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0화
말과 마차는 기적적으로 무사했다.
버논의 시신을 운반해야 했기 때문에, 짐 마차는 메브와 미구엘이 몰고 가기로 했다.
판금 갑옷을 입은 기사가 짐 마차에 앉은 모습은 전혀 멋지지 않았지만, 메브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일행은 무덤 숲을 나와 갈림길 앞에서 잠시 멈춰 섰다.
작별은 담백했다.
"아겔 란에서 기다리마, 이안."
"또 뵙겠소."
인사는 그게 전부였다.
이안과 메브는 각각 오른델과 아겔 란 방향으로 갈라졌다.
마차가 더는 보이지 않을 때까지 뒤를 힐끔대던 필립이 말했다.
"미구엘이 과연 나리를 잘 모실 수 있을지 걱정입니다."
이안이 피식댔다.
"네 걱정은 안 되고?"
"물론이죠. 나리께서 부탁하셔서만이 아니라, 제게 부여된 임무인 이상 성심을 다할 겁니다."
"경을 모실 때와는 여러모로 다를 거다."
"그게 나리께서 제가 경험하길 바라시는 부분이겠죠. 걱정하지 마십시오. 각오는 되어 있습니다."
그래, 백문이 불여일견이지.
어깨를 으쓱인 이안이 말을 몰았다.
한동안은 성기사 덕에 편했지만.
이제 다시, 암흑시대의 본모습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
밤. 어둠이 또다시 세상을 덮었다.
이안이 횃불을 켜지 못하게 한 까닭에, 필립이 점점 말의 옆구리로 바짝 붙었다.
"그래도… 횃불 하나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요?"
"안 괜찮아. 어젯밤 잊었냐?"
이안이 콧방귀를 뀌며 일축했다.
일행이 많을 때야 편하게 다녔지.
단둘인 지금 횃불을 켠다는 건, 걸어 다니는 전광판이 되겠다는 의미였다.
굶주린 마물들이 환장하는.
물론 그들이 아겔 란의 마물에게 당할 만큼 약하진 않았지만.
귀찮고 피곤한 일은, 아예 만들지 않는 게 상책이었다.
어제만 해도, 모닥불을 보고 찾아온 고블린 몇 마리 덕에 잠을 설치지 않았던가.
"그렇게 어둡지도 않은데, 엄살 부리지 말고 노숙할 자리나 잘 찾아봐."
게다가 이안이 볼 땐, 이 정도면 다닐 만한 어둠이었다.
"그렇게 어둡지도 않다고요…?"
필립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달조차 제대로 뜨지 않은 밤.
"송구한 말씀입니다만. 전 주위가 거의 보이지도 않습니다."
"...?"
이안의 미간이 설핏 좁아졌다.
주위를 훑던 그가 이윽고 턱을 긁적였다.
'혼돈력 덕분인가…?'
마력의 도움 없이도 시야가 유독 선명하긴 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횃불을 켜게 할 생각은 없었다.
"걷기나 해라. 이참에 어둠이랑 좀 친해지면 되겠네."
"…예."
침묵의 전진이 이어졌다.
때때로 느껴지는 시선과 바람 소리에 간헐적으로 움찔대던 필립이, 문득 눈을 치켜떴다.
"나리. 저기, 보이십니까?"
그가 어둠 너머를 가리켰다.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불규칙적으로 번지는 빛.
나무와 풀숲 사이에, 모닥불을 피운 이들이 있었다.
이안은 불빛 사이로 보이는 그들의 형체까지 확인할 수 있었다.
성인 남자, 다섯.
"가 볼까요? 저들과 함께 보내면, 밤이 좀 편하지 않겠습니까?"
필립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글쎄… 하고 중얼거리며 턱을 긁적인 이안이 그를 내려다봤다.
"네가 원한다면. 가 보지 뭐."
"잘 생각하셨습니다!"
혹시라도 맘을 바꿀까, 필립이 걸음을 재촉했다.
모닥불이 점점 가까워지던 순간.
"멈춰!"
외침이 터져 나왔다.
나무에 몸을 가린 두 사내가 쇠뇌를 겨누고 있었다.
이안이 보기엔 얼토당토않은 수준의 오조준이었지만, 필립은 화들짝 몸을 숙였다.
"저흰 지나가던 여행객입니다!"
"그래서?"
"함께 밤을 보낼까 하는데. 합류해도 괜찮겠습니까?"
쇠뇌를 둔 두 사내의 시선이 모닥불 쪽으로 향했다.
작은 바위에 걸터앉아 술을 홀짝이던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천천히 다가오시오."
이안에게 뿌듯하게 웃어 보인 필립이 모닥불로 다가갔다.
사내들이 가까워지자, 비로소 필립의 얼굴에도 긴장이 서렸다.
쇠뇌를 겨눈 둘 뿐만 아니라, 다섯 모두가 무장을 갖추고 있었으니까.
대장으로 보이는 이는 한쪽 눈이 하얗게 멀어 있기까지 했다.
"보통 여행객이 아니시군. 앉으시오. 자리에 여유가 있으니."
이안과 필립을 번갈아 본 애꾸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말에서 내린 이안이 터덜터덜 그들의 곁으로 다가갔다.
"신세 좀 지겠소."
"자리만 내드리는 건데, 별말씀을. 보아하니 용병인 모양이오."
"댁들도 그래 보이는군."
이안이 모닥불 옆에 앉았다.
애꾸가 웃음 지었다.
"이 시간에 노숙하는 이들이야, 대부분 우리처럼 칼 밥 먹고 사는 부류들이지 않겠소?"
말을 나무에 묶어 둔 필립이 이안의 옆에 앉았다.
애꾸의 호의적인 반응에 마음이 좀 놓였는지, 방패와 검을 풀어 허벅지에 기대 놓았다.
"덕분에 오늘 밤은 좀 편히 자겠군요. 감사의 의미로 먹을 것을 좀 나누겠습니다."
"거참 반가운 일이군. 잘 먹겠소."
애꾸뿐 아니라, 다른 용병들도 홀짝이던 잔을 들어 감사를 표했다.
그들을 슥 돌아본 이안이 말했다.
"힘든 의뢰였던 모양이오."
"눈썰미가 좋으시군. 맞소."
애꾸가 웃었다.
필립도 그제야 그의 팔에 감긴 붕대를 확인했다. 다른 이들도 어깨나 다리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엄청난 마물이었던 모양입니다."
"지랄 맞았지. 루 사드에서 들었던 얘기랑은 딴판이었소."
"국경을 두 개나 넘어오셨단 말씀이십니까?"
"그렇소. 보상이 짭짤한 게 촌구석까지 오가야 해서 그런 거겠지 했는데. 염병, 낮에 기습했는데도 부하를 셋이나 잃고 겨우 잡았소. 돈값을 하는 놈이었단 얘기지."
어깨를 으쓱인 애꾸가 덧붙였다.
"어쨌건 머리가 줄었으니, 우린 돌아가면 돈방석에 앉을 거요."
용병들이 낄낄대며 웃었다.
그들 중 한 명이 걸터앉은 상자가 문득 들썩였다.
신음 같기도, 울음 같기도 한 희미한 소리가 그 안에서 번졌다.
필립의 눈이 커지는 가운데, 이안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생포하셨나 보군."
"그게 요구 조건이었소. 저것도 고용주한테 받은 봉인함이오."
대답한 애꾸가 이안을 돌아보았다.
"댁은? 의뢰를 해결하고 돌아가는 길이셨소?"
"뭐, 그런 셈이오."
이안이 고개를 끄덕이는 가운데, 필립이 말했다.
"무덤 숲에서 오는 길입니다."
"무덤 숲…?"
"아, 모르시겠군요. 안개가 잔뜩 낀 숲입니다. 거기서… 음, 마물을 죽였죠."
"둘이서? 실력이 대단하신 모양이군. 하긴…."
애꾸가 이안의 허리춤을 곁눈질했다.
"차고 다니시는 검만 해도 범상치 않소."
"당연하죠. 이 검으로 말할 것 같으면-"
떠들려던 필립이, 이안의 서늘한 눈빛에 입을 다물었다.
시선을 거둔 이안이 말했다.
"의뢰 보수로 받은 거요."
"호오… 그러시군. 알겠소. 이것도 인연인데, 한잔합시다."
애꾸가 부하에게 턱짓했다.
나무잔을 두 개 꺼낸 그가 술을 따라서 들고 왔다.
잔을 받아든 이안이 한 모금을 마셨다.
"좋군."
"괜찮을 거요. 우리가 딴 건 몰라도, 술에는 돈을 안 아끼거든."
용병들이 잔을 들며 웃음 지었다.
육포를 불 옆에 늘어놓은 필립도 잔을 집었다.
이안이 손을 까딱인 건 그때였다.
"잔 이리 가져와."
"예…?"
"찬물도 위아래가 있지. 앞에 놔."
"…예."
필립이 시무룩하게 잔을 이안 앞에 내려놨다.
애꾸가 웃었다.
"부하 대접이 박하시군."
"부하는 무슨. 배울 게 많은 애송이요."
벌컥벌컥, 술을 한입에 털어 넣은 그가 필립의 잔을 들었다.
"기본적인 것도 모르는 놈이지."
"호오. 기본이라면 무슨?"
"뭐, 간단한 것들이오. 낯선 자가 주는 음식은 받아먹지 말라던가."
"...."
애꾸의 눈매가 꿈틀거리는 가운데.
아무렇지도 않게 한 모금을 더 마신 이안이 입을 열었다.
"필립. 정면을 봐라."
이게 뭔 소린가 하는 표정이던 필립이 반사적으로 앞을 바라보았다.
"거기 보이는 둘은 네가 상대해."
"예…?"
필립의 고개가 기울어지는 가운데.
사내들의 눈빛이 서늘해지기 시작했다.
잠깐 굳었던 애꾸의 얼굴에, 이윽고 웃음이 번졌다.
"둘? 으하하…. 둘만? 댁이 나머질 상대하시고?"
"그래."
애꾸를 따라 사내들도 킬킬대는 웃음을 흘렸다.
"거참 재미있는 농담이군."
"왜. 못 할 것 같나?"
"당연하지."
"내가 독을 먹어서?"
애꾸가 어깨를 으쓱이며 웃었다.
그제야 필립의 얼굴에도 경악이 번졌다.
잔을 내려놓은 이안이 애꾸를 돌아보았다.
"그럼 내가 왜 아직도 멀쩡한지를 궁금해해야 하지 않을까?"
"약 기운이 덜 돌았나 보지. 댁이 먹은 건 코끼리도 기절시키는 독이거든."
"코끼리를 실제로 본 적은 있냐?"
"네놈은 봤고? 푸흐… 흐…?"
애꾸의 웃음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이안의 눈빛이 지나치게 고요했기 때문이다.
경험상, 지금쯤 속을 게워내거나 억지로 견디면서 식은땀을 줄줄 흘리고 있어야 했다.
이윽고 그의 미소가 굳어질 찰나.
푸확-!
벼락같이 달려든 이안이 왼손을 올려쳤다.
거의 뽑을 일 없던 단검이 애꾸의 볼과 눈, 이마로 이어지는 붉은 호선을 그려냈다.
"아악-! 내 눈!"
이제는 장님이 된 애꾸가 비명을 지르며 나자빠졌다.
눈을 치켜뜬 부하들이 뒤늦게 잔을 집어 던지며 일어섰지만.
이미 이안은 올려친 단도를 그대로 내던지고 있었다.
푸욱-!
"아악!"
한 놈의 팔뚝에 단도가 깊숙이 박혔다.
"이, 이런 시발…! 죽여!"
"뒈져라!"
남은 세 놈이 일제히 몸을 날렸다.
공교롭게도 이안이 지목한 둘은 필립에게 달려갔다.
약해 보이는 놈부터 제거하리란 심산일 터.
이안은 신경 쓰지 않고 자신에게 달려오는 놈을 바라보았다.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도약한 놈이 검을 힘껏 내리쳤다.
이안이 단죄의 검을 뽑았다.
쩌엉-!
단죄의 검과 맞부딪힌 상대의 검이 그대로 부러졌다.
"어…?"
놈이 얼빠진 표정을 지을 찰나.
콰직!
단죄의 검이 놈의 목덜미부터 가슴팍까지 깊이 박혀 들었다.
갈라진 몸에서 한 박자 늦게 피가 솟았다.
이안은 피거품을 무는 강도를 걷어차 밀어 버리고는, 팔에 박혔던 단검을 뽑아 들고 주춤대는 놈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오, 오지 마…! 오지 말라고!"
"보아하니 한두 번 한 짓이 아닌 것 같은데. 지금까지 너희가 죽인 자들도 그렇게 말했겠지."
고저 없는 목소리로 내뱉은 이안이, 놈의 눈을 빤히 응시했다.
"너는 그때 안 갔었냐?"
"이, 이런… 시바알-!"
푸욱-!
떠밀리듯 달려든 놈의 가슴 한복판에 검이 틀어박혔다.
이안이 검을 뽑자 그르륵, 하는 숨소리를 낸 놈이 허물어졌다.
이안의 몸에도 피가 튀었다.
…메브처럼 깔끔하게는 안 되는군.
생각하며, 이안은 놈이 떨어뜨린 단검을 주워들었다.
다른 두 놈과 뒤엉켜 있던 필립이 간신히 거리를 벌린 건 그때였다.
"나, 나리! 끝내셨으면 도와주십시오! 저 이러다 죽습니다!"
필립과 대치 중인 둘의 얼굴에 뒤늦게 경악이 스쳤다.
비명을 지르고 있는 대장은 그렇다 쳐도, 그 짧은 사이에 동료 둘이 다 죽어 버린 것이다.
놈들을 일별한 이안이 어깨를 으쓱인 건 그 직후였다.
"싫은데?"
"...?!"
"시, 싫다니요?"
두 강도와 마찬가지로 눈을 치켜뜬 필립이 되물었다.
단죄의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낸 이안이, 검을 회수하며 말했다.
"그 두 놈은 네가 상대하라고 했잖아."
"아니, 그, 그러긴 하셨습니다만-"
"너희 둘도 생각 잘해라. 나한테 덤벼도 죽고 도망가도 죽어. 그러니까 저 녀석과 싸워라."
"그, 그러면 살려 주는… 거요?"
두 강도 중 하나가 물었다.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건 이기고 나서 물어야 할 것 같은데."
"나, 나리.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은-"
"뒈져라아아아!"
"으아아아!"
필립의 목소리가 달려드는 두 놈의 고함에 묻혀 사라졌다.
고함과 비명. 검과 방패가 맞부딪히는 소리가 살벌하게 이어졌다.
하지만 이안은 눈길도 주지 않은 채 걸음을 옮겼다.
물론 필립이 싫거나 죽길 바라서 이러는 건 아니었다.
눈치 없고 겁도 많지만, 이 세계의 인간 중에선 보기 드물게 성실하고 의리도 있는 놈이었으니까.
하지만 여정 내내 놈의 뒤를 봐줘야 하는 건 다른 문제였다.
그와 함께 하는 이상, 필립도 한 사람 몫은 해낼 수 있어야 했다.
보기보다 실력 있는 놈이니, 부상당한 허접 용병 둘쯤은 충분히 상대할 수 있으리라.
'저딴 것들에게 죽는다면, 차라리 지금 죽는 게 호상이지.'
이안은 장님이 된 두목을 향해 다가갔다.
놈은 고통에 흐느끼면서도 바닥을 기어 도망치고 있었다.
푹-
놈의 손등에 단검이 박혔다.
"아아악-! 개, 개자식아!"
손목을 움켜쥔 놈이 비명을 내질렀다.
놈의 바로 앞에 선 이안이 코웃음을 쳤다.
"먼저 독을 먹인 건 넌데? 누굴 죽일 생각이었으면 네가 뒈질 각오도 했어야지."
장님이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죽이, 죽이려던 게 아닙니다…! 기절만 시키려던 겁니다! 우린 그냥 물건만 털었을 거라고요!"
"그래…?"
몸을 돌린 이안이, 필립이 건넸던 술잔을 들고 돌아왔다.
그리고는 장님의 손등에 박힌 단검을 움켜쥐었다.
"으, 아악…!"
단검을 비틀자 놈이 비명을 질렀다.
이안이 벌어진 입에 술을 부었다.
"켁, 커억… 어억?!"
놈은 엉겁결에 삼키고 나서야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이안이 미소 지었다.
"기절만 한다며? 정말 그러면 살려 주마."
"이, 이런 개 같은, 컥… 꺼억…!"
욕지거리를 토해내던 놈의 얼굴에, 이내 핏발이 돋았다.
놈은 한참 고통에 몸부림치다, 이윽고 피를 토하며 잠잠해졌다.
"차라리 사실대로 말했으면 고통 없이 갔을 텐데."
이안이 혀를 차며 읊조렸다.
속에서 알싸함이 느껴졌다.
꽤 강한 독이었지만, 이안의 저항력을 뚫을 정도는 아니었다.
4챕터의 적들에게 살아남기 위해, 이안은 공용 스킬인 태초의 내성을 무려 3레벨이나 올렸었다.
어지간한 상태 이상에는 눈도 깜빡하지 않는 비결이긴 했지만.
과 투자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회수한 단검을 장님의 옷에 문질러 닦던 이안은, 문득 뒤에서 들려 온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호오."
강도 한 놈이 피를 흩뿌리며 쓰러지고 있었다.
방패로 공격을 방어한 필립이 치명적인 반격을 선보인 것이다.
저 정돈 해야지.
이안은 모닥불 앞, 애꾸가 앉았던 돌에 걸터앉았다.
"…팝콘이 없는 게 아쉽네."
그가 앞에 놓인 육포를 느긋하게 집어 들었다.
이어지는 전투를 눈에 담으면서.
#031화
"커흑…."
단말마가 필립의 목덜미를 간지럽혔다.
품이 뜨뜻해지고, 그와 엉켜 있던 강도가 허물어졌다.
놈의 명치에 박혀 있던 검을 뽑은 필립이, 비로소 주저앉았다.
"하악… 하악…."
참았던 숨이 터져 나왔다.
긴장이 풀리면서, 허벅지와 볼의 화끈함이 비로소 느껴졌다.
강도들과의 전투에서 생긴 상처.
지혈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헐떡이던 필립은, 이윽고 모닥불 옆에 앉은 이안을 돌아보았다.
느긋하게 육포를 우물대던 그가 말했다.
"남자다운 얼굴이 됐군."
"대체 왜…."
필립이 맥 빠진 목소리로 간신히 내뱉었다.
이안이 어깨를 까딱였다.
"경과 다닐 때랑은 다를 거라고 했잖아?"
"...."
그게 이런 식으로 다르단 얘기인 줄은 몰랐다고 토로하려던 필립은, 이내 한숨만 내쉬었다.
따지고 보면 각오했다고 말한 것도, 모닥불로 가자고 했던 것도 그였으니까.
이윽고 그가 읊조렸다.
"…어쩌면 나리께선 제가 이런 걸 경험하길 바라셨던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왕국의 민낯이요."
"의미 부여하긴."
피식한 이안이 붕대와 천을 필립에게 던졌다.
"응급 처치부터 하고, 일어서라."
"뭐가… 또 남았습니까?"
"가장 중요한 게 남았지."
남은 육포를 한입에 털어 넣은 이안이 장님에게 다가갔다.
그가 시체의 장비를 하나씩 벗기고 품을 뒤지기 시작하자, 비로소 필립의 미간이 좁아졌다.
"지금 주머니를 터시는 겁니까?"
"소유권 이전이라고 하는 거다. 국경 지대에서도 많이 봤을 텐데."
"그건 그렇습니다만… 그때는 부대로 환수했었습니다. 상대가 해적 출신 야만인들이기도 했고요."
"그럼 이참에 내 주머니 채우는 기쁨도 배우면 되겠네. 네가 죽인 놈들은 네가 털어."
"...."
필립이 입을 뻐끔댔다.
성기사의 종자로 오랜 시간을 보낸 그로선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이래서야 자신이 강도가 된 것 같지 않은가.
"못 하겠냐? 그럼 내가 챙기고."
능숙하게 필요한 물건을 챙긴 이안이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퍼뜩 정신을 차린 필립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이 또한 경험이겠죠."
대충 응급 처리를 끝낸 필립이 강도의 시체로 손을 뻗었다.
아직 따듯한 시신의 몸 이곳저곳을 뒤적인 것도 잠시.
"...!"
필립의 손에 돈주머니가 딸려 나왔다.
안을 확인한 그의 눈이 커졌다.
반짝이는 은화와 동화.
홀린 듯 응시하던 필립의 입꼬리가, 이윽고 슬며시 올라갔다.
주머니를 품에 챙긴 그의 손길이 바빠졌다.
열정적으로 시체를 벗겨 먹는 그 모습에, 이안이 헛웃음을 지었다.
"신났네."
지가 기사인 것처럼 굴더니.
노획은 빠르고 순조롭게 끝났다.
주머니가 두툼해진 이안. 그리고 새 검과 단검, 장갑, 신발, 벨트를 착용한 필립이 나란히 섰다.
그들은 같은 것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용병들이 운송하던 봉인함.
이안이 볼 때, 용병들의 실력에 비해 지나치게 좋은 봉인함이었다.
겉에 정교하게 새겨진 주문 회로.
사이 사이로 반짝이는 세공된 마석들.
'…이걸 장물아비한테 넘기는 게 돈을 더 벌었을 것 같은데.'
이안이 생각하는 사이, 필립이 그를 돌아보았다.
"저만 열어 보고 싶은 겁니까?"
이안은 입맛을 다셨다.
그도 같은 마음이었다.
게임에서 겪어 본 적 없는 상황이라는 것도 호기심에 불을 지피고 있었다.
'내가 건너뛴 퀘스트일지도. …이왕이면 낮에 열어 보고 싶은데.'
봉인함의 고리를 쥔 이안은 슬쩍 아공간을 열었다.
하지만 자성이 밀어내는 듯한 느낌만 들 뿐, 넣어지지 않았다.
'역시, 안 되나.'
생명체를 넣으려 하면 생기는 반발력이었다.
봉인됐으니 혹시나 했건만.
어쩔 수 없지.
결정한 이안이 단검을 뽑았다.
"물러나 있어라."
"옙!"
필립이 냉큼 옆걸음질 쳤다.
단검에 마력을 흘려보낸 이안은, 상자의 이음새 부분에 박힌 마석을 힘껏 후려쳤다.
빠각!
세 번 만에 마석에 금이 갔다.
다른 마석들의 빛이 잦아들었다.
잠깐의 적막. 곧이어 봉인함의 뚜껑이 벌컥, 예고도 없이 열렸다.
안에서 튀어나온 형체가 그대로 이안을 덮쳤다.
놈과 뒤엉킨 그가 바닥을 굴렀다.
쿵, 이안의 등이 나무 둥치에 부딪혀 멈췄다.
이안은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놈의 생김새를 눈에 담았다.
잿빛 머리칼과 뾰족한 귀. 검붉은 눈동자.
'요정? 이거 설마….'
이안의 눈이 가늘어질 찰나.
요정의 긴 머리칼이 망토처럼 주위를 가렸다.
동시에 놈의 입이 기괴한 각도까지 벌어졌다.
톱날 같은 이가 한가득 돋은 아가리가 가까워졌다.
이안은 반사적으로 단검을 뻗었다.
달려들던 아가리가 홱, 궤도를 틀어 검날을 깨물었다.
까득- 빠지직.
단검이 장난감처럼 부러졌다.
퉤, 부러진 날을 뱉은 녀석이 입을 다물었다.
놈의 인상이 순식간에 변했다.
심지어, 아름답게.
이안의 눈에 이채가 서리는 가운데, 그를 응시하던 요정이 문득 내뱉었다.
"너, 엄청 맛있는 냄새가 나네."
히죽 웃은 그녀가 이안을 밀치며 물러났다.
둥치에 등이 짓눌린 이안이 인상을 구겼다.
그 사이 공중을 핑그르 돈 요정이, 고양이 같은 자세로 봉인함 위에 착지했다.
광택 없는 잿빛 머리칼이 망토처럼 그녀의 몸을 감쌌다.
'피 때문에 미친 건 줄 알았는데… 원래 미친 년이었나.'
이안은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일어섰다.
저 여자는 그가 알기로, 이 세계의 유일한 흡혈 요정이었다.
진혈을 마시는 자, 테사이아.
장차 루 사드의 뱀파이어 군주를 흡수해 진혈의 여제로 거듭나는, 꽤 비중 있는 보스 캐릭터였다.
'가만, 루 사드의 의뢰인이란 게 뱀파이어였나…?'
자세한 사연까진 알 길 없었지만.
지금 눈앞의 테사이아는 그가 기억하는 것보다는 훨씬 야성적이고 자신만만해 보였다.
그때, 사방의 시체를 훑어보던 테사이아가 다시 그를 마주 보았다.
"혼자서도 충분히 탈출할 수 있었는데. 어쨌든 고마워, 대신 죽여 줘서."
자루만 남은 단검을 내던지며 이안이 대꾸했다.
"평소에도 고마우면 목덜미를 뜯어 버리려고 하냐?"
"배가 고파서 그만. 사실 지금도 군침이 돌아. 하지만 보아하니…."
싱긋, 요정이 미소 지었다.
입술 사이로 송곳니가 설핏 드러났다.
"넌 지금 내가 어떻게 해도 먹을 수 있을 것 같지 않네."
"잘 아네."
그럼 이제 내가 어떻게 할 건지도 알고 있겠지?
이안은 속으로 뇌까리며 단죄의 검을 뽑아 들었다.
테사이아의 눈매가 휘어졌다.
"그러니까 다음을 기약할게. 또 만나. 그전에 죽지 말고."
그녀가 그대로 솟구쳤다.
잿빛 머리칼이 그녀의 전신을 감싸더니, 순식간에 어둠 너머로 펄럭이며 멀어졌다.
화살처럼 빠른 속도.
"...."
이안의 입가에 헛웃음이 번졌다.
튀어 버릴 줄이야.
숨을 죽이고 있던 필립이 그를 돌아본 건 그때였다.
"저거… 안 쫓아가셔도 되는 겁니까?"
"저걸 어떻게 따라가?"
이안이 검을 회수했다.
"언젠간 알아서 찾아오겠지. 선언했듯이."
"대체 뭐였을까요. 보통 요정 같진 않았습니다만."
"당연히 보통 귀쟁이가 아니지. 저년은 흡혈 귀쟁이다."
"피… 를 빨아 먹는다고요? 요정이요? 말이 됩니까?"
"원래 세상은 말도 안 되는 일투성이야, 필립."
이안은 피를 마시는 요정에 대한 소문을 떠올렸다.
게임에서 테사이아를 만난 건 다른 지역이었으니, 당연히 외지의 소문이 흘러들어온 건 줄 알았었는데.
정말로 이 촌구석에 숨어 있었을 줄이야.
하긴, 제국을 제외하면 마물이나 마족이 숨을 만한 지역은 극히 한정적이었다.
외곽의 모든 왕국에 아겔 란만큼의 타락자들이 암약 중이리라 생각하는 게 차라리 합리적이었다.
"…그럼, 저희가 그런 엄청난 괴물을 풀어 준 거군요."
"놔둬도 어떻게든 탈출했을 거다. 애초에 이깟 용병들한테 잡힌 것도, 낮이라 그랬겠지."
이안이 주위를 돌아보았다.
"부업으로 강도질이나 하는 놈들이 운반자인데. 루 사드까지 무사히 돌아갔을 리가 없어."
"어… 그렇게 생각하니까 마음이 좀 편해지는 것 같긴 합니다만."
못내 꺼림칙한 듯 읊조린 필립이 어둠을 응시했다.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앞으로도 그러는 게 좋을 거다. 마음이라도 편해야지."
"…이런 일이, 계속 생길 거란 말씀은 아니시겠죠?"
"왜 아니겠어?"
"하… 루 솔라여…."
필립이 눈을 감으며 탄식했다.
시체 사이에서 새 단검을 주워든 이안이 봉인함의 손잡이를 움켜쥐며 말했다.
"말이나 끌고 와. 이동할 거니까."
"이렇게 바로요?"
"그럼 피 냄새 맡은 놈들이 몰려올 때까지 기다릴래?"
필립의 한숨이 깊어졌다.
여기서 멀어지려면 새벽까지 걸어야 한다는 뜻이었으니까.
이윽고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린 그가 몸을 돌렸다.
그사이 봉인함을 아공간에 밀어 넣은 이안은, 장비를 점검하고는 안장에 올라탔다.
떠돌이 용병과 그의 종자가 어둠 속으로 멀어졌다.
싸늘하게 식은 시체들과 잦아 들어가는 모닥불만이 고요하게 일렁인 것도 잠시.
어둠 너머에서 크고 작은 안광들이 번뜩이기 시작했다.
피 냄새를 맡은 아겔 란의 청소부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
오른델은 누더기로 기운 도시처럼 보였다.
고대 요정의 성을 멋대로 증축한 내성이 언덕 위에 삐죽했고, 외성 안팎으로는 주민들의 거주지가.
나무 말뚝으로 두른 울타리 너머에는 이주민들을 위해 급조한 판잣집들이 불규칙적으로 이어져 있었다.
통일성이라고는 없었지만, 도시의 규모만큼은 아겔 란에 필적했다.
판자촌에 위치한 여관도, 그에 걸맞은 크기를 자랑했다.
처음에는 집이 없는 이주민들을 위한 공간이던 여관은, 지금은 돈 냄새를 맡고 모여든 용병들의 아지트였다.
급격하게 성장하는 도시에는 그들을 필요로 하는 크고 작은 일거리들이 넘쳐나는 법이었으니까.
오늘도 번 돈을 고스란히 탕진하는 자들로 왁자지껄한 가운데.
끼이이-
여관 문이 시끄럽게 열렸다.
두 사내가 장내로 들어섰다.
술을 홀짝이던 이들이 하나둘씩 그들을 곁눈질했다.
못 보던 얼굴들이었기 때문이다.
앞에 선 주근깨 가득한 청년은 꽤 앳되어 보였지만, 험난한 여정을 해 왔음을 증명하듯 썩은 생선 같은 눈빛을 하고 있었다.
뒤에 선 검은 눈의 남자는 태연해 보였지만, 베테랑 용병 특유의 날카로운 분위기가 묻어 나왔다.
몇몇 용병들이 그가 걸친 가죽 갑옷과 허리춤의 검을 훑는 사이.
"저 안쪽 자리가 좋을 것 같습니다, 나리."
이안에게 속삭인 필립이 앞장서 걸음을 옮겼다.
그의 뒤를 태연하게 따르면서 이안이 말했다.
"꼭 구석에 앉아야겠냐?"
"그래야 싸움이 나도 뒤를 잡힐 일은 없을 것 아닙니까. 저번에 제가 죽을 뻔했던 것, 기억 안 나십니까?"
당연하다는 듯한 말투.
덤빌 테면 덤비라는 듯 장내를 훑는 필립의 모습에, 이안이 헛웃음을 흘렸다.
의심암귀의 화신이 따로 없었기 때문이다.
두 개의 마을을 거치고, 사이사이 노숙을 반복한 결과였다.
물론, 이안이 싸움이 일어날 때마다 필립의 몫을 꼬박꼬박 할당한 덕분이기도 했다.
몸에 새겨진 상처의 숫자만큼 세상에 대한 불신도 깊어진 것이다.
물론 이안의 눈엔 아직도 애송이였지만.
고작 보름여가 지났음을 감안하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적어도 지금의 필립을 보면서 성기사의 종자를 떠올릴 사람은 없을 테니까.
둘은 구석의 작은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뭘 드릴까요?"
그들을 지켜보던 여급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다가와 물었다.
의욕이라고는 없는 태도에 피식대며, 이안이 물었다.
"식사로는 뭐가 괜찮지?"
"괜찮은 건 없고, 먹을 수는 있는 걸 원하시면 소시지가 좋을 거예요. 빵을 시키실 거면 스튜를 꼭 같이 시키셔야 하고요. 그래야 삼킬 수 있거든요."
"그럼 그것들 전부."
고개만 끄덕인 여급이 몸을 돌렸다. 그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필립이 이윽고 속삭였다.
"그래서, 이제부턴 어쩌실 겁니까?"
"왜 자꾸 속삭이는 거냐?"
"남들이 들을지도 모르잖습니까."
"들어도 상관없어. 오히려 태연해야 더 신경을 안 쓸 거다."
"…또 하나 배웠군요."
뭘 맨날 배우고 난리야.
실소한 이안이 장내를 돌아보았다.
용병으로 보이는 자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사실 거의 전부로 보였다.
"며칠 머물면서 분위기를 좀 볼 거다. 겸사겸사, 푼돈도 벌고."
"일단은 이 사이에 섞여들겠단 말씀이시군요."
"갑자기 나타나서 실종된 병사에 대해 묻고 다니면, 그건 그것대로 수상하니까."
이안이 심드렁하게 대답하는 사이, 여급이 접시를 들고 돌아왔다.
테이블에 음식이 놓였다.
여급이 지켜보는 가운데, 소시지를 한 입 먹은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먹을 수만 있군."
"믿으세요. 다른 건 더 별로니까."
여급의 체념 섞인 말을 들으며, 이안은 품에서 은화를 꺼냈다.
이렇게 많은 팁을 받을 줄은 몰랐는지, 여급의 눈이 커졌다.
이안의 말이 이어졌다.
"보아하니 일거리가 꽤 많은 모양인데. 괜찮은 의뢰를 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누가 보기라도 할까, 재빨리 은화를 품에 챙긴 여급이 목소리를 낮췄다.
"곧바로 큰 건을 받으시면 충돌이 있을 거예요. 여긴 보기와 달리 나름대로 규칙이 있어서요. 아예 남들이 엄두도 못 낼 만큼 위험한 일이면 모를까. 작은 것부터 시작하셔야 해요."
받은 만큼의 의리가 눌러 담긴 조언.
이안이 미소 지었다.
"잘됐네. 내가 원한 게, 바로 그런 위험한 의뢰니까."
#032화
여급이 되물었다.
"…그게 아무도 완수한 적 없는 의뢰라도요?"
이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소시지를 한입 더 베어 물었다.
이윽고 한숨을 내쉰 여급이 고개를 끄덕였다.
"영주님이 직접 현상금을 건 일이에요."
"내용은?"
"지하에 수로가 있거든요. 엄청 오래전에 요정들이 만든 거라, 아무도 전체 구조를 몰라요. 뭘 버리면 저 너머의 배수구로 빠져나가니까 그냥 쓰는 거지. 아무튼, 거기 뭐가 살아요. 가끔 하수구를 타고 그르렁대는 소리도 들리고."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문은 들은 적 있어. 식인 악어."
"토벌하겠다고 들어간 사람 중에 딱 한 명만 돌아왔어요. 그 사람 덕분에 정체가 밝혀졌죠. 눈이 넷 달린 악어라던데. 사실 그게 진짜인지도 알 수 없어요. 그 사람 외엔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으니까. 그러니까 안 가시는 게 좋아요. 게다가 거길 들어가면…."
여급이 목소리를 낮췄다.
"똥물에 다리를 담그고 다녀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
이안과 필립의 인상이 동시에 구겨졌다.
필립과 눈빛을 교환한 이안이 물었다.
"그놈을 죽이면 어디로 가져가야 하지?"
"그냥 여기로 가져오셔도 돼요. 경비대가 찾아올 테니까."
고개를 끄덕인 이안이 은화를 하나 더 건네며 말했다.
"침대 두 개 있는 방으로 주고, 내일 나와 이 녀석이 갈아입을 옷을 두 벌씩 사다 줘. 돌아와서 씻을 물도 준비해 주고. 이거면 충분하고도 남겠지?"
"정말 하시게요?"
"내일 낮에. 바로."
"…전 말렸어요. 최선을 다해서."
그들이 묵을 방을 알려 준 여급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멀어졌다.
"똥물이라니… 하…."
딱딱한 빵을 스튜에 적시던 필립이 한숨 쉬었다.
이안이 어깨를 까딱였다.
"어차피 내 눈엔 여기나 똥물이나 다를 것도 없어."
"지하 수로에 사는 식인 악어라니. 버차드 후작은 잘도 그런 걸 방치하고 있군요."
"병사를 희생시키고 싶지 않은 거겠지. 전쟁을 준비하고 있으니까."
"어차피 많아야 백인대 한 두 부대나 지원할 거면서, 더럽게 쪼잔한 작자인 모양입니다."
"글쎄… 뭔가 생각이 있겠지."
"...?"
필립이 그게 무슨 소리냐는 눈길로 이안을 바라보았다.
이안은 대꾸도 하지 않고 소시지를 입에 넣었다.
내일 격하게 움직일 테니, 이런 맛대가리 없는 음식이라도 든든히 먹어 둬야 했다.
***
용병인 패튼은 늘 그렇듯, 해가 중천에 뜨고서야 일어났다.
간밤의 음주 덕에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홀로 나간 그는, 평소와 달리 이른 시간부터 모여 앉은 용병들을 발견하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뭣들 하고 있냐?"
"엉? 내기 중이었어. 너도 낄래?"
"내기…?"
그가 테이블로 다가갔다.
"뭔 내기?"
"어젯밤에 온 놈들 말이야."
양쪽 손가락이 둘씩 없어서 육손이라 불리는 녀석이 의미심장하게 눈을 빛냈다.
"지하 수로로 들어갔다더라고."
"수로에…? 설마 둘이서 그 괴물을 잡겠단 건 아닐 테고."
"그 설마가 맞아."
"미쳤군."
패튼의 미간이 좁아졌다.
여급에게 손짓으로 스튜를 부탁한 그가 자리에 앉았다.
"그래서, 내기 조건이 뭔데?"
"오늘 자정까지 돌아오느냐, 마느냐."
"…너무 뻔한 조건인데."
"그래서 누가 돌아온다에 걸 건지로 얘기 중이었어."
다른 용병이 거들었다.
"돌아오면 한 놈이 판 돈을 다 먹고. 못 돌아오면 전부한테 한 잔씩 사는 거로 말이야."
"차라리 그냥 한턱 쏘는 게…."
중얼거리던 패튼이 문득 볼을 긁적였다.
때마침 여급이 스튜를 가져왔다.
접시째로 들어 입에 부으면서, 그는 어젯밤에 본 떠돌이들의 행색을 떠올렸다.
한 놈은 애송이 같았지만, 다른 한 놈은 묘한 위압감이 있었다.
덩치가 크거나 얼굴이 무서운 것도 아닌데도.
그래서 적당히 지켜보다가 말을 걸어 봐야겠다고 생각했었다.
쓸만한 인재가 필요했으니까.
"…그럼 내가 그쪽에 걸지."
이윽고 접시를 내려놓은 패튼이 말했다.
둘러앉은 용병들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진심이냐, 패튼?"
"그래. 살아 돌아오면 돈을 벌어서 좋고. 아니면 너희 새끼들한테 한 잔씩 사서 좋다고 하지 뭐."
패튼이 테이블에 은화를 내려놓았다.
잽싸게 챙긴 육손이가 돈을 내기용 주머니에 넣었다.
"역시 넌 괜찮은 놈이라니까."
"도련님이 아끼는 이유가 있어. 둘이 비슷하다니까?"
곳곳에서 이어지는 속 보이는 덕담에 패튼이 코웃음을 쳤다.
"작작들 해라, 새끼들아. 그딴 사탕발림은 다른 호구한테나 가서-"
쿠우웅-
패튼의 말이 멈췄다.
어딘가에서 둔중한 떨림이 번졌기 때문이다.
어리둥절해하던 용병들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방금 그거, 뭐였."
구웅-
다시 한번 진동.
그들은 그제야 이 떨림이, 저 너머 어딘가의 땅속에서 번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용병들이 저마다 시선을 교환할 찰나.
쿠웅- 쿠우웅- 쿠구구구-
진동이 연달아 이어졌다.
여기서 이렇게 느껴질 정도라면, 외성과 내성에선 더 선명하게 느껴질 게 분명한 수준이었다.
그리고 다시 장내가 고요해졌다.
한참을 서로 눈빛만 교환하던 중, 이윽고 육손이가 웃음을 흘렸다.
"꽤 인상적이긴 했는데. 아무래도 끝난 것 같지?"
"그렇지? 무슨 짓을 한 건진 모르겠지만-"
콰앙-!
그때, 이번엔 아예 폭음이 울려 퍼졌다.
순간적으로 지진이 난 것처럼 건물 전체가 흔들렸다.
테이블 위의 잔들이 떨어져 바닥에 나뒹굴었다.
하지만 아무도 주울 생각을 하지 못했다.
지금까지 이런 적은 없었으니까.
누군가의 침 삼키는 소리가 번지는 가운데.
키아아아아아-
난생처음 들어 보는 비명이 사방에 메아리쳤다.
도시의 모든 배수구를 나팔 삼아 울려 퍼지는 소리였다.
그리고 적막. 장내에도 기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누구 하나 입을 열지 못하는 가운데, 여관 문이 요란하게 열렸다.
"방금 들었어? 그거 뭐냐?!"
도시에 나가 있던 용병이었다.
그를 시작으로 곳곳에 흩어져 있던 용병들이 여관으로 모여들었다.
삼삼오오 모여앉은 그들은, 모두 저마다가 들은 것과 본 것들을 떠들어 대느라 여념이 없었다.
"망치로 지하를 다 부수고 다니는 것 같은 소리였다고. 그 미친놈들이 수로를 막아 버린 거야. 악어를 잡으려고."
"난 욕이랑 외침을 들었어. 배수구 아래에서 도망치지 못하게 막으라고 하는 걸 내 귀로 똑똑히 들었다니까?"
"기름이야. 기름을 들고 가서 똥물에 불을 지른 거야. 불붙은 악어가 비명을 내지른 거지."
실체 없는 추측과 주장이 난무하고, 그에 따른 크고 작은 내기들이 성행하는 가운데.
끼이이이-
여관 문이 천천히 열렸다.
노을의 붉은 빛과 기다란 그림자가 장내에 드리웠다.
좌중이 삽시에 고요해졌다.
그림자를 앞세운 남자가 걸어 들어왔다.
오물과 체액을 뒤집어쓴 이안이었다.
"...."
하지만 아무도 그의 행색이나 그에게서 풍기는 구린내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그가 품에 안고 들어온 것에 완전히 시선을 빼앗겼기 때문이다.
장내를 돌아본 이안이, 여급을 발견하고는 품에 안고 있던 것을 내던졌다.
"가서 사람을 불러 와라."
철퍽-
거대한 머리통이 여관 바닥에 널브러졌다.
소 몸통만 한 크기에, 눈이 네 개나 달린 악어의 머리였다.
"지하 수로의 괴물을 죽였으니까."
이안이 말을 맺는 사이, 뒤따라 들어온 필립도 손에 든 것을 머리통 옆에 던졌다.
그건 머리와 마찬가지로 엉망진창으로 뜯겨나간 꼬리였다.
"못 들었습니까? 경비병이든 대장이든, 불러오라고. 당장."
"네, 네엣!"
필립이 짜증스럽게 덧붙이자, 여급이 불에 덴 것처럼 여관 밖으로 달려 나갔다.
다시금 장내에 내려앉은 적막을 깨뜨린 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 패튼이었다.
"내 돈 전부 가져와, 이 새끼들아! 형씨, 고맙소! 덕분에 대박이 터졌어!"
그의 외침을 시작으로, 탄성과 함성이 곳곳에서 터져나왔다.
사방에서 튀어 오른 용병들이 이안과 필립의 주위로 몰려들었다.
"어떻게 한 거요? 기름. 기름이지?"
"망치로 짓이긴 것 맞소? 난 거기에 걸었거든."
"저걸 진짜 죽이다니! 정말 엄청나군! 대체 어떻게 한 거야?!"
쏟아지는 질문과 환호에 이안의 미간이 점점 좁아졌다.
필립도 마찬가지였다.
이해할 수 있는 반응들이었지만.
적어도 똥오줌을 뒤집어쓴 상태에서 나눌 얘기는 아니었다.
슬슬 이안의 눈에 살기가 돌기 시작할 때쯤.
"작작 해, 미친놈들아! 몰골이 어떤지 안 보이냐? 내가 맥주 한 잔씩 살 테니까, 그거나 마셔!"
이안 덕에 큰돈을 딴 패튼이 용병들을 물렸다.
이안과 눈이 마주친 그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었다.
"목욕물을 준비해 달라고 했다는 얘긴 들었소. 안에 들어가면 준비되어 있을 거요. 댁들, 구린내가 장난 아니거든."
"…물 한 통으론 어림도 없어."
"여급이 돌아오면 말해 두겠소. 덕분에 한 달은 놀고먹게 됐는데, 이 정도는 도와 드려야지."
고개를 까딱인 이안이 걸음을 옮기고, 욕설을 중얼거리는 필립이 뒤를 따랐다.
악어의 머리와 꼬리를 중심으로 때 이른 술판이 벌어졌다.
그 한복판에서 복도로 들어서는 둘의 뒷모습을 놓치지 않고 응시하던 패튼이, 나지막이 중얼댔다.
"엄청난 놈들이 굴러들어 온 것 같은데… 도련님을 빨리 모셔 와야겠구만."
***
경비대장이 네눈박이 악어의 머리를 싣고 돌아갔다. 현상금은 사흘 내로 지급될 것이라는 말을 남긴 채였다.
이안은 뒷수습까지 깔끔하게 끝냈다.
악어와의 전투 중에 지하 수로가 조금, 아주 조금 파손되었으니 석공들을 파견하라는 말을 잊지 않은 것이다.
혹시라도 꼬투리를 잡힐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고대수 사건의 진위를 밝혀내는 것보다 오른델의 영주와 충돌할 일을 먼저 만들고 싶진 않았다.
"이런 경험은 한 번이면 충분한 것 같습니다. 두 번은 절대 못 해요."
마주 앉은 필립이 우울한 얼굴로 중얼댔다.
앞에 놓인 음식에는 거의 손을 대지 않은 채였다.
"동감이다."
이안도 고개를 끄덕였다.
온몸을 세 번이나 씻고 옷도 전부 갈아입었건만.
아직도 몸에서 암모니아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가지고 간 장비도 잘 씻어서 말려 두긴 했지만.
솔직히 완전히 깨끗해질 것 같진 않았다.
어쨌건, 그들을 향한 대우만큼은 극적으로 달라졌다.
어젯밤 같은 경계의 눈빛은커녕, 다들 눈길만 스쳐도 고개를 까딱이거나 술잔을 들었다.
이안에겐 익숙한 변화였다.
용병의 세계는 처세술이나 실력이 전부니까.
이제부턴 아무도 그들의 행동에 토를 달지 않을 터였다.
혹은.
"잠시 실례해도 괜찮겠소?"
오히려 저쪽에서 먼저 손을 내밀거나.
이안은 다가온 남자를 돌아보았다.
아까 용병들을 물렸던 인상 좋은 사내.
그의 뒤에는 꽤 곱상하게 생긴 못 보던 청년이 부하처럼 서 있었다.
이안이 고개를 까딱였다.
"본론만 짧게 말한다면."
"하하. 실력만큼 성격도 시원하시군. 반갑소. 패튼이오."
웃음 지은 패튼이 빈자리에 앉았다.
"이안."
"필립입니다."
패튼의 뒤에 선 청년이 거슬린다는 듯 곁눈질한 필립도 고개를 까딱였다.
"이런 실력을 가진 분들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다니. 이상하군. 혹시 출신지가 어찌 되시오?"
"늪지대."
"엥…? 하하. 말씀하고 싶지 않으신 거군. 알겠소. 그럼 전에는 어디서 활동하셨소? 실력을 봐선 분명, 어디에서건 명성을 떨치셨을 것 같은데."
"그딴 호구 조사나 할 거면-"
인상을 구기며 내뱉던 필립이, 이안의 시선에 입을 다물었다.
이안이 패튼을 바라보았다.
"내가 범죄자 출신이 아니라는 건, 이런 개소리를 들어 주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증명된 것 같은데. 본론이나 꺼내시오. 그쪽 말고…."
그의 시선이 패튼의 뒤에 선 청년에게로 향했다.
"할 말이 있는 당사자가, 직접."
"...!"
패튼이 놀란 표정을 짓는 가운데, 필립의 미간이 더 좁아졌다.
이안이 고개를 까딱였다.
"귀족이 왜 자유민 흉내를 내고 있소? 아니, 음지의 거물 흉내인가?"
"...?!"
그제야 필립도 눈을 치켜떴다.
공손하게 서 있던 청년이 머쓱한 웃음을 흘린 건 그때였다.
"들킬 줄은 몰랐는데. 내 연기가 그렇게 엉망이었나?"
"이런 베테랑 용병의 호위 흉내를 내고 싶으시면, 얼굴이나 손등에 흉터라도 몇 개 만드시는 게 좋을 거요."
"훌륭한 조언이지만, 그건 힘들겠군. 나름대로 이 얼굴이 재산이라서 말이야."
"죄송합니다, 도련님. 들켜 버렸군요."
패튼이 일어섰다. 청년이 웃으며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괜찮아. 보아하니 처음부터 속일 수 없는 상대였던 것 같은데."
그가 자연스럽게 패튼의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는 이안을 마주 보며 미소 지었다.
"무례를 사과하지. 알다시피 용병 중에는 아주 위험한 과거를 가진 자들이 섞여 있어서 말이야. 최소한의 확인 절차가 필요했어. 나는 칼부림엔 영 젬병이거든, 하하."
귀족보다는 자유민에 가까운 말투.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하오. 사과는 받아들이겠소."
"고맙군. 난 데클란 버차드라고 한다."
"버차드라면…."
필립의 입이 벌어졌다.
이안은 놀란 기색 없이 말했다.
"영주님의 아드님이시군. 귀하신 분이 우리 같은 일개 용병의 신분은 왜 확인하려 하신 거요?"
"이 도시의 용병들을 관리하는 게 내 역할이거든. 거기다 그대들은 특히 실력이 뛰어나고."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용병들이 득시글대는 것치곤 지나치게 평화롭더라니.
게임에서도 이랬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거기까진 알 수 없었다.
사실 스토리와 관련된 부가적인 설정에는 그가 모르거나 바뀐 부분이 더 많았다.
"소공자께서 이런 고된 일을 맡으시다니, 대단하시군요. 좀 전의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필립이 정중하게 말했다.
데클란이 피식댔다.
"소공자가 아니니까 맡은 거다. 난 서자거든."
"아하… 그러셨군요."
"그래서, 신분에 대한 확신은 생기셨소? 뭔가 물증이 더 필요하신가?"
이안이 느긋하게 물었다.
데클란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필요하지 않은 것 같군. 물론 실력을 검증할 필요도 없고 말이야. 바로 본론으로 넘어갈까 하는데, 괜찮겠나?"
그가 이안과 필립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필립이 이안을 바라보는 가운데,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는 보겠소."
"그래. 자네들, 내 밑에서 함께 일해 보지 않겠어?"
"...?"
#033화
데클란이 양손을 펼쳤다.
"이미 실력은 검증됐으니까, 약간의 훈련과 서약만 한다면 내 부대의 백인대장과 부관으로 임명하고 싶은데. 괜찮은 제안이지 않나?"
"용병들을 정규군으로 편성하신단 말씀이십니까?"
필립이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오래 전선에 살았던 그는, 그게 얼마나 허무맹랑한 이야기인지 알고 있었다.
데클란은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안을 바라보는 그의 눈이 솔직한 야망으로 반짝였다.
"전쟁을 앞두고 있으니 가능한 일이지. 다른 영주들은 용병을 천시하지만, 적어도 나는 그렇지 않아. 야전에서 잔뼈가 굵은 용병들은 훌륭한 전력이지. 합당한 대가와 기회만 수반된다면 말이야. 내 밑에 있으면, 공적을 올린 만큼 출세할 수 있을 거다. 물론 결코 너희를 내치지도 않을 거고."
"흐음…."
이안은 턱을 어루만졌다.
물론 제안에는 흥미가 없었다.
흥미로운 건 이자의 태도였다.
이자는 진심으로 용병들을 자신의 수족으로 삼으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자의 방식이 성공적이라는 건, 패튼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자신이 그의 부관이라도 된 것 같은 표정이었으니까.
"영주님은 허락은 받으신 거요?"
"물론. 할 거면 해 보라는 식이셨지. 아버님의 입장에도 손해는 아니거든. 우리를 선두에 세울 테니까."
"칼받이가 되기 딱 좋단 말씀이시군."
"부정하진 않겠어. 하지만 그런 만큼, 우리가 살아남는다면 강한 명분을 가진 세력이 될 거다. 내가 그렇게 만들 거고. 이래 봬도, 아예 멍청하진 않거든."
데클란이 검지로 자신의 관자놀이를 톡톡 두드렸다.
이안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보기에도 이 서자는 절대 멍청하지 않았다.
소탈한 행동부터 적당히 솔직하면서도 가볍지 않은 화법. 눈빛과 표정까지.
여러모로 촌놈치고는 인상적이었으니까.
물론 이안에겐 전혀 먹히지 않을 매력과 제안이었다.
이런 촌구석에서 출세할 생각도 없었고, 곧 일어날 전쟁이 어떻게 끝나는지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속내와 달리, 이안은 담담하게 내뱉었다.
"당장은 아무런 대답도 드릴 수 없겠소."
"왜지?"
"아직 끝내지 못한 의뢰가 있기 때문이오. 앞서 받은 의뢰를 끝마치지 않은 채로 수락할 수준의 작은 제안이 아니잖소?"
"하지만 악어는 이미… 아, 그래. 애초에 오른델에 온 것 자체가 우연이 아니었던 거군. 의뢰를 해결하러 온 거야."
말귀는 잘 알아먹어서 좋네.
이안은 어깨만 까딱였다.
데클란은 자신이 낚싯대를 드리웠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이안은, 그를 처음 본 순간부터 생각하고 있었다.
거꾸로 이자를 낚아서, 의뢰를 해결하는 데에 이용하자고.
별 관심도 없는 얘기들을 끈덕지게 들어 준 것도 그래서였다.
"내가 네 의뢰에 도움을 준다면, 내 제안을 고려해 볼 텐가?"
"생각이라면야. 사실 귀하가 도움이 되실지도 확신할 수 없소."
"너희들의 용무가 이 도시 안에 있다면, 아마 될 거야. 내성을 제외하곤 내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은 없거든."
데클란이 장담하듯 말했다.
이안을 바라보는 눈길에 호의와 열망이 느껴졌다.
이안은 태연하게 그 눈을 마주 보았다.
이게 이자의 본모습이건 아니건 상관없었다.
보이는 것만큼 선한 자라면 아버지의 본모습을 알게 될 테고.
그렇지 않다면 오히려 모든 게 더 쉬워질 테니까.
"송구한 말씀입니다만… 그럼 저희의 의뢰를 노출하게 될 텐데요."
필립이 시기적절하게 끼어들었다.
특유의 고지식한 부분이 이럴 때는 도움이 됐다.
"아. 용병의 불문율 얘기군. 흠, 패튼?"
턱을 만지작거린 데클란이 고개를 돌렸다.
패튼이 미소 지었다.
"에, 도련님."
"미안하지만, 물러나 주겠어? 주변에 궁금해하면서 얼쩡거리는 놈들도 같이."
"예, 뭐, 그러겠습니다. 들었지? 쥐새끼들처럼 얼쩡대지 말고 다 물러나. 술이나 마시자고."
패튼이 몸을 돌렸다.
이안이 앉은 구석 자리를 중심으로 작은 공간이 만들어졌다.
이안이 데클란을 바라보았다.
"귀하가 들으시기엔 맥 빠지는 내용일 수도 있소."
"사람의 궁금증을 자극할 줄 아는 친구로군. 말해 봐. 괜찮으니까."
"우리는 사람을 찾으러 이곳에 왔소."
이안이 품에서 반쯤 썩은 신분 패를 꺼냈다.
데클란의 눈이 가늘어졌다.
"데이브…?"
"보시다시피, 오른델의 정규군이오."
"이게 이 꼴인 걸 보니, 이자는 이미 죽었겠군."
"맞소. 이자는 죄수들을 이송하고 있었지. 이송 명령을 내린 자를 찾는 게, 의뢰의 첫 번째 목표요."
"두 번째 목표는, 이자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지를 알아내는 건가?"
데클란이 목소리를 낮췄다.
이안은 고개를 저었다.
"자세한 내막은 알려 드릴 수 없소만. 억울한 죽음이었소."
"정규군 내부에… 부패한 자들이 있다는 뜻이냐?"
"글쎄. 그건 귀하께서 더 잘 아실 것 같소만. 귀하가 보시기엔 어떻소?"
이안이 되묻자, 데클란이 볼을 긁적였다.
"부끄러운 말이지만, 영주군의 내부 사정은 나도 잘 몰라. 그들을 지휘하는 건 형님과 아버님이니까. 그쪽이 적통이고 후계자거든."
"그러시다면… 귀하가 도움을 주실 건 없을 거요."
"도움을 줄 수 없다고 하진 않았어."
데클란이 미소 지었다. 이안이 볼 때 그건, 어떤 기회를 포착한 자의 미소였다.
그가 의욕적인 눈으로 이안을 마주 보았다.
"내가 알아봐 주지. 내 개인적인 호기심도 더해졌으니까, 실망할 일은 없을 거야."
"그래 주신다면야. 사양하지 않겠소."
"명령을 내린 자를 찾으면, 그 후엔 어쩔 거지?"
"그건 그때의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 아시겠지만 나는 용병이오. 용병은 의뢰를 완수하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지."
듣고 싶었던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 데클란이 환하게 미소 지었다.
"몸에 밴 냄새를 빼면서 조금만 기다려. 좋은 소식 가지고 돌아올 테니까."
***
데클란이 말한 조금은, 정말 조금이었다.
다음 날, 해가 지기가 무섭게 여관을 찾아온 것이다.
이제는 이안의 지정석이나 마찬가지가 된 구석 자리에, 그가 마주 앉았다.
"나름대로 알아보니, 네 말대로 이상하더군."
용병들이 공간을 벌려 주고 입구 근처에서 떠들썩하게 떠들어 댄 덕분에, 그들의 자리는 인파 속의 밀실이나 다름없게 됐다.
이안이 미소 지었다.
"어떤 부분이 이상하셨소?"
"데이브는 가족이 여동생뿐이더군. 그리고 그녀는 데이브가 살아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어. 아겔 란의 감옥을 지키러 떠났다고 말이야. 확인할 방법이 없으니 그렇게 믿을 수밖에 없었겠지. 재미있는 게 뭔지 아나?"
데클란이 이안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의 푸른 눈동자가 반짝였다.
"데이브와 함께 죄수를 이송한 병사는 총 여섯이었지. 그리고 그들 모두가 부모가 죽었거나 고아였어. 하루아침에 사라져도, 행방을 제대로 찾아낼 사람이 없는 자들이었단 거야. 형제나 친구들 모두, 그들이 아겔 란으로 이주했다고 알고 있더군."
이안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놀랍지도 않은 이야기였다.
자유민 중에서도 최하층민들.
체스에서 폰을 미끼로 쓰듯, 모든 음모의 첫 희생양은 그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이송 명령을 내린 자는 누구였소?"
"브래들리라는 자야. 지휘관이자 형님의 수족이지. 나와 친하진 않아. 사실, 그 반대라고 할 수 있지. 그자는 내게 존대하는 게 싫어서, 거의 말을 걸지 않거든."
쾌활한 목소리로 말한 데클란이, 이안의 눈을 마주 보았다.
"그래서, 이제 어쩔 거야?"
"대화를 나눌 생각이오. 오붓하게."
"원하는 말을 끌어내기 쉽지 않을 텐데?"
이안이 단검을 뽑아 테이블 위에 놓았다.
"이건 훌륭한 대화 수단이오. 과묵한 자도 말문이 트이게 하는 마법이 걸려있소."
데클란이 웃음을 터뜨렸다.
"나도 그 마법을 구경하고 싶어지는데. 끼워 주겠나?"
"안 될 것도 없소. 대화의 장을 귀하가 마련해 주신다면야."
"하… 이럴 수가. 갈수록 자네가 마음에 들고 있어. 이렇게까지 말이 잘 통하는 상대는 오랜만인데. 혹시, 귀족 출신인가?"
또 이 소리군.
실소한 이안이 말했다.
"애석하시겠지만, 아니오."
"아니. 오히려 다행이군. 알다시피 내 피의 절반은 자유민이라서 말이야. 좋아, 그럼 먼저 일어나지. 생각할 게 많아. 자리가 마련되면, 바로 사람을 보낼게.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데클란이 일어섰다.
"나도 자네의 이 의뢰가 어떻게 끝날지, 너무 궁금하거든."
"나도 그렇소."
해사하게 미소 지은 그가 용병들 사이로 멀어졌다.
용병들과 친구처럼 어깨동무하며 술을 사는 그를 눈에 담으면서, 이안이 입을 열었다.
"여러 번 손 안 대고 코 푸는군."
"제가 볼 땐 나리께서 사람 부려먹는 데 도가 트신 것 같습니다만."
데클란의 자리에 앉으며 필립이 말했다.
피식한 이안이 그를 바라보았다.
"하던 이야기나 계속해 봐."
"예."
필립이 재빨리 입을 열었다.
사실 그는, 이안의 명령으로 종일 데클란을 미행했다.
놀랍게도 필립은 미행이나 잠입 따위에 소질이 있었다.
겁 많은 성격이 이런 부분에서 빛을 발한 것이다.
"도련님이 예상보다 일찍 오셔서 말이 끊겼습니다만. 큰 특이점은 없었습니다. 도련님이 아까 말씀하신 그대로의 동선이었고요. 겸사겸사, 저분의 평판에 대해서도 들었습니다."
"장족의 발전이군. 명령하지 않은 것까지 해 오다니."
"듣기 싫어도 들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른델의 백성들은 다들 저 도련님을 좋아하더라고요. 자유민의 피가 섞여서 그런 것 같다고들… 아무튼."
헛기침한 필립이 목소리를 낮췄다.
"도련님의 어머니는 몇 년 전에 죽었다더군요. 후작이 아들로 거둬들이긴 했지만 중요한 일에 쓰지는 않고. 장남인 메이슨 대공자는 저분을 눈엣가시로 여기는 것 같았습니다. 다들 도련님이 가장 위험한 전장으로 배치되고, 죽어서 돌아올 거라고 걱정하더군요."
흔한 콩가루 집안이구만.
고개를 주억거리는 이안에게, 필립이 덧붙였다.
"제가 볼 때, 저 도련님은 타락자는 아닌 것 같습니다. 만약 타락했다면… 본모습을 정말 잘 감추고 있는 거겠죠."
"그래. 정말 잘 감추고 있긴 하지. 그게 혼돈이나 어둠을 숭배하는 쪽은 아닌 것 같다만. …아직까진."
이안은 앞에 놓인 맥주를 입으로 가져갔다.
"일이 다 끝난 다음에도 그럴지는, 지켜보면 알게 되겠지."
벌써부터 코끝에, 피 냄새가 감도는 것 같았다.
***
침대에 기대앉은 이안은, 무덤에서 가져온 연구 일지를 펼쳤다.
오른델에 온 지 며칠 만에, 그는 가장 좋은 방을 쓰게 됐다.
다른 용병들과 충돌하는 일 없이 마을의 잡스러운 의뢰들을 해결해 주고, 여급과도 친해진 결과였다.
여관이나 주점에서 일하는 여급들은, 항상 이상할 정도로 이안을 편하게 여겼다.
아마도 위협적이지 않은 외모와 덤덤한 말투 덕분이겠지만.
그걸 고려해도 과한 호의였다.
어쨌건, 덕분에 이안은 조용한 혼자만의 시간을 만끽할 수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사제님은 내게 새로운 길을 열어 주셨다. 처음엔 완강하게 거부하고 분노했지만, 나는 결국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지 않을 수 없었다. 참된 진리였으니까. 내가 지금까지 진리인 줄 알았던 것들은 모두 거짓이었다. 이 세계도 마찬가지다….'
콘라우드의 연구 일지는, 전형적인 정신병자의 회고록이었다.
중간중간 놈이 정리한 수식이나 마법 공식, 규칙 따위가 나열되어 있었으나, 이안이 볼 땐 말이 되는 것이 단 하나도 없었다.
물론 이 세계는 이 말도 안 되는 것들이 작동하는 세상이지만.
이안은 자신이 이 세계의 방식으로 마법을 배우게 되는 일은 없으리란 사실만 다시 한번 확인했다.
아무리 예전보다 똑똑해졌다고 해도, 애초에 성립조차 되지 않는 것들을 이해할 순 없었다.
'…하긴. 이 세계 인간들에겐 스킬 포인트로 마법을 배우고, 쓰기까지 하는 내가 더 말도 안 되는 존재겠지.'
이안은 콘라우드라는 변방의 마법사가 어둠에 물들어, 비로소 인간의 굴레를 벗어가는 과정을 차근히 눈에 담았다.
예상대로 놈을 지하 무덤으로 불러들인 자는 아겔 란에 있었다.
이름이 언급되진 않지만, 이안은 그게 누구인지도 알고 있었다.
때가 되면, 콘라우드는 그의 첨병이자 하수인으로 세상에 나올 계획이었다.
아겔 란 왕국 전체를 마경화시키기 위해서.
끝내는 검은 벽을 세운 것과 같은 공허의 존재들을 이 땅에 강림시키는 게, 그들의 원대한 계획이었다.
신도 악마도 아닌 고대 신들에게 지배당하는 삶을 원한 것이다.
타락자들의 눈에는 그것이, 세상이 태초의 순리로 되돌아가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본래의 세상이라며 사이비의 교리로 치부했을 내용이지만.
'이 세계는 전부 다 제정신이 아니라서, 뭐가 진실인지를 알 수가 없네.'
일지의 내용이 이안을 처음 만난 부분까지 접어들었을 때였다.
"나리. 주무십니까?"
문이 열리고, 필립이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그가 속삭였다.
"대화의 장소가 마련되었다고 합니다."
"일 잘하는 양반이군."
미소 지은 이안은, 일지를 미련 없이 덮으며 일어섰다.
부하들을 어둠의 제물로 바친 자를 어르고 달랠 시간이었다.
칼과 주먹으로.
#034화
허름한 가구들이 놓인 판잣집.
"읍… 읍…."
한복판에 덩그러니 놓인 의자에, 팔다리가 결박된 브래들리가 버둥거렸다.
재갈을 물고, 먼지 덮인 주머니까지 머리에 뒤집어쓴 채였다.
"장소 선정이 훌륭하시군."
입장과 동시에 그 모습을 확인한 이안이 말했다.
여긴 판자촌에서도 특히 외곽에 위치한 집이었다.
패튼과 육손이의 안내가 아니었다면 찾기도 어려웠을 만큼.
벽면에 기대 있던 데클란이 웃음 지었다.
"애석하게도 그 부분만 내가 한 게 아니야. 여긴 이자가 정부와 밀회를 즐기는 장소거든. 난 그냥 기다리기만 했지."
그가 브래들리에게 다가갔다.
브래들리는 그의 목소리가 들린 순간부터 몸부림을 멈췄다.
데클란이 주머니를 벗겼다.
"반가워. 브래들리 경."
"?…! 이게 무슨 짓이오? 로즈는 어디에 있지?"
재갈을 풀자, 입에 고인 침을 뱉은 브래들리가 버럭 소리쳤다.
데클란이 어깨를 으쓱였다.
"집에서 잘 자고 있겠지."
"이런 함정을 파다니… 대공자께서 알게 되시면 감당할 수 있겠소?"
"그건 내가 걱정할 문제야. 경은 그보다, 자신부터 걱정하는 게 좋겠군. 아쉽게도 오늘 경에게 용무가 있는 건 내가 아니거든."
"그게 무슨…."
브래들리가 그제야 이안과 필립을 돌아보았다.
그들이 데클란의 부하가 아니라는 것을 이제야 눈치챈 모양이었다.
이안이 미소 지었다.
"드디어 만나는군. 브래들리."
"…넌 누구냐? 난 널 처음 보는데."
브래들리가 눈을 부라렸다.
품에서 신분 패를 꺼내면서, 이안이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
"맞아. 나도 널 처음 보지. 하지만 이자는 당신을 잘 안다던데?"
"무슨 헛소리…. ...!"
신분 패를 확인한 브래들리의 눈이 커졌다.
"네놈, 이걸 어디서…?"
"유령이 주던데. 원한을 풀어 달라고 말이야. 자신들을 죽이고 고대수 아래에 파묻은 자를 찾아 달라더군."
"고대수라니, 난 그딴 거 모른-"
이안이 브래들리의 각진 턱을 움켜쥐었다.
이안의 미소가 씻은 듯이 사라졌다.
무기질적인 검은 눈동자.
"경고는 이게 마지막이야. 다시 묻지."
턱을 놓은 이안이 팔걸이에 결박된 브래들리의 손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누구의 명령으로, 이자들을 제물로 바쳤지?"
"고대수? 제물? 자꾸 무슨 개소리를 하는지- 으아악!"
브래들리가 비명을 질렀다.
이안이 그의 왼손 새끼손가락을 쥐더니 그대로 꺾어 버린 것이다.
"누구의 명령이었지?"
"이… 개새끼가…! 내가 누구인지 알고-"
이번엔 반대쪽 새끼손가락이 부러졌다.
비명을 지른 브래들리가 충혈된 눈으로 데클란을 노려보았다.
"천하고 어리석은 줄은 알았지만. 이런 개소리에 넘어가서 미친 짓을 벌이다니- 아아악!"
손가락이 또 하나 부러졌다.
고함과 비명에도 집을 찾아오는 자는 없었다.
원래 인적이 드문 곳이기도 했고.
패튼과 육손이가 패거리를 이끌고 주위를 돌면서,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길목을 막은 덕분이었다.
"손가락으로 끝날 거라 생각 마. 발가락, 귀, 코, 눈… 부러뜨릴 곳은 많고, 부러뜨린다고 잘리지 않는 것도 아니니까. 물론 넌 기절하지도 못할 거고, 전부 생생하게 느끼게 될 거야. 내가 보증하지."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한 이안이 눈물과 콧물, 침까지 흘리는 브래들리를 다시 마주 보았다.
"누구의 명령이었지?"
"…대공자."
이안이 중지를 움켜쥔 순간, 브래들리가 토하듯 내뱉었다.
"대공자께서 명령하셨소."
이안의 손길이 멈췄다.
"메이슨 버차드? 대공자가 왜 그런 명령을?"
"그건 나도 몰… 끄흐윽…!"
왼손 중지가 부러졌다. 이를 악문 채 버둥거린 브래들리가 숨을 토해냈다.
"제기랄…! 길목을 막아야 한댔소. 아겔 란에서 오른델로 향하는 길목을 하나만 막아도, 전략적인 우위에 설 수 있다고!"
"전략적인 우위…?"
연극을 관람하듯 지켜보던 데클란의 미소가 순간 굳어졌다.
그에게 닥치고 있으라는 눈빛을 보낸 이안이 말했다.
"버차드 후작도 이 사실을 알고 있나?"
"당연히… 후작 각하께서 원하신 거였소. 때가 머지않았다고 하셨지."
"때가 멀지 않았다라…."
"내가 들은 건 정말 그게 전부요. 나는 명령을 수행한 것뿐이란 말이오! 오른델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그깟 천한 것들의 희생쯤, 아무것도 아니잖소!"
브래들리가 목에 핏대를 세우며 말했다.
이안의 한쪽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그래… 전쟁이 임박했기도 하고. 대업을 이루려면, 때로는 작은 희생도 필요한 법이지. 특히 그게, 독립과 건국이라면 말이야."
"이해하시는군. 제기랄… 나도 원하지는 않았소. 하지만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었고, 그게 나였을 뿐이란 말이오."
"앞뒤가 딱딱 맞는 대답이군. 마치 들켰을 때를 대비해 미리 준비해 둔 것처럼 말이야."
이안의 목소리가 스산하게 가라앉았다.
"하긴. 너희가 타락자라는 사실을 감추려면, 이 정도는 되어야겠지."
"...!"
브래들리의 눈썹이 순간 꿈틀댔다.
설마 이런 얘기가 튀어나오리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다는 듯이.
물론 그건 아주 잠깐이었다.
자연스럽게 인상을 찌푸린 그가 되물었다.
"타락? 타락이라니, 이게 또 무슨 허무맹랑한… 아악!"
손가락이 여지없이 부러졌다.
"난 너희가 타락자라는 걸 이미 알고 왔어. 어설픈 연기는 그만해라. 너희 영주부터가 타락했는데, 그 장남의 심복인 네가 무고할 리가 있나. 자, 다시 시작하지."
이안이 싸늘하게 미소 지었다.
"그들과 함께하는 조건으로 무엇을 약속받았지? 불사? 힘? 권력?"
브래들리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이안이 정말 전부 알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안이 그의 검지를 움켜쥘 찰나, 브래들리가 문득 내뱉었다.
"어떻게 알았지? 당신 말고도 그 사실을 아는 자가 더 있나?"
"글쎄. 사실 나도 다는 몰랐어."
"뭐…?"
"내가 아는 건, 네가 모시는 대공자가 타락했으리란 사실뿐이었지. 이젠 버차드 후작도 타락자라는 게 확실해졌군."
이안이 어깨를 까딱였다.
"방금 네가 증명해 준 덕분에 말이야."
"이… 이런… 개자식이…!"
브래들리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이안이 그의 입에 다시 재갈을 물렸다.
"협조해 준 보답으로, 이제 단숨에 보내주지. 움직이지 않는 게 좋아. 한 번에 편히 죽고 싶다면."
"으읍…!"
이안이 단죄의 검을 뽑았다.
브래들리의 눈이 터질 것처럼 충혈될 찰나.
"잠깐 멈추지."
데클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대화가 이어질수록 점점 굳어지던 그의 얼굴은, 이제는 어리둥절해 보이기까지 했다.
어느 순간부터 대화의 맥락을 전혀 따라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자를 죽이는 것에는 반대하지 않겠지만, 내게 제대로 설명해 주는 게 순서 같은데."
브래들리의 앞을 막아선 데클란이, 웃음기 없는 눈으로 이안을 마주 보았다.
"고대수, 반란, 독립에 이어 타락자라니. 이게 다 무슨 말이지? 아버지가 왕국에 반란을 꿈꾸고 있으며, 심지어 타락하기까지 하셨단 말이냐?"
"그렇소."
"그게 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아직 귀하도 모든 혐의를 벗은 것은 아니오. 그러니까…."
이안이 문득 말을 멈췄다.
잠시 미간을 좁혔던 그의 입가에, 이윽고 옅은 실소가 스쳤다.
"그래. 약속만 받은 게 아니었군."
"뭐…?"
멍하니 되묻는 데클란의 뒤에서 빠각, 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브래들리를 구속하던 의자가 부서지는 소리였다.
뿌득, 빠득, 빠드드득-
뼈가 부러지는 듯한 섬뜩한 소리가 이어졌다.
데클란의 머리 위로 그림자가 솟아오르기 시작한 가운데, 득달같이 달려든 이안이 그를 끌어당겨 등 뒤로 내던졌다.
"도련님을 지켜라, 필립."
행동과 달리 차분한 목소리.
바닥에 자빠지려는 데클란의 팔을, 필립이 움켜쥐었다.
"제 뒤에 계십시오."
어느새 검을 뽑아 든 그가 굳은 얼굴로 내뱉었다.
대꾸조차 하지 않고 뒤를 돌아본 데클란의 눈이, 이내 찢어질 듯 커졌다.
뿌득, 빠각- 뿌드드득-
기괴한 형상으로 변이하고 있는 브래들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온몸의 근육이 증식하듯 커지면서, 피부가 찢어져 붉은 속살이 드러났다.
브래들리의 각진 얼굴은 종양처럼 일그러지면서, 부풀어 오르는 근육 사이에 파묻히고 있었다.
갑각류의 외피 같은 돌기가 그의 어깨와 옆구리를 뚫고 돋아났다.
쉭-
변이가 한창인 놈의 머리 위로, 이안이 솟구쳤다.
그의 손에 들린 단죄의 검이 날카로운 호선을 그리며 떨어졌다.
콰지직-!
브래들리의 어깨에 돋은 돌기가 이안의 검을 막았다. 검은 줄기를 반 이상 파고들었지만, 아예 절단하지는 못했다.
터질 것처럼 핏발이 돋은 브래들리의 눈이 호선을 그렸다.
"형편없는 일격이군… 흐… 흐흐."
저주파가 섞인 섬뜩한 목소리.
브래들리의 일그러진 얼굴에 희열이 번졌다.
"이것이… 힘인가… 흐… 흐흐흐. 나는 어리석었군… 이토록 강대한 힘을 앞에 두고도 고작… 본래 모습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을 두려워하였다니…."
"난 투명 인간 취급이냐, 근육몬 새끼야?"
검 자루를 쥔 채 돌기에 매달려 있던 이안이 내뱉었다.
브래들리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럴 리가…. 흐흐, 움직여도 상관없다… 편히 보내줄 생각은 없으니까…."
"창의력 없는 유언이군."
자루를 움켜쥔 이안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검신을 타고 불길처럼 푸른 빛이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브래들리가 눈을 치켜떴다.
놈의 눈알이 앞으로 툭 튀어나왔다.
"신성…? 신성력이라고…?"
"그것도 진부하긴 마찬가지야."
내뱉은 이안이, 온 힘을 다해 검을 내리쳤다.
번- 쩍!
신성력이 섬광처럼 폭발하고, 푸른 궤적이 브래들리의 몸을 가르며 떨어졌다.
검을 내리친 이안이 한쪽 무릎을 꿇으며 착지했다.
"끄… 아… 아아악...."
어깨부터 사타구니까지 반으로 갈라진 브래들리가, 늘어지는 비명과 함께 좌우로 쓰러졌다.
흩뿌려진 피와 내장을 뒤집어쓴 채, 이안이 일어섰다.
그는 아직 빛을 머금은 검을 고쳐 쥐며 브래들리를 내려다보았다.
놈은 몸이 반으로 쪼개진 채로도 여전히 살아 있었다.
고통과 공포가 뒤섞인 얼굴.
더 덧붙이는 말은 없었다.
콰직! 콰직! 쩌억!
이안은 놈의 얼굴 근처, 뒤틀리고 비대해진 근육을 마구 내리쳤다.
신성력이 사그라들고, 검의 궤적마다 검붉은 핏물이 튀었다.
마침내 브래들리의 머리가 잘렸다.
난자된 살점 사이의 잘린 머리를 집어 든 이안이 시선을 돌렸다.
넋이 나간 얼굴로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는 데클란.
브래들리의 잘린 머리가 그의 발치로 굴러갔다.
"이제는 믿으시겠소?"
절대 인간의 형상은 아닌 브래들리의 머리를 응시하던 데클란이, 이윽고 다시 이안을 바라보았다.
"너는… 아니… 너희들의 진짜 정체는 뭐지? 정말, 의뢰를 해결하기 위해 온 용병일 뿐인가?"
뭔가 말하려던 이안의 시선이 문득 필립에게로 향했다.
필립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기 때문이다.
그가 결연하게 내뱉었다.
"이건 제 역할입니다만."
"…마음대로 해라."
고개를 설레설레 저은 이안이 얼굴에 묻은 핏물을 닦기 시작했다.
"정식으로 다시 소개하겠습니다."
그사이, 필립이 정중하게 검을 회수하며 입을 열었다.
"늪지대의 용 사냥꾼. 발크령의 해결사. 늑대 인간과 고대수, 목 없는 기사의 참수자이며, 무덤 숲 마경의 정화자."
이안의 인상이 점점 구겨졌다.
하지만 필립은 본 척도 하지 않고, 오히려 희미한 미소까지 입가에 머금은 채 말을 이었다.
"또한, 티르 엔의 사도이며 남부 국경의 집행자이자 아겔 란의 보검이신 메브 리우렐 경의 유일하며 공식적인 대행자. 이안 호프 나리입니다."
"...."
멍하니 입을 벌린 데클란이 대답조차 하지 못하는 가운데.
가슴에 손을 얹은 필립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저는 나리를 모시는 종자, 필립입니다."
#035화
골목을 지키던 패튼과 용병들은, 약속된 시간이 되자 브래들리의 판잣집으로 돌아왔다.
"도련님. 일은 다 끝내셨...."
장내로 들어선 패튼이 굳어졌다.
뒤따라 들어온 육손이와 패거리들도 마찬가지였다.
코를 찌르는 피비린내와 함께, 살풍경한 광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토막 난 거대한 시체. 피와 내장, 살점이 사방이 흥건했다.
누가 이런 광경을 만들어 낸 건지는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장내의 세 사람 중 유독 이안만 피범벅이 되어 있었으니까.
데클란이 그들을 돌아보았다.
"마침 잘 왔어. 여길 좀 수습해 주겠어?"
안색은 다소 창백했지만, 평소와 크게 다를 바 없는 말투.
재빨리 문을 닫은 패튼이 그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이게 다 뭡니까? …브래들리 경은 어디 있죠?"
"이 시체가 브래들리야."
데클란의 대답에, 패튼과 용병들이 어리둥절하게 시체를 돌아보았다.
"이게… 브래들리 경이라고?"
비대해지고 뒤틀린 근육과 징그럽게 생긴 돌기들. 거대한 덩치까지.
인간이라기보단 마수의 시체에 가까워 보였기 때문이다.
"…타락자."
육손이 불쑥 내뱉었다.
그가 떨리는 입술로 덧붙였다.
"브래들리 경이 타락자였던 거야. 내 말이 맞습니까?"
이안의 눈치를 슬쩍 살핀 데클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용병들 사이에서 탄식이 흘렀다.
명확한 실체를 아는 이는 거의 없었지만. 칼밥을 먹고 살다 보면 한 번쯤은 그들에 대한 소문을 듣게 마련이었다.
검은 벽의 광기를 전염시킨다거나.
죽지도 못하게 될 수도 있다든가.
제국의 눈에 띄면 신성기사단이나 감찰단을 파견해, 주위의 모든 것들을 말살한다는 등의, 하나같이 무시무시한 소문들.
그런데 오른델에. 그것도 지휘관 중 하나가 타락자라니.
"그럼 난 이만 돌아가겠소."
이안이 툭 내뱉은 건 그때였다.
용병들이 왔으니, 더 남아 있을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겸사겸사 데클란의 심문까지 끝마친 참이었으니까.
무엇보다, 온몸이 너무 찝찝했다.
"잠깐만."
데클란이 황급히 그를 잡았다.
"시간을 조금 더 내주지 않겠어?"
"아직도 궁금한 게 남았소?"
"이제 나를 의심하진 않는댔지."
"당장은 그렇소."
"그럼 알려 주지 않겠나? 이제부터 어쩔 건지."
"놈이 한 말을 들으셨잖소. 남은 타락자가 있으니, 처리해야지."
술렁이던 용병들이 얼어붙었다.
지하 수로의 마물에 이어 타락자까지 죽인 자가 내뱉은 말이 거짓일 리 없었다.
"아버지와 형님을, 모두?"
"...?!"
이어진 데클란의 말에는, 다들 숨을 쉬는 것조차 잊었다.
저마다의 본능이 경고하고 있었다.
들으면 안 될 얘기를 듣고 있다고.
누군가의 시선이 문으로 향했다.
어느새 필립이 그 앞을 막고 서 있었다.
불신 가득한 눈빛을 한 채로.
"그렇소만."
"그렇다면… 며칠만 말미를 주지 않겠어?"
그러거나 말거나, 이안과 데클란은 태연하게 대화를 이어나갔다.
"말미?"
"말리려는 게 아니야. 다만, 하루아침에 영주와 후계자가 다 죽어 버리면, 영지에 엄청난 혼란이 일어날 거란 얘기지."
"그건 내가 신경 쓸 바 아니오만."
"자네의 일이 조금 편해질 수도 있다고 한다면, 신경을 써 주겠나?"
"흐음…."
침음한 이안이 턱을 까딱였다.
"일단, 들어는 보겠소."
"내성에 잠입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닐 거야. 물론 너희들의 실력이면 충분히 해낼 수 있겠지만. 옳은 일을 하는데 도둑이나 암살자처럼 행동할 필요는 없지 않겠어? 오명을 뒤집어쓸 필요도 없고."
"그래서?"
"정문으로 들어가자. 당당하게."
"…반란이라도 일으키겠단 거요?"
"반란이라니."
데클란이 미소 지었다.
"타락자를 심판하는 걸 어떻게 반란이라고 하겠어? 정의를 바로 세우는 일이지."
"귀하가 영주 자리에 앉으시고?"
"그게 순리라면, 해야겠지. 나는 어둠에 손을 뻗을 생각도, 왕국에 반기를 들 생각도 없어. 왕국의 미래를 위해서도 나쁘지 않은 선택일 것 같은데."
뭔가 대단히 착각하고 있군.
피식한 이안이 말했다.
"왕국의 미래에는 관심 없소. 중요한 건, 귀하를 도와주면 내가 무엇을 얻게 되느냐지. 내가 저들을 죽이려는 것도, 그게 의뢰이기 때문일 뿐이오."
"아, 그래. 실리적인 걸 제시하란 거군. 내가 내리는 직위 따위엔 관심도 없을 테고…."
잠시 고민한 데클란이 말했다.
"무기는 이미 훌륭하니, 어울리는 방어구를 주는 건 어떤가? 성을 뒤지면 분명 좋은 게 있을 거야. 물론 돈도 주겠네. 넉넉하진 못해도 합당한 수준으로."
이안이 잠시 눈을 깜빡였다.
퀘스트 창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서자의 복수.
이안은 수락을 선택하면서도, 내색하지 않고 내뱉었다.
"네가 볼 땐 어떠냐, 필립? 이게 이치에 맞는 제안인가?"
필립이 고개를 끄덕였다.
"영지에는 반드시 영주가 있어야 하는 법이죠. 버차드 후작과 그의 적자가 타락자였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만 있다면, 국왕 폐하께서도 정당성을 인정하실 겁니다."
"그렇다는데. 후작과 대공자의 목까지 넘겨주시겠소?"
"적어도 둘 중 하나는 내 손으로 죽이게 해 준다면. 사적으로나 공적으로나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거든."
혈육을 죽이리란 말을 하면서도, 데클란에겐 아무런 동요가 없었다.
오히려 바라 마지않던 일을 앞둔 것처럼 눈을 빛냈다.
물론, 이안은 그 속사정 따위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계약은 성사되었소. 단, 완벽하게 준비하셔야 할 거요. 상황이 지저분하게 돌아가면, 나는 언제라도 가장 확실하고 손쉬운 방법으로 돌아갈 거니까."
"그럴 일은 없을 거야. 그나저나, 이제 여기 이 친구는 나를 돕겠다는데…."
데클란의 시선이, 숨소리도 내지 못하고 있는 용병들에게로 돌아갔다.
"너희들도 나와 함께해야지? 오른델의 타락한 영주와 가신들을 심판하고, 그 공로로 한 자리씩 꿰찰 기회인데 말이야."
그가 부드럽게 말하며 미소 지었다.
하지만 용병들을 응시하는 눈만큼은 묘한 한기를 머금은 채였다.
몇몇이 마른침을 삼키는 가운데.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전 도련님을 모시기로 한 순간부터, 그런 미래를 항상 꿈꿨습니다."
"거, 재미있겠네. 손가락이 여섯 개밖에 없는 귀족이 될 기회잖아."
패튼과 육손이가 차례로 입을 열었다.
껄껄 웃은 패튼이 패거리들을 돌아보았다.
"뭘 쫄아 있어? 혼자서 타락자까지 쳐죽인 실력자가 함께 싸우겠다는데. 출세할 길을 병신같이 걷어찰 거냐?"
"그, 그럴 리가! 좋아, 해 보자고."
"까짓거, 그래! 해 봅시다!"
용병들이 그제야 함성을 지르며 호응했다.
어차피 그들 모두 알고 있었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도 합류하지 않는다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죽게 되리란 것을.
고개를 끄덕인 데클란이 이안을 바라보았다.
"좋아. 이안, 푹 쉬게. 준비는 나와 이 친구들이 할 거야. 자네는 자네가 하려는 일만 잘해 주면 돼. 계약 내용도, 잊지 말고."
고개를 끄덕인 이안이 덧붙였다.
"만전을 기하시오. 귀하에게 두 번의 기회는 없을 테니까."
데클란의 미소가 짙어졌다.
"걱정 마. 난 평생, 두 번째 기회 같은 건 가져 본 적 없었으니까."
***
이틀이 지났다.
변화는 조용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3할에 가까운 용병들이 소리소문없이 도시 밖으로 사라졌고, 판자촌 주민들의 얼굴에는 묘한 긴장감이 오갔다.
물론 저들과 함께 생활하지 않는다면 눈치채기 힘든 변화였다.
용병들은 여전히 많았고.
표면적으로는 모든 게 일상적이었으니까.
이안의 일과도 그랬다.
낮에는 소소한 의뢰들을 해결하고, 밤에는 식사와 술을 마시며 시간을 보냈다.
다른 이들과 다른 부분은, 그의 여유는 연기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그는 정말 서두르거나 긴장할 이유가 없었다.
물론, 종자의 입장은 또 달랐다.
"도련님은 오늘도 코빼기도 안 보이시는군요."
필립이 불만스럽게 읊조렸다.
"무소식이 희소식이지."
심드렁하게 대꾸한 이안이 소시지를 입에 물었다.
놀랍게도 이 맛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서자이니 명분과 정통성을 인정받아야 한다는 건 알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정면 돌파는 무리입니다. 나리가 계시니 타락자는 어떻게든 처리할 수 있다 해도… 영주군과 용병, 양쪽 다 타격이 클 겁니다."
"뭔가 생각이 있겠지. 도련님도 그걸 모르진 않을 테니까."
"짐작 가는 바라도 있으십니까?"
"짐작해서 뭐 하게? 때 되면 알게 될 텐데. 그리고 우리한테 중요한 부분도 아니야."
이안이 맥주잔을 들었다.
"우린 우리 일을 끝마치기만 하면 돼. 도련님의 계획이 뭐건, 원래 하려던 것보단 쉽고 편하겠지."
"…그러고 보니, 여쭤본 적이 없었군요. 원래 나리의 계획은 뭐였습니까?"
"하나는 외성 성벽을 기어 올라가서 내성까지 잠입하는 거였지. 경비병들과 다른 거주민들의 눈을 잘 피해서."
"…또 하나는요?"
"우리가 전에 가 본 길이 있잖아?"
멈칫한 필립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설마, 지하 수로요?"
"그래. 내성 안쪽까지 이어져 있을 테니까. 냄새는… 어쩔 수 없었겠지만."
질색하는 표정을 지은 필립이, 비장하게 덧붙였다.
"도련님의 계획을 믿어야겠군요."
"그러는 게 좋을 거다. 수틀리면 당장 오늘 밤이라도 내 계획대로 움직일 거니까."
"루 솔라시여, 부디…."
필립이 읊조리는 가운데.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군."
인파를 뚫고, 데클란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안이 고개를 까딱였다.
빈자리에 앉은 데클란이 미소 지었다.
"설마 그사이에, 우리의 계약이 없던 일이 된 건 아니겠지?"
"아직은. 귀하가 어떤 소식을 들고 왔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
"잘 됐군. 모든 준비가 끝났거든."
이안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스쳤다.
"빠르시군. 미리부터 준비해 오셨던 것처럼."
데클란이 어깨를 으쓱였다.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 두기만 했었지. 공교롭게도 그게 이번에 도움이 된 거고."
"그래서, 언제 시작하실 거요?"
"내일."
"내일 밤이요? 자정입니까?"
눈을 빛낸 필립이 물었다.
데클란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밤이 아니라, 낮에 할 거다. 내일 정오. 종이 칠 때가 신호야."
"엥…? 밤이 아니라, 낮이라고요?"
"그래. 떳떳한 일이니, 루 솔라께서 지켜보시는 아래에서 해야지."
"허어…."
필립의 탄식이 길어졌다.
대낮의 반란이라니. 쉽게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피식한 이안이 물었다.
"우리 역할은 무엇이오?"
"자네들은 그냥 내 옆에 잘 붙어 있어 주기만 하면 돼. 자네들이 해야 하는 일을 하기 전까진."
"정말 그거면 되겠소?"
"그래. 만약 내 생각만큼 일이 잘 풀리지 않는다고 해도…."
결전의 날을 앞둔 자라고는 믿기 힘들 만큼 생기 넘치는 눈빛으로, 데클란이 미소 지었다.
"우리는 결국, 정문을 통해서 내성에 들어가게 될 거야."
***
데엥-
정오를 알리는 종이 울렸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대기하던 이안은, 필립과 시선을 교환하고는 곧바로 방을 나섰다.
그가 식당으로 나오자 무장한 용병들이 벌떡 일어섰다.
흥분과 두려움을 억누른, 번들거리는 눈빛들.
이안은 그들의 목례나 눈인사를 본 척도 하지 않고 지나쳤다.
하지만 용병들은 자연스럽게 그의 뒤를 따랐다.
재빨리 달려간 필립이 여관 문을 열었다.
뭐 이렇게들 비장해?
이안은 내심 코웃음 치며 문을 나섰다.
"오. 딱 맞춰 나왔군."
데클란의 목소리가 들린 건 그 직후였다.
그가 패튼을 비롯한 심복들을 이끌고 다가오고 있었다.
평소와 달리 사슬 갑옷은 물론, 원형 방패와 검까지 착용한 채였다.
고개를 까딱인 이안은 무리 맨 뒤편, 육손이가 몰고 있는 짐 마차를 돌아보며 데클란의 곁에 섰다.
"…이게 전부입니까?"
필립이 나지막이 물었다.
데클란을 따라온 자들과 여관의 용병들은, 다 합쳐도 서른 명 남짓에 불과했다.
평소보다도 더 적은 숫자.
데클란이 고개도 돌리지 않고 대답했다.
"그럴 리가. 곧 지원군들이 더 합류할 거야. 아주 많이."
판자촌의 골목을 지난 그가 외성의 정문으로 향하는 대로로 나섰다.
"...!"
필립의 눈이 커진 건 그때였다.
대로로 이어지는 거의 모든 골목에서 인파가 몰려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길잡이 역할을 하는 용병들을 필두로 한, 판자촌의 주민들이었다.
"이 사람들이… 지원군입니까?"
데클란이 미소 지었다.
"그래. 대단하지?"
"고생 좀 하셨겠소. 이들을 합류시키기 쉽지 않으셨을 텐데."
이안이 말했다.
현대인인 그는 신분 따위에 전혀 구애받지 않았지만.
이 세계의 인간들은 아니었다.
신분의 고하는 당연했고. 영주쯤 되는 귀족들은 신의 축복과 가호를 받는다고 여겼으니까.
당연히 그들에게 반하는 건 신성 모독이나 다름없었다.
주동자가 데클란이 아니었다면, 이건 성립조차 되지 않았으리라.
"생각만큼 어렵진 않았어. 대부분 강제로 이곳에 이주했으니까. 그 과정에서 친우나 가족을 잃었고. 난 계기만 마련해 줬을 뿐이야."
태연하게 말한 데클란이 계속 걸음을 옮겼다.
수많은 행렬이 그를 따라 오른델 성으로 향했다.
성벽이 가까워지면서, 본래 오른델의 주민이었던 자들도 합류하기 시작했다.
적지 않은 숫자였다.
성벽 안쪽에 사는 이들이나, 문을 걸어 잠그고 숨은 자들도 물론 있었지만.
어쨌거나 오른델의 백성 과반수가 동조하고 있는 셈이었다.
"브래들리가 한 짓을 알리셨군."
"저들도 진실을 알 권리가 있지. 내 형제와 친우에게 생긴 일이라면 특히."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그도 데클란의 계획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정말 모든 걸 거셨군."
"그럴 만한 기회니까."
"그건 곧, 저들이 이번만 넘기면 된다는 뜻이기도 하오."
이만한 인원이 두 번 집결하는 것은 불가능할 테니까.
그전에 피바람이 먼저 불리라.
"그럴 일은 없지. 자네가 있으니까. 내 계획이 망해도, 자네는 자네가 할 일을 할 것 아닌가?"
"그건 그렇소만."
"그래서 자네의 성공이 내 성공이 되도록 준비했지. 그러니까 나는, 자네한테 완벽한 판을 깔아 주기만 하면 돼."
"호오."
이안의 입가에 미소가 스쳤다.
그 부분에 방점을 찍다니.
훌륭한 발상의 전환이었다.
"어차피 이건, 자네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기도 하니까."
그를 돌아본 데클란이 미소 짓는 가운데.
"저, 정지! 멈추시오!"
성벽 위에서 외침이 울려 퍼졌다.
#036화
황망한 얼굴로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는 자는, 네눈박이 악어의 머리를 회수해 갔던 경비대장이었다.
"도련님! 대체 무슨 짓을 벌이신 겁니까?"
"도란 경, 가서 형님을 모셔 오시게. 가능하다면, 아버지도."
멈춰선 데클란이 말했다.
평소처럼 태연한 말투.
도란의 얼굴에 당황이 짙어졌다.
"이, 이런 일을 벌이신 이유는 알아야 할 것 아닙니까! 지금 이건, 어떻게 봐도 영주님께 반기를 든 것으로밖엔 보이지 않습니다!"
그는 오른델의 지휘관 중에선 그나마 데클란과 가까운 사이였다.
가장 말단이기도 하고, 판자촌을 오가며 마주칠 일이 많았던 덕분이었다.
그의 목소리에 담긴 염려를 느낀 데클란이 미소 지었다.
"그 반대일세. 오른델의 백성들은 물론 왕국까지 배반한 건 오히려 아버님과 형님이시니까. 심지어 신들까지 배반하고 타락하셨지."
"타, 타락…?!"
도란의 안색이 파리해졌다.
그가 감당할 수 있는 주제가 아니었다.
"기, 기다리십시오! 이 이상의 접근은 불허하겠습니다!"
소리친 그가 황급히 몸을 돌렸다.
팔짱을 낀 데클란이 성벽 위의 병사들을 차분히 바라보았다.
오히려 초조해하는 건 경비병들이었다.
성 앞에 모인 모든 이들이 말없이 그들을 올려다보고 있었으니까.
심지어 대부분은 아는 얼굴이었다.
만약 이게 반란이라면, 그들에게 무기를 겨눠야 한다는 뜻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성벽 위로 누군가가 절뚝이며 올라왔다.
기다란 흑단목 지팡이를 짚은, 부드러운 인상의 중년인.
버차드 후작이었다.
'저 새끼, 게임에선 아들을 잃은 아버지 연기를 아주 잘 했었지.'
속지 말고 죽였어야 했는데.
이안의 눈빛이 가라앉는 가운데.
"오셨습니까, 아버지."
데클란이 가볍게 몸을 숙였다.
좌중을 돌아본 후작이 말했다.
"어째서 이런 일을 벌인 것이냐, 아들아?"
"아버지와 형님께서 저지른 부정과 타락을 밝히기 위해서지요."
"찬란한 루 솔라께서 지켜보고 계시거늘. 어째서 그토록 불경한 말을 입에 담는단 말이냐."
"이미 다 알고 왔습니다. 아버지께서 백성들을 이주시키신 것이 왕국에 반기를 들기 위해서라는 것도…."
데클란이 말을 끌었다.
그사이, 판자촌 주민들의 눈에 원망과 분노가 번졌다.
"그 과정에서, 영지의 병사들을 마물의 제물로 바치셨다는 것도요. 아버님과 형님이 희생시킨 이들의 명단이, 제 손에 있습니다."
품에서 두루마리를 꺼낸 데클란이, 거기 적힌 이름을 하나씩 외쳤다.
오른델 주민들의 얼굴에 슬픔과 분노가 서리고, 성벽 위의 병사들 사이에서도 동요가 일었다.
그들도 아는 이름들이었으니까.
"무슨 근거로 그런 허무맹랑한 주장을 하는 거지?"
뒤이어 외친 건, 버차드 후작이 아니었다.
장남인 메이슨 버차드가 성벽 위로 올라온 것이다.
갑옷을 걸쳐 입은 그의 뒤로 쇠뇌를 든 병사들이 도열했다.
"아버님께서는 네 천한 핏줄을 아시면서도 자식으로 거두셨거늘. 은혜를 누명으로 갚다니. 그깟 명단으로 아버님을 반역자이자 타락자로 몰고 간단 말이냐?"
살기 가득한 목소리.
서늘한 푸른 눈이 좌중을 훑었다.
공기가 얼어붙는 가운데, 데클란이 태연하게 미소 지었다.
"저도 반갑습니다, 형님. 물론 물증도 있지요. 형님의 심복인 브래들리 경이, 모든 것을 실토했으니까요."
"뭐라고…?"
"심지어 브래들리 경은 자신의 타락한 본모습까지 제 앞에서 드러냈습니다. 보여 드릴까요?"
데클란이 손가락을 튕겼다.
인파가 갈라지고, 육손이가 짐 마차를 몰고 앞으로 나왔다.
마차가 성벽 앞에 멈췄다.
뒤따라간 용병 몇이 짐칸에 실린 커다란 관을 들었다.
관뚜껑이 열리고, 안에 든 것이 땅에 쏟아졌다.
"윽…!"
내용물을 본 백성과 병사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토막 난 시체와 살점들이 흩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역겨운 썩은 내까지.
비위가 약한 자들은 고개를 돌려 토하는 가운데, 데클란이 외쳤다.
"똑똑히 보시오. 이 괴물이 바로 브래들리 경이니!"
그제야 시선을 피하던 이들조차 다시 시체를 살폈다.
인간보다는 마물에 가까운, 끔찍하게 뒤틀린 형체.
"브래들리 경이 모든 것을 실토했소. 아버지와 형님이 타락하였으며, 자신 역시 그리되었다고! 자신이 저지른 모든 부정 역시, 아버지와 형님의 명령으로 이뤄졌다고!"
데클란이 쩌렁쩌렁하게 외쳤다.
메이슨의 얼굴에 웃음이 번진 것은 그 직후였다.
"치밀하게 준비했구나! 그래, 누명을 씌우려면 그 정돈 해야겠지! 하지만 그게 브래들리 경이라는 사실은 어떻게 증명할 것이냐? 내 눈엔 마물의 시체로밖엔 보이지 않는데."
그가 데클란을 노려보았다.
"너야말로 무고한 브래들리 경을 죽이고, 그에게도 누명을 씌운 것이 아니냐? 나와 아버님께 지금 그리하고 있는 것처럼!"
"증인이 있습니다."
"내가 바로 그 증인이오!"
"나도! 두 눈으로 똑똑히 봤소!"
패튼과 육손이를 비롯한 용병들이 손을 들었다.
메이슨이 코웃음 쳤다.
"다 네놈의 용병들이군. 저것들의 증언이 진실이라고 할 수 있을까?"
용병들의 인상이 구겨지는 가운데.
"그럼, 제 오라비는요?"
백성들 사이에서 걸어 나온 소녀가 문득 외쳤다.
"아겔 란에서 잘살고 있다던 오라버니의 신분패가, 왜 숲에 버려져 있었던 건가요…?"
이안이 회수한 신분패.
데이브의 여동생이었다.
"제 형님은 잘 있는 겁니까?"
"제 친구는요?! 연락이 없습니다!"
그것을 시작으로 곳곳에서 외침이 터져 나왔다.
메이슨의 얼굴이 붉게 물드는 가운데.
"너희들의 마음은 잘 알았다. 어째서 이런 의심을 품게 되었는지도."
후작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장남과 달리 너그러운 말투.
"정말 그들이 내가 알지 못하는 사건에 의해 희생당한 것이라면, 조사단을 꾸려 파견하겠다. 내 의도에 대한 의혹도, 폐하께 직접 수사를 요청하도록 하지. 우리가 타락했다는 말도 안 되는 주장 역시… 제국 교단의 감찰과 판결을 요청하겠다."
차근하게 말을 이은 그가 군중들을 한차례 돌아보고는 덧붙였다.
"이만하면 노기를 가라앉힐 수 있겠느냐?"
"...."
"...."
당장이라도 성벽으로 달려갈 것 같던 백성들이 움찔했다.
정말 그들의 요청을 전부 들어줄 줄은 몰랐으니까.
"그, 그렇게 해 주신다면야…."
누군가가 중얼댔다.
'역시. 정치인들의 구라는 세상을 가리지 않는군.'
이안이 심드렁하게 코웃음 쳤다.
아까 그가 우려했던 상황이 그대로 펼쳐지고 있었으니까.
"이제 만족하겠지? 그렇다면 돌아가라! 계속 이곳에 남는 놈들은, 이제부터 반역자로 간주할 테니!"
소리친 메이슨이 손을 들었다.
병사들이 쇠뇌를 겨눴다.
백성들의 얼굴에 공포가 번졌다.
완전히 분위기가 넘어간 상황.
하지만 데클란의 얼굴에는, 반대로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그가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방금, 국왕 폐하의 수사와 교단의 판결을 받겠다고 하셨습니까?"
"그래. 그리 말했다, 아들아."
후작이 마주 웃으며 말했다.
데클란의 미소가 짙어졌다.
"잘 되었군요. 마침 제가, 그에 걸맞은 인물을 알고 있거든요."
"걸맞은 인물…?"
후각의 미간이 좁아졌다.
데클란이 필립을 바라보았다.
"전에 했던 그거, 다시 해 줄 수 있겠나? 이왕이면, 뒷부분만."
"그거…? 아, 그거 말씀이시군요."
필립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그거라면, 설마.
이안의 미간이 좁아지는 가운데, 데클란이 그에게 한쪽 눈을 찡긋댔다.
"거의 다 왔어. 조금만 더 어울려 주게."
"...."
입맛을 다신 이안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용병…?"
"지하 수로의 괴물을 처치한, 그자 같은데."
그를 알아본 병사들이 수군댔다.
이안의 명성은 이미 오른델 전체에 퍼져 있었다.
"걸맞은 인물이라더니. 또다시 용병이군."
메이슨이 조소를 머금을 찰나.
"정식으로 소개하겠습니다."
이안의 옆에 선 필립이 낭랑한 목소리로 외쳤다.
"티르 엔의 사도이며 남부 국경의 집행자, 아겔 란의 보검이신 메브 리우렐 경의 유일하며 공식적인 대행자이자, 엄정한 여신의 총애를 받는 심판자! 이안 호프 경입니다!"
…뒤에 뭐가 더 붙었는데?
이안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필립이 깍듯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저는 경을 모시는 종자, 필립입니다."
"...."
메이슨과 후작의 입이 순간 벌어졌다.
다른 병사들도 마찬가지.
필립에게 고개를 끄덕인 데클란이 덧붙였다.
"또한, 호프 경은 브래들리의 타락을 직접 목격했고, 심판한 당사자이기도 합니다. 이만하면 자격은 차고 넘치는 것 같은데요?"
"…말도 안 되는."
이윽고 내뱉은 버차드 후작의 얼굴이 천천히 일그러졌다.
지금까지의 너그러운 표정이 거짓말처럼.
"공식적인 대행자? 티르 엔의 심판자? 그자가 성기사라도 된단 말이냐?"
"글쎄요. 하지만 확실한 건, 두 분에 대한 판결은 엄정한 여신께서 직접 내리시리란 겁니다."
데클란이 이안을 바라보았다.
이제 판이 다 깔렸다는 듯이.
희미하게 미소 지은 이안이, 보란 듯 단죄의 검을 뽑아 들었다.
검신을 타고 푸른 신성력이 불길처럼 번졌다.
"오… 오오...."
"성기사. 정말 성기사시다…."
빛의 검을 움켜쥔 듯한 형상에, 병사와 백성들이 탄식을 흘렸다.
몇몇은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리기까지 했다.
후작과 메이슨의 얼굴에도 경악이 번져나가는 가운데.
"...."
이안은 설핏 미간을 좁혔다.
날을 타고 솟구치는 신성이 평소보다 많았기 때문이다.
검신 내부에서 싸늘한 분노가 전해졌다.
…아, 그래. 이걸로도 엿볼 수 있단 거지.
어깨를 으쓱인 이안이 버차드 후작을 올려다보았다.
후작의 눈썹이 꿈틀댄 직후, 이안이 걸음을 옮겼다.
걸음은 이내 질주로 바뀌었다.
"쏴, 쏴라! 왜 구경만 하는 것이냐?"
버차드 후작이 뒤늦게 소리쳤다.
하지만 쇠뇌를 든 병사들조차 망설이고 있었다.
"하, 하지만, 신의 사도입니다…!"
누군가 탄식하듯 말했다.
메이슨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너희가 누굴 섬기는지 잊지 마라! 당장 저자를 저지해!"
검을 뽑아든 그가 덧붙였다.
"명령을 따르지 않는 놈들은 이 자리에서 목을 베겠다!"
그제야 병사들이 이안을 조준했다.
떨리는 손길들.
"쏴라!"
피피피핏-!
쇠뇌가 일제히 발사됐다.
대부분 조준이 형편없었지만, 일부는 정확하게 이안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슈확-!
하지만 이안의 근처까지 날아간 볼트들은 보이지 않는 바람에 휘말려 사방으로 흩어졌다.
휘몰아치는 방벽.
어느새 전신에 바람을 두른 이안이, 쏜살같이 성벽에 닿았다.
타타탓-!
성벽을 연달아 박찬 이안이 새처럼 솟구쳤다.
바람이 그의 몸을 힘껏 떠밀었다.
허공에서 잠시 멈춘 이안이, 자신을 올려다보는 메이슨과 눈을 마주쳤다.
"여신께서 내린 판결은…."
신성력이 가득 맺힌 검을 머리 위로 치켜들며, 그가 덧붙였다.
"사형이다."
눈부신 섬광이 메이슨을 향해 떨어졌다.
허공에 새겨진 푸른 궤적이 메이슨이 치켜든 검을 쪼개고, 그 너머의 팔뚝을 꿰뚫었다.
메이슨의 오른팔이 피를 흩뿌리며 잘려 나갔다.
"아아악-!"
메이슨이 비명을 지르는 가운데.
이안의 시선은 저만치에 선 후작에게로 향해 있었다.
'저자가 미쳐 날뛰면 좋겠는데. 할 수 있겠냐?'
손가락에 따끔한 감각이 이어졌다.
신성력에 질색하던 늪지의 원한.
놈의 분노가 이안의 피를 매개로, 후작을 향해 뻗어나갔다.
물론 겉으로 드러난 현상은 실제보다 훨씬 초라했다.
망령화되어 후작에게 날아간 놈이, 다시 실뱀의 형태로 돌아와 목덜미를 깨문 것에 불과했으니까.
후작은 이안의 난입에 놀라, 따끔함조차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이 개자식이-!"
이안이 고개를 뒤로 젖혔다.
후웅, 메이슨이 휘두른 팔이 그의 볼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대로 뒷걸음질 친 메이슨이, 잘린 팔뚝을 움켜쥐었다.
"뭣들 하느냐! 다들 이자를 막아!"
"...."
이안은 주위의 병사들을 돌아보았다. 두려움 가득한 눈빛들.
신성력 맺힌 검을 치켜든 그가 내뱉었다.
"오늘 흘릴 피는 타락자들의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 같은데."
"…마, 맞습니다."
챙그랑, 가장 가까이에 있던 병사가 창을 떨어뜨렸다.
다른 병사들도 손에 든 쇠뇌와 창을 떨어뜨리는 가운데.
"도란 경! 병사들을 물리시오!"
데클란의 외침이 이어졌다.
화들짝 정신을 차린 경비대장이 소리쳤다.
"경비병들은 모두 물러나라! 정규군 모두 물러나시오! 이건 우리가 낄 싸움이 아니니!"
병사들이 기다렸다는 듯 물러나기 시작했다.
메이슨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 버러지만도 못한 것들…! 내성으로 물러 나야 할 것 같습니다, 아버님!"
주춤주춤 물러나며 외친 그가 고개를 돌렸다.
"아버님…?"
후작의 상태를 확인한 그의 눈이, 이내 찢어질 듯 커졌다.
#037화
후작의 상태가 얼핏 보기에도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목과 얼굴을 타고 새카만 핏줄이 거미줄처럼 돋아나고 있었고.
핏발 선 눈으로 주위를 쉬지 않고 두리번대고 있었으니까.
지팡이를 쥔 손이 덜덜 떨렸다.
늪지의 저주가 효과를 제대로 발휘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메이슨이 물었다.
"아버님, 왜, 왜 그러십니까?"
착란 상태인 후작이 소리쳤다.
"이, 이게 보이지 않는 것이냐? 병사들에게서 빛나는 여신의 증표가. 창과 활에 맺힌 신성이…?"
"그게 대체 뭔…."
되묻던 메이슨이 숨을 멈췄다.
이안을 본 후작의 눈동자에 자주색 마력이 번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야, 이제야 모든 게 명확하군! 네놈, 단순한 성기사가 아니구나! 티르 엔, 그 망할 여신의 화신이었어!"
고오오-
전신에 마력을 머금은 후작이 일갈했다.
"웃기지 마라…! 나는 네년의 심판 따윈 받지 않을 것이니!"
그를 바라보던 백성들과 병사들의 얼굴에 경악이 번졌다.
"여, 영주님이 정말 타락하셨다!"
"도련님의 말씀이 전부 사실이었어…!"
이안의 입가에도 비로소 후련한 미소가 번졌다.
이 오글거리는 성기사 흉내를 계속할 필요가 없어졌으니까.
"어째서… 제기랄…!"
탄식한 메이슨이 뒷걸음질 칠 찰나.
이안이 후작을 향해 몸을 날렸다.
아직 옅은 신성력을 머금은 검이 후작의 목을 노리고 뻗어나갔다.
후작이 짚고 있던 지팡이를 쿵, 내리친 건 그때였다.
푸확-!
그를 중심으로 터져 나온 마력의 파장이 이안을 튕겨냈다.
이안이 성벽 끄트머리를 간신히 부여잡고 매달리는 사이.
"어억…?! 윽, 으윽, 그그극…!"
"컥, 크억…!"
동심원을 그리며 번진 파장에 휩쓸린 병사들의 몸이, 기괴하게 꺾이기 시작했다.
섬뜩한 뼛소리. 전신에 핏발이 돋고 눈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성벽 안쪽의 병사들에게도 비슷한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운 좋게 마력 잠식을 피해간 병사들이 눈을 끔뻑인 것도 잠시.
"애들 이러는… 으헉?!"
관절이 뒤틀린 병사들이 그들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콰득! 콰직-!
"아악-! 미친! 놔! 놓으라고!"
"으아악! 제기랄! 뒈져!"
성벽 위에 아수라장이 펼쳐졌다.
"저렇게까지 본색을 드러내실 줄은 몰랐는데…."
그 광경을 바라보며 중얼댄 데클란이, 이윽고 검을 뽑아 들었다.
"백성들은 뒤로 물러나라! 패튼! 다 끌고 따라와!"
그가 용병들을 이끌고 성문을 향해 달리기 시작한 사이.
"마법은 아닌 것 같은데. 괴상한 재주를 숨기고 있었네."
중얼대며 성벽 위로 올라선 이안이 몸을 날렸다.
눈 전체가 자주색으로 물든 후작이 지팡이를 치켜들었다.
콰직-!
이안의 검이 손쉽게 막혔다.
후작의 손은, 어느새 피부가 벗겨지면서 마물의 그것처럼 변이되고 있었다.
검은 핏발이 돋은 입술이 말려 올라갔다.
"공허의 참된 신께서 하사한 태초의 힘이다…. 너희 같은 가짜 신들과는 다른-"
펑-
이안의 검에서 소리 없는 폭발이 일어난 건 그때였다.
진공 폭발.
아주 작은 범위에 일어난 폭발이었지만, 후작의 지팡이와 지팡이를 쥔 손을 피 보라만 남긴 채 날려 버리기엔 충분했다.
후작의 눈이 찢어질 듯 커진 순간, 드러난 공간으로 이안의 검이 날아들었다.
콰직-!
후작의 옆얼굴에 틀어박힌 검날이 광대를 지나 코에서 멈췄다.
"...!"
치켜뜬 후작의 눈이 경련했다.
그를 마주 보는 이안의 눈동자에 잿빛 마력이 휘몰아쳤다.
"주절댈 시간에 변이나 했어야지."
서걱-
날을 타고 번진 바람 칼날이, 후작의 얼굴을 반대쪽 광대까지 깨끗하게 갈라 버렸다.
잘려 나간 후작의 머리가 스르륵, 미끄러지듯 떨어졌다.
잘린 단면에서 피가 울컥울컥 솟아오르는 가운데.
"마… 법…?"
코 아래만 남은 후작의 몸이, 탄식 같은 단말마와 함께 허물어졌다.
이안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기계적으로 달려들어, 쓰러진 후작의 목을 기어코 잘라냈다.
후작의 몸이 축 늘어졌다.
"후우…."
비로소 숨을 내쉰 이안이 검을 늘어뜨렸다.
…깨끗하게 잘라내고 싶었는데.
혀를 찬 그가 두 개로 나뉜 후작의 머리를 각각 주워드는 사이.
"나리. 벌써 끝내신 겁니까?"
헐떡이며 달려온 필립이 그의 곁에 멈춰 섰다.
교전이 있었던지 벌써 얼굴에 피가 튄 채였다.
"아직. 잃어버리지 마라. 후작의 머리니까."
이안이 후작의 머리를 넣은 천 주머니를 내밀었다.
"가서 병사들을 도와."
주머니를 허리에 단단히 묶은 필립이 덧붙이는 말 없이 달려 나갔다.
이제야 좀 쓸 만해졌네.
피식한 이안은, 저만치에서 달려오는 데클란을 돌아보았다.
"병사들을 구하는 것에 집중해! 도란 경! 그대가 병사들을 지휘하시오! 다른 지휘관은 아무도 믿을 수 없으니!"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대며 다가온 데클란이 그를 마주 보았다.
"이안, 괜찮나?"
"보다시피. 후작은 죽었소."
"아버님께서 이러실 줄은 몰랐는데. 설마, 자네가 뭔가 했나?"
"글쎄. 영업 비밀이오."
"그래. 그게 뭐건, 덕분에 일이 쉬워졌어."
데클란이 성벽을 훑어보았다.
용병들이 합류하면서, 난전의 무게추가 그들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형님은 어디 계시지?"
"후작이 본모습을 드러낸 순간 도망쳤소. 내성으로 달려가던데."
"아, 그래…? 내성엔 아버님과 형님의 수족들이 아직도 많을 텐데. 귀찮게 됐군."
데클란의 미간이 좁아지는 가운데.
검을 고쳐 쥔 이안이 내뱉었다.
"성에 도망칠 만한 뒷문이 있소?"
"내성 옆에는 마구간으로 이어지는 쪽문이 있고, 마구간에도 바로 말을 몰고 나갈 수 있는 뒷문이 있지. …설마, 형님이 성을 포기하고 도망칠 거라고 보는 거야?"
"남아 있어 봐야 죽을 걸 알 테니까. 설명은 이쯤 하고."
내성 쪽으로 시선을 돌린 이안이 덧붙였다.
"안내하시오. 형님의 목을 직접 베고 싶다면."
"그렇다면 기꺼이 앞장서지."
성벽의 정리를 끝내면 내성을 포위한 채로 대기하라고 외친 데클란이, 계단으로 달려갔다.
***
"빌어먹을…!"
벌컥, 쪽문을 박차며 뛰어나온 메이슨이 이를 갈았다.
하인들이나 오가는 길로 도망을 쳐야 하는 날이 올 줄이야.
"아버님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붕대를 감은 오른 손목을 만지며 아직 소란스러운 성벽 쪽을 돌아본 그가, 이내 소리쳤다.
"빨리 움직여라! 여기서 뒈지고 싶지 않다면!"
"예, 예, 대공자!"
짐가방을 멘 채 그를 따라 나온 종자와 기사가 머리를 숙였다.
메이슨의 심복이자, 그를 통해 심연의 세례를 받은 타락자들.
그들은 메이슨의 턱짓에 재빨리 마구간으로 달려갔다.
"나, 나리. 이게 다 무슨… 커헉."
겁에 질린 채 다가오던 마구간지기를 망설임 없이 찔러 버린 기사가 종자에게 손짓했다.
종자가 그들이 타고 갈 말을 꺼내러 마구로 달려갔다.
"아버님의 말로 가져와라. 오른델에서의 마지막이 이 똥 냄새나는 마구간이라니… 제기랄."
마구간으로 들어서며 메이슨이 뿌득, 이를 갈았다.
데클란. 그 천한 놈이 성기사를 데리고 올 줄이야.
놈이 영주 자리에 앉을 것을 상상만 해도 속이 뒤집혔다.
"진작 죽였어야 했는데. …그래 봐야 잠깐일 거다. 내가 아겔 란에 도착하면 모든 게 달라질 테니까."
메이슨이 맹세하듯 읊조렸다.
"그 늙은 사슴도 오른델을 포기할 순 없을 테니. 병력을 내줄 수밖에 없겠지…."
야심차게 눈을 빛낸 것도 잠시.
메이슨의 미간이 다시 좁아졌다.
"뭘 꾸물대고 있는 거냐? 내 말은 어디에…."
뒤를 돌아본 그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가슴 한복판에 검날이 삐죽 튀어나온 기사가, 저만치에서 입을 뻐끔대고 있었기 때문이다.
폐를 꿰뚫려 신음조차 내지 못하던 그는, 검날이 쑥 빠져나가자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그 뒤로 이안의 모습이 드러났다.
"허억…!"
그의 새카만 눈을 마주한 제이슨이 숨을 들이켰다.
아랑곳 않고 쓰러진 기사의 목을 힘껏 내리쳐 잘라 버린 이안이, 비로소 미소 지었다.
"방금 한 얘기, 다시 듣고 싶은데."
"네, 네놈, 언제...!"
메이슨이 주춤주춤 뒷걸음질 쳤다.
그의 시선이 마구간을 황망하게 훑었다.
불안하게 콧김을 뿜어 대는 말들.
그리고 마구 앞, 기둥에 기대듯 주저앉아 있는 종자.
"그렇게 보셔도 도와주러 올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형님."
기둥 옆으로 모습을 드러낸 데클란이, 종자의 목을 후려치듯 잘랐다.
잘린 머리가 굴러갔다.
미간에 깊숙이 박혀, 자루만 보이는 단검.
"데, 데클란, 이 배은망덕한 놈! 이런 짓을 저지르고도 무사할 것 같으냐?"
"그러는 형님은, 신을 저버리시고도 무사할 줄 아셨습니까?"
툭, 메이슨의 등이 마구간의 뒷문에 닿았다.
그의 시선이 빗장으로 향한 순간.
"안 그러는 게 좋을 거야. 남은 왼손이라도 지키고 싶다면."
느긋하게 다가오던 이안이 말했다.
모멸감에 이를 간 메이슨이, 왼손으로 검을 뽑아 들었다.
"웃기지 마라! 나도 두 번 당할 생각은 없으니!"
"부전자전이란 말이 딱이군."
이안이 입꼬리를 당겼다.
"네 아비도 본 모습을 드러낼 시간에 나불대다가 죽었거든."
"뭐… 라고…?!"
메이슨의 눈에 핏발이 돋았다.
이안이 그를 향해 쇄도한 건 그 직후였다.
채앵-!
메이슨이 그의 검을 막았다.
왼손으로도 상당히 능숙한 움직임.
이안의 미소가 짙어졌다.
"하는 짓도 똑같군."
퍼엉.
소리 없는 폭발이 일었다.
메이슨의 검이 튕겨 나가고, 육편이 흩날렸다.
"아, 아아악-! 내 손! 내 손이!"
양손을 다 잃은 메이슨이 울부짖었다.
이안이 비웃듯 덧붙였다.
"그러니까 진작 변신했어야지. 난 너희처럼 되다 만 것들은, 정신을 집중하지 않으면 힘을 끌어내지 못한다는 걸 이미 알고 있거든."
물론, 변이하는 걸 기다려 줄 생각 따윈 애초에 없었지만.
콰직!
입술만 올려 미소 지은 이안이 메이슨의 한쪽 발목을 내리쳤다.
"아아악-! 아악!"
메이슨이 바닥을 굴렀다.
변이할 수 없도록 계속 고통을 줄 생각이었다.
푹, 메이슨의 반대쪽 허벅지에 검날이 박혔다.
발작하듯 몸을 떠는 메이슨의 머리채를 움켜쥔 이안이 말했다.
"맘 같아선 내 손으로 목을 날리고 싶지만. 묻는 말에 솔직하게만 대답하면 참아주지."
"뭐, 뭐가 듣고 싶은 거냐…?"
"늙은 사슴이, 누구지?"
"그, 그건… 아으윽-!"
이안이 검을 비틀자, 주저하던 메이슨이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이안의 눈길에는 일말의 온정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저 원하는 답을 끌어낼 생각뿐.
게다가 늙은 사슴이라는 말은, 전에도 들은 적이 있었다.
'안돌프… 그냥 헛소릴 한 게 아니었구만.'
저주받은 안돌프. 그가 유언으로 남긴 말도 그것이었으니까.
이제야 그게 누구를 지칭하는 말인지 알 것 같았다.
남은 건 그 이름을 직접 듣는 것뿐.
"아겔 란의 귀족 같던데. 한 번 더 묻게 하면 허벅지를 자를 거다. 늙은 사슴이 누구지?"
"브란트 공작…!"
메이슨이 토하듯 내뱉었다.
이안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브란트면, 왕족일 텐데?"
"그래…! 레지스 브란트. 나와 아버지는 그를 섬긴다…."
"그가 늙은 사슴이고?"
메이슨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안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스쳤다. 원하던 이름이 나왔으니까.
레지스에게 그런 별칭이 있다는 것까진 몰랐지만.
"레지스 브란트? 폐하의 작은아버지이자 왕국의 발이라 불리는 그 브란트 공작이, 타락자란 겁니까?"
데클란이 놀란 듯 물었다.
메이슨이 킬킬댔다.
"그러니 왕국을 손에 넣으신 거지. 왕은 아무것도 모르는 머저리다. 그저 우리가 내는 세금과 정보만 받아먹으며, 그 어떤 전쟁이라도 이길 수 있다고 믿는 병시… 읍."
이안이 메이슨의 턱을 움켜쥐었다.
"제보 고맙군. 이제 그 혀는 필요 없겠어."
"...?!"
메이슨의 눈이 커지는 가운데, 데클란이 이안의 곁에 주저앉았다.
"이안. 부탁 하나 해도 되겠나?"
"말씀하시오."
"형님의 혀도 내게 양보해 주게."
"나쁘지 않은 제안이군."
"...!"
메이슨이 말이 다르지 않냐는 눈으로 이안을 바라보았다.
이안이 어깨를 까딱였다.
"약속대로, 나는 참고 있잖아? 네 아우가 참지 않을 뿐이지."
"그게 무슨 말 같지도… 읍…!"
데클란이 메이슨의 턱을 콱 움켜쥐었다.
"제가 얼마나 오늘을 기다렸는지 모르실 겁니다, 형님."
메이슨의 공포에 질린 눈을 응시하면서, 그가 미소 지었다.
"형님이 저와 어머니가 사는 집에 독을 탄 음식을 보낸 그 날부터니까. 벌써 몇 년이나 됐군요."
"...!"
"어머니는 그것도 모르고, 아버님이 선물을 보내셨다며 좋아하셨죠."
좋은 추억을 이야기하듯 조곤조곤한 말투.
하지만 메이슨을 내려다보는 그의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어머니는 제가 음식을 먹지 못하게 몸을 던져 막으셨습니다. 입에 피거품을 물면서도요. 나중에 보니 혀를 깨무셨더군요. 거의 끊어질 만큼. 절 살리려고 어떻게든 정신을 차리려고 하신 겁니다. 그러니까…."
데클란이 단검을 메이슨의 입 앞으로 가져갔다.
"형님께도 어머니가 느끼셨을 고통을 꼭 알려 드리고 싶었습니다."
필사적으로 입을 다물려던 메이슨의 노력은, 이안이 허벅지에 찌른 검을 가볍게 비튼 것만으로 수포로 돌아갔다.
손과 발, 혀가 잘린 채 끌려 나온 메이슨 버차드는, 그의 타락한 본 모습을 드러낼 기회도 가지지 못한 채 목이 잘렸다.
내성 안팎의 모든 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새로운 오른델의 영주인, 데클란 버차드의 손에 의해서.
#038화
오른델 내성.
이안은 칙칙한 복도를 걸었다.
내성에 발을 들인 그는, 가장 먼저 후작과 대공자의 침실을 뒤졌다.
아무도 그를 저지하지 않았다.
다들 그를 티르 엔의 성기사로 여겼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를 신경 쓰지 못할 만큼 바빠서이기도 했다.
데클란은 간이로나마 후작 작위와 영지의 통치권을 승계받는 절차를 진행해야 했고.
용병들은 후작과 대공자의 심복들을 분류하고, 타락자를 가려내 처리하고 있었다.
사실상의 숙청 작업.
쿠데타가 성공했으니 당연히 이어져야 할 과정이었다.
"피비린내가 여기까지 나는 것 같군요."
뒤따라 걷던 필립이 말했다.
이안이 태연하게 말했다.
"곧 구린내에 덮일지도 모르는데, 그것보단 낫지."
"…그래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지하는 내일 뒤지면 안 되겠습니까? 오늘은 전투도 있었고, 후작과 대공자의 방을 수색한 거로 충분할 것 같은데요. 물증이 제 발로 도망가진 않을 것 아닙니까."
"그럴 수도 있지. 성에 도적들이 득시글한데."
"…아."
용병들을 떠올린 필립이 짧게 탄식했다.
지하로 이어지는 나선형 계단에 발을 들이며, 이안이 말을 이었다.
"오늘은 다들 얄팍한 정의감이나 사명감에 취해 있지만, 내일만 돼도 다를 거다. 물증이 엄한 놈들의 손에 들어가면, 우리만 귀찮아져."
"하긴. 뭐가 숨겨져 있을진 몰라도, 남김없이 챙겨가야 합니다. 솔직히, 저도 믿기 힘들거든요."
벽면의 촛불들이 필립의 얼굴에 흐릿한 음영을 만들어 냈다.
"공작 각하가 타락자라니…. 아마 물증 없이는 아무도 믿지 않을 겁니다."
"평판이 좋은 작자인 모양이지."
"그 이상이죠. 폐하를 대신해 직접 영지를 오가며 칙명을 전하거나, 영주들의 요청을 처리해 주는 분이시니까요. 저도 국경 지대에서 두어 번 얼굴을 뵌 적이 있습니다. 현명하고 자비로운 분이셨죠. 전쟁도 반대하신다고 들었는데…."
필립의 눈빛이 우울하게 일렁였다.
"그분이 타락자들의 수장이라니."
"그러니까 더더욱 주위를 완벽하게 속인 거겠지. 그런 의미에서…."
계단이 끝났다.
이안은 음습하게 펼쳐진 지하실을 눈에 담았다.
"그자를 그대로 두면, 언젠가 왕국을 통째로 말아먹을 거다.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지만, 네놈한테는 아니겠지."
"…물론입니다."
"그럼 잡생각 그만하고 움직여. 분명 후작이 쓰던 비밀 공간이 있을 거다. 여기가 아니면 수로까지 갈 거니까, 하나도 놓치지 마."
"예."
벽면의 촛대 하나를 뽑아 든 필립이 앞서나갔다.
이안은 차분히 그 뒤를 따랐다.
제대로 왔다는 직감이 들었다.
대피소와 수로로 이어지는 이 지하실은, 밀실을 숨겨 놓기 딱 좋은 구조였으니까.
마력 탐지로 구석구석을 훑은 것도 잠시.
"호오."
이안이 구석진 벽면의 반파된 조각상 앞에 멈춰 섰다.
주위를 훑던 그가, 벽면의 벽돌 하나를 꾹 밀어 넣었다.
드드드득-
조각상이 옆으로 밀려나면서 숨겨진 통로가 드러났다.
계단 쪽에서 보면 조각상의 그림자에 가려 잘 보이지 않을, 낮은 통로였다.
"결국, 또 나리께서 찾으셨군요."
달려온 필립이 입맛을 다셨다.
통로를 응시한 것도 잠시. 그가 몸을 숙여 앞장섰다.
"이젠 이런 게 놀랍지도 않네요."
짧은 통로를 지나고 나타난 광경에, 그가 중얼댔다.
빛 한 점 들지 않는 밀실.
촛불을 비추자 벽면과 천장에 새겨진 검붉은 기호들이 드러났다.
신의 눈을 피하려 새긴 문양들이 분명했다.
여기 들어선 순간, 단죄의 검이 잠시 덜그럭거리다 침묵했으니까.
방의 구석. 책과 두루마리, 제식용 단검과 접시 따위가 놓인 책상을 대충 훑어본 이안이, 이윽고 밀실 중앙의 제단으로 시선을 돌렸다.
가슴 높이 정도 되는 팔각형 제단.
그 위에는 내부에 자주색의 마력이 가득한 커다란 구슬이 놓여 있었다.
"증거가 될 만한 건 싹 다 챙겨라. 확인은 가면서 해도 되니까."
아공간에서 봉인함을 꺼낸 이안이 말했다.
테사이아를 붙잡았던 봉인함을, 그는 보관 상자로 쓰고 있었다.
후작과 메이슨의 머리도 이 안에 있었다.
"예."
이안이 허공에서 상자를 꺼낸 것에 놀란 기색도 없이, 필립이 책상으로 다가갔다.
이미 이안이 무슨 묘기를 보여 주건 마법이려니 생각하게 된 그였다.
"흐음."
제단 앞에 선 이안이 침음했다.
이런 구슬에 얽힌 마지막 기억이 워낙 강렬한 탓에, 전처럼 손부터 나가지는 않았다.
'확실히… 혼돈의 조각은 아니네. 정수도 아니고.'
이안 본인도 그때와는 달랐다.
그는 이제 혼돈력을 어느 정도 별개의 느낌으로 구별할 수 있었다.
혼돈의 파편을 품으면서 생긴 변화였다.
구슬 내부의 오염된 마력에 담긴 혼돈력은 아주 희미했다.
'그럼 어디… 한번 볼까?'
이안이 손을 뻗었다.
구슬 내부의 마력이 그의 손길에 감응하듯 일렁였다.
그의 손이 표면에 닿은 순간, 자주색 마력이 역류하듯 그의 팔을 타고 밀려들었다.
이안은 당황하지 않았다.
어느 정도는 의도했기 때문이다.
한 줌의 혼돈력을 손아귀에 머금고 있었으니까.
어쩌면, 모든 일의 배후인 공작과 연결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해서.
환영이 눈앞에 펼쳐졌다.
공허인 것 같았지만, 전에 봤던 것과는 다른 광경이었다.
자주색과 선홍색이 뒤덮여 일렁이는 공간.
'공허의 다른 지역…? 아니면, 공허가 하나가 아닌 건가? 하긴. 블랙홀이 하나만 있는 건 아니니까.'
공허가 거대한 블랙홀의 내부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 할 수 있는 생각이었다.
그때 문득,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졌다.
초월적인 존재는 아니었다.
인간의 형태와 비슷한, 아주 흐릿한 실루엣.
그것을 보았음에도 아무런 위압감이나 전율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안은 이것이, 지금 이 공허를 엿보고 있는 또 다른 타락자의 의식이리라 짐작했다.
어쩌면 공작일지도.
-귀하는 누구십니까?
이어진 사념은 뜻밖에도, 전혀 적대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어떤 분의 사도이시기에, 예고도 없이 심연에 발을 들이셨는지요. 혹여, 혼돈의 사도이십니까?
이 새끼가 뭐라는 거야?
끈질기게 이어지는 사념에, 이안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렸다.
나이도 성별도 알 수 없는 타락자의 사념이 움찔했다.
-언짢으셨다면… 용서를….
-왜 나를 사도라고 생각했지?
이게 되네.
자신의 사념이 전해지는 것에 내심 놀라면서, 이안이 물었다.
잠시 멈칫한 타락자의 의식이, 조심스럽게 답했다.
-그야… 당연히….
치직, 주파수가 어긋난 라디오처럼 환영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공허의 혼돈과… 하게… 융합한....
잡음이 섞이던 사념이 사라졌다.
이안의 눈동자를 덮었던 자주색 마력이 한순간에 증발했다.
"...."
이안이 눈을 깜빡였다.
구슬 내부에 가득하던 마력이, 어느새 텅 비어 있었다.
아, 그래. 소모품이었단 거지.
뒤에서 필립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방금 그건 또… 뭐였습니까?"
"내가 묻고 싶은데. 어때 보였지?"
"구슬에서 나온 마력이 나리를 감싸고 일렁였습니다. 나리한테 조금씩 스며들더니 사라졌고요."
"아, 그래?"
스며들었다라.
곱씹던 이안이 눈썹을 꿈틀댔다.
그의 심상에 자리한 혼돈의 파편이 조금, 정신을 집중하지 않으면 느끼기 어려울 만큼 미세하게 커졌기 때문이었다.
그의 입가에 헛웃음이 스쳤다.
아무래도, 게임에선 타락해야 얻을 수 있던 특수 능력을 갖게 된 것 같았으니까.
혼돈력의 총량을 이런 식으로도 늘릴 수 있다니.
타락자들을 찾아내 쳐 죽여야 할 이유가 또 하나 늘어난 셈이었다.
"…나리, 괜찮으십니까? 설마, 오염된 마력에 홀리신 건 아니겠죠?"
"네가 아직 살아 있는 걸 보면 그렇진 않은 것 같은데. 물건이나 챙겨라. 볼 건 다 본 것 같으니까."
태연하게 내뱉은 이안의 시선이, 문득 텅 빈 구슬에 머물렀다.
'혼돈의 사도라….'
따지고 보면, 아예 틀린 말은 아닐지도 몰랐다.
***
다음 날 아침.
"정말 그거면 충분하겠어?"
데클란이 걸음을 옮기며 물었다.
깨끗하게 씻고 단정한 옷을 걸쳤을 뿐인데도, 그에게선 귀족적인 품위가 묻어 나왔다.
"충분하오."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빈말이 아니었다.
새 장갑과 부츠. 얇은 사슬을 덧댄 견갑과 정체 모를 가죽으로 만든 밴드까지 몸에 걸친 참이었으니까.
하나같이 정보 확인이 가능한 고급품들이었다.
뒤따르는 필립도 새로운 방어구를 여럿 걸친 상태였다.
통일성 대신 실용성을 선택한.
전형적인 용병의 무장이었다.
"그렇다면야. 여기. 섭섭지 않게 넣었어. 마음 같아선 더 주고 싶지만. 알다시피 이젠, 영지의 재정도 생각해야 하는 몸이라서 말이야."
어깨를 으쓱인 데클란이 돈주머니를 건넸다.
"…이것도 충분하군."
말과 달리 꽤 묵직한 주머니였다.
미소 지은 이안이 주머니를 품에 넣었다.
내성 밖으로 나온 그들은 마구간으로 걸음을 옮겼다.
데클란이 문득 내뱉었다.
"정말 아침 식사만 하고 떠난다니, 아쉽군."
"의뢰를 끝내야 하니 어쩔 수 없소. 어차피 귀하도 이제부터 해야 할 게 많으시잖소."
"그야 그렇지만."
데클란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새 마구간지기에게 손짓을 보낸 데클란이, 문득 걸음을 멈췄다.
"이안. …이렇게 이름으로 불러도 괜찮겠지?"
"상관없소. 버차드 후작."
멈춰 서며 이안이 답했다.
순간 굳어졌던 데클란의 입가에 미소가 스쳤다.
"그렇게 불리니 어색하군. 아무튼… 자네가 말했듯, 난 이제부터 해야 할 게 아주 많아. 생각할 것도 많지. 내 입장도, 위치도, 모든 게 달라졌으니까."
"그래서, 무슨 말씀이 하고 싶으신 거요?"
"의뢰가 끝나면 다시 돌아오지 않겠어? 평생 눌러살라고는 하지 않겠어. 다만, 내가 이 모든 일에 능숙해질 때까지만이라도 함께해 주면 좋겠는데. 유능하고 믿을 수 있는 오른팔이 필요해서 말이야."
이안이 피식 웃었다.
평소처럼 건조하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은 듯한 미소.
"말 잘 통하는 오른팔이 필요하신 거겠지."
"당연히 그도 그렇고."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 부탁은 들어줄 수 없겠소. 난 한곳에 정착할 수 없는 몸이오."
"그래… 너라면 그렇게 말할 것 같았지."
데클란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쉬워서 한 말이었어. 이렇게까지 내 속을 들여다보는 것 같은 사람은 처음이었으니까."
"아마 비슷한 부분이 있어서 그럴 거요. 나도 귀하처럼, 주위를 속이는 게 익숙하거든."
태연한 말투였지만, 데클란을 놀라게 하기엔 충분했다.
그의 시선에 이안이 피식댔다.
"용병들도 백성들도, 사실 전혀 좋아하지 않으시잖소."
"…언제부터 알고 있었지? 아니, 어떻게 알았지?"
"글쎄…. 그냥 알겠던데."
"그래. 네 눈썰미가 좋은 거군. 그렇다면 다행이야. 난 또 내 연기가 엉망인 줄 알았네. 그건 문제거든. 앞으로도 계속해야 하는데."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데클란의 모습에, 이번엔 이안이 헛웃음을 지었다.
"연기력을 걱정하신 거라니."
"이미 들킨 건 어쩔 수 없으니까. 틀린 말도 아니고. 사실, 지금도 걱정하고 있거든. 반란이 성공했으니, 이제부턴 용병 놈들이 내 속을 썩일 테니까."
당연한 걱정이었다.
이안 덕분에 기회를 얻었지만.
사실 그가 나타나면서 데클란의 본래 계획은 엉망이 됐으니까.
본래라면 용병들과 함께 전장을 구르면서, 그들에 대한 지배력을 확실히 다질 생각이었다.
통제되지 않는 녀석들은 제거하고, 남은 놈들은 잘 길들여서.
그 과정이 사라졌으니, 데클란은 저 못 배우고 제멋대로인 용병들에게 목줄을 채울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들개들이 걱정이면, 들개들과 대신 싸울 사냥개를 들이면 되잖소."
이안이 툭 내뱉었다.
데클란의 눈이 번뜩였다.
"사냥개?"
"본래 주인에게 버림받은, 죽음만 기다리는 놈들이 있잖소."
"…아!"
데클란이 짧은 탄성을 흘렸다.
숙청에서 살아남은 지휘관과 관료들을 뜻하는 말임을 곧바로 깨달은 것이다.
"새 주인이 직접 다시 목줄을 채워 주면, 감격하지 않겠소? 주인에게 예쁘게 보이려고, 들개들과 힘 싸움도 하고."
"난 상황에 따라 양쪽의 목줄을 잘 흔들어 주기만 하면 되겠군. …역시, 넌 굉장해."
데클란은 진심으로 감탄하며 이안을 바라보았다.
이자가 곁에 있다면, 지금보다 더 원대한 꿈을 꿀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그걸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이미 거절한 이야기를 다시 꺼내면, 그나마 남은 일말의 가능성도 사라질 것 같았으니까.
그때 마구간지기가 말을 이끌고 나왔다.
윤기가 흐르는 검은 말.
데클란이 시선을 돌렸다.
"저기 자네 말이 오는군."
"…저건 내 말이 아닌 것 같은데."
"너희들이 타고 온 말은 너무 야위어서 말이야. 어울리는 놈으로 골라 놨지. 형님의 애마였어."
"사양하진 않겠소만…."
"뇌물이기도 해. 폐하께 잘 말씀드려 달라고. 새로운 영주는 왕국에 대한 충성심이 아주 깊다고 말이야."
"어렵지 않소. 나는 그 말이 사실이건 아니건 상관없으니."
"거참. 네 앞에선 거짓말을 할 수가 없군."
"뭐, 타락하지만 않으신다면야. 언젠가 유혹이 들 때, 나를 다시 만나게 될 수도 있다는 것만 기억하시오."
그땐 아마도, 친구나 조력자로 만나게 되지는 않으리라.
데클란이 웃음 지었다.
"거참 무서운 말이군. 명심하지. 자네를 적으로 만나는 건, 상상하고 싶지도 않으니까."
"언젠가 또 뵙겠습니다, 후작 각하."
그때, 꾸벅 인사한 필립이 말을 받으러 달려갔다.
이안도 다시 걸음을 옮겼다.
필립의 인도 아래, 능숙하게 말에 오르는 그를 가만히 바라보던 데클란이 물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물어도 되나?"
"이런 근사한 뇌물까지 주셨는데. 얼마든지."
"왕국에 이런 음모들이 도사리고 있는데도, 폐하께선 전쟁을 벌이실 것 같나?"
"무슨 예언자 취급이시군."
고삐를 쥔 이안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걸렸다.
"하지만 아마도 일어날 거요."
"...!"
"그리고 그 후엔 어쩌면, 그보다 더한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지. 워낙 모든 게 개판인 세상이잖소."
어깨를 으쓱인 이안이 말머리를 돌렸다.
"잘해 보시오. 이제 이 동네는 귀하가 하기에 달렸으니까."
이안이 말을 몰았다.
한 번 더 몸을 숙인 필립이 말의 고삐를 잡으러 달려갔다.
마구간 반대편. 성의 후문으로, 용병과 그의 종자가 멀어졌다.
아무런 미련도 없는 듯, 뒤 한 번 돌아보지 않은 채로.
그 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던 데클란이, 문득 시선을 돌렸다.
패튼이 달려오고 있었다.
"그들은 떠났습니까?"
"그래. 떠났네, 패튼 경."
어느새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데클란이 말했다.
호칭이 낯간지러운 듯 웃은 패튼이 덧붙였다.
"가시죠. 성벽 앞에 주민들이 모두 모여 있습니다. 도련님, 아니, 영주님의 연설을 기다리면서."
"성벽 위에는?"
"용병 놈들… 아니, 우리 백인대와 살려 둔 관료와 지휘관들이 전부 모여 있습니다."
"좋아. 바로 가지."
"이대로요? 옷을 갈아입으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괜찮아. 이게 더 자연스러워 보이니까."
데클란이 그대로 몸을 돌렸다.
'양손의 목줄이라… 그럴싸한 명분을 준비해야겠군. 시작부터 미움받고 싶진 않으니까.'
조언을 곱씹으며 걸음을 옮기던 그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이안과 필립의 모습은, 이미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039화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걸음을 옮기던 필립이 문득 내뱉었다.
후작의 밀실에서 가져온 기록물을 세 권째 읽고 있던 이안이 심드렁하게 되물었다.
"뭐가."
"오른델이요. 제가 볼 땐 불안한 게 한둘이 아니라서 말입니다. 나리와 영주님의 대화가 아니더라도요."
"드디어 너도 사고라는 걸 할 줄 알게 됐군. 축하할 일이야."
"나리가 보시기에도 그렇단 거죠?"
이안은 어깨를 까딱였다.
필립의 말대로, 오른델의 불안 요소는 여전히 많았다.
데클란 본인까지 포함해서.
하지만 그게 마음에 걸리지는 않았다.
멸망을 향해가는 이 세계에서, 결국 개인이 만들어 내는 변화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으니까.
오른델이 타락자의 손에 남겨지는 것은 막았으니, 이만하면 차선의 결말 정도는 될 터였다.
"신경 꺼라. 지금 네가 오른델을 걱정할 때냐?"
덧붙인 말에 필립이 퍼뜩 정신이 든 얼굴이 됐다.
"하긴. 옳은 말씀이십니다. 아겔 란의 문제가 가장 크고 시급하죠. 그런 의미에서...."
그가 턱을 까딱였다.
"뭔가 나온 게 있습니까?"
"아직은. 뭔가 있길 바라는 게 좋을 거다. 별 게 없다면… 아겔 란으로 돌아가는 날이 늦어질지도 모르니까."
"...!"
필립은 긴장한 얼굴이 됐지만.
사실, 이안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타락자란 것들은 마법사와 비슷해서, 제 놈들이 한 짓을 기록으로 남기는 걸 좋아했으니까.
그 내용은 배신을 염려한 증거 기록이냐, 정신 승리나 자의식 과잉에 의한 자기 과시냐에 따라 극명하게 달라지지만.
후작은 전자에 가까워 보였다.
그렇게 그다지 알고 싶지 않은 온갖 잡지식과 정보들을 계속해서 눈에 담던 한순간.
"있군."
이안이 툭 내뱉었다.
슬슬 초조한 눈빛이던 필립이 홱 고개를 돌렸다.
"뭐가요? 뭐가 있습니까?"
이안이 보고 있던 책자를 필립 쪽으로 내밀었다.
필립이 눈을 깜빡였다.
"제 눈엔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요."
"그래?"
씩 미소 지은 이안이 표지에 그려진 문양에 마력을 흘려 넣었다.
종이에 글자들이 홀연히 나타났다.
"지금은?"
"…마법이 걸린 책이었군요."
"그래. 남한테 보이면 안 될 내용을 기록하기에 딱 좋지."
이 많은 기록물 사이에 깨끗한 공책이 섞여 있으면 오히려 수상하다는 생각까진 못한 것 같지만.
"그래서, 뭐가 적혀 있습니까?"
"명단이야. 후작은 정말 아무도 믿지 않는 성격이었군. 언급된 자들의 명단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 조사한 신상까지 다 적어 뒀어."
이 작자, 정말 왕이 되고 싶었군.
이안의 입가에 조소가 번졌다.
하지만 그도 늙은 사슴, 레지스 브란트의 진짜 목적이 뭔지까지는 알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그와의 밀회나 대화를 요약해 둔 부분 어디에도, 아겔 란 전체를 마경화시키리란 내용은 없었으니까.
타락자들을 주축으로 한 연합 국가를 설립하고, 심연에서 얻은 금단의 지식으로 불사의 군단을 만들어 세력을 넓히리란 계획만이 상세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변방 국가들을 집어삼켜, 끝내는 제국마저 위협할 세력으로 성장하는 것이 후작과 다른 타락자들의 원대한 야망이었다.
'결국, 전부 레지스의 꼭두각시에 불과한 거네.'
레지스 브란트라는 작자의 방식이 어떤지도 알 것 같았다.
권력자와 지식인들이 가진 은밀한 야망과 욕망을 부채질해, 끝내 선을 넘게 만들었으리라.
물론 그들이 원하는 바가 이뤄지리란 약속도 수없이 했겠지만.
이안이 볼 땐, 아겔 란이 마경화되면 다 없던 일이 될 것들이었다.
그때가 되면 타락자들은 원치 않아도 복종해야 할 테니까.
아니 어쩌면, 그들조차 제물에 불과할지도.
'이런 미친놈들이 전 대륙에 암약하고 있으니, 이 세상이 안 망하고 배길 리가 있나.'
이 와중에도 인간들은 서로 전쟁할 궁리나 하고 있으니.
혀를 차는 이안을 조바심 나는 얼굴로 바라보던 필립이 내뱉었다.
"어떤 이름들이 있습니까? 아는 이름도 있나요?"
"레지스 브란트는 확실히 있고."
페이지를 넘기던 이안의 손길이 멈췄다.
"프레드릭 헨슨…."
"…그건 누굽니까?"
"발크시의 사제다. 영주와 가까운 사이였지. 오, 한나 버튼. 이것도 아는 이름이군."
"그건 또 누구죠?"
"발크시의 귀족 부인이지. 정식 귀족은 아니지만."
"…정말 왕국 전역에 숨어 있었던 거군요. 토벌대를 파견하시라 건의해야겠습니다. 정 안되면 제국에라도 제보를-"
"그럴 필요 없어."
"...?"
"방금 말한 자들, 다 죽었으니까."
"예...?"
필립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죽이다뇨. 누가...."
이안의 시선에, 필립의 눈썹이 말려 올라갔다.
"나리가요?"
"의도한 건 아니었어. 의뢰비를 떼먹으려 하거나 뒤통수 치거나 해서 어쩔 수 없었지. 타락자라는 건 죽이기 직전에나 알았고."
"…발크 성의 영주가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오히려 좋아하던데."
"예?"
"본인밖에 모르는 자였거든. 권력을 나눠 먹고 훈수질하던 것들이 죽으니 나쁠 게 없었겠지. 거기다 타락자라는 증거까지 명확했어. 오히려 비밀로 하자고 돈도 주더군. 일이 커지는 건 싫었던 거야. 그 후에 추방당하긴 했지만, 아무튼. 여기 있는 이름의 절반은...."
피식한 이안이 덧붙였다.
"내가 죽인 것 같은데."
"...."
오랜만에 얼빠진 종자의 표정을 지었던 필립이 이윽고 내뱉었다.
"나리는 정말이지… 대단한 분이십니다. 이만하면, 아겔 란의 수호자라 불리셔도 손색이 없겠군요."
"아겔 란을 위해서 그런 적은 한 번도 없어. 그러니까 내 이름 앞에 이상한 수식어 추가할 생각 하지 마라."
이안의 싸늘한 목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필립이 덧붙였다.
"그렇다면 타락자들을 물리칠 운명을 타고나신 것일 지도요."
"...."
그 말은 설득력이 있었다.
그의 육체인 이안 호프는 엄밀히 말해, 게임의 주인공이었으니까.
가는 곳마다 타락자와 마물, 마족들과 얽히게 되는 건 어찌 보면 필연적인 일이었다.
그들과 관련된 퀘스트가 보상이 가장 좋으니, 더 강해지기 위해서라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결론적으론 잘됐군요. 타락의 뿌리를 확실히 제거하면, 남은 타락자들에겐 기반이 거의 사라지는 셈이 될 테니까요."
필립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이제 아겔 란으로 가기만 하면 되겠습니다. 한시라도 빨리요."
"흠."
책을 아공간에 안전하게 넣은 이안이, 대답 대신 침음했다.
미간을 좁힌 필립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다른 곳을 들르실 생각은 아니시겠죠?"
"닥쳐 봐. 고민 중이니까."
"...."
이안은 필립의 시선을 무시한 채 갈등에 잠겼다.
이대로 아겔 란에 간다면 어떤 일들이 벌어지게 될지가 눈에 그려지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모든 일을 끝내면 아마도, 아겔 란을 떠나야 하리라.
한동안은 다시 발을 들일 수도 없을 테고. 게임에서도 그랬듯이.
아직 어딘가에 남아 있을 퀘스트들과도 이별하게 되리란 뜻이었다.
아겔 란을 떠나는 것엔 조금의 미련도 없었지만, 그 부분엔 아니었다.
'굵직한 도시를 다 거치긴 했지만… 분명 몇 개쯤은 더 있을 텐데.'
메브가 그때까지 버틸 수 있을까.
이안은 그녀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렸다.
이질적일 정도로 차분하던 모습.
아마도 격렬한 감정의 표출 끝에 찾아온, 잠깐의 평온이었으리라.
혼자가 된 지금도 그럴지는 판단할 수 없었다.
내면의 저울이 오가는 가운데.
문득, 필립이 멈춰 섰다.
"뭐냐?"
이안이 그를 내려다보았다.
필립이 앞을 턱짓했다.
"갈림길입니다, 나리. 한쪽은 선회해서 발크시 쪽으로 이어지는 길이고. 한쪽은… 아겔 란으로 직행하는 길이고요."
"...."
이안은 앞을 바라보았다.
노을이 지는 가운데, 좌우로 길게 나뉜 관도가 눈에 들어왔다.
"지금 저는 나리의 종자이니, 어떤 선택을 하시더라도 따르겠습니다."
필립이 덧붙였다.
잠시 턱을 긁적인 이안은, 이윽고 말머리를 틀었다.
"이쪽으로 가지."
아겔 란으로 이어지는 길목.
굳어 있던 필립의 표정이 극적으로 밝아졌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
"이렇게 현명한 결정을 내리시다니. 드디어 모든 게 잘 풀리리란 예감이 드는군요. 저희는 환대를 받으며 왕성에 들어가게 될 테고, 왕성에 드리운 어둠을 뿌리 뽑아 명예도 손에 넣게 될 겁니다."
"네 말을 듣고 있으니까 내 선택이 잘못된 것 같다는 예감이 드는데."
"그럴 리가요. 닥치겠습니다."
혹시나 마음을 바꿀까, 필립이 재빨리 말고삐를 끌었다.
이안은 피식대며 시선을 돌렸다.
아겔 란에서 순탄한 것까진 바라지도 않으니, 가는 길이라도 순탄하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
"드디어…."
비탈길을 내려오던 필립이 감격의 탄식을 흘렸다.
저 멀리, 아겔 란의 전경이 펼쳐져 있었다.
"촌구석치곤 제법이군."
이안이 읊조렸다.
완만한 언덕을 중심으로 형성된 아겔 란은, 왕국의 다른 도시들보다 최소 수십 년은 앞서 있었다.
게임에서도 작은 도시는 아니었건만. 현실이 되고 보니, 그때는 많은 부분이 생략되어 있었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언덕 꼭대기에 솟은 내성. 그 아래로 건물들이 이어지고, 언덕 중턱을 성벽이 둘러싸고 있었다.
언덕 아래로도 건물이 많았고, 또 다른 성벽이 한 겹 더 도시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 주위로도 건물이 많았는데, 가장자리로 또 다른 성벽을 두르는 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그 옆으로는 적당한 넓이의 강이, 반대편 평야에는 밭이 가득했다.
도시의 이름이기도 한 아겔 란이 왕국을 이룬 비결 중에는, 이런 입지 조건 훌륭한 곳에 터를 잡은 것도 포함되어 있을 터였다.
아마 전 버차드 후작은 오른델을 이렇게 만들고 싶었으리라.
'아직 피바람이 불지도 않았고.'
이안은 멀쩡한 성의 모습에 고개를 끄덕였다.
메브가 그와의 약속을 지켰다는 뜻이었으니까.
"오늘 밤은 드디어, 따듯한 방에서 잘 수 있겠군요."
필립의 걸음이 빨라졌다.
오른델을 떠날 때까지만 해도 말끔하던 그의 몰골은 지금, 부랑자가 따로 없었다.
거기다 날씨도 조금씩 추워지는 중이었다.
계절의 변화가 그리 크지 않은 동네지만, 노숙하는 이들에겐 작은 변화도 크게 다가오는 법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안은 아겔 란의 외곽 시가지로 들어섰다.
제법 많은 인파. 그들 대부분은 이안과 필립을 신경 쓰지 않았다.
외지인의 왕래가 잦고 치안이 좋다는 의미였다.
그때 필립이 말을 멈췄다.
첫 번째 성벽의 관문 앞이었다.
"외지인 같은데. 신분과 목적을 밝히시오."
경비병이 말했다.
같은 일을 수없이 반복할 텐데도, 꽤 군기가 잡힌 모습이었다.
"저는 아겔 란의 보검, 메브 리우렐 경의 종자입니다. 여기 이분은 리우렐 경의 손님인 이안 호프 나리이시고요."
"리우렐가의 손님이라고…?"
둘의 행색을 보며 불신의 눈빛을 보낸 병사가 턱짓했다.
"사람을 보내 확인하겠소. 기다리시오."
"예."
필립이 성벽으로 말을 몰았다.
이안도 군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심 놀라는 중이었다.
이렇게나 상식적이고 정상적인 절차라니.
"도시가 체계적으로 돌아가는군."
"당연하죠. 여긴 왕국의 중심이니까요. 법도부터 거주지까지, 모든 게 체계적입니다."
아마 제국을 따라 한 거겠지만.
이안은 생각하면서도,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건 이 세계에선, 이만하면 아주 살 만한 동네였다.
게임의 장면이 뇌리를 스쳤다.
화마에 휩싸인 채 아수라장이 되어 있던 도시가.
지금으로선 전혀 상상할 수 없는 광경이었다.
'이번에도 삐끗하면 그렇게 되겠지.'
그때, 관문 밖으로 누군가가 달려 나왔다.
귀족의 가신들이 걸치는 로브와 후드를 뒤집어쓴 체격 좋은 사내.
주위를 두리번댄 그가 이안과 필립을 발견하고는 다가왔다.
"드디어 오셨군! 기다리다 목 빠질 뻔했소!"
후드를 벗으며 미소 짓는 건 그들에게도 익숙한 얼굴이었다.
"미구엘! 살다 보니 댁이 반가운 날이 다 있군요!"
필립이 그를 와락 껴안았다.
왜 이래? 하고 중얼거리면서도 그의 어깨를 토닥여 준 미구엘이, 말에서 내리는 이안을 바라보았다.
이안이 내뱉었다.
"얼굴에 기름이 줄줄 흐르는군. 살만했던 모양이지?"
미구엘이 웃음을 터뜨렸다.
잘 다듬은 턱수염과 흉터가 흔들렸다.
"댁들 몰골을 보니 아니란 말은 못 하겠소. 자, 들어갑시다."
몸을 돌린 그가 걸음을 옮겼다.
그 와중에 경비병과 시선을 교환하며 고개를 까딱여 보이기까지 했다.
필립이 피식댔다.
"현지인이 다 되셨군요."
"아시다시피 내가 적응력이 좋잖소. 여기서 지낸 기간을 생각하면 뭐, 그럴 만하지. 그러는 댁도, 이제 제법 용병 느낌이 나는군."
"원하진 않았지만 말이죠."
"다 그렇게 시작하는 거요."
껄껄 웃은 미구엘이 말을 이었다.
"우린 성벽을 하나 더 넘을 거요. 필립은 알겠지만, 리우렐가의 저택은 제일 안쪽에 있거든."
"그런데 왜 당신이 나오셨습니까? 전 나리께서 직접 나오실 줄 알았는데요. 사안이 사안이니까."
"물론 그러셨지. 나보다 더 댁들을 기다리셨는데. 다만, 그러실 수가 없었을 뿐이오."
볼의 흉터를 긁적인 미구엘이, 주위를 돌아보며 목소리를 낮췄다.
"지금 나리께선, 가택에 연금 중이셔서 말이오."
"...?"
필립은 물론, 이안의 미간도 설핏 좁아졌다.
#04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