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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별이 빛나는 땅 (2)

"미국이요?"

내 말을 들은 유성철이 무전으로 되물었다.

그러곤 현재 합참이 가지고 있는 정보를 풀어주기 시작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연방정부가 붕괴됐습니다. 몇몇 살아남은 주정부들이 움직이고 있는 것 같기는 한데... 내부 사정이 급한지 연락이 잘 닿지는 않는 상황이고요. 그런데... 미국에 가시려고요?"

"네. 엘븐하임에서 이야기하기로는... 애리조나에 거대한 산맥이 생겨났을 거라고 하더군요."

나는 더 높은 등급의 강화석이 필요하다는 것,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미국에 있는 세공사 드워프를 찾아야 한다고 전해주었다.

포탈을 이용하면 언제든 돌아올 수 있으니 딱히 걱정할 필요도 없다고도.

하지만 유성철은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새로운 걱정거리를 떠안겨주었다.

"저번에 드린 수송기는 타지 마세요. 미국까지 가기에는 항속거리가 한참 모자라거든요."

"그럼 다른 비행기는 없을까요? 미국까지 갈 만한..."

"여객기를 빌려드릴 수는 있지만, 저는 반대합니다. 자살 행위에요."

유성철의 단호한 목소리.

그는 과격한 표현을 써가면서까지 나의 미국행을 만류하고 있었다.

"아까 미국의 상황을 말씀드렸죠. 사실 멸망이 시작된 직후, 주한미국이 철수를 결정했었어요. 뭐, 그들도 어쩔 수 없었겠죠. 당장 본국의 상황도 말이 아니었을 테니... 하지만 그 많은 주한미군 중에서 미국 땅을 밟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미처 몰랐던 사실이었다.

동맹국 미국이 한국을 두고 철수를 결정했었는 것.

하물며 그 강력하기로 유명한 미군이 철수 작전에 실패했다는 것까지.

유성철은 신중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갔다.

"개중 몇몇 항공기 파일럿이 한국으로 되돌아왔어요. 차마 태평양을 건널 엄두가 나질 않았던 거죠."

"...대체 태평양에 뭐가 있길래요?"

강력한 미 공군을 굴복시킨 하늘의 괴물들.

잠시 그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보던 유성철이 내게 제안했다.

"직접 한 번 보시죠. 녹화된 영상이 있거든요."

***

포탈을 타고 들어간 용산의 합참 본부.

내부는 여느 때처럼 하얀 조명으로 가득 차 있었다.

"여깁니다."

유성철을 따라 들어간 영상 분석실.

위이잉.

전원을 누르자 컴퓨터가 먼지 섞인 팬 소리를 울렸다.

"여긴 그래도 모두 멀쩡하네요."

"다 김 대령님 덕분이죠. 발전기도 그렇고 연료도 그렇고... 지금 세계 각지에 이런 정보전이 가능한 군은 우리밖에 없을 겁니다."

그 혜택이 내게도 되돌아온 참이었다.

태평양을 배회하는 괴물을 정체를 마우스 몇 번 딸깍이는 것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되었으니.

폴더에 담긴 영상 파일을 열며, 유성철이 덧붙였다.

"당시 비행했던 전투기에 남은 영상인데..."

한적한 푸른 하늘이 담겨 있는 영상.

그런 하늘 사이로, 점점이 박힌 생물체들이 접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저건가요?"

"맞습니다. 미군 파일럿들이 '자폭 갈귀'라고 부르더군요."

보랏빛 몸체를 가진 녀석이 모습을 드러냈다.

뾰족한 이빨로 이루어진 입과 새우처럼 둥글게 말아 올린 꼬리.

양쪽으로 발톱과 함께 난 날개까지.

달칵.

유성철은 영상을 멈춰놓은 상태였다.

"...이 녀석들이 좀 빨라야 말이죠."

멈춘 영상에서조차 '자폭 갈귀'들의 모습은 잔상 그 자체였다.

몸 전체가 흔들린 채로 찍혀 있었고, 바쁘게 움직이는 날개는 뿌연 얼룩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마치 벌새의 뜨거운 날갯짓을 보는 듯.

하지만...

퍼어엉!

앞서가던 수송기와 충돌했을 때, 비로소 자폭 갈귀의 진면목이 드러났다.

검붉게 피어오르는 폭염.

몸체 절반이 날아간 수송기가 연기를 피우며 화면 바깥으로 떨어져 나갔다.

다음 표적은 영상을 찍고 있던 전투기였다.

화면을 향해 희번뜩 눈빛을 빛내는 갈귀들.

수십 마리의 갈귀들이 조종석을 향해 달려들었다.

쐐애애액!

쐐애액!

회전하고 뒤집히기를 반복하는 화면.

주변에서 터져나가는 폭발.

자폭 갈귀들의 끈질긴 추격은 보는 것만으로도 고문 그 자체였다.

"...이 파일럿은 어떻게 됐죠."

"비상탈출로 살아남았습니다. 전투기는 강릉 해수욕장에 처박혔고요. 영상도 겨우 건졌습니다."

유성철의 결론은 간단했다.

"전투기로도 쉽지 않은 게 바로 저 자폭 갈귀들입니다. 여객기로 태평양을 건넌다는 건 더더욱 말이 안 되죠. 물론, 김 대령에게 여러 가지 안전 장치가 있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신중하셨으면 합니다."

비행하는 자폭 괴물.

그리고 놈들 이상으로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항공기.

얼추 상황이 파악되자, 한 사람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엘븐하임에서 미국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줄곧 그래왔었으니까.

메카닉 제임스.

그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

.

.

퍼엉!

수송기의 폭발 장면을 면밀하게 들여다보는 제임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돌아섰다.

"노우, 정겸. 저건 강화해도 못 버텨."

딱 봐도 각이 나오는 모양이었다.

그의 강화로도 버틸 수 없는 공격.

여객기를 강화해 태평양을 건너는 계획은 애초에 불가능한 계획이었다.

내가 늘어놓은 주문 사항에 대해 제임스는 볼멘소리를 냈다.

"결국 개 빠르고, 개 단단하고, 개 멀리 갈 수 있는 비행기가 필요하다는 거잖아?"

중간중간 뻑킹을 섞어가며 열변을 토하는 제임스.

그가 결론을 내렸다.

"오우 젠장, 정겸. 그런 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

"다른 건 몰라도 비행거리는 연료 때문에 그런 거잖아? 연료는 내가 중간에 공급할 수 있어."

전투기에 빨대를 내려주는 공중급유기가 괜히 있겠는가?

먼 거리를 이동하기 위한 특단의 조치.

하지만 아공간 포탈을 이용한다면 공중에서도 얼마든지 무한한 연료를 공급할 수 있었다.

그 뜻을 이해한 것인지, 제임스도 가만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럼 빠르고 단단하게만 만들면 되겠군."

"가능하겠어?"

"그 정도면 가능하지. 더럽게 어렵겠지만."

내게 미국으로 데려가 달라 부탁하던 제임스.

포탈을 통해 이동할 수 있는 만큼, 나를 미국 땅에 내려놓기만 한다면 그 또한 자신이 그토록 그리워하던 차고로 돌아갈 수 있을 터였다.

"재료만 충분하게 제공해달라고."

제임스가 앞주머니에 꽂힌 커다란 종이를 꺼내 들었다.

그러곤 슥슥 펜을 휘두르며, 새로운 이동 수단을 설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데..."

쉴새 없이 설계를 이어가던 제임스는 갑자기 우뚝 손을 멈춰세웠다.

"이걸 운전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모르겠네."

"그거야..."

다른 사람이 있을 수 없었다.

택배 기사 이용수.

그는 내 포탈을 가장 잘 운송해줄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

나의 포탈을 가장 처음으로 운송해준 사람이다.

나를 가족들에게 데려다주겠다는 용감한 선의에서 비롯된 인연.

그 인연은 적지 않은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었다.

그 덕분이다.

모든 가족을 만날 수 있었고, 이용수 또한 아내와 딸을 안전하게 아공간에 수용할 수 있었으니.

초기의 목적을 이룬 만큼, 나는 궁금했다.

지금의 이용수가 어떤 마음을 갖고 움직이고 있는지.

"그건 말이죠..."

그가 과일주스를 삼키며, 내 질문에 답해주었다.

"가끔 유정이가 물어볼 때가 있어요. 아빠는 밖에서 무슨 일을 하는 거냐고. 옛날에는 사람들이 애타게 기다리는 물건을 가져다주는 사람이라고 했었어요. 일하다 보면 잊을 때가 많기는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나름 보람이 있는 것도 사실이었거든요."

그는 꽤 오래전 옛날을 회고하고 있었다.

모든 사람이 태평하게 집에 도착할 택배를 기다리던 일상을.

결혼식 때 입기 위한 원피스, 지난주에 산 게임 CD가 언제 도착하냐며 묻던 사람들의 한가로움을.

하지만 멸망과 함께, 그 또한 새로운 역할을 찾아 나설 수밖에 없었다.

"요즘은 사람들이 기다리는 세상을 가져다주는 사람이라고 말하곤 해요. 사실 좀 거창한 말이죠. 실제로는 정겸 씨를 목적지까지 태워다주는 일일 뿐이니까.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정겸 씨의 아공간에는 사람들이 기다릴 만한 모든 것들이 채워져 있으니..."

탁!

그 말을 끝으로 이용수는 잔을 내려놓았다.

그러곤 책상 위에 놓인 설계도를 집어 들었다.

"제 능력이 운송수단의 숙련도를 얻는 거긴 한데..."

차량이든, 헬기든, 수송기든, 모든 운송수단을 가리지 않고 운전하던 그였지만 이번만큼은 상황이 달랐다.

팔랑.

블루프린트 위로 그려진 독특한 형상.

제임스가 그려낸 것은 이전까지는 존재하지 않던 새로운 개념의 운송수단이었다.

기본적인 운전 방법부터 세세한 조작법까지, 기존과는 구조적으로 완전히 다를 수밖에.

"제 딴에서도 나름 설계가 필요하겠어요."

이용수는 굴하지 않았다.

"...이 기계에서 '운전'이라는 게 뭘 의미할지."

다만 그렇게 덧붙일 분.

***

그렇게 며칠 뒤.

밤낮을 지새운 제임스가 마침내 운송수단의 '완성'을 알렸다.

"이야..."

"이것 참..."

작전본부장 유성철, 이용수, 그리고 나까지.

완성된 작품 앞에, 모두가 하나같이 혀를 내둘렀다.

이미 보유하고 있던 헬기와 수송기부터, 합참으로 새로 제공받은 전투기와 여객기까지 다종다양한 재료들이 깡끄리 투자된 물건이었다.

"...이렇게 만들어도 되는 거 맞아요?"

"살짝 꼬질꼬질한 느낌도 들고..."

개조와 제작의 중간쯤에 있는 물건이었다.

그래서인지 얼마 전 기간트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스팀 펑크적 취향이 다분히 가미되어 있었지만, 정작 자세히 외부 장갑을 살펴볼 때는 빈틈없이 꼼꼼하게 마감처리가 되어 있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일단 파일럿이 받는 압력을 최소화하려고 신경을 좀 썼어. 주제에 안 맞게 장거리 비행이 목적인 기체니까. 콕피트 안쪽으로 급유장치도 설치했고..."

10시간 이상의 장기 비행.

그 시간 내내 갈귀들의 공격을 받으며, 마하의 비행을 이어간다면 파일럿이 고되다 못해 중력에 찌그러질 것이 분명했다.

때문에 기체의 속도를 줄이는 한이 있더라도 여객기와 같은 안정성을 가미해야만 했다.

그러면서도 상당한 기동력을 갖춰야만 했다.

기존 전투기로는 차마 대적하기가 어려웠던 자폭 갈귀들.

속도를 줄이면서도 놈들의 공격을 자유자재로 회피할 수 있는 기상천외한 기동력이 요구되었으니까.

그러기 위한 방법으로 고안된 것은...

"오오...!"

위잉.

버튼을 누름과 동시에 움직이는 비행기 날개.

양옆으로 쭉 뻗어있던 두 날개가 몸체 뒤편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변신...! 변신이다!"

"가변익으로 설계했어. 날개가 앞뒤로도, 위아래로 움직일 거니까 움직임에 자유도가 있지. 물론 조종하는 입장에선 죽을 맛이겠지만..."

하지만, 그뿐만이 아니었다.

얼마 전 K북선을 만들며 영감을 얻은 제임스.

제작 당시 그가 요구했던 물건 중에는 마법 스클로도 있었으니까.

'익스플로전'이라는 이름으로, 그 자리에 즉발적인 폭발을 일으키는 2서클 마법이었다.

"날개 끝부분 위아래로 세절기를 달아뒀어. 버튼을 누르면 알아서 마법이 나갈 건데... 공격용은 아니고, 급격한 방향전환이 필요할 때 쓰면 될 거야."

제임스가 제공한 것은...

"...두 날개로 할 수 있는 건 죄다 때려 박은 셈이지."

파일럿의 완전한 자유도였다.

비행기를 제 몸처럼 움직일 수 있도록 하는.

제임스가 발표를 성황리에 마친 뒤, 우리는 새로 얻은 운송수단의 이름을 결정했다.

그렇게 붙이게 된 이름은...

'P-22'

지상 최강의 전투기의 이름을 본뜬, 팍스FC의 차세대 배송수단이었다.

***

쐐애애애애액!

전투기에 비해 줄였다고는 하나, 이 또한 어마무시한 속도였다.

뒷자석에 포탈을 설치해둔 채 아공간에 들어와 있는 나와는 달리, 이용수는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실시간으로 날아드는 자폭 갈귀들의 공격을 회피하고 있었다.

퍼어엉!

퍼엉!

스친 날개 뒤로 그 자리에서 터져나가는 자폭 갈귀들.

아찔한 고공 비행으로 벌써 십수 마리의 갈귀들을 떨궈댔지만, P-22의 뒤로는 아직 수백 마리의 갈귀들이 바짝 따라붙고 있었다.

철컥!

위이이이!

덜컹!

계단처럼 치켜 올라가는 양쪽 날개.

무식하기 짝이 없는 움직이었음에도, 푹 꺼지는 기체 위로 십수 마리의 갈귀들이 휙 하니 스쳐 지나갔다.

주르륵.

이용수의 땀이 물처럼 흘러내렸다.

전투기의 속도를 줄이며 떨어진 기동력.

그 기동력을 날개의 변칙적인 움직임을 통해 메꿔야만 했다.

그저 잘 모는 것이 아닌 폭탄으로 이뤄진 장애물을 실시간으로 피해야 하는 천재적이 조작이 필요했음에도, 이용수는 혼신의 힘을 다해 불가능에 가까운 임무를 수행해내고 있었다.

연료통의 크기를 극도로 줄인 어처구니없는 설계.

나는 콕피트 내부에 달린 급유기 안으로 미리 준비해둔 연료를 틈틈이 출하하고 있었다.

아무리 포탈에 들어와 있다지만, 나 또한 긴장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일이 조금이라도 잘못되는 순간, 재빨리 상품 회수를 발동해 위기에 빠진 이용수를 구해내야 할 테니까.

내 손에는 이용수의 아내, 오지수가 들려준 도시락이 들려 있었다.

하지만...

-먹었다고 전해주세요. 안 그러면 화내거든요...

여느 때처럼 운전석에 앉은 그와 음식을 나눠먹는 호사는 누릴 수 없었다.

철컥!

드르르르르륵!

타악!

그의 손은 코에 맺힌 땀을 닦을 시간도 없을 만큼 바빴으니까.

더욱이...

"이게 몇 시간째냐..."

중간에 쉬는 텀이 없지는 않았다지만, 이용수는 몇 시간 내내 초인적인 집중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출발지인 엘븐하임으로부터 목적지인 애리조나까지 예상했던 비행시간은 대략 10시간가량.

하지만 이용수의 운전 덕에, 벌써 8시간 만에 미국 대륙이 두눈에 담기기 시작했다.

어느덧 목적지에 다다른 참이었지만...

카아악!

카악!

우리의 등 뒤로는 수백 마리의 자폭 갈퀴들이 맹렬한 추격을 이어가고 있었다.

퍼엉!

퍼어어엉!

날개 곳곳에 설치된 마법 사출 기계가 이번에도 빛을 발했다.

연이은 폭발을 이용해 날개를 향해 날아드는 갈퀴들의 공격을 회피했고.

팽그르르르르!

360도 회전을 시작했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전투기의 주변 풍경.

그 소용돌이 같은 장면은 미국이라는 거대한 대륙의 지면을 행해 쇄도하고 있었다.

"...진짜 다 왔구나."

멀쩡히 착륙할 여유가 없었다.

바짝 추격해 들어오는 수백 마리의 갈귀들을 떨어낼 방법이 없었으니.

다행히, 우리에게 있어 추락은 착륙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그렇게 나는 땅으로 곤두박질치는 포탈을 전경을 바라보았고...

'상품 회수.'

슈와아아아악!

즉시 이용수를 빨아들였다.

콰당!

거칠게 빨려 들어온 그를 받아들며, 그 충격에 함께 바닥을 나뒹굴었다.

이마 위로 흥건하게 맺혀 있는 땀.

그리고 녹초가 된 몸까지.

영락없는 배송기사의 모습을 한 그가 간신히 진 빠지 목소리를 덧붙였다.

"...확실히 배송했습니다."

도착했다.

서부에.

이 다음은 무사히 배송된 내게 달려 있었다.

65. 별이 빛나는 땅 (3)

부우우웅.

황량한 미국의 서부를 지나는 코란도 스포츠.

기진맥진한 이용수를 대신해 오늘만큼은 손수 운전대를 잡았다.

"...이게 대체 얼마 만이냐."

몇 년 만에 잡아보는 핸들이다.

이용수의 빈자리가 컸지만, 다행히 나 같은 장롱 면허에게 있어 미국의 도로는 힐링 그 자체였다.

전세라도 낸 듯한 텅 빈 도로.

벌써 30분 이상 내달렸음에도 단 한 대의 차량도 마주치지 않았다.

이쯤 되니 중앙선 위로 뻔뻔하게 얹힌 차 바퀴가 당당하게까지 느껴질 지경이었다.

그나저나...

"...이게 맞나?"

뒤쫓아온 갈귀들 때문에 제대로 목적지를 살필 틈이 없었다.

운 좋게 도로를 발견한 덕에 도로 표지판을 알음알음 살피며 통폐합이 진행되었다는 애리조나를 향해 무작정 액셀을 밟을 뿐.

하물며 그 넓은 애리조나에서 어딜 가야 하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일단 달려보자. 뭐가 됐든 애리조나로 가는 건 맞으니까."

몇 시간이라도 휴식이 필요한 이용수였다.

합참의 병력 또한 곳곳으로 빠져 있는 상태였기에, 당장에 헬기를 비롯한 다른 운송 수단을 몰아줄 사람 또한 남아 있지 않았다.

혈혈단신으로 미국의 서부를 가로지를 뿐.

"...가다 보면 뭐라도 나오겠지."

아무리 서부라지만, 모든 땅이 텅 비어있을 리는 없을 터.

어떻게든 사람이 모여있는 장소를 찾아 정보를 캐내 볼 작정이었다.

애리조나에 들어선 정체불명의 산맥.

세공사 드워프가 산다던 라이시온에 대해.

아니나 다를까, 오래지 않아 사람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오!"

도시는 아니었다.

웅장한 풍경 한가운데 던져진 작디작은 마을.

곳곳에 세워진 차들이 사람의 흔적을 물씬 풍겨오고 있었다.

"그럼 그렇지, 요즘이 어떤 세상인데."

아무리 멸망했다지만, 사람들은 살아간다.

그 방식이나 스케일이 다를 뿐.

나는 반가운 마음에 핸들을 꺾어 마을로 접근해나갔다.

물론...

그때만 해도 알지 못했다.

이 작은 마을이 나를 오래된 타임머신으로 이끌 줄은.

***

[포티나인 빌리지(Forty nine Village)]

그것이 마을의 이름이었다.

휘이이이...

황량한 모래 먼지를 휩쓸고 지나가는 바람.

그리고...

텅- 텅-

주변을 뒹구는 황야의 회전초를 구경하며, 나는 알듯 말듯 한 기시감에 사로잡혔다.

"...이것이 서부?"

서부하면 떠올리는 이미지에 정확히 들어맞는 풍경.

하지만 오랜 서부극에서나 볼법한 그 풍경이 현대의 미국에 버젓이 존재하리라고는 미처 생각해보지 못했다.

휘이이...

보기 좋게 자라나 있는 사람만 한 크기의 선인장.

마을 표지판 옆으로 녹이 슨 채 쓰러져 있는 할리 데이비슨.

그리고 긴 통로를 이루며 양쪽으로 늘어져 있는 오래된 목조주택까지.

비교적 최근에 지어진 듯한 건물도 없지는 않았지만, 상당히 오래된 시골 마을임에는 분명했다.

그리고 가장 놀라웠던 점은...

'...이렇게 그냥 들어와도 되는 건가?'

마을에 들어오는 동안,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았다.

이를 증명하듯, 안에는 적지 않는 사람들이 마을 곳곳을 누비고 있었다.

흑인, 백인, 히스패닉, 그리고 나 같은 아시아인까지 다양한 인종이 있는 것은 물론, 평범한 일상복을 걸치 사람부터 청바지에 밀짚모자를 쓴 전형적인 시골 농부까지 다양한 종류의 사람이 거리를 활보하고 있었다.

'좀 살벌하긴 한데.'

물론 멸망의 흔적은 역력했다.

총기의 나라, 미국답게 모든 사람이 떡하니 총기를 소지하고 있었으니까.

저마다 큼지막한 산탄총 따위를 들춰 맨 그들은, 서로를 흘깃흘깃 바라보며 모종의 긴장감 어린 시선을 주고받고 있었다.

그 말인 즉슨...

'...규합된 세력이 아니구나.'

모두가 하나같이 외지인인 이곳.

포티나인 빌리지는, 사람들의 교통로로 기능하는 장소였다.

'어떻게 이런 곳이 있을 수 있지?'

미국인들은 멸망 그 자체에 완전히 적응해버린 모습이었다.

정부의 구원은 기대할 것조차 없으며, 이 모두가 각자의 등에 얹힌 짐이라도 된다는 듯이.

일단은 내 목적에 충실하기로 했다.

드워프가 있다는 라이시온 산맥.

그리고 가는 길을 찾아야 했으니까.

'...재들한테 묻기는 좀 그렇고.'

사람은 많았지만 하나같이 살벌한 눈빛이었다.

하나같이 총기로 무장한 사람들.

7위계에 달하는 내 척력을 생각하면 우습지도 않은 게 사실이었지만, 아무쪼록 대화가 통하는 사람을 찾을 필요가 있었다.

"저기는 좀 낫겠네."

마을 중심부에 놓인, 비교적 최근에 지은 듯한 건물.

일종의 가게처럼 운영되는 곳인지, 테라스에 놓인 테이블에도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 있었다.

한결 여유로워 보이는 모습.

대화 상대로는 제격이었기에, 나는 가게에 들어가 라이시온에 대한 정보를 캐내 보기로 했다.

저벅저벅.

그렇게 바싹 마른 마을 길을 가로질렀고.

끼이이이이이...

건물 중앙에 있는 유리문을 열었다.

경첩이 제대로 맛이 갔는지, 유난히 크게 들리는 문소리.

그렇게...

"...?"

덜컹.

나는 무언가 잘못됐단는 걸 깨달았다.

나름 깔끔했던 외관과 달리, 건물의 내부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오래된 나무로 얼기설기 만든 바닥과 천장.

어두컴컴한 실내와 누런 창문을 통해 투과되는 먼지 섞인 빛줄기.

그리고 정면에 보이는 바 형태의 주문대까지.

결정적으로...

'...아 제발.'

곳곳에 놓인 테이블에 앉은, 수십 명의 사람이 나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밖에서 보았던 나른한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하나같이 승냥이 같은 게슴츠레한 눈빛을 내뿜는 그들.

그야말로 함정 그 자체였다.

방문객을 서부영화의 주인공으로 만들기 위한.

그 덫에 제대로 걸려든 나는, 홀리듯 앞에 있는 바텐더를 향해 걸어갈 수 밖에 없었다.

삐걱.

삐걱.

제대로 썩은 마룻바닥이었다.

걸음걸음마다 강한 존재감이 부여된 덕에, 포커를 치던 몇몇 일행들이 카드를 내던지고 나를 주시하기 시작했다.

턱!

턱!

곳곳에서 들리는 술잔 내려놓는 소리.

싸늘한 적막으로 가득 찬 '살롱'의 중앙에서, 나는 그제야 바텐더의 인사를 들을 수 있었다.

"...어서오세요."

덥수룩한 수염과 깡마른 얼굴, 살롱의 주인이 나를 반겨주었다.

나는 얼떨떨한 목소리로 물었다.

"술을... 파시겠죠?"

"...예? 예예..."

좀처럼 적응하지 못하는 내게 주인은 친절히 설명해주었다.

"값은 마석으로 받습니다. 선불이고요."

"그냥 제일 간단한 걸로..."

"마석 두 개입니다."

즉시 품에서 마석 두 개를 출하해 그에게 값을 지불했고, 주인은 커다란 잔에 코딱지만큼의 위스키를 담아 내게 건네주었다.

잔을 아무렇게 치워둔 나는, 그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이 근처에 라이시온이라는 산맥이 있습니까?"

라이시온.

그 말을 듣자마자 가게 주인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버렸다.

그러곤 남들이 들을 새라, 목소리를 작게 줄인 채 내게 속삭였다.

"보아하니 외지에서 오신 듯한데... 죄송하지만, 그냥 알려드릴 순 없습니다."

"그럼 마석을?"

"정보는 현물로 받습니다. 예를 들면...이런 거죠."

현물.

멸망한 세계이다 보니, 물이나 식량 혹은 더 나아가 기름이나 탄약 따위를 요구하겠거니 했다.

하지만 주인이 앞치마 속에서 꺼내 든 것은...

'..이걸 가지고 있다고?'

틀림없는 강화석이었다.

괴물들을 쓰러뜨리던 과정에서 간간히 발견되기는 했지만, 한국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 바로 이 강화석이었다.

그런 물건이 술집 주인의 앞치마에서 떡하니 나왔으니 놀라울 수밖에.

물론 내게는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물건이었다.

몇 개쯤 사라져도 눈치조차 못 챌 만큼.

턱.

테이블에 강화석을 올려놓았다.

내게 정말 강화석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지, 주인은 꽤나 놀란 눈치였다.

"그...물어보고 싶으시다는 게?"

한결 공손해진 태도.

재차 질문하자, 그가 내가 원하던 정보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그랜드 캐니언입니다. 그쪽 지형에 고블린들의 산맥이 통폐합됐거든요. 여기서 북동쪽으로 가시면 되는데... 어디 지도라도 구해오시면 좀 더 정확한 위치를 표시해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비싸게 생각하지는 마세요. 이건 애리조나 사람들에게 천금 같은 정보거든요."

엘븐하임의 존재가 한국과 일본에 전해진 것처럼, 라이시온에 대한 통폐합 소식 또한 이곳 애리조나 주민들에게만 주어진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 정보가 천금과도 같다는 점은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적대 세력이 주변 지역에 나타났다는 공지.

쌈박질하라는 상공회의소의 부추김 외에, 무얼 더 찾을 수 있단 말인가?

의아하다는 듯 덧붙이는 내 질문에.

"그게 왜 천금같은 정보죠?"

주인은 한층 더 목소리를 줄이며 대답했다.

"몰라서 물으시는 겁니까? 라이시온에 광산이 있잖아요. 강화석이 나오는..."

"아..."

그래서였다.

샬롱의 주인이 강화석을 가지고 있던 이유는.

그에 따르면, 라이시온의 본래 주인은 탐욕스런 광부 고블린들이었다.

지구가 고블린들에게 탐스러운 곳이었던 것처럼, 라이시온의 광산 또한 지구인들의 욕심을 부추기는 장소였다.

그 결과...

"최근 들어 토벌과 채굴이 계속해서 이뤄지고 있죠. 덕분에 8위계 괴물도 잡을 수 있단 건 이미 아실 테고..."

라이시온과 애리조나는 그야말로 서로가 서로에 대한 침략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정확히 상공회의소가 의도했던 대로.

나는 그에게 약속한 강화석을 밀어주며, 마지막으로 물었다.

"혹시 거기에 드워프가 있다는 소식은 못 들어봤습니까?"

"드워프요? 거기 깔린 건 더럽고 욕심 많은 고블린뿐이지요. 드워프는 무슨..."

아무래도 그 이상 아는 것은 없는 모양.

"그럼 됐습니다."

드르륵.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곧장 '살롱'을 빠져나왔다.

.

.

.

목적지는 그랜드 캐니언이 있을 라이시온.

하지만, 차로 돌아가기 위해 출구로 이어지는 골목길에 접어들었을 때쯤.

앞을 가로막는 건장한 체구의 남성들을 마주했다.

"...뭐야?"

하나같이 밤색 가죽자켓과 청바지, 그리고 웃기지도 않는 카우보이 모자를 쓴 이들.

그러니까...

그들의 정체는 그거였다. 불한당.

"고작 말 몇 마디에 강화석을 태우는 거 보니... 우리도 대화를 좀 하고 싶어서 말이야."

철컥.

묵직하게 집어 든 산탄총.

그것이 이야기를 나누기 위한 그들만의 대화 문법인 모양이었다.

"야, 빨리 꺼내 봐."

고민이 됐다.

이놈들을 죽여야 할지, 아니면 그냥 무시하고 가야 할지.

마을 내에서 총구를 들이미는 것만 봐도 무법지대라는 것만큼은 틀림이 없었지만, 사람을 죽였다는 빌미로 괜한 시비에 휘말릴 위험 또한 없지 않았다.

라이시온과의 전쟁 당사자가 애리조나인 이상, 드워프를 찾는 과정에서 그들 수뇌부의 협조가 필요할 수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신중한 나와는 달리, 무법자들에게는 인내심이 부족했다.

"이 새끼, 동작 느린 거 봐라. 안 되겠다."

철컥!

개중 한 명이 예고도 없이 나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그리고...

"...?"

그와 동시였다.

누군가 나를 덮쳐온 것은.

콰당!

온몸을 짓누르는 육중한 무게감.

누군가가 나를 날아든 총알로부터 보호하고 있었다.

그리고...

'...뭐야 이 아저씨는?'

눈 앞에 보이는 것은 땀을 삐질 흘리는 중년의 동양인 남성이었다.

타앙!

타앙!

총성이 몇 발 더 이어졌고.

"에이 썅! 이 새끼는 또 뭐야!"

불한당들이 짜증과 함께 산탄총을 내던졌다.

중년의 남성에게는 고통스러운 기색이 없었고...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했다.

'...위계 보유자?'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자신의 위계를 앞세워 나를 구해준 모양.

내가 자그만치 7위계의 척력을 두르고 있다는 걸 모르는 게 분명했다.

"노랭이들이 쌍으로 아주..."

한편, 산탄총을 내버린 불한당들은 새로운 무기를 꺼내 들었다.

철컥.

은빛으로 빛나는 리볼버.

서부를 상징한다는 점에서는 낭만 가득한 무기였지만, 산탄총에 비하면 그 위엄이 다소 떨어지는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런 내 생각이 무색하게...

"히...히익!"

용감하게 나를 지켜주던 남자가 기겁하며 양손을 치켜들었다.

그러곤 불한당들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진심이야...? 그걸 여기서 쏘겠다고?"

"왜? 그놈한테 이깟 강화석 몇 개쯤은 있겠지. 한 개 정도는 투자금으로는 그리 비싸지 않잖아?"

'아...'

그들의 대화로부터 짐작할 수 있었다.

이번에 꺼내든 리볼버, 그리고 그 안에 담긴 탄환은 각각 강화된 물건이라는 걸.

내가 군의 제식소총을 강화했던 것처럼 말이다.

'과연 미국답네. 이렇게까지 총에 진심인 걸 보면.'

그렇다면 산탄총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한 무기가 된 것이 맞았다.

나를 지켜준 아저씨의 척력을 찢어버릴 만큼.

물론...

'...나한테는 해당 사항이 없겠지만.'

+1 수준의 강화로는 생채기 하나 낼 수 없는 7위계의 척력이었다.

더욱이, 강화석 몇 개가 아쉬울 놈들이 고작 소모품에 불과한 탄환에 그 이상의 고 강화를 진행했을 리도 만무했다.

놈들에게 죽으려야 도무지 죽을 수가 없는 상황.

대충 생각이 정리된 나는 무력화된 아저씨를 옆으로 슬쩍 밀어냈다.

"...?"

의문스럽게 나를 바라보는 아저씨.

한편, 내 손에는 갓 출하한 K2C1 소총이 들려 있었다.

강화된 탄환이 자그만치 아홉발이나 장전된 채.

하지만 내 무기를 확인한 불한당들은 곧장 웃음을 터뜨렸다.

"아이고! 화났다 이거지?"

"무서워라! 귀엽게 짝이 없네!"

까르륵 웃어대는 꼴을 보니, 셋 모두 위계를 보유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어디 한번 쏴보라는 듯, 가죽 자켓을 열어젖히고 뱃가죽을 들이밀며 나를 한껏 도발하는 불한당들.

나는 그저 무심하게 놈들을 조준할 뿐이었다.

"이봐, 지금 그럴때가 아니야! 자네가 뭘 모르는가 본데..."

아저씨가 나를 만류했지만, 나 또한 내게 총을 발사한 이들을 두고 넘어갈 만큼 인내심이 강한 사람은 아니었다.

투두두두두두!

세차게 울리는 총소리, 그와 함께...

"어어억!"

"어...?"

감전, 점화, 빙결로 이루어진 아홉 발의 강화 탄환이 놈들의 척력을 가볍게 찢어냈다.

짜릿하게 팔을 비틀었다가, 불붙은 손을 휘저었다가, 이내 꽁꽁 얼어붙은 채 동그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 불한당들.

"어어어억..."

그들이 싸늘한 목소리와 함께 자리에 허물어졌다.

"저...저..."

휘둥그레 뜬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아저씨.

"저게 다 강화 탄환이라고...?"

그의 입이 다물어질 줄을 몰랐다.

***

근엄하면서도 매력적인 허스키한 목소리.

머리 위로 비스듬하게 쓴 카우보이 모자와 밤색 자켓.

새파란 청바지와 가죽 부츠, 마지막으로...

두툼하게 튀어나온 아랫배와 살짝 벗겨진 이마까지.

그것이 LA 한인 타운에서 건너온 카우보이, 박동관 씨의 매력적인 외양이었다.

"아시아계 사람 같길래 일단 돕고 봤지. 그런데 정말 한국 사람이었을 줄이야..."

간단한 신상 명세를 나눈 뒤다.

며칠 전 이곳 포티나인 빌리지에 도착했다는 그는, 지금 이곳 서부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 대해 간략히 설명해주었다.

"사람들이 이곳 광산으로 몰려들고 있어. 강화탄으로 위계를 뚫을 수 있다는 게 알려진 다음부터는... 강화석이 마석 이상으로 비싼 물건이 됐거든. 여기 모인 사람들도 다들 어떻게든 한탕 해보려고 모인 타지역의 각성자들일 거야."

멸망으로 인해 황폐해진 서부.

새롭게 출현한 강화석 광산과 이를 차지하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까지.

그야말로, 골드러시의 재현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와는 별개로 한 가지 물어볼 수 밖에 없었다.

미국인들의 사치스런 전투 방식에 관하여.

"...그 비싼 강화석을 총알에 사용하면서요?"

소모품에 불과한 탄환이다.

나처럼 복사 능력이 있지 않은 한 엄두도 못 낼 것이라 생각했지만, 미국인들은 아낌없이 총알 강화에 강화석을 소모하고 있었다.

박동관이 내 질문에 답했다.

"미국인들이 '무기'로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게 총이야. 그리고 가장 확실하게 믿는 무기이기도 하고. 대신, 자네 말대로 아껴 쓸 수밖에 없는 건 맞아. 그래서 강화탄을 사용할 땐 리볼버나 저격총을 사용하지. 그 비싼 강화탄을 소총에 넣어 연발로 당기는 자네 같은 사람이 괴짜인 거고..."

과연 낯선 이국땅 답게 미국인들 또한 자신들만의 전략으로 멸망에 대처하고 있었다.

그 전략이 강화석 세공사를 찾는 나의 계획과 절묘하게 겹칠줄은 미처 몰랐지만.

박동관에게 드워프에 대한 정보를 물었지만, 그 또한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드워프...? 잘 모르겠네. 고블린들이 득실거린다고는 들었지만..."

그럼에도, 그는 한 가지 단서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곳 보안관은 알고 있을 거야. 그 사람이 라이시온과의 전쟁이나 이곳 강화석 채굴 사업을 총괄하는 사람이거든."

그리고 그 단서를 연결해줄 능력까지.

"만나볼래? 내가 인사 정도는 시켜줄 수 있어."

66. 별이 빛나는 땅 (4)

코리안 카우보이, 박동관은 평범한 배불뚝이 아저씨가 아니었다.

그는 LA에서 건너온 한인 각성자들의 수장이었는데, 서른 명가량의 한인들과 함께 이곳 포티나인 빌리지의 광부들로 정착시킨 것 또한 그의 역할이었다고 했다.

"뭐, 그러니 이곳 보안관이랑 업무상 얼굴 볼 정도는 되지..."

덕분이었다.

드워프가 있으리라 판단되는 이곳 광산지대의 책임자를 만나 볼 수 있는 것은.

그렇게 그는 나를 포티나인 빌리지의 보안관 사무소로 안내했다.

사무소 부관의 안내에 따라 안으로 접어들자...

"오! 파크!"

박동관을 반갑게 맞이하는 보안관, 고든을 마주할 수 있었다.

고든은 통통한 볼살에, 거대하다시피 한 체구를 가진 백인 남성이었는데 면면에는 정체 모를 영업용 미소를 띠고 있었다.

이제 그와 인사를 나누고 드워프에 대한 정보를 캐낼 차례였지만...

"마침 부르려고 했는데. 파크, 사실... 내가 부탁할 게 하나 있어요."

"뭐지요, 보안관님?"

고든이 먼저 선수를 처버렸다.

그리고 놀랍게도...

"한인들이 나를 좀 도와줬으면 합니다. 광산에 드워프가 나타났는데... 이게 아주 골칫거리거든요."

"...!"

그가 드워프에 관한 이야기를 먼저 꺼내들었다.

박동관은 나와 눈을 살짝 마주치더니, 이내 고든의 이야기를 경청하기 시작했다.

내게 필요한 정보가 있으면 주워들으라는 듯이.

"...드워프라고요?"

"최근 강화석 생산량이 반토막이 나고 있는데... 파크도 이 물건 본 적 있죠?"

고든이 품에서 작은 물건 하나를 꺼내 들었다.

손가락 마디만 한 크기의 투명색 돌.

보석처럼 은은한 빛을 발하는 것이 눈부시게 아름다운 물건이었지만... 표정을 보아하니 고든에게 있어 그리 달가운 물건은 아닌 모양이었다.

시선을 집중하자 각성 시스템을 통해 물건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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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원석 (D)

속성 :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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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묘한 이름이었다.

강화석이라기에도, 아니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물건.

고든이 말을 이어 나갔다.

"드워프가 원흉이었어요. 어제 애덤이 똑똑히 봤다고 합니다. 땅딸막한 드워프 한 마리가 강화석을 캐내는 족족 이런 원석으로 만들어버리고 있었다고요. 어쩐지... 깊숙이 들어갈수록 강화석 매장량이 형편없더라니!"

세공사 드워프.

무슨 사정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는 강화석을 사용해 더 높은 등급의 강화석이 아닌 이도 저도 아닌 '원석'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강화에 사용할 수도 없는 예쁜 쓰레기를.

그것이 고든에게도 크나큰 손실을 입히고 있는 모양이었다.

박동관이 신중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저희가 어떻게 도움을 드리면 될까요?"

그리고.

고든의 대답은 가히 충격적인 것이었다.

"하루라도 빨리 드워프를 죽여야죠. 하지만 계속해서 광산 내부를 돌아다니는 통에 위치를 특정하기가 어려워요. 그러니 채광 경험이 많은 한인들도 함께 나서서 드워프 수색을 도와줬으면 합니다."

"그... 짐작하기론 말씀하신 위치가 아직 점령이 덜 된 구역으로 생각되는데... 거기엔 엘리트 고블린들이..."

조심스레 질문하는 박동관.

하지만 고든은 이내 호탕한 웃음을 지으며, 그의 등을 친근하게 두드렸다.

"하하, 파크! 한인들 모두 위계 보유자가 아니었나요? 우리 모두 코리안들의 저력에 깜짝 놀라고 있답니다."

"하하..."

뭐라 덧붙이지 못한 채, 헛웃음을 흘리는 박동관.

그러던 중, 고든이 나를 보며 말했다.

"그리고 당신도 같이 도와줬으면 합니다."

"...?"

다짜고짜 박동관에게 장기 할 말만 늘어놓은 탓에 아직 통성명도 나누지 못한 사이였다.

하지만 고든은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 씨익 웃음을 지어 보였다.

"당신이 누구인지는 이미 부관으로부터 들었습니다. 마을에서 한바탕하신 모양이지만... 특별히 탓할 생각은 없습니다. 포티나인은 원래 그런 곳이니까요. 그나저나 대단하군요. 그 셋 모두 위계 보유자였을 텐데..."

마을에서 불한당들을 처리했던 일.

그게 벌써 보안관의 귀에 들어간 모양이었다.

한껏 나의 전투력을 치켜세운 보안관이 덧붙였다.

"그러니 당신도 어렵지 않게 광산을 수색할 수 있을 겁니다! 답례는 충분히 할 테니, 꼭 파크를 도와주세요!"

은근슬쩍 도움의 수혜자를 박동관으로 비트는 뻔뻔함까지.

나는 물었다.

그가 드워프를 죽이겠다는 포부를 내세웠을 때부터 줄곧 궁금했으니까.

"그 드워프 말인데... 혹시 사람을 해친 적이 있나요?"

"음... 그런 일은 없었지만, 그런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인류의 자산인 강화석을 훼손하고 있으니깐요."

그러곤 다시 화창한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어쨌거나 인간이 아닌 존재들입니다. 타 차원의 존재들이 우리에게 손해를 끼치는 방식은 다양하죠. 살인, 방화, 파괴, 이런 자잘한 훼방까지..."

그야말로 청산유수였다.

한 손에 마석을 쥔 그는 자신의 지론을 유감없이 털어놓고 있었다.

그리 오래 듣고 싶지는 않은 연설이었기에,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해보죠. 그런데..."

그러곤 테이블 위에 올려진 원석을 집어 들었다.

"이건 혹시 필요가 없으신지?"

고든은 흔쾌하게 손을 내저었다.

"마음에 들면 가져가세요. 쓸모없는 물건이니... 아니, 내 눈앞에서 치워준다면 그게 더 고맙겠네요."

그것이 그의 축객령이었다.

.

.

.

사무소에서 빠져나오자마자, 박동관은 내게 귀띔해주었다.

대뜸 갑작스러운 선언과 함께.

"내일 밤에 한인들을 데리고 여길 뜰 거야."

"...갑자기요?"

그의 표정은 한껏 살벌해져 있었다.

아까 전만 해도 볼 수 있었던 아저씨 특유의 서글서글함을 온통 지워버린 채.

그가 말했다.

"저 새끼, 우리를 미끼로 쓸 생각이야. 뭐? 엘리트 고블린이 별것 아니라고?"

주먹을 불끈 쥔 채,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얼굴.

그가 덧붙였다.

"8위계 네댓이 몰려다니는 놈들이야. 거기에 지능까지 있지. 누굴 바보로 아는 거야 뭐야?"

"그럼 안 한다고 하면 되잖아요?"

"말이 부탁이지 사실상 강제야. 싫다면 그때는 강화탄이 장전 된 총을 들이밀면서 광산에 처넣겠지. 사실..."

박동관이 덧붙여준 이야기는 실로 놀라웠다.

지금의 미국 전역이 인종을 중심으로 한 세력들로 분열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얼마 전 알게 된 바로는 고든이 백인우월주의 세력의 소속원이었다는 것까지.

"그러니 조용히 떠나는 게 최선이야. 어차피 이번이 처음도 아니고..."

결국, 이들이 LA에서 떠나온 것도 같은 이유였다.

들이닥친 멸망, 인종 갈등으로 분열된 이곳 자유의 나라는 이들에게 작디작은 둥지 하나 내어주지 않았다.

박동관이 내 어깨를 붙잡았다.

"같이 가세. 이런 타지에서는 고향 사람들만큼 믿을 존재가 또 없는 법이야. 자네가 어쩌다 이렇게 홀로 떨어져 나왔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몸을 던져 총을 막아줄 때부터, 보안관을 만날 수 있게 해준 것은 물론, 아예 동행을 권하는 지금까지.

박동관이 나를 챙겨주는 이유는 내가 한국 사람이라는 것, 그것 하나뿐이었다.

달리 말하면...

"한국이 많이 그리우신가 보네요."

"음? 그야... 당연하지. 그런데 갑자가 그건 왜?"

그들은 정처 없이 그저 떠돌고 있었다.

'집'의 흔적을 찾아가며.

하지만 나는 그들처럼 떠날 생각이 없었다.

떠나도 떠날 수 없는 것이, 어딜 가더라도 이미 정착한 집이 있는 것이 내가 가진 아공간 능력의 운명이었으니까.

"드워프를 찾아야 해요. 그러니 여기 남을 겁니다."

"그런가... 그것 참 아쉬운..."

"그리고 저를 좀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응?"

고든의 드워프 사냥은 모레로 예정되어 있었다.

어떤 사정이 있어서 '원석'이라는 이상한 보석을 만들어내는지는 모르지만, 세공 능력이 있는 그를 이렇게 죽게 내버려 둘수는 없었다.

놈들보다 먼저 드워프를 발견해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한인들의 도움이 필요했다.

이곳 광산에서 직접 일해본 한인들의 경험이.

"아까 이야기하시는 걸 들어보니... 수색 지역을 대강 알고 계시는 거잖아요? 길을 잘 아니까 보안관이 드워프 수색을 도와달라고 한 걸 테고."

"그렇지, 그렇긴 한데..."

"저를 그리로 데려다 주세요. 그러면 저도..."

지잉.

나는 즉시 용산으로 향하는 포탈을 열었다.

"여러분이 정착할 만한 장소를 마련해 드릴 테니."

한국의 도심.

그 오랜 풍경이 포탈의 푸른 표면을 타고 넘실거렸다.

***

이른 새벽.

우리는 바쁘게 움직였다.

부우우웅.

차를 타고 라이시온 광산이 통폐합된 그랜드 캐니언의 일부 지역으로 접어들어 갔다.

원래라면 산맥을 넘지 않는 한, 포티나인의 경비병들을 마주쳐야만 했지만...

"여기 샛길이 있어요."

한인 각성자들의 도움으로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다.

그렇게 들어간 라이시온 광산의 초입.

내가 출하해준 랜턴을 비추며, 박동관을 비롯한 한인들은 나를 착실하게 안내하기 시작했다.

단순한 길 설명부터...

"고든이 말한 구역까지 가려면 한참 더 들어가야 해. 이쪽으로 내려가다 보면..."

주의해야 할 점.

"벽 따라서 움직이다 보면 땅이 움푹 파인 곳이 있는데..."

마지막으로 이동 수단까지.

"고블린 광부들이 설치한 수레인데, 우리도 사용할 수 있어요. 여기 레버를 이렇게 당기면..."

합참의 유성철에게는 미리 언질을 해둔 터였다.

마침내 드워프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광산의 한 구역에 다다랐을 때, 나는 한인들 모두를 용산으로 돌려보냈다.

그러곤.

"정겸 님!"

아공간에 있던 나의 반려 난민, 솔렌을 불러냈다.

프르르르 꼬리를 덜며 내 다리에 안기는 솔렌.

그 복슬복슬한 털을 만지고 있자니 이제야 고향에 온 기분이었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드워프의 위치를 찾아볼 차례였다.

광산 내부의 이곳저곳을 배회하고 있다는 드워프.

거미줄처럼 드넓게 뻗은 광산을 모두 조사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므로, 나는 솔렌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이거 냄새 한번 맡아볼래?"

내가 꺼내 든 것은 고든으로부터 받은 '원석'.

드워프가 만들었다던 예쁜 쓰레기를 솔렌의 코앞에 가져다댔다.

킁킁.

킁킁.

코를 씰룩이며 신중하게 냄새를 맡는 솔렌.

그러곤...

"저쪽..."

수줍게 털로 뒤덮인 다리를 들어 어두컴컴한 동굴의 한 통로를 가리켰다.

마농족, 솔렌의 추적은 계속됐다.

그가 갈림길에 설 때마다 확신에 찬 발짓으로 방향을 알려주는 동안...

쿠에엑!

켁!

나는 마주 오는 엘리트 고블린들을 강화된 성창으로 꿰뚫었다.

어두운 동굴 지형과 8위계의 척력, 마지막으로 머릿수까지 동원하는 놈들이었지만... 주변을 밝히며 날아드는 성창에 의해 곧장 생명을 달리했다.

그렇게 두어 시간의 지루한 여정이 반복되었을 즈음...

"음?"

파드득!

파득!

동구의 한쪽 구석에서 날갯짓하는 박쥐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 아래로.

"하지 마! 하지 말라고!"

박쥐들에게 한껏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땅딸막한 존재를 발견할 수 있었다.

"..."

양쪽으로 땋은 흰 수염, 짧은 다리와 술이라도 먹은 듯 발갛게 달아오른 넓적한 코까지.

누가 봐도 드워프라고 부를 수 있을 존재를.

.

.

.

"...고맙군."

드디어 박쥐들로부터 해방된 드워프.

그는 자신의 이름을 '브로크'라 소개했다.

허름한 작업복 위로, 금테 외눈 안경을 낀 그가 멋쩍다는 듯 덧붙였다.

"...내가 싸움을 싫어해서."

"..."

싫어하는 게 아니라 못 하는 것 같다고 차마 덧붙이지는 못했다.

물론 브로크의 몸에는 생채기 하나 나 있지 않았다.

일전에 보았던 상공회의소의 일본지부장처럼 전투력 자체는 없되 높은 위계를 지닌 타입인 듯했다.

헥헥.

혓바닥을 내민 채, 열기를 내보내고 있는 솔렌.

기특한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나는 브로크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내가 가진 강화석을 세공해주었으면 한다는 것.

그와 더불어...

"...여기 있으면 죽습니다."

그의 목숨을 노리는 인간들이 곧 들이닥친다는 것까지.

인간들이 자신의 목숨을 노린다는 사실에, 브로크는 적잖이 놀란 표정이었다.

슥.

나는 이곳 광산에서의 이정표 역할을 해준, '원석'을 꺼내어 보여주었다.

그것이 브로크에게 죽음의 그림자를 드리운 원흉이었으니까.

후우.

깊은 한숨을 내쉰 브로크가 내게 물었다.

"혹시 세공이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는지는 알고 있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엘븐하임의 엘리로부터 간략한 방법을 전해 들은 터였으니까.

강화석의 세공은 실로 독특한 작업이었다.

낮은 등급의 강화석을 깎고 깎아 원석으로 만든 다음 그걸 다시 모아 하나의 강화석으로 만드는 과정.

이 원석은 브로크가 정해진 세공의 원칙을 따르고 있다는 증거였다.

하지만...

"미안하지만, 거기까지가 내 한계요."

벅벅.

브로크가 거칠게 머리를 긁었다.

"세공이라면 바라던 바지. 더 좋은 강화석이나 장신구를 만드는 건 나 같은 세공사 드워프에겐 영예나 다름없으니까. 하지만..."

슥.

갖가지 공구가 빼곡하게 꽂혀 있는 그의 작업복.

그가 들어보인 것은 볼이 빠진 채, 자루와 머리만 남아있는 허전한 망치였다.

"원석을 합치는 데 쓰는 장비 이 꼴이요. 원래는 클레멘타인이라는 요망한 금속이 달려있어야 하지. 하지만..."

나는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가 덧붙인 말이 꽤 난해했기에.

"집을 나갔다고요? 금속이?"

"그냥 금속이 아니야. 제 나름의 '성질'을 가지고 있소. 클레멘타인 같은 경우엔... 간단히 말해 아주 돈독이 오른 녀석이지."

마치 자석과도 같았다.

타고난 보석의 일종인 클레멘타인은 더 많은 '재물'에 이끌리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런 클레멘타인이 집을 나가게 된 경위에는...

"그놈의 황금 고블린만 아니었어도..."

역시나 돈이었다.

"여기 라이시온에 있는 건 분명하고... 찾아다닌 지도 한참인데... 도무지 찾을 수가 없소. 그러니 주구장창 원석만 다듬고 있을 수 밖에."

그것이 이 짧은 다리의 드워프가 꾸준히 광산을 배회하는 이유였다.

더 높은 강화석을 만들고 싶다는 열망.

그 열망에 사로잡힌 드워프는 간단하게 자신의 소망을 정리했다.

"클레멘타인을 찾아주시오. 그러면 그깟 강화석이야 얼마든지 세공해드릴 테니까."

돈 많은 황금 고블린과 함께 야반도주를 감행한 클레멘타인.

그 금속을 도로 되찾아오는 것.

"그나저나..."

나로서도 궁금했다.

보석이 반할 만큼의 재물을 가진 황금 고블린.

녀석의 지갑이 얼마나 두툼할지.

그리고...

부유함의 상징인 황금 고블린, 그리고 무한의 물류창고를 지닌 나.

클레멘타인이 둘 중 누구를 선택할지.

별이 빛나는 땅 (5)

067화 별이 빛나는 땅 (5)

"황금 고블린이라······."

우선은 인력을 동원하기로 했다.

아공간 포탈을 열어 주먹왕 김솔, 그리고 카멜롯의 열두 기사들을 광산으로 불러들였다.

거기에 더해,

"정겸 님!"

마찬가지로 비슷한 수의 마농족들을 불러들였다.

먼저 나와 있던 솔렌이 다른 마농족들에게 대략적인 임무를 전해주었다.

'······딱히 냄새를 맡게 할 만한 건 없는데.'

원석을 이용해 드워프를 찾을 때와는 달리, 황금 고블린에 대한 단서는 전무한 상황이었다.

한 가지 있다면 브로크의 금속 '클레멘타인'을 가져갔다는 것 정도.

결국 덧붙일 수 있는 말은 이 정도뿐이었다.

"······돈 냄새 많이 나는 쪽으로 찾아봐."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는 마농족들.

그러곤 코를 킁킁거리며 내 주변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내 몸에 앞발을 더듬어 가며 혼신을 다해 냄새를 맡는 녀석들.

"······나 말고."

아무래도 녀석들도 '부'의 기운을 느낀 모양이었다.

무한 재고의 물류센터가 자아내는 그 풍성한 향기를.

이내 시무룩해진 마농족들은 산개하여 광산의 골목 이곳저곳을 뒤지기 시작했다.

땅을 긁고, 바닥을 뒹굴고, 신사답게 볼일까지 처리하는 녀석들.

"이러다 언제 찾냐······."

아무리 봐도 황금 고블린의 행방은 오리무중이었다.

그러던 중,

"그······."

드워프 브로크가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해 주었다.

"혹시 귀금속 같은 게 있다면 미끼로 쓸 수 있을지도 모르오. 값비싼 물건이 있으면 곧잘 훔쳐 가곤 하거든."

과연 황금 고블린다운 습성이었다.

마석이나 강화석을 한 아름 쏟아 놓는다면 놈의 구미를 당기기엔 충분할 터.

하지만······.

"단, 잃어버릴 각오는 하는 게 좋을 거요. 아주 날쌘 놈이거든······."

재빠른 몸짓의 황금 고블린.

포획에 성공한다면 별문제가 없겠지만, 행여나 놓치기라도 한다면 애꿎은 마석이나 강화석을 날릴 위험이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다른 귀금속이 있을 리 없었다.

저렴한 제품만 박리다매로 판매하는 물류센터에 황금고블린이 탐낼 만한 물건이······.

"······있잖아?"

[한국순금거래소] 순금 골드바 3.75g (25K 99.99% 1돈), 가격은 377,000원입니다.]

혹시나 해서 조회해본 상품 페이지.

최상단에는 상품으로 등록된 순금이 떡하니 자리 잡고 있었다.

김솔이 황당하다는 듯 덧붙였다.

"······뭔 놈의 물류센터에 금까지 있냐?"

나도 몰랐다.

내가 이렇게까지 부자일 줄이야.

금이고 나발이고 모든 것이 무너져 버린 이 세상이 원망스러울 따름이었다.

"어쨌든 간에."

확보했다.

황금 고블린을 끌어들일 만한 미끼를.

.

.

.

능력을 이용해 순금을 복제하고 덧붙이기를 반복했다.

그 결과 광산 한 가운데에 놓인 것은······.

"와······."

반짝반짝, 산더미처럼 쌓인 미니 골드바였다.

하나같이 한국 순금 거래소의 로고가 각인된.

브로크가 곱게 땋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충분하고도 남겠군."

덫을 놓았으니, 이제 남은 건 기다리는 일뿐이었다.

다행히 곳곳에 숨을 곳이 많은 광산이었다.

대여섯 갈래로 뻗어나가는 곳곳에 해골 기사들을 배치했고, 나 또한 골드바가 놓인 근처 도랑에 몸을 숨겼다.

어두운 광산에 수북하게 쌓인 금.

인위적이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지만, 광산이라는 장소와 퍽 어울리는 그림이기도 했다.

그렇게, 숨을 죽인 채 한 시간가량 놈을 기다렸을 즈음.

"······왔다!"

김솔로부터 소곤거리는 무전이 들려왔다.

통로 벽면 곳곳에 성창을 세워 둔 터였다.

그로부터 새어 나온 빛이 주변을 비추었고······.

저벅저벅.

발소리를 죽이며 서서히 다가오는 놈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확실히 고블린이었다.

우둘투둘한 피부, 거대한 코와 쭉 찢어진 눈까지.

다만 온몸이 황금색으로 물들어 있었고, 다른 고블린들과 달리 깨끗한 비단옷을 두르고 있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특이한 점이 있었다.

'······강화석?'

분명 강화석이었다.

비단옷 주변으로 드러난 황금 고블린 목, 다리, 그리고 팔뚝에는 수십 개의 강화석이 촘촘하게 박혀 있었다.

그리고······.

"······!"

동시였다.

나와 녀석의 눈이 마주친 것은.

정말이지 소름 끼치는 속도였다.

타다닥 다리로 잔상을 일으킨 놈이 그대로 시야에서 사라지기 시작했으니까.

물론,

"······출하." 

쐐애애액!

갓 출하된 강화된 성창 또한 놈을 매섭게 추격하고 있었다.

카가가각!

서서히 좁혀지는 거리.

출하 사정거리에 아슬아슬하게 닿았을 즈음.

타아아앙!

"······맞았다!"

성창이 황금고블린의 등을 찌르고 들어갔다.

하지만······.

"······튕겨 냈다고?"

허망하게 튕겨 나가는 성창.

콰과과과곽!

그대로 줄행랑이었다.

강화된 성창마저 튕겨 내는 수준의 척력.

황금 고블린을 처리하는 일은 상상 이상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어떻게 됐어?"

곁으로 돌아오는 김솔과 해골 기사들, 그리고 마농족과 드워프 브로크까지.

나는 그들을 바라보며 허탈한 헛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놓쳤어. 그 와중에······."

대체 언제 챙긴 것일까?

눈앞에 쌓아두었던 골드바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녀석과 눈을 마주친 순간 알 수 있었다.

지능을 가진 놈이며, 같은 수법이 두 번 통할 리 없다는 것까지.

"큰일이네. 어떻게든 클레멘타인을 찾아야 하는데······."

그리고······.

가만히 입술을 깨무는 나를 마농족들이 가만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왜 자꾸 나를 봐? 황금 고블린을······."

내가 아니었다.

마농족들이 바라보고 있는 것은······.

"······어?"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댔다.

찰싹 달라붙어 있는 정체불명의 보라색 금속.

브로크가 쓴웃음을 지으며 알려주었다.

"자네를 아주아주 좋아하는 모양이구만······."

클레멘타인.

이 돈독 오른 금속께서 내 손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

세공사 브로크.

그리고 강화석을 세공하는데 필요한 금속, 클레멘타인까지 손에 넣었다.

"찾던 건 다 찾긴 했는데······."

애당초 강화석 세공사를 찾기 위해 시작한 미국행이었다.

얼떨결에 한인들을 구했고, 보안관 고든의 존재가 다소 찜찜하게 남아 있기는 했지만 이대로 포탈을 타고 한국으로 돌아가도 크게 아쉬울 건 없었다.

다만······.

"같은 속성 강화석 열 개가 필요합니다."

브로크가 밝힌 C급 강화석 세공 조건이었다.

수북하게 쌓인 강화석이다 보니 열 개쯤은 대수롭지 않게 느껴지지 않았지만, 문제는 같은 속성이라는 조건에 있었다.

"······그러면 선택의 폭이 확 줄어드는데."

감전, 내성, 폭발, 점화 등등.

몹시 다양한 종류의 속성을 가진 강화석들이었다.

더욱이 생산의 주체가 저주받은 카멜롯이라 그런지, '신성'을 비롯한 몇 개의 속성은 아예 생산이 되질 않았다.

휙!

주변을 둘러보았다.

오는 길에도 심심치 않게 발견한 강화석이다.

어쩌면 카멜롯 다음으로 강화석이 가장 풍족한 장소, 그것이 바로 이곳 라이시온 광산이었다.

더욱이, 만약 그렇다면······.

"그놈 배때기를 꼭 갈라 보고 싶단 말이지······."

자그마치 황금 고블린이다.

어떻게 두고 떠날 수 있단 말인가?

물론 내게는 놈을 잡을 방법이 없었다.

가지고 있는 무기 중 가장 강력한 강화 성창조차 놈의 척력을 뚫어내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이제 세공이 가능하니까."

드워프 세공사.

그리고 풍족한 양의 D급 강화석까지.

내게 모든 준비물이 갖춰진 터였으니.

"문제는 어떤 물건을 강화할까인데······."

아쉽게도 +3에 해당하는 에메스의 성창은 강화가 불가했다.

저주받은 카멜롯을 통해 강화석을 수급한 탓에, '신성' 속성을 지닌 강화석이 전무한 상황이었으니.

고민은 길지 않았다.

지금까지 모은 강화석의 수를 종류별로 가늠하고 나니, 절로 결론이 내려졌다.

"내성 열 두 개에······ 감전이 서른하나······."

가장 많이 모인 강화석의 종류였다.

유독 많이 모인 내성과 감전.

그중에서도 특히 감전 강화석의 수가 압도적이었다.

적도 이미 설정되어 있었다.

미친 듯한 속도를 자랑하는 황금 고블린.

놈을 꿰뚫을 만큼 빠르고 강한 무기가 필요한 시점이었으니.

결국······.

"총이랑 탄을 강화해야겠네."

나는 그렇게 가닥을 잡았다.

남은 일은 일사천리였다.

브로크가 명절날 밤 깎듯 내가 건네준 강화석들을 모조리 원석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러곤 나로부터 클레멘타인을 떼어내어 허전한 망치 앞부분에 단단히 결속했다.

지지직······.

완성된 망치가 여전히 내게 자석처럼 이끌려왔지만, 세공사 드워프의 완력을 이길 만큼은 아니었다.

그렇게 C급 내성 강화석 하나와 감전 강화석 세 개가 완성되었고,

나는 지체없이 K2C1 소총과 5.56mm 감전 탄환을 각각 최대치로 강화했다

그렇게 완성된 물건은······.

----

[K2C1 제식소총 +3]

등급: [에픽]

설명: [정보를 불러오는 데 실패했습니다. 직접 설명을 입력할 수 있습니다.]

속성: [없음]

옵션: [내성+3]

----

----

[5.56mm NATO 탄 +4]

등급: [에픽]

설명: [정보를 불러오는 데 실패했습니다. 직접 설명을 입력할 수 있습니다.]

속성: [전기]

옵션: [관통+4], [감전+4]

----

단숨에 에픽 등급으로 뛰어 버린 두 아이템이었다.

황금 고블린의 척력을 뚫어내기 위함이다.

소총의 내성 등급이 3에 불과함에도 탄환의 등급을 4까지 끌어올렸다.

그래도 쓸 수 없는 물건은 아니었다.

실험실을 통해 확인해 본 결과, 내성+3의 소총이 감전 탄환의 위력을 간신히 버텨 주었으니까.

단발, 연발 가릴 것도 없었다.

"딱 한 발이라······."

단 한 발.

그것이 내성+3 등급의 소총으로 쏠 수 있는 최대치였으니.

"근데 황금고블린은 어떻게 찾으려고?"

김솔이 물었지만, 이 또한 문제없었다.

놈에게 줄곧 달라붙어 있던 클레멘타인.

이 금속에 황금 고블린의 진한 누린내가 깃들어 있었으니까.

킁킁.

킁킁.

마농족들이 그 체취를 맡았고,

척!

하나같이 앞발을 들어 방향을 가리키기 시작했다.

***

"자꾸 밑으로만 내려가네······."

김솔이 손부채질하며 따라왔다.

안 그래도 갑갑하기 짝이 없는 동굴 내부다.

하지만 마농족들이 따라가는 냄새는 광산의 끝도 없는 내리막으로 이어져 있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냥 찾으라면 절대 못 찾았겠는데?"

사람 한 명 겨우 지나갈 듯한 크기의 비좁은 틈.

아무리 봐도 길이라 볼 수 없는 그 좁은 틈을 벌써 몇 차례나 통과했다.

그렇게, 계단처럼 이어지는 마지막 구간에 막 접어들었을 때쯤.

우리는 새로운 장소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게 다 뭐야?'

휘이이······.

내려다보이는 것은 거대한 공동이었다.

그저 광산이라고만 여겼던 라이시온이다.

하지만, 공동에 세워진 기둥에는 알 수 없는 외계의 표식들이 가지런히 각인되어 있었다.

이곳이 그저 그런 광산이 아니라는 걸 여실히 드러내듯이.

하지만 그것까진 괜찮았다.

애당초 타 차원으로부터 통폐합되어 들어온 지형.

지하에 또 다른 시설이 있다 한들 크게 이상할 일은 아니었으니까.

정작 문제는 따로 있었다.

'쟤는 왜 저깄어······?'

샛노란 머리와 거대한 체구.

익숙한 외모였다.

포티나인 빌리지의 보안관, 고든.

놈이 휘하의 부하들과 함께 두런두런 공동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후우욱!

즉시 유령기사들을 내려보냈다.

모드레드를 비롯한 유령기사들은 은신과 유체화를 활용했고, 빠르게 거대한 지하공간의 벽면을 타고 내려갔다.

그러곤, 내게 시선을 공유해 주기 시작했다.

보안관 고든과 그를 따르는 몇 명의 부관들.

목적지에 다다랐는지, 그들이 자리에 우뚝 멈추어 섰다.

그 맞은 편에는······.

'······?'

고블린들이 있었다.

다른 고블린들과는 달랐다.

놈들의 몸에도 곳곳에 강화석이 박혀 있었으니.

그렇게, 나는 이들의 은밀한 거래를 목격할 수 있었다.

킥킥.

고블린들이 웃으며 고든을 향해 손바닥을 펼쳤고,

탈탈.

고든은 주머니를 꺼내, 그들 손에 강화석을 털어놓았다.

주머니를 높게 치켜든 고든.

그런 그의 팔뚝에서도 언뜻언뜻 강화석이 박혀있었다.

'······그랬구나.'

모든 것을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몇 가지는 분명했다.

고든이 고블린들에게 강화석을 상납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고블린들처럼 몸에 강화석을 박아 넣고 있다는 것.

결론은 간단했다.

고든이 인류를 배반했다는 것.

드워프를 죽이려 했던 이유도 분명했다.

고블린들에게 상납해야 할 강화석을 브로크가 모조리 원석으로 만들어 버리고 있었으니까.

한편,

'······차라리 잘 됐어.'

이곳 라이시온 광산에서의 강화석 사업을 총괄하던 고든이었다.

하지만 놈의 속내를 알게 된 이상, 나로서도 더 이상 손속을 봐줄 필요가 없어졌다.

'그렇다면.'

그래서였다.

이곳 라이시온 광산을 통째로 삼켜 버릴 생각을 한 것은.

'아공간에 넣지는 못하겠지만······.'

어디 아공간에 넣어야만 내 것이겠는가?

'소유' 개념을 결정하는 핵심은 다른 곳에 있었다.

'싹 다 쓸어 버리고 포탈 깔아두면 그게 내 거지.'

그 소유를 결정할 힘의 논리에.

별이 빛나는 땅 (5)

067화 별이 빛나는 땅 (5)

"황금 고블린이라······."

우선은 인력을 동원하기로 했다.

아공간 포탈을 열어 주먹왕 김솔, 그리고 카멜롯의 열두 기사들을 광산으로 불러들였다.

거기에 더해,

"정겸 님!"

마찬가지로 비슷한 수의 마농족들을 불러들였다.

먼저 나와 있던 솔렌이 다른 마농족들에게 대략적인 임무를 전해주었다.

'······딱히 냄새를 맡게 할 만한 건 없는데.'

원석을 이용해 드워프를 찾을 때와는 달리, 황금 고블린에 대한 단서는 전무한 상황이었다.

한 가지 있다면 브로크의 금속 '클레멘타인'을 가져갔다는 것 정도.

결국 덧붙일 수 있는 말은 이 정도뿐이었다.

"······돈 냄새 많이 나는 쪽으로 찾아봐."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는 마농족들.

그러곤 코를 킁킁거리며 내 주변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내 몸에 앞발을 더듬어 가며 혼신을 다해 냄새를 맡는 녀석들.

"······나 말고."

아무래도 녀석들도 '부'의 기운을 느낀 모양이었다.

무한 재고의 물류센터가 자아내는 그 풍성한 향기를.

이내 시무룩해진 마농족들은 산개하여 광산의 골목 이곳저곳을 뒤지기 시작했다.

땅을 긁고, 바닥을 뒹굴고, 신사답게 볼일까지 처리하는 녀석들.

"이러다 언제 찾냐······."

아무리 봐도 황금 고블린의 행방은 오리무중이었다.

그러던 중,

"그······."

드워프 브로크가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해 주었다.

"혹시 귀금속 같은 게 있다면 미끼로 쓸 수 있을지도 모르오. 값비싼 물건이 있으면 곧잘 훔쳐 가곤 하거든."

과연 황금 고블린다운 습성이었다.

마석이나 강화석을 한 아름 쏟아 놓는다면 놈의 구미를 당기기엔 충분할 터.

하지만······.

"단, 잃어버릴 각오는 하는 게 좋을 거요. 아주 날쌘 놈이거든······."

재빠른 몸짓의 황금 고블린.

포획에 성공한다면 별문제가 없겠지만, 행여나 놓치기라도 한다면 애꿎은 마석이나 강화석을 날릴 위험이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다른 귀금속이 있을 리 없었다.

저렴한 제품만 박리다매로 판매하는 물류센터에 황금고블린이 탐낼 만한 물건이······.

"······있잖아?"

[한국순금거래소] 순금 골드바 3.75g (25K 99.99% 1돈), 가격은 377,000원입니다.]

혹시나 해서 조회해본 상품 페이지.

최상단에는 상품으로 등록된 순금이 떡하니 자리 잡고 있었다.

김솔이 황당하다는 듯 덧붙였다.

"······뭔 놈의 물류센터에 금까지 있냐?"

나도 몰랐다.

내가 이렇게까지 부자일 줄이야.

금이고 나발이고 모든 것이 무너져 버린 이 세상이 원망스러울 따름이었다.

"어쨌든 간에."

확보했다.

황금 고블린을 끌어들일 만한 미끼를.

.

.

.

능력을 이용해 순금을 복제하고 덧붙이기를 반복했다.

그 결과 광산 한 가운데에 놓인 것은······.

"와······."

반짝반짝, 산더미처럼 쌓인 미니 골드바였다.

하나같이 한국 순금 거래소의 로고가 각인된.

브로크가 곱게 땋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충분하고도 남겠군."

덫을 놓았으니, 이제 남은 건 기다리는 일뿐이었다.

다행히 곳곳에 숨을 곳이 많은 광산이었다.

대여섯 갈래로 뻗어나가는 곳곳에 해골 기사들을 배치했고, 나 또한 골드바가 놓인 근처 도랑에 몸을 숨겼다.

어두운 광산에 수북하게 쌓인 금.

인위적이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지만, 광산이라는 장소와 퍽 어울리는 그림이기도 했다.

그렇게, 숨을 죽인 채 한 시간가량 놈을 기다렸을 즈음.

"······왔다!"

김솔로부터 소곤거리는 무전이 들려왔다.

통로 벽면 곳곳에 성창을 세워 둔 터였다.

그로부터 새어 나온 빛이 주변을 비추었고······.

저벅저벅.

발소리를 죽이며 서서히 다가오는 놈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확실히 고블린이었다.

우둘투둘한 피부, 거대한 코와 쭉 찢어진 눈까지.

다만 온몸이 황금색으로 물들어 있었고, 다른 고블린들과 달리 깨끗한 비단옷을 두르고 있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특이한 점이 있었다.

'······강화석?'

분명 강화석이었다.

비단옷 주변으로 드러난 황금 고블린 목, 다리, 그리고 팔뚝에는 수십 개의 강화석이 촘촘하게 박혀 있었다.

그리고······.

"······!"

동시였다.

나와 녀석의 눈이 마주친 것은.

정말이지 소름 끼치는 속도였다.

타다닥 다리로 잔상을 일으킨 놈이 그대로 시야에서 사라지기 시작했으니까.

물론,

"······출하." 

쐐애애액!

갓 출하된 강화된 성창 또한 놈을 매섭게 추격하고 있었다.

카가가각!

서서히 좁혀지는 거리.

출하 사정거리에 아슬아슬하게 닿았을 즈음.

타아아앙!

"······맞았다!"

성창이 황금고블린의 등을 찌르고 들어갔다.

하지만······.

"······튕겨 냈다고?"

허망하게 튕겨 나가는 성창.

콰과과과곽!

그대로 줄행랑이었다.

강화된 성창마저 튕겨 내는 수준의 척력.

황금 고블린을 처리하는 일은 상상 이상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어떻게 됐어?"

곁으로 돌아오는 김솔과 해골 기사들, 그리고 마농족과 드워프 브로크까지.

나는 그들을 바라보며 허탈한 헛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놓쳤어. 그 와중에······."

대체 언제 챙긴 것일까?

눈앞에 쌓아두었던 골드바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녀석과 눈을 마주친 순간 알 수 있었다.

지능을 가진 놈이며, 같은 수법이 두 번 통할 리 없다는 것까지.

"큰일이네. 어떻게든 클레멘타인을 찾아야 하는데······."

그리고······.

가만히 입술을 깨무는 나를 마농족들이 가만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왜 자꾸 나를 봐? 황금 고블린을······."

내가 아니었다.

마농족들이 바라보고 있는 것은······.

"······어?"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댔다.

찰싹 달라붙어 있는 정체불명의 보라색 금속.

브로크가 쓴웃음을 지으며 알려주었다.

"자네를 아주아주 좋아하는 모양이구만······."

클레멘타인.

이 돈독 오른 금속께서 내 손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

세공사 브로크.

그리고 강화석을 세공하는데 필요한 금속, 클레멘타인까지 손에 넣었다.

"찾던 건 다 찾긴 했는데······."

애당초 강화석 세공사를 찾기 위해 시작한 미국행이었다.

얼떨결에 한인들을 구했고, 보안관 고든의 존재가 다소 찜찜하게 남아 있기는 했지만 이대로 포탈을 타고 한국으로 돌아가도 크게 아쉬울 건 없었다.

다만······.

"같은 속성 강화석 열 개가 필요합니다."

브로크가 밝힌 C급 강화석 세공 조건이었다.

수북하게 쌓인 강화석이다 보니 열 개쯤은 대수롭지 않게 느껴지지 않았지만, 문제는 같은 속성이라는 조건에 있었다.

"······그러면 선택의 폭이 확 줄어드는데."

감전, 내성, 폭발, 점화 등등.

몹시 다양한 종류의 속성을 가진 강화석들이었다.

더욱이 생산의 주체가 저주받은 카멜롯이라 그런지, '신성'을 비롯한 몇 개의 속성은 아예 생산이 되질 않았다.

휙!

주변을 둘러보았다.

오는 길에도 심심치 않게 발견한 강화석이다.

어쩌면 카멜롯 다음으로 강화석이 가장 풍족한 장소, 그것이 바로 이곳 라이시온 광산이었다.

더욱이, 만약 그렇다면······.

"그놈 배때기를 꼭 갈라 보고 싶단 말이지······."

자그마치 황금 고블린이다.

어떻게 두고 떠날 수 있단 말인가?

물론 내게는 놈을 잡을 방법이 없었다.

가지고 있는 무기 중 가장 강력한 강화 성창조차 놈의 척력을 뚫어내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이제 세공이 가능하니까."

드워프 세공사.

그리고 풍족한 양의 D급 강화석까지.

내게 모든 준비물이 갖춰진 터였으니.

"문제는 어떤 물건을 강화할까인데······."

아쉽게도 +3에 해당하는 에메스의 성창은 강화가 불가했다.

저주받은 카멜롯을 통해 강화석을 수급한 탓에, '신성' 속성을 지닌 강화석이 전무한 상황이었으니.

고민은 길지 않았다.

지금까지 모은 강화석의 수를 종류별로 가늠하고 나니, 절로 결론이 내려졌다.

"내성 열 두 개에······ 감전이 서른하나······."

가장 많이 모인 강화석의 종류였다.

유독 많이 모인 내성과 감전.

그중에서도 특히 감전 강화석의 수가 압도적이었다.

적도 이미 설정되어 있었다.

미친 듯한 속도를 자랑하는 황금 고블린.

놈을 꿰뚫을 만큼 빠르고 강한 무기가 필요한 시점이었으니.

결국······.

"총이랑 탄을 강화해야겠네."

나는 그렇게 가닥을 잡았다.

남은 일은 일사천리였다.

브로크가 명절날 밤 깎듯 내가 건네준 강화석들을 모조리 원석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러곤 나로부터 클레멘타인을 떼어내어 허전한 망치 앞부분에 단단히 결속했다.

지지직······.

완성된 망치가 여전히 내게 자석처럼 이끌려왔지만, 세공사 드워프의 완력을 이길 만큼은 아니었다.

그렇게 C급 내성 강화석 하나와 감전 강화석 세 개가 완성되었고,

나는 지체없이 K2C1 소총과 5.56mm 감전 탄환을 각각 최대치로 강화했다

그렇게 완성된 물건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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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2C1 제식소총 +3]

등급: [에픽]

설명: [정보를 불러오는 데 실패했습니다. 직접 설명을 입력할 수 있습니다.]

속성: [없음]

옵션: [내성+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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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6mm NATO 탄 +4]

등급: [에픽]

설명: [정보를 불러오는 데 실패했습니다. 직접 설명을 입력할 수 있습니다.]

속성: [전기]

옵션: [관통+4], [감전+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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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숨에 에픽 등급으로 뛰어 버린 두 아이템이었다.

황금 고블린의 척력을 뚫어내기 위함이다.

소총의 내성 등급이 3에 불과함에도 탄환의 등급을 4까지 끌어올렸다.

그래도 쓸 수 없는 물건은 아니었다.

실험실을 통해 확인해 본 결과, 내성+3의 소총이 감전 탄환의 위력을 간신히 버텨 주었으니까.

단발, 연발 가릴 것도 없었다.

"딱 한 발이라······."

단 한 발.

그것이 내성+3 등급의 소총으로 쏠 수 있는 최대치였으니.

"근데 황금고블린은 어떻게 찾으려고?"

김솔이 물었지만, 이 또한 문제없었다.

놈에게 줄곧 달라붙어 있던 클레멘타인.

이 금속에 황금 고블린의 진한 누린내가 깃들어 있었으니까.

킁킁.

킁킁.

마농족들이 그 체취를 맡았고,

척!

하나같이 앞발을 들어 방향을 가리키기 시작했다.

***

"자꾸 밑으로만 내려가네······."

김솔이 손부채질하며 따라왔다.

안 그래도 갑갑하기 짝이 없는 동굴 내부다.

하지만 마농족들이 따라가는 냄새는 광산의 끝도 없는 내리막으로 이어져 있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냥 찾으라면 절대 못 찾았겠는데?"

사람 한 명 겨우 지나갈 듯한 크기의 비좁은 틈.

아무리 봐도 길이라 볼 수 없는 그 좁은 틈을 벌써 몇 차례나 통과했다.

그렇게, 계단처럼 이어지는 마지막 구간에 막 접어들었을 때쯤.

우리는 새로운 장소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게 다 뭐야?'

휘이이······.

내려다보이는 것은 거대한 공동이었다.

그저 광산이라고만 여겼던 라이시온이다.

하지만, 공동에 세워진 기둥에는 알 수 없는 외계의 표식들이 가지런히 각인되어 있었다.

이곳이 그저 그런 광산이 아니라는 걸 여실히 드러내듯이.

하지만 그것까진 괜찮았다.

애당초 타 차원으로부터 통폐합되어 들어온 지형.

지하에 또 다른 시설이 있다 한들 크게 이상할 일은 아니었으니까.

정작 문제는 따로 있었다.

'쟤는 왜 저깄어······?'

샛노란 머리와 거대한 체구.

익숙한 외모였다.

포티나인 빌리지의 보안관, 고든.

놈이 휘하의 부하들과 함께 두런두런 공동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후우욱!

즉시 유령기사들을 내려보냈다.

모드레드를 비롯한 유령기사들은 은신과 유체화를 활용했고, 빠르게 거대한 지하공간의 벽면을 타고 내려갔다.

그러곤, 내게 시선을 공유해 주기 시작했다.

보안관 고든과 그를 따르는 몇 명의 부관들.

목적지에 다다랐는지, 그들이 자리에 우뚝 멈추어 섰다.

그 맞은 편에는······.

'······?'

고블린들이 있었다.

다른 고블린들과는 달랐다.

놈들의 몸에도 곳곳에 강화석이 박혀 있었으니.

그렇게, 나는 이들의 은밀한 거래를 목격할 수 있었다.

킥킥.

고블린들이 웃으며 고든을 향해 손바닥을 펼쳤고,

탈탈.

고든은 주머니를 꺼내, 그들 손에 강화석을 털어놓았다.

주머니를 높게 치켜든 고든.

그런 그의 팔뚝에서도 언뜻언뜻 강화석이 박혀있었다.

'······그랬구나.'

모든 것을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몇 가지는 분명했다.

고든이 고블린들에게 강화석을 상납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고블린들처럼 몸에 강화석을 박아 넣고 있다는 것.

결론은 간단했다.

고든이 인류를 배반했다는 것.

드워프를 죽이려 했던 이유도 분명했다.

고블린들에게 상납해야 할 강화석을 브로크가 모조리 원석으로 만들어 버리고 있었으니까.

한편,

'······차라리 잘 됐어.'

이곳 라이시온 광산에서의 강화석 사업을 총괄하던 고든이었다.

하지만 놈의 속내를 알게 된 이상, 나로서도 더 이상 손속을 봐줄 필요가 없어졌다.

'그렇다면.'

그래서였다.

이곳 라이시온 광산을 통째로 삼켜 버릴 생각을 한 것은.

'아공간에 넣지는 못하겠지만······.'

어디 아공간에 넣어야만 내 것이겠는가?

'소유' 개념을 결정하는 핵심은 다른 곳에 있었다.

'싹 다 쓸어 버리고 포탈 깔아두면 그게 내 거지.'

그 소유를 결정할 힘의 논리에.

별이 빛나는 땅 (6)

068화 별이 빛나는 땅 (6)

저벅저벅.

유령기사들의 추적은 계속됐다.

상납을 마친 고든은 부하들을 남겨둔 채, 홀로 공동의 구석으로 들어갔다.

부스럭.

탈탈 털고 남은 주머니를 꺼내 드는 고든.

"······후우. 오늘은 세 개인가."

그 안에는 아직 세 개의 강화석이 남아 있었다.

화아아악!

짧은 통로를 지나자,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작은 방.

안에는 갖은 보석과 금은, 세공된 장식품들이 산처럼 쌓여 있었고, 그 사이사이로 적지 않은 수의 강화석 빼곡하게 들이 차 있었다.

그 앞에서 고든을 반긴 것은······.

"케케케······."

온몸에 강화석을 이식한 황금 고블린이었다.

멈춰 있는 놈을 보니 알 수 있었다.

그 하나하나가 '내성' 속성을 지닌 강화석이라는 걸.

놈의 어처구니없는 맷집의 비결이 바로 거기에 있었다.

스윽.

고든이 팔을 걷었다.

아직은 듬성듬성하게 박혀 있는 강화석.

그 사이, 민둥민둥한 살갗을 향해 황금고블린이 성큼 다가왔다.

그러곤 강화석을 박아넣을 자리에 기다란 손톱을 찔러넣기 시작했다.

지이익.

물줄기처럼 흘러나오는 핏물.

고든이 질끈 눈을 감았다.

'으으······.'

눈 뜨고도 못 볼 광경이었다.

힘을 향한 무한한 추구.

거기에 더해, 고든이 한 가지 가치를 덧붙였으니.

"······이로써 한결 순수해지겠군."

고든의 시선은 이중적이었다.

우둘투둘한 황금 고블린의 피부를 혐오스러워하면서도, 정작 그 몸 곳곳에 박혀 있는 강화석에서는 좀처럼 눈을 떼지 못했으니까.

반면, 나는······.

"······이제 그만 보자."

즉시 눈을 떼곤 모드레드를 비롯한 유령 기사들을 거둬들였다.

사방이 둘러싸인 '보물의 방'.

저격이 불가했던 탓에, 결국 입구를 지키는 고블린들과 고든의 수하들을 상대하는 수밖에 없었다.

"컥!"

"······큭!"

몸에 강화석이 듬성듬성 이식된 고든의 수하들.

돌아오던 유령기사들이 그들의 숨통을 단박에 끊어냈다.

그와 동시에,

쐐애애액!

"케에엑!"

"켁!"

고블린들의 심장에 성창을 꽂아 넣었다.

이식한 강화석의 양이 충분하지 않은 것인지, 고든의 수하들은 기사들에게, 그리고 강화된 고블린들은 내가 던진 성창에 얕은 비명과 함께 쓰러졌다.

뻥하니 뚫려 버린 입구.

최대한 조용히 처리했다고 생각했건만, 황금 고블린의 예민한 감각을 속일 수는 없었다.

"케에에에에에에엑!"

어딘가 뒷문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놈이 괴성을 지르며 쏜살같이 방을 빠져나왔고, 고든 또한 철철 피가 흐르는 팔뚝을 부여잡은 채 뛰쳐나왔다.

어리둥절한 표정의 고든.

하지만 그는 바닥을 나뒹구는 수하들을 보며 빠르게 상황을 가늠했다.

그러곤 뚜벅뚜벅 걸어오는 나를 향해 고성을 질렀다.

"이 새끼가······! 여기가 어딘 줄 알고!"

"힘든 일은 죄 남들한테 떠안겨 놓고······ 한가하게 성형시술이나 받고 있고 말이야. 어?"

아주 못돼먹은 놈이었다.

드워프를 찾아내라는 무리한 요구.

억지로 동원된 사람들은 지금쯤 한창 목숨을 걸고 광산 내부를 수색하고 있을 터였다.

단칼에 목을 베어도 시원찮은 놈이었지만, 곧장 죽이지는 않았다.

갖은 문양들로 장식된 정체불명의 공간.

놈은 이 공간의 정체에 대해 설명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으니까.

하지만······.

콰과과과과!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놈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손을 휘두르며 땅굴을 파고 들어간 것은.

서둘러 땅굴 아래를 내려다보았을 땐, 그새 방향을 튼 것인지 그 모습이 보이질 않았다.

"내가 너희 같은 하등 종족들에게 당할 것 같으냐! 이 내가!"

구덩이를 통해 웅웅 울려 퍼지는 목소리.

파바박!

재빠른 두더지와도 같았다.

고위 종족을 운운하는 것치고는, 얼굴에 묻은 흙먼지가 꽤나 잘 어울렸다.

도망자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뛰쳐나온 황금고블린.

김솔과 해골 기사들이 놈을 잡는 데 난항을 겪고 있었으니.

타앗!

육상선수처럼 해골 기사들의 공격을 유유히 피해 나가는 황금 고블린.

"이 쥐새끼 같은 놈이!"

퍼억!

기다렸다는 듯, 김솔이 고블린의 복부에 주먹을 꽂아 넣었지만······.

"아! 왜 이렇게 딱딱해!"

역시나 그 맷집을 뚫어 내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두더지 고든이 우리를 조롱했다.

"감히 이곳에 들어온 죗값을 치르게 될 거다. 라이시온의 주인이 너희를 용서하지 않을 테니까."

라이시온의 주인이라는 아리송한 말.

하지만 우리는 곧장 그것이 무얼 의미하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지이이잉······.

고블린의 이마 한구석이 은은한 빛을 발하기 시작했고,

쿠웅!

쿠우웅!

끼기기기기긱······.

공동 곳곳의 각인된 바위들이 하나둘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뭐야 저건!?"

김솔이 다급히 외쳤지만, 모를 수가 없었다.

그것이 동굴 유적의 단골손님인······ 골렘이라는 것을.

주인의 명을 받은 골렘들이 하나둘 우리를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콰아아앙!

육중한 골렘의 주먹을 가까스로 피해냈다.

어느덧 움푹 파여 있는 바닥.

느리긴 하지만 위협적이기 짝이 없는 공격이었다.

그 사이로······.

휙! 휙!

황금고블린이 골렘들을 뜀틀 삼아 공동을 누비며, 해골 기사들을 유린하고 있었다.

저 너머에 황금고블린이 모은 보물의 방이 있었다.

녀석은 줄행랑을 치기보다는 주변을 뺑뺑 돌며 시간을 끌기를 택했다.

골렘들이 우리를 모두 처리해 주기까지.

"이 새끼가······."

브로크가 강화해 준 탄환이 있었다.

하지만 단 한 발로는 재빨리 움직이는 놈을 맞출 자신이 없었다.

엉거주춤한 나와 김솔, 그리고 해골기사들 사이로,

"하등 종족들이 그러면 그렇지!"

"케케케케케케!"

몸에 강화석을 받아 넣은 두 존재가 조롱 섞인 웃음을 터뜨렸다.

땅꿀을 파고, 뜀틀을 뛰며 올림픽에 온 것 마냥 탁월한 신체 능력을 자랑하는 그들.

내 신체 능력은 날렵한 그들에 비해 미약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흐흐······ 벌써 다 죽어 버린 게냐? 왜들 말이 없어?"

"케케케케······."

내게는 수많은 도구, 그리고 나를 도와줄 인력들이 있었다.

우월한 신체를 자랑하며, 인종을 운운하는 놈들과 달리.

누구보다도 문명인답게.

"케······?"

당황스러운 표정과 함께 우뚝 멈춰 선 황금 고블린.

그 앞에는 공동 한가운데에는 덩그러니 놓인 아공간 포탈이 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케······?!"

고블린의 누런 이마에 수십 개의 붉은색 점이 표시되기 시작했다.

.

.

.

[[K2C1 제식소총 +2, 가격이 설정되지 않았습니다.]

[5.56mm NATO 탄 +1, 가격이 설정되지 않았습니다.]

[아카데미 과학 레이저 사이트, 가격은 13,600원입니다.]

별것 아닌 잔재주였다.

어둑어둑한 지하 공동에서의 사격을 도와주기 위한 소소한 부속품.

타앙!

타앙!

그렇게 여러 재료가 모여 하나가 된 '저격총'이 연신 불을 뿜어댔다.

타앙!

약한 소총의 몸체 때문에, 단 한 발밖에 쏠 수 없는 K2C1 소총.

하지만 부족한 양은 또 다른 양으로 보충할 수 있었다.

"진즉 말씀하시지 그랬습니까. 정겸님."

스윽.

치렁치렁한 금발 머리를 뒤로 넘기는 에단.

공동 곳곳에는 수십 명의 엘프가 저마다 황금고블린을 겨냥하고 있었다.

각 한 발씩이다.

하지만······.

'수십 명이 발사하면 그게 연발이지.'

얼마 설명하지도 않았다.

육군 예비역 병장, 김정겸의 몇 분짜리 사격 강의를 수료한 그들은 자신들의 주 무기인 활만큼이나 능숙하게 소총을 다루기 시작했다.

타아앙!

타앙!

곳곳에서 날아드는 탄환.

한껏 여유로웠던 황금고블린은 이제 창백한 표정을 한 채, 필사적으로 골렘들 뒤로 몸을 숨기고 있었다.

하지만······.

타아앙!

콰득!

두부처럼 분쇄되는 골렘들의 몸.

골렘들이 전혀 방패가 되지 못한다는 걸 깨달은 황금고블린은 다시 속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재빠른 두 다리.

그것이 지금껏 놈의 생명을 부지해 준 둘도 없는 도구였을 테니.

하지만 놈은 알지 못했다.

속도를 붙이면 붙일수록 우리가 친 그물에 더 복잡하게 얽혀들 뿐이라는 걸.

"이런 사냥쯤은 익숙하죠. 숙련된 도망자일수록 지형지물을 노련하게 활용하기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 같은 전문 추적자들은······."

에단이 덧붙였다.

"현장에서 그런 지형지물을 직접 만들어 내곤 하죠."

과연 그랬다.

황금고블린을 아슬아슬하게 빗나가는 수십 발의 탄환들.

그건 아무렇지 않게 버려지는 공격이 아니었으니까.

"이야······."

실로 감탄스러웠다.

에단이 손가락을 들어 가리킨 방향.

정확히 그 방향으로 황금고블린이 내달리고 있었으니까.

애당초 수십 명의 엘프들에 의해 공격이 시작되었을 즈음, 에단이 지목한 목표 지점이었다.

그리고 그 목표 지점의 정면에는······.

철컥.

또 한 명의 명사수, 베디비어가 총구를 겨누고 있었다.

그리고······.

타아앙!

그렇게 막을 내렸다.

황금 고블린과 이어지던 치열한 수 싸움.

휘둥그레 뜬 두 눈과 함께 미간이 뚫리는 황금 고블린.

"케에······."

놈은 끝끝내 이해하지 못했다.

사방에서 날아든 총알 하나하나가 놈을 옭아맨 거미줄이었다는 걸.

터어엉!

터엉!

그와 동시였다.

사방에서 움직이던 골렘들이 일제히 쓰러진 것은.

고든이 그렇게 추켜세우던 '라이시온의 주인'.

그것은 역시나 이 황금 고블린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니까.

그리고,

"못 다가가게 해!"

타아아앙!

죽은 황금 고블린의 사체 주변으로 또 한 번의 총성이 울려 퍼졌다.

사사삭!

바퀴벌레처럼 다시 땅을 파고 들어간 고든.

놈이 황금고블린의 사체를 탐내고 있었으니.

"······어디 보자."

엘프들이 고든을 향해 견제 사격을 해 주는 동안, 나는 황금 고블린의 사체를 조사했다.

그러던 중, 놈의 미간에서 툭 하니 떨어져나온 울퉁불퉁한 보석 하나를 챙길 수 있었다.

띠링!

이윽고 떠오른 메시지.

[라이시온 광산의 점령석을 획득했습니다.]

[소유권을 등록하시겠습니까?]

팍스가 아닌, 각성 시스템이 보내온 메시지였다.

이곳 라이시온의 주인이었던 황금고블린.

분명 대단한 보상을 줄 것이라 예상하기는 했지만 광산을 통째로 줄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뿐만이 아니었다.

사사사삭!

내가 라이시온의 점령석을 확보한 걸 확인한 고든.

놈이 땅굴을 판 채, 빠르게 출구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마침내 출구에 다다른 녀석.

하지만,

꽈아아아아아앙!

거대한 돌덩이가 놈을 그대로 짓뭉개 버렸다.

"와우······."

형체도 알아볼 수 없었다.

끼기기기기기······.

뻑뻑하게 들어 올린 골렘의 손에서 후두둑 강화석이 떨어질 뿐.

고든의 몸에 박혀 있던 정순하게 그지없는 강화석들이었다.

두더지 잡기를 성공적으로 클리어한 골렘은 이내 푸른 눈을 빛내더니, 나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오기 시작했다.

쿠웅!

거대한 무릎을 꿇는 골렘.

라이시온의 소유권을 얻은 만큼, 이를 지키는 골렘들 또한 내 휘하에 들어오게 되었다.

"······이것까지 준다고?"

차마 아공간에는 넣을 수 없는 라이시온 광산이었다.

골렘들이 대신 광산을 지켜준다면, 별다른 방위 전력을 배치하지 않더라도 편안하게 광산의 수확을 누릴 수 있을 터였다.

"몸이 좀 굼뜬 게 아쉽기는 한데······ 그래도 이게 어디야."

그때였다.

"그······ 그거!"

지금까지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세공사 브로크.

그가 내 손에 들린 울퉁불퉁한 점령석을 보며 눈을 빛내고 있었다.

"세공해야 돼!"

흥흥, 거칠게 새어 나온 콧바람에 곱게 땋은 수염이 양 갈래로 흩어졌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두 볼.

안절부절못하는 발걸음까지.

이미 한 차례 본 적이 있었다.

세공해야 할 강화석을 잔뜩 쥐여 주었을 때도, 브로크는 저런 표정을 짓고 있었으니까.

그 덕분이었다.

별다른 걱정 없이 그에게 점령석을 빌려줄 수 있었던 것은.

더욱이, 고블린의 피부처럼 울퉁불퉁하게 솟아있는 점령석의 상태는 암만 봐도 온전하다고 보기 어려웠으니까.

좌르륵!

브로크는 즉시 자리에 세공 도구를 늘어놓았고,

카가가가각······.

내가 물류센터에서 꺼내준 조명을 켜둔 채, 점령석을 곱게 다듬기 시작했다.

"이야······."

그렇게 완성된 라이시온 광산의 점령석.

은은한 푸른빛의 보석은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그리고,

그 변화는 비단 아름다움에만 머물러 있지 않았다.

슈우웅!

쿠웅!

라이시온 광산의 골렘들.

줄곧 뻑뻑한 마찰음을 내던 녀석들의 관절이 기름이라도 칠한 듯 부드럽게 움직이기 시작했으니까.

슈슈슈슉!

슈슈슈슈슈슉!

기지개라도 피는 것일까?

무슨 놀이기구라도 되는 듯, 골렘들은 팔과 허리를 360도로 무한 회전시키기 시작했다.

저 거대한 돌덩이에 조금이라도 스칠 것을 떠올리니 정신이 아득해질 지경.

한창 골렘들의 서커스를 보던 나는 세공사 브로크에 물었다.

"······이걸 위해서 세공을 해 준 겁니까?"

그리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점령석의 세공이 마무리되자마자, 자양강장제라도 먹은 듯 골렘들이 날뛰기 시작했으니까.

하지만 브로크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전혀 생각 못 했소. 그야, 가디언을 처음 보는 건 아니지만······."

가디언.

그것이 골렘들의 이름이었다.

광산을 지키는 존재들이니 '수호자'라는 이름이 퍽 잘 어울렸지만, 핵심은 가디언이 아닌 '점령석'에 있었다.

"사실 나도 이런 보석은 처음 봅니다. 직접 만져보니 알 수 있었소. 자연적으로 형성된 물질이 아니라······ 철저히 의도되고 설계된 물건이라는 걸. 나는 그 회로에 낀 불순물을 걷어냈을 뿐이지."

"그렇다면······."

나는 생각을 거슬러 올라갔다.

애당초 이곳 라이시온 광산을 지구로 불러들인 것은 상공회의소였다.

이 점령석이 누군가의 의도에 의해 탄생한 물건이라면······.

'그 누군가는 상공회의소일 가능성이 크겠지.'

소유권을 빼앗을 수 있는 점령석.

그리고 그 안에 담긴 유용한 자원과 영토까지.

만일 이 모든 것이 상공회의소가 벌이는 침략 게임의 일환이라면, 나 또한 그 전모를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미국에서 발생한 통폐합.

그리고 정체 모를 점령석까지.

다행히, 물어볼 만한 상대가 하나 있었다.

척! 척!

차곡차곡 사용하고 난 소총을 수거해서 돌아오는 엘프들.

나는 에단을 붙잡고 말했다.

"같이 가죠. 엘리를 만나봐야겠습니다."

곧장, 엘븐하임에 들러볼 작정이었다.

이동통신 (1)

069화 이동통신 (1)

"그 전에 일단은······."

엘븐하임으로 향하기 전, 나는 황금고블린이 숨어 있던 비밀 공간으로 들어갔다.

강화석과 마석, 그리고 금화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던 곳.

"······뭘 굳이 이렇게 다 꺼내놨담."

강화석이나 금화는 몰라도, 마석은 차원 계좌에 수용이 가능한 물건이었다.

구태여 보물과 함께 쌓여 있는 마석.

황금고블린의 과시욕을 여실히 느낄 수 있는 대목이었다.

슈우우우우욱!

로 열린 포탈이 강력한 바람을 일으켰다.

차르르르르륵!

곳곳에 쌓여 있던 금화와 금붙이들이 와르르 쏟아졌고, 사이사이 숨어 있던 마석과 강화석이 빠른 속도로 아공간 내부에 저장됐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산더미처럼 쌓인 값비싼 금이, 지금 내게는 불순물과 다름없었으니.

그래도······.

"참 쏠쏠하네."

잔고가 10만 개 이상으로 훌쩍 불어나 있었다.

얼마 전만 해도 까마득하게 여겨지던 액수.

그것이 단 몇 초 만에 내 계좌로 흘러들었다.

물론, 많으면 많을수록 되레 부족하게 느껴지는 것이 이 '돈'의 속성이기도 했다.

"그만큼 씀씀이가 커지니까······."

아공간 레벨 7 달성을 위해 요구된 금액은 자그마치 마석 25만 개.

당장 레벨을 올리기엔 무리였지만, 그럼에도 의미 없는 돈은 아니었다.

"어디 보자, 이번에 개방된 능력이······"

레벨 6에서 개방한 능력은  단 하나.

이후 남은 돈이 전혀 없었던 고로, 나머지 두 개의 능력을 자세히 살피지 못한 상황이었다.

띠링!

팍스가 개방할 수 있는 항목을 띄워 주었다.

----[개방 가능 항목]----

[비용 10,000]

◈ 포탈 운송

-아공간을 거치지 않은 포탈 간 운송이 가능합니다.

◈ 상품 주문

-주문을 받아 아공간에 등록된 사물을 자동 출하할 수 있습니다.

(주문 자격, 물품 종류, 비용 및 조건을 자유롭게 설정할 수 있으며, 주문자로부터 리뷰 메시지를 수신할 수 있습니다.)

※ 단, 출하 사정거리까지만 자동 출하가 가능합니다.

-------------------------

"······확실히 좋네."

상당히 쓸만한 능력이었다.

아공간을 거치지 않아도 된다는 조건.

당장 아공간에 수용할 수 없는 물건일지라도, 다른 안전한 장소로 옮겨 두는 것이 가능하다는 뜻이었으니까.

상품 주문 능력도 나쁘지 않았다.

전국 각지에 깔린 팍스 FC의 쉘터들.

지금까지는 사람들에게 내가 일방적으로 물자를 지원해주는 형태였지만, 주문이나 요청사항을 접수할 수 있다면 더 쉽게 편의를 봐줄 수 있을 테니까.

자연스레 팍스FC의 소속원들이 늘어나는 결과로 이어질 터였다.

"둘 다 개방해 줘."

[알겠습니다.]

[마석 20,000개 받았습니다.]

[남은 마석은 95,443개입니다.]

이로써 마무리였다.

라이시온 광산, 그리고 새로운 능력을 손에 넣은 나는 아공간 포탈로 향했다.

엘븐하임의 엘리.

그녀에게 점령석의 정체를 묻기 위해.

***

나를 라이시온 광산으로 안내해 주었던 박동관과 한인들.

당장은 그들을 한국이 아닌 엘븐하임에 보내 둔 터였다.

팍스맨들과의 왕래가 이어진 덕에, 지금 엘븐하임은 지구 어디서도 볼 수 없을 따듯한 마을 공동체가 되어 있었으니까.

그리고······.

"어흐흐흐흑!"

박동관과 한인 일행들은 그 '정'을 여지없이 느끼고 있었다.

우적우적.

박동관의 두 볼이 터질 듯 차올랐다.

벅벅.

그가 긁고 있는 것은 거대한 양푼 그릇.

안에는 고사리, 취나물, 곤드레, 가지 등등이 알차게 든, 이제는 엘프들의 주식이 되어버린 담백한 산채 비빔밥이 담겨 있었다.

우물우물.

문어 다리처럼 입을 삐져나온 고사리.

그리고 뭉근하게 끓인 미역 된장국까지.

"어허어엉!"

멸망 이후, 처음으로 보는 제대로 된 '한식'에, 한인들은 눈물을 거두지 못했다.

"어이구, 괜찮아. 괜찮아."

"어흐흐흑! 할머니! 흐으윽!"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그를 위로하는 것은 그의 할머니보다도 나이가 곱절은 많을 엘프 장로들이었으니.

휘이이······.

시골 풍경으로 물든 엘븐하임.

갈대처럼 높게 자라난 세계수 사이로, 한인들은 고향을 느끼고 있었다.

수년, 아니 수십 년 전에 떠나온 고향을.

한편, 그곳에는 엘프들의 수장인 엘리도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엘리?"

함께 포탈을 넘어온 브로크가 알아보았다.

그를 마주 본 엘리 또한 쓴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역시······ 무식하게 계속 라이시온에 있을 줄 알았지."

.

.

.

내 예상대로, 엘리는 '점령석'의 용도를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상공회의소가 사용하는 방법 중 하나예요. 약간의 보상을 내세우면서 이곳 지구의 각성자들을 또 다른 '침략자'로 훈련시키려는 거죠."

지구를 침공해 들어오는 타 차원의 세력들.

그들 모두가 한차례 멸망의 위기를 겪은 존재들이었다.

하지만 개중 누군가는 바득바득 멸망을 헤쳐 나갔고, 상공회의소의 선택을 받아 새로운 역할을 부여받았다.

바로 자신에게 들이닥쳤던 멸망을 뒤집어, 자기 자신이 멸망이 되는 것으로.

"탐스러운 열매를 놓아 두곤, 싸움의 승자가 보상을 독차지하게 하는 거죠. 싸우고, 빼앗고, 차지하기를 반복하면서······ 더 강해질 수 있다는 원초적인 감각을 제공하는 거예요."

탐스러운 보상과 독점.

그것이 상공회의소가 미국 땅에 꽂아놓은 라이시온 광산의 정체였다.

"······그런 거였군."

대화의 상대는 엘리뿐만이 아니었다.

시뻘건 눈을 한 채 고개를 끄덕이는 박동관.

다름 아닌 미국에서 벌어진 일이니만큼, 그가 공유해줄 정보 또한 적지 않았으니까.

"라이시온에는 캘리포니아 말고도 콜로라도, 유타, 멀게는 중부의 댈러스에서 온 사람도 있었어. 다들 강화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에 개떼처럼 몰려들었던 거지."

"모두 상공회의소의 메시지를 받았던 거고요?"

"그랬지, 하지만 아주 자세히 알려준 것도 아니었어. 모르긴 몰라도······ 광산을 차지하는 과정에서 박 터지게 싸워 보라 유도했던 거겠지."

더욱이, 그뿐만이 아니었다.

드넓기 짝이 없는 미국 땅.

상공회의소가 박아 넣은 '점령지'는 라이시온뿐만이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그 문제는 이제 완연한 전쟁의 형태로 불거져 있었다.

"지금 동부에서는 아예 전쟁을 벌이고 있어. 각성자들로 이뤄진 극단주의자들이 남부를 휘어잡았다는데······ 전세가 우세한 쪽도 그쪽이라고 하더라고."

무너진 미연방.

주 단위의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고 했었는데, 어느덧 세력을 규합한 북부와 남부 세력이 과거의 남북전쟁을 재연하고 있었다.

그림 또한 비슷했다.

각성 능력을 숭상한다는 남부의 극단주의자들.

그들이 비각성자들을 죽이고, 또 노예로 부리며 가파른 속도로 세를 불리고 있었으니까.

이야기를 들은 엘리가 심각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상공회의소에 의해 길들여진 최종 승리자가 나오면 상당히 위험해져요. 그때부턴 상공회의소가 그 세력에 온갖 지원을 몰아주거든요. 아마 미국의 상황이 정리되고 나면······."

"······밖으로도 비집고 나오겠네요."

이제는 비단 타 차원의 세력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상공회의소에 의해, 지구 자체에서 새로운 침략자들이 양성되고 있었으니.

새로운 적이 등장했지만, 그 존재는 암세포처럼 자라난 내부의 적이었다.

우리 자신처럼 무한한 성장 가능성을 지닌.

언젠가는 그 마수가 이곳 동아시아까지 미칠 게 분명했다.

게다가······.

"상공회의소의 지원은 이미 시작된 거나 다름없어요."

엘리가 덧붙였다.

미국 곳곳에 뿌려진 점령지들.

강화석과 가디언과 같은 막강한 자원이 숨겨진 곳이었다.

상공회의소가 양성한 남부의 침략자들이 이 금싸라기 땅들을 차지한다면, 그 전력이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할 게 분명했다.

입술이 바싹 마르는 기분.

하지만 다행히, 아직 시간이 있었다.

"바로 당장은 점령지를 확보하지 못할 거예요. 통폐합으로 넘어온 지역들 대부분이 지구인들보다 월등하게 강하거든요."

당장 엘븐하임부터가 그랬다.

피골이 상접한 외모 뒤로, 고위계의 숙련된 궁수 부대로 무장한 그들이었으니까.

라이시온 광산만 하더라도 평범한 각성자들이 황금 고블린과 가디언들을 무찌를 수 있을 거라 생각되지는 않았다.

황금 고블린과 협력하던 고든이 있었기에 그나마 라이시온에 둥지를 틀 수 있었을 터.

엘리가 말을 이어 나갔다.

"그러니 당장 본격적인 점령전이 시작되지는 않을 거예요. 하지만 북부와 남부가 서로 전쟁을 통해 충분히 성장하고 난 뒤에는······."

"대규모의 전쟁이 벌어지겠군요."

"맞아요. 지구인들로서는 마음 아픈 일이 되겠죠."

그야말로 내전이었다.

자그마치 미국의 '북부'와 '남부'가 벌이는 싸움.

그 병력 단위가 적게는 수십만에서 많게는 수백만에 달할 것이었다.

'내버려 둘 수도 없고······.'

이제 미국에는 내 영토로 선포된 '라이시온 광산'이 있었다.

더욱이, 한국을 위해서도 미국 남부의 침략자들이 성장하는 일은 막아야 했다.

놈들의 탐욕이 비단 아메리카 대륙에만 머무르리라는 보장은 없으니까.

이러나저러나 미국의 내전에 끼어들어야 한다는 것만은 틀림이 없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우리도 그만한 세력을 갖춰야겠네요."

엘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어렵네.'

동아시아의 수장들을 규합했지만, 정작 제대로 가용할 수 있는 전력은 수백에서 많아야 수천에 불과했다.

팍스FC도 마찬가지다.

최근 10만을 돌파하는 기염을 토했다지만 허수에 불과했다.

대다수가 생존에 급급한, 제대로 된 전투원으로 보기는 어려운 사람들이었으니까.

결론은 간단했다.

'······제대로 관리되는, 편제된 병력이 필요해.'

그리고······.

이런 이야기를 나눌만한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합참 본부의 작전본부장 유성철.

엘븐하임에서의 대화를 마친 나는 그를 만나기 위해 아공간 포탈에 몸을 실었다.

***

"그랬군요. 미국에 그런 일이······."

유성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는 미국으로의 파병이 필요하다는 점에는 동의하면서도, 정작 한국에서 대규모의 병력을 편제하는 일에는 고개를 저었다.

"어려울 겁니다. 각성자들이 나서지 않을 거예요."

한국도 아닌 미국이다.

당장 생존이 급급한 각성자들이 목숨까지 걸며 나서긴 쉽지 않았다.

아무리 무기나 풍족한 식량이 대가로 주어진다고 한들 그랬다.

물론, 각 지역대표처럼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아끼지 않는 영웅들도 존재했다.

하지만 그들마저······.

"자신들의 지역을 우선하는 경향이 강해요. 한국에서의 상황이 많이 안정화되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별다른 조짐도 없이 괴물들이 튀어나오고 있거든요."

"그 말인즉슨······."

"생명은 평등하다지만······ 누구나 자기 가족, 친구, 동료가 우선인 법이죠. 대부분의 각성자들은 섣불리 밖으로 나가지 않습니다. 움직이더라도 가족들과 함께 움직이고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사정이었다.

나 또한 멸망이 벌어진 직후, 무엇보다 가족들을 찾는 일을 우선하지 않았던가.

"그것참······."

쉽지 않은 일이었다.

답답함과 함께 곰곰이 생각에 잠겼을 즈음······.

번뜩 떠오른 기억에, 갑자기 눈이 뜨였다.

나는 곧장 유성철에게 말했다.

"그거······ 완전히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예?"

그 열쇠는 새로 얻은 두 개의 개방 능력이었다.

한국을 이동통신의 혁명 아래 놓을 수 있는 획기적인 활용 방법이 떠오른 참이었다.

첫 번째는 '포탈 운송'이었다.

아공간을 들르지 않아도 된다.

설치된 포탈을 교통수단처럼 활용한다면, 혹여나 가족들에게 변고가 생기더라도 즉시 집으로 되돌아갈 수 있을 테니까.

더욱이, 꼭 그들 자신이 아니더라도 팍스 FC의 세력 모두가 괴물이 나타난 장소로 신속하게 집결할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유성철이 한 가지 문제를 지적했다.

"대처가 빨라지기는 하겠습니다만······ 사실 변고가 생겼는지조차 알 수 없다는 게 더 큰 문제입니다. 전국적으로 모든 통신이 마비된 상태니까요. 한국 사람 모두에게 무전기를 쓰도록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고······."

"그것도 문제없습니다. 직접 구조 요청을 할 수 있게 하면 되니까요."

둘째는 '상품 주문'이었다.

출하 스킬과 달리, 자체에는 따로 제한된 사정거리가 없었다.

포탈과 멀리 떨어진 장소에서도 내게 상품 주문을 의뢰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소리.

그 말인즉슨······.

"꼭 물건만 팔라는 법은 없으니까요. 서비스를 파는 겁니다. 이를테면······ 괴물이 나타났을 때 필요한 '112 서비스'나, 사람이 다쳤을 때 '119 서비스' 같은 걸 말이죠. 게다가······."

세 번째가 있었다.

능력의 부가 기능인 '리뷰 작성'.

여기에 반드시 '리뷰'만 적으리라는 법은 없었으니까.

"상공회의소의 메시지 시스템과 연동해서, 아예 사람들끼리 문자를 주고받을 수 있게 만들 거예요. 손을 좀 본다면······ 한국에서 통신은 완전히 복구하는 것도 가능하겠죠."

물류센터를 넘어, 이동통신사를 넘보는 팍스FC.

그 탐욕스러운 문어발에, 유성철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그게 어떻게 가능한 겁니까? 대체 사람들이 어떻게 메시지를 보낸다는 거예요?"

"그냥은 불가능하죠. 하지만······."

애당초 팍스가 설명해 주었던 터였다.

능력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그 정보를 전송해줄 별개의 매체가 필요하다고.

그리고, 그 매체는 내가 직접 선택할 수 있다고.

그렇게, 나는 결정했다.

"······사람들에게 스마트폰을 뿌릴 겁니다. 그것도 아주 많이."

대한민국에 공짜폰을 팔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