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0화
어제 낮에 정신을 차린 보르는, 파엘의 부축을 받으며 직접 일행을 찾아와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이안을 대하는 태도가 한층 더 깍듯해진 건 물론이었다.
"벌써 혼자 나다니다니. 회복이 빠르시군."
이안이 입꼬리를 슬쩍 말아 올리며 말했다. 보르가 북부식으로 고개를 숙였다.
"덕분입니다."
그대로 목에 걸고 있던 목걸이를 벗은 그가, 양손으로 공손하게 받쳐 들어 앞으로 내밀었다.
거참 깍듯하구만.
델라 루의 은총을 받아들며 이안이 덧붙였다.
"푹 쉬시오. 주교가 온다니, 정화 기도도 한 번 더 받으시고."
"그러죠. 함께 가지 못해 아쉽군요."
고개를 끄덕인 보르가, 이안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덧붙였다.
"타락한 주문쟁이를 조심하십시오, 경. 다시 공격해 올 것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이안이 입술을 말아 올렸다.
"염려 마시오. 그놈의 목은, 단주에게 들려 보낼 테니."
보르의 야윈 얼굴에도 미소가 번졌다.
"그래 주신다면 그보다 감사한 일이 없을 겁니다. 잘 말려서 집에 걸어두겠습니다."
"그건 알아서 하시고."
"경이 계셔서 다행입니다. 단주가 모자란 짓을 해도 위험해지지는 않을 테니."
"모자란 건 자네 아닌가?"
이안의 뒤에서 이어진 목소리에, 보르의 미소가 굳어졌다.
"당하고 다니기나 하고. 아직도 툭 치면 쓰러질 것처럼 비실대는데."
실실 웃으며 덧붙인 파엘이 이안의 옆에 나란히 섰다. 제국식으로 고급스럽고 화려하게 차려입어서, 지금은 전형적인 제국 상인처럼 보였다.
보르의 야윈 팔을 놀리듯 훑어보며, 그가 덧붙였다.
"나 없는 동안 집이나 잘 지키고 있게. 몸도 좀 다시 만들고. 덩치가 좋아서 칼받이로 고용한 건데, 영 볼품이 없어졌어."
"…내 창술을 보고 결정했다고 하지 않았소?"
보르가 울화를 꾹 억누르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파엘이 코웃음을 흘렸다.
"겨우 그것만 보고, 이름과 비슷한 도시여서 이곳으로 왔다는 야인 전사를 고용하진 않지. 내가 괜히 자네를 개인 경호로 쓰겠어?"
"그때 글을 읽을 줄 알았어야 했는데…."
살만해지니까 바로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이군. 이안이 피식대는 사이, 만족스럽게 그를 돌아본 파엘이 덧붙였다.
"떠날 준비가 다 됐소. 출발시킬 테니, 천천히 따라오시오."
고개를 끄덕인 이안이 저 옆에 멈춰선 마차를 돌아보았다. 미리 타고 있던 필립이 문을 열고, 엘리야가 올라타고 있었다.
몸을 돌리던 파엘이 덧붙였다.
"잠시 후에 술 한 병 들고 경의 마차로 가겠소. 상황이 이런데, 붙어 있어야 하지 않겠소."
그냥 떠들고 싶은 거겠지.
생각하면서도, 이안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술을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게다가 파엘은 필립이나 엘리야와도 대화가 잘 통했다.
행렬 앞으로 향하는 파엘을 잠시 불안하다는 듯 바라본 보르가, 이내 다시 이안을 바라보았다.
"목숨을 구해주신 빚은, 언젠가 반드시 갚겠습니다. 경."
"그래야 할 일이 생긴다면, 그때는 사양하지 않겠소."
어깨를 까딱이며 대답한 이안이 마차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안 경."
보르의 목소리가 이어진 건, 이안이 마차로 거의 다가섰을 때였다.
멈춰 선 이안이 그를 돌아보았다. 그를 계속 바라보고 있었던 듯 눈이 마주친 보르가, 낮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질문 하나 드려도 되겠습니까?"
"하시오."
"단주는 굳이 생각하거나 캐내려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만….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공교로워서 말입니다. 경의 행적이나, 들려 오는 소문들이요. 그러니까 제 말은… 어쩌면 경이 바로 그…."
보르가 슬며시 시선을 내리깔며 북부인답지 않게 더듬댔다.
낮게 실소한 이안이 내뱉었다.
"역시, 감이 좋으시군."
"...!"
번쩍 고개를 든 보르가 이안을 바라보았다. 이안이 다시 몸을 돌렸다.
"잘 지내시오. 보르."
석상처럼 굳어진 보르를 남겨 둔 채, 이안이 마차에 올랐다. 그가 문을 닫기도 전에 마차가 출발했다.
"그거, 비밀로 하시려던 거 아니었습니까?"
엘리야의 건너편에 앉은 필립이 넌지시 물었다. 흘러가는 장원의 풍경을 눈에 담으며, 이안은 어깨만 으쓱였다. 그가 아는 보르라면, 떠벌리고 다니지는 않을 터였다.
"----!"
'…아닌가?'
뒤에서 터져 나온 포효에, 이안의 한쪽 눈썹이 슬며시 올라갔다.
보르의 전투 함성이었기 때문이다. 카르하를 부르짖는 외침이 뒤를 이었다.
환자가 저래도 되나.
이윽고 이안의 입가에 옅은 헛웃음이 번졌다. 왼팔의 문신이 간질거렸다. 보르의 함성에 반응이라도 하듯이.
'정작 죽어갈 땐 신경도 안 쓰더니.'
콧방귀를 뀐 이안이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느새 펼쳐진 거리의 전경을 응시하는 그의 눈빛이, 삽시에 검게 가라앉았다.
'그래. 꽤 오래 평화롭긴 했지.'
보르가 말했듯, 흑마법사와의 싸움이 기다리고 있을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본바, 흑마법사들은 일반 마법사들과 달리 한 가지 종류의 흑마법만을 익히지 않았다.
아마 환경적인 특성 때문일 터였다. 원하는 종류의 금서만을 골라서 손에 넣는 건 쉽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어쨌건, 주력으로 사용하는 흑마법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번 놈은 저주 술사에 가까웠다. 꽤 드문 부류라고 할 수 있었다. 소굴을 만들어 처박혀야 하는 것들과는 조금 다른.
'그러니 자객으로도 활동할 수 있는 거겠고.'
심지어 꽤 실력도 있는 놈이었다. 어쩌면 마탑에서 나온 놈일지도 몰랐다. 대범하게 중앙에서 활동하는 걸 보면, 가능성은 충분했다.
어쨌건, 이안은 차라리 이동 중에 습격당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러면 뒷수습도 편할 테고, 숨어있는 놈을 찾아내기도 훨씬 쉬울 테니까.
그게 아니라면, 꽤 지저분한 상황이 펼쳐지게 될 터였다.
'…두고 보면 알게 되겠지.'
경험상, 후자일 확률이 더 높아 보이긴 하지만.
거기까지 생각한 이안은, 이내 입맛을 다시며 상념에서 깨어났다.
그가 옆자리를 돌아보았다. 아까부터 시선이 따갑게 느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엘리야였다.
눈이 마주친 엘리야가 동글동글한 볼살을 말아 올리며 미소 지었다.
본인이 도움이 될 방법이라는 걸, 당장 알려 주고 싶은 것이리라.
몸을 숙여 의자 아래에 놓여 있던 술병을 집어 든 이안이, 등받이에 머리를 기대며 입을 열었다.
"그래, 어디 들어나 보자."
***
다각- 다각-
길게 이어진 마차들이 아침 이슬이 채 마르지 않은 관도 위를 나아갔다.
행렬 맨 끝. 마차 지붕에 투구를 베개 삼아 기대 누운 이안은, 심드렁하게 술병을 입에 가져갔다.
'역시는 역시인가….'
여정은 사흘 내내 평화롭게 이어지고 있었다. 저주술사는커녕 마물 한 마리조차 마주치지 않았다.
누군가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조차 없었다. 달라진 점이라고는, 하늘에 다시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다는 것 정도가 전부였다.
덕분에 지난 사흘간 이안이 한 건 술과 음식을 축내고, 그의 마차를 제집처럼 찾아오는 파엘과 일행들의 대화를 들은 게 전부였다.
"…그래서, 제도에 가시는 이유가 대학에서 검은 벽을 연구하기 위해서였단 말씀이십니까?"
지금처럼.
"네. 그럴 예정이예요. 그런데, 왜 그렇게 놀라시나요?"
"어제 제가, 이번 회담이 끝난 뒤에 제도에 연줄을 만들어야겠다고 이야기하지 않았었습니까?"
"하셨죠."
"그럼 그때 왜 이 말씀을 해 주시 않으신 겁니까?"
"어… 저는 연줄이 될 만한 사람이 아니니까요? 묻지도 않으셨고요."
오늘은 아침부터 시끄러웠다.
파엘은 막상 이동이 시작되자 술을 거의 마시지 않았다. 그저 입술만 축이는 정도였다. 아마 회담을 앞두고 있기 때문이리라.
어쩌면 그저, 포도주를 끝도 없이 마셔대는 일행에게 질려 버린 걸지도 몰랐다. 대신 그는 일행들과 온갖 대화를 나눴다.
이안은 딱히 궁금하지 않은 이야기가 대부분이었지만, 어쨌건 일종의 배경 음악이나 백색 소음 정도의 역할은 충분히 하고 있었다.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제도의 대형 상단들은 귀족 가문이나 교단에 기부하는 것 말고도, 전도유망한 예술가나 기술자, 학자를 후원하기도 한다고요. 우리도 동맹의 이름으로 같은 걸 하려는 겁니다."
잠시 말을 멈춘 파엘이 설득하듯 덧붙였다.
"필립 경은 성기사가 되실 테니 따로 후원할 수 없겠습니다만. 영애는 사정이 다르지요. 심지어 검은 벽을 연구하신다면, 자격은 차고 넘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아직 이렇다 할 성과를 낸 게 없는걸요. 아직 공부도 더 해야 하고, 상단에 이득이 되지도 않을 테고요."
"대신 세상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까? 게다가 검은 벽의 비밀을 조금이라도 밝혀낸다면 학계의 주목을 받으시게 되겠죠. 그때 영애의 연구에 도움을 준 이들로 우리의 이름을 언급해 주시기만 해도, 의미는 충분합니다."
"…정말 그거면 된다고요?"
"동맹이 그저 돈만 밝히는 수전노가 아니라, 제국의 발전에 이바지하는 존재들이라는 걸 증명하는 데에 그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죠. 필립 경. 경이 보시기엔 어떻습니까, 제 제안이?"
"어… 글쎄요. 전 잘 알지도 못하지만, 제가 말씀드릴 부분은 아닌 것 같군요. 영애의 보호자 대리는 제가 아니라 이안 경이시니까."
벌컥, 곧바로 마차 문이 열렸다.
상반신을 마차 밖으로 뺀 파엘이, 지붕 위로 고개를 내밀며 말했다.
"경, 들으셨소?"
"…들었소."
불똥이 튀고 난리야.
이안이 시선도 주지 않고 대답했다. 파엘의 말이 이어졌다.
"어떻게 생각하시오? 우리가 영애를 후원한다면, 영애의 연구 환경에 큰 도움이 되지 않겠소?"
"뭐…. 되기야 하겠지."
말하며 고개만 돌린 이안이, 파엘의 눈을 마주 보며 덧붙였다.
"후원금을 빌미로 이리저리 휘두르고, 빚을 지운 것처럼 목줄을 쥐지만 않는다면 말이오."
움찔한 파엘이 웃음 지었다.
"그럴 리가 있겠소…? 영애께서 성과를 내신다면 우리의 격도 함께 높아지는 것인데. 제도에 진출할 기틀을 다지는 일을, 조바심으로 망칠 리가 없잖소."
야망은 이미 거상이시군.
건조하게 웃음 지은 이안이 대답했다.
"그 얘기는, 이번 의뢰가 끝난 뒤에 다시 해 봅시다."
"알겠소. 오늘은 아침부터 기분이 별로 안 좋으시군…. 설마, 아직도 마음에 걸리시는 것이오?"
이안은 대답 대신 다시 위를 바라보며 술병을 입에 물었다.
파엘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주 든든하지만, 염려 놓으시오. 이제 곧 도착하게 될 테니까. 아, 마침 저기 보이는군. 보시오. 바스무트요."
파엘이 저 앞을 가리켰다. 이안은 그제야 상반신을 일으켰다. 내내 누워 있느라 보지 못했던 풍경이 그의 눈앞에 펼쳐졌다.
아주 완만한 내리막을 그리며 이어진 평야와 줄지어 이어진 마차. 널찍한 판석이 깔린 관도. 그 너머로 구름이 내려앉은 것 같은 안개가 펼쳐져 있었다. 도시는 그 한복판에 빼꼼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회색에 가까운 낡은 판석이 도시 밖까지 평평하게 펼쳐져 있고, 성벽과 불그스름한 지붕이 덮인 건물들이 장난감처럼 솟아 안개 너머까지 이어졌다.
아마 다른 몇몇 도시들이 그렇듯, 저곳 역시 과거의 유산 위에 재건되고 확장된 도시인 모양이었다.
유적 위에 지은 도시들이 많은 건, 보통 지하 수로 때문이었다. 게다가 저긴 강까지 낀 도시가 아니던가. 길가에 오물을 내버리는 꼴은 보지 않을 수 있으리란 의미였다.
도시를 반쯤 뒤덮고 자욱하게 이어진 안개는, 아마도 강에서 번진 물안개인 모양이었다.
"도시에 들어가고 나면, 정오가 지나기 전에 회의가 시작될 것이오. 그리고 해가 지기 전에는 끝나겠지."
파엘의 느긋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흑마법사가 대낮에, 그것도 도시에서 무슨 짓을 할 수 있겠소? 놈이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해도, 동맹이 결성되는 걸 막지는 못할 것이오."
"흐음…."
어깨를 으쓱인 이안은, 뭔가 더 덧붙이는 대신 술병을 다시 입으로 가져갔다.
일이 어떻게 돌아가게 될지는, 어차피 도시에 도착하고 나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터였다.
***
활짝 열린 성문 앞.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군."
방주 상단의 마차들이 길가에 일렬로 멈춰 선 가운데. 그 앞에 선 파엘이 눈을 동그랗게 치켜뜬 채로 경비병을 바라보았다.
"바스무트는 엄연히 자유 도시 잖소. 왜 하필 우리 앞만 막는단 말이오?"
손바닥까지 펼쳐 보이며 항의하자, 투구를 눌러 쓴 경비병이 귀찮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댁들만 막은 게 아니오. 나는 명령에 따르는 것뿐이니, 내게 따지지 마시오."
"무슨 명령을 받으신 거냐고 묻는 거잖소…!"
파엘이 탄식하듯 내뱉었다.
투구를 눌러쓴 채 그의 뒤에 선 이안은, 시큰둥하게 시선을 돌리며 손에 든 포도주병을 고쳐 쥐었다.
개인 경호병인 만큼, 여기서부터는 한동안 파엘의 뒤를 따라 다녀야 했다.
어쨌건, 그는 지금 이 상황에 놀라거나 걱정하고 있지 않았다. 그저 뭔가 있을 줄 알았지, 하고 내심 수긍했을 뿐이었다.
그보다는 차라리, 머리에 눌러 쓴 투구가 더 거슬렸다.
얼굴을 완전히 가리는 투구는 아니었지만. 갑갑하고 감각이 무뎌지는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귀도 울리고.'
장비들은 크고 무거워질수록 필요 능력치만 올라가는 게 아니었다. 조금씩이지만 손해 보는 능력치들도 생겼다.
투구는 감각이나 주문과 관련된 수치들을 일부 감소시켰다. 아마 머리를 가린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일 터였다. 마법사들이 강철 뚜껑을 뒤집어쓰고 다니지 않는 것도 그래서이리라.
"나는 이미 영주님께 이곳에서 있을 모임에 대한 허락을 받았으며, 장소까지 대관해 주기로 이야기가 끝났단 말이오. 지금 내 품에, 영주께서 자필로 보내주신 서신도 있소!"
이어진 파엘의 반론에, 경비병이 심드렁하게 내뱉었다.
"기다리시오. 다른 경비병이 안으로 들어가는 것 못 보셨소? 관리를 모셔 올 거요. 다시 말하지만, 내게 따져 봐야 아무런 의미도 없소."
"끙…. 알겠소."
침음하며 고개를 끄덕인 파엘이, 비로소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가슴 앞에 팔짱을 낀 그가 미간을 찌푸린 채 읊조렸다.
"이상하군… 이럴 리가 없는데."
없긴 뭐가 없어.
내심 읊조리며, 이안은 낮은 성벽과 활짝 열린 성문을 심드렁하게 돌아보았다.
파엘의 항의가 억지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듯, 행인들이 자유롭게 성문을 오가고 있었다. 보르타와 마찬가지로 다양한 복식과 인종이 뒤섞인 채였다.
'정말 이 세계의 인간들 과반수가 중앙에 모여 사는 거군….'
엘리야의 말에 따르면, 중앙에만 제도를 중심으로 크고 작은 도시가 일고여덟 개쯤 존재했다.
그리고 이 바스무트는, 그중에서도 작은 쪽에 포함되는 도시였다.
변방까지 갈 것도 없이 서부나 북부만 되어도 충분히 대도시라 불릴만한 규모이건만.
하긴. 중앙은 제국의 심장이자 핵심인 지역이었다. 사실상 대륙 전체를 지배하는 나라의 중심부에 사람이 몰려드는 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오시는군…."
그때 파엘이 미간을 찌푸린 채 읊조렸다. 정복을 걸친 깐깐해 보이는 인상의 관리가, 작은 짐마차를 한 대 이끌고 다가오고 있었다.
아까 안으로 들어갔던 경비병이 마부석에 앉은 채였다. 그의 표정 역시 이안처럼 심드렁해 보였다.
이안을 돌아본 파엘이 속삭였다.
"술병, 주시겠소?"
이안은 선선히 술병을 내밀었다. 파엘이 머쓱하게 덧붙였다.
"걱정 마시오. 별 문제 없이 해결될 테니까."
이안은 코로 웃음 지을 뿐,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고개를 돌린 파엘이 언제 미간을 좁히고 있었냐는 듯 활짝 웃음 지으며 관리 쪽으로 다가갔다.
"처음 뵙겠습니다. 하하. 작은 상단을 운영 중인 파엘이라고 합니다."
그가 손에 든 술병을 내밀며 덧붙였다.
"아무래도, 뭔가 오해가 있는 모양입니다. 이미 영주님께도 도시에 방문하는 목적을 말씀드렸고, 허락도 받았는데 말입니다."
"그건 알고 있소."
태연하게 대답하며 술병을 받아 든 관리가 파엘을 마주 보았다.
"하지만 오해는 없소. 영주님 명령이오. 도시에 입장하려면, 호위병들의 무장을 해제하시오."
#271화
"무장을요…?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무장을, 왜요?"
파엘이 눈을 치켜뜨며 물었다. 관리가 조금의 표정 변화도 없이 말을 이었다.
"영주님께서 허락하신 건 여러 도시의 상인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모임이지, 무장 단체들 간의 회담이 아니오. 듣자 하니 여섯 개의 상단이 모인다던데. 전부 무장한 경호병을 대동하고 한자리에 모이면, 그 숫자가 몇이나 될 것 같소?"
"...."
파엘의 입이 멍하니 벌어졌다.
관리가 태연하게 덧붙였다.
"정확히 몇일지는 모르지만. 법을 초과해도 한참은 초과했겠지."
이안의 입가에 옅은 헛웃음이 번졌다. 이렇게 합리적인 이유가 튀어나올 줄은 상상도 하지 못해서였다. 어쩌면 이곳이 중앙이기에 더 엄격하게 따지는 것일지도 몰랐다.
'제국법상, 상단은 열몇 명까지였던가. 용병은 외부로 나갈 때만 고용할 수 있고.'
제국법은 대충 들은 게 전부인 터라, 이안도 정확한 부분까진 알지 못했다.
하지만 어쨌건, 상인 하나당 경호병을 열 명씩만 대동하고 오더라도 중무장한 칼잡이 육십 명이 한자리에 모이게 되는 셈이었다.
여기에 짐꾼과 마부들을 더하면 그 숫자가 배는 늘어나리라.
음험한 목적이 있다면, 도시에 큰 혼란을 일으키기 충분한 숫자였다.
관리가 덧붙였다.
"외부로 상행을 떠나는 길에 들른 것이라면 모를까. 도시에 목적을 가지고 방문한 이상, 법에 따르시오. 무장을 해제하면 경호병이라도 무장 인원으로 분류하지 않을 것이며, 맡겨 둔 병장기는 도시를 떠날 때 모두 돌려주겠소."
"옳은 말씀이십니다만…. 지금 마차에는 상인들끼리 교환하기 위해 가지고 온 물품들이 많습니다. 무장도 하지 않고 어떻게 지킨단 말씀이십니까?"
"지금, 바스무트의 치안이 불안하다고 말하는 것이오?"
관리의 목소리가 싸늘해졌다. 파엘이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닙니다. 그럴 리가요. 제가 달리 이곳에 회담을 요청했겠습니까. 육로와 수로를 겸비한 교통의 요지여서만이 아니라, 도시의 훌륭한 치안도 큰 몫을 차지했습니다."
"그럼 문제가 없으리란 것도 아시겠군. 물론 모든 경호병의 무장을 해제라는 것은 아니오. 앞선 상단들도 개인 경호병 한 명씩의 무장은 허용했소. 귀 상단은…."
손에 든 술병을 슬쩍 내려다본 관리가 덧붙였다.
"두 명까지 허락하도록 하지."
합법적인 범위일 텐데, 더럽게 인심 쓰는 척하네.
이안이 내심 생각하는 사이, 비로소 파엘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건 이안과 필립까지 무장을 해제할 필요는 없게 된 것이기 때문이리라.
물론 아공간이 있는 이안에겐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파엘은 그런 사실까지는 알지 못했다.
"자비로운 처리에 감사드립니다."
내뱉은 파엘이 마부에게 손짓해, 개인 경호 둘을 제외한 모든 이들의 무장을 반납하라 일렀다. 곧 상단의 경호병들과 짐꾼들이 차례로 앞으로 나와 짐 마차에 각자의 병장기들을 실었다.
파엘이 문득 덧붙였다.
"그런데, 다른 상단들은 얼마나 도착했습니까?"
"귀하의 상단이 네 번째요."
"넷이요?"
"그렇소만. 문제 있소?"
"…아닙니다. 혹시 성문을 통과한 상단과 부두를 통과한 상단의 숫자를 알 수 있겠습니까?"
"육로가 셋. 수로가 하나였소."
고개를 주억거린 파엘이 감사하다 덧붙이며 미소 지었다. 그사이 모든 무장이 짐 마차에 실렸다. 파엘이 양 손바닥을 펼쳐 보이며 관리를 바라보았다. 관리가 옆으로 고개를 까딱였다.
"입장하시오. 귀하들이 요청한 회담장은 도시의 서남쪽 외곽으로 가면 있을 것이오. 영주께서 별장으로 쓰시는 저택이니, 깨끗하게 사용하시오."
"물론입니다. 좋은 하루 되십시오."
마부들에게 출발하라 손짓한 파엘이, 그대로 성문으로 걸음을 옮겼다. 여기서부터는 그냥 걸어서 가려는 모양이었다.
술병을 바라보며 미소 짓는 관리를 바라보던 이안도 터덜터덜 파엘의 뒤를 따랐다.
성벽을 통과하며, 그가 투구를 조금 느슨하게 올려 쓰는 사이.
"배 시간에 뭔가 문제라도 생긴 것인가…."
앞서 걷던 파엘이 중얼댔다. 드러난 도시의 전경을 차근히 눈에 담으며, 이안이 내뱉었다.
"뭔가 또 문제가 있소?"
파엘이 미소 지으며 그를 돌아보았다.
"별 것 아니오. 그저, 약속한 시간이 거의 다 되어서 말이오. 내심 우리가 제일 늦었을 줄 알았는데. 뭐, 출항이 늦어지는 건 드문 일도 아니오. 끽해야 한두 시간쯤 늦겠지."
도시 외곽. 아마도 강이 보이는 위치에 솟은 것일 오래된 성의 첨탑을 눈에 담으며, 이안이 피식댔다.
"지금까지 본 바로는, 단주의 감이라는 건 영 믿을 만한 게 못 되는 것 같던데."
"보르같은 말씀을 하시는군."
파엘이 풀썩 웃음 지었다.
"방금도 보셨잖소? 이곳의 영주가 얼마나 깐깐한지. 허락을 구하며 금화를 한 무더기 같이 보냈는데도 저런 것이오. 아마 외지인들이 많이 드나드니 의심병이라도 있는 거겠지."
입맛을 다시며 어깨를 으쓱인 그가 덧붙였다.
"어쨌든 덕분에, 이 도시가 치안이 좋은 이유를 다시 한번 알게 됐소. 차라리 마음이 놓이는군."
"뭐, 이번엔 단주의 감이 맞길 바라겠소."
심드렁하게 말한 이안이, 슬며시 파엘의 눈을 마주 보며 덧붙였다.
"나라면 혹시 모를 최악의 상황도, 대비는 해 두겠지만."
"가만 보면 경도 은근히 잔걱정이 많으시다니까…."
파엘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외곽으로 이어진 대로로 방향을 틀었다. 몇 걸음을 옮긴 것도 잠시.
"…그런데, 말씀하신 그 최악의 상황이라는 게 무엇이오?"
마차가 잘 따라오고 있는지 확인하며, 파엘이 속삭였다.
호언장담하긴 했지만, 막상 이안의 반응을 보고 나니 불안해진 모양이었다. 무기도 죄다 빼앗긴 참이 아니던가.
하긴. 감도 없고 고집도 세지만, 어쨌건 끝내 조언을 듣기는 한다는 게 파엘의 장점 중 하나였다.
"당연한 걸 물으시는군…."
낮게 웃음 지은 이안이 덧붙였다.
"오늘 밤 이곳에서 공격당하는 게 가장 최악의 상황 아니겠소."
"아무리 정신 나간 놈이로서니, 그러기야 하겠소?"
"글쎄. 나라면 그럴 것 같은데. 당신들을 죄다 죽이진 못하더라도, 죄를 다 뒤집어쓰게 만들 수도 있잖소?"
"…빈말이 아니시군."
잠시 입을 뻐끔거린 파엘이 이윽고 읊조렸다. 이안이 한쪽 어깨를 까딱였다.
"어디까지나 만약 일 뿐이오. 단주 말씀대로 일이 잘 풀려서 밤이 되기 전에 흩어진다면, 별 일 없겠지."
"그… 만약, 만약에 말이오."
침을 꿀꺽 삼킨 파엘이 조금 더 이안의 곁으로 다가서며 물었다.
"일이 잘 안 풀리면, 어떻게 해야겠소?"
"또 당연한 걸 물으시는군. 단주들에게 상황을 밝히고 대비를 해야지."
"그건 안 될 일이니 드리는 말씀이 아니겠소. 곧 단주들을 만나면 아시게 되시겠지만. 그건 경이 말씀하신 최악의 상황과 별로 다를 바 없는 결과를 낳을 것이오. 동맹이 와해 될 테니까. 그럼 우리 상단은 망하는 거나 다름없소. 이미 대형 상단들의 눈 밖에 났잖소."
"뭐, 그러시다면 별 수 없고."
이안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기대도 하지 않던 부분이었다. 어차피 그는 퀘스트와 의뢰만 완료하면 그만이었다. 이 자들의 협조까지는 바란 적도 없었다.
이안의 무심한 태도가 오히려 더 불안한 듯, 파엘이 덧붙였다.
"혹시, 차선책은 없겠소?"
"있긴 한데… 이것도 쉽진 않을 텐데."
"일단, 말씀이라도 해 주시오. 물론 별 일 없겠지만, 만약의 경우라는 게 있잖소. 정말 그런 상황이 생긴다면, 한번 노력해 보겠소."
"그럼 일단 좀 떨어지시오."
"아, 흠흠."
이안의 곁에 거의 착 달라붙어 있던 파엘이 헛기침을 하며 거리를 벌렸다.
이래서 보르가 그렇게 불안해하는 거군. 내심 읊조리며 혀를 찬 이안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
"만약 그런 상황이 된다면…."
***
영주가 대여해 준 회담 장소는, 널찍한 정원이 딸린 저택이었다.
관리의 말대로 영주의 별채가 분명했다. 이곳을 대여해 준 건, 마차를 여러 대 댈 수 있는 공간이 있기 때문일 터였다. 물론, 커다란 마구간도 있었다.
정원에는 먼저 도착한 상단의 마차들이 정차되어 있었다. 방주 상단의 마차들도 그 옆에 나란히 멈춰 섰다.
짐꾼들이 마차에 실린 상자들을 내리고, 경호병들이 말들을 마구간으로 옮기는 사이.
"소금 상단이, 늦는단 말이오?"
파엘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다른 상단의 단주들과 웃으며 인사를 나눈 지 불과 몇 분도 지나지 않아서였다.
치렁치렁한 옷을 걸친 반투르인 단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마 우리 상단이 가깝잖소. 출발 직전에 인편이 도착하더군. 배끼리 엉켜서 사고가 났다고 말이오. 반나절 정도 늦을 것 같으니, 사정을 전해 달라고 했소. 먼저 회담을 시작하지 말라고도 하더군."
"늦으면서도, 어떻게 손해 볼 일이 생길까 걱정은 되셨나 보군."
대각선 옆, 나무 상자를 의자 삼아 걸터앉은 단주가 콧수염을 꼬며 내뱉었다. 제국인이었는데, 다소 신경질적인 인상이었다.
그의 건너편에 선 또 다른 단주가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황금 고리를 코뚜레처럼 코에 걸고 있었다.
"육로로 더 오랜 시간이 걸려 온 상단들은 다 제시간에 도착했는데, 편하게 배를 타고 오는 분들은 한 곳 빼고는 다 늦으시네요."
"어쨌든… 회담은 오후 늦게나 시작하게 되겠군."
입맛을 다시며 말한 파엘이, 뒤에 선 이안을 슬쩍 돌아보며 헛기침했다.
민망해하긴.
이안은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이젠 전혀 놀랍지 않은 일이었다.
"순풍 상단은 곧 도착할 것이오. 지금쯤 부두에서 무기를 다 털리고 있을지도 모르지. 우리처럼."
반투르인 단주가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콧수염 단장이 콧방귀를 뀌었다.
"어쨌든 지각이오. 상인은 이유 불문하고 신뢰가 생명이니, 그 둘은 수장이 될 자격을 잃은 것이나 다름없지."
"옳은 말씀이네요. 논의하고 결정해야 할 문제가 한둘이 아닌데. 시작부터 늦다니."
어쨌건, 이안은 파엘이 그렇게나 비밀 엄수에 목매던 이유를 확실히 알게 됐다. 다들 벌써부터 머릿속으로 주판알을 튕기기에 여념이 없지 않은가.
하긴. 중앙 곳곳에 자리를 잡고도 상단을 거대하게 키워내지 못한 이유가 있을 터였다.
파엘이 감이 좋지 않은 것처럼, 다른 단주들에게도 저마다의 결격 사유가 있으리라. 그런 단점들을 상쇄하기 위해 하나로 뭉치는 것이기도 하겠지.
'어쨌든, 판은 제대로 깔리고 있네.'
상단주들의 잡담을 한 귀로 흘리며, 이안은 그들의 뒤에 선 개인 경호병들을 차근히 돌아보았다. 이안이 그렇듯, 그들도 전부 무장을 갖추고 있었다. 북부인. 제국인. 반투르인. 인종은 다양했지만, 어쨌든 전부 인간이었다.
'수인 하나쯤은 끼어 있을 줄 알았는데….'
하긴. 그들을 부리려면 돈이 꽤나 많이 필요할 터였다. 수인들은 자부심에 걸맞은 액수를 받아야만 명령에 따르지 않던가. 천칭 상단 시절의 샬롯이 그랬듯이.
"...."
어쨌든, 그들에게서는 어떤 흑마법의 징후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안과 눈이 마주친 북부인 경호병이 슬쩍 턱을 까딱였다. 북부식 인사였다. 그러고 보니 저자도 머리와 눈 색이 검었다.
'솔직히 나는, 어딜 봐도 북부인처럼은 안 보일 텐데.'
생각하면서도 태연하게 고개를 까딱인 이안이 시선을 돌렸다.
무장을 해제한 호위병들이 저마다 마차 주위에 모여 있고, 짐꾼들도 할 일을 끝내고 쉬고 있었다.
저들에게도 오염된 마력이나 저주의 흔적은 느껴지지 않았다.
정원 너머, 마구간에서도 사람들이 나오고 있었다.
그 사이로 안면 가리개를 눌러쓴 필립과 그와 나란히 걷는 엘리야가 보였다. 말들을 직접 마구간에 넣어 둔 모양이었다. 시간이 꽤 걸린 걸 보면, 뭔가 다른 조치라도 취해 둔 것일지도 몰랐다.
그와 시선이 마주친 엘리야가 팔을 높이 치켜들며 흔들었다.
긴장감 없긴.
이안이 낮게 웃음 지을 찰나, 파엘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정리가 끝나면, 경호병들과 짐꾼들은 밖으로 내보내 두는 게 어떻겠소?"
이안이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단주들의 시선이 파엘에게 집중되고 있었다. 그린듯한 미소를 지으며, 파엘이 슬쩍 다시 한번 이안을 돌아보았다. 이게 이안이 말했던 대책이었기 때문이다.
흑마법사가 회담장을 습격하거나 무리 사이에 하수인을 섞어 뒀다면, 무장을 하지 않은 이들은 큰 피해를 보게 될 테니까.
"그러고 보니, 경호인이 바뀌셨군. 늘 함께 다니던 북부인은, 그만둔 것이오?"
반투르인 단주가 대답 대신 물었다. 눈빛을 보아하니, 그렇다면 자신이 보르를 영입할 생각인 모양이었다.
파엘이 손사래를 쳤다.
"보르 그 친구는 지금 홍역을 앓고 있어서 말이오. 전부터 알고 지내던 유능한 자유 기사 두 분께 이번만 경호를 부탁드렸소."
"아. 기사 나리들이셨군… 어쩐지."
"그보다, 어떠시오? 무게도 없겠다, 남겨 둬 봐야 떠들어 대기나 하지 않겠소. 도시로 내보내서 좀 쉬게 하면, 영주도 흡족해하고 사기도 올라갈 텐데."
"아무리 그래도, 마차를 아예 비울 수는 없지 않겠소? 여기 모인 물건들만 해도 가격이 얼만데."
제국인 단주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코뚜레 단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안전한 곳이라 해도 아예 비워 둘 순 없죠. 뭐, 논의가 길어진다면 다들 피곤하긴 하겠지만."
"그럼 각자 절반씩 순번을 정해서 교대시키는 것으로 합시다. 어떻소?"
반투르인 단주의 제안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곧 각자의 개인 경호병을 돌아본 단주들이 명령을 이어갔다.
"우리는 다 내보내겠소. 뭐, 우리끼리 도둑질을 할 일은 없지 않겠소."
덧붙인 파엘이 이안을 돌아보며 입맛을 다셨다.
"나름대로 최선은 다했소만. 역시, 말씀대로 쉽진 않군."
이안은 어깨만 으쓱였다. 사실, 반이라도 내보내게 된 것만으로도 성과가 있다고 할 수 있었다.
이안이 몸을 돌리며 내뱉었다.
"단주의 뜻을 전달하겠소."
"알겠소. 아, 그리고, 앞으로 내 감은 믿지 않기로 했소."
파엘이 머쓱하게 덧붙였다. 이안이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오늘 중에 가장 훌륭한 결정이시군."
이안은 다가오고 있는 필립과 엘리야를 향해 마주 다가갔다.
필립의 안면 가리개 사이로 목소리가 이어졌다.
"전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방주 상단 전원, 밖으로 내보내. 한잔하고 푹 쉬라고. 필요하면 부를 테니 과음하진 말고. 그리고…."
태연하게 말하며 다가선 이안이 목소리를 낮췄다.
"아무래도 여기가, 우리 전장이 될 것 같다."
"느낌이 오신 겁니까?"
"뭔가 느껴지는 건 아니야. 그냥, 감이 그래."
"경험상, 그게 가장 정확하더군요."
안면 가리개 사이로 드러난 필립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하긴. 저주를 뿌리기에 딱 좋은 장소이긴 하군요."
"그럼, 어떻게든 다들 자리를 피하게 해야 하는 거 아닐까요?"
엘리야의 속삭임이 이어졌다. 이안이 어깨를 까딱였다.
"회담을 아예 깰 생각이 아니면, 이게 최선이야. 무슨 일이 있건, 우린 우리 역할만 다하면 돼. 책임은 저자들이 질 거다."
그때, 쇠창살로 만든 저택의 정문의 소란스럽게 열렸다. 또 한 무리의 마차가 들어오고 있었다. 아마도 순풍 상단이리라. 일련의 행렬을 잠시 눈에 담은 이안이, 이윽고 엘리야를 내려다보며 덧붙였다.
"그러니까, 너도 마음의 준비를 해 둬라. 엘리."
***
모든 상단이 한자리에 모인 건, 예상대로 해가 지기까지 얼마 남지 않은 때였다.
회담은 저택 2층의 회의실에서 이루어졌다. 저택 뒤편으로, 창문을 닫고 커튼까지 치자 외부와 완전히 단절된 것처럼 느껴지는 공간이었다.
"그럼, 우리 동맹의 이름은 육각 연맹으로 결정되었소."
커다란 원탁에 모여 앉은 여섯 상단주들은 차근히 논의를 이어가고 있었다. 동맹의 이름을 결정하는 데만도 한 시간은 족히 걸렸다. 누가 상인들 아니랄까 봐, 다들 쓸데없이 따지는 게 많았다.
"그럼 이제, 사전에 합의되었던 세 가지 규칙 외에 더 추가할 것이 없는지 논의해 봅시다."
파엘의 뒤. 복도 쪽 벽면에 선 이안은 내심 입맛을 다셨다.
'더럽게 지루하네….'
게임이었다면 불과 몇 분짜리 컷씬에 불과했으련만. 현실이 된 지금은 그저 가만히 선 채, 이 관심도 재미도 없는 대화를 듣고 있어야 했다.
그의 옆에 나란히 선 필립도, 그리고 둘의 사이에 선 엘리야도 마찬가지로 지루해 보였다.
엘리야가 이 자리에 동행한 건 파엘의 결정이었다.
다른 상인들은 외부인의 참석을 못마땅하게 여겼지만, 파엘은 회담이 끝난 뒤에 그녀와 관련된 제안이 있다는 말로 불만을 잠재웠다.
연맹의 이름으로 후원하겠다는 얘기를 꺼내려는 것이리라.
합의되지 않은 일이었지만, 이안은 별다른 불만을 표시하지 않았다.
어쨌건 덕분에 엘리야가 무리 없이 동석하게 된 데다, 이 회담이 무사히 끝날 것 같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이안이 보기에 오늘 밤이 아무 일도 없이 지나간다면, 오히려 그게 더 놀라운 일이었다.
"...!"
그런 반전은 없었다는 게 확실해진 건, 그로부터 한 시간쯤이 더 지나서였다.
#272화
희미한 소란이 귀를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아직 이변을 눈치챈 건 이안 뿐이었다. 회의에 몰입 중인 상인들뿐 아니라, 그들의 개인 경호병들도 지루한 표정으로 반쯤 눈을 감고 있었다.
옅은 마력까지 느낀 이안이 필립을 돌아볼 찰나.
"그럼, 연맹의 대표 선출 안건으로 넘어갑시다. 입후보할 분들은 자리에서 일어서 주시오."
반투르인 단주가 말했다. 동시에 셋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순풍 상단의 단주와 코뚜레 단주, 그리고 콧수염 단주였다. 서로 눈빛을 교환한 그들이 입을 열 찰나.
"그건 잠시 미뤄 두셔야겠소."
이안이 내뱉었다. 미간을 좁힌 단주들의 시선이 집중되는 가운데, 그가 덧붙였다.
"문제가 생긴 것 같으니까."
"문제…?"
콧수염 단주가 인상을 구기며 내뱉는 사이, 잠이 확 깬 표정이 된 경호병 하나가 커튼을 거둬 밖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들이 모인 회의장은 저택 뒤편이었다.
파엘이 설마 하는 얼굴로 이안을 바라보는 사이, 몸을 돌린 경호병들이 문을 열고 복도 건너편의 방으로 몰려갔다.
"...?"
그들을 따라가려던 이안이 멈칫했다. 엘리야가 그의 손목을 잡아서였다.
고개를 돌려 그녀를 내려다본 이안이 이내 피식댔다. 엘리야의 눈동자에 흐릿한 마력이 감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엘리야가 말했다.
"때가 된 것 같은데요. 이안 님."
"…그래. 얼마나 유용할지, 한번 보자."
기어코 도움이란 걸 주고 싶다면.
이안이 몸을 숙였다.
반대편에서 필립도 한쪽 무릎을 꿇는 가운데. 마력이 일렁이는 눈으로 이안을 마주 본 엘리야가 양손으로 그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여러모로 수상해 보이는 행동이었지만, 파엘을 제외한 그 누구도 그들을 보고 있지 않았다.
"이런 미친…?"
"저 새끼들은 뭐야?"
"기습인가? 대체 누가."
건너편 방으로 달려간 경호병들이 숨을 들이켜며 소리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상을 구기며 무기를 뽑아 드는 자도 있었다. 어느새 자리를 벗어난 상단주들도 건너편 방의 창가로 다가가는 중이었다.
"루 솔라 맙소사…."
"저게 대체 무슨 일이지?"
창밖을 확인한 상단주들의 입에서 탄식이 번졌다.
서걱-! 콰지직!
"아아악-!"
"달려들어! 무기를 빼앗아!"
저택 앞에 살풍경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칼을 든 괴인들이 맨주먹으로 달려드는 경호병들을 마구잡이로 베어 넘기고 후려치고 있었다.
상단주들의 얼굴에 위기감 대신 놀람만이 감도는 건, 그 숫자가 고작 넷에 불과해서였다.
하지만 경호병들의 표정은 심각하게 굳어지고 있었다.
아무리 맨주먹이라도, 상대가 고작 넷이라면 진작 제압했어야 했기 때문이다.
"커헉…!"
"아윽- 끅…."
하지만 지금은 반대로 상단의 인원들이 일방적으로 당하고만 있었다. 게다가 괴인들의 번들거리는 보랏빛 안광도 불길하기 짝이 없었다.
"아무래도 나가 봐야겠습니다. 단주들께선 여기서 기다리십시오."
"지루해 죽을 뻔했는데, 차라리 잘됐군…."
이윽고 서로 눈빛을 교환한 경호병들이 몸을 돌릴 찰나.
"나가지 않는 게 좋을 것이오."
이안이 방으로 들어서며 내뱉었다.
"...!"
경호병들이 멈칫했다. 어쨌건 가장 먼저 상황을 눈치챈 건 그였기 때문이다. 창가로 다가선 이안이 밖의 풍경을 바라보며 덧붙였다.
"저 안개는, 아무래도 저주 같으니까."
"안개…?"
그제야 경호병들의 시선이 다시 창밖으로 돌아갔다.
그러고 보니, 어느새 부자연스러운 검은 안개가 스멀스멀 정원으로 밀려들고 있었다. 외부에서 번지는 것 같기도, 저택에서 번져 나오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새카만 색이어서, 마차 주위에 밝혀 둔 횃불이 아니고서는 분간하기가 쉽지 않았다.
어쨌건 마차 주위로도 모여들고 있었다. 다들 싸움에 정신이 팔려 눈치채지 못했을 뿐.
이안이 느낀 오염된 마력의 정체이기도 했다. 이안이 보기에는 저 안개가, 날뛰고 있는 괴인들보다 더 위험해 보였다.
'용병들을 홀려서 하수인으로라도 만든 거겠지….'
경호병들을 연신 베어 넘기는 괴인들의 눈과 코에는 어느새 피가 뚝뚝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생명력을 소진하며 강하게 만들어주는 저주이거나, 사령술의 일종일지도 몰랐다.
"윽… 그극…."
그사이, 스멀스멀 번지던 안개가 괴인들의 칼에 쓰러진 경호병들을 하나둘씩 삼키기 시작했다.
넘실대는 어둠 사이로 드러난 그들의 육체가 검게 물들어갔다.
"이런 미친…."
"주문쟁이는 어디 있지? 어디서 이런 주문을…?"
경호병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다들 칼부림이라면 일가견이 있겠지만, 주문에 대항하는 건 다른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래도 저마다 몸 곳곳을 더듬대는 걸 보면, 이런 상황을 대비한 마법 무구나 마도구 하나쯤은 가지고 다니는 모양이었다.
"싸우다 죽을 생각이라면 나가도 상관없겠지만, 그게 아니면 아래층으로는 내려가지 마시오. 단주들은 회의실로 돌아가 밖으로 나오지 마시고."
이안이 문밖을 가리켰다. 멍하니 창밖만 바라보던 단주들의 시선이, 거의 동시에 회의실로 돌아갔다.
그들이 문 앞에 선 필립과 엘리야, 그리고 필립의 곁에 딱 달라붙듯 서 있는 파엘을 바라보는 사이.
"컥… 크륵…!"
"조나단…? 읏… 으윽…."
"아악! 아아악-!"
창밖에서 크고 작은 비명이 이어지기 시작했다. 저주의 안개가 본격적으로 사람들을 집어삼키기 시작한 것이다. 게다가 점점 둔해지던 괴인들의 움직임도 다시 활기를 띠고 있었다. 어느새 그들의 피부도 먹물이 번지듯 검게 물들었다.
"어서들 이리 오시오! 이안 경의 말에 따르란 말이오!"
파엘이 버럭 소리쳤다. 화들짝 정신을 차린 단주들이, 뒤로 주춤주춤 물러나며 이안을 돌아보았다.
"그래서, 우린 안전한 게 맞소?"
"설명부터 해 주시오. 대체 이게 무슨 일이오? 저주라니?"
"어떻게 그렇게 침착하죠? 혹시,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을 미리 알고 있었던 건-"
하여간 상인 새끼들, 진짜.
짧게 한숨을 내쉰 이안이 투구를 벗었다.
텅그렁, 그가 내던진 투구가 바닥을 굴렀다. 저마다 전투를 준비하던 경호병들도 그를 바라보는 가운데.
스르릉-
이안이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검날이 어둠 속에서도 새하얗게 빛났다.
"...!"
뒤이어 상인들과 경호병들의 눈이 동시에 커졌다.
이안의 왼손 손등에서 빛이 번지더니, 육각형을 그리는 황금빛 방패가 피어오른 것이다. 대조적으로 검게 가라앉은 눈으로 상인들을 바라보며, 이안이 내뱉었다.
"당장 움직여. 여기서 당장 내 손에 뒈-"
"서, 성기사!"
파엘이 화들짝 말을 자른 건 그때였다. 그는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경악한 표정을 짓고 있으면서도, 재빨리 단주들을 돌아보았다.
"이 두 분은 성기사란 말이오! 그러니 당장 지시에 따르시오!"
"아, 알겠습니다…!"
그제야 상인들이 우르르 회의실로 걸음을 옮겼다.
퀘스트만 아니었어도. 이안이 내심 혀를 차며 몸을 돌릴 찰나.
"그으으으아-!"
"크르륵… 그륵…."
밖에서 명백하게 인간의 것은 아닌 비명들이 울려 퍼졌다.
안개에 삼켜졌던 자들이 본격적으로 다시 일어서고 있었다.
죽었던 때의 모습 그대로 다시 생명을 얻은 것처럼, 온몸이 새카맣게 물든 채였다. 마찬가지로 흰자위까지 검게 물든 눈동자들이 섬뜩하게 번뜩였다.
"크르르륵-!"
"크어어-"
저주로 되살아난 망자들은, 아직 살아있는 자들에게 짐승처럼 달려들거나 그대로 저택으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오, 옵니다! 경! 명령을!"
경호병들이 소리쳤다. 엘리야를 등지고 앞으로 나서는 필립과 시선을 교환한 이안이, 복도로 나서며 덧붙였다.
"위로 올라오는 놈들을 처리해. 필립 경을 도와서."
"그럼, 경은…?"
이안이 괴물들의 비명이 메아리치기 시작한 복도 너머를 돌아보았다.
"이 저주의 근원을 제거해야지."
내뱉은 그가 곧바로 복도 너머로 달려나갔다. 황금빛 방패가 만들어내는 궤적이 삽시에 멀어졌다.
"저, 저주 속으로 나간다고…?"
경호병들이 읊조릴 찰나.
"정신들 똑바로 차리고 밖으로 나오십시오."
어느새 새하얀 방패와 장검을 움켜쥔 필립이 복도로 나섰다. 그의 투구 아래로 황금빛 안광이 아른거렸다.
"죽고 싶지 않다면."
콰장창-!
동시에 유리창을 깨며 무언가가 안으로 뛰어들었다. 관절이 이리저리 뒤틀린 새카만 망자가 바닥을 나뒹굴고는 부스스 일어섰다. 벽면을 타고 기어 올라온 것이리라.
새카맣게 물든 망자의 전신을 눈에 담은 것도 잠시.
"으아아아-!"
몇몇 경호병들이 고함을 내지르며 놈에게로 달려들었다.
***
콰직-!
이안은 아래층으로 내려가자마자 반겨준 망자의 머리통을 그대로 반으로 썰어 버렸다. 그리고도 죽지 않고 손을 뻗는 놈의 상반신을, 새하얀 궤적이 다시 한번 꿰뚫고 지나갔다.
"그어억-!"
비스듬하게 잘려나가 허물어지는 망자의 뒤로, 어느새 또 다른 놈이 달려들고 있었다. 놈의 가슴팍에 검을 찔러 넣은 이안의 눈동자가 일순간 잿빛으로 물들었다.
퍼석-!
소리 없는 폭발이 망자의 몸을 산산조각냈다. 이안이 자욱하게 번지는 피 안개 너머를 노려보았다. 어둑어둑한 복도와 장내에 망자들의 실루엣이 우글대고 있었다.
저주로 되살아난 이 망자들은 일반적인 구울보다 빨랐다. 아마 온몸에 저주도 가득 머금고 있을 터였다.
콰직-!
그대로 피 보라를 뚫고 달려나간 이안이 앞에 보이는 놈의 머리를 그대로 내리쳤다.
위층에서도 시끄러운 고함과 소란이 번지고 있었다. 벽면을 타고 기어 올라간 놈들이 제법 많은 모양이었다.
서걱-! 빠악!
하지만 이안은 신경 쓰지 않고 눈앞의 적에게만 집중했다. 위층에는 필립이 있었다. 그 녀석이라면 충분히 상인들을 지켜낼 수 있으리라.
콰직! 빠각-!
진은 강철 장검이 만들어낸 새하얀 궤적이 쉬지 않고 망자들을 썰어댔다. 때때로 백금 방벽이 만들어낸 황금빛 궤적이, 벽면이나 천장을 기어 달려드는 놈들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
한순간 이안의 눈매가 꿈틀댔다. 어느새 그의 발아래로도 검은 안개가 스멀스멀 번지고 있었다. 저주가 그의 몸을 타고 올랐다.
하지만 이안은 망자들처럼 저주에 물들지 않았다.
기운이 조금 빠지고, 매연을 마시는 것처럼 목이 칼칼해졌을 뿐이었다.
'완벽하게 저항할 줄 알았는데….'
뭐, 이게 어디야.
생각하며, 이안은 쉬지 않고 검을 휘두르며 복도를 나아갔다. 광역 마법은 사용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권역이라도 만들어진 거라면 모를까. 지금은 자칫하다간 저택이 무너지거나 위층에까지 피해를 끼칠 수도 있었다.
-거기…!
이안의 뇌리로 탄성이 번진 건, 복도를 반쯤 나아갔을 때였다.
엘리야의 목소리였다. 속삭임이라 부르는 비전 주문이었다. 그다지 쓸 데가 없어서, 이안조차 하나도 찍지 않은 스킬이었다.
-마력의 흐름이 그 근처에 집중되어 있어요! 뭔가 보이지 않으세요?
엘리야의 잔재주는 이게 전부가 아니었다. 그녀의 마력 탐지는 이안보다도 수준이 높았다. 그보다 마력의 흐름을 더 선명하게, 더 먼 곳까지 읽을 수 있던 것이었다.
달려드는 구울들을 베어 넘기며, 이안이 미간을 찌푸렸다.
-안 보이는데. 아무것도.
-그럴 리가… 분명히 그 근처에 마력이 응집되고 있을 텐데요.
그렇다면….
내심 읊조리던 이안이 문득 검을 고쳐 쥐었다.
마구 달려들던 저주의 망자들이 슬금슬금 물러나더니, 그 사이로 검을 움켜쥐고 갑옷을 검은 놈이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흰자위가 검게 물든 보라색 눈동자가 이안을 뚫을 듯 응시했다.
심지어 하나도 아니었다. 두 놈이 더 저만치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완전히 마인이 다 됐군…."
읊조린 이안이 백금 방벽을 치켜드는 사이, 짐승 같은 포효를 토해낸 마인이 그에게로 달려들었다.
타타탓-
이안도 놈을 향해 마주 달려갔다.
집중력이 자연스럽게 최고조로 치달았다. 저주의 여파가 마취된 것처럼 느껴지지 않으면서, 시야와 모든 감각이 한층 또렷해졌다.
쩌엉-!
마인이 달려들며 내리친 검날이 백금 방벽을 후려쳤다. 방벽은 그저 옅게 번쩍였을 뿐 깨지거나 휘청이지 않았다.
이안은 손등의 회로에 담긴 마력이 조금 줄어드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아직 진언 회로에 축적된 마력은 꽤 많았고. 이걸 다 쓰고 나면 그의 마력을 밀어 넣어 동력으로 삼을 수도 있었으니까.
필립에게 실험 삼아 깨질 때까지 공격하게 해 본 덕분에 알게 된 사실이었다.
물론 회로에 축적된 마력을 쓸 때보다 효율은 떨어졌고, 그만큼 마법을 사용할 수 없게 될 테지만.
눈에 띄는 마법은 지양해야 하는 지금 같은 상황에선 그다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마력은 부족한데 쓸 곳은 점점 많아지네.'
생각하며, 이안은 진은 강철 검을 횡으로 휘둘렀다.
쉬악- 서걱!
바람 칼날을 머금은 새하얀 칼날이, 본래는 별것 아닌 용병이었을 마인의 가죽 갑옷과 허리를 깔끔하게 갈랐다.
잘린 단면에서 새카만 체액이 치솟아 이안의 얼굴에도 튀었다. 하지만 닦을 틈은 없었다.
쒸에엑!
뒤따르던 다른 놈이 쇄도하고 있었으니까. 이안은 놈을 향해 마주 달려가며 검을 휘둘렀다.
콰직!
이안의 검과 맞부딪친 놈의 검이 그대로 토막 나며 지나쳤다. 덕분에 드러난 놈의 목덜미를 향해, 이안이 왼팔을 휘둘렀다.
콰득-!
방벽의 방패 날이 그대로 놈의 목을 잘라 버렸다. 이안에게는 무게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 것과 달리, 방벽은 이렇게 무기로도 충분히 쓸 수 있었다.
허물어지는 놈을 내리치려다 멈칫한 이안이, 다시 방패를 들었다.
콰직-
앞선 마인과 함께 베어 버릴 생각이었던 듯, 다른 한 놈이 양손으로 움켜쥔 도끼를 내리찍고 있었기 때문이다.
쿠확-!
방벽과 맞부딪친 도끼날에서 새카만 마력의 충격파가 번졌다. 이안의 무릎이 살짝 굽어지는 사이, 그를 내려다보던 괴인의 입술이 달싹였다.
"너는… 뭐지…?"
쇳가루를 삼킨 듯한 목소리. 이안을 응시하는 보랏빛 눈동자가 선명하게 번쩍였다.
아, 그래. 지켜보고 있었단 거지.
"뭐긴."
이안의 왼팔에 힘이 들어갔다.
쩌엉-!
이안이 방벽을 후려치듯 휘둘렀다. 도끼를 쥔 채로 튕겨 나간 놈이, 바닥의 판석을 깨부수며 밀려나 착지했다.
"네 목을 쳐 줄 사람이지. 저주술사."
이안이 검을 고쳐 쥐며 말했다. 마인의 입꼬리가 괴상하게 말려 올라갔다.
"이걸 구별하다니… 흑마법에 나름대로 조예가 깊은 모양이지."
"조금은. 그리고 네가, 여기 지하에 숨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지."
"...!"
마인이 순간 멈칫하는 사이.
자세를 낮춘 이안이, 입꼬리를 슬며시 말아 올렸다.
"잘 어울리는군. 벌레는 벌레답게 하수도에 살아야지."
#273화
인상을 구겼던 마인의 입매가 이내 비틀렸다.
"혀 놀림이 제법이군…."
파사사삭, 동시에 물러나 있던 저주의 망자들이 복도 좌우로 바퀴벌레처럼 흩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상관없다… 난 저 수전노 놈들만 처리하면 그만이니…."
이안의 미간이 설핏 좁아졌다.
도발이 안 통할 줄이야.
슈확-
이안은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놈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 워억-!"
불현듯 어깨를 떤 마인이 도끼를 치켜들었다. 하지만 울부짖으며 이안을 노려보는 놈의 눈에는, 방금까지 존재하던 이성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콰지직-!
새하얀 궤적이 놈의 머리를 반으로 가르며 떨어져 내렸다. 가랑이 사이까지 깨끗하게 가르며 착지한 이안은, 반으로 갈라진 마인이 허물어지기도 전에 놈의 몸을 뚫듯이 다시 내달렸다.
'시발….'
새카만 체액을 잔뜩 뒤집어썼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아무래도, 저주술사 놈이 튀려는 것 같았으니까. 마법사들은 자존심이 강해서 도발에 잘 넘어오는 편이었지만, 이놈은 자존심보다 겁이 더 많거나 신중한 성격인 모양이었다.
하긴. 습격할 때마다 본인을 드러내지 않은 부분에서 미리 눈치챘어야 하는 부분인지도 몰랐다.
'정체가 드러나면 안 되는 걸지도.'
체액을 뒤집어 쓴 얼굴이 조금 따끔거리는 것을 느끼며, 이안은 복도 좌우로 이어진 방들을 연신 눈에 담았다.
문과 창문이 죄다 부서졌고, 망자들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어두운 실내보다 더 새카만 안개가 바닥에 넘실댈 뿐이었다.
위층의 소란이 더 커지는 것을 느끼며, 이안은 멈추지 않고 나아갔다. 지하로 통하는 길을 찾아야 했다.
-서, 서둘러 주세요, 대부님…! 너무, 너무 많아요. 이건… 이렇게 끔찍할 줄은….
엘리야의 헐떡대는 듯한 속삭임이 뇌리를 울렸다.
나도 그러고 싶다. 속으로만 읊조리며, 이안은 복도를 꺾은 끝에 나타난 문을 걷어찼다.
쩌엉-
밖이었다. 저택 뒤편. 그대로 걸음을 옮기던 이안은, 비로소 저택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을 발견했다.
검은 안개가 스멀스멀 번져 나오는 걸 보니 제대로 찾은 게 분명했다.
하수도는 딱 질색인데.
내심 혀를 차면서도, 이안은 망설임 없이 두더지 굴 같은 계단으로 내려갔다.
좁고 낮고 어두운 데다, 저주의 안개가 자욱해져서 눈까지 따가웠다.
더는 백금 방벽의 빛도, 마력 탐지도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내 위치가 느껴지냐? 엘리.
찰박, 몸을 반쯤 접은 채 하수도로 들어선 이안이 속삭였다. 대답이 곧바로 돌아왔다.
-네. 느껴져요.
-마력의 근원지까지 방향을 안내해.
-일단… 계속 나아가세요. 지금 대부님이 나아가시는 방향에서 북동쪽이에요.
이안은 엘리야의 속삭임에 따라 이동했다. 화생방 훈련이 따로 없었다. 발목까지 찰랑대는 오물과 구린내를 곁들인.
-시발….
-뭔가 문제라도 생겼나요?
-모든 게 문제야. 됐고, 위쪽 상황은 어때.
-안 좋아요. 이 망자들의 피에도 저주가 깃들어 있는 것 같아요. 경호병들이 벌써 셋이나 당했어요….
어쩐지 따갑더라니.
이안이 내심 혀를 차는 사이, 엘리야의 속삭임이 이어졌다.
-필립 경이 펼친 기적이 중화하고 있긴 하지만, 위태로워 보여요. 밤이라 그런 것 같아요.
-위태롭다고…? 필립, 얼마나 버틸 수 있겠냐?
이 자식 성격상 이미 한참 죽는 소릴하고 있어야 하는데.
이안이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필립도 엘리야를 매개로 이어져 있었다. 이어진 코너를 돌 때쯤, 대신 엘리야의 대답이 되돌아왔다.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대요. 죽을 것 같으니까 빨리해 주시라네요.
아, 그래. 그냥 속삭일 방법을 몰라서 조용했던 거군.
-버텨라, 필립. 정 힘들면 싸움은 경호병들에게 맡기고 기도라도 올려. 최대한 빨리 돌아갈 테니까.
덧붙인 이안이 굽히고 있던 허리를 폈다. 공간이 조금 넓어지는 게 느껴져서였다.
-거기예요! 거기 같아요!
-알고 있어.
보고 있거든. 내심 덧붙이며, 이안은 지하실을 눈에 담았다.
본래라면 비밀 피난처나, 하수도를 청소하다 잠시 휴식을 취하도록 만들어진 공간일 터였다.
솨아아-
지금 이 한복판에는, 어디서 옮겨온 건지 모를 간이 나무 단상이 솟아 있었다. 그 위에는 주문 회로가 새겨진 커다란 양피지가 펼쳐져 있고, 회로 한복판에는 꽤 커다란 정수가 얹어진 채였다.
정수가 보랏빛으로 일렁이고, 주문 회로가 불길한 검은 빛을 내뿜었다. 자욱한 검은 안개의 근원지이기도 했다. 덕분에 단상은 파도치는 어둠 한복판에 불쑥 솟은 것처럼 보였다.
'역시, 회담 장소를 미리 알고 준비해둔 거네.'
보르를 습격할 때 알게 된 건가.
어쨌든, 이안은 내내 묘한 불길함을 느끼면서도 그 실체를 알 수는 없던 이유를 확실히 알게 됐다.
회로를 발동시키기 전에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게 당연했으니까. 게다가 사실, 이런 지하에서 벌어지는 일을 땅 위에서도 온전히 느끼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두근….
내면에서 파편의 울림이 번졌다.
닥치고 있어. 넌 당분간 근신이니까. 내심 속삭이며, 이안이 진은 강철 검을 들었다.
콰직-!
새하얀 궤적이 정수를 박살 내고, 그 아래의 주문 회로와 나무 단상까지 쪼개 버렸다. 정수에서 터져 나온 마력이 한차례 번쩍이고는 흩어졌다.
파슷….
주문 회로가 삽시에 빛을 잃었다. 주위의 검은 안개가 파도치듯 일렁이며 밀려났다. 더는 주위로 새로운 안개가 번져 나오지 않았다.
"...."
물론, 이안의 표정은 딱히 밝아지지 않았다.
어쨌든 흑마법사는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길을 찾는 사이, 하수도를 기어 도망친 모양이었다.
'바퀴벌레 같은 새끼.'
혀를 차면서도, 이안은 곧바로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저주의 근원을 없앴다고 해서 안게까지 단숨에 사라진 건 아니었으니까. 게다가 이 안개는 저주뿐만 아니라 망자들의 동력원 역할도 했다. 게다가 놈들의 피에도 저주가 담겨 있다지 않던가.
필립이 당할 리는 없어도 상단주 중 누군가는 죽게 될지도 몰랐다.
퀘스트에 숫자가 적혀있는 건 아니었지만, 하나라도 죽는다면 실패로 끝날 가능성이 있었다.
'이 짓까지 했는데 그냥 날릴 수는 없지.'
이를 악물며 내달린 이안이 그대로 2층으로 이어진 계단을 달려 올라갔다.
"그워어어억-!"
"갸아악…! 그륵…!"
복도 바닥에 검은 안개가 양단처럼 깔린 가운데, 미쳐 날뛰는 망자들의 뒷모습이 펼쳐졌다.
그 너머로 황금빛 장막이 아른거렸다. 필립이 펼친 신성 장막이 저주의 안개와 망자들을 막아내고 있는 게 분명했다. 빛이 꽤 옅어진 상태였지만, 적어도 아직은 제 역할을 다하고 있었다.
콰직-! 서걱!
생각하는 와중에도 내달린 이안이, 망자들의 후미를 덮쳤다. 새하얀 궤적이 쉬지 않고 이어져 앞에 걸리는 것들을 썰어 나갔다.
카드득- 푸확-!
단죄의 검과 흑검을 제외하면, 진은 강철 검은 지금까지 이안이 사용한 것 중에 가장 좋은 검이었다.
하나는 성검, 하나는 마검에 가깝다는 걸 생각해 보면, 사실상 일반적인 검 중에서 이보다 좋은 걸 찾아보긴 어려울 터였다.
하긴. 그러니 유일 등급인 것이겠지만.
서걱-! 퍼억-!
쉬지 않고 베고 찌르고 방벽을 후려치며 나아간 끝에, 이안은 마침내 생존자들을 눈에 담았다.
둘만 남은 경호병들이 신성 장막을 앞에 둔 채 싸우고 있었다.
뒤편의 제국인은 날에 불이 붙은 검을 휘두르고 있고, 이안 쪽의 북부인은 외날 도끼와 뇌전이 번쩍이는 쇠장갑으로 망자들을 필사적으로 후려쳤다.
우글대는 망자들 사이로, 문틈에 무릎 꿇은 필립의 모습이 얼핏 보였다.
이안의 조언대로 기도에 집중하고 있는 것이리라. 한밤중이니, 성흔의 신성을 다시 채우려면 다른 방법이 없을 터였다.
"비켜!"
눈이 마주친 북부인 전사에게 소리친 이안이, 앞을 가로막는 망자의 목을 날려 버렸다. 놈의 몸통을 방벽으로 후려쳐 벽에 짓이겨 버린 그가, 반사적으로 비켜서는 북부인 경호병 곁을 지나쳤다.
"헉…!"
화염 검을 휘두르던 제국인 경호병도 다급하게 벽면에 찰싹 붙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공간으로, 백금 방벽을 앞세운 이안의 황금빛 궤적이 뻗어 나갔다.
콰지지직-
백금 방벽에 떠밀린 망자들이 구겨지듯 밀려났다. 그 사이로 새하얀 궤적이 그 어떤 기교도 없는 매끄러운 곡선만을 연달아 그려냈다.
서걱- 콰직! 콰드득-
일방적인 학살이 이어졌다.
미쳐 날뛰는 망자들은 방벽을 깨뜨리지 못했고, 진은 강철 검은 저주를 잔뜩 머금은 살과 뼈를 말 그대로 종잇장처럼 갈랐다.
아직 남은 안개나 망자들의 체액에 담긴 저주도 이안을 멈추지는 못했다.
철퍽-
그보다 마지막 망자가 바닥에 쓰러지는 게 덜 빨랐다.
썰물처럼 서서히 밀려나는 검은 안개 사이로, 토막나고 짓이겨진 시체 조각들이 가득했다.
새카맣게 물들어 있던 살덩이들이 조금씩 본래의 색을 되찾아 가는 가운데.
"후우… 후우…."
검을 늘어뜨린 채 숨을 고르던 이안이 비로소 뒤를 돌아보았다.
"...."
"...."
멍하니 입을 벌린 채 그를 바라보고 있던 두 경호병이 화들짝 어깨를 떨었다. 문틈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던 두 명의 상단주도 마찬가지였다.
놀라운 반응은 아니었다.
이안은 방금, 복도에 가득하던 저주 구울들을 말 그대로 인간 전차처럼 밀어 버린 셈이었으니까. 게다가 그가 쥔 검은 여전히 새하얗게 빛나고 있었고, 백금 방벽도 은은한 황금빛을 머금고 일렁였다.
파슷-
방벽을 거둬들인 이안이, 체액 한 방울 묻어 있지 않은 검을 허리춤으로 되돌리며 걸음을 옮겼다.
"기도 멈춰도 돼. 저주가 물러나고 있으니까."
솨아아, 그 순간 신성 장막이 금가루 같은 빛무리로 화하며 흩어졌다. 필립이 허물어지듯 땅에 양손을 내디뎠다.
"콜록 콜록, 하아… 후…."
안면가리개 사이로 핏물이 방울져 떨어졌다. 코피라도 흘린 모양이었다. 신성력을 과도하게 끌어다 쓴 부작용이리라.
밀려드는 저주를 홀로 막아내는 게 쉽지는 않았을 터였다.
어쨌건, 덕분에 상단주들은 단 한 명도 죽지 않았다. 저들이 죽지 않게 지키는 게 필립의 임무였으니, 훌륭하게 수행해 낸 셈이었다.
"...!"
이안의 시선을 받은 두 경호병이, 그의 턱짓에 재빨리 몸을 돌려 필립을 부축했다. 필립이 숨을 헐떡이며 몸을 일으켰다. 그의 안면 가리개 사이로 아른거리는 금광을 내려다보며, 이안이 옅게 웃음 지었다.
"마법 무구는 장식이냐?"
"도무지 익숙해 지지가… 하하. 조금만 더 늦으셨다면… 기절했을 겁니다. 아마도요…."
필립이 헐떡대며 대답했다. 수고했다고 덧붙인 이안이 그의 뒤편, 회의장을 바라보았다.
낯이 하얗게 질린 엘리야는 물론이고, 겁에 질린 채 모여선 상단주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귀하는… 도대체…?"
이안의 눈길을 받은 쿠르드인 단주가 더듬대며 물었다. 문틈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던 둘 중 한 사람이었다. 이안이 입을 열었다.
"다들 자리를 비우지 마시오. 아마 곧, 경비대가 들이닥칠 테니까. 뒷수습을 잘 하셔야 될 거요. 살고 싶다면."
"...!"
그제야 상단주들의 눈이 커졌다.
그들의 눈동자에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현실감이 되돌아왔다.
당연한 일이었다.
아무리 외곽이라 해도, 여긴 엄연히 도시 안이지 않은가. 심지어 영주의 별채이기도 했고, 전투와 저주의 여파로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자칫하면 전부 목이 달아나기에 딱 좋은 상황이라는 의미였다.
"이제 와서 발 뺄 생각들은 하지 않으시는 게 좋을 것이오. 똘똘 뭉치지 않으면 다 죽을 테니. 나도, 여기서 발을 빼는 자를 가장 먼저 의심할 거고."
상단주들의 눈을 차례로 마주 보며 덧붙인 이안이, 마지막으로 파엘을 마주 보며 말을 맺었다.
"나라면, 연맹의 대표자부터 마저 뽑겠소."
"아… 그, 그렇지…! 지금 이럴 때가 아니오! 시간이 얼마 없소!"
파엘이 더듬대면서도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콧수염 단주가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 이 상황에서 회담을 계속하자고? 이 시체 밭 한복판에서? 심지어 이게 다, 우리 식구들이었는데?"
"어쨌든 절반은 살았잖아요. 방주 상단주의 혜안 덕분에."
코뚜레 단주가 덧붙였다. 쿠르드인 단주를 비롯한 다른 단주들도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파엘을 돌아보았다.
"빨리빨리 머리를 짜냅시다. 여기서 다 죽고 싶지 않다면. 저분의 말이 맞소. 이제부턴 흩어지면 죽는 것이오. 습격의 배후는 일단 살고 난 뒤에 알아내도 늦지 않소."
떠들어 대기 시작한 단주들에게서 시선을 돌린 이안이, 필립을 부축한 두 경호병을 돌아보았다.
"두 분을 안전하게 모셔. 내가 없는 동안."
"또… 어딜… 가십니까?"
북부인 경호병이 물었다.
이안이 몸을 돌리며 내뱉었다.
"바퀴벌레가 아직 남아 있어서."
그놈의 목을 가져와야, 내 의뢰도 끝나는 거거든.
이안은 토막 난 시체로 즐비한 복도로 걸음을 내디뎠다.
안개가 사라졌지만, 구린내와 피비린내는 여전했다. 이안은 마비되지도 않는 자신의 후각을 내심 원망했다.
어쨌건, 시체 토막들에서는 저주의 흔적을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됐다. 안개가 사라지면서 저주의 잔재도 함께 빠져나간 모양이었다.
사령술이나 강령술로 만들어진 변이체와는 다른 반응이었다. 상황을 모르는 이들이 본다면 서로 싸우다 죽은 것이라 여길지도 몰랐다.
'애초에 그걸 노렸던 건가….'
어쨌건, 이 개판을 수습하는 건 상인들의 몫이었다.
애초에 파엘의 말만 들었어도 일어나지 않았을 상황이 아니던가.
지금도 피해를 입지 않은 건, 경호병과 짐꾼들을 전부 밖으로 내보낸 방주 상단뿐이었다. 물론, 이 개판을 수습한 게 파엘의 개인 경호병인 이안과 필립이니 괴상한 오해를 살 일은 없으리라.
"...?"
문득 멈칫한 이안이 뒤를 돌아보았다. 누군가 그의 손목을 잡아서였다. 엘리야였다.
"손에 피 묻는다. 떼."
"저도 같이 가요."
"...?"
엘리야의 말에, 이안이 미간을 찌푸렸다. 엘리야는 안색이 여전히 창백한 와중에도 그를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사람들을 이렇게 만든 그 흑마법사를 꼭 잡고 싶어요. 주문 회로의 도움을 받았다고 해도, 이만한 주문을 사용했다면 아직 마력의 잔재가 남아 있을 거예요. 저라면 그걸 찾을 수 있을지도 몰라요."
"인파 사이에 섞여 있는 놈은 나도 찾을 수 있어. 꼭 지하 수로에서 붙잡을 필요는 없으니까."
"수로 끝은 강으로 이어져 있습니다."
엘리야를 따라온 제국인 경호병이 끼어들었다. 이안의 시선을 받은 그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이 도시의 지하 수로는 예전부터 밀수꾼들이나 범죄자들이 애용하는 공간입니다. 배수구 근처에 배를 대놓고 물건이나 사람을 운반하는 식이죠."
"전 지하도 꿰뚫어 볼 수 있고요."
엘리야가 재빨리 덧붙였다.
…하긴. 흑마법사는 꼭 이 녀석이 보는 앞에서 목을 치겠다고 생각했었지.
입맛을 다신 이안이, 목에 건 델라 루의 은총을 풀었다. 목걸이를 엘리야에게 걸어 주며 그가 내뱉었다.
"싸움이 시작되면 뒤로 물러나 있어라. 절대 끼어들지 마."
"네. 그럴게요."
하여간, 다들 대답은 잘해.
이안은 한 팔로 엘리야를 안아 들어 올렸다. 체액과 오물이 엘리야의 로브에도 묻었지만, 그녀는 전혀 상관없다는 듯 그의 목을 감싸 쥐었다. 어쨌건 그녀는 생각보다 묵직했다.
들고 달리려면 진땀 좀 빼겠는데.
내심 중얼대며 걸음을 옮긴 이안이 이내 계단을 내려갔다.
"…대부님 말씀이 맞았어요. 전 흑마법도 마법의 일부이며 학문일 뿐이라 여겼거든요. 그게 터부시되는 건 그걸 익힌 자들의 문제일 뿐이라고."
엘리야가 문득 읊조렸다. 이안이 슬쩍 내려다보는 가운데, 그녀가 덧붙였다.
"잘못된 생각이었어요. 이런 걸 익혔다면, 정신이 온전하게 유지될 리 없어요. 멀쩡한 사람도 결국은 미치광이가 될 거예요."
이안이 낮게 코웃음을 흘렸다.
"그래. 마법이 정신을 갉아먹게 되겠지. 검은 벽도. 공허도 마찬가지야. 그저 마주한 것만으로도 영혼을 오염시키지."
"…공허를 본 적이 있으신 것 같은 말투시네요."
"...."
"설마, 정말 보신 건가요?"
눈을 치켜뜬 엘리야가 이안을 올려다보았다.
하여간, 이놈의 호기심은. 이안은 짧게 혀를 차며 녀석을 내려다보았다. 눈을 깜빡인 엘리야가 덧붙였다.
"하, 하지만, 제가 알기로 공허를 엿본다는 건…."
"아주 끔찍한 일이지. 운이 좋지 않았다면 나도 미치광이가 되었을 거다. 호기심으로라도 시도한다면, 너도 그렇게 되겠고."
"…확실히. 이런 짓을 아무렇지도 않게 벌이는 미친 난쟁이가 되고 싶진 않네요."
어둠에 휩싸인 복도의 끔찍한 전경을 돌아보며 엘리야가 읊조렸다.
…교훈이 아예 없진 않아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생각하며, 이안은 저택의 대문을 열었다.
사아아….
외부의 안개도 거의 다 흩어지고 있었다. 불길한 어둠이 물러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마차 주위에 밝혀 뒀던 횃불이 전부 다 꺼져서, 어쨌건 여전히 어둡긴 했지만.
"...?"
이안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간 건, 늘어선 마차들 사이를 지나쳤을 때였다.
다그닥- 다그닥-
발굽 소리와 거친 숨소리가 귀를 파고들어서였다.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이안이, 이내 조금 멍한 표정을 지었다.
"…오늘 밤의 또 다른 기적이군."
은색 마갑을 걸친 백마가, 정원을 가로질러 달려오고 있었다.
#274화
마구간 안에서 무슨 일을 겪은 것인지, 마갑 곳곳에 튄 피가 눈에 띄었다.
"필립 경이 혹시 모른다고 마갑을 옮겨 달아 놨었어요. 줄도 훨씬 느슨하게 묶고요. 똑똑한 말이라, 사실 묶을 필요도 없다고 하면서요."
다가오는 백마를 눈에 담으며 말한 엘리야가, 이안을 슬쩍 올려다봤다.
"그 덕을 본 모양이에요."
"…아마, 그 녀석 같은 종자는 어디서도 다시는 못 구할 거다."
이안이 진심을 담아 읊조리는 사이, 닐라인지 셀림인지 모를 백마가 그들의 앞에 멈춰 섰다.
콧김을 뿜으며 이안을 바라보는 눈빛이, 오히려 그를 걱정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누가 누굴 걱정해?
헛웃음을 삼키며, 이안은 녀석의 상태와 마갑을 살폈다. 머리와 발굽 주위로 유독 피가 흥건했지만, 녀석이 흘린 피가 아니었다.
마갑도 마찬가지였다. 마력을 거의 다 소진한 듯, 곳곳에 박힌 마석들이 흐릿하게 점멸할 뿐이었다.
비단 저주의 안개뿐만 아니라, 마구간 안에서 벌어진 일과도 무관하지 않으리라.
하지만 어쨌든, 아직 아예 빛을 잃은 건 아니었다.
백마의 숨결도 빠르게 안정을 되찾고 있었다. 이안이 다가가자, 녀석이 올라타라는 듯 고개를 땅으로 숙였다.
이안이 엘리야를 내려다보았다.
"말에 타서도, 그 재주를 부릴 수 있겠냐? 많이 흔들릴 텐데."
"아마도요. 해 본 적은 없어서 확신은 못 하겠지만요."
"그럼, 이번 기회에 알아보면 되겠네."
엘리야를 들어 올린 이안이 그녀를 안장 앞쪽에 앉혔다.
뒤이어 훌쩍 뛰어오른 그가 안장에 올라탔다. 왼팔로 엘리야의 몸을 감싸고 오른손으로는 고삐를 쥔 것도 잠시.
"이런…."
저 앞을 바라본 이안이 짧게 혀를 찼다. 쇠창살로 만들어진 대문이 굳게 닫혀 있었기 때문이다. 저것부터 열었어야 했는데. 말이 살아남은 것에 놀라서 잠시 깜빡한 것이다.
다각, 다각-
백마가 알아서 앞으로 나아갔다.
…뭐, 알아서 수습해 주겠지.
대문을 바라보던 이안이, 이윽고 입맛을 다시고는 오른손을 펼쳤다. 그의 눈동자가 붉게 일렁였다.
화륵-
손아귀에서 화염구가 피어올랐다. 대문이 적당한 거리까지 가까워지자, 이안이 화염구를 그대로 내던졌다.
콰앙-! 쿠우웅….
대문이 폭발에 휩쓸려 넘어갔다. 이 소리에 경비병들이 더 빨리 몰려올지도 몰랐지만, 이안은 차라리 그러기를 바랐다. 그때 그는 여기 없을 테고, 그만큼 상황도 빨리 마무리될 테니까.
"눈 똑바로 뜨고, 놓치지 말고 찾아. 그 새낄 놓치면, 밤에 잠이 안 올 것 같으니까."
"네…!"
엘리야가 비장하게 대답했다.
백마가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나갔다.
***
다그닥- 다그닥-
"아니, 저건 미친…?!"
"피해! 미친놈이다!"
백마가 밤거리를 가로지르며 내달렸다.
길을 오가던 시민들이 비명과 고함을 지르며 사방으로 물러났다. 뒤에서 밤 장사를 위해 펼쳐 둔 가판이 우르르 무너지는 소리가 번졌다.
'…이런 짓을 현실이 되고서도 할 줄은 몰랐는데.'
실제로 하니까 더 재미있긴 하네.
이안은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생각을 하며 고삐를 쥐었다.
어쨌든, 아직까지 사람을 치는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의 기마술이 훌륭해서가 아니라, 순전히 말의 역량이 뛰어나서였다.
닐라인지 셀림인지 아직도 모를 이 녀석은, 요리조리 방향을 틀거나 뛰어넘으면서 용케도 아무와도 부딪히지 않았다. 재산의 손실은 조금 내고 있긴 하지만, 이 정도는 육각 연맹 선에서 충분히 처리해 줄 수 있을 터였다.
-저기…! 저 앞에서 꺾으셔야 해요! 저쪽에서 잔재가 느껴져요!
그때, 엘리야의 속삭임이 뇌리를 울렸다. 그녀는 어느새 대각선 앞으로 손을 뻗고 있었다.
어떻게 느낀 거람. 이안은 내심 헛웃음을 지으면서도 말의 고삐를 옆으로 당겼다.
어쨌건, 이안은 엘리야가 생각보다 유용하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저택에서도 그랬고, 지금도 제 역할을 다 하고 있지 않은가.
'마법사로 치면, 나보다 더한 망캐일지도.'
생각하는 사이, 백마가 미끄러지듯 엉덩이를 돌리며 방향을 틀었다. 질주가 다시 시작됐다.
"으악-?!"
"다, 다들 피해! 물러나!"
갑작스러운 폭주 기수의 등장에, 시민들이 홍해가 갈라지듯 사방으로 도망쳤다. 밤거리인데도 행인이 상당히 많았다.
하긴. 중앙의 도시는 굳이 일찍 잠들어야 할 이유가 없을 터였다. 거기다 반 정도는 외지인이지 않던가.
-점점 흔적이 짙어져요. 하수구. 정말 하수구로 가고 있는 것 같아요.
엘리야의 속삭임이 뒤를 이었다.
-네 말이 맞는 것 같다. 여긴 부두 방향이야.
이안은 대로 저 너머를 눈에 담았다. 저쪽에는 성벽이 없었다. 대신 새카만 어둠이 펼쳐져 있을 뿐이었다. 강으로 이어져 있기 때문이리라.
댕댕댕댕-
뒤편 저 멀리 어딘가에서 종소리가 시끄럽게 울려 퍼졌다. 드디어 경비대가 출동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도심의 소란보다 먼저 영주의 별채로 향하길 바랄 뿐이었다.
다그닥- 다그닥-
그사이, 백마는 도시 외곽으로 접어들었다. 어느새 행인의 숫자가 눈에 띄게 줄었다.
대신 좌전방에 정박 중인 배들의 모습이 보였다. 부두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래… 이제 나한테도 보이는군.
곧 이안이 속삭였다. 대로의 판석 아래로 흐릿한 마력의 잔재가 아지랑이처럼 일렁였다. 그의 눈에는 아주 옅었지만, 어쨌든 분간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흔적은, 저 앞의 강까지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 바퀴벌레 같은 놈이, 정말 하수구로 빠져나간 모양이었다.
-온몸으로 말 목을 꽉 붙잡아라, 엘리.
이안이 엘리야를 감싸고 있던 팔을 풀며 속삭였다.
-네…? 그게 갑자기 무슨. 아니, 대부님?!
의아한 듯 뒤를 돌아본 엘리야가 눈을 치켜떴다. 고삐를 놓은 이안이 안장 위에서 일어서고 있었기 때문이다.
길 끝이 다가오면서 백마가 알아서 속도를 줄이고 있긴 했지만. 어쨌든 달리는 말 위였으니 놀라는 게 당연했다.
-꽉 잡아. 길이 끝나면 이 녀석이 알아서 멈춰 설 테니까.
이안이 눈길도 주지 않고 대답했다. 그는 저 너머, 어두운 강물을 응시하고 있었다.
시야가 더 높아지면서 직각에 가깝게 꺾인 길 너머, 제방 아래로 이어진 수면이 훤히 내려다보였다. 천천히 멀어지고 있는 나룻배도.
수면 만큼이나 어두워서, 이안처럼 눈이 좋지 않다면 쉽게 발견할 수 없는 배였다.
다행히 아직 십 미터도 멀어지지 않은 채였다. 이안의 시선이 그 한복판, 로브를 덮어쓴 채 엎어져 있는 실루엣에 고정됐다. 저놈이 바로 그가 찾던 저주술사일 터였다.
저 비열한 놈은, 노조차 자기가 젓고 있지 않았다. 놈의 앞에는 딱 봐도 불법적인 일로 먹고살 법한 비쩍 마른 놈이 오만상을 찌푸린 채 양손을 움직이고 있었다.
인상을 구기고 있는 건, 아마 흑마법사에게서 구린내가 진동을 하기 때문이리라. 지금 이안 자신처럼.
'그 토 나오는 곳을 또 들어가게 하다니….'
이안의 눈동자에 흐릿한 잿빛이 휘몰아쳤다. 뒤이어 모여든 은은한 바람이 그의 전신을 감쌌다.
속도를 줄이던 백마가 길 끝에서 확 엉덩이를 틀며 미끄러지듯 멈춰 선 건 바로 그 직후였다.
쉬아악-!
하지만 이안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무릎을 살짝 구부렸다가 관성에 몸을 맡긴 채 안장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힘껏 도약하지 않은 건, 그랬다간 말과 엘리가 다칠 게 분명해서였다.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배까지 충분히 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조금 아슬아슬하긴 하지만.
-대부님-!
엘리야의 비명에 가까운 속삭임이 뇌리를 울리는 가운데. 이안은 진은 강철 장검을 뽑아 들었다.
시선은 여전히 나룻배에 고정한 채였다.
그의 몸을 떠민 바람 칼날이, 그의 궤적을 의지에 따라 자연스럽게 비틀었다.
쒸아아아악-
파공음이 요란하게 귀를 울렸다.
바람 소리를 들은 건 이안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엎어지듯 주저앉아 있던 저주술사가 몸을 돌렸다.
뒤이어 허공을 올려다본 놈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들고 있는 이안을 발견하고는 눈을 치켜떴다.
"...?!"
그의 입술이 달싹이는 게 이안의 눈에도 보였다. 저런, 미친.
'대량 학살까지 벌인 새끼가, 뭘 이 정도로 놀라고 난리야.'
이안은 검을 머리 위로 치켜들며 한쪽 입꼬리도 함께 말아 올렸다.
저주술사는 흑마법사들이 대부분 그렇듯 야위고 창백한 안색을 가진 중년 남자였다. 수염을 멋스럽게 기른 걸 보니 제국인인 모양이었다.
어쨌든, 지하 동굴이나 유적에 남몰래 틀어박혀 괴상한 연구나 이어가는 미치광이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어딘가의 마탑에서 기어 나온 놈이리란 추측에 더 힘이 실렸다. 복합적인 저주뿐만 아니라, 꽤 높은 수준의 주문 회로까지 직접 만들어 낸 놈이 아니던가.
어쩌면 용병 일은 마탑의 연구비를 충당하기 위한 부업인지도 몰랐다.
물론, 당장 중요한 부분은 아니었다.
'지금은 네 목부터 딸 거다. 새꺄.'
생각하며, 이안은 점점 가까워지는 놈의 눈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다행히 놈은 눈을 치켜뜨고 있을 뿐, 뭔가 주문을 사용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
뒤늦게 놈의 눈에 경악이 서렸다.
이안이 자신과 충돌하게 되리란 것을 이제야 깨달은 모양이었다.
놈은 뭔가 주문을 사용하는 대신, 소매가 치렁치렁한 팔을 머리 위로 치켜들었다. 본능적인 방어 자세였다.
물론, 무의미한 짓이었다.
콰지직-!
이안이 떨어져 내리며 내리친 검은, 놈의 가느다란 팔을 단숨에 잘라내고 그 너머의 목덜미까지 깊숙이 갈랐다.
콰당탕탕-
그대로 놈과 부딪힌 이안이 조악한 갑판 위를 나뒹굴었다. 배가 뒤집힐 것처럼 흔들렸다.
"으아아악?!"
비명을 내지르던 사공이 이안과 충돌해 튕겨 나갔다. 덕분에 뱃머리에서 겨우 멈춰선 이안이, 녀석을 짓밟으며 벌떡 일어섰다.
"아으윽…."
이안은 앓는 소리를 내는 사공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몸을 돌려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의 시선은 만신창이가 된 채로 바닥에 처박혀 있는 흑마법사에게 여전히 고정되어 있었다.
"켁… 커윽…."
한 팔이 잘리고 목덜미부터 가슴 한복판까지가 쪼개진 채로도, 놈은 아직도 살아 있었다. 이안과 충돌하면서 배 바닥에 처박혔는데도 그랬다. 잘린 단면과 눈코입에서 검은 피를 왈칵왈칵 토해내고 있긴 했지만, 꽤 끈질긴 생명력이었다.
"야."
놈의 앞에 쪼그려 앉은 이안이, 그대로 놈의 머리를 붙잡아 들어 올렸다.
쩍 벌어져 있던 목덜미가 거의 떨어질 것처럼 너덜거렸지만 신경도 쓰지 않은 채였다. 고통과 경악으로 뒤섞인 푸른 눈이 이안을 마주 보았다.
이안이 덧붙였다.
"어느 마탑에서 나왔냐?"
"큭… 크륵…."
저주술사는 대답 대신 피만 토해냈다. 어깨를 으쓱인 이안이, 그대로 오른팔을 휘둘렀다. 어차피 대답을 기대하고 한 말이 아니었다.
서걱-
새하얀 궤적이 놈의 목을 깔끔하게 훑고 지나갔다. 흑마법사의 안면에서 힘이 풀리고, 푸른 눈이 퀭하니 돌아갔다. 입과 잘린 목 단면에서 검은 피가 주르륵 쏟아졌다.
'뭐, 다시 살아날 일은 없겠네.'
놈의 머리를 옆에 내려놓은 이안은, 곧바로 자연스럽게 놈의 로브 품을 뒤졌다. 칼에 잘린 단면을 중심으로 피가 흥건하게 번지고 있긴 했지만, 품을 뒤지는 데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곧 어디에 쓰는 건지 알 수 없는 작은 쇳조각과 꼬깃꼬깃하게 접힌 종이를 꺼내든 그가, 옆에 널브러져 있는 작은 짐가방까지 집어 들었다. 저주술사의 가방이었다.
'확실히, 아예 거지도 아닌 놈이고.'
가방은 꽤 묵직했다. 엘리야에게 줄 마법서 한 권쯤은 기대해도 될 만한 무게였다. 타락자 전용 아이템도.
로브에서 꺼낸 것들을 대충 짐가방에 쑤셔 넣은 이안이 짐가방을 아공간에 던져 넣었다.
다시 저주 술사의 머리채를 집어 든 그가, 비로소 일어서며 몸을 돌렸다.
"히… 히이익…."
배 구석에 구겨진 채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사공이 숨이 넘어가는 소리를 냈다.
흑마법사의 머리를 손에 든 채 다가간 이안이, 검을 놈의 목덜미에 얹듯이 드리웠다.
"이자가 흑마법사라는 걸, 알고 있었나?"
얼어붙은 듯 새하얀 검날을 내려다보던 사공이 번쩍 다시 이안을 바라보았다. 곧 그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흑마, 흑마법사라니요? 전혀 몰랐습니다…! 정, 정말입니다! 저는 그냥 돈만 받으면 누구든-"
주절대는 녀석의 눈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위로만 우는 게 아니었다. 바지가 축축해지는 게 이안의 눈에도 보일 정도였다.
이 정도로 지리고 난리야.
검면으로 사공의 볼을 툭툭 친 이안이, 검을 거두며 고개를 옆으로 까딱였다.
"그럼 당장 뱃머리 돌려. 부두로 돌아가게."
"네, 네…!"
네발로 기듯이 그의 곁을 지나간 사공이 다시 노를 쥐었다. 배가 빠른 속도로 머리를 틀었다. 늦으면 죽게 되리라 여기는 게 분명했다.
"...!"
뱃머리에 선 채 가까워지는 부두를 눈에 담던 이안이, 이내 입가에 옅은 웃음을 머금었다.
부두에 낯익은 백마가 멈춰 서고 있었기 때문이다. 녀석의 목덜미를 꽉 껴안은 난쟁이도 낯이 익었다.
솨아아-
이안의 눈동자에 잿빛 마력이 일렁였다. 전신에 바람이 모여드는 게 느껴지자, 그가 배를 박찼다.
이번에는 굳이 힘을 아끼지 않았다.
"으아악-?!"
돌풍과 각력에 휘말린 배가 휘청대다가 끝내 뒤집혔다.
포물선을 그리며 솟구친 이안이 부두 위를 나뒹굴며 착지했다.
찝찝해 죽겠네, 시발….
그가 내심 읊조리며 일어날 찰나, 말 위에서 엘리야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괘, 괜찮으신 거예요…?"
"그래. 난 괜찮아."
이안이 걸음을 옮기며 대답했다. 뭔가 더 말하려던 엘리야가 굳어졌다. 이안이 잘린 머리를 자신의 얼굴 앞까지 들어 보여서였다.
"이놈은 아니지만."
"...."
훌쩍 말 위로 올라탄 이안이, 다시 엘리야를 안장 앞으로 끌어당겼다. 그가 왼팔로 엘리야의 몸을 감쌌다. 물론, 손에는 여전히 머리를 움켜쥔 채였다.
남은 한 손으로 고삐를 쥐며, 이안이 덧붙였다.
"돌아가자. 경비병들이 몰려오기 전에."
"…네."
엘리야가 욕지기를 억누르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걸 보니, 몸 바로 아래에 달랑대는 머리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잘 봐 둬라. 그게 타락한 주문쟁이의 보편적인 최후니까.
내심 읊조리며, 이안은 고삐를 흔들었다. 백마가 기다렸다는 듯 경쾌하게 달려나갔다.
#275화
이안은 올 때와는 다른 길로 말을 몰았다.
같은 길로 되돌아가는 건 체포해 달라는 뜻이나 다름 없었기 때문이다. 경비대와 한 밤의 추격전을 벌이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게다가 지금은 한 손에 잘린 머리를 들고 있기까지 하지 않은가.
다각- 다각-
적당히 굽어진 골목으로 들어선 백마가 속도를 줄였다. 이안의 시선이 옆으로 이어진 건물들의 지붕 너머로 돌아갔다. 웅성대는 소란과 외침이 메아리치듯 번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역시, 여기로 오길 잘했군."
읊조리며, 이안은 비로소 적당히 어둑어둑한 골목길을 눈에 담았다. 인적이 드문 뒷골목이었다.
보통은 온갖 범죄의 온상이겠지만, 이곳은 도시의 치안을 증명하듯 일찍부터 만취해 널브러진 취객과 비틀대는 행인, 그리고 반쯤 헐벗은 여인들의 모습만이 간헐적으로 보였다.
"잠깐 놀다 갈… 이런 젠장."
다가왔던 여자가 인상을 구기며 재빨리 몸을 돌려 멀어졌다.
이안의 몰골 때문이거나, 앞에 앉힌 난쟁이, 혹은 그가 손에 쥔 잘린 머리 때문일지도 몰랐다.
'어쩌면 셋 다일지도.'
어쨌건, 더는 아무도 앞을 가로막거나 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이안의 눈빛이 느긋해졌다.
이 길이 어디로 이어져 있는지는 그도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하지만 다른 도시들이 그렇듯 거미줄처럼 길이 이어져 있을 테니, 지금처럼 방향만 잘 맞춰 가다 보면 별채에 도착할 수 있을 터였다.
-일부러 천천히 가시는 건가요?
엘리야의 속삭임이 이어졌다.
-그래.
대답하며, 이안은 속삭임 스킬이 생각보다 마력을 많이 소모하지 않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순수하게 엘리야의 마력으로 유지되고 있는 주문이 아닌가. 꽤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그녀는 그다지 힘들어 보이지 않았다.
의외로 엄청난 양의 마력을 감추고 있는 게 아니라면, 속삭임이 고작해야 마력 탐지 정도의 소모값만을 가지고 있는 것이리라.
-뒷수습이 끝나기를 기다리시는 거군요.
잠시 고민한 엘리야가 이제야 알겠다는 듯 덧붙였다.
퀘스트 완료 창이 뜨길 기다리는 거기도 하고. 속으로만 덧붙이며, 이안은 대답 대신 고삐를 쥔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살짝 헝클였다.
다 큰 성인인데 너무 애 취급을 했나, 하는 생각이 뒤를 이었다.
난쟁이라는 종족의 특성상 종종 잊곤 하는 사실이었다. 물론 엘리야는 신경도 쓰지 않는 눈치였다.
-그럼 곧 알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필립 경이 속삭임을 들을 수 있는 거리까지 가까워지고 있거든요.
-그 녀석은 쓸 줄 모른다며.
-요령을 알려 줘 봐야죠.
아직 마법 무구도 제대로 못 다루는 놈이, 그렇게 쉽게 될까.
생각하면서도, 이안은 어깨만 으쓱였다. 어쨌건 시도해 봐서 손해 볼 건 없었다.
-그런데… 이 머리는, 계속 이렇게 들고 가실 건가요?
-그래.
엘리야가 작게 한숨 쉬었다.
백문이 불여일견인 법이지.
웃음을 삼키며 엘리야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던 이안이, 이윽고 툭 덧붙였다.
-혹시, 너도 용의 진원을 마셨냐?
-진원이요…? 그럴 리가요. 그분께선 우리에게 자립할 능력을 기를 좋은 환경을 제공해 주셨을 뿐, 그런 식의 도움은 주지 않으셨어요. …잠깐.
엘리야가 홱 뒤를 돌아보았다.
-대부님, 그분의 진원을 드셨나요?
-이젠 규칙을 전부 무시하는구나. 엘리.
-아, 죄송해요.
엘리야가 머쓱하게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낮게 실소한 이안이 대답했다.
-어쨌든, 그래. 마셨지.
-맙소사… 제가 알기로 그분께서 진원을 내린 건, 여러 대행자 중에서도 둘뿐이에요. 그마저도 상당히 오래전 기록이 마지막이고요.
-거 참 영광스럽군….
이안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물론 빈말이었다.
자신이 몇 번째로 진원을 마신 대행자인지보단, 차라리 아직도 뜨지 않고 있는 퀘스트 완료 창이 더 신경이 쓰였다.
뭔가 문제라도 생겼나.
-진원을 마신 분들은 전부 큰 힘을 손에 넣었다던데…. 이안 님도 그러시겠군요.
이어진 속삭임에, 이안이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글쎄. 난 약발이 잘 안 받은 것 같은데.
-어떤 효과를 보셨는데요?
-주문을 빨리 완성할 수 있게 됐지. 잘 실패하지도 않게 됐고. 아마도.
-…엄청난 능력 같은데요.
난 마력 회복이나 마력량 증가를 원했거든.
이안은 어깨만 까딱였다.
하긴. 이안이 조금 특별한 경우일 뿐. 마법사는 보통 주문을 준비할 때는 무방비 상태가 되었고, 거칠게 움직이면 주문을 제대로 완성할 수도 없었다.
초 단위로 생사가 갈리는 전투에서는 치명적인 단점이었다. 이안도 가끔은 주문이 깨지거나 아슬아슬한 순간을 겪지 않았던가.
하지만 진원을 마신 후로는 큰 충격이라도 받지 않는 한 주문이 실패하지 않았고, 하위 마법 정도는 눈 깜빡할 사이에 완성할 수 있었다.
본래라면 지능 수치가 지금보다 훨씬 더 높아야 가능했을 일이었다. 물론, 정신력도.
…그렇게 생각하면, 아예 구린 건 아닌 것 같기도 하고.
-필립 경이 느껴져요.
곧이어 엘리야가 덧붙였다. 이안이 그녀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는 사이, 속삭임이 이어졌다.
-필립 경. 들리세요? 저택의 상황은 어때요?
물론,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코너를 돌며 이안이 덧붙였다.
-기도를 올린다고 생각해. 대신 신이 아니라, 우리한테 올리는 거다.
다시 적막이 이어졌다.
역시 안 되나. 이안이 입맛을 다실 찰나.
-들리십니까? 들린다고 해 주십쇼. 들리십니까? 들리시나요?
뇌리로 흐릿한 속삭임이 파고들었다.
-들리니까 그만해.
-되는군요! 드디어!
소리친 것도 잠시, 필립이 물었다.
-일은 끝내셨습니까? 저주술사는 죽이셨고요?
-그래. 머리를 들고 돌아가는 중이다.
-잘 됐군요. 그럼 어서 와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곧바로 대답한 필립이, 한숨을 내쉬고는 덧붙였다.
-이러다, 죄다 감옥으로 끌려갈 것 같거든요. …저만 빼고요.
***
저택으로 몰려든 병사들은, 부채꼴을 그리며 상단의 마차 주위를 포위했다. 결백을 증명하려 저택 밖으로 나가 있던 상인들은 곧바로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하지만 상황은 그들이 바라던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피해자입니다. 흑마법사가 우리 식구들을 몇이나 죽였는지 아십니까?"
파엘이 억울하다는 듯 소리쳤다. 그의 뒤에 선 다른 상단주들도 같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병사들의 창끝은 여전히 그들을 겨누고 있었다.
"알고 있소."
그 한복판에 선 관리의 표정 역시, 목소리만큼이나 싸늘했다. 병사가 든 횃불에 비친 그의 얼굴은 가면을 쓴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헝클어진 옷을 추스르지도 않은 채, 관리가 말을 이었다.
"찬란한 여신의 사도께서 증언하신 내용과도 일치하니, 그 부분에선 의심할 여지가 없지. 하지만."
그가 짜증 섞인 냉막한 눈으로 상인들을 돌아보며 덧붙였다.
"당신들이 이 도시에 그런 위험한 종자를 들였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소. 타락자라니. 심지어 살아서 도망쳤다지. 사전 준비와 정보 없이 그럴 수 있을 리가. 당신들 사이에, 하수인이 섞여 있을지도 모른다는 뜻이오."
"우리가 왜 그러겠습니까? 아무런 이득도 남지 않는데요."
"정말 아무런 이득도 없는지는 밝혀지면 알게 되겠지. 타락자와 관련된 일은, 아무리 작은 부분이라도 허투루 넘어갈 수 없소. 자칫하면 도시 전체가 화를 입을 수도 있단 말이오. 그러니 모든 것은 법대로 집행할 것이오."
팔짱을 낀 관리가 덧붙였다.
"당신들이 정말 결백하다면, 아무런 문제 없이 무사히 풀려나게 되겠지."
"…결백을 입증하려면, 얼마나 시간이 걸리겠습니까?"
파엘이 마른 침을 삼키며 물었다. 관리가 짧게 혀를 찼다.
"날이 밝으면 테디어스 백작 각하께서 황실과 대교회에 연락을 넣으실 것이오. 귀하들은 격리될 것이며, 수사는 대교회에서 합당한 권한을 가진 조사원이 도착한 뒤에 그들의 입회하에 이루어질 것이오."
"대교회라니…."
파엘과 단주들이 탄식했다.
오랜 시간 더럽고 냄새나는 감옥에 갇혀 있어야 하리란 건 둘째 치고, 여차하면 목이 달아나게 생겼기 때문이다.
만약 조사단에 대형 상단의 후원을 받는 이가 섞여 있다면, 사실상 이미 사형 선고를 받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찬란한 여신의 사도께서 이 자리에 계시며, 이분이 우리의 결백을 증명해 주셨는데도 그러신단 말입니까? 이보다 더 확실한 증거가 어디 있겠습니까?"
파엘이 뒤편, 마차의 문틀에 기대앉은 필립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처음까지만 해도 앞에 서서 그들을 변호해 줬건만.
지금 그는 옆에 무기를 내려놓고 선 경호병들과 마찬가지로, 멀거니 앉아 상황을 지켜보고 있기만 했다. 파엘의 항변에도 대꾸조차 없었다.
"물론, 사도님의 증언은 믿소. 이 자리에서 유일하게 결백이 증명된 분이시지. 하지만 본인께서 직접 말씀하시지 않았소? 아직 대교회에 소속된 것은 아니시라고."
관리가 슬슬 짜증을 참기 힘든 듯 혀를 차고는 덧붙였다.
"교단의 이름을 대행할 자격까지는 아직 없으신 셈이지. 게다가 사도께서도 속으신 걸 수도 있잖소. 타락자들은 기본적으로 간교하며, 이런 끔찍한 짓을 벌인 자가 세 치 혀로 거짓을 논하는 걸 두려워할 리 없으니."
"그런…."
"그러니 순순히 따라오시오."
더는 입씨름 하고 싶지 않다는 듯 말을 자른 관리가, 파엘을 똑바로 응시하며 선언했다.
"이 이상 연행을 거부한다면, 공범으로 간주하고 집행하겠소."
"그런…. 잠깐-"
이어진 파엘의 말을 무시하며 병사들에게로 시선을 돌린 관리가 고개를 까딱였다.
"잠시 멈추셔야 할 것 같군요."
덤덤한 목소리가 번진 건 그때였다. 모두의 시선이, 비로소 일어서고 있는 찬란한 여신의 사도에게로 돌아갔다.
상인들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앞으로 나서며, 필립이 덧붙였다.
"이들이 무고하다는 것을 확인시켜 줄 가장 확실한 증거가, 지금 도착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필립이 손을 들어 병사들의 뒤를 가리켰다. 모두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의 손을 따라 돌아갔다.
다각- 다각-
쓰러진 대문을 넘어, 새하얀 마갑을 걸친 백마가 들어서고 있었다.
그 위에 탄 남자와 난쟁이까지 눈에 담은 관리가 미간을 찌푸리는 사이.
"내가 아니라 이걸 보시오."
병사들의 근처까지 다가온 남자, 이안이 관리를 향해 손에 든 것을 훌쩍 집어 던졌다.
"...!"
땅에 튕기며 발치로 굴러온 것의 실체를 확인한 관리가 눈을 치켜떴다. 잘린 머리였기 때문이다. 혀를 내밀고, 눈이 퀭하니 돌아간.
"이곳을 공격한 흑마법사의 목이오."
말에서 뛰어내린 이안이, 엘리야를 안아 들며 내뱉었다. 엘리야를 땅에 무사히 내려놓은 그가 본능적으로 주춤주춤 물러난 병사들의 사이로 다가오며 덧붙였다.
"강에서 밀수선을 타고 도망치려는 걸 잡아 죽였지."
관리의 놀람과 두려움이 섞인 눈을 마주 본 그가, 멀찍이 선 상단주들을 일별하며 덧붙였다.
"나는 저들의 부탁으로 이자를 쫓았고. 이 정도면, 저들의 결백은 증명된 것 같소만. 타락자의 하수인이라면, 그런 부탁을 할 리가 없잖소?"
여기까지 오는 동안, 필립에게 저들의 대화를 실시간으로 전부 전해 들은 그였다. 필립이 멀뚱히 앉아만 있었던 건, 그에게 말을 전하느라 다른 걸 신경 쓸 여력이 없어서였다.
가만히 이안을 바라보던 관리가, 이윽고 슬쩍 뒤로 한 걸음 물러나며 내뱉었다.
"사도님의 종자이시오?"
종자…?
내심 헛웃음을 지으면서도, 이안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협조를 부탁드리겠습니다. 날이 밝으면 두 분이 함께, 이곳에서 있었던 일을 소상히 중언해 주십시오. 두 분은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다만, 상인들에 대한 조사는 절차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안의 미간이 좁아졌다.
"증거는 충분하잖소."
"저도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백작께선 본래 도시에서 일어난 사건의 작은 흠결도 용납하지 않으시는 분이니까요. 게다가 이번 일은 타락자가 얽혀 있지 않습니까. 교단과 황실의 주목을 받을지도 모르는 사안은, 결코 그냥 넘어가지 않으실 겁니다."
시발, 더럽게 깐깐하네. 이것도 중앙이라 그런가.
이안은 내심 혀를 찼다. 퀘스트는 여전히 완료되지 않았다.
상단주들은 아직도 확실히 안전해지지 않은 것이다. 영주는 기어코 대교회의 조사단을 부를 것이며, 자신의 작은 손해도 용납하지 않을 게 분명했다.
조사 과정에서 적어도 단주 한둘은 대신 책임을 뒤집어쓰고 죽게 되리라.
'게임에서는 대체 어떤 식으로 완료되었던 거지. 무슨 선택지라도 튀어나오는 거였나.'
파엘을 중심으로 모여선 가지각색의 상단주들을 한차례 바라본 이안이, 이윽고 짧게 혀를 차며 시선을 돌렸다.
필립의 시선이 조금 전부터 뜨겁게 느껴지고 있었다.
-이대로면 며칠은 더 발이 묶이고, 상황도 골치 아프게 돌아갈 것 같은데요. 그냥, 그렇게 되게 두실 겁니까?
눈이 마주친 순간, 필립이 기다렸다는 듯 속삭였다.
-아니면… 그냥, 제게 맡겨 주시겠습니까?
속삭임에 은근한 기대감이 묻어 나오는 건 아마도 착각이 아닐 터였다.
이안은 코로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필립이 그렇듯, 그 역시 이 상황을 간단하게 정리할 방법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내키지 않았을 뿐이었다.
'중앙에서도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고 싶지는 않았는데….'
물론,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이안이 필립에게 간단한 몇 마디를 속삭이는 사이.
"그럼, 이 흑마법사의 머리는 저희가 회수하도록 하겠습니다. 상단주들은, 병사들이 정중하게 후송할 겁니다."
이안의 침묵이 동의라 여긴 듯, 관리가 옆에 선 병사에게 눈짓을 보내며 덧붙였다.
이안의 시선이 다시 그에게로 돌아가는 그때.
"멈추십시오."
필립이 싸늘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머리를 주우려던 병사가 멈칫하는 가운데, 필립이 앞으로 한 걸음을 더 나서며 덧붙였다.
"바스무트의 영주님과 관리들이 얼마나 신실하며 법을 준수하는지 충분히 알았습니다. 하지만 타락자가 관련된 일이니, 수사권은 넘겨받도록 하겠습니다."
"…그 부분은, 이미 알고 계실 텐데요."
어리둥절하게 미간을 좁힌 관리가, 필립을 돌아보며 덧붙였다.
"아무리 찬란한 여신의 사도시라 해도, 귀공께선 아직-"
"물론 나는 그렇죠. 하지만 지금부터 소개할 분은 아닙니다."
"...?"
관리의 고개가 슬쩍 기울어졌다.
낮게 헛기침한 필립이, 이윽고 넓게 번져 나가는 엄숙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다들 무기를 버리고, 무릎을 꿇어 합당한 예를 갖추시오."
#276화
이안과 엘리야를 제외한 모두가, 이게 무슨 소리인가 하는 얼굴로 필립을 돌아보았다.
"루 솔라의 사도인 이 몸, 필립이 정식으로 소개하겠소."
그런 시선들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것처럼 내뱉은 필립이, 한 손을 흉갑 위에 얹으며 말을 이었다.
"엄정한 여신의 성전사. 타오르는 여신의 화로를 되살린 불씨의 운반자이며, 풍요로운 여신의 은총 받은 자."
"...?"
관리와 병사들은 물론, 상단주들과 그들의 뒤에 선 경호병들조차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선뜻 입을 열지 못하는 건, 필립의 권위와 그의 엄숙하고 진지한 말투 때문이리라.
"...?!"
표정이 변하고 있는 건 단 한 사람, 파엘뿐이었다.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어리둥절해 한 것도 잠시. 이윽고 무언가 깨달은 듯 서서히 눈을 치켜뜨고 있었던 것이다.
"거인 왕국 최후의 징벌자이며 북부의 진정한 대전사. 타락한 고대룡의 심장을 찌른 용살자. 흡혈 일족의 처단자이며 또한, 루 사드의 구원자."
이어진 말에, 비로소 병사들이 서로를 돌아보기 시작했다. 적어도 북부의 용살자를 모르는 이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과 달리, 상단주들은 이미 눈을 치켜뜨고 있었다.
"...."
몇몇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파엘에게로 돌아갔다.
하지만 파엘은 그들 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저 눈을 치켜뜨고 입을 멍하니 벌린 채로, 필립이 아닌 다른 누군가를 고개만 돌린 채 바라보고 있었다.
고개를 갸웃한 그들이 파엘과 같은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는 사이.
"부패와 역병의 정화자이며, 공허의 악마와 타락한 공작을 처단한 서부의 집행자. 또한, 저 위대한 백금룡의 유일하며 공식적인 대행자이자 백금룡의 가호받은 자!"
우렁차게 외친 필립이 잠시 말을 멈췄다. 어느새 숨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있는 관리와 병사들을 한차례 돌아본 그가, 양손을 정중하게 들어 앞을 가리켰다.
"초인, 이안 호프 경이시오!"
모두의 고개가 비로소 그가 가리키고 있는 반대편으로 돌아갔다.
"...!"
마주 선 이안과 눈이 마주친 관리가, 멍하니 입술을 달싹였다. 하지만 입술 사이로는 목소리 대신 희미한 숨소리만 번졌을 뿐이었다.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적막은, 그리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단숨에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든 필립이 일갈을 토해낸 것이다.
"무릎 꿇으라! 무지에서 저지른 무례는 죄를 묻지 않을 것이나, 알고도 저지른다면 이는 신성 모독이니! 성자 대행께 합당한 예를 다하라!"
동시에 그의 안면 가리개 사이로 황금빛 안광이 번쩍였다.
"차, 찬란한 빛에 영광 있으라…!"
가장 먼저 소리치며 주저앉은 건 상단주들이었다.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는 그들의 눈동자는 하나같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을 위기에서 구한 경호병이 바로 그 북부의 용살자이자, 백금룡의 대행자로 밝혀진 참이었으니까. 자신들이 보인 무례와 추태에 대한 기억들이 뇌리를 스치고 있으리라.
"루 솔라여…."
그 한복판의 파엘은, 다른 이들과 달리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은 듯한 상태였다. 여전히 이안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은 다소 망연자실해 보였다.
그건, 받은 충격과 밀려드는 감정이 너무 거대한 나머지 오히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것에 가까웠다.
철그럭- 촤르르륵-
상인들의 반응이 신호라도 된 것처럼, 병사들이 들고 있던 창과 방패를 떨어뜨리며 일제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여전히 서 있는 건, 이안을 마주 보고 있는 관리뿐이었다.
이안의 시선에 사로잡힌 것처럼 헐떡대던 그가, 이윽고 간신히 읊조렸다.
"즈, 증명하실 수-."
"감히 어느…!"
씹어 뱉던 필립이 멈칫했다. 이안이 왼팔을 들어 저지한 까닭이었다. 가라앉은 눈으로 필립을 일별한 것과 달리, 그는 내심 헛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칼은 그렇다 쳐도, 신성력까지 쓸 필요가 있었냐?
그의 속삭임에, 필립이 검을 다시 허리춤으로 회수하며 대답했다.
-다른 말 나올 일 없게 분위기를 확실히 잡아달라고 하셨잖습니까. 그래서 그렇게 한 겁니다.
개뿔. 그냥 하고 싶었던 거겠지.
어쨌든, 이미 내친 걸음이었다.
들고 있던 왼팔을 내린 이안이, 그대로 슬며시 주먹을 쥐었다.
지잉-
그의 손등에서 번진 황금빛이 삽시에 육각형을 그리며 피어올랐다.
금빛 방패에 시선을 빼앗긴 관리를 바라보며, 이안이 덧붙였다.
"신분증명서도, 필요하시오?"
"차… 찬란한 빛에 영광 있으라…!"
그제야 허물어지듯 무릎 꿇은 관리가 땅에 고개를 파묻으며 덧붙였다.
"부, 부디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성자 대행…! 저는, 저는 단지-"
"의무에 충실했을 뿐이지. 알고 있소."
덤덤하게 말을 자르며, 이안은 온통 무릎 꿇고 있는 좌중을 한차례 돌아보았다.
다들 그를 아르케아스의 화신이라도 되는 것처럼 여기는 게 분명했다. 심지어 그도, 이제는 이런 반응에도 익숙해지고 있었다.
'이렇게 자꾸 써먹다가, 언젠가 한 번은 역풍을 맞을 날이 올 것 같은데….'
생각하던 이안은, 문득 다시 헛웃음을 삼켰다.
사람들 사이, 반쯤 넋이 나간 얼굴인 파엘과 눈이 마주친 것이다.
'알려 준다고 할 땐 괜찮다더니.'
그에게 슬쩍 입꼬리를 올려준 이안이, 이윽고 내뱉었다.
"다들 일어나시오."
모든 이들이 기다렸다는 듯 일어섰다. 이안과 그의 손등의 금빛 방패를 곁눈질하면서도, 아무도 입을 열거나 고개를 들지 않았다.
백금 방벽을 거둬들인 이안이, 자신의 앞에 고개를 숙인 관리를 다시 바라보았다.
"내가 협조한다면, 대교회의 조치를 기다리지 않고도 조사를 끝낼 수 있겠소?"
"물론입니다. 성자 대행…! 영주께서도 이견을 제시하지 않을 겁니다."
"그럼 영주께 안내하시오. 오늘 밤이 지나기 전에 모든 일을 마무리 짓고 싶으니."
"아, 아닙니다…! 성자 대행께서 가시겠다니요…!"
관리가 재빨리 소리쳤다. 여름도 아닌데, 그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허락해주신다면, 지금 바로 영주를 이곳으로 모셔 오겠습니다."
굳이 그렇게 하겠다면야.
필립에게 마차 문을 열라고 속삭인 이안이 덧붙였다.
"병사들에게 저택 내부의 시신 수습을 부탁해도 되겠소? 저주에 물들었을 뿐, 그저 무고하게 희생된 이들이라서 말이오."
"물론입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이안이, 엘리야를 슬쩍 일별하고는 걸음을 옮겼다.
-따라 와라.
-저도요…?
흥미롭다는 듯이 상황을 지켜보던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따라붙었다.
-여기 있으면 구경거리가 될 거다. 두건 눌러 쓰고 가만히 앉아만 있어. 입만 안 열면, 어쨌든 너한테 먼저 말을 걸진 않을 테니까.
-아하… 네.
고개를 끄덕이며, 여전히 침묵 중인 이들의 곁을 지나친 것도 잠시.
-그런데, 대부님.
엘리야가 이내 덧붙였다.
-대부님은 대교회에 소속되어 있지 않으시니까, 조사를 대행할 자격은 없으시지 않나요?
…이 와중에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니.
소리 없이 헛웃음을 흘린 이안이, 마차 문을 쥐고 선 필립을 눈에 담으며 대답했다.
-상관없지 뭐. 어쨌든 대교회는 내 말을 무시하지 못할 테니까.
-이것도, 용병의 방식이란 거군요.
현대인의 방식이지.
속으로만 대답하며, 이안이 마차에 올랐다.
뒤따라 탄 엘리야가 그의 옆자리에 앉는 가운데, 필립이 밖에서 정중하게 문을 닫았다.
비로소 시간이 흐르기 시작한 것처럼, 밖이 들썩이기 시작했다.
"맙소사, 루 솔라여…."
"북부의 초인을 눈앞에 두고도 알아보지도 못했다니…."
충격과 경악에 휩싸인 와중에도, 그 누구도 목소리를 높이지는 못한 채였다.
***
"찬란한 빛에 영광 있으라…. 소문으로만 들었던 성자 대행을 이렇게 뵙게 되어, 가문의 영광입니다."
말을 타고 달려온 테디어스 백작은, 당황을 감추지 못한 와중에도 정중하게 인사하며 마차에 올랐다.
두툼한 책과 깃털 펜을 쥔 관리가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깡마르고 예민한 인상인 백작의 얼굴에는 핏기가 없었다. 비단 마석 등의 불빛 때문만은 아닐 터였다.
별장에서 일어난 소란에, 난데없이 튀어나온 백금룡의 대행자까지.
마른 하늘에 날벼락을 연달아 맞은 듯한 기분일 게 분명했으니까.
물론 온몸에 피와 오물이 끈적하게 엉겨 붙은 이안의 몰골 때문일지도 몰랐다.
어쨌건 그의 얼굴은, 이안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조금씩 평온을 되찾아갔다.
"…결국, 그 흑마법사는 바스무트에 아무런 연고도 없는 자라는 말씀이시군요."
백작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다시 한번 이안의 입으로 확인받고 싶은 것일 터였다.
그의 옆자리. 쉬지 않고 펜을 움직이는 관리를 일별하며,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말했듯, 그자는 누군가의 사주를 받고 육각 연맹의 중심축인 방주 상단의 단주를 노리고 있었소. 다만, 도시에서 이런 짓을 벌이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을 뿐이오."
이안은 늘 그렇듯, 사실에 적당한 거짓을 섞어 이야기했다.
백작은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내심 의심하고 있더라도 굳이 진실을 밝히려 들지는 않을 터였다. 그러는 편이 자신에게도 더 도움이 될 테니까.
지금도 그랬다.
"누가 예상할 수 있었겠습니까. 오히려 제가 감사를 드려야겠군요. 성자 대행께서 저들과 동행하지 않으셨다면, 상단의 인원들뿐 아니라 도시의 시민들까지 큰 화를 입었을 게 분명하니."
"미리 내 신분과 목적을 밝히지 않은 것을 이해해 주시길 바라겠소. 불가피한 결정이었소. 타락자는 간교하고 약삭빨라서, 조금만 낌새가 이상하면 모습을 감춰 버리기 일쑤이니."
"이해하지 못할 리가요. 다만…."
고개를 끄덕인 백작이, 입가에 흐릿한 미소를 머금으며 덧붙였다.
"성자 대행께서 하신 모든 말씀은 빠짐없이 기록되고 보고될 것입니다. 도시의 책임자로서 외면할 수 없는 의무이자 책임이니, 이 부분만큼은 성자 대행께서도 너그러이 이해해 주시길 바라겠습니다."
역시. 귀족이랑은 이런 부분에선 말이 잘 통한다니까.
내심 읊조리며, 이안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귀하의 의무를 무슨 권리로 막을 수 있겠소."
"과연, 공정하십니다."
백작의 미소가 더 짙어졌다. 그의 눈빛과 얼굴은 이제야 비로소 평온해 보였다.
이건 일종의 거래나 다름없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한 부분을 교환하는 것이다. 이안은 편의를. 백작은 책임을 대신할 이름을.
이안은 가만히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아직 그들의 거래는 다 끝난 것이 아니었다.
곧, 백작이 다시 입을 열었다.
"흑마법사의 수급만 들고 돌아오셨다지요. 그자의 시신은 어디에 있습니까?"
"강물 바닥에 있을 것이오. 떠내려가거나, 물고기 밥이 됐겠지. 밀수선을 운용하던 놈이 있더군. 그자를 찾으면 증언을 해 줄 것이오. 물에 빠져 죽지 않았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흑마법사의 존재를 입증할 증거는…."
"별장 지하 수로에 놈이 만든 제단의 잔해가 남아 있소. 백작께서 그것으로 충분하시다면, 흑마법사의 머리는 내가 가져가고 싶소만."
"그렇게 하시지요. 한 가지만 더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하시오."
"흑마법사가 누군가에게 고용된 것이라 말씀하셨지요. 혹, 그에 대한 물증도 가지고 계십니까? 황실이나 교단에서 이야기를 뒷받침할 물증을 요구할지도 모릅니다만."
"물증은 없소."
이안은 딱 잘라 말했다.
물론 아공간에는 흑마법사의 가방이 들어 있었지만. 이 안에 든 물건들을 넘겨줄 생각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추측은 하고 있지."
대신, 다른 먹잇감을 던져 줄 생각이었다.
"추측이요…?"
이안이 덧붙인 말에, 순간 백작의 눈빛이 묘하게 빛났다. 그쪽으로 몸을 기울인 백작이 목소리를 낮췄다.
"혹, 그 추론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말씀해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백작께서도, 이미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계시잖소?"
"그럴 리가요. 저는 시야가 좁고 생각이 짧은 편입니다. 성자 대행과는 달리."
무슨. 내 입에서 나온 말을 인용해야 네 이름을 뺄 수 있어서겠지.
백작의 속내를 알면서도, 이안은 선선히 입을 열었다.
"타락한 마법사를 고용할 만한 자금력과 인맥을 가진."
애초에 이건 그가 유도한 질문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이왕 이름이 팔리게 된 이상, 확실하게 써먹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중앙의 자유 상단들이 뭉치면 가장 큰 피해를 보게 될 누군가가 아닐까 싶소."
"과연…."
백작은 짐짓 감탄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관리가 제대로 기록하고 있는지를 흘깃 확인했다. 이윽고 그가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그러고 보니 공교롭게도, 이곳에는 제도의 상단에서 나온 이가 단 한 명도 없군요."
"참 공교롭군. 하지만 말했듯, 추측일 뿐이오."
"물론입니다. 그저 추론일 뿐이지요. 합리적인. 이 문구를 빠뜨리지 않겠습니다."
척하면 척이군.
내심 웃음 지은 이안은, 만족스러운 눈빛을 숨기지 않는 백작을 바라보았다.
당연한 반응일 터였다. 이번 일의 여파에서 벗어나는 정도가 아니라, 황실과 교단의 시선을 확실하게 돌릴 수 있는 이야기가 될 테니까.
'연맹의 단주들이 알면 깨춤을 추겠군.'
이안이 바라는 부분이기도 했다.
어째 갈수록 제국에 혼란만 야기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긴 했지만, 그에게 관심이 집중되지 않게 하려면 별수 없었다.
게다가 어차피 제국은, 머지않아 지금보다 더 개판이 될 예정이지 않던가.
"공정하고 자비로운 협조에 감사드립니다. 성자 대행. 이로써 조사는 모두 끝났습니다."
백작이 덧붙인 순간, 이안의 입가에도 흡족한 미소가 스쳤다.
눈앞에 퀘스트 완료 창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비로소 모든 위협이 사라진 것이리라.
이안이 부드럽게 덧붙였다.
"별장과 도시에 피해를 끼친 부분에는, 심심한 사과를 전하겠소. 그에 대한 배상은 육각 연맹의 상인들이 대신할 것이오."
"이미 많은 인명과 재산의 피해를 본 이들에게, 어떻게 또 배상을 요구할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이쪽에서 저들을 위로해야겠지요."
빚을 하나 지우겠단 거군.
내심 생각하면서도, 이안은 입가의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자비로우시군."
이미 할 도리는 다했으니, 연맹과 백작 사이의 관계까지 간섭할 생각은 없었기 때문이다. 나머지는 저들이 알아서 할 문제였다.
백작이 은근한 눈빛으로 덧붙인 건 그 직후였다.
"그런 의미에서, 이곳의 모든 분을 본가로 모시고 싶습니다만. 허락해주시겠습니까?"
#277화
이안의 시선에, 백작이 야윈 볼이 더 도드라지게 미소 지었다.
"귀한 분들을, 이렇게 폐허가 된 곳에 모실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 이런 말도 할 줄 알았지.
이안의 입꼬리가 조금 더 말려 올라갔다.
백작에겐 여러 가지 의미로 이득이 될 제안이었다. 이안도 딱히 손해 볼 부분은 없었다.
상단주들은 더는 백작에게 빚을 지고 싶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건 이안이 상관할 부분은 아니었다. 물론, 그렇다고 바로 고개를 끄덕인 건 아니었다.
"제안은 고맙소만. 희생자들과 마차를 두고 가는 건 마음에 걸려서 말이오. 나 때문에 더는 주위가 시끄러워지는 것도 원하지 않고. 소란은 오늘 밤만으로 충분한 것 같으니."
미리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들이 있었으니까. 백작이 염려 말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병사들에게 현장을 수습하게 하겠습니다. 관계자 외의 출입을 금지하고, 날이 밝으면 적법한 절차로 장례를 준비할 것입니다. 성자 대행을 귀찮으시게 할 일도 없을 겁니다. 별채를 내어 드리고, 시종들을 제외한 그 누구도 드나들지 못하게 할 테니까요. 다만…."
백작의 미소가 은근해졌다.
"감히 청하건대, 내일 밤 만찬에 참석하여 자리를 빛내 주십시오. 귀하신 분께서 도시를 방문하셨는데 식사조차 제대로 대접하지 못한다면, 예의와 법도를 모르는 무뢰한이라는 말을 듣게 될 것입니다."
…이 정도는 해야 중앙의 귀족인 거군.
이안이 내심 헛웃음을 흘리는 사이, 백작이 덧붙였다.
"함께 가 주시지요. 따듯한 목욕물과 식사를, 바로 준비하라 일러두겠습니다."
그가 양 손바닥을 들어 문을 가리켰다. 이안은 옆자리의 엘리야를 슬쩍 돌아보고는, 비로소 못 이긴 척 의자에서 엉덩이를 뗐다.
"그럼, 신세를 지겠소."
***
'분명히 한동안 이름 없는 용병으로 돌아가 조용히 지낼 생각이었는데…. 또 정반대의 상황이 됐네.'
이래도 되나.
늦은 아침 식사를 하며 문득 생각한 이안은, 이내 실소를 흘렸다.
느지막이 일어나 시종들이 준비해 준 따듯한 물로 목욕까지 한 번 더 하고, 깨끗한 새 옷을 걸친 채 빵과 고기를 씹으며 할 생각은 아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상황이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 것도, 사실 전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지 않는 경우가 언제나 더 많지 않았던가.
애초에 중앙이 이렇게 평화롭고 법을 엄격하게 준수하는 지역이라는 것조차, 이안의 기억이나 예상과는 조금 다른 부분이었다.
"저녁에 만찬에 참석하셔도,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듣자 하니 백작 일가는 물론이고 도시 귀족들과 사제들도 죄다 참석할 예정이라던데요."
식탁 너머에서 필립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는 진작 식사를 끝내고 두툼한 누비옷 위에 갑옷을 하나씩 걸치는 중이었다. 이안이 닭고기를 우물대며 말했다.
"그런 건 또 어디서 들었냐?"
"어제, 상단주들과 돌아오는 길에요"
이안, 엘리야와 달리 필립은 별장에 남아 뒷수습을 도왔었다.
고개를 끄덕인 이안이 대답했다.
"뭐, 어쨌든 약속은 약속이니까. 귀찮을 것 같으면, 넌 남아 있든가."
"제가 있어야 조금이나마 시선이 분산되지 않겠습니까. 그래도 걱정은 조금 되는군요. 백작은 어떻게든 나리를 도시에 더 머물게 하고 싶어 할 테니까요. 어제 보니, 아주 귀족적인 작자던데요."
"너도 서임을 받고 나면 귀족이거든? 어쨌든, 신경 쓰지 마. 알아서 할 테니까."
피식 웃은 이안이 술잔을 집어 들며 일어섰다.
방 저편, 바닥에 깔린 곰 가죽 위에 앉은 엘리야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깨끗한 천과 정체 모를 기름으로 이안의 장비를 닦고 있었다.
"내가 해도 된다니까."
이안의 말에, 엘리야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냄새를 다 없애려면, 제가 해야 돼요."
실제로도 그녀는, 이안의 장비들을 거의 해체하다시피 해서 구석구석 닦고 있었다.
…이것도 난쟁이의 장인 정신 같은 거라고 봐야 하나.
"그러던가. 그럼."
이안은 어깨를 으쓱이고는, 창가에 끌어다 둔 소파에 걸터앉았다.
포도주로 입을 헹구는 그의 시선이, 창밖으로 펼쳐진 도시의 전경을 훑었다.
백작의 저택은 내성과 이어진 것처럼 지어져 있었다. 벽돌의 색이 다르지 않았다면 그냥 성의 일부라고 생각했을 생김새였다.
어쨌건 실제로 이어져 있는 건 백작이 머무는 본관뿐이었다. 이안 일행과 상단주들이 머무는 별관은 그저 벽면만 이어져 있었다.
일행은 최상층을 통째로 썼다. 각자 개인 방을 쓰고도 남을 만큼의 방이 있었는데도, 그들은 자연스럽게 가장 큰 방에 모여서 잤다. 엘리야도 그 부분에 전혀 이견을 표시하지 않았다.
"뭔가 더 시키실 일은 없으십니까?"
갑옷을 거의 다 걸친 필립이 물었다. 이안이 저 멀리, 별장이 있을 방향을 바라보며 말했다.
"말은 연맹에서 한 마리 준비해 준다고 했댔지."
"예. 정오에 합동 장례를 치르고, 남은 부분들을 정리한다고 들었습니다. 말만 죄다 죽은 게 아니라 물건도 반절은 못 쓰게 됐다더군요. 그 뒤엔, 아마도 못다 한 회담도 마무리 짓겠죠."
필립은 희생자들의 장례를 주도하게 됐다. 루 솔라의 사도로서 자처한 것이리라.
"그럼 장례가 끝나면 파엘 단주는 내게 오라고 해. 일정과 의뢰에 대해서 할 말이 남아 있으니까. 뒷정리는 네가 대신해 주고."
어젯밤 이후, 이안은 아직 파엘과 한 마디도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눈 적이 없었다.
상단주들은 이안보다 훨씬 늦은 시간이 되어서야 별관에 도착했고, 이른 아침에 다시 밖으로 나갔으니까.
물론 이안도 굳이 먼저 그를 찾지 않았다. 충격이 꽤 커 보였으니, 추스를 시간을 주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기다려 줄 생각은 아니었다. 그들에게는 남은 계산이 있지 않던가.
"예. 만나자마자 말해 두겠습니다."
관절을 이리저리 움직여 본 필립이 방패를 등에 짊어졌다. 마지막으로 투구를 뒤집어쓴 그가 비로소 몸을 돌렸다.
엘리야가 먼저 다 닦아 둔 덕분에, 갑옷이 새것처럼 반짝였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내일 바로 떠나실 겁니까?"
"아마도. 잘 준비해 둬."
"염려 마십시오. 제가 누굽니까."
벌어진 안면 가리개 사이로 미소 지은 필립이 밖으로 나갔다.
새끼. 넉살만 는다니까.
짧게 웃음 지은 것도 잠시.
"그럼 나도… 못다 한 걸 해 둬야겠군."
이안은 아공간에 손을 넣었다.
툭, 뒤이어 갈색 가죽으로 만들어진 짐가방이 소파 위에 떨어졌다.
견갑 안쪽을 닦고 있던 엘리야가 고개를 돌렸다.
"그게… 뭔데요?"
"모가지 날아간 놈의 물건."
"...!"
엘리야의 색이 다른 두 눈이 반짝였다.
"흑마법사의 가방이라고요?"
"그래. 같이 볼래?"
"…그래도 돼요?"
멈칫한 엘리야가, 조심스러운 표정이 되어 되물었다. 확실히 어제의 경험이 기억에 깊숙이 박히긴 한 모양이었다.
이안이 가방의 가죽끈을 풀며 어깨를 으쓱였다.
"보기만 할 거라면."
벌떡 일어선 엘리야가 그대로 곰 가죽의 머리 부분을 잡고 소파 앞까지 질질 끌고 왔다.
장비를 계속 닦으면서 보려는 모양이었다.
그사이 가방을 연 이안은, 맨 위에 보이는 것부터 집어 들었다.
저주술사의 품에서 꺼냈던 접힌 종이였다.
"역시…."
종이를 펼친 이안의 한쪽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예상대로, 놈이 받았을 의뢰의 내용이 적혀 있었다. 상단들의 연합이 결성되지 못하게 막으라는 것이다. 그리고 방주 상단의 위치와, 파엘의 간단한 신상 정보가 쓰여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저주술사가 직접 쓴 듯한 휘갈긴 글자들이 더 있었다. 바스무트 라던가 회담 일정 따위를 메모한 것이다.
'하긴. 처음에는 보르의 목으로 경고만 하려고 했었지.'
경고가 동하지 않자, 그냥 단주들을 다 죽여서 결성을 막는 것으로 방향을 튼 것이리라. 흑마법사다운 논리의 전개였다.
의뢰인에 대한 단서는 전혀 없었다. 물론, 이안은 전혀 실망하지 않았다. 있었다면 오히려 놀랐을 터였다. 종이를 대충 옆에 놓은 그가, 다시 가방으로 손을 뻗었다.
"네가 좋아할 만한 게 있네."
그가 두툼한 책을 꺼내 들었다. 작은 사전 정도의 두께였다. 이런 부류의 책들이 그렇듯, 불길해 보이는 잿빛 표지에는 아무런 글자도 쓰여있지 않았다.
"마법서군요."
"아마도. 그리고 이건…."
마법서를 옆에 놓은 이안이, 이내 불그스름한 가죽으로 덮인 손바닥만 한 책자를 꺼내 들었다.
"놈이 쓰던 개인 일지겠고."
"저도 읽어 봐도 되나요?"
엘리야가 손을 멈추지 않은 채 물었다.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먼저 읽어 본 뒤에. 문제없을 것 같으면."
"네."
엘리야가 미련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경험이 중요하다니까.
싱긋 미소 지은 이안이, 뒤이어 작은 가죽 주머니를 꺼냈다.
"이건… 마석이군. 정수도 하나 있고."
안을 살펴본 그의 미소가 짙어졌다. 소형과 중형 마석이 여러 개 섞여 있었다. 정수도 중급이었다. 게다가 하나같이, 아직 오염되지 않은 것들이었다.
'안 그래도 슬슬 필요한 시점이었는데.'
마석이나 정수는 돈이 있다고 무한정 구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이안은 돈주머니도 꺼내 들었다.
금화가 스무 개나 들어 있었다. 은화도 여러 개였다. 진행비. 혹은 선금으로 받은 것이리라.
만족스럽게 돈주머니를 던졌다 받은 이안은, 이어 돌돌 말린 채 들어 있는 양피지로 손을 뻗었다.
"호오…."
양피지를 활짝 펼친 그가, 이윽고 짧은 탄성을 흘렸다. 양피지 너머에서 엘리야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뭔데요, 이안 님?"
"주문 회로야."
이안이 얼굴이 드러나게 양피지를 내리며 덧붙였다.
"고통과 광란의 저주가 새겨진."
"...!"
눈을 동그랗게 뜬 엘리야가, 이윽고 덧붙였다.
"주문 회로를… 어떻게 읽으신 거예요? 마법사마다 회로를 만드는 방식이 제각각이라, 복잡한 주문 회로는 제작자가 아닌 이상 읽는 게 불가능에 가까울 텐데요…."
아, 그게 놀라웠던 건가.
이안은 어깨만 으쓱였다.
"잘."
물론, 그는 주문 회로를 읽는 방법 따윈 전혀 알지 못했다. 그저 정보창을 확인했을 뿐이었다.
이건 시전자의 마력으로 발동되며 중급 이상의 정수로 유지되는 설치형 주문 회로였다.
그가 다시 양피지를 말며 말을 이었다.
"어쨌든, 사방에 저주를 뿌려야 하는 상황이 오면 유용하게 쓸 수 있겠네."
"그런 상황이, 어떤 상황인데요?"
"최악의 상황."
"...."
이안은 이제 작은 목함만 남은 가방 안을 내려다보았다. 손을 뻗은 그가, 이내 목함 대신 작은 쇳조각을 집어 꺼내 들었다.
이것도 저주술사의 로브에서 꺼냈던 물건이었다. 의뢰서와 달리 안쪽 깊숙한 곳까지 굴러 떨어졌던 것이다.
이안의 대답에 말문이 막힌듯한 표정이던 엘리야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의 손으로 돌아갔다.
"휘장… 인가요?"
"아마도."
이안은 조각의 뒷면을 확인하며 대답했다. 소매나 옷깃에 고정할 수 있게 뾰족한 핀과 고정쇠가 달려 있었다.
하지만 정작 표면은 반질반질할 뿐 아무런 문양도 새겨져 있지 않았다. 하지만 이안은 이 휘장의 본모습이 드러나게 하는 방법을 이미 알고 있었다.
"...."
이안의 눈동자에 마력이 아른거렸다. 마력이 휘장으로 흘러들자, 표면에 옅은 빛이 번지기 시작했다. 엘리야가 눈을 깜빡였다.
"문양을 감춰 둔 거군요."
"그래. 같은 마법사들끼리만 알아볼 수 있게."
말하며, 이안이 휘장 표면에 일렁이는 문양을 엘리야 쪽으로 보여 줬다.
위아래가 길쭉한 마름모. 그리고 십자로 교차한 직선이 각 꼭짓점 밖까지 길게 튀어나와 있었다.
"청색 마탑…."
문양을 알아본 엘리야가 탄식했다. 그녀가 굳어진 얼굴로 덧붙였다.
"그자는 청색 마탑의 마법사였던 거군요."
"과거에 그랬거나. 지금도 그렇거나."
휘장 표면의 문양을 다시 내려다보며, 이안이 읊조렸다.
어느 쪽이건 전혀 놀랍지 않았다.
놈의 일지를 읽어 보면 확실하게 알게 되겠지만.
"혹시나 해서 묻는 거다만, 위치를 아는 마탑이 있냐?"
"아뇨. 애석하게도요. 아시다시피 모든 마탑의 위치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고…."
"마법사들이 드나드는 통로의 위치도 알려진 바가 없지. 모르면 됐어."
이안이 심드렁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게임에서도, 그가 발을 들여 본 마탑은 회색 마탑이 유일했다. 그나마도 들키자마자 바로 추방당했었다.
마탑이 위가 아니라 아래로 향하게 지어져 있다는 걸 알게 된 것도 그 덕분이었다.
물론 회색 마탑의 정확한 위치를 아는 건 아니었다. 마경인 마법사의 악몽이 그들의 탑과도 이어져 있었기에 들어갈 수 있었을 뿐이었다.
한 가지 속성의 마법만 익혔다면 해당 마탑의 일원이 될 수도 있었겠지만, 이안은 어디에도 속할 수 없었다.
물론 현실이 된 지금은, 뇌를 해부해 보겠다고 달려들지나 않으면 다행일 터였다.
"어쨌든 이게 있으면, 청색 마법사인 척은 할 수 있겠네."
들키기 전까지는. 읊조린 이안이 휘장을 마석 주머니에 넣었다.
"…그러고 보니 이안 님은, 여러 색의 마법을 쓸 수 있으셨죠."
엘리야가 새삼스럽게 읊조렸다.
이안이 슬쩍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분께 들었나 보군."
"네. 이안 님은 여러 비밀을 품고 계시고, 그에 대해서는 묻지 말라고도 하셨어요. 대답해 주지도 않으시겠지만, 좋아하지도 않으실 거라고요."
"예습을 잘했네."
그냥 내 얘길 많이 한 것 같기도 하지만.
어깨를 으쓱인 이안이 목함을 꺼내 들었다. 이게 마지막이었다.
손바닥보다 조금 큰 크기였고, 표면에 아주 낡은 주문 회로가 새겨져 있었다.
아무런 빛도 흘러나오지 않았지만, 비슷한 것을 전에도 본 적이 있었다.
암흑 성물을 보관하던, 지금은 공허의 표식을 보관 중인 봉인함.
'암흑 성물 같은 걸 가지고 있기엔, 좀 모자란 놈이었는데.'
고개를 갸웃하며 걸쇠를 푼 이안이, 목함의 뚜껑을 열었다.
안에 담긴 물건을 확인한 그의 눈매가 순간 가늘어졌다.
"이건…."
호두알보다 조금 큰 크기의 유리구슬이었다. 정말 유리인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물론, 이안은 구슬의 재질 따위에는 관심도 없었다.
엄지손가락 한 마디 정도 크기의 새카만 덩어리가 구슬 안에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것 같은, 숯덩이를 연상시키는 질감의 덩어리였다. 하지만 숯은 아니었고, 구슬 내부에서 살짝 떠 있기까지 했다.
상자를 꺼내며 흔들려서인지, 가루 같은 조각이 주위로 안개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구웅….
이안의 손끝이 구슬에 닿은 순간, 내면에서 혼돈의 파편이 옅은 울림을 토해냈다. 이안의 눈매가 다시금 꿈틀대는 가운데.
"이안 님…?"
심상치 않다는 걸 느낀 듯, 엘리야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눈 감아야 하는 건가요?"
"…그럴 필요 없어."
어쨌든 이건,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정신에 영향을 끼치는 종류의 물건은 아니었다. 이안이 상자를 그녀 쪽으로 돌렸다.
"이건…?"
엘리야의 미간이 좁아졌다. 이안이 나지막이 덧붙였다.
"너는 바로 알아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아닌가 보네."
"...?"
고개를 갸웃한 것도 잠시. 곧 엘리야의 눈이 서서히, 그리고 찢어질 것처럼 커졌다.
"말도 안 돼…. 설마… 설마 이건…."
이안의 눈을 마주 본 그녀가 멍하니 입술을 달싹였다.
"검은 벽의… 파편인 건가요…?"
#278화
"그래."
이안이 덤덤하게 대답했다.
게임에서도 한두 번쯤 얻은 적이 있는 물건이었다. 그때는 그냥 상점에 헐값에 팔아넘겼었다. 타락자 전용 아이템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현실이 된 지금은 그럴 수 없을 터였다. 제도의 암시장에 넘기는 거라면 모를까.
'이걸 대체 어떻게 채취한 건지는, 여전히 감도 안 잡히지만.'
이안은 다시 상자를 자신 쪽으로 돌려, 구슬 속의 파편 조각을 내려다보았다. 어쨌든, 이건 파편 중에서도 하급품이었다. 소지 시에는 마력 회복 속도를 미미하게 상승시켰고, 사용 시에는 혼돈력을 아주 조금 영구적으로 늘려 줬다.
어떻게 사용하는 건지는, 굳이 생각할 필요도 없는 부분이었다.
"자신의 마력을 오염시키는 용도로… 사용했던 거겠군요."
멍하니 상자를 바라보던 엘리야가 이윽고 덧붙였다.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아마도."
하긴. 모든 타락자가 암흑 성물이나 혼돈의 파편이 담긴 정수를 가지고 있을 리는 없었다.
직접 공허에서 마력을 가져올 방법이 없는 자들은, 검은 벽의 파편을 그 대용품으로 사용하는 것이리라.
물론 이것도 쉽게 구할 수 있는 물건은 아니겠지만. 마탑 소속의 마법사에게는 그렇게까지 어려운 일은 아니었을 터였다.
"전선 인근에만 마법사들이 우글댄다더니. 이유가 있었던 거지."
이안이 대수롭지 않게 덧붙였다. 짧게 침음한 엘리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책에서 지나가듯이 읽은 적이 있긴 하지만…. 이걸 실제로 보게 될 줄은 몰랐어요."
상자를 응시하는 그녀의 눈빛에 호기심과 두려움이 뒤섞여 일렁였다. 연구해야 할 대상이 눈앞에 나타났으니 당연한 반응일 터였다.
파편을 잠시 내려다 본 이안이, 이내 다시 상자를 닫았다.
"이 물건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자."
"...?"
"손님이 오고 있거든."
내 예상보다 빨리.
내심 덧붙인 이안이, 가방에 목함과 양피지를 비롯한 물건들을 차곡차곡 채워 넣었다.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이어진 건, 이안이 돈주머니와 마석 주머니까지 아공간에 넣은 직후였다.
"…파엘입니다. 성자 대행."
문 너머에서 목소리가 이어졌다.
엘리야에게 표정을 관리하라는 눈짓을 보낸 이안이, 바닥에 내려놓았던 술잔을 집어 들며 입을 열었다.
"들어오시오."
문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뒤이어 그보다 더 조심스러운 표정인 파엘이 안으로 들어섰다.
경직된 미소를 입가에 건 채였고, 이안과는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어쨌건 어제처럼 넋이 빠진 상태는 아니었다.
내심 웃음을 삼키며, 이안이 입을 열었다.
"생각보다 일찍 오셨군. 아직 장례가 다 끝나지 않았을 것 같은데."
"찾으신다고 들어서 말입니다…. 다들, 먼저 가 보라고 하더군요. 말씀드려야 할 내용도 있는데… 제가 적임이니까요."
하긴. 방주 상단은 육각 연맹의 상단 중에서 희생자가 단 한 명도 나오지 않은 유일한 상단이었다.
게다가 다른 단주들은 이안에게 직접 뭔가 이야기를 하는 것도 부담스러울 터였다. 이제는 파엘도 마찬가지겠지만, 어쨌건 이안은 그의 개인 경호 신분으로 동행 중이지 않던가.
이안이 턱짓했다.
"일단 앉으시오."
"아, 예."
삐걱대며 몸을 돌린 파엘이 곧 의자를 들고 돌아왔다.
사이에 엘리야를 둔 채였다.
영애가 갑옷을 닦고 있다는 사실에 의문을 품을 여유조차 없어 보였다.
의자에 앉으려던 파엘이, 이안이 손을 뻗자 엉거주춤하게 멈춰섰다.
"저주 술사가 가지고 있던 의뢰서요. 배후를 특정할 수는 없었지만. 의도적으로 연맹의 결성을 막으려는 자가 있다는 증거로는 충분할 것이오. 백작에게 들키면 빼앗길 테니, 간수 잘 하시고."
"따로 챙겨 주셨군요…. 감사합니다."
허리를 숙인 파엘이 양손을 공손하게 내밀었다.
그의 손에 종이를 건네준 이안이 덧붙였다.
"이젠 이걸 보여줘도 아무런 문제가 없어진 것이오?"
의뢰서를 흘깃 내려다본 파엘이 재빨리 접어 품에 넣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이번 일로 다들 적지 않은 손해를 입게 됐으니까요. 거기다 백작의 보고서에도 이름이 올라갔으니. 사실, 이제는 흩어질 수도 없게 됐습니다."
"백작의 보고서가 벌써 나왔소?"
"밤새 작성한 모양이더군요. 몇 시간 전에 이미 제도로 전령이 출발했습니다."
더럽게 부지런하네.
이안은 헛웃음을 흘렸다.
하긴. 여긴 황실과 교단의 입김이 바로 닿는 중앙이었다.
정리를 끝내야 다리를 뻗고 잘 수 있으리라. 백작이 달리 그렇게 야위고 예민한 게 아닌 것이다.
"그럼 이제…."
고개를 끄덕인 이안이, 아직 앉지 않고 서 있는 파엘을 마주 보았다.
"내 의뢰는 완료된 셈이군. 추가 조항을 포함해서."
"물론입니다. 성자 대행."
대답한 파엘이, 곧 한쪽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숙였다.
"연맹의 모두를 대신해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성자 대행이 아니셨다면, 그 누구도 살아남지 못했을 겁니다. 오히려 욕심에 눈이 멀어 서로를 죽인 수전노들이라는 오명까지 뒤집어썼겠지요. 그리고…."
잠시 머뭇거린 파엘의 볼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간의 무례에도 사과드립니다. 성자 대행."
아주 난리가 났네.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린 이안이 덧붙였다.
"이안."
"예…?"
"하던 대로 부르시오. 그렇게 불리는 건 영 불편해서 말이오."
그가 슬쩍 고개를 든 파엘의 눈을 내려다보며 덧붙였다.
"알던 사이끼리 이렇게 낯간지러운 짓을 하는 것도 질색이고."
"하지만… 제가 어찌…."
"우리가 처음 알았을 때는, 나는 용살자도 아니고 백금룡의 대행자도 아니었소. 게다가 그 이후로도 귀하에게 굳이 알려 주지 않았으니, 사과를 받을 것도 없지. 그러니 적당히 하시오."
이안이 입술을 말아 올렸다.
"솔직히, 뒤통수가 얼얼하셨잖소. 아니오?"
눈을 깜빡인 파엘이, 비로소 입가에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아니라고 하지는 못하겠군요."
대답하며 공손하게 일어선 그가, 비로소 의자에 앉았다.
"정말이지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습니다. 저를 보시면서 경이 무슨 생각을 하셨을지…."
"재미가 아예 없진 않았지."
이안의 대답에 파엘의 미소가 더 짙어졌다.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그가 덧붙였다.
"그래도, 억울하기만 한 건 아닙니다. 보르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땅을 칠 테니 말입니다. 그 친구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보르는 이미 알고 있소."
"-궁금해서 참, 예?"
파엘이 눈을 치켜떴다. 이안이 한쪽 어깨를 으쓱였다.
"눈치 빠른 친구잖소."
"허… 아니… 그럼… 저만 몰랐단 겁니까?"
"그런 셈이지."
"루 솔라여…. 상인은 눈치와 감이 생명이나 다름없건만. 저는 정말 자격 미달이군요."
"말했잖소. 단주의 감은 믿을 게 못 된다고."
눈을 감은 파엘이 허탈한 웃음만 흘렸다. 이안이 고개를 까딱였다.
"의뢰 얘기로 돌아갑시다. 정산이 남았잖소?"
"물론입니다. 그 전에… 한 가지 제안을 먼저 드려도 되겠습니까?"
"제안?"
"미드퍼트로 가실 예정이라고 하셨었지요."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파엘이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저도 함께 동행해도 되겠습니까?"
"...?"
***
오후. 별채의 응접실에서 이루어진 잔여 회담의 분위기는 전날과는 사뭇 달랐다.
"그럼, 정기 회담은 반년에 한 번씩 이곳 바스무트에서 이루어질 것이며, 단주가 불참 시 적법한 대리인이 참석하는 것으로 결정하겠소. 이의 있는 자는 잔을 드시오."
"...."
"...."
남은 논의 사안 대부분이 상단주들의 이견 없이 속전속결로 진행되고 있다는 부분이 특히 그랬다.
귀빈의 자격으로 테이블의 한 자리를 차지한 이안과 엘리야. 그리고 그들의 뒤에 선 필립 때문일 터였다.
"...."
게다가, 필립의 곁에는 한 사람이 더 서 있었다. 북부인 경호병. 본래 풍차 상단 단주의 개인 경호병이었던 그는, 이안을 다시 본 순간 자연스럽게 따라붙었다.
이안은 본업으로 돌아가라 명령했지만, 이곳에 함께 있는 동안만이라도 모실 수 있게 해달라고 사정하는 통에 별수 없었다. 그리고는 회담 내내, 필립과 나란히 선 채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아마 그의 시선도, 회담의 원활한 진행에 일부나마 도움을 주고 있을 터였다.
'그래도 지루하긴 마찬가지지만.'
심드렁하게 생각하며, 이안은 포도주를 홀짝였다.
그가 이 자리에 참석한 건, 파엘이 미리 약속했던 추가적인 보상 때문이었다. 회담 자리에서 이야기해야 하는 안건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 자리에서 언급될 내용은 의뢰의 보상만이 아니었다.
"그럼, 이제 이 자리를 빛내 주신 분들에 대한 안건으로 넘어가겠소."
포도주로 입술을 축인 파엘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연맹의 공식적인 초대 대표자가 되었다. 연맹의 설립이 그의 계획이었던 것도 있지만, 이안의 후광이 큰 역할을 한 게 분명했다.
파엘의 시선이, 이안의 옆에 앉은 엘리야에게로 돌아갔다.
"이 자리를 빛내주신 영애께선, 제도의 대학에서 아주 중요한 연구를 하시게 될 예정이오. 저 검은 벽의 비밀을 밝혀낼 연구 말이오."
"...!"
"...!"
단주들의 시선이 엘리야에게로 집중됐다. 다들 백금룡의 대행자와 함께 다니는 묘령의 난쟁이가 대체 누구인지 내심 궁금했던 것이리라.
"검은 벽은 이 자리의 모든 분들에게도 저마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을 것이오. 누군가는 고향을 잃었고. 누군가는 가족을. 누군가는 삶의 터전을 잃었을 테니."
파엘이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그의 시선이 고개를 끄덕이는 단주들을 훑었다.
"이번에 우리가 겪은 일도 검은 벽과 무관하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오. 목숨을 잃은 이들 역시. 그러니 영애를 연맹의 이름으로 후원한다면, 의미가 있지 않겠소?"
엘리야는 전에 그랬듯 파엘의 말을 정정하지 않았다. 그저 입을 꾹 다문 채 묵묵히 이야기를 듣고 있을 따름이었다.
이미 아까 방에서 이 부분에 대한 합의를 끝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이안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모두가 아는 이상, 상단주들도 그녀를 멋대로 휘두를 수는 없을 터였다.
"동의하는 분들은 잔을 드시오."
파엘이 술잔을 들며 말했다.
차례로 술잔을 든 단주들의 시선이, 곧 이안의 앞에 놓인 술잔으로 향했다.
'나는 왜.'
생각하면서도, 이안은 선선히 술잔을 들었다. 미소 지은 파엘이 술을 한 모금 들이켜고는 말했다.
"이제, 우리들을 이 자리에 있을 수 있게 해 주신 두 분에게 감사를 표할 일만 남았군요."
파엘의 시선이 이안과 필립을 차례로 훑었다. 단주들도 마찬가지였다. 표정을 보아하니, 그들은 이미 파엘이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안을 마주 본 파엘이 말을 이었다.
"두 분께는, 연맹의 황금 휘장을 발급해 드릴까 합니다."
"황금… 휘장이요?"
이안이 슬쩍 고개를 갸웃할 찰나, 뒤에 선 필립이 그의 속내를 대변하듯 물었다.
파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연맹의 은인이나 귀빈께는, 금이나 은으로 만들어진 휘장을 발급해 드릴 예정입니다. 합당한 대우를 받으실 수 있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비단 우리뿐만 아니라, 연맹에 소속된 모든 상인에게요."
파엘이 양손을 활짝 펼치며 말을 이었다.
"두 분께 발급해 드릴 황금 휘장은 가장 높은 등급의 휘장입니다. 앞으로 연맹에 소속된 상인들의 모든 물건을 가장 싸게, 그리고 가장 우선 적으로 구매할 권리를 가지게 되실 겁니다. 기본적으로요."
…그러니까, 일종의 VIP란 거네.
이안이 입가에 헛웃음이 번졌다.
생각지도 못한 추가 보상이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적어도 금화 백 개보다는 가치 있어 보였다. 게임에서처럼 바가지를 쓸 일은 없어지지 않겠는가.
"거처가 정해져 있으시다면, 필요한 물건을 요청하시면 직접 가져다드리기도 할 것입니다. 이 경우에는 약간의 추가 비용이 발생할 것이며, 구할 수 있는 물건일 경우에만 가능하긴 하겠지만요. 이 이외에도 여러 가지 크고 작은 혜택을 드릴 예정입니다. 연맹의 은인 분들이시니까요."
어쨌건, 이건 연맹의 입장에서도 마냥 손해는 아닐 터였다.
아무에게나 황금 휘장을 발급해 줄 리는 없지 않겠는가. 심지어 백금룡의 대행자와 루 솔라의 사도가 첫 황금 휘장의 주인이니, 상징적인 기준점이 되기도 하리라.
연맹의 신뢰도를 높이는 건 물론이고, 고객들의 허영심을 자극하기에도 좋겠지.
'감은 별로여도, 이런 머리는 잘 쓴다니까….'
이안이 생각하는 사이, 잠시 숨을 고른 파엘이 입을 열었다.
"황금 휘장을, 받아 주시겠습니까?"
단주들도 숨을 멈춘 채 이안의 입술만 바라보았다.
이안의 대답 여하에 따라, 저들의 계획 역시 달라지게 될 터였다.
필립의 시선이 뒤통수를 간지럽히는 가운데, 이윽고 이안이 술잔을 들었다.
"받아들이겠소."
"다행이군요…."
파엘이 안도를 숨기지 못한 채 말했다. 단주들의 얼굴에도 안도의 미소가 번질 찰나.
"다만."
이안이 덧붙였다.
"연맹이 그분의 이름에 먹칠을 하고 다닌다는 이야기가 들려온다면, 그때는 귀빈이 불청객으로 바뀌게 될 것이오."
"...!"
단주들이 그대로 굳어졌다. 마찬가지로 멈칫했던 파엘이, 이내 한 손을 가슴 앞에 얹으며 허리를 폈다.
"찬란한 여신께 맹세코, 그런 일은 없을 것입니다. 이 자리에는 대형 상단의 횡포와 부조리한 처신에 고통받았던 이들만 있으니. 악습이 되풀이되는 일이 없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 맹세가 지켜지길 바라겠소."
이안이 덧붙인 말에, 파엘은 물론 모든 단주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맹세하리라 덧붙였다.
…사명감 같은 걸 끼얹을 생각까진 없었는데.
이안이 내심 생각하는 사이, 빙긋 미소 지은 파엘이 덧붙였다.
"아시다시피 아직 휘장이 준비되지는 않았습니다만. 미드퍼트에서 제작이 완료되는 대로 발급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서 동행하자고 했던 거구만. 이안의 입꼬리가 비로소 다시 말려 올라갔다.
"그렇게 하시오."
이안이 술잔을 입에 가져갔다. 그가 술을 마시는 모습을 본 파엘이, 마침내 후련하게 미소 지었다.
"자. 이것으로 연맹의 첫 정기 회담은 모두 끝났소. 그럼, 저녁 만찬에서 다시 봅시다."
약속대로, 이안은 백작과의 저녁 만찬에도 참석했다.
필립이 예상한 것처럼 백작은 그가 도시에 더 머물기를 바랐다.
아마 제도에 보낸 보고서의 결과가 나올 때까지 이안이 남아 주길 바라는 것일 터였다.
이안은 딱 잘라 거절하는 대신, 자신과의 대작에서 승리하면 남아 주리라 약속했다.
그리고 만취해 기절했던 백작은, 다음날 오후 늦은 시간이 되어서야 간신히 다시 눈을 떴다.
연맹의 상단들과 이안 일행은, 이미 진작 도시를 떠난 뒤였다.
#279화
"방주 상단이라. 기록된 것보다 마차 수가 적은데. 문제라도 있소?"
의자에 기대앉은 이안은, 심드렁하게 저 앞에서 들려 오는 목소리를 귀에 담았다. 아마도 성문을 지키는 경비조장일 터였다.
미드퍼트. 바스무트를 떠난 지 이틀 반나절 만에, 이 성벽이 높은 대도시에 도착한 것이다.
파엘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마차 절반 이상은 미리 보르타로 돌려보내서 그렇소. 지금은 납품할 소량의 포도주만 싣고 있지. 이번에 도시를 방문한 건 팔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기 위해서요. 주문 제작할 물건들이 있는데, 이곳의 장인들이 워낙 기술이 좋잖소."
"뭐, 틀린 말은 아니지. 그래도 마차가 네다섯 대는 되는 것 같은데. 머물 곳은 구하셨고?"
"손님용 저택을 며칠 빌릴까 하는데. 남은 집이 있소?"
"운이 좋으시군. 마침 딱 한 채가 남은 상태요."
"오. 잘됐군. 그렇다면-"
여기도 더럽게 평화롭겠군.
이어지는 대화를 한 귀로 흘리며, 이안은 짧게 입맛을 다셨다.
시민이나 여행객, 귀족들에게는 천국이나 다름없겠지만.
용병에게 법과 평화는 그다지 달가운 단어가 아니었다.
용병들이 죄다 변방이나 북부로 몰려간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어딘가에 장기적으로 고용될 정도의 실력자가 아니라면, 밥을 벌어 먹고사는 게 쉽지 않았으리라.
'확실히, 침식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계속 이 모양이겠네.'
이안은 중앙에 접어든 이래 몇 번이나 했던 생각을 다시 한번 곱씹었다.
이렇게 보면, 게임에서의 주요 사건들을 미리 해결한 게 무작정 좋은 일만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여기서 볼일을 끝내고 곧바로 제도로 향해야겠다는 생각까지 들지는 않았다.
제도에 발을 들이는 건, 검은 벽이 준동하기 시작한 이후가 되어도 충분했다.
그전까지는 이렇게 계속 떠돌아다닐 생각이었다. 아무리 평화롭더라도, 찾다 보면 서브 퀘스트 몇 개쯤은 더 그를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이 친구가 안내할 거요. 따라가시오."
"고맙소. 그 술은, 아껴 드시고."
그때, 앞에서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졌다. 파엘과 필립이 돌아오고 있었다. 필립이 마부석에 오르는 가운데, 마차 문을 연 파엘이 싱글대며 안으로 들어왔다.
"요 반나절은 심심하셨겠습니다. 제가 없어서."
엘리야의 건너편에 앉은 그가 넉살 좋게 말했다.
언제 그렇게 어려워했었냐는 듯, 파엘은 이동하는 내내 이안의 마차를 들락거렸다. 상단 인원 대부분을 먼저 돌려보낸 뒤엔. 거의 살다시피 했다.
마차가 출발하는 가운데, 이안이 짧게 웃음 지었다.
"조용해서 좋던데."
"며칠만 참아 주십시오. 하하. 그런데, 영애께선 뭘 이렇게 열심히 보고 계십니까?"
파엘이 마주 앉은 엘리야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마석 등을 옆에 놓은 그녀는, 파엘이 온 것도 모른 채 책을 읽느라 여념이 없었다.
사락, 책장을 넘기는 그녀를 돌아본 이안이 묘한 미소를 지었다.
"흑마법사가 탄생하는 과정을 보는 중이랄까."
"과정이라니요…?"
"목 날아간 놈의 일지거든."
"...!"
"원래 진작 읽어 볼 생각이었는데. 단주 덕분에 오늘에야 겨우 봤소."
이안이 태연하게 덧붙이자, 눈을 치켜뜬 채 굳어 있던 파엘이 화들짝 눈을 깜빡였다.
"그, 그게 문제가 아니라…. 이런 위험한 물건을 가지고 계셔서 놀란 겁니다. 아시다시피, 자칫하면 목이 달아날 수도 있잖습니까."
목소리를 낮춘 파엘이 쏟아내듯 말했다. 눈을 깜빡인 이안이 시큰둥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내 목을? 누가?"
"아… 하, 하긴. 경이 어떤 분이신지 알면, 그런 터무니없는 의심을 받지는 않겠군요. 하지만… 그래도 영애께서 이런 불길한 책을 읽으시는 건 좀…."
머쓱하게 대답하면서도, 파엘이 꺼림칙한 눈길로 일지를 바라보았다.
아 그래. 이제 후원자라 이거지.
"검은 벽을 연구하는 건 위험하지. 그러니, 이렇게 미리 조심해야 할 부분들을 알아두게 하는 것이오. 나와 필립이 곁에 있는 동안."
담담하게 덧붙인 이안이, 파엘을 마주 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이 일지엔 사실, 별로 위험한 내용도 없고."
파엘은 못 미더운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빈말이 아니었다.
이안의 아공간에는 저 일지보다 위험한 물건이, 그렇지 않은 것보다 훨씬 더 많지 않던가.
어쨌건, 엘리야는 완전히 몰입하고 있었다. 아마 저 일지의 주인의 최후를 직접 눈으로 보았기 때문일 터였다.
'경각심이 더해지긴 하겠지.'
이안의 뇌리로, 몇 시간 전 읽었던 내용들이 스쳐 지나갔다.
저주 술사의 이름은 다리오였다. 그리고 그는 예상대로, 여전히 청색 마탑 소속이었다. 용병으로 활동한 건 연구 재료를 충당하기 위한 부업이었다.
다른 마탑들이 그렇듯, 청색 마탑도 마력의 황혼기를 극복하기 위해 발악하고 있었다.
다리오도 그랬다.
주문 술식의 효율을 높여 적은 양의 마력으로 주문을 완성할 방법을 찾는 것으로 시작된 그의 연구는, 당연히 실패로 끝났다.
다음은 마석에 담긴 입자화된 마력을 인체에 축적할 방법을 찾는 것이었다. 물론, 실패.
반복된 몇 번의 실패 끝에, 그는 자연스럽게 선후배들과 같은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검은 벽.
검은 벽이 때때로 토해내곤 하는 공허의 마력을 여과할 방법이 있으리란 게, 그의 생각이었다.
그 이후는 보편적인 수순이었다.
공허의 마력 자체에 매료되고, 흑마법의 세계에 발을 들인 것이다.
아마 마탑의 다른 마법사들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는 않을 터였다.
'인체 실험까지 하고 있진 않아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회색 마탑처럼.
생각하며, 이안은 거리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잘 포장된 길을 오가는 행인들은 모두 말끔하고, 걱정이 없어 보였다. 하늘에 점점 짙게 뒤덮이고 있는 구름은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한 얼굴들이었다.
'혼돈이 더 선명하게 느껴진댔지.'
일지 끝부분의 문구를 떠올린 이안이 짧게 혀를 찼다.
저들과 달리, 다리오는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다른 타락자나 마족들도 마찬가지일지도 몰랐다.
아직은 전조만 보일 뿐이지만. 검은 벽의 침식이 시작되면 모든 게 걷잡을 수 없이 변화하기 시작할 터였다.
그때는 중앙의 시민들도 밤과 성벽 밖을 두려워하게 되리라.
"흠흠…."
다소 어색한, 분위기를 환기하고자 하는 의도가 분명한 헛기침 소리가 번진 건 몇 초 지나지 않아서였다.
"그러고 보니, 지금쯤이면 이미 제도에 바스무트의 소식이 전해졌겠군요."
이어진 파엘의 말에, 이안은 다시 그를 돌아보았다. 파엘이 능청스럽게 덧붙였다.
"걱정하는 건 아닙니다. 이안 경께서 증명해 주셨으니, 아무런 문제도 없겠죠."
"연맹의 이름도 알려지고 있겠군. 단주에게 중요한 건 그거잖소?"
"솔직히, 마냥 기쁘지는 않습니다. 이제야 막 결성된 참이니까요. 하지만 어쨌든, 대형 상단들도 우리 목숨을 대놓고 노리기는 어려워지겠지요. 적어도 한동안은 말입니다."
그 이상일걸.
속으로만 대꾸하며, 이안은 어깨를 으쓱였다.
황실이 움직일지 교단이 움직일지는 알 수 없었지만. 타락자를 자객으로 고용했다는 좋은 명분을 그냥 지나칠 리 없었다.
심지어 육각 연맹이라는 대체재까지 생기지 않았는가. 자본을 바탕으로 권력을 휘둘러 대던 상인들의 목줄을 틀어쥐려 할 게 분명했다.
아니면, 그냥 목을 날리고 거기서 쏟아져 나오는 황금을 챙기거나.
"이 도시에, 강철 금고의 지부가 있다던데."
거기까지 생각한 이안이 넌지시 입을 열었다.
그에게도 상인의 목을 날리고 손에 넣은 황금이 있지 않던가.
"어디로 가야 있소?"
"대로를 따라 도시 서쪽으로 가면 있을 겁니다. 교회의 반대편이죠. …설마, 미드퍼트에 있으시다던 볼일이 강철 금고였습니까?"
"그게 전부는 아니지만. 일단은."
이안이 고개를 까딱이며 말했다. 파엘이 낮은 탄성을 흘렸다.
"뜻밖이군요. 은행 같은 곳에는 관심이 없으실 줄 알았는데요."
"돈에 관심 없는 용병도 있소?"
"놀라서 드린 말씀입니다. 물론 강철 금고를 배정받는 건 돈만으로 되는 일은 아니긴 합니다만, 그래도 상당한 재력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니까요.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보관 중인 자금의 규모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글쎄. 금화가 천 개도 넘는다던데."
"처, 천 개요…?"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뜬 것도 잠시, 이내 파엘의 고개가 슬며시 옆으로 기울어졌다.
"그런데 왜, 전해 들은 것처럼 말씀하십니까?"
"그러게. 왜 그럴 것 같소?"
이안이 덤덤하게 되물었다.
그의 검은 눈을 가만히 바라보던 파엘이, 이윽고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시선을 돌렸다.
"의뢰 보상으로 받으시기라도 하셨던 모양이군요. 하하…. 오, 마침 거의 다 왔군요. 보십시오."
과장된 목소리로 말하며 창문을 연 그가 밖을 가리켰다.
"숙소로 쓰게 될 저택입니다."
은근히 놀리는 맛이 있다니까.
안도하는 파엘의 얼굴에 내심 웃음을 삼킨 이안이, 엘리야 쪽의 창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길을 안내하는 경비병이, 나지막한 담장이 딸린 저택의 대문을 열고 있었다.
그 너머로, 작은 마당을 가진 저택의 모습이 드러났다.
다소 빛이 바랬지만, 어쨌든 제법 널찍한 2층 높이의 저택이었다.
마당이 좁긴 해도 마차를 전부 세워둘 수는 있을 정도였고, 집 역시 상단 인원들까지 묵기엔 충분해 보였다.
'상단을 따라다니니 이런 건 편하네.'
"세 분은 위층의 가장 좋은 방을 쓰시면 될 것 같습니다."
이안을 슬쩍 곁눈질하며 말 한 파엘이, 이내 은근하게 덧붙였다.
"오늘은 일을 보기에는 시간이 늦었으니, 쉬면서 한잔하시겠습니까? 바스무트에서도 연회가 있긴 했습니다만, 그때는 자축의 의미는 아니었으니까요."
"그건 단주가 떠나기 전날에 합시다. 오늘은 쉬면서, 미뤘던 다른 일을 처리하고 싶거든."
"무슨 일을 미루셨는데요?"
"영애에게 보여 드릴 흑마법사를 검열할 생각이오. 느긋하게."
"흐, 흑마…."
"그보다 위험한 것도 조금 만질 예정이니까, 되도록이면 내 방 근처로는 아무도 오지 못하게 하시오. 나야 걱정 없지만, 다른 사람들은 혹시 모를 일이잖소?"
말문이 막힌 듯 잠시 입을 뻐끔댄 파엘이, 이윽고 깊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도 경을 귀찮게 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물론, 저도 포함해서요."
***
"오셨군요."
낮. 전실 구석의 탁상 앞에 앉아 있던 파엘이 벌떡 일어섰다.
무장을 완벽하게 갖춘 이안과 필립, 그리고 엘리야가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식사를 마치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바쁘실 줄 알았더니."
걸음을 옮기며 이안이 말했다. 파엘이 어깨를 으쓱였다.
"필요한 일은 오전에 다 끝낸 참입니다. 포도주도 다 넘겼고, 휘장의 제작도 의뢰했고요. 이제 제가 할 건 기다리는 것뿐입니다."
빈말이 아닌 듯, 식당에서 늦은 점심식사를 하는 이들의 소리가 번지고 있었다.
이안이 그대로 문을 나서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바가지 쓰지 않게 옆에서 잘 지켜봐 주시오. 필립 경은 흥정을 잘하는 편이 아니고, 영애는 세상 물정에 어두우시니."
"솔직히 저도 나쁘지는 않습니다. 나리께서 유달리 재능이 뛰어나신 거죠."
태연하게 덧붙인 필립이, 갑주를 걸친 자신의 양팔을 슬쩍 들어 보였다.
"얕잡아 보이지 않기 위해, 갑옷까지 걸치고 나왔지 않습니까."
이안이 파엘을 돌아보았다.
"보셨겠지. 딱 이런 수준이오."
너털웃음을 지은 파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만 믿으십시오. 영애의 보호 장구와 보급품을 구매할 예정이라고 하셨었지요?"
"필립 경이 쓸 좋은 검과, 쓸만해 보이는 마도구나 마법 무구도."
저택을 나서 거리로 들어서면서, 이안이 필립을 돌아보았다.
"돈 잃어버리지 않게 조심하고."
"염려 마십시오. 심장과 가장 가까운 곳에 두었으니까요. 가슴이 묵직합니다. 아주 기분 좋은 묵직함이에요."
필립이 흉갑을 두드리며 말했다. 지금 그의 가슴에는, 이안이 의뢰를 끝내고 받은 금화 전부와 그가 받은 금화까지 들어 있었다.
엘리야의 돈은, 한 푼도 쓰지 않고 제도까지 들려 보낼 계획이었다.
"일이 끝나면, 교회 뒤편의 공방 거리로 오시겠습니까? 근처에 용의 날개라는 이름의 주점이 있는데, 음식이 훌륭합니다. 물론, 술도요. 남부에서 올라온 술들을 취급하는데, 열매부터 약초까지 재료가 아주 다양한 편입니다."
갈림길에서 파엘이 덧붙였다.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녁은 거기서 먹으면 되겠군. 문제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필립이 안면 가리개 사이로 고개를 갸웃했다.
"강철 금고를 가시는데, 문제가 생길 게 있습니까?"
"강철 금고 자체가 문제야."
덧붙인 이안이, 엘리야에게 잘 다녀오라는 눈짓을 보내고는 몸을 돌렸다.
그의 걸음이 조금 느긋해진 건, 일행들과 찢어진 지 몇 분 지나지 않아서였다.
'역시, 혼자가 속 편하긴 하네.'
미드퍼트는 현대인인 그의 눈에도 도시라는 말이 잘 어울렸다.
크고 작은 건물들과 대로 사이사이로 이어진 골목길. 나쁘지 않은 냄새. 길가에 늘어선 가판과, 거리를 오가는 수많은 사람들. 그들은 복장뿐 아니라 종족도 다양했다. 요정은 물론이고 코나 송곳니에 금장식을 건 오크들도 있었고, 한 명뿐이지만 수인도 보였다.
'대륙의 모든 도시가 이 정도 수준만 돼도, 훨씬 살기 편할 텐데.'
이안이 보기에, 중앙의 도시들은 교통의 요지 따위의 의미를 부여하는 게 무의미했다. 모든 도시가 저마다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고, 거미줄처럼 이어진 길의 교차 지점에 위치했다.
제국이 대륙의 패권을 쥘 수 있었던 건, 지형적인 이점뿐만 아니라 그걸 제대로 활용한 방향성에 있는 걸지도 몰랐다.
이 세계가 현실이 되었다는 실감을 하는 건 이런 순간들이었다. 현대인의 관점에선 말도 안 되는 것투성이인 세상에서, 나름의 설득력을 느끼게 되는 순간.
'…설득력은 개뿔.'
거리 저 너머의 건물을 눈에 담은 이안이 입맛을 다셨다.
회백색의 직사각형에 가까운 건물이었다. 활짝 열린 대문 위에는, 금괴를 움켜쥔 강철 손의 조각상이 솟아 있었다.
강철 금고. 방금까지와는 반대로, 이 세계가 게임이었다는 것을 상기시켜주는 광경이었다.
심지어 이안의 기억과도 흡사했다. 그때는 다른 지부였건만.
'죄다 똑같이 짓는 건가.'
생각하며 아공간에서 금고 열쇠를 꺼낸 이안은, 장갑을 벗은 왼손 중지에 깊숙이 끼워 넣으며 걸음을 옮겼다.
활짝 열린 문 옆에는 정복 차림의 덩치 큰 오크가 서 있었다.
"...."
이안이 내민 반지를 확인한 그가 말 없이 고개를 숙였다.
삭막해 보이는 외관과 달리 고풍스럽게 장식된 복도가 이어졌다. 무엇보다 아주 고요해서, 발소리가 메아리치듯 울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 역시, 게임에서 본 것과 그리 다르지 않은 광경이었다. 강철 금고는 모든 지부를 통일성 있게 구성한 모양이었다.
하긴. 사람들은 익숙한 것에서 신뢰감을 느끼는 법이었다.
물론, 겉모습만 비슷한 것은 아닐 터였다.
'내가 거쳐야 할 절차도 비슷하겠지. 더 개 같아졌거나….'
통로는 목조 칸막이로 완벽하게 분리된 세 개의 창구로 나뉘었다.
각 창구 중앙의 커다란 책상 너머에는, 직원으로 보이는 인간이 한 명씩 앉아 있었다.
그들 뒤편의 벽면에는 닫힌 문이 하나씩 있었고, 그 옆에는 정복 차림의 오크들이 석상처럼 서 있었다. 그들은 황색 눈동자만 움직여 이안의 움직임을 좇았다.
이안은 그 시선이 느껴지지 않는 것처럼 태연하게 정면의 책상으로 다가갔다.
건너편에 앉은 직원이 미소 지었다.
"어서 오십시오. 어떤 용무로 방문하셨습니까?"
그린 듯한 미소를 짓는 그를 바라보며, 이안이 담담하게 내뱉었다.
"돈을 찾으러 왔소."
그가 내민 왼손의 열쇠를 확인한 직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직원의 눈짓에, 뒤에 서 있던 오크가 앞으로 나섰다. 몸을 숙인 그가, 책상 아래에 양손을 넣고 뭔가를 꺼내기 시작했다.
누런 팔뚝에 근육과 힘줄이 돋고, 위로 솟은 엄니 끝에 달린 금 사슬이 흔들렸다.
꾸웅….
곧 그가 묵직한 금속 상자를 책상 위에 얹었다. 기하학적인 무늬가 표면을 덮고 있는, 금고처럼 생긴 정사각형의 상자였다. 내부에 아주 복잡한 마력 회로와 기계 장치가 내장되어 있으리라.
이안 쪽의 단면에는 옆으로 길쭉한 구멍 하나가 뚫려 있었다.
"안으로 손을 넣어 주십시오."
선선히 의자에 앉은 이안이 구멍 안으로 왼손을 넣었다.
쿠구구….
곧 상자 내부에서 마력이 느껴졌다. 뿜어져 나온 마력이 그의 손을 훑고 있었다. 정확히는 열쇠를 훑는 것일 터였다.
철컥, 철컥, 철크럭-
상자 내부에서 수많은 태엽 장치들이 돌아가는 듯한 소리가 났다.
이안은 상자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게임에선 클릭 한 번으로 끝이었는데….'
아마 이 인식기는 이 세계의 기술력이 총집결된 물건일 터였다.
난쟁이 명인과 세공 명인, 마법사가 여럿 갈려 나갔으리라.
틱. 틱. 틱.
소리는, 직원이 바라보고 있는 쪽의 단면에서도 이어졌다. 아마도 금고에 보관 중인 금액을 표시해 주는 것일 터였다.
"...!"
태엽 돌아가는 소리가 멈출 때마다 직원의 얼굴에 점점 더 큰 놀람이 번졌다. 그의 뒤에 선 오크도, 황색 눈동자를 굴려 상자와 이안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뒤이어 상자가 고요해졌다.
"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눈을 깜빡이던 직원이, 한 박자 늦게 튕겨 오르듯 일어섰다.
그가 더 깍듯해진 얼굴로 이안을 바라보았다.
"얼마나 찾으시겠습니까, 고객님?"
"전부."
"예…?"
직원의 미소가 그대로 굳어졌다.
당황이 번지는 그의 눈을 바라보며, 이안이 다시 한번 대답했다.
"전부 찾겠소."
#28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