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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어붙은 세상 - 5 >

"석현아, 들어와."

과연 그는 어린애처럼 화장실로 쫄래쫄래 들어왔다.

나는 차원문으로 입구를 막았다.

이렇게 입구가 겹쳐지게 막으면 방음효과가 있다.

안에서 무슨 소리가 나도 밖에는 안 들린다는 것.

물론 벽을 통해 전달되는 소리는 막을 수 없지만 주위에 누가 있어야 말이지.

다정이 석현의 엉덩이를 찰싹 때렸다.

"길 잃은 건 너지, 우리가 아니고."

"아니야. 난 똑바로 가고 있었는데."

"어디로 가는데?"

"동두천."

"여기는 부천이야 이 길치야."

"아."

"아는 무슨."

그녀는 석현이 답답해 죽겠다며 팔짱을 꼈다.

"토공 얘 좀 어떻게 해야 되지 않아? 사람 구하러 나왔나본데 하루 종일 돌아다니게 생겼어."

"뭐 그건 방법이 있고···석현아, 사실은···"

여기서 나와 다정의 관계를 이야기해줘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내가 말하기 전 다정이 선수를 쳤다.

"토공, 우리 섹스했어."

너무 급발진인데?

석현은 천천히 눈을 깜빡이더니 우리 둘을 바라봤다.

그리곤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안 되겠어. 성호는 못줘. 내 눈에 흙이 들어가지 않는 이상은···"

그때 다정의 구울이 화장실 칸에서 튀어나와 팔에 묻은 흙을 뿌렸다.

석현은 어푸푸 눈을 가렸다.

"으아앗 눈에 뭐가!"

"허락받는 게 아니라 통보하는 거야. 뭐하면 너도 껴줄까?"

다정은 3P라도 할 기세였지만 석현은 거절했다.

대신 그는 내게 엄지를 척 치켜세웠다.

"훌륭해. 이제 오리가 니 여자가 됐구나."

"아니지. 성호가 내 남자가 된 거야."

"보통은 남자가 먹는다고 하잖아?"

"어허, 잘 생각해 봐. 내가 먹은 거야."

"흠···인정."

둘의 헛소리에 나는 정신이 혼미해졌다.

안 되겠군.

"이, 일단 중요한 것부터 하자. 석현이 너는 지금 할 일이 있는 사람이야, 그렇지?"

"다섯 곳에 들러야 돼."

그는 팬티에서 지도를 꺼내 펴보였다.

동두천과 가평, 김포 등이다.

석현의 능력이라면 왕복하는 데에는 문제가 없겠지만 길 찾기가 난관이었다.

이정표고 뭐고 죄다 무너졌으니.

정부 쉘터는 왜 석현을 혼자 보낸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길잡이라도 붙였어야지.

나는 머릿속에서 생각을 정리하며 입을 열었다.

"석현이가 사람을 구하는 건 우리한테도 도움이 돼. 그러니까 하긴 해야겠지."

"어떻게 도움이 돼?"

"그건 나중에 설명할게. 하여튼 길잡이가 필요한데, 잠시만."

동굴에서 풍뎅이 한 마리를 꺼내오자 석현이 호기심을 보였다.

그는 풍뎅이를 처음 볼 것이다.

"얘가 너를 도울 거야."

"···그냥 풍뎅이인데?"

"그냥 풍뎅이가 아니라, 사람 말을 알아듣는 풍뎅이야. 한글은 모르지만 지도는 읽을 수 있지."

나는 녀석에게 서울권의 지도를 보여주었다.

머리 셋과 풍뎅이의 시선이 지도에 집중되었다.

"우리가 있는 곳이 지도에선 이 지점이야. 이 다섯 곳을 찾아가면 돼. 할 수 있겠어?"

풍뎅이가 고민하자 이번에는 석현이 충격에 빠졌다.

"푸, 풍뎅이가 말을 듣고 생각하고 있어···"

"얘네들 재주 많다니까. 아마 우리보다 더 똑똑할 거야."

"들?"

"쉘터 안에 풍뎅이 많아. 사슴벌레도 있고."

아무튼 풍뎅이는 심사숙고해서 지도를 보더니 석현을 데리고 밖에 나갔다.

태양의 위치를 확인한 모양.

녀석은 최종적으로 OK사인을 보였고 다정의 얼이 빠졌다.

"그게 가능하다고? 말도 안 되는데···"

"잘 보면 여기 범례에 건물들 이름이 적혔지? 벽에 새겨놓은 거라 멀쩡한 거야. 풍뎅이에게 글자만 가르쳐 주면 돼."

풍뎅이는 한글을 모르지만 모양 자체는 얼마든지 기억할 수 있다.

가평을 예로 들면, 가평의 모양을 기억해서 이름이 새겨진 건물들을 이정표 삼아 목적지까지 가는 것이다.

석현에겐 불가능한 일이지만 풍뎅이라면 충분하다.

사람보다 나은 풍뎅이라니 좀 그렇지만 애초에 총알도 만드는 수상한 녀석들이니.

"마지막엔 풍뎅이 돌려줘야 돼."

"근데 니들은 뭐할 거야?"

"우린···"

다정이 손으로 내 입을 턱 막았다.

"얘 레벨 업 시킬 거야. 지금 24레벨인데 1렙만 더 올리면 추가효과 붙잖아. 뭐가 붙는지 확인해야겠어."

석현은 그녀의 계획이 마음에 드는지 엄지를 척 세웠다.

"섹스."

나는 황급히 다정의 손을 떼며 말했다.

"그리고 쉘터에 복귀하면 시비 거는 놈이 있을 거야."

"시비? 토공한테?"

다정은 어이없어 했다.

하긴 정부 쉘터의 최강자로 알려진 석현인데 누가 시비를 걸겠는가.

하지만 나는 누군가가 나서리라 생각했다.

"정확히는 토공의 행적을 지적할 거야. 너 길치인데 어떻게 다녀왔냐 하면서. 또 승연씨에게서 이야기를 듣고 이상하게 생각할지도 모르고."

"할아방탱이 아니면 검인이?"

나는 고개를 저었다.

검인도 대통령도 내 적은 아니다.

그렇다면 주승철만 남는데 그가 이번에 나설 거라는 게 내 생각이었다.

이만한 미끼를 보고 달려들지 않으면 이상하니까.

"주승철. 걔가 시비를 걸 거야. 석현이 너하고는 접점이 없지?"

"전혀."

"다정이한테는 치근덕대기도 했는데 왜 그럴까? 여자라서? 예뻐서?"

"내가 좀 이쁘긴 하지."

나는 그녀를 무시했다.

"어떻게 잘 구슬리면 이야기는 통할 것 같아서야. 석현이 너한테는 그게 안 먹히거든."

"완전한 또라이라서?"

"그래. 우리 셋은 다 또라이지만 석현이 독보적이지. 그래서 주승철은 아무런 제안도 하지 않은 거야. 어떻게 할 자신이 없어서."

"내가 또라이로 1등이네."

석현이 활짝 웃었다.

뭐 순수한 거니까 좋게 보도록 하자.

나는 그의 어깨에 팔을 걸치고 강조했다.

"그놈이 조용히 있으면 너도 나설 필요까진 없어. 그럴 확률도 꽤 되니까. 그게 아니면···"

"죽일까?"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고. 조금 거칠게 대해서 특성을 드러내봐. 걔 특성은 아무도 모르지?"

"대통령도 모르는 것 같던데."

"소문도 못 들었어."

둘이 쉘터에서 지낸 시간을 합치면 꽤 되는데 소문도 없다는 건 정말 철두철미하게 특성을 숨겨 왔다는 뜻이다.

나는 이번 기회에 가면을 벗기고 싶었다.

"주승철 그놈은 수상한 것 투성이야. 게임 제작사에 투자했다는 것도 그렇고, 특성도 아무도 모르고, 자기 쉘터가 있음에도 정부 쉘터에 있는 것도 이상하지."

"이번 기회에 정체를 드러내고 싶다?"

"놈이 덤비면. 조용하면 석현이 너도 편히 쉬면 돼."

"흐음, 만약 둘이 싸우면 재밌겠는데. 석현이 얘 힘 장난 아니잖아."

"혹시 모르지. 비장의 수가 있는지도."

나는 주승철이 부활 스크롤을 가졌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적당히 수상한 놈이어야 말이지.

그가 초월적인 힘을 가졌다는 건 일단 배제하기로 했다.

그런 힘을 가지고 있었다면 진작 다정을 꼬시고 나를 찾아냈을 테니까.

다정이 내 등에 매달렸다.

"토공, 토공. 이렇게까지 하는데 얘한테 뭐 받아내야 되지 않아?"

"그러게. 뭘 받아내면 좋을까···"

"참치 내놓으라고 해. 참치."

"참치회? 나도 좋아해. 한 번도 못 먹어봤거든."

이상한 말이로군.

하여튼 둘이 쑥덕대는 걸 들으니 진짜 잡아와야 할 것 같았다.

나는 둘에게 고백했다.

"근데 앞바다에 참치가 있는지 없는지는 몰라. 안 나가봤어."

"여태껏 안 나가고 뭐했어? 나 같음 보트 타고 나가서 싹싹 훑었겠다."

다정이 나를 힐난했고 나는 나름의 논리를 펼쳤다.

"나라고 하루가 48시간인 건 아니잖아. 요즘엔 너 때문에 잘 들어가지도 못한다고."

그녀가 쌍심지를 켜며 내 볼을 잡아 늘렸다.

"하여튼 빨리 레벨 업 하면 우리 둘이 들어가서 널 도울 수 있잖아."

가장 염려하던 것이다.

차원문을 보여주면 누구나 욕심을 품게 된다.

그것은 집착으로 이어지고 좋지 못한 결말로 이어질 것이다.

하지만 이들이라면, 내 친구들이라면.

나는 둘의 손을 잡았다.

"그래, 언젠가 같이 들어가자."

갑자기 토공이 홀딱 벗고 섹스를 외치며 해변에서 뛰는 모습이 떠올랐다.

그건 안 돼.

.

.

.

한 방, 두 방, 세 방.

쓰러진 승철을 마구잡이로 두들기던 석현은 팔목을 잡히고 당황했다.

갑자기 힘이 쭉 빠지는 느낌이 들었다.

"가소로운 힘 가지고 설치는데, 적당히 해라."

승철이 이를 악물고 중얼거렸고 석현은 팔을 비틀어 손아귀를 떨쳐 뒤로 물러났다.

"상태창."

기가 막힌 일이었다.

스탯이 대폭 너프되었고 아이템의 효과는 봉쇄되었으며 스킬에 빗금이 쳐져 있었다.

그리고 효과.

「효과 : 능력 봉쇄」

예전에 성호가 경고했던 와이파이 좀비의 능력인가?

모든 능력을 봉쇄하니 정말 대단한 특성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아무리 석현이라고 해도 이 상태에선 큰 힘을 쓰기가 힘들다.

승철은 소매로 입가를 닦으며 일어섰다.

"일말의 이성은 있는 줄 알았는데 완전히 미친놈이군."

"그걸 알고 나한테 말 붙이지 않은 거 아니었어?"

"···확실히 뒤에 누가 있군. 김밥조아 그 새끼지?"

잠시 소강상태가 이어지자 주변에서 둘을 뜯어말렸다.

감히 석현에게 손을 대는 사람은 없었으나 장원택이 직접 그의 앞을 막아섰다.

배검인도 엉거주춤 그를 막는 시늉을 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진정합시다, 진정하고···"

그때 승철이 어이없다는 듯 두 팔을 들어올렸다.

"아니 맞은 건 난데 그러시깁니까? 지금 저 인간은 살인을 저지른 거나 마찬가지라고요."

맞는 말이다.

그 룰을 정한 사람은 다름 아닌 장원택이었다.

쉘터의 모든 인원은 그 룰에 동의했다.

하지만 석현에게도 할 말은 있었다.

그는 장원택의 어깨너머로 크게 소리쳤다.

"저 새끼 능력 봉쇄 특성 갖고 있어!"

"예?"

"그게 뭡니까?"

승철이 당황했고 석현은 재빨리 사정을 설명했다.

몇 번 주먹을 휘두르자 그가 특성을 발휘해 모든 능력을 봉쇄했다는 것.

덕분에 육체능력이 떨어지는 그가 자신의 주먹을 막을 수 있었다는 게 요지였다.

"세상에···"

"그런 특성도 있었어?"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승철에게 향했다.

그는 오해라며 몇 발짝 뒤로 물러섰다.

특성 자체를 부인하면 죽도 밥도 안 된다.

"숨기려던 건 아니었습니다. 말할 기회가 없었던 것뿐이죠."

"승철씨, 전에 쉘터로 초대했었죠? 나 데리고 가서 능력을 봉쇄할 생각이었나요?"

윤정이 나서서 따지자 그는 절대 아니라며 부인했다.

"답답하십니다. 나한테 아무런 이득이 없는데 왜 그러겠습니까?"

세뇌 특성이 아닌 이상 미움 살 짓은 못한다는 게 그의 해명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의 반응은 좋지 않았다.

특성을 숨기고 있었다는 것부터가 수상쩍은데 그게 능력 봉쇄였다니.

마음만 먹으면 사람을 바보로 만들 수 있다는 뜻 아닌가.

장원택이 목소리를 높였다.

"일단 진정합시다. 오늘 여러 일이 있는데, 모든 결정은 차후로 미루겠습니다. 그 때까진 두 사람 다 방에서 나오면 안 됩니다. 아시겠습니까?"

"···"

석현은 말없이 승철을 노려봤고 그는 사람들의 눈치를 보았다.

"기다리죠. 하지만 저놈이 이 쉘터에서 나가야 하는 결과가 나와야 할 겁니다. 폭행은 살인이다, 그게 이 쉘터의 룰 아닙니까?"

"···석현씨는 불복입니까? 그러면 이 쉘터에서 나가주십시오. 지금 즉시."

"아냐. 방에서 얌전히 지낼게."

"약속한 겁니다."

사태가 겨우 진정되었다.

사람들은 침묵함으로써 모든 판단을 장원택에게 미루었다.

괜히 나서서 주목을 받기 싫은 것이다.

석현은 부하들에게 둘러싸여 나가는 승철에게 말했다.

"능력 봉쇄 풀어."

"풀면 또 나를 때릴 거 아닙니까?"

"얌전히 지낼 거라고 했잖아. 풀라고."

"얌전은 무슨···내가 방에 갈 때까지는 안 풀 겁니다."

"알았어."

석현은 의외로 순순히 포기했다.

도저히 환영회를 할 분위기가 아니라 생각한 사람들이 식당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그 틈에 끼어 석현도 발걸음을 옮겼다.

검인이 옆에서 뭐라고 물었지만 그는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오로지 승철에게 향해 있었다.

그리고 승철의 부하가 사람들에게 밀려 잠시 자리를 벗어났을 때, 석현은 아주 자연스럽게 그에게 접근했다.

승철은 미친놈이 자기에게 접근하는 건 알았지만 놔두었다.

무기도 없고 능력도 봉쇄당한 놈이 대단한 짓을 벌이지는 못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

하지만 그게 실수였다.

석현은 벼락처럼 토끼 귀에서 미스릴 조각을 떼어 승철의 등을 찔렀다.

"컥!"

심장을 관통당한 승철은 외마디 비명을 지르곤 가슴을 부여잡았다.

"씨, 씨발···"

"칼로 찔렀어!"

"미친 놈!"

식당 입구는 아비규환이 되었다.

"떨어져! 떨어져!"

"이 씹쌔끼가!"

석현은 승철의 부하들에게 거칠게 취급당하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다.

장원택은 사태를 목격하곤 진심으로 화를 내었다.

"이러지 않기로 했잖습니까!"

"방에서 얌전히 지낸다고 했으니 약속 어긴 건 아냐."

아직 방에 안 들어갔으니 얌전히 지내지 않아도 된다는 어린애 같은 논리였다.

다들 어처구니없어 할 때 뜻밖의 일이 일어났다.

천천히 무릎을 꿇은 주승철이 빛에 휩싸여 사라진 것이다.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사건이었다.

"부, 부활이야?"

"부활 스크롤 갖고 있었어?"

거의 동시에 석현의 상태창에서 능력 봉쇄가 사라졌다.

기를 쓰고 그를 잡고 있던 승철의 부하들이 한 대씩 얻어맞고 벽에 처박혔다.

"비켜!"

천둥 같은 목소리에 사람들이 기겁하며 입구를 비웠다.

석현의 몸이 화살처럼 쏘아져 나갔다.

< 얼어붙은 세상 - 5 > 끝

< 얼어붙은 세상 - 6 >

나와 다정은 부천운동장역 근처에서 몬스터를 잡으며 레벨 업을 시도했다.

구울들이 몬스터의 위치를 알아내면 다정에게 알려주고 나에게 바통터치를 하는 식.

워낙 추운 날씨 탓에 몬스터의 감각이 둔해져 있어서 처리하긴 어렵지 않았다.

하루하고 몇 시간이 흐른 후, 나는 부천운동장역 근처의 몬스터를 거의 몰살시켰다.

「레벨이 25로 올랐습니다」

「포인트를 20 획득했습니다」

「25레벨이 되어 특성에 추가효과가 붙습니다」

「차원감옥」

"···다정아."

"응? 나도 들어갈 수 있는 차원문 나왔지? 빨리 말해."

그녀는 내 옆에 찰싹 붙어서 귀를 들이댔다.

차원감옥이란 단어만 보면 그녀가 바라는 것과는 거리가 먼 것 같은데···

나는 설명 대신 직접 써보기로 했다.

"차원감옥."

평소와는 다른 차원문이 나타났다.

물결치는 듯한 내 전용 차원문과는 달리 빡빡한 빗금이 쳐져 있었다.

이거 왠지 기분이 나쁜데.

다정은 내 앞의 공간을 만지다가 갑자기 손이 쑥 들어가자 기쁜 듯 외쳤다.

"들어가진다!"

그녀는 환호하며 차원감옥에 들어갔다.

그리고 5분 후 쓰러지듯 차원감옥에서 튀어나왔다.

"아아아아악!"

"왜, 왜 그래?"

나는 황급히 그녀를 부축했다.

그녀가 와락 내 어깨를 잡았다.

"떠, 떨어지기만 했어! 하늘에서!"

"진짜?"

"주, 죽는 줄 알았다고! 어헝헝···"

그녀는 마치 물개처럼 울며 내게 매달렸다.

5분 동안 하늘에서 떨어지기만 했다는 말이 진짜라면 뭐 그럴 만도 하지.

나는 차원감옥에 들어가려 했으나 거부되었다.

"다른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것 같은데···또 들어가 볼래?"

다정은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절대 안 들어갈 거야, 절대."

뭐, 대충 짐작은 간다.

차원감옥은 제대로 살 수 없으리라 생각되는 무작위 장소에 보내버리는 역할을 한다.

하늘이 나타난 걸 보면 바다도 있겠고 화산지대와 한랭지도 있을 것이다.

그런 곳에 떨어지면 기분 안 좋겠지.

내 입장에선 5분 동안 적 하나를 이탈시킬 수 있는 기회가 된다.

"···다시 돌아오긴 하지만 사기가 많이 꺾인 상태겠지. 이게 차원감옥의 효과야."

설명을 들은 다정은 실망한 듯 툴툴거렸다.

"이번에는 쉘터에 들어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안 되겠어, 다음 목표는 30레벨이야."

"잠깐, 그 전에."

나는 경매장을 호출해 석현이 남긴 코멘트를 확인했다.

그는 이틀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네 명의 생존자를 구출했다.

지금 마지막 생존자를 데리고 쉘터로 복귀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는 미리 정부 쉘터 근처에 가 있어야 한다.

풍뎅이는 돌려받아야지.

우리가 사냥에 열중하는 동안 사슴벌레들이 눈썰매를 수리해둔 상태였다.

구울들에게 로프를 매고 있으려니 다정이 착잡하게 말했다.

"수가 너무 줄었어···좀 보충해야 하는데 죄다 빌빌거려서 할 맛이 안 나네."

"하긴···"

그녀의 지배 특성은 하루에 한 번 발휘할 수 있다.

아무 놈이나 지배하면 곤란한 게, 기존의 스탯을 따라가기 때문이다.

추가효과를 받기에 성장하긴 하지만 시간이 걸린다.

혹한에 식량까지 찾기 어려운 이 환경에선 구울을 지배해 봐야 빌빌거린다는 소리다.

나는 뜨거운 물을 넣은 페트병을 다정에게 안겨주고 침낭을 프레임 안에 넣었다.

"거기 들어가 있으면 따뜻할 거야."

"어디···오···진짜네. 완전 포근해."

그녀는 침낭에 들어가 한 마리 애벌레가 되어 꿈틀거렸다.

뒷좌석에 앉아 로프를 힘껏 내리치자 구울들이 달리기 시작했다.

목적지는 여의도 주변.

경인로를 따라 달린지 30분도 되지 않아 구울이 발견되었다.

녀석은 길가에 뻣뻣이 굳어 있는 좀비를 뜯어 먹고 있었다.

다정이 그걸 보곤 내게 고개를 돌렸다.

"잠깐, 쟤 어떻게 움직이는 거야?"

"적응한 거야."

나는 다정이 침낭에서 나오기 쉽게 단추를 풀고 썰매에서 내렸다.

우리는 건물 뒤에 숨어 녀석을 관찰했다.

"잘 움직이네···탐난다."

"피부가 푸른색이지? 이 추운 환경에 적응했다는 증거야."

"원래 저런 게 있었어?"

"있었지. 별로 신경은 안 썼지만."

고인물 입장에선 구울이라고 해봐야 어차피 잡몹이다.

50레벨이 10레벨 몬스터의 특성을 제대로 파악하기란 쉽지 않다.

대충 때려도 픽픽 쓰러지는데 뭐 하러 시간을 낭비한단 말인가.

나는 녀석을 가리키며 말했다.

"쓸 만하게 보이지만 어딘가 빠진 구석이 있을 거야. 추위에 적응한 만큼 다른 부분이 퇴화되었을 거란 말이지."

"전투력이 떨어지면 안 되는데."

"그러니까 그걸 보자고. 구울 보내봐."

"알았어."

다정이 손가락을 튕기자 구울 한 마리가 녀석에게 다가갔다.

녀석은 곧장 이를 드러내며 구울에게 달려들었다.

제법 민첩하군.

녀석은 스피드로 잠깐 우세를 점하는 듯했지만 다정의 구울이 제대로 공격하자 얼마 버티지 못했다.

캬아악!

푸른 구울이 내동댕이쳐졌다.

다정은 그걸 보곤 적이 실망한 듯했다.

"뭐야. 형편없이 약하잖아."

"뇌에 자리 잡은 포자가 싸우는 것보다는 생존이 더 중요한 거라고 판단한 거야."

"에이 버려버려."

"아니지. 다른 건 몰라도 제법 빠르잖아? 분명 쓸모가 있을 거야."

나는 다정을 설득해 녀석을 지배하게 했다.

지배는 간단했는데, 구울들이 희생물을 잡고 있으면 다정이 손가락을 튕기는 걸로 끝이었다.

우리는 구울들을 불러들여 경인로를 달렸다.

영등포 이마트에 도착하니 풍뎅이가 계산대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토공이 내려놓고 갔나 보다.

나는 녀석을 쉘터에 놓고 1층을 살폈지만 파밍할만 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의류매장에 다녀 온 다정이 혀를 내둘렀다.

"진짜 먼지만 남기고 다 털어갔네."

"여긴 서울 중심부잖아. 생존자도 그만큼 많겠지."

이젠 석현을 기다릴 차례다.

여기 오자고 한 이유엔 풍뎅이도 있지만 그를 백업하고자 하는 목적도 있었다.

승철이 과하게 시비를 걸 경우 그가 바로 들이받을 위험이 존재했다.

그는 생각하기 전에 몸이 행동하는 스타일이니까.

다정과 함께 커피를 마시며 기다리는데 영등포역 근처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쎅쓰!"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쳐다봤다.

토공은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군.

.

.

.

"헉!"

주승철은 영등포공원 주차장에서 눈을 부릅떴다.

부활 스크롤을 가지고 있었기에 망정이지 까딱 했으면 이 세상을 등질 뻔했다.

그는 몸을 훑어보며 분노를 토해냈다.

"개새끼가 나한테 칼찌를 놨다 이거지? 오냐, 쉽게 죽이진 않으마."

승철은 이를 갈며 벌떡 일어났다.

부활 후유증인지 현기증이 찾아왔지만 곧 사라졌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쉘터로 돌아가도 사태를 진정시키긴 어렵다···'

사람들이 그에게 의심을 품기 시작했으므로 돌아가 봐야 할 일이 없을 것이다.

부하들도 곧 쉘터를 나올 것이고.

여기서는 사태의 추이를 관찰하다가 한남동으로 복귀하는 편이 좋다.

"추, 추워···"

쉘터에서 나오니 얼어 죽을 것 같았다.

그는 손바닥으로 귀를 감싸며 근처에 숨어 부하들을 기다렸다.

그런데 누군가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렸다.

"쎅쓰!"

이런 미친 소리를 할 수 있는 놈은 하나뿐이다.

승철은 이를 갈며 나서려 했으나 흠칫했다.

'분명 능력 봉쇄를 확인했을 텐데?'

그런데도 밖으로 나왔다는 건 자신이 있다는 뜻이다.

혹시 누가 백업을 온 걸까?

'미친놈이라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 주의하는 편이 좋겠지.'

눈이 서서히 그쳤다.

승철은 조심스럽게 도로를 건너는 부하들을 확인하고 눈물이 날 뻔했다.

"여기다!"

"사장님!"

부하들은 그를 보고 달려왔다.

승철이 육체적으로 강건한 다수 부하를 이끌기 위해선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그는 종말 이전에도 끊임없이 베풀었으며, 자신이 많은 것을 준비했다고 어필했다.

덕분에 그는 부하들로부터 리더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토공에게 죽은 것 때문에 충성심이 흔들렸겠지만 완전히 실망하진 않았을 것이다.

거기에 더해서 한남동의 벙커에 들어가려면 그의 허락이 있어야 한다.

그 많은 물자를 포기하고 돌아서는 것은 바보짓이다.

승철은 부하들을 맞이한 뒤 물었다.

"토공은 지금 어딨지?"

"다른 곳으로 간 모양입니다. 쉘터는 지금 난장판이고요."

"찾아서 끝장을 볼까요? 능력 봉쇄면 꼼짝 못하잖습니까."

승철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일단 벙커로 돌아가자. 아무래도 백업이 있는 것 같다."

"백업이라···김밥조아가 여기 왔단 말이죠?"

"찾아서 조져버립시다!"

다들 사장으로 모시는 그가 칼찌를 맞아 흥분한 모양이었다.

승철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방금 쉘터에 같이 있었을 텐데 거기선 아무 말도 않다가···

하지만 그걸 지적해 부하들을 머쓱하게 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었다.

"벙커로 가지. 다들 준비도 없이 나왔잖나. 돌아간 뒤에 플랜을 짜보자고."

"현명하십니다."

한남동 벙커로 가는 여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올림픽대로를 따라 한강변으로 나가서 보트를 찾고 한참 노를 저어야 한다.

승철은 창틀에 쌓인 눈을 쓸다가 문득 말했다.

"이 날씨면 한강도 다 얼었을 거야, 그렇지?"

"그렇겠죠?"

"그럼 두 시간이면 도착할 수 있어. 다들 배낭 챙겨, 여길 뜬다."

승철은 만약을 대비해 정부 쉘터 주위에 약간의 물자를 비축해 두었다.

여기에서 그걸 쓰는 것은 아깝지만 어쩔 수 없었다.

얼마 후 네 명은 건물에서 나와 올림픽대로로 향했다.

부하들은 그나마 괜찮았지만 승철은 죽을 맛이었다.

허벅지까지 쌓인 눈을 헤치며 걸으려니 체력이 실시간으로 쭉쭉 빠졌기 때문.

"헉, 헉···"

그는 눈치를 보며 뒤로 쳐졌고 눈을 헤치는 부담은 부하들이 맡게 되었다.

그들이 씨익 웃었다.

"복귀하면 한 턱 쏘시는 겁니다?"

"요번에 김사장님이 예쁘장한 애들을 들이셨다고 하는데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세뇌 특성 아주 기가 막히던데요. 완전 인형으로 바뀌던데."

"가만히 누워서 떡치면 뭔 재미야?"

"새끼 뭘 모르네."

부하들이 음충맞게 웃었다.

승철은 귀찮아져서 대충 손을 저었다.

"알았다. 말해 볼 테니까 가서 보자고."

"예엡!"

한강공원에 도착하니 과연 한강은 두껍게 얼어 있었다.

그들은 얼어붙은 한강을 건너는 사이, 다시 눈보라가 불었다.

"으···추워···"

"훅, 훅, 훅!"

폐에 스며드는 한기는 결코 장난이 아니었다.

그간 쉘터에만 틀어박혀 있었던 이들은 연신 귀와 코를 문질렀다.

이렇게 비벼주지 않으면 떨어져 나갈 것 같아서였다.

"이렇게 추울 줄 알았나···"

승철은 귀마개를 준비하지 않았던 것을 뼈저리게 후회했다.

쉘터에서 나갈 일은 없을 거라 여겼는데 망할 놈의 토공이 모든 것을 망쳤다.

벙커에 복귀하면 놈을 어떻게 해줄까?

그는 즐거운 상상을 하며 옷깃을 여몄다.

1시간이 지난 후.

마침내 일행은 강변북로에 도착했다.

그런데 마지막에 문제가 생겼다.

한강 저 멀리에서 몬스터들이 달려오는 게 아닌가.

일행의 눈이 절로 부릅떠졌다.

"구, 구울입니다!"

"미친···이 추위에?"

사람도 활동하기 힘든 이 추위에 구울이 저렇게 뛴다니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설마 다정의 구울인가?

'아니야···저렇게 시퍼런 구울이 아니었어···'

새로 지배한 건가 싶었지만 그녀가 밖에 나와서 활동하는 걸 상상하기란 어려웠다.

눈이 내리기 전에도 춥다고 투덜투덜한 그녀였으니.

아무튼 승철은 여기서 싸우는 건 바보짓이라 판단했다.

"도망가자!"

"옙!"

사실 선두의 푸른 구울은 생존과 스피드에 특화되어 전투력이 많이 떨어지는 종이었다.

하지만 이들이 알 리가 없으니 지레 겁을 먹고 도망갈 수밖에.

일행은 구울에 쫓기다 방향을 틀어 무너진 아파트단지 옆의 주택가에 들어갔다.

거의 닿을 듯 말듯 하고 있으니 너무 급했던 것이다.

"으···"

급기야 승철이 꼬마빌딩 입구에서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다.

눈보라 속에서 두 시간이나 움직여서 체력을 많이 뺏긴 것이다.

부하들은 그를 거의 끌다시피 해서 위층으로 데리고 올라갔다.

다정의 구울들이 건물을 포위했다.

.

.

.

나와 다정은 섹스를 외치며 돌아다니던 석현과 합류했다.

그는 일단 승철의 뒤를 쫓자고 했다.

이대로 보내면 후환이 클 거라나 뭐라나.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었지만 일단 빠르게 움직이는 게 중요했다.

때마침 불어 닥친 눈보라가 우리를 가려주었기에 들키지 않고 한강을 건널 수 있었다.

석현이 썰매 프레임 위에 앉아서 달려달려를 외치는 아주 웃긴 모양새였다.

아무튼 한강을 건넌 뒤에 다정이 새로 영입한 구울들을 이용해 그들을 몰아붙였다.

그들은 당황했는지 방향을 틀어 꼬마빌딩으로 들어갔다.

한숨 돌리고 있으려니 석현이 충격적인 발언을 했다.

"나 승철이한테 칼찌 놨어. 그래서 걔가 지금 도망가는 거야."

"어···나 이해가 살짝 안 되거든? 자세히 풀어서 설명해줄래?"

다정은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해가 안 되는 모양이었다.

사람을 구조해서 들어간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누굴 칼로 찌르고 추격전을 벌인다고?

"무슨 일이 있었냐면···"

석현의 설명에 다정의 입이 벌어졌다.

"미친···너 쉘터에서 폭력 저지르면 쫓겨난다는 거 알아 몰라."

"조금 자극하려고 했을 뿐이야."

"조금 자극이 주먹을 휘두르고 칼찌하는 거냐 이 또라이야."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시비를 걸어와서 어쩔 수가 없었어. 일단 들이받고 보는 거지."

다정이 미심쩍은 눈을 내게 돌렸다.

"이거 다 계산한 건 아니지?"

"승철이 시비를 걸 거라는 건 예상했었지. 석현이가 과하게 반응하는 바람에 상황에 조금 엇나갔고."

"나 실수한 거야?"

왠지 풀이 죽은 듯한 석현의 목소리에 나는 황급히 부인했다.

"아니, 실수가 아니야. 오히려 잘 된 거지. 특성도 알아냈고 부활 스크롤도 소모시켰으니까. 그리고 지금은 추위와 두려움에 떨고 있을 거야. 아주 잘했어."

"흐흠, 역시 그렇지?"

석현이 들뜨자 다정이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무슨 강아지 우쭈쭈 하는 것도 아니고···하여튼 이제 어쩔 거야? 구울로 계속 포위만 하는 것도 수상쩍어."

나는 생각을 정리했다.

"여기선 벙커 위치만 알아내자."

"그걸로 끝이야? 저놈들 살려두면 앞으로 귀찮아질 걸. 저기 벙커 다 누구 소유일 것 같아?"

그녀의 말대로다.

한남동의 주택단지는 거의 벙커 밭이었다.

대체 언론에 얼마를 쥐어줬기에 이런 걸 숨길 수 있었을까 싶을 정도.

재벌들이 많이 산다고 듣긴 했지만 이 정도로 준비했을 줄은 몰랐다.

뭐 대부분은 비어있겠지만 생존자 몇몇은 승철과 꽤 돈독한 유대를 갖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준비가 필요한 거야. 벙커는 대부분 비어 있겠지만 튼튼하단 말이지. 우리가 당장 쳐들어가기엔 부담이 있어. 준비가 필요해."

다정은 고개를 끄덕였으나 석현은 조금 의견이 다른 모양이었다.

"제일 좋은 방법이 뭔지 알아? 성호가 차원벽을 내 발 밑에 설치해주면 그걸 디디고 저 건물로 가는 거야. 모조리 죽이고 자살하는 게 베스트야."

석현의 발상에 우리 둘은 땀을 흘렸다.

거 진짜 화끈하네.

< 얼어붙은 세상 - 6 > 끝

< 미친놈과 수상한 놈 - 1 >

"승철을 살리잔 얘기가 아니야, 내 말은."

나는 목소리를 높였다.

"걔 죽이는 건 간단해. 저 건물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볼트 발사하면 돼. 내가 쏘는 게 아니라서 살인으로 등록되지도 않을 거야."

사실 살인자가 아닌 인간에게 쏜 적은 한 번도 없다.

시스템이라면 그렇게 판정할 거라는 거지.

다정이 궁금하다는 어조로 물었다.

"볼트? 그건 누가 쏘는 거야? 석궁 말하는 건 아니지?"

"풍뎅이들하고 딩고, 딩순이가 쏘는 큰 거 있어."

그녀는 차원문에서 볼트가 튀어나오는 걸 한 번도 보지 못했다.

하긴 다정과 다닐 땐 볼트를 쓸 만한 녀석을 만난 적이 없으니까.

원래는 딩고가 장전했지만 최근 딩순이도 조작법을 익혔다.

조작법이라고 해봐야 끈을 물고 당기는 것밖에 없지만.

힘이 굉장하고 풍뎅이의 숫자도 늘어서 장전시간이 줄었다.

옆에서 석현이 과장되게 말했다.

"오리 넌 허공에서 볼트 튀어나오는 거 못 봤지? 굵고 커다란 게 튀어나오는데 굉장하다고."

"굵고 커다란···나 나도 볼 거야."

"야야 이상한 말 하지 마."

나는 둘을 진정시킨 뒤 설득했다.

"그리고 좀 더 지켜보고 싶은 이유는 또 있어. 여기 각종 특성들 추가효과 적은 게 있는데···"

노트를 꺼내자 둘의 시선이 고정되었다.

다정은 주욱 훑어보곤 내 허벅지를 꼬집었다.

"누가 이렇게 다 적어놓으래?"

"니가 다 말해준 거잖아."

"이렇게 적을 줄은 몰랐지. 함성? 이런 특성도 있었어?"

"목소리로 명령하면 그대로 이뤄지는 거야. 멈춰 하면 그대로 멈추는 식으로. 나하고 처음 만났을 때 기억 안 나?"

"아···전에 김해에서."

"지금 생각난 거지만 너 그때 한 명 죽였으니까 사람 죽이면 안 돼. 골치 아파져."

다정이 히죽 웃었다.

"잘 때 꼭 붙어서 자야지."

"거절한다."

그때 석현이 정리를 끝내고 입을 열었다.

"그놈, 보는 것만으로도 능력을 봉쇄할 수 있어."

"접촉은 아니고? 잘 생각해봐. 때린 것도 접촉이야."

"처음엔 접촉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냐. 방에 돌아가서 봉쇄를 풀어준다고 했거든."

"그럼 하나는 확정이고···최소 15레벨은 될 테니까 2개 더 알아내야 돼."

전투에 특화된 특성이 아니라고 해도 레벨을 올릴 방법은 있다.

세뇌 특성의 권씨가 그랬듯이 막타를 치든 휘발유를 부어 사냥하든 방법은 많다.

주위에 같은 처지의 생존자들이 많을 테니 도움을 받을 수도 있겠고.

하여튼 둘은 내 말에 넘어오는 듯했다.

"능력 봉쇄라는 거, 대단히 위험해. 만약 쉘터에 있던 게 석현이 아니라 다정이 너였으면 꼼짝없이 당했을 걸?"

"···개새끼."

그녀는 새삼 화가 나는지 이를 부드득 갈았다.

승철의 초대에 응했다면 바로 감금당했을 테니까.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지는 뻔했다.

나는 쐐기를 박았다.

"전에 와이파이 좀비도 그렇고, 능력을 봉쇄하는 적이 언제 또 나올지 몰라. 이번 기회에 다 알아놔야 돼. 또 재벌들 벙커와 어떤 관계인지도."

"그걸 다 알아내고 차츰차츰 말려 죽인 뒤 다 입에 털어 넣겠다 이거지?"

다정은 역시 나를 잘 이해하고 있군.

"이유는 또 있어. 쟤네들 옷차림이 바뀌었지? 간이 아지트에서 뭘 챙겼단 얘기야. 아마 이 근처에도 있을 걸? 탈탈 털고 싶어."

내 말을 들은 그녀는 질린 표정을 하곤 석현에게 속삭였다.

"토공토공, 얘는 생선뼈까지 쪽쪽 빨아먹는 스타일이야."

"나는 다 씹어 먹는 걸 좋아하지만···여기선 성호가 맞다고 생각해."

결정됐군.

나는 창밖을 쳐다보며 말했다.

"저기 구울들 하나만 남기고 근처로 풀어. 어디로 가는지 감시하게 하고."

"알았어. 당분간은 지켜보기만 하는 거지?"

"나는 차원벽으로 하늘에 올라가서 볼 거야. 일종의 드론 역할이지."

"나는?"

"다정이 넌 여기서 파밍 좀 하고, 석현이는···"

"이제 난 쉘터로 돌아갈게."

"응?"

"거길 들어가겠다고?"

우리는 그의 결정에 놀랐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장원택은 그를 받아들이지 않을 텐데?

그가 쉘터의 모든 것을 총괄하지는 않지만 영향력이 매우 큰 것은 사실이었다.

부활하기는 했지만 어쨌든 석현이 저지른 건 폭력에 더해 살인이다.

아니지···

나는 생각을 바꿨다.

묻히긴 했지만 석현은 다섯 명의 생명을 구했다.

그리고 쉘터의 룰을 어긴 건 승철의 흑심을 드러낸 걸로 퉁쳐도 될 일이었다.

또한 장원택은 그 소동으로 인해 사람이 많이 빠져서 곤란할 것이다.

그 틈을 노린다면···

석현은 쉘터가 있는 쪽을 바라봤다.

"사과하면 그는 받아줄 거야."

"···사과까지 하면서 들어갈 필요는 없어. 넌 잘못한 거 없으니까."

"나 오늘 느꼈어. 성호가 날 쉘터로 들여보낸 이유 말이야. 안에 있으니까 그런 사건에 잘 대응할 수 있잖아. 기회도 생기고."

뭐 그렇긴 하지만 그건 석현의 희생을 필요로 한다.

나는 그에게 물었다.

"괜찮겠어? 무리할 필요는 없어."

"철사병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까진 쉘터에 있을게. 그 후에는 같이 다니자."

"그래."

나는 석현의 팔을 살짝 쳐주었다.

우리는 모여 서로의 레벨을 확인했다.

다정은 23, 석현이 24이고 나는 25.

"추가효과가 생기긴 했는데 위험해서 함부로 실험을 못 하겠네."

"어떤 건데? 내가 해볼게."

"잠깐만 기다려, 차원감옥."

허공에 차원감옥이 생겨났지만 석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투명이야?"

"나한테는 빗금이 쳐져 있는 문으로 보여. 이제 거기 안에 들어가면 어떤 세계가 펼쳐질지 몰라. 참고로 말하자면 다정이는···"

그녀가 갑자기 얼굴을 확 들이밀었다.

"하늘에서 낙하했어! 5분 동안 말이야! 너흰 그게 무슨 기분인지 상상도 못할걸?"

"하늘을 난다는 거 아냐? 기분 좋겠는데."

"너 빨리 들어가."

급기야 다정이 석현의 엉덩이를 차서 차원감옥에 밀어 넣었다.

내가 말릴 틈도 없었다.

"야야, 그렇게 밀면 안 돼."

"쟤 죽어도 괜찮잖아."

"엄연히 포인트가 든다고. 죽을 때마다 포인트가 높아진다고 그러던데."

"···그래?"

다정은 좀 미안한 듯 팔짱을 끼고 초조하게 차원감옥 앞에서 서성였다.

이윽고 5분이 지나 석현이 차원감옥에서 튀어나왔다.

시간이 되면 자동으로 뱉는 시스템이군.

그는 흠뻑 젖어 있었다.

"푸하! 바다야, 나 바다에서 헤엄쳤어."

"주위에 아무것도 없는 그런 바다야?"

"어. 그리고 무슨 이상한 소리가 들리던데, 심해에서."

다정은 소름이 돋는지 내게 달라붙었다.

"나, 나 절대 안 들어갈 거야."

사실 나도 무섭다.

그 깊은 바다에 뭐가 있는지 알고.

아무튼 차원감옥은 차원벽처럼 내가 원하는 곳에 생성할 수 있다.

적의 방향만 알면 그 앞에 깔아둘 수 있다는 말.

그러면 적은 5분 동안 완전히 격리되는데 못 버티고 죽어도 살인은 아니다.

내가 불러낸 건 어디까지나 차원감옥이지 험악한 환경은 아니거든.

나는 동굴에서 수건을 꺼내 석현에게 주었다.

"모처럼 셋이 모였으니까 밥이나 먹자."

"쟤네들 아직 안 나오네."

"많이 지쳤을 걸. 들어가면서 헐떡이는 거 봤잖아."

레벨이 높다고 스탯이 높아지는 건 아니니 당연한 노릇이다.

금방 돌아가겠다던 석현은 뜨끈한 국물이 포함된 식사를 마치곤 완전히 뻗어버렸다.

"얘 좀 봐···세상도 모르고 자네."

"놔둬. 이틀 동안 뛰어다녀서 피곤할 거야."

쉘터에서 그 사건도 겪었으니 몸도 마음도 녹초가 되었을 것이다.

나는 석현에게 두꺼운 이불을 꺼내 덮어주고 안에 뜨거운 물병도 넣었다.

우리는 잠시 휴식을 가졌다.

.

.

.

눈보라가 그쳤다.

기온은 여전히 영하 20도 밑이지만 날은 훨씬 좋아져 그럭저럭 활동할 만했다.

다정이 새로운 구울을 찾는 동안, 나는 차원벽으로 하늘에 올라가 벙커를 확인했다.

"대단하군···"

재벌인 건 알았는데 저만한 토지에, 저만한 벙커를 지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이건 권씨의 골프클럽 벙커에 절대 쳐지지 않는 규모였다.

"얼어붙은 시체···레이드가 있었던 모양이지?"

아예 좀비 레이드를 상정하고 벙커를 만든 것 같았다.

좀비 레이드라고 해도 24시간 내내 일어나는 건 아니니까.

"대단하군, 대단해."

그런 벙커가 이 부촌에 몇 개나 건설되어 있었다.

대통령은 이걸 알까?

"알아도 모른 체하겠지."

워낙 꿍꿍이를 숨기고 있어서 무슨 목적인지 알 수가 없었다.

현재로선 적이 아니라고 믿지만.

하여튼 승철의 벙커와 긴밀히 연결된 벙커는 2개였다.

하나는 김사장, 다른 하나는 이실장의 것이었다.

"이실장은 주인급은 아닌 것 같은데···생존자 중 최선임인지도 모르겠군."

김사장의 특성은 세뇌이고, 이실장의 특성은 함성이었다.

많은 사람들을 거느렸던 경험에 걸맞은 특성이랄까.

"함성은 몰라도 세뇌는 없애고 만다."

여기서 없애야 할 놈은 최소 둘이다.

주승철과 김사장.

주승철이 초월적인 힘을 가졌는지 의심했는데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제작사에 투자했던 건 그냥 우연인가?"

아니면 뭔가 숨기는 게 있나.

이걸 알려면 놈을 죽이고 벙커를 찾아보는 수밖에 없다.

문제는 벙커가 굳게 닫혀 있다는 것이다.

주승철은 영악한 놈이라 벙커를 여는 것 자체가 위협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아예 벙커 안에 처박혀서 나오질 않았다.

내가 얻은 정보도 부하들의 대화에서 알아낸 것뿐이었다.

"쥐새끼처럼 숨어 있으니 죽일 수가 있나···"

석현의 말대로 그때 죽여 버릴 걸 그랬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시설을 잘 해놨어도 벙커 안은 엄청나게 답답하다.

기다리고 있으면 분명 나올 것이다.

"아니면 개구멍이 어디에 있나···"

전에 권씨가 콘크리트 벙커를 홍보하면서 한 말이 있었다.

개구멍을 뚫어 놨다고.

벙커 공략 당시엔 생각하지 못했지만 머리를 굴리다 보니 그게 생각났다.

"저만한 벙커면 분명 환기구 겸 개구멍이 있을 텐데."

벙커 주위를 눈여겨보니 한 주택의 정원이 이상했다.

"저기만 지저분하네."

며칠간 눈이 계속 와서 정원에는 눈이 가득 쌓여 빙판으로 변해 있었다.

누구도 밟지 않았으니 당연히 깨끗한 얼음이어야 한다.

그런데 저기만 지저분하다는 건?

"누가 드나들었다는 증거지."

밑에 있었으면 이런 걸 찾기 어려웠을 텐데 차원벽과 그리폰의눈 스킬 덕분이다.

나는 정원으로 내려가 얼음을 긁어냈다.

강화 플라스틱으로 단단히 봉인된 입구가 드러났다.

외부의 출입을 경계했는지 밖에서는 열리지 않게 되어 있었다.

"새끼들 꼼꼼하게 해놨네."

이걸 어떻게 여나···

아니지.

굳이 내가 열 필요는 없잖아?

녀석들이 문을 열고 나오게 하면 되는데.

"인간은 도구를 써야 한다니까."

나는 동굴에서 필요한 물품을 골랐다.

점화석 가루, 휘발유, 성냥···

이것들을 환기구 안에 처넣고 불을 그어서 던져버릴 생각이었다.

"존버메타가 위험하다는 걸 가르쳐주지."

나는 밖으로 나와서 점화석 가루를 섞은 휘발유를 환기구 안으로 흘려보냈다.

콜롱콜롱 하는 소리가 끝나기 전에 성냥을 그어 안으로 휙 집어던졌다.

그러자 작은 구멍으로 불길이 확 이는 게 보였다.

점화석 두 개에다 휘발유를 두 통이나 넣어서 그리 쉽게 잡히지는 않을 것이다.

"이크."

나는 구멍에서 눈을 뗀 다음 서둘러 벙커의 입구로 내려섰다.

그리고 동굴에 들어가 풍뎅이들을 불렀다.

"발리스타 장전하고 신호하면 쏘는 거야, 알겠지?"

끄덕끄덕.

대장 풍뎅이는 최근 입주한 풍뎅이들에게서 신뢰를 얻은 상태였다.

녀석들도 이 쉘터에 만족해서 어지간한 일은 알아서 하고 있었다.

사슴벌레 이놈들이 문제인데···

나와 풍뎅이가 가꾼 텃밭이 마음에 안 든다며 씨앗을 찾으러 가야 한다고 떼를 썼다.

전생에 농부였냐고 물어보면 시치미나 떼고 말이야.

차원문에 귀를 기울이고 있으려니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불이야! 불이야아!"

"물, 물 끼얹어!"

"으아악! 불 번졌어!"

유류화재인 걸 모르고 물을 끼얹은 모양이다.

근처에 투척용 소화기가 없었나?

풍뎅이들이 달려와 볼트를 레일에 놓았다.

딩순이까지 불러오더니 끈을 입에 물려주었다.

크르르르―

녀석은 잠에서 깨어 화가 났는지 으르렁거리면서도 끈을 잡아당겼다.

장전 끝.

이제 놈이 나오기를 기다리면 된다.

마침내 벙커의 문이 열렸다.

그런데 주승철은 부하의 바로 뒤에 있었다.

"이런 젠장할 놈."

나는 곧장 차원감옥을 열었다.

"흐아악!"

부하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허공으로 사라지자 주승철은 그 자리에 덜컥 멈췄다.

"ㅆ···"

내가 신호를 내리기 전에 주승철이 옆으로 몸을 날렸다.

덕분에 발리스타를 발사할 각도가 나오지 않았다.

내 차원문을 어느 정도 눈치 채고 있는 것 같았다.

대체 어떻게 아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새끼가 진짜."

나는 리볼버로 일어서는 승철을 겨냥했다.

면벌부로 리셋했으니 한 번은 괜찮다.

타탕!

차원문을 통과한 총알 두 발이 승철의 가슴에 혈흔을 남겼다.

"끄헉!"

그는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쓰러졌다.

부하들이 놀라 다가갔고 잠시 후 믿기지 않는 일이 일어났다.

주승철이 빛에 휩싸여 사라진 것이다.

"이런 씨발."

부활 스크롤이 하나가 아니라 두 개였어?

나는 부랴부랴 차원문을 닫았다.

녀석은 차원문에 대해 알고 내가 총을 갖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런 놈을 가만히 둘 수는 없지만 나는 살인을 저지른 놈이었다.

한 번 더 살인을 저지르면 바로 살인자가 된다.

"다정이를 불러야 하나···"

하지만 내가 저지른 일에 그녀를 끌어들일 순 없었다.

젠장, 이걸 쓰고 싶진 않았는데.

나는 서둘러 무장을 갖추고 부활 스크롤을 꺼냈다.

차원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니 부하 둘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둘에 더해 주승철까지 반드시 죽인다.

"이 개새끼가!"

"나올 줄 알았어!"

덤벼드는 기세가 흉흉하기 그지없다.

투쟁본능과 야성이 동시에 활성화되며 시야가 붉게 물들었다.

내 눈을 본 부하들이 흠칫하며 뒤로 물러났다.

"호, 혹시 살인자 아니야?"

"곧 그렇게 될 거야."

나는 차원슬롯에서 롱나이프를 집고 놈들에게 뛰어들었다.

< 미친놈과 수상한 놈 - 1 > 끝

< 미친놈과 수상한 놈 - 2 >

시간이 없다.

주승철은 나에 대해 알고 있다.

부활한 뒤 경매장에 그걸 폭로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일 것이다.

물론 나는 놈이 그걸 밝히지 않으리라 생각하지만, 항상 최악을 가정하는 게 좋다.

따라서 느긋하게 차원문에 숨어 공격할 여유가 없었다.

속전속결.

나는 앞서 달려오는 한 놈을 차원벽으로 막았다.

"큭!"

그리고 동시에 다른 놈이 휘두르는 롱나이프를 롱나이프로 막았다.

카칵, 칵!

롱나이프가 서로 부딪히면서 이가 갈려나갔지만 상관없다.

내가 무식하게 밀어붙이자 남자가 엇, 하고 놀랐다.

설마 육체강화를 뛰어넘는 힘을 발휘할 줄은 몰랐겠지.

"이 새끼!"

그는 롱나이프를 옆으로 흘리고 다리를 차올렸다.

경호원 출신인가?

나는 하드스킨을 믿고 놈의 얼굴을 이마로 들이받았다.

퍽!

"끄악!"

맞은 건 둘인데 비명을 지른 건 하나였다.

남자는 콧잔등이 깨져 뒤로 튕겨나갔다.

두 스킬이 중첩되었으니 아마 뇌가 흔들릴 것이다.

물론 나도 멀쩡하지는 않아서 몸이 휘청하고 뼈마디가 찌릿찌릿 울렸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몸의 중심을 잃지는 않았다.

그거면 충분하다.

나는 누더기가 된 롱나이프를 쥐고 놈의 품에 뛰어들다시피 했다.

그는 쓰러지는 상황에서도 나를 밀어내려 노력했으나 그게 전부였다.

몸무게를 실은 롱나이프가 남자의 복부를 빠르게 파고들었다.

내 뒤에선 차원벽에 막혔던 남자가 공격을 해왔다.

"떨어져!"

나는 쓰러지던 자세 그대로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롱나이프를 배에 꽂고 쓰러지는 남자와 내게 덤벼드는 남자의 동작이 슬로우 모션처럼 보였다.

"뒤져!"

남자가 롱나이프를 휘둘렀다.

가까스로 상체를 숙여 피하자 머리카락 몇 가닥이 허공에 휘날렸다.

나는 허리를 곧게 펴며 그 반동을 이용해 주먹을 남자의 턱에 꽂았다.

퍽!

남자는 턱에 큰 충격을 받고 나뒹굴었으나 다시 일어서려 애썼다.

나름 육체파라서 내구력이 상당하군.

다른 능력자였다면 이 한 방에 치명상을 입었을 텐데.

나는 쓰러진 둘에게 에메라스 비도를 던졌다.

내 투척술은 그렇게 뛰어나진 않지만 정지된 표적을 못 맞출 정도는 아니었다.

날카로운 비도가 남자들의 몸을 파고들었고 둘은 다리와 배를 부여잡고 비명을 질러댔다.

"헉!"

"크흑!"

슬슬 끝낼 때로군.

나는 차원슬롯에서 에메라스 창을 꺼내 턱을 꽂은 남자에게 투척했다.

그는 고통에 신음하는 상태에서도 창을 피했으나 추가로 날아오는 비도를 막을 순 없었다.

"끅!"

남자는 이마에 비도를 꽂고 천천히 뒤로 넘어갔다.

남은 건 배에 롱나이프를 꽂은 저 놈이다.

나는 그의 이마를 발로 밟고 롱나이프를 잡아 지긋이 힘을 주었다.

"끄아아악!"

남자가 롱나이프의 칼날을 잡고 발버둥치자 핏물이 주르륵 흘러나왔다.

「50포인트를 획득했습니다」

「50포인트를 획득했습니다」

빼도 박도 못하는 살인 두 건.

시야가 살인자의 그것으로 바뀌고 새로운 스킬이 등록되었다.

토공에게 목토시를 줘서 스킬칸을 비우지 않았으면 마비독저항이 삭제될 뻔했다.

두근, 두근, 두근.

심장소리가 격한 가운데 나는 차원문을 열어 딩고와 딩순이를 불러냈다.

시간이 없다.

"···니들 근처에 있다가···잠시 시간만 벌어줘, 무슨 말인지 알지?"

녀석들은 낑낑대며 내 냄새를 맡고 얼굴을 핥았다.

아직은 안 죽었다니까.

뭐 곧 죽을 예정이지만.

나는 늑대 두 마리를 달래 다른 곳으로 쫓아 보냈다.

이제 슬슬 주연이 등장할 차례인데.

피에 절은 롱나이프를 뽑자 마침내 그가 나타났다.

그는 나를 향해 손가락으로 총을 쏘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능력 봉쇄 메시지가 나타났다.

십여 개나 되는 스킬이 일제히 봉쇄당했고 스탯이 대폭 너프되었다.

마지막으로 특성이 봉쇄되었다는 메시지가 떴다.

상태창을 보면 떡이 되어 있을 것이다.

"내가 쏜 총은 어때? 살인자 김밥조아씨."

"···효과 죽이네. 거기 있지 말고 내려오지 그래?"

그는 담장에 엉덩이를 걸치고 있다가 피식 웃곤 내려왔다.

"뭐 소원대로 해주지. 가까이서 얼굴 좀 보고 싶으니까."

아직이다. 조금 더 가까이 와야 한다.

나는 극심한 피로감에 롱나이프를 쥔 손에서 힘을 풀었다.

능력이 봉쇄되다 보니 이런 것도 무겁게 느껴졌다.

"그래서 구경한 감상은 어때?"

"내 부하들 처리하는 솜씨도 그렇고, 특성도 그렇고···"

그는 내 앞에서 멈췄다.

지금 그걸 꺼내고 싶지만 스탯에서 승철이 우위였다.

자칫 잘못하면 역공당한다.

여기서는 시간을 조금 끌어야겠군.

"제법 쓸 만해. 시건방진 내 부하들보다는 훨씬 나아."

"리더십이 충분하지 않았던 모양이지?"

"그게 아니고, 아무래도 나는 전투계가 아니다보니 많이 내줄 필요가 있었던 거지. 뭐 죽었으니 상관없나? 참 아쉬워. 너도 죽여야 하니까."

"살려주면 안 되나? 부하가 될 수도 있는데."

승철은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게 불가능하다는 건 너도 알잖아? 아공간에 뭐가 있는 줄 알고 받아줘? 그냥 죽이는 게 낫지."

"하긴 그렇지···"

내가 쓸쓸하게 고개를 떨구자 그는 득의만면하게 웃었다.

"하하, 걱정 마. 나중에 니가 죽으면 스탯은 유용하게 써줄 테니까."

"그건 무슨 소리지?"

"능력 봉쇄를 건 대상이 죽으면, 스탯 중 하나가 플러스 되거든. 지금까진 1 올랐는데 너 정도면 2 오르겠지."

"스탯을 흡수···하는 건가? 하지만 너도 살인자가 될 텐데?"

"내가 아니라 부하가 죽이는 거야. 능력 봉쇄를 건 상대가 죽으면 스탯이 들어온다고. 이제 이해하겠냐?"

그게 추가효과 중 하나였군.

"하 존나···"

"사실 난 니 능력을 알자마자 경매장에 알리고 싶었어. 세상엔 김밥조아를 회뜨고 싶어하는 놈이 참 많잖아? 근데 안했어, 왜인지 알아?"

"왜?"

그때 승철의 표정이 확 바뀌었다.

"어차피 나한테 붙잡혀 고문당하다 죽을 놈이니까. 넌 나를 죽였어, 이 씨발새끼야."

"부활 스크롤이 두 개나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어."

"하나는 선물 받은 거야. 너 같은 놈은 상상도 못할 곳에서."

"그게 어딘데?"

내가 물었지만 그는 나를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토공인가 하는 개새끼도 내 등에 칼찌를 놨지···그 때만 생각하면···"

그는 희열에 몸을 떨며 나를 똑바로 노려봤다.

"너도 토공도 절대 쉽게 죽이지는 않을 거다. 인간의 생명력이 얼마나 질긴지 시험해 볼 참이야. 겸사겸사 아공간에 있는 것도 뜯어내야지. 아주 쪽쪽 빨아먹어주마."

그건 내 주특기인데.

"···"

나는 잔뜩 긴장한 연기를 하며 뒤로 물러났다.

승철이 수중에 든 롱나이프를 바로 쥐고 다가왔다.

잔뜩 흥분해서 그런지 심장소리를 들어서 그런지 담장에 늑대 두 마리가 올라온 걸 모르는 것 같았다.

"알아서 살인자가 되어주니 참 고마워. 내 손으로 죽이고 싶진 않으니까 얌전히 굴어."

"싫은데?"

"뭐, 팔 하나 정도로는 안 죽겠지."

그때 딩고와 딩순이가 담장에서 점프했다.

둘은 꽤 긴 거리를 뛰어넘어 순식간에 승철을 덮쳤다.

그는 늑대 두 마리에게 깔려서는 욕설을 내뱉었다.

"개새끼들이!"

깨갱!

주둥이를 들이밀던 딩고가 녀석의 주먹에 맞아 나가떨어졌다.

딩순이는 꽤 위협적으로 어깨를 물어뜯어 피범벅으로 만들고 뒤로 물러났다.

"저리 꺼져!"

그는 롱나이프를 휘두르며 겨우 일어섰다.

나는 준비했던 무기를 그의 가슴팍에 겨누었다.

"···뭐야."

승철은 경찰용 리볼버를 보고 어이없는 표정이 되었다.

"철사···"

탕!

그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약실이 회전하며 화약을 폭발시켰다.

커다란 충격에 리볼버가 분해되었으나 총알은 멀쩡하게 승철의 머리로 향했다.

"···"

그걸로 끝이었다.

승철은 이마에 구멍이 난 채 멍하니 나를 쳐다봤다.

"너···어떻게···"

"30분 정도는 버티더라고. 그래서 한 방은 버텨줄 거라 생각해서 미리 꺼내놨어."

"씨···"

그는 욕설을 내뱉지 못하고 쓰러졌다.

빙판이 시뻘건 선혈로 물들었다.

"세 장은 없는 모양이군."

두 장을 구한 것만으로도 기적에 가깝다.

나는 상상도 못할 곳에서 선물 받았다는데 대체 어디인지 궁금했다.

그건 그렇고 다정이 올 시간이 됐는데···

근처에 있다면 심장소리를 들었을 테니 곧 나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미안하지만 그녀에게 부탁해야겠군.

마침내 다정이 덩치 구울의 어깨에 탄 채 담장을 넘어왔다.

그녀는 빙판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아 있는 나와 시체를 보곤 대강 짐작을 한 모양이었다.

무엇보다 크게 들리는 심장소리가 그것을 증명한다.

"성호야."

나는 그녀에게 피범벅이 된 손을 들어보였다.

"총이 박살나서 손 다쳤어. 힘이 안 들어가는데 대신 부탁해."

"···알았어."

다정은 말없이 롱나이프를 손에 쥐고는 내게 다가와 키스했다.

"부활하면 더 찐한 거 하자."

"하하, 막상 죽으려니까 무섭네."

롱나이프는 순식간에 내 가슴을 파고들었다.

심장이 얼어붙는 차가운 감각.

의식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

.

.

다정은 성호의 가슴에 롱나이프를 박고 뒤로 물러섰다.

잘근잘근 씹히는 입술이 그녀의 심정을 말해주고 있었다.

"빨리 사라져···"

부활 스크롤을 믿긴 하지만 자기 손으로 성호를 죽이는 기분은 가히 좋지 않았다.

하고 싶진 않았지만 피범벅이 된 손을 보니 도저히 거부할 수가 없었던 것.

살인자를 죽였기에 대량의 포인트와 스킬이 들어왔지만 그녀는 신경도 안 쓰고 성호의 시체가 사라지는 걸 지켜봤다.

뭐, 부활하긴 한 모양이다.

다정은 한숨을 내쉬며 손가락을 튕겼다.

"성호 데려와."

덩치를 제외한 휘하 구울이 전부 출동했다.

그녀는 성호가 준 어그부츠를 까딱거리며 그를 기다렸다.

'진작 죽였으면 이런 일이 없잖아.'

뭐 그리 알고 싶은 게 많은지.

이번에 돌아오면 잔소리를 좀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좀 늦다?

다정은 쪼그려 앉아 기다렸지만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적당히 시간이 됐는데?

다정은 살짝 당황해 덩치의 어깨 위에 올라 담장을 넘었다.

그녀의 구울들이 주변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아직도 못 찾은 거야?"

설마 성호가 헤매는 건···아니다.

그녀는 차원벽으로 하늘에 올라가 정찰하던 그를 떠올리곤 고개를 저었다.

뭔가 잘못됐다.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다정은 건물 하나하나를 뒤지고 다녔지만 성호를 볼 수 없었다.

"지금 장난하는 거지? 응? 그렇지?"

몇몇 생존자가 구울과 마주치는 바람에 전투가 일어났다.

승철을 백업하러 온 놈들이다.

다정은 얼굴을 굳히곤 신경을 집중해 그들을 쫓아냈다.

그리고 10분, 20분 쯤 지났음에도 성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다정은 절망감에 사로잡혀 미친 듯이 주변을 쏘다녔다.

"야! 빨리 나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다녔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설마 다른 지역에서 부활한 건가 해서 경매장에 코멘트를 올렸지만 그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서, 설마···아니야, 그럴 리가···"

다정은 결사적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에게 칼을 꽂은 것은 자신이었다.

하지만 그가 죽었다는 걸 믿고 싶지 않았다.

"부활 스크롤 갖고 있었잖아···빨리 나오라고···"

차가운 바람이 다정의 긴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다정은 서서히 무릎을 꿇었다.

"내가···내가 죽인 거야···"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

.

.

"···"

나는 부자연스러운 느낌에 눈을 떴다.

여기가 어디지?

스크롤을 갖고 있으면 근처에서 부활하는 건줄 알았는데···

온 몸이 두들겨 맞은 듯 아팠고 무력했다.

나는 억지로 힘을 넣어 몸을 일으켰다.

"푸하!"

머리를 휘휘 흔들고 나니 그제야 악취가 느껴졌다.

코가 비뚤어질 정도의 엄청난 악취였다.

"윽···"

순간 현기증이 닥쳤고 나는 물에 얼굴을 처박았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몸을 가누기가 쉽지 않았다.

"씁···"

정신을 차리고 일어서니 절로 눈이 커졌다.

여긴 옹달샘 아닌가?

"희한하네···"

현실이 아니라 숲에서 부활한 이유가 뭔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그리고 옹달샘의 물이 시커멓게 변한 까닭도.

"으···"

나는 진저리를 치며 더러운 옹달샘에서 걸어 나왔다.

주변을 살피니 예전에 숲에서 발견한 옹달샘이 맞았다.

꿈을 꾸는 듯한 환상적인 풍경은 어디 가고 시커멓게 오염된 물이 나를 반겼다.

"혹시 부활 스크롤이···"

주머니를 뒤지니 놀랍게도 두 장 다 있었다.

물에 젖었지만 양피지라 잘 말리면 될 것이다.

그나저나 왜 이렇게 아프고 힘이 없는 걸까.

능력 봉쇄가 풀렸으니 원래대로 돌아와야 되는데.

나는 상태창을 불러내곤 기겁했다.

"이게 뭐야."

「레벨:24 포인트:0

건강:6 근력:6 민첩:5 재주:5 인지:4

특성:전용 차원문 개방

스킬:마비독저항2, 투쟁본능, 가벼운발걸음, 진실을보는눈, 죽음의낙인, 하드스킨2,그리폰의눈, 단호한일격, 치명적인일격, 야성, 냉기저항, 수중호흡효과:부활 후유증」

포인트가 0이 되었고 스탯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효과란에 있는 부활 후유증으로 약체화와 탈진이 동시에 적용된 건가 싶었다.

나는 밑의 메시지창으로 눈을 돌렸다.

「부활 시스템 오염됨」

「13560포인트로 1분의 부활시간과 3시간의 부활 후유증 적용」

"설마 이거···"

포인트를 제물로 해서 옹달샘이 날 살려낸 건가?

죽음을 옹달샘이 받아내서 오염된 거고?

포인트가 많이 소모된 덕분에 부활시간과 부활 후유증에 적용된 시간이 짧은 것일까.

나는 허탈함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걸 다행이라고 봐야 하나···"

부활 스크롤을 아꼈지만 대신 옹달샘이 오염되었고 포인트가 몽땅 증발했다.

포인트는 다시 모으면 되지만 옹달샘은 되돌릴 방법이 있을까 의문이었다.

나는 악취가 풍기는 옷을 벗고 조심조심 쉘터로 돌아왔다.

다행히 몬스터는 없었고 풍뎅이들이 나를 보곤 깜짝 놀랐다.

주인 어떻게 된 거야? 하고 묻는 눈이었다.

"사정이 좀 있어. 철조망 좀 옮겨주지 않을래?"

풍뎅이 전체가 달라붙어 철조망을 옮겼다.

나는 거의 기다시피 해 해자를 넘고 쉘터 안에 들어갔다.

"후우···고마워."

거의 실신한 채 쓰러져 있으려니 사슴벌레들이 다가왔다가 달아났다.

나는 그들에게 사정을 설명했다.

"사실은, 죽었다가 되살아난 거야. 나대신 근처에 옹달샘이 오염됐고."

풍뎅이들은 그렇구나···하며 머리를 끄덕였지만 사슴벌레들은 달랐다.

화들짝 놀라더니 내게 기어와 옹달샘을 찾는 그림을 그렸다.

"어디에 있냐고? 여기서 멀진 않은데···"

일단 씻고 보자.

나는 비틀거리며 일어나 동굴에서 몸을 씻었다.

새로 옷을 걸치고 보니 다정이 생각났다.

지금쯤은 날 찾고 있을 텐데.

나는 간단한 장비만 챙기고 차원문을 열었다.

"다정···어디 간 거야."

빙판에는 싸늘하게 얼어붙은 세 명의 사체뿐이었다.

나는 주변을 돌며 다정을 찾았다.

구울이 많이 몰려 있는 곳에 가보니 그녀가 무릎을 꿇고 울고 있었다.

"너 왜 우냐?"

"어?"

다정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렸다.

도저히 믿지 못하겠는지 눈이 부릅떠져 있었다.

"너, 너···어, 어떻게 된 거야? 난 죽은 줄 알았는데···"

"죽었지. 니가 칼로 쑤셨잖아?"

"그, 그랬지."

"근데 숲에서 살아나더라고. 부활 스크롤이 아니라 무슨 시스템이 적용된 모양이야. 오염된 옹달샘에서 일어났거든."

"···진짜?"

나는 두 팔을 벌렸다.

"봐. 옷이 다르잖아. 냄새가 나서 씻고 갈아입은 거야."

"···"

그녀는 재빨리 내 전신을 훑어보곤 울 듯 말 듯 한 얼굴이 되었다.

"설마 죽었다고 생각하고 울고 있었어? 맨날 나한테 박고 싶다던 오리궁뎅이 답지 않은데."

다정은 갑자기 내 목을 껴안고 진하게 키스하더니 밀었다.

나는 그녀의 힘을 버티지 못하고 바닥에 상체를 뉘였다.

"야야, 나 지금 힘없어. 부활 후유증 때문에 능력치 완전 떡락했어. 몸도 아프고."

다정의 눈이 요사하게 빛났다.

"그럼 내가 뭘 해도 못 막겠네?"

이거 괜히 말했나 보다.

< 미친놈과 수상한 놈 - 2 > 끝

< 미친놈과 수상한 놈 - 3 >

긴 시간이 지난 후, 나는 뻐근한 허리를 주무르며 그녀에게 설명했다.

"···이렇게 된 거야."

차원문 안의 숲에 옹달샘이 있는데 거기 부활 기능이 숨어 있었다는 것.

다정은 이해가 안 되는지 눈썹을 찌푸렸다.

"숲에 그런 게 있었다고? 그럼 부활 스크롤은 뭐야?"

"그건 별개야. 자 봐, 부활했는데도 멀쩡하지?"

내가 스크롤 두 장을 내밀자 그녀는 반신반의하며 만졌다.

"신기하네···그러니까 그 숲의 옹달샘에 부활기능이 있었는데 넌 지금까지 몰랐고?"

"평범한 옹달샘인 줄 알았지···죽어봐야 알 수 있는데 지금까지 죽질 않았으니까."

"왜 오염됐는데?"

"들어봐. 내가 처음 차원문 안의 숲에 들어갔을 때 옹달샘을 발견했단 말이야. 그 땐 정말 깨끗했어. 여기가 동화 속 숲인가 착각할 정도로."

"그런데 죽은 뒤에는?"

"시커멓게 오염됐지. 내 죽음을 옹달샘이 받아낸 거야. 대신 나는 포인트가 증발했고, 부활 후유증으로 골골대고···뭐야, 지금 보니까 레벨도 1깎였어."

"레벨도? 뭐야. 내가 버스해준 게 다 날아갔잖아."

다정이 투덜투덜했다.

나도 아쉬웠지만 부활 스크롤을 아낀 대가라고 생각하면 수긍이 간다.

요컨대 옹달샘의 부활 기능은 부활 스크롤과는 별개인 것이다.

"부활 스크롤은 그냥 떼놓고 생각하자고. 난 이걸 갖고만 있었지 쓴 적이 없어."

다정은 가만히 생각하다 이마를 찌푸렸다.

"그럼 넌 죽어도 차원문 안에서 부활할 수 있다는 말이네? 스크롤 없이?"

"앞으로는 모르지. 내 죽음을 옹달샘이 받아내고 오염됐으니까. 원래대로 되돌릴 수 있는지 없는지는 나도 몰라."

사슴벌레들이 뭔가를 아는 것 같지만 일단은 그렇다는 얘기.

다정은 턱을 괴고 나를 쳐다봤다.

"밸런스 실화니? 왜 너만 그런 기능 갖고 있는 거야. 플레이 시간은 얼마 차이 안 나는데."

"내 생각엔···운이 좋았던 거야. 숲 대신 다른 곳에 차원문이 열렸다면 어땠을까? 완전 개고생 했을 걸."

"운이 좋군···은 개뿔 깊은 산 속 옹달샘을 니가 더럽혔어."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다. 나도 나름 대가 치른 건데."

포인트가 많았기에 망정이지 적었다면 한참 후에 부활이 됐을 수도 있었다.

하여튼 스크롤 아낀 대가로 복구할 게 세 개나 생겼다.

레벨과 포인트, 그리고 될지 안 될지도 모르는 옹달샘까지.

물론 이 모든 걸 하기에 앞서 주승철의 벙커부터 털어야 한다.

나는 천천히 일어서서 창밖을 바라봤다.

"주승철 그놈이 부른 인원들은 다 쫓아냈다고 했지?"

"주위엔 우리밖에 없어. 뭐 또 숨어있는 놈이 있는지도 모르지만."

"원래는 세뇌 특성 가진 놈까지 죽이려고 했었거든. 그런데···"

"벙커에 틀어박혀서 어렵다?"

"난리친 거 확인했을 테니 더 안 나오겠지. 승철이 벙커나 털자."

다정이 내 옆구리를 콕콕 찔렀다.

"니가 제일 즐거워하는 시간이네."

"이번에는 더 그래. 안에 뭔가 재미있는 게 숨겨져 있을 거라서."

그녀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긴 주승철 걔 뭔가 숨기는 게 많긴 했어. 매일 하는 말이 그거였거든. 우리 벙커에 오면 가르쳐 준다고."

"그래서 뭐 얼마나 대단한 거 갖고 있었는지 확인하자고."

"좋아."

우리는 구울을 앞세워 승철의 벙커로 자리를 옮겼다.

사체는 어느새 눈에 반쯤 뒤덮여 있었다.

다정은 사체를 바라보며 씁쓸해 했다.

"하여튼 김밥조아하고 얽히면 안 된다니까."

"매일 나 욕하는 경매장 애들한테 이거 보여주고 싶네. 죽여 버리기 전에 그만하라고."

"더 신나서 욕할걸? 익명이잖아."

"나한테는 익명이 아니야. 스킬로 다 확인했거든. 나중에 아이디하고 이름 알아내면 조지려고 기록해놨어."

"으와···너 진짜 지독하다."

"그걸 이제 알았어?"

익명을 앞세워 날 욕한 놈들과는 상종할 생각 없다.

덩치 구울이 입구를 열었고 우리는 안으로 들어갔다.

"다 탔으면 안 되는데···"

"니가 불냈으면서 무슨 소리야."

염려와는 달리 벙커의 대부분은 멀쩡했고 환기구 주위만 검게 탄 상태였다.

창고를 확인해보니 과연 엄청난 물자가 쌓여 있었다.

다정이 팩으로 포장된 스팜을 보곤 혀를 내둘렀다.

"이 비싼 걸 이렇게 많이 비축했네···"

"재벌이잖아. 이런 거쯤은 푼돈이겠지."

스팜뿐만 아니고 전투식량과 비스킷, 건조야채, 피클 등 양이 어마어마했다.

진짜 중요한 건 이런 게 아니지만 일단은 챙겨야지.

나는 차원문을 열고 식량과 식수를 쉘터에 집어넣었다.

다정은 스팜을 던졌다가 툭 튕겨나가는 걸 보곤 투덜거렸다.

"도와주려고 해도 도와줄 수가 없네."

"괜찮아. 자주 해서 익숙해."

그런데 이 창고, 장난이 아니다.

1층만 있는 줄 알았는데 구석을 살펴보니 지하로 내려가는 문이 있었다.

다정이 발광석을 들고 내려가더니 환호성을 내질렀다.

"우와! 여기 쌀하고 밀가루 엄청 많아!"

"다른 것도 있어?"

"가루로 된 건 다 여기 모아놨나 봐!"

재벌이었으니 창고도 그만큼 크게 만들었겠지.

직접 내려가 보니 과연 다정이 놀랄 정도의 양이었다.

곡물을 포함해서 설탕과 소금, 각종 조미료도 상당히 많았다.

꼼꼼하게 밀봉처리를 해놔서 상당히 오래 갈 것 같았다.

내가 물자를 옮기는 동안 다정은 내려가면서 환호성을 질렀다.

"밑에 말린 채소하고 과일 장난 아니야! 세상에! 고기하고 생선도 있어!"

수분을 완전히 제거하고 탈산제를 투입해서 진공포장을 해버리면 보존기한이 엄청나게 늘어난다.

확실히 주승철은 상당히 체계적으로 준비를 해왔다.

"게임을 많이 하진 않은 것 같은데···"

그는 어떻게 종말이 올 줄 확신하고 벙커와 물자를 비축했을까?

부활 스크롤을 선물 받은 것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여튼 나는 창고를 탈탈 털었다.

"마트를 통째로 넣어놨나."

워낙 물자가 많아서 쉘터를 또 확장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이거 다 먹을 수 있을지 모르겠네···"

식량이 썩지 않는 아공간이라도 있으면 참 좋을 텐데.

나는 진공포장된 고기와 생선을 뜯어 딩고와 딩순이에게 먹였다.

큰 일 했으니 많이 먹어라.

벙커엔 이 외에도 각종 물자가 상당히 많았다.

생필품은 물론이고 포인트로 구입한 무기류가 눈에 띄었다.

"롱나이프만 세 자루네."

부서졌는데 잘 됐군.

나는 벙커의 모든 것을 쉘터로 날랐다.

몇 시간쯤 그렇게 하니 심신이 지쳤다.

"휴우···"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보안문이었다.

덩치가 보안장치를 뜯어버리자 책상 위의 작은 금고와 바닥의 문이 눈에 띄었다.

"우와, 이거 다 금이야."

다정이 금모래를 만지며 즐거워했다.

금고 안쪽엔 종이가 몇 장 들어 있었다.

그런데 이거···심상치 않다.

―김밥조아, 플레이시간 5541시간, 확장팩 미지의 괴물들까지 플레이. 데스매치 103회, 배틀로얄 25회, 대미궁 85% 공략, 살인자 플레이 105시간···

옆에서 본 다정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거 너 게임기록이잖아."

"···"

어떻게 된 게 내 기록보다 더 자세할까.

나뿐만 아니라 석현과 다정, 그리고 검인의 것까지 세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다른 종이엔 종말의 날짜와 정부의 대처, 행동방안 등이 낱낱이 적혀 있었다.

또한···

"고인물 4인방 위치 추적 실패···또 다른 정보 제공자 위치 추적 실패···이건 지만이를 말하는 건가 보네."

"지만이? 돝섬에 있는 불쌍맨 말하는 거지?"

"어. 걔가 그랬거든. 정부에 연락하니까 양복 입은 무서운 아저씨들이 찾아왔다고."

"얘네들도 모든 걸 알고 있는 건 아니네?"

"그렇지···모든 걸 알고 있다면 지만이를 필요로 하진 않을 테니까."

그의 특성이 필요했을 수도 있었다.

게임에선 특성이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나는 책상을 뒤져서 종이를 더 찾아냈다.

"이건 반드시 포획해야 될 사람들 목록이고···"

"헐, 죽여야 할 사람도 있네."

"철사병이 사라진 뒤의 구체적인 행동요령···아주 체계적으로 준비했구만."

마지막으로 정부 쉘터를 장악하고자 하는 노력도 엿볼 수 있었다.

다정이 들어가기 전까지는 그럭저럭 잘 되었던 모양이다.

그녀와 석현이 들어가고부터는 뭔가 삐걱거린다는 걸 느꼈고.

나에 대한 평가는 적나라했다.

―김밥조아. 20대, 혹은 30대로 추정.

―아공간 능력자로 추정되며 조심스럽고 의심이 많음.

―어지간하면 선공을 걸지는 않지만 전투를 피하지는 않음.

―냉혹하며 욕심이 많음.

―덩치가 상당히 크고 누군가의 도움을 받고 있는 것으로 보임.

―토끼공듀와 접촉한 후 서울로 상경.

―정부 쉘터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음. 아마 봉인된 총기류 때문인 것으로 보임.

―아공간 능력은···

―반드시 협력, 세뇌, 척살해야 할 대상.

이 자식들 보게.

"너보다 널 더 잘 아는 것 같은데?"

"···그러게."

주승철에게 부활 스크롤을 선물로 준 세력이 확실했다.

서버의 기록을 알고 있는 걸로 봐서 대단히 위험한 놈들이었다.

"게임 기록까지 아는데 왜 우리 정보는 모르지? 신상 말이야."

"흐음···한국에 대해선 잘 모르는 거 아닐까?"

"전에 그거 기억 나? 여의도 총격사건."

다정은 이마에 손가락을 대더니 아, 하고 말했다.

"기억나. 그거 완전 묻히지 않았어? 국회의원들이 막 날 세우고 대정부질문 하고 그랬는데."

"대통령이 나한테 그러더라고. 지휘관들 불러서 확인했는데 아니더라고. 총기를 반입해서 서울 한복판에서 총격전을 벌일만한 세력이 있었다는 거야."

"주승철에게 선물을 준 놈이라는 거네?"

"아마도 적일 확률이 높겠지."

"우리의."

고개를 끄덕거린 후 바닥의 문을 여니 시커먼 구멍이 드러났다.

나는 밑으로 내려가 콘크리트 덮개에 낙하산 줄을 여러 개 꼬아 묶었다.

다정이 그걸 덩치에게 건넸다.

"끌어."

영차영차.

힘 좋은 구울 여러 마리가 콘크리트 덮개를 끌어올렸다.

그런 식으로 몇 개의 덮개를 치우니 구멍이 보였다.

다정이 돌멩이를 던지고 숫자를 세었다.

몇 초 후에 작은 소리가 들렸다.

"200미터도 안 되겠는데?"

"그래?"

이거 왠지 불길한데.

겨우 200미터로 철사병을 막을 수 있나?

정부 쉘터는 500미터를 팠다는데 여긴 준비가 부족했나 보다.

나는 로프를 길게 엮어 덩치 구울의 몸에 묶고 구멍 속에 넣었다.

바닥까지 내려가 발광석을 꺼내자 놀라운 광경이 나를 반겼다.

"흠···"

러시아제로 보이는 권총과 산탄총, 소총 몇 자루와 탄박스가 바닥에 깔려 있었다.

7.62mm 탄박스를 까보니 짙은 녹색의 깡통에 러시아어가 가득했다.

"깡통 하나에 500발은 들어 있겠지?"

2개가 탄박스에 들어가 있고 그런 탄박스가 5개이니 최소 수천 발은 된다는 소리다.

"그렇게 많지는 않네···"

양이 이것밖에 안 된다는 게 이상했다.

재벌이 마음먹고 비축했으니 작은 방 하나를 가득 채울 정도는 되지 않을까 했는데.

"쩝."

나는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총기와 탄박스를 동굴에 넣었다.

로프를 잡고 올라가니 다정이 들뜬 표정을 하고 있었다.

"총 많아? 내 구울들에게 들려줄 정도 돼?"

"얼마 없었어. 총 6정하고 탄박스 5개."

들뜬 표정이 실망으로 바뀌었다.

"겨우 그거뿐이야? 나한테 거짓말하는 거 아니지?"

"너하고 석현이한테는 거짓말 안 해."

"흠···역시 그렇지?"

그녀는 만족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벙커는 다 털었으니 나갈 차례다.

여기를 임시 쉘터로 하고 싶었지만 근처에 적대적인 벙커가 많아서 말이지.

그들을 모두 죽이는 건 어려우니 사라지는 수밖에.

우리는 벙커를 뒤로 하고 눈썰매를 탔다.

.

.

.

둘이 한남동 부촌에서 난리를 치고 있을 무렵.

석현은 빠르게 한강을 가로질러 정부 쉘터로 돌아왔다.

하지만 입구는 굳게 닫혀 있었다.

그는 주먹으로 쿵쿵 두드려 담당자를 호출했다.

"무슨 낯짝으로 돌아왔습니까?"

담당자가 아니라 대통령이 그를 맞았다.

석현은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수상한 놈하고 같이 꺼져줬으니 쉘터엔 이득이잖아?"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당신이 룰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행동했다는 것 자체입니다. 황석현씨, 당신을 들여보내면 쉘터 인원들이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나도 그걸 무마할 순 없어요."

"잠깐만요, 잠깐만요."

그때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건 배검인인가?

석현은 관에 귀를 대어 둘의 대화에 집중했다.

"대통령님, 좋게 생각합시다. 토공 말대로 정체를 숨기고 있던 놈이 사라졌잖습니까. 앓던 이가 빠진 격 아닙니까?"

"앓던 이를 빼기 위해 환자의 머리를 의자로 내려쳤단 말입니다. 누가 그걸 용납하겠습니까?"

석현은 전에 성호의 뒤를 추적하지 말라고 협박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행동으로 옮기진 않았다.

그래서 장원택과 이범석도 불문에 붙이기로 한 것이다.

원래 범죄에는 결과가 있어야 하니까.

"검인씨도 보고 들었잖습니까? 석현씨가 언제 또 누구를 죽일지 어떻게 안단 말입니까. 저 성격에."

"안 죽일 겁니다."

"그걸 누가 보증합니까?"

"···내가 보증하죠."

석현은 깜짝 놀라 관에서 귀를 떼고 눈을 끔벅거렸다.

이 목소리가 검인의 것이 맞는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한편 쉘터 안에선 사람들이 모였다.

이범석과 오승연, 그리고 몇몇 사람이 와서 둘의 대화를 들었다.

장원택은 그들을 힐긋 보곤 검인에게 물었다.

"갑자기 왜? 친해지기라도 했습니까?"

그가 석현과 친하지 않다는 건 이미 알려져 있었다.

검인은 김밥조아와 만났고, 그에게 목숨을 구원받았다는 걸 차마 말하지 못했다.

"그···런 건 아니지만, 하여튼 토공도 우리에게 도움을 많이 줬잖아요. 여기 승연씨도 계시고."

기운을 회복한 승연이 가슴에 손을 얹고 나섰다.

"저, 석현씨가 오지 않으셨다면 절망해서 죽었을지도 몰라요. 정말 고마운 분이에요."

그의 등에 업혀 쉘터로 복귀한 네 명의 사람들도 그를 두둔했다.

"사람 등에 업고 뛰는 거 절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석현씨는 그 눈보라를 헤치고 우리를 구해줬어요."

"처음 만났을 땐 조금 무서웠지만···굉장히 착한 분 같았어요."

"그냥 표현이 서투른 것뿐입니다. 석현씨는."

검인은 이 사람들 보라는 듯 살짝 물러서서 장원택의 답을 기다렸다.

이범석이 그에게 귓속말을 했다.

"다섯 명이나 빠져나가서 전력의 공백이 있습니다. 석현씨가 복귀하지 않는다면 피해가 클 겁니다."

"···"

장원택은 눈을 감았다.

사실 석현은 거의 10명분의 몫을 하고 있었다.

처음부터 없었다면 모를까, 지금 와서 전력 외로 생각하자니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리고 석현은 사람을 구했다.

다섯을 살리고 하나를 죽인 격이지만 부활 스크롤을 가지고 있었으니 진짜 죽인 것도 아니었다.

법적으로 따지면 결과가 없으니 무죄라고 할 수 있었다.

아포칼립스에서 법은 아무 효력이 없지만.

장원택은 굳은 얼굴로 문을 열었다.

밖에선 석현이 알몸으로 그랜절을 하고 있었다.

이게 무슨 짓이지?

그가 당황하는데 범석이 그에게 귀띔했다.

"젊은 사람들 사이에선 최대한의 예의를 보이는 걸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최대한의 예의라···"

장원택은 한숨을 푹 쉬고는 석현에게 다가갔다.

"사람과 사람이 대화할 때는 눈을 보는 겁니다. 일어서시죠."

석현은 몸을 뒤집어 일어났다.

그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그의 알몸을 보게 되었다.

"용서해주는 거야?"

"용서는 내가 하는 게 아닙니다. 석현씨는 분명 룰을 어겼지만 참작의 여지가 있을 것 같아 숙고의 기간을 두기로 했습니다."

"숙고?"

"두고 본다는 뜻입니다. 앞으로 얌전히 지내면 사람들도 당신을 받아들여주겠지요. 허나 또 사고를 친다면···"

"이제 사고 안 칠 거야."

"그것도 김밥조아의 지시입니까?"

이제 석현이 김밥조아와 관계가 깊다는 건 모든 사람이 알아버려서 숨길 것도 없었다.

"응."

"그는 어디에 있습니까?"

"지금쯤은 주승철을 죽이고 있을 걸."

"설마···그 벙커는 매우 튼튼합니다. 아무리 그라고 해도···"

"한 시간 뒤면 벙커를 털고 있을 것 같은데. 내기해도 돼."

장원택은 할 말을 잃었다.

대체 무슨 방법으로 콘크리트 벙커를 한 시간 만에 턴단 말인가.

역시, 그를 만나보고 싶었다.

장원택은 석현에게 말했다.

"석현씨를 받아들이는 대가로 제안 하나 하지요."

"뭔데?"

"김밥조아를 만나고 싶군요. 예전과 같은 방법은 말고, 직접 대면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가능하겠습니까?"

"이야기는 해보겠지만 기대하지는 마. 워낙 수줍은 친구라서."

수줍은 친구···

뭐, 틀린 말은 아니다.

석현은 이야기를 들을 때까지 여기 있겠다며 빙판 위에 앉았다.

검인이 그에게 모포와 옷을 가져다주었다.

"고마워."

"어, 뭐, 별 거 아냐."

검인은 울컥하는 느낌을 받으며 물러섰다.

왠지 모르지만 기뻤다.

< 미친놈과 수상한 놈 - 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