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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40

#230화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어서 가서 말부터 챙겨라. 도망이라도 치기 전에. 두 마리 다 덩치가 상당히 보이던데 조심하고. 마차를 끌고 돌아와."

"염려 마십쇼. 다녀오겠습니다!"

곧바로 몸을 돌린 필립이 달려갔다. 신이 난 듯한 뒷모습.

'꺼림칙 해하더니, 벌써 다 까먹었나 보군.'

내심 헛웃음을 흘린 이안이 테사이아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고티어의 장비를 요리조리 살펴보는 중이었다. 놈의 시신은 어느새 흔적도 남지 않은 채였다.

그의 손짓에 테사이아가 냉큼 달려왔다.

"왜?"

"도시를 수색해 주면 좋겠는데."

"…뭘 찾아야 되는데?"

멈칫한 테사이아가 되물었다.

귀찮은 작업이 되리라 직감한 게 틀림없었지만. 이안은 전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내 부러진 칼. 어딘가 떨어져 있을 거다."

부러진 단죄의 검은 이제 내구도가 거의 다 떨어진 상태였다.

단죄의 일격을 많아야 두어 번 쓸 수 있을 수준이었는데, 이번 싸움에서 그중 한 번을 사용해 버린 것이다.

심지어 힘껏 패대기치기까지 했으니, 어쩌면 이제는 한 번 더 쓰려는 시도만 해도 검날이 산산 조각나 버릴지도 몰랐다.

어쨌건, 그렇다 해도 버리고 갈 수는 없었다.

"알았어. 찾을게."

"죽은 놈이 걸쳤던 로브도. 도시 안 어딘가에는 있을 거다."

"…지금 주위가 어떤 상태인지는 알고 있는 거지, 이안?"

"그래서 너한테 부탁하는 거다. 넌 눈도 좋고 감도 좋으니까. 보다시피 지금은 나도 이 꼴이라, 할 수 있는 건 너밖에 없어."

질색하는 표정이었던 테사이아의 콧대가 점점 위로 올라갔다. 곧 텐시아 아이나스의 미소를 입가에 건 그녀가 내뱉었다.

"이 몸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라니. 별수 없지. 너그럽게 도와주도록 하마."

이 녀석, 이제 저게 본체 같은데.

멀어지는 테사이아를 바라보며 피식댄 이안이, 이내 메브의 시선을 느끼고는 고개를 돌렸다.

"왜 그렇게 보시오?"

"별거 아니야. 그냥, 우리가 용병단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도적 떼가 아닌 게 다행이군."

어깨를 으쓱인 이안이 몸을 돌렸다. 샬롯을 지나쳐 그의 뒤를 따르며, 메브가 말을 이었다.

"걱정이구나. 본 교단에 너를 노리는 자가 있다면, 그 정체를 밝혀낸다 해도 손을 쓰기 쉽지 않을 텐데."

"뭔가 방법이 있지 않겠소."

보아하니, 놈들을 죽인다고 여신의 진노를 살 것 같지도 않고.

어깨를 으쓱인 이안이 고티어의 잔해 옆으로 다가가며 덧붙였다.

"신경 쓰지 마시오. 대교회와 충돌할 일이 있다 해도 경을 끌어들이지는 않을 거니까. 물론, 필립도 마찬가지고."

"그런 일이 생기더라도 네 곁에 서겠다는 얘기다. 이안."

"...?"

멈칫한 이안이 메브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지친 녹색 눈동자가 흔들림 없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본 교단이 너를 타락자나 이단으로 규정한다고 하더라도. 그래서 모든 교단이 적이 된다 해도, 나는 기꺼이 너를 위해 싸울 거야. 아마 그건 필립도 마찬가지겠지."

"...."

그녀를 빤히 바라본 것도 잠시. 이내 이안의 입가에 흐릿한 미소가 번졌다.

"가만 보면, 은근히 낯간지러운 말씀을 잘 하시는군."

"...! 그저, 그렇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다. 네가 방금 같은 생각으로, 곤경에 처하더라도 홀로 모든 걸 해결하려고만 할까 봐."

눈을 치켜떴던 메브가 황급히 시선을 돌리며 내뱉었다.

귀가 불그스름해 보이는 건 착각이 아닐 터였다.

"알아 두겠소. 그런 상황이 온다면, 꼭 경부터 찾도록 하지."

소리 없이 웃으며 손을 뻗은 이안이, 옆에 떨어져 있던 고티어의 양손 검을 주워들었다.

적당한 두께에 곧고 흰 검날은, 여전히 이 하나 나가지 않고 날카롭게 빛났다. 심지어 보이는 것처럼 무겁지도 않았다.

정화자의 진은 강철 검. 무려 유일 등급 양손 검이었다.

"왜 이렇게 튼튼한가 했더니. 진은을 섞어 만든 칼이었군."

"진은…? 말로만 듣던 그 진은말이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던 메브가 홱 고개를 들며 내뱉었다.

드물게도 놀란 표정을 지은 채였다. 당연한 일이었다. 진은은 이 세계에서 가장 귀한 금속 중 하나였으니까.

은처럼 빛나며 강철보다 단단하고, 심지어 가벼웠다. 게다가 신성을 가장 잘 받아들였다. 그래서 신성한 금속이라 불리기도 했다.

물론 그런 만큼 제련하기 어렵고 구하는 건 더 어렵다고 알려져 있긴 했지만. 어쨌건, 그래서 이름난 무구 중에는 운철이나 진은을 섞어 만든 것들이 많았다.

날을 이리저리 확인한 이안이 날 윗부분을 쥐었다.

"경이 쓰기에 딱 좋은 칼이군."

"...!"

그가 그대로 자루를 메브의 품에 내밀었다. 엉겁결에 받아든 메브가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내가…? 난 이미 세검도 받았고, 갑옷까지 받기로 했는데. 그냥 네가…."

"난 저걸 가질 생각이라서."

이안이 저만치를 돌아보며 말했다. 방패와 함께 떨어져 있는 장검. 검집은 물론이고 십자 막이와 자루의 형태로 보았을 때, 저것도 평범한 칼은 아닐 터였다.

"그러니 그건, 그냥 경이 쓰시오."

"이렇게 귀한 검을…."

메브가 탄식하듯 중얼대며 검을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어느새 양손으로 날을 곱게 받쳐 든 채였다.

희게 빛나는 검날을 훑는 그녀의 눈빛이 보석을 바라보듯 일렁였다.

"그래서…."

실소를 삼킨 이안이 일어섰다. 고티어의 전신 판금 갑옷과 샬롯이 분해 중인 나세르의 갑옷을 차례로 돌아본 그가 덧붙였다.

"갑옷은 뭘 가지시겠소?"

"...."

마찬가지로 좌우를 번갈아 돌아본 메브가, 이윽고 시선을 슬며시 내리깔며 읊조렸다.

"하나씩 걸쳐 보고 결정해도… 되겠느냐?"

쑥쓰러워 하고 난리야.

이안이 풀썩 웃음 지었다.

"얼마든지."

***

다각- 다각-

흐릿한 말발굽 소리와 함께, 나세르는 의식을 되찾았다.

가장 먼저 밀려든 건 거대한 상실감이었다. 내면에 늘 느껴지던 가장 중요한 무언가가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

눈을 감은 채 텅 빈 어둠을 응시하던 그는, 곧 입안 가득 느껴지는 쓴맛에 슬며시 미간을 좁혔다. 의식이 선명해질수록 목덜미도 뻐근해졌다. 목과 어깨가 담이라도 온 것처럼 욱신거렸다.

목을 어루만지려던 그는, 곧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양팔이 등 뒤로 교차 된 채 묶여 있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묶은 건지는 몰라도 옴짝달싹도 할 수 없었다.

다리도 마찬가지였다. 양 무릎과 발목이 딱 붙은 채로 묶여 있었다. 팔을 움직이려 하자, 이상하게도 다리가 더 불편해졌다.

"읍…."

이게 뭐냐는 말을 내뱉는 것도 불가능했다. 입에 재갈이 물려 있었기 때문이다. 천을 뭉쳐 만든 것 같았는데, 입안 가득 느껴지는 쓴맛의 정체이기도 했다.

나세르의 뇌리로, 비로소 정신을 잃기 전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찬란한 여신의 손길. 깨달음과 상실. 참회의 기도. 그리고 암전.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거지?

덜컹-

바닥이 한차례 흔들렸다.

나세르가 퍼뜩 눈을 깜빡였다. 비로소 자신이 누운 나무 바닥이 선명해졌다. 그는 지금 마차 안에 있었다. 앞뒤로 마주 보게 놓인 의자 사이의 바닥이었다.

머리맡과 몸 앞에 드리운 기다란 다리가 눈에 들어왔다. 발톱처럼 뾰족한 징이 여럿 튀어나온 강철 장화. 천천히 고개를 옆으로 돌려 위를 올려다본 나세르의 눈동자가 이내 굳어졌다.

"...."

동공이 세로로 길게 찢어진 주황색 눈동자가 그를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파닥거릴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상황 파악이 빠르네. 재미없게."

뒤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나세르가 고개를 꺾어 간신히 뒤를 돌아보았다.

반대쪽 의자 위에 길게 누운 테사이아가, 턱을 괸 손을 까딱이며 미소 지었다.

"안녕, 나세르. 잘 잤어? 너무 오래 자서, 사실 죽은 건 줄 알았지 뭐야."

"...."

"그건 우리 일족이 사냥감을 산채로 포획했을 때 사용하는 매듭이다."

샬롯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나세르와 다시 눈이 마주친 그녀의 눈매가 슬며시 휘어졌다.

"움직일수록 더 강하게 조이지.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군."

샬롯을 올려다보는 나세르의 눈빛은 도리어 차분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옅은 두려움까지 완전히 감추지는 못한 채였다.

샬롯이 만족스럽게 손을 뻗었다. 그녀의 날카로운 손톱 끝이 나세르의 턱 아래에 닿았다.

"난 찬란한 여신께 버림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 둬라. 난 그분을 섬기지만, 그분은 날 품어 주신 적이 한 번도 없거든."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인 샬롯이 미소 지었다.

"그러니 부디, 쓸모없는 말은 많고 중요한 말은 아껴 주길 바라겠다. 우리식 매듭뿐만 아니라, 설득 방식도 경험하게 해주고 싶으니까."

"...."

나세르는 대답하듯 눈을 한 차례 깜빡였다. 샬롯이 그의 턱을 살짝 긁으며 손을 뗐다. 뒤에서 테사이아가 손을 뻗어 재갈의 매듭을 풀었다.

나세르가 입에 물었던 천 뭉치를 뱉었다. 장비를 닦을 때 썼을 법한 더러운 천이었다.

바닥에 침을 탁 뱉은 나세르가, 바닥에 힘없이 머리를 기대며 미소 지었다.

"…이러지 않으셨어도 순순히 협조했을 텐데요."

"순순히는 무슨. 넌 그 반짝이랑 한 패잖아."

테사이아가 핀잔을 줬다. 고개를 꺾어 뒤를 돌아본 나세르가 미소 지었다.

"말투가 많이 바뀌셨군요, 공. 지금 이게 본래의 모습이십니까?"

"응. 게다가 사실 난, 텐시아 아이나스도 아니야."

"…아니시라고요?"

"반가워. 테사이아라고 해. 원로 요정이긴 하니까, 예의는 갖추고."

나세르는 이들이 자신을 살려 보내지 않을 생각임을 직감했다. 그게 아니라면 이런 진실을 선뜻 먼저 털어놓을 리 없었다.

하지만 그는 그저 허탈한 웃음만을 흘릴 따름이었다.

"이것 참… 난처하게 됐군요. 전 그것도 모르고, 아이나스 가에 서신을 보냈거든요."

"서신…?"

테사이아가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을 찰나, 샬롯이 손을 뻗어 나세르의 양 볼을 움켜쥐었다.

옆구리의 단검 자루에 왼손을 얹으며, 그녀가 덧붙였다.

"자세히 말해. 전부."

"…저희는 공이 이안 경을 보호하는 것이라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아이나스가에 연락을 넣었죠. 가문의 원로가 서부에 발을 들인 이유를 소명하고, 공에 대한 정보를 알려달라고요. 이제 보니… 무의미한 일이었군요."

"무의미하진 않지."

대답은 밖에서 들려왔다.

마차 문이 열리고, 지붕에 앉아 있던 이안이 미끄러지듯 안으로 들어왔다.

"덕분에 아이나스가에서 귀쟁이들을 파견할 테니까. 서부를 활보하면서 자신들의 이름을 멋대로 가져다 쓰는 요정을 붙잡기 위해서."

이안이 의자에 걸터앉으며 덧붙였다.

"안녕하십니까. 이안 경."

나세르가 턱을 잡힌 채로 미소 짓는 가운데, 테사이아가 이안을 바라보았다.

"그럼 난 또 쫓기게 되는 거야?"

"글쎄. 어쨌건 네가 원로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으니까. 하기에 따라서 별문제 없을지도 모르지. 내가 피곤해지는 거면 모를까."

허리춤의 검집을 풀어 건너편 의자에 대충 얹은 이안이 덧붙였다.

"아이나스가의 브로치를 어떻게 손에 넣게 되었는지, 대답을 들으려고 할 테니까."

"어쩌면, 귀쟁이들의 멱을 여럿 더 딸 수 있게 될지도 모르겠군."

"그때까지 네가 나와 함께 있다면 말이지."

이안의 말에 샬롯이 미소 지었다.

"기다려서라도 만나고 가고 가면 안 되겠느냐?"

"괜찮은 생각이네. 나도 요정들이 날 어떻게 대할지 궁금하거든."

테사이아의 첨언에 나세르의 눈빛이 조금 어리둥절해지는 사이.

"그건 나중에 생각해도 될 문제야. 그보다 지금은…."

이안이 샬롯을 바라보았다.

샬롯이 기다렸다는 듯 왼손으로 자루를 쥐고 있던 단검을 뽑아 들었다. 길쭉한 단검 날이 나세르의 귀 위에 얹어졌다. 순간 굳어진 나세르의 눈을 바라보며, 이안이 미소지었다.

"우리 대화에 집중하도록 하지. 너에게 들을 말이 아주 많을 것 같거든. 나세르."

마른 침을 삼킨 나세르의 시선이 귀 위에 드리운 검날로 향했다. 곧고 날카롭게 뻗은 흰 검날. 샬롯의 손아귀 사이로 슬쩍, 자루의 금장식이 드러났다.

"낯익은… 단검이군요."

"좋은 칼이야. 날이 얼마나 잘 드는지 시험해 보고 싶을 만큼. 덕분에, 좋은 기회가 생겼군."

샬롯이 부드럽게 속삭였다. 나세르의 시선이 이안에게 돌아왔다.

"이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안 경. 아시다시피, 저는 처음부터 경과 싸울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럼 말렸어야지. 손 놓고 구경만 하는 게 아니라. 방관도 죄다, 몰라?"

테사이아가 놀리듯 말했다. 나세르가 곧바로 대답했다.

"겪으셨다시피, 선배는 고집이 센 분이셨으니까요. 경이 정말 그토록 위대한 용사이신지 확인하고 싶기도 했고요. 저에겐 그게 가장 중요했습니다. 다른 선배들과는 달리."

"다른 선배라는 건, 네가 속한 정화대를 말하는 거냐? 아니면, 따로 뜻을 함께하는 자들?"

"후자… 라고 할 수 있겠군요."

이어진 이안의 물음에 나세르가 곧바로 대답했다.

이안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럼, 바로 그 부분부터 시작하면 되겠군."

"얼마든지 물으십시오. 제가 아는 범위 내에선 전부 답하겠습니다. 다만…."

나세르의 시선이 아래와 옆으로 움직였다.

"이 칼날과 제 얼굴을 쥔 손만 좀 거둬 주시겠습니까? 적어도, 둘 중 하나라도요."

코웃음 친 샬롯이 왼손을 살짝 움직였다. 단검 날이 나세르의 귀와 얼굴을 이어주는 살점을 살짝 파고들었다. 번져 나온 피가 나세르의 귓가를 타고 흘러내렸다.

"꿈도 꾸지 마라. 네가 헛소릴 할 때마다 칼날이 조금씩 내려갈 거고, 네놈 눈깔에 신성이 맺힌 순간 이 손이 바로 네 목을 꺾을 거니까."

"그래서라면… 더더욱 이러실 필요가 없습니다."

씁쓸하게 미소 지은 나세르가, 이안을 바라보며 덧붙였다.

"저는 더 이상 신의 사도가 아니니까요."

#231화

이안의 미간이 설핏 좁아졌다.

"뭐, 성흔이 사라지기라도 했단 거냐?"

"…예."

나세르가 힘없이 대답했다. 성흔을 두고 거짓말을 할 리는 없었다.

이안의 눈빛이 순간 묘해졌다.

'빛을 섬기고 교리와 율법을 따르면, 루 솔라도 멋대로 어쩔 수 없는 거 아니었나?'

뭔가가 더 있나.

지금까지 본 바, 이 세계의 신들은 두 가지 부류로 나눌 수 있었다. 신도를 필요로 하는 신과 아닌 신.

카르하나 공허의 고대신 같은 부류가 후자였고, 루 솔라는 대표적인 전자였다.

신도들의 신앙으로 막대한 신격을 유지하는 만큼, 그녀 역시 교리와 율법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았다.

빛은 만물을 두루 비춘다는 말은, 사실 루 솔라에게는 족쇄나 다름없는 것일 터였다.

"웃기네. 그 반짝이한테는 축복을 잘만 내리더니. 너한테는 왜 그랬대."

그때, 테사이아가 비웃듯 말했다. 나세르가 짧게 침음했다.

"글쎄요. 지금에 와선, 짐작 가는 부분이 너무 많군요. 이안 경과 대적해서일 수도. 이게 정말 옳은지 의구심을 품고 있었으면서도 호기심 때문에 방관해서일지도. 어쩌면 교만했던 벌을 받은 것일지도 모릅니다. 저는 여신의 총애를 받는다고 자부하며 살아왔으니까요."

본인도 정확히 모르는 건가.

이안의 입가에 옅은 헛웃음이 스쳤다.

하긴. 신들과 관련된 부분은 공허와 마찬가지로 모호한 부분이 너무 많았다.

아는 것이라 봐야 대부분 추측이었고, 알지 못하던 새로운 법칙이나 예외적인 경우도 얼마든지 튀어나올 수 있었다.

루 솔라가 자신의 신도조차 아닌 이안에게 사도를 제안하거나, 카르하가 사도가 아닌데도 멋대로 문신을 새겨 축복을 내리는 것처럼.

'확실한 건, 카르하 그 새끼는 아주 속이 편할 거란 사실 뿐이군.'

물론 잘못 나대다가 악신으로 규정되기라도 한다면 공허로 추방될 수밖에 없긴 하겠지만.

그가 아는 카르하라면 그런 건 신경도 쓰지 않을 게 분명했다.

그런 걸 두려워했다면, 루 솔라의 사도와 싸울 때 축복을 내리지도 않았으리라.

"뭐든, 저도 모르는 사이에 죄업이 쌓이고 있었으리란 건 분명합니다. 그러니 직접 임하신 때에 그 대가를 치르게 하신 거겠죠."

"직접…?"

이어진 나세르의 혼잣말에 가까운 중얼거림에, 테사이아가 눈을 깜빡였다.

"모르셨습니까? 아마 이안 경도 느끼셨을 텐데요."

나세르가 오히려 되물었다. 샬롯과 테사이아의 시선이 동시에 이안 쪽으로 돌아왔다.

"그랬어, 이안?"

"그랬지."

"아니, 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얘기를 안 해 줬단 말야? 뭔데? 신이랑 대화라도 나눴어?"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런 건 아니고. 사도가 될 뻔 했는데, 거절했다."

"...!"

샬롯의 입이 순간 벌어지는 가운데, 마부석과 이어진 간이 창문이 벌컥 열렸다.

"뭐라고요? 여신의 계시를 거부하셨단 말씀이십니까? 왜요?"

필립이었다.

새끼, 역시 다 듣고 있었군.

이안은 제안을 거절한 게 처음이 아니라거나, 그 어떤 신도 섬길 생각이 없다는 식의 대답은 굳이 하지 않았다. 그저 테사이아에게 턱짓했을 뿐이었다.

테사이아는 시선도 돌리지 않고 손을 뻗어 창문을 닫아 버렸다.

다시 나세르를 바라본 이안이 입을 열었다.

"어쨌든, 그럼 넌 이제 성기사도 뭣도 아니란 거군. 신에게 버림받은 존재일 뿐."

"…예. 그렇습니다."

"그럼 널 어떻게 다루건 아무런 걱정도 할 필요가 없겠네."

"...!"

나세르가 그렇게 해석할 줄은 몰랐다는 듯 눈을 치켜떴다.

샬롯이 슬쩍 송곳니를 드러내며 미소짓는 가운데, 화들짝 정신을 차린 나세르가 내뱉었다.

"제, 제겐 죽음보다 비극적인 일입니다만. 그렇다 해서 제가 더 이상 찬란한 여신을 섬기지 않는 건 아닙니다. 오히려 그분의 뜻을 비로소 확실하게 알게 됐죠."

잠시 이안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본 그가 말을 이었다.

"여신께선 슬퍼하고 계셨습니다. 우리가 서로에게 칼을 겨눈 것을 마음 아파 하신 게 분명해요. 경도 느끼셨을 텐데요."

"뭐, 기분이 좋으신 것 같진 않더군."

이안의 덤덤한 대답에, 나세르가 고개를 간신히 조금 끄덕였다.

"그건, 선배들의 확신이 틀렸다는 의미나 다름없습니다. 여신께선 이안 경이 죽기를 바라지 않으시는 거예요. 계시까지 내리셨다니, 더더욱 확실해졌군요. 경은 대륙을 다시 밝히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분이신 겁니다."

나세르의 눈빛이 한순간 번쩍였다.

이안도 여러 번 본 적 있는 눈빛이었다. 대부분 광신도들에게서.

이 정신 나간 놈의 내면에 새로운 확신이 꽃핀 모양이었다.

심지어 고티어의 죽음을 그다지 슬퍼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아마 당연한 최후를 맞았다 여기는 것이리라.

어쨌건, 불만을 가질 이유는 없었다.

"그럼 증명해 봐. 본론으로 돌아가지."

당장 써먹기엔 더 쉬워질 테니까.

슬쩍 샬롯 쪽을 돌아본 나세르가, 그녀의 손길과 검날을 치우는 건 포기한 듯 입을 열었다.

"…예. 알겠습니다."

"너와 뜻을 함께하는 자들이 있댔지. 너희를 뭐라고 부르지?"

"저희는… 이제는 그들이라고 해야겠군요. 그들은 여명단이라는 조직입니다."

"정화대로만 이루어져 있나?"

"대부분은요. 제가 알기론."

대답이 묘하게 두루뭉술했다.

눈매를 살짝 찌푸린 이안이 덧붙였다.

"규모는?"

"정화대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고, 어떤 식으로 활동하는지 알고 계십니까?"

"…계속 그렇게 질문해 주면 좋겠군. 내 친구가 아주 바라고 있는 상황이야."

기다렸다는 듯 샬롯이 단검을 조금 더 움직였다. 검날이 살을 더 깊이 파고들었다.

뜻밖에도 출혈은 그리 늘지 않았지만, 어쨌건 나세르에게 충분한 고통을 준 건 분명해 보였다.

눈썹을 바르르 떨며 고통을 참은 나세르가 내뱉었다.

"심문이 아주 능숙하시군요. 경께서 용병 출신이시란 건 알고 있긴 했습니다만…."

"난 지금도 용병이야. 하나 더 알려 주자면, 난 루 솔라를 섬기지도 않지. 심지어 지금은 해도 졌고. 그러니 대답이나 똑바로 하는 게 좋을 거야. 말 돌리지 말고."

예, 하고 대답하며 숨을 고른 나세르가 이내 말을 이었다.

"정화대는 소문처럼 교단의 정계 군단이 아닙니다. 전원이 한곳에 모이는 일도, 서로 간의 교류가 잦지도 않죠. 극단적으로는 개인. 보통은 조 단위의 소규모로만 나뉘어 개별적인 임무를 수행합니다. 왜냐하면 정화자 대부분의 활동지는-"

"검은 벽 인근이지. 벽을 넘어온 마물이나 놈들의 둥지, 광기가 만들어낸 마경을 정화하는 게 너희 주요 임무니까."

"…정확하게 아시는군요. 언제든 죽을 수 있는 임무들을 수행하는 만큼, 상하 관계는 물론 이름, 명성, 서로 간의 관계에도 집착하지 않습니다. 그런 건 영혼을 약하게 만드니까요."

"내부적으로도 폐쇄적인 조직이란 말을 하고 싶은 거군."

이안이 심드렁하게 내뱉었다. 나세르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사실상 같은 조원이나 임무를 하달하는 사제님을 제외하면, 정화자들은 서로 접점이 없습니다. 함께 합동 임무를 수행하고도 이름도 모른 채 헤어지는 경우도 있죠. 당연히, 정화대의 총원이 몇 인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건, 여명단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정확한 규모는 모른다고?"

"예. 저희, 아니 그들은, 내부에서 선택된 소수만이 입단하게 되는 비밀 결사이며, 그 존재를 발설하지 않는 것이 첫 번째 철칙입니다."

"…한 마디면 끝날 대답을 길게도 하는군."

이안의 목소리가 서늘해졌다.

"모른다고만 대답하면 믿지 않으실 것 같아서-"

나세르가 다급히 대답하던 그때, 샬롯이 아무런 예고도 없이 왼팔을 움직였다. 단검 날이 삽시에 귀 옆으로 튀어나오고, 다음 순간 나세르의 귀 끝이 비스듬하게 잘려나갔다.

"...!"

이를 악문 나세르가 코로 거친 숨을 내쉬는 가운데, 이안이 샬롯을 돌아보았다. 눈을 깜빡인 그녀가 내뱉었다.

"신호를 보낸 거 아니었나?"

…그래도 나름대로 유용한 정보였다고 말하려 한 건데.

내심 생각한 것과 달리, 이안이 건조하게 내뱉었다.

"마차 안이 너무 더러워지진 않았으면 좋겠다만."

"…아, 그래. 주의하지."

샬롯이 머쓱하게 대답하는 그때.

"하여간, 어떻게든 피를 보고 싶어 한다니까."

손을 뻗어 떨어진 귓 조각을 마차 창밖으로 던져 버린 테사이아가,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건넸다.

단검을 마차 벽면에 꽂은 샬롯이 손수건을 받아 나세르의 잘린 귀를 콱 움켜 쥐었다.

"읏…!"

나세르가 부들댔다. 물론, 샬롯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여전히 그의 턱은 샬롯의 손에 잡혀 있었다.

눈을 감은 나세르가 숨을 골랐다. 어느새 그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축축했다. 그가 고통을 추스를 시간을 준 이안이, 이윽고 다시 입을 열었다.

"여명단의 목적은 뭐지?"

"…필연적인 어둠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아침을 밝히는 것입니다."

나세르가 숨을 고르며 내뱉었다. 어쨌건, 덕분에 잔머리를 굴릴 여유가 없는 건 분명해 보였다.

"이건 좀 더 자세히 들어야겠군."

"대륙이 어둠에 뒤덮이는 건,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피할 수 없는 필연적인 결과라더군요.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려 애쓰는 것이 아니라, 그 이후를 준비하고 대비하는 게 신의 사도로서 옳은 선택이라는 겁니다."

"그럴듯한데. 누가 그렇게 말했지?"

"제게 입단을 명령한 선배가요. 이름은-"

"그건 나중에. 그래서, 너희가 어둠 이후에 찾아올 여명이란 거군."

"여명이 되고자 준비하는 자들이죠. 혼돈의 시대가 열리면 모든 어둠의 족속들이 본모습을 드러낼 테니까요. 그때 우리가 여명의 한 가닥으로서 앞장서 그것들을 소탕할 거랬습니다. 그러면 모든 법도가 바로 서고, 새로운 빛의 시대가 열릴 것이라고요."

"그래… 그럴 듯도 하고, 솔깃하기까지 한 얘기였겠군."

이안이 중얼댔다. 이름도 없이 평생 어둠과 싸워야 하는 정화자들에겐, 그야말로 달콤한 속삭임이었으리라.

한결 차분해진 얼굴로 나세르가 대답했다.

"호기심이 더 컸습니다. 정말 그런 어둠이 찾아올지. 그리고 새로운 빛의 시대가 열릴 수 있을지 확인하고 싶었죠."

호기심으로 사람도 죽일 새끼일세. 속으로 읊조린 이안은, 이내 짧게 실소했다.

이 세계엔 그런 인간들이 발에 차이게 많았으니까.

"그래서, 너희 단장은 누구지?"

"모릅니다."

"너희를 이끄는 자가 누군지도 모른다고?"

이안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때 샬롯이 손수건을 쥔 손에 힘을 줬다. 손수건 위로 불그스름한 빛이 번졌다. 인상을 잔뜩 찌푸렸던 나세르가 신음하듯 내뱉었다.

"아시다시피 교단 내부에도 타락자들이 암약하고 있습니다. 수없이 솎아냈음에도 남은, 아주 신중하고 사악한 자들이죠. 그러니 개개인이 아는 게 많아지면 전체가 위험에 빠질 확률도 높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제, 제가 아는 건 소문이 전부입니다."

"소문?"

"교구장 중 하나라더군요. 그게 전부입니다. 전 단장을 실제로 본 적도 없습니다. 여명단을 소집하고 임무를 하달하는 건, 대주교라 불리는 분이시고요."

"…그자의 정체도 모르긴 마찬가지겠군."

"예. 그분은 저희와는 식사도 함께하지 않습니다. 확실한 건, 꽤 젊다는 것뿐입니다. 많아야 서른 안팎일 겁니다."

이안이 짧게 코웃음 쳤다.

"호기심이 참 많아 보였는데. 그 부분에선 쓸데없이 선택적이었군."

"그보다 더 중요한 일들이 늘 기다리고 있었으니까요. 암흑 성물을 가져간 북부의 용살자나, 루 사드의 흡혈 일족 같은."

"그들에 대해서도 이번에 알게 된 거냐?"

"예. 경이 그들을 멸족시키신 덕분입니다."

테사이아가 짧게 코웃음을 흘렸다.

"날 필요로 한 건 너희들이었는지도 모르겠네."

"예…?"

"여명단이 마족을 부리고 있었는데,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나?"

테사이아가 뭔가 더 내뱉기 전에, 이안이 말을 잘랐다.

"필연적인 결과가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그 결과를 조금이라도 통제하기 위해 여러 가지 시도를 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물론 놀라지 않은 건 아닙니다만…."

나세르가 씁쓸하게 덧붙였다.

"당시에는 물을 분위기가 아니었습니다. 저는 입단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아서, 선뜻 먼저 입을 열 위치가 아니기도 했고요."

이안의 표정이 묘해졌다.

"…설마, 날 따라온 게 첫 번째 임무라던 가 그런 건 아니겠지."

"세 번째입니다. 두 번째가 글루미르의 조사였고요. 정화자로서의 사명에도 충실해야 하기에, 여명단의 소집은 자주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어쩐지, 모르는 게 너무 많다 싶더라니. 비로소 짧게 입맛을 다신 이안이 읊조렸다.

"뒤에서 구경만 한 이유가 있단거군…."

"…그건 제 경력과는 무관한 부분입니다. 처음부터 임무는 경과 싸우는 게 아니었습니다. 선배들의 생각은 달라 보였지만, 대주교께선 경과 적대하지 말라고 당부까지 하셨습니다."

불에 기름을 부은 거군.

이안이 짧게 코웃음을 쳤다.

나세르의 조금은 어리둥절한 시선에, 그가 이내 내뱉었다.

"그 대주교란 작자가 몰랐을 것 같지 않거든. 너희와 내가 마주치면 어떻게 될지."

"…충돌이 일어날 걸 알면서도 보냈을 거란 말씀이십니까?"

"네 눈에도 보인 걸 못 볼 정도의 병신이 아니라면."

나세르의 입이 또 한 번 설핏 벌어졌다. 이윽고 그가 내뱉었다.

"하지만, 어째서요…? 그건 아무런 이득도 되지 않는 일입니다."

"그건 네 입장이고. 그자에겐 어떤 결과가 나와도 이득이었을 거다."

"그게 무슨…"

헛똑똑이가 따로 없군.

실소를 흘린 이안이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너희가 내 손에 죽으면 백금룡의 대행자에게 다른 꿍꿍이가 있다는 확신을 단원들에게 심어줄 수 있었겠지. 너희가 날 죽이면, 거슬리는 존재 하나가 사라지는 거였을 테고."

"...."

입을 몇 번 달싹인 나세르가, 이윽고 내뱉었다.

"우리를 일종의 희생양으로 삼은 거란 말씀이십니까…?"

"너희 식으로는 그런 걸, 순교라고 부르는 것 같던데."

나세르의 눈이 흔들렸다. 신에게 버림받은 것과 비슷한 수준의 충격인 모양이었다. 이안은 코로 짧게 웃었을 뿐, 신경도 쓰지 않았다.

물론, 그 대주교란 놈도 정화자 둘 중 하나가 포로로 잡히리란 것까진 예상하지 못했을 터였다.

신의 사도가 사로잡힌다는 건 어지간해선 하기 힘든 생각일 테니까. 그 포로가 이렇게 아는 걸 전부 털어놓으리란 것도, 당연히 전혀 생각지 못했을 터였다.

'어차피 제대로 아는 건 별로 없는 놈이긴 하지만….'

조각난 정보들만으로도 충분히 유용했다. 이안이 잠시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

"그런데 너희는 이안을 왜 그렇게 싫어한 거야? 백금룡은 또 왜 싫어하고? 교단의 성자잖아?"

테사이아가 자연스럽게 끼어들었다. 이안의 시선에, 그녀가 어깨를 까딱였다.

"계속 궁금했단 말야."

"…이안 경을 싫어하는 건."

조금은 지친듯한 목소리로 내뱉으며, 나세르가 이안을 바라보았다.

"아마도 경이 부러워서였을 겁니다. 정화자 대부분은 그 이름이 알려지는 일 없이, 어둠과 싸우다 죽어가니까요."

"그야말로 인간다운 이유로군."

샬롯이 한심하다는 듯 읊조렸다. 이미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던 이안은 딱히 놀라워하지 않았다.

테사이아가 코웃음을 흘렸다.

"백금룡도 그래서 싫어한 거야? 단순하긴."

"그건 아닙니다. 교단에는 백금룡의 저의를 의심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런 이들을 내부에서는-"

"순수 교도라고 부르지."

이안이 툭 내뱉었다. 나세르가 놀란 듯 그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잘."

"…그러시군요. 어쨌든, 아예 근거 없는 주장은 아닙니다. 백금룡은 대부분의 시간을 둥지에서만 보내시니까요. 그 누구도 알지 못하며, 신의 시선조차 닿지 않는 은신처에서."

가져다 붙이긴.

이안은 낮게 웃음 지었다.

엄청난 힘을 가진, 심지어 죽지도 않는 존재라면 껄끄러워하는 자들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자주 보이면 자주 보여서. 보이지 않으면 보이지 않아서.

"그런 주제에, 백금룡이 만든 물건은 잘만 쓰더군."

이안의 핀잔에, 멈칫한 나세르가 미소 지었다.

"전 딱히 그분께 악감정이 있진 않습니다만…. 변명하자면 어둠과 맞서 살아남기 위해선 뭐든 이용해야 하는 법입니다. 그게 백금룡이 마법을 새긴 망토라거나, 용의 숨결로 제련한 검이라면 말할 것도 없고요."

"미치광이 주문쟁이들이 만든 무구도 그렇겠고."

"…예. 물론, 선배들은 그런 이유가 전부가 아니었겠지만요."

"뭐가 더 있나?"

"백금룡과 싸우게 될 상황도 염두에 둔 걸 겁니다. 다들 대륙에 어둠이 내려앉으면, 그가 본색을 드러내리라 여겼으니까요."

"난 또 무슨…."

코웃음을 흘린 이안이 말했다.

"장담하는데. 그 양반은 너희 전부가 몰려가도 못 죽여."

"선배들은 가능성이 아예 없다 여기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저 조차도요."

"...?"

이안의 시선에, 나세르가 도리어 어리둥절하게 되물었다.

"진언 마법은 진언 마법으로 막을 수 있으며, 용의 마력이 깃든 무기는 용에게도 치명상을 입힐 수 있다고 알려져 있으니까요. 용은 다른 용으로 죽이라는 옛말, 모르십니까?"

#232화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전혀 몰랐는데."

그가 아는 건 용의 뼈를 섞어 만든 무기에 용의 마력이 깃든다는 것 정도가 전부였다.

게임 속, 용의 무덤에서 구한 뼛조각으로 장비를 만든 후에 알게 된 사실이었다.

거기서도 그게 용에게 추가적인 대미지를 입힌다든가 하는 설명은 전혀 적혀 있지 않았었는데.

'또 써 놓지 않은 설정인가.'

문득, 아르케아스에게 넘겼던 타후므리트의 뼈가 떠올랐다.

…역시, 한 조각은 달라고 할 걸 그랬나.

눈을 깜빡인 나세르가 입을 연 건 그때였다.

"하지만 경은 이미, 북부에서 악룡을 죽이지 않으셨습니까…?"

"그때는 백금룡께서 그놈의 가슴을 열어 주셨어. 덕분에 심장을 찌를 수 있었고."

"그랬군요…. 들은 대로, 그 과정이 순탄하셨을 것 같진 않습니다."

"몇 번이나 죽을 뻔했지. 그전에도, 그 후에도."

덤덤하게 내뱉은 이안의 고개가 슬며시 나세르 쪽으로 기울어졌다.

"지금 너처럼."

"...."

나세르가 순간 숨을 멈췄다. 쌍꺼풀이 짙은 눈을 부릅뜬 그가, 이안의 눈동자를 헤집듯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 속에서 일말의 희망이라도 찾고 싶다는 듯이.

하지만 이안의 눈은, 어둑어둑한 마차 내부보다도 더 새카맣게 가라앉은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살려 주십시오."

이윽고 나세르가 내뱉었다. 이안이 입꼬리만 당겨 미소 지었다.

"식상한 유언이군."

"부탁드립니다. 제가 속죄할 기회를 주십시오. 찬란한 여신과 경께 지은 죄업을 제 손으로 씻을 수 있도록요. 이대로는 제 영혼은 구원받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니 부디…."

재빨리 말을 이은 나세르가, 애써 지은 게 분명한 미소를 입가에 걸었다.

"경을 모실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뭐, 종자라도 되겠단 거야?"

테사이아가 물었다. 나세르가 곧장 대답했다.

"하인이라 해도 상관없습니다. 저는 더 이상 성기사가 아니며, 정화대는 물론 여명단의 일원도 아닙니다. 성흔이 사라진 순간부터 그랬고, 경께 모든 걸 털어놓은 순간부터 돌이킬 수 없어졌습니다. 제가 희생양이었다는 걸 알게 된 이상 그럴 생각도 없고요. 그러니 부디… 기회를 주십시오."

"흠…."

이안이 짧게 침음하며 턱을 어루만졌다. 그를 올려다보는 나세르의 눈이 절박하게 일렁였다. 그 시선을 무심하게 마주하던 이안이, 샬롯을 돌아 보았다.

"일단 다시 재워."

"그러지."

샬롯이 나세르의 귀에 대고 있던 손수건을 테사이아에게 던졌다.

비스듬하게 잘린 나세르의 귀는 이미 딱지가 앉고 있었다. 성흔이 사라졌다 해도, 축복을 받아 강해진 육체까지 단번에 되돌아간 건 아닌 모양이었다.

샬롯이 왼손을 치켜들자, 나세르가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이안 경, 부디-."

샬롯의 손날이 나세르의 뒷목에 박혔다. 나세르가 그대로 눈을 까뒤집었다. 샬롯이 놈의 얼굴을 쥔 손을 툭 놔버리는 사이.

"갈수록 태산이군. 그렇지 않소?"

이안이 마차 문을 열며 내뱉었다. 어느새 어두워진 밖의 풍경이 활짝 드러나는 가운데, 지붕 위에서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래. 여명단이라…. 정말, 타락자들만이 문제가 아니었군."

마차 지붕에서 안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메브였다. 마부석으로 이어진 간이 창문이 기다렸다는 듯 다시 열렸다.

"여간 위험한 자들이 아닙니다. 필연적인 어둠을 받아들이다니요. 심지어 정화자들이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니…."

필립이 숨 쉴 틈 없이 내뱉었다. 설핏 드러난 표정을 보아하니 어지간히 큰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이안이 어깨를 까딱였다.

"그게 순리라 여기는 거겠지. 순리가 되도록 만들고 싶거나."

"저들의 계획대로라면 혼돈의 시대가 찾아올 겁니다. 그 과정에서 백성들이 수없이 희생될 테고요. 루 솔라를 섬기는 자들이 그런 걸 전혀 고려하지 않다니…."

"뭐, 내가 알기론 그런 걸 신경 쓰는 사제가 더 귀한 것 같은데."

"그건… 그렇긴 합니다만."

"어쩌겠어. 그게 너희 교단인걸."

테사이아가 태연하게 덧붙였다. 필립이 대답 대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필연적인 어둠과 새로운 아침이라…."

메브의 읊조림이 이어졌다.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린 이안이 내뱉었다.

"비슷한 말을 어디서 들어 본 것 같지 않소?"

"그래. 완전히 같지는 않다만."

"일하는 방식도 어디서 많이 본 방식이고."

이안이 덧붙인 말에, 메브를 제외한 일행 전체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모여들었다.

"여명단도 원탁 의회의 일원일 거란 말씀이시군요."

필립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내뱉었다. 얜 또 당연한 추측을 대단한 것처럼 하네. 이안이 생각하는 사이, 지붕 위에서 대답이 이어졌다.

"타락자가 정화자로 바뀌었을 뿐, 많은 부분이 비슷하니까. 이용당한다는 자각도 없게 이용하고, 계획에 따르는 희생이나 피해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 점이 특히."

"그렇소. 적어도…."

이안이 기절한 나세르를 내려다보며 덧붙였다.

"놈들의 윗대가리는 그렇겠지. 가만…."

그렇다면?

문득 묘한 눈빛이 된 이안이, 턱을 어루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물론, 그 사이에도 대화는 멈추지 않고 이어졌다.

"백금룡까지 의심하는 자들이 심지어 많기까지 하다니. 순수 교도는 대체 또 뭐랍니까. 아무래도 본교단은, 제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곳인 모양입니다."

"그러니 늘, 계시를 받던 순간을 잊지 말거라. 필립. 네 어떤 마음이 여신의 눈에 들었던 것인지."

"염려 마십시오. 제가 어떤 분들께 배웠는데요."

대부분 필립과 메브였다. 오래 묵묵히 듣기만 한 만큼 참은 말이 많은 모양이었다.

"…해 볼 만할 것 같은데."

그사이 생각을 끝낸 이안이 중얼댔다. 그를 기다리던 샬롯이 비로소 입을 열었다.

"그래서, 이놈은 어쩔 거지?"

마차 밖이 한순간에 조용해졌다. 이안의 대답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리라.

이안이 시선도 돌리지 않은 채 내뱉었다.

"글쎄. 고민 중이야."

"마지막 말은 거짓말 같지 않았어. 내가 볼 때, 털다 보면 나올 얘기도 더 있을 것 같고."

테사이아가 덧붙였다.

표정을 보아하니 정말 그래서 살리려는 게 아닌 건 분명했다. 그저, 새로 생긴 장난감이 빨리 사라지는 게 싫을 뿐이리라.

가만 보면, 천상 귀쟁이라니까.

코로 웃은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써먹을 게 있을 것 같으니까. 당장은 살려 두도록 하지."

샬롯이 짧게 혀를 날름댔다. 그녀는 나세르를 죽이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이안은 신경 쓰지 않고 시선을 돌렸다.

"적당한 곳에 야영지를 꾸려라, 필립."

"예. 나리."

"그리고 경을 제외한 나머지는, 이번에 새로 얻은 방어구들을 다 벗어 놔. 필립, 너는 반대로 전에 쓰던 걸 벗어 두도록 해. 전부."

"전부요? 왜요…?"

"내일 아침에, 너도 전신 판금 갑옷을 입을 거니까."

"제가요?"

필립이 고개를 돌려, 간이 창문 너머로 이안을 바라보았다.

아공간에서 강철 장갑을 꺼내며, 이안이 미소 지었다.

"그래. 잘하면, 백작이 스스로 자기 정체를 불게 만들 수도 있을 것 같거든."

"...?"

***

"...."

나세르는 천천히 눈을 떴다.

얼굴에 닿는 마른 흙의 감촉. 목덜미가 뻐근하게 아프고 팔다리가 저렸지만, 이번에 그의 눈에 가장 먼저 떠오른 감정은 안도였다.

아직 살아있었으니까.

"생각보다 가볍긴 합니다만. 그래도 어색하군요. 감각이 둔해지는 느낌이에요."

"익숙해지면 안정감으로 바뀔 거야. 그때부턴 싸우는 방식도 달라지게 되지. 알려 주마. 오늘 밤부터."

필립과 메브의 목소리를 귀에 담으며, 나세르는 눈동자를 굴렸다.

말라비틀어진 나무 아래였다. 퀴퀴한 곰팡내 사이로 아침 이슬이 스쳤다. 이곳에 야영지를 꾸리고, 어느새 날이 밝은 모양이었다.

"잘 잤나?"

"...!"

이어진 샬롯의 목소리에, 나세르가 소스라치게 눈을 치켜떴다.

억센 손길이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이안에게 감사해라. 운 좋은 놈."

샬롯이 나세르를 꿇어 앉혔다.

여전히 결박된 팔다리는 감각이 거의 없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나세르는 고통을 호소하는 대신, 그저 앞에 펼쳐진 야영지의 전경을 눈에 담았다.

불씨만 남은 모닥불 너머, 전신 판금 갑옷을 걸친 필립이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서 있었다.

"저것도, 낯이 익은 갑옷이군요."

나세르가 읊조렸다. 흉갑만이 고티어의 것일 뿐, 나머지는 전부 그가 걸치던 장비였다.

"경. 나란히 서 보시오."

그때, 나세르를 비스듬하게 등진 채 앉아 있던 이안이 말했다. 옆에서 메브가 다소 머쓱한 얼굴로 일어섰다.

나세르의 것이었던 흉갑은 그녀가 걸친 채였다. 물론, 나머지는 고티어의 유품이었다.

"투구도 써 보시겠소?"

"…그러지."

읊조림과 함께, 메브의 흉갑 좌우에 박힌 마석이 한차례 깜빡였다. 철컹, 뒤로 젖혀져 있던 투구가 솟아나 그녀의 머리를 덮었다.

뒤이어 안면 가리개까지 좌우에서 튀어나와 메브의 얼굴을 가렸다. 끝이 뾰족한, 눈구멍과 숨구멍만 작게 뚫려 있는 안면 가리개.

나세르가 쓰던 투구였다.

이안이 덧붙였다.

"이질감은 없소?"

"없다. 전혀."

메브가 대답하는 가운데, 자신의 몸을 이리저리 살피던 필립이 말을 받았다.

"확실히, 보통 명품이 아니군요. 크기가 다른 부위도 연결 고리가 잘 맞고, 조절도 편리하고요. 분명 마탑의 고위 마법사들과 난쟁이 명인의 합작품일 겁니다. 이걸 팔면 대저택도 사겠군요."

나세르가 그의 말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테사이아가 옆에서 그들을 향해 다가간 건 바로 그 직후였다.

"이것까지 뒤집어쓰면 더 그럴듯할 거야."

그녀가 품에 안고 있던 빛바랜 천 덩어리를 내밀었다. 본교단의 로브였다. 메브와 필립이 말없이 로브를 뒤집어쓰기 시작하는 사이.

"일어났군. 필립."

나세르를 돌아본 이안이 내뱉었다.

나세르가 눈을 끔뻑였다.

"필… 립이요?"

"당분간, 대외적으로는 그게 네 이름이다."

"예…?"

나세르가 고개를 갸웃하는 사이, 짧게 혀를 찬 샬롯이 단검을 뽑아 들었다.

투둑, 검날이 줄을 끊자 비로소 나세르의 팔다리가 자유를 되찾았다.

물론 곧바로 움직일 수는 없었다. 뻣뻣하게 굳은 데다 저리기까지 해서, 나세르는 그저 손가락만 까딱일 수 있었다.

샬롯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안심하지 마라. 내가 항상 지켜볼 거니까. 헛짓거릴 한 순간, 네 영혼이 구원받을 길은 영영 사라지게 될 거야."

욕을 먹고 있음에도, 나세르의 입가에는 미소가 맺혔다.

"염려 마십시오. 그럴 일은 없습니다."

"계속 살고 싶다면, 네가 해야 할 일들을 잘 해내야 할 거다."

이안이 그의 앞에 쪼그려 앉으며 말했다. 나세르가 그를 바라보았다.

"예. 첫 번째는 뭡니까?"

"방금 말 한, 네 이름."

"…필립이요?"

"그래."

"…예. 이제 전 필립입니다."

나세르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대답했다. 고개를 끄덕인 이안이 왼팔을 들어 옆을 가리켰다.

"두 번째는 마부가 되는 거다."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린 나세르의 눈에 새카만 마차와 그 옆에 묶인 두 마리 백마가 눈에 들어왔다. 녀석들이 걸친 은빛 마갑이 흐릿하게 일렁였다.

"아주 좋은 말들이더군. 마갑도 마도구고, 사람 여섯을 태운 마차를 끌고도 힘이 남아. 괜히 그 산을 살아서 넘은 게 아니었어."

"…북부 전마의 피가 섞인 녀석들이라 그럴 겁니다. 도움이 되셨다니 다행이군요."

맥없이 중얼댄 나세르가, 이내 말을 이었다.

"감사의 의미로 말씀드리자면, 저 녀석들의 안장 옆쪽을 보시면-"

"가방이 잘 보이지 않게 달려 있지. 안에는 마석과 식량을 비롯한 물자들이 잔뜩 들어 있고. 전부 잘 챙겼으니 염려 마라."

"…꼼꼼하시군요."

"그래. 네 반지와 귀걸이, 팔찌까지 남김없이 챙길 만큼은. 다들 골고루 나눠 가졌지."

이안이 태연하게 대꾸했다.

나세르가 허탈한 웃음을 흘리는 사이.

"다 끝났습니다. 나리."

필립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뒤를 돌아본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하군…."

메브와 필립은 두건까지 깊이 눌러쓴 채였다. 어느새 투구를 벗어 버린 메브의 얼굴은, 턱 끝만 간신히 보일 정도였다.

필립이 중얼댔다.

"이런데도 앞을 보는 데 전혀 문제가 없다는 게 놀랍군요."

"이만하면 아무도 의심하지 않을 것 같은데. 네가 보기엔 어때. 정화자 같아 보이나?"

이안이 나세르를 돌아보며 물었다. 나세르가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습니다만…."

"그래. 그럼 지금부터 저 둘은 고티어 경과 나세르 경이다."

"...?"

나세르가 다시 이안을 돌아보았다.

"이게 다, 무슨 상황인 겁니까?"

"무슨 상황이긴."

이안이 입꼬리를 살짝 말아 올렸다.

"너희는 나와 싸우다 죽은 순교자로 기억되지 않을 거다. 내 말에 넘어가 여명단을 배신한 변절자로 남게 될 거야."

나세르의 입이 멍하니 벌어지는 가운데,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크랄렌 공작이 의회의 일원이라면."

"의회… 가 뭡니까?"

"공작이 그 일원이길, 네가 간절히 바라야 하는 단체지."

"...?"

나세르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그가 이해하기엔 너무 많은 부분을 건너뛴 말들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안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래야 네가, 백금룡을 만날 수 있을 테니까."

"…백금룡께서 내리신 사명과 관련이 있는 일인 모양이군요."

"그때가 네가 세 번째 할 일을 하게 될 때다. 나에게 했던 말들을 그분께도 다시 해야 할 거야. 너희가 그분을 어떻게 생각하는지까지, 전부."

"경이 아니라… 제가 말입니까?"

"그래. 내가 하긴 귀찮거든. 그것 말고도 해야 할 말이 산더미고."

나세르가 진심인가, 하는 눈빛으로 이안을 바라보았다. 물론 진심이었던 이안이 말을 이었다.

"넌 말단 시종이자 마부인 필립이고 저 둘은 교단의 정화자이자 여명단의 일원인 고티어와 나세르다. 그리고 내가 이들을 이끌고 있지. 넌 이 정도만 알아두면 돼. 대충 그런 설정이니까."

"왜… 그런 연극을 하시는 겁니까?"

"크랄렌 공작에게 얻고 싶은 정보들이 있거든. 그걸 편하게 끌어내기 위해서다. 잘 될지는, 해 봐야 알겠지만."

"크랄렌… 공작이요?"

"아. 그래. 이 얘길 안 했군. 우리는 그자를 죽일 거다."

"...!?"

태연하게 덧붙인 말에, 나세르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233화

그러거나 말거나, 이안은 게임에서의 기억을 곱씹고 있었다.

그때의 크랄렌 공작은 원탁 의회와 관련된 퀘스트는 주지 않았었다. 만약 놈이 의회의 한 자리를 차지한 의원이라면, 조건부 퀘스트가 있으리란 의미였다.

그걸 끄집어내는 게, 이안의 가장 큰 목적이었다. 그가 아겔 란을 비롯한 여러 타락자들을 암중에서 후원한 원흉이라는 사실도, 겸사겸사 함께 밝혀내고.

놀람을 추스른 나세르가 말했다.

"그러시려는 이유가 뭡니까? 크랄렌 공작이 어떤 분인지는 아십니까?"

"타락자지. 일단은."

나세르의 미간이 좁아졌다.

"에드워드 크랄렌이, 타락자라고요?"

이안이 어깨를 까딱였다.

"그래. 서부가 이 꼴이 된 건, 그가 자신의 실패작들을 방치한 결과지."

"…믿기 힘든 얘기군요. 하지만 사실이겠죠. 경이 거짓말을 하실 이유가 없으니."

이안이 나세르의 연갈색 눈을 마주 보았다.

"그자에 대해 잘 아나 보군."

"중앙에까지 알려진 사실들 정도는요. 라클리프는 물론, 사실상 서부 전체를 다스리는 대귀족이잖습니까."

"좋아. 그럼 그 얘긴 가면서 듣지. 떠날 준비를 해라."

고개를 끄덕인 이안이 샬롯을 돌아보며 덧붙였다.

"샬롯이 네가 해야 할 것들을 지도해 줄 거다."

"…예, 이안 경. 아니, 나리."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샬롯의 손길이 나세르를 일으켜 세웠다.

***

"…그 비극적인 사건 후로, 공작은 후사를 두는 것을 포기했다더군요. 대신 영지를 부유하게 일궈내는 것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구요. 매년 대교회에도 엄청난 금액의 헌금을 보내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마부석으로 뚫린 간이 창문 너머, 나세르의 목소리가 멈추지 않고 이어졌다.

제국 내부의 사정에 어두운 이들만 모인 터라, 일행들은 저마다 묵묵히 그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크랄렌 공작은 자식들을 모두 잃었다. 전쟁에서. 중앙에서의 정치적 암투 끝에. 그리고 병으로.

새로운 타락자를 탄생시키기엔 충분한 비극이었다.

물론 그렇다 해서 새삼스럽게 동정심이 들지는 않았다. 비극적인 일을 겪었다 해서, 모두가 잘못된 선택을 하는 건 아니었으니까.

혹시 써먹을 만한 단서가 있을까 싶어 귀 기울여 들은 것뿐.

사실 이안에겐 그리 특별하지도, 인상적이지도 않은 이야기였다.

"덕분에 황실과 교단 모두에 큰 신임을 얻고 있다더군요. 군도 쪽과는 말할 것도 없고요. 그러니 공작이 타락자로 밝혀진다면… 한동안 중앙이 떠들썩해 질 겁니다."

나세르가 말을 멈췄다. 마차 내부에는 여전히 적막만이 감돌았다. 슬쩍 뒤를 돌아본 그가 덧붙였다.

"제가 아는 건 여기까지입니다."

"수고했어, 짝귀. 제법 재미있는 이야기였어. 좀 길었지만."

창가에 기대앉은 테사이아가 말했다. 나세르가 그녀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입니다."

"더 물을 게 있나, 이안?"

이어진 샬롯의 물음에, 창틀에 팔을 걸치고 있던 이안이 고개를 저었다.

"없어. 충분해."

"마차가 조금 빠른 것 같습니다, 샬롯. 말들이 지치지 않게 신경 써 주십시오."

테사이아의 건너편에 앉은 필립이 덧붙였다.

"알았다. 그러지."

대답한 샬롯이, 나세르를 돌아보았다. 나세르가 눈치껏 고삐를 살짝 당겼다.

새로운 마부가 생기면서, 일행의 자리에도 변화가 생겼다.

샬롯은 나세르의 감시를 자처하며 마부석에 나란히 앉았다. 물론 그게 이유의 전부는 아닐 터였다.

나머지 일행이 모두 마차 안에 들어와 있었으니까.

마차는 본래 여섯 명까지는 탈 수 있게 설계되어 있었지만, 그건 승객이 가벼운 차림일 때의 얘기였다.

"얘기를 듣고 보니 확실히, 라클리프는 다른 곳과는 상황이 다를 것 같군."

잠깐의 침묵 끝에, 필립과 나란히 앉은 메브가 읊조렸다.

그녀는 여전히 전신 판금 갑옷 위에 로브를 걸치고, 얼굴만 드러낸 채였다. 그건 필립도 마찬가지였다. 둘이 나란히 앉은 것만으로도 마차 한 면이 꽉 찬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반대편, 테사이아의 옆에 앉은 이안이 한쪽 어깨를 까딱였다.

"어떤 상황이건, 달라지는 건 과정뿐일 거요. 공작이 이미 죽어버린 거면 모를까. 그게 아니면 그자의 앞에 서서, 하려던 걸 하면 그만이니."

"정말 계획대로 잘 될지 걱정이군요. 나리가 원탁의 일원이라는 말을, 그자가 순순히 믿어 주겠습니까?"

필립이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공작의 앞에서 원탁의 일원인 척 연기하는 게 이안의 계획이었다.

메브와 필립이 정화자로 위장한 건, 공작을 속이기 위한 근거 중 하나였다. 공작이 정말 의원이라면 여명단의 존재 정도는 알고 있을 테니까. 교단과도 각별한 사이라지 않던가.

이안이 손바닥으로 턱을 괴며 대답했다.

"어차피 밑져야 본전이야. 잘 안 되면, 원래 하려던 대로 싸우면 그만이니까."

"중요한 건, 불필요한 희생을 최소화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도, 이안의 계획은 충분히 의미가 있지."

덤덤하게 내뱉은 메브가, 테사이아와 필립을 돌아보며 덧붙였다.

"우리가 이안의 권위에 힘을 더할 테니까. 비록 그것이 거짓일지라도."

…거기까지 의도하진 않았지만.

속으로 읊조리면서도, 이안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세르의 이야기 덕에, 일행은 공작의 세력이 예상보다 더 크다는 걸 확실히 알게 됐다. 그를 죽이면 뒤따르는 부작용도 더 크리라는 의미였다.

이안이 아무리 백금룡의 대행자라 할지라도 전부 무마할 수는 없을 수도 있었다. 북부라면 모를까. 여긴 제국 서부였고, 상대는 서부 최고의 권력자였으니까.

하지만 원로 요정과 정화자까지 함께라면 상황이 또 달라질 터였다. 적어도 불필요한 피를 볼 가능성은 훨씬 줄어들게 되리라.

'뒷수습은 뭐, 아르케아스 그 양반이 어떻게든 해 주겠지.'

이안이 무책임하게 생각하는 사이, 기대된다는 눈빛이 된 테사이아가 입을 열었다.

"우리가 걱정할 게 뭐 있어. 이번엔 이안이 다 알아서 할 텐데. 너희랑 나는 그냥 분위기 잡으면서 서 있기만 하면 되고. 어차피, 이제 처음도 아니잖아?"

"…그래야겠군요. 하긴. 이때가 아니면 제가 언제 또 정화자가 되어 보겠습니까."

필립이 풀썩 웃음 지었다.

이안이 턱을 괸 손을 까딱이며 말했다.

"방심만 하지 마라. 어떤 돌발 상황이 생길지 모르니까."

"그래. 모든 게 확실해지더라도. 네가 신호를 주기 전까지는 조용히 지켜보기만 하겠다. 이안."

메브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며, 이안이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변이된 채로 말라 죽어 있던 식물들은 어느새 찾아볼 수 없었다. 평범한 들판과 숲이었다. 칙칙한 잿빛 하늘과 텁텁한 공기만 제외하면.

테센 외곽으로 접어들었다는 증거였다. 아직 공기에 짠내가 섞이지는 않았지만, 라클리프가 그리 멀지는 않았을 터였다.

일행이 마차 안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것도 그래서였다.

언제 라클리프의 병사나 귀족, 최악의 경우엔 피난민들을 마주칠지 알 수 없었으니까.

"어쨌든, 테센에서와 같은 비극이 일어나지는 않았으면 좋겠군요. 일이 더 어려워지더라도요."

필립이 나지막이 읊조렸다.

게임에서의 라클리프를 다시 한번 떠올리며, 이안이 심드렁하게 내뱉었다.

"뭐, 가 보면 알게 되겠지."

***

날이 어두워지도록 아무것도 마주치지 않았다. 피난민은 물론이고 인적을 아예 찾아볼 수 없었다.

심지어 이 인근에는 마물도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처음부터 없었던 건 아닐 터였다. 타락자들의 의식에서 비롯된 공허의 마력에 홀려 뿔뿔이 흩어진 것이리라.

덕분에 일행은 관도 밖의 들판 한복판에 대놓고 야영지를 꾸렸다.

샬롯은 나세르를 끌고 다니며 짐꾼으로 부려먹고, 나세르는 그녀의 구박에도 미소를 잃지 않은 채 궂은일을 도맡았다.

'묘한 놈이라니까.'

이안은 마차를 정리하는 나세르를 바라보며 육포를 우물댔다. 그는 정말 모든 게 속죄의 과정이라 여기는 것 같았다.

앞의 모닥불에는 온갖 것들을 넣은 꿀꿀이 죽이 끓고 있었다. 생긴 건 저래도, 막상 먹어 보면 나름대로 먹을 만한 잡탕 스튜였다.

콰장창-!

그때, 건너편에서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안이 입을 멈추지 않은 채 시선을 돌렸다.

필립이 바닥에 나자빠져 있었다. 그를 내동댕이친 건 메브였다.

대련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건만. 필립은 벌써 세 번이나 바닥을 나뒹굴었다.

필립의 흉갑 위로 올라탄 그녀가, 녀석의 얼굴 앞에 검날을 들이밀었다.

한 손은 자루에, 다른 한 손은 칼날 중앙을 잡은 채였다.

"지금 너는 온몸이 철벽이며, 동시에 무기다, 필립. 그걸 무의식에 새겨야 해."

칼날을 거둔 메브가, 손을 뻗으며 일어섰다. 그녀의 손을 잡고 간신히 일어선 필립이 숨을 헐떡였다.

"…지켜본 시간이 있어서 쉬울 줄 알았는데. 역시, 생각과 실전은 다르군요."

"금방 익숙해질 거야. 다시 해보자."

필립의 견갑을 두드린 메브가 몸을 돌려 거리를 벌렸다.

"가겠습니다, 나리!"

둘의 대련이 다시 시작됐다.

필립이 전신 판금 갑옷을 걸친 김에, 메브는 그에게 기사의 전투 방식들을 전수하고 있었다. 기사끼리의 결투 요령도 마찬가지였다.

아주 진지한 걸 보니, 헤어지기 전까지 자신의 모든 기술을 가르쳐 주려는 게 분명했다.

'나름대로의 작별 준비이기도 하겠고.'

나세르가 건넨 그릇을 받으며, 이안은 그들의 대련을 눈에 담았다.

그가 보기에 지금 저건, 필립의 몸에 밴 여러 습관들을 빼는 과정이었다.

게다가 보이는 것만큼 무작정 필립이 밀리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결과는 늘 메브의 승리였지만, 어쨌건 필립도 지렁이가 꿈틀대는 정도의 저항은 해내고 있었다.

"역시, 싸움 구경이 제일 재미있네."

마찬가지로 그릇을 받아든 테사이아가, 그릇째로 스튜를 입에 가져가며 말했다. 옆에 앉은 샬롯이 낮게 콧방귀만 뀌는 가운데, 다시 한번 필립이 바닥에 처박혔다.

샬롯이 스튜 그릇을 들며 내뱉었다.

"먹고들 해라."

"전… 됐습니다…. 나리만 드십쇼. 먹고 다시 했다간, 금방 다 토해 버릴 겁니다…."

대자로 드러누운 필립이 숨을 고르며 내뱉었다. 메브가 소리 없이 웃으며 모닥불로 다가왔다.

그녀도 숨이 꽤 거칠었지만, 필립에 비하면 여러모로 여유가 있어 보였다.

"방패를 겁쟁이처럼 쓰시는군요."

메브에게 그릇을 건넨 나세르가 내뱉은 건 그때였다.

일행 모두의 시선이 집중됐다.

인상을 찌푸린 샬롯이 이안을 곁눈질했다. 이안이 살짝 고개를 젓는 사이, 필립이 고개만 들어 나세르를 바라보았다.

"지금, 나한테 한 말입니까?"

죽이는 걸 반대하는 쪽이었음에도, 메브와 필립은 정작 나세르에게는 한마디도 말을 걸지 않았다.

입장과는 별개로 그를 좋아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혐오하는 쪽에 가까웠다. 나세르는 여명단의 일원이었으며, 끝내 신에게 버림받은 자이기까지 했으니까.

그러니까 지금이, 나세르가 합류한 이래 둘이 처음으로 말을 섞는 순간인 셈이었다. 그것도 꽤나 좋지 않은 시작으로.

"호오."

필립의 표정을 본 테사이아의 입가에 삽시에 미소가 번졌다. 그녀가 눈을 빛내며 스튜를 홀짝였다. 나세르가 미소 지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예. 모든 공격을 막아내려 하시니까요. 가벼운 차림이실 때는 그게 맞습니다만, 그걸 걸친 채로는 그러실 필요가 없어요."

"그런 얘기라면 우리 나리의 가르침만으로도 충분히-"

"메브, 아니, 고티어 경께선 물론 대단한 실력을 지닌 기사이시지만, 방패를 다루지는 않으시죠. 하지만 아시다시피, 전 아니고요."

지금 필립의 왼팔에 끼워져 있는 방패는, 본래 나세르가 사용하던 것이었다.

연 방패를 적당히 축소한 형태였고, 이안의 장검이나 메브의 양손 검과 마찬가지로 제국 강철에 진은을 섞어 만든 명품이었다.

공격 마법이 새겨져 있진 않았지만 대신 마법을 일정 수준 중화시킬 수 있었다. 심지어 중위 이하의 마법은 튕겨 내 버리는 것도 가능했다.

신성 스킬이 증폭되는 건 덤으로 느껴질 정도의 옵션이었다.

"주제넘은 소릴 지껄이는군."

필립의 미간이 좁아지는 가운데, 나세르를 노려보던 샬롯이 씹어 뱉었다.

"반대쪽 귀도 반만 남고 싶은 모양이지."

"…도움을 드리고 싶었을 뿐입니다. 무례했다면 죄송합니다, 경."

선선히 고개를 숙인 나세르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스튜를 우물대며 그를 지켜보던 이안이, 비로소 툭 내뱉었다.

"야."

"예, 나리."

"너, 얼마나 잘 싸우냐?"

"...?"

#234화

잠시 눈을 깜빡인 나세르가, 이내 실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질문은 태어나 처음이군요. 굳이 따져 본 적은 없습니다만…."

적당히 구불거리는 머리를 쓸어넘긴 그가 말을 이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기사로 키워졌고, 성년이 됨과 동시에 서임을 받았습니다. 바로 다음 해에 찬란한 여신께 계시를 받았고, 교단에 귀의했죠. 정화자로 발탁된 건 반년쯤 지나서였습니다. 그리고 그 후로 몇 년을 더 살아남았죠. 그러니, 재능이 없는 편은 아닐 것 같군요."

꼴에 천재과셨다 이거지. 심지어 귀족 출신에. 거참 제국스럽군.

코웃음 친 이안이 덧붙였다.

"고티어랑 비교하면? 여기 이 고티어 경 말고, 죽은 놈."

"노련함으론 선배를 따를 수 없었겠죠. 맞서 싸울 생각을 해 본 적은 없습니다만, 아마 쉽게 지지는 않았을 겁니다. 전 젊으니까요."

"그럼 여명단은? 너나 그 반짝이는 어느 정도 수준이야?"

테사이아가 냉큼 끼어들었다.

나세르가 슬쩍 고개를 기울였다.

"그 역시 고하를 나눠 본 적은 없습니다만…. 그래도 평균보다는 강한 편이었을 겁니다. 버림받기 전의 저라면요. 죽은 선배도 마찬가지고요."

이안은 짧게 입맛을 다셨다. 어쨌건 여명단과 또 싸우게 된다면, 그때도 쉬운 싸움이 되지는 않을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하긴, 정화자 중에서 또 추려낸 자들이 속한 비밀 결사이니 약한 자가 있을 리 없었다.

온갖 마법 무구와 마도구, 성물까지 온몸에 두르고 있을 테니 더더욱.

'3챕터에 접어든 실감이 나네, 시발.'

게임에선 벌써부터 신경 쓸 놈들이 아니었는데.

씁쓸하게 혀를 찬 이안이, 메브를 돌아보았다.

"식사하시는 동안, 이 녀석을 필립과 붙여 보면 어떻겠소?"

"저를요…? 저 사람하고요?"

필립이 홱 이안을 돌아보며 물었다. 아무리 그래도 신에게 버림받은 자에게까지 지지는 않으리라 여기는 게 틀림없었다.

묵묵히 식사를 이어가고 있던 메브가 나세르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대련이라도, 그 복장으로 싸우기는 쉽지 않을 것 같은데."

최소한의 무장조차 허락받지 못한 나세르는, 천 옷만 달랑 걸친 채였다. 심지어 맨발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어깨를 으쓱이는 그의 표정은 여전히 태연했다.

"검 한 자루와 방패만 주시면 됩니다."

필립이 슬슬 열이 받는 듯한 얼굴로 나세르를 돌아보는 가운데, 메브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나는 괜찮아 보이는군. 필립만 동의한다면."

"저도 괜찮습니다. 이젠 정말 궁금해지는군요. 신의 은총과 이 대단한 무구 없이도 강할지."

필립이 곧바로 대답했다.

훈련 효과 하나는 끝내 주겠군. 낮게 웃은 이안이 나세르를 돌아보았다.

"마차 짐칸을 뒤지면 저 녀석이 쓰던 방패가 있을 거다. 칼은…."

"내 걸 주지."

샬롯이 허리춤의 장검을 풀며 말했다. 그녀의 주황색 눈동자가 나세르를 노려보았다.

"대련을 핑계 삼아 허튼짓이라도 했다간…."

"염려 마십시오. 그럴 생각은 없습니다."

검을 받아들며 대답한 나세르가 마차로 향했다. 그가 방패를 찾는 사이, 벌떡 일어선 필립이 요란하게 몸을 풀기 시작했다. 목을 이리저리 돌리는 그의 눈빛이 이글댔다.

"검도 그렇고, 방패도 생각보다 훌륭하군요. 길이 아주 잘 들었어요. 관리에 신경을 많이 쓰신 모양입니다."

반면 나세르는 태연하게 방패를 훑어보며 돌아왔다. 어깨를 휘휘 돌리며 필립이 내뱉었다.

"아프면 말씀하십시오. 멈춰 드릴 테니까."

"경도 제게 여러 요령을 배우고 싶다면 말씀하십시오. 성심껏 알려 드릴 테니까요."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말한 나세르가 슬쩍 이안의 눈치를 살피고는 덧붙였다.

"그런 의미에서, 저도 부탁 하나 드려도 되겠습니까?"

움직임을 멈춘 필립이 말해 보라는 듯 턱짓했다.

"종자로 오래 일하셨다 들었습니다. 저는 종자를 둔 적도 없고, 종자로 일한 기간도 없어서 알지 못하는 부분이 많습니다. 제게 경의 비법을 좀 전수해 주십시오. 앞으로 이안 나리를 섬기려면 필요할 것 같거든요."

"...."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라는 듯 눈을 한차례 깜빡인 필립이, 이내 옅은 미소를 지으며 검과 방패를 들었다.

"좋습니다. 제안을 받아들이죠."

"감사합니다. 경."

고개를 끄덕인 나세르가 전투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는 필립이 시작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인 순간 곧바로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쒸에엑-!

나세르와 필립이 거의 동시에 서로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필립은 날아드는 나세르의 검을 방패로 막았다. 하지만 나세르는 오른팔을 휘두름과 동시에 왼팔도 비스듬하게 앞으로 내뻗고 있었다.

필립이 휘두른 칼은 그냥 어깨로 맞겠다는 듯한 자세였다.

"...!"

오히려 눈을 치켜뜬 필립이 휘두르던 검의 속도를 줄였다.

그래도 완전히 멈출 수는 없어서, 칼날이 나세르의 팔뚝에 틀어박혔다. 하지만 나세르는 튕겨 나가지도, 내민 팔을 거둬들이지도 않았다.

"...."

그가 내민 원형 방패의 날이 필립의 턱 앞에서 멈췄다. 그대로 둘의 움직임이 잠시 멈췄다. 숨을 멈췄던 필립이 화들짝 검을 거뒀다.

칼날에 찍힌 나세르의 팔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나세르가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전신 판금 갑옷이었다면, 제 팔에 상처가 생기지는 않았을 겁니다. 대신 경은, 투구를 쓰고 계셨다고 해도 머리가 많이 울리셨겠죠."

방패를 늘어뜨린 그가 어깨를 으쓱였다.

"당연한 얘기이긴 합니다만. 이렇게 보여 드리는 게 더 와닿으실 것 같아서요."

"그, 일단 팔에 붕대라도 감고 말씀하시죠."

필립이 허둥댔다. 그렇게 전의에 불타더니, 막상 피를 보자 미안해진 모양이었다.

피가 흐르는 자신의 팔뚝을 내려다보며 나세르가 덧붙였다.

"괜찮습니다. 여신께서 성흔을 거둬 가셨더라도, 육체에 깃든 축복이 전부 사라진 건 아니라서요. 경도 곧 알게 되시겠지만, 찬란한 여신의 축복을 받은 몸은 특히 튼튼하고 회복도 빨라지거든요. 어쨌든…."

나세르가 칼로 자신의 머리를 톡 쳤다.

"방패를 수비용으로 쓰는 건, 머리가 노려질 때면 충분합니다. 마법이 날아들 때나요. 그 외에는 오로지 무기로만 쓰셔야 합니다. 그게 아니면, 그 갑옷을 걸치고 방패를 들 이유가 없습니다."

말을 맺은 나세르가 장난스럽게 미소 지었다.

"이제 좀, 몸에 새겨지셨습니까?"

"…예, 뭐. 까먹을 것 같지는 않네요."

필립이 머쓱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어느새 다가온 샬롯이 나세르의 옆에 섰다. 손에는 붕대로 쓸 천을 쥔 채였다.

나세르의 시선을 받은 그녀가 심드렁하게 뒤쪽을 턱짓했다.

"감아 주라더군. 대련을 그만할 게 아니라면."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나세르가 팔을 내밀었다. 샬롯이 마뜩잖은 얼굴로 붕대를 감아 주는 사이, 그의 시선이 다시 필립에게로 향했다.

"제가 자주 써먹던 잔기술들이 여럿 있는데, 익혀 보시겠습니까? 경도 이미 알고 계시는 것들이 많겠지만요."

"…필립."

어깨를 으쓱이며 내뱉은 필립이, 씩 미소 지었다.

"그냥 필립이라고 부르십쇼. 어차피 전 아직, 서임도 받지 못했으니까."

"나세르가 아니라요?"

"…우리끼리 있을 때는 괜찮을 겁니다. 그런다고 그 쪽이 실수를 할 것 같진 않고요."

"하하. 예, 필립. 그럼, 다시 해 볼까요?"

…청춘 드라마를 찍고 앉아있네.

둘을 지켜보던 이안이 코웃음을 흘렸다. 어쨌건, 보기에 나쁘지는 않은 광경이었다.

술을 한 모금 마신 그가, 식사를 끝낸 메브에게 술병을 내밀며 말했다.

"어때 보이시오?"

"훌륭한 스승이군. 내가 가르칠 수 없는 부분에서 큰 도움이 되겠어. 어쩌면 또래라 더 도움이 될지도."

"저놈의 실력 말이오."

"...?"

술병을 입에 가져간 메브가, 눈동자만 굴려 이안을 바라보았다.

이안이 덧붙였다.

"종자로도 쓸 만할 것 같소?"

"...!"

재빨리 술병을 내려놓은 메브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설마, 저자를 내 종자로 삼으란 거냐?"

"정화자 출신이니, 마물이나 타락자를 상대하는 법을 잘 알 테니까."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메브가 그에게 술병을 내밀었다.

"그러니 더더욱 네가 데리고 다니는 게 나을 것 같다만."

"여명단이나 교단과 부딪힐 일이 많을 것 같은데. 그때 저 녀석을 믿을 수는 없을 것 같아서 말이오. 날 배신하지 않더라도, 예상 못 한 짓거리를 벌이겠지. 그런 놈을 데리고 다닐 수는 없소. 루 솔라께 속죄하고 싶은 것 같은데, 변방에서 죄를 씻게 하면 되잖소."

술을 한 모금 더 마신 이안이, 슬며시 메브를 돌아보며 덧붙였다.

"경을 섬기면서."

"...."

"천천히 생각해 보시오. 아직 시간이 있으니까."

"…내가 데리고 가지 않겠다고 하면, 어떻게 할 셈이냐?"

"그야 뭐…."

이안이 고개를 까딱였다. 메브가 생략된 말을 짐작하게 하기에는 충분한 행동이었다.

"…그래. 고민해 보도록 하마."

읊조린 메브가 필립과 대련 중인 나세르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눈동자에 새로운 갈등이 서렸다.

그런 그녀의 옆얼굴을 잠시 바라본 이안은, 이내 다시 술병을 입에 가져가며 시선을 돌렸다.

'뭐, 이만하면 할 만큼 했지.'

어쨌건, 저 녀석들 덕분에 지루하지는 않은 밤이었다.

다음 날부터 나세르는, 필립이 벗어 뒀던 장비들을 몸에 걸칠 수 있게 됐다.

***

"이 탄내, 나한테만 나?"

콧잔등을 씰룩이던 테사이아가 말한 건, 오후로 접어들 무렵이었다.

그녀의 건너편에 앉은 필립이 코를 킁킁대고는 말했다.

"저한테도 나는군요. 희미하긴 합니다만."

메브에 이어 이안도 대충 고개를 끄덕이는 가운데. 테사이아가 마부석으로 이어진 창문을 열었다.

"뭐야, 야옹아? 어디 불이라도 났어?"

"그래 보이는군. 연기가 솟고 있다."

샬롯의 대답이 곧바로 돌아왔다.

"한두 곳이 아니야."

"어디 뭐, 산불이라도 난 건가?"

테사이아가 창밖으로 상반신을 내밀었다. 필립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것도 의식의 여파인 걸까요."

"사람이 한 걸 거다."

대답하며, 이안도 고개를 돌려 마차 앞쪽을 바라보았다.

관도가 이어진 언덕길 너머, 검은 연기가 솟고 있었다. 샬롯의 말대로 여러 가닥이었다.

"사람이요? 확실하십니까…?"

"부패와 역병의 권속들은 불이 약점이니까. 놈들이 불을 지르지는 않았겠지."

"그럼 역시, 라클리프는 자력으로 의식을 저지하는 데 성공한 거겠군요!"

필립이 메브를 돌아보며 내뱉었다. 메브의 표정도 설핏 밝아졌다.

이안은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 어쨌건 그가 보기에도, 저건 꽤 긍정적인 신호였다.

물론 동시에 그건, 그가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는 상황이 머잖아 일어나리란 의미이기도 했다.

어차피 일어날 일이긴 했지만, 이왕이면 보는 사람이 별로 없는 상황에서 하게 되길 바랐었는데.

테사이아와 샬롯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간 건, 마차가 오르막길 중턱쯤에 접어들었을 무렵이었다.

"발소리가 들리는군."

"여럿이야. 기수도 있고. 쇳소리도 들리고. 도적떼가 아니라면, 병사들 같은데?"

샬롯과 테사이아의 연이은 말에, 이안은 옅은 쓴웃음을 흘렸다.

하여간. 양반들은 못 되는군.

재빨리 마차 안으로 들어온 테사이아가 한쪽 창문을 닫았다.

서로를 돌아본 메브와 필립도 로브의 두건을 눌러쓰는 사이, 이안도 마차의 창문을 닫았다.

실내가 조금 어두워지는 가운데, 마부석 쪽 간이 창문 너머로 나세르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저는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넌 그냥 가만히만 있으면 돼."

이안이 고개를 돌리며 내뱉었다. 어느새 한 손으로는 아공간 안을 훑는 중이었다.

"나머지는 숙달된 조교가 알아서 할 테니까."

"숙달된 조교… 라니요?"

나세르가 고개를 기울였다. 이안은 대답 대신 샬롯과 눈빛을 교환했다. 슬쩍 송곳니를 드러내며 미소 지은 샬롯이 내뱉었다.

"공작의 앞까지 한 번에 가려면, 짧고 간단한 걸론 안 되겠지?"

"…알아서 해."

입맛을 다시며 내뱉은 이안이, 가죽으로 고급스럽게 제본된 서첩을 내밀었다. 북부 자치령에서 발급받은 그의 신분증명서였다.

증명서를 내려다본 샬롯이 덧붙였다.

"그것도, 필요한 상황이라면 네가 직접 보여 주는 편이 더 효과적일 것 같다만."

"...."

미간을 잠시 찌푸렸던 이안이, 코로 짧은 한숨을 내쉬고는 홱 창문을 닫았다.

닫힌 창문을 바라보며 눈을 깜빡인 나세르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샬롯에게로 돌아갔다.

그녀는 어느새 가르릉 대는 숨소리를 내며 몸에 걸친 장비들을 정돈하고 있었다. 목을 풀기 위해 내는 소리 같았다.

"뭘 하시려는 겁니까?"

"너는 내가 뭐라고 생각하지?"

샬롯이 눈길도 주지 않고 되물었다. 나세르가 어깨를 까딱였다.

"이안 나리의 동료시죠. 수인 전사이시기도 하고."

"그래. 하지만 동시에, 이안의 시종이기도 하지."

"그러셨습니까…?"

"앞을 봐라. 그리고 품위를 유지해. 너 때문에 이안까지 낮잡아 보이면 가만두지 않을 거다."

"…예. 뭐, 알겠습니다."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나세르는 입가의 미소를 거두며 앞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저 위로, 기사를 필두로 한 일련의 병사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235화

"...."

스펠로 경은 두툼한 미간을 찌푸리며 저만치의 마차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미간이 좁아진 건, 저 크고 단단해 보이는 마차의 모든 부분이 범상치 않아서였다.

은색 마갑을 걸친 백마 두 마리도. 그 뒤에 앉은 갈색 피부의 마부와 그 옆에 앉은 중무장한 수인. 그리고 저들이 등장한 시기까지.

심지어 여긴 테센으로 이어지는 길목이 아니던가.

"어쩌시겠습니까? 검문부터 할까요?"

그의 곁에 선 부관이 물었다. 말을 탄 건 그와 부관, 둘뿐이었다.

스펠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부관이 말을 한 걸음 앞으로 몰았다.

부관의 얼굴에 긴장이 묻어나는 건, 그 역시 저 마차가 범상치 않다 여기기 때문일 터였다.

"마, 마차를 멈추고 신원을 밝히시오!"

곧 부관이 소리쳤다.

"이곳은 크랄렌 공작께서 다스리시는 땅이오! 절차에 따르지 않는다면 더 이상 들어오실 수 없소!"

마차는 멈추지 않았다. 그저 오르막을 오르는 속도가 조금 느려졌을 뿐이었다. 부관이 침음하는 가운데, 마부석 한 쪽에 앉아 있던 수인이 일어섰다.

"...."

수인답게 크고 단단한 체구. 목덜미까지 돋아난 갈기가 바람결에 흔들렸다.

그리고 그녀의 주황색 눈동자는 부관이 아니라 스펠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상당한 거리가 있음에도, 그녀와 눈이 마주친 순간 절로 긴장감이 돋아났다.

스펠로의 한쪽 눈매가 꿈틀댈 찰나.

"크랄렌 공작의 병사들인가?"

수인이 서늘하게 내뱉었다. 그리 크지 않음에도 스펠로의 귀에까지 또렷하게 박히는 목소리였다.

부관에게 물러나라 눈짓한 스펠로가 숨을 고르며 앞으로 말을 몰았다. 그는 자신의 긴장을 드러내지 않으려 더 힘껏 소리쳤다.

"그렇소! 나는 라클리프의 정당한 지배자이자 푸른 함대의 주인이신 내해의 수문장, 에드워드 크랄렌 공작 각하를 섬기는 기사, 스펠로요!"

"훌륭하군."

수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공작의 이름을 듣고도 전혀 주눅 든 기색이 없었다.

"그렇다면 우리를 공작께 안내하시오, 스펠로 경. 안에 타고 계신 분들이 그분께 용무가 있으시니."

"...."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듯한 말투에, 스펠로의 미간이 더 좁아졌다. 부관과 눈빛을 교환한 그가 내뱉었다.

"나는 공작 각하의 기사이며, 그분의 명령을 그 무엇보다도 우선해야 할 의무가 있소. 대체 어떤 분들이 타고 계시기에 이토록 당당하게 무리한 요구를 하시는지 모르겠군."

"병사들을 물려 길을 트고, 말에서 내려 기다리시오. 귀하들이 내려다보며 들을 이름이 아니니."

"..."

스펠로의 볼에 힘줄이 돋았다. 수인을 바라보던 부관이 속삭였다.

"어, 어쩌시겠습니까…?"

"…병사들을 물려라. 길을 터."

스펠로가 말 머리를 돌렸다. 내심 화가 났지만, 동시에 그보다 더 큰 호기심이 일었다.

대체 마차에 누가 타고 있기에 저토록 자연스럽게 헛소리를 늘어놓을 수 있는지.

물론 기대에 부응할 정도가 아니라면, 저들이 누구건 오늘 살아서 이곳을 빠져나가지 못할 터였다.

그의 말 한마디면, 잘 훈련된 병사들이 저들을 걸레짝으로 만들어 놓을 테니까.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저 수인의 목은 그가 직접 칠 생각이었다.

다각- 다각-

병사들과 보급품을 실은 마차가 길 밖으로 물러나는 가운데, 천천히 오르막을 오른 마차가 스펠로와 부관의 앞까지 다가왔다.

둘이 말에서 내리는 것까지 확인한 수인이 비로소 손가락을 튕겼다. 갈색 피부의 마부가 고삐를 당겼다.

마차가 한복판에서 멈췄다. 그사이 스펠로와 부관, 그리고 늘어선 병사들까지 찬찬히 눈에 담은 수인이 뒷짐을 지며 입을 열었다.

"안에 계신 분들을 소개하겠소. 찬란한 여신의 사도이자 어둠을 밝히는 빛의 한 가닥, 정화대의 일원인 고티어 경과 나세르 경."

"...!"

그리 크지도 빠르지도 않은 목소리였지만, 그로 인한 파장은 거대했다. 스펠로와 부관은 물론 병사들까지 석상처럼 굳어진 것이다.

하필 이런 시기에, 그 악명 높은 이름을 듣게 됐으니까.

"또한."

하지만 수인의 말은 이제야 시작된 참이었다.

"끝없는 지식의 탐구자이자 생명수의 막내딸. 죽음의 세례를 받고 눈뜬 자. 최연소이자 최후의 원로이신 텐시아 아이나스 공이 함께하고 계시며."

원로 요정이라고…?

스펠로가 참고 있던 숨을 들이켰다. 도무지 현실성이라고는 없는 말들이었다. 정화자들은 그렇다 쳐도, 중앙이나 남부에 있어야 할 귀쟁이가 왜 서부에 있단 말인가.

더 기가 막힌 건, 소개 순서로 봤을 때 본론은 이제부터인 것 같다는 사실이었다.

"이들은 모두, 한 분의 신성한 과업을 돕는 중이시니. 모두 한쪽 무릎을 꿇고 예를 갖추시오."

그 예상을 확인이라도 시켜주듯 덧붙인 수인이, 좌중을 한차례 돌아보고는 말을 이었다.

"엄정한 여신의 성전사이며 타오르는 여신의 성화를 되살린 불씨의 운반자. 거인 왕국 최후의 징벌자이자, 북부의 진정한 대전사."

"...!"

지금까지보다 한층 더 또박또박 내뱉는 말에, 스펠로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부관과 주위에 선 병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어느새 다들 눈을 치켜뜨고 입을 벌린 채로 수인만을 주목하고 있었다.

"타락한 고룡의 심장을 찌른 용살자이며, 저 위대하신 백금룡의 공식적이며 유일한 대행자. 또한!"

한순간 버럭 소리친 수인이 스펠로와 병사들을 싸늘한 눈빛으로 돌아보았다. 아직도 그들이 무릎을 꿇지 않은 것에 불쾌함을 느끼는 게 분명했다.

저도 모르게 한쪽 무릎을 꿇을 뻔했던 스펠로는 황급히 다리에 힘을 주었다.

그야말로 충격적이었지만, 저 말만 듣고 공작의 기사인 그가 무릎을 땅에 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애써 눈에 힘을 주며 수인의 번뜩이는 시선을 마주했다.

슬쩍 송곳니를 드러낸 수인이 말을 이어갔다.

"흡혈 일족을 멸족시킨 루 사드의 구원자이며, 공허에서 현신한 악마를 물리치고 부패와 역병을 정화한 초인, 이안 호프 경이시오!"

"...."

말을 마친 수인이 고개를 살짝 치켜들었다. 사위에 적막이 내려앉았다. 말들이 콧김을 뿜는 소리만이 흐릿하게 번질 따름이었다.

멍하니 그녀를 올려다보던 스펠로가, 마른 침을 삼키며 내뱉었다.

"그 모든 말을… 증명할 수 있으시오?"

"...."

스펠로를 뚫을 듯 내려다본 수인이 이윽고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뒤편, 병사들과 마찬가지로 다소 멍한 얼굴이던 마부가 화들짝 눈을 깜빡였다.

수인이 마차 쪽으로 고개를 까딱였다. 마부가 마부석 뒤편의 간이 창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그러나 그가 뭔가 말을 할 필요는 없었다.

끼이익-

기다렸다는 듯 마차의 한쪽 문이 열렸으니까.

뒤이어 빛바랜 은발에 새하얀 피부를 가진 요정이 고개를 살짝 치켜든 채로 모습을 드러냈다.

낡은 천 옷 위에 무두질한 가죽으로 만든 수수한 방어구들을 걸친 채였지만, 타고난 게 분명한 그녀의 기품을 가릴 수는 없었다.

마차에서 내린 그녀는 스펠로나 병사들 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문 옆에 섰다.

"...!"

뒤이어 두건을 깊이 눌러쓴 둘이 마차에서 내린 순간, 스펠로의 눈에 비로소 커다란 파장이 번졌다.

기사임과 동시에 루 솔라의 신도인 그는 저 로브가 대교회의 상징임은 물론, 그 아래로 육중한 갑옷까지 걸치고 있음을 단숨에 알아챘기 때문이었다.

저들은 정말 교단의 정화자인 게 틀림없었다.

두 정화자도 요정의 옆에 나란히 서는 가운데.

저벅-

스펠로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마차에서 내리는 남자에게로 자연스럽게 빨려 들어갔다.

검은 머리칼과 눈동자. 가면을 쓴 것 같은 무표정한 얼굴. 판금과 사슬을 엮은 무장은 평범해 보였고, 그건 그의 체구도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허리춤의 검이 범상치 않아 보이긴 했지만, 어쨌건 앞선 이들에 비하면 특별히 존재감이 두드러지지는 않았다.

"...."

하지만 원로 요정과 두 정화자는 그를 향해 깍듯하게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심지어 그는 본 척도 하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곧 스펠로의 앞에 멈춰 선 그가, 손에 든 서첩을 내밀었다.

"확인하시오."

스펠로는 저도 모르게 두 손으로 증명서를 받아 들었다.

이 모든 게 당연하다는 듯한 그의 태도에서 오히려 더 큰 권위를 느낀 것이다.

증명서의 내용을 눈에 담은 스펠로가, 비로소 탄식했다.

"맙소사, 루 솔라여…."

이건 트라벨가의 교회가 발급하고 북부 자치령의 지배자인 울라프 대공이 직접 날인 한 증명서였기 때문이다. 글자를 새긴 잉크에는 금가루까지 섞여 있었다.

북부에 초인이 나타나 용을 죽였다는 소문은 모르는 이가 없었다. 그리고 이건, 눈앞의 이 남자가 바로 그 용살자라는 사실을 뒷받침하기에 충분한 증거였다.

그건 곧, 저 수인이 한 모든 말이 사실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심지어 백금룡의 대행자이기까지 한 북부의 초인이, 정말 원로 요정과 정화자까지 대동한 채 그의 앞에 나타난 것이다.

"아직도 부족한가?"

수인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어깨를 떤 스펠로가 허물어지듯 한쪽 무릎을 꿇었다.

"무,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찬란한 빛에 영광 있으라…!"

그게 신호라도 된 것처럼, 부관을 비롯한 병사들이 줄지어 몸을 숙이기 시작했다. 들고 있던 창은 전부 땅에 내려놓은 채였다.

스펠로의 볼을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릴 찰나.

"이곳에서 일어난 일들에 대해서 공작과 긴히 나눠야 할 대화가 있는데. 안내해 주시겠소?"

이안이 말했다. 고저가 거의 없어서 버석버석하게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스펠로가 더 깊이 고개를 숙이며 내뱉었다.

"부,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저는 명령을 수행하러 떠나야 합니다. 대신, 존귀한 분을 안내할 병사들을 차출하겠습니다."

"무슨 명령을 받으셨소?"

"저희는… 테센으로 가고 있습니다. 각하께선 테센에도 타락한 자들의 마수가 뻗쳤으리라 예상하고 계십니다. 해서, 저희는 테센의 상황을 파악하고 인근에 군영을 꾸릴 예정입니다."

"그럼 이대로 나와 같이 돌아가셔도 되겠군."

"예…?"

스펠로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며, 이안이 말을 이었다.

"테센의 상황은 이미 정리가 끝났소. 그래서 내가 공작을 만나려 하는 것이고."

"...."

스펠로의 입이 다시 한번 설핏 벌어졌다. 이안의 검은 눈을 바라보던 그가, 이윽고 간신히 덧붙였다.

"테센은, 어떻게 됐습니까?"

"테센시는 멸망했소. 우리가 그곳에 도착했을 때, 이미."

대답한 건 수인이었다. 눈을 치켜뜬 스펠로의 시선에, 그녀가 덤덤하게 덧붙였다.

"그리고 여기 계신 이안 호프 경께서, 그곳에 뿌리내린 공허의 악마를 물리치고 더럽혀진 땅을 정화하셨지."

그때, 이안이 스펠로의 앞으로 손을 뻗었다. 굳어진 스펠로와 눈을 마주친 그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세한 이야기는 가면서 나눠도 될 것 같은데."

"…예."

간신히 대답한 스펠로가 신분증을 고이 접어 머리 위로 들었다. 당연하다는 듯 집어 든 이안이 덧붙였다.

"안내하시오. 스펠로 경."

***

걸음을 옮기는 병사들은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하지만 입가에 번진 안도 섞인 미소까지 감추지는 못한 채였다.

당연한 일이었다. 위험하기 그지없던 임무가 고작 마차 호위로 바뀐 데다, 라클리프로 회군하고 있기까지 했으니까.

분명 다른 임무에 다시 투입되긴 하겠지만, 그렇다 해도 본래의 임무만큼 위험하지는 않으리라.

그리고 그건, 마차 옆을 나란히 따르는 스펠로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그야말로 역사에 기록될, 위대한 업적입니다."

샬롯에게 테센에서의 일을 간단히 전해 들은 그가 읊조렸다.

물론, 샬롯의 이야기는 상당 부분이 각색된 채였다. 정화자들이 이안을 죽이러 찾아온 부분은 특히.

그들은 테센 인근에서 이안에게 합류했고, 함께 타락한 의식을 저지한 것이 됐다. 적어도 스펠로가 쓸 보고서에는 그렇게 기록되리라.

"...."

무표정하게 앉아 있던 이안이, 슬쩍 옆자리의 테사이아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아까부터 조용히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듣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 것이리라. 이안은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그도 정보를 어느 정도는 알아 둘 필요가 있었다.

테사이아가 냉큼 입을 열었다.

"스펠로 경."

"예, 공."

스펠로가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 어느새 그의 표정과 말투는 더없이 깍듯해진 상태였다.

"테센으로 지원 병력을 보낸 정도라면, 라클리프는 무사히 모든 위기를 극복했다는 뜻이겠죠."

텐시아 아이나스의 미소를 지은 테사이아가 덧붙였다.

"어떻게 해낸 것인지 궁금하군요. 테센의 타락자들에게 듣기로는, 이곳에서도 의식이 이루어졌다고 하던데요."

"그랬습니다. 모든 게 썩어들어갔습니다. 심지어 바닷물까지도. 지하 수로에서는 역겨운 괴물들이 기어 나오고, 놈들에게 죽은 이들은 끔찍한 몰골이 되어 되살아났습니다."

스펠로의 시선이 저 먼 곳을 응시했다. 경치가 아니라 기억을 훑는 것이리라.

"각하께선 기사들을 이끌고 도시를 누비며 백성들을 구하셨습니다. 내성에 생존자들이 가득해질 정도였죠. 하지만 버티는 게 고작이었습니다. 며칠 뒤 군도에서 지원 병력이 도착했습니다만, 그들 역시 도시로 진입할 수는 없었습니다. 저희는 내성에 완전히 고립되어 있었습니다. 악몽 같은 시간이었죠. 죽음이 예정된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요."

게임에선 결국, 그렇게 됐었지.

이안이 속으로 읊조리는 사이, 스펠로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얼마 전, 갑자기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지하 수로를 아래에서 절규가 메아리치고, 곧 도시 전체가 비명에 휩싸이더군요. 괴물들이 내지르는 소리였습니다. 각하께선 기회가 왔다는 것을 깨닫고, 반격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랬습니다. 도시를 뒤덮은 저주와 괴물들이 힘을 잃고 있더군요. 그때는 왜 그렇게 된 것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만…."

스펠로가 일렁이는 눈빛으로 이안의 옆얼굴을 돌아보았다.

"…이제는 이유를 알 것 같군요."

#236화

이안이 불결한 거목을 처치한 순간을 말하는 것이리라.

이안은 스펠로가 더없이 깍듯해진 게, 비단 자신의 권위에 압도당해서만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실제로도 도움이 되었을 터였다.

가장 작은 규모로 의식을 치른 만큼, 그곳의 타락자들은 거목의 힘에 더 많은 부분을 의지하고 있었을 테니까.

물론 이안은 새삼스럽게 놀라지 않았다. 그저, 예상이 현실이 되었다는 걸 확인했을 뿐이었다.

"감사드립니다. 경. 이 사실이 알려지면, 시민들은 물론이고 각하께서도 직접 감사를 표하실 겁니다."

이어진 스펠로의 말에, 이안이 턱 끝만 까딱였다.

"감사 인사는 됐소."

"그래서, 그렇게 모든 게 끝난 건가요?"

테사이아가 덧붙였다. 스펠로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치열한 전투가 이어졌습니다. 놈들은 약해지고 혼란에 빠져있었습니다만. 그렇다고 아예 무력해진 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각하께서 용감하게 선봉에 서셨고, 군도의 지원군과도 힘을 합칠 수 있게 됐습니다. 덕분에 도시를 되찾을 수 있었죠."

"저주의 원흉도, 찾아냈나요?"

"물론입니다. 각하께선 타락한 자들의 소굴이 지하 수로 어딘가에 숨어 있으리라 확인하셨습니다. 해서 토벌대를 투입하셨죠. 토벌은 성공했습니다. 타락자들은 모두 죽었고, 의식을 치렀던 소굴은 불로 태워 정화했다고 들었습니다."

이안이 슬쩍 미간을 좁히며 스펠로를 돌아보았다.

"타락자들을 전부 죽였다고?"

"저도 직접 본 것은 아닙니다만. 지하 수로에서 번진 굉음과 비명은 똑똑히 들었습니다. 저뿐 아니라 거의 모든 이들이요. 각하의 호위 기사인 발로이 경과 팔메르 경. 그리고 고문 마법사인 마티아스 공의 활약이었죠. 그 끔찍한 지하에서 살아 돌아온 것도, 그들뿐이었습니다."

"그랬겠지…."

이안의 한쪽 입꼬리가 설핏 말려 올라갔다. 다른 생존자가 있었더라도 입막음을 위해 죽였으리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어쨌건 살아 돌아온 자들은 게임에서도 본, 공작의 하수인들일 터였다.

그때는 둘뿐이긴 했지만. 지금까지의 경험상, 숫자가 하나 더 늘어나는 정도의 변화는 놀랍지도 않았다.

그의 표정을 눈치채지 못한 스펠로가 말을 이었다.

"물론, 아직 모든 일이 끝난 건 아닙니다. 반파된 도시를 재건하고, 지하 수로와 숲에는 여전히 저주받은 잔당들이 남아 있으니까요. 하지만 머잖아 남김없이 뿌리 뽑고 본모습을 되찾을 수 있을 겁니다. 덕분에 테센으로 병력을 차출할 필요도 없어졌으니, 더더욱 빨라지겠죠."

"이 탄 냄새가 그래서 나는 거였군…."

"예. 토벌을 끝내고 오염된 숲과 들판을 불태우고 있는 겁니다. 저주의 잔재를 정화하기 위해서요."

"그것도 공작께서 명하셨겠고."

"물론입니다."

민심이 하늘을 찌르겠군.

코웃음을 삼킨 이안이 뒤통수를 뒤로 기댔다.

모든 걸 솔선수범해서 진두지휘했다니. 이번 비극의 수습이 끝나면, 공작의 입지는 오히려 더 공고해질 게 분명했다.

적어도 이 일대에서는 황제나 다름없는 권세를 누리게 될 터였다. 그것도 진심에서 우러난.

물론, 그렇게 되게 만들어줄 생각 따위는 없었다.

"라클리프까지는 얼마나 남았지?"

이안이 나지막이 물었다. 스펠로가 곧바로 대답했다.

"내일 해가 지기 전까진 도착할 수 있을 겁니다."

"조금 더 서둘러 주시오."

스펠로를 돌아본 이안이 슬며시 미소지었다.

"백작을 한시라도 빨리 만나고 싶으니까."

"예.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의 속내를 알 리 없는 스펠로가 고개를 숙였다. 너그럽게 고개를 끄덕여준 이안이, 마차의 창문을 닫았다.

***

매캐한 연기를 뿜으며 타들어 가는 숲과 들판을 지나, 병사들은 늦은 밤이 되어서야 잿더미가 된 들판에 야영지를 꾸렸다.

그들이 가장 먼저 세운 건 이안 일행이 묵을 막사였다.

따로 요청하지 않았음에도, 눈치껏 무리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은 채였다.

열 명도 넘게 사용할 수 있을 법한 커다란 천막. 꽤 편해 보이는 목제 침상과 침구는 물론, 가장자리에는 여러 개의 등잔이. 중앙에는 커다란 식탁까지 차려졌다.

본래는 지휘관들이 사용했을 물건들이었다.

"실례하겠습니다."

일행이 막사에 들어선 직후, 스펠로가 접시를 잔뜩 든 병사들을 대동하고 나타났다.

염장한 고기. 마찬가지로 소금에 절였다가 구운 생선과 포도주 같은, 제법 그럴듯한 음식들이 식탁에 줄지어 놓였다.

회군하게 되면서 보급 물자를 아낄 필요가 없어진 덕분이리라.

"편히 쉬십시오. 더 필요한 게 있으시다면…."

"충분할 것 같군. 호위도 필요하지 않으니, 전부 물려 주시오."

"예. 알겠습니다."

정중하게 인사한 스펠로가 막사 밖으로 나갔다. 곧 주위를 지키던 병사들도 물러나기 시작했다.

기척을 감지하던 샬롯과 테사이아가 신호를 주자, 메브와 필립이 비로소 두건을 벗었다.

식탁으로 홀린 듯 모여 앉는 일행들의 시선이, 검집을 풀고 있는 이안에게 집중됐다.

이안이 식탁으로 다가오며 풀썩 웃음 지었다.

"뭘 기다려? 먹읍시다."

기다렸다는 듯 장갑을 벗은 일행들이 음식으로 손을 뻗었다. 다들 한동안 말 한 마디 하지 않고 식탁에 고개를 파묻었다.

보존 식량만 먹으며 지낸 기간이 꽤 길었기 때문이었다. 소금에 절인 것들이라 해도, 어쨌건 육포나 딱딱한 빵과는 비교할 수 없이 맛있었다. 아마도 테센에서 만들어졌을 포도주 역시.

심지어 나세르까지도 입가에 기름을 묻혀가며 음식을 집어 먹었다.

"…이제야 좀 살겠군요."

이윽고 필립이 작은 한숨을 내쉬며 읊조렸다. 듣는 이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목소리를 낮춘 채였다.

"잔뜩 먹어 둬라. 라클리프에 도착하면, 식사할 틈도 없이 힘을 써야 할지도 모르니까."

이안이 고기를 우물대며 말했다.

메브가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공작의 최측근들은 하수인이 분명해. 아무리 약해졌다 해도 타락자들을 처리한 걸 보면, 보통내기들도 아닐 거다."

"그렇겠지. 게다가, 의식을 완전히 끝내 버린 것도 아닌 것 같고."

이어진 이안의 말에, 일행들이 눈동자만 움직여 그를 바라보았다.

이안이 포도주로 입을 축이고는 내뱉었다.

"의식의 매개체에는 공허의 표식이 새겨져 있지. 그걸 없앴다면, 저주의 잔재는 몰라도 잔당들이 남아 있을 수는 없잖소. 다들 알 텐데."

"아. 그렇겠군…. 그래. 과연."

메브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경을 닫거나 타락자를 처치해 본 자들만이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메브가 가라앉은 눈빛으로 읊조렸다.

"하수인들을 통해 공허의 힘이 담긴 표식을 회수한 건가. 그래서 그들만 살아서 돌아온 거고."

"뭐, 그럴지도."

나중을 위해 남겨 뒀든, 메브의 말대로 표식이 새겨진 부분만 회수해 돌아왔든. 결과적으론 달라질 게 없는 부분이었다.

"어쩌면 그래서 테센으로 병력을 보낸 건지도 모르겠군요. 누가 일을 꾸민 건지, 공작은 알고 있었을 테니까요."

필립이 덧붙였다. 메브가 동의하듯 말을 받았다.

"테센의 의식이 뭔가 잘못된 것이라 여겼겠군. 상황을 확인한 후에, 그곳의 힘도 차지하려 한 거겠지."

"뭐, 그럴지도."

이안은 어깨를 으쓱였다.

공작의 진짜 의중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부분이었다.

"당장 중요한 건, 공작이 주인 없는 공허의 마력을 차지했으리란 사실이오. 잔당 소탕이 끝나면 오롯이 그놈의 것이 되겠지. 어쩌면 이미 그렇게 되었거나."

물론 그렇다 해도, 그가 게임에서 본 것보다는 훨씬 더 약하겠지만.

알아 둬서 나쁠 건 없었다.

"정말 크랄렌 공작이 타락자인 거군요."

듣고 있던 나세르가 내뱉었다. 딱히 놀란 말투는 아니었다. 그저 이제야 확신하게 된 것이리라.

"그자가 마법을 익혔다는 얘기는 들은 적 없냐?"

이안이 툭 덧붙였다. 메브의 시선에, 그가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표식에 담긴 힘을 부릴 수 있다면 고대 신을 섬기는 사제나 마법사일 텐데. 전자면 타락한 사제들과 사이가 틀어질 리 없잖소."

사실은 게임에서의 기억을 토대로 끼워 맞춘 거지만.

메브가 납득한 듯 고개를 주억거리는 가운데, 미간을 좁히고 있던 나세르가 입을 열었다.

"중앙에서 죽은 차남이 마법사였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습니다만. 공작도 그럴지는 모르겠군요. 하지만 가능성은 충분해 보입니다."

"하수인 중에도 주문쟁이가 있던데. 타락한 주문쟁이가 둘이겠군."

샬롯이 읊조렸다.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속전속결로 끝내야지. 주문을 부릴 틈도 없게."

지금은 충분히 가능할 터였다. 메브와 필립은 정화자의 무구들로 중무장 하고 있고, 샬롯과 테사이아도 마도구나 마법 유물을 나눠 가졌으니까. 물론 그건 이안도 마찬가지였다.

"어느 정도 윤곽이 드러났으니 역할만 적합하게 분담하면 되겠군."

메브가 덧붙였다. 이안이 그녀를 돌아보며 미소 지었다.

"경은 나와 공작을 상대하셔야지."

"그럼 주문쟁이는 내가 상대할게."

테사이아가 손을 번쩍 들었다.

"주문쟁이는 주문쟁이끼리 노는 거라며. 난 마법은 아직 쓸 줄 모르지만, 어쨌든. 유물도 있으니까."

"그럼 기사들은 자연스럽게 우리 둘의 차지가 되겠군요."

필립이 샬롯을 돌아보며 미소 지었다. 샬롯이 그가 걸친 로브를 턱짓했다.

"그걸 쓴다고 혼자 다 상대할 생각은 하지 마라. 네 상대를 끝내면, 나한테 합류하지 말고 다른 놈을 상대해. 하수인들이 더 있을지도 모르니까. 내 상대는 내가 죽일 거다."

"예. 그러죠."

필립이 고개를 끄덕이는 가운데, 테사이아가 덧붙였다.

"칼 좀 빌려줘, 빨강 머리. 이안도, 던지는 단검을 빌려줘. 그 안에선 활이 별 쓸모가 없을 것 같거든."

"내 세검을 빌려주지. 이안이 보관 중이니, 받아 가라."

"주는 건 어렵지 않은데. 던질 줄은 알고?"

메브에 이어 이안이 되물었다.

테사이아가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몰래 좀 던져 봤는데, 활 쏘는 것보다 쉽더라고."

아, 그래. 활만 연습한 게 아니란 거지.

피식한 이안이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나세르가 불쑥 내뱉었다.

"그럼, 저는 무슨 역할을 하면 됩니까?"

한순간 동시에 그를 바라본 일행이, 이윽고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이안이 손에 묻은 고기 기름을 쪽 빨고는 내뱉었다.

"마부."

"예…?"

나세르의 입가에 늘 맺혀 있던 미소가 굳어졌다. 그 사실에 묘한 즐거움을 느끼며, 이안이 말을 이었다.

"넌 우리랑 같이 들어가지도 않을 거다."

"…저도 도움이 될 텐데요."

"알아. 그러니까 마차를 지켜야지. 우리가 공작의 목을 따면 소란이 일 거다. 그때 말과 마차에 해코지하려는 놈들이 있을 수도 있어. 네가 제압해. 죽이진 말고."

"...."

나세르가 말문이 막힌 듯 입을 뻐끔댔다. 그 표정에, 일행들이 저마다 크고 작은 웃음을 흘렸다. 이안만 즐거움을 느끼고 있었던 게 아닌 모양이었다.

"별 수 없군요. 그게 제 역할이라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윽고 나세르가 자신의 처지를 다시 한번 실감한 듯 헛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의 시선이 일행들을 훑었다.

"무튼, 듣고 보니 여러분들이 전문가라는 건 확실히 알겠습니다. 정화대 못지않은. 아니, 어쩌면…."

그가 술잔을 들며 덧붙였다.

"더 뛰어나실지도 모르겠군요. 수단과 방법을 가릴 필요가 없다는 부분에선 특히요."

"뭐, 정화자분들은 제약이 많은가 봅니다?"

필립이 고기를 다시 우물대며 물었다. 나세르가 미소 지었다.

"우리. 아니 그들은 이름 없는 자들이니까요. 동시에 늘 노출되어 있죠. 복장부터가 눈에 띌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에 비해 여러분들은, 아주 자유로우시고요."

"글쎄. 아까 봐서 알겠지만, 우리도 눈에 띄지 않는 건 아니야."

테사이아가 덧붙였다. 나세르가 인정한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주목받는 걸 아주 적극적으로 활용하셨죠. 정화대에선 불가능한 방식입니다. 그들은 그저 교단의 권위를 빌릴 따름이죠. 덕분에, 정화대의 귀에 나리의 소식이 어떻게 들리게 된 건지 알겠더군요. 저를 포함한 모두는 정말, 선후를 반대로 알고 있었던 겁니다."

술을 한 모금 마신 나세르가, 양손 검지를 모아 교차하듯 휘휘 돌렸다.

"나리가 나타난 곳에 사건이 터지는 게 아니라, 타락자가 있는 곳을 나리가 찾아가시는 거니까요. 오늘처럼, 가능한 수단과 방법을 전부 동원해서."

"익숙해지는 게 좋을 거다. 앞으로 너도 그래야 할지도 모르니까."

이안이 실소를 흘리며 내뱉었다. 나세르의 미소가 짙어졌다.

"기대되는군요. 저도 좌중 앞에서 연설하는 법을 연습해 둬야겠습니다."

그걸로 내 이름을 소개하게 되진 않겠지만.

속으로 읊조린 이안이, 메브의 눈을 슬쩍 돌아보며 술잔을 들었다.

잠시 묘한 눈빛이 되었던 그녀가, 생각을 떨치듯 고개를 살짝 털고는 내뱉었다.

"공작이 의원인지만 확실히 밝혀낼 수 있으면 좋겠군."

"…그가 의원이라면, 뭔가 또 달라지는 겁니까?"

의원이 뭐냐는 질문은 포기한 듯, 나세르가 물었다. 잠시 멈칫한 메브가 술잔을 들며 내뱉었다.

"내 복수가 끝이 나게 되겠지."

"복수요…?"

메브는 더이상 대답하지 않고 술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필립과 샬롯, 테사이아의 얼굴에서도 문득 미소가 사라졌다. 저마다 이번 일이 끝난 후를 떠올린 것일 터였다. 저마다의 길로 뿔뿔이 흩어지게 될 테니까.

그런 속내를 알 리 없는 나세르만이, 또 뭔가 말실수를 했다고 판단한 듯 머쓱하게 고개를 숙였다.

"벌써 하기엔 이른 생각들 같은데."

술잔을 비운 이안이 입을 열었다. 일행들의 시선을 받은 그가, 술잔을 채우며 말을 이었다.

"아직 남은 일이 있으니까. 맡은 역할을 잘 숙지하고, 방심하지 마. 오늘처럼."

"…예. 나리."

고개를 끄덕인 필립을 시작으로, 일행들이 멈췄던 식사를 다시 이어갔다. 이안을 물끄러미 바라본 나세르가 덧붙였다.

"공작을 정확히 어떻게 속이시려는 겁니까? 타락자들은 의심도 경계심도 많은 자들이라, 같은 편이라 해도 순순히 모든 걸 털어놓지는 않을 텐데요."

"잘."

"예…?"

"안 되면 말라는 생각으로."

"…알려주고 싶지 않으신 거군요. 알겠습니다."

진심인데. 음식을 입에 넣는 나세르를 바라보며 생각한 이안이, 느긋하게 술잔을 들면서 덧붙였다.

"그리고 거짓말과 이간질로."

"...?"

#237화

나세르가 무슨 의미냐는 듯 다시 그를 바라보았다. 술을 마저 마신 이안이 말을 이었다.

"네 말처럼 우리가 올 걸 알기만 해도 경계하고 의심할 테니까. 굳이 없애려고 노력하지 않을 거다. 대신 반대로 할 거야."

필립과 슬쩍 시선을 교환한 이안이 덧붙였다.

"그런 자들은, 또 막상 본인이 의심받는 건 못 견디는 법이거든."

어차피 들어야 할 말이 많은 것도 아니고. 나세르의 고개가 슬쩍 기울어지는 가운데, 이안은 더 덧붙이는 말 없이 술잔을 입에 가져갔다.

"그, 설명 정도는 해 줘도 되지 않을까요?"

필립이 조심스럽게 물은 건 그때였다. 눈을 빛낸 나세르가 이안을 돌아보았다.

빈 술잔을 채우며, 이안이 어깨를 까딱였다.

"간단하게만 끝낸다면야."

"물론이죠."

냉큼 대답한 필립이 나세르를 돌아보았다.

"소위 착한 기사 나쁜 종자라고 부르는, 가장 기본이 되는 전략이 있습니다. 이번 건 그걸 살짝 응용한 방식이라고 볼 수 있는데요."

수제자가 따로 없군.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하는 나세르를 눈에 담은 이안이, 헛웃음을 삼키고는 다시 술잔을 입에 가져갔다.

***

똑똑.

닫힌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번졌다. 명상 중이던 이안이 번쩍 눈을 떴다.

그의 왼손 검지에는 한때 나세르의 것이었던 유물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정신력은 물론 명상 스킬의 레벨도 하나 올려 주는 물건이었다.

나세르는 여기에 그런 옵션이 붙었다는 것도 모를 것 같았지만.

어쨌건 덕분에 이제 명상이 4레벨에 이른 이안은, 어떤 자세나 상황에서도 자유자재로 명상에 빠졌다가 깨어날 수 있게 됐다.

'최고 레벨을 찍으면 움직이면서도 할 수 있는 것 같던데….'

생각하며 장내를 한차례 확인한 이안이 창문을 열었다.

스펠로의 얼굴이 드러났다.

"곧 도착할 것 같습니다, 경."

"그래? 알겠소."

이안의 대답에 가볍게 고개를 숙인 스펠로가 마차를 앞질러 걸어갔다.

이른 아침부터 시작된 행군은 정오가 지나서까지 멈추지 않았다.

휴식 없는 급속 행군. 물론 그 누구도 불만을 표시하지 않았다. 집으로 빨리 돌아간다는 데에 불만을 가질 이유가 없을 터였다.

있다 해도, 행렬 최후미의 마차에까지 들리지는 않았겠지만.

"예정보다 반나절은 일찍 도착하는 것 같군요."

테사이아의 건너편에 앉은 필립이 나지막이 내뱉었다.

그와 메브는 창문을 닫은 채로도 두건을 벗지 않았다. 적어도 필립은 조는 걸 들키지 않기 위해서가 분명했다.

이안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마차는 뱀처럼 구불구불하게 이어진 언덕길을 내려가고 있었다.

그리고 저 너머. 잿빛 천장 같은 구름 아래, 검푸른 수평선이 펼쳐져 있었다.

바다였다.

"짠 냄새가 착각이 아니었네…."

테사이아가 멍하니 읊조렸다. 이안 쪽 창문 너머를 홀린 듯 바라보는 채였다. 처음 본 바다에 시선이 사로잡힌 것이리라.

물론, 이안의 감상은 조금 달랐다.

'이놈의 세상은, 바다도 우울하게 생겨 먹었네.'

겨울 바다처럼 짙은 남색인 수면은, 심지어 그리 고요해 보이지도 않았다.

먹구름 자욱한 하늘과 어우러져 금방이라도 폭풍우가 몰아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어쨌건, 게임에서 본 것처럼 시커멓게 죽어 있지는 않았다.

물론, 게임에서와 다른 건 바다만이 아니었다.

"정말 크군요…. 제국 서부의 중심이라더니…."

중얼대는 필립의 목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이안은 해안가로 펼쳐진 정경을 눈에 담았다.

바다에서 이어진 널찍한 수로가, 한복판에 성벽을 품은 채로 도시 전체를 감싸고 있었다.

덕분에 라클리프는 거대한 인공섬처럼 보이기도 했다.

수로 양 끝에서 뻗어 나온 성벽은 앞바다까지 원을 그리며 이어졌다.

중간중간 솟은 망루와 등대. 거대한 수성 병기들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 끝에 솟은 여러 개의 해상 수문들은 듬성듬성 이가 빠진 것처럼 열린 채였다.

범선 몇 척이 마침 수문을 통과해 진입하는 중이었다. 좌우로 튀어나온 긴 노가 검푸른 바닷물을 연신 떠밀었다.

그 안쪽, 해안 성벽 아래로 길게 이어진 항구에는 이미 여러 척의 배가 정박해 있었다.

저마다 다른 문양이 새겨진 검은 깃발이 돛대 위에 펄럭였다.

'검은 군도에서 온 배들인가….'

그리고 그 한복판. 크고 작은 건물들이 빼곡하게 솟은 도시는, 들은 것처럼 여전히 의식의 여파가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무너지거나 반파된. 혹은 허물고 다시 짓는 중인 집이 즐비했다.

길가 곳곳에서 흐릿한 검은 연기가 번지고 있기도 했다. 아마도 지하 수로에서 괴물이나 저주의 잔재를 태우고 있는 것이리라.

전체적으로 거무튀튀한 느낌이긴 했지만. 어쨌건 게임일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멀쩡하고, 거대한 모습이었다.

'…그래도 그때랑 같은 게 아예 없진 않네.'

이안은 도시 끝, 바다와 마주 보게 솟은 커다란 성을 눈에 담았다.

게임에선 3챕터의 보스 중 하나인 역병 공작이 기다리던 장소였다.

물론, 게임과 같은 건 공작과 싸우리란 부분까지였다.

이번에 만나게 될 공작은 그때보다 훨씬 약할 테고, 놈을 만나기까지 겪을 귀찮고 험난한 과정도 없을 테니까.

'…앞에서 그 개고생을 했는데. 쉽게 갈 수 있을 땐 쉽게 가야지.'

그때, 마차가 굽이진 길을 돌았다. 테사이아가 냉큼 반대편 창문을 여는 가운데, 이안은 등받이에 뒤통수를 기댔다.

아직 도시에 들어서기까지는, 제법 시간이 남아 있었다.

***

퀴퀴한 곰팡내와 탄내가 비린내와 짠 내에 뒤섞였다.

도시가 가까워질수록 콧잔등을 씰룩대던 테사이아의 표정이, 어느 순간 다시 평온해졌다.

아마도 후각이 마비된 것이리라.

다각- 다각-

말발굽 소리가 가까워진 건, 마차가 도시로 이어진 다리 위로 접어들었을 때였다.

스펠로 경이었다.

"양해를 구하겠습니다. 저는 먼저 내성으로 달려가 보겠습니다. 각하께 상황을 전하고, 귀빈들께서 바로 입장하실 수 있도록 준비해 두겠습니다."

"알겠소."

거참 친절하기도 하군.

이안은 내심 읊조리며 대답했다. 스펠로 경은 자신이 인도하는 이들이 공작을 죽이러 왔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이안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진실은 밝혀질 테고, 그때 그걸 믿는 건 이자의 몫이었다.

"귀빈들께선 병사들과 함께 이동하시면 됩니다. 부관이 대신 행렬을 지휘할 겁니다."

고개를 한 차례 숙인 스펠로가 말을 몰아 달려나갔다.

잠시 느려졌던 마차의 속도가 다시 빨라졌다.

"길을 트시오! 다들 물러나시오!"

행렬 선두에서 부관의 외침이 연신 이어지는 가운데, 마차가 도시로 접어들었다.

이안은 반쯤 열린 창문으로 도시와 시민들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길가로 물러난 시민들은, 딱히 일행의 마차에 관심을 보이지 않고 저마다 떠들며 하던 일을 이어나갔다.

본래 꽤 부유한 삶을 살고 있었으련만. 지금은 죄다 난민이 따로 없는 몰골이었다.

하지만 표정이나 행동은 그리 우울하거나 지쳐 보이지 않았다.

그건 관리로 보이는 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 역시 우렁차게 소리쳐 대며 도시의 수복 작업에 집중하고 있었다.

드네로브의 주민들이 그렇듯. 이들 역시 상황에 적응하고 삶을 이어나가려는 의지로 가득해 보였다.

어쩌면 이런 게 서부 사람들의 특징인 건지도 몰랐다.

북부나 변방과는 또 다른 의미의 강인함.

'…뭐, 성주를 잃는 것도 금방 극복할 수 있겠네.'

게임에서처럼 죄다 권속이 되어 버린 것도 아니고.

심드렁하게 생각하던 이안의 눈매가 이내 슬쩍 가늘어졌다.

각양각색의 무장을 갖춘 자들이 시민들 사이사이에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병사보다는 도적이 더 어울릴 것 같은 행색들이었다.

"…군도에서 온 자들이군."

"예. 천벌을 받아야 할 자들이죠."

필립이 나지막이 대답했다. 이안이 돌아보자, 두건 아래로 드러난 그의 입매가 머쓱한 호선을 그렸다.

"죄송합니다. 옛날 생각이 나서 그만."

"옛날 생각?"

"아겔 란 남부 국경에 있을 때를 말하는 겁니다. 이젠 정말 아득한 옛날 같군요."

필립이 덧붙이자, 이안이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해적 놈들이 어쩌고 했었지. 그것들이 군도 출신이었나?"

"거기서 쫓겨난 범죄자들과 인근의 해적들이 뭉쳐 만들어진 세력이었습니다. 공식적으로는요."

필립이 혀를 차며 읊조렸다.

"군도는 그들을 인정하지 않으며, 해적은 극형으로 다스리고 있다고 한다더군요. 하지만 제가 지켜본 바로는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오히려 군도가 그것들의 뒤를 봐주는 게 분명해요."

"어떻게 확신하는데?"

테사이아가 입술만 달싹여 물었다. 창밖을 응시하는 얼굴은 고고하고 냉정하게 유지한 채였다.

"무장 상태가 늘 좋았거든요. 어딘가에서 인원이 끝없이 보충됐고. 그게 아니라도, 섬 조각들에 모여 사는 자들이 그렇게까지 부강하다는 게 이상하지 않습니까."

필립의 목소리는 거의 속삭이듯이 고저 없이 이어졌다. 내내 그랬지만, 도시로 들어선 후부터는 다들 특히 더 언행이 흘러나가지 않도록 조심하고 있었다.

"제국의 지원금을 본인들의 세력 확장에 쓰고 있는 겁니다. 흑해의 괴물들을 사냥하고, 대륙 반대편으로 갈 신항로를 개척하라고 보내 주는 돈일 텐데요. 실제로도 항로 개척은 전혀 성과가 없잖습니까?"

"군도에 대해 아는 게 이렇게 많은 줄은 몰랐는데."

이안이 헛웃음을 흘렸다. 입맛을 다신 필립이 대답했다.

"국경 지대의 병사들이 떠들던 말을 들은 겁니다. 다들 상륙한 해적 놈들에게 원한이 깊었으니까요. 듣자 하니 군도 너머에도 야만인들이 사는 섬이 여럿이라던데. 거기서 인력을 추려서 해적으로 만드는 거랬습니다. 본인들의 영향력을 더 키우기 위해서겠죠. 변방을 침략하는 것도 그래서일 테고요."

낮게 콧방귀를 뀐 필립이, 군도의 병사들을 바라보며 씹어 뱉었다.

"어쩌면 항로 개척 같은 위험한 임무에도 해적들이나 보내고 있는 건지도 모릅니다. 어차피 내해만 잘 지켜도, 제국에선 별다른 간섭을 하지 않을 테니까요."

나라 어쩌고 하던 게, 일종의 약탈 전초기지였단 거군.

이안은 짧게 콧방귀를 뀌었다.

어쨌건, 아예 터무니없는 추론은 아니었다.

게임에서 검은 군도에 가 본 적은 없었지만. 군도 출신인 자들은 기본적으로 도적 기질이 있었다.

이동을 위해 배를 탈 경우, 출항과 동시에 강도로 돌변하는 돌발 이벤트도 있을 정도이지 않았던가.

'사실상 해적들이 모여 사는 동네란 거지….'

이안은 방금 들은 이야기들을 머릿속에 새겨 뒀다.

남부가 그렇듯, 검은 군도 역시 아는 게 없긴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애초에 스토리 진행을 위해 필수적으로 방문해야 하는 지역도 아니었다.

하지만 현실이 된 지금은, 언제 예상치 못한 이유로 가게 될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공작을 죽인 뒤에 바로 가야 할 일이 생길 수도 있었다.

거기다 슬슬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더 많아지고 있기도 하니까. 도움이 될 만한 정보들은 기회가 될 때 기억해 둘 필요가 있었다.

다각- 다각-

어느새 마차는 도시 깊은 곳까지 들어서고 있었다. 완만한 오르막길. 마차 뒤편으로 해안가를 감싼 성벽이 보였다. 아까 밖에서 본 내성이 이제 멀지 않았으리라.

다그닥- 다그닥-

앞쪽에서 말발굽 소리가 가까워진 건 그때였다.

스펠로인가? 생각한 이안은, 곧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마차 근처로 다가와도 말의 속도가 전혀 줄지 않고 있었다.

다그닥- 다그닥-

곧 꽤 고급스러운 남색 정복을 걸친 중년 남자가 마차 옆을 스쳐 지나갔다. 그 와중에도 마차 쪽을 힐끔 돌아보고 있었는데, 덕분에 이안과도 눈이 마주쳤다.

그야말로 찰나에 불과했지만.

"...."

이안은 자신과 눈이 마주친 순간 중년인의 눈매가 꿈틀대는 것을 똑똑히 인지할 수 있었다. 그의 이목구비도 선명하게 뇌리에 남았다.

안색이 좋지 않고 신경질적인 느낌이 드는 얼굴이었다. 달리 말하면, 전형적인 주문쟁이의 관상이었다.

곧 마차의 속도가 느려졌다. 뒤이어 또 다른 말발굽 소리가 가까워졌다. 이번에는 아는 얼굴이었다. 스펠로.

"문제라도 있소?"

마차가 멈추는 가운데, 그의 표정을 본 이안이 내뱉었다.

마차 옆에 붙은 스펠로가 입을 열었다.

"그게… 지금 각하께서는 성이 아니라 저택에 계시다고 합니다. 피로 누적으로 잠시 쉬고 계시다고요. 해서, 방금 업무를 대행하던 마티아스 공이 직접 공작저로 소식을 전하러 달려갔습니다."

아, 역시 주문쟁이군.

슬며시 한쪽 입술을 말아 올린 이안이 내뱉었다.

"그래서?"

"송구스럽습니다만, 이곳에서 잠시 기다려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죄송합니다. 절차가 있다 보니… 저도 달리 어떻게 할 수가…."

"설마, 병사들을 앞에 달고 기다리란 얘긴 아니겠지?"

"아. 아닙니다. 병사들은 이대로 복귀해 작업에 투입될 예정입니다. 물론, 저는 여기서 대기합니다."

"뭐, 그럼 됐소."

이안이 어깨를 으쓱이며 내뱉었다. 불쾌한 기색도 없이 받아들일 줄은 몰랐다는 듯 스펠로가 눈을 치켜뜨는 가운데, 그가 덧붙였다.

"길가로 마차를 인도하고, 아무도 근처로 접근하지 못하게만 해 주시오."

"예. 그러겠습니다. 아량을 베풀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스펠로가 재빨리 대답했다.

뭘 또 아량 씩이나.

이안이 실소를 삼키는 사이, 스펠로가 마차를 인도해 길 가장자리로 향했다. 작은 반원을 그리며 정차해서, 자연스럽게 마차의 방향이 바뀌었다.

창밖, 마차 뒤편으로 내성 성문을 통과하는 병사 행렬과 높이 솟은 성이 얼핏 보였다.

마차에서 떨어지는 스펠로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이안이 다시 창문을 닫았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군."

테사이아도 창문을 닫는 가운데, 메브와 거의 동시에 두건을 벗은 필립이 내뱉었다.

"그러게요. 시간이 조금 걸리겠군요."

공작이 그들을 기다리게 하리라 이미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교단의 성자 대행이 그 악명 높은 정화자까지 이끌고 나타난 셈이었으니까.

이안을 만나는 걸 피할 수는 없겠지만, 최악의 상황을 대비할 시간은 필요할 터였기 때문이다.

이미 켕기는 게 있으니 더더욱 신중해질 수밖에 없으리라.

"누가 오면 알려줘, 야옹아."

마부석 쪽 간이 창문을 살짝 연 테사이아가 속삭이는 가운데. 이안이 느슨하게 걸치고 있던 장비들을 딱 맞게 조율하기 시작했다.

그게 신호라도 된 것처럼 일행도 분주하게 움직였다.

테사이아는 요정의 세검과 투척용 단검들이 달린 가죽띠를 몸에 둘렀고, 메브와 필립은 로브를 아예 벗어버리고는 갑옷을 재점검했다.

"저택이 따로 있을 줄은 몰랐는데.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군. 이리로 올지. 아니면 우리를 불러들일지."

양손검을 등에 사선으로 고정하며 메브가 읊조렸다. 팔뚝 갑주를 조이던 필립이 곧바로 대답했다.

"저택으로 부를 것 같습니다. 여긴 보는 눈이 너무 많아요. 자신의 정체가 드러날 상황도 염두에 두고 있을 겁니다. 공허의 표식이 담긴 흉물을 성에 보관하고 있을 것 같지도 않고요."

"이젠 정말 하산해도 되겠군…."

이안이 중얼댔다. 진은 강철 방패를 등딱지처럼 짊어지던 필립이 그를 바라보았다.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나도 같은 생각이란 얘기야."

"저택으로 부른다면, 여차하면 우릴 죽일 생각도 있단 거겠군…."

메브가 서늘하게 중얼댔다. 다시 로브를 어깨에 걸치는 그녀의 눈매는, 어느새 전투가 시작되기라도 한 것처럼 날카로웠다.

허리를 이리저리 돌리던 테사이아가 덧붙였다.

"하긴. 여긴 기분 나쁜 마력이 잔뜩 남아 있으니까. 소란이 너무 커지지만 않으면 들킬 염려는 없겠네."

"공작도 어지간하면 그럴 생각까진 없을 거다. 우릴 죽이는 건, 뒤처리가 귀찮을 테니까."

다시 등받이에 기대며 말한 이안이, 고개를 좌우로 꺾으며 덧붙였다.

"하지만 그런 만큼, 막상 시작하면 더 확실하게 하겠지."

"방심하지 말란 거지? 이제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내뱉던 테사이아가 재빨리 입을 다물었다. 샬롯이 마부석 쪽 창문을 두드렸기 때문이다.

생각보다 빨리 왔는데….

이안이 내심 읊조리는 가운데, 로브의 매무새를 가다듬은 메브와 필립이 두건을 뒤집어 썼다.

다그닥- 다각-

곧 달려온 말발굽 소리가 마차 근처에서 멈췄다. 조용해진 것도 잠시, 마차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창문을 열자 이제는 익숙한 스펠로의 얼굴이 드러났다. 물론, 이번에는 그 혼자가 아니었다.

"...."

스펠로의 뒤에 선 기수를 확인한 이안의 눈매가 설핏 꿈틀댔다.

수인이었기 때문이다.

#238화

줄무늬가 섞인 짙은 갈색 털.

머리를 제외한 전신에 판금 갑옷을 걸치고 있었는데, 샬롯 보다도 덩치가 더 커 보였다.

동공이 세로로 긴 샛노란 눈이 이안을 빤히 응시했다.

무표정했지만, 이미 수인과 오랜 시간을 보낸 이안은 저자의 시선이 그리 호의적이지 않다는 걸 곧바로 눈치챘다.

"각하의 호위 기사인 팔메르 경입니다."

스펠로가 공손하게 말했다. 샬롯을 대하는 태도가 묘하게 자연스럽다 싶더니. 이미 수인을 자주 본 덕분인 모양이었다.

어쨌건, 이 팔메르란 자는 게임에서는 본 기억이 없었다. 현실이 되면서 늘어난 하수인 하나가 이 자인 게 분명했다.

"반갑소."

이안이 덤덤하게 내뱉었다. 팔메르가 고개를 까딱였다. 그러면서 슬쩍 마부석 쪽을 일별하고는 다시 그를 바라보았다.

'아, 그래. 꼬리가 잘린 걸 봤군.'

그리고 자른 범인이 나란 거지.

이안은 코웃음을 삼키며 놈의 시선을 받아 넘겼다. 저놈의 속내보다, 지금 샬롯의 표정이 더 궁금했다. 오래간만에 만난 동족이 타락자의 하수인이라는 걸, 그녀도 알고 있을 테니까.

이안과 팔메르 사이의 묘한 분위기를 눈치챈 듯, 스펠로가 짧게 헛기침을 흘렸다. 그는 팔메르가 왜 저러는지 전혀 알지 못할 터였다.

"그… 각하께서 귀빈들을 저택으로 초대하신다고 합니다. 여기 이 팔메르 경이, 마중을 나온 것이고요."

일행들이 슬쩍 시선을 교환하는 가운데.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끄덕인 이안이 스펠로를 바라보았다.

"경도 함께 가시오?"

"저택 앞까지는요. 제가 모셨으니, 끝까지 배웅해 드려야지요."

"그리고 다시 여기로 돌아오고?"

"예. 보고서를 작성해야 하니까요. 들은 이야기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럼 그냥 이대로 성으로 돌아가시오. 안내는, 여기 팔메르 경만으로도 충분할 것 같으니까."

내뱉은 이안이, 팔메르의 노란 눈을 마주 보았다.

"그렇지 않소?"

"물론… 입니다."

멈칫한 팔메르가 대답했다. 이안에게 존대하는 게 내키지 않는 듯, 낮은 목소리에 절로 저주파가 묻어 나왔다.

물론, 이안에게는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했다.

"훌륭하군. 마부석 옆으로 서시오."

보란 듯 미소 지으며 말한 그가, 손을 뻗어 마부석 쪽 간이 창문을 열었다. 그가 팔메르를 빤히 응시하는 샬롯의 옆얼굴을 돌아보며 덧붙였다.

"우리를 인솔하는 건 여기, 샬롯 경의 역할이니까."

"...."

샬롯이 그를 마주보았다. 이안이 슬쩍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팔메르 경을 맡아 줄 수 있겠나?"

그 말에 담긴 속뜻을 눈치챈 듯, 샬롯의 눈빛이 순간 가라앉았다.

"물론입니다."

오히려 고맙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그녀가 다시 팔메르를 돌아보았다. 슬쩍 미간을 꿈틀댄 팔메르가 묵묵히 말머리를 돌렸다. 서로를 의식하는 게 분명했지만, 딱히 대화가 오가지는 않았다.

뭐, 알아서들 하겠지. 이안이 생각하는 사이, 스펠로가 그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모실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경도 수고 많았소. 작은 조언을 하나 하자면…."

덤덤하게 대답한 이안이 말을 흐렸다. 스펠로가 귀를 기울이듯 고개를 들이밀었다. 이안이 낮게 덧붙였다.

"보고서 작성이 끝날 때까지, 밖으로 나오지 마시오."

"...?"

스펠로가 의아한 눈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이안은 더 덧붙이는 말 없이 마차 창문을 닫을 뿐이었다.

마차가 기다렸다는 듯 출발했다. 말 머리를 미리 돌려놓은 덕분에 바로 대로로 올라가 멀어졌다.

팔메르와 마차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스펠로가 중얼댔다.

"밖으로 나오지 말라고…?"

뒤늦게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다. 어쩌면 저들이 말 한 용무가, 그가 생각한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설마…."

고삐를 후려치려던 스펠로의 손길이 멈칫댔다. 이윽고 짧게 혀를 찬 그가, 대신 말머리를 성 쪽으로 당겨 돌렸다. 이안의 조언을 따르기로 한 것이다.

어차피 이미 그의 손을 떠난 일이었다. 윗사람들 간의 문제에 껴 봐야, 그가 바꿀 수 있는 건 없으리라. 고래 사이에 낀 새우처럼 등이나 터져 나가겠지.

대신, 그는 곧 자신이 쓰게 될 보고서에 집중하기로 했다.

교단의 성자 대행과 정화자들의 업적을 영웅적으로 기록한다면, 대교회에서도 그 보고서를 인정해줄 게 분명했으니까.

그렇다면 그 위업을 기록한 인물로, 그 역시 역사의 한 귀퉁이에 이름을 올릴 수 있을 터였다.

***

공작의 저택은 도시 반대편 외곽에 지어져 있었다. 높은 담벼락이 정원을 감싸고 있고, 경비병 둘이 대문 앞을 지켰다.

무장한 병사들은 그게 전부인 것 같았다. 검은 흙만 남은 정원은 황량했고, 대저택은 빛이 바랜 것처럼 음산했다.

곧 마차가 멈췄다.

샬롯이 마차 문을 열자, 일행이 기다렸다는 듯 차례대로 내렸다.

물론 이안은 마지막 순서였다.

샬롯과 테사이아. 메브와 필립이 각각 좌우에 마주 서서 길을 만들었다.

그 사이로 내린 이안은, 곧 앞에 마중 나온 사람을 눈에 담았다.

'직접 마중 나올 줄은 몰랐는데.'

처음 보는 얼굴이었지만, 크랄렌 공작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걸 증명하듯, 어느새 말에서 내린 팔메르가 그의 뒤로 다가가고 있었다.

"...."

일행을 지나친 이안이 멈춰 섰다.

공작의 우측 뒤에 서 있던 기사가 기다렸다는 듯 두 걸음 앞으로 나섰다.

서른쯤 되어 보이는 제국인. 아마 공작의 마지막 측근인 발로이 경일 터였다. 그가 살짝 고개를 치켜 들며 입을 열었다.

"소개하겠습니다. 선황 폐하께서 임명하신 라클리프의 정당한 지배자. 푸른 함대의 주인이며-"

이안은 발로이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공작을 마주 보았다.

공작은 그의 기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그때처럼 거대하고 역겨운 몰골도 아니었고, 반쯤 정신이 나가 있지도 않았다.

꽤 완고해 보이는 인상. 풍채 좋은 몸에는 고급스러운 남색 정복을 걸친 채였다.

전체적으로 마법사보다는 기사에 더 어울릴 분위기였다. 그에게서 마법을 떠올리게 할 만한 건, 중지의 반지에 박힌 커다란 흑요석 하나가 전부였다.

노년을 바라보는 나이라던데. 겉보기엔 중년이나 다를 바 없었다.

'영생에 관심이 많다더니. 아예 헛수고만 하진 않았나 보네.'

그때, 소개를 끝낸 발로이가 뒷걸음질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기다렸다는 듯 샬롯이 이안의 옆으로 나섰다. 어느새 일행들은 이안의 뒤에 모여선 채였다.

"소개하겠습니다."

이 짓거리좀 그만 하고 싶군.

내심 한숨 쉬면서도, 이안은 묵묵히 공작과 그의 하수인들을 눈에 담았다. 아까의 주문 쟁이는 보이지 않았다. 아마 저택 안에서 뭔가 바쁘게 준비하고 있으리라.

어쨌건, 공작에게는 그 어떤 마법적인 징후도 느껴지지 않았다. 기사들에게선 흐릿한 파장이 느껴졌지만, 오염된 느낌은 아니었다. 아마도 마도구나 마법 무구를 장착하고 있는 것이리라.

"-루 사드의 구원자. 역병의 정화자. 초인, 이안 호프 경이십니다."

소개를 끝낸 샬롯이 물러났다. 옅은 미소를 지은 채 듣고 있던 공작이 정중하게 무릎을 굽혔다.

"먼저 감사를 표하겠소. 성자 대행. 그리고 교단의 정화자들이여. 이야기는 전해 들었소. 라클리프가 귀공들에게 큰 은혜를 입었소. 찬란한 빛에 영광 있으라."

그의 말투와 표정은 진솔하고 무게감이 있었다. 일행을 경계하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고위 타락자일 수록 자신의 본모습을 위장하는 능력도 뛰어나지 않던가.

하지만 공작의 뒤에 선 두 기사는 아니었다.

그저 자신들의 역할에 충실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눈빛에 묻어나는 경계심에 날이 서 있었다.

크랄렌 만큼 가면이 두껍지는 않은 것이리라.

이안이 태연하게 미소 지었다.

"감사 인사는 기꺼이 받겠소. 이렇게 직접 환대해 주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군."

"이런 모습으로 맞이하게 되어 유감이오. 본래는 훨씬 아름다운 저택이었소만. 그 끔찍한 저주를 피할 수는 없었소."

공작이 덤덤하게 답했다. 이안의 시선이 그의 뒤편, 한쪽만 열린 대문 너머로 향했다. 목덜미가 조금 서른해졌다. 육감이 경고를 보내는 것이리라.

'마법사의 소굴이라는 거지.'

생각하면서도, 이안은 고개를 저었다.

"조용해 보여서 마음에 드는군. 괜찮소."

"너그러우시군. 들어갑시다. 나 역시, 소문으로만 듣던 북부의 용살자에게 듣고 싶은 말이 많으니."

손을 펼쳐 문을 가리킨 공작이 먼저 몸을 돌렸다. 이안은 선선히 그의 뒤를 따라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위로 모시겠소."

공작의 두 호위 기사가 자연스럽게 그의 뒤에 나란히 붙었다. 바로 뒤, 샬롯과 테사이아가 그들의 뒤통수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걸음을 옮겼다.

물론, 이안은 신경 쓰지 않았다. 공작이 그들의 목적을 듣기도 전에 본색을 드러낼 리 없었다.

대신 그는 황량한 저택 내부를 차근히 눈에 담았다. 오염된 마력 같은 게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전체적으로 불길했다. 사람도 많지 않았다. 고작 하인 몇이 눈에 띄었을 뿐이었다.

복도로 접어들며, 공작이 입을 열었다.

"경황이 없다 보니, 이 몰골로 방치 중이오. 양해 부탁드리겠소."

"이해하고 있소. 도시를 수복하고 일대를 정화하는 것에 전념하기에도 손이 부족한 시기일 테니까."

"역시. 통찰력이 대단하시군."

나였어도 그 핑계를 댈 거거든.

이안은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지금의 상황은 공작에게는 낙원이나 다름 없을 터였다.

음험한 연구도 마음 껏 할 수 있는 데다, 민심까지 챙길 수 있을 테니까. 저택의 하인들을 주문으로 홀리는 것 정도는 일도 아닐 터였다.

곧 널찍한 응접실이 나타났다. 본래는 이런저런 장식물들이 있었겠지만. 지금은 직사각형의 커다란 식탁과 의자가 전부였다.

"급하게 준비하느라 부족함이 많소. 앉으시오."

공작이 테이블 끝을 가리켰다. 이안의 자리를 중심으로, 좌우에 주석 잔이 두 개씩 놓여 있었다.

그 한복판에도 마찬가지로 주석으로 만든 술병이 놓여 있었다. 포도주 향이 은은했다.

자리에 앉은 이안이 맞은편을 바라보았다. 공작의 자리가 분명한 의자 뒤에, 두건을 눌러쓴 중년인이 공손하게 서 있었다. 아까 본 주문쟁이, 마티아스였다.

표정이 평온한 것을 보니, 모든 준비가 끝난 모양이었다.

'뭐, 우리 자리 아래에 주문 회로라도 설치해 뒀나.'

어차피 이 저택 전체에는 주문이 새겨져 있을 게 분명했다. 이번 기회에 그걸 더 정교하게 가다듬었을지도. 가능성은 차고 넘쳤다.

이안이 생각하는 사이, 테사이아와 샬롯이 좌우에 마주 보고 앉았다.

앉은 건 둘 뿐이었다. 메브와 필립은 이안의 뒤에 나란히 섰다.

"대화부터 하고 싶은 생각에, 술만 먼저 준비했소만. 원하신다면 바로 식사를 준비하겠소."

하인 하나가 잔을 채우며 돌아다니는 가운데, 이안과 마주 앉은 공작이 말했다. 저쪽도 앉은 건 그 혼자였다. 세 하수인은 모두 공작의 뒤에 그대로 서 있었다.

"괜찮소. 오는 길에 간단히 요기를 한 터라."

이안이 술잔을 들며 말했다. 테사이아와 샬롯은 술잔에 손도 대지 않았다.

물론 이안도 저항력이 낮았다면 그랬을 터였다. 하지만 그의 중독과 질병 저항력은, 말 그대로 초인적인 수준이었다.

어지간한 독은 고통조차 느끼지 않고 소화 시킬 수 있으리라.

포도주로 입을 축인 이안이 미소 지었다.

"맛이 좋군."

"입에 맞으신다니 다행이군. 테센의 포도주요. 어쩌면 이제 다시는 맛보지 못하게 될 수도 있는 술이지."

마찬가지로 포도주를 한 모금 마신 공작이, 이안 쪽으로 상반신을 기울이며 미소 지었다.

"여쭈고 싶은 말이 많소만. 우선은 손님의 용무를 먼저 해결해 드리는 게 순서일 것 같군. 그래야 다른 대화를 나누기에도 수월하지 않겠소?"

이안도 마주 미소 지었다.

"옳은 말씀이시오."

"해서, 성자 대행께서는 무슨 용무로 나를 찾으셨소? 이렇게, 교단의 정화자들까지 대동한 채로."

이안이 구석에 선 하인을 돌아보았다.

"우선, 사람들을 물리는 게 좋을 것 같소만."

"어렵지 않은 일이지. 나가 있거라. 전부 근처로는 얼씬도 하지 못하게 해."

공작이 곧바로 내뱉었다. 꾸벅 허리를 숙인 하인이 방을 나섰다.

문이 닫히자, 비로소 장내에 묘한 적막이 내려앉았다.

포도주를 한 모금 더 마신 이안이 입을 열었다.

"귀하의 존재는, 일종의 필요악이오."

아주 느긋하고 덤덤한. 하지만 지금까지와는 확연히 달라진 말투였다. 공작의 입가에 맺혀 있던 미소가 굳어졌다.

"필요악?"

"필연적인 어둠을 맞이하려면 필요한 인물이란 뜻이지. 그래야, 다가올 아침이 더 찬란해질 테니까."

"...."

공작의 눈매가 살짝 가라앉았다.

이안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 어둠이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한다면, 새로운 아침도 빛이 바랠 수밖에 없지 않겠소?"

#239화

"…지금 내게 누명이라도 씌우겠다는 것인가."

공작이 서늘하게 내뱉었다.

철컥. 스르릉-

동시에 발로이와 팔메르가 검을 뽑아 들었다. 뒤로 한 걸음 물러난 마티아스도 품에서 얇은 마법봉을 꺼내든 채였다.

공작이 타락자가 아니라 해도 충분히 나올 수 있는 반응이었다. 크랄렌 공작은 라클리프의 지배자이며, 지금 이안은 그에게 모욕적인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고 있었으니까.

"...."

이안의 좌우 대각선에 앉은 샬롯과 테사이아의 허리도 꼿꼿해졌다. 둘 다 저마다 상대로 점찍은 자를 무표정하게 응시하며, 눈조차 깜빡이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서로에게 달려들 듯한 긴장감이 서릴 찰나.

"방금 발언에 대한 합당한 해명을 준비해야 할 것이오, 성자 대행. 귀하의 발언은 곧, 백금룡의 뜻으로도 해석될 수 있음이니."

심복들을 진정시키듯 손을 까딱인 공작이 내뱉었다. 그의 눈빛은 목소리만큼이나 가라앉아 있었지만, 어쨌건 여전히 여유가 있었다.

비단 권력에서만 비롯된 여유는 아닐 터였다.

따로 믿는 구석이 있으리라.

하지만 술잔을 집어 드는 이안의 손길은 여전히 태연했다.

"해명을 준비해야 할 것은 내가 아니라 당신이오. 공작."

"뭐라…?"

"개인적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소.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들을 방치한 것인지. 서부를 이 꼴로 만든 자들 말이오. 귀하가 버린 실패작들."

마지막 순간 공작의 눈을 바라보며 내뱉은 이안이 술잔을 입에 가져갔다. 그가 천천히 포도주를 마시는 사이, 가만히 그를 응시하던 공작이 내뱉었다.

"그 저주받을 타락자들이 헛소리라도 늘어놓았나 보군. 설마, 교단의 성자 대행이라는 자가 고작 타락자의 이간질에 넘어가 이런 무례를 저지르는 것인가."

"오해가 있으시군."

코웃음을 친 이안이 술잔을 든 손등에 입술을 닦으며 덧붙였다.

"실패를 탓하는 것이 아니오. 다만, 실패작들은 폐기하셨어야지."

공작의 미간이 설핏 꿈틀대는 가운데, 빈 잔을 내려 놓은 이안이 말을 이었다.

"여긴 변방이 아니잖소. 귀하의 태만이 얼마나 큰 위험을 불러올 수 있었는지 아직도 모르시나 보군. 당신의 민낯이 드러나는 건 그다지 큰 문제가 아니오. 공작."

덤덤한 말투와 달리, 공작을 노려보는 눈빛은 날카로웠다. 말 그대로 그의 잘못을 질책하는 눈빛이었다.

"당신은 대업을 무너트릴 뻔했소. 공작. 균형을 깨뜨리고 모두를 위험 속으로 몰아넣을 뻔했지. 때마침 내가 서부에 있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 것 같소?"

"...."

공작의 눈매가 설핏 가늘어졌다.

여전히 불쾌해하는 듯한 표정이었지만, 아마 내심까지 그렇지는 않을 터였다.

지금 이안은 그의 행적과 숨겨진 정체를 알고 있다는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그 부분은 그저 당연한 사실로 치부하고, 그보다 더 깊은 부분을 자연스럽게 언급하고 있었다.

사실과 다른 부분이 있다 해도 상관없었다. 공작은 어차피 타락자였고, 해석도 그의 몫이었다.

설사 그가 원탁의 일원이 아니라 해도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을 테니 의미는 충분했다.

실제로도, 이안의 그런 의도는 적중하고 있었다.

'설마. 정말로 이 자가?'

공작의 뇌리에는 온갖 의구심이 싹트고 있었으니까.

물론 그는 그런 속내를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군. 증거가 있다면 대교회에 제공하고 정식 절차를 밟으시오. 기꺼이 협조할 테니."

눈앞에 앉은 건 그 유명한 북부의 초인이었으며, 백금룡의 대행자였다. 그의 뒤에는 교단의 정화자가 둘이나 서 있기까지 했으니까.

이 모든 게 함정일 가능성은 여전히 차고 넘쳤다.

덤덤하게 내뱉은 그가, 잠시 이안의 눈을 뚫을 듯 응시하고는 덧붙였다.

"그리고 그 후엔, 귀하도 귀하의 발언에 책임을 지게 될 것이오. 이곳, 서부에서. 나와 내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지켜낸 이 도시 한복판에서."

"대응이 아주 모범적이시군. 훌륭해. 원하신다면 그렇게 해 드리겠소. 사실, 그걸 더 원하는 이도 있어서 말이오. 그러는 게 귀하에게도 좋은 교훈을 하나 남길지도 모르지."

이안이 빙긋 미소 지었다.

"언제나 예외적인 경우는 일어날 수 있다는."

공작의 머릿속을 또 한 번 헝클어 놓기엔 충분한 말들이었다. 불현듯 근본적인 의문 하나가 그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북부의 용살자가 서부에 발을 들인 게 과연 우연이었을까, 하는.

합리적인 의문이었다. 이 자는 서부와는 아무런 연관도 없었으니까. 특히 테센 같은 변경은 우연히라도 떠돌이가 발을 들일 지역이 아니었다.

때마침 우연히 동시에 서부의 타락자들이 의식을 시작할 확률은, 당연히 더더욱 낮아지리라.

처음부터 누군가 이 모든 걸 의도했다면 모를까.

'설마, 백금룡이?'

공작은 이어진 의문을 곧바로 부정했다.

그 불멸자는 교단의 성자로서, 온갖 교리와 법령에 꽁꽁 얽매인 처지였다. 그 빈틈을 파고들 수도 있겠지만, 사실상 그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보다는 다른 누군가가 배후에 있다고 생각하는 게 합리적이었다. 자신이 죽기를 바라거나, 혹은 목줄을 채우고자 하는 누군가.

그것도 교단 내부에 큰 영향력을 가진.

설마…?

공작의 시선이 불현듯 이안의 뒤에 선 정화자들에게로 향할 찰나.

"기회가 있을 때 해명하시는 게 좋을 것이오. 솔직히 말해서, 내가 보기에도 귀하는 본인의 영달에만 관심이 있으신 것 같거든."

느긋하게 말을 이은 이안이, 손을 뻗어 술병을 들었다. 빈 술잔을 채우며 그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권력과 영생 말이오."

"...."

공작의 표정도 확인하지 않은 채 술병을 내려놓은 이안이, 다시 술잔을 들어 입에 가져갔다.

"이 잔을 비우면 일어나겠소."

내뱉은 그가 천천히 술잔을 기울였다. 공작이 어떻게 나오든 전혀 상관없다는 태도였다. 오히려 공작이 보기에는, 그가 이대로 입을 다물고 있어 주기를 바라는 것처럼 보였다.

"보내드리지 않겠다면?"

공작이 툭 내뱉은 건, 술잔이 반 이상 줄어들었을 때쯤이었다. 이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사실, 그럴 필요도 없었으리라.

솨아아아-

뒤에 선 두 정화자의 로브가 펄럭이더니, 그 아래로 선명한 황금빛이 일렁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얼핏 드러난 육중한 판금 갑옷. 어느새 두 정화자의 손에는 각각 은처럼 흰 날을 가진 양손 검과 끝이 뾰족한 방패가 들려 있었다.

공작은 저것이 백금룡이 진언을 새긴 보구이며, 양손검과 방패는 진은을 섞어 만들어진 물건임을 곧바로 알아챘다.

저들이 정말 정화대인가 하던 일말의 의구심도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정화자를 흉내낼 수는 있어도, 그들의 무구까지 흉내 낼 수는 없는 법이었다.

물론, 그 사실이 공작을 두렵게 만들지는 못했다.

"내게는 황실의 피가 섞여 있으며, 또한 루 솔라의 신도이자 교단의 주교이기도 한바. 그대들은 물러나 간섭하지 말라. 교리와 법령을 거스르는 것은 물론이며, 그대들의 행동은 백금룡을 섬기는 것으로 비춰질 수도 있음이니. 찬란한 여신께서 지켜보고 계시다."

"우리가 귀하를 용인하는 건, 빛을 위한 어둠이기 때문일 뿐이오. 감히 빛을 입에 담지 마시오."

씹어뱉은 건 필립이었다. 아주 낮고 서늘한, 정화자 특유의 말투였다.

"계속 주제넘은 소리를 지껄인다면, 이 자리에서 절차대로 집행할 것이니."

두건 아래, 공작을 응시하는 그의 눈동자에 황금빛이 아른거렸다.

공작의 눈매가 꿈틀대는 가운데. 발로이가 언제부터인가 들고 있던 투구를 눌러썼다. 팔메르도 허리춤에서 한 자루의 검을 더 뽑아 들었다. 과거 샬롯이 사용하던 것과 같은, 날 끝부분이 앞으로 툭 튀어나온 송곳니 검이었다. 치칫, 마티아스가 쥔 마법봉 끝에서 푸른 전격이 번쩍였다.

탁.

그때, 이안이 빈 잔을 내려놓았다. 그가 엄지로 입가를 닦으며 공작을 바라보았다.

"귀하의 해명은 잘 들었소."

드르륵, 그가 말을 마침과 동시에 일어섰다. 공작의 입에서 풋, 하는 낮은 실소가 번진 건, 그가 막 몸을 돌린 순간이었다.

슬쩍 미간을 찌푸린 이안이 돌아보는 가운데, 공작이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아주 대단하군. 대단해. 그 누가 순수를 추구하는 여명이 백금룡의 대행자와 함께한다 여길 수 있을까. 그 누가 백금룡의 대행자가 여명의 일원이며 순수 교도라 여길까."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읊조리며, 공작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대체 왜 의식이 시작된 건지 이해할 수 없었는데. 처음부터 놀아나고 있었군. 그야말로 빠져나갈 수 없는 함정이었어. 하긴. 우연이 반복되면, 그건 더이상 우연이 아니지."

"...."

이안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무표정하게 공작을 바라볼 따름이었다. 하지만 공작에게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앉아서 한 잔 더 드시오, 경. 향이 아주 좋잖소?"

"...."

"부디. 정중하게 부탁드리겠소."

덧붙이는 공작의 눈동자에 흐릿한 마력이 아른거렸다. 동시에 천장과 벽면, 바닥에 푸르스름한 빛이 삽시에 피어났다. 빼곡하게 새겨진 주문 회로였다.

오염된 마력이 아니었다. 저택 곳곳에 숨겨진 마석과 정수에서 발현되는 순수한 마력.

샬롯과 테사이아가 금방이라도 튀어나갈 듯 움찔대고, 두 정화자의 시선도 공작의 얼굴에 꽂혔다.

공작이 건조하게 미소 지었다.

"조금 더 솔직해지겠다는 의미로 보인 것이니, 오해 없길 바라겠소."

"아직 덜 솔직하신 것 같은데."

미소 지으며 내뱉은 이안이 자리에 앉았다. 주석 술병을 드는 그를 눈에 담으며, 공작은 다시 한번 확신했다. 역시, 이 자는 자신의 비밀을 전부 다 아는 게 분명하다고.

이미 늦은 깨달음이었다.

'빌어먹을.'

부글부글 끓는 속내와 달리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공작은 잔을 드는 이안을 바라보았다.

"궁금하군. 혹시 귀하의 위업은, 처음부터 전부 만들어진 것이오? 백금룡 조차 속였나? 하긴. 그를 죽이기에 더없이 좋은 칼날이겠군. 이미 한 번 용을 죽인 경험이 있는데, 두 번은 못 할까."

"그건 당신이 알 바 아닐 텐데."

이안이 말을 잘랐다.

공작의 미소가 짙어졌다.

"귀하가 새로운 아침을 밝힐 구세주로 선택받은 건 아닐까, 궁금해서 말이오. 그렇다면 우리는 뗄래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될 테니."

"…술잔이 벌써 반밖에 남지 않았소. 이번엔 내가 나가는 걸 막을 수 없으실 거요."

공작의 눈을 바라본 이안이, 건조하게 덧붙였다.

"그리고 나면, 원탁에 자리가 하나 남게 되겠지."

"…하."

공작이 짧은 웃음을 흘렸다. 이안의 미간이 살짝 좁아졌다.

"뭐가 웃기지?"

아주 작은 감정 표현이었지만, 공작의 기분을 조금 좋아지게 하는 데에는 충분했다. 정곡을 찌르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였다.

입가의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공작이 말을 이었다.

"귀하의 야망이 느껴져서 말이오. 그래… 이제 확실하군…. 더 이상의 균형은 필요치 않은 거였어. 혼돈의 시대가 열렸으니. 많은 게 달라지겠군. 돌아가서 전하시오. 나는 여명의 곁에 서겠노라고. 아마, 이 답을 원하시는 거겠지."

술잔을 내려놓은 이안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바라보는 가운데, 공작이 미소 지었다.

"너무 서운해하지 마시오. 원탁의 의자는 상징적인 의미일 뿐, 숫자가 정해진 것이 아니니. 귀하도 언젠가는 그사이에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될 날이 있을 것이오. 지금처럼 계속해서 잘 해 나가신다면."

"글쎄…."

술잔을 어루만지며 고개를 끄덕인 이안이, 문득 다시 공작을 마주 보았다. 언제 언짢아했냐는 듯, 입가에 묘한 미소를 띤 채였다.

"나는, 네 의자가 탐이 나는데."

"뭐라고…?"

푸확-!

되묻는 공작의 목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이안의 일행들이 거의 동시에 몸을 날렸다.

콰장창-!

가장 먼저 달려든 건 샬롯이었다. 그녀는 검조차 뽑지 않은 채 팔메르를 향해 달려들었다. 검을 내뻗기도 전에 휩쓸린 팔메르가 그녀와 뒤엉켜 바닥을 나뒹굴었다.

퍼억!

마티아스의 고개가 누가 뒤에서 당긴 것처럼 치켜 올라간 것도 거의 동시였다. 날이 반쯤 박힌 단검이 그의 얼굴 한복판에 박혀 있었다. 벌어진 그의 입술이 경련하듯 달싹이고, 마법봉에 맺힌 전격이 바스라졌다.

콰치치칫-!

그리고 필립은 판금 갑옷의 마석들을 번쩍이며 발로이의 코앞까지 쇄도하고 있었다. 뾰족한 방패 날이 그의 투구 바로 앞으로 칼날처럼 날아들었다. 그가 몸을 날린 순간 위로 솟구친 로브가 활짝 펼쳐진 채 하늘댔다. 그 사이로 번진 황금빛 광채는 아직 필립을 따라잡지도 못한 채였다.

이 모든 상황이 눈 깜짝할 사이에 동시에 일어난 가운데.

쒸에엑-!

의자를 박차고 기다란 식탁을 단숨에 뛰어넘은 이안은, 공작의 코앞까지 쇄도하고 있었다.

검집에서 매끄럽게 뽑혀 나온 정화자의 진은 강철 장검이 새하얀 궤적을 그리며 공작을 향해 날아들었다.

파치치칫-

장내의 주문 회로가 번쩍이며, 눈을 치켜뜬 공작의 앞으로 푸른 역장이 솟구쳤다.

카가가가각-

검날이 역장 위를 할퀴듯 베었다. 역장 위로 새빨간 불똥이 튀고, 새하얀 검날이 톱날처럼 역장을 가르며 박혀 들었다.

하지만 어쨌든, 끝내 단칼에 공작에게 닿지는 못했다.

역장 너머, 이안을 노려 보던 공작이 씹어 뱉었다.

"기습이라니. 이런 비겁한 짓을?"

이안의 눈매가 설핏 휘어졌다.

"극찬이군."

#24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