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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0-290

#280화

살짝 입을 벌리며 굳어졌던 것도 잠시.

"아… 전액을 찾으시겠다는 말씀이시군요."

이내 다시 얼굴에 미소를 머금으며, 직원이 말을 이었다.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전액을 인출하신다면 열쇠를 반납하셔야 합니다."

그가 이안의 눈을 조심스럽게 마주보았다.

"그러니, 가능하시다면 최소 단위인 금화 오십 개는 남겨 두시는 게 어떠시겠습니까? 열쇠를 반납하신다면, 다시 금고를 배정받기 어려우실 수도 있습니다만."

바로 시작되네.

내심 읊조린 이안이, 슬쩍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괜찮소. 전부 주시오."

"…예. 그러시다면, 잠시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제가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초과한 금액이라서요."

순간 멈칫한 직원이 공손하게 덧붙였다. 이안은 그렇게 하라는 듯 고개만 까딱였다.

"양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한차례 고개를 숙인 직원이 몸을 돌렸다. 그의 시선을 받은 오크 경호원이 창구 구석의 간이 탁상으로 향하는 가운데, 직원이 뒤편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금화 천 개가 넘는댔으니까, 지부장이 나오려나.'

푹신한 등받이에 기대앉으며, 이안은 게임에서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때도 다른 이의 열쇠를 들고 금고를 찾았기 때문에, 비슷한 절차를 거쳤었다.

인출 절차는 함정 피하기 같은 선택지가 이어지는, 일종의 미니 이벤트였다.

방금 직원의 질문도 함정이었다. 금고를 남긴다면 신분을 반드시 증명해야 했으니까.

별문제 없이 남은 절차가 끝나지만, 다시 강철 금고를 방문하면 금고가 봉인되었다는 것을 통보받고 열쇠를 빼앗긴 채 추방당하게 됐다.

"...."

그때, 머리 위로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웠다. 책상 앞으로 다가온 오크 경호원이, 들고 있던 접시를 금속 상자 너머로 내밀어 이안의 앞에 내려놓았다.

파이 한 조각과, 향이 우러나오기 시작한 차였다.

"...."

말없이 꾸벅, 고개만 한 차례 숙인 오크가 몸을 돌렸다. 본래 있던 문 옆으로 돌아간 그가 석상처럼 우두커니 섰다.

포크를 들며, 이안은 오크의 모습을 차근히 눈에 담았다.

흉악한 외모와 달리, 저들은 규율과 절제, 인내를 가장 중요한 가치로 삼았다.

'아마 강철 금고가 저들과 협업하는 것도 그래서겠지.'

하지만 어쨌건, 마음만 먹으면 사람을 맨손으로도 찢어버릴 수 있는 종족이기도 했다.

게임에서는 추방을 거부하면 저들과 싸워야 했었다. 마법 무구로 무장까지 하고 있어서, 게임 오버 화면을 보게 되기에 딱 좋았다.

다 죽이고 탈출한다 해도, 범죄자로 등록되어 경비병들에게 쫓겨야 했다.

잘못된 선택지를 고르면 빈손으로 추방당하거나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잘한 설정 놀음에 관심을 가졌다면 별문제 없이 지나갔겠지만.

그렇지 않았던 이안은, 그저 오기로 다시 도전해야 했다.

그나마도 처음 금고를 나온 뒤에 마음을 바꿔서 곧바로 다시 들어가지 않았다면, 저장 지점으로 되돌아갈 수도 없었을 터였다.

'하여간, 자잘한 부분에 더럽게 불친절한 게임이었다니까….'

생각하며, 이안은 파이를 태연하게 집어 먹었다. 어쨌건, 맛이 좋은 무화과 파이였다.

문 너머에서 발소리가 가까워진 건, 접시 위의 파이가 거의 다 사라졌을 때쯤이었다.

철컥-

문이 열리고 직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물론, 이번엔 혼자가 아니었다.

회색 정복을 걸친 중년 제국인과 함께였다.

이안이 차로 입을 헹구는 사이, 책상 앞으로 다가온 중년 남자가 미소 지었다.

"오래 기다리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지부장인 넬슨이라고 합니다."

넬슨이 정중하게 말했다. 그 와중에도 이안은, 그의 시선이 파이가 담긴 접시를 훑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뭐, 쫄아서 못 먹고 있을 줄 알았나.

내심 생각하며, 이안이 대답했다.

"반갑소."

넬슨이 그의 눈을 마주 보았다. 곧바로 대답하지 않는 건, 이안이 이름을 밝히기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일 터였다.

물론 이안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몇 초의 적막 후에, 넬슨이 그린 듯한 미소를 입가에 걸었다.

"이미 저희 직원에게 간단한 설명을 들으셨다더군요. 확인차 한 번 더 여쭙겠습니다. 정말 열쇠를 반납하시더라도, 보관 중인 금액을 전부 찾으시겠습니까?"

"그렇소."

이안은 곧바로 대답했다.

말을 길게 할 필요는 없었다.

현실이 된 지금은 게임과 달리 결정을 번복할 수도 있겠지만.

굳이 그런 위험성을 감수할 필요는 없었다. 그가 알지 못하는 어떤 규율이 정해져 있을지도 몰랐으니까. 애초에 저들이 개입할 여지를 주지 않아야 했다.

"예. 그러시다면 그렇게 처리하겠습니다. 신분 증명서를 제출해 주시겠습니까?"

넬슨의 말이 이어졌다. 이안이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무기명 개인 금고인 것으로 아는데. 익명으로 처리하겠소."

"물론 그렇습니다만…."

넬슨이 짐짓 걱정스럽다는 듯 말을 이었다.

"신분 증명 없이 돈을 찾으시게 되면, 그동안의 이자를 받으실 수 없게 되시는 건 물론이고 상당한 규모의 보관 수수료도 지불하셔야 합니다만. 그래도 그렇게 하시겠습니까?"

이건 정말 토시 하나 안 다른 것 같은데. 매뉴얼이라도 있나.

이안의 입가에 맺힌 미소가 짙어졌다.

무기명은 일종의 말장난이었기 때문이다. 이름과 성의 머리글자는 기록이 되어 있었다.

무기명이란 말만 믿고, 수수료를 아끼기 위해 증명서를 제출했다간 곧바로 추방 절차가 이어졌다.

그리고 그 이후로는 금고에 발을 들일 수조차 없었다.

물론 머리글자가 똑같다면 상황이 달라질 수도 있었지만.

게임일 때는 아니었고, 지금도 그랬다.

"수수료가 전체 금액의 삼 할, 맞소?"

"정확히는 삼 할 삼 푼입니다."

"지불하겠소."

잠시 이안을 바라본 넬슨이, 이윽고 다시 미소를 머금으며 금속 상자의 단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금화 천 백 삼십 개. 수수료를 제외하면 칠백 오십 개이며, 나머지는 은화로 지급해 드리겠습니다. 혹시, 전표로 받기를 원하십니까?"

"돈으로 받겠소."

그렇게 대답할 줄 알았다는 듯, 넬슨이 곧바로 물었다.

"돈을 보관할 금고는 가지고 오셨습니까?"

"가지고 오지 않았소."

"소형 금고를 원하신다면 금화 다섯 개를 추가로 지불하셔야 하고, 나무 보관함의 경우에는 은화 열 개를 지불하셔야 합니다."

"나무 보관함으로 하겠소."

"예. 그럼,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비로소 고개를 끄덕인 넬슨이, 오크 경호병에게 눈짓하며 몸을 돌렸다. 오크가 그의 뒤를 따라 문을 나섰다.

모든 절차가 무사히 지나간 것이다.

거의 다 식은 찻잔을 들며, 이안은 내심 미소 지었다.

금화 칠백 오십 개라. 가는 도시마다 돈을 뿌리고 다녀도 몇 년은 살 수 있을 금액이었다. 최고급 마법 무구라도 다섯 개는 구할 수 있으리라.

물론, 예상보다 빨리 다 써버리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올해만 하더라도 벌써 금화를 수백 개는 쓰지 않았던가.

어쨌건, 돈은 있는 게 없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언제나.

찻잔을 내려놓은 이안이 느긋하게 앞을 바라보았다.

"...."

책상 앞에 선 직원이 슬그머니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입가에 다소 어색한 미소를 띄우고, 숨소리도 내지 않는 채였다.

당연했다. 이안은 신분을 밝히는 대신 금화 수백 개를 포기한 참이었으니까. 금고의 원주인이 아니리라 확신하고 있을 터였다.

원주인을 죽이고 빼앗았거나, 불법적인 경로로 열쇠를 손에 넣었으리라 여기고 있겠지.

사실 틀린 생각도 아니어서, 이안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그는 절차를 전부 통과했다. 그가 금고의 주인이 아니라는 걸 강제로 입증할 방법은 없었다.

게다가 어쨌든, 은행도 수수료를 거하게 챙기지 않았는가.

그가 지불한 건 일종의 입막음 비용인 셈이었다. 애초에, 강철 금고도 이런 걸 의도하고 만든 방식이리라.

'이래놓고도 뒤통수를 칠지도 모르긴 하지만….'

어떻게 갚아줄지는, 그런 일이 일어나고 나서 고민해도 늦지 않았다.

철컥-

다시 문이 열렸다. 오크 경호병이 묵직해 보이는 나무 보관함을 들고 넬슨과 함께 들어섰다.

재빨리 다가온 직원이 이안의 앞에 놓인 접시를 치웠다. 그 자리에 나무 보관함이 대신 놓였다.

"액수를 확인해 보시겠습니까?"

오크가 물러나는 가운데, 넬슨이 물었다. 왼손에 끼고 있던 반지를 빼며, 이안이 고개를 저었다.

"괜찮소. 맞게 넣어 주셨겠지."

일어선 그가 반지를 책상 한쪽에 놓아두었다. 그 모습을 놓치지 않고 눈에 담던 넬슨이 덧붙였다.

"원하신다면 머무시는 곳까지 경호를 붙여 드리겠습니다. 인당 금화 하나씩입니다."

"됐소. 혼자서도 충분하니."

마지막까지 끈질기네. 내심 읊조리며, 이안은 보관함 양쪽의 손잡이를 잡았다. 기분 좋은 무게감.

"그럼, 수고하시오."

넬슨에게 싱긋 미소 지은 이안이 몸을 돌렸다. 은행을 나설 때까지, 한 번도 멈춰 서거나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였다.

***

"드문 일이군…."

발소리가 더는 들리지 않자, 넬슨이 비로소 입가에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 읊조렸다.

주인이 아닌 자가 열쇠를 들고 금고를 찾는 일은, 흔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마냥 드문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 대부분은, 결국 돈을 받지 못한 채 흠씬 두들겨 맞고 쫓겨나기 마련이었다.

은행과 고객 사이의 거래 방식을 이해하지 못하는, 욕심에 가득 찬 이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사실 강철 금고의 규율 대부분은, 그런 부분을 자극하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아무리 봐도, 범죄자가 분명합니다."

직원, 코르보가 속삭이듯 말했다.

넬슨은 그가 겁을 먹은 이유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방금 나간 남자의 눈은, 빛을 반사하는 것이 아니라 삼키는 것처럼 칙칙하고 깊었으니까. 살인자의 눈이었다.

"본부에 명부를 뒤져보라 연락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뭐하러, 굳이."

이어진 속삭임에 낮게 웃음 지으며 말한 넬슨이, 허리를 굽혀 책상으로 손을 뻗었다.

"빌미를 제공했다면 모를까. 모든 절차를 깔끔하게 통과하고 수수료도 냈는데. 그리고, 저런 고객은 괜히 건드리지 않는 게 좋아."

말하며 반지를 집어 든 그가, 책상 위에 놓인 열쇠 인식기의 단면을 다시 눈에 담았다.

금속 태엽으로 만들어진 활자들이 금고 주인의 이름 머리글자와, 잔고의 금액을 표시하고 있었다.

넬슨은 반지를 그 옆의 작은 구멍에 미련 없이 밀어 넣었다.

곧 상자 내부에서 태엽 돌아가는 소리가 이어졌다. 단면의 태엽 활자들이 차례대로 돌아가면서, 떠올랐던 글자와 숫자가 지워지기 시작했다.

초기화 절차였다.

"다 끝나면, 거래 내역서나 정리해서 함께 가지고 와. 수수료 실적은, 너와 내 이름으로 반씩 나누고."

덧붙인 넬슨이 몸을 돌렸다.

방금 나간 남자에 대한 기억을 머릿속에서 지우면서.

자신의 결정이 여러 사람의 목숨을 구했다는 사실은, 끝내 알지 못한 채였다.

***

"아까는 듣는 귀가 많아서 말을 아꼈습니다만. 은행은 정말 날도둑이 따로 없군요."

인적이 드문 거리로 접어들자, 필립이 비로소 입을 열었다.

조금 이른 저녁 식사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어둑어둑한 거리를 돌아보며, 그가 목소리를 낮췄다.

"아무리 그래도, 수수료를 삼 할이 넘게 받아먹다니. 저라면 난동을 부렸을 겁니다."

"성기사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코웃음을 치며 읊조린 이안이, 손에 든 술병을 입으로 가져갔다.

파엘이 말한 것처럼, 향이 아주 좋은 술이었다. 종류도 다양해서 골라 마시는 재미도 있었다.

덕분에 지금 필립의 양손과 파엘의 양손에는 전부 다른 종류의 술병이 들려 있었다. 심지어 엘리야도 술 한 병을 품에 안은 채였다.

전부, 오늘 밤에 마실 예정인 남부의 술이었다.

"그렇게 욕심부리다 다 잃게 되는 거다."

"옳으신 말씀이긴 합니다만…."

이안이 술병에서 입을 떼며 덧붙인 말에, 필립이 입맛을 쩍쩍 다셨다.

"하긴. 어쨌든, 이제 다시 부자가 되셨으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제게 일을 맡겨 주시지 않겠습니까?"

뒤따르던 파엘이 은근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여기선 쓸만한 마법 무구를 구할 수 없었습니다만. 위임해 주신다면, 중앙을 다 뒤져서라도 만족하실만한 물건을 찾아내겠습니다."

여기서 또 영업을 하네.

이안이 실소를 흘렸다.

"어차피, 나한테 파는 건 남는 것도 별로 없으실 텐데."

"중요한 건, 어떤 물품을 취급하고 있느냐니까요. 그런 고급품을 거래하는 것 자체가 상단의 격을 증명해 주는 겁니다."

"뭐, 생각은 해 보겠소."

"천천히 생각해 보십시오. 아시겠지만, 저희가 경에게 물건을 가져다 드릴 수도 있으니까요. 제가 감은 별로여도, 안목은 괜찮지 않습니까."

동의를 구하듯 엘리야와 필립을 돌아본 파엘이 앞장서 달려갔다.

저택이 머지않았기 때문이었다. 미리 문을 열어 두려는 것이리라. 경호병에게 달려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필립이, 어깨를 으쓱이며 이안을 돌아보았다.

"단주가 안목이 있는 건 사실입니다. 엘리의 맞춤 장비도 가장 실력 있는 곳에 주문해 뒀고, 제 검도 정말 제 생각을 읽은 것처럼 마음에 쏙 드는 걸 찾아내더군요."

허리춤의 검을 슬쩍 내려다본 그가 덧붙였다.

"원하시는 부분을 정확히 전달하면, 아마 어떻게든 찾아올 겁니다."

"이래서 다들, 돈을 벌어도 모으지를 못하는 거지."

낮게 웃음 짓던 이안이, 이내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대문 옆에서 기다릴 줄 알았던 파엘이 돌아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만치에는 경호병이 천천히 대문을 열고 있었다.

"뭔가 문제라도 있습니까?"

그의 표정을 뒤늦게 확인한 필립이 투구를 갸웃하며 물었다. 미간을 찌푸린 채 다가오던 파엘이 대답했다.

"그게, 손님이 기다리고 계시 답니다."

"손님이요?"

"예. 그런데 상단이 아니라…."

파엘의 시선이 이안 쪽으로 돌아왔다.

"경을 찾아오신 분들이라는군요."

"...?"

#281화

이안의 눈매가 슬쩍 구겨졌다. 멈칫한 필립이 돌아보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걸음을 늦춘 이안이 내뱉었다.

"신원은?"

"그게… 밝히지 않았다고 합니다."

여전히 미간을 좁힌 채로 대답한 파엘이, 이안을 기다리듯 멈춰 서며 덧붙였다.

"귀족 가의 영애가 확실해 보인다더군요. 기사도 대동한 데다, 경의 이름까지 대시니 안으로 들일 수밖에 없었답니다."

"영애… 라고요?"

고개를 갸웃한 필립이 다시 이안을 돌아보았다.

"짐작 가는 분이 있으십니까?"

"전혀."

눈을 조금 더 가늘게 뜬 이안이 즉답했다.

어쨌건, 그리 달가운 손님은 아니리란 예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 그의 행방을 알아내고 찾아온 것도. 신원을 밝히지 않은 것도 예감을 뒷받침할 근거로는 충분했다.

이안의 뇌리로 게임과 공략 글의 기억들이 스쳐 지나가는 사이.

"누굴까요. 이안 님이 이곳에 계시다는 걸 아는 사람 중 하나일 텐데요."

엘리야가 눈을 끔뻑이며 말했다. 고심하듯 침음한 필립이 이내 말을 받았다.

"강철 금고에서는 신원을 밝히지 않으셨다고 하셨으니…, 테디어스 백작 쪽 사람이거나 연맹 소속의 상인들에게 이야기를 들은 누군가가 아닐까요."

"연맹 식구들의 이야기를 듣고 따라오기엔 너무 짧은 시간입니다."

이안의 뒤로 따라붙은 파엘이 걸음을 옮기며 덧붙였다.

"바스무트에서 누군가 온 것 같습니다. 그 외에는 경의 행방을 아는 이가 없으니 말입니다."

"있지. 그 외에도."

이안이 혼잣말처럼 읊조린 건 그때였다. 일행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모였다. 하지만 이안은 더 덧붙이는 말 없이 그저 걸음의 속도를 다시 평소대로 되돌렸을 뿐이었다.

엘리야가 짧은 탄성을 흘린 건 바로 그 직후였다.

"황실이나 교단을 말씀하시는 거군요. 백작의 보고서를 받았을 테니까요."

"하지만… 황실이나 교단에서 누군가가 파견 나오기에도 너무 이른 시기 아닙니까? 백작의 보고서가 도착한 지 닷새도 지나지 않았을 텐데요."

필립이 덧붙였다. 파엘이 콧수염을 어루만지며 입술을 달싹였다.

"주문 전서나… 연락용 매를 이용해 인근의 귀족에게 연락을 넣은 걸지도 모릅니다."

그의 시선이 이안의 옆얼굴을 훑었다.

"경께서 다시 행방이 묘연해지시기 전에, 대리자를 만나게 하기 위해서요. 둘 다 아주 비싸고 귀하지만, 다급한 상황에는 종종 사용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바스무트에서 있었던 일의 추가적인 조사를 요구할지도 모르겠군요."

…그게 최선의 경우지.

이안은 속으로만 읊조렸다.

교단과 황실, 어느 쪽이든 달갑지 않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어쨌거나 그중에서도 고하는 나뉘는 법이었다. 물론, 가장 바라지 않는 상황이 일어났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아직 여러모로 이른 시기인 데다, 이곳은 제도도 아니었으니까.

'…어쨌건, 이왕이면 그냥 둘 다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짧게 입맛을 다시며, 이안은 활짝 열린 대문 너머를 눈에 담았다.

마당에는 못 보던 마차가, 다른 마차들의 앞을 막듯이 정차되어 있었다.

덕분에 마차의 측면이 선명하게 보였다. 천장과 벽면이 단단해 보이는, 크고 고급스러운 마차였다.

"우리 마차보다, 아주 조금 더 좋아 보이는군요. 아주 조금 더요."

필립이 묘하게 못마땅한 듯한 말투로 읊조렸다. 이안은 이미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린 뒤였다.

저택 밖에 사람들이 죄다 나와 삼삼오오 모여 있었기 때문이다.

상단의 일꾼과 경호병들이었다.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한 파엘이 손짓했다.

경호병 몇이 냉큼 달려왔다. 이안의 술병을 받으라 손짓한 파엘이, 자신의 술병도 건네며 물었다.

"왜 다들 나와 있나?"

"기사 나리께서 저택을 비워 달라고 하시더군요. 성자 대행과 나누는 대화는, 그 누구도 엿들어서는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필립의 술병을 받아들던 경호병의 대답에, 파엘이 미간을 좁혔다.

"그래서, 손님들께선 어디에 계신가?"

"식당에 계실 겁니다. 식사는 사양하셔서, 차만 내어 드렸습니다."

"술도 아니고 차라… 흐음…."

정문으로 멈추지 않고 걸음을 옮기며, 이안은 다시 한번 입맛을 다셨다. 좋지 않은 예감이 조금씩 더 짙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설마… 아무리 그래도, 벌써 일어날 리가.'

내심 생각하는 그때, 필립의 속삭임이 이어졌다.

"보아하니, 나리하고만 독대하려고 할 것 같은데요."

"그럼 올라가 있던가."

이안의 심드렁한 대답에, 필립이 또 이런다는 듯 짧게 웃음지었다.

"무슨 의도로 온 자들인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러겠습니까? 상황이 험해져도 엘리는 걱정하지 마시란 말씀을 드리려고 한 겁니다. 제가 지킬 테니까요."

거참 든든하네. 생각한 이안은, 이내 낮게 헛웃음을 흘렸다.

비꼰 게 아니라 진심으로 그런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 모자라던 놈이 이렇게나 믿음직해지다니.

"제 도움이 필요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엘리야가 재빨리 덧붙였다. 필립이 안면 가리개를 올려 얼굴을 가리는 사이, 이안이 문고리를 쥐며 웃음 지었다.

"아서라. 그냥 남몰래 떠들고 싶은 거잖아."

"...."

엘리야가 들켰다는 듯 입술을 오므리는 가운데, 문을 연 이안이 전실로 들어섰다.

경호병들에게 술을 잘 보관해두라 이른 파엘이 허둥지둥 일행의 뒤로 따라붙었다.

그사이 전실을 지나친 이안은, 식당으로 이어진 복도로 접어들고 있었다. 그가 멈춰선 건 바로 그 직후였다.

"...."

복도 한복판. 두 남자가 식당을 지키듯 서 있었기 때문이다.

일행들을 돌아보는 그들을, 이안도 마주 눈에 담았다.

마법 무구가 분명한 전신 판금 갑옷을 걸친 중년 제국인. 그리고 사슬과 판금이 섞인 장비로 무장한, 다소 차가워 보이는 인상의 청년.

전형적인 기사와 종자였지만, 어쨌거나 둘 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불청객이 구면은 아니리라는 게 확실해지는 순간이었다.

선 굵은 얼굴의 중년 기사가 이안을 마주 보았다. 시선을 교환한 것도 잠시, 그가 입술을 달싹였다.

"이안 호프 경이십니까?"

울림이 좋은 정중한 목소리. 이안이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

"그렇소만. 누구시오?"

앞으로 나서려는 청년을 슬쩍 팔을 들어 저지한 기사가, 자신의 흉갑에 한 손을 얹으며 한쪽 무릎을 굽혔다.

"저는 루 솔라와 티르 엔을 섬기는 기사, 페이든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성자 대행."

정중한 말투와 달리, 많은 정보가 생략된 소개였다. 게다가 이안이 백금룡의 대행자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랬다.

"처음 뵙겠소. 페이든 경."

하지만 이안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중요한 건 자기소개 따위가 아니었다.

"그래서, 무슨 이유로 날 찾아오셨소?"

"성자 대행께 용무가 있으신 것은, 제가 아니라 소니에르 가의 잉그리드 아가씨입니다. 저는 그분의 호위로 동행한 것입니다."

"소니에르…?"

이안이 고개를 갸웃하는 사이, 파엘이 그의 뒤로 가까이 붙었다. 이안에게만 들릴 나지막한 속삭임이 빠르게 이어졌다.

"제도의 가문입니다. 황가의 외척 중 하나이기도 하고요."

슬쩍 고개를 끄덕인 이안이 덧붙였다.

"그럼 질문을 바꿔야겠군. 영애께서는 왜 나를 찾아오셨소?"

"제가 말씀드리기는 어려운 부분입니다. 기다리고 계시니, 안으로 들어와 말씀 나누시는 게 어떠시겠습니까?"

"뭐, 그러지."

저럴 거면 뭐하러 지키고 있었지.

내심 생각하며 이안이 다시 걸음을 내디뎠다. 페이든이 슬쩍 손바닥을 앞으로 펼친 건 그때였다.

"성자 대행께서만 입장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다시 멈춰 선 이안의 눈매가 슬쩍 구겨졌다. 역시, 이래서 지키고 있었던 건가.

"바라는 게 많군. 뭐 하나 제대로 설명해 주지도 않는 주제에."

"...!"

이어진 싸늘한 목소리에, 페이든의 눈이 설핏 커졌다.

"미리 말하지만, 난 당신들이 날 찾아온 이유 따윈 사실 궁금하지도 않아. 그냥 날 찾아왔으니 만나 보려던 것뿐이지. 남의 집에서 집주인 행세를 한 번만 더 하면, 설명할 틈도 없이 나가게 될 거야."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은 이안이, 검게 가라앉은 눈으로 잠시 페이든을 응시하고는 덧붙였다.

"살아서든. 죽어서든."

"으음…."

페이든이 낮게 침음했다. 뒤에 선 종자의 눈빛이 서늘해진 것과 달리, 그는 화가 나거나 분개하기보다는 그저 난처해 보였다.

백금룡의 대행자가 이런 식으로 나오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옳은 말씀이시니 물러나세요. 경."

여자의 차분한 목소리가 번진 건 그때였다. 페이든의 뒤편, 열린 식당 문 너머에서였다.

페이든과 종자가 더 덧붙이는 말 없이 좌우로 비켜섰다.

회색 망토를 걸치고 망토에 달린 두건을 깊이 눌러쓴 여인이 걸어 나온 건 거의 동시였다.

망토로 온몸을 가리고 있어서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어쨌건 꽤 큰 키와 여리여리한 체구를 가진 여인이었다. 적어도 망토 아래에 갑옷을 걸치고 있지 않은 건 분명했다.

이안과 정당한 거리까지 다가온 여인이 두건을 벗으며 멈춰섰다.

윤기가 흐르는 갈색 머리카락이 흘러내리고, 새하얀 얼굴과 푸른 눈동자가 드러났다.

"무례를 사과드리겠습니다. 성자 대행."

여인이 정중하게 몸을 숙이며 말했다. 하지만 이안은, 그녀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부터 오히려 미간을 구기고 있었다.

아직은 이르다고 여긴, 가장 달갑지 않은 상황이 일어났다는 걸 깨달아서였다.

'언젠가 역풍을 맞을 수도 있겠다 싶긴 했지만….'

…그게 오늘일 줄이야.

그놈의 길고 긴 소개 때문이리란 확신에 가까운 직감이 뇌리를 스쳤다.

우호도나 명성치는 게임에서도 존재하던 시스템이 아니던가. 영향력이 크진 않았지만, 어쨌건 퀘스트를 비롯한 다방면에 두루 작용했다.

현실이 된 지금은, 그때보다 영향력이 더 커진 게 분명했다.

하긴. 명성이나 권위로 상황을 모면한 게 한두 번이 아니지 않은가.

게임이었다면 불가능했을 부분들이었다.

"...!"

미간을 찌푸린 이안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던 여인이, 이윽고 조금 놀란 듯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물론 아주 잠깐이었다. 삽시에 표정을 수습한 그녀가, 아무렇지도 않게 덧붙였다.

"사실, 사과드려야 할 게 하나 더 있습니다. 본래 성자 대행과 단둘이 되었을 때 말씀드리려 했지만. 제 본래 이름은 잉그리드가 아니예요. 페이든 경이 여러 부분을 명확히 밝히지 못한 것도, 전부 저 때문입니다."

"여, 영애… 지금 여기서 그런 말씀을 하시면…."

뒤에 선 페이든이 다급하게 끼어들었다. 난처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잉그리드가 그를 돌아보았다.

"괜찮아요. 성자 대행과 뜻을 함께하는 분들은 신뢰할 수 있겠죠. 게다가 아무래도… 성자 대행께서 이미 알고 계신 것 같거든요."

"...!"

페이든이 눈을 치켜뜨는 가운데, 그녀가 덧붙였다.

"경. 내 소개를 다시 부탁해요. 대신, 짧고 조용하게."

"…예."

이윽고 고개를 끄덕인 페이든이 그녀의 옆으로 나섰다.

어리둥절한 얼굴로 이안과 영애를 번갈아 바라보던 일행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집중됐다.

페이든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다시 정식으로 소개하겠소. 여기 계신 이 분은 루 솔라의 신도이며 루 엔테르의 신도. 황궁의 가장 총명한 별-"

"...!"

파엘의 눈이 커졌다. 필립의 안면 가리개 사이에서는 엥, 하는 얼빠진 탄성이 스쳤다.

"-갈림길을 엿보는 자. 저 지엄하며 존엄하신 황제 폐하의 차녀이신, 세라스 아스트레이아 전하이시오."

잠시 말을 멈춘 페이든이, 일행들을 한차례 돌아보고는 진중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무릎을 꿇고 예를 다하시오."

"화, 황제 폐하 만세…. 제국에 무궁한 영광과 번영 있으라…."

넋 나간 듯 읊조리며, 파엘이 바닥에 납죽 엎드렸다. 필립과 엘리야도 뒤따라 한쪽 무릎을 꿇었다.

엘리야는 놀라기보다는 흥미로운 눈빛이었다. 필립도 그다지 다른 것 같지는 않았다.

"...."

그리고 어느새 무표정한 평소의 얼굴로 되돌아온 이안은, 정중하게 무릎을 굽혔다 펴며 인사했을 뿐이었다.

애초에 그저 예상보다 빨리 이런 상황이 벌어진 것에 놀란 것일 뿐.

황녀를 만난 것 자체는 그에게 별다른 감흥도 주지 못했다.

여전히 서 있는 이안을 바라보며, 페이든이 슬며시 미간을 찌푸렸다.

"그것이 예를 다하신 겁니까, 성자 대행?"

"…다하신 게 맞아요."

이안보다 먼저 입을 연 건 세라스였다. 이안의 눈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그녀갸 덧붙였다.

"황제 폐하나 교황 성하 앞이라면 모를까. 제게는 무릎을 꿇으실 필요가 없죠. 오히려… 제가 그래야 해요."

"괜찮소. 원하지 않으니."

이안이 말했다. 표정만큼이나 덤덤한 말투였다.

"너그러우시군요. 감사드려요."

정중하게 대답한 세라스의 눈매가 이내 휘어졌다.

"그리고 역시, 전혀 놀라지 않으시는군요. 어떻게 눈치채신 건지, 여쭤봐도 될까요?"

이안이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전에 본 분과 너무 많이 닮으셨더군."

"전에 본 분이요…?"

"화로의 성녀."

"아…!"

탄성을 터뜨린 세라스의 얼굴에 비로소 후련한 미소가 번졌다.

"그렇군요. 고모님을 뵌 적이 있으셨어요. 화로의 사원에 새로운 불씨를 운반하셨다는 이야기는 이미 들어 알고 있었는데. 거기까진 미처 생각하지 못했네요. 평소에도 닮았다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거든요."

고모라기엔, 나이 차이가 그렇게까지 커 보이진 않았는데.

내심 생각한 이안이, 이내 가볍게 고개를 까딱였다. 화로의 성녀는 타오르는 여신의 사도였으니까.

신의 은총은 인간의 육체를 더 강하게 만들어주지 않던가. 노화까지 느리게 해준다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이런, 호기심 때문에 너무 오래 불편하게 했군요. 다들 일어나세요. 바닥이 차답니다."

과장된 표정으로 놀란 세라스가 재빨리 덧붙였다.

필립과 파엘, 엘리야가 차례로 일어섰다. 파엘은 지금 이 상황이 여전히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엘리야는 아까와는 별반 다르지 않은 눈빛이었다. 그저 서로 다른 색의 눈을 반짝이며 이안과 세라스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제국의 황녀가 백금룡의 대행자를 직접 찾아온 이유가 궁금할 따름이리라.

빙긋 미소 지은 세라스가 다시 이안을 마주 보았다.

"타오르는 여신의 신도로서, 늦었지만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성자 대행. 제가 눈치챌 수 있게 신호를 주신 것도요. 아니었다면, 오래도록 부끄러울 뻔했어요."

딱히 신호를 준 건 아니었지만, 이안은 그 사실을 정정하는 대신 다른 말을 내뱉었다.

"눈과 머리 색은, 마법으로 바꾸신 건 가 보군."

"맞아요."

세라스의 망토 아래가 꿈틀댔다. 손을 앞으로 모은 채 뭔가를 한 모양이었다. 다음 순간 그녀의 푸른 눈이 물감이 번지듯 붉게 바뀌었다. 머리 색 역시 윤기 흐르는 금발이 되었다.

그녀가 정말 황녀라는 실감이 난 듯, 파엘이 낮게 탄식을 흘렸다.

…보여달란 말은 아니었는데.

심드렁하게 생각하며, 이안은 세라스를 가만히 마주보았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할지는 이미 알고 있었지만, 신분까지 밝힌 이상 그냥 돌려보낼 수는 없었다.

그러니 차라리 영양가 있게 이용해야 하리라. 늘 그래 왔듯, 게임일 때와는 다르게.

'왜 이렇게 빨리 일어난 건지도 알아 보고.'

그때, 세라스의 눈과 머리칼이 삽시에 다시 푸른색과 갈색으로 돌아왔다. 그녀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럼 이제… 남은 대화는 안으로 들어가 나누시는 게 어떨까요?"

"뭐, 그럽시다."

못 이긴척 대답한 이안이, 고개를 옆으로 까딱이며 덧붙였다.

"내 친구들도 데리고 들어가겠소. 저 안에서 있을 일을, 다시 설명하고 싶진 않아서 말이오."

#282화

"알겠어요. 다만, 여기서 나눈 대화가 밖으로 새어 나가는 일이 없게만 부탁드리겠습니다."

세라스의 대답에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빙긋 미소 지은 세라스가 몸을 돌렸다. 페이든과 종자가 그녀를 따라 식당으로 들어가는 사이, 필립과 엘리야를 일별한 이안도 고개를 까딱이고는 걸음을 내디뎠다.

"겨, 경. 저는 잠시 자리를 비웠다가 돌아와도 되겠습니까?"

파엘의 속삭이는 목소리가 따라붙은 건 바로 그 직후였다. 이안의 시선을 받은 그가 재빨리 덧붙였다.

"화, 황녀께서 오셨는데 아무것도 대접하지 않을 수는 없어서 말입니다."

연줄을 만들고 싶은 거겠지.

뜻밖의 순간에만 발휘되는 파엘의 배포에 짧게 웃음을 흘린 이안이, 다시 걸음을 옮기며 내뱉었다.

"들으셨겠지. 입조심만 잘하시오."

염려 마십시오, 하고 고개를 끄덕인 파엘이 재빨리 몸을 돌렸다.

***

황녀는 텅 빈 식당의 벽 쪽 식탁에 앉아 있었다.

자리에 앉은 건 그녀뿐이었다. 뒤편에는 페이든과 그의 종자, 그리고 세라스와 마찬가지로 회색 두건 망토를 걸친 또 다른 여인이 서 있었다. 세라스의 시녀 같았다.

이안은 세라스의 맞은편에 앉았다.

빙긋 미소 지은 그녀가, 이안의 뒤판을 바라보았다.

"두 분도 앉으세요."

"전 이게 편합니다. 전하."

필립이 득달같이 대답했다. 엘리야는 그저 동의한다는 듯 고개만 끄덕였다. 이런 자리에선 말을 아끼라는 이안의 교육을 충실히 따르고 있는 것이리라.

세라스의 입가에 미소가 스쳤다.

"한 분은 루 솔라의 사도이신 필립 경이시겠고. 다른 한 분은, 애석하게도 아직 이름을 모르는군요."

"엘리야 마이어. 난쟁이 귀족 가문의 영애이시오. 내 의뢰인이시기도 하고."

덤덤하게 내뱉은 이안이, 세라스의 눈을 마주 보았다.

"역시, 테디어스 백작의 보고서를 읽으셨군."

이안은 테디어스 백작의 별채로 향하는 길에, 그에게 미드퍼트에 볼 일이 있다고 말했었다. 자꾸 며칠 더 머물기를 은근히 권해서 떨쳐내고자 한 말이었지만 빠뜨리지 않고 기록한 모양이었다.

세라스가 엘리야의 이름을 모르는 것도 근거를 뒷받침했다. 백작에게 그녀의 이름은 알려준 적이 없었으니까.

"네. 맞습니다. 성자 대행."

"그걸 읽고 제도에서 출발하셨다기엔, 너무 빨리 도착하신 것 같소만."

"물론이죠."

덧붙인 말에, 세라스가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제도를 떠난 건, 성자 대행께서 중앙에 발을 들이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니까요."

"그렇게 일찍…?"

이안의 미간이 절로 좁아졌다.

"내가 어디에 있을 줄 알고. 중앙은 넓잖소."

"떠돌다 보면 어디선가, 성자 대행의 소식을 들을 수 있으리라 여겼죠."

생각보다 대책 없는 분이셨군.

이안은 헛웃음을 삼켰다.

어쨌건 선후의 차이가 있을 뿐, 언젠가는 이 황녀를 만나게 되었으리란 생각이 뒤를 이었다.

중앙이 넓어도, 결국 거쳐 갈 도시는 정해져 있게 마련이었으니까.

그의 권위를 휘둘러야 할 순간 역시, 바스무트가 아니라도 결국 한 번쯤은 있었으리라.

명성이든 업보든, 중앙에 발을 들이기 전부터 이미 충분히 쌓여 있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시기에 상관없이, 명성이 높아지면 중앙에 발을 들이기만 해도 시작되는 이벤트였던 건가.'

굳이 제도일 필요도 없는 거고?

게임에서도 이랬을지는 알 수 없는 부분이었다. 다른 부분들이 그렇듯, 현실이 되면서 제약이 사라진 것일지도.

"…황궁에서 기다리던 소식이 전해졌을 때는, 마침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어요. 루 솔라께서 인도하신 게 분명합니다. 제 예상보다 훨씬 빨리, 이렇게 성자 대행을 뵐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글쎄…."

이어진 세라스의 말에, 이안이 그녀의 눈을 마주 보았다.

"정말 여신께서 인도한 건지는, 대화를 끝까지 나눠 봐야 확실해지지 않겠소?"

세라스의 미소가 더 짙어졌다.

"물론이죠. 성자 대행."

"그럼 이제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황녀. 나를 왜 찾아오셨소?"

"직설적으로 대화하시는 걸 좋아하시는 것 같으니, 저도 그렇게 하겠습니다. 성자 대행. …제가 성자 대행을 찾은 이유는 간단합니다."

슬며시 이안 쪽으로 몸을 기울인 세라스가, 의미심장하게 눈을 빛냈다.

"아버님께서, 성자 대행을 뵙기를 원하십니다."

"흠… 그렇군."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세라스가 순간 눈을 깜빡였다. 이안이 놀란 표정이라도 지을 줄 알았던 것이리라.

"나는 아직 뵐 생각이 없다고 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소?"

"...!"

그리고 이어진 이안의 질문은, 반대로 그녀의 미소를 순간 굳어지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녀의 뒤에 선 세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이안에게 집중되는 가운데, 당황을 감추듯 더 짙게 미소 지은 세라스가 입을 열었다.

"폐하의 칙령을… 거부하시겠단 말씀이신가요?"

"모르시는 것 같은데. 나는 제국인이 아니오."

느긋하게 운을 뗀 이안이, 세라스의 파란 눈을 가만히 마주 보았다.

"그리고 알려졌다시피, 위대한 분이 내린 과업을 수행 중이지. 그것을 제외한 그 무엇도 나를 강제할 수는 없다는 뜻이오. 그것이 비단 황제 폐하의 칙령일지라도. 그리고 사실…."

등받이에 기대앉은 이안이 옅은 미소를 입가에 걸었다.

"정말 폐하께서 칙령을 내리셨다면, 이 자리에서 그 사실을 증명할 무언가를 이미 보여주셨을 것 같아서 말이오. 여긴, 제국이잖소?"

"...."

세라스의 미소는 이제 눈에 띌 정도로 굳어져 있었다.

정곡을 찔린 것이리라.

무거운 침묵 한복판에서 태연하게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며, 이안은 게임에서의 기억을 떠올렸다.

3챕터 중반. 본격적인 혼란이 중앙을 휩쓸던 무렵. 제도에서 서브 퀘스트를 수행하던 이안은, 지금의 세라스와 마찬가지로 신분을 숨긴 황자를 만나게 됐다.

'그런 상태에서도 더럽게 거만한 새끼였지. 신분을 밝힌 뒤엔 더했고.'

어쨌건, 그는 지금처럼 황명을 들먹이며 퀘스트를 던져 줬다.

보상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이안은 연계 퀘스트가 있으리라 생각하고 받아들였다.

그렇게 가게 된 별궁에서, 이안은 황제와 만났다.

그가 진짜 황제였는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벽을 사이에 두고 만나서, 얼굴조차 마주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쨌건, 그렇게 그는 전선으로 가게 됐다. 검은 벽이 쏟아낸 온갖 마물들이 득시글대는 혼돈의 한복판으로.

'보상에 비해 너무 어려웠지. 연계 퀘스트 보상도 별로였고.'

일시적으로 거절이 가능한 퀘스트라는 건, 공략 글을 읽은 뒤에나 알게 된 사실이었다.

거절하면 일정 시간이 지난 후에, 다른 황자가 다른 보상을 제시하며 찾아오는 것이다.

심지어 그가 황제를 마주하지 못한 건 명성이 부족해서였다.

마음에 드는 보상과 충분한 업적을 쌓을 때까지, 총 여섯 번의 기회가 더 있었다.

물론 현실이 된 지금은, 정말 다섯 번이나 제안을 거절할 수는 없을 터였다. 황가의 미움을 사게 될 테니까.

앞으로 이런 식의 깜짝 방문이 계속되리란 것도 달갑지 않은 부분이었다.

하지만 어쨌든, 그런 이유로 헐값에 팔려갈 생각 따윈 없었다.

철컥-

식당의 문이 열린 건 그때였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이렇게 귀하신 분들이 한자리에 모이셨는데, 변변치 않지만… 나름대로…."

술병과 안주가 담긴 쟁반을 들고 장내로 들어선 파엘의 목소리가, 점점 힘을 잃고 작아졌다.

장내의 무거운 적막과 서늘한 분위기를 읽은 것일 터였다.

"준비를…. ...."

파엘의 얼굴에 핏기가 사라졌다.

그 짧은 사이에 이런 분위기가 되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게 분명했다.

수많은 번뇌가 오가는 눈으로 쟁반을 내려다본 것도 잠시.

"…아무래도 제가, 좋지 않은 순간에 들어온 모양입니다."

이내 애써 억지 미소를 지은 파엘이 뒷걸음질을 쳤다.

"죄송합니다. 대화 나누십시오. 저는 문 앞에서 조용히…."

"아니에요. 마침 잘됐네요. 고마워요."

미소 지은 세라스가 내뱉은 건 그때였다. 파엘이 화들짝 멈춰서는 가운데, 다시 이안을 마주 본 그녀가 덧붙였다.

"마침, 더 솔직해질 필요가 있던 참이었거든요."

"그러시다면… 다행입니다."

식은땀 맺힌 웃음을 흘리며, 파엘이 식탁 옆으로 다가왔다.

그가 술병과 잔, 그리고 치즈가 담긴 접시를 내려놓는 사이, 이안은 세라스의 눈을 가만히 마주 보았다.

이제야 좀,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상단에서 직접 담그고 판매하는… 상품입니다. 부디… 입에 맞으시면 좋겠군요."

파엘은 술을 따르는 손을 벌벌 떨면서도, 준비한 게 분명한 말을 꿋꿋이 내뱉었다.

뒤에 서 있던 두건 여인이 세라스의 곁으로 다가선 건 그때였다. 잔을 들려던 세라스가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지금도 꼭 이래야겠어, 아스메?"

고개를 끄덕인 여인, 아스메가 잔을 들었다. 그녀가 먼저 술을 입에 대는 것을 보며, 이안이 짧게 웃음을 흘렸다.

이 세계에도 기미 상궁 같은 게 있나.

"양해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에요."

세라스가 민망하다는 듯 말했다. 잔을 들어 술을 한 모금 마신 이안이 고개를 까딱였다.

"황녀로 사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시겠군."

"감사해요. 이 작은 한 부분만으로 거기까지 헤아려 주시다니."

세라스가 대답하는 사이, 기어코 치즈 조각까지 하나 입에 넣은 아스메가 물러났다.

세라스가 기다렸다는 듯 잔을 들었다. 다급한 손짓과 달리 음미하듯 한 모금 마신 그녀가, 뒷걸음질 쳐 물러난 파엘을 돌아보았다.

"보르타의 포도주는 다 좋지만, 이건 특히 훌륭하군요. 매년 제도의 소니에르가에 다섯 상자씩 보내도록 하세요. 잉그리드의 이름을 대면, 가문에서 값을 지불할 겁니다."

"영광… 영광입니다, 전하…!"

파엘이 허리를 깊이 숙이며 머리를 조아렸다. 세라스가 빙긋 미소 지었다.

…그래, 정말 쉽지 않겠는데.

이안은 내심 웃음 지었다.

방금 그녀가 보인 행동들은, 오랜 기간 받은 교육의 결과물이 자연스럽게 튀어나온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조차 걸맞은 행동을 강요받는 것이다.

"…말씀하신 대로, 저는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게 없습니다."

술을 한 모금 더 마신 세라스가, 비로소 이안을 다시 마주 보았다.

"하지만 아버님께서 성자 대행을 만나 뵙고 싶어 하시는 건 틀림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지 않으셨다면, 제가 제도 밖으로 나가는 것도 허락해 주지 않으셨을 거예요."

제도 밖으로 나가는 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거짓말은 아니란 말씀이시군. 이해했소."

"거짓일 리가요. 성자 대행을 만나 뵙고자 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신다면, 놀라실 거예요. 물론, 아버님께서 뵙고자 하는 이유는 대다수와는 다른 이유이시겠지만요."

"어떻게 다르시단 말씀이오?"

태연하게 물으며, 이안이 술잔을 입에 가져갔다. 목이 타는 듯 마찬가지로 술을 한 모금 더 마신 세라스가 말을 이었다.

"성자 다행께선 역사에 기록될 업적들을 이룩하셨고, 신성을 스스로 입증한 분이십니다. 하지만 그런데도, 대교회에 속해 있지 않으시죠."

"그게 왜 날 만나고자 하시는 이유가 되는지 모르겠군. 황제 폐하야말로, 신들의 은총과 선택을 받은 분이시잖소."

"물론 그렇습니다. 황좌는 신들의 선택을 받지 않고는 오를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니까요. 하지만… 아시다시피, 교단을 구성하고 있는 건 신이 아니라 인간들이죠."

잠시 말을 멈춘 세라스가, 이윽고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저는 성자 대행께서 교단에 속하지 않으신 이유도, 그래서이시리라 생각했습니다만."

정말 솔직해지긴 했네.

내심 웃음 지은 이안이 덧붙였다.

"보통은 내가 북부의 대전사이기 때문이라 여길 텐데."

"카르하를 섬기는 북부인이라 해서, 루 솔라를 섬기지 않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래서, 내가 교단이 아니라 폐하의 손을 잡아 주길 원하신다는 말씀이시오?"

"역시… 직설적이시군요."

세라스가 조금 놀란 듯 읊조렸다. 방금 본인이 신성 모독적인 발언을 했다는 사실은 미처 자각하지도 못한 모양이었다.

"아버님은 본심을 드러내는 분이 아니십니다. 저희는 다만, 추측할 뿐이죠. 그리고 제 추측은, 성자 대행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아요."

"황실과 교단은 한 몸인 줄 알았는데. 아닌가 보군."

슬며시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읊조린 이안이 술잔을 입에 가져갔다.

세라스가 묘하게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혹, 몸이 붙은 채로 태어나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샴쌍둥이라고 부르던가.

생각하며,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세라스의 말이 이어졌다.

"지금 황실과 교단이 그렇습니다. 본래는 둘이었으나 온전히 하나가 되었고, 어느 순간부터 하나도 둘도 아닌 모습이 되었죠."

"흠…."

"그러니 성자 대행께서 아버님께 힘을 실어 주신다면, 큰 도움이 될 겁니다. 교단 내부가 어수선한 요즘 같은 시기에는 더더욱."

"교단에 문제라도 생겼소?"

"여러 교파가 나뉘어 있으니까요. 자세한 내막은 저도 알지 못하지만, 아주 조용하게 힘겨루기를 하고 있는 것 같더군요."

의회의 내분 때문인가. 생각하며, 이안은 술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물론 그는 교단의 내부 사정이나, 황실과 교단의 내밀한 관계 따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가 세라스의 이야기를 계속 들은 건, 그보다 실용적인 이유에서였다.

"그럼 결국, 내부의 소란이 잦아들면 교단에서도 나를 찾을 거란 말씀이시군."

"아마도요. 찬란한 여신께서, 그 전에 저희에게 먼저 길을 열어 주신 거겠죠."

"나는 양쪽의 이야기를 다 들어 보고,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하는 쪽의 손을 잡아도 늦지 않겠고."

"물론 그렇. …예?"

#283화

세라스의 입이 순간 벌어졌다.

술이 조금 들어가서인지, 아니면 솔직하기로 한 결과인지. 아까보다 표정의 변화가 더 도드라졌다.

그녀의 뒤에 선 세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페이든 경은 이안과 황녀의 대화가 오갈 때마다 냉탕과 온탕을 오가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은 냉탕 같았다.

"알고 있겠지만, 나는 용병이오. 많은 이들이 착각할 뿐, 지금도 그렇지."

물론, 이안은 진심이었다.

솔직히 그리 내키지 않지만, 시간이 지나면 교단에서도 접촉해 오리란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게임 속 성기사나 수행사제는, 황실이 아니라 교단의 부름을 받고 전선으로 가게 되는 것이었는지도 몰랐다.

물론, 현실이 된 지금은 직업에 따른 제약 같은 건 없으리라.

심지어 그는 저 위대한 백금룡의 대행자가 아닌가.

"그러니 나와 폐하를 만나게 하고 싶다면, 내가 그런 선택을 할 만한 합당한 보상을 먼저 제시하시오."

다소 얼이 빠진 얼굴인 세라스를 바라보며, 이안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솔직히 말해, 내 입장에선 황실과 교단은 그다지 다를 게 없소."

"루 솔라여…."

세라스의 입에 탄식이 번졌다.

"정말이지, 성자 대행께선 제가 전해 들은 것과는 여러모로 다른 분이시군요…."

"많이들 그렇게 말하더군. 실망했다면, 애석하게 됐소."

"아뇨. 오히려… 그 반대에요."

빈말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듯, 세라스의 입가에는 오히려 묘한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충격적인 와중에도 정말 무언가가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그게 어떤 부분인지는 이안도 알 수 없었지만.

"성자 대행께 누가 되지 않을 정도의 금화라면… 제 손을 잡아 주실 이유가 될 수 있을까요?"

이어진 세라스의 말에, 이안의 입가에도 미소가 스쳤다.

"귀하가 아니라 폐하의 손을 잡는 것일 텐데."

그가 세라스의 눈을 마주 보았다.

"그게 귀하의 손을 잡는 것이기도 한 모양이오."

"…물론이죠."

세라스가 선선히 대답했다.

부정하는 게 의미가 없다 여긴 것이리라. 자신이 협상에 유리한 입장이 아니라는 것도, 이제는 확실히 인정한 모양이었다.

이안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평소라면 구미가 당겼겠지만. 아쉽게도 지금은 아니오. 마침 오늘, 돈이 충분하고도 넘칠 만큼 많아진 참이라서. 그러니, 다른 조건을 제시해 보시오."

이를테면 유물이라든가. 성물이나 최고급 마법 무구. 황실의 보물 창고 열쇠라거나.

이어진 수많은 뒷말을, 이안은 포도주와 함께 삼켰다.

"...."

마찬가지로 골똘하게 생각에 잠긴 얼굴로, 세라스가 술잔을 입에 가져갔다. 그녀가 불현듯 눈동자만 움직여 이안을 바라본 건 바로 그 직후였다.

"…성자 대행께, 한 가지만 여쭙겠습니다."

이안을 빤히 응시하며 술을 전부 들이켠 세라스가, 이윽고 빈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이안은 말하라는 듯 고개를 까딱이고는 다시 술잔을 입에 가져갔다. 세라스의 차분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혹, 이미 정혼자가 있으신가요?"

"...?"

이안의 입술에 닿은 술잔이 우뚝 멈췄다.

"전하…!"

"맙소사, 루 솔라여…."

동시에 사방에서 크고 작은 탄식이 이어졌다. 세라스의 뒤에 선 이들은 물론이고, 파엘과 필립까지 경악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이안도 예외는 아니었다.

다만 그를 가장 놀라게 한 건 황녀의 말이 아니었다. 그녀의 말을 들은 순간 떡진 붉은 머리와 위태롭게 의연한 녹색 눈동자가 뇌리를 스쳐서였다.

"…정혼자는 없지만."

상념을 떨치며 내뱉은 이안이, 술잔을 도로 내려놓았다.

"정략결혼 같은 걸 할 생각도 없소."

페이든과 아스메의 시선이 동시에 이안에게 집중됐다. 안도한 것 같기도, 뭔가 발끈한 것 같기도 한 묘한 눈빛들이었다.

그들과 달리, 세라스는 그저 빙긋 입꼬리만 말아 올렸다.

"아쉽네요. 제가 가진 가장 좋은 패였는데. 이렇게 단박에 거절하실 줄은 몰랐어요."

"거절할 건, 이미 알고 있으셨을 것 같소만."

"조금은 고민이라도 해 주시길 바랐죠."

어깨를 으쓱인 세라스가, 옆으로 손을 뻗어 술병을 집어 들었다.

황족과의 정략결혼이라.

이안은 내심 곱씹으며 웃음 지었다. 이게 게임에서도 존재하던 보상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때였더라도 받아들이지는 않았을 터였다. 얻게 될 혜택만큼이나 제약도 많을 것 같은 보상이 아닌가.

"어렵네요… 성자 대행을 만나는 게 가장 어려운 부분일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요."

천천히 자신의 잔을 채우며, 세라스가 읊조렸다. 그녀의 시선이 이안의 뒤편으로 향한 건 바로 그 직후였다. 이윽고 술병을 다시 내려놓은 그녀가 입을 열었다.

"필립 경은 아직, 대교회의 임명 의식을 치르지 않았다고 들었는데. 맞나요?"

"예…? 아, 예. 그렇습니다. 전하."

자신에게 말을 걸 줄은 몰랐다는 듯, 필립이 조금 얼떨떨한 말투로 대답했다.

이번엔 주변을 공략해 보겠다?

이안은 실소를 삼키며 잔을 들었다.

또 다른 거한 헛발질이긴 했지만, 일단 들어서 손해 볼 건 없었다.

어쨌건, 테디어스 백작이 정말 병적으로 꼼꼼한 작자였다는 건 분명했다. 자신이 보고 들은 모든 것을 기록한 것이다.

이안이 술잔을 입에 가져가는 사이, 세라스가 방긋 미소 지었다.

"잘 됐군요. 혹, 그 후에 교단의 성기사가 될 예정인가요?"

"글쎄요. 아직, 결론을 내리지는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의식을 마친 후에 내게 오는 건 어떤가요?"

"…전하께요?"

순간 굳어졌던 필립이 되물었다.

세라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믿을 수 있는 기사는 많을수록 좋지만, 사실 전혀 그렇지 않거든요. 여기 이 페이든 경처럼 실력과 신의를 겸비한 분은 더더욱 드물죠."

그녀의 시선이 필립의 안면 가리개를 바라보았다.

"전 필립 경도 그런 분이시리란 확신이 들거든요. 찬란한 여신의 사도이며, 성자 대행의 친우이기도 하시니까요. 심지어, 교단을 신뢰하지도 않으시는 것 같고요. 그게 아니라면, 아까 제가 한 말에 질문이나 반박을 하셨겠죠."

나를 낚기 위한 제안만은 아니군.

이안은 내심 웃음 지었다. 세라스는 정말 필립도 원하는 것이다. 어쩌면, 이게 두 마리 토끼를 잡을 묘책이라 여기는 걸지도 몰랐다.

어쨌건 필립에게도 나쁜 제안은 아니었다.

황실. 그것도 황족의 직속 기사가 되는 건, 기사에게 가장 명예로운 일 중 하나였으니까.

이안이 보기에도, 교단의 성기사가 되는 것보단 차라리 이쪽이 나아 보였다.

"더없이 황송하고 감사한 말씀입니다만…."

필립이 더듬더듬 입을 연 건 그때였다.

"이 자리에서 확답을 드리는 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전하."

"어머… 왜죠?"

세라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번에는 정말 놀란 것 같았다.

페이든과 종자, 아스메와 파엘도 마찬가지였다. 파엘은 말 그대로 입을 떡 벌린 채 필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필립이 굴러들어온 황금을 걷어차는 것으로 보이리라.

"저는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내뱉고 나자 오히려 더 확실해진 듯, 이어진 필립의 목소리는 더 이상 떨리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건, 전하를 섬기면서 동시에 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메브가 들으면 땅을 치겠는데.

내심 생각하면서도, 이안은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이상하게 필립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이렇게나 많이 거절당하다니…. 오늘 밤을 평생 잊지 못하겠네요."

탄식한 것과 달리, 세라스는 전혀 상처받은 얼굴이 아니었다. 오히려 필립을 바라보는 눈빛이 더 반짝였다. 그녀의 시선이 필립의 옆쪽으로 향한 건 그 직후였다.

…온 동네를 다 찔러 보겠군.

"구경하는 재미가 있긴 하지만. 불필요한 노력은 거기까지 하시는 게 좋겠소."

느긋하게 내뱉은 이안이, 잔을 들며 세라스를 바라보았다.

"거래 상대는 나잖소? 내 친구들이 아니라."

"마땅히 떠오르는 게 많지 않아서요. …성자 대행께서 작은 단서라도 주신다면, 제게는 아주 큰 도움이 될 텐데요."

잔을 쥔 손가락을 연주하듯 꼼지락대며 세라스가 대답했다.

이안이 짧게 웃음 짓고는 말했다.

"너무 거창하고 상징적인 보상을 생각하시는 것 같군. 나는 그보다는 실용적이고 물질적인 쪽을 선호하는 편이오."

"아하…?"

탄성을 흘린 세라스가, 생각할 시간을 벌려는 듯 재빨리 술잔을 입에 가져갔다. 허공을 가만히 응시하며 술을 마신 것도 잠시.

"…소니에르가는, 다양한 귀중품과 유물을 수집하고 있습니다."

잔을 내려놓은 그녀가, 슬며시 다시 이안을 바라보았다.

"어쩌면 그중에, 성자 대행의 눈에도 드실만한 물건이 있을지도 몰라요. 제 손을 잡아 주신다면 그 비밀 창고로 들어가실 수 있게 손을 써 보겠습니다."

지금까지와 달리, 오히려 조심스럽고 신중한 말투였다.

"원하시는 물건을 최소한 하나는 가지고 나올 수 있으실 겁니다. 그 이상은… 저도 확신할 수 없지만요…."

세라스의 시선이 조금씩 아래로 흘러내렸다.

대답 대신 술잔을 입에 가져가며, 이안은 내심 헛웃음을 흘렸다.

정략결혼 같은 건 아무렇지도 않게 지르더니, 이런 걸 더 어려워할 줄이야.

하지만 그래서 오히려, 이게 그녀가 물질적으로 내걸 수 있는 가장 좋은 조건이란 확신이 들었다.

그 창고에는 황녀조차도 확답을 줄 수 없을 정도의 물건들이 잠들어 있는 것이다.

"마음 같아선 황실의 보물 창고를 열어 드리고 싶지만, 그건 제 권한을 벗어난…."

"어쨌든, 지금까지 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 제안이군."

이안이 잔을 놓으며 말을 잘랐다. 세라스가 홱 그의 눈을 마주 보았다.

"정말이십니까…?"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세라스가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정말 이게 통할 줄은 몰랐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그럼, 함께 가 주시겠어요?"

"의뢰 내용과 보수를 확실하게 정리하는 게 우선인 것 같소만."

덧붙인 말에, 포도주를 한 모금 더 마신 세라스가 숨을 골랐다.

이내 침착하고 기품있는 얼굴로 돌아온 그녀가 입을 열었다.

"성자 대행. 저와 함께 입궁해, 아버님을 만나 주세요. 그래 주신다면, 모든 일이 끝난 후에 소니에르가의 비밀 창고로 모시고 가겠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성자 대행께서 원하시는 물건을 드리겠습니다. 적어도 하나 이상은."

비로소 이안의 눈앞에 퀘스트 창이 떠올랐다.

황실의 부름.

이름은 같았지만, 목적지도 보상도 게임과는 달랐다. 보상에 물음표가 하나 더 있는 걸 보니, 잘하면 정말 추가적인 보상도 받을 수 있는 모양이었다.

'…결국, 이 퀘스트가 생겨 버리는군.'

물론, 그 사실이 이안을 기쁘게 하지는 못했다. 이건 게임이 중반부를 넘어섰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 퀘스트였으니까.

동시에 그가 직접 경험했던 부분들의 끝이 머지않았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4챕터까지는 아직도 제법 여러 사건이 남아 있었지만.

미지의 영역이 눈에 보일 정도로 가까워졌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내가 원하던 것보다 빨리.'

어쩌면, 이어질 사건들도 그의 예상보다 빨리 일어날지도 몰랐다.

시간을 벌기 위해 미리 해결한 사건들이, 오히려 기폭제의 역할을 하고 있을지도.

지금까지를 돌이켜보면 가능성은 충분했다.

물론, 그렇다고 이 퀘스트를 거절할 생각은 아니었다.

그가 기억하는 황자들은 죄다 재수 없는 것들이었다는 건 둘째 치더라도, 이 황녀보다 좋은 조건을 제시할 것 같지는 않아서였다.

분명 황위 계승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 텐데. 세라스의 언행에는, 반드시 그와 함께 가리란 어떤 절박함마저 느껴졌다.

어쩌면 계승권에서 멀기에 오히려 더 그런 걸지도 모르지만.

"폐하와 나눈 대화의 결과가, 황녀께서 기대하신 것과는 다를 수도 있소만. 그래도 괜찮으시겠소?"

그런 생각들과 달리, 이안은 건조한 목소리로 물었다.

세라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제 이름을 걸고, 타오르는 여신께 맹세할게요."

"조금 돌아가게 될 것이오. 육로로 이동할 테니까."

"다행이네요. 저도 배를 타는 걸 좋아하지 않거든요. 멀미를 아주 심하게 해서요."

난 배가 침몰하면 살아나가기가 어려우니까 싫은 건데.

생각하며, 이안은 퀘스트를 수락했다.

"그렇다면 의뢰는 받아들이겠소."

"훌륭한 결정이세요…!"

세라스가 엉덩이를 들썩이며 내뱉었다. 뒤에 선 아스메가 낮게 혀를 차며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술까지 벌컥 들이켰다.

이윽고 잔을 내려놓은 세라스가, 기쁨을 고스란히 드러낸 얼굴로 미소 지었다.

"어려운 결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성자 대행. 함께하게 되어 영광이에요."

"이안."

"...?"

"앞으로 이름으로 부르시오. 의뢰인이시잖소."

덧붙인 이안의 시선이, 세라스의 뒤에 선 세 사람에게로 향했다.

"당신들도 마찬가지요. 내가 백금룡의 대행자라고 사방에 떠들고 다니고 싶은 게 아니라면."

"명심하겠습니다. 이안 경."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 페이든이, 곧이어 덧붙였다.

"저도 부탁을 하나 드리자면-"

"가명은 너무 기니까, 그냥 영애라고 부르면 되겠소? 아니면, 공녀?"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덧붙인 말에, 페이든이 눈을 깜빡였다. 곧 입가에 옅은 미소를 머금은 그가 대답했다.

"공녀로, 부탁드리겠습니다."

이안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신분을 감추는 건 그에게는 특별한 일도 아니었다. 그는 물론이고, 엘리야도 자신이 용의 아이라는 것을 감추고 있지 않은가.

오히려 환영할 일이었다. 괜히 귀찮은 일이 생기지 않도록, 저쪽도 알아서 노력할 테니까.

"휴…."

그사이 자축하듯 술을 한 모금 더 마신 세라스가, 숨을 내쉬며 잔을 내려놓았다.

이제야 긴장이 풀린 듯 얼굴이 불그스름하게 물들고 있었다.

저러다 만취하겠는데.

이안이 심드렁하게 생각할 찰나, 세라스가 덧붙였다.

"그럼, 내일 바로 떠나실까요?"

"모레 떠나야 할 것 같소. 도시에 남은 용무가 있어서."

"아, 그러시군요."

멈칫한 세라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아직 이안의 말은 끝난 게 아니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나는 지금 이미 수행 중인 의뢰가 있소. 그걸 완수하는 게 우선이오. 입궁은, 그 후에 하도록 하겠소."

"그래요… 영애가 의뢰인이라고 하셨었죠…."

뒤에 선 페이든의 얼굴에도 영문 모를 묘한 긴장이 서리는 가운데, 엘리야를 일별한 세라스가 덧붙였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의뢰의 목적지를 알 수 있을까요?"

"제도."

"네…?"

세라스의 표정이 어리둥절해졌다. 페이든도 마찬가지였다. 이안이 술이 거의 남지 않은 잔을 들며 덧붙였다.

"나는 영애를 제도의 대학까지 모시고 가는 중이었소. 그래서 필립 경도 동행하게 된 것이고. 그러니, 귀하의 의뢰에도 그리 큰 지장이 있지는 않을 것이오."

세라스의 얼굴에, 비로소 허탈한 미소가 번졌다.

"…제도에서 기다리고만 있었어도, 경을 만날 수 있었겠군요."

#284화

잔에 남은 술을 전부 마신 이안이 낮게 웃음 지었다.

"대신 다른 형제분들과 경쟁하게 되셨을지도 모르지. 소문은 말보다 빠르다잖소."

"재미있는 격언이군요. 옳은 말씀이시기도 하고요. 덕분에 경을 일찍 만나게 됐잖아요? 루 솔라께서 인도해 주셨다는 것도, 이제는 분명해졌고요."

발그레해진 얼굴로 미소 지은 세라스가, 이내 덧붙였다.

"제가 시간을 너무 오래 빼앗았네요. 괜찮으시다면 오늘은 이만 자리를 파하고, 내일 다시 뵙는 게 어떨까요? 함께 하게 된 기념으로, 친목도 다질 겸."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일행들끼리도 할 얘기가 많을 테니까. 물론, 그건 저쪽도 마찬가지이리라.

어깨를 으쓱인 이안이 슬쩍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내일은 방주 상단과 연회가 예정되어 있소. 앞선 의뢰인인 단주가 준비해 준 송별회라, 내가 빠질 수는 없소만."

"...!"

파엘의 눈이 커지는 가운데, 그를 돌아본 세라스가 덧붙였다.

"그럼, 우리도 참석해도 될까요? 황녀의 신분으로 함께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괜찮다면요."

"무, 물론입니다…!"

아스메가 세라스를 빤히 돌아보는 가운데, 파엘이 다시 바닥에 엎드릴 기세로 고개를 숙였다.

"자리를 빛내 주신다면, 일생의 영광일 것입니다. 제 입은 염려하지 마십시오. 상인에겐 신뢰가 목숨이나 다름 없는 법이니. 저 역시, 철저하게 공녀로만 모시겠습니다."

"다행이네요. 이 맛 좋은 포도주를 또 맛볼 수 있게 되다니. 그럼, 내일 낮에 다시 뵙겠습니다. 이안 경."

일어나 식탁 옆으로 나선 세라스가 무릎을 굽혀 인사했다.

정중한 표정과 달리, 그녀의 몸은 좌우로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취한 거 맞네.

"상단 사람들을 쫓아내지는 마시오. 정 거슬리면, 차라리 위층으로 올려보내시고."

이안이 덧붙인 말에, 세라스가 페이든과 아스메를 홱 돌아보았다.

"들었죠? 너무 과하다고 했잖아요. 다들 명심하도록 해요."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대답한 페이든이 아스메와 함께 세라스의 뒤를 따랐다. 아까와 달리 이안에게 목례하는 것도 잊지 않은 채였다. 심지어 싸늘한 인상의 종자도 그렇게 했다.

"아, 그리고."

식당을 나서려던 세라스가 문득 걸음을 멈췄다. 이안이 뒤를 돌아보는 가운데, 그녀의 시선이 필립에게로 향했다.

"거절당하긴 했지만 내 제안은 아직도 유효해요, 필립 경. 제도로 향하는 동안 잘 생각해봐요. 난, 정말 경이 마음에 들었거든요."

"…예."

필립이 머쓱하게 대답했다. 빙긋 미소 지은 세라스의 시선이, 이번에게 이안에게로 돌아왔다.

"성자 대행, 아니, 이안 경도요."

"...?"

"전 어차피 언젠가, 원치 않는 누군가와 혼인해야 하거든요. 그럴 바엔 차라리, 제가 하고 싶-"

세라스가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밖으로 나갔다. 사실상, 아스메의 손에 끌려나가는 것에 더 가까웠다.

"별…."

뒤늦게 이안의 입가에 실소가 번졌다.

아직도 미련을 못 버리다니. 어쩌면, 가지지 못한 것에 더 욕심을 느끼는 부류일지도 몰랐다.

털썩, 하는 소리가 이어졌다.

파엘이 주저앉는 소리였다.

"루 솔라 맙소사…. 이런 날이 다 오다니…."

이안의 헛웃음이 짙어졌다. 지금 파엘은, 그의 새로운 의뢰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으리라.

"경호병들에게 맡겨 둔 술이나 다시 가져다주시겠소, 단주? 이제 우리끼리도 대화를 좀 나눠야 할 것 같은데."

"물론입니다. 경…! 바로 대령해 오겠습니다!"

"바로 말고, 조금 천천히."

"예. 조금 천천히 대령해 오겠습니다…!"

파엘이 네발로 기다시피 달려나갔다. 이제는 이안이 죽으라면 죽는시늉도 할 기세였다.

당연한 일일 터였다. 이번에는 이안 덕분에 제도에 거래처까지 생겼을 뿐 아니라, 황녀와도 안면을 트게 되었으니까.

'구하기 힘든 최고급 마법 무구를 찾아서 배송해 달라고 해야겠는데….'

내심 읊조리며, 이안은 좌우에 앉은 필립과 엘리야를 돌아보았다.

투구를 벗은 필립은, 파엘과 달리 상대적으로 담담한 표정이었다.

이안이 그렇듯 그 역시 황녀와의 만남이 대단히 놀랍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하긴. 이 정도로 놀라기엔, 그동안 겪은 일이 너무 많았다. 심지어 아르케아스와도 술을 함께 마신 적이 있지 않던가.

용의 아이인 엘리야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녀에게 지금 상황은 그저 흥미로운 사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리라.

둘의 시선에, 이안이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쓸데없이 일찍 제도에 가게 생겼군."

물론 그건, 그에게만 달갑지 않은 일일 터였다.

빙긋 미소 지은 필립이 입을 열었다.

"그래도 엘리의 장비와 연맹의 휘장이 모레 아침에나 완성될 예정이니까. 저쪽이 원하는 만큼 빨리 떠날 수는 없을 겁니다."

"그래 봐야 하루 차이지."

"황제 폐하는 이안 님과 손을 잡고 뭘 하시려는 걸까요."

엘리야가 덧붙였다. 황녀에 대한 의문은 해결되었으니, 이제 다음 단계로 호기심이 넘어간 것이리라.

다시 자신의 잔에 술을 채우며,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 뭔가 부탁이라도 하겠지."

"아마, 상징적인 칙령을 내리실 겁니다. 나리가 황실과 뜻을 함께한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요."

필립이 대답했다.

머리 쓰는 척하긴. 생각하면서도, 이안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같은 생각이었다.

아직 침식이 시작되지 않은 시점이지만, 황제의 머릿속엔 이안을 써먹을 방법이 여러 개는 들어 있을 터였다.

그리고 분명, 하나같이 위험한 것이리라. 이안을 바라보는 필립의 시선에 불안이 묻어나는 것도 그래서일 터였다. 심지어 그때는, 이안도 다시 혼자가 되지 않던가.

"징그러운 눈빛 하지 마라. 뭐건, 들어 보고 결정할 거니까."

"…아. 의뢰는 폐하를 만나는 거였지, 칙령을 받드는 게 아니었죠. 그렇게 말씀도 하셨고요."

엘리야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필립의 입가에 헛웃음이 스쳤다.

"역시, 진심으로 한 말씀이셨군요. 저쪽에선 나리가 정말 칙령을 거절하실 수도 있으리란 생각까진 하지 못하고 있겠습니다만."

"그거까진 내가 어쩔 수 없는 부분이지. 어차피 황제도 무작정 밀어붙이진 못할 거야. 그러다 내가 교단 쪽에 붙어 버리면, 오히려 더 거슬려질 테니까."

"설마, 대교회와 손을 잡으실 생각도 있으신 겁니까? 정말로요?"

필립이 오히려 이게 더 놀랍다는 듯 물었다.

갈수록 성기사 답지 않은 말을 한다니까.

생각하면서도, 이안은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하긴, 필립도 이젠 교단에 대한 불신이 깊을 수밖에 없었다.

"웬만하면 안 그러긴 할 거야. 하지만 그걸, 저쪽은 모르니까."

"웬만하면 이라니…. 교단에서도 이런 식으로 사람을 보내면, 일단 대화는 나눠 보시겠단 거군요."

"왜 아니겠어? 계약에 그러지 말라는 조항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러다, 저쪽에서 엄청난 조건을 제시하기라도 하면요?"

"그럼 뭐…."

이안이 고개를 까딱이며 술잔을 들었다. 엘리야가 덧붙였다.

"그게 용병의 방식이니까요."

미소로 대답을 대신한 이안이 술잔을 입에 가져다 댔다. 필립에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탄식했다.

"루 솔라 맙소사…. 이제 정말 어지간한 건 다 배웠다고 생각했는데, 제 오만이었나 봅니다."

"배움에는 끝이 없는 법이죠."

한 마디씩 잘도 거드네.

피식 웃으며 빈 술잔을 내려놓은 이안이 내뱉었다.

"염려 마라. 너희한테 불똥 튈 일은 없을 테니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 없…."

필립의 입이 닫혔다. 문이 열리고, 쟁반을 든 파엘이 식당으로 들어섰기 때문이다.

이안이 태연하게 고개를 까딱였다.

"남은 시간 동안 먹고 마시기나 하자고. 아무리 봐도 여길 떠나면, 노숙이나 하면서 제도로 직행하게 될 것 같으니까."

"…예. 그러시죠."

그리고 정말, 도시에서의 남은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갔다.

***

다각- 다각-

상단 행렬의 뒤를 따라, 이안이 탄 마차가 성문을 지나쳤다. 높고 두꺼운 성벽이 멀어졌다.

미드퍼트를 떠나는 순간이었다.

'짧고 굵게 머물다 간다고 해야 하나.'

계획은 다 틀어졌지만.

창가에 턱을 괴고 앉은 이안은, 남부의 담금주를 병째로 한 모금 들이켜며 생각했다.

계획이 틀어진 건 출발 시간도 마찬가지였다. 정오가 지나서야 겨우 도시를 떠나게 된 것이다.

어젯밤 있었던 연회의 여파였다.

다들 만취할 만큼 먹고 마신 탓에, 이안 일행을 제외한 모두가 아침 내내 골골댄 것이다.

반쯤 기절했던 파엘은, 뒤늦게 떠날 채비를 하느라 이안과 이렇다 할 대화조차 나누지 못했을 정도였다.

물론, 이안 일행은 상대적으로 느긋하고 확실하게 채비를 끝낼 수 있었다.

"…그렇게 어색하냐?"

옆에서 계속 이어지는 소리에, 이안이 고개를 돌리며 내뱉었다.

망토까지 벗어 둔 채 자신의 몸 이곳저곳을 더듬던 엘리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불편하네요. 갑갑하고."

그녀는 옷 위에 보호 장구들을 착용하고 있었다. 하나 같이 잘 무두질 된 가죽에 얇고 정교한 사슬을 덧대 만든 것들이었다.

오늘 아침에 찾아온 맞춤 장비들.

파엘의 안목이 쓸만하다는 필립의 말은 사실이었다.

하나같이 정보를 확인할 수 있었고, 별다른 추가 옵션이 없는데도 희귀 등급이었다.

물론 게임일 때와 달리, 이안이 저것들을 착용할 수는 없겠지만.

어쨌든, 아무리 좋은 맞춤 장비라도 평상복만 걸친 것처럼 편할 수는 없었다.

"고정부를 느슨하게 풀고 있어. 아예 벗지는 말고. 몸에 익을 시간이 필요하니까."

"네. 그럴게요."

"익숙해지면, 그 답답함이 든든하게 느껴지는 순간이 올 거다."

고개를 끄덕인 엘리야가 장비의 이음매를 만지작대기 시작했다.

이안은 잠시 그녀를 눈에 담았다.

황녀의 등장으로 곧바로 향하게 된 지금, 사실 엘리야의 보호 장구는 그다지 의미가 없어졌다.

하지만 돈이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뭐, 이 녀석은 분명히 암시장을 들락거릴 테니까. 그때라도 유용하게 써먹겠지.'

어깨를 으쓱인 이안은, 다시 술병을 입에 가져가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서늘하고 눅눅한 바람이 마차 안으로 흘러들고 있었다. 탁 트인 평야. 그리고 먹구름이 저 너머까지 끝도 없이 이어졌다.

금방이라도 뇌우를 토해낼 것 같은 하늘이었다.

중앙에 접어들기 전까지만 해도 일상 같던 광경.

'지금쯤이면, 진작 다들 목적지에 도착했겠지.'

헤어진 이들의 생각이 자연스럽게 뇌리를 스쳤다.

샬롯과 테사이아는 각자의 길로 흩어졌으리라. 이 순간 샬롯은 일족의 광전사들과 혈투를 벌이고, 테사이아는 요정 사회를 장악할 잔머리를 굴리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둘 다 앞날이 순탄하진 않겠지만, 전처럼 걱정이 되지는 않았다. 그 녀석들이라면 어떻게든 해내리라는, 전에는 들지 않았던 막연한 믿음이 들었다.

오히려 불안한 건 메브였다.

그녀는 기어코, 변방으로 돌아갈 것 같았으니까.

루시아와 미구엘이 그녀를 잘 설득했길 바랄 뿐이었다.

화로의 사원에 남는다면 어쩌면, 생각보다 일찍 다시 만날 수 있을지도 몰랐으니까.

…내가 지금 왜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지.

이안은 문득 낮게 실소했다.

엊그제의 기억이 무의식중에 남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정도 들었겠다, 뭐, 이젠 이 세계에 남고 싶어지기라도 한 거냐?'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은, 곧바로 이어지지 않았다.

마차가 멈췄기 때문이다.

드륵, 마부석의 간이 창문이 열리고, 필립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갈림길입니다. 내리시죠, 나리."

이안은 술병을 바닥에 내려놓으며 엘리야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다시 망토를 걸친 엘리야가 고개를 마차 문을 열었다.

이안은 아공간에서 검은 천에 두 겹으로 싸인 보따리를 꺼내 문 앞에 내려놓고는, 그녀의 뒤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

흐린 하늘을 올려다 본 이안이, 이내 마차 뒤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크고 단단해 보이는 마차가 멈춰서고 있었다. 마부석에는 페이든의 종자인 쉘비가 앉은 채였다.

뒤이어 마차 문이 열리더니 다소 퀭한 얼굴의 페이든이 내렸다.

똑같은 회색 두건을 걸친 두 여인이 그의 뒤를 따라 땅을 밟았다.

신장이 다르긴 했지만, 자세히 보지 않으면 누가 세라스이고 누가 아스메인지를 분간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같은 망토를 걸친 것일 터였다. 위급한 상황에, 적들이 누가 진짜 황녀인지를 알아볼 수 없도록.

'그런 간 큰 놈들이 있을 것 같진 않지만.'

생각하며, 이안은 마차 앞쪽을 돌아보았다.

갈림길 앞에 멈춰선 상단 행렬 옆으로, 파엘이 다가오고 있었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숙취와 남은 일 처리로 정신이 없어 보이더니. 지금은 평소의 모습과 그리 다를 바 없어 보였다.

"이별의 순간이 이렇게 빨리 오다니. 아쉬울 따름입니다. 경."

내뱉으며 이안의 앞에 멈춰 선 파엘이, 이내 덧붙였다.

"마음 같아선, 이대로 제도까지 따라가고 싶군요."

"후회하실 거요. 지금도 돌아가면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지실 텐데."

이안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벌써 골치 아프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은 파엘이, 이내 양손을 앞으로 모아 쥐었다.

"경. 다시 한번 감사 인사를 올리겠습니다. 그동안, 진심으로-"

"낯간지러운 소리는 그만합시다. 어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잖소."

이안이 말을 잘랐다. 아닌 게 아니라, 파엘은 어젯밤 연신 건배사로 이안 일행에게 감사를 전했다. 물론, 자리를 빛내 준 황녀에게도 감사를 표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상단의 직원들은 세라스를 제도 유력가의 공녀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그럼, 드리기로 했던 선물로 감사 인사를 대신 해야겠군요."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한 파엘이, 품에서 꺼낸 목함을 양손으로 공손하게 내밀었다.

겉을 아주 매끈하게 다듬은, 궐련함 정도 크기의 목함이었다.

"아, 이게 그 황금 휘장이군."

#285화

이안이 목함을 받으며 한 말에, 파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착용까지 하지는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그저, 보여 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이런 휘장을 달고 다니는 상인들에게요."

파엘이 자신의 옷깃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철로 만들어진 육각형의 휘장이 고정되어 있었다. 연맹 소속의 상인들은 철 휘장을 달게 되는 모양이었다.

고개를 끄덕인 이안이 목함의 윗부분을 밀어 여는 사이, 몸을 돌린 파엘이 옆의 엘리야에게도 또 다른 목함을 건넸다.

"받아 주십시오, 영애. 은 휘장입니다."

"감사해요, 단주."

"당연한 겁니다. 말씀드렸다시피, 앞으로는 연맹의 이름으로 후원을 받으시게 될 테니까요. 제도에 도착해 자리를 잡으시면, 인편을 통해 연락을 한 통만-"

이어지는 대화를 한 귀로 흘리며, 이안은 입꼬리를 슬며시 말아 올렸다.

'정말 금으로 만들었네.'

목함 내부에는 부드러운 붉은 천이 깔려 있었다. 황금 휘장은 그 한복판, 딱 맞는 크기로 음각된 홈에 놓여 있었다.

"이건, 저 위대한 백금룡의 상징 아닌가요?"

옆에서 목소리가 이어졌다. 두건을 깊이 눌러쓴 세라스가 그의 옆에 서서 황금 휘장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이안이 한쪽 어깨를 까딱였다.

"우연의 일치일 뿐이오."

"연맹의 첫 황금 휘장의 주인인 경이, 그분의 대행자인데도요?"

"연맹의 이름을 지을 땐, 다들 내가 그분의 대행자라는 건 알지도 못했었소. 저들은 아마, 이게 백금룡의 비늘과 비슷하게 생겼다는 것도 전혀 모를 것이오."

애초에 육각은 여섯 상단이 모여서 붙게 된 이름에 불과했다.

이후 연맹의 규모가 커지더라도, 자신들이 가장 큰 권한을 유지하기 위한 상징인 것이다.

"절묘한 우연이네요. 하지만 저처럼 그분에 대한 지식이 있는 이들에게는, 좀 다르게 받아들여질 겁니다. 적어도 경의 이름이 함께 언급되는 동안에는요."

"뭐. 그럼 상인들도 그분의 이름에 누가 되지 않게 더 조심하겠군."

어깨를 으쓱인 이안이 목함을 닫았다.

"…변방으로 상단을 보내시는 것도, 잊지 마십시오. 단주."

"염려 마십시오, 경. 내부 정리가 끝나면, 계획해 보겠습니다. 자고로 위험이 도사린 곳에 황금이 있는 법 아니겠습니까."

그사이, 파엘은 또 다른 황금 휘장의 주인인 필립과 대화를 마치고 있었다. 어젯밤 둘이 뭔가 쑥덕대더니, 모종의 합의라도 있었던 모양이었다.

필립이 흐뭇하게 목함을 어루만지며 마부석으로 돌아가는 사이, 파엘이 다시 이안 쪽으로 다가왔다.

이번에는 세라스에게 볼일이 있는 것일 터였다.

이내 멈춰선 파엘이, 정중하게 무릎을 굽혔다.

"만나 뵐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공녀님."

"…나도 그래요. 단주."

비로소 쓰고 있던 두건을 벗으며, 세라스가 미소 지었다. 드러난 그녀의 얼굴은 평소보다 더 하얗게 핏기가 없었다.

'어젯밤엔 터질 것처럼 붉더니.'

이안은 내심 코웃음을 삼켰다.

그녀의 상태가 이런 건 물론, 연회의 여파였다.

어제는 더 거나하게 취한 채로 돌아간 것이다.

아스메를 제외한 황녀 일행 모두가 그랬다.

세라스는 술을 아예 마시지 못하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이안이 만났던 사람 중에선 가장 약한 편에 속했다.

황족은 저마다 특별한 능력을 하나씩은 가지고 태어난다던데. 그녀의 능력은 적어도 육체를 강화해 주는 쪽은 아닌 게 분명했다.

"머잖아 또 만나게 되리란 예감이 드는군요. 본가에 도착하면, 사람을 보내도록 할게요."

조만간 황금 휘장의 주인이 한 명 더 탄생하겠군.

몸을 돌려 마차로 다가가던 이안은, 뒤에서 이어진 세라스의 말에 심드렁하게 콧방귀를 뀌었다.

지독한 숙취를 남기긴 했지만, 어쨌건 덕분에 세라스와 파엘은 확실한 인연을 맺었다.

제도 진출을 목표로 하던 파엘은 말할 것도 없고, 세라스 역시 새로 만들어진 유력한 상인 연합에 관심을 보인 것이다.

"손꼽아 기다리겠습니다."

마차 바닥에 내려 놓았던 검은 천 보따리를 집어 든 이안이, 허리를 숙이는 파엘에게로 다가갔다.

이안과 눈이 마주친 파엘이 이안에게도 다시 한번 깊이 허리를 숙였다.

조건 반사적으로 하는구만. 생각하며, 이안은 파엘의 품에 보따리를 안겨 줬다.

"가지고 돌아가시오."

엉겁결에 받아든 파엘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게 뭡니까? 생긴 게 꼭…."

"저주술사의 머리요."

"…잘린 머리 같다고 하려고 했는데. 정말이었군요."

멈칫한 파엘이 입맛을 다시며 읊조렸다.

이안이 덤덤하게 덧붙였다.

"보르에게 전해 주시오. 썩지 않게 잘 보관하시고."

아공간에 넣어 둔 덕분에, 머리는 아직도 아주 신선했다. 물론, 그리 오래가지는 않을 터였다. 보따리를 고쳐 든 파엘이 빙긋 미소 지었다.

"잊지 못할 작별 선물이군요. 적어도 보르 그 친구는 아주 좋아할 겁니다."

"내가 주문한 조건들은, 기억하고 있소?"

"물론이죠, 경."

파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이안은 그에게 금화 한 무더기와, 원하는 마법 무구의 조건을 꽤 상세하게 알려 준 참이었다.

"찾으면 잘 가지고 계시오. 연맹 소속 상인을 만날 일이 있으면, 내 위치를 전할 테니."

"염려 마십시오. 한 달 보름이면 물건을 공수할 수 있을 겁니다. 그 이후엔 언제라도 연락만 넣어 주십시오. 돈이 남으면, 함께 딸려 보내겠습니다."

이안이 고개를 까딱였다. 미소 지은 파엘의 시선이, 일행들을 한차례 훑었다.

"그럼 저는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다시 만났을 때는 여러분 모두, 부디 원하는 바를 이루셨기를 바라겠습니다."

정중하게 무릎을 굽힌 파엘이 몸을 돌렸다. 이안이 툭 덧붙인 건 바로 그 직후였다.

"회담 때 내가 한 말도, 잊지 마시오."

"…물론입니다, 경. 아니. 성자 대행."

멈칫한 파엘이 다짐하듯 덧붙이고는 걸음을 옮겼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이안의 입가에 비로소 미소가 스쳤다.

퀘스트를 전부 완료했으니, 이제 저 넉살 좋은 제국 상인이 죽을 자리만 찾아다니는 일도 없어질 것 같아서였다. 본인의 감을 믿지 않으리라 공언까지 하지 않았던가.

연맹이 민심을 잃지 않고 성장한다면, 세상이 지금보다 더 개 같아진 후에도 충분히 활동을 이어 갈 수 있으리라.

물론, 세상의 거의 모든 것이 그렇듯 덩치가 필요 이상으로 커지면 고여서 썩어버리게 되겠지만.

적어도 혼돈의 시대가 끝나기 전까지 그럴 일은 없을 터였다.

"...."

옆에서 낮은 한숨이 이어졌다. 이안이 세라스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이제야 감추고 있던 피로가 묻어나오고 있었다.

"힘들어 보이는군."

"티가 많이 나나요? 날씨가 이래서 그런지, 오늘은 더 힘드네요."

이안을 돌아본 세라스가 조금은 머쓱한 미소를 머금었다.

"아침부터 내내 아스메에게 혼이 나고 있답니다. 제발 체통을 지키라고요."

이안은 그녀의 뒤편에 선 아스메를 슬쩍 돌아보았다.

확실히 벙어리는 아닌 모양이지만.

그는 아직도 저 시녀가 말을 하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입을 열 때를 가려야 하는 규율 같은 것이라도 있는 모양이었다.

어쨌건, 지금 그녀는 못 말리겠다는 듯한 눈길로 세라스의 뒤통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틀린 말은 아닌 것 같군. 내가 보기에도 공녀께선, 되도록 술을 드시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소."

"…제가 뭔가 또 추태라도 부렸나요?"

"단주를 옆에 앉혀 놓고 같은 말을 여러 번 반복하긴 하셨지."

"이런…. 부끄러운 기억이 하나 더 늘었군요."

세라스가 탄식했다.

이안은 짧게 웃음 지었다. 세라스가 보이는 이런 모습들은, 일종의 전략적인 빈틈에 더 가까워 보였기 때문이다. 정말 어설픈 부분들도 있겠지만, 의도적인 것들이 분명 섞여 있었다.

상대를 안심시키거나, 자신을 친근하게 여기게 하기 위한 것이리라.

그보단 언뜻언뜻 내보이는 야심이, 그녀의 본모습에 가까울 터였다.

애초에 그를 만나기 위해 무작정 제도를 떠날 정도의 행동력도 가지고 있지 않던가.

물론 그녀의 내밀한 진심과 속사정 따위는 그가 알 바 아니었지만.

다각- 다그닥-

상단 마차들이 멀어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서쪽으로 이어지는 갈림길로 줄지어 들어섰다.

이안과 황녀 일행은 북쪽으로 이어진 길로 나아가야 했다.

"그럼 이제, 우리도 떠납시다."

엘리야에게 눈짓을 보내며, 이안이 내뱉었다. 엘리야가 다시 마차에 오르는 가운데, 세라스의 뒤에서 목소리가 이어졌다.

"여기서부터는 우리가 앞장서겠습니다. 경."

페이든이었다. 이안의 시선을 받은 그가 덧붙였다.

"제도까지 가장 빠른 길로 돌아가고자 합니다."

그때 저 먼 하늘이 번쩍였다.

구름이 심상치 않더라니.

어깨를 으쓱인 이안이 몸을 돌렸다.

"편할 대로 하시오."

우르릉, 하는 천둥이 한참 늦게 마차 내부를 울렸다.

***

솨아아아….

빗소리가 멈추지 않고 귓가를 간지럽혔다.

해가 지기 전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는 한밤중이 되어서도 멎지 않았다. 폭우라 부를 만한 수준은 아니었지만, 오히려 그래서 쉽게 그칠 것 같지 않았다.

천장에 매달린 마석등만이 마차 내부를 은은하게 밝히는 가운데.

'오늘 밤은 마차 안에서 자겠군….'

창가에 옆머리를 기댄 이안이 심드렁하게 술병을 입에 가져갔다.

어쨌건 이동은 멈추지 않고 이어지고 있었다. 황녀 일행은 앞서 말했듯 한시라도 빨리 제도로 돌아가고 싶은 모양이었다.

'이러다 말들이 감기에 걸리기라도 하면, 오히려 이동에 더 차질이 생길 텐데.'

내심 읊조리며, 이안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의 눈은 빗줄기와 어둠에 잠긴 주위를 어렵지 않게 분간할 수 있었다.

관도 주위에는 어느새 나무가 울창해져 있었다. 멀지 않은 곳에 강이라도 흐르는 게 분명했다. 한기에 시들고 있는 풀숲과 멋대로 자란 나무들이 끝없이 이어졌다.

"...."

이안의 눈매가 설핏 가늘어진 건, 숲이 전해주는 느낌이 묘하게 달라진 것 같아서였다.

불과 삼십여 분 전까지만 해도 운치 있게 느껴지던 광경이건만.

지금은 변방의 숲을 마주한 것처럼 음산했다. 이안의 뒷목으로 오소소, 닭살이 돋았다.

들고 있던 술병을 바닥에 내려놓은 이안이, 이윽고 위로 손을 뻗었다.

틱-

장내가 삽시에 어두워졌다. 이안이 마석등을 꺼 버린 것이다.

"...?"

옆자리, 마법서를 읽느라 여념이 없던 엘리야가 영문도 모른 채 고개를 들었다.

"주위를 살펴봐. 이상한 마력이 느껴지는지."

이안이 정화자의 판금 장갑과 팔목 보호대의 고정부를 차례대로 조이며 내뱉었다.

고개를 갸웃하는 와중에도 엘리야의 눈에 마력이 일렁였다.

뒤이어 그녀의 두 눈이 어둠 속에서도 번뜩이는 광택을 머금었다.

닫아뒀던 옆의 창문을 슬쩍 열며, 엘리야가 고개를 돌렸다.

"특별히 이상한 마력은…."

그녀의 시선이 창밖과 정면의 벽면. 이안 쪽의 창문에 이어, 장비 점검을 거의 끝내 가는 이안에게로 돌아왔다.

"…없는 것 같아요. 우리 마차와 저쪽 마차에서 느껴지는 것 말고는요."

"그래…?"

딱히 놀랍지도 않다는 듯 읊조리며, 이안은 건너편의 의자로 건너갔다.

마차의 벽면과 빗줄기 때문에 평소보다 감각이 둔해지긴 했지만. 사실 이안도 엘리야와 마찬가지로 별다른 이상 징후는 느끼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육감만큼은, 여전히 조용히 불길함을 속삭이고 있었다.

경험상 육감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니 무언가 있으리라. 아마도 기척을 감춘 무언가가.

타후므리트처럼 강대한 마력과 존재감을 지닌 용조차, 자신의 기척을 감쪽같이 숨길 수 있지 않던가.

드륵-

간이 창문이 열리고, 비를 피해 벽면에 기대앉은 뒷모습이 드러났다.

이안이 내뱉었다.

"뭔가 문제가 생길 것 같다."

"...!"

졸고 있었던 듯 어깨를 들썩인 필립이 상반신을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빗물이 들이치지 않게 하려 한 듯, 안면 가리개도 올린 채였다. 서늘하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마물입니까?"

"글쎄.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걸 보면, 아닐지도 몰라."

"그럼 또, 나리를 노리는 것들이 따라붙은 거겠군요."

이안은 어깨만 까딱였다.

가능성은 충분했다. 또 다른 역천룡의 사도이거나, 의회의 하수인일지도.

황녀가 그랬듯, 놈들도 그의 위치를 알게 되었을 터였기 때문이다. 습격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어쨌건, 육탄전이 되리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가 마법사라는 사실을 황녀가 알게 할 생각은 없었으니까. 주문은 마법 무구라 여길만한 수준의 것들만 사용할 생각이었다.

"투구 벗고 얼굴이나 안으로 들이밀어. 엘리의 도움을 받을 거다."

"아, 예. 나리께서 앞장 서실 겁니까?"

필립이 재빨리 자신의 투구 양쪽을 쥐며 물었다.

"그래. 너는 말과 엘리를 지켜."

내뱉으며, 이안이 엘리야의 옆자리로 되돌아왔다. 기다렸다는 듯 책을 덮어 내려놓은 엘리야가 양손을 활짝 펼치고 있었다.

이안이 얼굴을 내밀자, 그녀가 마력이 아른거리는 손으로 그의 양 볼을 감싸 쥐었다.

눈을 감고 그녀의 주문을 받아들이며, 이안이 재빨리 입술을 달싹였다.

"내가 나가면 문과 창문을 전부 잠궈. 절대 밖으로 나오지 마라. 밖의 상황은 필립이랑 나한테 듣고, 넌 보조할 수 있는 부분을 해. 이 안에서."

-네. 그럴게요.

얼굴에서 손을 뗀 엘리야가 속삭였다. 이안이 눈을 떴을 때, 그녀는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건너가고 있었다. 간이 창문으로 들이민 필립의 얼굴을 감싸 쥐기 위해서일 터였다.

스윽-

이안은 소리 없이 마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빗물이 머리와 얼굴에 이어 온몸을 적시기 시작했다.

'그만 좀 축축하고 싶은데. 시발.'

미간을 좁히면서도, 이안은 단숨에 지붕 위로 올라갔다. 평소보다 훨씬 은밀하고 빠른 움직임이었다.

한쪽 무릎을 꿇고 자세를 낮춘 그의 눈동자에 잿빛 마력이 아른거렸다.

솨아아….

감각들이 예민하게 돋아나면서, 모든 게 점점 더 또렷하고 선명하게 인식되기 시작했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앞서 나가고 있는 황녀의 마차. 그 마차를 끌고 있는 말들의 숨소리. 사방에서 쉬지 않고 떨어지는 빗방울과 끝없는 어둠에 삼켜지고 있는 듯한 숲. 저 앞까지 커다란 곡선을 그리며 이어진 관도.

"...."

그리고 그 주위로 소리 없이 꿈틀대며 다가오고 있는 어둠까지.

#286화

-나리, 뭔가 보이십니까?

필립의 속삭임이 뇌리를 스쳤다. 아무도 듣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으련만. 그는 늘 진짜 속삭이는 것처럼 목소리를 낮췄다.

-그래.

전신에 바람이 모여드는 것을 느끼며, 이안은 짧게 대답했다.

여전히 소리도 기척도 마력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역시 육안까지 완전히 속일 수는 없었다.

물론 이안이 아니었다면 알아차리기 어려웠을 만큼 은밀한 움직임이었다. 이 정도로 충분히 가까워지지 않았다면, 그도 발견하지 못했을 터였다.

-어떤 놈들입니까?

-일단은 인간이야. 내가 보기엔….

이안의 속삭임이 멈췄다.

쉬쉬쉭-

빗소리와 비슷한, 그러나 상대적으로 크게 느껴지는 파공음이 귀를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이안은 소리를 들음과 동시에 앞으로 몸을 날렸다.

뭔가 발사되는 소리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이 노려질 때의 서늘한 감각은 없었다. 그게 뜻하는 바는 간단했다. 그가 아니라 앞의 마차를 노리는 것이다.

쒸에엑-!

마차를 박차고 솟구친 순간, 바람이 그의 몸을 힘껏 떠밀었다.

"...!"

어느새 방패를 꺼내든 마부석의 필립이 위를 올려다보는 가운데.

이안은 빗방울을 사방으로 튕기며 화살처럼 황녀의 마차로 쇄도했다.

덜컹-

하지만 정말 날아드는 화살보다 빠를 수는 없었다. 앞서가던 마차가 한차례 흔들리더니, 이내 눈에 띄게 느려졌다.

습격자들도 이것을 노린 것일 터였다. 앞선 마차를 막으면, 뒤의 마차도 자연스럽게 멈춰 설 수밖에 없을 테니까.

-나리. 상황을 알려 주십시오. 마차가 멈춥니다.

-기다려.

속삭이며 황녀의 마차 지붕에 미끄러지듯 착지한 이안은, 곧바로 다시 몸을 날렸다.

또 다른 파공음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번에는 등골이 서늘했다.

쒸아악-!

날렵하게 공중제비를 도는 그의 주위로 검은 궤적이 스쳤다.

긴장감이 집중력을 단숨에 최고조까지 끌어올렸다. 덕분에 이안은,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빗방울을 꿰뚫고 스쳐 지나가는 궤적들을 선명하게 인식할 수 있었다. 흑연이라도 바른 것처럼 새카만 볼트들.

심지어 사격 솜씨도 꽤 정교했다.

하지만 이안의 눈길이 그것들에 머문 건 아주 잠깐뿐이었다.

솨사사사삿-

어둠이 이제는 본격적으로 아주 빠르게 밀려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야가 한층 더 선명해진 덕분에 놈들의 형체가 또렷하게 구별되기 시작했다.

어둠이 넘실대는 것처럼 보인 건 뒤가 길게 이어진 새카만 두건 망토였다.

빗물을 머금고도 전혀 번들거리지 않았고, 숲에서 달려오고 있음에도 풀숲이나 가지에 전혀 걸리지 않고 미끄러졌다.

망토 아래로 설핏 드러난 팔다리 역시 광택 하나 없이 검었다. 덕분에 그림자 인간들이 달려오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달려오는 놈들의 발소리는 나뭇가지나 갈대가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처럼 들렸다.

-…제대로 훈련받은 암살자들 같은데. 숫자는 스물 이상.

이안이 비로소 속삭였다. 필립의 상대적으로 느리게 느껴지는 속삭임이 되돌아왔다.

-많군요. 그리고요?

-사격 솜씨가 좋은 놈들이야.

퀘스트도 있고.

이안이 내심 덧붙였다. 그의 시선은 눈앞에 떠오른 퀘스트창을 훑고 있었다.

완료 조건은 두 가지였다. 암살자들을 물리치거나, 전멸시키거나.

상당한 경험치가 기본 보상이었고, 추가 조건을 달성하면 능력치 포인트도 하나가 추가됐다.

어쨌건, 전형적인 연계 퀘스트 보상이었다. 황녀나 엘리야와 관련되어 있을 가능성이 더 높다는 뜻이었다. 엘리야는 용의 아이이니, 아마도 전자이리라.

'하지만 어떤 미친 놈들이 황녀를.'

이안의 눈매가 순간 가늘어졌다.

몸이 회전하면서, 황녀의 마차 앞쪽이 자연스럽게 시야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마차를 끌던 말 두 마리는 그대로 주저앉아 죽어 있었다. 머리와 목 곳곳에 볼트가 여러 개 박힌 채였다. 그리고 그건 마부석에 앉은 페이든의 종자, 쉘비도 마찬가지였다.

"...."

등받이에 기댄 것처럼 널브러진 그의 목과 옆구리에도 볼트가 깊이 박혀 있었다.

그는 코와 입으로 피를 왈칵왈칵 토해내며 죽어가고 있었다. 앞으로 떨어져 내리는 이안을 바라보는 그의 흐린 눈은, 평소의 냉정함 대신 두려움과 고통이 가득했다.

내심 혀를 차면서도, 이안은 쉘비의 목과 턱이 새카맣게 물들고 있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무기에 독까지 발려 있군.

-독이라니… 말에 한 발이라도 맞으면 끝장이겠군요.

-그래. 황녀의 말들이 그렇게 당했다. 그리고 쉘비도.

이어진 필립의 탄식을 흘리며, 이안은 빗물이 고인 관도 위를 구르듯 착지했다. 물론 물기를 털어낼 틈 따위는 없었다. 곧바로 이어진 섬뜩한 예감에, 이안은 주문을 시전하며 튕겨 오르듯 일어섰다.

아니나 다를까, 부채꼴을 그리며 밀려들던 암살자들이 일제히 그를 향해 손을 내뻗고 있었다.

놈들의 팔뚝에는 다소 작은 크기의 쇠뇌가 부착되어 있었다.

쉬쉬쉬쉭-

수십 발의 볼트가 일제히 이안을 노리며 날아들었다. 한 번의 사격이 끝이 아니었다. 연사할 수 있도록 설계된 듯, 약간의 텀을 두고 곧바로 다시 발사됐다.

'한 번 피했으니, 아예 벌집을 만들어 놓으려는 거군.'

날아드는 수십의 궤적을 응시하며 잿빛으로 일렁이던 이안의 눈동자가 고요해졌다.

푸확-!

주위로 돌개바람이 터져 나왔다. 휘몰아치는 방벽. 날아드는 궤적들이 빗방울과 함께 휩쓸려 날아갔다. 그 뒤로 이어진 궤적들 역시 사방으로 흩어졌다.

지잉….

그 한복판에서, 육각형을 그리는 금빛 방패가 피어올랐다. 어둠 속에서도 새하얗게 빛나는 검날이 동시에 드러났다.

자루를 움켜쥔 강철 장갑과 팔목 보호대에 박힌 마석들도 어느새 번쩍이고 있었다.

푸확- 푸화악-!

이안이 곧바로 검을 교차하듯 휘둘렀다. 장갑에서 뿜어져 나온 돌풍이 세 번째 일제 사격까지 사방으로 흩어버렸다.

퍼버벅-!

운 좋게 휩쓸리지 않은 볼트들은 백금 방벽에 가로막혔다. 방패에 부딪힌 볼트들은 박히는 대신 산산조각으로 터져 나갔다.

이안의 코로 매캐한 악취가 스며들었다. 촉에 발려 있던 독이 볼트가 터지면서 번진 것일 터였다.

하지만 입에서 쓴맛이 느껴진 게 이안이 느낀 변화의 전부였다.

그의 저항력을 뚫지 못했거나, 미약한 효과밖에 불러일으키지 못한 것이리라.

방패로 얼굴과 상반신을 가린 이안이 재차 주문을 시전하는 사이.

철컹-!

마차 우측 문이 열리면서 커다란 실루엣이 튀어나왔다. 페이든 경이었다.

"네 이놈들-!"

그는 얼굴을 완전히 가리는 투구를 뒤집어쓰고, 날이 얇고 긴 양손 검을 한 손으로 움켜쥔 채였다. 갑옷 곳곳에 박힌 마석들이 일렁이고 있었다.

이변을 눈치채자마자 전투를 준비해 나온 것이리라.

'당황한 기색도 없단 말이지.'

전투태세를 갖추는 그를 힐긋 돌아본 이안의 미간이 슬쩍 좁아졌다.

역시, 기습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걸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던 게 분명했다.

제도로 서둘러 돌아가려 한 건, 그저 이안을 빨리 황제에게 데리고 가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어쩐지, 일정이 늦어질 때마다 표정이 안 좋더라니.

대화는 물론, 나중으로 미뤄야 했다.

사사사삿-

쇠뇌를 연신 발사하던 암살자들이 자연스럽게 좌우로 간격을 벌리고 있었으니까.

-곧 우리 마차로도 갈 거다. 말 잘 지켜. 엘리 너는 절대 나오지 말고.

-온 힘을 다해 막아내겠습니다. 나리.

-염려 마세요. 전 어차피 이번에는 별 도움이 안 될 것 같거든요. 아직도 아무것도 안 느껴져요.

이안은 방패 위로 정면을 바라보았다. 모든 암살자가 좌우로 흩어진 건 아니었다. 절반 정도는 여전히 그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물론, 쇠뇌로 그를 겨눈 채였다.

쉬쉬쉬쉭-

동시에 쇠뇌가 발사됐다. 물론, 이안이 볼트에 닿는 것보다 돌개바람이 터져 나오는 게 더 빨랐다.

푸확-! 휘몰아치는 방벽이 솟구침과 동시에, 그 한복판을 뚫고 이안이 질주했다.

"...!"

이안의 고개가 옆으로 꺾였다. 쉬학, 날카로운 칼날이 볼을 스치고 지나갔다. 퍼벅, 다시 한번 방패 표면에도 충격이 번졌다.

마찬가지로 새카맣게 칠해진 투척용 단검이었다. 이것들에도 독이 발려 있으리란 건 깊이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주문은 단발성이니까, 엇박자를 노린 건가.'

그 와중에도 이안은 놈들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 와중에도 좌우로 갈라지며 간격을 벌린 암살자들이 좌우 대각선으로 그에게서 멀어지고 있었다.

-이쪽은 단검도 던집니다! 조심하십시오!

필립의 다급한 속삭임이 이어졌다.

뒷북 오지네. 생각하며, 이안은 멈추지 않고 내달렸다.

암살자들의 움직임은 기민하기 그지없었지만, 물러나는 것과 나아가는 것 중에서는 나아가는 게 더 빠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바람 칼날도 이안의 질주에 속도를 더해줬다. 그는 이어진 파공음에도 속도를 늦추거나 물러나지 않았다.

타타탓-

오히려 바닥에 깔리듯 자세를 낮춘 채, 백금 방벽을 앞세워 내달렸다. 궤적들이 머리 위를 지나쳤다. 그나마 제대로 날아든 하나도 방벽에 막혀 튕겨 나갔다.

조준이 정확하다는 건, 반응할 수만 있다면 피하기도 쉽다는 의미였다.

물론 상대적인 의미에 불과했지만, 이안은 정말 그렇게 할 수 있는 보기 드문 집중력과 반사 신경의 소유자였다.

"...!"

암살자들과의 간격이 삽시에 좁아졌다. 이안은 땅을 박차듯 일어서면서, 땅에 끌리듯 쥐고 있던 진은 강철 장검을 올려쳤다.

스걱-!

암살자 하나가 뭔가 반응하기도 전에 사선을 그리는 궤적에 휩쓸렸다.

검날에 맺힌 바람 칼날이 함께 뻗어 나가면서, 검은 망토와 그 아래의 몸을 깨끗하게 갈랐다.

가슴팍이 쩍 벌어지며 검붉은 피가 솟구쳤다. 암살자가 뒤로 넘어져 진흙탕이 된 흙바닥에 잠기는 사이, 이안은 이미 다음 놈을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좌우의 암살자들이 내뻗은 쇠뇌가 그를 향해 출렁였다.

퍼버벅-

이안이 옆으로 빙글 돌며 궤적을 피했다. 백금 방벽이 만들어 낸 황금빛 궤적이 팽이처럼 한 바퀴 돌았다가, 그대로 불현듯 뻗어 나갔다.

쩌엉-!

방패 표면이 암살자 하나의 팔뚝을 후려쳤다. 놈의 몸이 순간 슬쩍 들리는 가운데, 이안의 왼팔에 힘이 들어갔다. 그대로 암살자를 밀치듯 떨쳐낸 그가 동시에 오른팔을 휘둘렀다.

서걱-

허리춤이 반 토막이 난 암살자가 피와 내장을 흩뿌리며 허물어졌다.

'역시, 방어력이 약하네.'

닿는 족족 썰리는 건, 그저 예리한 칼날과 이안의 강한 근력 덕분만은 아닐 터였다. 암살자들은 급소 에만 가죽을 덧댄 보호 장구를 걸치고 있었다. 게다가 공격을 방어할 수단도 많지 않아 보였다.

계속 거리를 벌리려고 하는 것도 그래서일 터였다. 하긴. 저렇게 기민하게 움직이려면 별 수 없는 선택인지도 몰랐다.

판금을 주렁주렁 달고도 저렇게 움직이는 건 초인이나 가능한 일일 터였다.

애석하게도 놈들을 상대하는 이안은, 바로 그 초인에 근접한 능력치의 소유자였다. 원해서 이렇게 된 것은 아니었지만.

콰직-!

이안의 칼이 또 하나의 암살자를 베어내자, 둘 남은 암살자들의 움직임이 다급해졌다. 이안을 향해 투척용 단검을 내던진 놈들이, 곧바로 품에서 뭔가를 흩뿌리며 뒤로 훌쩍 몸을 날렸다.

"...!"

몸을 젖혀 단검을 피한 이안의 눈에, 놈들이 내던진 작은 조각들이 선명하게 담겼다. 휴지를 작게 뭉친 것 같은 형태들이었다.

섬뜩한 예감에 그가 방패를 치켜들며 땅을 박찬 다음 순간.

퍼버버벙-!

땅에 떨어진 조각들이 연달아 폭발했다. 마력이 조금도 담겨 있지 않은 순수한 폭발이었다.

어떻게 만든 건지는 몰라도 빗물 속에서도 제 역할을 다했다.

'이 새끼들도 진짜 가지가지 하네, 시발…!'

연기에 휩싸인 채 튕겨 나와 나뒹굴면서, 이안은 이를 악물었다.

살상력이 커 보이지는 않았지만, 제대로 휩쓸린다면 손목이나 발목 정도는 충분히 날려 버릴 수 있는 화력이었다.

이안은 진흙 바닥을 멈추지 않고, 오히려 더 땅을 박차 나뒹굴었다.

푸푸푸푹-

그의 궤적을 따라 볼트들이 날아와 박히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안은 이놈들에게서 마력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이유를 비로소 확실히 알게 됐다. 이놈들은 마법 무구나 마력이 깃든 물건을 단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다.

대신 온갖 기술력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연사가 가능한 쇠뇌나, 지금 사용한 폭발탄 같은.

콰지지직-! 쩌엉-!

뒤편에서 이어지는 폭음과 굉음이 귀를 파고든 건 그때였다. 흙바닥을 구르는 와중에도 이안의 시선이 흘낏 뒤편을 훑었다.

주위가 더 밝아진 것 같은 건 착각이 아니었다. 마차 주위는 정말 밝아져 있었다.

솨아아아-

저 뒤편의 눈부신 빛무리는 필립이 뿜어낸 신성력이 분명했고, 페이든의 검에서도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그가 휘두른 검의 궤적을 따라 불길이 넘실대며 뿜어져 나갔다.

지금도 암살자 하나가 불길에 휩싸여 장작처럼 타들어 가고 있었다. 빗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불이었고, 놈은 그 와중에도 비명조차 지르지 않은 채였다.

'그러고 보니, 이것들은 비명을 안 지르네.'

그보다 놀라운 광경은 마차 좌측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마차를 등지고 선 두건 망토 차림의 여인이, 푸른 역장에 휩싸인 채 한 손을 앞으로 내뻗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뻗은 손아귀에는 보옥이 분명한 정수가 번쩍이고 있었다.

파치치치칫-

그리고 그녀가 뿜어낸 눈부신 뇌전이 동시에 네 명의 암살자를 휩쓸어 태워 버리고 있었다.

펄럭이는 두건 사이로 드러난 얼굴은, 분명 아스메였다.

'마법사 같아 보이지는 않았는데.'

그녀의 눈동자 역시 전혀 마력을 머금고 있지 않았다.

빛나고 있는 건 보옥과 앞으로 내뻗은 팔뚝이었다. 소매 사이로 드러난 팔과 두건 아래의 목덜미에는 온갖 문양과 기호들이 마력을 머금고 빛나고 있었다.

'뭐 걸어 다니는 주문 회로라도 되는 건가…?'

사실, 아무래도 상관없는 부분이었다. 중요한 건 황녀를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는 사실 뿐.

-뒤는 어때?

-정신, 정신 없습니다…!

-너 말고.

-말들은 아직 무사합니다. 나리는요?

어떻겠냐. 개 같지.

내심 읊조리며, 이안은 비로소 땅을 박찼다. 저 너머, 새카만 망토를 너풀대며 물러나는 암살자들이 선명해졌다.

놈들의 팔뚝에 장착된 쇠뇌가 그를 겨누고 있었다. 집요하게 따라붙던 사격의 정체였다.

쉬쉬쉭-

그리고 아직도 끝나지 않은 참이었다.

집중력이 극한까지 치달은 덕분에, 이안은 빗방울을 터뜨리며 날아드는 궤적들을 선명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높은 정신력은 오히려 이런 순간에 가장 빛을 발했다.

두려움은 마취된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고, 정신은 더없이 명징했다.

위험한 선택을 앞두고 있음에도 그랬다.

타타탓-!

놈들을 향해 질주하며, 이안은 상반신만 비틀어 날아드는 궤적들을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뒤이어 반대 방향으로 힘차게 허리를 꺾으며, 이안이 검을 휘둘렀다.

그의 몸을 감싸던 바람이 그대로 칼날을 타고 분출됐다.

스걱-!

검이 닿을 거리가 아닌데도, 암살자 하나의 상반신이 사선으로 잘려 치솟았다. 놈의 하반신이 피를 흩뿌리며 허물어질 때, 이안은 이미 그 옆의 암살자를 향해 쇄도하고 있었다.

콰직-

치켜들었던 칼날이 그대로 암살자의 목덜미로 떨어져 내렸다. 휘청 꺾이는 놈을 그대로 몸으로 부딪쳐 날려버린 이안이, 그 반작용으로 멈춰 서며 재차 옆으로 몸을 날렸다.

채앵-!

동시에 뻗어 나간 새하얀 궤적은, 이번에는 피를 보지 못한 채 멈췄다. 구불구불한 날을 가진 기형 검이 앞을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287화

'이걸 막아?'

찰나의 순간, 이안의 시선이 기형 검을 훑었다.

날의 특이한 형태는, 얕게 베이거나 찔려도 최대치의 출혈을 유발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리라.

표면에 균열이 번졌을 뿐 진은 강철 검과 맞부딪쳐도 단박에 부러지지 않은 걸 보면, 최상급 제국 강철로 만든 것일 터였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촤아악-

암살자는 이안의 힘을 견디거나 흩어버리지 못하고 주르륵 밀려났다. 맞닿은 검날을 뿌리치지도 못했다.

"...!"

하지만 두건 아래의 눈동자가 순간 커진 건, 이안의 힘 때문이 아니었다. 그를 마주 보는 이안의 눈동자에 잿빛 마력이 아른거리고 있어서였다.

그리고 그게, 그의 마지막 기억이 되었다.

쩌엉-!

검날에서 소리 없이 터져 나온 무형의 폭발이 기형 검과 검을 쥔 팔뚝을 산산 조각내 버렸기 때문이다. 암살자의 얼굴에는 조각난 검의 파편이 후두둑 틀어박혔다.

이안은 그대로 놈을 밀쳐내며 몸을 휘돌렸다.

쒸에엑-

어느새 측면으로 다가선 또 다른 암살자가 기형 검을 내뻗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걱-!

그보다 빠르게 휩쓸고 간 새하얀 궤적이 암살자의 내뻗은 팔뚝을 그대로 앗아갔다. 자루를 쥔 잘린 손이 검과 함께 옆으로 날아가는 사이, 샛노란 궤적이 뒤를 이어 뻗어 나갔다.

콰직!

백금 방벽의 방패 날이 놈의 안면에 틀어박혔다. 방패가 손등에 붙어 있는 것도 아니건만. 이안의 손을 타고 두개골 부서지는 감촉이 전해졌다.

암살자의 두건이 충격파에 휩쓸려 벗겨졌다. 드러난 놈의 얼굴은 눈구멍만 뚫린 검은 복면으로 덮여 있었다.

그 내부가 흐물흐물해진 암살자가 튕겨 나가듯 뒤로 나뒹굴었다. 어느새 사방이 비 냄새 대신 피비린내로 자욱했다.

"후우… 후우…."

숨을 고르며 자세를 다잡은 것도 잠시. 이안이 불현듯 고개를 옆으로 비틀었다.

그의 미간을 노리고 날아든 단검이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반사적으로 이안이 왼손을 뻗었다.

턱-

날아가던 단검의 자루를 움켜쥔 이안이, 그대로 다시 앞으로 내던졌다. 퍽! 날아온 그대로 되돌아간 단검이, 저 앞 암살자의 두건 사이에 박혔다. 고개를 뒤로 튕기듯 꺾은 암살자가 통나무처럼 쓰러졌다.

'…이게 되네.'

삐이이익- 고막을 찌르는 듯한 소리가 번진 건 그때였다.

이안에게 달려들던 두 암살자가 멈칫하더니, 그대로 폭발탄을 이안을 향해 흩뿌리며 몸을 돌렸다.

이번에는 이안도 당하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 힘껏 펄쩍 뛰어오르면서, 몸을 비틀어 백금 방벽을 아래로 향했다.

퍼버버벙-

폭발이 연달아 터져 나갔다.

사람 키보다 높이 솟구친 이안의 몸을 조금 더 위로 솟구치게 하기엔 충분한 폭발이었다.

온몸이 울리는 와중에도, 이안은 마차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폭발이 오히려 조금 고마워졌다. 덕분에 전장이 훤히 보였으니까.

화르르-

마차 쪽에서도 이곳과 같은 폭발이 번지고 있었다. 특히 페이든의 인근이 그랬다. 아스메 근처의 암살자들은 전부 쓰러져 있었다.

숫자는 훨씬 적지만, 이안의 마차 근처도 마찬가지였다.

확인은 그 정도면 충분했다. 이안은 한 방향으로 모여들며 도주하는 암살자들을 눈에 담았다. 여섯.

'이래서 완수 조건이 두 개였군.'

다시 추락하기 시작하면서, 이안은 검을 허리춤에 회수했다.

그의 눈동자에 다시금 잿빛 마력이 휘몰아쳤다.

저것들이 순순히 도망치게 놔둘 생각은 없었으니까.

***

"하아… 하아…."

숲의 어둠을 노려본 것도 잠시.

-나리! 놈들이 물러납니다!

속삭이며, 필립은 투구 앞까지 들고 있던 진은 강철 방패를 내렸다.

전신에 아른거리던 신성이 가라앉고, 판금 갑옷 곳곳에 번쩍이던 마석의 빛도 옅어졌다.

-나도 알아.

-그럼, 끝난 건가요, 이안 님?

-아직. 기다려라.

이어지는 이안과 엘리야의 속삭임을 들으며, 필립은 주위를 돌아보았다. 그와 이안의 마차 근처에 쓰러져 있는 암살자의 숫자는 몇 되지 않았다.

그들이 저들의 최우선 목표는 아니었던 게 분명했다.

암살자들은 필립이 펼치는 기적과 주문에 몇 번 당한 후로는, 볼트와 단검만 던져댈 뿐 근처로 좀처럼 다가오지 않았었다.

아마 그가 말을 지키는 데에만 주력하고 있다는 걸 눈치챈 것이기도 했으리라.

"이안 경?! 경! 어디 가십니까? 멈추십시오!"

"...?!"

페이든의 다소 당황한 듯한 외침이 번지자, 필립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저 앞, 빗줄기를 뚫고 멀어져가는 황금빛 궤적이 비로소 그의 눈에도 막혔다. 암살자들이 도주한 방향이었다.

-나리! 저놈들을 따라잡으시려고요?

이어진 그의 속삭임에도, 이안은 멈춰 서거나 돌아오지 않았다.

-뒷수습이나 하고 있어.

짧은 속삭임만이 뇌리를 울렸을 뿐, 그나마 보이던 황금빛마저 흩어져 버렸다. 이안의 모습은 더이상 육안으로 확인할 수조차 없었다.

"대체…?"

저 옆에서 페이든의 탄식이 번지는 가운데, 필립은 문득 오래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변방에서 있었던 해묵은 추억과 비슷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결과 역시, 그때와 그리 다르지 않으리라.

어깨를 으쓱인 필립이 검을 다시 허리춤에 회수했다. 그는 방패를 다시 등에 짊어지면서, 안면 가리개까지 내리며 몸을 돌렸다.

습기 섞인 차가운 밤공기가 투구 안으로 밀려들었다. 비릿한 피 냄새까지도.

"...."

그러나 크게 숨을 들이켜는 필립의 입가에는, 숨길 수 없는 뿌듯함이 번지고 있었다.

이런 난장판의 와중에도, 그의 뒤에 선 두 마리의 말들이 모두 무사했기 때문이다.

마석이 번쩍이는 마갑을 걸친 닐라는 물론이고 녀석의 곁에 선 갈색 말도 잔뜩 겁을 집어먹은 채 헐떡이고 있을 뿐, 어쨌든 살아 있었다.

가진 능력을 총동원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결과였다. 덕분에 필립은 이제야 비로소, 마법 무구를 적재적소에 제대로 활용하는 방법을 익힌 기분이었다.

퍼억-

콧김을 뿜던 닐라가 고개를 휙 옆으로 움직여, 갈색 말의 목덜미에 자신의 옆 머리를 박았다. 정신 차리라고 다그치는 것 같았다.

갈색 말은 화들짝 고개를 털면서도 성질조차 부리지 못했다. 녀석이 살아남은 데에는 닐라의 도움도 있었다. 마갑에 새겨진 주문이 날아오는 볼트와 단검을 몇 번이나 막아냈으니까.

필립의 입가에 맺힌 미소가 더 짙어질 찰나.

"따라가야 하지 않겠소, 경?"

옆에서 페이든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아닙니다. 우리는 주변 정리나 하고 있죠. 다 끝난 것 같으니."

태연하게 대답하며, 필립은 말들의 고정끈을 풀기 시작했다.

방금까지는 이 녀석들도 바짝 긴장하고 있던 터라 상관 없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계속 가만히 세워 둘 수는 없었다.

기껏 지켜 놓고 감기로 잃는다면 그보다 허망한 일은 없으리라.

필립이 갈색 말에 이어 닐라의 고정 고리까지 풀어헤칠 찰나.

"아, 아스메!"

저 앞에서 비명 같은 다급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페이든 경…! 아스메, 아스메가!"

황녀였다. 이어진 외침에, 필립의 얼굴에 맺혀 있던 미소가 씻은 듯 사라졌다.

-엘리. 말들을 나무 아래로 데려가 주시겠습니까? 비를 피할 수 있게요.

-네. 알았어요.

-닐라 곁에 붙어 계십쇼.

닐라의 등을 두드린 필립이 곧바로 몸을 돌렸다.

어둠 너머, 쓰러진 아스메를 안고 있는 황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에 다시 샛노란 빛이 아른거렸다.

***

쩌저저적-

한기가 안개처럼 모여든 것도 잠시, 삽시에 잿빛 장벽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

선두를 달리던 암살자가 눈을 치켜뜨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간신히 멈춰선 그는, 퇴각 피리를 불었던 조장이기도 했다.

쉬학-

하지만 모든 부하가 그와 같은 선택을 한 건 아니었다. 그의 바로 뒤를 달리던 암살자는, 오히려 속도를 높이며 몸을 날렸다. 장벽을 뛰어 넘으려는 시도였다.

꾸드드득-

하지만 그건 잘못된 선택이었다. 저 장벽은 땅에서 솟은 게 아니라, 빠르게 얼어붙으며 만들어지는 것이었으니까.

"…헉!"

장벽은 몸을 날리던 암살자를 그대로 집어삼켰다. 그는 벽면에 반신이 박힌 듯한 형상이 됐다. 툭 튀어나온 두 다리가 허공에서 바들댔다.

"...."

조장은 그 모습을 다소 망연자실하게 눈에 담았다.

이미 전장을 한참이나 벗어난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안심하고 속도를 늦춘 게 화근이 될 줄이야.

드드드드득….

심지어 잿빛으로 번들거리는 얼음 장벽은, 위로만 높이 솟아나는 게 아니었다. 좌우로도 커다란 원을 그리듯 이어졌다.

갑자기 생겨난 얼음 성벽이 그들을 가둔 듯한 형국.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 힘든, 말 그대로 당혹스러운 규모의 주문이었다.

"후우… 후우…."

이 주문을 누가 사용했는지 알아내는 건 전혀 어렵지 않았다.

저 뒤에서, 그들의 것이 아닌 숨소리가 번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멈춰선 부하들과 조장의 시선이 거의 동시에 뒤로 돌아갔다.

솨아아….

손에 움켜쥔 푸른 빛이 일렁이는 정수를 앞으로 내뻗은 남자는, 조장도 이미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모를 수가 없었다. 마차 앞으로 갑자기 튀어나와 그들의 기습을 망쳐버린 장본인이었으니까.

가장 많은 부하들을 죽인 자이기도 했다. 대체 자신들의 습격을 어떻게 그렇게 빨리 눈치챈 건지는 아직도 의문이었지만. 당장은 그보다, 저자의 모습 자체가 훨씬 더 불가사의했다.

"간신히 잡았네…."

손아귀의 정수만이 아니라, 그들을 응시하는 눈동자도 불길한 보랏빛으로 번쩍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늘어뜨린 오른손에도 아까와는 전혀 다른 검을 움켜쥐고 있었다. 분명 어둠 속에서도 날이 새하얗게 번뜩였건만. 지금은 모든 빛을 빨아들이는 것처럼 검었다.

체감과 달리, 그들의 적막한 대치는 찰나에 불과했다.

사사사삿-

새카만 검날에 보랏빛 아지랑이가 솟구치기 시작한 순간, 부하들이 일제히 그를 향해 달려들기 시작한 것이다.

조장의 눈에 그건, 고도로 훈련된 암살자의 본능적인 반응에 가까워 보였다. 그 역시 같은 느낌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장 저자를 죽이지 않는다면, 내가 죽는다는.

지잉-

앞으로 내뻗은 남자의 손아귀에서 황금빛 방패까지 솟아난 순간, 그 느낌은 훨씬 더 짙어졌다.

하지만 조장은 부하들과 달리 그를 향해 달려가지 않았다.

무의식에 각인된 의무감이 본능을 이겨냈다.

임무의 실패를 보고해야 했다.

벌떡 일어난 조장은, 남자를 향해 달려드는 부하들을 등진 채 얼음 장벽으로 달려갔다.

서걱-! 콰직!

이미 완성된 장벽은 빈틈이 없었고, 반대쪽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두꺼웠다. 중앙에 박힌 채 아직도 바들대고 있는 하반신을 올려다본 조장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꽈직-

힘껏 내리친 기형 검은, 장벽 표면에 푹 파인 흔적만을 겨우 만들어 냈을 뿐이었다. 깊이 박히지도, 균열을 만들어내지도 못했다.

서걱- 푸확-!

뒤에서 푸른 빛이 번쩍인 건, 조장이 장벽을 넘을 방법을 찾기 위해 다시 몸을 돌린 순간이었다.

"...!"

이내 그의 눈이 커졌다. 원을 그리며 밀려 나온 한기가 그의 전신을 훑고 지나갔다. 속눈썹이 얼어붙고, 빗방울들이 그대로 얼어붙어 우박처럼 후두둑 떨어졌다.

하지만 저 앞에 펼쳐진 광경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콰장창-

허공에서 그대로 얼어붙은 듯, 부하 하나가 얼음 깨지는 듯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달려들던 자세 그대로 조각상처럼 굳어버린 둘의 뒷모습. 이미 토막 나 널브러진 시신들에도 하얗게 성에가 끼어 있었다.

콰지직-!

보랏빛 궤적이, 굳어버린 둘을 단숨에 갈라버린 건 바로 그 직후였다.

피도 솟구치지 않고 비스듬하게 떨어져 내리는 부하들의 상반신 너머로, 이 모든 광경을 만들어 낸 장본인의 푸른 안광이 번뜩였다.

조장이 일순간 숨을 멈출 찰나.

"…네가 마지막이군."

남자가 입꼬리만 말아 올리며 읊조렸다.

얼어붙은 하반신들이 한 박자 늦게 쓰러지면서, 보랏빛 아지랑이를 뿜어내는 마검과 금빛으로 일렁이는 방패의 모습이 온전히 드러났다.

"...."

조장은 자신의 미래를 직감했다.

죽음을 만들어내는 자들이 끝내 모두 그렇듯, 그에게도 피할 수 없는 죽음의 순간이 찾아온 것이다.

#288화

하지만 이 순간 조장의 머릿속을 채운 건, 공포가 아니라 의문들이었다.

천천히 다가오고 있는 저 죽음의 정체에 대해서였다. 저 복장으로 어떻게 자신들을 따라잡은 것인지. 어떻게 성물이 분명한 방패와 마검을 동시에 사용하고 있는지. 그런데도 어떻게 이런 수준의 마법까지 펼친 것인지까지.

"...!"

등허리에 차고 있던 목함의 감촉이 왼손 손아귀에 번진 순간, 조장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무의식에 각인된 의무감이 그의 몸을 움직인 것이다.

목함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간 순간.

타탓-!

남자가 그를 향해 예고 없이 달려들었다.

조장은 목함을 머리 위로 힘껏 던지면서, 오른손의 쇠뇌를 그에게 겨눴다. 보랏빛 궤적이 휘몰아친 건 거의 동시였다.

카가각-

조장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간 궤적이, 뒤편의 얼음 장벽에 기다란 할퀸 자국을 새겼다.

털썩, 팔꿈치 아래가 잘려나간 오른팔이 한 박자 늦게 땅에 떨어졌다.

"...."

자세를 낮춘 채 달려들던 남자는 정작 그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조장이 머리 위로 내던진 목함을 좇고 있었다.

푸드득-

정확히는 그 안에서 쏜살같이 튀어나와 장벽 너머로 날아가는 검은 새를. 임무의 실패를 본단에 알릴 연락용 매였다.

남자의 시선이 미련 없이 다시 조장에게로 돌아왔다.

조장은 잘린 팔을 지혈할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덩그러니 서 있었다. 역할을 다 했으니 저항할 이유도 없었다. 그 생각을 느낀 듯 남자의 걸음이 다시 느려졌다.

걸음걸이와 달리 방심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 눈으로 조장을 바라보며, 그가 내뱉었다.

"누구에게, 어떤 의뢰를 받았지?"

"...."

조장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제 그에게 남은 의무는 하나뿐이었다.

으득-

자신의 죽음을 만들어내는 것.

턱을 비틀어 어금니 뒤에 붙어 있던 독약을 씹은 그가, 이내 눈을 까뒤집으며 널브러졌다.

"…이런."

쓰러진 그의 앞에 멈춰 선 이안이, 심드렁하게 중얼댔다.

자살이라니. 전형적인 최후였다.

물론, 경련하는 암살자를 내려다보는 그의 눈에는 딱히 실망한 기색이 없었다. 그저 백금 방벽을 거둬들이며, 눈앞에 떠오른 퀘스트 완료 창을 닫았을 뿐이었다.

어차피 놈에게 정보를 얻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암살자를 전부 죽이는 데에 성공했다는 게 더 의미 있었다.

암살자들이 방심하고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면. 그리고 정수와 혼돈력으로 두 번 증폭한 빙하 방벽이 아니었다면 쉽지 않았을 터였다.

솨아아….

이안은 드라이아이스처럼 증발하며 사라지는 빙하 방벽을 잠시 올려다보았다. 중간쯤에 축 늘어져 있던 시체가 힘없이 떨어졌다.

고개를 끄덕인 이안이 왼손에 쥐고 있던 정수를 아공간에 되돌렸다.

우우웅-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듯 바들대는 흑검까지 미련 없이 아공간에 던져 넣은 그가 몸을 숙였다.

자살한 암살자는 이제 힘없이 축 늘어져 있었다. 손을 뻗은 이안이 복면을 억지로 벗겨냈다. 뒤이어 그의 미간이 슬쩍 좁아졌다.

'…이래서 복면을 씌워 뒀나.'

암살자의 얼굴은, 코가 있어야 할 자리에 구멍만 뻥 뚫려 있었다.

일부러 얼굴을 망쳐 버린 게 분명했다. 본래 얼굴을 알아볼 수 없게 하려는 것이리라. 가짜 코를 붙이는 식으로 변장을 할 수도 있는지도 몰랐다. 코는 사람의 인상에 큰 영향을 끼치지 않던가.

뭐건, 정신 나간 방식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수색병을 고르고 타락시켰으면… 나도 이런 면상이 됐던 건가.'

의례적으로 놈의 품을 뒤지며, 이안은 짧게 코웃음을 흘렸다.

마법사를 선택한 게 처음으로 다행스러워지는 순간이었다. 타락하면 끔찍한 몰골이 되는 건, 사실 마법사도 마찬가지이긴 했지만.

이내 배후를 추정할 만한 단서 같은 건 없다는 걸 확인한 이안은, 놈이 겨드랑이 아래에 끼워둔 투척용 단검만 뽑아 아공간에 넣었다. 옆구리에 일렬로 이어진 검집에 딱 한 자루만 남아 있었다.

이안은 놈의 목에서 가느다란 쇠줄로 묶인 목걸이도 끊어냈다. 끝에 새끼 손톱만한 길이의 가느다란 피리와, 금속으로 만든 조그마한 약병이 달려 있었다.

'새를 날린 것도 그렇고, 이놈이 대장이었군.'

약병에는 무려 최고급 해독제가 들어 있었다. 게임에서는 모든 중독 상태를 해결할 수 있던 물건이었다. 마찬가지로 아공간에 넣은 이안은, 땅에 떨어진 잘린 팔뚝도 집어 들었다.

팔목에 고정된 쇠뇌를 탈착하기 위해서였다.

자객의 연발 쇠뇌. 희귀 등급이었고, 아랫면에 일체형으로 붙은 금속 통에는 아직도 볼트가 한 발 남아 있었다. 쏘고 나서 다시 시위를 당기면 재장전이 되는 구조 같았다.

이안은 놈의 망토까지 벗기고서야 비로소 일어섰다. 그림자 망토. 민첩을 하나 올려주는 희귀 등급 망토였다.

'…정보창에 없는 능력이 하나 더 있네.'

탈탈 털어 몸에 걸친 이안이, 이내 어깨를 까딱였다. 빗물이 전혀 스며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대로 걸음을 옮긴 이안은, 여전히 차가운 암살자들의 시체 토막들도 빠르게 뒤졌다.

해독제를 가진 놈은 없었다. 하지만 그것 말고도 소득은 충분했다.

독이 발린 볼트도 통에 가득 채웠고, 마비 독이 발린 투척용 단검도 네 자루 더 손에 넣었다. 독사 검이라 이름 붙은 비교적 멀쩡한 기형 검도 한 자루 챙길 수 있었다. 이건 그다지 그의 취향은 아니었지만, 어쨌건 보조 무기를 마다할 필요는 없었다.

"...."

정리를 끝낸 이안은, 두건을 깊이 눌러쓰며 빗소리만 번지는 일대를 잠시 눈에 담았다.

이 시체들은 그 누구에게도 발견되지 못한 채, 이 숲에서 썩어가게 될 터였다. 그 사실이 어떤 새삼스러운 감흥을 불러일으키지는 않았다. 그저, 놓친 무언가가 있지는 않을지 확인한 것뿐이었다.

이내 어깨를 으쓱인 이안은,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아직 마무리 지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

***

빗줄기가 조금씩 가늘어졌다.

몇 시간 뒤면 완전히 그칠 모양이었다. 하늘로 봐선, 언제 다시 내려도 이상하지 않긴 했지만.

-대부님. 들리시면 대답해 주세요. 대부님?

한순간 뇌리를 울리는 속삭임에, 두건을 눌러쓴 이안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스쳤다. 그래, 길을 잃지는 않았네.

-대답.

-느껴진 게 착각이 아니었네요. 다행이에요…. 일은, 잘 끝내셨나요?

-그래. 그런데….

숲의 그림자가 끝나는 지점을 눈에 담으며, 이안이 슬며시 미간을 좁혔다.

-왜 엘리 너만 대답하지? 필립은?

시끄러워야 할 녀석이 조용했기 때문이다. 엘리야의 대답이 곧바로 이어졌다.

-필립 경은 지금 기도 중이에요.

-기도…?

이안의 걸음이 빨라졌다. 이 밤중에 대답도 못 할 정도의 기도를 올리고 있다면 뭔가 일이 생겼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상황은?

-일단 저는 무사해요. 알고 계실지 모르지만, 말도요. 그런데, 아스메가 다쳤어요.

숲 가장자리로 다가가며, 이안은 짧게 혀를 찼다.

하긴. 마법사는 전통적으로 암살자에 취약한 법이었다. 괴상한 방식으로 주문을 사용하긴 했지만, 아스메도 굳이 따지자면 마법사라 할 수 있었다.

-그놈들에게 당했으면, 다치는 정도로 끝나지 않을 텐데.

-중독된 것 같아요. 필립 경이 기도로 정화 중인데, 시간이 꽤 지났는데도 아직도 대답이 없어요.

잘 될 리가 없겠지. 이건 저주가 아니니까.

생각하며, 이안은 숲 밖으로 나섰다. 저 앞에 일렬로 선 마차의 실루엣이 선명해졌다. 황녀의 마차 창문 틈에서 흐릿한 빛이 번졌다.

"이안 경…?"

옆에서 페이든의 목소리가 번졌다. 이안은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일별했다. 시체의 다리를 집어 든 페이든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투구를 벗은 상태인 걸 보니, 혼자 주변을 정리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맞소."

"…다행이군요. 그걸 걸치고 계셔서, 암살자가 돌아온 줄 알았습니다."

페이든이 시체를 길 밖으로 휙 집어 던지고는 달려왔다.

"부상자가 있다던데."

이안이 눈길도 주지 않고 내뱉었다. 물론 걸음도 멈추지 않았다. 옆으로 따라붙은 페이든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스메가 당했습니다. 팔에 볼트를 맞았는데, 독이 번지고 있더군요. 쉘비에게 그랬던 것처럼…."

표정이 어두운 건 자신의 종자를 잃었기 때문이리라. 그가 슬며시 이안이 눌러쓴 두건을 돌아보았다.

"암살자들은, 전부 처리하셨습니까?"

"그렇소."

"…감사드립니다. 그 녀석의 원수를 대신 갚아 주셔서. 본래 제가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만, 부끄럽군요."

"됐소. 원수를 갚아 주려고 한 일도 아니니까."

건조하게 내뱉은 이안이 두 대의 마차 사이로 다가서며 덧붙였다.

"하던 일이나 마저 하시오. 나도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으니."

다시 한번 감사하다 속삭인 페이든이 선선히 몸을 돌렸다.

-대부님!

엘리야의 속삭임이 뇌리를 울렸다. 그녀는 저 건너편의 나무 아래에 서 있었다. 옆에는 말들이 함께 비를 피하고 있었다.

왜 나와 있나 했더니, 말들을 지키고 있었던 것이리라. 반대로 백마가 엘리야를 지키고 있는 것처럼 보이긴 했지만.

-거기 잘 붙어 있어.

속삭이며, 이안은 황녀의 마차로 다가갔다. 벌컥 문을 열자 내부의 모습이 드러났다.

의자에 길게 누운 아스메. 그리고 바닥에 무릎 꿇은 채, 그녀의 왼팔에 손을 얹고 기도 중인 필립. 그의 전신에서 번지는 은은한 빛이 마차 안을 밝혔다.

"돌아오셨군요. 경…."

필립의 뒤편에 앉은 세라스가 그를 돌아보았다.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안색은 창백했고,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채였다.

그녀를 일별한 이안은 별다른 말 없이 마차에 올랐다. 그는 곧바로 아스메의 상태부터 확인했다.

의식이 없는 그녀의 얼굴은 납빛이었다. 소매를 걷어 올린 왼팔에 검은 피가 찐득하게 흘러내렸다.

환부는 필립의 양손 사이에 있었다. 볼트를 뽑아낸 듯한 구멍에서 핏물이 고여 있고, 근처의 핏줄이 검게 물들어 번지고 있었다.

어쨌건 그녀가 아직 죽지 않은 건 필립의 기도 덕분이 틀림없었다. 신성력이 독이 번지는 걸 억제하고 있었다.

하지만 완벽하지는 않을 터였다.

시간이 제법 지났으니, 독이 어느 정도는 퍼져 나갔으리라. 아스메의 안색이 그 증거였다.

'…좀 아까운데.'

입맛을 다시면서도, 이안은 손을 뻗어 아스메의 턱을 억지로 벌렸다. 어느새 그의 반대 손에는 해독제 병이 들려 있었다. 마개를 연 그가 안에 담긴 수상한 액체를 그녀의 입안에 흘려 넣었다. 아스메가 무의식적으로 받아 마셨다.

세라스가 입을 앙다문 채 그를 올려다 보는 가운데, 이안이 재빨리 손을 움직여 오른손의 강철 장갑을 벗었다.

스슷-

손가락에 끼워져 있던 늪지의 원한이 기다렸다는 듯 움직여 환부 위로 떨어졌다. 신성력이 거슬리는 듯 몸부림을 치면서도, 녀석이 환부에 이빨을 박아 넣었다.

"이제 충분해. 수고했다."

이안이 필립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필립의 전신에 맺혀 있던 빛이 금가루 같은 빛무리로 화했다.

손을 놓은 필립이 뒤로 벌러덩 주저앉았다.

"하아… 후아…. 오셨습니까? …또 좋은 걸 챙겨 오셨군요."

식은땀 맺힌 얼굴로 이안을 올려다본 그가 너스레를 떨었다. 이안이 피식 웃는 사이.

"아스메는 이제… 괜찮은 건가요…?"

아스메의 피를 빨고 있는 검은 뱀을 내려다보던 세라스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언제 그랬냐는 듯 입가의 미소를 지운 이안이 환부 위로 손을 뻗었다.

스슷-

용수철처럼 몸을 말았다가 펄쩍 뛰어오른 늪지의 원한이 그의 손가락에 감겼다. 곧바로 강철 장갑을 다시 손에 끼우면서, 비로소 이안이 입을 열었다.

"푹 자고 일어나면 그럴 것이오."

"감사… 감사합니다. 두 분 다,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벌떡 일어선 세라스가 허리를 깊이 숙였다. 그녀에게 손사래를 치던 필립이 슬며시 이안의 눈치를 살폈다. 이안이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손을 뻗어 필립을 일으켜 세운 이안이 덧붙였다.

"가서 붕대를 가져 와라. 그리고 영애에게 말들을 다시 데려오라고 해. 준비되는 대로 바로 떠날 거니까."

"예…? 아, 예. 알겠습니다."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필립이 더 덧붙이는 말 없이 마차에서 내렸다. 허리를 숙였던 세라스가 아스메를 일별하고는 다시 이안을 바라보았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출발을 몇 시간만 늦춰 주시면 안 될까요, 경? 아스메의 상태가 조금 더 안정될 때까지만요."

"귀하는 그렇게 하시오."

고저 없는 목소리로 내뱉은 이안이, 비로소 세라스를 돌아보았다.

"우리는 이대로 떠날 테니까."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경?"

세라스가 눈을 깜빡였다. 이안이 몸을 돌리며 덧붙였다.

"계약을 파기하겠다는 말이오."

#289화

"파기? 파기라니요…?"

세라스의 눈이 한 박자 늦게 커졌다. 그대로 마차에서 내리려던 이안이 이내, 미간을 좁혔다.

"자, 잠깐만요. 잠깐만요, 경."

숨을 들이켠 세라스가 거의 몸을 날리듯 문 앞을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감사 인사를 잊었군요. 도와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경. 두 분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습격을 무사히 이겨내지도, 아스메를 살리지도 못했을 거예요."

평소보다 훨씬 빠르게 내뱉은 세라스가, 애써 지은 게 분명한 미소를 입가에 걸었다. 그렇다 해서 말투와 눈동자의 떨림까지 감추지는 못한 채였다.

습격. 전투. 죽음과 부상. 거기다 이제 청천벽력 같은 통보까지 이어진 셈이니, 평정심을 유지하기 어려울 터였다.

"물론, 그저 인사로만 끝내려는 건 아닙니다. 제도에 도착하면, 이안 경은 물론이고 필립 경께도 합당한 추가적인-"

"순서부터 틀리셨군. 감사 인사가 먼저가 아니잖소?"

그런 그녀를 무심한 눈으로 내려다보던 이안이, 툭 말을 잘랐다.

"그놈들은 귀하를 노리는 거였소. 그리고 귀하는, 이런 일이 일어나리란 걸 이미 알고 계셨고."

세라스의 미소가 굳어졌다. 뒤이어, 그녀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일이 생길 수도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내게 언질조차 주지 않으셨지. 내가 수행 중인 의뢰가 있다는 것도 이미 알고 있었으면서."

"...."

"위험한 상황은 일어날 수 있소. 하지만 그걸 미리 경고하지 않는 건 다른 문제지. 그래서 나는 비밀이 많고 믿을 수 없는 자들과는 일하지 않소. 귀하는, 둘 다라고 할 수 있고."

세라스의 얼굴에는 더 이상 미소를 찾아볼 수 없었다. 그녀는 그저 말문이 막힌 듯 입술만 달싹였다.

이안이 그녀의 앞으로 다가선 건 그때였다.

"영애가 다치지 않은 것에 감사하시오. 만약 그런 일이 있었다면, 그냥 계약을 파기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을 테니."

"...!"

고저 없는 목소리에, 세라스가 퍼뜩 정신을 차린 듯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안의 광택 없는 검은 눈을 마주한 그녀의 얼굴에서, 그나마 남아있던 핏기가 완전히 사라졌다.

이안이 멈추지 않고 다가섰다.

"귀하가 황녀라는 사실에도 감사하는 게 좋을 것이오. 그게, 지금 귀하가 내 앞에 멀쩡히 서 있을 수 있는 유일한 이유니까."

"서, 성자 대행…."

주춤주춤 물러나며 세라스가 탄식했다. 이안의 말이 허언이 아니라는 건 그녀도 잘 알고 있을 터였다.

철컥. 손을 뻗어 마차 문을 연 이안이, 두건을 다시 올려 쓰며 내뱉었다.

"제도에서 봅시다. 그럴 기회가 또 있다면."

"...."

마차에서 내리는 이안에게 뒤늦게 손을 뻗었던 세라스가, 이내 아스메를 돌아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이안은 본 척도 하지 않고 마차 문을 닫았다. 몸을 돌린 그의 미간이 다시금 좁아졌다.

"왜 조용한가 했더니…."

마차 뒤편에 붕대를 든 필립이 가만히 서 있었기 때문이다. 이안과 눈이 마주친 그가 머쓱한 미소를 지었다.

-그게… 일부러 훔쳐 들은 건 아닙니다. 두 분이 중요한 말씀을 나누시는 것 같아서, 방해하지 않으려고 어쩔 수 없이…. 하하.

그렇게 당당한데 왜 속삭여?

콧방귀를 뀐 이안이 걸음을 뗄 찰나, 엘리야의 속삭임이 이어졌다.

-무슨 말씀을 나누셨는데요? 왜 벌써 다시 떠날 준비를 하시는 거고요?

그녀는 말들을 이끌고 이미 거의 마차 근처까지 도착해 있었다. 난쟁이가 고삐를 쥐고 있는데도, 두 말은 얌전히 뒤를 따랐다.

마차 벽면에 슬쩍 기댄 필립이, 다가오는 이안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방금, 나리께서 계약을 파기하셨습니다.

-네…? 계약을요? 왜요?

엘리야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이안을 돌아보았다. 필립의 속삭임이 이어졌다.

-엘리를 위험하게 만들어서 화가 나신 거죠.

-저요? 전 괜찮았는데…. 그럼 정말 지금 바로 떠나는 건가요?

-설마요. 분명 다른 생각이 있으신 거겠죠.

이 새끼가 이젠 사람 마음도 읽으려고 하네.

필립을 지나친 이안이 짧게 혀를 찼다.

-가서 붕대나 감아. 늦으면 두고 갈 거다.

-엥…? 진심으로 파기할 생각이신 겁니까? 계약 조건을 갱신하고, 겸사겸사 품고 계신 비밀도 털어놓게 하시려던 게 아니라요?

다시 마차로 걸음을 옮기면서도, 필립이 이안의 뒤통수를 돌아보았다. 엘리야에게 마주 다가가며, 이안이 어깨를 까딱였다.

-그래. …반쯤은.

물론 보상이 좋은 퀘스트를 날려 버리고 싶진 않았지만. 이안에게는 교단이라는 선택지도 있었다.

어쩌면 이번 퀘스트를 실패로 끝낸다 해도, 다른 황자가 같은 퀘스트를 다시 들고 찾아올지도 몰랐다. 본래도 거절이 가능한 퀘스트가 아니던가.

그러니 그냥 하려던 대로, 중앙의 대도시를 돌아다니면 그만이었다. 다른 손님이 찾아올 때까지.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그냥 이대로 떠날 때의 이야기였다.

나머지 절반의 진심은, 필립이 말한 그대로였으니까.

"저 때문에 굳이 그러실 필요는 없어요. 대부님. 전 정말 괜찮았거든요."

이안에게 고삐를 넘겨주면서, 엘리야가 말했다. 이안을 올려다보는 그녀의 입가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래도 기분은 좋네요. 화를 내주시다니."

"헛소리 그만하고 안에 들어가 있어. 망토 다 젖겠다."

내뱉으며 몸을 돌린 이안이, 말들을 마부석 앞으로 끌고 갔다.

뭐가 그렇게도 좋은지 연신 헤실대며, 엘리야가 그와 말들 사이를 지나갔다.

이안이 말들을 마차에 고정하기 시작한 그때.

-나리. 전하께서 곧 나가실 것 같습니다.

필립의 속삭임이 이어졌다.

이안은 낮게 코웃음을 흘렸다.

당연한 반응이었기 때문이다. 손에 넣은 기회가 눈앞에서 날아가는 걸 지켜만 볼 사람은 없을 테니까.

-제게 나리를 설득할 방법을 물으시더군요. 저도 성공해 본 적이 없다고 했더니, 그 후론 붕대만 보고 계시네요. 조치가 끝나길 기다리시는 것 같습니다.

물론, 그게 아니라도 초조할 수밖에 없을 터였다.

황녀의 마차를 끌던 말들은 이미 다 죽어버리지 않았던가. 이대로 이안이 떠난다면 그녀는 도보로 이동해야 했다. 그것도 부상자를 이끌고.

-황녀께서 진심으로 사과하고 용서를 구하면, 받아주실 건가요?

엘리야가 속삭였다. 이안은 말들 사이에 심드렁하게 고리를 걸었다.

-말하는 거 봐서.

세라스에게 남은 최선의 선택지는, 이안에게 비밀을 전부 털어놓고 자비를 구하는 것뿐이었다.

사실 그가 듣고 싶은 이야기는 습격의 배후에 대한 것뿐이긴 했지만.

'…다른 이야기도, 들어서 손해 볼 건 없지.'

그녀가 뭔가 떠들어 댄다면 굳이 막지는 않을 생각이었다.

미지의 영역이 가까워질수록, 정보는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었다.

누군가 주절대도 잠자코 듣는 일이 많아진 건 그래서였다. 하물며 황녀라면, 어디서도 듣기 힘든 정보들을 여럿 토해낼 터였다.

당장은 쓸모없어 보이더라도, 예상치 못한 상황에 도움이 되리라.

물론 그녀가 그렇게까지 솔직해질 확률은 많이 쳐야 반반이었다.

황족들은 귀족 중에서도 가장 오만하고 이기적인 족속들이 아니던가. 그녀의 본질도 그리 다르지는 않을 터였다.

아마 오늘 일도, 이안이 고분고분 사정을 물었다면 못 이긴 척 아주 약간의 진실만을 털어놓았으리라.

푸르르….

연결을 끝내자 백마가 낮게 투레질했다. 다시 출발할 준비가 끝났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기특한 놈.'

녀석의 목덜미를 툭툭 두드린 이안이 몸을 돌렸다. 그는 미리 열어둔 마차 문 앞으로 다가갔다.

엘리야는 마석 등을 켠 채, 이안이 앉았던 좌측 창가 자리에 앉아있었다. 이안이 올라오자, 그녀가 손에 들고 있던 술병을 내밀었다.

"마침 필요하던 거네."

"장비는 바닥에 벗어놔 주세요. 내일 아침에, 제가 다시 닦아 둘게요."

"굳이 그러지 않아도 돼."

"제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예요."

오늘은 한 게 너무 없다 이거지?

피식 웃은 이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문을 닫았다.

턱-

뻗어 나온 흰 손이 닫히려는 문을 막은 건 그때였다. 문틈으로 세라스의 얼굴이 드러났다.

이안은 놀라지도, 고개를 갸웃하지도 않았다. 그저 다시 문을 여는 그녀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를 올려다보는 세라스의 푸른 눈은, 그 잠깐 사이에 다시 차분해져 있었다. 아니, 그보다는 결연한 쪽에 가까워 보였다.

"…먼저, 정중하게 사과드리겠습니다. 성자 대행."

두건까지 벗은 세라스가 고개와 무릎을 같이 굽혔다. 빗줄기가 머리와 얼굴을 적셨지만, 상관도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성자 대행의 말씀이 맞아요. 처음부터 전부 말씀드려야 했습니다."

덧붙인 그녀의 시선이, 이안의 옆자리에 앉은 엘리야에게로 돌아갔다.

"제 비밀 때문에 위험에 처했던 영애와 필립 경에게도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엘리야가 미소로 화답했다. 고맙다는 듯 설핏 입꼬리를 말아 올린 세라스가 다시 이안을 돌아보았다.

"제가 변명할 기회를, 한 번만 주실 수는 없을까요? 왜 아까 같은 일이 일어났는지 전부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번엔, 단 하나의 비밀도 없이요."

이안은 마차 안쪽으로 고개를 까딱였다.

"올라오시오."

세라스가 다시 한번 깍듯하게 무릎을 굽혔다. 저게 진심이건 아니건, 그녀가 황족 중에서도 귀한 부류라는 건 분명했다.

-그… 저도 같이 들으면 안 되겠습니까?

세라스가 마차에 오르는 사이, 뇌리로 필립의 속삭임이 이어졌다.

-황녀께서 무슨 말씀을 하실지, 저도 궁금한데요. 나리.

내심 콧방귀를 뀐 이안이 대답했다.

-이야기가 길어질지도 모르니까, 말들 다시 나무 아래에 묶어 놔라. 그리고 거기서 아스메를 돌봐.

-대신 제가 전해 드릴게요. 한 단어도 빠뜨리지 않고.

엘리야가 끼어들었다. 그녀는 조용히, 그러나 눈을 빛내며 세라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 그래 주시겠습니까, 엘리?

…더럽게 정신없겠군.

내심 읊조린 것과 달리, 이안은 그러지 말라고 하지 않았다.

그저 잠시 내면을 관조해, 엘리야의 속삭임 주문을 흩어 버렸을 뿐이었다.

마주 앉은 세라스는, 이안의 침묵을 오해한 듯 다소 초조한 눈빛이 되어 있었다. 어쩌면 마석 등의 창백한 불빛 덕분에 빗물과 흙, 피로 범벅인 이안의 몰골이 선명하게 드러났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제가 성자 대행께 이런 일이 생길 수도 있다고 미리 말씀드리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가문이 얽혀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안과 눈이 마주친 그녀가, 낮게 헛기침을 하고는 운을 뗐다.

"가문의 속사정은, 외부에 발설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거든요.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나름대로 방비를 해두고 제도를 떠나기도 했고요."

이안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술병을 입으로 가져갔다. 세라스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이어졌다.

"성자 대행을 예상보다 일찍 만나 뵙게 됐으니, 제가 황궁을 떠난 것을 들키기 전에 돌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안일한 생각이었다는 건, 이미 확실해 졌지만요."

"그러니까 결국…."

술병을 입에서 뗀 이안이 그녀를 마주 보았다.

"암살자의 배후가 황실이라는 말씀이시군."

"가문의 누군가겠죠. 그게 정확히 누구인지 밝혀내는 건, 아마 불가능하겠지만요."

"귀하를 왜?"

세라스가 잠시 머뭇댔다. 슬쩍 이안의 손에 들린 술병을 일별한 그녀가, 이내 한숨을 삼키듯 입을 열었다.

"저는 이복형제가 아주 많아요. 아시다시피, 아버님의 공식적인 후계자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고요."

이안은 낮게 코웃음 쳤다.

황가 얘기가 나온 순간부터 예상한 그대로의 대답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귀하는, 어차피 계승 확률이 아주 낮을 텐데."

"물론입니다. 하지만, 제 오라버니는 아니죠."

"아, 그래…."

술병을 내려놓은 이안의 한쪽 입꼬리가 비로소 슬며시 올라갔다.

"날 데려가려던 게, 본인을 위해서가 아니셨군."

"절반 정도는요."

하긴. 결국은 그것이 본인을 위한 일이기도 하리라.

왕만큼이나 대접받는 건, 왕을 옹립하는 데에 큰 공을 세운 공신들이니까. 하물며 그게 황녀라면, 더 막강한 권력을 누리게 되리라.

어쩌면, 그녀 역시 황좌에 앉는 꿈을 꾸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것까진 이안이 알 바 아니었지만.

"오라버니는 아직 가장 유력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세 손가락 안에는 꼽힐 겁니다. 기본적으로 우리는 가문의 피가 진한 쪽이기도 하거든요. 부모님께서 사촌지간이셨던 덕분에요."

옆에서 엘리야가 티 나게 숨을 멈췄다.

이안도 물끄러미 세라스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정작 그녀의 표정은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그래… 드문 일도 아니란 거지.

이안은 더 덧붙이는 말 없이 술병을 입으로 가져갔다. 기다렸다는 듯 세라스의 말이 이어졌다.

"하지만 제 지지와 조력이 없다면, 혼자서는 무너지고 말 거예요. 게다가 제가 성자 대행을 모시고 가는 데에 성공한다면, 오라버니의 입지는 더 공고해지겠죠. 아마 그것을 막고 싶은 누군가가 손을 쓴 걸 겁니다."

"…아무리 그래도, 폐하께서 형제끼리 칼부림을 하는 걸 그냥 보고 만 계신단 말이오?"

"저를 죽일 생각은 아니었을 거예요. 살려서 어딘가에 가둬 두는 게 전략적으로 더 가치 있을 테니까. 아마 저를 제외한 모두를 죽이고, 저를 손에 넣을 생각이었겠죠."

세라스의 말투와 표정은 빠르게 차분해지고 있었다. 이제는 낯뜨거워하는 기색도 없었다. 가문을 떠올린 것만으로도 감정이 가라앉은 것이리라.

"물론, 이것도 추측입니다. 그냥 깔끔하게 죽일 생각이었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그랬다고 해도, 아버님께서 불같이 화를 내셨을 것 같지는 않네요."

그녀가 입술 끝만 말아 올렸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여기신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아요. 어쨌든 저는, 제 발로 제도를 떠났으니까."

"전부터, 제도를 떠나는 게 대단한 일인 것처럼 말씀하시는군."

"우리에겐 그래요. 어쨌든 아버님의 시야 안에서는, 형제들끼리 피를 보는 일은 금지되어 있거든요."

그녀의 목소리가 순간 낮아졌다.

"그리고 아버님은 황궁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알고 계시죠. 아무리 은밀한 비밀이라도 빠짐없이."

낮을 뿐만 아니라, 아주 조심스러운 말투였다. 이안의 한쪽 입술이 말려 올라갔다.

"그게 폐하께서 타고나신 능력이오?"

세라스가 멈칫했다. 이안이 말을 이었다.

"황가는 신들의 축복을 받은 가문이라, 그 피를 이어받은 이들은 저마다 특별한 능력을 타고난다던데. 이건 대단한 비밀도 아니잖소."

"…그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아버님의 능력을 정확히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전부, 오래전에 죽거나 사라졌죠."

조심스럽게 대답한 세라스가, 이안을 마주 보았다.

"저도 예외는 아닙니다. 그저, 무언가 관계가 있으리라 추측만 할 뿐이에요."

가족들을 전혀 믿지 않는 아버지라. 정말 콩가루 집안이군.

이안은 낮게 코웃음을 흘리며 다시 술병을 들었다.

하긴. 새삼스럽게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황제는 애초에, 황궁 밖으로는 한 걸음도 나오지 않는 작자가 아니던가.

술을 한 모금 마신 이안이 대수롭지 않게 덧붙였다.

"그럼, 귀하는 어떤 능력을 타고나셨소?"

#29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