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0화
마차에서 뛰어내린 미구엘이 후다닥, 저만치의 풀숲으로 달려갔다.
의자 아래에서 기어 나온 이안이, 루시를 들어 먼저 내려주고는 마차 아래로 내려왔다.
새로 착용한 장비들이 어색한 듯 어깨와 팔다리를 이리저리 돌리는 채였다.
여전히 기본 재질은 가죽이었지만, 어깨나 무릎, 가슴 같은 급소에는 철판이나 사슬이 얇게 덧대져 있었다.
"혹여 제국에서 추격대를 파견할지도 모른다. 염두에 두고 움직이거라."
마차에서 내린 메브가 말했다.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알고 있겠소. 걱정 마시오. 최대한 빨리 움직일 거니까."
계획대로라면, 제국에 루시의 소식이 전해질 때쯤엔 이미 북부에 발을 들였으리라.
"휴. 한나절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생겼을까, 엄청 쫄았네."
미구엘이 풀숲 사이에 숨겨 뒀던 짐 마차를 몰고 왔다.
그가 직접 외성에서 구매한 물건이었다.
이안과 미구엘이 한패라는 걸 증명할 또 다른 의도적 단서였다.
필립과 미구엘이 마차에 짐을 옮겨 싣기 시작한 가운데.
"용병 나리."
시녀가 이안에게 다가왔다.
광기의 밤에 구출했던 생존자.
"제가 보답해 드릴 게 이런 것밖에 없었습니다."
그녀가 내민 건 두툼한 로브와 망토였다.
"북부는 춥다고 들었어요. 도움이 되셨으면 좋겠네요."
"…고맙소."
이안이 머쓱하게 말했다.
이런 보답을 기대하진 않았으니까.
게다가 이안의 것만 준비한 게 아니었다.
미구엘은 물론 루시의 것도 있었다.
루시는 로브를 곧바로 눌러썼다.
백미는 식량이었다.
치즈와 육포를 잔뜩 준비해 준 것이다. 특히 육포는 향신료를 아끼지 않은 고급품이었다.
이안이 보기엔 매 끼니 먹을 수도 있을 것 같은 양이었다.
"부디 루시 아가씨를 잘 부탁드립니다."
깍듯하게 인사한 시녀가 물러났다.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이긴 하군.
이안이 피식대는 사이, 준비가 끝났다.
마차를 반대 방향으로 돌린 미구엘이 훌쩍 뛰어내렸다.
"…그럼, 작별이군."
메브가 비로소 내뱉었다.
이안과 미구엘, 루시를 돌아보는 눈길에 애틋함이 묻어났다.
"뭐, 언젠간 다시 볼 날이 있을 거요."
이안이 덤덤하게 말했다.
"보수를 받아야 하니까."
"...!"
"그러니 그때까지, 죽지 마시오."
"…그래. 살아서 기다리마. 이안."
메브가 다짐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피식한 이안의 시선이, 문득 필립에게로 향했다.
"경이 죽고 싶어 안달 난 것처럼 굴거든, 네가 몸을 던져서라도 막아라. 그것도 종자의 역할이니까."
"예, 나리."
"그리고 여차하면, 왕국을 버려. 네가 왕국에 미련이 없다는 건 이미 알고 있어. 경도 마찬가지요."
필립이 속내를 들킨 듯 헛기침하는 사이, 이안이 다시 메브를 마주 보았다.
"뭣하면 방랑 기사로 살아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경험일 거요."
"…방랑 기사라."
메브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이윽고 그녀가 물었다.
"네가 방랑 기사라면, 어디로 갈 것 같으냐?"
"발길 닿는 대로 가겠지. …그러다 결국엔, 제국으로 갈 거요. 제국을 떠돌다 보면, 반가운 이들을 다시 만나게 될지도 모르니까."
메브의 시선에,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어디까지나 만약이오. 아겔 란이 번영한다면, 그건 그것대로 잘된 일이지."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말을 마친 이안이 훌쩍, 마차의 짐칸에 올라탔다.
뒤에 서 있던 미구엘이 깍듯하게 몸을 숙였다.
"모시게 되어 영광이었습니다, 나리."
"나도 그렇다, 미구엘. 넌 훌륭한 종자이자 길잡이였다."
"제가 알려 준 것도 잊지 마십쇼, 미구엘."
필립이 덧붙였다.
미구엘이 의미심장하게 미소 지었다.
"걱정 마쇼. 댁이 형씨를 기깔나게 모신 건 나도 들어서 잘 아니까. 나도 최선을 다해 보겠소."
"예. 덕분에 즐거웠…."
말하던 필립이 고개를 홱 돌렸다.
미구엘이 피식댔다.
"사내로 태어나서, 울긴."
"눈에 먼지가 들어간 겁니다...!"
"그러시겠지."
필립의 어깨를 툭툭 친 미구엘이, 루시를 내려다보았다.
"인사를 나누십쇼, 아가씨. 어쩌면 지금이 마지막일지도 모릅니다."
"마지막이 아니야."
루시가 차분하게 말했다.
"나도 책을 찾아봤어. 신전에서 공부를 마치면, 다시 세상으로 나갈 수 있댔어. 그때 다시 돌아올 거야. 그러니까요, 언니."
메브를 올려다본 루시가, 이윽고 그녀를 껴안았다.
"다시 만나요. 꼭."
메브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이윽고 루시아의 어깨를 감싸 쥔 그녀가 대답했다.
"그러자꾸나."
뒤로 물러난 루시아가 짐칸에 올랐다.
미구엘이 마부석에 타는 가운데, 짐칸에 기대앉은 이안이 고개를 까딱였다.
"언젠가 또 봅시다."
다각 다각-
두 용병과 남장 소녀가 탄 마차가, 어둠 너머로 멀어졌다.
"…정말 가 버렸군요."
필립이 나란히 선 메브에게 말했다.
"그래. 이제 우리만 남았구나."
대답한 메브가 미련을 떨치려는 듯 단숨에 마차에 올라탔다.
뒤따라 마부석에 오르면서, 필립이 문득 덧붙였다.
"이안 나리가 제게 하신 말씀 말입니다."
"그래."
"해야 할 상황이 온다면, 저는 따를 겁니다. 왕국이 아니라, 나리와 명운을 함께할 생각이니까요."
잠시 눈을 치켜떴던 메브가, 이윽고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염려 말거라, 필립. 나 역시 더는, 왕국을 위해 목숨을 바칠 생각은 없으니까."
마차가 다시 아겔 란으로 향했다.
이안 일행이 멀어져간 방향을 바라보며, 메브가 읊조렸다.
"갚지 못한 보수가 남아 있지 않느냐. 다시 만나야 할… 가족들도 남아있고."
저택으로 향하는 내내, 메브의 시선은 같은 방향을 향해 있었다.
물론, 도시 어딘가에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는 존재가 있으리란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한 채였다.
***
찌익-!
지붕 위를 기어가던 쥐를 날쌘 손길이 낚아챘다.
으직, 몸통을 한입에 깨문 건 흡혈 요정인 테사이아였다.
처마 끝에 고양이처럼 웅크리고 앉은 그녀가, 입에 문 쥐의 피를 빨며 도시 너머를 응시했다.
이제는 은빛으로 반짝이는 머리칼이 희미하게 나풀거리고, 그녀의 오뚝한 코끝이 움찔댔다.
그녀가 노리는 달콤한 냄새의 주인공이, 마침내 아겔 란을 나와 멀어지고 있었다.
"…헷."
테사이아의 눈매가 휘어졌다.
그녀의 뇌리로 지난 시간들이 스쳐 지나갔다.
한동안 야생 동물과 마물을 먹으며 체력을 회복한 그녀는, 이안의 냄새를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그의 체취를 잊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흡혈귀로 거듭난 이래 맡아 본 그 어떤 것보다도 달콤하고 먹음직스러운 향기.
어째서 그에게서 그런 냄새가 나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언젠간 반드시 그의 피를 먹으리란 열망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렇게 몇 주에 걸친 각고에 노력 끝에, 그녀는 체취를 찾아냈다.
뒤를 쫓다 보니 도착하게 된 곳이 이 아겔 란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이곳에서, 뜻밖의 진수성찬도 맞이했다.
붉은 달이 뜬 밤. 맛있는 괴물들이 출몰하기 시작한 것이다.
놈들의 피에는 아주 옅지만, 이안에게서 나던 것과 비슷한 향기가 났다.
물론 지금 그녀의 능력으로는 고작 몇 마리를 빨아먹는 게 전부였다.
하지만 그거면 충분했다.
그녀는 더 빠르고, 더 영민하고, 더 강해졌다.
그녀의 이성을 마비시키곤 하던 갈증이 아직까지도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따라다니다 보면, 그런 것들을 계속 먹을 수 있을 것 같은데."
퉤, 쥐를 뱉은 테사이아가 뇌까렸다.
아직도 이안의 피를 빨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은밀하게 따라다니기만 해도 얻는 게 있으리란 예감이 들었다.
"그러다 보면 언젠간…?"
테사이아가 피범벅인 이를 드러내며 미소 지었다.
이안을 죽일 수 있을 때쯤엔, 그녀 역시 지금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강해져 있으리라.
어쩌면 루 사드의 그 빌어먹을 것들까지 모조리 죽여 버릴 수 있게 될지도 몰랐다.
소리 없이 킥킥대던 테사이아의 고개가, 불현듯 돌아갔다.
"...호오."
이내 그녀의 눈매가 느슨해졌다.
꼬마들이 나란히 서 있었기 때문이다.
촛불을 손에 든 녀석들은, 테사이아를 발견하고 얼어붙은 채였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아이들의 다리가 덜덜 떨렸다.
몇몇은 바지가 축축해지고 있었다.
그녀에 대한 소문은, 이미 외성을 중심으로 알음알음 퍼진 상태였다.
테사이아의 붉은 눈이 은은하게 일렁였다.
"너희들은 아주 운이 좋은 거야."
흥얼거리는 듯한 목소리에, 아이들의 눈동자가 하나둘씩 풀어지기 시작했다.
풀쩍 뛰어오른 테사이아가, 그들의 앞에 착지했다.
붉은 혀가 튀어나온 송곳니를 핥았다.
"다행히 아직은 내가 배가 고프지 않거든. 그러니까, 다들 집으로 돌아가. 자고 일어나면 지금의 일은 깨끗하게 잊을 거야."
아이들이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는 밤에 돌아다니지 말렴. 위험한 세상이니까. 알았니?"
"네…."
"네에...."
아이들이 꿈결 같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싱긋 미소 지은 테사이아가 말했다.
"그럼 간식거리들, 해산."
아이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한 마리 정돈, 챙겨 갈 걸 그랬나."
그 모습을 돌아보며 읊조린 테사이아가, 이윽고 땅을 박찼다.
너풀거리는 은빛 머리칼이 도시 밖의 밤하늘로 멀어졌다.
다음 날 아겔 란에는, 은빛 매를 봤다는 사람이 속출했다.
국왕은 이를 길조로 여겼다.
***
"어디로 가는 길이시라고?"
국경 검문병이 물었다.
신분패와 미구엘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는 채였다.
"루 사드로 가는 길이오. 거기 친척이 살아서."
"뒤에 앉은 두 분은?"
"한 놈은 아들이고. 한 놈은 호위 겸 고용한 친한 아우요."
"먼 길을 가시는군. 부인도 없이."
제법 날카로운 질문.
하지만 미구엘은 오히려 인상을 찌푸렸다.
"아겔 란에서 있었던 일을 모르시오?"
"알고는 있소만."
"그날 아내를 잃었소. 슬퍼할 틈도 없이, 폐하께서 전쟁을 준비한다 하시더군."
슬픔과 분노를 꾹 억누른 듯한 눈으로, 미구엘이 검문병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래서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했소. 평생 칼밥 먹고 살다가 겨우 정착했는데. 나까지 죽으면 내 자식은 누가 키운단 말이오?"
"...."
원망까지 섞인 어조에, 병사가 턱을 긁적였다.
신분패에 새겨진 아겔 란의 이름을 가만히 바라보던 그가 이윽고 내뱉었다.
"아겔 란, 그날 밤이 그렇게 끔찍했소?"
"지옥이 따로 없었소."
"소문이 사실이었나 보군.... 듣자 하니 아겔 란의 보검인 메브 리우렐 경과, 검의 달인인 용병 하나가 타락자인 공작을 죽였다던데. 그것도 사실이오?"
순간 입술 끝을 씰룩댄 미구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이오. 폐하께서 직접 보증하셨소."
"그 난리가 나고서도 전쟁이라니… 폐하는 기어코 우리들을 전부 죽이시려나 보군."
중얼댄 병사가 신분패를 내밀었다.
"아이를 고아로 만들 순 없지. 가시오. 그리고 조심하시오. 벨 론데도 치안이 좋지 않다고 들었소."
"걱정 고맙소."
미구엘이 신분패를 받았다.
길을 막고 있던 병사들이 물러났다.
검문병과 눈이 마주친 이안과 루시가 고개를 까딱였다.
국경 관문이 멀어졌다.
그들이 아겔 란 밖으로 나왔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한참을 묵묵히 앉아 있던 미구엘이, 문득 웃음 지었다.
"것 보시오. 내가 속여 넘길 수 있다고 했지?"
"뭐, 나쁘진 않더군."
이안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관문을 통과하자고 한 건 미구엘이었다.
혹시 모를 왕국군의 추적에 혼선을 만들어 주자는 이유에서였다.
물론 조금만 생각할 줄 아는 자라면, 그들이 루 사드로 가지 않으리란 걸 눈치챌 수도 있겠지만.
어쨌건 고민은 될 테니, 나쁘지 않은 전략이었다.
"소문으로 듣긴 했지만. 벨 론데도 개판인 모양이오."
"떠돌이들이 많이 들르는 나라니까. 외지인이 많을 수록 어수선 할 수밖에 없겠지."
이안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벨 론데는 아겔 란 보다는 기억이 많지 않은 나라였다.
게임에선 루 사드와 북부로 이어지는 연결고리 역할에 불과한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여러 나라와 국경을 인접하고 있어 떠돌이 용병과 상인이 많고, 국경 지역의 관리도 소홀했다.
그런 만큼 저들끼리 치고받는 일도 많은 나라라는 정도가 그가 아는 거의 전부였다.
아겔 란 처럼 야만인들과 대립 중이라거나 한 것도 아니어서, 군사력이 그리 강하지도 않았다.
용병이나 상인, 사병을 거느린 영주들이 깽판 치기 딱 좋은 나라라는 의미였다.
아겔 란의 국왕이 전쟁의 승리를 자신하는 것도 그런 부분들 때문일 터였다.
하지만 우습게도, 이안이 알기론 전쟁의 판도를 바꿔 놓은 것도 바로 그 용병과 상인들이었다.
공통의 적 앞에, 대립하던 이들이 하나로 뭉친 것이다.
이번에도 크게 다르진 않으리라.
"뭘 만나든 무슨 걱정이겠소. 검의 달인이 우릴 호위해 주시는데."
넌지시 이아진 농담에, 이안이 코웃음을 쳤다.
"은근슬쩍 묻어가지 마라. 지켜야 하는 건 루시뿐이야. 너랑 나는 여차하면 같이 목숨 걸고 싸울 입장이고."
"그러니 난 요 녀석으로 후방 지원만 하겠단 거요. 그래서 대신 잡일을 전부 내가 도맡는 거잖소?"
미구엘이 옆에 놓은 석궁을 슬쩍 들어 보였다.
이안이 실소를 흘렸다.
"어이가 없군. 북부 출신이란 놈이 칼 솜씨가 형편없다니."
"그런 게 다 편견이오. 북부인이라고 다 우락부락한 근육질에 머리만 한 도끼를 들고 다니는 게 아니란 말이지. 물론 그런 곰 같은 자들도 있지만, 나처럼 생존과 지략에 특화된 여우 같은 부류가 훨씬 많소."
미구엘이 자신의 관자놀이를 톡톡 두드렸다.
"그게 훨씬 살아남기 좋으니까. 그래도, 활은 꽤 잘 쏘잖소?"
"뭐, 그렇긴 하지."
한 발 쏘면 재장전하는 데 오래 걸려서 그렇지.
미구엘이라면 하급 마물이나 촌구석 강도쯤은 한 발에 한 놈씩 죽일 수 있으리라.
도움도 안 되면서 앞에서 얼쩡대느니 차라리 그게 나았다.
"형씨가 생각하는 북부인은 오히려 남서부 해적 놈들에 가깝소."
"그것도 편견 아니냐?"
"어, 그런가…?"
중얼대며 웃음 지은 미구엘이 이내 시선을 돌렸다.
"아가씨, 아니, 루시. 불편한 건 없냐?"
그가 어색한 반말로 덧붙였다.
루시가 루시아가 아닌 루시페르가 되면서, 존칭을 쓰지 않기로 한 것이다.
혹시 모를 말실수를 막기 위해서였다.
"괜찮아요."
이안의 반대편에 기대 있던 루시가 덤덤하게 대답했다.
그저 이동만 할 뿐이라 해도, 어린 몸으로는 고될 수밖에 없건만.
그녀는 앓는 소리 한 번 하지 않았다.
가뜩이나 적은 말수가 더 줄어든 게 전부였다.
"경치 구경이라도 하면 좀 덜 심심할 텐데. 염병, 볼 것도 없네."
미구엘이 입맛을 다셨다.
벨 론데로 들어섰어도, 풍경은 크게 달라진 게 없었다.
먹구름 낀 하늘. 칙칙한 들판. 관도 저 너머까지 완만하게 이어진 거뭇한 언덕. 능선을 따라 멋대로 자란 나무와 풀숲.
"...?"
이안의 시선이 마차 정면으로 돌아간 건 그 직후였다.
눈썹을 꿈틀댄 그가 내뱉었다.
"루시. 누워라. 미구엘, 넌 앞을 봐."
엉겁결에 그가 시키는 대로 한 미구엘이 후드를 눌러쓰며 물었다.
"뭐요? 뭔데?"
"아직 몰라. 뭔가 잔뜩 오는군."
"…그게 무슨."
미구엘이 눈을 끔뻑였다.
그에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으니까.
당연한 일이었다.
이안은 저 멀리에서 희미하게 번지는 수많은 발소리를 들은 거였으니까.
사냥개의 꼬리 부적을 얻은 이후로, 오감 중에서도 특히 청각과 후각이 예민해진 덕분이었다.
언덕 위로 무언가 삐죽 솟아오르는 것을 발견한 미구엘이, 이윽고 이안을 돌아보았다.
"저 소리를 들으셨다고?"
"그래."
"아니, 대체 어떻게...."
"잘."
이안은 언덕 너머로 모습을 드러내는 무리들을 뚫어질 듯 노려보았다.
언덕 위로 가장 먼저 솟아오른 깃발을 한 눈에 알아 보았기 때문이었다.
검은 바탕을 4등분하는 십자가.
그리고 그 중앙의 노란 원.
제국의 국기였다.
#051화
"이런 시벌, 뭐가 저렇게 많아…?"
미구엘이 탄식하듯 읊조렸다.
서른도 넘어 보이는 무리였다.
무리를 호위하는 말 탄 경호병만 열 명도 넘었다.
"제국의 상단이군."
이안이 내뱉었다.
제국의 상인들은 변방의 왕국들을 상대로도 장사를 했다.
게임에서도 그랬다. 랜덤하게 출몰하는 그들은, 월등한 성능을 가진 제국제 물건들을 팔았다.
물론 가격도 월등했지만, 초반부 게임의 난이도를 낮춰 주는 일등 공신들이었다.
그때는 그렇게 반가웠었는데.
이안이 혀를 차는 사이, 눈을 가늘게 뜬 미구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네. 제국에서 온 상단이 맞소. 원래 1년에 딱 한 번 오는 자들인데. …잠깐만. 저거 제국기요? 염병할. 설마?"
그의 얼굴도 뒤늦게 구겨졌다.
상단의 깃발 위에 제국기를 달았다는 건, 일행에 제국의 귀빈이 포함되어 있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유력가의 사절이나 귀족들은, 이런 식으로 목적지가 같은 상단의 보호를 받으며 움직이는 경우가 많았다.
상단 입장에서는 보호비라는 추가 수입과 제국기를 들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으니, 일종의 상부상조였다.
어쨌건 공교로운 시기였다.
"소란 떨지 마라. 자연스럽게 지나치면 돼."
내뱉으며, 이안은 가까워지는 상단 무리를 눈에 담았다.
말부터 마차까지 온통 검은색으로 덮인 자들이었다.
마부와 하인들까지도 소속을 드러내듯 검은 옷을 입었다.
상단 깃발에 그려진 것과 같은 노란 저울이 곳곳에 새겨져 있었다.
'저게 무슨 상단의 상징이더라.'
생각하는 사이, 어느새 그들이 지척까지 가까워졌다.
짐 마차를 길 가장자리로 몰며, 미구엘이 후드를 더 깊이 눌러썼다.
누운 루시의 머리를 자신의 허벅지 쪽으로 당기며, 이안은 경호병들을 눈에 담았다.
마석 박힌 검은 마갑을 씌운 흑마.
그 위에 탄 자들도 하나같이 검은 갑옷 차림이었다.
자세히 보면 그 구성 요소는 저마다 조금씩 달랐지만.
일개 상단의 호위병이라기엔 지나치게 훌륭한 무장이란 사실엔 변함이 없었다.
아겔 란의 친위 기사단도 저들보다 중무장하진 않았으니까.
하지만 이런 이질감이야말로, 저들이 제국에서 왔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제국의 문명 수준은 변방 왕국들을 최소 몇 세기는 앞서 있었으니까.
달리 제국이 아니었다.
과거 마족의 침공이 아니었다면, 그리고 검은 벽이 솟아오르지 않았더라면, 대륙은 저들의 손에 통일되었으리라.
사실 지금도 늦지는 않았겠지만.
제국은 변방에 병력을 낭비하느니, 왕국들이 알아서 영토를 지키며 조공을 바치게 하는 쪽을 택했다.
큰 나라일수록 자신들을 질투하고 선망하는 자들이 있어야, 내부의 결속과 국가의 자존심이 유지되는 법이었다.
짐 마차와 상단이 교차했다.
경호병. 선두의 검은 천에 덮인 짐 마차. 내부가 보이지 않는 고급스럽고 단단해 보이는 마차까지.
차근하게 이어지던 이안의 시선이 이윽고, 그 마차를 지키는 경호병에게서 멈췄다.
'수인…?'
흑마 위에 꼿꼿하게 앉은 그, 혹은 그녀는 인간과 짐승을 섞어 놓은 것처럼 생긴 이종족이었다.
퓨마나 표범을 연상시키는 이목구비와 검갈색의 털.
갑옷 사이로 비치는 피부에도 융단 같은 털이 돋아 있었다.
수인은 게임에서도 볼 일이 많지 않은 종족이었다.
마법사가 미치광이나 예비 타락자 취급을 받듯.
사람들은 저들을 마족의 하수인이나 예비 마수쯤으로 여겼다.
이 암흑시대는 인종과 국가를 넘어 종간의 차별까지 존재했다.
하지만 저 수인 경호원은 아주 태연하고 당당해 보였다.
강자만이 가진 특유의 여유가 전신에서 배어 나왔다.
"...."
그 순간 문득, 수인이 이안을 돌아보았다.
주황색 눈동자.
이안은 세로로 길게 찢어진 동공을 피하지 않고 마주했다.
그러면서도 로브 아래에 숨겨 둔 검에 슬쩍 손을 얹은 채였다.
언제라도 뽑아 들 수 있도록.
수인이 위협하듯 낮게 으르렁댄 건 그 직후였다.
"...."
아무런 반응이 없는 이안이 오히려 재미있다는 듯, 송곳니를 혀로 훑으며 미소지은 그가 그대로 마차를 지나쳤다.
안장 위, 비늘처럼 겹겹이 겹쳐 이어진 꼬리 갑주가 느긋하게 꿈틀댔다.
상단 행렬이 멀어졌다.
저들의 목적지가 어딜 지는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흐어… 시부럴...!"
바싹 얼어 있던 미구엘이 비로소 탄식했다.
후드를 홱 벗어 버린 그가 숨을 몰아쉬었다.
"심장 터지는 줄 알았네. 형씨, 그냥 가고 있는 게 맞소? 다시 돌아온다거나 그러진 않고?"
"소란 떨지 마라. 우리가 누군 줄 알고 돌아와?"
이안의 핀잔에, 그가 이마의 식은땀을 훔쳤다.
"그야 그런데…. 그 빌어먹을 제국기 못 보셨소? 장담컨대 국왕을 만나러 온 그, 어쩌고 제후 가문의 인간이 섞여 있을 거요."
"내가 보기에도 그런 것 같더군."
이안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빨리 온단 얘긴 못 들었는데. 경도 정확한 일정까진 몰랐나 보군."
그나마 아겔 란 국경을 넘은 후에 마주쳐서 다행이었다.
아직 아겔 란도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면, 꽤 골치가 아파졌으리라.
"우리, 이제 많이 위험해진 건가요?"
루시가 문득 물었다.
이안은 아직도 허벅지를 베고 누워 있는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위험한 건 널 데리고 도망친 이후부터 항상 그랬어. 조금 더 위험해졌을 뿐이지."
"…형씨, 그럴 땐 그냥 걱정하지 말라고 하는 게 맞는 것 아니오?"
뭐래. 애도 알 건 알아야지.
이안이 코웃음 치는 사이, 문득 루시가 덧붙였다.
"정말 정말 위험한 순간이 오면, 그땐 그냥 절 버리고 떠나세요."
"...?"
"저를 죽이진 않을 테니까요. 그게 두 분이 죽는 것보단 나아요."
뭐라는 거야, 요 망할 꼬맹이가.
이안이 루시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콱 쓸어내렸다.
"...?!?!"
루시가 영문을 모르겠단 얼굴로 눈을 마구 깜빡댔다.
"그럴 일은 없으니까, 애 같지 않은 소리 그만해라."
"나도 동감이오. 아니, 이야. 두고 가라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오히려 이성이 돌아온 얼굴로, 미구엘이 이안을 바라보았다.
"내가 볼 때, 저들은 길어야 일주일이면 아겔 란에 도착할 거요."
"화로의 사원까진 얼마나 걸리지?"
"한 달...? 글쎄. 어쩌면 그보다 더 걸릴 수도 있소. 나도 워낙 오래된 데다가, 마차를 끌고 움직여 본 것도 아니라서."
"흐음."
이안은 잠시 손가락을 까딱였다.
최상의 시나리오는 라르무트가의 놈이 그냥 빈손으로 부랴부랴 돌아가 주는 건데.
"…그게 아니라면, 최소한 한 번은 추적자를 처치해야 할지도 모르겠군. 왕국에서도 추적자를 보냈다면, 두 번."
"무장이 장난 아니었소. 거의 리우렐 나리를 보는 것 같았달까."
경의 무구가 전부 제국제니까 당연하지.
생각하며, 이안이 말을 이었다.
"달라질 건 없어. 넌 길을 똑바로 찾고, 말에 탈이 생기지 않게만 신경 써라. 길을 잃거나 말이 죽어 버리면, 그게 더 큰 문제가 될 테니까."
그들의 이동 속도는 지금도 충분히 빨랐다.
이 이상 행군 속도를 늘리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들르는 마을마다 말을 갈아 치운다면 불가능하진 않겠지만, 한 번만 실패해도 짐을 다 버리고 걸어서 이동하게 될 터였다.
"알겠소. 걱정 마슈. 최선을 다할 테니까. 하지만… 정말 그거면 되겠소?"
"안 되면 어쩔 건데? 꼬리가 붙으면, 그 꼬리를 잘라 버릴 뿐이야."
대비책이 없는 것도 아니고.
태연하게 공언한 이안이,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아까 그 수인 경호병이 뇌리를 스쳤다.
"…제국제 장비가 잔뜩 생길지도 모르겠군."
중얼댄 그가 이내 시선을 거뒀다.
추적대에 대한 고민은, 사실 그리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낮에는 스쳐 가는 떠돌이들을. 밤에는 주위를 어슬렁대는 마물들을 신경 쓰느라 매 순간이 새로운 긴장의 연속이었기 때문이다.
미구엘이 제국 상단을 언급하지 않게 되는 데에는, 닷새면 충분했다.
***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납치라니요."
아겔 란 국왕에게 형식적인 인사를 올린 후 국고를 탈탈 털 생각이었던 천칭 상단의 하비에르는, 동행한 라르무트 가신의 호통을 들은 순간 생각을 바꿨다.
큰 문제의 냄새가 났으니까.
그는 저들의 위기가 자신에게는 기회가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문제가 클수록, 그걸 해결하고 손에 넣게 될 황금의 무게도 늘어나리라.
"우리도 예상치 못한 상황이오. 비극적인 사건을 해결하는 데 큰 공을 세운 장본인이, 또 다른 비극을 만들어 낼 줄이야."
왕좌에 앉은 국왕, 어윈 2세는 난처함과 언짢음을 숨기지 못했다.
물론 그를 올려다보는 라르무트의 사절만큼 대놓고 노여움을 드러내고 있지는 못했다.
"이는 제국의 비극이기도 합니다! 그 아이가 어떤 아이인지 잊으셨습니까? 영공께서 직접 점찍은 아이입니다. 그런 귀중한 아이가 고작, 일개 용병에게 납치되어 행방불명이라면 영공 전하께서 어떻게 여기실 것 같습니까?"
"그것이…."
"폐하께서 숨기셨다 여기실지도 모르지요. 모욕당했다 느끼실지도 모릅니다."
어윈 2세의 안색이 파리해졌다.
"…찬란한 여신께 맹세코, 그렇지 않소."
라르무트 가는 제국의 5대 제후 가문 중 하나였다.
그들의 심기를 거스른다면, 아겔 란의 대업은 하룻밤의 꿈으로 끝이 날 것이 분명했다.
왕국의 적들을 지원해, 오히려 왕국을 불바다로 만들지도 몰랐다.
저들에겐 그만한 힘이 있었다.
"대체할 인물을 찾아봄이 어떻겠소?"
"그 아이에 필적하는 재능을 가진 이가 또 있는 게 아니라면, 전하를 만족시켜 드릴 수 없을 겁니다."
"…제길. 이미 추적대를 보냈으니, 조금만 말미를 주시오."
"대체 어떤 정신 나간 자가 라르무트의 점지를 받은 아이를 납치한단 말입니까? 혹, 그 리우렐가에서 수작질을 부린 건 아니겠지요?"
"말도 안 되는 소리요."
어윈 2세가 펄쩍 뛰었다.
이 판국에 메브 리우렐까지 잃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납치한 자들은 용병으로, 왕가와 리우렐가의 신뢰를 얻은 후 말도 되지 않는 보상을 요구했소. 이를 거절하자 아이를 납치한 것이오."
"…설마, 그 아이의 정체를 그자들도 알고 있는 겁니까?"
"그만큼 신뢰를 얻은 자들이었소. 리우렐가의 가주가 직접 진술한 내용이며, 그녀는 엄정한 여신의 사도이니 거짓은 아닐 것이오."
"그런 어리석은 짓을…! 허면, 사흘의 말미를 드리면 되겠습니까?"
"고작 사흘…? 으으음."
갈등과 고민이 극에 달했다.
하비에르의 상인으로서의 감각이, 바로 지금이 자신이 나설 때라고 속삭이고 있었다.
"아뢰옵기 황송합니다만."
고개를 숙인 그가 입을 열었다.
어윈 2세와 사절의 시선이 그에게로 쏠렸다.
"주제넘은 제안을 하나 올려도 괜찮을지요."
어윈 2세가 고개를 끄덕였다.
"고하시오. 지금은 자리와 신분을 따질 때가 아니니."
"그자들이 영애를 납치한 것이 보름도 지나지 않았다 하셨지요. 그렇다면 아직 벨 론데를 빠져나가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소인의 수하들이라면… 충분히 영애를 되찾아 올 수 있을 거리이지요. 약간의 단서만 있다면 말입니다."
"...."
어윈 2세의 시선이 하비에르의 뒤에 선 네 호위병을 바라보았다.
검은 갑옷. 자세히 보면 그 생김새나 각자의 무장도 달랐지만, 하나같이 범상치 않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심지어 하비에르의 바로 뒤에 선 자는, 저주받을 수인이었다.
필시 남몰래 어둠을 숭상하는 타락한 족속이겠으나, 그만큼 실력만큼은 확실할 터였다.
"이런 상황에 어찌 도움을 마다하겠소."
"물론 일방적인 도움은 아니옵니다. 아시겠지만, 저는 만사에 가격을 매기는 천한 족속이라서 말입지요."
"그야 당연히-"
"막중한 사안이오."
사절이 어윈 2세의 말을 잘랐다.
어윈 2세의 얼굴이 똥을 씹은 것처럼 구겨졌으나, 자신의 말을 자른 무례를 지적하지는 못했다.
"천칭 상단의 능력은 의심치 않소만. 귀하가 부리는 자들만 보낼 수는 없소. 만일 아이가 죽거나 온전치 못한 상태로 돌아온다면, 전하의 공분을 사게 될 것인데."
그렇게 말할 줄 알았지. 겁 많은 놈.
회심의 미소를 삼키며, 하비에르가 고개를 숙였다.
"제가 직접 나서도록 하겠습니다. 나리께선 이곳에서 상단과 함께 귀국하십시오. 가져온 물건들을 정리할 동안만 기다려 주시면 됩니다."
"직접 나서신다는 것은, 상단과 귀하의 이름을 걸겠단 말씀이시오?"
책임도 떠넘기겠단 소리였다.
실패한다면 그저 실패로만 끝나지 않겠지만.
하비에르는 이런 촌구석 놈들을 상대로 한 일이 실패할 리 없다고 확신했다.
오히려 더 큰 보상을 요구할 명분만 되어줄 터였다.
마침 내년에 상단의 네 총단주 중 하나가 은퇴하니, 그 자리에 오를 수 있게 될지도 몰랐다.
그렇게 된다면 더 이상 이런 냄새나는 촌구석을 오가며, 왕족이랍시고 건방 떠는 촌놈들을 떠받들 일도 없어지리라.
"물론입니다, 나리. 대신 제 목과 상단의 이름을 거는 만큼…."
"성공한다면, 합당한 상을 내릴 것이오. 라르무트는 은혜를 잊지 않으니. 물론, 무능도."
그리 말하는 사절의 시선이 어윈 2세를 훑고 지나갔다.
너 때문에 큰 손실이 생겼다는, 명백한 힐난의 의미.
어윈 2세가 모르는 척 손을 마주쳤다.
"고난을 주시고 또한 구원자를 보내주시다니. 이 또한 오만하지 말라는 찬란한 여신의 뜻이리라. 그래서, 무엇이 궁금하신가?"
하비에르와 어윈 2세의 대화가 이어졌다. 필요한 모든 정보를 들은 하비에르가 공손하게 뒤로 물러서자, 이윽고 사절이 어윈 2세를 올려다 보았다.
"하면, 마지막으로 청을 하나 올리겠습니다, 폐하."
"말씀하시오."
"타락자, 레지스의 집을 수색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그 저택에는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소만."
"타락자의 저택이라면 어떤 저주받은 물건이 숨겨져 있을지 모릅니다. 영공 전하께선 그런 물건을 수집해 연구하기를 즐기시지요. 혹여 하나라도 찾을 수 있다면, 전하의 노여움을 조금은 가라앉힐 수 있을 것입니다."
"으음…. 알았소, 그리 하시오."
어윈 2세가 꺼림칙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허리를 숙인 라르무트의 가신이 그대로 몸을 돌렸다.
이윽고 왕성을 나선 그가 하비에르를 돌아보았다.
"반드시 되찾아 와야 하오. 이 촌것들을 믿느니 귀하를 믿는 것이 백 배는 낫겠지. 내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 말씀하시오."
이 콧대 높은 라르무트 놈이 이렇게까지 말할 정도라니.
정말 보통 아이가 아닌 모양이군.
생각하며, 하비에르는 허리를 숙였다.
"저만 믿으십시오. 영애를 무사히 모시고 돌아가겠습니다."
"그래야 할 것이오. 귀하는 물론, 상단의 이름도 걸려 있음이니. 하면, 나는 이만 저택을 수색하러 가 봐야겠군."
내뱉은 가신이 몸을 돌렸다.
이건 금괴로 치면, 100개쯤 놓아야 균형이 맞을 일이로군.
그 뒷모습을 보며 셈을 끝낸 하비에르가, 이윽고 시선을 돌렸다.
"들었겠지? 나뿐 아니라 너희 모두의 출세가 달린 건수다."
네 경호원들이 자신만만하게 미소 지었다.
그들은 하비에르의 최정예였다.
하나하나가 최소 금괴 스무 개씩의 값어치를 하는 실력자들.
"국왕께서 과장이 심하시더군. 검의 달인이라니. 푸후?."
한 녀석의 말에 경호원들이 낮게 웃음 지었다.
하비에르도 마찬가지였다.
이 촌동네에서 돈을 주고 살 만한 실력자는 티르 엔의 사도인 메브 리우렐뿐이었다.
뛰어난 자들은 제국에 모일 수밖에 없으니, 당연한 이치였다.
그런데 고작 떠돌이 용병이 메브 리우렐이 보증한 검의 달인이라니.
앞뒤가 맞지 않는 소리였다.
필시 리우렐이 겸양의 미덕을 보인 것일 터.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습니다."
가르릉대는 숨소리가 섞인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이어졌다.
하비에르가 미소 지었다.
"그래, 샬롯. 말해 보거라."
수인 경호원을 바라보는 그의 눈길이 끈적하게 일렁였다.
샬롯 본인을 비롯해 경호원들 모두가 혐오감을 느끼는 눈빛이었으나, 내색하는 자는 없었다.
"아겔 란 국경을 넘기 전에 스쳐 지나간 자들이 있었지요. 한 놈의 눈빛이 인상적이었습니다. 포식자의 느낌이 들었지요, 저처럼."
수인 전사, 샬롯이 붉은 혀를 날름거리며 말했다.
그 요망한 놀림에 시선을 빼앗긴 채, 하비에르가 말했다.
"해서, 그자들이 문제의 납치범들이란 말이냐?"
"확신할 순 없습니다만, 시간대가 일치합니다. 정말 루 사드로 가는지는 알 수 없으니, 벨 론데를 빠져나가기 전에 잡아야 합니다."
"저도 암표범의 말에 동의합니다."
"저도."
암표범이란 말에 샬롯이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댔으나, 경호원들은 눈도 깜빡하지 않았다.
그들을 노려보며 샬롯이 덧붙였다.
"제가 뒤를 쫓겠습니다. 카일을 곁에 붙여 주십시오. 가는 길에 죽여야겠습니다."
"야, 이년아. 네가 어르신의 총애를 받는 건 아는데. 이건 우리도 양보 못 해. 검의 달인을 죽이면 달인의 반열에 오를 수 있는데, 이걸 어떻게 양보해?"
다시 한번 코웃음이 번졌다.
하비에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샬롯. 너는 내 곁을 지켜야지. 케네스와 카일을 보내겠다. 부하가 필요한가?"
샬롯을 놀리던 둘, 케네스와 케인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피 냄새가 나는, 숙련된 살인자의 미소였다.
"신속이 생명인데, 필요 없습니다. 오래 달려야 할 것 같으니 마석이나 챙겨 주십시오. 별거 아닌 것들 때문에 애마의 심장이 터지면, 그게 더 손해니까."
"넉넉하게 챙겨 가라. 계획이 바뀌었으니, 나는 일 처리를 끝내고 내일부터 뒤따르도록 하지. 이정표를 남기는 것도 잊지 말고."
케네스와 카일이 서로의 팔뚝을 맞부딪치며 몸을 돌렸다.
"…조금 애를 태워서 돌아가야겠군. 그래야 그 애새끼 몸값이 더 높아지겠지."
읊조린 하비에르도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흥."
멀어지는 둘을 아쉬운 듯 바라보던 샬롯이, 이윽고 낮게 그르렁대며 하비에르의 뒤를 따랐다.
그럴 일은 없어 보였지만.
그녀는 내심 케네스와 카일이 실패하기를 바랐다.
용병으로 추정되는 자의 서늘한 눈빛이 아직도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런 눈을 가진 자를 죽일 때가, 그녀가 맹수로서의 본능을 충족시키는 유일한 순간이었다.
#052화
어둠 한복판.
콰직! 콰직!
이안이 도끼질을 하듯 검을 내리쳤다.
궤적을 따라 녹색 체액이 사방으로 튀고, 회색 트롤의 굵직한 목이 완전히 잘려나갔다.
이마가 징그럽게 튀어나오고 흉측한 이빨이 돋은 머리가 힘없이 땅을 굴렀다.
"후… 하아."
이안이 굽혔던 허리를 일으켰다.
멀지 않은 곳에 또 다른 회색 트롤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160cm 남짓한 키에 비정상적으로 긴 근육질의 팔과 커다란 손.
심지어 짝을 지어 다니는 통에 상대하기 짜증 나는 놈들이었다.
하지만 이안의 미간이 좁아진 건 그 때문이 아니었다.
"…또 이 느낌이네."
야행성 동물처럼 새카맣게 변한 그의 눈동자가 어둠을 훑었다.
며칠 전부터, 때때로 시선 같은 게 느껴질 때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감각을 곤두세워도, 자신을 바라보고 있을 만한 존재를 찾을 수는 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래도 이건 영적인, 혹은 마법적인 감각에 가까운 모양이었다.
콘라우드의 정수에서 때때로 느껴지던 시선처럼.
"...쯧."
뭔진 몰라도 걸리면 뒈진다, 진짜.
혀를 찬 이안이 몸을 돌렸다.
야영지가 가까워졌다.
"다 끝났소? 비명이 엄청나던데."
모닥불 앞의 미구엘이 내뱉었다.
그는 루시를 온몸으로 가린 채, 손에 쇠뇌를 움켜쥐고 있었다.
"그래. 석궁 치워."
덤덤하게 대꾸하며 이안이 모닥불 앞에 다가섰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미구엘이, 미리 준비했던 천을 던졌다.
얼굴에 튄 트롤의 체액을 익숙하게 닦는 이안에게, 그가 물었다.
"뭐였소?"
"트롤."
"또? 엊그제도 그러더니…. 음, 기분 탓인지도 모르지만 말이오."
미구엘이 머뭇대며 덧붙였다.
"뭔가, 흉악한 놈들만 습격해 오고 있지 않소? 북부라면 모를까, 벨 론데는 아겔 란이랑 별반 다를 것도 없을 텐데."
은근히 예리한 놈.
이안은 어깨만 으쓱였다.
감각이 예민해진 덕에, 그는 주변을 어슬렁대는 것들의 기척을 전보다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별 것 아닌 놈들은 탐색만 하다 사라지고, 트롤이나 밤의 추적자, 동굴 거미처럼 비교적 강한 놈들만 접근해 온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다만 왜 그런 변화가 생긴 건진 설명할 도리가 없었다.
퀘스트 때문이거나, 이안 자신에게 생긴 어떤 변화 때문이거나.
어쩌면 아까 느낀 그 마법적인 시선과 관련이 있을지도.
"좋게 생각해. 적어도 오늘 밤은 더 습격받을 일 없을 테니까."
입맛을 다신 미구엘이 투덜댔다.
"이게 다, 쓸데없이 땅덩이가 커서 그렇소. 관리할 능력도 없으면서 땅만 나눠 가졌으니, 원."
"언제는 그래서 너 같은 용병들이 먹고사는 거라며?"
"그래도 어지간해야지. …하긴, 저 대단한 제국에도 방치된 마경이나 오염된 땅이 여럿이라는데. 왕국들이 무슨 재주가 있어서 전역을 관리하겠소. 시대를 탓해야지."
오늘따라 불평이 많네, 새끼.
이안은 육포를 씹으며 피식댔다.
어쨌건 아예 틀린 말은 아니었다.
대륙의 넓이에 비해, 인간의 숫자가 너무 적은 건 사실이었으니까.
인구가 지금의 두 배만 되어도 이 지경까진 아닐 텐데.
그나마도 머릿수가 좀 늘자 준비한다는 게 전쟁이니, 상황이 나아지리란 기대도 할 수 없었다.
'전쟁이 계속되다 보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고 말이지.'
이안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어차피 개인이 막을 수 있는 흐름이 아니었다.
그가 앞날을 예견한들 믿지도 않을 테고. 불온하거나 야심에 가득찬 이들은 한둘이 아니었으니까.
경험상, 일어날 일은 어떤 식으로든 일어났다.
그저 게임에서 같은 최악의 상황만은 맞이하지 않도록 하는 게,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루시가 불쑥 입을 연 건 그때였다.
이안과 미구엘이 동시에 바라보는 가운데, 그녀가 덧붙였다.
"검술. 저도 배우고 싶어요."
"뭐라고…?"
"최소한의 자기방어는 할 줄 알고 싶어요. 짐만 되는 게 아니라."
"네가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우리가 있는 거다."
이안이 딱 잘라 말했다.
루시가 고개를 저었다.
"만약의 경우라는 게 있잖아요."
"안 돼. 넌 칼을 잡기엔 너무 어려. 뭔가를 죽이기엔, 더 어리고."
이안은 단호했다.
아무리 이 세계에 적응했다 해도, 변치 않는 부분들이 있었다.
아이에게 날붙이를 들게 하지 않는 것도 그중 하나였다.
루시가 덧붙였다.
"전 이미 열두 살인 걸요."
"…다 컸다고 말하고 싶은 거냐?"
이안이 헛웃음을 흘렸다.
열둘이면, 아무리 많이 쳐줘도 중딩이거든?
미구엘의 미간이 좁아졌다.
"열둘이나 됐다고? 겉보기론 아무리 많아도 열 살 정도라고 생각했는데. …서부 사람이라 발육이 느린가."
이안이 어이없다는 듯 미구엘을 돌아보았다.
그게 놀라웠던 거냐고.
"하긴. 열둘이면 자기 자신을 지키는 법 정도는 알아야 할 나이이긴 하지."
"...."
그가 턱수염을 긁적이며 덧붙인 말에, 이안의 미간이 구겨졌다.
그의 표정을 본 미구엘이 어깨를 으쓱였다.
"왜 그러슈? 내가 처음 사냥에 성공해서 뭘 죽인 게 열둘이었소. 북부에선 빠른 것도 아니지. 진짜 타고 난 놈들은 그 나이에 이미 사람도 죽여 봤었소."
"…아, 그래. 그러시겠지."
외눈박이 세상에선 양 눈이 이상한 거라더니.
지금이 딱 그 꼴이었다.
"호신술 정돈 배워서 나쁠 거 없잖소? 기사 가문의 피가 흐르니 배움도 빠를 거고."
루시가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를 돌아보는 미구엘의 눈길이 따스했다.
훈훈하고 지랄이야.
이안이 한숨 쉬듯 입을 열었다.
"넌 칼질 같은 건 배울 필요도 없다, 루시. 그게 아니어도 네 몸 정도는 얼마든지 지킬 수 있어."
"…어떻게요?"
루시가 눈을 끔뻑대며 되물었다.
진짜 몰라서 묻는 건가.
"넌 타고난 재능이 있잖아."
"제 저주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
진짜 모르는 것 같은데.
이안은 그제야 미간을 좁혔다.
"경한테 아무 말도 못 들었냐?"
"무슨 말씀인지 이해를 못 하겠어요."
"그럼 넌 왜 화로의 사원으로 가겠다고 한 건데."
"거긴 안전하댔어요. 지금보다 훨씬 많은 것들을 배울 수도 있다고 했고요."
그냥 가라고 해서 간다고 한 거군.
이안이 헛웃음을 지었다.
메브는 이안이 사실을 알고 있으니 그걸로 충분하다 여긴 게 틀림없었다.
루시가 미리 알아서 좋을 게 없으리라고도 생각했겠지.
하지만 이안의 생각은 달랐다.
"너에겐 특별한 재능이 있다. 화로의 사원으로 가는 건, 그 재능을 꽃피우기 위해서야."
"그게… 무슨 재능인데요?"
루시뿐만 아니라 미구엘도 눈을 빛내며 바라보았다.
이안이 대답 대신 손을 펼쳤다.
화륵. 그의 손아귀 위로 불덩이가 피어올랐다.
"...!"
루시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화염구와 이안을 번갈아 바라본 그녀가 이윽고 내뱉었다.
"마법사... 셨어요?"
평소 성격을 생각하면, 최대치의 경악이리라.
이것도 몰랐다고?
이안의 시선을 받은 미구엘이 어깨를 으쓱였다.
"비밀이잖소. 뭘 또 새삼스럽게."
다들 입이 어지간히 무겁구만.
코웃음 친 이안이 다시 루시를 바라보았다.
"그래. 나는 마법사다. 반쪽짜리지만."
"이제 루시 아가씨도 비밀을 공유하는 사이가 됐군. 좋은 일이오. 한층 가까워진 기분이군."
"루시페르."
"그래, 루시 아가씨가 아니라, 루시페르."
불덩이에 시선을 완전히 빼앗긴 상태임에도, 루시가 미구엘의 말을 정정했다.
화염구를 위아래로 움직이며, 이안이 말을 이었다.
"네 재능은 나보다 훨씬 더 대단해. 네가 마음만 먹는다면 사람 하나를 숯덩이로 만드는 건 일도 아닐 거다. 그러니까, 몸을 지킬 수단이 없다고 생각하지마."
"…자꾸 끼어들어서 미안한데 말이오. 루시한테 그렇게나 대단한 능력이 있었소?"
"그래. 대마법사의 재능이지."
"맙소사. 요즘은 마법사 한 명 보기도 어려운데. 내 옆엔 둘이나 있군."
루시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이안이 한 것처럼 활짝 편 손아귀.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자, 루시가 다시 이안을 바라보았다.
설명이 필요하다는 듯한 눈빛.
파슥, 화염구를 손아귀에서 흩트려 버린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마력을 끌어올리면 돼. 넌 마법 술식이나 주문도 필요 없을 거야."
"마력을… 어떻게 끌어 올리는데요?"
"...."
이안도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다.
마력은 대외적으로는 얼마든지 감출 수 있지만, 스스로는 언제든 느낄 수 있었으니까.
손가락을 움직이는 법을 배울 필요가 없듯.
그저 그걸 움직이기만 하면 됐다.
게다가 이 이상은, 사실 이안도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이 세계의 다른 마법사들과 달리, 그는 스킬을 올리는 것만으로 마법을 배우고 사용했으니까.
이안의 눈을 올려다보던 루시가, 이윽고 읊조렸다.
"언니가 뭔가 잘못 알고 계신 걸지도 몰라요."
"그건 아닐 거다."
이안이 고개를 저었다.
"넌 은총을 받았어. 내가 뭐라 설명하지 못한 건, 나는 너처럼 특별한 재능을 타고나지 못해서다."
퀘스트를 받았기에 할 수 있는 단언이었다.
적어도 퀘스트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게다가 장차 화로의 사원이 어떻게 되는지를 생각하면, 모든 게 아귀가 맞아떨어졌다.
"너무 오래 재능의 존재조차 잊고 살아서, 다시 일깨우는데 시간이 필요할 뿐일 거야."
주먹을 쥐락펴락하던 루시가, 조금은 힘 빠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도 역시, 칼 쓰는 법도 배우고 싶어요. 이안님 처럼."
학구열이 엄청나군.
코웃음 친 이안이 대충 덧붙였다.
"네가 불꽃을 피울 수 있게 되면 가르쳐 주마. 그때부터."
루시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그때가 되면, 넌 칼질 따위엔 관심도 없어지겠지만.
이안은 속으로만 읊조리며 다시 육포를 우물댔다.
루시가 다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어찌나 집중했는지, 미동도 하지 않을 정도였다.
곧 미구엘이 코를 골기 시작했다.
어느새 곯아떨어진 것이다.
당연한 일이었다. 종일 길을 찾고 주위를 경계하며 마차를 모는 건, 보기보다 훨씬 고된 일이었다.
이동 중에 잘 수 있는 이안이나 루시와 달리, 그는 낮에는 한숨도 잘 수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루시도 앉은 자세 그대로 졸기 시작했다.
손은 여전히 활짝 펼친 채였다.
'이렇게만 보면, 참 목가적인 광경인데 말이지.'
이안은 게임이었을 때를 떠올렸다.
사실 그때의 그는 누군가를 호위하거나 일정 시간 동안 지키는 식의 퀘스트는, 제대로 완수한 적이 많지 않았다.
퀘스트를 받고 나면 필연적으로 적들이 밀려들기 시작했던데다가, 지켜야 할 대상의 인공지능도 그다지 뛰어나지 않았으니까.
결정적으로, 호위 대상이 죽어도 게임이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대상의 시신이나 유품만 챙겨 가도 어느 정도의 보상을 받을 수 있기까지 했다.
실패를 장려하는 듯한 시스템.
지금 생각하면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그런 비극이야말로 제작자들이 바라던 시나리오였을 테니까.
하지만 현실이 된 지금은 달랐다.
'일단 받은 퀘스트는, 절대 실패하지 않을 거니까.'
루시를 누이고 로브를 덮어준 후, 이안은 땅에 박아 둔 검의 십자 막이에 팔을 기댔다.
또 한 번의 밤이, 그렇게 무사히 지나가고 있었다.
***
"음. 또 갈림길이군."
중얼댄 미구엘이, 별다른 고민도 없이 방향을 선택해 나아갔다.
짐칸에 기대앉은 이안이 툭 내뱉었다.
"제대로 가고 있긴 한 거냐?"
"확신은 못 하오. 하지만 대충 맞게 가고는 있소."
"더럽게 솔직하네."
이안이 실소를 흘렸다.
벨 론데는 아겔 란은 물론 메네르와 루 사드, 심지어 일부지만 제국령까지도 국경이 맞닿아 있었다.
하지만 모든 국경이 칼로 자른 것처럼 나뉘어 있진 않았다.
아겔 란의 늪지대가 그렇듯, 국경 인근에도 오염되거나 저주받은 흉지들이 포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언제든 검은 벽의 광기가 스며들어, 끝내 마경이 되어도 이상하지 않은 곳들.
그런 흉지의 경계를 따라 이동해 북부까지 진입하는 게 그들의 계획이었다.
물론 만약을 대비한 계획도 있었지만.
이안은 미구엘에게 굳이 그 부분까진 설명하지 않았다.
"저쪽에 이어진 산이 보이시지? 저 산 사이의 계곡에 마수가 산다는 소문이 있었소. 보아하니 지금도 그런 것 같고. 이쪽 길이 더 좁고 관리도 안 되어 있잖소."
미구엘이 죽 이어진 산을 턱짓하며 말을 이었다.
"물론 계곡을 가로지르는 게 제일 빠르지만. 우린 능선을 따라 빙 돌아갈 거요. 여길 넘어가면 슬슬 추워지니 각오해 두시고."
이놈은 길잡이가 천직일지도.
생각하며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한 위치까진 알 수 없었지만, 그들은 이미 벨 론데를 절반 이상 지나친 상태였다.
그동안 생긴 충돌이라곤 일상적인 마물의 야습 정도가 전부였으니, 이만하면 상당히 성공적인 여정이라 할 수 있었다.
아직까지는.
'이대로 일주일 정도만 더 갈 수 있으면….'
생각하던 이안의 고개가, 문득 마차 뒤로 돌아갔다.
그의 미간이 좁아졌다.
양반은 아니네, 시발.
"온다."
"뭐가 온단 말이오?"
"말발굽 소리야. …이제 보이는군."
저 멀리, 달려오는 기수들을 확인한 이안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미구엘이 바짝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쓰벌, 꿈자리가 뒤숭숭하더라니. 설마 그 제국 놈들이오?"
"그렇진 않은 것 같은데. 그 좋은 장비들을 다 버린 게 아니라면."
이쪽으로 달려오는 놈들의 복장에는 통일성이 없었다.
전형적인 강도나 용병 무리였다.
이안의 눈동자에 옅은 마력이 일렁이는 사이.
"뒈지기 싫으면 멈춰라!"
일행의 마차를 따라잡은 놈들이, 순식간에 적당한 거리를 두고 주위를 에워쌌다.
총 다섯 놈.
"혹시나 했는데. 우리가 제대로 찾은 것 같은 느낌이 드는군."
멈추라 소리쳤던 인상 험악한 놈이, 이안과 미구엘, 후드를 눌러 쓴 루시를 차례로 보며 읊조렸다.
무리의 우두머리인 모양.
어느새 다른 놈들도 이안과 미구엘을 향해 쇠뇌를 겨누고 있었다.
이안이 태연하게 물었다.
"무슨 일이시오?"
"네가 이안 호프냐? 내가 볼 때 마부는 미구엘이란 놈이고, 그 꼬맹이가 아가씨 같은데."
이름까지 안다고?
내심과 달리, 이안은 고개를 저었다.
"사람 잘 못 보셨소. 범죄자들이오?"
우두머리가 피식, 웃음 지었다.
"글쎄. 내가 묻고 싶은 말이군. 무슨 짓을 벌였기에 수배령이 떨어진 건지 말이야. 내가 볼 때 댁은 그렇다 쳐도, 저자는 미구엘이 확실한 것 같거든."
"...?"
고개를 돌린 이안의 미간이, 이내 좁아졌다.
미구엘의 얼굴에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
#053화
이안과 눈이 마주친 그가, 자신도 어쩔 수 없었다는 듯한 처량한 표정을 지었다.
'이름을 불린 게 어지간히 당황스러웠나 보군.'
이안이 입맛을 다시는 사이.
"어차피 우린 너희 인상착의도 알고 있었다. 남색이 도는 검은 머리에 검은 눈. 한 놈은 수염에 얼굴 흉터. 제일 중요한 아가씨는 붉은 머리에 녹색 눈. 딱 너희 같은데."
대장이 위로라도 하듯 덧붙였다.
이안과 다시 눈이 마주친 그가 싱긋 미소 지었다.
"그러니까 그냥 순순히 따라오는 게 좋아. 정말 아니라면 확인만 하고 보내줄 테니까."
너 같음 가겠냐?
이안의 눈빛이 우묵해졌다.
대장이 턱을 까딱였다.
"좋은 눈빛이군. 하지만 무모한 짓 하지 마라. 이래 봬도 우리가 사격에는 자신이 있거든. 게다가…."
그가 대단한 비밀을 알려 준다는 듯 목소리를 낮췄다.
"우린 저 꼬마 아가씨만 생포해서 돌아가도 돼. 너희 둘도 붙잡으면 추가 보상이 있지만, 그게 아니라도 충분한 거금이지."
"아, 그래."
고개를 끄덕인 이안이 덧붙였다.
"그럼 쏴 봐. 이제부터 움직일 테니까."
"...?"
대장의 미간이 좁아졌다.
무슨 자신감인가, 싶은 눈빛.
이안이 보란 듯이 팔을 움직였다.
로브가 슬쩍 벌어지면서, 그 안의 단죄의 검이 드러났다.
이안이 자루에 손을 얹었다.
대장의 미간이 비로소 구겨졌다.
"미친놈이었군. 그냥 쏴 버려!"
피슉, 거의 동시에 이안과 미구엘을 향해 쇠뇌가 발사됐다.
그들의 사격 실력은 우두머리의 말처럼 훌륭했다.
발사 시점도 거의 같았고, 조준도 정확했다.
하지만 우습게도, 지금은 오히려 그 훌륭한 실력이 독이 됐다.
푸확-!
주위로 몰아친 바람 장막이 단숨에 모든 볼트를 흩어 버린 것이다.
하나 정도는 쳐낼 생각이었던 이안은, 덕분에 로브를 벗어 버리며 그대로 도약했다.
뽑혀 나온 단죄의 검이,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미처 깨닫지도 못한 한 놈에게 그대로 떨어져 내렸다.
콰직!
"꺼... 헉."
정수리부터 목까지 반으로 잘린 놈이 눈을 까뒤집으며 뒤로 넘어갔다.
흘러내리는 뇌수와 피.
그대로 안장 위에 착지한 이안의 왼손이 채찍처럼 휘둘러졌다.
퍼억!
그의 손길을 따라 바람이 번지고, 저만치의 다른 놈의 고개가 뒤로 튕겨 나가듯 젖혀졌다.
그대로 낙마한 놈의 얼굴 한복판에는 단도가 깊숙이 박혀 있었다.
"이런 미친...."
그제야 상황을 깨달은 우두머리가 탄식하는 그때, 이안은 이미 안장을 박차고 뛰어오르는 중이었다.
쩌억-!
또 한 놈이 목덜미부터 반대쪽 옆구리까지 사선으로 잘려 나갔다.
잘린 상체가 피와 오물을 흩뿌리며 떨어졌다.
하반신은 여전히 말에 탄 채였다.
이안이 바닥을 구르며 착지했다.
"...!"
대장의 눈에 핏발이 돋았다.
단칼에 사람을 양단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힘이 장사이거나, 기술이 경지에 올랐거나. 최소한 무기라도 명검이라 불릴 만한 것이어야 했다.
어느 쪽이 정답인지는 본인을 제외하고는 알 도리가 없으리라.
중요한 건, 눈 깜짝할 사이에 부하가 셋이나 죽었다는 사실이었다.
"이, 시발 놈이…!"
뒤늦게 마지막 놈이 쇠뇌를 집어던지며 검을 뽑아 들었다.
어느새 자세를 다잡은 이안이 놈에게 단도를 던졌다.
아예 맹탕은 아닌지, 놈은 날아오는 단검을 몸을 젖혀 피했다.
하지만 그렇기에 뒤따라 내달린 이안의 도약까지 막지는 못했다.
안장보다 높이 뛰어오른 그가 검을 내리쳤다.
용병은 검을 들어 이안의 일격을 흘려내고 반격하려 했다.
정석적인 대응이었다.
콰직-
검이 그대로 부러지기 전까진.
단죄의 검이 놈의 어깨에 깊숙이 박혔다.
"아아악-!"
비명. 놈의 몸을 짓누르며 착지한 이안이 박힌 검을 뽑으며 확인 사살을 준비했다.
대장이 그의 지척까지 달려든 건 그때였다.
그는 이안이 부하를 죽이는 동안 뒤를 노릴 작정이었다.
푸슉-!
검을 치켜든 그는, 등에서 이어진 뜨끔한 고통에 그대로 굳어졌다.
미구엘이 발사한 볼트가 그의 등을 뚫은 것이다.
"크… 헉."
휘청대며 낙마한 그가 억눌린 신음을 흘렸다. 그를 버리고 야속하게 도망치는 애마의 뒷모습이 보였다.
탁.
그리고 그 앞에, 이안이 착지했다.
쓰러진 우두머리는 내려다보는 그의 눈길이 무감정했다.
우두머리가 바닥을 기며 말했다.
"살려… 살려 주시오…."
이안이 그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턱. 우두머리의 얼굴 근처에 검이 박혔다.
피와 지방이 검날을 타고 미끄러지듯 흘러내리고 있었다.
고저 없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누가 수배령을 내렸지? 제국의 상인인가?"
"제, 제국…? 무슨 말인지 모르겠소. 나도 전해 들은 얘기지만… 그들은 아니었소. 아겔 란의… 기사들이라던데…."
우두머리는 힘겨워하면서도 순순히 대꾸했다.
눈을 가늘게 뜬 이안이 덧붙였다.
"아겔 란에서 온 자들이라면 너희들 같은 놈들만으로는 우릴 잡을 수 없단 걸 알 텐데. 정말 생포하란 수배를 내렸다고?"
"사실 위치를 제보하기만 해도 보상이 있었소. 사로잡았을 때의 보수가 더 컸을 뿐… 아, 이런."
순간 또렷하게 말하던 우두머리의 얼굴에 묘한 깨달음이 스쳤다.
그가 이안을 바라보며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난 이미 틀린 거였군. 그래서 정보라도 뽑아먹으려고 한 거야."
"뭐, 간을 꿰뚫리고 살아남을 순 없으니까."
선선히 대답한 이안이 일어섰다.
쿨럭, 피 섞인 기침을 토한 우두머리가 이윽고 실실댔다.
"이게 끝이라 생각하지 마라… 우린 동료가… 많아… 너희 이름은… 이미 벨 론데에선…."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하지만 이안은 이미 그를 보고 있지도 않았다.
기사라. 친위 기사단인가.
턱을 긁적이는 그의 뇌리로 그럴싸한 시나리오가 스쳐 지나갔다.
극대노한 아겔 란의 국왕. 그의 명으로 추적에 나선 친위 기사단.
아마 다수가 국경을 넘진 못했으리라. 많아야 다섯. 그보다 더 적을 가능성도 높았다.
'반신반의하면서도 일단은 루 사드 방향으로 움직였겠지.'
아마 며칠쯤 지나 자신들이 잘못된 길로 들어섰다는 걸 알게 됐으리라.
그리고 그때부터 방향을 틀어, 들르는 마을마다 수배령을 내린 것이 틀림없었다.
기사들이기에 가능한 멍청한 짓거리였다.
일이 커지면 용병과 상인들 만큼이나 돈에 눈이 먼 영주들까지 판에 끼어들 수도 있는데.
돌아가는 상황으로 봐선 시간문제 같았다.
그때부턴 진짜 예측 못 할 개판이 펼쳐지리라.
"그, 듣자 하니 근처에 우리 이름이랑 인상착의가 쫙 뿌려진 것 같은데.... 다 잘라내기엔 꼬리가 너무 많아진 것 아니오?"
미구엘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알면, 우선 이것들부터 치워."
미구엘이 마부석에서 내렸다.
곧 시체들을 말 안장에 얹어 묶은 그들은, 말들을 사방으로 흩어 버렸다.
큰 도움이 되진 않겠지만 조금이라도 교전 지역이 늦게 발견되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말을 한 마리 남긴 이안이 안장 위로 올라탔다.
기동력을 하나 더 확보해 놓기 위함이었다.
이제부턴 시간 싸움이 됐으니까.
짐칸에 앉은 루시와 눈이 마주친 그가 태연하게 미소 지었다.
"머리카락까지 자르고 그 난리를 피웠는데, 결국 들켜 버렸군."
루시가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 여기까지 큰일 없이 올 수 있었던 거니까요. 괜찮아요."
방금 피바람이 불었음에도 떨림조차 없는 목소리였다.
하긴. 아마 그녀는 열두 살 중에선 가장 죽음에 익숙할 터였다.
눈을 깜빡인 루시가 덧붙였다.
"그런데 왜 마법을 쓰지 않으셨나요? ?渚颱?죽일 거였는데."
이 와중에도 그런 게 궁금하다니, 마법사의 기질은 어디 안 가는군.
사실 회색 마법을 쓰긴 했다만.
속으로 읊조린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마법은 필요한 순간에만 써야지. 이딴 것들한테도 마법을 써 대다간, 마력이 남아나지 않을 거다. 지금은 마력의 황혼기니까."
루시가 고개를 끄덕이는 가운데.
이안이 문득 양팔을 들었다.
"지금 내 모습이나 잘 봐라. 칼을 들고 싸우면 이렇게 돼."
"찝찝해 보여요."
"바로 그거야."
"하지만 멋져요. 강해 보이고."
…고집 센 것도 딱 마법사고.
이안이 입맛을 다시는 사이.
"그래서, 이제 어쩌실 거요? 이대로 그냥 가던 길 갈까?"
마부석에 오른 미구엘이 물었다.
"아니."
마차로 다가간 이안이, 저만치에 이어진 산을 돌아보았다.
이대로면 길어야 며칠 내로 그들의 위치가 알려질 터.
"저길 가로지르면, 시간을 얼마나 단축할 수 있지?"
플랜B를 써야 할 순간이었다.
***
미구엘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좋은 판단이 아닌 것 같소. 기껏해야 이틀에서 사흘 줄이자고…."
"그 시간 동안 포위당해서 쫓기기 시작하면 생각이 달라질 거다."
이안이 태연하게 내뱉었다.
미구엘의 한숨이 깊어졌다.
그들은 지금 산을 오르는 중이었다. 정확히는 산과 산 사이의 계곡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샛길처럼 이어진 관도가 있었지만.
오랜 시간 사람이 오가지 않은 듯, 상태가 엉망진창이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미구엘의 말에 따르면, 여기는 마수가 산다는 소문이 도는 흉지였으니까.
"내가 소문을 들은 게 벌써 몇 년 전 얘기요. 지금쯤이면 검은 벽의 광기나 괴상한 원한 같은 게 깃들고도 남았을 거란 말이오. 형씨 실력은 알지만…."
"걱정 마라. 너한테 나서서 싸우라고 할 생각은 없으니까. 넌 마차만 잘 지키면 돼. 게다가…."
이안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둑어둑해지는 먹구름.
"어차피 돌아가기엔 늦었거든."
미구엘은 생각해 본 적도 없었던 모양이지만.
이건 흉지 근처로 움직인다는 계획을 세운 그 순간부터 염두에 둔 대비책이었다.
추적자들도 그들이 그냥 흉지로 들어가 버리리란 생각까지는 하기 쉽지 않을 테니까.
설사 눈치채더라도 쭉정이들은 따라 들어올 엄두도 내지 못할 터.
심지어 이번 경우엔 일정까지 단축할 수 있으니 일석이조였다.
"필립이 그리워지는군. 그 양반이라면 이런 순간에 내 편을 들어줬을 텐데."
미구엘이 체념한 듯 읊조렸다.
이안이 피식댔다.
"어차피 달라질 건 없었을 거다."
그가 탄 말이 콧김을 뿜었다.
녀석뿐 아니라 마차를 모는 말들도 겁에 질려 있었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온통 검게 말라붙은 나무들을 포함해서, 어딜 봐도 생기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이 삭막했으니까.
이 산에 뭔가 도사리고 있는 건 확실해 보였다.
파사삭-
"...?!"
귓가를 스치는 소리에 미구엘이 번쩍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보이는 건 없었다.
가지만 거뭇거뭇하게 남은 나무들과 먹구름 낀 밤하늘뿐.
파사삭- 파슷-
"바람 소리인가...?"
"그럴 리가."
코웃음 치는 이안의 눈빛은, 이미 싸늘하게 가라앉은 후였다.
파사삿- 파스슷-
이미 며칠 전에 이런 소리를 들어 봤기 때문이었다.
"여기 무슨 마수가 사는 건지 알 것 같군."
"어떤 놈이… 사는 거요?"
이안이 문득 손을 들었다.
그가 가리킨 방향을 돌아본 미구엘이 눈을 치켜떴다.
"...!"
나무 위를 쏜살같이 이동하는 형체를 비로소 확인한 것이다.
시야 밖으로 그림자처럼 숨어 버리는 그것은, 검회색의 거미였다.
크기가 거의 늑대만 한.
"동굴 거미...?"
"그래. 저건 동굴 거미지. 저것도. 그리고 또 저것도."
이안이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일순간 굳었던 미구엘이 허둥지둥 짐가방으로 손을 뻗어 횃불을 들었다.
화륵-
불길이 타오르는 순간, 미구엘은 나무 사이로 반짝이는 눈알들을 볼 수 있었다.
열 마리도 넘는 동굴 거미가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벨 론데의 동굴 거미들은 죄다 여기서 빠져나간 놈들인 거다."
"그럼… 여기 산다는 마수가 바로...."
"저것들의 어미겠지."
파스슥- 파스스슥-
그 말이 신호라도 된 것처럼 바람 소리 같은 동굴 거미의 발소리가 사방에서 파도치듯 밀려들었다.
이안이 문득 루시를 돌아본 건 그때였다.
"잘 봐 둬라."
"...!"
루시가 눈을 치켜떴다.
자신을 마주 보는 이안의 눈동자가, 어느새 타오르듯 붉게 일렁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지금 같은 상황이, 마법을 써야 하는 순간이니까."
화르륵-
그의 주위로 새빨간 불덩이들이 일제히 피어올랐다.
#054화
주위가 밝아지면서, 밀려드는 동굴 거미들의 모습이 드러났다.
놈들은 털이 잔뜩 돋은 다리를 쉴 새 없이 움직이며 빠른 속도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공포에 질린 말들이 콧김을 뿜으며 내달렸다.
"이런 미친… 루 솔라여…!"
미구엘이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며 고삐를 당겼다.
그런 주위의 혼란과는 관계없이, 루시의 시선은 허공에 타오르는 불덩이들에 고정되어 있었다.
눈앞에서 일어난 신비와 아름다움에 정신을 빼앗긴 것이다.
마법사를 처음 보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선보인 마법은, 지금 이안의 마법에 비하면 애들 장난이나 다름없었다.
키이잇-
마차 근처까지 다가온 동굴 거미 한 마리가 펄쩍 뛰어올랐다.
메뚜기를 방불케 하는 움직임.
마차 주위에 일렁이던 화염구 하나가 뿜어져 나간 건 그 직후였다.
퍼엉-
큰 폭발은 아니었다.
하지만 솟구친 거미를 불덩어리로 만들기엔 충분했다.
키에에엑-!
그대로 떨어진 거미가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굴렀다.
그게 신호탄이었다.
파사사삭- 키잇- 키이잇-
동굴 거미들이 사방에서 껑충껑충 뛰어오르기 시작했다.
"으아아악-"
미구엘이 비명을 내질렀다.
마차의 속도가 다시 빨라졌다.
말들이 계곡의 오르막을 평지처럼 달렸다.
"운전에만 집중해! 말이 죽으면 네가 마차를 끌어야 할 거다!"
윽박지른 이안이 팔을 내저었다.
마차 주위를 호위하듯 타오르던 화염구들이 일제히 뻗어 나갔다.
퍼버버벙-!
눈부신 폭발. 루시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그 광경을 눈에 담았다.
이안이 마차 뒤로 돌아가며 손을 뻗었다.
화르르륵-
순식간에 피어오른 불덩이들이 다시 한번 뻗어 나갔다.
첫 번째 포격을 뚫고 달려들던 거미들이 재차 불길에 휩싸였다.
루시의 눈동자가 일렁였다.
이게, 진짜 마법.
전에 읽은 책의 내용이 떠올랐다.
전쟁의 시대에는 마법사 개개인이 하나의 군단이나 다름없었다는.
지금 이안의 모습이 딱 그랬다.
턱-!
그때 시커먼 형체 하나가 짐칸으로 떨어졌다.
연달아 이어진 포격을 뚫고, 끝내 착지에 성공한 동굴 거미였다.
털이 돋은 굵고 긴 다리. 검고 거대한 몸통. 열 개도 넘는 눈알이 루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세로로 길게 찢어진 아가리가 여러 겹으로 열리면서, 톱날 같은 이빨들이 드러났다.
놈이 루시에게 달려들려는 순간.
뻐억-!
마차로 뛰어든 이안이, 놈의 몸통을 그대로 걷어찼다.
이안은 옆으로 굴러떨어지는 놈을 향해 곧바로 손을 뻗었다.
퍼엉-!
그대로 뻗어 나간 화염구가 거미를 집어삼켰다.
몸부림과 비명. 루시와 이안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루시가 전혀 겁먹지 않았다는 것을 눈치챈 듯, 그가 내뱉었다.
"구석에 들어가 있어. 횃불은 네가 들고."
이안은 루시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확인하지도 않고 다시 몸을 날렸다.
그가 떠난 자리에 바람이 휘몰아쳤다.
이것도, 마법…?
생각하며 고개를 돌린 루시의 눈에 들어온 건, 달리는 말의 안장에 아슬아슬하게 착지한 이안과 달려들고 있는 동굴 거미였다.
푸확-!
다음 순간, 동굴 거미가 뭔가에 떠밀린 것처럼 허공에 멈췄다.
쉬악-!
이안이 검을 내리쳤다.
검날이 닿지도 않았건만, 거미의 몸이 머리부터 배까지 반으로 갈라졌다.
녹색의 끈적한 체액이 흩날렸다.
이안이 그대로 마차 앞으로 달려갔다.
퍼엉- 콰광-!
묘기 같은 전투가 이어졌다.
이안은 주위를 빙빙 돌면서, 때로는 불덩이를 날리고 때로는 닿지도 않는 거리의 거미를 베어 넘기며 마차를 지켰다.
그 과정에서 몇 번 삐끗대며 낙마할 위기를 겪었지만, 어떻게든 자세를 다잡으며 극복해 냈다.
그리고 마침내, 동굴 거미들이 썰물처럼 물러났다.
루시에게 횃불을 넘기고 양손으로 고삐를 쥐고 있던 미구엘이 환호성을 터뜨렸다.
"됐다! 해냈소! 봐라! 이게 우리 마법사님이다, 이 빌어먹을 거미 새끼들… 어?"
미구엘의 눈이 순간 커졌다.
계곡을 따라 이어진 관도 너머.
불쑥 튀어나온 바위 위로 새카만 그림자가 솟아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멀리서 봐도 비정상적인 크기.
"미구엘. 멈춰야 할 것 같아요."
내뱉은 건 루시였다.
미구엘이 반사적으로 고삐를 당겼다.
바위 위에 웅크리고 있던 그림자가 솟구쳐 오른 건 그 직후였다.
동굴 거미들보다 훨씬 둔탁한 움직임.
쿠웅-!
비탈길에 육중하게 착지한 그것은, 다른 동굴 거미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놈이었다.
회색빛이 도는 털.
열여섯 개나 되는 붉은 눈알.
괴상하게도, 놈의 아가리 부분은 인간 여성의 상반신을 형상화한 것 같은 형태였다.
물론 찰흙으로 어설프게 빚어낸 듯한 형상이라, 아름답긴커녕 오히려 더 기괴하기만 했다.
키… 키이이잇-
풀벌레 소리 같은 울음소리.
놈과 마차 사이를 가로막으며, 이안이 내뱉었다.
"졸라 징그럽게 생겼구나, 너."
지금 그의 눈에는, 다른 이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퀘스트 창이 떠올라 있었다.
동굴 거미 여왕.
키이잇-!
몸을 숙였던 여왕이 또다시 둔중하게 솟구쳤다.
보기와는 달리 엄청난 속도.
그대로 자신을 깔아뭉갤 작정이라는 것을 깨달은 이안이 고삐를 후려쳤다.
촤라락-!
여왕의 꼬리에서 거미줄이 뿜어져 나온 건 그 직후였다.
그건 거미줄이라기보단 끈적이는 물줄기에 가까웠다.
"...?!"
눈을 치켜뜬 이안이 몸을 날렸다.
거미줄에 뒤덮인 말이 바닥을 굴렀다.
쿠웅-!
여왕이 그대로 말을 내리찍었다.
거대한 몸통이 땅을 두드리면서, 말의 피와 살점을 사방에 흩뿌렸다.
바닥을 구르며 간신히 멈춘 이안이, 고깃덩어리가 된 말을 확인하고는 고개를 들었다.
키… 이잇….
거미 여왕의 아가리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여인의 상반신이 좌우로 쩍 갈라졌다. 무수한 칼날이 돋은 것 같은 아가리. 여러 겹의 턱 사이로 낫 같은 송곳니가 길게 튀어나왔다.
그 끝에서 독액이 실처럼 늘어지며 뚝뚝 떨어졌다.
이안이 입맛이 뚝 떨어진 표정으로 손을 뻗은 것과, 거미 여왕이 그에게 달려든 건 거의 동시였다.
콰아아아-
"...!"
그 모습을 지켜보던 루시의 눈이 커졌다.
용의 숨결 같은 불길이 이안의 손아귀에서 뿜어져 나왔기 때문이었다.
키에에에에-
달려들던 여왕의 머리가 밀려났다.
불길이 사그라들었을 때 이안은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그는 뒤로 물러나는 대신, 오히려 여왕의 몸통으로 파고들었다.
양손으로 움켜쥔 단죄의 검이 여왕의 거대한 몸통에 틀어박혔다.
콰지직- 키에에엑-!
그가 검을 내지르는 것보다, 여왕이 발작하듯 뛰어오른 게 더 빨랐다.
순식간에 10미터 가까이 멀어져 뒤집힌 채로 떨어진 놈이, 허겁지겁 자세를 다잡았다.
키엣- 키이이잇-!
여왕이 몸을 잔뜩 웅크렸다.
여성의 형태였던 아가리는 불에 익어서 한층 더 기괴한 모습으로 변했고, 붉은 홑눈들도 네 개나 하얗게 멀어 버린 채였다.
키잇- 키에에엣!
위협하듯 울부짖은 여왕이 몸통을 아래로 불쑥 내밀었다.
검이 긁고 간 자리에서 진녹색 진액이 흘러내리고.
촤아아악-!
거미줄이 마구잡이로 뿜어졌다.
이안이 또다시 바닥을 굴렀다.
그가 고개를 들었을 때, 거미 여왕은 이미 비탈길을 따라 멀어지고 있었다.
파스스스- 파스스슷-
계곡 주위의 나무들이 파도치듯 흔들렸다.
동굴 거미들이 여왕을 따라 도망치고 있었다.
"튈 줄이야…."
허탈하게 읊조린 이안이 일어섰다.
온 사방을 뛰어다니고 바닥을 나뒹구느라, 그의 몰골은 이제 거의 거지꼴이나 다름없었다.
"고생하셨소. 또 저런 미친 괴물을 물리치다니. 매번 느끼지만, 보면서도 믿을 수가 없는 전투였소."
미구엘이 양팔을 들어 환영했다.
코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한 이안이, 문득 루시를 마주 보았다.
"마법사의 전투가 다 이렇진 않아. 난 반쪽짜리라 이 모양인 거고."
루시가 고개를 저었다.
"전혀 반쪽짜리 같지 않았어요. 정말, 정말 대단했어요."
진심이었건만. 짐칸에 오르는 이안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
마차가 다시 출발하는 가운데, 그가 루시를 돌아보았다.
"너는 나랑은 비교도 안 될 만큼 대단한 마법사가 될 거다. 적어도 적색 마법에 있어서만큼은."
"...."
상상도 할 수 없고 믿기지도 않는 이야기였다.
루시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혹시나 싶어 정신을 집중해 봤지만, 오늘 내내 그랬듯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형씨도 형씨지만, 루시도 대단했소. 비명 한 번 안 지르다니."
"비명은 너만 질렀지. 루시는 겁먹지도 않았다. 아니…."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애초에, 이런 걸 무서워하는 걸 본 적도 없는 것 같은데."
"무섭지 않으니까요."
루시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제가 죽거나 다치는 건, 하나도 무섭지 않아요."
내가 두려운 건 오히려….
뒷말을 삼키는 그녀를 바라보며, 이안이 입맛을 다셨다.
"또 그 표정이군. 언제까지 그럴 거냐?"
"내 말이 그 말이오. 우리가 함께 한 시간이 얼만데. 편하게 지내자고, 편하게. 응?"
미구엘이 눈썹을 들썩이며 뒤를 돌아보았다.
이안이 인상을 찌푸렸다.
"다신 그딴 얼굴 하지 마라. 특히 애 앞에선."
"이게 왜? 나 정도면 사람 좋아 보이는 얼굴이잖소."
"도적놈들 사이에선 그렇겠지."
둘의 대화에, 루시는 말려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꾹 억눌렀다.
가슴에 번지는 그들에 대한 감정도 온 힘을 다해 가라앉혔다.
평생 해 왔기에 어렵지는 않았다.
'이게 맞아.'
루시는 자기 자신에게 속삭였다.
이들을 지금보다 좋아하게 된다면, 분명 큰 불행이 닥칠 테니까.
그녀가 좋아했던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계곡의 경사가 점점 완만해졌다.
주위는 어느새 계곡보다는 협곡에 가깝게 변해 있었다.
"…저거, 동굴이오?"
미구엘이 문득 내뱉었다.
비탈길 중턱. 바위가 갈라져 생긴 커다란 틈에 불경한 어둠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래. 아마 저기가 그 거미들의 둥지... 이런."
동굴을 노려보며 읊조리던 이안이, 문득 탄식했다.
그의 눈동자가 물결치듯 일렁였다.
"…계곡을 통과하려면 얼마나 남았지?"
"아직 정상도 못 갔으니까. 아마 새벽 늦게까진 움직여야 할 거요. 말들한텐 내리막이 더 위험하기도 하니까."
"아까 같은 추격전이 벌어지면?"
"말들이 못 버티지. 적어도 오늘 밤엔 무리요. 내리막에서 다리라도 부러지면, 뭐 말할 것도 없고. 그런데 갑자기… 이런 건 왜 물으시오?"
"여왕이 우릴 포기하지 않은 것 같거든."
동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이안이 덧붙였다.
그가 지금 보고 있는 게 무엇인지, 루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미구엘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또… 쫓아 올 거라고?"
"아마도. …어쩔 수 없지."
혀를 찬 이안이 일어섰다.
그가 미구엘을 돌아보며 말했다.
"여기서 조용히 기다려라."
"…혼자 들어가시려고?"
"그럼 따라 들어갈래?"
"아니, 그게, 가 봐야 짐밖에 안 될 것 같기도 하고… 누군가는 마차를 지켜야 하잖소."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는 듯 코웃음 친 이안이 말을 이었다.
"근처의 거미는 죄다 저 안에 있는 것 같긴 한데. 혹시 모르니까 횃불을 주위에 몇 개 세워 놔라. 저것들, 불을 무서워해."
"알겠소."
"두어 마리 정도는 너 혼자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거다. 교활한 놈들이니까, 방심만 하지 마. 그걸로 대가리나 배만 잘 찍어도 돼."
미구엘 허리춤의 손도끼를 턱짓한 이안이 루시를 돌아보았다.
그는 루시가 걱정 말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곧장 몸을 날렸다.
또다시 바람이 휘몰아쳤다.
날다람쥐처럼 계곡을 달려 올라간 이안이 바위틈으로 쑥 사라졌다.
"하여간, 저 형씨랑 다니면 목숨이 열 개라도 부족하다니까…."
마차 주위에 횃불을 세우면서 미구엘이 중얼댔다.
돌덩어리를 여러 개 주워 바퀴에 괴어 놓은 그가, 비로소 다시 마부석에 올랐다.
"그런데 또, 저러는 걸 보다 보면 계속 따라다니고 싶어지기도 하단 말이지. 좀 놀라워야 말이지. 안 그러냐?"
"신기해요. 대단하고."
루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미구엘이 씩 웃었다.
범죄자 같은 미소.
"그치? 어디 가서 얘기해도 아무도 안 믿겠지만. 저 양반은 이런 일을 밥 먹듯이 해낸다니까. 내가 볼 땐 저 동굴도 이제 곧-"
콰르르- 끼에엑- 끼에에에-
그때, 동굴 너머에서 웅웅 울리는 굉음과 비명이 메아리치듯 번지기 시작했다.
동굴을 돌아보았다가 다시 루시와 눈을 마주친 미구엘이, 어깨를 으쓱였다.
"…저렇게 난리가 날 거다. 안 따라가길 잘했지. 분명히 맨정신으론 못 버틸 광경일 거다. 전에도 그랬거든."
"전 궁금한데요."
"겪어 보기 전엔 나도 그랬어."
루시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미구엘이 흉터를 씰룩댔다.
"거 봐라. 웃으니까 보기 좋잖…"
파사삭- 파스스슷-
문득 들려온 바람 소리에, 미구엘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재빨리 석궁을 집어 든 그가 몸을 일으켰다.
"시부럴… 루시, 몸을 낮춰라."
루시가 짐칸에 바짝 몸을 숙였다.
파스스- 파스스스스-
사방에서 울리는 듯한 바람 소리에 이리저리 시선을 옮기던 미구엘이, 한순간 인상을 구겼다.
비탈길을 따라 내달리는 거미를 발견한 까닭이었다.
몸이 반쯤 타 버린 동굴 거미였다.
아까 이안의 공격을 받은 놈들 중 하나였다.
그때의 충격으로 여왕의 통제력에서 벗어났다는 것까지는 알지 못한 채, 미구엘이 석궁을 놈에게 겨눴다.
비탈길 중간까지 미끄러진 놈이, 예고도 없이 뛰어오른 건 그 직후였다.
"...!"
숨을 멈춘 미구엘이 석궁을 치켜들었다.
쉬악, 이어진 날카로운 파공음.
퍼억- 키에에엑-!
달려들던 놈이 뚝 떨어졌다.
곧바로 석궁을 내려놓고 횃불을 든 미구엘이 웃음 지었다.
"것 봐라. 나도 사격 솜씨 하난 쓸 만하다니까-"
그의 뒤로 검은 그림자가 불쑥 솟구친 건 그때였다.
반대편에서 조용히 다가오던 또다른 동굴 거미.
기척을 눈치챈 미구엘이 고개를 돌렸을 때는, 놈이 이미 코앞까지 달려들고 있었다.
"우왁…!?"
놈에게 짓눌린 미구엘이 본능적으로 횃불을 휘둘렀다.
키이잇- 키엑-!
동굴 거미가 불길을 피했다.
말들이 울부짖으며 마차가 덜컹댔다.
"이 미친 거미 새끼...!"
놈의 다리를 쳐내면서 미구엘이 허둥지둥 도끼를 움켜잡았다.
그를 돕기 위해 일어서던 루시의 눈이, 일순간 흔들렸다.
어느새 반대편 비탈길에 또 한 마리의 거미가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대로면 미구엘이 죽는다.
비로소 루시의 눈에 공포가 서렸다.
'내가 마음을 열어서…? 또 나 때문에?'
정신을 추스를 틈도 없이, 또 다른 거미가 솟구쳤다.
놈을 올려다보는 루시의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
일순간, 모든 게 느리게 느껴졌다.
기묘한 고양감. 전에도 종종 느꼈지만, 다른 감정들과 마찬가지로 꾹 억눌러 온 감각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그러지 않았다.
화륵- 화르륵-
횃불의 불길들이, 루시가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그녀 쪽으로 빨려들듯 타올랐다.
루시가 손을 뻗었다.
거의 본능적으로 이루어진 행동.
콰아아아아-
횃불의 불길이 그에 응하듯 일제히 뿜어져 나갔다.
키에에엑-!
불덩이가 된 거미가 떨어졌다.
놈이 바닥을 뒹굴었지만, 불길은 놈을 완전히 숯덩이로 만들고서도 꺼지지 않았다.
"...."
루시의 시선이 미구엘과 뒤엉킨 놈에게로 돌아갔다.
불길이 또다시 파도치듯 밀려들었다.
키이잇- 키아아-
거미가 펄쩍 뛰어 물러났지만 소용없었다.
불길은 순식간에 놈을 집어삼켰다.
살이 타들어 가는 매캐한 냄새.
"...!"
루시가 퍼뜩 정신을 차린 건 그때였다.
그녀에게 쏠리듯 타오르던 횃불들이 고요하게 잦아들었다.
남은 건 숯덩이가 된 거미 두 마리의 시신뿐.
털썩, 기운이 쭉 빠진 루시가 주저앉았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드러누운 채로 눈을 끔뻑이던 미구엘이, 이윽고 루시를 올려다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으하하! 이런 미친!"
횃불을 집어던지며 달려든 그가 루시를 와락 안아 들었다.
"네가 날 살렸구나! 이번엔 정말 뒈지는구나 싶었는데! 네가 날 살렸어! 으하하!"
그가 루시를 든 채 펄쩍댔다.
반쯤 얼이 빠진 채로 대롱대롱 매달려 있던 루시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미구엘. 숨 막혀요."
"응? 어, 아 그래. 생명의 은인을 숨 막혀 죽게 할 순 없지."
루시를 내려놓은 미구엘이 눈을 빛냈다.
"어떻게 된 거냐? 응? 이제 마법을 쓸 수 있게 된 거야?"
"…모르겠어요."
루시가 힘없이 중얼댔다.
아까의 위기감과 분노, 고양감이 지금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이젠 안 되는 것 같아요."
"으하하. 무슨 상관이야. 신경 쓰지 마라. 네가 날 살렸다는 사실엔 변함이 없으니까."
미구엘이 루시의 머리를 마구 헝클이며 말했다.
루시는 살짝 인상을 찌푸렸지만, 뭐라 말하지는 않았다.
죽다 살아난 것이 어지간히 기뻐 보였으니까.
사실, 마냥 싫지만도 않았다.
끼아아아아아-
동굴 너머에서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터져 나온 건 그 직후였다.
미구엘과 루시가 동시에 동굴을 올려다보았다.
이어진 의미심장한 적막.
한참 만에, 흐릿한 형체가 동굴 밖으로 비틀대며 걸어 나왔다.
그가 비탈길을 미끄러지듯 내려왔다.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쉰 미구엘이, 언제 그랬냐는 듯 웃음 지으며 일어섰다.
"형씨! 그 괴물 놈은 족치셨소?"
"그래."
이안이 지친 목소리로 내뱉으며 마차로 다가왔다.
"…보아하니, 여기서도 일이 있었군."
그는 체액과 오물로 뒤덮여, 만신창이가 따로 없는 몰골이었다.
물론 미구엘은 그의 몰골 따위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뒈질 뻔했소. 그런데 여기 루시가 마법으로 저것들을 태워 죽였소. 응? 루시가 드디어 마법을 썼단 말이오! 그것도 날 살리려고!"
"벌써 썼다고…?"
드물게도 놀란 표정을 지은 이안이 루시를 돌아보았다.
루시가 어깨를 으쓱였다.
"잠깐이었어요. 지금은 다시 안 되거든요."
"상관없어. 뭐든 처음이 어려운 거니까. 갈수록 쉬워질 거다."
짐칸에 벌렁 드러누운 이안이, 이윽고 루시를 올려다보며 덧붙였다.
"이제, 너도 마법사란 얘기지."
"...!"
#055화
일행은 거미 여왕의 동굴 앞에서 밤을 보냈다.
이안은 물론 미구엘도, 마물을 퇴치한 후엔 놈의 보금자리가 오히려 가장 안전한 쉼터가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미구엘이 채비를 하는 사이, 이안은 다시 거미 동굴로 향했다.
여유가 있으니 전리품을 찾아보겠다는 이유였다.
루시가 냉큼 그의 뒤를 따랐다.
이안이 안 보는 게 좋을 거라고 만류했으나, 이 작고 무표정한 예비 마법사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그렇게 동굴에 들어간 둘은, 미구엘이 움직일 준비를 마치고 아침 식사를 준비할 때쯤 돌아왔다.
"뭐 좀 건지셨소?"
이안은 대충, 하고 성의 없이 대답하며 육포를 씹었다.
안색이 하얗게 되어 나온 루시는 여전히 무덤덤한 얼굴이었지만, 식사에는 손도 대지 못했다.
미구엘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어땠길래 못 먹겠다는 거냐?"
돌아온 대답은 간단했다.
"맨정신으론 못 버틸 광경이었어요."
그제야 미구엘도 더는 권하지 않았다.
계곡 반대편에는 냇물도 있었다.
아주 깨끗하고 차가운 물.
덕분에 일행은 몸까지 씻고 여정을 이어 갈 수 있었다.
다들 거지꼴이나 다름없었으니, 그것만으로도 감지덕지였다.
"최소 이틀은 벌었소."
고삐를 쥔 미구엘이 덧붙였다.
"거기다 한나절 정도만 더 가면 다른 영주의 땅이오. 어쩌면 우리 소문이 아직 거기까진 안 닿았을 수도 있겠지."
"운이 좋다면 말이지."
이안이 젖은 머리를 털며 중얼댔다.
다행히 계곡을 빠져나온 후에도 추적자가 따라붙는 일은 없었다.
사방을 주시하던 일행의 분위기가 이윽고 느슨해졌다.
"화로의 사원에서도, 마법을 가르쳐 줄까요?"
문득 루시가 입을 열었다.
이안은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 아마 당장은 아니겠지."
사제들은 보편적으로 마법사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예비 타락자라는 편견 때문만이 아니라, 마법을 신의 기적을 모방한 것이라 여기기 때문이었다.
마법사들의 세력이 거대하지 않았다면 마력의 황혼기와 함께 숙청당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특히 루 솔라의 광신도들은, 세상의 기적은 신의 권능만으로 충분하다 여기는 자들이 태반이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보편적인 정서.
특정 교단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마탑이나, 그 이상의 교류를 이어가는 이들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공부를 하다 보면 결국, 어떤 식으로든 기회가 올 거다. 너에겐 그만한 재능이 있으니까."
루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사의 능력은 익힌 주문의 숫자로 알 수 있단 말을 본 적이 있어요. 그때가 되면, 저도 여러 가지 주문을 배울 수 있겠죠."
"…그런 얘긴 어디서 봤냐?"
"책에서요."
"그 책, 엉터리야."
이안이 단언했다.
주문의 숫자로 마법사의 능력이 결정된다면, 그는 이미 대마법사라 불리고 있으리라.
"중요한 건 얼마나 수준 높은 주문을, 어떤 경지까지 익혔느냐다."
"아하…."
"나는 그런 의미에서 특히 형편없지."
이안의 입가에 쓴웃음이 스쳤다.
한 분야에 통달한 대마법사는, 그에겐 이미 불가능한 미래였다.
"전혀 그래 보이지 않았는데요."
"네가 마법사로 조금만 성장해도 알게 될 거다."
그러고 보니, 슬슬 스킬 포인트를 몇 개쯤 쓸 때가 됐는데.
생각하는 사이, 루시가 덧붙였다.
"그럼 저도 스승님을 모시게 되는 건가요? 주문은 엄격한 규율 아래 전수된다고 들었거든요."
"그것도 그 책에서 읽은 거냐?"
"…네."
"그건 제대로 썼군. 그러니까, 혹시라도 주문을 가르쳐 달란 말은 하지 마라. 난 제자를 들일 생각 같은 건 전혀 없으니까."
어차피 가르쳐 줄 수도 없고.
이안은 스킬 창을 열었다.
거대한 스킬 트리가 눈앞에 펼쳐졌다.
"네가 가진 재능은, 굳이 고정된 관념에 국한될 필요가 없을 만큼 뛰어나. 공부하다 보면 너만의 주문을 만들어 낼 수도 있을 거다."
"…그럼, 주문이 아니라 마법에 대해서라도 알려 주실 순 없나요?"
"나도 별로 아는 게 없는데."
"기초적인 지식이라도요."
…칼질 가르쳐 달라고 보채는 것보단 이게 낫긴 하다만.
적색 마법의 스킬 트리를 눈에 담으며, 이안이 입을 열었다.
"적색 마법은 알다시피, 직관적이고 파괴적이지. 하지만 그런 만큼 위험하고, 통제하기 어려워."
고위 마법에 이를수록 장점과 단점이 모두 극대화됐다.
초월의 경지에 오르면 비로소 단점이 상쇄된다고 하지만.
이안은 그 수준에는 결코 닿을 수 없었다.
그게, 그가 다양한 속성의 마법을 필요한 수준까지 골고루 익혀야겠다고 결정한 이유이기도 했다.
어떤 속성에 올인한들, 대마법사가 될 수는 없었으니까.
섞어 사용하면 상승효과를 낼 수 있는 마법들을 최대한 익히고 활용해 돌파구를 찾는 게 현실적이었다.
자칫하면 더 엄청난 망캐가 될 수도 있겠지만….
"청색은요?"
"적색 말곤 굳이 네가 당장 알 필요는 없을 텐데."
"재미있어요. 궁금하고. …안 될까요?"
"…청색은 단단하고 날카롭지. 다채로운 변화가 가능하고. 하지만 그만큼 섬세함이 필요해. 숙달되기 전까진 별로 강하지 않기도 하고."
질문과 대답이 두런두런 이어졌다.
회색 마법은 빠르거나 치명적이지만 둘이 공존하지는 않는다거나.
갈색 마법은 변칙적이고 동시에 파괴적이지만 제약이 많아서 별로라던가 하는 식의 이야기를, 루시는 눈을 반짝이며 경청했다.
이안도 자신에게 내심 놀랐다.
이렇게까지 막힘없이 술술 설명할 수 있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어쩌면 공략집의 정보와 직접 사용하며 체득한 지식들이 내면에서 융합된 것일지도 몰랐다.
…이런 걸 게임일 때 알았어야 했는데.
"듣고 보니 확실히 알겠어요."
루시가 비로소 고개를 끄덕였다.
"선택권이 있었더라도, 전 적색 마법을 배웠을 거예요."
피식한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고 싶은 것과 잘하는 게 일치하는 건 축복이지."
"하지만 다른 마법들을 배우기 싫은 건 아니에요. 그럴 순 없겠지만. 그 옛날 백마법사처럼요."
"백마법사…?"
"모르세요? 먼 옛날, 마법이 처음 태동하던 시기엔 마법사들이 지금처럼 나뉘어 있지 않았대요. 서로 지식을 공유하고, 여러 속성의 마법을 익히고 연구했다고요."
루시의 눈에 생기가 돌았다.
"그러다 마침내, 모든 마법에 통달한 대마법사가 나타났다는 거예요. 다들 그를 경외를 담아 백색 마법사, 그러니까 백마법사라고 불렀고요. 모든 빛이 섞이면, 하얗게 변하거든요."
말문이 트였군.
대충 고개를 끄덕이는 이안을 바라보며, 루시가 덧붙였다.
"백마법사는 본인이 익힌 마법을 다른 마법사들에게 가르쳤대요. 하지만 제자들은 그가 승천하자 여러 색으로 나뉘어 분열했죠. 당연히 백마법사의 유산도 쪼개지고 유실되어서, 이젠 어디에도 온전하게 남지 않았다고 하고요."
"…그것도 책에서 읽었냐?"
"역사서에서요."
"아, 그래."
"그게 그냥 전설이 아니었다고?"
미구엘이 불쑥 끼어들었다.
조용해서 딴생각 중인 줄 알았더니.
이안과 루시의 대화를 경청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너도 아는 얘기냐?"
"나름 유명한 전설이오. 형씨는 마법사인데도 모르셨소?"
공략엔 그런 거 안 나오거든.
이안은 어깨만 으쓱였다.
역사나 전설 따위의 설정은, 굳이 책을 찾아 읽거나 NPC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퍼즐을 맞추듯 알아나가야 했다.
고인물이면 모를까. 주요 시나리오를 따라가기에도 바빴던 이안이 관심을 둘 분야는 아니었다.
"지금 마법사들의 지식과 주문은, 모두 한 명의 고대 대마법사로부터 전승된 것이라는 전설이오. 멋지잖소. 마법사들의 시조이자 신에게 가장 가까이 도달한 인간이 있다는 게. 현실적으로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역사서에도 기록이 있다는 걸 보면, 아예 없던 얘긴 아닌 모양이오."
"백마법사라…."
읊조리며, 이안은 눈앞의 스킬 트리를 바라보았다.
문득, 그의 머리 뚜껑을 열려던 노인이 떠올랐다.
그가 이안의 지식을 원한 건 그 전설 때문이었는지도 몰랐다.
'이걸 실제로 보면 생각이 달라지겠지만.'
이안이 볼때, 이 많은 스킬을 다 마스터 하는 건 불가능했다.
미구엘이 넌지시 물은 건 그때였다.
"그, 아직 말씀하실 게 남지 않았소?"
"뭐가 남았는데."
"전에 그러셨잖소. 흑마법에도 다양한 종류가 있다고."
번갈아 귀찮게 하네, 진짜.
혀를 찬 이안이 말했다.
"그걸 네가 알아서 뭐하게."
"그냥 궁금해서 말이오. 형씨 아니면 어디 가서 이런 걸 묻겠소?"
"마법사도 아닌 놈이…."
"뭐든 알아야 오래 사는 거 아니겠소. 지금만 해도 주문쟁, 아니, 마법사를 만나면 어떻게 튀어야 할지 감이 딱 잡혔단 말이오."
"어떻게 해야 죽일 수 있는지가 감이 온 거겠지."
"아니, 뭐, 그 생각도 안 한 건 아니긴 한데…."
미구엘이 머쓱하게 중얼댔다.
이안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나중에. 오늘만 날이 아니니까."
"...! 알겠소. 형씨가 기분 좋으신 날을 노려야겠군."
"그래. 지금은 닥치고."
미구엘이 냉큼 입을 다물었다.
비로소 조용히 집중할 수 있게 된 이안은, 차근하게 스킬들을 눈에 담았다.
그가 몇 개의 스킬 포인트를 투자한 건, 그로부터 몇 시간이 지나서였다.
'이만하면, 보급형 백마법사 정돈 된 것 같은데….'
피식한 이안은 미련 없이 스킬 창을 닫고 눈을 감았다.
자신의 판단이 옳았는지는,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될 터였다.
***
"후...."
긴 날숨과 함께, 이안은 명상에서 깨어났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완만하고 삭막한 오르막길.
언덕을 타고 불어오는 바람이 서늘했다.
북부가 가까워지고 있다는 증거였다.
"일어나셨소?"
미구엘이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잠든 루시를 확인한 이안이 입을 열었다.
"우리가 지금, 어디까지 왔지?"
"오늘 말이오, 아니면 전체적으로 말이오?"
"둘 다."
"일단 이 언덕을 넘으면 곧 갈림길이 나올 거요. 거기서 북쪽으로 꺾으면 새 영주가 다스리는 땅이지. 거기까지만 가도, 오늘 목표한 지점까진 간 거요. 전체적으론…."
수염난 턱을 긁적인 그가 이윽고 덧붙였다.
"반은 넘은 것 같소. 계속 지금처럼만 가면, 아마도 예상보단 빨리 도착할 것 같고."
이렇게 오래 움직였는데도, 반이라니.
이안은 등받이에 기대며 입맛을 다셨다.
더럽게 긴 여정이었다.
먼 거리를 단숨에 이동할 수 있는 마법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이 빌어먹을 세상엔 그런 것도 없었다.
마차가 언덕 정상을 올랐다.
"엥…? 형씨, 좀 보셔야겠소."
미구엘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마차 앞을 돌아본 이안의 눈매가, 이내 가늘어졌다.
완만한 내리막길 너머.
관도가 두 갈래로 갈라지는 지점에, 두 명의 기수가 서 있었던 것이다.
검은 마갑을 씌운 전마.
"정말 이쪽으로 가는 거였군."
"것 봐라. 내 말이 맞지? 우리가 길을 잘못 든 게 아니라, 앞질러 갔던 거라니까."
그리고 말에 기대 선 채 태연하게 대화를 주고받는 검은 갑옷의 남자들까지 확인한 순간, 이안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올 게 왔군.'
"내가 생각하는… 그게 맞소?"
미구엘이 그들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물었다.
이안이 내뱉었다.
"내가 내리면 마차를 뒤로 물려. 내가 안 보이는 거리까지 충분히. 알아 들어?"
미구엘이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어쨌든 이번 내기는 내가 이긴 거다. 뒤로 물러나 있어."
옆의 갈색 머리에게 말 고삐를 던진 금발이, 앞으로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손에 든 투구를 눌러쓴 그가 마차를 향해 양팔을 흔들었다.
"반가워! 드디어 만나는군!"
"이런 시벌…."
미구엘의 표정이 떨떠름해졌다.
호의적일 리 없는 자가 호의적으로 군다는 건, 그만큼 믿는 구석이 있다는 뜻일 터였다.
금발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래서, 너희 둘 중에 누가 검의 달인이지? 내가 그 친구한테 먼저 볼 일이 있거든."
"...."
이안의 미간이 구겨졌다.
여기서 또 저 얘길 들을 줄이야.
차라리 잘 됐다는 생각이 뒤를 이었다.
"나다. 검의 달인은 아니지만."
장단을 맞춰주면서, 필요한 정보도 캐낼 수 있을 테니까.
저놈의 거만한 태도로 봐선, 알아서 술술 불어댈 게 틀림 없었다.
로브를 벗어 어느새 깨어나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루시에게 덮어준 이안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일어섰다.
"오오… 당당하시군."
금발이 과장된 탄성을 터뜨렸다.
그가 뒤를 돌아보며 덧붙였다.
"내가 상상한 거랑은 좀 다른데. 난 좀 더 우락부락할 줄 알았거든. 네가 볼 땐 어때, 케네스?"
"뭐, 사람은 겉모습만으론 판단할 수 없는 법이니까."
말고삐를 쥔 채 우두커니 선 케네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아주 여유만만이군.
마차에서 훌쩍 뛰어내린 이안이 금발 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입을 열었다.
"대답했으니 나도 하나 묻지."
"얼마든지."
"어떻게 우릴 앞지른 거지?"
"의외인데? 난 우리 정체부터 물을 줄 알았거든."
"그건 이미 알아. 천칭 상단의 조무래기들이지."
"오...."
탄성과 달리, 금발의 눈빛이 순간 번들거렸다.
역시, 자존심이 센 놈이군.
이안이 생각하는 사이, 금발이 어깨를 으쓱였다.
"암표범 말이 사실이었군. 우릴 눈여겨 봤던 거야. 애석하게도, 조무래기는 아니지만."
"그래서, 대답은?"
"간단해. 우린 다른 놈들이 사흘은 걸릴 거리를 하루면 달릴 수 있거든. 그것도 매일."
뒤의 전마 쪽을 가리킨 금발이, 선회해서 왔던 길을 되돌아가고 있는 짐마차를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도망쳐 봤자 소용없다는 뜻이지."
지금 이들이 보이는 여유도, 마주친 이상 절대 놓칠 리 없다는 자신감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이안이 보기에도 당연한 자신감이었다.
제국에서 온 놈들이니까.
게임에선 3챕터에나 마주쳤을 자들.
상단에 고용된 놈들인 만큼, 제국 최고의 실력자까진 아니겠지만.
적어도 지금까지 상대해온 촌놈들과는 격이 다를 것이 분명했다.
물론 그게, 질 것 같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도망치는 게 아니야. 마차가 상하지 않게 물러나는 거지."
적당한 거리에서 멈춰선 이안이 내뱉었다.
"마차가 상하면, 앞으로의 여정이 피곤해지거든."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돼. 네 여정은 여기가 끝이니까."
미소 지은 금발이 허리춤에서 검을 뽑았다.
비늘을 이어 붙인 것처럼 생긴 검이었다.
이안이 덧붙였다.
"이름이 뭐지?"
"카일."
"그래, 카일. 진심으로 하는 말이라면, 저기 선 네 친구와 함께 덤비는 게 좋을 거야."
"...?"
"지금부터 싸울 텐데. 너 혼자서는 내 상대가 안 될 것 같거든."
"…하!"
순간 굳어졌던 카일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가 케네스를 돌아보았다.
"아무래도 검이 아니라 아가리의 달인인 것-"
콰직-!
말을 끝내기도 전에, 그의 고개가 옆으로 튕겨 나가듯 젖혀졌다.
충격으로 투구가 벗겨지고, 날아들었던 단검이 핑글핑글 회전하며 땅에 박혔다.
카일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이… 개… 자식이...?"
충혈되는 그의 눈을 마주 보면서, 이안이 태연하게 미소 지었다.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지. 함께 덤벼라. 이기고 싶다면."
#056화
"진심인 것 같은데. 합류할까?"
뒤에 선 케네스가 덧붙였다.
어깨를 부들댄 카일이 소리쳤다.
"지랄하지 마! 끼어들면 너도 죽인다!"
그가 붉어진 눈으로 이안을 노려보며 뿌득, 이를 갈았다.
"그 아가리부터 찢어 주마, 이 개자식아!"
그래. 그렇게 나올 줄 알았다.
카일이 돌진한 건, 이안이 실소를 삼키며 검을 뽑아 든 직후였다.
덩치에 걸맞지 않게 빠른 속도.
놈의 얼굴로 단검이 한 번 더 날아들었다.
콰직, 후웅-!
팔로 단검을 쳐 낸 놈이, 그대로 검을 내리쳤다.
옆으로 몸을 날린 이안이 바닥을 구르고, 비늘검이 허공을 갈랐다.
풍압에 땅이 푹 패였다.
힘 하난 엄청난 놈이군.
생각할 찰나, 한쪽 발을 내리찍으며 급제동한 카일이 그대로 몸을 돌려 검을 휘둘렀다.
이안이 황급히 검을 들었다.
카가가강-
날 사이에 단죄의 검이 걸리면서, 이안의 몸이 주르륵 밀려났다.
검날에 팔을 덧댄 이안이 간신히 멈춰 섰다.
카일이 그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다.
"검의 달인이라더니, 고작 이거냐?"
"네가 착각하는 게 있는데."
이안의 눈동자가 붉게 물들었다.
"난 한 번도 내가 검의 달인이라고 한 적 없어."
"...!"
화르르르-
이안의 주위로 불덩이가 연달아 피어올랐다.
눈을 치켜뜬 카일이 이안을 밀쳐내며 뒤로 물러났다.
퍼버버버벙!
그를 따라 쏟아진 불덩이가 연달아 폭발했다.
카일이 팔을 들어 얼굴을 가리는 가운데.
쉬학-!
폭발을 뚫고 쇄도한 이안이 검을 횡으로 후려쳤다.
카일이 당황한 와중에도 검을 들어 막아냈다.
콰지직- 펑.
"...?!"
이안의 검에서 소리 없는 폭발이 일었다.
일순간 주위 모든 것을 끌어당겼다가 밀어내는, 진공 폭발.
마법이라는 티가 거의 나지 않기 때문에, 이런 난전에 사용하기 가장 편리한 마법 중 하나였다.
콰장창-
포탄에 맞은 것처럼 튕겨 나간 카일이 바닥을 굴렀다.
화르르륵-
춤추는 불꽃을 다시 피워 올리며, 이안은 쓰러진 카일을 향해 재차 달려들었다.
단죄의 검이 파공음을 흩뿌리며 날아들 찰나.
"주문쟁이였냐? 차라리 잘 됐군!"
쩌엉-!
일갈과 함께, 카일의 전신에서 충격파가 터져 나왔다.
후끈한 열기. 충격파에 부딪힌 이안이 뒤로 밀려나고, 날아들던 불꽃들이 허공에서 폭발했다.
자욱해진 연기를 밀어내며, 카일이 몸을 일으켰다.
"나도 비슷한 걸 할 줄 알거든."
진공 폭발에 적중당했음에도, 그의 팔은 부러지지조차 않았다.
검은 갑옷 곳곳에 박힌 마석이 붉은빛을 머금고 일렁였다.
카드득-
자루를 움켜쥐는 손길을 타고 불똥이 튀었다.
"아, 그래. 템빨로 승부 보는 타입이었군."
착지한 이안이 자세를 다잡으며 내뱉었다.
카일이 되물었다.
"템빨…?"
"실력보다 장비가 좋다는 뜻이지."
"이… 빌어먹을 주문쟁이가…!"
쿠확-!
카일이 포탄처럼 돌진했다.
그의 뒤로 불똥이 사방으로 흩날렸다.
청색 마법으로 싸울 걸 그랬나.
전신에 바람 칼날을 두른 이안이 몸을 날렸다.
콰아아-
내리치는 칼날의 궤적을 따라 불길이 넘실댔다.
상단 호위병 주제에 마법 무구 풀 세트라니.
헛웃음이 절로 나왔지만, 사실 상대가 제국인임을 감안하면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변방의 왕국들이 아무리 날고 기어도 결코 제국보다 강대해질 수 없는 이유도, 이런 것들 때문이었다.
왕국은 저들처럼 마법 무구를 개개인이 소유할 만큼 확보할 수도, 만들어 낼 기술을 손에 넣을 수도 없었다.
저놈이 온몸에 두른 마법 무구는, 일종의 특권이나 다름없었다.
콰아아아- 콰르르-
카일의 공세가 숨 쉴 틈 없이 이어졌다.
섬세함은 떨어졌지만, 힘과 체력만큼은 대단한 수준이었다.
집중력과 육감, 바람 칼날의 도움까지 받으며 피해 내던 이안을, 끝내 회피할 수 없는 순간까지 몰아붙인 것이다.
이를 악문 이안이 날아드는 궤적에 맞춰 검을 들었다.
그의 눈동자에, 날아드는 비늘검이 느릿느릿 새겨졌다.
후끈한 열기가 궤적을 따라 밀려들었다.
"...!"
하지만 이안의 미간이 꿈틀댄 건, 그 불길 때문이 아니었다.
일순간 느껴진 불길함.
카가가각-
비늘검과 맞부딪친 단죄의 검에서 불똥이 튀고, 일순간 카일의 눈에 살기가 번뜩였다.
"뒈져라-!"
철컥, 촤르르르륵-
그가 검 손잡이를 누르자, 비늘검이 순간적으로 뱀처럼 늘어났다.
검날이 단죄의 검을 휘감으며, 그 너머의 이안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이안이 순간적으로 몸을 뒤로 젖힌 건 그때였다.
"...?!"
승리를 확신했던 카일의 눈이 비로소 커졌다.
비늘검이 이안의 코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뒤따르는 불길.
하지만 이안의 저항력을 뚫어 낼 만큼의 열기는 아니었다.
불길은 그의 피부를 붉어지게 하고, 앞머리만 조금 불태웠다.
촤르륵-
카일이 늘어난 검을 끌어당겨 회수하는 사이.
용수철처럼 몸을 일으킨 이안이,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놈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이것도 막아 봐라."
땅을 스치듯 휘둘러지는 단죄의 검에, 푸른 빛이 타올랐다.
카일의 눈에 핏발이 섰다.
"무슨?!"
쩌엉-!
그리고 그것이 그의 유언이었다.
올려 친 단죄의 검은 놈의 옆구리에 박혀 멈췄지만, 섬광은 그대로 뻗어 나가 상반신을 꿰뚫었다.
쩍 벌어진 카일의 입에서 피가 왈칵 토해졌다.
허리부터 가슴까지 사선으로 잘린 상반신이 뒤로 넘어갔다.
주위로 일렁이던 불길과 흩날리던 불씨가 뒤이어 잦아들었다.
"…허."
연기 사이로 드러난 광경에, 케네스의 입이 뒤늦게 벌어졌다.
카일의 일격으로 자욱해진 연기 속에서 푸른 빛이 번쩍인 것밖에 보지 못한 그였다.
다음 순간 이어진 광경이 가슴이 쩍 벌어져 죽은 카일과, 이제는 자신을 바라보는 이안이라니.
"어이가 없군. 내가 제대로 본 게 맞나? 검을 쓰는 마법사도 처음 보는데, 신성력이라니…."
케네스가 눈을 간신히 깜빡이며 내뱉었다.
어깨만 까딱이는 이안에게, 그가 덧붙였다.
"아무리 성물이라도, 신들이 마법사에게 신성을 내려 주실 리가 없는데. 어떻게 한 거지?"
"글쎄. 나한테는 내려 주던데."
"네 진짜 정체는 뭐지? 이런 촌구석의 떠돌이 용병이 카일을 죽일 수 있을 리가 없어."
"뭐, 이 세상 사람은 아니지."
"...?"
대답이 이어질수록, 케네스의 표정이 점점 더 어리둥절해졌다.
이안은 더 내뱉는 말 없이, 팔을 휘둘러 검에 묻은 피를 털어냈다.
비로소 케네스의 얼굴에 헛웃음이 번졌다.
"그래, 순순히 대답해 줄 생각 따윈 없는 거군."
"사실을 말했을 뿐이야."
곧 죽을 놈한테 뭐 하러 거짓말을 해?
속으로 읊조린 이안이, 우묵한 눈으로 케네스를 바라보았다.
"하나 묻지. 너희 패거리 중에, 이놈은 어느 정도 수준이지?"
케네스의 시선이 카일의 시신으로 향했다.
그의 입가에 쓴웃음이 번졌다.
"최약체… 라고 하고 싶지만. 애석하게도 샬롯을 제외하곤 다 비등비등하다고 할 수 있지. 샬롯은 확실히 남다른 구석이 있거든."
"샬롯...?"
"아, 이름은 모르겠군. 수인이다. 그 녀석은 널 기억하고 있던데. 우리가 너흴 쫓은 것도, 그 녀석 덕분이거든."
"아, 수인. 나도 기억하고 있지."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놈이 우릴 쫓아 올 줄 알았는데. 너희가 왔더군."
"그러고 있을 거다. 우리가 선발대일 뿐. …너희를 다 죽이고 아가씨를 들고 돌아갈 줄 알았는데. 이런 촌구석이 내 무덤이 될 줄은 몰랐군."
"그런 게 인생이지. 나도 내가 이런 개 같은 세상으로 떨어질 줄은 몰랐거든."
"영문 모를 소릴 잘하는군. 마법사라 그런가."
케네스가 등에 멘 창을 뽑았다.
자루를 비틀자, 창대 옆에서 반달 형태의 날이 튀어나왔다.
"아무리 성물이라도 연달아 신성을 빌려 올 수는 없겠지. 네가 적색 마법사라는 것도, 검술이 엄청나진 않다는 것도 알았고. 이만하면 밑천은 꽤 드러난 것 같은데…."
담담하게 말을 이은 케네스가 이안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이 정도로 하고 보내주지 않겠나? 솔직히, 아무런 상처 없이 이길 자신은 없어서 말이야."
"보내 주면, 안 쫓아올 거냐?"
"나는 그러고 싶지만. 고용주가 그럴지는 모르겠군."
케네스의 쓴웃음이 짙어졌다.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어느새 헐떡이던 숨이 거의 가라앉은 채였다.
"그럼, 결론은 난 것 같군."
"애석하군. 아까 네 말대로 합공할 걸 그랬어. 카일을 도발한 거라고 생각했는데. 진짜 우리가 살 길을 알려준 거였군."
쿠- 확-!
다음 순간, 케네스가 예고 없이 달려들었다.
그의 갑옷에 박힌 마석들이 일제히 빛나고, 흐릿한 냉기가 뿜어져 나와 그를 떠밀었다.
적색 다음은 청색이냐?
헛웃음을 지은 이안이 뒤로 몸을 날렸다.
동시에 손을 뻗어, 케네스를 향해 화염구를 발사했다.
펑- 퍼엉-!
케네스는 미늘창을 휘둘러 화염구를 아무렇지도 않게 베어 내며 돌진했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그가 손을 뻗었다.
쩌저적-!
이안의 뒤와 옆으로 순식간에 얼음 가시들이 솟구쳤다.
이안이 바닥을 구르며 멈춰 섰다.
쩌저적, 이어진 가시들이 그의 퇴로를 막았다.
아, 그래. 다 이유가 있는 조합이군.
이안은 쇄도하는 케네스를 바라보며 몸을 낮췄다.
이미 패배한 것처럼 굴었지만, 놈의 눈빛은 삶을 포기한 자의 그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어디까지나 이안의 방심을 유도하려 한 것일 터.
하지만 그건, 이안도 마찬가지였다. 애초에 그는 이 전투를 길게 끌고 갈 생각이 없었다.
쩌저적-!
이안의 앞으로 얼음 방벽이 피어올랐다.
"...?!"
콰지직!
눈을 치켜뜬 케네스가, 그대로 방벽 위를 후려쳤다.
하지만 일격에 박살 낼 수는 없었다.
오히려 표면에 종유석처럼 튀어나온 얼음 기둥들이 그의 갑옷을 찔렀다.
혼돈력으로 발현한 서리 방패는, 한 번이라면 용의 숨결도 막아 낼 수 있을 터였다.
"청색...?!"
케네스의 얼굴에 경악이 번지는 사이.
콰앙! 방패가 폭발하면서, 파편이 그의 전신을 휩쓸었다. 투구 아래로 드러난 얼굴에 칼로 베인 것 같은 상처가 생겼다.
그 사이로 쇄도한 이안이, 마력이 휘몰아치는 눈으로 케네스를 마주보았다.
이를 악문 케네스가 갑옷에 새겨진 마법을 발동하려 한 그때.
쿠확-!
이안의 손아귀에서 마력의 파장이 터져 나왔다.
파치칫-
형성되던 마법이 흩어지고, 무구에 박힌 마석들이 멋대로 점멸하기 시작한 건 그 직후였다.
케네스의 얼굴에 당혹이 번졌다.
"이게 무슨…?!"
마력 역류라는 거다.
속으로 대꾸한 이안이 곧바로 다음 마법을 준비하며 뛰어올랐다.
마력 역류는, 말 그대로 마력의 흐름을 역류시켜 마법 무구나 시전 중인 마법을 일시적으로 무력화시키는 비전 스킬이었다.
유용해 보이는 능력과 달리 사거리가 짧고 정확한 타이밍에 써야 하는 데다가.
유물이나 성물, 보스급 네임드의 스킬은 무력화시킬 수도 없었다.
하지만 그런 만큼, 허를 찌른다는 측면에선 확실한 효과가 있었다.
주문을 완성한 이안은 아직 상황 파악이 끝나지 않은 케네스를 향해 손을 내뻗었다.
쩌저저적-
케네스의 주위로 벌집 같은 얼음 기둥들이 솟아올랐다.
청색 마법, 얼음 감옥.
"대체 어떻게…?"
내뱉던 케네스가 숨을 멈췄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이안의 눈이, 어느새 다시 붉게 일렁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콰직! 콰장창-!
뒤늦게 창을 든 그가, 얼음 감옥을 마구 내리치기 시작했다.
콰르르르르-
하지만 샛노란 불길이 그를 집어삼키는 게 더 빨랐다.
불길은 케네스와 얼음 감옥은 물론, 인근 지역을 모조리 뒤덮었다.
중위 적색 마법, 화염 장벽.
새로 익힌 스킬 중 하나였다.
감옥을 뚫고, 불길에 휩싸인 케네스가 나뒹굴었다.
비로소 다시 갑옷의 마석이 번쩍이고, 냉기 파장이 터져 나왔다.
이미 너무 늦은 다음이었다.
케네스는 숨이 끊어지진 않았지만, 전신에 지독한 화상을 입은 데다 두 눈까지 멀어버린 상태였다.
"하...."
그의 입에서 체념의 한숨이 번지는 가운데, 인상을 찌푸린 이안이 그 앞에 착지했다.
의도한 결과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케네스가 이렇게까지 고통받게 할 생각은 없었다.
단숨에 타죽을 줄 알았건만.
"미안하군, 지금 바로 편하게 해 주겠다."
케네스의 입가에 허탈한 미소가 번졌다.
"돈 받고 사람 죽이며 산 죗값을 이렇게 치르는군…."
콰직!
이안이 내리친 검이 케네스의 목을 단숨에 잘라냈다.
주위에 일렁이던 냉기가 잦아들었다.
"후우…."
한숨을 내쉰 이안이 그 곁에 주저앉았다.
두통과 현기증이 뒤늦게 밀려들었다.
마력을 연달아 너무 많이 소모한 까닭이었다.
하지만 수확이 없는 건 아니었다.
지금까지 연구하고 체득해 온 그의 전투 방식이, 제국의 실력자들에게도 통한다는 것을 확인했으니까.
물론 최강자들이라 할 순 없었지만, 이안 역시 전력을 쏟아부은 것은 아니었으니 의미는 충분히 있었다.
적어도 묘한 안도감을 주기엔 충분했다.
"좀 더… 아껴도 되겠네."
아직은 스탯 포인트와 스킬 포인트를 다 써 버릴 때가 아니다.
그 사실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이안은 삶의 유예 기간이 늘어난 것 같은 느낌이 들었으니까.
"...?!"
이안의 눈매가 꿈틀댄 건 그 직후였다.
두 호위병의 시신에서 기묘한 마력의 흐름이 전해졌다.
죽은 자들이 되살아날 리는 없었으니, 저들의 마법 무구에서 일어나는 현상일 터였다.
케네스의 시신을 붙잡아 든 이안의 미간이, 이윽고 좁아졌다.
"아, 이런."
시신 아래에 마력이 모여 문양을 이루고 있었다.
과거 콘라우드의 정수가 그랬듯, 희미한 마력의 파장이 이어졌다.
아마 이들의 고용주에게 신호를 보내는 것이리라.
없애는 건 당연히 불가능했다.
"…촌놈들 상대할 때가 좋았지."
고게를 설레설레 저은 이안이, 이윽고 몸을 일으켰다.
***
"그러니까 이게, 마법 표식, 뭐 그런 거란 말이오?"
미구엘이 물었다.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이런, 시부럴. 좆됐구만."
"그럼 우리 위치가 알려지는 건가요?"
짐칸에서 고개만 내민 루시가 물었다.
"그렇겠지. 여기까지 오면, 우리가 북부로 가고 있다는 것도 확실히 알게 될 테고."
대답한 이안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만 보고 누워 있어라. 자꾸 이런 거에 관심 가지지 말고."
"시체는 익숙한걸요. 아무렇지도 않아요. 한두 번 본 것도 아니고."
"하아…."
이안의 한숨이 깊어졌다.
시체가 익숙한 열두 살이라니.
그가 냉혹한 살인마가 된 것만큼이나 끔찍한 일이었다.
"와서 이거 벗기는 거나 좀 도와주시겠소? 이상하게 안 벗겨지는데."
그사이, 카일의 시체를 붙잡고 끙끙대던 미구엘이 말했다.
이 와중에도 경호병들의 마법 무구에 눈이 돌아간 것이다.
혀를 찬 이안이 내뱉었다.
"그걸 벗기려면, 시체를 다 토막 내야 할 거다."
"엥...? 왜?"
"귀속 마법이 걸려 있는 것 같거든."
이안이 이걸 아는 건, 물론 그도 이들의 갑옷을 벗기려는 시도를 했었기 때문이었다.
"이 무기들도, 주인이 아니면 제 성능을 다 낼 수 없을 거고."
천칭의 비늘검과 천칭의 미늘창.
정보 확인이 가능한 이 무기들은, 제대로 된 성능을 발휘하려면 각인 과정을 다시 거쳐야 했다.
그러려면 마법 무구를 다룰 줄 아는 장인도 필요했다.
게임에선 난이도가 너무 낮아지는 걸 막기 위해 만든 것이 분명했던 시스템이, 현실이 된 지금도 이런 식으로 작동하고 있었다.
"오, 그래도 이 석궁은 쓸 만해 보이는군. 좀 타긴 했지만."
케네스의 허리춤에서 쇠뇌를 집어 든 미구엘이 눈을 빛냈다.
시위가 이중으로 걸린 소형 석궁.
"그… 저기 말이오, 이거…."
"네가 써라. 눈치 보지 말고."
"어, 정말이오? 그래도 되겠소?"
화색이 된 미구엘이 석궁을 품에 안았다.
이안이 심드렁하게 덧붙였다.
"곧 숨 막히게 쫓길지도 모르는데, 쓸 수 있는 건 다 써야지."
"…아, 그래서였소?"
"상단의 추적자가 더 있을 거다. 거기다 곧 벨 론데의 용병들도 따라붙겠지. 상단의 추적자들은 눈에 띌 테니까."
말을 이으며, 이안은 카일과 케네스의 품에서 뒤진 무기들과 마석들을 점검했다.
갑옷을 벗길 수는 없어도, 검날을 넣어서 비틀면 마석은 충분히 분리할 수 있었다.
정수만큼은 아니라도, 비상시엔 요긴하게 써먹을 수 있으리라.
비늘검과 미늘창을 아공간에 쑤셔 넣고, 카일이 쓰던 제국제 단검을 허리에 찬 이안이, 마지막으로 케네스의 단검을 들어 마차로 향했다.
"...?!"
그가 단검을 내밀자, 루시의 눈이 커졌다.
"제 거예요?!"
"가지고 놀라고 주는 거 아니다. 정말 위급한 상황에서만 뽑도록 해. 그러지 않으면, 그냥 다시 회수할 거다."
"네…!"
루시가 고개를 끄덕이며 단검을 받아 들었다.
…벌써부터 불안한데.
입맛을 다시는 이안의 귓가로, 미구엘의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가만 보면 말이오. 형씨는 보기보다 잔소리가 많으신 것 같소. 루시가 한두 살 먹은 애도 아니고 그런 건 알아서… 크흠."
이안의 시선을 받은 미구엘이 헛기침을 했다.
재빨리 마차로 다가선 그가 말을 이었다.
"그래서, 이제 어쩌실 생각이시오?"
"조금 더 빨리 움직여야지."
"어떻게…?"
이안의 시선이 옆으로 돌아갔다.
"...!"
같은 곳을 돌아본 미구엘의 눈이 이내 커졌다.
마갑을 걸친 전마 두 마리가 그제야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마갑에 박힌 마석들이 아직도 반짝이고 있었다.
#057화
검은 마차 위.
"아니…?"
푹신한 의자에 앉아 있던 하비에르가 문득 미간을 찌푸렸다.
나른한 표정으로 그 옆을 따르던 샬롯이 고개를 돌렸다.
마석 박힌 목걸이를 움켜쥔 하비에르의 얼굴이 심상치 않았다.
날카로운 눈빛. 그와 반대로 억지로 미소를 그려낸 듯한 입매.
그녀의 고용주가 일이 원치 않는 방향으로 흘러갈 때 지어 보이는 특유의 미소였다.
목걸이를 움켜쥐고 잠시 눈을 감았던 그가, 이윽고 상단의 고용인에게 손짓했다.
그를 포함해 열 명으로 꾸려진 추적대는, 그저 카일과 케네스가 남긴 이정표를 따라 이동만 한 것이 아니었다.
둘씩 짝을 지은 고용인들이 인근을 오가며 정보를 수집해 왔다.
하지만 바쁜 건 그들뿐.
샬롯에겐 따분한 행군의 연속에 불과했다.
"…그리 가지. 준비해 두도록."
속삭임 끝에 하비에르가 내뱉자, 고개를 끄덕인 고용인들이 말머리를 돌려 달려 나갔다.
그들이 달려가는 방향이 본래의 목적지와는 다르다는 것을 확인한 샬롯이, 비로소 혀를 날름거리고는 입을 열었다.
"뭔가 문제가 생겼습니까?"
"그래… 카일과 케네스가 당했다."
"...!"
샬롯의 눈이 순간 커졌다.
나른하게 안장에 기대 있던 그녀의 허리가 꼿꼿해졌다.
마차 반대편, 또 다른 직속 호위병인 올레그가 내뱉었다.
"그 검의 달인이라는 놈의 짓입니까?"
"이 변방에 그 둘을 동시에 죽일 실력자가 또 있는 게 아니라면, 아마도. 국왕의 말이 아예 허무맹랑하진 않았던 거야. 내 오판 때문에 추가적인 손실이 생겼군…."
하비에르의 목소리에는 일말의 애도나 슬픔도 담겨 있지 않았다.
손해 본 금액에 대한 아쉬움뿐.
올레그와 샬롯의 반응도 다르지 않았다.
애초에 그들은 고용주가 같을 뿐, 동료애 따위로 맺어진 관계가 아니었다.
샬롯의 얼굴에는 오히려 희열이 번지고 있었다.
빼앗긴 줄 알았던 사냥감이 돌아왔으니까.
"제가 나설 차례로군요."
그녀가 가르릉대는 숨소리와 함께 내뱉었다.
안장 위로 기분 좋게 곤두선 그녀의 꼬리를 홀린 듯 곁눈질하던 하비에르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지금은 나슬란으로 간다."
"...?"
샬롯의 꼬리가 힘을 잃었다.
나슬란은 이 근방의 도시였다. 본래라면 들를 일정도 없었던 곳.
그녀는 그제야 조금 전의 고용인들이 나슬란으로 향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상대를 과소평가하는 건 한 번으로 족해. 설사 요행수였다 하더라도, 두 번 반복되지 않으리란 법은 없지."
"…전 그놈들처럼 당하지 않습니다."
샬롯이 싸늘하게 내뱉었다.
하비에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네 실력을 잘 안다, 샬롯. 올레그, 자네도. 난 자네들을 믿어. 하지만 상인은 절대 믿음만으로 모든 걸 걸지 않지. 상대가 하룻강아지가 아니라는 걸 알았으니, 조금의 위험도 간과할 수 없어."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올레그가 물었다.
하비에르가 어깨를 으쓱였다.
"이미 다른 들개들이 그들을 쫓고 있지 않나. 우린 그것들보다 더 힘센 사냥개를 풀어야지. 사냥감의 힘이 빠질 때까지 쫓도록. 마침… 나슬란에 그런 사냥개들이 있다더군. 어리석은 선택 때문에 옴짝달싹 못 하게 된 멍청한 사냥개들이 말이야."
그가 은근한 미소를 지었다.
샬롯에게 어떤 본능적인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상인 특유의 미소.
부하들을 바쁘게 놀린 덕분에, 그는 인근 영지의 상황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알고 있었다.
사냥감이 엄한 자들의 손에 들어갈 것을 염려한 행동이었다. 만일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그자들에게서 빼앗기라도 해야 할 테니까.
국왕이 파견한 기사들의 소식도, 그 과정에서 손에 넣은 정보였다.
루시아 리우렐의 행방을 놓친 것에 분개한 나머지, 거치는 마을마다 현상금을 뿌리고 용병을 고용한 멍청한 놈들.
놈들은 결국, 돈 냄새를 맡은 영주의 명령으로 구금됐다.
국경을 넘어왔으니 저항할 명분도 없었으리라.
그들은 나슬란에서, 벨 론데의 영주 중 누군가가 루시아 리우렐을 붙잡아 오길 기다리는 신세가 됐다.
그때가 되어도 몸값을 흥정할 전령으로나 활용될 테니, 하비에르가 내미는 구원의 손길을 거절할 수 없을 터였다.
자신들의 치욕과 불명예를 씻어 낼 방법은 그것뿐일 테니까.
샬롯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내뱉었다.
"결국은… 몰이 사냥이로군요."
"그만큼 확실한 방법이 없으니까. 아무리 멍청한 것들이라도, 제대로 된 주인이 목줄을 채워서 부린다면 쓸모가 생기는 법이지."
"사냥감이 사냥개에 물려 죽게 만들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걱정 마라. 그럴 일은 없을 테니까."
하비에르가 저 멀리 보이기 시작한 도시를 눈에 담았다.
"사냥감의 숨통을 끊고 전리품을 차지하는 건 자네들이 될 거야. 이만하면, 모두가 만족하는 거래 아닌가?"
"...."
그런 건 내 취향이 아니라니까. 당신처럼.
속으로 읊조리면서도, 샬롯은 더 이상 불만을 토로하지 않았다.
억눌린 야성을 발산할 기회가 다시 손에 들어온 것만으로도, 조금 더 인내할 가치는 충분했다.
***
말을 교체했음에도, 일행의 이동 속도는 그다지 빨라진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마갑에 새겨진 마법은 제대로 작동하고 있었지만, 말이 달리면 마력 소모량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기 때문이다.
시험 삼아 달려 본 결과,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마석들이 빛을 잃었다.
최소 세 가지 이상의 마법이 새겨져 있는 모양이었다.
짐가방에 남아 있던 마석은 고작해야 사흘 남짓 달리면 동날 분량.
상단에서 온 추적자 놈들은 마석을 말 그대로 물 쓰듯이 하면서 그들을 따라왔던 게 분명했다.
그래서 이안은 속도 대신 이동 시간만 늘리기로 했다.
사실, 의미는 만약의 상황에 더 빠르고 멀리 도주할 방법이 생긴 것만으로도 충분히 있었다.
미구엘은 여기에 한 가지 제안을 더했다.
"시간도 벌었고 더 오래 이동할 수도 있게 됐으니, 여기선 조금 돌아서 갑시다."
"얼마나?"
"내 기억이 맞으면, 북동쪽으로 질러가면 영주성 인근을 지나야 한단 말이오. 별일 없으면 다행이지만, 있으면 난리가 날 거요. 그러니 우회해서 갑시다. 번 시간만큼 다시 쓰면, 충분할 거요."
"중간에 들키면 영지를 넘나들면서 튀고?"
"바로 그거요. 이젠 뿌리칠 수도 있잖소. 형씨도 영원히 싸울 순 없으니까. 피할 건 피해야지. 여기만 지나면 버려진 땅이오. 거긴 흉지 천지이니 여기보단 안전하겠지. …거길 안전하다고 표현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너도 드디어 사람이 마물보다 무섭다는 걸 깨우쳤군."
피식한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도 체력과 마력을 회복할 시간이 필요한 건 사실이었다.
그렇게 다시, 언제 끝날지 모르는 조용한 전진이 시작됐다.
마부석의 미구엘은 제국제 석궁을, 그 뒤에 기대앉은 루시는 단검을 질리지도 않고 만지작댔다.
이안은 구석에서, 갑각 같은 재질의 회색 가시에 가죽 띠로 손잡이를 만들고 있었다.
동굴 거미 여왕의 독니였다.
이건 심지어 정보 확인이 가능한 무기였는데, 무려 4레벨의 마비독을 머금고 있었다.
4레벨이면 순간적으로 이안도 마비시킬 수 있는 수준.
수치상 최대 5번에, 따로 독을 보충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강적을 상대할 때 훌륭한 보험이 되어 줄 터였다.
단검을 완성한 이안은 독니를 아공간에 넣고는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짐가방에서 식량과 붕대, 양초 따위를 꺼내 작은 배낭에 꼼꼼히 눌러 담기 시작했다.
그 영문 모를 행동들을 가만히 지켜보던 루시가, 이윽고 등받이 너머의 마부석으로 고개를 돌렸다.
"미구엘."
"엉?"
"미구엘은 의뢰가 끝나면 어떻게 할 거예요?"
"어허! 빨리 침 뱉어! 빨리!"
어깨를 들썩인 미구엘이 재빨리 외치고는 밖으로 가래침을 뱉었다.
영문도 모른 채 일단 따라 한 루시가 그를 향해 몸을 돌렸다.
미구엘이 입맛을 다셨다.
"재수 없는 말을 하면, 빨리 침을 뱉어야 해. 일종의 액땜이지."
"액땜은… 왜 하는 건데요."
"잘 들어라, 루시. 용병들 사이에는 의뢰 도중에 절대 하면 안 되는 말들이 여럿 있어. 내뱉거나 대답하기만 해도 재수가 옴 붙고, 심하면 죽을 수도 있는 말이지."
"그건, 저주라고 부르지 않나요?"
"거의 비슷해. 미신이라고 치부하는 사람도 많지만, 내 말 믿어라. 그렇게 무시한 인간들, 다 죽었으니까."
"제 질문이 그런 거였다고요?"
"그래. 이번 의뢰가 끝나면 뭔가를 하겠냐고 했지? 이 질문에 대답한 순간 저승에 한 다리쯤 걸쳤다고 보면 돼. 비슷한 말로 고향에 돌아갈 거다. 결혼을 약속한 사람이 있다. 자식들이 기다린다가 있지."
미구엘이 진지한 얼굴로 루시를 돌아보았다.
"이런 말은, 의뢰가 끝난 후에나 하는 거다. …사실, 넌 알 필요 없는 것들이지만."
"미구엘은 아는 게 참 많은 것 같아요. 특히 미신에 대해서는."
"네가 저주받았다고 생각하듯이, 나도 그렇거든."
"하지만 제 저주는 진짜인걸요. 지금까지 이걸 피해간 건 언니를 포함해서 세 분뿐이에요."
"나랑 저 형씨? 그럼 필립은?"
"필립은… 그 정도는 아니에요."
푸학, 웃음을 터뜨린 미구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쨌든 내 말이 그 말이다. 난 불운을 몰고 오는 행동은 절대 안 해. 그 덕에 아직 살아있는 거고."
"…이해했어요."
고개를 끄덕인 루시가, 몸을 낮춰 등받이에 턱을 얹었다.
"전 그냥, 절 데려다준 후에 갈 곳이 없다면 함께 남아 주실 수 없나 해서 여쭤본 거예요."
"엥…? 화로의 사원에?"
"거기에도 고용인들이 있다던데요. 제가 부탁하면 미구엘이랑 이안 님도 지내실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요."
미구엘의 옆얼굴을 올려다 본 루시가 덧붙였다.
"나중에 제가 다시 세상에 나올 때, 같이 나올 수도 있고. 미구엘은 훌륭한 길잡이니까."
"흐음… 아니 뭐… 사실 딱히 갈 곳이 정해진 건 아니긴 한데."
턱을 어루만지는 미구엘의 입술 끝이 슬며시 올라갔다.
"저 형씨는 안 남겠지만, 나는 네가 그렇게나 원한다면 남을 수도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재수 옴 붙는다더니. 그거면 대답한 거나 마찬가지 아니냐?"
어느새 정리를 끝내고 한쪽 벽면에 기대앉은 이안이 되물었다.
미구엘이 정색하며 고개를 저었다.
"끝을 흐렸잖소. 이건 대답한 게 아니지. …그래서, 형씨는 어떻게 생각하시오?"
"난 당연히 떠날 거다. 그렇게 봐도 달라질 건 없어. 루시."
"…어디로 가실 건데요?"
루시가 입술을 꾹 누르며 물었다.
이안의 표정이 가라앉았다.
"글쎄… 어디든 가겠지."
"...."
"너랑은 상관없는 일이니까, 미련 남길 시간에 연습이나 해. 그날 이후로, 아직 불씨도 못 만들어 내고 있잖아?"
"…알았어요."
루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손바닥을 내려다보는 눈길이 시무룩했다.
미구엘이 슬쩍 중얼댔다.
"거, 말 좀 곱게 하시지. 애 기죽게…."
"곱게 갈아 줄까?"
"…혼잣말이었소. 혼잣말."
미구엘의 뒤통수에 대고 콧방귀를 뀐 이안은, 이내 비스듬하게 드러누웠다.
"명상할 거니까, 싸워야 될 일 아니면 깨우지 마라."
"알겠소."
잠시 어둑어둑한 하늘을 눈에 담은 이안이, 명상을 활성화했다.
주위의 잡음이 사라지면서, 의식이 내면으로 침잠했다.
행선지에 대한 상념이 이어졌다.
이번 의뢰가 끝나고 어디로 갈지는, 그도 아직 제대로 결정한 적이 없었다.
이미 게임에서의 흐름과 그의 여정이 완전히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때는 벨 론데와 루 사드를 거쳐 북부로 갔고. 산맥 지대와 버려진 땅을 거쳐 화로의 사원으로 들어왔었기 때문이다.
사실상 모든 순서가 어그러진 셈.
'그럼 아예 역순으로 움직이면…?'
이안은 심상에 지도를 떠올렸다.
화로의 사원에서 버려진 땅으로. 그리고 산맥을 거쳐 루 사드로 향하는 선이 어렴풋이 이어졌다.
그럴듯하지만, 변수는 여전히 많았다.
특히 버려진 땅이나 산맥 지대는, 길을 찾기가 어려운 데다 툭하면 눈보라에 얼어 죽는 바람에 많은 퀘스트를 건너뛴 지역이었다.
물론 그러면 안 된다는 걸, 공략집을 보고 난 지금은 알고 있었다.
그러니 직접 겪어 본 적은 없는 상황을 여럿 마주하게 될 터.
'…각오 단단히 하고 움직여야겠군. 기억도 열심히 되새기고.'
그 과정에서 죽지만 않는다면, 제국에 들어설 때쯤엔 게임에서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강해져 있으리라.
'만약 루 사드까지 포인트를 쓰지 않고도 버틸 수 있다면… ...?'
이안은 문득 생각을 멈췄다.
감각이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되살아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휘이이이-
휘파람을 부는 것 같은 바람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 왔다.
시야가 천천히 밝아졌다.
새하얀 눈밭 위. 어둠 너머까지 끝도 없이 펼쳐진, 가지만 앙상한 흰 나무들.
'이건 또 뭐야…?'
#058화
미간을 찌푸리려던 이안은, 비로소 자신이 움직여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또 이 지랄이군.
게임이었다면 일종의 이벤트 컷 신에 불과했을 상황이었지만.
현실이 된 지금은 결코 그렇게 맘 편하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무방비 상태로 정신이 붕괴할 뻔한 이후로는 더더욱.
'대체 어떻게 저항력을 무시하고 의식을 가로채는 거지. 그만큼 강한 놈이라는 건가…?'
어둠이 물결치듯 일렁이기 시작한 건 그때였다.
이안의 생각이 뚝 멈췄다.
어둠 너머에서 무언가 지켜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종종 느껴지던, 바로 그 시선.
너구나.
이안은 내심 읊조리며, 물결치는 어둠을 노려보았다.
-…오라.
메아리 같은 속삭임이 번졌다.
어린 소녀의 목소리와 노파의 가래 낀 목소리가 뒤섞인 듯한 기묘한 목소리.
-내게로 오라… 선택받은 자여.
이어진 속삭임에, 이안은 아무런 반응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이 또다시 안타까워졌다.
코웃음을 치고 싶었기 때문이다.
선택받은 자라니. 진부하기 짝이 없는 멘트였다.
-불멸이 너를 기다릴지니….
심지어, 불멸?
유혹이라기보단 오히려 구애하려 안간힘을 쓰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안은 어둠을 노려보며 뇌까렸다.
그러니까 어디로 가면 되는데?
정체만 드러내 주면, 내가 알아서 찾아갈-
"…테니까."
…? 방금, 목소리가 나온 건가?
이안이 순간 어리둥절해 한 그때.
파도치던 어둠도 문득 고요해졌다.
적막은 잠깐이었다.
-운명이 너를 기다린다….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속삭임이 이어졌다.
방금 너도 당황했던 것 같은데.
생각하며, 이안은 다시 목소리를 내 보려 노력했다.
하지만 그보다 주위의 풍경이 흘러내리는 것이 더 빨랐다.
모든 감각이 아스라이 흩어졌다.
그리고 다시, 어둠.
"...."
이안은 비로소 눈을 떴다.
새카만 하늘.
방금 본 환영이 그 위에 자연스럽게 겹쳐졌다.
그 어설픈 놈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감도 잡히지 않았다.
게임에서 겪어 보지 못한 이벤트였기 때문이다.
그도 모르는 어떤 특정한 조건을 만족 시켰거나, 어쩌면 또 다른 타락자 전용 이벤트인지도 몰랐다.
어쨌거나 그의 내면에는 타락자만이 가질 수 있는 혼돈력이 버젓이 자리하고 있으니까.
모든 걸 확실하게 해 줄 퀘스트 창이 없다는 게 아쉬웠지만, 이런 방식은 게임에서도 드물지 않았다.
그때와 같다면 이벤트 컷 신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을 터였다.
의문의 어둠이 도사린 장소에 가까워지다 보면 다시 시작될 테고.
퀘스트 창은 놈의 정체가 완전히 드러난 후에야 만들어지리라.
'…그럼, 방금 그것도 그래서 시작된 건가?'
이안의 눈썹이 슬쩍 올라갔다.
눈 덮인 숲. 북부로 향하고 있으니, 합리적인 추론이었다.
그렇다면 이대로 계속 북부로 향하기만 해도, 또다시 그 진부한 놈이 보내는 환영을 보게 될 터였다.
…다음번엔 정체를 드러내 줬으면 좋겠는데.
생각하던 이안은, 뒤늦게 건너편에서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녹색 눈동자를 깨닫고는 미간을 좁혔다.
"안 잤냐?"
"잠이 안 와서요."
담담하게 대답한 루시가, 이내 덧붙였다.
"방금 그거, 뭐였어요?"
너도 뭔가 느낀 거냐.
눈을 끔뻑인 이안이 되물었다.
"뭐 같아 보였는데."
"전혀 모르겠어요. 그냥, 섬뜩한 느낌이 들었어요. 이안 님 주위로 뭔가 아른거리는 것처럼 보였고. 그러다가 이안 님이 마력을 내뿜으셨는데… 이것도 느낌이에요. 그렇게밖엔 설명할 수가 없어서요."
루시의 설명은 거의 횡설수설하는 것처럼 들렸다.
본인도 자신이 느낀 것을 제대로 표현할 수 없는 모양.
오히려 그래서 더 전형적인 마법사의 화법처럼 느껴졌다.
뭔가 눈을 뜨긴 한 것 같은데….
속으로 읊조린 이안이 입을 열었다.
"환영을 봤다."
"환영… 이요?"
"정체는 모르지만. 보나 마나, 세상에 미련이 남은 고대의 원혼 같은 거겠지. 날 부르더군. 흔히들 말하는, 어둠의 속삭임이란 거다."
"...! 책에서 읽은 적 있어요. 마법사들은 의식의 경계를 허문 존재들이라, 그만큼 어둠과 광기의 유혹에 노출될 일이 많다고요."
"…넌 대체 무슨 책을 읽고 산 거냐."
"버논 오라버니의 서고에서요. 언젠가부터 마법이나 신비와 관련된 책들을 수집하셨었거든요. 다 읽으셨는지는 모르지만."
"아하…."
왕국에 어둠이 깃들었다는 걸 알게 된 후로, 나름대로 조사를 했던 거군.
루시와 관련된 자료도 모았다는 걸 보면, 버논은 그의 생각보다 꼼꼼한 성격이었는지도 몰랐다.
하긴. 성기사인 누이와 신의 은총을 받은 사촌 사이에 끼어 있으면, 어떤 식으로든 안간힘을 쓸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 노력이 이런 식으로 빛을 발하리라고는 본인도 알지 못했겠지만.
"…아무튼, 아예 틀린 얘긴 아니야. 더 강한 힘과 지식을 위해서라면 넘지 말아야 할 선도 넘고 마는 게, 마법사란 족속들이니까."
"이안 님도, 그러셔요?"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어느 정도는."
어깨를 으쓱인 이안이 덧붙였다.
"다만 악마나 공허에 영혼을 팔 만큼 멍청하진 않을 뿐이지."
그런 자들의 말로가 어떤지는, 게임을 통해 지긋지긋하게 경험했으니까.
"저한테도, 그런 유혹의 순간이 있을까요."
"있겠지. 네 재능의 크기만큼, 네가 느끼게 될 유혹도 커질 거다."
이 세계에선 재능이 빛날수록 타락의 그림자도 더 짙게 드리우는 법이었다.
"어둠의 유혹에 넘어가면 소중한 것들을 잃게 된다는 사실만 기억하고 있으면 돼. 그러면 최소한 최악의 결정은 하지 않을 수 있을 거다. 경이 그랬듯이."
"마법사가 된다는 건… 제 생각보다 무서운 일일지도 모르겠어요."
"뭐든 마찬가지다. 네가 루 엔테르를 섬기게 되더라도, 또 다른 유혹이 있을 테니까."
루시의 눈이 순간 커졌다.
"제가 사제가 될 수도 있는 거예요?"
"넌 네가 원하는 건 뭐든 될 수 있어. 어쩌면 성기사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지. 네 몸엔 기사 가문의 피도 흐르고 있으니까."
"...."
루시의 입이 설핏 벌어졌다.
그렇게 많은 선택권이 있으리라 믿기 힘든 눈치.
하지만 이안이 볼 땐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였다.
루시는 아직 어리고, 그녀의 재능은 사제들의 눈길도 사로잡을 테니까.
어쩌면 메브가 원한 건, 루시가 마법사가 아니라 사제가 되는 것이었는지도 몰랐다.
결정은 루시의 몫이겠지만.
"당장 고민할 문제는 아니야. 이번 여정이 무사히 끝난 후에 시작해도 늦지 않을 거다."
"…그렇겠죠. 제국으로 가게 될 수도 있으니까."
이안의 낯이 순간 굳어졌다.
루시를 돌아본 그가 내뱉었다.
"그럴 일은 없다. 절대로."
"...?"
루시가 당황한 듯 눈을 끔뻑였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제국에 끌려가면 어떤 일들을 겪게 될지, 꿈에도 알지 못할 테니까.
"제가 괜한 소릴 했나 봐요. 다시, 환영 얘기로 돌아갈까요?"
"돌아가긴 뭘 돌아가."
잠이나 자라, 늦었다. 하고 말을 맺은 이안이 벌떡 일어섰다.
"으응…?"
꾸벅꾸벅 졸던 미구엘이 곁에 앉은 이안을 돌아보고는 잠이 확 깬 듯 눈을 치켜떴다.
"조용하다 싶더라니."
"아니, 그, 잠시 딴생각을 하고 있었소. 좀 깊이."
"입가의 침이나 닦고 말해."
핀잔을 준 이안이 턱짓했다.
"넘어가서 자라. 내가 몰 테니까."
"어, 그래도 되겠소…? 그럼, 몇 시간만 부탁 드리겠소."
미구엘이 어물쩍 뒤로 넘어갔다.
고삐를 쥔 이안은 묵묵히 마차를 몰았다.
루시의 시선에도 더는 입을 여는 일 없이, 밤새도록.
***
"어윽…."
도망치던 용병이, 등에 볼트가 박힌 채 쓰러졌다.
겨누고 있던 석궁을 내린 미구엘이 짧게 입맛을 다셨다.
"처리했소."
"그래."
마차 앞에 널브러진 시체들을 휙휙 끌어내던 이안이 눈길도 주지 않고 대꾸했다.
며칠간 이어진 평화로운 여정의 종지부를 찍은 건, 한 무리의 용병들이었다.
달려오며 찾았다고 소리치더니, 대뜸 쇠뇌부터 쏴 댄 것이다.
물론, 그들은 죽음으로 그 경솔한 행동의 대가를 치르게 됐다.
"괜찮냐, 루시?"
주위를 휘휘 둘러본 미구엘이 물었다.
루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렇지도 않아요."
"다행이군. 미친놈들, 애가 맞으면 어쩌려고."
미구엘이 혀를 차는 사이, 이안이 마차에 올라탔다.
"출발해."
주인 잃은 말들과 시체들을 뒤로한 채, 마차가 다시 나아갔다.
미간을 찌푸린 채 고삐를 쥐고 있던 미구엘이 이윽고 내뱉었다.
"저놈들, 예전 그 용병들처럼 우리 신원을 확인하려 들지도 않았소."
"그래. 그냥 본 순간 확신했던 거지."
"염병할. 이 정도면 다들 우릴 알고 있는 거요. 현상금이 얼마인지나 물어볼걸."
"예정된 일이었어. 요란 떨지 마라."
이안은 평소처럼 태연했지만.
미구엘은 침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보이지 않는 올가미가 서서히 목을 옥죄여 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전부터 어느 정도는 느끼고 있었지만. 지금은 더 선명하고 명확하게 느껴졌다.
"이러다 영주군까지 따라붙는 거 아닌가 모르겠소."
"그러겠지. 내 생각엔, 길목을 지키고 있을 것 같은데."
"제기랄… 병사들 피는 보고 싶지 않은데."
이안의 코웃음이 이어졌다.
"네 피를 보는 건 괜찮고?"
"의미가 다르단 얘기요. 용병 놈들이야 돈만 받을 수 있으면 무슨 짓이든 하는 놈들이니 상관없지만. 병사들은 아니잖소. 죄라고는 영주의 명령에 따른다는 것밖엔 없지. 대부분, 영문도 모르고 까라니까 까러 온 자들일 거요."
"호오…."
이안이 탄성을 흘렸다.
네가 그런 생각도 할 줄 아냐는 듯한 반응이었기에, 미구엘은 콧방귀를 뀌고는 덧붙였다.
"뭐, 칼 밥 먹고 살면서 불법적인 일도 여럿 한 건 사실이지만. 나도 최소한의 선은 지키고 살아왔단 말이오. 앞을 가로막는 자들과 싸우는 거야 별수 없지만. 그저 자기 의무를 다할 뿐인 자들까지 죄다 죽이는 게 좋을 리 없잖소."
게다가 이안의 성격을 미뤄 봤을 때, 그는 자신에게 덤비는 자들의 사정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고 죄다 죽여 버릴 것이 분명했다.
메브는 그를 기사보다 더 기사 같은 용병이라 했지만.
미구엘이 본 이안은 용병 중에서도 가장 지독한 용병이었다.
의뢰를 완수하기 위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는.
"일리 있는 지적이군."
"엉…?!"
그래서 이어진 이안의 대답에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사실, 이안이 자신의 말을 귀담아들으리라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다.
"왜 놀라지? 내가 사람 죽이고 싶어 안달 난 놈처럼 보이냐?"
"아, 아니, 그런 건 아닌데…."
물론 이안이 동조한 건 그런 감정적인 이유가 전부는 아니었다.
머잖아 필시 대규모 추적대를 마주치게 될 터.
그때 앞을 가로막는 자들의 절대적인 숫자를 좀 줄여 놓을 필요가 있었다.
경험상, 아무리 약한 놈들이라도 숫자가 많아지면 예상 못 한 변수를 만들어내곤 했으니까.
물론, 그런 생각을 알 리 없는 미구엘은 눈만 끔뻑일 따름이었다.
이안이 덧붙였다.
"네 말대로 병사들 대부분은 까라니까 까는 걸 테니까. 의무감을 넘어서는 공포를 한두 번만 심어줘도, 알아서들 몸을 사리겠지."
"그야… 그렇겠지만. 그게 쉽겠소?"
이쪽은 달랑 셋인데.
이안의 태연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자기들이 아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걸 알게 해주지 뭐."
"...?"
뒤를 돌아본 미구엘의 미간이 이내 좁아졌다.
로브를 걸치고 후드를 깊이 눌러쓴 이안이, 그 위에 시녀에게서 받아 온 망토까지 걸친 채 서 있었기 때문이다.
품을 뒤적인 이안이 이윽고 웬 마법봉까지 꺼내 들었다.
끝에 보라색 정수가 박힌, 불길하게 생긴 거무튀튀한 마법봉이었다.
미구엘이 멍하니 물었다.
"그건 또 뭐요…?"
"지하 무덤의 흑마법사가 쓰던 마법봉이다."
"뭐라고…? 아니, 그 저주받을 물건을 계속 가지고 다니셨소? 어디에? 또 그, 허공에서 물건을 숨기는 마법이오?"
"그런 셈이지."
이안이 태연하게 대답하며 마법봉 끝에 박힌 정수를 분리했다.
"흑마법사의 마법봉이라고요? 우와."
루시가 탄성을 터뜨리며 뻗은 손을, 이안이 쳐냈다.
"이건 저주가 서린 물건이다. 건드리지 않는 게 좋아."
"…저주까지 서려 있다고?"
미구엘을 슬쩍 돌아본 이안이 피식댔다.
"걱정 마라. 이건 쥔 사람한테만 영향을 끼치는 저주야. 어쨌든…."
그가 양팔을 슬쩍 펼쳤다.
"이만하면 내 정체를 들킬 일은 없어 보이는데."
"어…. 확실히, 검의 달인 같아 보이진 않소만."
비로소 이안의 생각을 짐작한 미구엘이,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정말 괜찮으시겠소? 촌놈들 겁주는 데 마법만 한 게 없는 건 사실이지만. 마력을 아껴야 한다고 하셨잖소."
"그럼 그냥, 하던 대로 앞을 막는 것들은 죄다 죽이면서 갈까? 그것도 효과는 충분히 있을 텐데."
"아, 아니… 그런 의미는 아니오."
입맛을 다시던 미구엘은, 이내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형씨 하고 싶으신 대로 하시오. 난 그냥 하던 대로 따를 테니까."
뭐가 됐건, 무고한 자들까지 죽였다는 죄책감에 시달리게 되는 것보단 나을 터였다.
#059화
"이런, 염병할."
완만하게 굽이진 길을 나아가던 미구엘이 마차를 황급히 멈췄다.
잎이 거의 떨어진 나무들 너머, 언덕 위의 전경이 설핏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마부석에서 뛰어내린 그가 살금살금 전진해 언덕 위를 살폈다.
병사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간이 검문소.
얼핏 보이는 것만 해도 열 명이 넘는 병사들이었다. 죽 늘어선 목책 사이. 기사로 보이는 지휘관이 비스듬하게 기대앉아 있었다.
"아무래도, 저 작자들이 기다리는 게 우리 같소."
마부석으로 돌아온 미구엘이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이안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우리 위치를 눈치챘나?"
"아직. 하지만 이 앞으로 나가면 어디로 가도 결국 들킬 거요."
"그럼 별수 없지. 기다려라."
부스럭대는 소리가 이어졌다.
미구엘이 뒤를 돌아봤다.
그들이 탄 짐 마차는, 며칠 사이 모습이 조금 바뀌어 있었다.
좌우와 후방의 칸막이가 한 칸씩 높아진 것이다.
지나가다 발견한 버려진 마차를 분해해 덧댄 방호벽이었다.
혹시 모를 발사체는 물론, 내부가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덕분에 여러모로 전보다 눈에 띄는 형태가 되었지만.
어차피 이 인근의 병사나 용병들은 다 그들을 알고 있으리라 가정하고 있었으니 상관하지 않았다.
"후…."
이안이 채비를 끝냈다.
얼굴이 보이지 않게 깊이 눌러쓴 잿빛 로브. 망토도 안감이 겉으로 드러나게 뒤집어 입었고, 손에는 마법봉까지 움켜쥔 채였다.
"형씨를 아는 사람이 봐도, 동일 인물이라곤 생각 못 할 거요."
미구엘이 덤덤하게 내뱉었다.
마부석으로 넘어오며,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네가 할 건 별거 없다, 미구엘."
마부석 등받이 위에 걸터앉은 그가 덧붙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냥 길을 따라 달리기만 하면 돼."
"그… 어떻게 하실 건지, 미리 귀띔이라도 해 주시지 않겠소?"
"별 도움 안 될 텐데. 그냥 쫄지 말고 달려라. 멈칫대다가 마차가 전복되기라도 하면, 다 같이 망하는 거야."
이안의 왼손에는 어느새 마석 하나가 들려 있었다.
전에 쓰던 정수보다 훨씬 작아서, 손가락 사이에 굴러다녔다.
미구엘은 알 수 없었지만, 어쩔 수 없이 필요한 물건이었다.
사령술사의 지휘봉은 스킬 데미지를 크게 올려 주는 대신, 마력 소모량도 3배나 높여 버리는 엄청난 마이너스 옵션이 붙어 있었으니까.
끝에 정수를 장착해야 사라지는 조건부 페널티였다.
물론 마이너스 옵션은 그게 전부가 아니었지만….
"하… 알겠수."
마석을 꾹 움켜쥔 이안이 턱짓했다.
"그럼, 출발."
"내가 어쩌다 이런… 에라이…!"
미구엘이 될 대로 되라는 듯 고삐를 후려쳤다.
다각, 다각, 다그닥- 다그닥-
언덕을 오르는 전마들의 발굽 소리가 점점 빨라졌다.
오르막이라는 게 전혀 느껴지지 않는 속도.
마갑에 박힌 마석들의 빛이 점점 선명해졌다.
"아, 아니, 저런 미친...?"
달려오는 마차를 발견한 병사들이 소란스러워졌다.
느슨하게 기대앉아 있던 지휘관이 허둥지둥 앞으로 달려 나왔다.
"당장 마차를 멈춰라! 멈추지 않으면 쏘겠다!"
석궁을 든 병사들이 마차를 겨눴다.
루시가 있는 이상 절대 진짜로 쏠 리는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미구엘은 눈을 질끈 감았다.
'고삐를 당기면 안 돼. 쫄지 말자. 쫄지… 시부럴!'
어쩌다 이 지경까지 온 건가 하는 생각이 또다시 뇌리를 스쳤다.
이게 다 그 병신 같은 아겔 란 기사들 때문이었다.
조용히 따라왔다면 이런 개 같은 상황은 겪고 있지 않았을 텐데.
"속도 늦추지 마라. 계속 달려."
이안의 말이 귀를 파고들었다.
웅웅 울리는 목소리.
마력이 담겼다는 증거였다.
"다시 한번 말한다! 당장 마차를 멈춰라!"
지휘관의 다급한 외침이 이어졌다.
이안이 벌떡 일어선 건 그때였다.
그가 보란 듯 양팔을 펼쳤다.
로브와 망토가 부자연스럽게 일렁이고, 그의 전신에서 아지랑이 같은 마력의 파장이 번져 나갔다.
의도적으로 마력을 내뿜고 있는 게 분명했다.
적어도 시선을 집중시키는 데에는 아주 성공적이었다.
"마, 마법사...? 마법사가 있다는 얘긴 못 들었는데?"
당황한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미구엘의 귀까지 파고들었다.
이안이 마법봉을 내뻗은 건 그 직후였다.
콰르르르르-!
"...!"
언덕 위로 거대한 불의 장벽이 눈부시게 치솟아 오르자, 미구엘의 입이 멍하니 벌어졌다.
***
콰르르르-
"우와아아악-!"
"어, 어머니...!"
초소가 아수라장이 됐다.
병사들이 후끈하게 밀려드는 열기에 바닥을 나뒹굴었다.
고개를 위로 꺾은 채 불의 장벽을 망연자실하게 올려다보던 지휘관이, 뒤늦게 입을 달싹였다.
"다들 당장 뒤로- 어어억?!"
쿠구구구-
그의 외침은 끝을 맺지 못했다.
지진이었다.
휘청댄 그가 바닥에 넘어졌다.
주위의 땅이 움푹 파이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흙이 한 지점을 향해 모여드는 중이었다.
초소 한복판의 땅이 위로 불쑥 솟아오르고 있었다.
서 있던 병사들이 굴러떨어지고, 목책들이 우수수 넘어졌다.
입을 뻐끔대던 지휘관이 간신히 다시금 목소리를 냈다.
"다, 다들 물러나! 물러나라!"
필사의 외침이었지만, 그의 목소리를 귀담아듣는 병사는 거의 없었다.
"루 솔라여… 저희를 굽어살피시고…."
"살려 줘. 제발 살려...!"
바닥에 넙죽 엎드려 기도를 올리는 자부터 벌벌 떨며 땅을 기는 자들이 태반이었으니까.
푸화악-!
돌풍과 함께, 불길 한복판에 구멍이 뻥 뚫린 건 그 직후였다.
그 사이를 쏜살같이 지나친 마차가, 마법으로 만들어진 언덕을 날듯이 타 넘었다.
"마, 막아야...!"
본능적으로 읊조리며 마차를 쫓던 지휘관의 눈길이 얼어붙었다.
멀어지는 마차 주위로 연달아 피어오르는 거대한 불덩이들.
그에게 남은 일말의 의무감마저 사라지게 만드는 광경이었다.
쾅-! 콰광! 쾅-!
쏟아진 불덩이들이 언덕 중턱을 쑥대밭으로 만들며 폭발했다.
병사들과 함께 바닥을 나뒹구는 지휘관의 뒤로, 불의 장벽이 어느새 잦아들고 있었다.
***
"으… 으하하! 해냈소!"
미구엘이 비로소 웃음을 터뜨렸다. 뒤늦게 흥분이 밀려오는지 얼굴까지 벌겋게 달아오른 채였다.
좋댄다, 새끼.
속으로 중얼댄 이안이 마부석 등받이에 털썩, 걸터앉았다.
두통과 현기증이 밀려들었다.
어느새 손에 쥔 마석이 텅 비어 있었다.
'죽이지 않는 게 죽이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니. 어이가 없군.'
헛웃음을 지은 그가 사령술사의 지휘봉을 아공간에 쑤셔 넣었다.
귓가에 시끄럽게 울리던 귀곡성이 잦아들었다.
지휘봉에 깃든 원혼의 저주였다.
높은 정신력과 저항력 덕분에 아무런 영향도 없었지만, 시끄러워서 머리가 다 울렸다.
"대단하셨소, 형씨! 대마법사 흉내가 아니라, 정말 대마법사 같았단 말이오!"
"소리 그만 질러라. 머리 아프다."
후드를 벗고 뻐근한 목을 이리저리 푼 이안이, 이내 턱짓했다.
"적당히 달리며 속도도 줄이고. 마석 닳는다."
"아, 맞다. 그렇지. 알겠수."
"배… 백마법사...!"
루시가 불쑥 내뱉은 건 그때였다.
이안이 자신을 홀린 듯 바라보고 있는 그녀를 돌아보았다.
"응?"
"좀 전에… 적색 마법만 쓰신 게 아니잖아요...!"
"아니, 그건…."
"엥? 정말로?!"
끼어든 미구엘이 눈을 치켜뜨며 이안을 돌아보았다.
"그럼 형씨가, 그 전설의 마법사란 말이오? 정말로?"
"확실해요…! 확실하다고요…!"
"확실은 무슨. 전혀 아니거든."
코웃음 친 이안이 내뱉었다.
루시가 눈을 깜빡였다.
"하지만, 여러 색의 마법을 쓰셨잖아요."
"그건 맞지만. 그게 내가 백마법사란 뜻은 아니야. 애초에 별로 대단한 마법들도 아니었고."
이안이 루시와 미구엘을 번갈아 바라보고는 덧붙였다.
"이건 그냥 일종의 영업 비밀, 비장의 한 수 같은 거다. 그러니까 착각들 하지 마."
"…알았어요."
이윽고 고개를 끄덕인 루시가, 이안을 빤히 올려다봤다.
"이안님의 비밀은, 지켜드릴게요."
"나도 마찬가지요, 형씨."
그의 말을 전혀 믿지 않는 듯한 눈빛들.
"하… 그래. 마음대로들 생각해라. 아닌 건 아닌 거니까."
진짜 그런 거면 억울하지라도 않지. 난 그냥 레벨만 높은 망캐일 뿐이거든?
혀를 찬 이안이 뒤를 돌아보았다.
연기가 치솟는 언덕이 어느새 한참 멀어지고 있었다.
아마 오늘부로, 변방에 마법사에 대한 괴담 하나가 추가될 터였다.
이윽고 미구엘이 이성이 좀 돌아온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
"방금 든 생각인데. 저런 검문소를 한둘은 더 마주치게 될지도 모르겠소."
"별수 없지. 그래도 그러고 나면, 우리 앞을 막으려는 병사들은 없어질 거다. 물론…."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런데도 쫓아오는 놈들과의 싸움은, 절대 피할 수 없겠지만."
"시부럴… 벌써 코에서 쇠 냄새가 나는 것 같네."
미구엘이 중얼댔다.
이안은 등받이에 머리를 기댔다.
슬슬 차라리 빨리 죄다 몰려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치고 있다는 증거였다.
"쉴 수 있을 때 쉬어 둬라. 쓸데없는 생각들 하지 말고. 이제, 얼마 안 남았으니까."
***
"그래서, 이 보고서의 내용들이 다 사실이다?"
책상 앞에 앉은 랜디스 백작이 고개를 들며 물었다. 앞에선 기사, 제이미 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개의 초소가 파묻히고 불바다가 됐습니다. 엄청난 마법사라고 다들 벌벌 떨더군요. 게다가 그자들이 탄 마차가 상당히 빨랐답니다. 앞을 막는 건 자살 행위고 뒤를 쫓을 수도 없으니, 철수하게 해 달라는 요청이 빗발치고 있습니다."
"겁 많은 놈들….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군. 보고서 대로면 엄청난 마법사인 것 같던데. 어디서 튀어나온 놈인진 모르지만, 나한테 경고를 보낸 것 같단 말이야. 아직까진 자비를 베풀고 있지만, 앞을 계속 막으면 다 죽이겠다고 말이지."
"그럼, 병사들을 물릴까요?"
"그래. 계속 내보냈다간 나에 대한 원망이 하늘을 찌를 테니까."
물론, 그 건방진 놈들을 그냥 보내겠단 뜻은 아니었다.
랜디스 백작이 넌지시 덧붙였다.
"그자는, 기다리고 있나?"
"물론입니다."
"들어오라 하게."
제이미 경이 문을 열고 손짓했다.
곧 건장한 체구의 북부인이 걸어 들어왔다.
때가 반질반질한 갑옷과 검집.
이 하이람시에서 가장 실력 있는 용병이자, 우베 용병단의 우두머리인 우베였다.
"용병들의 분위기는 어떤가?"
간단하게 인사를 나눈 백작이 물었다.
우베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다들 이를 갈고 있습니다. 놈들 손에 죽은 동료가 꽤 있어서요. 거기다 나슬란에서 넘어온 놈들이 엄청난 속도로 따라가고 있단 얘기까지 들리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 남의 영지를 제집처럼 뛰어다니는 그 빌어먹을 제국 놈들과 아겔 란 촌놈들. 나도 거슬리던 참일세."
백작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무엇보다 그의 심기를 거스르는 건, 그놈들을 저지할 수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 속 좁은 놈들에게 한마디라도 했다간, 영지로 물건을 공급하지 않을지도 몰랐으니까.
"그놈들이 빈손으로 돌아가는 걸 보고 싶단 말이지. 영애의 몸값을 깎아 달라고 애원하는 꼴을 볼 수 있으면 더 좋고. 아마 폐하께서도 기꺼워하시겠지."
납치범들은 어느새 정치적인 영향력까지 끼치고 있었다.
아겔 란이 전쟁을 준비한다는 소문이 파다한 와중이기 때문이다.
그 소녀를 이쪽에서 먼저 손에 넣는다면, 몸값은 물론이고 국왕 폐하의 총애까지 받을 수 있으리라.
"맡겨만 주십시오. 말 잘 타고 실력 있는 놈들로 서른은 추려 뒀습니다."
우베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납치범들을 잡아 족치고 싶은 건 그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부하들의 원수를 갚아야 한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아겔 란의 기사들을 따라 건너온 옆 동네 용병단 놈들 때문이었다.
나슬란 영주의 총애를 받으며 덩치를 불린 놈들은, 그의 용병단과 알게 모르게 대립하고 있었다.
아마 이번 일을 성공시키는 쪽이, 벨 론데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지게 되리라.
"잘됐군. 본론으로 넘어가지."
백작이 영지의 지도를 펼쳤다.
거기에는 납치범 일당의 이동 경로와, 나슬란에서 넘어온 추적자들의 경로가 꼼꼼하게 표시되어 있었다.
"지금까지의 정보를 종합해 보면, 납치범 놈들은 버려진 땅으로 가고 있는 것 같더군."
"...!"
"자살이라도 하려 한단 말씀이십니까?"
제이미는 물론 우베도 눈을 치켜뜨며 말했다.
백작이 어깨를 으쓱였다.
"아마 그 마법사를 믿고 그러는 거겠지. 마법사에 검의 달인이면, 그 저주받은 땅을 돌파해 북부로 넘어갈 수도 있지 않겠나?"
"하늘이 돕는다면 말이죠."
제이미가 읊조렸다.
백작이 어깨를 으쓱였다.
"나도 믿기 힘들었네만. 그게 아니면 이 동선을 설명할 방법이 없더군. 우리에게 다행인 건, 놈들이 빙 돌아가고 있다는 걸세."
백작이 손가락으로 하이람시로부터 북쪽으로 이어지는 직선을 그렸다.
"우리가 앞질러 가서 놈들을 기다릴 수 있어."
국경 너머의 버려진 땅으로 이어지는 강가. 계곡 끄트머리.
"가능하다면 놈들이 다리를 건너기 전에 잡게."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지휘는 제이미 경에게 맡길 걸세. 대기하고 있게나."
고개를 끄덕인 우베가 몸을 돌렸다.
문이 닫히자, 백작이 제이미 경을 바라보았다.
"기병 스물을 붙여 주지. 희생은 되도록 저쪽에서 나오면 좋겠군."
우베 용병단은 유용하지만, 동시에 거슬리는 자들이었다.
갈수록 덩치가 커지면서, 언제 이빨을 드러낼지 모르는 상태가 되고 있었다.
이번 기회에 그 숫자를 조금 줄여 두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우베가 죽으면 더 좋고.
"만약 납치범들이 끝내 버려진 땅으로 넘어간다면…."
지도를 툭툭 두드린 백작이 덧붙였다.
"해가 지기 전에는 기병들을 이끌고 빠져나오도록 하게."
"용병단은, 남겨 둘까요?"
"저놈들은 포기하지 않을 걸세. 자존심이 걸렸으니까. 권유해 보고, 통하지 않으면 그냥 둬. 아마 천칭 상단 놈들과 촌놈들도 포기하지 않을 테니, 그쯤 되면 다들 죽은 목숨이야."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고개를 숙인 제이미 경이 몸을 돌렸다.
홀로 남은 백작이, 지도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길어야 사흘이면, 이 모든 소란의 결과를 알 수 있게 되리라.
"돈과 자존심을 다 얻거나… 다 죽겠군. 상관없지. 빼앗기지만 않는다면 말이야…."
납치범들이 살아서 도주하는 결말은, 고려 대상조차 아니었다.
#06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