던져서가 아니었다.

더럽게 무거운 거다.

겨우 한 바퀴의 회전력을 실어 수리검을 날려 보냈다.

그만큼 속도도 빠르지 않았다.

그런데도 암벽을 부순다? 이건 그저 수리검이 미친 듯한 무게를 가지고 있기에 가능한 것이었고, 이런 수리검을 던진 나 역시 힘이 크게 늘어나 있단 증거였다.

의심해서 죄송합니다, 비전 수리검 님.

그리고 아직 끝이 아니었다.

도윤이 기억 속에서 피렌조를 봉인의 문까지 끌고 갔던 기술.

무슨 느낌이려나.

순간이동.

만화나 애니메이션에서는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기술이었다.

항상 순간이동을 하는 사람은 무슨 기분일까 궁금했었는데.

드디어 오늘 그 궁금증을 풀 수 있을 것 같다.

"휴우우."

작은 심호흡을 한 뒤 머릿속으로 단어를 떠올렸다.

[비전]

팟.

!!

내가 내 의도로 사용했지만, 놀라웠다.

휘이이.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나무들 사이에 서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발아래로 느껴지는 수리검의 묵직한 쇠의 무게.

쩐다.

눈 깜짝할 사이, 내 위치는 암벽에 박혀 있던 수리검 위로 옮겨져 있었다.

* * *

쿠구우--!

"초희 님,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점점 기울어져 가는 땅에 호다닥 달려가 이초희를 들쳐 엎었다.

"네!"

돌발행동에 깜짝 놀랄 거란 예상과 달리 또박또박 대답을 하는 이초희.

역시 보통 멘탈이 아니다.

"조금 이상할 수도 있어요!"

비전으로 이동하는 기분은 뭐라 말로 설명하기 힘들었다.

굳이 설명하자면 찰나의 순간 빛이 되어 원래 위치부터 수리검까지 날아가는 느낌이랄까.

초희 님 정도는 거뜬하다.

다시 사찰로 돌아가기 전 몇 가지 확인 겸 테스트를 했다.

기억 속에서 피렌조를 끌어안고 함께 이동했던 도윤.

추후 실전에서 제대로 사용하려면 내가 함께 비전할 수 있는 한계를 몸에 익혀야 했다.

무기왕의 능력 때문인지 머리로는 어느 정도 파악이 된 상태지만, 중요한 건 실전.

- 비전.

그렇게 시작된 수십 번의 테스트.

주변에 있는 작은 돌멩이부터 꺾인 나무, 박살 나 있는 암벽 덩어리까지 여러 가지로 테스트를 진행했었다.

그 결과,

내가 들 수 있는 건 함께 비전이 가능하다.

라는 한계점을 설정했다.

손을 얹고 있는 게 다 함께 비전됐다면 사기였을 텐데. 

아쉽게도 그러진 않았다.

나름 양심이 있는 무기.

거기다 비전 역시 이동 가능한 거리는 무한대가 아니었다.

수리검이 육안으로 보이는 거리.

거기까지가 나의 이동 가능한 최대 거리였다.

그래도 쿨타임은 없으니까.

수리검의 또 다른 장점이었다.

몇 개의 무기를 더 모으고 나서야 쿨타임이 사라졌던 면도칼과 달리, 수리검엔 처음부터 쿨타임이 존재하지 않았다.

팔이 뒤지게 아프긴 하지.

물론 팔이 버텨줘야 했다.

어제 테스트를 하느라 던져댄 여파가 아직까지 남아있을 정도로 수리검을 던지는 건 팔에 무리가 갔다.

이게 어디냐.

적을 한 방에 전멸시키는 강력한 능력은 없었지만 여러 상황에 이동기로 써먹을 수 있는 유틸형 무기.

지금 이 순간만 해도 가뭄의 단비 같은 능력이었다.

"후웁."

이초희를 들쳐메고 몸을 몇 바퀴 회전시킨 뒤.

후웅!

마운티거와 마을에서 최대한 먼 곳으로 수리검을 집어 던졌다.

콰앙!

멀리까지 날아가 굉음과 함께 먼지를 일으킨 수리검.

수리검이 도착했다는 걸 확인한 후 비전으로 몸을 옮겼다.

"휴, 도착."

"!!"

이상하다고 미리 말한 걸론 부족한 듯했다.

이초희가 깜짝 놀란 토끼 눈이 되어 날 바라보고 있었다.

그럴만도 하네.

마운티거 쪽을 바라봤다.

처음 있던 곳에서 한 방에 키로미터 급으로 멀어졌으니 이런 반응도 무리가 아니었다.

"초희 님, 여기서 잘 숨어 계세요."

"!"

무언가 말하려다 망설이는 이초희.

맞다.

"전 백운이에요."

"아! 백운 님도 여기 같이 있어요. 다른 헌터들이 곧 도착할 거예요."

저도 그러고 싶네요.

마음 같아선 다른 이들이 도착할 때까지 숨어있고 싶었다.

아무리 곡성이라도 주변 큰 도시엔 마운티거를 상대할만한 화력의 화기나 버금가는 능력을 가진 헌터들이 존재할 터.

지금 당장 저놈을 쓰러뜨릴 방법이 마땅치도 않다 보니 그들을 기다렸다 가는 게 나아 보이긴 했다.

그럼 지옥 가겠지.

문제는 밥 시간을 놓친 마운티거가 화가 많이 나 있다는 것.

마운티거가 저 걸음걸이로 조금만 걸어도 처음 내가 도착했던 마을이었다.

어그로라도 끌어야 한다.

내가 잡진 못하더라도 다른 이들이 올 때까지 시간을 벌어야 했다.

어차피 문진국을 죽인 나한테 제일 화나 있을 테니까.

씨…씨익.

미소를 지으며 엄지를 치켜세워 보였다.

"잘 숨어 계세요, 그럼!"

"아! 조… 조심하세요!"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거의 다 일으킨 마운티거를 바라봤다.

액션 캠 켜고.

쓰러뜨릴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캠을 켰다.

저벅.

앞으로 걸어나가며 몸을 회전시켰다.

"으랴아!"

후웅!

빠르게 마운티거의 근처로 날아가는 수리검.

수리검이 어딘가로 박히기 전, 마운티거 근처 적당한 허공에 도달했을 때 비전을 사용했다.

팟.

와씨.

이동과 동시에 욕이 튀어나올 뻔했다.

빠른 속도로 날아가는 수리검의 위.

수리검 아래는 그야말로 아찔 그 자체였다.

일단 나 좀 쳐다봐라.

[앤 보니&메리 리드]

발아래를 지탱해주던 수리검이 사라지고 양손에 리볼버가 생겨났다.

"여기 봐라! 나무 새끼야!!"

[빛의 구원]

48화. 불장난

빛의 탄환이 마운티거에게 뻗어 나갔다.

콰가가가가!!

닿자마자 시원하게 마운티거를 갉아나가는 탄환.

쉴새 없이 탄환을 뿌리며 아래를 바라봤다.

시… 시발.

절대 잊어서는 안 되는 사실이 있었다.

난 지금 하늘에서 추락하며 총을 쏘고 있다는 사실을.

잊으면 그대로 추락사다.

개무섭다.

온몸으로 느껴지는 바람의 저항을 느끼며 마른침을 삼켰다.

어딘가에 발을 디디고 쏘는 것과는 천지차이였다.

그나마 마운티거의 크기가 커서 아무대나 쏴도 맞는 게 다행이었다.

아니었다면 발아래를 신경쓰느라 다 빗나갔을 터.

우어어어---!!

열심히 총을 쏜 보람이 있는 걸까.

마운티거가 천천히 몸을 돌리기 시작했다.

효과가 있다.

다행이었다.

시원하게 뻗어 나간 탄환이 앞에 있는 지반을 박살 내고 있었지만, 산 그 자체인 마운티거에게 있어선 그리 큰 데미지가 아니었다.

이 정도 데미지로 나를 돌아봐 준다는 건 무척이나 감사해야 하는 일.

거기다 밥 시간을 방해한 게 나란 것도 알 테니.

마운티거가 왜 최대한 몸을 일으키지 않았겠는가.

사람으로 치면 극한의 귀차니즘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한참 모자라지만 문진국 같은 놈이라도 잡아 계약해 먹이를 구해오게 한 것.

그런 마운티거를 시원하게 일으켜 세웠으니 아마 날 찢어 죽이거나 다른 사람으로 배를 채우기 전까진 멈추지 않을 터였다.

후우우우웅!

[비전 수리검]

가까워져 가는 지반을 바라보며 다시 수리검을 꺼내 들었다.

리볼버를 벌써 집어넣어야 한다는 게 아쉬웠지만 조금 더 미뤘다간 내가 추락사할 것 같았다.

일단 살고 생각하자.

뒤에 있는 산으로 수리검을 던졌다.

쿵!

수리검이 박히는 걸 확인하자마자 몸을 옮겼다. 

슥.

아직도 고개를 돌리고 있는 마운티거.

어그로는 끌었고.

날 바라보게 하는 건 성공했으니 이제 누군가 도착할 때까지 신나게 도망치기만 하면 된다.

되는데….

만약 아무도 안 온다면?

늦은 시간에 곡성이라.

결국 누군가 오긴 하겠지만 몹시 늦게 올 경우도 고려해야 했다.

시선을 계속 끌며 저 마운티거의 엄청난 공격 범위에서 도망치려면 수리검의 비전이 필수적인 상황.

무한대로 던질 순 없다.

사용시간이나 쿨타임은 없지만 내 팔이 견디지 못하기에 타임리밋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마냥 세월아 네월아 도망만 치다 아무도 도착하지 않으면 그대로 마운티거에 깔려 쥐포가 되고 말 터.

마운티거의 약점.

산에 가면 항상 조심하라고 귀에 못이 박히게 듣는 게 있다.

바로 산불.

작은 불씨만으로도 커다란 산을 홀라당 다 태워버릴 수도 있기에 산에 오르는 사람들은 항상 불조심을 강조한다.

저놈한테는 유일하게 불조심을 안 해도 되니까.

산 그 자체인 마운티거 역시 불에는 쥐약이었다.

몸집을 다 때려 부수는 방법도 있지만 그건 마운티거의 크기를 봤을 때 쉽지 않은 일.

쉽게 번지게 만들 수 있는 불이 마운티거에게 가장 많은 데미지를 줄 수있는 방법이었다.

지반은 알아서 약해진다.

몸에 있는 나무와 풀을 태워버릴 때마다 마운티거의 생명력은 줄어들고 동시에 몸을 지탱하고 있는 바위와 토반은 약해진다.

박살 내는 건 나중의 일, 일단은 다 태워버려야 했다.

불을 어디서 구해야 되나.

이럴 때 무기고에 불에 관련된 무기가 있으면 참 좋았을 텐데.

지금은 당장 없다는 게 아쉬울 따름이다.

시골이라 주유소도 없을 거고.

시골 중에서도 상시골인 곡성의 마을.

어디 민가에 쳐들어가서 LPG가스라도 뽑아오지 않는 이상 불을 구할 방법이 없어 보였다.

아. 

순간 문진국과 진선미가 있던 요새가 떠올랐다.

분명 첫 만남 때 화기를 들고 있었던 몇몇의 인원.

거기다 요리까지 했으니 불이 아니더라도 가스통 혹은 기름이라도 있을 터였다.

스윽.

고개를 들어 요새가 있는 위치를 가늠했다.

아까 저쯤에서 던졌을 테니까.

마운티거가 일어서면서 어느 정도 위치가 달라졌겠지만 워낙 움직임이 둔한 녀석이었다.

오차가 있더라도 크진 않을 듯했다.

부디 기름이랑 화기가 가득하길.

속으로 소박한 기도를 한 후.

후웅…!

마운티거를 향해 수리검을 던졌다.

* * *

"빨리 다 깨워서 오라고 해!"

곡성 근처의 소규모 헌터 지부.

이제 막 퇴근의 달달함을 느끼려던 헌터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시랑 군 헌터 지부는!?"

연락 담당인 헌터가 고개를 내저었다.

"높은 급수 중엔 가용한 헌터가 없다고 합니다. 일단 가능한 헌터라도 보내준다고는 하는데 그마저도 꽤 오래 걸린다네요."

"헌터 중앙처에서 마운티거에게 긴급 현상금을 붙여 준다고는 합니다. 주변에 프리랜서 헌터라도 있으면 와 줄 겁니다."

으득.

지부를 이끄는 5급 헌터 오태구가 인상을 찌푸렸다.

웬만한 데몬이라면 보통 오태구의 선에서 끝낼 수 있었다.

하지만 마운티거는 아니었다.

아무리 대인전에서 강한 능력을 가졌더라도 압도적인 크기를 가진 마운티거에겐 무소용.

불 능력자 같은 화력이 강한 헌터가 필요했다.

'나타난 위치가 외진 곳이라 다행이지만… 마운티거의 걸음이라면 시내까지도 금방이다.'

지금은 근처의 경찰서에서 마을 주민들을 대피시키고 있다고 했다.

살고 있는 사람이 워낙 소수다 보니 마을 사람들의 대피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문제는 주거지역이 밀집해 있는 시내였다.

'거긴 오래 걸릴 텐데.'

서울만큼은 아니지만 시내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살았다.

오밤중에 일어나 도망치라 해도 길이 제한 되어있는 이상 제 시간 안에 모두가 피할 수 있을지가 의문이었다.

'어떻게든 지체라도 시키자.'

고개를 돌린 오태구가 당황하고 있는 부하들을 바라봤다.

배치된지 얼마 안 된 인원도 있는데 다짜고짜 산이랑 싸우라니.

저런 표정을 하고 있는 것도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안 갈 수는 없는 노릇.

"마운티거는 공격 자체가 강한 녀석이 아니다! 기름, 가스통, 수류탄 할 것 없이 불을 낼 수 있는 건 다 챙겨!"

"예!"

명령을 전달한 오태구가 장비를 챙겨 문으로 향했다.

"최대한 빨리 간다!"

* * *

빙고.

감을 따라 도착한 산속의 마을.

마운티거가 움직이며 기울고 부서지고 아수라장이 되었지만 쓸만한 게 많이 놓여있었다.

이 새끼들은 탈옥하면서 뭘 훔쳐온 거야.

도움 될 만한 걸 찾다 보니 도착한 집.

집 안엔 별의별 화기가 다 놓여있었다.

유탄 발사기부터 기관총, 수류탄까지.

생긴 것 뿐만이 아니라 갖추고 있는 화력 역시 요새라 부를 만했다.

우우우우우우우---!!

와씨.

아주 느리지만 저 멀리서부터 마운티거의 손이 다가오고 있었다.

날 쥐포로 만들겠다는 일념을 담은 채 말이다.

호다닥.

혀를 내두르는 걸 멈추고 재빠르게 소총과 수류탄 몇 개를 챙겨 담았다.

모기가 이런 느낌이었나.

먹고 살기 위해 어깨에 앉아 피를 빠는 모기.

그 모기의 입장에서 다가오는 사람의 손을 생각해보니 지금의 나와 비슷할 것 같았다.

다음엔 한 번 봐주자.

무기를 다 챙긴 뒤 음식을 내오던 주방으로 달려갔다.

여러 개의 LPG통과 휘발유 통이 놓여있는 주방.

주방에 왜 이런 것들이 모여있나 궁금했지만, 중요하지 않았다.

영화에서나 보던 건데.

놓여있는 노끈을 이용해 LPG통에 수류탄을 연결 시켰다.

기름통은 몸이 버텨주는 만큼 최대한 등으로 둘러멨다.

우어어어어어---!

다시 한번 마운티거의 손 위치를 확인한 뒤.

옆에 있는 철막대를 집어 밖으로 달려나갔다.

부디 지옥 가시길.

엎어져 있는 살인마의 옷을 찢어 막대에 감은 다음 기름통에 한 번 담궈줬다.

칙!

라이터로 불을 붙이니 훌륭한 휴대용 횃불이 탄생했다.

예상대로 활활 타오르는 기름 횃불에 고개를 한 번 끄덕여 준 후,

팅.

수류탄의 핀을 뽑은 가스통을 사방으로 굴려버렸다.

경사를 따라 데굴데굴 잘 굴러가는 가스통.

콰앙! 콰앙! 콰앙! 콰앙!

잠시 후 수류탄과 함께 가스통이 폭발하기 시작했다.

화륵!

동시에 생겨난 불씨까지.

폭발 지점을 중심으로 마운티거의 몸에 불이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모자르다.

불은 계속 커지겠지만 마운티거의 전체에 번지려면 한참 걸릴 것 같았다.

가볼까.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명확했다.

어릴 적부터 어른들이 하지 말라고 누누이 말했던 것.

자기 전에 하면 오줌 싼다고 했던 그것.

불장난.

* * *

"우오오오오!"

잭 더 리퍼를 꺼내 들고 열심히 내달렸다.

왼손엔 면도칼, 오른손엔 급조한 횃불이 들려 있었다.

화르륵!

급조했지만 효과는 확실했다.

날씨가 건조해서인지 횃불이 닿았다 하면 무섭게 불이 옮겨붙고 있었다.

우아아아아아아----!!

왠지 모르게 분노가 더 쌓인 듯한 울음소리.

화날 만하지.

모래알만 한 모기 새끼가 빈혈이 일어날 정도로 피를 빨아먹고 있으니.

어찌 화를 안 낼 수 있겠는가.

휙!

메고 있던 휘발유통 하나를 내던지고 K2 소총을 겨눴다.

탕! 퍼엉!

그대로 적중해 주변으로 불붙은 기름이 흩뿌려졌다.

흐뭇.

이래 봬도 군 시절 특등사수였다 이 말씀이야!

다시 내달리며 불을 붙이기 시작했다.

길이 끊기면 수리검을 던져 이동했고 달릴만한 곳이 있으면 다시 면도칼을 꺼내 빠르게 불을 질렀다.

꽤 돌아다닌 거 같은데.

마운티거의 몸 전체를 돌진 못했다.

하지만, 내가 굳이 다 돌 필요는 없었다.

화마가 무서운 속도로 마운티거의 몸을 집어삼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어어어어---!

마지막 남은 기름까지 탈탈 털어 마운티거에게 부은 뒤 반대쪽 산으로 몸을 이동시켰다.

장관이네.

몸 대부분이 활활 타고 있는 마운티거.

워낙 덩치가 크다 보니 대낮이 된 것처럼 사방이 밝아져 있었다.

쩌적!

괴로워하던 마운티거의 몸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됐다!

몸을 감싸고 있던 나무와 풀들의 소실로 몸을 지탱하는 힘이 많이 약해진 것.

이제 화력을 쏟아 약해진 마운티거의 본체를 박살 내면 됐다.

이쯤이면 누가 와야 할 텐데.

쿠웅!

…!?

누가 안 왔나 고개를 두리번거리던 찰나.

몸부림치던 마운티거가 서서히 방향을 틀었다.

지금까진 몸에 불을 지르는 날 잡기 위해 바둥거렸었는데.

이젠 공격이 아닌 생존으로 방향을 튼 모양이었다.

이런 샹.

불은 지를 만큼 다 지른 상태.

불에 타면 탈수록 마운티거의 몸은 약해지겠지만, 시간이 필요했다.

저쪽은 시내 방향인데…!

온몸이 활활 타고 있는 산, 마운티거.

죽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불을 질렀지만 저런 게 시내로 나갔다간 재앙이었다.

타앙! 펑! 다다다다다! 

…!

그런 마운티거의 발아래로 탄과 미사일이 부어졌다.

마을에서 가까운 곳에 있던 헌터들인 것 같았다.

반가운 이들이었지만,

부족하다.

전투 계열이라 할지라도 이런 거대한 적에게 통할 만한 화력을 가진 헌터는 소수였다.

지금 도착한 이들 중엔 충분한 화력을 가진 헌터들이 없는 듯했다.

어떡하지.

헌터들의 공격에도 마운티거는 방향을 바꾸지 않았다.

급격히 줄어든 생명력을 채우기 위해 가벼운 공격쯤은 무시하려는 듯했다.

쿵… 쿵… 쿵.

천천히지만 조금씩 멀어져 가는 마운티거.

쩌저적!

몸 자체는 많이 약해진 상태였다.

꿀꺽.

- 콰아앙!!

산산조각 났던 옹달샘의 거북이를 떠올린 뒤, 마운티거의 머리 위를 바라봤다.

될까?

확신은 안 섰지만, 할 수밖에 없었다.

해보자.

심호흡을 한 뒤 몸을 일으켰다.

[비전 수리검]

49화. 지키다

현장에 도착한 오태구와 헌터들.

"최대한 다리로 쏟아부어!"

팀원들에게 지시한 오태구가 마운티거를 쳐다봤다.

도착했을 때부터 이미 활활 불타고 있었던 마운티거.

자기들 외에 먼저 도착한 사람이 있는 것 같았다.

'저렇게 전체에 불을 붙여놓다니.'

마운티거는 불에 약하기에 불을 놔야 한다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고, 불을 놓는 행위 역시 어려운 건 아니었다.

단지, 유의미한 데미지를 주기 위해선 그만큼 넓게 불을 질러야 한다는 게 어려운 일이었다.

'누군지 얼굴이나 보고 싶군.'

저렇게 불을 붙인 걸 보니 적어도 불과 관련된 능력자인 듯했다.

어찌 됐든 누군지 모를 헌터 덕에 마운티거는 상당한 타격을 입은 상태였다.

우어어어어---!

문제는 마무리였다.

아무리 약해졌더라도 여전히 규모는 엄청난 마운티거.

저런 거대한 녀석에게 마지막 큰 한 방을 먹일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다.

'거기다 저놈이 향하고 있는 방향은… 시내다.'

시내도 조금 전 대피를 시작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최소 필요 시간은 세 시간.

아무리 못해도 세 시간 동안 마운티거의 발을 묶어놔야 했다.

'가능할까…?'

오태구가 개방한 능력은 들고 있는 도끼를 강화시키는 엑스 인첸트.

대인전에선 강한 능력을 발휘했지만 마운티거에게 있어선 있으나 마나 한 능력이었다.

두두두두두… 쾅!

고개를 돌려 화기를 쏘고 있는 팀원들을 바라봤다.

모두가 최선을 다해 퍼붓고는 있지만 마운티거는 시선조차 주지 않고 있었다.

냉정하게 봤을 때 마운티거의 발을 잡아두는 건 불가능한 일.

'다가가서 도끼질이라도 하고 싶은데.'

이 역시 불가능한 일이었다.

엄청난 크기인 만큼 한 발자국 한 발자국이 위협적이었다.

조금만 틀어지더라도 그대로 깔아뭉개질 수 있었다.

"지… 지부장님, 어떡하죠? 멈추질 않습니다."

"데미지를 주고 있는 게 맞는지도 헷갈립니다!"

팀원들의 말대로였다.

계란으로 바위치기.

불에 의해 마운티거의 몸은 많이 약해져 있었지만 그렇다고 대인전에서나 사용하는 화기에 데미지를 입을 정도는 아니었다.

'딱 한 방… 한 방이면 되는데… 정말 없는 건가.'

몸 곳곳에 붉은 균열이 생긴 걸 봤을 때 한 방이면 될 것 같았다.

마운티거를 눕힐 수 있는 커다란 한 방 말이다.

번쩍.

"…!?"

"조금 전에 뭔가…?"

오태구가 쏘던 화기를 멈추고 조금 전 빛이 발생한 곳을 응시했다.

마운티거에게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위치였다.

번쩍!

또다시 반짝이는 빛.

"저… 저게 뭐야?"

오태구를 포함한 모두가 빛에 시선을 집중시켰다.

주기적으로 계속 반짝이는 금색 빛.

빛은 계속해서 마운티거의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 * *

되나?

후우웅… 팟.

될까?

후우웅… 팟!

백운아 진짜 되겠냐아아!!

내면이 의문 섞인 비명을 질렀다.

조금 전, 천천히 걸어가는 마운티거를 보며 미친 생각이 떠올랐다.

- 콰아아앙!

옹달샘에서 시원하게 깨부숴버렸던 거북이 쉨.

강도로만 따지면 거북이의 등딱지가 마운티거보다 몇 수는 위였다.

차이가 있다면 크기에 따른 엄청난 밀도 정도였다.

거북이를 부술 때는 아래에서 위로, 그것도 물속에서 올라가는 상태였다.

반대로 내가 빠르게 떨어지는 상황이라면?

당연히 그때보다 훨씬 더 강한 힘이 실릴 것이었다.

등껍데기를 다 깨부수고도 기스 하나 안 났던 유탈라스의 비늘.

비늘이라면 반대의 경우에도 날 지켜줄 수 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꽈아악!

그렇게 급조된 싸구려 생각에 의한 결과가 이것이었다.

현재 몸이 있는 곳은 공중.

마운티거보다 조금 더 위인 위치였다.

빙글.

몸을 한 바퀴 돌려 수리검을 하늘로 던졌다.

바람을 가르며 시원하게 뻗어 나가는 수리검.

[비전]

팟.

현재 내가 반복하고 있는 행동이었다.

수리검을 하늘로 던지고 시야에서 벗어나기 전 비전을 사용해 이동한다.

그리고 다시 잡은 수리검을 또 하늘로 던진다!

구름이 점점 가까워지네.

열심히 하늘을 향해 올라가고 있는 현재 소감이었다.

별은 왜 안 가까워지는 걸까.

이쯤 되니 별생각이 다 들었다.

아마 본능이 정신줄을 놓지 않기 위해 아무 생각이나 쏟아내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이 든다.

이런 생각이라도 쏟아내지 않으면.

시… 시발….

아래를 향해 고개를 돌리게 될 테고 그럼 잔뜩 멀어져 있는 지상과의 거리에 기절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건 적셔도 무죄다.

맨날 농담으로 지리겠다는 표현을 썼었는데 그 대가를 오늘 받을 것 같았다.

내 판단은 과연 옳았나?

벌써 정신이 아찔해지는 높이까지 올라오자 의구심이 들었다.

과연 이런 행동을 하기까지 충분한 고민과 갈등을 거친 게 맞는지, 나는 옳은 판단을 내릴 만큼 정신이 또렷했는지에 대한 의구심이었다.

너무 부족했어!!

사람은 왜 항상 저질러 놓고 후회를 하는 걸까.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너무 성급했던 것 같다.

다른 방법이 있을 수도 있는데 왜 난 하늘로 올라오는 선택을 했단 말인가.

지금쯤이면 다른 헌터들 도착한 거 아니야!?

화끈한 화력을 가진 헌터가 도착했다면 내가 이런 짓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펑--! 펑--! 쾅--!

하지만, 기대와 달리 아직 그런 헌터는 오직 않은 듯했다.

마운티거의 발에 집중해 화력을 쏟아붓고는 있지만 여전히 끄떡하지 않는 상태.

꽈악… 후웅!

심호흡을 한 뒤 다시 한번 수리검을 위로 날려 보냈다.

이젠 뒤는 돌아보지 않기로 했다.

후회를 하거나 판단에 의구심이 들어서는 아니었다.

그냥, 

너무 개무서웠다.

조금 전에도 오금이 저렸는데 지금 돌아본다면?

지리는 건 기본이요 자칫하다간 정신줄을 잃음과 동시에 심장마비가 올 것 같았다.

번지점프 하다가도 심장마비 온다던데.

꿀꺽.

믿는다, 젊은 백운의 심장아.

무책임하게 책임을 전가한 후 계속해서 위를 향해 올라갔다.

최대한 올라가야 했다.

기회는 단 한 번.

지금 유탈라스를 사용해서도 저놈을 막을 수 없다면, 그때는 정말 마냥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얼마나 올라온 걸까.

호흡이 가빠지기 시작했다.

주변의 산소량이 급격히 줄어든 느낌이었다.

한 번만 더.

마지막 한 바퀴를 돌며 최대한 위로 수리검을 내던졌다.

후우…!

마지막 비전을 마친 뒤 잠시 눈을 감았다.

멀쩡했던 괴물 거북이도 부쉈다.

정신 차려! 그건 겨우 거북이 한 마리고 밑에 있는 건 산이야!

짝!

재수 없는 소리를 하는 부정적인 백운의 뺨을 후려갈긴 후 긍정적인 생각을 떠올렸다.

아래에 있는 건 다 타버린 장작 나무 같은 놈이다.

불에 의해 약해질 대로 약해져 몸마저 갈라지고 있는 그런 허우대 자식.

부술 수 있다.

아니,

부숴야 한다.

스르르.

호흡을 고른 뒤 천천히 눈을 떴다.

눈앞으로 펼쳐지는 곡성의 밤 풍경.

저 멀리로 시내의 빛들이 눈에 들어왔다.

늦은 시간임에도 빼곡하게 켜져 있는 불빛들.

비행기도 안 타봤는데 더 높게 올라 와버렸네, 맨몸으로.

"스으으…."

마지막으로 호흡을 정리한 후.

몸을 뒤집어 머리를 아래로 향하게 했다.

올라오면 떨어져야 한다.

변하지 않는 불변의 법칙이었다.

휘이이이이이--!!

귓가로 들리는 건 바람 소리뿐이었다.

떨어지고 있는 내 얼굴을 반기는 것 역시 눈 뜨기조차 힘든 매서운 바람.

이러다 눈알이 터지는 거 아닌가 싶었지만 그렇다고 감을 순 없었다.

봐야 한다.

아래에서 불타고 있는 마운티거.

너무 높이 올라와 삐끗하면 다른 위치로 떨어질 수도 있었다.

마운티거를 눈에서 놓치지 않으며 떠올렸다.

유탈라… 번쩍.

?!

비늘을 꺼내려는 순간.

주변의 배경이 바뀌었다.

내가 떨어지고 있던 장소는 밤 시간의 곡성.

하지만 이곳은 낮이었다.

구룡산…!

어째서 익숙한가 했는데 배경은 유탈라스가 추락했던 날의 구룡산이었다.

한낮의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

번쩍. 번쩍. 번쩍.

번갈아가며 배경이 전환되고 있었다.

한밤중에 불타고 있는 마운티거를 향해 떨어지고 있는 나와, 한낮에 황무지로 떨어지고 있는 유탈라스의 시점이었다.

"너도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는 건가?"

!!

떨어지고 있는 중 눈앞에 나타난 유탈라스.

유탈라스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날 바라보고 있었다.

"묘… 묘한 만남이네요."

대화를 나누기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둘 다 머리를 아래로 한 채 열심히 추락하고 있는 상황.

"이대로 떨어지면 넌 죽을 수도 있다. 뭘 믿고 이런 행동을 하는 거냐?"

너무 무책임하게 책임을 전가하는 건가 싶은 마음에 살짝 대답이 망설여졌다.

"용을 천 년 동안 지켜온, 그 무엇에도 뚫리거나 부서지지 않는 비늘을 믿고…?"

조심스럽게 대답하자 유탈라스가 웃음을 터뜨렸다.

유탈라스가 내게 비늘을 건넬 때 했던 말이었다.

"왜 이렇게까지 하는 것이냐? 무엇을 지키기 위해서?"

천 년을 기다려온 승천을 포기하고 윤슬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택했던 용, 유탈라스.

"저 밑에 있을 다른 인간들을 지키기 위해서인가?" 

"음… 아뇨."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잠시 대답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닌 건 아닌 거니까.

이기적인 새끼! 라고 할 거 같은데.

그래도 솔직하게 말해야지.

"저를 지키기 위해서요."

뜻밖의 대답이었는지 유탈라스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하긴 비행기도 안 다닐 상공까지 올라와 떨어지고 있는 놈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 이 짓을 하고 있다니.

내가 말해놓고도 궤변이었다.

하지만, 그게 솔직한 내 마음이었다.

"전 계속 올라가야 하거든요."

나도 사실 계속 의문이었다.

그렇게 정의로운 성격도, 그렇다고 영웅이 되고자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도망치면 만사가 편할 일이었다.

그런데 왜 난 항상 뒤를 돌아 사서 고생을 하는 걸까?

음… 스스로를 몹시 유하고 융통성 터지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럴 때 보면 아닌 거 같기도 하고.

- 어쩔 수 없었어.

회귀 전.

항상 똑같은 핑계를 대고 도망치며 후회를 잔뜩 쌓았었다.

그렇기에 회귀 후의 삶에선 절대 그러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

그게 마운티거를 상대로 도망치지 않는 것과 무슨 상관이냐고?

뭔가 한 발자국 뒤로 후퇴하는 느낌이란 말이지.

- 왕이 되거라.

카이안의 말을 들은 이후로는 조금씩이지만 멈춤 없이 올라가고 있었다. 

그리고, 이 걸음을 절대 멈출 생각은 없었다.

….

그런데 안될 거 같으니 물러선다?

강해 보여서 물러나고, 못 부술 거 같아서 물러나고, 죽을 거 같아서 물러나고.

이렇게 물러나다 보면 대체 어디까지 물러서야 하는 걸까?

계속 물러나다 보면… 내가 올라가야 하는 길을 잃어버리고 마는 게 아닐까?

"올라가는 길을 잃어버릴 바엔… 그 앞의 길이 낭떠러지일 망정 계속 올라갈 생각이거든요."

내 깊은 감정을 표현하려고 애써보지만 쉽진 않다.

올라갈 길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계속해서 올라가기 위해 물러서지 않으려는 날 지키기 위한 행동.

유탈라스가 미친놈 헛소리라고 생각 안 하기를 바랄 뿐이다.

"그래서입니다. 내가 길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지키기 위해서요."

"…."

잠깐의 정적이 흐르고.

싱긋.

대답이 마음에 든 건지 유탈라스가 미소를 그려 보였다.

"나를 지킨다라…. 궤변이구나."

"윽."

역시 너무 이상한 소리였나보다.

"궤변인데, 마음에 드는구나."

"…!"

"궤변이었어도 내가 하려고 했던 행동은 달라지지 않았겠지만 말이다."

?

행동이라니.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리는 유탈라스.

"어디 한 번 계속 올라 가보거라."

유탈라스가 청색 비늘이 되어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 길을 계속 오를 수 있도록."

스으으.

"내가 지켜주마."

번쩍.

다시 되돌아온 곡성의 밤 하늘.

돌아왔다는 걸 깨달은 뒤 오른손에 힘을 집중시켰다.

[유탈라스 - 2단계 의태]

용의 숨결.

1단계 의태와 마찬가지로 오른손에 유탈라스의 비늘이 모여갔다.

그리고, 이전보다 더 많은 비늘이 내 주변으로 둘러졌다.

오른손처럼 밀착되어 감싸지는 건 아니지만, 마치 하늘에 떠 있는 비늘이 따라오며 날 지켜주는 느낌이었다.

- 그 길을 계속 오를 수 있도록, 내가 지켜주마.

씨익.

미소를 지으며 아래에서 불타고 있는 마운티거를 바라봤다.

산 녀석아, 아무래도 내가 훨씬 단단한 거 같으니.

꽈아악!!

부서져라.

50화. 산을 부수다

"…."

오태구가 멍하니 정면을 바라봤다.

조금 전까지 마운티거의 발을 묶기 위해 화기를 쏘아대던 것도 멈춘 채였다.

"…."

오태구의 팀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어느 순간부터 공격하는 걸 멈추고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드드드득!!

지진이 난 것처럼 땅이 진동하고 있었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오태구와 팀원들은 그저 알고 싶었다.

대체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를 말이다.

우르르르릉!!

엄청난 굉음을 자아내고 있는 건 조금 전까지 시내로 향하던 마운티거였다.

온몸에 불이 붙어 주변을 밝히고 있었던 마운티거.

그랬던 마운티거가 지금은 산산조각 박살이나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냐?"

"…."

지부장인 오태구가 물었지만 대답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살면서 산의 극히 일부분이 무너지는 산사태는 본 적이 있었어도 산 자체가 박살 나는 건 처음 보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오태구가 조금 전 보였던 빛을 떠올렸다.

마운티거의 중심지에서 시작되어 계속해서 위로 올라가던 금색 빛.

끝도 없이 하늘로 올라가던 빛은 어느샌가 너무 높이 올라가 보이지 않게 됐었다.

사라라락!

그리고 잠시 후.

하늘에서부터 무언가 내려오기 시작했다.

먼 거리까지 영롱한 청색빛을 뿜어내던 무언가는 마치 하늘에서 부서진 유리가 흩날리며 빛을 반사하는 것 같았다.

- 용…?

말도 안 된다는 건 알지만 오태구는 그 빛을 보며 거대한 용을 떠올렸었다.

무수히 잘게 쪼개진 청색 빛이었지만 멀리서 보니 왠지 모르게 용의 형태를 띠고 있었던 것.

그렇게 지상을 향해 내려온 청색의 용이 마운티거에게 떨어지고.

- 콰아아아앙!!!

귀를 찢는 굉음이 터지며 지금의 믿기 힘든 광경이 시작되었다.

화르륵!

불타던 거대한 산이 무너져 내리는 장관

무시무시했지만, 동시에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꿀꺽.

오묘한 광경을 보며 오태구가 마른침을 삼켰다.

'대체 뭐가 있는 거냐.'

* * *

"와… 이걸 사네."

엄청난 토사가 쌓여 있는 중앙.

그 중앙에 누워 하늘을 보고 있자니 웃음이 나왔다.

용님 아주 그냥 확실하구만.

지켜주겠다고 말했던 유탈라스.

처음에 하늘로 올라갈 때까지만 해도 의구심이 남아있었다.

과연 내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

물론 살아남을 거란 생각이 더 컸기에 하늘로 향한 것이긴 했지만 말이다.

- 지켜주마.

하지만 유탈라스의 말을 들은 다음부턴 조금 있던 의구심마저 깨끗하게 사라져버렸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다.

그저 강한 확신이 들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난 죽지 않을 거란 확신이.

감사합니다, 용님.

그 덕에 최대 파워로 마운티거의 머리를 내려찍을 수 있었다.

조금이라도 망설였다면 오른손에 들어가는 힘에도 지장이 있었을 텐데.

무조건 산다는 확신이 생기고 나니 망설임 따위는 존재하지 않게 됐다.

"하아…."

다 박살 나서도 여전히 활활 타오르고 있는 마운티거의 잔해들.

뜨듯허네.

딱 좋은 온도였다.

차가운 밤바람과 주위에서 몸을 데워주는 천연 장작들까지.

어디 가서 이런 최적의 온도를 맛볼 수 있겠는가.

어찌 됐든.

씨익.

또 한 발자국 올라갔다.

발끝을 시작으로 온몸에 퍼져 가는 짜릿한 만족감.

분명 삐끗했으면 죽을 뻔했던 상황임에도 이상하게 미소가 지어졌다.

좀 오그라들지만, 살아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다다다다다---!

멀지 않은 곳에서 헬기 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사람들이 도착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으챠."

몸을 일으켜 이초희가 있는 산을 바라봤다.

시끄러워지기 전에 탈주할 생각이었다.

호다다…?

"엉?"

열심히 달려가려는 찰나.

파묻혀 있는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다.

익숙한 모양의 꽃이었다.

시… 시발?

입술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마운티거에 관한 글을 본 적이 있었다.

얼마나 산지 모르겠는 마운티거를 잡으니 산삼 중에서도 귀하다는 천년삼이 나왔다는 글이었다.

- 데몬계의 로또, 마운티거!

이런 기사의 제목과 함께 해맑게 웃고 있던 심마니 헌터의 얼굴이 떠올랐다.

호다닥.

달려가 몸을 바짝 엎드렸다.

사삭 사삭.

조심스럽게 양옆으로 흙을 파헤쳤다.

조금이라도 다쳐선 안 된다.

덮고 있던 흙이 사라지며 조금씩 모습을 드러낸 꽃의 정체.

하악. 시… 심 봤다!!

심마니들의 꿈이라고 불리는 산삼.

산삼을 발견한 뒤 돌아오는 심마니의 어깨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구쳐 있다고 들었는데.

난 어깨 대신 콧구멍이 벌렁거리고 있었다.

몇 년 산이지?

마운티거가 품고 있던 산삼은 특히 더 높은 효능을 자랑한다고 들었다.

물론 사람의 양분을 빨아들이며 컸다는 게 조금 찜찜하긴 하지만, 일단 내가 먹을 건 아니니까.

"이쪽을 돌아봐! 깔린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멀리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소리.

사삭.

신속하면서도 조심스럽게 산삼을 챙긴 뒤 이초희가 있는 산을 향해 발을 뻗었다.

* * *

머엉.

"…."

예상은 했었는데.

휘휘.

멍하다 못해 얼이 빠져있는 이초희의 눈앞으로 손바닥을 휘둘렀다.

"배… 백운 님이… 무기왕이었어요?"

뜨끔.

죄를 지은 건 아니지만 들을 때마다 움찔거리게 만드는 단어였다.

"하하."

머쓱한 기분에 머리를 긁적였다.

꽤 먼 거리긴 했지만 리볼버의 이펙트가 워낙 화려하다 보니 못 봤을 거라 생각하진 않았었다.

"이제 그만 멍하셔도 되지 않을까요?"

조심스럽게 말을 건네자 이초희가 황급히 벌리고 있던 입을 다물었다.

"누가 봤든 아마 이런 표정일 거예요."

입은 다물었지만 여전히 눈은 튀어나오기 직전이었다.

하긴, 내가 해서 그렇지 남이 했으면 나도 놀랐겠네.

고개를 돌려 박살 나 있는 마운티거의 잔해를 바라봤다.

산을 부수다니.

곤란하네.

고개가 절로 내저어졌다.

어디까지 강해지려는 거냐구.

내가 생각해도 무시무시한 성장 속도였다.

"아! 백운 님은 괜찮으세요?"

"네 저는 멀쩡해요."

멀쩡한 걸 보여주기 위해 양팔을 들어 올리자 다시 한번 고개를 내젓는 이초희.

믿을 수 없다는 눈빛이었다.

쩔긴 해.

하늘에서 날 감싸줬던 유탈라스의 비늘을 떠올렸다.

오른손의 변형까진 1단계 의태와 같았지만, 주변을 감쌌던 비늘은 달랐다.

이렇게 완벽하게 지켜주다니.

몸엔 조금 전 누워 굴러다니며 묻은 재 말고는 작은 생채기마저 존재하지 않았다.

"초희 님은 괜찮으세요? 정신이 없어서 물어보지도 못했네요."

"아… 네! 전 괜찮아요."

멘탈 점수 100점.

꾸벅.

이초희가 고개를 숙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백운 님이 아니었으면 꼼짝없이 살인마들 손에 죽을 뻔했어요."

그런 이초희를 향해 엄지를 치켜세워 보였다.

"아니에요, 당연히 해야 될 일을 했을 뿐인데요."

해보고 싶었다.

정의로운 천사의 멘트.

"제가 사람들 있는 곳까지 바래다 드릴게요. 얼른 가서 아버지께 연락하세요."

"네…!"

이초희가 눈물을 글썽이며 고개를 끄뎍였다.

"아! 백운 님도 뭔가 볼일이 있다고 하시지 않았나요?"

마운티거에게 향하기 전.

계속해서 미안해하는 이초희에게 나도 볼 일이 있어 온 거니 신경 쓰지 말라고 말했었다.

혹시…?

조금 전까진 마운티거를 잡느라 정신이 없어 생각하지 못했었다.

식물과 대화를 할 수 있는 이초희의 능력.

첩첩산중에서 스이카의 흔적을 찾아야 하다 보니 막막했는데.

무언가를 알려줄 수 있지 않을까?

"저 초희 님, 안 그래도 무서운 일 겪어서 힘드실 텐데."

"아니에요! 편하게 말씀하세요. 제 목숨을 구해주셨는데 제가 뭐든 못해 드리겠어요."

해맑게 대답하는 이초희에게 천천히 이야기를 꺼냈다.

단도직입적으로 스이카를 찾고 있다고 말하진 못했지만 몇 가지 특징을 말해주었다.

"혹시 식물들에게 한 번 물어 봐주실 수 있을까요?"

"네. 한 번 물어볼게요. 구체적인 의사소통 능력까지 되는 건 아니라서 너무 기대하시면 안 되지만요."

"괜찮습니다. 원래도 막막했으니까요."

고개를 끄덕인 이초희가 깊은 산 쪽으로 걸어갔다.

풀이 무성한 곳으로 걸어가 몸을 숙이는 이초희.

제발 풀님들!

아까 하늘에서 보니 곡성에 산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산속에 있는 데몬들이야 별로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물리적으로 시간이 너무 들 것 같았다.

스윽.

몇 번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리에서 일어난 이초희.

이초희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동굴이 하나 있는 거 같아요. 풀들이 말하기로는 그곳에서 계속 들려온다고 해요."

"드… 들려온다 하면?"

"비명이 들려온대요."

* * *

두어 시간 후.

이초희를 마을에 데려다준 후 조금 전 있던 곳으로 복귀했다.

- 이쪽으로 쭉 가시면 될 거예요.

이초희가 찝어준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둘이 있다가 혼자 있으니까 개무섭네.

둘과 하나의 차이는 엄청난 것 같았다.

데몬이 나온다고 이초희가 대신 잡아줄 건 아니지만, 적어도 귀신이 나오면 같이 비명을 질러 줄 순 있었을 텐데.

"나와라, 있는 거 다 안다!"

찐따 특.

아무도 없는 집에다가 으름장 놓기를 시전하며 천천히 앞으로 걸어나갔다.

우우우우--!

"뒤… 뒤질래!"

귀를 스치는 바람 소리가 마치 귀신이 우는 소리 같았다.

저벅.

그렇게 의미 없는 소리를 지르며 얼마나 걸었을까.

오.

딱 봐도 흉흉해 보이는 동굴이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얼마나 오랫동안 사람의 발길이 끊긴 건지 입구가 전부 넝쿨과 거미줄로 막혀 있는 동굴.

스이카만 아니었다면 억만금을 준다 해도 안 들어갈 동굴이었다.

아니지, 억만금이면 들어가야지.

고개를 끄덕이며 오다 주운 막대기로 넝쿨과 거미줄을 걷어냈다.

끼아아아아아아아아----!!

거미줄을 치우기 무섭게 들려오는 엄청난 비명.

주륵.

몸에서 무언가 흘러내렸다.

식은땀인지 지린 건지는 모르겠지만 너무 놀라서 비명조차 안 나왔다.

[잭 더 리퍼]

아직 데몬이 나오거나 한 건 아니지만 일단 꺼내 들었다.

이거라도 안 꺼내고 있으면 안으로 못 들어갈 것 같았다.

저벅.

와 분위기 봐라.

끼아아아아아아아아---!

두 번 들으니까 좀 낫네.

시원한 바람과 함께 쏟아져 나오는 소리.

처음엔 귀신이 우는 건가 싶었는데 이제 보니 깊은 동굴에서 바람이 빠져나오며 만들어진 소리였다.

반짝.

!

빙고.

동굴의 안쪽에서 흘러나오는 보라색 빛.

황금색 빛이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그렇게 쉽게 찾을 수 있다고는 생각 안 했었다.

애초에 대산에서도 제일 고생했다고 했었으니까.

빛을 따라 동굴로 조금 더 들어갔다.

힉.

보라색 빛을 뿜어내고 있는 것의 정체.

심장 약했으면 오늘 최소 세 번은 죽었다.

사람의 것으로 보이는 유골이었다.

꺼림직하긴 했지만 어쩌겠는가.

천천히 해골을 향해 손을 뻗었다.

스윽.

누군지 모를 해골 님.

손을 뻗음과 동시에 작은 기도를 올렸다.

제게 검의 흔적을 보여주십시오.

51화. 귀신

스산한 바람이 불었다.

해골에 손을 댄 뒤 펼쳐진 건 어느 평야였다.

와아아아아---!

엄청난 숫자의 부대가 성을 향해 달려 들어가고 있었다.

"와아아아아!"

병사 중에 한 명이었나.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해골의 주인에게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미카이! 바로 성을 뚫고 들어가라! 승리가 눈앞에 있다!"

"예!"

몸 주인의 이름은 미카이인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들리는 건 일본어인데 다 알아듣고 있다니 신기할 따름이다.

요즘이야 나노 알약 하나만 먹어도 다 알아들을 수 있는 세상이긴 하지만.

알약을 안 먹는데도 다 알아듣는 걸 보니 언어 역시 미카이 그 자체가 된 듯했다.

두근.

빠르게 뛰는 심장박동이 느껴졌다.

거대한 성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미카이와 군대.

아마 어느 전장의 한복판인 듯하다.

"마지막 성이다! 안에 적의 장군이 있을 것이다!"

심장이 두근거리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마지막 성이라니.

무슨 전쟁인지는 몰라도 짧지 않은 여정이었을 터.

마지막을 눈앞에 두고 있으니 심장이 두근거리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끼아아아아아악---!

!?

얼마나 달렸을까.

성안에서 귀를 째는 비명이 들려왔다.

사람이 지르는 것과는 다른 느낌의 비명.

듣는 이로 하여금 몸을 얼어붙게 만드는 소리였다.

귀신이 소리 지르면 이런 느낌이려나.

소리를 들은 당사자인 미카이도 마찬가지였다.

본능적인 불안감을 느끼며 약간이지만 주춤거리는 발걸음.

바글바글.

왜 안 들어가는 거지?

성의 마지막 관문인 성문은 열린 지 오래였다.

이제 밀고 들어가기만 하면 전투를 끝낼 수 있을 거 같은데 왜 안 들어가는 걸까?

"뭣들 하는 거냐! 안 들어가고!"

미카이는 어느 정도 계급이 되는 병사인 듯했다.

앞에서 멈칫거리는 부하들을 다그치며 전진하라고 소리를 질렀다.

"안 갈 거라면 비키거라!"

그렇게 병사들을 비집고 앞으로 튀어나가려는 찰나.

누군가가 미카이의 뒷덜미를 붙잡아 뒤로 잡아당겼다.

끼아아아아아악---!!

동시에 조금 전 들려왔던 비명이 귀를 찢고 들어왔다.

핏…!

!!

왼쪽 뺨을 시작으로 콧등을 지나 오른쪽 뺨까지 그어지는 검흔.

눈앞으로 피가 터져 나왔다.

"끄악!"

조금 전 누군가 뒷덜미를 당겨준 게 아니었다면 머리가 반으로 갈라졌을 것이다.

뭐냐… 저건.

붉게 물든 시야로 머리를 풀어헤친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허리까지 오는 기다란 백발의 남자.

적으로 보이는 남자는 홀로 서 엄청난 수의 대군을 막아내고 있었다.

"미.. 미카이 님! 저곳으로 갈 수가 없습니다!"

"무슨 소리냐! 갈 수가 없다니!"

"조금 전 보시지 않았습니까! 저 남자의 검을!"

남자가 휘두르고 있는 검을 응시했다.

스이카…!

보라색의 검손잡이를 시작으로 새하얗다 못해 투명한 검신이 곧게 뻗어 있었다.

검신에 새겨진 붉은색의 줄기들은 마치 사람의 혈관이 뻗어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 우와아아---!

회귀 전.

대산의 이사가 처음 검을 뽑아 들었을 때의 반응이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투명한 검날과 검날의 구석구석까지 뻗어 있는 핏줄까지.

소름 끼치지만 동시에 귀신의 검이란 이름이 잘 어울리는 멋들어진 생김새였다.

"전쟁은 끝났다! 헛된 저항을 멈춰라!!"

뒤늦게 도착한 남자가 소리를 내질렀다.

비싸 보이는 갑옷과 말에 타 있는 걸 보니 이번 전투의 장수인 것 같았다.

"끝났다니…?"

백발의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

차갑다고 느껴질 정도로 차분하게 가라앉아있는 남자의 눈.

저게 압도적인 대군을 마주하고 있는 사람의 눈이라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지원군이 오고 있다. 너희는 그 전에 이곳을 함락시켜야 하지. 안 그런가?"

"네놈들의 지원군은 아직도 5일 거리에 있다! 최대 속도로 달려도 3일은 족히 걸리거늘! 네놈 혼자 무슨 수로 버티겠다는 거냐!"

내가 봐도 무리였다.

검을 든 남자의 아군은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상태.

미카이 측의 군대는 어림잡아도 몇만은 되어 보였다.

일당백이란 말은 들어봤어도 일당십만이란 건 못 들어봤는데.

안 들리는 이유가 있었다.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

"글세…. 내가 무슨 수로 버틸지는 이제부터 알게 될 것이니 네가 걱정할 필요는 없다."

"!!"

압도당하고 있다.

누가 보든 승기는 이쪽에 있었다.

수만 대 일의 싸움.

대충 물량으로만 밀어붙여도 일 분을 채 못 버틸 터였다.

두근 두근 두근.

미카이의 심장박동이 처음보다 더 빨라지기 시작했다.

처음엔 전쟁의 끝이라는 설렘에 의한 두근거림이었다면 지금은 아니었다.

어쩌면… 어쩌면 저 남자에게 막힐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한 발자국만 더 넘어가면 저 남자에게 목이 베일지도 모른다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두근거림의 원인이었다.

겁 먹었군.

소리 지르고 있는 장군과 달리 미카이는 조금 전 경험하고 말았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검이 날아와 자신의 얼굴을 벤 게 조금 전의 일.

미카이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저 남자에게 다가가면 죽는다는 것을.

"뭣들 하는 거냐!!"

장수의 우렁찬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단 한 놈이다! 쉬지 말고 몰아붙여라!!"

"와아아아아아!!"

장수의 외침 덕분이었을까.

사기가 살아난 병사들이 남자를 향해 돌격하기 시작했다

덜덜.

미카이를 제외하고 말이다.

다른 병사들과 달리 몸이 굳어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미카이.

철컥.

백발의 남자가 검을 검집으로 집어넣었다.

우웅!

원…?

동시에 남자의 주변으로 푸른색의 경계가 그려졌다.

미카이의 몸을 빌렸다보니 직접 현장에 서 있는 건 아니었지만, 한 가지는 알 것 같았다.

저 경계를 넘으면 죽는다. 

무조건.

탁.

끼아아아아아아악--!!

병사들이 경계를 넘어간 순간.

조금 전 들렸던 비명이 퍼져나갔다.

!!

귀를 울리는 비명에 잠시 눈을 찌푸린 사이.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다.

우수수.

경계로 발을 디뎠던 병사들의 목이 떨어져 내렸다.

"계속 돌격해라! 한계가 있을 것이다!"

장수는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하긴 어떻게 멈추겠는가.

전쟁의 끝이, 그토록 바랐던 승리가 코앞에 있는데 단 한 명 때문에 포기를 하다니.

불가능한 일이었다.

철컥.

그때부터는 같은 상황이 반복되었다.

남자가 검을 휘두르면 경계 안에 있는 모두의 목이 떨어져 내렸고.

다음 병사들이 경계에 들어올 때 쯤이면 남자는 다시 검을 집어넣고 타이밍을 기다렸다.

얼마의 시간… 아니, 며칠이 지났을까.

함성이 가득했던 주변은 고요해져 있었다.

툭.

미카이의 눈앞으로 장수의 머리가 굴러왔다.

패닉이군.

미카이는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함께 했던 수천, 수만의 병사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그나저나 완전 미쳤네.

당사자가 아니다보니 패닉까진 아니지만.

기가 찰 정도의 발도였다.

말 그대로 귀신 같은 발도.

비명이 들리면 그걸로 끝이다.

아마 경계 안의 이들은 비명을 끝까지 듣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만큼 찰나의 순간 목이 날아갔기 때문이다.

"현명하구나."

차가운 달빛이 백발의 남자를 내리쬐고 있었다.

달빛 아래서 검에 묻은 피를 닦아내는 남자.

남자가 무심한 표정으로 덜덜 떨고 있는 미카이를 응시했다.

"불가능에 부딪히는 건 용기가 아니다. 무모함이지."

미카이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지금 자신의 목숨은 눈앞에 있는 남자의 결정에 달렸기 때문이었다.

"가거라, 보내주마."

"!!"

보내주겠다는 말에 미카이가 조금씩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주춤.

처음엔 엎어져 있는 상태로.

벌떡.

잠시 후엔 몸을 일으켜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어디로 향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저 성과 멀리, 저 성을 지키고 있는 귀신과 최대한 먼 곳을 향해 내달렸다.

도망쳐야 돼.

미카이의 머리를 가득 채우고 있는 말이었다.

최대한 멀리…. 저 남자가 찾을 수 없는 곳으로!

미카이는 계속해서 달렸다.

* * *

여기까지 와버린 건가.

전문가는 아니었지만 미카이의 유골은 깨끗했다.

무언가에 의해 상처를 입거나 하지 않았다는 것.

도망치고 도망치다 결국엔 타국의 동굴까지 숨어들어 그대로 죽은 건가.

도망치던 미카이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저 도망쳐야 한다는 일념 하나만을 가지고 이곳에 도달했을 터.

끊임없이 몰려왔을 배고픔이나 외로움, 쓸쓸함 따위로는 백발의 남자에게서 받은 공포를 떨쳐낼 수 없었다.

그렇기에 여기서 최후를 맞이한 것이었다.

스이카… 라.

귀신의 검이라 불리기에 그저 멋있어 보이려고 붙인 이름이라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긴 백발을 늘어뜨리고 있던 남자.

분명 사람이었지만, 어느 쪽에 가깝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귀신이었다.

누굴까.

배경이 중국이었고 생긴 게 조금 더 거칠었다면 장비를 떠올렸을 것이다.

홀로 조조의 군사 수만을 막아냈다는 장판파의 전투.

일본이었지.

하지만 기억의 배경은 분명 일본이었다.

그리고 일본에서 장판파의 장비 같은 이야기는 존재하지 않았다.

내가 알고 있는 신화나 구전되어 온 이야기가 전부는 아니겠지만 비슷한 것조차 들어본 적이 없었다.

수만을 베었는데도 안 남을 정도라니.

이 정도의 일이 무슨 연유가 있어야 작은 기록조차 안 남을 수 있는 건지 신기할 따름이었다.

아.

미리 구비 해놨던 수첩을 꺼내 들었다.

역시 난 천재야.

흔적에서 무언가 보거든 잊기 전에 메모해놓기 위해 산 수첩이었다.

스슥.

이번에 적고 있는 건 글씨가 아닌 그림이었다.

처음 미카이가 달려갈 때 봤던 거대한 성의 모습을 그렸다.

더럽게 못 그리네.

중고등학교 때부터 미술 선생님이 누누이 말씀하셨었다.

넌 예체능을 가는 순간 굶어 죽을 거라고.

혜안을 가지고 계셨어.

개차반으로 성을 그리고 있자니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흠.

성을 다 그린 뒤 감상을 시작했다.

일본에 있는 성들은 주기적으로 보수 겸 리모델링을 하지만,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게 아니라면 성의 원래 모습을 그대로 보존해놓는다.

역사가 깊은 성의 본 모습을 최대한 헤치지 않기 위함이었다.

먼저 해야 할 건 그림 맞추기인가.

배경이 일본인 건 알았지만 먼저 성을 찾아야 했다.

이런 엄청난 일이 벌어졌던 성이니 그곳으로 가면 뭐라도 있을 게 분명했다.

큰일이네, 해외여행 한 번도 못 가봤는데.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기도 힘들었던 회귀 전의 삶.

종말의 날이 오기 전에도 남들 다 가보는 해외여행을 한 번도 못 가봤었다.

나의 첫 해외여행이 귀신 찾기라니.

첫 여행은 뜨듯한 남태평양으로 떠나 바다와 일몰을 보며 시원한 모히또 한 잔 하는 게 꿈이었는데.

모히또는 좀 미뤄야겠어.

저벅.

수첩을 잘 넣어둔 뒤 동굴을 빠져나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곡성으로 오기 전보다 한층 가벼워진 발걸음.

여러 산을 다 뒤져야 할까 걱정했었는데 이초희 덕에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다다다다다---!

동굴을 빠져나와 여전히 소란스러운 마을 쪽을 바라봤다.

마운티거의 뒷처리가 한참인 듯했다.

스윽.

소란스러운 마을 쪽을 피해 걸음을 걸었다.

그럼 가볼까.

일본으로.

52화. 일본으로

풀썩.

"하아아아아!"

따듯한 물로 목욕을 때린 후 침대에 몸을 눕혔다.

포옥 파이며 날 감싸 안는 고급 침대의 부드러운 감촉.

"이게 행복이다."

행복은 먼 곳에 있지 않았다.

- 서울로 돌아가는 차량입니다. 가실 분 있으면 같이 가시죠.

마운티거가 나타났다는 소식에 서울에서 지원을 왔던 국가 소속 헌터들.

헌터들은 같은 국가 소속이라는 이유로 날 서울행 차에 태워줬었다.

착한 사람들이야.

이 첩첩산중에 또 어딜 가서 자야 되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착한 이들 덕분에 무사히 서울까지 와 호텔에 입성할 수 있었다.

호텔 이거 맛 들리겄네.

처음엔 나도 모르게 값싼 찜질방으로 가려 했지만, 문득 계좌에 있는 3000만원 상당의 잔액이 떠올랐고, 거의 동시에 방향을 틀어 가까운 호텔로 뛰어들었다.

이 정도는 나를 위한 선물로 줘야지. 

암! 그렇고말고.

고개를 끄덕이며 애써 자기 합리화를 했다.

잔고도 잔고지만 오늘은 너무 고생을 해버렸다.

산을 부수다니.

이 정도면 일주일 내내 호캉스를 즐겨도 무죄였다.

게다가.

호다닥.

금고 앞으로 달려가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넣어뒀던 나의 소중한 산삼.

아직 몇 년 산인지 알 수는 없지만 풍겨오는 기운이 심상치 않았다.

"히히."

나도 모르게 육성으로 웃음이 터졌다.

산삼이라니.

내일 날이 밝자마자 헌터 전용 프라이빗 은행에 맡길 생각이었다.

믿을만한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숨겨놔야지.

당장에라도 달려가 감정을 맡기고 싶었지만 이곳은 서울.

눈 깜짝하면 코 베어가는 곳이 아니던가.

내 만년삼을 백년삼으로 눈탱이 쳐 빼앗아 갈지도 몰랐다.

안되지, 안돼.

어떻게 구한 산삼인데.

전문가가 나타날 때까진 보류다.

산삼이 무사함을 확인한 후 금고에 들어있던 헌터증을 꺼냈다.

참 좋은 세상이야.

여권이 없어도 헌터증만 있으면 해외로 나갈 수 있다니.

헌터가 되기 전까지는 몰랐던 사실이었다.

비행기 예약도 했고.

처음 해보는 비행기 예약이다 보니 영문 이름과 시간을 얼마나 많이 확인했는지 모른다.

볼 때마다 닳았다면 이미 호텔 컴퓨터의 모니터는 터지고도 남았을 정도.

PM 9:00, FIRST.

흐뭇.

티켓을 보고 있자니 절로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내가 예약한 건 무려 퍼스트 클래스.

처음엔 이코노미를 골랐지만 두어 시간의 갈등 후 퍼스트로 바꿔버렸다.

의미 있는 첫 비행인데 퍼스트는 타줘야지.

산삼을 주워서 간이 배 밖으로 나온 것도 같았지만 어쩌겠는가.

첫 비행을 의미 있게 남기고 싶은 것을.

아마 일본을 퍼스트 클래스 타는 건 나밖에 없겠지.

내일 목적지는 오사카의 간사이 국제공항.

더 디테일하게는 효고현의 히메지 성이었다.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한 건 바로 성 찾기.

메모장에 그려진 성을 찾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유명한 성 1페이지에 나와 있는 히메지 성.

기억에서 봤던 것과는 조금 달라졌지만 구조나 외형을 봤을 땐 이곳이었다.

지금까지는 아주 순조로워.

내심 걱정하고 있었다.

대산이 개고생하며 찾았다길래 대체 무슨 고생을 한 걸까란 걱정.

지금은 쉽지만 4년 뒤에 고난이도가 됐을 수도 있지.

애써 희망회로를 돌리며 다시 침대에 몸을 묻었다.

삑.

앞에 놓여있는 액션 캠의 영상을 돌려봤다.

- 콰아아아앙!!

"크으…!"

내가 했지만 취할 것 같은 장면이었다.

푸른 비늘을 감싼 채 마운티거에게 부딪히는 순간.

부딪힌 곳을 중심으로 마운티거에게 엄청난 균열이 생겨나는 장관이었다.

이거 후원금 터지는 거 아니야?

영상 알못인 내가 봐도 이건 크럭커 보다 한 수 위였다.

스케일부터 따라올 수 없는 수준.

크럭커가 일반 액션 영화였다면 이건 블록버스터였다.

"히힉."

이초희가 나온 장면을 포함, 산삼을 득하는 순간을 깔끔하게 삭제한 후.

업로드.

업로드 버튼을 눌렀다.

들어와라! 후원금아!

* * *

백운이 업로드 버튼을 누르고 잠들어버린 새벽.

"안녕하세요, 시청자 여러분. CBC 긴급 생방송입니다. 송유빈 리포터가 자리에 함께 나와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CBC 방송의 송유빈입니다."

곡성에서 들려온 소식에 CBC의 긴급 생방송이 편성됐다.

- 졸려 죽겠는데 무슨 일이에요?

한참 달콤한 잠을 자던 중 회사의 전화를 받은 송유빈.

송유빈은 일어나자마자 걸려온 전화에 짜증을 내뱉었었다.

- 긴급 생방송이야! 빨리 와!

- 아 왜 저에요! 다른 리포터도 있잖아요!

- 무기왕인데?

- 지금 갈게요.

어느 새부턴가 송유빈은 무기왕에게 꽂혀버리고 말았다.

물론, 처음부터 꽂혔던 건 아니었다.

처음 시작은 괘씸함이었다.

이름이라도 알려달라고 힘들게 따라갔음에도 끝까지 지독하게 도망가버린 무기왕.

오기가 생겨서라도 누군지 알아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 아가리 벌려라, 탄 들어간다.

크럭커의 동영상에선 괘씸함이 호기심으로 바뀌었다.

'무기왕에겐 특별한 무언가가 있어.'

그리고 이런 호기심에 불을 지르다 못해 빠져들게 만든 것이 바로 대산의 토벌전이었다.

안에서 있었던 모든 사실을 시원하게 카메라 앞에서 까발린 무기왕.

아무렇지 않다는 듯 카메라에 동영상을 들이댄 순간부터 송유빈은 무기왕에게 푹 빠져들고 말았다.

"조금 전 곡성에서 마운티거가 나타났다는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 마… 마운티거? 그 산 데몬?

@ 그렇게 크진 않다고 하던데?

@ 안 커도 산은 산임.

"그리고 아직 확실치는 않지만 마운티거를 잡은 게 무기왕이란 주장이 나오고 있습니다. 송유빈 리포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송유빈의 선배이자 진행자인 김창수가 마이크를 넘겼다.

회사 내에서도 무기왕 덕후로 소문이 난 송유빈.

알려진 대로 송유빈은 무척이나 상기되어 있는 얼굴이었다.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장 근처에서 무기왕의 탄을 봤다는 목격자가 한 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 에이, 그거 쐈다고 무기왕이 마운티거 잡은 건 아니지.

@ 맞아 애초에 마운티거를 잡은 건 그 탄이 아니라고 하던데?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댓글에 송유빈이 입술을 깨물었다.

무기왕이 잡았다고 주장하고 싶지만 아직은 증거가 부족했다.

@ 애초에 자기가 잡았으면 동영상 올렸겠지. 포상금 걸려 있을 텐데.

@ 맞네, 무기왕이 아니니까 못 올리는 거겠지.

댓글을 지켜보던 김창수가 입을 열었다.

"일각에선 무기왕의 활동이 끝났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습니다. 국가가 손을 써 무기왕을 빼오긴 했지만 상대가 대산인 만큼 분명 대가를 치뤘을 거란 관점이죠."

송유빈이 가장 걱정하는 것이었다.

대기업 대산의 외압.

광산에서 동영상을 까버린 건 엄청난 행동이었지만, 동시에 위험한 행동이기도 했다.

아무리 국가가 나서 무기왕을 지지했을지언정 국가 역시 대기업과는 공생하는 관계.

대산을 완전히 무시한 채 그런 행동을 하진 못했을 것이다.

대외적으로는 드러나지 않지만 무언가 거래를 했을 터.

'그 거래가 무기왕의 활동을 제한하는 거라면.'

사람들이 열광하고 있는 무기왕은 더 이상 없을 수도 있었다.

"무기왕을 응원하는 대중의 입장에선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무기왕은 뭔가 지금까지의 헌터들과는 다를 거라고 생각했는데 결국엔 대기업에 굴복하고만 것이니까요."

'….'

생방송이다 보니 티는 못 내고 있지만 김창수의 말을 듣는 송유빈은 잔뜩 시무룩해져 있었다.

반박하고 싶지만 다 맞는 말이었다.

@ 결국 무기왕도 어쩔 수 없는 거지.

@ 아무리 새로운 영웅이니 뭐니 해도 개인이 대기업을 이길 순 없으니까.

@ 좀 아쉽네. 무기왕은 다를 줄 알았는데.

@ 무기왕도 사람인데 뭘 어쩌겠음.

그렇게 무기왕은 이제 끝났다는 방향으로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을 때.

진행을 맡고 있던 김창수의 이어폰으로 무언가 들려왔다.

"…!!"

'뭐지?'

놀란 얼굴의 김창수에 송유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정보가 들어왔길래 저런 걸까.

"조금 전 한튜브로 영상 하나가 올라왔다고 합니다! 마운티거를 잡은 헌터의 동영상입니다!"

@ 뭐? 누구야?

@ 한튜브면 국가 소속 헌터였나 본데? 누가 그런 거지?

@ 그래서 누구 동영상인데!?

"무기왕… 무기왕입니다! 국가 소속 10급 헌터 무기왕이 올린 동영상입니다! 무기왕이 마운티거를 잡았습니다!!"

화악.

김창수의 외침에 시무룩했던 송유빈의 얼굴에 빛이 드리워졌다.

쾅!

생방송이든 뭐든 책상을 치며 자리에서 일어난 송유빈.

"여러분!"

지금까지 답답하게 묵혀뒀던 것들.

그것들을 한꺼번에 밖으로 쏟아냈다.

"무기왕이 돌아왔습니다아!!!"

* * *

"하!"

사북의 카지노.

핸드폰을 바라보던 비광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실시간으로 방송되는 CBC의 방송은 그야먈로 난리가 나 있었다.

# 무기왕입니다! 무기왕이 돌아왔습니다!

@ 와….

@ 미쳤다…. 산을 부순다고?

"손님, 패 오픈해주시기 바랍니다."

카드를 치다 말고 핸드폰에 정신이 팔린 비광.

"빨리 좀 칩시다! 바빠 죽겠는데."

"아니 카드 하다 말고 무슨 방송이야?"

그런 비광에게 딜러와 옆자리의 사람들이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옆에서 그러든 말든 비광은 핸드폰에 정신이 뺏긴 상태였다.

보다 못한 딜러가 입을 열었다.

"손님! 카드 오픈하세요!"

"거참 시끄럽네."

딜러에게 시선조차 안 준 비광이 들고 있던 카드를 오픈했다.

"!!"

"!!"

스페이드 A의 포카드.

자리에 앉은 그 누구보다 높은 패였다.

순간 꿀 먹은 벙어리가 된 사람들에게 비광이 고개를 돌렸다.

"이번 판 무효로 해줄 테니까."

싱긋.

여유로운 미소를 짓는 비광.

"조용히 좀 해. 우리 신입 활약 좀 보게. 오케이?"

"오… 오케이!"

* * *

"쓰으읍… 하아!"

여기가 공항이란 곳이구만!

강남역에서 공항 리무진을 타고 도착한 인천공항.

공항의 공기를 깊게 들이마신 뒤 주위를 둘러봤다.

모두가 밝은 얼굴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두근.

다들 왜 이렇게 밝은 얼굴인지 알 것 같았다.

그냥 비행기를 타고 다른 나라로 가는 것뿐인데도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리고 있었다.

드르륵.

새로 장만한 캐리어를 끌고 신나게 공항 안으로 들어갔다.

처음엔 일본까지 가야 된다는 사실에 생겨났던 귀차니즘.

공항에 도착하자 그 귀차니즘이 깨끗하게 씻겨 내려가 버렸다.

"좋구만, 좋아. 다 모르는 사람들 뿐이니 마음도 편하네."

보기 싫은 인간들의 얼굴을 한 명씩 떠올렸다.

어딘가로 사라져버려 조금 불쌍하지만 재수 없는 김대석과 독사 그 자체인 최리아.

다시는 보지 맙시다.

영영 한국을 떠나는 건 아니었지만,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다는 마음에 약소하게 기도를 올렸다.

자, 이제 산뜻하게 출발.

!!

호다닥!

어째서일까.

기도를 한 게 역효과가 난 걸까?

빼꼼 고개를 내밀어 내가 가야 하는 체크인 카운터를 바라봤다.

저 인간이 왜 이곳에 있단 말인가!

저… 저… 숭헌 것이 왜!

체크인을 해야 하는 카운터엔 낯익은 얼굴이 있었다.

조금 전 다시는 보지 말기를 바랐던 사람 중 한 명.

대산의 홍보 실장, 최리아였다.

53화. 공중전 가능

내가 이렇게 숨어서 쳐다보는 이유는 절대 무서워서가 아니다.

똥이 더러워서 피하지 무서워서 피하겠는가.

그저 마주치기 싫기에 빼꼼 내다 보고 있는 중이다.

설마 아니겠지.

마침 내가 가야 하는 카운터에 서 있다니.

불길하기 짝이 없었다.

나의 첫 여행을 최리아와 함께?

절레절레.

고개가 절로 내저어지는 상황이다.

같은 비행기라도 칸은 다르겠지.

난 무려 퍼스트 클래스다.

물론 주제에 안 맞는 비싼 가격을 치루었지만 어쨌든.

아무리 대기업의 홍보 실장이라 할지라도 퍼스트는 무리일 터.

비즈니스겠지.

최리아의 옆엔 찹쌀떡… 아니지, 팀장 전수희도 함께였다.

오늘도 호다닥거리며 열심히 무언가를 최리아에게 어필하고 있는 상태.

뭔가 짠하단 말이야.

마주하고 있기만 해도 선함이 풀풀 풍기는 사람, 전수희.

어쩌다 저런 실장 밑으로 가서 하루가 멀다하고 푸드덕거리며 힘들게 사는지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갔네.

체크인을 마친 최리아와 일행이 떠나고.

약 오 분 정도의 시간을 보낸 뒤 체크인 카운터로 걸어갔다.

정말 다시는 보지 맙시다, 최리아 님.

* * *

신은 없어.

조금 전 탑승한 퍼스트 클래스 좌석.

처음 들어와서 터뜨린 건 감탄이었다.

어떻게 비행기 안에 이런 공간이 있을 수 있는 걸까.

작은 사이즈의 고급 호텔 방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했다.

푹신.

좋은 침대야.

침대 전문가는 아니지만 알 수 있었다.

손을 대자마자 딱 알맞게 감싸주는 매트리스의 감촉.

이건 고급 침대다.

비싼 술도 나온다고 하던데.

고급 침대였지만, 몸을 눕힐 시간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오사카 간사이 국제공항까지 비행 시간은 약 2시간 30분.

그 시간 안에 먹을 수 있는 만큼 최대한 술을 때려 넣을 생각이었다.

신나는구만.

매일 박물관의 골방에 박혀 우울하게 먹는 맥주가 최대였는데.

엄청 높은 상공에서 이런 고급진 의자에 앉아 먹는 고급 양주라니.

비행기가 이륙하기 전임에도 이미 내 기분은 하늘에 붕 떠 있는 것 같았다.

물론,

"여기인가요?"

숭헌 것의 목소리가 들리기 전까지 말이다.

시발.

왜 저게 여기에 있지.

사실 최리아가 퍼스트 클래스에 있는 게 그리 이상한 건 아니었다.

단지 싫었다.

회사 자금은 저것이 다 까먹는구먼.

일원이라도 더 영업이익을 올려야 할 판에 퍼스트 클래스라니.

주주들이 알면 경을 칠 노릇이었다.

다행히 거리상으로는 꽤나 떨어진 위치였다.

복도에 나가서 삼바 춤이라도 추지 않는 이상 마주칠 일이 없는 거리.

"저희 에티드 항공은 승객 여러분의 안전을 최우선 시 합니다."

퍼스트 클래스의 중앙에 선 승무원의 설명이 시작되었다.

에티드 항공이 비행하는 하늘은 항공사의 인원들이 지키고 있기에 데몬으로부터 안전하다는 것과 기내에서도 비상시에 대처할 수 있는 항공사 소속 헌터들이 항시 대기 중이라는 설명이었다.

어떻게 지키나 했더니 항로 자체를 방어하는 거였군.

개방 시대 전과 다를 바 없는 비행기의 모습에 잠시 의문을 가졌었다.

분명 비행형 데몬이 언제 어디서든 나타날 수 있을 터.

일반 비행기로 어떻게 데몬을 막는 건지 궁금했다.

안전하겠지?

근거 없는 우려는 아니었다.

회귀 전에도 잊을만하면 올라오던 기사가 데몬에 의한 비행기 추락이었기 때문이다.

내부엔 항상 추락 시에도 승객들을 지킬 수 있는 보호형 헌터가 타고 있었지만, 모두를 구한다는 건 한계가 있기에 비행기 추락 사고는 언제나 많은 사상자를 동반했다.

"잠시 후 이륙하겠습니다."

비상시의 대처에 대한 승무원의 안내가 끝이 나고.

비행기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우.

비행기 처음 타보는 사람답게 창문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내가 하늘을 날다니.

물론 어제도 하늘에 있긴 했지만 그건 날았다기보단 떨어진 거에 가까우니 제외다.

우우우우우웅!

차츰 속도를 올려가던 비행기가 하늘로 떠올랐다.

* * *

스윽.

"필요한 거 있으신가요?"

몸을 복도로 내밀기 무섭게 승무원이 달려왔다.

이게 돈의 힘인가.

새삼스럽게 데몬을 열심히 잡아 돈을 많이 벌어야겠단 다짐을 했다.

"발렌타인 한 잔 더 주실래요?"

흔들.

흔들렸다.

순간이지만 분명히 흔들렸다.

퍼스트 클래스라고 너무 양심 없었나.

지금까지 먹은 발렌타인의 양만 해도 두 병이 넘을 듯했다.

그냥 병째로 가져다주시면 마음이 참 편할 텐데.

라고 말하면 워낙 볼품없을 것 같아 마음속으로만 말해봤다.

"어디… 불편하거나 하신 곳은 없으시죠?"

애써 해맑게 웃는 승무원 분이 조심스럽게 질문을 건넸다.

이륙한 지 이제 막 한 시간 반 정도가 지났는데 양주 두 병을 마셔댔으니 걱정이 될 만도 했다.

소곤.

최리아 자리까지 목소리가 들릴세라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낮췄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사나이 백운, 술에 지지 않습니다."

"네… 네. 바로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두 잔으로 좀."

"아… 알겠습니다."

끄덕.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인 후 창밖을 바라봤다.

넘나리 좋고.

입안을 가득 채우는 발렌타인의 향.

내리기 전에 최대한 많이 축적 시키고 싶었다.

"말씀하신 발렌타인입니다."

술잔을 받기 위해 몸을 돌리려는 찰나.

"응…?"

순간이지만 창가의 구름 사이로 무언가 보인 것 같았다.

"손님…?"

창문에 집중하는 나를 봐서일까.

술을 가져왔던 승무원이 내 시선을 따라 밖으로 눈을 돌렸다.

이런 샹.

잠시 후, 날개를 펄럭이며 열댓 마리의 데몬이 모습을 드러냈다.

"!!"

데몬의 모습을 인지하자마자 어딘가로 달려가는 승무원.

어떻게 된 거야?

분명 비행기가 날아가는 항로는 지키고 있다고 했을 텐데.

어째서 데몬들이 여기까지 다가온 걸까.

비둘기 새끼들.

도번.

사람보다 두 배 정도 큰 몸집을 가진 조류형 데몬이었다.

기다란 부리에 보기만 해도 밥맛 떨어지는 깃털의 색까지.

도시의 비둘기를 떠올리는 외형 때문에 도번이란 이름보단 비둘기 데몬이라고 더 많이 불리는 녀석이었다.

# 기장실입니다. 창가에 데몬이 출몰했지만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곧 주변에 있을 방어 팀이 와 처치할 예정입니다. 

그런 것 치고는 너무 가까운데.

걱정말라는 기장의 방송이 흘러나왔지만 이상한 상황이었다.

방어 팀이 어떤 공격 수단으로 데몬을 잡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비행기와 가깝다면 뭘 사용하든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치직.

첫 방송이 흘러나오고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잠시 후 기장의 두 번째 방송이 흘러나왔다.

# 긴급 사태입니다.

* * *

"여긴 에티드 항공 A768, A768. 응답하라."

잠시 응답을 기다리던 기장 최명호가 인상을 찌푸렸다.

"여기는 A768! 데몬이 출몰했다! 왜 아무도 응답하지 않는 건가!"

"기… 기장님."

상황을 알리러 온 승무원 이다혜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일인지 관제탑은 응답하지 않고 있었다.

마치 비행기의 통신이 먹통이 되어버린 느낌이었다.

쾅.

"어제까지만 해도 잘 되던 게 왜 이러는 거야!"

기기판을 내려친 최명호가 옆에 있던 명단을 살폈다.

비행기에 타고 있는 상시 대기 중인 헌터들의 목록.

"사람 크기의 배리어, 손가락 튕김으로 공기 탄알… 이런."

몇몇의 헌터가 타 있긴 했지만 공중에 있는 데몬을 처치할만한 사람이 없었다.

접근하고 있는 데몬이 비행기를 공격하면 속수무책으로 당해야 하는 상황.

"방어 팀은 응답하지 않는 건가요?"

이다혜의 물음에 최명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이해가 되지 않았다.

수많은 비행 중 두어 번은 데몬이 어느 정도 가까이 온 적이 있었지만.

이 정도까지 접근하게 둔 경우는 처음이었다.

그 전에 영공을 비행하고 있을 방어 팀에 의해 모두 제거되었기 때문이다.

"대체 어떻게 된 거지."

응당 있어야 할 방어 팀은 나타나지도 않는 데다 통신까지 먹통이라니.

마치 누군가 작정하고 준비한 것처럼 최악의 상황이 계속되고 있었다.

"배리어…! 배리어라도 키면 되지 않을까요?"

최명호가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A768 항공기에는 배리어가 없어."

수많은 기술을 개발하는 능력자가 나온 현시대.

당연히 비행기를 데몬으로부터 지킬 수 있는 기술들도 많이 개발되었다.

문제는 비용.

개발된 기술들을 장착하려면 비행기의 모델 자체가 달라져야 했다.

이미 매입한 항공기들을 쌩으로 내다 버릴 수도 없는 일이었기에 항공사들은 모델의 교체 대신 헌터의 고용과 방어 팀을 꾸리게 한 것이었다.

"아…."

저번 비행에선 배리어가 달려있는 VIP 항공기를 탔기에 헷갈려버린 이다혜.

"기장님, 구형 모델로는 데몬들의 공격을 버틸 수 없습니다."

빠르게 활강하며 들고 있는 창으로 찌르는 게 공격의 다인 도번.

특별하다 할 것 없는 공격이었지만 구형 항공기에겐 이마저도 치명적이었다.

여러 마리가 떼 지어 한 곳을 공격하면 기체에 상처가 생길 터였고.

만 미터 상공에 이런 상처가 생기는 순간 치명적인 결과를 불러올 것이었다.

꽈악.

고민하던 최명호가 기내 방송으로 채널을 돌렸다.

"긴급 사태입니다. 방어 팀과의 연락이 끊겨 접근 중인 데몬을 처치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승객분들 중에 공중에서의 전투가 가능하신 분이 있다면 속히 기장실로 와주시기 바랍니다. 훈련 상황이 아닌 실제 상황입니다."

한 번 더 방송을 반복한 뒤 채널을 닫은 최명호.

최명호의 얼굴엔 낭패감이 물들어 있었다.

실낱같은 희망을 가지고 방송을 하긴 했지만 확률은 희박했다.

'없을 거야….'

이백 명이 넘는 승객이 타 있는 만큼 다양한 능력자가 있겠지만.

만 미터 상공에서 전투가 가능한 인원이 있을 확률은 높지 않았다.

높지 않은 걸 떠나 거의 없다고 보는 게 맞는 수준.

"일단 비상 착륙 준비해주세요. 기내에 있는 헌터들에게도 준비하라고 말씀해주시고요."

"네…!"

비상 착륙이라 말은 했지만 데몬 열댓 마리를 달고 바다로 착륙하는 게 가능할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들리십니까? 기장실입니다."

채널을 돌린 이다혜가 기내에 타고 있는 헌터들에게 상황을 전달했다.

"뭐라고 합니까?"

"헌터들도 동요하고 있습니다. 승객들을 구조하는데 특화된 헌터들이지만 한계가 있을 거 같아요. 이백 명을 모두 챙기는 건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암울한 상황에 기장실로 무거운 침묵이 찾아왔다.

"…."

다가오고 있는 데몬을 마냥 기다릴 수밖에 없는 상황.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는 게 침통할 따름이었다.

똑똑.

기장실의 침묵을 깨며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저기요…? 방송 듣고 왔는데요."

위잉.

기장실의 문이 열리고.

"…!"

열린 문과 함께 등장한 사람에 이다혜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비행기가 이륙하기 무섭게 쉬지 않고 발렌타인을 들이키던 사람.

혹여나 너무 취해 술주정을 부리지 않을까 걱정하던 사람.

알콜 중독이 아닐까 걱정했던 사람이 지금 기장실 문 앞에 서 있었다.

"저 비둘기들, 제가 잡을 수 있을 거 같은데… 딸꾹! 요."

54화. 음주 전투

비행기의 비상구 앞.

승무원 이다헤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날 바라봤다.

"저…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엄지를 치켜세웠다.

안 괜찮지만.

솔직히 기장실에서의 방송이 나온 후에도 한동안은 조용히 앉아있었다.

공중전이라니.

난 불가능이지 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던 것.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기장실로 향하는 이가 단 한 명도 없었다.

없는 건지 아니면 일부러 안 나서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이런.

시간은 흐르고 데몬은 점점 비행기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비행기 안의 승객들은 술렁임과 동시에 패닉에 빠지기 직전인 상황.

처음엔 데몬을 보고도 항공사 측에서 처리하겠지 하고 있었는데 기장의 방송 이후 위급 상황이란 걸 깨달은 모양이었다.

생각해보자.

취기를 누르며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공중전이야 수리검이 있으니 어떻게든 할 수 있었다.

정신만 똑바로 차리고 있으면 추락한다고 해도 수리검을 먼저 던져 살아남을 수 있는 상황.

일단 이론상 공중전 가능.

조금 더 편한 방법 없나?

보니와 리드의 리볼버를 떠올렸지만.

내가 무기왕이요 광고할 게 아니라면 최대한 보류해야 했다.

또 쓴다고 해서 다 제거도 못 할 거고.

도번이 도시의 비둘기와 다른 점이 있다면 비행 속도가 무척이나 빠르다는 것이었다.

어딘가 발을 디디고 쏴야 하는 리볼버를 밖에 있는 녀석들이 그대로 다 맞아 줄 리가 없었다.

어차피 리볼버로 다 잡을 수 없다면 안 꺼내는 게 나아.

리볼버 사용을 보류한 뒤 수리검으로의 전투를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던지고 비전하고 던지고 비전하고.

오케이.

역시 답은 수리검 뿐이었다.

마운티거의 전투에서 사용하긴 했지만 워낙 순식간에 집어 던지다 보니 수리검의 모습이 캠에 제대로 잡힌 적은 없었다.

특징이라 하면 비전하면서 생기는 금색 빛이었지만 영상 때와 달리 지금은 환한 대낮.

눈앞에서 비전을 하더라도 금빛을 알아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준비되셨나요?"

이다혜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음주 전투 관련한 처벌은 없겠지.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사이, 뒤에 있던 헌터가 어깨에 손을 얹었다.

"신호하시면 바로 당겨오겠습니다."

사전에 연결해둔 실로 사람을 당길 수 있는 능력.

전투가 끝나면 바로 당겨달라고 미리 부탁해놨었다.

꼬옥.

다시 한번 헌터의 손을 두 손으로 감싸 잡았다.

"꼭… 꼬옥! 잘 당겨 주셔야 합니다."

다시 돌아오자고 이 무거운 수리검을 비행기로 던질 수도 없는 노릇.

누군가 당겨 주는 게 아니라면 되돌아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일본까지 비전으로 갈 순 없어!

아직도 약 사오십 분이 남은 상황.

꽤나 먼 거리를 계속 수리검을 던지며 나아갈 순 없었다.

분명 중간에 힘이 빠져 바다로 추락할 터.

끄덕.

준비가 되었다는 신호를 보내자 이다혜가 비상구로 손을 뻗었다.

기내에 있는 승객들은 모두 안전벨트를 단단히 하고 있는 상황.

비상구 앞에 있는 사람들은 만약을 대비해 헌터의 실이 연결되어 있었다.

"열겠습니다."

철컥.

후우우우우우우웅!!

비상구가 열리기 무섭게 엄청난 바람이 날 반겼다.

취소하고 싶다.

가능하다면 지금 당장에라도 문을 닫고 안락한 자리로 복귀하고 싶었다.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 해 본 공중에서의 전투.

이론과 실전은 천지 차이라고 했던가.

막상 엄청난 바람을 느끼고 있자니 쉽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저 기권 좀 하겠….

"조심하셔야 합니다!"

"비행기에 탄 이백 명의 승객들과 승무원들이 응원하고 있습니다!"

기권하겠다 하면 얼마나 실망할지 감도 안 왔다.

펄럭 펄럭.

열심히 날개를 휘저으며 다가오고 있는 도번들.

비둘기 쉨.

왜 하필 이번 비행기에 나타나 나의 꿀 같은 퍼스트 클래스 여정을 망친단 말인가.

스윽.

고개를 돌려 실로 연결되어 있는 헌터를 바라봤다.

끄덕.

난 당신을 믿는다는 메세지를 눈빛으로 보낸 뒤 다시 도번으로 눈을 돌렸다.

이왕 가는 거 멋진 포즈와 대사를 하며 가볼 생각이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나라를 위해 희생하러 가는 영웅의 표정을 지은 뒤.

비장하게 첫 발자국을 내디뎠….

삐끗.

응?

"어…?"

이래서 뭘 하든 음주는 위험하다.

첫 발자국을 뻗기 무섭게 발을 헛디뎌버리다니.

그리고 지금 발을 헛디뎠다는 건.

"끄아아아아아!"

몸이 무서운 속도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 * *

"끄아아아아아!"

비장한 얼굴로 비상구를 나서던 백운.

백운이 첫 발자국에 헛디디면서 아래로 추락해버렸다.

"다… 당기세요!"

다급해진 이다혜가 실을 연결한 헌터를 바라봤지만.

"안 당겨져요! 너무 멀어졌어요!"

헌터 이재훈의 능력엔 사정거리가 존재했다.

사정거리 안에는 있어야 당길 수 있는데 준비도 하기 전에 너무 갑작스럽게 떨어져 버렸다.

"아아…."

이다혜가 이마에 손을 짚었다.

처음부터 불안했었다.

짧은 시간에 양주를 두 병이나 들이키고 싸우러 나가겠다니.

다른 방도가 없어 비상구를 열긴 했지만 끝까지 말렸어야 했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비상 착륙을 시도했어야 했는데."

만 미터 상공에서 떨어져 확정형 죽음을 맞이해버린 백운.

싸움을 택한 건 너무 무모했다는 뒤늦은 후회가 몰려왔다.

펄럭!

어느새 도번은 바로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잠시 후면 창을 앞세우고 비행기를 향해 돌진할 기세였다.

"다혜 님, 일단 문을!"

이재훈의 말에 이다혜가 입술을 깨물며 손을 뻗었다.

후회해도 늦은 상황이었다.

지금은 비상구를 닫고 기장실로 가 상황을 알려야 했다.

'백운 님, 죄송합니다.'

말리지 않았다는 죄책감을 느끼며 비상구를 닫으려는 찰나.

콰득!

"?"

순식간에 지나간 무언가에 의해 도번 한 마리가 사라져 버렸다.

"바… 방금 뭐가…?"

콰득!

생각할 새도 없이 이번엔 위에서 거대한 수리검이 날아들었다.

얼마나 강한 위력을 가진 건지 사람보다 두 배는 큰 도번이 순식간에 시야에서 지워지고 있었다.

"꾸륵…!?"

당황한 건 이다혜와 이재훈만이 아니었다.

여유롭게 비행기로 다가오던 도번들도 뜻밖의 상황에 고개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파악하기 힘든 정도의 속도였다.

콰직!

다시 한번 아래에서 날아든 수리검에 도번 한 마리가 삭제당하고.

"야이 비둘기 새끼야아!"

어떻게 한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분명 아래로 추락했던 백운.

죽었을 거라 생각했던 백운이 거대한 수리검을 들고 도번의 머리를 내리찍고 있었다.

* * *

콰직.

"꾸르륵."

머리를 부순 도번의 몸에 발을 디뎠다.

와 존나 무섭다.

취기에 발을 헛디뎌 추락한 순간.

아 이렇게 죽는구나.

라는 생각이 나도 모르게 들었다.

정신줄 안 잡았으면 진짜 죽을 뻔했네.

점점 멀어져 가는 비행기를 보며 이렇게 가는구나 생각이 든 찰나.

정신을 차리고 수리검을 꺼내 위로 냅다 집어 던졌다.

끄덕.

도번 위에 선 잠시의 틈을 이용해 비상구에 있는 사람들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전 괜찮습니다, 여러분.

잠시 본 표정을 봤을 땐 이미 날 포기한 모양이었다.

이다혜의 손 위치를 봤을 때 비상구를 닫으려고 한 듯했다.

절 그렇게 쉽게 포기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문 닫으시면 안 돼요.

눈빛으로 많은 말을 전달한 후.

"꾸르르르!!"

퍼덕이며 위에서 날아드는 도번들을 바라봤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내 모습조차 못 본 비둘기 자식들.

잠시 모습을 보여줬다고 달려드는 꼴이라니.

마치 설사약이 든 빵 부스러기를 향해 달려드는 비둘기 녀석들 같구나.

그렇다고 내가 설사약인 건 아니었다.

그냥 말이 그렇다는 것이다.

휘이이이이!!

아래에서 느껴지는 엄청난 바람이 느껴졌다.

하루 만에 또 이런 바람을 느끼게 되다니.

절레.

인생에 바람 질 날이 없다고 하더니.

진짜 쉬지 않고 바람을 만나고 있었다.

스윽.

아래쪽으로 쇄도하고 있는 도번 무리를 향해 수리검을 집어 던졌다.

제아무리 사람보다 두 배 큰 덩치였지만 수리검의 무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콰득!!

수리검의 속도를 조금도 지체시키지 못한 채 그대로 함께 날아 가버리는 도번.

동족이 죽어서인지 남은 도번들이 눈깔을 뒤집은 채 빠르게 하강하고 있었다.

역시 새대가리야.

조금 전의 공격을 받으면서도 배우는 게 없는 쉨들이었다.

아래에서 위로, 위에서 아래로.

내가 반복하고 있는 공격이었다.

밑으로 열심히 내려와 봐야 의미 없는 짓.

"꾸르르르륵!!!!"

엄청난 울음소리를 내며 도번들이 창을 치켜들었다.

우매한 놈들.

시야에서 수리검을 놓치지 않으며 나도 도번을 향해 무언가를 치켜 들어줬다.

엿 드시고.

시원하게 가운데 손가락을 세워준 후.

얄미운 인사를 건넸다.

안녕히 계시고.

[비전]

* * *

"당겨요오오오오!!"

도번을 다 정리한 후.

비상구 가까운 곳으로 이동한 뒤 이재훈을 향해 소리 질렀다.

팽팽!

이재훈이 손을 뻗기 무섭게 무언가 내 몸을 당기기 시작했다.

오… 좋은데.

그대로 당겨져 가 비상구로 몸이 골인되었다.

쿵!

"끄어."

당기는 속도에 조절은 불가능한 건지 그대로 비행기 벽에 머리를 박아버렸다.

도번을 죽일 때도 멀쩡했던 머리가 깨지는 느낌이었다.

데굴데굴.

그렇게 몇 바퀴를 굴러다닌 후.

왠지 모르게 조용한 주변에 눈을 떠보았다.

"…."

어느새 닫힌 비상구.

비상구 주변으로 퍼스트 클래스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몰려 나와 있었다.

동물원의 물개가 이런 느낌이었나.

멍한 얼굴로 날 내려다보고 있는 여러 명의 사람들.

아.

그 중엔 아는 얼굴들이 섞여 있었다.

술 취한 상태로 도번 잡는다고 잠시 잊고 있었다.

"배… 백운 님?"

* * *

비행기 내부의 의료실.

앞에 앉은 치유계 능력자가 혹이 난 이마에 손을 얹었다.

"정말 깜짝 놀랐네요."

여전히 토끼 같은 눈을 가진 찹쌀떡.

굳이 의료실까지 따라온 전수희가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해외여행 가시는 거라구요?"

"하하. 네."

전수희의 눈에 엄청난 불신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하긴 어제까지만 해도 곡성에서 마운티거 잡고 있었는데.

뜬금 해외여행이라니 의심할 만했다.

"그래도 백운 님 덕분에 아무 일도 없이 끝났네요. 대산의 경호 헌터들도 있었지만 공중전이 가능한 인원은 없었거든요.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어요."

경호원이라니.

어디로 가길래 경호원이 따라다니는 건가 의문이 생겼다.

"수희 님은 어디 가시는 거예요? 그 독… 아니, 실장님이랑."

"일본의 높은 분과 회담이 있어서요. 실장님이 대산 측 대표 대리인으로 참가하게 됐어요."

대… 대표 대리?!

역시 독하게 살아야 하나보다.

실장이 대표를 대리해서 외국으로 가고 있다니.

소피아 님은 공식석상에 안 나선다고 했었지.

소피아는 어지간히도 최리아를 믿는 모양이었다.

저번 토벌전에선 나 때문에 제대로 물을 먹긴 했지만, 최리아는 객관적으로 봐도 일을 잘하는 타입이긴 했다.

"그런데 보통 경호원들이 함께 가나요? 일본이면 해외여행으로도 편하게 가는 곳이잖아요."

"음…."

내 질문에 잠시 미간을 찌푸리던 전수희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정보가 들어왔거든요."

"정보요?"

전수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회담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누군가가… 공격해 올 거라는 정보요."

55화. 뜻밖의 동행

"정말 감사드립니다."

몇 번째 감사 인사인지 모르겠다.

내리는 그 순간까지 계속해서 고개를 숙이는 승무원들.

꾸벅!

비행기가 착륙한 뒤에는 기장까지 버선발로 나와 고개를 숙이기 시작했다.

이쯤 되니 기장과 승무원들의 허리가 걱정될 지경이었다.

슥.

기장 최명호가 금색으로 된 티켓을 건넸다.

뒤에 바코드가 찍혀 있는 걸 보아 무언가의 쿠폰으로 쓰이는 것 같았다.

"아이고… 이런 건 안 주셔도 돼요."

무슨 쿠폰인지는 몰라도 굳이 쓸 거 같지도 않은 걸 받을 필요는 없었다.

마음만 받겠다고 말해야지.

훈훈하게.

"에티드 항공의 골드 쿠폰입니다. 항공사 사이트에 입력하시면 앞으로 어딜 가시든 6회 퍼스트 클래스를 타실 수 있습니다."

훈훈 같은 건 중요하지 않지, 암.

자본주의 시대에 머선 훈훈이야.

사삭.

누가 뺏어갈세라 재빠르게 쿠폰을 안 주머니 깊은 곳으로 찔러 넣었다.

퍼스트 클래스 6회는 참을 수 없었다.

꽈악.

두 손을 잡은 최명호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다음에도 꼭 저희 에티드 항공을 이용해주시기 바랍니다!"

끄덕.

최명호에 응수해 힘차게 고개를 끄덕여줬다.

당연하죠.

타지 말라고 하셔도 최소 6번은 탈 겁니다.

"그럼 즐거운 여행 되시기 바랍니다!"

* * *

백운보다 먼저 심사를 마친 대산의 인원들.

전수희에게 무언가를 들은 최리아가 미간을 찌푸렸다.

'마음에 안 드는데.'

- 백운 님께 동행을 부탁드리는 게 어떨까요?

조금 전 전수희가 건넨 말이었다.

우연도 이런 우연이 없었다.

대산의 인원들이 향하는 회담 장소는 효고현의 히메지 성.

백운 역시 히메지 성이 목적지라니.

"흐음."

토벌전에서 제대로 물을 먹었기에 마음에는 안 들었지만.

'느낌이 안 좋아.'

내리기 전 들었던 기장의 말이 떠올랐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다는 말.

실제로 간사이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먹통이 됐던 관제탑과 방어 팀과의 통신도 모두 연결되었다고 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 아침에 지시가 내려왔다고 합니다. 저희가 지나가는 경로인 기존 작전 지역에서 전부 철수하라는 지시가요.

상부에서 내려온 명령이었기에 그대로 따랐던 방어 팀.

하지만 사건이 일어나고 알아보니 상부에서는 그런 명령을 내린 적이 없다고 했다.

통신 체계를 통해 명령을 하달했던 이가 안개처럼 사라져 버린 것.

'아무나 건들 수 있는 통신이 아니야.'

여기까지만 봐도 누군가 의도적으로 비행기를 노렸다는 건 분명해 보였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비행기에 타고 있던 이백 여명의 승객들.

과연 승객들 중 누구를 노리고 이런 일을 벌인 것일까.

슥.

고개를 든 최리아가 대산의 경호팀을 바라봤다.

국가직으로 쳐도 최소 4급은 될 헌터들이었다.

'더 강한 헌터들이 와주길 바랐지만.'

일정이 맞질 않았다.

그저 홍보용이던 김대석 따위와는 차원이 다른, 어둠 속에서 대산을 지켜내고 있는 진짜 기둥들.

위협을 받는 상황이었기에 그 헌터들의 지원을 받고 싶었지만 한 명 한 명이 모두 따로 임무를 가지고 파견 나가 있는 상태였다.

그렇다고 이번 일정을 미룰 수도 없는 일.

'백운이라.'

대산에 제대로 엿을 먹인 토벌전 동영상.

볼 때마다 이가 갈렸지만 한 가지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강하다.'

토벌전에서 모습을 드러냈던 데몬은 대산의 4급, 5급 헌터들을 어린애 다루듯이 썰어버렸었다.

그런 데몬을 상대로 엄청난 대인 전투를 선보이며 승리를 거둔 백운.

'거기다 어제 곡성에서 있었던 마운티거의 처치와 오늘 있었던 공중전까지.'

토벌전에서도 강했지만 지금은 그때보다 훨씬 더 다채롭게 강해진 느낌이었다.

'그리고 자존심을 세우기에는.'

옆에서 눈을 똘망이고 있는 전수희를 바라봤다.

혼자 왔다면 모르겠지만 자존심 때문에 백운을 놓치기에는 함께 하고 있는 전수희가 마음에 걸렸다.

'….'

대산을 위해 외부의 적에겐 피도 눈물도 없는 최리아였지만.

오랜 시간을 함께해온 전수희에게만큼은 달랐다.

- 퇴사하겠습니다.

- 그만두겠습니다.

입사한 지 며칠 되지 않아 최리아의 성격을 못 견디고 도망쳤던 수많은 사람들.

하지만, 전수희는 달랐다.

힘들어하는 게 눈에 보였음에도 끝까지 곁을 지켜준 부하였다.

"하아."

한숨을 내쉰 최리아가 입을 열었다.

"가서 협조를 구해보도록 하죠."

* * *

불펴어어어어언.

기분 좋게 쿠폰을 받아 나온 간사이 국제공항.

입국 심사를 마치고 나오자 뜻밖의 인물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휘적휘적.

작은 키에 열심히 까치 발을 들고 손을 젓고 있는 전수희.

전수희의 뒤엔 선글라스를 끼고 팔짱를 낀 채 먼 산을 바라보고 있는 최리아가 있었다.

- 저희와 동행해 주시면 안 될까요?

지금 앞에서 눈을 반짝이고 있는 전수희가 건넨 말이었다.

전수희와 동행이라면 모를까 내 첫 여행을 저 독사 년이랑?

절대 안 될 말이지.

칼 같이 거절을 하려던 찰나.

- 백운 님은 지금 히메지 성으로 가실 수 없어요.

청천벽력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곧 있을 회담으로 인해 히메지 성으로 가는 모든 길이 막혔다는 것.

- 히메지 성이 있는 효고현은 현재 삼엄한 경비로 둘러싸여 있어요. 회담과 관련이 없으면 최소 다음 달은 되어야 들어가게 해줄 거예요.

다음 달요?

내가 가지고 있는 스이카에 대한 정보라곤 검의 주인이었던 남자가 귀신같이 백발을 늘어뜨리고 있다는 것과 기억이 보여줬던 배경이 히메지 성이었다는 것, 두 개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한 달을 기다리라니.

안되지, 안돼.

여기까지 왔는데.

스윽.

조심스레 고개를 돌려 기다리고 있는 최리아를 바라봤다.

질끈!

존나 싫다.

벌써부터 온몸이 비틀리며 불편해지는 기분이었다.

- 백운 님이 히메지 성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대산에서 신분을 보증해드릴게요. 히메지 성까지만 같이 가요, 네?

디테일한 이유는 말할 수 없다고 했지만, 뻔했다.

누군가로부터 노려지고 있는 최리아와 전수희.

대산의 경호팀이 있긴 하지만 최대한 더 안전을 기하고 싶은 것이었다.

"백운 님…?"

전수희가 다시 한번 되물어왔다.

대답을 해야할 때였다.

침착해.

난 최리아를 지키는 게 아니다.

스이카를 구하러 가는 거야.

히메지 성에 들어가는 순간 바로 빠이 짜이찌엔이야.

스스로를 다독이며 기다리고 있는 전수희를 바라봤다.

"조… 좋습니다! 같이 가시죠."

* * *

와우.

생각보다 더 불편하네.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목이 뻐근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돌릴 순 없었다.

바로 정면에 앉아있는 최리아.

정면을 바라볼 바엔 담에 걸리는 게 나았다.

"백운 님, 히메지 성으로 가시는 이유가 뭐죠?"

!?

무거운 침묵을 깨며 최리아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 대산을 위해 옳지 않은 방법을 택하긴 했지만, 리아 님은 그리 나쁜 사람은 아닙니다. 너무 미워하지 말아 주세요.

최리아가 한 행동에 대해 대신 사과를 건넸던 소피아.

겉으론 알겠다고 했지만 어쩌겠는가.

싫은 건 싫은 건데.

"해외여행이라고 하시진 않겠죠?"

뜨끔.

이거 봐.

사람을 뜨끔하게 만들기나 하고 말이야.

이래서 눈치 빠른 녀석은 싫다니까.

"개인 용무입니다."

솔직히 물어볼 거라 예상은 했었다.

어떤 미친놈이 관광하자고 이 불편한 차에 올라타겠는가.

지나가던 꼬맹이도 의심할만한 상황이었다.

저 저 눈알 희번덕거리는 거봐라.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최리아는 묘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휙.

더러워서 안 물어본다는 듯 창밖으로 다시 고개를 돌리는 최리아.

"하하…."

그런 둘 사이에서 전수희만이 전전긍긍하며 땀을 흘리고 있었다.

분위기 개선을 위해 무언가 하고 싶어도 옆에 있는 건 다름 아닌 상사 최리아.

회사에서의 관계를 생각해보았을 때 뭔가를 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래도 가는 길엔 아무 일 없어서 다행이네요."

어허 저런 복선 깔리는 말을 하다니.

"계속 이 상태로 히메지 성까지…."

퍼엉!!

!?

"꺄악!"

차량 좌측 아래를 때리며 폭발한 무언가. 

무언가에 의해 차량이 하늘로 솟아올랐다.

* * *

"끄아… 괜찮아요?"

그대로 나뒹굴며 뒤집혀버린 차량.

특수 소재의 차량이라 그런지 폭발이 닿은 건 아니었지만, 정신없이 구른 탓에 아직도 눈앞이 핑핑 도는 것 같았다.

"네… 네, 괜찮아요. 실장님 괜찮으세요?"

"…."

구르며 부딪힌 건지 최리아는 머리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시… 실장님!"

최리아를 살피는 전수희를 뒤로 하고 뒤집혀 있는 차 문을 열어젖혔다.

동굴을 찾는 것부터 이상하게 순탄하다 싶었는데.

아까 데몬도 한 통속인지는 모르겠지만 벌써 두 번째 공격이었다.

어떤 새끼들이야.

아직도 빙빙 도는 눈에 머리를 흔들며 몸을 일으켰다.

챙! 챙! 쾅!

먼저 차에서 내려 정체불명의 적들과 교전 중인 대산의 헌터들.

헌터들이 밀릴 거 같진 않았지만 적의 숫자가 배는 더 되어 보였다.

요즘 세상에 닌자야 뭐야.

검은색 복면을 뒤집어 쓴 채 대산의 헌터들과 싸우고 있는 적들은 흡사 영화에서나 보던 닌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한 명 한 명의 움직임이 잘 훈련되어있는 듯한 느낌.

처음 전수희의 말을 들었을 땐 과한 우려가 아닌가 했었는데.

이건 제대로 작정하고 죽이려는 것 같았다.

"후우…!"

천천히 숨을 들이쉬며 초점을 맞췄다.

저벅.

팽팽하게 싸우고 있는 곳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잭 더 리퍼]

* * *

"가… 감사합니다, 백운 님."

"고맙습니다."

적들을 상대로 치열하게 싸웠던 대산의 헌터들이 고개를 숙였다.

토벌전 이후로 나를 대하는 태도가 180도 변해버린 대산 헌터들.

"아니에요. 그나저나 이 닌자 새끼들 어디서 튀어나온 거지."

묻은 피를 털어낸 뒤 면도칼을 해제시켰다.

싸움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훈련을 받은 듯 했지만 닌자들이 잭 더 리퍼의 움직임을 따라오는 건 무리였고, 내가 참전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도망친 몇몇을 제외한 모든 닌자들이 피를 뿜으며 바닥에 널브러지게 되었다.

부우우우웅!

멀리서 이곳을 향해 달려오는 차량들이 보였다.

"아! 히메지 성에서 나오기로 했던 호위 병력입니다."

"공항 도착해서부터 마중 나왔어야지 뭐하다 이제 오는 거예요?"

내 투덜거림에 옆에 있던 헌터가 고개를 내저었다.

"원래는 시간을 맞춰 마중 나오기로 했었습니다. 도착하고 나서 연락이 안 닿았지만요."

구린내 봐라 이거.

비행기부터 호위 병력의 마중 시간까지.

마치 누군가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고 있는 기분이었다.

고개를 돌려 차에 기대있는 전수희와 최리아를 바라봤다.

다행히 최리아는 정신을 차린 모양이었다.

의외네.

보려고 본 건 아니었다.

전수희는 놀라느라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지만, 차가 공중으로 떠오른 뒤 떨어지는 순간.

최리아는 온몸으로 전수희를 감싸 안았었다.

"실장님, 괜찮으신 거죠?"

최리아의 옆에서 눈물을 글썽이고 있는 전수희.

전수희는 최리아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었다.

- 너무 미워하지 말아 주세요.

소피아의 말이 떠올랐다.

흠… 뭐.

누군가한테는 좋은 사람일 수도 있겠네.

56화. 히메지 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