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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novel.munpia.com/393983 은퇴한 헌터의 아포칼립스 1-52(무료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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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1.

첫 번째 은퇴는 17살, 그러니까 한국으로 따지면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흔한 일이었다.

"어깨가 박살이 났습니다. 재활은 포기하시는 게 좋습니다."

프로야구선수를 꿈꾸던 고등학생이 무리한 연투 끝에 부상으로 프로에 데뷔하지 못하고 은퇴하는 것은.

너무나도 흔해서 특별할 것은 하나도 없는.

그 후의 이야기도 특별할 것은 없었다.

평생 공부라고는 해본 적 없는, 뛰고 던지고, 배트를 휘두르는 것만 해온 고등학생이 몸을 쓰는 다른 직업을 진로로 삼은 것은.

"이제부터 자네는 군인이다."

그렇게 나는 직업군인이 됐다.

그 후의 삶도 특별할 건 없었다.

"이번 임무는 팔레스타인이다. 명심해라. 국가는 어떤 지원도 해줄 수 없다. 죽어도 그림자로 죽는 것이다. 그러니 꼭 살아 돌아와라."

군인답게 여러 임무를 받았고, 수행했다.

그러다가 은퇴하게 된 사건이 터졌다.

그 역시 흔한 일이었다.

"김지운 소령님,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임무 수행 중에 부하들을 지키기 위해 부상을 입으셨다고."

아프리카에 위치한 나라 소말리아, 아군의 지원은 감히 꿈도 꿀 수 없는 그곳에서 극비리에 임무를 진행하던 어떤 특수부대 조직이 위기에 빠지고, 그 상황에서 부대를 이끌던 리더 한 명의 희생으로 나머지 이들이 목숨을 구하는 일은.

어디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특별할 것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결국 다리에 열두 발의 총알이 박혀서 평생 다리를 쓸 수 없게 된 군인이 은퇴를 하게 되는 것 역시 특별할 것은 조금도 없는 일이었다.

"저는 이도준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병실에 누워있는 그 군인을 향해 한 사내가 찾아오는 순간, 그 순간부터는 조금 달랐다.

"현재 헌터 클랜인 삼족오 클랜을 이끌고 있습니다."

일단 그 이도준이란 사내가 하는 말은 특별했다.

"아, 설명이 너무 부족했군요. 일단 그럼 설명을 해드리겠습니다. 헌터란 2018년부터 세계 각지에 등장한 게이트, 그 너머에 있는 어비스에서 몬스터를 사냥하는 자들을 말함입니다."

"어비스란 안개 낀 세상입니다. 그 안개의 색깔에 따라 그곳에 거주하는 몬스터의 강함이 달라집니다."

"어비스에 입장해서 조건을 만족하는 순간 헌터로 각성됩니다. 그 각성한 능력은 상태창이란 명령어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눈앞에 상태창이 뜹니다."

"몬스터를 잡으면 레벨을 올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가끔 낮은 확률로 몬스터로부터 스킬을 배울 수 있는 룬을 얻을 수 있습니다."

"또는 몬스터로부터 매우 특별한 힘을 가진 아이템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와 별개로 어비스에서만 구할 수 있는 식물과 금속 등을 통해 마법과도 같은 기적을 만들 수 있습니다."

너무 특별해서 도중에 그냥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었을 정도.

지금 여기 10층은 중환자실이고, 정신과는 5층에 있으니 그곳에 가라고 친절한 안내를 하고 싶어질 정도.

김지운의 생각도 그랬다.

평소 때의 그였다면 그 이도준이란 사내가 하는 말을 절대 두 마디 이상 듣지 않았을 것이다.

"박호철 중장님, 저 말, 사실입니까?"

그 이도준이란 사내를 데려온 이가 수도방위사령부의 사령관인 박호철 중장이 아니었다면, 다리 병신인 김지운은 이도준을 3초 안에 제압해서 그를 병실 밖으로 보냈을 터였다.

"믿기 힘들겠지만 사실이다. 이도준 씨가 하는 말은 사실이며, 정부는 이도준 씨에게 적극 협조하고 있다."

그러나 그 말은 사실이었다.

"그러니까 무슨 소설이나 게임 속에서나 볼 법한 세상이 존재한다는 겁니까?"

"예. 맞습니다."

"그럼 날 찾아온 이유는 뭡니까?"

"간단합니다. 어비스에서 구할 수 있는 아이템 중에는 지금 김지운 소령님을 걷게 만들 수 있는 아이템이 있습니다. 물론 공짜는 아닙니다. 김지운 소령님에게 제안을 하겠습니다. 3년, 3년 동안 우리 삼족오 클랜의 헌터로 활동해 주십시오."

그렇기에 이어진 제안, 그 제안 앞에서 고민은 길지 않았다.

일단 김지운은 당장 은퇴하고 싶지 않았다.

무언가를 더 해보고 싶었다.

그리고 은퇴를 하더라도 평생 지팡이 없이는 걸을 수 없는 몸뚱이로 하고 싶지는 않았다.

"좋습니다."

동시에 궁금했다.

"그 어비스란 곳, 가보겠습니다."

이도준이 말한 게 진실인지.

그리고 그 말은 진실이었다.

"헌터가 되는 순간 명심해야 할 것은 한 가지입니다. 어비스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매우 중요합니다. 어비스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신비가 존재하는 겁니다. 그리고 이 어비스와 헌터에 투자하는 분들은 이 신비가 공유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그렇잖습니까? 누구나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가지면 황금 값이 제 값을 받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이것만 명심하시면 됩니다."

"예, 명심하겠습니다."

"그럼 이제 게이트를 넘어가셔도 됩니다. 부디 헌터가 되어 살아 돌아와 주십시오."

준비를 마치는 순간 김지운은 어비스에 들어갔다.

그렇게 볼 수 있었다.

새하얀 안개로 가득 찬 세상을.

크어어!

그 안개 속에서 등장한 온갖 종류의 괴물들을.

[레벨이 올랐습니다.]

그리고 들려오는 알 수 없는 목소리를.

그렇게 시작된 헌터의 삶, 김지운은 그 삶을 꽤 잘 해냈다.

"역시 제 눈이 틀리지 않았군요! 이렇게 멀쩡하게 귀환하신 분은 처음 봅니다."

10명 중 1명만이 놀아온다는 첫 사냥도 훌륭하게 해냈다.

"헌터가 되신 걸 축하합니다!"

그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김지운은 동료들과 함께 여러 결과물들을 내놓았다.

"그거 아십니까? 지금 김지운 소령님이 최초로 그린존에 도달하셨다는 거? 아, 이제 소령님이 아니죠. 그래도 이게 편해서 이렇게 부르게 되는군요."

"이번에 잡으신 블러드 오크, 아무래도 김지운 소령님이 처음 잡으신 것 같습니다. 찾아보니까 잡았다는 클랜이 없네요."

"범닭의 알을 가져오셨다고요? 진짜입니까? 맙소사! 그걸 구해오시다니! 용케 구해오셨습니다! 이건 최초입니다! 그 알을 가져온 건 김지운 소령님이 최초입니다!"

꽤 놀라운 결과물들을.

하지만 언제나 운이 좋을 수는 없는 법.

결국 그날이 왔다.

"대장!"

"긴 말은 필요 없다."

모두가 전멸할지도 모르는 위기를 앞두고 결국 가장 뛰어난 한 명이 희생을 해야 하는 날이.

"내가 놈을 유인할 테니까 도망쳐라."

그리고 그날 제물은 김지운이었다.

김지운은 마주한 괴물을 유인했고, 그 사이 동료들은 도망쳤다.

"······여기서 인디고존이라니, 이런 식으로 들어올 줄은 몰랐는데."

그 과정에서 김지운은 이제까지 그 누구도 살아 돌아온 적 없는 영역에 들어갔다.

저승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그곳으로.

"김지운 소령님!"

그러나 운 좋게 김지운은 살아 돌아왔다.

"여섯 달입니다! 여섯 달 만에 돌아오셨습니다!"

적잖은 시간을 보내고, 처참한 몰골을 했지만 그래도 어쨌거나 목숨을 부지한 채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그렇게 살아 돌아온 김지운은 말했다.

"······6개월이 지났습니까?"

"예? 예. 김지운 소령님이 동료들과 헤어진 후에 6개월이 흘렀습니다."

"그럼 계약기간은 끝났겠군요."

"예? 아, 계약기간은 진작에 끝나긴 했습니다."

그리고 그날 김지운은 선언했다.

"그럼 이제 은퇴하겠습니다."

헌터의 세계에서 은퇴하겠다고.

"김지운 소령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충격적인 말이었고, 그래서 삼족오 클랜의 마스터인 이도준 역시 질문을 건넸다.

"김지운 소령님은 최고의 헌터입니다. 이 어비스의 궁극에 도달할 수 있는 유일한 헌터입니다!"

그 설득에 김지운은 말했다.

"저는 어떤 임무이든 성공 가능성이 있는 임무만 수행합니다. 0.0001퍼센트라도 좋으니, 가능성이 있는 임무만 수행합니다."

"예, 모든 걸 해내셨죠. 아주 작은 확률이도, 희망이라도 있으면 기필코 해내셨죠."

"그게 제가 은퇴를 하는 이유입니다."

"아······."

어비스에서 현재까지 가장 깊은 곳, 그곳을 경험한 김지운이 보기에 어비스를 모험하는 것은 자살행위나 마찬가지라고.

그곳에는 단 티끌의 희망도 없음을.

그 말을 들었을 때 이도준 역시 의미를 알았고, 그렇기에 더 이상 김지운은 설득하지 않았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그 한 마디를 끝으로 김지운은 은퇴한 헌터가 됐다.

"은퇴 후의 삶이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물론 은퇴한 헌터의 삶이 평화로운 건 아니었다.

"많은 눈이 이제부터 김지운 소령님을 바라볼 겁니다. 비행기를 타고 어딘가로 가는 것은 불가능할 겁니다. 제주도를 가는 것조차 아마 적잖은 불편함이 따를 겁니다. 사람이 많은 곳, 누구나 볼 수 있는 곳만을 다니실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만약 룰을 어긴다면, 그때는 분명한 응징이 따르게 될 겁니다."

어비스는 세상의 권력자들에게 꿈과 희망, 미래가 가득한 세상이 되어 있었고, 그 권력자들이 원하는 것을 가져올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헌터 밖에 없었다.

"저보다 잘 아시겠지만, 어비스를 향한 그들의 욕심은 이미 상식의 선을 넘어섰습니다."

그리고 그 헌터와 권력자들은 자신들이 누리는 것을 다른 이들과 공유할 생각이 없었다.

자연스레 은퇴한 헌터의 주변에는 온갖 귀와 눈이 붙었다.

평생 조용한 삶을 강요받았다.

그러나 김지운은 기꺼이 그 조용한 삶을 받아들였다.

도리어 그는 그 조용함을 즐겼다.

매일매일 백화점이나 핫플레이스 카페에서 파는 달콤한 디저트를 사서 메이저리그나 KBO경기를 보며 하루를 보는 나날을 보냈다.

은퇴한 헌터의 나날을 보냈다.

그날도 그랬다.

12월, 야구 시즌이 끝나고 스토브 앞에 모인다는 스토브리그 시즌.

그 시즌에 김지운은 여의도에 위치한 유명한 백화점의 지하 1층에 방문했다.

"딸기방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딸기 케이크로 매우 유명한 카페의 팝업 스토어를 방문하기 위해서.

"대기요? 대충 3시간은 기다리셔야 할 겁니다. 여기 태블릿에 일단 번호 입력해 주세요."

그렇게 그 딸기 케이크를 맛보기 위해서 대기 순번을 건 김지운은 하염없이 시간을 보냈다.

어려울 건 없었다.

야구 경기도 없는 그에게 남는 건 시간뿐이었으니까.

그렇게 하염없이 제 시간이 올 때까지 기다리던 김지운.

[잠시 후 차례가 옵니다. 대기해 주세요. 호명 후 5분이 지나도 오지 않으시면 예약은 취소됩니다.]

이윽고 제 차례가 오는 순간 김지운은 어느 때보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팝업스토어를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김지운은 볼 수 있었다.

커헝, 커헝!

"괴, 괴물이다!"

백화점 지하 1층, 그곳에 어비스의 괴물 중 하나인 도그블린이 등장한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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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미스트 (1).

1.

2023년 12월 31일.

이번 해의 끝자락은 어느 매우 추웠다.

[2023년의 마지막 날은 매우 추울 것으로 예상됩니다. 서울 최고 기온은 영하 11도, 파주가 영하 14도, 안동이 영하 10도로 낮 기온은 어제보다 매우 낮겠습니다.]

한낮에도 눈과 코가 잘려나갈 것처럼.

"미치겠네, 무슨 날씨가 이래?"

"지구 온난화 아니었어? 그럼 좀 따뜻해야지, 이게 무슨 지구 온난화야? 응?"

밖으로 나오는 것이 자살행위인 것처럼 느껴질 만큼 한국의 날씨는 섬뜩하기 그지없었다.

"미친 건 이 인간들이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말의 마법은 사람들을 움직이게 했다.

"무슨 놈의 백화점에 사람이 이렇게 많아?"

도로 위는 자동차로 가득 했고, 사람들이 갈 만한 곳은 사람으로 가득 찬 상태였다.

"야, 놀이공원도 터진다고 하더라고."

"놀이공원? 이 날씨에? 어떤 미친놈이 놀이공원을 가?"

"다들 그렇게 생각할 줄 알고, 사람 없을 줄 알고 가는 인간들이 잔뜩 모였더라고."

"눈치게임 실패네."

"그건 눈치게임 실패가 아니야 그냥 지능지수가 실패 아닐까? 사람 없다고 덜 추운 거 아니잖아?"

실내든, 실외든 예외 없이.

물론 실내가 좀 더 사람이 많았다.

"됐다, 말을 말자. 여기 있는 우리도 미친놈이긴 매한가지니까."

"야, 말은 바로 해야지. 그놈의 사진 좀 건지겠다고 여기 오겠다고 지랄한 건 너잖아?"

"좋다고 온 것도 너잖아?"

여의도에 위치한 대형 백화점이 그랬다.

요즘 소위 말하는 핫플레이스로 젊은이들이 가장 많이 찾는 여의도의 백화점은 일단 주차장부터 들어가는 게 지옥이었다.

빠아앙!

"아니, 씨발 무슨 차가 이렇게 많아!"

주차장 입구, 그러니까 주차 가능한 숫자를 볼 수 있는 자그마한 전광판을 보는데 걸리는 시간이 1시간.

그곳에 들어간 후에는 기약 없이 차가 빠지기만을 기다려야 했다. 도중에 차를 돌려 백화점 입장을 포기하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부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난 발렛하러 들어왔다고요!"

"발렛도 만차입니다. 죄송합니다."

"뭐? 야!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내가 여기 얼마를 쓰는지 알아?"

서민들이 하염없이 시간을 보낼 때 그들을 농락하듯 유유히 들어가던 부자들도 오랜만에 시간을 낭비해야 했다.

동시에 그들도 느꼈다.

"뭐야? 저 차는? 왜 들어가?"

"차만 봐도 느껴지네. 롤스로이스 컬리넌이잖아? VIP가 아니라 VVIP인 모양이지."

돈 없는 자의 서러움을.

물론 그렇게 경쟁을 뚫고 백화점에 들어간다고 해서 모든 게 정리되는 건 아니었다.

백화점은 안은 더 지옥이었다.

"몇 분이요?"

"주문이 많아서 30분은 기다리셔야 합니다."

목마름을 달래기 위해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 받는데 하루 종일이 걸릴 정도.

무언가를 제대로 쇼핑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뭔가를 하려고 하더라도 그야말로 몸싸움을 해야 할 정도.

"이게 무슨 백화점이야? 전쟁터지!"

모두의 입에서 전쟁 같다는 표현이 수없이 나왔고, 그만큼 모두는 불만과 짜증을 터뜨렸다.

예외는 단 한 명뿐이었다.

'평온하군.'

188센티미터의 건장한 체격을 가진 사내.

그러나 건장한 체격과 달리 매우 평범한 외모를 가진 사내는 이 전쟁 같은 분위기에 유난히 분위기가 달랐다.

쭈욱! 

가지고 온 텀블러에 담긴 바닐라 카페라떼를 홀짝이는 모습에는 평온함이 넘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허세 같은 게 아니었다.

사내에게는 지금 펼쳐진 세상은 매우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사내의 이름은 김지운, 그 사내가 살아온 나날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처절하고, 치열했으니까.

일단 사내는 군인 출신으로 그 어떤 군인보다 죽음이 가까운 무대를 경험했었다.

그 후에 부상으로 의가사제대를 한 후에는 군인으로의 삶이 평화롭다고 생각될 만큼의 삶을 살아왔었다.

죽다 살아났다, 그런 수준이 아니었다.

사내는 어찌 보면 좀비에 가까웠다. 이미 죽었는데, 어찌어찌 살아가는 수준.

'그래도 정말 많군.'

그런 김지운에게 있어 이 사람으로 넘치는 백화점의 분위기는 전쟁통은커녕 오히려 평화의 증거였다.

'다들 살만한 모양이야.'

이렇게 많은 이들이 연말을 뜻 깊게 보내기 위해 기꺼이 추위를 뚫고 모였다, 이보다 더 확실한 평화의 증거는 없을 터.

해서 김지운은 눈앞의 상황에 별다른 감흥을 보이지 않은 목적지를 향해 느긋하게 걸어갔다.

사실 빨리 갈 수도 없었다.

그쯤이었다.

한 일행이 보였다.

한 남녀가 유모차를 이끌고 이 인파 사이를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것이.

사실 그건 움직인다고 할 수도 없었다. 거의 전진을 할 수가 없었다. 이곳 사람들은 이렇다 할 배려를 해주지 않았고, 반대로 그 부부는 혹여 주변 사람을 방해할까 최선의 배려를 해주고 있었다.

출생률이 밑바닥에 고꾸라진 나라다운 광경이었다.

물론 김지운이 그 광경에 눈길이 간 건 그런 대국적인 어떤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군인이군.'

김지운은 그 부부 중 남편이 군인, 그것도 꽤 훈련된 군인임을 알 수 있었다.

'특수부대, 그것도 그림자 쪽이다. 광호부대인가?'

밀리터리 오타쿠들이 미주알고주알 떠들 수 있을 만큼 유명한 특수부대가 아니라 결코 세상에 그 존재 자체가 드러나지 않고, 나서도 안 되는 곳의 군인임을.

그게 김지운의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짓게 했다.

'휴가 내기 쉽지 않을 텐데.'

저들이 이곳에 어떻게 왔는지, 어떤 마음으로 있는지 어느 정도 느껴졌으니까.

물론 거기까지였다.

김지운은 딱히 그 부부와 아이를 위해 나설 생각이 없었다.

애초에 나서는 게 더 큰 민폐였다.

여기서 김지운이 나서서 여기 젊은 부부가 지금 백화점을 즐기기 힘드니까 다들 길을 비키시오! 애도 안 낳는 주제에 세금 더 낼 거 아니면! 이렇게 외치고 나서면 저 부부는 당장 이곳을 떠나야 할 터.

무엇보다 김지운은 나서서는 안 되는 몸이었다.

그가 누군가의 이목을 끄는 짓을 하려는 순간, 장담컨대 그의 삶은 관객수가 천단위에 불과하던 지루한 영화에서 천만 관객을 찍을 수도 있는 액션 블록버스터가 될 테니까.

김지운은 이제 그런 삶은 사양이었다.

그것 말고도 김지운에게는 직접 나서지 않고 저 부부를 도울 방법이 있긴 했다.

김지운에게는 몇 명의 연락처가 있었고, 그 연락처에 있는 이들에게 연락을 해서 부탁을 하면 좀 과장해서 지금 김지운이 있는 백화점의 매장 몇 개 정도는 당장 개인용으로 써먹을 수 있었다.

그러나 김지운은 굳이 그러지 않았다.

그 연락처를 알게 됐을 때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저 원하는 목적을 이루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을 뿐.

"딸기방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그 역시 허세가 아니었다.

"대기요? 대충 3시간은 기다리셔야 할 겁니다. 여기 태블릿에 일단 번호 입력해 주세요."

"예? 몇 시간이요?"

"3시간 정도 걸릴 겁니다."

목적지에 도달해서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에도 김지운은 연락을 하지 않았다.

'양 회장님 번호가 010-32······ 아니지.'

잠깐 연락처를 떠올리려고 노력만 했다가 멈췄을 뿐.

그렇게 김지운은 태블릿PC에 연락처를 입력하고 대기 순번을 받은 후에 고개를 들었다.

'3시간.'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을 하염없이 보내게 된 상황.

그러나 그 사실에 김지운은 이내 여유를 찾았다.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는 차도 가지고 오지 않아서 주차요금을 걱정할 필요도 없었고, 무엇보다 그는 시간이 누구보다 넘치는 사람이었다.

'까짓것 기다리지.'

그렇게 김지운은 시간 낭비를 시작했다.

백화점의 지하 2층부터 지상 5층까지, 백화점의 모든 것을 구경했다.

그건 처음이었다.

김지운의 인생에서 백화점에서 식품관 말고 다른 곳을 눈으로 쇼핑한 것은.

그래서였다.

김지운은 꽤 놀랐다.

'별게 다 있네.'

백화점에 이렇게 많은 게 있는 줄은.

특히 김지운이 놀란 건 그거였다.

'화재용 마스크로 이런 걸 구비해놨네?'

백화점 구석구석, 엘리베이터 근처에 배치된 화재 대비용 마스크들이 꽤 대단한 성능을 자랑하는 모델이란 것.

그렇게 별천지에서 김지운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별을 구경했다.

그쯤이었다.

우웅!

그의 스마트폰이 울렸다.

[잠시 후 차례가 옵니다. 대기해 주세요. 호명 후 5분이 지나도 오지 않으시면 예약은 취소됩니다.]

온 메시지를 보는 순간 김지운은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그가 있는 곳은 4층.

사람이 넘치는 이곳에서 5분 만에 지하 1층에 위치한 그 팝업스토어 매장으로 가는 것은 쉽지 않아보였다.

빠르게 가야 했다.

물론 김지운이 마음먹으면 1분 안에도 갈 수 있었다.

그가 있는 백화점은 일반적인 백화점과 다르게 멋을 위해 가운데가 뚫려 있었고, 그 한가운데는 커피숍이나 음식점이 자리 잡은 구조였다.

4층 난간에서 몸을 던진 후에 몇 번 묘기 비슷한 것을 하면 10초 안에 1층에 도달할 수 있었다.

이후 에스컬레이터에서 SNS에 '백화점에서 파쿠르하는 미친놈' 같은 주제로 올라갈 법한 행위를 몇 번 하면 20초 안에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빠르게 걸어가서 에스컬레이터에서 천천히 내려가는 수밖에.

그 과정에서 조금의 낭비도 있으면 안 됐기에 김지운은 모든 걸 무시하고 움직였다.

그쯤이었다.

1층에 도달했을 때쯤.

"야, 밖에 안개 장난 아니야."

"뭐? 안개?"

"그래, 안개가 미쳤어! 하나도 안 보여?"

대화가 들렸다.

"어, 이거 뭐야? 안개 미쳤네?"

"야 찍어! 이거 찍어!"

곳곳에서.

"야, 한 겨울에 안개라니! 말이 돼? 지금 영하 10도라고, 10도!"

"대박!"

그 대목에서 지하 1층으로 가는 에스컬레이터에 탄 김지운이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그의 표정은 이미 달라져 있었다.

더 이상 여유로움이나 평온한 따위는 없었다.

'설마.'

당혹감이 그의 얼굴을 지배하고 있었다.

'아니겠지.'

지금 그의 머릿속에 든 생각은, 상황은, 결코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아닐 거야.'

그러한 당혹감으로 가득 찬 표정은 빠르게 바뀌었다.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 어떤 감정도 드러나지 않는.

사냥감을 앞에 둔 사냥꾼의 표정으로.

그렇게 에스컬레이터가 끝나고 지하 1층에 발을 들여놓은 김지운이 고개를 들어 지상 1층을 바라봤다.

그 순간 그는 더 이상 걸음을 내딛지 않았다.

3시간이 기다려서 먹고 싶어 했던 그 핫한 딸기 케이크에 대한 것도 머릿속에는 없었다.

비단 그만 그런 건 아니었다.

지상 1층에서 온 어수선함은 이미 지하 1층에도 도달한 상태였다.

적지 않은 방문객들이 말했다.

"밖에 안개 엄청나다던데?"

"안개가? 이 날씨에?"

"안개 맞아?"

"잠깐만, 지금 인스타 찾아보고 있어."

한 낮에 안개가 나와도 놀라운 일인데 무려 영하 10도의 날씨에 안개가 온다는 것.

여러모로 상식적인 일은 아니었으니까.

더불어 이곳 백화점은 SNS에 적잖게 진지한 이들이 자주 찾아오는 곳이었다.

이런 눈에 띄는 사건이 있으면, 관심을 벌 수 있는 일이 있으면 뒤도 돌아보지 않는 이들이.

그러다가 누군가 말했다.

"어, 지금 인스타 하나 떴는데, 라스베이거스에도 안개를 꼈다던데?"

"여기도 올라왔는데?"

"여기? 어디?"

"파리."

"파리?"

그리고 그 중에서 누군가가 말했다.

"미친! 괴물이다! 시부야에 괴물이 나타났데!"

그 꽤 큰 목소리에 사람들의 이목이 그곳에 집중됐고, 그 사실에 말을 뱉은 이는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즉, 그 순간 모두는 생각했다.

어떤 한 명이 민폐 짓을 했고, 눈총을 받는 거라고.

즉, 이건 해프닝이라고.

예외는 한 명이었다.

'빌어먹을.'

김지운, 그는 이제 확신했다.

'어비스가 열렸다.'

이제 곧 등장하리라고.

그리고 그 확신은 곧 현실이 됐다.

커헝, 커헝!

"괴, 괴물이다!"

몬스터의 울음과 비명이 들렸다.

2023년 12월 31일.

은퇴한 헌터 김지운의 아포칼립스가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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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미스트 (2).

2.

몬스터가 현실에 등장했다!

현재 2023년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이 상황은 그리 특별할 게 없는 상황이었다.

이 상황은 너무나도 많은 소설과 만화, 영화에서 소재로 써먹었다.

그런 매체 속에서 나타난 몬스터가 등장하는 순간의 상황은 대개 비슷했다.

괴물이다, 그 소리에 사람들은 부리나케 도망치고 그러다가 서로 뒤엉키고, 압사 당하는 식.

그러나 현실은 조금 달랐다.

커헝, 커헝!

"괴, 괴물이다!"

괴물이 등장했다 그리고 누가 들어도 반려동물의 것으로 보이지 않은 소리가 나왔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보인 반응은 다름 아니라 무시였다.

말 그대로였다.

'뭐야?'

그 소리를 들은 이들 대부분은 눈살만 찌푸릴 따름이었다.

그들이 몬스터를 수없이 경험해본 헌터라거나 혹은 이계 경험이 있는 귀환자이건가 그래서 그런 건 아니었다.

'뭔데 저기 저렇게 시끄러워?'

일단 대부분의 이들은 그 소리 자체를 제대로 듣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모두가 있는 이곳 백화점은 한 층의 넓이가 5천 평을 넘는 거대한 공간이었다.

그리고 지하 1층은 식품관과 음식점이 배치된 곳으로 다른 곳들보다 더 많은 소음이 가득 찬 곳이었다.

그런 그곳을 사람으로 가득 채웠을 때, 그때 만들어지는 소음은 어지간한 비명소리 정도는 뚫지 않을 만큼 강렬했다.

물론 가장 큰 이유는 그거였다.

'별일 아니겠지,'

위기감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

당연한 일이었다.

대한민국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각 이상으로 평화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그렇게 말하면 대한민국 국민들은 저들마다는 치열하고, 힘들하고 이야기하겠지만 그런 이들 중에서 밤중에 집 앞 편의점으로 가거나 저녁 시간대에 늦은 밤까지 술을 마시고 길거리에서 앉아 쉬는 것을 두려워하는 이는 손에 꼽을 만큼 적었다.

혹여 그런 반응을 보이면 도리어 예민하다고, 정신이상자라고 취급을 당할 뿐.

그런 그들의 상식으로 몬스터가 등장해서 자신의 생명을 위협한다, 라는 것을 제대로 인지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물론 한 명은 달랐다.

'빌어먹을.'

김지운, 그는 몬스터가 등장하는 순간, 그 울음을 듣는 순간 등골이 오싹해졌다.

얼굴 역시 납처럼 굳었다.

그리고 움직였다.

커헝!

그는 온갖 소음과 인파를 뚫고 그 몬스터의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그건 본래 김지운의 방식이 아니었다.

김지운, 헌터 시절의 그는 동료들에게 혹은 가끔 만나는 관광객에게 말했다.

몬스터의 소리가 들리면 움직이지 말고 숨을 죽이라고.

절대 몬스터에게 다가가지도 말고 동시에 몬스터로부터 도망치려고 하지도 말라고.

그게 어비스에서 살아남는 가장 중요한 방법 중 하나라고.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일단 지금 김지운이 있는 곳은 어비스가 아니었다.

'확인해봐야 해.'

새로운 장소에서는 새로운 정보가 필요한 법.

결정적으로 지금 김지운에게는 확신이 필요했다.

'이게 꿈인지 아닌지.'

지금 자신이 보고 있는 게 현실이라는 확신이.

그것을 인지해야만, 그래야만 비로소 김지운의 모든 감각이 깨어날 수 있을 테니까.

헌터 김지운의 감각이.

"밀지마요! 아, 밀지 말라고!"

그러나 막상 그런 김지운의 노력은 곧 등장한 거대한 사람의 벽 앞에서 가로막혔다.

과장이 아니었다.

미식축구의 라인맨들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사람들이 뭉쳐 벽을 만들었다.

벽이 만들어진 이유는 간단했다.

커헝!

"어우, 저거 대체 뭐야?"

커헝!

"끔찍하네."

커헝!

"야, 찍어. 일단 찍어."

등장한 괴물을 관람하거나 사진 하나라도 찍기 위해 몰려든 자들이었다.

2023년의 사회는 그런 사회였다.

무언가 특별한 일이 생기면, 사건사고가 터지면, 심지어 사람이 죽어가도 일단 스마트폰으로 찍고 보는 세상.

그리고 그것을 주저함 없이 자신의 SNS에 올리는 세상.

그냥도 아니고 몇 가지 코멘트를, 작가들도 쓰기 힘든 만큼 번뜩이는 문장을 포함해서 올리는 세상.

심지어 좀 과한 경우도 있었다.

"여러분! 지금 제가 엄청난 걸 발견했습니다!"

"저 무서운데, 지금 도와주실 뿐 있나요?"

연기를 섞어 방송을 하거나 영상을 촬영하는 이들조차 있었다.

물론 그것이 가능한 가장 큰 이유는 그거였다.

커헝, 커헝!

"꺄악!"

"어우, 무서워."

"저거 진짜 뭐야? 장난이야?"

지금 등장한 몬스터가 독특한 생김새와 들어본 적 없는 거친 울음 소리를 내지만, 아직까지 피를 본 이는 없다는 것.

커헝, 커헝!

오히려 등장한 몬스터도 몰려든 인파에 당황한 몬스터 역시 공격을 하는 대신 소리만 내지를 뿐이었다.

이쯤에서 몇몇은 생각했다.

"이거 이벤트 아니야?"

"백화점에서 영화 촬영하나?"

이건 괴물이 아니라 그냥 하나의 쇼일지도 모른다고.

시간이 흐를수록 그런 감정은 더더욱 커져갔고, 그쯤에서 누구 한 명이 움직였다.

"여러분! 제가 이 괴물을 잡아보겠습니다!"

톰브라운과 구찌, 두 명품으로 도배한 뚱뚱한 거구의 사내가, 옷을 입었음에도 보이는 손등의 문신과 조폭이 분명한 외모를 가진 사내가 괴물을 향해 걸어갔다.

"구독, 좋아요, 후원 부탁드립니다!"

방송을 하면서.

그렇게 등장한 조폭 사내의 덩치는 등장한 괴물과 비교했을 때 매우 압도적이었다.

사실 등장한 괴물은 그리 무시무시한 존재가 아니었다.

일단 덩치가 작았다.

키는 130센티미터 정도, 피부는 초록색이었고, 팔다리는 앙상했고, 배는 아프리카 혹은 북한에서 굶주림에 허덕이는 아이처럼 부풀어 올라 있었다.

누군가 비유를 하라고 한다면 판타지 소설이나 영화에서 자주 나오는 고블린을 꺼내 비유를 할 정도.

그러나 고블린하고는 달랐다.

"어우, 주둥이가 무시무시하네요."

그 머리가 사람 같은 고블린이 아니라 개, 그것도 주둥이가 튀어나온 사냥개와 비슷했다.

물론 그럼에도 기본 덩치는 그리 인상적이지 못했다.

"개새끼, 아주 박살을 내주마."

그렇기에 조폭 사내는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그 괴물을 향해 적의를 드러내며 다가갔다.

"아! 지우여신사랑님 10만 원 후원 감사합니다!"

눈은 들고 있는 스마트폰에 꽂힌 채로.

"예? 조심하라고요?"

그렇게 그 괴물과의 거리가 1미터에 되는 순간, 그 순간이었다.

커헝!

이제까지 잠자코 있던 괴물이 마치 다리에 스프링이 달린 것처럼 제 자리에서 발사되었다.

주둥이를 벌린 채로,

콰직!

그렇게 단숨에 괴물이 조폭 사내의 오른 발목을 그대로 물었다.

"끄아아악!"

그 순간 거대한 비명소리와 함께 핏물이 튀었다.

'어? 어?'

그제야 비로소 몰려든 사람들 사이에 균열이 생겼다.

크르르! 커헝!

"끄억, 끄어어억!"

그리고 그 균열은 괴물이 거친 소리와 함께 조폭 사내의 다리를 사정없이 씹어댈수록, 그 사실에 조폭 사내가 이제 비명을 넘어 숨이 넘어가는 소리를 내뱉을수록 커졌다.

이윽고 바닥에 누군가 거대한 붓으로 붉은칠을 한 것처럼 피가 흥건하게 칠해지는 순간, 그 순간 모든 게 바뀌었다.

"끄아아아악!"

사람들이 터진 수류탄 파편처럼 사방으로 도망가기 시작했다.

미친 듯이.

서로가 뒤엉켜서 넘어지고, 넘어진 이들 위로 사람들이 덮쳐지고, 짓밟히면서.

모두가 이 말도 안 되는 광경에서 도망치고자 했다.

단 한 명만이 달랐다.

김지운, 그는 모두가 도망치는 곳을 향해 나아갔다.

커헝!

'역시.'

그리고 비로소 볼 수 있었다.

'화이트 클래스인 도그블린이었군.'

어비스에서만 마주했던 몬스터를.

3.

어비스.

그곳에서 살아가는 헌터들에게는 한 가지 책자가 지급됐다.

초창기 헌터들, 그 중에서도 모두가 인정할 만한 별을 다섯 개 이상 가진 헌터들이 모여서 이제 막 헌터가 된 이들을 위해 만든 일종의 초보자 매뉴얼이었다.

그런 책자의 가장 첫 페이지에는 5가지 수칙이 적혀 있었고, 그 첫 번째 수칙은 이게 적혀 있었다.

1. 몬스터를 마주했을 때는 움직이지 마라.

김지운, 그가 그랬다.

이제까지 전력을 다해 몬스터를 볼 수 있는 곳까지 도달하는 순간 그는 그대로 멈췄다.

다리가 멈췄다.

그리고 숨도 멈췄다.

물론 머릿속은 달랐다.

그의 뇌는 어느 때보다 빠르게 움직였다.

'도그블린이었군.'

일단 김지운은 눈앞의 몬스터가 화이트 클래스인 도그블린이란 것을 인지했다.

그건 꽤 긍정적인 일이었다.

화이트 클래스는 가장 낮은 등급이었고, 도그블린은 잘 훈련된 대형 사냥개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커헝, 커헝!

"끄륵, 끄으으윽!"

물론 그 정도면 현실에서는 그야말로 맹수급, 사람을 충분히 죽일 수 있는 위험이지만, 어비스에서 위험도는 시츄 새끼나 치와와 새끼 정도 수준에 불과했다.

'무리는 없군.'

그래서 도그블린은 보통 어비스에서 적게는 20여 마리, 많게는 천 마리 단위로 무리를 지었다.

그 괴물이 넘치는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그러나 지금 눈앞의 도그블린은 한 마리뿐이었다.

커우우우! 커우우우!

그쯤에서 갑자기 도그블린이 피로 점철된 주둥이로 하울링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신호였다.

'동료를 불렀다.'

내가 이곳에 있다.

'사냥을 위한.'

그리고 이곳에 있는 인간들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나약하니까 사냥을 시작하자, 라는.

위험한 소리였다.

하지만 그 소리를 듣는 순간 김지운은 답을 내놓았다.

살아남는 데에는 문제가 없다고.

'그전에 도망치자.'

그렇다고 사냥을 한다는 건 아니었다.

일단 김지운은 이제 헌터가 아니었다. 정확히는 어비스에서 얻은 능력치와 스킬은 현실에서 적용되지 않았다.

단, 아이템은 달랐지만 너무나도 당연하게도 헌터에서 은퇴하는 순간 김지운은 그동안 그가 모아온 모든 아이템을 길드에 반납했고, 수중에는 이렇다 할 무기도 없었다.

그 단순한 칼이나 총조차 없었다.

물론 김지운은 잡고자 하면 지금 상태에서도 도그블린 몇 마리를 잡는 건 어렵지 않았다.

열 마리까지는 거뜬했다.

단지 알 뿐이었다.

'몸에 도그블린의 피가 묻으면 그때는 죽을 때까지 쫓다온다.'

도그블린의 응징을.

'어차피 안개 밖에서는 얼마 못 버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어비스의 몬스터들은 오로지 주어진 안개에서만 살 수 있었다.

특히 강한 몬스터일수록 그 등급에 맞는 안개에서만 살아갈 수 있었다.

예를 들면 가장 낮은 화이트 클래스의 몬스터는 하얀 안개, 속칭 화이트존은 물론 그 윗등급인 레드존에서도 살 수 있었지만 레드존에서 살아가는 몬스터들은 화이트존에서는 오래 버틸 수 없는 구조였다.

그리고 아예 안개가 없는 곳에서는 그 생존 시간이 매우 제한되었다.

막연한 기준도 아니었다.

'도그블린은 안개 밖에서 평균 8분 22초를 버텼다.'

김지운, 그는 그 생존 가능 시간을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2,323마리의 도그블린을 통해서.

즉, 이건 도망치면 이기는 싸움이었고 김지운은 그 마땅한 승리를 마다하지 않았다.

김지운이 천천히 뒤로 움직였다.

"끄륵, 끄르륵!"

그쯤에서 이제 비명조차 제대로 내지르지 못하는 조폭 사내가 김지운을 향해 눈빛을 보냈지만 김지운은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일단 나설 때가 아니었다.

그리고 지금 당하는 사내는 누가 보더라도 살아오면서 좋은 일보단 안 좋은 일을 했을 부류였다.

아포칼립스를 소재로 한 소설을 보면 가만히 있어도 중간은 갈 텐데 꼭 흉악한 문신과 평생 무법자로 살아온 걸 자랑하며 사고를 치는 부류.

차라리 여기서 처리되는 게 나을지도 모르는 부류.

그렇게 물러나 김지운.

그 순간 그는 봤다.

"으아아악!"

1층과 지하 1층을 연결하는 에스컬레이터, 도망치는 사람들로 이미 아수라장이 되어버린 그곳에서 사람들이 눈사태가 일어난 것처럼 쏟아지기 시작한 것을.

그와 동시에 김지운은 봤다.

'안개다. 어비스의.'

에스컬레이터 끝으로 보이는 1층 무대가 새하얀 안개들이 보이기 시작한 것을.

커헝, 커헝!

그리고 그 안개 사이로 소리가 들렸다.

커헝, 커헝, 커헝!

하나도 아닌 여러 개가.

'열두 마리.'

그 소리를 듣는 순간 김지운은 당황하지 않았다.

이곳은 도망칠 곳이 넘쳤다.

당장 지하 1층에서도 밖으로 이동 가능한 계단이 있었고, 지하 2층은 지하철역과 연결되어 있었으며, 지하 3층부터 시작되는 지하주차장을 통해서도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또한 곳곳에 엘리베이터가 다수 배치되어 있었고, 비상대피를 위한 계단도 있었다.

도망칠 루트는 차고 넘쳤다.

머릿속으로는 이미 그 루트들의 우선순위가 정해지고 있었다.

마치 자동계산기처럼.

그러나 김지운의 눈은 한 곳만을 향하고 있었다.

"꺄악!"

에스컬레이터 근처에서 유모차를 밀고 있는 한 여인을.

한 번 봤던 여인을.

그 순간 김지운은 고민하지 않았다.

김지운, 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사냥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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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미스트 (3).

4.

그 부부는 젊은 부부였다.

동갑으로 25살, 지금 시대로 보면 매우 젊은 나이에 결혼을 해서 이제 29살에 그토록 원하던 아이를 가진.

"괜찮겠어? 안 바빠?"

"연말에 군인이 바쁠 게 뭐 있어?"

"그래도 간신히 얻은 휴가잖아? 쉬는 게 낫지 않아?"

"에이, 당신도 그렇고 하은이도 그렇고 연말에라도 어디 가서 사진이라도 남겨야지."

그렇게 올해로 태어난 지 7개월이 된 아이를 위해 부부는 연말에 큰 마음을 먹고 요즘 가장 핫한 곳이라고 평가 받는 여의도의 백화점을 찾아왔다.

아쉽게도 그들은 몰랐다.

"사람이 이렇게 많은 줄은 몰랐어."

핫플레이스가 왜 핫플레이스인지.

처음에는 이것저것 보이는 신기함에 놀라긴 했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부부는 이내 깨달았다.

"으아아앙!"

이곳을 아직 돌도 지나지 않은 아이와 같이 다니는 것이 너무나도 쉽지 않음을.

그 무렵에 남편은 말했다.

"여기서 잠깐 쉬고 있어. 내가 먹을 것 좀 사올게."

그렇게 남편이 사라졌고, 그쯤에서 에스컬레이터 근처에 마련된 식탁에 앉아 식사를 하던 한 커플이 울기 시작한 아이를 달래기 시작한 엄마를 보며 말했다.

"여기 앉으세요."

"괜찮아요, 식사들 하세요."

"저흰 다 먹었어요."

말은 그리 했지만 커플이 시킨 떡볶이 세트는 절반도 비워지지 않은 상태.

그러나 그 커플은 그냥 그것을 들고 다른 곳으로 향했고, 그쯤에서 아이 엄마는 처음으로 제대로 앉아 쉴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휴식을 만끽했다.

언제 다시 올지 몰랐으니까.

그쯤이었다.

"괴, 괴물이다!"

커헝!

소란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은.

끄아악!

으아악!

커허엉!

그렇게 백화점 지하 1층이 아수라장이 되어가는 상황에서 아이 엄마의 기억은 듬성듬성했다.

떠오르는 건 세 가지였다.

"으아앙!"

"괜찮아요, 우리 하은이 괜찮아요."

우는 아이를 달래기 위해 품에 안은 것.

"엄마아빠가 있잖아요, 괜찮아요."

커헝!

그 상태에서 갑자기 괴물의 소리가 들려왔다는 것.

커헝!

그리고 그 괴물이 달려오는 순간 아이 엄마는 아이를 품은 채 그대로 몸을 웅크렸다는 것.

때문에 아이 엄마는 알 수 없었다.

깨앵!

자신과 아이를 향해 달려드는 괴물, 그 괴물을 향해 한 사내가 몸을 날렸다는 사실을.

5.

강현중 중사, 오늘 아내와 어린 딸아이를 데리고 오랜만에 외출을 한 그의 직업은 군인이었다.

매우 특별한 특수부대인 광호부대 소속으로 정부는 그 존재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당연히 강현중은 삶은 매우 불규칙했다. 출근과 퇴근은 제멋대로였고, 휴가를 내는 것도 쉽지 않았다.

연말에 큰 마음을 먹고 백화점에 온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하은이 선물도 사고, 주혜 선물도 하나 사야지.'

크리스마스는 지났지만, 그래도 무언가 올해를 기념할 만한 선물을 사주기 위해서.

그러나 아쉽게도 강현중 중사가 준비했던 모든 것은 넘치는 인파 속에서 무의미한 것이 되었다.

"죄송합니다. 30분 이상은 기다리셔야 합니다."

'미치겠네.'

사람이 넘치는 연말의 백화점에서는 가볍게 먹을 만한 것을 사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그 사실에 강현중 중사의 마음은 무거워졌다.

오늘 좋은 경험은커녕 오히려 아내와 아이에게 고생만 시킨 것이 되어버렸으니까.

미안함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그쯤이었다.

"괴, 괴물이다!"

커헝!

그 소란이 일어났고, 그 소란이 일어났을 때 강현중 중사는 바로 반응했다.

'무슨 일이지?'

모두가 무시하는 그 상황에서 강현중 중사는 그 소란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움직일 순 없었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강현중 중사, 그 역시 험한 경험을 해왔지만 그의 상식에 괴물 같은 건 없었으니까.

'별 일 아니겠지.'

그렇게 주문한 메뉴가 나오기를 기다리는 순간, 그 순간 강현중 중사의 스마트폰이 울렸다.

번호를 보는 순간 강현중 중사의 표정이 바뀌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임해철 소령님이?'

그 번호의 주인은 다른 누구도 아닌 그가 속한 광호부대를 이끄는 대장이었으니까.

강현중 중사에게는 다른 어떤 상관보다 중요한 상관이었으니까.

"강현중입니다. 무슨 일이십니까?"

- 강 중사! 조심해!

"예?"

- 조심해. 무조건 조심해. 일단 문자 보내줄게. 아이랑 와이프 데리고 그곳으로 올 수 있으면 와. 하지만 절대 안개에 들어가서는 안 돼. 젠장, 이거 연락도 하면 안 되는데, 강 중사. 진짜 너 믿는다. 살아남아라.

그렇게 통화는 긴박하게 그리고 일방적으로 끝났고 강현중 중사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일반인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극한의 경험을 여러 번 경험한 그조차도 이번 상황은 쉽사리 이해할 수 없었다.

대신 몸은 움직였다.

'위험해.'

아내와 아이가 있는 방향으로.

'하은이랑 주혜가 위험해.'

최대한 빨리.

그러나 상황은 이제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심가해져 있었다.

"으아아악!"

"밀지 마! 끄아악!"

마치 파도처럼 밀려온 사람들이 강현중 중사를 방해했고, 그쯤에서는 강현중 중사도 힘을 썼다.

몰려오는 사람을 온힘을 다해 밀쳐냈고, 그런 그가 힘을 쓸 때마다 사람들이 쓰러졌다.

무시무시한 힘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아가는 것은 쉽지 않았다. 버티는 것이 용할 따름이었다.

대신에 볼 수 있었다.

"아."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것들이 뒤엉켜 있는 것을.

커헝!

그리고 그것을 향해 난생 처음 보는 괴물들이 탐을 내고 있는 것을.

그 순간 강현중 중사가 전력을 다해 움직였다.

방해하는 이들을 향해 주먹을 휘두르면서.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하면서.

그러나 그 순간 강현중 중사의 표정은 이미 참담함과 절망으로 물들어 있었다.

알았으니까.

자신이 앞으로 일어날 참사를 막을 방법은 없음을.

구할 수 있는 건 시체뿐일 거라고.

'신이시여.'

그 순간 할 수 있는 것은 신께 기적이 오기를 기도하는 것뿐이라고.

그러나 강현중 중사는 알았다.

이제껏 자신을 비롯해 자신의 동료들이 기적을 바라며 신께 기도를 했으나, 신이 기적을 보여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음을.

이번에라도 다를 게 없을 것임을.

'신이시여.'

그럼에도 강현중 중사는 이번에는 재차, 연거푸, 거듭해서 신에게 기도를 했다.

무슨 대가를 치러도 좋으니 그것만은 피해달라고.

그러나 그런 기도가 무색하게 그 괴물이 아이와 아내를 향해 몸을 날렸고, 아내는 아이를 안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빌어먹을 신이시여!'

그 사실에 비명조차 내뱉지 못하는 강현중 중사.

'제발.'

그렇게 마지막 기도를 내뱉는 순간, 그 순간이었다.

깨앵!

아내와 아이를 향해 달려든 괴물이 불쌍한 소리를 내며 어디론가 날아갔다.

동시에 아내와 아이 근처에는 괴물 대신 다른 게 등장했다.

요리용, 그것도 일본요리용 회칼을 든 채 오는 괴물들을 겨누고 있는 덩치 좋은 사내가.

그 사내는 그렇게 강현중 중사의 아내와 아이를 지키려는 듯 다가오는 괴물들을 향해 회칼을 겨누었다.

맹수가 이발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리듯이.

크르르!

그 기세에 등장한 괴물들 역시 쉽사리 몸을 날리지 않은 채 상황을 지켜봤다.

대치국면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 대치국면을 향해 강현중 중사가 달려들었다.

"이 빌어먹을 개새끼들아!"

거기서 강현중 중사는 몸 따위는 사라지 않은 채 그대로 괴물 한 마리를 향해 몸을 날렸다.

레슬링을 하듯 한 마리를 잡고 그대로 바닥을 굴렀다.

커헝!

그 사실에 다른 괴물들이 놀라며 강현중 중사를 바라봤고, 그 순간 회칼을 들고 있던 사내가 허리춤에서 또 다른 회칼을 꺼내더니 자신으로부터 등을 돌린 괴물 한 마리를 향해 던졌다.

푹!

그렇게 날린 회칼이 그대로 괴물의 몸뚱이에 꽂혔고, 괴물이 깨앵! 비명을 내지르며 사내를 바라봤다.

그와 동시에 사내가 말했다.

"정신 차려!"

괴물과 뒤엉킨 강현중 중사를 향해서.

"가족을 지켜!"

그제야 비로소 괴물과 레슬링을 한바탕 했던 강현중 중사는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지금 자신이 해야 할 건 목숨을 걸고 이 괴물과 뒤엉키는 게 아님을.

가족을 데리고 도망치는 것임을.

강현중 중사가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고, 뒤엉켰던 괴물은 숨넘어가는 소리와 함께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괴물과 사람들 사이에서 대치국면이 이루어졌고, 그사이 슬금슬금 움직이던 강현중 중사가 가족과 합류했다.

"여보!"

일단 강현중 중사는 가장 먼저 아내와 아이의 상태를 살폈다.

"으아아앙!"

아이는 열심히 울고 있었다.

반면 아내는 강현중 중사의 말에도 제대로 된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눈에 초점이 없었다.

패닉 상태에 빠진 모습이었다.

흔한 반응이었다. 전쟁터에서 민간인들이 큰 충격을 받았을 때 보여주는 가장 흔한 반응.

흔한 만큼 이런 상황에서 대처법이 무엇인지도 알았다.

무리하지 않는 것.

물론 상황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크르르!

그사이 강현중 중사 가족과 그들을 구하러 온 사내, 넷의 주변을 포위하고 있던 괴물들의 숫자가 세 마리에서 다섯 마리로 늘어났다.

전략적인 숫자였다.

상대보다 머릿수가 하나만 더 많아도 전략적으로 그 가치는 매우 컸으니까.

강현중 중사 입장에서는 매우 껄끄러운 상황이었다.

자신이 괴물 두어 마리를 상대하는 동안 남은 것들이 아내와 아이를 노리면 방법은 없었으니까.

'어디서 이런 괴물들이?'

더 나아가 강현중 중사는 많은 훈련과 실전을 경험했지만, 지금 상황에 도움이 될 만한 것은 없었다.

그때였다.

"어렵게 생각하지 마라. 가족만 지키도록."

은인의 말에 강현중 중사의 눈빛이 바뀌었다.

흔들림이 사라졌다.

여기서 강현중 중사는 괜히 자신이 나서겠다, 목숨을 걸겠다, 자신 대신 가족을 지켜달라, 같은 말은 하지 않았다.

눈앞의 사내에게는 경험이 있어 보였으니까.

저 괴물들을 상대해본 경험이.

그런 사내가 이렇게 말했다면 충분한 계획이 있다는 의미 그리고 그 계획에서 강현중 중사가 해야 하는 건 차고 넘치는 활약이 아니라 괜한 사고를 치지 않는 것이었다.

쉽게 말하면 시키는 것만 하면 된다는 의미.

그렇기에 고개를 끄덕이는 강현중 중사.

대신 그는 한 가지 질문을 던졌다.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은인의 이름을 기억하는 것.

그 질문에 사내는 대답했다.

"김지운이다."

그 대답과 동시에 사내가 괴물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것은 매우 위험해 보였다.

커헝!

괴물, 도그블린의 숫자는 앞서 말했듯이 다섯.

또한 놈들은 그냥 다섯이 아니라 극도로 경계하고, 분노한 상태였다.

그런 놈들을 향해 하나가 덤벼든다?

당연히 다섯 마리들은 동시에 그 한 명을, 김지운을 향해 달려들 터.

잘 싸우더라도 피를 볼 수밖에 없는 일!

그러나 김지운은 개의치 않았다.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그에게는 능력치 충분했으니까.

일단 그는 가장 먼저 한 마리에게 달려들었다.

그 한 마리 역시 바로 김지운에게 달려들었고, 헌터와 도그블린이 이내 뒤엉켰다.

뒤엉키는 순간, 김지운은 바로 도그블린의 목젖에 회칼을 찔러 넣었다.

푹!

그 상대에서 김지운은 들어간 회칼을 움직였다.

수동 자동차의 수동 스틱을 1단에서 3단까지 움직이듯이.

푸화아앗!

그리고 이내 회칼을 뽑는 순간 도그블린의 목에서는 엄청난 양의 핏줄기가 뿜어졌다.

단순히 목에 찔려서 나올 수 있는 양이 아니었다.

목에 있는 주요 혈관들 전부가 잘려야 나올 수 있는 양.

커헝!

그 엄청난 출혈에 같이 덤벼 들려 하던 도그블린들의 걸음이 멈추었다.

본능 때문이었다.

크르르, 크르!

지금 눈앞에 있는 김지운이 사냥감이 아니라 자신들을 단칼에 먹어치울 수 있는 사냥꾼임을.

물론 그렇다고 물러서는 건 아니었다.

어비스에서 물러선다는 것은 그냥 죽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해서 대부분의 몬스터들은 어차피 죽는 거 싸우다 죽는 것을 택하고는 했다.

무엇보다 동료를 죽인 것은 응징을 해야 했다.

그게 도그블린들의 룰이었다.

특히 동료의 피를 뒤집어 쓴 것은 용이라고 하더라도 끝까지 추적해서 물어뜯는 것이 도그블린의 방법이었다.

'결국 피 범벅이 됐군.'

김지운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제 당분간 피 냄새를 없애기 전까지는 도그블린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됐다는 것을.

하지만 그 사실에 후회하거나 그러진 않았다.

그럴 만한 일도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 김지운이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하나뿐이었으니까.

정확히는 어비스의 몬스터가 등장한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이었으니까.

헌터가 되는 것.

그 순간 김지운의 발치에서 피를 뿜어대며 부르르 몸부림을 떨던 도그블린의 경련이 멈췄다.

과다 출혈로 도그블린이 죽는 순간.

그것을 본 김지운은 떠올릴 수 있었다.

[도그블린을 처치했습니다.]

[상태창이 활성화됐습니다.]

[스킬슬롯이 활성화됐습니다.]

[도감이 활성화됐습니다.]

[사전이 활성화됐습니다.]

[음험한 사기꾼이 당신에게 깃듭니다.]

'5년 만에 다시 듣게 될 줄이야.'

자신이 헌터가 됐던 순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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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미스트 (4).

6.

어비스.

그것이 발견된 것은 2018년 2월 3일이었다.

최초의 발견지는 일본 도쿄.

그러나 그곳이 어비스이며, 미지의 신비가 가득한 곳이란 걸 알게 된 건 3개월 뒤인 5월 8일이었다.

호주 국적의 최초의 헌터 잭 다니엘스가 어비스에서 살아 돌아왔다.

"이것은 아웅의 꽃입니다. 먹으면 부상이 치료됩니다. 어떤 부상이든. 잘린 손발도 자라납니다. 양만 맞는다면."

기적을 손에 쥔 채로.

그때 가장 먼저 움직인 것은 다름 아니라 사우디아라비아 왕가였다.

그들이 막대한 자본을 들여 어비스를 사냥할 헌터들을 모았고, 클랜을 창설시켰다.

알사우드 클랜이 등장했다.

그쯤에서 그 낌새를 느낀 다른 권력자들 역시 빠르게 움직였다.

클랜을 창설했다.

하지만 아직 이렇다 할 정보가 전혀 없는 상태였고, 소수의 개인 헌터들이 결과물을 가지고 나오는 상황에서 클랜들은 일단 거금을 들여 헌터가 될 만한 재목을 모으기 시작했다.

김지운, 그가 영입된 건 2018년 7월 3일이었다.

김지운은 그날을 선명하게 기억했다.

그날 그는 이도준을 만났고, 그곳에서 아웅의 꽃으로 총알을 맞고 쓸모가 없어진 왼쪽 다리를 치료했다.

이후 다음날, 김지운은 몇 가지 계약서에 서명한 후에 어비스 포털 앞에 설 수 있었다.

새하얀 포털 앞에.

그리고 그 안에 들어갔다.

아무것도 없이.

"들어가는 순간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이 사라질 겁니다. 옷은 물론 금니나 혹은 몸 안에 있는 여러 장치들까지. 그야말로 태어날 때 가지고 태어난 것만 가지고 들어갈 수 있습니다."

들고간 건 조언뿐이었다.

"그 상태에서 그 어떤 조력 없이 마주한 몬스터를 사냥하셔야 합니다. 그게 어비스에서 헌터로 각성하는 첫 번째 조건입니다."

조언이라기보다는 사형선고에 가까운 말이었지만, 그게 사실이었다.

어비스에는 누구나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제 혼자 힘으로 몬스터를 잡지 않은 자들은 결코 헌터로 각성할 수 없었다.

그래서 어비스에는 두 부류가 있었다.

헌터 그리고 관광객이.

어쨌거나 김지운은 들어갔고, 알몸으로 당시 마주했던 화이트 클래스의 몬스터를 상대했다.

각성을 했다.

[도그블린을 처치했습니다.]

[상태창이 활성화됐습니다.]

지금처럼.

[스킬슬롯이 활성화됐습니다.]

[도감이 활성화됐습니다.]

[사전이 활성화됐습니다.]

[음험한 사기꾼이 당신에게 깃듭니다.]

김지운의 운명에 다양한 옵션들이 추가됐다.

물론 5년 전과 지금의 반응은 달랐다.

5년 전에는 꽤 놀랐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각성을 하다니.'

김지운은 지금 상황에 놀랐다.

'알몸이 아닌데.'

조건이 달랐으니까.

그건 꽤 중요한 부분이었다.

어비스에서는 헌터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꽤 절대적인 조건들이 존재했다.

지구의 물건은 가지고 들어갈 수 없으며, 자신이 직접 잡은 몬스터에서만 경험치를 얻을 수 있다는 것.

그런데 지금 김지운은 지구의 물건, 회칼을 이용해서 도그블린을 잡았는데 각성을 했다.

그렇다는 건 지구의 물건도 어비스의 시스템이 아이템으로 인지해준다는 의미.

'핵무기도 유효할지 모르겠군.'

정말 중요한 부분이었다.

또한 그것도 중요했다.

'다시 상태창이 등장한 걸 보면, 어비스에서 이룩한 것은 초기화된 모양이고.'

김지운은 은퇴를 했을뿐, 그가 어비스에서 얻은 능력은 어비스로 가는 순간 유효했다.

그런데 지금 이룩했던 모든 것이 처음으로 돌아갔다.

그건 곧 다른 헌터들도 같은 처지라는 의미.

물론 지금 당장 염두에 둘 부분은 아니었다.

'어차피 지금은 쓸모가 없다.'

김지운에게는 지금 여러 가지가 생겼지만, 당장 김지운에게 도움이 될 건 없었다.

상태창은 레벨이 올라야 의미가 이었고, 스킬슬롯은 스킬룬을 얻어야 의미가 있었으며, 사전은 아이템을 얻어야 발동이 가능했다.

굳이 의미가 있다면 도감 정도.

[도그블린이 도감에 등록됩니다.]

[체력이 1포인트 상승합니다.]

하지만 그 의미 역시 지금 당장 김지운의 운명을 바꿀 만큼 인상적이진 않았다.

그리고 딱히 인상적일 필요도 없었다.

크르르!

김지운에게 있어 지금 남은 네 마리의 도그블린을 처리하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니었으니까.

일단 이미 상황은 끝났다.

도그블린들은 기세 싸움에서 졌다.

이미 김지운을 자신들보다 더 강한 존재로 인지를 했고, 그때부터는 전술이 달라졌다.

무작정 덤벼드는 게 아니라 눈치를 보고, 낌새를 봤다.

사냥개들이 곰을 상대할 때처럼.

김지운 입장에서는 그게 더 쉬웠다.

어차피 도그블린들이 전술을 짠다고 해봐야 그 수준은 사냥개들 수준에 불과.

수가 뻔했다.

도리어 김지운 입장에서는 놈들이 개떼처럼 달려드는 게 훨씬 더 골치 아픈 일.

그 예상대로였다.

커헝!

일단 한 마리가 김지운에게 덤벼들었다.

시선을 끌기 위한 미끼였고, 김지운은 그 미끼를 물지 않았다.

퍽!

발로 도그블린을 옆으로 쳐낸 후에 그 뒤에 이어서 덤벼드는 놈의 목덜미에 회칼을 꽂았다.

푹!

꽂은 상태에서 레버를 당기듯 회칼의 손잡이를 두어 차례 움직인 후에 그대로 뽑아냈다.

핏줄기가 뿜어지는 상황.

그 상황에서 이번에는 김지운이 나섰다.

뒤에서 대기 중인 두 마리, 개중 한 마리를 향해 김지운이 몸을 날렸고, 레슬링을 하듯 뒤엉킨 상태에서 김지운이 그대로 목덜미에 다시 한 번 더 회칼을 꽂았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 상태에서 바로 빠져나갔다.

김지운이 그대로 근처에 있는 음식점의 카운터를 넘어갔다.

그 후에 바로 등장하는 주방에서 다시 칼 몇 자루를 챙겼다.

커헝!

그 사이 남은 두 마리가 김지운을 쫓아 같이 음식점 카운터를 넘었다.

그리고 그 순간 오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구석에 몸을 웅크리고 있던 김지운이 한 마리의 목덜미를 향해 식칼을 꽂았다.

푹!

이제 남은 건 한 마리.

사실상 게임 끝이었다.

다섯으로도 안 된 것을 한 마리가 해낼 수 있을 리 만무.

푹푹!

그렇게 비좁은 음식점 주방 안에서 섬뜩한 소리가 몇 번 나는 것을 끝으로 더 이상의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저 피투성이가 된 김지운만이 모습을 드러낼 뿐.

그쯤에서 주변 상황은 많이 바뀌어 있었다.

일단 사람들이 많이 빠져 있었다.

이상할 건 없었다.

갑자기 몬스터가 등장하고, 그 몬스터 때문에 피바람이 불기 시작하고, 비명이 울려 퍼지는 와중에 여전히 지하 1층에 남아있을 정상인이 많다면 그게 이상한 일일 터.

대부분은 도망쳤다.

도망칠 곳도 많았다.

누군가는 엘리베이터로, 누군가는 계단으로, 누군가는 에스컬레이터를 통해서.

또는 화장실이나 창고 등으로.

그렇게 모두가 지상으로, 지하로 도망쳤다.

남은 이들은 두 부류였다.

공포에 질려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부류들.

"대박!"

"미친, 저 사람 뭐야?"

"영화 찍는 거 아니지? 이거 현실이지?"

나머지는 지금 이 순간 쉴 새 없이 김지운을 찍으며 저마다의 감탄사를 내뱉는 부류들.

김지운 입장에서는 후자의 부류들은 그리 탐탁지 않은 자들이었다.

특히 두 가지 부분에서 그랬다.

일단 그들이 찍은 영상이나 사진을 개인적인 소장용에서 만족할 리가 없었다.

어떤 식으로든 세상에 알릴 것이 분명했다. 한 번 올려서 묻히면, 재차 올리는 한이 있더라도.

혹은 제목으로 19금 후방주의! 라는 식으로 조회수를 올리기 위한 낚시를 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리고 그게 알려지면 김지운은 계약 위반이었다.

클랜들이 응징이 들어올 터였다.

물론 지금 이 순간 김지운이 그 클랜을 염두에 두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이제는 세상이 바뀌었다.

무엇보다 그 응징은 어디까지나 은퇴한 헌터를 대상으로 하는 이야기였다.

현역으로 복귀한 헌터라면 기준이 조금 달라졌다.

오히려 이 순간 김지운의 신경을 건드린 건 두 번째 이유였다.

'또라이들이 많군.'

지금 자신을 향해 스마트폰을 내민 이들이 정상적인 판단 대신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자들이라는 것.

'1층에 안개가 가득 찬 걸 보면 백화점 밖 역시 안개로 가득 찼을 가능성이 크다.'

몬스터가 넘치고, 어비스의 안개가 가득 찬 상황에서 그런 부류와는 같이 있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는 건 사실상 여기 갇힌 거다.'

특히 제한된 공간 내에서 같이 갇혀있는 건 더더욱 탐탁지 않았다.

여러모로 탐탁지 않은 상황.

그러나 김지운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동시에 두 가지 부분이 해결됐다.

"어, 뭐야? 왜 인터넷이 안 돼?"

"119죠? 여기 괴물이 나타났어요! 괴물이! 어? 어? 여보세요? 저기 여보세요?"

갑작스레 모든 이들의 통신이 끊겼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통신사 구분 없이 모든 이들의 스마트폰이 계산기와 카메라, 캔디크러쉬 정도만 할 수 있는 전자제품으로 변했다.

당장 김지운의 사진이 갑자기 SNS에 올라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됐다.

그리고 저들과 함께 이곳에 갇혀있는 것을 걱정할 필요도 없어졌다.

커헝, 커헝!

'······최소 백 마리군.'

지하 2층에서 에스컬레이터를 역주행하면서 수백 마리의 도그블린들이 등장했다.

7.

훈련 받은 사냥개와 건장한 성인 남자가 싸우면 누가 이길까?

그 질문을 하면 저마다 답변이 다를 것이다.

하지만 질문을 건장한 성인 남자 다섯과 훈련받은 사냥개 다섯이 싸우면 누가 이길까, 라고 바꾸면 모두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성인 남자 다섯을 고를 것이다.

그리고 그게 맞았다.

하지만 현실은 조금 달랐다.

장담할 수 있다.

성인 남자 다섯이 아니라 오십 명이 있는 곳에 사냥개 한 마리가 입에 거품을 물고 덤벼들면 아수라장이 될 거라고.

훈련과 경험의 부재는 그만큼 치명적이었다.

하물며 훈련된 사냥개가 아니라 보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돋을 정도로 기괴한 생김새를 가진 괴물 백여 마리가 등장한다면 어떻게 될까?

심지어 훈련 정도가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 무수히 많은 것을 죽이고, 산 채로 물어뜯어 먹어온 생살코기의 맛을 아는 녀석들이라면?

그 상황에서 싸움은 성립되지 않았다.

양떼에 늑대가 등장한 것처럼, 일방적인 사냥이 있을 뿐.

"으아아악!"

커헝!

여기서는 인간들이 양떼였다.

인간들은 비명을 내지르며 도망쳤다.

1층으로 또는 지하 2층으로.

새하얀 안개가 가득한 그곳으로.

모두가 경쟁적으로 그곳으로 향했다.

예외는 한 명뿐이었다.

'지옥으로 가는군.'

김지운은 안개로 향하지 않았다.

그는 알았다.

'어비스의 안개에서는 아이템 없이 결코 1시간 이상 버틸 수 없다.'

저 안개 속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물론 다른 이들은 모를 수밖에 없었다.

어비스의 경험자가 아니면 결코 알 수도 없고, 알아서도 안 되는 정보였으니까.

"저기."

그런데 강현중 중사, 아이와 아내를 부축한 채 김지운에게 다가와 말했다.

"안개는 위험합니다. 가시면 안 됩니다."

그 말에 김지운의 눈빛이 가늘어졌다.

앞서 말했듯이 지식은 보통 지식이 아니었으니까.

특히 현직 군인이 얻을 만한 지식이 아니었다.

어비스의 지식을 아는 일반인들은, 그러니까 관광객들은 대부분 권력자 본인 혹은 그 자식들이 대부분이었으니까.

'헌터는 아니다.'

그렇다고 강현중 중사가 어비스의 헌터라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보면 안다.

헌터라면 결코 그런 대응을 했을 리 없다는 것을.

그런 대응을 하는 헌터는 열 명 중 열 명이 어비스의 방랑자가 되어버린다는 것을.

'헌터라면 이걸 말해줄 리 없다.'

결정적으로 헌터는 결코 어비스에 대한 것을 타인에게 말해주지 않았다.

"제가 하는 말이 이해가 안 되시겠지만, 부디 믿어주십시오. 저는 특수부대 출신입니다. 그리고 제 상관에게서 긴급하게 통화가 왔습니다. 저곳이 위험하다고."

그때 이어진 설명을 듣는 순간 김지운의 머릿속에는 의문이 사라졌다.

그 역시 클랜에게 가입하게 된 게 다른 누구도 아닌 수도방위사령부의 사령관의 소개를 통해서였던 바.

실제로 헌터 중에는 군인 출신의 비율이 꽤 높았다.

"이름."

무엇보다 김지운은 이제 확신했다.

"강현중이라고 합니다."

"강현중, 계급은?"

"예?"

"계급."

"중사, 중사입니다."

"강 중사."

지금 이 순간 강현중은 김지운을 위해서 자신이 가진 가장 귀한 정보를 주었다.

"이제부터 여기서 나갈 수 없다."

즉, 김지운은 맡길 수 있었다.

"그러니 이곳의 괴물들을 전부 사냥한다. 같이."

자신의 등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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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지하주차장 (1).

1.

2023년, 현대 사회의 사람들은 어지간한 사고에는 크게 당황하지 않았다.

물론 자연재해 같은 것에는 당황했다.

만약 자신이 있는 곳에서 7.0 이상의 지진이 일어났다거나, 눈앞에서 갑자기 쓰나미가 몰려오는데 당황하지 않는 인간은 없었다.

"요즘 사람들은 어지간한 대형 사고가 터져도 크게 놀라지 않는다."

그러나 대한민국을 기준으로 한다면 북한이 동해상으로 미사일을 발사했다고 해도 놀라는 이는 없었다.

심지어 이제는 외국인들도 놀라지 않았다. 

과거에는 북한이 미사일을 쏘면 화들짝 놀란 외국인들이 한국 주식을 팔아치우며 코스피와 코스닥이 바닥을 쳤지만, 요즘은 북한이 미사일을 쏘면 외국인들이 먼저 방산주, 북한 미사일 관련주를 찾아서 매수를 하는 시대였다.

어딘가에서 전쟁이 일어나도 마찬가지였다. 예전에는 중동에서 전쟁이 터지면 세계전쟁을 두려워하며 사재기를 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요즘은 그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 현대 사회의 사람들도 당황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러나 스마트폰 인터넷이 1분만 되지 않아도 패닉 상태를 일으킨다."

스마트폰이 먹통이 됐을 경우.

하물며 그냥 먹통이 아니라 동시다발적으로 먹통이 된다면?

자기 자신은 물론 주변에 있는 모든 이들이 그렇다면?

그때부터 사람의 경계심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질 게 분명했다.

터지기 직전의 폭탄과 같은 상태.

그런 상황에서 등장한 안개 그리고 괴물은 사람들을 패닉 상태에 몰아넣기에 조금의 부족함이 없었다.

여의도의 백화점, 그곳이 아수라장이 됐다.

더군다나 백화점은 백화점이라는 사실이 상황을 조금 더, 더 많이 악화시켰다.

"끄아아악!"

"밀지 마! 으아악!"

일단 수만 명에 이르는 방문객들이 제한된 입구에 몰려들면서 압사 사고가 일어났다.

거기서만 수백 명이 죽었다.

더 큰 문제는 그렇게 사람들이 몰린 곳이 깔려 있는 부상자들 그리고 사망자들로 더 좁아졌다는 점이었다.

또 다른 문제는 그거였다.

출구가 가장 많이 있는 백화점 1층, 그곳에는 백화점에서 가장 값비싼 물건이 있다는 것.

쨍그랑!

"꺄아악!"

당연히 약탈이 일어났다.

사치품 매장들의 창들이 깨졌고, 그곳으로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달려들어 손에 잡히는 것을 가지고 움직였다.

모든 층이 비슷한 꼴이었다.

예외는 단 한 곳뿐이었다.

2.

푹!

지하 1층, 그곳에서 김지운은 도그블린 사냥을 하고 있었다.

어려울 건 없었다.

일단 김지운 입장에서는 운 좋게도 지금 지하 1층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괴물이다! 으아아아! 괴물이야!"

"저리 가! 저리 가!"

온갖 소리를, 그것도 겁에 질린 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커헝!

도그블린 입장에서는 참을 수 없는 사냥감들이.

그리고 김지운 입장에서는 미끼였다.

즉, 김지운은 도망치는 인간에 눈이 팔린 도그블린의 옆구리를 파고든 후에 놈의 목덜미에 칼을 찔러 넣으면 될 뿐이었다.

푹!

그 후에 굳이 무리해서 뒤엉킬 필요도 없었다.

일단 출혈이 생긴 도그블린은 생각보다 오래 버틸 수 없었으니까.

물론 그건 매우 잔혹한 일이었다.

사람을 미끼로 삼는다, 일반인들이라면 감히 엄두도 낼 수 없는 생각이었으니까.

그러나 김지운은 그 사실에 별 감흥을 느끼지 않았다.

이제 이곳은 현실이 아니다.

어비스였지.

'결국 다 잡게 되는군,'

그리고 애초에 김지운은 도그블린을 사냥할 생각 자체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리 미끼를 이용한다고 해도 김지운 입장에서는 위험한 일이었다.

도그블린의 주둥이에 한 번만 물려도 그 상처는 결코 작지 않았으니까.

무엇보다 지금 세상은 병원에 가서 제대로 된 치료를 받기는커녕 이제 해열제 하나 구하기도 힘들어진 세상이었다.

작은 상처가 죽음으로 이어져도 이상할 게 없는 세상.

'어차피 안 잡아도 죽는 놈들이지만.'

결정적으로 김지운은 안개가 없는 지하 1층에서 도그블린들이 살 수 있는 시간이 제한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게 어비스의 법칙이었다.

자신의 안개를 벗어난 몬스터는 결국 죽는다는 것.

김지운 입장에서는 적당한 곳에서 모습을 감추고 있기만 해도 살 수 있다는 의미.

또한 괜찮은 장소도 있었다.

당장 엘리베이터, 그곳의 문을 강제로 연 다음에 엘리베이터 줄을 잡고만 있어도 됐다.

혹은 지하 1층에 너부러진 식당들, 그 식당이 쓰는 냉장고나 수납장에 몸을 쑤셔 넣는 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이었다. 

도그블린들 입장에서는 상자 안에 숨은 사냥감을 힘들게 상대하는 것보다 그냥 도처에서 소리를 지르며 도망치는 팔팔한 놈들을 사냥하는 게 훨씬 이익이었으니까.

그러나 김지운은 그러지 않았다.

기꺼이 사냥을 했다.

이유는 단 하나 때문이었다.

[도그블린을 처치했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바로 이것.

'예상대로다.'

헌터가 가진 능력인 레벨업을 위해서.

더불어 레벨업을 위해서는 무조건 살아있는 몬스터를 죽여야만 했다.

죽은 몬스터를 상대로는 그 무엇도 얻을 수 없었다.

심지어 아이템조차도.

물론 어비스에서는 몬스터가 아닌 다른 방법으로도 얻을 수 있는 아이템들이 다수 있었다.

그럼에도 헌터들은 기꺼이 목숨을 걸고 몬스터 사냥에 나섰다.

가치 때문이었다.

레벨업을 했을 때의 가치.

김지운, 그는 그 가치를 누구보다 잘 알았다.

짝!

그렇게 김지운이 박수를 한 번 치자, 그의 눈앞에 반투명한 창이 모습을 드러냈다.

상태창이었다.

이름 : 김지운

나이 : 33세

레벨 : 2

직업 : 음험한 사기꾼

스킬 : 없음

능력 : 근력(14), 체력(9+1), 기력(1), 마력(1)

여분 포인트 : 4

그 생김새는 게임에서 흔히 보는 것과 거의 똑같았다.

그러나 이 상태창이 가지는 가치는 차원이 달랐다.

자신의 능력을 올릴 수 있다는 것.

심지어 그 능력 상승에는 한계가 없었다. 레벨업을 한다면 혹은 아이템이나 도감을 채워서 보상을 받는다면 얼마든지 올릴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올린 능력의 수준은 아득했다.

실제로 김지운은 많이 봤다.

맨주먹으로 강철보다 단단한 몬스터의 가죽을 쳐부수는 헌터들을.

아쉽게도 김지운은 그런 타입은 아니었다.

어비스의 헌터들은 각성하는 순간 직업이 정해졌다.

일단 밝혀진 것은 여섯 개였다.

우둔한 사냥꾼, 무식한 파수꾼, 화려한 장난꾼, 근엄한 시중꾼, 야비한 서리꾼 그리고 음험한 사기꾼.

'이번에도 음험한 사기꾼이군.'

김지운은 음험한 사기꾼으로, 이 직업의 특징은 간단했다.

초능력 계열 스킬을 배울 수 있다는 것.

더불어 스킬을 배우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했다.

하나는 스킬 룬이었고, 다른 하나는 스킬슬롯이었으며 스킬 룬은 어비스에서 몬스터를 사냥하거나 혹은 도감 보상을 통해서 구할 수 있었으며, 스킬슬롯은 10레벨 마다 하나씩 개방됐다.

더불어 한 번 스킬슬롯에 넣은 스킬 룬은 빼낼 수도, 삭제할 수도 없었다.

어쨌거나 김지운의 직업인 음험한 사기꾼은 다른 어떤 능력치보다 마력 능력치가 중요했다.

초능력은 마력을 기반으로 발동하니까.

'근력에 4포인트 추가.'

그러나 여기서 김지운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레벨업으로 얻은 포인트를 근력에 투자했다.

이상할 게 아니었다.

'뭐가 됐건 근력 스탯 50포인트는 찍어야 살아남을 수 있다.'

어비스의 몬스터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힘이 필요했다.

절벽에 한 손으로 매달린 채 다른 한 손으로 사과 하나는 먹을 수 있을 정도의 힘.

앞에 가는 사람과 대화를 하거나 수다를 떨면서 100미터짜리 절벽을 오를 수 있을 정도의 힘.

치타까진 아니고, 대신 사냥개 정도가 달려오면 도망칠 수 있을 정도의 힘.

그게 없으면 그냥 관광객이나 마찬가지였고, 그래서 모든 헌터들은 가진 능력이 무엇이든, 스킬이 무엇이든 간에 근력 스탯을 50포인트 만드는 것을 시작으로 삼았다.

헌터가 된 이들을 위해 마련된 매뉴얼, 그 매뉴얼에 적힌 5가지 수칙 중에 3번째 수칙이 그거였다.

3. 근력 50포인트 찍는 게 우선이다.

어비스가 아닌 지구라고 다를 건 없었다.

아니, 오히려 지구이기에 더 힘이 필요했다.

어비스의 환경은 대체적으로 아마존 밀림이나 로키 산맥 같은 느낌이었다.

안개로 가득 차 있긴 하지만, 도망치고자 하면 도망칠 만한 길은 얼마든지 있었다.

하지만 지구는 달랐다.

개중에서도 온갖 건물들이 잔뜩 늘어선 도심에서는 도망치다가 벽에 가로막히는 것이 일상이었다.

건물이 아니더라도 뒤엉킨 자동차들도 매우 골치 아픈 장애물들이었다.

그 넘치는 것들을 피해 움직이기 위해서는 현실 기준으로 올림픽 메달 클라스, 그 이상의 능력치가 필요한 바.

'언제 룬을 얻을지도 모르고.'

그게 아니더라도 언제 얻을지 모르는 스킬 룬을 위해서 미리 마력이나 기력에 투자하는 건 바보짓이었다.

'어떤 걸 얻을지도 모르고.'

또한 10레벨이 되기 전까지 스킬 슬롯은 단 하나, 그 하나를 어설픈 것으로 채워 넣는 것은 피해야 했다.

결정적으로 김지운은 알았다.

'이제 시작이지만.'

에스컬레이터 너머로 보이는 1층과 지하 2층, 그곳을 가득 채운 안개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저기, 다 잡은 거 같습니다."

그쯤에서 강현중 중사가 김지운에게 말을 걸었다.

그런 강현중 중사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

온몸이 피 범벅이었다.

본인의 피는 아니었다. 도그블린의 피였다.

김지운, 그가 목덜미에 칼을 꽂아 넣은 후에 피를 뿜는 도그블린들이 김지운에게 달려드는 걸 막아 세우는 것, 도그블린들이 과다출혈로 죽기 전까지 김지운을 보호하는 것, 그게 강현중 중사의 역할이었으니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상처 입은, 그것도 죽기 전 괴물이 내뿜는 적의는 어지간한 이들은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었으니까.

군인, 그것도 진짜 피를 보는 전장을 경험한 강현중 중사이기에 버틸 수 있는 일.

그 강현중 중사마저도 일이 끝나는 순간 두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극도의 피로감과 긴장감 탓.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

그런 강현중 중사에게 김지운은 그 말과 함께 어깨를 두드렸다.

그게 전부였다.

김지운은 칭찬이나 살가운 말은 뱉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일단 이곳에서 몬스터를 잡아야 할 필요성은 김지운보다 강현중 중사가 더 컸다.

"예."

김지운은 도망치면 됐지만 강현중 중사에게는 지켜야 할 게 있으니까.

몬스터를 잡아준 김지운이 은인이라는 의미.

결정적으로 김지운은 말했다.

"앞으로도 돕겠습니다."

이번이 끝이 아니라고.

즉, 김지운은 이제부터 강현중 중사가 제 몫을 하는 이상 같이 움직일 생각이었다.

그를 자신의 파티로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오빠!"

"주혜야! 하은이는?"

"하은이는 무사해!"

그 범주에는 너무나도 당연하게도 강현중 중사의 아내와 그 아이도 포함되어 있었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으아아앙!"

"그래, 하은아. 이제 괜찮아. 아빠는 괜찮아요."

아내는 몰라도 이제 돌도 되지 않은 아기를 데리고 어비스에서 넘어온 몬스터들의 세상을 살아간다?

미친 짓이었다.

그러나 김지운은 그 부분에 대해서는 큰 고민을 하지 않았다.

김지운은 알았다.

자신이 오래 살 수 있는 성격이 아님을.

헌터가 되기 전부터 그랬다. 그가 군인에서 은퇴한 것도 결국 자신의 그 기질 때문이었다.

헌터에서 은퇴한 것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쩔 수 없는 일.

오히려 지금 고민할 건 아이의 울음 소리가 아니었다. 솔직히 아이의 울음 소리는 달래면 될 일이었다.

문제가 되는 건 달래지지 않은 성인들이었다.

김지운이 돌아봤다.

사람으로 발 디딜 틈도 없어 보였던 지하 1층은 이제 사람을 찾기 힘들 정도로 허전해졌다.

그러나 사람이 없는 건 아니었다.

이 소란 속에서 저마다 곳곳에 숨은 이들, 모습을 웅크린 이들의 숫자는 꽤 됐다.

최소 천 단위가 넘어갈 터.

김지운 입장에서는 골치 아픈 자들이었다.

이제 이들은 생존자들이었으니까.

밖으로 나가지 않은 채 이곳, 백화점 지하 1층에서 살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생존자들.

그리고 김지운은 단언할 수 있었다.

그들 중 상당수가 김지운의 골치를 아프게 할 거라고.

물론 몇 백 명은 이제 상황이 정리된 만큼 밖으로 나갈 것이다.

밖의 안개가 뭔지 알 리가 없으니까.

실제로 상황이 정리된 걸 알게 된, 더 이상 몬스터가 없다는 걸 알게 된 생존자들이 고개를 내밀었고, 그들의 눈이 에스컬레이터나 비상계단의 위치를 찾아 움직였다.

이제 곧 그들이 이곳을 벗어나기 위해 움직일 터.

그러나 그런 김지운의 예상은 빗나갔다.

"으아아악!"

1층에서 내려오는 에스컬레이터, 그곳으로 한 사내가 비명을 내지르면서 에스컬레이터를 굴러 내려왔다.

정말 사정없이.

보는 이가 아플 정도로.

실제로 사내의 상황은 안 좋았다.

지하 1층까지 굴러서 내려온 사내는 곧장 제대로 일어서지도 못한 채 자리에서 비틀거리고 넘어지기를 반복했다.

"으억!"

결국 사내는 일어서기를 포기한 채, 바닥에 엎드린 채 말했다.

"조, 좀비다! 사, 사람들이 좀비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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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지하주차장 (2).

3.

1층에서 생존자가 등장했을 때 대부분의 이들은 그것을 보고 식겁했다.

혹은 도망을 치는 이도 있었다.

"으아아악!"

"괴, 괴물이다! 괴물이 왔다!"

떨어진 생존자가 괴물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리고 그게 당연한 생각이었다.

이제까지 1층 혹은 지하 2층에서 올라온 것들 중에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오로지 괴물들뿐이었다.

심지어 등장한 사람의 상태는 정상인이 결코 아니었다.

'좀비 아니야?'

'저거 좀비다! 좀비가 확실해!'

보는 순간 모두가 머릿속에 좀비, 그 단어를 떠올릴 정도.

그때였다.

"으억!"

그때 바닥에 넘어진 사내의 입에서 말이 나왔다.

모두가 아는 좀비물에서 나오는 좀비라면 결코 내뱉을 수 없는 매우 유창한 말이.

"조, 좀비다! 사, 사람들이 좀비가 됐다!"

하지만 여기 있는 이들에게 결코 위로가 될 수 없는 말이.

그 사실에 주변의 분위기는 더더욱 싸해졌다.

학습 때문이었다.

지금 이 상황, 갑자기 괴물이 등장하고 모든 통신이 단절되고, 안개로 가득 찬 밖에서는 어떤 낌새도 느껴지지 않는 상황에는 익숙한 이들은 단 한 명도 존재치 않았다.

그러나 좀비는 달랐다.

현대에는 좀비를 소재로 한 콘텐츠가 무한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많았다.

특히 한국의 경우에는 좀비를 소재로 한 드라마, 영화의 인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한국 주요 수출품 중 하나가 좀비물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그렇기에 좀비가 주는 공포를 너무나도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좀비라고?"

"좀비면 물리는 순간 감염되는 거잖아!"

"미친 씨발! 좀비라니!"

공포가 빠르게 번졌다.

"저, 저 새끼!"

그 중에서 명품 옷에 흉악한 외모를 가진 사내가, 앞서 등장한 도그블린에게 겁도 없이 덤벼들었다가 물려죽은 조폭 사내를 마치 찍어낸 듯한 사내가 소리쳤다.

"저 새끼 감염된 거 아니야?"

1층에서 등장한 사내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면서.

그리고 그 말을 들은 이들은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머릿속으로 상상할 수 있었다.

생존자 무리에 등장한 외부인.

그런 외부인의 몸뚱이에 알고 보니 상처가 있었고.

외부인은 별거 아닌 상처라고 하지만 잠시 후 각기춤을 추기 시작하는 외부인이 요즘 트렌드라고 하는 매우 날쎄고 빠른 좀비가 되고, 생존자 무리의 생존자들을 물어뜯으며 좀비 바이러스를 퍼뜨리기 시작하는 장면을.

좀비물 드라마의 2화쯤이나 3화쯤에 흔히 나오는 클리셰와 같은 장면을.

볼 때마다 쯧쯧, 저런 외부인을 받아들이다니 멍청한 새끼들 아니야? 답답하네, 답답해, 라는 소리를 뱉었던 장면을.

머릿속으로 그러한 장면을 떠올렸을 때 사람들이 할 수 있는 말은 하나였다.

"주, 죽여!"

생존자를 처리하는 것.

그쯤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적의와 살의가 등장한 사내를 향하기 시작했고, 그제야 사내도 눈치를 챘다.

쓰러져 있던 사내가 놀란 눈으로 몸을 일으켜 세웠다.

이제는 어느 정도 감각기관이 돌아온 듯 비틀거리기는 했지만 쓰러지진 않았다.

그러나 상황이 좋진 않았다.

"자, 잠깐. 자, 잠깐. 저건, 저건, 저저!"

무어라 말을 하고 싶었으나 목마저 막힌 모양.

"어, 잠깐. 저거 시계."

그쯤에서 사내를 구한 건 다름 아니라 사내가 손목에 차고 있는 시계였다.

"리차드밀?"

"뭐?"

"저거 시계 리차드밀 같은데?"

가장 저렴한 시계가 1억 원부터 시작한다는 초고가 시계이자, 매우 특별한 디자인으로 유명한 사내의 시계를 몇몇 이들이 눈치챘다.

그게 시작이었다.

몇몇 이들이 사내의 옷차림을 봤다. 입고 있는 옷은 전부 디올이었고, 신발은 디올과 나이키가 협업해서 만든 수백만 원짜리 운동화였다.

솔직히 길거리에서 봤다면 짭이네, 하고 넘어갈 만큼 유명하고 동시에 값비싼 제품들이었다.

반면 이곳은 요즘 가장 핫한 백화점, 저 정도 사치품을 가짜가 아닌 진짜로 가지고 다닐 만한 이들이 충분히 오고도 남은 것이었다.

"저 사람!"

결정적으로 사내의 얼굴을 아는 이가 있었다.

"이영후다!"

"이영후?"

"그 코인 거래소 상장 시켜서 돈 엄청나게 번 사람!"

"아!"

그것도 꽤 많았다.

"그 인스타에서 돈지랄 자랑하는 쓰레기 새끼?"

좋은 의미보다는 안 좋은 의미였지만, 어쨌거나 얼굴이 알아보는 이들이 생기자 적의와 살의는 잦아들었다.

아예 모르는 이들과 어쨌거나 이름을 알고 있는 이를 죽이는 것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으니까.

그러한 분위기에 이영후, 그 역시 어느 정도 여유를 되찾았다.

물론 매우 작은 여유였다.

몇 분도 되지 않을.

그 안에 이영후는 자신을 변호해야 했다. 자신이 위험하지 않다고, 죽여서는 안 된다고.

"나, 난 문제 없습니다!"

그렇기에 이영후는 말했다.

"물리지도 않았고, 저, 저기 좀비들은 물려서 감염되는 것도 아, 아닙니다."

물론 여전히 사람들은 이영후를 경계했다.

그 말을 믿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으니까.

그래서였다.

"씨발, 씨발."

이영후는 결국 결코 뱉어서는 안 되는 말을, 뱉는 순간 자신의 모든 것을 잃어버릴지도 모르는 말을 꺼내들었다.

"저, 저건 어비스야. 어비스의 괴물들이라고! 어비스의 안개라고!"

그 순간이었다.

한 사내가 이영후를 향해 다가갔다.

물티슈로 몸을 닦기는 했지만 여전히 피로 점철되어 있는 사내가.

한 손에는 피와 살점을 깨끗하게 닦은 회칼을 들고 있는 사내가.

그 모습에 이영후는 입을 꾹 다물었다.

'주, 죽었다.'

저 사내가 자신을 죽이러 온다고 생각했으니까.

"이영후 씨."

"끕!"

그렇기에 이름이 불리는 순간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뱉는 이영후, 그런 그에게 등장한 사내, 김지운은 말했다.

"괜찮으십니까?"

4.

김지운, 그가 이영후에게 접근하는 순간 모두는 생각했다.

김지운이 이영후를 죽일 거라고.

이제까지 몬스터를 처리했을 때처럼 자비 없는 손길을 보여줄 거라고.

히어로처럼 앞장 서서 모두를 구해줄 거라고.

"괜찮으십니까? 일단 이걸로 흐르는 피 좀 닦으시죠."

그러나 김지운은 자비가 없기는커녕 어느 누구보다 친절하기 그지없는 손길을 내밀었다.

"어, 어, 어."

그 손길을 받은 이영후가 놀라서 제대로 된 반응을 보이지 못했다.

오히려 반응을 보인 건 다른 이였다.

"뭐하는 거야!"

처음 이영후를 향해서 감염된 거 아니야, 라고 말한 살집 두둑한 험악한 인상의 사내.

"저, 저 새끼 죽여야 한다고! 좀비 바이러스에 걸린 새끼라고! 지가 지 입으로 말했잖아! 좀비가 있다고!"

그 조폭 사내는 언성을 높이며 살의를 드러냈다.

"다 죽기 싫으면 죽이라고!"

그런 조폭 사내의 목소리에는 협박이 섞여 있었다. 

목소리만 그런 게 아니었다. 조폭 사내는 근처에 있는 다른 사내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빨리 나서라고.

나서서 저 생존자를 죽이라고.

물론 나서는 이는 없었다.

일단 이런 상황에서 먼저 나서서 굳이 피를 보고 싶어 할 만큼 용기와 행동력이 넘치거나 혹은 머리에 나사가 빠진 이는 이미 진작에 움직이고 남았을 터.

무엇보다 여기에 있는 이들 중 적지 않은 이들은 봤다.

김지운이 무슨 짓을 했는지.

지금 생존자를 죽이라고 눈알을 부라리고, 소리를 내지르는 조폭 사내가 그걸 봤다면 장담컨대 여기서 단 한 마디도 내뱉지 않았겠지만, 아쉽게도 조폭 사내는 괴물이 나타나는 순간 누구보다 빨리 여자화장실로 도망치는 바람에 돌아가는 사정을 모르고 있었다.

해서 김지운은 나설 수밖에 없었다.

김지운이 조폭 사내를 향해 웃으며 다가갔다.

"지금 오해가 있으셔서 그렇습니다."

호의를 가지고.

"오해? 야이, 새끼야, 지금 멈춰. 안 멈춰?"

물론 조폭 사내는 그런 김지운의 행동에 조금의 호의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김지운은 개의치 않고 조폭 사내와의 거리를 좁혔다.

이윽고 둘 사이의 거리가 1미터쯤이 됐을 때.

퍽!

김지운이 단숨에 거리를 좁히며 조폭 사내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그것도 인중을 향해서.

뿌드득!

그러자 기괴한 소리와 함께 조폭 사내가 그대로 뒤로 자빠졌다.

그런 조폭 사내의 코에서는 피가 뿜어졌고, 벌어진 입에서는 앞니 두 개가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 광경에 침묵이 깔렸다.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영후를 죽이라고 외치던 이들이, 살의를 보내던 이들이 순한 양이 됐다.

김지운이 노리던 바였다.

'괜한 여지를 남길 필요는 없지.'

김지운은 지금 이 상황에서 사람이라면 사람끼리 돕고 살아야죠! 그런 휴머니즘을 강조하며 상대방을 설득하느라 힘과 시간을 허비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런 성격도 아니었고, 지금은 그럴 여유도 없었다.

'시간이 없는데.'

지금 지하 1층은 결코 안전한 상황이 아니었다.

이미 지하 2층과 지상 1층은 하얀 안개로 점령된 상태, 화이트존이 된 상태였다.

이건 매우 골치 아픈 점이었다.

"이영후 씨 일단 이것부터 드시죠."

"예?"

"초코바입니다. 일단 천천히 드시면서 이야기 좀 해봅시다. 어비스에 대해서 말이죠."

"어, 어, 어비스요? 제, 제가 그런 말을 해, 했습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는 어비스의 헌터입니다. 저 안개가 어떤 의미인지 압니다. 저 안개를 들이마신 이들이 좀비와 같은 꼴이 된다는 것도."

어비스의 안개는 그곳에서 태어나지 않은 존재들에게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다.

일단 안개를 들이마시는 순간 정신에 문제가 생겼다.

피해망상, 과대망상, 환각 증상 등, 그러니까 약물에 중독된 것과 비슷한 문제가.

그리고 노출된 시간이 지날수록 그 정도는 심해졌다.

종국에는 정신이 파괴됐고, 그때부터는 모두가 생각하는 좀비와 비슷한 상태가 됐다.

으어어, 말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채 가만히 있다가 무언가 생명체가 지나가면 덤벼드는 좀비.

어비스의 헌터들도 실제로 그들을 좀비라고 불렀다.

정식 명칭은 어비스의 방랑자였지만, 그건 실전을 모르는 양반들 기준일 뿐, 실전에서 뛰는 헌터들은 좀비라는 표현을 더 자주 썼다.

더불어 패닉 상태에 빠지거나, 몸상태가 안 좋을수록 좀비가 되는 속도가 빨라졌다.

즉, 지금 지상 1층과 지하 2층은 안개 자체도 문제이지만 좀비도 넘칠 것이다.

최소 수만 마리가.

그런 상황에서 이곳 지하 1층으로 안개가 내려오지 않으리란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리고 한 번 안개가 내려오기 시작하면, 움직이기 시작하면 그건 누구도 막지 못했다.

즉, 안개를 막는 건 불가능했다.

단지 몇 가지 물건들을 이용해서 안개에서 정신이 무너지는 속도를 막을 수 있을 뿐.

솔직히 지금 상황 자체가 운이 매우 좋은 것뿐이었다. 안개는 아주 운좋게 지하 1층에 오지 않았을 뿐이고, 여기 생존자들은 더더욱 운 좋게 지하 1층에 있었을 뿐.

'어차피 구조대는 없다.'

결정적으로 김지운은 지금 이곳만이, 이 백화점만이, 여의도만이 어비스를 경험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면 해피 엔딩이다.

그러나 그 해피 엔딩이 될 거란 믿음으로 가만히 앉아서 여기 있는 식품관의 연말 선물용 과일을 깎아먹으며 시간을 보낼 수는 없었다.

결국 움직여야 했고, 그런 의미에서 김지운에게는 아주 좋은 기회가 왔다.

"이영후 씨, 관광객이시죠?"

"예?"

"괜찮습니다. 저도 몇 번 관광객분들을 어비스에서 모셔봤습니다."

관광객.

어비스의 헌터와 달리 어비스를 순수하게 관광하고 싶어 하는 이들이었다.

물론 아무나 관광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일단 조건이 여러 개 있었다. 

한국 기준으로는 최소 1조 원 이상의 가치를 지닌 기업의 오너여야 했고, 관광비용으로 사망 시 자신의 모든 자산을 클랜에 기부하는 계약서를 써야 했으며, 한 번 관광을 할 때마다 최소 130억 원이 넘는 관광비용을 지불해야 했다.

아득한 일이었다.

그러나 의외로 관광 수요는 많았다.

일단 돈이 넘치는 이들에게는 어비스라는 새로운 세상은 이제까지 누리지 못한 세상이었다.

어차피 평생 써도 못 쓸 만큼 돈이 많은 이들에게는 그만큼 매력적인 곳도 없을 터.

물론 그냥 단순히 새로운 광경을 보고 싶어서 가는 이들만 있는 건 아니었다.

본래 관광이라면 가서 기념품을 챙기는 게 제 맛인 법.

어비스 관광 역시 마찬가지였다.

관광지에 따라 관광객들에게 어비스에서만 구할 수 있는 기념품을 제공했다.

암을 낫게 하는 물이라든가, 얼굴의 주름살을 없애주는 기름이라든가, 눈이 좋아지는 소금이라든가, 머리가 자라나는 용의 피라든가.

본래대로라면 값비싼 대가를 지불하는 것은 물론 구매를 위한 대기표를 뽑아야 하는 아이템들이 관광이 끝나는 순간 즉시 멋진 패키지에 담겨서 제공됐다.

그거 말고도 다양한 것이 기념품으로 제공됐다.

그중에는 헌터들이 사용하는 아이템이나 스킬 룬도 포함되어 있었다.

헌터들도 값비싼 대가를 주고 사는 물건은 어떤 의미에서 금괴나 미술품보다 더 가치가 넘쳤으니까.

즉, 김지운은 가능성을 점쳤다.

'기념품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그게 이유였다.

"이영후 씨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종종 들었습니다."

이름조차 들어본 적 없는 이영후에게 말을 건 것은.

"일단 특별한 상황인 만큼 서로 도와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클랜 본부까지 안내해드리겠습니다. 그러니 이영후 씨도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아, 아무렴요! 어떻게든 도와드리겠습니다! 뭐든 말씀하시죠!"

"그럼 혹시 도움이 될 게 있습니까? 기념품 같은 거 가지고 계십니까?"

"당연히 있죠! 지금 제 차에 있습니다!"

"그래요?"

매우 중요한 기회였으니까.

"그럼 꺼내도록."

"예?"

"차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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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지하주차장 (3).

5.

김지운, 그는 알았다.

'관광객이란 놈들은 열 명 중 아홉 명은 특권의식에 절어진 놈들이다.'

어비스의 관광객이 얼마나 다루기 힘든지.

'실제로도 특권을 가지고 있기도 하고.'

그들은 그저 단순히 콧대가 높은 자들이 아니라, 현대사회에서 막강한 권력을 가진 자들이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평범한 사람 몇 명 정도는 죽여도 아무런 문제없이 넘길 수 있는 자들.

물론 법적으로 무마한다는 게 아니라 들키지 않고 처리할 수 있다는 의미였지만.

어쨌거나 어비스의 관광객들은 그런 특권의식으로 가득찬 이들 중에서도 나사는 물론 나사가 고정하고 있던 상식과 관련된 부품 몇 개가 같이 빠진 이들이었다.

'골치 아팠지.'

김지운은 그런 관광객을 꽤 많이 상대했었다.

그는 매우 우수한 헌터였고, 보통 관광객들의 관광코스 가이드로는 우수한 헌터들이 붙고는 했으니까.

특별한 이들을 다루는 만큼 대가는 컸다.

한 번 관광 가이드에 나갈 때마다 김지운의 이름 앞에는 상상할 수 없는 금액이 꽂혔다.

그것 말고도 인맥 역시 생겼다. 관광객들 입장에서도 우수한 가이드와 사이가 좋으면 나쁠 건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건 예전의 이야기, 현재 중요한 건 관광객들이 결코 가소로운 존재들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오히려 지구에서 관광객들은 자신들이 가진 특권 그리고 어비스의 경험을 동시에 발휘할 수 있었다.

그래서였다.

"차키."

"예?"

김지운이 이영후를 상대로 이렇게 대화를 이끌어온 것은.

만약 김지운이 대놓고 무언가가 필요하다고 물어봤다면 이영후는 자신이 가진 패를 숨기고 협상을 제시했을 테니까.

수작을 부렸을 테니까.

그게 이상한 건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이 가진 강력한 패를 멋대로 꺼내는 게 도리어 바보짓 아닌가?

김지운이 이영후 처지였다면 결코 순순히 어비스에 대한 이야기를 내뱉지 않았을 터.

그냥 순한 양인 척 탈을 쓰고 연기를 했을 터.

어쨌거나 김지운의 호의에 정신없던 이영후는 모든 것을 고백하고 말았다.

자신의 차에 무엇이 있는지 말했다.

"차키 내놓으라고."

그렇기에 이 순간 김지운은 더 이상 예의를 차리지 않았다.

어비스에서 가장 필요 없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예의였으니까.

당연히 김지운은 이영후가 비협조적으로 나올 경우에는 더더욱 무례해질 수 있었다.

필요하다면 조금 전 자신의 주먹에 쓰러진 문신 사치품 돼지와 비슷한 꼴을 만들어줄 생각도 있었다.

그런 김지운에게 이영후는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차, 차키는 모, 못 드립니다."

그 모습에 김지운은 속으로 짧게 감탄했다.

이렇게까지 위협을 줬는데 이 정도 배짱을 부린다?

이영후의 근성이 보통은 아닌 모양.

물론 김지운은 그 근성에 박수를 치며 어깨 동무를 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김지운이 차가운 눈빛으로 슬그머니 허리춤에 손을 가져갔다.

그 모습에 이영후가 기겁하며 말했다.

"아, 안 드리겠다는 게 아, 아닙니다. 어, 없습니다. 저 지금 차키가 없습니다!"

"없다고?"

그쯤에서 이영후가 다급하게 제 안주머니에 손을 넣더니 지갑을 꺼내고, 그 안에 대충 꽂힌 카드 하나를 꺼내며 말했다.

"바, 발렛 맡겼습니다."

발렛을 맡기면 주는 카드를.

그것을 본 김지운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이런 상황은 예상하지 못한 바.

'하필이면.'

무엇보다 김지운은 발렛파킹존의 위치나, 발렛된 열쇠의 보관 상태를 알지 못했다.

그런 걸 이용해본 적이 없었으니까.

'가보지 않은 곳이다.'

또한 오늘 내내 백화점을 돌아다닌 김지운도 지하 주차장까지는 가본 적이 없었다.

머릿속으로 동선을 짜는 게 어렵다는 의미.

그건 꽤 중요했다.

"그럼 차는 어디에 있지?"

"지, 지하 3층에 있습니다."

"지하 3층."

김지운은 이 백화점이 처음이었고 심지어 지금 지하 3층 주차장은 안개로 가득 찼을 가능성이 높았다.

이 백화점의 지하 주차장은 본격적으로 지하 3층부터 시작됐으니까.

밖에서 나온 안개가 가장 먼저 지하 3층부터 점령하기 시작했을 테니까.

그 새하얀 안개 속에서 알지도 못하는 장소로 이동하는 것은 김지운 입장에서 시간이 꽤 걸리는 일이었다.

그게 핵심이었다.

'시간이 부족하다.'

어비스의 안개에서는 다른 무엇보다 시간을 가늠하는 게 중요했다.

그럼 남은 답은 하나.

"이영후."

"예? 예."

"여기 백화점 많이 와봤나?"

"거, 거의 매일 옵니다. 근처에 살아서······."

"그럼 눈 감고도 차 있는 곳까지 갈 수 있겠군."

"예?"

"못 가나?"

"가, 갑니다."

"다행이군."

길잡이를 데리고 가는 것.

6.

30분, 그리 길지 않은 시간.

그러나 지금 백화점 지하 1층의 생존자들에게는 그 어떤 때보다 기나긴 시간이었다.

특히 몬스터가 사라진 이후에, 비명과 괴성이 사라진 후에는 시간은 정말 멈춘 듯이 흘러갔다.

미칠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모두가 정신을 붙잡을 수 있었던 것은 모두의 손에 들린 스마트폰 덕분이었다.

현대 사회에서 스마트폰은 성경이나 불경, 코란보다 더 확실한 믿음과 희망을 주었으니까.

장담컨대 지금 상황에서 종교인에게 성경이나 코란하고 스마트폰 중 하나를 불태워 버려야 산다고 말하면 10명 중 9명은 성경이나 코란을 불태웠을 것이다.

물론 성경 같은 대부분의 종교적 물건들이 답을 주지 않듯, 지금 스마트폰도 답을 주진 않았다.

'대체 왜 전화가 안 되는 거야?'

'인터넷은 언제 복구되는 거지?'

주는 것은 답답함뿐.

그 답답함 속에서도 막상 지상 1층으로 혹은 지하 1층과 밖으로 연결된 문을 통해 밖으로 나가는 이는 없었다.

이제 모두는 알았다.

"구조대는 언제 오는 거야? 응? 여기 여의도잖아? 경찰도 한 명도 안 오는 게 말이 돼? 근처에 국회의사당이 있는데!"

"거, 쫑알쫑알 말 좆나게 많네. 그럼 나가시든가."

"뭐?"

"나가면 되잖아? 누가 막아?"

"그, 그건······."

"상황 알면 아가리 좀 합시다, 아가리 좀."

지금 저 안개 너머는 지옥이라는 것을.

모를 수가 없었다.

'씨발 저기 뭐가 있을 줄 알고.'

저 안개 너머에서 괴물들이 나타났다.

그리고 저 안개 너머로 도망친 이들 중에서 단 한 명도 돌아온 이가 없었다.

소리조차 없었다.

결정적으로 그 너머에서 도망쳐온 이는 말했다.

저 안개 너머에 좀비가 있다고.

그쯤에서는 이제 지상 1층이나 지하 2층으로 연결된 에스컬레이터 근처로도 사람들은 가지 않았다.

엘리베이터는 물론 계단까지, 모두가 위나 아래로 갈 수 있는 곳에서 멀어졌다.

안개를 멀리했다.

단 한 명.

"에스컬레이터 타고 그대로 지하 3층까지 이동한 다음에 발렛파킹 존으로 이동한다."

김지운, 그는 안개 너머로 갈 생각이었다.

"이해했나?"

"예?"

아니, 정확히는 두 명이었다.

김지운과 이영후, 둘이 갈 예정이었으니까.

그 사실에 너무나도 당연하게도 이영후는 격한 반응을 보였다.

"헌터라면서요? 그런데 안개에 들어가겠다고요? 아무런 대비도 없이?"

어비스의 안개가 어떤 곳인지 다른 누구도 아닌 헌터들에게 귀가 따갑게 들었던 바.

격한 반응을 보이는 건 한 명 더 있었다.

"저곳은 위험합니다. 분명 제가 들었습니다. 저 안개로 들어가서는 안 된다고."

강현중 중사, 그 역시 김지운을 만류했다.

물론 김지운은 그 둘보다 어비스의 안개가 가지는 위험성을 잘 알고 있었다.

'안개에서 활동가능한 시간은 30분 이내. 물론 제정신으로 활동하는 것은 채 5분도 되지 않는다. 안개를 마시는 순간 정신이 붕괴되기 시작하니까.'

동시에 이에 대한 대비책도 알고 있었다.

모를 수가 없었다.

헌터들이 어비스에 들어간 이유는 다른 무엇도 아니라 그 안개 속의 몬스터를 사냥하기 위함이니까.

대비책은 의외로 많았다.

'보통 이것을 막기 위해 헌터들은 어비스에서만 구할 수 있는 나무인 부레수 나무의 잎을 이용한다.'

그중 가장 많이 쓰이는 방법이 한국의 은행나무만큼 보기 쉬운 부레수 나무의 잎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방법도 간단했다.

사람 얼굴만한 부레수 나무의 잎을 마스크 모양으로 만들어서 쓰면 될 뿐이었다.

그러면 보통 10분 정도는 정신 파괴 없이 버틸 수 있었다.

당연히 10분만 활동할 일은 없기 때문에 수백 장을 구비하는 게 기본 중의 기본이었다.

그렇다고 부레수 나무가 만능이란 건 아니었다.

부레수 나무로 버틸 수 있는 안개 등급은 하얀색 정도 뿐, 붉은색 안개부터는 더 강력한 아이템이 필요했다.

또한 부레수 나무는 어비스에서만 생존하는 나무였다. 지구에는 존재치 않았다.

그러나 그에 대해서 김지운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마스크를 쓴다."

"예?"

현실에는 훨씬 더 구하기 쉬운 녀석이 있었으니까.

"마스크요? 그 코로나 때 쓰던 마스크 말하는 겁니까?"

2023년 겨울, 이제는 조금 찾기 힘들어진 마스크란 녀석이.

물론 실험해본 적은 없다.

지구의 물건은 어비스로 가져갈 수 없었으니까.

그리고 그 규칙은 절대적이었다. 머신건이나 토마호크 미사일, 핵배낭은 밸런스를 해치지만 마스크나 탈모약 정도는 눈감아 드리겠습니다, 그런 게 아니었으니까.

지구의 마스크로 안개에서 얼마나 버티는지는 테스트해본 적 없었던 바.

하지만 반대로 부레수 나뭇잎이 왜 효과를 가지는 지에 대해서는 지구에서 분석이 끝났다.

원리는 마스크와 똑같았다.

부레수 나뭇잎은 KF80보다 좀 더 우수한 성능을 가지고 있었다.

"KF94 정도의 성능을 가진 마스크라면 제정신인 상태로 약 10분 정도는 활동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보다 더 효과가 좋은 KF94마스크로는 그 이상을 버틸 수 있을 터.

그 대목에서 이영후는 말이 없어졌다.

어비스의 관광객인 만큼 김지운의 말이 충분히 타당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강현중 중사는 그런 이영후를 바라보는 순간 말했다.

"그럼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강현중 중사, 그는 어비스를 몰랐다.

안개가 위험하다는 것도 믿을 수 있는 상사로부터 경고를 받았기에 아는 것뿐.

지금 김지운이 하는 말이 진짜인지 아니면 그냥 정신 나간 놈의 헛소리인지 구분할 역량이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동행을 자처했다.

믿음이었다.

김지운에 대한 믿음.

"도움이 될 겁니다."

그 믿음에 김지운도 이제 믿음이 생겼다.

'꽤 믿음직한 친구가 생겼군.'

강현중 중사 입장에서는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김지운의 말을 믿고 안 믿고를 떠나서 그에게는 지켜야할 가족이 있었다. 그것도 매우 소중하 가족이.

그런데 이렇게 동행을 자처한다는 것, 김지운에게 입은 은혜를 매우 대단하게 생각한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그건 매우 힘든 일이었다.

김지운은 장담할 수 있다. 이제부터 그가 적잖은 이들을 구해주겠지만, 그 목숨 값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는 이는 손에 꼽을 정도라고. 대부분은 구명의 은혜를 입어도 무시하거나 혹은 뒤통수를 거리낌 없이 때리고도 남을 족속이라고.

그렇기에 김지운 입장에서는 기쁜 일이었다.

어비스에서도 그랬다.

그를 든든하게 해주는 건 실력 좋은 헌터가 아니라, 믿고 따를 수 있는 동료였다.

때문에 김지운은 다른 무엇보다 믿을 수 있는 이들만을 동료로, 부하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게 은퇴의 이유가 됐다.

그 믿을 수 있는 동료들을 살리기 위해 김지운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미끼를 자처했었으니까.

그렇기에 김지운은 기꺼이 말했다.

"그러니까 남도록."

따라오지 말라고.

"아닙니다, 어떻게든 제가······."

그 말에 무어라 말하려던 강현중 중사에게 김지운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우리 둘 다 여기서 사라지면 돌아올 때 여기 있는 이들이 환영할 것 같나?"

그 말을 듣는 순간 강현중 중사의 눈빛이 달라졌다.

"여차하면 이곳을 막을 수도 있지. 그럼 더 골치 아파진다."

자신에게 맡겨진 임무가 무엇인지 깨달았으니까.

그렇게 상황을 마친 김지운이 고개를 돌렸다.

"그럼 마스크를 찾고 이동한다."

그리고 그 말과 함께 김지운이 이영후의 등을 두드렸다.

"잘 부탁한다."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