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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화. 헬리오폴리스

탕!

"뭐야!!"

갑자기 들려온 소리에 스프링처럼 몸을 일으켰다.

책을 읽으며 시간을 때우고 있던 찰나에 발견한 소파.

잠깐만 누워볼까 하는 마음으로 소파에 몸을 뉘었다.

솔솔.

그리스에서부터 수영을 해서인지 조금씩 밀려오기 시작한 노곤함.

눈 잠깐만 감아볼까… 했던 게 내 마지막 기억이었다.

얼마나 잔 건지 뺨에는 침이 줄줄 흘러 있는 상태.

그러던 와중에 들려온 소리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찾았어요!"

소리의 정체는 셀린이 책상을 내려친 것이었다.

"뭐… 뭘 찾아요?"

여전히 잠이 안 깨서인지 지금이 몇 시인지, 셀린이 뭘 알아냈다고 하는 건지 도통 감이 안 잡혔다.

셀린의 시선을 따라 사각형의 투명 봉인함에 든 다크메타를 바라봤다.

여러 도구로 이리저리 분해 당해서인지 처음보다 여러 조각으로 갈라진 모습이었다.

"다크메타가 온 곳이요!"

"!!"

소파에서 일어나 셀린에게로 호다닥 달려갔다.

다크메타가 온 곳이라 하면 공명으로 봤던 공간일 터였다.

"다크메타의 흔적을 역추적해봤어요. 바다로 들어가서 빙하로 변하기까지 여정이 길어서 시간이 좀 걸렸지만요."

내가 다가오자 펜을 집어 들고 지도로 걸어가는 셀린.

셀린이 빙하가 발견됐던 바다를 시작으로 선을 죽죽 그어나갔다.

대단한데…?

두어줄 그어지고 말려나 했는데 그런 수준이 아니었다.

다크메타는 먼 길을 왔는지 바다에서 도시로, 도시에서 강으로, 강에서 다시 도시로 가는 등 꽤 많은 길을 거쳐 있었다.

콕!

여기저기 선을 긋던 셀린이 어느 도시 위에 점 하나를 찍었다.

"여기에요."

여기라는 셀린의 말에 고개를 들이대 지도를 살폈다.

"헬리오폴리스?"

"여기에서 얼마 안 떨어진 도시에요. 다크메타는 여기에서 왔어요."

의외의 장소였다.

어디 구석진 지하나 사막에서 왔을 거라 생각했는데 도시라니.

"여기 사람 사는 곳 아니에요?"

"맞아요. 그래서 이상해요."

셀린이 화면으로 도시의 모습을 띄웠다.

관광객과 주민 등 인구가 꽤 많은 도시였다.

"헬리오폴리스에서 다크메타에 의한 이상 현상이 발생했다는 소식은 못 들었었거든요."

"도시 안에서의 구체적인 위치까지 알 수 있는 건가요?"

"지금 당장은 알 수 없지만, 이 다크메타를 데리고 가면 반응이 있을 거예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화면으로 눈을 돌렸다.

이집트의 도시들 중에서도 태양의 신 라에 대한 숭배가 가장 강했던 도시, 헬리오폴리스.

무슨 의미라도 있는 걸까.

직접 가보는 방법 밖엔 없을 것 같았다.

* * *

연구실에서 하룻밤을 보낸 후.

날이 밝기 무섭게 셀린, 헤리아, 무하타와 함께 대학교를 나섰다.

셀린의 말대로 얼마 걸리지 않아 도착한 헬리오폴리스.

"얼레."

헬리오폴리스의 사방을 둘러싸고 있는 바리게이트가 눈에 들어왔다.

급하게 쳐진 모양을 보니 한밤중에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았다.

"무슨 일이 있나요?"

바리게이트를 지키고 있는 헌터에게 다가간 헤리아.

헤리아가 신분증을 보여주자 헌터가 어깨를 으쓱 올려 보였다.

"도시 안에서 데몬이 나타났다고 해요."

"데몬요…?"

"도심지 한가운데서 갑자기 튀어나오는 바람에 피해자가 꽤 많이 생겼어요."

"도심지 한가운데라니 그게 가능한가요?"

설명해주는 헌터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도시를 담당하고 있던 헌터들도 전부 외곽에 배치되어 있었거든요. 그래서 빠르게 대처하지 못했고요."

갑자기 튀어나왔다 하니 헤리아가 들고 있는 케이스로 눈이 갔다.

셀린이 역추적한대로 다크메타의 발생지가 헬리오폴리스라면.

도시 안에 뭐가 있든 이상할 게 없었다.

"데몬이 꽤 많이 발생해서 비칼 님이 오셨어요."

"네!? 비칼 님이요?"

누구길래 저리 놀라지.

깜짝 놀라는 헤리아에 사사삭 무하타에게 다가갔다.

"비칼 님이 누구에요?"

"아! 어제 말씀드렸던 1급 헌터요. 이집트의 수호신이라는 분."

"아."

무하타가 눈을 반짝이며 설명했던 헌터였다.

이렇게까지 유명한 걸 보니 대한민국으로 치면 기태랑과 같은 포지션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저벅.

헤리아와 헌터의 대화를 듣던 셀린이 바리게이트로 다가갔다.

"혹시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요? 다크메타의 흔적이 언제 사라질지 몰라서요."

"도시 안은 위험한 상태입니다. 비칼 님이 계시다곤 하나 언제 어디서 데몬이 튀어나올지 몰라서요."

슥.

헌터의 설명에 셀린이 조심스럽게 날 바라봤다.

어떻게, 가능하겠냐는 듯한 눈빛이었다.

가능하고 말고요.

스리슬쩍 엄지를 세우자 셀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습니다. 정부의 의뢰를 받은 상태이니 허락을 구해 주실 수 있을까요?"

정부 의뢰라는 말이 통한 건지 난처한 얼굴이던 헌터가 전화기를 꺼냈다.

어딘가로 전화해 현재 상황을 설명하는 헌터.

아마 안쪽에 있는 비칼이란 헌터한테 전화를 한 것 같았다.

"젊은이."

멍하니 통화하는 모습을 바라보던 중.

"와씨!"

갑자기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버렸다.

인자한 얼굴로 홀홀 웃고 있는 할머니.

"돌아가게나."

"네?"

다짜고짜 돌아가라는 할머니.

"돌아가라니…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평소라면 에이 머선 말씀이세요 하면서 넘겼을 테지만.

할머니의 말엔 알 수 없는 묘한 무게가 담겨 있었다.

밑도 끝도 없는 햇소리가 아닌 무언가를 알고 말하는 듯한 느낌.

"자네는 원래 여기 올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

거울은 없지만 아마 내 눈은 몹시 커진 상태일 것이다.

뭐지.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마치 내가 회귀했다는 걸 아는 듯한 말투였다.

회귀 전의 나였다면 이 시기쯤 헬리오폴리스는커녕 작은 자취방에서 찌질대고 있었을 테니까 말이다.

"아직 더 살아야지."

들으면 들을수록 뒷골이 쭈뼛해지는 말이었다.

인자한 얼굴로 저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다니.

마지막 기회인가.

공포 영화에서 주인공이 지옥 같은 상황에 봉착하기 전.

항상 그 상황을 피할 수 있는 천금 같은 기회가 주어지는 게 보통이었다.

마을 주민의 경고라던가 길 가던 중 만난 할아버지의 조언이라던가 하는 것들.

주인공들은 그거 무시하고 갔다가 개고생하지.

그런 장면을 볼 때마다 저 새끼 저거 또 무시하고 가네라며 답답해했었는데.

막상 그 입장이 되니 쉽사리 발길을 돌릴 수가 없었다.

욕해서 죄송합니다, 이름 모를 주인공 여러분.

"혼돈이 불꽃을 집어삼키는 건 정해진 순리이니."

"…!"

"불꽃이 사라지는 순간, 이집트엔 빛이 사라지고 혼돈으로 가득해질 것이야."

공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그대로 읊어 주는 할머니.

"백운 님, 들어갈까요? 허락해주셨다고 하네요."

"아, 네!"

셀린에게 대답을 한 후 홀홀 웃고 있는 할머니를 바라봤다.

"아직 불꽃은 살아있나요?"

"홀홀, 그렇긴 하지. 아직 이집트가 살아있지 않은가."

내가 봤던 공간은 현재 진행형이었나 보네.

집어 삼켜지고 있던 불꽃은 아주 작았지만 여전히 뜨거운 열기를 내고 있었다.

[지켜라]

누구의 목소린지는 알지 못했다.

나를 향해 지키라고 말했던 목소리.

싱긋.

"그럼 됐네요."

할머니를 향해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불꽃, 제가 살릴 거거든요."

* * *

조금 쫄리네.

할머니를 향해선 멋진 대사를 뱉고 왔지만.

막상 들어오니 살짝 쫄리는 감이 있었다.

공포 영화의 주인공처럼 귀인의 경고를 무시하고 들어온 거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별일 있겄어.

1급 헌터도 와있다는데.

옆에 딱 달라붙어 있으면 되겠지.

"비칼이란 분한테 가는 건가요?"

"아뇨? 비칼 님은 하시는 일이 있다고 하셨어요. 들어오는 건 자유지만 자기는 못 지켜준다고 하셨거든요."

"그… 그렇군요."

마음을 든든하게 받쳐주고 있던 1급 헌터가 사라졌다.

그래도 무하타와 헤리아가 있어서인지 마음이 그리 외롭지만은 않았다.

"셀린 님, 다크메타는 어떤가요?"

"반응하고 있어요. 확실히 헬리오폴리스와 연관이 있나 봐요."

제대로 찾아왔구만.

고개를 끄덕이며 뒤를 따라갔다.

따라가다 보니 전투의 흔적이 하나둘 눈에 들어왔다.

더럽게 크네.

다크메타의 영향인지 바다에서 봤던 샤킨이나 문어쉨 만큼 커다란 크기의 데몬들.

하지만, 놀라운 건 데몬들의 크기가 아니었다.

그런 크기의 데몬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찍어 죽여 놓은 모래들.

어딜 가나 1급 헌터는 다 괴물인건가.

직접 본 건 아니지만 처리된 데몬들을 보니 비칼이 얼마나 강한지 짐작이 가는 바였다.

"여기에요."

탐구 능력을 사용하며 걷던 셀린이 고개를 들었다.

셀린이 걸음을 멈춘 곳은 제단처럼 생긴 장소였다.

"모스크에요. 태양 신 라를 숭배했던 장소."

라를 숭배했던 장소에서 다크메타가 기어 나왔다?

뭔가 잘못돼도 단단히 잘못된 느낌인데.

"입구가 참… 캄캄하네요."

모스크를 바라보고 있는 한국인의 간단 한줄평이었다.

- 아직 더 살아야지.

갑자기 조금 전 만났던 할머니의 말씀이 떠오르는 건 왜일까.

"들어가죠."

"네… 넵."

물론 이곳을 찾기 위해 온 것이기에 셀린에게 돌아갈 생각따위는 전혀 없는 듯했다.

저벅.

발을 들이기 무섭게 시원한 공기가 몸을 반겼다.

시원하다기보다는 왠지 모르게 오싹한 한기에 가까운 느낌.

태양의 신이시여 우매한 양 한 마리를 굽어살피소서.

평소 믿지도 않는 라를 향해 기도하며 셀린을 따라갔다.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어둠이 펼쳐졌다.

"이거 하나씩 받으세요."

우웅…!

옆에 있던 무하타가 품에서 구슬을 꺼내 하나씩 나눠주었다.

밝은 빛을 내고 있는 구슬.

폭탄으로 사용될 뿐만이 아니라 다른 용도로도 활용이 가능한 듯했다.

"뭔가 공간이 있네요."

구슬의 빛에 의존해 어느 정도 걷자 좁은 통로가 끝나고 넓은 공간이 나타났다.

여긴 또 뭐 하는 곳이야.

슥.

"…!!"

머선 공간인가 구슬을 비추자 뜻밖의 물체가 눈에 들어왔다.

무언가의 거대한 알.

"알…?"

"무슨 알일까요?"

누구 건지는 몰라도 불길한 알임에는 분명했다.

일정한 박자에 맞춰 움찔거리는 걸 보니 아직 살아있는 알이었다.

- 돌아가게나.

왜 자꾸 할머니의 말씀이 떠오르지.

"뭔가 이상해요, 모스크 안에 이 정도 크기의 공간이 있을 수가 없는데."

"지하로 이어진 거 아닐까요? 통로로 내려올 때 경사감을 느꼈었거든요."

"이 알은 또 누구의 알인 걸까요?"

대화를 나누고 있는 세 사람.

일단 나가는 게 좋을 거 같은데.

도심지에 있는 모스크 안에 왜 이런 공간이 있는 건지, 그리고 그 공간 안에는 왜 이런 알들이 있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단지, 여기까지 발견했으니 일단 나가서 지원을 받아 들어오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의 말씀도 말씀이지만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는 알이 부화하는 순간 위험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여러분, 일단 밖으로 나… 허."

"백운 님…?"

"왜 그러세요?"

의아한 얼굴로 날 향해 고개를 돌린 세 사람.

그런 세 사람의 야광 빛으로 무언가가 날름거리고 있는 혓바닥이 비추어졌다.

말이 혓바닥이지 웬만한 성인 남성보다도 거대한 크기.

"여러분."

낮은 목소리로 세 사람을 부른 후.

[비젼 수리검]

수리검을 꺼내 들었다.

"뛰어요!!"

130화. 아포피스

라의 신화에 빠짐없이 등장하던 게 있었다.

라와 치열하게 싸웠었다 알려진 악의 생명체, 아포피스.

신화마다 아포피스의 모습을 묘사하는 방법은 제각각이었는데, 그럼에도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어느 신화에서든 아포피스의 크기는 더럽게 크다는 것이었다.

쾅!!

왜 아포피스까지 나오냐고오!

할머니 말씀 들을걸!

세 사람 뒤에 모습을 드러낸 건 진짜 더럽게 큰 코브라였다.

보자마자 신화 책에서 읽었던 아포피스가 떠오르는 그런 생김새였다.

드드득…!

아니 뱀 새끼 힘이 왜 이래.

현재 수리검에 맞닿아 있는 건 코브라의 머리통이었다.

세 사람을 향해 시전한 몸통 박치기를 달려들어 수리검으로 막아낸 것.

"백운 님!"

"일단 밖으로 나가요! 빨리!"

머뭇거리는 세 사람을 향해 소리 질렀다.

앞에 있는 게 아포피스던 그냥 코브라 데몬이던 간에 이렇게 어둡고 좁은 공간에서 누군가를 지키며 싸운다는 건 힘들었다.

나도 나가야겠는데.

스스스…!

수리검 너머로 소름 끼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를 바라보며 입맛을 다시는 듯한 혓바닥의 움직임 소리.

현란하구만 현란해.

드드… 쿵!

힘을 집중해 코브라를 밀어낸 후 뒤쪽으로 몸을 날렸다.

시야가 닿는 곳은 무하타에게 받은 구슬의 빛 범위가 다였기에 비젼도 사용할 수 없는 상황.

쩌적.

시발?

무언가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고, 굳이 빛으로 비추어보지 않아도 무슨 소린지 알 것 같았다.

사방을 가득 채우고 있었던 알.

그 알에서 무언가가 탄생하는 소리였다.

사아악! 사아악!

울퉁불퉁한 땅에 뱀의 비늘이 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둠 속에서 들으니 소름 그 자체.

녀석은 커다란 덩치에 안 어울리게 꽤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칼데아는 꺼낼 수 있는데… 어째야 되나.

코브라의 움직임에 귀를 기울이며 잠시 고민에 빠졌다.

햇빛이 없는 만큼 날개는 꺼낼 수 있지만 굳이 아무것도 안 보이는 곳을 싸움의 장소로 정해야 하는지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

나가자.

사아아아!!!

나에게 다시 한번 돌진해오는 소리를 들으며.

[이카로스 - 칼데아 윙]

날개를 꺼내 연기를 폭발시켰다.

스프링처럼 통로 쪽으로 튕겨 나가지는 몸.

쾅!!

조금 전 서 있던 땅에 코브라가 처박히며 엄청난 굉음이 들려왔다.

딛고 있던 땅마저 진동시키는 무식한 힘이었다.

머리 터져서 뒤지진 않았겠지.

잠시 짤막한 소망을 말한 뒤 무기를 바꿔 들었다.

[앤 보니&메리 리드 - 작열탄]

킹코브라를 제외하고라도 사방에 놈의 알이 드글드글한 걸 본 이상.

그냥 나가는 건 불가능했다.

작열탄 안 뿌리고는 못 참지.

철컥.

통로에 발을 딛기 무섭게 리볼버를 안쪽으로 겨냥했다.

두두두두두두두두---!!

불을 휘감은 빛의 탄환이 모스크 안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콰과과앙!!

날아간 탄환이 폭발음을 내며 모스크 전체에 불을 질렀다.

"쉬이이이이익!"

"시시시식!"

소리 봐라.

소름 돋게 만드는 소리를 들으며 방아쇠를 당기는 손가락에 힘을 줬다.

"뱀 구이나 되라!"

* * *

콰아아아아아!

"음?"

파삭!

"끄륵…!"

도심지에 등장한 데몬을 차례차례 찍어 누르고 있던 중이던 비칼이 굉음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조금 전 들어온 사람들인가.'

도시를 수비하던 부하 헌터에게 바리게이트를 친 후 아무도 들여보내지 말라고 했었다.

그로부터 몇 시간이 지난 후 걸려온 부하의 전화.

정부의 의뢰를 받은 인원들이 들어가려는데 들여보내도 되겠냐는 전화였다.

- 안전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합니다. 국가직 헌터 2인 외에 호위해주는 한 명의 헌터가 더 있습니다.

스스로의 목숨은 알아서 지키는 것이기에.

알아서 하라는 대답을 들려줬었다.

'헌터 2명은 모두 7급이라 했었는데… 나머지 한 명이 한 건가.'

"쯧."

비칼이 혀를 차며 고개를 내저었다.

저런 굉음이 터진 이상 주변에 있을 데몬들이 전부 저곳으로 향할 터였다.

"괜히 들어오라고 했군."

한숨을 내쉰 비칼이 굉음이 들려온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 * *

호다닥!

모스크의 출구를 향해 몸을 날렸다.

콰아아아아!!

뒤이어 통로를 뚫고 터져 나오는 엄청난 화염.

내가 구워질 뻔했네.

너무 열심히 갈기느라 폭발에 의해 화염이 터지는 걸 잠시 간과했었다.

달려 나오는 순간에도 비늘을 꺼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을 정도.

"백운 님! 괜찮아요!?"

"멀쩡합니다. 뱀쉨들도 다 태워버렸고."

"방금 뭐였어요…?"

"개 큰 뱀이요."

내가 뛰란 말에 곧장 통로로 달린 세 사람은 코브라의 모습을 못 본 모양이었다.

안 보는 게 낫긴 하지.

100% 꿈에 나온다 이거.

오늘 잠은 다 잤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대한 뱀이라면 아포피스…?"

뒤에서 읊조리는 셀린의 말이 들려왔다.

더럽게 큰 뱀이라 듣더니 나와 같은 걸 떠올린 듯했다.

신화 속에서나 등장하던 놈이니 설마 진짜 아포피스겠나 싶지만 말이다.

어차피 구워버렸으니까 뭐.

"아포피스는 불사에 가까운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던데."

불길한 소리를 하는 셀린을 바라봤다.

그런 복선 깔리는 말 하지 말라는 눈빛을 강하게 보내자 웃어 보이는 셀린.

"어디까지나 신화 속의 존재니까요, 하하."

우르릉…!

"하…?"

발아래로 느껴지는 진동에 서 있던 사람들의 눈이 셀린에게 향했다.

"어…?"

설마 아니겠지.

뱀 주제 그런 화염 구덩이에서 살아남았으면 진짜 말도 안 되는데.

드드드…!

나의 작은 바람과 달리 진동은 점점 커지고 있었다.

차라리 땃쥐여라.

이렇게 된 거 이왕 등장할 거라면 아까 봤던 뱀 새끼 말고 귀여운 땃쥐가 등장했으면 했다.

"조심해요!"

드드드… 쾅!!

땃쥐는커녕 징글맞은 뱀 새끼가 튀어나왔다.

아포피스다.

등장한 뱀 새끼에 확신이 들었다.

일반적인 코브라 데몬 같은 게 아니었다.

작열탄의 폭발을 정중앙에서 다 처맞았음에도 그을린 곳 하나 없이 모습을 드러낸 녀석.

"와우."

밝은 데서 보니 또 색다른 느낌이었다.

어두운 곳에서 야광빛에 의지해 봤을 때 보다 더욱 웅장한 모습.

몸 전체적으로 의미를 알 수 없는 문양들이 가득 새겨져 있어 그 기괴함을 더하고 있었다.

이무긴가.

크기만 보면 청룡 유탈라스와 삐까 뜰 것 같았다.

"백운 님! 다크메타는 저놈한테서 나온 거예요!"

"…?!"

격렬하게 반응하는 다크메타를 살핀 뒤 들려오는 셀린의 외침.

저런 생김새와 크기, 말도 안 되는 생명력에 더해 다크메타를 내보내는 능력까지.

아직까지 다크메타가 세트와 연관되어 있을 거란 확신은 없었지만, 만약 맞다면 눈앞에 있는 건 정말 아포피스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일단 아포피스라 치고.

어떻게 죽인다?

작열탄에 불태워도 뒈지질 않는 생명력.

어떤 매커니즘으로 버텨낸 건질 모르기에 함부로 공격을 쏟아부을 수 없었다.

일단 탐색전 가볼까.

"도시 밖으로 피해 계세요."

크기가 크기이니만큼 무슨 공격을 하든 범위급으로 데미지를 입힐 터.

웬만큼 멀리 떨어져 있는 걸론 전투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쉬리릭!

[잭 더 리퍼]

아포피스의 공격을 회피하며 면도칼을 휘둘렀다.

서걱! 서걱!

외피 자체는 두껍지 않은지 손쉽게 갈라지는 아포피스.

… 뭐야?

문제가 있다면 면도칼을 통해 손으로 전해지는 감촉이었다.

무언가 살아있는 생물체의 살을 베었다기보단 뭉쳐 있는 연기 혹은 액체를 벤 느낌이었다.

서걱!

아포피스의 공격을 피하며 썰어봐도 마찬가지였다.

베는 순간만 갈라질 뿐 순식간에 다시 원상복귀 되는 녀석의 피부.

- 불사신.

오반데.

작열탄의 불도 안 통하고 베는 것도 안 통한다라.

녀석을 중심으로 빙글빙글 돌며 머리를 회전시켰다.

한순간에 몸 전체를 부술 만큼의 데미지라면?

아포피스의 회복력이 어디까지인지부터 알아내야 했다.

[비젼 수리검]

수리검을 꺼내 하늘 높이 집어 던졌다.

나름 녀석도 빙글빙글 돌며 신중한 모습을 보였기에.

공중에서 못 움직이는 상대를 보면 좋다고 달려들 것 같았다.

[비젼]

하늘로 몸을 이동시키고 아래를 내려다봤다.

사라진 날 찾느라 두리번거리는 녀석.

"여기다 새끼야!"

"시이이이!!"

공중에 뜬 날 발견한 아포피스가 무서운 속도로 돌격해왔다.

면상에 한 번 먹여보자.

비늘을 두른 채라면 면상부터 꼬리 끝까지 박살내는 게 가능할 것 같았다.

쩌억!

홀리.

아포피스가 날 향해 입을 벌렸다.

아가리가 어찌나 큰지 전방이 전부 가려질 정도.

[유탈라스 - 1단계 의태]

최대한 강한 한 방을 위해 오른팔로 모든 비늘을 집중시켰다.

목표는 면상 대신 매섭게 날아들고 있는 거대한 송곳니.

"오라오라… 오라아!!"

꽈아앙!

바로 앞까지 다가온 아포피스의 송곳니에 주먹을 꽂자 굉음이 터져 나왔다.

몸을 순식간에 밀쳐내는 엄청난 충격파.

아포피스의 무게를 실은 몸통 박치기와 유탈라스의 주먹이 만들어낸 충격이었다.

퍼어엉!

경쾌한 소리와 함께 송곳니부터 시작해 머리, 몸통 순으로 힘의 이동 경로에 따라 아포피스가 터져나갔다.

끝까지 터져라!

반짝.

응?

아포피스의 실시간 폭파를 구경하던 중.

폭파보다 앞서 빠르게 꼬리 쪽으로 향하는 빛이 보였다.

아주 작은 빛이 문양을 따라 폭파를 피해 이동하는 듯한 모습.

펑….

이런.

꼬리 끝에 위치한 문양까지 빛이 도망쳤지만.

파워가 조금 부족했는지 폭파는 꼬리 언저리에서 끝나고 말았다.

설마.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생각을 할 만한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쿠아아아!

꼬리 부분에서 검은색의 액체가 터져 나오며 순식간에 박살났던 송곳니까지 완벽하게 복구해버린 아포피스.

아니 십… 사기 아닌가 저거.

그런 아포피스를 보고 있자니 아찔함이 느껴졌다.

몸의 4/5가 날아갔음에도 저런 속도의 재생이라니.

듣도 보도 못한 규격 외의 재생력이었다.

"시이아아아아아!!"

한 번 몸이 박살 나서일까.

잔뜩 화가 난 아포피스가 내가 서 있는 건물로 돌진해왔다.

잠시 쨀까.

조금 전 번쩍였던 빛.

확실친 않지만 실마리를 잡았으니 작전상 후퇴를 할까 고민하는 사이.

쾅!!

"!!"

땅 아래서 솟아오른 모래가 아포피스의 머리를 후려갈겼다.

쾅! 쾅! 쾅! 쾅!

"오우."

사람의 주먹 모양으로 변해 쉴새 없이 아포피스를 두들기는 모래 주먹.

갑자기 나타난 주먹에 아포피스는 일방적으로 맞으며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맞은 부위는 금세 회복하고 있는 녀석.

저벅.

"…?"

뱀을 조패고 있는 장본인인지 태연한 걸음으로 내게 다가오고 있는 회색 머리의 남자.

저 사람이 비칼인가.

딱 봐도 장난 아닌 아우라가 느껴지는 걸 보니 저 사람이 무하타가 말했던 이집트의 1급 헌터인 것 같았다.

척.

바로 앞까지 다가와 걸음을 멈춘 비칼이 무미건조한 눈으로 날 응시했다.

"저거 어떻게 죽이는 거지? 알고 있나?"

통성명 할 새도 없이 훅 들어오는 비칼의 질문.

"짐작 가는 건 있는데요."

"뭐지?"

비칼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좀 도와주셔야 돼요."

"…."

말없이 날 바라보던 비칼이 고개를 끄덕였다.

"해보지."

131화. 발을 떼다

사방으로 일어나는 모래를 보며 아포피스의 뒤쪽으로 내달렸다.

비칼에게 긴 설명을 해준 건 아니었다.

아포피스는 웬만한 상처를 입어도 회복하며 그럴 때마다 몸에 그려진 문양을 따라 무언가 반짝이는 게 의심스럽다는 정도의 설명이었다.

- ….

아무 말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던 비칼.

그렇게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던 비칼은 모래를 끌어 올려 아포피스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겁나 쿨한 사람이네.

처음에 저런 강압적인 말투로 반말을 들으면 기분이 나쁠 법도 했지만.

이상하게 기분 나쁜 걸 떠나 약간의 위화감조차 느끼지 못했었다.

오히려 비칼이 존댓말을 했으면 훨씬 어색했을 것 같은 느낌.

전체적인 이미지와 강압적인 반말이 이렇게 잘 어울리는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다.

그건 그거고… 화끈하네.

콰앙!!

아포피스를 향해 뻗어 가는 모래를 바라봤다.

시원시원하게 휘둘러지며 거대한 크기의 아포피스를 휘청이게 만드는 위력.

한두 번이면 모를까 쉴새 없이 저런 공격을 할 수 있다니 역시 1급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반짝.

신체의 일부가 파괴될 때마다 어김없이 반짝이는 아포피스의 문양.

문양이 빛나는 부분은 몹시 작았고, 반짝이는 것도 정말 찰나의 순간이었다.

아까는 박살나는 몸을 피해서 달아나느라 계속 빛났던 모양이네.

문제가 있다면 몸이 잘린 게 아닌데도 반짝이는 부분이 계속해서 이동한단 것이었다.

마치 한 자리에 계속 머무르면 위험하다는 걸 아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키시시시시시시!!"

무한한 재생력을 믿어서인지 비칼의 공격에도 밀려나지 않고 계속해서 전진하는 아포피스.

받은 데미지를 순식간에 회복할 수 있으니 가능한 행동이었다.

무식한 뱀쉨!

탓.

아포피스의 몸으로 올라타 문양의 빛으로 달려갔다.

빛은 어차피 문양을 타고 움직이는 상태.

비칼이 공격하는 틈에 반짝이는 부분을 면도칼로 갈라볼 생각이었다.

스스스…!

내가 올라타기를 기다리고 있던 건지 아포피스를 두들기기만 하던 비칼의 모래가 거대한 창 모양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쐐에에엑… 푹! 푹! 푹!

아포피스의 머리를 시작으로 아래를 향해 꽂혀 오는 모래의 창.

!!

광범위한 모래 창에 위험을 느낀 건지 아포피스의 빛이 내 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비칼이 일부러 빛을 내 쪽으로 몰아주는 듯한 느낌이었다.

부디 맞기를!

어느새 사정거리까지 들어온 빛을 향해 면도칼을 휘둘렀다.

반짝!

!?

면도칼이 휘둘러지는 찰나의 순간.

일정하게 내려오던 빛이 방향을 틀며 속도를 올렸다.

뭐… 뭐야.

아포피스의 머리는 저 위에서 비칼의 모래에 박살 나버렸는데.

마치 날 발견한 뒤 새로운 판단을 내린듯한 빛의 움직임이었다.

삭! 싸악!

아까와는 비교가 안 되는 속도였다.

사방으로 뻗어 있는 문양을 따라 마구잡이로 움직이는 빛.

하도 찰나의 순간에 지나쳐 내 발아래를 지나가도 면도칼을 휘두른 후엔 이미 빛이 도망간 뒤였다.

서걱. 서걱. 서걱.

수십 번을 휘둘렀는데도 빛에 닿긴커녕 근처조차 못 가고 있는 면도칼.

이걸론 안 되겠는데…?

드드드드…!!

빛을 벨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는 사이.

옆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허.

아포피스가 몸을 감싸고 있는 비늘을 세우기 시작했다.

칼과 가까운 정도의 예리함을 가지고 있는 비늘.

이런 씨.

밀려오는 비늘을 피해 뒤쪽으로 몸을 이동시켰다.

파바밧!

몸을 착지하기 무섭게 날아오는 비늘을 피하고 쳐내며 뒤로 움직였다.

단순히 크기랑 힘만으로 싸우는 놈인 줄 알았는데 잔기술까지 위협적인 녀석이었다.

쿠웅!

오?

어느새 내 앞으로 생겨난 모래의 벽이 비늘을 막는 사이.

다가온 비칼이 입을 열었다.

"안되는 건가?"

"반짝이는 거 봤죠? 저걸 베어야 하는데 너무 빨라요. 이제 녀석도 절 인식해서 더 힘들 거 같고요. 한 번에 저놈 몸 전체를 분쇄하거나 빛을 베거나 하면 될 거 같은데, 혹시 모래 더 끌어 올릴 수 있나요?"

"불가능하다."

현재 나와 있는 모래가 최대라는 듯 비칼이 고개를 내저었다.

하긴 가능했다면 애초에 모래를 극한까지 끌어 올려 아포피스의 몸 전체를 찍어 눌렀을 것이다.

빛이 반짝이며 한 자리에 머무르는 건 아주 찰나의 순간.

그 찰나의 순간을 베려면… 스이카 뿐인데.

현재 최선의 무기는 인식을 넘어서는 속도를 가진 스이카 뿐이었지만.

비늘을 날려대며 계속해서 난리 치는 아포피스를 상대로 땅에 발을 붙이고 있어야 하는 스이카의 검기를 맞추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크기도 너무 커서 범위에 들어오는 것도 극히 일부분이야.

상대가 사람이라면 스이카의 경계의 크기는 충분했다.

하지만 상대는 높은 층수의 빌딩에 버금가는 크기의 뱀이었다.

땅에서 스이카가 도달할 수 있는 부위는 기껏해야 아포피스의 꼬리 언저리가 한계.

"눈앞에 오면 벨 수 있나?"

"네, 벨 수는 있는데."

문제는 아포피스의 빛이 날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바보가 아닌 이상 땅에서 발도를 준비하고 있는 날 가만히 둘 리도 없으며 심지어 빛이 근처의 문양으로 움직이지도 않을 터였다.

내게 보이지 않는 몸통 반대편 문양으로 이동하겠지.

그렇게 되면 부디 맞길 기도하며 스이카를 휘둘러야 했다.

눈 감고 휘두르는 거와 다를 바 없는 수준이기에 현명한 선택이 아니었다.

"… 혹시 꼬리 아래부터 위로 빛을 몰아주실 수 있나요?"

몸 전체를 감싸고 있는 문양이 양면으로 그려져 있지 않은 곳이 한 군데 있었다.

코브라와 비슷한 넓적한 모양을 가진 아포피스의 머리통 부분.

머리통에서 문양이 그려진 건 뒤통수뿐이었다.

빛의 움직임이 한쪽으로만 제한될 수밖에 없는 유일한 장소. 

"그리고 저 뒤통수 부분에 딛고 설 수 있는 발판이 필요해요."

비칼이 묘한 눈으로 날 응시했다.

정확히 알 순 없지만 뭐 하는 새낀가 하는 눈빛이었다.

내가 생각해도 요구사항이 많긴 해.

납득이 가는 눈빛이었다.

어디서 굴러온지도 모르겠는 녀석이 1급 헌터에게 이래라저래라 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스이카를 휘두르려면 발을 딛고 있어야 하는걸.

"이번엔 베어야 한다."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인 비칼.

"내 모래도 무한은 아니니까."

마지막 말을 남겨두고 비칼이 아포피스 쪽으로 몸을 돌렸다.

* * *

쾅! 쾅! 쾅!

비칼의 모래가 아포피스의 꼬리를 시작으로 천천히 빛을 몰기 시작했다.

예상과 같이 꼬리에 꽂히는 모래를 피해 위쪽으로 계속 이동하는 문양의 빛.

[비젼]

아포피스의 눈에 띄지 않도록 수리검을 이용해 하늘 위로 몸을 이동시켰다.

목표는 아포피스의 뒤통수.

뒤통수의 노려보며 타이밍을 기다렸다.

스이카의 속도면 충분하다.

아주 잠시라도, 찰나의 순간이라도 좋으니 아포피스의 빛이 스이카의 경계에만 들어오면 됐다.

콰가가가가!

아래에서 위로 올라오는 수백, 수천 개의 모래 바늘.

빛은 빠른 속도로 자신을 덮치는 공격으로부터 몸을 피하고 있었다.

꽈악.

수리검을 잡은 손에 힘을 주며 비칼의 신호를 기다렸다.

드드득!

…!

비칼의 모래가 모여들어 아포피스의 뒤쪽에 작은 지형을 만들었다.

스이카를 휘두를 수 있는 발판.

얼추 갖추어진 지형을 향해 수리검을 던졌다.

[비젼]

모래로 이루어진 발판에 수리검이 부딪히기 직전.

몸을 이동시켜 수리검을 잡아냈다.

촤아악!

지형에 발이 닿기 무섭게 수리검을 집어넣었다.

[사사키 코지로 - 스이카]

콰가가가가가!

가까운 아포피스의 몸으로 비칼의 모래 바늘이 꽂혀 오고.

쉴새 없이 문양을 타고 올라오던 빛이 어느새 모래 발판 근처까지 도달했다.

철컥.

우웅…!

원형으로 퍼져 나가는 스이카의 경계.

올라오는 빛을 보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꽈악.

경계에 들어오는 순간, 한 발이면 충분했다.

"후우."

와라.

서서히 경계로 접근하는 문양의 빛에 오른손에 힘을 줬다.

그리고 경계에 빛이 도달하는 순간, 천천히 스이카를 검집에서….

쿵!!

!?

언제 쏘아진 걸까.

마치 타이밍을 노린 듯 발사된 아포피스의 거대한 비늘에 모래 발판이 부서지고.

몸이 허공으로 떠오르며 그려졌던 스이카의 경계가 흐릿해졌다.

* * *

발판이 무너지며 스이카의 경계가 사라졌다 생각한 순간.

…?

모든 게 멈춰버렸다.

아포피스를 공격하던 모래도, 모래를 피해 움직이고 있던 빛도, 쉴새 없이 울부짖으며 머리를 흔들던 아포피스도 정지해버린 상태.

머리를 아래로 한 채 떨어지던 나도 마찬가지였다.

워낙 순간에 일어난 일이라 눈만 끔뻑이고 있는 내게 누군가 걸어왔다.

여전히 찰랑찰랑한 백발을 휘날리고 있는 귀신의 남자, 사사키 코지로.

사사키 코지로는 허공을 걸어와 거꾸로 매달려 있는 내 바로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뭐 하고 있는 거지?"

"… 떠… 떨어지고 있는데요."

너무 솔직한 대답이었는지 피식 웃음을 터뜨리는 코지로.

게이지가 꽉 찼었던 스이카를 떠올리며 코지로를 향해 입을 열었다.

"땅을 딛고 있지 않아도 스이카를 휘두를 방법이 없을까요?"

지금 당장 내게 필요한 것이었다.

아포피스의 공격으로 발을 디딜 수 있는 모래 발판은 사라진 상태.

문양의 빛은 눈앞까지 와 있었다.

비칼이 모래가 무한이 아니라고 했던 만큼 지금 이 순간을 놓치면 또 언제 이 범위를 잡을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지금까지 스이카를 몇 번이나 휘둘렀지?"

"음… 1000번은 되지 않을까요?"

그리스에서 메토스의 군단을 상대로 몇 시간 동안 셀 수 없이 휘둘렀던 스이카.

세보진 않았어도 얼추 1000번 가까이는 휘둘렀을 것 같았다.

"999번. 네가 스이카를 휘두른 횟수다."

"오."

"오가 아니다. 나를 통해 사용법을 알고 있다 한들 넌 검에 대해 아무런 기초도 없는 상태니까. 딱 발도만 사용할 수 있는 거지."

"그… 그렇죠."

"기초와 이해가 없다는 건 검에 사용되는 근육이 발달 되지 않은 건 물론이고 흐름도 전혀 납득하지 못한 것. 이 상태로 발도를 휘두르는 건 계속해서 팔에 부담이 될 거야. 보통 몸이 아니라 금방 회복되는 거 같긴 하지만." 

아무 말 없이 듣고 있자 사사키 코지로가 말을 이어나갔다.

"그래서 더더욱 너에겐 발을 디딜 곳이 필요한 거다. 발도는 몸의 힘만으로 휘두르는 게 아니니까."

"몸의 힘만으로 휘두르는 게 아니라면…?"

"발도를 휘두르며 느꼈을 거다. 땅 아래에서부터 무언가 끌어 올려지는 감각을."

"…!"

코지로의 말대로였다.

발아래에서부터 올라온 힘을 스이카로 전달하고, 그 응축된 힘을 폭발적으로 뿌려내는 감각.

"땅의 힘을 사용하고서도 그 정도의 부하다. 만약 발을 딛지도 않고 순수 힘으로만 발도를 사용하려 한다면, 오른팔이 박살 나겠지."

"… 그래서 발을 떼면 스이카가 풀린 거군요."

코지로가 나를 위해 준비해둔 최소한의 안전장치였다.

두 발을 온전히 딛고 있지 않은 상태에선 사용할 수 없도록, 잠깐의 방심으로 자세가 틀어져 오른팔이 박살나지 않도록 강제로 풀려버리게 한 것.

고개를 끄덕인 코지로가 입을 열었다.

"이제 천 번 가까이 휘둘렀으니, 스스로도 어느 정도의 리스크가 있는지는 잘 알겠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휘두르게 해주세요." 

단호하게 대답하자 날 바라보며 묘한 미소를 짓는 코지로.

"그러지."

대답과 동시에 공간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움직이며 스이카를 사용할 수 있는 것. 제대로만 사용할 수 있다면."

싱긋.

"많은 게 가능해질 거다."

화악! 

 

* * *

멈췄던 시간이 풀리고.

후우웅!

추락하며 밀려드는 공기압이 느껴졌다.

신기한 일이었다.

공간에서 빠져나온 후 왠지 모르게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듯한 느낌.

반짝.

문양을 타고 위로 향하는 아포피스의 빛을 바라보며 사라지지 않은 스이카의 손잡이로 손을 올렸다.

철컥.

파아악!

동시에 흐릿해지던 스이카의 경계가 선명해지며 아포피스의 빛에 도달했다.

… 후우.

[발도]

끼아아아아아아악---!!

132화. 아포피스의 송곳니

"…."

비칼이 쓰러지고 있는 아포피스를 바라봤다.

백운의 말대로였다.

무슨 공격을 해도 금새 회복하던 녀석이 빛을 베이자 순식간에 무너져버렸다.

쿠구구구궁!

크기가 크기이다 보니 쓰러지는 것 자체만으로도 장관을 연출해내고 있는 아포피스.

아포피스가 완전히 쓰러지자 비칼이 조금 전 말도 안 되는 소리와 함께 검기를 뿜어내고 바닥에 착지한 백운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뭐 하는 놈이지.'

이곳에 도착한 순간부터 비칼의 관심은 아포피스보단 백운에게 가 있었다.

- 파아앙!

처음 주먹 한 방에 저 거대한 데몬을 머리부터 꼬리 끝 언저리까지 터뜨려 버린 말도 안 되는 위력.

그리고 사방에서 날아드는 비늘을 피하며 등을 타고 올랐던 속도와 반사신경까지.

- 저 빛을 베면 될 거 같아요, 발판 좀 만들어 주세요.

순간 순간의 상황 판단과 눈썰미까지 좋았다.

아무리 적게 쳐도 S급은 되어 보이는 데몬을 상대하면서도 겁에 질리긴커녕 냉정한 상황 판단과 파훼책을 생각하는 여유.

'안될 거라 생각했는데.'

비칼 역시 백운이 말한 문양의 빛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말도 안 되는 빛의 속도에 저걸 파괴하는 건 불가능할 거라 생각했다.

그렇기에 이번 시도까지만 해본 후 위험을 감수해서라도 모래의 힘을 더 끌어다 쓰려는 중이었다.

아포피스의 몸 전체를 찍어 누를 수 있을 만한 모래를 모으기 위해서 말이다.

- 콰앙!!

발판이 무너지고 자세를 잡고 있던 백운이 추락하는 걸 보며 안되겠구나 라고 확신하는 순간.

흐릿해지던 푸른 경계가 다시 선명해지며,

- 끼아아아아아악---!

귀를 찢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비칼조차 갑작스런 소리에 눈을 찡그렸을 정도의 소리.

- …!

그리고, 눈을 찡그렸다 다시 뜨는 그 짧은 순간에 모든 게 끝나 있었다.

비칼의 눈으로조차 따라가지 못했던, 언제 뿌려진 지 알 수조차 없는 백색 검기는 흐릿해지고 있었고, 검기가 베고 지나간 아포피스의 몸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

찰나의 순간에 일어난 일들을 떠올리며 비칼이 바닥에 엎어져 있는 백운을 응시했다.

"꾸어어!!"

조금 전까지만 해도 혀가 내둘러지는 퍼포먼스를 보여주더니, 지금은 오른팔을 붙잡은 채 이리저리 데굴데굴 굴러다니고 있는 백운.

그런 백운을 보며 비칼이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이상한 놈이군.'

* * *

살려줘!

끔찍한 고통이었다.

정확히 빛을 베고 착지한 순간.

됐어!

확실하게 베어진 빛에 주먹을 움켜쥐려는 찰나였다.

찌이잉… 우두둑!

허공에서 뿌려낸 발도의 리바운드로 근육이 시원하게 뒤틀려버렸다.

가만히 듣기에도 공포가 밀려오는 뒤틀림 소리와 함께 밀려온 끔찍한 고통.

바닥을 굴러다니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다.

제한을 걸어둔 이유가 있었어억!

다행이었다.

오늘 이전에 이런 고통을 겪었었다면 딛고 있는 땅 없이 스이카를 휘두르는 게 망설여졌을 터였다.

"백운 님!"

아포피스가 쓰러지고 잠시 후.

정부의 지원을 요청한 건지 셀린을 포함한 여럿의 헌터가 내쪽으로 달려왔다.

그런 셀린을 향해 온전한 왼손을 들어 뒤쪽을 가리켰다.

"다크메타! 저 말고 다크메타부터 빨리이!"

머리맡.

아포피스의 몸이 분쇄된 곳엔 전에 발견했던 것보다 훨씬 큰 다크메타가 일렁이고 있었다.

* * *

호로록.

"으음, 딜리셔스 하구만."

이집트 카이로의 수도 병원.

붕대로 꽁꽁 싸매어진 오른팔을 보며 음료수를 홀짝였다.

모래를 마셔가며 아포피스와 싸워서인지 몹시 칼칼했었는데, 얼음장 같은 음료를 때려 넣으니 뇌까지 시원해지는 기분이었다.

진짜 개아프다.

두 번 쓰라면 못 쓰겠는데.

물론 필요하면 쓰게 되겠지만.

최대한 자제하고 싶은 고통이었다.

땅을 딛고 안 딛고에 이런 큰 차이가 있다니.

- 많은 게 가능해질 거다.

시간이 풀리기 전 사사키 코지로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정확히 어떤 의미에서 그런 말을 한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대충 떠올려봐도 어떤 자세로든 자유롭게 스이카를 휘두르는 게 가능해졌다는 건 정말 큰 강점이었다.

웬만한 이의 눈으론 쫓아올 수조차 없는 발도.

꽤 많은 활용이 가능할 것 같았다.

수리검을 먼저 던지고 비젼을 사용한 후에 스이카를 휘두르는 게지.

그럼 적은 비젼으로 나타난 내 움직임에 놀람과 동시에 목이 댕강! 하고 날라갈 터였다.

흡족하구먼.

물론, 어디까지나 팔이 이렇게 안 된다는 가정하에서 가능한 전략이었다.

한 번 휘두르면 팔이 이 지경이 되어버리니 무턱대고 휘두르는 건 불가능했다.

"흐음."

한숨을 쉬며 창가로 고개를 돌렸다.

셀린 님은 뭐 좀 발견했으려나.

병원으로 따라오려는 셀린을 애써 연구실로 돌려보냈었다.

아포시스가 무너지며 남긴 다크메타.

다크메타의 흔적이 따끈따끈하게 남아있을 때 조금이라도 더 추적해야 했다.

그 송곳니는 또 뭐지.

쓰러진 지 얼마 안 되어 검은 액체로 흩어져 버렸던 아포시스.

아포시스가 남긴 건 다크메타 뿐만이 아니었다.

몸과 마찬가지로 신박한 문양이 잔뜩 새겨진 송곳니를 놓고 간 것이었다.

어디다 쓰긴 쓰는 거 같은데.

일단은 다크메타와 송곳니 둘 다 셀린의 연구실로 옮겨진 상태.

부디 셀린이 무언가 알아내기를 바라야 했다.

시간이 많진 않을 거야.

헬리오폴리스에서 만났던 할머니.

할머니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면 아직 불꽃은 살아있었다.

하지만, 시간 문제였다.

공간에서 봤던 상태를 보면 얼마 가지 않아 불꽃은 다크메타들에 집어 삼켜질 게 분명했다.

벌떡!

공간의 상황을 떠올리며 침대를 박차고 일어났다.

안돼!!

이집트의 미래가 너무 걱정되어서는 아니었다.

이집트 사람들이 들으면 경을 칠 노릇이었지만.

더 지체했다간 사라져 버릴 나의 불꽃이 걱정됐다.

아직 내건 아니지만.

공간의 생김새와 이집트의 신화, 헬리오폴리스에서 만났던 할머니와 아포피스까지.

이것들이 가리키는 건 분명 혼돈의 신 세트와 태양의 신 라였다.

그리고 선명한 황금빛을 냈던 불꽃. 

어떤 형태의 무기인지는 아직 감이 오지 않았지만 라가 가지고 있었을 무기임엔 틀림이 없었다.

시… 신의 무기야!! 놓칠 수 없어!

아테네와 이카로스의 경우처럼 라 역시 진짜 신이 아닐 수도 있었다.

하지만, 신이나 아니냐의 여부를 떠나 그런 불꽃을 뿜어낼 수 있는 무기를 놓쳤다간 살아가는 내내 꿈자리가 사나울 터였다.

꽈악!

멀쩡한 왼손을 움켜쥐며 굳은 결의를 다졌다.

라의 불꽃.

무슨 일이 있어도 내 손에 넣는다!

"환자분."

"옙!"

어느새 벌떡 일어나 있는 내 침대로 다가온 의사 선생님.

무표정한 의사 선생님이 입을 열었다.

"누우세요."

"네… 넵."

많은 이의 시선을 느끼며 조심스럽게 침대로 몸을 눕혔다.

* * *

카이로 대학교의 연구실.

책임자인 셀린이 조심스럽게 송곳니를 살폈다.

생김새만 봤을 땐 신화 속에 나오는 아포피스의 재림이라 봐도 무리가 아니었던 데몬.

'이 문양은…!'

본 적이 있는 문양이었다.

빠르게 책장으로 걸어간 셀린이 책들을 훑기 시작했다.

어느 낡은 책 앞에서 손을 멈추는 셀린.

# 아포피스와 라.

제목만 봤을 땐 흔하디흔한 내용일 거라 생각할 수 있지만.

이 책 속엔 다른 책엔 적혀 있지 않은 내용이 담겨 있었다.

단순 라와 아포피스 사이의 관계를 정리한 게 아닌, 아포피스가 지니고 있는 기능성에 대한 내용이었다.

# 아포피스는 라의 단순한 적이 아니었다. 적임과 동시에 라에게 접근하기 위해 필요한 걸 지니고 있는 존재이다.

라에게 접근할 수 있는 존재.

그리고 책엔 이어서 이런 말이 쓰여 있었다.

# 아포피스의 독기를 품은 송곳니. 그 송곳니를 뽑을 수 있는 자만이 라에게 도달할 수 있으리라.

거대한 몸체에서 송곳니와 다크메타만을 놓고 사라진 데몬.

이 책이 어느 시대에, 어떤 걸 보며 쓰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 상황에 있어선 몹시 신빙성이 느껴지는 내용이 아닐 수 없었다.

'어떻게 사용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만약 라가 실존하고 어딘가에 숨어 있다면. 분명 쓰이는 곳이 있을 거야.'

송곳니에 새겨진 문양도 해석이 더 필요하긴 하겠지만, 어떤 거대한 문양을 이루는 일부분으로 보였다.

송곳니와 이어질 거대한 문양을 찾는 게 관건인 셈.

슥.

셀린이 고개를 돌려 이번에 가져온 다크메타를 살폈다.

보존이 잘 되어 흔적이 그대로 유지되어있는 상태였다.

꿀꺽.

연구실로 들어왔음에도 셀린은 다크메타를 쉽사리 살펴보지 못하고 있었다.

다크메타를 통해 아포피스가 탄생하고 온 곳을 알아낼 수 있을 터.

그럼에도 망설여지는 건 감당할 수 없는 현실을 마주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

이전의 다크메타를 통해 진행한 여러 가지 실험.

아무리 작게 쪼개고 잘라내도, 폭발을 일으키고 다른 헌터의 힘을 때려 박아도, 다크메타는 소멸되지 않았었다.

그때마다 적절한 형태로 바뀌어 가며 계속해서 생명을 이어가고 있는 것.

'숙주가 죽으면 사라진다고 생각했었는데… 사실은 그 자리에서만 없어진 게 아닐까.'

숙주가 죽으며 잠시 모습을 나타냈다 사라지는 다크메타를 보며 단순히 죽은 거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무슨 짓을 하던 절대 죽지 않는 다크메타를 보며 셀린은 새로운 가능성을 떠올렸다.

숙주의 죽음과 상관없이 다크메타는 소멸되지 않으며, 그저 그 자리를 떠나 새로운 숙주를 찾아가는 게 아닐까 하는 가능성.

'만약 다크메타가 애초에 우리가 어쩔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면… 근원지를 알아낸다 한들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있을까.'

불안한 빛이 드리워진 셀린의 눈.

'….'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던 셀린이 고개를 흔들며 다크메타로 다가갔다.

* * *

카이로 근처의 피라미드.

"이쪽으로 오세요!"

"이집트의 자랑인 피라미드입니다. 옛날 파라오들이 묻혀 있는 곳이죠!"

이집트로 관광 온 사람들이 피라미드 주변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을 이끌고 있는 가이드가 쉴새 없이 피라미드의 역사와 역할에 대해 설명해 나갔다.

흔들.

"…?"

한창 설명을 하던 가이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조금 전 발밑에서 느껴진 정체불명의 진동.

"잘못 느꼈나."

아무렇지도 않은 듯 구경 중인 사람들을 바라보며 가이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자! 여기까진 보고 다음 장소로 이동…?"

관광객들의 뒤쪽.

광활한 사막만이 존재하는 방향에서 엄청난 크기의 모래 먼지가 일어났다.

"어…?"

어째서인지 점점 선명해지고 있는 모래 먼지.

정체불명의 모래 먼지는 빠른 속도로 가이드와 관광객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

일 분도 채 되지 않는 시간이었다.

어느새 정확한 식별이 가능할 정도로 가까워진 모래 먼지.

모습을 드러낸 건 단순한 먼지 수준이 아니었다.

콰가가가가가!!

엄청난 크기의 모래 폭풍.

"피… 피하세요! 피라미드 안으로!! 빨리!!"

뒤늦게 모래 폭풍을 발견하고 몸을 피하려 했지만.

"으… 으아아!"

이미 늦어버렸다.

말도 안 되는 속도로 코앞까지 다가온 모래 폭풍.

바로 앞까지 닥쳐온 폭풍을 보며 가이드가 무릎을 꿇었다.

"시… 신이시여."

그런 가이드의 눈에 들어온 무언가.

거대한 다크메타가 모래 태풍 안에서 일렁거리고 있었다.

133화. 증식

와 이놈의 몸은 대체 뭘까.

하루 오지게 자고 일어나서일까.

잠에서 일어나자마자 확인한 건 어제 박살났던 오른팔이었다.

요근래 그리스에서부터 쉼 없이 혹사당하고 있는 나의 불쌍한 오른팔.

그럼에도 오른팔은 다시 한번 엄청난 회복력을 보이며 놀라움을 주고 있었다.

까딱.

어제까지만 해도 조금도 움직이지 못했던 손가락이었다.

조금만 힘을 줘도 침대에서 튀어 오를 것 같은 고통이 느껴졌었기 때문이다.

여전히 아프긴 하지만.

지금은 조심스럽게 힘을 주면 손가락 정도는 까딱일 수 있을 정도로 기능이 많이 돌아와 있었다.

물론 아주 조심스럽게 힘을 흘려보내야 했다.

조금이라도 과하게 힘을 흘려보내면 엄청난 고통이 느껴지는 건 어제와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조심조심.

조심스럽게.

쾅!!

빠악!

"끄억!"

갑자기 벌컥 열린 문에 나도 모르게 힘이 들어간 오른팔.

손에서 전기로 지진 듯한 고통이 밀려 왔다.

원망 섞인 눈초리로 바라본 곳엔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 셀린이 서 있었다.

"백운 님! 찾았어요!"

"네… 네?"

상기된 얼굴로 날 바라보고 있는 셀린.

"아포피스가 온 곳, 그리고 다크메타들의 근원지요!!"

* * *

침대에 걸터앉은 셀린이 지도를 펼쳤다.

카이로로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은 사막 지대.

그곳에 거대한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었다.

"바다에 빙하를 만들었던 건 아포피스로부터 나온 녀석이었어요. 새끼의 새끼인 셈이죠."

핸드폰에 아포피스로부터 얻었던 다크메타를 보여주는 셀린.

"이 다크메타엔 엄청나게 강한 흔적과 한기가 묻어 있었어요. 처음엔 단순히 크기가 커서라고 생각했는데."

셀린이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었어요, 탐구를 통해서 본 장소. 아포피스에 들어 있던 다크메타는 이전 것과 비교조차 안 되는 거대한 곳에서 분리되어 나왔기에 다른 거였어요. 그게 얼마나 거대한 건지는… 뭐랄까, 제 인식 범주를 아득히 벗어나서인지 가늠이 잘 안 되고요."

인식 범주를 벗어난 장소.

공명으로 봤던 공간이 떠올랐다.

이번이 진짜겠네.

공간이 아포피스를 낳았고, 아포피스가 또 다른 다크메타를 낳았다.

아마 이렇게 태어난 다크메타는 또 다른 곳으로 퍼져 새로운 다크메타를 낳고 있을 터.

다크메타가 어디까지 퍼져 있을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지도에 동그라미 그려져 있는 곳은 카이로 근처 사막에서 가장 큰 피라미드에요."

피라미드.

아무 기계도 없던 고대에 어떻게 지은 건지 아직까지도 갑론을박이 활발한 건축물이었다.

이집트의 왕들의 무덤으로 지어졌으며 사후 세계와 현세를 잇는 임시 거처라고도 불리는 장소.

"…."

여기까지 설명을 한 셀린이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지금까진 장소를 발견했다는 사실에 흥분해 말을 이어갔지만, 무언가 걱정이 있는 얼굴이었다.

"이곳으로 가도 될지는 확신이 잘 서지 않아요."

탐구를 통해서 뭔가 느낀 건가.

내가 공명으로 봤던 것만큼은 아니더라도, 인식 범주를 벗어났다는 말을 보면 셀린 역시 비슷한 무언가를 느꼈을 가능성이 있었다.

아찔하긴 했지.

많이 순화해서 아찔이었다.

공간에서 느껴진 건 세 가지 정도였다.

몸을 저릿하게 만드는 한기와, 아득함, 그리고 막연함이었다.

"제가 여러 가지 시도를 해봤는데… 다크메타는 소멸되지 않더라고요."

지금까지 사라졌던 다크메타도 소멸된 게 아닌 것 같다고 셀린은 말했다.

"저희가 간다고 해서 무언가 가능할지 모르겠어요. 일단 정부로 지원 요청을 해서 피라미드 앞에서 합류하기로 했는데 이게 옳은 선택일까요? 괜한 피해만 늘리는 게 아닐까요?"

셀린은 걱정하고 있었다.

다크메타를 통해 근원지를 알아낸 시점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다 한 것과 마찬가지였음에도.

자신이 알아낸 정보로 인해 더 많은 사람이 다칠지도 모른다는 걱정이었다.

저희가 안 가면 더 최악의 상황이 일어날 거예요.

사람이 다치냐 안 다치냐의 문제는 부차적인 문제였다.

결국 불꽃이 삼켜지고 공간에 묶여 있던 다크메타가 터져 나온다면.

다치는 걸 넘어 상상도 안 되는 끔찍한 일이 벌어질 게 분명했다.

"피라미드 앞에서 합류하기로 했다고 하셨죠?"

"아, 네."

오른팔에 감긴 붕대를 풀며 셀린을 바라봤다.

근원지의 위치가 확정되면 셀린 님은 데리고 나가게 해야 돼.

공간에서 느꼈던 한기의 양을 봤을 때, 셀린은 그곳에 들어가선 안 됐다.

직접적으로 몸에 피해를 주는 건 아니었지만, 보통 사람의 정신으로는 이겨낼 수 있는 한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저벅.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저희한테는 선택지가 없어요. 제 생각엔 다크메타가 퍼지면 퍼졌지 알아서 사라질 거 같진 않거든요."

"… 맞아요."

"그러니까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셀린을 바라보며 고개를 까닥였다.

"일단 가보죠."

* * *

한 시간 전, 정부의 작전실.

"장관님! 기자에서 거대 데몬들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어제 피라미드를 관광하던 팀이 통쨰로 사라졌다고 합니다. 각 국가의 관광객들이 섞여 있던 터라 대사관들에서 확인 요청이 빗발치고 있습니다."

이집트의 국방부 장관인 모함자가 미간을 찌푸렸다.

'대체 무슨 일이지.'

어제까지도 엄한 곳에서 데몬이 튀어나오고 이상 기후가 나타나는 문제는 있었지만.

모함자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었다.

단순한 이벤트 정도로 여겼기에 적절하게 대처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사그라들 거라 생각한 것.

"헌터들 배치는?"

"각 데몬이 나타난 곳에 배치는 하고 있습니다만… 끝이 없습니다."

"끝이 없다니? 무슨 말입니까."

삑.

작전실에 있던 참모가 화면으로 카이로 근처 마을의 영상을 띄웠다.

들이 닥친 거대한 데몬을 제거하자 튀어나오는 다크메타.

이전엔 숙주가 죽으며 사라졌던 데크메타였지만, 지금은 달랐다.

숙주가 죽기 무섭게 사라지더니 곧이어 다른 데몬을 거대화시켜 나타났다.

"무한 반복이라고 합니다. 오히려 현장에 있는 헌터들의 힘만 점점 소모되고 있습니다."

"그럼 다크메타를 부수는 건요? 숙주에서 나오기 무섭게 없애면 되지 않습니까?"

모함자 장관의 말에 참모가 고개를 내저었다.

"파괴가 되지 않습니다."

"뭐라고요…?"

"온갖 능력으로 공격해봤지만 소멸되기는커녕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꿀꺽.

모함자가 아찔함을 느끼며 마른침을 삼켰다.

데몬 발생의 원인인 다크메타가 파괴되지 않는다면 지금까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심각한 상황이었다.

"자… 장관님. 큰일입니다."

"…?"

이보다 더 큰 일이 날 수 있는지 의심스러웠지만, 모함자가 빨리 말하라는 눈으로 참모를 바라봤다.

삑.

"!!"

잠시 후 바뀐 화면.

참모가 말한 큰일이 뭔지는 굳이 보고로 듣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카이로를 향해 다가오고 있는 말도 안 되게 큰 모래 폭풍.

이집트에서 수십 년을 산 모함자조차 본 적이 없는 엄청난 폭풍이었다.

"…."

화면이 띄워지기 무섭게 작전실로 무거운 정적이 찾아왔다.

사방에서 나오고 있는 데몬도 큰 문제였지만, 다가오고 있는 폭풍은 더 큰 위기였다.

"어떻게 저런 게 일어난단 말입니까."

모함자가 아득함을 느끼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물론 이런 비상식적인 사태에 모함자에게 대답해줄 수 있는 건 아무도 없는 상태.

'다 쓸려나갈 거다.'

가끔 사막에서 모래 폭풍이 불긴 했지만, 이동 정도를 어렵게 만드는 수준이었다.

단 한 번도 저런 토네이도 급의 폭풍이 발생했던 적은 없었다.

기상학적으로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어떻게 해야…!'

한 번도 발생한 적 없기에 이집트의 도시는 저런 폭풍에 대비되어 있지 않았다.

도착하는 순간 복구 불가능한 피해가 생길 터였다.

"장관님! 조금 전 연구를 맡고 있던 셀린 교수로부터 보고가 올라왔습니다. 다크메타의 근원지를 찾아냈다고 합니다!"

"…!!"

오늘 전까지는 다크메타에 큰 신경을 기울이지 않았었기에, 대학 교수에게 맡겨둔 후 잊고 있었던 의뢰.

오늘 들은 보고들 중 처음으로 반길만한 보고였다.

"헌터의 지원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1급 헌터 중 바로 지원 가능한 인원 있습니까?"

"모두 각 도시를 방어하고 있는 중이고… 카이로 근처에 비칼 님이 있습니다."

장관 모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 셀린 교수 지원하라고 하세요! 지금 당장!"

* * *

셀린을 따라 도착한 피라미드 앞.

"허."

셀린의 보고를 받아서인지 미리 피라미드 앞에 도착해 있는 헌터들.

다가가서 인사를 건네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피라미드 근처를 가득 채우고 있는 엄청난 수의 데몬들과 전투를 벌이고 있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저… 저게 무슨…!"

옆에 있던 셀린도 놀란 얼굴이었다.

죽은 데몬들 몸에서 튀어나오고 있는 다크메타.

다크메타는 나오기 무섭게 다른 데몬에 옮겨붙어 더욱 덩치를 키워가고 있었다.

셀린 님 생각이 맞았네.

숙주가 죽어서 소멸된 게 아니었다.

다른 숙주로 옮겨 가느라 사라졌던 것.

쾅!!

데몬 무리로 거대한 모래 주먹이 떨어졌다.

아포피스 때 봤던 비칼도 와 있는 모양이었다.

"셀린 님! 백운 님!"

나와 셀린을 발견한 무하타와 헤리아가 달려왔다.

"이게 무슨 일이에요? 왜 갑자기 데몬들이…!"

"모르겠어요. 피라미드에서 갑자기 많은 수의 다크메타가 튀어나왔어요. 동시에 데몬들이 나타났고요. 여기뿐만이 아니에요, 이집트 각지에서 다크메타에 의한 피해가 속출하고 있어요!"

불이 꺼지고 있다.

나도 덩달아 마음이 급해지기 시작했다.

다크메타의 발이 풀렸다는 건 불꽃에 의한 억제력이 약해지고 있다는 증거였다.

아직 꺼진 건 아니야.

만약 불꽃이 완전 삼켜졌다면.

이 정도가 아니었을 것이다.

대처할 생각은커녕 손 놓고 지켜볼 수밖에 없는 참사가 났을 터.

"시간이 없어요, 빨리 들어야겠어요."

다급한 내 말에 셀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탐구 능력을 통해 느낀 것 때문인지 셀린은 시간이 없다는 내 말에 굳이 되묻지 않았다.

"헤리아 님, 송곳니는요?"

"가져왔어요! 이쪽으로 오세요!"

오는 길에 셀린이 설명했던 송곳니.

정확하진 않지만 다크메타의 근원지로 들어갈 때 필요할 거 같다며 챙겨온 것이었다.

"제가 들고 갈게요."

"네…?"

거대한 송곳니를 구르마에 실은 채 힘겹게 끌고 있는 헤리아와 무하타.

물론 구르마라는 싸구려 단어에 비해 무척이나 최신식 수레로 보였지만, 어쨌든.

덥썩.

"어… 어!"

상황이 상황인 만큼 대답을 기다려줄 틈은 없었다.

헤리아의 수레에서 송곳니를 집어 어깨에 짊어졌다.

"헤리아 님, 몸이랑 고정 좀 시켜주세요!"

"네… 네!!"

사슬을 뿜어내 내 등과 송곳니를 고정시키는 헤리아.

"가죠!"

당황하는 세 사람을 뒤로하고 피라미드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쿠아아아아!!

"!?"

피라미드를 향해 얼마나 움직였을까.

앞쪽으로 밀려든 모래의 파도가 길을 막았다.

"비… 비칼 님!?"

따라오던 무하타와 헤리아가 고개를 돌렸다.

옆에서 천천히 걸어오고 있는 비칼.

가까이 다가온 비칼이 입을 열었다.

"피라미드로는 못 간다."

"그게 무슨…?"

무미건조하게 말한 비칼이 나와 셀린을 응시했다.

"출입 금지다."

134화. 비켜

당황스러운 눈으로 길을 막고 있는 비칼을 바라봤다.

출입금지라니.

한시라도 빨리 피라미드로 가야 하는 상황에 무슨 말일까.

"곧 피라미드로 폭격이 떨어질 거다. 물러나라."

다급해진 셀린이 입을 열었다.

"폭격이라뇨…? 모함자 장관님께 저희가 들어간다고 보고를 올렸습니다."

모함자 장관.

셀린이 오는 길에 계속해서 보고를 하던 사람인 것 같았다.

보고의 마지막엔 반응하는 다크메타를 보며 근원지가 있는 곳으로 피라미드를 찍어줬던 셀린. 

"내려온 명령이 변경됐다. 기다려 줄 여유가 없다더군."

"무슨…!"

셀린이 근원지를 찍어주기 무섭게 모함자는 인원 투입에서 폭격으로 계획을 변경한 듯했다.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지만.

이집트 사방에서 다크메타로 인한 피해가 속출하고 있었다.

이집트 국가 입장에선 대학 교수와 정체불명의 헌터한테 맡기기보다는 시원하게 근원지를 날려버리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모함자가 간과하고 있는 게 있었다.

"다크메타는 폭격에 사라지지 않아요! 오히려 피라미드 안에 갇혀 있을 다크메타들에게 자유를 주는 꼴이 될 겁니다!"

수많은 실험 속에서도 다크메타는 파괴되지 않았다는 것.

마음이 급해 이 사실은 생각지도 못하고 일단 미사일부터 꽂고 보려는 결정이었다.

회귀 전에 본 게 없으니 답답하네.

애초에 현재까지 흘러온 흐름도 회귀 전과는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애초에 내가 개입하지 않았다면 셀린이 타고 있던 배는 바다의 빙하에 부딪혀 침몰했을 터.

그 뒤에 제2의 셀린이 나타나 근원지를 밝혀냈을 수도 있지만, 어디까지나 작은 가능성이었다.

기억 속엔 이집트에 관련된 기사가 없다.

유물관에 박혀 여러 역사는 읽었어도 정말 큰 사건이 아닌 이상 다른 나라의 기사까지 챙겨보진 않았었다.

그럴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었기도 하고 굳이 찾아볼 관심 역시 없었기 때문이다.

다크메타의 증식하는 특성을 봤을 땐 아마 세계가 떠들썩했을 텐데…. 모르겠네.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기억이 나지 않는 건 어쩔 수 없는 일.

지금 활용할 수 없는 회귀 전의 정보가 없으니 현재 내가 가지고 있는 것에 집중해야 했다.

"미사일이 떨어지는 순간 마지막으로 다크메타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사라질 거라고요!"

"…."

무하타와 헤리아는 비칼과의 아득한 급수 차이로 이미 고개를 숙이고 있는 상황.

셀린만이 간절한 얼굴로 말하고 있었지만, 비칼의 표정엔 어떠한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어쩔 수 없다. 명령이니."

"!!"

꿈쩍도 하지 않는 비칼에 셀린의 얼굴로 절망감이 드리웠다.

"지금 나와있는 다크메타는 아주 극히 일부분이에요."

"…?"

그런 셀린을 뒤로하고 비칼에게 다가가 입을 열었다.

"솔직히 피라미드 안으로 들어간다고 해서 막을 수 있을지 없을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셀린 님 말씀대로 적어도 무언가를 해볼 수 있는 기회는 있을 겁니다."

빨리 비켜주세요.

급하단 말이야.

지금으로부터 딱 세 마디.

세 마디 후에도 비칼이 비키지 않는다면 강행돌파 할 생각이었다.

지금 내 무기가 몹쓸 것들에게 삼켜지고 있다고!

아마 비칼이 아니었다면 길을 막는 순간 기절시킨 뒤 나아갔을 터였다.

그럴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니 세 마디는 해보기로 한 것.

충분히 따돌릴 수 있다.

비칼이 가지고 있는 모래가 강력하단 건 알지만, 나 혼자라면 면도칼을 들고 냅다 뛰거나 수리검을 던져 비칼의 모래를 따돌리는 게 가능했다.

"뭔가 아는 건가?"

잠시 날 응시하다 물어오는 비칼.

셀린이 말했을 때완 또 다른 반응이었다.

"처음 빙하에서 다크메타를 발견했을 때 본 게 있어요. 지금 기어 나온 건 애교 수준인 엄청난 양의 다크메타죠. 아주 짙고 찐한 녀석들요. 아마 조금만 더 지체되거나 미사일이 떨어져 피라미드를 날리면, 갇혀 있던 것들이 튀어나올 거예요. 그땐 돌이킬 수 없을 겁니다."

처음 듣는 이야기에 옆에서 셀린이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지금은 시간이 없기에 나중에 애둘러서 잘 설명할 생각이었다.

"네가 가면 막을 수 있단 건가?"

무미건조한 비칼의 질문에 지체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100% 수준의 확신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무조건 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가서 어떻게든 꺼져가는 라의 불을 지켜내면 충분히 막을 수 있을 거란 생각.

할 수 있냐 없냐 보단 어쨌든 가서 지켜내야 했다.

"아주 높은 확률로 막을 수 있습니다. 한 99%…?"

한 번만 더 물어보면 달린다.

수리검을 꺼낼 준비를 했다.

더 대화가 길어지면 끝도 없을 것 같았다.

"…."

아무 말 없이 날 바라보고 있는 비칼.

여전히 무미건조한 얼굴이었다.

안되겠구만.

그렇게 설득을 포기하고 수리검을 꺼내려는 순간.

우우우우우---!

피라미드를 향해 날아드는 수십 발의 미사일이 눈에 들어왔다.

이런 샹.

솔직히 미사일이 떨어진다고 해서 내가 봤던 공간이 무너진다거나 불꽃이 한 방에 꺼진다거나 할지 여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미 난리가 난 상황에서 굳이 더 변수를 만드는 건 사양이었다.

이렇게 이집트 정부의 적이 되는구나!

스윽.

응…?

리볼버를 꺼내 피라미드로 날아드는 미사일을 격추시키려는 중이었다.

나보다 먼저 손을 들어 올리는 비칼.

곧이어 모여든 모래가 피라미드로 날아가고 있는 미사일을 덮쳤다.

콰가가가가아아아아!!

"!!"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없이 조용히 미사일을 격추시킨 비칼.

비칼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만 가라."

"그건…!"

옆에서 나서려는 셀린을 향해 손을 뻗었다.

"셀린 님, 제가 송곳니 가지고 갈게요. 아마 다크메타가 넘칠 거라 안쪽은 아수라장일 테니까요."

다크메타의 근원지를 찍어 준 이상 셀린이 저기까지 굳이 들어가 위험을 질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백운 님은 이집트와 아무런 관련도 없잖아요. 제 의뢰를 위해 이렇게까지…!"

"…."

할 말이 없었다.

라의 불꽃 아니었으면 옛날에 토꼈지.

최소한의 양심의 가책이 남아 있는지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 상황.

척.

대신 셀린에게 엄지를 치켜세워준 뒤 괜찮다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위… 위 아더 월드 아니겠어요, 어쨌든."

[비젼 수리검]

수리검을 꺼내 몸을 한 바퀴 회전시켰다.

후웅!

강한 바람을 일으키며 피라미드로 날아가는 수리검.

수리검이 시야의 끝에 도달하길 기다린 뒤 입을 열었다.

"좀 있다 봬요!"

[비젼]

* * *

비칼이 조금 전까지 백운이 있던 자리를 바라봤다.

금색 빛이 일렁이는가 싶더니 사라져버린 백운.

아포피스를 잡을 때 하늘로 몸을 옮겼던 기술이었다.

'무슨 능력을 개방한 거지.'

평소 남에게 관심을 갖는 비칼이 아니었지만, 백운에게 만큼은 달랐다.

아포피스와의 전투에서 본 능력의 종류만 해도 네 가지였다.

마치 네 가지 각각의 능력을 한 사람이 개방한 듯한 느낌.

# 비칼 님! 어떻게 된 겁니까! 어째서 미사일을!

귓가에 꽂힌 인이어로 모함자 장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신들이 쏜 미사일을 비칼이 막아 무척이나 당황하고 있는 목소리였다.

"30분만 기다리지."

"…!"

국방부 장관에게도 노빠꾸로 반말을 날리는 비칼에 헤리아와 무하타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 무슨 소립니까! 한시가 급한데! 지금 다시 발사하겠습니다!

"30분이 안 지나면 다시 막을 뿐이다."

# 비칼 님!!

"29분 남았다."

틱.

인이어를 뽑아 던진 비칼이 피라미드 방향을 바라봤다.

어느새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린 백운.

"쯧."

비칼이 한숨을 쉬며 혀를 찼다.

'이게 옳은 선택인가.'

백운과 만난 시간은 아주 짧았다.

아포피스의 전투에서 10분 정도를 같이 싸웠을 뿐, 그 전까지는 대화조차 나눠본 적 없는 사이였다.

그럼에도 비칼은 백운에 대해 자신조차 납득하기 힘든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상황이 어떻든… 해낼 거 같다.'

저벅.

생각해봐야 본인 스스로도 납득되지 않는 선택을 한 비칼.

비칼이 생각하는 걸 멈추고 쏟아져 나오고 있는 데몬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 * *

와우.

멀리서 봤을 땐 몰랐는데 가까이 오니 정말 더럽게 많았다.

피라미드 근처를 가득 채우고 있는 데몬들.

데몬들 안에선 조금 전 봤던 다크메타가 일렁거리고 있었다.

"크아아아!"

"쿠우우우!"

달려가는 날 발견한 건지 가지각색의 데몬이 내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마음 같아선 놀아주고 싶지만.

[잭 더 리퍼]

하늘 땅 가리지 않고 그득한 데몬들로 인해 수리검을 사용하긴 쉽지 않은 상황.

면도칼을 꺼내 달려드는 데몬들을 회피하며 피라미드로 속도를 올렸다.

"크어어어어!!"

무시하고 지나쳐서인지 더 맹렬하게 쫓아오는 녀석들.

고개를 돌려 우루루 몰려오는 데몬들을 바라봤다.

꿀꺽.

우루루 몰려있는 걸 보니 시원하게 쓸어버리고 욕구가 샘솟았지만, 불꽃이 꺼져가고 있기에 참아야 했다.

우웅.

오?

거의 피라미드의 입구까지 도달한 시점.

뒤에 메고 있던 송곳니에서 녹진한 초록색 빛이 솟아났다.

독 터지는 거 아니겠지.

아포피스의 이빨인 만큼 무척이나 걱정되었지만, 다행히 송곳니는 터지지 않았다.

대신 뿜어낸 빛으로 바닥에 선을 긋고 있는 송곳니.

길… 인가?

선은 계속해서 확장되어 피라미드의 한쪽 면을 가리키고 있었다.

사람들이 드나드는 입구가 아닌 막힌 벽을 가리키는 초록빛.

[비젼 수리검]

벽에 거의 도달했을 쯤 수리검을 꺼내 망설이지 않고 휘둘렀다.

뭔지는 몰라도 일단 이쪽으로 가라고 하니 부숴 볼 생각이었다.

콰앙!!

후두둑!!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무너지는 벽면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난 나쁜 놈이야.

세계의 문화 유산을 아무렇지도 않게 뿌개버리다니.

아주 미량의 죄책감을 느끼기도 잠시.

무너진 벽으로 통로가 나타났다.

통로를 따라 쭉 뻗어 나가는 초록빛.

예쓰!

호다닥.

….

빛을 따라 얼마나 달렸을까.

거대한 공당이 나타나며 송곳니의 빛이 거대한 사각형의 벽면으로 향했다.

거대한 벽면에 새겨진 수많은 문양들.

문양의 사이에는 빈 공간이 있었다.

딱 맞겠는데.

송곳니를 꽂아 넣으면 왠지 벽이 열릴 듯한 느낌.

일단 꽂자.

그렇게 벽으로 달려가려는 순간이었다.

우루룽… 쿵! 쿵! 쿵!

갑자기 벽 앞으로 나타난 사족보행의 데몬.

스… 스핑크스?

어디서 나타난 건지 거대한 크기의 스핑크스가 송곳니의 공간을 가린 채 우뚝 서 있었다.

"이곳을 지나가려거든 나의 수수께끼에 답하라."

"!?"

귓가로 스핑크스의 음성이 울려왔다.

사로카와 페샨을 만났었기에 데몬이 말하는 게 그리 놀랍진 않지만, 들을 때마다 당황스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수수께끼?

스핑크스 하면 떠오르는 게 있었다.

문지기와 수수께끼.

수수께끼를 맞추면 보내주고 못 맞추면 영원히 돌로 만들어버린다는 게 피라미드의 문지기, 스핑크스였다.

"묻겠다."

노빠꾸로 질문을 시작하는 스핑크스를 향해 빠르게 달려갔다.

"밤에는…?"

근엄한 목소리로 질문을 읊던 스핑크스.

스핑크스가 의아한 눈으로 달려오는 날 바라봤다.

[유탈라스 - 1단계 의태]

"바빠 죽겠으니까."

탓!

스핑크스의 얼굴로 날아올라 팔을 젖혔다.

"좀 꺼져!!"

콰아아앙!!!

"그어어…!!"

단말마와 함께 산산조각이 나 모래로 돌아가는 스핑크스.

그런 스핑크스를 뒤로하고 송곳니를 들어 봐뒀던 공간에 냅다 꽂아 넣었다.

키이잉…!!

문양에 맞춰진 송곳니를 출발점으로 문 전체에 빛이 퍼지기 시작했다.

135화. 불을 가진 남자와 혼돈을 다루는 소년

송곳니에서 시작된 초록빛이 문에 새겨진 문양의 틈을 채워가며 천천히 퍼져나갔다.

반짝이는 빛이 흐르며 문양을 완성 시켜나가는 듯한 광경이었다.

뭘 그린 거지.

어두운 공간 속에서 펼쳐지는 빛의 향연.

서서히 완성되어 가는 문양에 집중했다.

사람…?

빛이 가장 먼저 그려낸 건 거대한 한 명의 사람이었다.

손에는 이글거리는 불을 들고 있는 남자.

그 남자의 발아래엔 수많은 이들이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다.

그들 위에 떠 있는 거대한 태양까지.

태양의 신, 라.

어떻게 생긴 지 본 적은 없어도 라임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집트 신화에서 태양과 불꽃, 그리고 숭배가 가리키는 건 라 뿐이었기 때문이다.

츠츠츠…!

라와 숭배하는 사람들에게서 조금 떨어진 위치.

그들을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또 다른 소년이 그려졌다.

라에 비해서는 몹시 작은 체구를 가진 소년.

라의 손에서 불꽃이 이글거렸던 것처럼 작은 체구의 소년 주변에도 무언가 일렁이고 있었다.

선으로 이루어진 문양이다 보니 정확히 뭔지는 알 수 없지만, 라가 들고 있는 불꽃과는 다른 성질의 것이었다.

"다크메타."

선으로 이루어진 문양으로만 봐도 뜨거움이 느껴지는 듯한 라의 불꽃.

소년이 들고 있는 건 라의 불꽃과는 반대의 느낌을 풍기고 있었다. 

단순한 선임에도 목을 억죄는 불편함과 몸을 저릿하게 만드는 한기의 일렁임.

다크메타에서 느낄 수 있었던 기운이 그대로 문양을 통해 전달되고 있었다.

키이이이!

어느새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던 문의 문양이 완성되었다.

철컥.

공간으로 거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움직이지 않던 문이 움직이며 만들어낸 소리였다.

…!

잠시 후.

화아악…!

열린 문 사이로 빛이 터져 나오며 머릿속으로 무언가의 기억이 전달되기 시작했다.

* * *

끈적하고 기분 나쁜 공기가 가득한 사막 구석의 동굴.

저벅.

뜨거움이 느껴지는 붉은 머리와 태양과 비슷한 노란 눈동자를 가진 남자가 동굴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

무미건조한 남자의 상체엔 의미를 알 수 없는 휘황찬란한 문양이 가득 새겨져 있었다.

"크르르…!"

동굴 안에서 무언가의 울음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소리를 들은 남자의 표정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여전히 무덤덤한 표정.

- 저흴 구해주소서! 태양의 신 라여!

- 아들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부디 신의 응징을!

동굴 안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는 남자, 라의 귀에 들리고 있는 건 무언가의 울음 소리 따위가 아니었다.

귀를 가득 채우고 있는 건 이곳으로 향하기 전 자신을 바라보던 수많은 사람의 외침이었다.

"크르… 르…!"

시야가 닿지 않는 동굴 안쪽.

동굴의 침입자인 라가 더 가까이 다가왔음에도 무언가의 소리는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마치 다가오고 있는 라를 위협하기보단 점점 가까워져 오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듯한 울음이었다.

화륵.

얼마나 더 안쪽으로 들어갔을까.

라의 몸에 새겨진 문신에서 불꽃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닿는 모든 걸 태워버릴 것 같은, 어떤 어둠이든 밝힐 수 있을 듯한 불꽃이었다.

"크라라라!!!"

안쪽에서 두려움에 떨던 무언가가 라를 향해 몸을 날렸다.

이집트에서 사톤이라 불리는 존재였다.

악에 집어 삼켜져 사라져야 하는 대상이 된 존재.

"사라지거라."

가벼운 손짓이었다.

라가 손을 젓자 상체의 문신에서 시작된 불꽃이 사톤에게 옮겨붙었다.

"키아아아아아악!"

꺼지지 않는 불꽃에 휩싸인 사톤.

사톤의 절규가 동굴을 가득 메웠다.

"…."

점점 타들어 가는 사톤을 바라보던 라.

풀썩.

숯덩이가 된 사톤이 쓰러지자 라가 들어왔던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욱씬!

"…!"

몸이 타들어 가는 고통에 라가 걸음을 멈추고 상체를 수그렸다.

모든 악한 것을 태워 재로 만들어버리는 태양의 불꽃.

불꽃이 태우는 건 악뿐만이 아니었다.

치이익…!

불꽃을 사용할 때마다 새겨지는 불꽃에 의한 그을림.

하루가 멀다하고 겪는 고통이었지만, 앞으로 수백 수천 번을 더 겪는다 해도 익숙해지지 않을 끔찍한 통증이었다.

"하아…!"

고통에 얼굴이 일그러졌던 라가 참았던 숨을 뱉어냈다.

라가 태어났을 때부터 몸에 새겨져 있는 문신과 문신에서 뿜어지는 불꽃.

분명 라의 것이었음에도 인간의 몸으로는 온전히 견디는게 불가능한 불꽃이었다.

- 신이시여!

어렸을 적 라는 항상 궁금했었다.

자신은 그들과 다름없는 평범한 인간인데 어째서 고개를 조아리며 신이라 부르는 걸까.

라가 가진 거라곤 몸에 새겨진 문신과 문신에서 나오는 불꽃이 다인데 말이다.

- 저희를 구하소서!

- 라 님뿐입니다!

- 당신이 우리의 태양입니다!

라가 아무리 물어도 그들은 대답해주지 않았다.

그저 큰 소리로 모여 당신은 신이며 그렇기에 당신을 숭배하는 자신들을 굽어살펴야 한다고 말해왔다.

'….'

그래서였을까.

라는 어느 순간부터 평범한 인간인 자신이 어째서 신이라 불리고 있는지 궁금해하지 않게 되었다.

'구해야 한다.'

'보살펴야 한다.'

'난 저들의 신이니까.'

오직 이 생각들만이 라의 머리를 가득 채우게 되었다.

- 마을에 사톤이 나타났습니다. 저희를 구해주십시오!

불꽃을 사용하며 태워진 몸의 통증이 가라앉기도 전, 사람들은 아랑곳 않고 라를 찾아왔다.

그렇게 사람들은 또다시 부탁해 왔고, 라는 쉬지 않고 불꽃을 사용했다.

사람들의 부탁과 불꽃의 사용, 그리고 사용의 대가로 인한 통증의 연속.

비틀.

이것들이 라가 살아가고 있는 삶의 전부였다.

* * *

여전히 가라앉지 않은 고통을 안고 라가 신전으로 들어섰다.

라를 제외하곤 누구도 올라올 수 없는 곳이었다.

정확히는 올라올 생각조차 않는, 아무도 올라온 적이 없는 장소.

오로지 태양의 신 라만이 오를 수 있는, 라 이외의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 고독한 장소였다.

털썩.

장소에 놓인 건 거대한 의자뿐이었다.

신전 위에서 도시를 내려다볼 수 있는 위치.

'….'

라가 조용히 도시를 내려다봤다.

환한 빛이 밝혀지고 많은 이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공간.

라가 있는 곳과 그리 먼 거리는 아니었지만, 벽이 있었다.

눈에 보이거나 실존하진 않지만 오로지 라에게만 적용되는 벽.

저들은 언제든 신전 아래로 와 고개를 조아렸지만, 라는 저 벽을 넘어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없었다.

'이것이 신으로서의 숙명이다.'

그럼에도 라는 사람들을 원망하지 않았다.

혼자서 고통에 몸부림치고 끔찍한 고독이 느껴져도, 라는 사람들에게 서운해하지 않았다.

'나는 저들의 신이다.' 

그들은 라가 지켜야 하는 존재들이었기에.

'난… 괜찮다.'

* * *

- 사톤의 주인입니다!

- 그를 없애면 모든 사톤도 사라질 겁니다!

- 라여! 악을 물리치고 도시를 구해주소서! 

이른 아침부터 신전의 아래로 사람들이 모여들었었다.

사톤의 주인이 도시를 해치려 한다며 도움을 요청했던 사람들.

저벅.

- 알겠다.

지체 없이 신전에서 나와 사람들이 일러준 곳으로 온 라.

몹시 차갑고 숨이 막히는 공간이었다.

사톤을 잡을 때마다 미세하게 느껴졌던 한기가 가득한 공간.

"키르륵…!"

"시이이익!"

"크르르!"

사람들의 말대로 사톤의 주인이 있어서일까.

공간은 엄청난 수의 사톤으로 가득 차 있었다.

라가 나타나자마자 주인을 지키기 위해 이빨을 드러내고 있는 사톤들.

일렁.

라의 몸에서 터져 나온 불꽃이 순식간에 공간에 있던 사톤들을 태워버렸다.

드러냈던 이빨을 제대로 한 번 써보지도 못한 채 재가 되어버린 녀석들.

"…?"

라가 재가 된 녀석들의 뒤쪽으로 눈을 돌렸다.

어쩐 일인지 라의 불꽃이 더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처음 있는 일에 의아함을 느낀 라가 공간의 안쪽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쿠아아아아아!

계속 소멸해가면서도 필사적으로 라의 불꽃을 막아서고 있는 검은 물체, 혼돈.

끈적이고 일렁이는 혼돈들이 무언가를 감싸고 있었다.

"넌 누구냐."

소년.

그것들이 감싸고 있는 건 작은 체구의 소년이었다.

칠흑 같은 흑발과 눈동자, 그에 상반되는 새하얀 피부를 가진 소년.

사톤을 움직이는 혼돈이 지키는 존재이자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는 한기의 정체였다.

사람들이 말했던 사톤의 주인임이 분명했다.

스윽.

라가 더 강한 불꽃을 일으키기 위해 소년에게 손을 뻗었다.

"사라…!!"

불꽃을 일으키려는 순간, 멍하니 있던 소년의 눈동자가 라를 향했다.

너무나 순수하고 맑은 눈동자였다.

너무 맑아 악함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눈동자.

그 어느 것에도 더럽혀지지 않은 깨끗함이 소년의 눈동자에 깃들어 있었다.

슥.

라가 망설이는 사이.

소년이 뻗어져 있는 라의 팔에 손을 얹었다.

사르르….

"…!"

신기한 일이었다.

일렁거리던 라의 불꽃이, 힘의 사용에 대한 대가로 느껴지던 고통이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무슨…."

소년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째선지 소년의 눈동자는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스스로를 고통으로 밀어 넣고 있는 불꽃을 더 이상 사용하지 말라고 말이다.

'없애야 한다.'

분명 없애야 하는 존재였다.

지금까지 도시와 사람들을 괴롭혔던 사톤의 주인이었다.

'뭐 하는 거냐 라여, 넌 그들의 신이다.'

몹시 낯선 감각이었다.

무언가를 태우기 전에 망설였던 적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없애야 하는데.'

없애야 하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어째서인지 들어 올렸던 손이 서서히 내려가고 있었다.

라의 고통은 아랑곳 않고 불꽃의 사용을 종용해왔던 사람들.

눈앞에 있는 소년은 사람들과 달랐다.

사람들과 반대로 불꽃을 집어넣고 더 이상 고통스러워 하지 말라는 듯한 눈동자와 손길.

'….'

처음이었다.

처음이었기에, 라는 눈앞에 있는 소년을 죽이지 못했다.

* * *

라의 신전.

"…."

라가 여전히 아무 말도 없는 소년을 바라봤다.

손을 뻗자 아무런 대꾸도, 반항도 없이 조용히 라의 손을 붙잡았던 소년.

소년은 조용히 라를 따라 신전까지 오게 되었다.

'난 뭘 하고 있는 거지.'

사람들 몰래 소년을 신전으로 데려온 라는 몹시 혼란스러웠다.

자신이 하고 있는 행동이 옳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라는 소년을 죽일 수 없었다.

유일하게 자신의 불꽃을, 끔찍한 고통을 사그라들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넌 무엇이냐."

라는 궁금했다.

소년의 정체가 대체 뭐길래 자신의 불꽃을 사그라들게 만들 수 있었던 걸까.

"이름이 무엇이냐."

여전히 아무 말 없이 라를 바라보고 있는 소년.

'….'

같을 리 없는 존재였다.

태양의 불꽃을 다루는 라와 어둠이 혼돈을 다루는 소년.

분명 상반되는 존재였지만, 라는 어두운 공간에서 홀로 머무르고 있던 소년에게서 홀로 지내던 자신의 쓸쓸한 모습을 엿보고 있었다.

'이름조차 없는 존재.'

쓸쓸함을 넘어 소년에겐 이름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소년을 보며 잠시 고민하던 라가 입을 열었다.

"세트."

"…?"

의아해하는 소년을 향해 라가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세트, 너의 이름이다."

"…!"

말을 알아들은 것일까.

세트의 입가로 작은 미소가 그려졌다.

136화. 망설임

신전의 구석.

라가 멍하니 앉아 있는 세트를 바라봤다.

여느 날과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어두운 곳을 좋아하는 세트가 가장 좋아하는 자리.

세트는 저곳에 앉아 하루의 대부분을 보냈다.

'….'

신전에서 시작된 라와 세트의 기묘한 동거.

말을 할 수 없는 건지 신전에 온 이후부터도 세트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저 웃거나 고개를 끄덕이고 손을 뻗으며 의사 표현을 대신할 뿐이었다.

꿀렁.

"…."

라가 세트의 몸에서 흘러나온 혼돈을 바라봤다.

세트가 무언가를 한 건 아니었다.

아무것도 안하고 가만히 있어도 혼돈은 세트의 몸에서 흘러나왔고, 그렇게 탄생한 혼돈은 세트를 부모라 인식한 건지 주변을 떠나지 않은 채 맴돌고 있었다.

저벅.

세트에게 다가간 라가 혼돈을 내려다봤다.

혼돈은 어떠한 공격에도 소멸되지 않았다.

단 하나.

라의 불꽃을 제외하고 말이다.

화륵.

라가 팔에서 불꽃을 일으켜 조금 전 탄생한 혼돈을 향해 휘둘렀다.

혼돈을 없앨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스르르.

순식간에 불태워진 혼돈이 검은 연기를 내며 소멸했다.

치이… 텁.

그리고, 라의 몸으로 불꽃에 의한 그을림이 생기기 전.

가만히 앉아있던 세트가 손을 뻗어 라의 팔을 감쌌다.

팔을 시작으로 퍼지려던 통증이 거짓말처럼 사라져갔다.

'난 뭘 하고 있는 걸까.'

신전에서의 일상은 조금 전과 같은 일의 반복이었다.

세트의 몸에서 혼돈이 나오면 라가 불꽃을 일으켜 없앴고, 불꽃에 의한 통증을 세트가 없애주는 것.

누군가 보면 몹시 무의미하고 부질없는 행동의 반복이라고 여길만한 일상이었다.

'….'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세트를 바라보는 라.

라는 아직도 세트가 어떤 존재인지 알지 못했다.

그저 몸에서 끊임없이 어둠과 혼돈을 뿜어내는 존재라는 것 말고는 말이다.

'어둠의 근원.'

한 가지 더 유추할 수 있는 사실이었다.

라가 세트를 데리고 신전으로 온 이후부터, 도시 주변에서 나타나는 사톤은 눈에 띄게 약해졌다.

굳이 라가 나서지 않아도 도시의 이들이 처리할 수 있을 만큼이나 말이다.

'세트가 사톤을 강화하던 어둠의 근원이었고, 지금은 내가 세트의 어둠을 제어하고 있기 때문인가.'

라가 자신의 팔을 감싸고 있는 세트의 손을 응시했다.

정말 차가운 한기를 가진 손이었다.

불꽃에 의해 뜨겁게 타오르던 팔의 열기를 순식간에 가라앉히는 한기.

몹시 차가웠지만, 어째서일까.

세트의 손이 자신에게 닿는 순간 라는 이유 모를 따스함을 느끼고 있었다.

"…."

그리고 아무 말 없이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저 눈.

라는 티끌의 작은 악의조차 존재하지 않는 저 눈을 좋아했다.

바라보고 있노라면 지금껏 느껴본 적 없는 평화로움이 라를 가득 채웠기 때문이다.

슥.

몸을 돌린 라가 입을 열었다.

"기다리거라, 먹을 걸 가져올 테니."

신전 안쪽으로 걸음을 옮기는 라.

세트가 멀어져 가는 라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드드드!

그런 세트의 몸이 순간이지만 울룩불룩해지며 경련을 일으켰다.

터져 나오려는 무언가를 꾹꾹 눌러 담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

세트가 라의 팔을 붙잡았던 손을 내려다봤다.

손바닥 안에서 일렁거리고 있는 혼돈.

혼돈은 어째서인지 라의 불꽃을 식혀줄 때마다 증식하고 있었다.

으득.

세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결코 원해서가 아니었다.

세트는 그저 홀로 있던 자신에게 손을 뻗어 준 라가 아프지 않기를 바랐기에. 

라의 몸을 태우는 불꽃을 꺼주고 싶었던 것뿐이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라의 불꽃은 서서히 약해졌고, 세트의 혼돈은 증식을 거듭하고 있었다.

'… 안… 돼.'

함께 있으면 안 된다는 걸 진즉부터 알고 있었다.

함께 하는 시간이 오래되면 오래될수록 라의 불꽃이 약해질 것이며, 불꽃에 반비례해 혼돈이 증식할 것이기에.

둘을 기다리고 있는 건 파국뿐이었다.

'….'

라와 함께 하는 이 시간이 좋았다.

혼자가 아니여도 되는 지금이 소중했다. 

그렇기에.

세트는 라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 * *

"라여! 강한 사톤들이 나타났습니다! 부디 정화의 불길로 그들을 없애주십시오!"

"저희를 구해주십시오!"

신전으로 도시의 사람들이 몰려왔다.

분명 세트를 데려오며 사톤을 강하게 만들었던 혼돈은 사라졌을 터인데.

어느 날부턴가 도시의 사람들은 전과 같은 강한 사톤이 나타났다며 라를 찾아오기 시작했다.

'세트의 혼돈은 내가 없애고 있는데… 어째서지.'

라를 의아하게 만드는 건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전해 들은 장소로 가면 도시의 사람들이 말했던 강한 사톤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그저 약하디약한 일반적인 사톤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

이해되지 않는 상황이 이어지자 라는 의아함을 가지게 됐지만, 크게 개의치는 않았다.

자신에겐 강하지 않은 사톤이라도 사람들에게 있어선 강하다 인식될 수도 있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알겠다."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는 라.

그리고,

으득.

그런 라를 바라보고 있는 이가 있었다.

신전의 어두운 곳에서 잔뜩 얼굴을 찡그린 채 입술을 깨물고 있는 세트.

세트는 라가 불꽃에 태워져 고통받지 않았으면 했다.

하지만, 저들이 오는 날이면 라는 불꽃을 사용해야만 했다.

'….'

끊임없이 라에게 고통만을 안겨 주는 존재들.

세트가 오늘도 불꽃의 고통에 잠식될 라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지금 바로 가도록 하마."

사톤을 없애기 위해 지체 없이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한 라.

… 그래서였다.

뒤쪽에서 커지고 있는 혼돈의 분노를 라가 눈치채지 못한 것은 말이다.

'없어… 져… 야해.'

세트는 라를 고통스럽게 하는 모든 게 없어지길 바랐다.

* * *

라가 도시로의 발걸음을 재촉했다.

조금 전 전달 받은 장소에서 만난 사톤 무리.

얼마 전까지 만났던 약한 개체들이 아니었다.

사람들의 말대로 내부에 세트의 혼돈을 지니고 있는 녀석들이었다.

'어떻게…!'

세트에게서 흘러나오던 혼돈은 날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었다.

라는 자신이 계속해서 없앰으로 근원지인 세트의 혼돈이 약해지고 있다 생각했다.

그렇기에 라는 마음을 놓았고, 사람들의 부탁이 있는 날이면 세트를 남겨둔 채로 신전을 떠날 수 있었다.

꿀꺽.

하지만, 조금 전에 발견한 사톤 무리들로 인해 라는 자신이 간과하고 있던 한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

도시로 향하고 있는 라의 마음이 급해졌다.

'만약 발생한 혼돈을 세트가 밖으로 내보내고 있었던 거라면.'

라를 불안하게 만드는 가능성이었다.

자신으로 인해 세트의 혼돈이 약해진게 아닌, 그저 세트 스스로가 라 모르게 혼돈을 내보낸 거라면 조금 전에 만난 사톤을 설명할 수 있었다.

'부디… 아무 일도 없기를.'

….

정체 모를 불길함에 휩싸인 채 얼마나 걸었을까.

"아…."

검은 혼돈에 집어 삼켜지고 있는 도시가 라의 눈에 들어왔다.

"꺄아아아아악!"

"으아아아아! 살려줘!!"

아비규환이었다.

어디선가 몰려든 엄청난 수의 사톤.

사톤의 몸 안엔 선명하게 일렁이는 세트의 혼돈이 자리 잡고 있었다.

'약해진게 아니라… 오히려 더 강해졌구나.'

조금 전 오며 떠올린 라의 가능성대로였다.

언제부터였는진 알 수 없었다.

세트의 힘은 점점 강해졌고, 동시에 몸에서 흘러나오는 혼돈을 어느 정도 다룰 수 있게 된 것이었다.

그렇게 라 모르게 증식하는 혼돈을 밖으로 흘려보내고 있었던 것.

"…!"

사톤이 무차별적으로 사람들을 찢고 있는 참혹한 현장의 중심.

그 모습을 무미건조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세트가 보였다.

처음 만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얼굴엔 어떠한 표정의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

라가 처참히 무너지고 있는 도시를 바라봤다.

도시의 이들을 구하기에는 너무나 늦은 시점.

오랜 시간을 지켜온 도시와 사람들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걸 보며 라가 입술을 깨물었다.

화르르륵!!

불을 일으킨 라가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사톤들을 잿더미로 만들며 세트에게 나아갔다.

"세트!!"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 라를 바라보는 세트.

불꽃을 온몸에 두른 라가 바로 앞까지 다가왔음에도, 세트는 그저 멍하니 라를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콰악!

라가 손을 뻗어 세트의 목을 움켜잡았다.

한순간에 자신의 모든 걸 앗아간 세트를 단숨에 불태워버릴 생각이었다.

"…!"

하지만, 라는 그러지 못했다.

첫 만남 때와 같이 자신을 조용히 응시하고 있는 세트의 눈동자.

그 눈동자를 통해 알아버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세트가 이런 일을 벌인 건 스스로를 위해서 아닌, 라를 위해서라는 사실을 말이다.

화르… 르.

강해지고 있는 세트의 혼돈이 약해지고 있는 라의 불꽃을 역전하기 직전.

라가 세트를 불태울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

하지만, 마지막 찰나의 순간.

세트의 눈동자를 본 라는 망설이고 말았다.

그리고.

쿠아아아아!!

제어를 잃은 세트의 혼돈이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터져 나와 라를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 * *

전달되던 기억이 끝나며 감각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방금 본 건 분명.

태양의 신 라와 혼돈의 신 세트의 과거였다.

문이 열리기 무섭게 흘러들어오기 시작한 기억.

엄청난 시간 동안 열리지 않았던 문이 간직하고 있던 기억인 듯했다.

사아아…!

감각이 돌아와서일까.

느끼지 못하고 있던,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온몸을 저릿하게 만드는 한기가 몰려왔다.

그리고 떠진 눈을 통해 보이는 공간.

낯익은 공간이었다.

거의 다 삼켜져 사라졌다 봐도 무방한 태양이 보였고, 그다음으로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는 다크메타가 눈에 들어왔다.

어둠이자, 혼돈.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는 다크메타의 정체였다.

- 쿠아아아아!

라를 덮치던 세트의 다크메타를 떠올렸다.

계속 버틴 건가.

정확한 시간을 알 수 없지만 분명 엄청난 시간이 지났을 터.

그 시간 동안 라의 불꽃은 버텨낸 것이었다.

혼돈이 세상으로 퍼져나가는 걸 막기 위해서 말이다.

세트의 혼돈인 다크메타가 이곳을 온전히 벗어나지 못한 이유였다.

꿀꺽.

긴장으로 인해 메말라버린 침이 목을 통해 넘어갔다.

사방을 가득 싼 채 미친 듯한 한기를 뿜어대고 있는 다크메타.

백운아, 이거 맞는 거냐.

입가로 묘한 미소가 그려졌다.

들어오기 전에 기억을 미리 본 게 도움이 되는 건지 안되는 건지 약간 헷갈렸다.

오히려 사기 깎아 먹은 거 같은데.

피라미드로 향하기 전에도 어느 정도 예상은 했었지만.

어디까지나 가능성 정도였다.

그리고, 지금은 그 가능성이 확정된 현실로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그렇단 말이지.

이제부터 내가 싸워야 하는 상대.

상대는 태양의 신 라조차도 집어삼킨 신화 속의 존재였다.

드드드…!

불청객이 왔다는 걸 눈치챈 걸까.

정면을 가득 채우고 있던 다크메타가 좌우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흡사 모세의 기적을 보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등장하셨구만.

갈라진 다크메타 속으로 어둠이자 혼돈인 세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137화. 불꽃은 꺼지지 않았다

피라미드의 밖.

쾅!

비칼이 다가오는 데몬을 찍어 누르며 인상을 찌푸렸다.

'끝이 없군.'

지원 나온 헌터들과 쉴새 없이 잡고 있었지만, 데몬의 수는 점점 더 늘기만 할 뿐 줄어들 생각을 하지 않았다.

꿀렁.

데몬이 죽는 순간 튀어나오는 다크메타.

비칼 역시 알고 있었다.

저 다크메타를 없애지 않는 이상 이 싸움은 끝이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비칼 님…! 사라지지 않습니다."

화기를 든 헌터가 비칼에게 다가와 고개를 내저었다.

보고를 들으며 한숨을 내쉬는 비칼.

'건물도 날리는 화력에도 안 없어진다라.'

미사일이 떨어져도 다크메타는 사라지지 않을 거라 말했던 셀린과 백운의 말대로였다.

모래뿐만이 아니라 어떤 공격에도 다크메타는 사라지지 않았다.

마치 다른 공간에 존재해 이쪽에서의 간섭을 완벽하게 회피하는 느낌이었다.

드드드…!

그렇게 뚜렷한 방법 없이 데몬의 진군을 막고 있을 때.

비칼의 발아래로 강한 진동이 느껴졌다.

"비… 비칼 님…!"

"…?"

부하의 부름에 고개를 돌리는 비칼.

"이런."

비칼의 얼굴로 난처함이 드리워졌다.

웬만한 일엔 눈 하나 깜짝조차 안 하는 비칼이었지만, 눈앞의 광경엔 어쩔 수 없었다.

다른 헌터들도 마찬가지였다.

공격하는 걸 잠시 멈출 정도로 놀란 표정이었다.

드드!!

도시 카이로로 밀려오고 있는 거대한 모래 폭풍.

어디서부터 나타난 건지 도시를 덮고도 남을만한 거대한 폭풍이었다.

고오오…!

거대한 폭풍 안에서 선명하게 빛나고 있는 다크메타.

지금까지 봤던 어떤 다크메타보다도 거대한 크기였다.

데몬에게 들어가 있는 녀석들이 최소 몇백 개는 합쳐진 느낌이었다.

"저… 저런 게 도시로 갔다간… 끝입니다."

부하 헌터의 말대로였다.

워낙 갑자기 악화된 상황에 도시의 사람들은 대피를 시작조차 못 한 상황.

저런 게 갔다간 대참사를 떠나 다시는 회복될 수 없는 피해를 입을 터였다.

저벅.

"비칼 님…?"

"여길 막아라. 저건 내가 알아서 해볼 테니."

짧은 한마디를 남긴 후 비칼이 폭풍 쪽으로 걸어갔다.

아무리 비칼이라해도 다가오고 있는 건 규격 외의, 소멸되지 않는 폭풍이었다.

콰득.

손을 들어 올린 비칼이 엄지손가락을 깨물었다.

슥… 슥.

비칼이 손가락 끝으로 맺힌 피를 이용해 양손등에 문양을 그렸다.

평소엔 사용하지 않는, 위험하기에 꺼내지 않았던 힘을 사용하기 위해서였다.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짧은 순간에 강한 화력을 낼 수 있는 만큼 그에 대한 리바운드를 각오해야 하는 모래의 문양.

다른 방법이 있다면 사용하지 않았겠지만, 다가오고 있는 폭풍을 상대로는 그런 걸 따지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턱.

모래 바닥에 손을 댄 비칼이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양손을 기점으로 모래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후우우우웅…!

서서히 강해지기 시작한 모래 바람이 태풍으로 모습을 바꾸어갔다.

다가오고 있는 것과 비교해도 모자람이 없는 거대한 힘.

'….'

모래 폭풍을 응시하던 비칼이 고개를 돌려 백운이 있는 피라미드를 응시했다.

'빨리 끝내라.'

쿠와아아아아…!!

'오래 못 버티니.'

* * *

콰앙! 쾅!! 쾅!

거 더럽게.

으득.

무겁네!!

수리검으로 밀려드는 다크메타를 밀어냈다.

기억에서 봤던 대로 칠흑에 가까운 흑발과 눈동자를 가진 세트.

여전히 세트에겐 표정이 없었다.

말이라도 걸어볼라 했는데.

헛된 희망이었다.

모습을 드러내기 무섭게 다크메타를 휘두르기 시작한 세트.

대화를 떠나 이 공간으로 침범한 날 당장에라도 죽이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흔적에서 봤던 불꽃의 위치는 저쯤인데.

저쯤이라 해도 무언가 보이는 건 아니었다.

시야가 닿는 모든 곳을 세트의 다크메타가 덮고 있는 상황.

그 덕에 현재 서 있는 곳의 위치와 방향감각마저도 잃어버릴 판국이었다.

사아아…!

응…?

쉴새 없이 다크메타를 쳐내던 중.

사방에서 느껴지는 소름에 고개를 들었다.

이런 씨.

빼곡하다 못해 사방으로 가득 채워지는 검은 바늘들.

세트가 모습을 드러낸 후부터 다크메타는 필요에 따라 모습을 바꾸고 있었다.

방어가 필요할 땐 방패로, 공격이 필요할 땐 칼 또는 주먹으로.

데몬에게 얌전히 들어 있던 다크메타가 양반으로 보이는 순간이었다.

쐐에에에엑!

[잭 더 리퍼]

콰가가가가가가!!

땅으로 내리꽂히는 바늘을 피해 세트 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챙!챙!챙!

모든 바늘을 다 피할 수는 없기에 면도칼로 쳐내며 달릴 수밖에 없는 상황.

완벽히는 못 피하지만… 어쩔 수 없다.

팔과 어깨, 다리 언저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바늘을 느끼며 세트를 응시했다.

사방이 다크메타로 가득한 이상 싸움을 오래 끄는 건 현명하지 못했다.

시간이 없어.

지금은 공간에 있는 다크메타 중 일부만이 날 공격하고 있었다.

아마 라의 불꽃을 삼키는 중이라 그런 듯했다.

불이 꺼지면 저것들이 다 날 덮치겠지.

꼴깍.

생각만 해도 아찔해지는 상황이었다.

극히 일부가 날 바라보는데도 이 정도의 화력인데, 모든 다크메타가 날 본다면 피하긴커녕 순식간에 죽임당할 터였다.

불꽃으로 달릴 틈을 안 주니.

탓!

일단 본체다…!

멍하니 서 있는 세트를 향해 몸을 날렸다.

라의 불꽃이 아닌 이상 다크메타가 사라지지 않는 건 봐서 알고 있었다.

하지만, 기억의 마지막 순간 라는 분명 세트의 목을 붙잡았었다.

어찌 됐건 물리력이 닿는다는 증거.

상처를 입힐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해보자.

"…."

코앞까지 다가왔음에도 조금의 움직임도 없는 세트를 향해 면도칼을 그어나갔다.

서로의 몸이 지나쳐지는 찰나의 순간, 세트의 목과 어깻죽지, 얼굴 등을 순식간에 베어냈다.

느낌은 있다.

면도칼 끝으로 느껴지는 감촉을 느끼며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어째선지 날 공격하던 다크메타들도 모두 멈춘 상태였다.

…!

면도칼에 깊게 베였는지 세트의 목이 갈라져 옆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어깻죽지와 얼굴 역시 눈에 띌 정도로 베인 상태.

하지만, 그곳에서 솟아오르고 있는 건 피가 아니었다.

스스스스…!

짙은 농도를 뽐내며 세트의 몸에서 뿜어지고 있는 건 다크메타였다.

분명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음에도 피 대신 다크메타를 뿜어내는 존재.

다크메타… 그 자체라는 건가.

세트의 몸에서 다크메타가 뿜어진 건 아주 잠시였다.

조금 전과는 반대로 흡수되듯 세트의 몸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한 주변의 다크메타들.

다크메타가 흡수됨과 동시에 갈라졌던 세트의 상처 역시 완벽히 아물어버렸다.

꿀렁! 꿀렁!

상처가 다 아물었음에도 계속해서 다크메타를 흡수하는 세트.

얼마나 많은 양을 담을 수 있는 건지 세트의 몸은 꿀렁이면서도 쉬지 않고 다크메타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스륵.

충분한 다크메타를 빨아들여서일까.

흡수를 마친 세트가 천천히 내쪽으로 몸을 돌렸다.

오싹.

[이카로스 - 칼데아 윙]

찰나의 순간.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죽음의 기운에 날개를 꺼내 들었다.

파바바박!

세트의 몸에서 다크메타로 이루어진 수천 개의 칼날이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푸푸푸푸푹!!

"끄아…!"

칼데아의 연기가 많은 칼날을 방어해냈지만.

전부를 막아내기엔 무리였다.

삼켜지며 대부분의 힘을 잃었다곤 하나 여전히 태양이 존재하는 공간.

칼데아의 연기는 평소보다 훨씬 약해져 있었다.

파앙!

연기를 터뜨려 하늘로 날아올랐다.

꿰뚫린 상처에서 칼날이 뽑히며 적지 않은 피가 흘러나왔다.

급소는 피했다.

칼데아 덕에 급소가 뚫리는 건 막았지만, 그렇다고 상황이 좋은 건 아니었다.

인상이 찌푸려질 정도로 몸을 가득 채우고 있는 상처의 통증.

피가 흐르는 양도 적지 않아 오래 버티는 건 힘들 것 같았다.

콰아아아아…!

고개를 돌려 맹렬히 추격하는 다크메타를 바라봤다.

이번엔 파도냐.

조금 전까진 칼날이었던 다크메타는 거대한 파도가 되어 날 덮쳐 오고 있었다.

슥.

빠르게 사방을 조여오는 다크메타를 뒤로 하고 아래를 훑었다.

공간에서 봤던 불꽃이 있던 위치를 찾기 위해서였다.

세트 자체가 다크메타로 이루어졌으니 공격은 무의미하다.

남은 방법은 라의 불꽃을 찾는 것뿐이었다.

그나저나… 어떻게 찾는다.

흔적으로 봤을 때 보다 이미 많이 삼켜진 건지 작은 불씨조차 보이지 않는 상황.

다크메타만이 가득한 공간에서 어떻게 불꽃을 찾아야 할지 막막했다.

[… 화륵]

!?

짧은 순간이었지만 피부로 느껴진 온기.

단순히 온기만 느껴진 게 아니었다.

흔적 때처럼 목소리가 들린 건 아니었지만, 마치 불꽃이 나를 부르고 있는 듯한 감각이었다.

어디냐…!

쫓아오는 다크메타로 인해 멈출 순 없었기에.

계속해서 움직이며 조금 전의 감각을 다시 느끼기 위해 집중했다.

[화르르…!]

… 찾았다.

보다 명확히 느껴진 열기에 고개를 돌렸다.

조금 전까진 몰랐었는데 집중해서 보니 알 것 같았다.

공간에 있는 다크메타가 가장 많이 모여 있는 장소.

다시 나올 수 있나.

저기로 들어갔다간 다시는 못 돌아올 거란 생각이 절로 드는, 그런 곳이었다.

저기에 있다.

보이는 건 아무것도 없었지만 확신이 들었다.

이제 곧 사그라들 불꽃이, 억겁의 시간동안 혼돈의 발을 붙잡고 있던 불꽃이 저곳에 있다는 확신.

아이러니 하구만.

등 뒤에서 밀려오는 다크메타를 피해 하늘로 올라왔는데, 그 다크메타가 가장 많이 모여 있는 곳으로 들어가야 한다니.

어느 방향으로 보나 무모한 행동이었다.

눈에 보이는 태양 역시 이미 완전히 삼켜진 상황.

본능에 의한 확신만을 따라 다크메타 속으로 들어간다 해도 불꽃이 아직까지 남아 있을 거란 보장도 없었다.

….

아주 잠깐이지만 저 멀리로 들어왔던 문이 보였다.

칼데아가 있기에 마음만 먹으면 문으로 빠져나갈 수 있는 상황.

애초에 이집트를 구하겠다거나 하는 원대한 정의를 가지고 들어온 게 아니었기에, 불꽃만 포기한다면 미련 없이 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을 걸 알기에. 

불꽃이 있는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안될 말이지.

언제부터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무기들이 나에게 있어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는 걸 깨달은 게 말이다.

그렇기에, 불꽃을 여기에 홀로 내 버려둔 채 나갈 순 없었다.

무조건.

파앙!!

같이 나간다.

불꽃이 있을 거라 생각되는 곳으로 칼데아의 연기를 터뜨렸다.

아래를 향해 빠르게 쏘아지는 몸.

콰아아아아!

그런 내게 위협을 느껴서일까.

아래에 있던 다크메타가 파도가 되어 하늘을 덮쳐왔다.

* * *

세트가 공간에 침범했던 남자를 바라봤다.

어떻게 안 건지 불꽃이 있는 위치에서 아래로 향했던 남자.

콰드득.

하지만, 그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불꽃을 덮고 있는 다크메타에게 도달하기 직전, 아래에서 솟아오른 다크메타에 삼켜졌기 때문이다.

뒤이어 추격해오던 엄청난 양의 다크메타에게까지 추가로 삼켜졌기에.

남자의 등장은 잠시의 해프닝으로 끝이 났다.

"…."

하늘 위에서 남자를 삼킨 채 뭉쳐 있는 다크메타 덩어리.

덩어리를 잠시 응시하던 세트가 몸을 돌렸다.

드득.

"…?"

이상한 느낌에 세트가 고개를 돌렸다.

남자를 감싸고 있는 다크메타의 덩어리가 어딘지 이상했다.

꿀렁.

어째선지 심하게 요동치고 있는 다크메타.

무언가에 의해 다크메타가 부풀려지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두두… 두두두두두두!!

다크메타의 안에서부터 엄청난 양의 빛이 터져 나왔다.

공중에서 내려오며 사방으로 탄환을 쏘고 있는 세 사람의 형체.

빛의 탄환은 다크메타를 소멸시키진 못했지만, 잠시 물러나게 하기엔 충분했다.

파아아앙!!

믿기 힘든 광경에 세트가 잠시 머뭇거린 사이.

날개의 연기를 터뜨린 남자의 몸이 불꽃이 있는 곳으로 쏘아졌다.

138화. 라의 불꽃

본능에 의한 순간적인 판단이었다.

사방에서 덮친 다크메타를 리볼버로 뿌리친 후 바닥으로 향한 것은 말이다.

뿌리치고 나왔는데 더한 곳으로 다이빙 해버렸네.

눈에 보이지 않는 확신에 의한 행동.

누군가 보면 무모하며 정신 나간 짓이라고 할만한 행동이었지만 난 내 확신을 믿었고, 믿었기에 실패했을 때 확정적인 죽음을 안겨 줄 수도 있는 다크메타에게 뛰어들었다.

"하아아."

다크메타로 다이빙한 후 보인 것 역시 캄캄한 어둠뿐이었다.

온통 다크메타 투성이라 호흡조차 불가능했던 어둠 속.

얼마나 깊숙이 들어온 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저 호흡이 부족하려는 찰나 본능과 감각에 의지해 열기가 느껴지는 곳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 결과.

싱긋.

죽지 않고 무기의 공간으로 도착하게 되었다.

비광 님한테 맨날 도박 중독이라고 놀렸었는데.

나도 남말 할 처지는 못 되네.

물론 무기왕의 감각과 확신이 있었지만, 100% 확률에 목숨을 건 것은 아니었기에 딱히 변명할 말은 없었다.

슥.

눈앞엔 기억에서 봤던 높은 층고의 계단이 놓여 있었다.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모르지만 도시 사람들이 라를 숭배하던 신전이었다.

동시에 세트와의 기묘한 동거가 이루어졌던 장소.

"올라와라."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흔적에서 불꽃을 지키라고 말했던 목소리.

보랏빛 흔적이었던 만큼 날 인식하고 말한 건 아니었을 것이다.

단지 불꽃에 근접하여 있는 모든 이에게 향했을 메시지였다.

날개는 안 꺼내지네.

계단이 높은 만큼 칼데아를 꺼내서 단숨에 올라갈까 했었는데.

태양의 신이라 불리는 라의 앞이라 그런지 칼데아는 꺼내어지지 않았다.

저벅.

계단을 향해 첫발을 내디뎠다.

사람들에게 신으로 숭배받은 라가 오랜 시간을 홀로 보내온 장소.

자신이 왜 신이라고 숭배받는지, 어째서 저들을 도와야 하는지, 왜 그들을 도울 때마다 불꽃에 의한 끔찍한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 모른 채 지내왔을 터였다.

뜨겁네.

계단을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몸으로 느껴지는 열기가 강해졌다.

세트의 공간에 있는 아주 작은 불씨로부터 느꼈던 열기와는 차원이 달랐다.

"불꽃이 꺼질 거라 생각했다."

거의 정상에 도착하자 커다란 의자에 앉은 라가 보였다.

라는 날 바라보며 안도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어떻게 찾아왔는지 물으려고 했는데."

잠시 날 훑던 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묻지 않아도 되겠구나."

지금까지 만났던 무기의 영혼들이 했던 말과 비슷했다.

마치 자격이 있는, 응당 찾아올 만한 사람이 자신을 찾아냈다는 듯한 뉘앙스.

처음엔 무슨 말인지 궁금하기도 했었지만, 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내가 무기왕이니까.

어찌 보면 당연한 답.

그래서였다. 

답을 얻은 뒤에는 굳이 궁금해하지 않기로 한 것은 말이다.

"밖의 상황은 어떻지?"

"세트의 다크메타 때문에 아수라장입니다. 사방에서 데몬이 끝도 없이 쏟아지고 있고요."

"흠… 혼돈과 사톤인가."

혼돈과 다크메타, 사톤과 데몬.

단어는 달랐지만 의미는 동일했다.

"이곳으로 오기 전에 세트를 만났겠군."

고개를 끄덕이며 이곳으로 오기 전까지 봤던 모든 것들을 이야기했다.

세트의 공간엔 엄청난 양의 혼돈이 있으며 불꽃이 꺼지는 순간 세상으로 퍼져나갈 준비를 마쳤다는 이야기.

"세트는 어떻지?"

"라 님이 마지막으로 봤던 모습 그대로입니다. 불꽃으로 접근하는 걸 필사적으로 막으려는 느낌이었고요."

음.

조금 전 상황을 떠올리다 보니 이상한 점이 있었다.

그때 당시엔 워낙 정신이 없어 따로 생각하지 못했던 것.

마지막에 세트는 왜 공격하지 않은 거지?

리볼버로 빠져나온 뒤 불꽃을 감싸고 있던 다크메타로 다이빙한 직후.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난 다크메타 속을 헤맸었다.

다크메타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세트라면 충분히 날 공격할 수 있었을 터.

어째서 그 시간 동안 날 내버려둔 건지 의문이었다.

"의아해할 필요 없다. 그 녀석도 혼란스러운 걸 테니까."

고개를 갸웃거리는 날 향해 라가 입을 열었다.

마치 내가 의아해하고 있는 게 무엇인지 아는 듯한 말이었다.

"혼란스러워하고 있다니, 그게 무슨 말이죠?"

좀 의아한 상황이 있긴 했으나 쉽게 이해되진 않는 말이었다.

사방으로 혼돈을 뿜어내며 불꽃과 태양을 삼키고 있던 세트였다.

"세트와 혼돈은 동일한 존재이기도 하지만, 다른 존재이기도 하다."

어려운 말이었다.

눈썹을 찡그리고 있자 더 자세히 설명을 해주려는 듯 몸을 앞으로 내미는 라.

"혼돈은 끊임없이 파괴와 종말에 대한 유혹을 내뱉지. 혼돈 그 자체를 담고 있는 세트는 그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고."

담고 있다…?

겉에서 보기엔 혼돈 그 자체로 보이지만, 사실 세트는 혼돈을 담고 있는 그릇에 불과하며 그렇기에 자신의 의지와 혼돈의 유혹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하고 있단 말일까.

"혼돈은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강해졌기에 점점 더 세트를 침식해나갔지. 세트의 감정과 생각 등 모든 걸 말이다."

"그럼 세트는 자의와는 다르게 혼돈의 유혹으로 인해 라 님을 집어 삼켰다는 건가요…?"

라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음.

라가 내게 거짓말을 할 이유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쉽게 납득되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기억의 문에서 봤던 라는 세트에게서 그런 이야기를 들을 새도 없이 혼돈에게 집어 삼켜졌었기 때문이다.

"불꽃에 도달하기 전, 혼돈에 둘러싸여졌을 때 느껴진 게 있을 거다."

워낙 급했던 상황이라 머릿속엔 오로지 불꽃을 찾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지금 다시 떠올려보니 불꽃의 감각 외에도 느껴졌던 것들이 있었다.

목소리가 들리거나 하는 건 아니었어.

뭐랄까… 몸을 감싸고 있던 다크메타를 통해 메시지가 전달되는 듯한 느낌.

"갈등, 후회, 혼란, 그리고 죄책감."

많은 것들이 다크메타를 통해 전달됐었다.

한 단어로는 정리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들.

떠오르는 대로 읊은 감정들에 라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 또한 삼켜지는 순간 너와 같은 걸 느꼈다."

"그 속에서 느껴졌던 게 세트의 감정이란 말인가요?"

"지금의 세트가 날 삼킬 때와 같은지는 알 수 없다. 정말 오랜 시간이 지났으니까. 하지만, 혼돈이 증식하며 힘이 강해져 이전보다 세트를 더 깊숙이 잠식했을지언정. 그릇으로써 존재하는 이상 세트도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닐 거다."

혼돈의 유혹에 의해 행해지는 행동과 세트로써 행하는 행동이 다르다.

마치 이중인격처럼.

"그렇기에 난 세트를 원망하지 않는다. 정확히는, 원망할 수가 없었다."

기억에서 봤던 장면을 떠올렸다.

라가 불꽃에 의해 고통을 느끼려 하자 지체 없이 손을 잡아 통증을 막아줬던 세트.

처음에 기억만 봤을 땐 배신을 하기 전의 가면일 거라 생각했었다.

그럼 마지막 순간 일부러 날 불꽃으로 보내줬다…?

그 전까지 미친 듯이 공격했던 세트를 보면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라의 이야기를 듣고 다크메타 속에서 느꼈던 감정들을 떠올리니 조금씩 납득이 가기 시작했다.

"물론 나도 세트의 모든 걸 아는 건 아니다. 어디까지가 세트의 의지인지, 어디서부터가 혼돈에 의한 것인지는 말이다. 하지만… 삼켜진 순간 느꼈던 건 분명 세트의 후회와 죄책감이었다."

무엇에 대한 후회와 죄책감인지는 어렴풋하게나마 알 것 같았다.

자신에게 처음으로 손을 내밀어 준 라를 집어삼킨 것에 대한 후회.

불꽃으로 향하며 다크메타를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세트의 감정을 느꼈기에 가능한 추측이었다.

"그리고, 나 또한 후회하고 있다."

후회한다 말하는 라의 눈으로 슬픈 빛이 어렸다. 

"망설였으면 안 됐다. 세트는 더 깊은 혼돈의 수렁으로 빠졌고 그 결과로 이런 사태가 일어났으니까."

이거 참.

예상이랑 많이 다르네.

조금 전 들은 세트에 대한 이야기와 자책하는 라의 모습.

자신을 배신하고 집어삼킨 것에 대해 바득바득 이를 갈고 있을 거라 생각했었는데, 이를 갈긴커녕 라는 세트를 구해주지 못했다며 자책하고 있었다.

"그래도 다행이구나."

고개를 든 라가 따듯한 눈으로 날 응시했다.

"불꽃이 꺼지기 직전, 모든 걸 되돌릴 수 있는 이가 왔으니."

"…."

잠시 생각을 하다 찜찜한 기분에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전 라 님과 세트 사이에 있었던 과거를 바로잡으려 온 건 아니었습니다."

둘의 사연에 대한 건 애초에 몰랐었다.

여기까지 온 이유는 그저 라의 불꽃에 대한 나의 욕심이었다.

"알고 있다. 그대에게 있어 난 그저 싸우기 위한 무기에 불과…?"

라가 말을 끝마치기 전에 호다닥 손을 들어 올렸다.

무기를 찾으러 온 건 맞지만, 불과하다라는 단어는 맞지 않았다.

"그것도 절대 아닙니다. 저한테 있어 무기는 단순한 도구가 아니거든요. 음 뭐랄까."

갑작스레 말을 하려니 마땅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기에, 본능적으로 떠오르는 단어를 입에 올렸다.

"그 뭐랄까, 함께 싸워나가는 도… 동료랄까…? 아니면 친구…?"

동료와 친구라니.

내 입으로 말해놓고도 무척이나 머쓱해지는 단어였다.

"…."

화났나.

오그라드는 말을 해서인지 벙찐 표정을 짓고 있는 라.

태양의 신이라 불렸던 존재도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하하!"

잠시 후, 라가 시원한 웃음을 터뜨렸다.

"동료와 친구라."

한참을 웃던 라가 동료와 친구란 단어를 곱씹었다.

도시의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지만, 정작 모든 순간이 혼자였던 라.

라에게 있어 두 개의 단어가 주는 의미는 단순하지 않은 듯했다.

"그럼 여기 온 것까지는 너의 욕심이었다 치고." 

"네… 네."

라가 조금 전보다 한껏 풀린 얼굴로 날 바라봤다.

"새로운 동료이자 친구로서 부탁을 하나 할까 하는데, 들어줄 수 있겠나?"

"…!"

"내가 망설여 하지 못했던 걸 떠넘기는 느낌이라 미안하지만 말이야."

미안하다 말하는 라를 향해 힘차게 고개를 내저었다.

라의 부탁이 아니었을지라도 어차피 내가 하려던 일이었다.

"천만에 말씀을요."

다시 한번 웃어 보인 라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저벅.

천천히 바로 앞까지 걸어온 라.

"불꽃을 주기 전에, 네가 알아둬야 할 게 있다."

라가 희미한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 * *

스윽.

천천히 눈을 떴다.

다크메타의 속.

보이는 건 어둠뿐이었다.

좀 차분해지니 더 잘 느껴지네.

라의 말대로였다.

다크메타를 통해 느껴져 오는 세트의 감정들.

정신이 없었던 때보다 더 선명하게 전달되고 있었다.

"후우."

작은 호흡을 뱉어낸 뒤.

[유탈라스 - 동기화]

무기고에서 비늘을 꺼내 들었다.

"가겠습니다."

"지켜주마."

귓가로 유탈라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신 의태 - 갑주]

다크메타 안에서 흩어져 있던 비늘이 내 몸을 빠짐없이 감싸기 시작했다.

이전에 주변을 감싼 것과는 달리 피부와 완전히 밀착한 비늘들.

지금껏 날 지켜왔던 유탈라스.

난 유탈라스를 믿는다.

다시 한번 유탈라스에 대한 믿음을 확인한 후.

"불꽃이여, 활활 타올라…."

사방을 감싸고 있는 다크메타를 응시했다.

"어둠을 밝혀라."

[라 - 불꽃의 문양]

139화. 어둠이 걷히다

몸을 감싸고 있는 비늘 위로 문양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라의 몸을 빼곡히 채우고 있었던 문양.

불꽃을 일으키는 원천이 되는 문양이었다.

화륵.

서서히 흘러나오기 시작한 라의 불꽃.

불꽃의 감각을 익힌 뒤 고개를 들어 올렸다.

터져라.

콰아아아아아아아!!

문양에서 불꽃이 터져 나왔다.

닿는 모든 걸 태우는 불꽃이었다.

리볼버의 탄환을 뿌려도 소멸하지 않고 물러나게 하는 게 최선이었던 다크메타.

그랬던 다크메타가 라의 불꽃에는 닿기 무섭게 깨끗하게 소멸해버렸다.

후우.

주변을 감싸고 있던 다크메타가 소멸하자 트이는 시야.

확보된 시야로 날 응시하고 있는 세트와 서서히 밀려오는 다크메타의 파도가 보였다.

속전속결.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이었기에 망설임 없이 세트가 있는 곳을 향해 걸음을 내디디며, 공간을 빠져나오기 직전 라가 해줬던 말을 떠올렸다.

- 너의 몸은 불꽃을 견디지 못할 거다.

불꽃을 건네주기 직전 라가 한 말이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었다.

기억 속에서 봤던 라 역시 불꽃을 사용한 뒤에는 끔찍한 통증을 느꼈으니까 말이다.

- 네가 기억에서 봤던 나의 몸은 지금 이 순간의 네 몸보다 뛰어났다. 신의 육체라 부를 순 없지만, 인간보다는 훨씬 강했지.

지금의 나보다 뛰어난 신체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라는 끔찍한 통증을 겪었었다.

그렇다면 그보다 약한 몸을 가진 내가 불꽃을 사용한다면?

통증을 넘어 잿가루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 다행이라면 너 역시 보통 인간의 몸이 아니라는 것. 조금은 버틸 수 있을 거다.

조금이면 곤란했다.

사방을 가득 채우고 있을 다크메타와 세트까지.

라의 불꽃을 얻어 빠르게 처치가 가능하다 하더라도 최소한의 시간은 필요할 터였다.

- 별다른 방법이 있는 게 아니라면, 전 항상 불꽃을 최소한으로밖에 사용하지 못하는 건가요?

라를 향해 물었던 질문.

궁금했었다.

불꽃을 이어받더라도 애초에 내 몸이 이 정도라면, 영원히 불꽃의 사용에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내 걱정과 다르게 라는 고개를 저었었다.

- 조금 전에 말했듯이 지금 이 순간의 몸 기준이다.

의아한 말이었다.

이 순간의 기준이라니.

지금이 지나면 무언가 달라질 거란 말일까?

- 네가 정확히 어떤 존재인지는 알지 못하지만, 넌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강해질 거다.

시간이 흐르며 증가할 무기의 숫자.

무기를 모을수록 강해지는 무기왕의 능력을 말하는 듯했다.

- 단순히 네가 사용할 수 있는 힘의 종류가 늘어나는 것과는 다르다. 그에 비례해 네 원천적인 힘 역시 강해질 거다.

무기를 모을수록 내 원천적인 힘이 강해진다라.

조금 전까진 무기를 모으는 것과 내 몸이 불꽃을 못 버티는 것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는지 의아했었는데.

이쯤 되니 조금은 이해가 될 것 같았다.

이미 내 몸의 회복력은 비정상이지.

원래부터 회복력이 이랬던 건 절대 아니었다.

어느 순간 돌아보니 사기적인 회복력을 가지고 있었던 몸.

단순히 돌산에서의 수련 때문인가 했었는데, 돌이켜보면 그것 외에도 계속해서 모아온 무기가 있었다.

무기를 모을수록 내 본연의 신체 역시 강해진다는 건가.

- 오래 걸리지 않을 거다.

날 내려다보며 라는 확신하는 듯 말했었다.

- 멀지 않은 시기에 넌 나의 육체를 뛰어넘을 거다.

이 말을 마지막으로 라가 내 머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 그러니, 그 전까지만 조심해서 다뤄라.

귓가에 흘러들어온 라의 목소리를 끝으로 공간에서 빠져나왔었다.

쐐에에에엑!

눈앞으로 수백 발의 바늘이 날아들었다.

처음 공간으로 들어오자마자 받았던 공격이었다.

면도칼을 이용해 간신히 쳐내면서도 몸의 잔상처까지는 모두 막을 수 없었던 공격.

화르륵!

팔에서 불을 일으켜 바늘을 향해 휘둘렀다.

콰아아아!

불꽃에 닿기 무섭게 빠르게 소멸하는 다크메타.

뻗어진 팔을 감싸고 있는 유탈라스의 비늘을 바라봤다.

화륵.

흐트러짐 없이 불꽃을 이겨내고 있는 유탈라스의 비늘.

공간에서 빠져나온 후, 정확히는 라의 문양이 내 무기고에 들어온 직후였다.

무기고가 달라졌다.

무기고의 다음 단계까지 단 하나의 무기만이 남아있던 상황.

불꽃이 추가되며 무기고는 즉각적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정확히 어떤 것들이 변했는지는 이곳에서 빠져나간 뒤에 자세히 살펴봐야겠지만, 한 가지 만큼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두 가지 무기의 사용.

지금까진 한 번에 하나의 무기만이 사용 가능했었지만, 이젠 아니었다.

한순간에 꺼낼 수 있는 무기는 두 가지가 되었고, 그렇기에 생각해낼 수 있었던 응용 방법이었다.

비늘과 문양의 동시 사용.

무기를 더 모은 후엔 몸 자체가 강해져 불꽃을 마음껏 사용할 수 있게 되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순전히 내 몸으로만 불꽃을 사용하면 라가 느꼈던 통증을 그대로 감당해야 할 터.

전투에 필요한 충분한 시간을 버티지 못할 게 분명했다.

그렇기에, 내 몸을 불꽃으로부터 보호해 줄 무기가 필요했다.

유탈라스.

오래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내 몸을 보호해줄 수 있는 최선의 무기는 유탈라스 뿐이었기 때문이다.

유탈라스의 게이지가 차 있던 것도 행운이었어.

두 가지 무기의 동시 사용을 떠올리기 무섭게 유탈라스와의 동기화가 시작되었다.

- 이제 비늘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을 거다.

이전에도 비늘의 사용량을 조절할 순 있었지만, 자유자재로 비늘을 이용해 무언가를 하진 못했었다.

정해진 의태에 따라 오른팔에 비늘을 둘렀을 뿐이었다.

이젠 아니야.

피부를 통해 비늘 하나하나의 감각이 느껴졌다.

마치 흩어져 있는 모든 비늘에 나의 신경이 연결되어있는 듯한 감각이었다.

쾅!!

다시 한번 다가온 다크메타를 쳐내며 가까워지고 있는 세트를 바라봤다.

비늘의 사용 시간 혹은 사용량이 바닥나기 전.

내 몸에 직접적으로 불꽃이 닿기 전에 끝내야 했다.

"…."

세트는 여전히 무미건조한 표정이었다.

나의 불꽃을 보며 당황하지도, 되살아난 불씨에 분노하지도 않았다.

그저 덤덤하게 쉴새 없이 다크메타를 날릴 뿐이었다.

진짜 더럽게 많네.

몸에 그려진 문양을 통해 남은 불꽃의 양을 느꼈다.

유탈라스의 비늘과 마찬가지로 문양의 불꽃 양엔 한계가 있었다.

내가 불꽃을 버틸 수 있는 것과는 별도로 말이다.

몸이 나약하니 제약이 두 가지나 있네.

어느새 가까워진 세트를 향해 몸을 날렸다.

쿠아아아아!

나의 접근을 막으려는 듯 사방에서 덮쳐오는 다크메타들.

무덤덤한 표정과는 달리 불꽃을 얻기 전과 상반되는 반응이었다.

불꽃을 두르기 전까지만 해도 내가 다가가던 말던 개의치 않았었던 세트.

그랬던 세트가 지금은 나의 접근을 막기 위해 필사적으로 다크메타를 뿌리고 있었다.

푸화아아아악!

불을 뿜어내 길을 막는 다크메타를 제거한 뒤.

꽈악.

힘을 준 주먹을 세트에게 휘둘렀다.

쾅!!

본체라 그런지 바로 불꽃에 사그라든 건 아니었지만.

아무리 베어도 금방 회복했던 때와는 달랐다.

여전히 피 대신 다크메타가 터져 나오는 건 똑같았지만, 아까와는 달리 불꽃에 닿은 부분이 회복되지 않고 있었다.

휘릭.

위기를 느껴서일까.

세트 역시 몸을 더 이상 가만히 두지 않았다.

손을 빠르게 휘둘러 아까보다 더 맹렬히 다크메타를 쏘아내기 시작했다.

쾅! 쾅! 쾅! 쾅!

모든 곳을 주시해야 했다.

지금 싸우고 있는 곳은 세트의 공간.

다크메타가 가득했기에 어디서 공격이 날아오든 이상할 것이 없었다.

최소한의 불꽃만을 담는다.

공격을 쳐낼 땐 불필요하게 많은 불꽃을 일으키지 않았다.

주먹과 발끝에 불꽃을 담아 날아드는 다크메타만을 처리했다.

쐐엑… 콰앙!

거리를 벌리려 뒤를 돈 세트의 뒤통수를 세게 찍어 눌렀다.

엄청난 굉음과 함께 세트의 몸에서 터져 나오는 다크메타.

쿠웅!!

바닥으로 처박힌 세트가 몸을 일으키기도 전.

쉬지 않고 달려들어 주먹을 휘둘렀다.

쾅!! 쾅!! 쾅!!

화르륵!

주변에서 날아드는 다크메타를 신경쓰지 않기 위해 전신의 문양에서 불을 뿜어냈다.

불꽃을 뚫고는 쉽게 접근하지 못하는 다크메타.

세트의 몸속에 있는 다크메타가 무한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기에 계속해서 두들겨나갔다.

세트가 그릇이라면.

쉬지 않고 몸속에 있던 다크메타를 뿜어내는 세트를 응시했다.

그릇과 다크메타를 각각의 존재로 봤었던 라.

나 역시 다크메타 안에서 느낀 감정으로 인해 라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다크메타를 다 뿜어내게 하면… 어쩌먼.

몸을 침식하고 있는 다크메타가 원인이라면, 다크메타를 다 뿜어낸 세트는 자의를 찾고 다크메타를 제어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라가 부탁한 건 이게 아니지만.

해볼 수 있을 때까지만 해보자.

드드드득!!

한참동안 다크메타를 뿜어내던 세트의 몸에서 수많은 줄기가 뻗어 나왔다.

불꽃으로 향하기 직전 내 몸을 꿰뚫었던 공격이었지만, 지금은 비늘과 둘러져 있는 불꽃으로 인해 내 몸에 닿지 않게 되었다.

쾅!!

"얌전히 맞아라!"

다시 한번 세트의 얼굴을 찍어 누르며 속도를 올렸다.

* * *

얼마나 많은 공격을 날렸을까.

더 이상 세트의 몸에선 다크메타가 뿜어지지 않고 있었다.

"하아."

마치 몸 안에 가득 담아뒀던 다크메타를 모조리 뱉어낸 느낌이었다.

….

주먹질을 멈추고 바닥에 있는 세트를 내려다봤다.

사방에서 날 덮쳐오던 다크메타도 멈춘 상태였다.

돌아와라.

작은 바람이었다.

마지막 시도였기 때문이다.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세트가 혼돈으로부터 자유로워지지 않는다면 더 이상 방법이 없었다.

사아아…!

주먹을 휘두르느라 일어났던 먼지가 걷혀갔다.

…!

먼지가 걷히자 드러난 세트의 얼굴.

세트는 여전히 무표정으로 날 올려다보고 있었다.

달라진 게 있다면, 날 올려다보고 있는 세트의 눈동자였다.

조금 전까지 무미건조하기만 했던 눈동자가 아니었다.

라가 봤던 눈동자.

정말 맑은 눈동자였다.

마주친 순간 지금까지 생각했던 모든 걸 잊게 만드는 반짝임.

악의 같은 건 전혀 존재하지 않는 맑은 눈이었다. 

그저 순수한 깨끗함만이 느껴지는 신비로운 느낌. 

….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눈을 마주치고 있는 세트와 나 사이로 정적이 찾아왔다.

마치 기억에서 봤던 세트와 라의 마지막 같았다.

"…."

아무 말 없이 날 올려다보고 있는 세트.

슥.

세트가 천천히 팔을 들어 올려 불꽃이 일렁이고 있는 문양으로 손을 얹었다.

치이익!

자신의 손이 불태워지는데도 세트는 손을 떼지 않았다.

몹시 그리웠던 것을 만났기에 고통 따위는 어찌 되든 상관없다는 눈이었다.

꿀렁.

…!

그리고, 순간이지만 세트의 몸에서 꿀렁이는 다크메타가 눈에 들어왔다.

콰아아아아아아아!!

동시에 공간을 채우고 있는 다크메타가 세트를 향해 쏟아지기 시작했다.

잠시지만 혼돈의 제어를 벗어났던 세트를 다시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 하고 있었다.

- 세트는 그릇이지만, 그릇이기에 혼돈과는 떨어질 수 없다.

라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릇이기에 혼돈으로 채워지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는 존재.

혹시나 싶어 시도해봤지만, 그릇과 혼돈의 관계를 끊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스윽.

사방에서 밀려드는 다크메타를 느끼며.

오른손을 세트의 심장 부근으로 가져갔다.

"…."

여전히 맑은 눈을 빛내고 있는 세트.

[괜찮아.]

…!!

오른팔에 얹어져 있는 세트의 손을 통해 들려온 감각.

과거의 라처럼 내가 망설이고 있을까 걱정하는 듯했다.

….

그런 세트를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난."

화륵…!

"망설이지 않으마."

덮쳐온 다크메타가 세트에게 떨어지기 직전.

세트의 심장에 얹은 손으로 남아있는 모든 불꽃을 모아갔다.

드드드드…!

불꽃을 터뜨리기 직전.

세트의 입가로 작은 미소가 그려졌다.

….

찰나의 순간, 그 미소를 확인한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정화."

푸화아아아아악!!

140화. 정화

쾅!!

피라미드의 밖에선 데몬들과 헌터들의 싸움이 한창이었다.

그런 난장판의 뒤에서 땅에 손을 짚고 있는 남자, 비칼.

울컥!

비칼의 입에서 한 움큼의 피가 터져 나왔다.

다크메타로 이루어진 모래 폭풍을 막느라 힘의 사용 한도를 한참 넘어선 대가였다.

'밀린다.'

비칼의 모래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약해지고 있었다.

한도를 넘어 끌어올린 힘이 비칼의 몸을 좀 먹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다크메타로 이루어진 모래 폭풍은 다른 데몬에게서 나온 다크메타를 흡수하며 계속해서 덩치를 불려갔다.

"끄아악!"

"지원은 언제 오는 거야!"

"더 이상 지원은 없습니다! 이곳 말고도 데몬이 들끓고 있다고 합니다!"

상황이 안 좋기는 뒤쪽의 헌터들도 마찬가지였다.

줄어들긴커녕 점점 숫자를 늘려 가는 데몬 때문에 질 수밖에 없는 소모전이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정부에서 보낸 지원 병력도 오는 길에 데몬을 만나 막혀 있는 상황.

잠시 후면 아슬아슬하게 맞춰져 있던 균형이 무너지며 순식간에 다크메타에게 덮쳐질 터였다.

드드드드!

명백하게 불리하고 결말이 정해진 싸움이었지만, 그렇다고 후퇴를 선택할 순 없었다.

전략적으로 후퇴가 가능한 상황이 아니었다.

지금 물러서는 순간 카이로는 폭풍과 데몬에 삼켜져 초토화될 테고, 그건 다른 도시들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 사우디와 그리스, 터키에서 헌터 병력을 보내주기로 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희망적인 이야기였지만, 현 상황에 봤을 땐 무의미한 지원이었다.

각 국가에서의 병력이 도착할 때쯤이면 이집트는 이미 사라져 있을 테니 말이다.

'1분 정도인가.'

비칼이 남아있는 힘을 가늠하며 입가에 고인 피를 뱉어냈다.

절대 소멸하지 않은 채 강해지기만 하는 모래 폭풍과의 싸움.

처음부터 예상했던 결말이지만 막상 마주해야 하는 순간이 오니 스스로의 무력함이 느껴졌다.

'마지막이다.'

점점 막아내기 벅차지는 힘을 느끼며 비칼이 마지막 모래를 끌어 올리기 위해 눈을 감았다.

이것까지 쏟아내고 나면 아마 서 있을 힘조차 사라질 터였다.

'비술, 모래의…?'

최후의 힘을 끌어올리려는 찰나.

손을 짚고 있는 땅으로 정체불명의 떨림이 느껴졌다.

후끈.

느껴진 건 떨림 뿐만이 아니었다.

떨림과 함께 손을 타고 올라오는 열기.

왜 모래 안에서 이런 열기가 느껴지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잠시 후.

푸화아아아아아!!

"…!!"

백운이 들어갔던 피라미드 안에서 불꽃이 터져 나왔다.

피라미드를 쌓고 있는 돌 사이 사이로 뿜어져 나오는 엄청난 불꽃.

꽤 먼 거리에 있음에도 후끈함이 느껴지는 강한 열기였다.

"부… 불꽃?"

데몬을 막고 있던 헤리아와 무하타, 셀린을 포함해 그 자리에 있던 모든 헌터의 눈길이 불을 뿜어내고 있는 피라미드로 향했다.

한참을 뿜어져 나오더니 서서히 사그라들기 시작한 불꽃.

불꽃이 사그라듦과 동시에 마주하고 있던 것들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모… 모래 폭풍이!"

비칼이 필사적으로 막고 있던 모래 폭풍.

강해지기만 할 뿐 조금도 약해지지 않았던 폭풍이 사그라들고 있었다.

"데몬도 약해지고 있습니다!"

비정상적으로 크기가 키워져 본래보다 강한 힘을 냈던 데몬도 마찬가지였다.

순식간에 줄어드는 크기에 비례해 미친 듯이 날뛰던 공격성마저 잃어버린 듯한 모습이었다.

스윽.

그제야 몸을 일으킨 비칼이 사그라들고 있는 모래 폭풍을 응시했다.

덩치를 키워가던 다크메타가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있었다.

# 도시를 습격하던 데몬이 물러나고 있습니다!

# 조금 전보다 훨씬 약해졌습니다! 이젠 저희만으로도 충분합니다!

'….'

인이어로 들려오는 각 도시의 보고를 들으며 비칼이 고개를 돌렸다.

불길은 사그라들었지만 여전히 후끈한 열기를 뿜어내고 있는 피라미드.

비칼이 시계가 채워진 왼손을 들어 올렸다.

'아직 10분 남았는데.'

내내 무표정했던 비칼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빠르군.'

* * *

마지막 불꽃을 터뜨림과 동시에 몸을 감싸고 있던 비늘도 사라졌다.

"후우."

고개를 돌려 다크메타가 가득했던 공간을 둘러봤다.

사방을 채우고 있던 다크메타가 터져 나온 불꽃에 닿으며 모두 소멸해버린 공간.

공간은 거짓말처럼 깨끗해져 있었다.

신전이었구만.

다크메타가 모두 걷히니 이곳이 어딘지 알 것 같았다.

세트와 라의 기묘한 동거가 시작됐던 장소.

마지막으로 세트가 라를 집어삼켰던 신전이었다.

다크메타로 둘러싸여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던 것.

해님도 말짱하시고.

공간에서 집어 삼켜져 제 기능을 모두 잃어갔던 태양.

태양을 삼키던 어둠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고, 그 덕인지 태양은 본래의 기능대로 찬란한 빛과 열기를 뿜으며 공간을 밝히고 있었다.

스르르…!

태양의 빛 때문일까.

세트에 의해 유지되고 있던 공간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모든 것의 시작이었던 장소가 사라진다는 건 한 가지를 의미했다.

끝.

라와 세트가 바라던 끝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단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끝임엔 분명했다.

회귀 전엔 어떻게 됐을까.

흩어지는 공간을 보고 있자니 새삼스레 의문이 생겼다.

마지막 사태까지 가기 전에 막아내긴 했지만, 공간에 있던 다크메타가 터져 나갔다면 보나마나 엄청난 참사가 일어났을 터였다.

내가 아니었어도 누군가 막았으려나.

다크메타는 라의 불꽃이 아니면 소멸되지 않는 존재.

내가 이곳으로 오지 않았다면 불꽃은 그대로 사그라들었을 터인데 다른 방법이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뭐… 모르는 일이지.

아무리 생각해봐야 풀리지 않을 의문이었기에.

생각하는 걸 멈추고 두 팔을 뻗어 올렸다.

우두둑!

"끄어어!"

뼈 마디마디가 시원하게 풀리는 걸 느끼며 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

천천히 소멸되고 있는 공간. 

설마 문도 소멸되나.

뼈마디와 함께 멈춰있던 뇌도 제 기능을 찾은 탓일까.

불현듯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문을 통해 들어온 공간인 만큼 저 문이 아니면 나갈 방법이 없었기에.

호다닥!

문을 향해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 * *

무사히 문을 빠져나온 뒤.

등 뒤에서 서서히 흐릿해지는 문을 바라봤다.

오 씨.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하더니.

공간과 연동되어있는 문 역시 사라지고 있었다.

어느 정도 여유가 있어 보여서 수리검을 던지는 대신 달려 나온 건데.

이젠 완벽히 사라진 문을 보고 있자니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밖은 어떠려나.

다크메타가 존재하기 위해서 필수 조건이었던 그릇, 세트.

밖에 드글거렸던 다크메타는 어떻게 되었을지 궁금했다.

세트와 공간이 소멸되며 함께 사라졌을 것 같긴 하지만, 보기 전에는 단정 지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저벅.

통로를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세계의 문화유산이자 이집트의 자랑거리인 피라미드.

역시 오래 살고 봐야 돼.

인터넷을 통해서만 봤었는데 이곳에 직접 들어오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으음, 피라미드 스멜.

사실 스멜이라고 할만한 건 딱히 없었다.

오랫동안 봉인되어 있어서인지 오래되고 꿉꿉한 냄새가 나는 게 다였기 때문이다.

오래된 스멜.

어찌 됐든 이집트의 랜드마크에 와봤단 만족감을 느끼며 빛이 보이는 통로의 출구로 발을 뻗었다.

응…?

출구로 빠져나가며 눈 앞에 펼쳐진 광경.

가볍던 발걸음이 멈춰지고, 여유롭던 눈동자가 오돌오돌 떨리기 시작했다.

들어갈 때의 통로와는 다른지 내가 나온 곳은 피라미드의 꼭대기였다.

꼭대기에 존재하는 유일한 문.

신화에 따르면 이집트의 신 혹은 왕만이 드나들 수 있다던 문이었다.

….

물론 그런 문에서 나왔다는 사실 때문에 굳은 건 아니었다.

몇 번 겪긴 했지만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는 상황이었다.

꿀꺽.

피라미드 아래에 있는 모든 이들.

비칼과 무하타, 헤리아, 셀린을 포함한 정부 소속 헌터들.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 향해 있었다.

* * *

피라미드의 꼭대기로 향해 있는 셀린의 눈동자.

셀린의 두 눈은 꼭대기 문에서 등장한 백운을 바라보고 있었다.

덜덜.

어째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피라미드 꼭대기에서 백운이 나타난 순간부터 셀린의 몸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두려움이나 공포에 의한 떨림은 아니었다.

'….'

이집트를 집어삼키려던 다크메타의 소멸과 함께 피라미드의 꼭대기에서 등장한 남자, 백운.

피라미드 꼭대기의 뒤론 사막의 태양이 찬란한 빛을 사정없이 뿌려대고 있었다.

태양의 후광으로 인해 정작 백운이 있는 곳엔 그림자가 드리워졌지만.

그림자는 마치 온전히 보이지 않는, 감히 똑바로 바라봐선 안 되는 존재를 가려주는 역할인 것처럼 느껴졌다.

'경외감.'

셀린은 자신의 몸이 떨리는 이유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 과학자로 살며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감각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셀린은 이집트에 퍼져있던 숭배 사상을 이해하지 못했었다.

지금이야 개방이 나타나며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지만, 개방이 없었을 과거에 평범한 사람을 신격화하며 숭배를 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납득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 겪어보지 못했던 것뿐이구나.'

하지만, 지금은 그 마음을 완전히 이해해버리고 말았다.

셀린의 몸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경외감.

이 경외감 역시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증명할 수 있냐 없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저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 채워지고 우러러보게 만드는 신비로운 감각이었다.

주륵.

셀린도 모르는 사이, 얼굴로 눈물 한줄기가 흘러내렸다.

곧이어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그렇게 셀린을 포함한 모든 이들이 피라미드 꼭대기를 바라보며 경이로움을 느끼고 있는 사이.

우당탕!!

"꾸어어어어!!"

근엄한 척 계단을 내려오던 백운이 계단에서 굴러떨어지기 시작했다.

* * *

너무 긴장한 탓이었다.

피라미드에서 등장하기 무섭게 집중포화를 받듯 쏟아진 사람들의 눈길.

감당하기 힘든 부담스러움에 몸이 굳어버렸고, 나도 모르게 근엄한 척 몸을 빳빳하게 세운 채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

그리고 잠시 후.

어울리지 않는 왕의 걸음을 흉내낸 것에 대한 벌이었을까.

삐끗.

어?

계단을 잘못 밟으며 몸의 균형이 무너졌다.

평소라면 반사신경을 이용해 다시 자세를 잡았을 테지만.

세트와의 싸움 직후여서인지 지친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데굴데굴… 쿵!!

그렇게 초스피드로 도달하게 된 피라미드의 아래.

푹신한 모래여서 망정인지 딱딱한 바닥이었다면 머리가 터질 뻔했다.

욱씬.

물론 계단에 우당탕 처박으며 내려온 몸은 몹시 욱씬거렸다.

하지만 그런 욱씬거림 따위는 간단히 이겨내 버리는 게 있었다.

쪽팔림.

쉽사리 일어날 수가 없었다.

굴러떨어지기 전 날 바라보고 있던 수많은 눈.

그 눈들이 조금 전의 모습을 다 봤을 테니 말이다.

이건 기네스 감이야.

기록을 본 적은 없지만 분명했다.

세계에서 가장 길게 계단에서 굴러떨어진 인간.

근엄한 척하지 말걸.

잠시나마 왕의 흉내를 냈던 게 몹시 후회됐다.

"백운 님! 괜찮아요!?"

"백운 님!"

곧이어 달려온 무하타와 헤리아가 애타게 내 이름을 불렀다.

큰 소리로 부르지 마요.

똑똑히 들리고, 몸을 일으킬 수도 있었지만.

창피하니까.

그 대신, 정신을 잃은 척 눈을 꽉 감았다.

주륵.

141화. 무기고의 변화

"백운 님, 정말 죽은 줄 알았잖아요."

이집트 카이로의 병원.

셀린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날 내려다봤다.

나도 깜짝 놀랐네.

정신없이 공간에서 빠져나와서일까.

굴러떨어지는 순간까지도 잠시 잊고 있었다.

라의 공간으로 들어가기 전 세트에게 꿰뚫렸었던 상처.

그 상처에서 계속해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단 사실을 말이다.

유탈라스 덕분에 싸우는 동안에는 몰랐었네.

비늘이 피부와 완전 밀착되어 있었기에 지혈의 역할까지 동시에 해준 듯했다.

"하하… 저도 놀랐네요."

굴러떨어진 날 애타게 부르며 달려왔던 사람들.

사람들이 도착해서 다급하게 날 부른 원인이었다.

떨어진 것도 모자라 온몸에 구멍이 숭숭 난 채 피칠갑을 하고 있었으니.

발을 헛디뎌서 떨어진 게 아니라 정신을 잃어 떨어졌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래도 정말 튼튼한 몸이네요. 거기서 굴러떨어졌는데 어디 하나 부러지거나 금 간 곳도 없다니."

셀린이 고개를 저으며 혀를 내둘렀다.

나도 놀라울 정도의 튼튼함이야.

병원으로 와 검사한 결과.

내게 있는 상처는 세트의 다크메타에 의해 꿰뚫린 상처뿐이었다.

피라미드의 꼭대기부터 구르며 생긴 상처는 없었다.

"조금 전에 의사 선생님이 놀라면서 나가셨어요. 별 치료를 안 했는데도 꿰뚫린 상처에서 피가 멈추고 있다고요."

날 바라보고 있는 셀린의 눈엔 여전히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경외감이 서려 있었다.

사람으로서는 불가능한 회복력이니 어쩔 수 없는 반응이란 생각이 들었다.

카이안 님, 당신은 대체…!

카이안을 만났을 당시 공간에 있던 무기는 정말 셀 수 없이 많았었다.

지금 내가 모은 것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숫자.

그런데도 이 정도의 육체라니, 그 정도 수의 무기를 모은 카이안은 얼마나 강했을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상황은 좀 정리되고 있나요?"

주변을 살필 새도 없이 병원으로 끌려왔기에.

세트가 사라진 후 어떻게 상황이 흘러가고 있는지가 궁금했다.

"이집트 각지에서 나타나던 다크메타는 전부 사라졌어요. 다크메타 때문에 생겼던 데몬이나 이상 현상도 마찬가지고요."

"다행이네요."

대답이 너무 간단해서였을까.

날 멍하니 바라보던 셀린이 웃음을 터뜨렸다.

"왜… 왜요?"

"그냥 백운 님 반응이 웃겨서요."

어느 정도 웃음이 잦아들자 작은 한숨을 내쉰 셀린이 입을 열었다.

"다크메타를 직접 마주하지 않았던 정부는 그렇게까지 생각하지 않는 듯하지만, 전 백운 님이 이집트를 구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 엄청난 일을 한 사람의 감상이 다행이네요, 한 마디라는 게 놀라워서요."

"하하… 이집트를 구하다니 너무 과분하네요."

공간에 있던 다크메타가 뻗어 나갔다면 셀린의 말대로 이집트가 위험할 수도 있었다.

세트와 다크메타를 마주하며 싸웠었기에 누구보다 잘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것에 대해 크게 생각하고 있진 않았다.

이미 충분히 만족하니까.

애초에 이집트로 온 건 혹시나 있을지 모르는 라의 불꽃을 찾는 것이었고,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기대 이상으로 빠르게 불꽃을 찾아내 무기고에 넣을 수 있었다.

사전의 목표를 미리 달성한 것에 몹시 만족하기에, 이에 파생되어 해결된 것들에 대해선 크게 염두해두지 않았다.

"과분하다뇨. 아마 다크메타를 상대했던 이들은 모두 알고 있을 거예요. 백운 님이 아니었으면 필패였다는 걸요."

"하하… 아 맞다. 비칼 님은 어떻게 됐나요?"

내가 공간으로 향하기 전 정부에서 쏜 미사일을 격추해버렸던 비칼.

비칼이 한 행동은 명백히 상위권자의 결정을 정면 반박한 행동이었다.

비칼 님이 안 했다면 내가 했겠지만.

비칼이 날 대신해 이집트 정부에 반하는 행동을 해준 것이었다.

"아무 일도 없을 테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오…?"

"공식적으론 국방부 장관인 모함자 님이 비칼 님보다 상위권자이지만. 이집트 내에서 비칼 님의 역할과 위치는 절대적이거든요."

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데몬을 잡으며 이집트를 지켜냈을 1급 헌터, 비칼.

한국에서의 기태랑을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가 되는 말이었다.

국가적 영웅에 가까운 존재를 누가 감히 탓할 수 있겠는가.

"또 백운 님이 검증해주신 것과 마찬가지니까요. 비칼 님이 한 행동이 옳았다는 거를요."

셀린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놀랐었지.

피라미드로 미사일이 날아들던 순간. 

당연히 비칼은 내 행동을 막으려 할 거라 생각했었다.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으니까.

하지만 찰나의 순간 비칼은 날 믿어줬고, 상부에 반하는 행동을 하면서도 날 도왔다.

묘한 사람이야.

만나자마자 반말을 박은 건 둘째 치고 작은 표정의 변화도 보여주지 않았던 비칼.

몹시 무뚝뚝하고 냉정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또 이런 걸 보면 아닌 거 같기도 하고, 보이는 이미지와 행동이 쉽게 매칭이 되지 않는 사람이었다.

빠아아안.

응…?

잠시 비칼에 대해 생각하던 중.

옆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가까운 곳에서 날 응시하고 있는 셀린.

"왜… 왜 그러세요?"

찐특인지 나도 모르게 말이 더듬어졌다.

그런 나를 보며 셀린이 입을 열었다.

"빙하랑 부딪히기 전, 백운 님을 만나서."

싱긋.

보는 사람의 기분마저 좋게 만드는 맑은 미소가 셀린의 입가로 그려졌다.

"정말 다행이에요."

* * *

모두가 잠에 든 늦은 시각.

조용히 병실을 빠져나왔다.

드디어 자유구만.

병실에 도착한 이후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계속 옆에서 날 돌봐주던 셀린은 고사하고 끊임없이 사람들이 병실을 찾았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이집트를 구했다는 것에 대한 감사를, 누군가는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를 물어왔었다.

"후으읍!"

호다닥 빠져나온 병원.

깊게 숨을 들이마시자 상쾌한 밤공기가 코를 통해 흘러들어왔다.

아따 상쾌하다.

고개를 들어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바라봤다.

쪄죽을 것 같은 낮에는 상상하기 힘든, 촘촘한 별이 박혀 있는 아름다운 하늘이었다.

[이카로스 - 칼데아 윙]

날개를 꺼내 하늘로 날아올랐다.

바다에서 셀린 일행을 만난 이후부터는 굳이 비행을 할 필요가 없었기에 세트와의 전투 때를 제외하곤 꺼내지 않았었다.

사막의 달이라.

천천히 날개를 움직여 달과 가까운 곳을 향해 올라갔다.

여기가 좋겠구만.

어느 정도의 높이까지 올라온 후.

달구경을 하던 두 눈을 천천히 감았다.

* * *

오, 안 뜨겁네.

사막의 하늘에서 들어온 무기고의 공간.

이번에 찾은 라의 문양이 밝은 빛을 내며 불을 뿜어내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면 타는 거 아닌가 걱정했지만 다행히 열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나중에 유탈라스 없이 꺼내보긴 해야 하는데… 무섭다.

게이지가 쌓여 있던 유탈라스의 비늘.

적절한 시점에 동기화가 되며 불꽃에 의한 상처를 입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앞으로도 항상 두 무기를 함께 사용할 수 있는 여건이 주어질지는 미지수였기에, 어느 정도의 고통이 올지 한 번쯤은 맨몸으로 꺼내볼 필요가 있었다.

음… 이건 나중에 하기로 하고.

쫄보답게 어려운 일은 뒤로 미룬 후.

공간에서 사용했던 유탈라스와의 동기화를 떠올렸다.

신기한 감각이었다.

이전보다 비늘의 수가 늘어난 것은 물론 비늘 하나하나에 내 신경이 연결된 듯한 감각.

이제 내가 원하는 대로 사용할 수 있게 됐다.

이전엔 이 정도의 디테일한 연결이 아니었기에, 오른팔에 둘러 사용하는 게 최대였었다.

하지만, 이제부턴 비늘의 개체를 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게 됐으니 다양한 활용이 가능해졌다.

흠.

비늘에서 눈을 돌려 무기고를 둘러봤다.

공간 자체에서의 느껴지는 분위기가 많이 달라져 있었다.

가장 큰 변화는 하늘이었다.

라의 불꽃을 찾기 전까지만 해도 하나의 달만이 떠 있었는데, 지금은 파란색의 달이 하나 더 추가되어 있었다.

평범했던 노란색 달과 시린 빛을 뿜어내는 파란 달.

마치 레벨 1에서 레벨 2가 되었음을 명시적으로 알려주는 느낌이었다.

카이안 님은 굳이 드러내지 않았던 건가.

카이안을 만났던 공간엔 단 한 개의 달만이 떠 있었다.

하지만, 공간 자체가 레벨 1의 느낌이었던 건 절대 아니었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했지.

내가 맨 처음 나의 무기고로 들어왔을 때 의아했던 점이었다.

카이안의 공간에서 느껴졌던 강력함.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충만함과 강력함이 내 공간에선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튜닝의 끝은 순정이라더니.

그때의 기운만 떠올려 봐도 카이안의 공간은 두 개의 달이 뜬 지금의 내 공간보다 압도적으로 강했었다.

카이안이 있는 그대로 공간을 나타냈다면, 카이안의 무기고엔 서너 개의 달이 아니라 수십 개의 달이 떠 있었을 것이다.

격차 실홥니까, 이거.

두 개의 달이 떠올라 기쁘면서도 동시에 카이안과의 격차에 아득함이 느껴졌다.

그리고, 까마득한 아득함에 정신이 아찔해지려는 순간.

두근.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상한 일이었다.

보통 이 정도의 아득함을 느끼면 막막하다거나 좌절하는 게 보통인데 말이다.

하하.

내 몸이여서 일까.

금방 두근거림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 난 계속해서 강해질 수 있다.

두근거림의 이유였다.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아득한 격차.

이 격차는 곧 그만큼 내가 강해질 수 있다는 증거였다.

어느 정도 더 강해진다고 해서 끝나는 게 아닌, 성장을 제한하는 천장 없이 무한히 강해질 수 있다는 것.

그것이 날 미친 듯이 두근거리게 만들고 있었다.

"후우…!"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해 손을 올린 뒤 심호흡을 했다.

….

어느 정도 진정이 되자 눈을 떠 무기들을 바라봤다.

무기고에 두 개의 달이 뜨며 생긴 가장 큰 변화는 단연 무기 두 개를 동시에 사용할 수 있단 것이었다.

"좋네."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단순히 개수가 두 개로 늘어난 게 아니었다.

두 개를 사용할 수 있다는 건 곧 세트 때와 마찬가지로 무기 간의 여러 조합이 가능하단 것이었다.

해보고 싶은 게 많았었는데.

무기를 하나씩만 사용하며 수도 없이 생각했었다.

두 개 사용이 되면 가능해질 다양한 전략들을 말이다.

물론 단점도 존재하지만.

단점이라고 할 정도인지는 헷갈렸지만.

무기의 사용엔 한 가지 개념이 더 생겨났다.

글로벌 쿨타임.

두 개의 무기가 각각 얼마만큼의 사용 시간과 쿨타임을 가지고 있던 간에, 동시에 사용하는 순간 그 중 사용이 빨리 끝나버리는 무기의 쿨타임이 두 무기에 동시에 걸려버렸다.

쿨타임과 사용 시간에 제약이 사라진 면도칼을 사용하더라도, 리볼버와 함께 사용하는 순간 리볼버의 사용 시간이 끝날 때 함께 사라졌고.

심지어는 리볼버의 쿨타임을 면도칼에도 적용받게 되는 것이었다.

두 개의 동시 사용… 듀얼은 잘 생각해서 써야겠어.

생각 없이 듀얼을 난발했다가는 초기와 같은 문제가 발생할 수 있었다.

모든 무기가 쿨타임에 걸려 아무것도 사용하지 못하는 상황 말이다.

"흐음."

생각의 정리를 마친 뒤 다시 한번 두 개의 달을 올려다봤다.

두 개의 달이 뜨며 많은 변화가 일어난 무기고.

나와 무기고의 무기들을 비추고 있는 달님들을 향해 두 손을 모았다.

"빨리 세 개 되게 해주세요."

반짝.

내 기도에 대한 화답일까.

두 개의 달이 유난히 더 밝은 빛을 무기고로 뿜어냈다.

142화. 전령

으음.

느껴지는 인기척에 천천히 눈을 떴다.

빠아아안.

셀린이 바로 옆에 앉아 날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뭐지.

"셀린 님…? 왜 자는 사람을 그렇게 보고 계세요?"

"아, 죄송해요."

왜 보고 있냐고 묻자 그제야 호다닥 물러나는 셀린.

멋쩍게 웃어 보인 셀린이 입을 열었다.

"그냥 아직도 실감이 잘 안 나서요. 지금 침 흘리면서 자고 있는 사람이 피라미드의 꼭대기에서 신처럼 내려오던 그 사람이 맞나."

츄릅.

셀린의 말에 뺨까지 흐른 침을 닦아냈다.

해가 뜰 때 들어와 잠을 청해서인지 사람이 온 줄도 모르고 깊은 잠을 자버렸다.

너무 신나부러쓰.

무기고에서 빠져나온 이후. 

내 기분은 성층권을 뚫고 우주로 날아가 있었다.

평소처럼 한 걸음이 아니라 두세 걸음은 더 나아갔다는 생각과 나아갈 길이 아직 많이 남았다는 기대감까지.

늦은 시간이었음에도 하늘 여기저기를 날아다니며 기쁨을 만끽했었다.

그나저나 셀린 님은 말이야.

사람이 침을 흘리고 있으면 못 본 척해줘야지!

약간은 괘씸하다는 생각에 셀린을 향해 눈을 가늘게 떴다.

"밖에 나가요, 백운 님."

그러던가 말던가 활짝 웃으며 나가자고 말하는 셀린.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걸 알아서인지 오늘따라 밝게 웃는 셀린이었다.

"밖은 왜요?"

방구석 히키코모리 출신답게 되묻자 셀린이 당연한 걸 묻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집트 바다에서부터 고생 밖에 안 하셨잖아요. 제 부탁 때문이긴 하지만요."

그거 아니라니까.

불 구하러 간 거라니까요.

"그래서! 오늘은 제가 이집트 구경시켜 드릴게요. 맛있는 것도 사드리고요."

"맛있는 거요?"

꼬로록.

맛있는 거라는 말에 배가 즉각적인 신호를 보내왔다.

생각해보니 어제부터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했었다.

병원 밥은 더럽게 맛없었지.

사막 나라 아니랄까봐 정말 모래알 씹는 맛이었다.

스윽.

손을 들어 셀린을 향해 엄지를 치켜세웠다.

"좋습니다!"

침대에서 빠르게 일어나려는 찰나.

셀린이 손을 들어 내 움직임을 막아섰다.

"…?"

다시 한번 빙긋 웃는 셀린.

"세수는 하고 가셔야죠."

"네… 넵."

마음을 가라앉힌 뒤 병실 안쪽 세면대로 걸음을 옮겼다.

* * *

앞에 놓인 다리를 집어 한 입 베어 물었다.

"와우."

"맛있죠?"

고개를 끄덕이며 폭풍 흡입을 시작했다.

앞에 놓인 건 흡사 닭의 모습을 하고 있는 비둘기.

이집트가 자랑하는 요리 중 하나라고 셀린은 설명했다.

- 비둘기는 좀.

처음 식당에 들어와 셀린을 향해 고개를 저었었다.

왠지 모르게 비둘기라 하면 번화가 길거리에서 쓰레기나 널브러진 토를 쪼아먹는 게 떠올랐기 때문이다.

- 이집트 비둘기는 직접 사육해서 깨끗하니까 걱정마세요.

나를 달래는 셀린을 미심쩍은 눈초리로 쳐다봤지만.

막상 한 입 베어 무니 무척이나 담백한 맛이었다.

"육즙이 팡팡 터지네요."

"그쵸? 맛있다니까 안 믿고 그러세요."

"제가 겁이 많아서요."

빠르게 대답을 하고 단백질 섭취를 위해 가슴살을 뜯었다.

겁이 많다는 말에 푸훕하고 웃음을 터뜨리는 셀린.

다르네 달라.

다크메타를 조사하는 게 고됐는지 셀린은 항상 녹초 상태였었다.

하지만 오늘은 이전과 달리 생기가 팡팡 터지는 모습.

다크메타 일이 해결되며 근심이 사라진 모양이었다.

"백운 님은 이제 어디로 가시나요?"

"한국으로 돌아가야죠. 해야 할 일이 있어서요."

"그렇군요, 언제 가시려고요?"

비둘기 날개를 씹으며 어제 봐뒀던 비행기 시간을 떠올렸다.

"다크메타 때문에 아직 공항이 폐쇄된 상태더라고요. 빨라야 일주일 뒤일 거 같아요."

"다행이네요."

"네?"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보자 셀린이 미소를 지었다.

"무하타 님과 헤리아 님도 백운 님을 보고 싶어하거든요. 이집트가 큰 신세를 졌으니 감사 인사를 하고 싶다고요."

"하하… 이거 참."

의도한 건 아니었는데 몇몇 이들에게 이집트를 구한 영웅이 되고 말았다.

나쁘진 않아.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정의로운 목적으로 시작된 일은 아니었지만.

어찌 됐든 결과는 해피엔딩이니 또이또이 한 거 아니겠는가.

"두 분은 바쁘신가 보네요."

"백운 님, 못 들으셨나요?"

"네? 뭐를요?"

셀린이 무언가를 검색한 뒤 내게 핸드폰을 건넸다.

"푸훕!"

웃음이 터진 건 아니었다.

핸드폰에 검색되어있는 내용에 놀란 것이었다.

# 세기의 미스테리, 스핑크스 하루아침에 실종.

시… 시발.

진짜 스핑크스였어?

문을 열기 전 무슨 수수께끼를 내려던 사족보행 데몬을 떠올렸다.

마음이 급했던 터라 들어보지도 않고 가루로 만들어버렸는데 진짜 스핑크스였을 줄은.

내가 세계의 문화 유산을 가루로 만들었구나!

"백운 님, 왜 그러세요? 괜찮아요?"

"네, 하하! 사레가 들려서."

이실직고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이집트를 구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어.

암, 그렇고말고.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자기 합리화를 할 뿐이었다. 

"어쨌든 사라진 스핑크스 때문에 바쁘신 거 같더라고요. 어떻게든 찾아내라는 명령을 받아서요."

죄송합니다. 

무하타 님, 헤리아 님.

아마 못 찾을 거예요.

"아, 백운 님. 비행기 예약은 하셨어요?"

"시간만 확인하고 아직 예약은 안 했어요."

까먹을 수도 있으니 미리 해둘까.

말 나온 김에 하고자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아.

텅 비어 있는 주머니에 깨닫게 되었다.

피라미드에서의 싸움으로 내가 잃게 된 것들을 말이다.

꼬챙이 됐었지.

칼날 모양으로 날아든 다크메타에 내 몸과 함께 꿰뚫려버린 핸드폰.

상처가 너무 빨리 아물어 다크메타에 꼬치가 됐었다는 사실도 까먹고 있었다.

산지 얼마 안 됐는데.

그리스로 향하기 전 유연경, 배이슬과 함께 샀던 신상 핸드폰이었다.

기능을 제대로 써보기도 전에 생명을 다해버린 것.

심지어 액션 캠도 망가졌네.

샹.

육성으로 터지려는 욕을 간신히 참아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정확하진 않지만 아마 다크메타 안으로 들어갔을 땐 것 같았다.

아닌가? 피라미드에서 굴러떨어질 때였나.

어쨌든 핸드폰과 함께 하늘나라로 가버린 액션 캠.

한국으로 돌아가면 액션 캠과 핸드폰 먼저 장만해야겠다.

"핸드폰 없나요?"

뒤적거리다 말고 멍 때리더니 혼자 고개까지 저어서일까.

셀린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날 쳐다봤다.

"망가진 거 깜빡했었네요. 뭐 연락 올 곳도 없으니 상관없지만요."

"그럼 비행기 예약은 제가 해드릴게요."

"감사합니다!"

셀린에게 고개를 끄덕인 후 비둘기 흡입을 재개하려는 찰나.

와장창!!

옆에 있던 창문을 꿰뚫고 무언가가 날아들었다.

* * *

며칠 전, 백운이 이집트에 도착하기 전의 대산 본사 80층.

회장 소피아가 엔티크한 의자에 앉아 아티라를 바라봤다.

"아티라, 어떻게 됐나요?"

옆에 서 있던 아티라가 대답 대신 고개를 저어 보였다.

"이런."

평소엔 무슨 일이 있어도 항상 온화하고 유한 얼굴을 유지하는 소피아였다.

그런 소피아의 얼굴에 드리워지는 그늘.

심각한 건 아티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전부 사라졌습니다. 파견을 나갔던 인원들도, 사라진 이들을 찾으러 나간 헌터도요."

소피아와 아티라가 심각한 이유였다.

얼마 전부터 포착된 다른 회사들의 움직임.

대산과 연관된 회사도 아니었기에 그냥 넘겨도 무방했지만.

소피아는 그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걸 눈치채고 몰래 인원을 투입해 조사를 벌이고 있었다.

- 투입됐던 인원들의 연락이 끊겼습니다.

투입되고 며칠이 채 지나지 않았을 때 들려온 보고였다.

끊임없이 본사와 컨택을 하고 있던 인원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었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심어뒀던 추적 장치마저 무력화되어 찾는 게 막막해진 상황.

- 헌터들을 투입해서 찾으세요. 비밀리에 찾지 않아도 됩니다. 문제가 생겼을 땐 제가 책임질 거예요.

비공식적인 수사엔 한계가 있었기에.

소피아는 사라진 이들을 찾기 위해 공식적으로 헌터를 투입하기에 이르렀다.

모든 정보망을 이용해 사라진 이들을 찾기 시작했기에 얼마 지나지 않아 소식이 들려올 거라 생각했고, 소피아의 예상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소식이 도착했다.

- 헌터들이 사라졌습니다.

기다리고 있던 소식은 아니었다.

오히려 악화되어버린 상황에 대한 보고였다.

"아티라, 어떻게 생각해요?"

상황이 여기까지 치닫자 소피아는 아티라 휘하에 있는 직속 헌터 부대인 마틸다를 현장에 투입했었다.

아티라 만큼은 아니더라도 2급 혹은 3급 정도의 전력을 가진 실력자들이었다.

"조직적이고 계획된 움직임입니다. 만만치 않은 전력이고요."

그렇게 투입됐던 마틸다는 다행히 실종되지 않고 본사로 복귀했다.

현장에서 만난 적에게 많은 상처를 입은 채로 말이다.

"그리고."

말을 하던 아티라가 잠시 망설이자 말해보라는 듯 소피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부 정보가 새어나가고 있습니다."

소피아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티라가 말하지 않아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던 것이었다.

직속 부대 마틸다의 투입은 소피아와 아티라를 포함해 알고 있는 이가 몇 되지 않았었다.

그런데도 적은 마치 마틸다가 올 걸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 함정을 파고 기다리고 있었다.

"…."

소피아가 의자에 몸을 기대며 생각에 잠겼다.

'어디서일까.'

마틸다의 정보에 대해 알고 있던 건 극히 소수.

이 중에서 분명 내통자가 있었다.

'그리고 기업들의 움직임은 대체 무얼 위해서?'

한동안 아무것도 안 하고 숨죽이고 있던 기업들.

그런 기업들이 서로 짜기라도 한 듯 동시에 움직이고 있었다.

'누굴 믿어야 하고, 누굴 믿으면 안 되는 거지.'

소피아의 머리가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내통자가 있는 건 분명했지만, 짐작조차 가지 않는 상황에서 들쑤시는 건 현명하지 못했다.

오히려 많은 반감과 분열을 일으켜 상황이 더 안 좋아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도 없어.'

사방에서 불길한 움직임이 계속되고 있는데 아무것도 안 하고 있을 순 없는 노릇.

어떻게 해서든 움직일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야 했다.

"소피아 님, 내부의 적이 누구인지 모르는 이상 섣불리 움직이긴 힘듭니다."

"맞습니다. 오히려 우리 인원들이 위험해지기만 할 뿐이죠."

슥.

의자에서 일어난 소피아가 책장으로 걸어가 케이스 하나를 꺼냈다.

"그건…?"

전령.

어떠한 전파망도 거치지 않고 특정인에게 무조건 도달하는 전령이었다.

"회담 때 선물로 받아뒀었습니다. 핸드폰이나 위성망이 발달된 세상이다 보니 직접 쓰는 일이 생길 줄은 몰랐지만요." 

아직 소피아의 의중을 눈치채지 못한 아티라.

소피아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럴 땐 피아식별이 되지 않는 내부 인원보단, 완벽한 외부인이 더 안전한 법이니까요."

"누구에게… 보내시려는 건가요?"

전령에게 메시지를 적어 넣은 소피아의 입가로 미소가 그려졌다.

"완벽한 외부인이자, 최대한 아껴두려고 했던 비장의 카드입니다."

143화. 이동 수단

쿵.

묵직한 소리가 들려왔다.

내 심장이 떨어지는 소리.

- 와장창!

셀린과 함께 이집트의 햇빛을 즐기며 비둘기 고기를 먹던 중이었는데.

왜 눈앞에는 노란색 빛을 뿜어내는 참새가 퍼덕거리고 있는 걸까.

퍼덕퍼덕!

"…."

놀란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포크를 든 채 그대로 뒤까지 날아가 있는 셀린.

셀린의 눈은 갑작스러운 참새의 습격에 놀라 몹시 커져 있었다.

"뭐… 뭐야!!"

아직도 떨리는 심장을 추스리며.

뒤늦게 참새를 향해 소리 질렀다.

퍼…!

내 목소리를 알아들은 건지 퍼덕임을 멈춘 노랑 참새.

참새가 천천히 몸을 일으켜 날 돌아봤다.

오씨.

소름 돋는 모습이었다.

친척격인 비둘기를 먹다 만나서 그런지 더 무섭게 보이는 듯한 녀석의 생김새.

꿀꺽.

저러고 있다가 갑자기 달려들까봐 주먹을 꽉 쥔 상태로 녀석을 노려봤다.

번쩍… 번쩍.

왠지 모르겠지만 참새의 눈에서는 정체불명의 빛이 뿜어지고 있었다.

지이잉…!

잠시 후.

참새의 눈에서 정체불명의 빔이 쏘아지고.

"…!"

익숙한 얼굴이 나타났다.

# 안녕하세요, 백운 님.

대산의 회장, 소피아.

창문을 깨고 들어온 참새도 모자라 이집트 한복판에서 소피아의 얼굴을 보게 되다니.

쉬지 않고 일어나는 돌발상황에 정신을 차리기 힘든 지경이었다.

# 제 메시지가 잘 도착했을지 모르겠습니다.

무슨 일이지.

다른 이었다면 안부 인사라도 하려고 보냈을까 했겠지만.

상대가 소피아라면 달랐다.

무기에 대한 정보를 넘겨받으며 소피아가 했던 부탁.

- 저를 위해 싸워 주셨으면 합니다.

아직 메시지를 들어보지 않았지만 왠지 모르게 그 부탁과 관련된 게 아닐까 싶었다.

여유도 많이 사라졌어.

소피아에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여유와 평온함이 있었다.

적진이라 생각했던 대산 한가운데서도 평온함을 느끼게 해주는 신비로운 기운.

그랬던 소피아의 여유와 평온함이 영상 안에서는 많이 사라져 있었다.

# 백운 님이 메시지를 어디서 받으셨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여기까지 말한 후 잠시 뜸을 들이는 소피아.

잠시 침묵을 이어가던 소피아가 입을 열었다.

# 이전의 약속이 유효하다면, 지금 저를 위해 한 번 싸워 주셨으면 합니다.

역시.

보통 일이 아닌 것 같았다.

대한민국에서 손에 꼽는 대기업 중 하나인 대산.

그런 대산의 정점에 있는 게 소피아였다.

마음만 먹으면 수백의 사람을 부릴 수 있을 위치인데도 나에게 싸워달라고 도움을 요청했다는 건.

대산 내부에 문제가 생겼다.

이게 아닌 이상 외부인인 나를 끌어들일 리가 없었다.

최리아의 손아귀로부터 날 구해주고, 나로 인해 대산의 이미지 실추는 물론 무기에 대한 정보까지 내주며 얻어낸 약속이었다.

그런 약속 이행을 갑자기 요청한다는 건 소피아의 힘만으로는 무언가 하기 힘든, 내부를 믿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해있다는 것이었다.

# ….

지금 싸워달라는 말을 한 뒤.

옅은 미소를 지어 보인 소피아의 모습을 끝으로 영상은 종료되었다.

사락!

영상이 끝나자 거짓말처럼 흩어져 사라져 버리는 참새.

등장했던 임팩트에 비해서는 몹시 빠른 퇴장이었다.

"백운 님? 대체 뭐였나요?"

그제야 뒤로 도망쳐 있던 셀린이 내게 다가왔다.

아무것도 모르는 표정을 봐선 참새의 영상은 수신인으로 지정된 나에게만 보인 듯했다.

"음… SOS 요청요."

"네…?"

의아한 표정을 짓는 셀린을 뒤로하고 생각에 잠겼다.

대산 회장의 SOS라.

솔직히 대산만 놓고 본다면 내가 도와줘야 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굳이 좋은 기억이냐 나쁜 기억이냐를 따진다면.

대산과는 나쁜 기억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냥 도착한 메시지를 못 본 척하고 휘파람 불며 피라미드 구경을 나가도 되는 일.

하지만.

대산이 아니라 소피아의 부탁이니까.

약속을 할 때도 소피아는 분명한 어조로 말했었다.

대산이 아닌, 자신을 위해 싸워달라고 말이다.

대산은 괘씸해도 소피아에겐 빚이 있어.

아직도 왜 그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소피아는 처음 본 내게 여러 방면으로 도움을 줬다.

사나이 백운, 약속 이행을 앞에 두고 도망치지 않으리!

벌떡.

굳은 다짐을 하며 자리에서 시원하게 일어섰다.

어차피 창문의 유리가 박혀 비둘기 고기도 못 먹게 된 상황.

상황이 여유로워 보이지 않는 만큼 바로 출발할 생각이었다.

"백운 님…?"

참새의 영상을 보지 못해 계속해서 따라오지 못하고 있는 셀린.

그런 셀린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저 가야겠어요."

"네에? 어디를요?"

갑작스러운 떠남 선언에 셀린의 동공이 흔들렸다.

이 인간은 대체 어떤 템포를 가지고 있는 걸까 몹시 궁금해하는 눈빛이었다.

싱긋.

시원한 미소를 지으며 주먹을 쥐었다.

"한국으로요!"

* * *

어두운 회의실 안.

이사 연수정이 앞에 모인 사람들을 바라봤다.

정확히는 영상으로만 이루어진 화면.

"정이사님, 준비는 차질 없겠죠?"

연수정의 질문에 바로 옆에 있는 화면에서 음성이 들려왔다.

# 누구를 위한 일인데요. 확실합니다.

무거운 거 같으면서도 어딘가 끈적함이 느껴지는,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기분 나빠지게 만드는 목소리였다.

대답을 들은 연수정이 보이지 않게끔 조소를 머금었다.

'지 일이라 하니 참 적극적이네.'

다른 일이 있을 땐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거나 몸을 사리더니.

지금은 자기 일 아니랄까봐 누구보다 앞장 서 주도적으로 준비를 진행하고 있었다.

# 일이 끝나면 말씀하셨던 대산의 계약 건들은 저희에게 넘겨주셔야 합니다.

# 이번 일에 들어간 공수의 보상 역시 이행되어야 하고요.

곧이어 하이에나들의 목소리가 정이사에게 향했다.

대의를 위해 뭉쳤지만, 표면적인 이유일 뿐이었다.

뒤로는 모두 자신의 이익을 위해 협조하는 것일 뿐.

전세가 기운다면 얼마든지 등을 돌릴 자들이었다.

# 당연하죠. 약조 드렸던 것들은 틀림없이 이행될 겁니다. 저희가 이번만 보고 말 사이도 아니지 않습니까.

정이사의 말대로였다.

아직 힘을 모아 해야 할 일이 많았기에.

서로에게 이빨을 드러내는 건 시기상조였다.

"이번엔 꼭 성공해야 합니다. 저번 히무라 님의 일로 얼마나 큰 시간적 손실이 생긴지는 아실 겁니다."

# ….

# ….

연수정의 말에 정적이 찾아왔다.

시노카 암살대를 거느린 히무라의 죽음.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죽음이었다.

회의에 참가하는 모든 이들이 경계했을 만큼 위험한 인물이었던 히무라. 

그의 죽음에 구성원들은 한동안 숨을 죽이고 지낼 수밖에 없었다.

히무라를 죽인 게 자신들을 겨냥한 공격이었는지, 아니면 히무라 개인을 노린 공격이었는지 알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덕에 일본과의 커넥션이 사라졌다.'

뼈 아픈 손실이었다.

커넥션마저 사라진 탓에 히무라를 공격한 게 누군지 감조차 잡을 수 없었다.

# 걱정 마십시오.

회의실의 정적을 깨며 정이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소피아 회장은 독 안에 든 쥐입니다. 누가 아군이고, 누가 적군인지도 모른 채. 클클…!

희미한 정이사의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 최후를 맞이할 겁니다.

* * *

아차.

머리가 어떻게 되어버린 걸까.

의기양양하게 밖으로 나온 것까지는 좋았는데, 잠시 잊고 있었다.

비행기 없지.

다크메타 사태로 인해 하늘길이 막혀버린 이집트.

이집트와 한국 간의 거리는 그리스와 차원이 다르기에, 수영을 하고 칼데아를 사용하며 갈만한 거리가 아니었다.

칼데아를 사용하는 순간에야 비행기보다 훨씬 빠르겠지만.

무한하게 사용할 수 없는 만큼 길게 봤을 땐 엄청난 시간이 걸릴 터였다.

저벅.

옆으로 다가온 셀린이 고개를 저었다.

"안된다네요. 일주일 뒤까지는 단 한 대의 비행기도 뜰 수 없대요."

가게에서 나오기 전 설명을 들으며 궁금증을 푼 셀린.

한국으로 빨리 가야 한다는 내 말에 셀린은 적극적으로 여기저기에 전화해 비행기를 알아봐 주었다.

결과적으론 잘 안 된 모양이지만 말이다.

"음."

팔짱을 끼고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라의 불꽃을 생각보다 빨리 찾아 몹시 급하거나 그러진 않았기에, 일주일 뒤에 뜰 비행기를 기다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소피아의 메시지를 받으며 상황은 달라졌다.

빨리 가지 않으면 늦을 것 같은 이 느낌.

참새의 한계인지 영상은 몹시 짧았다.

인사와 함께 약속을 이행해달라는 내용이 끝.

그렇다 보니 정확히 어떤 상황이고 얼마나 급한지는 알 수 없었지만.

참새가 내게 온 시간까지 합치면 이미 꽤 시간이 흘러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역시 철인 3종 경기뿐인가.

이집트에서 한국까지는 비행기로도 하루가 넘는 거리였다.

아무리 내 체력이 남아돈다 해도 엄청난 거리였고.

또 한국으로 가는 동안 평평한 지형만 있으란 법이 없었다.

칼데아를 꺼내지도 못하는데 그런 지형을 만났다간 그야말로 도착 시간이 확 늘어나게 될 터.

오히려 일주일을 기다려 비행기를 타는 것만 못한 상황이 펼쳐질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다짜고짜 대산에 전화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비행기가 없단 사실에 처음으로 떠올린 방법이었다.

대산으로 전화해 전세기든 뭐든 좀 보내줄 수 없겠느냐 물어보는 것.

아주 잠시 떠올린 방법이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스스로의 머리를 후려칠 수밖에 없었다.

요즘 시대에 누가 이런 걸로 전령을 보내겠어.

소피아 님이 바보도 아니고 이유가 있으니까 조심하기 위해 그런 거겠지.

전화해서 나 백운인데 그쪽 회장이 도와달라고 했으니까 당장 비행기 보내!

생각만 해도 소피아 입장에선 아찔해지는 상황이었다.

"백운 님, 제가 이집트 정부 쪽에 도움을 요청해볼게요. 정부는 최대한 이번 사건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 같지만, 그래도 그때 당시 피라미드 옆에는 많은 정부 소속 헌터들이 있었으니까요. 백운 님을 마냥 무시할 수 만은 없을 거예요."

이것뿐인가.

어떻게 보면 소피아의 약속은 개인 사정이었기에.

셀린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치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셀린이 말한 방법 말고는 딱히 좋은 대안책이 없는 상황.

"셀린 님, 그럼 죄송하지만 그렇게…!?"

사아아.

그렇게 해달라고 말하던 중 느껴지는 무언가의 기척.

익숙까진 아니지만, 완전히 낯선 기척 또한 아니었다.

슥.

기척이 느껴지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얼마 지나지 않아 기척의 주인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스르르….

"허…!"

페샨의 눈은 발동하지 않은 상태.

이번엔 다른 사람도 볼 수 있도록 모습을 드러낸 것 같았다.

서서히 또렷해지기 시작한 검은 망토와 거대한 낫을 든 남자.

그리스에서 만났던 사신, 로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로인.

사신이란 능력 때문인지는 몰라도 여전히 나이에 맞지 않는 우중충한 표정을 하고 있는 로인.

로인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날 응시했다.

"길이 필요하시다면."

잠시 말을 멈췄던 로인이 낫을 치켜들었다.

"열어드리겠습니다."

144화. 망자의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