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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선의 방어란 - 1 > 끝

< 최선의 방어란 - 2 >

수연과 조병장에게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고 떠벌리긴 했지만 당장 쳐들어가잔 소리는 아니었다.

방금 왔는데 조금 쉬어야 할 것 아닌가 말이다.

조병장이 내게 대대 숙소와 시설 등을 간략히 안내했다.

헬스장 멤버들과 김대위네는 연병장을 사이에 두고 떨어져 지내고 있었다.

저 정도 거리면 됐어.

"일단은 좀 쉬시고, 중대장님이 나중에 따로 보자고 하시는데 괜찮을까요?"

"그렇게 합시다."

나와 수연은 간부숙소에 들어갔다.

금속이란 금속은 죄다 사라져 있었지만 의외로 깔끔해서 지내기엔 괜찮을 것 같았다.

1층 복도로 들어가니 미경이 2층 계단에서 내려왔다.

젖은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말리면서.

"아저씨 오셨네요."

"어때요, 여기 지낼만해요?"

금방 온건 알지만 그냥 물어보는 것이다.

그녀는 배시시 웃으며 물이 많아서 좋다고 했다.

알고 보니 대대의 모든 물탱크와 대야에 물을 받아놨다고.

새삼 군인들의 준비정신에 감탄이 나왔다.

수연이 내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남자들 방은 1층이에요. 냄새 많이 날 거니 좀 씻으시고···응?"

그녀는 내 얼굴을 바라봤다.

"냄새가 하나도 안 나네. 어디서 샤워하고 왔어요?"

아차.

김해평야를 지날 때 동굴에서 샤워를 한 걸 깜빡했다.

미경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내게 다가와 킁킁댔다.

"아···비누냄새 난다."

"김해평야 그 강에서 씻고 왔거든요."

"아저씨 근데요. 예전부터 제가 생각한 건데 너무 뽀샤시 하세요. 저는 막 피부 뒤집어지고 난리 났는데."

숲에서 잘 씻어서 그런가?

"제가 좀 깔끔 떠는 스타일이라."

나는 대충 둘러대곤 방에 들어왔다.

침대에 옷장과 책상 하나씩 있는 간소한 방이지만 그럭저럭 지낼 만은 할 것 같았다.

어차피 장기간 있을 곳은 아니니까.

짐을 풀고 있는데 수연이 잔소리하는 게 들렸다.

"미경이 너 맨다리 내놓고 있을래?"

"잉, 왜요오."

"빨리 가서 긴 바지 입어. 남자들한테 함부로 다리 보여주지 마."

"시원해서 좋은데."

"우리끼리 있으면 상관없는데 저쪽 남자들이 혹할지도 몰라요, 그레이스씨."

"엑. 언니 그거 어떻게 알았어요?"

"시끄럽고 빨리."

미경이 칭얼댔고 수연은 빨리 긴 걸로 갈아입으라고 난리였다.

하긴 그녀는 조심성이 부족한 편이었다.

아무리 이쪽 남자들이 얌전해도 맨살을 그렇게 노출하면 쓰나.

아포칼립스에선 방검복에 모자가 딱이다.

좁은 침대에 누워 있으려니 유현이의 종이비행기가 날아들었다.

―김대위님이 식사나 같이 하잔데요?

좋지.

식사는 예전과 크게 달랐다.

아무래도 1종 창고에 비축된 물자가 어마어마했기 때문.

컵라면만 해도 수십 박스가 넘고 팩에 담긴 군납식품은 질릴 정도였다.

거기에 전투식량까지 합하니 8명이 몇 달은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여기 물자를 우리만 쓰는 건 아니긴 하다.

인근 생존자는 물론이고 코볼트들이 빼간다고 하니 대책이 필요했다.

아무튼 우리는 식사를 마치고 모였다.

"애들은 쉬게 하고 우리끼리 이야기 좀 하십시다."

형준 형이 부른 사람은 나와 수연, 그리고 김대위였다.

애들이란 건 20대 초반의 병사 둘과 유현이, 미경까지인가 보다.

아무래도 나이 차이가 좀 있다 보니.

나는 도자기에 물을 끓여 믹스커피를 한 잔씩 건넸다.

"아···커피 오랜만에 마시네요."

수연이 호로록 마셔보더니 만족스럽게 웃었다.

귀뚜라미가 우는 가을 저녁, 어두운 숲을 바라보며 커피를 마시는 건 나쁘지 않았다.

빌어먹을 몬스터만 없으면 완벽한데.

김대위가 이야기를 꺼냈다.

"낮에 성호씨가 이야기를 하셨다던데,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고 말입니다."

"맞습니다. 여러분들이 여기 계실 동안 코볼트 토벌을 좀 할까 합니다. 사정이 여의치 않으면 저희끼리 하고요."

그라면 반드시 참가하겠다고 할 것이다.

뭐, 그냥 서울로 올라가도 별 문제는 없다.

"창고를 터는 놈들 때문에 그렇습니까?"

"놔두기 그렇잖습니까. 승태씨 말을 들어보니 그놈들은 창고를 털어도 지저분하게 턴다고 하더군요. 치우기가 짜증날 정도로."

"그래도 어려울 텐데···혹시 계획이라도 갖고 계십니까?"

나는 접이식 테이블 위에 대강 그린 지도를 한 장 올려놓았다.

김해대대와 분성산, 정상의 테마파크 등이 포함된 지도였다.

"길쭉한 이 지역만 청소하면 당분간은 훨씬 나을 겁니다."

"다른 몬스터도 있지 않습니까. 좀비나 고블린이요."

"좀비는 주위엔 많이 없고, 고블린은 도심에 많습니다. 그 녀석들은 뭔가 신기한 것을 좋아하거든요. 공략집에 나와 있을 겁니다."

"오···진짜네요. 깨알같이 적혀 있긴 하네."

수연이 공략본을 지도 옆에 올려놓았다.

김대위가 그걸 훑어보더니 내게 말했다.

"코볼트만 좀 토벌하면 이 주위가 조용해진다는 말씀이시죠?"

"당분간은 그렇습니다. 이 부대는 입구가 숨겨져 있어서 몬스터들이 찾기가 어렵습니다. 근처에 먹을 것도 없고요."

유기물이 없다는 건 몬스터가 있을 이유가 없다는 말과 같다.

녀석들은 숲에 머무느니 도심을 돌아다니는 편을 택할 것이다.

단, 코볼트는 고블린과 달리 숲을 선호하는 습성이 있다.

녀석들만 적당히 청소하면 대대 주위는 당분간 조용해질 것이다.

형은 이야기를 듣는 척은 하지만 시선은 딴 곳에 가 있었다.

남서쪽···형수와 지은이가 있는 방향이겠지.

물론 두 명이 살아있으리라곤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그 흔적만이라도 찾고 싶은 게 형의 솔직한 심정이겠지.

차마 자기가 가지는 못하겠고···여기선 내가 나서는 것도 나쁘진 않겠군.

"형님, 나중에 제가 한번 가보겠습니다. 위치가 어딥니까?"

"어···? 성호 니가?"

"예. 잠깐 찾아보고 오겠습니다."

"···고맙다. 장유2동 앙코르 아파트야."

"거기 아파트 단지는 다 무너졌을 테니까 혹시 살아 있다면 근처로 도망갔겠네요."

"그렇지···근처에 원룸단지하고 상가가 있거든? 거기만 좀 봐주라."

"옙."

그 정도야 뭐 어렵겠습니까.

아무튼 김대위는 지도를 몇 번이나 훑어보고 결정을 내렸다.

"합시다. 저도 코볼트 놈들 남겨두고 서울로 가는 건 마음이 편치 않네요. 그놈들 먹이려고 물자 지킨 건 아니라서."

"그럼 오늘 밤은 우리끼리 불침번 서고, 내일 아침에 계획 짜서 시작하기로 하죠."

내 제안에 다들 동의했다.

애들···이라고 해봐야 다들 성인이지만, 하여튼 그들을 재우고 싶었던 것이다.

두 병사는 물론이고 미경과 유현이도 먼 길을 와서 무척 피곤할 터였다.

수연은 거뜬하다고 하면서도 연신 눈가를 문질렀다.

형준 형이 나를 보더니 부러워했다.

"역시 스물아홉이라 그런지 쌩쌩하네. 부럽다야."

그 말에 김대위가 놀라며 나를 쳐다봤다.

"어? 저도 스물아홉인데요. 동갑이네요."

"그럼 우리 말 놓을까?"

내 제안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야 말 편하게 할 수 있으면 좋지."

우리는 활과 간식거리를 가져와 번갈아가며 불침번을 섰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코볼트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고 8일 아침이 되었다.

.

.

.

"수연씨하고 미경씨, 그리고 유현이는 지원조. 각자 역할은 아시죠? 메딕, 장갑차, 정찰기가 되는 겁니다."

"메르시다, 메르시."

조병장이 수연의 직업과 특성을 듣고 한 말이었다.

뭔가 했더니 유명한 게임 캐릭터란다.

수연은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캐릭터하고 비교당하고 싶진 않은데요."

"아, 죄송합니다. 근데 너무 닮으셔서요."

"예뻐요?"

"엄청 예뻐서 인기 짱입니다. 근데 나이가 좀 많다는 단점이···"

"···"

임일병은 괜한 소리를 꺼냈다가 큰 누나뻘인 수연의 눈초리를 받게 되었다.

이 친구도 눈치가 참 없어.

나는 형준 형에게 말했다.

"형님이면 코볼트에게 당할 염려는 없을 겁니다. 단 화살 쏟아지는 쪽으로 넘어가면 안 됩니다."

"밖에서 돌란 얘기지?"

"예. 딩고가 같이 움직이면서 코볼트들 몰 겁니다."

"알았다. 거 기특한 녀석이구만."

"그리고 이거···"

롱나이프를 내밀자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300포인트 무기 아니냐? 빌려주는 거지?"

"옙. 형님이 이거 휘두르고 다니면 코볼트들 아주 작살날 겁니다."

형은 들어보고 군침을 삼켰다.

"나도 이거 살까 했는데 포인트 다 털어야 해서 망설였거든. 근데 되게 좋다야."

군인 셋은 실질적인 화력 투사를 맡게 되었다.

사실 몬스터 둥지 몇 개 터는데 이런 거창한 계획까진 필요 없다.

하지만 상대가 코볼트라서 주의가 필요했다.

이 녀석들은 괴상한 소리를 내서 동족을 모으는 습성이 있기 때문이다.

공략집엔 없는 내용이라 내가 돌아다니며 차단하는 수밖에 없었다.

"각자 자리만 지키고 공격하면 됩니다! 2조는 코볼트들이 도망가면 쫓지 마세요! 1조나 3조가 알아서 할 겁니다!"

"수신 완료."

"갑시다."

일행은 대대를 벗어나 산으로 향했다.

유현이 미리 둥지를 찾아놨기에 가서 공격하기만 하면 되었다.

딩고가 마구 짖자 견디다 못한 코볼트들이 움막에서 뛰쳐나왔다.

헬스장 멤버들은 코볼트를 처음 봤다.

아침이슬에 젖은 털과 사나운 이빨, 엉거주춤한 자세.

녹색 피부를 가진 고블린과는 다른 차원의 지저분한 몬스터였다.

주 무기는 창과 돌팔매질.

그물 정도는 쓰는 고블린과 달리 정말로 원시적인 무기만 사용한다.

하지만 코볼트는 은근히 성가신 몬스터인데, 동족을 모으는 습성이 있기 때문이다.

급하면 네 발로 뛰기도 하는데 은근히 빨라서 추적하기도 어려웠다.

"어? 저 녀석 뛰어요!"

유현이 코볼트 한 마리를 포착하고 화살을 날렸다.

종이모형이 묶여 있는 화살이 마치 유도탄처럼 나무를 피해 코볼트의 등에 박혔다.

펑!

작은 폭발이었지만 몸 안에서 일어난 터라 치명적이었다.

코볼트는 폭발을 견디지 못하고 앞으로 엎어졌고 낑낑거리는 소리만 냈다.

어느새 나타난 성호가 흑단목 몽둥이로 머리통을 후려갈겼다.

"다섯, 끝! 잠깐 쉬고 다음 둥지로 올라갑시다!"

그의 외침에 김대위는 자리에 앉아 한숨을 돌렸다.

벌써 둥지 두 개째다.

그는 코볼트 사냥이 이렇게 수월하리라곤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두 병사도 그렇게 생각하는지 눈이 성호를 따라다녔다.

"중대장님 신기하지 않습니까? 코볼트하고 엄청 많이 싸워본 사람 같던데요."

"···그러게. 어디로 도망갈지 미리 알고 있는 것 같더라."

당연히 뒤로 도망가겠지만 그 방향과 타이밍이 너무 정확했다.

그는 후방과 전방을 오가면서 사람들의 행동을 유도했다.

하라는 대로 하면 전투가 너무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뒤로 몇 걸음 후퇴하래서 후퇴하면 코볼트들이 던진 돌멩이가 앞에 떨어지는 식.

본인 말로는 공격예지가 특성이라 미리 봤다고 하는데···

헬스장 멤버들은 그와 함께 싸워봤는지 전적으로 신뢰하는 분위기였다.

하긴, 저렇게 앞뒤가 딱딱 들어맞는데 신뢰할 만도 하지.

정작 성호는 싸우진 않고 수연과 함께 돌아다니며 그녀에게 경험치를 몰아줬다.

딩고와 형준이 코볼트들을 한쪽으로 몰면 선빵을 치는 식이다.

그런 식으로 사냥한 결과 마침내 수연의 레벨이 10으로 올랐다.

"아. 10레벨 됐어요."

"추가효과는 어떻습니까?"

"원거리 치유네요. 너무 멀리 떨어지면 안 되는 것 같지만."

"메르시 맞는 것 같네요. 자세히는 모르지만."

"안경 벗으면 똑같다고 하는데 머리도 묶어 볼까요? 말총머리로?"

하지만 성호는 그녀의 외모엔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어느새 유현이에게 다가가 수고했다며 등을 두드려주었다.

수연은 입을 다물곤 고무줄로 머리를 묶었다.

사냥은 거기에서 끝났다.

산을 타느라 일행의 체력소모가 너무 심했기 때문이다.

또 가까운 코볼트 둥지는 대부분 소탕해서 당분간은 괜찮을 거라는 판단도 있었다.

일행은 일사불란하게 산을 내려와 대대로 향했다.

그리고 동의 없이 물자를 가져가는 건 코볼트 뿐만이 아니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

.

.

"와, 진짜 한대 후려갈기고 싶더라."

"잘 참으셨습니다."

형준 형이 흥분한 채 돌아다녔다.

그를 화나게 한 원인은 인근의 생존자들이었다.

우리가 코볼트 토벌을 적당히 끝내고 대대로 복귀하자 창고를 뒤지고 있었던 것이다.

병사들은 한숨을 내쉬었고 형이 따졌다.

―지금 뭐하는 겁니까?

―그걸 당신이 왜 묻습니까? 여기 뭐라도 돼요?

―이건 국가가 마련한 공공물잡니다. 당신네들 것이 아니라.

생존자들은 국가의 소유니 국민이 가져가는 게 당연하다는 논리를 폈다.

보다 못한 현우가 말했다.

―한꺼번에 좀 가져가시는 게 어떻습니까? 매번 저희가 신경을 써야 하잖습니까.

―그건 우리 마음이지.

―신경 쓰지 말고 할 일들 해요. 그나저나 인원이 늘었네? 저기 아가씨 둘은 누굽니까?

생존자들은 수연과 미경의 신상까지 파려 들었다.

거슬리는 양반들이구만.

이곳을 점령하고 있던 현우가 가만히 있으니 나도 나설 수가 없었다.

그들은 양껏 물자를 챙기곤 우리에게 한마디 했다.

―거 같이 좀 삽시다. 물자가 이렇게나 많은데 어차피 다 먹지도 못한다고.

―가져가서 주위 생존자들하고 나누시는 겁니까? 그럼 얼마든지 가져가셔도 됩니다.

현우가 그렇게까지 말했건만 그들은 실실 웃었다.

―뭐 하러 나눠요? 우리만 알면 됐지.

―김중위는 사람이 너무 좋은 게 탈이야.

나눈다고 한 마디만 했어도 괜찮았을 텐데 생존자들은 끝까지 속을 긁었다.

태도가 어찌나 짜증났는지 항상 침착하던 현우의 얼굴이 붉어질 정도였다.

"···저 꼴을 보려고 코볼트 사냥한 게 아닌데."

수연의 말에 모두가 동감했지만 당장 어쩔 수가 없었다.

물자가 많은 것도 사실이고.

우리가 이 물자의 주인이 아닌 것도 맞다.

단지 태도가 짜증난다는 이유로 생존자들을 몰아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형은 돌아버리겠다며 현우를 데리고 생활관으로 향했고 나는 조용히 방으로 돌아왔다.

"태도를 보면 분명 어딘가에 속해 있을 텐데···"

평범한 생존자가 우리 화를 돋울 이유가 없다.

분명 누군가에게서 지시를 받은 것이다.

마침 8일, 권씨와 관련이 있던 김해와 창원의 클랜이 회동하는 날이었다.

경매장을 켜니 과연 이상한 아이템이 경매품으로 올라와 있었다.

나는 권씨의 일지를 폈다.

―CW5 C

―CW3 C

―GH4 C

―GH2 ST EG

"앞은 지부명이고 뒤가 클리어···이상 없다는 뜻이군."

CW는 창원, GH는 김해를 가리킨다.

ST와 EG는 각각 이방인 출현이란 영어를 단축시킨 것이다.

그 이방인이란 우리를 가리키는 거겠지.

"GH2는 대대 주위에 있다는 뜻이겠고."

역시 클랜의 끄나풀 정도는 되어야 우리에게 시비를 걸 수 있는 거겠지.

진정한 목표는 아마 우리를 몰아내고 창고를 독차지하는 것일 확률이 높았다.

누군가 메시지를 입력했다.

―BS11?

―BS11 C

내가 입력하자 더는 질문이 오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각 지역의 상황을 체크하는 거구만.

주기적으로 경매품을 내리고 새로 올려서 흔적을 다 지우는 치밀함도 보였다.

나는 포인트를 써서 모두의 아이디를 확인했다.

그리고 놀랄만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서바이벌 라이프의 중기를 언플과 선동으로 장식했던 트롤들이 여기 있었다.

―도와주셈(개트롤) : 이방인들 중에 여자가 있다고? 예쁘냐?

"얼씨구."

전에 각성자들에게서 천만 원씩 받아먹고 튄 놈이다.

―도와주셈(개트롤) : 계획변경. 내일 밤에 애들 들여보내서 여자들이 어디에서 자는지 확인해.

"절씨구."

수연과 미경이 예쁘다는 소문이 거기까지 퍼진 모양이지?

나는 좋은 생각을 떠올렸다.

최선의 방어는 역시 공격이지.

다른 경매품을 보니 오리궁뎅이가 밀양까지 내려왔다는 소식이 띄었다.

"밀양이면 그리 멀지도 않은데.···"

워낙 유명인이라 한번 보기 위해 몰려든 생존자들로 지역 전체가 북적인다고 한다.

―좀비 레이드도 두번 있었음ㅋㅋㅋ

―몸매 포스 완전 쩜. 진짜 여왕님임.

―에라이 병신들아 좀비박이 따위한테 설설기네.

―ㅋㅋㅋ그렇게 말하는 새끼들 중 직접 와서 개길 놈 하나도 없을듯ㅋ

―ㄹㅇㅋㅋㅋ

―근데 밀양엔 왜 있는거에요?

―모르죠. 토공 만나러 왔을지도.

"인기는 인기네."

그나저나 밀양까지 내려온 이유는 역시 나를 만나러 온 거겠지.

정작 나는 그녀를 만날까 말까 망설이고 있는데 말이다.

"···"

나는 오리궁뎅이와의 추억을 떠올렸다.

주로 토공과 놀긴 했지만 그녀와 서먹서먹한 사이는 아니었다.

"늑대인간한테 박고 싶다고 그랬지."

그때는 그러려니 했는데 지금 생각하니 뭔가 이상했다.

여잔데 뭘로 박는다는 소리지?

"생각하지 말자, 생각하지 말자."

오리궁뎅이도 토공에 못지않은 또라이라서 생각하면 할수록 나만 골치 아프다.

···뭐, 일단은 만나보는 게 좋겠지.

많은 기억을 공유하고 있는 사람이니까.

"나 보자고 여기까지 내려왔는데 매정하게 대할 수야 있나."

나는 결심했다.

만나자. 만나서 이야기하자.

< 최선의 방어란 - 2 > 끝

< 최선의 방어란 - 3 >

다음날.

속을 긁으며 물자를 가져간 그들이 다시 왔다.

실실 웃으며 말이다.

형준 형과 현우는 그놈들 보면 혈압 올라 죽을 것 같다면서 아예 나오지 않았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그들이 물자를 가져가는 걸 지켜봤다.

괜히 부스럼 긁어서도 과하게 친절해서도 안 된다.

평범하게, 조금 퉁명스럽게 대하자 그들의 입가에 웃음이 걸렸다.

"같이 먹고 살자고 하는 건데 인상 좀 폅시다."

"거 김중위는 사람이 참 괜찮았는데 어째 아저씨는 좀 그러시네."

···형이 여기 있었다면 못 참고 주먹을 날렸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최대한의 인내심을 발휘해 그들을 보냈다.

하지만 속에서 열불이 치솟는 건 어찌할 수 없었다.

"두 번 다시 그 지랄 못하게 해준다."

계획은 이미 서 있었다.

그들이 가져간 박스에는 유현이의 종이인형이 붙여져 있다.

위치만 확인하면 준비는 끝난다.

나 같은 또라이에게 잘못 걸리면 두 발 뻗고 못 잔다는 걸 가르쳐주마.

숙소에 가니 유현이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형 어쩌시려고요?"

"어디에 사는지 알아내야지."

"그 뒤에는요?"

"그냥 알아만 본다는 거야."

"설마 전처럼···"

"전처럼 뭐?"

유현이는 고개를 돌리곤 시치미를 뗐다.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내가 원룸촌에 남아 무슨 짓을 했다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모른 체하는 편이 편하다는 것도 알고 있겠지.

녀석이 우물거렸다.

"저, 전 가끔 무서워요···형이 우리 적이 될까봐···코볼트 사냥도 그렇고···형은 우리와는 뭔가 다른 차원에 있는 사람인데···"

나는 배낭을 챙기다 말고 녀석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먼저 배신하지 않는 이상,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거야."

"진짜요?"

"그래. 난 머리도 나쁘고 성격도 더럽지만 아는 사람들 방치할 정도는 아니거든."

"···혹시 우리가 원룸촌에 왔을 때 식량···"

"그건 원래 거기 있었던 거야. 그렇지?"

내가 웃어보이자 녀석도 어색하게 웃었다.

그래.

적당히 바보처럼 굴면 모두가 편해져.

짐을 챙기자 유현이가 정신을 집중했다.

"도착한 것 같아요. 밖으로 나올까요?"

"그래야지. 주위에 뭐가 있는지 알려줄래?"

"학교···학교가 보여요. 나란히 세 개가 붙어 있는데···"

"삼안동이네."

나는 지도에 놈들의 위치를 표시해두었다.

이제 행동할 차례다.

"혹시 모르니까 밤이 되기 전에 여자들 숙소 위치 바꿔. 알겠지?"

"무슨 일 있어요?"

"걔네들 어제 수연씨하고 미경씨 보는 눈이 심상치 않았어. 무슨 짓을 할지 몰라."

"네, 네."

"사람들이 나 찾으면 잠깐 정찰 나갔다고 그러고. 대충 알지?"

그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밖에 나가며 연병장에서 뛰놀던 딩고를 불렀다.

분탕 치러 가자.

.

.

.

그들의 소재지는 학교 앞의 빌라촌이었다.

나는 한동안 근처에 있으면서 그들이 드나드는 걸 감시했다.

"세 명···"

GH2엔 세 명이 있는 걸로 봐도 되겠지?

그들은 주변의 좀비들을 피해 부지런히 파밍을 하고 있었다.

죄다 남자라서 수연과 미경에게 시선을 빼앗긴 건지도 모르겠다.

유현이의 종이비행기가 창문으로 날아 들어왔다.

―입구가 안에서 여는 방식이어서 들어가기가 어려울 것 같아요.

보안에 꽤 신경을 썼군.

안에서 여는 사람까지 합해서 네 명이다.

나는 종이비행기를 톡톡 두드려 됐다고 의사를 표시했다.

종이비행기가 날아간 후 망원경으로 놈들의 빌라를 살폈다.

한 놈이 창문을 통해 밖을 훑어보고 있었다.

저놈을 끌어내야 내가 들어갈 수 있는데.

"좋은 미끼가 뭐가 있을까···"

이럴 땐 시간이 필요한 법이지.

나는 계단에 앉아 빌라를 관찰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녀석이 또 창문으로 밖을 살폈다.

혹시 30분마다 저러는 건가?

"밖을 쳐다봤을 때 먹음직스러운 녀석이 지나가고 있다면 못 참겠지."

이 경우 황금고블린이 거기에 속한다.

큰 주머니를 메고 다니기 때문에 어지간한 생존자는 녀석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단, 홉고블린 주위에 있을 때가 많아 보기가 힘들 뿐이다.

"마비독이 얼마나 있나···"

벙커 공략하느라 다 써버리고 새로 모은 건 많지 않았다.

빨리 내놓으라고 독개구리를 자꾸 건드리면 녀석들도 스트레스를 받아 죽거든.

"두 방 쓸 정도는 되는군."

이번 희생자는 인간이 아니라 고블린이다.

나는 골목에서 돌아다니는 세 마리를 찾아냈다.

둘을 죽이고 하나는 독침을 쏴서 마비시켰다.

이제 황금고블린으로 위장시킬 차례다.

"이 녀석들 욕심이 엄청나단 말이지."

원래 없던 주머니가 자기한테 묶여 있어도 그게 마음에 들면 그대로 가져간다.

뭔가 수상하다는 의심을 탐욕이 덮어버린다고나 할까.

적당히 멍청하고 적당히 욕심이 많아서 이런 식으로 이용하기 딱 좋다.

황금고블린이 보통 고블린과 딱히 구분되는 것도 아니었다.

"큰 주머니 하나만 들려주면 끝이지."

나는 잡동사니를 집어넣은 주머니를 쓰러진 고블린의 목에 묶었다.

적당히 탐욕을 부릴만한 것도 좀 넣었으니까 벗어던지지는 않을 것이다.

잠시 기다리고 있으려니 녀석이 꿈틀거렸다.

"마비시간은 사람하고 비슷하군."

덩치는 별 상관이 없는지도 모르겠다.

하여튼 녀석은 온 몸을 꿈틀거리더니 벌떡 일어나 주머니를 만졌다.

키익!

녀석은 놀라 허둥거렸지만 감자를 만지고 희희낙락했다.

어이, 고블린 친구.

골목에서 빠져나가면 더 좋은 게 있다고?

과연 녀석은 내가 던져놓은 사탕 몇 개에 유인되어 골목을 빠져나갔다.

"시간이···"

거의 맞긴 한데 1,2분 정도는 오차가 있었다.

제발 이때쯤에 녀석이 나와야 하는데.

내 간절한 바람을 들었는지 어땠는지 녀석이 창문을 열고 밖을 쳐다봤다.

"혼자 있는 황금고블린이야. 죽이고 싶지?"

그는 주위를 돌아보더니 창문을 완전히 열고 화살을 쏘았다.

처음은 빗나갔지만 두 번째에 고블린의 등이 꿰뚫렸다.

그는 소리 없이 환호하곤 창문에서 사라졌다.

이제 내가 올라갈 차례다.

나는 빌라의 입구를 주시했다.

은신 스킬을 가졌나보다.

나는 소리가 완전히 사라진 후 조심스레 2층으로 올라갔다.

"···"

어딘가에 모이는 장소가 있을 텐데.

여기군.

나는 창문 옆의 벽에 차원문을 열고 몸을 숨겼다.

차원문은 투명한데다 벽과 완전히 밀착되어서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잠시 그러고 있으려니 내려갔던 남자가 투덜거리며 올라왔다.

"씨발 황금고블린이 뭐 이래?"

그야 황금고블린이 아니니까.

나는 사람들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다.

.

.

.

"아포칼립스라서 그런가···"

아니면 원래부터 저열한 욕망을 품고 있었던 건가.

저녁이 되기 전 들어온 남자들은 음담패설을 늘어놓으며 시시덕거렸다.

대상은 물론 수연과 미경이었다.

그녀들이 들었다면 아마 꼭지가 돌아버렸을 것이다.

"그렇게 되기 전에 내가 처리해주지."

단, 유용한 정보를 얻은 후다.

최소 도와주셈, 김효종의 위치를 알아내어야 한다.

듣기 싫은 개소리를 듣고 있으려니 짜증이 났지만 겨우 참았다.

그리고 식사시간.

마침내 그들이 떠벌리기 시작했다.

"아까 클장 쪽에서 사람이 왔는데···클장 형님이 직접 간다고 그러던데요."

"몸이 달았네. 내외동에서 오려면 시간 좀 걸릴 텐데."

"적당히 이쁘다고 했어야지 존나 이쁘다고 말하니까 클장이 지랄을 하지."

"오늘 젖탱이 한번 만지고 올까요?"

"세게 만지면 깨니까 적당히 해 병신아."

놈들은 뭐가 그리 재밌는지 웃어댔다.

짜증나는 자식들이군.

나는 더 기다려서 클장이라는 놈의 아지트까지 알아냈다.

내외동 공원 근처라니 거기 가서 찾아보면 되겠지.

그건 그렇고···

"니들은 여기서 죽어줘야겠다."

나는 플라스틱 호루라기를 꺼내 차원문 밖으로 살짝 꺼내고 훅 불었다.

휘이이익―

갑자기 대화가 뚝 끊겼다.

한 남자가 거실로 나와 두리번거렸다.

"···방금 호루라기 소리 뭐야."

"아무도 안 불었는데요."

"그러니까 뭐냐고, 병신아. 너 낮에 뭐했어? 집에 처박혀서 뭐했냐고."

"아, 아무것도 안했습니다! 그냥 집 지켰어요···"

황금고블린을 루팅하러 나간 적은 있지만 그걸 말하면 거하게 털리겠지.

"그럼 씨발 누가 분 거야? 야, 전체 다 뒤져. 싱크대 화장실 천장 다 찾아보라고."

네 명의 남자가 집을 뒤지기 시작했다.

나는 그들이 나간 틈을 타 암막커튼을 젖히고 폭죽에 불을 붙여 올려놓았다.

퍼퍼퍼퍽!

화려한 불꽃이 방안에 피어올랐다.

슬슬 어두워지는지라 밖에서도 아주 잘 보일 것이다.

남자들이 기겁하며 뛰어왔다.

"씨발 뭐야 이거!"

"빨리 꺼! 빨리 끄라고!"

그들이 난동을 부리고 있을 때, 나는 조용히 고추폭탄 몇 개를 던졌다.

워낙 화염과 연기로 방 안이 시끄러워서 뭐가 튀어나온 줄도 모를 것이다.

"아 씨발!"

쿨럭쿨럭!

처음엔 인상을 찌푸리던 남자들이 코를 부여잡고 심하게 기침을 해대기 시작했다.

늑대인간조차 넉다운시킨 물건이니 평범한 인간이 버틸 리 없다.

남자 네 명이 죄다 쓰러져 버둥거렸다.

그 중 하나는 불꽃에 몸이 데여 비명을 질러댔다.

"앗 뜨거!"

"시, 시끄러···병신아···구웨에엑!"

숨을 쉬면 쉴수록, 입을 열면 열수록 점막이 따가워서 미칠 지경일 것이다.

나도 조금 당해봐서 알지.

파파파팟!

이러는 동안에도 집은 비명에 불꽃에 연기에 아주 난리도 아니었다.

이 개판을 눈치 채지 못할 몬스터들은 없다.

입구가 시끄러워지더니 좀비들이 계단을 통해 올라왔다.

그어어어―

예전의 흐느적거리던 좀비들이 아니다.

구울만은 못하지만 상당히 힘이 세고 민첩하다.

문이 쿵쿵거리고 시끄러운 소리가 났다.

좀비 몇 마리가 힘을 쓰기 시작하자 와지끈하며 뭔가가 부서졌다.

"조, 좀비!"

"웨에엑!"

남자들은 위험하단 걸 알고 있으면서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지금쯤은 죽고 싶은 생각밖에 들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남은 고추폭탄 하나를 입구에 던진 다음 차원문을 닫았다.

그들이 좀비를 피해 창문으로 달아나더라도 고블린 떼를 마주하게 된다.

비틀거리며 도망가 봐야 마비독침을 피하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딩고의 배를 쓰다듬으며 10분쯤 기다린 후 차원문을 여니 소동은 끝난 상태였다.

매캐한 연기가 자욱한 상태에서 두 명이 처참한 모습으로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좀비들이 식량을 우걱우걱 먹어댔다.

"둘은 도망쳤나."

나는 폭죽으로 좀비들을 유인한 다음 창문을 부수고 2층에서 뛰어내렸다.

스탯이 워낙 높아서 이 정도 충격은 별거 아니었다.

저 멀리 고블린들이 누군가를 질질 끌고 가고 있었다.

옷차림으로 봐선 내가 모르는 남자였다.

정신없이 2층에서 뛰어내렸다가 고블린에게 당한 게 틀림없었다.

"하나는 어디 갔지?"

그때 골목에서 인기척이 났다.

형체가 보이지 않는 걸로 봐서 은신을 가진 그 놈이다.

놈은 내게 덤빌 생각도 못하고 조용히 자취를 감추었다.

이건 위험하군.

생명체추적 스킬과 투쟁본능이 활성화되어 시야가 붉게 물들었다.

숨어봐야 소용없다.

죽음의낙인이 널 찾아갈 테니까.

나는 가볍게 바닥을 박찼다.

.

.

.

김효종.

최근 그의 입가에서 웃음이 떠날 줄을 몰랐다.

드디어 가능성이 생긴 것이다.

옆구리에 애인 하나를 꿰찰 가능성이.

부산의 권씨가 애인 두 명이라며 자랑할 때만 해도 누구 납치해올까 생각했었는데.

'가서 데려오기만 하면 된다 그 말이지.'

다른 지부의 정보에 의하면 김해대대에 여자 두 명이 왔다고 한다.

정보원들이 보고 깜짝 놀랐을 정도의 미인이란다.

몸매도 잘 빠져서 침을 질질 흘렸다고.

클랜에 여자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효종에겐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몇 개 지부를 관리하는 클랜장인데 와꾸가 좀 있어야지.

새로 김해대대에 자리 잡은 녀석들은 신경 쓸 필요가 없다.

물자를 빼내며 툭툭 시비를 걸었지만 전혀 반발하지 않더란다.

'완전 병신들이야.'

물자도 여자도 다 빼앗기고 서러워 대들다가 죽는 일만 남았다.

효종은 남을 등쳐먹는 일에 쾌감을 느끼고 살아왔다.

그는 보이스피싱의 국내 총책이었으며, 서바이벌 라이프에선 클랜을 만들어서 뉴비들을 학살하며 지냈다.

그 때 만들어 둔 영상을 미끼삼아 수천 만 원을 빼돌린 것은 지금 생각해도 짜릿한 일이었다.

물론 그의 동료, 부하들은 이걸 모른다.

보이스피싱과 사기를 좋아하는 놈은 어디에도 없을 테니까.

효종이 일어섰을 때 부하 중 한 명이 빌라에 들어왔다.

"형님, 어떤 새끼가 이 화살을 쐈습니다."

"뭔데?"

그는 의아해하며 화살에서 편지를 풀어냈다.

―보스에게 보여줘.

편지에 무슨 지랄을 해놨을지 몰라 등을 돌리고 젓가락으로 풀어냈다.

하지만 정작 위험한 건 내용이었다.

효종은 눈을 부릅떴다.

―도와주셈. 김효종. 사기꾼. 나는 니가 한 일을 알고 있다.

"···"

그는 편지를 급하게 손으로 덮었다.

대체 어떤 놈이기에 내 아이디와 이름을 알고 있는 거지?

설마 다른 사람이 이걸 봤나?

그는 급히 편지의 접힌 부분을 살폈다.

한번 접었다가 펼친 것치고는 모서리가 헐거웠다.

효종의 목소리가 자연스레 낮아졌다.

"···너 이거 봤어?"

"예? 안 봤습니다."

하지만 그는 의심을 떨칠 수 없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에겐 박호준으로 알려져 있었다.

김효종이란 이름은 각성자 커뮤니티에 워낙 알려져 있어서 어쩔 수 없이 다른 이름을 댄 것이다.

만약 이 사실이 알려진다면···

심장소리가 쿵쿵 울렸다.

혹시 이 새끼들이 다 짜고 나를 궁지에 모는 거 아냐?

효종은 부하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 최선의 방어란 - 3 > 끝

< 좀비 여왕 - 1 >

한번 의심을 가지면 쉽게 풀리지 않는다.

궁지에 몰려 있다면 더더욱 그렇다.

김효종은 부하들이 편지를 봤고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을 거라는 생각에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김효종이 영상을 미끼로 각성자들에게 사기를 친 그 사건은 상당히 유명했다.

클랜 내부에서도 아는 사람이 제법 되었고 당연히 여론은 좋지 않았다.

그것뿐이면 참작의 여지가 있겠지만 아이디까지 알려지면 정말 끝장이었다.

서바이벌 라이프를 플레이한 사람치고 트롤에게 휘말려 캐릭이 삭제당한 경험이 없는 사람이 드물 지경이었다.

뉴비학살자를 누가 좋아하겠는가 말이다.

당장이라도 니가 그 새끼냐? 하며 뒤에서 누군가 칼로 찌를 것 같았다.

"왜 그러십니까?"

부하가 물어왔음에도 효종은 대답하지 못했다.

입안이 바짝 말라왔고 식은땀이 흘렀다.

어떻게 알았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당장 이 상황을 모면할 방법이 필요했다.

'이걸 역으로 이용한다면.'

이 모든 것을 얼굴도 본 적 없는 그 새끼의 탓으로 돌린다면 어떨까.

화살을 쐈다는 건 방금 전까지 근처에 있었다는 뜻이다.

사람은 자신이 남긴 흔적을 관찰하길 좋아한다.

아마도 놈은 지금 밖에서 이 건물을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그가 당황한 모습을 보고 싶겠지.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다···'

그놈만 죽이면 일이 순탄하게 풀린다.

우선은 부하가 봤는지 안 봤는지 확인하는 게 필요했다.

효종은 즉시 편지를 갈기갈기 찢었다.

"그 새끼다."

"예? 누구요?"

"그 새끼 말이야. 스피드런 이벤트 1등한 그놈!"

"김밥조아 말입니까? 그놈이 여기 왔다고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묻는 걸로 봐서 보지는 않은 모양이다.

최소한 이 녀석은 그렇다.

하지만 그놈이 화살을 하나만 날렸으리란 보장은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부하 하나가 편지를 쥐고 안으로 들어왔다.

"형님, 이건 뭡니까? 해명이 필요할 것 같은데요."

"무슨 해명?"

"여기 형님 이름이 김효종이라고 쓰여 있잖습니까. 도와주셈? 이거 쓰레기 아이디 아닙니까? 형님하곤 무슨 관곕니까?"

"뭔 헛소리를 하나 했더니···"

효종은 이를 드러내며 그를 노려봤다.

"야이 새끼야, 넌 대체 누굴 믿는 거냐? 어디서 날아왔는지도 모르는 이따위 편지를 믿고 나한테 따져? 지금 장난하는 거지?"

"전에 형님이 이름을 못 알아들은 적도 있어서 말입니다. 효종, 호준, 이름이 비슷한데···"

그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아무래도 호준이라는 이름은 익숙지 않아서 못 알아들은 적이 몇 번 있었던 것이다.

그걸 지금 꺼내다니.

효종은 기가 막힌 듯 버럭했다.

"어처구니가 없네. 김밥조아 이 새끼가 내분을 일으키는데 그걸 대놓고 당해주니까 내가 미쳐버릴 지경이다. 어?"

"김밥조아요?"

"그래, 그 새끼! 그 새끼가 니들한테만 편지 보낸 줄 아냐? 나한테도 보냈어, 이거!"

과장되게 편지를 콱콱 밟자 부하의 기세가 약간 수그러들었다.

역으로 화를 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가 틀렸나? 하는 생각을 갖게 되어 있다.

또한 분위기가 이런데 편지를 살펴볼 사람도 많지 않았다.

이 미묘한 시간이 지나가기 전, 효종은 둘을 재촉했다.

"빨리 나가서 그 새끼 잡아와. 분명 근처에 있을 거야. 일단 잡고 나서 물어보자고!"

"아···예!"

"혹시 모르니까 둘이 붙어 다녀. 김밥조아 그 새끼 창조 계열인 것 같으니까 뭐 날아오지 않는지 조심하고, 알겠어?"

"옙. 알겠습니다."

둘은 이상하다 하면서도 밖에 나갔다.

효종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이걸로 끝난 것은 아니었다.

'그 새끼를 꼭 잡아 죽여야 돼.'

김밥조아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실수인 척 죽여 버리고 뒤집어씌우면 그만이니까.

한편, 남하하던 최다정이 드디어 김해에 도착했다.

.

.

.

최다정은 이경훈과 김보라를 이끌고 김해에 도착했다.

둘은 그녀에게 길 안내는 물론이고 그럭저럭 괜찮은 정보를 알려주었다.

부산에서 잠깐 행동을 같이 했다는 남자가 그녀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강성호라는 남자인데요, 키가 크고···특성은 공격예지라고 하는데 별로 그런 것 같지는 않더군요.

―몬스터에 대한 지식이 엄청 해박했어요. 저희도 그 덕을 많이 봤고요. 그 사건만 아니었어도 같이 있는 건데.

그 사건이 뭔지 물어봤더니 경훈과 남자가 대립했단다.

경훈이 머리를 긁적였다.

―지금 생각하니 제가 완전 잘못 생각한 거였습니다. 성호씨가 얘기한 게 다 맞았어요. 몬스터의 습성이나, 대처방법 같은 거요.

―게임은 해봤대요?

―그게···영상만 봤답니다. 미튜브 김밥조아꺼요.

―오호.

냄새가 났다.

그녀는 꼬치꼬치 캐물어 마침내 확신할만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원래 헬스장 멤버는 아니었습니다. 분식집 하던 사람인데···

찾았다.

다정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부산, 분식집, 몬스터에 대한 지식이라는 요소를 합치니 도저히 다른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경훈과 보라가 물었다.

―혹시 아는 사람이세요?

그녀는 시치미를 떼곤 그가 간 방향을 물었다.

자세한 건 모르고 부산 서쪽이나 김해일 거란다.

방사능 때문에 다들 뿔뿔이 흩어졌다고.

시간을 따져보면 지금쯤은 창원까지 갔을 수도 있었다.

그거야 천천히 찾아보면 되겠지.

전남까지 가지는 않았을 테니까.

다정은 둘에게 제의했다.

―김해까지 갈 건데, 어때요? 동행하는 게.

둘은 냉큼 동의했다.

다정은 그들에게 안전을 보장해 줄 수 있고, 그들은 정보를 제공하니 윈윈이었다.

다만 귀찮게 구는 것들이 있었으니 다정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생존자들이었다.

가끔은 그들과 다정 간에 말다툼 아닌 말다툼이 벌어질 때도 있었다.

―여왕님 오늘은 왜 하얀 하이힐인가요오!

―우효! 빨간 하이힐이 섹시한데!

다정은 그들에게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 올렸다.

―빨간색 염색은 니들 피로 대신한다!

물론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지진 않았다.

그녀가 국도를 타자 따라오던 사람의 숫자가 확 줄어서였다.

아무래도 아포칼립스에서 도시 간 이동은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끝까지 따라오던 몇 명도 다정의 좀비들이 속도를 높이자 모두 뒤쳐졌다.

덕분에 셋은 아무 탈 없이 김해 북부동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여기서 헤어지죠."

"아, 그럴까요?"

여기서 그를 찾겠다는 거겠지···

경훈과 보라는 좀비 여왕이 찾는 사람이 진짜 성호일지 궁금했다.

확실히 뭔가 숨기고 있지만 그렇게 대단한 사람 같지는 않았는데.

다정은 약속대로 그들에게 보상을 내렸다.

평소 상점에서 사고 싶었지만 포인트가 아까워 사지 못한 무기들이었다.

둘은 아쉬워하며 그녀와 헤어졌다.

한편 다정은 천천히 남하하다 생존자들을 발견했다.

어떻게 알았는지 접근해보고 싶어 난리도 아니었다.

그 이유는 다정의 외모에 있었다.

이런 아포칼립스에서 살다 보면 외모에 투자를 하기가 쉽지 않다.

할 이유도 없고 말이다.

자연스레 여자 생존자들의 얼굴이 남자와 비슷하게 변해갔다.

화장은 언감생심이고 피부는 새카매졌다.

관리하기 귀찮다고 머리카락도 싹둑 잘라버리니 남자와의 차이는 덩치밖에 없었다.

그 가운데 다정의 외모는 군계일학, 아니 군계일봉이었다.

항상 좀비들에게 보호받으니 여유를 가지게 되고 그게 외모로 나타났다.

특유의 드레스에 하이힐도 음충한 생존자들을 자극하는 요소였다.

하지만 정작 앞으로 나서는 자는 없었다.

생존자들 사이에서는 좀비 여왕이 어떤 남자들을 붙잡아서 좀비들로 하여금 능욕하게 했다더라 하는 소문이 돌았다.

괜히 자극했다가 좀비 여왕도 아니고 좀비들한테 능욕당하면 무슨 꼴이야.

덕분에 다정은 일체의 방해를 받지 않고 남하할 수 있었다.

여기선 협력을 받는 게 쉽지 않겠어.

그렇게 판단을 내리곤 좀비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두 명만 잡아와."

10여 마리의 좀비가 빠르게 흩어졌다.

다정에 대해 음담패설을 나누고 있다가 잡혀 온 두 명은 오들오들 떨었다.

차이나 드레스를 입고 있던 다정이 둘의 다리 사이에 발을 위치시켰다.

"해치지 않으니까 안심해요. 그보다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예, 예···"

"개를 데리고 돌아다니는 키 큰 남자 봤어요?"

둘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이 주변에는, 수상한 사람은 없습니다."

"저희 구역이거든요."

"그런 사람을 봤다는 소문은?"

"글쎄요···밑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긴 하던데."

"클랜에서 싸운다고 인원 보내랍니다."

"싸운다라···자세한 소식은 모르고요?"

"그건 저희 내부 일이라···"

다정이 둘에게 싱긋 웃어보였다.

"나한테만 말하고 입 닫으면 발설하지 않은 게 되는 거죠, 그렇죠?"

그녀의 발이 남자들의 사타구니로 향했다.

평소 같으면 업계의 포상이라고 외쳤겠지만 둘은 본능적으로 다리를 오므렸다.

아포칼립스에서 거시기를 다치고 싶진 않았다.

언제 쓸지도 모르는데!

"마, 말할게요! 말하겠습니다!"

"···좋아요."

셋이서 이러는 사이에도 좀비들은 주변의 몬스터들을 처리하고 있었다.

대체 포인트를 얼마나 버는 거야?

두 남자는 부러움을 뒤로한 채 말했다.

"김밥조아와 싸운답니다."

"근데 김밥조아가 이런 곳에 있을 이유가 없, 없지 않습니까?"

사실이건 아니건 상관없다.

누군가가 김밥조아와 착각될만한 일을 저질렀다는 뜻이니까.

다정은 음산하게 웃었다.

"만약 거짓일 경우, 다시 여기로 올 거예요. 그 땐 어떻게 될지 알죠?"

그녀가 손가락을 튕기자 한 좀비가 허리춤을 풀었다.

둘이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자 다정은 그제야 허리를 바로 세웠다.

조금만 밑으로 내려가면 그가 싸우고 있다는 말이지?

경훈과 보라의 말에 의하면 키와 덩치가 큰 사람이어야 했다.

얼굴은 무표정하고 헤어스타일은 스포츠 컷이란다.

개까지 데리고 다니면 게임 끝이지 뭐.

다정은 그를 만나기 위해 여기까지 내려왔다.

처음 이유는 심심해서였지만 지금은 조금 바뀌었다.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과 만나고 싶었다.

그럴 자격이 있는 사람은 그녀와 추억을 함께 한 고인물들 뿐이었다.

토공은 만나려니 한세월이고 생존자1은 살았는지 죽었는지 소식도 없었다.

남은 건 김밥조아 하나.

"절대 안 놓쳐. 소년시대 출바알."

소년치고는 지나치게 강건한 좀비들이 그녀의 몸을 받쳐 올렸다.

.

.

.

이른 저녁 내외동 주택가에서 생존자들 간에 싸움이 벌어졌다.

처음엔 멀리에서 서로를 인식하고 화살만 쏴대는 소극적인 싸움이었다.

하지만 다수 쪽에서 인원을 보충하고 본격적으로 압박에 들어갔다.

혼자서 그들과 맞서던 성호는 잠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본격적으로 나를 구석에 몰겠다는 거군.'

싸움을 피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들에게 흉심이 있는 한 전부 치워버리고 싶을 뿐이었다.

성호는 어느새 인간사냥꾼처럼 행동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다른 사람은 몬스터를 사냥하는데 나는 인간만 조지고 있네.'

하지만 그만두고 싶지는 않았다.

만약 이들을 놔뒀다면 아주 지저분하고 잔혹한 일이 벌어졌을 테니까.

최소한 수연과 미경은 그들에게 끌려가서 온갖 짓을 당하고 있을 것이다.

'우리를 안 건드렸어야 했어.'

후회해봐야 이미 늦었다.

성호가 그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철저한 파멸뿐이었다.

그는 단단히 마음먹고 차원문에서 나와 클랜원이 많은 곳에 숨었다.

높은 인지 스탯과 스킬 덕분에 어디에 몇 명이 있는지는 대강 알 수 있었다.

가만히 숨어 있다 보면 어느새 비명이 들린다.

"좀비다!"

"씨발 그 새끼 여기 있었어?"

좀비 레이드가 시작되었다.

클랜원들은 욕을 내뱉으며 도망쳤고 성호는 조용히 차원문에 숨었다.

이 짓을 몇 번 하다 보니 클랜원들도 매우 지친 모양이었다.

"클장한테 언제까지 이지랄 해야 되는지 물어봐!"

"이 새끼 대체 어디 가서 숨은 거야?"

클랜원들이 다급해진 것은 나름 통쾌했지만 레이드도 시원한 성과를 내진 못했다.

기껏해야 1명을 죽였을 뿐이었다.

'나름 생존에 단련됐다 이건가.'

그렇다면 더 혹독하게 해주지.

그는 고추폭탄과 마비독침, 에메라스 비도 등 모든 것을 동원해 클랜원들에게 맞섰다.

성호는 고추폭탄을 던지고 에메라스 비도를 한 명에게 투척했다.

"끄악!"

"허벅지에 뭐 맞았어! 일단 끌어내!"

"이거 씨발 뭐야?"

"카아악!"

클랜원들은 죽을 지경이었다.

단지 한 명만을 상대하고 있는데 어찌 이리도 안 잡히는지!

우회해서 공격해도 소용없었다.

김밥조아는 모든 특성을 꿰기라도 했는지 유유히 공격권에서 벗어났다.

이런 소란이 일어나면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몬스터들이 달려든다.

그들은 필사적으로 도망쳐 헉헉거렸지만 김밥조아는 멀쩡한 상태로 재등장했다.

이게 몇 번 반복되니 미칠 지경이었다.

"저 새끼는 왜 쌩쌩한 거야?"

한편 김효종은 클랜원들이 싸우는 걸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창조 계열인 줄 알았는데···'

싸우는 걸 보니 전혀 아니었다.

블링크나 은신도 아니었고 아예 존재 자체를 감추는 것 같았다.

아공간 같은 곳에 들어가는 건가?

확실한 건 부하들만으로는 그를 상대하기가 힘들다는 사실이다.

10명이 투입되었지만 벌써 1명이 죽었고 나머지도 전투의지가 꺾인 상태였다.

'내가 나서야겠군.'

그의 특성은 함성이다.

목소리에 힘이 실려 여러 효과를 가지게 되는데 처음 당하면 대응하기가 쉽지 않다.

보이스피싱 총책이라서 이런 특성을 가지게 된 건지 참 우스울 따름이었다.

"어이, 거기! 멈춰!"

효종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고 성호의 몸이 그 자리에 딱 멈춰버렸다.

그는 잠시 당황했지만 온 몸에 힘을 주어 겨우 벗어날 수 있었다.

그가 있던 자리에 화살이 날아왔다.

'이런 젠장.'

목소리에 힘이 실리다니 정말 희한한 능력이다.

역시 사기꾼다운 특성이라고나 할까.

아무래도 멈춰, 라는 말이 시동어로 생각되는데 어찌하면 좋을까···

귀마개를 껴봐야 말하는 순간 발휘되니까 별 소용은 없을 것 같았다.

'15레벨은 넘었을 테니 명령이 두개 더 있다는 말이지.'

우선은 그게 뭔지 파악하고 부하들의 수를 줄여야 했다.

성호는 그를 피해 달아나며 외쳤다.

"김효종은 사기꾼이다아!

"보이스피싱을 해서 특성이 그런 거다아!"

"각성자 등쳐먹어서 지금 클랜장 노릇을 하는 거다아!"

그 외침을 들은 클랜원들이 웅성거렸다.

"클장님 이름이 김효종이에요? 박호준이 아니고?"

"전에 호준 형님이라고 했을 때 못 알아들은 적이 있긴 했어요."

"에이, 설마···"

가뜩이나 의심을 가진 판국에 이런 말까지 듣게 되니 심히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저놈의 말이 맞다면 그들은 완전 뻘짓을 하고 있는 것이다.

클랜원들이 공격을 망설이자 김효종은 다급해졌다.

혼자서라도 빨리 저놈을 죽이고 사태를 수습해야 했다.

자칫 잘못하면 클랜원들이 그를 공격하는 사태가 벌어질지도 모른다.

그는 떠오른다는 함성을 써서 하늘 위로 솟았다.

성호의 위치가 바로 드러났다.

'흐흐, 날 수도 있는 건 몰랐겠지.'

얼핏 공중부양 특성과 비슷한 것 같지만 시간에 제한이 있다.

또한 다른 사람에게 적용되는 함성은 저항하면 풀린다는 단점이 존재한다.

그는 공격하지 않고 내려와 조심조심 성호의 뒤로 돌아갔다.

몬스터도 피해야 했기에 참으로 긴 여정이었다.

그런데 가보니 정작 그가 없었다.

효종은 황급히 그를 찾았지만 정말 감쪽같이 사라졌다.

"이 새끼 어디로 튄 거야?"

아공간에 몸을 감추었을 수도 있다.

그는 황급히 자리를 벗어나다 누군가를 발견했다.

하얀색 차이나 드레스에, 하이힐을 신은 어처구니없는 여자였다.

이런 옷차림을 하고 아포칼립스 세상을 돌아다니는 사람은 하나밖에 없다.

오리궁뎅이꽥꽥.

'설마 김밥조아를 찾으러 온 건···'

효종은 어색하게 웃으며 뒷걸음질 쳤다.

괜히 공격해서 경계하게 만드는 것보다는 이대로 도망가는 게 나았다.

하지만 그녀에겐 공격할 의사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녀가 두 팔을 치켜 올리며 모델 포즈를 취했다.

"···몽땅 생략! 소년시대 출동!"

좀비들이 그에게 달려들었다.

효종의 눈이 찢어져라 커졌고 급하게 떠오른다 함성을 썼다.

불행히도 그가 떠오르는 속도는 느렸고 좀비들은 빨랐다.

순식간에 좀비의 탑을 쌓더니 마침내 효종의 발목을 잡아챘다.

"끄악!"

그는 볼썽사납게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또각또각 소리가 들리더니 하이힐이 머리 옆에 왔다.

그녀는 한 좀비에게서 롱나이프를 받았다.

"서, 설마···"

"김밥조아와 싸우는 게 너라고 했지?"

"아, 아니야! 그냥 내가 그렇게 떠들어댄 것뿐이야! 사실은 누군지 몰라!"

"뭘 아니야."

누군가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다정은 천천히 뒤를 돌아봤다.

큰 키와 덩치. 스포츠 컷에 무표정한 얼굴을 한 남자가 거기에 있었다.

등에 배낭과 활을 메었고 손에는 롱나이프를 들었다.

누군가 설명한 그 남자와 꼭 닮았다.

다정은 롱나이프를 밑으로 찍었다.

버둥거리던 효종이 조용해졌고 성호는 당황했다.

여기서 살인을 해도 되나?

그녀는 천천히 하이힐을 벗었다.

성호는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그래도 친구가 온다니 만나봐야지 했는데 실제로 보니 상상이상의 또라이였다.

이 시국에 차이나 드레스와 하이힐은 대체 무슨 생각일까.

아니 그보다 망설임도 없이 살인을 저지르는 이 과감함은···

그녀가 고개를 삐딱하게 하곤 웃었다.

"우리 처음 만나지?"

"···그래."

처음부터 반말이군.

성호는 그녀를 보며 왜 아이디가 오리궁뎅이인지 알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하여튼 토공과 마찬가지로 그녀도 정상은 아니었다.

이렇게 다가오며 그를 잡으려 하는 걸 보면 말이다!

"야! 왜 뛰는 거야?"

"니가 먼저 뛰니까 그렇지!"

"이게! 난 널 위해서 살인까지 했다고!"

"그건 고마운데! 일단 서서 말하자!"

"싫어! 또 도망갈 거면서! 소년시대 출동!"

"미친! 좀비가 소년시대야?"

좀비들이 달려들자 성호는 화들짝 놀라 도망가기 시작했다.

다정이 그를 쫓아가며 유쾌하게 웃었다.

"이 짓도 오랜만이네! 쎅쓰!"

< 좀비 여왕 - 1 > 끝

< 좀비 여왕 - 2 >

나는 아무래도 좆된 것 같다.

나무에 거꾸로 대롱대롱 매달려 있으면 누구라도 그런 생각이 들 것이다.

주변에 좀비들이 30마리나 있으면 더더욱.다정은 갑자기 일어서더니 바지와 팬티를 스윽 내렸다.

그 좀비들을 거느리는 여왕은 좀비 의자에 앉아선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렇게 다리 꼬면 골반 틀어진다던데.

"또 도망갈 거야?"

"저기···지금 10번째 물어보는 건데."

"또 도망갈 거야?"

그녀는 앵무새처럼 질문을 되풀이했다.

나는 속으로 눈물을 좍좍 뽑으며 빌 수밖에 없었다.

"안 도망갈게."

"진짜지?"

"진짜. 리얼. 혼또. 약속."

"···좋아."

다정은 그제야 로프를 잘라서 나를 풀어주었다.

나는 그제야 바닥에 앉을 수 있었다.

"휴···이제야 말하는 거긴 하지만, 처음 만나네."

"그렇지? 겜에선 자주가 아니라 거의 매일 봤지만."

"난 니가 이런 사람인 줄 몰랐어. 여자인 줄도."

다정은 눈을 크게 떴다.

"그래? 난 김밥조아가 이런 모습일 거라고 종종 생각하곤 했어. 평소 말투를 보면 모습이 상상이 갔거든."

"토공은?"

"그 아저씨는 혼돈 그 자체라 상상이 무의미해."

당신도 비슷한데요.

토공이 혼돈 100%라면 오리궁뎅이는 90%정도라고 할 수 있겠다.

거기서 거기라고 생각되겠지만 내 입장에서 보면 엄연한 차이가 있다.

그나저나 신기하군.

우리는 서로의 나이를 묻지 않았다.

이름이면 충분하다는 거다.

아마 토공이 와도 셋이서 반말하는 분위기가 될 것 같았다.

그녀가 좀비 의자에서 내려와 바닥에 앉았다.

우리는 마지막 모였던 때처럼 밑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가 웨이브진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 넘겼다.

"게임할 때는 이런 날이 오리라곤 생각 못했는데."

"낸들 아냐. 난 브루트 잡을 준비하면서 니들 안 오나 기다리고 있었다고."

"···많이 기다렸어?"

그녀의 목소리가 은근히 걱정스러운 어조로 변했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사실은 그렇게 기다리진 않았어. 나 혼자 몬스터 잡는다고 준비하는 것도 나름 재미였고. 결국 못 잡았지만."

"그때 니 스펙으로도 실패했다고?"

"우리 모두가 철저하게 준비하고 덤비면 승산이 있는 정도야. 오우거 같은 놈과도 차원이 다르더라고."

"호오. 그거 재밌어 보이네."

"근데 지금 나는 니들보다 훨씬 약해서···만약 브루트가 나타나더라도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다···"

내가 말투를 끌자 그녀가 일어서더니 내 다리를 잡고 하이힐을 사타구니에 들이댔다.

"어? 자, 잠깐만!"

"뭐가 잠깐만이야. 정신 차려 이 친구야!"

"으아악!"

나는 사타구니로 전해져오는 고통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이 미친년은 친구한테도 이걸 쓰는구나!

좀 더 조심했어야 했는데!

항복을 외치며 바닥을 탁탁 두들기니 겨우 압박이 풀렸다.

"아이고."

아포칼립스에서 써먹지도 못하고 끝장날 뻔했네.

그녀가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약한 건 문제가 안 돼. 중요한 건 뭘 하기로 마음먹었느냐, 야."

나는 고개를 저었다.

"니가 내 특성을 몰라서 그래."

"몰라도 상관없어. 갑자기 나타난 걸로 봐서 공간을 열어 도망갈 수 있다고 봐도 되겠지? 그리고 안에는 얼음을 비롯한 신기한 게 잔뜩 있을 테고."

"···"

나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다정이 여기까지 내 특성을 추측한 건 뭐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녀가 무릎을 꿇고 앉아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보통 이런 건 남자가 여자한테 하는 거 아닌가.

"우린 친구잖아? 서로 믿고 준비하면 못할 게 없어. 적어도 서바이벌 라이프에선, 그 게임을 기반으로 한 현실에선 그렇지. 우리를 믿어봐. 그 괴물은 문제없이 깰 수 있어."

"정말 그럴까?"

"그래."

"근데 너···내 특성을 안 물어보는구나."

"니가 얘기하지 않았으니까."

"안 궁금해?"

"나중에 얘기해 줄 때까지 기다릴래. 언젠가는 말해주는 거지? 약한 친구."

이번에는 내가 말했다.

"그래."

그런데···신경 쓰이는군.

무시하려 해도 너무 잘 보여서 어쩔 수가 없었다.

나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너 팬티 보인다."

그녀는 밑을 힐끗 보곤 웃었다.

"토공 팬티보다는 깨끗하지?"

반응이 그거냐.

확실히 정상은 아니야.

나도 그렇지만.

.

.

.

"살인해도 괜찮아?"

"하나쯤은 괜찮아."

"여태껏 안 안했다는 소리로 들리네."

"너는?"

"···많이 했지. 날 위협하는 놈들은 전부."

"잘했다고 칭찬해줄까?"

"아니, 됐어. 그리고 저기에 나하고 같이 있는 사람들이 있어."

"동료란 거구나."

"서로 도울 수 있다는 점에서는."

"조건을 붙이는 걸 보면 언제든 떠날 수 있는가보네."

"저 사람들이 내 정체를 알면 어떻게 행동할까?"

"하긴, 인류의 배신자 수준이니 어쩔 수 없네."

"인류의 배신자라. 너무 거창한 별명인데."

"경매장에서 욕 무지하게 먹더라. 그냥 숨만 쉬어도 까이는 수준이야. 스피드런에서 1등한 뒤로는 추종자도 조금 생겼지만."

"그 추종자들도 얼마 전까지 나를 욕하던 놈들이야. 기회만 되면 내 등에 칼을 꽂으려 할 걸?"

"너 되게 의심이 많구나."

"그렇게 해서 손해 본 적은 없었거든."

우리는 숲에 숨어서 김해대대를 바라봤다.

다정은 내 필사적인 강요로 옷을 갈아입은 상태였다.

청바지에 티셔츠 좋잖아.

하지만 그놈의 하이힐만큼은 포기시키지 못했다.

그녀는 이렇게 주장했다.

"나는 걸어 다닐 일이 없어. 그러니까 하이힐 신어도 돼."

"너 잘났다."

"잘났지 그럼?"

"근데 조심해야 될 걸. 특성을 무효화시키는 좀비도 있으니까."

다정의 눈이 처음으로 커졌다.

"특성을 무효화한다고? 진짜?"

"나는 와이파이 좀비라고 부르는데. 대충 어떻게 생겼는진 알겠지? 튜토리얼 초반에 나온 놈이라 전투력은 그저 그래. 하지만 나중에 구울로 변하면 상당히 강해지겠지. 특히 넌 부하 좀비들이 덮칠 테니까 위험해."

"이 씨발새끼들이 대체 패치를 어떻게 한 거야."

다정은 제작진에게 질펀하게 욕을 퍼부었다.

다 좋은데 고자나 되라는 말은 너무하지 않냐.

뭐 인간인지도 의문이지만.

그녀가 내게 말했다.

"그래서 토공을 찾으러 가는 거야?"

"만나보긴 해야지. 같이 있는 건 좀 곤란하지만."

"왜? 토공은 널 원하는데."

"그렇게 말하니까 너무 끈적하잖아. 그냥 모이고 싶은 걸로 하자."

"어쨌든 우리가 모여야 한다는 건 변함없잖아?"

"모이면 사람들은 내가 김밥조아란 걸 바로 알아내겠지."

"아하···"

다정은 그제야 문제가 뭔지 알아챘다.

만나는 건 좋다.

나 또한 토공과 같이 지내고 싶은 마음이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사람들이 내 정체를 알게 된다.

토공과 오리가 살갑게 대하는 정체불명의 남자···누군지 뻔하다.

생존자1 행세를 하는 것도 그가 정부에 있기 때문에 어려웠다.

지금은 모르겠지만 워낙 허세가 심한 관심종자라 나중에는 다 알게 될 것이다.

"니들하고 나는 문제의 해결방법이 달라. 니들은 정면에서 뚫어버리지만, 나는 일단 도망가서 약점부터 찾아야 되거든."

다정의 눈썹을 꿈틀거렸다.

"마음에 안 들어."

"어쩔 수가 없어. 이게 내가 가진 특성이고 아포칼립스에서 살아온 방식이니까. 너는 강하니까 널 공격한 놈들을 살려 보냈지? 난 달라. 후환을 남기면 위험하니까 죽일 거야."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다정은 한참동안 말이 없다가 내 손을 잡았다.

"그래도 우리는 믿는 거지?"

얼마 전까지는 의심하는 마음이 있었다.

하지만 직접 만나고 보니···내 생각이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다.

다정은 나를 위해 살인도 서슴지 않았다.

아마 토공도 그럴 것이다.

그러니 나도 그들에게 선의로 보답해야 되지 않을까?

같이 있지는 못한다 해도.

"그래."

나는 그녀에게 종이를 건넸다.

권씨가 쓰던 암호문을 토대로 한 독자적인 암호였다.

"이렇게 대화하면 다른 사람들은 우리가 뭘 얘기하는지 모를 거야."

"음···이거 생존자1에게는 안 알려도 될까?"

"생존자1은 당분간 지켜보자."

"왜? 무슨 일 있어?"

"나한텐 경매장에서 글 쓰는 사람들의 아이디가 보이거든."

"···오늘 여러모로 놀랄 일이 많네. 혹시 그거 스피드런 보상이야?"

"스킬인데, 포인트를 써서 아이디를 알아낼 수 있어. 현실에선 안 되지만."

"그걸로 생존자1이 쓴 글을 본 거구나."

"정부에 있을 거야. 은근슬쩍 자기 아이디를 사람들에게 주입시키려 하고, 자화자찬을 하더라. 원래 그런 기미가 있었나?"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있다는 느낌은 있었지. 쉘터 꾸미기에만 열중했잖아."

"특성도 그쪽일 텐데···하여튼 당분간은 우리끼리만 대화하는 게 좋겠어."

다정은 갑자기 일어서더니 바지와 팬티를 스윽 내렸다.

내가 기겁하는 사이, 그녀가 눈앞에서 팬티를 달랑거렸다.

"토공도 자기 팬티 올렸으니까 나도 이거 올릴까? 이거 올리고 대화하면 되잖아."

"절대, 제발, 그러지 마···빨리 입어."

"응, 알았어."

그녀는 순순히 내 말에 따랐다.

하여튼 대화하기 힘든 사람이다.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토공과 같이 있을 순 없지만, 어쨌든 만나보기는 해야겠어."

"내가 갈까?"

"아니. 내가 갈게. 넌 너무 화려해서 사람들이 다 알아본다고."

"그럼 난 여기 처박혀 있으란 말이야?"

"나 대신 저 사람들을 좀 도와줘. 그냥 옆에 있기만 하면 돼."

"내가 죽인 그 놈의 부하가 치근덕거리지 않게 하란 말이지?"

"···그래. 그놈들 원래 목표가 그거였거든."

다정은 내 망원경으로 대대 안을 들여다보곤 다급해졌다.

"저기 저 사람 누구야? 여자처럼 보이는 남자!"

"어디 보자···유현이네."

"유현이? 되게 잘생겼네."

"왜, 애인 삼고 싶어?"

애가 워낙 착해 보이고 잘생겼으니까 그런 마음이 들 법도 하지.

그녀는 벌떡 일어서서 소리쳤다.

"아 좆 갖고 싶다! 유현이한테 박게!"

결국 그거였습니까.

하긴 몬스터한테도 박고 싶다는 여자인데 유현이라고 마수를 피할 수 있을 리 없지.

좀비 여왕이 자기한테 박고 싶다는 걸 알면 그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조심하라고 해야겠군.

이 여자라면 진짜 성인용품을 차고 밤에 유현이한테 쳐들어갈지도 모른다.

"진정해."

"날 진정시키려면 얼음 줘! 아주 많이!"

"그래? 잠깐만."

나는 종이에 메모를 해서 차원문 안에 들여보냈다.

다정은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내 손이 들어가자 신기해했다.

"저기 안이 도망갈 수 있는 장소겠네."

"뭐, 그렇지."

"안엔 뭐가 있는 거야? 아니, 그건 나중의 즐거움으로 남겨둬야지."

"좋을 대로."

잠시 기다리고 있으려니 풍뎅이들이 얼음을 대야에 담아 내 손에 올려주었다.

대야를 빼내자 그녀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혹시 안은 얼음세상이야?"

"비슷해."

겨울이니까 뭐 그렇다고 봐도 되겠지.

그녀는 하이힐을 벗더니 대야에 발을 담그고 좀비에게서 콜라를 받아 넣었다.

"그거 얼마나 들고 다녔어?"

"한 달? 엄청나게 흔들려서 지금은 김 다 빠졌을 거야."

"그거 버리고 이거 마셔."

나는 페트로 된 콜라 한 병을 풍뎅이에게서 받아 그녀에게 주었다.

"···특성이 혹시 자판기야?"

아까는 제법 그럴듯하게 추측하더니 이젠 뭔지 헷갈리는 모양이다.

안에 동굴과 숲을 비롯한 자연이 펼쳐져 있고 말을 알아듣는 풍뎅이와 같이 살고 있다고 하면 놀라 자빠지겠지.

나는 끝까지 입을 다물었다.

다정과 토공을 믿는다.

하지만 내 특성이 완전히 밝혀짐으로서 그들 안에서 생겨날 의심과 질투까진 믿을 수 없었다.

인간인 이상 그런 마음이 없으면 더 이상하니까.

또한 정보가 새어나가는 것도 두려웠다.

물론 둘은 내 정보를 발설하지 않겠지만 일망의 가능성은 존재했다.

혼자만 알고 있으면 그 가능성이 제로가 된다.

나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니까 지금처럼 적당히 모른체 해줘.

.

.

.

효종을 잃은 김해 클랜은 급속도로 분해되었다.

유현이에 의하면 내분이 일어났다고 한다.

내가 퍼트린 정보 덕분에 의심이 생겨났고 자기들끼리 사기꾼에게 충성했니 어쨌니로 많이 싸웠다고.

효종이 있었다면 찍어 눌렀겠지만 그는 죽고 없다.

그러니 내분을 가라앉힐 사람도 존재하지 않았다.

거기에 좀비여왕 최다정이 기름을 부었다.

그녀는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에게 불안감을 선사했다.

몬스터들이 치열하게 싸워대고 심지어 좀비 레이드까지 몇 차례 일어났다.

사람들은 여기가 있을 곳이 못 된다고 판단하고 짐을 챙겨서 이주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김해 클랜이 있던 곳은 텅 비어버렸다.

다정은 몇 차례 동네를 돌고 나서야 내게 찾아왔다.

"쫓아내기 끝."

"···대단하십니다, 여왕님."

나로선 엄두가 안 나는 방법이었다.

그들은 좀비 여왕에 대해 알고 있었고 건드리면 좆된다는 것도 알았다.

똥이 더러우니 피한 격인데 하여튼 나는 흉내도 낼 수 없었다.

나는 그녀와 향후계획을 의논했다.

"어차피 여기 오래 있진 못해. 당분간은 물자가 많으니까 있어도 되겠지만···"

"창원이 괜찮아. 거기 바다도 있으니까."

사람 생각하는 건 다 비슷한 모양이다.

우리는 창원을 목적지로 하기로 잠정 합의했다.

다정은 이미 헬스장 멤버들과 군인들에게 자신을 어필한 상태였다.

―해치지 않아요.

말로만 듣던 좀비 여왕을 직접 본 사람들은 두려워하면서도 일단 환영했다.

그녀에게서 적의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

유현이가 그녀에게 관심을 보였다가 광기 어린 눈을 보곤 학을 뗐다.

―누, 눈 못 보셨죠? 절 잡아먹으려는 눈이에요!

뭐, 따먹는 거나 잡아먹는 거나 본질은 같을지도 모르지.

물론 먹히는 쪽은 다정이 아니라 유현이겠지만.

나는 밤에 조심하라고 주의를 주었다.

저 여자면 진짜 쳐들어갈지도 모른다.

그는 벌벌 떨며 당분간은 형준 형과 같은 방을 쓸 거라고 했다.

불쌍한 녀석.

아무튼 그녀의 등장으로 김해 일대가 조용해졌다.

몬스터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좀비는 여전하고 고블린과 코볼트의 위협도 생생했다.

하지만 사람끼리 싸울 일이 팍 줄었다는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나는 미경과 함께 김해 신도시로 향했다.

이것만 끝내면 창원에 가서 자리를 잡고 토공을 찾을 계획이었다.

그 다음엔 오크 퍼스트킬 이벤트인가···하여튼 이벤트가 많다.

오크와 늑대인간이 나타나면 더 힘들어지겠고.

놈들이 나오기 전에 장기간 머물 튼튼한 아지트를 만들어야 한다.

나는 미경과 신도시를 한 바퀴 둘러봤으나 단서를 찾지는 못했다.

아파트단지가 전부 무너져서 생존자들이 다른 곳으로 피신한 모양이었다.

우리 둘이 복귀해서 그 얘길 하자 형은 착잡해하면서도 포기한 듯했다.

"상황이 그러니까 어쩔 수 없는 거지. 하여튼 고맙다. 이젠 나도 포기할 수 있겠어···"

일치감치 가족을 잃고 친척들과 연을 끊은 나로선 형의 심정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당분간 뭘 시도하기 힘들다는 건 명백했다.

현우와 병사 둘은 그제야 서울로 향했다.

그들은 우리가 김해대대에 오래 머물지는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가급적이면 주변의 온화한 생존자들에겐 물자를 나눠달라고 부탁했다.

물론 형준 형은 그걸 받아들였다.

조병장이 미경에게 뭔가 부탁한 모양이지만 그녀는 완강히 거절했다.

아마 댄스 좀 보여 달라는 거겠지.

그녀는 자기의 과거를 알고 있는 조병장이 꺼림칙하기도 하고 춤추기도 망측하니까 거절했을 테고.

하여튼 조병장은 시무룩한 채 서울로 올라갔다.

나는 창원으로 떠날 준비를 했다.

미리 가서 아지트로 쓸 만한 곳을 찾는다고 하자 다들 걱정했으나 말리진 않았다.

워낙 혼자 다니다 보니까 적응한 거겠지.

"아저씨 저하고 같이 가면 빨리 다녀올 수 있는데."

미경이 제안했으나 나는 혼자가 편하다고 거절했다.

같이 가면 확실히 빠르긴 하겠지만 내 목표는 그게 다가 아니란 말이지.

토공을 만나고 오크를 잡을 준비를 해야 하는데 그녀가 있으면 곤란했다.

다행히 그녀는 눈치를 보곤 더 달라붙지는 않았다.

나는 짐을 챙기고 딩고와 함께 창원으로 길을 떠났다.

< 좀비 여왕 - 2 > 끝

< 쉘터의 조건 >

지금까지 출현한 몬스터는 크게 위협적이지 않다.

이게 무슨 개소린가 하겠지만, 뜯어보면 명백한 사실이다.

좀비, 고블린, 코볼트···잘 도망 다니고 잘 숨기만 하면 치명적인 위협은 아니었다.

각성자들이 대응 가능한 몬스터이기 때문.

수가 많아서 치고 빠지는 등의 전술이 필요하지만, 하여튼 대응할 수 있다는 것 자체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강화 좀비가 패치로 삭제된 것도 있어서 사람들이 의외로 많이 살아남았다.

무서운 키퍼나 본 크리퍼는 일종의 이벤트 몬스터로, 밤에만 볼 수 있다.

숨어 있으면 거의 볼 일이 없다는 말이다.

하지만 오크와 늑대인간을 기점으로 상황이 크게 달라진다.

놈들은 특성을 가진 인간보다 우월한 전투력을 갖고 있다.

또한 적극적으로 인간을 찾아 사냥하려 하는 지능도 갖췄다.

유저들에게 가장 유명한 몬스터는 오우거.

가장 두려운 몬스터는 본 크리퍼지만.

서바이벌 라이프를 대표하는 몬스터는 오크와 늑대인간이라고 할 수 있다.

고인물들이 될성부른 떡잎에게 괜히 오크를 붙여보는 게 아니다.

"지독한 건 놈들이 거의 동시에 나타난다는 거지."

기존 몬스터들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서 더 고달플 것이다.

이제부턴 공략도 별 소용이 없다.

그저 살기 위해 싸우고, 도망가고, 숨어야 하는 마경이 펼쳐진다.

진정한 아포칼립스가 열리는 것이다.

"집도 바꾸고, 할 일이 많구만."

오크와 늑대인간이 등장하면 아지트도 바꾸는 게 좋다.

기존엔 2층 정도가 선호되었지만 이젠 최대한 높이 올라갈수록 좋다.

아지트의 짐을 여러 곳에 분산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기존 몬스터들은 화력을 집중하면 퇴치할 수 있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오크나 늑대인간에겐 어림도 없지."

맷집이 엄청나기 때문에 화살 몇 방쯤은 씹고 들어온다.

따라서 짐을 여러 곳으로 분산시키고 대미지를 누적시키는 사냥법이 주효했다.

이제부턴 내가 즐겨 써왔던 폭죽 등도 큰 효과가 없다.

섬광캔이나 점화캔이 절실해지는 시점이 왔다.

"문제는 점화석이 별로 없다는 건데."

발광석은 상점에서 살 수 있지만 점화석은 루팅으로밖에 구할 수 없다.

나는 풍뎅이들에게 점화석을 발견하면 꼭 캐달라고 부탁했다.

가능성은 높지 않지만 녀석들이라면 또 모르니까.

"지금 있는 게 발광석 10개, 점화석 4개···"

풍뎅이들이 착실하게 모아서 겨우 이거다.

확실하게 오크나 늑대인간을 죽일 수 있는 기회는 4번이라고 보면 된다.

"고추폭탄도 효과가 쏠쏠하긴 한데 무한정이 아니란 말이지."

김해 클랜에 쓴 게 마지막이었다.

심어놨으니 빠르게 자라겠지만 당장은 없이 사냥해야 한다.

마비독침은 중형이상 몬스터에겐 드라마틱한 효과는 없었다.

"그러니까···함정이 필요해."

인간은 오래 전부터 무기와 함정을 동원해 동물을 사냥해왔다.

나도 그렇게 할 수 있다.

"좀 힘들긴 하겠지만."

오크와 늑대인간의 습성과 행동양식을 생각해보니 당장 쓸 만한 몇 개의 함정이 떠올랐다.

점화석은 아껴야 하니 당분간은 함정으로 사냥해야겠지.

나는 김해를 떠나 창원으로 향했다.

새롭게 자리를 잡을 지역은 마산이었다.

상업지구와 주거지구가 복잡하게 얽힌 곳이라 파밍하기 좋았다.

바다가 바로 옆에 있어서 식량 수급하기에도 괜찮을 것 같았다.

물론 해산물을 대량으로 수급하려면 거제나 통영으로 가는 게 좋겠지만 너무 멀었다.

"언젠가는 가게 될지도 모르지만···"

일단은 마산에서 멈추기로 했다.

내가 눈여겨 본 곳은 부두 주변의 상가단지였다.

FRP보트도 몇 척 있고 낚시용품점도 두어 곳 있었다.

"텃밭으로 쓸 만한 땅은 거의 없네···"

겨우 몇 명이 먹을 건데 대단한 면적이 필요하진 않아서 다행이었다.

나는 적당한 곳을 골라 정찰에 들어갔다.

사람 생각은 다 비슷한 모양인지 생존자들이 제법 눈에 띄었다.

그들은 나를 적당히 경계했다.

대놓고 이죽거리던 김해 클랜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큰 세력은 없는 모양인데···"

창원의 인구 많은 곳으로 가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여튼 나는 최종적으로 4층 꼬마빌딩 한 곳을 낙점했다.

건물은 볼품없었지만 숨을 곳이 많았고 그만큼 집기와 잡동사니가 넘쳤다.

이불가게와 그릇가게가 입점해 있었던 것도 내 구미를 당겼다.

"식량만 구하면 적당히 먹고 살 수 있겠는데."

나는 괜찮지만 이주해 올 사람들이 워낙 빈털터리라서 장소 선정은 굉장히 중요했다.

언제 올지는 모르겠지만.

"몬스터도 꽤 있고···괜찮아."

몬스터가 아예 없으면 살만한 곳이 못 된다.

어느새 포인트가 필수적인 것이 되어버렸기 때문.

상점에는 정말 다양한 물건이 많아 식수만 챙긴다면 포인트만으로 살아가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그 경우 맛없는 빵만 먹어야 하지만.

"사람이 하나만 먹고 살 수는 없으니 문제지."

그러니 몬스터도 물자도 적당한 곳이어야 한다.

생존자도 꽤 많아서 내가 본 것만 10명이 넘었다.

그들은 두세 명씩 짝을 지어 파밍하고 조심스럽게 몬스터를 사냥했다.

대단한 전투력을 가지진 않은 듯하지만 생존에 문제는 없어 보였다.

일단은 괜찮은 이웃 같군.

"조용히 삽시다."

김해 클랜처럼 쓸데없이 시비를 걸지만 않으면 된다.

권씨와 친분이 있던 창원 클랜은 성산구에 있을 테니까 당장은 마주칠 일이 없다.

나는 4층의 한 사무실에 배낭을 던졌다.

.

.

.

나는 낚시용품점부터 파밍을 시작했다.

다행스럽게도 아직 생존자들이 건드리지 않은 곳이었다.

통발은 던져볼만 할 텐데 여유가 없어서 그런가?

하긴 고블린 같은 놈에게 잘못 걸리면 다 빼앗긴다.

녀석들은 인간의 물건에 매우 관심이 많기 때문.

못된 심보를 갖고 있어서 꼭 망가트리고 훔쳐야 직성이 풀리는 놈들이다.

안 걸리면 되지만 고블린들은 어디에나 있다.

그걸 방지하려면 밤에 던지고 새벽에 건져야 하는데 키퍼와 본 크리퍼가 무섭겠지.

"아직은 식량이 남아 있기도 할 테고."

좀비 사태가 터진지 약 두 달이 지났다.

부산에서 살던 사람들은 물자 대부분을 버렸지만 타 지역은 상황이 다를 것이다.

"필요한 게···"

그물과 통발, 민장대와 일체의 도구다.

부두에선 통발을 던지고 낚시는 보트를 타고 나간 다음 해야 될 것 같았다.

멍하니 낚싯대만 드리우고 있다간 몬스터들이 아주 좋아할 테니까.

인적이 드문 해안가에 가면 비교적 편하게 낚시할 수 있겠지만 파밍도 어려워진다.

어디든 일장일단이 있다.

"그래도 아직은 도시가 살기 좋지."

너무 번화한 곳이라면 생존자도 몬스터도 많으니까 버겁겠지만 여기 정도면 딱이다.

나는 필요한 것들을 차원문에 넣고 4층집으로 돌아왔다.

용품을 정리하고 있는데 갑자기 창문에 화살이 날아들었다.

포물선으로 날아들었기에 나를 공격할 의도가 아닌 것을 직감했다.

"화살촉도 없고···"

결정적으로 쪽지가 묶여 있었다.

아마도 주변의 생존자가 보낸 거겠지.

펼치니 우려 가득한 문구가 나를 반겼다.

―우리는 당신이 얌전한 이웃이길 바랍니다. 우리에게 대단한 힘은 없으나 불손한 이웃을 쫓아 보낼 정도는 됩니다. 그러나 가장 좋은 것은 싸우지 않는 것이겠지요. 괜히 몬스터를 불러들이고 싶지 않습니다. 부디 당신이 조용히 지냈으면 합니다.

"이건 잘 지내보자는 건가 경고인가···"

의미가 애매해 보였지만 하나는 확실했다.

이 쪽지를 보낸 사람은 최소 김해 클랜의 놈들처럼 불한당은 아니라는 것.

불한당이었으면 이런 쪽지를 보내는 일 따위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스윽 와서 내부를 보고 탈탈 털면 되니까.

"세력이 별로 강하지는 않은 모양이군."

나를 쫓아낼 힘이 있다고 강조하는 걸 보니 그렇게 느껴졌다.

그래서 그런지 싸우고 싶지 않다는 의지도 엿보였다.

혹시 노인이나 애를 데리고 있나?

"뭐 그건 나중에 알아보면 될 테고."

우선은 이 건물을 쉘터화하는 작업이 필요했다.

나는 식사를 대충 때우고 그물함정의 설치에 들어갔다.

질긴 그물로도 두 몬스터를 무력화하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다.

오크는 힘이 좋고 늑대인간에겐 발톱이 있으니 그물은 오래 버티지 못한다.

하지만 단 몇 초라도 녀석들을 묶어둘 수 있다는 게 중요했다.

창을 찌를 시간을 벌어야 한다.

"유인하고 함정에 빠트리고 찌른다···"

체중을 실어서 있는 힘껏 찔러야 한다.

안 그러면 몬스터의 화만 돋울 뿐이다.

유인해놓고 차원문에 숨어 그물총을 발사하는 건 나쁜 아이디어였다.

그물총에 들어가는 그물은 규격화되어 있어서 망가지면 보수해서 써야 하기 때문.

"정 급하면 총을 써야겠지만···"

총알이 164발밖에 남지 않아서 가능하면 아끼고 싶었다.

욱해서 고블린 녀석한테 쏘지만 않았어도 몇 발 더 있었을 텐데.

나는 그물이 쏟아지는 함정을 하나 만들어 여러 번 시험했다.

두 번은 통하지 않기 때문에 단숨에 포획하고 죽여야 했다.

"이렇게 로프를 잡아당기면."

와장창!

천장이 무너지면서 그물이 쏟아진다.

몬스터 바로 앞에서 당겨야 하기에 공격을 최소 한 번은 피해야 한다.

"오크는 어렵지 않은데 늑대인간이 문제로군."

좁은 곳이라 발톱에 걸리면 팔 하나 정도는 날아갈 것 같았다.

여기서 끈을 안쪽에 이어볼까?

이것저것 고민하는 사이 저녁이 되었다.

주변을 돌아다니던 생존자들이 거리에서 사라졌고 고블린들도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나는 동굴에 들어가 화조 한 마리를 잡았다.

꿔걱!

화조는 평소 잘 울지는 않지만 그래도 소리를 못 내는 건 아니라서 홰를 치며 거세게 반항했다.

"미안해. 오랜만에 닭 좀 먹어보자."

진짜 닭은 아니지만 비슷한 맛이 나겠지.

도축서적에 나와 있는 대로 목을 꺾고 심장을 찌르려 했으나···

"심장이 어디 있는 거야?"

닭과는 다른 생명이고 워낙 덩치가 커서 찾기가 쉽지 않았다.

나는 하는 수 없이 녀석의 목을 쳐버렸다.

거꾸로 매다니 피가 줄줄이 흘러나왔다.

다음으로는 뜨거운 물에 담그고 깃털을 뽑는 작업이다.

"혹멧돼지에 비하면 좀 낫구만."

깃털을 뽑고 보니 의외로 마트에서 보던 생닭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크기가 2,3배 정도 크다는 걸 제외하면 말이다.

나는 발을 바르고 내장을 꺼내 안을 정리하고 씻어냈다.

손이 순식간에 오물로 범벅이 되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딩고야, 냄새 많이 나지?"

녀석은 흥분해선 연신 코를 핥아댔다.

이렇게 크니까 너도 마음껏 먹을 수 있을 거야.

풍뎅이들이 몰려와 작업을 구경했다.

힘이 제법 필요한 작업이라 녀석들이 하기엔 어렵다.

"니들은 텃밭 관리만 좀 해줘."

풍뎅이들이 머리를 끄덕였다.

녀석들이 평소에 열심히 일해 준 덕분에 내 텃밭은 제법 풍성하게 변해가고 있었다.

물론 텃밭 자체를 만드는 건 내 일이다.

이 녀석들이 하기엔 너무 힘든 일이다.

하지만 그 뒤에 비료를 뿌리고 텃밭을 고르는 것은 충분히 가능했다.

작물을 심고 수확하는 것까지 해내니 텃밭에 최적화된 일꾼이라 할 수 있다.

지금은 감자 외에 시금치와 상추, 대파, 양파 등도 심어 놨다.

성장속도가 워낙 빨라서 상추는 4일이면 뜯어먹을 수 있을 정도로 컸다.

"원래는 날씨가 좋아도 한 4주 정도는 걸린다고 하던데."

몬스터와 말을 알아듣는 풍뎅이가 있는 숲이니 무슨 일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다.

나는 손질한 화조를 토막 내고 솥에 빠트려 부글부글 끓였다.

딩고는 화로 앞에 엎드려 인고의 시간을 가졌다.

이제 녀석도 얌전히 기다리고 있으면 먹을 것이 나온다는 걸 안다.

"머리가 좋은 녀석이야."

나는 화로의 온기를 쬐며 노트북 영상을 확인했다.

스피드런 이벤트에 이은 퍼스트킬 이벤트가 있다.

서바이벌 라이프를 대표하는 몬스터, 오크를 죽이는 이벤트다.

오크 하나라면 그리 어렵지 않겠지만 녀석에겐 인근 고블린과 코볼트를 지배하는 폭군이라는 설정이 붙어 있다.

퍼스트킬을 하려면 몇 개의 둥지를 박살내야 한다.

"이건 몰래 하기가 좀 그런데···"

도시 어딘가에 오크의 둥지가 나타난다.

오크가 주변을 지배한다는 설정이라 고블린이나 코볼트가 도망가지를 않는다.

악착같이 달라붙는데 그걸 모두 처리해야 마침내 왕에게 접근할 수 있다.

원래 게임에선 혼자 하긴 어려운 이벤트였다.

"둥지 구조가 어떻게 되어 있냐에 따라 달라지겠군."

그리고 경쟁자의 숫자도 중요하다.

스피드런과 달리 많은 유저가 참여한 이벤트라 경쟁이 치열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장소가 던전이나 미궁이 아니라 도심이라는 것도 경쟁률을 높이는 요소였다.

"쉽지 않겠어."

하지만 미리 포기할 생각도 없었다.

다른 경쟁자들이 몬스터와 싸우고 있을 때 몰래 둥지에 들어가는 방법이 있으니까.

발각되면 쌍욕을 퍼붓겠지만 배부르게 먹어주면 된다.

애초에 견제하고 싸우라고 만들어진 이벤트다.

"협력도 포함되어 있지만 굳이 할 필요는 없지."

독식할 수 있다면 해야 한다.

영상을 플레이해보니 내가 분석한 내용이 있었다.

―김밥조아 : 이 왕의 둥지가 꽤 규모가 커서 좁은 지역엔 리젠이 안 되는가보네요.

―김밥조아 : 그리고 둥지는 밤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반드시 낮에 나오는데, 코볼트가 돌아다니는 곳을 찾으면 됩니다. 원래 코볼트는 낮에 안 나오는데 설정상으로는 폭군의 위세에 짓눌려···

"왜 혼자 떠들고 있는 거지?"

시청자가 한 명도 없었다.

목소리가 쳐져 있는 이유를 알겠다.

워낙 마이너한 게임이고 나도 하꼬라서 고정 시청자가 안 오면 어쩔 수가 없었다.

조금 더 보고 있으려니 내가 한숨을 쉬면서 방송을 꺼버렸다.

하꼬의 비애여.

"잘했어, 과거의 나."

힌트를 두 개 얻었으니 됐다.

퍼스트킬 이벤트는 반드시 낮에 시작되며, 근처에서 코볼트를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둥지는 꽤 큰 곳에 리젠된다.

이걸 염두에 두고 활동하면 빠르게 둥지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경매장에 들어가 보니 꽤 많은 사람들이 그 얘기를 나눈 흔적이 보였다.

주제는 또 나였다.

―이번에 그새끼가 퍼킬하면 내가 장을 지진다.

―니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장 지진걸 어케 확인함?

―그냥 불가능하다고 병신아. 장소가 미궁이 아니고 도심인데 사람들이 그걸 두고 볼 것같음? 몬스터 숫자도 장난이 아닌데.

―이번에는 김밥조아도 힘들걸. 클랜 여러 곳에서 벼르고 있다는 소문이 있음.

―원래 혼자 하는 이벤트가 아니지 않았어요?

―맞음요. 몬스터가 너무 많아서 혼자 돌파하기가 불가능에 가까움. 오크도 꽤 강화되어 있고.

―생존자1 : 이번에는 생존자1이 지휘하는 사냥꾼들이 퍼킬할 겁니다. 아이템하고 스킬 나오면 알려드림.

―무슨 퍼킬이 지들꺼인줄 착각하고 있네.

―관심없으니까 ㄲㅈ.

생존자1은 여전히 자기PR에 열심이구만.

하지만 누구도 생존자1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

"존재감이 이렇게 희미할 줄이야···"

보고 있으려니 열심히 생존자1을 홍보하는 게 불쌍해 보일 지경이었다.

누구 시키든가 좀 하지.

"뭐 그건 알아서 하시고."

아무래도 사람들은 오리궁뎅이가 퍼킬을 가져갈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토공의 특성과 전투력이 워낙 출중하지만 혼자라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내가 스피드런 1등한 건 단지 미궁이어서 운이 좋았을 뿐이란다.

―이번에는 오리궁뎅이가 퍼킬 가져갈거임. 좀비가 30마리나 되니까 물량전 쌉가능.

―근데 지금 어디서 뭐함?

―김해에서 난리치고 있다는 소리는 들었음.

―거기서 뭐하지? 혹시 토공 있는 거 아님요?

―토공은 거기까지 못 내려갔을 텐데···

―얼마 전에 대전에서 봤다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이후로는 아무도 모름.

나는 지도를 꺼내 확인했다.

대전에서 경남까지 그럴싸한 도시가 없어서 그런지 토공의 흔적이 드러나지 않았다.

"조금만 더 내려오면 진주···아니면 창원."

사람들 말을 들어보면 옆에 누가 붙어 있다고 하니까 다른 곳으로 샐 염려는 없을 것이다.

"일단 여기서 쉘터 만들면서 기다려보자."

화조가 익으려면 시간이 좀 걸린다.

어느덧 주변이 어둑해졌다.

나는 딩고와 함께 통발을 가지고 나가 부두에 던져두었다.

고블린은···없군.

부두 밑을 보니 새끼 복어와 쥐치 등이 통발을 물어뜯다가 포기하고 달아났다.

"사람이 없으니까 물고기가 꽤 많네."

몇 개월만 지나도 꽤 많은 해산물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계에도 바다가 있다는 걸 떠올렸다.

확인해보진 않았지만 마산 앞바다보다는 해산물이 훨씬 풍부할 듯했다.

해풍에 말리면 오래 보관할 수 있을 텐데.

집에 돌아와서 동굴로 들어가니 풍뎅이들이 장작을 빼면서 화력을 조절하고 있었다.

덕분에 화조백숙이 아주 야들야들하게 익었다.

기특한 녀석들.

나는 먹기 전 경매장에 암호문을 올렸다.

다정에게 사가라고 할 셈이었다.

공짜로 주고 싶었지만 다른 놈이 잽싸게 채갈 위험이 있다.

다정은 포인트 부자라 낙찰가가 높아도 신경 쓰지 않는다.

다리 두 개를 떼어놓고 잔불에 백숙을 달구고 있으려니 그녀가 응답했다.

―지금 당장 올려. 빨리. 나 배고파 죽어.

―너무 싸면 다른 놈이 가져가니까 100포 어때?

―천포도 괜찮으니까 빨리 올리라고!

그래도 친구인데 비싸게 받을 수가 있나.

100포인트에 올리자 그녀가 잽싸게 낙찰 받았다.

화조백숙이 사라졌고 그녀가 감탄하며 코멘트를 남겼다.

―내 엉덩이만큼 크네. 근데 다리가 안 보이는데?

―DLC입니다 고갱님.

―야! 뒤질래!

―어차피 다리 두개 없어도 엄청 크잖아?

―그래도 사람 마음이란 게···됐어. 근데 이거 니가 말한 그 추운 곳에서 구한 거야? 안에 들어가면 너구리가 어서 오세요 하는 거 아니지?

너구리 대신 풍뎅이가 있지.

그녀는 헬스장 사람들을 부른다고 코멘을 남겼다.

미친 것처럼 행동해도 속은 따뜻하군.

나는 딩고에게 다리 하나를 주고 하나는 국물에 얹어 밥을 말아 먹었다.

이것도 맛있네.

< 쉘터의 조건 > 끝

< 김밥조아와 불쌍맨 >

타닥타닥.

화로의 불길이 오늘따라 뜨겁게 느껴졌다.

슬슬 겨울이 숲을 떠나고 있는 것이다.

지긋지긋한 눈이며 얼음이며 안녕.

나는 점화석을 파우더로 만들어 화염캔을 만들 준비를 했다.

딩고는 엎드려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얘네들이 슬슬 돌아올 때가 됐는데···"

늘 쉘터에 있던 풍뎅이들이 없으니 뭔가 허전했다.

녀석들은 점화석을 최대한 확보하라는 내 특명을 받고 외출했다.

사실 명령까진 아니었다.

평소 풍뎅이들이 숲을 돌아다니니까 점화석을 찾으면 가져와 달라고 주문한 것이다.

그걸 다소 과하게 받아들인 모양.

"한 번 나가볼까···"

밤이 되어서 나가기가 좀 그랬다.

본 크리퍼에게 잘못 걸리면 한 방에 훅 가버리므로 조심 또 조심해야 한다.

요즘은 숲이 조용해서 어지간하면 나올 것 같진 않지만.

으으하합!

기지개를 켜고 있으려니 똑똑, 하는 소리가 들렸다.

녀석들이 왔구나.

문을 여니 과연 풍뎅이 네 마리가 점화석 두 개를 이고 있었다.

"이거 캐느라고 늦었어? 위치만 확인하면 나하고 가도 되는데. 일단 들어와, 들어와."

녀석들은 안으로 쪼르르 들어와 몸을 녹였다.

겨울이 떠나고 있다고는 하지만 밤이라서 아직은 엄청 춥다.

나는 점화석을 받아 작업대 위에 놓고 녀석들에게 꿀을 주었다.

싸구려 꿀인데 풍뎅이들이 꽤 좋아하는 간식이다.

보통의 풍뎅이에게 꿀을 주면 혀가 굳어버린다고 하는데 이 녀석들은 끄덕도 없었다.

"금속도 녹이는데 뭐."

풍뎅이들은 몸을 녹이고 배를 채운 후 잠자리로 기어들어갔다.

대장 풍뎅이가 내 다리를 콕콕 찔렀다.

뭔가 할 말이 있나 보다.

"음···오. 거기에 굴이 있었다고? 보통 굴이 아니라고?"

녀석들은 예전의 고블린 둥지 북쪽 너머까지 찾아갔단다.

거기에서 광산 비슷한 굴을 발견했는데 거기에서 이 점화석을 캐냈다고.

발광석과 흑탄 등도 꽤 있다며 다시 가보는 게 좋겠단다.

"그럼 내일 가보지 뭐."

나는 느긋했지만 녀석은 다급했다.

화살표를 굴로 죽죽 그어댔다.

"지금 당장 가야 한다고? 왜?"

동그란 과일과 그걸 따는 손을 그리는 대장 풍뎅이.

지금 나오는 과일이 있는 것 같았다.

마법이 걸린 숲이니까 뭐가 나와도 이상하진 않다.

"···좋아. 가보자."

코볼트는 두들겨 패면 되고 본 크리퍼만 조심하면 된다.

뭔가 희끗한 게 나온다 싶으면 바로 차원문 열고 도망쳐야지.

그늘포도를 먹고 짐을 챙기려니 딩고가 기지개를 켜고 따라나섰다.

밤은 여전히 무서웠다.

숲에도 익숙해졌고 야간시야도 좋아졌지만 밤이라는 환경이 가져다주는 공포감이 있다.

귀신 따위를 말하는 게 아니다.

실질적으로 나를 위협하는 본 크리퍼.

녀석을 1초라도 늦게 발견하면 내 목숨이 날아간다.

그러므로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잔뜩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대장 풍뎅이는 내 머리에 앉아선 방향을 지시했다.

다행히도 가는 길에 몬스터는 없었다.

고블린 둥지를 지나, 생소한 지형을 지나치자 탁 트인 공간이 나왔다.

거기에 달귤과 겨울딸기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달귤」

「효과:3분 동안 민첩+2」

「겨울딸기」

「효과:냉기저항 상승」

가지가 달을 향해 뻗어 있어서 달귤인가.

겨울딸기는 알고 있는 효능 그대로였다.

"달귤이 신기하네."

올리기 힘든 민첩이라니.

이걸 먹으면 오크와 늑대인간에게 한결 편하게 대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투쟁본능까지 활성화시키면 정면에서 개겨도 되겠는데?"

롱나이프만 들고 싸우겠단 뜻은 아니다.

함정 등 온갖 수단을 동원해야지.

괜히 밑지는 싸움을 할 필요는 없다.

나는 주섬주섬 달귤과 겨울딸기를 딴 후 지도에 위치를 기록해두었다.

그리곤 더 북쪽으로 향했다.

한참 걷자 절벽이 드러났다.

중턱에 동굴의 입구가 커다랗게 뚫려 있었다.

"···저기를 올라가라고?"

풍뎅이가 내 어깨를 탁탁 쳤다.

할 수 있어! 힘내! 하고 외치는 듯했다.

절벽 자체는 꽤 단단하고 디딜 곳도 많았다.

"그렇게 높지도 않네."

기껏해야 4m정도?

바닥이 푹신푹신하다는 걸 감안하면 떨어져도 죽진 않을 것 같았다.

갈고리를 어딘가에 걸 수 있으면 더 좋을 텐데···

나는 대장 풍뎅이에게 갈고리를 건넸다.

"이거 들고 올라가줄 수 있어?"

녀석은 뿔에 갈고리를 걸치고 낑낑거리며 절벽을 올랐다.

그리곤 밑으로 내려와 기둥과 갈고리를 그렸다.

기둥에 묶어뒀단 말이지?

딩고가 배낭 위로 올라왔고 나는 힘을 주어 로프를 당겼다.

튼튼하군.

"밤중에 이게 무슨 짓이···"

컹컹컹!

딩고가 크게 경고했고 등줄기에서 짜릿한 느낌이 올라왔다.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로프를 잡고 무작정 올라갔다.

발밑에서 희끗한 것이 보이는 것도 잠시.

펑 소리와 함께 회색 폭풍이 몰아쳤다.

"휴···"

이게 본 크리퍼의 자폭을 피하는 방법 중 하나다.

생존자1의 공략본에도 나와 있지만 막상 도시에서 실행하기는 힘들었다.

보통은 도로를 걷다가 뒤를 돌아보면 본 크리퍼가 있는 식이니까.

전봇대를 찾기도 전에 씨발쾅이니 인지를 높여서 미리 발견하는 것만이 최선이다.

"죽는 줄 알았네."

나는 어깨에 힘을 주고 올라갔다.

동굴 입구에 도착해선 플래쉬를 켰다.

"오오···"

이건 대박이군.

동굴 벽면에 점화석과 흑탄, 발광석 등이 제법 묻혀 있었다.

뿐만 아니라 광맥이 동굴 전체를 휘감고 있는 게 보였다.

이런 곳을 노다지라고 부르는 건가?

뭐 금은 아니지만.

나는 풍뎅이와 배낭을 내려놓고 점화석 위주로 캐낼 준비를 했다.

벽은 제법 물러서 곡괭이로도 충분히 팔 수 있을 것 같았다.

밤중에 작업을 하면 코볼트가 아주 좋아하겠지만.

"본 크리퍼가 있는 걸 봐서는 제법 많을 것 같단 말이지···"

여기까지 올라오긴 힘들겠지만 대비는 필요했다.

나는 대장 풍뎅이를 딩고의 머리 위에 얹고 말했다.

"내가 일하는 동안 밑을 봐줘, 알겠지?"

둘 다 머리를 끄덕끄덕했다.

나는 플래쉬 광량을 약하게 맞추고 작업에 들어갔다.

깡, 깡 하는 소리가 숲을 울렸다.

동네 코볼트들 다 몰려오겠네.

뭐 낮에 해도 큰 차이는 없을 것이다.

코볼트나 고블린이나 거기서 거기지.

점화석을 하나 캐서 배낭에 넣자마자 딩고가 왕왕 짖었다.

입구로 가보니 과연 코볼트 몇 마리가 서성거리고 있었다.

돌멩이나 창을 던지긴 하겠지만 여기까지 닿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입구 주위의 돌을 모아서 녀석들에게 투척했다.

"저리, 꺼지, 라고."

두어 놈의 머리에 부딪혀 깨갱 소리가 났지만 놈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고추폭탄이 하나 있었으면 박살을 냈을 텐데 아쉽네.

"니들 거기서 딱 기다려라. 내가 작업만 끝나면 손봐줄 테니까."

물론 말로만 하는 소리다.

상대할 시간이 있으면 도망가야지.

나는 코볼트들의 컹컹거리는 소리를 무시한 채 작업을 계속했다.

일과를 마치고 동굴에 들어온 터라 피곤했다.

점화석 5개를 배낭에 넣자 어깨가 축 늘어졌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노다지를 만나서 반가웠지만 잠을 자야 내일도 활동할 수 있다.

딩고와 풍뎅이는 여전히 밑을 감시하고 있었다.

코볼트들이 던진 돌멩이를 슬쩍 떨어트리는 등 견제도 톡톡히 해냈다.

나는 둘을 쓰다듬어주었다.

"잘했어. 이제 집에 가자. 내가 내려가면 갈고리를 푸는 거야, 알겠지?"

돌아가는 것도 일이었다.

코볼트 10여 마리를 뚫고 내려가야 하기 때문.

나는 폭죽을 하나 꺼내 불을 붙이고 집어던졌다.

퍼퍼펑!

커륵!

코볼트들이 눈을 붙잡고 나가떨어졌고 나는 재빨리 딩고와 함께 절벽을 내려갔다.

"풍뎅아!"

잠시 후 풍뎅이가 갈고리를 던지고 절벽을 내려왔다.

나는 녀석을 어깨에 얹고 뛰었다.

눈두덩을 문지르고 있는 코볼트들을 다 죽이고 싶었지만 도망가는 게 우선이었다.

온 숲에 소동이 벌어진 듯 시끄러웠다.

우리는 간신히 쉘터로 돌아왔다.

"두 번은 못하겠네."

끄덕끄덕.

딩고와 풍뎅이도 같은 생각인 모양이다.

밤이 깊었으니 이제 쉬어야지.

우리는 각자의 잠자리에 기어들어갔다.

.

.

.

낚시꾼이라면 누구나 그런 상상을 한다.

해산물은 풍부하다 못해 넘치며 낚싯대를 드리우는 족족 입질이 오는 바다 말이다.

거길 독차지하고 있으면 더 좋겠지.

바로 그런 바다가 내 앞에 펼쳐져 있었다.

나는 딩고, 대장 풍뎅이와 함께 해변을 거닐며 통발을 던질 곳을 찾았다.

"적당히 수심이 있는 곳이 좋은데···"

이렇게 여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 것도 두어 시간 정도다.

고블린이 깨어나고 코볼트가 둥지로 돌아가는 어스레한 새벽.

키퍼는 아예 없었고 본 크리퍼는 뛰어오는 게 잘 보여서 안심이었다.

나는 한참을 돌아다닌 끝에 적당한 갯바위에서 통발을 던졌다.

줄을 길게 늘어뜨리고 돌멩이로 고정시킨 후 낚싯대를 꺼냈다.

"여기엔 뭐가 살고 있으려나."

전에 잡았던 문어나 게 등을 보면 지구와 크게 다른 것 같지는 않았다.

혹멧돼지나 계곡사슴도 그렇고, 몬스터만 빼면 동식물은 비슷할 것이다.

미끼는 화조를 잡고 남은 내장이었다.

길게 캐스팅을 하자 채비가 잔잔한 바다에 빠졌다.

뭐가 나올지 몰라서 일단은 수심을 다양하게 공략할 생각이었다.

"이 정도 바다면 큰 놈이 나와 줘야지."

최소 몇 개월은 아무도 손을 대지 않은 바다다.

내 추측이지만, 몇 년 이상 이 상태로 보존되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대물이 막 올라오는 거 아냐?

행복한 상상을 하고 있을 때 갑자기 입질이 왔다.

"왔구나!"

나는 낚싯대를 확 채어 제대로 걸린 것을 확인하고 릴을 감았다.

제법 힘을 쓰는데!

딩고가 벌떡 일어나 내 곁으로 다가왔다.

치열한 밀고당기기 전쟁 후 힘이 빠진 고기가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크다 커."

거의 7자 정도는 되는 돌가사리였다.

나는 이름만 알뿐 돌가사리가 무슨 고기인지 모른다.

뜰채로 꺼내서 아이스박스에 담으니 힘 있게 퍼덕였다.

"생긴 건 숭어 비슷한데."

특히 눈이 노란 게 가숭어와 매우 흡사했다.

덩치만 조금 줄이면 시장에 가숭어라고 해서 팔아도 괜찮을 것 같았다.

"배가 뭉툭한데 알인가."

숭어 알이 또 유명하지 않나?

이건 돌가사리라서 숭어와는 다르지만, 하여튼 생선 알은 대부분 먹을 수 있다.

딩고는 풍뎅이를 머리에 얹고 돌가사리에게 덤벼들고 싶어 난리였다.

"오히려 니가 잡힐 것 같은데."

나는 다시 캐스팅을 했다.

돌가사리.

또 돌가사리.

"또?"

바다는 돌가사리만 계속 토해냈다.

덕분에 아이스박스가 돌가사리로 꽉 차버렸다.

알을 밴 놈도 제법 많았다.

"돌가사리 노다지네."

하여튼 귀중한 식량이다.

나는 즉석에서 돌가사리를 손질해 포를 뜬 후 비닐팩에 포장했다.

남은 서더리는 매운탕을 해서 먹어도 되겠지만 귀찮았다.

뒷정리를 하는 동안 대장 풍뎅이가 돌가사리 뼈에 달라붙어 있었다.

뭔가 했더니 뼈로 바늘을 만들고 있었다.

"오···이거 괜찮은데."

현실에선 철사병 때문에 바늘을 쓰지 못하지만 뼈바늘이면 괜찮겠지.

손가락으로 만지니 무척이나 억셌다.

작은 고기는 이걸로도 낚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대장 풍뎅이가 나를 올려다봤다.

계속 만들까 말까?

"몇 개만 더 만들어줘. 이런 모양으로."

녀석은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작업을 계속했다.

나는 한동안 낚시 삼매경에 빠진 채 돌가사리만 계속 잡았다.

"아니 무슨 놈의 바다가 이래?"

수심을 다양하게 공략했지만 오는 입질이라곤 한입에 덥석 무는 돌가사리였다.

바다에 니들밖에 없니?

"미끼가 이래서 그런가···"

실력이 부족한 것도 있겠지.

바다를 더 잘 알면 멋진 고기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두 박스에 가득 찬 돌가사리를 보곤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래도 이거라도 잡았으니 다행이지.

슬슬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나는 통발을 끌어올리다가 생각보다 묵직한 느낌에 놀랐다.

"뭐가, 이리, 많냐!"

갯바위에 끌어올리고 보니 문어와 게, 새우, 소라 등 온갖 해산물로 가득했다.

문어 세 마리가 게와 새우를 닥치는 대로 집어삼키고 있었다.

"야야야."

나는 문어를 따로 격리했다.

통발을 다 확인하니 입가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진짜 굶을 걱정은 없겠네."

이걸 경매장에 올려서 장사나 해볼까 싶었다.

당장 포인트를 쓸 일은 없지만, 많아서 나쁜 건 없으니까.

나는 아이스박스에 해산물을 몽땅 때려 넣고 끌고 온 ATV에 실었다.

"여기도 노다지네, 노다지."

곧 겨울이 찾아오니까 당분간은 식량 확보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딩고와 풍뎅이가 아이스박스에 올라탔고 나는 ATV를 출발시켰다.

4륜 오토바이가 해변을 가로질렀다.

.

.

.

사람이 없는 바닷가를 드나드는 것은 성호뿐만이 아니었다.

여기, 한 남자가 해변을 돌면서 통발을 수거하고 있었다.

육지로 끌어올려진 통발은 형태가 무너져 빈약하기 그지없었다.

"으잇차."

통발이 바닷물을 촤악 쏟아냈다.

그는 다른 통발을 수거해 두 개를 어깨에 메고 걸었다.

그러면서도 주위를 경계하는 걸 게을리 하지 않았다.

좀비는 다 사냥한지 오래지만 몇몇 몬스터들이 출현했기 때문이다.

특히 코볼트는 밤중에 그의 식량을 훔쳐가는 매우 골치 아픈 족속들이었다.

훔쳐가기만 하면 다행인데 어구까지 부숴놓으니 환장할 노릇이었다.

고블린이야 말할 것도 없이 위험하고.

이제 오크와 늑대인간이 출현한다는데 걱정이었다.

연약한 전투능력으로 버틸 수 있을지.

그는 해안도로를 걷다 어촌에 들어섰다.

중심에 있는 마을회관이 그의 아지트였다.

마을이라고 해봐야 집과 펜션 몇 채가 전부인 아주 소소한 규모다.

다른 생존자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어 무척이나 심심한 곳이었다.

'사람은 무서워.'

얼마 전에는 그도 생존자가 많은 상점가에서 살았다.

소소한 선물도 하는 등 다가가려 애썼지만 돌아오는 것은 욕심 가득한 눈이었다.

생존자들은 그의 특성인 생물친화에 군침을 삼켰다.

작물을 키우면 크고 빨리 자라고 동물이 잡아달라고 다가오는 신기한 특성이었다.

전투에는 별로 도움이 안 되지만 생존에는 엄청난 강점을 가졌다.

생존자들은 솔직하게 특성을 밝힌 그를 옆에 두고 감시했다.

―우리니까 너를 보호해주는 거야.

―그러니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야지?

―어디 도망가면 알죠? 확 다리몽둥이를 분질러버립니다. 그럼 못갈 거 아냐.

그 말을 한 사람은 농담이라고 덧붙였지만 스무 살의 청년은 억압적인 분위기를 버틸 수 없었다.

그래서 기회를 틈타 도망 나왔다.

걷고 뛰고 해서 온 곳이 바로 이곳, 어촌이었다.

파밍할 것은 별로 없었지만 그래도 한 명이 그럭저럭 살아갈 정도는 되었다.

특히 생수가 많아서 다행이었다.

청년은 2층으로 올라간 다음 입구를 가구로 봉쇄했다.

민박으로 쓰였던 곳이라 그가 지내기에 딱 좋았다.

얼마 없는 세간은 각이 잡혀 있었고 모든 물자가 제자리에 놓여 있었다.

청년은 20년을 살아오면서 자신만의 물건이란 걸 별로 가져보지 못했다.

그래서 정리정돈에 집착하게 되었다.

별로 할 건 없지만.

'일단은 이것부터 손질하고.'

청년은 세라믹 과도로 능숙하게 해산물을 손질했다.

오늘 잡은 것으로 며칠은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걱정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곧 오크와 늑대인간이 나온다고 하던데.'

이제 며칠 남지 않았다.

청년은 정리를 끝낸 후 앉은뱅이책상 앞에 무릎을 꿇고 공책을 펼쳤다.

그가 목숨만큼이나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었다.

안에는 문장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몇 장 넘기자 오크와 늑대인간에 대한 구절이 나타났다.

―오크 같은 경우는 일직선입니다. 다른 물건에는 신경 쓰지 않고 유저만 쳐다보고 달려옵니다. 뒤로 물러서면 안 됩니다. 옆으로 피해야죠.

―오크의 체형은 확실히 고릴라와 비슷합니다. 근데 고릴라하고 같이 보면 안 되는 게, 투척력이 엄청 좋습니다. 나무창 던지는 걸 보면 깜짝 놀랄걸요?

―늑대인간은···제가 초보들에겐 이렇게밖에 말씀을 못 드리겠네요. 그냥 밤에 나가지 마세요. 그래도 아예 방법이 없는 건 아닙니다. 그게 뭐냐면···

"···"

청년은 문장 전체를 외우려 애썼다.

전투능력이 보잘 것 없는 그에게 있어 김밥조아의 방송에서 발췌한 이 공략은 금과옥조나 다름없었다.

그는 좀비 사태가 터지기 전 김밥조아의 모든 공략을 이 노트에 옮겨 적었다.

한 때는 인터넷에 공략을 올리기도 했지만 모두 무시당했다.

온갖 가짜 공략이 나돌고 있어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방송국과 정부의 대책본부에 정보를 알리자 몇몇 사람들이 그를 찾아왔다.

그들은 정부에서 일하고 있다고 말했으나 청년이 보기엔 아니었다.

정체 모를 불길한 분위기가 그들에게서 풍겼다.

청년은 그들의 추적을 피해 도망쳤고 다시는 정보를 드러내려 하지 않았다.

생존자들 악다구니에서 도망친 후로는 줄곧 혼자였다.

바다와 갈매기를 벗 삼아.

크게 부족하진 않은 생활이지만 그는 하나를 더 가지고 싶었다.

좋은 친구.

그를 구속하고 이용하려 하는 사람이 아니라 좋은 친구와 함께 살고 싶었다.

'김밥조아 같은 사람이라면 괜찮을 것 같은데.'

하지만 무리겠지.

그의 신상은 모르지만 대단한 힘을 가졌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었다.

누구보다 오래 서바이벌 라이프를 플레이한 사람 아닌가.

그런 사람이 자신을 돌아볼 리 없다···

엄지만, 불쌍맨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노트를 덮고 일어섰다.

창밖을 보니 산에서 가을이 느껴졌다.

분명 엇, 하는 사이에 겨울이 성큼 다가올 것이다.

하지만 별 걱정은 없었다.

지만은 추위에 잘 버티는 사람이니까.

사회가 멀쩡했을 때에도 그는 난방과는 친하지 않았다.

아포칼립스가 닥쳤음에도 그의 생활은 이전과 크게 다른 점이 없었다.

'하지만 가끔은 외로워.'

대화할 사람이 없어서 고양이를 주워 길렀지만 몬스터에게 죽고 말았다.

유일한 희망은 경매장이었다.

거기 들어가면 많은 사람들이 반겨줄 것 같았던 것이다.

6레벨에 불과한 지만에겐 머나먼 15레벨.

그래도 열심히 사냥하는 수밖에 없었다.

지만은 무기를 챙겨 밖으로 나섰다.

< 김밥조아와 불쌍맨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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