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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0-030

#020화

피를 토한다고? 갑자기?

이안이 눈을 끔뻑이는 사이, 신성력이 증발하며 메브가 어둠 너머로 사라졌다.

"나, 나리?! 나리! 기다리십시오! 제가 가겠습니다! 나리이이!"

거의 동시에, 비명을 내지른 필립이 말고삐를 내던지고 달려나갔다.

'내 팔자에 버스는 무슨. 씁.'

비로소 상황 파악을 끝낸 이안이 시선을 돌렸다.

"두고 간 말부터 잡아라, 미구엘."

"엉…? 아, 알겠소!"

미구엘이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도망치려는 말의 고삐를 낚아챈 그가 이안을 돌아보았다.

"잡았소! 그리고?"

이안은 숲의 중심부에 똬리를 튼 오염의 원흉을 떠올렸다.

그를 열 번은 게임 오버시키고, 마우스를 집어 던지게 했던 놈.

다시 그때의 빡침을 경험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짐에서 기름을 꺼내. 많이."

횃불을 안장 옆에 꽂은 미구엘이 가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사이 이안은 검을 회수하며 곁으로 다가섰다.

"넌 필립을 따라가라."

"알겠… 나 혼자 말이오?"

기름이 든 가죽 주머니를 연달아 내려놓던 미구엘이 고개를 들었다.

눈을 끔뻑인 그가 덧붙였다.

"이 많은 기름은 어디다 쓰시고?"

안장에 걸린 횃불을 집어 든 이안이 그를 내려다보았다.

"어디다 쓸 것 같냐?"

"그야 당연히…."

미구엘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의 손에 들린 횃불로 향했다.

"…하지만 아무리 댁이라도 그런 미친 짓은 안 하실 것 같소만."

글쎄다.

고개를 까딱인 이안이 말했다.

"필립에게 리우렐 경만 지키고 있으라고 전해. 다른 건 아무것도 하지 말고. 물론, 너도."

"그게 말은 쉬운데…. 하, 시부럴. 정말 안 가실 거요?"

"그럼 나 대신 싸울래?"

튕겨 오르듯 일어선 미구엘이 양손의 말 고삐를 끌어당겼다.

"말 꼭 전하겠소. 살아 돌아오쇼."

그가 뒤도 보지 않고 멀어졌다.

저것들한테 메브를 맡겨도 되나.

이안은 고개를 저으며 기름 주머니를 차례로 집어 들었다.

마지막 하나만 남기고 아공간에 넣은 그는, 주머니의 기름을 횃불에 천천히 부으며 시선을 돌렸다.

숲의 어둠 너머. 살아남은 숙주들이 메브 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숫자는 제법 줄어들었지만, 늘어나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일행은 이미 오염된 숲에 발을 들였으니까.

보통 자신의 영역을 구축하는 마물은 이유를 불문하고 침입자를 용서하지 않았다.

인간을 먹이로 삼는 것들은 더했고, 이 숲을 오염시킨 원흉도 그런 부류였다.

분명 곧 다시 공격을 시작할 터.

그래서 이안은 일행에게 돌아가기 전에 놈부터 제거할 생각이었다.

홀로 싸워야겠지만, 일행을 지키며 밤새 싸우는 것보단 그쪽이 훨씬 나으리라.

"일단은 어그로부터 나한테 돌려놓고… 앗 뜨거. 시발."

읊조리던 이안이 주머니를 든 손을 얼른 뒤로 뗐다.

횃불이 어느새 손잡이까지 태울 기세로 타오르고 있었다.

"뭐 이렇게 잘 타?"

마력 아껴 보려다 구워질 뻔했네.

주머니를 던진 이안은 검을 뽑아 들며 마력을 일으켰다.

눈동자가 잿빛으로 물들고, 산들바람이 그의 전신으로 번졌다.

하위 회색 마법, 바람 칼날.

화르륵-!

흘러내리던 횃불이 바람을 타고 솟구쳤다.

한 손에는 검을, 한 손에는 불의 철퇴를 든 듯한 형상.

"…이 정도면 싫어도 보이겠지."

양쪽 손목을 휘휘 돌린 이안이 땅을 박찼다.

쉬학-!

가장 후미의 숙주 한 마리가 어둠을 뚫고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콰직!

달리던 그대로 내리찍은 검에, 숙주의 머리통이 가슴까지 쪼개졌다.

놈에게 부딪혀 감속한 이안은, 옆의 숙주를 왼손의 횃불로 후려치고는 다시 몸을 날렸다.

생사는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어차피 경험치도 주지 않는 놈들.

움직일 수 없게만 해도, 일행에게 도달하지 못하리라.

키엑-! 키에엑-!

몇 마리가 더 토막 나고서야 근처의 숙주들이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이안은 놈들을 지나쳐, 선두를 달리던 다른 숙주를 쪼개 놓는 중이었다.

쒸엑- 콰직!

거의 동시에 육식 나무의 아가리가 떨어졌지만, 이안은 몸을 뒤로 젖히는 것만으로 가볍게 피해냈다.

바람 칼날에 더해 고유 특성인 집중력까지 발휘된 덕분이었다.

움직임과 인지 능력이 함께 기민해진 지금의 그에겐, 모든 게 조금 느려진 것처럼 느껴졌다.

쩌억! 콰르르-!

숙주들이 연달아 썰리고 불탔다.

때때로 육식 나무의 아가리까지 쪼개며 얼마나 싸웠을까.

콰득-!

숙주 한 마리를 죽이고 반사적으로 몸을 돌리던 이안이 멈칫했다.

어느새 사방이 고요해졌다.

"하아…. 하아…."

울려 퍼지는 건 자신의 숨소리뿐.

이안은 비로소 검을 회수하며 시선을 돌렸다.

반쯤 무아지경으로 싸운 것이었지만, 목적은 훌륭하게 달성했다.

사방에 널브러져 움찔대는 숙주들.

그를 향한 증오와 광기를 머금은 마력의 파장과 오염된 뿌리까지.

일행을 노리던 적들을 전부 제거하고 주의도 확실히 끈 것이다.

이윽고, 이안의 시선이 숲의 어둠 너머에서 멈췄다.

악의가 끈적하게 묻어나오는 어둠.

"…겨우 이 정도로 빡치긴."

이제 시작인데. 서운하게.

보란 듯이 횃불을 치켜든 이안이 어둠 너머로 몸을 날렸다.

***

횃불이 유성처럼 숲을 가로질렀다.

키엑-! 키에엑-!

내달리는 이안의 뒤로 섬뜩한 울음소리가 메아리쳤다.

그가 지나치고 나서야 깨어난 숙주들이 추격해 오는 소리였다.

하지만 이안은 멈춰서지 않았다.

그저 앞으로 달리기만 할 뿐.

'잡몹은 스킵이 국룰이지.'

이건 사실, 그가 홀로 다시 이곳을 찾을 때 쓰려던 전략이었다.

보스만 최단 시간으로 노리는, 속칭 스피드 런.

메브와 함께 오고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을 뿐, 효율적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뒷수습이 문제긴 한데. …뭐 어떻게든 되겠지.'

여기서 더 엉망진창이 된다고 티 날 것 같지도 않고.

이안은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돌아보았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숲 자체가 기괴하게 변해 있었다.

중심부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그- 워억-!

앞을 가로막는 마물 역시도, 더 끔찍한 몰골로 나타났다.

타타탓-! 쉬학-!

거대 숙주의 공격을 흘려내며, 이안은 그대로 뛰어올랐다. 고블린 여럿이 넝쿨에 감겨 융합된 놈의 형상이 차근히 눈에 들어왔다.

놈의 어깨를 밟은 이안이 다시 도약했다.

그어억-!

고함과 파공음이 곧바로 이어졌다.

육식 나무 수준의 반응 속도.

"...!"

꼴에 네임드다 이거지.

이안은 풍차처럼 몸을 돌려 궤적을 틀었다. 넝쿨이 휘감긴 팔뚝이 아슬아슬하게 그를 스쳐 지나갔다.

꽈지직-!

대신 손에 든 횃불이 휩쓸려 부러지면서 사방으로 불씨가 튀었다.

손잡이를 미련 없이 내던진 이안이 바닥을 구르며 착지했다.

번쩍이던 시야가 어두워졌다.

동시에 등골이 서늘해지면서 신경이 팽팽하게 곤두섰다.

거대 숙주 때문은 아니었다.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놈은 제가 휘두른 팔의 원심력을 이기지 못하고 자빠졌다.

그의 육감을 서슬 퍼렇게 일깨운 건, 저 너머의 무언가였다.

"...!"

고개를 든 이안은 자신의 시야가 완전히 달라졌음을 깨달았다.

빛이 없음에도, 볼 수 없던 것들이 오히려 더 또렷한 형상으로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심장 박동처럼 규칙적으로 번지는 마력의 파장과 땅속에 꿈틀대는 수많은 뿌리까지.

모든 게 손에 잡힐 듯 선명했다.

그리고 그것들이 모이는 저 너머, 새카맣게 솟은 무언가가 느껴졌다.

이안의 눈에 그건 수많은 촉수가 꿈틀대는 기둥처럼 보였다.

실제로도 크게 다르지는 않으리라.

저 기둥이 바로 숲을 오염시킨 원흉이자 보스인, 뒤틀린 고대수니까.

그 실루엣을 응시하던 이안의 미간이 서서히 좁아졌다.

"왜 저렇게 크지…?"

놈이 예상보다 거대했다.

게임보다 오염이 덜 진행된 만큼, 당연히 더 작을 줄 알았건만.

"방심할 틈을 안 준다니까."

투덜대면서도 이안은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어차피 예전과는 다른 건 그도 마찬가지였다.

'계획이 망한 것도 아니고.'

이안은 왼손을 펼쳤다.

손아귀에 흰 구슬 하나가 홀연히 나타났다.

마력의 정수. 곧바로 정수를 움켜쥔 이안이 마력을 일으켰다.

밀어 넣으려 노력할 필요도 없었다. 정수에 닿은 마력은 자성에 이끌리듯 내부로 빨려 들어갔다.

솨아아-!

마력과 공명한 정수에서 흰 빛무리가 번졌다.

정수 내부에 응축된 마력이 눈에 보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마력은 단순한 응축이 아니라, 기하학적인 배열로 중첩되어 있었다.

인위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이 자체로 마법 술식의 역할을 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마법이 증폭되는 건가.'

이어진 간지러움에 이안은 손을 펼쳤다. 기다렸다는 듯 정수가 빙글빙글 돌며 떠올랐다.

회전은 손바닥과 약간의 거리가 생기자 느려졌고, 이윽고 자리를 잡은 것처럼 허공에 멈춰 섰다.

손아귀와 정수가 자기장으로 이어진 듯한 묘한 느낌.

"이런 식이란 말이지. ...!"

감탄하며 손가락을 꿈틀대던 이안이 별안간 바닥을 굴렀다.

쒸에엑-!

다음 순간, 대기가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떨어져 내렸기 때문이었다.

쿠웅-!

굉음과 함께 땅을 파고든 것은, 새카만 나무껍질이 비늘처럼 돋은 거대한 아가리였다.

이안 정도는 한입에 삼켜버릴 수 있을 만한 크기. 그 위에 이어진 줄기도 어지간한 육식 나무의 둥치와 맞먹는 굵기였다.

어느새 뒤틀린 고대수의 공격권에 들어온 것이다.

아가리가 둔탁하게 위로 솟구쳤다.

'여기가 최대 사거리인 건가.'

이안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경로를 틀어, 고대수를 중심으로 큰 원을 그리며 달리기 시작했다.

콰득! 콰앙!

뒤틀린 고대수의 아가리들이 이안의 등 뒤로 줄지어 떨어졌다.

저것들은 육식 나무처럼 민첩하진 않았지만, 훨씬 많고 거대했다.

꿈틀대는 촉수처럼 보이는 게 전부 놈의 아가리였다.

'실제로 보니까 더 개 같네.'

게임에서의 기억이 절로 겹쳐졌다.

놈에게 다가갈수록 더 많은 아가리가 떨어지고, 일정 거리부터는 뿌리도 솟구쳐 올랐다.

위아래로 정신을 쏙 빼놓는 합공.

거기다 어느 순간부터는 숙주들도 사방에서 몰려들었는데, 죽여도 죽여도 끝이 없었다.

고인 물이라면 모를까. 저놈은 무작정 덤벼들기만 해서는 이길 수 없도록 설계된 보스였다.

다른 몇몇 보스가 그렇듯, 놈을 죽이려면 약점들을 찾아내 공략해야 했다.

물론 지금이라면 정면승부로도 어떻게든 죽일 수는 있겠지만.

'뻔히 약점을 아는데, 굳이.'

늘 그랬듯, 쉬운 길을 두고 돌아갈 생각 따윈 없었다.

이안은 아공간에서 기름 주머니를 꺼내, 그대로 기름을 흩뿌리며 달리기 시작했다.

아가리들이 땅을 헤집어 놓았지만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놈들도 기름을 머금을 테니 더 좋았다.

주머니가 비면 곧바로 다음 주머니를 꺼내 뿌리는 것의 반복.

그렇게 아공간에 있던 주머니를 다 꺼냈을 때쯤, 앞에 움푹 파인 구덩이가 나타났다.

처음 떨어진 아가리가 만든 흔적.

구덩이를 펄쩍 뛰어넘으며, 이안은 기름이 남은 주머니를 뒤로 던지고는 오른손을 뻗었다.

손아귀에서 불덩이가 솟구쳤다.

기초 적색 마법, 화염구.

퍼엉-!

주머니에 적중해 폭발한 화염구가 사방에 불꽃을 흩뿌렸다.

화르르-!

땅에 덮인 기름에 불이 붙고, 순식간에 사방으로 번져 나갔다.

콰직! 쿠웅!

그 위로 떨어진 아가리들에도 마찬가지였다.

불붙은 아가리들이 되돌아갔다.

사위가 밝아지는 가운데 불길 사이를 내달린 것도 잠시.

호오오오-!

뿔피리 소리 같은 괴성이 울려 퍼지더니, 연달아 이어지던 아가리들의 공격이 거짓말처럼 멎었다.

이안이 비로소 속도를 줄였다.

"약점이 없어졌나 했네…."

숨을 고르며 읊조린 그가 시선을 돌렸다. 그의 눈동자에 뒤틀린 고대수의 본모습이 맺혔다.

놈은 나무라기보단 거대한 검은 말미잘에 가까워 보였다.

높고 굵은 둥치 곳곳에 타르 같은 점액을 뚝뚝 흘리는 구멍들이 뚫려 있었고.

그 위로는 수없이 돋은 가지들이 멋대로 휘청대며 서로에게 불을 옮겨붙이는 중이었다.

어찌 보면 당연하게도, 저게 고대수의 첫 번째 약점이었다.

자신에게 일정 이상 불이 붙으면 공격을 멈추고 진화 과정에 돌입하는 것이다.

불이 약점인 건 머잖아 몰려들 숙주들도 마찬가지.

게임을 플레이하며 읽은 공략에는 등유를 충분히 챙겨가서 불을 지르고, 아가리도 같은 방식으로 처리하라고 되어 있었다.

두 번째 약점에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만들기 위해서.

물론 저놈을 상대할 당시의 이안은 그런 꿀팁까진 알지 못했다.

대신 그는 더 간단하고 무식한 방법을 택했었다.

몇 개의 적색 마법에 스킬 포인트를 더 투자한 것이다.

'생각해 보니까 그때부터 망캐 테크를 타고 있었…. 찾았다.'

고대수의 주위를 돌며 관찰하던 이안의 눈이 번뜩였다.

둥치 곳곳에 뚫린 구멍.

그중 하나에서 희미하게 번져 나오는 자줏빛을 확인했으니까.

정확한 이름까진 알지 못했지만.

저게 뒤틀린 고대수의 두 번째이자 가장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쓸데없이 높이도 있다, 진짜.'

혀를 차며, 이안은 고대수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뒤틀린 고대수가 가까워졌다.

오오오….

울려 퍼지던 괴성이 불현듯 잦아든 건, 검을 거꾸로 쥔 이안이 둥치를 향해 도약한 순간이었다.

푸화악-!

둥치에 뚫린 모든 구멍에서 잿빛 수증기가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

수증기는 단숨에 가지들을 집어삼키고, 달려들던 이안까지 덮쳤다.

바닥을 나뒹군 이안은 놓친 검을 주울 새도 없이 고개를 들었다.

수증기 너머, 여러 개의 아가리가 활처럼 휘어지고 있었다.

곧 일제히 떨어져 내리리란 신호.

하지만 이안은 피하는 대신 왼손을 위로 내뻗었다.

'도대체 언제 끄나 했다, 새꺄.'

이 순간을 대비하고 있었으니까.

휘이이-!

손바닥 한복판의 정수가 회전하기 시작했다.

어떤 마법을 쓸 것인지는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하위 적색 마법, 화염 방사.

불길을 직선으로 뿜어내는 단순한 마법이었지만, 그런 만큼 변수가 적고 효과도 확실했다.

'사거리가 단점이지만 정수가 있으면 충분히…. ...?!'

이안의 눈이 불현듯 커졌다.

휘아아아아-!

정수 내부에 중첩된 마력이 맹렬하게 회전한다 싶더니, 그의 마력을 빨아들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멈출 수도 없었다.

'이런 미친…?'

순식간에 눈앞이 아찔해질 정도의 마력이 빨려 나간 다음 순간.

콰아아아아-!

붉게 물든 정수에서, 용의 숨결을 방불케 하는 샛노란 불길이 터져 나왔다.

#021화

사방이 일순간 대낮처럼 밝아졌다.

숨이 턱 막히는 열기와 함께, 이안이 뒤로 주르륵 밀려났다.

콰르르르-

끝없이 뿜어져 나가던 불길이 이윽고 잦아들었다.

이안이 비틀대며 얼굴을 감쌌다.

"아오 내 눈, 시발…."

양손으로 압력을 버티느라 눈을 가릴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마력 소모로 인한 두통과 배신감이 뒤를 이었다.

정보창의 불친절한 문구에 또 뒤통수를 맞은 셈이었기 때문이다.

정수 내부의 마력으로 마법을 증폭시키는 건 줄 알았더니.

착용자의 마력을 빨아들여 증폭시키는 방식이었을 줄이야.

'게임에선 안 이랬던 것… 아.'

이안은 그제야 게임에서도 정수만 단독으로 사용한 적은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날강도나 다름없는 사제들 덕분에, 정화 비용을 감당할 수 있을 때쯤엔 이미 유물과 마법 무구를 잔뜩 착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중에는 마석이나 정수가 없으면 제 성능을 내지 못하는 것들도 있어서, 정수를 굳이 단독으로 쓸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럼 그것들이 정수의 컨트롤러 역할까지 한단 건가.'

충분히 가능성 있는 추측이었다.

게임의 설정이 억지스럽게라도 나름의 이유를 가지게 된 경우를, 이미 여러 번 경험하지 않았던가.

정수 내부에 중첩된 마력처럼.

자연스럽게 정수를 다시 손에 쥔 이안의 미간이 또다시 좁아졌다.

정수 내부의 마력 밀도가 현저히 낮아져 있었다.

'템에 장착하면 50번은 쓸 수 있었던 것 같은데.'

개 아깝네.

정수를 아공간에 되돌린 그가 고개를 들었다.

시력이 어느 정도 되돌아왔다.

눈을 깜빡이며 초점을 맞춘 것도 잠시.

"허…."

뒤틀린 고대수의 상태를 확인한 이안의 입가에 헛웃음이 번졌다.

놈은 거의 통구이가 되어 있었다.

화염이 관통한 아가리와 가지들은 달궈진 숯덩이처럼 변했고.

화르르-

주위의 가지들은 제대로 꿈틀대지도 못하고 타들어 가는 중이었다.

아나콘다를 방불케 하는 뿌리들만 땅을 헤집으며 고통을 호소했다.

"…등유 괜히 챙겨왔네."

어차피 이렇게 될 거였음 냅다 마법부터 갈겨 볼걸.

허탈하게 읊조리며, 이안은 아공간에서 검을 꺼내 들었다.

이제 저 불쌍한 마물의 고통을 덜어 줄 차례였다.

***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미구엘이 읊조렸다.

말들이 불안하게 투레질하고, 주위로 썰리고 불탄 숙주 몇 마리가 널브러져 움찔대고 있었지만.

그는 숲 저 너머의 밤하늘만 멍하니 응시할 따름이었다.

한 시간쯤 전.

콰아아-

굉음과 함께 웬 불기둥이 밤하늘을 밝히며 솟구쳤었기 때문이다.

그 후로부터는 그저 희미한 빛무리만 일렁이고 있었지만.

"분명히 형씨 작품인데."

그는 여전히 시선을 떼지 못했다.

"기름으로 뭔 짓을 해야…."

읊조리던 미구엘이 굳어졌다.

저벅대는 발소리가 희미하게 귀를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졸라게도 머네, 진짜…."

지친 목소리. 숨까지 참고 있던 미구엘이 비로소 내뱉었다.

"이안…? 댁이시오?"

풀숲을 헤치고 이안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래."

미구엘이 허물어지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가, 간 떨어질 뻔했잖소! 그보다, 저기서 대체 뭘 하신 거…?"

횃불을 비춘 미구엘이 다시금 말을 멈췄다.

이안이 잿더미에서 뒹굴다 온 것 같은 몰골이었기 때문이다.

"그… 괜찮소?"

"괜찮겠냐?"

가뜩이나 찜찜해 죽겠는데, 시발.

미간을 구기며 대꾸한 이안은, 뒤틀린 고대수의 최후를 떠올렸다.

놈의 약점에 칼을 꽂은 순간.

원념 가득한 비명과 함께 마력 폭발이 일었다.

크게 위험하진 않았지만, 놈이 통구이 상태였다는 게 문제였다.

충격으로 숯덩이가 된 부분들이 떨어지면서, 사방이 연막탄을 터뜨린 것처럼 개판이 돼 버린 것이다.

뒈질 거면 좀 곱게 뒈질 것이지.

혀를 찬 이안이 멈춰 섰다.

"물."

"...?"

"물 내놓으라고."

미구엘이 잽싸게 움직였다.

그가 내민 수통을 받아 한 모금을 마신 이안은, 나머지로 대충 얼굴과 장갑을 씻으며 덧붙였다.

"자리 계속 지키고 있어. 뭔가 나타나면 태우든 썰든 알아서 하고."

"알겠…."

미구엘은 이안이 자신을 그냥 지나치자 뒤늦게 고개를 돌렸다.

"그, 그게 끝이오? 더 하실 말씀 같은 건 없으시고?"

"없어. 닥치란 것 빼고는."

"...."

이안은 필립에게 다가갔다.

횃불을 든 필립은, 이안이 나타난 순간부터 똥 마려운 강아지 같은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안은 그의 발치에 주저앉은 메브를 내려다보며 멈춰 섰다.

땅에 박은 검에 몸을 기댄 그녀는 간헐적으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냐?"

"그게… 나리께서 이리되신 건 저도 처음 봤습니다. 지병이 있으신 것도 아니고요."

필립이 메브를 내려다보았다.

"필시 뭔가에 중독되신 거겠지요. 흑마법은 아닐 테니."

"흠."

이안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답지 않게 합리적인 추론이었다.

메브는 티르 엔의 사도니까.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신성력에는 기본적으로 부정한 것을 태우는 힘이 있었다.

어지간한 흑마법이나 저주는 범접조차 할 수 없을 터.

하지만, 전투의 여운이 남아 아직 날카로운 이안의 감각은 전혀 다른 느낌을 전해 주고 있었다.

묘한 이질감과 불쾌함.

오염된 마력인가?

이안이 다시금 메브의 전신을 자세히 훑어보려는 찰나.

"그냥 제게 맡겨 주십시오, 나리."

필립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횃불을 땅에 세운 그가 품에서 단검을 뽑아 들며 덧붙였다.

"이거면 금방 편해지실 겁니다."

이안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그걸로 뭘 어쩌게?"

"모르십니까? 상처를 내서 오염된 피를 빼내는 겁니다. 오염된 피가 스스로 극복하실 수 있을 만큼만 남을 때까지, 충분히요."

"...."

이게 또 뭔 미친 소리야…?

이안의 표정을 오해했는지 필립이 말을 이었다.

"물론 피를 한 번에 너무 많이 잃으면 위험하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결국 피는 매번 소모되고 다시 만들어지는 거잖습니까. 믿어 주십시오. 전 이미 국경에서 이 시술을 여러 번 해 봤습니다."

"하…."

이안은 결국 이마를 감싸 쥐었다.

이 암흑시대의 의료 지식이란 게 얼마나 야만스러운지 새삼 깨닫게 된 것이다.

온갖 마법과 신비, 신성까지 실존하는 세상인 만큼, 의학 지식의 발전이 더딘 게 당연하겠지만.

막상 역사책에서나 볼 법한 개소리를 듣게 되자 밀린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오는 기분이었다.

"…넣어 둬라. 경이 돌아가시는 걸 보고 싶지 않다면."

"달리 생각이 있으신 겁니까?"

이안이 대답하려던 그때.

"이안…?"

메브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번졌다.

"왔구나… 기다렸다…."

간신히 덧붙인 그녀가, 기대고 있던 검 자루에 손을 가져갔다.

이안의 시선이 검을 쥐는 그녀의 왼손으로 향했다.

덜덜 떨리는 팔. 그리고 긁힌 흔적이 올올이 남은 팔목 보호대.

이안의 눈매가 가늘어지는 사이, 필립이 허둥대며 말했다.

"아, 아직 움직이시면 안 됩니다, 나리. 나리께선 지금-"

"아니, 아니다. 이제 괜찮다. 이만하면 충분히… 우웩…."

갓 태어난 사슴처럼 바들대던 그녀가 피를 토하며 주저앉았다.

"나, 나리!"

필립이 철렁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대답조차 하지 못한 채, 메브가 다시 몸을 일으키려 했다.

"쉬시오."

그녀의 어깨를 지그시 누른 건 이안이었다.

"마물은 이미 다 처리했으니."

"그런가… 또 네 도움을...."

메브의 몸에 힘이 탁 풀렸다.

기울어지는 그녀의 몸을 받아들며, 이안이 필립을 돌아보았다.

"경의 왼팔 보호대를 벗겨라."

"예…? 아, 예!"

필립이 허둥지둥 움직였다.

넋이 나간 중에도 익숙한 손길.

곧 메브의 왼팔이 드러났다.

"맙소사… 루 솔라여."

"역시. 그때의 상처군."

뱀이 칭칭 감은 듯한 흔적.

고름이 가득 차 부은 데다, 주위가 검게 물들어 있기까지 했다.

툭툭 불거진 핏줄들이 불길하게 꿈틀댔다.

"나리께서 언제 이렇게 되신 건지… 알고 계신 겁니까?"

"둘라한에게 입은 부상이다."

혀를 찬 이안이 덧붙였다.

"갑옷과 신성력이 막아 준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군."

사실, 이 숲이 검은 벽의 광기에 물든 것만큼이나 의아한 일이었다. 둘라한 따위의 원한이 아무리 깊게 남았다 한들, 신성력을 이길 만큼 강할 리는 없었으니까.

어쨌든 지금 중요한 건, 메브의 신성력으론 이 저주를 정화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이안의 뇌리로 문득, 간단한 해답이 스쳐 지나갔다.

'이거, 그냥 내가 루 솔라에게 기도하면 해결되는 거 아닌가?'

빛의 신의 신성이라면 어떤 저주라도 정화할 수 있을 테니까.

물론 내키지는 않는 선택이었다.

그에게 러브콜까지 보냈던 만큼 큰 힘을 내려주긴 하겠지만.

그러고도 부름을 거절한다면 이번에야말로 천벌이 내리리라.

"쯧…."

이윽고 혀를 찬 이안이, 양손을 가슴 앞에 깍지 껴 모아 쥔 순간.

꿈틀-

오른손에서 무언가 움직였다.

멈칫하는 이안의 뇌리로 원초적인 속삭임이 이어졌다.

유일 등급의 반지, 늪지의 원한.

이안의 사역마이기도 한 놈이, 불현듯 사념을 보내온 것이다.

이안의 미간이 좁아졌다.

'네가 삼킬 수 있다고?'

정보창에 그런 내용은 없었는데.

…하긴. 그게 전부는 아니지.

이안은 이윽고 어깨를 으쓱였다.

그는 정보창이 전지전능하지 않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거기다 애초에 늪지의 원한은 둘라한의 본체나 다름없던 놈.

놈의 저주를 거둬들일 수 있다 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

'할 수 있는데 왜 가만히 있었냐?'

간단한 대답이 돌아왔다.

명령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이안의 몸에 신성이 깃드는 것은 달갑지 않았으니, 그전에 의사를 표현한 것이다.

나만 신을 싫어하는 게 아니었군.

뜻밖의 공통점에 실소하며, 이안은 장갑을 벗었다.

"경의 팔을 꽉 잡아라, 필립."

"알겠습니다… 만. 뭘 하시려고요?"

"치료."

"어떻게요?"

이안은 대답 대신 오른손을 메브의 팔 위로 내밀었다.

스륵-

중지의 반지가 살아 움직였다.

필립의 눈이 커졌다.

"그, 그게 뭡니까? 그냥 반지가 아니라고요?"

"둘라한이 남긴 원념이다. 지금은 내게 복속된 사역마고."

필립의 미간이 천천히 구겨졌다.

"마물이란… 말씀이십니까?"

"왜. 문제 있냐?"

"왜 없겠습니까! 타락한 자들이나 마물을 가까이하는 법입니다! 하물며 종으로 부리시다니요!"

뭐라는 거야.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그만이지.

코웃음이 절로 나왔지만, 저 편협한 시각이야말로 이 세계의 보편적인 통념이었다.

이 암흑시대 인간들의 기준에선 이안의 실리적인 사고방식이 오히려 불경스러운 것이다.

"그걸 나리께 사용하신다면 분명, 여신께서도 진노하실 겁니다."

듣고 있던 이안이 툭 내뱉었다.

"사도가 죽도록 두는 것보다 더?"

"예…? 어, 그건, 글쎄요…."

필립이 말문이 막힌 듯 더듬댔다.

이안이 덧붙였다.

"네 눈엔 내가 타락한 것 같냐?"

"그래 보이진… 않습니다만."

"그럼 아가리 닥치고 팔이나 잡아. 한마디만 더 하면 내 진노가 뭔지부터 알게 해 줄 테니까."

"...."

입술을 떨던 필립이 마지못한 표정으로 메브의 팔을 움켜쥐었다.

검은 실뱀이 기다렸다는 듯 메브의 팔 위로 떨어졌다.

고름 위를 기어간 놈이 상처 한복판을 콱 깨물었다.

검은 핏물이 뭉근하게 번졌다.

번진 피가 선이 되어 흘러내릴 때쯤, 필립의 눈이 커졌다.

"벼, 변화가 있습니다, 나리!"

검은 자국이 가장자리부터 눈에 띄게 희미해진 것이다.

쉬익- 몇 분 지나지 않아, 늪지의 원한이 만족스러운 숨소리와 함께 아가리를 뗐다.

비늘의 윤기가 더해졌을 뿐 겉모습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지만.

메브의 팔을 덮었던 검은 자국은 완전히 사라진 상태였다.

물론 뱀이 기어간 듯한 흔적과 고름이 가득 찬 환부는 여전했지만.

'일단 고비는 넘긴 것 같군.'

적어도 육감을 자극하던 불길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정말로 이 마물이 나리를 치료할 수 있었던 거군요."

그렇다니까, 새꺄.

콧방귀를 뀐 이안이 다시 손을 내밀었다.

샤아-!

늪지의 원한이 송곳니를 드러낸 건 그때였다.

필립이 화들짝 뒤로 몸을 젖혔다.

"왜, 왜 이러는 겁니까?!"

"글쎄."

이안은 태연하게 원한의 아가리 앞으로 계속 손을 가져갔다.

놈과 이안의 시선이 교차했다.

이안이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또 해 봐, 어디.'

대치는 짧았다.

이안의 손끝이 닿은 순간 놈의 아가리가 스르륵 닫힌 것이다.

그대로 손가락을 타고 기어 올라간 놈이, 반지의 형태로 돌아갔다.

필립이 꺼림칙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거 정말 괜찮은 겁니까…?"

"길들인다고 본성까지 사라지진 않는 법이지."

아무리 닥치라고 해도 떠들어 대는 네놈처럼.

"단검이나 내놔. 가방에서 붕대랑 술도 꺼내 오고."

"술은 어째서…. …예, 나리."

이안의 눈빛에 입을 다문 필립이 단검을 건네며 일어섰다.

이안은 단검 날을 횃불에 지졌다.

어떤 의미론 이제부터가 진짜였다.

"가져왔습니다, 나리!"

필립이 붕대와 술병을 들고 돌아왔다.

이안은 술병의 마개부터 열었다.

코끝을 찌르는 독한 냄새.

다행히 맥주보단 럼에 가까웠다.

이안은 술로 손을 씻었다.

'이게 정말 영화에서처럼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안 하는 것보단 낫겠지.

"경의 팔을 꽉 잡아라, 필립."

환부 끝에 단검 날을 가져다 댄 이안이 속삭였다.

"좀 아플 거요."

검을 쭉 그은 건 거의 동시였다.

끈적한 피와 고름이 번져 나왔다.

곧바로 단검을 내려놓은 이안은, 양손으로 환부를 힘껏 쥐어짰다.

"...!"

메브의 몸이 발작적으로 꿈틀댔다.

하지만 이안, 그리고 자신이 아픈 것처럼 오만상을 찌푸린 필립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순 없었다.

이윽고 이안이 술병을 들었다.

피와 고름이 흥건한 팔뚝 위로 술이 쏟아졌다.

메브의 허리가 활처럼 휘어졌다.

"흐윽…!"

쫙 편 그녀의 손이 덜덜 떨렸다.

이안은 묵묵히 남은 피고름을 전부 닦고 환부를 천으로 싸맸다.

응급처치 스킬 덕분에 모든 과정이 제법 그럴싸했다.

이안이 손을 놓자 메브의 몸이 힘없이 축 늘어졌다.

"저, 정말 치료가 맞습니까? 제 눈엔 오히려 나리를 해치시려는 것처럼 보이는데요…!"

죽이려던 건 내가 아니라 너고.

코웃음 친 이안이 메브를 내려다보았다.

"정신이 드시오?"

안면 가리개 너머로 힘없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덕분에."

#022화

"나리…!"

필립이 눈을 치켜뜨는 가운데, 메브가 이안을 올려다보았다.

"의술에도 조예가 깊을 줄은 몰랐거늘… 고맙구나, 이안."

"전혀 깊지 않소. 어디서 본 대로 해 본 게 통한 것뿐이지."

농담이라 생각한 듯, 메브가 힘없이 웃었다.

"그렇다기엔…. …그래, 네 말이 그렇다면 그런 것이겠지."

메브가 검 자루를 움켜쥐었다.

비틀대며 일어선 그녀가 덧붙였다.

"보호대를 다시 씌워 다오, 필립. 싸우러 갈 것이다."

"예…?!"

필립이 화들짝 고개를 숙였다.

"재고해 주십시오, 나리!"

"...?"

"아직 몸을 다 추스르지 못하셨습니다. 상처가 덧나게 될 겁니다."

"검을 휘두르는 건 한 손만으로도 충분해. 나는 괜찮다."

"하지만-"

이안의 입가에 헛웃음이 번졌다.

또 이런 촌극을 보게 될 줄이야.

메브가 그를 돌아본 건 그때였다.

"너는 어찌 생각하느냐, 이안?"

"뭐… 일리는 있는 말이오."

이안이 턱을 긁적이며 말했다.

필립의 표정이 밝아졌다.

"옳으신 말씀이십니다!"

"…네 생각도 그러한가."

반대로 메브의 목소리에는 실망이 묻어나왔지만.

"뭐, 어차피 오늘 밤 경이 더 싸우실 일은 없겠지만."

이안의 말은 끝난 게 아니었다.

메브의 투구가 기울어졌다.

"그게 무슨 말이냐? 만일 또 네가 홀로 해결하겠다는 뜻이라면-"

"이미 다 끝났단 말이오."

"결국엔 같은 말- 뭐라고…?"

메브가 굳어지는 가운데, 덩달아 눈을 치켜뜬 필립이 말했다.

"그럼 아까 그 소란이, 오염의 원흉과 싸우시느라 일어난 거였습니까? 마물들이 아니라요?"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메브가 휘청댄 건 그 직후였다.

"또… 이렇게 된 것인가…."

부축하려는 필립의 손길을 밀어낸 그녀가 안면 가리개를 올렸다.

붉은 머리칼이 흘러내렸다.

메브는 입가의 핏자국도 닦지 않은 채 이안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된 것인지 들을 수 있겠느냐?"

"안 될 건 없소만…."

내가 다 하긴 귀찮은데.

시선을 돌린 이안은, 이내 적임자를 찾아냈다.

대화에 끼고 싶어 안달 난 표정의 남자와 눈이 마주쳤기 때문이었다.

"…전후 사정은 저 녀석에게 들으시는 게 편하실 거요."

미구엘이 냉큼 달려왔다.

"어디서부터 듣길 원하십니까요?"

메브가 진중한 표정으로 답했다.

"내가 쓰러진 직후부터."

"생각이 통하셨군요. 앉으십시오, 말씀드릴 게 많습니다."

미구엘이 손짓과 발짓까지 더해가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메브의 표정이 점점 더 무겁게 가라앉는 가운데, 잠시 말을 멈춘 미구엘이 이안을 돌아보았다.

"막판엔 불기둥과 비명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게 뭐였는지는, 형씨만 알고 있겠죠."

잘나가다가 끝에 사족을 다네.

이안의 눈빛에 날이 섰다.

재빨리 입을 다문 미구엘이 딴청을 피웠다.

머리칼을 쓸어넘긴 메브가 이안을 올려다본 건 그때였다.

"숲을 오염시킨 원흉의 비명이었겠지. 어떤 마물이었느냐?"

"고대수였소. 원한이 아주 깊어 보이더군."

"원한에 광기가 스며든 것인가…."

"아마도."

"그럼 불기둥은요?"

필립이 불쑥 끼어들었다.

이안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들었을 텐데, 등유를 챙겨 갔다."

"기름을 태운 거였다고요? 그렇다기엔 불길이 지나치게 컸는데요. 안 그렇습니까, 미구엘?"

"당연히 그건 말도 안-"

대답하다 멈칫한 미구엘이, 이안의 눈치를 살피고는 말을 이었다.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분명 형씨만의 비결이 있을 거요. 생각해 보면, 전에도 형씨가 불을 질러서 의뢰를 해결한 적이 있었소. 그때도 대단했지."

"그렇습니까…?"

"중요치 않은 호기심이다, 필립."

미심쩍은 표정으로 되묻는 필립의 말을 메브가 잘랐다.

그녀는 죄책감마저 느껴지는 눈빛으로 이안을 바라보았다.

"정말 중요한 것은 그토록 위험한 마물을 이안 홀로 퇴치했다는 사실이지. …또다시 말이야."

"뭐, 내 입장에도 아예 밑지는 장사는 아니었소."

어깨를 으쓱인 이안이 품에서 손바닥만 한 무언가를 꺼냈다.

"전리품도 챙겼으니까."

미구엘이 인상을 찌푸렸다.

"씨앗… 이오?"

"그래."

"이렇게 큰 씨앗은 처음 보는데."

"그렇겠지."

이안은 손아귀를 내려다보았다.

"이건 고대수의 씨앗이니까."

그의 눈앞에 정보창이 떠올랐다.

게임일 때의 정보와 같았다.

섭취 시 추가 스킬 포인트.

그런데도 곧바로 먹어 치우지 않은 것은, 이 씨앗에는 사실 숨겨진 연계 퀘스트가 있기 때문이었다.

이 옵션은 일종의 미끼인 셈.

예전에는 미끼를 물었었지만, 이번엔 그러지 않을 생각이었다.

'퀘스트 보상이 뭔진 모르지만, 그냥 먹어 버리는 것보단 낫겠지.'

필립이 떨떠름하게 말했다.

"고대수의 씨앗이라면… 그것도 오염되지 않았을까요?"

"상관없어. 그래 봐야 씨앗일 뿐이니까. 땅에 파묻기 전까진 별일 없을 거다."

"흐음…."

필립과 메브가 침음하는 사이.

"그럼, 이제 여기서 볼 장은 다 본 것 아니오?"

미구엘이 툭 끼어들었다.

일행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에게 집중됐다.

"오염의 원흉을 없애려고 이 빌어먹을 숲까지 들어온 거잖습니까. 처리했으니 원래 가려던 길을 가면 되는 거… 아닌가 싶어서…."

부담스러운지 자라처럼 점점 목을 집어넣으며 미구엘이 말을 마쳤다.

필립이 손뼉을 친 건 그 직후였다.

"아주 훌륭한 지적입니다! 이제 이 불길한 숲에 있을 이유가 없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나리? …나리?"

필립이 고개를 돌렸다.

메브의 얼굴을 확인한 그가, 설마 하는 표정으로 눈을 깜빡였다.

"나리…?"

"틀린 말은 아니다."

이윽고 메브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 원흉을 조사하면,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된 원인이 무엇인지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지."

"...."

필립의 입이 벌어졌다. 미구엘도 루 솔라를 읊조리며 얼굴을 감싸 쥐었다.

당황하지 않은 건 이안뿐이었다.

그는 오히려 길에 떨어진 금화를 발견한 것 같은 눈빛으로 메브를 바라보고 있었다.

메브가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허락을 구하는 게 순서 같군.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안?"

필립과 미구엘이 간절한 눈빛을 보내는 가운데, 이안이 대답했다.

"원흉을 제거했다 해서, 숲이 정화된 건 아니오. 저 너머엔 아직도 마물이 있다는 뜻이지."

두 남자의 얼굴에 희망이 번졌다.

이안이 태연하게 덧붙였다.

"그러니 오늘은 여기서 자고, 내일 해가 뜨면 갑시다. 그편이 조사하기에도 편하지 않겠소?"

"아니, 나리!"

필립이 뒤통수를 맞은 듯한 표정으로 외쳤다.

미구엘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이번엔 루 솔라를 찾는 대신, 체념의 탄식만 남긴 채였다.

"옳은 말이군. 알았다. 그러지."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인 메브가 곧바로 필립을 돌아보았다.

"야영을 준비하거라. 필립."

"…알겠습니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답한 필립이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이안은 해탈한 미구엘을 돌아보았다.

"넌 불침번을 서라."

미구엘의 눈이 번쩍 뜨였다.

"내가? 밤새 말이오?!"

"싫으면 싸우는 걸 네가 하든지."

"…둘이 나눠 서겠단 말이었소. 필립! 댁이 내 뒤에 서쇼!"

미구엘이 후다닥 달려갔다.

비로소 땅에 주저앉은 이안은, 메이스를 벗어 버리고 드러누웠다.

이제야 좀 살겠네.

그가 숨을 내쉴 찰나.

"…그냥 돌아갔어도 괜찮았거늘."

곁에 앉은 메브가 문득 말했다.

피식한 이안이 대답했다.

"나중에 다시 들를 생각이셨잖소. 그럴 바엔 그냥 함께 가는 게 효율적이지."

선심 쓰듯 말하긴 했지만, 메브의 제안은 그에게도 달가운 것이었다.

시간이 촉박해서, 씨앗만 챙기고 도망치듯 빠져나왔었으니까.

어쩌면 전리품을 더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의 그런 속내를 알 리 없는 메브는 감명받은 듯 탄식했다.

"내일은 내가 선두에 서겠다. 이것까지 사양하진 않았으면 좋겠군."

"편할 대로 하시오."

어차피 싸울 일도 거의 없을 테니.

뒷말을 삼킨 이안은, 더 덧붙이는 말 없이 눈을 감았다.

정말이지 더는, 손가락조차 까딱이고 싶지 않았다.

***

다음 날. 돌아가는 길은 이안의 예상대로 수월했다.

숲이 정화된 것은 아니었으나, 남은 마물 대다수가 햇빛을 피해 숨어든 덕분이었다.

육식 나무 정도만을 간간이 처리하며 나아가길 한 시간여.

"이런… 미친…."

일행은 오염의 중심부에 도착했다.

이안이 그 사실을 알려 줄 필요도 없었다.

"개판일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소."

일대가 온통 잿빛이었을 뿐만 아니라, 불쑥 솟은 고대수의 잔해가 한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사방에 불을 지르신 겁니까? 용케도 불이 번지지 않았군요."

파이고 뒤집힌 흔적이 가득한 땅에 발을 딛으며 필립이 말했다.

"이곳이 먼 과거, 요정들의 숲이었기에 그런 것이다. 필립."

앞서 걷던 메브가 안면 가리개를 올리며 답했다.

"요정이 살던 숲의 나무는 좀처럼 불에 타지 않지. 그래서 왕국의 많은 요새와 진지가 요정들이 살던 숲에 지어진 것이다. 몰랐느냐?"

"처음 알았습니다. 그랬군요…."

"아마 이안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불을 지른 것이겠지."

전혀 몰랐는데.

이안은 어깨만 으쓱였다.

말을 묶어 둔 미구엘이 꺼림칙한 눈빛으로 고대수를 바라보았다.

"저거 진짜 죽은 게 맞소? 꼴로 봐선 통구이가 된 것 같긴 한데. 더럽게 불길하게 생겨서 말이오."

이안이 그를 돌아보았다.

"그걸 왜 나한테 물어?"

"그럼 누구한테 물으란 거요?"

"놀러 왔냐?"

"이, 일하러 왔지. 확인하겠소."

미구엘이 곧바로 몸을 돌렸다.

덩달아 시선을 받은 필립도 한숨을 내쉬며 그 뒤를 따랐다.

"뭘 찾아내든 보고부터 해라."

그들의 등에 대고 덧붙인 이안의 걸음이, 비로소 한결 느긋해졌다.

초과 근무는 어젯밤으로 충분했다.

오늘은 굿이나 보고 떡이나 얻어먹을 생각이었다.

메브가 그의 곁에 나란히 걸었다.

생각에 빠진 표정으로 걸음을 옮기던 그녀가 불쑥 내뱉었다.

"아무래도 흑마법사의 원한을 산 자가 또 있는 것 같다. 이안."

이안이 고개를 돌렸다.

"그게 무슨 말씀이시오?"

"어제, 정수의 오염된 마력이 날 잠식했었다. 난 의식을 겨우 붙잡고 있던 터라 저항할 수 없었지."

그런 일이 있었다고…?

이안이 슬쩍 눈썹을 치켜드는 가운데, 그녀가 말을 이었다.

"놈의 존재가 느껴지더군. 웃음소리도. 그리고는 살고 싶다면 여기서 발길을 돌리라고 속삭였다."

"…경을 오염시키려 한 게 아니라 경고를 했단 말이오?"

"나 역시 이해할 수 없지만… 그랬다. 각자에겐 각자의 역할이 있으니, 주제넘은 짓은 멈추라더군."

각자의 역할이라….

이안의 미간이 비로소 풀어졌다.

게임의 메브를 떠올렸기 때문이다.

그녀를 피 흘리는 복수자로 만든 것은 왕국의 흑막.

흑마법사도 한통속일 테니, 뭔가 알고 있는 것이리라.

"…그래서. 원한을 산 자가 또 있다지 않으셨소?"

"그래. 주제넘은 건 적색 나부랭이만으로도 충분하다고 했으니까. 놈은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는 게 마지막 말이었다."

"...."

이안의 눈썹이 슬쩍 올라갔다.

"적색… 아마도 마법사를 뜻하는 것이겠지. 누군지 알아낼 수 있다면 앞으로 도움이 될지도 몰라."

그녀를 바라보던 이안의 입가에 비로소 헛웃음이 맺혔다.

'그게 나일 거란 생각은 죽어도 못 하는 거군.'

숯덩어리가 된 고대수를 눈앞에 두고도 말이지.

이안의 미소를 오해한 듯 메브가 덧붙였다.

"뭔가 부탁하려 꺼낸 말이 아니다. 이안. 내가 알게 된 사실을 네게도 알려 주고 싶었을 뿐이야."

"그러시다면야. 알아 두겠소."

이안이 고개를 끄덕일 찰나.

"형씨! 좀 와서 보셔야겠소!"

미구엘의 외침이 이어졌다.

메브의 시선이 돌아갔다.

"뭔가 찾은 모양이군."

"먼저 가 보겠소. 천천히 따라오시오. 뭔가 나오면 알려 드릴 테니."

태연하게 말한 이안이 몸을 돌렸다.

'그 새끼가, 눈치를 깠단 말이지.'

방금 들은 이야기를 곱씹으면서.

***

고대수 둥치 뒤편.

"시부럴… 아침부터 재수 없게."

"인간 사냥이라도 한 걸까요?"

미구엘과 필립의 목소리는 거대한 뱀처럼 뻗어 나온 두 갈래의 뿌리 사이에서 들려왔다.

"사냥은 무슨. 이 흔적들을 보시오. 땅속에 묻혀 있다가 드러난 거요. 먹은 걸 파묻는 짐승도 있소?"

확실히 전리품은 아니네.

이안은 혀를 차며 뿌리 사이로 들어섰다.

"뭐냐?"

미구엘이 그를 돌아보았다.

"시체가 나와서 말이오."

"그게, 숫자가 좀 많습니다, 나리."

필립이 옆으로 비켜서며 덧붙였다.

그들이 보던 광경이 드러났다.

뿌리가 파헤친 땅 위로, 다 썩은 시체들이 삐죽삐죽 솟아있었다.

"확실히… 많군."

그 앞에 선 이안이 읊조렸다.

게임의 기억이 희미하게 이어졌다.

고대수 주위의 반쯤 묻힌 시체들.

하지만 아직 숲이 다 오염되지도 않은 지금 시점에 시체 더미라니.

'내가 모르던 설정이 있는 건가.'

유골을 관찰하기 시작한 이안을 바라보며, 필립이 물었다.

"나리가 보시기에도 사냥당한 게 아닙니까?"

"그래. 그보단… 제물 같은데."

"제물이라니요?"

"이상했거든. 이렇게 거대한 고대수가 숲 한복판에 있는데, 지금까지 알려진 적이 없다는 게. 누군가는 발견할 법도 한데 말이야."

이안의 눈동자가 한곳에서 멈췄다.

미구엘이 인상을 구기며 물었다.

"그럼 누군가가 이 빌어먹을 마물을 키우려고 시체를 바쳤단 거요?"

"모르지. 정황상 그쪽이 더 자연스럽다는 것뿐."

이안이 허리를 숙였다.

그는 곧 유골 사이, 땅에 반쯤 파묻혀 있던 무언가를 집어 들었다.

흙범벅이 된 묵직한 쇠고리.

그가 고리에 묻은 흙을 터는 사이, 뒤에서 메브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뭔가 나왔느냐?"

"경께서 찾으시던 단서인지는 모르겠소만…."

이안이 손에 든 것을 던졌다.

"이런 게 나왔소. 시체 사이에서."

반사적으로 받아든 메브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고리 한쪽을 장갑으로 긁으며 다가온 메브가 이윽고 멈춰 섰다.

"설마 했거늘. 왕국의 수갑이 맞군. 인장이 남아 있다."

메브가 수갑을 내밀었다.

고리를 고정하는 부분에, 흐릿한 사슴뿔 문양이 드러나 있었다.

필립이 어리둥절하게 물었다.

"이 시체들이… 전부 왕국의 죄인이란 말씀이십니까?"

"그건 이제부터 확인해 봐야지."

이안이 시선을 돌렸다.

"네가 잘하는 걸 할 시간이다, 미구엘."

"그게 뭔. …설마, 진심이시오?"

이안이 고개를 까딱였다.

한숨 쉰 미구엘이 몸을 돌렸다.

"삽 챙겨 오겠소…."

#023화

유골이 땅에 줄지어 놓였다.

발굴이 끝나지 않았음에도 열 구가 훌쩍 넘었고 온갖 유품도 줄줄이 딸려 나왔다.

"...."

그것들을 바라보는 메브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흙범벅이 된 해골에, 아우인 버논의 얼굴이 겹쳐졌기 때문이다.

'…아니. 아닐 것이다. 그럴 리가.'

곧바로 부정했지만, 이미 떠오른 생각을 떨치기란 쉽지 않았다.

차라리 어둠과 맞서다 장렬히 전사한 것이라면 모를까.

이렇게 이름 모를 마물의 양분으로, 구원조차 받지 못하고 있다면.

혹은 어둠 속에 버려져 끝끝내 시신조차 찾을 수 없는 상태라면.

'만약 그렇다면….'

까드득, 그러쥔 주먹에서 쇠 긁히는 소리가 번졌다.

'내 모든 것을 걸어서라도-'

그녀의 눈동자가 늪에 가라앉듯 칙칙하게 일그러지던 그때.

"보면 볼수록."

이안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건 우리가 찾는 놈의 소행은 아닌 것 같은데."

퍼뜩 정신을 차린 메브가 시선을 돌렸다.

평소와 다름없는 심드렁한 얼굴로, 손에 든 뭔가를 응시하는 이안.

필립이 눈을 끔뻑이며 물었다.

"흑마법사의 짓이 아니라고요?"

"일단 방식이 달라. 놈은 마력을 이용하지. 산 제물이 아니라."

"…그리고요?"

"이 시체들. 반 정도는 알다시피 죄인이지만, 나머지는 병사다. 아마 죄인을 호송하던 자들이겠지."

이안의 시선이 유골들을 훑었다.

"이 정도 규모의 정규군을 제물로 삼는 짓은 나 같아도 안 해. 심지어 그게 오른델의 영주군이면 아예 쳐다보지도 않을 거다."

"오른델… 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래."

이안이 손에 든 것을 내밀었다.

시신을 뒤지다 찾아낸 목패였다.

반쯤 썩어 인장은 흐려졌지만, 하단의 글자는 알아볼 수 있었다.

데이브. 오른델.

차근히 확인한 필립이 읊조렸다.

"정말이군요. 정규군에게만 발급되는 신분증이 맞습니다."

"숨어 사는 흑마법사가 건드리기엔, 위험 부담이 너무 큰 상대지."

묵묵히 듣고 있던 메브가 한결 차분해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설득력이 있는 말이군."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오. 아직은."

명패를 본 순간, 이안은 어렵지 않게 적당한 흉수를 떠올렸다.

그의 추론은 거기에 단서를 죄다 끼워 맞춘 것에 불과했다.

'표적 수사가 뭐 별건가.'

어차피 죽여야 할 자였으니, 틀렸다 해도 딱히 문제 되진 않으리라.

"그러니까…."

이안은 느긋하게 본론을 꺼냈다.

"직접 확인할 생각이오. 이게 사고인지, 누군가의 음모의 결과인지."

"직접 확인한다니?"

"아직 다음 계약의 목적지를 정하지 않으셨잖소."

"...!"

메브의 눈이 비로소 커졌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다음 계약이라니요?"

어리둥절하게 묻는 필립을 무시한 채, 이안이 말을 이었다.

"오른델에는 분명 이들을 아는 누군가가 있겠지.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뭐라도 나오지 않겠소?"

"…그래. 알았다. 그리 정하지."

메브가 고개를 끄덕였다.

결정은 항상 시원하시군.

덕분에 다음 행선지가 정해졌다.

이안이 만족스럽게 목패를 품에 넣는 사이.

"계약을 또 하셨다고요, 나리?"

필립이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필요한 일이었다, 필립. 보다시피, 흑마법사 말고도 배덕자들이 더 존재할 가능성이 있으니까."

"하지만 나리…."

"잡소리 그만하고 말이나 챙기러 가라, 필립."

이안이 말을 잘랐다.

"말이 죽으면 널 타고 갈 거니까."

"농담하실 때가 아닌 것 같습니다, 나리."

"...."

"농담이 아니시군요. 알겠습니다."

저건 언제쯤 눈치란 게 생기려나.

이안이 필립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혀를 차는 그때.

"그… 슬슬 말씀들 다 나누신 것 같은데 말이오."

헐떡이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구덩이 아래, 땀 범벅이 된 미구엘이었다.

"그만 파도 되겠소? 더 파도 나오는 게 없는 것 같은데."

옆에는 유골 더미가 쌓여 있었다.

일행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도 삽질을 계속한 결과물이었다.

이안은 메브를 슬쩍 돌아보았다.

그녀는 다시 유골들을 뚫어질 듯 응시하고 있었다.

못내 눈에 밟힌다는 듯이.

"경."

"...?"

뒤늦게 자신을 마주 보는 메브를 향해, 이안이 툭 덧붙였다.

"기도를 올려 주실 수 있겠소?"

메브의 눈이 커졌다.

"기도라고 하였느냐?"

"이들이 마물이 되어 되살아나도 이상하지 않잖소. 경이 안식에 들게 해 주시는 게 좋을 것 같소만."

"훌륭한 판단이다. 기꺼이 하지."

반색한 메브가 앞으로 나섰다.

구덩이 앞에 한쪽 무릎을 꿇은 그녀가 기도문을 속삭이기 시작했다.

이안은 푸른 신성력을 머금는 그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까 전, 유골을 응시하던 그녀의 일그러진 눈빛을 떠올리면서.

'알기 쉬워서 다행이라 해야 할지.'

이안이 볼 때 그건 틀림없는 광기의 징후였다.

기도를 부탁한 건 그래서였다.

신성으로 광기를 잠재우려고.

물론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이었다.

이미 균열이 일어난 이상, 아주 작은 계기로도 다시 시작되리라.

앞으로 남은 일들을 생각하면, 그런 계기는 차고도 넘쳤다.

고민에 빠진 것도 잠시.

이안의 눈동자가 평소의 냉랭한 그것으로 되돌아왔다.

'…그렇다고, 이렇게 공들인 퀘스트를 실패로 끝낼 순 없지.'

***

오염된 숲을 빠져나온 이후, 여정은 거짓말처럼 평화로워졌다.

며칠째 습격은커녕 마물과 마주치는 일조차 없었다.

하지만 모두가 평화를 즐기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

메브는 발작하듯 눈을 떴다.

그녀의 망막에, 피눈물을 흘리는 버논의 잘린 머리가 아른거렸다.

숨을 헐떡인 것도 잠시.

'이젠 이런 악몽까지 꾸는군.'

쓴웃음을 지은 메브가 이마의 식은땀을 닦았다.

먹구름 낀 하늘.

마차의 떨림이 비로소 느껴졌다.

'평화가 불안하다니. 이 무슨 어리석은 조바심인가.'

메브의 쓴웃음이 짙어졌다.

그녀의 시선이 문득, 등받이 너머의 마부석으로 돌아갔다.

메이스를 등에 멘 익숙한 뒷모습.

'뭔가 있다면, 이안이 가장 먼저 알아챘을 것이거늘.'

언젠가부터, 그녀는 자신보다 이안의 판단을 더 신뢰하고 있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 혼자서는 결코 여기까지 올 수 없었을 테니까.

필시 불안과 의문에 사로잡혀, 옳지 못한 결정을 내렸으리라.

지금까지 몇 번이나 그랬듯이.

하지만 반대로, 이안은 자신이 옳다는 것을 계속 증명해 왔다.

이 마차만 해도 그랬다.

짐수레에 더 가까운 이 마차는, 길가에 버려져 있던 것이었다.

미구엘은 이게 객사의 흔적이랬다.

습격이나 약탈이 휩쓸고 간 끝에 남겨진, 일종의 묘비라는 것이다.

불길하니 건들지 말자는 그의 말을 무시한 건, 당연히 이안이었다.

이게 더 효율적이라는 이유였다.

결과적으론 또 그의 말이 옳았다.

말의 부담이 줄면서 행군에도 속도가 붙었고, 일행도 교대로 쉬면서 체력을 보충할 수 있었으니까.

메브 역시 부상의 여파를 거의 떨쳐낸 상태였다.

'이러다 사사로운 감정에 휘둘려 대의마저 저버리게 될까 두렵군. 그러니 차라리, 앞으로도 내가 아니라 이안을….'

"깨셨소?"

그때, 이안이 불쑥 내뱉었다.

메브는 깜짝 놀랐지만, 내색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내가 얼마나 잠들었었지?"

"두어 시간쯤. 적당한 때에 일어나셨소."

이안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곧 무덤 숲에 도착할 거요."

"...!"

메브가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앙상한 나무들과 그 아래로 깔린 잿빛 안개.

"언제부터…. 왜 미리 알려 주지 않은 것이냐?"

"그, 그게 말입니다…."

미구엘이 난처한 얼굴로 우물댔다.

"내가 말하지 말라 했소."

대신 답한 건 이안이었다.

그가 메브를 돌아보며 덧붙였다.

"미리 아셨다면 지금처럼 쉬지 않으셨을 거잖소."

말려 올라갔던 메브의 눈썹 끝이 다시 내려앉았다.

"…그랬군. 알았다."

그녀가 머쓱하게 시선을 돌렸다.

그사이, 또다시 미구엘의 시선을 느낀 이안이 미간을 좁혔다.

"그만 힐끔대고 타라. 새꺄."

눈알 파 버리기 전에.

이안이 마차에서 뛰어내리자, 미구엘이 화들짝 고개를 저었다.

"교대하고 싶어서 본 게 아니오."

"그럼 뭔데?"

머뭇거리면서도 마부석에 오른 미구엘이 말을 이었다.

"그, 따지고 보면 말이오. 내 의뢰는 이제 완수된 것 아니오?"

"호오."

이안의 얼굴에 감탄이 번졌다.

지금 이런 말을 꺼낼 줄이야.

"여기까지 안내하는 게 의뢰였잖소. 그러니까 여기서부턴…."

"엄밀히 말하면 실패지."

"어떤 추가적인, 엉…? 실패라니?"

"약속한 시일을 지나쳤잖아?"

순간 굳어졌던 미구엘이 엉덩이를 들썩였다.

"그, 그건 그 빌어먹을 숲에서 하루를 날려서 그런 거잖소! 그건 참작을 해 주셔야지."

"그래서 네가 살아 있는 거다. 돈을 토해내지도 않은 거고."

"...."

"뭐, 어쨌든. 아예 틀린 말은 아니니까."

이안이 뒤편을 턱짓했다.

"가든지. 우린 계속 들어갈 거다. 넌 이대로 내려서 돌아 나가."

미구엘의 고개가 뒤로 돌아갔다.

잿빛 안개가 깔린 음산한 숲.

넷이 올 땐 별일 없었지만, 홀로 돌아갈 때도 그러리란 보장은 없어 보이는 광경이었다.

이윽고 고삐를 고쳐 쥔 미구엘이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그냥, 내가 의뢰를 충실히 완수했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었을 뿐이오. 지금부턴 의리로 가는 거요."

"그러시겠지."

어차피 못 갈 거 알고 한 말인데.

코웃음 친 이안이 시선을 돌렸다.

하여간, 용병이란 것들의 잔머리는 하나같이 얄팍하기 그지없었다.

메브가 뒤이어 몸을 일으켰다.

"너도 타거라, 필립. 걸으면서 몸을 좀 풀어 두고 싶구나."

"…감사합니다, 나리."

후들대던 필립도 짐칸에 올랐다.

이안과 나란히 걷기 시작한 메브의 시선이, 이내 무릎을 스치는 안개에 고정됐다.

축축하긴커녕 화장터의 안개처럼 메마른 느낌이 드는 안개.

바스락대는 듯한 불쾌한 감촉 사이로, 오염된 마력이 전해졌다.

낯익은 감각이었다.

그녀가 가진 오염된 정수에서 번지던 것과 같았으니까.

"놈의 마력이군…."

메브는 놀라지 않았다.

이안을 믿어서 뿐만 아니라, 흑마법사의 경고를 통해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소. 놈의 마력이지."

이안이 덤덤하게 대꾸했다.

미구엘이 문득 한숨을 내쉰 건 그때였다.

"아무래도, 혼자서라도 숲을 나가는 게 맞았던 것 같소."

"그새 마음이 바뀌었냐? 정말 엄청난 의리군."

이안이 헛웃음을 지었다.

미구엘이 고개를 저었다.

"나 같은 잡졸이 끼기엔 너무 큰 판 같아서 말이오. 경험상 꼭 분수 모르고 낀 놈이 죽더란 말이지."

이안의 웃음이 짙어졌다.

주제 파악만큼은 확실한 놈이었다.

심지어 그에게 도움이 되는 말이기도 했다.

"나는 몰라도, 경은 절대 너랑 필립이 죽게 두지 않으실 거다."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떠넘길 명분이 생긴 셈이었으니까.

메브가 순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 둘은 내가 반드시 지킬 것이다. 여신께 맹세하지."

"맹세라고 하셨습니까…?"

어리둥절하게 되물은 미구엘의 얼굴에 이내 감격이 번졌다.

"나리께선 정말이지, 제가 아는 모든 기사를 통틀어 가장 명예로운 분이십니다."

"감사할 것 없다. 나 역시 이유가 있기에 그리하는 것이니."

"엥…? 이유라굽쇼?"

이안이 불쑥 걸음을 멈춘 건, 메브가 뭔가 말하려던 그때였다.

덜컹, 마차도 뒤이어 멈춰 섰다.

"아윽. …갑자기 왜 멈춘 겁니까?"

등받이에 머리를 박은 필립이 뒤통수를 문지르며 일어섰다.

미구엘이 어리둥절하게 말했다.

"내가 멈춘 게 아니오."

"뭐라고요…?"

"이것들이 갑자기 왜 이러지."

미구엘이 고삐를 찰싹 후려쳤다.

하지만 말들은 콧김을 뿜어 댈 뿐, 더 나아가려 하지 않았다.

"소용없을 거다."

이안이 저만치 앞을 응시하며 내뱉었다.

그와 같은 방향을 바라보던 메브가 미간을 좁혔다.

"…불길한 마력이 느껴지는군."

필립이 눈을 깜빡였다.

"불길한… 마력이라니요?"

"저기서부턴 마경이다."

대답한 건 이안이었다.

"들어가서 나온 자가 없다더니. 애초에 나올 수가 없는 거였어."

타락하거나 저주받은 땅.

완전히 어둠에 물들어 세상의 법칙마저 뒤틀린 장소들을, 이 세계에서는 마경이라 불렀다.

"마차는 두고 가야겠군."

결정을 내린 메브가 필립과 미구엘을 돌아보았다.

"필요한 짐을 챙기거라."

미구엘이 눈을 치켜떴다.

"그 전에 설명부터 들으면 안 되겠습니까, 나리? 방금 형씨가 들어가면 못 나온다고 한 것 같은데요."

"신경 쓸 거 없어."

이안이 심드렁하게 말을 잘랐다.

"흑마법사를 죽이면 사라질 테니까. 아마도."

"아니, 뭐 그런 무책임한…."

"그냥 책임지고 죽여 줄까?"

미구엘이 냉큼 몸을 돌렸다.

그사이 가방을 등에 멘 필립이 굳은 얼굴로 마차에서 내렸다.

"각오는 했습니다만, 예상보다 더 떨리는군요."

"방심하는 것보단 낫지. 선두에 서게 될 텐데."

멈칫한 필립이 이안을 돌아보았다.

"선두라니요? 그게 무슨…."

그의 목소리가 이내 잦아들었다.

이안과 처음 만난 날의 기억이 뇌리를 스쳐 지나간 것이다.

숲에서 앞장서겠다는 자신을 향해, 꼭 그렇게 해 주리라던 이안의 눈빛이 특히.

"그걸… 아직도 기억하고 계셨습니까?"

"어떻게 잊겠어?"

낯이 하얗게 질린 필립이 메브에게 구원의 눈빛을 보냈다.

메브가 단호하게 말했다.

"네가 내뱉은 말이니 내가 끼어들 여지가 없구나, 필립. 이번 경험이 네게 교훈을 남기길 바랄 뿐이다."

미구엘이 마차에서 훌쩍 뛰어내린 건 그때였다.

망연자실한 필립과 눈이 마주친 그가, 안개 쪽을 턱짓했다.

"뭐 하쇼? 얼른 안 서고."

"...."

#024화

안개는 마경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엄청나게 자욱해졌다.

"후우… 후우…."

선두를 걷는 필립의 얼굴에는 일말의 여유도 찾아볼 수 없었다.

검과 방패를 바짝 치켜든 그가, 고개도 돌리지 못한 채 입을 열었다.

"나리. 제가 지금 제대로 가고 있는 게 맞습니까…?"

"그래."

이안이 귀찮다는 듯 대꾸했다.

미구엘이 그를 곁눈질했다.

"여기서 어떻게 길을 찾으시는 거요? 사냥꾼인 나도 방향조차 모르겠소만."

"잘."

"…그게 끝이오?"

"그런데. 불만 있냐?"

이안의 시선에 재빨리 앞을 돌아본 미구엘이 중얼댔다.

"그럴 리가. 이런 비법을 맨입으로 배우려는 게 도둑 심보지. 암…."

어차피 넌 배워도 못 하거든.

속으로 읊조리며, 이안은 자욱한 안개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그가 보고 있는 건 안개에 잔뜩 섞인 오염된 마력이었다.

안개와 함께 선회하는 마력의 결이 신기루처럼 일렁였다.

이게 일종의 이정표였다.

무덤은 이 중심부에 있을 테니까.

마력의 결을 가로지르다 보면 도착할 수 있으리라.

'어떻게 이걸 다 유지하는 거지? 타락한다고 마력이 무한정 샘솟진 않을 텐데.'

전에는 해 본 적 없던 의문이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그가 이런 잡생각을 할 정도로 느긋한 건, 이 숲엔 사실 위험한 마물 따윈 존재하지 않아서였다.

개미 새끼 한 마리 없는 죽은 숲.

물론 숲 자체가 미로인 데다, 오염된 마력이 스며들어 침입자를 끝내 죽음에 이르게 만들긴 했지만.

길을 찾는 방법을 아는 이상, 그다지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나아갔을 무렵.

한순간 시야가 밝아졌다.

"어…?"

어리둥절하게 멈춰 선 필립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

"이거 설마… 도착한 겁니까?"

"아마도."

이안이 뒤를 돌아보며 대답했다.

칼로 자른 듯이 끝난 안개가 잿빛 장막이 되어 펼쳐져 있었다.

필립과 미구엘이 거의 동시에 주저앉았다.

"제가 정말 해낼 줄은 몰랐습니다. 루 솔라여… 감사합니다…."

"나도 댁이 해낼 줄 몰랐소. 명 짧아지는 소리가 들리네, 염병할…."

주접들 떨고 있네. 이제 시작인데.

이안은 콧방귀를 뀌며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훤히 드러난 공터에 고대 요정 유적지가 펼쳐져 있었다.

그 한복판, 반파되어 지하로 통하는 계단을 훤히 드러낸 건축물이 바로, 지하 무덤의 입구였다.

"저곳인가…."

안면 가리개를 올린 채 같은 곳을 바라보던 메브가 중얼댔다.

이안과 눈빛을 교환한 그녀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 뒤를 느긋하게 뒤따르면서, 이안은 게임에서의 기억을 헤집었다.

지하 무덤은 게임에서 처음 등장한 본격적인 던전이었다.

그런 만큼 전형적이기도 했다.

개미굴처럼 이어진 거대 미로.

공략 루트도 두 갈래였다.

빙 돌아가며 중간 보스를 상대하고 흑마법사와 만나는 정석 루트.

그리고 흔히들 숏컷이라 부르는, 기본적인 트릭으로 감춰진 지름길.

게임에선 보스전을 끝내고서야 그 존재를 알게 됐었지만, 이번엔 처음부터 지름길을 택할 생각이었다.

'안 그럴 이유가 없지.'

전리품을 놓치는 것도 아니고 추가 퀘스트가 있지도 않았으니까.

메브가 계단 앞에 멈춰 섰다.

그녀의 곁에 선 이안은, 계단 아래의 어둠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싸울 준비는 되셨소?"

"물론. 그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메브가 결연하게 내뱉었다.

이안이 피식댔다.

"어차피 물러설 곳도 없을 거요."

"맙소사, 루 솔라여…."

그때, 뒤에서 탄식이 이어졌다.

"허미, 시부럴. 산 넘어 산이네."

"제 말이 바로 그 말입니다…."

뒤따라온 필립과 미구엘이었다.

망연자실하기 그지없는 표정들.

이안이 무시하며 앞으로 나섰다.

"그럼, 이제 내가 선두에 서겠소."

미구엘의 눈이 커졌다.

"엥? 이렇게 바로 가신다고? 잠깐 마음의 준비를-"

준비 같은 소리 하고 앉아 있네.

코웃음 친 이안이 보란 듯 계단에 발을 들였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듯한 얼굴인 필립과 미구엘, 굳은 안색의 메브가 차례로 그 뒤를 따랐다.

곧, 지하의 어둠이 일행을 삼켰다.

***

저벅, 저벅-

계단을 내려가는 발소리가 유독 크게 메아리쳤다.

주위는 몇 분도 지나지 않아 칠흑같이 어두워졌다.

미구엘이 횃불을 켰지만 크게 달라질 건 없었다.

빛은 불과 몇 걸음 앞을 간신히 비췄다.

이제는 놀랍지도 않은 현상이었다.

이 세계의 어둠은, 그저 단순한 빛의 부재가 아니었으니까.

거기다 계단은 겉보기와 달리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깊었다.

무덤 자체에 어떤 영구적인 고대 마법이 깃들어 있다는 증거였다.

공간을 구부리고 휘어서, 외부에서 보는 것과 실제를 다르게 만드는.

이안이 볼 땐 그야말로 편의적인 설정이었지만, 어쨌건 이 세계에는 이런 말도 안 되는 것들이 얼마든지 실존했다.

한참 이어진 침묵을 깬 건, 뜻밖에도 메브였다.

"지하에 도착하면, 잠시 기도를 올려야 할 것 같군."

무심하게 이어지던 이안의 걸음이 느려졌다.

"뭔가 문제라도 생기셨소?"

메브가 흉갑에 손을 얹었다.

"이곳에 들어서고부터 성흔의 공명이 약해지고 있다."

"성흔…?"

이안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를 물끄러미 바라본 메브가, 이윽고 진심임을 깨달은 듯 말했다.

"사도로 선택받은 순간 영혼에 새겨지는 낙인이다. 이를 통해 신께 감응하며, 신성을 부여받지."

그런 원리였다고…?

이안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루 솔라의 성상이 뇌리를 스쳤다.

기도를 올릴 뻔했던 때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두 번이나 영혼을 저당 잡힐 뻔한 것이다.

'이 빌어먹을 세계는 신들도 통수를 치네.'

사도에 대한 실낱같은 미련조차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이 세계 인간들에겐 더없이 영광스러운 일일지 몰라도, 그에겐 노예 계약에 불과했다.

메브의 말이 이어졌다.

"하지만 지금은 신성이 선명하게 느껴지지 않는군. …어쩌면, 이 또한 마경의 영향인지도 모르지."

"알겠소."

이안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신성력의 지원을 받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는 말이었지만.

앞에 들은 말에 비하면 그다지 놀랍지도 않은 얘기였다.

애초에 신성력은 흑마법의 천적.

흑마법사가 뭔가 대비를 해 뒀다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었으니까.

'어차피 잡몹 정리에는 아무 영향 없을 텐데. 그거면 됐지, 뭐.'

보스전 때 눈치껏 빠져 주면 더 좋겠지만. 그럴 리는 없겠지.

이안이 어깨를 으쓱일 찰나, 메브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혹여 여신께서 답을 주지 않으시더라도, 짐이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염려하지 말거라, 이안."

피식 웃은 이안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그런 걱정은 한 적도 없소."

계단은 퀴퀴한 공기의 맛이 입안 가득 느껴질 때쯤 끝났다.

필립과 미구엘은 당장이라도 폐소 공포증이 올 것 같은 표정이었다.

공간만 넓어졌을 뿐, 어둠은 여전히 그들을 집어삼킬 것처럼 짙었기 때문이다.

물론 모두가 어둠에 짓눌려 있는 것은 아니었다.

"기도를 올리셔도 될 것 같소."

주위를 훑던 이안이 말했다.

맹수의 그것처럼 일렁이는 그의 눈은, 어둠 너머를 꽤 또렷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부서진 석상의 잔해가 곳곳에 널브러져 있는 넓은 석실.

"알았다."

메브가 검을 역수로 뽑으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검 끝을 바닥에 찍은 그녀가 눈을 감았다.

입술만 달싹이는 기도가 이어지는 가운데.

"이렇게 아무것도 없다니…."

횃불을 이리저리 비추던 미구엘이 중얼댔다.

필립이 고개를 갸웃하며 속삭였다.

"그게 왜 이상합니까?"

"여기 묻힌 시체가 내가 들은 것만으로도 수백이오."

"그런데요?"

"유골이 하나도 없잖소. 댁 같으면 이런 불길한 곳에 들어와서, 시체를 깊숙이까지 가져다 버리겠소?"

"어… 그러게요…?"

입을 뻐끔댄 필립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이안에게로 돌아왔다.

이안의 미간이 이윽고 좁아졌다.

"정말 몰라서들 묻는 거냐?"

"뭘 모른다는 말씀이십니까?"

오히려 되묻는 필립을 보며, 이안은 정작 자신이 흑마법사에 대해 자세히 말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혀를 찬 그가 말했다.

"이 주문쟁이 놈은 자길 사령 술사라고 했었다."

"사령… 술사요?"

"사령술은 시체와 망령을 다루지."

"...."

필립의 입이 벌어졌다.

흑마법에도 다양한 종류가 있음을 전혀 생각지 못한 얼굴이었다.

그저 막연하게 사악하고, 끔찍한 주문이리라 생각했을 뿐.

거의 사색이 된 미구엘이 간신히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니까, 시체를 되살리고 망령을 부리고 그런다는 말씀이시오?"

"아마도. 그게 전부는 아니겠지만."

"말도 안 돼… 그렇게 엄청난 힘을 가진 자가 왜 숨어만 있겠소? 왕국을 몇 번은 뒤집어엎을 텐데."

"못 그럴 이유가 있겠지."

이안은 대충 어깨만 까딱였다.

짐작이 가는 부분은 있었지만.

정말이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놈의 야망은 오늘로써 막을 내릴 테니까.

"그러니까 쓸데없는 생각 말고…."

덧붙이던 이안이 순간 멈칫했다.

미간을 살짝 좁힌 것도 잠시.

"그래. 올 게 왔구만."

묘하게 후련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은 그가, 어둠을 돌아보았다.

"뭐, 뭐가 온단 겁니까…?"

그 모습에서 오히려 불길함을 느낀 필립이 물었다.

"사실 주문쟁이 놈은 한참 전부터 우리가 오는 걸 알고 있었거든."

"예에?!"

"그런데도 너무 조용해서 슬슬 거슬리던 참이었는데."

이안의 미소가 짙어졌다.

"역시. 여기까지 무방비인 건 말이 안 되지."

말이 끝나기도 전에, 어둠 너머에서 흐릿한 빛이 피어올랐다.

고개를 돌린 필립과 미구엘의 눈이 동시에 커졌다.

혈관에 피가 돌기 시작하듯, 보랏빛 선들이 천장과 벽면에 빼곡하게 새겨지고 있었다.

그게 끝없이 이어진 문자와 기호의 집합체라는 것을 깨달은 필립이 멍하니 뇌까렸다.

"고대어…?"

"주문 회로다. 무덤의 마법 기관이 작동하기 시작한 거야."

"고대 요정의 주문이라기엔 너무… 불길하게 생겼는데요…?"

"흑마법사 손에 들어간 주문이 멀쩡하겠냐?"

"…아."

게임에서 마법 기관이 작동한 건, 던전을 반쯤 진행했을 무렵이었다.

지하 무덤의 진면목이 드러나는 시점이기도 했다.

게임에서와 같다면, 가장 먼저 시작되는 것은….

쿠르릉-

등 뒤에서 울려 퍼진 굉음에, 미구엘이 펄쩍 뛰어올랐다.

"으악?! 아니, 이런, 미친…?"

뒤를 돌아본 그의 눈에 핏발이 섰다.

거대한 돌벽이 계단 앞에 솟아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곧 입구를 완전히 막은 벽 한복판에, 고대어가 홀연히 떠올랐다.

유적의 타락을 증명하듯 검붉은 빛을 머금은 채로.

"이게… 대체…."

읊조린 미구엘이 이안을 돌아보았다.

이안은 돌벽을 보고 있지 않았다.

그저 새카맣게 가라앉은 눈으로 어둠 너머를 응시하고 있을 뿐.

절걱, 절그럭- 절그럭-

희미한 소음이 이어졌다.

미구엘도 비로소 이안과 같은 방향을 돌아보았다.

주문 회로 가운데에도 여전히 어둠에 휩싸인 통로 너머.

절걱- 절그럭-

기묘한 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어둠이 구더기가 들끓듯 일렁였다.

수십 개의 보라색 안광과 함께, 살아 움직이는 해골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령술로 되살아난 망자들.

"...."

미구엘의 입이 멍하니 벌어지고, 필립도 뒤늦게 얼어붙는 가운데.

절걱, 절걱 절걱-

둑이 터지듯, 해골들이 통로를 비집고 밀려들기 시작했다.

"너희는 경을 지켜라."

내뱉은 이안이 몸을 날렸다.

"엥? 잠깐만! 형씨! 또 혼자 싸우시려고?!"

내달리는 그의 뒤통수로 미구엘의 목소리가 따라붙었다.

그럼 너희가 싸울래?

속으로 읊조리며 홀을 가로지른 이안은, 석상의 파편을 연달아 딛고 도약했다.

쉬아악-

바람이 전신을 휘감는 사이.

마력이 아른거리는 그의 눈동자가, 눈 앞에 펼쳐진 통로를 훑었다.

복도를 가득 채우고, 그 너머까지 끝도 없이 이어진 해골들. 사이사이로 구울의 모습까지 보였다.

'존나 많긴 하네.'

단순히 숫자로만 치면 이 세계에 떨어진 이래 가장 많았다.

심지어 이게 전부도 아니었다.

기관이 작동한 이상, 무덤의 거의 모든 언데드들이 몰려오고 있을 테니까.

하지만 이안의 눈빛에는 그다지 위기감이 묻어 나오지 않았다.

'무장도 허접하고 자아도 확실히 없어 보이고. 고작 이런 것들한테 당하면 살아남을 자격도 없지.'

물론 지하 무덤의 위험 요소는 이게 전부가 아니지만.

길만 막으면 되는 당장은 별로 해당 사항 없는 이야기였다.

활강하듯 통로로 접어든 이안이, 그대로 메이스를 내리찍었다.

콰직!

돌진에 반응도 하지 못한 해골의 두개골이 박살 났다.

안광이 바스러지고 온몸의 뼈가 우수수 허물어질 찰나.

푸확-!

이안의 주위로 폭발하듯 돌풍이 휘몰아쳤다.

돌풍에 휩쓸린 해골들이 뼛조각이 되어 사방으로 튀었다.

휘몰아치는 방벽.

발사체나 돌진을 막아 주는 이 하위 회색 마법은, 이렇게 공격적으로 활용할 수도 있었다.

살상력이 크진 않고, 머리를 없애지 않으면 되살아나는 이 언데드들에겐 더 그렇겠지만.

콰직-

공간을 확보한 것만으로도 의미는 충분했다.

굴러가는 두개골을 짓밟으며 착지한 이안은, 그대로 한쪽 무릎을 꿇으며 메이스를 치켜들었다.

빠직! 빠각!

굴러다니는 머리통들이 닥치는 대로 터져 나갔다.

검이었다면 날이 몇 번은 부러졌을 마구잡이식 타격.

하지만 메이스는 부러지긴커녕 휘어지지도 않았다.

"후…."

인근의 두개골을 모조리 으깨 버린 이안이 비로소 일어섰다.

튕겨 나갔던 언데드들이 어느새 다시 다가오고 있었다.

놈들을 응시하는 이안의 눈동자에 흐릿한 마력이 일렁였다.

쉬아아-

순식간에 번져나간 바람이 메이스 자루를 타고 휘몰아쳤다.

이안은 그 흐름을 거스르지 않고, 자루를 양손으로 움켜쥐며 크게 휘둘렀다.

콰지직-!

달려들던 것들이 포탄에 맞은 것처럼 벽에 처박혔다.

산산 조각난 뼈의 잔해와 그 사이에서 곤죽이 된 구울의 살점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자루를 고쳐 쥔 이안은, 언데드들이 다가오길 기다렸다가 반대 방향으로도 팔을 휘둘렀다.

콰장창-!

언데드들이 또다시 벽에 처박혔다.

거대한 망치로 후려친듯한 광경.

실제로도 그랬다.

검으로 펼칠 때는 예리한 선이었던 바람 칼날이, 지금은 맹렬하게 회전하는 구체가 되어 메이스 끝에 휘몰아치고 있었으니까.

이게 잘 먹히는 것을 확인한 이상, 대응은 훨씬 간단해졌다.

콰지직-! 콰장창-!

기다렸다가 휘두르는 것의 반복.

그렇게 몇 번쯤 언데드들의 전진을 저지했을 때였다.

"...?"

언데드들이 불현듯 멈춰 섰다.

슬쩍 미간을 좁혔던 이안이, 이내 한쪽 입술을 말아 올렸다.

놈들 사이에서 따끔한 시선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증오와 분노가 뒤섞인.

이게 누구의 시선일지는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왜, 유물까지 챙겨올 줄 몰랐냐?"

이안은 태연하게 거짓말을 했다.

놈이 믿고 말고는 중요치 않았다.

"거기 쥐새끼처럼 숨어서 잘 보고 있어라. 이걸로 네 장난감 대가리를 다 터뜨려 줄 테니까."

어디까지나 놈을 열 받게 하는 게 목적이었으니까.

놈이 이성적이고 효율적인 판단을 추구할수록, 일행 중 누군가가 죽을 확률은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이안이 손에 든 메이스를 까딱일 찰나, 주문 회로의 빛이 출렁였다.

해골들의 안광이 타올랐다.

"제대로 빡쳤나 보네. 고맙게."

이안이 송곳니를 드러내며 웃었다.

소리 없이 포효한 언데드들이, 들짐승처럼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025화

"저런 미친…."

미구엘이 탄식을 흘렸다.

그의 시선은 홀로 통로를 막아선 이안의 뒷모습에 고정되어 있었다.

아직까지 단 하나의 언데드도 그를 지나치지는 못하고 있었지만.

솔직히 말해, 언제라도 휩쓸려 사라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아무리 봐도 저건 미친 짓입니다. 우리가 가서 도와야 해요…!"

필립이 참지 못하고 말했다.

아랫입술을 질근대던 미구엘이 이내 고개를 저었다.

"우린 나리를 지키는 게 맞소."

"하지만-"

"명령 잊었소? 우리가 낀다고 엄청난 도움이 되진 않을 거요. 차라리 뒤를 지켜서 형씨 마음이라도 편하게 해 주는 게 낫지."

필립이 침음하며 입을 다물었다.

그를 막긴 했지만, 사실 미구엘도 불안하긴 마찬가지였다.

언데드는 끝이 없어 보였고, 이안이 아무리 강한들 영원히 싸울 순 없을 테니까.

미구엘은 본능적으로 발목을 까딱였다.

'시발, 여기선 안 통할 것 같은데.'

하지만 정말 최악의 순간이 온다면 이판사판이었다.

내면의 갈등을 이어가며 이안과 메브를 번갈아 곁눈질하던 한순간.

"...!"

미구엘의 눈이 마침내 번뜩였다.

메브의 전신에 맺힌 신성력이 갑옷 속으로 스며들었기 때문이다.

석상처럼 굳어 있던 그녀의 어깨가 천천히 들썩였다.

미구엘이 참지 못하고 내뱉었다.

"정신이 드십니까? 나리?"

메브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가 뭔가 입을 열기도 전에, 미구엘이 말을 이었다.

"나리께서 기도에 들어가시고 나서, 주문 회로라는 게 작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언데드들이 득시글하게 튀어나왔고요!"

"…그래서, 이안은 어디 있느냐?"

"그게 제가 드리려던 말씀입죠!"

미구엘이 통로 쪽을 가리켰다.

"언데드들을 형씨가 혼자 막고 있습니다!"

"저희는 나리를 호위하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필립이 거들었다.

통로를 돌아본 메브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그렇군."

그녀가 벌떡 일어섰다.

휙, 검이 거꾸로 회전하고, 날 윗부분이 그녀의 손아귀에 잡혔다.

"길을 뚫겠다."

철컥, 안면 가리개를 내린 메브가 질주했다.

갑옷의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 듯한 속도.

거꾸로 든 검을 얼굴 옆에 바싹 치켜든 그녀가, 이윽고 일갈했다.

"이안-! 길을 터라!"

이안이 뒤를 돌아보았다.

"…늦으셨소."

숨찬 목소리로 내뱉은 그가 옆으로 훌쩍 물러났다.

드러난 공간으로 메브가 돌진했다.

이안을 지나치는 그녀의 전신에 희미한 푸른빛이 아른거렸다.

그녀의 돌진은 언데드들이 가까워지자 오히려 더 빨라졌다.

콰장창-!

메브와 충돌한 해골들이 산산이 튀어 올랐다.

순식간에 무리 한복판까지 뚫고 들어간 메브가, 거꾸로 쥔 검을 힘차게 올려 쳤다.

콰지직-

검이 만들어 낸 둔탁한 호선이 언데드들을 박살 내며 지나쳤다.

머리를 노리지 않았음에도 휩쓸린 해골들의 안광이 바스러졌다.

언데드에게 신성력은 적은 양으로도 아주 치명적이었다.

메브는 공세를 멈추지 않았다.

휘두른 검의 원심력을 살려 몸을 회전하며 다시 한번 휘둘렀고, 치켜들었던 팔을 힘으로 멈춰 반대로도 다시 내려쳤다.

꽈직!

같은 궤적으로 이어진 두 번의 공격에 운 좋게 살아남은 구울의 머리통에는 주먹이 틀어박혔다.

언데드들도 짐승처럼 달려들며 반격을 시도했지만.

부러진 칼이나 곤봉, 손톱 따위로는 그녀의 갑옷에 흠집조차 내지 못했다.

신성력을 아주 조금 갉아먹을 뿐.

심지어 공격한 주제에 신성력에 닿아 허물어지는 놈들도 있었다.

"볼 때마다 박탈감 오지네…."

뒤에서 지켜보던 이안이 결국 헛웃음을 흘렸다.

언제 봐도 대단한 전투력.

하지만 구경만 할 수는 없었다.

메브의 몇 없는 약점 중 하나는 지구력이 부족하다는 거였고, 신성력도 여유롭진 않아 보였으니까.

빠각-!

메브가 놓친 해골의 머리통을 박살 내며, 이안이 따라붙었다.

메브도 자연스럽게 그에게 등을 맡겼다. 더불어 움직임이 훨씬 더 과감해졌다. 몇 마리를 놓치건 이안이 처리해 주리라는 확고한 믿음 덕분이었다.

전진에 순식간에 가속도가 붙었다.

통로를 지나 조금 작은 석실로.

다시 그 너머의 또 다른 석실까지.

파죽지세로 이어지던 전진이 멈춘 건, 더 깊은 지하로 이어지는 내리막길 앞에서였다.

쿠르르르-

별안간 솟아오른 석벽이 통로를 막아 버린 것이다.

"후, 후우…."

숨을 고르며 석벽에 새겨진 고대어를 응시하던 메브의 시선이 이안에게로 향했다.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제야 검을 늘어뜨린 메브가 뒤를 돌아보았다.

끝없이 이어진 언데드의 잔해들.

횃불을 든 필립과 미구엘이 그 한복판을 주춤대며 가로질렀다.

"길이 막혔다."

덤덤하게 말한 메브가 안면 가리개를 올렸다.

미구엘이 눈을 끔뻑였다.

"그럼… 갇혔단 말씀이십니까?"

"보다시피."

물주머니를 꺼내며 다가온 필립이 말했다.

"뭔가 방도가 있으신 거겠죠."

주머니를 받으며 메브가 답했다.

"방도는 없다만."

"역시 그러시… …예?"

아랑곳하지 않고 물을 마신 메브가 이안에게 주머니를 건넸다.

그는 이미 벽에 기대앉아, 메이스 자루에 팔을 걸치고 쉬고 있었다.

"이안이 당황하지 않았으니까. 그걸 믿을 뿐이야."

이젠 보증도 서 주겠는데.

이안은 실소를 삼켰다.

흑마법사가 개 빡쳤으니 그들을 고이 굶어 죽게 놔둘 리 없다든가, 게임에서도 있었던 패턴이라든가 하는 설명은 굳이 하지 않았다.

그저 어깨를 으쓱이면서.

"이렇게 된 거, 좀 쉽시다."

하고 말한 게 전부였다.

고개를 끄덕인 메브가 이안의 곁에 앉았다.

"두 분의 뜻이 그러시다면야…."

미구엘이 어물쩍 주저앉았다.

그의 곁에 앉는 필립의 얼굴에도 짙은 피로가 묻어났다.

싸우지 않았다 해서 지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이 어둠과 주문 회로의 마력은, 마주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정신을 갉아먹었으니까.

밀려드는 언데드와 마주하는 것 역시, 스트레스의 연속이었다.

마물을 상대하는 자들이 미쳐 버리거나 어둠에 물드는 경우가 많은 이유이기도 했다.

"정수는 언제부터 그랬소?"

이안이 불쑥 물었다.

메브가 흉갑에 손을 얹었다.

오염된 정수를 품은 위치였다.

"그저 공명하고 있을 뿐이다. 성흔이 침묵하면서부터 이러더군."

"신과의 연결이 아예 끊어지셨소?"

"그래."

"그렇다면 조심하시오. 언제 경을 잠식하려 할지 모르니."

"그리하지. 염려 마라."

고개를 끄덕인 메브의 시선이, 이내 사방에 널브러진 언데드의 잔해로 향했다.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군. 이토록 거대한 군세를 거느리고도 지하에 숨어만 있었다니."

대체 왜 다들 그딴 걸 궁금해하지.

이안은 내심 한숨 쉬면서도 입을 열었다.

"여긴 놈의 마경이잖소. 여기라서 가능한 군세일 거요. 밖에선 유지할 수 없겠지. 아직은."

어디서 이만한 마력을 끌어오는지는 둘째 치고.

안개와 언데드 군단에 마력을 공급하는 건 주문 회로가 확실했다.

듣고 있던 필립이 물었다.

"마경 자체가 흑마법사를 더 강하게 만들어 준다는 말씀이십니까?"

"그게 악마나 타락자가 마경을 형성하는 이유다. 거미가 거미집을 짓듯이. 자신만을 위한 작은 세계를 만들어 내는 거지."

물론 고위 타락자나 악마가 만들어 낸 마경은, 이런 지하 무덤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메브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여기서 힘을 축적하고 있었던 거군. 정수를 심은 건 세상에 나올 때를 위한 안배였던 거고. …왕국을 뒤엎을 거악이 탄생할 수도 있었겠어."

솔직히, 잘 풀려도 그만한 깜냥이 되는 놈 같진 않지만.

어깨를 으쓱이던 이안의 시선이, 문득 천장으로 향했다.

주문 회로를 타고 심상치 않은 마력이 밀려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작된 건가?

이안은 기억을 복기하며 일어섰다.

메이스를 집어 든 그가 석벽을 돌아본 순간.

"어, 어어…?!"

필립과 미구엘 쪽에서 의문성이 터져 나왔다.

이안도 그제야 등 뒤에서 응축되는 마력을 느꼈다.

주문 회로의 마력 탓에 늦게 알아챌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안의 미간이 좁아진 건, 바닥에 널브러진 잔해들이 덜컥대며 진동하는 소리 때문이었다.

'저게 벌써?'

이안이 뒤를 돌아본 순간.

잔해들이 자성에 이끌리듯 뒤쪽의 통로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한데 뭉친 잔해가 순식간에 통로를 가득 채웠다.

뼈와 살점으로 이루어진 덩어리.

그것이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대기 시작하자, 이안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었다.

죽음의 찌꺼기.

말 그대로 불사의 추적자인 비정형의 마물이, 게임에서보다 훨씬 이른 시점에 만들어진 것이다.

'그땐 갈림길로 들어서기 직전이었던 것 같은데. 시체가 충분히 모여서 그런 건가?'

개 같네.

이안이 미간을 찌푸리는 사이.

"저건 또 뭔 미친… 어억?!"

쿠구구구-

얼빠진 탄식을 흘리던 미구엘이 화들짝 어깨를 들썩였다.

앞길을 막았던 석벽도 내려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 너머로 일렁이는 수많은 안광.

이안의 입가에 헛웃음이 번졌다.

"작정을 했구만, 시발…."

메브가 굳은 얼굴로 내뱉었다.

"저 마물은 내가 상대해야 할 것 같다, 이안."

이안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바라던 바였다.

"죽이려 하지 말고 저지만 하시오. 길을 뚫을 테니."

"다, 다가옵니다, 나리!"

필립의 외침이 이어졌다.

죽음의 찌꺼기가 일행을 향해 기어 오고 있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일행 쪽으로 무너지고 있었다.

위쪽의 뼈와 살점이 앞으로 쏟아지면서 이동하는 거였으니까.

저 더미에 휩쓸리면 어떻게 될지 상상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메브가 안면 가리개를 내렸다.

"너희는 대열 중앙에 있어라."

내뱉은 그녀가 돌진했다.

이안이 거의 다 내려간 벽 너머로 몸을 날린 건 거의 동시였다.

쉬아악-!

언데드들이 삽시에 가까워졌다.

가죽 갑옷을 걸친 해골 전사부터, 고대 요정 갑주를 걸친 해골 기사. 비교적 최근에 죽은 것으로 추정되는 구울 병사까지.

더 깊은 곳에 있어야 할 것들이 죄다 모여 있었다.

'군단은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 이거지.'

빠각! 이안이 해골 병사의 투구를 그대로 내리쳤다.

녹슨 투구가 움푹 들어가고 그 아래의 두개골이 산산 조각났다.

놈이 허물어질 때쯤, 이안은 이미 다음 언데드를 후려치고 있었다.

체력을 아낀 덕에 그의 움직임에는 한결 여유가 있었다.

거기다 이제는 머리만 박살 낼 필요도 없었다.

이안은 바람 칼날을 전신에 두른 채로 길을 뚫는 데 집중했다.

그렇게 한참 전진하던 그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경! 너무 뒤처지지 마시오!"

찌꺼기를 상대하던 메브가 그제야 몸을 돌렸다.

그녀도 저놈을 죽일 수는 없었다.

그저 전진을 늦출 뿐.

와르르르-

방해꾼이 사라진 찌꺼기가 석실을 지나쳐 통로까지 접어들었다.

뼈 더미가 허물어지는 소리가 파도 소리처럼 장내를 울렸다.

머리가 부서져 허물어진 언데드들은 물론, 재조립되던 놈들까지도 잔해에 덮여 사라졌다.

"히익…! 히이익…!"

"앞만 보쇼. 앞만!"

필립과 미구엘은 압박감에 거의 정신이 나간 것처럼 보였지만.

'무한 동력이 따로 없네.'

이안은 여전히 여유가 있었다.

슬슬 끝이 보였기 때문이다.

지름길로 들어서는 갈림길만 놓치지 않는다면, 흑마법사의 코앞까지 단숨에 들이닥칠 수 있으리라.

그 계획에 변수가 생긴 건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키히힛-

웃음소리가 귓가를 스친 것이다.

잊고 있던 기억을 절로 되살아나게 만드는 섬뜩한 소리.

'아니 시발, 저건 또 왜 여기 있어?'

이안의 고개가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득달같이 돌아갔다.

널찍한 석실의 천장에, 산발한 머리칼의 망령이 둥둥 떠 있었다.

뼈가 훤히 드러난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저 망령은, 여기서 꽤 떨어진 호수에 사는 놈이었다.

남자는 홀려서 정기를 빨아먹고 여자는 호수에 가라앉혀 빙의체로 부리던, 호숫가의 망령.

저게 호수와는 관련도 없는 이곳에 와 있을 이유는 단 하나였다.

'저 새끼도 권속이었던 거네.'

아예 소굴로 불러들였다 이거지.

앞을 가로막는 언데드들을 후려친 이안이 다시 망령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놈은 이미 사라진 뒤.

정수리 위에서 기척이 이어졌다.

크히힛-

"...!"

이안은 반사적으로 뛰어오르며 메이스를 휘둘렀다.

메이스는 정확히 놈을 후려쳤지만, 아무런 감촉도 전해지지 않았다.

물리적인 공격이 통하지 않는 놈이니 당연했다.

그저 쫓아내려는 의도.

"이런 시부럴! 그건 또 뭐였소?!"

신기루처럼 사라지는 망령을 발견한 미구엘이 쉰 목소리로 외쳤다.

이안은 미간만 찌푸릴 뿐, 대꾸도 하지 않았다.

뒤에는 죽음의 찌꺼기. 앞에는 언데드의 물결. 위에는 망령까지.

별것 아닌 놈들이 한자리에 모이니, 이렇게 거슬릴 수가 없었다.

심지어 따로 노는 것도 아니었다.

크히힛-

저만치 앞쪽에 홀연히 나타난 망령이 웃음을 흘렸다.

산발한 머리카락에서 푸르스름한 마력이 안개처럼 번졌다.

언데드들의 안광에 푸른빛이 스며들기 시작한 건 그 직후였다.

잠시 감전된 것처럼 몸을 떤 놈들이, 발작하듯 달려들었다.

더 빠르고 기민해진 움직임으로.

"염병을 떠네."

이안이 이를 갈며 달려드는 해골들을 후려쳤다.

이렇게 쳐 죽여도 찌꺼기의 덩치만 키워 줄 뿐이란 건 알지만, 다른 방법 따윈 없었다.

최대한 빨리 길을 뚫어서 이 빌어먹을 것들을 떨쳐낼 수밖에.

이안이 마력을 일으킨 순간이었다.

크히힉-

저 뒤에서 망령의 웃음이 들렸다.

"...!"

뒤를 돌아본 이안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망령이 필립과 미구엘의 머리 위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신경이 탈 것처럼 곤두섰다.

주변의 모든 정보가 한순간에 인식됐다.

주위만 두리번대느라 이제야 망령의 존재를 눈치챈 두 놈.

얼마 없는 신성력을 쥐어짜며 찌꺼기의 전진을 늦추는 데에 여념이 없는 메브.

얼굴을 가린 손을 내리는 망령.

그리고 놈의 푹 파인 눈두덩이에 휘몰아치는 푸르스름한 마력까지.

단말마를 내지르려는 게 분명했다.

데미지는 물론, 지속시간이 긴 착란 상태까지 유발하던 스킬.

이안은 인지하는 것만큼이나 빠르게 결론을 도출했다.

저걸 막지 못하면 필립과 미구엘은 죽는다.

"둘 다 귀 막아! 당장!"

이안의 눈동자가 붉게 타올랐다.

#026화

콰르르르-

그의 주위로 새빨간 불덩이가 연달아 피어올랐다.

그것들은 형태를 갖추기가 무섭게 앞으로 뿜어져 나갔다.

콰콰콰쾅! 끼아아악-!

불덩이 네 개가 연달아 망령에 부딪혀 폭발했다.

망령이 비명과 함께 증발했다.

콰광-!

빗나간 두 개는 찌꺼기를 맞췄다.

앞부분이 움푹 들어가며 뼛조각이 사방으로 튀었지만, 흘러내린 파편들이 순식간에 그 자리를 메꿨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

필립과 미구엘은 눈을 치켜뜬 채로 이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경악과 불신으로 가득한 눈빛.

"말도 안 돼…."

어찌 보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이안이 마법사이리라고는, 꿈에도 상상한 적 없었을 테니까.

"구경났냐? 정신 차려 새끼들아!"

태연하게 덧붙인 이안이,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앞을 돌아보았다.

막상 마법을 쓰고 보니 속이 다 시원했기 때문이다.

"이왕 쓴 거… 제대로 쓰지 뭐."

읊조린 이안이 몸을 날렸다.

왼손 손아귀에 주먹만 한 화염구를 움켜쥔 채로.

콰직- 퍼엉!

몇 번째인지 모를 폭발이 일었다.

구울 기사가 파편이 되어 흩뿌려지고, 주위의 해골들이 우수수 튕겨 나갔다.

'이제야 모든 게 이해되는군.'

그 사이를 뚫고 돌진하는 이안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메브는 흑마법사의 속삭임을 다시 떠올렸다.

적색 나부랭이. 어째서 그게 이안이란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가.

단지 겉모습이 어울리지 않을 뿐.

식견과 지식. 안목과 통찰력. 신중하며 비밀이 많은 성격까지.

돌이켜 보면, 이안의 많은 의문스러운 부분이 마법사와 어울렸다.

물론 마법사는 온갖 음험한 소문과 비화를 몰고 다니는, 광기와 가장 인접한 존재들이었지만.

메브는 그런 뜬소문보다 자신이 직접 보고 겪은 것을 믿었다.

오히려 조금 안도하기까지 했다.

반드시 찾으리라 마음먹었던 적색 마법사가 이안이었다니.

'결국은 또 빚을 지게 되겠군.'

사실 빚은 지금도 지고 있었다.

품은 신성력을 다 소모할 각오까지 했건만.

이안 덕에 전진이 훨씬 빨라지면서, 찌꺼기를 막으려 안간힘을 쓸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놈이 전진하는 속도는 보이는 것보다 훨씬 빨랐지만.

그렇다고 달리는 걸 따라잡을 정도로 빠르지는 않았다.

키이… 키이잇-

이제 메브가 신경 써야 할 적은,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저 분노한 망령뿐이었다.

이안의 공격이 치명적이었는지, 놈은 한동안 일행의 근처로는 다가오지도 않았다.

웃음 대신 기분 나쁜 숨소리를 토해내며 주위를 맴돌 뿐.

하지만 메브는 놈이 곧 다시 공격해 오리라 확신했다.

계속 따라오고는 있었으니까.

그녀는 그런 속내를 드러내지 않은 채 달리기만 했다.

망령이 방심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야 근처까지 다가올 테니까.

그 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아 찾아왔다.

키이이잇-

정수리 위에서 울리는 숨소리.

곧장 쥐고 있던 검날을 놓은 메브는, 떨어지는 검의 자루를 낚아채며 그대로 길게 올려 베었다.

번쩍! 신성력이 푸른 선을 그렸다.

선이 망령을 세로로 관통했다.

망령이 얼굴을 가리고 있던 손을 툭 떨어뜨렸다.

끼아아…

산발한 머리칼을 얹은 흉측한 두개골이 비명과 함께 쪼개지고, 이윽고 한 줌의 재가 되어 스러졌다.

"망령을 처리했다, 이안!"

메브가 소리쳤다.

좀 전부터 주위를 살피며 달리던 이안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럼 이제부터 나를 시야에서 놓치지 마시오! 곧 갈림길이 나올 거요!"

"갈림길…? 알았다!"

대답한 메브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가 의아해한 건, 이안이 전에도 이곳에 와 본 적이 있는 것처럼 말해서였다.

이 또한 마법사가 품은 수많은 신비 중 하나인가.

하지만 그녀의 새로운 의문은,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

이안이 후려친 구울 기사가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이안은 자신이 죽인 구울을 돌아보지조차 않았지만.

그녀는 머리가 으깨져 널브러진 구울 기사를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설마….'

놈이 걸친 갑옷의 형태가 아주 익숙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왕국의 친위 기사들이 착용하는 것과 똑같이 생겼으니까.

이안이 계단 앞에서 주운 목걸이가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애써 잊었던 불길한 상념들이 선명하게 고개를 들었다.

'설마….'

멈춰선 메브가 무릎을 꿇었다.

그녀가 떨리는 손길로 시신을 붙잡았다.

갑옷의 이음매 부분에 새겨진 사슴뿔 문양.

허겁지겁 시신을 뒤적인 그녀의 손아귀에, 이윽고 부러진 목패 하나가 들려 나왔다.

흔들리는 눈으로 거기 새겨진 이름을 확인한 메브가, 비로소 고개를 떨궜다.

버논이 아니었다.

"하… 하하."

안도인지 무엇인지 모를 한숨이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온 그 순간.

품속에서 공명하던 정수가 문득 마력을 퍼뜨렸다.

신성력을 일으키려던 메브가 순간 멈칫했다.

흑마법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낯설지만 익숙한, 모순된 느낌이 드는 또 다른 누군가의 의식.

"...?!"

눈을 치켜뜬 메브의 고개가 좌측으로 돌아갔다.

수많은 언데드의 보랏빛 안광.

정수와 공명하는 무언가는 그 너머에 있었다.

그녀를 부르듯이.

"…경! 리우렐 경! 메브!"

마력 실린 이안의 외침이 메브의 정신을 간신히 일깨웠다.

눈을 깜빡인 메브는, 목소리가 들려온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널브러진 언데드의 잔해들.

그 위를 내달리는 필립과 미구엘.

그리고 그 너머의 통로 한복판, 눈을 부릅뜬 이안.

그의 외침이 이어졌다.

"조심하시오!"

"...!"

본능적으로 몸을 날린 메브가 바닥을 굴렀다.

촤르르르르-

그녀가 주저앉아 있던 자리로 뼈 무더기가 쏟아졌다.

구울 기사의 시신이 그 사이로 파묻혀 사라졌다.

어느새 죽음의 찌꺼기가 지척까지 다가온 것이다.

"나, 나리이이!"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필립과 미구엘이, 바닥을 구르다시피 방향을 돌려 그녀 쪽으로 달려왔다.

연달아 땅을 구르며 메브는 숨을 헐떡였다.

충격을 받아서인지, 평소에는 한 몸 같던 갑옷이 납덩이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나리…! 괜찮으십니까?"

그런 그녀의 팔을 붙잡아 일으켜 세운 건 필립이었다.

반대쪽 팔을 부축한 미구엘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설마 또 부상이라도 당하신 건-"

쿠구구구-

익숙한 진동이 그의 목소리를 가렸다.

필립과 미구엘, 메브의 고개가 거의 동시에 진동의 근원지 쪽으로 돌아갔다.

이안이 선 통로 앞에 석벽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비로소 메브의 눈이 커졌다.

"이안-!"

이내 이안의 모습이 벽에 가려져 사라졌다.

홀연히 떠오른 검붉은 고대어.

"저런 미친, 염병할, 개 같은…!"

미구엘이 욕설을 토해내는 사이.

찌꺼기를 곁눈질하던 필립이 메브를 돌아보았다.

"나리! 이제 어떻게 할까요?"

굳어졌던 것도 잠시.

메브의 고개가 좌측으로 돌아갔다.

유일하게 남은 길.

"…따라오거라."

검을 으스러질 듯 움켜쥔 메브가, 이윽고 걸음을 내디뎠다.

이렇게 된 이상 갈 수밖에 없었다.

저 너머에 기다리는 게 무엇이건.

***

"뭘 봤길래 저런 거야…?"

앞을 가로막은 석벽을 응시하며, 이안이 나지막이 읊조렸다.

하필 갈림길 앞에서 멈춰 서다니.

영문 모를 상황이었지만, 이안은 이내 어깨를 으쓱였다.

일어난 일은 일어난 일.

게다가 메브라면 필립과 미구엘을 데리고도 한동안은 충분히 살아남을 수 있으리라.

"…늦기 전에 끝내면 되겠지."

이안이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복도 너머, 낡아빠진 갑옷을 걸친 해골 기사 수십이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물론 혼자가 된 지금은, 저놈들의 숫자 따윈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솨아아- 타탓!

몸을 기울였던 이안이 예고도 없이 튀어 나갔다.

카앙-!

해골 기사 하나가 내리친 검을 메이스로 빗겨 막은 이안은, 미련 없이 자루를 놔버리며 내달렸다.

좌우로 줄지어 이어진 석관들이 그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이윽고 이안의 시선이 안치실 너머의 야트막한 단상 위에 꽂혔다.

한쪽 무릎을 꿇고 검을 땅에 꽂은 요정 기사의 석상.

'게임이랑 똑같이 생겼네.'

해골 기사들을 이리저리 피해 지나친 이안이 석상으로 돌진했다.

그리고 적당한 거리에서 도약.

쩌억-

공중제비를 돈 이안이 석상이 내리꽂은 검의 무게추 부분을 짓밟으며 곡예하듯 착지했다.

한 박자 늦게 검이 단상 아래로 움푹 들어갔다.

철컥-! 쿠구구구-

단상이 뒤로 밀려나면서, 더 깊은 지하로 이어진 계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게 숨겨진 지름길이었다.

게임에선 흑마법사를 죽인 뒤에 출구로 사용했던 길.

달려오던 해골들이 우뚝 멈췄다.

고요하게 일렁이는 안광들.

들어오라 이거지?

이안은 보란 듯 미소 짓고는 계단 아래로 뛰어내렸다.

계단은 직선으로 이어지다 꺾였다.

이안이 코너를 돌자, 얼마 지나지 않아 한쪽 벽면이 사라졌다.

시야가 순식간에 트였다.

거대한 지하 동공.

'아겔 란의 국왕도 이런 곳이 있는 줄은 모르겠지.'

벽면을 따라 이어진 계단을 내려가면서, 이안은 주위를 살폈다.

저 멀리까지 빽빽하게 이어진 주문 회로.

곳곳에 솟은 굵직한 기둥은, 거대한 신전을 고스란히 지하로 옮겨 놓은 것처럼 웅장했다.

실제로도 그랬다.

여긴 고대 요정들이 죽음의 신을 모시던 신전이었으니까.

주문 회로가 모이는 중심부에 높이 솟아 있는 제단이 그 증거였다.

제단 위에는 반으로 부서진 석상과 온갖 뼈로 만들어진 거대한 의자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유적을 타락시킨 장본인은, 바로 그 의자에 앉아 있었다.

로브를 머리까지 덮어쓴 채.

흐르는 마력을 전신에 머금고서.

"기어코 여기까지 오다니…. 그 만용만큼은 칭찬해 주마, 적색 버러지야."

쇠를 가는 듯한 목소리가 울렸다.

보랏빛 안광을 줄기줄기 흘리면서, 흑마법사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이곳에서도, 네 하찮은 잔재주가 통하리라 기대하지는…."

느긋하게 이어지던 목소리가 문득 끊겼다.

흑마법사의 안광이 흔들릴 찰나.

콰아아아아-

용의 숨결을 방불케 하는 불길이, 제단을 통째로 집어삼켰다.

콰르르르-

제단을 녹여 버릴 기세로 쏟아지던 불길이 한참 만에 잦아들었다.

자욱한 연기 사이, 왼손을 내뻗은 이안의 모습이 드러났다.

손아귀의 정수에서 아지랑이 같은 열기가 번졌다.

"학습 능력이란 게 없나…."

겪어 보고도 주절대고 지랄이야.

이안이 비웃듯 읊조릴 찰나.

"이… 노오오옴!"

제단에 덮인 연기를 뚫고 보랏빛 안광이 터져 나왔다.

"감히 또 내 말을 자르다니!"

흑마법사가 연기를 뚫고 솟구쳤다.

입고 있던 로브가 너덜너덜해지면서, 놈의 본모습이 드러났다.

"그때와 같으리라 생각하지 마라! 네놈의 조잡한 주문 따윈 더는 통하지 않을 테니!"

"말 많네. 되다 만 리치 주제에."

이안이 놈을 훑으며 빈정댔다.

얼굴은 물론 온몸이 미라처럼 말라비틀어졌고 어깨 위에 뼈로 만들어진 팔이 하나씩 더 돋아 있는, 기괴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지만.

그의 기억보단 여러모로 초라했다.

게임에서의 놈은 뼈만 남은 데다 팔도 여섯 개였고, 이마 한복판에 커다란 정수까지 박혀 있었으니까.

"이… 버러지 같은 놈이!"

정곡을 찔린 듯 흑마법사가 격노했다.

제단 뒤편에서 보라색 마력이 번지더니, 그대로 흑마법사가 치켜든 마법 봉으로 빨려 들어갔다.

놈의 등 뒤로 거대한 악령이 뭉치기 시작했다.

사령 소환. 물리적 실체를 갖춘 악령 덩어리가 아가리를 벌리며 달려들었을 때, 이안은 이미 제단을 향해 내달리고 있었다.

"네놈이 얼마나 미약한 존재인지 철저하게 깨닫게 해 주마! 끝없는 고통은 그 후에 선사할지니!"

흑마법사가 마력이 맺힌 왼손을 치켜들었다.

퍼서석- 푸스스-

땅속에서 해골들이 공포 영화의 한 장면처럼 기어 나왔다.

인간보다 더 크고 긴 골격.

시원 지하에 묻혀 있던 고대 요정들의 유골이었다.

순식간에 포위당한 형국이었지만.

이안의 눈빛은 여전히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내 기억보다 약한 것 같은데. 변이가 덜 끝나서 그런가.'

게임 속 흑마법사는 날아다니는 데다 온갖 주문과 소환을 난사하고, 패턴도 까다로웠다.

하지만 그런 만큼 체력이 낮고 물리 공격에도 취약했다.

접근할 수만 있으면 의외로 쉽게 죽일 수 있다는 얘기였다.

여러모로 불완전한 지금은, 아마 더 쉬우리라.

"두렵나? 벌써 굳어 버리다니 애석하군. 공포는 이제 시작이거늘."

흑마법사가 마법 봉을 뻗었다.

장내의 모든 언데드가 이안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 반대일걸? 새꺄."

이안의 눈동자가 다시금 붉게 달아올랐다.

손아귀의 정수가 회전하면서, 이안의 주위로 수많은 불덩어리가 동시에 피어올랐다.

춤추는 불꽃.

쓰기 쉽다는 이유로 별생각 없이 2레벨이나 배운 이 하위 적색 마법은, 정수로 증폭되자 불꽃의 숫자가 엄청나게 늘었다.

정확한 조준이 어렵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이번에는 조준 자체가 필요하지 않았다.

적이 모든 곳에 있었으니까.

콰과과과광-

달려들던 해골들이 불꽃에 부딪혀 터져나갔다.

후끈한 열기와 산산이 부서진 뼛조각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쉬학-!

그 사이로 이안이 솟구쳤다.

자신을 향해 쇄도하는 그를 보며, 흑마법사가 조소했다.

"통하지 않는다고 했을 텐데?"

그가 보랏빛 마력을 내뿜는 마법 봉을 길게 휘둘렀다.

마력의 궤적을 따라, 울부짖는 망령들이 맺힌 장벽이 피어올랐다.

끼아아아-

장벽에서 터져 나오는 귀곡성.

이안이 땅을 향해 화염구를 내던진 건 그 직후였다.

퍼엉-!

화염구는 얼마 뿜어져 나가지 않아 폭발했다.

그 반작용으로 연기에 휩싸인 이안의 몸이 허공에서 한 번 더 솟구쳤다.

"뭣…?!"

그것까지 예상하지는 못했는지, 흑마법사가 쇳소리를 냈다.

그사이 망령 장벽을 뛰어넘은 이안이 몸을 휘돌렸다.

잿빛이 아른거리는 눈동자.

바람을 전신에 두른 채 회전하던 그의 몸이, 일순간 화살처럼 흑마법사를 향해 쏘아졌다.

어느새 이안의 오른손에 들린 새로운 메이스가 흑마법사의 머리를 향해 뻗어나갔다.

네 개의 팔로 얼굴을 가린 흑마법사가 황급히 물러났지만, 이안보다 빠를 수는 없었다.

철퇴로 모여든 바람이 맹렬하게 회전했고.

콰지직-!

뼈로 만든 팔 두 개와 함께, 흑마법사의 한쪽 어깨가 통째로 박살 났다.

"키- 아아악-!"

흑마법사가 허공에서 활처럼 몸을 꺾으며 비명을 내질렀다.

제단 위를 구르며 착지한 이안이, 혀를 차며 읊조렸다.

"빗나갔네. 씁."

#027화

역시 응용은 어렵다니까.

마법을 본래 용도와 다르게 사용하거나 서로 다른 속성의 마법을 섞어 쓰는 것은, 그가 망캐이기에 가능한 응용법이었다.

사실 망캐가 아니라면 연구할 필요도 없었겠지만.

끝까지 살아남으려면, 계속 연구하고 시도할 필요가 있었다.

실패해도 괜찮을 때 특히 더.

한 번의 실수로도 목숨을 잃을 만한 시점이 됐을 때는, 연습할 기회조차 없을 테니까.

그런 의미에서 이번 실패는 그리 위험하지 않았다.

"네 이노오옴…! 유물이 하나가 아니었구나! 방심을 유도하다니!"

자세를 추스른 흑마법사가 울부짖었다.

다른 속성의 마법일 거란 생각은 그 역시 전혀 하지 못한 모양.

이안이 어깨를 까딱였다.

"들켰네."

흑마법사의 시선이 메이스로 향할 찰나, 이안이 다시 몸을 날렸다.

바람이 그를 힘껏 떠밀었다.

"쥐새끼다운… 짓이로구나!"

흑마법사가 하나 남은 팔을 치켜들었다.

용케도 마법 봉을 놓치지는 않은 채였다.

끼아아아-!

아까보다 훨씬 거대한 망령 장벽이 귀곡성을 흩뿌리며 펼쳐졌다.

이번엔 아예 주위 전체를 뒤덮은 형태.

역시 두 번은 안 통하나.

입맛을 다신 이안이 마력을 끌어올렸다.

아무리 그라도 빈틈이 없는 장막까지 피할 수는 없었다.

끼아악-!

장벽이 이안을 뚫고 지나가며 저주를 흩뿌렸다.

눈앞이 아찔해지는 원한.

그의 정신을 오염시킬 수는 없었지만, 돌진을 막는 데는 충분했다.

이안이 그대로 추락하는 사이.

고오오오-

마법 봉을 치켜든 흑마법사의 전신에 보랏빛 마력이 휘몰아쳤다.

제단 뒤편에서 다시 한번 마력의 파장이 번졌다.

사방의 주문 회로가 번뜩이고, 이안을 올려다보던 언데드들이 감전된 것처럼 몸을 떨었다.

그 사이로 무사히 착지한 이안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바로 2페이즈? 빨라서 좋네.'

촤르르르-

해골들이 조각조각 분해되어 흑마법사에게 빨려 들어갔다.

촤라락- 뼛조각들이 흑마법사의 전신에 끝도 없이 달라붙었다.

무수한 뼈로 이루어진 거대한 리치의 형상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놈의 약점 중 하나인 물리 방어력이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물론 방어력만 올라가는 건 아니었다.

"네 발버둥은 여기까지다, 적색 버러지야…. 이것이 공허의 심연에서 손에 넣은 권능이니."

공동을 웅웅 울리는 목소리.

무수한 두개골을 왕관처럼 두른 리치가, 거대해진 팔을 들었다.

"…전형적인 새끼 같으니라고."

그 손아귀에 뭉치는 사령의 덩어리를 바라보며, 이안이 피식댔다.

그의 눈동자에 붉은 마력이 휘몰아쳤다.

"죽음이 곧 축복이리란 깨달음을 내려주마."

이안이 마법을 완성하는 것보다, 리치가 손을 내리치는 게 빨랐다.

끼아아아아-

응축된 사령이 광선처럼 뿜어져 나갔다.

이안이 그대로 옆으로 내달렸다.

콰과과과과- 끼아아아악-

쏟아진 광선이 사방으로 사령의 잔재를 흩뿌리며 그를 따라왔다.

이안은 이를 악문 채 흑마법사의 주위를 돌았다.

빙글빙글 돌면서 조금씩 간격을 좁히는 건 게임에서의 전략이었다.

직선으로 달려가면 광선을 피할 수 없었고, 기둥 뒤로 숨으면 반격의 기회가 사라졌으니까.

그리고 이 방식은 현실이 된 지금도 유효했다.

끼아아아-

한참 따라오던 광선이 잦아들었다.

사령의 잔재들이 천장과 벽면을 튕기며 수없이 날아들고, 흑마법사가 곧바로 다음 공격을 준비했다.

'나도 두 번은 안 당하거든.'

이안의 눈동자에 다시 붉은 마력이 몰아쳤다.

날아드는 사령의 잔재들은 굳이 피하지 않았다.

이 정도는 충분히 견딜 수 있었다.

화르르륵-

덕분에 이번에는 그의 마법이 더 빨리 완성됐다.

수십 개의 불꽃이 연달아 피어올라 리치를 향해 뻗어나갔다.

콰과과광-

놈의 거대한 머리와 어깨, 가슴팍에 마구잡이로 부딪힌 불덩이들이 폭발했다.

섬광과 자욱한 연기가 놈을 휘어 감았다.

"하찮은… 주문이군."

비웃는 듯한 목소리와 함께, 사령이 가득 맺힌 손아귀가 연기를 가르며 뻗어 나왔다.

끼아아아악-

사령 광선.

하지만 이안은 이미 거기 없었다.

처음부터 놈의 시야를 가리는 게 목적이었기 때문에, 마법을 펼치자마자 직선으로 내달린 것이다.

쩍, 텅 비어 버린 정수가 쪼개지며 손에서 떨어졌다.

개 아깝네, 시발.

혀를 찬 이안이 아공간에서 새로운 정수를 꺼냈다.

"쥐새끼 같은 짓만 골라 하는군!"

리치가 그제야 이안의 위치를 눈치챘다.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 쏟아지던 광선이 빠른 속도로 따라붙었다.

이안이 놈의 발과 발 사이로 쑥 들어가 버린 건 그 직후였다.

"...?!"

리치의 안광이 흔들렸다.

그의 기형적인 팔은 다리 사이를 조준할 수 없을 만큼 컸고, 마법을 펼치는 동안에는 몸을 돌리는 정도밖에는 움직일 수 없었다.

치직- 치지직-

이안이 고등 마법을 완성할 시간이 충분히 주어졌다는 의미였다.

그의 주위로 푸른 빛이 번쩍였다.

그러쥔 손아귀 사이에서 전격이 줄기줄기 피어올랐다.

파치치치칫-

전격은 순식간에 거미줄처럼 빼곡하게 번져 나갔다.

손아귀를 넘어 팔뚝까지 번개를 휘감은 듯한 형상이 된 그때.

비로소 악령 광선이 잦아들었다.

둔탁한 움직임으로 한 걸음 물러난 리치가 이안을 내려다보았다.

해골에 표정이 있을 리 없건만.

그의 얼굴에 또렷하게 새겨진 감정은, 경악이라고밖에는 표현할 수 없었다.

"회색…?! 유물이… 아니었다고?"

이안이 그를 올려다봤다.

"지금 그딴 게 중요하냐?"

"...?!"

그제야 리치의 안광이 출렁였지만.

이안은 이미 망설임 없이, 번개가 가득 맺힌 양손을 놈의 가랑이를 향해 뻗고 있었다.

손바닥 사이의 정수에서 시리도록 푸른 빛이 터져 나왔다.

꽈릉-!

굵은 벼락이 리치를 관통했다.

콰치치치칙-

눈부신 발광이 이어졌다.

시전 시간과 마력 소모량 때문에 거의 쓸 일이 없는 중위 회색 마법, 연쇄 번개.

하지만 그만큼 공격력이 높았고, 물리 방어력을 무시하는 부가 효과까지 있었다.

정수의 증폭까지 더해지면, 전신에 뼈 껍질을 두른 흑마법사라도 충분히 튀겨 버릴 수 있으리라.

파치치칙-

리치의 전신에 맺혀 한참을 번쩍이던 전격이, 이윽고 흩어졌다.

바들대던 리치가 굳어졌다.

거대한 눈구멍과 벌어진 턱 사이로 연기가 피어오른 것도 잠시.

파스스스-

놈의 전신이 가루가 되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

이안이 황급히 물러났다.

하지만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뼛가루를 피할 수는 없었다.

가루 더미에 파묻혔다가 솟아오른 이안이 오만상을 찌푸렸다.

개 찝찝하네, 진짜.

얼굴만 대충 털어낸 그가 앞으로 나아갔다.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정수와 메이스를 아공간에 되돌린 그가, 검을 꺼내 들며 멈춰 섰다.

수북한 뼛가루 한복판.

흑마법사가 널브러져 있었다.

본래도 미라 같던 팔다리는 검게 타서 눌어붙었고, 눈은 익은 것처럼 하얗게 멀어 버린 채였다.

귀까지 먹지는 않았는지, 놈이 바들댔다.

"어떻게… 다른 색의 마법을…?"

입술 사이로 연기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안의 입가에 실소가 스쳤다.

"곧 뒈질 텐데 아직도 그딴 게 궁금하냐?"

"...."

흑마법사가 입을 뻐끔댔다.

놈의 비쩍 마른 얼굴에 비로소 공포가 번졌다.

"조금만 더 시간이 있었다면… 진정한 불사자로 거듭날 수 있었을 텐데…. 태초의 진리가… 심연의 권능이 내 것이었거늘… 제기랄…."

몸의 뼛가루를 털며 애원인지 유언인지 모를 주절거림을 듣던 이안은, 이윽고 흑마법사의 등에 한쪽 발을 얹었다.

"위로가 되진 않겠지만."

그가 팔을 치켜들었다.

"넌 시간이 더 있어도 불사자가 되거나, 그놈의 진리라는 걸 깨닫지도 못했을 거다. 콘라우드."

"그럴 리가 없… 네, 네놈, 내 이름을 어떻게…?"

퍼석!

검이 콘라우드의 목을 쳤다.

마른 나뭇가지처럼 잘려나간 그의 머리가 굴러떨어졌다.

몸을 숙인 이안이 놈이 사용하던 마법 봉을 주워든 그때였다.

푸스스스-

콘라우드의 머리에서 검 보랏빛 연기가 피어올랐다.

구멍이란 구멍에서 모두 번져 나온 그건, 뒤틀리고 비대해진 흑마법사의 망령이었다.

"...?"

이건 없었던 일인데?

이안이 미간을 좁힌 순간, 또 다른 변화가 일었다.

허공에 쩍, 균열이 일더니 공간이 갈라지며 구멍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 너머로 보랏빛이 일렁였다.

끄- 아아아아-

콘라우드의 영혼이 끌려 들어가기 시작한 건 그 직후였다.

고통에 찬 비명.

진공청소기처럼 콘라우드의 영혼을 빨아들인 구멍은, 나타날 때만큼이나 한순간에 사라졌다.

"…뭐야, 저거."

이안이 눈을 끔뻑였다.

공간을 찢고 영혼을 삼키는 구멍이라니.

"공허… 인 건가?"

공허, 태초의 혼돈, 심연 따위는 타락자들이 달고 사는 말이었다.

어깨를 으쓱인 이안은 마법 봉을 아공간에 넣으며 뼈 더미 아래로 내려갔다.

콘라우드의 수급.

영혼을 빨렸어도, 오염된 마력의 잔재가 선명하게 느껴졌다.

"증거로 써먹기엔 충분하겠지…."

준비해 둔 천 주머니에 머리를 넣은 이안이, 비로소 비틀대며 주저앉았다.

마력을 대량으로 소모한 여파가 뒤늦게 밀려들었다.

울렁거리는 속과 지끈거리는 머리.

정수로 마법을 몇 번만 더 썼더라면 마력 탈진 상태에 빠졌으리라.

"그나저나…."

관자놀이를 주무르며, 이안은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이게 왜 안 꺼지지.'

주문 회로가 여전히 작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덤의 언데드들이 계속 움직이고 있으리란 의미였다.

게임에선 흑마법사를 죽이면 작동이 멈추면서, 언데드들까지 싹 다 쓰러졌었건만.

"혹시…."

이안의 시선이 제단으로 향했다.

콘라우드가 고위 마법을 쓸 때마다 번지던 마력의 파장을 떠올린 것이다.

또 쓸데없는 현실성 같은 게 생긴 건가.

'애초에 마법부터가 말도 안 되는 거라고….'

이안이 혀를 차며 일어섰다.

제단을 빙 돌아간 그는, 이윽고 제단 뒤편의 한복판에서 멈췄다.

제단의 옆면을 따라 새겨진 주문 회로가 모여, 원형의 빈 공간을 만들어 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손바닥이 충분히 들어갈 크기.

마력을 끌어올린 이안이 손을 가져다 댔다.

쿠르릉-

문양이 새겨진 벽면이 움푹 들어가면서, 제단 아래로 향하는 계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안이 계단에 들어섰다.

벽면과 천장에 새겨진 마력 회로 덕에 어둡지는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계단과 계단 사이의 간이 공간이 나타났다.

작은 책장. 그리고 종이와 책이 쌓인 책상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하여간 마법사란 것들은.'

이안은 무심하게 책상을 훑었다.

마법사는 저마다의 연구와 탐구를 끝없이 이어가는 족속들이었다.

이안도 몇 번인가 다른 마법사의 연구 일지를 읽은 적이 있었다.

대부분 조현병 환자의 일기 같은 느낌이었지만.

'어쨌건 나름대로 도움 되는 정보도 섞여 있긴 했었지.'

이안의 시선이 이윽고 가죽으로 제본된 두꺼운 책에서 멈췄다.

연구 일지.

일지를 챙긴 이안이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주문 회로의 빛이 점점 더 밝아지는 가운데, 한 평 남짓한 넓이의 밀실이 모습을 드러냈다.

주문 회로는 밀실 중앙의 기둥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1미터 정도 높이의 기둥.

그 위에 축구공만 한 보라색 구체가 둥둥 떠 있었다.

'이게 정수가… 맞나?'

처음 보는 거대한 크기.

기둥으로 다가서면서 이안은 고개를 기울였다.

전해지는 느낌이 오염된 마력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정순한 마력 같았고, 심지어 신성력 같기도 했다.

'어쨌든, 이게 동력원이긴 하겠지.'

기둥 앞에 멈춰 선 이안이 잠시 볼을 긁적였다.

'…부숴 버리긴 좀 아까운데.'

이안은 이내 자신의 저항력을 믿기로 했다.

전해지는 느낌이 타락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도 결정에 한몫했다.

손아귀에 마력을 응집시킨 이안이 구체로 손을 뻗었다.

최소한의 안전장치. 손끝이 닿자, 구체 표면에 동심원이 번졌다.

이안의 손이 구체 내부로 쑥 빨려 들어간 건 그 직후였다.

"어…?"

눈을 치켜뜬 이안이 손을 빼려 한 다음 순간.

푸확-!

구체가 페인트 탄처럼 폭발하면서 그를 덮쳤다.

세상이 확 뒤집혔다.

그리고 암전.

#028화

'이게 대체 뭐야…?'

이안은 정신을 잃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의식은 그 어느 때보다도 또렷했다.

불현듯 귀가 먹먹해졌다.

끝없이 추락하면서도 동시에 솟구치는 듯한 기묘한 감각이 번졌다.

다음 순간, 별들의 바다가 눈앞에 펼쳐졌다.

끝없이 펼쳐진 우주.

이안은 그 한복판으로 떨어지면서도 솟구치고 있었다.

이안은 지금 자신의 육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저 의식만이 우주 한복판에 떨어져, 엄청난 속도로 흘러갈 뿐.

온갖 행성들이 가까워졌다가, 다음 순간 까마득하게 멀어졌다.

황홀하고도 공포스러운 광경.

다큐멘터리나 영화에서 보았던 것들과 엄청나게 다르지는 않았지만.

현실감은 비교도 할 수 없었다.

'이게 뭐건 간에, 개 쩔긴 하네.'

이안은 시선을 돌리거나 눈을 감을 수도 없이, 그저 그 모든 것들을 마주 보았다.

저 멀리 반짝이던 별들이 형형색색의 선이 되어 그의 시야를 가득 채우며 밀려났다.

이안은 자신이 점점 더, 끝도 없이 빨라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직선이 곡선이 되고, 지금 자신이 보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조차 알 수 없게 되어가던 한순간.

불현듯 모든 선이 사라졌다.

대신 이안의 시야를 채운 건, 소리 없이 일렁이는 빛의 고리였다.

암흑을 머금은, 거대한 빛의 고리.

이안은 그것이 예전에 영화에서 본 무언가와 몹시 닮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블랙홀…?'

이걸 정말 그런 단순한 이름으로 불러도 되는 것일까.

경탄을 끝맺을 틈도 없이, 그는 블랙홀의 고리 앞에 도달했다.

아무리 이안이라도 이런 순간까지 침착할 수는 없었다.

저 안에선 빛조차 빠져나갈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시야가 번쩍이고, 일렁이고, 다시 어두워졌다.

끝이 보이지 않는 심연.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안은 눈이 부시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법칙이 뒤집힌 세계.

다음 순간, 빛이 사라졌다.

대신 어둠이 내려앉았다.

새하얀 어둠.

어떤 거대한 존재의 눈동자였다.

그의 인지력으로는 형체를 제대로 파악조차 할 수 없는 무언가.

그때, 눈동자가 그를 바라보았다.

'...!'

전율. 뒤이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공포가 밀려들었다.

영원과도 같은 찰나의 순간.

모든 것이 점이 되어 멀어졌다.

시야가 다시 뒤집혔다.

"우웩…!"

처박히듯 바닥에 쓰러진 이안이 속을 게워냈다.

그의 전신에 맺힌 보라색 안개가 반짝이며 흔적도 없이 증발했다.

현실로 돌아왔으나, 이안은 여전히 공포에 잡아 먹혀 이성을 되찾지 못했다.

모든 감각이 뒤섞여 흘러내렸다.

전신이 발작하듯 떨리는 가운데, 이안은 상태 창을 열어 정신력 수치를 마구 올렸다.

본능적인 발악에 가까운 행동.

하지만 효과가 있었다.

발작이 가라앉고, 공포가 서서히 밀려났다.

감각이 제자리를 되찾았다.

칠흑 같은 어둠만큼은 여전했다.

주문 회로가 작동을 멈추면서, 광원이 완전히 사라진 탓이었다.

"퉤. 후우, 후우…."

이안은 위액 섞인 침을 뱉으며 숨을 골랐다.

상태 창을 보니 정신력 수치가 무려 아홉 개나 올라 있었다.

포인트를 대량 소모한 셈이었지만,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쓰지 않았다면 미쳐 버렸을 테니까.

어차피 필요한 능력치이기도 했고.

상태 창을 닫은 이안의 시선이, 문득 다시 어둠 한복판에 고정됐다.

새로운 창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건 또 뭐야…?'

처음 보는, 심지어 받은 적도 없는 서브 퀘스트가 완료되어 있었다.

혼돈의 조각.

태초의 혼돈에서 떨어져 나온 조각을 공허로 돌려보냈다는 게 본문의 내용이었다.

보상은 혼돈의 파편.

'그 블랙홀이 공허였다고?'

이안은 빠르게 상황을 받아들였다.

'그럼 그 존재는… 고대신인가.'

그렇게밖엔 생각할 수 없었다.

이안의 입가에 헛웃음이 번졌다.

타락자들이나 종종 언급하는 공허의 신 중 하나를 보게 될 줄이야.

'콘라우드도 이걸 봤을까? …하긴. 봤으면 살아 있을 리 없지.'

두 번 다시 하고 싶지 않은 경험이었지만, 어쨌건 보상은 있었다.

그것도 그의 몸속에.

이안은 이성이 돌아온 직후부터, 마력을 처음 느꼈을 때와 같은 감각을 느끼고 있었다.

몸속 어딘가에 새로운 감각 기관이 돋아난 듯한 감각.

이안은 차분히 기관을 관조했다.

심상 어딘가에 멋대로 자리 잡은 주먹만 한 덩어리.

그 내부에서, 혼돈의 조각과 같은 기운이 느껴졌다.

정순한 마력 같기도, 신성력 같기도 한 무언가.

'혼돈… 이거 설마, 혼돈력인가?'

이안의 미간이 절로 좁아졌다.

아귀가 딱 맞는 생각이었지만,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혼돈력은 공허의 에너지니까.

게임에서도 극소수의 타락자나 마족들이 사용하던 힘이었고.

플레이어가 혼돈력을 손에 넣으려면, 캐릭터를 타락시켜야 했다.

'…사도 퀘스트 때도 그러더니. 정말 모든 제약이 없어진 거군.'

이안은 이내 현상을 받아들였다.

원리나 근거 따윈 중요치 않았다.

혼돈력을 손에 넣었다는 사실이 중요할 뿐.

'잘 됐지 뭐, 가뜩이나 마력도 딸리는데. 연구만 잘해서 쓰면….'

생각을 이어가던 이안의 눈썹이 문득 꿈틀댔다.

익숙한 파장이 느껴져서였다.

"메브…?"

착각이 아니었다. 신성력, 그리고 오염된 마력이 만들어 내는 파장이 피부가 오싹할 정도로 전해졌다.

다 끝난 판에, 뭔데?

심상치 않음을 직감한 이안은, 더 생각할 것도 없이 몸을 날렸다.

빛 한 점 없는 암흑 속을 아무렇지도 않게 헤집으면서.

***

일행의 위치를 특정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중간 보스, 죽음의 기사.

주문 회로의 작동이 멈춘 지금, 이만한 전투를 만들어 낼 수 있는 놈은 그놈뿐이었으니까.

그의 생각은 정확했다.

"...."

단지 조금 늦었을 뿐.

울부짖는 듯한 기합 소리.

이어진 신성력과 마력의 충돌을 느끼며, 이안은 통로로 들어섰다.

그의 걸음이 이내 느려졌다.

기사의 방 한복판.

두 기사가 한데 들러붙은 채로 굳어있었기 때문이다.

승자와 패자는 명확했다.

메브의 검이 죽음의 기사의 갑주를 꿰뚫고, 놈의 등 뒤로 비죽 튀어나와 있었으니까.

죽음의 기사의 검은 메브의 한쪽 견갑에 박혀 있었다.

느낀 대로, 불과 몇 초 전에 결착을 맺은 모양.

이안은 안도의 한숨을 삼켰다.

어쨌거나 메브가 이겼으니까.

보아하니 주문 회로가 꺼지면서, 다시 신성력을 받을 수 있게 된 모양이었다.

'막판에 다 망치는 줄 알았네….'

생각하며, 이안이 느긋하게 장내로 들어선 그때였다.

"아… 아아…."

굳어 있던 메브가 탄식했다.

"아… 아아아악-!"

탄식은 처절한 절규로 바뀌었다.

직후, 그녀의 전신에서 푸른 신성력이 폭발하듯 솟구쳐 치솟았다.

이안이 멍하니 굳어질 찰나.

콰아아아- 쩌엉!

타오르던 신성력은, 아예 빛의 기둥이 되어 메브를 집어삼켰다.

그 사이로 죽음의 기사를 움켜쥔 메브의 몸이 둥실 떠올랐다.

안면 가리개 때문에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정신을 잃은 것처럼 보였다.

"...."

대체 이게 뭔 상황이지.

눈을 끔뻑인 이안은, 이내 방의 구석으로 걸음을 옮겼다.

필립과 미구엘이 거기 서 있었기 때문이다.

얼빠진 표정의 미구엘과 달리, 필립은 눈물을 글썽대고 있었다.

다가오는 이안을 발견한 미구엘이 눈을 치켜떴다.

"혀, 형씨…! 기다렸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이놈은 또 왜 이러고."

넋 나간 필립을 보며 미간을 좁힌 이안이 물었다.

필립은 빛의 기둥을 망연자실하게 응시하며, 우리 불쌍한 나리… 따위의 말을 중얼대고 있었다.

미구엘이 우물댔다.

"그, 그게 말이오… 끄응."

"뜸 들이지 말고 말해. 전부."

"저, 나리가 죽인 기사 말이오."

"그래."

"그게… 나리의 동생이오."

"뭐…?"

이안이 눈을 부릅떴다.

털썩 주저앉은 필립이 말했다.

"용병 나리와 떨어진 후에, 저희는 반대쪽 길을 뚫었습니다. 위험했지만, 어떻게든 해냈죠. 나리께서 무리하셨습니다. 평정심을 잃으신 것처럼 보였죠. 전 그게 호프 나리와 떨어져서인 줄 알았습니다. 그게 아니었습니다. 느끼고 계셨던 겁니다. 동생분께서 이곳에 있으시단 것을요."

"하…."

이안의 입가에 헛웃음이 번졌다.

죽음의 기사가 버논이었다니.

상상도 해 본 적 없는 정체였다.

"그래서."

"어쨌든 우린 여기까지 왔소. 언데드들이 물러나더군. 저 작자… 리우렐 가주가 명령한 거였소. 나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거요."

미구엘이 눈치껏 말을 받았다.

입맛을 다신 그가 빛의 기둥을 돌아보았다.

"그러면서 뭐라고 했는지 아시오? 나는 이제 누님보다 강해졌다고 했소. 누님을 죽일 수도 있을 만큼. 애초에 나리를 직접 죽이려고 기다리고 있었던 거요."

"…경이 많이 놀라셨겠군."

"저 작자의 말에 대꾸도 못 하실 정도였소. 저자가 우릴 먼저 죽이겠다고 하니, 그제야 움직이시더군. 나 같아도 피붙이가 어둠에 물들어서 미쳐 버리면 바로 받아들일 수 없었을 거요."

버논은 미친 게 아닐 테지만.

생각하며, 이안은 입맛을 다셨다.

물론 고위 언데드로 되살아나면서 정신이 오염되긴 했으리라.

하지만 아예 없던 생각을 하게 만들지는 못할 터였다.

가지고 있던 생각을 뒤틀거나 증폭시킬 뿐.

물론 오랜 시간이 지나면 아예 다른 인격이 되긴 하겠지만.

버논이 언데드가 된 시간은, 그러기엔 너무 짧았다.

"어쨌든, 그렇게 싸움이 시작됐소. 우리 나리께서 밀리셨지. 충격도 받으셨고 신성력도 거의 없으셨으니까. 가주 저 작자는 나리를 조롱했소. 고양이가 쥐를 가지고 노는 것처럼. 실력을 증명하려는 애송이처럼 굴었소. 그러다가…."

미구엘이 이안을 돌아보았다.

"저 작자가 갑자기 그러더군. 자신의 주인이 죽었다고. 그때 우리도 알게 됐소. 형씨가 흑마법사를 죽이는 데 성공했다는 걸 말이오. 그러면서 저자가 뭐라고 했는지 아시오?"

"뜸 들이지 말라고 했을 텐데."

"…자신을 구속하던 존재가 사라졌으니, 세상으로 나가겠다 했소. 이 빌어먹을 왕국부터 불태울 거라더군. 모든 것들의 생명을 취해서, 더 강해지겠다고 말이오. 저 검은 벽 너머의 마족들처럼. 자신의 영지를 만들겠다고."

그 주인에 그 하수인이군.

이안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야말로 헛된 꿈이었다.

분명 버논은 다른 타락자의 꼭두각시가 되었으리라.

"그래서 경이 결단을 내리셨군."

"아니오. 나리는 끝까지 희망을 놓지 않으셨소. 정화할 수 있다고, 저 작자를 설득하려 했지."

미구엘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다가 갑자기 사방이 어두워졌소. 나리의 온몸에서 신성력이 샘솟더군. 나리도 당황하신 것처럼 보였소. 단죄의 여신께서 화가 단단히 나신 거요. 그러실 만하지. 아끼는 사도가 갑자기 사라졌다가 돌아왔으니."

"이런…."

이안의 미간이 좁아졌다.

차라리 메브가 자의로 버논을 죽인 것이길 바랐건만.

"저 미친 작자는 오히려 즐거워했소. 그러면서 진심으로 나리를 죽이려 했소. 전력을 다하고 싶었던 건지…. 어쨌든, 그렇게 진짜 싸움이 시작된 거요. 나리께선 거의 울부짖으셨소. 끝까지 죽이고 싶진 않으신 것 같았는데…."

미구엘의 표정이 씁쓸해졌다.

"마지막엔, 저 작자가 나리의 검에 몸을 던지는 것처럼 보였소.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한 건지 뭔진 모르겠소만. 어쨌든… 그리고…."

미구엘이 빛의 기둥과 이안을 번갈아 턱짓했다.

"저렇게 되셨고, 형씨가 온 거요."

"…그랬군."

이안은 짧게 혀를 찼다.

동생을 찾지 못하면 미친 학살자가 되고, 찾으면 자신의 손으로 죽여야 하는 운명이라니.

이 세계가 게임이었을 때는 이런 비극적인 부분들이 재미있었지만.

현실이 된 지금까지도 즐길 수는 없었다.

빌어먹을 세계라는 생각이 들 뿐.

그때.

푸스스…

마침내 빛의 기둥이 잦아들었다.

메브의 몸이 부드럽게 떨어졌다.

그녀의 품에 안긴 죽음의 기사, 버논의 시신도 마찬가지였다.

전신에 흐릿한 신성력을 머금은 채, 메브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손길이 버논의 찌그러진 투구를 훑었다.

철컥. 안면 가리개가 떨어지고, 버논의 얼굴이 드러났다.

얼굴의 한쪽에 뼈가 드러난, 언데드 특유의 변이된 몰골.

하지만 메브는 애틋하기까지 한 손길로 그 얼굴을 쓰다듬었다.

무거운 침묵이 이어지는 가운데, 이안이 걸음을 옮겼다.

메브가 다가오는 그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안면 가리개 너머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네 의뢰는 완수되었다, 이안. 감사를 표하마. 네가 아니었다면, 여기까지 올 수 없었을 것이다."

뜻밖에도 아주 차분한 목소리.

"하지만 더 함께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여기서부터는 나 홀로 해나갈 생각이니."

"…그게 무슨 말씀이시오?"

멈춰 선 이안이 물었다.

잠시 침묵한 메브가 말했다.

"내 동생은 배덕자들에게 죽임당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강제로 되살아나 부려지기까지 했지. 그로 인해 이 아이의 영혼은 타락했고… 끝내, 구원조차 받지 못했다."

그녀가 버논을 돌아보았다.

"나는 여신께 간청하였다. 이 아이의 영혼을 구원해 주시라고. 하지만 응답하지 않으셨다. 당연하다. 여신은 죄를 심판하는 분이시지, 구원하는 분이 아니시니까."

그녀의 전신에 맺힌 신성력이 일렁였다.

"…하지만 내가 복수를 바란다면, 응답을 주시겠지."

"...."

이안의 눈이 검게 가라앉는 가운데, 메브가 혼잣말하듯 내뱉었다.

"나는 이 아이를 이렇게 만든 자들을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 그들을 섬기는 하수인들 역시."

"그러니까…."

비로소 이안이 입을 열었다.

그가 싸늘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다 죽여 버릴 거란 말씀이오?"

메브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전신에 맺힌 신성력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그게 내가 원하는 복수다, 이안."

이윽고 완전히 일어섰을 때, 그녀의 전신은 핏빛으로 물들어있었다.

"왕국의 타락자와 하수인을 찾아내, 내 손으로 죽일 것이다."

복수의 사도가 이안을 돌아보았다.

"내가 버논에게 그리했듯. 단 한 명도 남지 않을 때까지, 전부."

"...."

슬쩍 눈을 감은 이안이, 피로가 묻어나오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허리춤의 장검을 천천히 뽑아 들었다.

눈을 떠 메브를 마주 본 그가, 고저 없는 말투로 내뱉었다.

"그렇게는 안 되겠소."

#029화

순간 굳어졌던 메브가 물었다.

"안 되겠다니?"

"경과 나 사이엔, 아직 의뢰가 남아 있잖소."

"그 의뢰를 취소하겠다는 뜻이다, 이안."

이안이 고개를 작게 저었다.

"나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의뢰인의 사정 때문에 받은 의뢰를 취소한 적이 없소. 의뢰를 받은 이상, 내 알 바 아니기 때문이지."

메브를 똑바로 마주 보며, 그가 덧붙였다.

"일어난 일은 유감이오. 하지만 예외를 둘 수는 없소."

"...."

메브의 신성력이 흔들렸다.

이안이 이렇게 나오리라고는 생각해 본 적도 없는 모양.

필립과 미구엘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멍하니 입을 벌린 채 이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이안의 말은,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그리고 나는 지금까지, 일방적으로 계약을 파기하거나 보수를 떼먹은 의뢰인을 살려 보낸 적도 없소. 그러니까 경이 계약을 파기하신다면…."

이안이 검을 고쳐 쥐었다.

"나와 싸우셔야 할 거요. 한 명이 죽을 때까지."

"그런…."

"어려우실 것도 없잖소? 경의 말씀대로면 수많은 이들을 죽이게 되실 텐데. 거기 나 하나 추가된들 뭐가 대수겠소. 물론…."

이안의 시선이 메브를 훑었다.

깨진 견갑. 지쳐서 떨리는 손끝.

"경이 죽게 되실 수도 있겠지."

"...."

신성력이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안면 가리개 너머의 눈에 분노와 실망이 뒤섞인 살의가 번져나갔다.

이안은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 보았다.

"두, 두 분, 우선 진정을-"

허둥지둥 끼어들던 필립의 입을, 미구엘이 황급히 틀어막았다.

그가 버둥대는 필립에게 제발 닥치라고 속삭이며 물러나는 사이.

메브가 버논의 가슴에 박힌 자신의 검을 움켜쥐었다.

검이 천천히 뽑혀 나왔다.

"나는 오늘 이미 소중한 사람을 잃었다."

그녀가 이안을 다시 마주 보았다.

"…한 명을 더 잃고 싶진 않군."

신성력이 사그라들었다.

메브가 검을 회수했다.

바짝 긴장했던 필립과 미구엘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무너졌지만.

이안은 미동도 하지 않고 물었다.

"취소하지 않으시겠다는 거요?"

"그래. 우리의 계약은 유효하다. 하지만… 내 복수 역시 그렇다."

"경의 복수를 말릴 생각은 없소."

비로소 검을 늘어뜨리며, 이안이 덧붙였다.

"성공하실지는 모르겠소만."

"…내 방식이 틀렸다는 말이냐? 아니면, 혼자서는 힘들다는 뜻인가?"

이안은 그녀의 방식이 얼마나 추상적인지, 그리고 그걸 택한 그녀가 어떤 결말을 맞이하게 될지를 굳이 설명하지 않았다.

그저 평소처럼 어깨를 으쓱이며.

"둘 다라고 하겠소."

하고 대답했을 뿐이었다.

잠시 굳어졌던 메브가 이윽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

철컹, 안면 가리개가 올라갔다.

여기사의 슬픔과 피로에 찌든 얼굴이 드러났다.

"…네가 내 복수를 돕는다면?"

"그럼 얘기가 달라지겠지."

이안이 검을 회수했다.

일행을 차례로 돌아본 그가, 이윽고 몸을 돌렸다.

"나갑시다. 이 썩은 내 나는 지하에서 할 얘긴 아닌 것 같으니."

물론 그 전에, 먼저 정리해야 할 부분들도 남아 있었다.

***

어느새 한밤중이었다.

미구엘은 지하 무덤의 출입구 앞에 모닥불을 피웠다.

흑마법사가 사라지면서, 역설적이게도 이곳이 밤을 보내기에 가장 안전한 공간이 되었다.

"대단하셨소, 형씨."

나뭇가지에 꿴 육포를 불 옆에 늘어놓은 미구엘이 이안을 돌아봤다.

쉬고 있던 이안이 입만 달싹였다.

"뭔 소리냐?"

"나리를 막으신 것 말이오."

저만치, 버논의 시신을 정돈하는 둘을 돌아본 미구엘이 목소리를 낮췄다.

"나리께서 아무리 눈이 돌았어도, 형씨까지 죽이려 들진 않으시리란 걸 알고 그러신 거잖소."

"아닌데?"

"아니긴 무슨. 미친 게 아니고서야, 그 살벌한 상황에서 진짜로…."

이안의 눈을 본 미구엘이 순간 입을 뻐끔댔다.

"…진심이셨군. 그러실 수 있지."

"예외라는 건, 두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는 거야."

죽일 생각까진 아니었지만.

이안은 뒷말을 삼켰다.

사실 그는, 팔 하나 정도는 날려 버려서라도 메브를 굴복시킬 생각이었다.

그녀가 복수의 사도가 되는 건 막지 못했지만.

미쳐 날뛰다가 개죽음당하는 꼴까지 보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메브가 먼저 검을 거둔 건 그로서도 의외였다.

분명 넘실거리는 증오와 광기를 느꼈고, 그걸 억누르는 건 쉽지 않았을 텐데.

"뭐가 한도 끝도 없으십니까?"

그때 필립이 옆에 앉았다.

"몰라도 되니까 이거나 드쇼."

미구엘이 육포를 건네는 사이, 메브가 이안의 건너편에 앉았다.

분위기가 순간 어색해졌다.

필립과 미구엘이 시선을 돌리며 육포만 질겅대는 가운데.

"괜찮으시겠소?"

이안이 침묵을 깼다.

메브가 그를 바라보았다.

"무엇이 말이냐?"

"복수의 사도가 되셨잖소. 많은 것이 달라지셨을 것 같소만."

"…그래."

메브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이제 여신께선 오로지 복수를 위해서만 신성을 내려 주시겠지."

극단적인 제약.

하지만 그런 만큼, 복수에 있어서만큼은 전보다 더 강대한 힘을 휘두를 수 있게 되었으리라.

'단죄의 사도로서 지켜야 할 제약도 사라졌을 테고. …정말 복수를 위해선 뭐든 할 수 있게 된 거군.'

이안이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내 선택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내 손으로 흑마법사를 죽이지 못한 것만큼은, 평생의 후회로 남겠지…. 사사로운 감정에 이끌려, 대의와 복수를 모두 저버렸으니."

자조적으로 읊조린 메브가 이안을 마주 보았다.

"놈과의 전투는 어떻게 된 거냐?"

"평소랑 같았소. 싸웠고, 죽였지."

이안이 옆에 내려놨던 천 주머니를 그녀에게 던졌다.

"놈의 수급이오. 가지고 돌아가시면 될 거요."

"...."

메브가 주머니를 열어, 안에 든 콘라우드의 머리를 내려다보았다.

여러 감정이 오가는 눈빛.

눈동자만 굴리던 필립이 조심스럽게 입을 연 건 그때였다.

"그래서, 그… 마법으로… 죽이신 겁니까?"

왜 이 말이 안 나오나 했다.

이안이 심드렁하게 내뱉었다.

"그런 셈이지."

"…필립. 내가 댁을 생각해서 하는 조언인데 말이오."

혀를 찬 미구엘이 끼어들었다.

"댁은 눈치를 좀 키울 필요가 있소. 아니면 말하기 전에 생각이란 걸 좀 하든가."

"뭐라고요…?"

"형씨가 왜 마법을 숨겼겠소? 알리고 싶지 않아서겠지? 그걸 우리를 살리려고 드러냈으면, 질문이 아니라 감사를 표해야 한다 이거요. 모르는 척도 해 주고. 눈치껏."

"...."

말문이 막힌 표정이 된 필립이, 이윽고 이안을 돌아보았다.

"죄송합니다, 나리. 그리고 감사드립니다. 나리의 비밀은 무덤까지 가지고 가겠습니다."

이안이 고개를 까딱이는 그때, 메브가 천 주머니를 내려놓았다.

"…의뢰가 완료되었으니, 보수를 지불하는 게 순서겠지."

그녀가 이안을 마주 보았다.

"흑마법사를 죽이면 추가 보수를 받기로 했었지. 무엇을 원하느냐?"

"흐음…."

이안은 턱을 긁적였다.

본래는 흑마법사를 죽이고 얻은 전리품을 다 요구할 생각이었는데.

메브가 족족 양보해 댄 덕에, 막상 더 요구할 게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안 받을 수는 없는 노릇.

이내 이안은 어깨를 으쓱였다.

"알아서 주시오. 합당한 것으로."

"합당이라…."

잠시 고민한 메브가 일어섰다.

그리고는 허리춤에 멘 검을 검집째로 떼어 냈다.

"그럼 이 검을 받아 주겠느냐?"

필립과 미구엘은 물론, 이안까지도 순간 눈을 치켜떴다.

필립이 더듬댔다.

"나리, 그건 제국 강철로 만든 검이지 않습니까…?"

"그러니 걸맞은 보상이 되겠지."

메브가 검을 내밀었다.

이걸 줄 줄이야.

그녀의 배포에 감탄하며, 이안은 사양하지 않고 검을 받아들었다.

이 검은 게임에선, 그녀를 죽여야 얻을 수 있는 전리품이었다.

복수자의 검.

'단죄의 검이라….'

하지만 지금은 이름뿐만 아니라 능력치도 달랐다.

그때는 부서지기 직전인 데다 수리도 불가능했었는데.

지금은 아무런 페널티도 없었다.

무엇보다, 게임에선 본 적 없던 권능까지 깃들어 있었다.

2레벨의 단죄의 일격.

24시간의 쿨타임이 있긴 했지만, 아무런 대가 없이 쓸 수 있었다.

유일 등급의 검이지만, 사실상 성물에 가까운 것이다.

게임에서 이런 게 없었던 건, 아마 무고한 자들의 피를 잔뜩 머금으면서 신성을 잃었기 때문이리라.

"들었다시피 제국 강철로 만들었고, 나와 오래 함께한 검이다. 이름난 명검은 아니지만, 도움이 될 거다."

"…이 검은 명검이 맞소."

자루를 쥔 이안이 가볍게 손목을 휘둘렀다.

좋은 균형감.

하지만 보기보다 훨씬 무거웠다.

그의 근력으로는 메브처럼 가볍게 휘둘러 대진 못하리라.

'최대한 적응해 보고, 정 안 되면 힘을 두어 개까진 더 찍지 뭐.'

가뜩이나 쓰는 무기마다 족족 부러뜨리는데.

이만한 명검을 오래 쓸 수 있다면, 그 정도 지출은 감수할 수 있었다.

이안이 계속 검을 관찰하는 사이.

메브가 부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미구엘을 돌아보았다.

"네게도 합당한 보상을 더 지급할 것이다, 미구엘."

"저, 정말이십니까 나으리?!"

"대신, 왕성까지 동행해 다오."

"엥…? 왕성까지요?"

눈을 치켜떴던 미구엘이 어리둥절한 표정이 됐다.

"네게도 추가로 의뢰할 것이 있다. 네가, 이곳에서의 일을 폐하께 증언할 공증인이 되어 주었으면 해."

"공증…? 그, 증거가 이미 다 있지 않습니까?"

왕과 만나는 것이 부담스러운 듯, 미구엘이 떨떠름하게 되물었다.

메브가 고개를 저었다.

"폐하 곁에는 가신들이 있지. 그들 중에는 배덕자들이 섞여 있을 것이다. 그들이 반박하지 못하게 하려면, 증거뿐만 아니라 증인도 필요해. 가능하다면 많이."

"그럼 이안 형씨는…."

"나는 오른델로 간다."

"아, 그랬었지… 염병…."

앓는 소리를 낸 미구엘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까짓거, 없던 일을 지어내는 것도 아니고. 함께 가겠습니다."

"고맙군. 다소 위험한 순간들이 있더라도 염려치 마라. 너는 내가 지킬 것이니."

"위, 위험…. 에이, 뭐. 아무리 그래도 언데드가 득시글대는 무덤만 하겠습니까? 괜찮습니다."

새끼, 배포가 좀 커졌네.

검을 허리에 찬 이안이 피식대는 가운데, 메브가 이번에는 필립을 돌아보았다.

"네게도 부탁이 있다, 필립."

"예, 나리. 말씀만 하십시오."

"너는 이안과 함께 가거라."

"예…?"

필립이 황당한 듯 되물었다.

이안의 미간도 좁아지는 가운데, 메브의 말이 이어졌다.

"아무리 의뢰라고는 하나, 귀중한… 증인이자 용병인 이안을 홀로 보낼 수는 없다. 그러니 네가 이안을 보좌하고, 이안이 겪을 일의 공증인이 되어 주었으면 해."

"하, 하지만 나리. 저는 나리를 모셔야 하는데요."

"미구엘이 있잖느냐. 내 종자가 되어 줄 수 있겠느냐, 미구엘?"

"물론입니다, 나리."

미구엘이 실실대며 말했다.

필립이 말문이 막힌 듯 탄식했다.

그런 그를 묘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이안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경의 뜻은 알겠소만. 이번 의뢰는 위험할 수밖에 없소. 이 녀석이 죽게 될 수도 있다는 얘기요. 그래도 괜찮으시겠소?"

"...!"

필립이 눈을 치켜뜨며 이안을 돌아보았다.

메브가 고개를 끄덕였다.

"필립은 어엿한 종자이며 전사다. 그만한 각오는 언제나 되어 있겠지."

"그런 일이 생겨도 원망하지 않으시겠다는 뜻으로 알아듣겠소."

"나리…!"

이안이 피식하는 가운데, 필립이 다시 메브를 돌아보았다.

그녀가 엄하게 덧붙였다.

"이안과의 여정에서 배울 것이 아주 많을 것이다, 필립. 성실히 모시고 많이 배우도록 하거라."

"…예."

필립이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이지 내키지 않는 표정.

나랑 둘만 남게 될 텐데 어쩌려고 저러지. 목숨이 두 개인가.

내심 코웃음 치는 이안을, 메브가 다시 바라보았다.

"이 순간부터 너는 나의 대행자다, 이안. 고대수 사건의 전모를 확실히 파헤쳐 주길 바란다. 그리고 살아서 돌아와다오."

"내 걱정은 마시오. 걱정하셔야 할 것은 경 자신이오."

이안이 언제 풀어졌었냐는 듯 냉정해진 얼굴로 말했다.

"누군가를 죽이지도, 속내를 드러내지도 마시오. 복수를 이루고자 한다면 신중해지셔야 할 거요. …적어도 내가 돌아올 때까진."

메브가 속내를 들킨 것처럼 아랫입술을 깨무는 가운데, 이안이 덧붙였다.

"살아 있으셔야, 내가 알아낸 정보의 값을 치르실 수 있지 않겠소?"

이윽고 메브가 고개를 끄덕였다.

"맹세하지. 네가 오기 전까지 분란을 일으키는 일은 없을 것이다."

다시 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 중요한 말씀은 이제 다 나누신 것 아니오?"

그런 분위기를 바꾼 건, 뜻밖에도 미구엘이었다.

"내일이면 한동안 보지 못할 것 같은데. 마지막으로…."

그가 짐가방에서 천에 꽁꽁 싸인 통을 꺼냈다.

"어떠십니까?"

술통이었다.

그 난리를 겪고도 저게 깨지지 않은 건 둘째치고, 던전을 앞두고도 술을 챙겨온 미구엘의 정신머리에도 기가 찰 지경이었지만.

이안은 핀잔을 주는 대신, 메브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윽고 메브가 고개를 끄덕였다.

"술을 즐기진 않지만… 오늘은 마시고 싶군."

"잘 생각하셨습니다! 함께 사선을 넘었는데, 술잔도 나누지 않고 헤어질 수는 없지요."

일행은 충분히 취해 잠들 때까지 술을 나눠 마셨다.

더는 무거운 얘기를 꺼내는 일 없이, 시시껄렁한 농담과 무용담을 주고받으면서.

#03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