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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중력과 은총 (2)

"후퇴! 후퇴!"

우리를 조롱하던 성기사들의 비장한 목소리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관통] 옵션이 포함된 총알이 놈들의 은빛 갑옷을 종잇장처럼 뚫고 들어갔고, 놈들은 낯선 신문물에 화들짝 놀라 엉덩방아를 찧으며, 후다닥 후퇴를 시작했다.

물론, 우리의 총알은 놈들의 줄행랑보다 빨랐다.

덕분에 앞에서 깐죽거리던 성기사들의 절반가량을 총으로 사살했고, 추가로 쏘아낸 헬파이어 미사일에 의해 휘말려 나머지 대부분 또한 운명을 달리했다.

다만 중간에 치유 능력을 발휘한 사제가 섞여 있었던 탓에, 몇몇이 어떻게든 빠져나가는 걸 막을 수는 없었다.

"···그래봤자 여의도 안짝이겠지."

놈들은 이곳 여의도를 벗어날 수 없었다.

지켜야 할 '게이트 핵'이 국회의사당에 버젓이 놓여 있을 테니.

덜컹!

덜컹!

블랙호크 여섯 대를 노량진 수산시장 앞에 나란히 출하했다.

척척!

규칙적인 군홧발 소리.

특수부대원들이 일사불란하게 각자의 위치로 움직였다.

그들은 하나같이 사격 만발의 특등사수들이었지만···

그것만 있는 건 아니었다.

"각자 위치로!"

이들 중 상당수는 헬기를 운용할 수 있는 전문 인력들이었으니.

헬기마다 두 명의 조종사가 조종 칸에 올랐고, 여섯 명의 병사들이 마저 수송 칸에 올랐다.

내가 탄 헬기만큼은 이번에도 이용수가 운전을 맡았다.

단, 장착된 미사일을 발사해줄 기술자가 필요했기에, 합참 측 화기 관제사 한 명이 부조종석에 몸을 실었다.

나와 김솔, 그리고 베디비어는 각각 강화된 소총을 들고 수송 칸에 올랐다.

한편, 란슬롯과 큰누나, 그리고 나머지 병사들은 지상에 있을 적들을 견제해주기로 했다.

투두두두두!

여섯 대의 블랙호크가 날아올랐다.

그야말로 웅장한 자태.

헬기를 보며 코웃음 치는 성기사들의 모습이 잠시 눈에 들어왔지만···

꽈아아아앙!

파창!

바로 교육에 들어갔다.

터져나가는 여의도 고층 빌딩의 유리.

그 아래로, 두꺼운 갑옷을 입은 성기사가 화마에 삼켜졌다.

[관통]과 [폭발]이 담긴 헬파이어 미사일.

헬기마다 각각 열여섯 발의 헬파이어가 장전되어 있었으니까.

"히··· 히익!"

성기사들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지옥불.

놈들에게 공포를 심어주기엔 충분했다.

투두두두두두···

이제는 완전히 떠오른 헬기.

놈들의 근거지가 있을 국회의사당으로 서서히 다가서려던 찰나였다.

"저건···?"

낯선 풍경을 발견했다.

분명 국회의사당이 폭삭 무너진 것을 똑똑히 보고 온 터다.

하지만 그 자리 위로 낯선 건물의 골조가 올라가고 있었다.

따앙!

따앙-!

망령을 통해 전해져 들어오는 망치 소리.

헬기의 프로펠러 소리를 뚫고 들어올 만큼, 그 소리는 맑고 청아했다.

그때였다.

꽈아아앙!

타아앙!

소리의 근원지는 나란히 옆을 날던 2번 헬기.

두 번째 블랙호크의 기체가 검은 매연을 풍기며 흔들렸다.

헬기에는 눈부신 광채로 휩싸인 기다란 창이 꽂혀 있었고, 엔진룸 옆으로 새카만 불길이 치솟기 시작했다.

"···이 자식들."

범인은 지상에 있는 성기사들.

놈들이 특유의 완력으로 창을 집어 던지며 헬기를 요격하고 있었다.

성스러운 기운이 감도는 것이, 그야말로 '성창(聖槍)'이었다.

-다운! 다운!

무전을 통해 들려오는 2번 조종사의 다급한 목소리.

나 또한 무전을 통해 신호를 보냈다.

"탈출!"

전투기와 달리, 헬기에는 비상탈출 장치가 없다.

요격을 당하면 그 자체로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다는 소리.

하지만 괜찮았다.

레벨 4 아공간의 최대 수용 인원은 자그마치 100명에 달했고, 작전에 참여한 모든 병사들을 아공간에 등록해둔 터였으니.

덜컹!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헬기에서 뛰어내린 조종사들과 수송칸의 병사들.

그 믿음에 답하듯, 그 모두를 로 빠짐없이 구조했다.

슈우우우욱!

주인을 잃은 헬기는 그대로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꽈릉!

꽈아아아아앙!

장착된 미사일의 연쇄 폭발로 인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쐐애애애액!

타아앙!

적들의 투창은 계속됐고, 헬기들 또한 추락을 거듭했다.

떨어지는 병사들을 모두 아공간에 수용하고 나니, 

"···이제 우리뿐이네."

하늘에 남아 있는 건 내가 타고 있는 1번 헬기, 단 한 대뿐이었다.

우리가 멀쩡할 수 있는 이유는 수송 칸에 탄 김솔 덕분이었다.

차아앙!

차앙!

지난 일주일간 레벨업을 거듭한 결과.

이제는 몸에서 벗어난 일부 거리까지 방어막을 형성하는 것이 가능했는데, 특유의 동체시력을 이용해 수송 칸의 양 문을 번갈아보며, 날아드는 투창을 순발력 있게 막아내고 있었다.

투두두두두!

란슬롯을 앞세운 지상의 군대가 적들의 투창을 견제했고,

차아앙!

수송 칸의 김솔이 창을 쳐내기를 한참.

마침내, 놈들의 스타팅 포인트에 다다랐다.

과거 국회의사당이 놓여 있던 자리다.

중앙계단 위로, 유난히 화려한 옷을 입은 사제 한명이 쩌렁쩌렁 목소리를 뱉고 있었다.

눈부실 듯 새하얀 사제복.

놈은 붉은 어깨 망토를 걸친 채, 금빛 자수가 놓인 모자를 쓰고 있었다.

놈이 외쳤다.

"지구 차원의 민족들은 들으라!"

지이이···

땅이 울릴 듯 쩌렁쩌렁한 목소리.

놈의 어깨 망토가 하늘 방향으로 치솟았고, 놈은 그 바람에 소리를 실어 보내듯 우리에게 자신들의 논리를 설파하기 시작했다.

"자애로운 에메스 여신께서 말씀하시길! 지구와 이곳 대한민국에 태초에 예언이 있었다 하였느니라! 너희 민족의 지도자는 들으라. 내 너희가 선택된 민족임을 전하러 왔나니!"

타차원의 광신도께서 갑자기 어화둥둥 비행기를 태워주시기 시작했으나···

"너희 지구는 우리 에메스에 주어진 개요! 두 발 달린 가축이니! 에메스의 성스러운 발을 핥아 자격을 갖추고, 이 땅에 건설 될 천국을 목도하라 하셨느니라! 이는 에메스 여신의 말씀이라!"

광신도 특유의 개소리로 머리를 지끈거리게 만들어주셨다.

"뭐야 이 미친놈들은···?"

지구인들로 김장을 담그려 했던 기사왕 할아버지, 지구인들을 산 채로 구워 먹으려 했던 원시 부족 토나티우와는 또 다른 접근이었다.

침략에도 다양한 이유와 근거가 존재하는 모양.

놈들은 하나같이 맹목적이었다.

우리에게는 허무맹랑하게 짝이 없는 그것이, 놈들에게는 선로에 깔린 레일처럼 선명한 미래로 주어져 있었다.

"표적, 사정권입니다!"

부조종칸에 앉은 화기 관제사의 목소리가 전해져왔다.

어느덧 퍽 가까워진 정체 모를 건축물의 골조.

에메스 차원의 스타팅 포인트가 설정된 곳으로, 부화를 기다리고 있는 '게이트 핵'이 놓인 장소였다.

우리가 깨부수어야 할.

무전기를 들고 대답했다.

"쏩시다!"

푸슈욱!

푸슉!

열여섯 발의 헬파이어 미사일이 빠르게 날아들어갔다.

꽈아아앙!

꽈앙!

세찬 파도처럼 폭음이 밀려들었지만···

"안 부서진다고···?"

목표는 건재했다.

놈들의 건물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되레 서서히 주변으로 강철판을 덧씌워가고 있을 뿐.

싸움이 시작된 지 채 1시간이 지나지 않은 걸 생각하면, 그야말로 가공할 만한 건설 속도였다.

"출하."

헬파이어 미사일이 주렁주렁 장착된 헬기를 아예 수직으로 떨어뜨려 보기도 했지만···

꽈아아아앙!

"···젠장."

폭발로 인해 파르르 떨렸을 뿐, '게이트 핵'을 감싸고 있는 정체 모를 건축물의 위용은 여전했다.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 사제의 연설이 계속되었다.

"불경하다. 너희 지구의 자손들이여! 너희가 정녕 여신의 축복을 받은 성전을 부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가! 여신의 은총이 담긴 백목과 신성철로 그 골조를 세웠으니, 이는 지구의 노예들이 몸소 지고 나아가야 할 하나의 방주가 될 것이라. 이 또한 에메스의 말씀이니라!"

한음절 한음절이 또랑또랑하게 귓바퀴를 찔러 들어왔다.

서서히 짜증이 치밀던 찰나···

"······?"

옆에 세워진 거대한 천막이 눈에 들어왔다.

원래 있었던 국회의사당의 반만 한, 그야말로 엄청난 규모의 천막이었다.

이곳에서만큼은 성기사들이 보이지 않았다.

그저 건설 현장을 부단히 오가는 에메스 차원의 인부들이 눈에 들어왔을 뿐.

빠르게 올라가고 있는 골조.

그 아래로 개미처럼 움직이고 있는 인부들.

나는 천막의 정체를 어렵잖이 짐작할 수 있었다.

"···자재 창고구나."

쐐애액!

쐐액!

하나둘 매섭게 날아드는 성창.

무전기를 통해, 조종 칸에 계획을 전했다.

"추락합시다!"

덜컥!

1초의 지체도 없이, 조종 칸의 문이 열렸다.

를 통해 이용수와 화기 관제사, 작은누나와 베디비어를 빠짐없이 수용했고···

꽈아앙!

주인을 잃은 헬기가 곧장 땅으로 처박혔다.

.

.

.

지이잉.

우리는 곧장 다시 포탈을 비집고 나왔다.

숙련된 대열로 앞장서는 40여명의 특수부대원.

우리가 도착한 곳은 에메스 차원의 자재 창고였다.

"···죽어라!"

인부들이 치켜든 칼로 환영 인사를 건넸다.

타아앙!

베디비어가 드센 팔을 휘두르며 그 인사를 받았고,

투두두두두!

특수부대원들의 [감전] 탄환이 적들의 미간을 꿰뚫었다.

그렇게, 놈들의 자재 창고 내부에 다다랐을 때.

"와···"

경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켜켜이 쌓인 것은 은은한 빛을 내뿜는 건축 자재들이었다.

공사장에서나 볼법한 거대한 H 모양의 형강.

다발처럼 쌓여 파노라마 빛깔을 자랑하는 축복받은 철근.

해변의 모래알처럼 빛나는 정체 모를 시멘트까지.

"잠깐···"

번뜩 든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이 창고만 없다면···"

얼마나 더 단단해질지 예상조차 할 수 없는 놈들의 성전이다.

바로 그 성전이 세워지는 걸 저지할 수 있을 터.

더 나아가···

"···아예 '게이트 핵'을 박살 낼 수 있을지도."

광신도 사제의 말이 떠올랐다.

여신의 축복을 받은 성전이라 했던가.

하나같이 광채를 내뿜는 걸 보면, 그 여신이라는 분께서 미리 축복을 부여해놓으신 게 분명했다.

하지만···

"여신께서 뭘 잘 모르시네."

토템 신앙도 아니고, 무슨 철골 기둥에다 축복을 발라둔단 말인가?

그러니, 제대로 알려줄 생각이었다.

저 광신도들은 물론, 에메스 여신에게도.

진짜 은총이 무엇인지.

"팍스, 이 자재 창고를 아공간에 넣어줘."

물류창고에 이어, 아공간에 입성하게 될 두 번째 창고였다.

팍스가 말했다.

[대상이 지정되었습니다. 저장하시겠습니까?]

'그래.'

[저장을 시작합니다.]

"우욱!"

메스꺼움이 몰려왔고, 베디비어와 작은 누나, 그리고 소총을 든 병사들이 온 힘을 다해 나를 지켜주었다.

그리고 마침내, 정신을 차렸을 때.

식후에 맞이하는 익숙한 공허함이 내 시선을 채우고 있었다.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자재 창고 너머로, 텅 빈 한강의 지평선이 보였다.

서둘러 움직였다.

"이제 됐어! 가자!"

곧장 헬기를 출하했고, 이용수와 작은 누나가 허둥지둥 헬기에 올랐다.

베디비어와 화기 관제사를 태울 겨를도 없었다.

투두두두두두!

자재 창고가 통째로 사라진 탓일까.

적들의 당황이 은연중에 느껴졌다.

쐐애애액!

이를 대변하듯, 놈들이 집어던진 창이 부쩍 늘어나고 있었다.

차아앙!

차앙!

숨 쉴 틈도 없었다.

김솔이 미친 듯이 날아드는 창을 쳐냈고,

우리는 한껏 프로펠러를 돌렸다.

높게, 더 높게 하늘을 박차고 올랐다.

"최대 고도입니다!"

투두두두두!

무전기를 켤 겨를도 없이, 이용수가 목청을 찢었고···

나는 읊조렸다.

'출하.'

작은 기도를 올리는 것처럼.

그리고···

우뚝.

헬기 다리 아래로, 거대한 H자 모양의 쇳덩어리가 떡하니 생겨났다.

구름처럼 떠 있는 은은한 백색의 H형강.

슈우우···

그 거대한 물건이 서서히 추락을 시작했다.

자고로 '진짜' 축복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법이었으니.

그 은혜가 얼마나 무거울지, 차마 가늠할 수 없었다.

더욱이···

"출하."

셀 수도 없는 법이었다.

떠어어어어어엉!

머리를 찢을 듯한 소리.

그 소리가 끝없이 이어졌다.

떠어어엉!

떠어어어엉!

까아앙!

비처럼, 또 한편으로는 빛처럼 쏟아지는 H빔.

그 축복된 무게가 에메스 성전의 철골을 장난감처럼 으스러뜨렸다.

그리고···

그 다음의 결과를 예상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파삭!

어처구니 없을 만큼 가벼운 소리.

무너진 성전 골조 아래로, '게이트 핵'의 노른자가 피처럼 퍼져나갔다.

"···!"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생명의 노른자.

찐득거리는 그 금빛 점액질 안에는 작은 실핏줄이 얼기설기 엉킨 채, 정체를 알 수 없는 온갖 생물들의 기관이 뒤죽박죽으로 섞여 있었으니.

실로 괴이한 형상이었다.

절로 구역질이 새어 나올 만큼.

그리고···

남은 것은 행정적인 절차였다.

[등록번호 0471, '서울' 지역에서 진행된 입찰 경쟁에서 지구 차원의 주민들이 승리하였습니다.]

[승리 수당, 마석 5,000개가 기여도에 따라 차등 배분됩니다.]

[참가자 100명 전원에게 차원 계좌가 발급됩니다.]

[에메스 차원이 보유하고 있던 '레텔'차원에서의 사업권이 서울 대표에게 이양, 귀속됩니다.]

딱딱하기 짝이 없는 상공회의소 놈들.

놈들이 우리의 승리를 알렸다.

36. 수백 장의 성적표, 그리고 페이스트리 (1)

후두두둑.

상공회의소로부터 보상이 쏟아졌다.

첫째로는 승리 수당이었다.

총 5,000개의 마석을 기여도에 따라 나누어 먹는 구조.

[참여자, 김정겸의 승리 수당은 마석 2,911 개입니다.]

[참여자, 김솔의 승리 수당은 마석 706 개입니다.]

[참여자, 이용수의 승리 수당은 마석 488 개입니다.]

[참여자, 김주연의 승리 수당은 마석 239 개입니다.]

예상하지 못했던 건 아니지만, 내게 상당한 양의 기여도가 책정됐다.

절반을 훌쩍 넘어가는 수치.

손수 노른자를 터뜨린 게 가장 주요하게 작용했겠지만, 란슬롯이나 베디비어의 활약 또한 나의 기여로 인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밖에 를 사용해 적들의 성창을 막아 세운 작은 누나 김솔, 그리고 내가 건축 자재를 떨굴 수 있도록 높은 위치까지 헬기를 운전해준 이용수의 기여도가 꽤나 높게 책정됐다.

"그 다음은 역시···" 

차원 계좌였다.

내게는 별 의미가 없는 물건이었지만··· 두 누나와 이용수에게 있어서만큼은 그 무게감이 남달랐으니.

계좌가 있다면 을 통해 위계를 얻을 수 있게 될 테고, 척력과 함께 비로소 타차원의 괴물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게 될 터였다.

마침 내게는 1군단장으로부터 빼앗아 온 A4 사이즈의 가 주어져 있었다.

문제는 한 명당 마석 1,000개라는 적지 않은 등록 비용.

나름의 육성 철학이 있는 김솔과는 작은 의견 갈등이 있었으나···

"아! 이번에 산탄 주먹 업글해야한다고!"

"내가 낸다고···"

"그걸 먼저 말했어야지!"

아무쪼록 을 우선시하기로 결정되었다.

용산으로 되돌아가는 길.

잠시 아공간에 들어온 나는 마지막 보상을 확인했다.

[레텔 차원, '테르티우스' 지역 독점 사업권]

서울 대표인 나에게만 특권적으로 주어진 보상.

그 보상은 평범하게 생긴 서류 파일철에 담긴 종이 한 장에 불과했다.

지구가 아닌 다른 세계의 물질로 만들어진 종이.

역시나 이계의 언어로 쓰인 문서였지만, 이번에도 어렵지 않게 그 내용을 읽고 이해할 수 있었다.

[귀하에게 '테르티우스' 지역에 대해 독점 거래 권리가 주어져 있음을 증명함.]

[다차원 상공회의소]

단출한 내용.

하지만 정작 나를 놀라게 한 것은 따로 있었다.

위이이잉-

눈 앞에 드리운 포탈.

"···이건?"

아공간 능력으로 만든 포탈은 아니었다.

독점 사업권이 담긴 파일철을 펼치자마자 생겨난 것.

그 안에는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시커먼 심연이 자리 잡고 있었다.

나는 국통사의 연병장 한 가운데에 서 있었다.

멍하니 포탈 내부를 응시하던 나는, 그 안쪽으로 돌 하나를 집어 던졌다.

타앙!

단단한 벽에 부딪힌 듯, 곧장 튕겨 나오는 돌.

포탈의 문은 단단히 걸어 잠겨 있었다.

마치 내가 적들을 향해 포탈을 운용하는 방식처럼.

그리고 동시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등록된 사업자가 아닙니다. 권한을 확인해주세요.]

나름 정중한 문구.

천천히 돌벽 같은 포탈의 표면에 손을 대었을 때도, 똑같은 메시지가 나타났다.

[등록된 사업자가 아닙니다. 권한을 확인해주세요.]

간단히 말해, 나의 접근을 막고 있는 것.

상공회의소는 내게 에메스 차원의 '사업권'을 넘겨주었다고 말했다.

어쩌면 나도 이 포탈을 통해 다른 차원으로 넘어갈 수 있을 지 모를 일이었지만··· 포탈은 나의 진입을 완고하게 막아 세우고 있었다.

그것이 명명백백한 나의 '소유'임에도 불구하고.

이 오묘한 물건을 어찌 여겨야 할지 내심 고민이 되던 찰나.

띠링!

메시지가 날아왔다.

[소유하신 사업권을 다차원 상공회의소에 매각하시겠습니까?]

[매각 시 마석 10,000개가 매각 대금으로 지급됩니다.]

팍스의 메시지가 아니었다.

우리에게 공문서랍시고 '입찰 경쟁'을 늘어놓았던 '다차원 상공회의소'의 메시지.

나는 곧장 대답했다.

"···아뇨?"

이 도둑놈 새끼들이 사람을 뭘로 보고.

"갖다 버리는 수가 있더라도, 네놈들 득 보는 꼴은 못 본다."

당장 나로서는 활용이 불가한 물건인 것이 맞다.

하지만 놈들이 자그마치 마석 1만 개를 냉큼 부르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터.

아무리 집에서 굴러다니던 애물단지더라도, 누군가 그걸 헐값에 집어 가 대박이라도 터뜨린다면 평생 배가 아프다 못해 찢어지는 것이 사람의 심리였다.

"뭐, 혹시 모르는 일이기도 하고···"

미래는 길다.

비록 놈들이 밀어 넣는 멸망이 우리의 숨통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더라도, 나는 갖은 발광을 해서라도 그 미래를 길게 길게 늘려볼 작정이었다.

"네놈 뜻대론 안 될 거다."

벽에 똥칠을 해서라도 살아남을 테니까.

***

합참 본부의 거한 환영을 받으며, 우리는 용산으로 복귀했다.

출발한 지 채 여섯 시간이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부상자들이 제법 있기는 했지만, 놀랍게도 단 한 명의 전사자도 발생하지 않았다.

나를 보는 작전본부장 유성철이 당장이라도 청혼할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작전에 참여한 군인들에게 차원 계좌와 마석이 주어졌으니 가서 어떻게 써먹을지나 고민해보시라 당부하며 서둘러 자리를 파했다.

물론···

"편하긴 편하네."

합참본부와의 협력은 상상 이상으로 달달했다.

각종 장비 제공은 물론, 그 장비들에 대한 숙련된 기술자들까지 함께 지원해주고 있었으니.

더욱이 내 아공간을 제외하면, 한국 전체에서 합참 본부보다 안전한 장소는 존재하지 않았다.

저절로 아공간 바깥까지 방위가 되는 셈.

물론 내 쪽에서도 식량이나 물자를 무한정 지원해주고 있었으니 여러모로 서로 득이 많은 관계였다.

지잉.

나는 곧장 아공간으로 들어왔다.

그러곤 국통사 관사에 있던 아버지를 모시고 나왔다.

'선물'을 준비해온 참이었으니.

"···이게 다 뭐냐?"

에메스 차원으로부터 앗아온 자재 창고.

국통사와 맞닿아 있던 물류센터의 반대쪽 입구에 놓인 이 자재 창고는 기존에 있던 팍스 풀필먼트 센터만큼이나 거대한 위용을 자랑했다.

품목의 수를 두고 비교할 순 없겠으나, 안에 담고 있는 사물들의 크기가 그야말로 형용할 수 없었으니.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집 짓는 동안 별의별 자재들은 모두 조사하셨던 아버지였다.

전원주택이라고 한들, 그 컨셉이나 채택할 수 있는 자재는 각양각색이었으니.

오랜 기간 품어온 꿈이었던 만큼, 아버지는 마음속으로 수십 개의 집을, 그것도 서로 다른 크기와 높이로 짓고 부수기를 십수 년간 반복해왔을 터였다.

아버지는 연이은 감탄하며 질문에 스스로 답했다.

"이게 다 웬거냐? 벽돌··· 이건 석고보드인 것 같고··· 잠깐, 형강에다 철근까지?"

창고를 가득 메우고 있는 건설 자재들.

심지어 평범한 자재들도 아니었다.

"대체 무슨 마법을 부렸길래 재료마다 버프가 다 붙어있냐? 방어력 옵션에 탄성 강화에···"

"아버지 능력으로 쓸 수 있는 물건들 맞죠?"

"그걸 말이라고 하냐? 그동안 재료 궁해서 지나친 설계도가 몇 장인데··· 오늘 잠은 다 잤다 이놈아!"

활짝 피어오르는 웃음.

저렇게 밝게 웃으시는 건 아버지의 전원주택이 준공되었을 때 이후로 처음이었다.

아공간에 넣은 네 번째 사물.

승리를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아버지를 떠올리기도 했더랬다.

"이 수준이면 전에 만들었던 요새보다 몇 배는 더 단단하게 만들 수 있겠다. 다들 두 다리 뻗겠어."

"아···"

아버지의 기쁨은 단순히 블럭 조립에서 오는 사사로운 즐거움이 아니었다.

전원주택 위로 장갑을 덧대어 쌓던 아버지는 가족들에게 더 안전한 장소를 마련해주겠다는 일념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아공간에 들어온 이후로 가족들이 겪을 위험은 현저히 사라졌지만, 아버지는 여전히 부모로서의 소임과 쓸모를 찾으며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어쩌면 그런 아버지의 부단한 동선 자체를 '집'이라 부를 수 있을지도 몰랐다.

이러나저러나···

"그렇게 좋으세요?"

"아무렴!"

그 미소만큼 만족스러운 건 없었으니.

.

.

.

그로부터 몇 시간이 흘렀다.

이미 한차례 승리를 거머쥔 터였지만, 우리는 여전히 긴장감 속에 있었다.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된 '입찰 경쟁'이다.

부여된 제한 시간이 총 12시간이었던 점을 감안한다면, 슬슬 다른 지역에서도 싸움의 결과가 판가름 났을 터.

우리 가족들, 그리고 합참의 간부들은 나란히 대응실 의자에 앉아 추가로 날아들 의 안내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입찰 경쟁'이 시작 이후, 정확히 12시간이 지났을 즈음.

띠링!

우리의 성적표를 받아볼 수 있었다.

[대한민국에서의 '입찰 경쟁' 결과를 안내드립니다.]

[5전 4승 1패]

[서울 승]

[인천 패]

[대전 승]

[광주 승]

[부산 승]

한국에서 열린 입찰 경쟁은 총 다섯 개.

이걸 다행이라고 여겨야 할 지 모르겠지만, 개중 하나를 빼면 모두 승리를 거둔 참이었다.

자그마치 80퍼센트에 달하는 승률.

하지만···

띠링!

띠링!

드넓은 지구촌에는 우리만 살고 있는 게 아니었다.

[지구 차원 전역에서의 '입찰 경쟁' 결과를 안내드립니다.]

[중국 117전 16승 101패]

[인도 129전 24승 104패]

[미국 31전 6승 25패]

···

땅도 크고 사람도 많은 국가들이다.

그만큼 '입찰 경쟁'도 많을 수밖에.

문제는 따로 있었다.

"···뭐 이렇게 많이 졌어?"

그 결과는 처참했다.

4승 1패를 거둔 우리가 말도 안 되게 느껴질 정도로.

그 모든 수치를 합한 결과는 다음과 같았다.

[총 761전 113승 648패]

그 결과를 끝으로···

[다차원 상공회의소에서 알려드립니다.]

놈들의 논평이 날아들었다.

[지구 차원 여러분들의 성원과 참여에 감사드립니다. 상공회의소는 이번 '입찰 경쟁'의 결과를 토대로 지구차원의 성장 잠재성을 면밀히 논의하였으며, 지구 차원의 성장 등급을 [BB-]에서 [CCC]로 격하하였습니다.]

'입찰 경쟁'은 일종의 시험이었다.

놈들이 매긴 성장 등급만 보더라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지구의 성적이 개판이었다는 걸.

그리고 당연하지만···

그걸로 끝나는 문제가 아니었다.

[다차원상공회의소의 개방 세부 전략에 따라, 현시간부 지구에 설치된 모든 포탈에서의 7위계 통행이 제한적으로 허가됩니다.]

[입찰 경쟁 승리로 '사업권'을 획득한 타차원은 인근 지역을 추가적으로 점령할 수 있으며, 승리한 지구 차원의 '지역 대표'를 사살할 경우 해당 지역에 추가 게이트 포탈를 생성할 수 있습니다.]

7위계.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강한 적들이 쏟아질 것이었다.

서울을 승리로 이끌었지만 임시 방편에 불과했다.

우리 집에 붙은 불을 껐다 한들, 옆집에서 넘어오는 불길을 막을 수는 없을 테니.

아니나 다를까 놈들은 분명하게 명시하고 있었다.

'인근 지역을 추가로 점령할 수 있으며··· '지역대표'를 사살해 게이트를 열 수 있다고.'

그 뜻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았다.

"···곧 인천에서 적들이 몰려들겠군요."

유성철이 걱정스러운 말투로 덧붙였다.

놈들이 노리는 건 이곳 서울, 그리고 '서울 대표'인 나의 목숨이었으니.

게이트 포탈을 통해 적의 병력이 쏟아져 들어올 것이고, 개중에는 더욱 강한 힘을 가진 7위계 괴물들이 섞여들 것이었다.

규모 면에서나, 힘에서나 한층 더 강한 적들이 몰려들 터.

앞서 '입찰 경쟁'에서와는 반대로, 이번에는 우리가 방어를 맡은 셈이었다.

물론, 멍하니 있을 생각은 없었다.

내가 유성철에게 물었다.

"혹시 군에 건축 능력을 각성한 자들이 있습니까?"

"꽤 있습니다. 특히 1공병여단에서 그런 사람들이 많아요. 얼마 전까지 1군단에 포로로 있었던···"

그들은 내가 몸소 구해낸 조력자들이었다.

더욱이, 지금 내게는 에메스로부터 빼앗은 전리품이 있었으니.

"모두 불러주세요. 자재는 제가 대겠습니다."

"예?"

"저희 아버지도 제가 대겠습니다."

"···예?"

곧 인천에서 적들이 들이닥칠 터.

단, 쉽게 뚫리진 않을 생각이다.

수십 겹의 벽을 쌓아서라도.

37. 수백 장의 성적표, 그리고 페이스트리 (2)

치이익! 치익!

유성철이 무전기의 수화기를 들었다.

통신 상대는 인천의 17사단.

원래라면 무전기의 통달 거리가 닿지 않아 중계를 거치는 번거로운 과정이 필요했겠지만··· 다행히 이곳 합참 본부에는 통신장비의 성능을 강화할 수 있는 각성자가 존재했다.

심지어 내가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과천에서 구해냈던 50정보통신대대장 한경호.

그야말로 통신대대장다운 능력이 아닐 수 없었다.

한편, 유성철은 한껏 긴장된 표정이었다.

지금쯤 인천은 아비규환에 빠져 있을 테니까.

다행히, 오래지 않아 17사단과 통신이 연결됐다.

"통··· 통신보안."

"통신보안은 얼어 죽을. 지금 어때? 어떤 상황이야?"

"충성. 죄송합니다, 본부장님. 도무지··· 도무지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 현재 차이나타운에 놈들의 게이트가 열려 있는 상황입니다."

완전히 두려움에 싸인 목소리였다.

"숫자가 얼마나 돼? 많아?"

"많습니다. 와이번들··· 그리고 도마뱀 같은 놈들이 계속해서 밀려들고 있습니다. 사브로스 차원의 리자드맨이라고 하는데, 만만치 않게 숫자가 많고요."

와이번.

낯선 괴물은 아니었다.

물류단지 터널, 그리고 과천에서도 질리도록 봤던 녀석들이니까.

하지만 그렇게 까다로운 놈들은 아니었다.

소총으로도 얼마든지 처리할 수 있었었으니까.

하지만 상공회의소의 공지대로라면, 괴물 중에는 8위계, 심지어 7위계도 섞여있을 터였다.

아니나 다를까, 17사단의 장교가 덧붙였다.

"개중에는 와이번을 타고 움직이는 리자드맨들도 있습니다. 그중에 우두머리도 있는 것 같고요."

바글대는 와이번과 리자드맨들.

거기에 와이번을 탄 상위 개체들까지.

파충류로 뒤덮인 인천을 떠올리자니,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유성철이 뒤늦게 17사단의 안부를 물었다.

"그래서 지금 병력 상황은 어때? 교전 중인 거야?"

"일단 포병여단이 그대로 날아갔습니다. 직할 방공중대도 증발했고요. 그 밖에는··· 일단은 교전을 중지한 상태입니다."

"···중지했다고?"

"예, 놈들이 전투보다는 병력 재편이 집중하는 분위기거든요. 물론··· 안전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가까이 접근했던 1개 중대가 그대로 전멸했거든요."

병력 재편.

놈들이 무엇을 서두르는지 어렵잖이 짐작할 수 있었다.

"···곧장 서울로 넘어올 생각인가 보네요."

인천을 짓밟을 시간도 없다.

바로 서울을 손에 넣어 기세를 몰아가겠다는 것.

유성철이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17사단에 당부를 남겼다.

"현재로서는 현상 유지. 섣불리 공격해서 병력을 잃는 일이 없도록 해. 수시로 통신 넣어줄 테니 매시간 상황 보고하고."

"알겠습니다. 충성···!"

"후우······"

연락을 마친 유성철이 긴 한숨을 몰아쉬었다.

물론, 예상했던 서울 침공이다.

하지만 막상 사실로 확인하고 나니, 긴장감이 찾아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곧 놈들이 파충류 특유의 비늘을 꿈틀거리며 이곳 용산에 도달할 테니까.

한편,

따앙!

땅!

창문 너머로 세찬 망치 소리가 들려왔다.

이미 아버지를 필두로, 건축 능력을 갖춘 각성자들이 한데 모여 방어 시설을 건설하고 있었다.

원래라면 크레인을 통해 구조를 짜 맞추고 옮기는 과정이 필요했겠지만, 출하 스킬로 필요한 위치마다 자재를 출하해준 덕에 시간을 상당히 단축할 수 있었다.

능력 각성자들의 가공할만한 건설 속도 또한 빠뜨릴 수 없는 요인이었다.

하지만···

"서울 전체를 지킬 순 없겠네요."

유성철이 씁쓸하게 덧붙였다.

아무리 합참본부와 용산공원 전체를 성벽으로 둘러싼다 한들, 서울 전체를 방어할 수는 없는 일이었으니.

놈들이 이곳 서울을 침공하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으리라는 건 불 보듯 뻔한 결과였다.

그 수를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해 노력할 뿐.

내가 말했다.

"당분간 집 밖으로 나오지 말라고 일러두는 수밖에요."

리자드맨까지는 알 수 없다.

처음 보는 적이니만큼 정보가 없으니까.

하지만 적어도 와이번들이 지붕 아래 인간을 건드리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다.

쓸데없이 나돌아다니지만 않는다면 놈들의 공격을 피할 수 있을 터.

더욱이, 서울 점령을 최우선으로 하는 놈들이었다.

지금도 전력 재편에 집중하는 걸 보면, 불필요한 살육보다는 곧장 이곳 용산으로 진격해 들어오리라는 것이 타당한 추론이었다.

살육은 그다음의 일이다.

내가 죽어야 서울에 게이트 포탈이 열릴 것이고, 그때 비로소 놈들도 맘 놓고 판을 벌일 수 있을 테니까.

결국 놈들이 노리는 건 서울 대표인 나였다.

그 덕분에···

[서울 대표]

이렇게 쓰인 글씨와 함께, 더럽게 큰 홀로그램 화살표가 하늘에 둥둥 떠 있는 상황이었다.

수 킬로미터 바깥에서도 볼 수 있을 만큼 선명한 글씨였다.

"······"

인간 서울이 된 나.

긴박한 상황임에도, 가족들은 도무지 배꼽을 놓지 못했다.

"당선 축하드려요. 대표님."

큰누나 김주연 씨께서 전국 의료인협회를 대표하여 인사를 올렸고,

"제가 목숨을 걸고 대표님을 지켜드리겠습니다. 대표님은 이곳 서울의 자존심, 천만 시민의 얼굴, 해치 뺨 때리는 마스코트, 한강의 기적, 서울 그 잡채, 아이러브 서울···"

김솔이 2절 3절 뇌절로 나를 떠받들었으며,

"주군께서는 서울과 카멜롯의···"

"그만해."

란슬롯이 충성심을 발휘했다.

아무리 아공간을 들락날락해도, 이놈의 홀로그램 화살표는 사라질 기미가 없었다.

분명한 건, 이 홀로그램 화살표가 놈들에게도 보일 것이라는 점.

그리고 이를 표적으로 삼아 미친 듯한 군세가 진격해 들어 오리라는 점이었다.

"그래도···"

그저 불리하기만 한 건 아니었다.

대놓고 내 위치가 드러나는 게 찜찜하긴 하지만, 역으로 놈들을 꾀어내기 쉽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자연스레 공성전의 그림이 그려질 터였다.

우리가 원하는 위치에서 적들의 공격을 방어하는 형국.

내가 한 가지 덧붙였다.

"요 근처 주민들만큼은 대피가 필요하겠네요." 

삼각지부터 한강대교까지 이어지는 기나긴 대로.

다른 곳은 몰라도, 이곳만큼은 확실한 전쟁터가 될 테니까.

적들의 목표, 그리고 전력을 확인했다.

남은 건 철저히 파놓은 늪에서 놈들을 기다리는 일뿐.

***

카아아악!

와이번이 울음을 터뜨렸다.

펄럭.

넓게 펼친 날개 사이에 타고 있는 것은 한 명의 리자드맨.

사브로스 차원의 7위계 전사, 공대장 라키스였다.

"어디···"

그는 함께 인천에 도착한 코스타스 사령관의 명령에 따라, 상당수의 병력을 이끌고 서울로 진격하고 있었다.

덜컹! 덜컹!

선두를 달리고 있는 거대한 수레.

그 위로는 온몸이 사슬에 묶인 거대 리자드, '야투'가 실려 있었으며, 주위로 8위계에 달하는 엘리트 리자드맨들이 나란히 행군을 이어가고 있었다.

공중, 그리고 지상 병력이 합쳐진 군세.

사실, 애당초 공중 세력들을 모아 서울을 급습했다면 상황이 빨랐을 것이다.

하지만 와이번들에게는 척력이 존재하지 않았고, 8위계에 해당하는 와이번 기수들 또한 그 수가 충분하지 않았다.

에메스 차원으로부터 지구인들에게 척력을 뚫어낼 무기가 있음을 전해 들은 상황.

하여 강력한 맷집을 자랑한 7위계 괴물, 야투를 앞세웠고, 대량의 지상 병력을 대동했다.

결코 빠르다고 할 수 없는 속도였지만, 사브로스 차원 특유의 강한 체력을 활용했다.

낮과 밤을 가리지 않았고, 이따금 한 시간 내지 두 시간의 휴식을 취하며 세찬 행군을 이어 나갔다.

어느덧 인간들이 부천이라 부르는 도시를 지난 지 한참.

몇 시간 뒤면 서울 대표가 있는 위치에 다다를 예정이었다.

"하여간 에메스 놈들···"

라키스가 혀를 찼다.

애당초 에메스가 입찰 경쟁에서 승리했더라면 이럴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사브로스와 에메스는 돈독한 협력 차원이었고, 이번 입찰 경쟁에서도 함께 세력을 굳혀나가기로 계획되어 있었으니까.

에메스 차원이 덜컥 입찰에서 패배한 탓에, 모든 계획이 어그러진 터였다.

예상을 뒤엎고 에메스를 꺾은 서울 세력이었지만, 라키스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에메스야 뭐, 애초에 방어력만 높은 바보들이니···"

에메스 차원의 장기는 신성력 버프를 두른 건축술, 그리고 무기 제작이었지 싸움 그 자체는 아니었다.

덕분에 압도적인 물량과 공중 전력을 가진 사브로스 차원과는 꽤나 궁합이 좋은 편이었지만, 이제는 그것도 옛말이었다.

"유일하게 할 줄 아는 게 방어인 놈들인데, 수성 미션을 실패했으니··· 당분간 다차원에서는 고개도 못 들겠어."

그가 차원 지도부에 있었다면 진즉에 에메스와의 관계를 단절했으리라.

라키스는 그런 생각을 주억거렸다.

"정지!"

펄럭.

라키스가 와이번의 날개를 펄럭이며, 자신의 군세 앞으로 활강했다.

그들 앞에는 적의 본진으로 이어지는 기나긴 한강 다리가 놓여 있었다.

그 위로, [서울 대표]라는 붉은 글씨가 한눈에 들여다보였다.

"···다리는 아직 멀쩡한가."

어쩌면 인간들이 다리를 폭파할 수도 있었다.

이 기나긴 강을 건널 수 있는 길목은 그것뿐이었으니까.

하지만, 그건 그것대로 라키스가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해볼 테면 해보라지."

애당초 물에서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리자드맨들이었다.

놈들이 다리를 무너뜨리는 것으로 기세등등하다면 오히려 자신들에게 기회가 될 터.

본격적인 전투에 앞서, 라키스는 자신을 뒤따르는 수천 마리의 병력을 향해 말했다.

"잘 들어라! 지금 우리는 에메스 멍청이들의 뒤를 닦아주러 온 셈이지만··· 어쩌면 이게 기회가 될지 모른다. 놈들과 나누는 것 없이, 이 지구 전체를 사브로스로 뒤덮을 수 있을 테니까. 그뿐인가? 우리의 주머니도 두둑해질 거다. 모두들 한탕 해서 돌아가고 싶겠지?"

"실패는 나 라키스, 그리고 코스타스 사령관께서 용납하지 않으신다. 죽고 싶지 않다면 목숨을 아끼지 않고 싸우는 게 좋을 거야."

카아아아아!

쉬리리리릭!

그의 말을 알아들은 8위계 지성체들, 그리고 단순히 그들의 살육 의지에 동조할 뿐인 와이번들이 뱀 같은 혀를 내밀며 포효했다.

"가자! 사브로스의 전사들이여!"

그렇게, 그들은 한강대교를 질주했다.

차르르르르르!

사슬이 풀린 채, 미친 듯이 내달리는 '야투'를 앞세우며.

의외로 한강대교는 폭파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의 입성을 반기는 듯, 뻥 뚫려 있을 따름이었다.

쐐애애액!

라키스가 와이번을 타고 빠르게 하늘을 질주했다.

그러곤 다른 병력들보다 한발 빠르게, 지구인들이 있는 용산에 다다랐다.

하지만···

황당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에메스가 패배했다고 하지 않았나?"

[서울 대표]라고 쓰인 홀로그램 글씨.

하지만 그 아래 놓인 것은 틀림없는 에메스의 성채였다.

성벽, 철골, 그 주변을 지탱하는 벽돌 하나하나까지, 어느 것 하나 에메스 여신의 축복이 깃들지 않은 것이 없었으니까.

그건 물론이요···

"아예 도배했다고? 저 비싼걸?"

비싸다.

그것도 아주아주.

성능 하나는 알아주지만, 더럽게 비싸기로 유명한 것이 바로 저 에메스 차원의 건설 자재들이었다.

하물며 에메스 차원 자신들조차 아껴쓰는 재료들이었으니, 두말하면 입이 아팠다.

하지만···

"에메스 이 새끼들이 진짜 돌았나···?"

실속이라곤 찾아볼 수 없다.

어지간한 하위 차원에서는 구경조차 못 한다는 축복 형강.

그걸 서너 겹으로 둘러 아예 성벽처럼 만들었으니.

눈 뜨고도 볼 수 없을 만큼 개판을 친 가성비였다.

두두두두두!

사브로스의 군세가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라키스가 그저 탄식과 함께 이마를 부여잡았을 때쯤.

슈욱.

그들을 향해 시커먼 그림자가 덮쳐왔다.

"······"

여신의 축복을 받은 거대한 H형강이었다.

38. 수백 장의 성적표, 그리고 페이스트리 (3)

에메스 차원의 패배.

그건 상공회의소가 발표한 분명한 사실이었다.

"···?"

하지만 라키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눈앞에 에메스의 요새가 떡하니 드리워 있는 것은 물론이요, 심지어 곳곳에는 그 비싼 에메스의 각종 자재가 칠갑 되어 있었으니까.

하지만 당장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두두두두두두두!

한강대교로부터 사슬을 풀어준 7위계 괴물, '야투'.

놈이 악어처럼 흙먼지를 일으키며 빠르게 정문을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야! 멈··· 멈춰!"

애타게 외쳤지만, 멈출 리가 없었다.

애초에 통제가 불가능한 녀석인 것은 물론, 설령 가능했다 하더라도 이미 한강대교 초입부터 속도를 붙여온 놈이었으니까.

이제 와 제동이 될 리 만무했다.

다가올 충격을 예상한 라키스가 제 귀를 부여잡았다.

아니나 다를까···

까아아아앙!

찢을 듯한 굉음이 성채 앞에서 들려왔다.

"야단났네···"

그렇게 귀를 막고 있던 손을 내리던 찰나,

까아아아앙!

까아앙!

세찬 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뭐, 뭐야?"

화들짝 놀란 그가 다시 땅을 내려다보았을 때.

휘이이···

자욱한 먼지 사이로, 움찔거리는 야투의 꼬리가 보였다.

"···야투?"

돌격 임무를 맡았던 녀석.

하지만 성문을 타격하기는커녕, 십수 개의 쇳더미에 깔린 채, 경련하듯 그 거대한 몸을 떨고 있었다.

그때였다.

투두두두두!

날아드는 총소리.

그제야 라키스는 알아차렸다.

자신이 마주한 상대가 인간들이었다는 걸.

"젠장! 공격해!"

이미 야투의 발이 묶여 버렸다.

계획이 어그러졌지만, 더 이상 물러날 수도 없는 상태.

"전위병! 앞으로!"

척력을 두른 엘리트 리자드맨들을 앞세웠지만···

투두두두두!

그그그극!

놈들의 총알에 의해 고소한 냄새를 풍기며 쓰러졌다.

이럴 때를 대비해 데려온 야투였다.

7위계인 녀석의 척력이라면 어지간한 공격은 막아낼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야투는 인간들이 던진 H형강에 깔린 채 옴짝달싹하지 못했다.

되레 소총을 쏘아대는 적들의 엄폐물 역할을 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젠장!"

사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바로 와이번들.

까아아아악!

끼에에에에에에에!

쿵!

쿠웅!

추락이 끝없이 이어졌다.

성벽 위에 놓인 발칸포가 비처럼 탄환을 쏟아댔으며, 팽팽 돌아가는 레이더에서 발사된 미사일이 끈질기게 와이번들을 추적해왔다.

슈우우우웅!

퍼엉!

하늘에 그려지는 커다란 폭죽.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는지, 라키스가 와이번들을 뒤로 물렸다.

더 큰 한 방이 필요한 시점.

"가라!"

라키스는 아껴두었던 와이번 기수들을 내보냈다.

펄럭!

하나하나 8위계의 척력을 두르고 있는 공중전력들.

기수들은 와이번들과 척력을 나누며 날아드는 총알을 아무렇지 않게 튕겨냈다.

슈우우웅!

퍼엉!

따끔한 폭발.

그리고 매캐한 폭연이 날아들었지만, 그들은 의연했다.

그러곤 요새 주위에서 재빠른 곡예비행을 이어 나갔다.

라키스가 지시했다.

"놈들도 모든 걸 쏟아붓고 있다! 총알이든 포탄이든 전부 소진하게 해!"

숙련된 지휘관이었던 라키스의 지혜였다.

아무리 적들의 무기가 강력하다 한들, 무한은 아닐 테니까.

놈들의 총알과 포탄이 떨어지는 대로, 와이번들을 한데 모아 요새로 쏘아져 들어갈 계획이었다.

퍼엉!

펑!

"끄윽!"

와이번 기수들의 열연이 계속됐다.

인간들의 공격에 속수무책인 척, 간지럽지도 않은 총알과 포탄에 비명을 지르고 휘청이며 갖은 비위를 맞췄다.

하지만···

"······??"

똑같은 상황이 십여 분 이상 계속되자, 라키스에게도 서서히 의문이 찾아들기 시작했다.

"적당히란 걸 모르나···? 총알이 대체 언제까지 나오는 거야?"

오히려 시간이 지나자,

와이번 기수들이 벌이던 연극은 되레 현실로 돌변했다.

까아아아악!

기수들이 하나둘 지상으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하나같이 몸통이 깔끔하게 꿰뚫린 채.

라키스는 두 눈을 의심했다.

"···성창?"

그것은 에메스의 무기였으니까.

적들의 요새 위.

외팔이 기사와 짧은 머리의 인간 여성이 성창을 다발로 늘어놓은 채, 하이파이브를 주고받으며 와이번 기수들을 사냥하고 있었다.

뿌득.

라키스가 입술을 깨물었다.

야투, 엘리트 리자드맨, 와이번 기수들까지 당한 상황이다.

더 이상 망설일 수 없었다.

더욱이, 그에게는 마지막 수가 있었으니.

"안 됐지만··· 무기라면 이쪽이 한 수 위야."

채앵!

그가 등에 매달린 무기를 꺼내 들었다.

광채를 내뿜는 창.

이 또한 에메스의 성창이었지만, 인간들의 것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대부분의 차원 존재들은 원거리 무기를 잘 사용하지 않는다.

무기가 손끝을 벗어나는 순간, 위계의 힘이 상실되기 때문.

하여 아케인의 마법사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차원 존재들은 검이나 도끼 같은 근접 무기를 애용했다.

에메스의 성창 또한 본래는 투척보다는 쥐고 찌르는 용도로 고안된 물건이었다.

하지만···

"무조건 통용되는 건 아니지."

한가지 예외가 존재했다.

그 모든 걸 무시할 만큼 아이템 자체의 성능이 월등한 경우.

라키스의 성창은 자그마치 3차까지 강화가 진행된 '에픽' 아이템이었다.

그가 전 재산을 털어 에메스의 창을 강화하는 것을 모두가 비웃었지만, 라키스는 창의 성능을 특유의 전투 스타일에 녹여냄으로써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해냈다.

쐐애애액!

와이번의 고삐를 거칠게 잡아끌며, 라키스가 쏜살같이 하늘을 갈랐다.

슈욱!

벼락처럼 날아가는 성창이 표적인 대공 발칸포를 정확히 꿰뚫었고···

꽈아아앙!

폭발과 함께 전장에서 이탈시켰다.

순식간에 파괴된 대공 무기.

휘리릭!

와이번의 날개를 접은 라키스는 능숙하게 궤도를 바꾸어 적진에 꽂힌 성창을 유유히 회수했다.

투두두두두두!

쐐애애액!

인간들이 총알, 포탈, 또 성창을 날려댔지만, 라키스의 비행 속도를 감당하지는 못했다.

퍼엉!

끈질기게 따라붙던 유도 미사일 또한 창술에 의해 무력하게 두동강이 날 뿐.

콰아앙!

콰앙!

어느덧 라키스가 요새에 비치된 절반가량의 대공무기를 파괴했을 즈음이었다.

"······!"

성벽 위로 유유히 걸어 나오는 누군가.

그를 따라 거대한 홀로그램 화살표가 움직였다.

[서울 대표]

라키스가 반색했다.

저놈!

바로 저놈이다.

녀석을 죽이겠다는 일념 하나로 바득바득 서울까지 넘어온 사브로스의 군대였으니까.

"찾았다!"

라키스가 성창을 치켜들었다.

더 이상 이 지난한 싸움을 끌고 갈 필요가 없어졌다.

대표만 죽인다면 이곳 서울에 게이트 포탈을 열 수 있을 테니.

머지않아 사브로스의 군세가 이곳 서울을 새카맣게 뒤덮을 터였다.

기회는 한 번뿐이었다.

주르륵 흐르는 식은땀.

뱀 같은 그의 동공이 차르륵 목표를 향해 감겨들었다.

후우우우욱!

온 힘을 집중한 일격.

그는 그 끝에 한 마디를 덧붙였다.

"···끝이다."

쐐애애액!

쏜살같이 손끝을 빠져나간 성창.

아찔한 창끝이 놈의 미간을 향해 날아들었다.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정밀한 투척.

라키스가 그 놀라운 실력에 자신도 감탄하려던 찰나···

"···?"

은근슬쩍 창의 궤도가 비틀렸다.

그러곤···

"······???"

놈의 어깨 위로 열린 포탈에 제 집마냥 쏘옥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당황한 라키스가 눈꺼풀을 수십 번 올렸다 닫았다.

하지만,

지잉.

놈의 주변으로 여덟 개의 포탈이 피어올랐다.

쐐애액!

돌연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성창.

8개, 아니 16개, 아니 32개··· 그 수가 차츰 불어나고 있었다.

"·········???"

라키스는 이해할 수 없었다.

이곳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단 한 가지도.

***

에메스 차원의 자재 창고를 털었을 당시, 안에 들어 있던 것은 비단 건설 자재뿐만이 아니었다.

성창.

우연하게도 놈들의 주력 무기인 그것이 창고 한편에 놓여 있었으니.

[신성]은 물론 [관통]이 달달하게 붙어 있는 레어 아이템이었다.

당연히 무한히 복사가 가능했다.

김솔과 베디비어에게 수십 자루를 쏟아 주었고, 이들은 특유의 근력으로 귀찮던 와이번 기수들을 깔끔하게 사냥해주었다.

하지만···

"쟤는 왜 저렇게 세?"

보나 마나 우두머리였다.

놈이 뭐라 뭐라 목청을 틔울 때마다 지상에 있는 리자드맨들은 물론이요, 하늘을 뒤덮던 와이번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곤 했으니.

놈이 성벽 곳곳에 장착된 천마, 그리고 대공포들을 하나둘 무력화시킬 때는 사뭇 위기감이 찾아들었다.

그때였다.

"잠깐, 저건······"

놈이 꺼내든 빛나는 창.

그 모양새가 너무도 낯이 익었기에, 위험을 무릅쓰고 놈의 앞에 나섰다.

그리고 그 결과는···

"···이게 되네."

아주 고마운 선물을 받아버렸다.

---

[에메스의 성창(聖槍) +3]

등급: [에픽]

설명: [에메스 여신의 축복이 부여된 성스러운 창입니다.]

속성: [신성]

옵션: [관통+3], [가속+3], [정화]

----

에픽.

처음 보는 등급이다.

그 아래 붙은 갖은 옵션들마저 영롱하기 짝이 없었다.

뭐?

빼앗은 적 없다.

저 도마뱀께서 냅다 받으라 던져주신 물건이 아닌가?

물론 미간 정면에 던져준 덕에 자칫하다간 죽을 뻔했지만···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게 있는 게 사람 정이었다.

"팍스, 다중 출하 개방해줘."

[알겠습니다.]

[마석 1,000개 받았습니다.]

[동시 출하(3) 개방 완료]

[이제부터 최대 8개의 사물을 동시에 출하할 수 있습니다.]

[남은 마석은 4,810개입니다.]

즉시 여덟 개의 포탈을 열었다.

스르륵.

포탈 안에서 슬그머니 고개를 내미는 8자루의 성창.

흰 살모사를 닮은 마름모꼴의 머리를 제외하면, 성창의 자루는 군더더기 없이 일직선으로 뻗어 있었다.

다시 말해···

"꼬치 요리에 아주 적합하단 소리지."

재료는 널려 있었다.

주위에 널린 것이 와이번과 리자드였으니.

서바이벌 다큐멘터리에서나 보던 도마뱀 꼬치를 손수 만들어 볼 기회였다.

그렇게···

"출하."

슈슈슈슉!

수슈슉!

축복(?) 꼬치들이 1초 간격으로 미친 듯이 뿜어져 나갔다.

분수처럼 쏟아지는 실선.

신기전(神機箭)이 따로 없었다.

슈우우웅.

그뿐만이 아니었다.

사아아아악!

부여되어 있었던 [가속] 옵션.

시속 300킬로미터로 나아가던 성창이 한층 더 빠르게 치고 나가기 시작했으니.

이쯤 되니 출하 능력의 사정거리 또한 아무 의미가 없어질 지경이었다.

성창이 주어진 제한 거리를 박차고 날아갔으니까.

"······!"

우두머리는 화들짝 놀란 기색이었다.

대공포와 천마 미사일을 유린했을 때처럼 날렵하게 방향을 돌렸지만···

"···카아아아악!"

지옥까지 따라가는 [추적 배송]을 피할 순 없었다.

그렇게,

푸욱!

푹!

푹!

수십 자루의 창이 놈의 몸을 꿰뚫었다.

와이번과 함께 천천히 땅을 향해 가라앉는 녀석.

놈의 비행은 거기까지였다.

.

.

.

놈의 숨이 끊어지자마자, 익숙한 메시지가 떠올랐다.

[차원 계좌가 소유 이전되었습니다.]

[기존 예금주, 라키스, 잔액 : 3,374개]

[이미 차원 계좌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금액이 합산됩니다.]

이후로는 시시한 일들이었다.

H빔에 깔려 버둥거리는 거대 악어에게도 침 맛을 보여주었고···

[기존 예금주, 야투, 잔액 : 1,667개]

[이미 차원 계좌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금액이 합산됩니다.]

얼쩡거리던 와이번들, 득실거리던 리자드맨들까지 모조리 청소했다.

한편, 지상에서는 란슬롯과 함께 합참 본부의 각성자들이 적잖은 활약을 보여준 터였다.

전리품을 배분하는 일이 필요했는데, 이 또한 어렵지 않게 끝낼 수 있었다.

직접 숨통을 끊은 라키스와 야투의 마석은 내 몫이었고, 그밖에 다른 괴물들 또한 죽이자마자 자동으로 계좌에 마석이 꽂힌 상태였으니.

그저, 바닥에 널브러진 시체들에서 회수한 마석만 합참본부에 전달해주면 될 따름이었다.

이 또한 적은 액수는 아닌지라, 그들의 전력 강화에도 큰 도움이 될 터였다.

이러나저러나···

[보유하고 계신 마석은 도합 12,757개입니다.]

내 계좌는 또다시 1만 개를 돌파했다.

휘이이···

전투는 승리로 마무리 지었다.

주변으로 널브러진 괴물들의 사체.

우리는 그 모두가 내려다보이는 요새의 성벽에 올라 있었다.

유성철이 내게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아무래도···"

"예. 인천으로 갈 겁니다."

더할 나위 없는 승리였지만, 이걸로 끝낼 순 없었다.

이미 놈들이 인천에 둥지를 틀고 있었으니까.

그 와중에도 내 머리 위에는 [서울 대표]라 쓰인 붉은 글씨가 둥둥 떠올라 있었다.

"계속해서 저를 노리겠죠. 아무래도···"

내가 덧붙였다.

"수도권 대표 한번 해봐야겠습니다."

39. 동굴 속 마법 대여점 (1)

전투가 마무리되자마자, 우리는 인천의 소식을 들었다.

처음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이곳 용산에서의 패전 소식을 접한 것인지, 사브로스 차원의 침략자들은 돌연 방어 태세로 돌아섰다.

"···아예 굳히기에 들어가려는 것 같습니다."

17사단의 장교는 그렇게 말했다.

인천은 그야말로 마굴이 되어가고 있었다.

바닥, 또는 건물을 넝쿨처럼 타고 자라난 단단한 물질.

그것이 차이나타운을 덮고, 감싸며 완전히 새로운 지형을 만들어내고 있노라고.

"서울 침공은 실패했지만, 적어도 인천은 지키고 싶겠죠."

유성철이 덧붙였다.

놈들은 게이트 포탈을 통해 들여온 병력 중 상당수를 이곳 서울로 보낸 터였다.

그런 병력이 거의 전멸하다시피 했으니, 방어 자세로 돌아서는 건 당연한 전략일 터.

이곳 서울에서 승리를 거두긴 했지만, 그렇다고 멍하니 있다간 인천을 고스란히 적들에게 빼앗기게 될 터였다.

"그렇겐 안 되죠."

다른 방도가 없었다.

한시라도 빨리 인천으로 넘어가는 수밖에.

이번에도 역할을 나누었다.

합참본부의 주변 대로에는 피딱지로 얼룩진 괴물들의 사체가 가득했다.

향후 이와 같은 싸움이 재차 벌어질 것을 대비해 주변을 정돈할 필요가 있었다.

더욱이, 그간 1군단으로 인해 미뤄졌던 군 본연의 임무 또한 수행해야 할 터였다.

이번 전투를 위해 사전에 대피시켜두었던 주민들을 되돌려놓는 것은 물론, 서울 전역에 대한 인명구조와 물자배급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더불어 그 과정에서 적들과의 전투에 보탬이 될 만한 각성자들을 모집하고 선발하는 일을 수행할 것이었다.

물론, 인천으로 향할 나에게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휘이이···

내가 선 곳은 국통사 사령부의 연병장.

그 앞으로는 60명가량의 장교 또는 부사관들이 도열해 있었다.

도대체 언제 만든 것인지는 몰라도, 앞 열두 명은 요란한 색감의 깃발을 휘두르고 있었다.

"아··· 저거 하지 말라니까!"

여기에 합참본부 예하, 아공간 사령부라는 낯부끄러운 이름을 붙이겠다는 유성철을 가까스로 뜯어말렸는데, '대령 김정겸'이 금빛 자수로 적힌 빨간 깃발이 휘둘러지는 것만큼은 미처 막지 못했다.

어젯밤에도 김솔이 남자 휴게실에 쳐들어와 퍼드드득 바람 소리가 나부끼게 저 깃발을 흔들어댔는데, 분명 갖다 버렸음에도 무슨 수를 쓴 것인지 기가 막히게 되돌아온 깃발이 도열한 군인들의 손에 들려 있었다.

"김정겸 대령을 향하여··· 경례!"

"추웅- 서엉!"

아공간 안에 부대라도 창설한 모양새였지만, 사실 그런 것까지는 아니었다.

그저 손을 빌리고 했을 뿐.

블랙호크부터 천마, 국통사에 딸린 각종 통신 장비들까지.

아공간 안에는 내가 가지고 있지만, 정작 다룰 줄 모르는 물건들이 즐비했다.

60명의 전문 주특기를 가진 군인들.

얼마 전 입찰 경쟁에서 미사일을 발사해줄 화기 관제사를 조수석에 태웠던 것처럼, 이들은 내가 이미 가지고 있는, 또는 새로 불하해 줄 군용 장비들을 다뤄줄 전문 인력들이었다.

잘 곳이야 국통사의 생활관을 내어주면 되었고, 식량 또한 프레시 센터에 있는 밀키트나 물류센터의 가공식품들을 전해주면 되었다.

다만 낯선 이들로 인해 가족들이 불안해하지는 않도록, 물류센터나 위병소 근처에 있는 사령관 관사, 그리고 간부생활관으로는 넘어오지 말라 일러두었다.

나란히 도열한 수십 명의 병력을 보며, 자리에 참석한 작전본부장 유성철이 눈물지었다.

"······드디어."

"···드디어는 뭐가 드디어에요."

항상 그랬지만, 이번에도 군의 소속이 되겠다는 식의 이야기는 일언반구도 내뱉지 않았다.

나는 그저 주변의 모든 사람이 안전하게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 다짜고짜 쳐들어오는 외계인 놈들을 쳐부수고 있는 것뿐이었다.

그저 지금으로서는 국가의 재건을 목표로 하는 합참본부와 뜻이 맞아 함께 움직이고 있을 따름.

그러니 애당초 저들은 내 휘하의 병사가 아니며, 아공간에 들어왔다 한들 새로운 부대가 창설된 것도 아니었다.

그저 멸망이라는 대상에 발맞추는 협력자들일 뿐이다.

그런 내 생각은 아는지 모르는지, 유성철은 덥석 내 두 손을 마주 잡았다.

"정말 고맙습니다. 정겸씨."

아공간에 군을 들였다는 것.

어쩌면 그건 서로가 신뢰를 나눴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물론 '강퇴'가 가능할뿐더러, 이곳 아공간 내에서의 모든 권한이 내게 주어져 있는 건 사실이지만, 가족들을 들여놓은 내밀한 공간이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으니.

나와의 협력을 천군만마처럼 여기는 유성철의 기분도 모르는 것은 아니나···

나로서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사람은 왜 퍼주면서 좋아하는 거지?'

군인 60명.

이건 공짜 용병이나 다름이 아니었으니까.

***

투두두두!

헬기가 인천을 향해 날았다.

단 한 대에 불과했지만, 사실상 안에는 80여명의 사람이 타고 있는 셈이었다.

나는 조종칸에 이용수와 화기 관제사, 그리고 수송칸에 기관총 사수를 비롯한 몇 명을 남겨두고 아공간으로 들어왔다.

아공간에 들어오니 희소식이 하나 있었다.

고이고이 모셔 기르는 씨암탉.

강화석 낳는 거위, 카멜롯이 드디어 강화석을 생산했으니까.

란슬롯이 제 목 뒤를 벅벅 긁으며 내게 따끈따끈한 강화석을 넘겨주었다.

[강화석(D)]

속성 : 없음

옵션 : [유체화]

"오호···?"

이번에도 독특한 옵션이 달린 강화석이었다.

얼마 전 [내성] 옵션이 달린 강화석과 유사하게, 이번에도 [관통]이 달려있지 않았다.

[유체화]라는 뜻 모를 능력이 부여되어 있을 뿐.

"좋아. 어디······"

바로 실험에 들어갔다.

에메스 차원의 형강과 벽돌로 만든 단단한 벽면을 세웠고, [유체화]로 강화한 볼링공을 그 앞으로 발사했다.

쐐애애액!

빠른 속도로 날아간 볼링공은··· 

슈욱!

보기 좋게 단단한 벽면을 통과했다.

아주 탁월한 효과였다.

달리 말해···

"······쓸모가 없잖아?"

[관통] 능력이 없는 것도 모자라, 아예 타격 자체가 불가능했다.

일정 거리를 날아가다가 유체화가 풀리기라도 한다면 엄폐물 뒤의 적을 공격하는 용도로라도 쓸 텐데, 이마저도 없이 그저 유령이 된 공을 종이비행기마냥 던지는 격이었다.

그렇다면 남은 용도는 한 가지였다.

"기사 서임에 써야겠네."

지금쯤 필요한 일이기도 했다.

아공간의 생명유지 시스템과 카멜롯의 생명력 착취를 통해 생산되는 강화석이다.

기사가 늘어난다면 그 생산 속도가 비약적으로 늘어날 테니까.

이번에도 란슬롯의 이야기를 참고했다.

망령이 된 기사들은 저마다 다른 특징과 능력을 갖추고 있었으니까.

이번에 선택한 망령의 이름은 모드레드였다.

생전 어쌔신이었던 녀석에게는 미약한 '은신' 능력이 부여되어 있었는데, 아무리 봐도 이 녀석만큼 [유체화] 옵션과 잘 어울리는 녀석이 없었다.

물론 그간 카멜롯의 망령들이 탁월한 정찰, 염탐 능력을 보여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녀석들에게는 탐색 거리의 제한이 있었을뿐더러, 물리력을 발휘할 수 없다는 단점이 있었다.

은신과 유체화를 두른 모드레드라면 분명 큰 도움이 될 터.

더욱이, 이번에 내가 들고 있는 강화석은 하나가 아니었다.

용산으로 진격해온 도마뱀들을 처치하며 얻은 강화석이 하나 더 주어져 있었으니까.

[강화석(D)]

속성 : 없음

옵션 : [재생]

거대 악어인 '야투'를 처치하고 얻은 강화석이다.

놈의 능력은 그저 단단하고, 힘이 좋다는 데 그치지 않았다.

압도적인 재생 능력.

가뜩이나 7위계인 놈을 처리하기 위해 에픽 등급의 성창을 활용할 수밖에 없었는데, 깊게 찌른 성창 주변으로 새살이 돋아날 만큼 놈의 재생능력은 매서웠다.

그러니 당연했다.

이 [재생] 능력으로 카멜롯의 기사를 만들어낼 생각을 한 것은.

특유의 재생능력이 더해진다면, 그 얇은 뼈다귀 위로 새살이 더 빠르게 솟아오를 것이고 강화석의 생산 또한 한층 더 빨라질 테니까.

그야말로 완벽한 조합이 아닐 수 없었다.

"이거지, 이거야."

"사악한 놈···"

"어떻게 우리 집안에 저런 유전자가···"

양어깨를 쓸어내리는 두 누나.

내가 모르는 사이 아공간이 제법 추워진 모양이었다.

특히, [재생] 옵션을 가진 강화석에 대해서는 란슬롯이 추천하는 바가 있었다.

"아, 그거라면 퍼시발이 괜찮을 겁니다. 그 녀석 언데드이기는 하지만 생전에 정령사였거든요."

카멜롯의 저주에 의해 언데드가 된 그들이었다.

상당 부분 약화되기는 했으나, 어느정도 생전의 능력을 간직하고 있었다.

특히 퍼시발은 카멜롯의 저주와 정령사로서 받은 자연의 축복이 더해져 독특한 외양을 지니게 되었다고 했다.

"좋아. 그럼···"

카멜롯에 [재생] 옵션이 달린 강화석과 마석 500개를 지불했고, 기사로 서임할 망령으로 퍼시발을 선택했다.

후우우욱!

퍼시발의 망령이 카멜롯으로 빨려 들어간 뒤.

머지않아, 나는 그 '독특한 외양'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오···?"

분명 해골이었지만, 뼈는 아니었다.

해골의 모양을 고스란히 본뜬 나무조각, 그리고 그 주변으로 몇 개의 새싹이 새초롬하게 매달려 있었다.

함께 구경하고 있던 두 누나도 감탄을 자아냈다.

"이야··· 정겸아, 이거 마당에 가져다 심어도 돼?"

"···되겠냐?"

그건 안 될 말이었다.

녀석은 앞으로 우리의 든든한 전력이 되어야 했으니.

척!

내 앞에 부복한 나무 기사, 퍼시발의 어깨를 두드리며, 내가 말했다.

"고생했어. 이제 집에 들어가."

"존명."

퍼시발이 또각또각 나무 소리를 울리며 카멜롯으로 들어갔다.

성의 우중충한 그늘 아래.

녀석의 몸에 달린 새싹들이 돌연 시들었다 파릇하게 피어나기를 반복했고···

우우웅!

좋은 동력이 확보된 덕인지, 카멜롯은 여느 때 이상으로 부르르 세찬 구동음을 울렸다.

역시 내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퍼시발을 심어두기에 카멜롯만큼 좋은 화분은 있을 수 없었다.

"어떻게 인간의 탈을 쓰고 저럴 수가···"

"악마 그 자체······"

쓰읍.

비난은 받지 않는다.

나는 그저 이곳 아공간에서의 조화를 추구했을 뿐.

그저 그뿐이다.

***

투두두두!

세차게 돌아가는 프로펠러.

인천으로 향하는 길.

우리는 서서히 그 중간에 놓인 부평에 다다르고 있었다.

나는 그 아래 수송칸 좌석에 앉아 있었다.

맞은 편에 앉은 사람은 무전기의 수화기를 들고 있었다.

내가 과천에서 구출해온 통신 능력자 한경호였다.

그가 유성철과 17사단의 장교의 이야기를 내게 전달해주었다.

"일단은 507여단에 합류했다가 넘어가시는 게 어떨까요? 여기 '입찰 경쟁'에 참여했던 인천 지역 참가자들이 모여있다고 하거든요."

"참가자들이요?"

"예, 지역 대표를 포함해서 대다수가 입찰 경쟁 중에 전사했다고 하는데··· 한 서른 명가량이 살아남았다고 하더군요. 그중 절반은 지금쯤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상황이고, 나머지 열다섯 명이 군 쪽에 복귀해 있다고 합니다."

끔찍한 결과였다.

백 명 중 고작 서른 명이 살아남았다니.

마지막 순간까지 처절했을 그들의 모습이 절로 머리에 그려졌다.

아무리 패배했다지만 누가 그들을 나무랄 수 있을까.

한경호가 말을 이었다.

"전원 각성자라고 하더군요. 그리고 17사단 측에서···"

그가 긴장감이 어린 목소리로, 덧붙였다.

"꼭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며 507여단에 들러주길 부탁했습니다. 놈들이 만들어내고 있는 '지형'에 관해서요."

휙.

우리는 동시에 시선을 돌렸다.

수송칸 창문 너머로 보이는 인천.

차이나타운으로부터 뻗어 나온 시커먼 무언가가 인천 전역을 덮어나가고 있었으니.

시커먼 매연도, 무너진 빌딩도 아닌 물질.

아무래도 게이트 포탈을 통해 넘어온 것은 놈들의 병력뿐만이 아닌 듯했다.

"507 작전참모는 그런 식으로 부르더군요. 일종의··· '테라포밍'일지도 모르겠다고요."

테라포밍.

다른 행성에 지구인들이 살 수 있는 환경을 구축하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

그 동일한 과정이 반대로 이어지고 있던 터였다.

507여단에 들리자는 제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러나저러나 상황 파악이 우선이었으니까.

.

.

.

투두두두!

507여단의 연병장에 내려선 헬기.

마중 나온 여단의 작전참모를 따라, 여단 건물의 지휘통제실로 들어섰다.

인천의 상황을 주시하고 있던 507여단의 간부들.

그리고 입찰 경쟁에 참여했던 열다섯의 각성자들이 나란히 의자를 채우고 있다.

"먼 길 넘어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김 대령님."

"아, 예···"

어쩌다 보니, 한 명씩 자리에서 일어나 차례로 악수를 주고받는 상황으로 이어졌다.

그렇게 각성자들과도 차례로 인사를 주고받던 찰나.

"······김정겸?"

귀에 익은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하자마자, 나는 소스라치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백민우?

절친한 대학 친구가 바로 이곳에 있었으니까.

40. 동굴 속 마법 대여점 (2)

우적우적.

우선은 밥부터 먹였다.

백민우를 비롯한 각성자 생존자들.

그리고 507여단의 간부 및 병사들이 미친 듯이 음식을 퍼먹었다.

어머니와 오지수가 만들었던 음식 중 상품으로 등록해둔 것들이 있었고, 프레시 센터에서 꺼내온 간단한 즉석식품을 몇 개 섞었다.

전투 식량도 없이 건빵 몇 봉지로 연명하던 그들에게는 둘도 없는 식사였다.

민우가 나를 보며 눈을 빛냈다.

"고맙다, 김대령."

"······"

군대에 가기 전, 대학 1,2학년 동안은 내내 이 녀석과 점심을 먹었다.

그러고 보니, 한번은 민우의 집에서 밥을 얻어먹은 적도 있었다.

공교롭게도 대보름날이었는데, 민우의 어머니께서 이날 오곡밥을 먹어야 복이 들어온다며 우리를 나란히 식탁에 앉히셨더랬다.

그녀의 당부에 따라 최소 열 번, 많이는 서른 번씩 찰진 오곡밥을 잘게 씹었던 그날이 떠올랐다.

더욱이, 잡곡에서 배어 나오는 고소한 쓴물을 씹으며, 어머니와 민우 단둘로 텅 비어있던 그 집을 나지막이 바라보았더랬다.

우적우적.

그런 민우를 내 손으로 먹이고 있었다.

대단히 시간이 지난 것도 아니고, 밥 한 끼 먹이는 게 별 대수겠냐마는, 둥근 달처럼 세상이 홱 뒤집어진 것이 새삼 여실히 느껴졌다.

민우가 어지간히 배를 채웠을 찰나.

평소에 곧잘 먹던 초코우유를 물려주자, 녀석이 그간 인천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줬다.

"여기에서도 입찰 경쟁이 열렸어. 각성한 사람들끼리 나서봤지만 상대가 안 됐지. 나도 참가했었어. 검사 클래스로 각성했었거든. 결국 별 도움은 못 됐지만···"

멸망 이전에도 검도를 했던 민우였다.

중학교 시절에는 지역 대회에 나가 준우승도 한 적이 있다고 했었는데, 그 실력이 어디 가지 않은 모양이었다.

인천에서의 입찰 경쟁이 어떠했는지는 묻지 않았다.

지역 대표가 사망했고, 100명 중 고작 서른 명이 살아남았다.

그 참혹했던 상황을 구태여 상기시킬 필요는 없을 테니까.

하지만···

"···어머니는 무사하시고?"

내 질문이 그보다 더 깊게 민우의 심장을 파고든 모양이었다.

녀석이 털썩 고개를 떨구었다.

학기 중에는 기숙사에 머물렀지만, 방학 때면 인천 집으로 돌아가 어머니와 지내곤 했던 민우였다.

별일이 없었다면 어머니와 같이 머물고 있었을 터.

민우가 대답했다.

"그래서 입찰 경쟁 참가자로 자원했던 거야. 꼭 그 새끼들을 내몰아야 했거든···"

민우의 집은 차이나타운 뒤쪽 주택가에 있었다.

하지만 멸망이 시작된 이래 얼마 지나지 않아, 차이나타운과 그 옆 자유공원이 통째로 입찰 경쟁의 전장이 되었고, 투명한 결계에 가로막힌 탓에 민우는 어머니와 생이별할 수 밖에 없었다고 했다.

만일 놈들을 밀어냈더라면 인천 구역을 되찾아 집으로 향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입찰 경쟁에 실패한 탓에···

"···테라포밍이 진행돼버렸지. 이제 결계는 없지만 들어가려야 들어갈 수가 없어. 지금 차이나타운은 아예 동굴로 뒤덮인 상황이야."

인천에 세워진 게이트 포탈.

그것이 불러들인 것은 비단 적들의 병력뿐만이 아니었다.

게이트 포탈을 타고 흘러든 검은 진흙.

그것은 건물과 건물, 나무와 나무를 타고 올랐고, 이내 하늘을 향해 단단하게 굳어지며 인천 시내 전체를 곳곳이 연결된 거대한 개미굴처럼 만들어버렸다.

사브로스의 존재들이 편히 기거할 수 있고 유리하게 움직일 수 있는 형태로.

완벽한 테라포밍의 방식이었다.

덥썩!

민우가 내 손을 부여잡았다.

"정겸아. 네가 서울 대표가 됐다고 들었어. 여기서 서울로 넘어간 도마뱀들도 모조리 해치우고 왔다고 들었고. 제발 부탁할게. 꼭 좀 도와줘. 나도 목숨 걸고 싸울 테니까."

절절한 부탁이었지만, 예정된 일이기도 했다.

애당초 사브로스 차원의 도마뱀들로부터 이곳 인천을 수복하기 위해 넘어온 참이었으니까.

더욱이, 녀석의 어머니를 구하는 것은 내게도 기꺼운 일이었다.

나는 아직 정월대보름 밤의 쌉쌀한 오곡밥을 기억하고 있었다.

돌이켜보면 그랬다.

내게는 가장 가까운 우리 가족들.

이들은 나의 기억을 이루는 가장 두꺼운 뿌리요 줄기지만, 인연은 그밖에 셀 수 없는 잔뿌리들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진즉 연락이 끊어진 사람도 있다.

멸망 직후 통신 장비들이 먹통이 되며 행방을 알 수 없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이번에 백민우를 만났듯이, 불현듯 돌아와 그래 이런 일도 있었지, 하며 얇은 심지 하나를 태우고 들어오는 기억도 있는 법이다.

모두 하나같이 흐릿한 기억이지만, 먹물 같은 멸망이 그 모두를 뒤덮는 것이 달갑지만은 않았다.

물론, 그 모두를 구하겠노라 자신할 수는 없다.

하지만 갑작스레 들이닥친 멸망을 최전선에서 걷어내다 보면, 알게 모르게 그들에게도 광명이 찾아들 터였다.

인천을 구하는 것이 민우의 어머니를 구하는 일이 되듯이.

민우가 덧붙였다.

"사브로스의 게이트 포탈이 열렸지만··· 그래도 아직 끝난 건 아니야. 게이트 핵이 남아 있다고 했거든."

"···아직 남아 있다고?"

입찰 경쟁에서 한 차례 파괴한 바 있었던 괴이한 노른자.

게이트 포탈을 형성하며 절로 사라지는 줄 알았건만, 꼭 그렇지만은 않은 모양이었다.

"상공회의소가 그렇게 이야기했어. 게이트 핵을 부수면 사브로스의 게이트를 닫을 수 있다고."

패배로 끝난 줄 알았던 입찰 경쟁.

그것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다.

내가 물었다.

"게이트 핵은 지금 어디에 있는데?"

"그게···"

우물쭈물 답하지 못하는 민우.

누군가 나타나 녀석 대신 답해주었다.

507 여단의 작전 참모였다.

"아직 수색 중입니다. 시내 곳곳이 테라포밍 탓에 동굴로 뒤덮여버린 상황이라 수색이 쉽지 않아요. 여러 차례 드론도 띄워봤지만 모두 초입에서 격추당해버렸고요. 이번에 들러달라 요청했던 것도 놈들의 동굴 지대에 대해 설명해 드리기 위함이었습니다."

그가 말을 이어나갔다.

"동굴 바깥까지는 잘 나오지는 않지만, 되레 테라포밍이 진행되고 있는 탓에 놈들의 영역이 점차 넓어지고 있는 실정입니다. 여의치 않다면··· 해병대 쪽에 포격 지원을 요청하는 방법도 고려하고 있고요."

"잠깐만요, 참모님!"

포격이라는 말에 화들짝 놀란 민우가 끼어들었다.

"그 밑에 있을 사람들은 어떻게 하고요?"

"게이트 핵을 찾아내지 못하면 그 이상이 죽습니다. 무차별로 폭격할 것도 아니고요. 놈들의 게이트 포탈이 있는 위치 주변으로 조금씩 반경을 넓혀 갈 겁니다. 찾으면 포격을 멈추면 그만이고요."

작전 참모로서는 차선의 결정이었다.

동굴처럼 뒤덮인 도시와 그 안에 갇힌 사람들.

그들 또한 폭발에 휘말릴 테지만, 게이트 핵을 찾지 못하면 더 큰 피해로 번지리라는 건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하지만···

"제가 찾아드리죠. 일단 좀 더 가깝게 붙어야 해요."

내가 끼어들었다.

최선을 두고 구태여 차선을 택할 필요는 없는 법이었으니까.

카멜롯의 망령들을 활용할 차례였다.

***

507여단의 위치는 부평.

때문에 인천의 상황을 살피기 위해서는 좀 더 가깝게 접근할 필요가 있었다.

스멀스멀 도시를 뒤덮은 놈들의 동굴 벽.

차이나타운에서 시작된 사브로스의 테라포밍은 어느덧 제물포역에 다다라 있었다.

우리는 그로부터 멀리 떨어지지 않은 인천대 제물포 캠퍼스에 자리를 잡았다.

멀찍이서 사브로스 차원의 진흙이 스멀스멀 넘어오고 있었지만, 그 정도 시간이면 충분했다.

후욱!

후욱!

어느덧 네 명까지 소환된 기사들.

남은 망령은 여덟에 불과했지만, 여전히 많은 숫자였다.

휘익!

지형지물을 통과할 수 있는 녀석들이다.

차이나타운을 향해 한껏 쏘아져 나간 망령들은, 인근 주택가에 이르러 스르륵 동굴 벽을 타고 내려갔다.

줄곧 망령들의 시선을 공유받고 있던 나는, 망령 라이오넬이 익숙한 대문을 후욱 통과하자마자 빙긋 미소를 지었다.

그러곤 초조하게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민우의 어깨를 불끈 움켜쥐었다.

"어머니 무사하시다."

"뭐···?!"

물론 잘 계시다곤 할 수 없었다.

바싹 매마른 싱크대.

텅 빈 찬장.

낡은 자개장에서 두꺼운 솜이불을 꺼내놓으신 민우의 어머니는 몸을 옆으로 뉜 채 쓸쓸하게 누워계셨으니까.

식량도, 마실 물도 다 떨어졌고, 밖을 돌아다니는 괴물들 탓에 집에서 나갈 수조차 없는 상황.

몸을 파고드는 무력감에 대응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을 터였다.

민우에게는 특별히 덧붙이지 않았다.

그저 아직 무사하시니, 게이트 핵을 부수고 구해내면 될 거라 말해주었을 뿐.

"고맙다··· 고마워 정겸아···"

눈물 콧물 쏟는 백민우.

이상한 말이지만, 녀석의 고맙다는 말이 영 불편했다.

하루라도 빨리,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평소의 내 친구로 돌아올 수 있기를 바랄 뿐.

그리고 그건, 이제 내게 달린 문제였다.

"어디 보자···"

이제는 사브로스 차원의 '게이트 핵'을 찾을 차례였다.

놈들의 동굴은 골목과 골목, 거리와 거리를 복잡한 혈관처럼 연결하고 있었다.

그 사이를 통과하는 망령들은 먼 거리를 왕복하고, 같은 자리를 빙빙 돌며 부단히 놈들의 심장이 숨어 있을 장소를 수색해나갔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안 보이는데?'

놈들의 게이트는 발견했다.

푸른 빛의 영롱한 포탈.

그 안에서는 지금까지도 리자드맨들이 한두 마리씩 스멀스멀 기어 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 주변으로부터 천천히 영역을 넓혀갔음에도, 게이트 핵은 커녕 그걸 지키고 있을 만한 병력조차 찾아 볼 수 없었다.

놈들은 그저 이곳저곳으로 뻗은 동굴의 출입구를 관리하며 서서히 인천을 덮어나가고 있는 테라포밍에 집중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나는 잠시 고민에 잠겼다.

게이트 핵.

사브로스 차원으로서도 반드시 지켜야 할 물건이었다.

당연히 놈들이 감출 수 있는 최적의 장소에 숨겼을 터.

잠시 이런저런 생각을 주억거리던 나는, 한 가지 생각에 다다랐다.

자연적인 동굴이 아니다.

테라포밍으로 인해 자라나고, 빚어진 동굴 지대.

만일 그렇다면···

'아예 밀실이 있을 수도.'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동굴이다.

'비밀의 방' 하나쯤은 만들어져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터.

곧장 망령들에게 온 벽을 뚫고 다녀보라 지시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은은한 불빛으로 밝혀진, 좁디좁은 방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뭐지?'

하지만 그 내부는 사브로스 차원과는 퍽 어울리지 않았다.

고풍스러운 나무 책상.

그 위로는 수십 개의 잉크병이 쌓여 있었고, 책상 뒤에 놓인 작은 책장에는 낡은 두루마리 양피지가 끈에 동여 매인 채 빼곡하게 꽂혀 있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훠이! 훠이! 뭐야 이게!"

인간 노인 한 명이 나의 여덟 망령을 내쫓고 있었다.

큼지막한 코, 잘게 뻗은 회색 머리칼.

하지만 표독스러운 눈만큼은 어딘가 소름끼치는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역시, 이곳에 있었다.

사브로스 차원의 게이트 핵.

짧은 팔다리가 달린 구 형태인 게이트 핵은, 아무렇게 달린 눈 코 입을 덜렁거리며 망령을 내쫓는 마법사를 시시덕거리며 즐겁게 바라보고 있었다.

생명의 반죽, 정확히 그런 인상이었다.

내가 에메스 차원의 게이트 핵을 부쉈을 때 느꼈던 것과 정확히 궤를 같이하는 역겨움이었다.

망령들을 보다 못한 마법사가 결국 칼을 빼 들었다.

정확히는 그의 뒤에 놓인 책장을 허둥지둥 뒤적거리더니, 그중 두루마리 하나를 꺼내 북 찢어 넘겼다.

그러곤 외쳤다.

"에··· 엑소사이스!"

휘이익!

노란 장막이 놈이 찢은 양피지를 중심으로 퍼져나갔다.

다섯의 망령들이 공간에서 밀려났고, 나머지 세 망령은 그 자리에서 소멸해버렸다.

띠링!

[카멜롯의 망령, 헥터, 트리스탄, 캐러독이 소멸했습니다.]

[재생산까지 남은 시간 23h 59m···]

정체를 알 수 없는 노인.

방법은 알 수 없으나, 망령들을 내쫓아버렸다.

더욱이, 사브로스의 게이트 핵과 희희낙락하는 걸 보면, 적어도 지구의 인간이라 보기는 어려웠다.

'분명, 타차원의 존재야.'

사방이 둘러싸인 공간.

마침내 놈들의 심장을 발견했지만, 예상치 못한 방해꾼이 숨어 있었다.

"아무렴, 지키는 사람 하나 없을 리는 없겠지."

이번에는 내가 직접 행차해줄 생각이었다.

놈의 아담한 방으로.

하지만 그 전에···

"먼저 가서 손 좀 봐주고 있어야겠다. 모드레드."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유체화] 능력을 가진 유령기사, 모드레드.

녀석을 먼저 보내볼 참이었다.

41. 동굴 속 마법 대여점 (3)

사방이 동굴 벽으로 가로막힌 밀실.

천장에는 전등을 대신한 라이트 마법이 두둥실 떠올라 있었다.

가운데 자리 잡은 늙은 마법사 슐젠.

그가 터덜터덜 방 한쪽 구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곤 구석에 놓인 포대 하나를 거꾸로 집어 올렸다.

차르르르르르륵!

모래처럼 쏟아지는 마석.

희번뜩 눈을 빛내는 존재가 있었다.

눈코입이 기괴하게 뒤섞인 구체.

사브로스 차원의 게이트 핵이었다.

타다다닥!

놈이 짧은 팔다리를 휘저으며 미친 듯이 달려왔다.

으적으적.

꿀꺽!

정수리에 달린 눈을 껌뻑거리며, 어깨 날갯죽지에 난 구멍으로 콧김을 내뱉는 녀석.

게이트 핵은 혀를 날름거리며 바닥에 떨어진 마석을 게걸스럽게 먹어 치웠다.

슐젠은 소름 끼친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그러곤, 하늘을 향해 혼잣말처럼 외쳤다.

"···코스타스, 네크로맨서가 찾아올 거다."

사실 그것은 혼잣말이 아니었다.

이곳 지구를 침공한 사브로스 차원의 사령관, 코스타스를 향한 경고였으니까.

사사삭.

스르르륵.

기나긴 동굴의 벽면을 스치며, 울림을 통해 그 대답이 전해져왔다.

-네크로맨서라고?

"그래, 틀림없다. 망령을 봤거든."

-그럴 리 없다. 한국 지역 입찰 경쟁에 네크로맨서가 참여했다는 소식은 들어본 적 없어.

"코스타스, 내가 잘못 보기라도 했다는 거냐? 내가 누군지 몰라?"

-안다, 슐젠. 네가 아케인의 마법사였다는 것. 꽤 오래전의 일이지만.

뿌득.

마법사 슐젠은 이를 갈았다.

꽤 오래전이라는 말이 그의 폐부를 찔렀으니까.

그가 덧붙였다.

"입찰 경쟁에서 온 놈이 아니야. 진즉 자유개척 때부터 들어와 있었겠지. 끽해야 8위계쯤 될 테고."

-그래? 그렇다면 그렇게까지 대단한 놈은 아니군. 하지만···

슐젠과 코스타스는 같은 이미지를 떠올렸다.

졸개 한 마리 한 마리를 처리하고, 자신의 해골 군단으로 편입해 나가며 사브로스의 영역을 야금야금 잠식해나가는 네크로맨서의 모습을.

슐젠이 당부했다.

"그래, 와이번이든 도마뱀들이든 쫄따구들은 미리 다 치워놓으라고. 뼈다귀로 달그락거리는 모습 보고 싶지 않다면."

-그러마. 아예 공터 쪽에 모아두는 게 낫겠군. 각개격파만 당하지 않으면 문제는 없을 테니··· 그건 그렇고, 괜찮겠나?

걱정스러운 목소리에, 슐젠이 흐흐 웃음을 흘렸다.

"나 슐젠이야. 자유개척이나 전전하는 하급 네크로맨서따위······"

-게이트 핵 말이다. 네 목숨 따위 아무래도 상관없어. 게이트 핵만 제대로 지키면 돼. 그게 우리 약속이니까.

"이 구렁이 새끼가 말을 해도······"

그때였다.

후우욱!

밀실로 들어온 영체.

슐젠은 놈으로부터 조금 전 망령들에서 느꼈던 흑마술의 기운을 감지할 수 있었다.

"거봐! 내가 말했지!"

하지만 이번만큼은 단순한 망령이 아니었다.

스스륵 굳어지는 몸.

어느덧 완연한 해골기사가 된 망령의 정체는 카멜롯의 기사, 모드레드였다.

차갑게 내려앉은 긴장감.

게이트 핵을 뒤로 감춘 슐젠이 네크로맨서의 병사를 마주했다.

***

채앵!

이어지는 모드레드의 공격.

나는 살아남은 다섯 망령을 통해, 동굴 속 밀실에서 이루어지는 전투를 지켜보고 있었다.

회색 머리칼과 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노인.

그는 보기보다 상당한 실력자였다.

타앗!

재빨리 움직인 그가 두루마리가 빼곡히 꽂힌 책장을 등졌다.

그러곤 능숙하게 두루마리를 펼치고 찢으며 모드레드의 공격을 받아치기 시작했다.

"그리스!"

미끄덩!

검을 휘두르던 모드레드가 바닥으로 넘어졌다.

마법사는 곧장 다음 종이를 찢었다.

"매직 미사일!"

피웅.

흰색 광채가 눈 깜짝할 사이 모드레드를 향해 날아들었지만,

휘익!

[유체화]를 통해 유령으로 되돌아간 모드레드를 그대로 통과해버렸다.

마법사가 이내 '엑소사이스'를 외치며 영체가 된 모드레드를 공격했지만, 이번엔 유체화를 해제한 모드레드가 역으로 칼을 내질렀다.

카앙!

마법사가 로 자신과 게이트 핵을 감쌌다.

그러곤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코스타스! 지금이다!"

그때였다.

타아아아아앙!

와르르르!

폭삭 무너지는 한쪽 벽면.

갑작스레 날아든 거대한 꼬리가 동굴 한쪽을 그대로 날려버렸다.

쿠구구구···

놈들의 밀실이 마침내 표면으로 드러났다.

거기까지는 좋았으나,

[카멜롯의 기사, 모드레드가 소멸했습니다.]

[모드레드가 카멜롯의 망령으로 되돌아갑니다.]

공격에 휘말린 모드레드가 파괴되어버렸다.

데구르르 바닥을 구르는 강화석과 대형 마석.

천천히 다가온 마법사가 슬쩍 강화석을 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러곤, 두 개의 대형 마석을 등 뒤로 휙 던져놓았다.

합!

촐랑촐랑 움직이던 게이트 핵.

녀석이 모드레드가 죽고 남긴 마석을 꿀떡 삼켜버렸다.

후욱.

주변을 맴도는 망령들을 보며, 마법사가 씨익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내게 전하는 메시지였다.

"흐흐. 이제 정신 좀 차리겠나, 네크로맨서? 이거 어쩌냐? 너에겐 꽤 큰 돈일 텐데. 차라리 모습을 드러내라. 10초 내로 온다면 강화석은 되돌려 주마."

놈이 나를 조롱했다.

마침 그리로 가고 있기는 했다.

아무리 헬기를 탔다 한들 10초만에 도착할 수 있는 거리는 아니었지만.

그때, 쉭쉭 하는 스산한 소리를 내며, 동굴 같은 목소리가 울렸다.

-길을 텄으니 빨리 게이트핵을 데리고 빠져나가라. 슐젠.

"뭐? 갑자기 왜? 그깟 네크로맨서 상대가 안 된다니까···?"

-지금 이곳으로 오고 있는 건 네크로맨서뿐만이 아니야. 전쟁에서 승리한 서울 대표가 이리로 넘어오고 있다. 분명 게이트핵을 노릴 테지.

"이봐, 코스타스. 니들이 제 할 일 똑바로 못해놓고 왜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야? 네가 알아서 해. 나는 이 책장 두고는 아무 데도 못 가니까."

-슐젠!

"나를 여기다 박아놓은 건 애초에 네놈들 생각이었어! 이제 와서 말 바꿀 생각 마."

마법사의 말을 마치자, 스스슥 동굴을 맴돌던 거대한 꼬리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쉬르르르륵!

길고 거대하게 이어지는 몸.

녀석은 온몸이 비늘로 덮인 한 마리의 구렁이였다.

그 크기가 얼마나 거대했던지, 놈의 몸이 동굴의 통로 곳곳을 거의 가득 메울 지경이었다.

망령의 눈으로 보더라도, 녀석의 몸 일부밖에 시선에 담을 수 없을 만큼.

쉬익!

어디선가 소름끼치는 혓바닥소리를 울리며 거대 구렁이, 코스타스가 마법사를 쏘아붙였다.

-스크롤 없이는 아무것도 못하는 반쪽짜리 마법사 주제에···

"이 새끼가··· 뭐라고?"

놈들은 주변을 떠다니는 망령들의 존재조차 잊은 채, 저들끼리 언성을 높이고 있었다.

더욱이 이 모든 촌극은 '테라포밍'으로 형성된 동굴 안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즉 나의 발아래였다.

타고 온 헬기가 동굴 위쪽에 착륙한 참이었으니까.

이 아래 게이트 핵이 있다.

아무리 동굴 천장이 가로막고 있다고는 하지만, 하늘에서 축복받은 쇳덩어리들을 떨구고, 미사일을 쏟아붓는다면 손쉽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여기는 놈들의 근거지이기 이전에, 인천 도심의 한복판이기도 했다.

대규모 공격을 쏟아붓는다면 놈들을 일망타진할 수도 있으나, 그러기엔 민우의 어머니처럼 집에 숨어 있을 인천 사람들이 공격에 휘말릴 위험이 있었다.

더욱이···

"···저건 좀 많이 탐이 나는데?"

늙은 마법사가 애지중지 등지고 있는 책장.

그 안에는 각종 마법 스크롤이 빼곡하게 들어 있었으니.

아쉽게도 나는 레벨 4에서 주어진 저장 가능 횟수를 이미 소진한 상태였다.

하지만 한 가지, 저 책장을 넣을 방법이 남아 있었다.

팍스가 정보창을 띄워주었다.

띠링!

---

◈ 카테고리 상품 등록(2)

-물류센터에 포함될 새 카테고리를 신설할 수 있습니다. (최대 2회)

(단, 카테고리 신설에 비용이 소모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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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의 의 심화 버전이다.

이미 아공간에 들어있는 '물류센터'나 '군부대'와 같은 카테고리에 해당하는 사물을 저장할 수 있는 능력.

여기서는 한술 더 떠, 그 카테고리 자체를 새롭게 창조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해···

'뭐든 넣을 수 있겠지. 이름만 잘 때려 맞춘다면.'

다만 공짜는 아니다.

카테고리를 신설하는 데에도, 그렇게 신설된 카테고리에 물건을 채워 넣는 데에도 돈이 필요하니까.

하물며 아직 개방된 능력도 아니었다.

"팍스, 개방해줘."

[알겠습니다.]

[능력 개방을 위한 비용으로 마석 1,000개를 받았습니다.]

[남은 마석은 10,757개입니다.]

이제 관건은 새롭게 설정할 카테고리의 '이름'이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나는 망령을 통해 놈들의 대화에서 빠짐없이 엿들은 터였다.

"'마법 스크롤' 카테고리를 신설해줘."

[카테고리 신설에는 비용으로 마석 5,000개가 소모됩니다.]

[카테고리 신설을 진행하시겠습니까?]

오천 개.

상상 이상으로 비싼 비용이었지만, 망설이지 않았다.

"더럽게 비싸네. 그래, 해 줘."

[알겠습니다.]

[마석 5,000개 받았습니다.]

[카테고리 신설 진행 중···]

[남은 마석은 5,757개입니다.]

연이은 소비의 향연.

하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다.

바로 저 책꽂이에 있는 마법 스크롤 모두를 빨아들여야 했으니까.

팍스에게 요청했다.

"저 책꽂이에 있는 스크롤 모두··· 으로 아공간에 넣어줘. 대신, 전부는 말고 종류별로 하나씩만."

['마법 스크롤' 카테고리에 해당하는 품목입니다.]

[등록 비용 책정 중···]

띠링!

[등록에 필요한 총비용은 마석 3,914개입니다.]

"좋아, 진행해."

[비용 전달받았습니다.]

[남은 마석은 1,843개입니다.]

그렇게··· 

[등록을 진행합니다···]

[1서클 마법 스크롤, '매직 미사일'을 얻었습니다.]

[1서클 마법 스크롤, '라이트'를 얻었습니다.]

[1서클 마법 스크롤, '아이스'를 얻었습니다.]

···

[2서클 마법 스크롤 '파이어 볼'을 얻었습니다.]

[2서클 마법 스크롤 '아이스 스피어'···

내 아공간에 마법이 들이차기 시작했다.

***

책장을 등지고 있던 슐젠.

뒤를 더듬거리며 마법 스크롤을 매만지던 그가 묘한 위화감에 사로잡혔다.

홱!

몸을 돌렸다.

"······뭐지?"

자신의 수족처럼 사용하는 책장이었다.

외견상으로는 별반 차이가 없었지만, 어딘가 듬성듬성해졌다는 묘한 느낌.

마치 그중 수십 장이 소리소문없이 사라진 것만 같았다.

"나 참······ 정신 차려야지."

고개를 저었다.

고작 하급 네크로맨서를 두고 긴장이라니.

세월이 무색하게 느껴지는 슐젠이었다.

그때였다.

피잉!

피잉!

다발처럼 뿜어져 나가는 섬광.

슐젠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마법이라고?"

비록 추방당한 몸이지만, 그 또한 아케인의 마법사였다.

1서클 마법인 매직 미사일 하나 못 알아볼 리 없었다.

콰아앙!

콰앙!

수십 발의 매직 미사일이 거대한 코스타스의 몸통을 타격했다.

그 광경을 목도한 슐젠이 다급하게 외쳤다.

"코스타스! 네크로맨서가 아니었어! ···마법사, 마법사야!"

문제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이게 대체 몇 발이야···?"

피잉!

피잉!

고작 1서클 마법이지만, 그 위력이 문제가 아니었다.

더블, 심지어 트리플도 아니다.

자그마치 수십 발에 달하는 매직 미사일.

아케인의 대마도사가 오더라도 이만한 수의 매직미사일 발사할 수는 없었다.

"설마··· 수십 명인가?"

하지만 그럴 리 없었다.

아케인의 마법사가 이런 하위 차원에, 그것도 수십 명씩이나 몰려올 턱이 없었으니까.

한편, 코스타스는 묵묵부답이었다.

슐젠이 허둥지둥 마법사의 침입을 알렸음에도.

초조해진 그가 다시금 목청을 틔웠다.

"코스타스! 듣고 있나? 이게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마법사가···"

하지만···

-슐젠.

돌아온 것은 지금껏 들어본 바 없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코스타스의 음성이었다.

우르릉.

그의 낮은 목소리가 동굴을 숨 막힐 듯 조여왔다.

-게이트 핵이 그렇게 탐이 나더냐?

"···뭐?"

그제야 슐젠은 무언가 단단히 잘못 돌아가고 있음을 느꼈다.

정곡을 찌르는 코스타스의 말을 들으며.

-이깟 하위차원에 들락거릴 만한 반푼이 마법사가 너 말고 누가 또 있다고?

치이이···

수십 발의 매직 미사일이 타격한 지점.

한껏 그을린 코스타스의 살점이 연기를 피워내고 있었다.

"코스타스. 잠깐···"

-우리는 네가 원하는 대로 포로를 제공해왔다. 포로들을 산 채로 갈아 넣는 너의 그 역겨운 실험도 눈감아주었지. 고고한 아케인 차원과는 달리 우리는 너에게 아량을 베풀었어.

휘이이···

잠시 정적으로 물든 동굴.

하지만 이내 분노에 찬 고성이 휘몰아쳤다.

-니가 감히 사브로스를 배신해? 너 같은 추방자 떨거지를 받아준 사브로스를?

"뭔 개소리야! 뱀 대가리 새끼가!"

사르르르르르륵!

동굴 내부에 어지럽게 엉켜있던 코스타스의 몸이 빠르게 움직였다.

그리고···

마침내, 코스타스의 거대한 머리가 슐젠의 눈앞에 당도했다.

-공격은 잘 받았다. 기습은 제법이었지만··· 위력이 형편없더군.

쉬리릭!

코스타스의 가느다란 혓바닥이 위협적인 춤을 추었다.

"······젠장."

좀처럼 대화가 통하질 않는다.

설득을 포기한 슐젠은 슬그머니 뒤로 손을 뻗었다.

그의 무기들이 담긴 '책장'을 향해.

하지만···

'···어?'

아무리 손을 저어봐도, 단 한 장의 스크롤도 잡히질 않았다.

아니 오히려,

"···이게 뭐야?"

쑤욱!

품에 꽂아두었던 몇 장의 스크롤이 돌연 공중으로 튀어 올랐다.

그러곤···

쏘옥!

빛이 새어 들어오는 동굴의 천장 틈새로 귀신처럼 빨려 들어갔다.

"아··· 안돼!"

한 땀 한 땀 주문식을 적어 내린 마법 스크롤이다.

책상에 놓인 수십 개의 잉크병과 펜만 보더라도, 그의 노고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아케인 차원이 그의 마나하트를 박살 낸 이래, 스크롤은 그의 마법의 전부이자 지난 세월의 고생이 담긴 주마등 같은 기억이었다.

하지만···

사라진다.

후루룩 하늘로 치솟는 그의 세월.

그 모두를 송두리째 빼앗길 수밖에 없었다.

날벼락처럼 찾아든 인력(引力)에 의해.

"······"

그러나, 차마 절규할 시간조차 없었다.

쐐애애액!

거대한 구렁이의 입이 그를 덮쳐오고 있었으므로.

슐젠은 뭐라도 항변하려 했으나···

카압!

코스타스는 밀실에 있던 모든 것을 한 입에 집어삼켜버렸다.

슐젠과 그의 책장, 책상, 잉크와 마력 종이를 비롯한 사소한 물품들 하나까지도.

끗끗 웃음을 거두지 못하는 게이트 핵도 함께.

-잘 가라. 반푼이 마법사.

코스타스의 목적은 단순했다.

하나는 배신자 슐젠을 처치하는 것.

다른 하나는 다가올 적들로부터 게이트 핵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게이트핵을 입안에 붙잡아 둔 채, 나머지를 거칠게 목 너머로 밀어 넣었다.

넘실넘실 넘어가는 늙은 마법사과 잡동사니들.

그리고···

뿌득!

목에 힘을 주어 입에 들어온 슐젠의 몸을 부러뜨렸다.

짧디짧은 비명을 내지른 슐젠이 코스타스의 위액에 서서히 녹아들었다.

늙고, 탐욕스럽고, 또 누구보다도 잔인했던 아케인 마법사의 씁쓸한 누린내가 코스타스의 기분을 제대로 망쳐놓았다.

쉬르르르륵!

코스타스의 움직임은 기민했다.

그는 다짐했다.

-모든 병력을 잃더라도, 아니, 내 목숨을 걸어서라도 게이트 핵을 지킨다.

그것이 '손실'로부터 사브로스를 지킬 유일한 방법이었으니까.

하지만···

콰앙!

콰아앙!

-!!??

아찔한 타격을 느끼며, 코스타스는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것이 슐젠의 매직 미사일이라는 것.

하지만 그는 이미 죽었다는 것.

그 기민한 지혜가 코스타스를 곤경에 빠뜨렸다.

42. 되찾을 것들을 위한 기념비 (1)

마법사 슐젠으로부터 얻어낸 수십 종의 마법들.

그중 공격 마법을 골라냈고, 출하를 반복했다.

뭉텅이로 쌓인 마법 스크롤을 몇 초마다 집어 들었고,

북! 북!

즉시 찢어 마법을 발동했다.

슈우우웅!

곧장 날아든 십수 발의 매직 미사일은,

콰아아앙!

거대 구렁이의 몸체를 연달아 타격했다.

'코스타스라고 했었나.'

마법사와의 대화로 미루어본다면, 놈의 정체는 이곳 인천을 점령한 사브로스 차원의 사령관이었다.

제 동료였던 마법사 슐젠을 먹어 치운 코스타스는 이내 맹렬히 몸을 굴리며, 동굴의 통로 곳곳을 휩쓸고 다니기 시작했다.

쿠구구구구!

"···스치기만 해도 즉사겠는데."

지하철 선로를 내달리는 열차와도 같았다.

놈이 쇄도할 때마다 포탈에 몸을 숨겼고, 지나갔다 싶으면 다시 나와 공격을 감행했다.

사용할 수 있는 무기는 제한적이었다.

어느덧 동굴로 뒤덮인 차이나타운이었지만, 잠시 그늘에 가려졌을 뿐 상가와 주택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으니까.

H빔을 떨구거나 헬파이어 미사일 같은 폭발 무기를 사용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콰과과과광!

사브로스의 사령관답게, 놈도 상당한 척력을 지니고 있었다.

비록 볼품없는 화력을 가진 매직 미사일이었지만, 같은 부위에 수십 발이 연달아 박히니 그 또한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더욱이, 나는 강화된 에메스의 성창을 함께 섞어 날리고 있었으니까.

콰득!

성창이 놈의 비늘을 꿰뚫었고,

콰과과광!

곧 이어 수십 발의 매직 미사일이 날아들었다.

콸콸 쏟아지는 보랏빛 체액.

벌겋게 드러나 꾸물거리는 생체 조직은 거대한 뱀 코스타스가 상처 입고 있다는 명확한 증거였다.

명확히 유리한 싸움이었다.

동굴을 휩쓸고 다니는 놈의 공격은 분명 매서웠지만, 내게는 포탈이라는 확실한 방어 수단이 주어져 있었으니까.

그저 치고 빠지기를 반복하면 될 터였다.

하지만, 놈에게도 한 가지 수단이 남아 있었으니.

훌렁.

훌렁.

놈이 '탈피'를 시작했다.

보랏빛 체액의 누수가 멈췄다.

꾸물거리던 살점은 죽은 껍질과 함께 벗겨져 나갔고, 상처 입은 자리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단단한 새 살점과 비늘이 들이 차 있었다.

"···무적이잖아?"

그야말로, 가공할만한 재생력이었다.

수십 자루의 창을 한 번에 꽂는다 한들, 놈은 새살을 틔워 그 창 모두를 튕겨낼 것만큼 강한 생명력을 지니고 있었다.

우우우웅.

파르르 떨리는 동굴 벽.

그 벽면을 타고, 놈이 내게 목소리를 전해왔다.

-넌 누구지? 네크로맨서? 설마··· 정말 마법사인 게냐?

녀석은 혼란스러운 눈치였다.

망령이 돌아다녔고, 내 주위에는 란슬롯을 비롯한 해골 기사들이 있었다.

또 한편으로 나는 마법 스크롤을 찢어 놈에게 '매직 미사일'과 '아이스 스피어'를 날려댔다.

'자동 출하'를 이용해 놈에게 매 초마다 강화된 성창 꼬치를 꽂아준 것은 물론이다.

요컨대··· 한 마디로 설명이 불가했다.

"이것저것 취급해. 없는 것 빼고 전부."

-뭐?

세상의 모든 것을 신속하고 정확하게.

나의 물류센터를 정의하기에 이보다 더 정확한 표현이 있을까?

잠시 정적이 흘렀고, 곧 놈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동굴을 울렸다.

-그렇군··· 역시 서울 대표였나?

서울 대표.

맞다.

그것이 상공회의소가 마련해준 내 신분이기는 했다.

하지만···

"일단 아직은 수도권만 하는데··· 전국적으로도 넓혀보려고 해. 해외도 좋고."

놈들은 지구를 전방위적으로 침략하고 있었다.

서울을 구했고, 이번에는 인천이었지만, 내 할 일이 그것으로 끝날 리 없었다.

입찰경쟁 이전부터 전국 곳곳에 괴물들이 들끓었고, 해외는 한층 더 상황이 심각할 터였다.

아공간 물류센터가 머무를 자리는 서울뿐만이 아니었다.

아니, 애당초 어딘가에 머무르는 것을 넘어 쉴새 없이 달려야 할 공간이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코스타스는 내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헛소리만 지껄이는군. 됐다.

쉬리리리릭.

놈의 소름끼치는 혓바닥소리가 동굴을 타고 흘렀고,

카가가가가각!

동굴 벽면을 거칠게 쓸며, 이전 같은 움직임을 이어 나갔다.

그때, 허리춤에 매단 무전기가 소리를 울렸다.

-정겸 씨! 놈이 빠져나가려는 것 같습니다!

투두두두두!

무전기 너머로 들리는 헬기 소리.

이용수는 듬성듬성 구멍이 뚫린 인천의 동굴 지대를 한눈에 내려다보고 있었다.

-몸이 점점 동쪽으로 넘어가고 있어요!

코스타스의 몸은 아주 길고 길었다.

놈의 방향이 어딘지, 놈의 꼬리와 머리가 어디인지 쉽게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다만 하늘에 시선을 둔 이용수가 놈의 비늘이 점차 동쪽 구역을 물들이고 있음을 내게 전해준 참이었다.

콰과과과과광!

가파른 속도로 휩쓸며 지나가는 거대한 구렁이의 몸통.

급행열차와도 같은 움직임이었다.

퉁! 퉁!

차마 그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튕겨 나가는 에메스의 성창.

게이트 핵을 머금은 놈을 붙잡기 위해서는 새로운 방법이 필요했다.

강력한 한 방이 아니다.

별것 아닌 것들로 이뤄진 수천, 수만 방.

물류센터의 진면목은 바로 거기에 있었다.

지잉.

등 뒤로 열린 포탈.

그 사이로 아공간의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두 누나와 카멜롯의 기사들, 그리고 이곳에서 만난 민우까지.

곳곳을 휘감은 코스타스의 몸통을 향해, 우리는 각각 위치를 잡았다.

지잉.

지잉.

각자의 머리맡에 여덟 개의 포탈이 나란히 열렸다.

그리고···

팔랑.

팔랑.

매초.

각각의 포탈에서 마법 스크롤이 찌라시처럼 떨어졌다.

별것 아니었다.

'아이스'라는 이름의 1서클 마법.

매직 미사일이 놈에게 별다른 타격을 주지 못했던 걸 떠올린다면, 이 '아이스' 마법은 놈에게 작디작은 동상 하나 남기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수북하게 쌓인 종이 더미.

우리 모두가 덩어리째 종이를 집어 들었다.

그러곤,

부욱!

부욱!

미친 듯이 종이를 찢어대기 시작했다.

파앗!

정면으로 뿜어져 나가는 냉기.

미약한 서늘함에서 시작된 '아이스' 마법은 이내,

쿠구구구···

맹렬했던 코스타스의 속도를 늦추기 시작했다.

쿠구구···

그렇게 앞을 향해 나아가던 놈의 몸은···

우뚝.

마침내 꽁꽁 얼어붙은 허리로 인해 단단히 제자리에 멈춰버렸다.

휘이이이···

파괴적인 소음으로 가득 찼던 동굴 공간이 고요한 대기로 다시금 채워졌다.

그 앞에 놓인 것은 인천 곳곳을 한 몸으로 누비던 거대한 구렁이의 몸이었다.

하나로 연결된 긴 몸이 놈의 약점으로 되돌아온 순간이었다.

타악!

수백 장의 '아이스' 스크롤을 마저 쏟아놓은 뒤,

나는 한껏 내달리기 시작했다.

망령들이 알려준 위치.

미로처럼 얽힌 동굴, 그리고 그만큼이나 복잡한 매듭처럼 이어진 코스타스의 몸을 넘어, 놈의 머리가 있는 곳에 다다르기 위해.

[투알톤 코디악 스포츠 전기자전거 16.5Ah, 블랙색상, 가격은 1,890,000원입니다.]

덜컹.

툭하니 떨어진 전기자전거에 훌쩍 몸을 올렸다.

헬기니, 전차니, 차량이니 다 좋다.

하지만 때로는 이런 전기 자전거 따위가 더 빠를 때도 있는 법이다.

특히나 이렇게 쓰러진 건물이 도로를 덮치고, 전신주가 내려앉은 유별난 배송지역인 경우에는.

지잉!

지잉!

망령들의 인도에 따라 쉴 새 없이 페달을 밟았고, 전기 자전거의 심심한 구동음이 울렸다.

이 태평한 사물은 멸망이 들어앉은 인천의 도심을 한순간 레저 스포츠의 영역으로 탈바꿈해버렸다.

휘익!

무너진 차이나타운의 거리가 옆을 스쳐 지나갔다.

우뚝 멈춰 서있는 코스타스의 몸통도 여러 차례 지나쳤다.

이쯤 되자 가파른 오르막이 제법 버겁게 느껴졌다.

그렇게 도달한 언덕길의 끝.

TV에도 여러 차례 소개된 바 있는 유명 중식당들이 양옆으로 늘어서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

"······"

노란 눈을 껌뻑거리는 거대한 구렁이, 코스타스의 머리가 떡하니 놓여 있었다.

여전히 일행들은 '아이스' 마법 스크롤을 찢고 있었다.

그 덕분인지, 놈은 하얗게 질린 기색으로 움찔거리며 파리하게 굳어 있을 뿐이었다.

내가 놈에게 물었다.

"너희는··· 왜 쳐들어오는 거지? 우릴 그냥 둘 수는 없었던 거야?"

지구를 뒤덮은 멸망.

괴물들에게 분명한 목적이 있다는 사실만큼은 알고 있다.

그 모든 과정을 다차원 상공회의소가 중개하고 있다는 것까지도.

하지만 정작 그 목적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제대로 정확히 들어본 바가 없었다.

내 질문을 들은 코스타스는 질끈 눈을 내려 감았다.

그러곤 경직된 입을 가까스로 열며 대답했다.

놈의 목소리는 더 이상 동굴을 타고 흐르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어쩌면 너희 차원이 스스로 알게 될 날이 올지도 모르지. 그땐 너희가 반대로 다른 차원을 사냥하고 있을 거다. 이 우주는 애초에 그런 시스템으로 되어 있으니까."

나를 위한 말은 아니었다.

자신들의 침략의 명분을 스스로 되뇌는 말.

시스템을 운운하며, 거대한 수레바퀴를 바라보는 듯한 무상한 뱀의 시선은 어쩐지 익숙한 신화적 이미지를 떠올리게 했다.

그때.

잠시 가만히 말을 멈추었던 코스타스가 쩍 하니 입을 벌렸다.

"사브로스의 번영을 위하··· 커억!"

놈은 제 말을 끝마치지 못했다.

강화된 에메스의 성창 여덟 자루가 놈의 입과 머리 곳곳을 꿰뚫었으니까.

놈의 돌발행동에 반사적으로 반응한 결과였다.

더불어···

카득!

코스타스의 턱 속 깊은 곳에 숨겨져 있던 노른자가 터져나갔다.

황금색 물결이 넘실 거리는 코스타스의 입.

보라색 체액과 검은색 독이 물감처럼 퍼져나갔고, 그 위로 게이트 핵의 역겨운 눈코입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팍스가 담담히 그 결과를 띄워주었다.

[차원 계좌가 소유 이전되었습니다.]

[기존 예금주, 코스타스, 잔액 : 6,911개]

[이미 차원 계좌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금액이 합산됩니다.]

거기에, 덩달아 추가적인 메시지가 떠올랐다.

[차원 계좌가 소유 이전되었습니다.]

[기존 예금주, ???, 잔액 : 33,138개]

[이미 차원 계좌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금액이 합산됩니다.]

[남은 마석은 50,806개입니다.]

"······삼만 개?"

입이 떡 벌어지는 액수.

내가 처치한 것이라곤 다른 게 없었다.

코스타스, 그리고 하나 더.

"게이트 핵이구나."

끗끗거리며 괴이한 웃음을 흘리던 생명체.

그것이 예금주 '???'의 정체였다.

믿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양의 마석.

상당한 수확이었다.

하지만, 이다음 벌어진 일에 비하면 그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차원, 사브로스가 '인천' 지역에 대한 사업권을 상실했습니다.]

['인천' 지역이 지구 영역으로 수복됩니다.]

쿠구구구···

인천을 뒤덮고 있던 동굴 지대.

그 단단하던 동굴벽들이 진흙과 먼지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허물어진 놈들의 보금자리는···

쑤우우우우욱!

차이나타운 중심에 자리 잡고 있던 거대 게이트로 순식간에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어두웠던 그늘.

가슴을 답답하게 만들었던 습기.

게이트 포탈은 놈들이 테라포밍을 통해 펼쳐두었던 그 모든 지형을 진공청소기처럼 빨아들였다.

그 모두를 머금은 게이트 포탈은,

쿠구구구궁!

제자리에서 거칠게 흔들렸다.

그리고,

꽈아아아앙!

가루 같은 빛 자국을 하늘에 남기며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게이트 포탈도, 사브로스의 동굴 지형도.

그저 새로이 떠오른 해가 인천을 찬란히 비출 뿐이었다.

그리고···

그 변화를 감지한 것은 비단 나뿐만이 아니었다.

끼이이···

인천 시내의 주민들이 굳게 닫혀 있던 문을 열어젖혔다.

그러곤 내내 그늘처럼 싸여있던 하늘이 맑게 트여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아아···!"

누군가는 탄성을 질렀고, 또 누군가는 집 안으로 달려들어 갔다.

반가운 기상 변화를 가족들에게 알리기 위해.

되찾은 땅.

비로소 볕이 찾아 들었다.

.

.

.

꽤 오래 되었다.

1군단장을 처치한 이후로, 내 아공간은 줄곧 4레벨에 머물러 있었으니.

특별한 이유랄 건 없었다.

레벨 5 달성을 위해 팍스가 요구한 비용은 자그마치 마석 3만 개였고, 지금껏 그만한 자금은 모아본 적이 없었으니까.

이전처럼 열 배가 뛰어오르지 않은 건 천만 다행이었지만··· 여전히 어마어마한 비용임에는 틀림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코스타스와 게이트 핵을 처치하며 막대한 양의 마석이 굴러 들어온 상태.

나는 망설이지 않았다.

"팍스, 레벨 업 진행해 줘."

[알겠습니다.]

띠링!

띠링!

띠링!

레벨 5에서의 유지 비용, 그리고 강화할 수 있는 항목들과 새로운 개방 능력들이 어지럽게 시선 위로 떠 올랐다.

하지만, 개중 하나가 유독 나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 포탈 설치

-해당 지역에 아공간으로 통하는 포탈을 설치합니다. (비용, 마석 1,000개)

줄곧 내 몸에 매달려 있던 아공간 포탈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리로 향하는 문을 이곳저곳에 뿌려둘 수 있게 되었다.

그 장소가 인천이 됐든, 서울이 됐든, 혹은 파리나 뉴욕 한복판이 되었든 간에.

공교로운 일이었다.

마침 나는 상공회의소가 열어둔 게이트를 닫은 참이었으니.

놈들의 게이트를 치우고, 그 위에 내 영역을 선포하게 된 것이다.

물류센터의 지역별 터미널을 깔아둘 수 있게 됐다.

전국, 아니 세계, 어쩌면 우주 곳곳,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장소에.

43. 되찾을 것들을 위한 기념비 (2)

콰아아앙!

제물포 고등학교의 탁 트인 운동장.

그 중앙에서 거센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마법사와 코스타스는 나를 네크로맨서로 오인했다.

놈들은 자칫 병사들이 각개격파로 언데드가 될 것을 우려해 남은 병력을 모조리 공터에 모아주었는데, 그 덕분에 사브로스의 잔당들을 편하게 일망타진할 수 있게 되었다.

카아아악!

사라진 게이트와 동굴.

퇴로를 잃은 사브로스의 도마뱀들은 허둥지둥 노란 눈동자를 뒤집으며 죽음을 맞이했다.

그 방식은 다양했다.

'지옥불' 헬파이어 미사일부터, 유사 파이어볼인 강화 볼링공, 마지막으로 진짜 2서클 마법인 '파이어 볼'까지.

각각의 불길이 파충류들의 껍질을 바삭하게 구워버렸다.

물론 와이번들은 예외였다.

퍼득!

퍼드득!

녀석들은 땅을 박차고 하늘로 도주를 시도했으니까.

하지만,

투두두두두!

수천 발의 총알이 놈들의 날개를 종잇장처럼 꿰뚫었다.

아공간에서 쏟아져 나온 60여명의 군인들이 탁 트인 하늘을 겨냥했다.

카아아악!

끼에에에엑!

불에 타는 리자드맨, 그리고 벌집이 되어가는 와이번들.

그렇게 괴물들의 사체가 몇십 분째 겹겹이 쌓였을 때쯤.

쿠웅!

마지막 리자드맨이 비명과 함께 불길에 허물어졌다.

치이이···

새카만 파충류들의 사체와 함께 잔뜩 그을린 운동장.

그 위로 '아쿠아' 마법을 연달아 쏟아 부었다.

촤아아악!

뭉게뭉게 핀 수증기가 하늘을 뒤덮었다.

"후우······"

긴장된 어깨를 내려주는 한숨과 함께.

그렇게, 인천에서의 전쟁이 비로소 막을 내렸다.

.

.

.

급한 일을 모두 마무리한 뒤.

나는 유유히 차이나타운의 언덕으로 되돌아갔다.

뽀옥!

뽁!

로 곳곳에 널브러진 와이번들의 마석을 빨아들였다.

그러곤 코스타스의 입 속에 담긴 마법사의 시체에서 모드레드의 [유체화] 강화석을 회수했다.

"정겸아!"

길목 한쪽에서 민우가 뛰어나왔다.

한결 편안한 표정이었다.

이미 어머니를 구한 상태니까.

내가 사브로스의 잔당을 처리하는 동안, 민우의 어머니는 아공간에서 큰누나로부터 치료를 받고 있었다.

형수가 만든 포션까지 복용한 덕에, 단순 탈진 상태였던 그의 어머니도 금세 활기를 되찾으셨다고.

얼추 상황을 갈무리한 뒤, 나를 데리러 왔다고 했다.

"지금?"

"그래, 다 너만 기다리고 있으니까 빨리 와."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민우가 목적지를 가리켰다.

"여기야."

공교롭게도, 방금 전 입맛을 다셨던 장소였다.

차이나타운을 대표하는 유명 중식당.

계단을 통해 그곳 3층에 다다랐다.

화악!

문을 열자마자 드리운 커다란 공간.

식당 곳곳에는 우리 가족들과 형수의 처가 식구들은 물론, 이용수 일가, 아공간의 군인들, 그리고 이곳 507 여단의 각성자들이 빠짐없이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그 많은 인파를 감당하기 위해, 주방에서는 중국집 특유의 거센 불길이 끊임없이 타오르고 있었다.

'언뜻 파이어볼 스크롤이 보인 것 같은데··· 착각이겠지?'

가족들이나 민우에게 인천에 필요한 식량을 아공간에서 빼내 가라 일러두었었는데, 생각 이상으로 화려하게(?) 가져다 쓴 모양이었다.

민우가 내 등을 턱턱 두드리며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 사장님이 우리 엄마랑 절친이시거든. 너 밥은 꼭 먹이고 보내야겠다고 하셨어."

민우가 나를 가족들이 있는 테이블로 안내했고, 민우의 어머니 또한 함께 앉아계셨다.

그녀는 나를 발견하자마자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내 양어깨를 호들갑스럽게 두드렸다.

"정겸아! 고생 많았다··· 고생 많았어!"

정월대보름의 그날, 인천까지 오느라 고생했다는 그녀의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사뭇 그간의 멸망이 지워진 것처럼.

그런 명랑한 착각이 싫지만은 않았다.

"자! 드세요!"

인사도 식후경이다.

주방에서 따끈따끈한 요리가 하나둘 날아들었다.

이곳의 명물인 하얀 짜장부터 탕수육, 고급 메뉴인 누룽지탕과 가지튀김까지.

모락모락 피워 오르는 김이 깊숙하게 입맛을 자극했다.

마지막으로 뜨겁게 달궈진 철판 위에 바삭바삭하게 튀겨진 유린기가 식탁 위에 올려졌고···

치이이이익!

민우 어머님의 절친, 주방장께서 달달한 소스를 끼얹어주셨다.

뜨거운 철판에 고여 바글바글 끓어오르는 소스.

그 위로 촉촉하게 젖어 들어가는 바삭한 튀김을 향해,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젓가락을 치켜들었다.

하지만,

"잠깐!"

큰누나 김주연 씨께서 돌연 그 손길을 제지했다.

그러곤···

"사진 찍어야지!"

그녀가 꺼내 든 것은 일전의 폴라로이드 카메라였다.

파앙-!

시원하게 터진 플래시.

어디 자랑할 곳도 없을 것이다.

SNS는 커녕, 인터넷 자체가 먹통이 되어버린 상황이니까.

하지만 이런 제대로 된 요리를 마주하는 것은 더더욱 드문 일이었다.

당연히 카메라를 들이밀고 싶을 수밖에.

"이제 끝!"

큰누나의 허락에, 다시 모두가 젓가락을 들어 올렸지만···

"잠깐!"

이번엔 내가 제지했다.

"상품으로 등록해 둬야지."

제대로 갓 만든 중식요리.

프레시센터에 쌓여 있는 레토르트 즉석요리와 밀키트의 뺨 싸대기를 후리고도 남는다.

하물며 중식의 본고장, 차이나타운의 요리가 아니던가?

이건 참을 수 없었다.

"아 진짜!"

배고픔을 참지 못한 초원의 맹수, 김솔이 내 머리칼을 쥐어뜯었지만, 나는 꿋꿋이 팍스를 불러 으로 유린기, 하얀짜장면, 삼선짬뽕, 탕수육, 누룽지탕, 가지튀김, 팔보채, 고량주 등등을 빠짐없이 쟁여 넣었다.

갖은 역경을 헤치고 마침내 진행된 식사.

한상 그득 차려진 요리들을 차례로 맛보았고,

후루룩!

하얀 짜장과 간짜장을 차례로 흡입했다.

"휘우!"

그렇게, 차디찬 탄산음료를 삼키며 식사를 마무리할 때쯤이었다.

"정겸씨."

통신대대장 한경호가 슬쩍 내게 다가왔다.

어딘지 무거운 목소리였다.

"예, 무슨 일이죠?"

"작전본부장님으로부터 온 무전입니다. 급히 할 이야기가 있으시다고···"

어쩐지 심상치 않은 기운에, 최대한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왁자지껄 식후 담화를 나누는 가족들을 뒤로하고 조용한 건물의 계단 쪽으로 향했다.

덜컹.

무전기를 출하했고, 한경호가 주파수를 세팅해주었다.

덕분에 곧장 작전본부장 유성철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정겸씨, 인천을 수복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고생 정말 많으셨습니다.

"아닙니다. 지원해주신 병력들의 도움이 컸어요. 그보다··· 급히 하실 말씀이라는 게?"

-논의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정겸씨도 아시다시피 입찰 경쟁에서 패배한 국가들이 많지 않습니까? 당장 주변에 있는 중국이나 일본, 북한도 그렇고요. 남아 있는 핫라인으로 국가별 상황을 공유받는 중인데···

주변국들이 처한 상황에 대한 이야기일까?

하지만 정작 유성철이 꺼내 든 것은 한층 더 심각한 이야기였다.

-모두 상당한 규모로 테라포밍이 이뤄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영향이 넘어오고 있어요.

"···넘어오고 있다고요?"

테라포밍의 속도는 꽤 빨랐다.

이곳 인천 시내만 해도 꽤나 빠른 시간 내에 동굴 지대로 뒤덮여버렸으니까.

하지만 그것이 하루 이틀 내에 수도권을 잠식할 정도냐 묻는다면, 단연코 그 정도로 빠른 것은 아니었다.

테라포밍이 해당 지역을 넘어 주변국까지 영향을 미치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터.

나는 유성철의 대답에서 그 전모를 확인할 수 있었다.

-베이징 게이트에서 중독을 일으키는 대기가 흘러나오고 있어요. 후쿠오카 게이트에서도 독성이 담긴 해수가 뿜어져 나오고 있고요.

주변국들로 인한 대기 오염과 수질 오염.

어쩐지 퍽 익숙한 이야기였지만, 이번엔 그 정도가 상상을 초월했다.

-베이징의 대기가 편서풍을 타고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 독성은 상상을 초월하고요. 벌써 베이징과 톈진 일대에서는 최소 수천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산하고 있습니다. 후쿠오카도 사실상 완전히 괴멸된 상태고요.

"둘 중에··· 우리에게 더 심각한 건 어느 쪽이죠?"

-물론 중국입니다. 오염된 대기는 바다든 육지든 가리지 않으니까요. 저희 쪽 기후 전문가가 추산하기로는··· 최소 일주일, 늦어도 열흘 이내에는 오염된 대기가 한반도에 상륙할 겁니다.

유성철이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베이징에 열린 게이트를 닫아야 합니다. 저희 쪽에서도 병력을 보낼 예정이지만··· 냉정히 판단하기로 저희 선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닙니다. 그저 발버둥이지요. 해서··· 정겸씨에게 손을 보태주십사 요청드리는 겁니다.

그것이 그의 부탁이었다.

하지만 이걸 부탁이라고 할 수 있을까?

가만히 있다간 한반도가 통째로 지옥으로 변할 마당에?

"알겠습니다. 이곳 상황이 정리되는 대로 다시 연락드리죠. 오늘 저녁 중에요."

-예, 기다리겠습니다.

뚝.

수화기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인천을 수복했지만, 아직 시작에 불과했다.

세계는 테라포밍으로 인해 오색찬란한 멸망들로 물들어가고 있었으니.

더욱이, 그 영향이 곧장 한반도로 밀려들고 있었다.

무거운 발걸음.

한경호와 함께 가족들이 있을 식당으로 되돌아갔다.

그런데 들어가고 나니, 누나들이 꽤나 호들갑이었다.

"야야! 어디 갔다가 이제 와? 오빠가 중대 발표한대."

"중대 발표···?"

가족들과 형수네 처가 식구들, 그리고 이용수 일가와 민우와 그의 어머니까지 모두가 둥글게 모여 앉아 있었다.

그 중심에는 형수를 앉혀 둔 채, 형이 우뚝 서 있었다.

완연한 '중대발표'의 그림이었다.

형수가 배에 손을 얹으며 조심스레 이야기를 꺼냈고···

확실히, 그건 놀라운 소식이었다.

"···임신한 것 같아요. 정확히는 임신해 있었던 거지만··· 배가 불러오길래 혹시나 싶어 임테기를 돌려봤는데, 역시나더라고요."

"꺄악!"

누나들이 환호를 내질렀고, 누구나 할 것 없이 손뼉 소리를 울렸다.

이용수가 내게도 축하를 건넸다.

"이야··· 정겸씨 조카 생기겠네요? 유정이도 너무 좋아할 것 같고요."

물류센터에서 아기 인형을 줄곧 선호하던 유정이었다.

내 조카에게도 좋은 누나, 또는 언니가 되어줄 것 같은 느낌.

식당 전체가 훈훈한 분위기로 물씬 달아올랐다.

유성철로부터 한국의 시한부 선언을 듣고 온 참이다.

하지만 당장은 모른 척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이 상황에 어찌 찬물을 끼얹는단 말인가?

오염된 대기가 넘어오기까지 남은 시간은 최소 일주일에서 열흘.

적어도 오늘 저녁만큼은, 다가올 멸망을 품속에 감춰두기로 했다.

아무튼···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였다.

"조카···! 조카라고···!"

나 또한 흥분을 감출 수 없었으니.

"···내 새끼!"

"애가 왜 니새끼야 임마!"

큰형이 버럭 외쳤지만, 해주고 싶은 게 너무 많았다.

"몰라! 앞으로 학용품은 내가 책임진다! 유모차도! 기저귀랑 분유도!"

묘한 감정이 휘몰아쳤다.

아공간 한 곳을 개조해 값비싼 유아용품으로 도배한 아기방을 만들어 주어도 좋으리라.

물론 건강하게 태어나는 것이 우선이겠지만.

그와 동시에,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무거운 현실이 있었다.

건강하게 태어날 아이, 그리고 녀석이 성장할 환경.

그를 위해선···

'···이곳 지구를 멀쩡한 땅으로 만들어야겠지.'

괴물들이 인간을 도륙하고, 곳곳에서 오염된 대기와 해수가 날아드는 세상을 살게 할 수는 없었다.

그러니 이 세계는 반드시 수복되어야 했다.

새로 태어날 아이를 위해서도, 미래를 살아갈 나를 위해서도.

그건 아공간에 담을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니까.

***

모두가 잠든 인천의 저녁.

나는 민우와 함께 차이나타운의 거리로 나섰다.

청명한 밤공기.

이 맑은 대기가 열흘도 채 지나지 않아 오염될 것이라는 것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내일 당장 떠날 계획이었다.

베이징의 소식을 민우에게 전하자, 녀석이 걱정스런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나도 같이 가는 게 좋지 않을까?"

"여기 정리가 덜 끝났잖아. 그리고··· 같이 가는 거나 다름없을 거야."

새로 얻은 포탈 설치 능력.

나는 사브로스의 게이트가 있던 바로 이 자리에, 아공간 포탈을 설치해둘 작정이었다.

---

◈ 포탈 설치

-해당 지역에 아공간으로 통하는 포탈을 설치합니다. (비용, 마석 1,000개)

---

"팍스, 포탈 하나 설치해줘."

[알겠습니다.]

[마석 1,000개 받았습니다.]

[아공간 포탈을 설치합니다.]

설치형 포탈.

평소에 사용하던 아공간 포탈과는 성질이 조금 달랐다.

기존의 아공간 포탈은 일종의 '물리력'을 가지고 있었다.

방패처럼 사용할 수 있는 것은 물론, 좌표로 지정한 사물을 따라 움직이게도 할 수 있었으니까.

물류단지 터널에서 와이번들을 상대할 때 트럭에 아공간을 실었던 것, 벽돌 째 움직이는 카멜롯 성에서 포탈을 타고 이동했던 것 모두 이러한 성질을 응용한 것이었다.

하지만,

[설치형 포탈은 외부로부터 물리적인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그대로 허공에 고정될 뿐.

설치된 포탈은 만질 수도, 옮길 수도 없었다.

간단히 말해···

"매번 내가 직접 설치해야 하는 거구만."

[그렇습니다.]

누구에게 맡길 수도, 어디에 실어보낼 수도 없다.

결국 내가 움직이는 경로마다 하나씩 설치해두는 게 최선이었다.

물론, 그만 해도 엄청난 능력이다.

한 번만 고생하고 나면, 그 이후로는 아무리 먼 거리라도 포탈을 타고 이동할 수 있다는 뜻이니까.

"···뭐, 좋아."

이러나저러나, 그 첫 시작점은 이곳 인천이 될 터였다.

지이잉.

차이나타운 중심에 활짝 피어오른 푸른색 포탈.

팍스에게 미리 민우의 입장을 허가해두었다.

"나 보고 싶으면 여기로 들어와."

"···가는 게 가는 게 아니었네."

민우가 너털웃음을 흘렸다.

우리는 인천의 밤 시내를 거닐었다.

내리막을 쭉 걷다 보니, 짙은 남색으로 물든 인천항이 한 눈에 들어왔다.

차갑게 식은 맥주 몇 캔을 출하했고, 부두에 걸터앉았다.

바다에 비치는 달빛을 보고 있자니 한잔 걸치기에 이만한 풍경이 없었다. 

다 큰 사내 둘이 주접을 떨었고, 내가 그 포문을 열었다.

"민우야, 얼추 상황이 정리되고 나면··· 우리 꼭 복학하자."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어? 다 박살 난 마당에?"

"싹 다 되돌려 놓으면 되지. 뭘."

"이걸 소탈하다고 해야 할지··· 대범하다고 해야 할지. 그나저나 니가 학교를 다 그리워할 줄은 몰랐다."

쭈욱.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켠 나는, 진짜 소망을 내비쳤다.

"CC··· 해보고 싶거든."

"씨씨······?"

캠퍼스 커플.

지옥 같은 군 생활 내내 진정 꿈꿔오던 것이었다.

복학 직전에 세상이 뒤집어진 턱에 요원한 일이 되었지만.

꽤나 의외라는 듯, 민우가 물었다.

"학교 2년 동안 다녀놓고, 그동안은 왜 안 했어?"

"안 하긴? 못 했지. 연애를 나 혼자 하냐?"

되묻는 나를 보며, 민우가 그야말로 똥 씹는 표정을 지었다.

"너 진심으로 하는 말이냐? 내가 자리 비켜준 게 몇 번인데?"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너랑 약속 파투 내고 먼저 집에 간 적 몇 번 있었지? 그때마다 갑자기 밥 먹자고 온 애들 없었든?"

"미정이랑 지유? 에이 걔들은······"

"······"

잠시 정적이 흐른 뒤, 내가 되물었다.

"······그게 계획된 거였다고?"

"와··· 이런 미련 곰탱이 같은 새끼······ 난 니가 그냥 연애에 관심이 없는 줄···"

"······"

잠시 말을 멈춘 나는 다시 의지를 다졌다.

"민우야, 반드시··· 반드시 세상을 구해야겠다."

"진짜 깬다. 사심이 그득하네."

반드시 세상을 구할 것이다.

외계의 황사로 뒤덮인 한국이 아닌, 벚꽃으로 휘날리는 핑크빛 교정을 걷기 위해.

얼추 대화가 마무리되어갈 때쯤, 민우가 물었다.

"그런데, 중국으론 어떻게 넘어가게? 헬기로?"

"거리가 멀어서 그건 어렵다더라. 비행기 타야지."

마침, 우리가 있는 곳은 인천이었다.

한국 최대 규모의 공항이 위치한.

"인천공항으로 갈 거야."

그것이 베이징으로 갈 경유지가 될 터였다.

44. 되찾을 것들을 위한 기념비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