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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텃세를 깨는 방법 - 1 >

"아···진짜."

악마의 똥가루가 숲에 쏟아졌다.

이전과는 비교도 안 되는 폭설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긴 창을 만들어 똥가루를 뿌리는 악마의 엉덩이를 쑤시고 싶었다.

"으아악!"

내 고함소리에 놀란 새들이 날아갔고 주변의 나뭇가지에 쌓인 눈이 우수수 떨어졌다.

일이나 하자.

나는 창고 위에 쌓인 눈을 시작으로 쉘터의 제설에 나섰다.

200평이나 되는 만큼 내가 치울 눈의 양도 상상을 초월했다.

그렇다고 소홀히 할 수도 없는 것이, 결국 내가 디뎌야 할 땅이기 때문이다.

빙판으로 변한 땅을 다니다가 자빠지면 하소연할 곳도 없다.

"미리미리 치워야지···"

나는 30분간 제설하고 10분간 동굴에 들어와서 몸을 녹이는 루틴을 정확히 지켰다.

이렇게 하니 제설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었다.

조금만 더하면 쉬러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니까.

"으잇차."

마지막 눈을 얼음벽에 던지고 나니 눈이 그쳤다.

윤형철조망 너머의 세계는 완전히 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봄은 언제쯤 오려나···"

너무 추워서 빨리 왔으면 싶었다.

딩고는 이 온도가 딱 적당한 것 같지만.

나는 삽을 창고에 넣고 동굴 안에 들어왔다.

풍뎅이들이 눈치를 채곤 장작 두어 개를 더 넣었다.

"오, 고마워."

화로불의 열기가 얼어붙은 몸을 천천히 녹였다.

나는 의자에 앉아 졸고 있다가 풍뎅이들이 이상한 것을 녹이는 걸 발견했다.

그릇에 담긴 걸쭉하고 투명한 액체···인데.

"그건 뭐냐?"

먹는 거란다.

양해를 구하고 손가락 끝으로 살짝 찍어 맛을 보니 약간 단 맛이 있는 수액이었다.

그러니까 이건 풍뎅이들의 주식이다.

대장 풍뎅이의 그림에 의하면 겨울엔 수액이 얼어붙어 식량 구하기가 곤란하다고.

그 때문에 위험을 무릅쓰고 내 동굴에 들어온 건가 싶었다.

"니들도 고생이 참 많아."

대체 어떤 연유로 지능을 가진 풍뎅이가 되어선 힘들게 살아가는지.

그나마 내가 보금자리를 만들어주어서 요즘엔 살맛이 나는 모양이다.

몸 따듯하지, 위협적인 몬스터도 없지, 배불리 먹을 수도 있으니까.

대가로 내가 요구하는 것은 그들에겐 손쉬운 것들이었다.

요즘에는 시간이 남아서인지 내가 가져다주는 사금을 모아 뭔가를 만들기 시작했다.

손가락만 한 금괴였다.

"잘 다듬었네···"

크기에 비해 묵직한 금괴를 들고 살펴보니 감탄밖에 나오지 않았다.

얘네들 제대로 가공하면 이렇게까지 반짝반짝 광을 낼 수 있구나.

아포칼립스라서 지금은 영 쓸모가 없지만 나중엔 혹시 모르지.

나는 적당히 몸을 녹이고 마비독을 바늘에 발라 콕 찔렀다.

며칠간 이 짓을 한 결과 마비독저항이 2로 올랐다.

이제 고블린들이 쏘는 마비독침을 맞아도 적당히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마비독만 버티면 고블린 쯤이야."

맛보기 미궁과 함께 등장하는 코볼트도 그렇게 어렵진 않다.

녀석들의 장점이라면 야간시야가 끝내주게 좋다는 것뿐이기 때문이다.

뭐 몬스터들 피해 밤에 파밍하는 사람에게야 재앙이겠지만.

하여튼 그 이후가 되면 난이도가 확 뛰어오르게 된다.

대망의 오크와 늑대인간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오크는 낮에, 늑대인간은 밤에 주로 활동한다.

물론 주 활동시간이 그렇다는 거지 아예 자취를 감추는 건 아니다.

밤에 사냥하러 나서는 오크도 얼마든지 있다는 말.

이 녀석들부터는 정면에서 상대하기가 매우 어렵다.

생명력도 높아서 화살 몇 대 쏴봐야 씹어버린다.

"점화석이 있으면 그나마 대처가 쉬운데···"

보유량은 풍뎅이들이 가져온 2개뿐이다.

캡사이신 스프레이도 쓰기가 어렵고···

잠깐. 황소고추가 있었지.

나는 텃밭에서 황소고추 몇 개를 따왔다.

장갑을 2개 끼고 마스크까지 착용한 후 잘게 빻았다.

매운 냄새가 동굴에 솔솔 퍼지자 딩고가 안으로 도망가 버렸다.

"크···진짜 독하네."

이걸 오크나 늑대인간 코에 던질 수만 있다면 10초는 무력화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

특히 늑대인간은 후각이 예민해서 발랑 뒤집어질지도 모른다.

문제는 이걸 어떻게 모아서 던지냐는 것.

"흠···"

나는 풍뎅이들이 녹인 수액을 보다가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황소고추 빻은 것과 밀가루를 합쳐 덩어리로 만든 다음 수액으로 코팅하면 어떨까?

추운 곳에 놔두면 언 상태로 유지될 텐데.

"일단 해보자."

남아도는 게 시간이고 안 되면 다른 방법으로 시도하면 된다.

나는 고춧가루와 밀가루를 섞은 다음 수액통에 넣고 굴렸다.

그러자 약간 끈기 있는 덩어리가 되었다.

추운 곳에 방치하자 그대로 사탕처럼 변해버렸다.

"되려나 모르겠네."

나는 새총에 넣고 동굴 안에서 쏘려다가 간신히 참았다.

사고 칠 뻔했네.

밖에 나가 얼음벽에 쏘니 수액 코팅한 것이 퍼석 깨지면서 내용물이 확 퍼졌다.

"···이거 되겠는데?"

단숨에 몬스터를 제압할 도구가 필요한 건 아니었다.

몇 초만이라도 무력하게 만들 수 있으면 충분했다.

이 고추폭탄은 그 요구에 딱 들어맞았다.

겨울에만 쓸 수 있다는 단점이 있지만 그건 나중에 개량하면 되고.

얼음벽에 가까이 가본 나는 뇌를 흔드는 독한 냄새에 주저앉고 말았다.

"컥!"

숨이 턱 막히고 눈코입에서 물이 줄줄 흘러나왔다.

왕년에 가스실에 들어갔을 때보다 더 지독한 것 같다.

매운 냄새가 사라졌을 거라 생각한 내 잘못이다.

"이, 이 정도면 훌륭해···"

몬스터는 더 지독하게 당할 거라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나는 동굴에 들어가 쇠장갑을 끼고 에메라스 창날을 살펴봤다.

"이거 비도로 만들어서 던지면 효과 죽이겠는데."

워낙 날카롭기 때문에 창날로 만들어서 찌르나 비도를 날리나 별 차이가 없다.

어떻게 작은 손잡이만 달 수 있으면 훌륭할 것 같은데.

대장 풍뎅이에게 줘보니 솜씨 좋게 에메라스에 구멍을 내고 손잡이를 붙였다.

금속가공만 잘하는 게 아니라 그냥 전반적으로 일을 잘하는 것 같다.

"훌륭해."

나무토막에 던져봤지만 손잡이가 맞았는지 튕겨나가 옆의 롤휴지에 틀어박혔다.

"이건 진짜 위험하고."

잘못 던졌다간 몸에 구멍이 나게 생겼다.

상당한 연습이 필요하겠어.

나는 풍뎅이들에게 부탁해 에메라스 비도와 비슷한 크기의 비도를 몇 개 만들었다.

이걸 마음먹은 대로 꽂아 넣을 수 있다면 늑대인간이 와도 두렵지 않을 것이다.

"비도집 만들면 철가루로 코팅해줄래?"

허벅지에 메고 필요할 때 꺼내 집어던질 생각이었다.

풍뎅이들은 흔쾌히 승낙했다.

정말 좋은 녀석들이야.

.

.

.

어느덧 9월이 되었다.

현실은 여전히 덥지만 그래도 밤에는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숲을 점령하고 있던 한기도 한풀 가셨다.

나는 텃밭에 앉아 비닐 밑을 파헤쳤다.

주먹만 한 감자가 만져졌다.

"언제 이렇게 컸냐."

감자를 고블린이 튀어나올 때 심었었나?

현실에선 이제 싹이 솟을 시긴데 이만큼 자라다니 믿기지가 않았다.

이 숲에 어떤 힘이 작용하는 게 틀림없다.

나는 줄기를 자르고 비닐을 걷어 감자를 캤다.

몇 개는 씨눈을 기준으로 잘라서 씨감자로 만들 예정이었다.

"오늘 저녁은 맛있는 찐감자다."

딩고는 캐낸 감자에 덤비고 난리가 났다.

나는 바구니를 동굴 안에 들이고 영상을 검색했다.

고블린 소굴 다음에 뭐가 나오더라···

"스피드런 이벤트네."

미궁의 최심부에 가장 빨리 도달하는 유저에게 보상이 주어지는 이벤트다.

일종의 맛보기 미궁으로 곳곳에 차원문이 열린다.

잘하면 서울에 있는, 아니 어딘가에 있을 토공이나 다른 고인물을 만날지도 모른다.

"지금 만나도 뭐 큰 문제는 없지만서도."

미궁에는 지금까지 나왔던 몬스터가 잔뜩 도사리고 있다.

포인트를 목적으로 싸울 수도 있겠지만 별로 현명한 방법은 아니다.

정말 아무것도 안 보이기 때문.

"안에서 볼 수 있는 수단이 거의 없지···"

기껏해야 횃불과 발광석 정도인데 몬스터 불러들이기에 딱 좋다.

결국 맨눈으로 돌아다녀야 하는데 스킬이 없는 사람은 엄청 곤욕스럽다.

원래 게임에선 초반에 열렸기에 이걸 하는 사람도 많지 않았고.

그나마 나은 점은 이벤트라서 몬스터의 추적 능력이 대폭 저하되어 있다는 것 정도다.

"이걸 아는 사람이 있으려나."

혹시 해서 경매장에 들어가니 마침 그 주제가 뜨거운 감자였다.

―님들 스피드런 이벤트 언제 일어나는지 암?

―안알랴줌.

―여기 아는 사람들 없을걸요.

―그 새끼는 알듯.

나는 계속 그 새끼로 불릴 운명인가.

―분명히 초반은 확실한데···

―아놔 지형감지 하나밖에 못 얻었는데 미궁 어떻게 뛰지?

―스킬 얻었다고 은근히 자랑하죠?

―발광석 들고 뛰면 됨.

―그럼 몬스터들이 좋다고 쫓아오겠지 뇌가 있으면 생각좀 해라.

―좆까 씨발아.

―게임에선 클리어하면 따로 랭킹창이 열렸던 것 같은데.

―말 들어보면 존나 유명한 이벤트인 것 같은데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어?

―다른 데서 뒤지기 바빴거든. 고인물들도 초반이라 안했을 거임.

―그 새끼만 빼고.

―이번에 1등은 그 새끼일듯?

―아니지 병신아. 특성 있잖아? 블링크면 그 새끼보다 훨씬 빠르지.

―은신으로 몬스터 피해서 다니면 1등 확정이네.

―근데 님들 그 새끼가 무슨 특성인지 암?

―그게 최대의 미슷헤리임.

―토공은 부활이고, 오리궁뎅이는 좀비 조종인가? 김밥조아랑 생존자1은 뭐지?

―김밥조아가 누구죠? 아이디가 그 새끼 아니었나?

―저새끼 간첩임.

―하여튼 난 그 새끼만 1등 못하면 만족하겠는데.

―씹인정.

―우리 연합하쉴?

―그럴까요?

―님들 잘 생각하셈. 들가서 뒤통수치면 하나는 못 나옴ㅅㄱ

―ㅋ?

―여기서 그 새끼 그 새끼 해대는 놈들 나중에 아이디 밝혀지면 웃기겠닼ㅋㅋ

―그럴 일 없어 병신앜ㅋㅋㅋ

―잠수함 패치 있죠? 킹능성 있죠?

―허미시펄.

익명 커뮤니티는 언제나 개판이다.

나에 대한 증오도 여전하고.

설사 영상을 풀었다 해도 욕먹는 건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사람들은 분풀이 할 대상을 찾고 싶은 거니까.

"그늘포도만 있으면 이길 수도 있는데···"

풍뎅이들이 가져오지 않으려나.

경매장을 살폈지만 정작 경매품은 얼마 되지 않았다.

다들 빠듯하게 살다 보니 올릴 아이템이 없는 것이다.

나도 당장 포인트가 필요한 건 아니니.

"느긋하게 생각하자."

스케줄을 체크하자 계곡 너머의 숲 탐사가 눈에 띄었다.

날도 슬슬 풀렸고 한번 가볼까?

아울베어 때문에 갈 엄두도 못 냈는데 녀석은 이미 족쳤단 말이지.

"딩고야, 밖에 나갈까? 밖에?"

녀석은 뭐가 그리 좋은지 쉘터 안을 방방 뛰어다녔다.

하긴 숨어 다녀야 하는 현실보다는 숲이 훨씬 편하겠지.

"오케이. 잠깐만 기다려."

나는 배낭에 필요한 것들을 챙기고 권총을 슬롯에 넣었다.

드론을 띄워 계곡 너머로 보내자 호수가 보였다.

"엄청 크네."

저렇게 큰 호수엔 왠지 괴물이 살고 있을 것 같아 무서웠다.

드론을 계속 움직였지만 위험한 건 없었다.

이쯤 정찰했으면 됐지.

나는 딩고와 함께 모처럼 쉘터 밖으로 나왔다.

.

.

.

계곡 너머의 숲은 분위기가 달랐다.

높은 나무가 많아 어두웠고 자욱하게 내려앉은 안개가 음침함을 더했다.

하지만 딩고는 분위기 따위 신경 쓰지 않고 씩씩하게 앞서나갔다.

"너만 믿는다."

그나저나 이런 숲이라면 늑대인간이 튀어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어둡고 음침한 숲.

낯선 장소에 위축된 인간.

늑대인간이 딱 좋아하는 분위기 아닌가?

나는 딩고와 함께 돌아다니다가 나무 밑에서 그늘포도 덤불을 발견했다.

"대박."

원래는 이렇게 자라는 거였구나.

나는 주머니를 열고 주섬주섬 그늘포도를 따서 넣었다.

당분간은 밤에도 걱정 없이 다닐 수 있다.

그때 팔뚝의 솜털이 주뼛 섰다.

"···"

딩고가 자세를 낮추고 두리번거렸다.

이 숲에 뭔가 있다.

우리는 지체하지 않고 차원문에 들어갔다.

순간 뭔가가 헥헥거리며 차원문 앞을 지나치는 게 보였다.

시커먼 털을 가진 늑대인간이었다.

"지금 나오면 좀 곤란한데."

녀석은 보통 몬스터와 달리 끈기가 엄청나다.

사냥감의 냄새가 사라질 때까지 추적을 멈추지 않는다.

존재감은 사라졌지만 냄새는 남아 있을 것이다.

크르르륵.

녀석은 차원문 주위를 킁킁거리며 돌아다녔다.

힘으로 보나 민첩함으로 보나 정면에서 대들 상대는 아니었다.

"괜히 위험을 무릅쓸 필요는 없지."

기다리자. 녀석이 포기할 때까지.

아니면 총을 쏴볼까?

탄수가 많은 토가레프를 가지고 온 게 조금 아쉬웠다.

타격은 줄 수 있겠지만 치명상은 입히기 힘들다.

"소총탄이 별로 없으니까···"

녀석은 킁킁거리며 차원문 바로 앞에 다가왔다.

거기서 냄새가 제일 많이 나나보지?

잘하면 좋은 스킬 하나 얻겠는데.

제발 늑대의감각이나 투쟁본능 둘 중 하나만 나와라.

나는 스킬을 얻을 욕심에 슬롯에서 토가레프를 꺼내려다가 간신히 멈췄다.

지금 내가 숨은 곳은 현실의 투룸이다.

철사병이 여전한테 총이라니.

슬롯은 일종의 아공간이라 괜찮지만 호출하는 순간 부스스 부서질 것이다.

"젠장."

어떻게든 나가야 총을 쓸 수 있는데···

대신 나는 에메라스 창을 슬롯에서 꺼내 서성이는 늑대인간의 배를 조준했다.

힘껏 찌르자 저항도 없이 쑥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놀랍게도 늑대인간은 내 창을 잡고 확 끌어당겼다.

"윽!"

하마터면 창대와 함께 끌려 나갈 뻔했다.

나는 손을 털고 늑대인간을 노려봤다.

역시 치명상은 아니군.

놀라운 체력재생으로 피가 금방 멎었다.

상처 입은 녀석은 절대 차원문 정면에 있지 않았다.

뭔지는 몰라도 위험하다는 걸 눈치 챘네.

날카로운 눈빛을 번뜩이며 크르륵대고 있는데 왠지 텃세를 부리는 것 같았다.

"거긴 니 영역이라 이거냐?"

그렇다면 텃세를 깨주마.

< 텃세를 깨는 방법 - 1 > 끝

< 텃세를 깨는 방법 - 2 >

늑대인간은 에메라스 창을 부러뜨리고 차원문 주위를 계속 돌아다니고 있었다.

뭔가 있는 건 확실한데 안 보이니 속이 타겠지.

나는 으르렁거리는 딩고에게 손바닥을 보여주고 준비물을 점검했다.

"새총, 고추폭탄, 토가레프···"

에메라스 창도 필요하다.

부러졌지만 관통력 어디 안 간다.

문제는 타이밍.

지금의 나는 늑대인간의 움직임을 따라잡지 못한다.

그러니 정신을 못 차리게 해놓고 일방적으로 공격해야 한다.

조금이라도 멈칫하면 놈의 발톱이 내 몸을 갈기갈기 찢을 것이다.

"굳이 정공법으로 상대할 필요는 없지, 안 그래?"

고추폭탄을 꺼내자 딩고가 기겁하고는 구석으로 도망갔다.

"딩고 넌 거기 있어."

나는 새총에 고추폭탄을 장전하고 늑대인간을 노려봤다.

인내심이 슬슬 바닥나지 않냐?

당장이라도 날 찾아내 찢어발기고 싶지?

크르르―

녀석의 눈에 핏발이 섰다.

투쟁본능이 활성화되었는지 움직임이 보이지 않았다.

저 상태에서 휘두르는 발톱을 막으려면 공격을 유도하는 수밖에 없다.

"가라앉아라···"

잠시 기다리고 있으려니 녀석이 갑자기 느려졌다.

투쟁본능 스킬이 비활성화된 것이다.

나는 녀석이 정면에 왔을 때 새총을 당기고 놓았다.

고추폭탄이 녀석의 가슴팍에 부딪쳐 퍼석 깨져나갔다.

크륵?

녀석은 당황한 듯 팔을 마구 젓다가 코를 킁킁댔다.

그거 실수야, 친구.

늑대인간은 황소고추 분말을 깊게 들이마시곤 제자리에서 펄쩍 뛰어올랐다.

크라아악!

녀석은 콧잔등을 발톱으로 마구 비비며 발광을 해댔다.

피와 침이 사방으로 튀었고 주변의 흙이 퍽퍽 날아갔다.

저 지독한 분말을 깊게 들이마셨으니 영혼이 사출되는 느낌일 것이다.

늑대인간에게 영혼이 있는지는 둘째 치고.

"시작."

나는 조용히 차원문 밖으로 나간 다음 토가레프가 수납된 슬롯을 호출했다.

탕탕! 탕!

총 세 발이 늑대인간의 가슴과 머리를 두들겼다.

녀석은 내 예상대로 죽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발광하고 있었다.

원체 질긴 녀석이라 당연하다.

나는 창을 수습하고 차원문을 닫은 채 뛰기 시작했다.

숨바꼭질도 나쁘진 않겠지만 녀석이 견디다 못해 도망칠 위험이 있었다.

반드시 죽이고 스킬을 얻어야 한다.

전력을 다해 뛰다 보니 뒤에서 늑대인간의 거친 뜀박질 소리가 들렸다.

거리는 그렇게 가깝지 않으나 방심하면 눈 깜짝할 사이에 따라잡힌다.

이 짓거리를 워낙 많이 해봐서 잘 안다.

"훅, 훅!"

나는 몸을 돌리고 권총을 꺼내 쏘았다.

타탕!

달려오던 늑대인간이 기세를 이기지 못하고 거꾸러졌다.

원래라면 씹고 달려올 테지만 녀석도 타격을 꽤 입은 상태였다.

나는 적당한 나무를 발견하고 갈고리를 꺼내 던졌다.

갈고리가 튼튼한 나뭇가지에 핑핑 감겼고 로프가 축 늘어졌다.

"흡! 차! 흡! 차!"

이거 마치 유격하는 기분이다.

교관은 날 씹어 먹을 준비가 되어 있는 늑대인간.

로프를 잡고 필사적으로 기어오르자 늑대인간의 포효가 숲을 울렸다.

커헝!

하지만 녀석의 점프공격은 내 발을 스치지 못했다.

나는 팔로 몸무게를 지탱하며 밑을 내려다봤다.

늑대인간이 나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었다.

녀석의 서전트 점프는 대략 3m니까 내 발을 공격하기엔 무리다.

저러다가 나무를 타고 오르는 게 빠르다는 걸 깨닫겠지.

크르르륵!

아니나 다를까 녀석은 나무에 발톱을 박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너 잊은 거 하나 있지?

내가 고추폭탄을 꺼내자 늑대인간의 콧잔등이 씰룩거렸다.

선택의 순간이다.

녀석은 과연 나무에서 떨어져 고추폭탄을 피할 것인가?

물론 나는 그렇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늑대인간은 나에 대한 증오로 크게 주둥이를 벌리고 이빨을 드러냈다.

"입 되게 크네. 이거나 먹어라."

내가 집어던진 고추폭탄이 정확히 녀석의 주둥이에 빨려 들어갔다.

녀석은 눈을 부릅뜨더니 뒤로 벌러덩 넘어졌다.

크아아악! 카아악!

그 뒤로는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처절함의 향연이었다.

모르는 사람이 봤으면 자해한다고 느꼈을 것이다.

나는 토가레프로 녀석의 머리를 조준하고 발사했다.

몇 발의 총성이 울리자 늑대인간의 움직임이 현저히 느려졌다.

아무리 생명력이 강해도 머리에 총을 이렇게 맞고 무사할 수는 없다.

녀석은 피로 범벅이 된 주둥이로 가쁘게 숨을 내쉬었다.

빨리 끝내주마.

나는 에메라스 창을 녀석의 심장이 있는 곳에 꽂았다.

카흑!

늑대인간의 육체가 경련하더니 축 늘어졌다.

메시지가 파파팟 떠올랐고 그제야 나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헉, 헉···"

위험했어.

몸이 가벼워졌다고 해도 로프만 타고 올라가는 건 꽤 부담이었다.

토공이 준 투스탯 반지가 없었더라면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다음에 한 턱 내야겠구만."

나는 뻐근한 어깨를 주무르며 메시지를 확인했다.

「레벨이 16으로 올랐습니다」

「포인트를 25 획득했습니다」

「스킬 : 투쟁본능을 획득했습니다」

"예스."

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레벨이나 포인트는 큰 감흥이 없었다.

하지만 투쟁본능은 달랐다.

이건 흔히 말하는 2티어 스킬이다.

"스탯을 올려주는 스킬은 별로 없거든."

서바이벌 라이프에서 스탯의 한계치는 20정도였다.

제작진에서 정한 인간의 한계가 그 정도라는 이야기다.

하지만 2티어 스킬이 있으면 특정 상황에서 한계를 돌파할 수 있게 된다.

"1티어는 더 엄청나지."

1티어 스킬을 갖고 있는 몬스터로는 대표적으로 오우거가 있다.

스톤스킨.

모든 대미지를 50%로 줄여 받는다.

오우거는 엄청난 맷집과 방어력을 갖고 있는데 이 스킬까지 활성화되면 당최 죽어주질 않는다.

"주먹으로 콘크리트 벽을 때리는 거나 마찬가지지 뭐."

하여튼 투쟁본능은 3분 동안 건강과 근력, 민첩을 20%나 더해준다.

차원문 앞에서 돌아다니던 늑대인간이 갑자기 빨라진 것도 이 스킬 덕분이다.

그러나 발동조건이 조금 까다롭다.

맹렬한 살의를 가질 것.

적당히 싸우고 치우겠다고 마음먹으면 절대 활성화되지 않는다.

물론 게임 상에선 적당히 음성 입력하는 식이었지만.

"늑대인간 이놈들이 성격이 나쁜 이유가 있어."

뭐 그래봐야 나와 비슷하다.

나는 상태창을 불러냈다.

「레벨: 16 포인트: 505

건강: 12(+2) 근력: 13(+2) 민첩: 9 재주: 12(+2) 인지: 10(+4) 

특성: 전용 차원문 개방

스킬: 생존갈망, 지형감지2, 기척없는움직임, 생명체추적, 마비독저항2, 투쟁본능 효과:-」

스킬 4개만 더 얻으면 10개가 된다.

아이템 장착 한계가 5개이듯, 스킬도 10개가 한계다.

새로 스킬을 얻으면 가장 오래된 스킬이 교체되는 식이다.

내가 처음 얻은 스킬은 생존갈망이다.

체력이 늘어나고 공격을 잘 당하지 않게 되다 보니 발동횟수가 현저히 줄어들었다.

"괜찮은 스킬이긴 한데."

없어서 불편하냐면 그 정도는 아니었다.

더 나은 스킬을 얻을 기회가 있으면 갈아치우는 것도 나쁘진 않다.

그나저나 늑대인간 이 녀석 아이템을 안 주네. 아쉬워.

곧 나올 미궁 스피드런을 노려봐야 할 것 같았다.

나는 늑대인간의 발목을 잘라내고 멀리 던져버렸다.

그리고 차원문을 열었다.

"딩고, 딩고."

녀석이 헥헥거리며 뛰쳐나왔다가 늑대인간의 사체를 보곤 낑낑댔다.

언제쯤 이 털뭉치와 함께 싸울 수 있을까.

적어도 두 계절은 지나야 할 것 같았다.

나는 딩고와 함께 쉘터로 돌아왔다.

.

.

.

유현이의 특성은 인형제작이다.

인형을 만들어 마음대로 움직이고 또 인형을 통해 세상을 보고 들을 수 있다.

특성의 이름은 저렇지만 사실 비행기여도 큰 상관은 없었다.

유현이는 전투능력을 가지지 못한 대신 정보 캐내기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종이비행기를 만들어서 주위를 한 바퀴 빙 돌면 생존자와 몬스터들의 윤곽이 드러난다.

유현이와 미경은 성호의 부탁을 받고 근처 원룸 건물에 올라가 종이비행기를 날렸다.

종이비행기는 황량한 원룸촌을 지나쳐 골프 클럽으로 향했다.

한참 비행기를 조종하고 있던 유현이 탄식했다.

"와, 텃세 너무 심해."

옆에 엎드린 미경이 물었다.

"무슨 텃세?"

"대충 설명하자면···여기 온 사람들 대체로 식량이 부족하잖아? 우린 성호 형이 도와줘서 괜찮지만···"

"예전부터 느낀 건데 너 너무 설명충이야."

"빌드업이 있어야 이야기가 되지."

"알았어, 빨리 말해봐."

"하여튼 저 경준이라는 사람이 그걸 이용하려고 하네. 식량 주는 대신 확실히 자신의 편에 서라고 막 윽박지르네."

"자기편에 서는 게 어떤 건데?"

"···사람 죽이기?"

"뭐?"

미경의 눈썹이 찡그러졌다.

그녀가 재촉하려는 순간, 유현이 손을 들어 저지했다.

"잠깐만 기다려봐. 사람들이 흥분해서 잘 안 들려."

"알았어, 빨리 얘기해 줘."

잠시 후 유현은 엉거주춤 일어서서 이마에 달라붙은 땀을 훔쳐냈다.

"와···진짜 지독하구나. 경준이라는 사람."

"어떤데?"

"뭐냐면···"

유현이 들은 이야기는 이랬다.

경준은 박힌 돌이라 할 수 있다.

그는 골프장을 확실히 지배하고 있으며, 굴러들어온 돌인 생존자들을 못마땅해 한다.

사람이 모이면 몬스터도 모이니까.

그는 몇몇 사람들에게 말했다.

―황량한 주변 풍경을 보라고. 뭘 먹고 살 거야? 그에 비해 생존자들은 넘쳐나지. 조금 있으면 좀비들이 몰려들겠네. 그 새끼들 인간 하나만큼은 귀신같이 찾아낸단 말이지.

―그러면 어떻게 하잔 말입니까?

―숫자를 줄이자고.

사람들은 경악했다.

설마 살인을 하란 말인가?

―한 명까지는 살인자 안 되는 거 알지? 죽이고 와. 그럼 내가 식량을 주지.

―아니 무슨 그런 말을 합니까? 사람을 죽이라뇨.

―당신 돌아간 뒤에 몸조심 좀 해야겠어?

남자는 주위 사람들이 자신을 묘한 눈으로 보고 있는 걸 눈치 챘다.

어느새 경준의 말에 넘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아, 아니···

경준이 히죽 웃었다.

―내 회사에 납품할 업체를 고르는 거야, 지금. 납품 못하면 굶어 죽거나 다른 놈들 공격해야 된다고. 그게 내가 제의한 것과 뭐가 다르지? 이 간단한 게 이해가 안 되나?

그러니까 경준은 식량을 미끼로 사람들을 조종하려는 것이다.

여기에 온 생존자들은 대부분 배낭 하나밖에 가지고 있지 않았다.

며칠 치 식량도 없는 상황.

그에 비해 경준은 튼튼하기 그지없는 벙커를 갖고 있었다.

비축물자도 엄청날 것이다.

누군가 말했다.

―이 근처에 미곡센터도 있어요! 흔들리지 맙시다!

―쌀만 퍼먹을 거야? 반찬도 있어야지 않겠어? 물은 어때? 낙똥강 퍼먹을 자신 있어?

―김해나 진해로 가면 돼···

―거기 놈들이 퍽이나 당신들 받아주겠다. 이보셔들. 굴러오는 돌은 아무도 안 좋아해.

―뭣하면 다시 저기로 가면 되잖소!

누군가 도심을 가리키자 경준이 그를 비웃었다.

―방사능 무서워서 도망 온 주제에 다시 들어가겠다고? 방사능 좀비로 변해서 나오는 거 아냐?

사람들의 인상이 확 구겨졌다.

경준은 그들을 재촉했다.

―잘 생각해. 나와 손을 잡으면 일은 빡세지만 그럭저럭 먹고 살 수는 있는 거야. 나쁜 게 아니라고.

―경준씨를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일단 얼마라도 식량을 주면···

누군가 그렇게 말했지만 경준의 눈은 냉랭했다.

―지금 착각하는 것 같은데, 당신들이 내 신뢰를 얻어야 돼. 반대가 아니라고.

사람들의 반응은 반반으로 나뉘었다.

살인을 하면서까지 이 사람 말을 들어야 되나?

어딜 가도 위험하고 고달픈데 이 사람과 손을 잡는 것도 나쁘진 않지.

아무래도 반대하는 쪽이 다수였다.

그들은 몇 차례 경준에게 애원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경준은 열 명이나 되는 부하들 사이에 있어서 공격하기도 여의치 않았다.

―빨리 결정해, 레이드 올라.

주변에 좀비는 없지만 혹시 모른다.

경준의 재촉에 세 명이 나와 장갑을 낀 그와 악수했다.

그의 눈빛이 확 변했다.

―이 새끼들 조져.

―뭐?

열세 명이 다섯 명에게 달려들었다.

처참한 비명이 골프장에 울려 퍼졌다.

한 명은 은신으로 몸을 숨겼으나 부하 중 하나가 페인트를 뿌리는 바람에 발각되었다.

―으아아!

경준이 활을 한 남자에게 건네주었다.

―잔디가 푹푹 파이지? 잘 보라고.

그는 고민하다가 결국 활을 쐈다.

털썩.

다섯 명이 모두 죽었다.

경준은 남은 세 명에게 말했다.

―난 신상필벌이 확실한 사람이야. 이거 가져가.

부하가 배낭 세 개를 내려놓았다.

개봉하니 식량과 생수로 가득했다.

셋은 희희낙락하며 배낭을 챙겼다.

―잘 얘기해서 다른 사람도 데리고 와. 알겠지?

클린한 생존자를 데려와 살인을 시키겠다는 뜻이다.

섬뜩했지만 누구도 경준의 말을 거역할 수 없었다.

이미 그들은 한 배를 탄 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란 거야."

유현의 얘기는 여기까지였다.

미경은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무, 무슨 저런 사람이 다 있어? 자기 말 안 들으면 다 죽이겠단 거잖아."

"수연 누나가 말했잖아. 부하들 시켜서 살인 저지르고 타임쉘터도 마음대로 열려고 하고 원래 저런 사람이야."

"그럼 어떻게 해?"

"나한테 물어도 뭐···성호 형이 감시하라고 한 거니까 비행기 날려봐야지."

"성호 아저씨라고 해도 혼자서는 해결 못하잖아. 사람이 너무 많아···"

미경이 걱정 섞인 목소리로 말했지만 오히려 유현의 타박을 받았다.

"넌 사냥도 같이 해봤으면서 못 믿어?"

"아니 그게 아니라."

"난 믿어. 형은 우리와는 뭔가 다른 사람이거든. 수연 누나가 말했잖아. 배신만 안 하면 알게 모르게 우릴 도와줄 거라고. 하라는 거 하면 돼."

"···"

미경은 여기 도착하자마자 식량을 발견한 그를 떠올리곤 입을 다물었다.

근처에 경준이라는 지배자가 있는데도 투룸에 그만한 식량이 남아 있었다는 건 믿기 힘든 일이었다.

확실히 그에겐 뭔가 있다.

하지만 그걸 밝혀내려 하면 좋은 결말이 나오지는 않을 것 같았다.

미경은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알았어. 빨리 아저씨한테 비행기 날려."

"근데 너 왜 형한테 자꾸 아저씨라고 그래? 수연 누나가 나이 더 많잖아."

"내 맘인데 뭐 어때."

"성호 형이 그거 때문에 상처받았다고 그러던데···누구는 언니고 누구는 아저씨고."

"···진짜?"

"당연히 농담이지. 어? 너 얼굴 빨개졌다."

"야!"

미경이 유현이의 엉덩이를 걷어차자 비행기가 하늘로 날았다.

성호는 창가에서 비행기를 잡아 살펴봤다.

"왜 쓰다 말았지?"

중요한 정보는 적혀 있으니 상관없나.

그는 골프장 전경을 종이에 그리고 생각에 잠겼다.

권씨는 좀처럼 골프장 밖으로 나오려 하지 않았다.

전에 하도 털려서인가?

'결국 내가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건데.'

튼튼한 벙커를 뚫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문까지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건 아니었다.

'10명이 넘는 인원을 제압해야 되는군.'

며칠 전의 그라면 부담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쓸 만한 아이템과 스킬을 얻었으니까.

그것들을 잘 조합해서 공략한다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그리고 권씨는 이번 기회에 확실히 죽일 생각이었다.

살인자에 등록되지 않으면서 살인을 해야 한다는 얘기.

주변에 몬스터가 없어서 녀석들을 이용하긴 어려웠다.

하지만 성호는 금방 방법을 떠올렸다.

'그거면 되겠어.'

< 텃세를 깨는 방법 - 2 > 끝

< 텃세를 깨는 방법 - 3 >

세상이 아포칼립스로 변하면서 밤은 더욱 무서워졌다.

달빛이 없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생존자의 흔적이나 고블린이 피워 놓은 불빛이 어렴풋이 보일 뿐.

어둠을 더듬어 길을 재촉하노라면 어디선가 하얀 해골이 튀어나와 공포를 선사한다.

그들을 피해 좀비를 사냥하다간 좀비보다 더 무서운 키퍼가 튀어나온다.

때문에 어지간한 강심장이 아니고서야 밤에는 외출을 자제하는 게 현실이었다.

물론 여러 이유로 밤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이제부터 권씨의 벙커를 공략하려는 나 같은 놈 말이다.

나는 주차장 옆의 정원에 숨었다.

종이비행기로 미리 확인한 결과 권씨의 벙커는 저기 클럽하우스 안이다.

보초 둘은 연신 하품을 해가며 지루한 시간을 달랬다.

"저놈들 지루한가보네."

세뇌를 당했어도 기본적인 생각이란 건 되는 모양.

"벙커 하나는 아카데미 안에 있겠고."

나머지 하나는 확인이 되지 않았다.

벙커간의 거리는 상당히 떨어져 있어서 좀비 레이드를 당할 염려는 없어 보였다.

덕분에 나도 작업이 편해졌고.

"낮에 확인한 인원이 12명이었지."

보초가 둘이니 안에 있는 사람은 권씨까지 포함해 셋이다.

"여자 둘하고 있는 거냐. 팔자 좋네."

오늘부로 그 좋은 팔자도 끝이다.

나는 계획을 점검했다.

부하들의 무력화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저들을 아는데 저들은 나를 모른다는 게 크다.

다른 벙커에서 지원이 온다면 차원문으로 입구를 막아버리고 천천히 조지면 된다.

하지만 의외로 벙커 자체가 문제였다.

콘크리트로 이뤄진 벙커는 내 수준에선 파괴가 불가능했다.

거기에 문은 강화 플라스틱이었다.

화재에도 녹지 않는다는 그거다.

유독가스가 문제인데 2중문이라서 안쪽은 멀쩡할 것 같았다.

"자식 준비 철저하게 해놨네."

벙커 밖에도 여러 가지 장애물들을 충실히 설치해뒀다.

가히 난공불락의 요새라 부를만했다.

"그래도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

정면에서 뚫지 못한다면 차근차근 말려죽이면 된다.

나는 실드를 열어 그늘포도 한 움큼을 씹었다.

「효과:야간시야 상승」

「그늘포도의 효과로 인해 야간시야가 상승합니다」

장애물과 보초 둘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효과 죽이네.

나는 조심조심 보초들에게 기어갔다.

여기서 쓸 것은 마비독 볼트를 장전한 석궁이다.

볼트를 얇게 만들었기 때문에 허벅지가 좀 뚫려도 죽지는 않을 것이다.

"1번 슬롯."

왼쪽 팔 옆에 볼트가 장전된 석궁이 나타났다.

나는 적당히 접근한 후 보초에게 볼트를 발사했다.

투박한 소리와 함께 녀석이 허벅지를 움켜쥐고 쓰러졌다.

"어?"

다른 보초가 의아해하는 찰나, 나는 2번 슬롯을 호출해 볼트를 쏴버렸다.

빌라의 양아치 둘에게서 루팅한 것이다.

마비독을 듬뿍 발랐으니 30분 정도는 조용하겠지.

나는 쓰러진 보초들을 수풀에 숨겨놓고 문을 살폈다.

이게 그렇게 튼튼하다 이거지.

하지만 금속가공의 장인인 풍뎅이들의 공격까지 막지는 못할 것이다.

"차원문 열어."

손을 넣자 미리 기다리고 있던 풍뎅이 네 마리가 손바닥 위에 올라왔다.

어서 와, 현실은 처음이지?

나는 조용히 말했다.

"이거 뚫을 수 있을까? 요만큼만."

화염캔을 집어넣을 정도의 구멍을 지정하자 대장 풍뎅이가 머리를 끄덕끄덕했다.

녀석들이 문에 달라붙어 작업을 하는 동안 나는 볼트를 석궁 2개에 장전했다.

마비독침은 이게 마지막이다.

풍뎅이들은 종이를 갉아먹는 애벌레처럼 강화 플라스틱을 갉았다.

작은 덩치 어디에 저런 힘이 숨어있는지 모를 지경이다.

잠시 기다리자 내가 원한 것보다 더 큰 구멍이 뚫렸다.

안에는 시커먼 나무로 된 문이 자리 잡고 있었다.

튼튼하겠지만 화염캔에는 못 버티겠지.

"잘했어. 일단 동굴에 들어가 있어."

풍뎅이들이 사라졌고 나는 화염캔에 불을 붙이고 안에 집어던졌다.

풍뎅이들이 뚫은 구멍 사이로 연기가 모락모락 솟아올랐다.

나는 차원문에 숨었다.

조금 기다리려니 문이 활짝 열리며 연기 사이로 누군가가 뭔가를 던지는 게 보였다.

"투척용 소화기군."

발화점을 향해 던지면 용기가 깨지면서 소화액이 화재를 진압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점화석으로 일어난 화재는 쉽게 진압되지 않았다.

소화기 여러 개가 깨져나갔고 그제야 화재가 잦아들었다.

시커먼 연기 사이로 방화복을 입은 누군가가 보였다.

권씨가 아닌 다른 사람이다.

나는 망설임 없이 그의 허벅지에 볼트를 발사했다.

"악!"

높은 톤의 목소리를 가진 여자가 풀썩 쓰러졌다.

남은 사람은 권씨와 여자 하나인가?

나는 고추폭탄 두 개를 사람이 숨었을 만한 곳에 던졌다.

구석에서 격한 기침이 터져 나왔다.

"카학! 카하악!"

또 여자군.

권씨는 부하 둘을 내세운 채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벙커 안에서 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의 그 새끼지!"

울리는 걸 보니 방독면을 썼나 보다.

나는 차원문에서 빠져나와 대답했다.

"그래. 맞다."

"개새끼가. 죽으려고 여기 쳐들어왔어?"

"누가 죽을지는 봐야 하지 않겠냐?"

내가 여유롭게 굴자 권씨는 악에 받쳐 욕을 퍼부었다.

"너는 잡히면 팔다리를 꼭 잘라준다. 좀비들한테 던져주면 아주 좋다고 뜯어먹겠지? 개새끼야, 넌 상대를 잘못 골랐어. 에미하고 붙어먹은 호로새끼가."

순간 머릿속에서 뭔가가 툭 끊어졌다.

.

.

.

권경준은 절대 잊지 못한다.

PC방에서 무방비로 당해 차가운 바닥에 몸을 뉘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다.

심지어 스마트폰과 총까지 빼앗겼다.

아포칼립스가 와서는 어떤가?

그는 부하를 잃었고 타임쉘터 앞에서 도망가는 추태를 보여야 했다.

저 놈은 그러고도 모자라 또 여기 와서 자신의 모든 것을 망치려 하고 있었다!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진심으로 죽이고 싶었다.

경준은 악에 받친 채 욕을 퍼부었다.

"에미하고 붙어먹은 호로새끼가."

욕이 끝난 순간 경준은 뭔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성호가 휘두른 주먹에 그의 얼굴이 홱 돌아갔다.

"억!"

대체 언제 안에 들어왔을까?

경준은 그의 움직임을 보지도 못했다.

장전해둔 석궁이 바닥을 뒹굴었다.

쏘고 불을 지른 후 개구멍으로 도망가려 했건만 모든 것이 틀어졌다.

"너, 넌 대체 누구냐···"

대답 대신 성호의 육중한 주먹이 그의 복부를 파고들었다.

"꺼윽!"

허리가 꺾였고 경준은 입을 딱 벌린 채 무릎을 꿇었다.

얼마나 강하게 때렸는지 방독면 틈으로 피가 섞인 침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성호는 그의 방독면을 벗겨내고 사커킥으로 걷어찼다.

경준의 몸이 힘없이 나가떨어졌다.

"끄으으···"

"내가 다짐한 게 하나 있어. 아포칼립스가 오면 너는 반드시 죽이겠다고."

"나, 흐흐···죽이면···"

경준은 혼미한 상황에서도 그를 비웃었다.

성호의 무심한 시선이 그에게 닿았다.

"죽이면 뭐? 살인자로 등록된다고? 내가 그거 모르겠냐?"

경준은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

날카로운 남자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가 말했다.

"자살로 위장하면 시스템은 감쪽같이 속는단 말이지. 넌 아마 모를 거다. 자칭 고인물이니까."

"뭐···?"

경준의 눈이 부릅떠졌다.

설마 이 놈의 정체는···

성호는 어지러운지 머리를 흔들었다.

"효과는 죽이는데 부작용이 좀 있네. 씁."

머리가 핑핑 돌았다.

그는 경악으로 굳은 경준의 머리를 다시 걷어찼다.

그리고 슬롯을 호출해 손에 무언가를 쥐어주고 로프로 꽁꽁 묶었다.

폭죽이었다.

경준은 앞으로 벌어질 상황이 어떤 것인지 알아채곤 피를 토해냈다.

"안돼애애엑!"

"아 귀찮게 하네."

성호는 저벅저벅 걸어가 쓰러진 두 여자를 밖으로 끌어냈다.

"차원문 열어."

아무것도 보이진 않았으나 뭐가 어떻게 된 건지는 알 수 있었다.

이 놈은 지금까지 차원문에 숨어서 자신을 기만한 것이다!

경준은 원통함에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으아아아악! 크흑! 아아악!"

"새끼 시끄럽네."

휘발유가 그의 주변에 부어졌다.

그리고 경준의 손에 고정된 폭죽에 불이 붙었다.

치지지직.

심지가 타들어가며 죽음을 예고했다.

그는 온 몸에 힘을 주었으나 바닥에서 꿈틀대는 게 고작이었다.

이제 경준은 애원하기 시작했다.

"제발···살려줘···다시···다시는 안 그럴게! 목숨만···다 내놓고 꺼질 테니까!"

"그래. 다음에 꼭 그렇게 해."

타타타탁!

"아아아!"

경준은 폭죽을 최대한 높이 들었으나 죽는 시간을 몇 초 번 것뿐이었다.

마침내 폭죽이 터졌고 휘발유에 불이 붙었다.

강렬한 화염이 경준의 몸을 휘어 감았다.

그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몸을 움츠렸다.

성호는 경준의 죽음을 똑바로 바라봤다.

그는 이런 식으로 판정을 피해 몇 번의 살인을 저질렀다.

마음이 가볍지는 않았지만 그만둘 생각은 전혀 없었다.

자신을 공격한 놈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반드시 죽인다.

성호는 물자를 차원문에 던지고 밖으로 나왔다.

쓰러진 사람이 몇 있지만 손을 댈 생각이 나지 않았다.

어차피 세뇌는 풀렸고 그들은 아무것도 모르니까.

"···피곤하구만."

다른 벙커에서 사람들이 나왔다.

"뭐야? 내가 왜 여기 있어?"

"당신들 누구예요? 여기 우리 팀장님 골프장인데?"

다들 영문을 몰라 서로에게 물어봤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성호의 몸이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

.

.

토끼공듀 황석현을 가이드하는 이윤정은 그에 대한 얘기를 지긋지긋하게 들었다.

서바이벌 라이프를 5천 시간 넘게 플레이한 고인물이라느니.

완전한 미친놈이라 상대하지 않는 게 좋을 거라느니 하는 이야기들 말이다.

물론 석현과의 첫 만남은 꽤 강렬했다.

요즘 세상에 팬티와 망토만 걸치고 돌아다니는 생존자가 그리 흔치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지난 며칠 동안 그가 보여준 모습은 완전히 미친놈까진 아니었다.

안내자인 그녀를 배려하고 부족한 거 없냐고 물어보는 자상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요즘 세상에 이 정도면 정상인이지.'

지저분한 외모도 친구와 떨어졌다는 상실감 때문일 것이다, 윤정은 그렇게 상상했다.

친구와 만난 후에는 살짝 정돈된 모습을 보여주지 않을까?

언뜻언뜻 드러나는 코의 윤곽이나 눈매에서 훈훈한 본판을 짐작할 수 있었다.

'친구와 만나면 이 사람도 달라질 거야.'

윤정은 이런 기대를 갖고 그를 안내했다.

그러나 세종시에 도착하면서 모든 것이 틀어졌다.

"토끼공주! 만나고 싶었다."

폐허 사이에서 토공을 부르는 자는 부하 둘을 데리고 있는 덩치 큰 남자였다.

그는 석현과 거의 비슷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

좀 더 땅딸막하다는 점만 다를 뿐.

윤정은 그를 보고 눈살을 찌푸렸고 석현이 외쳤다.

"나를 왜?"

"게임에서 당신 얘기를 많이 들었으니까."

"아이디 대라. 난 당신이 누군지 몰라."

그가 답했다.

"딸기공주!"

윤정은 그제야 깨달았다.

이놈의 게임엔 정상적인 공주가 하나도 없다고.

다음에 나올 공주도 이들과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다.

석현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아, 하고 손바닥을 탁 쳤다.

"처음 아이디가 사랑의 요정이었지?"

"그래."

윤정은 겨우 웃음을 감추었다.

아무리 봐도 사랑이나 요정 같은 단어와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부하 둘도 마찬가지인 모양인지 입꼬리가 슬쩍 올라가 있었다.

하지만 둘은 의외로 진지했다.

"그래서 날 불러 세운 목적은 뭐냐?"

"우리가 힘을 합치는 거다. 쌍공주가 세종을 지배할 수 있어!"

"지배해서 뭐하게?"

"뭐하냐니. 당신에겐 욕구가 없나? 권력을 누리고 물자를 마음껏 쓰는 건 아포칼립스에서 누구나 바라는 바 아니야?"

"내가 원하는 건 친구들을 만나는 거야."

"친구는 오리궁뎅이나 김밥조아, 생존자를 말하는 건가?"

"그래."

하나는 아닌 것 같지만.

"만나서 뭐하려고?"

"같이 노는 거지."

딸기공주의 미간이 좁아졌다.

"시시하군. 완전히 미친 줄 알았는데 미친 척하는 거였어."

"내가?"

"아포칼립스에서 하고 싶은 게 고작 그건가? 실망인데."

석현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왜 실망이라는 거지?"

"아포칼립스에서 살아남으려면 힘이 필요해! 제대로 미친놈만이 힘을 가질 수 있다는 건 너도 알잖아? 눈을 떠라, 토끼공주! 제대로 미쳐보란 말이야!"

아무래도 이 작자는 아포칼립스의 폭군이 되고 싶은 것 같았다.

석현은 멍하니 있다가 주섬주섬 망토를 벗기 시작했다.

"지금 뭐하는 거···"

다들 그가 망토를 벗었을 때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하지만 배낭과 장화까지 벗어버리자 사람들의 눈이 이상하게 변했다.

혹시?

석현의 손이 구멍 난 팬티에 닿았다.

팬티가 쑥 내려가자 윤정은 털이 숭숭한 탐스러운 엉덩이를 목격하고 말았다.

내 눈.

석현은 네 사람 앞에서 태초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삼."

"뭐?"

"이."

"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일."

"아니 그러니까···"

딸기공주는 갑자기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토공을 보곤 기겁했다.

홀딱 벗은 남자가 뛰어오는데 겁을 먹지 않을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어? 자, 잠깐!"

그는 달아나기 시작했고 부하들도 마찬가지였다.

"오지 마! 오지 말라고!"

석현은 그들을 향해 돌진했다.

"쎅쓰!"

가랑이 사이에서 뭔가 격하게 흔들렸다.

덜렁덜렁.

< 텃세를 깨는 방법 - 3 > 끝

< 새로운 사람들 - 1 >

권경준이 죽었다.

세뇌되어 있던 사람들이 풀려났으며 벙커의 물자는 그들이 나눠가졌다.

헬스장 사람들을 포함한 여타 생존자들도 한몫씩 챙겼음은 물론이었다.

가장 많이 챙긴 것은 나였다.

벙커 하나를 통째로 쉘터에 넣어버렸으니.

또한 권씨의 일지도 챙길 수 있었는데 거기에서 꽤 많은 정보가 나왔다.

"흠···생존자들끼리 네트워크를 만들고 있었네."

권씨와 연락하던 자들은 김해와 창원 등지에 몰려 있었다.

그들이 어떤 성향을 가졌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권씨와 연락할 정도니 기본적으로 경계해야 한다는 점은 확실했다.

다음으로 내 눈에 띈 정보는 경매장에서 쓰는 암호였다.

모두가 볼 수 있는 공간이다 보니 자기들끼리 암호를 정해서 소통하는 것 같았다.

"아하. 이렇게 했었군."

토공이나 오리궁뎅이와 대화할 때 써볼까 했었는데 벌써 써먹고 있었다니.

매주 특정한 물품을 경매장에 올려서 암호로 소통하는 방식이었다.

"9월 1일에 했을 테니 8일에 이상한 경매품을 찾아보면 되겠어."

그나저나 창원 클랜이라···

벌써 클랜이라 칭할 정도의 세력을 모았다는 건가?

다섯 명 이상은 힘들 텐데.

"지부를 두어서 느슨한 연계를 할 수는 있긴 한데."

경매장을 통해 지시를 주고받는다면 큰 문제는 없을 듯싶었다.

이 경우 통제력이 중요해지는데···

지부장이 다른 마음을 먹으면 어떻게 할 수가 없지 않은가.

"뭐 그건 내가 걱정할 일은 아니고."

초반 좀비와 고블린 사이에 끼어 버둥거렸던 사람들이 세력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이제 기반을 잡았다고 안심할 것이다.

하지만 내가 보기엔 전혀 아니었다.

오크와 늑대인간을 포함한 위협적인 몬스터들은 아직 등장하지도 않았다.

또한 3개월만 있으면 겨울이 찾아온다.

"여름이 죽도록 더웠으니까 겨울도 그만큼 추울지 모르지."

생존자들에겐 여름보단 겨울이 훨씬 더 힘들다.

슬슬 식량도 부족할 시기가 되었고.

요컨대 장기적인 생존대책을 마련해야 할 때가 왔다.

"언제까지 전투식량 까먹으며 살 수는 없잖아?"

지금이야 도시에서 파밍하는 게 더 효율적이겠지만 며칠만 지나도 사정은 달라진다.

코볼트 떼거리가 야간에 도시를 휩쓸면 남아나는 게 없다.

더욱 힘든 시기가 찾아오는데 내 주변 사람들은 어떻게 준비시키면 좋을까.

"···그 사람들은 신경 쓸 필요 없고."

고인물들은 자기가 알아서 한다.

결국 헬스장 멤버들이 문제인데 일단은 미곡센터를 파밍하고 있었다.

벙커에서 루팅한 물자도 있으니 최소 1개월 정도는 버틸 수 있을 것이다.

"다음엔 위냐 옆이냐···"

우선 김해로 올라가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다음에 창원으로 넘어가든가 하면 되지.

중요한 것은 장기적으로 식량을 수급할 장소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텃밭은 물론이고 낚시를 할 수 있어야 돼."

창원, 그 중에서도 마산구가 좋아 보였다.

경남에선 가장 대도시이고 해안에 붙어 있다는 장점이 있다.

"다른 도시는 어떨까···"

대단한 전력을 가진 것도 아닌데 도시 간 이동을 하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울 것이다.

혹시 나 말고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이 있을까 해서 경매장을 찾아보니 있었다.

경매품 하나를 덩그러니 올려두고 토론의 장으로 쓰고 있는 것이다.

내용은 대강 이랬다.

―내륙으로 들어가는 건 바보짓임. 바다는 오염되지 않았음. 차후 식량수급이 어려워진다는 걸 생각하면 해안가 도시가 최고.

―낚시도구와 그물 등을 최대한 확보하는 게 필요함. 당장은 비축한 식량으로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겨울만 되어도 힘들어질 것임.

―겨울 되기 전에 텃밭하고 장작 만들어놔야 함. 특히 경기 강원 서울은 엄청나게 추울 것임.

―여름하고 겨울 중에 겨울이 더 좋다는 사람도 있을 텐데, 그건 집하고 직장이 따듯할 경우의 얘기임. 집에서 동상 걸려보면 겨울이 좋다고는 못함.

"나와 큰 차이는 없군."

사람 생각하는 건 다 비슷하니까.

생존 정보를 공유하는 코멘트란이다 보니 장난은 드물고 진지한 코멘이 많았다.

목숨을 연명한다는 목표만 보면 의외로 어렵진 않다.

상점창에 빵이 업데이트 됐거든.

대체 누가 만들고 파는 건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포인트로 식량을 구입할 순 있다.

더럽게 맛이 없고 비싸다는 게 문제.

포인트를 많이 모은 미경이 하나 샀다가 한 입도 넘기지 못하고 뱉은 적이 있었다.

―안 익은 밀가루 씹는 거 같아요···

말 그대로 극한상황에서나 입에 대볼만한 물건이다.

"아직 그 정도는 아냐."

이것저것 찾아보고 있으려니 유현이의 비행기가 날아들었다.

같이 사냥할 때가 됐군.

.

.

.

헬스장 사람들의 레벨은 거의 10에 근접해 있다.

형준 형과 미경은 벌써 넘겼고 수연과 유현이는 각각 8, 9레벨이었다.

나는 둘의 레벨을 10까지 끌어올리고 싶었다.

특성에 추가효과가 붙으면 내게도 이득이니까.

약속장소에 가니 둘이 기다리고 있었다.

수연은 내게 물을 게 많은 눈치였다.

"성호씨. 골프장 얘기 들으셨어요?"

"예, 유현이한테서 대충."

"와···그 튼튼하던 벙커가 하루 만에 무너질 줄은 몰랐어요. 오전에 보니까 사람들 막 뒤집어엎고 난리던데."

"원래 뭐 무너지는 건 쉽다고 그러잖아요. 쌓는 게 힘들지."

"로마도 하루아침에 무너지진 않았는데 희한해요. 근처에 그 벙커를 무너뜨릴만한 사람들은 없어 보였는데."

수연은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이었다.

하긴 보통 사람이라면 그렇게 생각하겠지.

유현이가 내 눈치를 봤고 나는 조용히 말했다.

"어제 유현이를 시켜서 정찰을 좀 해봤는데, 와 방어가 대단하더라고요. 그걸 무너뜨렸다는 건 우리보다 훨씬 강하다는 거니까 준비를 좀 해야 할 겁니다."

내 말에 둘은 얼굴을 굳힌 채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 강한 세력이 이들을 덮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범인은 나니까.

하지만 약간의 긴장감을 가지는 건 나쁘지 않다.

유현이가 추가적인 정보를 전했다.

"어제 골프장에서 나온 사람들 있잖아요? 세 명."

"살인한 세 명 말이지?"

"네···방금 오면서 보니까 그 사람들이 저희 아지트 근처에 자리를 잡았더라고요."

"원래 벙커에 있던 사람들은?"

"그 사람들이 벙커 두 개를 차지했고요. 벙커 하나는 못쓰나 봐요. 완전히 불에 탔던데."

내가 불을 질러버렸으니까.

하여튼 새로이 자리 잡은 두 세력도 상당히 호전적일 것으로 짐작되었다.

한 세력은 벌써 한 번씩 살인을 저질렀고, 권씨의 부하였던 자들도 호락호락하지는 않을 테니까.

그들은 주변에서 자신들이 한 짓을 전해 듣곤 완전히 독이 오른 상태라고 한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우린 우리 식대로 살 테니까 신경 쓰지 마쇼.

―환장하겠네. 그거 전부 우리 물자인데 당신들이 왜 가져가?

여기서 당신들은 헬스장 사람들과 주변의 생존자들을 의미한다.

골프장이 어수선한 틈을 타 루팅한 것이라 권씨의 부하들은 이를 갈고 있다고.

새로운 갈등의 불씨가 생겼다.

수연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좀비들 부를 거라고 소리치는 사람도 있던데 어떻게 될지 모르겠네요."

나는 멈칫했다.

내가 죽인 건 권씨 1명뿐이다.

나머지 11명은 멀쩡히 살아 있고 그들이 벙커를 점령했다.

문제는 벙커 하나에 6명이 들어가 있다는 점이다.

벙커가 3개라면 모를까, 하나는 불에 탔고 입구도 망가져서 못 쓰는 상태였다.

나는 급히 말했다.

"유현아, 종이비행기 날려서 확인 좀 해줄래? 한 벙커에 사람 몇 명 들어가 있는지."

"잠시만요."

그는 배낭에서 노트를 꺼내더니 부욱 찢어 즉석에서 종이비행기를 만들어 날렸다.

잠시 후 유현이가 눈을 감았다.

"보여요···지금 클럽하우스? 앞에서 사람들이 싸우고 있어요···여자 둘이 어디로 들어갈 거냐가 문제가 되나 보네요."

아 그런 건가.

11명 중에서 여자가 2명인데 어디 벙커에 들어가느냐를 가지고 싸우는 거군···

수연이 그들을 비웃었다.

"권씨 애인 둘을 차지하고 싶은가 보네요. 완전 김칫국 마시네."

"둘이 독립하겠다고 하면 재미있을 텐데."

내 말에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이 상황에 여자 둘이 독립하기가 쉽나요? 살고 싶으면 더러워도 붙어 있어야죠. 머릿수는 못 이겨요."

그건 그렇지.

둘이 얼마나 강한지는 모르겠지만 나머지 9명을 이길 정도는 아닐 것이다.

물자를 쓰기 위해선 반드시 한쪽에 붙어야 한다.

권씨라는 문제를 해결했더니 새로운 문제가 생겨버렸군.

조금 있으려니 유현이 더듬거렸다.

"어, 어···지금 분위기가 되게 험악한데요. 한 명이 죽거나 나가야 한다고 누가 소리치고 있는데···"

"당장 뭐가 일어날 분위기니?"

살인 전적이 있는 사람이 또 살인을 저지르면 바로 이벤트가 뜬다.

문제는 저들 중 살인을 한 사람이 누구인지 모른다는 것.

권씨도 그건 일지에 남겨놓지 않았다.

유현이는 끝내 고개를 떨구었다.

"주, 죽었어요. 제일 덩치 작은 아저씨가 사람들한테 둘러싸여서···"

"누가 죽였는지 모르게 했나보네."

"네···그런 것 같아요."

죄책감을 더는 방법이지.

살인자 이벤트가 일어나지 않는 걸 보면 클린한 사람이 죽인 모양.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내쫓는 방법도 있을 텐데 참 무식하게도 해결했다.

곧이어 유현이는 여자 둘이 한쪽에 붙었다고 말했다.

"다른 쪽이 반발하긴 하는데 그걸 당신들이 왜 신경 쓰냐고 몰아붙이고 있어요."

"여자들이?"

"네. 남자 셋까지 포함해서요."

갈등을 봉합하나 했더니 새로운 갈등이 생겼다.

여자들 입장에서는 기가 찰 것이다.

간신히 권씨의 노예에서 벗어났는데 별 다를 바 없는 놈들이 집적거리니.

수치스럽기도 할 테고 짜증도 나겠지.

어쨌거나 저들은 그리 오래 가진 못할 것 같았다.

시작부터 이렇게 싸우는데 나중엔 원수지간이 될지도 모른다.

"여기도 오래 못 있겠네요."

내가 말하자 둘이 눈을 빛냈다.

"어디로 가는 게 좋을까요?"

"갈 곳이 두 군데밖에 없죠? 저는 창원이 나을 것 같은데."

"어···형준 형은 김해에 가고 싶어 하는 눈치던데···"

유현이가 주저하며 말했다.

왜 하필 김해인가 했더니 형수와 딸이 있던 곳이군.

둘이 살아있을 가능성은 없겠지만 그 흔적이나마 찾고 싶은 거겠지.

리더라서 대놓고 그걸 드러내진 못한 것 같았다.

"수연씨 생각은 어때요? 유현이는?"

"음···저는 바다가 있는 창원이 괜찮아 보여요. 이제 곧 겨울인데 식량 확보를 해놔야 하지 않을까요?"

"저도요."

미경도 마찬가지일 테고···

여기 계속 있을 수는 없으니 창원으로 간다고 생각하면 되겠지.

우리는 짐을 챙겨서 사냥에 나섰다.

막타를 유현이에게 양보하는 식으로 하다 보니 금방 10레벨이 되었다.

"아, 추가효과 생겼어요. 인형폭탄?"

"만든 인형을 폭탄으로 쓰는 건가?"

"지금 해볼게요."

그는 개구리를 접어서 멀리 보내곤 인형폭탄이라고 중얼거렸다.

그러자 개구리가 그 자리에서 폭발했다.

"윽."

파편이 흩날리자 수연이 머리를 움츠렸다.

위력이 애매한데···

유현이는 약간 실망한 모양이었다.

"···고블린도 한 방에 안 죽겠어요."

나는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너무 실망하지 말고 응용을 해봐. 예를 들면 화살에 종이 접은 걸 묶고 쏘면 어떻게 되지? 박힌 다음에 터질 거 아냐?"

"아."

거기까진 생각을 못한 모양이었다.

"큰 몬스터라도 사타구니 같은 곳에 화살을 박고 터트리면 치명상을 입는단 말이야. 여기에서 폭탄이 터진다고 생각해 봐."

내가 가랑이 사이를 가리키자 유현이는 겁에 질려 다리를 움츠렸다.

수연은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곤 손부채를 부쳤다.

앞으론 더한 짓도 해야 될 텐데 미리 적응 좀 하십시다.

우리는 사냥을 계속해 수연의 레벨을 9까지 올렸다.

파밍을 나갔던 형준 형과 미경이 돌아와 전리품을 자랑했다.

나는 그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투룸으로 돌아왔다.

곧 미궁이 열리니 복습을 해둬야지.

.

.

.

미궁은 서바이벌 라이프에서 꽤 큰 규모를 자랑하는 이벤트다.

하지만 이번에 열리는 미궁은 맛보기였다.

스피드런.

얼마나 빨리 최심부에 도달하느냐가 문제지 안에서 무얼 하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몬스터는 상당히 많지만 추적 범위가 매우 좁다.

시야가 퇴화된 좀비 같은 경우는 바로 옆을 지나쳐도 모를 정도.

하지만 미궁이란 공간이 워낙 어둡다 보니 유저도 헤매기 마련이었다.

또 초반에 일어난 이벤트라 제대로 성장도 되어 있지 않아서 더 어려웠다.

"게임이 그런데 현실은 더 위험하지."

게임에서 죽으면 다시 시작하면 그만이지만 현실에선 그럴 수가 없지 않은가?

생전 처음 들어가 보는 미궁을 돌파할 용기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기껏해야 나를 포함해 고인물들 몇 명···

하지만 경매장을 보니 예상외였다.

꽤 많은 사람들이 스피드런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 미궁 마렵다.

―안에 몬스터들 완전 바보임. 바로 옆을 지나쳐도 모름. 코볼트만 좀 조심하면 됨.

―님들 진짜 스피드런 할거임? 엄청 어두울 텐데 그거 무서워서 어떻게 버티냐.

―최심부에서 달달한 보상 먹는 재미지.

―랭킹에 이름 박는 재미도 있어요.

―병신들아 게임에서나 그게 재미지 목숨 내걸고 그짓을 한다고?

―쫄보는 좀 꺼지시고.

―지랄 너보단 잘하지.

―두유 해브 자쉰?

―콜.

흠···

"허세 아니야?"

익명인 코멘트란에서 무슨 말을 못하랴.

나는 내가 가진 영상을 뒤져 스피드런 부분을 찾았다.

겨우 두 개밖에 나오지 않았다.

시청자는 단 한명, 불쌍맨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 사람 방송 초기 멤버였지.

방송을 켤 때마다 꼬박꼬박 들어와서 후원을 한 정말 고마운 사람이었다.

그마저 없었다면 진작 방송을 접었겠지.

어떻게 보면 내가 영상을 저장할 수 있게 도와준 사람이다.

영상을 플레이하자 불쌍맨이 또 후원했다.

―불쌍맨님이 4,000원을 후원했습니다!

―불쌍맨 : 미궁 스피드런 하시는 건가요 ㅎㅎ좋은 기록 남기시길 바랄께요.

―김밥조아 : 오늘은 어떤 알바 하고 오셨어요?

―불쌍맨 : 아파서 좀 쉬었어요.

―김밥조아 : 저런···빨리 나으셔야 할 텐데.

―불쌍맨 : 그러게요. 빨리 일해야 후원금을 내는데 말이에요.

―김밥조아 : 아니 그게 아니고요.

불쌍맨과의 대화는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나중에 온 시청자들이 이걸 빌미로 나를 갈구고 불쌍맨은 컨셉을 확고히 했다.

"이 사람 살아 있나?"

게임을 한 번이라도 해봤으면 좀비가 되지 않았을 테니 가능성이 높아진다.

하지만 가난한 불쌍맨이 고가의 VR장비를 구입했으리라곤 생각하기 어려웠다.

VR방이란 게 나오긴 했지만 그건 한참 후의 일이다.

일단은 죽었다고 보는 게 맞겠지.

만약 살아 있고 만난다면 도움을 줄 수 있겠지만···

"부질없는 생각이야."

나는 영상을 뒤져서 설정을 찾아내고 복습에 들어갔다.

정확한 날짜는 내일이다.

차원문의 위치는 랜덤이지만 워낙 많이 열리니 문제없이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들어갈 사람은 나밖에 없겠지."

권씨는 이미 죽었으니까.

나는 짐을 챙기고 동굴에서 단잠을 잤다.

알람에 깨어보니 어느덧 새벽이었다.

밖에 나가자 주변 건물의 주차장이 크게 일렁이더니 차원문이 나타났다.

안에 들어가니 칠흑 같은 공간이 나를 반겼다.

< 새로운 사람들 - 1 > 끝

< 새로운 사람들 - 2 >

서바이벌 라이프를 플레이한 유저는 이런 의문을 품는다.

이 몬스터며 아이템, 미궁 같은 것들은 어디서 튀어나오는 걸까?

게임이니까 뭐 그러려니 치는데 최소한의 설정은 있어야 할 게 아닌가 말이다.

유감스럽게도 홈페이지엔 일체의 설정이 나와 있지 않았다.

있는 건 좀비 아포칼립스의 타임 스케줄과 이벤트 정도.

문의를 해도 답변은 없었다.

희한한 건 나름 숨겨진 배경은 깔려 있다는 점이다.

던전이나 미궁 등에서 몇 가지 책이 발견되었기 때문.

알아볼 수 없는 언어로 되어 있지만 이게 의외로 수집욕을 자극하는 면이 존재했다.

모으는 사람은 나와 생존자1 정도였지만.

"···"

나는 미궁에 들어와 앞의 어두운 공간을 바라봤다.

사실 여기는 제대로 된 미궁이라곤 할 수 없다.

목표지점인 최심부도 실제 최심부는 아니었다.

몬스터는 멍청하며, 함정도 거의 없고 길도 무진장 단순하다.

요컨대 초반용 맛보기 미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도전하는 이유는 누가 말했듯 보상이 워낙 달달해서였다.

이런 이벤트가 아니면 절대 구할 수 없는 유니크한 아이템이 보상으로 주어진다.

기록이 짧으면 짧을수록 보상이 좋아진다.

"꼭 먹어야 돼."

나는 복장을 점검했다.

몸을 가볍게 하기 위해 방검복도 배낭도 헬멧도 착용하지 않았다.

스킬과 아이템을 믿고 뛸 뿐이다.

태양사과가 있으면 좋겠지만 모두 소모한 상태였다.

스피드런 도중 발동되면 곤란한 스킬이 있는데, 생존갈망과 투쟁본능이다.

발동되고 난 후 후유증에 걸리면 시간을 대폭 깎아먹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투쟁본능은 상관없는데 생존갈망 이게···"

최대한 조절해서 마지막에 발동되면 막판 스퍼트를 올릴 수 있어서 딱 좋은데.

나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으려 애썼다.

지금부터는 야간시야와 지형감지, 그리고 인지 스탯과 경험을 믿고 뛸 뿐이다.

"가자."

나는 가볍게 바닥을 박찼다.

여기 미궁은 네 구역으로 이루어져 있다.

처음은 좀비들이 우글거리는 죽음의 복도.

워낙 좁아서 몇 마리씩 뭉쳐 다니는 좀비들을 피하기가 쉽지 않다.

미로는 간단한 수준이지만 처음 도전하면 워낙 어두운데다가 좀비의 압박감까지 있어 헷갈리기 쉽다.

나는 어두운 복도 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는 좀비에게 롱나이프를 휘둘렀다.

"흣!"

좀비의 머리가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

이 미궁의 좀비는 유기물 추적 능력이 극도로 억제된 샌드백이나 다름없다.

그렇다고 다른 유저들이 이렇게 할 수 있다는 얘기는 아니다.

좀비의 추적 범위를 정확히 알고 롱나이프까지 준비해야 하니 말이다.

다른 무기는 시간만 지체할 뿐이었다.

"1번 슬롯."

나는 롱나이프를 슬롯에 넣고 왼쪽으로 꺾었다.

차원 슬롯이라는 추가효과의 사기성이 여기서 드러난다.

무기 수납하느라 머뭇거릴 필요가 없는 것이다.

필요한 것은 모두 슬롯에 저장되어 있기 때문에 멈추지 않고 바로 불러내면 된다.

나는 0번 슬롯을 열어 플래쉬로 앞을 비추었다.

물웅덩이 곳곳에 떠 있는 발판을 팍팍 밟고 건너편으로 넘어갔다.

"느낌, 좋은데."

기록된 영상을 확인한 결과 예전의 나는 이렇게 빠르지 못했다.

그 때는 초보였거든.

적당히 복도를 달리다보니 갑자기 공간이 넓어졌다.

죽음의 홀에서 수많은 좀비들이 우글거리고 있었다.

여기선 공격할 게 아니라 좀비들 사이를 스쳐 지나가는 테크닉이 필요하다.

당시엔 이 홀을 디스코 클럽이라 부르곤 했다.

사이키 조명만 있으면 좀비들과 춤을 추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

내가 좀비들 사이를 뚫고 지나가자 녀석들이 팔을 뻗었다.

으으으으―

카아아악―

기세는 흉포했지만 반응은 그저 그랬다.

나는 춤추듯 좀비들 사이를 이동하며 가끔 롱나이프를 휘둘러 포인트를 획득했다.

"여기서 코사크 댄스를 춰봐야 하는데."

이따위 좀비가 아니라 강화 구울 사이에서 추는 게 진정한 고인물이라 할 수 있다.

근데 목숨이 아까우니까 그만두자.

"읏차."

마지막 좀비 두 마리의 머리를 날려버리고 나자 배경이 바뀌었다.

단단한 돌벽이 아니라 흙벽이 나를 에워쌌다.

지금부터는 고블린의 영역, 야생의 땅이다.

미궁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넓고 천장도 탁 트였다.

고블린들이 삼삼오오 모여 모닥불을 켜놓고 있었다.

나는 녀석들에게 돌진해 모닥불을 발로 차버렸다.

캬악!

키에엑!

한 놈이 모닥불을 뒤집어쓰곤 비명을 질러댔다.

이렇게 불을 차버리는 이유는 추격의지를 상실케 하기 위함이다.

고블린은 야간시야가 그렇게 좋진 않거든.

지금의 나보다 못한 수준이라서 모닥불만 없으면 앞을 가늠하지 못한다.

나는 수차례 모닥불을 걷어차며 야생의 땅을 가로질렀다.

"훅, 훅!"

둥지 입구 근처에 함정이 보였다.

고블린들이 자주 쓰는 가시줄 함정이다.

뛰다가 걸리면 줄이 발목에 칭칭 감기는데 마비독이 발려진 가시가 나 있어서 굉장히 위험하다.

이 함정은 그냥 뛰어넘으면 된다.

전력으로 질주하다가 탄력을 받아 뛰니 뒤에서 고블린들의 흥분한 소리가 들렸다.

약 오르냐? 나중에 보자고.

그런데 앗, 입구로 들어오는 고블린 한 마리가 보였다.

덩치에 비해 큰 주머니를 들고 있는 걸 봐서 황금고블린이다.

나는 달려 나가던 기세 그대로 살짝 점프해서 녀석의 배를 차버렸다.

끼악!

"차원문 열어!"

묵직한 주머니님은 차원문에 들어가 계시고요.

곧장 닫으려고 하니 갑자기 태양사과 조각이 튀어나왔다.

이거 설마 풍뎅이들이 찾아준 건가?

지쳤는데 잘 됐네.

"고마워."

나는 차원문 안에 손을 넣어 흔든 다음 태양사과를 우적우적 씹으며 달렸다.

꿀맛.

「효과: 지구력 회복」

「태양사과의 효과로 인해 지구력이 회복됩니다」

짧은 시간에 많이 섭취하면 효과를 못 볼 때도 있지만 그 전에 끝나니 상관없다.

몸이 기운이 솟았다.

고블린들의 땅을 벗어나려는데 두 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가 고블린들의 땅이야···"

"조심 또 조심해."

순간 나처럼 빠르게 진행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니었다.

스피드런 미궁은 세 단계를 반드시 거쳐야 하며 순서는 고정되어 있지 않다.

다시 들어오면 야생의 땅과 죽음의 복도 순서대로 진행할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지금처럼 사람들끼리 만날 가능성도 있다.

"뭐야?"

"허?"

둘도 나를 느꼈는지 나무 옆에서 멈췄다.

그런데 이 사람들 한국인이 아닌데?

한국에 왔다가 생존자가 됐나?

물어보고 싶었지만 시간이 없다.

나는 둘의 옆을 그대로 지나쳤다.

"바, 방금 뭐야? 뭐가 지나갔어!"

"홉고블린일지도 몰라!"

사람입니다요.

나는 열심히 달려 코볼트들의 영역에 진입했다.

침묵의 숲.

코볼트들이 좋아하는 늪과 안개가 가득한 음침한 공간이었다.

죽음의 복도나 야생의 땅과는 질적으로 다른 장애물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달리다보면 늪에 빠지고 덤불에 걸리게 되어 있다.

그리고 야간시야가 아주 좋은 코볼트들에게 끌려가 몽둥이찜질을 당한다.

하지만 내겐 어렵지 않은 곳이었다.

"나중에, 보자고."

스피드런 이벤트가 끝나면 질리도록 코볼트들과 싸울 텐데 힘을 뺄 필요는 없다.

나는 코볼트들을 걷어차며 장애물을 빠르게 돌파해 최심부로 향했다.

.

.

.

"헉, 헉."

미궁의 끝, 최심부.

실제 끝은 아니고 이벤트를 위해 임시로 꾸며놓은 공간이다.

모든 유저의 기록이 여기에 입력되며 이름도 새기게 된다.

물론 보상도 즉각 주어진다.

빛으로 감싸인 제단에 놓인 책을 뒤적이니 00:38:45라는 숫자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38분. 휴우···"

나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영상을 복습한 결과 1시간의 벽을 깬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걸 여기서 깨게 될 줄이야.

"준비를 잘 했지."

나는 이벤트를 미리 알고 준비했고, 적절한 스킬을 활용했으며 태양사과와 그늘포도의 도움까지 받았다.

만약 그것들이 없었다면 절대 1시간 안에 들어오지 못했을 것이다.

반칙 같은 느낌이 들지만 보상이 달려있는데 뭐 어때.

나는 1st라고 적혀 있는 칸에 뭔가를 썼다.

김밥조아 대신 새로 받은 이름으로···

"됐어."

이젠 보상을 획득할 차례다.

숨을 고르고 있으려니 책 옆에 두툼한 주머니가 나타났다.

고블린들이 가지고 다니는 추레한 것과는 차원이 다른 질 좋은 가죽 주머니였다.

"이런 게 진짜지."

열어보니 스크롤 하나와 가죽 신발이 들어 있었다.

「가죽 신발 : 건강+2, 민첩+2 착용시 스킬:가벼운발걸음 자동적용」

"오, 이거 괜찮네."

투스탯은 둘째 치고 가벼운발걸음 스킬이 마음에 들었다.

지구력 소모를 상당히 낮춰준다.

"행군에도 효과가 좋지."

수십km 행군을 옆 동네 놀러가듯 할 수 있게 된다.

단 상체 위주의 노동에는 그다지 효과가 없다.

"디자인도 나쁘지 않고···이 정도면 신고 다닐 만 하겠어."

나는 신발을 차원문에 넣고 스크롤을 펼쳤다.

「진실을보는눈 : 상대방의 아이디를 볼 수 있게 된다. 10포인트 소모」

"음···"

10포를 써서 상대방의 아이디를 볼 수 있다고?

경매장을 말하는 건가, 아니면 현실에서?

게임을 안 해서 아이디가 없는 사람은 어쩌지?

이건 직접 써볼 수밖에 없군.

주머니까지 챙기고 제단 앞 원형 장식물에 올라서자 빛이 나를 감쌌다.

정신을 차려보니 건물의 주차장이었다.

어느새 차원문은 사라져 있었다.

나는 투룸으로 돌아가 경매장을 켰다.

예상대로 조용했다.

"지금쯤 열심히 스피드런 하고 있으려나···"

최소 1시간은 걸릴 테니 조금쯤 쉬어도 되겠지.

나는 동굴에 들어가 밥을 차렸다.

돌솥에 밥을 해서 긁어내고 그대로 된장국을 끓였다.

누룽지와 된장국이 섞여서 구수한 맛이 일품이었다.

"이거 진짜 맛있네."

직접 담근 김치를 꺼내 길게 찢어 먹으니 진수성찬이 부럽지 않았다.

잘 먹었습니다.

.

.

.

이번 스피드런 이벤트는 꽤 많은 사람들에게 주목받고 있었다.

대단한 전투능력이 없더라도 특성 하나만 갖고도 비벼볼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특히 블링크나 은신 등의 이동계 각성자들이 많이 들떴다.

반드시 자기들 가운데 1등이 나와야 한다고 떠벌렸다.

경매장은 언제나 그렇듯 입만 산 놈들로 난장판이었다.

―아니 븅신들이 15렙 넘었으면서 미궁 구조도 모름? 시도도 안했다는 얘기잖음.

―ㅋ?

―ㅎㅎ

―뭘 쳐웃고 있냐 쫄보놈들이.

―그럼 넌 아냐?

―사실 나도 모름 ㅎㅎ

―이새끼가?

익명이다 보니 정확한 정보의 전달은 개나 준 상태가 되었다.

스피드런에서 엄청난 기록이 나왔다 하면사실 확인도 없이 개소리를 늘어놓았다.

아니라고 판명되어도 자제하는 일 따윈 없다.

익명성은 엄청난 무기이기 때문이다.

서바이벌 라이프를 어떻게 즐겼건 경매장 안에선 모두가 준고인물이었다.

고인물을 자칭하지 못하는 이유는 세 명 의 벽이 너무 높아서였다.

―고인물은 다음 세 명만 인정한다. 토끼공듀, 오리궁뎅이꽥꽥, 생존자1.

―김밥조아는?

―그 새끼는 그냥 그 새끼.

―ㅋㅋㅋㅋㅋ

이렇듯 사람들 사이에서 김밥조아는 얼마든지 조롱해도 좋은 대상이었다.

토끼공듀나 오리궁뎅이처럼 드러나 있지도 않고 대단한 능력을 가진 것도 아니고.

생존자1처럼 존재감이 약하지도 않았다.

분명히 살아있긴 할 텐데 숨어만 있으니 겁쟁이라고 놀리는 것이다.

특히 영상을 뿌리지 않았다는 점이 사람들을 분개하게 했다.

―감히 너 혼자만 살려고 해?

말은 하지 않았지만, 이런 생각을 해보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아무튼 경매장에서 김밥조아는 거의 공공의 적 취급을 받고 있었다.

진짜가 나타난다면 한국의 욕이 얼마나 다채로운지 새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모두 경매장이 익명이니 가능한 일이었다.

하여튼.

이번 스피드런 이벤트는 꽤 많은 사람들이 주목하고 있었다.

아포칼립스 세상에서 즐거운 일이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이런 거라도 즐겨야지, 하는 게 대부분 사람들의 생각이었다.

새로운 기록을 위해 도전하고 누군가 기록을 갱신하면 찬사를 보내는 면에선 운동경기와 다를 바 없지 않은가 말이다.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게 부담스럽지만 구경꾼들 입장에선 상관없는 문제였다.

―우린 그냥 누가 1등하는지 구경하면서 팝콘만 먹고 있으면 됨.

―근데 팝콘이 없잔아.

―김빠진 콜라는 있음ㅋ

사람들이 경매장에서 잡담을 나누는 동안 마침내 미궁을 겪은 유저들이 들어왔다.

안 그래도 난장판이던 코멘트란은 진짜 정보와 유언비어로 혼돈으로 변했다.

―56분 클리어는 어떤 새끼임? 1시간 안으로 들어가는 거 불가능하다는데?

―구라지 씹년아 그걸 믿고 있음?

―개씨발 코볼트가 문제임. 존나 위험한 늪지대라서 거기서 시간 다 보냄.

―블링크 능력자는 어케 안 되나···

―시야가 없는데 블링크 있으면 뭐함.

―와 몇 명 죽었다네. 고블린 소굴인 줄 알고 단체로 들어갔다가.

―병신들ㅋㅋㅋ 혼자서 하는건뎈ㅋㅋㅋ

―모른 척해주던 몬스터 형님들도 단체로 들어가면 어쩔 수 없을 거임.

―그래서 어케됨? 끝났음? 1등 누구임?

―미궁 클리어한 사람 솔직히 말해보셈. 기록 얼마 나왔음?

―저 1시간 52분이요. 코볼트 숲이 진짜 난관이었음.

―랭킹은 언제 나오는거?

―차원문이 전부 닫히면 랭킹 페이지 뜬다던데.

―근데 님들 미궁에서 외국인들 만난 사람 없어요?

―ㅇㅇ 저 일본인들 만났음. 한국말을 너무 잘해서 한국인인줄 알았는데 일본인이었음.

―구라 ㄴㄴ해.

―일본인이 서라를 할 수가 없는데?

―야야 랭킹 페이지 떴다.

사람들은 거의 동시에 랭킹을 띄웠다.

그리곤 할 말을 잊었다.

「1st 그 새끼 00:38:45」

―?

―ㅋ?

―38분컷 실화냐.

―그 새끼면 김밥조아임?

―이게 김밥조아 기록이라고?

―1시간 안이 말이 되나? 해본 놈들이 죄다 불가능하다고 했는데?

―이거 구라임. 내가 봤음.

경매장 코멘트란은 순식간에 혼돈의 카오스로 변해버렸다.

< 새로운 사람들 - 2 > 끝

< 새로운 사람들 - 3 >

38분 45초.

말도 안 되는 기록에 다들 충격에 빠졌다.

―아까 1시간 안으로 안된다는 놈 어디갔음?

―씨발 38분컷이 물리적으로 가능하긴 하냐? 뛰기만 해도 50분은 나올거 같은데?

―은신으로 숨어다녀도 1시간 20분이 넘던데 이걸?

―미쳤다 미쳤어.

―님들 이제 큰일났음.

―??

―뭐가?

―김밥조아가 여길 보고 있음ㅋ

―알게뭐야.

―병신아 어차피 익명인데 어쩔?

―넌 이마에 아이디 박고 다니냐?ㅋㅋㅋ

―님들님들 더 충격적인거 알려드림? 저거 몬스터 적당히 잡으면서 나온 기록임ㅋㅋ

―허미시펄.

실제로 그랬다.

시선을 조금만 옆으로 돌리면 몬스터 킬수와 포인트 획득량이 보인다.

최종기록은 이렇게 된다.

「1st 그 새끼 00:38:45 kill:23 포인트:46」

―미친 몬스터를 23마리나 잡으면서 38분이라고?

―이건 말이 안 되는 거 같은데···

―몬스터 하나도 없어도 저 기록은 안나오겠다.

―버그네 버그.

―대체 특성이 뭐임? 누가 창조 계열이라며?

―한여름인데 얼음파는 놈이 있었거든. 지금 생각하면 그 새끼가 김밥조아 확실함.

―창조 계열로 저 기록이 나오나?

―아이템 같은거 만들어서 도배하면 할수 있지 않음?

―그래봐야 5개가 한계인데 병신아.

사람들이 진짜 궁금한 건 대체 어떻게 그 어두운 미궁을 달렸냐는 것이다.

몬스터를 23마리나 잡은 건 고인물이니까 뭐 그렇다고 치자.

그래도 시야라는 물리적인 한계는 벗어날 수 없지 않은가 말이다.

몇몇 유저들이 심층 분석에 나섰다.

―키퍼는 아직 안 잡혔으니까 스킬은 지형감지 하나일 거임. 홉고블린한테서 나오는거.

―두개 얻었다 치면 지형감지2 이렇게 됨. 효과가 중첩되는데 그래도 저 기록은 좀···

―다른 스킬은 없음? 키퍼 잡으면 뭐 나옴?

―키퍼가 체력재생스킬 주던가? 예전에 어떻게 잡았더라···

―븅ㅋㅋ잡은 적 있긴 하냐?ㅋㅋ겜에서 키퍼 잡은 놈들은 진짜 얼마 없을 텐뎈ㅋㅋ

―나중에 점화석 드랍되면 가능하긴 한데 아직은 무리입니다.

―그럼 김밥조아님은 지형감지 하나만 믿고 달렸단 소리임? 말이 안 되는데···

―니이임?

―이젠 김밥조아가 자연스럽게 나온다? 간첩임?

―여기 보고 있을 텐데 잘 보여야지.

―김밥조아님 저는 언제나 응원했어요 충성충성 ^^7

―씨발 언제까지 그 새끼 그 새끼 할거임? 그 새끼도 별 신경 안쓰는 것 같은데.

―코멘트 하나에 그 새끼를 세 개나 쓰네 정성추.

―내가 김밥조아면 저 새끼 먼저 조진다.

―근데 김밥조아 은근 쿨한 놈인듯? 자기 욕을 아이디로 입력해버리네.

―지랄하네. 그 새끼가 쿨하게 영상만 풀었어도 생존자가 지금보단 많았을 거임.

―그건마찌.

―정보 다 풀었어도 욕먹었을 것 같은뎈ㅋㅋ 진짜 정보 숨기고 있지 이러면섴ㅋㅋ

―근데 생각해보면 정보 풀어도 김밥조아란건 숨겨야 되잖아. 생존자들이 자기 적대하면 현자타임 오겠닼ㅋㅋㅋ

―내가 니들 살렸다고! 내가 공략본 푼 사람이라고!

―어쩌라구요ㅋㅋㅋ

―님들 마지막에 공략본 돌린 사람 누군지 암?

사람들은 그제야 정보를 푼 사람이 있다는 걸 기억해냈다.

사태 당일에 공략본이 뿌려졌고 많은 생존자가 덕을 봤지만 지금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호의를 당연하다고 생각하니까 그렇지.

―일침충 극혐.

코멘트란에서 무의미한 싸움이 벌어졌다.

정작 성호는 토끼공듀와 오리궁뎅이로 추정되는 사람들의 기록을 살펴보고 있었다.

"이 사람들 보게."

.

.

.

「2nd 쎅쓰 00:56:15 kill:37 포인트:74」

「10th 여왕님이시다 01:45:24 kill:157 포인트:340」

이게 토공과 오리궁뎅이로 추정되는 기록이다.

"완전히 미쳤네."

오리궁뎅이는 그렇다 쳐도 토공의 기록은 말도 안 되는 것이었다.

아무 준비도 안 된 상태에서 몸만 믿고 뚫어버린 것이다.

부활이 바로 됐었나?

전에 이야기 들은 바로는 약간 시간이 필요하다고 하던데···

"나야 뭐 여러 스킬하고 아이템이 있으니까 기록을 낸 거지."

코멘트란을 보니 사람들은 내 기록에 비하면 별로라면서 폄하하고 있었다.

사실 이게 더 쩌는 기록인데.

―2등이 토공임? 의외로 별로인데···

―부활가지고 그냥 뚫으면 되잖아. 존나 쉽겠구만.

―토공 이번에는 실망이야.

니들이 한번 해보시던가요.

"오리궁뎅이는 무슨 학살극을 벌였네."

몬스터를 다 죽이면서 진행한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특성이 좀비 조종은 맞긴 한 모양이야."

저 기록은 부하가 많아야지 낼 수 있는 기록이다.

근데 아이디가 좀 이상하군.

"오리궁뎅이가 여자였었나?"

토공과 같이 온갖 미친 짓을 저지른 걸 생각하면 도저히 여자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이것도 편견이긴 한데.

"생존자1도 분명히 했을 텐데 어디 있나···"

기록을 다 뒤졌지만 그의 것으로 생각되는 기록은 보이지 않았다.

고인물의 특징은 몬스터를 꽤 잡았다는 것이다.

스피드런에서 몬스터를 잡는 건 손해라서 보통은 무시하고 지나치기 마련이다.

하지만 오리궁뎅이는 물론이고 나와 토끼공듀도 몬스터를 10단위로 잡았다.

다른 유저들은 5마리 이하인데.

"생존자1은 안했나보네."

어쩌면 그의 특성은 나처럼 전투에 적합하지 않은 건지도 모르겠다.

지원 계열일 경우 닥치고 돌격 식의 이런 이벤트는 안 하는 게 편하긴 하지.

"그럼 정부세력과 같이 있겠군."

나는 스크롤을 찢어서 「진실을보는눈」 스킬을 습득했다.

그러자 메시지가 나타났다.

「특정한 유저의 아이디를 확인 가능. 10포인트 소모」

코멘트란에서 과하게 어그로를 끌고 있는 놈의 아이디를 주시하자 메시지가 떴다.

「10포인트를 써서 아이디를 확인하시겠습니까? YES/NO」

나는 주저 없이 YES에 시선을 집중했다.

그러자 코멘트 뒤에 아이디가 표시되었다.

―지랄하네. 애초에 불가능하다니까? 내가 씨발 1시간 41분이라고(아이디:도와주셈) 

"어?"

예전에 영상을 미끼로 후원금 먹튀한 사람 아닌가?

분명 이름이 김효종이었지.

나는 영상을 뒤져서 내가 유저를 평가한 리스트를 찾아냈다.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긴 뭐해서 비방용이었다.

도와주셈 항목을 찾아보니 개트롤이란 평이 나왔다.

튜토리얼 마친 초보들 도와준다고 강화 구울이 리젠되는 구역으로 끌고 간 놈이다.

kill이 하나도 없는 걸 보니 은신계열인 모양.

"이 자식 이거 요주의 인물이네."

적어둬야지.

나는 코멘트를 입력한 사람들의 아이디를 전부 확인해 내 리스트와 대조했다.

150포인트를 소모한 결과는 이렇다.

―님들쩔좀(버스충) : 애초에 씨발 특성이 다른데 스피드런을 시키는게 말이 되나 특성 전부 못쓰게 하고 시작해야지.

―뉴비에겐친절(뉴비사냥꾼) : 씹인정. 원래 서라에선 특성 없었잖음? 스킬만 가지고도 깼었는데.

―욕설왕퍼킹(친절함) : 아니 서라야 게임이니까 재도전한다 치지만 현실에선 어쩌라고요. 님들 죽으면 재도전 가능해요?

―이겜망했네(병신26) : ㅇㅇ 저 토공임 재도전 쌉가능.

―몹인지아랏내(개병신7) : 니가 토공이면 나는 오리궁뎅이다.

"잘들 노네."

그나마 욕설왕이 정상적이란 게 참 아이러니하군.

특징이 있다면 내가 안 좋게 평가한 놈들은 반말은 기본에 어그로를 심하게 끌었다.

좋게 평가한 사람들은 존댓말을 쓰고 어그로도 끌지 않았다.

"이것도 경향성인가."

보고 있으니 참 웃길 따름이다.

이제 코멘트란은 아이템 자랑으로 활기를 띄었다.

―저 1시간 55분 찍었는데 무기 강화권 나왔어요.

―무기강화권 ㄹㅇ?

―잠수함 패치 완전 미쳤네.

―그거 쓰면 어케됨?

―무기 공격력이 업그레이드되는 것 같은데···아직 안해봐서 모름.

―근데 무기 강화해봐야 내구 떨어지면 꽝아님?

―몇번 쓰고 무기 깨먹겠넼ㅋㅋㅋ

―아 꼬시닼ㅋㅋㅋ

―근데 니들은 그것도 없잖아. 열폭쩌네.

―ㅋㅋㅋㅋ

―나중에 가챠 나오는거 아님? 포인트로 뽑기 가즈아.

―재수없는 소리 그만해.

―좆망겜 확 망해라.

―그럼 우리도 망하는데?

―님들 그럼 김밥조아님은 무슨 아이템 먹었을 것 같음?

―와 호칭 바로 달라지는거봐.

―쎅쓰 이거 토공 맞지? 고인물들 아이템 뭐 먹었는지 존나 궁금하네.

―씨빨 누구는 특성 좋은 거 받아서 아이템 먹고 누구는 쥐뿔도 없고.

―꼬우면 서바이벌 라이프 오래하시든가.

―뭐 씨발 겜폐인새끼가 자랑임?

―특성 좋은 거 먹었으면 당연히 자랑이지 병신앜ㅋㅋㅋ

―ㄹㅇ니가 사는 곳은 아포칼립스가 아니라 어디 알록달록동산임?ㅋㅋㅋ

―야 알록달록동산 존나 위험한데.

이제 코멘트란은 스피드런이 과연 공평한가에 대한 토론으로 불타올랐다.

"아포칼립스에서 공평 찾고 있네."

다른 경매품 코멘트란에 가보니 미궁에서 있었던 다양한 경험들을 공유하고 있었다.

여긴 정상적인 사람들만 모였군.

―발끝의밀크티(변태) : 님들 미궁에서 악마 봤어요? 와 진짜 무서웠음.

―우리엄마(좋은사람) : 미궁에 악마도 있어요?

―발끝의밀크티 : 제가 너무 어둡네 이러면서 가고 있는데 벌거벗은 채로 물구나무를 서 있더라고요.

―무서워잉 : ㅎㄷㄷㄷ

―발끝의밀크티 : 저를 보면서 막 이러더라고요. 어둠을 받아들여라. 네 안의 빛을 바라보면 길이 보일 것이다 막 이래요.

―우리엄마(좋은사람) :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요?

―발끝의밀크티 : 무서워서 ㅌㅌ했어요.

"토공이네."

벌거벗고 물구나무를 설 사람은 그 아저씨 밖에 없다.

부활 후유증으로 잠시 쉬고 있었던 걸까?

하여튼 진성변태가 아닐 수 없었다.

나는 다른 경매품의 코멘트란으로 이동했다.

여기는 일단 주목할 만한 뉴스를 게재하는 곳이다.

하지만 신빙성은 거의 없다는 게 이용자들의 평이었다.

아무나 개소리를 지껄일 수 있는데 신빙성이 있으면 이상하지.

다만 그 중에서도 다수의 증언이 일치하는 뉴스가 있었다.

―속보 : 좀비를 부하로 데리고 다니는 미친년이 경산에서 청도로 이동중.

―속보 : 세종시에서 웬 미친새끼가 벌거벗고 뛰어다님.

"이건 또 무슨 개소리야."

좀비를 부하로 데리고 다니는 미친년은 아무래도 오리궁뎅이인 것 같고.

벌거벗고 뛰어다니는 미친새끼는 토공일 확률이 높았다.

문제는 둘이 있어야 할 장소가 이상하다는 것.

토공은 북한에 있지 않았나?

오리궁뎅이가 경산에서 청도로 내려오는 이유는 뭘까?

"···이거 불안한데."

혹시 둘의 최종목적지가 내가 있는 곳은 아니겠지.

아닐 거야, 하하.

.

.

.

김현우 대위가 우리를 찾아와 놀라운 소식을 전했다.

"전에 제가 동료들에게 김해대대를 점령하란 적이 있다고 말씀드렸잖습니까? 놀랍게도 이 친구들이 해냈습니다. 1종 창고가 고스란히 있었답니다."

"오···대단한 친구들이네요."

나와 형준 형은 진심으로 박수를 보냈다.

전역 직전에 좀비 사태가 터져 울분에 찬 말년병장의 힘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무튼 김대위는 우리를 거기로 초대했다.

"김해대대가 인근 격오지 부대의 보급고 역할도 하기 때문에, 창고가 꽤 큽니다. 같이 가시죠."

좋은 사람이군.

아포칼립스에서 다들 식량을 독점하기 바쁜데 이렇게 내어줄 생각을 하다니 말이다.

형이 물었다.

"저희가 가도 괜찮습니까? 식량을 나눠야 하는데요."

"어차피 저희는 서울로 올라가야 할 몸입니다. 여러분들에게 맡기는 것도 나쁘진 않죠."

"서울요?"

형은 금시초문인 모양이다.

나는 경매장을 통해서 정부로 추정되는 세력이 소집령을 내린 것을 들어 알고 있었다.

소집령이라고 하지만 대단한 건 아니고.

마지막에 정부기관에 몸을 담은 사람이 있다면 보호해줄 테니 서울로 오라는 것이다.

군인도 당연히 거기에 속할 테니 김대위는 흥분했을 테지.

그나저나 벌써 15레벨까지 올렸다니 대단한데.

사격 관련 특성이라 전투에 특화되긴 한 모양이다.

그러니까 혼자서 그 먼 길을 뚫었지.

김대위가 경매장에 대해 설명했고 형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경매장에 그런 기능이 있었나···이거 빨리 레벨을 올려야겠는데요. 하여튼 정부가 건재하다 이거죠?"

"정확한 건 가봐야 알 것 같습니다만 최소 대통령님은 살아계신 걸 확인했고요."

"그 양반이···"

장원택은 정돈된 종말을 통해 의무를 다한 책임감 있는 대통령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만약 그가 살아있는 것으로 확인된다면 많은 사람들이 몰릴 것이다.

하지만 좀비 레이드는 어떻게 극복할 셈이지?

5명 이상 모여 있으면 위험하다는 걸 모르지 않을 텐데.

조금 있으려니 종이비행기가 날아왔다.

형이 거기에 뭔가를 쓱쓱 적고 보냈다.

혼자 결정할 수 없으니 멤버들의 의사를 묻는 것이다.

우리끼린 창원으로 잠정 협의한 바 있지만 먹음직스런 1종 창고는 놓칠 수 없지.

김대위가 물었다.

"그런데 여기 분위기는 좀 어떻습니까? 오면서 보니까 좋지는 않은 것 같던데."

형이 대강 설명했다.

"아주 험악하지요. 골프 클럽에 있던 세력이 무너졌거든요. 범인은 모릅니다만 주위에 있을 겁니다."

"그럼 빨리 떠야겠네요."

"김해대대 위치가 어디쯤입니까? 미곡센터에 잠깐 들릴까 하는데."

"여기 지도를 보시면···"

형준 형과 김대위가 의견을 나누는 동안 종이비행기가 날아왔다.

다른 멤버의 의견은 OK로 모였단다.

그럼 이제 떠나는 일만 남았군.

어차피 여기는 민심이 험악하고 파밍할 곳도 없어서 장기적으로 살 곳은 못 되었다.

목적지가 정해졌으니 빨리 떠나는 게 서로에게 좋다.

우리는 떠날 준비를 했다.

하지만 세상일이란 게 그리 쉽게 돌아가지는 않았다.

골프장 사람들이 갑자기 공격을 해온 것이다.

살인자 셋이 모여 있던 건물에 화살이 날아들었다.

"씨발 왜 이러는 거야!"

"이 도둑놈의 새끼들아! 물자 돌려받으러 왔다!"

세뇌에서 깨어난 골프장 사람들이 어수선한 틈을 타 생존자들이 벙커를 턴 걸 얘기하는 것이다.

근데 그건 니들 물자가 아니라 권씨 것이었잖아?

주인이 사라져서 좀 챙기겠다는데 뭐가 문제야?

나는 옥상에 올라가 두 세력이 싸우는 꼴을 지켜봤다.

"조용히 사라져 주니까 이렇게 나오신다 이거지."

십여 명과 3명의 싸움인 만큼 오래 가지는 않을 것 같았다.

문제는 좁은 지역에 너무 많이 몰려 있다는 것.

"좀비 레이드는 생각도 안하고 있네."

살인을 한 사람도 꽤 있어서 잘못하면 이벤트가 벌어질 수도 있었다.

저들은 그걸 모르는 모양이지만.

가기 전에 정리 좀 해야겠군.

< 새로운 사람들 - 3 > 끝

< 새로운 사람들 - 4 >

권씨가 죽고 나서 골프장 생존자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기억은 뒤죽박죽이고 왜 사회가 망했는지 모르는 사람도 많았다.

우리가 아는 세상은 이미 망했고 시스템이란 게 생겼다는 것까진 이해했지만 그걸 온전히 받아들이지는 못했다.

이제부터 치열한 생존경쟁을 벌여야 한다는데 누가 제정신일 수 있을까.

생존자들은 분노했다.

이 모든 사태의 원흉인 권씨는 이미 시체가 된 상태였다.

시체에게 분노를 돌릴 수는 없으므로 누군가에게 뒤집어 씌워야 한다.

한 명이 이렇게 말했다.

―내 기억으론 좀비 레이드를 막으려면 한 명이 죽어야 합니다!

―누가 그래요?

―이, 인터넷에서 봤습니다! 5명 이상이 몰려 있으면 위험하다고···

―씨발 그렇게 따지면 지금은 왜 조용해? 11명인데 좀비 몰려와야지?

―이 아저씨 수상하네.

선동자가 궁지에 몰렸다.

그는 한 명을 대놓고 지목했지만 정작 그가 역으로 선동에 나섰다.

―한 명이 사라지기만 하면 되는 거 아뇨? 저 아저씨를 죽입시다! 힘도 없어 보이는데!

―맞아. 당신만 죽이면 되겠네.

―둘러싸서 공격합시다!

―나, 나 죽이면 니들은 멀쩡할 거 같아?

사람들을 선동하려 했던 그는 순식간에 둘러싸여 윽윽거리다 죽고 말았다.

선동자의 허망한 최후였다.

그러나 사람들의 분노는 가라앉지 않았다.

원룸촌의 생존자들이 도둑질한 것을 눈치 챈 것이다.

―우리가 모여서 이야기하는 동안에 훔쳐간 게 틀림없어요.

―개새끼들이네.

―우리 물잔데!

―저 새끼들 죽이고 되찾읍시다!

갈 데 없던 분노가 마침내 목표를 찾았다.

그들은 세뇌에서 막 벗어났기에 다른 생존자들에겐 당연한 상식을 알지 못했다.

5명 이상 모여 있으면 위험하다거나.

살인을 두 번 저지르면 시스템상 살인자로 등록된다는 것들 말이다.

주변 생존자들에게 물어볼 수도 있겠지만 분노가 치밀어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 와중에 여자 두 명의 거취가 결정되었고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두 명은 그나마 젊고 괜찮아 보이는 남자 세 명을 끌어들였고, 나머지는 반발했다.

―아니 우리에게도 기회가 있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무슨 기회요? 우리가 무슨 물건이에요? 그 개새끼한테 부려 먹힌 것도 억울한데 뭐 어째요?

―진짜 웃겨. 당신들, 평범한 세상이었으면 우리 쳐다보지도 못했어요. 알아요?

―가만히 듣고 있었더니 뭐? 다시 말해봐.

―거 틀린 말은 아닌데 아저씨가 양보 좀 하십시다.

―너는 또 뭐야.

―꼭 다섯 명이어야 되는 겁니까?

―아니 죽은 그 아저씨가 그랬잖아요. 혹시나 하는 거죠.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상황.

누군가가 분노를 돌릴 곳을 제시했다.

―우리끼리 싸우지 말고, 도둑놈들 먼저 족칩시다! 그러면 되는 거잖소!

―나중에 천천히 이야기합시다! 그 새끼들 죽이고 나서!

―옳소!

분위기가 순식간에 도둑들의 성토로 바뀌었다.

―다 같이 가는 겁니다! 지금부터 빠지려는 놈은 가만 안 둬!

10명이 하나로 묶였다.

이제 벗어나려 했다간 분노를 뒤집어쓰게 생겼다.

그 와중에 철준과 유주는 남들 몰래 서로의 손을 잡았다.

둘 다 훤칠하고 훈훈하니 결합은 예정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들이 뭐라 하건 둘은 여기를 떠날 생각이었다.

일단 급한 불은 끄고 나서.

10명이 고블린들을 사냥하며 원룸촌으로 이동했다.

워낙 외진 곳이라 좀비는 거의 없었다.

마침내 생존자가 있을 것으로 추측되는 건물을 에워싸고 무차별로 공격을 퍼부었다.

세 명의 생존자들도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기에 반격에 나섰다.

바야흐로 원룸촌 일대가 전쟁터로 변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조용히 움직이는 사람들이 있었다.

.

.

.

전투를 감지한 헬스장 사람들과 김대위가 조용히 짐을 싸기 시작했다.

이럴 때 대활약하는 사람은 단연 미경과 유현이었다.

둘은 전투 자체엔 대단한 능력을 보이지 못했지만 정찰과 기동력에선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유현이가 종이비행기로 전투상황을 실시간 중계하면 미경이 사람들과 짐을 조금씩 옮기는 것이다.

채 10분도 되지 않아 다섯 명과 이삿짐이 원룸촌 외곽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내게도 종이비행기가 날아왔다.

―미경이 보낼까요? 어지럽다고 잠시 앉아 있어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중에 합류할 테니까 먼저들 가. 확인할 게 좀 있어."

종이비행기는 잠시 침묵했다가 다시 창문 틈을 통해 날아갔다.

현명한 사람들이니 괜히 나를 기다린다거나 해서 곤란하게 만들진 않을 것이다.

그걸 위해 혼자서 활동하는 게 성과가 좋다는 등의 밑밥을 깔아온 거지만.

나는 옥상에서 밑을 내려다봤다.

"몽땅 다 왔군."

공격하는 것까지는 좋은데 특성 다루는 걸 까먹었는지 연신 화살만 쏴댔다.

세뇌 당했을 때의 기억은 죄다 날아갔나?

"그래도 위협적이긴 한데."

살인을 저지른 세 명의 생존자도 아직은 숨어만 있었다.

그러다가 화살로 찔끔찔끔 반격하고.

위에서 보고 있자니 잠이 올 지경이었다.

그냥 갈까?

여기 있어봐야 별 거 없을 것 같은데···

라고 생각한 순간.

공격자 중 한 명이 답답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쓰러졌다.

그의 등에 화살이 돋아나 있었다.

"뒤에서 쐈어!"

"흩어져, 흩어져!"

공격자들은 삼삼오오 주변 건물로 흩어졌다.

"이러면 나가린데."

명확하게 두 번의 살인을 저질렀으니 이제 살인자 이벤트가 뜰 차례다.

하지만 데스매치의 시작을 알리는 쿵, 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아···여기 좀비가 없지."

게임 안에서는 언제 어디서든 좀비가 튀어나오지만 현실은 아니었다.

고블린도 별로 없는 외딴 곳이라 좀비들이 와서 벽을 만들려면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그렇다면 살인자 이벤트는 안 일어나나?

두근, 두근, 두근.

심장소리가 약하게 들렸다.

은신계열 살인자면 처치하기가 좀 곤란해지는데.

"여기서 쓸 수 있는 방법이···"

그때 또 비명이 들렸다.

이번에는 공격자들이 방어자들을 사살하는 데 성공한 것 같았다.

동시에 심장소리가 다른 곳에서 들리기 시작했다.

"살인자가 두 명이네."

서바이벌 라이프에선 이런 경우는 없었다.

유저도 별로 없고 살인자는 더더욱 드물었기에.

귀를 기울이니 심장소리가 가까워졌다가 멀어졌다가 난리도 아니었다.

나야 헤드폰으로 자주 들어서 익숙하지만 다른 사람은 그야말로 기겁할 것이다.

우선은 살인자를 확정해야 한다.

나는 1층으로 내려가 차원문 안에서 주의를 집중했다.

두근, 두근 하는 소리가 빠르게 들렸다.

사람 몇 명과 살인자로 추측되는 자가 추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오지 마세요! 오지 말라구!"

"잠깐만요! 잠깐 얘기 좀!"

웃기게도 살인자가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초보 살인자네. 안 그러냐 딩고야?"

녀석은 관심 없다는 듯 하품을 해댔다.

살인자라고 해서 꼭 의식이 날아가는 건 아니다.

전에 만났던 살인자는 세뇌를 당해서 그랬던 거고 처음엔 의식이 멀쩡하다.

시야가 붉어지고 주변 사람들의 위치가 보이니까 살인충동을 느끼긴 하지만.

기다리고 있으려니 누군가 악을 질러댔다.

"돌멩이 날리면서 뭐 이야기? 꺼져 살인자새꺄!"

다른 살인자는 염동력 계열이군.

나는 정신을 최대한 집중해 주변의 상황을 파악했다.

솔직히 말해 살인을 막는 데에는 큰 관심이 없다.

아이디 확인하는데 쓴 포인트를 벌고 싶을 뿐이었다.

"겸사겸사 물자도 확보하면 더 좋고."

타임쉘터의 물자는 손댈 엄두도 안 났지만 벙커 하나 정도라면 괜찮다.

그나저나 좀비 벽이 없어서 그런지 다들 살인자에게서 잘도 도망 다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비명소리가 또 들렸다.

"벌써 두 명을 죽였네."

더 죽이면 상당히 강화되기 때문에 내가 위험해진다.

아직 데스매치는 아니지만 하나는 여기에서 끝내야겠군.

장비를 챙기는데 멀리에서 좀비들이 다가오는 게 보였다.

"먼 길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레이드, 데스매치 둘 중 뭐가 우선일까.

살인자가 두 명이라 쿵, 하는 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데스매치가 시작됐다.

.

.

.

철준과 유주는 공격을 하는 척만 했다.

일이 끝나면 여기서 도망칠 생각이었기에 도저히 열의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적당히 물자만 확보하면 된다는 생각이 둘을 지배했다.

하지만 문제가 생겼다.

찢어지는 비명과 심장소리가 교차되어 들리기 시작한 것.

"뭐, 뭐야?"

"철준씨 이게 무슨 소리죠?"

"모르겠어요. 일단 피신합시다."

둘은 서로의 손을 꼭 잡은 채 건물에 들어가 계단에 숨었다.

살아서 벙커로 가기만 하면 되었기에 둘은 계속 도망만 다녔다.

그러나 심장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마침내 둘은 계단에서 어떤 남자와 마주쳤다.

"어?"

분명 아무도 없었는데?

철준이 망설이는 사이 남자가 입을 열었다.

"여기 있었네요."

"누, 누구세요?"

"지금 그게 중요합니까?"

그가 피가 묻은 세라믹 나이프를 들었다.

철준과 유주는 동시에 숨을 멈췄다.

그들이 마주하고 있는 건 살인자였다.

"이거···들려요? 쿵쾅쿵쾅하는 소리. 내 심장소리인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고요. 당신들 소리였어···"

남자의 나이프가 둘을 가리켰다.

왠지 약간 정신이 나가 있는 것 같았다.

그가 작게 웃었다.

"여길 어떻게 찾았는지 알려줄까요? 나한텐 당신들 위치가 보이더라고. 꼭 죽이라는 것처럼···하하."

"유, 유주씨, 위로 올라가세요."

"철준씨···"

둘은 서로의 옷을 움켜쥐었다.

살인자는 혀로 입술을 핥으며 성큼성큼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의 눈은 시뻘겋게 충혈 되어 있었다.

"나 지금 엄청나게 강하거든. 사람 하나 죽이는 거 참 쉽더라고. 그러니까 빨리···"

그때 남자의 가슴팍에서 뭔가가 삐죽 튀어나왔다.

"어?"

이게 뭐지?

살인자는 튀어나온 뭔가를 손으로 만졌다.

얼마나 날카로운지 만지는 족족 피부가 쩍쩍 갈라졌다.

그는 그제야 누가 자신을 찔렀다는 걸 깨달았다.

"어떤 놈이···"

살인자의 다른 팔이 벽을 후려쳤다.

퍼석, 하고 대리석이 깨져나갔지만 그것뿐이었다.

어느새 빠져나간 진녹색의 칼날이 살인자의 목을 훑고 지나갔다.

"컥!"

그걸로 끝이었다.

살인자의 머리가 떨어져 나갔고 몸이 천천히 무너졌다.

피가 분수처럼 뿜어졌고 철준과 유주는 동시에 비명을 질러댔다.

그 너머에 묵묵히 칼을 회수하고 있는 한 남자가 있었다.

커다란 헬멧에 검은 옷을 입고 있어서 용모는 파악되지 않았다.

"빨리 도망가는 게 좋을 겁니다. 좀비들 오고 있으니까."

"뭐, 뭐라고요?"

"뭐라고요만 하고 있으면 죽습니다."

철준은 진득한 피비린내에 코를 막았다.

이 남자 혹시···

"권경준이를 죽인 게···"

"납니다."

성호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은신형 살인마라서 까다로웠는데 스스로 모습을 드러낼 줄이야.

생존자들을 겁주며 즐길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그가 몸을 돌리고 나가려는데 유주가 소리를 꽥 질렀다.

"왜! 왜 말 안 해줬어요!"

"···뭘 말입니까?"

"권경준 그 새끼 죽인 뒤에! 우리한테 사정을 설명해 줄 수도 있었잖아요! 어떻게 됐다고!"

"내가 왜요?"

그 한마디에 유주의 말문이 콱 막혔다.

성호는 어처구니없어 했다.

"얌전히 떠나 줬으면 고맙게 여길 줄 알아야지 왜 난립니까? 내가 선생님처럼 자상하게 설명하기라도 했어야 한다는 겁니까? 11명을 상대로?"

"무, 물자를 훔쳐갔잖아요!"

"권씨를 죽였으니까 그건 내 물잡니다. 나머지는 당신들에게 양보한 거고요. 적당히 물자 챙겼으면 만족하고 정보나 알아봤어야지 뭘 얻겠다고 여기 왔습니까? 덕분에 다 죽게 생겼네."

"다 죽는다고요?"

철준이 물었고 성호의 롱나이프가 밖을 가리켰다.

어느새 나타난 좀비들이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이러고 있는 동안에도 좀비가 여길 에워싸고 있단 말입니다. 좀비 레이드 안 들어봤어요?"

둘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게 진짜로 있는 거였다니.

성호는 롱나이프를 허리에 차고 밖을 쳐다봤다.

"살고 싶으면 지금이라도 뛰세요. 북쪽으로 도망가면 되겠네."

"그, 그쪽은요?"

"좀비한테 물린 후엔 질문 그만할 거죠?"

빨리 도망 안가고 뭐하냐는 말이다.

"유주씨!"

철준은 급한 마음에 그녀의 팔을 쥐고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성호가 길을 비켜주었고 둘은 그대로 후다닥 달아났다.

"그 호기심을 진작 좀 발휘해보지."

참작의 여지는 있다.

세뇌에서 풀린 지 얼마 안 되어서 특성도 제대로 쓸 줄 모르고 궁금한 것도 많겠지.

하지만 아포칼립스에선 모르는 것도 죄가 될 수 있다.

억울하다고 하소연해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그어어어!

카아악!

성호는 밖에서 좀비들이 난리를 치거나 말거나 정산에 들어갔다.

"어디 보자···오늘 얻은 게."

살인자 둘을 처치해서 300포인트와 죽음의낙인 스킬, 그리고 아이템을 얻었다.

아이템은 허당이고 300포인트는 꽤 짭짤했다.

그리고 죽음의낙인은 살인자들이 생존자들을 찾아내는 바로 그 스킬이었다.

살인자는 최종적으로 적외선 시야까지 얻게 되지만 유저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생명체추적으로 추격하고 죽음의낙인으로 확정해 덮치고···좋은데."

이제 그에게 찍히면 무조건 죽는다고 봐야 한다.

어느새 좀비들이 건물 안까지 들어왔다.

성호는 느긋하게 짐을 챙긴 뒤 차원문 안에 들어갔다.

목표를 잃은 좀비들이 허우적거리다 건물 밖으로 나갔다.

원룸촌 일대가 조용해졌다.

.

.

.

"소집에 응한 사람이 좀 있습니까?"

"그렇게 많지는 않습니다. 3명 정도···"

장원택과 배검인은 쉘터의 옥상에서 담배를 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이차가 많지만 장원택은 신경 쓰지 않는다.

이 사람 덕분에 자신이 살았다고 봐야 하니까.

각성자 주변에 있으면 좀비가 안 될 확률이 높다는 걸 나중에 알고는 얼마나 가슴을 쓸어내렸는지.

속내를 조금 감추는 것 같았지만 그거야 얼마든지 감내할 수 있는 일이었다.

장원택이 재를 털자 밑에서 쉘터를 두드리고 있던 좀비의 머리에 떨어졌다.

"사람들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거니까···그나저나 미궁 이벤트는 어떻게 됐습니까?"

"김밥조아가 1등을 했더군요. 38분인데 말도 안 되는 기록입니다."

"게임을 못 해봐서 얼마나 말이 안 되는지 모르겠군요."

"게임에서도 1시간 안에 주파하기가 거의 불가능했었습니다. 근데 목숨은 하나뿐이잖습니까?"

"···그렇군요. 죽을 각오를 하고 달렸다는 말인데···거참."

장원택은 그 무모함에 혀를 내둘렀다.

"토끼공주가 2등이고 오리궁뎅이가 10등인 것 같은데···기록은 밀리지만 포인트에서는 압도적이더군요. 미궁의 몬스터를 죄다 죽였나 봅니다."

"하하, 못 말리는 사람들이로군요."

장원택은 입맛을 다셨다.

그런 뛰어난 자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쉘터는 훨씬 더 안전해질 것이다.

하지만 그들을 끌어들일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또 끌어들인다 해도 제대로 통제할 자신이 없었다.

검인이 화제를 돌렸다.

"요즘은 미궁에서 일어난 일들이 화제더군요. 외국인들을 만났다는 사람이 많습니다."

"뭔가 좀 이상하군요."

서바이벌 라이프는 한국에서만 서비스 된 게임이다.

전용 VR장비가 없으면 플레이하기가 불가능했기에 외국인이 있을 이유가 없었다.

한국에서 체류하다가 접한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말이다.

둘은 시선을 마주쳤다.

"아무래도···진짜 외국인인 것 같지요?"

"가능성은 있습니다. 한반도가 완전히 격리된 것과 관계가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벌써 9월인데 태풍도 없고 공기도 이렇게 상쾌하군요. 미세먼지가 대부분 사라졌다는 말이겠죠."

"흐음···"

장원택은 담뱃재를 털며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이 건에 대해서는 더 정보를 수집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장비가 모두 망가졌기에 데이터를 수집하려면 사람을 보내는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블링크 능력자가 있어서 다행이다.

장원택이 양해를 구하고 내려간 다음, 검인은 경매장을 호출했다.

'슬슬 작업을 해봐야겠군.'

그의 존재감에 대한 것이다.

많은 생존자들이 그의 도움을 받았지만 정작 그는 장원택의 존재감에 밀리고 있었다.

소집령에 응한 세 명 모두 대통령이 살아 있다는 말에 흥분했다.

자신은 철저히 밀린 것이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별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어쨌거나 장원택은 대통령이었고, 앞으로도 큰 영향력을 행사할 테니까.

하지만 검인은 그걸 두고 볼 수가 없었다.

'최소한 경매장의 인원들만이라도 내 편으로 만들어야 한다.'

우선적으로 그는 생존자1이라는 아이디를 계속 노출시켰다.

이런 식이다.

―그래도 생존자1인가 하는 걔는 좀 나았지. 완전히 미치지는 않았으니까.

―대통령하고 같이 있는 거 보면 정보 퍼트린 것도 걔 아님?

―생존자치고 그 공략본 안 본 사람은 없지 아마?

하지만 사람들은 생존자1에게 관심이 없었다.

경매장의 스타는 토공과 오리궁뎅이, 그리고 김밥조아였다.

절대 좋은 건 아니지만 화제의 중심이라는 점에서 배검인은 질투심을 느꼈다.

"공략본을 뿌린 건 난데···"

그는 생각했다.

지금 경매장에 죽치고 있는 놈들은 준고인물로 공략본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앞으로 몇 개월만 더 기다리면 그의 덕을 본 사람들이 들어올 것이다.

조금만 더 참자.

배검인은 고인물들이 어디 있는가로 싸워대는 사람들에게 코멘트를 남겼다.

―님들 생존자1 위치는 다 알지 않음? 소집령 내려졌던데 거기 가면 고인물 만날 수 있음.

―ㄲㅈ 관심없음.

―존나 듣보새끼 알아서 뭐함? 스피드런도 안했더만.

―김밥조아보다 더 쫄보임. 그 새끼는.

참담한 평에 배검인은 붉어진 얼굴을 손으로 덮었다.

"···어차피 마지막 승자는 나니까."

그는 애써 자위하며 경매장을 껐다.

그리고 그의 아이디를 확인한 성호가 히죽 웃었다.

생존자1은 자화자찬이 심한 타입이군.

< 새로운 사람들 - 4 > 끝

< 최선의 방어란 - 1 >

나는 골프장 벙커 하나를 더 털었다.

살인자 이벤트와 좀비 레이드가 겹치는 바람에 살아남은 사람이 드물었기 때문이다.

물자를 그대로 두고 떠나기엔 아깝잖아?

벙커 하나는 남겨놨으니 생존자가 있다면 적당히 먹고 살 수는 있을 것이다.

"그나저나 이거 확장을 해야겠는데···"

숲의 쉘터를 돌아보고 있으려니 왠지 비좁게 느껴졌다.

루팅한 물자가 하도 많아서 말이지.

조금 과장하면 딩고가 뛰어다닐 공간조차 부족해 보였다.

"윤형철조망을 해자 밖으로 옮기고 또 해자를 파면···"

파낸 흙을 기존의 해자에 덮으면 6m정도의 공간을 확보할 수 있다.

대단한 면적은 아니지만 당장 급한 불은 끌 수 있을 것이다.

권씨의 벙커에서 휘발유를 잔뜩 루팅했기에 미니 포크레인으로 작업이 가능했다.

포크레인은 보통 경유를 많이 쓰지만 코벨사에서 만든 이 녀석은 휘발유다.

전경을 그리고 있으려니 풍뎅이들이 텃밭에서 일하는 게 보였다.

"···쟤네들 저건 어떻게 배웠지?"

밭을 고르고 씨감자를 뿌린 후 비닐로 덮는데 힘이 세어서 그런지 작업에 막힘이 없었다.

작업내용도 딱딱 나뉘어져 있어서 보고 있으면 감탄밖에 나오지 않았다.

"좀 느리긴 해도 도와주는 게 어디야."

손해될 건 없었기에 묵인하기로 했다.

나는 딩고와 함께 차원문에서 빠져나와 곧장 북상했다.

김해대대는 김해시 북쪽의 생림면에 위치해 있었다.

그 말은 김해평야와 김해시를 관통해서 지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시간도 오래 걸리고, 위험하기도 하고."

차라리 김해시청 인근의 주택가에 자리를 잡는 게 어떨까 싶었지만 헬스장 멤버들은 이미 떠난 뒤였다.

"1종 창고가 참 탐이 난단 말이지."

다들 고되지만 대량의 식량을 확정적으로 얻을 수 있는 루트를 원했다.

나야 뭐 어디든 상관없다.

어차피 최종목적지는 창원이나 바닷가가 될 테니까.

하지만 김해대대가 있는 위치가 좀 골치 아팠다.

일대가 전부 산이고 공장지대라서 좀비는 별로 없겠지만 고블린과 코볼트가 문제다.

잘못하면 군부대를 거점으로 해서 몬스터 디펜스를 벌여야 할지도 모른다.

"좀비가 없으니까 크게 어렵지는 않은데···"

고블린은 낮에, 코볼트는 밤에 1종 창고를 덮칠 가능성이 높았다.

밤낮으로 경비를 서려면 짜증 좀 나겠지.

일단은 가보는 수밖에 없다.

나는 딩고와 함께 김해평야를 가로질렀다.

곧 수확철이건만 황금빛의 물결 같은 건 찾아볼 수가 없었다.

몬스터들이 죄다 쓸어가서 드넓은 김해평야가 황량하게 보일 정도였다.

"메뚜기 떼가 따로 없네."

이대로 놔두면 한반도, 아니 지구 전역이 저렇게 변할 것이다.

몬스터들은 유기물을 흡수하여 더욱 강력하게 진화하고 생존자들을 압박한다.

나중엔 식물형 몬스터까지 등장해서 토양 자체를 바꿔버린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생존자들이 할 수 있는 건 단지 도망가고 버티는 것뿐이었다.

"우리도 크게 다르진 않았지."

유저들의 활약은 전체 세계관에 비춰보면 아주 일부에 불과했다.

결국 대세를 거스를 수는 없다.

나는 가죽 신발로 바꿔 신었다.

계속 신고 있으면 좋겠지만 엄연히 내구도가 있는 거라 아깝다.

걸어 다닐 때도 스탯을 적용받을 필요는 없으니까.

"오, 몸이 훨씬 가볍네."

얼마든지 걸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딩고와 함께 몇몇 몬스터를 처치하며 김해평야를 벗어났다.

도심에 이르러서는 시청에서 곧장 북상하여 최단거리를 뚫었다.

길거리를 배회하는 몬스터를 상대하는 것보단 산복도로를 걷는 게 훨씬 나았다.

그런데 여기는 부산과 분위기가 달랐다.

"생존자가 꽤 많네···"

상가에 숨어서 밖을 구경하고 있으려니 여기저기에서 사람들이 뛰어다니는 게 보였다.

어김없이 좀비나 고블린을 뒤에 달고 있었다.

"김해 인구가 그렇게 많지는 않을 텐데."

부산에서 도망쳐 온 생존자들이 합류한 건가?

아무튼 내가 있던 동네와는 분위기가 크게 달랐다.

돈까스와 치킨, 피자 등 어울리지 않는 재료를 한 그릇에 넣고 섞은 것 같았다.

우리는 조용히 도심에서 벗어나 산복도로를 걸었다.

그러던 중 딩고가 무슨 냄새를 맡고 산으로 뛰어 올라갔다.

뭔가 해서 가보니 코볼트 똥이었다.

"이놈들 벌써 나왔네."

하긴 스피드런 이벤트 이후에 나오니까···

이제부턴 밤도 위험해진다.

고블린이 노상강도라면 이 녀석들은 도둑에 가깝다.

야간시력이 엄청나게 좋기 때문에 밤에도 낮처럼 활동할 수 있다.

덕분에 쉘터의 물자를 탈탈 털어가는 건 일상이었다.

"오랜만에 접속하면 어김없이 털려있었지···"

게임에서의 얘기지만, 쉘터를 아무리 튼튼하게 만들어도 몬스터를 완벽하게 막을 순 없다.

화가 난 유저들은 근처의 코볼트들을 학살했다.

그래봐야 녀석들은 꾸역꾸역 새끼를 낳아 숫자를 늘려나갔고 말이다.

괜히 혐볼트라고 하는 게 아니다.

"그래도 둥지를 순회 공연하는 게 효과가 있긴 해."

단시간이라서 노력대비 효과는 별로지만 안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여기 분성산에도 코볼트가 꽤 있을 것 같은데···

일단은 합류한 다음에 이야기를 해보는 게 좋겠지.

우리는 부지런히 도로를 걸어 마침내 목적지인 김해대대에 도착했다.

남자 하나가 경비초소 뒤에서 불쑥 튀어나와 내게 활을 들이댔다.

"정지, 정지. 용무는?"

나는 순순히 팔을 들었다.

"여기에 제 일행 안 왔습니까? 남자 둘에 여자 둘인데요."

"혹시 중위님하고 만나셨습니까?"

"대위 진이시죠? 아마."

그는 그제야 안심하고 활을 내렸다.

그러면서도 딩고를 신기한 듯 쳐다봤다.

"안에 연락하겠습니다."

초소에 깃발이 올라갔다.

.

.

.

안내를 받아 생활관에 들어가니 형준 형과 수연, 그리고 김대위와 처음 보는 남자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성호 왔냐, 우리도 온지 얼마 안 됐다."

"반갑습니다."

언뜻 어려보이는 그는 자신을 조승태라고 소개했다.

김대위가 웃으며 말했다.

"전에 말씀드린 전역 못한 그 사람입니다."

"아···"

이런 불쌍할 데가.

"강성호입니다. 일단 이분들하고 동료입니다만 같이 행동하지는 않고 있습니다."

동료인데 같이 행동하지는 않는다니 뭔가 좀 이상하지만 그러려니 하는 분위기였다.

김대위가 부대를 소개했다.

"여기는 통칭 김해대대로, 대단한 시설은 없지만 1종 창고가 꽤 큽니다. 인근 격오지 부대의 보급고 역할을 맡고 있어서요. 그런데 창고에 가보니까 엉망이더군요."

"그것도 저희가 엄청 치운 겁니다."

조병장이 얼른 첨언했다.

하긴, 군납품이라고 하면 깡통이 많다.

그게 전부 바스러졌으니 창고가 얼마나 개판일지는 보지 않아도 뻔한 일이었다.

"하나는 경계하고, 하나는 청소하고 하려니까 죽을 맛이던데요. 원래는 몬스터가 별로 없었는데 이젠 코볼트가 튀어나와서···"

"밤에 녀석들이 물자를 훔쳐간다고 합니다. 우리가 자고 있는 새에요."

형과 수연이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밤에 우리 몰래 뭘 훔쳐간다는 건, 결국 공격할 수도 있다는 얘기였다.

김대위가 민망한 듯 말했다.

"제가 갈 때까지만 해도 코볼트는 없었는데 어느새···"

"그럼 대책은 있습니까?"

다들 형의 질문에 고개를 저었다.

몬스터 아포칼립스에 완전한 대책이란 있을 수 없다.

버티고 버티는 것뿐.

"코볼트 외에는 괜찮습니까?"

내가 묻자 김대위가 조병장과 시선을 마주쳤다.

"그게···아니랍니다. 인근 생존자들도 여기를 노리고 있다는군요. 저희가 조금씩 내어드리고 있긴 한데 만족이 안 되나봅니다."

"처음에는 쌀 한 포대, 라면 한 박스도 고마워하면서 받아갔는데 요즘에는 그냥 자기들 물건처럼 가져가던데요."

그렇게 말하는 조병장의 표정에선 약간의 울분이 엿보였다.

자기들이 점령하고 방어하고 있는데 생판 처음 보는 사람들이 내놓으라고 하니 기가 차겠지.

뭐 우리도 어떻게 보면 그런 사람들이고.

전직 군인이라 생존자들에게 심하게 대하지는 못하는 모양이다.

그놈의 대민지원이 뭔지.

형이 팔짱을 끼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나중에는 창고를 자기들이 관리하겠다고 나오겠는데요? 방어는 자기들 일이 아니라고 하겠고."

"잠깐만요. 김대위님하고 두 분이 서울로 올라간다고 그러셨죠?"

수연이 물었지만 김대위와 조병장의 반응은 상이했다.

"그게 저···"

"할 말 있으면 해라, 승태야. 이젠 군인도 아니니까 의견도 맞춰보고 해야지."

김대위가 권하자 그는 주저하며 입을 열었다.

"저는 그냥 여기 있으면 안 될까요? 이 분들하고 같이 있고 싶은데···"

응? 헬스장 멤버들과 합류하고 싶다고?

나야 뭐 상관없지만.

수연의 눈이 묘하게 변했다.

"승태씨 미경이 보고 그러시는 거죠?"

"그, 그건 아닙니다."

아, 그랬나.

미경을 보고 한 눈에 반한 모양이다.

요즘 못 씻어서 좀 꾀죄죄하지만 원래는 하얀 피부에 예쁜 얼굴이다.

성격도 밝고 잘 웃어서 누구에게나 호감을 살만했다.

조병장하고 나이도 비슷하지 않나?

수연이 손등에 턱을 얹었다.

"걔, 마음이 다른 곳에 가 있어요. 제가 뭐 어떻게 말씀을 드리진 못하겠고."

참 애매하게 말씀하시는구만.

조병장은 당황하며 손을 저었다.

"그, 그냥 팬심으로 이러는 겁니다. 그레이스 춤 잘 추잖아요."

"그···뭐요?"

"미경이가 춤을 췄어요?"

다들 놀란 분위기였다.

조병장 조심 좀 하지 그랬어.

나도 미경이 댄스팀에 있었다는 건 알지만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녀가 말하지 않은 걸 꺼내봐야 분위기 싸해지거든.

조병장은 그걸 뒤늦게 깨달았는지 입을 다물었다.

수연이 먹잇감을 발견한 육식동물처럼 눈을 빛냈다.

"그레이스는 미경이가 댄스팀에서 쓴 예명인가요?"

"옙."

"예쁘던가요?"

"엄청 예뻤죠. 피부도 완전 우윳빛깔이고···"

골반 털기가 끝내줬지만 그걸 여기서 언급하느니 땅 파고 관에 들어가는 게 나을 듯하다.

"그래서 저희와 합류하고 싶으시다?"

이 대목에서 조병장도 다 틀렸다고 느꼈을 것이다.

합류하려면 멤버 개개인을 설득해야 하는데 왠지 수연이 화가 나 있었다.

나로선 그녀가 왜 화를 내는지 모르겠지만 여기선 조용히 있자.

조병장이 눈치를 보자 김대위가 중재에 나섰다.

"자자, 당장 서울로 올라갈 건 아니니까 며칠 상황을 보십시다. 저희가 준비를 좀 해야 되어서요."

"···그래요."

수연이 시선을 거두자 조병장이 땀을 뻘뻘 흘렸다.

띠 동갑쯤 되는 누나에게 약한 남자군.

여기서는 살짝 분위기를 환기시키는 게 좋겠지.

"괜찮으시면 창고 잠깐 둘러봐도 되겠습니까?"

"아, 예. 제가 안내할게요."

조병장이 냉큼 일어섰고 수연까지 따라왔다.

그는 안절부절 못하다가 창고에 가서야 안정을 되찾았다.

창고에선 엄청난 냄새가 풍겼다.

모두가 인상을 마구 찌푸리며 코를 막아야 했다.

"지금 느끼셨을 텐데 악취가 장난 아닙니다. 저희가 처음 왔을 땐 깡통이 다 깨져서 썩은 물이 줄줄 흐르고 있었거든요. 야채고 고기고 죄다 녹아서···대충 아시죠?"

"청소 정말 열심히 하셨겠네요."

조병장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재현이가 진짜 고생했죠. 하여튼 간신히 치워놨는데 코볼트들이 이걸 곶감 빼먹듯이 하니까 저희 입장에서는 화가 많이 나죠."

"저희도 빼먹으러 온 건데."

수연이 말하자 그는 부정했다.

"헬스장 분들은 저희가 얘기를 들어서 알고 있었거든요. 또 은근히 언제 오나 기대도 했고요."

"여자가 둘이나 있어서요?"

"···"

조병장은 쑥스러운 듯 고개를 돌렸고 수연이 유쾌하게 웃었다.

그의 어깨에 손을 턱 얹고 말하기를.

"여기 있는 동안이라도 친하게 지내봐요."

그의 얼굴이 환해졌다.

둘이 그러고 있는 동안 나는 창고 주변을 훑었다.

혐오스러운 발자국을 보니 코볼트들이 드나든 게 확실했다.

조병장이 내 뒤에 와서 하소연을 했다.

"창문을 아무리 막아놔도 뚫고 들어오니까 저희가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침입이 있을 때마다 일어나지도 못하고요."

"성호씨 무슨 방법 있을까요?"

"글쎄요."

여기를 무작정 지키기엔 벅찰 것 같았다.

창고 자체도 크고 창문은 수십 개에 문도 몇 개나 되었다.

한 10명이 투입되지 않는 이상 방어는 불가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최선의 방어를 하도록 하죠. 우리가 쳐들어갑시다."

"···네?"

둘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했다.

.

.

.

오리궁뎅이 최다정이 가는 곳마다 주변의 몬스터는 초토화된다.

몬스터란 몬스터는 씨를 말리면서 남하하는 통에 생존자들이 사냥할 게 없어졌다.

그럼에도 일부는 그녀를 좀비 여왕이라 부르며 찬양했다.

사냥할 몬스터야 어차피 다시 올 거고, 그 사이에 파밍에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뒤에서 따라다니면 또 주워 먹을 게 꽤 있기도 하고 말이다.

하여튼 다정이 밀양까지 남하하는 동안 주위엔 수십 명의 생존자들로 바글거렸다.

가끔은 좋은 자리를 선점한다고 싸우는 일까지 있었다.

오늘도 다정은 밀양교 앞에서 좀비 한 무더기를 맞아 싸우고 있었다.

그녀의 부하 좀비는 거의 구울 만큼이나 강해서 도저히 위기로 보이지가 않았다.

말 그대로의 일방적인 학살이었다.

주변의 건물에 숨어 있던 생존자들이 그걸 보곤 투덜거렸다.

"완전 미쳤네, 미쳤어."

"씨발 방금 120포인트 벌었어."

"저대로 강 따라 우회하겠지?"

"아마? 강을 넘지는 못할 거 아냐."

"우리도 갈 준비하자."

밀양에서 하중도로 가려면 다리를 건너야 하는데 공교롭게도 죄다 끊어져 있었다.

철사병 때문에 하중을 버티지 못한 것 같았다.

생존자들은 오리궁뎅이가 강을 따라 우회할 것으로 생각했다.

보트가 없는 이상 저 밀양강을 넘을 수는 없기 때문.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부하 좀비들이 강에 첨벙첨벙 뛰어드는 게 아닌가.

"어?"

"저거 대체 뭐하는 거야?"

놀랍게도 좀비들이 바닥을 만들어 그녀가 건널 수 있게끔 하고 있었다.

생존자들은 이 기막힌 광경에 입을 쩍 벌렸다.

"우와···"

"씨발 저게 말이 되냐?"

그녀가 우아하게 두 좀비의 팔에 들려서 이동하면 바닥 역할을 하던 좀비들이 헤엄쳐서 새로운 바닥이 되었다.

좀비들이 꽉 얽혀 있는 걸 보면 소름이 끼칠 지경이었다.

"완전 미쳤네, 미쳤어."

최다정은 어렵지 않게 강을 건너 하중도에 상륙했다.

이쯤에서 뭘 물어보고 싶은데···

그녀의 시선이 주변의 상가 건물을 훑었다.

손가락을 까닥까닥하자 창문에 숨어 있던 생존자들이 동시에 몸을 숨겼다.

"물어볼 게 있으니까 나와요. 해치지 않아요."

좀비 여왕의 보증에 한 남녀가 엉거주춤 골목에서 나왔다.

여왕은 사람을 두들겨 팰지언정 죽이지는 않는다.

뿐만 아니라 고분고분 답해주면 선물까지 준다고 익히 알려져 있었다.

그들은 구울의 기세에 질린 얼굴이었지만 용기를 내어 다가왔다.

여왕이 우아한 캣워크를 선보이며 앞으로 나왔다.

"최다정이에요. 그쪽 이름은?"

"어···저는 이경훈이고 이쪽은 김보랍니다."

"여기 살았어요?"

"아뇨. 그···부산에서 왔습니다. 거기 위험하다고 해, 해서요."

"오호."

평범한 사람이라면 왜 김해나 양산으로 가지 않고 여기 왔는지 물었겠지만 다정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녀가 웃자 둘은 불안해했다.

< 최선의 방어란 - 1 > 끝

< 최선의 방어란 - 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