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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160

#150화

"기꺼이."

미소 지은 파엘이 시선을 돌렸다. 그의 손짓에, 대기 중이던 단원들이 달려와 한 명씩 일행의 곁에 섰다.

"마음에 드는 물건을 고르시면, 어떤 물건인지 자세히 설명해 줄 것이오. 마음껏 구경하시고, 마음껏 물으시오."

내뱉은 파엘이 이안을 돌아보며 미소 지었다.

"경은 내가 직접 모시겠소."

고개를 끄덕인 이안이 메브와 필립을 돌아보았다.

"어제 나눈 대화, 잊지 마시오."

"그러지."

"아낌없이 고르겠습니다, 나리."

메브와 필립이 뒤편의 마차로 걸음을 옮겼다. 봉인함을 닫은 샬롯도 이안의 곁에 섰다.

"난 너와 함께 보겠다, 이안."

그러든가.

이안은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마차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검. 단검. 도끼. 창이나 철퇴는 물론, 온갖 종류의 방어구와 보조 장비들이 가득했다. 마도구나 화려한 의장용 장비들도 간간이 눈에 띄었다.

"혹시, 은으로 만든 무기도 있소? 이왕이면 검이나 철퇴 같은 걸로."

"은을 도금한 검은 몇 자루 있소만. 보시겠소?"

"전부 보여 주시오."

"알겠소. 잠시만 기다리시오."

공손하게 말한 파엘이 재빨리 몸을 돌렸다.

그를 기다리는 사이, 이안은 옆의 마차 앞에 선 둘을 돌아보았다. 메브는 차분한 얼굴로 단원의 설명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고, 필립은 눈을 반짝이며 마차 이곳저곳을 살폈다.

곧 단원이 원형 방패를 들고 그의 곁에 다가왔다. 적당한 곡선을 그리는 매끈한 금속 표면. 한복판에 볼록한 돌기가 몇 개 돋아 있어, 내구성을 보강하고 공격을 흘리기에도 더 용이하게 만들어진 물건이었다.

방패를 팔에 장착한 필립이 균형감이 좋다고 떠들어 대며 웃음 지었다.

신났네, 새끼.

이안이 낮게 피식대는 그때, 파엘이 돌아왔다.

세 자루의 검을 이안 앞의 마차에 늘어놓은 그가 말했다.

"은을 두껍게 입힌 검이오만, 아직 날을 벼리지는 않았소. 아시다시피 무기보단 장식품에 가까운 물건이기도 하고 말이오."

이안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검을 들었다. 세 자루 다 보통 길이의 장검이었다. 검집과 십자 막이, 자루와 무게추의 장식에 더 많은 공을 들인 물건이었다. 은으로 된 칼날까지 확인한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 사겠소."

"세 자루 전부 말씀이시오?"

"다 파실 순 없는 거요?"

"그럴 리가…! 이제 이건 전부 경의 소유물이오. 아, 계산은 저분들과 함께 한꺼번에 할까 하는데. 괜찮으시겠소?"

"편할 대로 하시오."

"고맙소. 허허, 참."

품에서 종이와 깃펜을 꺼내며, 파엘이 웃음을 흘렸다.

"보르 저 친구의 말이 맞았소. 경의 말은, 무조건 듣는 게 좋겠군."

그가 실실대며 종이에 글자를 휘갈기기 시작했다. 달려온 단원 하나가 그의 귓가에 뭔가를 속삭였다. 파엘의 미소가 짙어졌다. 아무래도 필립이 그 원형 방패를 산 모양이었다.

모두가 바쁜 와중에, 이안이 느긋하게 샬롯을 돌아보았다.

"두 자루는 네 거다."

"내가 쓰기엔 너무 무른 칼인 것 같다만."

"하지만 그놈들을 상대할 때는 필요하지. 내가 전에 알려 준 적이 있을 텐데."

"...!"

비로소 눈을 치켜뜬 샬롯이 고개를 끄덕였다. 뱀파이어는 은으로 만든 무기로도 죽일 수 있었다.

"망령 같은 것들에게도 효과가 있을 테니까, 한 자루는 항상 차고 다녀라. 원래 쌍검을 다뤘었잖아?"

이안이 덧붙인 말에, 샬롯이 송곳니를 드러내며 미소 지었다.

"그래. 네 것도 내가 날을 벼리겠다. 사람도 벨 수 있을 만큼 날카롭게 만들어 주지."

"그렇게 해."

고개를 끄덕인 이안이, 어느새 다시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파엘을 돌아보았다.

"제국 강철로 만든, 가장 튼튼한 검을 한 자루 보여 주시오. 그리고 마도구도 전부."

"바로 대령하겠소."

단원 하나에게 눈짓한 파엘이 재빨리 몸을 돌렸다. 다가온 단원이 은검 세 자루를 들고 물러났다. 구매한 물건을 한데 모아 가져다주려는 모양이었다.

"원래 제국의 상인들은, 다 이런 식으로 거래하나?"

이안의 물음에 샬롯이 고개를 저었다.

"왕족이나 고위 귀족들을 상대할 때만. 하비에르 같은 경우엔, 상대가 왕이 아니라면 이런 식으로 모시지 않았다."

정말 특급 서비스였군. 이안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바삐 움직이는 단원들과 메브를 돌아보았다.

그녀도 방패를 들고 있었다. 뜻밖에도 흔히 버클러라 부르는, 가장 작은 크기의 원형 방패였다. 단원에게 요구 사항을 조목조목 설명하고 있었는데, 손에 드는 것이 아니라 팔목 보호대에 딱 맞게 고정할 수 있는지를 묻는 거였다.

단원이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니 가능한 모양이었다.

필립은 그 옆에서 투구를 뒤집어쓰고 있었는데, 머리는 물론 코와 뺨까지 가리는 판금 투구였다.

저걸 쓰면 귀가 많이 울릴 텐데.

이안은 다시 한번 낮게 웃음 지었다. 저들이 쇼핑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나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심, 저들은 이런 걸 누릴 자격이 있다 여기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하긴. 어차피 혼자서는 다 쓰지도 못할 돈인데.'

이만하면 꽤 보람 있는 지출이라 할 수 있으리라.

"준비되었소. 궁금한 게 있으시다면 얼마든지 물으시오."

바삐 마차를 오가며 물건을 가져온 파엘이, 숨을 고르며 말했다.

그가 내민 검을 쥔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보 확인이 가능한 검이었다.

희귀 등급의, 제국 강철 장검.

장비 파괴 확률이 옵션으로 붙은 비교적 평범한 검이었지만, 내구도나 공격력은 상당히 준수했다.

물론 단죄의 검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그건 이 세계의 검 대부분이 그럴 터였다.

'유물이나 성물 정도 되는 검이 한 자루 더 있으면 좋겠는데….'

생각하면서도 사겠다는 의미로 검을 옆으로 내민 이안이, 앞에 놓인 마도구들로 시선을 돌렸다.

다가온 단원이 그의 손에서 검을 받아들었다. 이안은 가장자리에 놓인 랜턴의 손잡이를 쥐었다. 중앙의 네 면이 유리로 된, 이 세계에선 좀처럼 보기 힘든 물건이었다.

정보창을 확인할 수도 있었다. 마석등.

"마력으로 작동하는 물건이오. 마석을 이렇게 조정하면, 중앙에서 빛이 나오지."

파엘이 랜턴 하단의 마석을 꾹 눌러 끼우며 말했다. 유리관 너머로 은은한 빛이 번졌다.

"보시다시피 그리 밝지는 않소. 대신 꽤나 오래 쓸 수 있다더군."

이안은 마석등을 얼굴 앞으로 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허리에 차고 다니기에 충분한 크기였고, 유리 부분을 제외하면 내구도도 나쁘지 않아 보였다. 게다가 그의 시력은 어둠 속에서도 이 정도의 광원만 있으면 충분할 만큼 좋았다.

"이런 건, 마탑의 마법사들에게서 직접 구하는 것이오?"

"그들이 만든 물건을 상인들에게 공급하는 자가 있소. 마법사들은 이런 마도구는 거의 만들지 않소. 하찮다고 여기는 건지, 견습생들이 연습 삼아 몇 개씩 만드는 게 전부지. 어쩌면 용도에 비해 쓸데없이 많은 노력과 비용이 들어서인지도 모르겠소. 그렇잖소?"

어깨를 으쓱인 파엘이 덧붙였다.

"그냥 횃불이나 등잔을 들고 다니면 되는데. 굳이 그보다도 어두운 데다 마석까지 필요로 하는 물건을 쓸 필요는 없을 테니 말이오. 심지어 몇십 배는 더 비싸기까지 하고."

"그걸 알면서도 이걸 사셨군."

"희귀한 물건이잖소. 물론 마법 무구보다 훨씬 싸다는 이유가 컸지만, 어쨌든 실제로도 마법 무구보다 훨씬 더 소량만 만들어지는 물건이오. 귀족들은, 그런 이유만으로도 충분히 지갑을 열지."

"내 지갑도 열렸소. 난 쓰려고 사는 거지만."

마석등을 옆에 놓은 이안이, 다른 마도구들도 차분히 눈에 담았다.

대부분 희귀하지만 그다지 쓸모는 없는 것들이었다. 회로를 작동시키면 잉크가 지워진다는 책이나, 손바닥에 바람이 불어 땀을 날려주는 장갑 같은.

"호오."

이윽고 이안은, 그 사이의 고리 하나를 집어 들었다. 얇은 표면에 주문 회로가 촘촘하게 새겨진 팔찌였다. 정보창을 확인할 수도 있었다. 탄성을 흘린 건, 그 성능 때문이었다.

"안목이 좋으시군. 그게 이 중에서 가장 비싼 물건이오. 잠시 주시겠소?"

이안에게 팔찌를 받아든 파엘이 그대로 손목에 찼다. 뒤로 몇 걸음 물러난 그가 손아귀를 까딱였다.

일순간 마력이 번지면서, 번뜩이는 푸른 역장이 팔뚝 위로 피어올랐다.

푸스스-

역장은 불과 몇 초 만에 다시 사그라들었다. 손을 털어 마력의 잔흔을 흩트리며, 파엘이 말했다.

"마력 역장이오. 화살이나 칼날을 한 번 정도는 막아 줄 물건이지. 대 여섯 번 정도 사용하면 마석을 교체해 줘야 하지만… 아시잖소? 권력자들이 얼마나 자신들의 안전을 끔찍하게 생각하는지."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역장은 탐이 나지만 사용할 수 없는 기술이었다.

스킬 트리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임에서도 이런 식으로, 존재는 하지만 배울 수는 없는 종류의 마법이나 기술들이 여럿 있었다. 아이템이나 퀘스트를 통해서만 사용할 수 있게 되는 스킬들.

따로 익혀서 써보려는 시도는 진즉에 포기했다. 그는 마력이 마법으로 구현되는 원리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가장 비싼 거라면, 얼마요?"

"본래는 금화를 칠십 개는 받아야 하는 물건이오. 하지만 경께는 오십 개에 드리겠소."

"사겠소."

이러다 정말 모은 금화를 다 쓰겠는데.

생각하면서도, 이안은 팔찌를 받아들었다. 보호의 팔찌. 설명대로, 1레벨의 마력 역장을 사용할 수 있었다. 남은 횟수는 네 번. 아쉬운 대로 만족스러운 횟수였다.

어쨌건 휘몰아치는 방벽 보다 좁은 범위를, 서리 방패보다 빠르게 방어할 방법이 생긴 것이다.

파엘의 말이 이어졌다.

"소형 마석을 하나 더 챙겨 드리겠소. 공짜요. 많이 구매하셨으니, 이 정도 덤은 얹어 드려야지."

세공한 마석을 구할 방법도, 찾아봐야겠군.

이안은 고개를 주억거리고는 방어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후로도 구매는 순조롭게 이어졌다. 중소 규모의 상단이라 해도, 제국의 상인이란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다른 곳에서는 보기 힘든 물건들이 여럿 있었다.

게임에서 제국의 상인과 마주치길 바랐던 것도 같은 이유였다.

'그러고 보니, 현실이 되고 나서 제국의 상인과 거래한 건 처음 아닌가?'

북부는 엄밀히 말해서, 자치령이니까.

생각하며, 이안은 구매를 결정한 물건들을 돌아보았다. 방패와 투구. 각반. 사슬 갑옷과 견갑. 팔목 보호대. 장검과 은검. 몇몇 마도구까지. 이안은 물론이고 일행이 저마다 고른 물건들이 한가득이었다.

새삼 그간 번 돈이 얼마나 많았는지 실감이 났다.

"대금 확인이 끝났소."

금화를 딱 맞게 챙긴 파엘이 얼굴 가득 미소 지으며 다가왔다. 빈말이 아니라, 정말 얼굴에 혈색이 돌고 있었다.

"덕분에 한시름 놓았소. 어떻게 처분해야 하나 걱정하던 물건들도 있었는데 말이오."

"너무 솔직하시군."

이안이 피식댔다. 그동안 모은 금화가 거의 다 없어지긴 했지만, 그럼에도 만족스러운 거래였다.

이런 기회가 아니면 돈이 있어도 구할 수 없는 물건이 여럿이었으니까.

심지어 흡혈 일족과의 전투를 앞둔 시점이 아니던가.

"물건은 바로 착용하시겠소? 아니면, 여관으로 옮겨 드릴 수도 있소만."

"마차에 얹어 주시오. 우린 곧 떠날 거니까. 물건을 챙겨서, 한 시간쯤 뒤에 마구간 앞에서 다시 봅시다."

"한 시간이라. 잘됐군. 나도 남은 물건을 정리해야 하니, 그리하겠소."

고개를 끄덕인 이안이 몸을 돌렸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단원들이 멀어지자, 메브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아무리 그래도 영 마음이 편치 않구나. 네가 목숨 걸고 번 돈을, 너무 많이 쓴 것 같아."

"그럼 그만큼 더 열심히 싸워 주시면 되겠군."

덤덤하게 대답한 이안이, 메브와 필립을 일별하고는 여관의 문고리를 쥐었다.

"돈은 또 벌면 그만이오. 떠날 채비나 합시다."

***

어느덧 오후였다.

보통은 다들 도시를 찾아 들어오는 시간이건만. 이안 일행은 반대로 떠날 채비를 끝마쳤다.

방주 상단의 단원들이 마차에 그들이 구매한 물건들을 차곡차곡 실었다.

분배와 정리는 도시를 떠난 뒤에 하려는 모양.

마무리되길 기다리던 파엘이, 비로소 마차에 탄 이안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가 볼 때, 이들은 전쟁에 준하는 위험한 일을 앞두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게 아니라면 고작 넷이서 저렇게나 많은 병장기를 추가로 구매할 이유가 없었다. 어쩌면 루 사드에 고용되어 전쟁에 합류하려는 생각일지도 몰랐다.

만약 그렇다면 변방의 판도가 또 한 번 달라지리라.

그런 생각들을 이어 가면서도, 파엘은 아쉬운 미소를 입가에 걸었다.

"하루 더 묵고 가시지. 성공적인 거래를 기념하며, 한 잔 마셔 줘야 하지 않겠소?"

"갈 길이 멀어서 말이오."

의자에 기대앉은 이안이 말했다. 딱히 아쉽지도 않다는 듯한 표정. 북부에서 봤을 때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럼 다음에 합시다. 무슨 용무로 루 사드에 가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일이 다 끝나면 꼭 보르타에도 한 번 들러 주시오. 내 성대하게 대접할 테니."

파엘이 진심을 담아 말했다.

당연했다. 만날 때마다 도움을 주는 자가 아닌가. 루 솔라께서 점지한 인연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훌륭한 상인은 그런 직감을 외면하지 않는 법이었다.

"기회가 된다면 들르겠소. 물론, 귀하가 상행을 무사히 끝내셨을 때의 얘기겠지만."

이안이 덧붙인 말에, 파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뒤통수로 보르의 시선이 느껴졌다. 흘려듣지 말라는 무언의 압박일 터였다. 그게 아니라도, 그는 이안의 경고를 이미 가슴에 새긴 상태였다.

"염려 마시오. 일정대로 끝낼 것이니. 아, 그리고 이거."

파엘이 손에 들고 있던 목함을 내밀었다. 이안이 받아들자, 그가 덧붙였다.

"감사는 좋은 술로 표시해야 하는 법이지. 우리 지방 특산품인데, 포도주를 증류한 걸작이오. 한 모금만 마셔도 향이 다음 날 아침까지 코에 남소. 물론, 독하기도 하고."

이안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목함을 열어 그 안의 술병을 눈에 담은 그가 어깨를 으쓱이며 파엘을 돌아보았다.

"잘 마시겠소. 남은 돈을 털어서 이걸 몇 병 살 걸 그랬군…."

"보르타에 오시면, 아예 술통째로 드실 수 있게 내 드리겠소."

"그렇다면 꼭 들러야겠군."

"말 나온 김에, 한 가지만 더 여쭤봐도 되겠소? 어제는 어쩌다 보니 그냥 지나가 버려서 말이오."

덧붙인 말에, 이안이 그를 돌아보았다. 물어보라는 듯한 시선에, 파엘이 목소리를 낮췄다.

"북부의 용살자. 혹시, 누구인지 아시오?"

"...."

"경이라면 어쩌면 아실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오."

마부석에서 가르릉대는 낮은 소리가 번졌다. 이안의 시선을 받은 샬롯이 모른 척 길게 하품을 했다. 메브는 헛기침을 하며 안면 가리개를 내렸고, 입술을 입안으로 밀어 넣은 필립도 이안의 시선을 피하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다시 파엘을 돌아본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나중에 북부에 가게 되면, 북부인들에게 직접 들으시오. 그러는 게 귀하를 위해서도 좋을 거요."

"...?"

파엘이 어리둥절하게 눈을 끔뻑였다. 싱긋 미소 지은 이안이 말했다.

"그럼, 연이 닿으면 또 봅시다. 보르타의 파엘. 그리고 보르."

그가 파엘의 뒤에 선 보르와도 눈인사를 나누는 사이, 샬롯이 고삐를 흔들었다.

덩치가 크고 갈기가 풍성한, 북부 혈통의 말들이 힘차게 나아가기 시작했다. 파엘에게 고개를 까딱이며 인사를 건넨 두 기수도 재빨리 그 옆으로 따라붙었다.

"…이번 일이 끝나면, 한동안 푹 쉰 뒤에 북부로 가자."

뒤에 선 보르가 문득 말했다.

파엘이 그를 돌아보며 미소 지었다.

"왜, 북부의 대전사가 용살자라니까, 피가 끓는 모양이지?"

"방금 경이 한 말을 들었을 텐데. 북부에 가서 그 이름을 듣는 게, 단주를 위해서도 좋을 거라고."

"그렇게 말하긴 했는데…. 대체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군. 혹시, 용살자와 아는 사이라는 뜻이 아닐까?"

드물게도, 보르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것 같군. 다들 북부의 초인이 누구인지 아는 눈치였어."

"…북부에 가면, 일단 경의 이름부터 팔아 봐야겠군. 운이 좋다면 용살자와도 연이 닿을지도 모르지. 그게 통한다면… 다음번엔 술 한 병으로는 턱도 없겠어."

내뱉으며, 파엘은 성문을 돌아보았다. 이안 일행이 탄 마차는 이미 밖으로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그 전에, 살아 돌아갈 생각부터 하는 게 좋겠군. 다들 단주만큼이나 욕심에 눈먼 자들이니까."

이어진 보르의 핀잔에, 파엘이 피식대며 몸을 돌렸다.

"걱정 말게. 우린 무사히 오른델에 도착할 거고, 살아서 돌아오게 될 테니까."

그리고 그때는, 제국에 새로운 상인 연합이 탄생하게 될 터였다.

#151화

어둑한 장내를 밝히는 건, 책상 위에 놓인 촛불뿐이었다.

책상에 놓인 온갖 종류의 낡은 책들이, 불빛을 따라 좁고 낡은 집무실의 벽면에 이리저리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래서, 그게 끝이오?"

책상 앞에 앉은 중년의 사제가, 부드럽지만 고저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불빛에 비친 그의 얼굴은, 이 낡고 초라한 집무실 만큼이나 생기 없어 보였다.

앞에 선 관리를 응시하며, 그가 덧붙였다.

"북부의 용살자가 붉은 기사를 수족으로 부리고 있으시며…. 백작의 명령을 받고 찾아갔을 때는 이미 버브룩을 떠난 상태셨다?"

"…예. 그렇습니다. 말씀드렸다시피 은밀하게 모시라는 명을 받은 몇몇이 신속하게 움직였다고 합니다만. 그런데도 한발 늦은 모양이더군요. 떠나신 지 하루가 더 지났다는 걸 보면, 버브룩에서 단 하룻밤만 묵으신 모양입니다."

"그리고 그게 벌써 이틀 전의 일이고."

"예. 돌아온 자들이 보고한 건 오늘이지만요. 워낙 비밀리에 진행된 터라, 제가 알게 된 것도 요행이었습니다. 백작께서도 이 사실은 주교님께만 공유하셨고, 대교회에만 알릴 예정이라더군요."

"그래… 그럴 것이오. 그분에 대해선 함구하라는 교단의 엄명이 있었으니…."

"저도 이번엔 제법 큰 위험을 감수하고 알려 드리는 겁니다, 사제님."

관리가 나지막이 속삭이며 미소 지었다. 그는 사제에게 돈을 받고 백작가의 사정을 전해 주는, 일종의 정보원이었다. 그 은근한 시선을 본 척도 하지 않은 채, 사제가 낮게 탄식했다.

"교단에서도 알지 못한다던 용살자의 소식을,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듣게 될 줄이야…. 아쉽고도 아쉽소."

여긴 버브룩에서 불과 나흘거리에 위치한 도시였다. 도보일 때의 얘기였고, 말을 탄다면 절반 가까이 줄일 수 있었다.

"조금만 일찍 알았다면 어떻게든 그분을 찾아뵈었을 텐데. 해서, 그분들이 어디로 향하시는지는 정말 전해 들은 바가 없소?"

"예. 백작께서도 모르시는 것 같더군요. 벨 론데의 국경을 넘어 버브룩으로 가셨으니, 서쪽이나 남쪽으로 가셨으리라 추측할 뿐이지요. 양쪽 다 딱히 짐작 가는 부분은 없습니다만."

"흐음…. 그래. 알겠소."

사제가 비로소 고개를 끄덕였다. 같은 이야기를 두 번 듣는 건 그의 오래된 버릇이었다. 혹여 말이 달라지는 부분이 있는지를 확인하려는 기본적인 검증법이었다.

서랍에서 작은 주머니를 꺼낸 사제가 말없이 책상 위에 놓았다. 절그럭대는 동전 소리. 촛불에 비친 관리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냉큼 주머니를 집어 든 그가 허리를 굽혔다.

"매번 감사합니다, 사제님."

"내가 감사하지. 교단의 숨겨진 눈과 귀를 돕고 있으니, 찬란한 여신께서도 어여삐 여기실 것이오."

공허하게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자세의 말이 헛소리라는 걸 알면서도, 관리는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거래일 뿐이었다. 중년 사제의 야심 따윈, 그가 알 바가 아니었다.

"전해 드릴 만한 일이 생긴다면,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덧붙인 관리가 몸을 돌렸다.

문이 닫히고 장내에 적막이 내려앉았다. 본래도 가라앉아 있던 사제의 눈빛이 더 냉막해졌다. 촛불의 불빛을 반사하는 게 아니라 빨아들이는 것 같았다.

무표정하게 일어선 그가 몸을 돌려 창문을 닫았다. 이미 밤이라 어두웠지만, 손짓에 망설임이 없었다.

촛불의 미약한 불빛만이 장내를 간신히 밝혔다. 다시 책상 앞에 앉은 사제가, 비로소 나지막이 중얼댔다.

"이토록 가까이에 있었다니… 조금만 일찍 알았다면 어떻게든 발을 묶어 두었을 것을."

아까와 비슷한 말이었지만, 어조는 정반대였다.

용살자는 교단이 새로운 성자 후보로 점찍은 인물이건만.

그의 목소리에선 그 어떤 존경이나 경외도 묻어나지 않았다. 그저 싸늘한 아쉬움뿐.

당연한 일이었다. 사제복을 입고 있긴 했지만, 그는 루 솔라를 섬기지 않았으니까. 그렇다고 공허의 고대신을 섬기는 것도 아니었다.

그의 기도에 응답한 건, 전혀 다른 존재였다.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신을 끌어내리려다 도리어 유폐된, 용의 육신을 입은 실존하는 신.

그의 속삭임을 악마의 유혹이라 여긴 적도 있었으나, 지금은 아니었다.

그는 이 대륙의 참된 역사와 비밀을 아는 유일한 존재였다.

드륵.

사제가 서랍을 열었다.

촛불 위의 수저에 밀랍을 얹은 그가, 펜을 들어 작은 종이 위에 글자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비록 정확한 행방까진 알 수 없었으나, 이 편지를 받은 신의 사도에겐 충분한 단서가 될 터였다.

그분이라면 어떤 식으로든 용살자의 행방을 알아낼 수 있으리라.

"…그리고 주께선, 신도의 공을 잊지 않으시겠지."

분명 합당한 은총 역시 내려 주시리라. 어쩌면 이번엔 금단의 지식을 속삭여 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힘을 내려 주실지도 몰랐다.

"용의 권능을…."

기록을 끝낸 사제가 다시 몸을 숙였다. 달칵, 잠금장치가 풀어지는 소리와 함께 숨겨진 서랍이 열렸다.

안에는 기다란 목함이 담겨 있었다. 사제가 뚜껑을 열었다. 안에는 뻣뻣하게 굳어진 잿빛 비둘기가 구겨진 채 들어 있었다.

비둘기를 꺼내 책상 위에 놓은 그가, 길게 접은 종이를 녀석의 다리에 묶었다.

비둘기의 눈이 붉게 반짝인 건, 밀랍을 살짝 떨어뜨려 편지를 단단히 고정한 직후였다.

녀석은 언제 굳어 있었냐는 듯 일어섰다. 붉은 안광이 잦아들었다.

일어선 사제가 닫혀 있던 창문을 열었다. 푸드득, 회색 비둘기가 기다렸다는 듯 날아올랐다.

녀석의 형체가 순식간에 검은 그림자가 되어, 먹구름 낀 밤하늘 너머로 멀어졌다.

밤하늘을 가만히 응시하던 사제가, 이윽고 엄숙하게 읊조렸다.

"용살자의 죽음으로, 세상은 진정한 주인께서 돌아오셨음을 알게 되리라…."

***

버브룩을 떠난 지 어느덧 사흘째였다.

마차는 관도를 벗어나, 평평하게 이어진 숲길로 접어들었다.

관도에서도 어느 순간부턴 인적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지만.

글루미르까지 은밀하게 이동하기 위해선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말들의 체력을 아끼려 천천히 이동하던 필립도, 오늘 낮부터는 조금씩 속도를 올리고 있었다.

이안이 보기에도, 그들은 이미 루 사드에 접어들었다.

그렇다해서 긴장감이 감도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그가 새로운 버차드 후작으로 영주 자리에 올랐습니다. 얼마 전 들었던 오른델의 영주가, 바로 그 데클란 버차드인 것이죠."

오히려 일행의 분위기는 평소와 전혀 다르지 않았다.

마부석의 필립이 새로 산 방패에 한쪽 팔을 기대 얹은 채로 말을 이었다.

"만약 그가 끝내 왕위에 오르게 된다면…."

"너와 이안이 그의 기틀을 만들어 준 셈이 되겠군."

샬롯이 덤덤하게 내뱉었다.

고개를 끄덕인 필립이 다시 오른손을 펼쳤다. 그의 손아귀에서 은은하게 번진 빛이 허벅지에 놓인 정수를 내리쬈다.

"오늘 제 이야기는 여기까집니다. 드디어 샬롯의 차례로군요."

"기다려라. 나도 이야기를 곱씹을 시간은 필요하니까."

단호하게 말한 샬롯이 손에 든 휴대용 숫돌을 밀었다.

그녀는 한 손에는 은검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숫돌을 든 채 날을 벼리고 있었다.

말 위에서 하기에는 여러모로 어려운 행동이었지만. 그녀는 이런 식으로 벌써 은검의 날을 두 자루나 날카롭게 세웠다.

…드디어 좀 조용해졌네.

그들의 뒤를 따르던 이안이, 홀가분하게 술병을 입에 가져갔다.

그는 파엘이 선물로 준 술을 병째로 한 모금씩 마셔 대고 있었다.

술병이 제법 컸지만 어느새 반 가까이 마셔버린 상태였다.

걸작이라던 말대로 맛이 꽤 좋고, 향은 그보다 더 좋은 술이었다.

물론 취기를 불러일으킬 수는 없었다. 하지만 여정의 지루함을 희석시켜줄 자극으로는 충분했다.

"나도 한 모금 주겠어?"

마차에 앉은 메브가 물었다. 이안은 선선히 술병을 내밀었다.

"드시고 마개를 닫아 두시오."

"그래."

거, 말투 적응 안 되네.

병나발을 불고 있는 성기사를 돌아보며, 이안은 짧게 피식댔다.

버브룩을 떠나고부터 그를 대하는 메브의 태도가 본격적으로 변하고 있었다. 이제는 정말 가까운 친우를 대하는 듯했다.

물론 칼부림이 시작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딱딱한 말투로 돌아가겠지만.

"다 된 것 같습니다, 나리."

그때 필립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그가 치켜든 손바닥 위에 하얗게 변한 정수가 놓여 있었다. 다가간 이안이 정수를 받아들었다. 안개를 담은 것처럼 자욱한 구슬 내부를 응시하며,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다 됐군. 수고했다."

이안은 정수를 만족스럽게 어루만지고는 아공간에 넣었다.

하급이라도 정수는 정수였다. 강력한 화력이 필요한 순간에 제 역할을 다해주리라. 물론, 그의 마력을 제물로 하겠지만.

오른손을 쥐락펴락하며 필립이 덧붙였다.

"몇 개 더 있지 않으십니까? 계속할까요?"

"일단은 이거면 충분해. 네 그 성물에도, 힘을 모아 둬야 하니까."

"예. 그래도 다행입니다. 여기선 여신님의 손길이 닿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그렇진 않군요."

"밤만 조심하면 돼. 가능하면 낮에도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게 좋겠지만."

고개를 끄덕인 필립이 나무가 듬성듬성 이어진 숲을 바라보았다.

"적어도 여길 지나는 동안엔 괜찮을 겁니다. 평야가 많아서 조금 걱정이긴 합니다만, 그래도 숲은 어디에나 있으니까요. 어쩌면 글루미르까지 이대로 평화롭게 도착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도 그러면 좋겠다만.

이안이 어깨만 까딱이는 사이, 기름 먹인 천을 집어 든 필립이 방패를 닦기 시작했다.

이안처럼 거의 모든 장비를 새로 산 수준은 아니었지만, 필립 역시 장비가 여럿 바뀌었다. 그리고 그는 그것들을 특히 더 애지중지했다. 제국제 명품을 써 본 게 태어나 처음이라는 것이다.

이안이 보기엔 전투를 몇 번 거치면 넝마가 될 것들이었지만, 굳이 그런 사실을 미리 알려줄 필요는 없었다.

"짐승 한 마리 없군. 죄다 도망쳤거나, 숲에 굶주린 마물이라도 살고 있는 모양이야."

샬롯이 검을 허공에 탁탁 털며 읊조렸다. 필립이 손길을 멈추지 않은 채 물었다.

"루 사드는 뱀파이어들의 땅이잖습니까? 그런데도 여기 마물이 있을까요?"

"놈들은 인간을 잡아먹고 사니까. 대신 혐의를 덮어씌울 것들은 필요하지 않을까."

이안이 뒤로 물러나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필립이 슬쩍 미간을 좁혔다.

"그럼 마물을 하수인으로 부릴지도 모르겠군요."

"어쩌면."

뱀파이어는 여러 방식으로 하수인을 만들었다. 사람을 이지를 가진 구울처럼 만들 수도 있었고, 흑마법이나 진혈의 권능을 통해 노예로 부리기도 했다. 마물이라 해도 예외는 아니리라.

"그런 것들은 쉽게 죽지 않을 거다. 일반적으로는 죽었을 상황에서도 살아서 덤빌 수 있으니까, 언제든 긴장을 늦추지 마. 여차하면 그냥 신성력을 쓰든지."

"예. 명심하겠습니다."

필립이 고개를 끄덕였다. 검을 벼리는 샬롯의 눈빛도 진지해졌다. 어쨌거나 다들, 머잖아 싸우게 되리란 걸 알고 있었다.

이안이 메브를 돌아보며 덧붙였다.

"메브, 당신도 마찬가지요. 이제 신성력을 마음대로 쓸 수도 없으시잖소."

"그래. 이왕이면 끝까지 쓰게 될 일이 없으면 좋겠지만."

메브가 술병을 옆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향을 음미하듯 숨을 내쉬는 그녀를 잠시 바라본 이안이, 이윽고 물었다.

"정확한 조건이 뭐요?"

"무슨 조건?"

"신성력 말이오. 전에는 복수의 대상에게만 사용할 수 있으셨잖소.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는 않으셨을 것 같은데."

"그래. 여신께선 복수를 위해서만 은총을 내려 주시지. 그것이 비단 나의 복수가 아니라도 상관없을 뿐이다. 소중한 것. 소중한 이를 잃은 슬픔에 빠진 이들의 복수 역시, 대행할 수 있지. 여신께선 정당한 복수를 수호하시니까."

"그럼 전에 그건 뭐였소? 내가 피를 흘리니까 신성을 쓰기 시작하셨잖소."

"그 역겨운 고블린들과 싸울 때요? 그게 이안 나리 덕분이었군요. 이제야 의문이 풀렸습니다."

메브가 순간 멈칫하는 가운데, 필립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짧게 헛기침한 메브가 입을 열었다.

"내게 소중한 이들이 다치는 것 역시, 복수를 다짐할 이유로는 충분하니까."

"그래서 신성을 쓸 일이 없으면 좋겠다고 하신 거군."

이안이 읊조리자, 그를 슬쩍 돌아본 메브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누군가 피를 흘리게 되었다는 뜻이니까."

"하지만 제가 다쳤을 때는, 그렇게까지 신성을 휘두르진 않으셨잖습니까?"

필립이 문득 물었다. 멈칫한 메브가 재빨리 내뱉었다.

"그때는 살짝 긁힌 정도였지 않느냐? 네가 멋대로 앞서가다 생긴 상처고."

"어… 이안 나리의 부상은 그보다 훨씬 심각하셨던 모양이군요."

"물론이지. 머리에서 피를 철철 흘렸으니까."

그 정돈 아니었던 것 같은데.

이안은 볼을 긁적이며,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는 메브를 바라보았다.

어쨌건 그녀가 사도의 권능을 발현하는 조건은 확실히 알 것 같았다.

메브가 다시 한번 헛기침하는 사이, 그가 툭 덧붙였다.

"그럼 여차하면 내가 또 다치면 되겠군."

"뭐라고…?"

눈을 치켜뜬 메브가 돌아보았다. 이안이 어깨를 까딱였다.

"경의 복수심에 불이 붙을 정도면 충분한 거잖소."

"그건 그렇지만… 무슨 그런… 그러지 말거라. 부상은 언제나 위험한 상황으로 이어질 수 있어."

특유의 엄격한 말투로 돌아온 메브가 말했다. 코로 웃은 이안이 느긋하게 대답했다.

"걱정 마시오. 듣지 못하셨소? 난 온몸의 뼈가 다 으스러지고서도 살아남았소. 물론 백금룡의 도움을 받긴 했지만, 그 정도로 심각한 부상만 아니라면 금방 회복할 수 있을 거요."

"...."

메브가 말문이 막힌 듯 미간만 좁혔다.

물론 이안은 진심으로 한 말이었다. 목이 잘리거나 머리가 터지거나 심장이 꿰뚫리는 게 아닌 이상, 어지간해선 죽지 않을 자신이 있었으니까.

그의 각종 저항력과 회복력은, 이미 범인의 범주를 한참 초월한 상태였다.

어쩌면 손가락 정도는 잘려도 다시 자라날지도 몰랐다. 정말 가능한지 실험할 생각까진 없었지만.

"그럼, 내 복수를 대행할 수도 있지 않겠나?"

샬롯이 불쑥 내뱉은 건 그때였다. 메브가 냉큼 시선을 돌렸다. 그녀를 돌아본 샬롯이 덧붙였다.

"나는 그 누구보다도 그 박쥐 새끼들에게 복수하고 싶으니까."

"그래… 소중한 이를 빼앗긴 거라면 여신께서도 인정하시겠지. 다만 그럼 너는 이번 싸움에서 빠져야 할 텐데. 괜찮겠느냐?"

"…빠져야 한다고?"

"내가 네 복수를 대행하는 것이니까. 네가 네 복수를 수행한다면 나는 자격을 잃게 돼."

"그럴 순 없지. 없던 일로 하겠다."

즉답한 샬롯이 다시 시선을 돌렸다. 숫돌이 날을 가는 소리가 이어졌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옅게 미소 짓던 메브가, 시선을 느끼고는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친 이안이 턱을 까딱였다.

"역시, 다른 방법이 있을 것 같진 않군."

"...."

"걱정 마시오. 경의 신성력이 필요한 상황이라면, 그러고 싶지 않아도 피를 흘리고 있을 테니까."

"…그래."

메브가 이윽고 내뱉었다.

이안의 고집을 꺾는 건 애저녁에 포기한 그녀였다.

샬롯이 이안에게로 몸을 돌린 건 그 직후였다.

"다 벼렸다. 이안."

"아, 이게 내 거였군."

공을 엄청 들인다 싶더니.

은검을 받아든 이안은, 검집에서 날을 반만 뽑았다. 서늘할 정도로 예리한 칼날. 금방 다시 뭉툭해지겠지만, 적어도 몇 번은 사람도 벨 수 있을 터였다.

그가 오른쪽 허리춤에 검집을 장착하는 사이, 눈치를 살피던 필립이 넌지시 입을 열었다.

"그럼 이제, 다음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겁니까?"

"...."

"너무 궁금해서 그럽니다. 투쟁의 신이 이안 나리께 관심을 보인 건 이해가 됩니다만. 나리께서 그분을 섬긴다는 건 도저히 상상이 가지 않아서요. 이안 나리잖습니까…?"

"이안은 카르하를 섬기지 않아."

샬롯이 선심 쓰듯 말했다. 필립은 물론 메브의 눈에도 갈증의 빛이 번졌다. 침을 삼킨 필립이 물었다.

"그럼, 투쟁의 신은 자신을 섬기지도 않는 자를 대전사로 삼은 겁니까? 루 솔라 맙소사…. 어쩌다가 그렇게 된 건데요?"

그래, 또 시작이군.

고개를 설레설레 저은 이안이 메브에게 손을 내밀었다.

"술병, 다시 주시오."

#152화

이동은 밤중에도 이루어졌다.

일행은 횃불은 물론 새로 산 마석등조차 켜지 않고 어두운 숲을 나아갔다.

한밤중의 숲은 들판보다 훨씬 어두웠지만, 필립을 제외하곤 밤눈이 특출나게 밝은 일행에겐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다각- 다각-

말들의 머리에는 좌우의 시야를 가리는 안대가 씌워져 있었다. 공포에 질려 멋대로 날뛰거나 탈진해 버리는 상황을 방지하려는 조치였다.

파엘에게 산 물건 중 하나였다.

본래면 거들떠보지도 않았겠지만. 정보창을 확인할 수 있는 물건이었고, 정말 몇 가지 상태 이상에 대한 소량의 저항력을 부여했다.

야간 이동에도 말들의 호흡이 일정한 건, 안대의 효과도 일부나마 있을 터였다.

어쨌든, 루 사드 역시 다른 변방 왕국들과 마찬가지로 하늘에 늘 불길한 먹구름이 가득했다.

숲은 고요했고, 무리 지어 날아다니는 새들만이 밤하늘의 먹구름을 더 검게 수놓았다.

"슬슬 마차 세울 곳을 찾아라, 필립."

"예, 나리. 언제 말씀하시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냉큼 대답한 필립이 샬롯에게 도움의 눈길을 보냈다. 샬롯이 익숙하다는 듯 입맛을 다시며 주위를 살폈다.

평지의 숲에도 유독 풀숲이 우거지거나 작은 나무들이 모여 자라는 장소는 있게 마련이었다.

"저쪽이 괜찮아 보이는군."

얼마 지나지 않아 샬롯이 팔을 들어 한쪽을 가리켰다. 필립이 냉큼 마차의 방향을 틀었다.

"아, 이제 저한테도 보입니다. 딱 알맞군요."

미간을 찌푸린 채 어둠 너머를 응시하던 필립이 이윽고 말했다.

풀숲이나 나무 사이에 마차를 대서 막고 말들을 풀어 그 사이에 묶어 두는 게, 그가 야영지를 꾸리는 방식이었다.

필립이 정확히 같은 순서로 야영을 준비하는 사이, 샬롯은 말 모이를 챙겼다. 인근의 풀을 대충 잘라 섞어 주는 것도 잊지 않은 채였다.

이안과 메브는 마차 내부를 대충 정리해 누울 공간을 만들었다.

편하게 눕지는 못해도, 둘씩 적당히 구겨져서 자기엔 충분했다.

버브룩을 떠난 이래 일행의 야영은 늘 이런 식이었다. 모닥불도 피우지 않았다. 불 없이도 잘 만한 날씨라는 게 그나마 위안이었다.

"두 분 먼저 쉬십시오. 오늘 불침번은 저희부터 서겠습니다."

마차 천장에 기어 올라간 필립이 아래로 고개를 빼꼼 내밀고는 말했다.

이안과 메브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바로 잠들지는 못하겠지만, 둘 다 크게 개의치 않았다.

늘 더 고생하는 건 필립과 샬롯이었으니까.

이안과 메브는 바닥과 의자에 각각 누웠다. 이제는 익숙한 자세였다.

벽 쪽으로 돌아누워 눈을 감은 이안의 귓가로, 푸득대는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와 필립이 속삭이는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뱀파이어는 달을 좋아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루 사드에 들어서면 달을 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여기서도 전혀 보이지 않는군요."

샬롯에게 한 말이었다. 마부석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처음 듣는 말이군. 늑대 인간이라면 모를까."

이러니저러니 해도, 필립의 말에 가장 많이 대답해 주는 건 그녀였다. 테사이아와 함께 하면서 몸에 익은 습관. 둘이 불침번을 서게 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메브와 이안은 침묵을 더 즐기는 부류였고, 필요하지 않은 대답은 자주 건너뛰었다.

불침번 중에는 특히 더.

"엥, 정말로요? 초승달은 흡혈귀가 좋아하고, 늑대인간은 보름달을 좋아하지 않습니까?"

의외라는 듯 내뱉은 필립이 이내 덧붙였다.

"테사이아와 오래 함께하셨다면서요. 당연히 그분께 들어서 알고 계실 줄 알았는데요."

"말했을 텐데. 그 녀석은 아는 게 없어. 어쩌면 뱀파이어에 대해서도 차라리 네가 더 잘 알지도 몰라."

거의 백치 취급이군.

이안은 소리 없이 코웃음 쳤다.

물론 테사아가 아는 게 없는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만큼 모든 걸 더 빨리 배웠다. 한 번 들은 이야기는 잊는 법이 없었다. 스치듯 내뱉은 말조차, 진심이 아니라 치부할지언정 잊지는 않았다.

그러니 아직 살아 있다면 아마도, 그와의 계약 역시 기억하고 있을 터였다. 루 사드로 갈 것이라는 약속도.

"저는 지금도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샬롯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그분이 마족이라는 걸 잊을 정도거든요. 그런 마족이 존재할 수 있다니…."

"처음부터 그러진 않았지. 나도 내가 그 녀석을 구하러 가게 되리란 생각은, 해 본 적도 없었으니까."

"아. 처음엔 두 분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하셨었죠."

"그 이상이었다. 내 손으로 죽일 생각이었으니까."

"허… 번외로, 두 분에 대한 이야기도 살짝 해 주시면 안 될까요?"

이안은 나지막이 이어지는 둘의 대화에서 관심을 돌렸다.

별 흥미 없는 잡담이어서도 있지만, 그보다 다른 소리가 그의 신경을 거슬러서였다.

푸득대는 바람 소리. 나무가 흔들리면서 나는 것인 줄 알았던 소리가, 낮지만 멈추지 않고 이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마차 틈으로 서늘한 바람이 새어들고 있긴 했지만.

묘하게 꺼림칙한 느낌이 들었다.

바늘로 찌르거나 찬물을 끼얹는 듯한 살의나, 끈적한 마력의 기척 따위가 느껴지지 않아서 더더욱.

'그래. 이상하게 평화롭다 싶었지.'

결론 내린 이안이 눈을 뜨며 일어났다. 어둠에 완전히 적응한 눈이 컴컴한 마차 내부를 선명하게 식별했다.

"잠이 오지 않아?"

메브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안이 구부정하게 몸을 일으키며 내뱉었다.

"느낌이 좋지 않소."

더 말을 덧붙일 필요도 없었다.

필립과 샬롯의 대화가 뚝 끊어졌다. 메브도 상반신을 일으키며, 견갑을 비롯해 벗어 두었던 장비 쪽으로 곧바로 손을 뻗었다.

마차 밖으로 나온 이안은 말들을 지나쳐 걸음을 옮겼다. 그는 야영지와 어느 정도 거리를 벌리고서야 멈춰 섰다.

샬롯이 송곳니 검을 뽑아 들고, 필립도 세워서 기대고 있던 방패를 팔에 끼우며 마차 뒤편을 돌아보는 가운데.

솨아아-

때마침 불어온 바람이 이안의 전신을 휩쓸고 지나갔다. 어느새 잿빛으로 일렁이던 그의 눈빛이 가라앉고, 육감이 발달한 자들만 희미하게 느낄 수 있는 마력의 잔재가 바람결에 실려 흩어졌다.

"...!"

그게 신호라도 된 것처럼, 저 먼 나무 위에서 깨알 같은 붉은 안광들이 번지기 시작했다.

하나같이 나무 위였고, 순식간에 사방을 가득 채웠다.

"까마귀…?"

샬롯이 읊조렸다. 나뭇가지 위에 빼곡하게 앉은 수많은 까마귀들이, 중심부의 마차를 응시하고 있었다.

반짝이던 안광들이 사그라들었다.

까마귀들이 날갯짓을 시작한 건 바로 그 직후였다. 일순간 숲의 하늘이 어두워지면서 파도치듯 일렁였다.

까마귀들이 일제히 날아오르며 일어난 변화였다.

"루 솔라 맙소사."

검을 고쳐 쥐는 필립의 탄식은, 메아리치는 까마귀들의 울음소리에 파묻혔다. 공포심을 자극하는 소리였다.

물론 이안에게 영향을 주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이안은 가라앉은 눈으로, 상공을 빙글빙글 선회하는 까마귀 떼를 올려다보았다.

놈들은 곧 철새 무리 같은 덩어리로 응집하더니, 그대로 포물선을 그리며 하강해 이안을 향해 날아들었다.

붉은빛이 아른대는 새카만 물결이 이안의 시야를 가득 뒤덮었다.

"...?"

정면으로 온다고?

이안이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자세를 다잡았다. 파칙, 번쩍이는 빛과 함께 그의 검에 뇌전 자락이 맺히기 시작한 그때.

푸화악-

들이닥치던 까마귀의 물결이, 솟구친 돌개바람에 휩쓸려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물론 물결을 막아 낸 건 아주 잠깐이었다. 생겨난 빈틈은 뒤따르던 까마귀들에 덮여 곧바로 메워졌다.

이안이 왼손을 뻗은 건 바로 그 직후였다.

솨아-

피어오른 역장이 이안의 앞을 막았다. 퍼버벅, 까마귀들이 창문에 부딪힌 것처럼 피가 터지며 추락했다. 물론 놈들을 전부 막을 수는 없었다. 이안의 주위가 새카만 새의 물결로 뒤덮였다.

역장의 지속 시간이 다하는 것보다, 표면에 균열이 번지는 게 더 빨랐다. 곧 역장이 소리 없이 박살 났다.

하지만 이안의 검에 번지던 뇌전 자락이 응집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이안이 빛나는 검을 밀려드는 물결을 향해 내뻗었다.

콰릉- 파치치칫-!

날갯짓 소리 사이로 둔중한 굉음이 번지고, 거미줄 같은 전격이 사방으로 번졌다.

전격은 이안을 지나쳐 일행 쪽으로 밀려들던 까마귀들까지 휩쓸었다.

까마귀들이 후두둑 떨어지고, 뒤따르던 녀석들이 발작하듯 두 무리로 나뉘어 좌우로 갈라졌다.

단숨에 엄청난 숫자가 줄어들었지만, 아직도 비슷한 숫자가 남아 있었다. 두 무리를 번갈아 좇던 이안의 시선이, 불현듯 다시 정면의 상공으로 향했다.

나뉜 것보다 작은 크기의 무리가 그를 향해 날아들고 있었다. 휘몰아치는 방벽에 휩쓸려 튕겨나갔던 것들이 어느새 다시 뭉친 것이다.

'그렇게 되고도 안 죽다니.'

하긴. 딱 봐도 보통 까마귀들은 아니긴 하지.

생각하며 어둠 속을 선회하는 둘로 나뉜 무리를 다시 눈에 담은 이안이, 이내 뒤를 돌아보았다.

"말을 지켜! 저것들 너희를 노린다!"

"알았다!"

때마침 마차 밖으로 나온 메브가 안면 가리개를 내리며 소리쳤다. 검을 뽑아 든 그녀가 말들의 한쪽 앞을 막아서는 사이, 필립의 외침이 이어졌다.

"나리! 앞을 보십시오!"

나도 알아.

속으로만 대꾸하며, 이안은 잿빛 눈동자로 날아드는 까마귀들을 마주 보았다. 어느새 놈들이 지척까지 밀려들고 있었다. 이안이 기다렸다는 듯 왼손을 내뻗었다.

푸확, 뿜어져 나온 돌풍이 무리 한복판을 휩쓸었다.

휩쓸린 까마귀들이 사방으로 튕겨 나가고, 이안이 검을 치켜들며 몸을 날렸다. 이제부턴 하나씩 쳐죽일 시간이었다.

야영지의 상황도 다르지 않았다.

두 덩어리로 나뉜 무리가 좌우를 포위한 채 해일처럼 밀려들었다. 소나기가 쏟아지는 듯한 소리.

마차 지붕 위의 샬롯이 금방이라도 튀어 오를 것처럼 몸을 웅크리는 가운데.

"...."

메브의 반대편에 선 필립이 밀려드는 검은 물결을 응시하며 탄식을 삼켰다. 저기 휩쓸리면 뼈도 추리지 못할 게 분명했다. 그의 뒤에 선 말들도 마찬가지이리라.

아무리 가죽이 두꺼운 북부의 명마라도 갈기갈기 찢겨나간 고깃덩어리가 될 게 분명했다.

필립이 검을 쥔 손을 앞으로 내뻗은 건, 물결이 막 그를 뒤덮으려는 찰나였다.

솨아아아-

그를 중심으로 눈부신 빛의 장막이 피어올랐다. 까마귀의 물결이 그대로 장막에 부딪혔다. 놈들은 충돌해 떨어지는 게 아니라, 장막을 지나치면서 순식간에 타들어 갔다. 언데드이거나 흑마법에 걸린 상태라는 증거였다.

콰드드드-

반대편, 까마귀 떼와 정면으로 충돌한 메브의 전신에서 콩 볶는 듯한 소리가 났다. 어둠의 하수인이라 해도 결국 새는 새였다. 그녀의 전신 판금 갑옷을 뚫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놈들은 부딪힐 때마다 퍽퍽 터져나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밀려들었다.

메브는 그 해일을 견뎌내는 것에 그치지 않고, 검을 휘둘러 까마귀들을 썰어대기 시작했다.

평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였다. 번쩍이는 검의 궤적이 순식간에 별빛처럼 그녀의 주위를 가득 채우며 반짝였다.

검의 장막이 만들어진 것처럼 보였다.

그야말로 마법에 가까운 기술이었지만, 메브는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못하는 듯 그저 온 힘을 다해 움직이고 있었다.

토막난 새들이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가운데가 한 번 더 불룩하게 튀어나온 기형적으로 큰 부리. 그 사이로 작은 톱날 같은 이빨이 드러났다.

빠악! 서걱!

오른손을 앞으로 내밀어 장막을 유지한 채, 필립도 왼손의 방패를 휘둘러 끝내 메브를 지나친 까마귀들을 후려쳤다.

신성력을 충분히 축적한 덕분에 아직도 장막은 선명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한쪽에선 까마귀들이 타들어 가며 만들어내는 불빛이 쉴새 없이 번쩍이고, 다른 한쪽에선 말을 지키기 위한 사투가 이어졌다.

서걱-! 퍼슥!

샬롯도 연신 날렵하게 몸을 날려 말 위를 뛰어넘으면서, 묘기 부리듯 검을 휘둘렀다. 그녀의 검은 매번 정확하게 까마귀를 갈랐다.

모든 일이 체감보다는 훨씬 짧은 시간 동안 이루어졌다.

그 와중에도 끝내 살아남은 것들은, 아무런 규칙이나 질서 없이 마구잡이로 주위를 날아다니며 악착같이 빈틈을 노렸다.

일당백의 기세로 막아 내고 있긴 했지만, 어쨌건 결국 그들은 셋이었다. 호흡을 내쉬거나 바닥에 착지하는 순간 생겨나는 작은 빈틈은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키히이잉!

끝내 그 틈을 비집고 들어 가는데에 성공한 까마귀 한 마리가 말의 옆구리를 물어뜯었다. 놀란 말이 앞발을 치켜뜨며 울부짖었다.

콰직!

옆구리에 착 달라붙은 까마귀를 방패 날로 후려친 필립이 혀를 찼다.

말의 상태를 확인할 여유는 없었다. 당장 더 위급한 건 신성력의 장막이었다. 워낙 많은 숫자의 새들이 부딪히고 있어서인지, 빛이 옅어지는 속도가 평소보다 훨씬 더 빨랐다.

루 솔라여, 속으로 읊조린 필립이 검을 쥔 손에 더 힘을 줄 찰나.

"잘 버텼다."

어둠을 뚫고 달려온 이안이 미끄러지듯 그의 곁에 멈춰섰다. 어느새 그의 검에도 피가 흥건했다.

"다들 주위로 모여!"

이안이 눈동자에 잿빛 마력을 머금은 채 소리쳤다. 검격을 멈춘 메브가 뒤로 훌쩍 몸을 날리고, 샬롯도 바닥을 구르며 착지했다.

푸화악, 야영지를 감싸며 맹렬한 돌개바람이 치솟았다. 밀려들던 까마귀들이 그대로 휩쓸려 종잇장처럼 튕겨 올랐다.

덕분에 잠시 숨을 돌린 일행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네 방향을 점령하며 자세를 다잡았다.

하늘로 솟구쳤던 검은 그림자들이 다시 순식간에 무리를 형성하며 날아들었다.

'확 다 태워버릴 수도 없고. 씁.'

주먹으로 까마귀를 후려치면서, 이안이 짧게 혀를 찼다.

여기서 적색 마법을 쓰기에는 위험성이 너무 컸다. 모든 게 불이 붙기에 딱 좋은 환경이었다. 불붙은 까마귀들이 추락하면 사방이 순식간에 불바다가 되리라.

그들의 위치가 발각되리란 건 둘째치고, 말과 마차까지 타 버릴 수도 있었다.

아까처럼 연쇄 번개 같은 회색 마법을 사용하기에도 여의치 않았다. 이렇게 뒤엉킨 상황에선, 말뿐 아니라 일행들까지 함께 전기구이로 만들어 버릴 터였다.

빙하 방벽 같은 건 마력 소모가 말 그대로 엄청날 테고.

'…결국 몸으로 때우는 게 제일 효율적이라니.'

난 마법산데.

생각하면서도, 이안은 멈추지 않고 검과 주먹을 휘둘렀다.

다른 일행들도 충실히 제 역할을 수행했다. 까마귀들이 집요하게 노리는 대상이 그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눈치챈 것도, 대응을 한결 편하게 했다.

일행의 주위로 죽은 새 시체가 새카맣게 뒤덮였다.

푸드드득-

까마귀 떼는 처음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초라한 숫자가 되고서야, 비로소 사방으로 물러났다.

"하아… 하아…."

일행은 어둠 너머로 멀어지는 그림자들을 응시하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다들 온몸에 새털과 피가 흥건했다. 하지만 다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필립도 긁힌 상처조차 없었다. 갑옷을 벗어 보면 어딘가에 멍 하나쯤은 들었겠지만.

"나 원, 살다 보니 까마귀에게 이런 위기를 다…."

필립이 중얼대는 사이, 이안은 주저앉은 말을 살피고 있었다 옆구리의 가죽이 찢어지고 살점이 움푹 파여 피가 철철 흘렀다.

'시발.'

유일한 피해가 하필 또 말이라니.

이안의 입에서 혀 차는 소리가 번졌다. 이 녀석이 회복하길 기다려줄 시간은 없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미 감염됐을지도 몰랐다.

그러니 이대로 풀어주고 떠나야 할 터였다. 북부 혈통의 말이 다친 게 아니라는 게, 그나마 위안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말들만 노리는 것 같던데. 나만 그렇게 느낀 것이냐?"

숨을 고르던 메브가 물었다. 그녀는 안면 가리개를 올린 채 이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얼굴이 땀에 젖어 반짝였다. 단기간에 체력을 엄청나게 소모한 게 분명했다.

마차 지붕에 주저앉은 샬롯이 주변의 까마귀 시체를 털어내며 이안을 바라보았다.

"내가 보기에도 그랬소."

이안이 일어서며 말했다. 필립이 짧게 탄식했다.

"역시 다들 같은 생각이었군요. 하지만 왜일까요. 우리를 노리는 게 더 우선일 텐데."

"우리는 살려두고, 대신 기동력만 없애고 싶었나 보지."

"…이동 수단을 없앤 거란 말씀이십니까?"

"그게 아니면 굳이 이럴 이유가 없잖아."

"그럼, 이것들은 일종의 척후병인 셈이겠군."

메브가 꿈틀대는 까마귀를 발로 꾹 짓밟으며 말했다. 마차로 달려가 훌쩍 지붕으로 올라선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아무래도 우린, 뱀파이어의 사냥터에 들어온 것 같소."

그의 뇌리로 게임에서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지금과 비슷한 상황을 겪은 적이 있었다. 그때는 까마귀가 아니라 죽은 채로 뛰어다니는 들개 무리였지만.

이제 보니, 루 사드 전역에서 자행되던 일인 모양이었다.

"척후병들이 목적 달성에 실패한 걸 알았을 테니까…."

우묵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숲의 어둠을 응시하던 이안이, 이윽고 메브를 돌아보며 덧붙였다.

"…곧 본대가 달려오겠지."

그의 말을 증명하듯, 어둠 저 너머에서 희미한 발굽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153화

소리로 봐선 열댓 명쯤 되는 것 같았다. 오염된 마력이 숨길 생각도 없다는 듯 선명하게 느껴졌다.

어둠을 헤집는 이안의 눈이 반짝였다. 마력 탐지. 저 멀리, 달려오는 것들의 실루엣이 흐릿하게 일렁였다.

기수뿐 아니라 그들이 탄 말들도 마력을 머금고 있었다. 가장 선명한 마력을 뿜어내는 건 선두의 기수였다. 이안이 느낀 기척도 저 자의 것이리라.

스릉, 이안의 옆에 선 샬롯이 왼손으로 은검을 뽑아 들었다. 오랜만이라는 듯 왼손 손목을 휘휘 돌리며, 그녀가 입을 열었다.

"여제가 우리가 온 걸 눈치챈 거 아닐까?"

"글쎄. 그건 두고 보면 알겠지."

덤덤하게 대꾸한 이안이 뒤를 돌아보았다. 마차 쪽으로 다가오던 메브와 필립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안이 내뱉었다.

"우두머리는 내가 상대하겠소. 둘은 여기서 나머지를 상대하시오."

"너 혼자…? 소리로 봐선 한둘이 아닐 것 같다만. 가능할까?"

메브가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어깨를 으쓱인 이안이 샬롯을 돌아보았다.

"넌 경과 필립을 보조하면서 말과 마차를 지키는 데에 주력해. 우리가 도망칠 생각이 없다는 걸 알면 굳이 마차를 놀진 않을 거야. 하지만 여차하면 피를 빨기 위해서 말을 죽이려 들 수도 있어. 그건 반드시 막아라."

"그거야 어렵지 않다만…. 보조만 하라고?"

"넌 저놈들과 어떤 식으로 싸워야 하는지, 이미 꽤 잘 알잖아."

샬롯의 눈빛이 묘해졌다.

"저것들을 이 둘의 연습 상대로 삼을 생각인 거군."

"왜, 자신 없나?"

"그럴리가. 하지만 상황이 안 좋게 돌아가면, 나도 전력을 다할 거다."

"걱정 마라."

대답한 건 메브였다.

샬롯의 시선을 받은 그녀가 덧붙였다.

"네가 말을 지킨다면, 우리도 전투에만 집중할 수 있을 테니. 그거면 충분해. 그렇지않느냐, 필립?"

"글쎄요… 아니, 그렇습니다. 물론이죠."

말을 흐리던 필립이 메브의 시선에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샬롯이 덧붙였다.

"마차에 내 은검이 한 자루 남아 있다. 필요하면 그걸 써."

"일단은 그냥 싸워 보지. 정말 팔다리가 잘리고 목이 날아가도 죽지 않는지, 확인하고 싶으니까."

"전 성물의 힘을 아낌없이 쓰겠습니다."

"죽을 걱정은 마라, 내가 뒤를 봐 줄 테니."

몇 번 같이 싸워 봤다고, 합이 꽤 잘 맞는군.

생각하며, 이안은 달려오는 기수들을 다시 눈에 담았다.

어느새 놈들은 육안으로도 확인할 수 있는 거리까지 가까워졌다.

몸 곳곳의 뼈와 썩은 속살을 훤히 드러낸 채로 숨소리도 없이 달리는 말들. 기다란 창을 늘어뜨린 채 헐렁한 가죽 갑옷을 들썩이며 그 위에 탄 사내들.

선두를 달리는 건 날이 울퉁불퉁한 양손 검을 한 손으로 든 기사였다. 누비옷 위에 판금 흉갑과 견갑, 장갑 따위를 대충 걸치고 있었는데, 그 사이로 검은 안개 같은 마력이 연기처럼 흩날렸다.

좌우로 뿔이 돋은 판금 투구 아래로 붉은 안광이 유독 선명하게 일렁였다.

다그닥- 다각-

마침내 기수들이 속도를 줄였다.

그들은 마차에서 제법 떨어진 거리에서 멈춰 섰다.

뱀파이어 기사는 몇 걸음 더 앞으로 나왔다. 전신에 일렁이는 검은 안개가 그의 몸속으로 스며들었다. 투구 아래로 꽤 젊어 보이는 얼굴이 또렷해졌다. 이안은 응시하며 재미있다는 듯 미소 짓던 그가 입을 열었다.

"아버님의 새들을 죄다 죽였으니 도망치는 천것들은 아니겠거니 했다만…. 우리가 누구인지는 알고 기다리고 있었던 거냐?"

"알지. 흡혈귀와 떨거지들."

덤덤하게 대답한 이안이 덧붙였다.

"하지만 보아하니 내가 누구인지는, 모르는 모양이군."

"잘 알지."

송곳니를 드러내며 더 짙게 웃은 기사가, 양손검을 어깨에 비스듬하게 걸치며 말했다.

"오늘 밤의 내 사냥감. 질질 짜며 도망치는 것들보단, 훨씬 재미있어 보이는."

여유와 자신감이 넘치는 태도였다.

당연한 일이었다. 여긴 저놈들의 소굴이고, 오늘 밤 같은 사냥을 여러 번 반복해 왔을 테니까.

말투로 봐선, 최근에는 전쟁을 피해 도망치는 자국민도 사냥해 온 모양이었다. 하긴. 그것도 전쟁을 일으킨 여러 이유 중 하나일 터였다.

여유로운 건 그의 부하들도 마찬가지였다.

놈들은 칼 든 짐승을 또 보게 될 줄은 몰랐다든가, 피 맛이 궁금했는데 잘됐다는 식의 시시껄렁한 말들을 목소리도 낮추지 않은 채 떠들어 댔다.

이내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재미있는 놈이군. 이런 말을 듣고도 왜 웃는 거냐?"

기사가 덧붙였다. 입가의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이안이 내뱉었다.

"내가 누구인지 정말 모르는 것 같아서."

"...?"

기사의 투구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옆으로 슬쩍 기울어졌다.

물론 이안은 그게 네놈이 별로 대단하지 않은 흡혈귀라는 의미라던가, 덕분에 여제가 아직까지 자신이 루 사드에 들어선 걸 모른다는 게 확실해 졌다는 등의 부연 설명은 굳이 덧붙이지 않았다.

이내 기사의 코웃음이 이어졌다.

"그래. 명성깨나 떨치나 보군. 하긴, 새들을 다 쳐죽인 것들이 보통 놈들은 아니겠지. 그렇게 유명하다면 네 입으로 알려주는 게 어떠냐? 내가 얼마나 대단한 놈들을 먹었는진 알아야지."

대충 걸친 갑옷과 어우러져, 기사보다는 무법 지대의 약탈자를 떠올리게 하는 모습이었다.

거, 새끼. 더럽게 껄렁대네.

이안이 생각하는 사이, 샬롯이 낮게 가르릉 대고 필립도 짧게 헛기침을 흘렸다.

원한다면 바로 알려 주겠다는 듯.

왜 니들이 난리냐.

피식댄 이안이 말했다.

"알 필요 없어. 어차피 넌 여기서 죽을 테니까."

"...? 하!"

눈을 치켜떴던 기사가, 이내 짧은 탄성을 터뜨리고는 깔깔댔다. 놈의 부하들도 재미있는 농담을 들었다는 듯 웃어 댔다. 기사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자신감이 넘치는 놈이구나! 좋아, 네놈은 반드시 내 손으로 죽여주마. 그 자신감 만큼 피 맛도 좋다면-"

고맙네. 그게 내가 바라던 건데.

이안은 이어지는 놈의 목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눈앞에 떠오른 퀘스트 창을 확인했다.

여제의 종복들. 게임에서도 받은 기억이 있는 서브 퀘스트였다. 글루미르로 향하는 동안 마주치던 정예 수준의 흡혈 귀족 몇을 죽이자 알아서 완수되던.

그 정도 수준인 놈이란 말이지.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창을 닫은 이안이 다시 기사를 바라보았다.

놈은 아직도 떠들고 있었다.

"내 친히 네놈의 피로 혈주를-"

"그래서, 언제까지 거기서 입이나 털어댈 거냐?"

이안이 말을 잘랐다. 그리고는 기사가 뭔가 대답하기도 전에, 지붕을 박차며 몸을 날렸다.

달려오는 그를 바라보며 눈을 치켜뜬 기사가, 또 한 번 짧게 웃음을 터뜨리고는 소리쳤다.

"저놈은 내 거다! 너희는 가서 나머지나 조져! 맛이 괜찮은 놈이 있으면 살려 두고!"

도발하는 보람이 있는 놈이군.

이안은 멈추지 않고 내달렸다. 기사도 마주 말을 몰았다. 둘의 거리가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나는 워렌 셔피로! 이곳 달리홀의 지배자인 셔피로 백작의 장남이자, 정당한 후계자다!"

소리치는 와중에도 안장 옆으로 몸을 기울인 놈이 검을 휘둘렀다.

톱날 같은 기다란 검이 파공음을 흩뿌리며 사선으로 밀려들었다.

이안은 속도를 늦추지 않은 채, 자세를 낮춰 검과 말 사이의 빈틈을 지나쳤다. 동시에 양손으로 검을 움켜쥐고는 옆으로 내밀어 말의 옆구리를 갈랐다.

카가각-!

뼈와 살을 가르는 감촉과 함께 둘이 교차해 지나쳤다.

하지만 워렌은 낙마하지 않았다. 이미 죽은 말은 고통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녀석은 옆구리가 쩍 벌어진 채로도 아무렇지도 않게 달려 선회했다. 그 사이로 썩은 내장과 체액이 줄줄 흘러내렸다.

"자신감만 있는 놈은 아니군! 네 이름은 뭐냐?"

"모기 새끼가 기사 흉내는."

미끄러지듯 멈춰서며 이안이 중얼댔다. 목소리가 크지 않음에도 워렌의 귀에는 들어간 게 분명했다. 놈이 또 한 번 짧게 웃고는 소리쳤다.

"명예를 모르는 놈이로군. 용병이냐?"

놈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이미 다시 내달리고 있었다. 주위에 나무가 듬성듬성 돋아 있음에도 거침없는 질주였다.

"넌 명예를 아는 놈이라 말 타고 싸우냐?"

마주 달려가며 내뱉은 이안이 흘깃 시선을 돌렸다. 워렌의 부하들이 야영지 주위를 어지럽게 돌고 있었다. 놈들은 놀리는 듯한 괴상한 기합 소리를 내면서 창을 이리저리 흔들어 댔다.

꼴값들을 떠네.

하긴. 그에게나 그렇지, 보통 사람들에게는 그야말로 악몽처럼 느껴지는 광경일 터였다.

쒸에엑-!

다음 순간 섬뜩한 파공음이 일었다. 거의 옆으로 눕듯이 몸을 기울인 워렌이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피할 틈을 주지 않겠다는 듯, 칼날이 거의 수평으로 날아들었다.

검을 쥔 오른팔을 왼쪽 어깨 앞까지 바짝 당긴 이안이, 거의 눕듯 몸을 뒤로 젖혔다.

쒸아아악-

검날이 아슬아슬하게 팔뚝 위를 스치고 지나가고, 이런 식으로 피할 줄은 몰랐다는 듯 살짝 눈을 치켜뜨는 워렌의 얼굴이 뒤를 이었다.

"내려와, 새꺄."

이안이 젖혔던 허리를 세우면서 오른팔을 힘차게 휘둘렀다. 검신을 타고 솟구친 바람 칼날이, 그를 지나쳐가는 말의 뒷다리를 그대로 썰어 버리며 뿜어져 나갔다.

간신히 붙잡고 있던 균형이 완전히 무너진 이안이 바닥을 굴렀다.

콰장창창-

그건 워렌도 마찬가지였다. 뒷다리의 종아리가 잘려 나간 말이 몇 걸음 더 달리기도 전에 나뒹굴었다.

워렌이 함께 뒤엉켜 흙바닥에 처박혔다가 튀어 올랐다.

쿠웅-

인마는 나무 둥치에 부딪히고서야 멈춰 섰다. 튕겨 나간 뿔 투구가 바닥에 떨어지고, 나무의 가지들이 출렁이며 흔들렸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온몸의 뼈가 으스러져 죽었을 충격.

하지만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일어선 이안은, 검을 고쳐 쥐며 뒤를 돌아보았다.

썩은 고깃덩어리로 돌아간 말과 나무 둥치 사이에서 쇠장갑을 낀 손이 불쑥 솟아오른 건 바로 그 직후였다.

"너… 이 개자식… 마법 무구라도 쓰는 모양이지…?"

말을 밀쳐낸 워렌이 씹어뱉으며 일어섰다. 투구가 벗겨진 놈은 말의 썩은 피와 살점을 잔뜩 뒤집어 쓴 채였다.

"비열한 놈…. 오냐, 나도 똑같이 상대해 주지."

왼손을 흉갑의 틈에 쑤셔 넣은 그가, 조그마한 철제 수통을 꺼내 입에 물었다.

저 안에 든 게 무엇일지는 깊이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이 모기 새끼들은 틈만 나면 반칙이네.

생각하면서도 이안은 놈의 행동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워렌의 전신에서 다시 검은 안개가 번지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질 것 같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방심이 아니었다. 그는 여전히 딱 좋은 상태의 긴장감을 유지하고 있었고, 달아오른 머릿속은 쉴새 없이 주위의 정보들을 받아들였다.

이안이 볼 때, 저놈은 전에 마주친 심판자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약했다. 테사이아 보다도 약해 보였다.

어쩌면 여제가 아니라 백작에게서 진혈을 일부 물려받은 것에 불과할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충분히 이해가 가는 수준이었다.

단죄의 일격은 쓸 것도 없이, 마법을 적당히 동원하기만 해도 손쉽게 죽일 수 있으리라.

'하지만 근접전만으로도 그럴까?'

평소라면 딱히 하지 않았을 생각이었지만, 지금은 메브와 필립이 어느 정도 경험을 쌓을 시간을 줘야 했다.

물론, 그들이 고작 저런 것들에게 당하지도 않을 터였다. 일행 모두를 죽이려면 뱀파이어 군단 정도는 필요하리라.

게다가 앞으로 이런 수준의 뱀파이어를 몇이나 더 만날지도 알 수 없었다. 그때마다 마법을 마구 퍼부어 댄다면, 정작 글루미르에 도착할 때 컨디션이 좋지 않을 수도 있었다.

지금처럼 마법을 보조 역할 정도로만 사용해도 이길 수 있다면 여러모로 여유가 생기리라.

슬픈 말이지만, 체력이 회복되는 속도가 마력을 회복하는 속도보다 압도적으로 빨랐다.

푸스스-

워렌의 전신에서 번진 검은 안개가 검신을 타고도 흘러내렸다.

"다 끝났냐?"

이안이 턱을 까딱이며 물었다.

그의 태도에서 여유를 느꼈는지, 인상을 찌푸린 워렌이 질주했다. 놈의 전신에서 번지는 검은 안개가 잔상 같은 궤적을 그렸다.

이안이 마주 달렸다. 하지만 워렌을 먼저 마중 나온 건 그가 아니었다.

채앵!

눈앞에 번쩍이는 섬광을 반사적으로 쳐낸 워렌이, 튕겨 나가 바닥에 박힌 투척용 단검을 돌아보며 웃음 지었다.

"용병이 맞구나! 이런 비열한 짓거릴-"

말을 멈춘 놈이 반사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어느새 코앞까지 달려온 이안이 검을 내리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챙! 맞부딪친 검이 튕겨 나갔다. 이안은 물론이고 워렌 역시 조금 밀려났다.

눈을 치켜뜬 놈이 말했다.

"제국 강철? 제국 강철 검인가?"

함께 밀려났다는 것보다, 이안의 검이 부러지지 않은 게 더 놀라운 모양이었다.

이안은 대답 대신 미간만 찌푸렸다. 검과 검이 마주친 순간 그를 향해 뻗어 나온 검은 안개의 감촉이 기분 나빠서였다. 따끔하고 끈적한 느낌.

'공격 보조에, 상태 이상도 유발하는 건가? 공포나 착란?'

뭐, 이 정도면 할만하겠네.

결론 내린 이안이 다시 한번 검을 휘둘렀다.

워렌이 기다렸다는 듯 검을 맞부딪쳤다. 물러나거나 피하지 않는 건 그렇게 해도 이길 수 있으리란 자신감이 있어서일 터였다.

하지만 세 번째에 이어 네 번째까지 검격을 교환하는 중에도 이안의 검은 여전히 부러지지 않았다. 검은 안개 역시 그에게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쩌엉!

워렌이 힘껏 휘두른 일격에 이안이 주륵 밀려났다. 가늘게 떨리는 그의 검날에 기어코 작은 흠집이 패였다. 마력을 조금 밀어 넣어서 검은 안개가 주는 충격을 중화시켰건만. 어쨌건 내구도가 빠르게 떨어지는 것까진 막을 수 없었다.

이안은 짧게 혀를 찼다.

파엘에게 산 검이건만. 첫 싸움에서 바로 이 꼴이 되다니.

쒸에엑!

그때, 다시금 달려들며 워렌이 소리쳤다.

"여유가 없어 보이는군! 보기보다 힘도 좋고 검술 실력도 제법이다만. 너와 나 사이에는 결국 좁힐 수 없는 절대적인 차이가-"

워렌의 고개가 뒤로 튕겨 나가듯 젖혀졌다. 그의 오른쪽 눈에, 어느새 투척용 단검이 박혀 있었다.

한 손으로 그의 검격을 흘려낸 이안이, 빈틈을 놓치지 않고 단검을 던진 것이다.

이렇게 근거리에서 던지리란 예상은 하지 못한 듯, 워렌이 순간 굳어진 찰나.

"차이가, 뭐?"

이안은 훤히 드러난 놈의 목덜미로 가차 없이 검을 휘둘렀다.

콰직-!

잘려나간 머리통이 허공을 갈랐다. 머리를 잃은 목의 단면에서 검은 피가 왈칵 치솟았다.

이게 정말 되네.

생각하던 이안이, 다음 순간 불현듯 뒤로 물러섰다.

쒸악!

머리 잃은 몸통이, 쓰러지지 않고 그를 향해 검을 휘둘렀기 때문이다.

목 단면에서 치솟던 검은 피가 검은 연기로 화하기 시작한 건 바로 그 직후였다.

"귀쟁이보다 비열한 놈이로군…."

바닥에 굴러떨어진 워렌의 머리에서 쉭쉭 바람 새는 목소리가 번져나갔다. 뒤이어 그의 머리가 검은 연기로 변하며 녹아내렸다.

목 단면의 검은 연기가 거의 전신을 뒤덮듯 뿜어져 나왔다. 그 사이의 몸은, 여전히 당장이라도 다시 검을 휘두를 듯한 자세를 취한 채였다.

연기 사이로 음산한 목소리가 번졌다.

"하지만, 그래…. 네놈의 실력을 인정하마."

꼴에 뱀파이어다 이거지.

코웃음을 삼키며, 이안은 검을 고쳐 쥐었다.

저 상태가 된 놈도 날붙이만으로 상대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뇌리를 스쳤다.

#154화

연기 사이로 워렌의 구겨진 얼굴이 드러났다. 머리가 되돌아왔음에도 검은 연기는 사라지지 않았다. 놈의 눈과 코, 귀에서 번져 나왔고 갑옷 사이에서도 뭉실뭉실 피어올라 안개처럼 전신을 감쌌다.

검날을 타고 피어오르는 양도 늘어서, 안개로 만들어진 검날을 쥐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와라."

워렌이 검을 머리 위로 치켜들며 말했다. 흠잡을 데 없는 자세였다. 공격 거리에 들어온 것은 무엇이건 토막 내 버릴 듯한 기세.

"싫은데."

대답하며, 이안은 투척용 단검을 내던졌다. 마지막 투척용 단검이었다. 이제 가죽띠에 남은 건 가장 하단에 끼워 둔 요정의 비수뿐이었다.

인상을 찌푸린 워렌이 검을 내리쳤다. 검날의 궤적이 날아드는 단검을 쳐 내고, 그 뒤의 이안을 향해 밀려들었다.

이안은 옆으로 몸을 날려 피했다.

카가각-

검은 궤적은 뒤편의 나무에 깊은 흔적을 남기고는 사그라들었다.

진부한 패턴이네.

생각하며, 이안은 마력 탐지를 펼친 채 놈을 바라보았다.

엄청난 기세로 타들어 가는 마력이 선명해졌다. 저 상태를 오래 유지하기는 어려워 보였다. 아마 소모한 마력은 그의 피를 빨아 채워 넣으리라는 얄팍한 속셈일 터였다.

어쨌든, 시간이 촉박한 건 그가 아니라는 의미였다. 물론 저놈은 마력이 다 소진될 때까지 싸움을 끌 생각이 없겠지만.

"이제야 두려움이 느껴지나?"

내뱉으며 워렌이 달려들었다. 지금까지의 껄렁한 모습이 아닌, 잘 훈련된 기사의 움직임이었다. 인정한다던 말이 빈말이 아닌 모양이었다. 날아드는 궤적에도 아까 같은 여유는 느껴지지 않았다.

쉬하악-!

이안은 땅에 발을 찍으며 멈춰 섰다. 검은 호선이 그의 곁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안은 그대로 몸을 틀어 워렌에게 달려들었다. 카앙! 내리친 검을 워렌이 가볍게 막아냈다. 타오르는 안개가 이안의 검에 더 깊은 흠집을 만들었다.

시발. 속으로 읊조리면서도, 이안은 놈의 옆구리를 향해 왼손을 내뻗었다. 어느새 들려 있던 운철 단검이 흉갑 아래의 누비옷을 찢으며 틀어박혔다.

워렌의 미간이 움찔 떨렸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놈이 왼 주먹을 휘둘렀다. 강철 장갑에도 물론 검은 연기가 안개처럼 맺혀 있었다. 허리를 뒤로 젖혀 피한 이안이 황급히 물러났다.

"잔재주를 지나치게 좋아하는군. 그걸로 명성을 쌓았나 보지?"

그런 셈이지.

속으로만 대답하며, 이안이 검을 고쳐 쥐었다. 검날 중앙에 움푹 뜯겨 나간 듯한 흔적이 선명했다.

이가 나간 순간부터 반쯤 수명이 다한 상태이긴 했지만. 어쨌든 곧 부러질 게 분명했다.

위기감이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동시에 신경이 더 곤두서면서, 집중력이 최고조로 치달았다.

쒸아악-!

동시에 워렌이 달려들었다. 놈의 검에 실린 안개가 조금 옅어졌다.

의도적으로 줄인 것 같았다. 아무래도 이안은 검술로 압도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승부욕이라도 생겼나 본데.

생각하는 와중에도 그의 몸은 충실하게 움직였다.

카드득-

워렌이 내리친 검을 검날로 간신히 빗겨 흘려낸 이안이, 놈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쩡! 어깨와 어깨가 맞부딪쳤다. 동시에 손날 방향으로 고쳐 쥔 운철 단검이 놈의 반대쪽 옆구리를 찔렀다.

워렌은 고통스러운 티도 내지 않은 채 팔을 휘둘러 이안을 밀쳐냈다. 휘아악- 놈의 팔에서 뒤따라 흩뿌려진 검은 안개가 밀려나는 이안의 전신을 후려쳤다.

이안이 팔로 얼굴을 가렸다. 갑옷 위를 짐승이 할퀴는 듯한 느낌이 이어졌다. 하지만 머뭇댈 여유는 없었다. 워렌이 곧바로 다시 검을 내리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안은 숨을 멈춘 채 뒤로 몸을 날렸다.

쐐액-!

휘두르던 검을 중간에 힘으로 멈춘 워렌이 곧바로 따라붙었다.

가까워지는 놈을 응시하는 이안의 등골을 따라 오싹한 전율이 흘렀다. 동시에 평소에는 추상적인 예감으로만 존재하던 육감이 완전히 깨어났다.

이안은 놈과 눈을 마주친 와중에도, 주위의 모든 것들을 동시에 인식할 수 있었다. 시야가 눈이 닿지 않는 범위까지 늘어난 느낌이었다.

육감과 집중력. 그리고 그걸 뒷받침할 지능과 정신력 수치가 만들어낸 결과물일 터였다.

그 결과 이안은,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워렌의 움직임을 세밀하게 눈에 담으면서도, 야영지의 전황까지 동시에 파악할 수 있었다.

고함과 비명, 욕설. 빛의 신의 신성력 특유의 따듯하면서도 단단한 느낌. 병장기 맞부딪치는 소리와 메브의 기합성. 그리고 마차 위로 훌쩍 뛰어오르고 있는 샬롯. 그녀의 입가에 맺힌 여유로운 미소와 숨결까지 느껴졌다.

그 순간 초점이 바뀐 것처럼 워렌의 존재가 뚜렷해졌다. 이안의 뇌리로 이어질 놈의 공격이 그려졌다. 사선으로 올려 베기.

쒸아악-

예상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궤적을, 이안은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전부터 그랬듯, 인식과 대응은 다른 영역이었다. 물론 지금은 그 와중에 반격까지 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이안이 내뻗은 칼을, 워렌은 물러나지 않고 고개만 옆으로 젖혀 피했다.

카드득-

바람 칼날이 맺힌 검날이 놈의 한쪽 얼굴을 깊숙이 찢고 지나갔다. 하지만 워렌의 새카만 눈은 여전히 이안에게 흔들림 없이 고정되어 있었다.

머리가 잘려도 되살아나는 놈이었다. 얼굴 한쪽 정도는 충분히 내줄 수 있으리라.

씩, 워렌이 찢겨나간 얼굴 속살을 훤히 드러낸 채 미소 지었다.

"이건 예상 못 했나?"

올려 베기를 끝낸 놈의 팔에 다시 힘이 들어갔다. 이안의 뇌리에, 검이 만들어낼 궤적이 다시 한번 선명하게 새겨졌다.

"잔재주가 다 떨어진 모양이군."

쒸악-!

검은 궤적이 떨어져 내렸다.

이안은 흘리거나 피하는 대신, 검을 머리 위로 들며 방어 자세를 취했다.

쩌엉! 충격과 함께 이안의 한쪽 무릎이 순간 꺾였다. 워렌의 검도 이안의 검날에 막혀 멈췄다. 꽈직, 동시에 움푹 파여 있던 이안의 검이 부러졌다.

"그러게."

떨어지는 검날 아래로, 붉게 타오르듯 일렁이는 이안의 눈이 드러났다.

"아직 칼만 가지곤 안 되네."

"...!?"

그게 의미하는 바를 바로 이해하지 못한 듯, 워렌이 어리둥절하게 미간을 찌푸린 다음 순간.

콰아아-!

놈의 발아래에서 샛노란 불길이 터져 나왔다. 일점 폭발. 워렌의 전신이 피할 틈도 없이 폭발 속에 파묻혔다.

"갸- 아아아악-"

불길 속에서 놈의 비명이 이어졌다. 검은 안개는 이미 불길에 잡아먹혀 흔적도 남지 않았다. 눈알이 익고 피부가 타들어 가면서도, 놈의 얼굴에는 경악과 의문이 가득했다.

하지만 이안은 그의 의문에 답을 주지 않았다. 대신 부러진 검을 놔버리면서, 왼손으로 은검을 뽑아 들며 일어섰다. 그대로 검을 오른손으로 바꿔 든 그가 타오르는 불길 속으로 몸을 날렸다.

콰직-

뻗어 나간 검이 타들어 가는 누비옷을 꿰뚫고 워렌의 복부에 비스듬하게 박혔다. 그리고도 더 깊이 파고들어, 놈의 가슴 속까지 헤집었다.

워렌의 비명이 뚝 끊어졌다. 바들대던 놈이 눈을 치켜뜬 채 굳어졌다. 불길이 사그라들고, 놈의 입에서 연기 섞인 탄식이 번졌다.

"마법…?"

그게 유언이었다. 이안이 검을 뽑자 워렌이 그대로 허물어졌다.

앞머리에 피어오르는 연기를 털며, 이안은 놈의 시신을 내려다보았다. 다른 뱀파이어들이 그랬듯, 전신이 조금씩 재가 되어 바스러지고 있었다.

'솔직히, 이게 편하긴 해.'

짧게 혀를 찬 이안이 은검을 털었다. 사서 고생이라니. 두 번 할 짓은 아니었다.

물론 나름의 성과는 있었다. 얼뜨기 마족이긴 해도, 그의 근접 전투가 뱀파이어 기사에게도 먹힐 수준까지 올라섰다는 걸 몸소 증명했으니까. 검이 좀 더 좋았다면 검만으로 끝낼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검을 허리춤에 회수한 이안이, 바닥에 떨어진 워렌의 검으로 손을 뻗던 그때였다.

"나, 나리! 끝난 겁니까…?"

저만치에서 필립의 외침이 터져 나왔다. 어느새 사위가 고요해져 있었다. 워렌이 죽으면서, 놈의 하수인들도 죄다 죽음으로 돌아간 모양이었다.

"그래. 끝났다."

열기를 머금은 검을 집어 들면서 이안이 내뱉었다.

출혈의 직검. 날이 좀 길긴 해도, 생각보다 능력치가 좋은 검이었다.

정신력이 약간 감소하는 페널티가 붙어 있긴 했지만, 이안에겐 귀여운 수준이었다. 무엇보다 치명타 확률이 높았다. 검날의 형태만 봐도 충분히 설득력이 있었다.

나머지 방어구들은 별 볼 일이 없었다. 뱀파이어답게 방어 따위에는 그리 신경 쓰지 않은 모양이었다.

검만 챙겨 든 이안이 비로소 야영지로 돌아왔다.

새와 썩은 말의 시체. 그리고 하수인들이었던 잿더미로 뒤덮여 개판이 된 일대가 눈에 들어왔다.

"후… 하아…."

그 한복판에 주저앉아 숨을 고르던 필립이, 이안을 돌아보며 내뱉었다.

"언제 끝내시려나 했습니다… 정말 죽는 줄 알았거든요."

말과 달리, 겉으로 드러난 상처는 딱히 보이지 않았다.

새끼, 엄살은.

피식대며 노획한 검을 마차 안에 던져 넣은 이안이 메브를 돌아보았다. 안면 가리개를 올린 그녀의 얼굴이 땀으로 반질댔다.

"어떠셨소?"

"정말 머리가 잘려도 살아 있더구나."

"별거 아닌 놈들이었다. 연기 같은 걸 뿌리면서 조잡한 술수를 부리긴 했지만."

말하며 마차 지붕에서 훌쩍 뛰어내린 샬롯이 덧붙였다.

"경은 팔다리를 다 잘라서 산채로 굴러다니게 만들더군. 필립은, 정말 신성력을 아끼지 않았고."

"그래도 여럿 죽였습니다, 나리."

필립이 첨언했다. 수통을 들어 물을 한 모금 마신 이안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턱짓했다.

"그럼 이제 떠날 준비를 해라."

"이렇게 바로요…?"

필립이 되물으면서도 일어섰다.

메브를 돌아본 이안이 말했다.

"방금 죽인 놈은 셔피로 백작의 아들이오. 그리고 백작의 진혈을 일부 나눠 받은 것 같았지."

"…백작이 아들의 죽음을 알게 되었겠구나."

"아마도."

"그럼, 그냥 기다리면 알아서 찾아오지 않을까요?"

필립이 말들의 상태를 점검하며 내뱉었다.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다른 뱀파이어들에게 도움을 요청할지도 모르지. 어차피 여기 있어 봐야 잘 수도 없을 텐데, 그럼 그냥 시간만 날리는 거야."

"하긴. 그도 그렇군요."

"해가 뜨고 쉬면 돼."

정 우리를 죽이고 싶다면 알아서 따라오겠지.

뒷말을 삼킨 이안이 샬롯을 돌아보았다. 고개를 작게 끄덕인 그녀가 곧바로 마차로 다가갔다.

"이 녀석은 데리고 가지 못할 것 같습니다만…."

옆구리가 찢어진 채 주저앉은 말을 쓰다듬으며 필립이 덧붙였다.

메브와 눈빛을 교환한 이안이, 짧게 입맛을 다셨다.

"어쩔 수 없지. 풀어 줘."

***

일행이 숲을 빠져나온 건 동이 틀 때쯤이었다. 일행은 야트막한 계곡을 따라 흐르는 냇가를 발견하고서야 마차를 멈췄다.

휴식은 길지 않았다.

일행은 정오가 지날 무렵 다시 이동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말들은 물과 풀을 충분히 뜯어 먹고 체력을 제법 회복한 상태였다.

오히려 피로가 다 풀리지 않은 건 일행이었다. 메브와 필립은 물론이고, 한숨도 자지 못한 이안과 샬롯은 말할 것도 없었다.

일행은 이동하면서 교대로 쉬기로 했다. 감각이 특히 예민한 이안과 샬롯은 따로 나뉠 수밖에 없었다.

샬롯이 양보한 덕분에, 이안과 메브가 먼저 눈을 붙였다.

말이 한 마리 줄어든 게 이런 부분에선 전화위복이 됐다.

네 마리가 다 무사했다면 한 번에 한 명만 자야 했을 터였다.

구겨져 잠들었던 이안이 눈을 떴을 때는 이미 한밤중이었다. 또 다른 숲 한복판. 완만한 내리막이 이어지고 있었다.

"들어가서 자라. 내가 몰 테니까."

"아직 교대 시간이 아닐 텐데요."

"됐으니까 잠이나 자."

이안이 마부석에 앉으며 말했다. 필립이 못 이긴 척 일어났다.

"동틀 때쯤 깨워 주십시오. 어차피 그때는 말들도 쉬어야 합니다."

"알았다. 샬롯, 너도 들어가서 자라. 경을 깨우고."

"난 아직 괜찮다. 한두 시간쯤은 더 자게 둬도 돼."

샬롯이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이젠 배려도 할 줄 아는군.

이안은 짧게 웃음 짓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용한 전진이 이어졌다.

이안이 육포 한 덩어리를 다 먹고 두 덩어리째를 꺼내 들 무렵, 하품하던 샬롯이 비로소 마차 옆으로 말을 붙였다.

어느새 일어난 메브가 나올 채비를 하고 있었다.

"너무 오래 잤군. 미안하다. 샬롯."

"별말씀을."

태연하게 말한 샬롯이 안장에서 훌쩍 뛰어올라 마차 지붕에 착지했다.

크게 소리도 나지 않았고, 말도 잠시 콧김을 뿜었을 뿐 달려 나가지 않았다. 마차 밖으로 몸을 내민 메브가 손쉽게 안장에 올라탔다.

다들 기마술이 좋다니까.

이안은 짧게 입맛을 다셨다.

말을 타는 게 익숙해지긴 했지만, 그의 기마술은 여전히 뛰어나다고 할 수는 없는 수준이었다.

사실 그가 말을 타고 싸우는 방식은, 보통은 절대로 하지 않을 무모한 행동투성이였다.

"육포, 드시겠소?"

메브가 옆으로 붙자, 이안이 육포를 반으로 찢어 내밀었다.

받아든 메브가 말없이 우물댔다.

그녀는 이안이 건넨 술병도 마다하지 않았다.

일어나자마자 술부터 마시는 게 몸에 좋을 리는 없었지만. 잠기운을 몰아내는 데에는 이만한 게 또 없었다.

육포를 다 먹고도 한참을 더 말없이 앉아 있던 메브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인간성이라는 게, 전혀 남아 있지 않더군."

"뭐가 말이오?"

"그 하수인들. 타락자들과는 또 달랐어. 그저 고통을 주고 피를 마실 생각뿐이더군."

"뭐, 껍데기에 불과한 놈들이니까."

이안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메브가 그에게 술병을 건네며 물었다.

"껍데기?"

"죽었다 살아난 하수인들에겐 영혼이 없소. 그저 생전의 기억을 가지고 있을 뿐이지. 그래서 자기가 살아 있다고 착각하는 거요."

술은 어느새 얼마 남지 않았다.

아쉬워하며 한 모금을 마신 이안이 덧붙였다.

"사실은 공감 능력이 전혀 없고,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지. 그저 욕망과 명령에 지배당할 뿐."

"살아 있다고 착각하는 것들이라…."

나지막이 탄식하며 고개를 끄덕이던 메브가, 이윽고 이안을 돌아보았다.

"너는 모르는 게 없구나, 이안. 이럴 때면, 네가 마법사라는 게 실감이 나."

"나도 어디서 주워들은 얘기요."

어깨를 으쓱인 이안이 술병을 입에 가져갔다.

그가 방금 한 말은, 게임의 마법사 NPC에게서 들은 대사를 그대로 읊은 것에 불과했다.

마족을 연구하는 자였고, 마법사란 족속들이 으레 그렇듯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탐구열과 호기심을 가진 자였다.

아마 지금도 검은 벽 인근을 떠돌며 자신의 연구에 매진하고 있을 터였다. 언젠가는 마주칠 일도 있으리라.

"살려 둬선 안 되는 것들이다. 놈들에게 죽은 루 사드의 무고한 백성들을 위해서라도."

"그럴 생각이오."

"…한 명만 빼고 말이지."

메브가 의미심장하게 덧붙였다. 어둠을 응시하던 이안이 어깨를 까딱였다.

"글쎄."

더 이상의 대화는 없었다. 메브는 또다시 묵묵히 무언가 생각에 잠겼고. 이안은 육포를 꺼내 조금씩 우물대며 적막을 즐겼다.

어쨌건, 오늘 밤은 평화롭게 지나갈 것 같았다.

그 사실에 묘한 이질감을 느끼면서도, 이안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달라질 건 없었다.

뒤에서 하품 소리가 들려 온 건, 그로부터 몇 시간이 더 지나서였다.

"이러다 침대보다 마차가 더 편해질 것 같군요. 아주 편하게 푹 잤어요."

읊조린 필립이, 마부석 쪽으로 고개를 내밀며 덧붙였다.

"느낌으론 꽤 오래 잔 것 같은데. 아니었나 봅니다."

이안이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넌 오래 잔 게 맞다만."

"아직 이렇게 어두운데요? 이제 새벽 정도인 것 같습니다만."

"...?"

그럴 리가.

그제야 먹구름 자욱한 어둑어둑한 하늘을 올려다 본 이안이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쯤이면 날이 밝고도 남았어야 할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흐린 날씨에 익숙해진 나머지 깨닫지도 못하고 있었다.

이윽고 헛웃음을 흘린 이안이 읊조렸다.

"어쩌면, 여제가 내가 온 걸 눈치챈 걸지도 모르겠군."

#155화

"네…?"

메브가 홱 고개를 돌리는 가운데, 눈을 치켜떴던 필립이 덧붙였다.

"여기서 갑자기 그 이름이 왜 나온답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은 아침이거든. 내가 시간을 착각하고 있는 거라고 해도…."

여전히 하늘을 응시하며 내뱉은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적어도 이것보단 밝아야 하고."

"해가 뜨지 않는… 거라고요…?"

"그보단, 해를 가린 쪽에 가까워 보이지만."

멍하니 입을 벌린 필립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듣고 있던 메브가 입을 열었다.

"백작이 벌이기엔, 규모가 너무 큰 일이라는 거구나."

"그렇소."

"그 뱀파이어의 죽음으로 알게 된 것인가…."

"글쎄. 여제도 일족을 속속들이 감시하지는 못하는 것 같았소만."

이안이 짧게 입맛을 다시고는 덧붙였다.

"영지에 이상한 일이 생기면 곧바로 보고하라는 명령 정도는, 내려놨어도 이상하지 않잖소. 그럼. 백작이 따라오지 않는 이유도 대충 설명이 되고."

백작은 당연히 아들의 복수를 원할 터였다. 그런데도 아직 아무런 습격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건, 여제의 입김 때문일 가능성이 높았다. 자살 행위라 여기고 불허한 것이리라.

비슷한 생각인 듯, 메브가 고개를 끄덕였다. 얼빠진 표정으로 이안을 바라보던 필립이 덧붙였다.

"어디까지나… 추측인 거지요?"

"그래."

"그럼 그저 오늘이 유독 더 날이 흐린 거고, 백작도 다른 뱀파이어들에게 지원을 요청하느라 늦는 것일 뿐일 수도 있겠군요. …그렇지요?"

행복 회로가 상당히 구체적이네.

코로 웃은 이안이 대답했다.

"그래."

그의 대답이 필립에게 그다지 위안이 되지 못한 건 분명했다.

필립 역시, 자신의 말이 희망 사항에 불과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 루 솔라시여…."

마부석으로 기어나온 필립이 탄식하듯 중얼댔다.

그에게 고삐를 건네면서,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지켜보면 확실해지겠지. 희망을 버리지 마라."

***

물론, 몇 시간이 더 지나서도 달라진 건 없었다.

날은 여전히 침침했다. 주위는 여전히 침침했다. 밤과 아침 사이의 그 어디쯤에서 시간이 멈춰 버린 것 같았다.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필립이 날씨만큼이나 어두운 얼굴로 읊조렸다.

"이건 아무리 봐도 이 인근에만 일어난 변화가 아닙니다. 아마 루 사드 전역이 이 지경이 된 거겠죠. 이렇게까지 거대한 마경이라니….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마차 지붕 위에 누워있던 샬롯이 낮게 웃음 지었다.

"왜 안 되지? 검은 벽이 엄연히 존재하는데."

"…아."

필립이 허를 찔린 얼굴로 굳어졌다.

"정말 마경이 열린 건지, 확인해 보면 되잖아."

의자 걸터앉아 손가락 사이에 끼운 빈 술병을 의미 없이 빙빙 돌리고 있던 이안이 내뱉었다.

필립이 무슨 뜻이냐는 표정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이안이 턱을 까딱였다.

"너한텐 성물이 있고 경에게는 성흔이 있으니까."

"아하…!"

"나는 이제 그 부분에선 쓸모가 없다. 내 성흔은, 오직 복수의 맹세에만 공명해."

메브가 말했다. 그녀를 홱 돌아본 필립이 양손을 모아 쥐며 내뱉었다.

"걱정 마십시오. 제가 확인하겠습니다."

곧 고개를 숙인 필립이 기도문을 읊었다. 어둠을 밝히며 세상 만물을 찬란하게 비추는 어쩌고 하는, 가장 흔한 기도문이었다.

하지만 효과는 분명했다. 필립의 손아귀에서 흐릿한 빛이 번졌다.

…저러다 정말 성기사라도 되는 거 아닌가.

이안이 터무니없는 생각을 떠올리는 사이.

"느껴집니다…!"

기도를 끝낸 필립이, 방금까지의 경건한 모습이 거짓말처럼 눈을 치켜떴다.

"평소보다 훨씬 더 희미하긴 합니다만, 여신의 손길이 닿고 있어요. 성물에도 신성이 고이고 있고요."

"그럼 마경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거나, 이게 일종의 결계일지도 모른다는 거군."

타후므리트가 몰고 다니던 어둠을 떠올리며, 이안이 읊조렸다.

필립이 눈을 깜빡였다.

"결계는 마법 아닙니까? 그걸 이렇게 넓은 지역에 펼치는 게 가능할까요?"

"모르지. 하지만 상대는 마족이야. 여긴 놈들의 영역이고. 이 안에서 무슨 짓까지 벌일 수 있는지는, 아마 여제 본인만 확실히 알고 있을 거다."

그의 말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인 메브가, 이내 입을 열었다.

"그렇다 해도 놀랍구나. 이런 일을 벌이면 교단의 귀에 들어가게 될 텐데. …하긴. 용살자를 맞이하려면 그 정도 각오는 해야겠지."

그놈의 용살자는.

혀를 찬 이안이 덧붙였다.

"믿는 구석이 있어서 일을 벌인 걸지도 모르지."

"믿는 구석…?"

"놈들의 뒤를 봐주는 자들이 있는 것 같다고 했었잖소."

메브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게 교단을 막아줄… 그래, 교단 내부에 조력자가 있으리란 얘기로구나."

"사제인 척하는 타락자가 한둘이 아니잖소."

이안이 대수롭지 않게 덧붙였다.

메브는 물론 필립도 부정하지 못했다. 애초에 그들이 타락자의 배후로 상정하고 추적 중인 인물도 사제였다.

이윽고 메브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전에 뱀파이어의 배후가 누구인지 추측은 하고 있다 했었지. 이제는, 알려주지 않겠느냐?"

"굳이 지금 말이오?"

메브가 고개를 끄덕였다.

필립도 불안을 잊으려는 듯 그를 돌아보았다. 샬롯의 가르릉 대는 숨소리도 뒤를 이었다.

하긴, 이 부분에 대해선 샬롯에게도 자세히 알려준 적이 없었다.

입맛을 다신 이안이 말했다.

"배후의 존재는 여제가 직접 암시했었소. 물론 내가 미끼를 던지긴 했소만, 어쨌든. 그리고 그 배후로 추정되는 이들의 이름을 내게 알려준 건, 백금룡이오."

"루 솔라 맙소사…."

탄식한 필립이, 황급히 손으로 입을 가리고는 덧붙였다.

"죄송합니다. 여기서 갑자기 그분이 언급되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해서요. 다물고 있겠습니다. 계속해 주십시오."

"…기울어진 세상의 균형을 바로잡는 게 아니라, 아예 무너뜨리고 다시 시작하는 게 순리라 여기는 자들이 있다더군."

메브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말을 끊어서 미안하다만. 혹시, 그들이 그걸 새로운 질서라고 부른다고 하지는 않으셨느냐?"

"그런 얘기까진 듣지 못했소만. 뭐, 비슷한 구석이 있는 건 사실이오."

메브와 필립이 시선을 교환했다.

둘 다 무의식적인 행동 같아 보였다. 이내 다시 이안을 돌아본 메브가, 갈증 섞인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을 원탁 의회라 부른다고 했소. 결코 외부에 정체를 드러내는 법이 없으나, 그들의 손길이 세상 곳곳에 닿아 있다더군."

사실은 내가 먼저 언급했지만.

생각하면서도, 이안은 대수롭지 않게 말을 맺었다.

그가 그 이름을 어떻게 알고 있었는지에 대한 거짓말을 지어내는 것보다, 그냥 아르케아스에게 덮어씌우는 게 훨씬 더 손쉬웠다.

"원탁 의회라…."

곱씹듯 중얼거린 메브가 이안을 바라보았다.

"그럼 네가 대행 중이라는 사명도, 그들과 관계가 있겠구나."

"그렇소."

어깨를 으쓱인 이안이 덧붙였다.

"말했듯, 흡혈 일족의 뒤를 봐주는 것도 그들의 일원이나 끄나풀이리라 추측하고 있소. 물론 증거는 없소만. 여제를 죽이는 데 성공한다면, 찾아볼 수는 있겠지.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모르고."

"…얼마 전에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었죠. 의회의 하수인이 이곳에 있으리라 보시는 겁니까?"

필립이 더듬더듬 물었다. 이안이 태연하게 대꾸했다.

"모르지. 여제가 그들에게 도움을 청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만약 정말 그렇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 직접 놈들에 대해 들을 수 있을 테니까."

"…보통 위험한 인물이 아니겠지만요."

"당연한 소릴."

"...."

필립이 침을 꿀꺽 삼키는 가운데, 메브가 덧붙였다.

"그들의 규모나 구성원에 대해선, 아는 바가 없느냐?"

"없소. 전혀."

"그런가…. 그래… 어쩌면, 우리가 같은 것을 쫓고 있는지도 모르겠구나. 나와 필립이 거슬러 올라가는 연결 고리의 끝에, 그들이나 그들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누군가가 있으리란 생각이 들어."

"나도 비슷한 생각이오."

이안의 덤덤한 대답에, 메브가 고개를 끄덕였다.

"함께 해야 할 이유가 하나 더 늘었구나. 어쩌면 타락자들의 배후에 대한 중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니."

"다시 말하지만, 추측일 뿐이오. 사실 전혀 다른 별개의 세력인 걸 수도 있소."

"그렇다 해도 달라질 건 없어. 내 근원적인 복수와는 관련이 없을지라도, 성기사로서 외면할 수는 없는 부분이니까."

"그러시다면야."

적어도 동기 부여는 확실히 됐군.

이안이 고개를 주억거리는 사이, 이윽고 필립도 묘한 웃음을 흘렸다.

"감히 저 같은 게 감당할 수 있는 사안인지는 전혀 모르겠습니다만. 적어도 넋이나 빼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건 확실히 알겠군요. 그런 의미에서…."

그가 품에서 지도를 꺼냈다.

"제가 할 수 있는 걸 하겠습니다. 글루미르까지 가는 경로부터 재점검해야겠군요."

"여기가 어디쯤인지는 알고?"

"그 뱀파이어가 달리홀이라 언급하지 않았습니까. 단서는 충분합니다. 글루미르까지 무사히 도착하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말을 마친 필립이 지도를 펼치며 시선을 돌렸다.

그 뒷모습을 잠시 응시하던 이안이, 이윽고 피식 웃으며 아공간에서 마석등을 꺼냈다.

마석등에서 번진 흐릿한 빛이, 필립의 지도를 비췄다.

***

일행의 이동은 멈추지 않고 이어졌다. 시간을 전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말이 지쳐서 쉬는 시간까지를 대충 하루로 치기로 했다.

그렇게 이틀이 거의 다 지나갔다.

"오늘도 이대로 무사히 지나가면 좋겠군요."

필립이 마차에서 분리한 말을 나무에 묶으며 말했다. 냇가가 멀지 않은 숲 가장자리가, 오늘 일행의 야영지였다.

이안은 대답 대신 장작더미에 작은 불꽃을 던졌다.

빛과 함께 은은한 온기가 번졌다.

일행은 다시 모닥불을 피우기 시작했다. 흡혈 여제가 그들의 침입을 눈치챘을 확률이 높은 이상, 굳이 모닥불을 피우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들을 찾아내려 마음먹는다면 어떤 식으로든 찾아낼 수 있을 테니까.

"너무 아무 일도 없으니, 오히려 더 불안하기도 하지만요."

필립이 모닥불 옆에 앉으며 덧붙였다. 날을 다시 벼린 검에 기름을 먹이던 메브가 고개를 까딱였다.

"닥치지 않은 일에 심력 쏟지 말거라. 지금은 쉴 수 있을 때 쉬어 두는 것에 집중하도록 해."

"예. 아, 오늘도 두 분이 먼저 주무시려고요?"

"그러는 편이…."

대답하던 메브가 입을 다물었다. 샬롯이 불현듯 자신의 입 앞에 검지를 가져다 댔기 때문이었다. 개울 하류 쪽을 빤히 응시하던 그녀가, 이내 읊조렸다.

"오늘은 밤손님이 있군."

육포를 씹던 필립이 그대로 굳어졌다. 마차 내부를 정리하던 이안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놈들이냐?"

먹구름에 섞인 오염된 마력은 이안의 육감을 교란하고 있었다.

지금은 샬롯의 감지 능력이 일행 중에서 가장 뛰어났다.

"숨소리로 봐선 짐승 같은데. 많지 않다."

"굶주린 들짐승들인가…."

메브가 읊조렸다. 머지않아 이안의 귀에도 희미한 발소리와 숨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

그의 고개가 슬쩍 기울어졌다.

아무리 굶주렸다 해도, 모닥불까지 피운 야영지를 향해 일직선으로 달려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의문은, 냇가의 풀숲 너머로 세 쌍의 붉은 안광이 드러난 순간 해소되었다.

"그냥 들짐승이 아니군."

이안이 내뱉었다. 풀숲을 헤치고 달려오는 세 마리의 늑대를 눈에 담은 필립이, 재빨리 방패를 팔에 끼웠다.

검을 뽑아 든 샬롯이 튕겨 오르듯 일어선 건 그때였다.

"쉬고들 있어라. 내가 처리하지."

그녀는 대답도 듣지 않고 몸을 날렸다. 달려오던 늑대들은, 야영지에 도달하기 전에 샬롯의 검에 썰려 고꾸라졌다. 말 그대로 눈 깜짝할 사이였다.

검에 묻은 피를 털며 돌아온 샬롯이 읊조렸다.

"날 거들떠보지도 않더군. 신음조차 흘리지 않았어."

필립이 육포를 씹으며 대꾸했다.

"우리 위치를 파악하려고 보낸 것들이 아니겠습니까?"

"…그보단 애초에 우리 손에 죽으라고 보낸 놈들 같은데."

대답한 건, 마차 옆에 걸터앉아 있던 이안이었다.

일어선 그가 모닥불을 지나치며 덧붙였다.

"나한테 할 말이 있나 보군."

"그게 무슨…."

고개를 갸웃하던 필립의 시선이, 이안이 향하는 방향으로 돌아갔다.

불빛이 간신히 닿는 어둠의 경계선. 끈적한 소리를 흘리며 꿈틀대는 것들이 비로소 눈에 들어왔다.

미간을 찌푸린 것도 잠시.

"...!?"

그것들의 정체를 깨달은 필립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샬롯이 죽인 늑대들의 내장이,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대며 모여들고 있었다.

"…저게 대체 뭐지?"

한데 뭉치기 시작한 내장을 바라보던 메브가 미간을 좁힌 채 읊조렸다. 이안이 그 앞으로 다가가고 있으니 지켜볼 뿐. 그렇지 않았다면 곧바로 달려가 짓밟아 버렸을 터였다.

"여제다."

대답한 건 샬롯이었다. 메브가 돌아보는 가운데, 멍하니 굳어져 있던 필립이 비로소 탄식했다.

"여제… 라고요…?"

"예전에도 저런 식으로 이안과 대화를 나눴었지. 보아하니 지금도, 뭔가 할 말이 있나 보군."

"할 말이라니…."

중얼댄 메브가, 질척대는 소리가 번지는 어둠으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내장들은 하나의 커다란 덩어리로 뭉쳐 있었다. 자세히 보니, 아주 끔찍하게 빚어낸 얼굴 같은 형태였다.

얼굴 전체가 계속해서 꿈틀댔고, 그럴 때마다 표면의 끈적한 광택이 반짝였다.

창자로 만들어진 입술이 달싹인 건 바로 그 직후였다.

"기어코 여기까지 오셨군요, 이안."

"루 솔라여…."

고막을 긁는 듯한 목소리에, 필립이 눈을 감으며 읊조렸다. 반면 이어진 이안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를 바 없이 태연했다.

"어차피 며칠 뒤면 얼굴을 마주 보게 될 텐데. 굳이 또 귀찮은 짓을 하는군."

"그래서예요. 며칠 뒤면 만나게 될지도 모르니까."

잠시 말을 멈춘 머리가 미소 지었다. 부드러운 미소였지만, 보는 입장에선 그저 역겹기만 했다.

"아주 인상적이었다는 말씀부터 드려야겠군요, 이안. 처음엔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내 시선을 피해 이렇게 깊숙한 곳까지 들어오시다니. 게다가 내 위치는, 대체 어떻게 알아낸 건가요?"

"몰랐어. 심증만 있었지. 보아하니 정답이었나 보군."

"확신 없이 움직인 거라고요…?"

머리에서 기포가 터지는 듯한 소리가 번졌다. 메브는 그게 웃음소리라는 걸 깨달았다.

"찾아낼 때까지 돌아다닐 생각이셨던 거군요. 여전히 자신감이 대단하네요. 하긴, 그러니 고작 넷이서 이곳에 발을 들인 거겠죠. 내가 당신을 만날 준비를 하고 있으리란 걸,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지금 네 목소리가 얼마나 역겨운지 전혀 모르나 보군. 본론이나 말해. 이대로 또 대가리가 터지고 싶지 않으면."

"…그러진 말아 줬으면 좋겠군요. 전에도 말했지만, 이 주문은 준비 과정이 꽤 길거든요. 어쨌든, 좋아요. 본론으로 넘어갈게요."

또 한 번 징그러운 미소를 지은 머리가, 이윽고 덧붙였다.

"우리 이쯤에서 휴전하지 않을래요, 이안?"

"...?"

#156화

메브의 미간이 좁아졌다. 필립과 샬롯도 귀를 의심하듯 서로를 돌아보았다.

이안도 같은 생각인 모양이었다.

짧게 코웃음 친 그가 내뱉었다.

"저번에도 그러더니, 이번에도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는군. 하늘이나 보고 말해."

"아직은 수습할 수 있어요. 잘 생각해 봐요, 이안. 당신이 아무리 우리를 싫어한다고 해도, 그깟 요정 계집애 하나 때문에 목숨을 걸 필요는 없잖아요."

"테사는, 살아 있나?"

"아직은요. 하지만 당신이 끝까지 멈추지 않는다면, 결국 죽게 되겠죠."

메브의 시선이 샬롯에게로 돌아갔다. 그녀의 주황색 눈동자에 진득한 살의가 고이고 있었다.

이안도 우뚝 움직임을 멈춘 채였다. 여제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나는 아직도 당신을 싫어하지 않아요, 이안. 오히려 그 반대죠. 당신은 이런 곳에서 죽기에는 너무 아까운 인물이에요. 살아남는다면 수많은 업적을 이룩하고, 역사에도 그 이름을 여러 번 남기겠죠. 북부에서 그랬듯이."

"너희를 전부 죽인 것도, 내 업적에 포함될 거다."

이윽고 이안이 덤덤하게 말했다.

머리가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비극적인 일이군요. 난 당신을 살리려 애쓰는데, 당신은 날 죽이지 못해 안달이라니. 지금 이 순간에도 모든 일족이 집결하고 있어요. 당신들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우리 전부를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은가요?"

"전부 모이고 있다고?"

"그래요. 당신이 여기 도착할 때쯤엔 준비가 끝나 있겠죠."

이안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메브는 비로소 그가 대화를 이어나가는 건 그저 정보를 더 얻어내기 위해서일 뿐이라는 걸 깨달았다.

어쩌면 여제도 눈치채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런데도 왜 설득을 멈추지 않는 거지?'

정말 이안을 죽이고 싶지 않아서?

그녀가 고개를 갸웃하는 사이, 이안이 내뱉었다.

"잘됐군. 찾아다니는 수고를 덜겠어. 경험치도 쓸어 담겠고."

"또 그런 못 알아들을 소릴…. 당신이 북부에서 어떤 업적을 이룩했는지는 잘 알아요, 이안. 그야말로 신화적이죠."

여제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하지만 난, 그게 온전히 당신의 공이 아니라는 것도 알아요. 그때와 지금은 여러모로 다르죠. 누구보다 당신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지 않나요?"

"...."

이안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얼굴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메브는 그가 무표정한 얼굴이리라 생각했다. 이안은 분노가 깊어질수록 얼굴에서 감정이 사라졌으니까.

"어지간히 초조한 모양이군."

하지만 뜻밖에도, 이어진 이안의 말투는 아주 부드러웠다.

"네? 그게 무슨-"

"네 뒤를 봐주는 자들이,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나 보지?"

"...."

여제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놀랍게도, 메브는 저 역겨운 얼굴에서 흐릿한 당황이 묻어나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게 아니면 직접 이런 개소리를 늘어놓을 이유가 없잖아."

이안이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사실은 너도 알고 있는 거야. 그들의 도움 없이는, 네가 애지중지하며 일궈 온 일족이 전부 내 손에 죽게 되리라는 걸. 그러니 어떻게든 날 설득하려는 거겠지. 되지도 않는 이유 들이나 가져다 붙이면서. 안 그래?"

"…비약이 너무 심하군요. 이안."

이윽고 여제가 내뱉었다. 낮게 코웃음 친 이안이 덧붙였다.

"테사가 죽었건 살았건 상관없어. 백성들을 칼받이로 세워도 날 막을 수는 없을 거다. 차라리 내 손에 죽는 게, 너희들에게 피를 빨리다 죽는 것보단 덜 고통스러울 테니까."

"...."

머리가 말문이 막힌 듯 입술만 달싹였다. 이안이 그 앞으로 가까이 다가가며 덧붙였다.

"이런 무의미한 짓거리는 이제 그만해라. 그리고 다음번엔."

이안이 발을 들었다.

"네 진짜 머리를 터뜨려 주지."

"이안. 정말 후회하게 될-"

콰직!

이안이 머리를 그대로 짓밟았다. 내부의 마력이 흩어지면서, 산산조각난 내장들이 솟구쳤다.

"하…."

피와 살점을 뒤집어쓴 이안이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얼굴에 튄 피를 손바닥으로 눌러 닦으며 모닥불로 돌아왔다.

필립이 어색한 미소를 입가에 걸었다.

"아, 아주 멋지셨습니다, 나리. 마족의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오히려 선전 포고를 하시다니요. 분명, 또 뭔가 생각이 있으신 거겠죠?"

"아니."

곧바로 대답한 이안이, 필립을 마주 보며 덧붙였다.

"그런 건 없다. 그냥 이대로 글루미르로 향해서, 놈들과 정면으로 맞부딪칠 거야."

"...."

말을 멈춘 필립이 입술을 달싹였다. 좀 전의 그 내장으로 만들어진 머리가 말문이 막혔을 때와 똑같은 반응이었다. 이안이 헛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여제는 자기 소굴에서 꼼짝도 하지 않을 거야. 거기 숨어 들어갈 방법 따윈 없겠지. 그러니 그냥 정면으로 돌파할 수밖에."

"허…."

필립이 탄식했다. 샬롯이 가라앉은 눈으로 씹어 뱉었다.

"성대한 전투가 되겠군. 싸우다 죽는다 해도 여한이 없고, 살아남는다면 평생 기억되겠지."

"그건 또 무슨 정신 나간…. 여제의 말이 사실이라면, 말 그대로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꼴이 될 텐데요. 물론 나리들께선 일당백의 용사들이십니다만. 상대도 엄연한… 마족이니까…."

이안의 시선을 받은 필립이 어깨를 움츠리며 말을 맺었다. 곧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 일리 있는 말이군."

"…예?"

필립이 눈썹을 치켜들며 되물었다.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네 말대로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꼴이 될 테니까. 이대로 말을 돌려서 버브룩으로 돌아가도 돼. 경도 마찬가지요."

메브를 일별한 이안이 말을 이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받은 도움만으로도 둘 다 충분히 제 역할을 다해 주었으니까. 물러난다 해도 전혀 탓하지 않겠소. 우리가 이긴다면 곧바로 버브룩으로 가겠소. 물론 알아낸 정보도 공유할 거고."

그가 이렇게 말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듯, 오히려 필립의 얼굴에 당황이 번졌다.

"아니… 그렇다고 말씀을 그렇게 서운하게 하십니까…. 돌아가다니요. 아무리 겁이 나도, 제가 두 분만 두고 혼자 내빼겠습니까?"

"나도 같은 생각이다. 너희들만 사지에 던져 놓고 도망칠 수는 없지. 끝까지 함께 싸우겠다."

메브가 덧붙였다. 그녀를 돌아본 필립이 너스레를 떨었다.

"흡혈귀들을 상대하는 법까지 연습했는데, 빈손으로 돌아가면 여러모로 무안하지요."

"아무리 이곳이 저들의 땅이라 해도, 정말 뱀파이어다운 자들은 많아야 수십에 불과할 거다. 나머지는 죄다 그때 본 하수인들과 비슷한 수준이겠지. 내가 보기에도 우리에게 승산이 없지는 않다. 각자 몇십 명씩만 상대하면 돼."

이어진 메브의 진지한 말에, 이안이 낮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그렇게들 말 할 줄 알았지.

"알겠소. 그렇게들 죽으러 가고 싶다면야."

물론 이안은 죽을 생각 따윈 없었다. 능력치 포인트는 몇 개 없지만, 아직 스킬 포인트에는 제법 여유가 있었으니까.

여차하면 바로 필요한 대로 포인트를 투자할 생각이었다.

그게 아니라도, 믿는 구석은 더 있었다.

여제의 제안을 거절한 순간, 눈앞에 퀘스트 창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미로 저택의 안주인. 미로 저택으로 들어가 흡혈 여제를 죽이는 게 목표였다.

게임에서도 존재하던 상황이라는 의미였다. 그러니 어쨌든, 클리어하는 게 불가능한 상황이 조성되지는 않을 터였다.

타후므리트와의 전투가 그랬듯이.

최악의 경우라도, 악착같이 발버둥 치다 보면 길이 보이리라.

뭐든, 일행이 납득할 수 있게 설명할 수 있는 근거들은 아니었다.

"내일부턴 천천히 움직입시다. 다들 체력 보전에 힘쓰시오. 끼니도 거르지 말고."

이안이 덧붙인 말은 이게 전부였다. 루 솔라여, 하고 비장하게 읊조린 필립이 메브를 돌아보았다.

"혹시 제가 싸우다 죽거들랑, 반드시 복수해 주십시오, 나리."

메브가 고개를 끄덕였다.

"염려 말거라, 필립. 내 목숨을 바쳐서라도 그렇게 하겠다."

"이 중에 누군가 죽는다면, 내가 처음이 될 거다. 그러니 내 복수를 맹세하는 편이 더 빠를 거야."

샬롯이 덧붙였다.

이젠 서로 죽겠다고 난리군.

헛웃음을 지은 이안이, 천을 들어 얼굴과 몸에 묻은 피를 대충 닦아내기 시작했다.

물론, 그는 아무도 죽게 할 생각이 없었다.

가능하다면.

***

다음 날부터 먹구름은 폭풍이 치듯 출렁이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낮게 깔리고 있기까지 했다. 하늘이 좁아진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밤낮의 구별 역시 여전히 불가능했다. 하지만 그 중심을 향해 나아가는 일행의 분위기는, 오히려 평소보다 더 차분했다. 매 끼니를 식량을 아끼지 않고 배불리 먹었고, 수면도 충분히 취했다.

그리고 그사이, 뱀파이어의 습격은 단 한 차례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들을 감시하는 시선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정말 없는 건지는 이안도 확신하지 못했다. 하늘이 가까워질수록 오염된 마력도 짙어져서, 그의 감각을 교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아마도 사흘째.

"호오…."

마침내 마차가 글루미르 외곽의 숲을 벗어났다.

안장에 앉은 이안은 갑자기 시야가 탁 트인 듯한 느낌을 받았다.

실제로도 그랬다. 들판은 완만한 내리막을 그리고 있었다.

덕분에 저 너머, 글루미르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첫 번째 성벽은 도시 밖의 농경지와 작은 삼림까지 감싸며 넓고 길게 이어져 있었다. 동시에 낮고 얇기까지 했다. 제국의 양식이었다.

높은 성벽에 둘러싸인 도시는 그 내부의 한쪽으로 치우쳐져 있었다. 외부 성벽이 둘러싼 지역의 반도 되지 않았지만, 그렇다 해도 제법 넓고 번성한 도시 같았다.

적어도 얼마 전까지는 그랬으리라.

지금은 도시 전체가 흐릿한 어둠에 잠겨 있었다. 작은 불빛조차 번져 나오지 않아서, 버려진 도시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런 이질감을 파악한 건 이안 뿐이었다.

다른 일행의 시선은, 하늘을 뒤덮은 먹구름의 소용돌이에 사로잡혀 있었다.

정확히는 태풍의 눈처럼 구멍이 뻥 뚫린, 소용돌이의 중심부에.

"루 솔라 맙소사…."

그 사이로 드러난 짙은 자주색의 하늘과 커다란 초승달을 응시하던 필립이, 이윽고 탄식을 흘렸다.

"…마법이군. 어쩌면, 다른 세상이거나."

뒤이어 샬롯이 읊조렸다. 이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뭐건, 길 잃을 걱정은 없겠네."

"...?"

고개를 갸웃하던 필립의 시선이, 이윽고 그를 따라 아래로 내려갔다. 이안은 구멍 뚫린 하늘이 아니라, 창백한 달빛이 내리쬐는 그 아래의 땅을 바라보고 있었다.

넓은 정원과 그 한복판의 대저택이 달빛을 받아 선명하게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달빛이 내리쬐는 건 정원을 둘러싼 담벼락 인근까지가 전부였다.

덕분에 다른 지역이 더 어둡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 비현실적인 광경을 눈에 담던 필립이 입술을 달싹였다.

"그럼… 저기가 바로…."

"우리의 목적지겠지."

말을 맺은 건, 마차 옆으로 몸을 내민 메브였다. 그녀가 가라앉은 녹색 눈으로 이안을 돌아보았다.

"저기가 바로 여제의 궁전인 거야. 그렇지?"

"아마도."

이안이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글루미르의 전경이 외부 성벽에 가려졌다. 낮다고 해도 성벽은 성벽이었다.

평지로 접어든 마차가 관도를 따라 나아갔다. 성문이 가까워졌다.

좌우로 열린 성문은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고요한 어둠에 잠겨 있었다. 문을 지키는 경비병조차 보이지 않았다.

비로소 부자연스러운 적막을 깨달은 필립이 중얼댔다.

"설마, 사람이 아무도 없는 건 아니겠지요."

"글쎄. 어쩌면."

"다들 어디로… 아니, 아닙니다. 생각하지 않는게 좋겠군요."

고개를 저은 필립이 입을 다물었다. 곧 마차가 성문을 지나쳤다.

이안의 미간이 꿈틀댔다.

감각이 일순간 미세하게 어긋나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마경에 발을 들일 때와 같은 감각.

"...."

그런 변화를 눈치채지 못한 필립은 주위를 돌아보고 있었다.

그들을 기준으로 오른편 저 멀리로 도시를 감싼 성벽이 보였고, 정면으로는 농경지로 이어지는 언덕이, 좌측으로는 듬성듬성 나무가 솟은 삼림이 펼쳐졌다. 소용돌이의 눈은 정면에서 좌측으로 조금 치우친 저 멀리에 뚫려 있었다.

필립이 그 아래, 내리쬐는 달빛이 만들어내는 흐릿한 빛의 기둥을 눈에 담던 그때.

"마차를 세워라, 필립."

이안이 말을 몰아 앞으로 나서며 내뱉었다.

필립이 반사적으로 고삐를 당겼다.

어느새 손에 든 투구를 깊이 눌러쓰며, 이안이 덧붙였다.

"다들 싸울 준비를 하시오."

"...!"

그제야 일행 모두의 시선이, 그가 응시하는 언덕 위로 향했다. 그건 아주 잠깐이었다. 메브가 재빨리 투구를 집어 들고, 마차 지붕의 샬롯도 튕겨 오르듯 일어섰다.

언덕 위로 검은 형체들이 솟아오르기 시작한 건 바로 그 직후였다.

필립이 마부석에서 벌떡 일어서며 그것들을 차근히 눈에 담았다.

죽은 말을 탄 기수들이었다. 뒤이어 그 사이로, 검은 연기에 휩싸인 존재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전신 판금 갑옷을 걸치고, 마갑을 두른 죽은 말을 탄 기사였다.

하늘의 휘몰아치는 먹구름과 어우러져, 지옥의 군세를 떠올리게 했다.

마른 침을 삼키던 필립의 시야 한구석에 붉은빛이 번지기 시작한 건 바로 그때였다.

"...?!"

시선을 내린 필립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저 앞으로 나선 이안의 전신에 붉은 빛이 번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요하지만, 언제라도 활화산처럼 타오를 것 같은 신성력이었다.

"북부의 대전사…."

메브가 마차에서 내리며 탄식했다.

자신의 손아귀를 내려다보는 이안의 눈매도 슬쩍 말려 올라갔다.

험난한 하루가 되리란 예감 때문이기도 했지만. 몸속으로 스며드는 신성력이 전보다 더 선명하게 느껴지고 있어서였다.

상태창을 확인해 보니, 실제로도 전보다 능력치가 몇 포인트씩 더 올라 있었다.

특별히 더 많은 신성력을 받고 있는 것도 아니건만.

'단죄의 검이 더 강해진 거랑 비슷한 현상인가…?'

어쩌면 용의 진원 덕분일지도.

확실히 알 수는 없는 부분이었다. 사실, 이유 따윈 그리 중요하지도 않았다.

이내 시선을 거둔 이안은, 목함을 꺼내 안에 담겨 있던 궐련 하나를 입에 물었다. 화륵, 손아귀에서 피어오른 불꽃이 궐련 끝에 불을 붙였다.

손을 털어 불꽃을 날려 버린 그가 연기를 깊이 들이마셨다.

"하…."

이안은 연기를 토해내며, 천천히 언덕을 내려오기 시작한 기수들을 눈에 담았다. 적지 않은 숫자. 하지만 저것들은 일부에 불과할 터였다. 미로 저택에 발을 들이기까지의 과정이 순탄치는 않으리라.

그렇다고 저런 놈들에게 마력을 마구 소모할 수는 없었다. 무기도 마찬가지였다. 지금이라면 어지간한 검은 몇 번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부러질 터였다.

하지만 대안은 있었다.

반대로, 지금이기에 가능한.

"후…."

궐련의 연기를 토해내며 이안이 오른손을 뻗었다. 아공간에 들어간 그의 손이 이내 천천히 밖으로 빠져나왔다.

한 손으로는 온전히 다 감을 수도 없는 두꺼운 자루를 움켜쥔 채였다. 뒤이어 그의 키만큼이나 길고 넓적한 검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끝이 살짝 휘어지고 날 등을 따라 고대어가 새겨진 외날 대검.

군단장의 대검이었다.

갑작스럽게 더해진 무게에 놀란 듯 비틀댄 말이, 투레질을 하며 자세를 다잡았다.

이안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루를 양손으로 움켜 주었다. 그의 손등에 힘줄이 돋았다.

뿌득, 뿌드득-

굵고 긴 자루에 그의 손자국이 조금씩 깊어졌다. 전신에 맺힌 신성력이 소리 없이 이글댔다.

이윽고 이안이 대검을 한 손으로 고쳐 쥐었다. 거대한 검날을 비스듬하게 늘어뜨리며, 그가 뒤를 돌아보았다.

궐련을 문 입술이 달싹였다.

"길을 뚫겠다. 천천히 따라 와."

#157화

"...!"

멍하니 그를 응시하던 메브와 필립이 화들짝 눈을 깜빡였다. 그들이 마차에서 말을 분리하려 재빨리 움직이기 시작했다. 샬롯에게 작게 고개를 끄덕인 이안이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다가오던 기수들이 언덕 중턱에서 도열 하고 있었다.

"내가 누구인지 알겠나?"

마력이 실린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기다란 미늘창을 움켜쥔 뱀파이어 기사의 목소리였다. 하수인 기병들이 죽 늘어서는 가운데, 그는 언덕 꼭대기 바로 아래에 홀로 서 있었다.

손가락 사이에 궐련을 끼운 이안이, 연기를 뿜으며 대답했다.

"셔피로 백작?"

그리 크지 않은 목소리였다. 하지만 백작의 귀에는 충분히 들어간 모양이었다. 낮은 웃음이 번졌다.

"기다리고 있었다. 용살자."

"이렇게 빨리 만날 줄은 몰랐는데."

백작이 투구를 벗었다. 아들인 워렌과 그리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아 보이는 얼굴이 드러났다.

그가 붉은 눈으로 이안을 노려보며 내뱉었다.

"내가 직접 여제께 간청하였다. 군단의 첨단에서, 가장 먼저 용살자를 맞이하게 해 달라고. 명예롭게 복수할 기회를 달라고."

"그 새끼가 기사 흉내를 누구한테 배웠나 했더니…."

코웃음 친 이안이 다시 궐련을 입에 물었다. 마차 쪽의 소란이 잦아드는 것을 느낀 그가, 고삐를 집어 들며 미소 지었다.

"그런 얘긴, 네 아들에게 가서 해라. 곧 다시 만나게 해줄 테니까."

그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고삐를 후려쳤다. 말이 발작하듯 내달렸다. 백작이 이를 갈며 투구를 눌러쓰는 가운데, 그게 신호라도 된 것처럼 하수인 기병들이 일제히 달려 나오기 시작했다.

말의 숨소리에 공포가 서렸지만, 이안은 오히려 고삐를 더 후려쳐 속도를 높였다. 이런 것들에게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솨아아-

투구 아래, 이안의 눈동자가 잿빛으로 물들었다. 전신에 바람이 맺히고 말의 속도가 한층 더 빨라졌다. 전열의 기병들이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놈들은 손에 든 장창을 내뻗은 채 망설임 없이 내달리고 있었다. 평소라면 저들의 창날이 먼저 그에게 닿았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쒸하악-!

이안은 허리를 꺾어 말머리를 옆으로 돌리면서, 양손으로 움켜쥔 대검을 힘차게 휘둘렀다. 말이 휘청대는 게 느껴졌지만 개의치 않았다. 바람 칼날이 검신을 타고 뿜어져 나가고, 붉은 신성력이 섞인 궤적이 창날보다 먼저 기병들을 휩쓸었다.

콰지지직-!

궤적은 말과 기수를 가리지 않고 걸리는 모든 걸 찢어발겼다.

잘려나간 말의 머리와 사슬 갑옷째로 찢긴 기수들의 상반신이 검은 피를 흩뿌리며 치솟았다.

몸이 토막 나고도 죽지 않은 기수들의 얼굴에 경악과 고통이 뒤엉켰다.

이안은 이미 놈들을 보고 있지도 않았다. 가랑이로 안장을 꽉 붙잡은 채, 내뻗었던 팔을 치켜들어 이번에는 사선으로 내리쳤다.

콰드드득-!

남아 있던 바람 칼날이 붉은 신성을 머금고 남김없이 뿜어져 나갔다. 허물어지는 기병들을 뛰어넘던 하수인들이 허공에서 그대로 찢겨 나갔다.

"저, 저런 미친…?"

"아아악-!"

썩은 피와 토막 난 살점. 욕설과 비명이 사방에 가득해졌다. 달려드는 기병들의 얼굴에 공포가 서렸다. 단 두 번의 참격이 만들어냈다기엔 너무 끔찍한 광경이었다. 하지만 그들에게 물러나는 선택권은 존재하지 않았다.

카가가각!

또 한 번의 붉은 궤적이 그 옆의 기수들을 휩쓸었다.

아무리 투쟁의 축복을 받았다곤 해도, 군단장의 대검을 보통 장검처럼 섬세하게 다루는 건 불가능했다. 하지만 그런 기교는 필요하지 않았다. 그저 앞을 가로막는 모든 것들을 찢어발길 생각으로 휘두르기만 하면 충분했다.

물론 그건 이안에게만 해당하는 얘기였다.

푸화악-

아슬아슬하게 휘청대던 말이 끝내 고꾸라졌다.

미안하다. 속으로 읊조리며, 이안은 안장을 박차며 뛰어올랐다. 고꾸라지던 말이 땅에 처박히고, 그의 몸이 둔중한 포물선을 그리며 솟구쳤다.

달려들던 하수인 기병들이 놀란 듯 그를 올려다보았다.

머리 위로 대검을 치켜들면서, 이안은 저 언덕 위를 바라보았다.

홀로 선 백작의 모습이 또렷하게 드러났다. 투구 사이로 일렁이는 안광에서 당황이 전해졌다. 놀랄 만한 일이었다. 아무리 강하다 한들 결국 인간이며, 용살자의 명성에는 여러모로 과장이 섞여 있으리라 여겼을 테니까.

놈에게 보란 듯 웃어 보인 이안이, 다시 아래로 시선을 돌렸다.

기병들이 창을 치켜들어 그를 겨누고 있었다.

이 순간에도 냉정을 잃지 않은 그의 이성은, 저 한복판으로 떨어지는 건 무모할 수도 있다고 속삭였다. 하지만 심장에 가득한 열기는, 당장 달려들라는 듯 더 거세게 타올랐다.

대검을 움켜쥔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오오오오오-!"

열기를 토해내듯 포효한 이안이, 대검을 내리치며 떨어져 내렸다.

***

"아니… 저런 말도 안 되는…."

허공을 가른 붉은 궤적을 바라보며, 필립이 멍하니 중얼댔다.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 힘든 광경이었다. 사람 키만 한 대검을 자유자재로 휘둘러 대는 것도. 저렇게 높이 솟구친 것도. 적들 한복판에 대검을 내리찍으며 떨어져 내린 것까지. 모든 게 비현실적이었다.

"정신 차려라. 구경이나 할 때가 아니야."

뒤에서 이어진 샬롯의 핀잔에, 필립이 화들짝 눈을 깜빡였다.

그제야 그가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적들이 가까웠다.

"준비하십시오!"

소리치며 필립이 고삐를 고쳐 쥐었다. 승객을 둘이나 태운 탓에 말이 숨을 헐떡였지만, 이안의 뒤를 따라가려면 어쩔 수 없었다.

하수인 기병들은 그들에게는 관심도 없었다. 죄다 이안에게 완전히 관심을 빼앗긴 상태였다.

당연한 일이었다. 붉은 신성력을 전신에 두른 채 대검을 휘둘러대는 그의 존재감은 독보적일 수밖에 없었으니까.

아마 본인도 그걸 의도하고 있으리라.

덕분에 일행은 별다른 방해 없이 적들의 후미에 도달할 수 있었다.

"제가 먼저 가겠습니다, 나리!"

검을 고쳐 쥔 필립이 소리쳤다. 샬롯이 말의 등 위로 비스듬하게 일어섰다. 언덕길인 데다 전력으로 질주하는 중임에도, 그녀는 하반신의 움직임만으로 안정적으로 균형을 잡았다. 그녀가 양손에 쥔 검을 어깨 옆으로 드리울 찰나.

솨아아-

필립이 내뻗은 검이 빛났다. 뒤이어 내달리는 말의 앞으로 눈부신 황금빛 장막이 피어올랐다.

장막이 그대로 하수인 기병 하나와 맞부딪쳤다.

"아아악-"

말과 함께 불이 붙듯 타들어 간 기수가 비명을 터뜨렸다. 그마저도 필립의 말이 부딪치면서 재가 되어 바스러졌다.

샬롯이 말 등을 박차고 가볍게 뛰어오른 건 그 직후였다. 가속이 더해진 검은 궤적이 허공을 갈랐다.

콰직!

샬롯이 기수의 양쪽 어깨에 검을 내리찍으며 착지했다. 꿰뚫린 기수가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축 늘어졌다.

그대로 검을 뽑은 그녀가 묘기를 부리듯 뛰어오르는 사이. 필립도 신성력이 맺힌 검을 찔러 넣으며 따라붙었다.

뒤를 조심할 필요는 없었다.

서걱-!

기다란 양손 검을 쥔 메브가 기수들의 목을 날려 버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기수들은 머리가 잘려도 죽지 않았지만, 적어도 전투력을 상실하게 만들 수는 있었다.

퍼석! 콰직-!

그들이 순식간에 기병들의 후미를 휩쓸기 시작했다. 이안에게 정신이 팔려있던 놈들이 비로소 뒤를 돌아보았다.

"언제 여기까지 온 거야, 시발…!"

"흩어져서 포위해! 흩어져!"

몇몇은 달려들고 몇몇은 좌우로 흩어져 간격을 벌렸다. 메브와 필립은 굳이 멀어지는 것들을 따라가지 않고, 길을 여는 데에만 주력했다.

그들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이안을 따라잡는 데에 있었다.

물론, 그게 마음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나리! 보입니다!"

날아드는 창을 방패로 쳐 내거나 피하며 기병들을 찔러 죽이던 필립이 이윽고 소리쳤다.

기병들에 가려져 있던 붉은 궤적이 다시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가 가리킨 방향을 돌아본 메브의 입에서 탄식이 번졌다.

"어느새 저기까지…?"

이안은 벌써 언덕 중턱을 지나치고 있었다. 일직선으로 멈추지 않고 달렸다고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속도였다.

게다가 어떻게 한 건지, 기병들이 탄 것과 같은 죽은 말을 타고 있었다. 신성력이 말을 조금씩 태우고 있었지만, 신경도 쓰지 않는 눈치였다.

하수인 기병들은 공포에 질린 표정이 되어서도 악착같이 그의 앞을 막으려 했다. 무의미한 저항이었다. 그들은 이안이 휘두르는 대검을 단 한 번도 견뎌내지 못했다.

곧 신성력을 버티지 못한 말이 허물어지고, 대검을 치켜든 이안이 미련 없이 몸을 날렸다.

콰지직-!

앞을 가로막던 기병 하나가 말과 함께 반으로 찢겨 나갔다.

대검 날을 땅에 찍으며 착지한 이안이, 전신에 검은 피를 뒤집어썼다.

"루 솔라 맙소사…."

필립이 중얼댔다.

이야기로나 들었던 북부의 초인이 저기에 있었다. 지금 대검을 뽑아 들며 일어서는 저 이안은, 그가 알던 이안과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이안이 검을 옆으로 늘어뜨리며 언덕 위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그와 셔피로 백작 사이를 가로막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쒸엑-

파공음이 귀를 파고든 건 그때였다. 눈을 치켜뜬 필립이 방패를 들려는 찰나.

콰직!

불현듯 솟구친 검은 궤적이 기수의 머리통에 검을 내리찍었다. 샬롯이었다. 곧바로 왼손의 은검으로 놈의 목을 날려 버린 그녀가 내뱉었다.

"한눈팔지 말라고 했을 텐데."

기수의 몸을 집어 던진 그녀가 안장에 앉았다. 죽은 말은 반항하지 않고 내달렸다. 안장에 앉은 이의 명령이라면 무조건 따르고 보는 모양이었다.

"가자! 필립!"

메브의 외침이 이어졌다. 전신에 검은 피를 뒤집어쓴 그녀가 양손검을 고쳐 쥐며 앞서 나갔다.

앞을 가로막는 기병들이 속속들이 쓰러졌다. 하수인에 불과한 것들은, 수많은 사선을 넘어온 그들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용살자-!"

마력이 실린 쩌렁쩌렁한 일갈이 울려 퍼진 건 그때였다. 전신에 두른 새카만 연기를 흩날리며 셔피로 백작이 돌진하고 있었다.

그를 향해 마주 달려가는 붉은 궤적은, 물론 이안이었다. 맨몸으로 돌진하고 있으면서도 그의 질주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백작이 미늘창을 내뻗었다. 이안은 피하지 않고 대검을 올려쳤다. 거대한 붉은 궤적이 대기를 찢었다.

궤적은 날아드는 창과 그 너머의 말까지 동시에 휩쓸고 지나갔다.

목 어름부터 마갑 채로 잘려나간 말이 허물어지고, 백작이 함께 나뒹굴었다.

바닥을 구르며 속도를 줄인 건 이안도 마찬가지였다. 백작의 분노에 찬 포효가 뒤를 이었다.

"이 노오오오옴!"

동시에 새카만 연기가 동심원을 그리며 번져 나갔다.

하수인 기병들의 눈과 입에서도 검은 연기가 번지기 시작했다. 그들이 탄 말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교전을 이어가는 와중에도 틈틈이 이안을 눈에 담던 필립이, 뒤늦게 탄식을 흘렸다.

"크… 르륵…!"

거리를 유지하며 빈틈을 노리던 기병들이 숨소리를 흘리며 일제히 그들을 돌아보았으니까.

"대열을 지켜라, 필립!"

차분하게 외친 메브가 검을 치켜들었다. 하수인 기병들이 짐승 같은 울부짖음을 토해내며 달려들기 시작한 가운데.

"빨리 끝내주십시오, 나리…!"

필립의 검이 신성력을 머금고 빛나기 시작했다.

***

"용서하지… 않겠다…!"

검을 뽑아 든 백작이 내뱉었다.

그는 새카만 안개에 완전히 뒤덮여, 그림자로 만들어진 괴물처럼 보일 정도였다.

부자가 하는 짓이 똑같네.

생각하며, 이안은 놈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늘어뜨린 대검이 밭을 갈듯 땅을 뒤엎으며 흙먼지를 흩뿌렸다.

"내 모든 힘을…!"

내뱉은 백작이 연달아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초승달 같은 검은 궤적이 연달아 이안을 향해 날아들었다.

이안은 역장이나 마법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저 왼손을 뻗어 검 자루를 반대 방향으로 움켜쥐고는, 그대로 팔을 비스듬하게 치켜들어 넓적한 검 면으로 몸을 가렸다.

하반신까지 전부 가릴 수는 없었지만 상관없었다.

솔직히 지금은, 저걸 맨몸으로 맞아도 죽지 않을 것 같았다. 방어구들은 넝마가 되겠지만.

콰드드득- 콰득-!

검은 궤적이 대검 위를 후려치며 지나갔다. 검면을 받친 오른팔을 타고 묵직한 압박이 전해졌다. 견딜만한 충격이었다.

궤적은 그를 지나치며 흩어졌고, 이안의 돌진은 멈추지 않았다.

이래서 대검에 방어력이 붙은 건가.

생각하며, 이안이 얼굴을 가렸던 팔을 비스듬하게 내렸다. 백작의 새카만 전신이 드러났다.

검격을 고스란히 막아내며 돌진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듯, 검을 양손으로 고쳐 쥐는 손길이 다급했다.

그보다 이안이 대검을 내뻗는 게 더 빨랐다.

콰지지직-!

사선으로 올려친 붉은 궤적이 백작의 새카만 몸을 비스듬하게 가르며 지나갔다.

투쟁의 축복이 더해진 괴력, 거대한 검날과 신성력을 머금은 바람 칼날은, 백작의 마력은 물론 그 너머의 판금 갑옷까지 찢어발겼다.

퍼석-

백작을 감싼 연기가 한순간에 사라졌다. 백작의 상반신이 땅에 처박혔다.

카가각, 이안은 대검 날을 땅에 내리찍으며 속도를 줄였다. 여력이 엄청난 탓에, 그는 땅에 기다란 흔적을 남기고서야 멈춰 섰다.

전부터 느꼈지만, 이만한 힘을 세밀하게 통제하는 건 쉽지 않았다.

"제… 기랄…!"

널브러진 백작이 신음했다. 그는 옆구리부터 오른쪽 가슴까지가 잘려나간 채로도 살아있었다. 오른팔도 어깨 아래까지 밖에 남지 않았다.

백작이 발악하듯 연기를 뿜었지만, 육체를 재생할 수는 없었다.

바람 칼날에 실린 신성력의 잔재가 잘린 단면을 태우고 있었다.

저걸 떨쳐낸 뒤에야 본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

물론 이안은 기다려줄 생각이 없었다. 대검을 어깨에 걸친 그가 백작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언덕 중턱의 소란이 비로소 귓가를 스쳤다. 일행이 미친 듯 날뛰는 하수인 기병들을 베어 넘기며 언덕을 오르고 있었다.

충분히 빠른 속도였다. 다만 그가 더 빨랐을 뿐.

"용서할 수 없다… 네 이놈, 용서할…."

실성한 듯 중얼대던 백작이 굳어진 건 그때였다.

"컥, 커헉…!?"

백작이 발작하듯 몸을 떨었다. 그의 입에서 피 화살이 치솟았다.

뒤로 치켜든 백작의 얼굴에 공포가 서렸다.

"아, 안 돼-"

푸화악, 놈의 눈코입과 잘린 단면에서 피 보라가 솟구쳤다. 그리고는 곧 찐득한 덩어리로 뭉치더니, 언덕 너머로 화살 같이 날아갔다.

"...?"

고개를 돌린 이안이 옅은 헛웃음을 흘렸다. 핏덩이가 날아간 건 정확하게 소용돌이의 눈이 위치한 방향이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진혈이었으리라.

"잃기 전에 회수한 건가…."

거참 알뜰하네.

아마도 이 안에서만 가능한 짓거리일 터였다. 아니라면 심판자들이 죽을 때 그가 진혈을 불태우게 놔두지 않았을 테니까.

"아, 아아…."

축 늘어진 백작이 신음했다. 그의 얼굴에 생기가 사라지고 있었다. 이안은 그걸 지켜보지 않았다.

콰직!

대검이 백작의 머리통을 으깼다. 놈의 떨림이 멎었다.

퍼석, 퍼서석-

언덕 아래에서 즉각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하수인 기병들이 재가 되어 허물어지고, 죽은 말들도 썩은 고깃덩어리로 되돌아갔다.

경험치가 오른 것까지 확인한 이안이, 언덕 꼭대기를 향해 몸을 돌렸다.

다각- 다각-

뒤에서 일행이 다가왔다. 말을 지킨 건 메브 뿐이었다.

"우리가 도착하기도 전에 끝을 냈구나, 이안."

이안이 언덕 꼭대기에 올라설 때쯤 그녀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언덕 너머의 광경을 눈에 담은 이안이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대꾸했다.

"끝이라니. 이제 시작인데."

온갖 것들이 뒤섞인 새카만 물결이 언덕으로 밀려오고 있었다.

"루 솔라 맙소사…."

뒤늦게 그 광경을 눈에 담은 필립이 탄식하는 가운데.

"다들 잘 따라오시오."

대검을 늘어뜨린 이안이 성큼 앞장섰다.

"지금부턴, 멈출 수 없으니까."

#158화

어느덧 먹구름의 소용돌이가 빠르게 휘몰아치고 있었다.

잿빛과 먹빛이 어지럽게 뒤엉켜, 침침한 땅 위에 더 짙은 음영의 물결을 만들어냈다.

그럼에도 공기는 텁텁했다. 온갖 누린내가 뒤섞인 악취가 코를 찔렀다.

끝없이 밀려드는 어둠의 하수인들이 풍기는 냄새였다. 선봉대는 그저 환영 인사에 불과했다는 듯, 온갖 것들이 무질서하게 뒤섞여 내달렸다.

늑대. 고블린과 동굴 트롤. 곰. 계곡 거미. 짐승과 마물을 누더기처럼 이어붙인 키메라.

도끼나 창 따위를 든 하수인과 한때는 인간이었을 게 분명한, 온갖 끔찍한 형태의 구울 실험체들. 그 위로 까마귀와 거대 박쥐 같은 날짐승들까지 날개를 펄럭댔다.

공통점은 하나였다. 이안을 비롯한 일행을 죽이겠다는 일념만으로 가득하다는 것.

'종합 선물 세트인가, 시발…?'

마족이 한 나라를 집어삼키면 어떻게 되는지를 함축적으로 보여 주는 듯한 광경이었다.

하수인. 은밀하고 음험한 취미 생활의 결과물. 주민 실종의 책임을 물을 눈속임용 사역마.

숫자를 보아하니, 여왕은 구울 실험체와 키메라로 구성된 군단을 만들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저것들은 게임의 글루미르에서도 본 적이 있었다. 아마도 넘쳐나는 인간과 마물 시신을 재활용할 가장 합리적인 방법이었으리라.

동시에 이것들을 남김없이 동원한 여제의 의지도 느껴졌다. 어떻게든 그를 막아내고 싶은 것이다. 적어도 온전한 상태로 저택에 발을 들이지는 못하게 하려는 게 분명했다.

'죽일 수 있다면 더 좋겠고.'

짧은 순간 수많은 생각을 이어 가면서도, 이안은 놈들의 한복판으로 멈추지 않고 내달렸다.

카가가가-

때때로 불똥을 튀기며 땅에 끌리던 대검이 이윽고 치켜 올라갔다.

그리고 다음 순간, 맹렬한 기세로 뿜어져 나갔다.

콰드드드드득-

불그스름한 반월이 앞에 걸린 모든 걸 찢어발겼다. 실험체. 늑대. 계곡 거미와 하수인. 심지어 운 나쁘게 휘말린 까마귀까지.

모든 게 저마다의 형태로 토막 나 체액을 흩뿌렸다. 하지만 전체에 비하면 아주 작은 일부분이었다.

잘려나간 조각이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뒤따르던 것들이 그 빈자리를 채우리라.

이안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휘아악-

그는 달리는 것을 멈추지 않은 채, 대검의 회전력에 몸을 맡겼다. 몸이 한 바퀴 돌고, 바로 다음 순간 한 발을 다시 앞으로 힘차게 내디디며 대검을 사선으로 내리쳤다.

허물어지는 토막들 너머, 그를 향해 몸을 날리던 것들이 붉은 사선에 휩쓸려 찢겨나갔다.

그대로 자루를 쥔 오른손을 놔 버린 이안은, 대검의 여력을 왼팔만으로 감당해 버텨 냈다.

그러면서 전면으로 드러난 오른팔을 어깨에 바짝 붙이며 이를 악물었다.

콰장창-!

떨어지던 토막과 그 뒤에 달려들던 하수인이, 돌진하는 황소에 치인 것처럼 튕겨 나갔다.

온갖 것들의 체액이 이안의 전신을 뒤덮었다.

시발. 욕지거리를 토해내며, 이안은 다시 바람 칼날을 시전했다. 동시에 그의 왼팔에 다시 힘이 들어갔다. 어느새 신장이 2미터에 육박하는 동굴 트롤 한 마리가 코앞에 있었다.

그 옆으로는 창을 내미는 하수인이. 반대편으론 뒤집힌 채 팔다리로 기어 다니는 구울 실험체가 기어 왔다.

놈의 복부에는 머리가 없는 다른 인간의 상반신이 불쑥 솟아 있었는데, 양팔의 팔꿈치 아래에는 계곡 거미의 앞발로 보이는 기다란 가시 발톱이 돋아 있었다.

토 나오게도 생겼네, 진짜…!

콰지지지직-!

울분을 토해내듯 휘두른 대검이 놈들을 차례로 찢어발겼다. 손아귀에서 느껴지는 저항이 거셌지만, 이안은 끝까지 팔을 휘둘렀다.

더 가까이 근접한 만큼 더 많은 것들이 휩쓸렸다. 이안은 조각난 것들을 그대로 몸으로 들이받으며 계속해서 나아갔다.

"캬아아-"

그 틈을 노리고 아가리를 쩍 벌린 거대한 박쥐 한 마리가 날아들었다.

놈의 비명이 귀를 울렸다. 보통 사람이라면 일순간 의식을 잃었을 터였다. 하지만 이안에겐 그저 짜증만 불러일으키는 소음이었다.

놈의 몸통으로 이안의 주먹이 틀어박혔다. 닿은 순간 뻥 터져 나가는 감촉이 아주 엿 같았다.

물론, 그 사실에 불평이나 늘어놓을 때는 아니었다.

'시발.'

그저 욕설 한 번으로 털어내며 계속 검을 휘두를 뿐. 한순간도 쉬어선 안 됐다. 그의 돌파력이 사라지는 순간, 역으로 저 물결에 휩쓸리게 될 터였다.

아무리 초인에 가까운 상태라 해도, 결국 그는 개인이었다.

모든 방향에서 밀려오는 것들을 전부 상대할 수는 없었다. 그는 몰라도 일행은 버틸 수 없을 테고, 그들을 구하려면 마법도 잔뜩 사용해야 할 터였다.

그러니 지금처럼 뒤는 일행에게 맡긴 채 오로지 앞으로. 저 멀리 보이는 달빛의 기둥을 목표 삼아 일직선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다른 선택지는 싸움이 시작된 순간부터 고려조차 하지 않았다.

각개 격파나 지형적 요충지를 찾아 수비하는 길을 택한 순간, 여제의 손아귀에 놓이게 되는 거였다.

여긴 그녀의 권역이니, 그녀에게 선택권을 넘겨줄 수는 없었다.

게다가 지금은 투쟁의 축복도 받고 있었다.

카르하, 그 인간 백정의 신은 전략적 후퇴는 겁쟁이나 하는 짓이라 여길 게 분명했다.

그래서 축복을 거둬들이기라도 한다면, 상황이 더 개같이 돌아가게 될 터였다.

카르하는 역경과 고난에 맞서는 걸 좋아했고, 그게 무모해 보일수록 더 좋아했다. 끝내 자신의 대전사가 그걸 극복하지 못할지라도.

전신의 신성력이 점점 더 붉고 뜨겁게 이글대는 게 바로 그 증거였다.

이안에겐 그게 카르하의 웃음소리처럼 느껴졌다.

'하늘이 저 지랄인데, 뭐가 제대로 보이긴 하냐? 이 무식한 백정 새끼야?'

역겨움과 분노. 불쾌함. 그 모든 것들을 연료 삼아 쉴새 없이 베고 후려치기를 반복하는 와중에도, 머릿속 한구석은 여전히 차가웠다.

그의 이성은 끝내 신성력이 만들어 낸 흥분과 감정에 잡아먹히지 않았다. 아마도 높은 정신력 수치 덕분일 터였다.

고도의 집중력과 육감이 뒤엉켜 만들어낸 일종의 각성 상태 속에서, 그의 이성은 주변의 모든 정보들을 인지하고 관조했다.

일행은 그의 뒤를 열댓 걸음 남짓한 간격을 두고 따라오고 있었다.

메브는 홀로 한쪽 측면을 감당하며 이안이 포위당하지 않게 도왔다.

필립은 반대편에서 거의 발악하듯 움직이고 있었다. 엄살 부릴 여유조차 없는 듯 그저 비명 같은 기합성만 연달아 내질렀다.

샬롯은 그런 둘의 사이를 오가며 어느 한쪽이 무너지지 않도록 도왔다. 물론 필립을 돕는 시간이 훨씬 더 길었다. 그 와중에도 전력을 다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는데, 심판자를 마주치는 걸 대비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일행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할 수 없는 판단이었다.

하지만 이안이 볼 때, 심판자들은 이것들 사이에 섞여 있지 않았다.

카가각-

이것들 사이에 숨어 있는 건 흡혈 귀족들뿐이었다.

그림자나 머리칼로 전신을 감싼 채 멀찍이 날아다니거나, 하수인들의 뒤에서 기회만 엿보는 겁쟁이들.

그중 하나가 불쑥 튀어나오며 기습적으로 선보인 그림자 가시를, 이안은 몸을 살짝 젖히는 것만으로 피해 냈다.

새카맣고 뾰족한 가시가 그의 투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대로 양팔에 힘을 준 이안이, 놈을 향해 대검을 휘둘렀다.

손을 내뻗었던 뱀파이어의 몸이 발끝에서부터 안개로 변하기 시작했다.

콰지지지직-

검날이 마물에 이어 안개로 변한 그의 허리춤을 휩쓸고 지나갔다. 하지만 바람 칼날에 섞인 신성력이 안개를 조금 불태웠을 뿐이었다. 어느새 어깨 위만 남은 놈이 웃음 지었다.

"하하, 소용 없-"

내뱉던 놈의 눈이 커졌다. 어느새 코앞으로 이안의 쇠주먹이 도착해 있었기 때문이다. 검을 휘두른 반동을 추진력 삼아 불쑥 앞으로 몸을 날린 결과였다.

빠각-!

이안의 주먹이 놈의 얼굴 한복판에 깊숙이 박혀 들었다. 주먹에 맺힌 신성력이 함몰된 안면을 태우고, 연기가 되었던 전신이 삽시에 본모습을 되찾았다.

주먹을 마저 뻗어 놈을 마물들 한복판으로 날려버린 이안이, 허공에서 몸을 비틀어 대검의 자루를 움켜쥐었다.

솨아아-

날 등을 타고 이어진 고대어에 삽시에 푸른 빛이 맺혔다. 이안은 비틀었던 허리를 다시 반대로 힘차게 휘돌리며 검을 내뻗었다.

마물들과 얼굴이 함몰된 흡혈 귀족을 휩쓸고 지나간 궤적이, 곧이어 푸르게 빛났다. 그리고는 그대로 얼어붙어 수많은 파편으로 돌변했다.

콰과과과과-

부채꼴을 그리며 방사된 파편이 전면을 휩쓸었다. 그 잔재가 가라앉기도 전에, 고깃덩어리가 된 흡혈 귀족의 전신에서 피보라가 치솟았다. 그리고는 빨려들듯 쏜살같이 미로 저택 쪽으로 멀어졌다.

퍼석-

이안은 숨이 멎은 놈의 머리통을 짓밟고 지나쳤다. 뒤이어 창이나 도끼를 치켜든 직속 하수인 몇의 얼굴에 공포가 서리더니 퍼퍼벅, 재가 되어 터져 나갔다.

물론 전체에 비하면 한없이 일부에 불과했고, 이안은 놈들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보다, 방금의 일격으로 드러난 공간에 파고드는 것에 집중했다.

'생각보다 더 센데…?'

마력 소모도 조금 더 많긴 했지만. 어쨌거나 바람 칼날만 쓸 때보다 더 범위가 넓은 공격이었다.

하긴. 군단장의 대검에 붙은 건 무려 3레벨의 냉기 칼날이었다.

물론 그가 보기엔 어이없는 옵션이었다.

게임에서 이 대검을 사용하는 직업은 기사나 야만 전사였을 테고, 그들은 마력을 다루지 못했으니까.

심지어 이건 마석이 아니라 사용자의 마력을 소모해 사용해야 하는 스킬이었다. 그러니 본래는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했으리라.

게임에는 이런 식으로 유저를 엿먹이는 듯한 아이템이 수없이 많았다. 치명타와 공격 속도를 올려 주는 보옥이라든가, 참격 스킬이 붙은 지팡이 같은.

아마 제작자도 이걸 사용하는 마법사가 있으리란 생각까진 하지 못했을 터였다.

콰드드드득-!

그 마법사인 이안은, 대검을 멈추지 않고 휘둘렀다. 죽음의 행진이 이어졌다.

마물과 짐승이 뒤섞인 키메라. 인간 둘이나 셋을 역겨운 모습으로 재조립한 구울 실험체들. 그것들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귀엽게 느껴질 정도인 마물과 하수인들이 쉴 새 없이 썰려 나갔다.

그 사이사이, 흡혈 귀족들도 본격적으로 끼어들기 시작했다.

놈들은 공포에 질린 채 이안을 사신처럼 바라보면서도, 저마다 가진 재주를 발작적으로 선보이며 달려들었다.

위에서. 측면에서. 때로는 자포자기한 듯 정면에서도. 이안은 놈들의 그런 행동에 작은 의문을 느끼면서도, 한 번도 당하지 않고 썰고 찢었다.

신성력에 타고 남은 진혈은 매번 놈들의 몸을 빠져나가 멀어졌다. 그때마다 직속 하수인들도 재가 되어 흩날렸다.

각성을 넘어 반쯤은 무아지경에 접어들던 그의 의식을 일깨운 건, 퀘스트 완료 창이었다.

여제의 종복들 서브 퀘스트가 어느새 완료된 것이다.

벌써 흡혈 귀족을 과반수나 죽였다는 의미였다.

"...!"

그리고 비로소, 그는 달빛의 기둥이 생각보다 가까워졌음을 깨달았다.

소용돌이의 눈 사이로 드러난 거대한 초승달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 아래의 미로 저택도.

기묘한 위화감이 이어졌다.

저택의 담벼락은 착실하게 가까워진 데 반해, 저 멀리 불쑥 솟은 저택은 아직도 꽤 멀었다.

게다가 담벼락 너머로 보이는 정원의 식물들도 나무처럼 솟아 있었다. 담장 뒤에 또 담이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의식을 집중하는 것만으로도 감각이 어긋나는 것을 느낀 이안이, 비로소 옅은 헛웃음을 흘렸다.

'또 공간을 가지고 노는 거네.'

정확히 어떤 광경이 펼쳐져 있을지는, 저 안에 발을 들인 후에나 알 수 있으리라.

"...!"

거기까지 생각하던 이안이 불현듯 뒤를 돌아보았다. 육감의 경고.

어느새 실체화한 흡혈 귀족 하나가, 칼날 같은 손톱을 내뻗으며 메브의 측면으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드디어 이안을 노려서는 답이 없다는 판단을 내린 게 분명했다. 사실, 언제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저택에 잠시 의식을 빼앗기지만 않았다면 미리 눈치챘으련만.

이를 악문 이안이 마력을 끌어올린 찰나였다.

솨아아-

삽시에 피어오른 황금빛 장막이 메브를 감쌌다. 카가각, 장막을 할퀸 손톱이 타들어 갔다. 솟구친 검은 형체가 그 뒤로 다가들었다. 역수로 쥔 은검을 치켜든 샬롯이었다.

콰직-

은검이 흡혈 귀족의 어깨를 꿰뚫고 몸통 깊이 박혔다. 뒤이어 메브의 검이 떨어져 내리는 흡혈 귀족의 목을 날려 버렸다.

모든 게 눈 한 번 깜빡할 사이에 연달아 일어났다.

"계속 가십시오, 나리! 뒤는 걱정하지 마시고요!"

필립의 외침을 귀에 담으며, 이안은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입가에 옅은 헛웃음이 스쳤다.

너무 많은 걸 혼자 감당하려 한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스쳐서였다. 서로를 지키는 것 정도는 손쉽게 해낼 실력자들이건만.

슈화아아-

끌어올린 마력은 고스란히 대검으로 들어갔다. 어느새 코앞까지 가까워진 하수인들을 향해, 신성력과 냉기가 뒤섞인 대검이 뿜어져 나갔다.

콰과과과-

이안은 더는 뒤를 의식하지 않않았다. 터질 것 같은 심장과 지끈대는 관자놀이, 귓가를 스치는 이명과 저릿저릿한 손아귀 따위도 전부 무시했다.

그저 눈앞의 모든 것들에게 평등한 죽음을 선사하는 것에만 집중했다.

그러던 한순간.

"...!"

시야가 탁 트였다.

더는 앞을 가로막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저 멀리. 달빛을 머금고 반짝이는 드넓은 담벼락이, 온전한 본모습을 드러냈다.

#159화

그 한복판, 장식된 철창살로 이루어진 고풍스러운 대문까지 확인한 이안이 살짝 방향을 틀며 소리쳤다.

"다들 앞만 보고 뛰어!"

막 포위망을 벗어난 일행도 오로지 달리는 데에만 온 힘을 다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뒤로 아직도 괴물 군단이 바글바글했다. 이제는 일행이 쫓기는 형국이었다.

'아무리 카르하가 망나니 새끼라도, 여기서 계속 뛰는 걸로 지랄하진 않겠지.'

악몽 같은 광경에 어울리지 않는 생각을 이어 가며, 이안은 마력을 끌어올렸다.

그의 눈동자에 푸른 빛이 아른거렸다.

쩌저적-

필립의 바로 뒤에 새하얀 얼음의 장벽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빙하 방벽. 오래 유지할 수 있을 리 없었지만, 상관없었다. 애초에 그럴 생각도 없었다. 최소한의 범위에 최소한의 마력만을 사용했다.

퍼버버벅-

선두의 마물들이 방벽에 처박히고, 곧 뒤따르는 것들에게 짓눌려 터져 나갔다. 방벽에 부딪힌 것들이 저들끼리 뒤엉켜 허물어졌다.

빙하 방벽은 그 잠깐의 혼란만을 야기하고 무너져 내렸다. 하지만 그거면 충분했다. 가장 달리기가 느린 필립조차 괴물 군단과 거리를 벌렸다.

"대문? 저 대문으로 뛰는 겁니까?!"

필립이 소리쳤다. 이안은 대답 대신 앞장서 달렸다. 대문 너머의 풍경이 비로소 또렷해졌다.

길이 짧게 이어진 공터 이후로는 곧바로 정원이 시작되고 있었다.

빽빽하게 뒤엉킨 덩굴들이 장벽처럼 솟은 형상이었다. 한눈에 봐도 평범한 덩굴은 아니었다.

어쨌건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일단 저기 발을 들이면, 포위될 걱정은 없이 괴물들을 상대할 수 있을 터였다.

"멈춰어어어억-!"

"안 돼! 거기 서어어!"

뒤에서 절규에 가까운 외침이 메아리치기 시작한 건 바로 그 직후였다.

뒤를 돌아보니, 눈에 핏발이 선 뱀파이어들이 손을 내뻗으며 날아들고 있었다. 끝내 이안이나 일행을 공격하지 않던 것들이었다.

아마도 괴물들을 끝없이 분쇄하는 이안의 모습에 차마 달려들 엄두를 내지 못한 것이리라.

하지만 지금, 맹렬한 속도로 날아드는 놈들의 얼굴에는 절박함과 공포가 뒤섞여 있었다.

아, 그래. 우릴 막아내지 못하면 큰 문제가 생기는 거군.

생각하며, 이안이 연달아 왼손을 털었다. 그때마다 바람 칼날을 머금은 투척용 단검이 뻗어나가 뱀파이어들에게 틀어박혔다. 세 개 다 명중이었다.

퍼엉-

마지막 한 놈에겐 화염구가 날아들어 폭발했다. 물론 이런 걸로 놈들을 죽일 순 없겠지만, 적어도 떨어뜨리는 데에는 충분했다.

이안은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대문이 멀지 않았다. 불현듯, 뭔가 마법이 걸려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그렇다 해도 달라질 건 없었다. 부술 수 있길 바랄 뿐. 이안은 대검을 머리 위로 치켜들며 양손으로 고쳐 쥐었다. 그리고는 힘껏 땅을 박찼다. 땅이 움푹 파이면서, 그의 몸이 굳게 닫힌 대문을 향해 뿜어져 나갔다. 대검이 붉은 궤적을 그리며 떨어져 내렸다.

콰지지직-!

걱정이 무색하게, 대문을 구성한 철창살들은 종잇장처럼 찢겨나갔다. 뒤이어 벌어지는 대문을 온몸으로 부딪혀 열어젖히면서, 이안은 저택으로 들어섰다.

촤아아악-

그는 그대로 바닥을 나뒹굴며 멈췄다. 달빛이 그의 전신을 내리?다. 갑자기 밝아져서, 조금 눈이 부실 정도였다.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이안은 대검을 움켜쥐며 벌떡 일어섰다.

뒤따라 들어선 일행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일행은 그들을 거슬러 입구를 향해 내달렸다. 뒤따라 밀려들 것들을 막아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가 다시 대검을 휘두르는 상황은 이어지지 않았다.

"...!"

괴물들이 멈춰 서고 있었기 때문이다. 놈들은 입구와 담장에 적당한 거리를 두고 보이지 않는 장벽에 가로막힌 것처럼 멈췄다. 놈들의 물결이 좌우로 주르륵 이어졌다.

"아, 안 돼. 나는, 아, 아아악-!"

"살려 주십시오, 살려 주…!"

그 너머로 절규와 비명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좌우로 늘어서는 괴물들의 머리 위. 누가 끌어당긴 것처럼 양팔을 활짝 펼친 채 떠 있는 뱀파이어들이 내지르는 소리였다.

놈들의 전신에서 피보라가 붉은 안개처럼 자욱하게 번졌다. 뒤이어 그대로 여러 개의 작은 덩어리로 뭉친 진혈들이, 이안의 머리 위를 가로지르며 화살같이 뿜어져 나갔다.

"커허…."

뱀파이어들이 단말마와 함께 추락했다. 몇 초 지나지 않아, 괴물 군단 사이에서 놈들의 하수인들도 퍽퍽 부서지며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끄오오오오-"

"끼야아아아아-"

남아 있던 마물과 마수, 키메라와 실험체들도 온몸의 구멍이란 구멍에선 전부 체액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검고 붉고 때로는 녹색이나 푸른 빛을 띠는 체액이 담장 주위를 뒤덮고, 곧 그대로 땅속으로 스며들었다.

"...!"

이안은 불현듯 발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저 깊은 곳에서 핏줄이 꿈틀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 저택의 부지가 놈들의 체액을 빨아들이는 것 같았다.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보인 것은 바짝 말라붙은 시체 더미뿐이었다.

기묘한 적막이 내려앉는 가운데, 그 광경을 멍하니 응시하던 필립이 이윽고 입술을 달싹였다.

"끄, 끝난 겁니까…?"

"아마도 그런…. ...?!"

숨을 내쉬며 대답하던 이안이 불현듯 눈을 치켜떴다. 왼쪽 어깨에서 타는 듯한 열기와 고통이 번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어깨와 등어름에 새겨진 카르하의 전투 문신에, 엄청나게 밀도 높은 신성력이 밀려들고 있었다.

심지어 평소처럼 전신으로 번지는 게 아니라, 그대로 문신에 고이면서 응축되고 있었다.

용암이 팔뚝을 뒤덮는 것 같았다.

이건 또 뭐야, 시발? 생각하면서도, 이안은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비명을 참아냈다. 하지만 대검을 떨어뜨리고 몸이 굽어지는 것까진 어쩔 수 없었다.

그의 전신에 불그스름한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이, 이안?! 무슨 일이냐! 이안?"

주저앉아 헐떡대던 샬롯이 경악한 듯 튀어 올랐다.

거의 동시에 달려가려던 메브가 멈칫했다.

"으윽…? 읏, 으악…?"

"필립…? ...!"

필립이 검을 떨어뜨리며 주저앉았기 때문이다. 억눌린 신음과 쫙 펼친 채 덜덜 떨리는 오른손. 중지에서 달아오른 듯한 주황빛이 번지고 있었다. 선명한 신성력.

안면 가리개를 치켜올리던 메브도, 이내 뭔가를 느낀 듯 흉갑에 손을 얹었다. 뒤이어 그녀 역시 한쪽 무릎을 꿇으며 눈을 감았다. 그녀가 창백한 안색으로 입술을 달싹이며 기도문을 중얼대기 시작한 가운데.

"괜찮으냐? 이안! 대답해!"

그들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달려간 샬롯이 소리쳤다.

그녀가 내뻗은 손이 닿기 전에, 이안이 한쪽 팔을 들며 떨리는 목소리로 내뱉었다.

"괜찮아… 건드리지 마라…."

지금은 깃털만 스쳐도 아플 것 같으니까.

속으로만 덧붙인 이안이 멈췄던 숨을 헐떡였다. 고통이 조금씩 가라앉고 있었다. 얼굴에 맺힌 식은땀이 체액과 뒤섞여 끈적하게 흘러내렸다.

하지만 그의 신경은 여전히 어깨에 집중되어 있었다. 고통은 잦아들었지만 열기는 여전히 낙인처럼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 내부로 응축된 신성력이 선명했다.

심지어 범위가 더 넓어져서, 팔뚝 아래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아마도 전투 문신이 더 넓게 새겨진 것이리라.

'자꾸 남의 몸에 멋대로….'

생각하면서도, 이안은 이 이상 현상의 이유를 곧바로 깨달았다.

여기서부터는 신의 시선이 거의 닿지 않는 영역인 게 틀림없었다.

더는 대전사를 지켜보지 못하게 될 것을 염려한 카르하가, 단숨에 어마어마한 양의 신성력을 들이부은 것이리라.

하지만 이번에는 무식한 새끼라고 욕할 수 없었다.

문신에 가득 응축된 신성력이 그의 일부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마력이나 혼돈의 파편을 처음 다룰 수 있게 됐을 때와 같은 감각이었다.

그래, 통제권도 넘겨줬다 이거지.

희소식인 것만은 아니었다. 이제는 사용할 수 있는 신성력의 한계치도 생긴 셈이었으니까.

'이거라도 준 게 어디야.'

생각하며, 이안은 그대로 주저앉아 숨을 골랐다.

샬롯도 비로소 안심한 듯 바닥에 철푸덕 주저앉았다. 그녀가 혀를 내밀며 헐떡대는 사이.

"감사합니다…. 찬란한 여신이시여…."

땀에 젖은 목소리로 내뱉은 필립이 무릎을 꿇고 기도를 시작했다.

이안은 그제야 자신에게만 일어난 상황이 아님을 깨달았다. 루 솔라도. 메브의 반응을 보아하니 심지어 티르 엔까지 신성을 내리는 모양이었다.

"...!"

거기까지 생각한 이안이 재빨리 팔을 뻗어, 아공간에서 부러진 단죄의 검을 꺼냈다. 검집 사이로 기다렸다는 듯 푸르스름한 빛이 번지기 시작했다.

큰일 날 뻔했네.

안도의 한숨을 삼킨 이안이 검집을 내려놓으며 일어섰다.

그의 시선이 비로소 담벼락 안쪽의 전경을 훑었다. 공터의 전면을 가로막고 있는 건, 덩굴들이 뒤엉켜 만들어 낸 장벽이었다. 성인 남성의 팔뚝만 한 덩굴들 표면에는 손가락 길이의 가시들이 삐죽삐죽 돋아 있었고, 이안의 키보다도 더 높게 솟은 채였다. 어찌나 빽빽한지 그 너머가 보이지도 않았다.

자세히 귀를 기울이면 꾸득, 꾸득 하는 기분 나쁜 소리가 쉬지 않고 번졌다.

넝쿨 장벽은 좌우로 길게 이어져 있었다. 담벼락 아래로도 다소 낮은 넝쿨들이 이어져 있었는데, 좌우로 갈라진 갈림길의 입구나 다름없었다.

'이게 미로 저택의 참모습이군….'

쓴웃음을 짓는 이안의 시선이 이윽고 메브 쪽으로 돌아왔다.

필립보다 먼저 기도를 끝낸 그녀가 차근히 숨을 고르고 있었다.

"경도 신성력을 받으셨소?"

"그래… 성흔이 충만해졌다. 아마도, 여기서부턴 완성된 마경인 듯싶어."

"그럼, 이제 신성력을 휘두를 수 있으시겠군."

뜻밖에도 메브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대로는 그저 성흔에 가득 차 있을 뿐이야. 복수를 위해서만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는 것 같아."

"이런…."

좋다 말았네. 이안은 짧게 혀를 찼다. 혹시나 부상당한 곳이 없나 얼굴 이곳저곳을 만져 보았지만, 너덜너덜해진 투구와 끈적한 체액의 역겨운 감촉만이 느껴질 뿐이었다. 긁힌 상처가 있다 한들, 이미 아물어 버렸으리라.

이안이 투구를 벗어 버리고 손바닥으로 얼굴의 체액을 훑는 사이.

그를 바라보던 메브가 입을 열었다.

"그야말로 카르하의 재림을 보는 것 같았다, 이안."

"…동감입니다."

필립이 고개를 번쩍 들며 말했다. 기도 중인 것 같더니, 귀는 활짝 열어 두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제 평생 이런 엄청난 무위는 처음 보았습니다. 이야기로만 듣던 것과는 전혀 다르더군요. 정말이지 초인적이라고밖에는-"

"지금 할 말들은 아닌 것 같군."

혀를 차며 말을 자른 이안이 시선을 돌렸다.

"우린 이제야 여제의 안마당에 발을 들였을 뿐이야."

"…아."

머쓱하게 헛기침한 메브와 낯이 굳어진 필립이 그제야 주위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고 보니… 이 식물들은 대체 뭐랍니까…? 설마, 예전의 그 육식 나무들 같은 부류는 아니겠죠?"

꺼림칙한 표정으로 뒤로 물러나면서 필립이 물었다.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 나도 잘 모르겠군."

"모르신다고요…? 아, 하긴. 나리라고 이렇게 변이된 식물까지 다 아실 수는 없겠군요. 언제나 답을 알고 계시니 종종 잊습니다."

이안은 대답 대신 입맛만 다셨다.

애석하게도, 지금 그가 모르는 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지금까지 겪은 거의 모든 상황이 게임에선 겪어 본 적 없던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하늘은 게임에서도 먹구름이 자욱하긴 했지만, 지금처럼 소용돌이치진 않았다.

온갖 괴물들이 뒤섞인 하수인 군단도 마주친 적 없었다. 그때의 놈들은 루 사드 전역에서 저마다의 우두머리에게 지배되며 흩어져 있었다.

글루미르 인근에서 본 것이라곤 그 역겹게 생긴 구울 실험체들과 키메라가 전부였다. 그마저도 아까처럼 체계적인 통제를 받으며 움직이지 않았었다.

아마 테사이아가 지금의 여제를 죽였기 때문이리라.

눈앞의 이 미로 정원도 마찬가지였다. 그때는 이렇게 넓지도 않았고, 식물들도 전부 말라 죽어 있었다. 그 사이로 구울 실험체들만이 배회하는, 말 그대로 저택으로 들어서기 위한 길목에 불과했었다.

'내가 다른 짓을 하면서… 이런 걸 전부 다 놓쳤던 건가?'

너무 많이 놓친 거 아닌가.

어쨌건, 지금 좌우로 펼쳐진 갈림길은 그야말로 본격적인 던전의 입구처럼 보였다.

"나도 믿기 힘들다만."

일행보다 먼저 정원을 훑고 있던 샬롯이 입을 열었다.

"이것들, 장미 넝쿨 같은데."

"장… 미라고요?"

필립이 미간을 일그러뜨리며 샬롯을 돌아보았다. 이내 그녀가 응시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면서, 그가 말을 이었다.

"아무리 변이되었다곤 해도 장미가 이렇게 끔찍해질 리가… 있군요. 루 솔라 맙소사."

필립이 탄식했다. 저만치의 넝쿨 끝에 핀 장미를 비로소 확인했기 때문이다. 피처럼 붉은, 일반적인 장미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장미였다.

심지어 한 송이가 전부가 아니었다. 저택에 들어서기 전까지만 해도 보이지 않았건만. 넝쿨 위에 어느새 듬성듬성 피어 있었고, 심지어 이 순간에도 봉오리가 피어오르는 것까지 있었다.

눈에 보일 정도의 속도로 솟아오르고 있는 봉오리는 꽃이라기보다는 괴생명체를 머금은 양막처럼 느껴졌다.

곧 툭, 하고 물방울 터지는 소리와 함께 봉오리 하나가 벌어졌다. 꽃잎 사이로 흘러내린 액체가 넝쿨을 타고 검붉게 흘러내렸다. 아무리 봐도 피 같았다.

"아까 그것들의 체액을 흡수해 꽃을 피우기 시작한 것인가…."

메브가 탄식했다. 필립도 오만상을 찌푸린 채 침을 뱉었다. 향기가 없는 꽃인 게 다행이었다. 적어도 평범한 장미 같은 향기로운 냄새가 나지는 않을 테니까.

"다들 이쪽으로 비켜 보시오."

이안이 대검을 주워들며 내뱉은 건 그때였다.

아직 전신에 남은 신성력 덕분에, 문신의 신성력을 끌어다 쓸 필요는 없었다.

메브와 필립이 재빨리 샬롯의 옆으로 달려오는 가운데, 양손으로 고쳐 쥔 대검을 얼굴 옆으로 치켜들며, 이안이 덧붙였다.

"어쨌든 식물이니, 벨 수도 있겠지."

쿠웅- 쒸에엑-!

동시에 힘껏 몸을 날린 이안이, 옆으로 비스듬하게 뻗은 대검을 힘차게 휘둘렀다. 바람 칼날을 머금은 붉은 궤적이 넝쿨 장벽의 한복판을 갈랐다.

#16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