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또 너냐 - 1 >
나는 돌가사리 포 뜬 것을 공터에 널었다.
바닷바람에 말리고 싶었지만 몬스터들이 관심을 보이는 건 곤란했다.
며칠 뒤 가면 뼈만 남아있을 것 같았다.
"여기도 냄새가 장난이 아니구만."
냄새를 맡고 몰려든 코볼트들이 해자와 윤형철조망을 돌파하려다 시체가 되었다.
"젠장할 놈들, 가망이 없으면 좀 그만두란 말이야."
결국 시체를 치우는 건 나라고.
나는 코볼트 시체를 토막 내서 멀리 던져버렸다.
그래도 내 쉘터가 튼튼한 것 같아 다행이었다.
최소 소형 몬스터의 침입은 끄떡없이 버틸 수 있다.
나는 따로 보관해둔 돌가사리 알집을 소금에 절였다.
명란젓 비슷하게 만들어볼 셈이었다.
"손이 꽤 많이 가는구만."
잘 만들려면 물기제거도 중요하고 숙성도 며칠이나 하는 등 품이 많이 들 것 같았다.
그래도 젓갈은 맛있으니까.
아포칼립스에서 짠 음식은 되도록 섭취하지 않는 게 좋지만 나는 입장이 다르다.
"없어서 못 먹지, 이런 건."
알젓이 완성되지도 않았건만 나는 경매장에 올릴 가격을 생각하고 있었다.
좀 비싸게 올려도 젓갈을 먹고 싶은 누군가는 구입할 것이다.
하지만 내 먹을 것도 별로 없다.
경매장에 올릴 정도로 만들려면 하루 종일 돌가사리를 낚아야 할 판이었다.
알을 밴 녀석이 그리 많지는 않으니.
"경매장에 식량 올리는 사람이 있나?"
확인해보니 의미 있는 양을 올린 사람은 거의 없었다.
눈에 띄는 것은 누군가가 올린 멧돼지 한 마리.
낙찰가를 1,000포인트로 설정하는 바람에 욕을 처먹고 있었다.
―좀비 500마리 잡아야 멧돼지 낙찰받네 씨발아.
―멧돼지 손질 잘못하면 냄새 배겨서 못 먹는데.
―그럼 적정가는 얼마임?
―상점빵이 20포인트니까 500포인트 정도면 될 것 같네요.
―와 그래도 비싸네.
―병신들아 잘 생각해봐. 저거 멧돼지라서 수율이 낮겠지만 그래도 고기 20키로는 나와줌. 1키로에 25포인데 이게 비싸다고?
―상점빵 20포 VS 멧돼지고기 1키로 25포?
―ㅋ?
―이렇게 보니 500포가 비싼 게 아니네···
―아니 상점빵은 바로 먹을 수 있는 거고 멧돼지는 손질해야 되잖아.
―상점빵 완전 개노맛임. 맛이 아예 존재하질 않음.
―그걸 또 먹어보냐. 능지 처참하죠?
그 때 누군가가 멧돼지를 낙찰해가는 바람에 코멘트란은 흥분에 휩싸였다.
―호구가 따로 없네 멧돼지를 천포에 사?
―생존자1 : 억울하면 포인트 내고 먹으면 됨.
―아니 먹고 싶은 게 아니라 물가가 교란되고 있다고 지금.
―위에새낀 등신인가? 애초에 상점 물가가 뒤죽박죽인데 교란은 뭔 교란이야.
―고기 먹고 싶은데 없으면 비싸게 사는 거지 물가가 어딨어.
―그래도 상식이란 게 있는건데.
―아포칼립스에서 상식을 찾네.
―ㅋㅋㅋㅋㅋㅋ
멧돼지 산 사람은 생존자1이었구나.
정부 사람들과 함께 있을 테니 다량의 고기가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쉘터에 관련된 특성인 줄 알았는데···"
생존자1의 특성은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그때 코멘트란의 주제가 묘하게 뻗어나갔다.
멧돼지 사냥 얘기를 하다가 누군가가 생물친화 특성도 있다고 글을 올렸다.
그게 있으면 멧돼지도 잡기 쉽다고.
―완전 골 때리는 특성이었음. 동물이 막 나잡아주셈하고 다가옴.
―ㄹㅇ?
―굶을 걱정은 없겠네. 부럽다.
―다 좋은데 쥐새끼들도 막 달려든다는 문제가 있었음ㅋㅋㅋ
―허미.
쥐까지 달려들면 좀 그렇지.
그나저나 그런 특성이 있으면 특정동물은 배제시키는 추가효과도 있을 법 한데.
나는 경매장에서 눈을 떼다가 누군가가 올린 코멘을 마지막으로 읽었다.
―그 특성 가진 놈 있으면 조심하셈. 우리 뒤통수 치고 달아났음.
아포칼립스에서는 흔한 거지.
하지만 뒤통수 맞은 것 치고는 멀쩡해 보이는데?
누군가 그 점을 지적하자 그는 달아난 놈이 바보였다고 둘러댔다.
얘는 좀 수상한데.
나는 10포인트를 써서 뒤통수를 맞았다고 주장하는 놈의 아이디를 확인했다.
「구경하러와봄(징징이5)」
"이거 징징이 시리즈잖아."
과한 훈지를 요구했으며 토공이 여자인 줄 알고 껄떡댄 놈이기도 했다.
이번에 토공의 실체를 알고 나면 충격을 받을지도 모르겠다.
"만든다는 길드가 종사모였나···"
나는 노트에 징징이의 아이디와 길드 이름을 기록해두었다.
언젠간 쓸모가 있겠지.
.
.
.
새벽.
나는 부두에 설치해놓은 통발을 건졌다.
철사가 부서졌기에 모양은 형편없었지만 안에 든 건 제법 많았다.
"여기도 문어가 있네."
새우는 없고 장어와 이름 모를 게 몇 마리가 눈에 띄었다.
확실히 이계의 바다에 비하면 부족하지만 한 끼 식사로는 나쁘지 않다.
통발을 건져 올리고 재빨리 골목길로 들어가는데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안녕하세요···"
모텔 주차장 안에서 남자와 여자가 내게 인사했다.
어디에서 본 얼굴인데.
기억을 되새기니 권씨의 노예였던 사람들이라는 게 생각났다.
살인자 이벤트에서 도망쳤었나?
둘은 무기를 내려놓고 최대한 조심스럽게 나를 불렀다.
"혹시 잠깐 이야기해도 괜찮을까요?"
"저희가 여쭤볼 게 있어서 그렇습니다···"
"···"
딩고는 느긋했고 나는 정신을 집중해 주위를 살폈다.
다른 사람은 없는 모양이다.
나는 안으로 들어가는 대신 따라오라고 고갯짓을 했다.
어두운 주차장으로 들어갈 필요는 전혀 없다.
둘은 서로의 얼굴을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곤 나를 따라오기 시작했다.
용케 여기까지 왔구만.
내가 찾은 곳은 기름 냄새 흥건한 주유소였다.
여기는 탁 트였으면서도 기둥이 몇 개 있어 숨을 곳이 많다.
뭣하면 건물로 도망가도 되고.
나는 기둥에 몸을 기대고 둘이 다가오길 기다려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남자가 나와서 다시 고개를 꾸벅 숙였다.
"전에는 인사도 못하고 도망가서···감사합니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저는 유주고 이쪽은 철준씨예요. 정말 감사합니다."
전에 못 다한 인사를 하는 거군.
나는 표정을 조금 풀고 고개를 꾸벅 숙였다.
"강성홉니다."
"아···성호씨셨구나."
아포칼립스에선 동료 아니면 적이라는 내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굳이 적을 늘릴 필요까진 없다.
내게 이를 드러내는 놈이면 바로 박살을 내야겠지만.
"어떻게 잘 도망가셨네요. 제가 북쪽으로 가라고 말씀드렸는데."
철준이란 남자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처음엔 저희가 김해 신도시 쪽으로 방향을 잡았거든요. 그런데 중간에 그게 생각나서···"
"그, 권씨의 부하였을 때의 기억이 조금 났어요. 김해하고 창원은 위험하다고···"
거기에 권씨와 관련이 있는 클랜이 있다.
기억이 하나도 없는 건 아닌 모양이다.
나는 물었다.
"어디까지 기억하고 있습니까?"
철준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 그걸로 성호씨와 거래를 하고 싶습니다. 저희가 알고 있는 정보와."
"성호씨가 가진 권씨에 대한 정보를···서로 이렇게 바꿔서요."
유주라는 여자가 말을 맺었다.
그러니까 정보를 맞바꾸자는 말이군.
내가 내줄 건 이제 쓸모도 없는 권씨에 대한 것뿐이다.
대가는 이들이 가지고 있을, 내가 모르는 정보.
"저기 들어가서 얘기합시다."
나는 주유소 안의 사무실을 가리켰다.
슬슬 주변의 좀비가 우리를 눈치 채고 몰려들 때였다.
둘은 따라오면서 내 통발에 관심을 가졌다.
"이거 성호씨가 잡은 거예요?"
"예, 뭐."
"문어 맛있겠다···"
"저기 낚시용품점에 가서 통발 가져오세요."
"부두에 몬스터가 있어서 위험하잖습니까. 통발 던지고 있다가 뒤에서 마비독침이라도 맞으면···"
"지금은 없었죠?"
둘은 딱히 할 말이 없는지 묵묵히 의자에 앉았다.
내가 제안했다.
"하나씩 묻기로 하죠. 먼저 물어보세요."
유주가 망설이며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옆에서 철준이 괜찮아, 하며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다.
아마 노예에 관련된 거겠지.
"권씨의 벙커에서 전 어떤 존재였나요? 제 말은, 저는 권씨의 뭐였을까요?"
"정확하게 알고 싶습니까, 아니면 대충?"
"100% 진실을 원해요."
"화가 많이 날 겁니다."
"알고 있어요, 대충은 아는데, 그걸 듣고 극복해야 할 것 같아요."
"성노예였습니다."
"···"
유주가 눈을 감고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리곤 내게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저, 전 원래 그 골프장에 에이전시 계약으로 간 모델이에요."
"저런."
왠지 키도 크고 예쁘다 했다.
"홍보물 찍으러 간다고 해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그랬는데···"
급기야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비쳤다.
원통하겠지. 화가 나겠지.
하지만 화풀이를 할 대상인 권씨는 존재하지 않는다.
철준이 내게 물었다.
"그···권씨는 어떻게 죽었습니까? 불에 탄 건 아는데, 그러니까···아시죠?"
고통 받으면서 죽었냐는 거겠지.
"질문은 하나로 치겠습니다. 권씨는 엄청난 고통 속에서 죽어갔습니다. 산 채로 불에 탔거든요."
"아주 잘 하셨어요."
"혹시 성호씨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까지 와서 내 소행이 아니라고 하는 건 좀 그랬다.
"이젠 제가 묻고 싶은데···여기에 세력이 있습니까?"
내 질문에 철준이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자기들도 얼마 전에 와서 잘은 모르지만, 하여튼 이 주위엔 나 말고 두 개의 세력이 있단다.
"하나는 저희가 포함된 세력이고, 다른 하나는 고등학생 몇 명이었습니다."
"남자 둘에 여자 하나···친구로 보였어요."
"성향은 어떻던가요?"
"그렇게 나쁜 것 같지는 않았는데 잘은 모르겠어요. 딱히 부딪친 적이 없어서."
"사냥은 거의 안 하고 파밍 위주인 것 같더군요."
전투 특성이 아닌 모양이다.
나는 화살로 날아온 쪽지를 보였고 철준이 자기들 리더의 글씨라고 실토했다.
"그, 나쁜 마음에 보낸 건 아닐 겁니다. 저희는 그렇게 과격한 세력이 아니라서요."
잘은 모르지만 그럴 확률이 높았다.
권씨나 김해의 이씨처럼 양아치는 아니고 그렇다고 헬스장 멤버처럼 선하지도 않은 보통 사람.
사실 아포칼립스에선 이런 사람이 많다.
상황과 입장에 따라서 선하게 행동하고 또 악행도 저지르고 하는 거지.
우리는 번갈아가며 질문했고 서로에게 필요한 몇 가지 정보를 얻어냈다.
진해는 몬스터의 천국이 되었다는 것.
그리고 창원 클랜이 크고 난폭하다는 것 정도였다.
"성산구 쪽에는 어지간하면 안 가시는 게 좋을 겁니다. 클랜이 꽉 잡고 있다는 소문이 있어요."
"인원이 제법 많은가보죠?"
"저희 리더가 그쪽에 있다가 밀려나왔는데 30명 이상이라고 합니다."
"나머지 생존자들은 그들의 횡포에 거의 지내는 신세고요."
"대단하네요."
그쯤 되는 세력을 통솔하는 놈이라면 분명 내가 아는 사람일 텐데···
미리 아이디를 알아둘 걸 그랬나.
며칠 후에 다시 회동이 열릴 테니 그 때 확인하면 된다.
암호문이 유출됐다 생각하고 잠수를 타버리면 어쩔 수 없지만.
그나저나 이 사람들과는 꽤 마음이 통하는군.
과하게 좌절하지도 않고 내게서 정보를 얻어내려 노력하고 있었다.
여기선 서로 돕도록 합시다.
나는 성의의 표시로 통발에 있던 것을 유주에게 건넸다.
"이사 떡은 못 돌려도 이 정도는."
"아···정말 감사합니다. 사실 저희 전투식량만 먹고 지냈거든요."
"유주씨가 그거 때문에 완전 변비에 걸려가지고···아야."
"그걸 왜 말하는 거예요?"
이 사람들 솔로천국 커플지옥을 모르네.
뭐 그래도 아포칼립스 세상에서 서로 믿고 의지한다는 건 좋은 일이다.
"다음에 봅시다."
나는 둘에게 인사한 후 밖으로 나왔다.
.
.
.
"야야, 저 사람들 건물 안에 들어갔어."
"통발은 좀 놔두고 가지."
"표정이 되게 심각한데?"
"오늘 뭐 잘못 먹고 지금 배가 아픈 상태일 거야."
"그럼 좀 있다가 똥 싸는 거냐?"
"이 미친 것들이 뭔 소리야."
성호와 철준, 유주가 주유소 건물에 들어갔을 때 그들을 지켜보는 시선 셋이 있었다.
이들은 종말 전까진 남녀공학 고등학교를 다니던 친구 사이였다.
같은 동네에서 나고 자라 18년간 같이 놀고 공부한 소꿉친구라고 할 수 있겠다.
박준호, 김도형, 한여울.
이렇게 세 명은 학교에서도 바보삼남매로 유명했다.
정확히 말하면 바보짓은 남자 둘이 저지르고 홍일점인 여울은 수습하는 쪽이다.
셋 모두 가족을 잃고 자기들끼리 뭉쳐서 지금까지 살아왔다.
뒤늦게 정보를 접해서 식량과 물을 충분히 준비하지 못한 게 아쉬울 따름이었다.
여울은 자세를 낮추고 건물 안의 아저씨를 쳐다봤다.
기둥에 가려서 모습이 잘 보이진 않았지만 제법 날카로운 외모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저 아저씨 어디서 왔을까?"
"어디선가 왔겠지."
"야이 바보들아. 지금 중요한 건 저 아저씨가 통발을 걷었다는 거라고."
여울이 신발로 두 친구의 엉덩이를 팡팡 때렸다.
둘은 엉덩이를 만지면서도 군침을 삼켰다.
"통발 안에 뭐 들어있는 거 같았는데."
"마산 사람 아니네. 여기 앞바다 완전 똥물인데."
"이게 신여우인가 하는 그거냐?"
"신포도! 이 바보들아."
여울은 화가 났는지 갑자기 버럭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녀의 친구 둘은 여전히 헛소리를 하고 있었다.
"저거 훔칠까? 밤에 아지트에 몰래 들어가면 어때?"
"저 아저씨 존나 강해 보이는데 되겠어?"
"···까놓고 자신은 없는데 그래도 우리 셋이면···"
"거기에서 나는 빼주라, 제발. 애초에 왜 도둑질을 하려고 하는 거야. 저 아저씨가 언제 통발을 던졌는지 그걸 알아내야지."
"오···그러네."
"여울이 말이 맞네."
"둘 다 일어나봐."
준호와 도형은 냉큼 일어나서 앉았다.
둘은 여울이의 말이라면 보통은 따라주는 편이었다.
그나마 머리가 돌아가는 게 여울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팔짱을 끼고 말했다.
"생각해봤는데, 지금 아침이잖아, 그지? 저 아저씨가 아침이 되기 전에 통발을 걷었다는 건 뭘 뜻하겠어?"
"어···몬스터가 별로 없어서?"
준호가 모처럼 그녀의 마음에 드는 답을 내놓았다.
"그래. 지금 시간대에는 고블린이고 좀비고 활동을 잘 안 한다고. 저녁에도 분명히 그런 시간대가 있을 거야. 저 아저씬 그걸 알고 통발을 던지고 걷고 하는 거지."
"그러고 보니 코볼트도 없네."
여울은 고개를 주유소 건물로 돌렸다.
"몬스터의 공백이란 거야, 지금이."
"그럼 우리도 통발 던져야겠네?"
"그것도 하고, 아저씨도 만나봐야지. 이것저것 많이 알고 있을 것 같아."
"오올. 여울씨 미인계 쓸 생각이세요?"
"미인계에?"
둘이 이상한 표정을 짓곤 낄낄 웃어댔다.
여울은 한숨을 내쉬며 배낭을 둘러멨다.
"마음대로 생각해. 나 먼저 간다."
"야야야, 잠깐만."
준호와 도형은 짐짓 어깨에 힘을 주었다.
"그래도 어? 우리가 친구인데 내버려 둘 수가 있나. 같이 가자고."
"니들 둘 데려갔다가 괜히 오해라도 사면 안 되는데."
여울은 한숨을 쉬며 먼저 계단을 통해 내려갔다.
멀찍이에서 남자가 나오는 걸 보곤 말을 걸 생각이었다.
철준과 유주와도 무리 없이 대화하는 걸 보면 그렇게 난폭한 사람은 아닐 것이다···
여울은 그렇게 생각했다.
이윽고 남자가 통발을 어깨에 메고 나왔다.
뒤에서 웬수들이 쑥덕댔다.
"와 어깨 엄청 넓다."
"키 저 정도면 거의 190 아니냐?"
"···"
여울이 보기에도 남자의 덩치는 장난이 아니었다.
험상궂은 얼굴은 아니었지만 쉽게 다가가기 힘든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옆에서 졸졸 따라다니는 개는 허스키인가?
그녀는 용기를 내어 천천히 몸을 밖으로 빼냈다.
남자가 경계하지 않게.
그리고 꾸벅 인사하려는데 느닷없이 그가 활을 들어올렸다.
"아."
여울은 자신을 향한 선명한 화살촉을 보곤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 또 너냐 - 1 > 끝
< 또 너냐 - 2 >
남자가 고개를 까딱했다.
"앉으세요."
이건 본능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녀가 냅다 주저앉은 순간, 성호가 시위를 놓았다.
화살은 막 골목에서 튀어나온 고블린의 머리통을 쑤시고 들어갔다.
케악!
괴성이 들림과 동시에 또 활이 휘어졌다.
여울은 왠지 모르겠지만 남자가 자신에게 존댓말을 한 것이 기뻤다.
그렇게 생각하며 뒤를 보는데 고블린의 입에 화살이 하나 돋아났다.
'강해···'
남자는 별로 수고도 들이지 않고 고블린 네 마리를 순식간에 해치웠다.
화살이 박힐 때마다 퍽, 퍽 하며 치명적인 소리가 났다.
일행이 쓰는 활이 갑자기 애기용 장난감으로 전락한 느낌이었다.
남자는 고블린에게서 화살을 회수했고 주머니를 뒤졌다.
여울은 멍하니 있다가 그제야 일어났다.
그는 자신에게 괜찮으냐고 물어보지도 않았다.
자기 일만 묵묵히 하는 느낌이었다.
뭔가 좀 다른 사람이네.
그녀는 용기를 내어 그를 불렀다.
"저···아저씨."
"왜요?"
"여쭤볼 게 있어서 그런데, 잠깐 시간 좀 내주실 수 있을까요?"
"어렵진 않은데···여기 언제부터 있었어요?"
그제야 남자 둘이 여자의 뒤에 붙었다.
철준과 유주가 말한 파밍에 열중한다는 그 학생들이다.
"저희 7월부터 여기 쭉 있었어요."
"태어나서 지금까지 여기서 살았죠. 토박이, 토박이."
그렇다면 근처 정보를 좀 알겠지.
성호는 고개를 끄덕이곤 옆의 가게에 시선을 두었다.
"저기로 가서 얘기합시다."
"오예."
왠지 남자 둘은 신난 것 같았다.
몬스터에게 공격당할 뻔한 이 상황에?
성호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곤 주위를 다시 둘러봤다.
저 멀리 좀비 몇 마리가 있긴 하지만 당장 공격할 것 같진 않았다.
아침은 늘 이러니까.
셋이 가게 안에 들어갔고 성호는 입구 쪽에 자리를 잡았다.
"저는 한여울이고요, 얘는 준호, 얘는 도형이요."
"반갑습니다."
"안녕하세요."
별 거부감 없이 고개를 꾸벅 숙이는 걸 봐서 나쁜 물이 든 학생들은 아니었다.
아니면 연기거나.
성호는 팔짱을 풀고 그들에게 인사했다.
"강성홉니다. 혹시 아침부터 나 보고 있었습니까?"
셋은 서로의 얼굴을 보며 미뤘다.
니가 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여울이가 한숨을 푹 쉬며 입을 열었다.
"아까 통발 걷어 올리는 거 봤어요. 부두에서요."
"밤에 몬스터가 없는 시간을 알고 싶다는 거죠?"
이 아저씨 눈치 되게 빠르네.
여울은 고개를 끄덕였다.
밤이 되면 정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몬스터가 사라지는 시간을 알아내겠다고 밖에 나갔다간 독침을 맞을 판이었다.
고블린이 사라진 뒤 통발을 설치했다간 어디선가 보고 있었을 코볼트에게 빼앗긴다.
그래서 몬스터가 없는 타이밍을 잡는 게 최선이었다.
성호는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착한 학생들 같아서 내가 도와주고 싶은데. 뭐 하나만 물어봅시다. 근처에 세 분 말고 또 사람이 있어요?"
"있어요, 있어요."
여울이 나서기 전 준호와 도형이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근처에 저희 학교 있거든요? 거기 사람들 좀 있어요."
"철길 서쪽에도 사람 엄청 많아요."
"눈에 띄는, 그러니까 강해 보이는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음···여기 사람들은 다들 고만고만해서요."
"법원 있는데 아세요? 거기 밑쪽에 경매장 연 사람들이 있다네요."
"저희도 빨리 경매장 열어야 하는데 큰일이에요."
"형, 혹시 상점이나 경매장 여셨어요?"
남학생 둘은 언제 봤다고 형이라 부르며 친근하게 굴기 시작했다.
성호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상점은 열었죠. 법원 쪽 사람들 얘기를 좀 더 듣고 싶은데···괜찮을까요?"
배낭에서 육포를 꺼내자 셋의 눈이 초롱초롱해졌다.
이게 얼마 만에 보는 고기야.
여울이 냉큼 세 개를 가져가선 하나씩 나눠주었다.
성호는 이들 셋의 관계를 대강 눈치 챘다.
'여자애가 대장인가 보군.'
셋의 전투력이 고만고만하면 그럴 수도 있다.
특성도 전투계는 아닌 모양이고.
남자애 둘이 육포를 뜯는 동안 여울이 털어놓았다.
"사실 저희는 법원 쪽 사람들 잘 몰라요. 그래도 아는 게 하나 있는데 어떤 거냐면···"
"그 형 쫓아낸 거 말이지?"
"도망간 거라니까. 그 형 되게 착하던데."
뭔가 사연이 있나보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다음과 같았다.
법원 쪽 공동체는 주변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는데 어떤 젊은 남자를 포섭하는 데 성공했다.
문제는 그 청년의 특성이 장난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동물이 경계심 없이 다가오는 특성 보셨어요? 와, 장난 아니던데요."
"잠깐 통발 던지니까 주변 고기들이 막 몰려들던데."
"···그래요?"
분명 경매장에서 징징이 5호가 이런 소리를 했었는데.
"법원 쪽 공동체 이름이 있었나요?"
"종···종말 뭐였는데."
"아 뭐였지."
둘이 버벅거리자 여울이 답답하다는 듯 자기 허벅지를 탁 쳤다.
"종말을 대비하는 사람들의 모임!"
줄여서 종사모. 맞나보군.
"하여튼 그 특성을 가진 사람이 도망갔거나 쫓겨났거나 둘 중 하나라 이거죠?"
"네. 그 오빠는 되게 착했거든요. 저희한테도 잡은 거 나눠주고 그랬어요. 반면에 종사모 사람들은 별로···안 좋아요.
"정확히 어떻게 안 좋죠?"
"그 오빠 막 가둬놓으려고 그러고. 밖에 나가려고 하면 감시 붙였대요."
"너무하네요."
그만큼 그 특성이 대박이란 뜻이겠지.
종사모는 아마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전투능력도 보잘 것 없는 애를 우리가 보호해주는데 뭐가 문제야? 상부상조 몰라?
정확히는 보호가 아니라 감금이겠지만.
아무튼 징징이 5호의 성향과 학생 셋의 증언을 합쳐 보면.
생물친화라는 대박 특성을 가진 생존자 1명이 도망 나왔다는 소리가 된다.
성호가 물었다.
"그 도망갔다는 사람···정확히 어디로 간 건지는 모르죠?"
"네. 남쪽으로 간 건 아는데 그 이상은."
이건 남하하면서 찾는 수밖에 없겠군.
퍼스트킬 이벤트를 클리어하고 나서 찾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성호는 부담스러운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학생들에게 이렇게 제의했다.
"좋은 정보를 줬으니까 하는 얘긴데, 아지트 알려주면 오늘 밤에 내가 가볼게요."
"그 때가 몬스터 없는 시간대죠?"
여울의 목소리가 살짝 밝아졌다.
"날씨와 온도 등에 따라 다르긴 한데 몇 번 하다 보면 감이 옵니다."
"아저씨가 가르쳐 주시면 제가 배울게요."
성호는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럼···서로 돕고 지내는 걸로 하죠."
"저희는 좋아요."
그녀는 별로 망설이지도 않고 손을 잡아 흔들었다.
"이예쓰!"
"형형, 저희 그냥 이름으로 불러주세요."
뭐가 그리 좋은 걸까.
어쩌면 아포칼립스에서 믿고 의지할만한 사람이 생겼다는 게 기쁠지도 모르겠다.
정작 성호 자신은 그런 놈이 아닌데.
하여튼 당분간 여기서 지내야 되니 이들과 돕고 지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았다.
.
.
.
그날이 다가왔다.
오크 퍼스트킬 이벤트 말이다.
나는 삼인방과 정보를 주고받으며 시간을 보냈다.
물론 이벤트에서 1등을 하기 위한 준비도 빼놓지 않았다.
슬슬 화염캔을 만들어놔야 한다.
동굴 안에 들어가 점화석을 깨고 있으려니 대장 풍뎅이가 흑탄을 들고 다가왔다.
"응? 그거 왜?"
녀석은 점화석과 흑탄을 깨서 섞는 제스쳐를 취했다.
"파우더를 섞으라고? 비율은?"
흑탄을 적당히 섞으면 화력이 높아지는데 많이 섞으면 위력이 감소하는 것 같다.
정확한 양이 얼마인지는 실험으로 알아낼 수밖에 없었다.
나는 점화석과 흑탄을 완전히 파우더로 만들고 조금씩 섞었다.
"일단 2:1 비율부터 해보자."
조금씩 덜어내어 불을 붙여보니 과연.
점화석 파우더만 투입한 것에 비해 훨씬 화력이 높아졌다.
체감 상으론 거의 1.5배 이상이었다.
"이거 좋은데."
점화석을 30%나 줄였는데도 화력이 1.5배 상승한다고?
욕심이 나서 흑탄 파우더의 비율을 늘리자 오히려 불꽃의 높이가 낮아졌다.
역시 대장 풍뎅이의 말이 맞았다.
"기존의 위력을 유지하기 위해선 절반 정도는 넣어야 되네."
그러니까 흑탄을 첨가하면 귀한 점화석 파우더를 절반으로 줄여도 된다는 거다.
이건 좋은데.
비축된 점화석은 겨우 9개가 끝이었다.
새로 발견한 동굴에 있는 것을 포함해도 15개 정도였다.
하지만 흑탄은 상대적으로 풍부했다.
"비축한 건 별로 없지만 동굴에 엄청나게 많단 말이지···"
대장 풍뎅이의 정보에 의하면 땅을 파면 그냥 흑탄이 나온다고 한다.
굳이 비축할 필요가 없어서 안 했을 뿐.
결론적으로 흑탄을 첨가하면 화염캔을 두 배로 늘일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이건 비싸게 팔 수 있겠는데."
흑탄은 상점에 없고 나도 게임 안에선 본 적이 없다.
고블린에게서 루팅했다는 사람도 못 봤고 숲의 고유 자원이라고 해도 된다.
그러니까 나만 이걸 팔 수 있다는 거지.
"지금 화염캔의 가치가 엄청나지 아마?"
화염캔 자체는 제조할 수 있는 사람이 제법 있다.
우리 고인물들이 제조법을 알아내 퍼트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점화석 자체가 드랍률이 안 좋아서 화염캔을 만든 사람은 얼마 없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경매장을 켜보니 다들 점화석만 올라오길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었다.
"멧돼지만큼 비싸도 산다고···"
하긴 점화석 하나면 오크를 잡을 수 있는데 1,000포인트는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흑탄 파우더를 두 개로 분류했다.
하나는 판매용, 다른 하나는 샘플용.
샘플은 가격을 낮게 책정해서 누구나 부담 없이 사서 쓸 수 있도록 할 생각이었다.
당연하지만 샘플용은 양이 매우 적다.
"일단은 홍보를 해야지."
코멘트란에 비율까지 작성해서 올리니 사람들의 관심이 쏠렸다.
―흑탄 파우더? 이건 뭐임?
―이거 섞으면 점화석 비율 줄이고도 위력이 유지된다는데?
―?? 그럼 점화석 하나로 화염캔을 두 개만들 수 있다는 거임?
―사기지 이런 건.
―사기면 샘플을 안 올렸겠지 등신아. 내가 샘플 사서 만들어본다.
샘플용 흑탄 파우더가 저렴하다보니 올리는 족족 팔려나갔다.
그리고 잠시 후에 판매용 흑탄 파우더의 경매가 시작되었다.
사람들은 혼란에 빠졌다.
―뭐임? 진짠가?
―진짜니까 경매가 시작된 거겠지?
―발 빠른 놈들은 다르네···쉬벌 나는 점화석 하나 없이 빌빌대고 있는데.
―저거 경매하는 놈들 준고인물들임. 올린 놈은 고인물이고.
―태생이 금수저 은수저네 부럽다 ㅆㅂ
―야 저거 얼마만큼 올라갈까?
―전에 점화석 천포에 낙찰된 거 봤음.
―그럼 500포까진 올라갈 것 같은데? 나머지 재료는 구하기 쉽잖아.
―이 봉다리가 500포라고? 멧돼지가 혜자였네.
―병신아 멧돼지하고 비교가 되냐. 저걸로 오크를 잡을 수 있는데.
―500포로 스킬하고 아이템 확정적으로 얻을 찬스지. 운 좋으면 퍼킬까지 쌉가능.
―근데 님들 흑탄 본 사람 있음? 나는 왜 한 번도 못봤지?
―그건 니가 운이 없어서가 아닐까요?
―점화석도 경매에서 제법 봤는데 흑탄은 지금 올라온 게 처음임.
―그럼 이거 올린 놈은 어디서 구한 거야?
―혹시?
―또 너냐?
그 새끼입니다요.
나는 경매가가 상승하는 걸 구경했다.
400포인트까진 가볍게 올라가는군.
코멘트란을 보니 입찰한 사람들끼리 싸우고 있었다.
―어차피 500포 찍을 거니까 없는 놈들 포기해라. 시간 아깝다.
―여기 500포 없는 사람이 있다고?
―ㅎㅎ 이거 최소 천포까진 올라갈거임.
―미쳤냐 점화석이 천포인데 이게 천포까지 올라갈 이유가 없지.
―으이구 바보들아 내가 가르쳐준다. 천포라는 것도 점화석 몇 개가 그렇게 경매됐다는 거지 시세는 아님. 이제 이거만 있으면 화염캔을 두 개 만들 수 있는데 500포?
―ㅋ?
―점화석 갖고 있는 사람은 이거 사서 화염캔 두 개로 늘리고 싶겠네.
―가격폭등 예스잼!
―이런쉬벌.
오, 그런 건가.
시험 삼아 점화석 하나를 경매에 올려보니 난리가 났다.
―이새끼 이거 보고 있었네.
―김밥조아님 제가 사랑하는 거 아시죠? 충성충성 ^^7
―씨발 이걸로 얼마를 버는 거야 짜증나 죽겠네.
―허미 천포 돌파!
점화석의 경매가는 순식간에 1,500포인트에 육박하려 하고 있었다.
보통이라면 경매가가 이렇게까지 치솟진 않는다.
퍼스트킬 이벤트에 대한 기대심리가 이 결과를 만들어냈다.
"애초에 퍼킬 이벤트 자체가 접근성이 워낙 좋아서···"
누가 1등 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들 화염캔만 있으면 혹시 나도? 하는 기대심리가 있을 것이다.
오크에게 먼저 끼얹으면 끝나니까.
물론 부하들을 어떻게 돌파하느냐 하는 사소한 문제가 있긴 하지만···
나는 즐겁게 점화석과 흑탄 파우더의 경매가가 올라가는 걸 구경했다.
사람들이 주목하고 있어서인지 끝도 없이 올라가고 있었다.
일종의 경쟁심리다.
처음엔 예스잼을 외치던 사람들도 경매가가 2천 포인트에 육박하자 질린 듯했다.
―미친놈들아 점화석을 2천에 사냐.
―나는 600포밖에 없는데 와 부자 많네.
사실 나도 지금 가진 포인트는 얼마 되지 않는다.
대량으로 벌 수 있는 방법이 있기에 포인트 벌이에 집착하지 않은 것이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지."
마침내 경매가 끝났다.
점화석은 1980포인트, 흑탄은 1050포인트로 낙찰되었다.
접시에 올려둔 두 아이템이 사라졌고 수수료를 제외한 2727포인트가 들어왔다.
"이거 쏠쏠하네."
지금 내가 가진 포인트는 3550이다.
아마도 오리궁뎅이를 제외하곤 가장 부자일 것이다.
희망적인 것은 이건 단지 시작에 불과하다는 점.
이계의 숲을 이용하면 생존자들에게 빨대를 꽂고 포인트를 마실 수 있다.
"전체 포인트가 그렇게 많지는 않지만···"
나중에 파밍 던전 등이 나오면 포인트 상황은 훨씬 나아진다.
하지만 당장은 그 포인트로 쓸 만한 게 별로 없었다.
영상을 뒤져보니 퍼스트킬 이벤트를 시작으로 2티어 상점이 열릴 예정이었다.
"엘더우드 롱보우 이게 참 좋은데."
가벼우면서도 위력은 상당해서 많은 유저들에게 인기를 얻은 아이템이었다.
문제가 있다면 지랄 같은 가격.
2티어 아이템이 원래 그렇지만 3티어와는 비교를 불허할 정도로 비쌌다.
"2천 포인트? 이게 이렇게 비쌌나?"
고인물일 때는 포인트가 넘치다 보니 가격 따윈 신경 쓰지 않았다.
화살도 따로 구입해야 하는 등 유지비가 상당하지만 사거리향상이라는 좋은 옵션이 부여되어 있다.
적당한 실력만 갖춘다면 더 멀리서 쏠 수 있으니 생존율이 올라간다.
"위력도 괜찮으니까 상점이 열리면 이걸 사야겠어."
관통력향상이 붙은 아다만트 창도 구미가 당겼다.
이거면 오크 같은 놈들은 쿡쿡 쑤셔서 잡을 수 있는데.
"투척하기에도 나쁘지 않아."
둘 다 사야겠군.
나는 활을 쏘고 투창 연습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며칠 후.
나는 마산의 도심을 돌아다니다가 낮에 돌아다니는 정신 나간 코볼트를 발견했다.
하지만 그걸 발견한 건 나 혼자가 아니었다.
똑같은 옷을 입은 몇몇 사람들이 돌아다녔다.
나는 근처 건물의 옥상에 올라가 그들을 구경했다.
"뭔 촌스럽게 단체복이야."
나름 단합의 상징이라 이건가?
행적을 추적하니 법원 근처였다.
나와 종사모가 이벤트를 두고 경쟁하게 된 것이다.
차원문을 열어두고 숨어 있으려니 덩치 큰 남자 하나가 지나갔다.
징징이 5호로군.
"여기 얼씬거리는 놈 하나도 없게 해. 알았어? 특히 새로 온 놈 조심해. 덩치 큰 그 새끼."
나를 아는 모양이다.
하긴 그렇게 돌아다녔는데 모르면 이상하지.
근데 왜 싫어하는 거야?
"돌아다니는 게 죄는 아니잖아?"
이런 말이 있다.
이유 없이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유를 만들어 주라고.
지금부터 그렇게 할 생각이다.
< 또 너냐 - 2 > 끝
< 또 너냐 - 3 >
생존자1로 알려져 있는 배검인은 주위를 둘러봤다.
'준비는 완벽해.'
이번 이벤트를 위해 그는 20여 명을 동원했다.
그들은 쉘터 주변에 흩어져서 코볼트의 출현을 감시하고 있었다.
코볼트가 나타나면 검인의 이벤트 팟이 출동한다.
이벤트 팟은 정부 쉘터의 최정예로, 모두가 15레벨 이상이었다.
그들의 목적은 오크의 퍼스트킬, 그것뿐이었다.
검인은 동료들의 면면을 천천히 훑었다.
"이번에는 제가 먹지만 다음 이벤트 때는 꼭 밀어드리겠습니다."
"그 얘긴 몇 번이나 들었습니다."
"저흰 검인씨와 같이 행동할 거라니까요. 걱정하지 마세요."
든든하다.
이들은 검인이 최근에 포섭한 생존자다.
고인물이라곤 할 수 없지만 어딜 가도 실력자 대접은 받는다.
이들이 둥지에 있는 친위대를 맡아주면 그는 오크와 1:1을 할 예정이었다.
'친위대만 없으면 죽이는 거야 쉽지.'
애초에 오크란 대단히 어려운 몬스터는 아니다.
굉장한 맷집에 공격력을 가졌지만 움직임이 느리다.
이벤트 몬스터라서 적당히 강화되어 있긴 하겠지만 화염캔이 도움을 줄 것이다.
'1등을 못하면 이야기가 안 돼.'
랭킹칸에 당당히 생존자1이라는 아이디를 써넣고 싶었다.
생존자들이 자신을 주목하게 만들고 싶었다.
'나는 대통령의 부하가 아니야.'
유감스럽게도 정부 쉘터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사람은 전직 대통령 장원택이었다.
기존 멤버도, 소집령을 보고 찾아온 생존자도 장원택을 보곤 기뻐하며 인사했다.
그가 끝까지 대통령으로서의 직무를 버리지 않은 게 존경스럽단다.
'그럼 나는? 내가 한 건 뭐지?'
공략본은 아무것도 아닌 건가?
왜 생존자들은 그가 아니라 다른 고인물들의 이야기만 하는 걸까?
'니들이 나를 존중하지 않겠다면 그렇게 만들어주마.'
그러기 위해선 퍼스트킬이라는 업적이 필요했다.
고인물들도 나름 기록을 노리고 있겠지만 이번은 경우가 달랐다.
개개인의 전투력이 크게 중요하지 않은 이벤트였다.
'토공이나 오리궁뎅이라고 해도 그 많은 몬스터를 쉽게 뚫을 수는 없어.'
요컨대 인원수가 중요하다는 말이다.
또 좀비 레이드가 일어나지 않게끔 최대한 빨리 정리해야 한다.
검인은 김밥조아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미궁에서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지만, 이번에는 이야기가 다를 것이다.
"검인씨, 찾았답니다."
누군가 말했고 생존자들이 검인과 시선을 마주쳤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록 세우러 갑시다."
.
.
.
생존자 다섯이 모이자 코볼트들이 흥분상태에 빠졌다.
저 상태의 몬스터들은 유인책이 통하지 않는다.
그저 힘으로 뚫고 지나가야 한다.
종사모가 모여 결의를 다졌다.
"나가자! 이기자! 화이팅!"
덩치가 바닥을 굴렀고 사람들이 따라했다.
되게 거창하네.
나는 차원문을 빠져나왔다.
몬스터가 워낙 많아서 인지 스탯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여기에 무언가가 있는 것만 알뿐.
"1층이냐 2층이냐 3층이냐."
은행 건물은 꽤 크고 넓어서 샅샅이 뒤져봐야 할 것 같았다.
이럴 때는 딩고의 힘이 필요하다.
나는 갈고리를 이용해 곧장 2층으로 올라갔다.
"딩고, 오크 냄새 찾아줘."
차원문을 열고 딩고를 풀어놓자 녀석은 냄새를 킁킁 맡더니 어디론가 달려갔다.
나는 투쟁본능을 활성화시켰다.
3분 동안 지속되는 이 스킬이 끝나기 전에 오크가 죽는 게 베스트다.
시야가 붉게 물들었고 나는 딩고를 앞서나갔다.
녀석이 깜짝 놀라며 나를 올려다봤다.
"계속 가, 신경 쓰지 마!"
밑에선 종사모의 생존자들이 몬스터들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조금 있으면 덩치가 올라오겠지?
블링크나 은신 등의 이동계 특성은 아닐 것이다.
전투력을 과시하는 리더가 가질 특성은 아니다.
"아마도 육체강화."
근육질로 보였으니 그럴 확률이 높았다.
딩고가 3층으로 뛰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역시 보스는 가장 높은 곳에 있는 법이지.
고블린 몇 마리가 뛰어 내려왔으나 나는 빠르게 그들을 지나쳤다.
창대가 허공을 갈랐다.
키익?
평소 같으면 저 맨들맨들한 머리에 발차기라도 날려줬겠지만 오늘은 시간이 없다.
나는 딩고의 뒤를 따라 빠르게 움직였다.
개방된 사무실에서 고블린들이 뛰쳐나왔다.
하나같이 눈이 붉었고 침까지 질질 흘리고 있었다.
정상이 아니라는 증거.
녀석들이 일제히 벽을 형성하고 대롱을 꺼냈다.
하지만 나와 딩고는 이미 지근거리까지 접근한 상태였다.
"합!"
뛰어드는 자세 그대로 고블린 한 마리를 덮쳤다.
녀석은 대롱을 꺼내들다가 내게 차여 나자빠졌다.
케헤헥!
피픽!
일제히 마비독침이 발사되었지만 우리는 이미 사무실에 들어간 상태였다.
재장전하려면 시간이 걸리겠지.
그 틈에 오크를 찾는다.
딩고가 자세를 낮추고 재빨리 뛰어갔고 나는 녀석의 뒤를 쫓았다.
간판이 떨어진 한 사무실에서 딩고가 멈췄다.
나는 녀석을 차원문으로 들여보내고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
전신을 얼룩덜룩하게 칠한 오크가 그곳에 있었다.
흔히 오크 샤먼이라 불리는 상위종이다.
육체적 능력은 보통 오크와 같고 특수능력까지 갖고 있다.
녀석은 주위에 친위대라 불리는 홉고블린 세 마리를 데리고 있었다.
"몽땅 죽여야겠군."
나는 뒤돌아서 차원문을 열었다.
문이 봉쇄되었고 이제 3층의 몬스터들은 들어오지 못한다.
오크 샤먼이 괴성을 지르자 홉고블린 두 마리가 곤봉을 든 채 내게 다가왔다.
지금이야말로 총을 쓸 때다.
나는 녀석들이 다가와 곤봉을 휘두르기까지 기다렸다가 차원문에 뛰어들었다.
크륵?
타타타탕!
네 발의 총알이 샷건탄처럼 홉고블린의 머리에 후두둑 박혔다.
녀석들은 이마를 감싸 쥐고 괴로워했다.
나는 바로 차원문에서 뛰쳐나가 롱나이프로 목을 갈랐다.
이제 남은 건 홉고블린 하나와 오크 샤먼뿐이다.
슬롯에서 화염캔을 꺼내 불을 붙이자 녀석이 지팡이를 흔들었다.
그와 동시에 오크의 거체가 팟, 사라졌다.
블링크?
특수능력이 뭔가 했더니 이거였나.
하지만 나도 그리 만만치는 않은 놈이다.
생명체추적과 죽음의낙인 스킬이 발동되어 오크 샤먼의 위치가 붉게 드러났다.
"젠장, 죽어보자."
나는 달려드는 홉고블린을 처치한 후 차원문을 열었다.
차원문에 가로막혀 아우성치던 몬스터들이 내게 덤벼들었다.
미친 듯이 롱나이프를 휘두르자 팔다리가 허공으로 치솟았다.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거지만 난전이라 전혀 상관없다.
퓩!
고블린이 쏜 마비독침이 하필 무릎에 맞았고 힘이 풀렸다.
하지만 나는 이를 악물고 롱나이프를 휘둘러 포위망을 뚫어냈다.
마비독저항이 여기서 빛을 보는구나!
"헉, 헉!"
오랜만에 생존갈망이 활성화됐다.
이제 죽든 살든 스킬이 꺼지기 전에 끝장을 봐야 한다.
마지막 몬스터를 처리하자 롱나이프에서 핏물이 뚝뚝 떨어졌다.
저리던 다리에도 힘이 돌아왔다.
다시 오크 샤먼을 쫓기 전 생각해야 할 게 있었다.
내가 가봐야 녀석은 시간을 벌었고 다시 블링크를 쓸 것이다.
그렇다면 블링크를 소모시켜야 했다.
미경의 경우를 생각했을 때 단시간에 여러 번 쓰면 머리가 어지럽다.
그 틈에 녀석을 덮친다면.
"차원문 열어."
딩고가 나와 내 손을 핥아주었다.
조금만 더 힘내자.
"다음에 혹멧돼지 잡아서 먹여줄게."
녀석은 내 호언장담을 다 듣지도 않고 정확히 오크 샤먼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나는 갈고리를 꺼내 준비했다.
2층은 자동차 전시관이었지?
집기나 자동차가 몽땅 부서져서 허허벌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설마 1층으로 가진 않겠지."
오크 샤먼도 치열한 전투에 끼어들고 싶진 않을 것이다.
답은 2층뿐이다.
딩고가 컹컹 짖으며 오크 샤먼을 몰아붙였다.
지닌 힘만으로도 새끼늑대 따위는 한방감이지만 녀석은 블링크를 썼다.
뒤에 내가 올 줄 알고 있다는 뜻.
나는 망설이지 않고 로프를 길게 잡아 단숨에 2층으로 내려갔다.
레펠 따위는 배운 적 없지만 놀라운 스탯이 그걸 가능케 했다.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나는 창틀을 통과해 전력으로 뛰었다.
내 예상대로 오크 샤먼은 2층의 창가에 주저앉아 있다가 벌떡 일어섰다.
"3번 슬롯."
에메라스 창이 손에 쥐어졌고 나는 있는 힘껏 집어던졌다.
오크 샤먼의 가슴팍에 창이 꽂혔다.
쿠어억!
강렬한 괴성이 전시관을 쩌렁쩌렁 울렸다.
내가 슬롯에서 화염캔을 꺼내는 사이, 녀석은 창을 뽑아내고 전투태세에 들어갔다.
지팡이를 내팽개치는 건 덤.
그래. 너도 오크라서 상처 입고 도망은 못 치겠다 이거지?
하지만 난 싸울 생각이 없는데 어쩌나.
"선물이다."
나는 화염캔을 녀석의 옆에 집어던졌다.
녀석은 이빨을 드러내며 내게 포효하다가 갑자기 솟아오른 불길에 당황했다.
점화석 파우더가 폭발하며 화염기둥을 만들어 녀석을 휩쓸었다.
쿠어어어!
오크 샤먼은 찢어질 듯한 괴성을 질렀다.
그럼에도 녀석은 완전히 죽지 않고 지팡이에 손을 가져갔다.
지금 블링크로 도망가면 끝장이다!
나는 달리면서 에메라스 창을 들고 녀석의 품속으로 뛰어들었다.
"하압!"
창이 튼튼한 뱃가죽을 뚫고 쑥 들어갔다.
녀석은 뒤로 넘어지며 창대를 잡았다.
"헉!"
나는 손을 놨지만 창밖으로 끌려 나가는 것까진 막을 수 없었다.
오크 샤먼이 먼저 1층으로 떨어졌고 나도 등으로 착지해야 했다.
"큭!"
높은 스탯과 스킬 덕분에 치명상은 입지 않았지만 고통은 어쩔 수 없었다.
우리 둘은 사이좋게 아스팔트를 굴렀다.
.
.
.
토공과 여정을 함께 하는 윤정은 그가 매우 충동적인 사람이란 걸 깨달았다.
잘 가다가 갑자기 배가 고프다며 근처의 고블린 둥지를 습격하는 건 애교에 속했다.
심지어 그는 고블린을 구워서 먹으려고 했다!
아무도 먹지 않는 몬스터를 말이다!
―제발! 제발 좀! 인간을 포기하진 마세요!
몬스터가 인간을 먹는다고 해서 인간도 몬스터를 먹을 필요까진 없잖아?
거기에 몬스터의 고기는 냄새도 많이 나고 독성도 있어서 먹을 게 못 된다는 것이 사람들의 평가였다.
토공은 고블린의 팔뚝을 뜯어먹으려고 하다가 그녀의 설득에 간신히 마음을 돌렸다.
대신 좀비에게 눈독을 들이는 바람에 윤정은 결사적으로 그를 뜯어말려야 했다.
'이 사람은 완전히 미쳤어.'
세종시에 도착할 때만 해도 그녀는 토공에 대해 좋은 평가를 내렸지만 팬티를 내린 후부터 평가가 180도 바뀌었다.
토끼공듀 황석현은 그냥 미친놈이었던 것이다.
그 미친놈이 갑자기 군청에 뛰어들었다.
윤정은 말릴 생각도 못하고 멍하니 그를 바라봤다.
며칠만 더 있으면 진주에 도착하고, 그녀의 여정도 끝난다.
그런데 왜?
왜 나를 힘들게 하는 거야?
"석현씨!"
그녀가 부르거나 말거나 토공은 산청군청에 뛰어들어 몬스터들과 맞붙었다.
키이익!
키륵!
몬스터들이 달려들었지만 토공의 그림자조차 쫓아가지 못했다.
윤정은 밖에서 그가 붕붕 날아다니는 걸 멍하니 지켜봤다.
누가 보면 특성이 공중부양인 줄 알겠네.
그의 공격 한 방을 제대로 버티는 몬스터가 없었다.
마치 곡예처럼 고블린의 공격을 피하고 걷어차니 녀석은 밖에 튀어나와 주차장에 나뒹굴었다.
석현의 몸이 몬스터 사이를 누볐다.
무수한 창과 돌멩이가 날아다녔지만 그를 맞추는 건 하나도 없었다.
주먹 한 방에 코볼트의 머리가 이상하게 변형되었고 그는 다리를 잡고 빙빙 돌렸다.
"자이언트으 스윙!"
쩌렁쩌렁한 목소리와 함께 몬스터 몇 마리가 창문을 깨고 튀어나왔다.
윤정은 기겁해선 바닥에 굴러다니는 몬스터들을 피했다.
"대체 뭐하는 사람이야···"
지금까지 석현이 싸우는 걸 몇 번 봤지만 오늘처럼 치열하게 싸우는 건 처음이었다.
그는 그녀의 생각보다 훨씬 더 강했다.
몬스터 수십 마리가 도사리고 있는 군청에 홀로 쳐들어가서 박살을 내놓으니 말이다.
정부 쉘터의 그 어떤 생존자도 흉내조차 내지 못할 전투력이었다.
어느새 그의 무대는 2층으로 옮겨졌다.
"숄더어 어택!"
그냥 어깨로 들이박는 공격을 너무 거창하게 부르지 마···
윤정은 한숨을 내쉬며 정자에 앉았다.
잠시 후 뭔가가 창문 밖으로 튀어나왔다.
"헉!"
"으으···"
바닥을 뒹굴고 있는 것은 석현이었다.
뭔가에 당했는지 피부가 빨갛게 달아올랐고 연기가 피어났다.
"석현씨!"
윤정은 그에게 포션을 먹이려 했으나 급히 도망가야 했다.
뭔가가 2층에서 뛰어내렸기 때문이다!
크륵.
바닥에 착지한 오크 샤먼이 고개를 갸웃하며 석현에게 다가갔다.
왜 안 죽었을까 이상하게 여기는 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팡이에서 뿜어지는 전격은 어지간한 생명체를 단숨에 죽일 수 있는 위력을 지녔다.
무방비로 2층에서 떨어지기까지 했으니 충격은 더 클 것이다.
그때 누워 있던 석현이 눈을 부릅떴다.
그는 오크 샤먼이 미처 대응하지도 못하는 사이 벌떡 일어나 달려들었다.
"쎅쓰!"
쿠어억!
둘의 육박전이 펼쳐졌다.
윤정은 맨몸으로 오크를 두들겨 패는 인간이 있을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가 아무렇게나 내지르는 주먹에 키 2m가 넘는 근육 괴물이 휘청거렸다.
크오옷!
녀석은 화가 잔뜩 나선 지팡이를 휘둘렀지만 석현은 한 대도 맞지 않았다.
마치 공격을 읽고 있는 것 같았다.
"세상에."
퍽, 퍽, 퍽!
힘이 어찌나 센지 샌드백 두들기는 소리가 났다.
오크는 정신없이 두들겨 맞다가 지팡이를 내질렀지만 그것뿐이었다.
한줄기 전격이 석현의 가슴팍을 스치고 지나갔다.
"피했다. 너는 이제 죽은 거야."
빠바박!
석현의 공격은 윤정의 눈에 잔상으로 보였다.
오크는 순식간에 지팡이를 빼앗기곤 그걸로 두들겨 맞았다.
꾸어억!
녀석은 괴성을 지르며 무릎을 꿇었다.
마지막 순간.
석현은 지팡이 끝으로 오크의 눈을 찌르려다가 멈췄다.
그는 거칠게 숨을 토해내며 지팡이를 내렸다.
보고 있던 윤정은 의아함을 감출 수 없었다.
오크를 죽일 찬스인데 왜 저러는 거지?
석현은 숨을 몰아쉬며 상태창을 불러냈다.
이대로 죽이는 건 어렵지 않지만 약한 친구를 도와줘야 했다.
미궁에서 놀라운 기록을 내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개인 참여이고 스피드런이다.
단체전인 이번 이벤트에선 꼼수가 통하지 않는다.
석현은 남들 앞에 나설 수 없는 비전투 특성을 가진 김밥조아가 고전할 거라고 지레짐작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클리어 할 때까지 기다릴 생각이었다.
아마 오리궁뎅이도 같은 생각이리라.
'우리 친구는 약하니까 도와줘야지.'
그런데 랭킹 페이지를 열자 존재하지 말아야 할 기록이 떡하니 새겨져 있었다.
"응?"
석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 또 너냐 - 3 > 끝
< 또 너냐 - 4 >
"따라와요."
좀비 여왕이 주택가 한가운데의 고등학교에 들어섰다.
헬스장 멤버들은 그 뒤를 졸졸 따랐다.
그들은 퍼스트킬 이벤트를 치르고 싶지 않았다.
애초에 실력이 안 되니 빠지겠다는 쪽에 가까웠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지난 며칠 동안 그들을 돌봐준 좀비 여왕이 부르는데.
돌봐주었다는 말에는 어폐가 있지만 도움을 받은 것은 그들도 부정하지 못했다.
김해 클랜을 분해시킨 좀비 여왕이 뒤를 봐주니 편하게 지낼 수 있었다.
이제 밥값을 할 차례라며 그들을 끌고 갔음에도 반항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반은 고마워서, 반은 무서워서.
평소엔 정이 많다는 이름답게 잘 대해주던 다정이었지만 가끔씩은 광기를 보이곤 했다.
그 광기가 오늘 폭발하진 않겠지···모두의 생각이었다.
특히 좀비들에게 납치된 경험도 있는 유현이는 다정의 눈길만 받아도 흠칫했다.
오밤중에 끌려가서 술주정을 들어주는 정도였지만 끔찍한 경험임에 틀림없었다.
종이비행기가 날아왔고 유현이가 다정에게 가서 뭔가 속닥속닥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현관 앞에서 말했다.
"여러분들은 내 귀염둥이들과 같이 1층을 맡도록 해요."
귀염둥이란 다름 아닌 좀비들을 말한다.
각각 아이돌을 연상케 하는 이름이 붙었는데 헬스장 멤버들도 다 외웠다.
매일 슈가성훈이니 최강지오니 하는 이름을 듣다 보면 그렇게 된다.
형준이 나서서 다시 물었다.
"저희는 2층에 올라가지 않아도 되는 겁니까?"
"무서~운 오크 언니가 기다리고 있는데 같이 갈래요?"
다정이 헤벌쭉 웃었고 그는 결사적으로 머리를 흔들었다.
고블린이나 코볼트도 충분히 버거운 적인데 오크를 상대하고 싶진 않았다.
사실은 당장 여기에서 나가고 싶었지만, 그 말을 꺼내기가 그렇게 어려웠다.
다정은 얼핏 보면 다정할 것 같은 아가씨지만 속이 약간···아니 많이 뒤틀려 있었다.
그 성격을 받아줄 수 있는 사람은 같이 게임했다는 고인물뿐일 것이다.
어쩌면 성호도 그 성격이 무서워 도망간 게 아닐까 생각될 정도였다.
그때 각 교실에서 난장판을 벌이던 몬스터들이 복도로 뛰쳐나왔다.
다정이 모델 포즈를 취하며 소년시대를 호출했다.
좀비들이 뛰쳐나갔고 그녀는 하이힐을 벗고는 롱나이프 두 개를 받아들었다.
"시작하죠. 참고로 도망가면 용서 안 해요. 알겠죠? 이게 다~ 여러분들을 위한 거니까."
헬스장 멤버들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냥 집에서 쉬고 싶다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이렇게 된 이상 해보는 수밖에.
형준이 손가락 관절을 풀며 나섰다.
"걱정할 거 없어. 늘 싸우던 놈들이야. 수연씨, 저한테 치유 집중 부탁합니다."
"네. 마음 놓으시고 돌진하세요."
"미경이는 측면에서 몬스터들 혼란시키고, 유현이는 내 뒤에 있다가 대롱 꺼내는 고블린만 노려, 알겠지?"
"옙."
좀비와 합세해서 몬스터와 싸우는 건 몇 번 해왔던 일이었다.
좀비들의 목에 달려 있는 빨간 리본만 아니었더라도 괜찮았을 텐데.
네 명이 몬스터와 싸우는 동안, 다정은 사뿐사뿐 2층으로 올라갔다.
뒤를 따르는 것은 좀비 두 마리뿐이었다.
가장 강력하고, 사나운 녀석들.
하지만 오크를 상대하는데 둘의 도움을 받을 일은 없을 것이다.
2층에서 코볼트들이 뛰쳐나와 그녀의 앞을 막았다.
좀비 한 마리가 그들을 상대했고, 다정의 시선은 복도 끝을 향했다.
"우리 오크, 저기 숨어 있겠네."
그녀의 말에 화답이라도 하듯, 오크 샤먼이 홉고블린을 대동하고 뛰쳐나왔다.
원래라면 숨어 있었을 테지만 다정을 만만하게 본 게 틀림없었다.
오크 샤먼의 지팡이가 쿵 바닥을 찍자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출렁거렸다.
"아하."
무슨 능력인지 알겠네.
최후까지 그녀를 지키던 좀비가 배낭을 내려놓고 몬스터들에게 돌진했다.
녀석이 몬스터를 상대하고 있는 동안, 다정은 배낭을 뒤져 아이템을 바꾸었다.
"드레스 코드가 바뀌었으면 통보를 해 줘야지 이게 뭐야."
그녀의 중얼거림에 오크 샤먼이 지팡이를 흔들며 걸어 나왔다.
아무리 강력한 좀비라도 홉고블린 세 마리를 상대하면서 오크까지 저지할 순 없다.
덕분에 다정은 1:1로 오크 샤먼과 마주하게 되었다.
크륵!
오크의 지팡이가 다시 바닥을 찍자 마치 물결치듯 출렁거렸다.
2층의 몬스터가 우르르 쓰러졌지만 다정은 놀라운 균형감각으로 버텨냈다.
그리고 선언하듯 말했다.
"성호는 나를 걱정하더라고. 특성을 봉쇄하는 좀비가 나오면 위험할 거라고 말이야."
크륵?
"너를 잡아서 내가 혼자서도 괜찮다는 걸 증명해야겠어. 오크 한 마리 잡으면 그도 인정해주겠지? 그러니까···덤벼."
까닥까닥.
오크는 이 작은 인간이 무슨 말을 하는지는 몰랐지만 손으로 자신을 도발한다는 걸 깨달았다.
녀석은 이빨을 드러내며 포효한 뒤 다정에게 돌진했다.
이까짓 작은 생명체, 돌진 한 번이면···
그러나 돌진은 무위로 돌아가고 말았다.
다정이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피하며 오크의 옆구리에 칼자국을 낸 것이다.
얕았지만 롱나이프가 원체 날카로웠는지라 가죽이 쩌억 벌어졌다.
크어어억!
오크는 화가 났는지 미친 듯이 지팡이를 휘둘렀다.
하지만 다정은 춤을 추듯 공격을 피하며 녀석의 피부에 칼자국을 선물해주었다.
그녀는 힘이 세지도 않았고, 공격도 정확하지 않았다.
단 하나.
민첩 하나만큼은 20에 근접해 있었다.
아이템을 몰빵한 결과였다.
보통 사람이라면 아이템 한두 개 얻기에도 벅찼을 시간.
다정은 부하 좀비들을 활용해 아이템을 잔뜩 모아 놓았다.
덕분에 그녀는 일방적으로 오크를 농락할 수 있었다.
바로 지금처럼.
"집중해, 집중!"
그녀가 롱나이프를 휘두르자 오크의 손가락 두개가 허공으로 떠올랐다.
오크 샤먼은 고통스럽게 울부짖으며 지팡이를 벽에 쿵 찍었다.
그러자 유리창이 와장창 박살나며 그녀에게 쏟아졌다.
다정은 포션을 하나 물고 끝까지 오크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녀가 유리조각에 상처를 입은 순간, 오크의 손목이 날아갔다.
크워억!"
오크가 고통스럽게 울었고 좀비 여왕은 혀로 입술에 묻은 피를 닦아냈다.
"내가 피를 흘렸으니까 너는 피를 좀 많이 흘려줘야겠어."
그게 어느 정도인지는 그녀가 결정한다.
어느새 부하 좀비가 홉고블린 셋을 해치우고 노려보았다.
하지만 다정은 녀석을 멈춰 세웠다.
"거기서 보고 있어, 최강지오. 나에 대한 너의 사랑은 인정하지만, 우린 맺어질 수 없는 관계야. 이해하지?"
좀비와 오크가 동시에 고개를 갸웃했다.
다정은 롱나이프 두 자루를 교차시키며 오크에게 뛰어들었다.
파파파팟!
몇 차례 공방이 오간 후, 오크는 전신에서 피를 흘리며 무릎을 꿇었다.
다정은 명백히 죽일 수 있음에도 일부러 물러섰다.
"···친구한테 1등 줘야지."
특성이 전투계가 아니어서 자신을 숨기고 다녀야 하는 불쌍한 친구.
그라면 1등은 못해도 바로 뒤를 쫓을 정도의 기록은 세울 수 있을 것이다.
조금만 양보하면 된다.
그녀는 토공도 자신과 같은 생각이리라 믿었다.
랭킹 페이지를 열자 다정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어라?"
.
.
.
"후우, 후우···"
생존자1 배검인은 가쁜 숨을 내쉬었다.
빨리 오크를 찾아내기 위해 블링크 특성을 복사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착오가 생겼다.
예상보다 몬스터의 저항이 강했다.
뒤를 받쳐줘야 할 각성자들이 2층으로 올라오질 못했고, 덕분에 그는 한동안 도망 다녀야 했다.
잡몹이야 어찌 해결한다 치는데 홉고블린과 오크를 동시에 상대하기가 힘들었다.
검인이 복사한 특성엔 추가효과가 딸려있지 않아 효율이 떨어졌던 것이다.
오크가 멀쩡하자 초조해진 그는 속으로 욕을 퍼부었다.
'빨리 올라오라고, 이 멍청이들아!'
실제로 욕을 하지 못한 이유는 그들을 함부로 대해선 안 되기 때문이다.
좋은 선물 해가며 겨우 이쪽으로 끌어들였는데 떠나보낼 수는 없지 않은가 말이다.
한 명이 소중한 시기였다.
"아직 멀었습니까?"
소심한 검인의 외침.
응답하기라도 하듯 두 명이 피에 젖은 채 올라왔다.
"늦었습니다!"
"친위대는 어딨죠?"
둘은 곧장 홉고블린 세 마리와 붙었다.
덕분에 검인은 오크 샤먼과 1:1을 할 수 있었다.
'내가 퍼스트킬이다!'
검인이 화염캔을 집어던졌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오크 샤먼의 지팡이에서 불이 뿜어지더니 화염캔이 허공에서 타오른 것이다!
불꽃의 기둥이 순식간에 복도를 가득 메웠고 오크 샤먼은 1층으로 도망치고 말았다.
"이런 씹···!"
검인은 절규하며 머리를 쥐어뜯다가 황급히 블링크로 이동했다.
아트센터 앞 도로는 삽시간에 난장판이 되었다.
"저거 지팡이 끝 조심해!"
"접근하지만 않으면 별거 아니야!"
불길이 뿜어지고 오크의 포효가 도로를 가득 메웠지만 생존자들은 침착했다.
고인물까진 아니었지만 그들도 오크를 상대해 본 사람들이다.
오크 샤먼 하나 튀어나왔다고 혼란에 빠져서야 이야기가 안 된다.
그들이 상대해 준 덕분에 검인은 오크의 등을 롱나이프로 찌를 수 있었다.
날카로운 칼날이 순식간에 오크의 옆구리를 찢었다.
성공이다!
검인은 희열에 젖었다.
그대로 오크의 목을 치자 볼썽사납게 데굴데굴 굴러다녔다.
그는 1등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중간에 몇 초 지연되었지만 그거야 다른 놈도 겪었을 일이었다.
계획은 일이 시작되자마자 틀어진다는 옛 격언도 있지 않던가.
생존자들이 여전히 몬스터와 싸우는 사이 그는 도로 한가운데에서 랭킹 페이지를 열었다.
생존자1이라는 이름을 기록에 단단히 새겨줄 작정이었다.
그런데···
검인은 랭킹 페이지를 보곤 흠칫했다.
어째서 기록이 3개나 있는 거지?
뭔가 잘못봤나 싶어서 눈을 비볐지만 기록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가 몬스터에게 공격을 당할 찰나, 다른 생존자들이 그를 구해냈다.
"검인씨! 일단 이놈들 처리하고 나서 봅시다!"
"몬스터 아직 많아요!"
하지만 검인의 귀에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그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랭킹 페이지를 뚫어져라 노려봤다.
「1st 00:03:21 그 새끼 kill:13 포인트:62」
「2nd 00:03:28 쎅쓰 kill:35 포인트:104」
「2nd 00:03:30 여왕님이시다 kill:20 포인트:76」
「2nd 00.03.31 _ kill:6 포인트:30」
마지막 3분 31초 기록 옆에 커서가 깜박이고 있었다.
검인에겐 빨리 이름 입력하고 꺼지라는 것처럼 보였다.
"···왜?"
그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설마 세 명이나 자신의 앞에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거기에 1등은 또 그 새끼였다.
경매장 사람들이 운 좋게 미궁에서 1등했다고 평가한 김밥조아 말이다.
"···운이라며?"
특성은 창조계라며?
그런데 이 결과는 뭐지?
검인은 충혈 된 눈으로 사람들을 노려봤다.
이 얼간이 같은 놈들이 10초만 더 빨리 올라왔으면 1등은 그의 차지였을 것이다.
가만히 있는 그를 한 몬스터가 덮쳤고, 보다 못한 생존자가 구해주었다.
"검인씨! 여기서 뭐합니까!"
그의 어깨가 거칠게 흔들렸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던 검인은 드디어 폭발하고 말았다.
"으아아아아!"
한편 멀리서 아트센터의 전경을 보고 있던 비서실장 범석이 망원경을 내렸다.
"울부짖고 있군요. 최종기록은 4등입니다. 1등 이외엔 전부 2등으로 기록되어 있긴 합니다만."
"허···그렇게 서둘렀는데도 4등이라고?"
장원택이 안타까워했고 범석은 분필로 벽에 기록을 써내려갔다.
"1등이 3분 21초라···놀라운 기록이군."
"검인씨가 그렇게 준비를 했는데도 넘어서지 못했다는 거죠. 스피드런 기록은 절대 운이 아니고, 특성도 창조계가 아닐 겁니다."
"그렇다면 뭘로 추측하고 있나?"
"아직은···사람을 보내 흔적을 찾고는 있지만 소득은 없었습니다."
"경남에 있는 건 확실하지?"
"석현씨와 다정씨 모두 경남에 있습니다. 아무래도 창원 즈음일 것 같은데···성산구 쪽을 찾고 있습니다."
장원택은 흐음, 하며 볼을 긁었다.
"더 찾아보게. 합류시키지는 못해도 반드시 우리의 뜻을 전달해야 돼."
"뜻을 알아줄까요? 그는 마지막까지 정보를 숨겼던 사람입니다."
"···그 얘기는 그만하도록 하지."
전직 대통령과 비서실장은 잠시 침묵했다.
대체 어떤 특성이기에 끝까지 정보를 숨겨야 했는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의외로 전투력도 굉장한 것 같고···
범석의 머리가 아파왔다.
.
.
.
"그 새끼 빨리 찾아!"
은행 주변에서 사람들이 바삐 돌아다녔다.
단체복을 입은 종사모의 일원이었다.
징징이 5호가 목에 핏대를 세우곤 목청을 세웠다.
다 된 밥에 재 뿌리는 것도 아니고 아예 훔쳐갔으니 화가 많이 났을 것이다.
"애초에 경쟁인데 뭐 어때."
오크와 함께 바닥에 뒹군 후, 나는 곧장 롱나이프로 녀석의 목을 찔렀다.
온갖 스킬이 활성화된 상태였기에 녀석이 반응하기도 전에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이다.
오크 샤먼은 목이 반이나 잘려서 죽었고, 나는 3분 21초를 기록했다.
그 후론 걸음아 나 살려라 도망쳐서 간신히 아지트까지 왔다.
소란이 가라앉을 때까지 당분간은 처박혀 있을 생각이었다.
"어디 보자···상태창."
「레벨 : 17 포인트 : 3712
건강: 12(+4) 근력: 13(+2) 민첩: 9(+2) 재주:12(+4) 인지:10(+4)
특성: 전용 차원문 개방
스킬: 생존갈망, 지형감지2, 기척없는움직임, 생명체추적, 마비독저항2, 투쟁본능, 가벼운발걸음, 진실을보는눈, 죽음의낙인, 하드스킨 효과:-」
드디어 레벨이 17로 올랐다.
"포인트는 뭐 그렇다치고···"
오크의 고유 스킬인 하드스킨이 눈에 띄었다.
"이게 20% 경감이었지?"
오우거의 스톤스킨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물리 대미지를 퍼센트로 줄여주므로 좋은 스킬이었다.
아이템으로는 오크가 차고 있던 뼈 목걸이를 얻었다.
재주와 인지를 2씩 올려주는 건 상당히 구하기 힘들다.
"투스탯 자체가 보기 힘들어."
쓰리스탯 아이템은 얻을 확률이 극악이었다.
플레이타임이 천 시간을 넘어도 구경도 못하는 유저가 대부분이고 나도 두 개밖에 얻지 못했다.
"진짜 중요한 건 이거지."
나는 스크롤을 펼쳤다.
유니크한 보상이 나오는 줄은 알았는데 이런 것일 줄이야.
「면벌부 : 살인기록을 모두 삭제한다. 살인자에게도 적용된다. 2,000포인트 소모」
원래 게임에 이런 건 존재하지 않았다.
시스템 상 두 번 이상 살인을 저지르면 살인자로 등록된다.
근처에 유저가 3명 이상 있으면 그들과 데스매치를 벌여야 한다.
심장소리 등을 통해 위치가 노출되기 때문에 정상적인 생활이 거의 불가능해진다.
덕분에 살인자는 오래 살기가 힘들었다.
항상 누군가와 싸워야 하는데 오래 살면 그게 이상한 거지.
그런 살인자를 되돌릴 수 있다고?
"···경매에 붙이면 값이 제법 나가겠는데."
아니 그것보단 다정에게 주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그녀는 나대신 살인을 저질렀다.
앞으로 또 그런 일이 일어나지 말란 법은 없다.
토공도 그렇게 될 수 있으니 우리 셋 중 먼저 살인자가 되는 쪽이 이걸 쓰면 되겠지.
나는 아이템을 정리하고 랭킹 페이지를 켰다.
"오, 역시."
토공과 오리궁뎅이가 나란히 2,3등을 차지했다.
이벤트 특성상 1등외에는 의미가 없지만 하여튼.
4등은 내가 모르는 사람이었다.
「2nd 00.03.31 씨발 kill:6 포인트:30」
"뭔 욕을 이름에 써놨나."
나하고 비슷한 처지일까?
경매장에 들어가 보니 역시 난리가 났다.
―또 너냐?
―이런 씨발 운이 아니잖아. 운이라고 지껄인 새끼들 전부 엎드려.
―와 퍼스트킬까지 1등을 먹네.
―개좆같은 새끼 확 고블린한테 따먹혀라.
―님들 지금 쓰는 거 김밥조아가 보고 있을 거임ㅋㅋㅋ
―병신아 보면 어쩔건데?
―속터진다 진짜. 생존자1 씨발아 니가 1등한다며? 순위권에 보이지도 않네.
―관심종자에 등신임 그 새끼는.
―생존자1 : 뭐 개새끼들아 닥쳐라.
―ㅎㅎ 너 생존자1임? 아이디 어딨음?
―생존자1 : 4등했는데 어쩔래?
그 순간 코멘트란이 ㅋㅋㅋ로 가득찼다.
―엌ㅋㅋㅋㅋㅋ
―저새끼 욕한 게 이름으로 박혔엌ㅋㅋ
―븅ㅋㅋㅋㅋ
그 때 누군가가 이상한 코멘트를 입력했다.
―뭔가 여기 일본인 없습니까.
―?
―일본인이 여기 왜 있어 병신아.
―일본인 다 죽지 않았나?
나는 잠시 코멘트란를 지켜봤다.
뭐, 일본인 생존자가 없으란 법은 없다.
게임에 대해 모르고 특성이 없어도 살아날 구석은 있을 테니까.
하지만 경매장에 들어왔다는 건 15레벨을 달성했다는 걸 의미한다.
"설마 각성까지 한 건가."
전에 사람들이 미궁에서 외국인을 봤다고 했었지···
그들도 시스템의 영향을 받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런데 한국어를 한다는 게 신기하군.
아무튼 그는 공격적인 반응에 당황했는지 더 이상 코멘트를 입력하지 않았다.
아이디를 확인하자 놀랍게도 이름이 나왔다.
"유즈카? 이름이 유즈카라고?"
세상에. 진짜 일본인인 모양이다.
< 또 너냐 - 4 > 끝
< 진정한 아포칼립스 - 1 >
퍼스트킬 이벤트가 있은 지 며칠 후.
나는 다정과 암호문을 통해 경매장에서 대화했다.
원래는 기록을 몇 초 앞당길 수 있었는데 나한테 양보하려고 기다려준 모양이다.
나는 그녀에게 감사를 표했다.
―맨입으로?
―뭐 해줄까? 먹고 싶은 거 있어?
―전에 백숙 그거 되게 맛있더라. 이번에는 튀겨줘. 치킨 먹고 싶어.
―음···튀기는 건 어렵겠는데. 튀김기가 없거든. 훈제는 어때?
―콜콜. 참 이번에도 DLC니 뭐니 하면 알지?
―시즌 패스라고 들어봤어?
―죽어.
다정과 나는 완전히 게임을 하던 때로 돌아가 있었다.
성별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서로 돕고 즐겁게 지낼 수 있다는 게 중요했다.
그녀는 토공이 빨리 합류했으면, 하고 바랐다.
같이 있지는 못해도 일단 암호문은 전해줘야지.
나는 그녀에게 훈제구이를 보내준 후 토공을 찾으러 갈 거라고 연락했다.
―지금쯤은 진주 근처에 왔을 텐데 내가 찾으러 갈 테니까 다정이 넌 기다리고 있어.
―응. 난 왕자님을 기다리는 공주님이야.
―공주님은 무슨···채찍 휘두르는 SM여왕이겠지.
―성인용품점에서 입가리개하고 엉덩이마개 찾아놨거든? 너한테 잘 어울릴 거야.
―말을 말자.
이 여자는 한다면 진짜 한다.
어쩌면 지금쯤은 유현이를 노예로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헬스장 사람들 근황을 물어보자 잘 지내고 있다고 한다.
설마 잡아먹진 않았겠지.
나는 그녀에게 부근의 사정을 설명했다.
―여기 지내기에 나쁘지 않아. 주택가에 물탱크가 많더라. 바다도 있고 하니 식량 수급에는 문제가 없을 것 같아.
―그럼 언제쯤 갈까?
―늦어도 다음 달에는 왔으면 싶은데···대대에 식량은 많이 남았지?
―성호 니가 떠날 때하고 비교하면 절반 정도 줄었어. 10월 초에 출발할까?
―사람들한테 좀 물어봐. 혹시 독불장군처럼 혼자 결정하는 건 아니지?
―나는 엄청 민주적이거든?
―5초 늦었어. 수상한데.
―쉿. 조용히. 사랑해. 내꿈꿔.
―이거 저주 아니냐?
나는 경매장에서 나와 식사준비를 했다.
여울이네가 올 시간이다.
우리는 며칠 동안 같이 통발 던지고 사냥하면서 꽤 친해진 상태였다.
언제 같이 밥이나 먹자는 말을 꺼냈더니 진짜로 오겠단다.
그냥 인사였을 뿐인데 그걸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다니 역시 애들답다.
하여튼 초대를 해놓고 가라고 할 수는 없어서 나름 열심히 준비했다.
여기저기서 파밍한 척 하며 동굴에 있던 식량을 꺼내놓았다.
옥상의 해시계가 12시에서 1시를 가리킬 무렵, 마침내 여울이네가 왔다.
"아저씨 저희 왔어요."
"우와, 맛있는 냄새 난다!"
"쉬잇."
나는 좀비로 가득한 도로를 가리키며 소리를 죽였다.
퍼스트킬 이벤트가 끝난 뒤, 좀비의 행동이 달라졌다.
몇몇 녀석에게서 예전과 같은 민첩한 반응을 찾아보기가 힘들어진 것이다.
학생 셋은 다니기 쉬워졌다며 좋아했지만 내가 보기엔 아니었다.
저 굼뜬 행동은 곧 구울로 진화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게 진짜 진화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충분한 영양을 섭취한 소수 좀비들이 구울로 변해 뛰어다닐 것이다.
그 때가 되면 지금은 천국이라 할 정도로 상황이 안 좋아진다.
구울은 좀비와 달리 뛰고, 기고, 장애물을 극복할 줄 안다.
힘과 맷집이 꽤 높아지고 무엇보다 추적능력이 현저하게 상승한다.
이제 슬슬 뛰어서 따돌리는 건 어렵게 됐다.
살려면 죽어라 뛰고 숨어야 한다.
거기에 소수지만 오크와 늑대인간까지···
진정한 아포칼립스가 곧 열린다.
···뭐 열리는 건 열리는 거고, 우리는 먹어야 산다.
밥상에다 큰 그릇 하나씩을 놓으니 애들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저씨 파밍 진짜 열심히 하셨네요."
"암만 찾아봐도 이런 거 없던데 어디서 구했어요?"
"진짜 말도 안 되네."
내가 준비한 건 건조야채를 물에 불려서 만든 비빔밥이었다.
물에 불려도 원형으로 돌아가지는 않지만 고추장으로 비비면 넘길만하다.
참기름을 뚝뚝 떨어트리니 애들 표정이 식량을 코앞에 둔 좀비의 그것처럼 변했다.
심지어 여울이까지 그릇만 쳐다보고 있었다.
화조알을 더한다면 금상첨화겠지만, 핑계를 댈 수가 없었다.
그건 나와 다정만 먹는 걸로 하자.
나는 건더기 별로 없는 된장국까지 펀 뒤 말했다.
"···먹자."
"감사히 먹겠습니다!"
애들 먹성이 끝내주는군.
평소에 식탐을 부리지 않던 여울이도 아예 그릇을 끌어안고 입에 퍼 넣고 있었다.
하긴 18살이면 돌도 씹어 먹을 나이지.
나는 천천히 밥을 먹으며 도주수단을 떠올렸다.
이제 뛰는 것만으로는 몬스터에게서 벗어날 수 없는 시기가 되었다.
건물 사이에 로프를 이어서 건너는 게 가장 나았다.
게임에서도 애용한 방법인데 대부분의 몬스터는 로프를 타지 못한다.
그걸 이용해 유격처럼 건물 사이를 오가는 것이다.
도로가 너무 위험해지니 어쩔 수 없는 조치였다.
"아저씨 뭐 생각하세요?"
어느새 자기 몫의 비빔밥을 끝장낸 여울이가 얌전을 떨며 물었다.
나는 조용히 밥과 고명을 그녀의 그릇에 더 얹어주었다.
"저 배부른데."
"비빔밥은 이게 마지막이야."
"잘 먹겠습니다."
과연 여자의 배엔 언제나 여유 공간이 있는 모양이다.
수연과 미경의 경우엔 밥을 그렇게 먹고도 과자 먹을 배가 따로 있다고 했으니 뭐.
준호와 도형이도 밥을 한 그릇씩 더 비웠다.
나는 그제야 입을 열었다.
"둘이 해줬으면 하는 게 있어."
"어떤 거요?"
"니들 둘 특성이 지형극복이라고 했지?"
"넵."
지형극복이란 파쿠르를 의미한다.
평범한 사람에 비해 월등한 운동능력을 가지게 된 나지만 둘과는 비교가 불가능했다.
짧게 잡아도 10m는 넘을 듯한 도로를 훌쩍 뛰어넘는 건 처음 봤다.
여울이의 말에 의하면 급식의 힘이란다.
학교 다닐 때 급식을 빨리 먹기 위해 뛰어다닌 게 지형극복으로 발전한 것 같다고.
블링크의 하위호환인 것 같지만 이건 부작용이 전혀 없다.
심지어 벽을 타서 올라갈 수도 있으니 블링크와는 분야가 다르다고 봐야 할 듯하다.
둘은 4레벨이라 추가효과도 얻지 못했단다.
앞으로 가능성이 상당하다는 말.
"로프 들고 건물 사이 뛰어다닐 수 있지?"
둘은 약간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는 뭐."
"아저씨 혹시 건물 사이를 로프로 묶을 생각이세요?"
여울이 중간에 끼어들었다.
내가 긍정하자 그녀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몬스터가 로프를 탈지도 모르잖아요."
안 탄다는 확신이 있지만 여기선 한 발 물러서는 게 좋다.
"일단은 설치를 해보는 거야. 혹시 너 로프 못 타서 그런 건 아니지?"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몬스터가 로프를 타면 도망갈 구석이 없는 거잖아요, 우리는."
"내 생각으론 대부분의 몬스터는 못 탈 것 같아. 좀비는 뭐 당연히 못 타고, 고블린이나 코볼트는 니들도 알다시피 겁이 많잖아?"
오크는 섬세한 움직임이 안 돼서 못 타고, 늑대인간은 찢어발기는 쪽을 택할 것이다.
하여튼 내가 알기로 로프를 탈 수 있는 몬스터는 극히 소수였다.
강화 구울 중에서도 민첩한 움직임으로 악명이 높은 메뚜기 정도는 되어야···
준호가 벌떡 일어섰다.
"형이 시켰으니까 일단 해볼게요. 로프는 저거 쓰면 되죠?"
"어. 복도 끝에 보면 구조물 있지? 거기 묶으면 돼."
딩고가 낙하산 줄을 물어서 준호에게 건네주었다.
그는 착하다, 하며 딩고의 머리를 쓰다듬어준 후 곧장 달려 나갔다.
여울이가 공략본을 둘러보더니 착잡한 어조로 말했다.
"고블린이나 코볼트까지는 어떻게 한다 치는데 오크랑 늑대인간이 문제네요. 특히 늑대인간요."
"밤에 주로 활동한다니 나올 생각을 말아야지."
"파밍하기가 더 빡빡해지겠어요···"
"뭐 어쩌겠냐. 적응해야지."
조금 기다리려니 준호가 들어왔다.
"형형, 묶었어요."
"내가 매달려도 되지?"
"당연하죠. 여울이가 매달려도 괜찮을걸요."
"야!"
여울이가 준호의 허벅지를 걷어찼다.
날씬한 애를 그렇게 놀리면 쓰나.
어쨌든 우리는 복도 끝에 가서 로프를 확인했다.
튼튼하게 묶어놨네.
나는 곧장 로프를 타고 건너편 건물로 이동했다.
힘이 부족하면 자세가 뒤집혀 대롱대롱 매달리게 되지만 지금 내 힘 스탯은 15였다.
턱걸이하는 것처럼 줄을 잡고 성큼성큼 옮기니 금방 건물 사이를 이동할 수 있었다.
건너편 건물에서 학생들이 환호하는 게 보였다.
"쉬잇."
나는 입가에 손가락을 가져다댄 후 여울이를 가리켰다.
그녀는 자신의 특성이 뭔지 말해주지 않았다.
특성을 알아야 대책을 세울 수 있다는 내 말에도 끝끝내 입을 다물었다.
아무튼 그녀는 용기를 내어 안전 줄을 메고 로프를 건넜다.
그러다가 힘이 부족해서 대롱대롱 매달리고 말았다.
"악!"
짧은 비명에 몬스터들이 위를 쳐다봤다.
나는 하나하나 다 쏴 죽인 다음 여울이에게 다가가 말했다.
"등에, 업혀."
"그, 아저씨, 괜찮으세요?"
"그렇게 매달려 있는 것보단 빨리 가는 게 낫겠지?"
그녀는 고개를 끄덕거리곤 내 등에 업혔다.
애가 워낙 가벼워서 별로 부담도 가지 않았다.
나는 원래 건물로 이동해 그녀를 내려주었다.
"하아···못 타겠어요."
"타야 돼. 도주수단을 조금이라도 더 확보해야지. 도형이하고 준호 너네 둘은 주변 건물들 좀 연결해줄래? 로프가 부족하면 나한테 말하고."
"옙. 가자가자."
둘이 사라진 뒤 여울이 무릎 사이에 고개를 파묻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해야 돼요? 저 못 하겠어요···"
"죽을 때까지 해야지. 앞으론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가 없을 거야."
"저는 아무 능력도 없는데···"
"특성 있잖아? 뭔지는 몰라도."
"없는 거나 마찬가지란 말이에요."
"말하고 싶지 않으면 안 말해도 돼."
누구에게나 비밀은 있다.
여울이도 특성을 숨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지내려면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것들이 많아진다.
나야 숲을 이용할 수 있으니 상관없지만 평범한 고등학생인 여울이는 힘들 것이다.
창밖에서 준호와 도형이가 건물 사이를 뛰어다니며 로프를 연결하는 게 보였다.
근처에 등산용품점이 있으니 거기서 파밍을 좀 해야겠군.
내가 떠나려하자 여울이가 내 바지자락을 붙잡았다.
"아저씨···"
"왜?"
"저···저랑 사귀지 않으실래요?"
"···"
이게 대체 뭔 소리야.
나는 쪼그려 앉아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자세히 좀 얘기해줄래? 아저씨는 눈치가 없어서 못 알아듣겠어."
그녀는 고개를 간신히 들어 올리곤 말했다.
"제 특성이요···일심동체라고 쓰여 있거든요. 뭔지는 모르겠는데 부부간의 그걸 말하는 거잖아요."
"그···렇겠지?"
강력한 단결력을 자랑하는 조직이나 친구를 가리키기도 하지만 보통은 부부겠지···
아무래도 그녀의 특성은 파트너가 있어야 발휘되는 건가 보다.
"그래서 나한테 사귀자고 한 거야?"
"나, 남자가 없잖아요···"
"준호나 도형이는?"
그녀가 질겁했다.
"걔네 둘하고는 그럴 마음이 안 들어요. 그리고 한 명하고 사귀면 다른 한 명하고는 서먹해지잖아요."
그건 그렇지.
워낙 어릴 때부터 친구로 지내 거의 혈육처럼 느껴질 것이다.
나는 그녀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싫은 걸 억지로 할 필요는 없어."
"아니요. 저 아저씨면 괜찮아요. 저 이대로 특성도 못 쓰고 죽기 싫어요···"
"죽긴 뭘 죽어? 나 말고도 남자 있는데 걔는 한번 만나보고 죽어야지."
이번에는 여울의 눈이 동그래졌다.
"남자 누구요?"
"10월 초에···남자애 하나 여기로 올 거야. 유현이라고 지금 스물 두 살인가? 보면 첫눈에 반할걸."
"저 얼굴 따지고 그런 애 아니에요. 능력이 더 중요하잖아요."
"걔도 능력 좋아. 아무튼 한번 만나보고 결정하라는 거야. 나 같은 아저씨하고 사귀어봐야 니 인생만 칙칙해진다니까."
"저 아저씨 괜찮은데."
"걔 오면 너 완전 후회한다. 진짜 잘생겼거든."
"···진짜 잘생겼어요?"
"나 처음 걔보고 아이돌인 줄 알았다니까."
"지금 애인 없는 거죠?"
"어···그건 확실히 모르겠는데."
유현이가 미경과 친했으니 지금쯤은 애인관계로 발전했을지도 모르겠다.
설마 다정이 노예로 만들지는 않았겠지.
하여튼 여울이는 잘생긴 오빠가 온다는 말에 생기를 되찾았다.
얼씨구.
방금 전까지는 완전히 죽을상이더니.
잠시 후 남자애 둘이 와선 로프를 받아갔다.
여울이와 함께 옥상에 올라가서 보니 가까운 건물에 로프가 설치되어 있었다.
멋지군.
이제 함정만 설치하면 된다.
.
.
.
숲이 시끄러워졌다.
코볼트들이 몰려와서 농성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녀석들은 낮에는 근처 둥지에서 잠을 자다가 밤만 되면 내 쉘터에 몰려왔다.
나는 걱정하지 않았다.
윤형철조망의 방어력은 상당한 수준이라서 코볼트 따위는 넘어갈 생각조차 못한다.
몇 놈이 철조망에 덤벼들었다가 피투성이가 된 후로 녀석들은 나무창과 돌멩이만 투척해댔다.
"힘도 약하고 명중률도 낮고···"
큰 피해는 없었지만 수가 제법 되다 보니까 신경 쓰이는 게 사실이었다.
내가 현실에서 활동할 때는 더더욱 그런데, 쉘터가 무방비 상태가 되기 때문이다.
"몽땅 죽여야겠어."
혹은 쫓아내고 쉘터를 확장할 계획이었다.
나는 풍뎅이들에게 부탁해 나무화살을 많이 만들게 했다.
코볼트 따위에게 카본이나 알루미늄 화살을 쓰기엔 아깝거든.
회수를 하면 되지만 화살에 가는 충격 자체가 아까웠다.
"슬슬 화살을 만들 때도 됐지."
풍뎅이들이 만들어주면 내가 조립을 하는 식으로 동업이 이루어졌다.
녀석들도 수십 마리의 코볼트가 무서운지 적극 협력했다.
그렇게 사흘이 지나 밤이 되었다.
푹 쉬러 들어온 쉘터 밖에서 코볼트 특유의 컹컹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딩고의 짖는 소리와는 질적으로 다른, 질척이는 울음소리였다.
나는 예비용으로 보관해 둔 60파운드 활을 쥐고 화살을 바닥에 흩뿌려놓았다.
코볼트의 수가 워낙 많아 아무렇게나 쏴도 명중할 지경이었다.
"···아무래도 이상한데."
코볼트가 이런 무리를 짓는 게 이상했다.
원래 녀석들은 대장 수컷을 중심으로 7,8마리 정도의 무리를 짓는다.
쉘터가 워낙 먹음직스러워서 잠시 연합했다는 설정은 아니겠지.
하여튼 이 쉘터가 만만하지 않은 걸 보여주어야 꼬리를 내릴 것이다.
크헝! 크헝!
대장으로 보이는 몇 놈이 나무창을 들고 울부짖자 다른 녀석들이 합창했다.
숲 전체가 코볼트의 울음소리로 가득했다.
"완전히 미친놈들이네."
코볼트가 합창이라니.
나는 폭죽에 불을 붙여 대장에게 던졌다.
굉음이 터지며 코볼트들이 혼란에 빠졌다.
그 틈을 타 시위를 튕기니 코볼트들이 픽픽 나가떨어졌다.
화살을 다 쏘고 허리를 굽히자 옆에서 풍뎅이가 하나씩 던져주었다.
"고마워."
손바닥에 화살이 쏙 들어오니 되게 편하네.
내가 공격하는 동안 딩고는 철조망 안에서 컹컹 짖어 코볼트들의 시선을 빼앗았다.
좋아, 이대로 하면···
그때 어둠을 뚫고 근육 고릴라, 아니 오크가 나타났다.
너 숲에서 보는 건 처음이다?
녀석이 등장하자 코볼트들이 깨갱하며 길을 비켰다.
나는 어이가 없어 녀석에게 묻고 말았다.
"니가 대장이라 이거냐?"
크륵.
오크의 들창코에서 거친 숨이 뿜어져 나왔다.
녀석은 해자에 내려가서 철조망을 움켜쥐었다가 고통어린 괴성을 내질렀다.
쿠어억!
"젠장."
쉽게 꺼져줄 것 같진 않았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다.
여기에 모인 몬스터를 몽땅 죽여야 한다.
슬롯을 점검하고 있는데 다시 땅으로 올라온 오크가 코볼트 몇 마리를 집어던졌다.
투석기라니 치사하다!
물론 땅에 떨어진 녀석은 반쯤 기절한 터라 쉽게 죽일 수 있었다.
하지만 오크가 재미가 들렸는지 계속 집어던지는 게 문제였다!
"개자식아!"
나는 100파운드 활로 녀석을 저격했다.
오크는 코볼트를 방패삼아 뒤에 숨었다.
다음에는 코볼트를 철조망에 집어던지고 극복할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되기 전에 막아야 한다.
나는 사력을 다해 몬스터에게 맞섰다.
그렇게 1시간 뒤.
마침내 내 쉘터에 도전하는 몬스터들은 사라졌다.
"헉, 헉···"
모든 스킬이 비활성화 되었고 나는 상당한 피로를 느꼈다.
그놈의 오크가 문제였다.
화염캔으로 쉽게 죽일 수는 있지만 자칫 화재가 번질 가능성이 있었다.
그래서 화살과 총을 동원해 녀석을 저격했는데 코볼트를 방패삼아 버텼다.
다혈질 오크 주제에 제법 머리를 쓸 줄 아는 녀석이었다.
"젠장할 놈."
퍼스트킬 이벤트보다 오늘이 더 힘들었던 이유는 뭘까.
그 때는 내가 상황을 주도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방어만 하니까 그렇다.
화염캔을 봉쇄당하고 총이 제대로 먹히지 않은 것도 치명적이었다.
아무래도 쉘터 안에 있다 보니까 각도가 나오지 않았다.
"확실한 대책이 필요해."
나는 바닥에 앉아 헥헥거리고 있는 딩고를 쓰다듬었다.
등에 올라타 있는 풍뎅이들도 꽤나 지쳐보였다.
화살을 던져주고 무기를 정리하는 것만 해도 힘든 일이다.
"오늘은 수고했어. 들어가서 쉬어."
대장 풍뎅이가 밑에 내려왔다.
녀석은 나뭇가지를 들더니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건 발리스타에 가까운데.
밑에 스탠드가 달려 있는 걸 봐서 절대 휴대용은 아니었다.
볼트는 거의 팔뚝만 하게 그려졌다.
이거면 확실한 대책이 될 수 있겠지만···
"···만들 수 있어?"
네 개의 머리가 끄덕끄덕 움직였다.
얘네들 혹시 전생에 대장장이였던 건 아닐까?
< 진정한 아포칼립스 - 1 > 끝
< 진정한 아포칼립스 - 2 >
사람은 죽을 때까지 공부를 해야 한다고들 한다.
책을 들여다보는 전통적인 의미의 공부 이외에도.
배움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나는 저장한 영상을 머릿속에 되새김질하고 현실에 적용하기 위해 애썼다.
살아남기 위해 쉘터를 개조하는 것은 물론이다.
이런 것도 어떤 면에선 공부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풍뎅이들이 하고 있는 것은 진짜 공부였다.
"···신기하네···"
녀석들은 지금 태블릿을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항상 궁금했다.
개나 고양이가 태블릿이나 스마트폰 화면을 보면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딩고는 석궁 만드는 화면을 보자 금방 잠에 빠져들었지만 풍뎅이들은 아니었다.
녀석들은 명백히 화면을 보고 공부를 하고 있었다.
자기들끼리 머리를 끄덕거리며 앞발톱으로 화면을 가리키는데 저게 공부가 아니면 뭐란 말인가.
자꾸 시멘트 바닥에 뭘 그리려고 해서 나는 큰 종이와 펜을 가져다주었다.
즉석에서 설계도가 그려졌다.
내 귀에는 풍뎅이들이 이렇게 다투는 것처럼 들렸다.
―활대는 금속으로 하는 게 낫지?
―문제는 장전이야! 우리 힘으론 발리스타의 장전이 어렵다고!
―주인은 가능하지 않을까?
―주인이 없을 때를 생각해야지! 우리가 장전할 수 있어야 돼!
―우리에는 저 늑대까지 포함된 거지?
―그렇지. 도르래와 기어를 사용해서···
이게 뭐야.
나는 고개를 흔들어서 정신을 차렸다.
피곤하니 이상한 소리가 들렸나보다.
하여튼 풍뎅이들은 열정적으로 발리스타의 설계에 관해 뭔가 의견을 나누고 있었다.
다른 부분에선 구조가 확정되었는데 장전이 문제인지 설계도가 몇 번이나 고쳐졌다.
대장이 뭔가를 낑낑거리며 돌리는 액션을 취하자 다른 녀석들이 머리를 끄덕였다.
"니들 힘이 부족하다 이거지?"
단체로 끄덕끄덕.
설마 내가 들은 게 진짜였나?
아무튼 풍뎅이들의 힘이 부족해 장전이 어려운 것은 사실인 것 같았다.
이 녀석들 은근히 힘이 세지만 결국 풍뎅이라서 한계는 있다.
녀석들은 나를 쳐다봤다가 딩고에게 관심을 가졌다.
풍뎅이 하나가 혀를 빼물고 자고 있는 딩고의 주둥이에 종이를 물려주었다.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딩고가 장전하게 하자고?"
딩고가 물고 당기는 힘은 엄청나다.
이제 작은 진돗개 정도로 커졌는데 나도 상대하기 버거우니까.
설계도를 슬쩍 보니 기어와 도르래가 들어가는 것 같았다.
딩고가 당기는 힘 이상으로 큰 힘을 쓸 수 있게끔.
"니들 혹시 전생에 드워프였어?"
그냥 해본 말이었다.
여기는 판타지 세계 같으니까, 거기에 흔히 나오는 드워프를 언급한 것.
풍뎅이들이 일을 멈추곤 빤히 나를 바라봤다.
뭔가 잘못한 것 같아서 얼른 사과했다.
"미안. 그래서 내가 준비해야 될 건 뭐야?"
녀석들은 비로소 종이에 각 부품을 그려나갔다.
나무로 대강 이렇게 깎으라는 거지.
설계와 작은 부품은 녀석들이 하고 나는 큰 부분과 조립을 맡는다.
말하자면 분업이다.
"좋아. 이대로 시작하···기 전에."
오늘은 피곤하니까 밥 먹고 푹 자고 일어나서 하자.
내가 제의하자 풍뎅이들이 눈치를 보며 고구마 맛 젤리를 가리켰다.
고생했으니까 저거 먹어도 되지? 하고 묻는 것 같았다.
나는 특별히 젤리 두 개를 건넸다.
"오늘 수고했어. 푹 자고 내일부터 다시 일하자."
잠을 자던 딩고가 코를 벌렁이더니 벌떡 일어나 짧게 짖었다.
"알았어, 알았어."
우리는 모여서 식사를 하고 긴 잠을 잤다.
.
.
.
다음날.
나와 풍뎅이들은 본격적으로 작업에 들어갔다.
가장 힘을 많이 받는 부분은 오래된 흑단목 몽둥이를 재활용하기로 했다.
무기로는 못 쓰지만 손잡이는 멀쩡하다.
나를 안내한 풍뎅이는 적당한 나무를 골랐다.
밑에 도토리처럼 생긴 열매가 떨어져 있는 걸로 봐서 참나무 비슷한 건가 싶었다.
"알았어. 해보자."
몬스터가 나타나기 전에 빨리 작업을 끝내고 도망가야 한다.
고블린 외에는 비교적 평화롭던 숲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
나는 엔진톱에 시동을 걸고 나무를 잘랐다.
발리스타의 크기에 맞게 적당히 재단한 후 쉘터에 나르니 비가 오기 시작했다.
기온이 제법 올랐기에 눈으로 변하진 않았지만 맞아서 좋을 건 없다.
감기라도 걸리면 나만 고생이다.
"이거를 이렇게 하는 거였지."
나는 선반에 목재를 고정시키고 가공해 나갔다.
레버를 돌려 목재를 잘라내는 작업은 참으로 힘겹고 지루한 작업임에 틀림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크와 몬스터의 공격을 떠올리니 소홀히 할 수가 없었다.
다음에 늑대인간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누가 보장할 것인가.
"더한, 일이라도, 해야지."
혼잣말을 하며 레버를 돌리고 톱으로 자르고 하다 보니 얼추 부품의 모양이 나왔다.
이걸 정밀하게 다듬는 건 풍뎅이들의 몫이다.
곁눈질을 하니 녀석들이 태블릿 화면을 소시지로 터치해가며 영상을 돌려보고 있었다!
"허."
태블릿이 뭔지, 화면이 뭘 설명하고 있는지 명확하게 이해하고 있다는 증거다.
나는 풍뎅이들이 무슨 짓을 하건 이해하는 걸 포기하기로 했다.
"고민해봐야 나만 손해지···"
녀석들이 금속 활대를 만드는 동안, 나는 스탠드 제작에 나섰다.
설계도를 보면 이거 고정식인 것 같은데···
하긴 이런 발리스타는 고정해서 운용하는 게 낫다.
쉘터 자체가 원형이니 회전시키기만 하면 대부분의 방위가 커버되는 것이다.
"애초에 이 큰 걸 옮기기도 힘들어."
큰 만큼 위력이 대단할 것으로 생각되어 괜히 들떴다.
이거면 오크나 늑대인간까지는 충분히 커버할 수 있을 것이다.
늑대인간의 경우, 움직임을 봉쇄하는 어떤 수단이 필요하지만 그건 걱정 없다.
"황소고추만 빨리 좀 자라면 걱정이 없을 텐데."
몬스터 중에서 냄새를 못 맡는 녀석은 별로 없다.
기껏해야 좀비계열, 식물계열 정도.
키퍼나 본 크리퍼 등도 냄새를 못 맡지만 녀석들은 워낙 특별하니 예외로 두자.
하여튼 고추폭탄을 많이 비축하면 어지간한 몬스터에게 대응할 수 있었다.
"먼저 인지하고 대비하는 게 중요해."
몬스터가 접근하는 걸 알지도 못하고 멍하니 있다가 물어뜯기는 게 최악이다.
여차저차 하다 보니 스탠드가 만들어졌다.
모양은 엉성했지만 풍뎅이들이 요구하는 스펙은 충분히 만족시켰다.
이제 이걸 고정시킬 지반이 필요했다.
나는 땅을 파고 각목을 깊이 심었다.
이게 일종의 심 역할을 한다.
구멍을 4개 낸 판자를 몇 개 씌우니 발로 밀어도 움직이지 않았다.
"이거면 됐지?"
대장 풍뎅이를 데려가 보여주니 녀석은 만족한 듯했다.
다음으로 내가 할 일은 부품을 조립하는 것이지만···
슬쩍 보니 풍뎅이들이 부품을 제작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모양이었다.
활대는 만들었는데 당기는 줄이 문제였다.
딩고가 사정없이 물고 당길 테니 탄력이 있으면서도 튼튼해야 한단다.
"이건 어때?"
나는 철물점에서 루팅한 와이어를 꺼냈다.
스테인레스 재질로 매우 튼튼하면서도 비교적 잘 휘어진다.
풍뎅이들은 와이어를 보곤 감탄했다.
이게 한국의, 현대국가의 기술력이란다.
아무튼 와이어가 큰 문제를 해결하긴 한 모양이다.
풍뎅이들이 다시 부지런히 움직이기 시작했고 나는 앞으로의 일에 대해 고민했다.
"늑대인간까지는 어찌 대응한다 치는데···"
그 이상의 몬스터가 나타나지 말란 법이 없다는 게 문제였다.
특히 비행형 몬스터.
드물게 나타나긴 하지만 그리폰 같은 경우는 매우, 매우 위험하다.
하늘에서 내리꽂아 사람을 낚아챌 수 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공포영화가 따로 없다.
갑자기 발톱에 붙들려 날아간 후 둥지에 처박혀 비명을 지르다가 새끼들에게 산채로 뜯어 먹히는 것이다.
그리폰이 사지 중 한둘을 못 쓰게 만들기 때문에 도망도 못 간다.
대부분 몬스터에게 붙들리면 참혹하게 죽어가지만 그리폰의 경우 둥지가 높은 곳에 있어 더 무섭다는 차이점이 있다.
나는 쉘터를 둘러봤다.
이곳이 비행형 몬스터에 대해 방어를 제공하지 못하는 건 명백했다.
그러나 나는 안심하고 있었다.
비행형 몬스터가 둥지로 쓸 만한 곳이 안 보였기 때문이다.
나무는 높긴 하지만 녀석들의 덩치를 지탱하기엔 무리다.
"그래도 혹시 몰라."
먹잇감이 부족해서 갑자기 활동범위를 넓힐지도 모른다.
동물 다큐에서 흔하게 나오는 사례다.
"그나저나 그리폰 새끼 맛있다고 나왔었지."
고기에 독성이 없어서 먹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몬스터다.
알도 큼직하고 굉장히 맛이 진하다고 나와 별미로 통했다.
원 게임에선 고인물들의 내기에 동원되는 단백질 셔틀에 불과한 녀석이었다.
특히 그물에 맥을 못 추는 경향이 있었다.
단 현실에서는 이야기가 다르다.
뭔가 조금만 잘못되어도 발톱에 붙들려 둥지로 끌려가니까.
"녀석의 위협을 대비하기 위해서는···"
쉘터에 숨을 곳을 만들어야 할 것 같았다.
마침 발리스타도 거치해야 하니 딱 좋다.
나는 발리스타 스탠드 주위를 살펴봤다.
"두 개는 만들어야 되겠는데."
작업을 하고 있다가 그리폰의 공습을 눈치 챈 상황이라고 가정해보자.
몇 초 안에 숨어야 하는데 너무 멀리 있으면 뛰어가다가 죽는다.
"샌드위치 패널 이거로는 방어가 안 되겠네."
물자를 비축해둔 창고는 일견 튼튼해 보이지만 내가 밀고 당겨도 흔들흔들한다.
덩치가 큰 그리폰이라면 단숨에 무너뜨릴 수 있을 것이다.
역시 튼튼한 초소를 만드는 게 좋겠어.
"만드는 방법은···"
벽돌을 쌓아 올리는 게 가장 좋을 것 같았다.
뒤에 고임목을 대면 더 튼튼해진다.
발리스타를 쏴야 되니 구멍도 내야겠지.
나는 대략적으로 구상도를 그렸다.
다만 이 작업을 하기 전에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다.
"좀비들을 박살내는 거지."
물론 좀비를 비롯한 몬스터들은 타도의 대상이다.
하지만 구울로 진화하려는 놈들을 집중적으로 공격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마침 그런 놈들은 움직임이 굼뜨고 혼자 다니기 때문에 구분이 쉽다.
"진화 마지막에는 구석진 곳에 가서 웅크리고 있는 것 같았는데."
진화의 순간이 정확히 어떤지는 다들 잘 모른다.
워낙 초보 때 일이고, 다른 위험한 몬스터가 많아서 잊어버렸기에.
나는 풍뎅이들에게 젤리를 하나 더 준 후 배낭을 챙기고 딩고를 불렀다.
"사냥하러 가자."
.
.
.
"이야···멋지네."
나는 준호와 도형이가 이렇게까지 일을 잘 처리했을 줄은 몰랐다.
아지트 건물 옥상에 올라가니 사방에 거미줄처럼 로프가 쳐져 있었다.
건물과 건물은 어김없이 로프로 이어졌고 멀다 싶으면 따로 매듭을 묶은 로프를 늘어뜨려 놓았다.
급하면 저거 타고 올라가라는 거지.
"이런 걸 기대하긴 했는데."
기대 이상으로 굉장히 잘 해냈다.
내가 준 로프로는 모자랐을 텐데 파밍까지 했나보다.
다음에 만나면 밥이나 잘 먹여야겠군.
애들이 아직 성장기라 그런지 돼지가 아닌가 생각할 정도로 잘 먹었다.
심지어 체구가 작은 편인 여울이조차 밥 두 공기는 기본이었다.
"이렇게 잘 해놓긴 했는데···"
세상에는 이런 걸 그냥 두지 못하는 놈들이 있다.
자르는 건 그놈 마음이지만 나한테 죽을 각오는 해야 할 것이다.
나는 옥상 구조물에 기대여 밑을 내려다봤다.
"구울이 될 놈들이 보이네."
다른 사람들에겐 잘 드러나지 않는 특징이 있다.
우선, 눈을 감고 있다.
구울이 되면 시각을 아예 상실하기 때문일까.
다른 감각도 둔해져서 움직임 자체가 둔하다.
그리고 귓바퀴가 커진다.
소리를 잘 모으기 위해서인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보통 때보다 커진다.
최종적으로 구울이 되면 시각과 후각은 거의 제로가 되는 대신 청각이 극대화된다.
조금 과장해서 말한다면 몇 미터 밖에서 사람의 심장소리까지 잡아낼 정도다.
영화에서 흔히 나오는, 구석진 곳에 숨고 좀비가 그걸 지나치는 클리셰는 불가능하다.
"그런 놈이 별로 없는 게 다행이야."
구울은 물론이고 오크나 늑대인간 같은 류의 몬스터는 개체수가 많지 않았다.
나중에 오우거가 나오더라도 생존자들이 자주 마주치는 건 고블린과 보통 좀비다.
그건 그렇고 이거 공략본에 있었는데.
정부에서 퍼트린 공략본을 보니 조금 애매하게 서술되어 있었다.
"눈치가 빠른 사람은 실제로 행동하겠지만···"
조금 둔한 사람은 의도를 눈치 채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경매장에 들어가 보니 그 주제로 이야기가, 아니 싸움이 한창이었다.
―다들 구울 사냥 안해봤음? 변하기 전에 죽이는 게 최선이라고. 나중에 강화 구울로 바뀌면 어떻게 할 거임?
―그 때 되면 1티어 상점도 열리니까 그걸로 사냥하면 되지.
―상점 못 여는 사람은 다 죽으면 됨?
―솔까 지금 10레벨도 안 되는 놈이 있음?
―있음. 많음.
―서울은 그나마 많이 알려졌지만 다른 도시 가보면 특성에 추가효과 붙는거 모르는 사람도 천지임.
―허미.
―하여튼 강요해봐야 소용없고, 알아서들 주위 좀비들 사냥하십시다. 그냥 포인트 얻는다고 생각하면 되잖아요?
―좀 느리고 혼자 다니니까 사냥도 쉬움. 근데 구석탱이에 기어들어가 있는 놈은 조심하셈. 곧 구울로 진화할 놈임.
―나는 사냥 안함.
―?
―왜여?
―구울로 바뀌면 포인트를 더 주거든. 내가 왜 포인트를 포기해야 함?
―존나 이기적인 새끼네.
―병신인가? 아포칼립스에서 대체 뭘 바라는 거임?
―씹새꺄 아이디 대라.
―풉ㅋㅋㅋ아이디 대랰ㅋㅋㅋ아이디 대면 바로 튈 새끼갘ㅋㅋㅋ
뭐, 나도 본질적으로는 이 사람과 다르지 않다.
단지 육체적으로 약하니까 구울로 바뀌기 전에 처리하는 게 낫다고 판단했을 뿐.
요컨대 어떤 상황이 내게 이득인가를 잘 골라야 한다.
"구울이 많이 쌓이면 위험하지."
덩치는 작은데 민첩해서 아지트로 마구마구 들어올 수 있다.
최종단계인 강화 구울쯤 되면 마주치는 것조차 위험해진다.
다만 원래 게임에선 없었던 특성이란 게 붙어서 양상은 많이 다를 것이다.
토공만 빼면 다들 목숨이 하나란 것도 변수고.
나는 떠들어대는 이들의 아이디를 확인해두었다.
"근데 내가 여길 왜 왔더라?"
아···맞다.
토공에게 암호문 전해주러 왔었지.
아지트 만들고 파밍하고 하다 보니 시간이 이렇게 흘렀다.
정작 토공은 진주에서 꽤 얌전하게 지내고 있었다.
소식이라도 들리면 바로 찾아갈 텐데.
"남쪽에 그 남자도 찾아봐야 되고···"
할 일이 많구만.
지금 당장 내가 할 일은 구울이 될 좀비를 찾아내서 박살내는 것이다.
딩고가 냄새를 잘 맡으니 혹시 내가 눈치 채지 못해도 잘 찾겠지.
"딩고, 여기 올라와."
녀석이 배낭 위로 훌쩍 점프했고 나는 로프를 타고 밑으로 내려갔다.
사냥 시작이다.
< 진정한 아포칼립스 - 2 > 끝
< 진정한 아포칼립스 - 3 >
나는 딩고와 함께 상점가를 돌아다니며 진화 직전에 놓인 좀비를 찾았다.
확실히 녀석들은 눈을 감고 있었고 행동도 느렸다.
갈고리를 한 놈의 목에 건 다음 낚아채니 질질 끌려 왔다.
"딩고, 냄새 맡아."
발로 밟고 있음에도 큰 반항은 없었다.
보통 좀비라면 밟고 있기가 힘들 정도로 발버둥 치는데.
딩고는 좀비의 허우적거림을 피해 돌아다니며 냄새를 맡았다.
킁킁.
"됐지?"
내가 내려친 흑단목 몽둥이에 의해 좀비의 머리통이 깨졌다.
딩고는 앞서 나가며 좀비들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두운 모텔 주차장 한구석에서 어떤 녀석을 발견했다.
"···진화 직전이군."
좀비가 웅크려 있는 모습은 기괴했다.
팔다리에서 투명한 막이 뿜어져 나와 몸 전체를 뒤덮었다.
이미 인간의 모습은 찾기 어려웠다.
이건 진화라기보다는 변태에 가깝다.
조금만 시간이 더 지나면 구울이 막을 찢고 나올 것이다.
"좀비는 2포인트, 구울은 10포인트···그래도 지금 처리하는 게 나아."
나는 망설이지 않고 좀비의 머리를 깨버렸다.
제법 단단해서 몇 번을 얻어맞고서야 겨우 두개골이 깨져나갔다.
이런 식으로 주변의 좀비들을 사냥하다 보니 점점 활동범위가 넓어졌다.
아무래도 진화에 돌입한 좀비가 그리 많지는 않았던 것이다.
고블린들을 피해 로프를 타고 이동하다 보니 어느덧 법원이 보였다.
"여기 종사모가 있었지."
그들은 나를 최근에 온 생존자로만 안다.
퍼스트킬 이벤트 때 내가 철저히 정체를 감췄기 때문.
접촉할 수도 있겠지만 리더의 성향을 보자면 굳이 그럴 필요까진 없었다.
생물친화 특성을 가진 남자를 감금한 걸 보면 성향도 뻔하다.
"별거 없는 놈이 권력을 잡으면 위험하지."
지금 접촉하면 글쎄, 한쪽이 죽는 것으로 끝날 것이다.
나는 적당히 사냥하고 아지트로 복귀하려 했다.
그런데 남자와 여자가 골목에서 나와 나를 가로막았다.
단체복으로 봐선 마주치고 싶지 않은 종사모다.
방향을 트는데 다시 그쪽에 나타났다.
블링크···
여자가 팔짱을 끼고 말했다.
"우리 처음 보죠? 종사모 장희원이에요. 이쪽은 김종수."
"···강성홉니다. 무슨 일입니까?"
"요 며칠···성호씨가 근처를 활보하는 걸 봤어요. 애들하고 노는 것도."
그게 노는 걸로 보인 건가.
뭐, 그렇게 착각했다면 딱히 할 말은 없다.
계속 그렇게 착각하고 있으라지.
"그런데요?"
내가 퉁명스럽게 말하자 남자의 눈이 살짝 꿈틀거렸다.
희원이 웃으며 목소리를 부드럽게 했다.
"왜 그렇게 날이 서 있는지 모르겠어요. 싸우자는 게 아닌데."
"내 행동을 관찰한 게 썩 기분 좋지는 않아서요."
"이해하세요. 조직이 되면 정찰이란 걸 해야 하잖아요? 리더에게 판단의 재료를 갖다 바쳐야 하고···뭐 그런 거죠."
"그래서 나는 어떻게 받아들여졌습니까?"
"결정했어요. 종사모의 회원으로 받아들여도 좋을 것 같다고."
뭔가 큰 혜택을 주는 것 같지만 나는 들어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
"사양하겠습니다."
"아···괜찮으시겠어요? 이 부근에서 우리와 척을 지게 되면 안전을 보장 못해요."
"지금까지 잘 살아왔으니까 그쪽이 보장 안 해줘도 됩니다."
"앞으로는 더 위험해져요. 구울부터 시작해서 오크, 늑대인간 같은 몬스터들에게 대항하려면 조직적인 힘이 필요해요. 성호씨에겐 그게 없구요."
"나름대로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건 방금 봤어요. 어떻게 구울로 진화할 좀비들 찾아내서 머리를 박살내더군요. 하지만 그건 좋은 방법이 아니에요."
"무슨 소립니까?"
그녀가 손가락 2개를 들어보였다.
"좀비는 2포인트. 구울은 10포인트를 주죠. 구울을 잡는 게 더 좋지 않겠어요?"
"공략본엔 구울이 훨씬 강력하다고 되어 있던데요."
여자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거야 뭣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하는 얘기구요. 좀비가 구울로 변하는 타이밍이 있어요. 그 타이밍을 잘 잡으면 2포인트가 10포인트로 변하는 거죠. 관심 있어요?"
타이밍이라···그건 나도 모르는데?
"아뇨. 없습니다. 타이밍이 잡아지는지도 모르겠고요."
"이런 말하면 조금 그렇지만, 우리 리더가 고인물이에요. 3천 시간을 넘죠."
이쪽은 5,500시간인데요.
그리고 내가 확인한 결과 징징이 5호, 구경하러와봄의 플레이시간은 겨우 350시간에 불과했다.
전쟁터에서 전공도 2배 이상으로는 불리지 않았다는데 10배는 좀 너무하지 않은가.
나는 내색하지 않고 말을 돌렸다.
"3천 시간이 맞으면 고인물들 다 알겠네요. 토공이나 김밥조아 뭐 그런 사람들."
그녀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알죠. 안다고 했어요."
"그래요? 그 사람들은 알까요?"
"들어와서 직접 확인하는 게 어떨까요?"
들어가면 못 나가니까 이런 소리를 하는 거겠지.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제안은 고맙지만 생각 없습니다."
"앞으로 지내기 불편하실 텐데."
"말했듯이, 혼자서도 잘 살아왔으니까요."
그녀가 건물 한쪽에 길게 늘어져 있는 로프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이런 건 혼자 한 작업이 아니잖아요? 그 애들 시켜서 한 거던데."
"가끔은 도움을 받을 때도 있는 거죠."
슬슬 지루해졌다.
여기서 이러고 있을 여유가 없어서 돌아서려는데 그녀가 급히 말했다.
"로프가 잘리면 성호씨도 좀 곤란하지 않을까요?"
"···협박하는 겁니까?"
"이건 협박이 아니에요. 로프 같은 건 전투하다가 잘려질 수도 있는 거잖아요."
"250kg까지 견디는 낙하산 줄입니다. 쉽게는 안 잘리죠. 그리고 나는 그쪽 공동체에 들어갈 생각이 전혀 없으니까 그만합시다."
"곤란하실 텐데···실은, 우리 아저씨가 성호씨를 의심하고 있거든요. 오크 퍼스트킬 이벤트 아시려나 모르겠네."
나는 일부러 눈을 크게 떴다.
"그 이벤트가 근처에서 벌어졌다고요?"
"누군가가 스틸해갔어요. 우리 아저씨가 완전히 이를 갈고 있거든요. 걸리면 곱게 끝나진 않을 거예요."
"하여튼 저는 뭐 그 이벤트는 보지도 못했으니까요."
"그건 앞으로 우리가 판단할···"
그때였다.
건너편 건물 앞에서 차원문이 열리며 오크 한 마리가 걸어 나왔다.
녀석은 잠시 어리둥절해 있다가 우리를 보곤 콧잔등을 씰룩였다.
여자와 남자의 안색이 급변했다.
"오크···너무 빠른데."
"본부에 돌아가는 게 낫겠습니다."
"그러죠. 미안하지만 성호씨는 저희가 못 구해드려요."
내가 어깨를 으쓱하자 그녀는 픽, 하고 웃었다.
"자신 있나 보네요. 그럼 열심히 살아남아 보세요."
그 말이 끝나고 남자가 여자의 어깨에 손을 얹자 둘 다 사라졌다.
"말 참 많네."
오크가 나를 노려보며 이를 드러냈다.
아 미안, 너한테 한 얘기 아니야.
나는 곧장 로프를 잡고 기어올랐다.
오크가 쿵쿵쿵 뛰어왔지만 나는 이미 3층으로 올라간 이후였다.
녀석은 로프를 몇 번 흔들어보더니 포기하곤 멀찍이 지나가는 고블린 무리에 대고 신경질을 냈다.
크어어억!
고블린들이 화들짝 놀라 도망갔다.
"오크까지 나타났다 이거지···"
현재 내가 가진 무기론 대항이 어렵다.
작물 버프를 받고 모든 스킬을 발동시키면 근접전에서도 우위를 점하겠지만 그렇게까지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싸움은 쉽게 이겨야 되는 거니까."
역시 발리스타를 서둘러 완성시켜야 한다.
나는 로프를 타고 아지트로 돌아왔다.
동굴로 들어가니 풍뎅이들이 막 발리스타 부품을 준비해놓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훌륭해.
.
.
.
나는 풍뎅이들의 도움을 받아 발리스타를 조립했다.
장난감 조립하는 것처럼 쉽지는 않아 있는 힘을 모두 동원해야 했다.
"무지, 빡빡하네!"
그렇게 완성된 발리스타는 상당히 크고 묵직해 활대만 해도 1m가 넘었다.
한 풍뎅이가 볼트를 가져와서 보니 굵기가 손가락만 했다.
"이거 맞으면 진심 한 방에 죽겠는데."
중형급 몬스터가 맞아도 치명상을 입을 것이 분명했다.
"멋지네. 장전은 어떻게 하는 거지?"
대장 풍뎅이가 내 손등에 올라와 장전법을 가르쳐주었다.
레버를 돌려서 도르래를 작동시키는 거군.
뒤의 손잡이를 잡아당겨서 장전할 수도 있게 되어 있었다.
이건 딩고가 물고 당기는 건가?
"딩고, 이거 물어봐."
손잡이를 물려주자 녀석은 본능적으로 뒤로 당겼다.
그러자 끼릭끼릭 하는 소리와 함께 도르래와 기어가 돌며 시위를 뒤로 당겼다.
활대가 금방 터질 것처럼 휘어졌고 나는 볼트를 레일에 놓았다.
"고정못을 빼고 이렇게 움직이면···"
발리스타가 휙휙 회전했다.
이거면 어디에서 몬스터가 나타나든 대응할 수 있다.
위력은 어떨까.
나무를 조준하고 스위치를 올리자 둔탁한 소리가 나더니 볼트가 사라졌다.
가서 확인해보니 볼트가 아름드리 나무를 반이나 파고들었다.
"위력 장난 아니네."
잘만 쏘면 대형 몬스터에게도 통할 것 같았다.
나는 성의를 담아 풍뎅이들을 쓰다듬었다.
"잘했어, 진짜 수고했어."
멋진 작업을 해낸 녀석들이 정말 대단하게 느껴졌다.
그런데···이거 하나로는 좀 부족한데.
내가 구상한 초소는 두 개였다.
어디에 숨어도 발리스타를 발사할 수 있도록 하고 싶었다.
"하나 더 만드는 건 힘들겠지?"
풍뎅이들이 대책회의에 들어갔다.
나는 젤리 한 상자를 가지고 와서 그들 뒤에 턱 놓았다.
"이거면 되겠어?"
녀석들은 젤리에 푹 빠져 있다가 발톱을 들어올렸다.
계약 성립이군.
풍뎅이들이 젤리를 포식하는 동안 나는 발리스타 스탠드 주위에 표시를 해두었다.
이제 벽돌을 쌓아 올려서 초소를 만들 셈이다.
필요한 자재를 나르고 혹시나 해서 상점을 열어보니 역시나였다.
2티어 상점이 업데이트 되었다.
결코 바라지 않았던 잠수함 패치도 함께 적용된 채로.
"이런 젠장할 놈들을 봤나."
엘더우드 롱보우의 가격표에 3,000포인트가 붙어 있었다.
전용화살은 자그마치 30포인트란다.
"1.5배나 올렸네."
이거 너무한 거 아니냐고 항의하고 싶지만 들어줄 곳이 있어야 말이지.
가격표가 바뀔 일은 죽어도 없을 거고···결국 사는 수밖에.
나는 엘더우드 롱보우와 화살 20발을 구입했다.
그 많던 포인트가 220으로 쪼그라들었고 동굴 바닥에 활과 화살집이 나타났다.
"참 멋진 무기란 말이야."
판타지 영화에서나 볼법한 고풍스러운 장식이 곁들여진 무기다.
시위를 걸고 튕기니 위잉, 우는 소리가 났다.
정말 멋지긴 한데 남들 앞에서는 못 쓰는 게 안타까웠다.
3,000포인트를 어디서 벌었냐고 하면 할 말이 없거든.
"화살만 샀다고 하자."
차원 슬롯이 있으니 무기를 바꾸는 데에는 문제가 없을 것이다.
경매장에 들어가 보니 역시 욕으로 도배가 되어 있었다.
포인트 없는 자들의 설움이 폭발하고 있으니 괜히 끼어들지 말자.
"포인트를 좀 모아야겠군."
나는 점화석 파우더와 흑탄 파우더를 세트로 해서 경매에 올렸다.
전에는 거의 3,000포인트까지 경매가가 치솟았지만 그건 이벤트라는 특수한 상황 때문이었다.
"화염캔만 있으면 나도 혹시? 하는 거지."
이젠 이벤트도 끝났으니 예전처럼 높게 받지는 못할 것이다.
그래도 최소 1,500포인트는 벌지.
경매를 지켜보니 선동하는 자와 부추기는 자로 나뉘어 치열한 설전을 벌이고 있었다.
―이거 천포 이상 주고 사는 놈은 설마 없겠지?
―1100포 돌파!
―이걸로 오크 잡아봐야 개손해인데.
―스킬하고 아이템 생각해야지 멍충아.
―그거 감안해도 비싸다고 병신아. 나는 레벨이 높아서 이제 오크 잡아도 아무것도 못먹는데.
―그런 놈이 왜 여기서 기웃거리고 있음? 바보임?
―ㅋㅋㅋㅋㅋ
―16레벨까지는 스킬 주던데 님 혹시 17렙임?
―17레벨은 없음?
―지금 17레벨 된 사람은 거의 없을 걸···경험치 엄청 필요함.
―혹시 오크 잡은 사람?
―우리 길드에서 레이드 준비중임.
―고인물들은 혼자 잡겠지···부럽다···
―1300포 돌파!
파우더 세트는 기어코 1,500포인트를 돌파하여 1,800에서 멈추었다.
하나를 더 올리자 1,700포인트에서 낙찰되었다.
수수료를 제하고 3,150포인트.
포인트 벌기 참 쉽구만.
나는 적당히 배낭과 무장을 챙겼다.
아지트에서 벗어나니 단체복을 입은 종사모 회원들이 얼쩡거리고 있었다.
저 사람들도 그 오크를 찾는 건가.
달려드는 고블린들을 사커킥으로 차버리고 골목길에 접어드니 여울이네가 계단에서 내려왔다.
"형형, 오크 나왔어요, 봤어요?"
"봤지. 니들은 보면 바로 도망쳐야 된다."
"아저씨는요?"
"나도 어지간하면 도망칠 거야. 무섭거든. 일단 올라가. 지금 사람들 돌아다녀서 위험하니까."
준호와 도형이는 사람들이 뭘 하는지 궁금해 죽겠다는 얼굴이었지만 안에서 구경하기로 합의를 봤다.
여울이가 둘을 끌고 갔고 나는 아쉬움을 느꼈다.
유현이만 있으면 종이비행기로 정찰할 수 있는데.
없으니까 내가 알아서 해야지 뭐.
옥상에 올라가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오크가 난동을 피우는 게 보였다.
고블린 무리가 포위하고 있는 걸로 봐서 한판 붙은 모양이다.
"마비독은 안 통하는데."
역시나 오크는 마비독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고블린들을 박살냈다.
그나마 홉고블린이 좀 저항하다가 죽은 뒤에는 고블린들이 고분고분해졌다.
오크를 새로운 대장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생긴 건 뭐 비슷하네."
새로운 대장의 덩치가 월등해서 그런지 고블린들의 어깨에 꽤나 힘이 들어가 있었다.
니들 태세전환이 너무 빠른 거 아니냐.
뒤늦게 오크를 쫓아온 종사모 회원들이 그 무리를 발견했다.
"고블린하고 같이 있어!"
"뭐야, 왜 안 싸워?"
"형님 불러! 빨리!"
삽시간에 다섯 명이 몬스터들을 에워쌌다.
오크와 고블린들이 흉포하게 울부짖으며 그들을 위협했다.
슬슬 빠져줘야겠군.
여기 있어봐야 좀비 레이드를 불러올 뿐이다.
로프를 타고 다른 도로로 가는데 하필 징징이 5호와 희원이라는 여자가 나타났다.
희원이 징징이 5호에게 귓속말을 했다.
"강성호씨. 내 제안을 거절하셨다고 들었는데요."
"저기 사람들이 오크 있다고 하던데요. 안 가도 됩니까?"
그가 히죽 웃었다.
"가야죠, 가는데···나는 당신이 참 의심스럽단 말입니다. 진짜 오크 이벤트에 개입한 적 없습니까?"
"그런 게 있었는지도 몰랐습니다."
모습을 보인 적이 없기 때문에 아무도 내가 개입한 줄 모른다.
하지만 징징이 5호는 끝까지 의심을 풀지 않았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요 며칠 수상한 사람은 강성호씨 뿐인데 하필 오크 이벤트를 스틸당했다···범인으로 생각해도 무리는 없을 텐데 말이죠."
"만약 내가 했으면 어쩔 겁니까?"
내가 묻자 징징이 5호가 씨익 웃었다.
"아 뭐, 긴장 푸시고. 내 사람이 되면 문제없습니다. 우리 식구가 먹었다는데 내가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하지만 그게 아닐 시에는···"
"아닐 시에는?"
"죽여야죠. 그냥 넘어갈 수가 없습니다. 무능한 리더라고 내가 식구들한테 비난받아요. 지금도 말이 나오고 있고."
"다시 말하는 거지만 난 아닙니다."
"모르죠, 그건···"
그가 손과 목을 두두둑 하며 풀었을 때였다.
쉽게 가긴 글렀군.
활에 손을 가져가는데 블링크를 선보인 남자가 와서 그에게 귓속말을 했다.
"그 새끼가 여기 왔다고?"
목청도 크구만.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인 것 같은데···
"찾아야지. 희원이하고 종수가 가봐. 나는 오크를 잡을 테니까."
둘이 블링크로 떠난 후 징징이 5호가 내게 웃어보였다.
"그 새끼가 누구인지 압니까?"
"경매장에서 김밥조아를 그렇게 부른다고 들었습니다."
"하하, 걔도 그 새끼는 맞네요. 온갖 기록을 독식해놓고 보이지도 않는 쫄보···근데 내가 잡으라고 한 놈은 좀 다릅니다. 원래 같은 식구였죠."
그 생명친화 특성을 가진 남자인가 보군.
"정말 잘 대해줬는데···진짜 동생이라 생각했는데 뒤통수를 맞았지 뭡니까."
"그쪽도 그렇게 생각할까요?"
"생각을 안 하면 짐승새끼죠. 내가 얼마나 친절하게 해줬는데."
글쎄, 그건 당신 입장이고.
이야기는 양쪽에서 들어봐야 하는 법이다.
"예, 뭐 그건 알아서 하시고."
내가 떠나려 하자 징징이 5호가 목청을 높였다.
"내가 이 말을 왜 한지 압니까?"
"모르겠는데요."
"나는 집착이 강하다 이 말입니다. 그 새끼를 반드시 붙잡을 거고, 강성호 당신도 내 레이더에 들어왔으니까 딴 생각 안하는 게 좋을 겁니다. 당신 진짜 의심스럽거든."
"착각은 자유지만 나 건드리면 곱게 넘어가진 않을 겁니다."
내가 경고하자 그는 두 팔을 쫙 벌렸다.
"어이구, 무서워라."
이쯤 하자.
곧 토공을 만나러 가야 하는데 여기서 드잡이질을 할 시간은 없다.
나는 몸을 돌려 딩고와 함께 그 자리를 벗어났다.
골목길로 접어드는데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종수야! 지만이 찾았냐?"
"예에! 지금 구석에 몰았습니다!"
"여기 뭐 하러 왔던?"
"생필품 파밍하다가 우리 보고 놀라서 튀던데요? 막 휴지 흘리고."
"누가 불쌍맨 아니랄까봐 진짜 불쌍하게 다니네. 가자. 지금 오크가 문제가 아니다."
"옙."
나는 발걸음을 멈췄다.
누굴 찾았다고?
< 진정한 아포칼립스 - 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