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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100

#090화

한결 가벼워진 발걸음을 옮기면서, 이안은 상태 창과 스킬 창을 차례로 확인했다.

추가 포인트가 들어와 있었다.

퀘스트가 아닌 레벨 업으로 포인트를 얻었다는 사실에, 어제는 미처 느끼지 못했던 작은 기쁨이 샘솟았다.

물론 언제나 그렇듯, 찰나에 불과한 감흥이었다.

"...."

모든 창을 닫으며 군단장의 시신을 지나친 그는, 놈이 앉아 있던 의자를 살피기 시작했다.

여왕의 왕좌가 그러했듯, 특별할 것 없는 의자였다.

상형 문자와 기호, 도형으로 이루어진 고대 주문 회로가 촘촘하게 새겨져 있는 것이 전부였다.

내부에서 여전히 희미한 마력이 느껴졌다.

'지하 궁전이랑 동력원이 같은 건가…?'

이안은 새삼, 거의 무한대에 가까워 보이는 마력의 원천에 대한 호기심을 느꼈다.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는지는 몰라도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마력의 황혼기인 지금은 더더욱.

'용의 힘을 쓴댔지… 설마 정말 용이 동력원이기라도 한 건가.'

불가능한 일이겠지만, 당장 떠오르는 추측은 그것뿐이었다.

용은 살아 있는 마력 덩어리 같은 존재였으니까. 오래 산 용의 유해 같은 것에서 마력을 뽑아내고 있는 거라면, 이런 유적을 천 년도 넘게 유지시킬 수 있으리라.

'언젠가 용과 싸워서 이기게 된다면… 반드시 그놈의 마력의 근원을 찾아내야겠군.'

마력의 제약 없이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면, 이 세계가 끝나는 순간까지 살아남는 것도 더 이상 막연한 목표는 아닐 터였다.

그때까지 살아 있을지도, 용의 근원을 손에 넣어도 그걸 그가 사용할 수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의자에서 더는 건질 게 없다는 걸 확인한 이안은, 주변을 한차례 돌아보고는 군단장의 시신으로 다가갔다.

영혼은 물론 품고 있던 마력까지 모두 잃은 군단장은, 아주 오래된 미라처럼 변해 있었다.

"흐음…."

절그럭, 이안은 놈의 허리춤에서 쌍검을 분리해 냈다.

거의 그의 키만 한 칼이었다.

날이 끝부분에서 살짝 휘어지는 외날 검.

심지어 정보도 확인할 수 있었다.

군단장의 대검.

'인간에겐 양손 검이다, 이거지.'

무려 유일 등급. 몇 가지 능력치 보정에, 냉기 칼날 스킬까지 사용할 수 있는 녀석이었다.

면이 넓적한 날을 검집에서 뽑아 쥐어 본 그는, 이내 어깨를 으쓱이고는 다시 검집에 되돌렸다.

억지로 쓰라고 한다면 아예 못 쓸 정도는 아니었지만. 한 몸처럼 휘두르는 건 불가능해 보였기 때문이다.

이걸로 누굴 후려친다면 베는 게 아니라 때려죽이는 것이 되리라.

'비슷한 걸 무슨 만화 같은 데서 본 것 같은데….'

생각하며, 이안은 검 하나를 아공간에 억지로 쑤셔 넣었다.

두 개를 다 넣을 수는 없었다.

사실 검의 크기를 봐선, 하나라도 들어가진 것이 기적이었다.

다음은 전투 망치였다.

이건 도저히 인간이 쓸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군단장조차 양손으로 쥐고 둔중하게 휘둘러 대던 물건이니, 더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이것도 정보를 볼 수 있다고…?'

이안이 헛웃음을 지었다.

군단장의 전투 망치. 유일 등급이었고, 충격파 스킬이 옵션으로 붙은 것이 눈에 띄었다.

'이걸 대체 누가 쓸 수 있단 거지. 거인이 아니면 불가능할 것 같은데.'

획득 가능한 전리품은 그 정도였다. 갑옷은 정보 확인도 불가능했고, 벗겨 봐야 쓸 수도 없었다.

정수라도 하나 있으면 좋으련만, 그런 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고생한 보람이 없진 않네. 왕관에 단검에 대검에, 스킬 포인트에….'

거기다 혼돈의 파편도 커졌고, 군단장을 죽인 보상으로 냉기 저항력도 조금 올랐다.

추가적인 저항력은 스킬 포인트보다도 드문 보상이었다.

"그리고 이것도… 챙겨 가야겠지."

이안은 군단장의 잘린 머리를 내려다보았다.

비쩍 말라서인지 덩치에 비해선 작은 편이긴 했지만, 그래도 들고 다닐 만한 크기는 아니었다.

"봉인함에 잘 구겨 넣으면 어떻게든…."

군단장의 머리를 양손에 든 이안이 중얼댈 때였다.

"헉…!"

숨넘어가는 소리와 함께 테사이아가 벌떡 상반신을 일으켰다.

눈을 끔뻑이는 그녀의 표정은, 말 그대로 얼떨떨해 보였다.

손을 이리저리 움직이고 주위를 돌아보던 그녀의 시선이, 이윽고 이안에게서 멈췄다.

"멀쩡해 보이는군."

이안이 내뱉었다.

크게 말하지 않았음에도 목소리가 웅웅 울리면서 번져 나갔다.

"그러게. 어떻게 된 건지 하나도 기억이 안 나네. 죽었다가 살아난 기분이야."

그녀가 뱀파이어가 아니었다면 즉사하고도 남았을 상태였으니, 아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어깨를 으쓱이는 이안을 잠시 바라본 테사이아가, 이윽고 덧붙였다.

"그런데 그 머리는 왜 들고 있는 거야, 이안?"

"전리품으로 들고 갈 거다."

이안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테사이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설마 그거, 샬롯한테 배운 거야?"

"...."

***

"뭐, 그래도 아예 은혜를 모르는 짐승은 아니네."

이안이 봉인함에서 꺼내 건네준 옷을 걸치면서, 테사이아가 내뱉었다.

눈을 뜨자마자 어떻게 된 거냐며 떠들어 댄 그녀는, 결국 이안의 입에서 그 후의 전말을 끄집어냈다.

물론 아주 간소화된 얘기였지만.

테사이아는 또다시 그것만으로도 한참을 떠들어 댔다.

아예 적막한 것보다는 나쁘지 않아서, 이안은 고개를 끄덕이거나 어깨를 으쓱이는 식으로 그녀의 말에 호응했다.

부지깽이로 쓰던 단죄의 검 검날을 더러운 천으로 닦아 내면서.

티르 엔의 신도들이 봤다면 참담한 심정이 되었을 행동이었지만, 이안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정말이지, 너랑 함께 다니려면 목숨이 두어 개여도 부족할 것 같아, 이안."

테사이아가 문득 말했다.

이안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악의 없는 얼굴.

"그렇잖아. 타락자에 마물에 마족에… 이젠 네 손으로 고대 거인인지 뭔지 하는 것들까지 죄다 죽여 버렸으니까."

"마족은 내가 아니라 널 따라온 놈이었던 것 같은데."

"물론 그렇지만… 이러다 언젠간 정말 죽을지도 모르겠어. 내가 아니라, 여기 이 야옹이가."

테사이아가 잠든 샬롯의 종아리를 발끝으로 툭툭 쳤다. 샬롯은 입맛을 한 번 다셨을 뿐 꿈쩍도 하지 않았다.

테사이아를 바라보던 이안이 툭 내뱉었다.

"그래서, 후회하냐?"

"뭘 후회해?"

"날 따라온 거."

"그건 아니야. 그러지 않았다면, 난 이미 예전에 루 사드로 끌려갔을 테니까."

"...."

이안은 그녀가 애초부터 자신을 따라오지 않았다면, 스스로 심판자를 이겨 낼 힘을 키울 수 있으리란 사실을 굳이 말하지 않았다.

악점이 명확할 뿐, 어떤 의미론 자신보다 더 강한 존재가 되었으리란 사실도.

그녀가 선택한 일이었고, 동시에 이미 지나간 일이었으니까.

게다가 만약 그렇게 되었다면, 끝내 반드시 그의 손에 죽게 되었을 터였다.

그러니까 살아남을 수 있는 실낱같은 희망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생존이란 측면에선 최악의 결말은 피한 셈이었다.

물론 끝까지 그럴지는 여전히 의문이었지만.

테사이아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더 널 떠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이안. 혼자서 저런 거인을 상대하는 전사… 아니, 마법사… 아니, 아무튼. 대륙에 너보다 강한 존재가 과연 있을까 싶거든."

"있다. 그것도 아주 많이."

"그래…? 그래도 뭐, 네 뒤에 잘 붙어 있으면 어떻게든 되겠지."

이안은 짧게 헛웃음을 흘렸다.

"긍정적이군. 어떤 최악의 상황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는데."

"지금 내가 생각하는 최악의 미래는, 루 사드로 다시 잡혀가는 게 아니라 네가 내 목숨을 노리는 거야."

테사이아가 차분한 눈으로 이안을 바라보았다.

"난 네가 제일 무섭거든. 물론, 제일 맛있어 보이기도 하지만. 덕분에 편하게 욕망을 억누를 수 있지."

약발이 잘 먹힌다니 다행이군.

피식한 이안이 고개를 까딱였다.

"당장은 저 문밖에 있는 것들부터 무서워하는 게 좋을 거다. 우린 아직 유적을 나간 게 아니니까."

"…문밖?"

테사이아의 표정이 어리둥절하게 변했다.

"밖에, 뭐가 더 있어?"

"봐서 알겠지만, 저놈은 군단을 이끄는 대장이었다. 그런 놈이 혼자 이곳에 묻혀 있었을 리가."

"...."

테사이아의 입이 벌어졌다.

완전히 마음을 놓고 있다가 뒤통수를 맞은 듯한 얼굴이었다.

"…그렇다면, 또 목숨 건 싸움을 하게 될 수도 있겠군."

나지막한 목소리가 번진 건 그때였다. 샬롯이 푸스스, 몸을 일으켰다.

"아직 반나절까진 안 된 것 같은데."

이안의 말에, 샬롯이 고개를 저었다.

"충분히 쉬었다."

"뭐라는 거야. 살이 쪽 빠졌는데."

테사이아가 비웃듯 말했다. 그녀를 슬쩍 돌아본 샬롯은, 대꾸할 가치도 없다는 듯 기지개를 켰다.

테사이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어머, 샬롯. 그게 전부야? 내가 또 네 목숨을 구했는데?"

"네 입가에 묻은 피가 누구 것일지 생각해라. 그만하면 빚은 충분히 갚은 것 같은데."

이안은 군단장의 머리를 봉인함에 담아 아공간에 넣었다.

움직일 준비는 빠르게 끝났다.

일행이 높다란 대문 앞에 섰다.

질렸다는 듯 문을 올려다 보면서, 테사이아가 읊조렸다.

"이제 거인이라면 지긋지긋해. 다신 쳐다보고 싶지도 않을 만큼."

"그 부분은 나도 동감이야."

내뱉으며, 이안은 대문을 힘껏 밀었다.

테사이아의 염원 덕분인지, 이어진 방마다 놓인 석관들은 단 하나도 움직이거나 열리지 않았다.

군단장을 잃은 거인 군단은, 끝내 깨어나지 않았다.

"…뭔가 꺼림칙한데."

읊조리면서도, 이안은 멈추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렇게 몇 시간 후.

쿠구구구….

느릿느릿 열리는 대문 너머로, 햇빛이 스며들었다.

폐를 얼릴 듯한 한기도.

"햇빛이 반가운 날이 있을 줄은 몰랐어."

망토의 두건을 눌러쓰면서, 테사이아가 읊조렸다.

문밖으로 나서며 샬롯이 피식댔다.

"마족 주제에 어울리지 않는 소릴 하는군."

"입들 다무는 게 좋을 거다."

이안이 말을 잘랐다.

샬롯과 테사이아를 돌아보며, 그가 덧붙였다.

"여기서 무사히 내려가려면, 말할 힘도 아껴야 할 테니까."

아공간에서 설표 망토를 꺼내 목에 두른 이안이, 유적 밖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흰색과 검푸른 색으로 뒤덮인 험준한 산이, 거친 바람과 혹한으로 그들을 맞이했다.

***

"후…."

소년, 아스켈은 걸음을 멈추고 잠시 숨을 골랐다.

슬슬 숨소리를 조심해야 할 시점이었다. 귀 밝고 겁 많은 짐승들을 죄다 쫓아내고 싶은 게 아니라면.

어깨에 걸치고 있던 활을 꺼내 들면서, 아스켈은 뒤를 돌아보았다.

소년은 앙상한 나무와 바위, 창백한 눈이 덮인 산기슭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서둘러야겠네."

눈을 한주먹 문 그가 읊조렸다.

이른 아침에 마을을 나섰건만.

어느새 해가 중천을 향해 기어오르고 있었다.

남은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다.

'어제 꿈이 좋았으니까. 오늘은 허탕은 아닐….'

생각하던 아스켈의 고개가, 득달같이 계곡 위로 돌아갔다.

버석대는 발소리들이 귓가를 스쳤기 때문이다. 짐승이 내는 소리는 결코 아니었다.

아스켈은 판단과 동시에 움직였다.

근처의 바위 뒤로 달려간 그는 재빨리 퇴로를 살피고, 몸을 숨긴 채 계곡을 노려보았다.

곧 불청객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니…?'

아스켈의 눈이 커졌다.

짐승이 두 발로 걷고 있었기 때문이다. 몸에는 늑대 털로 만든 망토를 두르고, 그 아래로는 인간처럼 갑옷까지 걸치고 있었지만.

갈기가 풍성하게 돋은 얼굴은 분명 육식동물의 그것이었다.

저건 가면 따위가 아니었다.

두 발로 걸으며 사람 말을 하는 짐승에 대한 이야기를 떠올린 아스켈이, 속으로 탄식했다.

'마족…!'

그 옆에 걷는 회색 머리칼의 여자도 괴상하긴 마찬가지였다. 핏기없는 창백한 피부. 끝이 삐죽 튀어나온 귀. 심지어 이 산속을 맨발로 걷고 있었다.

앞장선 흑발의 남자는 인간 같았지만, 얼굴에 표정이 전혀 없었다.

사람 가죽만 뒤집어쓴 것처럼.

결정적으로, 저긴 산맥 쪽이었다.

산맥에서 온 자들이 평범한 인간일 리 없었다.

'어떻게 대낮부터 돌아다니는 거지…?'

생각하며, 아스켈은 바위 뒤에 바싹 몸을 숙였다. 숨을 느리게 쉬면서 기척을 최대한 죽였다.

저벅- 저벅-

괴인들의 발소리가 아스켈이 숨은 바위 근처를 지나쳤다. 숨을 참고 있던 아스켈은, 그들이 지나치고 나자 비로소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밀었다.

두 괴인이 멀어지고 있었다.

'…둘?'

아스켈이 굳어졌다.

"도적이라도 있는 건가 했더니."

위에서 그르렁대는 듯한 나지막한 목소리가 번진 건 그 직후였다.

"헉…!"

숨을 삼킨 아스켈이 고개를 들었다.

아무런 소리도 기척도 없었건만.

어느새 그 새카만 마족이 바위 위에 웅크리고 있었다.

주황색 눈동자 한복판. 세로로 길게 찢어진 동공이, 아스켈을 싸늘하게 내려다보았다.

"여기 숨어서 뭘 하는 거지?"

#091화

"...."

시선에 담긴 살의에 얼어붙은 것도 잠시.

"사실대로 말하는 게 좋을 거다."

고저 없는 싸늘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어느새 바위 옆으로 다가온 검은 머리의 남자가 아스켈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망토 사이로 검 자루가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얼굴 곳곳에 튄 핏자국이 비로소 눈에 들어왔다.

심연처럼 검은 눈으로 아스켈을 바라보며, 남자가 물었다.

"여기서 혼자 뭘 하고 있었지?"

역시 사람이 아닐 거라고 생각하며, 아스켈은 활을 힘껏 움켜쥐었다.

죽더라도 벌벌 떨며 죽고 싶지는 않았다. 할 말은 다 하고, 그걸로 부족하다면 싸우다 죽어야 했다.

아스켈이 목소리를 떨지 않으려 애쓰며 내뱉었다.

"당신들을 피해서… 숨어 있었습니다."

물론, 말투가 조금 공손해지는 것까진 어쩔 수 없었다.

남자의 미간이 좁아졌다.

"숨어?"

"역시, 구린 게 있는 놈이군. 그게 아니라면 숨을 이유가 없지."

마족이 그르렁대는 듯한 낮은 목소리로 내뱉었다.

"여길 내려가면 도적떼라도 숨어 있나? 네 신호를 기다리면서."

"그게 무슨…."

어리둥절하게 읊조리던 아스켈은, 이내 자신이 얼토당토않은 오해를 받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런 위험한 곳에서 도적질을 하다간 굶어 죽거나, 마물의 먹이가 될 겁니다."

"그럼 왜 숨었지?"

"산맥 쪽에서 오셨으니까요. 저기서 넘어오는 건 괴물들뿐이니까."

"우리도 그런 괴물이라고 생각한 거군. 그래서 숨어 있었던 거고."

남자가 입가에 묘한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저도 모르게 마족을 곁눈질 한 아스켈이 되물었다.

"아니십니까?"

"당연하지. 우린 용병이다. 의뢰를 해결하고 돌아가는 길이야."

"...."

아스켈이 눈을 깜빡였다.

믿기 힘든 이야기였다.

지금 같은 겨울에는 더더욱.

산맥 인근은 숙련된 전사도 쉽게 목숨을 잃는 위험한 곳이었다.

"또 야옹이 때문에 오해가 생긴 거네. 하긴, 누가 안 그러겠어."

맨발의 요정이 비웃듯 말했다.

마족이 송곳니를 드러내는 가운데, 남자가 아스켈을 내려다 보며 덧붙였다.

"숨은 건 그렇다 치고. 그럼 넌 왜 여기 혼자 있지?"

"사냥을 하러 온 겁니다."

"믿기 힘든 말이군. 네 말대로 여긴 위험한 곳인데. 너 같은 꼬마가 혼자 사냥이라니."

잠시 미간을 찌푸린 아스켈은, 그냥 툭 터놓고 말하기로 했다.

어차피 숨길 얘기도 아니었다.

이들이 인간이건, 아니건.

"전 꼬마가 아닙니다. 그리고 마을 근처엔 사냥감이 별로 없습니다. 씨가 말랐죠. 여기 위험한 대신, 사냥할 게 제법 있고요."

"다른 어른들은 뭘 하고?"

"어른들은 어른들의 일이 있죠. 전 아직 성인으로 인정받지 못해서, 거기 끼워 주지 않아요. 그래서 제가 할 수 있는 걸 하는 겁니다."

"배포가 대단한 녀석이군. 마물을 마주치면 어쩌려고."

"숨거나 도망치면 됩니다. 전 발도 빠르고, 이 근방도 훤히 꿰뚫고 있거든요."

지금은 허무하게 붙잡혔지만.

아스켈이 뒷말을 삼키는 사이, 마족과 눈빛을 교환한 남자가 어깨를 까딱였다.

뭔지는 모르지만 분위기가 느슨하게 풀어지고 있었다.

아스켈도 마찬가지였다.

그를 그냥 죽이거나 잡아먹으려는 거라면, 이렇게 계속 말을 걸 이유가 없을 터였다.

맨발의 요정이 그의 앞으로 다가선 건 그때였다.

"반가워. 난 테사이아라고 해."

"…아스켈 입니다."

"그래. 아스켈. 이런 게 운명이 아닐까 싶네. 우린 지금 지치고 피곤한 상태거든. 어젯밤에 고생하기도 했고. 그러니까, 우릴 네 마을로 안내해 주지 않을래?"

"...."

아스켈의 얼굴이 굳어졌다. 느슨해졌던 경계심이 다시 바짝 고개를 치켜들었다. 지금 마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 때문이기도 했다.

그는 자신을 테사이아라 밝힌 요정과 흑발 남자, 그리고 검은 털 마족을 차례로 돌아보았다.

이윽고 아스켈이 결연하게 말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어머. 왜…?"

"제가 사는 마을은 초대받지 않은 외부인은 발을 들일 수 없는 곳입니다. 여러분을 초대하면 제 책임이 되죠. 그런데 솔직히 전 여러분들의 말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마을로 모시고 갈 수도 없고요."

"...."

적막이 내려앉았다.

아스켈을 빤히 응시하던 남자가 이윽고 손을 뻗었다.

본능적으로 목을 움츠린 아스켈의 머리를, 그가 가볍게 헝클였다.

"똑 부러지는 녀석이군."

"...?!"

아스켈이 눈을 끔뻑이는 사이, 그가 몸을 돌리며 덧붙였다.

"저 너머론 갈 필요 없을 거다. 거긴 지금 사냥할 상태가 아니니까."

남자가 걸음을 옮기는 가운데, 아스켈의 옆으로 마족이 뛰어내렸다.

그녀가 아스켈에게 뭔가를 내밀며 말했다.

"나는 수인이다. 마족이 아니라. 하지만 나도 오해했으니 이번엔 용서해 주마."

"...."

엉겁결에 받아든 아스켈이 손을 내려다보았다.

육포 조각이었다.

"강단 있는 놈이군."

"그러니 이런 곳을 혼자 다니겠지. 전사의 자질을 타고난 거다."

아스켈은 대화를 주고받으며 멀어지는 둘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스켈만 그런 건 아니었다.

"그냥 간다고…? 정말 이대로 그냥 가는 거야, 이안? 잘 설득해 보면 되잖아."

눈을 치켜 뜬 테사이아가 소리쳤다.

대답한건 마족, 아니 수인이었다.

"쓸데없는 수작 부리지 말고 조용히 따라와라, 귀쟁아. 대답은 충분히 들었으니까."

"아니… 하아."

짧게 한숨 쉰 테사이아가 아스켈을 돌아보았다.

"네 생각은 이해하지만, 우린 괴물들과 싸우는 쪽이야. 특히 저기 이안은 괴물 전문가지."

"...."

"우리가 산맥에서 어떤 것들을 죽이고 돌아가는 길인지 네가 안다면 이런 오해는 없을 텐데."

입맛을 다신 테사이아가, 이내 어깨를 으쓱이며 몸을 돌렸다.

"뭐, 별수 없지. 잘 지내렴, 꼬마 사냥꾼아."

그녀는 몇 걸음 만에 아쉬움을 떨쳐낸 듯, 통통 튀는 발걸음으로 앞서가는 일행의 뒤를 쫓아갔다.

"...."

잠시 눈을 깜빡인 아스켈은, 이윽고 육포를 입에 물며 몸을 돌렸다.

긴장이 풀려서 다리가 후들댔지만,

어쨌거나 하려던 일은 해야 했다.

아스켈이 계곡 정상에 오른 건, 그로부터 한 시간쯤 지나서였다.

"...!"

드러난 계곡 반대편의 광경에, 아스켈의 입이 멍하니 벌어졌다.

끄트머리만 조금 남은 육포가 툭, 바닥에 떨어졌다.

반 토막 나거나 내장을 흩뿌린 채 죽어 있는 오거들. 뭔가가 폭발한 듯한 흔적과 흩어진 뼛조각들.

변이된 들짐승과 구울, 심지어 하피로 보이는 것들도 있었다.

수많은 시체들이 사방에 계곡 곳곳에 너저분하게 흩어져 있었다.

인근의 모든 마물들이 모여들었던 것 같은 모양새였다.

한쪽 구석, 다 타서 이제는 연기만 흐릿하게 뿜고 있는 모닥불의 흔적까지 눈에 담은 순간.

아스켈의 뇌리로 비로소 테사이아의 목소리가 스쳐 지나갔다.

어젯밤에 고생했다는. 그리고 괴물을 상대하는 전문가라는.

"…설마."

비로소 그 말이 전부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산맥에서 온, 마물 사냥꾼들.

거기까지 생각한 순간, 아스켈은 본능적으로 몸을 돌려 왔던 길을 되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

"하아… 하아…."

이안은 가쁜 숨을 내쉬는 북부인 소년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거의 산비탈을 구르듯이 그들을 쫓아 달려온 것이다.

나리, 나리, 하고 소리치면서.

"그래서, 무슨 볼일이냐?"

이안이 툭 내뱉었다.

아스칼이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

"예…?"

"왜 따라왔냐고. 소리까지 지르면서."

"아, 그러니까, 그게 말입니다…."

아스켈의 땀범벅인 얼굴에 옅은 당황이 스쳤다.

"…산 반대편을 봤습니다."

이윽고 일어선 아스켈이 말했다.

이안과 샬롯, 테사이아를 번갈아 본 그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아까 제 무례를 사과드리겠습니다. 제가 오해했습니다."

이안이 헛웃음을 지었다.

"사과나 하려고 온 거냐?"

"아뇨. 그게… 여러분들을 놓치면 안 된다는 생각에 일단 오긴 했는데. 막상 말하려니 망설여집니다. 저 혼자 결정하고 말할 문제가 아니라서요."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마음대로 해라. 할거면 하고, 말 거면 마는 거지."

그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묘한 미소를 지은 샬롯과 반가운 얼굴로 손을 까딱이는 테사이아가 그의 뒤를 따랐다.

아스켈이 재빨리 이안의 옆으로 따라왔다.

"사실, 부탁 드릴 게 있습니다."

"의뢰."

"네…?"

"부탁이 아니라 의뢰라고. 나는 용병이다. 자원봉사자가 아니라."

"자원봉사자가 뭐죠…? 아무튼, 의뢰할 일이 있긴 합니다만. 그 전에 먼저 마을로 모셔도 되겠습니까?"

"그야 당연- 악, 왜 때려?"

끼어들었다 샬롯의 손바닥에 입수를 얻어맞은 테사이아가 눈을 부라렸다.

이안이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우린 못 믿는다더니. 네 이름을 걸고 초대해야 하는 거 아니냐?"

"맞습니다. 같이 가 주신다면, 여러분들은 제 손님이 되시는 겁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마물을 전문적으로 사냥하시는 용병단이란 걸, 이제는 믿습니다."

"농담한 거다. 앞장 서서 길이나 안내해."

"아, 네."

아스켈이 재빨리 앞장섰다.

그래, 사냥을 부탁할 마물이 있나 보군.

이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뒤를 따랐다.

의뢰가 급하진 않았지만.

일행 모두 지쳤고, 여정을 이어가기 위한 재정비도 필요했으니까.

게다가 여기가 정확히 어디쯤인지도 알지 못했다. 그저 남쪽으로 내려가고 있고, 트라벨가까지는 아직도 꽤 멀리 떨어져 있으리라 추측할 뿐이었다.

의뢰를 몇 개 처리해 주다 보면 알아서 해결될 문제들이었다.

'적어도 오늘 밤은 따듯한 음식과 잠자리가 기다릴 테니까.'

솔직히 당장은, 그거면 충분했다.

***

북부인 소년 하나가 더해진 것뿐인데도, 일행의 분위기는 한결 밝아졌다.

여정이란 건 보통 자고 쉬고 싸우는 시간을 빼고는 걷기만 하는 일이었다. 시간을 보내기 위해 할 수 있는 건 대화를 나누는 것뿐.

하지만 일행은 이제 딱히 서로에게 궁금한 게 없었다.

그러던 차에 온 북부인 소년은, 충분히 흥미로운 대화 상대였다.

물론 밤을 따듯하고 안전하게 보낼 수 있으리란 사실도, 분위기를 한결 부드럽게 풀어주고 있었다.

간단한 자기소개와 잡담 후, 테사이아가 물었다.

"그래서, 네가 사는 마을은 어디 쯤에 있어?"

아스켈이 손가락을 들어 앞을 가리켰다.

"이제 두세 시간만 걸으면 나옵니다. 숲 한복판의 언덕 위에 있죠."

"그래? 잘 됐다. 난 당분간 마을은 구경도 못 할 줄 알았거든. 눈 덮인 동네는 죄다 버려진 마을만 있으니까."

안도하듯 내뱉은 테사이아가, 뭔가를 깨달은 듯 아스켈을 바라보았다.

"너희 마을도 그런 동네 아니야?"

"맞습니다. 작년까진 아니었지만."

"왜 남쪽으로 이주하지 않았지?"

샬롯이 물었다.

잠시 멈칫한 아스켈이, 이윽고 말했다.

"장벽 안쪽으로 이주하자는 얘기가 없진 않았습니다. 실제로 떠난 사람들도 있죠. 하지만 대부분은 남았습니다. 결정적으로, 마을의 대전사도 반대하는 쪽이었죠."

무덤덤하게 말하고 있었지만, 옅은 불만이 섞이는 것까지 감출 수는 없었다.

그걸 느낀 건 이안 뿐이었다.

다른 둘은 그저 내용에만 신경이 쏠려 있었다.

"대전사…? 아, 그래. 너희 마을은 북부의 전통을 따르는 거군. 야인 부족인 거야."

"그게 뭔데?"

테사이아가 되물었다.

샬롯이 태연하게 말했다.

"북부가 제국의 속국이 되기 전의 방식으로 사는 자들이지. 무슨 전설적인 전사를 숭상한다던데."

그래서 초대 어쩌고 했던 거군.

이안의 뇌리로 기억들이 스쳐 지나갔다. 폐쇄적인 북부 토박이들의 마을은 게임에서도 몇 개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그 어디에도 발을 들일 수 없었다.

그의 입장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한 놈만 건드려도 마을 전체가 달려와 두들겨 패는 통에, 애꿎은 게임 오버 화면만 봤었다.

야만 전사를 선택해야만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란 건, 공략글을 보고 나서야 알았다.

전용 퀘스트가 몇 개 있다던가.

마법사와는 관계없는 부분이라, 아는 건 그 정도가 전부였다.

아스켈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카르하를 숭상하죠. 다들 그분처럼 되고 싶어 하고요."

"그게 누군데 숭상해?"

"북부의 전설적인 용사입니다. 거인 왕국의 잔당들을 수없이 죽이고, 악룡과도 단신으로 맞선 대전사. 끝내 악룡을 패퇴시키고 북부에 자유를 가져온 초인입니다. 사후에는 신이 되었고요."

"용을 죽였단 말이야?"

"전설에 따르면 사흘 밤낮을 싸웠고, 악룡이 끝내 먼저 물러났다더군요. 그 후론 다시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요. 카르하에게 입은 상처가 너무 커서 결국은 죽었을 거라는데.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용의 유해는커녕 뼛조각 하나 본 적 없거든요."

아스켈이 어깨를 으쓱였다.

피식한 이안이 내뱉었다.

"제국에서 좋아하지는 않을 것 같은 얘기군. 인간이 신이 되다니."

"루 솔라 교단에서도 인정한 신이다. 좋아하진 않겠지만. 어쨌건 인간의 신이고 실존한 초인이니까."

이번에도 샬롯이 대꾸했다.

이안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잘 아는군. 이런 거엔 관심이 없는 줄 알았는데."

"올레그에게 들은 얘기다. 그 녀석도 북부 야인 출신이었지."

올레그…? 아, 그 말 많은 대머리.

이안은 마법 부메랑을 던지던 천칭 상단의 경호병을 떠올렸다.

"수인의 신과 달리 자기네 신은 교단의 인정을 받았다고 으스댔는데. 지금쯤 카르하에게 얻어터지고 있을지도 모르겠군."

"뛰어난 전사였다면, 그럴지도요."

"그 녀석은 오염된 마력에 취해서 날뛰다가 어린 여자애의 마법에 타죽었다. 그 전에 같은 북부인의 손목도 날렸고."

이안의 덤덤한 말에, 아스켈이 어깨를 까딱였다.

"그렇다면 카르하의 군단이 되진 못했겠군요."

"카르하의 군단?"

"뛰어난 전사는 사후에 카르하의 군단이 됩니다. 신들을 지키는 천상의 병사들이죠. 말단이긴 하지만, 신이기도 하고요."

되는대로 다 갖다 붙인 종교로군.

하긴, 그러니 게임의 야만 전사들이 틈만 나면 그 이름을 외쳐 댔을 터였다.

내심 코웃음 친 이안은, 진짜 묻고 싶었던 말을 꺼냈다.

"그럼 너희는 부족 생활을 하는 거냐? 자치령과의 교류는 없고?"

"아뇨. 저희도 자치령의 일원입니다. 관문도 자유롭게 오가고요. 부족이라는 말도, 적어도 저는 한 번도 써본 적 없습니다. 그저 사는 방식이 조금 다를 뿐이죠."

그럼 됐군.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가 궁금한 건 그뿐이었다.

폐쇄적인 야만인들이 오로지 자급자족하며 연명하는 부락이라면 들를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문명화가 되어있다면, 변방 왕국의 작은 마을들과 별반 다를 것도 없으리라.

"너 같은 꼬마가 혼자 사냥을 다닐 정도라면, 그렇게 상황이 좋진 않겠군."

샬롯이 덧붙였다. 아스켈이 마음에 든 것인지, 평소보다 말이 많았다.

"문제가 있긴 하지만, 사냥은 제가 자발적으로 하는 겁니다. 그리고 다시 말씀드리지만, 전 꼬마가 아니에요."

샬롯이 피식대는 사이, 이안이 덧붙였다.

"그래서, 네가 의뢰하고 싶은 게 마을의 문제와 관련이 있는 거냐?"

"…예. 그래서 말씀드리기 전에 고민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저 혼자의 문제가 아니니까요."

"그러던가. 나는 대가 없이는 일하지 않아. 하루만 묵고 떠날 거고. 그 전에 알아서 결정해라."

"네. 제 손님이시니까, 마을에 머무시는 동안에는 최선을 다해서 대접하겠습니다."

"너희 마을에서도, 제국 돈을 쓸 수 있나?"

"당연하죠."

"잘 됐군."

이안은 아공간에서 은화가 든 돈주머니를 꺼냈다.

대충 무게를 가늠한 그가, 주머니를 아스켈에게 던졌다.

아스켈이 그를 돌아보았다.

"손님한테 돈을 받진 않는데요."

"네가 주는 대로 먹고 땅바닥에서 자고 싶진 않거든. 그걸로 우리가 든든하게 먹을 걸 사고, 따듯한 잠자리도 준비해라. 남는 건 너 가지고."

"남는 건 돌려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잠시 머뭇거린 아스켈이 덧붙였다.

"가는 동안, 산맥에서 죽이셨다는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실 수 있을까요?"

"...!"

샬롯과 테사이아가 말해도 되냐는 눈빛을 보내는 가운데,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안 될 거 없지."

#092화

샬롯과 테사이아가 주고받듯 내뱉은 이야기를 들은 아스켈은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거짓말이라기엔 지나치게 구체적이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좀처럼 믿기 힘든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전부 사실이라면…. 여러분들은 카르하 못지않은 전사들이시란 얘기가 되겠군요."

"이안은 그럴지도 모르겠군."

"...."

아스켈은 믿기 힘들어하는 와중에도 굳이 의구심을 표하지 않았다.

일행도 믿음을 강요하지 않았다.

그저 대화를 나누는 것 자체에 의미를 둘 뿐, 아스켈의 믿음은 중요한 부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호오…."

마침내 마을의 전경이 드러났다.

관도에서 떨어진 숲 한복판.

야트막한 언덕 위에 빽빽하게 솟은 목책을 보며 이안이 내뱉었다.

"내 예상보다 훨씬 크군."

"우리 마을에는 카르하의 성상이 있습니다. 성상은 북부를 통틀어도 몇 개 되지 않죠. 그래서 자치령 도시 대신 여기로 이주한 사람들이 꽤 됩니다."

아스켈이 말했다.

자랑스러워하거나 으스대는 것과는 거리가 먼 말투였다.

이안은 아스켈도 자치령의 관문 너머로 이주하길 원하고 있으리라 어렵지 않게 짐작했다.

의외인 부분이었다.

보통 저 나이엔 대전사나 용사 따위의 단어를 동경하게 마련이니까.

'내가 상관할 부분은 아니지만.'

"잠시 기다려 주세요. 문을 열겠습니다."

아스켈이 마을 입구를 막은 대문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거의 요새나 다름없군."

목책 위로 드러난 활을 든 북부 전사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샬롯이 말했다.

이안이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부터 이러진 않았겠지. 증축을 거듭하면서 요새화된 걸 거다."

목책을 구성하는 나무는 낡은 것과 새것이 섞여 있었다. 언덕 인근의 나무는 죄다 밑동만 남아 있었다. 오히려 그래서 더 숲속의 요새처럼 보였다.

"속이 좀 울렁거려. 기분 나빠."

미간을 좁힌 테사이아가 읊조렸다.

이안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속이 울렁거린다고?"

"응. 네가 전에 들렀던 사원 근처만큼은 아니지만."

"흐음."

이안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성상이 있다더니. 눈 덮인 이곳에서, 그저 북부인의 기백으로만 버티고 있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샬롯이 콧방귀를 뀌었다.

"잘됐군. 조용히 있어라. 그 눈깔 관리나 잘하고. 네가 마족이란 걸 들키면 상황이 피곤해질 테니까."

"눈은 내 맘대로 되는 게 아닌데, 어떻게 관리하란 거야?"

"그건 내 알 바 아니지. 장님인 척이라도 하든가."

"그게 말이 되는 소리-"

"입들 닫아라. 문이 열린다."

이안이 말을 잘랐다.

샬롯과 테사이아가 앞을 바라보았다. 대문이 열리고 있었다.

이안이 걸음을 옮겼다.

목책 위에 선 초병들의 시선이 그들을 따라 움직였다.

두꺼운 대문 너머, 눈을 가늘게 뜬 북부인 전사의 모습이 드러났다.

'전형적인 야만 전사군.'

미구엘은 북부인이라고 다 우락부락한 근육질은 아니라고 했었지만.

지금 보이는 전사들은 대부분 곰 같은 덩치의 소유자였다.

다들 온갖 짐승의 털가죽을 두르고 있어서 더 그렇게 보였다.

이안은 그들의 시선을 아무렇지도 않게 흘리며 대문을 지나쳤다.

뒤에서 샬롯의 그르렁대는 나지막한 숨소리가 이어졌다.

보나 마나 문지기와 눈싸움을 하는 것이리라.

"집으로 모시겠습니다. 따라오시죠."

기다리던 아스켈이 몸을 돌렸다.

"저건 마족 같은데. 이런 시기에 저런 자들을 손님으로 받다니. 마을의 일에 끌어들이려는 건가."

"그래 보이는데. 부끄러운 줄을 모르는군. 하긴, 겁쟁이 아스켈이니 그러고도 남겠지."

"그 훌륭한 전사의 핏줄에서 저런 겁쟁이가 나오다니…."

뒤에서 나지막한 목소리들이 이어졌다.

아스켈은 들리지도 않는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걸음을 옮겼다.

"겁쟁이 아스켈이라고…?"

오히려 미간을 찌푸린 샬롯이 되물었다. 아스켈이 어깨를 으쓱였다.

"마을에 눈이 덮이기 시작하면서, 전 마을 사람 전부가 관문 너머로 이주해야 한다고 주장했었습니다. 제 또래에서 그렇게 말한 건 저뿐이죠. 그래서 붙은 별명입니다."

"나였다면 저자들의 목젖을 전부 뽑았을 거다. 다신 헛소리를 할 수 없도록."

"전 그럴 생각까진 안 드는군요. 겁쟁이라 그럴 지도요."

"그럴 리가."

피식한 이안이 말했다.

"나와 이 녀석들을 똑바로 보면서 할 말 다 하는 인간은 아주 드물다, 아스켈. 혼자일 땐 특히."

"동감이다. 넌 겁쟁이가 아니야."

샬롯이 거들었다.

덤덤하게 미소 지은 아스켈이 덧붙이는 말 없이 걸음을 옮겼다.

이안도 마을을 눈에 담았다.

진흙탕인 대로 좌우로 통나무로 지은 집들이 늘어서 있었다.

멋대로 지은 것처럼 보였지만, 묘한 규칙성이 있었다.

저마다 바쁘게 움직이는 주민들은, 그 와중에도 거리를 지나치는 일행에게 경계의 시선을 보냈다.

아무리 폐쇄적인 마을에 샬롯까지 있다 해도 과한 경계심이었다.

"남자는 별로 안 보이는군."

"바쁜 시간이니까요. 어젯밤 경계를 선 사람들은 자고 있고, 나머진 사냥과 수색을 나갔을 겁니다. 말씀드렸다시피, 문제에 직면해 있거든요."

어느새 마을 중심부였다.

광장 비슷한 용도로 보이는 공터와 그나마 거대한 건물이 있었다.

일종의 연회장인 모양이었다.

아스켈이 손을 들었다.

"저게 카르하 성상입니다."

"이미 보고 있었다. 상당히 오래된 석상이군."

석상은 광장 옆에 솟아 있었다.

땅으로 향하게 든 대검을 양손으로 움켜쥔 장발의 전사였다.

석상을 응시하는 이안의 육감이 절로 예민하게 돋아났다.

"실제 모습을 그대로 만들었다는데. 확인할 방법은 없습니다."

아스켈의 말에,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신성이 깃든 거로 봐선, 사실일 수도 있겠는데."

석상 내부에서 신성력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예전 루 솔라의 성상이나 화로의 사원의 성화만큼 선명하진 않았지만. 저 석상의 내부 어딘가에 존재하는 건 확실했다.

샬롯이 흥미롭다는 듯 성상을 응시하고 테사이아는 조용히 미간을 좁히는 가운데, 아스켈이 이안을 돌아보았다.

"신성을 느낄 수 있으신 겁니까?"

"그렇지. 너희는 못 느끼나?"

"아주 선명할 때만요. …하긴, 이안 님이라면 느끼실 수도 있겠군요. 제가 들은 대로면 엄청난 전사실 테니까요."

별소릴 다 하네.

피식한 이안이 성상을 턱짓했다.

"칼끝의 저건, 피 같은데."

석상이 양손으로 쥔 대검 끝부터 인근의 땅이 검붉게 물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예. 검에서 흘러나오고 있죠."

"기적인 거군."

루 솔라의 성상이 빛을 뿜던 것처럼, 카르하는 검에 피가 맺히는 모양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피라니. 루 솔라 교단이 카르하를 악신으로 규정하지 않은 게 더 기적 같았다.

"두어 달쯤 전부터 저렇게 되기 시작했습니다. 불길한 징조라더군요. 전사의 검이 피로 물들 거라고요."

"두어 달…?"

"그 후로 일어나는 사건들을 보면, 아예 틀린 말은 아닐 지도요."

"흐음…."

이안의 눈매가 설핏 꿈틀댔다.

그가 북부에 발을 들인 시기와 묘하게 겹쳤기 때문이다. 지하 궁전의 악마와 맹약을 맺은 시기와도 비슷했다.

'…자의식 과잉이군. 모든 일이 나 때문인 건 아닐 텐데.'

이안은 이내 낮게 실소했다.

그와 관련이 있을 가능성도 없는 건 아니지만, 성상이 불길한 징조를 내보일 이유는 그 외에도 차고도 넘쳤다.

웅웅, 허리춤의 단죄의 검이 문득 낮게 울었다.

'뭐 어쩌라고. 난 댁들한테 관심 없어.'

속으로 읊조리며, 이안은 아무렇지도 않게 성상을 지나쳤다.

카르하의 검 끝에 맺힌 붉은 빛이 조금 더 선명하게 일렁이는 것은, 보지 못한 채였다.

***

골목 끝. 아스켈은 목책 근처의 집 앞에서 멈췄다.

"여깁니다."

"혼자 살기엔 커 보이는데."

"영감님과 둘이 삽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제 손님이니 별일 없을 겁니다."

이안이 가볍게 미간을 좁혔다.

"그냥 여관으로 가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우리 마을엔 여관이랄 게 딱히 없습니다. 빈집을 빌릴 테니, 잠시만 계시면 됩니다. 말씀드릴 것도 있고요.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아스켈이 집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서 대화가 몇 마디 이어지더니, 이내 다시 문이 열렸다.

"들어오세요.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테사이아와 눈빛을 교환한 이안이, 그녀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비로소 집 안에 들어섰다.

짐승 가죽에서 나오는 누린내와 퀴퀴한 한기가 감도는 내부.

구석의 의자에 기대앉은 노인이 이안을 바라보았다.

비쩍 마른 백발. 왼쪽 눈이 움푹 파인 애꾸였다. 눈을 앗아간 것으로 보이는 굵은 흉터가 한쪽 이마에서 턱 끝까지 이어져 있었다.

일행을 본 노인의 미간이 미미하게 좁아졌다.

"흐음."

"제 손님이니 무례하게 굴지 마시죠."

아궁이처럼 생긴 난로에 불을 피우며, 아스켈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노인이 실내 한복판에 놓인 식탁을 향해 팔을 들었다.

노인은 왼손도 손목 아래까지밖에 없었다.

"앉으시오."

이안이 태연하게 의자에 앉았다. 샬롯과 테사이아도 자연스럽게 주위에 모여 앉았다.

낡은 의자에서 삐걱대는 소리가 났다.

불을 지핀 아스켈이 몸을 돌렸다.

"숙소를 빌리고, 먹을 것도 구해서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더 필요하신 건 없으세요?"

"혹시, 목욕도 할 수 있나?"

"목욕이요…? 할 수는 있습니다만."

아스켈이 뜻밖의 말을 들었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럼 목욕 준비를 해 주고, 집을 미리 따듯하게 덥혀 주면 좋겠군. 추운 건 지긋지긋해서."

"예.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아스켈이 밖으로 나갔다.

잠시 불편한 적막이 내려앉았다.

일행을 응시하던 노인이 이윽고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마물 사냥꾼이라고 들었소."

"용병이오. 마물들과 주로 싸우긴 하지만."

"이미 의뢰를 받으셨소?"

"아직. 마을에 무슨 문제가 일어난 건지도 들은 바 없소."

"흐음. 마을 전사들의 동의라도 구하려는 건가. 동의할 리 없거늘."

이안의 미간이 설핏 좁아졌다.

"여긴 용병에게 의뢰도 마음대로 할 수 없소?"

"그건 아니오. 하지만 당신들이 아무리 전문가라도 셋이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닐 것이오. 마을 전사들과 함께 해결해야 하지."

"글쎄…."

이안은 목책 근처의 전사들을 떠올렸다. 일행 셋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면, 그런 놈들 수십이 더 있더라도 달라질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전사들은 동의하지 않을 것이오. 외부의 도움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건 의미 없다 여길 테니까. 아스켈은 이미 눈 밖에 났으니, 외부인을 들인 보복만 당할지도 모르겠군."

노인이 나지막이 혀를 찼다.

"카르하께서 싸운 건 살아남기 위해서였건만. 다들 진짜 중요한 게 무엇인지 잊었소. 이러다 결국은 다 죽게 되겠지."

"그럼 그냥 떠나면 되지 않겠소?"

노인이 피식 웃음 지었다.

"난 살 자리가 아니라 죽을 자리를 찾아야 하는 늙은이요. 살아야 하는 건 젊은것들이지."

"호오…."

이런 대답을 들을 줄이야.

이안의 눈빛이 묘해지는 그때, 문이 열렸다.

바구니를 손에 든 아스칼이 안으로 들어섰다.

"기다리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식사부터 준비하겠습니다."

"준비는 다 끝냈냐?"

"예."

바구니를 옆에 놓은 아스켈이 이안에게 돈주머니를 내밀었다.

이안이 가볍게 미간을 좁혔다.

"너무 조금 줄었는데."

"일단은 제 손님들이시니까요. 아예 안 쓰고 싶었는데, 제가 가진 돈이 별로 없어서요."

"흐음."

턱을 긁적이던 이안이, 문득 노인을 돌아보았다.

"영감님."

"...?"

"요리, 할 줄 아시오?"

"그냥 불에 굽는 정도라면."

"그럼 부탁 좀 드리겠소."

노인이 군말 없이 일어섰다.

아스켈이 고개를 기울였다.

이안이 탁자의 빈자리를 턱짓했다.

"앉아라."

자리에 앉은 아스켈이 눈을 끔뻑였다. 이안이 툭 내뱉었다.

"마을의 문제라는 게, 뭐지?"

"어… 여러분이 아무리 강하시다 해도, 세 분이 해결하실 순 없을 겁니다. 마을 전사들이 도움이 있어야 해요. 그 부분을 해결하는 게 우선입니다."

저 노인네 말대로군.

내심 피식한 이안이, 태연하게 아스켈을 바라보았다.

"그건 네가 판단할 문제가 아니다. 가불가와 방법 모두, 내가 판단하고 결정할 부분이지."

"...!"

"네가 할 건 의뢰의 내용을 설명하고, 보수를 제시하는 것뿐이야. 의뢰인의 역할은 거기까지지."

한쪽 어깨를 까딱인 이안이 덧붙였다.

"난 질질 끄는 건 딱 질색이야. 이미 그렇게 됐으니, 지금이 아니면 더는 묻지 않을 거다."

잠시 머뭇거린 아스켈이, 이윽고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밤마다 마을을 포위하는 마물이 있습니다. 저희는 하얀 악마라고 부르죠."

"자세히."

"처음엔 하나였습니다. 하얗고 거대한, 처음 보는 종류의 하피였죠. 저도 한 번 실제로 봤는데, 하피라기보단 악마에 가까워 보였습니다. 눈도 없고, 하얀 왕관 같은 뿔만 돋아 있었죠. 마을 전사들이 달려 나가자 그대로 날아서 도망쳤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다시 왔겠군. 이번엔 부하들을 끌고."

아스켈이 눈을 끔뻑였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얘기나 계속해."

"처음엔 오거 한 마리였습니다. 그저 멀리서 지켜보기만 했죠. 그다음 날엔 하피가 몇 마리 더 왔고, 그다음 날엔 고블린도 있었습니다. 그제야 부하가 계속 는다는 걸 알고, 토벌하러 나갔죠."

"실패했겠군."

"네. 놈은 마물들만 보내고 도망쳐 버리더군요. 몇 번 반복됐습니다. 그러다 얼마 전부턴, 망자들을 끌고 왔습니다."

이안의 미간이 설핏 좁아졌다.

"망자…?"

"예. 걸어 다니는 해골들이요. 전사들이 나가면, 망자들만 보내고 도망치고요."

이안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변이된 하피 여왕. 게임에도 있던 네임드 몬스터였다.

본래 하피는 여왕을 중심으로 소규모 무리 생활을 하는 마수였다.

날아다닌다는 걸 제외하면 전투력 자체는 별 볼 일 없는 놈들.

현혹 효과를 가진 정신파는, 정신력이 조금만 높아도 통하지 않았다.

하지만 검은 벽의 광기에 물들어 변이된 녀석은, 하피 대신 다른 마물을 끌고 다녔다.

거기다 특유의 경계심도 여전해서, 처음부터 놈을 노리거나 주의를 분산시키지 않으면 금방 도망쳐 버렸다.

하지만 언데드를 끌고 다니는 건, 게임에선 없었던 패턴이었다.

'이것도 현실이 되면서 달라진 건가. 내가 거인 네임드들을 죄다 쳐 죽여서 생긴 변화인지도.'

"그 후로도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쪽은 희생자가 조금씩 늘고, 피로도 쌓이고 있죠. 그래서 며칠 전부턴 토벌을 멈추고 낮에 놈의 둥지를 수색하고 있습니다."

"소득이 없겠군. 마물은 쌓일 만큼 쌓였겠고."

"…네. 다행히 어느 순간부터 숫자가 더 늘지는 않고 있지만, 싸우면 피해가 적지 않을 겁니다. 게다가 이젠 망자들만 보이고, 놈의 모습은 보이지도 않는다더군요."

"하피다운 방식이군. 그래서…."

고개를 끄덕인 이안이 아스켈을 바라보았다.

"우리가 놈을 처리해 주면, 넌 대가로 뭘 줄 수 있지?"

"그건-"

"나한테 제국 금화가 몇 개 있소. 그걸 전부 드리지."

끼어든 노인이 말했다.

아스켈이 놀란 듯 그를 돌아보는 가운데, 이안의 눈앞으로 퀘스트 창이 떠올랐다.

하얀 악마. 힘 능력치를 하나 올려 주는 게 보상이었다.

…이거, 원래는 야만 전사 전용 퀘스트인 것 같은데.

생각하며, 이안이 미소 지었다.

"받아들이지. 계약은 성립됐다."

#093화

식사를 마친 일행이 집을 나섰다.

"다녀올게요."

마지막으로 밖으로 나온 아스켈이 이안을 돌아보았다.

묘한 눈빛. 이안이 턱을 까딱였다.

"왜."

"…아닙니다. 가시죠."

아스켈이 몸을 돌렸다.

'내가 어쩌려는 건지 궁금한 거군.'

이안은 간만의 포만감을 느끼며 그의 뒤를 따랐다.

투박하지만 나쁘지 않은 식사였다.

더불어, 딱히 궁금하지 않던 마을의 상황도 제법 자세히 알게 됐다.

흔한 얘기였다. 고향을 떠나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과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의 대립.

다만 여긴 후자 쪽이 압도적으로 우세할 뿐이었다.

새삼스럽지도 않은 일이었다.

이 세계만 그런 건 아니지만, 인간들의 판단 기준은 보통 합리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었으니까.

"호오."

광장을 지나던 샬롯이, 문득 마을 입구 쪽을 돌아보았다.

십여 명의 남자들이 마을로 들어서고 있었다. 건장한 성인부터, 아스켈 또래의 소년들까지 섞여 있었다.

"수색대가 돌아왔군요. 수색은 허탕인 모양입니다. 사냥만 했네요."

"누가 대전사지?"

샬롯이 물었다. 아스켈이 가장 덩치가 큰, 곰 가죽으로 만든 망토를 걸친 남자를 가리켰다.

"발레리입니다. 대전사 중에서 가장 젊죠. 강하기도 하고요. 카르하의 총애를 받는다고들 하더군요."

이안이 보기에도 힘깨나 쓸 것 같은 놈이었다.

발레리를 비롯한 몇몇이 일행 쪽을 바라본 건 그때였다.

그들이 사냥해 온 짐승들을 받으러 온 마을 주민 몇몇이 그들에게 뭔가를 속삭이고 있었다.

경계심과 비웃음이 뒤섞인 눈빛들.

"가서 말을 좀 해 볼까요."

아스켈이 물었다.

이안은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발레리의 시선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럴 필요 없다. 숙소로나 안내해."

"…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이안을 돌아본 아스켈이, 이내 다시 걸음을 옮겼다.

***

"오만한 눈빛을 가진 놈이더군."

샬롯이 나지막이 읊조렸다.

이안이 피식했다.

"네 예전 눈빛과 비슷한 것 같은데."

"그럴지도. 하긴, 패배를 경험한 적 없는 자가 가질 법한 눈이다."

"언젠간 알게 될 겁니다."

빈집의 문을 열면서 아스켈이 말했다.

"이왕이면 제 손으로 느끼게 해 주고 싶지만요. 들어오시죠."

"네가? 몇 년은 걸리겠군."

집으로 들어서며 샬롯이 말했다.

이안의 말대로 미리 난로를 켜 둔 실내는 따듯했다. 딱딱해 보이는 침대. 방 중앙에 놓인 둥글고 커다란 통은, 이안이 쓸 욕조였다.

"몇 년… 그보다는 빨랐으면 좋겠는데요. 마을이 겨울을 몇 번이나 버틸 수 있을지 알 수 없으니."

"글쎄. 두 번도 버티기 힘들 거다."

단죄의 검을 비롯한 무기들부터 벗어내기 시작하면서, 이안이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었다.

아스켈의 미간이 좁아졌다.

"겨우 두 번이요? 우리 마을의 전사들이 그렇게까지 약하지는 않습니다, 이안 님."

"강하고 약한 건 상대적인 거다."

흉갑의 연결 고리들을 풀면서 이안이 덧붙였다.

"살고 싶다면 너라도 마을을 떠나는 게 좋아. 너희 영감님은 네가 떠난다고 하면 오히려 좋아할 것 같은데."

이안은 저녁 식사를 떠올렸다.

과거 마족과의 전쟁에서 눈을 잃었다던 노인은, 일행의 다음 목적지를 넌지시 물었었다.

그리고 트라벨가라고 대답했을 때 이어진 잠깐의 망설임을, 이안은 놓치지 않았다.

"저 혼자 떠날 수는 없죠."

"뭐, 알아서 해라. 목욕부터 할 거니까, 준비해."

"…아, 네."

아스켈이 재빨리 움직였다.

눈을 가득 담은 커다란 냄비를 난로 위에 올린 그가 밖으로 나가, 어디서 또 눈을 퍼 왔다.

퍼온 눈은 욕조로 들어갔다.

'뭘 어떻게 할 건가 했는데. 이런 식이군.'

생각하며, 이안은 샬롯과 테사이아를 돌아보았다.

"난 목욕부터 할 거다."

"…그래서, 보지 말란 얘긴가?"

"그건 알아서들 하고. 너희도 씻을 건지 물은 거다."

"…?! 진심으로 물은 거냐?"

"어머. 음흉하네, 이안."

샬롯과 테사이아의 반응에 오히려 이안이 미간을 좁혔다.

뭐라는 거야, 이것들이.

"같이 들어가잔 얘긴 아니었다만."

"…그렇군. 오해했다."

"난 그것도 나쁘지 않다고 봐."

배시시 미소 짓는 테사이아를 무시한 채, 이안은 안에 받쳐 입은 방한복을 제외한 모든 장비를 벗어 던졌다.

몸이 날아갈 것처럼 가벼웠다.

그사이, 욕조에 끓는 물을 한 번 부은 아스켈이 다시 한번 냄비에 눈을 퍼 와 난로 위에 얹었다.

"한 번만 더 부으면 될 겁니다."

"난 오래 들어가 있을 거니까, 멈추라고 할 때까지 계속 준비해."

"…목욕을 정말 좋아하시는군요. 알겠습니다."

이안이 욕조를 응시하는 사이,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샬롯이 입을 열었다.

"북부의 전사들은 수인 전사들과는 추구한 바가 다른 것 같더군."

"저들도 너처럼 싸우다 죽길 바랄 것 같았나?"

"비슷한 부류라 생각했다. 하지만 저들의 투쟁은 생존과 자유를 위한 수단이더군. 목숨 건 전투 그 자체가 아니라."

눈을 한 삽 더 떠와 욕조에 부은 아스켈이 입을 열었다.

"죽기 위해 싸우거나 싸우기 위해 싸우는 자들을, 북부에선 광전사라 부릅니다."

"...."

샬롯의 표정이 묘해졌다.

테사이아가 씩 미소 지었다.

"그럼 넌 확실히 광전사네, 야옹아."

"…추구하는 가치가 다를 뿐이다. 멍청한 귀쟁아."

냄비의 끓는 물을 욕조에 부으면서, 아스켈이 읊조렸다.

"여기서 계속 버틴다면, 마을의 전사들도 사실상 광전사나 다름없어지겠죠. 언젠가는 끝이 올 걸, 다들 모르진 않을 테니까요."

"혹시 모르지. 그 모든 역경을 이겨내고, 카르하에 버금가는 초인이 탄생할지도."

이안의 말에, 아스켈이 그럴 리 없다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냄비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옷을 벗은 이안이 욕조에 들어갔다. 딱 좋은 온기. 손으로 몸을 몇 번 문지르자 땟국물이 거뭇하게 번졌다.

'비누만 있었어도….'

내심 탄식하던 그의 시선이 옆으로 돌아갔다.

침대에 엎드려 양팔로 턱을 괸 테사이아가 실실 미소 짓고 있었다.

샬롯은 아예 옆으로 돌아앉은 채였다.

"목덜미가 아주 탐스럽네, 이안."

왜 저렇게 보나 했더니.

"원래 먹지 못하는 사과가 더 붉어 보이는 법이지."

"재미있는 격언이네. 딱 너 같아."

"못 오를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란 말도 있지. 눈 돌려라."

돌아온 아스켈이 새로운 솥을 난로 위에 얹었다.

몸을 적당히 문지른 이안이 욕조 옆에 머리를 기댔다.

뼈 사이에 고여 있던 한기가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이안의 잘 잡힌 근육과 그 위에 새겨진 크고 작은 흉터들을 눈에 담던 아스켈이, 문득 내뱉었다.

"전 지금도 이해가 안 됩니다."

"뭐가."

이안이 눈도 뜨지 않은 채 물었다.

"그 하얀 악마요. 왜 굳이, 전사가 이렇게나 많은 마을을 목표로 삼은 건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야 할 이유가 있겠지."

"짐작 가는 게 있으십니까?"

"글쎄…."

이안은 게임을 떠올렸다.

게임에서 이게 야만 전사의 전용 퀘스트가 된 이유는 충분히 유추할 수 있었다.

변이된 하피 여왕은 강력한 장거리 공격이 가능하거나, 놈에게 은밀하게 접근할 수만 있으면 생각보다 어렵지 않은 네임드였다.

야만 전사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는 부분들이었다.

물론 변이된 하피 여왕은 반드시 잡을 필요는 없는 놈이었다.

게임의 난이도를 높이기 위해, 상성 상 좋지 않은 전투를 유도한 것이리라.

현실이 된 지금은, 적당한 다른 이유가 생겼겠지만.

"…하긴. 놈의 의도는 중요한 게 아니죠."

혼자 결론 내린 아스켈이 읊조렸다. 대꾸도 하지 않고 목욕을 만끽하는 이안을 가만히 바라보던 그가, 이윽고 덧붙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이라도 발레리에게 다녀오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제 결정이 마음에 들진 않더라도, 놈을 퇴치하는 게 우선이라는 걸 모르진 않을 겁니다."

"아니. 그럴 필요 없다."

"하지만…."

"전사들은 도움이 안 돼."

이어진 말에, 순간 굳어졌던 아스켈이 눈을 끔뻑였다.

"이안 님은 저희 마을의 전사들을 얕보시는군요."

"약해서가 아니야. 전사들이 튀어 나가면, 놈이 또 도망칠 거란 얘기지. 전사들은 하던 대로 목책 뒤에 있어 주는 게, 오히려 우리 일에는 도움이 될 거다."

"그럼, 정말 세 분이서 해결하신다고요?"

"정확히는 둘이다. 이번 일은, 나랑 샬롯이면 충분해."

아스켈이 다시 말문이 막힌 표정을 지었다. 그는 이안이 만들어 낸 광경을 봤지만, 동시에 그 하얀 괴물이 얼마나 끔찍한지도 잘 알았다.

"어떻게… 하시려고요?"

이안이 슬쩍 눈을 떴다. 그가 옆의 테사이아를 돌아보았다.

"저 녀석은 마력을 아주 잘 감지하지. 하피가 숨은 위치를 알려 줄 거다. 저 녀석의 역할은 그걸로 끝이지. 그리고…."

이안의 시선이 샬롯에게로 향했다.

"샬롯이 한쪽에서 언데드들과 싸울 거다. 정확히는 시간만 끌 거야. 혼자인 데다 강해 보이지 않으니, 하피는 도망치지 않고 부하들을 이용해서 저 녀석을 사냥하려 할 거다. 그리고 그사이에."

아스켈을 바라본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나는 조용히 놈에게 다가가서, 날개부터 찢어 놓을 거다. 그 뒤엔, 목을 벨 거고."

"...."

아주 단순한 계획이었다.

하지만 아스켈이 볼 때는 말이 되지 않는 부분이 더 많았다.

샬롯 혼자 수십의 언데드와 대적해야 하는 건 물론이고, 이안도 홀로 그 거대한 괴물을 상대해야 하니까.

그게 말처럼 간단했다면, 마을의 전사들이 이렇게 고전하진 않았으리라.

하지만 이안의 말투와 표정은 태연했고, 심지어 샬롯과 테사이아도 마찬가지였다.

"넌 목책 너머에서 다른 전사들과 함께 구경이나 해. 네가 마을을 위한 옳은 선택을 했다는 걸, 모두가 알게 될 테니까. 그리고 지금은…."

그런 아스켈을 바라보며 말한 이안이, 슬쩍 턱짓했다.

"뜨거운 물이나 한 번 더 부어라."

"…아, 네."

***

밤.

"...."

목책 너머를 응시하는 전사들의 눈빛이 침침하게 일렁였다.

목책 너머, 숲의 경계선을 따라 늘어선 수십의 언데드들이 그들을 빤히 응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매일 밤 이어지는 긴장은, 강인한 북부의 전사들조차 지치게 했다.

이런 끔찍한 밤이 영원히 계속될지도 모른다는. 그전에 저것들이 끝내 마을을 무너뜨릴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생각에 잠을 설치는 이들이 늘고 있었다.

"...."

마을의 대전사인 발레리도 마을 전체에 점점 동요가 번지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덤덤한 얼굴과 달리, 그는 내일 수색할 지역의 지리를 쉼 없이 되새기는 중이었다.

하루라도 빨리 그 하얀 악마의 둥지를 찾아, 이 불안을 잠재워야 했다. 끝내 이주하거나, 대전사의 지위를 내려놓고 싶지 않다면.

그래서였다.

"...!"

곁에 다가선 아스켈의 존재를 평소보다 늦게 깨달은 것은.

"잘 시간일 텐데."

아스켈을 돌아본 발레리가 싸늘하게 내뱉었다.

죽은 전 대전사의 아들인 그는, 발레리에겐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뛰어난 전사의 피를 물려받았으면서도, 전통을 버리려 하는 겁쟁이.

하지만 동시에 내칠 수는 없는 존재였다. 이 녀석 덕분에 자신의 존재가 더 두드러지니까.

아스켈이 덤덤하게 말했다.

"잠이 안 와서."

"그 외지인들은 뭐지? 다들 네가 마족을 데려왔다고 수군대던데."

"수인이야. 마족이 아니라. 그리고, 마물 사냥꾼들이지."

"뭐라고…?"

발레리의 인상이 구겨졌다.

"마을의 일에, 정말 외지인을 끌어들였단 말이냐?"

"그래."

담담한 대답에 발레리의 미간이 더 좁아졌다. 고작 셋이 뭘 할 수 있겠냐는 생각이 이어졌다.

오늘 밤이 지나면, 아스켈은 겁쟁이 앞에 비겁자라는 수식어까지 더해질지도 몰랐다.

아스켈이 덧붙인 건 그때였다.

"끼어들지 말라더라."

"...?"

"마을의 전사들은 한 명도 나오지 말래. 우리가 나가면, 오히려 일을 그르칠 거라고."

"…정말 그렇게 말했다고?"

"그래."

믿는 구석이 있기라도 한 건가.

발레리의 미간이 좁아질 찰나.

"어…?! 저기…!"

측면의 목책에서 탄성이 터졌다.

동시에 숲의 경계에 서 있던 언데드들의 고개가 일제히 옆으로 돌아갔다.

서로를 돌아본 발레리와 아스켈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몸을 돌렸다.

빠각! 콰직!

"...!"

그들의 눈에 들어온 것은, 홀로 언데드들과 싸우고 있는 수인의 모습이었다.

거대한 전투 도끼를 들고, 언데드들을 박살 내고 있었다.

"...."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발레리의 눈매가, 이윽고 가늘어졌다.

용맹하긴 했지만 기대만큼 강하지는 않아 보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언데드들이 사방에서 몰려들고 있었다.

"죽으려고 작정했군."

"저 도끼는 탐나는데. 저 마족이 죽으면, 누가 가질지 내기하자."

어느새 주위로 모여든 전사들이 수군댔다. 모든 언데드들이 몰려가고 있어서, 다른 목책은 지킬 필요가 없었다.

빡-! 빠각!

용맹하게 저항하고 있긴 하지만, 수인은 점점 수세에 몰리고 있었다. 언데드의 숫자가 너무 많았다. 포위당하기 전에 간신히 한쪽을 뚫은 그녀가, 언데드들에게 쫓기기 시작했다.

완전히 궁지에 몰린 듯한 모습이었다.

"마족이란 거, 생각보다 별거 아닌 것 같은데."

"우리가 들은 얘기가 과장된 걸지도 모르겠어."

전사들이 하나둘씩 비웃었다.

외부인인 그녀를 도와주려는 자는 한 명도 없었다.

마을의 일에 멋대로 끼어들었으니, 그 책임을 지는 것도 본인의 몫이었다.

"...."

수인을 지켜보던 발레리의 시선이, 문득 아스켈에게로 돌아갔다.

무표정을 가장하고 있지만, 아랫입술을 꾹 깨문 채였다.

초조한 것이리라.

발레리는 지금이 바로, 저 마족을 구하러 가야 할 때임을 깨달았다.

그럼 아스켈의 결정은 더 어리석어 보일 것이고 자신의 관대함은 더 도드라지리라.

"…안 되겠군."

결정을 내린 그가 나지막이 입을 연 그때였다.

"키- 에에엑-!"

숲 저 너머에서, 생전 처음 듣는 비명이 메아리치듯 울려 퍼졌다.

듣는 것만으로도 영혼이 얼어붙는 듯한 소리.

낄낄대던 전사들의 목소리가 뚝 끊어졌다.

"...!"

"...?!"

다들 목소리가 들려 온 방향을 말없이 돌아보는 가운데.

콰지직-! 콰득-!

목책 저 아래에서 들려 오는 소리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저런…?"

"미쳤군…."

수인 쪽을 돌아본 전사 몇몇이 탄식을 흘렸다.

궁지에 몰려 도망 다니던 수인이, 오히려 놈들의 한복판으로 파고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살 행위처럼 보였지만.

콰지지직-! 빠각-!

언데드들은 그저 일방적으로 박살나고 터져 나갈 뿐이었다.

수인의 공세를 뚫긴 커녕, 더는 그녀의 근처로 다가가지도 못했다.

마치 비명이 울려 퍼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은, 극적인 변화였다.

"기다렸다고…?"

발레리의 미간이 천천히 구겨졌다.

정말 저 많은 언데드를 단신으로 상대하면서, 전력을 감추는 것이 가능하단 말인가?

발레리가 저도 모르게 아스켈을 내려다본 그때.

"키엑-! 키에에에엑-!"

저 멀리에서 또다시 비명이 울려 퍼졌다.

이번엔 비명이 전부가 아니었다.

푸확-!

어두컴컴한 숲을 뚫고, 새하얗고 거대한 마물이 솟구쳐 오른 것이다.

너덜너덜한 날개를 마구 홰치며 솟구치던 놈이, 이윽고 힘에 부친 듯 날갯짓을 멈췄다.

"...!"

솟구치던 괴물이 허공에 잠시 부유하듯 멈췄다. 놈의 등에 올라탄 새카만 형체가 비로소 또렷해졌다.

흑발의 외지인이었다.

머리 위로 검을 치켜든.

밤하늘을 등진 검날이 달빛을 반사해 일렁였고.

콰직-!

다음 순간 번뜩이는 궤적을 그리며 괴물의 목덜미로 떨어졌다.

"키에에에엑-!"

정신을 뒤흔드는 비명을 밤하늘에 흩뿌리며, 괴물이 다시 숲의 어둠 속으로 추락했다.

#094화

비명이 마을 구석구석까지 메아리쳤다. 잠에서 깬 주민들이 하나둘씩 집 밖으로 나왔다. 저마다 무기로 쓸 만한 것들을 하나씩 움켜쥔 채였다.

"...."

외눈 외팔의 노인, 우르드만이 맨손으로 집을 나섰다.

"그 하얀 악마의 비명인가…?"

"왜 전사들이 다 저기 모여 있지?"

마을 사람들이 술렁였다.

대화는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키엑-! 키에엑-!"

또다시 비명이 메아리쳤기 때문이다. 듣는 것만으로도 순간적으로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고 현기증이 이는, 끔찍한 비명.

주민들이 숨을 헐떡이는 가운데, 우르드는 비로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확실히 알게 됐다.

마물 사냥꾼들이, 정말 그 하얀 악마와 싸우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바로 시작할 줄이야."

읊조리며, 우르드는 광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키아아악-! 키엑-!"

높고 낮은 비명이 이어졌다.

목책 위에 선 병사들의 모습이 노인의 외눈에 담겼다.

"정말 고작 셋이서…."

우르드의 탄식이 순간 잦아들었다.

광장 한쪽에 솟은 석상으로 시선을 돌린 노인이, 이윽고 탄식했다.

"북부의 초인이시여…."

성상의 대검에서 붉은 신성이 번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검 끝에 맺힌 피가 증발하면서 신성력으로 화하고 있었다.

"오… 오오…."

"카르하의 화신이 마을을 구원하고 계신 건가…?"

성상을 본 마을 사람들이 탄식을 흘렸다. 몇몇은 성상을 향해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카르하는 기도 따위에 응답하는 신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키에에엑-!"

단말마와 같은 비명이 터져 나온 건 그때였다.

가장 먼저 조용해진 건 방벽 위의 병사들이었다.

그들의 적막은 마을로도 전염되어, 술렁이던 주민들의 입을 하나씩 닫게 만들었다.

"...."

카르하의 성상에서 번져 나오는 붉은 빛만이 소리 없이 주위를 밝히는 가운데.

"…오, 온다."

"맙소사… 정말 저걸 혼자…?"

"둘? 단 둘뿐이라고…?"

이윽고, 방벽 위에서 탄식과 경악이 번지기 시작했다.

전사들이 하나둘씩 주춤주춤 정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같은 곳을 바라보는 그들의 시선이 조금씩 아래로 굽어졌다.

"문! 당장 문을 열어요!"

이어진 외침은 우르드에게 아주 익숙한 목소리였다. 아스켈.

비로소 성상에서 시선을 뗀 우르드는, 목책의 난간을 내달리듯 걷고 있는 아스켈을 발견했다.

언제나 덤덤한 손자의 얼굴은 지금, 경악과 환희로 뒤섞여 있었다.

반대로 그 뒤를 따르는 발레리의 얼굴은 밀랍을 바른 것처럼 무표정했다.

허둥지둥 목책 아래로 달려 내려온 전사 몇이, 마을의 대문을 막고 있던 빗장을 풀었다.

끼이이이-

대문이 느릿느릿 열렸다.

그 너머에서 모습을 드러낸 검은 머리의 이방인이, 이윽고 느긋한 발걸음으로 마을에 들어섰다.

검은 털의 마족이 뒤따라 들어왔지만, 아무도 그녀에게 꺼림칙한 시선을 보내지 않았다.

"카르하시여…."

"정말 저 악마를 죽이다니…!"

다들 검은 머리 이방인이 품에 안은 거대한 머리에, 시선을 완전히 빼앗겼기 때문이다.

그건 일반적으로 알려진 하피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털 한 올 없는 새하얀 머리는, 비늘이 돋은 것처럼 윤기가 돌았다.

눈이 있어야 할 자리는 밋밋하게 비어있고, 깨진 유리 조각이 박힌 것 같은 아가리만이 그 아래 거대하게 벌어져 있었다. 축 늘어진 두꺼운 혀는 뱀처럼 두 갈래. 머리 앞뒤로 각각 두 개씩 돋은 뿔은 서로에게 휘어 있어, 마치 왕관을 쓴 것 같은 형태였다.

"하얀 악마…."

오랫동안 그들을 두려움에 떨게 한 그 괴물이, 목이 잘린 채 마을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남자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지저분하게 잘린 목의 단면에서 광택이 도는 새카만 피가 방울져 떨어졌다.

그리고 자신을 이안 호프라고 소개했던 흑발의 남자는, 그것을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이미 그의 얼굴과 몸은 똑같은 검은 체액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를 멍하니 바라보던 우르드의 시선이, 문득 다시 옆으로 돌아갔다.

성상의 빛이 더 짙어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

착각이 아니었다.

이안이 가까워질수록, 카르하의 대검에서 흘러나오는 신성력도 더 짙어지고 있었다.

"카르하께서, 어째서 저런 이방인에게…?"

"혹시 저자도 북부 출신인 건가."

그 모습을 목격한 주민 몇몇이 속삭였다.

'설마, 정말 북부인인가…?'

같은 생각을 하며, 우르드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이안을 바라보았다.

검은 머리에 검은 눈.

적당히 흰 피부.

북부인 치곤 털이 없고 골격도 얇아 보였지만. 혼혈이라 생각하면 또 이상한 부분은 아니었다.

이윽고 고요한 마을을 가로지른 이안이 그의 앞까지 도착했다.

"하… 오늘 씻었는데."

우르드에게만 들릴 만큼 작게 읊조린 이안이, 그의 발치에 손에 든 머리를 내던졌다.

거대한 머리가 바닥을 굴렀다.

덤덤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의뢰는 완수되었소. 이의 있소?"

그 무심한 검은 눈을 잠시 바라본 우르드가, 이윽고 대답했다.

"없소. 귀하는 의뢰를 완수하셨소."

목소리가 절로 경건해졌다.

"보수는 내일 받으러 가겠소."

고개를 끄덕이며 말 한 이안이 몸을 돌렸다.

그가 가까워지자 카르하의 성상이 더 밝은 빛을 흩뿌렸다.

"...?"

미간을 설핏 찌푸린 이안이 걸음을 멈추고 성상을 바라보았다.

덕분에 이제야 성상의 상태를 알게 된 몇몇 주민들과 전사들의 얼굴에도 경악이 번졌다.

그가 멈춰선 건 아주 잠깐이었다.

낮게 코웃음 친 그는, 그대로 걸음을 옮겨 자신이 묵고 있던 집으로 들어가 버렸다.

끼익, 철컹.

낡은 문의 경첩 소리가, 마을의 악몽 같은 밤이 끝났음을 알렸다.

닫힌 문과 성상. 이윽고 자신의 발 앞에 놓인 마물의 머리를 내려다본 우르드의 입에서, 나지막한 탄식이 흘러나왔다.

"어쩌면, 저자가 정말…?"

***

"토할 것 같아."

침대에 드러누운 테사이아가 신음했다.

그녀는 어제 새벽부터 쭉 이런 상태였다.

"부정한 존재라는 걸 온몸으로 드러내는군. 한 것도 없는 주제에."

"없긴 왜 없어. 내가 그 마물 위치도 찾아 줬는데."

"아주 대단한 일을 하셨군, 귀쟁아."

"조금만 견뎌라. 곧 마을을 떠날 거니까."

대충 닦아서 널어 뒀던 장비들을 몸에 걸치며, 이안이 말했다.

"카르하는 왜 갑자기 지랄이래? 이안 너한테 반하기라도 한 거야?"

테사이아가 신성 모독적인 발언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었다.

물론, 이안은 그 부분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성상은 그저 신성을 뿜어대기만 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난생처음 보는 퀘스트까지 선사했다.

"뭐, 처음 있는 일도 아니다. 전에는 루 솔라의 성상도 그렇게 빛났었지."

설마 야만 전사들의 신도 나한테 관심을 보낼 줄은 몰랐지만.

이안은 어깨를 으쓱이며 뒷말을 삼켰다.

게임의 야만 전사들은, 마법사 혐오에 있어선 그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는 족속들이었기 때문이다.

"천상의 모든 신들이 널 탐내나 보군. 이안."

샬롯이 감탄하듯 말했다. 실제로 그녀는 자신의 일처럼 자랑스러워하고 있었다.

이안을 바라보는 눈동자에는 어느새, 그저 존경과 애정만이 가득했다.

이안은 심드렁하게 코웃음 쳤다.

"뭐, 마음대로들 하라지. 힘을 빌려 준다면 기꺼이 쓸 거니까."

절대 그 누구도 섬기진 않겠지만.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에게 이 세계의 신들은 이용해야 할 대상일 뿐, 결코 숭배의 대상이 될 순 없었다.

감정적인 부분을 떠나, 실리적으로도 그랬다.

제약은 지금도 충분히 많았으니까.

게다가 신의 낙인이 혼돈의 파편과 어떤 상호 작용을 일으킬지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어땠어? 그 하피 여왕."

테사이아가 덧붙였다.

힘들다더니 주둥이는 살았군.

생각하며, 이안이 대답했다.

"별거 아니었다."

거인 망령들이 워낙 강해서인지, 변이된 하피 여왕과의 전투는 그리 위험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물론 이건 상성의 문제이기도 했다.

변이된 하피 여왕은 강력한 현혹 정신파와, 상태 이상은 물론 실질적인 대미지도 주는 죽음의 비명을 주 무기로 사용했다.

둘 다 이안의 정신력과 저항력을 뚫을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차라리 날카로운 발톱과 이빨이 더 위협적인 수준이었다.

게다가 이안은 날개의 피막을 먼저 공격해 비행 능력을 떨어뜨려야 한다는 공략법도 미리 알고 있었고, 놈의 방어력은 바람 칼날로도 뚫을 수 있는 수준이었다.

공격 마법을 더 활용했다면, 몸에 체액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잡아낼 수 있었으리라.

그러지 않은 건, 북부의 야인들에게 마법사라는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아서일 뿐이었다.

'확실히, 처음보단 훨씬 강해지긴 한 것 같은데.'

이안은 주먹을 쥐락펴락하며 생각했다.

물론 망국의 군단장처럼 강한 적을 상대하다, 비교적 상대하기 쉬운 네임드와의 전투여서 더 크게 와닿는 것일지도 몰랐지만.

어쨌건 능력치 자체만 놓고 봐도, 처음보다는 상당히 높아져 있었다.

시나리오가 초기화되면서 퀘스트 보상이 중첩된 효과가 지금에 이르러서야 조금씩 드러나고 있었다.

'사실 마법사로서의 성장이라고 말하긴 어렵지만….'

어쨌든 계속 강해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의미는 충분했다.

채비를 끝낸 이안이 걸음을 옮겼다.

"어디 가, 이안?"

"보수 받으러 간다."

테사이아의 물음에 심드렁하게 답하며, 이안이 문을 열었다.

그의 미간이 이내 좁아졌다.

아스켈이 문 앞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언제부터 이러고 있었냐?"

"두 시간 정도 된 것 같은데요."

대답은 덤덤했지만, 이안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경외가 담겨 있었다.

이제는 조금은 익숙해졌지만, 여전히 거북한 감정이었다.

그의 행동에는 그 어떤 숭고한 뜻이나 의지도 담겨 있지 않았으니까.

차라리 그를 두려워하거나 증오하는 이들이 상대하기 편했다.

"할 말이 있어서 기다린 거냐?"

"예. 혹시 며칠 더 마을에 머물러 주실 수 있는지 여쭤보려고요."

"왜?"

"내일 낮에 연회를 열기로 했습니다. 여러분이 그 하얀 악마를 토벌해 주셨으니, 꼭 참석해 주셨으면 좋겠는데요."

결속을 다지려는 거군.

현실 도피일 뿐일 텐데, 하고 생각하며 이안이 대꾸했다.

"너희 대전사가 싫어할 텐데."

"이안 님을 꼭 모시고 싶다고 한 게, 바로 발레리입니다만…."

"그래…?"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생각해 보지. 난 이제 너희 집으로 갈 거다."

"보수를 받으러 가시는 거군요. 저희 영감님도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고개를 끄덕인 이안이, 뒤따라 나온 샬롯 쪽을 턱짓했다.

"혼자 가도 되니까, 넌 샬롯을 안내해라. 여정에 필요한 것들을 살 거다."

아스켈이 고개를 끄덕이는 가운데, 샬롯이 그를 지나치며 말했다.

"마차는 구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이안."

"짐 마차라도 상관없어. 지붕을 달아 줄 수 있는지 확인하고, 없으면 그냥 없는 대로 사라. 그것도 없으면, 그냥 말만 있어도 충분하고."

"알았다."

이안은 곧바로 걸음을 옮겼다.

지나치던 주민들이 그를 보고는 하나둘씩 고개를 숙였다.

의뢰를 해결하고 사람들의 태도가 변하는 건 흔히 겪은 일이었지만, 이번에는 그 정도가 심했다.

'그렇다고 기대하진 마. 댁의 사도가 될 생각은 없으니까.'

어젯밤의 퀘스트를 떠올리며 카르하의 성상을 일별한 이안은, 이내 낮게 콧방귀를 뀌고는 광장을 지나쳤다.

***

"오셨소."

노인, 우르드가 의자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표정이나 말투의 변화가 크지는 않았지만, 그 역시 훨씬 공손해진 태도였다.

'어제 같은 일을 한두 번만 더 하면, 카르하가 아니라 날 숭배할지도 모르겠군.'

이안이 식탁에 앉자, 오르드가 곧바로 작은 주머니를 앞에 놓았다.

"약속한 보수요."

이안은 돈주머니를 쥐어 들었다.

금화 두 개. 다 죽어가는 노인의 쌈짓돈이라기엔 큰 액수였다. 어쩌면 과거 전쟁에 참전하고 받은 돈인지도 몰랐다.

"훌륭하군."

탁, 주머니를 탁자 위에 놓은 이안이 우르드를 바라보았다.

"머리는 어떻게 하셨소?"

"연회장에 가져다 뒀소. 내일 연회에서 모두가 볼 수 있도록."

"보복을 걱정하시더니."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소. 몇몇 전사들이 그러더군. 카르하께서 화신들을 보내 마을을 구하셨다고."

이안이 코웃음을 쳤다.

"난 카르하를 섬기지 않소. 그의 사도가 될 생각도 없고."

"오해가 있으시군. 카르하는 따로 대행자를 두지 않소."

"두지 않는다고…? 그럼 카르하는 사제도 없고 사도도 없단 말이오?"

이안이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우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카르하는 자신의 힘으로 신이 된 초인이기 때문이오. 그렇기에 다른 그 무엇도 필요치 않으시지."

"…하지만 성상도 있고, 전사들에게 축복도 내려 주지 않던가?"

"그건 그저 자신과 같은 길을 걷는 전사들을 어여삐 여겨서지. 다른 이유 따윈 없소. 전사들이 카르하께 때때로 공물을 바치는 것도, 그저 공적을 자랑하려는 의도일 뿐이오."

이안의 고개가 슬쩍 기울어졌다.

'사도 퀘스트가 아니면, 이건 무슨 의미인 거지.'

퀘스트창을 응시하던 이안이, 이윽고 다시 우르드를 바라보았다.

이 노인이라면 답을 알고 있으리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묻고 싶은 게 있소."

"잘 됐군. 나도 귀하께 여쭐 게 있던 참인데. 먼저 말씀하시오."

"북부의 대전사라는 게, 정확히 무슨 의미요?"

"...!"

느긋하게 미소짓던 우르드의 눈이, 일순간 커졌다.

#095화

"그 말을 어디서 들으셨소? 누군가 귀하를 그렇게 부르던가?"

"뭐… 비슷하다고 할 수 있지."

이안이 덤덤하게 대답했다.

정확히는 어젯밤, 카르하의 성상 앞을 지난 순간 생성된 퀘스트의 이름이었다.

북부의 대전사. 카르하의 앞에 의지를 내보이라는, 게임이었다면 클릭 한 번으로 해결됐을 목표가 설명의 전부였다.

보상은 투쟁의 축복.

심지어 선택 퀘스트조차 아니었다. 야만 전사의 전용 퀘스트라 그럴 터였다. 야만 전사는 이걸 거절할 이유가 없을 테니까.

이안은 이것이 카르하의 사도가 되는 퀘스트이리라 짐작했었다.

하지만 카르하가 사도를 두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된 지금은, 조금 더 알아볼 가치가 생긴 것이다.

"전사는 누구나 때가 되면, 카르하께 자신의 영혼을 내보이는 의식을 치르오. 일종의 성인식이지."

"정말 그가 영혼을 들여다보나?"

"전부 그러시는지는 모르겠소. 하지만 가끔 관심을 보이시는 경우는 있지. 그런 전사들은 보통 마을의 대전사로 임명된다오. 카르하께서 인정하셨다 여기는 거지."

물을 한 모금 마신 우르드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진정 위대한 영혼을 가진 전사에게는, 카르하께서 직접 살피시고 축복을 내리시지. 그런 전사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대전사요."

"결국은 카르하를 섬겨야 한단 얘기 같은데."

"그렇지 않소. 카르하께선 설사 대전사의 목표가 천상에 올라 자신의 머리에 도끼를 내리찍는 것이라 해도 상관하지 않으시니까."

"그런 자가 정말 있었나?"

"있었소."

우르드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스쳤다.

"전쟁의 시대에 탄생한 대전사가 그랬지. 죽인 마족의 머리를 성상 앞에 놓으며, 당신의 머리에 도끼를 찍어 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며 웃던 자였소. 그는 카르하를 섬기지 않았소. 자신이 넘어서야 할 경쟁자로 보았을 뿐. 그런데도 때때로 축복을 내려주셨었지."

"호오…."

"대전사는 상징적인 단어일 뿐이오. 책임지거나 얽매여야 할 것도 없소. 운명을 거스르고 자유를 위해 투쟁한 카르하가, 누군가를 억압하거나 구속할 리가 있겠소?"

…하긴, 그런 설정이긴 했지.

고개를 주억거리는 이안을 향해, 우르드가 덤덤하게 덧붙였다.

"카르하께선 그저 지켜보실 따름이오. 언젠가 자신처럼 신격에 다다를 또 다른 초인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면서."

"내킬 때 축복이나 던져 주면서 말이지. 제 멋대로인 작자로군."

"정확히 보셨소."

우르드의 대답에 이안이 결국 풀썩 웃음을 흘렸다.

카르하가 사제나 사도 따위를 두지 않는 건, 단지 필요 없기 때문만은 아닐지도 몰랐다.

뜻을 대행하고 교리를 설파하는 대신 축복과 신성을 내리는, 그런 관계 자체에 얽매이고 싶지 않아서일지도.

'그럼 그 놈의 축복은, 게임에선 확률적으로 작동한 건가? 그럼 정말 다른 리스크나 제약이 없을 수도 있겠는데.'

마음대로 사용할 수 없는 확률형 옵션이나 스킬은, 그 자체로 이미 제약의 역할을 했다.

지하 궁전에서 손에 넣은 고대의 운철 단검에 붙은 장비 파괴 확률 옵션이, 아무런 소모 값이 없는 것처럼.

"그래서, 그 대전사는 승천해 신이 되었소?"

이윽고 이안이 물었다.

우르드가 문득, 자신의 텅 빈 왼손을 내려다보았다.

과거를 헤집는 듯한 시선.

"그건 모르겠소. 그는 결국 어떤 마족과의 전투에서 죽었으니까. 그것이 그의 정해진 운명이었는지, 운명을 거부하고 삶을 개척하다 맞이하게 된 최후인지는 알 길이 없소. 본인과 카르하만이 알겠지."

우르드가 가볍게 미소 지었다.

"적어도 카르하의 머리에 도끼를 찍지는 못한 것 같소. 아직 카르하께서 건재하신 것을 보면."

'…대전사가 된다고 운명이 정해진다는 의미는 아니란 거군.'

그저 가능성을 본 것뿐이리라.

그것만으로도 이안은 묘한 감흥에 휩싸였다.

카르하가 자신에게서 정해진 운명을 거스를 가능성을 보았다는 뜻이나 다름없었으니까.

"어디서 들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내가 보기에도 허무맹랑한 말은 아닌 것 같소."

다시 이안을 눈에 담으며, 우르드가 말했다.

"카르하는 마을의 그 누구에게도 귀하에게 보인 것 같은 관심을 두신 적이 없었소. 마을의 대전사인 꼬마 놈은 물론이고, 죽은 내 아들놈과 내게도. 귀하가 전사의 의식을 치른다면 카르하가 인정한 대전사가 탄생하게 될지도 모르지."

"나 같은 외부인도 의식을 치를 수 있나? 심지어 난 북부인도 아닌데."

"의식은 그저, 같은 인간들에게 보이기 위한 절차일 뿐이오. 카르하께선 그딴 건 신경도 쓰지 않으시겠지. 게다가…."

우르드가 이안의 얼굴을 가만히 훑었다.

"검은 눈과 검은 머리를 가진 혈통은 그리 흔하지 않소. 그리고 그중 하나가 북부에 있지. 귀하의 몸에 북부인의 피가 섞여 있다 해도 이상하지 않단 얘기요. 사실, 나도 그래서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지."

이건 그냥 랜덤하게 배합된 기본 외형을 선택한 결과일 뿐이야.

속으로만 읊조리며,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뭐, 덕분에 호기심을 해결했군. 고맙소, 영감님."

"별말씀을. 나도 이런 얘긴 오랜만이오. 어린 놈들은 이제, 이런 건 궁금해하지도 않거든."

"그럼, 이제 영감님이 물으시려는 것도 들어봅시다."

이안이 느긋하게 물었다.

입가에 옅게 맺혀 있던 우르드의 미소가 흩어졌다.

그건 아주 잠깐이었다. 평소와 같은 덤덤한 얼굴로 되돌아온 그가, 이안을 마주 보았다.

"우리 마을이, 정말 고난을 극복한 것이 맞소?"

"...."

이안의 눈매가 꿈틀댔다.

우르드가 덧붙였다.

"솔직한 대답을 원할 뿐이오."

"당장은 넘어섰소. 하지만…."

이윽고 입을 연 이안이, 우르드의 외눈을 마주 보았다.

"언제든 다시 시작될 수 있겠지. 이번보다 더할지 덜할지는 알 수 없겠소만."

"그렇군…."

우르드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언제 즐거웠냐는 듯 칙칙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잠시 허공을 응시하던 노인이, 이윽고 다시 이안을 마주 보았다.

"귀하께 의뢰를 하나 더 하고 싶소만."

"일단 들어는 보겠소."

"마을을 떠나실 때, 아스켈을 함께 데려가 주실 수 있겠소?"

***

이안은 마을 인근의 숲을 몇 시간이나 뒤져, 간신히 청설모 두 마리를 붙잡아 돌아왔다.

사냥감이 씨가 말랐다던 에스켈의 말은 허언이 아니었다.

아마도 매일 밤 몰려오는 마물 무리에 겁을 집어먹고, 죄다 도망쳐 버린 것이리라.

"왜 이렇게 늦나 했네."

테사이아가 이안을 반겼다.

그녀의 눈동자가 어느새, 조금씩 붉게 물들고 있었다.

"샬롯은?"

"잠깐 들어왔다가 다시 나갔어."

"나갔다고?"

"지랑 비슷한 것들을 만나서 신난 모양이던데. 무슨 도끼 어쩌고 하는 별명도 붙었다던데. 촌스럽긴."

하긴, 대우가 달라진 건 샬롯도 마찬가지였다. 다들 그녀를 대단한 전사로 대우했다. 홀로 수십의 언데드를 도륙하는 것을, 마을의 모든 전사들이 본 덕분이었다.

보편적인 도시였다면 그녀를 더 두려워하거나 꺼렸겠지만.

문명화되었어도, 야인 전사의 본질은 변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좀 살 만한가 보군."

"낮보다는. 그거, 내 거야?"

"그래."

이안은 꼬리를 잡아 들고 있던 청설모를 테사이아에게 던졌다.

재빨리 받아든 그녀가 냉큼 한 마리를 입에 물고는 읊조렸다.

"…이젠 피만 마셔도 무슨 짐승인지 알 것 같아."

"맛이 그렇게까지 다르냐?"

무기를 풀며 이안이 물었다.

비쩍 말라 버린 청설모를 툭 내던지며 테사이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다양하게 맛없어. 사실, 맛있는 건 인간 피뿐이지만."

"...."

"왜 그렇게 봐?"

"마지막으로 사람의 피를 빤 게 언제지?"

"오래됐지. 네가 죽인 그 제국인들 피가 마지막이니까. 이젠 인간 피 맛이 가물가물할 지경이라고."

잘하고 있네.

고개를 끄덕인 이안이 말했다.

"충동을 잘 다스려라. 계속 살아남고 싶다면."

"…나쁜 놈들 피도 안 돼?"

잠시 침묵한 이안이 이윽고 대답했다.

"그놈들 피를 마시고도, 충동을 억누를 수 있다면."

"자신 있어. 걱정 마. 나 갈수록 인내심이 늘고 있다니까. 요즘은 야옹이가 때려도 참잖아."

"안 되겠군. 허락부터 구해라."

"…방금 내 얘기 어디가 못 미더웠던 거야?"

"전부."

"...."

입술을 비죽인 테사이아가 또 다른 청설모를 입에 물었다.

문이 벌컥 열린 건 그때였다.

화들짝 청설모를 집어 던진 테사이아가 빽 소리쳤다.

"노크 좀 해! 이 멍청한 짐승아!"

눈을 끔뻑인 샬롯이, 뒤따라 들어오던 아스켈을 몸으로 막으며 내뱉었다.

"깜빡했다. 앞으로 주의하지."

"…뭘 주의하신다는 겁니까? 왜 들어가다 멈추신 거고요."

아스켈의 물음에, 샬롯이 당황한 듯 눈을 끔뻑였다. 태연하게 대답한 건 테사이아였다.

"벗고 있었어. 옷 입는 중이니까, 훔쳐보지 마."

"아… 네."

탄식한 아스켈이 입을 다물었다.

테사이아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입가의 피를 꼼꼼히 닦았다.

평소라면 함께 피식댔겠지만, 이안은 웃지 않았다.

"됐어. 들어와."

"목욕물부터 준비해라, 아스켈."

이어진 이안의 말에, 아스켈이 재빨리 냄비를 챙기며 말했다.

"어제도 하셨는데. 목욕을 참 좋아하시는군요."

"이안의 특이한 부분 중 하나지."

샬롯이 덤덤하게 덧붙였다.

이안이 미간을 좁혔다.

"어차피 여정 중엔 잘 못 씻으니까, 씻을 수 있을 때 매일 씻을 뿐이다."

"네 취향은 존중한다, 이안."

언제부터 목욕이 취향이 된 거냐고.

이안이 고개를 젓는 사이, 목욕물을 능숙하게 준비하던 아스켈이 말했다.

"테사이아 님과 그런 관계이실 줄은 몰랐군요."

이안의 머릿속을 한 번 더 헝클이기에 충분한 말이었다.

"그런 관계?"

"남녀 간의 관계요."

"...."

이안의 미간에 골이 패이는 사이, 테사이아가 느긋한 미소를 지었다.

"몰랐다니 의외네, 아스켈. 한눈에 알아봤을 줄 알았는데."

…쟨 또 뭐라는 거야.

아스켈이 고개를 저었다.

"전 샬롯 님과도 잘 어울리신다고 생각했거든요."

"엥…? 무슨 그런. 너 눈이 좀 이상한 거 아니니?"

테사이아가 괴상한 말을 들었다는 듯 되물었다. 샬롯이 턱을 슬쩍 치켜들었다.

"안목이 뛰어난 거지. 애초에 너랑 나는 비교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귀쟁아. 나는 너보다 크고, 강하고, 아름답지."

"키 크고 힘센 건 알겠는데. 다른 건 동의 못 하겠는걸. 큰 게 키를 말하는 게 아니면, 그것도 포함해서. 애초에, 넌 짐승이잖아?"

"또 무식한 소릴 하는군. 우리 수인은-"

"그만."

못 들어 주겠다는 듯 미간을 찌푸린 이안이 말을 잘랐다.

둘을 싸늘하게 돌아본 그가 덧붙였다.

"애 앞에서 헛소리하지 마라."

"전 애가 아닙니다, 이안 님."

아스켈이 공손하지만 단호하게 대답했다.

이안이 칼 같이 덧붙였다.

"나보다 어리면 애다. 그리고 이 녀석들은 내 동료지 연인 같은 게 아니야. 쓸데없는 상상의 나래 펼치지 마라. 목욕물이나 부어."

"…네."

아스켈이 곧바로 움직였다. 입술을 비죽댄 테사이아가 드러눕고, 샬롯은 동료란 말도 나쁘지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벽면에 기댔다.

곧 이안이 욕조에 몸을 담갔다.

…이제야 좀 살겠네.

생각하던 그의 시선이, 다음 물을 올리는 아스켈의 움직임을 좇았다.

'확실히,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은데.'

아스켈의 얼굴에는 아무런 그늘이나 고민도 없었다.

마을의 문제가 해결된 것이 기쁜 듯 생기만 돌고 있을 따름이었다.

뇌리로 우르드의 목소리가 스쳤다.

트라벨가까지 저 녀석과 함께 가 달라는.

도시 인근의 야인 정착민들에게만 데려다주면, 나머지는 충분히 알아서 해나갈 수 있으리란 게 우르드의 생각이었다.

우르드가 그런 의뢰를 한 이유는, 물론 깊이 고민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결국 마을이 무너질 거라 생각하는 거겠지.'

동의하는 부분이었지만, 이안은 그의 의뢰를 거절했다.

아스켈은 우르드와 함께가 아니라면 이주하지 않을 것이고, 녀석을 억지로 끌고 갈 수는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우르드는 걱정하지 말라며, 녀석은 마을을 떠나게 될 것이라 장담하듯 말했다.

날이 예리하게 선 장검을 보수로 내밀기까지 했다.

희귀 등급인 북부 전사의 장검.

이안은 아스켈을 억지로 끌고 가지 않으리란 조건으로 의뢰를 받아들였다.

손자라도 살리려는 늙은 전사의 마음을, 아예 모르는 바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영 마음에 걸린단 말이지.'

우르드가 저 녀석을 어떻게 설득할지는 여전히 의문인 데다, 퀘스트가 뜬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퀘스트는 일종의 이정표였다.

어느 정도 정해져 있는 흐름이 있음을 알려 주는.

퀘스트가 없다는 것은, 일이 어떻게 돌아갈지 전혀 예상할 수 없다는 의미였다.

테사이아가 그렇듯이.

"왜 그렇게 보십니까?"

아스켈이 불쑥 물었다.

이안은 태연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아무것도."

"오늘 샬롯 님과 마을을 많이 돌아다녔습니다.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세 분이 계속 마을에 남아 주시길 바라더군요. 산맥에서 내려온 분들이니, 카르하가 보내 주신 거나 마찬가지라고요."

"카르하가 보낸 것도 아니고, 마을에 계속 남을 수도 없다. 연회가 끝나고 나면 떠날 거야."

"…아쉽군요. 남아 주신다면, 머잖아 대전사가 되셨을 텐데요."

"...."

이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퀘스트 창에 멈춰 있었다.

북부의 대전사.

"그래도 내일 연회는 기대하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전사들이 전부 사냥을 다녀와서, 고기를 마음껏 드실 수 있으실 테니까요."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

퀘스트 창을 닫으며 대답한 이안이, 느긋하게 눈을 감았다.

#096화

"오늘은 코가 비뚤어지도록 마시자고."

"그럼 넌 그만 마셔야 하는 거 아니냐? 한 번 부러진 후론 항상 비뚤어져 있잖아."

"그럼 원래대로 돌아올 때까지 마시지 뭐."

전사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광장 너머에 위치한 대회관.

아무것도 없이 널찍한 실내는, 마을의 거의 모든 행사를 진행하는 공간이었다. 때로는 여자와 아이들을 대피시키는 공간이기도 했다.

오늘은 축제를 위한 공간이었다.

"밤에 경계 서는 인원도 줄었겠다, 걱정들 말고 팍팍 드시오!"

"배가 부르면 저 역겨운 머리통을 좀 보고 있으라고. 속을 싹 비우고 다시 시작할 수 있을 테니까."

사슴과 산양, 멧돼지 같은 온갖 종류의 고기들이 통째로 구워지고, 빵과 염장 고기, 직접 담근 술까지 창고를 열어 아낌없이 꺼냈다.

창대에 꿴 하얀 악마의 머리는, 모두가 볼 수 있게 회관 중앙에 세워 둔 채였다.

매일 밤 반복되던 악몽에서 벗어난 주민들은, 마음껏 먹고 마시고 소리 지르며 기쁨과 결속을 다졌다.

이안은 구석에서 묵묵히 고기와 술을 입에 넣었다.

주민들은 그와 샬롯이 대전사의 옆에 앉길 바랐지만, 이안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간만의 제대로 된 고기와 술을, 주위의 시선을 의식하며 먹고 싶지 않다는 이유에서였다.

다들 그의 결정을 존중했다.

"...."

이안이 거절한 이유가 단지 그 때문만은 아니라는 걸 눈치챈 건, 늘 함께하는 샬롯뿐이었다.

"왜 그렇게 쳐다보지?"

고기를 우물대던 이안이, 마주 앉은 샬롯을 바라보며 물었다.

샬롯이 담담하게 말했다.

"네게 감사하려고 만들어진 자리인데, 전혀 기뻐 보이지 않는군."

"기쁠 것도 없지. 내가 원해서 만들어진 자리가 아니니까. 물론, 나쁠 것도 없지만."

술을 한 모금 들이켠 이안이, 샬롯의 옆에 앉은 아스켈을 눈에 담으며 덧붙였다.

"고기도 괜찮고, 술도 좋군. 기름이 싹 씻겨 내려가는 느낌이야."

"많이 드십시오. 부족하지 않게 제가 계속 채워 놓을게요."

기특한 녀석.

샬롯과 눈빛을 교환하며 피식한 이안이 다시 고기를 입에 넣었다.

"다들 고생 많으셨소!"

벌떡 일어난 발레리가 잔을 들며 외친 건 그때였다.

대전사의 건배사에, 좌중이 고요해졌다.

"눈보라만큼이나 혹독한 시간을, 우리는 또다시 견디고 이겨 냈소. 카르하께서도 우리를 지켜보고 계실 거요. 하지만 이번 고난은, 그저 우리의 힘만으로 극복한 게 아니었지."

덩치에 걸맞게 울림이 좋은 호탕한 목소리였다. 발레리가 나이에 비해 관록이 있어 보이는 건, 저 목소리와 수염의 영향이 컸다.

"산맥에서 내려온 마물 사냥꾼들. 우리는 저 외지인들에게 큰 빚을 졌소. 감사를 표하며, 건배사를 부탁드리겠소. 다들 잔을 드시오!"

주민들이 테이블을 두드리며 잔을 들었다.

모두의 시선이 이안에게 집중됐다.

잔을 든 이안이 무덤덤한 얼굴로 말했다.

"우리는 의뢰를 해결했을 뿐이오. 그런데도 이런 좋은 음식까지 대접해 주어 고맙소. 내게 빚진 건 없으니, 신경 쓰지들 마시오."

이안이 잔에 담긴 술을 들이켰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를 돌아보던 주민들이, 이윽고 웃음을 터뜨리며 잔을 입에 가져갔다.

발레리의 호탕한 웃음소리와 함께 다시 장내가 소란스러워지는 가운데, 문득 누군가가 일어섰다.

우르드였다.

잔을 들며 이안을 바라보던 그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하얀 악마를 죽인 마물 사냥꾼에게 묻고자 하는 것이 있소."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이안이 그를 돌아보았다.

"하시오."

"앞의 강건한 전사들을 보시오. 그리고 다른 이들도 돌아보시오."

목소리와 웃음이 잦아들었다.

주민들을 돌아본 우르드가, 이윽고 다시 이안을 바라보았다.

"귀하가 없이도, 계속 마을을 지켜낼 수 있을 것 같소?"

무슨 생각으로 묻는 거지. 찬물을 끼얹고 싶은 건가.

이안이 슬쩍 미간을 좁히는 찰나, 발레리의 웃음소리가 먼저 터져 나왔다.

"축하의 자리에서 무슨 말씀을 꺼내시는 거요, 우르드 영감? 설마 이런 자리에서 또, 고향을 버리고 떠나야 한다는 겁쟁이 같은 말을 꺼내시려는 건-"

"그건 내가 판단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오. 다만…."

이안의 목소리가 발레리의 말을 잘랐다. 발레리의 곧고 진한 눈썹이 꿈틀댔다.

"여긴 이미 마물들의 영역이지. 인간의 영역이 아니라."

이안이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그러니 마을은 앞으로도 마물들의 표적이 될 것이오. 심지어 신성을 품은 성상까지 있으니, 더 그렇겠지. 약한 것들은 신성을 두려워하지만, 강한 것들은 증오하니까."

이안이 술잔을 입에 가져갔다.

그것으로 할 말은 다 했다는 듯.

회관이 어느새 고요해졌다.

몇몇의 표정에는 술과 음식으로 잠시 잊었던 불안이, 어떤 이들의 얼굴에는 옅은 분노가 스쳤다.

우르드가 발레리를 바라보았다.

"마을의 대전사께서는, 아직도 자치령의 장벽 안으로 이주할 생각이 없으신 거요?"

"여긴 우리들의 고향이오. 동시에 카르하의 위대한 전투가 벌어진 전자이었으며, 그의 성상이 세워진 곳이지. 북부의 아들이자 전사로 태어난 내가, 어떻게 고향을 버리겠소?"

"그로 인해 결국, 모두가 죽게 되더라도 말인가?"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게 태어나지 않았소, 영감. 두려운 자들은 당장 일어서 이 자리를 떠나시오.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마시오. 말리지 않겠소."

발레리가 좌중을 돌아보며 덧붙였다.

일어서는 자는 없었다. 지금 일어선다면 고향을 버린 겁쟁이로 낙인찍히게 될 터였다.

'잔머리를 잘 굴리는 놈이군.'

생각하며, 이안은 술잔을 입에 가져갔다.

궁금한 건 우르드의 의도였다.

저 노인네 역시,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리라는 걸 아예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닐 텐데.

"대전사가 해야 할 판단을 아래로 미루다니, 비겁하시군. 무릇 대전사란 가장 어렵고 고통스러운 결정을 짊어져야 하는 법이오."

우르드가 담담하게 말했다.

이안의 시선이 아스켈에게로 향했다.

무덤덤한 얼굴. 그러나 불안한 눈빛까지 감추지는 못한 채였다.

잠시 우르드를 응시하던 발레리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나는 이미 가장 어렵고 고통스러운 결정을 짊어지고 있소, 영감. 내 결정이 그토록 불만스럽다면,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이시오."

행동…?

이안의 미간이 설핏 좁아졌다.

동시에 아스켈의 눈동자가 가늘게 떨리기 시작했다.

우르드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래. 전사는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뜻을 보여야 하는 법이지."

그가 손에 든 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발레리가 헛웃음을 흘렸다.

"거기서 멈추시는 게 좋소, 영감. 과거의 대전사에 대한 예우로 말씀드리건대, 나는 영감을 죽이고 싶지 않소."

"...!"

그제야 이안의 시선이 우르드에게로 향했다.

그는 태연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과거의 대전사로서 말하건대, 가는 데에는 순서가 없지."

발레리의 표정이 묘해졌다. 미소를 감추려 인상을 찌푸리는 것 같기도, 구겨지려는 인상을 미소로 풀어내려 하는 것 같기도 했다.

"밖으로 나오시게. 카르하가 보는 앞에서, 대전사의 권위에 도전할 것이니."

담담하게 내뱉은 우르드가 몸을 돌렸다.

대전사의 권위에 도전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 지는, 깊이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저 영감이….'

이안의 미간이 완전히 구겨졌다.

이제야 저 노인이 호언장담한 이유를 알게 됐기 때문이다.

자신이 없으면 아스켈이 마을에 남을 이유도 사라진다 여긴 것이리라.

"경사스러운 날에 전사의 피를 흘리게 생겼군…."

읊조린 발레리가 일어섰다.

마을 주민들도 저마다 술잔을 손에 든 채 회관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대전사와 우르드 영감이, 서로 싸우는 거냐?"

샬롯이 아스켈을 돌아보며 물었다.

가라앉은 눈빛만큼이나 낮은 목소리로, 아스켈이 대답했다.

"예. 패배를 인정하거나… 어느 한쪽이 죽을 때까지요."

이안이 잔에 담긴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죽을 자리를 찾아야 한다더니. 개 같은 짓거릴 하는군. 영감.'

혀를 차며 잔을 내려놓은 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

카르하의 성상 앞.

발레리가 먼저 기다리던 우르드와 마주 선 가운데.

"...."

"...."

뒤따라 나온 주민들이 거리를 둔 채 주위를 에워쌌다.

말리거나 저지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대전사의 자리를 놓고 다투는 결투는, 신성한 의식이었다.

걸치고 있던 망토를 벗으며 발레리가 말했다.

"지금이라도 멈추시오, 영감. 영감 같은 늙은이를 이긴다 한들, 자랑스럽지도 영광스럽지도 않소."

"전사는 내뱉은 말을 주워 담지 않는 법이지."

우르드는 담담하게 대꾸하며 몸을 풀었다.

"무기는 들지 않겠소.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예우요."

발레리의 말에 우르드의 입가에 미소가 스쳤다.

"잔인하구나. 꼬마야."

그의 외눈이 카르하의 성상을 돌아보았다.

"지켜보시오, 북부의 초인이여."

솨아아아-

카르하의 대검 끝에서 옅은 신성이 번진 건 그 직후였다.

"오오… 카르하께서…."

"우르드 영감에게 축복이 내리는군…."

지켜보던 전사들이 탄성을 흘렸다.

주민들 역시 숨죽인 채 눈앞의 기적을 바라보았다.

"북부의 신은 친절하군. 늘 이렇게 지켜보는 것이냐?"

한구석, 삐딱하게 기대선 샬롯이 물었다.

그녀는 지금 일어나는 결투가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그 옆에 주먹을 움켜쥔 채 우두커니 선 아스켈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원래는 검에 피가 맺히는 일도 드물었고, 이렇게 신성을 내리는 건 더 드물었습니다. 카르하께서 우리 영감님을 축복하다니…."

기쁘기보단, 오히려 야속하다는 듯한 말투였다.

샬롯이 뭔가 말하려는 찰나.

타탓-!

우르드가 발레리를 향해 달려들었다.

노인이라고는 믿기 힘든 속도.

그의 뒤로 옅은 신성력이 만들어낸 붉은 궤적이 신기루처럼 흩어졌다.

삽시에 발레리의 코앞까지 돌진한 우르드가 주먹을 내뻗었다.

"...!"

발레리가 조금 놀란 듯 팔을 들었다.

빠악-!

노인이 만들어 낸 것이라고는 믿기 힘든 타격음. 뒤로 한 걸음 밀려난 발레리가 슬쩍 입술 끝을 말아 올렸다.

"카르하께서 공정한 결투를 원하시나 보군."

동시에 그가 주먹을 내뻗었다. 우르드가 피하지 않고 막아냈다. 노인의 앙상한 몸은 대전사의 주먹에도 튕겨 나가지 않았다.

퍼억-! 빠각! 콰직!

난타전이 이어졌다. 발레리는 빠르고 강했고, 카르하의 축복을 받은 우르드는 노련하며 단호했다.

빡! 빠각!

급소를 공격하는 것도 서슴지 않고, 바닥을 구르거나 추한 모습을 보이는 것도 망설이지 않았다.

두 전사의 몸에서 튄 피가 사방을 물들였다.

"...."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이안이, 마침내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은 눈도 깜빡이지 않는 아스켈에게서 멈췄다.

설산의 얼음처럼 차갑고, 심연처럼 가라앉은 눈동자.

'댁은 잘못 생각하셨소, 영감.'

그가 죽더라도, 아스켈은 마을을 떠나려 하지 않을 테니까.

오히려 끝끝내 남아, 언젠가 반드시 자신의 손으로 복수를 이루려 할 터였다.

그리고 아마도 끝내 죽게 되리라.

복수의 성공 여부와는 상관없이.

이윽고 그의 시선이, 신성력이 아른거리는 성상으로 향했다.

'방해하지 마라, 카르하.'

기묘한 감각이 뒤를 이었다.

한순간 시간이 멈추는 듯하더니, 시야가 엿가락처럼 늘어졌다. 의식이 그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한복판으로 밀려들었다. 사방이 순식간에 선으로 뒤덮여 하얗게 변했다.

…방해하지 말라니까.

의도한 일은 아니었지만, 이안은 당황하지 않았다. 그저 차분하게 다음에 일어날 일을 기다렸다.

빛의 장막 너머에서 무언가가 느껴졌다. 정확한 형태나 존재를 인지할 수는 없었다. 저 존재를 정확히 인지하려면, 새로운 종류의 감각 기관이 필요했다. 느껴지는 건 끝을 알 수 없는 거대함 뿐.

물론, 이안은 저게 누구인지 이미 알고 있었다.

'난 널 섬길 생각도, 네 대전사가 될 생각도 없다. 카르하.'

말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안은 그저 생각만 했다.

이게 제대로 전달될지 알 수 없었지만, 상관 없었다.

'그러니 날 죽일 거면 그렇게 하고, 여기 영원히 붙잡아 둘 거여도 그렇게 해. 그게 아니면 꺼져라. 다신 너랑 엮이고 싶지 않으니까.'

푸하, 저 너머에서 바람이 휘몰아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곧 벼락이 치는 것 같은 쩌렁쩌렁한 울림이 사방을 뒤덮었다. 빛의 장막이 자글대는 파장처럼 떨렸다.

어이없게도, 웃음 소리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

칼로 자른 것처럼, 의식이 현실로 되돌아왔다.

눈앞에 퀘스트 완료 창이 떠올랐다.

왼쪽 어깨와 팔뚝에 기묘한 열기가 느껴졌다.

미간을 찌푸리는 이안의 뇌리로, 마지막 순간 파고든 목소리가 잔상처럼 메아리쳤다.

-마음대로 해라. 나도 그럴 거니까.

…진짜 제멋대로인 새끼네.

생각하며 창을 닫은 이안이, 혈투를 벌이고 있는 의뢰인을 바라보았다.

계약을 파기하러 갈 시간이었다.

***

'제법이군, 늙은이.'

우르드의 주먹을 쳐 내며, 발레리가 눈을 빛냈다.

우르드는 생각보다 강한 상대였다.

하지만 위기감이 들 정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달가웠다.

덕분에 힘없는 노인을 때려죽였다는 말은, 듣지 않게 됐으니까.

신의 축복을 받은 노련한 전사의 도전을 이겨 낸, 강인한 대전사로 기억되리라.

'이만하면 충분한 것 같으니까-'

쩍-!

우르드의 주먹을 팔뚝으로 막으면서, 발레리가 그의 측면으로 파고들었다. 왼손과 왼눈이 없는 노인의 약점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쉭-

우르드가 손목까지밖에 없는 왼팔을 뻗은 건 그 직후였다.

주먹은 아니었으나, 그래서 오히려 더 좁은 범위에 충격을 집중시킬 수 있는 비장의 한 수였다.

'…예상을 못 했다면 말이지.'

발레리는 여유롭게 몸을 틀었다.

왼손을 쓰지 못하는 것처럼 아껴 두고 있다는 건, 이미 싸움을 이어오면서 눈치채고 있었다.

노인의 일그러지는 얼굴을 눈에 담으며, 발레리가 그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콰앙-!

우르드가 그대로 바닥에 처박혔다.

벌어진 노인의 입에서 핏방울이 튀었다.

발레리는 멈추지 않았다.

쩌억-!

머리통만 한 주먹이 우르드의 얼굴에 틀어박혔다.

한 번. 다시 또 한 번.

'잔인하다는 당신의 말이 맞소, 영감.'

발레리는 주먹을 내리치며 생각을 이어갔다.

'영감을 이용해 확실히 보여 줄 거요. 내게 반기를 들면 어떻게 되는지.'

피를 토하는 우르드의 눈이 조금씩 풀렸다.

카르하의 신성력이, 발레리의 주먹질에 흩어지고 있었다.

콰앙-!

몇 번째인지 모를 주먹을 내리친 순간, 발레리는 이제 곧 이 노인에게 맺힌 신성이 완전히 사라지리란 걸 깨달았다.

더 힘껏 말아쥔 주먹이 위로 올라갔다.

"저게… 무슨…?"

"갑자기 어째서…."

주민들 사이에서 낮은 탄식이 번진 건 그때였다.

신경 쓰지 않고 주먹을 내리치려던 발레리는, 자신의 손목을 움켜쥐는 손아귀를 느끼고는 고개를 돌렸다.

"...?"

설산에서 온 마물 사냥꾼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부릅뜬 발레리의 눈을 응시하며, 이안이 내뱉었다.

"가만히 둬도 곧 죽을 영감을, 그렇게도 미리 죽이고 싶나?"

#097화

"뭐라고…?"

당황은 잠시였다. 곧 인상을 구긴 발레리가 씹어뱉었다.

"네게 진 빚이 있으니 지금 저지른 무례는 용서해 주마, 이방인. 하지만 두 번은 없다. 물러나라. 넌 신성한 결투에 끼어들 자격이 없다."

그는 대답도 듣지 않고 다시 우르드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는 치켜든 주먹을 그대로 내려치려 했다. 이안이 여전히 그의 손목을 움켜쥐고 있었지만 상관없었다. 제아무리 뛰어난 마물 사냥꾼이라도, 타고난 힘의 차이는 어쩔 수 없을 테니까.

놈을 그대로 바닥에 나뒹굴게 해서, 방금의 수모를 갚아 주려는 의도도 있었다.

"...?!"

하지만 주먹은 앞으로 나가는 듯하다, 다시 강한 반발력에 본래 자리로 되돌아갔다.

어이없게도, 이 이방인의 손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

"이런 식인 거군…."

이안이 나지막이 읊조렸다.

발레리의 얼굴이 분노로 벌겋게 달아올랐다. 아무래도 이놈을 죽여야겠다는 생각이 뒤를 이었다.

물론 1대1로 싸울 생각은 없었다. 주먹으로 한 대 치면 으스러질 것처럼 생겼어도, 어쨌거나 단신으로 하얀 악마를 죽인 자니까.

하지만 이자는 지금 자신뿐 아니라 전통까지 무시하고 있었다.

전사 전부가 달려들기 충분한 명분. 게다가 그가 아는 전사들이라면 이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무기를 움켜쥐고 있을 터였다.

일단 저 건방진 면상에 주먹을 한 대 먹여 준 뒤에, 모욕의 대가를 치르게 할 생각이었다.

"네놈이 진정 죽어야…. ...?!"

이안의 얼굴을 다시 보기 전까진.

고개를 돌리며 으르렁대던 발레리의 표정이 순간 멍해졌다.

이안의 눈동자를 따라 붉은빛이 아른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눈동자에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의 전신에 붉은 아지랑이가 연기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안이 내뱉었다.

"너희 신은, 마음대로 하라던데?"

"...."

멍하니 입을 벌린 발레리가 주위를 돌아보았다. 비로소 경건하게 일어선 주민들의 모습이 보였다.

일부는 이안을, 일부는 성상을 바라보며 탄식을 흘리고 있었다.

"카르하께서 인정하신… 진정한 대전사…."

"대전사의 참전을 기뻐하시는군…."

그들의 탄식이 비로소 귀를 파고들었다.

발레리의 시선이 멍하니 카르하의 성상으로 향했다.

지금 이안의 전신이 그러하듯, 성상에서도 붉은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대검이 불길에 휩싸인 듯했고, 살아 있는 것처럼 붉은 안광이 일렁였다.

방금 이방인이 의식을 치렀으리라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카르하는 그 어느 때보다도 선명한 신성과 축복으로 그의 자격을 증명하고 있었다.

"후손들이 하는 짓거리가 어지간히 한심해 보인 모양이지."

내뱉은 이안이 발레리의 팔을 툭 밀치듯 내려놓았다.

그는 자신을 응시하는 주민들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우르드의 옆에 쪼그려 앉았다.

"영감님의 의뢰는 거절하겠소."

"대… 전사… 시여…."

우르드의 피범벅인 입술이 달싹였다. 이내 그의 눈이 감겼다.

이안이 샬롯을 향해 손짓했다.

언제라도 지원할 수 있게 살짝 몸을 구부린 채 기다리던 그녀가, 기다렸다는 듯 달려왔다.

"집으로 옮겨. 응급 처치도 대충 해 주고."

"알겠다."

샬롯이 우르드를 안아 들었다.

심드렁하게 성상을 돌아본 이안이, 이윽고 다시 자신의 손아귀를 내려다보았다.

주먹을 쥐락펴락하는 그의 한쪽 입꼬리가 비웃듯 말려 올라갔다.

"딱 야만인다운 축복이군…."

그 모습을, 발레리는 그저 멍하니 응시하고 있었다.

믿을 수 없었다.

설산에서 온 마물 사냥꾼이, 십수 년간 단 한 번도 나타난 적 없는 대전사라니. 심지어 그는 북부인도 아니었으며, 카르하를 숭상하거나 존경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의 신성을 비웃고 있었다. 모든 전사들이 그토록 손에 넣길 바라는 힘을.

게다가 정말 저자가 카르하의 대전사라면, 자신은 지금 가진 모든 권위를 잃은 것과 마찬가지였다.

고작 마을의 전사들에 의해 선출된 대전사 따윈, 신의 인정을 받은 대전사 앞에선 아무것도 아니니까.

"…할 수 없다."

그가 나지막이 내뱉었다.

이안의 고개가 그에게로 돌아왔다.

주먹을 그러쥔 발레리가, 그를 노려보며 일어섰다.

"나는 인정할 수 없다. …네가 정말 대전사라면 힘으로 증명해라."

이대로 모든 걸 잃을 순 없었다.

그러니 쟁취할 뿐이었다.

카르하가 그랬던 것처럼.

주먹 쥔 팔을 얼굴 앞으로 치켜드는 그를 보며, 이안이 내뱉었다.

"네 인정 따윈 필요 없어."

발레리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온 힘을 향해 놈을 향해 달려들며 주먹을 내뻗었다.

쒸아아악-!

내뻗는 주먹에서 대기가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어지간한 사람은 한 번에 기절시키고, 운이 따른다면 죽일 수도 있는 주먹이었다.

"...!"

어디까지나, 맞출 수 있다면.

가볍게 몸을 기울이는 것만으로 주먹을 피해 낸 이안을 바라보며, 발레리가 눈을 치켜떴다.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 같았다.

주먹을 치켜들며 한 걸음 더 품으로 파고드는 이안의 모습이 발레리의 동공에 아로새겨졌다.

"…굳이 그렇게 모르모트가 되고 싶다면야."

읊조리는 그의 목소리는 이 와중에도 선명하게 귀를 파고들었다.

발레리는 그제야, 이자도 자신과 같은 시간의 흐름을 느끼고 있음을 깨달았다.

콰아아아-

이안이 주먹을 내뻗었다. 다가오는 주먹을 따라 붉은 신성력이 타오르듯 휘몰아쳤다.

발레리는 뻗었던 황급히 손을 회수하며 얼굴 앞을 가렸다.

본능적인 행동.

으직- 꽈앙!

발레리는 팔 위로 전해진 엄청난 충격에 그대로 뒤로 튕겨 나갔다.

돌격하는 멧돼지에 정면으로 치인 것 같은 충격.

철퍽, 촤르르륵-

바닥을 구른 발레리가 간신히 멈춰 섰다. 파르르 떨리는 팔에 억지로 힘을 준 그가 고개를 들었다.

쉬하악-!

쇄도하는 이안의 얼굴이 코앞에 있었다.

"...!"

눈을 치켜뜬 발레리가 팔을 들었다. 하지만 이안의 주먹이 그의 옆얼굴을 후려치는 게 더 빨랐다.

쩌엉-!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한순간 눈앞이 캄캄해지고, 의식이 돌아오자 피를 토하며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이안이 다시 한번 달려들었다.

발레리는 저항조차 할 수 없었다.

팔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콰득-!

발레리의 멱살을 낚아챈 이안이, 그를 그대로 바닥에 내리찍었다.

붉은빛이 아른대는 검은 눈이, 흐릿한 발레리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네가 잔대가리 잘 돌아가는 놈이란 건 이미 알고 있어, 발레리."

이안의 나지막한 속삭임이 그의 귀를 파고들었다.

"이주를 반대하는 게, 그 알량한 권력을 내려놓기 싫어서라는 것도 알고 있지. 내 눈에도 이렇게 뻔히 보이는데…."

꾸욱, 이안이 발레리의 멱살을 내리눌렀다.

"카르하가 모를 리가."

"...!"

발레리는 뭔가 말하려 했다.

하지만 입안 가득한 피가 목소리를 막았다. 부러진 이빨들이 피와 함께 굴러다녔다.

"이제 네 원래 자리로 돌아가라."

내뱉은 이안이, 주먹을 내리쳤다.

***

"…후우."

기절한 발레리를 툭 내려놓은 이안이 일어섰다.

주먹이 얼얼했다. 이런 걸 맞고도 죽지 않다니, 저 야만 전사 놈의 질긴 생명력에 내심 감탄이 나왔다. 어쨌건, 앞으로 평생 딱딱한 걸 먹긴 힘들 터였다.

'이 축복은 언제 끝나는 거야…?'

이안은 자신을 감싼 신성력을 다시 한번 내려다보았다.

웅웅, 단죄의 검이 불쾌하다는 듯 울었다.

무시한 채 눈을 감으며, 그는 상태 창을 열었다.

축복으로 올라간 능력치를 확인하기 위해서였지만, 그보다 먼저 새로운 카테고리가 눈에 들어왔다.

신성.

"하…."

이젠 다른 직업의 스킬 카테고리까지 생겼다고?

헛웃음을 흘린 이안이 창을 열었다. 텅 빈 가운데, 하나의 스킬만이 눈에 들어왔다. 투쟁의 축복.

사용할 수 있는 스킬이 아니었다.

전투가 시작되면 낮은 확률로 발동되는 패시브 스킬.

낮은 확률이란 게 얼마나 낮은 건진 확실히 알 수 없었지만, 어쨌거나 성능은 확실했다.

힘을 크게 올려 주고, 민첩성과 체력도 상당한 수준까지 올려 줬으니까.

'이 정도면 어지간한 야만 전사나 기사보다도 세지겠는데….'

이안의 헛웃음이 더 짙어졌다.

멋대로 이런 걸 내려 준 카르하도 카르하지만, 처음 생긴 신성 스킬이 정작 마법사에게 필요한 능력치는 하나도 올려 주지 않아서였다.

하긴. 애초에 마법사는 신성력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직업이었다.

신성 스킬 역시 야만 전사나 기사, 수행 사제에게 적합한 것뿐일 터.

'…뭐, 어쨌든 없는 것보단 낫지.'

이안은 이내 어깨를 으쓱였다.

어쨌건 그는 여전히 능력치 하나, 스킬 하나가 아쉬운 입장이었다.

'적어도 이게 발동되는 동안엔, 천하장사가 따로 없을 테니까.'

별다른 제약이나 페널티가 없다는 것만으로도, 사실 불만을 가질 이유는 없었다.

"...."

대신, 다른 의미로 조금 귀찮아진 것 같지만.

눈을 뜬 이안은, 모든 마을 주민들이 여전히 자신만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가 눈을 감은 채 서 있던 것이 결투의 여운을 즐긴 것이라 여기는 듯, 전사 중 몇몇은 감명받은 듯한 얼굴을 하고 있기까지 했다.

어느새 몸을 감싸고 있던 신성력은 자취를 감춘 후였다.

카르하의 성상 역시, 언제 그토록 타올랐냐는 듯 침묵했다.

'볼 장 다 봤다, 이거지?'

무책임한 백정 새끼.

이안은 그가 뭔가 말하기만을 기다리는 주민들을 무심하게 돌아보았다.

그 사이의 아스켈과 눈이 마주친 그가, 이윽고 턱을 까딱였다.

"들어가서, 식사나 마저 합시다."

***

"으음…."

우르드의 입에서 신음이 번졌다.

노인의 외눈이 가늘게 뜨였다.

잠시 멍하니 천장을 응시한 그가,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드디어 깨어나셨네요. 영감님."

아스켈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는 좀이 쑤시는 표정으로 의자에 걸터앉은 채였다.

"꼬박 하루를 주무신 거 알아요? 대전사께서 영감님이 깨어나기 전엔 나오지 말라고 하셔서, 저까지 종일 갇혀 있었다고요."

"…그래, 그게 꿈이 아니었군."

투덜대는 손자를 바라보던 우르드가 이윽고 읊조렸다.

아스켈이 콧방귀를 뀌었다.

"당연히 아니죠. 대전사께선 발레리를 흠씬 두들겨 패기까지 하셨다고요. 그걸 보셨어야 했는데."

"그래서, 지금은 뭘 하고 계시지?"

"종일 여기 있었는데 제가 어떻게 알겠어요?"

내뱉으며 일어난 아스켈이 문으로 향했다.

"같이 가서 확인하자고요. 덕분에, 우리 소원도 이뤄졌으니까."

"...!"

우르드의 눈이 비로소 커졌다.

온몸의 근육통도 잊은 채, 노인이 벌떡 일어섰다.

"이주하기로 결정했단 말이냐?"

"여기서 마물 밥이 되고 싶지 않으면 떠날 준비를 하라고 하셨거든요."

거리로 나서며 아스켈이 말했다.

우르드는 다시는 볼 일 없을 줄 알았던 마을의 전경을 차근히 눈에 담았다.

바삐 움직이는 주민들. 눈이 마주치자 가볍게 고개를 까딱이며 인사를 건네는 젊은 전사들.

확실히 이전과는 다른 분위기였다.

다들 저마다의 짐을 정리하고 있었고, 눈빛에 생기가 돌았다.

"우리 마을에서 북부의 대전사가 나오다니…."

"엄밀히, 우리 마을에서 나온 건 아니지 않나? 외지인인데."

"그게 무슨 상관이야? 우리 마을의 성상에서 인정을 받았는데."

"하긴, 뭐. 그래. 엄밀히 지금 북부의 대전사를 따르는 건 우리뿐이긴 하니까."

대화를 나누는 전사들의 목소리가 노인의 귀까지 들렸다.

광장 너머, 베어 낸 통나무를 짊어지고 들어오는 전사들이 보였다.

마차를 만들려는 게 분명했다.

이 많은 인원이 움직이려면 짐 마차도 여러 대가 필요했으니까.

"말이 부족하겠군…."

"아침에 전사 여럿이 장벽으로 출발했어요. 요새에서 말을 빌려 오겠다고. 어차피 며칠 만에 끝날 일이 아니에요."

주민 몇몇과 대화를 나누는 샬롯이 눈에 들어왔다.

한때 마족으로 오해했던 말하는 짐승은, 아주 귀찮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묵묵히 그들의 말을 들어 주고 있었다.

"대전사님, 주무십니까?"

문 앞에 선 아스켈이 물었다.

끽, 낡은 경첩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그렇게 부르지 마라. 카르하가 멋대로 축복을 내린 거니까."

심드렁하게 내뱉은 이안이, 이윽고 우르드를 발견하고는 피식댔다.

"일어나셨군."

"북부의 대전사가 되신 것을…."

우르드가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혹시나 하긴 했지만, 정말 북부의 대전사로 선택받은 이안을 마주 보자 경외심이 든 까닭이었다.

이안의 미간이 구겨졌다.

"그 뒷말은 듣고 싶지 않으니까, 문전박대당하고 싶지 않으면 조용히 들어오시오."

"…예."

우르드가 집 안으로 들어섰다.

"또 보네요, 영감님."

정체를 알 수 없는 요정, 테사이아가 손가락을 까딱이며 그들을 맞이했다.

"감사 인사부터 드리고 싶습니다, 대전, 아니, 이안 님."

아스켈이 깍듯이 말했다.

이안이 풀썩 웃음 지었다.

"인사는 그쯤 해. 그보다…."

이안이 아스켈과 우르드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우린 타고 갈 마차가 완성되는 대로 바로 떠날 거다."

"이렇게 바로 떠나신다고요?"

아스켈이 눈을 치켜떴다.

우르드도 마찬가지였다.

이안이 콧방귀를 뀌었다.

"그럼, 너희가 이주 준비를 다 할 때까지 기다릴 줄 알았냐?"

"당연하죠. 이안 님이 저희를 이끌어 주실 줄 알았는데요."

"그런 귀찮은 일은 사양이야. 지금도, 앞으로도. 그러니까, 내가 결정해야 할 일이 있다면 영감님이 대신하시오."

우르드가 미간을 찌푸렸다.

"제가… 말입니까?"

"대리자, 뭐, 대행자, 아무렇게나 부르시고. 이주 준비부터 이주까지 알아서 진행하시오."

"...."

우르드가 입을 다물었다.

이안의 코웃음이 이어졌다.

"영감님 뺨을 치지 않는 걸 감사히 여기셔야 할 텐데. 의뢰랍시고 유언을 남기다니. 내가 의뢰를 거절한다고 한 건, 기억하시오?"

"…예."

이안이 옆에 놓여 있던 장검을 내밀었다.

"보수는 도로 가져가시오."

"아닙니다. 부디 받아 주십시오."

우르드가 고개를 젓고는 말했다.

"의뢰가 아니라, 마을을 구해 준 보답이라 생각해 주십시오."

"…뭐, 굳이 준다면야."

어깨를 까딱인 이안이 일어섰다.

"할 얘긴 끝났소. 지금부터 할 게 많으실 텐데, 마음대로 하시오. 그놈의 존대도 그만하시고. 불편하니까."

"알… 겠소."

그때, 집의 문이 벌컥 열렸다.

인상을 찌푸린 샬롯이 아스켈이나 우르드에겐 눈길도 주지 않고 이안을 바라보았다.

"몇몇이 성상을 두고 갈 수는 없다는 미친 소릴 자꾸 하는데.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군. 그냥 혀를 잘라 버리고 싶다만."

"성상…?"

우르드와 아스켈의 얼굴에 난감함이 스쳤다.

이주를 원하던 자들도 항상 고민하던 문제였으니까.

하지만 이안은 고민조차 하지 않았다.

"그럼 성상도 옮기라고 해. 마차에 싣고 가든가, 정 안 될 것 같으면 토막 내서 들고 가든가."

"...?!"

#098화

아스켈과 우르드의 고개가 동시에 이안 쪽으로 돌아갔다.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이십니까? 성상은 결코 함부로-"

"장담하는데, 카르하는 그딴 건 신경도 안 써. 버리고 가도 그러려니 할 거다."

"...."

우르드가 말문이 막힌 표정으로 입을 달싹였다. 새로운 북부의 대전사는, 과감해도 너무 과감했다.

심드렁하게 걸음을 옮긴 이안이, 문을 나서며 덧붙였다.

"난 이제 손 뗄 거니까, 나머진 알아서들 하시오."

"…알겠소."

우르드는 더는 붙잡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

"나쁘지 않군."

마차에 올라탄 이안이 중얼댔다.

지켜보던 주민들이 시선을 교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르드가 미소 지었다.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이오."

이안 일행을 위해 만든 마차는, 마을의 몇 없는 장인들이 정성을 다한 물건이었다.

바람을 막아 줄 벽면과 천장에 작은 창문도 뚫어 놨고, 짐승 가죽을 깔아 둔 내부에는 널찍한 의자도 놨다.

대전사가 타기에 손색없는 튼튼한 마차.

거기다 말도 가장 건강하고 튼튼한 놈들로 둘이나 붙였다.

체구는 작지만 다리가 굵고 갈기가 풍성한, 북부 혈통의 말이었다.

"트라벨가로 가신다고 하셨죠."

우르드의 옆에 선 아스켈이 물었다.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가 아는 지휘관도 아마 지금쯤 거기에 있을 거다. 그자에게 너희들이 이주를 알려 주마. 관문을 통과할 때 수월하도록."

우르드를 돌아본 그가 덧붙였다.

"야인 정착지를 지나게 되면, 거기에도 말해 두겠소."

"감사할 따름이오."

"마차와 말을 내준 보답이오. 그 이상은 신경 안 쓸 거니, 알아서들 하시고."

"우리도 최대한 빨리 준비해서 움직일 것이오. 곧 눈보라가 몰아칠 것 같아서 말이오."

우르드의 말에, 이안이 설핏 미간을 좁혔다.

"눈보라?"

"사냥을 나갔던 전사들이 알려 줬소. 산맥 너머의 구름이 심상치 않다더군. 보통은 산맥 너머로 끝나거나 인근에만 몰아쳤지만, 작년부턴 마을 근처까지 먹구름이 내려왔었소. 그러니 올해는 더하지 않겠소."

"흐음…."

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이안이, 우르드를 돌아봤다.

"서두르셔야겠군. 여기 갇혀 있는 동안, 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까."

그의 눈빛에서 불길함을 느낀 우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이안은 할 말을 다 했다는 듯 샬롯을 바라보았다. 샬롯이 기다렸다는 듯 고삐를 후려쳤다.

"트라벨가에서 또 뵙겠습니다, 대전사님."

테사이아가 마을 사람들에게 손을 흔드는 가운데, 아스켈이 말했다.

이안이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피식댔다.

"그래. 그때까지 내가 거기에 있다면 말이지."

마차가 멀어졌다.

마차를 가만히 응시하던 아스켈이, 문득 입을 열었다.

"믿어지세요, 영감님? 저 이방인들이, 고작 며칠 만에 마을 전체를 구원했다는 게."

우르드가 손자의 머리에 하나뿐인 손을 얹었다.

"그렇기에 대전사인 것이다. 대전사는 범인들이 불가능하다 여기는 일조차 아무렇지 않게 해내지."

운명이라는, 절대 이길 수 없는 적을 상대로 싸우는 자들이기에.

뒷말을 삼킨 우르드가 몸을 돌렸다. 한시라도 빨리 준비를 끝내고 이주를 시작하기 위해서였다.

새로운 북부의 대전사가 마지막 순간 보여 준 눈빛이 묘하게 마음에 걸렸으니까.

하지만 그의 걸음은 이내 멈췄다.

"...."

주민들의 뒤에 선 거대한 덩치의 남자와 눈이 마주쳤기 때문이다.

이가 빠져 홀쭉해진 입과 긍지를 잃고 주눅 든 눈.

마을의 대전사였던 발레리였다.

"영감님… 나는… 그저…."

발레리가 뭉개지는 발음으로 웅얼댔다. 곁으로 다가선 우르드가, 손목만 남은 팔을 그의 어깨에 얹었다.

"야망은 전사의 특권이지. 과거를 변명하지 말게. 자네 같은 젊은 전사는, 뒤가 아니라 앞을 봐야지."

"...!"

발레리가 우르드를 돌아보았다.

늙은 전사가 무뚝뚝하게 덧붙였다.

"몸도 다 나은 것 같은데, 잡생각 말고 힘이나 쓰게. 성상을 실을 만한 마차를 만들어야 하니까."

***

구불구불한 숲길을 빠져나온 마차가 마침내 관도에 올랐다.

의자에 기대앉은 이안은, 말없이 생각에 잠겨 있었다.

지금 그의 머릿속을 떠다니는 상념은 크게 두가지였다.

야인 마을과, 고위 마법.

레벨이 오른 이래, 그는 아직까지 스킬을 단 하나도 찍지 않았다.

어떤 속성의 고위 마법을 먼저 배울지 전혀 결정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실, 당장 곧바로 배울 수 있는 고위 마법도 없었다.

고위 마법을 익히려면, 해당 스킬 트리의 경로에 놓인 상위 마법을 전부 찍어야 했으니까.

게임일 때의 이안 호프는 상위 마법을 익힐 수 있는 레벨임에도 중위 마법까지 밖에 배우지 못한 망캐였다.

현실이 된 후로 스킬 포인트를 추가로 얻으면서 상위 마법을 몇 개 익히긴 했지만.

아직도 고위 마법에 닿을 정도는 아니었다.

'하나를 익히려면 가진 스킬 포인트를 다 써야 할 것 같은데….'

이안이 짧게 혀를 찬 그때였다.

"가는 곳마다 재미있는 일이 생기네."

가죽으로 만든 넓적한 띠를 만지작대던 테사이아가 문득 내뱉었다.

…그만큼 죄다 개판이란 얘기지.

이안이 심드렁하게 코웃음 치는 사이, 샬롯의 비아냥이 이어졌다.

"그러셨겠지. 넌 구경만 했으니까."

"재미있는 일이 생긴댔지, 내가 재미있었다곤 안 했거든. 멍청아."

인상을 찌푸린 테사이아가 덧붙였다.

"나도 편하게 돌아다니고 싶다고. 솔직히 이번 마을에선 네가 제일 신났던 주제에."

"부정하진 않겠다. 결국은 전사들과 함께하는 게 가장 편하더군."

"앞으론 나도 사이에 낄 수 있을 거야. 이게 있으니까."

테사이아가 만지작대던 띠를 들었다.

뒤를 돌아본 샬롯이 눈을 가늘게 떴다.

"아스켈이 네게 가져다주는 건 봤다만. 또 무슨 쓸데없는 짓을 하려는 거냐."

"어머. 이젠 네가 말한 것도 기억을 못 하는 거니, 짐승아?"

놀리듯 내뱉은 테사이아가 띠를 얼굴에 뒤집어써서 눈을 가렸다.

사락, 잿빛 머리카락이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여 그 위를 덮었다.

테사이아가 보란 듯 이안 쪽으로 얼굴을 내밀며 말했다.

"이러면 내가 뱀파이어란 건 아무도 모를 거야."

"…제정신이냐? 정말 눈을 가리고 다니겠다고?"

샬롯이 되물었다.

이안도 미간을 설핏 찌푸리며 안대를 쓴 테사이아를 내려다보았다.

테사이아가 어깨를 으쓱였다.

"물론이지. 나는 눈이 안 보여도 주위를 식별할 수 있으니까. 밤에는 특히 더 선명하게."

"어떻게?"

이안이 툭 내뱉었다.

테사이아가 머리칼을 들어, 끝이 뾰족한 자신의 귀를 드러냈다.

"소리랑 냄새로."

"...."

자신만만한 태도로 봤을 때, 빈말은 아닌 것 같았다.

이건 요정의 특성일까, 아니면 뱀파이어의 특성일까.

잠시 생각한 이안은 이내 어깨를 으쓱였다.

아무래도 상관없었으니까.

"트라벨가로 간댔지. 거기서도 재미있는 일들이 생길까, 이안?"

테사이아가 덧붙였다.

이안이 턱을 괸 채 말했다.

"글쎄 가 봐야 알겠지. 어쩌면…."

그가 테사이아를 슬며시 내려다봤다.

"오래 머물지 않고 루 사드로 내려갈 수도 있을 거다."

"...!"

테사이아가 순간 얼어붙었다.

달콤한 꿈을 꾸다 갑자기 현실 한복판으로 떨어진 것 같은 표정.

"루, 루 사드로…?"

그녀가 간신히 되물었다.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디까지나 내 예상대로 상황이 흘러간다면."

"그 예상이란 게 뭔데?"

"...."

이안은 대답 대신, 마차 밖의 풍경으로 시선을 돌렸다.

게임에서의 북부는, 산맥에서부터 쏟아져 나온 언데드들의 물결로부터 상당한 피해를 입었었다.

그 피해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검은 벽이 발작을 일으키면서, 결국 국경 지대가 무너지는 결과로 이어졌다.

하지만 이안이 지하 궁전에 잠들어 있는 여왕을 죽인 지금.

어쩌면 산맥으로부터의 침공은 없는 일이 됐을 수도 있었다.

게임 내내 최악의 선택만 했던 그가 알 수는 없는 미래지만.

게임에선 비극으로 끝났던 이야기들을 여럿 바꿔 온 입장에선, 가능성이 아예 없어 보이진 않았다.

심지어 야인 마을만 해도, 게임에선 망령들의 습격을 이겨 내지 못하고 전멸했었을 터였다.

'상황이 그렇게 돌아가면…. 당분간 북부엔 별 볼 일이 없겠지.'

"꼭 바로 루 사드로 가야 할까?"

그때 테사이아가 내뱉었다.

그녀 역시, 잠깐의 시간 동안 많은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여전히 눈을 가리고 있어 눈빛을 볼 수는 없었지만.

"심판자들이 날 계속 쫓을 테니까, 찾아오는 놈들부터 하나씩 정리하는 게 훨씬 쉽지 않겠어? 거긴 그 흡혈귀들의 소굴인데."

"그래. 당장은 그럴 수도 있겠지."

선선히 고개를 끄덕인 이안이 덧붙였다.

"하지만 영원히 심판자를 보내지는 않을 거다. 손해가 너무 크니까."

이안은 아스콜드를 상대할 때, 끝내 놓쳤던 사념을 떠올렸다.

그게 아스콜드에게 일어난 일을 흡혈 일족에게 전달하는 용도였으리라 유추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안이 던진 화염구에 맞아 상당 부분 훼손되긴 했겠지만.

어떤 정보가 끝내 살아남았을지는 알 수 없는 부분이었다.

"저들은 네 곁에 나와 샬롯이 있는 것도,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몰라. 그에 맞는 대비를 했을지도."

"대비라면 어떤 걸 말하는 거야?"

"글쎄…."

이안은 턱을 괸 손가락만 까딱였다. 몇 가지 뇌리를 스치는 생각들이 있지만, 굳이 말해줄 생각은 없는 표정이었다.

테사이아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하긴. 적들은 그녀에 대해 잘 알겠지만, 정작 그녀는 적들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뭘 망설이는지 모르겠군."

샬롯이 한심하다는 듯 내뱉었다.

"네 의뢰고 네 복수다, 겁쟁아. 네 말대로면 우린 언젠가는 반드시 루 사드에 가야 해. 그저 그 순간이 조금 미뤄지느냐 앞당겨지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그래. 간만의 옳은 말이네, 야옹아."

이윽고 내뱉은 테사이아가 고개를 들었다.

"도망치지 않는 건 참 어렵네, 이안. 하지만 해 볼게. 내가 부탁한 주제에, 괜한 소릴 했어."

"알긴 하는군."

피식댄 이안이 덧붙였다.

"내 말은 어디까지나 가정일 뿐이야. 아직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어."

"확실한 게 하나 더 생겼어."

"...?"

"난 앞으로도 이안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영원히 알 수 없을 거야."

그럴 수밖에. 넌 이 세계가 원래는 게임이었다는 걸, 영원히 알 수 없을 테니까.

내가 그 게임을 플레이 하던 주인공이라는 것도.

쓴웃음을 삼킨 이안이, 이윽고 내뱉었다.

"지금은 네가 그걸 끼고도 싸울 수 있을지 궁금해하고 있었다."

"...!"

"오늘 밤부터 확인해 볼 거다. 나랑 샬롯이 고생할 동안 뒹굴기만 했으니, 밥값은 해야지."

"...."

***

테사이아는 정말 눈을 가리고도 잘 싸울 수 있었다.

남쪽으로 내려가는 동안, 마물들의 습격은 다시 매일 밤 이어졌다.

유별나게 사나운, 굶주린 마물들.

물론 놈들을 상대하는 건 테사이아와 샬롯의 몫이었다.

어차피 경험치도 주지 않을 놈들이었기 때문에, 이안은 아예 싸움에 나서지도 않았다.

물론 샬롯은 전혀 불만이 없었다.

"몸이 녹슬 틈이 없겠군. 좋아."

뜻밖에도 테사이아도 그랬다.

이안이 마물의 피를 빠는 것까진 막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동안 만성적인 갈증에 시달리던 그녀는, 간만에 마음껏 날뛰며 갈증을 풀 수 있었다.

"그래도 특별한 맛이 나는 녀석들은 없네. 죄다 별 볼 일 없어. 쓸데없이 사납기만 하지."

"굶주린 놈들이니 사나운 거야 놀라운 일도 아니다만."

사흘째 되는 날, 싸움을 끝내고 돌아온 샬롯이 모닥불 옆에 앉으며 내뱉었다.

"우릴 보고 달려드는 놈들과 그냥 지나치는 놈들의 차이를 모르겠군."

"지나치는 놈들…?"

육포를 질겅대던 이안이 물었다.

샬롯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릴 본 척도 하지 않고 지나치는 놈들도 있다. 오늘에서야 확실히 알겠군."

"나도 느끼긴 했어. 그냥 걷기만 하는 것들."

테사이아가 거들었다.

이안이 어둠 너머를 돌아보았다.

"지금도 그런 놈들이 느껴지나?"

"아까는 느껴졌지만, 지금은 아니다. 어차피 멀리 가진 못했을 텐데. 필요한가?"

샬롯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전에도 다가오지 않는 놈들은 있었지만….'

잠시 생각한 이안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네 말대로면 내일도 그런 놈들이 있을 테니까, 그때 부탁하도록 하지."

하지만 다음 날 밤에는 전혀 다른 상황이 기다리고 있었다.

"마차에서 떨어지지 마!"

"간격 유지해라! 온다!"

관도 저 너머에 또 다른 무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마물의 습격이 시작되고 있었다.

일렁이는 횃불들과 마차들.

그리고 그 주위를 포위한 채 물결치듯 내달리는 잿빛 마수 무리를 눈에 담은 샬롯이 미간을 좁혔다.

"상단 같은데. 장벽 너머까지 나오는 간 큰 자가 있을 줄은 몰랐군."

"어쨌건 우리한텐 잘된 일이야."

마부석으로 나오면서, 이안이 말했다.

"관문까지 함께 갈 동행이 생길 테니까."

테사이아에게 마차 안에 남아 있으라 말한 이안이, 싸우기 시작한 상단 무리를 바라보며 내뱉었다.

"속도를 올려라, 샬롯."

샬롯이 기다렸다는 듯 고삐를 후려쳤다.

#099화

상단 구출. 이 세계 대다수의 서브 퀘스트가 그렇듯, 보상도 경험치뿐인 별 볼 일 없는 퀘스트였다.

'이거라도 있는 게 어디야.'

창을 닫으며, 이안은 어둠 너머를 눈에 담았다.

상단을 습격한 건 설원 늑대 무리였다.

보통 많아야 열 마리 안팎이 몰려다니고,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면 훨씬 강한 마물이 많아서 이 근방에서나 볼 수 있는 놈들이지만.

"다들 말 주위를 떠나지 마!"

"새꺄, 뭘 멍청히 서 있어! 쇠뇌를 쏴!"

지금 상단 주위를 맴도는 놈들은, 족히 서른 마리는 되어 보였다.

'늑대 인간이 이끄는 건 아닌 것 같고. 굶주린 것들끼리 자연스럽게 뭉친 건가.'

생각하며, 이안은 놈들을 상대하는 상단을 바라보았다.

짐 마차가 세 대. 호위병은 짐꾼들을 포함해 스물 남짓이었다.

적은 인원이었지만, 설원 지역까지 허투루 나온 것은 아님을 증명하듯 간격을 잘 유지한 채 말을 지키고 있었다.

대부분 쇠뇌와 창으로 무장했고, 몇몇은 상당히 강해 보였다.

마법 무구로 보이는 창을 든 북부인 경호병이 특히.

'이 정도는 저들끼리도 충분히 막아낼 수 있을지도.'

대신 희생은 좀 있겠지만.

생각하며, 이안은 접근을 눈치챈 후미의 늑대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콰직-! 케엥!

이안은 단칼에 늑대 한 마리를 반 토막으로 썰어 버렸다. 이제 이 정도는 마법이나 축복의 도움 없이도 충분히 가능했다.

바닥을 구른 이안이 다른 늑대를 향해 내달렸다. 어느새 휘몰아치기 시작한 바람 칼날이 그의 전신을 감쌌다.

서걱-!

이안에게 달려들던 놈이, 쩍 벌린 아가리 한복판부터 반으로 갈라졌다. 반으로 잘린 늑대가 피를 분수처럼 뿜으며 바닥에 떨어졌다.

피 냄새를 맡은 굶주린 야수들의 눈빛이 붉게 번들댔다.

"고삐를 잡아라, 귀쟁아!"

내뱉은 샬롯도 이안의 뒤를 따라 몸을 날렸다.

콰직! 서걱-!

이안과 샬롯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설원 늑대를 베어 넘겼다.

대부분 두 번 공격할 것도 없었다.

그저 오염된 마력에 물들었을 뿐인 짐승들은, 거인과도 싸운 두 용병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물론, 그들을 노린 포위망이 아니라는 사실도 전투를 더 쉽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콰직-!

"뭐, 뭐지…?!"

"지원군? 지원군인가?"

지원군의 존재를 눈치챈 경호병들이 오히려 당황한 얼굴이 됐다.

여전히 사방은 내달리는 설원 늑대들로 어지러웠고, 어둠 속을 내달리며 싸우는 이안과 샬롯의 모습은 그들의 눈에는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대단한 전사들이군."

경호원들 사이, 장창으로 능숙하게 늑대들을 상대하던 북부인 경호병이 내뱉었다.

그의 시선은 어둠 너머의 이안과 샬롯을 정확하게 포착했다. 곧 그가 다른 경호원들을 돌아보며 외쳤다.

"다들 간격을 좁히고 달려드는 놈들만 상대해! 쇠뇌는 쓰지 마라!"

'저놈이 경호병 우두머리였나?'

외침을 들은 이안이 슬쩍 입술 끝을 말아 올렸다.

그 와중에도 그는 한 마리 늑대의 허리를 반으로 토막 내고, 그 위로 솟구쳐 달려드는 놈의 아가리에 검을 찔러 넣었다.

'또 피범벅이네. 시발….'

내심 투덜댄 것과 달리, 그는 성실하게 늑대의 숫자를 줄여나갔다.

전투는 얼마 지나지 않아 끝났다.

고작 네다섯 마리가 남은 늑대들은, 그제야 두려움이 굶주림을 이긴 듯 도망쳐 버렸다.

"후우…."

이안은 검에 진득하게 묻은 피를 털어내며 숨을 골랐다.

마찬가지로 피범벅이 된 샬롯이 그를 향해 걸어왔다.

희생자를 추스르고 있는 상인 무리를 돌아본 그녀가, 전투 도끼를 다시 등에 묶으며 말했다.

"나는 마부석으로 가 있겠다."

이안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상단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저쪽에서도 횃불을 든 자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아까 부하들에게 소리치던 장창을 든 북부인과, 상인으로 보이는 두꺼운 털옷을 걸친 남자가 선두에 있었다.

"북부인 같지는 않은데. 대단한 실력자였소."

"둘이라고 하지 않았나? 한 명은 안 보이는데."

"한 명은 수인이었소. 저 뒤에 따라오는 마차가 있는데, 거기로 가는군. 저들 둘이면 우리를 전부 죽일 수도 있을 거요."

"그럴 거였으면 진작 죽였겠지. 게다가 생명의 은인인데, 무슨 그런 무례한 말이야? 하여간."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단 얘기요."

속삭이듯 말하고 있었지만, 이안의 귀에는 고스란히 들렸다.

그래,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그가 피식하는 가운데, 털옷 남자가 멈춰 섰다.

서른 중반쯤으로 보이는, 수염을 기른 제국인이었다.

"도와주셔서 고맙소. 난 제국 방주 상단의 상인, 파엘이오."

그가 정중하게 인사했다.

이안이 검을 회수하며 답했다.

"용병, 이안이오. 저 뒤에 있는 녀석들은 내 부하고."

"아. 용병이셨군…!"

파엘의 목소리가 밝아졌다.

그가 이안 쪽으로 다가왔다.

"귀하들의 실력은 똑똑히 보았소. 대단하시더군. 그래서 여쭙겠소만, 혹시 어디로 향하고 계시오?"

"트라벨가로 갈 거요. 일단은 관문부터 넘을 거고."

"잘됐군. 우리도 북부 장벽 관문으로 가는 길이오."

이안의 눈을 마주 보며 미소 지은 그가 자신의 마차 쪽을 가리켰다.

"우선 돌아가서 대화 나누시겠소? 귀하께 맛 좋은 술과 치즈를 대접하고 싶은데. 향신료로 간을 해서 만든 고급 육포도 있소."

퀘스트 완료창과 함께 연계 퀘스트가 이어졌다. 상단 호위.

간만의 소소한 퀘스트구만.

생각하며, 이안이 미소 지었다.

"내 부하에게도 같은 걸 대접하신다면."

***

"보통 용병단이 아니셨군."

일행의 면면을 확인한 파엘은 혀부터 내둘렀다.

피범벅이 된 수인과 눈이 먼 은발 요정. 한눈에 봐도 범상치 않은 조합이었기 때문이다.

"하긴 이런 곳을 오가시는 분들이 보통 용병일 리 없지. 의뢰를 해결하고 돌아가는 길이시오?"

"뭐, 일단은 그런 셈이오."

파엘이 건넨 천으로 얼굴의 피를 닦으며 이안이 말했다.

파엘의 곁에는 직속 경호병인 북부인, 보르만 앉아 있었다. 다른 이들은 마차 주위에 모닥불을 여러 개 피우고 저마다 모여 앉았다.

몇몇은 죽은 설원 늑대의 가죽을 벗기고 있었다.

이안 일행을 힐끔대면서.

어둠 속을 유령처럼 뛰어다니던 이안과 샬롯의 모습을, 다들 흐릿하게라도 목격한 까닭이었다.

"의뢰 내용을 묻는 것은 아니오만, 어딜 거쳐서 오시는 길이시오?"

어지간히 궁금한 모양이군.

이안은 피식대면서도 선선히 대답했다. 파엘이 가져온 술과 치즈가 상당히 맛있다는 사실도, 그를 한결 너그럽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산맥 근처에 볼일이 있었소. 일을 끝낸 다음엔, 야인 마을을 들렀다 오는 길이오."

"야인 마을? 혹시, 마을의 이름을 아시오?"

"검은 숲 언덕 마을."

"허어…."

파엘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보르와 시선을 교환한 그가 말했다.

"거긴 북부 야인 중에서도 특히 강경한 자들이 사는 마을이라, 외지인들에겐 야박하기 이를 데 없는 곳인데. 용케도 거길 들어가셨소. 그 마을이 아직 남아 있다는 사실도 놀랍긴 마찬가지지만."

"북쪽에 꽤 해박하신가 보군."

파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상단 전부가 그런 건 아니지만, 나는 그렇소. 겨울마다 식료품과 돈을 챙겨서 장벽을 넘었으니까. 야인 마을을 돌면서 모피로 바꿔 돌아가는 거요."

술을 한 모금 마신 그가 읊조렸다.

"벌써 5년은 겨울마다 반복하던 일이지. 이문이 쏠쏠하게 남거든."

"잘 아실만한 분이, 왜 고작 이 정도 인원으로 장벽을 넘으셨소? 경호병들 실력이 뛰어나긴 했지만, 설원은 괴물 투성이인데."

"작년까지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소. 눈 덮인 지역만 조심하면 됐지. 불과 일 년 사이에 여기까지 위험천만한 지역이 되었을 줄, 누가 알았겠소."

"관문에서도 경고했을 텐데."

"거기선 매년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오. 설마 정말 이 정도일 줄은 몰랐소. 우리 상단은 그리 규모가 큰 편이 아니라 소문도 늦는 편이오. 그게 아니라도, 이쪽에 대해선 아는 자들이 별로 없었겠지만. 어쨌든, 귀하들이 아니었다면 상단의 소중한 인력을 다수 잃을 뻔했소."

"방주 상단이면 여기서 거리가 꽤 머니까, 소식이 더 늦었겠군."

샬롯이 태연하게 내뱉었다.

그녀는 파엘이 가져다준 술을 만족스럽게 홀짝이고 있었다.

파엘이 멈칫대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우리 상단을 아시오?"

"잘 알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천칭 상단에서 일했으니까."

"오오…! 그러고 보니 천칭 상단에 실력이 엄청난 수인 경호병이 있다는 얘길 들은 적이 있는데. 혹시…?"

샬롯이 대답 대신 어깨만 으쓱였다.

"상단 일은, 그만두신 거요?"

파엘이 욕심이 난다는 눈빛이 되어 물었다.

샬롯이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만뒀지."

"어쩌다가…?"

"모시던 고용주가 죽었거든."

"…아."

파엘의 눈에 맺힌 열기가 빠르게 식었다.

자세히 물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깨달은 듯, 그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시선을 돌렸다.

"그, 요정분은, 입맛이 없으시오?"

"여긴 내가 먹을 게 없네."

쪼그려 앉은 테사이아가 대답했다.

그녀의 입가에 고인 군침은, 음식이 아니라 늑대 피 냄새 때문이었다. 송곳니가 튀어나오려는 걸 꿋꿋이 억누르면서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리라.

"보다시피 독특한 녀석들이라. 굳이 말을 많이 섞지 않는 게 좋으실 거요."

이안이 넌지시 덧붙였다.

파엘이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용병깨나 만나 본 작자로군.

치즈를 한입 깨문 이안이 턱짓했다.

"보아하니 짐 마차에 먹을 게 거의 그대로 실려 있는 것 같은데. 이번 상행은 실패하셨나 보군."

"뭔가 잘못됐다는 건 눈이 덮인 걸 보자마자 알긴 했소만."

땅이 꺼질 듯 한숨 쉰 파엘이 술을 한 모금 마셨다.

"여기서 북동쪽으로 이틀만 가면 야인 마을이 하나 있소. 들어가니 다들 이주할 준비를 하고 있더군. 이제 장벽 너머로 나오는 상행은 의미가 없어진 거요."

"손해가 막심하시겠소."

"맨손으로 돌아갈 순 없소. 남은 건 트라벨가로 가져가서 팔 거요. 가능하면 모피로 바꿔서 돌아가야지. 이문이 많이 남진 않겠지만, 그래도 아예 빈털터리가 되진 않을 거요."

뭐, 한동안 먹을 걱정은 없겠군.

이안이 내심 미소 짓는 사이, 묵묵히 듣고 있던 보르가 내뱉었다.

"난 그것도 반대하는 입장이오."

"또 이러는군. 하여간에, 그런 얘길 일일이 다 신경 쓰다간 아무 일도 못 한다는 거, 알지 않나?"

파엘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이안이 보르를 돌아보았다.

"반대하는 이유가 있소?"

"마을에서 야인 전사들에게 소문을 들었소. 불길한 얘기였지."

"좀 더 자세히 듣고 싶은데."

이안이 술잔을 들며 말했다.

보르가 술을 병째로 들어 마시고는 말했다.

"산맥으로 들어가는 마물과 나오는 마물이 있댔소."

"들어가는 마물과 나오는 마물…?"

"하피나 오거 같은 놈들이 도망치듯이 떠나는 걸 본 전사들이 한둘이 아니랬소. 댁들은 못 보셨소?"

이안은 고개를 저었다. 사실 볼 일이 없었다.

그들이 지나온 길의 마물들은 죄다 그들에게 덤볐다가 죽었으니까.

"반면에 산맥으로 걸어 들어가는 마물들을 본 자들도 있었소. 되살아난 망자들. 고대 왕국의 망령들."

"...!"

술잔을 입에 가져가던 이안이 순간 멈칫했다.

"홀린 것처럼 산맥 쪽으로 걸어가는 걸 봤댔소. 산맥에 뭐가 잠들어 있는지는, 다들 알잖소?"

"거인?"

테사이아가 툭 내뱉었다.

보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테사이아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하지만 거인이라면 우리가- 악!"

테사이아의 입을 재빨리 후려친 샬롯이, 이안을 바라보았다.

"어쩌면 내가 느낀 덤비지 않는 기척도, 그 망자들이었는지도 모르겠군. 이자의 말대로 북쪽으로 걸어가고 있었으니까."

"…여기까지 오는 동안, 죽인 언데드가 몇이나 있었지?"

이내 술을 한 모금 마신 이안이 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잠시 고민한 샬롯이 고개를 저었다.

"하나도 없었군."

"으음…."

이안이 나지막이 침음했다.

그를 지켜보던 파엘이, 이윽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뭔가 짐작 가는 일이 있으시오?"

그를 잠시 바라본 이안이, 이윽고 내뱉었다.

"모르시는 게 좋을 거요."

"...."

"그리고 어쩌면, 댁의 경호병 말을 들으시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소."

"...!"

#10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