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토끼공듀 - 1 >
사람들이 그리폰의 살덩이를 챙기고 돌아갔다.
나는 그들의 대화에서 알력을 읽었다.
검인은 묘하게 조심스러웠고 사람들은 그의 눈치를 보지 않았다.
처음엔 쉘터에서 뽑은 동료들인가 했는데 아니었다.
전국 각지에서 그리폰 잡자고 모인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생존자1한테 안 밀리지."
고인물에겐 밀리겠지만 나름 플레이타임을 내세울 수 있는 사람들임이 분명했다.
그리폰 잡겠다고 덤비는 사람이라면 레벨도 최소 15는 넘었을 테고.
검인은 반쯤 해체된 그리폰을 넋 놓고 보고 있다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왠지 그가 불쌍하게 보였다.
따지고 보면 검인이 잘못한 것은 거의 없는데.
"내가 하도 해먹어서 좀 미안하게 느껴지긴 하네."
물론 양보할 생각은 없다.
단지 무턱대고 적의를 드러낼 필요까진 없다는 것뿐.
마침내 검인이 일어섰다.
"으아아아!"
깜짝이야.
그는 크게 고함을 지른 후 근처의 나무를 주먹으로 두들겼다.
쿵, 하며 나무가 주먹 모양으로 패였다.
그럼에도 전혀 아픈 기색이 없다.
설마 육체강화 특성도 가졌나?
내가 알기로 육체강화는 시전자의 능력을 크게 올려줄 뿐 아니라 부담도 줄여준다.
예를 들면 벽에 주먹질을 했을 때.
근력 스탯이 같아도 육체강화 특성을 가지고 있는 쪽이 고통이 훨씬 덜하다.
형준 형에게 들은 것이라 정확하다.
"블링크에 육체강화라···"
추측컨대 쉘터 강화 특성까지 보유하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정부 쉘터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진 않아야 하니까.
그럼 특성이 3개란 말인가?
"개사기네."
내가 평가할 입장은 아니지만 하여튼 놀랄 일임에 틀림없었다.
검인이 완전히 사라지고 얼마 후, 다정이 나타났다.
성미도 급하네.
나는 차원문에서 나가 그녀에게 사정을 설명했다.
"···란 거야. 일단은 견제하면서 지켜보기만 해."
"죽이진 말고?"
"아니 허세 좀 떤 게 죽을 죄까지는 아닌 것 같은데."
"내 몸을 음흉하게 훑어봤단 말이야."
"그건 좀 그렇긴 해. 근데 다정아, 니가 워낙 매력적이어서 어쩔 수가 없었을 거야."
"아니, 그게 아니고! 내가 남자를 음흉하게 훑어봐야 되는데 반대로 됐잖아!"
그거였습니까.
다정의 감성이 보통과는 다르다는 걸 깜빡했다.
그녀는 씩씩거리더니 나한테 상의를 벗으라고 요구했다.
"닭 대신 꿩이야. 니 근육질 상체 좀 구경해야겠어."
"그거 성희롱 아니냐?"
"시끄럽고 빨리 벗어."
나는 그녀를 간신히 진정시키고 정부 쉘터에 들어간 이후의 계획을 설명했다.
"흐음. 죽이진 말고 견제만 하라고?"
"일단 대통령과 손을 잡은 척하면서 추이를 관찰해봐. 특성이 뭔지 파악하면 더 좋고. 지금까지 내가 파악한 건 쉘터강화와 블링크, 육체강화야."
"다중 특성은 사기잖아."
우리 특성이 더 사기지.
"아무튼 묘하게 사람과의 관계에 집착한다는 느낌인데···어쩌면 다른 사람의 특성을 빼앗거나 복사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너도 조심해."
"악수만 안 하면 되는 거 아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조건이 어떤지는 아무도 몰라. 그러니까 쉘터에 들어가서 그걸 좀 알아보란 말이야."
그녀가 눈을 샐쭉 떴다.
"스파이 역할을 하란 말이네."
"스파이는 좀 그렇고 우리의 생존을 위한 대비 정도로 해두자."
"···좋아. 대신 토공을 확실히 데리고 오는 거야."
"당연하지. 이번 일만 끝나면 곧장 찾으러 간다."
창원부터 시작해서 진주까지 샅샅이 훑어야 한다.
어째 경남에 도착한 이후로는 그의 소식이 들리질 않고 있었다.
설마 신변에 문제가 생긴 건가 걱정스러웠다.
우리는 확보한 그리폰 새끼를 어떻게 할 것인지 논의했다.
워낙 커서 베이스 캠프의 인원이 다 먹고도 남았다.
여기서 훈제를 해가지고 돌아가야겠군.
우리는 시간차를 두고 캠프로 복귀했다.
.
.
.
파밍 던전에서의 여정이 끝을 맺으려 하고 있었다.
차원문이 깜빡이기 시작했고 헬스장 사람들은 곧장 캠프를 거두어들였다.
짧은 여정이었지만 그들이 얻은 것은 상당히 많았다.
우선 동료를 얻었었고.
발광석과 점화석 등 자원을 캤고.
다양한 식량을 확보하는 데에도 성공했다.
대단한 양은 아니었지만 2,3주 정도는 여유롭게 지낼 수 있다.
3일 투자해서 이 정도면 괜찮은 것이다.
다정은 갑자기 마음이 바뀌었다며 사람들에게 작별을 고했다.
헬스장 사람들은 그녀와 정이 들었는지 상당히 아쉬워했다.
"잘 있어요. 야한 꿈이라도 괜찮으니까 내 꿈꿔요."
여자한테도 저 말을 하니 과연 다정이라고 할까.
다른 여자들이 으엑, 하며 인상을 쓰는 동안 그녀는 손키스를 날리곤 좀비들과 함께 사라졌다.
"어서 오십시오. 다정씨. 아니 여왕님이라고 불러드릴까요?"
장원택은 흡족한 표정으로 그녀를 맞았다.
당연하지만 그의 주위엔 다정이 처음 보는 사람들뿐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전혀 주눅 들지 않았다.
"대구 촌년이라 서울 나들이나 할까 해서요. 괜찮죠?"
"이를 말씀이십니까. 다정씨가 오시면 우리 쉘터는 더욱 강화될 겁니다. 이쪽으로."
한편 검인은 멍한 표정으로 다정이 합류하는 걸 보고만 있었다.
왜? 하는 의문만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를 거절하지 않았는가?
아니 그는 쳐다보지도 않고 장원택과 붙어 있으니 그쪽을 선택한 건가?
검인은 마음은 복잡했다.
그는 정부 쉘터로 복귀한 뒤에 겨우 그녀를 불러냈다.
"다시는 안 본다며?"
"대체 무슨 생각이야. 내 제의는 거절해놓고."
"대통령의 제의는 마음에 들더라고."
검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이젠 대통령 아닌데?"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대통령으로 받아들이고 있던데, 아니야?"
말문이 막혔다.
그녀의 말은 사실이었다.
장원택은 정부 쉘터에서 매우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일부는 여전히 대통령이라고 부르곤 했다.
검인이 그 영향력에서 꿈틀거리곤 있지만 아직은 부족했다.
"대체 무슨 제의를 했는데?"
"그걸 들으려고 나를 불러낸 거야?"
다정의 입꼬리가 올라갔고 검인은 자신이 실수했다는 걸 깨달았다.
그걸 말해줄 멍청이가 어디 있나.
그는 화제를 돌렸다.
"쉘터에 들어온 이상 독불장군식으로 행동하는 건 무리일 텐데, 괜찮겠어?"
"그건 니가 신경을 쓸 게 아니야."
"나도 일단은 이 쉘터의 주요 인물이거든. 쉘터를 내가 방어하고 있는 만큼, 이물질이 들어오는 건 되도록 피하고 싶어."
이렇게까지 말하면 보통은 내가 이물질이냐며 화를 내게 되어 있다.
그러나 다정의 반응은 달랐다.
"바라는 대로 이물질이 되어서 쉘터를 뒤집어줄까? 그냥 다 오픈해버려?"
이런, 눈이 돌아갔다.
검인은 화들짝 놀라 수습해야 했다.
"아니 잠깐만, 잠깐만 진정해. 내 뜻은 그게 아니야. 같은 공간에 있으니까 협력해야 하지 않겠냐는 거야."
다정은 사나운 시선을 거두었다.
"쉘터에 있는 동안은 얌전하게 지낼 테니까 신경 안 써도 돼."
"그럼 다행이고. 그런데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들어오기로 한 거야? 진짜 제의 때문에?"
"내 맘이다, 왜?"
"물론 그렇긴 한데···계기가 있을 거 아냐?"
"아 진짜 마음에 안 드네. 왜 이렇게 사소한 거에 집착하는 거야?"
검인은 그녀의 기세에 움찔했다.
어떻게 게임과 이렇게 똑같을 수 있을까.
그는 게임에서 다른 고인물들에게 맞춰주는 식으로 플레이했다.
그들이 미친 짓을 해도 컨셉이라 여겼는데 직접 만나보니 아니었다.
최소한 토끼공듀와 오리궁뎅이는 살짝 맛이 간 게 분명했다.
김밥조아도 그럴까?
다정이 팔짱을 끼고 말했다.
"소년시대에게 총 들려주려고."
"어? 뭘 어떻게 한다고?"
"우리가 매일 하던 얘기가 그거였잖아. 몬스터들한테 총 두두두 쏴보기. 나 오우거가 총 몇 발 맞고 죽는지 진짜 궁금하거든."
"···그걸 함부로 쓸 순 없어."
지하 500미터에 공간을 만드는 건 장난이 아니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공간의 대부분은 총기가 아니라 향후 인류의 기반이 될 설비가 차지했다.
철사병이 가라앉은 뒤 원시시대는 벗어나야 하지 않겠는가.
총기와 실탄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사실 총기를 함부로 쓸 수 없는 이유는 다른 데 있었지만.
"아 몰라. 좀비들한테 총 들려주고 몬스터 다 쏴죽일 거야. 투타타타!"
그녀가 몸을 휙 돌리자 검인은 급해졌다.
"자, 잠깐만. 생각 좀 바꾸면 안 될까?"
"왜? 나한테는 총 있다고 자랑하더니."
"그게 아니라···"
검인은 총을 퍼트릴 생각이 전혀 없었다.
아무리 특성이 뛰어나도 총 한 방이면 사경을 헤맨다.
그런 무시무시한 무기를 아무에게나 쥐어줬다간 그의 지배력이 흔들릴 것이다.
소수의 믿음직한 부하를 무장시키고 그 위력을 바탕으로 사람들을 끌어들인다.
그 사람들로 하여금 설비를 이용해 실탄을 제조하게 한다.
장원택을 배제하는데 성공한다면 검인은 아포칼립스의 패왕이 될 것이다.
방구석에 처박혀 지냈던 그에게 있어서 정말 꿈과 같은 일이었다.
그런데 다정이 갑자기 개입하는 바람에 시작부터 엇나갈 위기에 처했다.
좀비들에게 총을 들려주겠다고?
절대 안 돼.
쓰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안 되지만 혹시 탈취당하기라도 하면 난리가 난다.
검인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그녀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애썼다.
그가 원하는 건 고분고분한 생존자지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이 아니었다.
다정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식으로 사람을 조급하게 만드는 건 그녀의 방식이 아니었다.
하지만 약속은 약속.
여기에 들어온 이상 적당히 어울려줘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밀고 당겨야 잡음이 나는 거지 아예 벽을 세워버리면 지레 겁을 먹고 포기하게 된다.
그녀가 서자 하이힐 소리도 멈췄다.
검인은 하마터면 그녀와 부딪칠 뻔하곤 겨우 피했다.
'실수인 척 할걸 그랬나···'
진한 샴푸 냄새를 맡을 수 있었는데 본능이 아쉬울 따름이다.
다정이 뒤에 대고 말했다.
"그런데 이렇게 얘기하는 우리, 서로의 특성에 대해서 잘 모르지 않아?"
"트, 특성?"
요즘 세상에 상대의 신뢰를 얻으려면 특성을 밝히는 건 필수다.
"나는 좀비 지배인데, 너는?"
"어, 음···"
검인은 다정이 이렇듯 대놓고 물어볼 줄은 몰랐다.
그는 한참 더듬거리다가 입을 다물었다.
아직은 비밀로 지켜야 했다.
다정은 진짜 소심하네, 라고 말하더니 하이힐을 또각거리며 걷기 시작했다.
검인은 물끄러미 그녀의 뒤를 바라봤다.
이건 어쩌면 기회인지도 모른다.
그녀가 정부 쉘터에 들어온 이상, 앞으로 마주칠 일이 많았다.
힘과 매력을 뽐낼 기회가 많다는 것을 뜻한다.
지금까지는 실패의 연속이었지만 앞으로 바짝 정신을 차린다면.
그녀에게 자신의 능력을 선보인다면 신뢰를 얻을지도 모른다.
다정은 대놓고 몸매를 훑어 본 자신을 욕하지 않았다.
조금은 마음이 있다는 거 아닌가?
가만···그래서 이 쉘터에 들어온 걸지도?
이렇게 착각하는 동안에도 그녀는 멀어지고 있었다.
검인은 결심하고 입을 열었다.
"내 특성, 하나가 아니야."
그녀가 뒤로 돌아섰고 검인은 기뻤다.
마음도 함께 돌아선 것 같아서.
.
.
.
돝섬에 처음 와본 헬스장 사람들은 놀라면서도 기뻐했다.
"이야···이런 곳이 있었네."
"여기 몬스터 못 오는 거예요?"
"못 오지. 몬스터가 헤엄칠 건 아니잖아?"
"파밍은···아, 미경이가 도와주면 되겠구나."
"헤헤, 저만 믿으세요!"
다들 안전한 쉘터가 생긴 것에 안심이 되는 모양이었다.
사람들이 갑자기 몰려오자 3일 동안이나 섬을 지켰던 딩고가 놀라 왕왕 짖었다.
녀석을 본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왜 이렇게 커졌어?"
"얘 허스키 아닌 것 같은데···"
내가 봐도 허스키라고 주장하긴 무리다.
새끼인데 진돗개만큼이나 커져버렸으니.
나는 시치미를 떼곤 형준 형과 수연, 그리고 여울이를 불러냈다.
"당분간 이 섬에서 자리를 지내면 별 문제는 없을 겁니다. 몬스터가 헤엄쳐도 수백 미터는 무리니까요."
형이 히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몇 놈이 와도 우리가 충분히 해치울 수 있어."
비행형 몬스터가 아니라면 큰 문제는 없다.
그리고 녀석들은 한참 뒤에나 나타난다.
사람들이 앞으로 희망에 차서 앞으로 파밍을 어떻게 하자고 계획을 짰다.
나는 그들에게 말했다.
"당분간은 섬을 떠나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아니 왜요?"
수연이 내 팔목에 손을 얹었다.
이제 섬에 왔는데 또 나가려 하다니 이상하게 느껴지겠지.
하지만 나는 토공을 찾으러 가야 한다.
"대단한 건 아니고 대구 씨드볼트, 종자보관소에 가보려고 합니다. 좀비들이 종자를 죄다 먹어치워서요."
이건 섬에 도착한 후 내가 발견한 것이다.
텃밭을 만들고 작물을 재배하려면 종자가 필요하다.
마산에도 종묘사가 많을 테니 별 걱정은 하지 않았는데 막상 가보니 엉망이었다.
몬스터들이 죄다 먹어치운 것이다.
흔적을 보면 좀비일 가능성이 높았다.
구울로 진화하기 위해 다량의 에너지가 필요해서인가?
덕분에 텃밭에 심을 종자가 없어졌다.
남은 씨앗이 좀 있긴 하지만 충분하지 않았다.
내가 여기까지 설명하자 다들 심각한 얼굴이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수연은 다른 생각을 한 모양.
"종묘사에서 파는 씨앗은 2대 3대 이렇게 내려가면 발아율도 그렇고 작물이 이상하게 자란다고 알고 있어요."
거기까지는 생각 안했는데.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자 수연이 감격한 듯 내 손을 어루만졌다.
흠흠, 손이 되게 부드러우시구만.
"그거 때문에 원본이 필요하신 거군요. 어떻게, 제가 같이 갈까요?"
"어···저는 혼자 돌아다니는 게 편해서요. 절대 수연씨가 불편해서가 아니고."
"이해해요. 근데 나중에는 오시는 거죠?"
"그래야죠···"
확신은 못 한다.
서울로 올라가는 것도 한참인데다가 거기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기 때문.
최소 몇 개월은 거기서 보내야 한다.
"지만이가 있으니 여기 굶을 일은 없을 겁니다."
"내가 능력이 부족해서 너만 고생하게 되네."
형은 진심으로 내게 미안해했다.
사서 고생하는 거니까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모임을 파하고 아지트에 들어가니 나이가 비슷한 애들끼리 모여 놀고 있었다.
논다기보다는 앞으로의 일을 자기들끼리 의논하는 거에 가깝다.
옆에 슬쩍 껴서 떠난다고 말하자 미경의 눈이 흔들렸다.
"내일 바로요?"
"아뇨, 내일은 아니고, 조금 쉬었다가."
파밍 던전에서 빡세게 일했으니 충전은 하고 가야지.
지만이에겐 미리 말해두었기에 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앞으로 여러 이벤트가 열리니까 만날 일이 있을 것이다.
"잠깐만요."
미경이 내 손을 끌고 밖으로 나갔다.
해변에 가니 그녀가 팔을 등 뒤로 포개며 내 주위에서 서성거렸다.
"생각해 봤는데요···앞으로 오빠라고 부르면 안 될까요? 아저씨는 제 이름 부르고요."
응? 갑자기 왜 이러는 거지?
아저씨도 나쁘지 않은데.
나이 차가 꽤 나기도 하고···
"뭐가 불편해서 그래요? 나는 괜찮은데."
"음···그건 말 안할래요. 아무튼요, 오빠라고 불러도 되죠?"
뭐 안 될 건 없지.
내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자 미경이 나를 살짝 껴안고 도망갔다.
흠흠. 몸이 참 부드럽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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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가 돝섬에서 꽁냥거리고 있을 때, 석현과 윤정은 드디어 창원에 도착했다.
참으로 기나긴 여정이었다.
윤정은 석현이 100% 또라이라는 걸 완벽히 이해하게 되었다.
대체 세상이 멀쩡할 땐 어떻게 살아온 거야?
정신병을 앓고 있어서 게임에 몰두한 것일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드디어 헤어질 때가 왔다.
당초 대통령의 요청은 그를 창원까지 안내하는 것이었기 때문.
석현은 그 말을 듣고는 그녀에게 큰 절을 하더니 무너진 아파트 단지로 향했다.
···조금 아쉽네.
윤정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그와 동행하는 동안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둘이서만 여행을 하다 보니 그도 심심했던 탓이리라.
툭하면 김밥조아나 오리궁뎅이와 게임했던 걸 털어놓았고 윤정도 그들에 대한 호기심을 갖게 되었다.
어떤 사람들이기에 이 남자와 친하게 지낼 수 있었던 걸까?
같이 미쳤는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이제는 돌아가야 한다.
이만한 성과를 보였으니 대통령도 자신을 크게 우대하겠지.
윤정은 발걸음도 가볍게 북으로 향했다.
그리고 석현은 얼마 지나지 않아 한 무리와 마주쳤다.
충분한 무장을 갖춘 사람들이 그를 반원형으로 둘러쌌다.
"읍!"
이런, 윤정이 잡혔다.
석현이 고개를 갸웃하는데 리더가 앞으로 나섰다.
"토공이지? 만나서 반갑다."
"중요 인물을 잡았으니 난 가도 되지?"
"도망갈 마음도 없으면서."
남자는 이미 토공에 대한 정보를 입수한 상태였다.
그는 미친놈처럼 보이지만 의외로 의리가 있다.
몇 주 동안 함께한 윤정을 확보하면 절대 혼자 도망가진 않을 것이라 판단했고, 그게 맞아떨어졌다.
석현은 주먹을 풀었다.
"급한데 길 좀 비켜줄 수 있어? 기왕이면 윤정씨도 놔줬으면 좋겠고."
"보스가 올 거니 그 때까지만 기다려."
"기다릴 시간 없어."
그는 이마를 덮었다.
"이런, 보스가 알면 섭섭해 하겠는데. 그래도 아웅다웅하면서 같이 게임하지 않았어?"
"보스가 누군데?"
"아~주 무서운 사람이야."
리더가 호들갑을 떨자 주변에서 낄낄댔다.
"가까이 가면 심장이 막 떨리거든? 너도 느껴보지 그래?"
혹시 살인자인가?
하지만 살인자가 무리를 끄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세 명만 근처에 있어도 데스매치가 일어나는데···
석현이 팬티에 손을 가져가자 리더가 오히려 부추겼다.
"벗어봐, 구경 좀 하자."
진짜 팬티가 내려가자 다들 휘파람을 불었다.
석현은 주먹을 불끈 쥐었고 리더의 입가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보스가 올 때까지만 시간 끌어. 그럼 이긴다."
토끼공듀가 화살처럼 튀어나갔다.
< 토끼공듀 - 1 > 끝
< 토끼공듀 - 2 >
현 시점에서 생존의 방식 중의 하나는 싸움을 철저히 회피하는 것이다.
아무리 강력한 전투력을 지녔다고 해도 언제나 승리할 수는 없다.
한 순간의 방심, 실수가 목숨을 앗아간다.
그걸 피하기 위해 싸움 자체를 회피하는 사람이 꽤 많았다.
종말 후 70여일이 지난 지금.
레벨과 포인트를 최초 상태로 유지하는 사람이 있다는 얘기다.
―안 싸우면 안 죽잖아요.
뭐, 당연한 논리다.
하지만 그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생존하는 사람도 있었다.
창원의 살인자가 거기에 속한다.
그는 종말이 시작되자마자 살인을 저질렀다.
종말 당일에 살인자 이벤트가 떴고 다수의 생존자가 그의 포인트가 되었다.
4,000시간 가까운 플레이타임과 철저한 준비는 그의 능력을 한없이 끌어올려 주었다.
준비된 살인자.
그게 바로 창원의 김철성이었던 것이다.
그는 성호처럼 시스템의 허점을 이용하지 않았다.
당당히 드러내어 살인을 저질렀고, 덕분에 그의 주위엔 생존자가 사라져갔다.
당연한 일이다.
주변에 막강한 살인자가 도사리는데 가만히 있을 사람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김철성은 놀라운 스킬을 획득했다.
친근감.
서바이벌 라이프를 플레이한 유저라면 누구나 얻길 원하는 스킬.
그러나 살인자로 남아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유지하는 사람은 별로 없는 그 스킬.
이 놀라운 스킬은 몬스터에게서 공격을 받지 않게 해준다.
철성은 이걸 얻은 후 몇 사람을 찾아가 담판을 지었다.
―너, 내 부하나 해라.
―저, 저를 죽일 거 아닙니까?
멱살이 잡힌 남자는 벌벌 떨었다.
두근두근하는 심장소리가 크게 들리고 있었기 때문.
자신을 들어 올린 거한이 살인자라는 증거다.
살인자 이벤트를 겪어 보지 못한 건 아니지만 이런 식의 접촉은 처음이었다.
철성은 그에게 희미한 웃음을 보였다.
―너를 죽이려면 지금 죽이는 게 쉽지 않을까? 잘 들어. 난 부하가 필요해···내게 철저히 복종하는 그런 부하 말이야.
―···
남자는 잠시 침묵했다.
그의 목적이 뭔지 헷갈리는 모양.
철성은 그를 벽에 밀어버렸고 남자의 입에서 답답한 신음이 터졌다.
―억!
멱살을 죄어오는 힘은 엄청나서 풀 엄두가 나지 않았다.
특성이 육체강화인데도 이 꼴이다.
철성이 그에게 얼굴을 들이댔다.
살인자는 다 이런 것인지 창백한 피부에 무표정이었다.
―나는 망설임 없는 부하를 원해. 내가 하라면 너는 한다. 대가로 일대의 지배권을 주지. 내게 복종하는 이상 뭘 하든 상관없다. 알겠나?
―무, 무엇이든?
―무엇이든. 약탈, 강간···그 무엇을 하든 상관없다. 살인만 내게 맡겨라. 너에게도 이게 편할 텐데? 살인자가 되고 싶지는 않을 테니까.
이건 충성을 대가로 내려주는 안전보장이다.
살인자에게 충성하면 다른 생존자와의 싸움에서 절대적인 우위를 점하게 된다.
남자는 머리를 굴리려 했으나 살인자는 그가 생각하게 두지 않았다.
―거절하면 지금 여기서 죽는다. 왜 생각을 하는 거지?
―따, 따르겠습니다!
―좋아.
살인자는 바로 그를 내려주었다.
―네 이름은?
―조경, 흡, 경수입니다.
―김철성이다. 그냥 보스로 부르면 돼.
놀랍게도 살인자는 경수를 내버려두고 저벅저벅 걷기 시작했다.
경수는 그의 등을 노려봤다.
덩치만큼 넓은 등이 과녁으로 느껴졌다.
롱나이프를 꺼내는 순간 살인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를 공격하는 대가는 너의 죽음이다. 그걸 원하나?
―으···
대체 무슨 스킬을 갖고 있기에 뒤를 볼 수 있는 걸까?
경수가 굴욕감에 오들오들 떨고 있을 때 살인자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두 번째는 없다. 따라와라.
용서를 해준 건가.
경수는 무기력하게 살인자의 약간 뒤에서 걸었다.
―나는 강대한 세력을 원한다. 그걸 위해 필요한 것은 생존자. 네가 위치를 찾아라.
―그러면 당···보스가 찾아가서 이런 식으로 무릎 꿀릴 계획입니까?
―그래.
―인원이 많아지면 좀비 레이드가 일어날 텐데요? 또 데스매치도 있는데···
―김해 클랜처럼 적당히 떨어져서 지내면 된다. 데스매치를 일으킬 정도로 바본가? 두 명이 내 의견을 전달하면 된다. 그것도 못한다고 하진 않겠지?
―아, 아닙니다···
살인자가 물었다.
―몬스터가 무섭나? 아니면 인간이?
생각할 것도 없다.
―인간이 무섭습니다.
몬스터는 아무리 강력한 능력을 지녔어도 몬스터다.
외형부터가 이질적이고 대응방법이 다 존재한다는 말.
나중이 되면 이야기가 달라지지만 최소 지금은 그렇다.
그러나 인간은 달랐다.
겉으로만 보면 저 놈이 약탈자인지 생존자인지 알 길이 없다.
친근한 척 옆에 접근했다가 칼찌를 놓으면 대응하지도 못한다.
살인자가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순간 소름이 끼쳤지만 경수는 간신히 참아냈다.
―그 인간과의 싸움을 내가 해결하겠다. 너희는 세력을 불리는 일에만 힘써라. 내가 죽여줄 테니.
경수는 열심히 머리를 굴리곤 마침내 결론을 내렸다.
이 살인자를 따라서 해될 것은 별로 없다.
기껏해야 두근거리는 심장소리를 참아야 한다는 것 정도다.
반면 그가 얻을 것은 상당히 크다.
우선, 별 이득도 없는 인간과의 싸움을 피할 수 있게 된다.
살인의 리스크를 피한 채 살인을 할 수 있다는 말이 되겠다.
그에 따르는 이득은 말 할 것도 없겠지···
잘하면 아포칼립스에서 주지육림을 누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경수는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보스를 따르겠습니다.
―잘 생각했다. 이제부터 너는 내 측근이다.
살인자는 급격히 세를 불려 나갔다.
생존자를 발견하면 붙잡아 부하로 만들었고 따르지 않는 자는 죽였다.
그러는 와중에도 살인자는 계속 강해졌다.
10월에 이르러서는 몇 명이 덤벼도 대적하기가 불가능할 정도였다.
경수는 보스에게 대항할 생각을 완전히 버렸다.
그의 밑에 있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주지육림까지는 아니어도 애인이 생겼고 풍족한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무엇이 더 필요한가?
가끔 보스에게 식량과 여자를 던져주면 그는 만족했다.
이젠 적당한 농담을 던져도 그가 받아주는 관계가 되었다.
보스가 서바이벌 라이프의 고인물이란 것도 이 시기에 알게 되었다.
무려 4천 시간을 플레이 했단다.
그것도 모자라 대부분을 살인자 상태로 지냈다고.
정말 괴물 같은 사람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보스가 그를 호출했다.
―일이 생겼다. 토공이 진주에서 온다는군. 그를 발견하면 시간을 끌어라.
언제나 그렇듯, 의문을 가질 필요는 없다.
보스는 부하들이 할 수 있는 명령만 한다.
그래서 경수는 부하들을 끌고 토공을 습격했다.
보스가 뒤에 있다는 자신감이 지나쳐 그에게 과하게 어필했다.
난 네가 무섭지 않다는 식으로 말이다.
토공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냥 움직였다.
그리고 경수는 고인물이 얼마나 무서운지 깨닫게 되었다.
.
.
.
사각사각.
세라믹 가위가 내 머리카락을 잘라냈다.
미경은 아지트를 계속 옮기면서도 이 가위만큼은 가지고 다녔다.
다른 사람들 머리를 손질해주고 싶다는 이유로.
이제 돝섬을 떠나는 나도 그녀에게 머리를 맡기기로 했다.
가만히 눈을 감고 있으니 미경이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오빠 전에도 저한테 머리 맡겼죠?"
"그랬었지. 6월이었나?"
"6월 20일이요. 새로 출발하는 의미로 스포츠 컷 해드렸는데."
벌써 3달 넘게 지났다.
그 때는 미경이 이렇게 오래 살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블링크라는 특성을 가졌다지만 체구도 작고, 힘도 없는 여자가 오래 버티면 이상하지.
하지만 그녀는 블링크로 종횡무진 활약하며 사냥도 쏠쏠히 해냈다.
형준 형의 말에 의하면 지금의 미경은 없어서는 안 될 멤버라고.
그녀가 내 구레나룻을 면도칼로 정리했다.
"오빠, 다정 언니하고 친하죠?"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싶어서 듣고 있으려니 그녀가 주위를 둘러보곤 낮게 말했다.
"다정 언니가 오빠 얘기 많이 했어요. 좀 이상하잖아요. 김해에서 처음 만났는데. 오빠는 언니가 오고 나서 거의 바로 떠났는데."
티를 많이 냈구만.
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내가 김밥조아라고 대놓고 얘기하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랄까.
"부려먹을 노예로 마음에 드나 보네. 일단 튼튼하게 보이니까."
미경이 내 앞으로 와서 앞머리를 정리해주었다.
나시티와 돌핀 팬츠만 입고 있어서 몸의 선이 드러나 보였다.
아지트에 몬스터도 없고 편하니까 이런 옷차림을 하고 있는 거다.
예전에도 느낀 거지만 선이 참 예쁘군.
"꼭 그런 것 같지는 않던데. 술주정하는 거 들었거든요. 혹시 예전에 연락하고 지내셨어요?"
게임에서 했었지.
내가 입을 다물고 있자 미경이 계속 재잘거렸다.
"수연 언니하고 유현이 말을 들어봐도 그렇고···제가 느낀 것도 그렇고···아저씨 서바이벌 라이프 해보신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그것도 아주 많이."
여기까지 안 이상은 숨길 방법이 없다.
하지만 더 나아가면 상처 입는다는 건 알려주는 게 좋겠지.
"미경이 너만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아니면 전부?"
"관장님도 대충은 눈치 채고 계실 거예요. 다정 언니가 워낙 오빠 언급을 많이 해서."
"내가 뭐 서바이벌 라이프의 고인물이라도 된다는 거야?"
"그 정도는 아니지만···아예 접한 적이 없는 건 아니라고 다들 생각할 거예요."
"내가 거짓말을 한 게 되네. 그렇지?"
목소리가 깔리자 미경이 당황해서 애교를 부렸다.
"오빠 그게 아니구요···이이잉. 왜 무섭게 하세요. 화 풀어요."
그러면서 어깨를 만져주었지만 내 경계심은 전혀 풀리지 않았다.
"어쩌지? 영상 하나 본 게 전부라고 해버렸는데···"
나는 내가 봐주는 사람들이 입을 다물길 바랐다.
내 행동에서 의문이나 이상한 점을 느꼈더라도 그냥 넘어가는 게 서로 편하다.
수연과 유현이는 현명하게 입을 다물었는데 미경이에겐 어려웠던 모양이다.
활발하고 호기심이 많은 성격이라 그런가?
그녀는 급기야 내 목을 끌어안았다.
"아저씨 저 사실은 아무것도 몰라요. 그냥 모르는 척할게요."
도로 아저씨가 되어버렸다.
뭐 이것도 나쁘진 않군.
나는 목을 감싼 그녀의 팔에 손을 얹었다.
"가끔은 모르는 게 편할 때도 있어. 그렇지?"
"네, 네."
"나는 미경이하고 오랫동안 좋은 사이로 지내고 싶은데, 미경이는 안 그래?"
"저도 그래요···"
"다른 거 없어. 그거만 지켜주면 돼."
"그, 그럼···방금처럼 편하게 대해도 되는 거죠?"
미경이 조심스럽게 물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입을 다물겠다는데 굳이 분위기 박살낼 거 없지.
미경은 다행이라며 또 재잘대기 시작했다.
금방 회복하는 스타일이구만.
머리 손질이 다 끝나자 6월 준비에 한참이던 나로 돌아가 있었다.
거울을 보니 살이 엄청나게 빠진 게 눈에 들어왔다.
숲에서 일하느라 엉겨 붙은 근육을 생각하면 약간 과체중 정도다.
"괜찮네."
"오빠 제가 머리 감겨 드릴게요."
"그렇게까지는 안 해도 되는데."
"여기 엎드리세요."
뭐 해주겠다는데 거절할 거 없지.
머리까지 감고 수건으로 닦고 있자 미경이 주위를 서성거렸다.
"오빠 방금 그거 때문에 화나신 거 아니죠?"
"전혀. 난 잊어버렸으니까 미경이 너도 잊어버려. 그냥 없었던 일이야."
"헤헤."
맹하게 웃는 얼굴이 귀엽다.
나는 방으로 가서 짐을 챙겼다.
밖에선 형준형과 수연, 그리고 고등학생 둘이 그물과 창을 보수하고 있었다.
늑대인간이 나타날 때를 대비한 것이다.
돝섬은 좋은 쉘터지만 계속 숨어 있을 수는 없다.
육지에 나가 파밍을 해야 하는데 다른 몬스터도 위험하지만 늑대인간이 큰일이다.
놈은 후각이 매우 민감해서 생존자를 금방 찾아낼 수 있다.
어설픈 도망은 안 통한다는 이야기.
그물은 그 때를 대비한 최후의 수단이다.
다정이 상점표 무기를 많이 넘겨주고 가서 그걸로 어찌 해보려는 것 같았다.
여울이와 유현이, 지만이는 밖에서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었다.
지만이의 특성 덕분인지 연신 낚싯대를 들어 올리는 게 보였다.
내가 건 고기가 크니, 니건 작니 아주 난리로군.
나는 배낭을 짊어진 채 그들을 돌아보며 당분간의 작별을 고했다.
다들 아쉬워하면서도 내가 돌아올 날을 기다린다고 말했다.
"딩고, 가자."
미경은 블링크로 우리를 육지 건너편으로 이동시켜주었다.
진짜 편하네.
나는 그녀에게 작별을 고했다.
"다시 보자."
"오빠 꼭 오셔야 돼요."
"당연하지."
미경은 머뭇거리고 있다가 고블린 몇 마리가 뛰쳐나와서야 돝섬으로 돌아갔다.
푸풍.
무릎이 살짝 꺾였다.
아침부터 마비독침을 맞으니 기분이 상쾌하군.
그 대가로 너희들은 죽어줘야겠다.
나는 롱나이프를 들고 고블린들에게 돌진했다.
딩고가 컹컹 짖으며 나를 따랐다.
.
.
.
"하아, 하아···"
석현은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손에는 남자의 멱살이 잡혀 있었다.
앞을 막아선 놈들의 능력이 보통이 아니라서 시간이 좀 걸렸다.
윤정은 이미 그에게 구출되어 멀리 달아난 상태였다.
"후···"
석현은 숨을 고르고 멱살을 놓았다.
쿵, 쿵 하는 심장소리가 들려왔다.
뒤로 도니 거한이 멀찍이에서 그를 보고 있었다.
크다.
위압감 때문인지 키가 2m를 훌쩍 넘는 것 같았다.
얼마나 살인을 했기에 이런 위압감을 뿜는 거지?
"오랜만이다. 토공."
"···누구시더라. 기억에 없는데."
"너희들을 죽이고 싶어 안달 난 놈이라고 하면 알겠나?"
"아니. 모르겠는데."
거한의 입술이 실룩거렸다.
그는 토공의 앞을 가로막은 사람들의 보스였다.
수십 명을 죽인 살인자이며 창원 일대의 지배자이기도 하다.
게임에서는 어땠는가 하면, 살인자로 1년 동안 활동하면서 많은 유저들과 싸웠다.
그러나 고인물 4인방과는 제대로 싸워보지 못했다.
그들이 천연기념물을 보호한다며 데스매치를 꺼렸기 때문이다.
살인자로 자존심 높은 철성에겐 어이없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누가 누구를 보호한다고?
모두 덤벼라, 캐릭터를 삭제해주마.
결국 4인방 중의 한 명인 김밥조아와 싸우긴 했는데 어이없이 끝나버렸다.
그는 시스템의 버그를 이용해 철성에게 일방적으로 칼찌를 놓았고 좀비들 사이로 유유히 빠져나갔다.
정신을 차려보니 그의 메시지만 남아 있었다.
―우리 강산 푸르게 푸르게.
진짜 누구를 천연기념물로 아는 건가.
이건 굴욕 중의 굴욕이었다.
철성은 고인물 4인방에 대한 증오를 불태웠다.
그리고 종말 이후로 그들을 만날 날만 기다려왔다.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살인자로 활동했다. 이러면 기억이 나나?"
석현은 그제야 거한의 정체를 깨달았다.
무려 1년 동안 살인자로 활동한 유저였다.
"아, 천연기념물!"
철성은 저벅저벅 토공에게 다가갔다.
이 놈을 붙잡으면 김밥조아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아니라면 최소 행방이라도.
그의 눈이 붉게 빛났다.
"덤벼라."
"싫어."
석현은 그 말을 남기곤 뛰기 시작했다.
그는 싸움을 즐기는 쪽이었지만 이 놈과 부딪치면 왠지 귀찮을 것 같았다.
그런데 철성이 더 빨랐다.
그는 뒤에서 육탄돌격으로 석현을 덮쳐 깔아뭉갰다.
둘은 콘크리트 더미 위를 마구 뒹굴었다.
상처가 생길 법도 하지만 워낙 튼튼해서 핏줄 하나 비치지 않는다.
먼저 자세를 잡은 것은 철성이었다.
"흐하하! 이 날을 기다렸다!"
"너 게임에 과몰입했어!"
"5천 시간을 게임에 버린 니가 할 소리는 아니지!"
철성이 돌진해 주먹을 휘둘렀다.
그의 주먹엔 엄청난 힘이 실려 있었다.
막은 석현의 팔이 부르르 떨릴 정도.
"무한부활을 가진 만큼 육체는 별 볼일 없는 모양이군?"
"너, 강하네."
석현이 힘겹게 내뱉자 그가 웃음을 내비쳤다.
"내 스킬칸은 10개가 꽉 차 있다. 너는? 고작해야 2,3개 정도겠지!"
"사람을 몇 명이나 죽인 거야?"
"너는 지금까지 몇 끼나 먹었는지 기억하나?"
어이없는 대답이었다.
둘은 서로의 주먹을 잡고 힘겨루기에 들어갔다.
그러나 누가 봐도 철성이 우위인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의 표정은 덤덤한데 비해 석현은 안간힘을 쓰고 있었기 때문.
"흐흐, 천하의 토공이 이 정도라. 김밥이나 오리도 별 볼일 없겠어."
"내, 친구는···나보다 강해."
몇 번의 이벤트에서 확인한 결과였다.
석현은 나름 양보를 했지만 김밥조아는 그 양보를 필요로 하지 않을 만큼 강했다.
"물론 그렇게 믿고 싶으시겠지!"
철성이 팔에 힘을 주자 석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둘이 그러고 있을 때.
어느새 창원에 진입한 성호는 멀리서 거한의 뒷모습을 확인했다.
그리폰의눈 스킬이 그에게 엄청난 시력의 상승을 부여했다.
지금의 그는 독수리처럼 멀리 볼 수 있었다.
"살인자가 서서 뭐하는 거지?"
누구를 죽이고 있나.
성호는 별 고민도 하지 않고 엘더우드 롱보우와 아다만틴 화살을 꺼냈다.
생존자는 위협받지 않는 이상 건드리지 않지만 살인자는 예외다.
보는 족족 죽여야 후환이 없다.
포인트와 스킬까지 주니 얼마나 좋은가.
성호는 잘 조준한 뒤 시위를 놓았다.
아다만틴 화살이 엄청난 거리를 뛰어넘어 살인자의 등으로 쏘아졌다.
철성은 뒤에서 파공성을 듣고 손을 뻗었다.
원한을 품은 생존자가 쏜 화살이겠지···
가볍게 잡으려 했지만 화살은 어이없게도 그의 손을 뚫어버렸다.
엄청난 관통력이었다.
"큭!"
철성은 피가 뿜어져 나오는 손을 부여잡았다.
누군가가 태양을 가리며 뛰어올랐다.
벌거벗은 토공이었다.
"팔콘! 펀치!"
< 토끼공듀 - 2 > 끝
< 토끼공듀 - 3 >
성호가 육지로 떠난 그날 저녁.
돝섬 멤버들은 식사를 마치고 각자의 구역에서 할 일을 하고 있었다.
수연은 자신의 몫으로 할당된 물을 알뜰하게 써서 씻고 양치질까지 끝냈다.
그녀는 의사이기에 청결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오늘은 이만 자자···"
낮에 육지에서 파밍한답시고 돌아다니느라 너무 피곤했다.
그나마 아무 일도 없었던 것은 학생 둘이 설치해놓은 로프 덕분이리라.
오크에게 걸렸을 때 로프를 딱 발견하곤 얼마나 안심했는지 모른다.
이런 걸 미리 설치해놓으라고 한 성호에겐 선견지명이 있음이 틀림없었다.
그래서 그를 홀로 보낸 게 더 아쉽게 느껴졌다.
딩고도 따라갔지만 걔는 개니까.
'억지를 좀 써볼 걸 그랬나···'
아니, 그는 누군가 자신을 쫓아오는 걸 허용할 사람이 아니다.
비밀이 많으니까···
수연은 이불 속에 들어가서 눈을 감았다.
내일 할 일을 점검하며 꼼지락거리는데 누군가의 징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잉, 언니이."
"···미경이니?"
"언니 잠깐 이불 안에 들어가도 돼요?"
무슨 22살이 이렇게 어리광을 부리는지.
수연은 이불을 살짝 들춰서 그녀가 들어오게 해주었다.
저녁공기라도 쐬었는지 차가운 피부가 느껴졌다.
올해 겨울은 춥겠구나···
옆구리에 든든한 남자만 있어도 따뜻하게 보낼 수 있겠건만.
"언니 오늘 아침에 속상한 일이 좀 있었어요···"
아침이면 성호가 떠나기 전이다.
혹시 그와 관련된 일일까?
차분히 기다리는데 미경이 사정을 설명했다.
"제가 아저씨, 아니 오빠를 화나게 한 것 같아요···"
성호가 언제 아저씨에서 오빠로 바뀌었담?
그런데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그에게 수상하다고 말해버렸단다.
돌려서 말하긴 했는데 성호가 정색하고 그녀를 나무랐다고.
아이고 머리야.
수연은 이마를 짚고 엉덩이로 미경을 밀어냈다.
그녀가 징징거리며 옆에 착 붙었다.
"제가 잘못했다고 해서 오빠가 편하게 대하라고 하긴 했는데 괜찮죠? 괜찮겠죠?"
"···진짜 괜찮다고 했어?"
"네네."
"그럼 괜찮은 거야. 성호씨···숨기는 건 있지만 뒤끝은 없거든."
달리 말하면 성호는 뒤끝 있게 행동할 바에는 인연을 끊는 쪽을 택한다.
이건 수연의 짐작이지만 실제로도 크게 다르진 않을 것이다.
"그럼 다행이구요. 제가 막 잘못했다고 했거든요···"
절로 한숨이 나왔다.
분명 유현이까지 셋이 모여서 그 얘길 한 적이 있었는데.
"왜 선을 넘니, 넘어···유현이가 그러지 않던? 그 사람에 대해 생각하는 걸 멈추라고."
"알았는데 오빠가 이제 간다고 생각하니까 접점이라도 만들고 싶어서···"
접점은 나도 만들고 싶단다.
수연은 그 말만은 차마 하지 못했다.
대신 그녀는 미경이를 꼭 안았다.
"우린 이제 한 가족이나 다름없어, 그렇지? 헤어질 수 없는 사이잖아."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헬스장 멤버들은 몇 십일 동안 행동을 같이 하며 돈독하게 지내왔다.
가끔은 생사의 위기를 넘기도 했고, 진지하게 자신의 과거를 토로하기도 했다.
하지만 성호만큼은 아니었다.
그가 분식집 이전에 뭘 했는지, 과거가 어땠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나마 형준만이 짐작하고 있을 뿐.
"성호씨는 아니야. 정확하게 말하면 우린 그를 가족으로 생각하지만, 그는 아니란 거야. 이게 무슨 뜻인지 알겠어?"
"그런 거 이상한데···"
"이상할 거 없어. 속에 뭔가를 품고 있어서 그걸 남에게 보여주지 못할 뿐이야."
미경은 말없이 그녀의 가슴에 볼을 대었다가 놀랐다.
"언니 가슴 되게 크다아···"
아이고 머리야.
얘가 참 분위기를 못 읽는구나.
이러니까 성호가 그어둔 선을 단숨에 넘어버렸지.
수연은 이참에 단단히 다짐을 받아야겠다고 생각했다.
푹신하다며 가슴에 달라붙는 미경을 떼어놓고 귀를 잡았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선이 있어, 그렇지? 나도 있고, 너한테도 있을 거야. 여기만큼은 타인이 침범하지 말았으면 하는 선."
"네···"
"성호씨한테도 그게 있어. 우리한테도 그걸 넘지 말았으면 한다고 은연중에 말했고, 근데 미경이 넌 눈치도 모르고 넘어버린 거야."
"넘을 생각은 없었는데···"
"없었는데 방정맞게 말한 게 요 입이니, 요 입이야?"
손으로 입술을 가볍게 두드리자 그녀는 합죽이가 되었다.
수연은 계속 밀어붙였다.
"평상시라면 정말 별 거 아닐 수도 있어. 나도 성호씨가 과민 반응하네, 정도로 생각했을 거야. 하지만 아포칼립스잖아. 지금도 육지에선 사람이 죽어가."
"알아요···"
"낮에 생존자 몇 명이 우리에게 부탁했었지? 섬에 들어오면 안 되냐고 말이야. 형준 오빠가 왜 거절했게?"
"음···그건···"
"성호씨가 괜찮은 사람은 다 데려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야. 지만이, 여울이, 준호, 도형이···넷 다 싹싹하고 착하잖아. 최소한 우리한테 해를 끼칠 애들은 아니야. 그런데 그 사람들을 받아들이지 않은 건 뭘 뜻하겠어?"
"혹시 모를 분란을 미연에 방지한다는 거죠?"
응?
얘가 뭘 잘못 먹었나?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니 유현이가 말해줬다면서 또 헤헤거렸다.
"···그래. 안 믿는 거지. 그리고 형준 오빠도 성호씨가 하지 않았던 걸 굳이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 거고. 여기 돝섬 정말 좋은 쉘터야. 우리는 지키기만 하면 돼. 괜히 확장한답시고 무리수를 두다가 다 망해."
"그럼 그 사람들은 어떻게 해요?"
"우리가 신경 쓸 게 아니야. 내가 말했지? 지금도 다른 곳에서는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어. 그거 일일이 신경 써서 어떻게 생활해?"
아포칼립스란 걸 강조하려 했는데 주제가 엇나가 버렸다.
수연은 헛기침을 하곤 다시 말했다.
"성호씨, 아무에게나 관심 주는 사람은 아니야. 또 관심 줬다고 완전히 자기편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아니고."
그녀가 생각했을 때, 성호가 진짜 자기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딱 둘이었다.
형준과 지만이.
형준은 종말 전부터 인연이 있어서 그러려니 했는데 지만이는 다소 의외였다.
애가 워낙 순해서 그런가?
둘이 쑥덕쑥덕하는 걸 들어보면 형제가 따로 없다.
성호가 간다고 했을 때 다들 아쉬워했지만 지만이는 덤덤했다.
다음에 만날 거라고 확신하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수연은 미경의 어깨에 손을 얹고 짐짓 목소리를 깔았다.
"그 사람 아니었으면 우린 살아 있지 못했을 거다. 대가로 그가 바라는 건 입을 다무는 거야. 어렵지 않은 일이지···안 그래?"
"어, 언니 꼭 오빠 같아요···"
"흉내 좀 내봤어. 아무튼, 그 입을 좀 다물란 말이야, 요것아. 응?"
"흡."
합죽이가 되겠답시고 입을 꽉 다무는 걸 보면 웃어야할지 울어야할지.
아무튼 거기에서 끝났으니 다행이었다.
미경이 더 나댔으면 성호는 아예 돌아오지 않을지도 몰랐다.
그걸 언급하자 그녀의 눈이 동그래졌다.
"호, 혹시 오빠 안 돌아오는 건 아니죠? 저 때문에···"
"오긴 할 걸. 그 사람이 우리를 모아둔 이유가 뭐겠니."
"음···뭘까요?"
"집이지, 집."
수연이 관찰한 결과, 그는 외로움을 견딜 줄 아는 사람이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혼자 지내도 외로움을 못 느끼는 성격이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돌아갈 집이다.
긴 여정을 끝내고 마침내 편하게 쉴 수 있는 안락한 장소.
성호는 그걸 위해 자신들을 차곡차곡 모아둔 것이다.
수연은 그렇게 생각했다.
.
.
.
"저거 완전 미친놈이네."
살인자는 내 화살을 잡으려 했다.
그게 아다만틴 화살이라는 건 모를 테고, 평소에 버릇삼아 심심찮게 해왔다는 뜻이다.
주변 사람들에게 원한을 많이 쌓았나?
하긴, 살인자로 보이니 당연한 건지도 모르겠다.
나는 2타를 준비하다가 살인자를 두들겨 패는 누군가를 발견했다.
덩치에 가려서 안 보였나보다.
그는 벌거벗은 상태였다.
아포칼립스에서 홀딱 다 벗고 있다니, 제정신이 아니군.
그리고 내가 알기로 오직 한 명만이 그럴 자격이 있었다.
"···토공?"
남자는 그야말로 붕붕 날아다니며 살인자를 두들겨 팼다.
특성이 공중부양이 아닌지 의심할 정도.
내가 쏜 화살이 그에게 기회를 주었음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 공세도 얼마 가지 못했다.
신나게 휘두르던 주먹이 살인자에게 막혀버렸고 둘은 다시 힘겨루기에 들어갔다.
힘겨루기를 참 좋아하는 양반들이구만.
나는 그 틈을 타 앞의 건물로 이동했다.
옥상에 올라가자 비로소 전경이 드러남과 동시에 예의 심장소리가 들렸다.
저 멀리 몇 명이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좀비 레이드가 안 일어난 게 신기하네."
싸움의 주도권을 쥔 자가 움직이면서 그들을 쓰러트린 것이다.
거리를 잴 줄 아는 걸로 봐서 고인물이다.
토공이 맞군.
마침내 그를 찾았다는 기쁨에 앞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와 맞서고 있는 살인자를 죽이는 것이다.
잔치를 벌이든 어쩌든 주변을 치워야지, 안 그런가?
나는 곧장 차원문을 열고 필요한 것들을 챙겨 나왔다.
그리고 소형 폭죽을 화살촉에 동여맸다.
이건 풍뎅이들이 특별히 제작한 것이다.
기존 폭죽은 너무 커서 주변의 몬스터들을 다 끌어들일 위험이 있다.
이렇게 작게 만들면 딱 한 명에게만 충격을 주는 폭죽이 된다.
조합비를 알아내고 거기에 점화석과 흑탄을 섞은 풍뎅이들에게 경의를.
화살의 탄도가 조금 이상해지지만 이 거리에선 상관없다.
어차피 맞추려고 쏘는 건 아니니까.
나는 둘이 떨어진 틈을 타 불을 붙이고 시위를 당겼다.
살인자는 또 화살이 날아들자 상체를 슬쩍 움직였다.
유감이지만 이번 화살은 폭발한다네.
놈의 얼굴 바로 앞에서 화살이 번쩍였다.
"억!"
얼마나 아팠는지 비명소리가 여기까지 들렸다.
토공은 누가 자기를 도와주고 있다는 걸 아는지 신이 나서 그를 두들겨 팼다.
그런데 그걸로 끝이었다.
살인자는 일순간 수없이 얻어맞긴 했지만 큰 타격을 받은 것 같지는 않았다.
스펙이 장난이 아닌데 대체 몇 명이나 죽인 거지?
설마 급속회복 스킬까지 얻었나?
그것보다 칼을 쓰지 않는 건 왜일까.
살인자들은 대부분 세라믹 칼을 가지고 있던데.
···하여튼 저 놈을 죽이려면 묵직한 물건을 써야 할 것 같았다.
나는 차원문을 열어 딩고를 들여보냈다.
그리고 풍뎅이들에게 요청했다.
"내가 신호하면 딩고가 이거 끈 잡아당기도록 해줘, 알겠지?"
끄덕끄덕.
발리스타 바로 앞에 차원문을 열면 준비는 끝이다.
이제 차원문을 열고 안에 돌멩이를 던지면 발리스타가 사격하게 된다.
탈진했고 아성체이긴 하지만 그리폰을 두 방에 보낸 물건이다.
아무리 스탯이 높아도 치명상이다.
"한 방에 보내야 되니까···"
접근해야 하는데 그러면 데스매치가 벌어진다.
나는 갈고리를 꺼내 난간에 걸고 레펠로 밑에 내려갔다.
갈고리를 회수하고 주차장에 숨어 둘이 신명나게 싸우는 걸 지켜봤다.
너무 빨라서 좀처럼 기회가 나지 않았다.
아무래도 차원문을 열고 신호를 보내고 발리스타를 쏘고 하는 과정이 길다 보니···
"하하하! 2:1로 싸워도 나를 못 이기는군! 그래서야! 토공의! 이름이! 아깝다!"
진짜 토공이 맞는 모양이다.
그는 더벅머리에 균형 잡힌 몸매를 갖고 있었다.
하체에서 덜렁거리는 건 신경 쓰지 않기로 하자.
살인자는 토공의 공중 발차기를 막은 후 몸을 회전시켜 그를 날려 보냈다.
토공은 공중에서 자세를 잡긴 했지만 달려온 살인자의 일격에 뒤로 쭈욱 밀려나고 말았다.
"무슨 액션영화 찍냐···"
거의 육체의 한계에 이른 사람들이다.
저 상태에서 2티어 스킬을 몇 개 얻으면 비로소 오우거를 상대할 수 있게 된다.
단, 상대할 수 있다는 거지 이긴다는 말은 아니다.
놈은 진짜 괴물이니까.
그나저나 저놈을 적당히 묶어둘 수 있으면 좋을 텐데.
토공은 상대하기도 벅차 보이니 안 되겠고, 역시 내가 나서야겠다.
나는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둘에게 슬금슬금 다가갔다.
인지가 높은지 토공이 나를 먼저 봤다.
"어딜 보는 거냐!"
살인자의 무시무시한 주먹이 토공을 후렸고 얼굴이 획 돌아갔다.
미안.
.
.
.
석현은 기뻤다.
누구를 확인하는 바람에 살인자에게 얻어맞긴 했지만 드디어 친구를 만났다.
창원 일대에서 악명을 떨치는 무시무시한 살인자.
그런 놈이 자신과 싸우고 있는데 슬금슬금 다가올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토공은 싸우면서도 그를 흘깃 쳐다봤다.
키와 덩치가 꽤 크다.
검은 방검복을 입고 있었는데 눈매가 날카로웠다.
허리춤에는 롱나이프를, 등에는 배낭과 활을 메고 있었다.
뭐랄까, 생존자의 정석과도 같은 차림새다.
하지만 그는 다른 생존자와 달랐다.
그의 눈은 이쪽을 또렷하게 직시하고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에서 어떤 결의가 엿보였다.
석현은 곁눈질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어느새 근접한 살인자가 그의 손목 두 개를 움켜쥔 것이다.
"너무 방심하는군! 내가 하찮게 보이나?"
그의 얼굴이 크게 확대되었다.
석현은 몸을 비틀어 빼내려 했지만 우악스런 악력에 꼼짝도 하지 못했다.
근력 스탯이 얼마나 높은 거지?
퍽.
이마와 이마가 부딪치며 북소리가 났다.
충격을 받은 쪽은 석현이었다.
그의 시야가 순간 아찔해졌고 살인자는 연거푸 박치기를 선사했다.
만약 둘 사이에 벽돌이 있었다면 바로 박살났을 것이다.
"하드스킨! 끝내주는군! 어떠냐, 견딜 만하냐? 나는 괜찮은데!"
석현은 이마에서 피가 흘러 시야를 가리는 상황에서도 정신을 잃지 않았다.
생존갈망이 활성화되어 눈이 번쩍 뜨였다.
그는 살인자가 주먹을 휘두르기 위해 잠시 손목을 놓은 그 순간을 정확히 포착했다.
"이얍!"
기합성과 함께 바람소리가 났지만 석현은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웅크렸던 몸이 펴지며 석현의 머리가 살인자의 턱을 쳐올렸다.
"컥!"
보통 사람이라면 죽었을지도 모를 일격에 머리가 뒤로 확 꺾였다.
철성은 큰 충격을 받고 휘청하며 주저앉고 말았다.
여기서 끝내야 한다.
더 지체하면 녀석도 생존갈망이 활성화된다.
석현은 니킥을 갈기려 했지만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몸을 긴장시켰다.
"피해!"
친구의 목소리다.
그는 수십 미터 밖에서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생각보다는 움직이는 게 더 빨랐다.
석현은 몸을 날렸다.
"요 쥐새끼 같은 놈이···"
철성이 눈을 부라리며 일어섰을 때, 허공에서 손가락만한 굵기의 볼트가 튀어나왔다.
볼트는 그 단단하던 철성의 몸을 간단히 관통했다.
"끄아악!"
철성은 엄청난 고통에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그의 본능이 명령했다.
이건 위험하다고, 빨리 도망치라고.
그는 토공이 다시 몸을 날리는 걸 간신히 막아냈다.
충격이 너무 커서 머리가 어질어질할 지경이었다.
"큭, 비켜!"
철성은 토공을 몸으로 밀어내고 달리기 시작했다.
어느새 주변에 좀비들이 몰려들었다.
성호는 살인자를 향해 볼트를 더 쏘려고 했지만 포기하고 말았다.
살인자가 좀비들 사이에 끼어든 것이다.
"어쩌려고 저러지?"
그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좀비들은 살인자를 보고도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저 평소처럼 으어어 거리며 이쪽을 향해 다가올 뿐이었다.
설마 친근감 스킬을 얻은 건가?
그 스킬을 유지하기 위해 죽인 사람의 숫자는 성호의 그것을 가볍게 능가할 것이다.
살인자는 구울의 머리를 잡아 석현에게 집어던졌다.
구울은 발랑 뒤집어지더니 곧 자세를 잡고 토공을 향해 이를 드러냈다.
그리고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데스매치가 열렸다.
철성은 좀비들 사이에서 힘겹게 웃었다.
"흐하하! 버티면 이긴다!"
반면 성호는 저게 미쳤나, 하고 눈을 찌푸렸다.
방금 볼트의 뜨거운 맛을 봤을 텐데 여기서 데스매치를?
"얼마나 잘하나 보자."
자신을 향해 뛰는 그를 본 토공이 크게 소리쳤다.
"내 친구 왔으니 너 이제 죽었어!"
그 말을 들은 철성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설마 김밥조아는 아니겠지?
< 토끼공듀 - 3 > 끝
< 토끼공듀 - 4 >
갑자기 난입한 생존자는 범상한 놈이 아니었다.
자신이 싸우고 있는데 감히 끼어들 놈이 창원에 있을 수가 없다.
그럴 능력이 있는 놈은 다 죽었으니까.
남은 생존자는 그의 눈에 띄지 않고 근근이 살아가는 놈들뿐이었다.
그렇다면 이놈은 무엇인가.
철성은 고통을 참으며 건물에 숨는 둘을 노려봤다.
주변의 좀비들이 벽을 에워싸고 있었다.
데스매치 이벤트가 열린 이상 죽음을 피해 달아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하지만 왜인지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진짜 김밥조아인가?'
토공이 허세를 부렸을 가능성이 높았다.
김밥조아라면 고인물 4인방 중 가장 짜증나는 놈이었다.
그와 데스매치를 치른 유일한 고인물.
비겁한 방법으로 칼찌를 놓고 도망간 놈이기도 했다.
'그런 놈이 정체를 드러낼 리가 없다.'
경매장에서 나쁜 쪽으로 인지도가 높은 김밥조아 아닌가.
실제로 봤다는 사람이 없어서 다들 살아있긴 한 거냐고 투덜거렸다.
조롱하듯 써놓은 랭킹을 보면 살아있는 건 확실한데.
'큭.'
철성은 오른쪽 어깻죽지를 움켜쥐었다.
상처가 너무 커서 당장 주먹을 휘두르기도 힘들었다.
회복계열 스킬의 도움 덕분에 상처가 아물고는 있었지만 시간이 필요했다.
문제는 완전히 회복되는데 시간이 꽤 걸린다는 것이다.
'행운인가 불행인가.'
버티면 반드시 승리할 수 있지만 철성은 끝장을 보고 싶었다.
침을 퉤, 뱉고 오른팔을 움직이자 극심한 통증이 밀려왔다.
하지만 처음에 비하면 훨씬 나아졌다.
아무래도 두 놈을 상대하기 위해선 왼손을 써야 할 것 같았다.
그는 롱나이프를 꺼내고 시야를 집중했다.
살인자 특유의 붉은 빛이 펼쳐졌다.
지금쯤이면 둘에겐 심장소리가 아주 크게 들릴 것이다.
"쥐새끼들이 어디로 숨었나···"
철성은 느긋하게 걸으며 난입한 놈의 특성을 유추하려 애썼다.
화살의 관통력은 그렇다 치는데 무시무시한 볼트를 쏜 것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볼트가 그 정도 굵기라면 석궁도 상당히 커야 하는데 어디서 쏜 거지?
아공간 따위에 무기를 숨기고 있을까.
하지만 그 경우 김밥조아가 아닐 가능성이 높아진다.
'김밥조아가 그 정도의 능력을 가지고 있을 리가 없다.'
플레이시간이 5,500시간을 넘는다는 고인물이다.
다른 고인물이 무한부활에 좀비 지배의 특성을 가졌는데 겨우 아공간?
'이 가능성은 버려야겠군.'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김밥조아일 가능성이 낮아졌다.
토공이 허세를 부린 걸로 치자.
철성은 롱나이프를 흔들며 앞으로 걸었다.
데스매치가 열린 이상 뛸 필요는 없다.
시간이 지나면 좀비들이 알아서 배경을 좁혀줄 테니까.
사실 이건 살인자가 공통적으로 지니는 죽음걸음 스킬 때문이기도 했다.
뛸 때보다는 빠르게 걸을 때 생존자에게 압박감을 전해준다.
토공은 크게 영향 받지 않겠지만 난입한 놈은 지금쯤 벌벌 떨고 있을지도 모른다.
벽 뒤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한 놈의 형체가 선명하게 보였다.
덩치가 작은 걸 봐서 토공이다.
보통의 살인자라면 벌써 포기했냐고 조소를 보낼 것이다.
하지만 철성은 방심하지 않았다.
토공은 알몸이지만 그에게 타격을 입힐 정도의 스탯을 보유하고 있었다.
육탄전에선 그가 우세를 점했지만 심대한 타격을 입히지는 못했다.
익숙지 않은 왼팔로 롱나이프를 쉭쉭 휘두르자 형체가 움찔했다.
"또 한 놈은 어디 있나···"
주위를 둘러봤지만 워낙 장애물이 많아 그놈을 찾는 게 쉽진 않을 것 같았다.
뭐, 상관없다.
어차피 시간은 철성의 편이니까.
그는 토공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심장소리가 크게 울리고 있었다.
.
.
.
데스매치에서 살아남기 위해 중요한 것은 생존자들의 협력이다.
그러나 정작 협력을 할 만한 상황은 많지 않았다.
서로 합을 맞춘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기 때문.
어설프게 나대다간 압도적인 스펙을 자랑하는 살인자에게 썰리기 십상이다.
단, 게임을 오래 한 소수의 유저들에겐 그게 가능했다.
분위기와 상황만 봐도 시소처럼 합이 착착 맞아 들어간다.
이게 가능한 소수의 유저들은 생존마로 불리곤 했다.
김밥조아와 토끼공듀도 거기에 속했다.
둘의 플레이시간을 합치면 1만 시간을 가볍게 넘는다.
같이 논 시간도 길어서 상대방이 뭘 원하는지, 뭘 할 작정인지 바로 안다.
그 장점이 철성을 상대로 한 데스매치에서 빛을 발했다.
토끼공듀가 갑자기 튀어나오자 철성은 난입자의 위치를 파악하려 애썼다.
하지만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았다.
조금 시간이 더 지나야 시야가 완벽해진다.
철성은 롱나이프로 토공을 위협했지만 그는 망설이지 않고 덤벼들었다.
"쎅쓰!"
"여유가 생겼나보군?"
쓸데없는 소리를 지르는 걸 보면 말이다.
토공의 하이킥이 아슬아슬하게 철성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철성은 반사적으로 오른쪽 어깨를 움직이려 했으나 어마어마한 통증을 느꼈다.
"큭!"
역시 습관은 무서운 것이다.
왼손에 롱나이프를 들고 있음에도 이 무슨 추태란 말인가.
그가 잠깐 멈칫하자 토공은 허공에서 몸을 돌려 반대쪽 발로 철성을 걷어찼다.
다급해진 철성이 팔로 막자 반탄력이 둘을 밀어냈다.
난입자가 나타난 것도 그 때였다.
"합!"
철성의 시야가 없는 오른쪽 뒤 창문이 깨지며 성호가 나타났다.
와장창!
그는 로프를 이용해 단숨에 복도에 난입해 철성의 머리를 차버렸다.
평소라면 피했겠지만 지금은 뒤로 밀려난 상태였다.
"억!"
철성은 큰 타격을 입고 나가떨어졌다.
휘휘휭!
언제 던졌는지 롱나이프가 공중을 회전했다.
석현은 롱나이프를 잡아채곤 바로 몸을 날려 철성을 덮쳤다.
1초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둘의 합이 조금만 빗나갔어도 철성은 상황을 파악하고 반격을 날렸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처참하게 바닥을 구를 뿐이었다.
"염병할!"
철성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일어섰다.
두 대 얻어맞고 나니 시야가 분명해져 두 놈의 형체가 잘 보였다.
석현이 롱나이프를 쥐고 달려들었다.
그렇게 당해 놓고 또 육탄전을 하자고?
철성은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석현의 목적은 육탄전이 아니었다.
그의 오른손이 창문틀을 잡아 멈추었다.
철성이 휘두른 롱나이프가 허공을 가른 순간, 석현의 발등이 자신의 롱나이프 자루를 걷어찼다.
"쳇!"
코앞에서 날아오니 피할 구석이 없다.
철성이 오른팔로 겨우 얼굴을 가렸고 롱나이프가 팔뚝에 꽂혔다.
격통이 번졌지만 이쯤은 견딜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쉬쉭!
석현의 좌우로 뭔가가 날아왔다.
막 팔을 회수하던 철성은 피하지도 못하고 맨몸으로 에메라스 비도를 얻어맞아야 했다.
날카로운 칼날이 그의 전신을 쑤시고 들어갔다.
"크억!"
철성은 기어코 무릎을 꿇고 말았다.
이 벼락 맞을 놈들은 뭐 이리 합이 잘 맞는단 말인가!
"으아압!"
대체 어디서 꺼냈는지 토공이 긴 창을 들고 그에게 달려들었다.
지긋지긋한 생존마놈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철성은 벌떡 일어서서 토공이 찌른 창을 손으로 막았다.
"흡!"
엄청난 고통이 밀어닥쳤지만 그는 겨우 토공의 돌진을 막아냈다.
토공은 막힌 순간 뒤를 슬쩍 바라봤다.
한 눈을 파는 게 아니라 신호를 주는 것 같았다.
철성은 그게 무엇인지 알아챘다.
어깻죽지에 구멍을 낸 굵은 볼트다.
심리전에서 한 발 앞섰다고 생각한 그는 옆으로 몸을 날리며 웃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시야에 보인 것은 토공의 놀란 얼굴이 아니라 발등이었다.
"페이크다 병신아!"
으드득.
토공이 날린 사커킥에 철성의 콧잔등이 내려앉았다.
그는 킥을 버티지 못하고 뒤로 벌러덩 나자빠졌다.
그제야 허공에서 볼트가 튀어나왔다.
퍽!
옆구리에 손가락만한 볼트가 박히자 철성은 입을 딱 벌렸다.
"커헉!"
영혼이 사출될 것 같은 엄청난 고통이 그를 쥐어짰다.
철성은 바닥을 기며 이를 악물었다.
여기서 더 버텨봐야 죽도 밥도 안 된다.
일단 도망가야 한다는 본능이 그의 뇌리를 꽉 채웠다.
토공이 재차 달려들었지만 철성은 힘겹게 무기를 뽑아버리고 달리기 시작했다.
어느새 좀비들이 벽을 좁히고 있었다.
"여기서 죽여야 돼."
차원문에서 나온 성호가 말했다.
단, 자신이 죽여선 안 된다.
친근감 스킬이라도 얻어버리면 매우 곤란해진다.
살인자가 아니면 무용지물이라 지형감지를 생으로 날리는 거나 다름없다.
석현은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친구와 인사를 나누고 싶었지만 일단은 저놈을 쫓는 게 먼저다.
하지만 철성은 언제 다쳤냐는 듯 빠르게 좀비들 사이로 사라졌다.
둘은 맷집 하나는 끝내준다며 투덜거렸다.
살인자가 사라지자 데스매치가 어정쩡하게 종료되었다.
벽을 형성하고 있던 좀비 무리가 둘을 덮쳤다.
평소의 성호라면 즉시 차원문 안으로 도망갔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친구와 함께였다.
도저히 물러설 기분이 들지 않았다.
둘은 등을 맞대고 좀비들을 노려봤다.
"토끼공주, 쟤네들이 째려보는데."
"석현이야, 황석현."
뜻밖의 통성명에 성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름을 밝혔다.
"강성호. 이렇게 만나는 건 처음이지?"
"우리가 해야 할 게 하나 있어."
"그렇지? 저놈들 뚫고 보자고."
좀비 수백 마리를 뚫는다···
누가 들었으면 말도 안 되는 헛소리라 치부할 발언이다.
하지만 둘은 수천 시간 동안 게임을 즐긴 고인물이었다.
처음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합을 맞춰 살인자를 일방적으로 몰아붙이기도 했다.
서바이벌 라이프를 통틀어서 둘처럼 마음이 잘 맞는 콤비를 찾기도 힘들 것이다.
둘은 고개를 돌려 서로의 얼굴을 확인했다.
토끼공듀는, 김밥조아는 이런 사람이었구나.
구울 두 마리가 뛰어올라 둘을 덮쳤지만 순식간에 한 대씩 얻어맞고 바닥을 뒹굴었다.
둘은 동시에 외쳤다.
"쎅쓰!"
.
.
.
"휴···웬만큼 다 가져왔어."
나는 거리에서 회수한 무기와 옷을 바닥에 쏟았다.
석현이 바닥에 널브러진 옷을 신기하게 바라봤다.
"이거 빨리 입어."
"내가?"
"그래. 보고 있으니 내가 다 민망해서 그래."
"하지만 난 이 상태가 좋은데."
"물론 석현이 넌 좋겠지···하지만 내 입장이 되어보라고. 사람들이 너하고 같이 다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할 것 같아?"
석현은 남자 주제에 고개를 갸웃하더니 곧 정답을 말했다.
"김밥조아라고 생각하겠지?"
"그래, 그러니까 빨리 입어."
"하지만 넌 강하잖아. 나보다 더."
강하니까 정체를 숨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거다.
하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달랐다.
"아냐, 그건. 그리고 사실이라 하더라도 남에게 나를 알리고 싶진 않아."
"흐음."
"제발 나를 위해서 좀 입어줘, 부탁이야."
내가 간절히 말하자 석현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팬티와 청바지를 걸쳤다.
그리고 티셔츠를 입자 말쑥한 남자의 모습이 드러났다.
"오···멋진데."
봉두난발과 지저분한 턱수염까지 정리하면 정말 괜찮은 얼굴이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석현의 얼굴은 어두웠다.
"이제 벗을 게 세 개나 생겼어···"
"아니 왜 꼭 벗으려고 하는 거야? 노출증도 아니면서."
"벗으면 해방된 느낌이 들거든. 너도 벗어보면 알 거야."
"사양한다."
나는 그렇게 툭 던지고선 석현의 곁에 앉았다.
그러고 보니 이 아저씨 30대였지···
형인데 반말을 지껄이는 게 영 어색했다.
하지만 분위기가 그렇게 되어버려서 어쩔 수 없었다.
다정과도 말을 그렇게 텄으니까.
"오리궁뎅이는 누군지 모르지?"
"응."
"이름이 최다정이더라. 여자인 건 알거고."
"지금은 어딨어?"
"일이 좀 있었어. 석현이 니 얘기를 먼저 듣고 싶은데. 잘 돌아다니다가 왜 갑자기 내려오기로 한 거야?"
다정도 그렇고 나는 둘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리 능력에 자신이 있다 해도 도시 간 이동을 하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나고 자란 곳에서 숨어 지내는 게 제일 편하다.
그는 잇몸을 활짝 드러내며 말했다.
"친구가 여기 있으니까."
친구라···
울림이 깊은 말이었다.
나 같은 놈을 이렇게 생각해주는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다.
우리는 잠시 말없이 석양이 지는 남쪽 하늘을 바라봤다.
느닷없이 석현의 배가 꼬르륵 울렸다.
일단 뭐라도 좀 먹여야겠군.
"배고프지? 밥이나 먹자."
"저기 많네. 내가 잡아올게."
석현이 가리킨 것은 고블린이었다.
나는 몸서리를 쳤다.
"너 설마 저거 먹었던 거야? 독이 있다고."
"독은 구우면 사라지니까 괜찮아."
먹어봤다는 거네.
그의 주장은 간단했다.
"쟤들도 우리 먹으니까 우리도 먹어야 공평하지."
"석현아···우리 인간을 포기하진 말자."
나는 필사적으로 석현을 뜯어말려 겨우 주저앉혔다.
그는 먹어보면 알 거라며 내가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 입에 고블린 고기를 쑤셔 넣기 전에 빨리 움직여야겠군.
나는 차원문을 열어 예전에 키핑해 놓은 그리폰 고기를 가지고 나왔다.
차가운 땅에 묻어두었기에 아직까지 멀쩡했다.
허공에 사람이 들락날락하는데 석현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특성이 무언지 캐묻지도 않았다.
언젠가 말해줄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생각이겠지.
다정이 그랬듯이.
"그리폰 고기야. 맛있으니까 먹어봐."
그 말을 한 나는 곧장 후회했다.
석현이 눈을 빛내더니 날것 그대로인 고기를 뜯기 시작한 것이다.
"아니 잠깐만! 그걸 뜯어먹으라는 말이 아니고!"
요리해 줄 테니 먹으라는 소리였는데!
석현은 고기를 뺏기고선 이렇게 먹어도 괜찮은데···하며 아쉬워했다.
하여튼 손이 많이 가는 남자로구만.
그날 저녁.
우리는 식사를 끝낸 뒤 모처럼 술잔을 기울였다.
도망친 살인자 녀석을 안주 삼아.
"걔 천연기념물이었지? 용케 살아 있었네."
"집착이 심한 녀석이라 우리를 포기하진 않을 거야."
"또 얻어터지려고?"
혹시나 해서 경매장을 살펴봤지만 녀석이 올린 코멘트 같은 건 없었다.
내 정체를 숨겨주는 게 아니라 집착이 심해 혼자 해결하려는 것 같았다.
이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우리는 이야기를 나눈 끝에 하나의 목표를 세웠다.
언젠가 우리 모두가 모여 함께 브루트를 사냥하기로.
단 석현은 거기에서 생존자1을 빼길 희망했다.
내가 이유를 묻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기분 나쁜 녀석이야."
무척 주관적인 평이다.
나로선 일단 지켜보자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다정을 보냈으니 그녀가 판단해주겠지.
자기한테 집적거린다고 두들겨 패지나 않았으면 좋겠는데.
"근데 석현아···"
이런, 벌써 자고 있군.
여기까지 내려오느라 무척 피곤했나보다.
나는 쉘터에서 이불과 베개를 꺼내 바닥에 깔고 그를 데굴데굴 굴려 눕혔다.
푹 자고 내일 보자, 친구.
< 토끼공듀 - 4 > 끝
< 미친놈이 너무 많음 - 1 >
드르렁―
"···이상의 사태에 근거, 즉각 조사단을 파견하는 등의 조치가 필요하다고 사료됩니다."
회의실에서 누군가 자고 있다면 즉각 깨워서 쫓아내는 것이 순리일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자고 있는 사람이 다정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의자 두 개를 모아 놓고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일부러 회의실까지 찾아와서 자는 건 아니고, 자고 있는데 사람들이 와서 회의를 하는 것뿐이었다.
회의실의 용도를 설명해주지 않은 게 불찰이다.
장원택은 피곤한 눈두덩을 문지르며 그녀의 옆에 앉은 남자에게 턱짓했다.
"그 조사는 다정씨에게 맡기도록 하지요. 깨우세요."
"예? 깨, 깨우라고요?"
남자는 화들짝 놀라더니 조심스레 그녀를 툭, 건드렸다.
자고 있는 사람은 별로 안 무섭겠지만 뒤에 있는 구울은 충분히 무서운 존재였다.
이 쉘터에 드나들 수 있는 유일한 몬스터.
다정의 힘을 받았는지 보통의 구울과는 달리 멀쩡한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키가 2미터를 가볍게 넘고 팔뚝이 사람 허리만큼이나 두껍다는 것만 제외하면 말이다.
다행히도 놈은 남자의 행동에도 불구하고 반응을 하지 않았다.
이 쉘터 사람들에겐 해를 끼치지 말라는 명령을 받은 걸까?
남자가 계속 다정의 어깨를 건드리기만 하자 이번에는 범석이 나섰다.
그는 그녀에게 다가가 힘 있게 어깨를 흔들었다.
"다정씨, 다정씨, 일어나십시오."
"흐으응···너무 빡빡해···"
대체 무슨 꿈을 꾸는 걸까.
사람들이 헛기침을 했고 다정은 그제야 잠에서 깨어나 눈을 힘겹게 떴다.
"···뭐야. 왜 여기 모였지? 날 어떻게 해보려고?"
그녀의 시선이 장원택에게 향했고 그는 지친 미소로 화답했다.
"아닙니다. 그나저나 다정씨에게 맡길 일이 있는데 해보시겠습니까?"
"나한테 일이요?"
"밥값은 하셔야죠."
밥값이란 말에 다정은 입술을 삐죽이며 바로 앉았다.
괜히 여기에 들어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부 쉘터는 일정한 규칙을 기반으로 하는 조직이었다.
그렇다고 군대처럼 빡빡하게 돌아가는 건 아니지만.
하여튼 배고플 때 먹고, 피곤할 때 자는 자유분방한 생활은 저 멀리 떠나버렸다.
앞서 발표했던 남자가 요약해서 다정에게 들려주었다.
"밤섬에서 이상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침식은 아닌데 이계의 식물이 넘쳐난답니다. 거길 조사해주셨으면 합니다."
"흐음, 침식이 일어날 시기는 아닌데."
침식은 식물형 몬스터가 대지를 뒤엎는 현상을 말한다.
좀비나 구울 등이 에너지를 다 쓰고 활동을 멈추면 식물형 몬스터로 변하게 된다.
장원택이 첨언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건 침식이 아닙니다. 이계의 몬스터들이 가져온 씨앗이 바람에 날아가 발아한 것으로 추측되고 있죠. 샘플을 확보하고 육지에 영향을 미치는지 어떤지 조사해 주셨으면 합니다."
다정은 턱을 괴고 하품을 했다.
"조사 끝나면 불 질러도 되죠? 오물은 소독해야 하니깐."
"방화를 일으킨단 말입니까? 하지만 거긴 생태보전지역으로···"
"아니 그거야 한국이 멀쩡할 때의 얘기고 지금은 개뿔도 없잖아요?"
"허허···"
과격하나 틀린 말은 아니었다.
멸망 직전에 몰렸는데 과격한 수단을 쓴다 해서 뭐가 문제란 말인가.
다만 이 경우는 좀 더 지켜볼 필요성이 있었다.
장원택은 다정을 달랬다.
"다음에 침식이 일어나면 마음껏 불을 질러버리기로 하지요."
"에이, 아쉽네요."
아무튼 밤섬 조사는 다정이 맡기로 결론이 났다.
회의에선 그 외에도 중대한 사항들이 속속 결정되었지만 다정에겐 지루함 그 자체였다.
"아···개노잼."
그녀는 짜증이 났다.
평소라면 좀비들이 가져다준 물로 씻고 유현이와 밥을 먹고 있을 텐데 말이다.
여긴 칙칙한 아저씨들 밖에 없었다.
자신을 여기로 보낸 성호는 지금쯤 토공과 만나 신나게 놀고 있겠지?
둘이 벌거벗고 도시를 뛰는 상상을 한 다정은 갑자기 흥분했다.
"나도 놀고 싶어!"
그녀가 벌떡 일어나자 원택이 서류를 정리하며 사람들에게 눈치를 줬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요. 각자 맡은 바 임무에 충실하십시다."
순식간에 회의실이 텅 비어버렸다.
다정은 허탈하게 앉아 테이블에 다리를 척 올렸다.
누군가 들어와 그녀의 옆에 앉았다.
"처음 뵙겠습니다. 주승철이라고 합니다."
그녀의 고개가 살짝 돌아갔다.
준수한 외모의 남자가 방긋 웃으며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인데···"
"주로 뉴스에서 들으셨을 겁니다. 대현그룹 재벌 3세라고 소개가 꽤 났었죠."
"아항. 근데 휠체어는 안 탔네요?"
"제 나이에 휠체어 타면 욕먹습니다. 최소 65세는 넘어야죠."
승철은 그녀의 빈정거림을 대충 받아넘겼다.
그리고 회의실 천장을 둘러보며 회한에 젖었다.
"종말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저는 여기에 있지 않았습니다. 따로 쉘터를 만들었었지요. 헌데 여기로 온 이유를 알고 계십니까?"
"별로 안 궁금한데요."
다정은 흥미가 없는 듯했지만 승철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고인물들을 만나보고 싶어서입니다. 특히 당신을 말이죠."
"만나보니 어때요? 막 침대에 눕혀놓고 다리 벌리고 싶어요?"
승철은 그녀의 정제되지 않은 말투에 당황했지만 부드럽게 넘겼다.
"다정씨의 외모에 혹하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죠. 하지만 저는 능력을 더 중요시합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죠? 나를 끌어들여서 이 쉘터를 지배하고 싶은 건가요? 속이 검은 사람처럼?"
속이 검다는 말은 혹시 배검인을 말하는 것일까?
승철이 잠시 할 말을 찾고 있을 때, 검인이 회의실에 들어섰다.
그는 다정을 보고 만면에 미소를 지었다가 승철을 발견하곤 바로 인상을 찌푸렸다.
"회의는 끝난 걸로 아는데···"
"저희만의 회의가 있어서 말이죠. 할 말이 있으면 하세요."
검인에겐 빨리 말하고 꺼지라는 소리처럼 들렸다.
또 은근히 다정과의 친분을 과시하는 듯한 단어 선정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둘이 기 싸움을 하고 있을 때, 다정은 거기에 전혀 관심이 없는 듯 기지개를 켜고 구울들을 불러 모았다.
"외출 준비해."
"다정씨 잠시만···"
"아직 이야기가···"
두 남자가 그녀를 불렀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쉘터의 문이 열리며 황폐화된 지상의 전경이 드러났다.
지금 이 순간에도 쉘터의 전투원 몇 명이 좀비들과 싸우고 있었다.
그들은 다정을 보고선 즉시 후퇴하기 시작했다.
"좀비 여왕이다!
"뒤로 빠져!"
한편 다정은 뉴 소년시대를 호칭하는 것도 귀찮았는지 앞으로 나가며 슬쩍 손짓했다.
명령만 기다리던 구울들이 포효하며 튀어나갔다.
일방적인 전투가 이어졌다.
다정의 구울들은 원래 강했던 데다가 추가효과의 버프를 받아 한껏 강화된 상태였다.
강화 구울과 맞먹어서 일반 좀비는 아무리 달려들어도 수수깡처럼 박살날 뿐이었다.
특히 덩치라 불리는 강화 구울의 활약이 눈부셨다.
"짜증나는데 다 부숴버려."
쿠오오오!
주인의 지시를 들은 덩치는 크게 포효하며 주변 좀비들을 일방적으로 두들겼다.
머리통만한 커진 주먹으로 쾅쾅 치니 좀비들의 머리가 곤죽이 되었다.
순식간에 좀비 레이드가 종료되었다.
구울들이 좀비를 먹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역겨워하며 고개를 돌렸다.
입구에서 담배를 피며 구경하던 검인이 옆에 선 승철을 보고 한마디 했다.
"후우···다정씨는 나 때문에 이 쉘터 들어온 겁니다. 그러니 손 떼세요."
"처음 듣는 말인데요. 듣기로는 대통령님에게 흥미가 있어서 왔다던데?"
"진실은 그게 아니란 거죠. 우린 수천 시간을 같이 놀았단 말입니다. 우리 사이에 쌓인 추억엔 누구도 개입할 수 없어요."
"수천 시간의 추억이 쌓인 것치곤 냉랭한 반응이더군요. 어쩌면 검인씨가 착각하고 있는 게 아닌지."
승철의 말에 검인은 뜨끔했다.
동료에게 좀비 여왕을 포섭했다고 자랑했는데 뜻대로 움직이지 않아 곤란했다.
괜히 호언장담을 했나···
하지만 엎지른 물을 주워 담을 순 없는 일이었다.
어떻게든 저기 걸어오는 다정의 마음을 돌려야 한다.
다정은 쉘터로 복귀하다가 둘을 발견하곤 딱 멈췄다.
"아···진짜 재미없어."
쉘터에 들어가서 두 남자의 헛소리를 들을 생각을 하니 괜히 울컥했다.
성호와 토공이 올 때까지만 참자···
그녀는 덩치의 넓은 어깨에 올라탄 후 명령했다.
"밤섬으로 출바알!"
수십 마리의 구울들이 움직였고 검인은 따라갈까 하다가 포기하고 말았다.
어떻게든 접점을 만들어야 하는데 용기가 나질 않았다.
검인은 한참동안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힘없이 쉘터로 들어왔다.
.
.
.
철성은 어두운 건물 속으로 숨어들었다.
둘의 공격에 그의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하지만 그는 초월적인 맷집과 회복력을 가졌다.
그리 쉽게 쓰러지지 않는다.
"후우, 후우···"
거칠게 숨을 내뱉는 이 순간에도 피가 멎고 상처가 아물고 있었다.
그는 고통을 되새기며 이를 갈았다.
"그 놈···"
정황상 난입한 놈은 김밥조아일 가능성이 높았다.
토공과 합을 맞춰 자신을 공격할 간 큰 놈이 있으리라곤 생각하기 어려웠다.
오리궁뎅이는 여자로 판명 났고, 생존자1은 정부 쉘터에 있다.
남은 것은 김밥조아 하나뿐이다.
"흐, 흐흐···"
괜히 웃음이 나왔다.
드디어, 드디어 발견한 것이다.
자신을 천연기념물 취급한 그 놈을.
경매장을 둘러보니 그를 찾은 사람은 자신 외엔 없어 보였다.
이제 정보를 올려서 그를 곤경에 처하게 할까?
"···아니지···"
철성은 다른 놈의 개입을 원치 않았다.
김밥조아와 토공은 반드시 자신의 손으로 끝장내야 한다.
게임에서의 악연을 현실에 연결시키는 건 바보 같은 짓이지만, 뭐라는 사람은 없다.
게임이 곧 현실이 되었으니.
"기다려라···"
끝까지 추적해서 죽여주마.
하지만 그 전에 둘의 전투력을 분석할 필요가 있었다.
토공은 그렇다 치고 김밥조아의 특성은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다.
아공간에서 무기를 꺼내는 걸로 끝인가?
'몸을 숨길 수도 있다고 봐야지···'
그의 시야에 포착되지 않은 걸로 봐서 그게 유력했다.
다시 말해 김밥조아는 자기가 원할 때 일방적으로 공격할 수 있다는 말이 되겠다.
'볼트는 조력자가 발사한 건가···토공이 아닌 다른 놈이 있단 말이군.'
어쩌면 1:3의 싸움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이건 좀 위험한데.
비록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그는 둘과의 데스매치에서 밀렸다.
그게 셋이 되면 자칫 죽을 위험이 있었다.
당분간은 사냥에 전념할 수밖에 없나···
20레벨을 달성하고 생존자를 더 죽인다면 그는 훨씬 강해질 것이다.
"···좋아."
이렇게 된 바에야 철저하게 해주지.
철성은 상처를 추스르고 다른 부하들이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심장소리가 크게 나자 몇 명이 그를 찾아왔다.
"보스, 토공은 어떻게 됐습니까?"
"따로 제압해두셨다면 저희가 데리고 오겠습니다."
"아니···그럴 필요 없다."
철성은 완전히 방심하고 있는 부하들을 세라믹 칼로 베어 죽였다.
작은 방에 피바람이 몰아쳤다.
"컥!"
"다, 당신이 왜···"
"푸흐헙!"
목이 반쯤 잘린 부하가 죽어가며 바람소리를 냈지만 그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포식자가 사냥 좀 하겠다는데 뭐가 문제란 말인가.
"흐음···"
부하 셋을 희생시키자 살인자 특유의 스킬 피의제물이 3으로 올랐고 근력 스탯이 25를 돌파했다.
맨주먹으로 콘크리트를 박살내는 무지막지한 스펙.
하지만 철성은 만족하지 못했다.
근력 스탯만 너무 올린 덕분에 토공의 움직임을 읽지 못한 게 패인 중의 하나였다.
1:1이었다면 단숨에 제압했을 테니 문제는 없었는데 그놈의 김밥조아 때문에···
'더 많은 죽음이 필요해.'
우선 창원의 부하들을 몽땅 죽이는 것부터 시작하자.
그러면 훨씬 강해진 상태에서 토공과 김밥조아를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마침내 둘을 죽이면···
철성은 거기에서 멈칫했다.
찾아서 죽인 다음에는 뭘 하지?
부하들을 만들고 세력을 확장시키는 건 그의 흥미를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일전의 싸움에서도 직접 겪지 않았나.
고인물만이 그를 흥분시킬 수 있었다.
다른 놈은 약해빠져서 별 기대가 되지 않았다.
"쉽게 죽이면 안 되지···흐흐···"
고양이는 쥐를 쉽게 죽이지 않는다.
궁지에 몬 뒤 툭툭 가지고 놀다가 흥미가 없어지면 비로소 물어 죽인다.
'천연기념물이라고 부른 걸 취소하게 만들어주마.'
그가 김밥조아에게 유독 집착하는 것도 그 모멸스런 단어 때문이었다.
페널티가 무서워서 살인자로 활동도 못하는 주제에 감히···
웃긴 건 다른 고인물들도 거기에 공감해서 자신과의 데스매치를 피했다는 점이다.
정작 싸우면 쳐 발릴 것들이···
철성은 근육을 꿈틀대며 거구를 일으켰다.
그의 시선이 북쪽으로 향했다.
둘이 서울로 갈 거라는 심증은 이미 확신으로 굳어진 상태였다.
경매장엔 오리궁뎅이가 정부 쉘터에 들어갔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남은 고인물 둘도 서울로 가겠지.
그는 천천히 뒤를 쫓으며 능력을 키우면 된다.
마침내 서울에 도착한 뒤엔···
'모두 데스매치로 상대해주마···기다려라.'
철성은 부하들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후두둑―
아침부터 비가 많이 내렸다.
창밖을 내다보자 어느새 보도블럭 사이로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나 있었다.
자연의 복원력이란 정말 엄청나서 몇 년도 지나지 않아 도시를 뒤엎을 것이 분명했다.
이계의 식물 몬스터도 가세하겠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어깨를 돌렸다.
어제 과하게 몸을 움직인 덕분에 피곤이 사라지지 않았다.
시선을 돌리니 토공, 아니 석현이 거울 앞에서 머리를 깎고 있었다.
"완전히 미는 거야?"
"모자 쓰기 편할 것 같아서."
"변장을 하면 좋겠다고 했지 대머리가 되라고는 안 했는데···"
"머리카락 따윈 신경 안 써. 뒷머리 좀 잘라줄래?"
"···그래."
나는 세라믹 칼을 받아들고 석현의 뒷머리를 밀었다.
그는 가만히 있지 않고 미스릴 나이프로 수염을 슥슥 깎았다.
석현의 머리에서 눈썹을 제외하고 털이 사라졌다.
모자를 씌워주자 제법 눈빛이 날카로운 훈남이 보였다.
"크. 인물이 사네."
이전에 토공을 본 사람은 그게 석현과 동일인이라고는 생각지 못할 것이다.
옷까지 걸치자 외모도 분위기도 완전히 달라졌다.
나는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밥 먹고 아침에 출발하자."
"메뉴는 뭐야?"
"밥하고 된장찌개에 생선구이, 김치."
오랜만에 먹는 백반이니 기뻐할 거라 생각했지만 그는 의외로 시무룩했다.
설마 고기가 없어서 그러는 건가?
"그동안 고기만 먹었다며? 채소도 많이 먹어야지. 균형 있는 식단이 필요하다고."
"동물이 채소를 먹으니까 괜찮아."
그 동물을 먹으면 채소까지 같이 섭취한다는 건가···희한한 논리군.
하지만 차마 반박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고기가 먹고 싶다는데 먹여줘야지.
나는 쉘터에서 화조 한 마리를 잡아 손질해서 밖으로 들고 나왔다.
석현은 안이 어떻게 생겨먹었는지 궁금한 눈치였다.
"다정이도 그런 눈이더라. 안에 너구리 있지 않느냐고 묻던데."
"진짜 너구리 있어?"
"너구리는 아니고 다른 녀석들이 있어."
고기가 익어가는 냄새가 나자 자고 있던 딩고가 벌떡 일어났다.
녀석은 얌전히 우리 사이에 자리를 잡고 앞발에 머리를 올렸다.
화조가 백숙으로 변하는 동안 나는 석현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로 정부 쉘터와 생존자1에 대한 것이었다.
"정부 쉘터에 총이 있어. 철사병이 완전히 가라앉고 나면 꺼낼 생각인가 봐. 그거 좀 알아보라고 다정이를 보낸 거야."
"총? 그건 숨긴다고 되는 게 아닌데."
"지하 수백 미터에 숨긴 모양이야. 철사병은 입자선이니까, 거기까진 미치지 못하는 거겠지."
경매장을 통해 다정과 암호를 써서 대화한 결과였다.
그녀는 뿔이 나 있었다.
자기만 빼고 둘이서 재미있게 논다고 생각하는 듯싶었다.
정작 우리는 살인자와 싸우는 등 홍역을 치렀는데.
아, 다정에겐 그게 신나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오호. 그럼 나중에 난리 나겠네."
"정부 쉘터를 장악하면 한국의 지배자가 돼. 배검인은 그걸 노리는 모양이고."
석현은 손등으로 턱을 받쳤다.
"그거 재밌겠는데."
"넌 재밌겠지, 난 아니야. 목숨은 하나뿐이거든."
"왜 목숨이 하나뿐이라 생각해? 특성으로 나왔잖아. 나중에 스킬로 나올 거야. 일회용이겠지만."
"···진심으로 하는 소린 아니지?"
"진심이야. 이런 세상인데 불가능한 건 없어. 뭐가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아."
그런가···
나는 스피드런과 퍼스트킬 이벤트에서 얻은 스킬과 면벌부를 떠올렸다.
본게임에선 구경조차 못한 것들이었다.
석현의 말마따나 몬스터가 사람을 습격하는 세상이 되었는데 부활이 스킬로 나온다고 해서 이상할 건 없었다.
이미 무한부활 특성을 가진 사람이 떡하니 있잖은가.
"니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어."
내가 한 발 물러서자 석현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러니까 다음에 위험하면 용감하게 싸우고 죽어도 돼. 내가 살려줄게."
"아니 그건 좀."
이런 무지막지한 인간을 봤나.
하여튼 우리는 서울로 올라가기 전에 창원 클랜의 아지트를 털기로 했다.
천연기념물이 어떻게 행동할지 뻔히 눈에 보였기 때문.
"아마 부하들을 다 죽이고 우리를 추적할 거야. 그 물자는 우리가 가지면 돼."
"부하들을 죽인 만큼 강해지겠네."
"그렇지···"
놈은 서울로 올라가는 우리를 쫓아올 것이 분명했다.
역시 그 때 총을 쐈어야 했나···
하지만 죽일 수 있다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
전의 살인자도 견뎌냈고 말이다.
꽁무니에 귀찮은 놈이 달라붙게 되는군.
아니 잠깐만.
여기선 역으로 생각해서···
나는 석현의 팔뚝을 툭툭 치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녀석을 따라다니자."
"우리가?"
"그래. 난 꽁무니에 뭐가 따라다니는 건 질색이거든. 녀석은 분명 부하들을 죽이며 강해질 거야, 그렇지?"
"우리가 깽판 놓는다?"
"그게 우리 주특기잖아."
"섹스."
석현은 손뼉을 짝, 치더니 벌떡 일어나 느닷없이 코사크 댄스를 추었다.
그러더니 구울이 없어서 옛날의 그 맛이 안 난다며 밑으로 뛰어내리려 했다.
"석현아 제발 좀!"
나는 간신히 그를 붙잡았다.
역시 정상이 아니야.
나도 그렇지만.
< 미친놈이 너무 많음 - 1 > 끝
< 미친놈이 너무 많음 - 2 >
다정이 밤섬을 조사하고 쉘터로 돌아왔다.
그녀를 맞은 건 전 대통령 장원택이었다.
그는 다정을 따로 불러 커피를 대접했다.
"어떻습니까, 밤섬은."
"가봤는데 쪼오끔 문제가 있었어요, 이게."
밤섬의 상태가 낱낱이 까발려졌다.
지구의 것으로 보이지 않는 덩굴식물이 밤섬을 온통 뒤덮고 있더란다.
성장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보고 있는 와중에도 자란다는 착각이 들 정도라고.
장원택의 미간이 모였다.
"그 덩굴식물이 밤섬만 뒤덮었습니까, 아니면···"
"당연히 육지에까지 줄기를 뻗었죠. 그거 때문에 밤섬 건너가기 편했어요."
"허허···이것 참."
덩굴줄기가 얼마나 굵고 튼튼하면 사람과 구울이 지나갈 정도가 된다는 말일까.
다정이 구울에게 업혀서 지나가는 걸 상상한 장원택은 소름이 끼치는 걸 느꼈다.
이건 당초 예상했던 정도가 아니었다.
이계의 식물형 몬스터가 지구를 침공하는 것으로 봐야 한다.
오히려 고블린이나 오크 등의 동물형 몬스터보다 더 심각할지도 모른다.
그들은 대지 자체를 더럽히진 않으니까.
장원택이 넌지시 물었다.
"혹시 그냥 두셨습니까?"
"생태보전지역이라 놔두라면서요?"
"침식이 일어나면 불을 지르자고 말씀드렸지요. 분명 그건 덩굴줄기에 의한 침식이나 다름없었을 겁니다만···"
구렁이 담 넘어가듯 슬슬 넘어가려 하자 다정이 화를 내며 하이힐을 벗어 테이블에 내리쳤다.
"아 진짜! 왜 말이 왔다 갔다 해요?"
하지만 장원택은 조금도 놀라지 않고 조용히 그녀에게 물었다.
"분명 다정씨라면 조치를 하셨으리라 믿습니다. 어떻습니까?"
"···했어요. 화염캔 만들어서 중심부에다 불 질러버리니까 아주 잘 타던데요? 끼에엑! 이러면서."
"거의 몬스터나 다름없군요···그나저나 화염캔이라···그거 만들 재료가 있었습니까?"
"경매장에서 샀죠."
"마침 그걸 올린 사람이 있었던 모양이군요···"
전직 대통령의 예리한 시선이 그녀에게 닿았다.
다정은 괜히 움찔해선 시선을 피했다.
사실 그녀는 눈앞의 덩굴식물을 어떻게 할까 고민하던 차였다.
그러다 경매장을 통해 성호에게 연락했다.
―화염캔으로 불 질러버리면 되겠네. 아주 잘 탈거야.
―너 토공 만났어 안 만났어?
―섹스.
―토공 맞네. 하여튼 니들 빨리 서울로 올라와. 안 그러면 내가 내려갈 거니까.
―지금 중요한 일이 있어서 당분간은 안 되겠어.
―그 중요한 일이 뭔지 내가 납득이 안 되면 둘 다 엉덩이를 차버릴 거야.
―천연기념물하고 놀고 있어.
―오케이, 인정.
노는 게 아니라 치고 박고 싸우고 있는 거겠지.
다정은 거기에 끼고 싶어 안달이 났지만 꾹 참았다.
조금만 더 기다리자···
그리고 성호는 입찰가를 평소보다 높게 해서 경매장에 올렸다.
경매장에서 놀고 있던 사람들은 돈독 올랐냐며 욕을 해댔지만 다정은 바로 구입했다.
그녀에게 있어 포인트란 하룻밤 지나면 쌓여 있는 눈이나 다름없었다.
구울들이 화염캔을 가져가 불을 지르자 커다란 덩굴식물이 불꽃에 휩싸였다.
―오물은 소독이다!
다정은 이 스토리에서 성호와 토공에 대한 것을 빼고 이야기했다.
그런데 장원택은 낌새를 챈 모양이었다.
"흐음···아무래도 그와 만난 듯하군요."
"누구요?"
"김밥조아 말입니다. 화염캔을 시기적절하게 만들어서 경매장에 올릴 수 있는 사람은 그뿐이지요."
이 영감탱이 경매장을 봤구나.
항상 쉘터에 처박혀 있으니 15레벨은 아닐 테고, 부하 중 하나가 보고한 거겠지.
다정은 머리카락을 어깨 뒤로 넘겨 정리하며 물었다.
"만났다면 어떻게 할 건가요?"
"저희가 어떻게 하겠습니까···.단지 정보를 수집하는 차원에서 사실 확인만 할뿐입니다. 만났습니까?"
여기까지 오면 숨기기도 힘들다.
사실 뭐 만났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정보도 아니고 말이다.
경매장에선 이미 토공과 오리궁뎅이가 남하한 이유가 김밥조아 때문이라고 소문이 파다했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장원택은 식어버린 커피를 단숨에 들이켰다.
"그를 정부 쉘터로 데려오고 싶군요."
"들어오면 난리가 날 걸요? 인류의 배신자니까."
"하하···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혼자 살겠다고 정보를 숨겼잖아요? 경매장 사람들은 아예 그 새끼라고 부르던데."
"그거야 그들의 입장이지요. 나는 약간 다릅니다. 미욱한 안목이지만, 어느 정도 전체를 보는 위치에 서 있었으니까요."
"흐음?"
마치 진실을 안다는 소리처럼 들렸다.
다정이 얼굴을 들이밀자 그는 부담스러워하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김밥조아를 데려온다고 약속하시면 전부 말씀드리지요. 아직은 아닙니다."
"뭐, 나하고는 상관없는 얘기네요. 그 아저씨하고 해결하세요."
"나이가 많나보군요?"
"아뇨···나하고 비슷한데. 잠깐, 넘겨짚지 말라구요."
"김밥조아는 20,30대 남자라···좋습니다. 우리 검인씨, 승철씨와 말이 통하겠군요."
"으엑. 그 아저씨들하곤 완전 상극이라서 안 통할걸요? 싸우지 않으면 다행이겠는데."
"만나보지 않으면 모릅니다. 혈기왕성한 남자들은 직접 부딪쳐봐야 알 수 있는 부분도 있으니까."
"아니, 확실해요. 승철씨는 모르겠는데 배검인 그 아저씨하곤 확실히 안 맞아요."
"···다정씨를 여기로 보낸 게 김밥조아군요?"
이건 또 어떻게 알았지?
"분명 다정씨는 내 제안에 흥미가 없었습니다. 그렇지요? 하지만 마지막 날에 나를 찾아왔습니다. 심경의 변화가 있었다는 뜻인데···김밥조아가 그 던전 안에 있었군요?"
이 아저씨 완전 넘겨짚기 선수네.
그러면서 정확히 핵심을 짚는 게 보통이 아닌 것 같았다.
다정이 아예 입을 다물어 버리자 그는 그녀의 손등을 툭툭 쳤다.
"나는 그 사람의 적이 아니라는 걸 말씀드리고 싶군요. 최소 내 입에서 그에 대한 비밀이 나가는 일은 없을 겁니다."
"대통령 아저씨는 그 사람이 안 미우세요? 조금만 더 일찍 정보를 말해줬다면 많은 사람들이 준비를 할 수 있었잖아요."
"일찍 말해줬다면 우리는 그를 찾아 행정력을 낭비했겠죠. 그리고 당시 정부엔 우리만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내 힘이 닿지 않는 곳에 또 다른 세력이 있었죠."
"대통령의 힘이 닿지 않은 세력이 있다고요?"
불쌍맨, 지만이를 찾아온 무서운 아저씨들과 관련이 있는 걸까?
"···여기까지 하죠. 남은 건 김밥조아에게 직접 전달하겠습니다."
듣고 싶으면 그를 데려오라는 말이군.
하지만 다정은 사태의 진실엔 별 관심이 없었다.
마음대로 하라며 테이블 위에 엎어지자 장원택은 일어서며 그녀에게 말했다.
"검인씨와 친하게 지내십시오. 조금만 인정해주면 다 내놓을 사람입니다."
"아니던데요. 완전 이 쉘터를 지배하고 싶어 하던데."
"그거야 남자라면 당연한 겁니다. 그리고 쉘터를 지배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그뿐만이 아닙니다."
"대통령 아저씨는 아니고요?"
그는 돌아서며 어깨를 으쓱했다.
"나는 노인입니다. 욕심을 부릴 나이는 지났지요. 그리고 대한민국의 대통령이었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뭘 더 바라겠습니까."
한 때 대한민국의 거인이었던 사람이 남긴 말이었다.
뭐 이쯤 되면 기회를 줘도 되겠지.
그래도 여전히 찌질찌질 행동하면 엎어버리면 되고.
다정은 하이힐을 신고 일어섰다.
.
.
.
쌀쌀해진 10월 중순의 밤.
느닷없이 거리에서 늑대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아우우우―
보름달이 선명한 밤에 늑대 무리의 울음소리라, 멋지군.
그 소리에 반응한 딩고가 주둥이를 쳐들고 울려는 찰나, 석현이 틀어막았다.
"쉿, 니 친구들 아니야."
그의 말이 맞다.
지금 우는 녀석들은 보통의 늑대가 아니라 어떤 질병에 감염된 늑대다.
덩치는 보통 늑대에 비할 수 없이 크고 매우 사납다.
본능조차 잃고 사냥감을 찾아 헤매는 짐승이라고 할 수 있었다.
녀석들에게 공격을 당하는 인간은 늑대인간이 된다.
이계에서 리젠되는 다른 몬스터와 달리 꽤 복잡하게 출현하는 몬스터인 셈.
"이제부터 고달파지겠네···"
"왜? 늑대인간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
"우리 말고 다른 사람들."
내가 지적하자 석현은 아, 하더니 베란다로 나와 밤의 거리를 바라봤다.
사실 생존자들은 지금까지 편하게 지냈다.
아지트에 숨어 있으면 생존확률이 확 올라가니까.
고블린이나 코볼트 등이 이리저리 돌아다닌다고 하지만 대응은 비교적 쉽다.
키퍼나 본 크리퍼는 밤에만 나타나는 몬스터고, 오크는 한 곳에 자리를 잡으면 잘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나 늑대인간은 다르다.
녀석은 적극적으로 사냥감을 찾아다닌다.
후각이 엄청나서 약간의 냄새만 풍겨도 위험하고 미친 듯이 날렵하기에 대응하기도 까다롭다.
전투계 특성이 아닌 한 녀석을 이길 방법은 다구리뿐이다.
그것도 함정을 파고 그물을 던져서 창으로 찌르는 등 꽤나 공을 들여야 한다.
석현은 딩고에게 너는 늑대인간이 되면 안 된다고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걔는 종이 다르다니까.
그 때 누군가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나와 석현은 베란다에 착 달라붙어 밖을 살폈다.
배낭을 맨 한 남자가 늑대무리에게 쫓기고 있었다.
도와주기도 뭐한 게, 눈 깜짝할 사이에 늑대가 덮치더니 상황을 끝내버렸다.
안됐군.
"끄아아악!"
남자는 처절한 비명을 지르더니 축 늘어졌다.
그리곤 변화가 일어났다.
남자의 덩치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커지더니 전신에서 털이 돋아났다.
옷이 부욱 찢어졌고 주위의 늑대들이 깨갱거리며 물러났다.
변신을 완료한 늑대인간이 보름달을 보며 포효하자 늑대들도 따라 울었다.
아우우우―
놈들이 달리기 시작했다.
이제 밤은 저들의 세상이 되었다.
영문도 모르고 밖에 나갔다간 늑대인간에게 갈가리 찢겨 죽는 결말을 맞이할 것이다.
곁눈질을 하니 석현은 심드렁했다.
"지금이면 일대일로 몇 분 컷할 것 같아?"
"세팅하고 무기 들면 1분, 주먹으론 10분."
"아무래도 트롤 스킬이 없어서 그렇지?"
"응, 맨주먹으론 한계가 있어. 2티어 스킬이 있어야 돼."
트롤의 스킬 중 하나인 발작적인힘.
그걸 얻으면 위기에 처했을 때 말도 안 되는 힘을 얻게 된다.
석현이 그걸 얻는다면 늑대인간을 맨손으로 목 졸라 죽일 수도 있을 것이다.
뭐 트롤이 등장하는 건 나중이지만.
나라면 글쎄···
맨손으로 대항하는 건 무리고 장비를 다 갖춰도 3,4분은 걸릴 것 같았다.
그래도 나름 성장해서 예전처럼 똥꼬쇼는 안 해도 되니까 다행이다.
몰려다니던 늑대들이 컹컹 요란하게 짖어댔다.
거 참 시끄럽구만.
나는 석현에게 제의했다.
"저거 잡자. 너 스킬 먹여줘야겠어."
"잡아본 적 있어?"
"있지, 차원문 안에서···쑈란 쑈는 다 해서 잡은 거긴 하지만."
"역시 성호 넌 강해. 내가 신경 쓰지 않아도 되겠어."
"그럼 저거 부른다."
내가 녀석을 부르려 하자 석현이 크게 고함을 질렀다.
"야! 이 개새끼들아아아! 개 짖는 소리 좀 안 나게 해라아아아!"
아니 여기서 이런 말을?
멀리서 늑대인간이 화답하듯 포효했다.
크어우우―
효과 확실하네.
석현이 나를 보며 씨익 웃었다.
"옛날처럼 신나게 싸워보자."
밤중에 체조 좀 해야겠군.
.
.
.
늑대인간의 등장으로 인해 경매장은 난리가 났다.
여기저기서 늑대인간을 잡았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하지만 그걸 진심으로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늑대인간 잡음ㅋㅋ스킬 쩌넼ㅋㅋ
―지랄하네 스킬 뭐 나왔는지 인증 가능?
―아무튼 잡았다고 병신아.
―원래 게임에서도 늑대인간 잡은 놈은 별로 없었는데 너 따위가?
―씨발 늑대인간 출현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구만 잡았다는 놈은 뭐야. 그 새끼세요?
―잡으면 뭐 주는지도 모르는 새끼가 장난하나.
―오크하고 같은 티어로 분류되긴 하지만 격이 달라요 늑대인간은···
―그쵸. 힘은 약간 딸리는데 엄청나게 빠름. 웬만한 사람은 움직이는 거 보지도 못하고 목이 날아갈걸요.
다들 늑대인간은 진짜 무섭다며 고개를 젓는 분위기였다.
서바이벌 라이프에서도 늑대인간부터는 협력해서 잡았다.
맞짱을 뜰 수 있는 건 소수의 유저뿐.
그리고 그 소수의 유저 중에서 정점에 오른 두 명이 늑대인간을 잡았다.
"젠장, 활어도 아니고 왜 이렇게 날뛰는 거야."
성호는 피에 절은 롱나이프를 털며 투덜거렸다.
몸빵은 석현이 댔고 자신은 딜을 담당했는데 이게 의외로 잘 먹혔다.
늑대인간은 엄청나게 날뛰다가 가슴에 볼트를 맞아 치명상을 입었고 결국 석현의 롱나이프에 목이 잘려나가는 최후를 맞았다.
"후우···"
석현은 스킬을 얻은 뒤 눈을 떴다.
19에서 올라갈 줄을 모르던 레벨이 드디어 20을 찍었다.
동시에 특성의 추가효과가 풀렸다.
「후유증단축」
30분씩이나 걸리던 부활을 줄여주는 아주 훌륭한 효과였다.
그는 자신의 가슴에 롱나이프를 들이댔다.
보고 있던 성호의 눈이 커졌다.
"자, 잠깐만, 지금 혹시···"
"금방 올 거야."
롱나이프가 석현의 심장을 찔렀다.
그는 그대로 쓰러졌고 성호는 멍하니 친구의 시신을 바라봤다.
분명 부활할 거라는 걸 알고 있지만 충격적인 장면이었다.
"허 참···"
잠시 후 시신이 빛에 휩싸여 사라졌다.
그리고 석현이 어딘가에서 헐레벌떡 뛰어왔다.
"몇 분 지났어?"
"···3분 정도. 근데 너 괜찮아?"
"괜찮아. 부활하면 할수록 필요 포인트가 늘어나는 거 빼면."
"그건 문젠데. 나중에는 포인트가 부족해서 부활 못하는 거 아냐?"
"잘 모아봐야지. 그건 그렇고 나 20렙이야."
"축하한다. 난 17렙에서 멈췄어."
석현의 눈이 붉게 빛났다.
"그 새끼 잡으면 레벨 오를 거야. 잡자."
"어?"
성호는 당황했다.
그 새끼라고 하니 마치 자기를 잡자는 말처럼 들렸던 것이다.
"내가 잡으면 스킬이 바뀌거든? 지형감지 대신 이상한 게 들어올지도 몰라."
그럼 스킬이 10개란 말 아닌가?
석현은 의아한 눈으로 성호를 바라봤다.
"스킬칸 꽉 찼어?"
"정확히 10개야. 친근감 같은 게 들어오면 나는 완전 손해 보는 거지."
게임에선 누구나 얻길 원하는 스킬이지만 현실에선 좀 다르다.
살인을 계속 해야 하는데 어지간히 강심장이 아니면 버티기조차 힘들다.
석현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그 새끼가···"
"잠깐만, 그 놈이라고 좀 해줘."
"하여튼 천연기념물이 나한테 말한 게 있거든. 자기 스킬이 10개라고. 그럼 확률은 1/10이잖아."
"그래?"
성호는 살인자의 스킬을 고작해야 4,5개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살인자 시스템이 개편된 모양.
그도 살인자 노릇을 해보긴 했지만 면벌부로 금방 풀어버려서 몰랐던 것이다.
확률이 10%라면 이야기는 좀 달라지지.
"좋아. 찾아보자."
둘은 의기투합해 천연기념물을 추적했다.
살인자라서 근처에만 가도 심장소리가 울리기 때문에 찾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낮은 빌딩에 올라가니 과연 심장소리가 들렸다.
"하필 데스매치 중이네···"
"부하들인지 뭔지 죽기는 싫은 모양인데?"
총 네 명이 좀비 벽에 갇혀 이리 뛰고 저리 구르고 있었다.
그들의 표정에선 공포감과 더불어 죽기 싫다는 결연한 의지가 엿보였다.
그리고 살인자는 유유히 그들을 쫓았다.
롱나이프도 아니고 세라믹 칼을 든 걸 보면 공포의 살인마 흉내를 내고 싶은가보다.
"김철성 이 개새끼! 살려준다고 했잖아!"
"마음이 바뀌었다. 너희들은 내 발판이 되어줘야겠어."
"지랄 발판 같은 소리하네!"
이름이 철성인가보다.
성호가 석현의 어깨를 툭 쳤다.
"우리가 잘하는 거 있지?"
"···난입해서 깽판치기?"
"정답. 철성이 저거 뒤통수나 치자고."
이미 풍뎅이들이 갈고리 하나를 더 만들어 둔 상태였다.
로프야 넘쳐나니 굳이 아까울 것도 없다.
석현은 로프를 이용해 단숨에 거리를 좁히곤 철성의 뒤통수를 발로 까버렸다.
스킬을 믿고 인지 스탯을 높이지 않은 게 그의 실수였다.
"크헉!"
날벼락을 맞은 철성이 앞으로 엎어졌다.
거의 동시에 성호가 공중에서 차원문을 열어 볼트를 쏴버렸다.
바닥을 박차고 일어서던 철성은 어깨를 비틀어 겨우 볼트를 피해냈다.
그의 앞에 성호와 석현이 착지했다.
철성은 둘의 붉은 눈을 보고 흠칫했다.
늑대인간의 투쟁본능 스킬을 활성화시키면 눈이 저렇게 된다.
"완전히 미친놈들이군···"
늑대인간이 언제 나타났는데 벌써 죽이고 스킬을 먹었단 말인가.
철성은 괜히 토공을 건드렸나 후회하기 시작했다.
< 미친놈이 너무 많음 - 2 > 끝
< 미친놈이 너무 많음 - 3 >
데스매치에 들어간 생존자들은 잠시 넋을 놓고 난입한 둘을 바라봤다.
그들은 둘이 미쳤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데스매치의 상대는 다름 아닌 철성이었기 때문이다.
최소 50명은 죽였다는 살인자.
창원에서 그를 거역할 사람은 없다고 봐도 좋다.
생존자 네 명은 후다닥 근처 사무실로 숨었다.
아직은 좀비 벽과의 거리가 있어 싸우는 소리가 명확히 들렸다.
"이봐, 협상하지. 여기서 우리가 싸워봐야 이득은 없어, 안 그런가?"
"이득이 없기는. 너는 죽고 우리는 스킬과 아이템을 얻는다. 개이득인데."
"포인트하고 레벨도."
"아 그렇지. 하여튼 철성씨는 우리한테 죽어줘야겠어. 지금까지 마음껏 살인했으니 아쉽진 않지?"
놀라운 일이었다.
보스인 철성이 협상을 시도하는 것도 모자라 그걸 거절하는 사람들이라니.
생존자들은 방금 들려온 대화가 헛것이 아닌지 서로를 쳐다보며 확인했다.
"제, 제가 잘못 들은 건 아니죠?"
"보스가 협상을 시도한 게 맞나 봐요···"
"보스는 무슨 얼어 죽을. 우리를 죽이려는 놈인데 보스가 뭡니까. 개새끼지."
"쉿, 조용히 좀 해봐요. 들어보게."
"흐흐흐···그래서 나를 죽이겠다는 건가? 너희들의 힘으로는 어려울 텐데."
"내 눈을 바라봐 넌 행복해지고."
"이 양반아 그게 아니라니까. 하여튼 우리 눈을 보면 알지 ? 무슨 스킬을 처먹고 왔는지."
"알다마다. 그새 투쟁본능 스킬을 얻고 왔군. 참 동작이 빨라."
"너를 두들겨 팰 때도 빠를 거다. 특히 이 아저씨는···"
"억!"
갑자기 퍽 하는 소리가 났다.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한 생존자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가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둘이 복도를 붕붕 날아다니고 있었다.
무슨 액션영화 찍나···?
확실한 건 압도적인 힘을 뽐내던 철성도 연신 밀린다는 점이었다.
"진짜 말도 안 돼···"
"뭔데요?"
"봐요. 둘이서 아주 찍어 누르고 있어요···"
"진짜다···"
둘은 정신없이 난입자들과 철성이 어우러진 액션영화를 구경했다.
또 한 명이 고개를 내밀고 어처구니없어 했다.
"저거 블링크죠? 공중에서 사라지는데?"
"에이, 말이 안 되는데요. 그거 연달아 쓰지는 못하잖아요. 머리 아프다던데."
"그러게요. 그럼 어떻게 움직이는 걸까요?"
"저기요, 지금 우리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빨리 도망가야죠."
"사방이 다 좀빈데 어떻게 도망갑니까···그냥 숨어 있을 수밖에 없어요."
"혹시 저 사람들이 김철성이를 죽인다면 또 모르죠."
꿀꺽.
이제 네 명의 생존자들은 난입자 둘을 열렬히 응원하는 처지가 되었다.
물론 들키면 안 되니까 마음속으로.
현실에서 그런 소동이 벌어지는 동안.
숲의 쉘터에선 딩고와 풍뎅이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영차영차.
대장 풍뎅이의 지시 하에 세 마리의 풍뎅이들이 레버를 돌렸다.
스탠드에 얹힌 발리스타가 끼기긱 소리를 내며 돌아갔다.
방향 전환 완료!
이제 딩고의 차례다.
녀석은 끈을 물고 반대쪽으로 열심히 뛰어가기 시작했다.
성인 남자도 버티기 힘든 딩고의 힘에 발리스타의 활대가 크게 휘어졌다.
와이어가 멈춤쇠에 닿자 달칵, 소리를 내며 고정되었다.
밑에서 풍뎅이 두 마리가 볼트를 휙 던지자 대장이 그걸 받아 레일에 놓았다.
사격 준비 끝!
이제 주인의 신호가 들어오면 대장 풍뎅이가 멈춤쇠를 뽑게 된다.
하지만 이번에는 신호가 조금 달랐다.
허공에 누군가의 손이 나타나 주먹을 꽉 쥔 것이다.
묵직한 것을 준비하라는 신호다.
풍뎅이들이 즉시 폭약을 대장에게 던졌다.
이 폭약은 풍뎅이들이 폭죽과 점화석, 흑탄의 배합비를 조절해 만들었다.
폭발력 자체는 대단하지 않지만 지근거리에서 터지면 아픈 선에서 끝나지는 않는다.
그리폰 이후 주인이 볼트로는 파괴력이 부족하다고 하자 풍뎅이들이 고심해서 만들어준 것이다.
대가는 황제꿀 탐색.
풍뎅이들이 원하는 꿈의 식량인데 봄이 오면 찾으러 가기로 했다.
대장 풍뎅이가 폭약을 볼트에 단단히 고정시켰다.
장착 완료!
발사 신호는 과연 언제쯤 나올까?
긴장된 시간이 흘렀고 드디어 주인의 손이 나타나 핑거 스냅을 시전했다.
대장 풍뎅이는 바로 멈춤쇠를 뽑았다.
활대가 펴지며 볼트가 순식간에 차원문 밖으로 사라졌다.
.
.
.
강해졌다.
확실히 이놈들, 강해졌다.
철성은 돌격해오는 토공의 롱나이프를 용을 쓰며 막아냈다.
인간을 초월한 힘에 롱나이프의 날이 쩌저적 균열이 갔다.
카카칵!
토공과 힘겨루기에 들어갔지만 이제 그는 힘으로도 자신에게 밀리지 않았다.
붉은 눈이 선명하게 그를 직시했고 철성은 힘겹게 웃었다.
"이렇게나 강해져서 돌아오다니···"
"보스를 앞에 두고 레벨 업은 필수거든."
"보스라 칭해줘서 고맙군···분명 최종보스겠지?"
"아니, 중간보스. 난이도가 좀 있는 게임이라서."
"하하···"
철성은 온 몸에 힘을 주어 토공을 밀어냈다.
그의 이마에 주름이 새겨지더니 팔이 조금씩 밀려났다.
그리고 압력을 버티지 못한 롱나이프 두 개가 동시에 콰직 부서졌다.
"엇!"
잠시나마 균형을 잃은 철성과 그걸 기다리고 있었던 토공.
승부는 명백했다.
그 좁은 공간에서 토공이 뛰어올라 무릎으로 철성의 턱을 가격했다.
뻑!
불길한 소리가 나며 철성의 몸이 뒤로 튕겨졌다.
토공은 반동을 이용해 물러섰고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은 갑자기 나타난 성호였다.
에메라스 비도 몇 개가 뿌려졌다.
"크억!"
날카로운 칼날이 사정없이 몸을 쑤시고 들어오자 천하의 살인자도 속절없이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그는 균형을 잡지도 못하고 나뒹굴었고 롱나이프를 받은 토공이 달려들었다.
완전히 잘못 걸렸구나!
철성은 롱나이프의 손잡이 부분으로 공격을 막아냈다.
제대로 방어가 되는 것도 아니라서 두 번째 공격에 손잡이가 분해되었다.
다음은 육신으로 칼날을 막아내는 것뿐이었다.
스펙이 비슷하다면 칼을 든 놈이 이기는 당연한 이치였다.
"큭!"
"억!"
철성은 연신 비명을 지르며 물러났다.
너무 많이 베여서 전신이 피로 물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눈은 전의를 잃지 않았다.
"그래, 그래야 놀 만하지."
성호가 바닥에 착지하며 말하자 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마지막으로 물어보자, 너 김밥조아냐?"
성호는 생존자들과의 거리를 떠올렸다.
낮은 목소리라 들리지는 않겠지만 대화를 오래 끌면 위험하다.
그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마음대로 생각해."
"맞는 모양이군···고인물 둘과 데스매치를 벌여서 죽으면 억울하진 않지···"
"그런 것치곤 눈깔이 선명한데? 뭐 숨기고 있는 모양이지?"
"개편된 살인자 스킬일거야, 아마."
둘 다 고인물이라서 눈치가 장난이 아니다.
철성에겐 죽음극복이라는 스킬이 있다.
치명상을 입으면 잠시 죽음에서 벗어나 최대한의 힘을 발휘하게끔 해주는 스킬이다.
페널티도 엄청나서 상대를 죽이지 못하면 이쪽이 끔찍한 피해를 입는다.
그래서 볼트에 꿰뚫릴 때에도 쓰지 않았던 것인데···
'여기서 써야겠어···'
그가 강해지는 것보다 이놈들이 강해지는 속도가 더 빨랐다.
철성은 다음을 기약할 수 없었다.
반드시, 여기에서, 둘 다, 죽여야 한다.
그나저나 너무 숨을 고르는군.
아니면 자신감의 표현인가?
둘은 철성이 상처를 회복할 때까지 숨을 몰아쉬고만 있었다.
김밥조아가 주먹을 꽉 쥐는 건 무슨 뜻이지?
이제 좀비의 벽이 사람들을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철성의 시야가 적외선 모드 비슷하게 변했다.
그는 시간을 주는 둘을 이해할 수 없었다.
뭐···고마울 따름이다.
"···하하···고맙다. 덕분에 시간을 벌었어. 이제 죽어라."
"너무 식상해. 첫판보스로 강등."
토공이 실망한 듯 말했고 철성은 눈을 부릅떴다.
"마음대로 생각해라!"
그가 달려들자 둘은 좌우로 공간을 넓혔다.
빌어먹을 볼트를 또 쏘겠다는 거겠지?
철성은 허공 어디에서 튀어나오는지도 대강 짐작하고 있었다.
치명상이 될 정도만 맞아주고 죽음극복 스킬을 활성화시킨다면 이쪽의 승리다!
마침내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철성은 배를 내주며 승리를 확신했다.
그런데···
펑!
믿기지 않는 소리가 났다.
"···"
철성은 너덜너덜해진 배를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허공에서 튀어나온 볼트가 그의 배를 꿰뚫곤 그대로 폭발했다.
큰 폭발은 아니었지만 피와 살로 이뤄진 육체를 날려버리는 데에는 충분했다.
덕분에 그의 배가 반이나 날아갔다.
죽음극복 스킬이 활성화됐지만 몸이 명령을 거부했다.
"하하···컥···"
급기야 입에서 핏물이 왈칵 올라왔다.
그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롱나이프를 휘두르는 김밥조아의 모습이었다.
"너 끝까지 힘을···"
"그래야 잘 살거든."
스걱.
철성의 머리가 허공으로 떠올랐다.
몇 개의 메시지가 성호의 시야에 나타났다.
「레벨이 18로 올랐습니다」
「포인트를 600 획득했습니다」
「스킬 : 단호한일격을 획득했습니다」
아이템도 하나 나온 것 같았지만 돌아볼 새도 없다.
둘은 재빨리 움직여 좀비의 벽을 뚫었다.
남은 생존자도 자연스레 뒤를 따랐다.
하지만 뱁새가 황새의 뒤를 쫓다간 가랑이가 찢어지는 법이다.
넷 중 둘이 구울에게 붙잡혀 처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하지만 누구도 돌아보지 않았다.
.
.
.
우리는 근처 오피스텔에 도망쳐 숨을 골랐다.
작전이 그렇게나 잘 먹혀들 줄은 몰랐다.
풍뎅이들이 폭약을 만들어 준 덕분이다.
석현이 머리를 흔들었다.
"마지막에 하려던 건 뭐였을까?"
"몸 대주고 스킬을 활성화시키려고 했을 거야. 정면을 피하더라."
"내장만 안 다치면 해볼 만하다 이건가?"
"근데 볼트가 폭발할 줄은 몰랐겠지."
나도 위력이 그렇게 절륜할 줄은 몰랐다.
지근거리에서 터지니 철성의 단단한 몸도 버티지 못한 모양이다.
대신 풍뎅이들에게 꿀을 찾아줘야 하지만 그쯤이야 나들이 치지 뭐.
나는 배낭에서 물건을 꺼냈다.
재주+2 장갑이 업그레이드 되어 쓰리스탯 아이템으로 변신했다.
「장갑 : 근력+2, 인지+2 재주+2 착용시 스킬 : 치명적인일격 자동적용」
석현이 쪼그려 앉아 장갑을 만져보곤 감탄했다.
"이거 완전 미친 아이템이네."
"왜, 갖고 싶어?"
"아니. 이건 니 거야. 그나저나 스킬은 단호한일격을 얻었다고 했지?"
"어."
"그거 중첩되면 위력이 장난 아니겠는데."
"그러게···나도 중첩은 처음인데."
단호한일격은 시전자의 모든 공격에 묵직함을 더해준다.
맞는 사람은 마치 망치로 두들겨 맞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상당한 맷집을 가진 석현이 철성에게 두들겨 맞고 정신을 차리지 못한 것도 이 스킬 때문이다.
치명적인일격의 효과는 조금 다른데, 부수적인 타격을 입힌다.
예를 들면 주먹으로 머리를 때리면 상대가 현기증을 느끼거나 하는 식.
석현은 두 스킬을 중첩하면 어떤 효과가 나오는지 궁금한 모양이었다.
일어서더니 자기 볼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장갑 끼고 나 때려봐. 있는 힘껏."
"에이, 그건 좀···"
"안 죽는다니까. 내 맷집 알잖아? 첫판보스가 박치기를 해도 멀쩡했어."
"다리 후들거리는 거 봤거든?"
"넌 너무 많은 걸 봤어···"
석현은 장난삼아 내 멱살을 잡았다.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한 대 때려주지 뭐.
내가 장갑을 집자 그는 자세를 잡고 진중하게 말했다.
"절대 봐주지 말고 있는 힘껏 치는 거야. 투쟁본능도 활성화시키고."
"그건 안 되겠다. 너를 죽이고 싶다는 생각이 안 떠올라."
"쳇, 어쩔 수 없지. 하여튼 내 마음에 안 들면 다시 때리라고 할 거야."
어째 선후가 바뀐 것 같은데···
장갑을 끼자 기척없는움직임이 비활성화 되고 치명적인일격이 나타났다.
착용이라는 조건이 붙은 스킬이라 이렇게 된다.
나는 있는 힘껏 석현의 얼굴을 후려쳤다.
퍽!
그는 반대쪽 벽에 부딪쳐 축 늘어졌다.
너무 세게 쳤나?
급히 달려가 부축하자 그가 손을 파르르 떨었다.
"미, 미안. 아프지?"
석현이 엄지를 척 들어올렸다.
"효과 짱."
그러냐.
< 미친놈이 너무 많음 - 3 > 끝
< 미친놈이 너무 많음 - 4 >
정부 쉘터의 사람들은 식당에서 식사를 하게 되어 있다.
조직이 체계화되었기에 식사시간도 정해져 있었고 메뉴도 동일했다.
그러니까 전직 대통령이든 누구든 같은 메뉴를 받는다는 것이다.
쉘터의 식량사정이 그리 좋지는 않기에 어쩔 수 없는 조치였다.
당연히 막 쉘터에 들어온 다정도 같은 메뉴를 받았다.
그녀는 플라스틱 식판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무발효빵에 스프와 감자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거 어제도 먹었는데···
주위를 둘러보자 모두 배가 고팠는지 허겁지겁 빵과 감자를 뜯어먹고 있었다.
그 모습에 다정은 입맛이 뚝 떨어져 포크를 내려놓았다.
"하아···꼴이 이게 뭐야."
그녀가 처음 여기 왔을 때에 대통령의 측근이라는 이범석이 식사에 대해 기대하지 말라고 언급한 적이 있었다.
정부 쉘터니까 풍족하겠거니 생각했는데 이게 웬걸, 형편없다는 말도 부족했다.
쉘터에서 식사메뉴를 짜는 꼬라지를 보자면 이렇다.
15일에 야채비빔밥, 빵과 스프와 감자, 카레밥이 나왔다면.
16일엔 카레밥, 야채비빔밥, 빵과 스프, 감자가 나오는 식이다.
그러니까 메뉴가 위치를 바꿀 뿐이었다.
이게 며칠 동안 지속되었고 몇 명이 항의를 하면 그제야 새로운 메뉴가 나왔다.
사실 여기엔 복잡한 사정이 있지만 다정은 거기까지 생각하지 않았다.
"부탁이고 나발이고 같이 있을 걸 그랬어어어!"
그녀가 갑자기 꽥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주위 사람들이 다 쳐다봤다.
다정은 화를 식히며 빵을 질겅질겅 씹었다.
정말 아무 맛도 나지 않았다.
뭐든 부족하니 빵을 만들었다는 것만으로도 기특하지만 그녀는 억울할 따름이었다.
성호와 같이 있으면 진수성찬을 즐길 수 있는데!
그게 아니어도 경매장을 통해 음식을 받을 수 있지만 그가 도통 접속하지 않았다.
토공과 함께 창원에서 천연기념물 살인자를 상대하고 있다는 것까진 들었는데 그 후로는 감감무소식이다.
"오기만 해봐 그냥. 아주 쫙쫙 빨아먹어 줄 테니까."
두 번째로 화를 식히는데 한 남자가 앞자리에 앉았다.
배검인이었다.
그는 분위기 파악도 못하고 싱글벙글 웃는 얼굴이었다.
"오늘 메뉴는 괜찮지? 내가 주방장에게 부탁해서 감자에 설탕을 쳤거든. 맛있을 거야."
"···"
다정은 말없이 그를 노려봤고 검인은 당황했다.
아침부터 왜 저기압이지?
둘은 머리를 숙이고 식사를 했다.
빵과 감자를 죽여 버릴 기세로 씹고 있는 다정에 비해 검인은 꽤 즐기는 표정.
중뿔이 난 다정이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그거 맛있어?"
"이거? 사실 별로 맛은 없어."
"표정은 그게 아닌데?"
"그야 어쩔 수 없거든. 수십 명이 모인 이런 쉘터에선 식사의 질을 기대할 순 없어. 굶지만 않아도 다행이지."
뜻밖의 대답에 다정은 눈을 살짝 떴다.
찌질한 검인에게 이런 면이 있었나.
그는 플라스틱 포크를 휘휘 움직이며 설명했다.
"애초 정부 쉘터는 30명이 정원이야. 그런데 지금은 50명이 넘어. 계속 사람이 들어오거든. 이것도 내가 홍보를 한 덕분이지만."
잘 나가다가 꼭 자기자랑을 덧붙여서 초를 치는 게 이 남자의 단점이다.
다정은 배알이 꼴렸지만 일단은 들어보기로 했다.
"그래서?"
"당초 계획했던 수용인원을 넘어선다는 거, 이거 무서운 거야. 그래서 급양담당은 보수적으로 메뉴를 짤 수밖에 없어. 부족하게 주느니 질을 떨어트리는 걸 택한 거지."
"흠흠, 그런 거구나."
그녀가 잘 들어주자 검인은 신이 났다.
평소에는 말을 붙이기가 힘들 정도로 날이 서 있었는데 오늘은 좀 달랐다.
뭔가 좀 부드러운 느낌?
지금이라면 점수도 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넌지시 주의를 주었다.
"주승철인가 하는 사람, 만났지? 아마 지금쯤은 너한테도 제의를 했을 거야. 맛있는 식사를 제공해주겠다고."
"그런 말은 없었는데?"
재벌 3세인 승철과는 단지 만나서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눴을 뿐이었다.
그에게서 대현그룹이 이 쉘터를 맡아 공사했다는 것도 처음 들었다.
검인은 상체를 낮추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직은 신뢰를 주지 못했다고 판단했나보네. 하여튼 조심해. 그 아저씨, 자기 쉘터로 가자고 할 거야."
"왜? 내 다리 벌리고 싶어서?"
직설적인 말에 검인은 당황했지만 간신히 말을 이어나갔다.
"호, 호감을 사는 거지. 거기 식량이 잔뜩 쌓여 있다는 소문이 있어. 어디에 있는지도 파악이 되진 않았지만 나오는 얘기가 그래."
"뭐야. 그럼 부자네. 부자가 대접하겠다는데 왜 거절해야 돼?"
"그, 소문이···"
검인은 이걸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이는 표정이었다.
이럴 땐 조금 애를 타게 하면 확 넘어오게 되어 있다.
다정은 그와 며칠 동안 지내봐서 어떤 성격인지 대강 파악하고 있었다.
"훤칠하고 마스크 괜찮잖아? 부자이기까지 하니 애인삼아 지내면 딱이네."
이렇게까지 말하니 검인은 속이 탔다.
그래서 꼭꼭 숨기고 있던 것을 발설하고 말았다.
"너 그거 모르는구나. 그 아저씨 소유의 회사가 서바이벌 라이프 제작사에 투자했다는 거."
"···진짜야?"
"그래. 이건 대통령하고 범석씨, 그리고 나밖에 모르는 정보야. 쉽게 말하면 승철이란 남자는 이 사태에 대해서 뭔가를 알고 있다는 거지. 아직까진 추측이긴 하지만."
오호라.
뜻밖에 좋은 정보를 얻었다.
다정은 히죽 웃었다.
"그렇게 말하니 승철씨 쉘터에 더 가보고 싶은데? 뭔가 신기한 게 잔뜩 있지 않을까?"
"위, 위험한데···"
"검인아."
검인은 깜짝 놀랐다.
이름을 불린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매일 아저씨, 남자로밖에 불리지 않았는데.
심지어 다정은 길게 뺀 의자를 바짝 당겨 앉기까지 했다.
덕분에 둘의 거리가 약간 가까워졌다.
"어, 그래. 뭐든지 말해."
"우리, 손을 잡을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는 크게 감격했다.
"손, 손 잡아야지. 잡아야 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고. 앞으로 강한 몬스터가 쏟아져 나오는데 우리가 도우면서 살아야지···"
"그러니까 날 밀어."
"어?"
갑자기 무슨 소리지?
다정과의 달콤한 생활을 그리고 있던 검인은 꿈에서 깨어났다.
그녀가 가슴을 팡팡 쳤다.
"내가 왕 할 테니까 지원하라고."
검인은 충격을 받아 입만 뻐끔뻐끔했다.
이 여자 제정신인가.
.
.
.
편한 곳에 있다 보면 나태해진다.
이건 돝섬 사람들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성호가 떠난 뒤, 형준과 수연을 위시한 어른들은 편하게 지내되 긴장의 끈을 놓지는 말자고 제의했다.
언제 싸울지 모르니 최소한의 전투력을 갖춰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처음에는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늑대인간 출현을 대비해 그물과 창을 만들고, 협동해 물리치는 훈련을 치렀다.
미경의 도움을 받아 육지에서 사냥하는 것은 물론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사냥과 훈련에 열중하는 사람이 줄었다.
돝섬이 워낙 풍족하고 편해서였다.
성호가 워낙 파밍을 잘 해놔서 최소 몇 개월은 버틸 수 있는 물자가 쌓였다.
또 지만이가 있으니 굶을 일이 없었다.
텃밭에선 채소가 쑥쑥 자랐고 날 잡고 민장대라도 드리우는 날에는 멤버 전원이 생선 파티를 벌일 수 있을 정도.
워낙 잘 먹고 지내다 보니 다들 살이 통통하게 올랐다.
형준은 큰형이자 리더로서 멤버들에게 잔소리를 하기도 했지만 섬이 워낙 조용하다 보니 겸연쩍어 했다.
마침내 나타난 늑대인간조차 물은 꺼려했으니 말이다.
간혹 섬에 리젠되는 몬스터가 있었으나 멤버들도 약한 게 아니라서 쉽게 물리쳤다.
육지는 좀비를 비롯한 온갖 몬스터로 난리법석인데 돝섬만은 태평성대였다.
그리고 두 명.
지만과 미경은 이런 상황에서도 사냥에 열중했다.
미경의 도움을 받아 사냥터를 옮겨 연신 화살을 튕겨댔다.
둘의 손에는 성호가 두고 간 60파운드 활이 쥐어져 있었다.
블링크란 특성이 도망에 워낙 좋다 보니 둘은 어떤 위험에도 처하지 않았다.
물론 공격에서 어떠한 보너스도 없이 싸우다보니 레벨 업이 느리단 단점은 있다.
하지만 둘은 그것도 감내하고 좀비와 고블린만 계속 잡았다.
다른 몬스터는 위험해서 건드릴 엄두가 나지 않았기 때문.
오크가 그들을 발견하고 달려들었다.
"튀자, 걸렸어!"
미경은 급히 지만이의 어깨를 짚곤 블링크를 시전했다.
둘은 근처의 낮은 빌딩으로 이동해 숨을 골랐다.
화가 난 오크가 제자리에서 쿵쿵 뛰며 부하 고블린들을 닥달하는 게 보였다.
"휴우···여기서 좀 쉬자."
"응. 오늘 너무 열심히 했어."
미경은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깨진 창문 너머로 돝섬을 바라봤다.
지금쯤 다른 사람들은 무를 캐고 있겠지···
어떤 이는 낚시도 하겠고, 다들 생존활동에 여념이 없었다.
하지만 미경은 사냥에 열중해야 했다.
왜냐면···
지만이 잠시 허공을 바라보더니 밝은 얼굴이 되었다.
"누나 나 8레벨이야."
"우와, 엄청 올랐네. 조금만 더하면 10레벨 되겠다."
"그치? 나 10레벨 되면 진짜 돌고래 탈 수 있을지도 몰라."
"오오, 돌고래 오오."
둘이 사냥에 열중하는 이유는 같았다.
언젠가 성호와 다시 만나면 내가 이렇게 열심히 했고 성장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미경은 그런 느낌을 받았다.
성호가 그녀에게 뭔가를 숨기고 있는 이유는 약하기 때문이라고.
보호의 대상이라 여기기 때문에 말을 하지 않는 거라고.
지만이 사냥하는 이유도 비슷했다.
언젠가 만날 때를 대비해 힘을 길러두고 싶었다.
다른 사람도 그렇지만, 생물친화라는 특성은 추가효과가 매우 중요했다.
빨리 10, 15레벨을 찍어서 추가효과를 개방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둘은 며칠 동안 사냥해 레벨을 올렸고 마침내 각각 13, 10레벨을 달성했다.
그리고 미경은 기가 막힌 광경을 보게 되었다.
"우와···"
지만이 마산 앞바다에서 뭔가를 타고 돌아다니고 있었다.
뭔가 했는데 등지느러미를 보니 상어였다.
그녀는 돝섬으로 이동해 사람들을 불렀다.
다들 주위 바다에 상어가 돌아다니는 걸 보곤 경악했다.
"아니 쟤 위험한 거 아니야?"
"지만이 특성이 생물친화잖아요. 설마 위험하겠어요?"
"근데 되게 친해 보이는데···"
"형 이쪽으로 손 흔드는데요?"
돝섬 주위로 상어들이 몰려들었다.
녀석들은 마치 지만을 호위하듯 뭉쳐서 주변을 돌아다녔다.
지만이는 마치 상어들을 아기 다루듯 했다.
등을 탁탁 두드리고 방향을 지시하니 돝섬까지 헤엄쳐 와서 내려주는 게 아닌가.
상어들이 단체로 그를 배웅하는 것은 정말 꿈에서나 볼 법 한 장면이었다.
이제 상어들은 교대로 돝섬 주위를 헤엄쳐 다니면서 방어 태세를 갖췄다.
몬스터가 바다에 나오기라도 하면 물어뜯어버릴 기세였다.
돝섬은 더욱 안전해졌고 지만이는 더 강해졌다.
그리고 그 때까지 태평하게 지내던 사람들도 레벨 업에 대한 욕구를 느꼈다.
전투와 전혀 관련이 없는 특성인 지만이도 저렇게 열심히 하는데 말이다.
그리하여 돝섬 멤버들 사이에 사냥 경쟁이 붙었다.
미경은 그들을 하나씩 육지로 데려다 주느라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하지만 불평은 하지 않았다.
언젠가 그를 다시 만났을 때 보여줄 게 많아졌다는 생각에.
.
.
.
나는 철성과의 데스매치에서 살아남은 사람 둘을 찾았다.
철성과의 대화를 들었을 가능성이 있기에 이대로 보내선 안 되었다.
최소 확인은 해야 했다.
석현과 함께 주변을 뒤지니 과연 그들은 상가 건물에 숨어 있었다.
나는 혼자 건물에 침투해 차원문에 숨었다.
소리가 나자 한 명이 밖으로 나왔지만 아무도 없는 걸 보곤 안심하고 돌아갔다.
"있잖아···그 사람들한테 붙는 게 좋지 않을까? 보스를 죽일 정도면···"
"그런 사람들이 우리를 필요로 하겠어? 거추장스럽다고 죽이지 않으면 다행이지."
"그렇게 잔인한 사람들은 아닌 것 같던데···"
"하나는 토공이잖아. 맨날 팬티만 입고 다니는 놈."
"덩치가?"
"아니 모자 쓰고 있던 남자."
나는 모르는군.
이로서 저들을 죽여야 할 필요성은 사라졌다.
토공이야 원체 유명인사니까···
나는 그들의 대화에서 창원 클랜의 위치까지 대강 알아낼 수 있었다.
"전에 들었는데 여기, 광장 이마트 옆에 아지트가 있댔어. 나중에 털자."
"거기를? 위험하지 않을까?"
"보스가 죽었잖아. 나머지는 다들 고만고만하다고. 아지트 물자는 먼저 먹는 놈이 임자야."
당연한 말이다.
나는 그들이 대화를 마치고 다른 곳에 간 틈을 타 재빨리 차원문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석현에게 돌아가 이 말을 전했다.
"거기 털어야겠네. 차원문 안에 집어넣을 수 있지?"
"이번 물자는 집어넣을 수 있지만 다음에는 확장 공사를 해야 돼."
"그럼 올라가기 전에 확장공사를 하자."
"내가 안에 들어가 있어야 되는데···넌 뭐 하게?"
그는 주먹을 들어보였다.
"다 벗고 늑대인간하고 다이뜨게."
역시 이 양반은 인간임을 포기했다.
포인트는 충분하다니 말릴 필요까진 없겠지.
자기가 싸우고 싶다는데.
나는 석현과 함께 중앙동 이마트로 달렸다.
근처는 상가와 모텔, 원룸 등의 밀집구역이었다.
야시시한 모텔에 들어서자 과연, 물자가 가득 쌓여 있는 게 보였다.
아직까지 사람은 없고···좋아.
내가 벽에 차원문을 열자 석현이 손으로 밀어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이거 열린 거 맞아? 그냥 벽인데?"
"내가 작업할 테니 놀고 있으면 돼."
다리를 쑥 밀어 넣자 석현이 아, 하고 자기 머리를 두드렸다.
이제 좀 익숙해질 때도 됐는데.
이윽고 쉘터에 물자가 차곡차곡 쌓였다.
한 시간 동안 쉬지도 않고 작업했지만 나는 지치지 않았다.
꽤 성장했구나.
모든 물자를 집어넣고 나니 등에 가볍게 땀이 솟은 정도였다.
나는 쉘터에서 시원한 콜라를 꺼내 석현에게 던졌다.
"안은 아직 춥나 보네."
"계절이 반대인 것 같더라고."
"크···시원하다. 이런 맛에 사는 거지."
우리는 안전한 곳으로 장소를 옮겨 다음 목적지를 정했다.
"여기···대구를 거쳐서 봉화군에 가야 돼. 씨드볼트가 있거든."
"씨드볼트?"
"종자 창고야. 전기는 나갔겠지만 건질 건 좀 있겠지."
돝섬 멤버들에게 핑계로 댄 거긴 하지만 종자가 필요하긴 했다.
아시아 최대의 씨드볼트라고 하니 엄청난 양이 보관되어 있을 것이다.
석현은 그게 왜 필요한지 궁금해 하다가 불쌍맨을 대니 깜짝 놀랐다.
"그 사람도 만났어?"
"내가 마산에 모셔다놨지. 특성이 생물친화였는데 그게 뭐냐면···"
자세히 설명해주자 석현이 무릎을 탁 쳤다.
"대박이네."
"진짜 대박이지. 낚싯대 던지는 대로 물고 올라오더라니까. 통발엔 광어가 꽉 차고."
"그러면 딩고하고 쉽게 친해질 수 있잖아."
"···뭐, 그렇지."
딩고는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을 경계한다.
정확하게 말하면 친근하게 굴지 않는 쪽에 가깝지만.
석현도 예외는 아니라서 그가 쓰다듬으려고 하면 몸을 비틀어 도망가곤 했다.
마침 딩고가 1층에서 올라와 우리를 빤히 바라봤다.
석현은 녀석에게 점프해 덥석 붙잡았다.
"그러면 문다니까."
진짜 물었는지 석현은 인상을 찌푸렸다.
거기까진 좋았는데 그가 딩고의 엉덩이를 무는 게 아닌가.
깨갱!
딩고가 깜짝 놀라 몸부림을 쳤고 둘은 데굴데굴 뒹굴었다.
"니가 무니까 나도 무는 거야! 크르릉!"
이제 인간임을 포기하는 것도 모자라 늑대까지 내려가기로 한 모양이다.
나는 차원문 안에 들어가 미니 포크레인의 시동을 걸었다.
확장 공사를 한 뒤 씨드볼트를 거쳐 서울로 올라갈 참이었다.
긴 여정이 되겠구만.
< 미친놈이 너무 많음 - 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