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 아이디는 - 2(내용수정) >
마산에 도착한 일본인들의 상황은 실로 처참한 지경이었다.
고향을 버린 이민자들이 그렇듯 행색은 무척이나 초라해서 거지를 연상케 했다.
그런 그들을 더 고달프게 만드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한국의 겨울 날씨였다.
규슈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추위에 다들 옷을 여러 벌 껴입고도 벌벌 떨었다.
마산 일대는 중부권에 비하면 그리 춥지 않은데도 그렇다.
여차저차 양곡동 주택가에 자리한 일본인들이 제일 먼저 한 일은 식량 찾기였다.
주위의 아파트는 죄다 무너진 지 오래라 주택을 뒤지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몬스터의 공격은 계속되었다.
사람 있는 곳에 몬스터 있다.
십여 명 남짓한 일본인들은 동료를 하나하나 잃으며 아포칼립스의 룰을 되새겼다.
"이게 전부다."
"···"
시라이시 유즈카는 멍하니 오빠 켄지가 내려놓은 식량을 바라봤다.
십여 명이 나누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수십 채에서 찾은 게 이걸로 끝···인가요."
"한국인들이 다 쓸어갔지 뭐냐. 이제 상점빵으로 배를 채워야 할 판이다."
상점빵.
20포인트로 살 수 있는 극악한···물건.
당최 맛이라는 게 존재하는지 의문이며 굶어죽지 않게만 해주는 빵이었다.
일본인들 사이에선 그걸 빵으로 부르는 건 빵에 대한 모독이라는 말이 돌았다.
물론 진짜 배고프면 다들 먹지만.
켄지는 착잡한 얼굴로 여동생 앞에 앉았다.
"아무리 둘러봐도 이것 외엔 찾을 수가 없더구나. 허약한 이들 위주로 먼저 배급을 할까 한다만 네 생각은 어떠냐."
"유즈카는 반대할 수가 없군요. 전부 거둬가세요."
"너도 배가 고플 텐데 미안하다···"
"아니에요. 견딜 만 해요, 아직은."
이들이 부산에서 떠난 지도 꽤 되었다.
처음엔 사람이 없는 도시에서 느긋하게 파밍하며 지낼 수 있을 거란 기대감이 있었다.
하지만 왜 사람이 없는지 뒤늦게 깨달았다.
부산이 방사선에 오염된 것이다.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복통을 겪었고 입안에서 피 맛이 난다고 호소했다.
설상가상으로 멀쩡한 사람들이 구역질까지 하자 더는 버티지 못하고 탈출을 시도했다.
오타로의 세력과 떨어진 것도 그 때였다.
시라이시 남매가 이끄는 십여 명의 세력은 부산을 탈출해 서쪽으로 향했다.
중간에 시가지가 여럿 형성되어 있었지만 이들은 방사능에 대한 공포로 여기까지 도망쳤다.
문제는 여기가 어딘지 모른다는 것이다.
이들에게 지도가 있을 리 만무했고 한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도 없었다.
한국인들과 대화는 통하는데 희한한 일이었다.
아무튼 이들은 당분간 여기에서 머물 생각이었다.
식량은 별로 없지만 그래도 몸을 지킬 수 있는 집은 있으니까.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
켄지와 유즈카는 서쪽 바다 너머의 작은 섬을 발견했다.
"사람이 사는 섬이군요···"
"이건 대단하구만. 이 상황에 불을 땐다니."
건물에서 연기가 솟아오른다는 건 난방을 한다는 뜻이다.
아포칼립스 상황에서 난방이라?
몬스터가 쳐들어오지 않으면 다행이다.
둘은 의견을 나눈 끝에 저 섬에는 몬스터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어쩌면, 몬스터는 바다를 건너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어요."
켄지는 동생의 말에 눈썹을 찌푸렸다.
"말이 안 되지 않느냐. 홋카이도의 불곰도 얕은 바다는 건넌다. 몬스터가 헤엄을 못 친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아."
"하지만, 저들의 모습을 보니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어요. 보세요. 텃밭에서 뭘 가꾸고 있어요."
"흐음···저들과 어떤 식으로든 연결되면 좋으련만."
"무리예요. 한국인들은 우리를 필요로 하지 않아요. 좋아하지도 않고요."
"하긴 우리는 그들의 입장에선 불편한 이방인에 불과하겠지."
그때 유즈카가 손으로 입을 막고 심하게 기침을 했다.
콜록콜록.
"이런, 유즈카. 괜찮으냐?"
"후우···네. 유즈카는 괜찮아요."
그녀는 감기인지 약한 폐렴인지 애매한 질환에 걸려 있었다.
부산에서 탈출할 때 체력을 너무 소진해서 면역력이 떨어졌는지 도통 낫지가 않았다.
약국에서 급하게 약을 털어왔지만 온통 진통제뿐이었다.
켄지는 동생을 부축해 집으로 복귀했다.
겨우 여기까지 왔건만 정착은 순탄치 않을 것 같았다.
.
.
.
"헉, 헉···어떠냐."
후타바 오타로가 보란 듯이 부하들을 둘러봤다.
그의 발치엔 작은 오크 한 마리가 쓰러져 있었다.
철저한 육탄전만으로 얻어낸 성과다.
물론 부하들이 유인하고 시선을 끄는 등 도움을 줬지만, 결국 쓰러트린 건 오타로의 무식한 힘이었다.
"훌륭합니다 총장!"
"오크도 상대가 안 돼!"
부하들이 호들갑을 떨어댔다.
근육질의 거한인 오타로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고개를 돌렸다.
"어때, 시라이시. 나는 이렇게 성장했다. 너희 남매는 어떻지?"
"하찮은 쇼군. 여기까지 와서 이런 허세를 떠는 건가?"
오타로의 입술이 실룩거렸다.
"이런 쇼 대신에 뭔가 거창한 것을 계획하고 있나 보지?"
"···네가 알 바 아니다."
이 근육질 고릴라에게 식량과 약을 찾아야 한다는 걸 알려줄 필요는 없었다.
오타로는 이토시마의 괴인이란 링네임을 가진 프로레슬러였다.
강건한 몸에 걸맞은 육체강화 특성을 얻어 현재는 오크와 육탄전으로 맞붙을 정도로 성장했다.
성격적으로는 상당히 결함이 있는 편인데, 쉽게 흥분했고 오만했다.
현재는 생존자들을 모아 신일본조라는 세력을 조직해 총장을 참칭하고 있었다.
한국에서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오타로는 오크의 사체에서 발을 떼어 나무 위의 켄지에게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가 허리춤의 목검을 쥐었다.
"더 이상 다가오면 공격하겠다."
"어이어이, 너무 야속하게 대하지 말라고. 우린 일본에서부터 인연을 맺어왔잖아?"
"악연이지. 뭘 원하는지 말해라, 후타바."
"뭐, 간단한 거야. 저기 바다의 섬."
오타로는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보이진 않았지만 바다 건너편에는 작은 섬이 하나 있다.
켄지에게도 어느덧 익숙한, 한국인들이 살고 있는 섬.
"저걸 갖고 싶단 말이지. 너희 남매가 협력해 줘야겠어."
"거절하겠다."
"이봐, 들어보기도 전에 거절할 셈이야? 이건 너희들에게도 좋은 일이라고."
"네놈의 제안이란 뻔하잖아. 부하들을 동원해 저 섬을 공격하고 빼앗자는 거겠지."
"감이 좋군 시라이시."
"네 탐욕스런 눈을 보면 누구나 알 수 있지···하여튼 우린 끼어들지 않을 테니 알아서 해라."
"이거야 원. 네 사랑스런 여동생에게 상점빵만 먹일 셈인가?"
급기야 켄지는 목검을 빼들며 경고했다.
"유즈카에게 관심을 가지지 말라고 했을 텐데."
"이렇게 보여도 염려해주는 거라고. 기침을 많이 하던데 약이 필요한가? 저 섬이라면 약도 비축했을지도 모르지."
"···북쪽에 시가지가 있다. 거기서 구하면 돼."
오타로가 이죽거렸다.
"무수한 한국인과 몬스터를 뚫고 말이지? 잊지 마. 여긴 한국 땅이란 걸. 내가 괜히 여기로 온 게 아니란 말씀이지."
"저 섬에 실력자가 없다고 어떻게 장담하지?"
"숫자로 밀어붙이면 돼. 고작해야 예닐곱 명이거든. 흐흐."
벌써 다 봤구나.
켄지가 경고했다.
"미리 말해두는데 한국 땅에서 괜한 소란을 일으키지 않는 게 좋아."
"그건 왜지?"
"경매장 봤잖아? 지금 15레벨이 넘은 한국인은 최소 100명은 넘을 거다."
이들이 부산에 도착하고 몬스터와 싸워 15레벨을 달성했을 때.
유즈카는 일본인으로서는 최초로 한국의 경매장에 들어갔다.
일본보다 인구가 적으니 활동이 별로 없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완전한 착각이었다.
경매장에 사람이 우글우글했던 것이다.
그녀는 일본인 없냐고 한 마디 했다가 욕을 먹고 말았다.
뒤늦게 15레벨을 달성한 켄지와 오타로도 놀란 눈치였고 잠시나마 행동을 조심하는 계기가 되었다.
오타로의 경우는 자신의 능력에 과한 자부심을 갖고 있어서 금방 잊어버렸지만.
"흐흐, 괜한 걱정이야, 사라이시. 아무튼 내가 저 섬을 점령하면 네 여동생도 나를 다시 보게 될 거야."
"그럴 일은 없다. 절대로."
켄지는 코웃음을 치며 몰러났고 오타로는 부하들을 불렀다.
그들은 머리 위로 누군가가 날린 종이비행기가 날아다니고 있음은 눈치 채지 못했다.
.
.
.
"쟤네들 뗏목 만들어서 이쪽으로 건너올 것 같은데요."
"골치 아픈 놈들이네. 대빵은 어때? 말은 좀 통할 것 같아?"
"어···전혀요. 키가 거의 성호형 만한데 몸무게는 훨씬 더 나갈 것 같아요. 이런 말은 좀 그렇지만 무지막지하게 생겨서···"
"그냥 돼지라고 해."
"마냥 돼지라고 하기엔 좀 그런 게, 몸이 굉장히 단단해 보여요."
"나와 같은 특성이다 이거지."
형준과 유현이는 해안가에 붙어서 일본인들을 염탐했다.
그들이 돝섬을 공격하는 것은 거의 확정적이었다.
안 그러면 뗏목을 만들 이유가 없잖은가.
유현이에 따르면 숫자는 약 20명에 달한단다.
형준은 초조하게 턱을 쓰다듬었다.
"레벨에서는 우리가 앞설 거야, 아마."
"근데 저 사람들은 사람도 죽여 본 것 같던데···우린 대인전 경험이 없잖아요."
"주위에 사람이 없으니까 어쩔 수 없는 거지."
돝섬 멤버들은 상당한 전투경험을 쌓았다.
하지만 그건 전부 몬스터에 대한 경험이었다.
사람과 싸울 일이 있어야 경험이 쌓이든지 하지.
성호가 떠나기 전 마산과 창원 일대의 살인자, 약탈자를 모조리 박살낸 덕분에 싸울 일이 없었던 것이다.
형준은 걱정 말라고 성호에게 큰 소리를 쳤지만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눈에 독기를 품은 저 일본인들은 레벨은 낮아도 싸움에 제법 익숙한 모양이었다.
숫자도 이쪽의 3배는 되고.
"씁···죽자 살자 달려들 텐데 어떻게 해야 하나···"
"성호 형이 온다고 했는데 버티면 안 될까요?"
"걔 지금 인천에 있는데 여길 어떻게 오냐. 말이 파밍 던전이지."
돝섬에 파밍 던전이 나타난 게 2개월 전이니까 슬슬 또 나타날 때가 되긴 했다.
하지만 파밍 던전의 출현은 완전히 랜덤이다.
아무리 성호라고 해도 파밍 던전을 포착하고 마산으로 통하는 입구를 찾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형준이 결정을 내렸다.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유현이는 거기 누구냐 여울이하고 계속 정찰해라, 수연씨하고 얘기 좀 해볼 테니까."
"무슨 얘기요?"
"여기 비울 건지 싸울 건지."
돝섬의 의사 선생, 통칭 메르시로 통하는 수연은 철수를 주장했다.
"밖에 나갔다가 나중에 기회를 봐서 탈환하는 게 낫죠. 물자가 아깝지만, 우리가 대인전 역량이 부족하니까 어쩔 수 없어요."
"역시 그렇죠?"
지나가던 지만이도 같은 의견이었다.
"저는 왠지 성호 형이 올 것 같지만, 만약의 경우를 생각해야 하니까요."
"성호는 못 온다고 생각해. 하여튼 다들 모여보자."
형준은 사람들을 모은 다음 의견을 듣고 종합했다.
"다들 아시다시피 일본인들의 공격이 임박했어요. 그래서 어떻게 할 거냐. 철수하는 쪽으로 의견이 모였습니다."
"옙."
"알겠습니다."
다들 순순히 수긍했다.
대인전을 해본 경험이 없어서 겁을 집어먹은 것도 있었다.
몬스터야 공략본이나 성호가 가르쳐 준 대로 잡는다지만 인간이야 어디 그런가.
20명의 특성을 생각하며 움직이는 것만 해도 머리가 아팠다.
형준은 바로 지금이라고 강조했다.
"바로 지금 가는 겁니다. 배낭 하나씩만 챙겨요."
돝섬이 갑자기 바빠졌다.
멤버들은 배낭 하나씩만 챙겨서 미경의 도움을 받아 서쪽 육지로 도망갔다.
나무 파레트로 만든 방패를 앞세워 노를 젓던 일본인들은 텅 빈 섬을 점령하고는 허탈해 했다.
"뭐냐고 이건. 왜 아무도 없냐고!"
오타로가 고함을 고래고래 질렀지만 대답할 수 있는 부하는 없었다.
"이 자식들 빠르네···"
"이제 이 섬은 우리 거지?"
신일본조는 희희낙락하며 숙소의 물자를 챙겼다.
그때 돝섬에 작은 변화가 생겨났다.
푸른 차원문이 열렸다.
.
.
.
다정의 구울들이 마침내 파밍 던전을 찾아냈다.
경매장을 샅샅이 뒤진 결과였다.
성호는 다정과 함께 던전에 들어서며 설명했다.
"아이템으로 파밍 던전을 고정시키는 방법을 쓴 거야."
"고정? 그게 뭔데?"
"파밍 던전에만 적용되는 건데, 출현장소가 고정되는 거야. 그러니까 내가 원하는 파밍 던전이 원하는 장소에서 나온다는 거지."
"너 진짜 연구 많이 했구나···"
"문제는 파밍 던전이 언제 열릴지 모른다는 건데 운이 좋았어."
그리폰 던전이 열린 것은 2개월 전이니 타이밍은 대강 맞아떨어진다.
안에 들어간 다정은 경치를 구경하곤 입을 벌렸다.
예전에 그리폰을 잡았던 던전이 아닌가.
파밍 던전이 완전히 랜덤인 것으로 알았던 그녀에겐 충격이었다.
"이게 진짜 되네···"
"내가 아이템으로 고정시켜서 똑같은 던전이 나온 거야. 언젠가 돝섬에 다시 갈 일이 있을 것 같았거든."
"···그럼 서울로 올라갈 때는 어떻게 해?"
"걸어야지."
"너도 참 대박이다···"
성호는 기억을 되새겨 돝섬으로 이어지는 입구를 찾았다.
절벽의 틈에 텐트를 쳤던 흔적이 보존되어 있었다.
다정은 신발을 벗고 바닥을 흐르는 깨끗한 물에 발을 담갔다.
"여기서 잠깐 쉬어가자, 응? 설마 무슨 일이 있으려고."
성호는 경매장을 확인하고 발걸음을 빨리 했다.
"시간 없어."
차원문을 넘으니 뜻밖의 광경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참 물자를 나르던 일본인들이 멍하니 성호를 쳐다봤다.
오타로는 히죽 웃으며 성호에게 롱나이프를 겨냥했다.
"이거, 한국인들이 꿩 대신 닭이라는 표현을 쓰던데, 나도 써봐야겠군. 그나저나 네놈은 누구냐?"
"나?"
성호는 주위 상황을 확인했다.
그래, 이렇게 된 거군.
"김밥조아."
< 내 아이디는 - 2(내용수정) > 끝
< 내 아이디는 - 3 >
내 말을 들은 일본인들이 비웃었다.
"웃기지도 않는 이름이군."
"김밥 그거 노리마키가 기원이잖아."
마음대로 생각해라.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아무리 적의 수가 많고 이쪽의 경험이 부족해도 이렇게 깔끔하게 도망갈 수가 있나.
형준 형은 제법 강해졌다고 자랑까지 했었는데.
나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일본인이 타고 온 뗏목을 발견했다.
나무 파레트로 방패를 만들어놨군.
저래서야 화살은 소용이 없다.
아다만트 화살이라면 간단히 관통하겠지만 돝섬 멤버는 기본적인 장비만 갖고 있다.
종이비행기를 폭탄으로 사용하는 방법은 자칫 살인을 저지를 우려가 있다.
가만히 있는 사람이라면 모를까 뗏목을 타고 있으면 조준은 상당히 어렵다.
이해는 가지만···아니 됐어.
"차라리 잘된 거지."
돝섬 멤버들이 도망간 덕분에 마음껏 날뛸 수 있게 됐다.
고릴라와 비슷한 체격의 일본인이 내게 누런 이를 들이댔다.
"뭐가 잘됐단 말이지? 김밥조아씨? 아하, 네놈이 우리에게 죽는 게 잘됐단 말이군!"
못 들어 주겠군···
내가 롱나이프를 꺼내자 그가 피식 웃으며 부하들을 윽박질렀다.
"뭐 하냐. 이 덩치를 정중히 모시지 않고!"
"헤헤."
부하들은 마치 싸구려 애니메이션의 악역처럼 웃음을 흘리며 내게 다가왔다.
일본인들이 원래 이렇게 행동할 리는 없을 거고, 살짝 맛이 갔군.
일본 고릴라는 팔짱을 끼고 이죽댔다.
"어떠냐. 알몸 도게자를 한다면 용서해 줄 수도 있는데? 물론 모닥불 위에서 말이지."
"총장, 그러면 보통 인간은 죽어버린다구요."
뭐 이리 말이 많은 거야?
나는 모든 스킬을 발동시켰다.
시야가 붉게 타오르자 고릴라와 부하들이 깜짝 놀랐다.
"총장! 저건···"
"호오. 장난은 끝이라 이거냐?"
나는 반응하지 않고 놈을 향해 도약했다.
고릴라가 기겁하며 롱나이프를 내미는 게 보였다.
놈의 특성은 100% 육체강화다.
기껏해야 경매장을 드나들 레벨이니 추가효과도 3개.
그에 대한 대응방법은 머릿속에서 질리도록 시뮬레이션 한 상태였다.
나는 허공에서 차원벽을 만들었다.
몸을 회전시켜 다리로 차원벽을 밀어내니 고릴라의 놀란 얼굴이 순식간에 확대되었다.
"이런 바보 같은···!"
그는 엉겁결에 롱나이프를 든 손으로 머리를 가렸다.
츠컥!
롱나이프가 고릴라의 손목을 잘라냈다.
놈이 쥐고 있던 롱나이프가 회전하며 허공으로 치솟았고 나는 그걸 잡아 휘둘렀다.
"끄아아악!"
고릴라는 순식간에 양 손목을 잃고 바닥에 나뒹굴었다.
나는 돌진하던 기세 그대로 롱나이프 두 개를 놈의 심장에 박아 넣었다.
두 손을 잃고 발작하던 고릴라가 천천히 피거품을 쏟아내며 움직임을 멈췄다.
"···"
"마, 말도 안 돼···"
"이봐, 총장이 순식간에···"
일본인들이 겁에 질려 주춤거렸다.
주승철을 죽이고 부활한 이후 한 명도 죽이지 않았기에 살인자가 되지는 않았다.
발리스타를 쓰고 싶었지만 갑자기 전투에 돌입한 터라 어쩔 수가 없었다.
나는 롱나이프 하나를 배낭에 넣고 놈들에게 걸어갔다.
모두 열여덟.
어떻게 죽일까 고민하는데 그들의 눈에 공포가 새겨졌다.
쿠르륵―
퀴에엑―
뒤에서 다정이 구울들과 함께 나왔다.
그녀는 짧게 상황을 파악하곤 손가락을 튕겼다.
"어떻게 된 게 맨날 시체야. 지겨워."
메뚜기를 포함한 구울들이 소름끼치게 울부짖으며 일본인들에게 덤벼들었다.
"구, 구울이다아!"
"모두 도망쳐!"
일본인들은 전의를 상실하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구울들이 뒤를 쫓았으나 치명적인 공격은 가하지 않았다.
주인이 살인자가 되면 곤란하거든.
콰직!
구울들이 달려가 뗏목을 모조리 박살내버리자 일본인들은 공황상태에 빠져들었다.
이제 살 길은 바다에 뛰어드는 방법뿐.
"나, 수영 못한다고!"
한 명이 뒤로 돌았다가 주둥이를 쩌억 벌린 구울을 보곤 완전히 굳어버렸다.
퀴에에엑!
"으···아···"
"이 멍청이!"
자기들끼리 발로 차고 난리도 아니다.
바다에 뛰어든 일부는 차디찬 겨울바다를 견디지 못하고 꼬르륵 가라앉았다.
굳이 추적해서 죽일 필요까진 없겠군.
다정이 내 옆에 나란히 섰다.
"다 죽여줄까?"
"아니. 이만하면 됐어. 어차피 여긴 안 쓸 거니까."
"일본인들 때문에?"
"쟤들이 다가 아니야. 수십 명이 이쪽으로 오는데 언제까지 돝섬에서 버티긴 힘들어."
"그 사람들은 어디로 가고."
"정부 쉘터로 가면 되지. 파밍 던전 열렸잖아."
다정은 뒤쪽의 푸른 차원문을 보더니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설마 여기까지 계산한 건 아니지? 나 가끔 무서워."
"이게 계산으로 되겠냐. 운 좋게 열리지 않았으면 여기 오지도 못했어."
"하긴."
그녀는 좀비들을 시켜 사체를 바다에 밀어 넣었다.
미경이 블링크로 나타났다.
그녀의 눈은 휘둥그레져 있었다.
"오빠 언제 오셨어요?"
"방금 차원문으로."
파밍 던전의 입구를 가리키자 그녀는 이해가 안 되는 표정이었다.
"일본인들은 도망갔어, 일부는 죽었고."
"아···다행이다···오빠 정말 수고하셨어요."
그녀는 내게 다가오려다가 다정을 보곤 얼굴이 굳어졌다.
다정이 손가락을 까닥까닥했다.
"요게 나를 보고 인상을 써? 너 이리와."
"어 언니 그게 아니에요···"
완전히 고양이 앞의 쥐로군.
나는 미경에게 멤버들을 데리고 오도록 일렀다.
커밍아웃 시간이다.
.
.
.
돝섬 사람들은 이야기를 전해 듣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곤 의아해했다.
성호와 다정은 어떻게 이 타이밍에 같이 나타날 수 있었을까?
수연은 다정의 손이 아무렇지도 않게 성호의 엉덩이를 쥐는 걸 보고 충격을 받았다.
할 거 다 한 연인 사이에서나 하는 행동이 아닌가.
'설마 둘이···'
아니라고 믿고 싶었지만 증거가 너무 명백했다.
둘의 시선에서 애정이 묻어났다.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둘이 그렇고 그런 사이란 게 분명해졌다.
수연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젠···마음을 접어야 할 것 같다.
기념관 숙소에 사람들이 모이자 성호가 헛기침을 했다.
"흠흠. 여러분 반갑습니다. 급식이 둘은 창원에 갔다고 했고, 모두 모인 거군요."
여울이가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아저씨 근데···분위기가 많이 바뀌셨네요."
"그렇게 보이니? 척박한 곳에서 살아남으려고 발버둥 치다 보니까 이렇게 됐어."
다른 사람들도 바뀐 성호의 분위기에 조금 당황했다.
예전의 성호는 그래도 둥글둥글한 면이 남아 있었는데 비해 지금은 칼날 같았다.
대체 두 달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가 느닷없이 말했다.
"내 아이디는 김밥조아입니다. 서바이벌 라이프의 그 김밥조아요."
"···뭐?"
"응?"
사람들은 금방 알아듣지 못했다.
김밥 싫어하는 사람도 있나 생각했던 것이다.
반응은 조금 후에 일어났다.
다정의 품에 강제로 안겨 꿈틀거리던 미경의 얼굴이 완전히 빨개졌다.
"오빠가 김밥조아였어요?"
"많이 놀랐지? 배신감도 들었을 테고."
"아니 그것보단···그, 제가 오빠 앞에서 김밥조아가 뭐 어쩌고 말했었잖아요···"
"그랬지."
종말 전.
미경은 오우거가 김밥조아를 물었는데 오히려 3일 후에 오우거가 죽었다는 뭐 그런 우스갯소리를 한 적이 있었다.
몸을 비비 꼬는 걸 보면 엄청 민망해하는 것 같다.
다른 사람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그···고인물과 관계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긴 했는데···"
"형이 김밥조아 본인일 줄은 몰랐어요···"
"그래서 그렇게 잘 싸웠던 거구나···"
사실 다른 사람의 반응은 성호에게 큰 의미를 가지지 못했다.
그는 형준만 바라봤다.
"형님 죄송합니다. 제가 미리 말씀을 드려야 하는 건데."
그는 혼란스러운 얼굴이었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무슨 사정이 있었겠지. 근데 성호 야. 우리한테까지 정체를 안 밝힌 이유가 뭐냐? 혹시 질문이 불편하면···"
"아뇨, 괜찮습니다. 정체를 안 밝힌 이유에 대해서는 지금부터 말씀드릴 겁니다."
성호는 주위를 둘러본 뒤 말했다.
"혹시 여러분들 중에 제가 김밥조아란 게 불편한 분이 계시면 손 들어주십시오. 폭력을 쓰거나 하진 않습니다. 절대로."
사람들은 자기들끼리 시선을 교환했다.
"불편할 일이···있나?"
"종말 전에 그 정보 있잖아요. 인터넷에선 왜 그거를 말 안 해주냐고 난리였었는데."
"근데. 사실 우리가 이렇게 지내는 것도 전부 형 때문이잖아요. 초반에 몬스터 공략도 그렇고, 파밍도 그렇고···여기 돝섬도 물론이고요. 저는 솔직히 성호 형 아니었으면 우리가 죽었을 거라 생각하거든요. 지금도 그랬고요."
유현이가 숨도 안 쉬고 말하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목숨은 전부 성호가 붙여준 거나 다름없었다.
여울이가 성호 옆에 쪼그려 앉았다.
"불편한 사람은 없어 보이는데요, 아저씨."
"그렇게 보이네. 일단 제 특성에 대해서 먼저 말씀드리자면···공격예지가 아닙니다. 이세계로 통하는 문을 여는 거죠."
성호가 차원문을 열었지만 아무도 보지 못했다.
그때 뭔가를 눈치 챈 수연이 허공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가 깜짝 놀랐다.
"여, 여기 뭐가 있어요."
"어디."
"아. 진짜다···"
"그게 차원문입니다. 투명화 기능이 있어서 다른 사람에게는 안 보입니다. 저한테는 가로 1미터, 세로 2미터짜리 푸른 문으로 보이고요."
"우와 신기하다···"
다들 허공에 손을 뻗어 차원문을 만졌다.
"전에 파밍 던전에 들어간 적 있죠? 거기와 같은 차원입니다. 저는 이 차원문을 항시 이용할 수 있습니다. 창고고, 집이기도 하고, 파밍 장소이기도 하죠."
형준이 무언가를 깨닫고 손뼉을 쳤다.
"성호 너, 그때 우리 부산에서 대피했을 때 투룸에서 물자 발견한 거."
"예. 그건 사실 제가 세팅한 거였습니다. 부산 생존자들의 것을 루팅해둔 거죠."
"그럼 우리가 두고 나온 것도···?"
"이 차원문 안에 그대로 다 있습니다."
"아아···이야기 들으니까 다 이해가 되네. 성호 니가 그렇게 돌아다닐 수 있었던 이유 말이다."
"이 차원문 덕분이죠. 위험하면 안에 들어가서 쉬면 됩니다. 계절도 반대라서 딱 좋고요."
수연이 말했다.
"잠깐 안에 들어가는 거 보여주실 수 있나요?"
"어렵지 않죠."
성호는 안에 들어가 팔을 뻗었다.
허공에서 그의 팔이 튀어나오자 다들 흠칫했다.
"와 차원문이란 거 진짜 신기하다···"
"혹시 성호씨 안에서 우리가 보여요?"
수연이 물었고 그는 긍정의 의미로 손가락 동그라미를 만들었다.
"이거 몰래 훔쳐보기에 딱 좋네."
"적이 뭐하는지 다 볼 수 있잖아요. 진짜 대박."
"···뭐 대충 이런 겁니다."
성호는 추가효과나 풍뎅이, 사슴벌레 등은 나중에 얘기하기로 했다.
"여러분에게 이걸 보여드린 건, 어느 정도 믿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발설하지 않을 거라고요."
"절대 말 안 해요."
"이건 무덤까지 가지고 가야지."
"하지만 그 때는 믿지 못했습니다. 저는 약해서 뒤에서 칼을 맞으면 바로 죽는 그런 상태였습니다. 누구도 믿을 수가 없었죠."
"그래···그렇게 된 거구나. 이해한다."
성호의 모든 걸 이해할 순 없지만 대충 사정은 짐작이 갔다.
혼자 차원문 안에 들어갈 수 있으니 다른 사람의 질투를 살 수 있다는 것도 정체를 숨기기로 한 이유가 될 것이다.
형준은 그를 이해했다.
"그리고···지금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형님, 일본인들 공격 때 바로 빠진 이유라도 있습니까?"
"후···걔네들 뗏목에 방패 붙여놨더라."
"화살은 안 통해도 유현이 종이비행기로 견제는 됐을 텐데요."
그는 말도 말라며 고개를 저었다.
"애가 여려서 그게 잘 안 돼. 거기다가 뗏목이 계속 움직이잖냐. 잘못해서 죽이기라도 하면 난리나지."
나름 계획은 세웠다는 항변이었다.
이쪽엔 블링크 능력자가 있으니 앞으로 계획을 세워서 탈환하면 된다는 생각이었겠지.
"알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엔 여러분들 좀 약한 것 같습니다. 몬스터는 곧잘 잡는지 몰라도 대인전 부분이 조금."
말하는 사람이 김밥조아라서 반박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다정이 무릎에 턱을 괴었다.
"얘는 내가 보장하는데 완전히 미친놈이야. 나하고 싸우면, 1분 안에 항복해서 빌 자신 있어."
"그 정도는 아니지."
성호가 부정했지만 그녀는 한 술 더 떴다.
"전력을 다하면 30초 안에 내 목에 롱나이프가 닿을 걸? 아니면 여기 화살이 꽂히든가."
"그, 그럴 수가···"
돝섬 멤버들은 다정과 꽤 지냈기에 그녀가 얼마나 강한지 잘 알고 있었다.
몬스터고 생존자고 그녀 앞에서는 추풍낙엽이었다.
그런 그녀가 상대가 안 된단다.
"그러니까 전투력에서는 믿어도 돼."
"···언니는 아저씨하고 어떤 관계세요?"
"응?"
그녀의 시선이 여울이에게 닿았다.
성호가 얘기해주려 했을 때, 다정이 손가락으로 원을 만들어 다른 손가락을 넣었다.
여울이의 얼굴이 잔뜩 붉어졌다.
"뭐, 뭔데요 그게···"
"이런 사이야. 설명이 됐어?"
"···"
다들 입을 뻐끔뻐끔 벌렸다.
세상에. 그 무서운 구울 여왕과 성호가 그렇고 그런 사이라니.
성호는 헛기침을 해서 주의를 집중시켰다.
"···사실 여러분들의 대인전 능력이 떨어지는 데에는 제 책임도 있습니다. 주변의 위험요소를 전부 치우고 떠났거든요."
그만큼 돝섬은 안전해졌지만, 반대급부로 이들은 온실에서 자란 화초가 되었다.
대인전 능력이 떨어지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경험도 쌓을 겸 해서 여러분들의 쉘터를 좀 옮기고 싶습니다."
"어디로?"
"서울에 있는 정부 쉘터로요."
다들 황당해 했다.
아니 거기가 어디라고···
성호는 팔을 뻗어 파밍 던전의 입구를 가리켰다.
"전에 우리가 파밍했던 그리폰 던전입니다. 저 안으로 들어가서 서울 쪽 입구로 빠지면 여의도가 지척입니다."
그때 수연이 고개를 갸웃했다.
"정부 쉘터에 가면 물론 좋겠지만 꼭 옮겨야 되는 이유가 될까요? 대인전 능력을 기르는 것만으로는 좀···"
"일본인들 때문도 있습니다. 지금 20명을 쫓아내긴 했는데 앞으로 더 골치가 아파질 겁니다. 최소 백 명 이상이 이쪽으로 오고 있거든요."
"백 명이나···"
수십 명이나 백 명이나 별 차이는 없다.
"이곳도 더 이상 안전하지 않다는 겁니다."
사실 진짜 목적은 따로 있었다.
성호는 정부 쉘터로 이들을 들여보내 지분을 확보할 생각이었다.
석현과 검인에 여섯 명이 추가되면 성호의 우호세력은 상당한 지분을 차지하게 된다.
장원택도 물론 이걸 알겠지만 거부하지 못할 것이다.
성호는 힘주어 말했다.
"물론 강제하는 건 아니고 여기 남으실 분은 남으셔도 됩니다."
"···남을 사람?"
형준이 물었지만 손을 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들 정이 들어서 함께 하고 싶은 거다.
그렇게 돝섬 멤버들은 서울로 이주하기로 했다.
.
.
.
"마산에서?"
"예. 전에 그리폰 던전에서 만났던 인원들입니다. 이쪽으로 합류하고 싶다고 전달해 왔습니다. 총 여섯 명입니다."
"여섯 명이라."
장원택은 턱을 쓰다듬었다.
하필 지금 그들이 합류하려는 이유가 무엇일까.
성호와 다정에게 일본인들의 근황을 알려준 것과 관계가 있지 않은지 의심스러웠다.
"공교롭군, 공교로워."
"성호씨에 대해 생각하고 계십니까?"
"이 모든 게 그의 계획이 아닌지 말일세."
"그렇게까진···파밍 던전은 완전히 랜덤이잖습니까."
"완전히 랜덤이라고 믿은 거지. 지금 여의도 근처에 나타난 파밍 던전은 예전과 똑같은 거잖나."
"그···렇습니다."
"그가 수를 써서 같은 던전을 출현시킨 것 같다는 의심이 계속 드네."
"그게 된다면 정말 무서운 사람일 겁니다."
"지금도 충분히 무섭네. 나한테 거부 못할 제안을 하고 있으니 말이야."
장원택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가 정부 쉘터의 인원을 죽인 게 벌써 일곱이다.
이유야 충분했지만, 하여튼 정부 쉘터의 전투력이 급감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는 그걸 자신의 세력으로 채워 넣으려 하고 있었다.
정부 쉘터에 한 번 들어오지도 않고.
"두 눈 뜨고 뺏긴다는 게 이런 기분인가···허허, 도저히 거부를 못하겠군."
"인원이···너무 없으니까요."
이범석은 깊이 탄식했다.
쉘터 인원의 25%가 사라진 바람에 모든 계획이 엉망이 되었다.
그리고 검인과 석현이 사라진 것도 큰 타격이었다.
대체 어디로 갔는지.
장원택은 쓴웃음을 지었다.
"옴짝달싹 못하게 만들어놓고 제안하는 거 하나는 나도 배워야겠어. 받아들이게."
그렇게 돝섬 멤버들이 정부 쉘터에 합류했다.
다들 끔찍한 추위에 한 번 놀랐고, 쉘터의 방대함에 두 번 놀랐다.
"추, 추워···"
"쉘터 안이 이렇게 추우면 밖은 대체 얼마나 춥다는 거야···"
"밖에 나가면 얼어 죽습니다, 진짜로요."
이범석이 그들을 안내해주었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석현과 검인이 생존자 둘을 데리고 귀환했다.
장원택은 무슨 귀신을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 둘이 언제 만났지?
"오다가 주웠어."
석현이 소개한 남녀는 예전 검인이 특성을 복사하고 버린 인원이었다.
둘은 정부 쉘터를 향해 가다가 포기했고, 뒤늦게 검인을 만나 합류한 것이다.
버림받아 절망한 둘이었지만 검인이 진정성 있게 사과하니 그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사실은 옆의 팬티만 입은 괴인이 무서워서였지만.
하여튼 장원택은 그들까지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일곱 명이 나갔고 여덟 명이 들어왔으니 이걸 좋아해야 하는 건가."
한편 회의실에서 석현을 처음 만난 돝섬 멤버는 어쩔 줄 몰라 했다.
진짜 팬티만 입은 남자라니.
"토, 토끼 머리띠를 하고 있어···"
"전혀 안 어울려···"
어린애라면 모를까 털이 숭숭한 30대 아저씨가 토끼 머리띠를 차고 있으니 눈이 썩는 느낌이었다.
석현은 성호가 지원한 사람들이라는 말을 듣고 그들과 인사를 나눴다.
그리고 검인은 머리를 묶는 수연을 발견했다.
의사였고 지금은 힐러란다.
'완전 메르시잖아···'
그녀는 FPS 게임에 나오는 여성 캐릭터와 거의 흡사한 외모를 하고 있었다.
그의 이상형이 나타난 것이다.
수연은 자신을 쳐다보는 검인의 시선을 눈치 채곤 어색하게 웃었다.
"배검인 씨죠? 성호씨에게서 얘기 많이 들었어요. 고인물이시라고."
"아, 예."
"앞으로 잘 부탁해요."
다정보다 더 예쁘고 매력적이었다.
그는 성호와 합류한 과거의 자신을 칭찬하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배검인 23세. 만나자마자 사랑에 빠지다.
< 내 아이디는 - 3 > 끝
< 차원문을 이용하려면 - 1 >
돝섬 멤버들은 개인당 짐 몇 개를 챙겨서 떠났다.
나머지 비축물자는 내 쉘터에 보관해 두기로 했다.
나는 지만이가 키우던 닭의 모가지를 잡아서 차원문 안으로 옮겼다.
숙소 앞으로 가니 벤치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던 다정이 한 마디 했다.
"일하는데 즐거워 보이는 거 진짜 신기해."
"이것도 어떻게 보면 파밍의 일종이니까."
"···내가 제일 궁금한 게 뭔지 알아?"
"이 모든 사태의 근원?"
"너 쉘터 어떻게 생겨먹었는가."
"별거 없는데."
진짜 별거 없다.
동굴과 원형으로 조성된 토지, 그 안의 비축물자가 전부다.
···가만 생각하니 텃밭도 있고 지하실도 있고 철조망도···이것저것 많군.
하여튼 돝섬 멤버들이 나름 파밍을 열심히 해서 옮길 게 상당했다.
언젠가 돌려줄 거지만 지금은 내 것이라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다정이 내 표정을 보곤 한숨을 쉬었다.
"하여튼 변태라니까. 그나저나 우리 급식이 둘이 올 때까지는 있는 거지?"
"그래야지. 둘이 오는 게 더 빨라."
여울이와 소꿉친구인 박준호, 김도형 이 둘은 창원으로 갔단다.
대단한 건 아니고 돝섬에 갇혀 있는 게 갑갑했다고.
하긴 둘의 지형극복 특성을 보면 페널티나 다름없다.
항상 뛰어다녀야 하는 애들인데.
유현이가 종이비행기를 날렸으니 곧 올 것이다.
파밍 던전은 2,3일 정도는 유지되니까 그 때까진 기다릴 참이다.
다정은 심심했는지 숙소 주위를 돌아다니다가 텃밭을 발견했다.
"햐···불쌍맨 걔 특성 진짜 죽이네. 딸기 이게 이 추위에 난다고?"
"진짜 대박이지?"
이렇게 말하는 나도 텃밭의 규모와 작물의 종류에는 놀랐다.
뭔 장사하나 싶을 정도로 많은 양의 작물이 자라고 있었다.
특히 딸기.
어린애 주먹만 한 붉은 딸기가 줄기에 주렁주렁 달려 있는데 감탄만 나왔다.
내 텃밭은 숲 자체의 힘이라면 이 텃밭은 전적으로 지만이의 특성 덕분이다.
다정은 쪼그려 앉아 딸기를 따서 먹었다.
"으흐음. 진짜 달고, 완전 상큼해. 나 이런 딸기 처음 먹어봐. 참 성호 너도 입이지."
나는 다정이 입에 넣어준 딸기를 먹었다.
···진짜 특성 대박이네.
그를 서울로 보낸 것은 어쩌면 실수였는지도 모르겠다.
장원택 그 사람이 안 놓아줄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다정아. 정부 쉘터에도 땅 있지? 장기적으로 작물 재배할 땅 말이야."
"밤섬. 전에 식물 몬스터 때려잡으러 갔었어. 나중에 날 풀리면 농사지을 거라고 그러던데?"
"밤섬? 거기가 어디야."
나는 지도를 펴서 밤섬의 위치를 확인했다.
한강에 있는 섬인데 육지에서의 거리가 상당히 가까웠다.
이 정도면 몬스터가 헤엄쳐서 올 수 있지 않나?
아니지.
이건 내 추측이지만 몬스터는 바다를 건너지 못한다.
만약 이런 강도 마찬가지라면.
"다정아, 밤섬에 몬스터 있었어?"
"식물 몬스터 말고는 없던데? 너 혹시 그게 궁금한 거야? 몬스터가 강이나 바다를 건널 수 있는지?"
"니가 부리는 구울은 그게 되는데 몬스터도 가능한 건지 궁금해서."
"흐음···지금 실험해줘?"
"해주면 고맙고."
그녀는 구울들을 출동시켜 야생 구울과 고블린을 잡아왔다.
헤엄쳐서 데리고 오느라 시간이 꽤 많이 걸렸고, 나는 텃밭 전체를 쉘터로 옮겼다.
마침내 돝섬에 상륙한 몬스터 두 마리는 구울들에게 둘러싸였다.
"쟤네들을 헤엄치게 하면 되는 거지?"
"오케이."
다정이 손가락을 튕기자 덩치가 구울을 바다로 휙 던졌다.
녀석은 나름 허우적거렸지만 헤엄치는 것은 아니었다.
원래 좀비와 구울이 헤엄을 못 쳤었나?
하긴 습지 미궁에 둘이 나오는 경우는 못 봤으니까···
"희한하네. 다정이 니가 헤엄 가르친 건 아니지?"
"내가 그렇게 한가한 줄 알아? 얘들아, 고블린 밀어붙여."
고블린은 구울들에게 둘러싸여 겁을 먹었음에도 바다로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한 구울이 코앞까지 다가가 주둥이를 쩍 벌리며 위협했다.
하지만 고블린은 바다가 더 무서운 듯했다.
나는 결론을 내렸다.
"쟤네들 바다를 서버의 경계로 인식하나보네."
"그게 무슨 말이야?"
"게임을 하면 유저는 한국 서버 일본 서버 이렇게 접속할 수 있잖아? 근데 NPC인 몬스터한테는 그게 불가능하다는 거야. 즉 저 몬스터들은 바다를 서버의 경계로 인식하고 접근하지 않으려 하는 거지."
다정은 쪼그려 무릎에 턱을 대었다.
"그게 말이 돼? 쟤네들 몬스터잖아. 누가 만든 것도 아닐 거 아냐."
"어떤 힘에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어. 우리가 각성하고 시스템의 영향을 받은 것처럼."
"흐음···뭔가 마음에 안 들어."
"그게 현실인데 어쩔 수 없지. 가까운 강이 어딨나···"
위쪽의 낙동강 정도면 충분하겠지.
끝까지 거부하던 고블린은 결국 강제로 바다에 나가게 되었다.
녀석은 허우적거리다가 가라앉았다.
육지 몬스터가 바다에 약하다는 게 확실해졌다.
검인이 알고 있는 좀비 레이드에서 안전한 쉘터와 합치면 뭐가 나올지도 모르겠다.
다정이 벤치에 앉아 패딩과 솜바지를 벗었다.
따뜻한 남부로 오니 살만한가보다.
"급식이들 왜 이렇게 안 오는 거야."
그녀의 날씬한 다리가 허공에서 춤을 추었다.
"···그러게."
좀 늦네.
.
.
.
둘은 저녁까지 오지 않았다.
우리는 모닥불을 피워놓고 식사를 했다.
다정은 내 옆에 달라붙어선 뜬금없는 얘기를 꺼냈다.
"낮에 의사 선생하고 미경이 표정 봤어?"
"아니."
"너 심하다···둘은 은근히 마음에 있는 눈치던데 신경도 안 쓰네."
"미경이면 모르겠는데 수연씨도 그렇다고?"
내색을 전혀 하지 않은 사람인데.
다정은 다리를 곧게 펴며 중얼거렸다.
"사람들 짐 쌀 때 내가 둘에게 물어봤거든. 3P할 의향 있냐고 말이야."
"야이 미친."
급발진에도 정도가 있지 이건 트럭으로 들이박는 꼴이잖아.
내 비난에도 다정은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성인인데 뭐 어때? 의향만 물어보는 건데. 하여튼 의사 선생은 완전 싫은 표정이더라."
"누가 그걸 좋아해."
"난 좋은데? 여자나 남자나 상관없어."
···같이 다니면서 익숙해지다 보니 그녀가 살짝 맛이 갔다는 걸 잠시 잊었다.
아니 이건 성 지향성에 관한 문제인가···
하여튼 이 주제에 대해서는 관심을 끄고 싶었지만 다정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녀의 다리가 내 허벅지 위에 올라왔다.
"사실 난 여자도 상관없거든. 그래서 의사 선생이나 미경이 꼬시려고 했는데 실패했어."
"아주 나를 미워하게 하려고 작정을 했구나."
"진짜 미워했으면 머리를 1시간이나 만져줬겠어?"
그렇게 말하니 할 말이 없군.
미경은 1시간이나 공을 들여서 내 머리를 다듬어 주었다.
남자 머리란 20분 안에 손질이 끝난다고 믿고 있던 나로선 좀이 쑤셨지만 워낙 진지해서 어쩔 수 없었다.
"옆에서 보고 있으니까 성호 너 얼굴을 신주단지 다루듯이 하던데? 애무하는 줄."
"턱수염 좀 깎아준 것뿐이야."
"미용실 아가씨라며? 미용실에서 턱수염도 깎아줘?"
"···보통은 아니지."
비싼 미용실에선 해주는지 모르겠지만, 대부분은 머리 감겨주는 걸로 끝이다.
다정은 상체를 숙여 나를 바라봤다.
"의사 선생은 바이바이지만 미경이가 남아 있지롱. 언젠가 3P하고 말거야."
"니가 무슨 치타냐···"
미경이 그걸 받을 리가 없으니 영원히 안 되겠지.
그나저나 얘는 대체 어떤 삶을 살아왔기에 이렇게 된 걸까.
"다정이 너 옛날에 뭐했어? 종말 전에 말이야. 내가 분식집 한 건 알거고."
"겪어봤으니 알겠지만 평범하진 않았어. 근데 안 묻는 게 좋을 거야. 너나 나나 불편해."
"그래···"
왠지 모르게 착잡한 어조였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입을 다물어야지.
하지만 그녀의 과거에 대한 궁금증은 뇌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석현이도 그렇고, 평범하지 않은 삶을 살아온 것이 분명했다.
그건 대체 어떤 삶일까···
우리는 서로의 몸에 기대어 밤하늘의 달을 바라봤다.
"급식이들 참 안 오네."
"그러게."
아침에 일어나는 대로 찾으러 가봐야겠군.
다정이 슬쩍 내 품으로 파고들었다.
.
.
.
우리는 새벽부터 일어나 돝섬을 떠날 준비를 했다.
내일까지 급식이들을 찾지 못하면 파밍 던전을 이용하는 건 불가능하다.
정든 돝섬을 떠나 구울들을 앞세워 공단 도로를 한참 걸었다.
양곡동에 접어들자 좀비와 구울의 합창이 들렸다.
좀비 레이드다.
"여기 사람 있나본데."
"어제 일본인들 아니야?"
돝섬을 공격한 일본인들은 일부에 불과했다.
그러나 여기서 괜히 힘을 뺄 필요는 없다.
놈들이 좀비 레이드를 당하건 알게 뭐야.
우리는 양곡동에 들리지 않고 북동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교차로에서 허무하게 무너진 공단을 바라보는데 누군가가 쌩 지나갔다.
쟤가 누구였지?
급식이들의 얼굴은 잊어먹었지만 그들의 움직임은 기억에 생생했다.
"준호야!"
녀석이 끼익 멈추더니 쇠모래를 타고 넘었다.
"어? 형!"
준호가 맞나보다.
녀석은 빠르게 달려와 내 앞에서 헉헉댔다.
"우와, 성호형, 진짜 오랜만이에요. 근데···"
다정이 이름을 까먹은 모양이다.
하긴 둘은 파밍 던전에서 만나긴 했지만 같이 지낸 시간은 거의 없었다.
"10초 준다. 10초 안에 내 이름 말해."
"누, 누나 죄송한데···"
다정이 준호의 얼굴을 손으로 감싸고 꽉 눌렀다.
"다정이야, 최다정. 앞으로 까먹으면 내가 너 엉덩이에 박아버릴 거야. 알아들어?"
"···"
얼굴이 붉어지는 걸 보면 급식이한테는 그것도 업계의 포상인 모양이다.
나는 녀석을 떼어놓고 물었다.
"니들 종이비행기 받았냐?"
"아뇨? 못 받았는데요."
연락이 안 됐나보군.
나는 녀석에게 간략한 사정을 설명했다.
돝섬 멤버들이 모두 서울로 갔다고 하자 그의 표정이 다급해졌다.
"그러면 안 되는데. 우리도 가야 되는데."
"아직 시간은 있으니까 걱정 마. 도형이는 어딨냐?"
"도형이 지금 일본인들하고 같이 있어요."
하필 걔네를?
내 인상이 안 좋아지는 걸 봤는지 준호가 급히 수습했다.
"그 사람들 막 나쁜 사람들 아니에요. 저희도 잘 대해주고 했어요. 별로 가진 건 없었지만."
우리가 만난 미친 일본인들과는 다른 부류인 것 같다.
인원은 십여 명으로 남매인 듯한 둘이 리더라고 한다.
준호는 그 대목에서 흥분해서는 날뛰었다.
"일본 화족이래요, 화족, 완전 높은 집안이라는 거죠."
"화족? 화교하고는 뭐가 다른 거야?"
다정이 묻자 그는 아는 것을 줄줄이 늘어놓았다.
요약하자면 오래 전부터 내려온 일본의 귀족이란다.
계급 자체는 폐지된 지 오래지만, 그 영향력은 여전하다고.
심지어 화족의 자제들이 다니는 학교도 따로 있다고 한다.
높으신 분이라는 소리를 들으니 갑자기 배알이 뒤틀렸다.
"도형이보고 빨리 나오라고 해. 니들도 정부 쉘터에 가야지."
내가 그렇게 말했지만 준호는 쭈뼛거렸다.
"근데 형···저 지금 약국 찾으러 갔다 오는 길인데요···"
"약국은 뭐 하러?"
"그 유즈카가 아프다고 해서···감기약 좀 찾으러···"
"얼씨구. 우리 준호가 일본의 귀족 아가씨와 사랑에 빠졌어요옹."
다정이 빈정거리자 준호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 그건 아니고요···"
"그럼 뭔데?"
"기침을 심하게 해서 도와주고 싶어서···"
"알았다, 알았어."
다른 사람을 도와주고 싶다는 마음을 폄하할 필요는 없다.
그나저나 유즈카란 이름은 어디서 본 적이 있는데.
"아, 경매장."
"무슨 경매장?"
"전에 누가 경매장에서 여기 일본인 있냐고 물었었거든. 누군가 싶어서 확인하니까 유즈카란 이름이 나오더라고."
"서바이벌 라이프 아이디가 없으면 본명이 나오는 거구나."
"뭐가요?"
준호는 뭐가 뭔지 이해가 안 가는 얼굴이었다.
얘는 내 정체에 관해 모르지···
"그건 나중에 사람들한테서 듣고, 일단은 가보자."
다정이 끼어들었다.
"왜, 도와주게?"
"높으신 분들이라니 나름 정보가 있을 거 같아서."
"있어봐야 일본 정보잖아. 가만, 너 혹시?"
나는 생각해둔 것을 말했다.
"언젠가는 일본 서버에 갈 일도 있지 않겠어? 스피드런 미궁에서 외국인들이 우리 서버에 온 것처럼 말이야."
"좋아. 구울로 툭툭 칠 테니까 막타만 쳐. 여기서 27렙 만드는 거야."
하여튼 차원문 안에 들어가고 말겠다는 집념 하나만큼은 대단하다.
우리는 서둘러 양곡동으로 향했다.
.
.
.
시라이시 남매가 이끄는 일본 유랑민들은 좀비들에 맞서 힘겨운 싸움을 벌였다.
그들은 좀비 레이드를 몰랐다.
한국에 도착한 후에 경매장에서 듣긴 했는데 5명 이상 모이면 안 된다는 걸 자주 잊어버리곤 했다.
그 결과가 이것이다.
"차아압!"
시라이시 켄지의 롱나이프와 목도가 힘차게 좀비의 두개골을 갈랐다.
그는 나름 훌륭한 전투를 벌이고는 있었지만 좀비의 숫자가 너무 많았다.
또한 중간에 구울이 섞여 있어 아주 골치가 아팠다.
녀석들은 질긴 생명력과 잽싼 움직임, 그리고 놀라운 힘을 갖고 있었다.
레벨이 높지 않은 사람들은 뭉쳐서 대항해도 처리가 어려웠다.
"켄지님! 이대로는 버티지 못합니다!"
주변에서 연이어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안 그래도 소수에 불과한 인원이 계속 줄어들고 있었다.
켄지는 자신을 향해 뛰어오는 구울을 노려보며 이를 악물었다.
저 기괴하게 비틀린 팔다리는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았다.
도망가고 싶지만 그의 뒤에는 아픈 여동생이 있다.
그는 거친 숨을 들이쉬었다.
"여기가 내 무덤이 된다 해도! 내 무너지지 않으리!"
마침내 구울이 점프했다.
켄지는 놈의 긴 발톱과 선명한 이빨을 보며 눈을 부릅떴다.
그의 롱나이프가 구울과 맞닿기 직전.
정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무언가가 구울의 다리를 잡아챈 것이다.
"누, 누구?"
켄지와 유즈카의 입이 벌어졌다.
그것은 큰 덩치를 가진 남자였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구울의 뒷다리를 잡아 바닥에 패대기를 쳐버렸다.
케악!
구울의 입에서 피와 체액이 튀어나왔다.
"이걸 버티네."
놈은 남자의 손에서 벗어나려 애썼다.
"옛다."
마침내 구울은 자유가 되었다.
하지만 그를 맞이한 것은 환영인사가 아니라 롱나이프였다.
파파파파―
허공에서 구울이 조각조각 해체되었다.
켄지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 강력하던 구울이 패대기쳐진 것도 모자라 생선마냥 회쳐진 게 믿기지가 않았다.
남자는 롱나이프에 묻은 피를 털고 남매를 바라봤다.
그 섬뜩한 시선에 둘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이 사람, 엄청나게 강하다.
< 차원문을 이용하려면 - 1 > 끝
< 차원문을 이용하려면 - 2 >
그 어떤 좀비도 구울도 그에게는 접근조차 못하고 육편이 되었다.
켄지는 벙어리가 되어 그가 싸우는 걸 바라보기만 했다.
그는 단순히 강한 것뿐만이 아니라 움직임 자체가 달랐다.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몬스터를 썰어냈다.
검술 특성을 가진 자로서 저렇게 움직일 수 있냐고 하면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대체 얼마나 지독한 수라장을 헤쳐 온 것인가···'
단순히 스킬 몇 개 더 얻은 것 같지는 않았다.
몬스터의 공격을 읽고 선수를 치는 듯한 느낌.
그의 롱나이프가 가는 곳마다 좀비와 구울의 팔다리가 솟았다.
켄지는 자신도 모르게 그에게 가려다가 경고를 들었다.
"다치고 싶지 않으면 물러서십쇼."
남자의 목소리는 매우 굵었다.
반발심, 경쟁심이란 것도 비슷한 상대에게나 통용되는 말이었다.
덩치 큰 남자의 전투력은 자신을 아득히 초월하고 있었다.
"···우리를 도와주는 겁니까?"
"일단은. 우리 구울이 공격할지도 모르니까 비켜서는 게 좋습니다."
"우리 구울?"
켄지와 유즈카가 의아해한 순간, 마을을 메우고 있던 좀비들이 허공으로 치솟았다.
누군가가 놈들을 집어던지고 있는 것이다.
뭔가 해서 봤더니 구울 무리였다.
그들은 유랑민을 덮친 구울과 명백히 달랐다.
굳이 비유하자면 소학생과 고교생의 차이 쯤 되겠다.
그리고 그 구울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자는 놀랍게도 여성이었다.
딱 하고 손가락이 튕겨지자 구울들이 일사불란하게 좀비들을 공격했다.
크아악!
케에엑!
"세상에···"
유즈카는 시위를 반쯤 당긴 채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구울을 조종하는 사람이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했다.
구울의 종류도 각양각색이라 여름철 메뚜기처럼 뛰어다니는 놈이 있는가 하면 거대한 덩치를 가진 놈도 존재했다.
녀석은 자신에게 달려드는 좀비들을 귀찮은 듯한 손짓으로 집어던지고, 깔아뭉갰다.
둘의 등장으로 인해 백여 마리의 좀비, 구울이 하나씩 정리되어가고 있었다.
정말 믿기지 않는 일이지만 둘이 좀비 레이드를 막아낸 것이다.
유랑민들은 정자나무를 기준으로 하여 물러서서 둘의 활약을 지켜봤다.
좀비 레이드가 정리되기까진 3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휴우···"
성호는 롱나이프를 털고 숨을 돌렸다.
제법 강해졌다고는 하지만 이런 대규모 무리를 정면에서 상대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다정이 도와줘서 망정이지 혼자 달려들었으면 위험할 뻔했다.
"1렙 올랐어. 27레벨이야."
"오오, 이제 3레벨만 더 올리면!"
왜 자기가 불타오르는 걸까.
성호는 정자나무에서 긴장된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남매에게 다가갔다.
멀찍이에서 활을 쏴대던 급식이 둘이 뛰어와 소개를 해주었다.
"형형, 이쪽은 시라이시 켄지구요, 이쪽은 시라이시 유즈카."
"다른 일본인들하고는 좀 달라요, 이 사람들은."
다른지 어떤지는 봐야 알겠지.
성호는 켄지에게 물었다.
"다섯 명 이상 모이면 좀비 레이드가 일어난다는 거 몰랐습니까??"
"···부끄럽게도. 본토에서는 항상 쫓겨 다녔기에 원래 그런 것인 줄 알았습니다."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이번 기회에 많이 배웠습니다."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는 유즈카.
그러면서도 심하게 기침을 하는 게 꽤 고통스러운 것 같았다.
다정은 그녀에게 다가가 주위를 돌았다.
"확실히 한국인하고는 뭔가 좀 다르네. 아가씨란 느낌이 팍팍 들어요."
대놓고 훑어보는 시선에 그녀는 기침을 멈추고 부끄러워했다.
"유즈카가 그렇게 달라 보이나요?"
"우와, 나 자기를 3인칭으로 부르는 사람은 처음 봐."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으니 저쪽으로 갑시다."
성호가 가리킨 것은 바로 옆의 원룸 건물이었다.
켄지는 서서히 올라오는 썩은 냄새에 코를 막았다.
"그 좀비 레이드, 지금은 괜찮습니까?"
"오는 게 있어야 가는 것도 있는 법이죠."
남매는 얼굴을 붉혔다.
아무래도 정보를 얻으려면 이쪽도 좋은 것을 내놔야 할 것 같았다.
.
.
.
"도움을 주신 것에 정말 감사드립니다."
3층으로 올라오자마자 켄지와 유즈카는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아무래도 유민들 앞에서 저자세로 나오기는 힘들었겠지.
나는 다정과 시선을 교환했다.
끄덕끄덕.
"예 뭐. 저희도 나름 목적이 있어서 도운 거니까요."
"목적이라 하심은?"
켄지는 턱수염을 기르고 있었는데 꽤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흘렀다.
나이는 30대 정도.
옆구리에 찬 목검을 보니 검도를 연마한 것 같았다.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정보를 캐야겠군.
"어제 우리는 일본인 20여 명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대장은 덩치가 큰 고릴라 같은 사람이던데, 혹시 압니까?"
"고릴라···말투가 기묘한 사람이었습니까?"
"아는 사람인가보군요."
그는 황급히 손을 저어 부정했다.
"아아, 단지 악연으로 이어진 것뿐입니다. 그 자의 이름은 후타바 오타로라고 합니다. 본토에서는 레슬러로 유명했었죠."
레슬러라서 그렇게 덩치가 큰 거였군.
하지만 그 이상한 언행은 설명이 되지 않는다.
켄지가 머뭇거리더니 말했다.
"후타바는 레슬러로서는 범용하다는 편이었습니다만, 기묘한 언행으로 다소의 인기를 끌었습니다. 세간에는 약물을 했다는 소문도 있었지요."
"그쪽과는 관계가 어떻게 됩니까?"
"같은 일본인이라는 것 외에는 아무런 접점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그들은 어떻게 됐습니까?"
"태반이 죽었죠."
"차라리 잘 됐습니다. 여기까지 와서 폐를 끼치는 일본인 따위, 없는 게 낫지요."
다정은 창밖을 보기만 했고 유즈카는 같은 여자라서 친밀감을 느끼는지 붙어 있었다.
그녀를 보통 여자로 보면 큰 코 다치는데.
슬슬 본론으로 들어갈 때군.
"제안할 게 있습니다. 그쪽이 정보를 주면, 우리도 정보를 줄 겁니다."
물론 정보의 질이 좋은 것이어야 한다.
별 거 없으면 내가 줄 정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켄지와 유즈카의 눈에 열망이 어렸다.
"살기 위해 여기까지 왔는데 망설일 이유가 없지요. 모든 것을 밝히겠습니다."
켄지는 부하를 불러 뭔가를 가져오게 했다.
급식이 둘은 건너편 상가건물 2층에서 일본인 소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꽤 즐거워 보이는구만.
이윽고 부하가 작은 주머니를 올려주었다.
그 안에는 지도와 노트가 들어 있었다.
다정이 와서 노트를 펼쳤다.
"일기네. 근데 왜 7월 17일부터 적혀 있죠?"
"저희가 정부로부터 종말이 일어난다고 통보받은 날짜입니다."
"뭐야. 5일 전에 좀비가 나타났잖아요? 그 전에는 고블린이 발견됐고."
유즈카가 고개를 숙였다.
"당시 일본에서는 한국의 날조로 생각했기 때문에···유즈카, 부끄럽습니다."
뭐 부끄러울 것까지야 있나.
나는 규슈의 지도를 펼쳤다.
"민간인은 그렇다 치더라도 정부가 그러면 안 되죠. 그래서 원전은 어떻게 됐습니까?"
켄지는 절망적인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정부에선 별 일 아니니 가만히 있으라고 했습니다. 저희는 나름대로 한국의 정보를 파악하고 물자를 비축해서 살아남을 수 있었죠."
"···이 동그라미가 원전 위치인가 보죠?"
"예. 후쿠오카현 북쪽은 죽음의 땅이 되었을 겁니다. 아무도 살아남을 수 없는···"
"다른 땅은 어떻습니까?"
"저희는 한국으로 가자고 결정을 내렸기 때문에 다른 지역은 잘 모릅니다."
이래서야 정보가 없잖아.
내 표정이 심상찮음을 느꼈는지 켄지가 펜으로 여러 곳을 그려주었다.
"혹시나 해서 드리는 정보입니다만, 이쪽이 산리부, 이쪽이···"
"산리부는 또 뭐죠?"
"규슈에 많은 할인점···한국식으로 하면 마트입니다."
"마트라면 다 털렸을 텐데요."
"외지에 있는 물류창고라서, 아직은 괜찮을 겁니다."
내가 물류창고를 좋아하는지 어떻게 알고.
보통 몬스터는 사람 있는 곳에 나타나기 때문에 외지엔 잘 가지 않는다.
다수의 미곡센터가 멀쩡한 것도 그래서다.
켄지와 유즈카는 지도 앞에 엎드려서 꽤 많은 정보를 가르쳐 주었다.
이 정도면 당장 일본에 가도 헤맬 일은 없을 것 같았다.
규슈 남쪽에 한해서지만.
그때 유즈카가 갑자기 멀어지더니 심한 기침을 해댔다.
거의 숨이 넘어갈 것 같다.
켄지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지만 그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없는 모양.
"며칠째 이렇습니다. 약도 찾지 못했고 기침은 심해져만 가니···피를 토하는 게 아닐지 걱정됩니다···"
다정이 내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이 정도는 해줘야 되지 않겠느냐고 묻는 듯하다.
뭐 그렇긴 하지.
나는 둘에게 물었다.
"내가 아는 의사가 있는데, 경매장을 통해서 진료를 받아볼 수 있을 겁니다. 잘하면 약도 구할 수 있을 거고요."
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그래만 주신다면! 절대,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유즈카도 잊지 않겠어요."
"잠시만요."
나는 경매장을 통해 멤버들을 불러냈다.
스스로 경매장 죽돌이라고 자칭하는 유현이가 바로 코멘트를 썼다.
―형 무슨 일이에요?
―여기 환자가 있는데···수연씨 시간 괜찮은지 모르겠네.
―누나 지금 검인이하고 얘기하고 있는데 잠시만요.
검인이가 수연과?
별로 안 어울리는 조합이긴 하지만 자기들이 좋다면 신경 쓸 건 아니다.
기다리고 있으려니 켄지가 초롱초롱한 눈빛을 보내왔다.
남자에게서 그런 눈빛을 받긴 싫은데.
―저 보자고 하셨다고요.
―아예, 수연씨. 다름이 아니고 여기 환자가 있는데요.
―아···원격진료가 필요한 거죠? 한국에선 불법인데.
―지금 한국엔 법이 없어요.
―참 그렇죠. 환자의 신상명세 좀 가르쳐주시겠어요? 증상하구요.
"유즈카씨, 신상명세와 증상."
"아, 네."
그녀는 급히 경매장에 들어가 코멘트로 알렸다.
―제 전공이 아니라서 정확하진 않지만 상기도 감염증이 의심되네요.
뭐가 대단히 위험할 것 같은 이름이다.
―엄청 위험한가 보네요.
―네. 치료법도 없고, 운이 없으면 각종 합병증으로 사망할 수도 있는 위험한 질환이죠.
―아···그래요.
점점 더 심각해지는데.
내 목소리가 심각해지자 수연이 황급히 수습했다.
―상기도 감염증이 감기예요.
난 또 뭐라고.
그냥 추워서 감기 걸렸다는 거잖아.
코멘트를 본 남매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한국이 워낙 춥고, 또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보니 체력이 바닥일 거예요. 한 마디로 말한다면 면역체계가 무너져 있는 상태란 거죠. 바이러스가 활동하는데 최적의 조건이죠.
―그럼 치료법은 잘 먹고 푹 쉬는 것밖에 없네요?
―보통 의사들은 그렇게 말하겠지만···기침이 심한 것 같으니 약을 처방해 드릴게요. 근데 이거 의사가 하는 거 아닌데.
지금은 아포칼립스라니까요.
이윽고 수연이 약봉지를 경매장에 올리자 켄지가 잽싸게 구입했다.
최저가인 10포인트.
유즈카는 컵에 물을 따라 약과 함께 들이키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뭔가 안심이 되네요. 콜록."
"이제 당분간은 잘 먹고 푹 쉬는 게 좋을 겁니다."
하지만 이들의 사정이 여의치 않음은 나도 알고 있다.
나는 다정과 함께 밖으로 나가 급식이 둘을 불렀다.
"형, 무슨 일인데요?"
"이거 위에 갖다 줘라."
쌀 한 포대와 성냥, 그리고 간장병이다.
이거면 하루 이틀은 버틸 수 있을 것이다.
그 다음은 알아서 하는 거고.
"근데 이거 쌀 어디서 구하셨어요? 아무리 찾아도 없던데···"
"내 귀여운 구울이 찾아왔는데 왜?"
이럴 땐 다정이 참 든든하다.
급식이들은 그녀의 기세에 눈치를 살피곤 포대를 메고 올라갔다.
나는 그들의 뒤에 대고 말했다.
"돝섬 점령해도 괜찮다고 그래. 그리고 니들 둘은 주고 바로 우리 따라오고."
작은 도움으로 마음을 얻을 수 있으면 좋은 투자다.
당장은 도움이 안 되겠지만 나중엔 혹시 모르지.
"옙!"
"금방 갈게요!"
우리는 돝섬으로 향했다.
.
.
.
급식이들이 사정을 듣곤 정부 쉘터로 떠났다.
파밍 던전의 지도도 줬고 사람이 마중 나오기로 했으니 헤맬 일은 없을 것이다.
우리는 멀리서 시라이시 남매가 섬에 들어가는 걸 지켜봤다.
드디어 살 길이 생겼다며 어찌나 기뻐하던지.
남매는 내가 은인이라며 그 어떤 요구든 한 번은 들어주겠다고 맹세했다.
다정이 장난삼아 몸을 요구할지도 모른다고 하자 유즈카의 얼굴이 빨개진 것은 덤.
뭐 내겐 무리한 요구를 할 생각은 없다.
다정이 내게 말했다.
"섬을 놔두기엔 좀 아까웠던 거지?"
"우호적인 세력이 차지하고 있으면 나쁘지 않아. 언제 또 필요해질지 모르니까."
"너 진짜 알뜰하다."
"그나저나 근처에 파밍할 게 있나 모르겠네···우리 멤버가 다 파먹었을 텐데."
"미곡센터 하나 가르쳐줬으면 알아서 하는 거지 뭐. 신경 꺼."
그래야겠지.
나와 다정은 구울들을 이끌고 북쪽으로 향했다.
몬스터를 갖고 실험한 끝에, 강은 문제없이 건넌다는 걸 알아냈다.
실망스런 결과지만 어쩔 수 없다.
우리는 방향을 꺾어 지리산 방향으로 향했다.
전남과 전북을 통과하면서 중국인들이 얼마나 있나 보고 싶었기 때문.
긴 여행이 이어졌다.
지리산 인근에 도착해서는 상당한 곤욕을 치렀다.
식물 몬스터의 분포가 장난이 아니었던 것이다.
마치 지리산 전체가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았다.
앞으론 도시도 이런 마경이 되겠지.
우리는 적당히 싸우다가 구례로 도망쳤다.
레벨은 29까지 올렸고, 포인트는 15,000을 돌파했다.
다정이 구울로 편의를 봐준 덕분이었다.
"1레벨만 올리면 돼···1레벨만 올리면 돼···"
그녀는 중얼중얼하며 나에게 바칠 몬스터를 찾아 나섰다.
마침내 오크를 발견했을 때, 그녀는 환호성을 질렀다.
"오크님 나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크륵?
오크는 가슴근육을 씰룩대며 그녀를 위협했지만 구울들에게 얻어맞고 내게 끌려왔다.
나는 이런 식으로 편하게 레벨 업을 계속했다.
그리고 마침내 30레벨이 되었다.
「레벨이 30으로 올랐습니다」
「포인트를 10 획득했습니다」
「30레벨이 되어 특성이 변화합니다」
「전용 차원문 개방이 차원문 개방으로 바뀝니다」
「차원문 이용에 필요한 포인트를 설정할 수 있습니다」
「차원문을 이용하려면 특별한 계약이 필요합니다」
드디어 나오긴 했는데···
뭔가 좀 이상하다.
< 차원문을 이용하려면 - 2 > 끝
< 차원문을 이용하려면 - 3 >
휑하던 정부 쉘터에 활기가 돌았다.
새로운 인원이 들어온 것이다.
상당수가 10대 후반부터 20대 초반의 젊은 층이라 약간 시끄럽기도 했다.
아무래도 할 말이 많은 애들이라.
장원택이나 이범석 등의 나이가 많은 사람들은 젊은 피가 들어왔다며 나름 흐뭇하게 여겼다.
정부 쉘터라고 해서 나이 많은 사람만 진치고 있으면 얼마나 재미없을 것인가.
물론 생존에 재미가 끼어들 여지는 없지만, 그래도 쉘터 안에 있다 보면 젊은 사람들의 기운이 필요한 법이다.
그 젊은이들이 검인의 방에 모였다.
검인은 돝섬 멤버들 중 상당수가 자신보다 동생이라는 점을 눈치 챘고, 기강을 잡을 필요성을 느꼈다.
기강···이라고 하면 좀 뭐하고 하여튼 앞으로의 일을 논의해 보려는 것이다.
오형준이나 조수연은 나이차가 많이 나서 말을 걸기가 부담스러웠다.
"저기···들어가도 돼?"
"들어와, 들어와."
검인은 사람들을 불러들였다.
이름이 뭐였더라···
유현, 미경, 지만, 여울, 준호, 도형이 줄줄이 안으로 들어왔다.
좁은 방이 꽉 차서 다들 엉덩이를 움직여 자리를 양보해야 했다.
덕분에 온기가 살짝 느껴졌다.
"여기 되게 따뜻하다."
"어우 이게 무슨 냄새야."
"우와 누가 고구마 먹었어?"
좁은 방 안에 구수한 냄새가 퍼졌다.
환기할 창문도 없어서 냄새를 다이렉트로 느껴야 했다.
돌겠군···
검인은 시끄러운 아이들을 진정시켰다.
"다들 자리에 좀 앉아봐. 시끄럽게 굴 일도 아니잖아. 고작해야 방귀라고."
"검인이 말이 맞아."
"일단 좀 앉아. 서성거리지 말고."
검인이?
검인은 호칭에 약간의 불편함을 느꼈다.
여기는 다 동생인데 왜 반말일까?
1살 차이로 유세 떠는 건 아니지만, 하여튼 자신은 명백한 형이자 오빠였다.
똥물에도 위아래가 있다는 걸 가르쳐줘야겠군.
"다들 자기 나이 말해봐. 난 23살."
"나도 23살인데."
미경이가 눈치를 보며 말하자 유현이 어이없는 얼굴이 되어서는 참견했다.
"너 나하고 동갑인데 무슨 23살이야? 아직 해도 안 넘어갔잖아."
"빠른이거든."
"요즘엔 2월 25일도 빠른으로 치냐?"
"그건 너무하네···"
"초까지는 봐주는데 25일은 선 넘었지."
"언니 빠른 노인정."
급식이 셋은 인정하지 않을 기세였고 유현이는 빈정대기까지 했다.
"다른 사람한테는 맨날 22살이라 그러다가 이제 23살인 거야? 그런 거야?"
"뭐래. 내 마음인데."
"나중에 성호 형한테 너 나이 23살이라고 알려줘야지. 아니 내년 되면 24살이잖아? 벌써 20대 중반이네?"
"···뒤질래."
"하나만 해, 하나만."
둘은 서로를 노려보며 으르렁거렸다.
돝섬에서 꽤 오래 지내서 사이가 좋아진 게 아니라 더 악화됐다.
거의 친남매처럼 변한 것이다.
옆에 앉은 여울이가 유현이의 팔짱을 살짝 꼈다.
"언니 제 남친한테 험한 말 하지 말아주세요."
"우와, 얘가 유현이 편을 드네. 남편이니? 남편이야?"
"지금도 결혼 할 수는 있거든요. 완전 합법이라니까요."
그 말에 유현이의 표정이 안 좋아지는 걸 보면 코가 꿰였나보다.
"이 세상에 법이 어딨는데?"
점입가경이다.
검인은 현기증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역시 애들이라고 해야 할까···
성호나 다정과 함께 있으면 주제가 아주 묵직했는데 가볍다 못해 날아갈 것 같았다.
이래서는 안 되지.
역시 여기선 기강을 잡아야겠어.
"잠깐만. 서열 정리를 좀 하자. 아무튼 여기선 내가 가장 연상인 건 인정하지?"
다들 마지못해 머리를 끄덕였으나 지만이는 달랐다.
"근데 너 성호 형한테 반말하잖아."
"응?"
"검인이 쟤 성호 오빠한테 반말해?"
"나이 엄청 차이나잖아···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완전 맞먹겠다는 거네."
또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이건 뭔가 잘못 됐어···
검인은 헛기침을 하며 변명에 나섰다.
"나, 난 고인물이라서 그런 거야. 김밥조아, 오리궁뎅이, 토끼공듀와 같이 게임을 하던 사람이라고. 5천 시간 가까이."
슬슬 존경심이 들지 않니?
하고 꺼낸 말이었지만 그를 쳐다보는 눈빛이 이상했다.
"별로 고인물 같지 않은데···"
"형 너무 평범하게 보이는데요."
"다른 사람은 고인물이라는 느낌이 팍팍 드는데 검인이 넌 아냐."
그랬다.
토끼공듀는 일단 외모에서부터 저 새낀 진짜다, 하는 고인물 포스를 풍겼다.
오리궁뎅이는 화려한 외모도 그렇지만 구울들로 자신의 위엄을 알렸다.
김밥조아는 일견 평범해 보이지만 굉장한 덩치에다 눈빛이 살벌했다.
속된 말로 사람 하나 박살내는데 10초도 안 걸릴 것 같은 분위기를 자랑했던 것이다.
이 셋에 비하면 20대 초반 겜돌이인 생존자1은 좀 쳐져 보이는 게 사실이었다.
"걔네들도 다들 나이 차 나는데 반말 한다고. 나만 존댓말 하는 건 이상하잖아."
"그럼 우리도 다 말 놓으면 되겠네."
"그럴까?"
"강물에도, 어? 위아래가 있다는데 급식들이 나서긴 좀 그래."
"우린 이제 급식 못 먹는데요. 언니가 줄 거예요?"
"얘가 눈 뜨고 대드는 것 좀 봐. 유현이 너 교육 똑바로 안 시켜?"
"너 성호 형한테 일러버린다. 애가 완전히 꼰대라고."
"야! 김유현!"
이쯤 되자 검인은 미치고 환장할 지경이 되었다.
애들을 데려다놓고 위엄을 내세울 계획이었는데 처참하게 무너지고 있었다.
여기서 공략본을 뿌렸니 어쨌느니 얘기를 해봐야 상황은 나아질 것 같지 않았다.
그는 필사적으로 화제를 돌렸다.
"그, 그건 그렇고 다들 어떻게 생각해? 성호의 목표에 대해서 말이야."
"이 쉘터에서 지분을 확보해야 된다는 거지?"
은근슬쩍 말을 놓는 미경이.
검인은 1살까지는 봐주기로 했다.
따지고 보면 토공과 그는 나이 차가 10살이나 되는데 말을 놓고 있으니까.
"지분이 뭐냐고 물으면, 결국 시설과 총기를 누가 점유하느냐야. 생필품이나 식량 같은 물자도 중요하지만 그게 더 중요해."
총기.
지금까지는 쓸 수 없었던 무기.
그러나 철사병이 가라앉고 나면 본격적으로 쓰게 될 거라고 한다.
정부 쉘터의 지하에 총기가 잔뜩 있다는 건 이미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검인은 목에 힘을 주었다.
"철사병이 가라앉고 총기를 꺼낸다 해서 바로 지분을 확보하는 건 아니야. 그런 건 서서히 이루어지는 거지. 우리 쪽에 총기를 다루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아. 대통령이 우리를 믿고 총기를 맡길 수 있어야 된다는 거지."
"그럼 공부를 좀 많이 해야겠네."
다들 지만이의 말에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총을 쥔다고 해서 숙련된 병사로 변신하지는 못한다는 걸 모두가 알고 있었다.
또한 대통령이 아무에게나 총을 내어주지도 않을 것이다.
최소 성인은 되어야겠고 다양한 임무를 수행해 능력을 증명해야겠지.
"지금처럼 이렇게 중구난방으로 떠들고 그러면 전력 외로 판정될 거야. 이범석 그 아저씨가 평가를 하고 있거든."
"그러면 인상 쓰고 다녀야 되나···"
급식이 중 하나가 말하자 검인은 고개를 저었다.
"그래봐야 평가는 못 바꿔. 평소의 행동이 어떤가에 따라 매겨지니까. 임무를 잘 수행하면 평가가 올라가니까 다들 알아서 열심히들 해."
총기함 열쇠는 강화 플라스틱으로 제작되어 장원택이 갖고 있었다.
그가 허락하지 않으면 접근조차 불가능했다.
이제 좀 낫군.
검인은 가라앉은 분위기에 만족했다.
그때 지만이가 신기한 얘기를 꺼냈다.
"다들 성호 형의 특성에 대해선 알고 있죠?"
"대충 알긴 아는데."
"정확히 어떤 건지는 모르는데요."
"성호 형 특성 공격예지 아니었어요?"
급식이 둘은 듣지 못한 모양이다.
지만이는 천천히 얘기를 꺼냈다.
"지금까지 우리가 많은 신기한 장소를 봐 왔잖아요. 소굴도 있고, 파밍 던전도 있고···"
"습지 미궁 같은 거."
"네. 그런 장소는 사실 하나의 차원으로 연결되어 있어요. 우리는 차원문을 통해 판타지 세계의 여러 장소를 여행하고 있는 셈이죠."
"아···"
"그런 거구나···"
다들 그런 쪽으로는 생각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진짜 중요한 것은 따로 있었다.
"성호 형은, 자력으로 판타지 세계로 이어지는 차원문을 열 수 있어요. 안에 들어가면 숲이라고 하는데, 형은 그 안에 쉘터를 만들어 놨다네요."
"지, 진짜요?"
"우와 대박이다···"
검인을 제외하고 다들 입을 벌린 채 다물 줄 몰랐다.
특성이 대충 그렇다고 듣긴 했는데 아무래도 상세히 알지는 못했던 것이다.
지만이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그 세계로 들어가는 차원문은 성호 형이 마음대로 열고 닫을 수 있어요. 지금 우리는 못 들어가지만, 앞으로는 상황이 달라질지 몰라요."
"잘하면 우리도 들어갈 수 있는 거지?"
"그 큰 닭 있잖아, 그거 사실 닭이 아니라 화조라는 동물이야. 엄청나게 커."
"나 생선회도 좀 먹었어."
"나도 먹고 싶은데."
다들 차원문 안의 세계를 상상하며 군침을 삼켰다.
지만이가 끝을 맺었다.
"그러니까 잘 해야 돼요. 여기서 괜히 말썽피우지 말고, 성호 형 배신하지도 말고. 할거 하면서 기다리면 형이 알아서 해줄 거예요."
"근데 안에 들어가서 뭐 해요?"
"섹스지 섹스."
이게 뭔 개소리야.
어느새 문턱에 토공이 서 있었다.
그가 엄지를 척 치켜세웠다.
"섹스."
"···"
다들 할 말을 잃었다.
.
.
.
"나왔어 안 나왔어, 그것만 말해."
다정은 거의 나를 씹어 먹을 기세였다.
나는 천천히 그녀의 손을 잡았다.
"나왔어."
"끼얏호!"
방방 뛰려는 찰나, 나는 그녀를 진정시켰다.
"그런데 조건이 있다는데."
"···조건? 무슨 조건?"
"이용요금하고 계약을 해야 한다는데 잠깐만."
나는 차원문을 열어 다정에게 들어가도록 권했다.
그녀는 의심스럽다고 말하면서도 걸음을 내디뎠다.
그리고.
"어? 이거 뭐야. 메시지가 주르륵 뜨는데?"
"전부 말해줘."
잠시 후 정리된 메시지는 다음과 같았다.
「허락된 존재가 아닙니다」
「필요한 포인트가 설정되지 않았습니다」
「출입불가」
「차원문을 이용하려면 특정한 계약을 맺어야 합니다」
「계약을 맺기 위해선 차원문에 필요한 에테르스톤을 수급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유일 퀘스트 : 에테르스톤 3개를 구하라」
"이거 흥미롭네."
반면 다정은 화가 나서 씩씩거렸다.
"겨우 버스 태워줬더니 나한테 이러기야?"
"내가 한 게 아닌데 어쩌겠냐."
"에테르스톤은 뭐고 또 어디서 구해오라는 건지 모르겠네. 너처럼 차원문 열어, 하면 내 전용 차원문이 열리기라도 하는 거야 뭐야?"
그때 그녀의 앞에 푸른 차원문이 열렸다.
보통의 던전 입구와 다를 바 없었다.
그녀는 잠깐 멍했다가 차원문에 손을 넣었다.
"들어가지네···그럼 나한테도 전용 차원문이 생긴 거지?"
그럴 리가 있겠냐.
"그건 아니고, 유일 퀘스트를 위한 한정 던전이겠지. 안에 들어가면 빨리 에테르스톤 구하라고 퀘스트가 뜰걸."
퀘스트는 서바이벌 라이프 중반부터 도입된 요소다.
워낙 사람들이 많이 죽어나가니 일일 퀘스트와 도전 퀘스트, 한정 퀘스트, 유일 퀘스트 등으로 분류해 도입했는데 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보상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기 때문.
말미에 확장팩이 나오면서 퀘스트 보상이 크게 개편됐는데 아는 사람은 나뿐이다.
다정은 잠깐 생각하더니 히죽 웃었다.
"들어가서 퀘스트 한다 치고 죽치고 있으면 내 전용 쉘터가 되는 거잖아?"
"마음대로 닫을 수도 없고 움직이지도 못하는데 무슨 쉘터야."
"···좋다가 말았네. 그나저나 필요 포인트는 또 뭐야. 설마 요금을 내야 되는 건 아니겠지?"
나는 손가락을 비볐다.
"100포인트부터 설정할 수 있던데 얼마쯤으로 할까···"
"너, 너!"
다정이 내 멱살을 잡고 눈을 부라렸다.
"세상에. 온갖 개고생을 해서 버스 태워줬더니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다시 말하지만 내가 원하는 게 아니야. 최소가 100포인트라고."
그녀의 눈빛이 조금 누그러졌다.
"진짜?"
"당연하지. 하여튼 들어가려면 준비를 좀 해야겠네."
"무슨 준비?"
"니가 여행할 준비."
나는 다정의 앞에 열린 차원문에 손을 가져다댔다.
차원문은 벽처럼 내 손을 밀어냈다.
"너 혼자 여행해야 되겠다."
"···"
다정은 넋을 잃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왜, 왜 나한테 이런 시련을 주는 거야···"
나는 생각한 걸 그녀에게 말했다.
"내가 고민을 좀 해봤는데···이제부터 대가를 받아내기 시작한 게 아닐까 싶어."
"무슨 대가?"
"우리가 특성을 쓰는 대가. 공짜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아니었던 거지."
그녀가 흠칫했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누가 게임을 오래 했다고 이런 능력을 주겠는가.
"29레벨까지는 맛보기고, 앞으로 더 능력을 쓰고 싶으면 에테르스톤인가 하는 걸 요금으로 내라는 거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서바이벌 라이프의 제작진이 아닐까 싶지만···
다정이 하소연을 했다.
"아니이. 니가 30레벨 도달한 건데 왜 내가 에테르스톤을 가져와야 되냔 말이지."
"집들이라고 생각해. 초대받으면 뭐라도 선물 사가잖아?"
"씨이."
그녀는 일어서더니 손가락으로 내 가슴을 콕콕 찔러댔다.
"진짜 불공평해. 애초에 플레이타임이 얼마나 차이난다고. 겨우 몇 백 시간 아냐? 그럼 특성도 그만큼만 차이 나야지."
"1등하고 4등은 천지차이야."
그녀는 부들부들 떨더니 내 허리를 꼭 껴안고 얼굴을 들이댔다.
옅은 화장품 냄새가 풍겼다.
"두고 봐. 내가 안에 들어가서 어찌하는지. 하고 싶은 대로 다 할 거야. 알았어?"
"마음대로 해도 돼."
나는 그녀의 뒷머리를 받치고 살짝 키스 했다.
다정은 조금 놀란 듯하다가 아예 내 입술을 먹으려 들었다.
미안, 내가 잘못했어.
키스가 끝난 후 그녀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혼자 다니면 재미없는데."
"전엔 혼자 잘 다녔잖아? 좀비들 부리면서, 사람들 두들겨 패면서."
"시끄럽거든. 하여튼 배낭이나 챙겨줘. 먹을 거 많이."
"알았어."
나는 쉘터에 들어가 풍뎅이와 사슴벌레를 모아 놓고 에테르스톤이 뭔지 물었다.
살짝 멈칫하는 녀석들.
그걸 어떻게 알았지? 하고 의심하는 듯하다.
나야말로 니들이 의심스러운데.
"누가 하나 안내를 해줬으면 좋겠는데···"
풍뎅이 중 하나가 앞발을 들었다.
그래, 잘 안내해서 다정이 퀘스트 끝낼 수 있게 도와줘.
"딩순이 너도. 성격이 비슷하니까 잘 통할 거야."
나는 배낭 몇 개를 싸고 딩순이와 풍뎅이를 데리고 나왔다.
다정은 같은 처지라며 딩순이를 쓰다듬었다.
"참 대단하신 차원문이야, 그지? 이용하려면 어마어마한 요금을 내래. 완전 폭리야."
흠흠.
나는 웃음을 감추고 배낭을 구울들에게 들려주었다.
마침내 다정이 풍뎅이를 머리에 얹고 차원문에 들어갔다.
구울들이 그녀의 뒤를 따라 들어가자 차원문이 사라졌다.
이거 유지되는 게 아니었어?
"여기서 기다려야 되나···"
근처에서 파밍하면서 기다리면 되겠지.
다정이 사라지고 나니 왠지 모르게 홀가분했다.
조금 아쉽다가도 시원하고 그러네.
전에 형준 형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집사람이 지은이 데리고 친정 가면 그날이 인디펜던스 데이야.
―형님은 무슨 말을 또 그렇게 합니까? 평소엔 형수 좋아 죽겠다면서.
―넌 임마 결혼을 안 해봐서 내 마음 모르는 거야. 여친은 있었을 거 아냐.
―한두 번 사겨보긴 했죠.
―그 여친이 집에 놀러 왔어. 처음엔 재밌고 뜨겁고 그래. 근데 몇 시간이 지나도 여친이 집에 안 가네? 계속 옆에 붙어 있으면서 잔소리를 해대는 거야. 좀 씻어라, 빨래 개라, 쓰레기 버리고 와라.
―그건 좀 무서운데요.
―집사람도 물론 똑같겠지. 내가 지은이하고 캠핑 간다고 하면 아주 그냥 입이 찢어지던데? 사람은 누구나 그래.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한 거지.
그러고 보니 형준 형이 요즘 외롭다고 하던데···
정부 쉘터에서 새로운 인연을 찾았으면 좋을 것을.
나는 차원문 안에 들어가 모니터를 켰다.
동굴에는 노트북뿐만 아니라 원룸에서 루팅한 컴퓨터도 두 대 있다.
전력을 많이 잡아먹으니까 조명은 끄고···좋아.
NAS 내용을 뒤지니 게임이 꽤 많이 나왔다.
검인이가 좋아하겠는데.
"아포칼립스에선 그 어떤 영화나 게임을 해도 재밌을 거야."
똥겜도 갓겜으로 느껴지겠지.
최신 영화도 꽤 많아서 당분간 심심할 일은 없을 것 같았다.
그나저나 덥구만···
동굴의 열기도 장난이 아닌데 컴퓨터가 발산하는 열이 합쳐져 상당히 더웠다.
나는 USB 선풍기를 컴퓨터에 연결했다.
미지근한 바람이지만 맥주와 함께라면 좀 달라지지.
나는 땅에 묻어둔 맥주캔을 꺼내 매트리스에 누웠다.
콜롱콜롱 차가운 맥주가 목구멍으로 흘러들어왔다.
"어후 시원해."
영화나 볼 요량으로 아무 파일이나 찍으니 하필 좀비영화였다.
누가 보다가 말았는지 모니터 가득히 좀비가 으르렁댔다.
―캬아아악!
"아오 깜짝이야."
그래도 뭐···나쁘진 않은데?
다음에 남녀의 정사 씬이 나와서 이러는 건 아니다.
역시 아포칼립스에 섹스가 빠질 수 없지.
나는 딩고와 함께 좀비영화를 관람했다.
팔자 참 좋네.
< 차원문을 이용하려면 - 3 > 끝
< 차원문을 이용하려면 - 4 >
퀘스트 던전에서 다정을 맞이한 것은 그림 같은 풍경의 초원이었다.
하늘엔 구름조각 하나 없었고 따스하게 부는 바람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휘날렸다.
'여긴 또 어디야.'
그녀는 눈에 불을 켜고 설산을 찾았으나 보이질 않았다.
고작해야 구릉 너머에 희미하게 보이는 낮은 산과 삼각형 표식이 전부였다.
'무슨 현실에 저런 게 있어?'
산 정상에 황금색 삼각형이 둥둥 떠 있으니 정말 신기했다.
상태창을 켜니 퀘스트창이 옆에 얌전히 붙어 있었다.
서바이벌 라이프가 이렇게 친절한 게임이 아닌데?
성호의 말에 의하면 사람들이 다 떠난 뒤에 자잘한 업데이트가 있었다고 한다.
그녀는 주위를 둘러봤다.
'이 부근에 쉘터 있는 건 아니겠지.'
지금까지 등장한 모든 던전은 하나의 이세계다.
즉 성호의 쉘터도 어떤 식으로든 다른 던전과 연결되어 있다는 말이 되겠다.
문제는 위치를 모르니 갈 수가 없다는 것.
'배틀로얄 전장에서 바로 쳐들어갔어야 했는데.'
설산 근처에 쉘터가 있을 줄 누가 알았겠어?
그녀는 풍뎅이를 머리에 얹은 채 산으로 나아갔다.
딩순이와 구울들을 데리고서.
문득 뒤를 보니 차원문이 사라져 있었다.
에라 모르겠다. 어떻게든 되겠지.
"머리에 똥 싸면 혼난다, 알았지?"
풍뎅이는 머리카락을 슥슥 당기며 그럴 일 없다고 의사를 표현했다.
이 녀석들 참 신기하게도 한국어를 알아듣는단 말이지.
외국인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게끔 한 힘이 이렇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그나저나 아무것도 없네···'
심심해진 다정은 구울에게 의자를 만들라고 지시한 다음 올라탔다.
그리곤 쭉쭉 달리는데, 어지간한 자전거만큼이나 빨랐다.
딩순이는 오랜만에 전력으로 질주하는 게 신나는지 헥헥거리면서 따라왔다.
다정은 비스듬하게 누워 따스한 봄바람을 즐겼다.
성호네 쉘터는 여기보다는 덥겠지?
매일 상상만 하자니 군침이 돌았다.
'숲도 있고 계곡도 있고 바다도···'
설명만 들어보면 럭셔리한 삶을 즐길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중요한 쉘터가 문제였다.
주인인 성호가 계속 별거 없다고 말했기 때문.
―안에 들어오면 실망할걸? 비축물자를 하도 쌓아놔서 그럴싸한 풍경 구경하기는 힘들어. 동굴도 좁고.
매트리스 하나를 놓고 거기서 잔다고 하는데 왠지 그 외에는 공간이 없을 것 같은 불안감이 몰려왔다.
'괜찮아, 공간이 없으면 내가 만들면 돼.'
그녀에겐 30마리나 되는 크고 힘센 일꾼이 있지 않은가.
물론 좀비나 구울에게 섬세한 작업은 힘들지만 짐을 나르는 것은 가능했다.
세부적인 설계는 사슴벌레나 풍뎅이가 해줄 테고···
다정은 즐거이 통나무집을 만드는 자신을 발견하곤 깜짝 놀랐다.
'이거 들어가서 일만 하는 거 아니야?'
저 알뜰한 성호가 유용한 인력인 자신을 가만히 놔둘 것 같지가 않았다.
퀘스트를 클리어할 경우, 쉘터에 드나들 수 있는 유이한 인력이 아닌가.
무슨 이유를 붙여서 일을 시킬 것 같았다.
'일···조금 해주지 뭐.'
성호와 같이 숲에서 지낸다고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짜릿했다.
그야말로 둘만의 세계가 아닌가.
거기서 뭘 하든 신경 쓰는 사람은 없다.
완벽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한참동안 앉아 있던 다정은 허리가 아파 일어났다.
아무래도 구울 위에 앉아 있다 보니 충격이 심했던 것이다.
근처에 건물이 있나 찾아봤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아 진짜. 왜 아무것도 없는 거야."
나지막한 산은 한참이나 더 가야 간신히 눈에 들어올 것 같았다.
그녀는 투덜투덜하며 다시 의자에 앉았다.
딩순이도 한참을 뛰다가 지쳤는지 모로 누워 헥헥거렸다.
그렇게 뛰고 쉬기를 반복한지 몇 시간 째.
다정의 구울들은 고블린 무리를 잡아먹고 힘을 짜냈다.
마침내 이름 모를 산이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풍뎅이가 안내한 곳은 산 중턱의 동굴이었다.
동굴 안에서 뭔가가 반짝반짝 빛났다.
"너 이런 거 잘 찾는구나···"
발광석을 들고 비춰보니 놀랍게도 광맥이었다.
풍뎅이의 그림에 의하면 이런 매직 메탈은 한 곳에 모여 있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성호네 숲의 옹달샘처럼, 땅의 정수가 모이는 지역이란다.
다정은 배낭에서 접이식 곡괭이를 꺼냈다.
철사병이 완전히 가라앉진 않았지만, 잠깐은 버틸 거라면서 성호가 챙겨준 것이다.
날을 펴고 고정시키니 제법 튼튼했다.
"이런 질감도 참 오랜만에 만져보네···"
7월 20일 이후로는 만지질 못했으니 5달 만이다.
그녀는 풍뎅이가 가리키는 부근의 암반을 힘차게 내리찍었다.
깡! 깡!
작업 진척은 느렸고 금방 저녁이 되었다.
다정은 발광석의 조명에 의지해 작업을 계속했다.
몇 개의 원광이 튀어나왔지만 중요한 것은 에테르스톤이었다.
풍뎅이에 의하면 에테르스톤은 암반 깊숙이에 자리 잡은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건 내가 개고생을 해야 겨우 하나 찾을까 말까 한다는 거지?"
끄덕끄덕.
그럼 그렇지.
다정은 별로 툴툴거리지도 않고 작업을 계속했다.
툴툴거리는 것도 성호처럼 들어주는 사람이 있어야 할 맛이 나지.
"···피곤해."
밤이 되어 그녀는 지쳐 바닥에 쓰러졌다.
배낭에서 모포를 꺼내 깔고 도시락을 먹었다.
차갑게 식었지만 반찬이 워낙 맛이 있어 그럭저럭 넘길 만은 했다.
딩고도 고기로 식사를 했고, 풍뎅이도 맛있는 젤리를 먹었다.
발광석의 빛이 아련한 동굴 안에서, 다정은 외로움을 느꼈다.
이전에는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었다.
"하아···"
쓸쓸해서인지 밥알이 모래알 같았다.
그녀는 도시락을 내려놓고 암호문으로 성호를 찾는 코멘트를 계속 썼다.
―야 김밥조아.
―누나가 부르는데 후딱 안 튀어오냐.
―강성호씨.
―여보~ 어딨어~
한참을 불렀음에도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대체 뭐하고 있는 거야 진짜."
생각해보면 24시간 경매장을 보는 사람은 없다.
성호는 할 일이 많은 사람이라 경매장을 확인할 시간도 부족할 것이다.
그래도 빨리 좀 와줬으면 했다.
다정은 다리를 모으고 무릎에 턱을 괴었다.
마침내 성호의 코멘트가 보이자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새겨졌다.
―나 불렀어?
―왜 이제 오는 거야. 내가 지금 어떤 상황인지 알기나 해?
―보나마나 어디 동굴에 들어가서 광 캐고 있겠지.
쉘터의 풍뎅이들이 가르쳐준 모양이다.
그녀는 밥이 식었느니 반찬이 맛이 없었느니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해댔다.
성호는 그녀를 다독여 주었다.
―힘내. 내가 도와주고 싶지만 할 게 있어야 말이지. 니가 들어올 거 대비해서 쉘터 청소하고 있어.
―나 들어가면 뭐할까?
―일단···너 잘 곳이 없어서 쉘터 확장을 좀 해야겠는데.
―뭐야. 들어가자마자 일해야 돼?
―동굴이 좁아서 어쩔 수가 없어. 잠이야 매트리스에서 자도 생활공간이 부족해. 이참에 집을 지어야겠는데. 내가 지금 사슴벌레에게 부탁해서 설계도를 만들고 있거든···
앞으로 할 일을 줄줄이 털어놓는 성호.
역시 그녀를 일꾼으로 써먹을 계획인 모양이다.
다정은 그가 자신을 필요로 한다는 것에 기뻤다.
―내가 돌아가기 전까지 싹 다 치우고 얌전히 목욕재계하고 기다리는 거야, 알겠지?
―알았으니까 조심해서 퀘스트 해.
대화가 끝났고 다정은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일어설 수 있었다.
깡! 깡!
곡괭이가 힘차게 암반을 두들겼고 30분 후 마침내 황금빛 보석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예!
이예이!
다정과 풍뎅이가 손발을 번쩍 들어올렸다.
.
.
.
다정은 3일 뒤 상거지가 되어선 나타났다.
그녀는 차원문에서 나오자마자 나를 발견하고 뛰어왔다.
"으헝헝 나 죽는 줄 알았어어~"
"수고했어."
이윽고 배낭에서 황금빛 찬란한 보석이 튀어나왔다.
흠 이건 듣도 보도 못했는데.
사슴벌레와 풍뎅이들을 모아놓고 물어봤지만 제대로 된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나한테 억하심정이 있을 리는 없고 어떤 제약에 걸려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맞겠지?
차원문을 열자 다정이 손바닥에 에테르스톤 세 개를 올리고 스윽 가져다댔다.
그녀의 손이 차원문에 빨려 들어갔다.
"오오."
에테르스톤이 사라지고 그녀가 손을 뺌과 동시에 내 시야에 메시지가 떴다.
「대상이 조건을 충족했습니다. 차원문 출입을 허락하시겠습니까? YES/NO」
여기서 NO를 골랐다간 다정에게 얻어터지겠지.
나는 그녀의 부담 가득한 시선을 안고 YES를 골랐다.
"어, 뜬다, 떴다. 근데···"
뭔가 메시지가 뜬 모양이다.
다정은 한참 이마를 모으고 있다가 내게 말했다.
"효과란에 그게 생겼어. 차원문 계약자. 근데 경고도 같이 떴어."
"무슨 경고?"
"차원문의 소유주를 배반하면 계약이 즉시 해지된다고···"
"마음까지 읽는 게 확실하네."
그게 아니고서야 배반이라는 감정을 캐치할 수가 없다.
다정은 찝찝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지만 그래도 즐거운 모양이었다.
"자자, 비켜, 이제부터 니 쉘터에 들어갈 테니까.
"마음대로."
나는 자리를 비켜주었고 다정이 드디어 차원문에 들어갔다.
「계약자 오리궁뎅이꽥꽥이 차원문에 들어갔습니다.」
「포인트를 100 획득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뜨는구만.
따라 들어가 보니 그녀가 동굴을 살펴보고 있었다.
"와···너 여기서 혼자 지냈구나···"
"뭐 그렇지."
"진짜 많다아···"
그녀는 신기한 얼굴로 컴퓨터와 노트북 등을 살펴봤다.
또 지하실 가득 쌓인 통조림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뭘 이렇게 많이 쌓아놨어? 몇 년은 먹겠다."
"통조림 같은 건 섭취기한이 엄청나게 길거든. 그래서 많으면 많을수록 좋아."
"자는 곳은 여기고···진짜 공간이 없네."
둘이서 일어서 있기에도 부담스럽다.
그녀는 동굴 앞쪽으로 가다가 풍뎅이와 사슴벌레의 집을 발견했다.
녀석들이 신기한 듯 다정을 관찰했다.
"왜 뭐. 여기 내가 들어오면 안 되는 곳이야?"
"그게 아니고 여기 들어온 사람은 나 말고 니가 처음이라서 그래."
"아항."
그녀는 즐겁게 동굴 여기저기를 살피다가 무기진열대를 보고는 혀를 내둘렀다.
"세상에. 진짜 다람쥐처럼 많이 모아놨네."
사실 지금까지의 물자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다.
동굴 밖에는 진짜 어마어마한 양의 물자가 쌓여있기 때문.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 다정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이게 다 뭐야."
"샌드위치 패널로 만든 창고야. 철물점도 털었고, 미곡센터도 털었고, 낚시용품점도···"
기름도 아주 많다.
거의 300평쯤 되는 공간 대부분이 그런 창고로 이루어져 있었다.
샌드위치 패널도 다 떨어져서 나무로 창고를 짜야 할 판이었다.
그녀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내 럭셔리하고 세레브한 전원생활이···"
세레브한 전원생활은 또 뭐야.
나는 그녀의 손에 삽을 쥐어주었다.
"구경 다했지? 이제 일하자."
다정이 참지 못하고 꽥 고함을 질렀다.
"야!"
거 목청 되게 크네.
.
.
.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
참 유명한 격언이고 동감이 가는 말이기도 했다.
나는 쉘터에 들어오는 모든 사람에게 이 격언을 적용할 생각이었다.
여기 숲은 풍요롭지만 그만큼 위험하다.
그 위험을 나와 같이 짊어질 수 있는 사람이 아니면 곤란했다.
"현재로선 들어올 사람이 석현이밖에 안 보여."
우리는 매트리스에 누워 있었다.
그녀는 무슨 쉘터가 이러냐고 한바탕 소동을 벌이다가 내게 진압되었다.
내친김에 씻기고 옷을 갈아입히다 보니 꽤 시간이 지났다.
그녀가 내게 돌아누웠다.
"···정부 쉘터 사람들은?"
"글쎄. 아직은 모르겠네. 들어와서 일만 하는 걸로는 충분하지 않아서 말이야. 전투를 해야 될 텐데···"
"못 미덥다 이거지?"
"스펙상 전투력은 그렇게 떨어지진 않을 거야. 문제는 마음가짐인데, 돝섬에서 지내서 그런지 거친 면이 조금 부족해. 내 헛소리일지도 모르지만."
이를테면 검인과 같다.
사람들과 협동해서 몬스터는 곧잘 잡지만 혼자서 하라면 언제 그랬냐는 듯 버벅거릴 것이다.
일본인들과 싸울 생각도 않고 도망간 게 그것을 증명한다.
이유야 있지만 혼자 숲에서 쉘터를 방어해야 할지도 모르는데 그러면 곤란했다.
해서 나는 그들을 정부 쉘터로 보냈다.
내 뜻에 따라주고 잘 성장한다면 나중에는 쉘터에 초대할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다정이 내게 속삭였다.
"공짜밥 먹일 생각은 없나 보네."
"그거 먹고 좋아할 사람들은 아니야. 다들 열심히 일하고 싸우는데 혼자서 짐이면 그게 무슨 쪽이야."
"하긴."
그녀는 내 품을 파고들었다.
"이러고 있으니까 참 좋다, 그지."
"난 좀 어색하네. 맨날 혼자 누워 있다가."
손을 뻗어 음악을 트니 다정의 귀가 쫑긋했다.
"이걸 얼마 만에 들어보는지 모르겠네. 진짜 좋다아···"
"아까는 쉘터가 너무 좁아서 싫다며?"
"아니 첫 인상이 그런데 어쩔 수 없잖아? 이제부턴 열심히 일해서 넓혀야지."
"잠깐만. 계획 좀 짜보자."
우리는 엎드려서 쉘터의 전경 그림에 이것저것 표시했다.
"봐봐. 동굴을 감싼 이 원의 크기가 거의 300평이야."
"300평이나 돼? 하긴 어지간한 전원주택 부지보다 더 넓더라."
"기름하고 쌀이 반이야. 하여튼 여기엔 집을 넣을만한 공간이 없어. 넓혀야 돼, 이런 식으로."
나는 철조망의 일부를 트고 오두막 그림을 그렸다.
다정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러면 오두막이 드러나게 되잖아?"
"철조망이 없으니까···대신 목책을 세울 거야. 밖에서 구울이 방어하게 하면 돼."
몬스터를 죽이고 그걸 먹으면 되니까 유지는 쉬울 것이다.
"으음···한 10마리 정도 투입하고 반응을 봐야겠어. 구울들이 듣는 건 나도 들을 수 있으니까 대처할 수 있을 거야."
편하게 됐네.
우리는 미래를 위한 그림을 그렸다.
"계곡에서 물도 끌어와야지. 이게 공사를 해도 문제인 게 24시간 지킬 수가 없잖아? 이 숲에는 몬스터가 진짜 많거든."
내가 손수 처리한 놈만 수백 마리는 넘을 텐데 아직도 몬스터는 넘쳐났다.
위쪽 검은 숲에서 유입되는 것 같았다.
놈들이 우글거리는 이상 밖에 뭘 설치하는 것은 어렵지만 지금은 이야기가 다르지.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 끌어오려면 완전 대공사를 해야겠네···아. 포크레인 있으니까 상관없구나."
"다 생각을 하고 모은 거야."
사실은 닥치는 대로 집어넣은 결과지만.
그녀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상체를 일으켰다.
"오토바이! 오토바이 있지?"
"뭐 있긴 한데."
나는 동굴 밖으로 나가 커버를 벗겼다.
오토바이와 ATV 한 대씩.
수리부속도 기름도 많아서 꽤 오랫동안 운용할 수 있다.
다만 숲은 워낙 울퉁불퉁해서 오토바이를 쓰긴 좀 그렇다.
그녀는 잽싸게 ATV에 올라탄 다음 내게 손짓했다.
"강기사 빨리!"
전에 태워달라고 했었지.
나는 시동을 걸고 설산으로 향했다.
몇몇 몬스터들이 따라왔으나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뒤쳐졌다.
다정이 그들에게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 올리며 웃었다.
"오빠 달려! 꺄하하!"
이윽고 ATV는 숲을 벗어나 설산 주위의 초원지대로 들어섰다.
그녀는 예전에 본 바 있던 배틀로얄 전장을 다시 목격하곤 환호성을 질렀다.
"저 푸른 초원 위에!"
후우웅!
그때 거친 바람소리가 들렸다.
뭔가 하고 올려다보니 상공에서 와이번이 우리를 쫓아오고 있었다.
"젠장 와이번이야!"
튀자.
우리는 꽤 강해졌지만 준비도 하지 않고 와이번을 정면에서 막아낼 정도는 아니었다.
ATV를 돌려 곧장 숲으로 진입하자 와이번이 따라오다가 나무를 부러뜨리며 멈췄다.
콰아아아―
한껏 벌린 주둥이에서 우렁찬 포효가 쏟아져 나왔다.
지독한 냄새가 나는 바람을 동반한 채.
나는 ATV를 멈추고 이쪽을 향해 다가오려 용을 쓰는 녀석을 노려봤다.
"저거 잡자."
"잡으면 뭐 나와?"
"아주 좋은 거 줘."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그 스킬을 얻을 수 있는 건 와이번이 유일하다.
우리는 쉘터로 달렸다.
< 차원문을 이용하려면 - 4 > 끝
< 새우 싸움에 고래가 끼면 - 1 >
우리는 쉘터에 복귀한 다음 계획을 짰다.
내 설명을 들은 다정은 다소 회의적인 입장이었다.
"총알이 와이번 가죽을 뚫을 수 있을까?"
"현대화기를 너무 무시하네. 철사병만 없었다면 모든 몬스터는 기관총에서 컷이야."
오우거나 그 윗급의 몬스터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대부분의 몬스터에게 총기는 치명적일 것으로 나는 판단했다.
그녀는 걱정스런 얼굴이 되었다.
"철사병이 가라앉은 후에는 나도 조심해야겠네? 언제 저격이 들어올지 모르니까."
총을 가진 사람은 많진 않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
"항상 구울들 대동하고 이동하고, 일 있으면 건물 안에서 해. 창문 없는 쪽에."
"이걸 꼭 쥐고 있어야겠네."
부활 스크롤.
목숨을 하나 추가해주는 정말 소중한 아이템이다.
나는 드론을 날렸다.
혹멧돼지를 미끼로 쓰기 위해서였다.
와이번을 꼬시는 건 드론이 한다고 해도 밑으로 내려오게 하기 위해선 먹음직스런 먹이가 필요했다.
그 다음에는 다정의 구울들이 덮쳐서 못 날게 하는 거지.
녀석은 그리폰과 좀 달라서 좀처럼 내려오려 하지 않는다.
다정이 신기해하며 노트북 화면을 바라봤다.
"너 이런 식으로 사냥하고 있었구나···"
"몇 마리 잡지도 않았어. 요즘은 워낙 파밍한 게 많아서."
주승철의 쉘터가 대박이었지.
나는 미리 심어둔 감자밭으로 드론을 비행시켰다.
아니나 다를까 혹멧돼지 무리가 꾸익거리며 감자를 파먹고 있었다.
"내가 심어둔 감자야. 이 숲에 저런 밭이 몇 개 있어."
다정은 기가 막혀 했다.
"감자를 혹멧돼지 유인용으로 쓰는 거야?"
너무 아깝잖아."
"글쎄. 이 숲에서 작물이 얼마나 잘 자라는지 알면 그런 소리 못할 걸."
"얼마나 잘 자라는데?"
"이틀 밤 자고 나면 상추가 다 자란다니까."
"···진짜?"
그녀는 도저히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뭐 이건 나중에 보여주기로 하고.
나는 정확한 위치를 지도에 그려주었다.
"이 옹달샘에서 나무를 보면 흰색 락카가 칠해져 있는데 그거 따라가면 돼. 근처에 가면 딩순이가 찾아낼 거야."
"오케이. 기다리고 있어."
"산채로 잡아와야 돼."
그녀는 구울들을 데리고 출동했다.
내가 나서기엔 좀 그런 게, 산채로 잡기가 어려웠다.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차라리 그녀에게 맡기고 다른 일을 하는 게 나았다.
"그나저나 스킬칸이 남나 모르겠네."
나는 상태창을 호출해 스킬칸을 살폈다.
냉기저항이 달린 목토시는 다정이 갖고 있으니까 총 12칸이다.
이 중에서 가벼운발걸음은 착용 시 적용되는 스킬이라 끼웠다 뺏다 하는 게 가능했다.
행군할 때는 신발 끼고 도시에 들어갈 때는 갈아 신으면 된다.
"좋아."
나는 두 번째 드론을 날렸다.
와이번 녀석은 아직까지 우리를 찾고 있었다.
원소저항 스킬이 나오면 좋을 텐데.
그건 불이나 전기 같은 비물리적인 공격의 저항력을 높여준다.
아포칼립스에 그런 공격이 얼마나 될까 싶지만 엄연히 게임과 뒤섞이는 중이 아닌가.
"전에 양아치도 전격계 능력을 썼었지···"
그 뒤로 같은 능력자는 한 번도 못 봤지만 언젠가는 만날 것이다.
파이어볼을 던지는 능력자가 나올지도 모른다.
그거 완전 마법사잖아.
그렇게 생각하니 더더욱 다른 스킬이 나오면 곤란했다.
"와이번 너 임마 하드스킨 주고 그러면 안 돼, 알았어?"
하드스킨이 3으로 오르면 좋긴 하지만 그걸 바라고 와이번을 사냥하는 건 아니다.
나는 무장을 점검했다.
고추폭탄 코팅 문제는 의외로 깔끔하게 해결되었는데, 현실로 나가서 만들면 된다.
계절이 정 반대니까 좋은 점도 있구만.
나는 AK74소총에 삽탄했다.
와이번이 내려오는 순간에 이미 상황이 끝나야 한다.
아니면 녀석의 몸부림으로 주변이 초토화될 것이다.
모든 준비를 끝내니 다정이 혹멧돼지 한 마리를 생포해 왔다.
녀석은 다리 하나를 다친 채 울부짖고 있었다.
"지금은 조용히 시켜, 내가 신호하면 나뭇가지로 좀 때리고."
"그러니까 와이번의 주의를 끌어야 한다는 거지?"
"정확해."
그녀는 구울들을 시켜 혹멧돼지의 입을 막았다.
슬슬 와이번을 부를 차례군.
나는 드론을 조종해 흉포한 기세로 주변을 돌아다니는 와이번 가까이로 갔다.
녀석은 주위에서 나는 모기 같은 드론이 마음에 안 드는지 주둥이를 벌렸다.
바로 지금이다.
나는 잽싸게 드론을 혹멧돼지가 있는 공터로 이동시켰다.
속도에서 비교가 될 리 없지만 가까우니까 상관없다.
콰아아아―
저 위에서 와이번의 포효소리가 들렸다.
이제 드론을 하강시키면!
"다정아, 지금!"
뀌에에엑!
구울이 뭘 어떻게 했는지 축 쳐져 있던 혹멧돼지가 벌떡 일어나 울부짖었다.
그 소리가 숲을 쩌렁쩌렁 울렸다.
야, 혹멧돼지 먹고 싶지 않냐? 아주 맛있을 거야.
내 속마음을 듣기라도 했는지 와이번이 날개를 접고 하강했다.
마침 주변에 나무도 없어서 하강하기가 수월한 듯 보였다.
쿵!
마침내 와이번이 내려앉았다.
녀석이 포식자를 눈치 채고 몸을 비트는 혹멧돼지에게 관심을 가지는 순간, 다정이 손가락을 튕겼다.
캬아악!
구울 30마리가 달려들었다.
와이번의 스펙은 그리폰과 비슷하다.
그러나 구울들은 예전과 달리 상당히 강해져 있는 상태였다.
덩치, 메뚜기와 같은 강화형까지 달려드니 와이번이라고 해도 버틸 재간이 없다.
녀석은 다시 날아오르기 위해 날개를 쫙 펼쳤지만 구울들이 매달려 불가능했다.
"잘했어!"
나는 앞으로 달려 나가며 슬링에 고추폭탄을 두 개 걸고 힘껏 잡아당겼다가 놓았다.
와이번의 콧잔등에서 터진 고추폭탄이 깨지며 분말을 확 뿌렸다.
크륵!
잠깐 멈칫하던 와이번은 곧 끔찍한 고통에 시달렸다.
구울이고 뭐고 머리를 흙바닥에 비비는데 정신이 완전히 가출한 것 같았다.
그 고통 잘 안다.
나는 소총을 녀석의 머리에 조준하고 외쳤다.
"구울들 빼!"
다정이 구울들을 물렸고 나는 즉시 방아쇠를 당겼다.
타타타타―!
AK74 소총이 분당 600발의 속도로 총탄을 쏟아 부었다.
조금 버텨내는 것 같던 와이번의 가죽이 숭숭 뚫렸다.
그렇게 2초 정도 총탄을 얻어맞던 와이번은 피를 뿜으며 축 늘어졌다.
「포인트를 50 획득했습니다」
「스킬 : 원소저항을 획득했습니다」
획득하자마자 주변 공기가 서늘해지는 게 느껴졌다.
원소저항이 숲의 열기를 막아준 것이다.
아이템으로는 내가 쓴 정글모가 변했다.
스킬은 안 달렸지만 투스탯이 붙어서 꽤 쓸 만하게 보였다.
"원소저항 나왔어?"
"어. 아이템은 이거."
나는 모자를 벗어 다정에게 씌워주었다.
그녀는 꽤 감동을 받은 듯했다.
"너만 맨날 처먹는 줄 알았는데 호의를 베풀 줄도 아는구나···"
"그거 쓰면 작업할 때 안 뜨거울 거야. 이제 오두막 만들어야지."
"이게 지금 뭐라는 거야."
그녀는 내 등에 올라타서 목을 꾹꾹 죄였다.
나는 그녀를 등에 매단 채 톱을 가지고 와서 와이번의 발톱을 잘랐다.
"그건 어디다 쓰게?"
"팔아야지."
"롱나이프가 있는데 발톱 따위를 쓴다고?"
"이런 건 매니아가 있다니까. 전에 아울베어 발톱도 팔았는데 이걸 못 팔겠냐."
개나 소나 들고 다니는 롱나이프 보다는 이런 걸 선호하는 사람도 있다.
성능은 롱나이프가 더 좋지만 저렴하게 팔면 매수자가 나올 것이다.
총 16개니까···최소 1600포인트다.
나는 와이번의 앞발목까지 잘랐다.
다정은 로프가 어디 있는지 묻곤 구울들을 시켜서 와이번의 몸에 묶었다.
"와이번 이거 못 먹지?"
"버려버려."
그리폰은 푹 익히면 먹을 수 있지만 와이번 고기는 너무 질기다.
미약하지만 독성도 있고 해서 안 먹는 게 나았다.
구울들이 힘을 합쳐 와이번의 사체를 저 멀리 끌고 갔다.
저거 몬스터들이 환장을 하고 달려들 텐데.
대형 몬스터의 사체는 몬스터를 끌어들이는 훌륭한 원동력이 된다.
그나저나 여기 정리를 좀 해야겠군.
나는 아직까지 울부짖고 있는 혹멧돼지의 멱을 땄다.
그리곤 다정과 힘을 합쳐서 스탠드에 매달고 피를 뺐다.
그녀는 더운지 바람막이를 벗으며 입맛을 다셨다.
"이걸로 수육 해먹자."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넌 오두막 짓고 계곡에 펌프 설치해. 필요한 건 여기 다 있으니까."
다정은 고개를 갸웃했다.
"왠지 우리 역할이 바뀐 것 같다?"
"나는 계속 이동해야 되니까 오두막 같은 건 못 지어."
"잠깐만, 차원문 기능이 정확히 어떻게 되는 거야. 차원문을 닫고 움직이면 나는 어떻게 돼?"
"그게 어떻게 되는 거냐면."
나는 차원문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아···내가 차원문 안에 들어가 있고, 니가 자리를 옮겨서 차원문을 열면···"
"너도 자리를 옮긴 거나 똑같아. 나와 같이 행군을 한 셈이지."
"이거 완전 사기네."
이제 다른 사람까지 들어갈 수 있으니 훨씬 좋아졌다.
강화급 구울 30마리를 흔적도 남기지 않고 이동시킬 수 있다고 생각해보라.
석현이 합류한다면 사기성은 더욱 커진다.
그야말로 움직이는 요새.
나는 동굴로 들어가 잔잔하게 타오르고 있는 화로에 손을 넣었다.
다정은 알고 있음에도 흠칫했다.
실제로 저지를 줄은 몰랐던 거겠지.
화로의 불이 손을 삼켰음에도 별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물론 계속 막아주는 건 아니라서 결국 화상을 입긴 한다.
손을 빼자 약간 그을린 것 외에는 멀쩡했다.
괜찮네.
우리는 머리를 맞대고 오두막의 설계도를 검토했다.
평소에는 어지간하면 내 의견에 맞춰주던 다정은 여기서 황소고집을 발휘했다.
"내가 만드는 집이니까 내 취향에 맞출 거야, 알겠어?"
"뭐, 마음대로."
욕실을 너무 크게 만드는 게 신경 쓰인다.
어차피 용변은 밖에 나가서 해결해야 될 텐데···
그녀는 풍뎅이들에게 두 사람이 들어가는 큰 욕조를 주문했다.
녀석들은 발톱을 비비며 그건 좀 어렵다는 그림을 그렸지만 황제꿀을 찾아준다는 유혹에 넘어가고 말았다.
참 쉬운 녀석들이야.
나는 혹멧돼지를 해체하고 훈연 작업에 들어갔다.
당장 먹을 거 외엔 이런 식으로 장기보관을 해두는 게 좋다.
다정이 옆에 와서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여기 진짜 멋진 곳이야."
나도 그렇게 생각해.
.
.
.
어느덧 해가 넘어가고 1월이 되었다.
나는 못이 아닌 금속으로 된 선반대를 하나 꺼냈다.
철사병이 사라졌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다.
선반대는 내가 광주로 이동하는 동안 형체를 유지했다.
약간 힘을 주어 만져도 구부러지기만 할 뿐 부서지지 않았다.
"거의 다 사라졌네."
다음 달이면 어지간한 금속제 도구는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냄비나 삽 같은 거 말이다.
3월쯤 되면 총도 사용이 가능하겠지.
"참 길었다, 길었어."
철사병은 인류에게서 거의 6개월 동안 금속을 빼앗았다.
이제 사라진다 하더라도 뒤가 문제였다.
죄다 모래로 변했는데 어떻게 복구하지?
"고로를 만들지 않는 이상 어렵지···"
그 정도 설비를 가진 곳은 정부 쉘터를 포함한 극소수일 것이다.
그마저도 만들어내는 건 잡철에 가깝겠고.
"풍뎅이들이 고로를 만들 수 있다고 했지···"
녀석들의 정체가 더더욱 확실해졌다.
금속을 자유자재로 다루고 고로를 만들 수 있는 한 종족이 떠올랐다.
젤리와 황제꿀을 좋아하는 건 이미지에 안 맞지만 풍뎅이로 변한 부작용으로 생각하자.
"철을 확보해야겠는데."
그것도 불순물이 섞이지 않는 순철모래가 필요했다.
그런 건 조선소에 많지.
나는 광주에서 주변 상황을 확인한 후 북상하면서 군산 조선소에 들릴 생각이었다.
"그 때쯤이면 날씨가 풀렸을 테니까 인천에 가서 타임쉘터와 예비쉘터를 털고···"
차원문 안에서는 다정이 열심히 쉘터를 확장하고 있으니까 공간 문제도 없다.
모든 게 완벽하다.
나는 짐을 챙겨서 딩고와 함께 길을 떠났다.
목적지는 광주.
그동안은 갈 일이 없어서 신경을 쓰지 않았는데 상당히 엉망이라는 걸 알게 됐다.
서해안에 상륙한 중국인들이 대거 몰려온 것이다.
광주뿐만이 아니라 서해안의 도시 대부분이 중국인으로 인해 몸살을 앓는다고 한다.
너희 나라로 꺼지라고 말하고 싶지만 들을 리가 있나.
지금 이 순간에도 경매장에선 빨리 꺼지라는 한국인과 개소리 말라는 중국인들의 말싸움이 한창이었다.
―니들이 우리한테 이럴 수 있냐. 우리가 얼마나 좋게 대해줬는데.
―중국이 우리한테 준 건 미세먼지하고 불법 어선뿐이야 씹새끼들아.
―빵즈 새끼가 말을 함부로 하네.
―착한 짱깨는 죽은 짱깨뿐이지.
―만력제가 이 자라새끼들을 안 도와줬어야 됐어.
―이새끼들 수백년 전 얘기를 꺼내는 거 보소.
―씨발놈들아 니들 도움 없어도 우린 임진왜란 이길 수 있었어.
―님 그건 아님. 당시 명나라 도움 없었으면 우린 개쪽박이었음.
―뭐 씨발 당시 짱개 새끼들 조선에 와서 하는 게 뭐가 있었는데. 약탈이나 하고.
―너 평양성 전투도 모름?
코멘트란의 주제는 산으로 흘러갔다.
한국인들끼리 팩트를 따지며 싸우기 시작하자 중국인들이 그건 잘못된 역사라며 따지고 들었다.
"경매장이 뭐 이렇지."
나는 야음을 틈타 전남대 주변에 자리를 잡았다.
서울에 못지않게 주변이 시끄러웠는데, 알고 보니 생존자가 엄청나게 많았다.
좁은 지역에 몰려 있다 보니 쉴 새 없이 좀비 레이드가 터졌고 비명소리도 장난이 아니었다.
서울 동부권도 이렇게 엉망은 아니었는데 중국인들이 많긴 하나보다.
경매장을 살피니 영산강에서 리자드맨들이 올라와 생존자들을 사냥하고 있다고 한다.
"완전 개판이네."
그리고 가장 중요한 타임쉘터는 백화점 지하에 마련되어 있었다.
입구는 대부분 뚫렸고 마지막 봉인문을 남겨놓고 있다고.
그러나 좁은 구역에 사람과 몬스터가 너무 많이 몰려서 봉인문을 뚫기가 쉽지 않았다.
경매장에선 싸움 좀 그만하고 뚫고 보자는 주장이 넘쳐났다.
타임쉘터이니 물자가 많을 거고, 모두 적당히 챙길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게 되면 천사들이지."
아포칼립스에서 양보만큼 바보짓은 없다.
밥이나 먹을까 생각하는데 밑의 층에서 작은 기척이 느껴졌다.
인지가 높지 않았으면 절대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으르렁거리는 딩고와 함께 차원문에 숨었다.
얼마 후 세 명이 조심스럽게 나타났다.
"없는데요?"
"이 아저씨 이거 도망갔네."
"분명히 처음 보는 남자라고 했지?"
"옙. 이 부근에선 처음 보는 놈이었습니다. 덩치가 엄청 크던데요."
"저···혹시 김밥조아 아닐까요? 걔 덩치가 그렇게 크다고 하던데."
"걔가 여기 왜 있어? 며칠 전에 신도림역에 있었는데. 미궁 사건 모르냐?"
"그거 엄청 유명하죠."
대장으로 보이는 남자는 주위를 훑었다.
"그 아저씨 아직 여기 있는 게 분명해. 블링크로 도망갈 각이 안 나와."
"은신일까요?"
"아마···어이, 아저씨! 잘 들으쇼. 여기 어떻게 왔는지는 모르겠는데 조심해야 될 겁니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져요."
내가 새우야?
< 새우 싸움에 고래가 끼면 - 1 > 끝
< 새우 싸움에 고래가 끼면 - 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