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죽음은 모든 문제를 해결한다 >
불쌍맨은 내 방송의 시청자 중 하나였다.
다른 사람들이 잘 들어오지 않을 때에도 그는 매번 내 방송을 시청했다.
언젠가는 혼자 방송을 시청하기도 해서 사람들은 그를 충신이라고 불렀다.
그는 방송을 시청할 때마다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힘들게 아르바이트를 했다고 너스레를 떨어서 사람들이 은근히 기대를 하기도 했다.
이번에는 무슨 아르바이트를 꺼낼까.
나는 불쌍맨이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했을 때마다 웃어넘겼다.
방송 시청할 여력이 있으니 후원도 하는 거겠지···하고 말이다.
"···"
나는 좀비 사태 이후로 그를 잊어버렸다.
그가 살아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그를 다시 만났다.
정확히는 그가 살아있다고 주장하는 놈들의 말을 들었다.
놈들은 불쌍맨의 특성을 탐내 감금하고, 착취했다.
그가 도망치자 돌봐준 거라고 둘러대고는 이제 찾으려 하고 있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오랜만에 열이 확 오르네."
나는 손바닥으로 뺨을 세게 두들겼다.
정신이 번쩍 들면서 눈에 핏발이 섰다.
이름이 지만이라고 했나?
"이번에 붙잡히면 험한 꼴을 당할 거야···"
징징이 5호가 수차례 말했다.
불쌍맨이 자신의 뒤통수를 치고 튀었다고.
그게 사실이건 아니건 상관없다.
확실한 것은 둘의 사이는 험악하며.
이번에 불쌍맨이 잡히면 절대 멀쩡하진 않으리란 것이다.
"스스로 집착이 심하다고 말했었지?"
징징이 5호는 남의 다리 하나는 부러뜨리고도 남을 인간이다.
내가 할 일이 정해졌다.
대화하는 건 불가능하니 힘으로 부딪쳐야 한다.
"친구들 미안. 이건 여기서 써야겠어."
슬롯에서 면벌부를 꺼내 손에 쥐었다.
모든 살인 기록을 삭제하는 아이템.
이것만 있으면 부작용 없이 살인을 저지를 수 있다.
죄책감?
나는 이미 사람을 여럿 죽였다.
시스템적으로 살인이 아닐 뿐이지 명백한 살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책감 따윈 느끼지 못했다.
죽이지 않았으면 내가 죽었을 테니.
누군가 이런 말을 했다.
죽음은 모든 문제를 해결한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면 죽음이 부족한 거라고.
최소한 아포칼립스에선 맞는 말이다.
"전부 죽여주마."
.
.
.
"야야, 저쪽으로 몰아!"
"도망간다!"
엄지만을 쫓는 종사모의 회원들은 반쯤 사냥꾼에 빙의해 있었다.
재미있지 않은가 말이다.
사냥감은 제대로 된 공격수단도 없는 토끼나 마찬가지였다.
그에 반해 이쪽은 온갖 공격용 특성과 무기로 무장했다.
인원도 4,5명이나 되어서 그를 궁지에 모는데 충분했다.
"골목으로 도망간다!"
"앞은 막지 마!"
이 사냥에서 중요한 포인트는 그들의 리더인 홍기섭의 가학심을 만족시키는 것이었다.
엄지만은 분명 그들의 뒤통수를 치고 달아났으니 대가를 받아야 했다.
그 대가를 받아내는 것은 리더인 홍기섭이어야 했다.
그는 블링크 능력자인 종수를 통해 몰기만 하고 잡지는 않도록 지시했다.
자신이 직접 잡겠다는 거다.
사람들은 기섭이 지만의 멱살을 잡고 두들겨 패는 장면을 상상하곤 실실 웃었다.
그들도 원래 악독한 심성의 소유자는 아니었다.
종사모라는 공동체에서 지내다 보니 폭력이 당연한 거라고 인식하게 된 것이다.
법도 도덕도 그들을 막을 공권력도 없다.
무제한의 자유가 통용되는 아포칼립스에서 인간 심리의 밑바닥에 잠자고 있던 가학증이 대두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지만을 불쌍하게 여기는 사람이 없는 건 아니었다.
특히 여자들이 그랬다.
하지만 그들도 기섭의 논리에 세뇌되었다.
―우리가 이렇게 보호하고 먹여 살리는데 도망을 가? 이건 배신이라고, 배신.
다들 머리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기섭의 말에 반대하지 못했다.
공동체를 배신하는 놈은 용서할 수 없다는 기저심리가 그들에게 깔려 있을지도 모른다.
···하여튼.
지만은 종사모 회원들에게 붙잡히지 않기 위해 열심히 도망가고 있었다.
배낭도 벗어던진 채였다.
그의 체력은 보통 이상이었지만 불행히도 추격해오는 인원이 많았다.
또한 블링크 능력자도 있어서 도망가는 게 쉽지 않았다.
지만은 좁은 골목길을 뛰다가 갑자기 나타난 마른 체형의 남자를 보곤 기겁했다.
"헉!"
"소용없다니까 그러네. 우리 형님 힘 빠지게 하면 더 맞는다고."
"···"
슬금슬금 뒷걸음치는 지만.
종수가 혀를 찼다.
"포기 좀 하자. 형님도 어? 그렇게 심하게 대하지는 않을 거야. 기껏해야 다리에 깁스하는 정도겠지."
"그건 다리를 부러뜨리겠다는 말이잖아요."
울컥한 지만이 외치자 그가 짜증을 냈다.
"니가 도망을 못 가게 하려면 그 수밖에 없잖냐? 그렇게 보호해줬는데, 우릴 배신해?"
"배신한 적 없어요."
"왜 없어? 우리 공동체는 하나야. 가족이라고. 가족 허락도 없이 가출이 말이 돼?"
"저는 당신들을 가족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어요."
지만이 목소리를 높였고 종수는 그에게 다가서며 고개를 저었다.
"기섭이 형이 니가 그럴 거라고 하더라. 붙잡아서 얘기하면 나아질 거라던데···야."
그가 그러고 있는 동안 지만은 벌써 담장을 넘어 한 주택으로 도망친 상태였다.
잽싸기도 하지.
하지만 거기엔 무서운 사람이 기다리고 있는데.
골목을 벗어나 주택의 정원으로 들어간 종수는 웃고 말았다.
지만이 기섭에게 잡혀 있었기 때문.
"우리 오랜만이다, 그지?"
"으···"
성호에겐 징징이 5호로 통하는 기섭은 지만의 멱살을 잡고 들어올렸다.
그리고 종수에게 말했다.
"사람들한테 연락해라. 지만이 잡았다고."
"옙."
고개를 돌린 기섭은 부드럽게 말했다.
"지만아."
"···"
"엄지만."
"···"
대답은 없었다.
지만은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이 녀석 앙탈 좀 보게.
기섭은 실실 웃으며 그의 뺨을 후려쳤다.
짝!
"야, 엄지만."
여전히 대답은 없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기섭이 지만의 코앞에 얼굴을 들이댔다.
"이 새끼가 말도 안하고 도망가? 그동안 너를 돌봐준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거냐. 엉?"
"도, 돌봐준 게, 아니잖아요···"
"뭘 돌봐준 게 아니야? 먹여주고, 재워주고, 같이 생활해줬으면 됐지 그 이상 뭘 바라는 거야? 바라는 게 너무 많다, 너."
그렇게 말하면서 멱살을 조였기에 지만은 더 이상 대답할 수 없었다.
"으···컥!"
이런 식이었다.
기섭은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며 폭력을 동반했다.
항복해 몸을 낮추면 비로소 잘 대해준다.
하지만 지만처럼 받아들이지 않으면 끝까지 괴롭힌다.
"지만아, 지만아, 내가 어떻게 해야 니가 말을 듣겠냐. 그냥 얌전히만 있으면 모두가 편한데 말이야. 이 다리가 문제야? 하나만 있어도 생활하는 데는 지장 없지?"
기섭이 헛소리를 주절거리고 있을 때.
지만을 보기 위해 주택으로 가던 희원은 갑자기 나타난 성호를 제지했다.
"다른 데 가세요."
"···"
대답은 없었다.
덩치 큰 성호는 눈에 핏발을 세운 채 그녀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희원은 인상을 쓰며 목소리를 높였다.
"다른 데 가시라니까. 왜 말을 안 들어요?"
"3번 슬롯."
"아 진짜. 대체 뭔 소리야."
짜증이 난 그녀가 능력을 발휘하려 했을 때, 성호의 몸이 길게 늘어졌다.
아니, 길게 늘어졌다는 것은 희원의 착각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목을 향해 날아오는 회색의 칼날을 목격했다.
'너무 빨···'
제대로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칼날이 그녀의 목을 잘라냈다.
희원의 머리가 힘없이 바닥에 떨어지자 잘린 단면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성호의 몸이 사라졌다.
.
.
.
강렬한 살의가 전신을 엄습했다.
나는 희원의 목을 날려버린 후 다음 사냥감을 찾았다.
투쟁본능이 활성화되어 시야가 붉게 물들었다.
저기 있군.
옥상에 올라가 실실 웃는 놈이 보였다.
저대로 놔두면 방해가 될 것이다.
나는 담장을 훌쩍 뛰어넘어 2층으로 올라섰다.
남자가 뒤돌아보곤 기겁했다.
"뭐, 뭐야?"
사람이나 몬스터나 이게 문제다.
일단 행동하고 나중에 놀라면 될 텐데.
그가 바닥의 활을 집어 들었을 때 나는 이미 그에게 뛰어들고 있었다.
그의 눈이 화등잔처럼 커졌다.
퍽!
2층에서 떨어진 남자는 담장에 머리를 부딪치곤 움직이지 못했다.
나는 곧장 그의 배에 뛰어내렸다.
"끄악!"
남자가 터질 듯한 비명을 질러댔다.
나는 그의 가슴에 대고 롱나이프를 꾹 눌렀다.
약간의 저항감과 함께 칼날이 안으로 쑥 들어갔다.
처절한 비명과 심장소리가 동시에 들렸다.
두근, 두근.
이 느낌도 오랜만이군.
나라고 해서 살인자 노릇을 안 해본 건 아니다.
서바이벌 라이프의 고인물이라면 다들 살인자를 해본 경험이 있다.
그래야 더 재미있는 데스매치를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생각보다 살인자 노릇이 재미가 없어서 금방 때려 쳤지만.
어쨌든 두 명을 죽여서 나는 살인자가 되었다.
살인자만이 가지는 고유 스킬이 시야에 나타났고 스탯이 폭증한 게 보였다.
투쟁본능으로 높아진 스탯 3개가 25에 육박했다.
쿵!
심장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데스매치가 열렸다.
안에 몇 명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좀비에게 둘러싸일 것이다.
나는 몰려드는 좀비들을 확인한 후 바닥을 박찼다.
거리로 나가자 남자 둘이 나를 발견했다.
"저거 살인자야!"
"씨발 좀비 온다! 일단 형님하고 합류하자고!"
도망갈 수 없다.
나는 갈고리를 빙빙 돌리다 한 놈에게 던졌다.
그는 하늘로 떠오르다가 로프에 휘감겨선 내게 끌려왔다.
"헉!"
뒤늦게 허리춤의 롱나이프를 찾았지만 내가 먼저였다.
"이익! 이거!"
나는 로프를 놓고 달려가며 사커킥으로 그의 머리통을 차버렸다.
뿌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머리가 뒤로 젖혀졌다.
목뼈가 부러졌으니 즉사다.
심장소리가 더 격하게 들렸다.
주변의 모든 것이 붉게 보였다.
아직 적외선 시야는 활성화되지 않았지만 내겐 생명체추적과 죽음의낙인이 있다.
주변의 생존자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저기군.
도망간 놈이 담장에 올라선 틈을 타 엘더우드 롱보우로 저격했다.
어디냐.
징징이 5호는 어디냐.
나는 거의 짐승처럼 거리를 돌아다니다가 좀비의 벽에 막혀 도망치고 있는 세 명을 발견했다.
정확히 말하면 두 명과 한 명이었다.
하나는 징징이 5호의 어깨에 메여 있었으니.
"형님! 살인잡니다!"
"씨발 저 새끼 그때 죽였어야 하는 건데!"
징징이 5호가 나를 돌아보며 침을 뱉었다.
나는 말없이 뛰었고 거리가 점점 좁혀들었다.
둘은 한참을 도망치다 화살을 내게 쐈다.
쉬잇.
나는 어깨를 움직여 화살을 피했다.
투쟁본능에 살인자 보너스까지 활성화되어 내 민첩 스탯은 25에 육박한 상태였다.
날아오는 화살을 보고 피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둘은 이를 악물고 계속 사격했고, 나는 마지막 화살을 눈앞에서 잡아 부러뜨렸다.
"···그걸 잡았다고?"
"혀, 형님!"
징징이 5호가 결연한 표정을 짓더니 어깨에 메고 있던 누군가를 남자에게 건넸다.
아마 불쌍맨이겠지.
"어디에 숨기고 와라. 내가···"
더 들어줄 이유가 없다.
나는 곧장 슬롯을 열어 비도를 마른 남자에게 던졌다.
그는 블링크로 위치를 바꿨다.
언제까지 바꾸나 보자고.
예상되는 위치에 에메라스 비도를 뿌리자 비명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나는 징징이 5호가 달려드는 걸 목격했다.
"이야압!"
그가 나를 후려치기 위해 달려들었지만 나는 한 손으로 그의 손목을 잡았다.
반대쪽 손도 마찬가지.
우리는 순식간에 힘을 겨루는 상황이 되었다.
아무리 육체계 능력자라 한들, 지금의 나는 버프란 버프는 다 받은 상황이다.
"무, 무슨 힘이···"
징징이의 근육이 꿈틀거렸지만 도리어 나에게 밀리고 있었다.
나는 있는 힘껏 팔을 비틀었다.
뿌드득―
불길한 소리가 나며 징징이의 팔목이 돌아갔다.
"끄아아악!"
징징이는 덜렁거리는 팔을 부여잡고 바닥에 쓰러졌다.
나는 다른 손목도 박살낸 다음 롱나이프를 꺼내 그의 가슴에 겨누었다.
그가 고통에 신음하며 말했다.
"누, 누구야···대체 너 누구야···"
"김밥조아라고 하면 알겠냐?"
"뭐···라고?"
징징이의 눈이 부릅떠졌다.
충격과 혼란으로 눈동자가 마구 움직이고 있었다.
"설마, 아니야···이렇게 멍청한 짓을 할 리가···살인자로 어떻게 살려고···"
"나한테는 이게 있거든."
면벌부를 끄집어내자 징징이가 뚫어져라 쳐다봤다.
"너 설마···"
"이벤트 깨니까 이거 주더라고. 양보해줘서 고마워."
"어흐흑! 끄윽!"
그는 분통함에 눈물까지 흘렸다.
나는 롱나이프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칼날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제발! 윽! 살려줘! 살려만 주면···"
"난 후회할 짓은 안 하는 성격이라."
힘 있게 롱나이프를 밀자 쑥 들어갔다.
징징이는 발버둥 치다가 서서히 움직임을 멈추었다.
나는 피에 절은 칼을 들고 일어섰다.
연이은 살인으로 심장소리가 거의 북처럼 울리고 있었다.
이제 됐다···
몇 명의 죽음으로 모든 문제가 사라졌다.
종사모는 해체될 거고 남은 놈들은 시비를 걸 여력도 없을 것이다.
면벌부를 찢자 주변이 평온해지며 시야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스탯도 스킬도 정상화되었다.
나는 극심한 피로감을 느꼈지만 불쌍맨을 보고 싶었다.
로프로 묶여 있던 그는 나를 보자마자 버둥거렸다.
나이는 20대 초반?
눈매만 봐서는 아주 선한 남자였다.
로프와 테이프를 끊어주자 그가 도망가려 했다.
살인자로 알 테니 당연한 행동이다.
나는 그의 뒤통수에 대고 말했다.
"불쌍맨님, 제가 언제 가도 된다고 했어요? 앉으세요."
"아."
언젠가 방송에서 내가 한 말이었다.
그가 멈추더니 천천히 뒤를 돌아봤다.
< 죽음은 모든 문제를 해결한다 > 끝
< 섬과 던전 - 1 >
"따라와요."
그 한마디에 불쌍맨은 어린애처럼 나를 졸졸 따라왔다.
따라오면서도 나를 구석구석 살펴보는 게 느껴졌다.
말로만 듣던 사람을 실제로 봐서 그런가?
하긴, 나도 반쯤은 그런 심정이다.
불쌍맨은 그 특유의 컨셉으로 스트리밍 사이트에서 유명한 유저였다.
슬프지만 나보다 인지도가 더 높았다.
나는 죽은 사람들의 무기와 배낭을 파밍한 다음 적당한 2층 주택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불쌍맨을 방에 앉히고 물을 줬다.
"일단···물 좀 마셔요. 그리고 진정해요."
"···네."
그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다가 물을 먹고 콜록거렸다.
나는 아무 말도 않고 그를 지켜봤다.
2,3분 쯤 지났을까. 그의 호흡이 안정화되었다.
유순한 눈동자가 이리저리 굴러다니며 내 눈치를 보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물었다.
"대답하기 싫은 건 대답하지 않아도 됩니다. 불쌍맨님 맞죠?"
"네. 이름은 엄지만이고요. 그···목소리가···"
"김밥조아입니다. 이름은 강성호고요. 제가 어디서 무슨 가게를 했게요?"
진짜 불쌍맨이라면 이걸 모를 리가 없다.
그는 바로 답했다.
"부산에서 분식집 하셨잖아요."
빙고.
나는 천천히 바닥에 앉았다.
"휴···이런 식으로 만날 거라곤 생각은 못 했는데."
"저도요. 김밥조아님은 왠지···많은 사람들과 함께 있을 것 같았거든요."
"어쩔 수가 없었어요. 특성 때문에."
"제 특성은 생물친화예요. 대충은 아시죠? 식물이 잘 자라고, 동물은 졸졸 따라와요."
나는 약간 고민했다.
과연 불쌍맨에게 비밀을 털어놓아도 될 것인가.
그는 꽤 유순하게 보였고 남에게 함부로 비밀을 털어놓을 사람 같지는 않았다.
또한 나와의 인연이 깊다.
어떻게 보면 토공이나 오리궁뎅이보다 더 나와 친했다고 할 수 있었다.
방송을 할 때마다 잡담을 했으니.
나는 진지하게 말했다.
"제 특성을 알려드리는 건 지만씨가 처음입니다."
"아···"
그는 잠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차라리 말씀을 안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왜요? 다른 사람에게 말할 겁니까?"
"아뇨···저는 절대 말하지 않을 거예요. 그래도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고 하잖아요."
"주위엔 아무도 없는데···뭐 특성을 아는 편이 좋을 것 같아서 하는 말입니다. 듣고 싶지 않으면 안 말할 거고요."
"···"
지만은 눈알을 굴리다가 내게 말했다.
"구, 궁금하긴 하네요. 김밥조아님 특성은 아무도 모르는 거잖아요."
"네. 아무도 몰라요. 심지어 토공조차. 오리궁뎅이는 눈치 채긴 했는데 안 물어보더라고요."
"두 분을 만나셨어요?"
"오리궁뎅이는 만났는데 토공은 아직요."
"만나셨구나···다행이다."
"뭐가요?"
"세 분이 친하게 지내셨잖아요. 이런 상황이니까 혹시 반목하면 어쩌나 해서."
우리가 싸울까봐 염려해주는 건가.
요즘 세상에 보기 드문 착한 사람이다.
나와는 극단인데···어쩌면 극과 극이라서 잘 맞을지도 모르고.
하여튼 나는 그에게 특성을 밝히기로 결심했다.
앞으로는 나와 붙어 있어야 할 테니까.
"제 특성은···차원문 여는 겁니다."
"차원문요? 어디로 통하는 거예요?"
"말로 하는 것보단 직접 보면서···"
참, 이게 투명화 되어서 안 보이는구나.
그래도 있다는 걸 간접적으로 느낄 순 있겠지.
"차원문 열어. 딩고."
딩고를 부르자 지만의 눈이 점점 커졌다.
그에겐 허공에서 개 한 마리가 뛰쳐나온 것처럼 보일 것이다.
"이, 이게 어떻게 된 거죠?"
"여기 차원문이 있어요. 문 하나 정도 크긴데···투명화 기능 때문에 저 말고는 안 보여요."
내가 차원문의 크기를 가늠하자 그가 손을 댔다가 깜짝 놀랐다.
"뭔가 만져지는데요?"
"그게 차원문이에요. 전용이라서 저만 이렇게 몸을 집어넣을 수 있죠."
나는 쉘터에서 통조림을 가지고 나왔다.
현실에선 있을 리 없는 물건.
통조림은 곧 바스러져 내용물과 범벅이 되었지만 지만에게 정보를 전달하는 역할은 충분히 해냈다.
"안에는 숲이 있더군요. 어떤 곳인지 대충 아시겠죠?"
"철사병이 없는 숲···아, 그 파밍 던전이네요?"
"그렇죠. 기간제로 열리는 파밍 던전. 저는 거기에 무제한으로 출입할 수 있어요. 안에 쉘터를 만들어 놨고요."
"그래서였구나···그래서 김밥조아님이 정체를 숨기고···"
"전투 특성이었다면 알렸을 겁니다. 하지만 특성이 이래서."
지만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 같아도 그랬을 거예요. 정보를 알리지 않은 것도 잘 하셨어요. 저한테 무서운 아저씨들이 찾아왔었거든요."
"···무서운 아저씨요?"
그럴 리가 없는데.
내가 아는 정부는 장원택 대통령을 필두로 하여 성실하게 책무를 수행한 사람들이었다.
위험시설을 셧다운 시키고 타임쉘터를 만들어 미래를 대비했다.
그 사람들이 정보 제공자를 해코지 할 리가 있나···
혹시 찾아서 보호하려는 게 아닐까 물어보니 절대 아니라고 한다.
"분위기가 이상했어요. 뭐라고 설명할 수는 없는데 평범한 사람이 아닌 것 같은···"
"···그래요?"
정부가 단일집단이 아니라는 게 확실하다.
나중에 접촉할 때 주의할 필요가 있겠어.
우리 둘이서 심각한 얘기를 쑥덕거리고 있을 때 딩고가 지만에게 배를 깠다.
낯선 사람에겐 잘 다가가지도 않는 딩고가 말이다.
"생물친화란 거 정말 대단하네요. 얘는 허스키로 보이지만 사실 늑대거든요."
"늑···대요?"
"예. 은색늑대라고, 성체는 황소만 해요. 그래서 나중엔 어떻게 변명할지 고민하고 있는 중입니다."
"아···안은 완전히 자연인가 보네요."
"숲도 있고 바다도 있고···뭔가 지성체의 흔적은 안 보이더군요. 탐험을 거의 못 해봐서 잘은 모르지만."
"안은 위험한가요?"
지만은 차원문 안의 숲에 대해 관심을 보였다.
나는 대략 내가 겪은 일들을 설명했다.
처음 숲에 들어가서 고블린과 아울베어를 만나 도망쳤던 이야기.
그 후로는 동굴을 쉘터 삼아 물자를 쌓고 철조망을 둘렀던 지난 일들.
오크와 늑대인간에 이르자 불쌍맨, 지만이 눈을 질끈 감았다.
"역시 위험한 숲이었어···"
"그래도 위험을 무릅쓰고 탐사를 할 가치가 있죠. 현실에선 못 구하는 게 많으니까요."
"그렇겠네요. 김밥조아님 전용이라 다른 사람이 못 들어가는 게 아쉬워요. 아···아니구나. 다른 사람이 들어가면 큰일 나는구나."
"질투를 유발할 수 있죠. 누구는 들어가고 누구는 못 들어가고. 만약 차원문이 전용이 아니었고 세상에 알려졌다면 저는 예전에 죽었을 겁니다."
"정말 그렇겠어요···"
"지만씨니까 이런 거 알려드리는 겁니다."
"절대 말 안할게요."
그는 거듭 다짐했다.
그 때 누군가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나는 일어서며 말했다.
"일단 지만씨 아지트로 갑시다."
"챙길 거 별로 없어서요···"
"없어요? 그래도 모아놓은 게 좀 있을 텐데."
지만은 별로 생각하지도 않고 고개를 저었다.
"아뇨. 생수 외엔 진짜 없어요. 저는 어촌마을에 있었거든요."
"종사모한테서 도망가서 거기 살았나 보죠?"
"네."
"그럼 거긴 포기하고, 그냥 몸만 오세요."
"제가 그래도 되는지 모르겠어요···"
"일해서 갚으면 되죠? 아지트 앞에 부두 있으니까 통발 던지고, 낚시도 좀 하고 텃밭도 가꾸고."
지만의 표정이 점점 밝아졌다.
자기가 할 일이 생겼다는 게 기쁜 걸까.
나는 그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어차피 내 비밀을 말한 이상 쉽게 지만씨 보내줄 생각은 없어요. 이것도 어떻게 보면 감금인데."
"저, 전 괜찮아요. 감금해 주세요."
"위험한 말씀을 하시네."
하여튼 지만은 결정을 내린 모양이다.
시체가 가득한 이곳에 더 있을 필요는 없지.
내가 앞장서자 지만이 졸졸 따라왔다.
왠지 동생이 하나 생긴 기분이었다.
환상 속에나 있을, 말 잘 듣고 착한 동생.
.
.
.
나는 지만을 아지트로 데려와서 일단 씻게 했다.
밥을 먹여야 할 텐데 뭐가 좋을까···
나는 고민 끝에 화조를 골랐다.
좀 크긴 하지만 지만이 잡은 토종닭으로 하면 되지 뭐.
그가 지만이 씻는 동안 나는 화조 한 마리를 잡았다.
풍뎅이들이 사료와 물을 주고 알까지 수거하기 때문에 내가 하는 일이란 가끔 들여다보는 것뿐이었다.
"···애들도 불러야겠지."
화조는 칠면조만큼은 아니지만 원체 커서 몇 명이 달라붙어 먹어야 한다.
옥상 위에 작은 깃발을 하나 올리자 애들이 우르르 아지트로 들어왔다.
"여울이 또 업혀온 거 아니지?"
내가 놀리자 그녀는 입술을 내밀었다.
"아니거든요. 저 혼자 로프 탔어요."
"형 얘 로프 타는 거 보면 웃겨 죽을걸요."
"큽···푸흐흡."
"니들 말하면 죽일 거야."
여울이가 서슬 퍼렇게 노려보자 둘 다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아지트를 불러보다가 앞 사무실에 귀를 기울였다.
"어? 아저씨, 누가 왔어요?"
"보면 놀랄 걸?"
"누군데요?"
이윽고 지만이 나오자 셋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지만 오빠!"
"형 살아있었네요."
"반가워. 김···성호 형이 구해줘서 살았어."
"무슨 일이 있었는데요?"
지만은 몬스터에 쫓기다가 구조된 것으로 설정을 끝마친 상태였다.
종사모 놈들이 죽은 건 우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다.
또한 우리 둘의 정체도 당분간은 숨기기로 했다.
말을 놓기로 한 건 덤이다.
지만이 토종닭을 찾으러 돌아다니다가 몬스터에게 쫓긴 얘기를 하자 셋이 어쩐지, 하곤 털이 다 뽑힌 화조를 바라봤다.
"···근데 토종닭 치고는 묘하게 큰데요?"
"그러게. 나 닭이 이렇게 큰 거 처음 봐."
"닭이다, 닭, 으흐흐."
진짜 닭은 아니지만 뭐 그러려니 하자.
아무튼 넷은 닭을 먹을 생각에 꽤 들떠 있었다.
나는 화조를 손질하기 시작했다.
여울이가 눈치를 보더니 내 옆에 와 쪼그려 앉았다.
"아저씨 제가 뭐 도와드릴 거 없어요?"
"나 혼자서 해도 돼. 가서 놀고 있어."
"그래도 뭔가 도와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왜?"
"계속 얻어먹는 처지에 뭐라도 도와야 하잖아요. 그래야 나중에도 얻어먹지."
잡담하느라 정신없는 준호와 도형이에 비하면 현실감각이 있네.
하지만 내가 공짜로 얘들을 밥 먹이는 건 아니다.
"나중에 시킬 일이 있을 거야."
"뭔데요?"
"조만간 알게 돼. 뭐 어렵고 힘든 일은 아니니까 인상 풀고."
단지 좀 위험할 뿐이지.
"아저씨는. 인상 안 썼어요."
"하여튼 심심하면 양념이나 해. 닭도리탕 할 거니까."
"닭볶음탕 하신다는 거죠?"
"내가 하는 거니까 닭도리탕."
"음···오케이."
여울이는 입을 다물고 내가 시킨 대로 양념을 만들었다.
그러다가 또 뭐가 이상한지 구시렁댔다.
"아저씨는 맨몸으로 왔으면서 뭐 이렇게 살림살이가 많아요? 완전 파밍대장이야."
내가 구비해놓은 양념 등을 말하는 것이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운이 좋았어."
잠시 후 도자기 그릇에서 맛있는 냄새가 풍기기 시작했다.
나는 모두를 모아 놓고 진중한 어조로 말했다.
"이미 알겠지만···오크가 나왔어. 이제부턴 웃고 떠들고 그럴 때가 아니야. 알겠지?"
"오크···엄청 강하다고 하던데."
"저기 철준 형하고 유주 누나네 말 들어보니까 몇 명이 잡았다던데요."
"아, 맞다. 전에 종사모에서 퍼스트킬 할 거라고 모여 있는 거 봤어요."
둘 다 나와 관련된 거라고 밝히긴 좀 그렇군.
지만이 눈치를 살폈고 나는 시치미를 뗐다.
"우리와는 별 상관없는 사람들 얘기야. 하여튼 오크도 나타났고 곧 좀비도 강력해질 거야. 이제부턴 함부로 나다니면 안 돼. 언제든 아지트를 떠날 준비를 해 두고."
"···"
다들 마른침을 삼키며 서로의 얼굴을 쳐다봤다.
동네 소풍 오듯 내 아지트에 왔는데 청천벽력 같은 소리겠지.
그때 지만이 배낭에서 주섬주섬 뭔가를 꺼냈다.
"제가 돝섬에 관심이 있어서 지도를 그려봤어요. 아지트로 괜찮을 것 같아서."
"돝섬? 아, 이 앞에 있는 섬을 말하는 거지?"
다들 뚫어져라 지도를 쳐다봤다.
지만의 수제 지도엔 시설 뿐 아니라 남은 보트와 낚시 포인트까지 기록되어 있었다.
"종말 당일엔 사람이 거의 없었어요. 기껏해야 관리인 두 명? 그마저도 떠났을 거니 지금은 좀비가 없을 거예요."
"몬스터도 없을 확률이 높구만."
몬스터는 결국 인간 주위에 리젠된다.
아무것도 없는 사막에 나타나지는 않는다는 이야기다.
우리가 자리를 잡으면 몇 놈 나타날 테지만 충분히 사냥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 괜찮은데.
"장기적으로 지내기에 괜찮아 보이는데 어때?"
셋의 표정은 별로 좋지 않았다.
"여기 진짜 별거 없는데."
예전에 마산 지역 학생들이 소풍을 간다 하면 십중팔구는 여기였다고 한다.
시설이 다 오래된지라 별 인기는 없었고, 배를 타야 하는지라 학생들 사이에서 불만도 많았다고.
준호가 열변을 토했다.
"형도 그 심정 아시잖아요. 소풍 끝나고 빨리 피방 가야 되는데 여기 섬이라서 못 도망가요."
"맞아맞아."
"그런 섬이라서 좋은 거야. 몬스터도 별로 없을 거니까."
"···여기에 살면서 파밍할 때만 밖으로 나오고요?"
여울이는 돝섬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확실히 얘는 감각이 있어.
"이거 보트 보이지? FRP보트라는 건데 쉽게 말해서 플라스틱으로 된 거야. 그걸로 섬과 육지를 오갈 수 있어."
"안에 건물도 있으니까 아지트를 만들자 이거군요···텃밭도 만들 수 있겠고요."
"그리고 장점이 하나 더 있는데···"
"무슨 장점요?"
여울이 물었고 나는 대강 설명했다.
나중에 헬스장 사람들까지 합류한다고 생각해보자.
보통은 몇 백 미터 정도는 떨어져 있어야 좀비 레이드가 일어나지 않는다.
돝섬이라면 그 조건을 충족하지 않는가 말이다.
너무 큰 섬이면 좀비와 몬스터가 우글거리고 너무 작은 섬이면 기반시설이 없다.
하지만 돝섬은 생존자 몇 명이 지내기에 딱 좋은 크기였다.
좀비 레이드가 안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하자 다들 반색했다.
"그러면 사람들하고 같이 지내도 되잖아요"
"빨리, 빨리 가요."
"잠깐만 기다려봐. 가능성이 있다는 거지 진짜 그렇게 될지는 아무도 몰라."
"좀비 레이드 조건을 보면 음···"
그때 닭도리탕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이거 냄새가 너무 심한데.
고블린이 몰려올지도 모르니 빨리 먹어치워야겠다.
나는 불을 끄고 그릇 뚜껑을 열었다.
닭도리탕 특유의 매콤한 냄새가 확 퍼졌다.
"회의도 좋지만 일단 먹고 보자."
"잘 먹겠습니다!"
다들 눈치껏 고기에 달려드는데 지만은 망설이고 있었다.
내가 먹으라고 하자 그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저, 여기 오길 정말 잘한 거 같아요."
"오랜만에 먹는 거지? 맛있게 먹어."
"네. 어렸을 때 먹어보고 그 뒤로는 못 먹어서···"
"···"
고기를 쉴 새 없이 흡입하던 셋의 움직임이 거의 멈추었다.
준호는 여울이의 사나운 시선을 받고 자기 접시에 담은 큰 다리를 그릇에 내려놓았다.
나는 실탄을 써서라도 혹멧돼지를 잡겠다고 마음먹었다.
당분간은 잘 먹여야겠어.
< 섬과 던전 - 1 > 끝
< 섬과 던전 - 2 >
불쌍맨을 데려온 그날 밤.
나는 그와 딩고를 재우고 곧장 종사모의 아지트로 향했다.
수뇌부가 몰살당했으니 어떤 식으로든 액션이 있을 것이란 판단이었다.
그 틈을 노리면 뭔가를 얻을 수 있다.
"법원 근처의 원룸 건물이라···여기군."
나는 근처 건물에 숨어 아지트를 지켜봤다.
분명 등화관제를 몸으로 익히고 있을 텐데 커튼을 젖혔는지 불빛이 다 보였다.
"어허이. 코볼트들이 아주 좋아하겠는데."
나는 조심조심 1층으로 진입해 차원문에 숨었다.
건물은 몇 명의 목소리로 시끄러웠다.
"지금, 당장, 떠나야, 한다고! 대체 몇 명이 죽었는지 알기나 해?"
"살인자가 있다는 거야? 이 주위에? 그래서 떠나자고? 이 짐을 두고?"
"목숨보다 짐이 더 중요합니까?"
"아니, 잠깐만, 잠깐만요. 시체 확인했어요?"
"희원이 머리가 잘려나가 있었다고! 기섭 형님은 좀비들에게 뜯겨서 형체도 못 알아보겠고!"
"하···진짜 좆같네."
난리도 아니군.
내가 저지른 일 때문에 다들 힘든 모양이다.
정신을 차린 누군가가 쉿, 하며 낮게 말했다.
"다들 조용히 좀 해요. 몬스터 와요."
"커튼 칩시다. 광고하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여기를 떠나야 한다고요? 복수는 안 하고?"
"복수는 무슨···다섯 명 죽였으면 살인자 스탯이 장난이 아닐 거라고요. 우리 힘으로 복수가 돼요?"
"어쩌면 지금 당장이라도 심장소리가 들릴 수도 있어요···"
"진짜 미치겠네. 으아악!"
"좀 조용히!"
"내 생각을 말하자면, 여기 빨리 뜨고 싶습니다. 다들 물자에 미련이 많겠지만 너무 위험해요. 배낭만 챙겨서 떠야 합니다."
"여기서 왈가왈부 하지 말고, 깔끔하게 해결합시다. 떠나실 분?"
"나만 남는 겁니까? 다들 살인자한테 겁먹었어요?"
"물자는 다시 파밍할 수 있지만 목숨은 하나뿐이잖아요···사람들 죽은 장소 여기서 가까워요···"
"살인자도 이 주위에 있다고 보는 게 맞겠죠···저, 저는 그놈하고 싸우기 싫습니다."
"저도요."
다들 떠나는 것에 동의하는 분위기였다.
하긴 여기는 살인 장소와 꽤 가까워서 말이지.
나는 이미 살인자에서 벗어났지만 이들이 그걸 알 리가 없다.
심장소리가 들리기 전에 빨리 떠나고픈 생각뿐일 것이다.
"하지만 이 많은 물자를 놔두고···"
고민이 많나보군.
나는 노트북을 뒤져서 심장소리가 크게 들리는 영상파일을 찾아냈다.
동굴 안에서 틀어봐야 밖에 들리진 않지만 판자가 있단 말이지.
조심조심 노트북을 바닥에 놓고 판자를 나팔 모양으로 접어 노트북에 덮었다.
플레이를 누르니 과연 심장소리가 상당히 크게 들렸다.
"갈 거면 빨리 좀 갑시다."
그래야 내가 파밍을 하지.
나는 미안한 마음 1그램을 감추며 나팔을 차원문 밖으로 뺀 후 플레이를 눌렀다.
두근, 두근, 두근!
노트북 스피커에서 나오는 심장소리가 건물 복도에 울려 퍼졌다.
"···지금 소리 뭐야."
"저, 저한테만 들리는 거 아니죠?"
"살인자다! 튀어!"
뭔가 뒤엉키고 넘어지는 소리가 났다.
내가 나팔을 안으로 들였음에도 난장판이 계속되었다.
몇 명의 사람들이 배낭 하나만 짊어지고 계단에서 떨어지듯 내려와 거리로 달렸다.
잘 가시게나.
정상이었다면 이런 조잡한 함정에 걸릴 일은 없었을 것이다.
노트북 스피커에서 나는 소리는 얇고 가볍거든.
하지만 종사모 사람들은 워낙 궁지에 몰려 있는 상태였다.
언제 살인자가 올지 몰라 전전긍긍하고 있는데 심장소리가 들리니 기겁할 수밖에.
나는 몇 분을 더 기다린 뒤 인기척이 없는 걸 확인하고 위로 올라갔다.
"많이도 모아놨네."
물자를 전부 가져갈 생각은 없었다.
쉘터의 공간도 부족하니 적당히 마음에 드는 것만 고르면 된다.
나는 차원문을 열고 거실과 방에 한가득 쌓인 물자를 집어던졌다.
"젤리도 있네. 풍뎅이들이 좋아하겠어."
소포장 스팸도 꽤 많았다.
깡통 스팸은 안 되니까 비싸도 이런 걸로 비축했구만.
팩소주에 담배에···많기도 하다.
나는 밖의 동향을 살피며 유유히 짐을 챙겼다.
"돌아오면 그 때는 죽는 겁니다."
놀라서 도망간 종사모 회원들에게 진심으로 전하고 싶었다.
도망갔으니 굳이 잡진 않겠지만.
돌아와서 물자가 없는 걸 보고 내게 복수심을 불태운다면 얼마 살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물자를 루팅하다 보니 거의 바닥났다.
나는 원룸 건물을 돌아다니며 싹싹 긁어서 차원문에 던졌다.
이거 하는 게 제일 재밌네.
.
.
.
여울이네와 우리는 돝섬으로 이사하기로 합의했다.
본격적으로 짐을 옮기기 전에 해야 하는 것이 있었는데 정찰이다.
막상 갔는데 몬스터가 바글거리면 곤란하기 때문.
나는 지만과 함께 선착장에서 보트를 타고 노를 저었다.
돝섬까지 노를 젓는 그 시간에 온갖 종류의 물고기들이 보트 주변에 달라붙었다.
"지만아, 넌 굶어죽을 걱정은 없겠다."
"생선 같은 건 괜찮은데 나중에 고라니나 멧돼지 같은 동물을 만나면 걱정이에요."
"왜?"
"걔네들은 저에게 친근감을 느껴서 오는 건데, 제가 잡아먹으면 미안하잖아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 거군.
내가 그런 능력을 가졌다면 땡큐 하며 다 잡아먹을 텐데.
한동안 침묵이 이어지는 가운데 노 젓는 소리만 들렸다.
그가 말했다.
"그냥 조개만 먹고 살까 봐요···"
그건 안 되지.
"괜찮아. 아포칼립스에서 너한테 뭐라고 할 사람 아무도 없어."
내 입장에선 조개와 멧돼지가 무슨 차이가 있나 싶지만 얘한테는 다른가 보다.
그는 우울한 시선을 털어내고 열심히 노를 젓기 시작했다.
"모르겠어요. 그냥 형이 하라는 대로 할게요. 저도 살고 싶어서···"
"그래, 그러면 돼."
혼자 오래 살아서 그런지 우울함이나 고민도 빨리 떨쳐내는 것 같았다.
하긴 긍정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도저히 버틸 수 없었겠지.
돝섬까진 20분 내외가 걸렸다.
우리는 고즈넉한 선착장에 보트를 대고 섬에 올랐다.
가끔 들리는 파도소리 외엔 조용했다.
"아무도 없는 것 같지?"
"네···"
유현이가 있었다면 금방 정찰을 끝냈을 테지만 없으니 몸으로 때워야 할 것 같았다.
안내센터에 가니 앞에 금속가루가 한 가득이었다.
지만의 말에 의하면 원래 황금돼지 동상이 있었다고.
센터는 그럴듯한 건물이었지만 금속 프레임이 바스러지고 유리가 전부 내려앉았다.
"여기선 못 살겠다, 그지? 겨울에 난방도 없으니 춥겠는데."
"난방 없어도 괜찮던데···"
난 안 그렇거든.
안에 들어가 보니 음식물 썩은 냄새로 가득했다.
그래도 과자와 컵라면 등은 멀쩡했다.
이건 나중에 챙겨야겠어.
둘레길을 따라 걷다 보니 조류원에 새들이 죽어 있었다.
"형, 저기 토끼 있어요."
지만이 토끼 무리를 발견했다.
우리를 어떻게 탈출했는지 공원에서 뛰어놀고 있다가 후다닥 도망갔다.
지만이를 가까이서 봤으면 달려왔을 텐데.
해안가를 따라 쭉 걸었지만 건물이 별로 없었다.
기껏해야 기념관과 팔각정 뿐.
작은 섬이라 더 둘러볼 것도 없었고 조형물 몇 개 구경하니 선착장으로 되돌아왔다.
"몬스터는 없는 것 같지?"
"네. 아무것도 못 느꼈어요."
"기념관이 그나마 멀쩡하네. 안내센터는 유리가 뻥 뚫려서 지내기엔 좀 그래. 냄새도 심하고."
"그럼 안내센터에 짐을 뒀다가 옮기는 게 어떨까요?"
"그러자."
우리는 다시 노를 저어 육지로 향했다.
좀비 몇 마리가 열렬하게 환영했고 나는 롱나이프로 대응했다.
"내가 애들한테 알릴 테니까 아지트로 가서 짐 챙기고 있어. 오크하고 구울 조심하고."
"짐 챙긴 뒤에는 가만히 있을까요?"
"내가 깃발을 올릴 테니 그거 보고 움직이면 돼."
그는 고개를 끄덕이곤 열심히 뛰어갔다.
이것저것 일을 많이 해서 체력은 좋은 편인지 꽤 빨랐다.
저 정도면 구울한테 잡힐 염려는 없겠어.
나는 몬스터들을 피해 여울이네 아지트로 향했다.
여울이가 망원경으로 나를 보고 있었는지 미리 문을 열어두었다.
"아저씨 돝섬 어땠어요?"
"괜찮았어. 지낼만한 곳이 기념관 말고는 없는 게 좀 그렇지만."
"안내센터하고 팔각정 있지 않았어요?"
"안내센터는 휑하게 뚫려서 못 쓰고, 팔각정은 사람 지내라고 만든 곳이 아니야. 겨울 되면 얼어 죽을걸."
"저 추운 건 싫은데."
"기념관에 방 있으니까 이불하고 침낭 가져가면 괜찮을 거야. 준호하고 도형이는?"
"마지막 파밍한다고 나갔어요. 어차피 파밍은 계속 해야 되는 건데."
아지트를 둘러보자 짐은 이미 정리되어 있었다.
거 참 야무지게도 싸놨네.
이것저것 잡담하고 있으려니 둘이 헐레벌떡 배낭을 메고 왔다.
나는 애들을 모아놓고 말했다.
"잘 들어. 우리가 보트에 다 탈 수 있긴 한데 짐은 하나씩이야, 알겠지?"
"넵."
"그리고 친구가 넘어져도 뒤돌아보지 마.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머뭇거리지 말라는 소리야."
다들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알아들었겠지.
하나씩 뛰는 건 편하긴 한데 한 명이라도 몬스터에게 걸리면 골치가 아파진다.
차라리 어그로를 모은 다음 내가 처리하는 게 나았다.
나는 배낭 하나씩 챙기라고 말한 뒤 옥상에 올라가 깃발을 올렸다.
"출발."
선착장까지 레이스가 시작되었다.
예상대로 몇몇 몬스터가 우리를 쫓아왔다.
네 명이 동시에 뛰니 모를 수가 없다.
개중에는 구울로 진화한 녀석까지 있었다.
"돌아보지 말고 뛰어!"
나는 애들을 향해 소리친 다음 롱나이프와 방패를 빼들고 돌아섰다.
카아악!
좀비 몇 마리가 달려들었지만 어렵지 않게 머리통을 잘라낼 수 있었다.
문제는 구울.
녀석은 기괴하게 변형된 골격구조를 갖고 있었다.
인간이라기보다는 도마뱀에 더 가깝다.
네 다리로 후다닥 기어 접근하는 걸 보면 누구라도 소름이 끼칠 것이다.
하지만 난 너무 많이 봐서 무덤덤했다.
"실제로 봐도 못생긴 건 똑같네, 너."
실없는 농담을 하자 녀석이 화가 난 듯 혀를 길게 빼물고 점프했다.
나는 궤도에 맞춰서 방패를 들어올렸다.
텅! 까가각!
구울의 긴 발톱이 나무방패를 긁어내렸다.
나는 녀석이 그러고 있는 틈을 타 몸을 옆으로 움직이며 롱나이프로 팔을 날려버렸다.
초록색의 혈액과 함께 팔이 허공으로 치솟았다.
케엑!
투쟁본능이 활성화되었다.
나는 괴성을 지르고 있는 구울에게 돌진했다.
녀석이 주둥이를 쫙 벌리며 혀를 내밀었지만 나는 이미 상체를 숙인 상태였다.
"잘 가라."
롱나이프가 목을 완전히 베어냈다.
머리를 잃은 구울은 바닥에 털썩 쓰러져 대량의 녹색피를 흘려냈다.
하지만 이걸로 끝난 건 아니었다.
맛집이라는 소문이 돌았는지 고블린들이 골목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롱나이프 손잡이로 방패를 쳤다.
"한꺼번에 처리하게 좀 와라."
녀석들은 내가 혼자인 걸 보고 용기를 냈는지 우르르 달려들었다.
그게 니들 착각이라는 걸 가르쳐주마.
마비독침이 우수수 날아왔지만 방검복이 대부분을 방어했다.
딱 한 방 관절부위에 독침이 파고들었지만 마비독저항 스킬이 빛을 발했다.
고블린 세 마리가 내가 무릎을 꿇은 것을 보고 기쁜 듯 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나는 녀석들이 지근거리에 들어왔을 때 몸에 힘을 주어 벌떡 일어났다.
키엑!
고블린 세 마리가 놀라 자빠졌다.
나는 롱나이프로 무자비하게 녀석들을 베어 갈랐다.
못생긴 머리와 팔, 다리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다른 녀석들은 겁을 먹었는지 골목으로 후다닥 달아났다.
이제 좀 조용해졌군.
나는 선착장으로 달려갔다.
애들 셋은 질린 표정이었다.
"형 완전 패왕인데요?"
"아저씨 그냥 여기 몬스터들 다 패 죽여도 될 것 같은데."
"나도 오크는 버거워."
말은 이렇게 했지만 롱나이프와 방패만 들고도 이길 수 있을 것 같았다.
워낙 설치다보니 몬스터의 움직임이 눈에 익었고 투쟁본능으로 보너스 스탯이 붙어 몸이 가벼워졌다.
오크의 움직임은 느리니까 딜레이를 파고든다면···
뭐, 원거리에서 안전하게 공격하는 것이 제일이다.
조금 기다리려니 지만이가 배낭을 메고 허겁지겁 뛰어왔다.
녀석이 보트에 올라탄 후 준호와 도형이 열심히 노를 저었다.
처음엔 영 어설펐지만 남자애들이라 그런지 금방 적응했다.
우리를 태운 보트가 돝섬으로 향했다.
.
.
.
그날 저녁.
우리는 기념관에 자리를 잡고 모처럼 평화를 만끽했다.
여기엔 물자가 별로 없지만 몬스터는 아예 없다.
마음 졸이지 않고 편히 쉬는 게 얼마만인지 다들 벤치에 늘어졌다.
"오늘은 이대로 쉬다가 밥 먹고 자고, 내일부터 또 열심히 움직이는 거야, 알겠지?"
"옙."
힘들게 뛰고 노를 젓고 했음에도 애들은 싫은 얼굴을 하지 않았다.
여기에 오니 희망이 비로소 보인 것이다.
섬은 좁을지언정 몇 명이 지낼 정도는 되었고 식량도 적당했다.
무엇보다 흙이 있어서 텃밭을 만들 수 있다는 게 컸다.
비료만 가져오면 우리가 먹을 채소 정도는 재배할 수 있을 것이다.
지만이가 있으니 더 빨리 자라겠고.
여울이가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다가 바로 세웠다.
"아저씨 팀을 나누는 거 어때요? 한 팀은 육지에 가서 파밍하고, 한 팀은 섬에서 일하고."
"그러는 게 편하겠지?"
나와 준호, 도형이가 움직이는 게 낫지만 둘이 그걸 받아들일지가 의문이었다.
아무리 봐도 섬이 편하기 때문.
다행히도 둘은 의욕을 보였다.
"지만이 형이 여기에 있는 게 맞죠. 대신에 내일은 회를 좀 먹고 싶은데, 헤헤."
"형형, 여기 바다에 아나고가 좀 있다던데요."
지만이는 입가에 웃음을 머금곤 고개를 끄덕였다.
"생선은 얼마든지 잡아줄게."
뭐 그럭저럭 정리된 것 같군.
섬에 남아 작업할 사람은 지만이와 여울이로 결정되었다.
안전한 대신 그만큼 작업량이 많아 쉽게 볼 건 아니었다.
그냥 저녁 우리는 밥을 먹으며 앞으로의 일정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10월 초에 아마 헬스장 사람들이 올 거야. 며칠 안 남았네."
내 말에 여울이가 조심스럽게 입술을 뗐다.
"이야기는 많이 들었는데 어떤 사람들인지는 모르겠어요."
"다들 좋은 사람들이야. 왜 헬스장 사람들이냐고 부르냐면 처음 모여 있던 곳이 헬스장이었거든. 내가 아는 형님이 관장이었고."
"아항."
나는 헬스장 사람들에 더해 좀비 여왕까지 소개했다.
모두의 표정이 두려움으로 물들었다.
"그, 그런 사람이 왜 헬스장 사람들하고 있을까요?"
"글쎄···마음에 들었나보지."
나와 다정의 관계를 여기서 설명할 필요는 없겠지.
준호와 도형이는 철준네에게서 소문을 들었다며 호들갑을 떨어댔다.
"사람 잡아서 자기 부하좀비한테 던져준다던데요."
"밤에는 막 그 좀비들하고 광란의 그걸···한다는 소문도 있고요···"
"···"
무슨 생각을 했는지 여울이가 이마를 잔뜩 찌푸렸다.
이것도 다정의 업보다.
하도 깽판을 치고 돌아다니니 그게 다 악의의 소문으로 변한 것이다.
뭐 그런 걸 신경 쓸 사람은 아니지만.
내가 보기에 다정은 이 섬의 안정된 생활에 만족할 사람은 아니었다.
좀비들을 시켜서 일거리를 도와주다가 떠날 가능성이 높았다.
몬스터가 많아야 그녀의 특성이 빛을 발하거든.
다정과 함께 진주로 가는 건 좋은 방법이 아니었다.
좀비 여왕 곁에 들러붙어 있는 수상한 남자가 누구인지에 대해 소문이 날 것이다.
창원에 있으라고 해야겠어.
그 때 노트를 뒤적거리던 지만이 말했다.
"조만간에 파밍 던전이 열리겠네요."
"파밍 던전요?"
"그게 뭔데요?"
그게 벌써 열릴 시간이 됐나.
말하자면 내 차원문과 같다.
기간제이고 인원수에 제한이 없다는 것만 다를 뿐.
어디로 연결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파밍 던전이라고 부르는 것은 거기에서 다양한 것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게 없었다면 생존하기에 훨씬 더 빡빡했을 것이다.
지만이 대강 설명했고 애들 셋은 초롱초롱한 눈으로 그의 노트를 바라봤다.
"형 이거 노트···"
"방송 보면서 정리해둔 거야. 그렇게 많지는 않지만."
"누구 방송요?"
"김밥조아라고, 서바이벌 라이프 전문 방송을 한 사람이야. 되게 좋은 사람이었어."
아니 좋은 사람은 아닌뎁쇼.
그 후로도 지만은 나를 한껏 치켜세웠다.
다 좋은데 착하고 멋진 사람이라는 건 좀 빼줘···
< 섬과 던전 - 2 > 끝
< 섬과 던전 - 3 >
섬에 텃밭을 만드는 건 힘든 일이었다.
차원문 안의 숲과는 상황이 전혀 다르다.
여긴 철로 된 농기구도 없고, 풍뎅이는 언감생심 생각도 못 했다.
우리의 기술수준은 원시시대 이하.
그나마 나은 건 나 혼자가 아니라는 것 정도다.
다들 이 섬이 마음에 들었는지 의욕에 차 있었기에 그 점은 높게 평가할 만했다.
물론 의욕이 꼭 성공으로 연결된다는 보장은 없다.
아무튼 나는 아이들을 불러놓고 작업을 지정했다.
이런 상황에선 딱딱 할 일을 지정하는 게 효율에 좋다.
일을 먼저 끝내면 확실한 보상···휴식이나 음식을 주고 다시 작업에 투입해야 한다.
안 그러면 주둥이가 튀어나오는 걸 보게 된다.
"니들 둘이 육지에 먼저 나가서 파밍하는 거야. 도망치는 건 자신 있지?"
준호와 도형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급식 빨리 먹겠다고 뛰던 게 특성으로 발전한 경우라 참 웃기지만 이런 상황에선 매우 든든하다.
나는 쪽지에 텃밭을 만들고 어로활동을 하기 위한 물품 목록을 적어주었다.
"농기구는 없을 거지만 일단 플라스틱으로 된 거라도 가져와. 삽은 있을 거야."
"넵."
"그리고 그물하고 통발 꼭 챙기고. 통발은 모양이 망가져 있을 거지만 상관없어."
지만이의 특성이면 생선들이 나를 잡숴봐 하면서 들어올 것이다.
나는 목록을 다시 점검한 후 둘을 선착장으로 보냈다.
한번 육지로 나가면 최소 1시간이기 때문에 할 때 확실히 해야 한다.
죽어라 노 젓고 파밍했는데 뭐가 빠졌다고 또 다녀오라고 하면 기분 안 좋겠지.
미경이 있다면 블링크로 바로 다녀올 수 있는데···
하여튼 여러모로 헬스장 사람들이 생각나는 환경이었다.
나는 지만이와 여울이를 데리고 나무를 가리켰다.
"가지가 두꺼운 나무를 도끼로 만들 거야. 도끼 겸 쟁기 겸 호미라고 해야 되나."
"앞에 돌을 붙이는 거죠? 완전 원시인이네요."
여울이가 허탈하게 말했고 나는 정정해주었다.
"원시인 이하지. 우린 돌도 제대로 다룰 줄 모르잖아. 차차 배우는 수밖에."
"제가 영상 좀 봐놨어요."
지만이 나서더니 내 롱나이프를 빌려 나무 하나를 잘라가지고 왔다.
그리고 가지를 뭉텅 쳐낸 후 돌 두 개를 주워와 다듬기 시작했다.
여울이 오오, 하며 쪼그려 앉아 구경했다.
잘 하는데.
튼튼한 노끈으로 꽉 묶자 돌도끼 비슷한 도구가 완성되었다.
허술하게 보이지만 나름 나무도 벨 수 있고 땅도 팔 수 있는 유용한 도구다.
지만이는 그걸로 땅을 파기 시작했다.
"힘이 많이 들긴 하지만, 할 수 있어요."
"여울이는 힘쓰는 건 어려우니까 수풀하고 돌 정리해. 알겠지?"
"네. 근데 딩고는 뭐해요?"
왕.
딩고가 작게 짖었고 나는 녀석의 엉덩이를 톡톡 쳐주었다.
"돌아다니면서 몬스터 감시해."
딩고가 바로 뛰어가자 여울이 미덥지 않은 듯 뒷모습을 바라봤다.
"쟤가 말을 알아듣긴 할까요?"
"대충 돌아다니기만 해도 돼. 몬스터가 나오면 짖을 테니까."
"하긴."
작은 섬이라서 좀 돌아다니다 보면 산책 끝이다.
나는 일을 맡겨놓고 계류장에 정박되어 있던 보트를 탔다.
하늘이 꾸물꾸물한 것이 비가 올 것 같아 대야를 많이 가져올 생각이었다.
섬에 생수가 꽤 있지만 물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텃밭에 줄 것도 필요하니.
무념무상으로 노를 젓다 보니 육지에 도착했다.
몇몇 좀비들이 반겼지만 나는 무시하고 보트를 선착장에 댔다.
돝섬 쪽을 망원경으로 보니 지만이와 여울이가 장난을 치는 게 보였다.
"쟤들 정들겠네."
지만이가 20살, 여울이가 18살인가?
커플이 되어도 이상하지 않은 나이다.
나 좋다는 건 몬스터밖에 없네.
업보로다.
나는 달려드는 좀비를 발로 까버리고 마트를 향해 뛰었다.
.
.
.
던전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흔히 어둠 속의 좁은 공간을 생각한다.
서바이벌 라이프에서의 던전도 크게 다르진 않았다.
소굴보다는 크고 미궁보다는 작은, 준비가 필요한 뭐 그런 공간이다.
하지만 파밍 던전이라고 하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차원문을 통해 넘어가는 이세계.
그게 파밍 던전이다.
안에 뭐가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숲, 바다, 늪지대, 산, 사막, 황무지 등 온갖 지형이 유저를 기다린다.
생태계도 각양각색이고 심지어 나뭇잎의 모양까지 세심하게 구현되어 있다.
이렇게 좋은 파밍 던전이지만 제한이 있다.
한번 들어갔다가 나오면 그 던전에 한해서는 다시 들어가지 못한다.
그래서 파밍 던전은 베이스 캠프를 차려놓고 거기에 물자를 비축한 후 한꺼번에 반출하는 게 상식으로 되어 있었다.
가끔은 유저끼리 만날 때도 있었는데 대부분은 협력했다.
안의 생태계는 꽤 거칠어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생존이 어렵기 때문.
"좋은 던전이 나오면 고정시켜야 돼."
파밍 던전은 기본적으로 랜덤이다.
나올 때마다 지형이 랜덤으로 바뀌는데 이걸 고정시키는 방법이 있다.
아이템을 하나 두고 나오는 것이다.
버그인지 뭔지 아이템을 두고 나오면 마지막 열렸던 파밍 던전이 다시 열린다.
내 경험상 사람이 4,5명 정도 되면 주변에 하나는 반드시 나타난다.
"섬이라서 독식할 수 있는 게 좋네."
던전이 열리는 주기는 1,2달 정도로 적당한 편이었다.
만약 파밍 던전이 없었다면 모든 캐릭터가 굶어 죽었을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도시에서 파밍할 게 없어지니까 농사를 해야 하는데 거기까진 구현되어 있지 않았거든.
"상점빵 먹고 살 수는 있겠지만···"
그걸 삶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나는 파밍 던전에 관련된 영상 몇 개를 재생했다.
지금 보니 열리는 차원문이 내 차원문과 거의 비슷했다.
그러니까 같은 세계일 가능성이 높다.
차원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우르르 들어갔는데 내 쉘터가 보이면 매우 곤란해진다.
"이거 완전 황금고블린 둥지잖아."
200평쯤 되는 내 쉘터엔 온갖 종류의 비축물자가 쌓여 있다.
심지어 오토바이와 ATV, 미니 포크레인까지 존재한다.
당장은 못 쓰겠지만 아이템으로 위치를 고정해두고 계속 열리게 하면 철사병이 가라앉았을 때 쓸 수 있다.
"···생각보다 더 위험한데."
내 쉘터를 본 순간 사람들의 눈이 뒤집어질 것이다.
공성전이 벌어질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해자와 윤형철조망의 방어력은 꽤 높지만 사람 몇 명이 달려들면 돌파하는 건 그리 어렵진 않다.
사실 물리적인 위협보다는 사람들의 인식이 바뀌는 게 더 위험했다.
저 새끼는 남들이 죽어나갈 때 혼자 여기에 쉘터 차려서 잘 먹고 지내고 있었구나.
이런 식의 소문이 금방 퍼질 거고 나는 공공의 적이 되어버릴 것이다.
지금도 공공의 적이지만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나를 적대하는 건 이야기가 좀 다르지.
"뭐 그리 쉽게 발견되진 않겠지만."
이세계가 얼마나 넓은지는 아무도 모르니까 이런 걱정은 부질없다.
나는 동굴에서 나와 부두를 향해 뛰었다.
파밍도 적당히 했고 이제 섬으로 갈 셈이었다.
오크 하나가 고블린들을 대동하고 위풍당당하게 나타났다.
녀석이 돌도끼를 바닥에 찍으며 괴성을 지르자 고블린들이 용기백배하여 달려들었다.
"해보자 이거냐?"
나는 주변 건물의 로프를 잡고 옥상에 올라가서 엘더우드 롱보우를 튕겼다.
화살 하나에 어김없이 고블린 하나씩 쓰러졌다.
"나도 성장하긴 한 모양이야."
오크는 부하들이 쓰러지자 화가 난 듯 주변의 기물을 내게 던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명중률은 낮아 어렵지 않게 피할 수 있었다.
"너한테는 왜 화살 안 쏘나 이거지?"
시위를 튕기자 오크의 어깨에 화살이 박혔다.
녀석은 분노해 건물로 달려와서는 창틀을 딛고 오르기 시작했다.
마치 킹콩 같군.
나는 끝까지 기다리다가 에메라스 창을 꺼내 이마에 조준했다.
오크의 눈이 커졌다.
"선물이다!"
체중을 실어 힘껏 내려찍자 오크가 바닥에 쿵 떨어졌다.
크워억!
오크는 발광했고 나는 위에서 아다만트 화살을 시위에 걸어 쏘기 시작했다.
엘더우드 롱보우의 위력에 관통력 향상이 더해지니 오크의 피부가 뻥뻥 뚫렸다.
마침내 머리에 두 발의 화살이 박히자 오크는 더 견디지 못하고 축 늘어졌다.
나는 마지막으로 창을 투척했다.
"흡!"
그동안 연습한 보람이 있어 오크의 가슴을 꿰뚫는데 성공했다.
질긴 생명력을 자랑하던 오크가 드디어 죽었고 포인트를 남겼다.
남은 고블린 두 마리는 벌써 도망갔다.
궤적이 보였지만 고블린 두 마리를 추적하기는 좀 그렇지.
"역시 포인트 말고 아무것도 안 주네."
오크와 같은 몬스터는 동레벨이 되면 스킬과 아이템을 드랍하지 않는다.
늑대인간은 레벨이 20이니까 한동안은 괜찮을 것이다.
화살을 뽑고 뒷정리를 하는데 몇 명의 사람이 건물 밖으로 나왔다.
"성호씨. 잠깐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요?"
누군가 했더니 철준네로군.
접촉은 없었지만 나는 저들의 존재를 들어서 알고는 있었다.
그 반대도 성립하겠고.
나는 안쪽의 가게를 가리킨 후 그들이 들어가자 입구 쪽에 자리를 잡았다.
남자 둘, 여자 둘이 나를 신기한 얼굴로 쳐다봤다.
리더인 듯한 젊은 남자가 말했다.
"철준 형님하고 유주씨는 아시겠고, 저희와는 초면이죠? 저는 이상철이라고 합니다."
"저는 이상희요."
뒤이어 말한 여자는 내게 부담스런 미소를 보냈다.
이름이 비슷한 걸로 봐서 남매인가?
상철이 고개를 숙이기에 무슨 일인가 했더니 전에 경고성 쪽지 보낸 걸 미안해했다.
"그 때는 제가 성호씨를 잘 몰라서···"
"뭐 괜찮습니다. 실질적으로 피해를 입은 건 아니니까."
피해를 입으면 가만있지 않겠다는 소리다.
상철이 다시 말했다.
"방금 오크 잡는 거 봤는데 정말 굉장하시더군요. 위에 올라가서 잡으려고 로프를 설치해두신 겁니까?"
"예, 뭐. 나중에 늑대인간이 나타나더라도 요긴하게 쓸 수 있으니까요."
"저희도 뒤늦게 로프를 몇 개 설치하긴 했는데 너무 어려웠어요."
유주가 손을 탈탈 털었다.
하긴 그 작업은 블링크나 지형극복 특성이 있어야 수월하다.
설치하는 것 자체도 어려운데 몬스터의 방해도 보통은 넘었다.
그런데 이 사람들 하고 싶은 말이 뭘까?
내가 눈으로 재촉하자 상철이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최근에 이 주변에서 수상한 일이 연달아 일어나서 말입니다. 살인자 이벤트는 뭐 그렇다 치는데 종사모 사람들까지 갑자기 사라졌죠."
"종사모 사람들이 사라졌다고요?"
"모르시는 모양이네요. 네. 말 그대로 하루아침에 사라졌습니다. 도통 안 보여서 아지트에 가봤더니 인기척이 없더군요."
"···살인자한테 습격당한 거 아닙니까?"
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아마 그렇겠죠. 살인자가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이 근처에 있는 건 분명합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저희와 연합해서 대항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결국 이 얘기를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범인한테 와서 이러다니 참 아이러니하군.
상희가 내게 상체를 기울였다.
"오다가다 하면서 성호씨 쭉 지켜봤어요. 실력이 대단하시던데 어떠세요···우리 잘 통할 것 같은데."
"같이 지내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학생들 요즘 통 안 보이던데요."
"아지트를 옮겼거든요."
"어디로···아, 돝섬 거기구나. 왠지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더니."
"돝섬에 갔다고요?"
사람들이 놀랐다.
상희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이해가 안 되는지 내게 물었다.
"거기 있어 봐야 할 수 있는 게 없지 않아요? 물자도 없고 파밍도 어려운데."
"나름대로 방법이 있죠."
"상희야, 잠깐만. 거기 들어가면 좀비 레이드에서 괜찮은 거 아닙니까? 살인자한테서도 안전하고."
"그 가능성 때문에 우리가 점유한 거죠."
나는 점유라는 단어를 강조했다.
돝섬에 주인이 있는 건 아니지만 먼저 점령했으니 다른 사람이 오면 불편합니다, 라는 의사를 전달한 것이다.
그걸 알아들었는지 철준과 유주의 표정이 다소 어두워졌다.
상철이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다가 쓰게 웃었다.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플라스틱 보트도 있으니까 노 저어가면 그만인데."
"돝섬에 아무것도 없잖아."
"그래서 좋은 거야. 몬스터가 없거든. 식량이야 보트로 실어 나르면 되는 거고. 하···아쉽네."
상희가 나를 보곤 입술을 삐죽였다.
"근데 섬에 들어가면 되게 심심하겠어요. 하루 종일 뭐해요?"
"나름 바쁩니다. 텃밭도 만들어야 하고요, 낚시도 해야죠."
"그렇구나···그래도 밤에는 심심할 텐데···성호씨 저는 어떠세요?"
그녀가 내 눈을 보며 입술을 달싹였고 주변 사람들이 민망해 했다.
대놓고 말하는 여자는 또 처음이군.
하지만 난 그녀에게 관심이 없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여자와 특별한 관계가 되는 게 귀찮았다.
혼자 할 일도 많고 바쁘게 움직여야 하는데 달라붙으면 좀 그렇지.
나는 배낭을 둘러메고 물었다.
"얘긴 다 끝난 거죠? 먼저 가겠습니다."
떠나려 하자 철준이 급히 말했다.
"잠시만요. 성호씨한테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었는데···지금 운동장 쪽에서 사람들이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마산에서 운동장이라고 하면 야구장을 의미한다.
여기서 북쪽이고 꽤 가깝다.
"혹시 클랜 사람들입니까?"
"창원에서 가장 큰 클랜 사람들이랍니다. 왜 돌아다니는지는 모르겠는데 성호씨도 조심하셔야 될 것 같습니다."
"고맙습니다."
누가 오든 상관없지만 대답은 이렇게 해야지.
나는 답례로 파밍 던전이 곧 열린다고 가르쳐주었다.
"그게 지금 열린다고요?"
"서바이벌 라이프에선 오크 출현 이후로 나왔잖습니까. 확정적으로 말은 못하지만 시기는 대충 지금이죠."
그 말을 들은 상희가 상철의 어깨를 퍽퍽 때렸다.
"오빠 그거 봤다고 했잖아. 완전 원시 생태계 영상. 미튜브에 있던 거."
"아, 그랬지. 근데 그거 제대로 못 봤는데. 그 아저씨 목소리가 워낙 졸려서···"
"김밥조아 그 사람?"
"그랬나? 하여튼 목소리 들으니까 잠이 슬슬 오더라고. 지금은 기억도 안나."
···내 방송을 수면제로 쓰다니.
뭐 시청자들 사이에서도 종종 나오는 얘기이긴 했다.
나는 화끈거리는 얼굴을 감추며 밖으로 나갔다.
뒤에서 상희가 은근히 말했다.
"혹시 파밍 던전에서 만나면 아는 척해요."
글쎄요. 상황 봐서.
나는 보트를 타고 돝섬으로 향했다.
애들이 작업을 하다 말고 토끼장을 구경하고 있었다.
"귀여워어···"
여울이가 콧소리를 냈다.
귀엽지? 곧 잡아먹을 거란다.
.
.
.
그날 저녁.
우리는 식사를 마치고 파밍 던전에 들어가기 위한 준비를 끝냈다.
이렇게 설레발을 치지만 막상 차원문이 안 나타날 수도 있다.
그러면 육지로 가서 찾아봐야 하나 고민하는데 산책을 갔던 딩고가 왕왕 짖으며 뛰어왔다.
"어? 몬스터는 아닌데?"
다들 딩고의 짖는 소리에 익숙해진지라 어느새 의미를 구분할 줄 알게 되었다.
이건 몬스터가 아니라 낯선 게 나타났다는 경계의 뜻이다.
녀석을 따라 안내센터에 가보니 푸른 차원문이 떡하니 나타나 있었다.
애들이 팔을 올리며 환호성을 질렀다.
"오예!"
"우효!"
어떤 곳인지도 모르는데 기뻐하긴 일러.
나는 딩고와 애들을 제지한 후 조심스레 차원문에 손을 집어넣었다.
싸늘한 공기가 느껴졌다.
이거 점점 불안해지네.
숲도 겨울이 끝나긴 했지만 아직은 춥다.
"아저씨 빨리요."
여울이의 재촉에 나는 차원문 안에 몸을 들이밀었다.
응?
여긴 또 어디야.
< 섬과 던전 - 3 > 끝
< 협력하거나 반목하거나 - 1 >
내가 한 발을 디딘 곳은 눈으로 덮인 세상이었다.
깎아지른 듯한 기암괴석이 수십 개나 자리 잡았고 끝에는 안개로 된 모자를 썼다.
발밑에는 눈 사이로 시릴 듯한 물이 졸졸 흐르고 있었다.
"여기 장가계네."
지형이 비슷해서 우리 고인물들이 붙인 별명이다.
비행형 몬스터만 조심하면 크게 위험할 건 없다.
아, 살을 에는 추위도 위험하지.
내 쉘터가 있는 숲과 비교하면 여기가 훨씬 더 춥다.
아직 겨울이 다 지나지 않았나?
호기심을 이기지 못했는지 여울이의 머리가 차원문을 뿅 뚫고 들어왔다.
"우와···아저씨 여긴 어디에요?"
"나도 모르지."
여울이는 길게 숨을 들이쉬고는 머리를 부르르 떨었다.
"되게 춥다···여기 뭐 있어요?"
"나도 잘 모른다니까."
아주 잘 알지만 여기서 말하기엔 좀 그렇지.
안개 사이로 뭔가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뀌아아악―
후하후하 숨을 들이쉬던 여울의 얼굴이 굳어졌다.
"바, 방금 소리 들으셨어요?"
"아무래도 하늘을 나는 몬스터가 있는 것 같다."
"위, 위험하지 않아요?"
"위험하지. 그걸 이겨내야 고기를 먹을 수 있는 거야."
비단 고기뿐만이 아니라 여러 자원도 얻을 수 있다.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전에 사람들한테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이 문은 한 번씩만 이용 가능하다고 그러더라."
"들어간 다음에 나가면 다시는 못 들어간다 이거죠?"
"그래, 다음에 차원문이 또 열릴 때까지. 유지되는 시간은 3,4일 정도라고 그러네. 애들한테 물어봐줄래?"
"잠시만요. 아, 이거 얼굴 빼도 되죠?"
"몸이 완전히 들어온 게 아니라서 괜찮을 걸?"
실은 나도 몸 반만 이세계에 담그고 있다.
영 아니다 싶으면 빼야지.
이윽고 여울이가 다시 얼굴을 내밀었다.
"좀 위험해도 해보고 싶대요."
"그럴 줄 알았어. 다 들어오라고 해."
주변 해안의 FRP보트는 다 수거해둔 상태였기에 섬에 침입자가 들어올 걱정은 없다.
이윽고 애들이 커다란 배낭을 두 개씩 가지고 들어왔다.
"어으, 춥다!"
"여긴 완전 겨울이네!"
벌벌 떠는 셋과 달리 지만이는 의외로 잘 적응했다.
하긴 그에겐 일상이나 다름없을 테니.
"여긴···그리폰 던전이네요."
"그리폰이면 날개 달린 몬스터 말하는 거지?"
"네. 무지 위험해요. 그래도 그만큼 파밍할 건 많아요."
"비행형 몬스터는 처음인데 어떨지 모르겠어요···"
"위에서 막 덮쳐서 우리 잡아가는 거 아냐?"
그거 맞아.
봉우리 끝에 안개가 걸쳐져 있어서 미리 발견하는 것도 쉽지 않다.
나는 동동 뛰는 애들을 모았다.
"진정하고, 일단 우리가 할 일은 베이스 캠프를 만드는 거야. 이 차원문이 보이는 곳이어야 돼, 알겠지?"
"3,4일 정도 지나면 차원문이 사라지니 그 전에 나가야 돼요."
역시 불쌍맨은 잘 아는군.
여울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못 나가고 차원문 닫히면 어떻게 해요?"
"어쩌긴, 갇히는 거지. 다음에 운 좋게 차원문이 열릴 때까지."
파밍 던전을 고정시키는 방법이 있어서 실제로는 그렇게까지 오래 있지 않아도 된다.
길어야 1,2달···
토공 같은 경우는 일부러 들어가서 몇 개월 동안 혼자 지내기도 했다.
하지만 이건 게임이 아니고, 다들 토공이 아니었기에 질린 얼굴이었다.
"왜, 괜히 들어온 거 같아?"
내가 셋을 둘러보며 묻자 여울이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아뇨. 여기서 한 밑천 챙겨야 돼요. 우리 먹을 거 없잖아요."
좋은 마음가짐이다.
사실 식량은 적당히 있지만 다들 고기를 먹고 싶어 했다.
우리는 몰려다니며 베이스 캠프로 쓸 만한 곳을 찾았다.
바닥이 워낙 축축해서 텐트를 설치하기조차 까다로웠다.
동굴이 있으면 좋겠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절벽에서 움푹 들어간 지형이 나왔다.
"안까지 대략 7미터쯤 되는 것 같은데. 여기 괜찮지?"
"바닥이 건조해서 딱이네요."
무엇보다 천장이 막혀 있어 그리폰의 습격을 막을 수 있다는 게 컸다.
차원문도 조금이지만 보이고.
우리는 텐트를 치고 얇은 매트리스를 깔았다.
"주변에서 나뭇가지 긁어 와, 불 피우게."
"옙."
그렇게 불을 피우고 옹기종기 모여 있으려니 다들 캠핑 같단다.
"구워먹을 고기만 있음 딱인데."
"고기를 구하려면 역시 사냥을 해야지."
"지만이 형이 있으니까 동물을 찾기만 하면 되잖아? 형, 특성 사거리가 얼마에요?"
"어? 그건 확인을 못 해봤는데."
"나중에 같이 가서 확인해 봐요."
"막 동물이 먹어달라고 오는 거 아냐?"
"그럼 짱인데."
입을 닫고 있으려니 자기들끼리 사냥 계획을 세우고 난리였다.
지만이는 내 눈치를 봤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들끼리 움직일 때도 있는 거지.
언제나 내가 뒤를 받쳐줄 수는 없다.
의기투합한 남자 셋이 사냥을 가기로 했고 나와 여울이는 베이스 캠프를 지키기로 결정이 났다.
남자애들이라 그런지 모험심이 강하군.
나는 쉘터에서 가져온 감자를 꺼내 구웠다.
"이거 먹고, 주변 잘 살펴봐. 혹시라도 사람 있으면 돌아와서 알려주고."
"우리 말고 사람도 있어요?"
"랜덤이니까···그 유명한 토끼공듀가 튀어나올지도 몰라."
"토끼공듀라는 그 사람 진짜 만나고 싶던데."
"며칠 전에 철준이 형이 말하던데 지금 진주에 있다네요."
나도 거기까진 안다.
대체 진주에서 뭘 하고 있는지 그걸 몰라서 그렇지.
간다간다 하는데 어째 계속 늦어지는군.
파밍 던전만 끝나면 섬을 애들한테 맡겨두고 진주로 가야겠다.
감자가 다 구워졌고 나는 종지에 설탕을 담아서 내놓았다.
여울이가 물끄러미 나를 쳐다봤다.
"아저씨는 진짜 신기해요."
"뭐가?"
"감자 이런 거 어디서 구하세요? 저희는 마산에서 계속 있었는데 구경도 못 했어요."
그야 쉘터에서 재배한 거니까···
나는 지만이를 핑계로 댔다.
"지만이가 있던 마을에 이걸 심어놨더라. 이게 전부야."
"으흠."
"자, 잔소리 말고 두 개씩 먹어."
"잔소리 아니에요."
그 때 어디선가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우우우우―
늑대인지 다른 동물인지 모호한 소리에 다들 흠칫했다.
그러다가 지만을 보고는 어깨를 폈다.
"형이 있으니까 안심해도 되죠?"
"근데 너무 큰 동물은 안 될지도 몰라. 고라니까지는 되는 거 확인했는데."
여기 늑대는 고라니보다 훨씬 클 테니 문제가 되겠군.
나는 애들에게 너무 날뛰지 말고 조심조심 탐험하라고 주의를 주었다.
세 명은 감자를 순식간에 먹어치운 뒤 옷을 단단히 챙겨 입고 떠났다.
나와 여울이는 뒷정리를 하고 짐을 풀었다.
사실 탐험보다는 캠프에서 할 일이 더 많다.
"여울아, 나무창 만들자."
"어떻게요?"
"나 따라하면 돼. 일단 이런 곧은 나무를 쳐서."
나는 지만이가 만든 돌도끼로 나무를 두 개 팼다.
계곡에 퍽, 퍽 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곧이어 나무가 쓰러졌고 나는 롱나이프로 가지를 친 다음 캠프로 끌고 왔다.
그리고 여울이에게 미스릴 나이프를 건넸다.
"나무를 손으로 딱 잡고 이 칼로 때 밀듯이 미는 거야. 날카로우니까 조심하고."
여울이는 몇 번 나무를 벗겨 보더니 감을 잡았다.
"이거 되게 쉽네요?"
"미스릴 나이프라서 그래."
"상점에서 얼마나 해요?"
"150포인트."
"엑. 좀비 하나 잡으면 2포인튼데."
"원래 100포인트였다네. 이번에 올린 거야."
"짜증나. 누가 올린 거예요?"
"그걸 알면 내가 이러고 있겠니."
우리는 나무를 뾰족하게 깎은 후 불에 넣어 표면을 구웠다.
"속이 타면 오히려 약해지니까 조심해. 겉만 살짝 태우는 거야."
"김 굽듯이 말이죠?"
잘 아는구만.
그렇게 나무창 몇 개가 완성되었다.
다음으로 필요한 것은 곡괭이다.
나중에 발광석이나 점화석이 포함된 땅을 발견할 수도 있기 때문.
돌 가져오고 나무를 잘라서 고정시키는 등 힘든 작업이 계속되었음에도 여울이는 불평 하나 하지 않았다.
저 자그마한 손으로 돌을 깨는 게 안쓰러웠지만 도와줄 생각은 별로 없었다.
방법을 가르쳐줬으니 스스로 해야 한다.
여울이가 낑낑대는 사이 나는 곡괭이를 완성하고 주변을 살폈다.
환경은 축축하지만 적당히 흐르는 물이 있어서 좋다.
먹을 것은 충분히 준비해놨고 이제 자원과 보존식량을 구해야 한다.
혹멧돼지 하나 잡으면 참 좋겠는데.
근데 여기에도 혹멧돼지가 있나?
갑자기 답답해져서 정찰을 갈 걸 하는 후회가 살짝 몰려왔다.
하지만 베이스 캠프를 지키는 것도 중요해서 어쩔 수가 없었다.
저 안개 위에선 그리폰이 날아다니겠지···
둥지에 가면 알과 새끼를 얻을 수 있지만 우리 전력으론 무리였다.
기암괴석을 기어 올라가는 것은 암벽등반과 비슷한 난이도다.
안전장치 하나 없이 말이지.
그렇게 생각하고 돌아서는데 큰뿔산양 한 마리가 수풀을 헤치고 다가왔다.
녀석은 더 접근하지는 않고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여울아, 활 좀 가져다줄래?"
100파운드 사냥활을 말하는 것이다.
그녀가 조심스레 활과 활집을 갖고 나와 내게 건넸다.
그리고 내 등에 숨어서 빼꼼 산양을 쳐다봤다.
"우와···엄청 커요···근데 저거 큰뿔산양이라고 이름이 적혀 있네요?"
"쉿, 목소리 낮추고. 맞출 자신 없지?"
여울이가 내 등에 대고 고개를 끄덕였다.
간지럽잖아.
나는 산양이 놀라 달아나지 않게 시위에 화살을 걸었다.
머리에 쏘는 건 바보짓이고 주요 장기를 노려야 한다.
심장이나 폐에 화살이 꽂히면 1분 이내로 쓰러지지만 그건 운에 가깝다.
피를 흘리게 만들어서 사냥감을 추적하는 것이 정석이다.
나는 시위를 놓으려다가 갑자기 들이닥친 바람소리에 깜짝 놀랐다.
후우우우!
마치 태풍이라도 일어난 듯 주위에 바람이 맹렬하게 몰아쳤다.
나는 돌아서서 여울이를 껴안으며 자세를 낮췄다.
"아저씨!"
"쉿, 뭔가 온다!"
이윽고 안개를 뚫고 낙하하는 커다란 존재가 있었다.
그리폰.
독수리의 머리에 네 발 육식동물의 몸을 가진 몬스터가 앞발톱으로 산양을 낚아챘다.
덩치가 어마어마해서 앞다리가 산양과 비슷할 정도였다.
산양은 반항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끌려올라가 안개 위로 사라졌다.
남은 건 회오리바람에 몸서리치는 나뭇잎뿐이었다.
"···방금 그거 그리폰이죠?"
"그런 것 같네."
왕년에는 그물과 에메라스 창만 가지고도 그리폰 한 마리 뚝딱했는데.
물론 그 때는 1티어 스킬로 상태창을 가득 채웠으니 가능한 일이었다.
기본 스탯은 17 정도가 한계지만 부스팅을 받고 스킬 보정을 받으면 30에 육박한다.
그쯤 되면 정말 영화에서나 나오는 초인들의 움직임이 가능해진다.
우리가 맨손으로 몬스터를 때려잡는 것도 그런 뒷받침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토끼공듀와 오리궁뎅이는 더 아크로바틱한 움직임을 선보이지만.
아무튼 여울이는 갑자기 그리폰을 봐서 겁이 났는지 텐트에 숨었다.
그리고 탐험을 나갔던 세 명이 헐레벌떡 돌아왔다.
그리폰 때문에 저렇게 급한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형, 여기 좀비 있어요."
"좀비?"
좀비가 있을 곳이 아닌데?
다른 몬스터와 달리 좀비는 베이스가 되는 인간이 있어야 비로소 리젠된다.
여기 우리와 같은 인간이 살았었나?
"그것도 엄청 많아요. 무슨 일인지 저희를 공격하지는 않았지만."
지만이는 좀비 치고는 옷차림이 꽤 깔끔하다고 보고했다.
옷차림이 깔끔한 좀비라···
왠지 누군가 생각나는데.
"지만이하고 도형이는 여기에 있고, 준호 니가 앞장서라."
"옙. 천천히 갈게요."
"적당히 뛰어도 돼."
"형 못 따라오실 건데. 특성 아시잖아요."
"시끄럽고 빨리 뛰어."
내가 재촉하자 녀석은 에라 모르겠다 질주하기 시작했다.
나는 녀석의 뒤를 쫓아 뛰었다.
지형극복 특성은 없지만 전체적인 스펙이 상당히 높아서 어렵지 않게 쫓을 수 있었다.
뒤를 돌아보던 준호가 말도 안 된다며 중얼거렸다.
"와, 진짜. 형 어찌 그리 잘 뛰어요?"
"살이 많이 빠져서 그런가보네."
"형 제가 봤을 때는 딱 좋은 체형인데. 어깨 떡 벌어지고."
"원래는 돼지였어."
"진짜요? 완전 대박."
뭐 돼지까지는 아니더라도 종말 전의 내가 날씬하다곤 죽어도 말 못한다.
아무튼 우리는 좀비들을 발견했다는 지형으로 접근했다.
호수 옆에 커다란 나무가 쓰러져 있었는데 어찌나 큰지 텐트가 두어 개 들어가 있었다.
준호가 흥분한 채 말했다.
"저기요. 저기 좀비들이 여자를 둘러싸고 있어요."
이런.
좀비들의 정체는 다정의 부하였다.
그녀가 좀비 의자에 앉아 호수를 노려보고 있었던 것이다.
나무 안의 텐트는 헬스장 사람들 건가?
이렇게 파밍 던전을 공유하는 것도 참 이상한 일이다.
나는 준호의 어깨를 툭툭 치고 다정에게 접근했다.
좀비들이 살짝 흥분했지만 다정의 명령에 길이 열렸다.
"뭐야. 당신 너무 당당하게 다가오는데? 어라? 이게 누구야."
"누구긴, 나지."
다정은 날 보더니 벌떡 일어서선 달려왔다.
갑자기 도망치고 싶어지네.
.
.
.
"어서 오십시오."
"하하, 반갑습니다. 내가 장원택입니다."
정부 베이스 캠프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정찰에 의하면, 무려 수십 명이 이 계곡에 들어왔다고 한다.
원 게임을 해본 유저들은 파밍 던전이 이렇게 붐비는 건 처음이라며 놀라워했다.
"원래 파밍 던전은 말입니다, 소규모로 들어가서 파밍만 하고 나오는 거죠. 이렇게 개떼처럼 몰리는 게 아니라."
"그렇죠···그래도 좀비가 없으니까 그건 좋네요."
"대통령님 인기 많으시네."
"종말 이후로 처음 만나는 거 아닙니까? 티비에서의 발표 그게 효과가 컸어요."
"자신의 의무를 끝까지 다하는 대통령···멋지잖습니까."
"하긴 저도 처음엔 그거 때문에 들어왔으니···"
플라스틱 의자에 앉은 배검인의 주위에서 사람들이 잡담을 떨어댔다.
다들 정부의 베이스 캠프가 여기에 있는 건 어떻게 알았는지 꾸역꾸역 몰려들었다.
하긴 특수능력 하나쯤은 있는 사람들이니까 소문이 퍼지는 것도 금방이다.
정부의 베이스 캠프는 이 파밍 던전에서 가장 큰 세력이었다.
'마음에 안 들어.'
배검인은 시무룩한 채 의자에 앉아 있었다.
원래 계획은 이게 아니었다.
좀처럼 자신에게 마음을 열지 않는 몇몇 능력자를 파밍 던전에 데리고 들어가서 인맥을 형성하는 게 그의 목적이었다.
하지만 이게 웬걸.
처음 열린 파밍 던전은 그리폰의 서식지로 엄청난 대규모였다.
수십 명이 들어왔다는데 검인의 추측으론 최소 100명을 넘을 것 같았다.
당장 여기에 있는 사람만 30명인데.
"오리궁뎅이도 여기 들어왔답니다!"
누군가 크게 소리치자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다들 그녀의 위치가 어디인지 알아보기 바빴다.
"호수 근처래요."
"사람들 몇 명하고 같이 있다는데요?"
"다 떨거지들이지. 우리가 나서면 따라올 겁니다."
"말은 되게 잘하시네."
"좀비들 때문에 외부인은 접근하지도 못한다는데 그게 될지 의문이네요."
"한번 가보지 그러세요?"
"지금은 사람들 만나기 바빠서···"
웃기는군.
검인은 그들을 비웃었다.
저들 중에선 경매장에서 서로 쌍욕을 하며 싸운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다들 인사를 하긴 했는데 서먹서먹했다.
장원택은 오리궁뎅이를 비롯한 고인물들에게 관심이 있는 모양이었다.
"호수에 있다라···한번 가봐야겠는데요. 혹시 김밥조아님은 보셨습니까? 누구 찾으신 분?"
그가 크게 외쳤지만 다들 고개를 저었다.
"그 사람은 아무도 모릅니다."
"랭킹 보면 어딘가에 숨어 있을 걸요."
"그 새끼."
누가 농담조로 말했지만 아무도 웃지 않았다.
여긴 익명성이 있는 경매장이 아니라 현실이다.
얼굴을 드러내고 말하는 건 상당한 위험부담을 지는 것이다.
당장 여기에 김밥조아가 없다고 누가 장담하는가?
"여기 김밥조아 있으면 아저씨 첫빠따로 죽으시겠네."
"내, 내가 지어낸 말이 아닌데요. 자기가 그렇게 써놓은 건데."
"그거야 사람들이 워낙 욕하니까 욱해서 랭킹에 박은 거죠."
"다들 경매장에서 김밥조아 실컷 욕했잖아요? 안한 사람 있어요?"
"전 안했습니다."
"나도요."
"어째 전부 욕 안했다고 하네. 그럼 경매장에서 욕한 놈들은 다른 곳에 있는 건가?"
검인은 한숨을 쉬며 일어났다.
"그쯤 합시다. 결론도 안 나는 걸 가지고."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 모였다.
계획에는 어긋났지만 이 또한 기회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지도력을 증명한다면 따를 사람은 많을 것이다.
검인은 자신감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폰 잡으러 가실 분 모십니다. 선착순 아홉 명."
< 협력하거나 반목하거나 - 1 > 끝
< 협력하거나 반목하거나 - 2 >
나는 헬스장 사람들과 만났다.
반가움에 앞서 다정을 제외하고 다들 옷차림이 가벼웠다.
무슨 일인가 했더니 창원터널을 지나는 중에 파밍 던전이 떠서 어쩔 수 없었다고.
"던전 포기하고 그냥 갈까 했는데 다정 언니가 들어와 버렸어요."
미경이 내게 달라붙어서 징징댔다.
이 목소리도 오랜만이네.
나는 모두와 인사를 나눈 다음 호숫가에서 서성거리고 있던 준호를 데려와 인사시켰다.
"마산에서 합류한 학생 중 한명입니다."
"박준홉니다! 특성은 파쿠르고요!"
"이야, 파쿠르도 특성이 있었네. 그나저나 다른 애들도 있는 것 같던데?"
"지금 베이스 캠프에 있습니다.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그쪽으로 가시는 게 나을 것 같은데···어떠세요?"
"성호씨 거기 가면 옷 좀 있어요? 추워 죽겠어요."
수연이 텐트에서 나와선 발을 동동 구르며 입김을 호호 불었다.
"일단 이거라도 입으세요."
나는 바람막이를 벗어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한결 편한 표정이 된 수연이 내게 웃어보였다.
"미안해서 어쩌죠? 성호씨도 추울 텐데."
나는 그녀의 미소를 본 순간 왜 상희에게 시큰둥하게 굴었는지를 알게 되었다.
예전에 같이 있을 때는 별 생각 없었는데 오랜만에 보니까 굉장한 미인이다.
준호는 그녀를 보자마자 넋을 잃고 메르시라고 중얼거렸다.
"그 소리 한 열 번쯤 들은 것 같아요."
수연이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김해에 있을 때에도 이런저런 일들이 있었던 모양.
다정이 내게 와서 말했다.
"강성호씨. 우리 버리고 혼자 마산에 가더니 뭐 좀 소득은 있어요?"
"도망이라니요. 먼저 아지트를 물색하러 간 건데."
"그래서 결과 어디?"
"그건 나중에 설명 드리죠."
원래 우리는 반말을 했지만 사람들 앞에선 이렇게 대화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우리 베이스 캠프 주위에 차원문이 있다고 말해두었다.
차원문이 아지트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까지 언급하자 헬스장 사람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형준 형이 내게 물었다.
"근데 성호야, 우리가 거기 가도 되냐? 너희 몇 명인데?"
"저까지 해서 네 명이고, 다정 씨까지 포함하면 총 아홉 명이네요."
"야야 그럼 좀비 레이드가···"
"없을 겁니다. 섬이라서."
"섬? 아, 마산에 섬이 하나 있었지···"
"지금 저희는 보트로 육지에 들락날락하고 있는데, 미경씨가 도와주면 움직이기가 편해질 겁니다."
"그러니까 살림을 합치자는 말이네? 다른 사람들 생각은 어때요?"
"괜찮은데요."
"우리 터널 벗어나려면 한참 걸어야 되잖아요. 그냥 마산으로 가요오."
다들 긍정적인 반응이었다.
파밍 던전이 뜻하지 않게 텔레포트 역할을 하게 되었다.
형이 결론을 내렸다.
"볼 것도 없네. 텐트 친 게 아깝겠지만 다시 걷읍시다. 조금만 가면 성호네 베이스 캠프랍니다. 거기 가서 얘기합시다."
"그렇게 해요."
나는 텐트를 걷는 유현이에게 가서 슬쩍 귓속말을 했다.
"밤에 거만한 여왕님이 덮치지 않던?"
"어···누나 의외로 불쌍한 사람이에요."
"그래?"
유현이도 함락된 건가 싶었지만 아니었다.
다정이 그에게 한 짓이란 술주정 밖에 없었다고.
물론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끔찍하지만 누나라고 생각하고 이야기를 들어주니 의외로 고분고분 굴더란다.
술이 깬 후에는 고맙다며 넘쳐나는 포인트로 무기를 사서 안겨줬다고.
저 막나가는 다정에게 그런 면이 있었다니 흥미롭구만.
어쩌면 정이 많은 사람인데 홀로 지낼 수밖에 없어서 외로웠는지도 모르겠다.
그녀의 주위엔 좀비들뿐이니.
"저 준호 학생 따라갑시다! 바람 불면 납작 엎드려요! 그리폰 조심!"
우리는 조심조심 왔던 길을 되돌아가 베이스 캠프에 도착했다.
지키고 있던 세 사람이 깜짝 놀랐다.
"누구예요?"
"전에 얘기한 헬스장 사람들이야. 이쪽이 유현이."
여울이의 시선이 바로 유현이에게 닿았다.
부드럽고 잘생긴 얼굴에 그녀의 표정이 실시간으로 녹아드는 게 보였다.
"잘생겼지?"
"모, 모르겠는데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녀는 잽싸게 거울을 보더니 유현이에게 가서 다소곳이 인사했다.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질 않는구만.
우리는 통성명을 했고 모여 앉았다.
기존 마산의 인원들은 베이스 캠프 밖에 자리한 다정을 무서워했다.
하긴 좀비에 둘러싸인 채 좀비 의자를 앉아 다리를 꼬고 있으니 말이다.
사람들의 시선이 자기에게 몰린다고 생각한 다정이 어흥! 하며 겁을 줬다.
성격 참 안 좋네.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우리는 지금까지의 일, 그리고 앞으로 할 일에 얘기를 나눴다.
어느덧 안개가 내려앉았고 몇 명이 베이스 캠프로 다가왔다.
누구인가 했더니 매우 익숙한 사람이었다.
장원택 대통령.
그가 우리를 찾아왔다.
이 던전에 대체 몇 명이 들어온 거야?
.
.
.
"여기는 참 분위기가 좋군요. 제가 잘못 느낀 건지도 모르겠습니다마는."
몇 명이 따로 대통령과 만났다.
사람이 너무 많아서 번잡스러웠기 때문.
그는 덕담을 늘어놓더니 약간 떨어져 있던 다정을 보곤 빙그레 웃었다.
"이로서 고인물 네 분 중 세 분과 만나게 되는군요."
"김밥조아는 못 만났나요?"
"그렇습니다. 사실 제가 가장 만나고 싶었던 분인데 조금 아쉽군요."
다정은 나를 힐끔 쳐다보는 짓 따위는 하지 않았다.
"그나저나···저희와 합류하실 생각은 없습니까? 저는 여러분 모두에게 권유하고자 합니다."
"생각 없네요."
다정이 너무 대놓고 말하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장원택도 의외로 덤덤했다.
"다른 분들은?"
형준 형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제 새로운 아지트에 자리 잡으려는 시점이라···또 서울은 익숙지가 않아서요."
완곡한 거절에 장원택은 희미하게 웃음 지었다.
"정부 쉘터는 언제든 열려 있으니 다음에라도 연락 주십시오. 경매장에 전용 코멘트란이 있습니다."
"아, 예. 근데 저희가 레벨이 안 되어서···"
형님, 그런 것까지 알려줄 필요는 없는데.
"곧 되겠지요. 아니면 다정 씨가 알려주셔도 되지 않습니까?"
"그 말을 들으니까 갑자기 하기 싫어지는데요."
"이런. 오리가 아니라 청개구리 과셨군요."
장원택이 장난스럽게 말하자 다정은 갑자기 일어서서 자기 엉덩이를 내밀었다.
"이래도 오리가 아니라구요?"
"아니, 크흠···"
당황한 게 눈에 보이네.
분위기를 환기시켜야겠군.
"정부는 왜 사람들을 모으려 하는 겁니까?"
내가 묻자 장원택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그야 몬스터에게서 우리의 사회를 지키기 위함입니다."
"좀비 레이드가 위험한데도 말입니까?"
"정부 쉘터는 튼튼합니다. 그리고 훌륭한 각성자들이 모이고 있어요. 지금도 좀비 레이드는 일어나고 있습니다마는 별 문제는 없습니다."
글쎄, 언제까지 그럴 수 있을까?
사람이 모인다는 건 결국 문제가 많아진다는 걸 뜻한다.
내부 단결이 잘 되면 좋겠지만 정부 쉘터는 생존자1이라는 폭탄을 안고 있었다.
그도 그걸 모르지는 않을 텐데···
장원택은 뒤의 보좌진에게서 쪽지를 건네받았다.
"여기 스카웃을 하러 오진 않았는데···하하, 인재들을 보면 괜히 마음이 동하게 되는군요. 그런 의미에서 정보를 하나 드리겠습니다. 혹시 부산에 계신 분 있습니까?"
"설마요···"
"기장 발전소 땜에 저희도 피난 갔었는데요."
사람들이 말하자 장원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시겠지요. 이건 최근에 입수한 정보인데, 부산에 외국인들이 상륙했습니다. 아마 일본인들인 것으로 판단됩니다."
"일본인들이 왜요?"
"뭐 먹을 거 있다고 부산에 왔지?"
"설마 바다를 건넌 겁니까? 근성 쩌네."
"아직 명확한 정보는 들어오고 있지는 않습니다만, 최소 몇 명은 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모두 한국어를 한답니다."
이 정보에는 나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일본 본토에서 건너온 일본인들이 단체로 한국어를 한다니?
사람들이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하자 장원택은 손을 비볐다.
"저도 그걸 전해 듣곤 다시 확인해보라고 지시했습니다만, 똑같은 정보가 올라왔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그들끼리는 일본어를 말하는데 우리에겐 한국어로 들린다는 겁니다. 이해가 되시지요?"
접촉을 해봤다는 얘기군.
그리고 우리에게 말하지 않은 정보가 있다는 뜻도 된다.
궁금하면 정부 조직에 들어와라···뭐 이런 소리겠지.
형준 형은 너무 놀라서 거듭 물었다.
"그럼 우리가 하는 말은 저들에겐 일본어도 들립니까? 그게 가능해요?"
"그 부분은 아직 명확하지 않습니다. 일단은 거리를 두고 관찰하고 있습니다만···"
"외국인들이 살아 있다는 게 놀랍네요."
"시스템도 없을 텐데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모르겠네."
그 때 묵묵히 있던 다정이 다리를 반대로 꼬았다.
장원택의 뒤에서 기립하고 있던 남자 보좌관들의 시선이 일제히 돌아갔다.
"며칠 전에 경매장에서 일본인 찾던 사람이 진짜 일본인이었나 보네."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그렇다면 예전의 스피드런 미궁에서 외국인을 만났다는 증언도 사실이었겠군요. 허허, 오히려 정보를 얻어가는군요."
그 일본인은 유즈카라는 이름이었지···
서바이벌 라이프의 아이디가 없으면 본명이 시스템에 등록되는 모양이다.
다수의 일본인이 살아있다면 다른 국가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는 정부가 어디까지 정보를 전달했는지 물었고, 장원택은 필요한 모든 국가라고 답했다.
"물론 종말 자체를 믿지 않는 국가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수의 국가는 몬스터의 실물을 직접 확인했습니다. 그걸 부정하기는 어렵죠."
"종합해보면, 현재 살아남은 생존자들 전부가 시스템을 갖고 있다는 소리겠군요. 부산에 상륙한 일본인들을 포함해서."
"아···경매장에 들어왔으니까 그게 그렇게 되나. 잠깐만, 벌써 15레벨이란 소리잖아? 엄청 빠른데?"
"전투 특성이고, 레벨 업에 집중하면 15렙 달성은 그렇게 어렵진 않아요. 그 이후부터가 헬렙 구간이라 드럽게 어렵지."
다정의 말이 맞다.
나도 17레벨에서 빌빌거리고 있잖은가.
뭐 전투에 전념한다면 그깟 레벨쯤 못 올릴 리는 없지만 그보다 중요한 게 있었다.
빨리 토공한테 가봐야 하는데 이놈의 일정이란 게···
장원택이 보좌진을 힐끔 보더니 일어서려는 모양새를 취했다.
"오늘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참, 다정씨는 오늘 여러 사람 만나시겠군요."
"누굴 만난다는 거죠? 난 생각 없는데."
"좀비 여왕에 대한 소문이 워낙 퍼져서···실제로 이런 미인이시니 또 발 없는 소문이 멀리 퍼질 겁니다."
"흐음···사랑의 도피는 싫은데. 하나 잡아서 내 소년시대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게 하면 조용해지겠죠?"
"하하···권장하진 않겠습니다. 아무튼 오늘 즐거웠습니다. 다음에 다시 만나죠."
그가 보좌진들과 함께 사라지자 형준 형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대통령이 살아 있긴 했구나. 말로만 들었는데."
나도 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이다.
우리 모두는 그에게 빚을 진 거나 다름없다.
하지만 정부 쉘터에 합류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생존자1 그 사람이 마음에 걸렸다.
그나저나 대통령도 각성을 했을 텐데 무슨 능력일까···
대통령이었으니 평범한 전투계는 아닌 것 같고, 지원계가 아닐까 싶었다.
다정이 하이힐을 발가락 끝에 걸고 까닥거렸다.
"대장님, 저기 애들이 부르네요."
"애들요?"
"네. 빨리 가보세요."
형이 사라진 뒤 다정이 내게 얼굴을 들이댔다.
"성호 너 너무 시치미 떼고 있는 거 아냐? 내가 너 땜에 며칠을 김해에서 썩은 줄 알아?"
"아직은 멀쩡해 보이는데."
"속이 썩어간다 어쩔래! 죄다 바른생활 사람들이라서 재미가 없어! 재미가!"
"야야, 목소리 좀 낮춰."
아무래도 사람들이 다정을 두려워해 정중히 대하다 보니 재미가 없었던 모양이다.
뭔가 신나고 위험한 일이 빵빵 터져야 되는데.
그녀는 내 턱에 손가락을 댔다.
"이제부터 너 따라다닐 테니까 그리 알아."
"아주 내가 김밥조아라고 광고를 하고 다니겠구만."
"내 노예라고 하면 되지. 아예 팬티만 입혀서 입마개 하고 다니면 딱인 것 같은데. 너 몸도 꽤 좋고."
"거절하겠다, 오리궁뎅이. 토공 찾으러 가야 되는데 시간 없어."
그녀의 눈이 희번득거렸다.
"토공? 아직도 못 만났어? 대체 마산에서 뭐한 거야."
"좀 바빴어. 사람들하고 좀 싸우느라."
"···니가 그렇게 말하는 거 보니까 장난은 아니었나 보네."
"그런 일이 좀 있었어. 참, 불쌍맨 찾았어."
"불쌍맨? 진짜?"
내 방송의 고정 시청자 몇 명은 고인물들도 알고 있었다.
불쌍맨 특유의 컨셉을 재미있어 했는데, 다정이 특히 그랬다.
"그거 컨셉이 아니더라. 진짜 힘들게 살아왔나봐."
"쟤지? 최강지오, 잡아와."
지만은 순식간에 좀비에게 붙들려왔다.
순식간에 그녀의 이목이 지만이에게 집중되었다.
"얼굴이 되게 순하네. 이름이 뭐라고요?"
"혀, 형···"
미안하다. 조금만 상대해 줘.
나는 슬쩍 자리를 벗어났다.
.
.
.
파밍 던전에 들어온 사람들의 대략적인 규모가 밝혀졌다.
200명이 넘는단다.
모두가 평화롭게 사냥하고 파밍에 전념했으면 좋겠지만 그렇게 될 리가 없지.
벌써부터 싸우고 난리가 났다.
유현이의 종이비행기가 관련된 정보를 물어왔다.
"자원 캐다가 싸움이 일어나서 누가 죽었다는데요···"
"어디쯤이야?"
"저희가 있었던 호수 쪽이요."
여기서 가까운데.
이건 분명 살인 사건이고 또 일어날 가능성이 높았다.
원래 피는 피를 부른다고 하지 않던가.
워낙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만큼 데스매치가 벌어지면 큰 소동이 벌어질 것 같았다.
얘기를 다 들은 형준 형이 다시금 멤버들에게 주의를 주었다.
"여기 위험하니까 당분간은 절대 주위를 벗어나지 말도록 하고, 특히 바람소리를 조심하십시다. 뭔가 돌풍이 분다 싶으면 바짝 엎드리는 겁니다. 알겠죠?"
"넵."
우리는 주위를 돌아다니며 파밍에 열중했다.
대단한 건 없지만 과일도 땄고 소소하지만 사냥도 해냈다.
그들이 그러고 있는 동안, 나와 다정은 따로 행동했다.
다정이 나를 부려먹는다는 핑계를 대니 다들 나를 안쓰럽게 쳐다봤다.
사실 진짜 목적은 가까운 그리폰 둥지를 덮치는 것이었다.
유현이를 통해 정찰한 결과, 주변의 그리폰 둥지 하나가 비교적 낮은 바위에 걸쳐져 있었다.
우리는 바위 아래쪽의 숲에 숨어서 둥지를 관찰했다.
"둥지가 되게 낮네. 내 기억으론 둥지가 낮으면 그리폰 덩치가 되게 작은데, 어때?"
내가 영상을 통해 확인한 바도 그렇다.
그리폰의 둥지는 영역싸움을 통해 결정된다.
강한 놈은 높은 곳에 둥지를 짓고, 약한 놈은 낮은 곳에 짓는다.
저 둥지의 주인은 아마 주변의 그리폰들에게 쫓겨났을 것이다.
"둥지 크기로 봐선 아성체에 가까울 거야."
"아성체가 어느 정도 크기지? 기억이 잘 안 나네."
"황소보다 두 배쯤 커. 우리가 달려들었다간 어이쿠 도시락님 하면서 환영해줄 걸."
"누가 달려든데? 그냥 간만 보다가 둥지나 털자는 거지."
대범한 다정도 그리폰에게 물려가고 싶진 않은 모양이다.
우리가 계획을 세우고 있는데 종이비행기가 눈앞을 날카롭게 비행했다.
이건 유현이가 보내는 경고의 의미다.
이젠 편하게 말도 못하겠군.
벌떡 일어서서 주위를 경계하자 수풀을 헤치고 몇 사람이 나타났다.
그들은 다정의 좀비를 보자마자 무기를 꺼내들었다.
"좀비다!"
"잠깐 진정하세요. 여기 계신 분이 누구신지 알 것 같으니까."
선두에 선 남자의 시선이 내게 잠시 닿았다가 다정에게로 옮겨졌다.
좀비들 사이에 있는 나는 별 가치가 없다고 여긴 거겠지.
"오리궁뎅이지? 나야, 생존자1."
"흐음?"
다정의 눈썹이 천천히 모였다.
< 협력하거나 반목하거나 - 2 > 끝
< 협력하거나 반목하거나 - 3 >
고인물 4인방 중 생존자1은 다소 미묘한 위치에 서 있었다.
왜 그런 친구 있잖은가.
같이 놀 때는 괜찮지만 정작 둘만 놀려면 어색한 친구 말이다.
토끼공듀도, 오리궁뎅이도, 김밥조아도 생존자1과 개인적으로 논 기억은 거의 없었다.
그건 그가 쉘터에 처박혀 있는 걸 즐겼기 때문이다.
어떤 게임에도 아이템 콜렉터는 있다.
게임의 주제가 서바이벌이다 보니 쉘터를 중요시하는 것도 문제는 안 되었고 말이다.
다만 다른 고인물들이 가끔씩 또라이 같은 짓을 할 때, 그는 한 발 빼며 사양했다.
토공과 오리궁뎅이가 캐삭을 당할 위기에 처하면 김밥조아는 욕하면서도 호응했다.
하지만 생존자1은 언제나 몇 발자국 떨어진 위치에 있었다.
일단 수습은 해준다.
그러나 같이 휘말리지는 않는다는 게 그의 포지션이었다.
그래서인지 오리궁뎅이 최다정이 그를 만났을 때 아주 기뻐하지는 않았다.
같이 논 기억은 있지만 토끼공듀나 김밥조아처럼 미친 짓한 기억은 없으니까.
"오랜만이야. 잘 지내지?"
아주 무난한 인사였다.
배검인은 그녀를 안으려다가 흠칫하고는 그 자리에 서서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나야 잘 지내지. 지금은 정부 쉘터에 있어."
"혹시 토공이나 김밥조아는 만나봤어?"
"전자는 예스, 후자는 노."
"토공을 만났다고?"
"좀 됐어. 소문대로 진짜 팬티만 입고 다니더라. 망토하고 장화는 옵션이고."
"오···진짜 남자네. 납치하고 싶어."
검인에게 방금 말은 쉘터에 자리 잡고 인의 장막을 치고 있는 자신은 남자가 아니라는 투로 들렸다.
"최다정, 맞지? 난 배검인이야. 우리 사이에 나이는 중요하지 않으니까 말을 놓을까?"
"응, 그렇게 해."
"잠깐 부하 좀 물려줄 수 있을까? 나도 그럴 테니까."
좀비 사이에 있는 성호를 말하는 것이다.
검인은 같이 온 사람들에게 잠시 비켜 달라고 턱짓을 했다.
그들은 조금 짜증이 났다.
부하도 아닌데 턱짓으로 오라 가라 하니 말이다.
하지만 그 유명한 좀비 여왕도 있고 해서 초를 칠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들이 물러가는 동안, 성호도 좀비들 틈에 휩싸여 걷다가 재빨리 차원문에 몸을 숨겼다.
검인은 그녀와 둘만 있게 되자 비로소 본색을 드러냈다.
"난 오리궁뎅이가 이런 미녀인 줄은 몰랐어. 진작 찾아봤어야 했는데, 하하."
그의 눈이 다정의 전신을 스윽 훑었다.
몸매에 어지간히 자신이 없으면 입지도 못하는 롱 원피스에 하이힐을 신고 있었다.
아포칼립스에선 말도 안 되는 옷차림이지만 그녀의 특성을 생각하면 납득이 갔다.
그녀는 직접 싸울 일이 없는 것이다.
괜히 사람들이 다정을 좀비 여왕이라 부르는 게 아니다.
다정은 그의 열정적인 시선을 눈치 챘다.
"찾아서 어쩌게?"
"···우리 고인물 4인방 중에서 제대로 사람 행실 하고 있는 건 너하고 나뿐이야."
"그럴까?"
"토공은 강하지만 정신이 나갔고, 김밥조아는 쥐새끼처럼 숨어만 있어. 물론 이벤트에서 1등한 걸로 봐서 꽤 강한 것은 확실해. 하지만 나만큼 건실하지는 않아."
"그런데?"
다정은 고개를 들어 재촉했다.
더 말해보라는 투다.
힘을 얻은 검인이 자기 PR에 나섰다.
"나는 정부 쉘터의 지배자야."
"지배자 중 하나겠지? 장원택이 있잖아."
"그건 명목상일 뿐, 쉘터를 직접적으로 지배하는 건 나야. 내 특성은 쉘터를 강화하는 거니까. 지금도 쉴 새 없이 좀비 레이드가 일어나고 있어. 그거 누가 막고 있다고 생각해?"
"그런가?"
다정은 고개를 갸웃했다.
성호에게 들은 바, 검인의 특성은 안개에 가려져 있었다.
일단 대외적으로 쉘터 강화라고 알려져 있긴 한데 여러모로 수상한 점이 많았다.
퍼스트킬 이벤트에서 4등을 했다는 게 수상함을 부추겼다.
"근데 용케 오크를 빨리 잡았네."
검인은 자신의 주위에 부하들이 있는 듯 팔을 좌우로 벌렸다.
"내겐 많은 부하들이 있으니까···그들이 나를 도와줬지."
"도와준 건 아니고 거래 아냐? 방금 사람들도 그렇고, 진짜 부하처럼은 안 보이던데."
잠깐이지만 짜증 섞인 표정을 짓는 게, 다정에겐 그렇게 보였다.
검인은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아무튼 정부 쉘터엔 나를 도와주는 사람이 많아···어때, 나와 함께 하면 아주 편하게 살 수 있는데."
좀비 여왕의 입가에 미소가 새겨졌다.
"나는 지금도 괜찮은 삶을 살고 있어."
"그야 상대적으로 그렇겠지. 하지만 니가 쉘터에 들어오면 많은 것을 얻게 돼. 식량, 옷가지, 연료, 의약품···필요한 모든 것이 우리 쉘터에 있어. 넌 그냥 가지기만 하면 돼."
"미안한데, 그걸로는 나를 못 꼬셔. 나한테 박으려면 좀 더 괜찮은 걸 생각해야 할 거야."
직설적인 말에 검인은 당황했다.
너무 몸매를 훑어본 게 무리수였나?
그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훑으며 생각을 정리했다.
여기까지 드러내야 하나···
그는 다정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특성은 그렇다 치고 외모가 너무 매력적이었다.
물자가 없어 다들 꾀죄죄하게 다니는데 그녀만 빛이 났다.
물론 자세히 뜯어보면 그녀에게도 검댕은 묻어 있다.
하지만 그 검댕이 매력을 돋보이게 해주는 게 사실이었다.
'내 여자로 만들고 싶다.'
검인은 그런 충동적인 욕망을 느꼈다.
그래서 그는 비밀로 했어야 할 사항까지 꺼내고 말았다.
"이건 너한테만 알려주는 건데···"
"응응, 나 비밀 좋아해."
마치 어린애처럼 손을 나팔 모양으로 만들어 귀에 댄 다정.
그는 재차 주위를 확인한 뒤 입을 열었다.
"우리 쉘터에, 총이 있어."
"···총이었던 것이겠지?"
"하하, 보통이라면 그렇겠지. 하지만 지하 깊숙이 묻어 뒀다면 어떨까?"
"철사병은 너도 알잖아? 지하에 있는 금속도 완전히 부숴버린다고."
"500미터 밑에 있는 것도?"
"···"
다정이 충격을 먹은 얼굴로 바뀌었다.
한 방 먹였다고 생각한 검인이 공세를 더했다.
"철사병은 입자선이야. 방사선이랑 비슷한 거지. 그럼 투과에 한계가 있다는 말이야. 너희들이 몬스터와 노는 동안, 난 그걸 연구했어. 쉘터에 구멍을 파서 어디까지 철사병이 영향을 미치는지 확인했지."
"게임 안에서? 금속이 어디···아."
매직 메탈을 말하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매직 메탈은 철사병에서 안전하다.
그러나 특수한 방법을 사용하면 옵션을 완전히 없애는 것도 가능하다.
평범한 금속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검인은 철사병이 맹위를 떨쳤던 그 몇 개월 동안 혼자 쉘터에서 시험한 것이다.
바보 같은 짓이지만 서바이벌 라이프엔 그런 사람이 많았다.
"너 혼자 수백 미터를 팔 순 없었을 텐데?"
그는 순순히 인정했다.
"맞아. 내가 판 건 고작해야 20미터 정도야. 하지만 하나를 확인했지. 20미터 지하에 있으면 철사병이 아주 약간 완화된다는 걸. 나는 거기에서 힌트를 얻었어."
"더 파내려 가면 철사병에서 완전히 벗어날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정부 사람들을 설득했지. 정부 쉘터를 만들 때 대량의 총기와 실탄을 미네랄 오일에 밀봉해서 지하에 파묻어뒀어. 정부 쉘터가 있는 곳이 지하철 미개통역인 건 모르지?"
엿듣고 있던 성호는 충격을 먹었다.
총을 숨기고 있었다니···몇 개월 후에 철사병이 완화되면 꺼내서 쓴다는 얘기 아닌가?
그 어떤 각성자라 할지라도 총을 무시할 순 없었다.
멀리서 긁어버리면 그걸로 끝이다.
거기에 말을 들어보면 총만 숨긴 게 아니었다.
"발전기에 컴퓨터, 가이거 계수기···거기에 폭탄까지. 엄청난 양을 비축해 놨어. 다시 말하면 몇 개월 후엔 특성으로 설치는 것도 어려워진다는 말이지."
"날 협박하는 거야?"
"천만에. 이건 권유야. 니가 그 주인이 될 수 있어. 내 손만 잡으면."
검인이 활짝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잡으면 모든 것의 주인이 된다···그렇게 말하는 듯했다.
하지만 다정은 그런 것들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녀는 나뭇가지를 집어 그의 손바닥을 쿡 찍어 내려버렸다.
검인의 입에 맺혀 있던 미소가 사라졌다.
손가락도 아니고 나뭇가지라.
"왜 날 거부하는 거지? 우린 친구였잖아."
"마음에 안 들어. 경매장에서 자랑에 몰두한 것도, 오크 이벤트 때 4등해서 열폭한 것도. 그리고 지금 나한테 허세를 떠는 것도. 전~부 마음에 안 들어. 정부 쉘터의 무기가 전부 니꺼는 아니잖아?"
"너만 도와주면 쉘터를 점령하는 것쯤은 문제가 아니야."
"그리고 난 너의 부하가 되고?"
"동등한 친구야. 우린 친구였잖아? 게임에서의 관계를 그대로 이어나가는 것뿐이야. 변한 건 아무것도 없어."
검인은 다시 손을 내밀었다.
그는 친구를 강조했지만 이미 다정의 마음속에서 그는 친구가 아니었다.
게임 속에서야 뭐 그렇다 치자.
하지만 실제 만나서 들은 그의 언행에서 경박함을 읽었다.
그녀의 몸매를 샅샅이 훑어보는 거 하며.
부하들이 많다는 허세에 더해 정부 쉘터의 막대한 물자가 자기 것이라고 확신하는 오만함까지.
하여튼 마음에 드는 구석이 단 하나도 없었다.
그에 비하면 성호는 꽤 괜찮은 친구였다.
별로 재미는 없지만 그와 있으면 썩 마음에 드는 일이 생기곤 했다.
아포칼립스에서 그럴싸한 닭백숙을 먹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리고 그는 유현이라는 괜찮은 남자애까지 연결해줬다.
유현이가 그녀의 애인은 아니었지만, 마음을 풀어놓는 데에는 큰 도움이 됐다.
'살짝 소심한 것만 고치면 재미있게 놀 수 있을 텐데.'
그건 특성 때문이니까 뭐 용납해줄 순 있었다.
다정은 앞으로 성호가 자신을 어떻게 놀라게 해줄지 기대하고 있었다.
그에 반해 검인에겐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았다.
좋은 특성을 가졌을 테니 사람들과 물자를 지배하겠지.
하지만 그것뿐이다.
그는 자신에게 두근거림을 주지 못할 것이다.
그녀의 얼굴이 차갑게 변하자 검인의 표정이 실시간으로 썩어 들어갔다.
또 실팬가···
여기서 매달려 볼 수도 있겠지만 부하···아니 동료들의 원성을 사게 된다.
우리 시간은 시간이 아니냐고 말이다.
좀비 여왕은 글렀으니 그리폰 사냥에 열중할 수밖에 없었다.
중요한 것은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이다.
그는 손을 거두어들였다.
"알았어. 앞으로 두 번 다시 너한테 제의할 일은 없을 거야."
다정은 웃으며 그에게 손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응, 그래. 잘 가."
"···"
검인의 속에서 뭔가 울컥 올라왔다.
그는 그녀를 노려본 뒤 조용히 길을 떠났다.
.
.
.
"이거 곤란한데."
내가 그 말을 하면서 나오자 다정이 깜짝 놀랐다.
"갑자기 거기에서···"
"쉿."
나는 입술에 손가락을 붙이곤 하늘을 가리켰다.
그리고 유현이의 종이비행기를 불러 양해를 구하곤 찢었다.
"유현이가 듣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항상 조심해."
종이비행기로 듣고 보는 세계에도 한계는 있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
"다른 마음을 품을 애는 아니야."
"사람은 언제든 다른 마음을 품을 수 있어. 내가 누군지 알았다면 더더욱."
그녀가 볼을 부풀렸다.
"거 되게 소심하네. 저 아저씨 따라갈걸 그랬어."
"마음도 없으면서 무슨."
"헤헤. 그나저나 어쩔 거야? 저쪽은 총을 갖고 있다는데. 그걸로 빵 쏴버리면 나 깨꼬닥이야."
물론 나도 그렇다.
미리 발견하고 쏠 여유를 주지 않는 게 최선이겠지만 총은 그 인지를 벗어난다.
저격총 들고 장거리에서 쏴버리면 난 골로 간다.
아니면 수류탄 하나 깔 수도 있고, 방법은 많다.
"지하철에서 더 파내려가서 보관해뒀다 이거지···맨날 쉘터에 처박혀서 뭐하나 했더니 그거 연구하고 있었네."
게임 안에서의 얘기다.
"우리야 뭐 몬스터 잡는다고 바빴지. 몰랐던 것도 무리는 아니야."
그녀의 말이 날 위로해주진 못했다.
앞으로 몇 개월 후면 철사병의 효력이 서서히 사라진다.
이건 설정이라서 우리가 실제로 체험하진 못했지만, 지금까지 이벤트가 일어난 걸로 봐서 틀리진 않을 것이다.
총기 수백 정이 세상에 나온다는 뜻이다.
배검인이 정부 쉘터를 장악하는데 성공한다면 큰 문제가 된다.
우호적이지 않은 세력이 우리에게 총부리를 돌릴 수도 있다는 뜻이니까.
우리가 숨어 있으면 찾아내기가 쉽지는 않겠지만 언젠가는 부딪칠 것이다.
내가 그렇게 말하자 다정의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몇 개월 후면 총 맞는 거야? 그건 싫은데."
"그렇게 확정된 건 아니니까. 지금도 그냥 의견이 안 맞아서 헤어진 것뿐이지 반목한 건 아니잖아?"
"두 번 다시 나하고는 말 안하겠다는 투던데."
나는 생각을 정리했다.
검인의 말이 허세일 가능성도 있지만 일단 여기서는 접어두기로 했다.
단시간에 정리된 종말을 준비한 대통령의 결단력을 생각하면 진짜 묻어놓은 게 맞을 것이다.
그리고 그건 아직 검인의 것이 아니었다.
정부 쉘터는 장원택과 배검인, 둘이 권력을 양분하고 있다.
그 틈을 파고든다면 기회는 있다.
"다정아, 잠깐 서울에 갈 수 있겠어?"
"뭐? 겨우 너하고 만났는데 이번에는 올라가라고? 싫어."
그녀는 단호히 거부했다.
"헤어지자는 게 아니야. 잠깐 다른 곳에서 활동하는 거지. 정부 쉘터에 들어가서 대통령과 함께 했으면 좋겠어. 배검인이 아니라."
"거기 들어가 봐야 재미없잖아. 숨 막혀 죽을 거야."
"잠깐만 있으면 돼. 내가 올라갈 테니까. 토공 데리고."
다정의 표정이 확 펴졌다.
"진짜?"
"내가 갈 때까지만 시간을 벌어달라는 거야. 우리 셋이서 놀려면 아무래도 여기는 좁잖아? 서울 크니까 시원하게 놀아보자고."
이건 다정을 꾀기 위해 하는 말이다.
셋이 붙어 다니면 나는 그날부로 살아 움직이는 과녁이 된다.
그녀는 팔짱을 끼곤 으음···고민했다.
내 눈엔 고기가 미끼 주위에서 서성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럼 액션을 줘야겠지.
"원하는 요리 무한대로 제공할게."
"음···치킨 가능?"
"가능."
다정이 쌍심지를 켰다.
"뭐야. 전에는 불가능하다며."
"어렵다고 했지 불가능하다고 한 적은 없어. 튀김기 없으니까 없는 대로 해봐야지."
"참치회 가능?"
"야 그건 좀···"
앞바다에 참치 비슷한 게 있나?
그거 잡다가 내가 잡히겠다.
나는 그녀를 설득해 수육과 회로 겨우 타협했다.
다정이 손가락을 튕겼다.
"내가 원할 때 원하는 만큼의 요리를 대령하는 거야, 알겠지?"
"알았어. 대신 너는 내가 신호할 때까지 정부 쉘터에서 장원택과 함께 있는 거야. 가능하면 배검인 견제도 좀 해주고."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문제가 있어."
"뭔데?"
"성호 너는 우리가 마치 한 팀인 것처럼 말했지만 엄밀히 말해서 한 팀은 아니잖아, 그치? 나는 지금이라도 저 아저씨 불러서 갈 수 있는데?"
"그럴 마음도 없으면서."
"그러니까 니가 나한테 확신을 줘야 한다 이 말이야! 으이그!"
다정이 묘한 미소를 짓고 내게 다가왔다.
뭔가 해서 흠칫하는데 갑자기 내 뒤로 돌아가더니 나를 껴안았다.
설마?
원하는 게 그건가?
아니 상대가 다정이라면 나도 싫지는 않지만 친구로 생각했는데···
그녀가 내 등에 얼굴을 파묻은 채 말했다.
"아 너한테 박고 싶다. 좆 갖고 싶어."
결국 그거였습니까.
다정이 정상적인 여자가 아니라는 걸 깜박했다.
나는 몸을 비틀어 그녀를 떼어냈다.
"너 유현이가 취향이라며?"
"곱상한 미소년과 근육질의 떡대는 우열을 가릴 수 없어."
"박고 싶다는 점에서는 말이지?"
"히히."
여기까지 하자.
나는 그녀를 돌려세워 어깨를 짚었다.
"넌 내 친구야. 토공과 함께. 그건 죽을 때까지 안 변해."
"응응. 절대 배신하지 않는다는 뜻이지?"
"그래. 그러니까 같이 살아남자."
단지 몬스터와 주변 환경에서 살아남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었다.
사람들과도 싸워 쟁취해야 한다.
그리고 그건 검인이 될 확률이 높았다.
다정의 눈이 반짝였다.
"나중에 나를 그 문에 초대해 줄 거야? 너구리 있는 곳."
아무래도 그녀는 차원문 너머의 세계를 너구리가 있는 환상의 나라로 착각하는 것 같다.
하여튼 그 세계를 오픈하라는 말에 쉽사리 대답할 순 없었다.
하지만 언젠가, 라는 단서를 붙이면 되겠지.
"약속해. 언젠가는 오픈할게."
"딜."
그녀는 내 엉덩이를 팡팡 두드리곤 좀비들을 불러들였다.
"그럼 이대로 서울 차원문으로 나가면 돼?"
"아직은 아냐. 그리폰을 죽여야지."
"둥지를 터는 게 아니라?"
"계획이 바뀌었어. 그리폰의눈 스킬이 필요해."
조잡한 망원경 따위보다 월등한 시야를 제공하는 스킬이다.
"위험할 텐데···지금 우리 스펙으론 그리폰 잡기 힘들어. 소년시대 몽땅 동원해 봐야 붙들지도 못한다는 거 알지?"
"내가 그거 모를까. 자신 있으니까 좀 도와줘."
꼭 우리 힘으로만 그리폰을 잡을 필요는 없잖은가?
가끔은 남의 도움이 필요할 때가 있는 법이다.
검인씨, 미안해.
이번에도 몬스터는 내가 먹어야겠어.
< 협력하거나 반목하거나 - 3 > 끝
< 협력하거나 반목하거나 - 4 >
그리폰 사냥에 앞서 실험이 필요했다.
전에 실험한 바로 차원문은 내 시선 전방 1미터 지점에 생성된다.
누워 있어도 바닥에 수직으로 생성되는데, 허공에는 바닥이 없다.
그렇다면 내가 떨어지고 있을 때 차원문을 열면 어떻게 되느냐는 의문이 남는다.
다정에게 그 말을 하자 그녀는 바위에 앉아선 고개를 갸웃했다.
"으음···그냥 바닥에 부딪쳐서 깨꼬닥하지 않을까?"
"그걸 알아내기 위해서 니 도움이 필요한 거야. 좀비들로 나를 받쳐줬으면 해."
"니 스탯이면 그냥 떨어져도 안 죽을 것 같은데?"
"방금하고 말이 좀 다르지 않냐···?"
"이런. 내 사악한 음모가 들키고 말았네."
그녀는 모른 척하곤 나무를 가리켰다.
"저기에서 떨어지는 거지? 빨리 올라가."
"믿는다, 최다정."
"후후후, 넌 나를 믿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어."
다정은 악당처럼 웃더니 시치미를 떼곤 고개를 쳐올렸다.
나는 배낭을 바닥에 내려놓고 나무를 오르기 시작했다.
"오, 지금 돌원숭이 같은데?"
칭찬이냐 욕이냐.
돌원숭이는 무리를 이뤄 생존자를 공격하는 몬스터다.
투척에 일가견이 있어 잘못 걸리면 우수수 쏟아지는 돌에 맞아 골로 가는 수가 있다.
몸이 굉장히 날렵하고 힘도 세어서 다들 녀석들을 상대하기 싫어했다.
단체로 끼기긱! 하고 소리 지르는 걸 듣다 보면 노이로제가 걸릴 지경이다.
"다 올라갔어?"
"어, 조금만 기다려."
나는 대답한 다음 나뭇가지에 발을 딛고 올라섰다.
부러지지 말았으면 좋겠는데.
이제 지면을 바라보며 떨어지면 된다.
밑을 보니 다정의 좀비들이 나를 받아낼 준비를 끝마쳤다.
나는 이 구도가 낯설지 않았다.
심심하면 하던 짓이 강화 구울들 품에 뛰어드는 것이었기 때문.
설마 좀비들이 나를 덮치진 않겠지.
나는 호흡을 멈추고 그대로―
나뭇가지를 박차는 순간 좀비들이 순식간에 확대되었다.
"차원문 열어!"
곧 차가운 바닥이 내 얼굴을 두들겼다.
"윽!"
나는 머리를 감싸 쥐고 데굴데굴 굴렀다.
요란을 떨어서 고통을 줄이기 위함이다.
그런데 의외로 아프지 않았다.
"···"
천천히 일어나니 내 동굴이었다.
풍뎅이 네 마리가 밥을 먹다가 나를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딩고는 돝섬에 두고 왔었지.
나는 풍뎅이들을 향해 손을 휘휘 저었다.
"계속 먹어. 신경 쓰지 말고."
보자···내가 짠 계획이 맞아 떨어진다면 최후에는 쉘터의 발리스타가 필요하게 된다.
다쳐서 쓰러진 아성체 그리폰이라면 한두 방에 죽는다.
롱나이프를 들고 달려갔다간 역으로 당할 위험이 있었다.
워낙 생명력이 끈질겨야 말이지.
"그렇게 만들기 위해선 미끼가 필요해."
나를 대신해서 시선을 끌고 죽어줄 좀비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그나저나 여기서 어떻게 나가지?
차원문은 평소처럼 바닥에 수직으로 형성된 게 아니라 평행한 상태였다.
내가 떨어지며 차원문을 불러냈기 때문이다.
일단은 나가보자.
차원문 밖으로 몸을 들이미니 다정이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너 반만 나왔네? 되게 신기하다···그게 너구리 세계야?"
"너구리 세계 아니라니까."
나는 필요한 것들을 챙긴 후 의자를 가져왔다.
그리고 점프해 바닥에 떨어진 후 차원문을 닫았다.
다정이 짝짝짝 박수를 쳤다.
"회전 안했으니 5점."
"시끄러. 그것보다 좀비 몇 놈 희생할 수 있는 거지?"
"흐음···누구를 희생시켜야 하나···다들 착한 아이들이라서."
"어차피 밖에 나가면 또 구할 수 있잖아. 이번에는 구울로 만들어."
"구울 걔네들 징그럽단 말이야."
다정은 몸서리를 쳤다.
몸에서 시큼한 냄새를 풍겨대는 이놈들은 안 징그럽고?
하긴 최소 인간 같기는 하다.
그게 내게는 더 끔찍하지만.
나는 배낭을 메고 자세한 계획을 설명했다.
그녀는 마지막 단계에서 의구심을 보였다.
"니가 그만한 충격을 줄 수 있을까? 그리폰 생명력 대단한 거 알지? 화살 몇 대 날리고 칼빵 놓는 걸로는 안 죽어."
"그건 걱정 마. 묵직한 놈으로 날려줄 테니까."
"검인이가 날뛰겠네. 자기가 선빵 쳤는데 옆에서 스틸해갔다고."
"그게 아니야. 우리는 둥지를 털고 있는데 그리폰이 화가 나서 날아온 것뿐이야."
다정은 이 대목에서 약간 입을 벌렸다.
"아···맞다. 그리폰은 둥지를 애지중지하지."
어디까지나 확률이다.
이게 100% 통한다고는 할 수 없다.
안 되면 다른 수를 쓰면 되지 뭐.
내게는 그리폰이 아주 좋아하는 여러 미끼가 있으니까.
다정은 어깨로 내 팔을 살짝 밀었다.
"스킬하고 포인트는 줄 테니까 둥지는 나한테 양보하는 거지?"
"당연하지."
다 먹고 싶었지만 다정이 돕는 이상 몫을 떼어줘야 했다.
둥지 안에 대단한 게 있는 건 아니니까.
기껏해야 새끼와 그리폰이 좋아하는 빛나는 물건 몇 개 정도겠지.
우리는 마지막으로 계획을 점검하고 둥지 밑에서 그리폰을 기다렸다.
"연기가 중요해, 연기가. 검인이 너한테 찾아올지도 몰라. 그 때 잔뜩 화를 내면 돼. 나는 둥지 털고 있었는데 니들이 못해서 내 좀비들 희생됐다고."
"둥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모르지 않을까?"
"쟤네들 특성을 우리가 모르잖아."
"하여튼 알았어."
.
.
.
검인은 자신에 차 있었다.
이만한 인원이면 성체도 아니고 아성체 그리폰 따위는 충분히 잡을 수 있다.
최후의 일격은 자신이 맡는다.
대가로 그가 약속한 것은 작지 않지만 충분한 가치가 있었다.
그리폰이 가진 고유의 스킬.
또한 그리폰을 사냥했다는 명성을 생각한다면 수지 맞는 장사다.
검인은 다양한 특성을 가진 많은 사람들의 신뢰를 필요로 했다.
애정이나 충성까진 아니더라도 그를 확고히 믿고 따라야 했다.
문제는 그런 사람이 많지 않다는 점···
지금까진 기껏해야 두셋이었고 그의 다중특성도 그들의 것으로 채워졌다.
'정말이지 아쉬워.'
토공이나 오리궁뎅이의 마음만 얻었다면 엄청난 특성을 가질 수 있는데.
추가효과까진 얻지 못하지만 특성 자체만으로도 충분했다.
무한부활과 좀비 조종이라니,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전율이 돋았다.
또한 김밥조아에게 짜증이 났다.
정황상 토공과 오리궁뎅이는 그와 만난 것처럼 보였다.
그게 아니라면 둘 다 경남으로 내려갈 이유가 없다.
'나만 따돌리고 셋이서 잘 논다 이거지.'
게임에서도 자주 겪은 일이었다.
원인은 자신이 쉘터에 처박혀 있어 어울리지 못했기 때문이지만 그는 그걸 무시했다.
괜히 서운하고 아쉽기만 했다.
'보란 듯이 지배자가 되면 돼.'
정부 쉘터를 완전히 장악하면 그들도 자신을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차츰 영역을 넓히고 최종적으로 모든 생존자들의 왕이 되어야 한다.
유일한 걸림돌은 장원택.
전 대통령이란 후광이 워낙 강렬해 지금까지는 사람들이 그만 바라보고 있었다.
지닌 특성도 특성인지라 사람이 모이면 모일수록 그의 힘이 강화된다.
이걸 타개하려면 실적이 필요했다.
'그리폰은 그 첫걸음일 뿐이야.'
그는 롱나이프를 움켜쥐었다.
미래의 부하가 소식을 전해왔다.
"그리폰이 둥지로 복귀합니다! 폭죽 터트릴까요?"
"시작합시다!"
귀중한 폭죽이지만 여기선 써야 한다.
공터에서 불꽃이 피어오르자 저공비행을 하던 그리폰이 그걸 목격했다.
녀석은 곧장 부리를 열어 자신이 이 부근에 있다는 신호를 내곤 점차 하강했다.
그리폰이 공터에 쿵, 내려앉자 검인이 신호를 보냈다.
"지금!"
좌우 수풀에서 사람이 튀어나오며 그물을 던졌다.
거의 동시에 창과 화살이 날아들었다.
그리폰은 얕은 상처를 입고 분노해 날뛰었다.
끼아아악!
"날개 펴지 못하게 하세요!"
"그물 다시 던져요!"
중요한 것은 그리폰이 하늘로 날아오르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녀석이 워낙 날뛰어서 날개를 봉쇄하는 것은 실패했다.
좁은 공터에 그리폰의 날개가 쭉 펼쳐졌다.
여기선 어쩔 수 없이 놈의 시선을 끌어야 한다.
"갑시다!"
검인이 튀어나갔고 동료들은 잠시 망설였다.
그들은 그리폰의 표적이 되고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중요한 것을 검인이 가져가는 만큼 위험도 그가 부담해야 했다.
아주 잠깐 동안의 망설임이 치명적인 결과를 만들어냈다.
검인이 그리폰의 정면 시야에 노출된 것이다!
녀석은 갑자기 튀어나온 검인을 보고 분노해 성큼성큼 달려갔다.
덩치가 덩치인지라 워낙 빨랐고 검인은 깜짝 놀라 녀석의 등으로 블링크를 펼쳤다.
끼아아악!
그리폰은 목덜미에 뭔가가 달라붙자 몸을 비틀며 날아올랐다.
사방에서 창과 화살이 날아들었지만 치명상을 입히진 못했다.
"큭!"
검인은 그리폰의 목덜미에 힘껏 롱나이프를 찍었다.
롱나이프가 튼튼한 깃털과 살을 파고든 순간, 검인은 중심을 잃고 그리폰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윽!"
그는 다시 블링크를 펼쳐 땅에 내려왔다.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그리폰이 롱나이프를 꽂은 채 상승하고 있었다.
분노한 눈이 파티원들을 훑었다.
분명 동시에 뛰쳐나가자고 했는데!
하지만 그들을 함부로 대해선 안 되었다.
특성까지 알려줬으니 반드시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어야 했다.
검인은 화를 억누르며 말했다.
"다시 내려올 겁니다. 이번에는 확실히 좀 합시다."
"아, 예."
파티원들은 망설인 것도 있어서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
이제 그리폰만 내려오면 2차전 시작이다.
잔뜩 화가 난 녀석이 다른 곳으로 가버릴 가능성은 희박했다.
파티원들이 창과 화살을 회수하고 준비를 하는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어어? 그리폰이 날아갑니다!"
"뭐요? 우리를 놔두고 어딜 가?"
검인은 깜짝 놀라 블링크로 나무 위에 올라갔다.
정말 그리폰이 저 멀리 둥지로 날아가고 있었다!
그는 욕설을 내뱉고 말았다.
"이런 씨발!"
.
.
.
블링크?
나는 분명히 목격했다.
그리폰의 목덜미에 붙어 있던 검인이 갑자기 사라지는 걸 말이다.
블링크, 혹은 은신이 아니면 설명할 수 없는 일이었다.
특성이 쉘터 강화가 아니었나?
아니면 다중 특성?
뭐가 됐든 현재의 검인이 블링크나 그에 준하는 이동계 특성을 가진 건 분명했다.
나는 고개를 내밀어 둥지를 약탈하는 좀비들을 바라봤다.
검인이 저걸 봤느냐가 문제인데.
끼아아악!
좀비들이 둥지를 터는 걸 본 그리폰은 깃털을 부풀리곤 일직선으로 날아오고 있었다.
틈을 봐서 내가 올라타기 위해선 좀비들이 시선을 끌어줘야 한다.
태어 난지 얼마 안 된 그리폰 새끼 하나가 죽어 내 차원문 안으로 넘어갔다.
자신의 새끼가 사라지는 꼴을 본 그리폰이 크게 분노해 달려들었다.
크웍!
좀비들이 이를 드러내며 그리폰에게 대항했다.
그러나 녀석의 부리 앞에서는 어떤 저항도 무의미했다.
단숨에 좀비들이 해체되었고 나는 그 틈을 타 그리폰의 목덜미에 떨어졌다.
롱나이프가 그리폰의 목덜미 깊숙이 박혔다.
캬아악!
그리폰은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몸을 뒤틀었다.
나는 떨어지지 않기 위해 온 몸에 힘을 주었다.
그런데 롱나이프가 두 개다?
검인이 꽂고 떨어져 나갔나보다.
이렇게 감사할 데가 있나.
내가 정신없이 깃털을 붙들고 있는 동안 그리폰이 다시 날아올랐다.
둥지 주위를 돌자 나까지 어지러웠다.
그리폰의 날갯짓이 점차 느려졌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그런 걸까?
녀석의 깃털은 피로 물들어 있었다.
끼아악―
하늘을 찢을 듯하던 울부짖음도 지금은 한없이 처량했다.
좋아, 이대로만 가면···
나는 정신없이 녀석의 깃털만 꼭 붙들고 있었다.
버티면 기회가 온다.
밑에서 몇 명이 꽥꽥 소리를 질러댔다.
빨리 내려와라 이거지?
하지만 상처를 많이 입은 그리폰은 내려갈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날개를 젓는 것도 힘에 겨워서 바람에 실려 활공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서서히 바위산에서 멀어져 갔다.
나는 마지막으로 롱 나이프 두 개를 뽑았다가 날개 주변에 힘껏 꽂았다.
끼악!
그리폰이 마지막으로 발악하며 나를 튕겨냈다.
나는 땅을 보며 낙하하기 시작했다.
땅에 돋아난 풀이 무슨 모양인지 알게 되었을 때 비로소 차원문을 열었다.
몸이 그리폰 새끼 위에 던져졌다.
"휴···다행이네."
풍뎅이들은 보금자리에 숨어서 눈만 내놓고 있었다.
갑자기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나 놀란 모양이다.
나는 녀석들을 안심시키고 그리폰 시체를 한 곳에 밀어둔 후 롱나이프 하나를 무기대에 놓았다.
그리고 밖의 소리에 집중했다.
쿵!
그리폰이 떨어졌다.
이젠 바삐 움직여야 한다.
나는 쉘터로 튀어나가 발리스타를 장전하고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리폰이 떨어진 곳에 가보니 녀석은 숨만 헐떡이고 있었다.
그러나 눈은 여전히 나를 노려봤다.
저렇게 탈진한 상태라도 최후의 일격을 가할 힘은 있다는 거지.
지금 가까이 접근하면 매우 위험하다.
"거기 딱 누워 있어라."
나는 차원문 안에 들어가 발리스타로 녀석을 조준했다.
그리폰의 눈이 나를 따라 움직이다가 멈추는 게 보였다.
갑자기 사라지니 이상하게 느껴지겠지.
스위치를 올리자 활대의 탄성이 볼트를 순식간에 밀어냈다.
퍽!
끼에에엑!
그리폰은 눈가에 커다란 볼트를 꽂고 괴로워했다.
나는 부랴부랴 볼트 한 발을 더 장전해 쏘았다.
잇따른 사격에 그리폰은 완전히 절명해 축 늘어졌다.
상태창이 갱신되었다.
「포인트를 50 획득했습니다」
「스킬 : 그리폰의눈을 획득했습니다」
됐다.
아이템도 봐야겠지만 지금은 확인할 시간이 없었다.
나는 등의 롱나이프 흔적을 완전히 뭉개고 볼트를 뺐다.
그리폰의 눈알과 피가 함께 튀어나왔다.
이제 누가 와도 그리폰이 어떻게 죽었는지는 모를 것이다.
그 때 멀리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기 떨어진 것 같은데?"
"빨리 알려!"
검인의 파티원들이 분명했다.
나는 적당한 곳에 차원문을 열어 몸을 숨겼다.
이윽고 사람 몇 명이 달려오더니 탄식했다.
"야···이거."
"그, 그냥 떨어져서 죽은 겁니까?"
"머리가 심하게 훼손됐는데요?"
검인이 갑자기 그리폰 시체 앞에 나타났다.
블링크가 확실하군.
그는 그리폰의 시체를 보더니 허탈하게 웃었다.
"하···진짜."
사람들 앞이라 그런지 분노를 토해내진 못하고 몸을 부들부들 떠는 게 보였다.
저러다 누가 건드리면 폭발하겠지.
그는 무릎을 꿇고 그리폰의 시체를 면밀히 관찰했다.
"롱나이프가 없습니다. 내가 분명히 꽂았는데."
"낙하하면서 떨어져 나간 게 아닐까요?"
"그리폰이 워낙 발버둥이 심해서 원."
"···"
검인의 시선이 심하게 훼손된 머리로 향했다.
"이건 낙하하면서 생긴 상처가 아닌데···"
파티원들이 그리폰 사체를 돌아보며 잡담을 나눴다.
"우리 말곤 아무도 없었잖습니까?"
"그 좀비 여왕이 벌인 짓일까요?"
"에이, 좀비들 해봐야 그리폰한테는 택도 없죠."
"그나저나 이거 맛있을 것 같은데."
"푹 익히면 먹을 만 할 겁니다."
"전에 이야기 들어보니까 성체보다는 새끼가 맛있다던데요."
"새끼니까 살도 야들야들할 거고···그리폰이라서 덩치는 크고···"
"소주 곁들이면 죽이는데 흐흐···"
"저기 둥지가 비지 않았어요?"
"새끼 잡으러 가볼까요?"
"지금 먹는 게 중요합니까!"
안 그래도 잔뜩 화가 나 있던 검인이 기어코 폭발하고 말았다.
파티원들은 그의 기세에 주춤하긴 했으나 열이 올라 투덜거렸다.
"먹고 사는 게 중요하지 그럼 뭐가 중요해요?"
"실패한 게 우리 책임도 아닌데 왜 소리를 지르고 그럽니까."
"애초에 우리 모은 게 누군데요."
"성깔은 댁만 있는 게 아닙니다, 예?"
검인의 눈에 아차, 하는 기색이 어렸다.
파티원들은 그가 고깝지 않은 모양이었다.
"에이, 치워요, 치워."
"새끼고 뭐고 이거나 챙겨 갑시다."
"손질하려면 빡세겠네."
"검인씨, 약속한 거 확실히 정산해주십쇼."
검인은 기운을 잃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좀 미안한데.
나는 시치미를 떼곤 차원문을 닫았다.
< 협력하거나 반목하거나 - 4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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