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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4화. 탈출 방법

덜그럭.

덜그럭.

"너 힘 세구나."

앞서 걷던 노운이 고개를 돌렸다.

사람 키보다 큰 높이와 넓이의 꾸러미.

피난을 가도 이렇게는 안 가겠다 싶을 정도로 꾸러미는 거대했다.

"이거 열 개는 더 들 수 있어."

안에 뭐가 들었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어쨌든 들 수 있을 것 같았다.

못 들면 수리검이나 비늘을 꺼내서라도 들면 되니 거짓말은 아닌 셈이었다.

"오호."

노운이 특유의 눈빛을 번뜩이며 날 이리저리 훑었다.

노운은 내가 처음 꾸러미를 들 때부터 신기한 생물을 보는 듯한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 내가 도와줄게.

꾸러미를 들기 직전 노운이 한 말이었다.

솔직히 놀랐었다.

예상 밖의 반응이었기 때문이다.

거대한 꾸러미를 들려고 하자 다가와서 손을 건넸던 노운.

아마도 꾸러미의 크기를 보고 내가 혼자 낑낑대며 들 거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조금만 더 가면 되니까 힘내자고."

살짝 웃어 보인 노운이 고개를 돌려 앞을 응시했다.

이런 곳에 은신처가 있다니.

신기하네.

먹을 걸 다 먹고 정적이 찾아오려는 찰나였다.

- 내 은신처가 있는데 거기로 가자.

안정된 장소에서 라면을 먹기 위해 나름 절벽 밑으로 파고 들었지만.

누군가 안정적인 장소가 맞느냐 묻는다면 1초의 고민도 없이 아니라고 대답할 수 있었다.

뒤에 절벽을 끼고 있다 뿐이지 앞은 아무런 바람막이도 없이 뻥 뚫린 장소였다.

저벅.

걸음을 옮기며 앞에 있는 노운의 뒤통수를 바라봤다.

때리려는 건 아니었다.

내 통수치려는 건 아니겠지.

단지 뭐랄까.

누군가의 뒤통수를 바라보고 있어서일까.

이대로 생각 없이 따라갔다가 되려 내가 맞는 거 아닐까란 의심병이 도졌다.

아는 게 너무 없어.

이름이 노운이란 거 말곤 알고 있는 게 전혀 없었다.

애초에 뭘 물어보던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대답하니 방법이 없었다.

진짠지 아닌지도 모르겠고.

반응 자체는 아무 일 없는 사람처럼 굴고 있지만.

정말 기억상실증일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구라치지마! 라고 강하게 밀고 나가기는 힘들었다.

어차피 따라가야 하니까.

의심은 들지만 내게 선택지는 없었다.

- 여기 나가는 방법, 아는데?

처음에 들었을 땐 내가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잠시 고민하는 척이라도 할 줄 알았는데.

노운은 그것도 모르냐는 얼굴로 안다고 대답을 해왔다.

사과 하나 더 먹으면 쫓아내려고 했는데.

꾸러미에 식량은 썩어날 정도로 많았지만.

그렇다고 막무가내로 소비할 순 없었다.

언제까지 이곳에 있어야 하는지도 몰랐고, 이런 황폐한 땅에 내가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존재하는지도 불투명했다.

다행이야.

내게 사과 하나만큼의 포용력이 더 있어서. 

못 참고 이전 사과를 먹을 때 쫓아냈으면 저 대답을 못 들을 뻔했다.

얼마나 기가 차고 억울한 일이던가.

사과 하나를 못 내줘서 탈출 방법을 잃어버릴 뻔했으니 말이다.

- 방법은 알지만 쉽지 않아.

여기서 조금 신뢰가 생겼었다.

사기꾼이었다면 온갖 귀를 홀리는 말로 날 꼬드겼을 텐데.

노운은 턱을 문지르며 쉽지 않다고 말을 덧붙였었다.

- 방법은 알지만 필요한 것들이 몇 개 있거든.

퀘스트 깨는 느낌이네.

어렸을 적 했던 게임의 퀘스트가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만드는 방법은 알고 있으나 필요한 재료는 내가 모아야 하는 상황.

- 여기 들어올 때 목걸이를 사용했다고 했지? 그런 신통한 바인딩 능력은 만들 수 없지만, 이 세계 밖으로 튕겨내는 건 만들 수 있어.

정확한 제작 방법이나 동작 방식은 굳이 물어보지 않았다.

내가 듣는다 한들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기 때문이다.

흠.

개발자나 과학자였으려나.

파편 같은 기억.

어떻게 그런 제작 방법은 기억하고 있냔 말에 노운은 대답했었다.

파편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어 하나로 모을 순 없지만.

드문드문 선명하게 기억나는 것들이 있다고 말이다.

"노운, 망자의 세계는 전부 이렇게 황폐하기만 한 거야?"

갑자기 생각이 들었다.

노운이 있다면 다른 사람도 있지 않을까란 생각.

"아니, 많이 다르긴 하지만 이곳도 다른 세계와 같은 세계 중 하나일 뿐이야."

"그럼 먹을 걸 구할 수도 있어?"

노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난 떠돌이처럼 지내지만 집단을 이룬 이들도 많거든. 그런 곳엔 네가 먹을만한 것들이 있을 거야."

몹시 다행이었다.

아직 식량이 가득하긴 하지만, 바닥 났을 때 보급의 가능 여부에 따라 허리띠를 졸라매야 할 수도 있었다.

다행은 다행이고.

의외네.

첫 방문 때의 임팩트 때문이었을까.

나에게 있어 망자의 세계는 생명이라곤 절대 찾아볼 수 없는 불모지란 이미지로 남아있었다.

그렇기에 노운을 처음 만났을 때도 기겁을 하며 넘어갔었다.

한 명도 모자라 집단을 이룬 이들이 있다니.

대체 뭐하는 사람들이지.

노운의 말대로 다른 이도 있다면 조금이라도 빨리 만나보고 싶었다.

모두가 이곳에 오기 전의 기억을 잃었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누군가는 기억을 가지고 망자의 세계로 온 과정과 이유 등을 알고 있을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척.

앞서 가던 노운이 걸음을 멈췄다.

"여기야."

도착했다는 말에 고개를 들자.

역시 발명가였어.

란 생각이 절로 드는 공간이 나타났다.

지형의 변화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듯한 동굴 비스무리한 공간.

공간 속엔 엄청난 양의 물건이 놓여있었다.

잡동사니… 라고 하면 실례니까.

잡동사니란 단어는 넣어두기로 하고 앞으로 걸어가 공간을 눈에 담았다.

"내 실험실이자 오락실, 오락실이자 연구실이야."

평소 노운이 뭘 하고 있을지 눈에 훤히 보이는 공간이었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그때마다 호기심이 느껴지는 물건을 만지작거릴 듯한 느낌.

"뭐랄까, 이곳에 오기 전의 난 이론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던 거 같긴 한데… 이곳은 생각만 하며 보내기엔 너무 심심하더라고."

어깨를 으쓱 올려 보인 노운이 아무렇게나 물건을 밀어 공간을 만들었다.

"여기에 자리 피면 돼. 오늘은 좀 쉬고 내일 출발하자."

덤덤이 말을 건네는 노운에게 엄지를 치켜세워준 뒤.

꾸러미에서 텐트를 꺼내 설치를 시작했다.

* * *

"여기 엄청 따듯하네."

텐트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들으며.

뭐지.

내 텐트 안에 다른 사람이 있어.

잠시 눈을 끔뻑였다.

- 이걸 텐트라고 부르는 거야?

처음 구매하기도 했고 크기도 꽤 큰 걸 샀기에 조립에 애를 먹고 있었다.

그런 과정을 시작부터 눈을 반짝이며 지켜보고 있던 노운.

노운은 텐트가 완성되기 무섭게 들어가서 누워봐도 되냐고 질문을 건네왔었다.

설치 지분을 인정해주긴 해야 하니까.

이것이 내 텐트를 노리고 있는 건가 의심도 들었지만.

그렇게 의심하기엔 설치하는 동안 노운의 활약이 컸다.

- 그건 그렇게 끼우면 안될 거 같은데.

텐트도 처음 보는 놈이!

라고 처음에 생각했지만 노운이 건넨 조언 중 틀린 건 단 하나도 없었다.

내가 설명서를 보면서 개삽질을 하는 것보다 노운이 한 번 스윽 훑어본 후 건네는 조언을 따라하는 게 더 빠르고 정확했다.

"여길 막아두는 구조라 온도가 유지될 수 있는 거구나."

안에서 부시럭대며 텐트를 탐구하는 노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까지 못 보던 흥미로운 물건을 발견해서일까.

착각일 수도 있지만 처음보다 더 신난 듯한 목소리였다.

슥.

탐구에 푹 빠진 노운을 남겨둔 채.

오랫동안 지냈다는 노운의 은신처를 다시 한 번 자세히 살폈다.

엄청 만지작거린 모양이네.

쭈그리고 앉아 여기저기 펼쳐져 있는 물건들을 살폈다.

각기 다른 생김새와 용도처럼 보였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전부 다 빛이 바랠 정도로 닳아 있단 것이었다.

흐음.

닳아버린 물건들을 보고 있자니 왠지 모르게 짠한 기분이 들었다.

온지 하루 밖에 안됐는데도 엄청난 황폐함과 적막함에 사람이 살 곳이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세계였다.

그런 세계에서 노운은 오랜 시간을 동굴의 물건들을 만지작거리며 홀로 보내왔다.

적막한 세계에 와서 그런가.

오늘 따라 어째서 이런 짠함이 느껴지는지는 의문이었다.

평소였다면 남의 일이라고 나름 재밌게 잘 살고 있네! 하고 넘겨버렸을 텐데.

이불도 없이 자는 건가.

망자의 세계에서 이불 생각을 하는 게 웃기기도 했지만, 어쨌든.

노운의 공간 어디에도 이불이나 덮고 잘만한 건 보이지 않았다.

"…."

쯧.

가만히 바라보다 혀를 한 번 찬 후.

아직도 부스럭대고 있는 텐트를 돌아봤다.

이불도 넉넉하겠다.

어차피 8인용 텐트니까.

"노운, 거기서 자볼래?"

질문이 건네지고 잠시 후.

"텐트란 것에서의 잠이라… 흥미로운 탐구가 되겠는데? 좋아."

아직까진 추정이지만.

과학자다운 노운의 대답이 들려왔다.

* * *

"거의 다 왔어."

오늘도 어김없이 눈에 보이는 건 노운의 뒤통수였다.

거의 다 왔다며 앞에서 여유롭게 걸음을 옮기고 있는 노운.

은근 쿨하네.

떠나는 길에 노운이 챙긴 건 특이하게 생긴 망토 두 개가 다였다.

- 이걸 쓰고 있으면 망자가 날 알아보지 못하거든.

노운은 엄청난 발명가이자 과학자일지도 몰라! 라고 생각이 든 부분이었다.

망자들은 조금만 다가가도 내 존재를 눈치채고 달려들었었다.

이런 살벌한 세계에서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남은 건가 궁금했었는데 저런 사기적인 망토가 있었다니.

- 너도 하나 써.

여기까지 오는 길에 망자를 만난 적은 없기에 효과가 검증되진 않았지만.

어찌 됐거나 쓰고 있으니 마음이 평온해지는 망토였다.

그나저나.

무슨 부탁이려나.

하루종일 어두워 밤과 낮의 기준이 모호하긴 하지만.

내 기준상 어젯밤.

노운과 난 각각 넓직한 텐트의 구석탱이에 자리를 잡고 누웠었다.

- 이곳이 아쉬운 게 있다면 빛이 너무 적다는 거야. 눈부신 빛이 있어야 그 빛에 반사되는 난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궁금할 텐데 말이야.

누가 과학자 아니랄까봐.

노운은 잠 드는 순간까지 여러 과학적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꾸러미에서 테이프를 꺼내 입을 막아야 하나 고민이 될 정도로 말이다.

- 아 맞다. 내가 널 원래 세계로 돌려보내 줄 테니까, 너도 내 부탁 하나 들어줘.

올게 왔구나! 라고 생각했었다.

무려 세계를 건너뛰게 해주는데 아무런 대가가 없는 건 말이 안됐었다.

- 뭐… 뭔데?

약간 목소리가 떨렸던 것 같았다.

뭘 요구하려나 긴장한 탓이었다.

- 때가 되면 말해줄게. 충분히 들어줄 수 있는 거야.

그렇게 모호한 말을 마친 뒤 노운은 잠에 들었었다.

말해 줄 생각이 아직은 없으니 되묻지 말라는 무언의 의사표현인 것 같았다.

"다 왔다."

나중에 무슨 부탁을 하려나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

도착했다는 노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가 첫 번째 재료가 있는 곳이야."

간단한 소개를 들으며 노운의 옆으로 걸음을 옮겼다.

…!!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입을 벌릴 수 밖에 없었다.

이건 또.

꼴깍.

뭐냐.

205화. 구렁텅이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 세계.

망자의 세계에 대한 내 첫 감상평이었다.

하지만.

그런 감상평을 한 게 무안해 질 정도로 눈앞엔 엄청난 수의 사람이 존재하고 있었다.

어디로 가는 거지.

정말 길고 긴 줄이었다.

미슐랭 쓰리스타를 받았지만 가격은 몹시 싼 맛집이 있다면 이 정도 웨이팅이 생기지 않을까 싶은 줄.

달팽이 껍데기의 소용돌이 마냥 일렬로 빙글빙글 끝도 없이 이어져 있는 행렬에 절로 고개가 내저어졌다.

"밑으로 가고 있는 거야."

진짜네.

노운의 말을 듣고 보니 알 것 같았다.

아주 느리지만 조금씩 앞으로, 밑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사람들.

대체 밑에 뭐가 있길래 이 정도의 줄이 있는 걸까.

"우리가 필요한 건 맨 밑에 있어."

아찔하네.

조금 더 앞으로 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엄청난 깊이의 구덩이였다.

말 그대로 끝이 보이지 않는, 들어갔다간 다시는 나올 수 없을 것 같은 구덩이.

깊이보다 더 아찔한 건.

슥.

이 미친 듯한 웨이팅을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음 대충 조금씩 나아가는 속도와 숫자를 봤을 때, 우리가 눈이 닿는 밑까지 내려가는 데는."

열심히 눈알을 굴리던 노운이 입을 열었다.

"2년 정도 걸리겠는데."

"…."

기가 차서 반박할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2년이라니.

당장 망자의 세계를 나가서 뜨신 물에 몸을 담그고 싶은데 2년이라니.

말도 안 되는 기다림의 시간이었다.

내려가기 전에 굶어 죽겠다.

꾸러미에 든 식량도 문제였다.

아래를 봤을 때 존재하는 건 밑으로 내려가는 행렬뿐이었다.

중간에 밥집이 있다던가 식료품을 구할 수 있다던가 하는 건 아무리 봐도 불가능했다.

따각.

"크클… 너네들도 저기 아래로 가려는 건가?"

저걸 어느 세월에 기다리고 앉아 있나 막막해하고 있을 때.

가래가 잔뜩 낀 듯한 걸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할아버지?

지팡이를 짚고 있는 할아버지였다.

딱 봐도 어딘가에서 요양을 하고 계셔야 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서라, 결국 모든 시간을 뺏기고 나처럼 될 테니까."

기분 나쁘게 웃으며 할아버지가 고개를 저었다.

"나는 다를 거야. 나는 괜찮을 거야… 나도 그렇게 생각하며 줄의 맨 뒤에 섰었지."

이야기는 더 들어봐야겠지만.

아마도 저 긴 웨이팅을 기다려본 경험자 같았다.

100세가 넘어 보이는 고령의 나이로 저걸 기다렸다니.

대단한 할아버지였다.

"아래로 내려가면 뭐가 있는데요?"

말을 길게 이어가고 싶지 않은 스타일이었지만, 정보가 필요했다.

사람들은 뭘 위해 오랜 시간을 기다리며 내려가는 것이고, 다 내려갔을 때 손에 넣을 수 있는 건 무엇인지 말이다.

"그건 아무도 모르지."

"…?"

통달한 듯이 말하길래 뭐라도 좀 알고 있나 했는데.

별 영양가 없는 대답이 들려왔다.

"아마 아무도 모를 거야. 맨 아래까지 내려가기도 전에 모두 실패하니까."

털썩.

서 있는 게 힘에 부치는지 자리에 앉은 할아버지.

기침을 몇 번 한 할아버지가 날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내가 몇 살로 보이지?"

몇 살 같아요? 

살면서 흔히 들을 수 있는 질문이었다.

딱 봐도 이렇게 어르신인 사람이 물어본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말이다.

낮춰야 하긴 하겠는데.

몇 살이나 낮춰야 하지.

질문은 간단했지만 답을 하는 건 쉽지 않았다.

보이는 것보다 낮춰야 하는 건 국룰이지만 얼마나 낮춰야 하는지가 문제였다.

허무맹랑할 정도로 낮게 부르면 날 놀려먹으려고 오바를 하는구나! 라고 호통을 칠지도 몰랐다.

"백…."

텁.

무언가 대답하려는 노운의 입을 막은 후.

"70살요."

내가 생각하던 나이에 마이너스 삼십을 한 후 대답했다.

"크하하하하!"

좋아!

크게 웃는 할아버지를 보며 속으로 나이스를 외쳤다.

미묘한 줄타기에 성공해 할아버지의 마음에 쏙 드는 나이를 말한 것 같았다.

"틀렸어."

그렇게 스스로의 처세술에 감탄하고 있을 때.

틀렸다는 말과 함께 믿을 수 없는 말이 들려왔다.

"서른 살이다."

거짓말하지 마!!

라고 외치고 싶었다.

농담도 정도껏 해야지 아무리 봐도 백살 이상인데 서른이라니.

단순히 노안이라는 단어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구덩이로 내려갔을 때의 대가지."

내 반응을 덤덤한 얼굴로 바라보며.

할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 * *

깜빡 잠이 들었던 륭이 눈을 떴다.

'아직도 이 정도 밖에 못 갔나.'

분명 오랜 시간을 잔 느낌이었는데.

그럼에도 눈앞의 사람은 몇 발자국 전진한 게 끝이었다.

'언제까지 저 뒤통수를 봐야 하지.'

더럽게 지겨웠다.

더럽게 지겹다는 말로 부족할 정도로 지긋지긋한 뒤통수였다.

'뭐 내 뒤에 있는 놈도 마찬가지겠지만.'

서로가 서로의 뒤통수를 보며 지긋지긋하다고 느끼고 있는 행렬.

륭은 수많은 인파의 행렬에 속해 끝이 보이지 않는 행군을 이어가고 있었다.

'얼마나 지난 거지.'

망자의 세계에 떨어지고 얼마의 시간이 지난 지는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밑으로 내려가기 위해 행렬에 속한 시간도 하도 오래되어 감이 잡히지 않았다.

'내려가야 돼.'

지긋지긋하고 지겨운 행렬.

저 끝에 무엇이 있고 언제까지 이렇게 가야 하는지 어느 것 하나 뚜렷한 게 없었지만, 포기할 순 없었다.

- 바닥엔 망자의 세계를 빠져나갈 수 있는 물건이 있다.

망자의 세게에 속한 사람들에게 암묵적으로 전해지는 말이었다.

누구도 끝까지 내려가 본 적은 없기에 어디서 나온 말인지 출처는 확인 불가능했으나.

말은 돌고 돌아 어느새 기정사실화 되어 있었다.

'나갈 거다.'

끝없는 행렬을 기다리게 만드는 원동력이었다.

망자의 세계에서 벗어나 다시 지구로 돌아가고자 하는 다짐.

이 다짐 덕분에 륭은 포기하지 않고 행렬을 계속해서 이어 갈 수 있었다.

"으아아악!"

"끄악--!!"

꽤 떨어진 곳, 륭보다 훨씬 앞선 곳에서 사람들의 비명이 들려왔다.

꿀꺽.

이미 내려오며 수도 없이 들은 비명이었지만.

들을 때마다 모공이 송연해지며 머리가 쭈뼛 서는 소름 끼치는 비명이었다.

'대체 앞에 뭐가 있는 거지.'

륭이 처음 행렬에 도착했을 때 가졌던 의문점이 있었다.

어차피 망자의 세계이고 어떠한 법도, 질서도 없는데 사람들은 어째서 이리도 질서정연하게 움직이고 있는 것일까란 의문.

그리고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륭은 질서가 지켜지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뭐라도 좀 보여라.'

다들 보고 대비하려는 것이었다.

앞에 있는 이들이 마루타가 되어 만나게 되는 것들을 뒤에서 먼저 본 후.

자신은 어떻게든 대처해 앞에 있던 사람과는 다른 결말을 맞이하고자 했던 것이다.

"으아악!"

그렇게 륭의 귓가로 몇 번의 비명이 더 들렸을까.

륭의 시야로 무언가가 보이기 시작했다.

"!!"

거대한 입을 가진 존재였다.

실체는 없지만 흐릿한 연기로 이루어져 있는 생물체.

지구에 있는 생물 중 굳이 닮은 걸 하나 고른다면 여우였다.

여우의 입을 닮은 생김새였다.

콰득!!

앞서 가던 이들은 한 명씩 잡아먹히고 있었다.

스스로 걸어 정체불명의 아가리로 걸어 들어가고 있다니.

아이러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타닥!

누군가는 달렸고.

샤삭!

누군가는 옆으로 붙어 벽을 따라갔다.

앞에서 벌어진 결과를 보며 나름 생각해낸 방법이었다.

하지만.

모두의 노력을 비웃듯 여우의 입은 길을 통과하려는 모든 이를 집어삼켰다.

그리고 집어 삼켜진 이들의 얼굴은 끔찍할 정도로 일그러졌었다.

감히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을 느끼는 것처럼 말이다.

'미… 미쳤어.'

앞에 있는 사람이 계속해서 잡아먹히는데도 뒤에 있는 이들이 포기하지 않는 이유는 간단했다.

이곳까지 내려오는데 너무 오랜 시간을 들였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왔는데 이제 와서 되돌아갈 수는 없다는 생각.

그 생각이 사람들을 무모하게 만들었고 결국엔 여우에게 잡아먹히는 결말을 낳게 만들었다.

'불가능해.'

하지만 륭은 달랐다.

죽기 아니면 까무라치기라고 길을 나섰던 륭이었지만.

앞에 놓인 현실을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용기가 넘치진 않았다.

주춤.

아주 오랜만에 앞이 아닌 뒤로 몇 걸음 물러난 륭.

"뭐야! 빨리 가!"

"앞으로 가!!"

뒷사람들의 목소리에 겁을 먹은 륭이.

"나… 난 안 가!!"

앞이 아닌 뒤를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 * *

"이게 규율을 무시하고 뒤로 내달린 결과지."

자신을 륭이라 밝힌 할아버지가 이야기를 마쳤다.

무시무시한데.

엄살을 피는 게 아니었다.

사람들과 달리 아래가 아닌 위로 내달려 도망치는 동안 륭의 몸은 급속도로 노화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꼭대기에 이르렀을 땐 지금처럼 백 살에 가까운 몸이 되었다는 륭.

슥.

고개를 돌려 끝이 안 보이는 구덩이를 바라봤다.

무슨 룰이 적용되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도망친 자에게 노화를 선물하는 구덩이라니.

말만 들어도 발을 들이고 싶지 않은 곳이었다.

"난 이 썩은 몸뚱이로 평생을 살아야겠지. 이렇게 되고 싶다면 내려가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야."

탁… 탁.

륭이 기분 나쁜 웃음을 흘리며 멀어져 갔다.

엄청난 시간을 기다려야 하는 것도 모자라서 내려가는 순간 정체불명의 여우에게 잡아먹히거나 할아버지가 되어야 한다라.

평소라면 고민할 것 없이 등을 돌려 후퇴했을 것이다.

망자의 세계에서 평생 살 생각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말이다.

안될 말이지.

물론 그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숨을 쉬기만 해도 꿉꿉하고 찐뜩함이 느껴지는 망자의 세계.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은 곳이었다.

"내려갈 거면 줄 서자."

옆에서 노운의 담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륭의 말을 들으면서도 조금도 겁에 질리지 않은 목소리였다.

다행이네.

가기 싫다고 안 해서.

나야 륭이 더 심한 말을 했어도 갈 생각이었지만.

노운이 겁에 질려 고개를 저을까 봐 조금 걱정했었다.

걱정한 게 무색할 정도로 아무렇지 않은 모습이라 다행이었다.

"가자."

저벅

노운과 함께 구덩이의 입구로 향했다.

입구까지 뻗어 있는 대기열.

불가능이라 불리면서도 모두가 이곳을 벗어나겠다는 일념 하나로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걸 다 기다릴 순 없지.

노운이 간략하게 했던 계산을 떠올렸다.

눈에 보이는 데까지만 해도 2년이었다.

구덩이가 더 깊을 것으로 가정했을 때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릴지는 정말 미지수.

흐음.

구덩이를 보며 약간의 생각을 마친 후 노운을 바라봤다.

"발상의 전환이란 말 알아?"

"…?"

갑자기 무슨 말을 하냐며 노운이 의아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말 자체는 알지만 내가 이런 말을 꺼내는 이유를 궁금해하는 것 같았다.

"줄은 서지 않는다."

당당하게 선포한 뒤 꾸러미를 더 꽉 조여맸다.

어디에 부딪히거나 하더라도 웬만해선 찢어지지 않는 튼튼한 소재의 꾸러미였다.

잘 샀어.

다시 한번 스스로의 선택에 고개를 끄덕인 후.

휘익!!

들고 있던 꾸러미를 구덩이로 집어 던졌다.

"!!"

나의 돌발행동에 눈이 커진 노운.

그런 노운의 뒷덜미를 붙잡았다.

"우리는."

아직까지 상황파악 중인 노운에게 묘한 미소를 그려 보이며.

"지름길로 간다."

구덩이로 몸을 날렸다.

206화. 먹이

가끔 인터넷이나 TV에서 본 적이 있었다.

사람이 어딘가에서 떨어질 땐 무거운 머리부터 떨어진다는 얘기였다.

진짜였구만.

어느새 뒤집혀 바닥으로 향해 있는 머리를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세상이 거꾸로 뒤집힌 느낌이었다.

시야에 들어오는 게 몽땅 뒤집혀 있는 신기한 경험.

"!!!"

구렁텅이를 내려가던 모든 이가, 앞사람의 뒤통수만 보며 몇 개월을 넘어 몇 년의 시간을 걷던 이들의 시선이.

모두 텅 비어 있는 구덩이의 중심으로 향해 있었다.

미친놈이라고 생각하겠지.

충분히 이해가 갔다.

륭이 들려준 이야기를 미루어 봤을 때.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사람들이 줄을 지어 내려가는 이유는 간단했다.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서.

아래에 뭐가 있을지 모르니 조금이라도 더 대비하고자 함이었다.

하지만, 아래에 괴물이 있든 죽음이 있든 빨리 가겠다고 일단 뛰어내리고 앉았으니.

내가 생각해도 미친놈이긴 했다.

슥.

고개를 돌려 함께 떨어지고 있는 노운을 바라봤다.

생각보다 덤덤하네.

뛰어내리기 직전 깜짝 놀라던 걸 미루어 봤을 때.

분명 비명을 지를 거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게 자유낙하구나."

비명은커녕 이런 말이나 하고 있었다.

언제 바닥과 만나 머리가 터져나갈지 모르는 상황인데도 말이다.

"지하의 중력이 우릴 당기고 있는 거야."

….

호기심을 빛내며 내게 알려주려는 듯 말을 건넸지만.

내 머릿속엔 이러한 정보보다 이런 상황에서도 덤덤할 수 있는 노운이 더 신기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어떻게 할 거야?"

무언가 열심히 중얼거리던 노운이 내게 물어왔다.

자기까지 잡아다 점프한 날 원망하려는 건 아니었다.

단지 궁금한 것 같았다.

지하 중력의 끌어당김으로부터, 자유낙하 운동 중인 이 상황으로부터 어떻게 안 죽고 살아남을 것인지를.

"다 방법이 있지."

떨어지면서 잠시 스쳐 지나가는 주변을 감상하긴 했지만.

내 눈은 줄곧 바닥 쪽을 향하고 있었다.

언제 바닥이 나타날지 모를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던져볼까.

얼추 처음 눈에 닿았던 지점까진 내려온 느낌이었기에.

[도윤 - 비젼 수리검] 

수리검을 꺼내 아래를 향해 빠르게 던져냈다.

후우웅--!

바람을 가르며 바닥으로 향한 수리검.

수리검이 날아가고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쿠웅!!

수리검이 바닥과 만나며 만들어낸 마찰음이 들려왔다.

지금 비젼하면 거꾸로 도착할 테니까.

옆에 멀뚱히 있는 노운을 위해 안정적인 랜딩을 하기로 결정하고.

바닥에 거의 다다랐을 때쯤.

[이카로스 - 칼데아 윙]

타이밍에 맞춰 꺼낸 날개의 연기를 바닥 쪽으로 터뜨렸다.

퍼엉!!

바닥과 부딪힌 연기의 반발력으로 떨어지던 속도가 순간 상쇄되었다.

휘릭.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몸을 바로 하며 바닥으로 발을 내디뎠다.

착지 성공.

"대단한데."

바닥에 착지하고서도 노운은 가슴을 쓸어내리거나 하지 않았다.

대신 아직도 일렁이고 있는 내 날개를 감상하고 있었다.

스르르.

바닥과 부딪히며 사방으로 퍼졌던 연기가 희미해질 때쯤.

꿈틀.

무언가가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하늘에서 웬 먹이가 떨어졌구나. 뭐 하는 놈이냐?"

지하 공간 전체를 울리는 무언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 *

여우…?

륭의 경험담이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소름 끼치는 목소리와 함께 눈앞에 나타난 건 여우 형상을 한 생명체였다.

생명체라고 부르는 게 맞나 약간 의구심이 들긴 했지만, 어쨌든 형태를 갖추고 말을 하고 있으니까.

할아버지가 말했던 것보다 훨씬 큰데.

륭 역시 거대한 아가리라고 표현하긴 했지만.

눈앞에 있는 여우는 거대한 수준이 아니었다.

거대한 기와집 몇 개를 붙여 놓은 듯한 초거대한 몸집이었다.

"뭐 하는 놈이냐고 물었다."

여우쉨이?

계속해서 강압적으로 묻는 말투가 거슬렸지만 지금은 찾아야 할 게 있었다.

- 첫 번째 재료는 구슬이야.

"여기에 구슬이 있다고 들어서요. 구슬을 찾으러 왔습니다."

지하의 눅눅함이 온몸으로 느껴지고 있었기에.

지체 없이 이곳으로 온 목적을 말했다.

"!!!"

구슬이란 단어 때문이었을까.

여우의 몸을 이루고 있는 연기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드드드!

단순한 연기가 아닌지 서 있는 지반마저 흔드는 엄청난 진동.

좀 천천히 접근했어야 했나.

너무 돌직구로 말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때는 이미 늦은 것 같았다.

스스스--!

"감히 망자 따위가!!"

여우의 주변으로 무언가 모여들고 있었다.

소용돌이 모양으로 이루어져 있는 구덩이의 지형.

지형으로 퍼져 있던 무언가가 여우의 뒤쪽으로 흘러들어왔다.

화악…!

어느 정도 모여들었다고 생각했을 때.

모여들던 게 순식간에 사방으로 펼쳐졌다.

구… 구미호?

단순히 여우를 닮은 녀석이 아니었다.

사방으로 펼쳐진 아홉 개의 꼬리.

이것만 봤을 땐 영락 없는 구미호의 모습이었다.

쩌적.

오우.

꼬리라고 하면 보통 복슬복슬하고 두툼한 꼬리가 생각나기 마련이지만.

눈 앞에 펼쳐진 꼬리는 귀여운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었다.

연기로 이루어진 날카로운 이빨을 갖고 있는 꼬리.

아마 륭 할아버지가 위층에서 봤던 아가리가 저 꼬리일 것 같았다.

"망자따위가 내 구슬을 노리고 들어오다니… 먹이 주제에 용기가 가상하구나."

"먹이?"

내 되물음에 여우가 웃음을 터뜨렸다.

"이곳이 어디라고 생각하는 거냐."

연기로 이루어진 여우가 거만하게 고개를 치켜들었다.

"먹이들이 제 발로 끊임없이 기어들어 오는, 이 몸의 천연 식량 창고이니라! 키하하하!!"

뭐… 뭐야, 무섭게.

혼자서 화내고 처웃고 북치고 장구치고 난리가 난 여우쉨.

미친놈만큼 무서운 게 없다더니 그 말이 사실인 것 같았다.

그나저나 식량 창고라니.

설마?

"망자의 세계를 벗어날 수 있다는 소문, 네가 퍼뜨린 거냐?"

"정확하다. 덕분에 먹이가 이렇게 끊임없이 쏟아지고 있지 않느냐."

여우가 만족스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여우가 그렇진 않겠지만 교활하기 짝이 없는 놈이었다.

이곳을 벗어나고자 하는 사람의 심리를 이용해 유기농 식량 보급소를 만들다니.

여우 놈은 그저 이곳에 머무르며 꼬리로 내려오는 사람들을 잡아먹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교활하지만 스마트해.

여우의 시스템을 벤치마킹하며 옆에 서 있는 노운을 바라봤다.

노운 역시 누군가로부터 전해 들은 것일 터.

헛된 발걸음을 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걱정하지 마."

"응?"

그런 내 생각을 눈채 챈 걸까.

가만히 여우를 바라보던 노운이 입을 열었다.

"이야기를 누가 퍼뜨렸든 구슬이 재료라는 건 변하지 않아."

흔들림 없는 목소리였다.

이야기의 주체가 누구던지 구슬이 필요하다는 확신이었다.

"도망칠 생각은커녕 아직도 그딴 소리를 지껄이다니."

터벅.

여우가 나와 노운을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노운 뭐 가능한 거 있어?"

다가오는 여우를 보며 노운에게 물었다.

조금 늦긴 했지만 노운이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를 확인해 둘 생각이었다.

"음."

잠시 생각하던 노운이 두 손을 들어 모았다.

파지직!

…!?

그렇게 노운의 두 손 사이에서 붉은 스파크가 생기나 싶더니.

포옹.

재질을 알 수 없는 작은 조각상이 생겨났다.

오… 오리쉨…?

여우에 이은 오리라니.

의아한 얼굴로 노운을 바라보자.

"연금술이 내 능력인데."

노운이 유감이라는 얼굴로 어깨를 으쓱 올렸다.

"망자의 세계로 올 때 장갑을 놓고 와서 이 정도가 한계야."

… 그냥 짧게 말해.

도움 되는 능력은 없다고.

"허튼 수작은 안 하는 게 좋을 거다. 어차피 도망갈 곳은 없을 테니까! 그러니 얌전히…."

콰아아!

여우의 꼬리가 한꺼번에 내 쪽으로 덮쳐왔다.

"나의 먹이가 되거라!"

그렇게 신이 난 여우의 연기가 내게 다가오는 순간.

드득.

…?

착지를 한 뒤 무기고로 넣어뒀던, 평소라면 얌전히 나의 부름을 기다리고 있었을 칼데아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 * *

얼레.

여우쉨의 꼬리가 내게 덮쳐오는 순간이었다.

시간이 멈추며 검은 연기가 사방을 감싸나갔다.

갑자기 일어난 일이라 놀라긴 했지만 걱정이 되진 않았다.

날 감싸고 있는 건 칼데아 윙의 연기였기 때문이다.

화악!

강한 바람이 부는가 싶더니 연기가 걷어졌다.

"사… 살려줘…!"

조금 전까지 서 있던 지하 구덩이가 아니었다.

주변의 공기와 분위기를 봤을 때 망자의 세계 어딘가였다.

여우쉨…?

그리고 내 앞엔 기세등등했던 여우가 몸을 잔뜩 움츠린 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일렁.

눈 옆으로 연기의 일렁임이 보였다.

연기는 내 몸 전체에서 뿜어지고 있었다.

이카로스의 기억인가…?

"아니, 나이기 이전의 기억이야."

"!?"

고개를 돌린 곳엔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 있었다.

그리스에서 아테네가 가지고 있던 유골을 통해 만났던 이카로스.

이카로스가 내 옆에 서 여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칼데아의 기억… 이라고 보는 게 맞겠지."

칼데아의 기억이라.

칼데아는 그냥 날개의 이름이 아니었던 건가.

단순히 이카로스가 자신의 날개를 칼데아라고 부른다 생각했었다.

그런데 칼데아의 기억이라니.

이카로스는 마치 칼데아를 살아있는 존재인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다시는… 다시는! 모습을 보이지 않겠다! 그러니 제발!"

다시 한번 여우쉨이 울부짖었다.

여우가 목숨을 구걸하고 있는 대상은 내가 현재 들어와 있는 칼데아였다.

"…."

칼데아는 여우를 향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굳이 말을 하지 않는 이유는 간단했고, 빙의해 있어서인지 난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너무 하찮아서.

칼데아에게 있어 여우의 존재 의의는 아주 단순했다.

먹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칼데아는 목숨을 구걸하는 여우를 바라보며 살려줄까 말까를 고민하고 있지 않았다.

대신 먹을까 말까를 고민 중이었다.

"저 바닥 밑으로! 볕이 들지 않는 지하의 구렁텅이 밑으로 처박혀서! 다시는 나타나지 않겠다! 그러니 제발… 살려다오!!"

여우의 구구절절한 목숨 구걸을 끝으로.

칼데아의 기억은 끝이 났다.

* * *

"얌전히 나의 먹이가 되거라!"

쿠아아아---!

거만하게 달려드는 여우를 보고 있자니 뭐랄까.

피식.

실소가 터졌다.

게이지가 꽉 차지 않은 칼데아가 왜 갑자기 이런 기억을 보여줬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기억을 통해 분명해진 건 하나 있었다.

"감히."

눈앞에 있는 건 더 이상 흉측하고 무섭게 생긴 여우 괴물이 아니었다.

앞에 있는 건….

스윽.

달려드는 여우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먹이 주제에."

먹이였다.

207화. 성장

사뱌티의 여우.

시간을 잡아먹는 악마.

아홉 개 꼬리를 가진 공포.

'….'

강한 힘을 가지고 태어난 여우, 치라타를 부르는 또 다른 이름이었다.

세계의 모든 이에게 균등히 적용되는 법칙이 있었다.

태어날 때부터 정해지기에 노력만으론 바꿀 수 없는 법칙.

강자와 약자의, 잡아먹는 자와 먹히는 자의 운명이었다.

- 난 포식자다.

치라타는 날 때부터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자신은 몹시 강하게 태어났으며 높은 곳에서 군림할 힘이 있다는 사실을.

그렇기에 치라타의 행보엔 거침이 없었다.

- 살려줘!

- 콰득!

- 제발!

- 콰직!

길을 가며 만나는 모든 이를.

일면식조차 없는 이들을 닥치는 대로 먹어치웠다.

목숨을 구걸하든 말든 상관없었다.

그저 각자에게 주어진 운명에 맞게 최후를 맞이할 뿐이었다.

- 억울해 하지 마라! 너흰 어차피 먹이일 뿐이니!

구걸을 하는 놈들을 보면 뭐랄까, 오묘한 혐오가 피어올랐다.

날 때부터 먹이인 놈들이 조금이라도 더 살아보겠다고 발버둥 치는 꼴이라니.

역겹다는 생각마저 들었었다.

- 쿵!

- 으아아! 치라타다!

치라타가 나타는 곳은 항상 아수라장이 됐었다.

닥치는 대로 집어삼키는 여우 형상의 악마, 치라타.

치라타는 모두가 두려워하는 공포의 대상이었으며 동시에 포식자였다.

- 네… 네놈도… 먹힐 거다.

어느 날이었다.

죽음을 목전에 둔 먹이 한 명이 건방진 소리를 해왔다.

- 내가 먹이사슬의 정점이거늘. 누가 날 먹는다는 거냐?

대수롭지 않게 여겼었다.

그저 죽어 가는 먹이의 발악일 거라 생각했다.

- 서쪽에서 올… 폭풍을… 맞이하라.

여기까지 들은 후 치라타는 먹이의 목숨을 끊었다.

더 이상 헛소리를 들어줄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며칠 뒤였다.

먹이가 마지막에 한 말을 잊어 갈때쯤.

- ….

치라타는 폭풍을 만났고 치욕적인 구걸과 함께 이곳으로 쫓겨나야 했다.

으드득.

지우고 싶었던 과거의 치욕을 떠올리며.

치라타가 어금니를 깨물었다.

화가 나서 깨문 건 아니었다.

"어… 어째서…?"

잊었다고 생각했지만 몸에 선명히 새겨져 있는 공포.

자신을 먹을 수 있는 포식자에 대한 공포를 견뎌내기 위해 깨문 것이었다.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조금 전까지 기세등등했던, 스스로 걸어 들어오는 먹이에 만족하며 으스대던 치라타는 온데간데없었다.

눈앞의 현실을 부정하며 서서히 연기로 된 얼굴이 일그러지고 있는 여우 한 마리가 있을 뿐이었다.

"어째서 여기에 있는 거냐."

주춤.

치라타가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토라소의 폭풍… 칼데아!!"

* * *

토라소의 폭풍?

기세등등하던 여우쉨이 바짝 쫄아 중얼거린 말이었다.

드드드…!

달려드는 여우를 보며 처음엔 악귀참도를 꺼내려 했었다.

망자의 세계에 있는 녀석이기도 했고 연기가 일렁이는 걸 보아 일반적인 공격은 통할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 우우우우…!

그 순간이었다.

무기고의 칼데아 윙이 요동치기 시작한 것은.

말이 통하는 건 아니지만 칼데아의 외침이 들리는 것 같았다.

어서 날 꺼내달라는 외침이 말이다.

- [이카로스 - 칼데아 윙]

그래서 칼데아의 바람대로 꺼내주었다.

- 콰드득!

등 뒤로 날개가 펼쳐지기 무섭게 칼데아의 연기가 뿜어져 날아들던 여우의 꼬리들을 잡아냈고.

그때부터 여우의 얼굴이 공포로 물들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좀 비슷한 거 같기도 하고.

여우의 몸 역시 검은색 계통의 연기로 이루어져 있었다.

처음 봤을 때 칼데아랑 조금 비슷하네 생각은 했었지만 별 의미를 두고 있지 않았었는데.

짧게 봤던 기억과 녀석의 반응으로 보아 인연이 있는 모양이었다.

저놈한테는 악연인 모양이지만.

저벅.

칼데아의 연기가 여우를 붙잡고 있는 틈을 타 걸음을 옮겼다.

"야 먹이."

"!?"

연기로 이루어져 잘 보이진 않지만.

분명 엄청 놀란 얼굴이었다.

상대적인 덩치로 봤을 때 개미만 한 놈이 자기를 먹이라고 불러 놀란 것 같았다.

"구슬 어디에 있어."

"건… 건방 떨지 마라!"

이 새끼 보소.

여우의 머릿속을 들어가 본 건 아니지만.

녀석이 지금 하고 있는 생각이 눈에 보듯 훤했다.

착각 중이겠지.

앞에 끔찍한 공포를 심어줬던 칼데아가 있긴 하지만, 코딱지만 한 인간 따위는 별거 아닐 거란 오만한 생각.

더불어 자신의 담당 일진을 만났다는 사실을 열심히 현실 부정 중일 터였다.

기억을 조금 더 되살려줘야겠네.

"건방? 먹이 새끼가 정신이 나갔나."

저벅.

한 발자국 더 다가서며 주변을 둘러봤다.

사방이 곰팡이로 떡칠 되어 있을 듯한 습한 공간이었다.

마치 회귀하기 전에 살았던 유물관 골방과 비슷한 느낌.

"잡아먹히기 싫어서 여기까지 도망친 새끼가 말이야."

"!!!"

여우가 동요해서일까.

녀석의 몸을 이루고 있는 연기가 크게 넘실거렸다.

"그렇게 목숨을 구걸하길래 살려줬더니… 시간이 좀 흘렀다고 다 잊어버린 모양이야."

기억으로 거기까지 보진 못했으나.

아직 저놈이 살아있는 걸 보니 영혼을 갈아 넣은 구걸이 통한 것일 터.

그 증거로 놈의 연기는 미친 듯이 떨리고 있었다.

"다시 한번 말한다. 구슬 가져와."

척.

어느 정도의 간격에 멈춰선 후.

떨고 있는 여우를 향해 조소를 머금었다.

"그럼 살려줄게."

* * *

예상대로였다.

교활한 건지 상황 판단이 빠른 건지.

여우쉨은 천천히 몸 안에 있던 구슬을 꺼내고 있었다.

"저거 맞아?"

확인 차원에서 뒤에 있던 노운에게 묻자.

"맞아, 첫 번째 재료."

빠른 대답이 돌아왔다.

샤삭.

맞다는 대답을 듣자마자 빠르게 걸어가 구슬을 낚아채 왔다.

녀석의 공격 수단인 꼬리는 칼데아에 의해 무력화되었기에 갑자기 공격당할 일도 없었다.

당한다 해도 안 맞으면 그만이고.

기억으로 봤던 게 있는지라 효과적이게 칼데아로 위협을 하고 있었지만.

칼데아가 없었더라도 여우쉨 한 마리쯤은 뚝딱 해치울 자신이 있었다.

반짝.

오호.

손에 들어온 구슬을 바라봤다.

크기 자체는 그리 크지 않은 구슬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커다란 에너지가 응축되어있는 느낌이었다.

여우 구슬이라.

과거 설화에도 종종 등장하는 녀석이었다.

구미호가 사람의 생명을 빼앗아 쌓아 놓는 저장소, 여우 구슬.

생명의 힘이 담겨 있는 만큼 인간이 구슬을 삼키면 영생을 얻는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영생은 이미 얻었으니까.

옛날이었으면 탐내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지금에 있어 여우 구슬은 날 이곳에서 탈출시켜 줄 재료 중 하나에 불과했다.

아.

잠시 영롱하게 빛나는 구슬을 구경하다가 고개를 들었다.

뭐지.

노려보고 있는 건가.

연기로 되어 있어 헷갈리긴 했지만.

왠지 모르게 여우년이 날 노려보고 있는 느낌이었다.

나 같아도 화나긴 하겠다.

구걸해가며 얻은 목숨이었다.

기껏 지하에 처박혀 열심히 먹으며 힘을 비축하고 있었는데.

어디서 굴러먹다 온 건지 모를 놈이 구슬을 날름 채갔으니 화가 안 날래야 안 날 수가 없었다.

"칼데아에 대해 아는 거 다 말해."

그러든가 말든가.

내가 궁금했던 걸 물어봤다.

몰라도 너무 몰랐어.

단순히 이카로스의 날개라고만 생각했었는데.

기억 속에서 했던 이카로스의 말을 미루어보건대 칼데아의 역사는 더 오래된 것 같았다.

누군가의 날개가 아닌 칼데아라는 존재로 말이다.

"토라소라는 지역이 있었다."

구슬을 내주며 자포자기해서일까.

여우는 순순히 내 질문에 대한 답을 들려줬다.

"강자는 살아남고 약자는 죽는 약육강식의 대표격인 지역이지."

노운의 이야기를 들으며 얼추 예상하고는 있었지만.

망자의 세계에도 여러 지역이 있는 모양이었다.

오면서 만난 사람들이나 여우를 봤을 땐 망자만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그곳에서 태어나는 존재는 모두 검은 연기로 이루어져 있으며 태어날 때부터 끊이지 않는 식탐을 갖고 태어나지."

"너도 연기잖아."

"처음부터 연기였던 건 아니다. 먹다 보니 연기가 된 것일 뿐."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연기가 아니었는데 먹이를 잡아먹다 보니 검은 연기의 존재가 되었다는 것.

짭 연기였구먼.

여우에 대한 정의를 내린 후.

계속 말해보라는 의미로 턱을 까딱였다.

"포식자들이 드글대는 토라소를 쓸어버렸던 게 포식의 태풍 칼데아다. 내가 아는 건… 여기까지다."

무슨 소리지.

팔짱을 낀 채 여우의 말을 경청하긴 했지만.

그다지 쏙쏙 이해가 되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요컨대.

칼데아는 강자들이 득실대는 지역을 씹어먹었고.

먹을 게 없어지자 망자의 세계에 있는 다른 지역으로 가 포식을 하다 여우를 만났다는 건가.

나름 잘 요약을 한 듯했지만 진짜 궁금한 건 따로 있었다.

망자의 세계에서 포식을 해대던 칼데아는 어째서 이카로스에게 깃들게 된 걸까?

여우가 알 리는 없을 듯하고.

이제 보니 여우는 운이 지지리도 없는 녀석이었다.

토라소가 아닌 다른 지역에서 태어났지만 길을 가다 칼데아란 절대 포식자를 만난 거니까.

그런 여우가 칼데아에 대해 더 아는 건 불가능해 보였기에.

슥.

어깨를 으쓱 올리며 천천히 몸을 돌렸다.

뭐.

때가 되면 알게 되겠지.

당장 급하게 알려고 할 필요는 없었다.

날개가 성장해 나감에 따라 보이는 기억 또한 늘어날 터였다.

덥썩.

내려올 때 먼저 던졌던 꾸러미를 챙겼다.

추락 전에 잘 잡아서인지 상한 곳 없이 멀쩡한 모습이었다.

필요한 것도 다 구했으니 올라가 볼까.

찌릿.

여우로부터 등을 돌린 이후부터.

뒤통수가 뚫릴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레이져가 나오는 눈으로 내 뒤통수를 노려보면 이런 느낌이지 않을까 하는 감각이었다.

"아 맞다. 나도 말해 줄 게 하나 있는데."

"…?"

정보 제공은 보통 기브앤테이크였다.

별 도움은 안 됐지만 어쨌든 최선을 다한 여우에게도 내가 알고 있는 걸 말해줘야 했다.

주섬주섬.

말을 건네기 전.

꾸러미에서 바나나 하나를 꺼냈다.

"칼데아는 자비를 베풀어서 널 살려 준 게 아니야."

"뭐…?"

다른 사람에겐 들리지 않는 칼데아의 목소리.

그 목소리가 아까부터 끊임없이 들려오고 있었다.

[먹어.]

"잠시 놓아준 거지."

휙!

들고 있던 바나나를 구덩이 위로 힘껏 던졌다.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던 거지. 지금 놓아주면 나중에 더 맛있게 먹을 수 있다는 걸."

파사삭!

위로 올라가기 무섭게 바나나가 썩어 문드러졌다.

"!!"

"이 교활한 여우 새끼야."

잊지 않고 있었다.

뒷걸음질 치며 구덩이를 올라오자 노화했다는 륭의 이야기를 말이다.

여우쉨은 애초부터 날 곱게 보내 줄 생각이 없었다.

내가 위로 올라가며 저주의 먹이가 되는 순간을 기다리고 있던 것뿐이었다.

이 정도면 잘 참았다.

스윽.

천천히 몸을 돌려 당황하는 여우를 바라봤다.

"아… 잠… 잠깐…!"

지겨운 구걸을 또 들어줄 생각은 없었다.

때를 기다리며 일렁이고 있던 칼데아를 향해.

입을 열었다.

"식사 시간이다."

콰지직---!!

208화. 돌멩이가 금으로

터벅.

이거 참 부담스럽구만.

위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머리를 긁적였다.

나를 향해 쏟아지는 무수한 이의 시선들.

살면서 이렇게 많은 시선을 받아본 적이 있나 싶을 정도였다.

악수 요청까진 안 와서 다행인 건가.

불행 중 다행이라 생각하며 거의 도착한 길을 바라봤다.

망자의 세계를 나가기 위한 첫 번째 재료, 여우 구슬을 구하기 위해 도착한 구덩이.

내려갈 땐 자유낙하였지만 지금은 온전히 두 발을 이용해 올라가고 있었다.

"어떻게 위로 올라가는데도 저주에 안 걸리는 거지?"

"어이! 저기 아래서 뭘 봤어!?"

"왜 다시 올라가는 거야?"

줄을 서 있던 사람들은 당황하고 있었다.

혹여나 저주에 걸려 늙어버릴까 한 발자국도 뒤로 가지 않고 있었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당당히 거슬러 올라가고 있는 놈들이 나타났으니 당황스러워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흠.

날개로 한 번에 올라갔으면 좋았을 텐데.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며 무기고에 있는 칼데아의 감각을 느꼈다.

뭐라고 해야 되지.

약간 뭐랄까… 먹튀…?

조금 전.

먹으라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칼데아의 연기가 여우쉨을 덮쳤었다.

- 오… 오.

뭔가 묘한 광경이었다.

보통 생물체 간의 포식 장면은 몹시 잔인한 게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칼데아의 식사는 달랐다.

찐한 색의 검은 연기가 덜 진한 색의 검은 연기를 잡아먹는 모습.

그래도 조금 웅장하긴 했어.

피가 튀거나 살이 찢기진 않았다.

그럼에도 장면을 바라보는 머릿속에 떠오른 단어는 포식이었다.

명확히 형상화되진 않았으나 여우의 연기를 닥치는 대로 흡수해버린 칼데아.

포크와 나이프를 들고 하는 정갈한 식사라기보단 게걸스럽게 해치워버리는 느낌이었다.

어쨌든.

중요한 건 여우의 연기를 먹어 치운 다음이었다.

먹을 것도 다 먹었겠다 이제 좀 올라가볼까 했었는데.

마치 연기를 다 소모했을 때처럼 칼데아가 사라지며 해제되어버렸다.

알다 가도 모르겠단 말이야.

연기를 먹었으면 이제 더 빵빵해졌을 텐데 왜 사라져!

라는 마음에 무기고로 호다닥 쫓아 들어갔었다.

- 고오오오.

크기나 모습에는 큰 차이가 없었다.

단지, 상태가 조금 달랐다.

이전엔 독수리 날개를 닮은 연기가 일렁이고 있었다면, 지금은 연기가 똘똘 뭉쳐 커다란 구체를 형성하고 있었다.

소화.

연기로 된 구체를 보며 떠오른 단어였다.

오랜만의 식사였기 때문일까. 

급격히 쏟아져 들어온 연기를 자신의 것으로 동기화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게이지는 꽉 차다 못해 넘어가 있네.

처음이었다.

게이지가 다 찬 무기가 어떤 조건이 만족될 때까지 개방되지 않은 적은 많았지만.

게이지를 넘어간 상태로 무기고에 있는 것은 말이다.

거기다 게이지 자체도 무기를 사용해서 채운 게 아니었다.

매번 날개를 꺼내 이동했음에도 쥐똥처럼 상승하던 게이지가 여우쉨 한 마리를 먹자 폭발하듯 상승했다.

무기를 성장하는 방법에도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인가.

무기고에 대해 모르는 게 아직 너무 많구나란 사실을 새삼스레 깨달으며.

"아래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내려가지 말고 올라가세요!"

앞의 사람들에게 올라가라고 말을 건넸다.

- 아무것도 없다고 말해주자.

소화를 위해 무기고로 들어간 날개를 대신하여 수리검을 꺼내려던 찰나였다.

잠시 위를 바라보던 노운이 입을 열었었다.

- 무를 향해 계속 걸어 내려오는 건 불쌍하니까.

슥.

고개를 돌려 사람들에게 말을 건네는 노운을 바라봤다.

착하단 말이야.

솔직히 생각도 못 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그다지 염두에 두지 않고 있었다.

그냥 첫 번째 재료를 구했으니 바로 다음으로 가볼까 하고 있었으니까.

- 네가 나타나 구슬을 차지하든 하지 못했든, 어차피 저들에겐 헛걸음이었겠지만.

노운은 마지막에 묘한 말까지 덧붙였었다.

무슨 말인지 물어볼까 했지만 일단은 이 눅눅하고 습한 구덩이를 벗어나는 게 먼저였기에.

오랜만에 좋은 일이나 좀 하자는 마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저벅.

그렇게 매크로 같은 멘트를 계속 건네며 꽤 오랜 시간을 걷고 나서야.

"후웁… 하아!"

처음에 뛰어내렸던 위치에 도달할 수 있었다.

"이제 좀 살 거 같네."

바깥도 그다지 상쾌한 공기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습기까지 더 해진 아래보단 훨씬 나았다.

"올라오는 사람은 한 명도 없네."

정상에 도착한 뒤 돌아본 구덩이.

구덩이에 있던 이들은 우리 쪽에 있던 시선을 거두고 다시 아래를 향해 내려가고 있었다.

"알려줘야 할 건 다 알려줬으니까. 이후부턴 저들의 선택이야."

마치 이럴 줄 알았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덤덤하게 말하며 미소를 지어 보이는 노운.

"너… 너희들! 어떻게!?"

아 한 명 더 있었지.

구덩이로 뛰어내리기 전에 만났던 할아버지, 륭.

륭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나와 노운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음.

그냥 가는 게 낫겠지.

륭에게 구구절절 설명하는 건 옳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륭은 여우의 저주로 노화해버렸고, 저걸 되돌릴 방법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꾸벅.

건넬 말도, 건넨다고 해서 좋은 말도 없었기에.

천천히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뒤 륭을 지나쳤다.

* * *

"어때? 너가 말한 재료 맞아?"

이리저리 돌려보며 구슬을 살피고 있는 노운.

그렇게 한참을 관찰하던 노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생각했던 것보다 에너지도 가득 차 있고."

"이제 두세 개 남은 거지?"

노운이 턱을 문지르더니 고개를 저었다.

"한 개면 될 거 같아."

"!?"

잠시 대답을 망설이길래 찾아야 될게 늘어난 건가 긴장 중이었는데.

오히려 재료의 숫자는 한 개로 줄어 있었다.

"에너지를 증폭시키는 재료가 필요할 거라 생각했는데."

슥.

내게 구슬을 건네며 노운이 미소를 지었다.

"생각보다 에너지가 충분해서 필요 없을 거 같아."

"오…!"

건네어진 구슬을 받아 들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노운이 정확히 뭘 만들려고 하는진 모르겠지만, 어쨌든 재료가 줄었다는 건 지구로 돌아갈 수 있는 시간이 단축됐단 것이었다.

"이젠 이 에너지를 올바른 방향으로 쏘아낼 수 있도록 장치를 만들 거야. 이제 구하러 가는 건 그 장치의 재료고."

문을 열 수 있는 에너지와 에너지를 쏘아낼 방향을 정하는 것.

지구로 돌아가기 위한 일차원적인 메커니즘 같았다.

얘는 이런 걸 어떻게 아는 거지.

망자의 세계로 오기 전 과학자 혹은 발명가였을 거란 추측은 하고 있었지만.

그렇다 한들 엄한 세계에서 이렇게 척척 장치와 필요 재료를 떠올리다니. 

갈수록 정체가 궁금해지는 녀석이었다.

관상은 참 좋은데.

관상은 과학이다 파지만 그렇다고 마냥 맹신하는 건 아니었다.

갑작스럽게 나타나 스며들듯 자연스레 동행하게 된 노운.

나의 필요로 인해 시작된 동행이었지만 난 아직 노운을 100% 신뢰하고 있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노운에 대해 아는 게 없어도 너무 없었다.

라면 한 사발이하고.

사과 몇 개 먹고.

텐트 구석탱이에서 자고.

구덩이 내려가서 구슬 구해오고.

노운과 함께 했던 전부였다.

- 나가게 도와줄 테니까 내 부탁 하나만 들어줘.

아직 그 부탁이 뭔지 듣진 못했으나.

그나마 노운에게 신뢰가 생긴 구간이었다.

무조건적인 선의를 경계하는 나였기에 노운과 주고받을 게 생겼다는 사실 자체가 조금 마음이 놓였었다.

파지직.

아.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걷던 중.

옆에 있던 노운의 손에서 붉은 스파크가 일어났다.

구덩이에서 오리를 만들었던 스파크였다.

물어본다는 게 깜빡했네.

여우가 앞에 있던 상황이라 물어보는 걸 잠시 미뤘었는데 완전히 망각하고 말았다.

"그건 뭐야?"

당시엔 싸움에 전혀 쓸모 없는 오리가 튀어나와 고개를 휙 돌렸었다.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신기한 능력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손에서 오리 조각상이 튀어나오다니.

파지직.

"아거?"

노운이 스파크 튀는 손을 들며 입을 열었다.

"연금술."

* * *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단지 멍한 얼굴로 노운을 바라봤다.

연금술…?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다.

"들어본 적 있어?"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철이나 구리 같은 걸 금으로 바꾸기 위한 시도… 맞지?"

역사책에도 자주 나오는 단골 소재였다.

각 시대마다 연금술에 대한 다양한 시도가 있었지만 결과는 모두 실패.

애초에 성질이 다른 광물들은 절대 금으로 변하지 않았다.

"철로는 금을 만들 수 없다. 이게 당시의 결과였어."

스윽.

걸어가던 노운이 쭈그리고 앉아 바닥의 모래를 집었다.

"사실 그런 시도 자체는 연금술을 몰랐기에 가능했던 거야. 철로는 금을 만들 수 없다."

파직!

오…?

스파크가 튀나 싶더니 노운의 손바닥 위에 있던 모래가 작은 코인으로 변했다.

파삭.

잠시 후 다시 모래로 돌아가긴 했지만 말이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어."

고개를 들어 날 바라보며 노운이 무언가를 읊었다.

"무언가를 희생하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는 그와 동등한 대가를 필요로 한다."

"등가교환의 법칙."

반사적인 내 대답에 노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연금술을 사용하는데 있어 절대적인 법칙이야."

툭툭.

자리에서 일어난 노운이 손을 털었다.

"그런데 철을 대가로 금을 얻고자 했으니, 급이 안 맞아도 너무 안 맞았던 거지."

"난 연금술이란 게 단순히 화학적인 실험이라 생각했는데 의외네."

"대부분은 그랬어. 애초에 연금술을 하던 사람들은 거의 화학자였으니까."

약간이지만 노운의 손에 남아있는 스파크를 바라봤다.

연금술이란 조금 특별한 화학 실험을 일컫는 단어라 생각했는데 실제로 가능한 사람이 있었다니.

역시 화학 쪽에 종사하던 과학자였나.

"음."

자신의 손에서 일어나는 스파크를 바라보며 노운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다른 사람의 손을 쳐다보는 표정이었다.

"난 언제부터 이런 걸 할 수 있었던 거지."

"…."

무언가 물으려고 했으나 노운이 한 말에 조심스레 입을 다물었다.

본인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본능적으로 방법은 알고 있지만 사용하게 된 계기 같은 것을 말이다.

"신기하네."

"뭐가?"

"원래 어제까진 몰랐었어."

이건 또 무슨 소리야.

갈수록 당황스럽게 만드는 노운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알겠더라고."

어제까진 몰랐던 연금술을 오늘은 사용하고 있다는 것.

"왠지 모르겠지만 조금씩 선명해지고 있어."

저건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파편화되어 흩어져 있던 기억이 정상화 되고 있단 이야기일 테니까.

"안개에 싸여 있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서서히 걷히는 느낌이야." 

"한참 그랬던 거 아니야? 왜 갑자기?"

"으음… 아마도."

노운이 얼빠져 있는 내 얼굴을 응시했다.

"망자가 아니면서도, 내 기억이 만들어진 세계에서 온 너랑 가까이 있어서겠지."

노운이 하는 말이 진짜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거짓말은 아닐 거란 확신이 들었다.

지금까진 항상 침착하고 흔들림 없던 노운의 눈동자가 잠깐이지만 불안정하게 흔들렸기 때문이다.

노운도 당황하고 있었다.

"조금 떠올라서 그런가 궁금해졌어."

스윽.

노운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난 누구였고."

작은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뭘 잊어가고 있었는지 말이야."

209화. 두둥실

백운과 노운의 등장으로 소란이 일어났던 구덩이.

구덩이 옆에 앉은 륭이 백운이 떠나간 방향을 바라봤다.

'무언가 달랐다.'

륭에게 무언가 느낄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저 본능적인 느낄 수 있었다.

온몸이 노화한 채로 평생을 살아야 하는 자신이나 구덩이를 빙글빙글 끊임없이 내려가고 있는 저 사람들과는 달랐다.

'온기… 같은 건가.'

정확한 표현을 떠올리기 위해 륭이 인상을 찌푸렸다.

구덩이에서 올라온 백운이 자신을 스치고 지나가는 순간 느껴졌었다.

완전히 사라져버려 잊힌 무언가가 백운에게서 만큼은 강하게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살아있는 느낌.'

륭은 생각을 하면서도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해 약간의 혼동을 느끼고 있었다.

백운에게서 느껴지는 온기가 없는 자신은 그럼 뭐란 말인가?

'난 뭐지?'

분명 숨을 쉬고 말을 하고 있음에도 륭은 자신이 살아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전까지는 몰랐지만 차이점을 가진 이를 만나며 생긴 변화였다.

… 구구…!

그렇게 륭이 갑자기 찾아온 괴리감에 당황하고 있을 때.

앉아있는 지면으로 미세한 진동이 느껴졌다.

"…?"

처음엔 잘못 느낀 건가 싶었지만.

구구구…!

진동은 점점 커지고 있었다.

"뭐야 이거?"

"땅이 흔들리는데."

진동이 어느 정도 다가오자 아래로 내려가던 이들도 구덩이 밖을 바라봤다.

뭐가 다가오고 있는지 궁금했지만 늙어버리는 저주가 두려워 감히 위를 향해 올라가 보진 못했다.

"어이! 거기 위에! 무슨 일이야!?"

"궁금하니까 말 좀 해봐! 아직 있지!?"

내려올 때 만났던 노인 륭을 떠올리며.

구덩이에 있는 이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

분명 밖까지 들렸을 텐데도.

어째선지 륭의 대답은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쿠구구구구구!!

"어… 어!"

"꽉 잡아!"

어느새 다가온 진동은 구덩이의 이들이 제대로 서 있기조차 힘들 정도로 강해져 있었다.

그리고.

구덩이 밖에 있던 륭만이 유일하게 그 진동의 정체를 보고 있었다.

"…."

륭은 구덩이 안에서 물어오는 목소리를 분명히 들었다.

하지만, 대답하는 건 불가능했다.

'뭐… 뭐야 저건.'

처음엔 빛이 사라진다고 생각했었다.

망자의 세계 자체가 빛이라고 표현하기 부끄러울 정도의 밝기를 가졌지만.

그 작은 빛마저 소멸한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먼 지면으로부터 서서히 검은 물결이 밀려오고 있었다.

"그라라라--!!"

"크어어어!"

밀려드는 물결에서 쏟아지는 포효에 륭이 몸을 움츠렸다.

머리털을 쭈뼛 서게 만드는 울음소리였다. 

'수만… 수십만…?'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입을 다물 수 없게 만드는 위압감이었다.

지형이 움직이고 있다고 느껴질 정도로 엄청난 숫자.

이 세계를 이루는 요소 중 하나인 망자들의 군세였다.

털썩.

륭이 바닥으로 주저앉으며 떨기 시작했다.

서 있기 힘들게 만드는 진동도 진동이었지만, 이런 광경을 보고도 다리가 풀리지 않는 건 불가능했다.

….

그렇게 륭이 망연자실한 상태로 군세를 바라보고 있기를 한참.

다그닥… 다그닥.

겁에 질려 있는 륭에게 한 명의 망자가 다가왔다.

한 명의 망자라고 하기엔 존재 자체가 너무나 거대하게 느껴지는 자였지만.

달리 그를 표현할 수 있는 단어가 륭의 머리엔 떠오르지 않았다.

다그닥.

그대로 떨고 있는 륭을 지나쳐 구덩이 바로 앞까지 걸어간 망자의 왕, 카사락.

카사락이 무미건조한 얼굴로 구덩이를 내려다봤다.

"…!!"

카사락의 등장에 웅성거리던 구덩이는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어느 누구도 입을 뗄 수가 없었다.

단순히 겁에 질려서는 아니었다.

격차.

이 세계에서의 카사락은 감히 말을 걸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걸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찌꺼기를 먹던 녀석이 사라졌군." 

치라타가 사라졌다는 걸 인지한 카사락.

카사락의 푸른 안광이 묘하게 일렁이기 시작했다.

"규율을 어긴 것도 모자라 혼돈을 가져오고 있구나."

다그닥.

잠시 구덩이를 바라보던 카사락이 몸을 돌렸다.

자신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는 수십만의 망자.

카사락이 망자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청소부가 없어졌으니."

다그닥.

해골마를 탄 카사락이 륭을 지나치며.

망자들에게 짧은 명령을 내렸다.

"치워라." 

* * *

"…."

가만히 멈춰 서 앞에 있는 걸 바라봤다.

뭐냐.

강아지 같이 생겼지만.

"멍옹."

라고 이상한 울음소리를 내는 놈이었다.

어째서 저놈은 고양이처럼 우는 걸까가 첫 번째 의문이었고.

"잠깐만 기다려."

저런 놈을 노운은 또 어떻게 알고 있는지가 두 번째 의문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무언가 쫓아오는 느낌이 들어 벽에 숨어 있으니 나타난 개냥이 녀석.

갑작스러운 등장에 난 잠시 뇌정지가 왔지만 노운은 익숙한 듯 몸을 숙이고 개냥이를 반겨줬다.

뒤적뒤적.

꾸러미 안을 뒤지던 노운이 플라스틱과 철로 이루어진 스팸통을 꺼냈다.

- 이건 챙겨둬야 돼.

스팸을 다 꺼내 먹은 뒤 휙 버리려던 찰나였다.

쓸데가 있다며 통을 챙겨두자 했었던 노운.

저걸로 뭘 하려는 거지.

"선물을 줘야 돼. 여우 구슬에 대해 알려 준 아이야."

"!?"

정보를 알려줬단 말에 저게?! 란 눈으로 멍냥이를 바라봤다.

둘이 주고받는 말을 알아들은 건지 늠름하게 몸을 세우는 녀석.

그런 녀석을 보며 잠시 웃어 보인 노운이 말을 이어갔다.

"망자의 땅 여기저기를 떠도는 아이야. 어느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기에 못 가는 곳이 없어."

저 녀석이 우리보다 먼저 구덩이에 내려갔었던 건가.

약간이지만 노운에 대한 의문점 하나가 풀리는 순간이었다.

노운은 내려가 보지도 않은 구덩이에 구슬이 있단 사실을 알고 있었다.

어떻게 미리 알 수 있었던 건지 줄곧 궁금했었는데.

빠안.

저런 멍냥이에게 그런 비밀이 있을 줄은.

"토라소."

"!?"

그나저나 노운은 멍냥이 언어를 어떻게 알아들은 건가 새로운 의문점이 피어나려는 찰나.

멍냥이의 입에서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단어가 튀어나왔다.

분명 여우가 칼데아 대해 말할 때 들었던 장소였다.

"그건 알고 있어. 그러니까 선물은 하나야."

대충 던져진 듯한 말에 대답한 노운이 스팸통 두세 개를 들고 걸어 나왔다.

파지직!

노운의 손으로 일어나는 붉은색 스파크.

스파크와 함께 스팸통들이 뒤섞이는가 싶더니.

뿅.

철로 만들어진 작은 고양이 모양의 조각상이 생성됐다.

오…오.

노운의 솜씨에 감탄하는 것도 잠시.

"고양!"

이번엔 고양이처럼 운 멍냥이가 노운에게 달려갔다.

조각을 물려주자 신이 나 주변을 몇 바퀴 빙글빙글 도는 녀석.

"잘 가, 또 보자."

익숙한 일인 듯 노운이 멍냥이를 향해 손을 몇 차례 흔들고 몸을 돌렸다.

나도 비슷한 장단에 맞춰 손을 두어 번 흔들어준 뒤 노운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이제 멍냥이도 제 갈 길 가겠지 생각하는 순간.

"도망가."

조금 전과는 달리 착 가라앉은 멍냥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가 먼저 할 것 없이 동시에 멈춰 서 뒤를 돌아봤다.

"같이 있으면 안 돼."

멍냥이의 반짝이는 눈이 날 응시했다.

"규율을 어겼어."

* * *

멍냥이쉨!

길을 걸으며 조금 전 만났던 멍냥이를 떠올렸다.

눈에서 레이저 나오는 줄 알았네.

날 노려보며 노운에게 도망가라고 말한 뒤 멍냥이는 모습을 감췄다.

마치 나랑 있으면 위험하니 당장 떨어지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스윽.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려 노운을 바라봤다.

아무렇지도 않게 나와 나란히 걷고 있는 노운.

멍냥이의 말을 듣고도 노운은 약간의 동요도 하지 않았다.

그저 평소처럼 걸으며 꾸러미에 있는 과일을 꺼내 먹을 뿐이었다.

- 별일 아니야.

멍냥이가 무슨 말을 한 건지 물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노운은 별거 아니라며 어깨를 으쓱 올려 보였다.

분명 뭔가 알고 있는데.

처음 만났을 때 망자를 죽였다고 하자 노운은 분명 말했었다.

- 완전 규율 위반이지.

규율 위반.

내가 뭘 위반했는지는 대충 감이 왔다.

원래라면 죽일 수 없는 망자를 죽인 것.

내가 어길만한 건 이것뿐이었다.

문제는 망자를 죽인 일이 이 세계에서 얼마나 큰 위반이고 잘못인지를 모른다는 것이었다.

음.

멍냥이가 같이 있으면 안 된다고 도망치라 했던 거 보면… 날 잡으려고 뭐라도 오고 있는 건가?

이 세계엔 망자를 죽여선 안 된다는 규율이 있으며 이것이 깨어졌을 때 바로 잡으려는 존재가 있다는 것.

내가 유추해볼 수 있는 건 이 정도가 한계였다.

쩝.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무언가 더 알아내는 건 불가능했기에.

콧방귀를 뀌며 어깨를 으쓱였다.

날 잡으러 오면 어쩔 수 없지 뭐.

그땐 규율 위반이 아니라 파괴자가 되는 거지.

무식하게 도출된 답에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지금 가고 있는 곳이 토라소라고 했지?"

바나나를 우걱거리던 노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엔 사과만 조지더니 점점 먹는 스팩트럼이 넓어지고 있는 노운이었다.

"토라소에서만 길을 여는 게 가능하거든."

"무슨 장치라도 있는 거야?"

잠시 말을 멈춘 노운이 미간을 찌푸렸다.

무언가를 떠올리려는 모습이었다.

"장치라고 할 수도 있고 흔적이라도 할 수 있어. 문이 한 번이라도 열렸던 곳에 남는 흔적이랄까."

간신히 기억을 되살려 말을 이어가는 노운이었기에.

어떻게 알고 있는 거냐고 묻진 않았다.

어차피 이미 탑승했으니까.

굳이 말하자면 난 노운이란 배에 탑승한 것이었다.

이것저것 의문점 투성이었지만 어차피 노운이 아니면 이곳에서 뭘 해야 할지도 막막한 상태.

배의 목적지가 어디든 끝까지 가보는 수밖에 없었다.

노운이 없으면 난 세계 미아야.

다시 한번 스스로의 현실을 자각한 후.

걷고 있는 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턱.

엇.

길을 걸을 땐 앞을 잘 보며 가라고 누누이 들었었는데.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걷다 돌부리에 발이 걸려버렸다.

갸우뚱.

순간적으로 등에 메고 있던 짐이 기울어지며.

데구르르.

노운이 꺼내먹기 좋게 맨 위에 올려놨던 사과 몇 개가 굴러떨어졌다.

마이 애플!

싱그러운 사과가 황폐한 땅에 떨어질까 손을 황급히 뻗어 두어 개를 잡아냈지만.

조금 떨어진 곳으로 향한 나머지 한 개마저 구하기엔 조금 늦을 것 같았다.

하나는 낙오인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손을 뻗으면서도.

늦은 타이밍에 떨어진 한 개는 멍냥이에게 줬다 치자라고 체념했다.

두둥.

!?

텁.

예상과 달리 손에 붙잡혀 있는 사과를 바라봤다.

뭐야?

조금 전 분명히…?

내 손이 낚아채기 전.

사과는 떨어졌어야 했다.

하지만 떨어지지 않았다.

아주 찰나의 순간이지만 낙하를 멈추고 공중에 머물렀던 사과.

스윽.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리자.

사과가 떨어지던 방향으로 뻗어진 노운의 손이 보였다.

파지직.

손에선 붉은 스파크가 일어나고 있었다.

210화. 닫히는 길

왜 쟤가 저런 표정을 짓고 있지.

물어보기 망설여지게.

사과를 잡고 쭈그려 앉은 채 노운을 돌아보고 있는 상태였다.

손에 남아있는 스파크를 보며 여전히 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노운.

마음 같아선 어떻게 한 거야! 묻고 싶었지만 무언가를 떠올리는 듯한 모습에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등가교환이 일어나지 않았어."

먼저 입을 연 건 노운이었다.

등가교환의 법칙.

노운이 연금술에 대해서 설명할 때 절대적인 법칙이라고 설명했었다.

스윽.

그제야 몸을 일으켜 노운에게 걸어갔다.

딱히 말을 걸거나 하진 않았다.

노운은 계속해서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떠오르는 것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런 노운을 바라보며 조금 전 상황을 다시 떠올렸다.

분명 사과가 멈췄었다.

시간이 정지하거나 한 건 아니었다.

그랬다면 사과를 향해 나아가던 나 역시 멈춰야 했을 테니까.

물체의 움직임을 멈추거나 제어할 수 있는 힘인가.

무언가를 자세히 파악하기엔 너무 찰나의 순간이었다.

"한 번 더 해볼게."

고개를 끄덕이며 사과를 올려놓은 손바닥을 노운의 눈높이까지 들어 올렸다.

손을 들어 올린 노운이 사과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내가 어떻게 되는 건 아니겠지.

서서히 일어나는 붉은 스파크를 보고 있자니.

과거 화학 실험 중 일어났던 폭발 사고들이 떠올랐다.

폭발은 안 돼.

라고 속으로 외치면서도 노운의 집중을 깨지 않기 위해 입은 다물고 있었다.

파지… 파지직!!

노운의 손에서 일어난 스파크가 절정에 달하고.

오…!

… 아무 일도 없네.

손에 있던 사과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노운도 왜 아무 일도 없지? 란 얼굴이었다.

음.

그러고 보니 대상은 같았지만 조금 전과 상황이 달랐다.

혹시 모르니.

노운과 한 번 눈을 마주친 후.

휙.

사과를 공중으로 던져 올렸다.

내 의도를 알아차린 노운이 곧장 사과를 향해 손을 들었다.

그리고.

콰아앙!

귀를 찢는 굉음이 들려왔다.

* * *

"뭐… 뭐야?"

데구르르.

그대로 떨어져 바닥을 굴러가는 사과와.

굉음과 함께 전달된 진동에 중심을 못 잡고 있는 노운까지.

쿠르릉… 콰앙!

얼마 떨어지지 않은 장소였다.

주변 지역 자체는 고요한데 유독 한 장소에만 번개가 내려치고 있었다.

맞으면 바로 통구이 되겠는데.

살면서 저런 번개는 처음이었다.

번개와 함께 장소를 가리는 소용돌이까지.

얼핏 보기만 해도 저기는 피해가야지란 생각이 절로 드는 광경이었다.

"토라소…!"

"!?"

물론 세상일이 다 마음처럼 되지는 않는 법.

노운의 외침을 들어보니 저곳을 피해가는 건 불가능했다.

정확히는 피해가는 게 아니라 저곳을 향해 가야 했다.

구워지는 게 무서워 지구로 돌아가는 걸 포기할 게 아니라면 말이다.

"이상해, 이렇게까지 불안정하지는 않았는데."

노운이 눈살을 찌푸리며 점점 심해지는 폭풍우를 살폈다.

꼴깍.

무슨 말을 할지 심히 걱정되는 순간이었다.

망자의 세계에 대해 아는 건 없었지만. 

미친 듯이 몰아치는 토라소의 폭풍우나 노운의 표정으로 미루어 보건대, 썩 달가운 상황은 아닌 것 같았다.

"달려야겠어."

"뭐?"

"누군가 토라소로 들어가는 길을."

몸을 일으킨 노운이 폭풍우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닫고 있어…!"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달리는 노운을 따라 몸을 일으켰다.

나름 날쎈데.

처음엔 노운을 들고 달릴까 했었다.

연구실 학자 스타일인 노운에게 달리기는 익숙지 않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생각과 달리 노운은 폭풍우를 향해 뒤쳐지지 않는 속도로 달려가고 있었다.

파직…! 파직…!

저거 때문인가.

달리는 와중에 무슨 연금술을 사용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노운은 본능적으로 발아래로 연금술을 사용하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서둘러야 돼!"

평소와 달리 다급한 노운의 목소리에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 정도까지 오니 보였다.

번개와 바람을 동반한 폭풍우의 장막.

장막이 토라소로 향하는 길을 덮으며 내려오고 있었다.

[유탈라스 - 1단계 의태]

[도윤 - 비젼 수리검]

오른팔을 비늘로 감싸며 수리검을 꺼내 들었다.

조금만 여유가 있다면 비젼으로 다짜고짜 들어가는 것보단 폭풍우를 살피며 들어가고자 했었는데.

노운의 반응을 보니 그럴 여유까지는 주어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드드드득…!

오른팔에 최대의 힘을 준 후.

후우우웅--!!

수리검을 토라소 방향으로 내던졌다.

두 가지 무기로 증폭된 힘을 싣고 엄청난 속도로 날아가는 수리검.

덥썩.

장막 바로 근처까지 간 수리검을 확인한 후.

노운의 뒷덜미를 붙잡았다.

비…!?

비젼을 하려는 순간.

콰르르릉!

수리검의 진행 방향으로 수십 줄기의 번개가 내리쳤다.

그리고, 단순히 번개만 있는 게 아니었다.

카아아앙!!

수리검이 뚫을 수 없는 무언가와 부딪히며 엄청난 굉음을 뿜어냈다.

이미 1차적인 건 처져있다는 건가.

길을 막기 위해 하늘에서 내려오고 있는 거대한 장막.

저 장막 이전에 안쪽에 이미 무언가가 길을 틀어막고 있었다.

"이런… 이미 막혔어."

수리검이 막히는 걸 봐서일까.

옆에 있는 노운의 얼굴이 낭패감으로 물들었다.

항상 천진난만 호기심만 가득하던 노운이 처음으로 보이는 표정이었다.

"아직이야."

스륵.

함께 비젼하려고 잡았던 노운의 뒷덜미를 놓은 후.

아직 장막의 근처에 있는 수리검을 바라봤다.

"뭘 하려는 거야…?"

무언가 하려는 내 눈을 발견했는지 노운이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이미 차단된 곳이야, 다른 방법을 찾아야 돼."

"차단 같은 건 없어."

"…?"

"내가 들어가기 전까지는."

여전히 의아해하는 노운을 남겨둔 채.

[비젼]

장막 바로 앞으로 몸을 옮겼다.

콰르르르!

멀리서 봤을 때보다 가까이서 보니 더 장관이었다.

미친 듯이 내려치며 다가오는 모든 걸 가루로 만들겠다는 폭풍우의 의지가 느껴졌다.

하지만.

비젼 이후 장막으로 날아가는 내 속도는 늦추어지지 않았다.

이게 옳은 선택인지 역시 굳이 고민하지 않았다.

"스으으…."

가까워져 오는 장막을 바라보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척준경 - 악귀참도]

콰아아아아!

수리검이 접근했을 때처럼 나를 향해 수십 줄기의 번개가 내리쳤지만.

악귀참도에서 풀어진 성해포에 막혀 내게 닿진 못했다. 

내가 가고자 한다면.

스르릉.

악귀참도의 호흡을 느끼며.

간다.

사아아아아악--!

장막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 * *

째엥--!

"!!!"

해골마를 타고 이동 중이던 카사락.

카사락의 손에 들려있던 구슬이 파열음과 함께 가루가 되었다.

투둑.

아래로 떨어지는 구슬의 잔해를 보며 카사락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어떻게…?'

깨진 구슬에 놀란 건 카사락 뿐만이 아니었다.

주변에 있던 망자들의 시선도 깨어져 가루만 남은 구슬로 향해 있었다.

- 토라소로 향하고 있습니다.

조금 전의 일이었다.

추적자로부터 규율 위반자의 목적지를 듣게 된 카사락.

순간 카사락의 머리를 스치는 게 있었다.

- 길을 열려고 하는구나.

지금은 아니지만 한때 포식자의 탄생지로 알려졌었던 토라소.

토라소에서 포식자의 흔적을 지운 게 바로 카사락이었다.

당시 균형을 흔드는 포식자들을 쫓아내기 위해 다른 세계로의 길을 열었던 지역.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길의 흔적이 남아있을 게 분명했다.

- 어떻게 안 거냐.

우연히 토라소로 향한다고 보기는 힘들었다.

구덩이의 마지막 포식자를 제거한 후 곧장 토라소로 향하고 있는 규율 위반자.

마치 토라소에 길의 흔적이 있다는 걸 알고 가는 느낌이었다.

- 폭풍의 구슬을 가져와라.

어떻게 알았는지는 가서 물어보면 되는 일이었기에.

뭘 꾸밀지 모르는, 불안정한 존재인 위반자를 막기 위해 카사락은 구슬을 꺼내 들었다.

지정한 위치에 폭풍의 장막을 내리는 구슬. 

구슬의 주인인 카사락을 제외하면 그 누구도 출입할 수도, 해제할 수도 없는 힘이었다.

'….'

그런 구슬이었다.

조금 전 카사락의 손에서 깨어진 폭풍의 구슬은 말이다.

'나의 세계이거늘.'

구슬이 깨졌다는 건 한 가지를 의미했다.

토라소를 중심으로 쳐지던 장막이 누군가에 의해 완전히 찢겨졌다는 것.

그리고 장막을 찢은 게 누구인지는 굳이 궁금해할 필요가 없었다.

이미 규율을 한 차례 위반한 자.

방법은 모르겠지만 분명 그자가 장막을 파괴한 범인이었다.

으드득.

카사락이 힘을 주어 주먹을 쥐자 뼈의 마찰음이 들려왔다.

'인정할 수 없다.'

망자의 세계는 카사락의 손아귀에 있었다.

수십만의 망자가 받드는 왕이었으며 예상치 못한 일로 망자의 세계에 흘러든 찌꺼기들도 본능적으로 카사락을 두려워하게 되는 세계였다.

원래대로라면 규율 위반은커녕 망자에 대한 본능적인 두려움으로 해할 생각조차 못 했어야 했다.

'당장 없애야 한다.'

스스로는 인지하지 못했지만.

구슬이 깨어지며 카사락의 마음은 급해지기 시작했다.

무언가 잘못 흘러가고 있었다.

망자의 세계에선 전지전능해야 하는 자신의 능력과 권위가 흔들리고 있었다.

"속도를 올린다."

고오오오…!

카사락의 명령과 함께.

수십만 망자들의 푸른 안광이 무섭게 일렁였다.

어두운 망자의 세계를 밝힐 정도로 불타오르는 푸른빛.

"위반자를 죽인다."

그아아아아아---!!

푸른빛과 함께 망자들의 포효가 울려 퍼졌다.

* * *

후우.

한숨을 돌리며 눈앞에 있는 지형을 둘러봤다.

여우의 말에 따르면 토라소는 칼데아를 포함한 포식자들의 고향이었다.

검은 연기로 이루어진 몸을 봤을 땐 애초에 어떻게 태어났을지 가늠도 안 되었지만.

온 김에 뭔가 좀 알아 갔으면 좋겠는데.

지구로 돌아가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였지만 이왕이면 알고 싶었다.

망자의 세계에서 태어난 칼데아는 어째서 이곳을 떠나게 된 것이며.

어쩌다 지구에서 이카로스에게 깃들어 다시 태어나게 된 것인지 말이다.

기다리다 보면 알게 되려나.

소화를 하고 있는 중인지 게이지가 다 찼음에도 다음 레벨을 개방하지 않고 있는 칼데아.

통상 무기가 다음 레벨로 넘어갈 땐 무기의 주인과 대화를 나눌 수 있었으니.

그때 이카로스를 통해 들어도 늦을 것 같진 않았다.

지직…지지…!

손에서 미세하게 느껴지는 전류에 고개를 내렸다.

음.

번개가 섞인 폭풍우를 베어버려서일까.

악귀참도에선 여전히 번개가 남긴 전류가 흐르고 있었다.

날이 갈수록 겁을 상실해가는 느낌이랄까.

예전엔 한두 번이라도 고민을 하고 뛰어들었었는데.

아까는 비젼을 하면서도 별다른 걱정이 들지 않았다.

알고 있어서겠지.

베지 못하는 걸 베는 검, 악귀참도.

무기를 모으면 모을수록 점점 더 선명해지고 있었다.

무기와 함께 하는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이 말이다.

음.

할 수 없는 건 없었지.

새삼스러운 깨달음에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터벅.

짐과 함께 걸어온 노운이 내 앞에 멈춰 섰다.

"이제 알겠어."

"응?"

도착하기 무섭게 노운이 입을 열었다.

"규율을 위반한 게 아니야."

잠시 날 응시하던 노운이 말을 이어갔다.

"애초에 따를 필요가 없었던 거야."

211화. 망자의 군대

천천히 거닐며 주변을 둘러봤다.

문이 닫히는 해프닝이 있었지만 어찌저찌 도착한 토라소.

분위기 봐라.

걷고 있는 것 뿐인데도 으스스한 기운이 느껴지는 땅이었다.

생명체라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을 듯한 땅.

오히려 있는 게 더 놀라울 것 같았다.

와삭!

한 명 있긴 있네.

그나마 혼자가 아니라서 다행이었다.

앞장서 걸으며 사과를 와삭와삭 먹고 있는 노운.

가방 안에는 여러 과일이 있지만 유독 사과를 좋아하는 노운이었다.

아까는 뭐라 했던 거지.

장막을 찢고 들어온 직후, 노운은 내게 다가오며 혼잣말을 중얼거렸었다.

위반자가 아니라 애초에 따를 필요가 없었다는 기묘한 말이었다.

- 여기라면 길을 열 수 있을 거야. 

무슨 의미냐고 묻자 노운은 웃으며 말을 돌렸었다.

- 내 부탁 들어주는 거 잊으면 안 돼.

재차 약속을 강조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대체 부탁이란 건 뭘까.

첫 등장부터 지금까지 왠지 알 것 같으면서도 전혀 모르겠는 녀석이다.

정말 기억을 못 하는 것 같으면서도 어떨 땐 무언가를 숨기는 것 같기도 하고.

착한 건 확실해.

함께 지낸 시간이 오래되진 않았으나.

노운이 나쁜 놈이 아니란 건 확실히 알 것 같았다.

내가 자거나 걷는 동안 등 뒤에 칼을 안 꽂은 것도 그렇고.

대화를 나누면 나눌수록 조금의 악의도 없는, 백치미에 가까운 순수함만이 느껴졌다.

저벅, 저벅, 저벅.

거리가 점점 벌어지는 노운을 바라봤다.

사과를 먹는 모습만 보면 여유롭지만 노운의 걸음걸이는 어째선지 빨라져 있었다.

"왜 이렇게 빨리 걸어? 뭐라도 쫓아오는 것처럼."

바로 옆으로 다가가 묻자 노운이 내게 고개를 돌렸다.

조금 전 건넨 말에 깜짝 놀란 얼굴이었다.

"어떻게 알았어?"

진짜였냐.

어쩌다 때려 맞춘 상황에 잠시 멍을 때리자.

노운이 계속 걸으며 입을 열었다.

"아까 장막은 자연적인 게 아니야, 알아차린 거지."

"알아차리다니… 누가?"

"망자의 세계를 다스리는 자, 그리고."

걸음을 멈춘 노운이 날 응시했다.

"널 쫓아오는 자."

꼴깍.

나도 모르게 침이 삼켜졌다.

망자의 세계를 다스린다길래 오 대단한 사람인데? 라고 생각했는데.

다짜고짜 날 쫓아오고 있다니.

좋은 일로 쫓아오는 건 아닐 것 같았다.

"그는 네가 토라소에 도착하는 걸 원하지 않았어. 그래서 장막을 내린 거고."

내가 그걸 시원하게 찢어버렸구만.

쫓아오고 있는 자가 뭐 하는 사람인지는 몰라도.

장막을 찢음으로써 아마 화를 한층 더 돋우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세계를 다스리는 사람이 날 왜 쫓아오는 거야? 아무것도 안 했는데."

"…."

"…?"

만난 이후 노운이 처음으로 보인 표정이었다.

뭐랄까.

어이가 없다고 해야 할지 황당하고 해야 할지.

어찌 됐든 얼탱이가 없어 할 말을 잃어버린 얼굴이었다.

"망자를 죽였잖아."

아.

기억의 저편으로 옮겨져 잊어버리고 있었다.

도운을 구하는 와중에 일어난 일이기도 했고,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날카로운 이빨을 뽐내며 내게 먼저 달려든 건 망자들이었으니까.

내가 먼저 가마에 올라가긴 했지만.

"그게 그렇게 큰일 날 일이었구나."

이 세계에 널려 있는, 많고 많은 망자 중 일부분이라고 생각했었다.

인간을 향해 먼저 달려드니 데몬과 비슷한 존재라 여겼기도 하고 말이다.

"망자는 죽어선 안 되는 존재야. 이곳은 다른 세계에서 죽거나 육신을 잃은 자들이 오는 곳이고, 망자들은 이곳의 규율이 깨지지 않도록 감시하는 존재니까."

- 망자는 다른 법칙을 가지고 있습니다.

맨 처음 망자의 길에 들어왔을 때 로인이 해준 말이었다.

다른 법칙을 가지고 있기에 죽일 수 없다는 말과 함께 말이다.

단순히 망자 한 마리를 죽인 게 아니라.

이곳의 법칙을 위반했다는 건가.

아까 노운이 혼잣말로 위반자라 말한 게 이제야 이해가 갔다.

로마에서는 로마의 법을 따르라.

난 로마의 법을 따르지 않은 것이었고, 그렇기에 법을 관장하는 자가 쫓아오고 있다. 

나름 명분이 충분한 이야기였다.

그나저나.

"넌 어떻게 그런 걸 알고 있는 거야?"

구덩이의 여우가 구슬을 가지고 있다는 건 멍냥이가 알려줬다 치더라도.

토라소로 향해야 한다는 걸 노운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멍냥이가 알려주려는 대도 이미 알고 있다고 대답한 노운이었다.

거기다 망자를 다스리는 자의 이야기까지.

노운이 누구인지 점점 더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만나 봤어."

"!?"

"내가 이곳에 맨 처음으로 왔을 때… 정확히는 내가 온전히 떠오르는 기억의 시작에, 그가 있었어."

한 번 뜸일 들인 노운이 입을 열었다.

"망자의 왕, 카사락."

* * *

노운을 따라 토라소의 가장 높은 건축물로 올라왔다.

사방이 한눈에 들어오는 높이였다.

찰칵… 찰컥.

건축물의 정중앙에서 노운이 무언가를 만지작거렸다.

제사나 의식에나 쓸법하게 생긴 제단이었다.

- 엄청난 수의 망자를 거느리고 있었어.

망자의 왕 카사락.

노운 역시 그에 대해 아는 건 많지 않다고 했다.

군세의 왕이며 망자의 세계에서만큼은 그 누구도 카사락을 거스를 수 없다는 게 자신이 알고 있는 전부라고 설명했다.

- 가자, 시간이 없어.

여기까지 말한 후 노운은 다시 걷기 시작했다.

아까 전보다 훨씬 더 빨라진 걸음이었고, 그렇게 걸어 도착한 곳이 이 건축물이었다.

대체 뭐가 살았던 거야.

건축물까지 오며 느낀 건 알 수 없는 웅장함과 낯섦이었다.

조금 과한가 싶지만 밖에서 말하는 코스믹 호러가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었다.

엄청 크네.

토라소에 있는 건물은 다 부숴졌지만 그 크기가 남달랐다.

한국에서 발견됐다면 외계인 혹은 거인이 살았을 거라 여겨질 정도였다.

거기다 건물 곳곳엔 다양한 벽화와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뭘 의미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는 듯한 그림.

누가 새겼는지는 알 수 없었다.

벽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역시 알 수 없었다.

단지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바가 있었다.

약육강식.

벽화엔 선명히 나와 있었다.

커다란 존재가 작은 존재를 잡아먹고.

그 커다란 존재를 더 커다란 존재가 잡아먹는 듯한 내용이 말이다.

그래서 포식자의 고향이라 불리는 건가.

내가 느낀 벽화의 의미가 맞다면 이곳은 포식자들에게 고향임과 동시에 가장 치열한 전쟁터였다.

포식자로 태어났지만 다른 개체보다 약하다면 곧바로 잡아먹히고 마는 동족 포식의 현장.

그렇기에 구덩이의 여우는 도망친 것이었다.

조금이라도 약하면 잡아먹히고 마는 이 미친 장소로부터 살아남기 위해서.

철컥…!!

…!

무언가 정확히 들어맞는 소리가 들려왔다.

- 여기야, 여우 구슬 좀.

건축물에 올라오기 무섭게 구슬을 받아갔던 노운.

제단 여기저기를 조립하는 듯하던 노운이 구슬을 끼우는 데 성공하는 소리였다. 

우우우우…!

아무 일도 없나 싶던 제단에서 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무슨 색이라고 표현하긴 힘들지만 굳이 말하자면 분홍과 파랑이 섞인 오묘한 빛이었다.

"…."

그리고 왠지 모를 아련한 눈으로 빛을 바라보고 있는 노운.

"다 된 거야?"

무언가 일어나는 반응에 묻자 노운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빛은 길을 열 수 있다는 신호일 뿐이야."

제단에 손을 올린 노운이 말을 이었다.

"토라소는 망자의 세계에서 가장 최근에 문이 열렸던 장소야. 그때 열렸던 문의 기운이 남아있기에 이곳으로 온 거고."

무언가 기억이라도 난 걸까.

아까와는 노운의 분위기가 달라져 있었다. 

그렇게 말없이 바라보고 있자 노운이 묘한 미소를 머금었다.

"내가 그 문을 통해 왔어."

"!!"

파지직.

뭔가를 더 물어보기도 전에.

노운의 손에서 붉은 스파크가 일어났다.

이전과 비교할 수 없는 거대한 스파크였다.

"문을 열기 위해선 구슬에 담긴 힘과 토라소에 흩어져 있는 길의 기운을 합쳐야 해."

파지지직…!

더욱 더 커져 건축물 전체로 퍼지는 스파크.

스파크가 퍼지자 토라소 여기저기에서 희미한 빛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마치 여우 구슬과 노운의 스파크에 이끌리는 듯한 모습이었다.

뭔지 모르겠지만 기다려보자.

그렇게 집중하고 있는 노운을 지켜보고 있을 때.

쿠구구구…!

진동이 느껴졌다.

"…?"

앞에서 일렁이는 스파크와 별개의 것이었다.

발아래로 느껴지는 무언가의 울림.

땅을 통해 건축물의 위까지 느껴질 정도로 울림은 거대했다.

"이런."

스파크로 기운을 모으던 노운이 미간을 찌푸렸다.

"늦었구나."

늦었다는 게 무얼 의미하는지는 묻지 않았다.

노운에게 묻지 않아도 눈에 들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땅 전체를 덮으며 밀려들고 있는 서늘한 푸른빛의 무리가 말이다.

하… 무슨 해일도 아니고.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그 정도로 밀려드는 빛의 숫자는 엄청났다.

망자의 세계를 다스리는 왕, 카사락.

군세를 이끈다길래 얼마나 많은 병사를 거느리고 있나 했는데.

지금 대충 눈에 보이는 것만 해도 내가 예상하던 숫자의 백 배는 되어 보였다.

"늦었지만, 괜찮지?"

뒤에서 노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보통 사람이 이 광경을 본다면 겁을 집어먹거나 주저앉기 마련인데.

노운은 주저앉긴커녕 여유로운 목소리로 괜찮냐 묻고 있었다.

"그럼."

굳이 노운을 향해 고개를 돌리진 않았다.

그저 밀려드는 군세를 바라보며 몸을 풀었다.

뚜둑.

"괜찮고말고." 

"길은 걱정하지 마, 내가 내보내 줄게."

괜찮다는 말에 노운의 확신에 찬 답이 돌아왔다.

내보내주겠다는 간단한 대답.

아무런 보증도 근거도 없는 대답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나 또한 확신이 들었다. 

내가 나갈 수 있는 길을 노운이 열어 줄 거란 확신이 말이다.

저벅.

군세 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척준경 - 악귀참도]

세계의 룰을 어기게 해주었던 검을 꺼냈다.

"그아아아아---!"

카사락의 군세는 소름 끼치는 함성과 함께 밀려오고 있었다.

살벌하게 생겼네.

어느 정도 다가오자 녀석들의 생김새가 눈에 들어왔다.

멀리서부터 보이던 푸른빛은 망자의 눈과 입에서 나오는 빛이었다.

그 수가 하도 많아 푸른빛의 물결로 보였던 것.

쿠구구…!

"…?"

그렇게 엄청난 기세로 몰려오던 망자의 군대.

끝까지 달려올 거라 생각했는데 예상과 달리 군대는 서서히 속도를 늦추고 있었다.

나와 노운이 있는 건축물과 거리를 둔 채 완전히 멈춰선 망자의 군대.

다그닥… 다그닥.

해골마와 함께 거구의 망자가 걸어 나왔다.

저놈이군.

아직 자기소개를 한 건 아니었지만.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단순히 머리에 씌워져 있는 왕관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저 걸어오고 있는 게 다인데도 느껴지는 엄청난 위세.

수많은 망자들 중 대장이 있다면 저놈일 게 분명했다.

"규율을 어긴 자여, 어딜 가려 하는가."

낮으면서도 한 마디 한 마디에 무게가 실려 귀로 명확하게 전달되는 목소리였다.

귀 시리네.

목소리에서 온도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듣는 것만으로도 시리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목소리는 차가웠다.

"보시다시피."

카사락을 향해 어깨를 으쓱 올려 보였다.

"도망가려고 했지."

가벼운 내 대답에도 카사락은 화를 내거나 소리치지 않았다.

단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문을 열고 있는 노운을 바라볼 뿐이었다.

"…."

그리고 잠시 후.

노운을 바라보던 카사락이 입을 열었다.

"그때의… 연금술사."

212화. 연금술사

오래된 이야기였다.

"그아아…!"

카사락이 자신의 앞에 무릎 꿇고 있는 망자들을 내려다봤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서로를 죽이기 위해 이빨과 무기를 휘둘렀던 사이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툭.

카사락이 들고 있던 누군가의 머리를 집어던졌다.

선대 왕이었던 망자의 머리였다.

조금 전까지 카사락과 왕의 자리를 두고 겨루었던 자.

데구르르.

방금 전까지는 왕의 머리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지금은 그저 가지고 있던 모든 걸 잃고 바닥을 뒹구는 패배자의 잔해일 뿐이었다.

"그어어!!"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망자들이 고개를 치켜들며 포효를 내뱉었다.

갑자기 나타나 원래부터 제 자리였던 것처럼 왕의 자리를 차지한 카사락.

모두가 새로운 왕의 탄생을 인정하며 내지르는 포효였다.

"잘 들어라."

포효하는 망자들을 향해 카사락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매우 낮은 목소리였지만 카사락의 말은 수십, 수백만의 망자들에게 똑똑히 전달되고 있었다.

"앞으로 망자에게 죽음은 없다."

왕의 자리에 도전하기 전.

카사락은 항상 궁금해함과 동시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망자의 세계에서 망자라는 존재가 가지는 위치.

카사락이 생각하기에 망자는 세계를 이루는 중심이 되는 존재였다.

세계는 망자를 위해 존재했고, 망자는 그 세계에서 가장 우대받아야 함이 마땅했다.

- 콰직!

그럼에도 전대의 왕은 자신 외의 망자를 소모품 정도로 여겼다.

기분이 나쁘거나 말을 잘 듣지 않는다는 이유로 망자를 소멸시켰고.

그렇게 세계를 구성하고 있던 망자는 한 줌의 재와 빛이 되어 하늘로 사라져야만 했다.

- 이대로는 안 된다.

전대 왕의 횡포를 보며 카사락은 힘을 키워나가기 시작했다.

단순히 왕의 행동이 마음에 안 들어서가 아니었다.

왕의 행동이 망자의 세계에 있어 얼마나 위험한지를 알았기에 힘을 키운 것이었다.

"망자는 망자를 죽이지 않는다."

그리고 오늘.

마침내 카사락은 전대 왕을 꺾고 규칙을 정할 수 있는 새로운 왕의 자리에 올랐다.

망자들에게 있어 왕의 규칙은 절대적이었기에.

지금 카사락이 전달하고 있는 한 마디 한 마디가 곧 세계의 규율이었다.

"이곳에서 망자가 소멸되는 일은 더 이상 없어야 한다."

애초에 망자를 죽일 수 있는 건 같은 존재인 망자뿐이라는 세계의 법칙이 있었기에.

카사락의 규율이 지켜진다면 이곳에서 망자가 죽는 일 따위는 더 이상 일어날 리 없었다.

"이것이 나의 규율이자 질서이다."

질서를 위한 세계의 새로운 규율.

규율은 새로운 왕과 함께 탄생했다.

* * *

세계엔 망자만 존재하는 게 아니었다.

때때로 다른 세계에서 봉인을 당해 육신을 잃은 자들이 흘러들어왔다.

세계의 법칙에 의해 흘러들어온 자들이었기에 카사락은 이들을 가마에 가두고 망자들에게 지키도록 명령했다.

왕이기 이전에 세계에 속한 자로서 지켜야 하는 질서이자 규칙이었다. 

"여… 여긴 어딥니까! 절 내보내 주십시오!"

물론 흘러들어오는 모두를 가둔 건 아니었다.

그럴 가치조차 없는 존재들이 있었다.

찌꺼기.

카사락은 그들을 찌꺼기라 불렀다.

어떤 룰에 의해선지는 몰라도 죽음 이후에 그 어느 곳으로도 받아들여지지 못한 낙오자들.

필시 자신이 살던 세계에서 추잡한 밑바닥 생을 살아 모든 곳에서 거절당한 낙오자가 분명했다.

콰득.

찌꺼기에 대한 카사락의 생각은 확고했다.

무자비와 방치.

눈에 거슬리면 죽였고 그게 아니라면 끝없는 세계를 떠돌게 하며 모든 걸 망각하게 만들었다.

굳이 기억할 가치도 없는 삶을 살아온 존재들이기에 그에 맞는 삶을 선물해준 것이었다.

'신경 쓸 가치도 없는 하찮은 존재들.'

세계의 질서에 어떠한 영향도 끼치지 못하는 하찮은 존재였기에 카사락은 이들에게 조금도 신경쓰지 않았다.

그저 지나가다 밟아 죽일 수도 있는 벌레 정도로 생각했다.

'질서는 확고히 유지되고 있다.'

세계의 법칙과 맞물려 안정을 가져온 자신의 규율에 카사락은 만족했다.

세계의 중요 구성체인 망자는 더 이상 죽지 않았고, 관리되어야 하는 이들 역시 빠짐없이 카사락의 손 아래에 있었다.

'나의 세계다.'

그 누구도 질서와 규율을 깰 수 없는.

오로지 왕인 카사락만이 질서의 유지와 혼란을 정할 수 있는 세계.

'앞으로도 세계의 질서는 나의 관리하에 지켜질 것이다.'

모든 게 카사락의 아래에서 돌아가고 있었기에.

카사락은 세계의 질서와 평화가 영원할 것이라 생각했다.

드드드!

콰아앙!

정확히는 그렇게 확신했었다.

'….'

그들이 탄생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세계에 질서가 확립되었다고 생각한 지 얼마나 지났을까.

망자의 세계엔 새로운 존재가 탄생했다.

토라소라는 지역과 함께 모습을 드러낸 검은 연기로 이루어진 생명체.

"키아아아악!!"

"크르르!"

카사락이 눈앞에서 서로를 물어뜯고 있는 생명체들을 바라봤다.

순수한 본능만을 가진 존재들이었다.

식탐과 생존.

그들은 자신들의 고향에서 태어나기 무섭게 서로를 향해 이빨을 드러냈다.

그들에겐 동족포식에 대한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마치 태어날 때부터 그렇게 설계되었다는 듯이, 그들은 서로를 먹으며 몸집을 키워갔다.

'위험하다.'

세계의 규율인 만큼 저들은 망자에게 어떠한 위해도 끼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카사락이 위험하다 느낀 건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었다.

'제어가 불가능하다.'

저들이 망자를 죽이지 못하듯, 망자 또한 저들을 죽일 수 없었다.

서로에게 손을 댈 수 없는 존재의 공존.

질서와 규율을 중요시하는 카사락에겐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과 같은 존재였다.

쿠웅!!

콰가가가가!

실제로 세계는 흔들리고 있었다.

거대한 크기만큼이나 생명체들의 싸움은 치열했고.

그럴 때마다 세계는 폭풍우라도 만난 것처럼 거칠게 요동쳤다.

우우우우우---!

'…!'

특히 생명체 중에서도 몇 번의 동족포식을 해낸 개체가 있었으니.

토라소의 폭풍이라 불리고 있는 칼데아였다.

검은 연기로 이루어진 거대한 날개.

칼데아가 가는 곳은 언제나 폭풍이 일었고, 망자를 제외한 모든 존재가 칼데아의 먹이로 바스러져갔다.

'내보내야 한다.'

칼데아는 죽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란 걸 알았기에.

카사락은 다른 방법을 선택했다.

망자의 세계를 지키기 위해 칼데아를 다른 세계로 튕겨 내버리는 것.

목적지가 어디가 될지, 칼데아가 도착한 세계엔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내 세계의 질서를 위하여.'

카사락은 망자의 세계를 다스리는 왕이었고.

세계가 무너지지 않도록 지켜야 할 책임이 있었다.

"망자들을 모아 찌꺼기들의 혼을 거두어 와라."

들어올 순 있지만 나가는 건 불가능한 세계.

카사락은 질서를 위해 이 규칙을 한 번 어기기로 마음먹었다.

'저들을 내보낼 수만 있다면.'

다시 한번 세계가 자신의 손 아래로 들어올 수만 있다면.

문을 엶으로 생기는 부수적인 파장은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었다.

고오오….

카사락이 푸른 안광을 빛내며 토라소를 노려봤다.

"토라소에 문을 연다."

* * *

"크라아아아!!"

"키아아아아아악!!"

엄청난 울음소리가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카사락과 망자들에 의해 열린 하늘의 문과 문으로 빨려 들어가는 검은 연기의 존재들.

드드드득…!

토라소의 모든 존재가 문으로 빨려 들어갔음에도.

칼데아는 문의 끝자락을 놓지 않고 끝까지 버티고 있었다.

거스를 수 없는 문의 힘조차 버텨내다니.

다시 봐도 위험한 존재였다.

'난 틀리지 않았다.'

그런 칼데아를 보며 카사락은 확신했었다.

이것이 망자의 세계를 위한 최선임을 말이다.

고오오오오---!

"…!"

엄청난 울림이었다.

귀로 들리는 게 아닌, 몸 전체를 울려대는 칼데아의 울부짖음.

그게 무슨 감정인지는 알 수 없었다.

고향으로부터 추방당하게 한 카사락에 대한 분노일 수도 있었고,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일 수도 있었다.

"가거라, 무질서의 존재여."

드드드… 드.

그렇게 카사락이 열었던 하늘의 문이 닫히고.

토라소에서 태어난 포식자들이 모두 다른 세계로 튕겨 나가졌다.

"…."

문의 닫힘과 칼데아의 사라짐을 확인하고 등을 돌리려는 순간.

문이 열렸던 건축물 옆으로 주저앉아 있는 소녀가 카사락의 눈에 들어왔다.

"아…!"

잔뜩 겁에 질린 얼굴로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을 하고 있는 소녀.

'휘말린 건가.'

이제까지 흘러들어온 찌꺼기들과는 달랐다.

소녀의 육신은 멀쩡했다.

그럼에도 망자의 세계로 들어오게 된 이유는 간단했다.

조금 전 카사락이 억지로 연 문 때문이었다.

문의 파장에 휘말려 운이 나빴던 소녀는 이곳으로 오게 되었다.

'….'

스릉.

잠시 소녀를 바라보던 카사락이 들고 있던 검을 꺼내 들었다.

육신을 가진 이는 이곳에 있어선 안 됐다.

소녀 또한 질서를 어긋나게 하는 존재였기에 사라져야만 했다.

다그닥.

그렇게 소녀를 죽이기 위해 걸음을 옮기고 있을 때.

파지직.

"…!?"

닫혔던 문에 붉은 스파크가 일었고.

콰앙!

"!!!"

열릴 리 없는 하늘의 문이 다시 한번 열어젖혀 졌다.

파지지지직!!

문으로부터 뻗어 나온 붉은 스파크가 소녀의 몸을 휘감았다.

"감히…!"

소녀를 데려가려는 힘에 카사락이 검을 휘둘렀지만.

사락.

"!!"

카사락의 검은 스파크에 둘러싸인 소녀를 베지 못했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 스파크는 카사락마저 간섭할 수 없는 새로운 규칙임을.

파직!

그렇게 건드릴 수 없는 붉은 스파크가 소녀를 문밖으로 끌어당기고.

쿵!

소녀가 사라짐과 동시에 잠깐 열렸던 하늘의 문이 굳게 닫혔다.

그리고.

스으으…!

소녀가 앉아있던 곳엔 새로운 인물이 서 있었다.

하얀색 더벅머리를 한 채 초록색 눈동자를 빛내고 있는 소년이었다.

카사락을 앞에 두고 있음에도 조금의 동요조차 않는 모습이었다.

"넌 무엇이냐."

카사락이 먼저 소년에게 질문을 건넸다.

소녀와 달리 소년은 세계의 질서에 어긋나지 않았다.

방금 전에 잃은 탓인지 약간의 기운이 남아있긴 했지만, 소년에겐 돌아갈 육신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굳이 죽일 필요는 없었다.

"그리고 방금 뭘 한 것이냐."

자신의 검조차 간섭하지 못하는 힘.

그 힘의 정체는 분명 소년의 것이었다.

질문을 들은 뒤 잠시 카사락을 보던 소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등가교환의 법칙."

알아들을 수 없는 말에 카사락이 인상을 찌푸리자.

조금의 떨림도 없는 목소리로 소년이 말을 이어나갔다.

"원하는 걸 얻기 위해선, 그에 상응하는 무언가를 내줘야 한다."

"…."

소년의 말을 들은 카사락의 입가로.

묘한 미소가 그려졌다.

"바꾼 게로구나…!"

갑자기 사라진 소녀와.

육신이 사라진 채 갑자기 등장한 소년.

지금의 상황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이곳은 흐르는 시간과 함께 모든 걸 잊어버리는 땅이다."

조용히 말을 건네는 카사락에도 소년은 동요하지 않았다.

"후회는 없어."

툭툭.

오히려 태연한 모습으로 하얀색 셔츠에 묻은 모래를 털어낼 뿐이었다.

"원하는 걸 얻었고, 대가를 치뤘다. 그뿐이야."

스윽.

고개를 든 소년이 카사락을 응시했다.

"아까 내가 무엇이냐 물었지? 난…."

그런 소년을 조용히 바라보는 카사락.

잠시 뜸을 들인 소년이 입을 열었다.

"연금술사다."

213화. 소화 완료

자신을 연금술사라 소개하는 남자.

카사락이 남자를 응시하며 재밌다는 표정을 지었다.

원래라면 법칙을 어기는 힘을 가졌으니 바로 소멸시키는 게 맞았지만.

이상하게도 그러고 싶지 않았다.

'흥미롭다.'

이유는 간단했다.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한낮 인간이 망자의 세계와 인간 세계를 잇는 문을 열다니.

남자가 가지고 있는 연금술이란 힘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거기다.

'어떻게 저리 덤덤할 수 있는가.'

카사락의 흥미를 끈 것은 한 가지 더 있었다.

카사락과 망자의 군대를 마주했음에도 남자는 겁에 질리지 않았다.

겁에 질리긴커녕 오히려 무덤덤한 얼굴로 카사락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다르구나.'

눈앞의 남자는 보통의 인간과는 달랐다.

단순히 문을 연 힘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보통의 사람은 미지의 세계를 두려워하며 어떻게든 오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기 마련인데.

남자는 반대였다.

다른 이를 위해 제 발로 걸어 들어온 것이었다.

- 내… 내보내 줘! 내 실수야!

물론 종종 가족이나 연인을 위해 제 발로 들어온 사람이 있긴 했었다.

얼마 안 가 카사락과 군대를 마주하며 내보내달라고 울부짖었지만 말이다.

"이곳이 어딘지는 알고 있는 게냐?" 

남자가 별 걸 다 묻는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내가 그걸 알아야 해?"

"하!"

헛웃음을 터뜨리는 카사락에 남자가 말을 이어나갔다.

"아까 말했듯이 난 원하는 걸 얻었고 대가를 치룬 것뿐이야. 이곳이 어디든 상관없어."

허세 같은 게 아니었다.

남자는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든 상관없다는 얼굴로 카사락을 응시하고 있었다.

씨익.

잠시 생각하던 카사락이 입을 열었다.

"법칙을 어겼으나… 난 널 소멸시키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키지 않았다.

법칙을 어긴 것을, 망자의 세계에 온 것을 후회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 인간.

그런 인간을 소멸시킨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

가만히 듣고 있는 남자를 바라봤다.

남자는 질서를 위협할 수 있는 힘을 가진 변수 그 자체였다.

세계를 어지럽히는 변수를 극도로 싫어하는 카사락에게는 혐오스러운 힘이었으나.

상관없었다.

'앞으로 사용할 수 없을 게다.'

남자가 그 힘을 사용하는 일은 앞으로 절대 없을 터였다.

"밖으로 나간 여자는 너에게 소중한 사람이겠지."

카사락이 남자가 나타나기 직전 망자의 세계로 전이되었던 여자를 떠올렸다.

카사락이 연 문에 휘말려 빨려 들어온 여자.

분명 앞의 남자에게 있어 무엇보다 소중한 사람일 터였다.

그렇지 않다면 이 정도의 자기희생은 불가능했을 테니.

다그닥.

남자를 향해 걸음을 옮기며 카사락이 말을 건넸다.

"이곳은 망자의 세계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모든 걸 망각하게 되는 세계지."

다그닥.

"넌 이곳에서 홀로 살아가며 소중했던 모든 것을."

카사락의 입가로 차가운 미소가 걸렸다.

"서서히 잊어 갈 것이다."

* * *

가만히 서 말에 타고 있는 카사락을 바라봤다.

노운을 연금술사라고 부르며 말이 없어진 걸 봐선 과거에 대해 회상 중인 듯했다.

둘 사이에 무슨 과거가 있으려나.

솔직히 궁금했다.

다른 이의 과거 이야기가 원래 재밌는 것도 있었지만.

인간에서 멀어져도 너무 멀어진 듯한 카사락과 일반인의 조합이라니.

정말 흥미로웠다.

이런 상황임에도.

무슨 관계시고 무슨 일이 있었나요?

저도 좀 알면 안 될까요?

라고 슬쩍 물어보고 싶을 정도로 말이다.

"…."

하지만 진짜 입을 열거나 하진 않았다.

지금 흐르고 있는 시간은 노운과 나의 편이었다.

카사락이 최대한 가만히 있어 주면 좋은 일이니 괜히 말을 걸어 자극하는 건 바보 같은 짓이었다.

스윽.

뜨끔.

들렸나?

갑자기 돌아보는 카사락에 나도 모르게 움찔거리고 말았다.

둘 사이에서 인지되지 않고자 공기처럼 조용히 있었는데.

소용없는 짓이었던 것 같다.

"넌 무엇이냐?"

"백운이다."

간략한 대답에 카사락이 인상을 찌푸렸다.

궁금한 게 내 이름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무엇이길래 저 연금술사가 다시 힘을 사용하게 된 거냐?"

카사락이 궁금한 건 따로 있었다.

어떻게 노운이 문을 열고 있는지를 묻는 카사락.

…?

벙찐 얼굴로 카사락을 쳐다보다가 열심히 문을 여는 중인 노운을 바라봤다.

다시 힘을 사용하게 됐다니.

노운은 원래 힘을 사용하지 못하는 상태였다는 걸까.

음… 생각해보니.

천천히 노운과 있었던 상황들을 떠올려봤다.

뜬금없는 타이밍에 손에서 스파크를 냈던 노운.

당시 노운의 표정을 봤을 때 일부러 힘을 숨긴 게 아니었다.

마치 자기도 몰랐던 힘을 새로 발견하게 된 듯한 느낌이었다.

새로운 발견이 아니라… 되찾은 쪽이었나.

"못 들은 게냐? 어떻게 했길래 망각이 사라지고 있는지를 물었…."

"나도 몰라 해골 새끼야."

앗.

안 그래도 모르겠어서 답답한데 듣기 싫은 목소리로 계속 보채는 카사락에.

나도 모르게 욕을 해버리고 말았다.

스… 스윽.

약간 떨리는 마음으로 고개를 돌렸다.

"…."

당황한 건지 화가 난 건지는 모르겠으나 카사락은 푸른 안광을 빛내며 날 노려보고 있었다.

아까보다 안광이 짙어진 걸 봐선 화가 났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았다.

"사실 네가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럼 왜 물어봤지란 의문을 가지며 카사락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넌 질서를 어겼기에 소멸되어야 하는 존재라는 것은 변하지 않으니."

점점 차가워지는 목소리와.

"이만 나의 세계에서 사라지거라." 

음산한 말을 마지막으로.

"크아아아아악!"

대기하고 있던 망자의 군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서걱! 서걱! 서걱!

- 중요한 건 둘러싸이지 않는 것.

돌산에서 귀에 딱지가 얹도록 들은 가르침이지만.

"크라아아아아!"

지금은 이행이 불가능했다.

사방에서 날 덮쳐오는 망자의 군대.

말도 안 되는 숫자였다.

물 밀듯 밀려온다는 게 이런 느낌이구나를 깨닫게 해주는 물량 공세.

콰아아앙!

"크라…!"

한 마리 한 마리 자체는 강하지 않았다.

죽일 수 없다는 법칙이 위협적인 존재였을 뿐이기에.

법칙을 무시하는 악귀참도가 내 손에 있는 이상 놈들은 평범한 해골바가지에 불과했다.

콰악…!

휘익… 스륵.

혹시나 해서 휘두른 면도칼이 그대로 통과하는 걸 확인하며.

다른 손에 들린 악귀참도를 휘둘러 두동강을 내버렸다.

무섭네.

검을 휘두르는 와중에 든 감상평이었다.

죽을까 봐 무서운 건 아니었다.

"키아아악!"

수백 수천 개의 뼈다귀 손과 무기가 휘둘러지고 있었지만.

그게 닿을까 무서운 것도 아니었다.

그냥 비쥬얼적으로 무서웠다.

"쿠와아아각!"

공포 영화에서 한 마리만 나와도 기겁할 생김새의 놈들이 수 천 마리나 달려들고 있으니.

공포 영화 수백 편을 한꺼번에 강제 주입 당하는 기분이었다.

콰직! 콰드득!

한 번의 휘두름에 열댓 마리의 망자가 먼지가 되어 흩어졌다.

먼지가 됨과 동시에 하늘로 솟구치는 푸른빛의 기운.

도윤을 구할 때도 망자 놈들치곤 아름다운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기운이 사방에서 솟구치니 싸우는 와중에도 눈이 돌아가는 장관이 펼쳐지고 있었다.

스윽.

고개를 돌려 문을 열고 있는 노운을 바라봤다.

붉은 스파크와 사방에서 모인 빛은 어느덧 거대한 구체를 형성하고 있었다.

구체가 커짐과 동시에 세계의 하늘에 나타나고 있는 작은 균열.

균열이 완성될 때까지는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노운이 문을 열고 있는 장소가 건축물 위라는 것이었다.

평지였다면 밀려드는 망자들로부터 지키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을 텐데.

건축물로 오르는 길만 지켜내면 되니 수월한 상황이었다.

평지가 아니라서 다행…?

쿠르르릉…!

한참 밀려드는 망자를 베고 있을 때.

귓가로 불길한 소리가 들려왔다.

조금 전 봤던 폭풍우의 장막을 떠올리게 만드는 소리였다.

괜한 생각을 했나.

해치웠나 같은 트리거를 발동한 건가 하는 의문을 가지며.

소리가 들리는 하늘로 고개를 들었다.

이런 샹.

어쩐지 쫄따구들만 몰려들고 대장은 조용하다 싶었는데.

카사락이 든 책에서 솟아 나온 에너지가 하늘로 모이고 있었다.

제대로 한 방 쏘아내려는 건지 어느 정도 구체가 커졌음에도 카사락은 계속해서 에너지를 모으고 있었다.

나한테 쏘려는 게 아니다.

콰드드득!

악귀참도를 크게 휘둘러 망자 무리를 떨쳐냈다.

카사락의 마법은 문을 여는 중인 노운을 노리고 있었다.

휙.

노운은 온몸에서 땀을 흘리며 문을 열고 있었다.

하늘에서 저런 게 날아든다고 해도 대응할 수 없는 상태.

내가 막아야 돼.

"크라라락!"

달려드는 망자를 베어내며 머리를 굴렸다.

벨 수 있을까.

당장 저런 에너지 구체를 막아 낼 방법이 악귀참도 말고는 떠오르지 않았다.

베지 못하는 것을 베어내는 검.

웬만한 마법은 벨 수 없다는 게 상식이니 불가능한 가설은 아니었다.

다음 문제는.

콰직!

저 높이까지 올라갈 수 있는 방법은 수리검뿐이라는 것.

카사락은 일부러 공중에 마법을 펼치고 있었다.

만에 하나 내가 막아낼 걸 대비해서 말이다.

늦지 않게 길로 돌아올 수 있을까.

수리검 역시 쿨타임이 존재하지 않으니 듀얼로 사용한다 해도 악귀참도를 사용하지 못 하는 일은 없을 터였다.

문제는 내가 망자들로부터 지켜내고 있는 길이었다.

공중에서 마법을 베어내고 망자가 노운에게 닿기 전까지 되돌아와야 했다.

으득.

쉽진 않을 것 같았다.

수리검을 아무리 부지런하게 던지더라도 목적지까지 날아가는 약간의 텀은 존재할 수밖에 없었고.

텀 동안 나는 수리검이 빨리 도착하길 기다리며 손가락을 빨 수밖에 없었다.

날개만 있었다면.

망자의 세계에 태양은 존재하지 않았다.

언제든 꺼낼 수 있었을 이카로스의 날개.

연기만 충분하다면 말도 안 되는 이동 속도를 부여해 주는 날개였다.

수리검과 달리 다음 이동을 위한 텀도 존재하지 않으니 지금 내게 있어 가장 절실한 무기였다.

쿠아아아아!!

카사락의 마법 구체는 어느새 커져 일대를 밝히고 있었다.

저런 게 노운에게 직격 했다가는 문이고 나발이고 물거품이 되는 상황.

악귀참도로 벨 수 있을지, 수리검으로 제때 돌아올 수 있을지를 따질 때가 아니었다.

일단 가야 한다.

"크라아아악!!"

이런 마음을 알 리 없는 망자놈들.

놈들은 더 신을 내며 끝도 없이 밀려오고 있었다.

못해도 천은 벤 거 같은데도 여전히 끝은 보이지 않았다.

탓…!

앞으로 나아가며 최대한 많은 망자를 베어낸 뒤.

빠르게 물러나 수리검을 꺼낼 준비를 했다.

비젼 수리…

두근.

….!

수리검을 꺼내려는 찰나.

무언가의 박동이 느껴졌다.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작게 시작된 박동이 몸을 완전히 메움과 동시에.

파아아아앙!!

내 시야를 가리며 사방에 존재하는 모든 걸 집어삼키는. 

사아아악…!

검은 연기가 터져 나왔다.

214화. 떨어지다

갑자기 벌어진 일이었으나 놀라진 않았다.

날 감싸며 사방을 어둠으로 물들이고 있는 건 익숙한 연기였다.

"항상 전장 한가운데 있구나."

연기의 어둠 속.

목소리와 함께 이카로스가 모습을 나타냈다.

전에 만났을 때와는 약간 달라져 있었다.

단순히 칼데아 윙을 달고 있는 게 아닌, 온몸이 연기로 이루어져 일렁이고 있는 생김새.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네요, 항상."

다가오는 이카로스를 향해 미소를 그려 보였다.

어찌 웃지 않을 수 있겠는가.

방금까지 애타게 기다리고 있던 존재의 등장인데.

"나도 실물로 보는 건 처음이네."

이카로스의 말과 함께 연기의 일부분이 걷혔다.

연기 사이로 보이는 카사락의 모습.

카사락은 책을 들어 올린 그 상태로 멈춰있었다.

새삼스럽지만… 놀랍네.

황금빛이든 보라빛이든.

무기와 관련된 공간으로 들어올 땐 시간이 멈추었다.

지금까지는 그냥 시간이 멈추는구나 하면서 넘겨왔었는데.

망자의 세계를 다스리는 카사락까지 멈춰있는 걸 보니 묘한 느낌이었다.

더 상위라는 건가.

"네 힘의 끝은 어딜 지 궁금하네. 다른 세계마저 통째로 멈추는 법칙이라니."

나만 느끼는 게 아닌 모양이었다.

카사락을 보더니 웃으며 말을 건네는 이카로스.

무기의 주인이면서 무기이기도 한 이카로스도 혀를 내두르고 있었다.

망자의 세계를 멈춘 절대적인 힘을 보면서 말이다.

저벅.

한 발자국 더 다가온 이카로스가 날 응시했다.

"날개가 필요했지?"

"절실했죠."

대답하며 일렁이는 날개를 바라봤다.

날개를 꺼낼 수 있게 되는 순간 지금의 난감한 상황을 파훼할 수 있을 터였다.

동시에 사용하는 건 불가능하겠지만.

악귀참도는 망자를 벨 수 있는 유일한 무기였다.

다른 무기처럼 쿨타임은 없지만 날개 역시 연기가 소진되는 순간 해제되는 건 같았고.

이는 다른 무기의 쿨타임과 비슷하게 듀얼로 사용하던 무기까지 해제시켰었다.

번갈아 가면서 써야 돼.

고속 이동이 필요할 때만 악귀참도를 해제하고 날개를 꺼낼 생각이었다.

계속 차례를 신경 써야 한다는 게 조금 불편하긴 하지만 말이다.

"연기의 양은 걱정할 필요 없어."

"…?"

날 바라보던 이카로스가 여유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자 이카로스가 말을 이었다.

"이곳은 칼데아의 고향, 토라소. 고향에서 칼데아의 연기는."

싱긋.

"무한이니까."

"…!"

날개를 꺼낼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나이스를 외쳤었는데 연기까지 무한이라니.

악귀참도와 날개를 동시에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에.

씨익.

이카로스와 마찬가지로 미소가 그려졌다.

"소화를 끝낸 칼데아는 조금 흉폭할 거야."

이카로스가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또 보자."

화악!

* * *

쿠르르르릉!

주변을 감쌌던 연기가 사라지며.

멈췄던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

발사 준비를 마친 건지 카사락의 마법 구체는 미친 듯이 요동치고 있었다.

깨끗하게 비워졌네.

소화를 완료하며 칼데아 윙에 채워져 있던 게이지도 사라지고 없었다.

꽈악.

손에 들린 악귀참도에 힘을 주며.

[이카로스 - 칼데아 윙]

날개를 꺼내 들었다.

사아아아아악!!

와우.

꺼낸 나조차 놀랄 정도로 폭발적인 기운이었다.

여우가 꽤 좋은 영양소였나 보네.

단순히 늘어난 건 기운뿐만이 아니었다.

뿜어져 나오고 있는 연기의 양과 속도까지.

모든 면이 이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고향이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콰아아아아아…!

엄청나네.

사방으로 뻗어 있는 검은 연기를 바라봤다.

날개라고 불러야 할지 조금 의아할 정도였다.

전보다 몇 배는 더 커져 등 뒤의 공간 대부분을 가득 메우고 있는 칼데아의 연기.

"크… 크르!!"

칼데아의 기운 탓일까.

쉴새 없이 몰려오던 망자들이 주춤거리고 있었다.

"포식자…!?"

놀란 건 망자들뿐만이 아니었다.

마법을 준비하던 카사락도 날 바라보며 굳어 있었다.

눈이 없다 보니 사람처럼 커지거나 한 건 아니었지만.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푸른 안광이 카사락의 놀라움을 대변해주고 있었다.

"네놈이 어떻게…?"

카사락의 질문에 답하고 있을 생각은 없었다.

스르…!

순식간에 모인 연기를 터뜨리며.

콰가가가가가!

앞에 있던 망자들을 베어나가기 시작했다.

이전과는 비교되지 않는 처리 속도였다.

내가 앞에 나타났다는 걸 인지도 하기 전에 가루가 되고 있는 망자들.

서걱!

어느 정도 길 주변을 치워낸 후.

파앙!!

날개를 터뜨리며 모여있는 카사락의 에너지 구체로 향했다.

벨 수 있을까.

엄청난 에너지가 모여 요동치고 있는 구체.

보기만 해도 소름이 돋는 구체였다.

아직 악귀참도로 카사락의 마법을 벨 수 있는지는 미지수였다.

"건방진…!"

아래에서 카사락의 목소리가 들려오는가 싶더니.

콰아아아아아!

구체가 빠른 속도로 노운을 향해 쏘아졌다.

휙휙.

쏘아지는 구체를 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벨 수 있을까라니.

쓸데없는 의구심이었다.

베어야 했다.

파앗.

날아가는 구체와 노운 사이의 허공으로 이동해 멈춰 섰다.

"후우."

악귀참도를 두 손으로 붙잡으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한 번도 베어보지 않은 종류였지만, 상관없었다.

이제 베면 될 일이었다.

"어리석은 놈!!"

카사락의 외침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벤다.

계속해서 뭐라고 떠드는 듯했지만, 이젠 들리지 않았다.

콰아아아아아아!

눈앞을 가득 채우며 다가오는 구체를 응시했다.

"후우우우."

몸과 검의 호흡이 완벽하게 일치되어감이 느껴졌다.

이전과는 달랐다.

단순히 서로 다른 호흡을 맞춰간다기보단.

완벽히 하나가 되는 감각이었다.

스윽.

천천히 악귀참도를 들어 올렸다.

뒤에는 노운이 있고 사방엔 망자가 가득했지만.

내가 보며 느끼고 있는 건 앞에서 다가오고 있는 구체뿐이었다.

나 자신과.

콰아아아아아!

내가 베어야 하는 것.

지금의 내가 인지하고 있는 전부였다.

꽈악.

힘을 흘려보냈던 악귀참도를.

바로 앞까지 다가온 에너지 구체를 향해.

스륵.

망설임 없이 휘둘렀다.

* * *

사아아아악!

백운의 뒤에서 돋아난 연기를 보며 카사락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무리 망자의 왕인 카사락이라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토라소에서 폭풍우라 불리며 닥치는 대로 먹어치우던 포식자, 칼데아.

카사락이 스스로 지키던 규칙을 어기면서까지 쫓아낸 존재였다.

'어떻게…!'

불가능한 일이었기에.

앞에 나타난 게 칼데아가 아니라며 부정하고 싶었지만 이 역시도 불가능했다.

몸에 닿는 연기의 서늘한 감각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망자의 세계를 위협하는 존재라 정의 내릴 정도로 위험한 존재였거늘.

빠득.

카사락이 백운을 바라보며 이를 깨물었다.

지금까지 지켜온 질서와 규율을 비웃는 존재.

갑자기 나타나 망자를 소멸시키는 것만 해도 위험한 변수라고 여기기엔 부족함이 없었는데.

여기에 더해 연금술사의 힘을 되살려 문을 여는 것은 물론 이젠 하다하다 과거의 위험마저 불러오고 있었다.

'당장 없애야 한다…!'

처음이었다.

이렇게 자신의 세계를 크게 위협했던 존재는 지금까지 없었다.

'문보다 먼저…!?'

하늘에서 만들어지던 마법의 목표는 연금술사였다.

하지만 문이 열리는 걸 막는 것보다 더 심각한 위험이 생겼기에.

카사락은 쏘아지는 마법의 방향을 바꾸려 했었다.

퍼어어어엉!

그 순간 하늘로 박차고 오른 백운.

백운은 연기를 터뜨리며 엄청난 속도로 구체와 연금술사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어리석은 놈!!'

스스로 자멸하려는 백운을 보며 카사락이 조소를 머금었다.

두 번 해야 하는 일을 알아서 한 번으로 줄여주다니.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

카사락의 안광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백운은 이상한 행동을 하고 있었다.

날아오는 구체의 정면.

피하긴커녕 날아오는 구체를 향해 검을 겨누고 있었다.

'오만하구나.'

드드득.

'건방지구나.'

카사락의 입가가 파르르 떨려왔다.

언제 느껴봤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 감정.

카사락의 몸으로 퍼지고 있는 건 견딜 수 없는 엄청난 분노였다.

"어리석구나 인간이여!!"

분노를 담은 카사락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인간이란 존재는 어찌 이렇게 오만하고!!"

카사락이 들고 있던 책을 펼쳤다.

"건방지단 말인가!!!"

에너지 구체로도 충분하겠지만.

더 짓이겨버리고 싶었다.

"리펠 도 파노마!"

책에서 쏘아진 마력이 지반을 들어 올리기 시작했다.

"설령 거기서 살아남는다 한들…?"

분노에 차 소리를 지르던 카사락이 말을 멈추었다.

자기도 모르게 내뱉은 말이었다.

절대 살아남을 수 없는 게 당연한 일인데.

카사락의 안에선 한 줄기의 가능성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벨지도 모른다.]

순간이나마 이런 가능성을 떠올렸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부정할 수도 없는 사실이었다.

으드드득!

'인정하마…! 네놈이 가진 예외성을!'

더욱더 분노한 카사락이 최대의 힘을 끌어올렸다.

'인정하기에 최대의 힘으로 소멸시켜주마!!!'

책이 가진 최대의 힘으로 끌어올린 지반.

엄청난 양의 돌덩이가 어느덧 에너지 구체와 겹쳐지고 있는 백운에게 날아들었다.

* * *

주변은 온통 구체의 백색 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누군가 보고 있다면 집어 삼켜졌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상식적으로 거대한 마법을 검으로 베어낸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

사악.

하지만.

난 알 수 있었다.

악귀참도의 검날과 구체가 만나는 순간.

분명히 느껴졌었다.

검날에 의해 베이는 구체의 감각이 말이다.

서거걱…!

망자 세계의 왕이 쏘아낸 만큼.

구체에 담긴 힘은 엄청났다.

어떻게든 악귀참도를 밀어내려고 구체는 미친 듯이 요동치고 있었다.

악귀참도가 먹히는 것과는 별개로 까딱하면 밀려나겠다 싶을 정도로 거대하고 강한 힘이었다.

으득.

어금니를 깨물며 구체를 맞서고 있는 두 팔로 힘을 흘려보냈다.

검의 검 자도 모르던 옛날이었다면 이겨내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질 것 같으냐…!"

퍼어어어어어엉!

날개의 연기를 터뜨리며 구체의 깊숙한 곳으로 나아갔다.

물러날 생각 따위는 없었다.

"나는…."

- 이제부턴 네가.

드드드드드드!!

온힘을 담아.

"검성이란 말이다아아!!!"

구체에 담긴 반발력을 이겨내며.

악귀참도를 크게 휘둘러냈다.

* * *

"후우!"

참아왔던 호흡을 뱉어내며.

파스스…!

흩어지는 에너지를 바라봤다.

완전히 반으로 갈라진 카사락의 마법 구체.

갈라짐과 동시에 구체는 동력을 잃으며 소멸하기 시작했다.

"별것도 아닌 것이."

뚜둑.

하도 힘을 줘서 결린 팔을 빙글빙글 돌렸다.

드드드득!

"응?"

이건 또 뭐냐.

아마 미리 준비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하늘 위로 가득 띄워져 있는 엄청난 양의 잔해들.

"짓뭉개져라!!"

카사락의 외침과 함께 하늘에 떠 있던 잔해가 내게로 돌진해오고.

치사한 새끼네 저거.

잔해를 피하기 위해 연기를 터뜨리려는 순간.

"그라비티 디바이스."

뒤에서 작은 읊조림이 들려왔다.

215화. 왕이 왕에게

머선 일이냐 이건 또.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하늘로 솟아있었던 수많은 돌무더기가.

두두두두두두!

땅으로 내리꽂히고 있었다.

파지직…!

떨어지는 돌무더기에는 익숙한 붉은색 스파크가 감아져 있었다.

스윽.

뒤쪽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건축물의 하늘엔 어느샌가 균열이 열려있었다.

확실하진 않아도 노운이 말했던 세계를 잇는 문인 것 같았다.

그리고.

파즈즈…!!

노운이 있었다.

건축물의 위.

손바닥을 바닥에 댄 채 노운이 하늘을 응시하고 있었다.

돌무더기를 감싸고 있던 붉은 스파크는 노운의 손에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허공을 타고 올라 돌무더기를 감싸버린 스파크.

돌무더기의 힘을 빼앗고 바닥으로 추락시킨 힘의 정체였다.

싱긋.

…!

노운이 힘겹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한 번이 최대야."

문을 여느라 이미 많은 힘을 소진했을 노운.

조금 전 돌무더기를 끌어내린 정체불명의 힘이 노운이 가진 최후의 힘이었다.

털썩.

이젠 서 있을 힘도 없어서일까.

노운이 숨을 몰아쉬며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문은 열어놨어."

"…."

척.

노운을 향해 엄지를 치켜세웠다.

조금 전 노운이 사용한 힘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중요하지 않았다.

노운은 약속한 것들을 지켜 준 것은 물론 날 위해 마지막 힘까지 짜내 카사락의 마법을 무효화시켰다.

여기만 정리하면 되겠구나.

스윽.

고개를 돌려 카사락과 망자의 군대를 바라봤다.

어째서인지 군대는 멈춰있었고 책을 들고 있는 카사락의 푸른 안광은 미친 듯이 흔들리고 있었다.

믿었던 에너지 구체가 베인 것도 모자라 노운의 힘에 두 번째 마법이 무효화되기까지.

당황을 넘어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책에 남은 힘이 없나 봐."

"!!"

다시 한번 푸른 안광이 크게 요동쳤다.

정답이구만.

처음 봤을 때 카사락의 책엔 푸른 기운이 잔뜩 둘러져 있었다.

지금은 완전히 사라져 낡은 책의 모습을 하고 있는 카사락의 마법서.

두 번의 마법에 가용한 모든 힘을 쏟아부은 모양이었다.

내 차롄가.

더 이상 신경 쓰이게 하는 마법 구체는 없었다.

다시 만들 수 있는 힘도 당장은 없는 듯하니.

남은 거라곤 아래에서 굳어 있는 망자들뿐이었다.

스릉.

하늘을 가득 채우고 있는 연기를 일렁이며.

"책을 다시 펼칠 수 있게 되기 전에."

검을 들어 카사락과 망자의 군대를 겨누었다.

"끝내주마."

* * *

카사락이 하늘을 바라봤다.

태양이 없는 세계였으나 하늘은 대낮처럼 밝았다.

하늘만 놓고 본다면 푸른 빛이 가득해 아름답다고도 느껴질 수 있는 광경이었다.

문제가 있다면.

"크라라아아… 아."

"크르… 크르륵…!"

그 광경을 만들고 있는 게 망자의 죽음이란 것이었다.

'….'

카사락이 무참히 쓸려나가고 있는 군대를 바라봤다.

오랜 시간 단 한 개체도 소멸되지 않았던 망자인데.

지금은 한 명의 남자에 의해 속수무책으로 죽어 나가고 있었다.

콰앙! 콰앙! 콰아아악!

말도 안 되는 스피드와 힘이었다.

스르르…!

칼데아의 날개를 이용해 순간이동에 가까운 이동을 하면서도.

백운의 검이 만들어내는 결은 끊이지 않고 이어지고 있었다.

물결.

마치 음율을 타고 끝없이 이어지는 물의 흐름 같았다.

"크라악!"

흐름이 지나가는 곳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가루가 된 망자와 소멸되며 발생한 푸른빛을 제외하면 말이다.

스윽.

카사락이 고개를 내려 마법서를 응시했다.

백운의 말대로 마법서는 그 힘을 다한 상태였다.

오만한 인간 때문에 화가 나 무리하게 힘을 끌어올린 탓이었다.

스르르.

물론.

다시 돌아오고 있었다.

흩어졌던 마나가 마법서로 모이고 있었다.

조금만 더 기다린다면 다시 마법을 쏟아낼 수 있을 터였다.

'다시 쏟아낼 수 있을 터인데…'

이상했다.

사라졌던 힘이 돌아오는 것임에도 카사락은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되려 탄생 이후 처음으로 느껴보는 낯선 감각이 밀려왔다.

의구심.

'돌아온다고 한들, 이길 수 있는 것인가.'

백운은 칼데아의 날개를 가지게 되었고 곧장 카사락을 향해 날아올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카사락을 죽이는 걸 넘어 망자의 세계 자체를 부숴버리겠다는 듯이.

백운은 닥치는대로 망자들을 베어내고 있었다.

'알고 있는 건가.'

죽어선 안 되는 망자가 죽는다는 것 자체가 카사락이 지켜왔던 질서가 흔들리는 걸 의미했고.

죽어 나가는 망자가 늘어난다는 것은 곧 질서는 물론이고 카사락의 세계가 무너지고 있다는 걸 뜻했다.

'무너지고 있다.'

저릿.

의구심에 이어 또 다른 감각들이 연달아 밀려왔다.

공포와 무기력감.

백운에 의해 망자의 세계가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고 있음에도.

카사락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

카사락이 백운과 구체가 만나기 직전을 떠올렸다.

이제 와서 돌이켜보니 알 것 같았다.

구체를 마주하고 있는 백운을 보며 카사락이 느낀 건 분노가 아니었다.

낯선 감정이라 분노로 감추어 내긴 했으나.

그것은 명백한 불안이었다.

그래서 마법서의 남은 힘을 전부 쏟아부은 것이었다.

그마저도 연금술사의 미지의 힘에 의해 가로막혔지만 말이다.

'운명의 장난인가.'

카사락이 하늘에 열려있는 균열 문과 건축물에 주저앉아 있는 연금술사, 그리고.

콰아아앙!!

"크라아아악!"

칼데아를 단 채 쉴새 없이 망자들을 쓸어내고 있는 백운을 응시했다.

카사락이 가장 중요시했던 질서를 위협하는 모든 요소가 한자리에 모여있었다.

'이길 수 없다.'

저벅.

카사락이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더 무너졌다가는 돌이킬 수 없었다.

더 싸운다고 한들 이길 수 있는 존재도 아니었다.

지금이라도 망자의 세계에서 내보내야 했다.

척.

멈춰 선 카사락이 입을 열었다.

"그만!!"

* * *

…?

카사락이 외침이 들려오고 잠시 후.

개떼처럼 달려들던 망자들이 물러나기 시작했다.

스윽.

고개를 들어 날 보고 있는 카사락을 응시했다.

처음에 비하면 턱없이 적지만 카사락의 마법서엔 푸른빛이 돌고 있었다.

마음만 먹는다면 내게 마법을 쏘아낼 수도 있었을 터.

하지만 카사락은 그러지 않았다.

대신 날 보며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 가만히 멈춰 서 있었다.

스륵.

카사락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보내주마."

"뭐…?"

의외의 말이 들려왔다.

하도 질서를 운운하길래 모든 망자가 가루로 변할 때까지 싸울 줄 알았는데.

보내준다니.

"문은 열렸다."

카사락이 손을 들어 하늘에 열려있는 균열을 가리켰다.

"막지 않을 테니 가거라."

"…."

망자를 겨누고 있던 검을 내리고 카사락을 응시했다.

"거짓말이 아니야."

뒤에서 노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봐도 거짓말은 아닌 것 같았다.

무언가 꿍꿍이를 가지고 있는 것 같지도 않고 말이다.

하지만.

저벅.

날 조용히 바라보고 있는 카사락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

뜻밖의 행동이었는지 안광이 흔들리는 카사락.

"크라아아!"

자신의 왕에게 다가가서일까.

물러나 있던 망자 몇 마리가 길을 막았다.

서걱! 서걱!

망설임 없이 망자를 베어버리자.

"물러서라."

길을 막지 말라는 카사락의 명령이 떨어지고.

"크르르…!"

수천… 아니, 어쩌면 수만 마리에 육박할 망자들이 길을 열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게 홍해의 기적을 떠올리게 만드는 광경이었다.

척.

카사락의 바로 앞까지 다가갔다.

카사락은 여전히 말에 탄 채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너."

가까이 와 바라보니 명확하게 알 것 같았다.

애써 감추려 하고 있으나.

그것은 감출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씨익.

"무섭구나."

"!!!"

"크라아아아악!!!"

"키아아악!!"

왕에 대한 모독에 화가 난 모양이었다.

명령이 있어 당장 들려 들진 않았으나 망자들은 당장에라도 날 찢어 죽일 듯이 울부짖었다.

고오오오…!

안광만 흔들리는 게 아니었다.

치욕을 당했다고 생각한 건지 안광과 더불어 카사락의 몸 전체가 미친 듯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던가 말던가.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얼굴의 웃음기를 지우며 고개를 까닥였다.

"내려와, 이 새끼야. 내려다보지 말고."

"감히 지금 누구한테…."

카사락이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지만 들어 줄 생각은 없었다.

"오랫동안 자서 그런가 상황 파악이 안 되는 모양인데."

스릉.

"네가 날 보내주고 말고를 결정할 수 있는 위치라고 생각해?"

"!!"

"네가 정해라."

검을 들어 주위에 있는 망자들을 가리켰다.

"얼마가 걸리든 마저 다 죽이고 나갈지, 아니면 여기까지만 하고 조용히 문으로 나갈지. 만약 후자를 원한다면."

톡.

"내려와서."

악귀참도의 검 끝으로 발 앞의 땅을 가리켰다.

"무릎 꿇어."

"!!"

분노하거나 놀랄 수 있는 경계를 넘어버린 것 같았다.

괴성을 지르던 아까와는 달리 망자의 군대로 무거운 침묵이 깔렸다.

"그리고 내가 필요로 할 때 한 번, 나를 위해 싸워라."

셀 수 없이 많은 수의 망자.

모든 망자의 눈이 자신들의 왕인 카사락에게 향해 있었다.

"그럼 더 이상 죽이지 않고 나가주마."

말을 건네며 어깨로 솟아있는 칼데아의 반응을 살폈다.

수 천의 망자를 베어서일까. 

연기를 터뜨리며 날뛰었던 아까와는 달랐다.

이쯤이면 됐다는 듯 차분한 상태.

"…." 

짧은 순간이었지만 상황을 파악하기 시작한 걸까.

카사락은 조금 전처럼 감히란 단어를 사용하거나 화를 내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나와 악귀참도, 망자들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도저히 못 하겠다면."

움직일 기미가 안 보이는 카사락에 천천히 악귀참도를 들어 올렸다.

언제까지고 기다려 줄 생각은 없었다.

그 순간.

철컥.

카사락이 말에서 내려 땅으로 발을 디뎠다.

이제야 어느 정도 맞추어진 눈높이.

재촉하지 않고 조용히 카사락과 눈을 마주쳤다.

"…."

한동안 말없이 날 바라보던 카사락.

스륵.

카사락이 천천히 무릎을 굽히며.

나를 향해 고개를 숙이기 시작했다.

* * *

"하하…"

노운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대단한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눈앞에선 말도 안 되는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이 세계에서 오랜 시간 군림해 온 망자의 왕, 카사락.

카사락은 지금 다른 세계에서 온 왕을 향해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현명하네."

긍지 높은 카사락이었으나.

깨달은 것이었다.

같은 왕이지만 앞에 있는 백운은 다른 차원의 힘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말이다.

우루루루루…!

"…!!"

카사락이 무릎을 꿇은 것을 시작으로.

백운을 둘러싸고 있던 엄청난 수의 망자가 몸을 숙이기 시작했다.

파도가 밀려오듯 순차적으로 몸을 낮추는 망자의 군대.

"…."

백운에게 무릎을 꿇은 건 단순히 망자의 왕뿐만이 아니었다.

망자의 세계.

하나의 세계 전체가 패배를 인정하고 백운에게 고개를 숙인 것이었다.

스윽.

노운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균열의 문을 여는 것으로 자신이 약속했던 바는 모두 이행했다.

이제 남은 건 하나의 세계를 무릎 꿇린 왕에게.

저벅.

"부탁하러 가볼까."

216화. 노운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었다.

여느 날과 다를 것 없는 날이었는데.

- 뭐해?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줄리아가 무언가 잘못을 한 것도 아니었다.

줄리아는 그저 밝은 얼굴로 내게 걸어왔을 뿐이었다.

- 콰아아아!

처음 느껴보는 힘이었다.

닿는 것만으로도 살이 시려오는 이질적인 힘.

힘은 연구실 중앙으로 거대한 소용돌이들 만들었고, 그 위에 있던 줄리아를 순식간에 집어삼켰다.

- 줄리아!!

삼켜지고 있는 자신조차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몰랐기에.

줄리아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그저 이겨낼 수 없는 힘에 끌려가며 겁을 먹은 채.

가장 믿을 수 있는 이를 향해 본능적으로 손을 뻗는 것만이 줄리아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 장갑이…!

연구실엔 장갑이 없었다.

연금술을 증폭시켜 줄 수 있는 유일한 장갑.

이제 와서 가지고 올 시간 따위는 없었다.

당장 눈앞의 균열이 닫혀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등가교환의 법칙]

장갑이 없기에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다른 대가를 치러서라도 연금술의 힘을 키워 균열을 열어야 했다.

균열이 사라지며 목적지를 완전히 소실하기 전에 말이다.

- 대가는.

한 손은 균열로.

다른 한 손은 내 몸으로 가져갔다.

- 그라비티 디바이스.

고민하지 않았다.

망설이지도 않았다.

곧장 닫히려는 균열을 비틀어 열었고.

- 줄리아!

어딘가에 홀로 떨어져 있는 줄리아와 나의 몸을 뒤바꾸었다.

"…."

스윽.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원래라면 주변을 둘러보며 이곳이 어딘지를 파악했을 테지만.

불가능했다.

줄리아를 데려가는 내 연금술에 검을 휘둘렀던 존재.

말을 탄 채로 날 내려다보고 있는 이세계의 존재가.

"넌 무엇이냐."

말을 걸어왔기 때문이다.

* * *

자신을 이 세계의 왕이라 밝혔던 카사락.

카사락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은 채 조용히 자리를 떠났었다.

의외였다.

들고 있는 칼을 휘두르거나 거느리고 있는 병사를 시켜 날 죽일 거라 생각했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자리를 떠나다니.

저벅.

망자의 세계.

육신을 잃은 자들의 종착지라고 카사락은 설명했었다.

- 보통은 올 수 없지만 말이다.

처음엔 죄를 많이 지어서 오는 지옥인가 했는데 그렇진 않은 듯했다.

죽는다고 무조건 오는 곳은 아니며 계기가 필요한 것 같았다.

지옥은 아니어서 다행인가.

"후읍."

걸음을 멈추고 숨을 들이켰다.

아니라고는 했지만 지옥이라 해도 충분히 믿을만한 장소였다.

분명 호흡을 하고 있음에도 숨이 막히는 답답한 기분.

공간을 메우고 있는 공기 자체가 탁한 것 같았다.

스윽.

고개를 들어 정면에 펼쳐진 길을 바라봤다.

눈앞엔 끝없는 황무지와 어둠이 펼쳐져 있었다.

아무런 대비도 하지 못하고 떨어진 이세계.

어차피 육신은 사라졌다.

다시 돌아가지 못할 테니 천천히 거닐어 볼 생각이었다.

"줄리아."

겁에 질려 있던 줄리아의 얼굴이 떠올랐다.

내가 이곳에 떨어져 있다는 건 연금술이 성공했다는 걸 의미했으니.

이제 바라는 건 줄리아가 잠시나마 봤던 광경을 잊은 채 무사히 살아가는 것뿐이었다.

저벅.

걸음을 옮기며 줄리아의 얼굴을 떠올리던 중.

…?

나도 모르게 미간이 찌푸려졌다.

----!!

소용돌이에 집어삼켜 진 순간.

줄리아는 내게 손을 뻗었었다.

내 이름을 부르면서 말이다.

스륵.

이상했다.

줄리아가 부른 그 이름이.

기억이 나지 않았다.

* * *

파지직…!

돌아다니며 주운 물건들에 연금술을 사용했다.

아무것도 안 하기엔 시간이 너무 남아서도 있지만.

무리해서라도 연금술을 사용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

내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을 땐 잠시 일어난 현상일 거라 생각했었다.

조금만 지나 이 세계에 적응하면 다시 기억날 거라고 위로하면서.

하지만, 아니었다.

여전히 내 이름은 기억나지 않았다.

파지… 직.

문제는 이름뿐만이 아니었다.

몸과 머리에 새겨져 당연시되었던 모든 것들이 잊혀지고 있었다.

지금 사용하고 있는 연금술도 마찬가지였다.

수천수만 번을 사용했던 나의 능력인데.

어느 순간부터 방법이 흐릿해지며 실패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으득.

입술을 깨물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잊어가고 있다니.

이곳에서 나란 존재를 기억하는 건 나 자신 하나뿐인데.

그마저도 잊혀지고 있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았다.

스슥.

들고 있는 쇠를 이용해 그림을 그렸다.

어두운 황무지의 모랫바닥.

내일이면 사라질 터였지만 그려야 했다.

슥. 슥.

전체적인 얼굴의 형태를 그리다 손을 멈췄다.

빠드득.

세게 깨문 입술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기억이 나지 않았다.

매일같이 그리던 얼굴이 있었는데.

잊어선 안 되는 얼굴인데 그릴 수가 없었다.

툭.

쇳조각을 내려놓고 하늘을 바라봤다.

"하…!"

헛웃음이 나왔다.

절대 잊어선 안 되는 사람인데.

"기억이… 안 나네."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다.

턱.

떨어져 있는 쇳조각을 집어 반대편 손목을 향해 휘둘렀다.

사락.

역시 허사였다.

몇 번인지 모르겠지만 수도 없이 시도해봤었다.

"…."

잠시 그렇게 멈춰있다가 천천히 몸을 눕혔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그저.

스륵.

내일은 더 이상 잊지 않기를 바라며 잠이 드는 것뿐이었다.

* * *

망자의 세계에 도착하고 얼마의 시간이 지난 걸까.

가끔 궁금하긴 했지만 알 방법은 없었다.

해가 뜨고 지는 세계가 아니었기에.

시간을 가늠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다리 아프네."

자리에 앉아 저릿한 다리를 두드렸다.

일어나서 하는 일이라곤 주변을 돌아다니는 게 전부였다.

자박.

멀지 않은 곳에서 지나가는 망자를 바라봤다.

돌아다니다 망자를 처음 마주쳤을 땐 깜짝 놀랐었다.

이곳에 도착한 날 카사락과 군대를 보긴 했으나.

인간이 아닌 존재의 생김새가 단번에 적응될 리 없었기 때문이다.

- 스으윽.

깜짝 놀란 나와 달리 망자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었다.

마치 내가 공기 중 일부라고 여기는 것처럼 조용히 지나칠 뿐이었다.

"에휴 쟤나 나나."

그다지 호감이 가는 생김새는 아니었으나.

어째서일까.

이상하게 마음이 가는 존재였다.

으쓱.

어깨를 올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하아."

한숨과 함께 팔을 짚으며 하늘을 바라봤다.

기분이 이상했다.

"대체 뭘까."

무언가 기억이 나거나 하진 않았다.

그저 종종 밀려오는 정체불명의 감각이 뭔지 궁금할 뿐이었다.

절대 잊어선 안 되는 걸 잊고 있는 이 감각.

그냥 기우겠거니 넘기기에는 몹시 찜찜하면서도 선명한 감각이었다.

"잠을 못 잤나."

스윽.

다시 몸을 일으켜 걸음을 옮겼다.

지루하다 지루해.

매일 매일이 다를 것 없는 하루였으니 안 지루한 게 이상했다.

무언가 작은 변화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라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고오오오오…!

"!!"

어둡기만 하던 하늘로 몇 줄기의 푸른빛이 솟아올랐다.

처음이었다.

움직이는거라곤 자신과 망자뿐이던 세계에 찾아온, 적어도 내가 본 첫 번째 변화였다.

저벅… 저벅… 저벅…!

걸음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확신이 들었다.

저곳으로 가야 했다.

* * *

빠르게 걸어 도착한 곳엔 한 남자가 있었다.

이럴 수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사람이었다.

육신이 존재하는, 온기가 존재하는 진짜 사람.

망자의 세계에 온 후 처음으로 만나는 것이었다.

후루룹!

남자는 무언가를 먹고 있었다.

국물 속에 담겨 김이 풀풀 나는 면이었다.

꼬로록.

…?

배에서 낯선 소리가 들려왔다.

먹어야 살아갈 수 있는 사람에겐 당연한 소리였지만 내겐 아니었다.

망자의 세계에 온 후 아무것도 먹지 않았음에도 난 배고프지 않았다.

더 이상 무언가를 넣지 않아도 되는 존재가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저벅.

나도 모르게 남자에게 다가갔다.

다가갈수록 매콤하면서도 맛있을 것 같은 냄새가 코를 찔러왔다.

저벅.

꽤 가까이 다가갔음에도 남자는 날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저게 뭘까.

남자가 먹고 있는 게 뭔지 너무 궁금했다.

조금 더 망설였다간 남자가 전부 먹어버릴 것 같았기에.

성큼.

크게 걸음을 옮기며 입을 열었다.

"맛있어?"

* * *

피식.

백운과 처음 만난 날을 떠올리며 노운이 웃음을 터뜨렸다.

지금 생각해보니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는 만남이었다.

그때 당시에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 채 세계를 떠돌기만 할 뿐이었으니.

당장 본능이 앞서 백운이 먹고 있는 라면을 뺏어 먹었었다.

'맛있었지.'

입으로 들어오는 면의 맛은 엄청났었다.

백운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어느샌가 옆으로 와 같이 라면을 먹고 있었다.

한 젓가락이라도 더 먹겠다는 의지를 불태우면서 말이다.

저벅.

카사락 앞에 서 있는 백운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라면을 먹고 난 후였나.'

정확한 시점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백운과 몇 마디를 나눈 시점.

어둡기만 하던 머릿속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점점 캄캄해지기만 하던 지금까지와는 정반대되는 상황.

- …!!

그리고.

잊고 있었던 것들이 조금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완벽한 기억은 아니었으나 알 수 있었다.

지금까지 종종 느껴지던 서글픈 감각.

잊어선 안 되는 걸 잊고 있다는 그 감각의 정체가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 ….

백운과 지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기억이 돌아오기 시작한 이유는 명확해졌다. 

규율을 어기며 망자를 베어낸 백운.

백운 덕분이었다.

망자의 세계가 가지고 있는 모든 규율과 질서를 거부할 수 있는 권능.

백운은 망자의 세계를 능가하는 권능을 가지고 있었고 그 영향이 나에게까지 끼친 것이었다.

'… 다시 잊어버릴 순 없어.'

기억을 되찾으며 노운은 알게 되었다.

지금까지 얼마나 소중한 것을 망각한 채 살아왔는지를 말이다.

'절대로.'

꽈악.

주먹을 움켜쥐며 노운이 한 발자국을 더 내디뎠다.

"노운!"

날 돌아본 백운이 손을 흔들었다.

그런 백운을 향해 미소를 지어줬다.

"괜찮아?"

다가온 백운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날 내려다봤다.

함께 한 시간은 오래되지 않았지만 알 수 있었다.

앞에 있는 친구는 재밌고, 또 좋은 사람이었다.

"뜸 들이는 거 보니 부탁을 말하러 왔구만. 안 그래도 궁금했는데 빨리 말해! 다 들어줄 테니까!"

눈치 빠른 백운을 응시했다.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지만 말해야 했다.

백운은 곧 떠날 것이었고, 그럼 다시 제자리였다.

'….'

인간일 때의 나를, 내 이름을 다시 망각하는 건 상관없었다.

하지만.

'줄리아.'

내게 가장 소중한 사람.

보기만 해도 미소가 지어지는 사람의 이름을, 목소리를, 얼굴을.

함께 했던 수많은 순간을 다시 잊는다는 건 너무나 끔찍한 일이었다.

"백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왕이시여, 망각으로부터 절….'

얼른 말해보라고 재촉하는 백운을 향해 미소를 그렸다.

'자유롭게 하소서.'

"날 죽여줘."

217화. 내 이름은

다가오는 노운을 보고 있자니 웃음이 나왔었다.

어느새 익숙해져 버린 하얀 더벅머리와 안경.

온종일 붙어 다닌 탓인지 이제 안 보이면 허전할 것 같은 노운이었다.

"…."

신기한 일이었다.

만난 지 그리 많은 시간이 지난 게 아닌데도.

오랫동안 알고 지낸 친구 같았다.

그리고.

"날 죽여줘."

반가움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처음에 말했던 부탁을 하겠다며 입을 연 노운.

당연히 들어줄 생각이었다.

애초에 노운이 아니었다면 이곳까지 오지도 못했을 테니까.

어떤 어려운 부탁을 하든 상관없이 전부 들어줘야지 마음먹었었는데.

"뭐라고?"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예상하던 부탁과는 거리가 너무 멀었기 때문이다.

죽여달라니.

차라리 뒤에 있는 망자들을 죽여달라는 부탁이면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노운이 죽여달라고 말하는 대상은 카사락이나 망자가 아니었다.

자기 자신이었다.

"잔인한 부탁인 거 알아. 하지만 들어줬으면 좋겠어."

놀란 내 모습에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노운이 덤덤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너밖에 부탁을 들어줄 사람이 없거든."

노운이 고개를 돌려 여전히 무릎 꿇고 있는 카사락을 응시했다.

"카사락도 망자를 소멸시키는 건 가능하겠지만… 뭐랄까, 저자에게 당하는 건 정말 완전히 사라져 버리는 것 같거든."

"잠깐만."

따라가기 힘든 진행이었다.

망자를 베는 데 있어 나와 카사락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는지도 당장은 궁금하지 않았다.

궁금한 건 왜? 였다.

"어째서 널 죽여달라는 거야?"

이해가 되지 않았다.

옆에는 지구로 나갈 수 있는 문이 열려있었다.

이젠 방황을 끝내고 나와 함께 나가면 될 터였다.

노운이 살아왔던 시대는 없겠지만.

노운의 정체를 아직은 알 수 없었으나.

옷차림이나 이야기를 들어봤을 땐 꽤 오래전의 사람이었다.

지금 지구로 나가면 완전히 다른 세계가 노운을 맞이하겠지만.

황량하기 짝이 없는 망자의 세계보단 분명 백배 천배는 더 좋은 세계였다.

"같이 나가자. 어차피 지구도 데몬이고 능력이고 나타나서 개판이야! 나도 아직은 낯선 세계니까 금방 적응할 수 있을 거야."

웃으며 날 바라보던 노운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왜 이곳을 벗어나는 것보다 죽음을 택하려는 건지 물으려는 순간.

쐐엑.

노운이 들고 있던 날붙이로 자신의 목을 그었다.

"이런 미…!?"

무슨 짓이냐고 소리 지르며 손을 내밀려고 했지만.

…!

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분명히 날붙이가 목에 닿았었다.

피가 흩뿌려졌어야 정상일 텐데.

사락.

노운의 목은 연기처럼 흩어졌다가 다시 뭉쳐질 뿐이었다.

내가 악귀참도를 구하기 전 면도칼로 망자를 베었을 때처럼 말이다.

"난 나갈 수 없어. 내가 속해있는 곳은 여기, 망자의 세계거든."

스윽.

노운이 쥐고 있는 주먹을 천천히 내 손등으로 올렸다.

"육신을 잃은 자의 온도야."

날붙이로 목을 긋는 돌발 행동에 놀랐었는데.

놀랐던 마음이 손등에 닿고 있는 온도로 인해 진정되어가고 있었다.

차갑다.

노운의 손에선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살아있는 사람이라면 없는 게 불가능한 온기가 말이다.

약간의 온기조차 느껴지지 않는 손에 미간을 찌푸렸다.

왜 몰랐지.

하루 종일 붙어 다니면서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마주 앉아 먹은 밥만 해도 적지 않을 텐데.

단 한 번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었다.

- 내 생각에는 말이야.

황량한 길을 걸으며 쉴새 없이 대화를 나눴었다.

시간이 되면 나란히 앉아 밥을 먹었고, 식사 후엔 가방에 있는 과일까지 꺼내 야무지게 먹었었다.

- 와삭!

나보다 훨씬 잘 먹었었다.

과일 중에도 특히 사과만 집요하게 폭격했던 노운.

사과를 못 먹은 게 한이 됐나 싶을 정도로 노운은 사과를 열심히 집어먹었다.

… 모르는 게 당연하네.

지나온 시간을 떠올려보니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와 다를 게 하나도 없었는데 어떻게 눈치챌 수 있었겠는가.

그래서 확신했던 것이다.

당연히 문을 연 이후엔 나와 같이 망자의 세계를 떠날 거라고.

"아직 모든 게 기억난 건 아니야. 그래도 너와 지내면서 많은 게 기억났거든."

노운이 작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기억났다고 밝힌 것들을 하나씩 곱씹어보는 듯한 얼굴이었다.

"망자의 세계에 온 이후 나는."

* * *

"그렇게 흘러오다 보니 여기까지 왔네. 여기까지가 내가 떠올린 기억의 전부야."

노운은 아직 스스로 이름을 떠올리지 못했다.

망자의 세계로 빨려들기 바로 직전의 상황만 기억하고 있을 뿐.

육신이 있을 때의 기억 역시 돌아오지 않은 상태였다.

휙.

고개를 돌렸다.

어느샌가 서 조용히 이쪽을 응시하고 있는 카사락.

노운이 겪은 모든 일의 원흉이었다.

"난 저자를 원망하지 않아."

"…!"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걸까.

노운이 진정하라는 얼굴로 말을 건넸다.

"다 잊어버렸거든. 이제 와서 굳이 복수하거나 그러고 싶지도 않고."

톡톡.

노운이 손으로 스스로의 가슴을 두드렸다.

"그리고 등가교환의 법칙에 의해 육신을 버리기로 한 건 내 선택이야. 누구도 등 떠밀지 않았어."

도인이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다.

나였으면 당장 원인을 제공한 카사락이란 놈을 박살 내버렸을 텐데.

노운은 자신의 선택이라며 어깨를 으쓱이고 있었다.

"내 부탁, 들어줄 거지?"

다시 한번 느끼지만, 신기한 녀석이었다.

자기를 죽여달란 부탁을 저렇게 해맑게 웃으면서 하다니.

세상에 이런 인간이 또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

웃고 있는 노운을 조용히 응시했다.

아까였다면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고개를 저었을 테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노운이 덤덤하게 들려준 이 세계에서의 이야기.

이야기를 들으며 노운이 어떤 마음으로 이런 부탁을 하는 건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 다시 잊고 싶지 않거든.

노운은 단순히 망자의 세계에서 평생 살아가는 걸 두려워하는 게 아니었다.

소중한 사람을 서서히 잊어 간다는 것.

노운이 두려워함과 동시에 가장 괴로워하는 것이었다.

나도 모르지 않으니까.

경우는 달랐지만 나 역시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소중한 사람을 잃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한 명 두 명씩 떠나가는 걸 보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무력함이 얼마나 끔찍한 고통인지를 말이다.

"다른 선택지는 없는 거겠지…?"

"응."

노운이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육신을 잃은 노운이 망자의 세계를 떠나 다른 세계로 가는 건 불가능했다.

노운은 계속 이곳에 머물러야 했고. 

내가 균열을 타고 떠나는 순간 나로 인해 되살아났던 기억들은 모두 잊혀질 터였다.

"까먹은 것 같아서 다시 말하지만, 넌 날 죽이는 게 아니야. 이곳으로부터, 끝없는 망각으로부터 날 벗어나게 해주는 거지."

이야기를 하던 중 노운은 이건 좀 아닌 것 같다며 말을 약간 정정했었다.

죽여줘에서 자유롭게 해달라는 것으로 말이다.

"안 까먹었어."

"다행이네."

싱글대는 얼굴을 보니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저게 지금 죽여달라는 인간이 지을 수 있는 얼굴이란 말인가.

"잠깐만 기다려."

기다리라는 말을 건네며 몸을 돌렸다.

저벅.

날 지켜보고 있는 카사락에게 걸어갔다.

카사락과 망자 모두 아까와는 분위기가 많이 달라져 있었다.

그들은 더 이상 울부짖거나 분노를 표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나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해골쉨!

마음 같아선 사건의 원흉인 카사락을 줴패 버리고 싶었으나.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노운의 말을 떠올리며 간신히 참을 인을 새겨 넣었다.

"…."

가만히 날 응시하고 있는 카사락에게 입을 열었다.

"육신을 잃은 사람을 되돌리는 방법은… 없겠지?"

"없다."

이 새끼가 고민도 안 해보고.

약간의 텀도 없이 대답하는 게 얄미웠지만.

그만큼 불가능한 일이라는 걸 의미했기에 더 묻진 않기로 했다.

"난 이 세계의 왕이지만 떠나가는 망자의 혼조차 붙잡지 못한다. 다른 세계의 생명을 되돌릴 수 있을 리가 없지."

합리적인 변명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카사락과 망자들에게 더 볼 일은 없었다.

이젠 떠나기 위해 몸을 돌리기 전에.

스윽.

카사락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

의아해하는 카사락에게 입을 열었다.

"어떻게 불러야 하지?"

"…."

가만히 내 손을 응시하던 카사락이 손을 들어 올렸다.

앙상한 해골만이 남은 망자의 손.

카사락이 천천히 손가락을 뻗어 내민 내 손에 가져다 대었다.

"리베 토 아스가."

카사락이 무언가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무언가 주문 같았다.

스르르.

주문이 이어지며 카사락의 손으로 푸른 기운이 일렁였고.

곧 일렁이던 기운은 흘러나와 내 손등에 문신을 새겨 넣기 시작했다.

두 개의 낫 사이에 사각형의 문이 서 있는 모양의 문신.

뼈로 이루어진 듯한 낫과 문은 보는 것만으로도 기괴함이 느껴졌다.

스륵.

손을 감싸던 기운이 사라지고.

손등에서 손을 뗀 카사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필요로 할 때 문을 열면."

고오오오…!

카사락을 포함한 수만의 망자가 안광을 일렁이며 날 응시했다.

"내가 갈 것이다."

카사락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인 후.

스윽.

몸을 돌려 기다리고 있는 노운에게 걸음을 내디뎠다.

* * *

우우우웅…!

망자의 세계를 벗어나는 균열 앞.

균열은 이질적인 밝은 빛을 쉴새 없이 뿜어내고 있었다.

"네가 나갈 때까지는 유지될 테니까 겁먹지 마."

균열 앞에 나란히 선 노운이 말을 건네왔다.

"겁 안 먹었어."

이 순간에 와서까지 딴 얘기를 하는 노운에 절로 한숨이 나왔다.

있던 긴장과 슬픔마저 없애버리는 녀석이었다.

"준비됐어?"

이쯤되니 어이가 없었다.

보통은 반대로 물어보는 게 정상일 텐데.

노운은 내게 준비됐냐고 묻고 있었다.

[척준경 - 악귀참도]

내 손에 쥐어지는 악귀참도를 보며 노운이 미소를 머금었다.

"어째서인지 모르겠지만… 너라면 또 만날 수 있을 거란 확신이 드네."

이번 말에는 나도 모르게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왠지 모르겠으나 나 역시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

스윽.

노운이 천천히 두 팔을 벌렸다.

"부탁할게."

"…."

그런 노운을 바라보며 한차례 심호흡을 한 후.

스윽.

천천히 악귀참도의 검 끝을 노운의 심장으로 가져갔다.

꽈악.

망설여지려는 검을 부여잡으며.

노운의 심장으로 검을 밀어 넣었다.

사락.

연기에 검을 넣는 느낌과 함께.

검이 닿은 심장을 기점으로 노운의 몸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오… 이런 느낌이었구나."

흩어지고 있는 건 자신의 몸인데도.

노운은 호기심 넘치는 얼굴로 빛의 입자가 되고 있는 몸을 내려다봤다.

"…?"

스윽.

하도 조용해서일까.

흩어지는 몸을 바라보던 노운이 고개를 들었다.

"안 어울리는 얼굴을 하고 있네."

"거 좀… 마지막까지."

나도 내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피식.

날 바라보다 작게 웃음을 터뜨린 노운이 입을 열었다.

"그러지 말고 사과 있으면 하나만 줄래?"

"…."

어이가 없었다.

이 지경이 돼서도 사과를 달라니.

없어진 어이야 어쨌든.

호다닥.

빠르게 메고 있는 가방을 뒤져 사과 하나를 꺼내 건네었다.

스륵… 툭.

"이런."

"…!"

그대로 노운의 손을 통과해 바닥으로 떨어지는 사과.

"아."

잠시 떨어진 사과를 바라보고 있던 노운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기억났다."

"…?"

어느새 목 바로 아래까지 푸른빛으로 변해버린 노운이었다.

"잘 기억해둬, 내 이름은." 

노운이 맑은 미소를 지으며 날 응시했다.

"아이작."

"!!"

"아이작 뉴턴."

스르륵…!

몸이 완전히 빛으로 흩어짐과 동시에.

마지막 목소리가 내 귓가로 울려 퍼졌다.

"또 보자, 친구야."

218화. 돌아가자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사방으로 흩어지는 푸른빛의 입자.

"하아."

빛이 완전히 사라짐을 확인하고 나자 깊은 한숨이 나왔다.

헤어짐이 슬퍼 눈물이 흐르거나 하진 않았다.

헤어지기 전까지 이야기했던 대로 왠지 마지막이 아닐 거란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스윽.

악귀참도를 쥐고 있는 손을 내려다봤다.

미세하지만 계속해서 떨리고 있는 손.

아까의 떨림이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

망설이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었다.

다시 만날 거라 확신을 가지고 있는 것과는 별개였다.

친구라고 생각하는 이의 심장으로 검을 찔러 넣는데 어찌 망설여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거 참.

들키지 않으려고 최대한 힘을 줬었다.

끝까지 어이없게 만들며 농담이나 건네던 녀석이었지만.

이런 내 망설임과 떨림을 보면 떠나는 순간에 죄책감을 가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처음이구만.

검을 잡은 손이 떨린 적은 처음이었다. 

처음 하운드를 마주했을 때도, 무기를 얻으며 몇 번이고 죽을 위기에 처하면서도.

회귀한 이후 단 한 순간도 떤 적이 없었는데 기묘한 일이었다.

스르르.

악귀참도를 해제하고 나자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어졌다.

잠시 그 상태로 멈춰있다가.

"하압!"

짜악!

얼굴을 두드리며 멍해지려는 정신을 다잡았다.

우울해하거나 슬퍼할 필요는 없었다.

아이작의 말대로 다시 만나면 될 일이었다.

그나저나.

역시 과학자였어.

처음 봤을 때부터 예전 시대의 과학자일 거라 생각했는데.

나의 예리함을 재확인하며 감탄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관상은 과학이라더니.

유사 과학의 힘은 위대하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달았다.

물론.

- 아이작 뉴턴.

이건 예상하지 못했다.

예상하지 못하는 게 정상이었다.

아이작 뉴턴은 단순히 유명하다는 말로는 부족한 사람이었으니까.

"쒸잍…! 아이작 뉴턴이라니!"

온몸으로 느껴지는 소름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이작은 자신의 이름을 기억해달라며 말을 덧붙였지만 절대 잊을 수 없는 이름이었다.

자신의 유명함을 몰랐던 건가.

동명이인은 아니겠지.

책을 읽으며 봤던 아이작 뉴턴과는 이미지가 달라도 너무 달랐다.

위인서에 그려져 있던 아이작 뉴턴은 고뇌의 흔적인지 폭삭 삭아버린 얼굴과 과학자 특유의 딱딱함 및 괴짜다움이 잔뜩 묻어나오는 인물이었다.

아 괴짜다움은 똑같네.

하나를 제외하곤 완전히 달랐다.

어릿어릿한 건 물론이고 딱딱하긴커녕 호기심이 가득해 천진난만하게까지 보이는 얼굴이었다.

어른보다는 어린아이에 훨씬 가까운 이미지.

책을 완전 대충 읽었어.

지금 돌이켜보니 아이작의 정체를 떠올릴만한 게 꽤 있었는데 알아차리지 못하고 말았다.

아니지.

생각해보니 알아차리지 못하는 게 정상인 거 같기도 했다.

아이작 뉴턴이 나무에서 떨어지는 사과를 통해 중력을 발견하긴 했지만.

무슨 애플 홀릭인 것마냥 사과를 미친 듯이 먹어대는 것과는 별개의 이야기였다.

- 파지직.

아이작의 손에서 피어올랐던 붉은 스파크를 떠올렸다.

역시 알아차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건 결과론적인 이야기였다.

누가 그걸 보면서 연금술을 떠올리고 과거의 과학자를 생각해낼 수 있겠는가.

연금술이라… 진짜 있던 거였어?

노운이 아이작 뉴턴이란 걸 알게 되며 새롭게 생긴 의문이었다.

다른 광석을 금으로 만들기 위해 시도되었던 연금술.

많은 과학자가 비난을 받으면서까지 연금술에 시도했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으나.

전부 실패했다고만 들었을 뿐 성공 사례는 없다는 게 지금까지 알려진 정설이었다.

- 그라비티 디바이스.

거기다 아이작이 사용한 연금술은 단순히 물체를 만들어내고 바꾸는 정도가 아니었다.

한 번뿐이지만 카사락의 무효화시켰던 힘.

그건 분명 중력이었다.

"하아."

공식적인 개방의 시대 전에도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힘과 존재가 있었다.

이 사실을 무기를 구하며 누구보다 많이 접해온 나지만.

접할 때마다 설명하기 힘든 경이로움이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

가만히 서 생각을 정리했다.

생각을 정리하며 마음도 어느 정도 진정이 되어서일까.

어느샌가 손의 떨림도 멈춰있었다.

스윽.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망자의 세계를 살폈다.

텁텁한 공기는 물론이고 생명이라곤 풀 한 포기조차 존재하지 않는 세계.

삭막하기 짝이 없는 세계라 미련이 남거나 하는 건 아니었지만.

짧은 기간 적지 않은 일을 겪어서일까, 아니면 다시 돌아오지 않을 세계라 생각해서일까.

왠지 모를 묘한 기분이 들었다.

….

그렇게 잠시 망자의 세계를 둘러보다가.

꽈악.

메고 있는 가방의 끈을 고쳐 잡으며 몸을 돌렸다.

우우우웅…!

저벅.

아이작이 열어 준 문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 세계에서 목적했던 바는 모두 이루었다.

친구를 구했고, 친구를 만났다.

이제는.

저벅.

돌아갈 시간이다.

* * *

지글지글.

서울 강남의 소고깃집.

"냠."

척유라가 구워진 고기를 집어 물었다.

입안 가득 퍼지는 소고기의 담백함과 고소함에 척유라의 입가로 미소가 지어졌다.

"유라야, 맛있어?"

고기를 우물거리며 척유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척유라와 소고기, 그리고 건너편에 앉아있는 찹쌀떡까지.

낯설지 않은 조합이었다.

"생활하면서 불편한 건 없어?"

"네 없어요."

존댓말을 하는 척유라에 전수희가 끼잉하는 표정을 지었다.

대산에 온 척유라의 담당자로 오랜 시간을 함께 해왔다.

주말이면 외곽으로 놀러 간 적도 있으며 오늘처럼 단둘이 밥을 먹은 적도 많았다.

'이제 꽤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그럼에도 척유라는 전수희에게 말을 놓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 나이 차가 꽤 있어 존댓말을 하는 게 자연스러운 건 맞지만.

전수희는 척유라가 단둘이 있을 때만이라도 말을 놓길 바랐었다.

이유는 무척 단순했다.

'백운 님한테만 편하게 말하고.'

부러웠기 때문이다.

척유라가 오빠라고 부르며 편하게 말을 건네는 유일한 존재, 백운.

전수희도 백운처럼 척유라에게 편한 사람 중 한 명이 되고 싶었다.

"수희 님, 이거 드세요."

반말은 고사하고 호칭도 쉽지 않았다.

- 언니라고 편하게 불러도 돼!

라고 몇 번이나 말했지만.

척유라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단 한 번도 전수희를 언니라고 불러주지 않았다.

'어째서야!'

전수희가 커다란 눈망울을 촐망이며 척유라를 바라봤다.

'어째서 언니를 언니라 부르지 못하는 거야!'

완전히 다르지만.

순간 아비를 아비라 부르지 못하는 홍길동이 생각나는 전수희였다.

"제일 맛있는 새우살이에요. 식으면 맛없으니까 빨리 드세요."

"고마워!"

전수희가 바라는 대로 반말을 하거나 언니라 불러주진 않았으나.

척유라는 예뻐할 수밖에 없는 아이였다.

항상 맛있는 걸 먹을 때는 전수희를 우선 챙겨주고 보는 척유라.

칠칠치 못한 자신을 항상 챙겨주는 모습을 보며 전수희는 생각했다.

척유라는 약간 무뚝뚝하긴 하지만 정말 착한 아이라고 말이다.

"유라야, 백운 님한테 선물할 거라는 건 잘 만들고 있어?"

전수희가 새우살의 고소한 풍미를 느끼며 물었다.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슬며시 고개를 끄덕이는 척유라.

"이제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는 알 것 같아요."

"다행이네! 원래 감이 잘 안 온다고 했었잖아."

"네, 이제 감은 왔는데… 아직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안 돼요."

척유라의 말에 전수희의 눈이 커졌다.

네가 무기 중에 못 만드는 것도 있냐는 눈이었다.

"하지만 만들 수 있을 거예요.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요."

확신에 찬 척유라의 대답에 전수희가 엄지를 치켜세웠다.

"그나저나."

이름을 꺼내며 떠올랐는지 전수희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백운 님은 대산에 한 번 들른다고 하더니 소식이 없네."

전수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척유라도 입을 열었다.

"바람 같은 사람이에요."

"오… 바람이라."

매우 적절한 표현이었다.

바람.

갑자기 불어왔다가, 갑자기 사라지고 마는.

잡으려고 해도 잡히지 않는 바람.

백운에게 딱 알맞은 표현 같았다.

"수희 님한테는 어떤 바람이었어요?"

"!?"

흔치 않은 척유라의 질문에 전수희의 눈이 커졌다.

평소에 만나고 있어도 대부분 질문은 전수희의 몫이었다.

척유라는 궁금한 게 없다는 듯이 물어오는 것에 성실히 답할 뿐이었다.

척.

척유라의 질문에 기뻐하기도 잠시.

"으음!"

전수희가 턱을 괴며 고민에 잠겼다.

"극적인 바람이려나."

"극적인 바람요?"

대산의 회사 앞 카페부터 공원에서 만난 것까지.

매번 상황은 달랐지만 백운과의 만남과 그 만남으로부터의 결과는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만날 때마다 항상 내 주변의 많은 게 변했었거든. 처음엔 잘 몰랐는데 엄청 긍정적인 방향으로."

"그렇군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는 척유라.

척유라를 잠시 보던 전수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유라한테는 어떤 바람이었어?"

고기를 우물거리던 척유라가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고개를 들었다.

흔치 않은 일이었다.

고기 귀신인 척유라가 먹는 걸 멈추다니.

고기를 먹는 것 이상으로 고민이 된다는 증거였다.

"저한테는."

척유라의 입가로.

보기 드문 잔잔한 미소가 그려졌다.

'은인.'

백운을 떠올리며 척유라가 입을 열었다.

"따듯한 바람이에요."

"오오… 따듯한 바람…!"

척유라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던 전수희가 고개를 돌렸다.

"우리의 바람님은."

가게의 창문 밖에선 많은 이들이 오가고 있었다.

"어디서 뭘 하고 계시려나."

* * *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물을 응시했다.

기다림의 시간 끝에 끓어오르는 만큼 반가워야 정상인데.

전혀 반갑지 않았다.

"고기 먹고 싶다."

나도 모르게 혼잣말이 나왔다.

고기, 미트.

정말이지 간절한 바람이었다.

툭. 툭.

익숙하다 못해 지겨운 손놀림으로 라면 스프를 털어 넣은 후.

옆에 놓여 있는 스팜을 뜯어 숟가락으로 퍼넣었다.

스팜 라면이라니.

가난한 자취생에겐 사치의 극에 달해있는 요리였다.

스윽.

어느 정도 설익어 꼬들한 면과 스팜을 집은 후.

"후루룹!"

크게 한 입 집어넣었다.

"으음! 맛있다! 스팜 라면 맛있다! 맛있…."

애써 자기 최면을 걸다가 느껴지는 현자타임에 젓가락을 내려놨다.

"시발… 고기 먹고 싶다."

아무리 맛있어도 적당히 먹어야지.

며칠째 똑같은 걸 먹고 있으니 지겨워 미칠 지경이었다.

"미친 길은 언제 끝나는 거야."

고개를 들어 정면으로 쭉 이어져 있는 길을 바라봤다.

묘한 공간이었다.

넓은 길 하나를 제외하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공간.

코로 들어오는 맑은 공기를 보니 망자의 세계는 아니었다.

- 조금 걸어야 할 수도 있어.

아이작이 지나가는 투로 말한 적이 있었는데.

조금 더 자세히 물어볼 걸 그랬다.

- 저벅.

아이작이 열어 놓은 균열로 발을 디디며 기대한 광경은 이게 아니었다.

내가 아테네의 목걸이를 사용했던 장소가 바로 나타나거나.

하다못해 지구의 어딘가이길 바랐었는데.

이런 나의 바람을 비웃듯 눈 앞에 펼쳐진 건 지구도, 망자의 세계도 아닌 또 다른 길의 공간이었다.

- 길의 끝은 지구야. 지구의 어딘지는 알 수 없지만.

이쯤 되니 흐리듯 말했던 아이작의 뒷말이 떠올랐다.

확신 가득했던 앞과는 달리 무척 자신이 없어 보이는 말이었다.

너 설마…!

그땐 지구면 어디든 상관없지란 마인드라 크게 신경쓰지 않았었는데.

애써 눈을 피하던 아이작의 모습을 떠올리니 조금씩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휙휙!

불안을 털어내기 위해 머리를 세게 흔들었다.

어쨌든 걷다 보면 지구에 도착하는 건 확실했다.

"길은 다 이어져 있으니까! 암! 그렇고말고!"

애써 자신을 토닥인 뒤.

이건 고기다. 이건 고기다.

자기 암시를 걸며 다시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후루룹!"

219화. 여긴 어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