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련자의 산에 있는 수행자들이 모두 선계로 모여들었다.
"소드마스터 락투샤가 산을 침범했다는 말입니까?"
"락투샤는 흑왕의 직속 중 하나 아닌지?"
"흑왕의 직속이 수련자의 산엔 대체 왜?"
"그야, 아리아님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공격적인 침투에 수행자들은 당황하고 있었다.
종족을 불문하고 열려있는 중립의 땅.
여태껏 누군가가 악의를 갖고 공격을 해온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
"락투샤가 산을 오르고 있습니다."
"모두 락투샤가 이대로 이곳까지 닿게 넋놓고 가만히 보고만 있을 겁니까?"
"아직 사상자는 없지 않나요? 그럼 우리 수행자들이 막을 명분도 없습니다."
락투샤는 자신있게 산을 오르는 중이다.
산을 묶어둔 채로.
아무도 나가지 못하게 구류하고선 산 전체를 정복해나가고 있었다.
문제는 락투샤의 태도다.
무차별적으로 살상을 벌이면, 수행자들이 나설 근거가 되지만 락투샤는 조용히 산만 오르고 있었다.
이게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정상에 도전하겠다는 의미 아닌가?"
"설마 산의 주인이 되려고 올라오는 중이라고요?"
"지금 주인은 아리아님인데······."
가장 깊게 수련한 자가 시련 끝에 산의 주인이 된다.
수행자들은, 산의 주인을 지켜야할 의무가 있었다.
하여 락투샤가 아리아를 노리면 수행자들은 싸워야만 했다.
하지만, 산의 주인이 락투샤로 바뀐다면?
모든 수행자들의 시선이 아리아에게로 향했다.
"······."
단순히 자신을 무력으로 납치하려는 게 아니다.
지금 락투샤의 의도는 산의 정상에서 시련을 깨고 주인의 자리를 빼앗아, 아리아를 완전하게 굴복시키겠다는 의미다.
여기서 피한다면, 도전을 무서워하는 겁쟁이가 되고 만다.
'피할 수도 없겠지만.'
아리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산의 주인이 되기 위한 시련은 세 가지.
그중 마지막 시련은 이전 주인과의 순수 대결이었다.
그렇다면, 락투샤의 도전을 받아줄 수밖에.
봉인해제
마침내 락투샤가 선계에 닿았다.
"시시하군."
무혈입성.
한 방울의 피도 흘리지 않고 막힘없이 올라왔다.
락투샤를 막아서는 수행자가 단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이다.
"패기로운 놈이 하나쯤은 있을 줄 알았거늘."
쯧쯧.
락투샤가 싱겁다는 듯이 혀를 찼다.
수련자 중에서도 실력이 괜찮은 자들이 이 산에는 많다고 들었다.
그러나 자신을 막아서는 용기 있는 자도 없었다.
하기야, 당연한 일이겠지만.
자신의 전신에서 이글거리는 검은 검기를 보고서도 도망치지 않을 존재가 있을 리가.
굳이 겪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격의 차이.
가까이 다가오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히며 진절머리가 쳐질 것이니.
"······ 오호라."
헌데, 있었다.
도망치지 않는 인간 하나가.
창을 든 창잡이가 천천히 산을 오르고 있었다.
창을 쥔 자세와 보폭의 거리. 몸을 움직이는 균형을 보아 제법 실력이 있는 놈이다.
락투샤가 대검을 들고 한 차례 휘둘렀다.
꽈르릉!
우레가 치는 소리와 함께 날카롭게 쏘아진 검기가 창잡이를 덮쳤다.
*
고대 시체 까마귀.
스킬 초월로 변신한 녀석들은 상급 시체 까마귀와는 완전히 달라진 모습으로 나타났다.
뒤뚱! 뒤뚱!
일단 크기부터가 다르다.
어린아이만 한 몸집과 두툼하게 올라온 살집.
날개를 펼치자 살집처럼 보이던 품속에서 백여 마리의 시체 까마귀가 추가로 나타났다.
까악! 까악!
까아아악!
"······ 걸어 다니는 둥지냐."
족히 천 마리가 넘는 숫자.
신전을 가득 채울 만큼 그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났다.
물론, 단순히 숫자만 늘어난 것도 아니다.
까아아!
까아아!
훨씬 질서정연하다.
예전에 소환한 상급 시체 까마귀들은 질서 없이 날아다니는 느낌이었다면, 고대 시체 까마귀들은 마치 장군들처럼 자신이 품었던 시체 까마귀들을 철저하게 통제하고 있었다.
내 명령을 기다리듯 멀뚱히 시선을 주면서 말이다.
"효율적으로 저주받은 기천석을 부숴라, 까악!"
까아아아악!
명령을 내리자 고대 시체 까마귀들이 입을 벌렸다.
'음?'
그러곤 나를 향해 저주의 파동을 쏘아냈다.
주인을 공격하다니.
순간 미친 건가 싶었지만.
"고대 시체 까마귀가 '저주의 파동'을 사용합니다."
"'저주 반사(25%)'가 적용됩니다."
"'저주 유지시간 증가(25%)'가 적용됩니다."
"반사된 저주에 관통 효과(10%)가 부여됩니다."
"고대 시체 까마귀가 '저주 증폭' 스킬을 사용합니다."
뭘 하려는지 곧장 이해가 됐다.
저주의 파동을 내게 쏘아내어, 바알 투구로 한 차례 증폭시킨 그 파동을 자신의 스킬로 다시 증폭시키고 있다.
한 마디로 무한 증폭이다.
그렇게 무한히 증폭된 저주의 파동을 다시 '저주받은 기천석'에 퍼붓자.
쩌저적!
때리지 않았음에도 기천석에 금이 갔다.
본래라면 수천만 번은 때려야 가능한 일.
까마귀들과 반나절은 함께 부숴야만 가능했던 게 고작 1분여 만에 끝났다.
'······ 바알 투구의 관통 효과를 이용하고 있는 거로군.'
관통으로 인한 고정피해!
저주를 증폭시켜, 10%의 관통 효과를 극대화하여 이용한 것이다.
저주받은 기천석은 모든 피해를 면역에 가깝도록 방어해내지만, 관통에 의한 고정피해만큼은 막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똑똑한데?'
이 녀석들, 설마 내가 가진 바알 투구의 효과를 이용할 줄이야.
효율적으로 부수라는 말에 즉각 취한 행동치고는 더할 나위 없었다.
처음엔 다소 당황스럽긴 했지만 이 정도면 훌륭한 시체 까마귀 군단이었다.
'증폭된 저주를 맨몸으로 받는 게 쉽지 않기는 하다만.'
그래도 이 속도면 하루 이틀 내로 신전의 저주받은 기천석을 전부 부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신전에만 기천석이 100개가 넘게 있다.'
이렇게나 많은 저주받은 기천석을 준비해둔 이유가 뭘까?
바알이 직접 만든 신전.
틀림없이 이유가 있을 것이다.
'신전에 무언가를 봉인해둔 느낌이군.'
부수는데 한세월이 걸릴 저주받은 기천석을 신전에만 백 개 넘게 깔아뒀다.
만약 봉인을 위해서라면, 대체 무엇을 봉인했기에 이 정도의 안배를 해놓은 건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쩌어억!
쿵!
"'저주받은 기천석(20)'을 파괴했습니다."
"검 숙련도의 레벨이 27을 달성했습니다."
"백성전의 모든 성좌가 여러 가지 의미에서 경악합니다."
"백성전의 새로운 성좌 전부가 계약조건을 높인 사도 계약을 제안합니다."
"'히든 퀘스트의 보상(3)'을 거절합니다."
"더 높은 숙련도 레벨에 도전합니다!"
"'저주받은 기천석(21)'을 파괴하십시오."
그렇게 기천석 20개를 파괴하자, 어느덧 검 숙련도 레벨이 27에 도달했다.
숙련도 레벨은 특정 구간에서 경험치가 말도 안 되게 늘어나기 때문에, 올리면 올릴수록 더뎌지는 게 맞다.
"27······!"
짧게 환호했다.
애초에 내 1차 목표가 23레벨이었던 걸 고려하면 27이라는 숫자는 이미 말도 안 되는 수준이고.
수련자의 산에서 올릴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 지 오래다.
그러나 아직도 저주받은 기천석은 많았다.
'사도 계약은 뭔데 계속 하자는 거지?'
어느 순간부터 새롭게 떠오른 성좌들이 사도 계약을 제안하기 시작했다.
조건 자체가 고작해야 '황금률의 조각' 조금과 '쓸만한 스킬' 하나가 전부였기에 무시했는데, 조건을 높여가며 계약하길 바라고 있었다.
그래 봤자 크게 구미가 당기는 수준은 아니다.
'황금률의 조각 100시간 정도에 신화급 스킬 하나. 대신 벌어들이는 조각 10%를 달라?'
일반적인 플레이어라면 눈이 휘둥그레질 법하다.
그러나 나는 아니다.
여태껏 내가 벌어들인 조각만 천 시간이 아득히 넘는다.
앞으로 벌어들일 기대수익을 합치면 그야말로 밑지는 수준.
밑지는 계약을 굳이 할 필요는 없을 터.
'새로운 성좌들은 기존의 성좌들과 다른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 아마도 다른 플레이어들에게도 권유하고 있겠지.'
일종의 투자방식을 채택했다.
만약 이 계약이 성행한다면 성좌에 따른 파벌이 대두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래도 내키진 않는다.
기존의 성좌 중에서 모험의 성좌나 행운의 성좌가 권유하면 1분 정도는 예의상 고민해줄 순 있을 것 같지만.
'내게는 새로운 보상 업그레이드 셔틀일 뿐.'
어쨌든, 저 관심 자체가 내게는 이롭다.
그간의 경험으로 대략적으로나마 성좌들의 보상 메카니즘을 이해했다.
아예 안 봤다면 모를까, 한 번 보기 시작한 이상, 일정 기준을 돌파하면 보상을 업그레이드시켜줘야만 하였다.
그리고 이미 백성전의 모든 성좌가 나를 유념이 여겨보고 있었다.
즉, 아무리 해주기 싫어도 나 하기에 따라서 그들 역시도 강제될 수밖에 없다는 의미였다.
"전부 부숴라, 까악! 하나도 남겨두지 마라, 까악!"
*
툭-.
정상에 오른 락투샤가 바닥에 기절한 창잡이를 던졌다.
그 락투샤의 주변으로 백이 넘는 수행자들이 긴장한 채 둘러싸고 있었다.
"창잡이가 제법이더군. 아무리 능력을 맞춰줬다고는 하나, 내 뺨에 생체기를 남길 줄이야."
락투샤가 뺨에 난 작은 상처를 만졌다.
창잡이의 '난무'는 확실히 볼만했다.
만약 레벨이 조금만 더 높았다면 더 재밌었을 것이다.
그래서 살려주었다.
어쨌든 자신에게 '재미'를 준 녀석이니까.
"소드마스터 락투샤! 이 이상은 올라갈 수 없소!"
가장 나이가 많은 수행자가 나와서 무기를 겨눴다.
락투샤가 비웃었다.
"그래도 올라가겠다면? 날 막을 건가?"
"당연한 말을!"
"그럼 막아보거라."
"108천령진을 펼쳐라!"
108천령진.
수련자의 산에서 수행자들이 익히는 가장 고절한 연합진이었다.
본래 수련자의 산의 주인이 되려면 108천령진을 30초이상 버티는 게 첫 과제다.
108천령진의 중심부에 서면 이 세상의 것이 아닌 압박감에 서있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초월자조차도 이 진의 안에서 그들을 모두 상대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하지만 락투샤는 중심부에 선 채 어깨만 으쓱해보였다.
"부디 그 창잡이보단 더 재밌게 해주기를 바라마."
*
108명의 수행자들 전원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괴물······!"
수행자들은 락투샤를 보며 경악했다.
108천령진을 중심에서 혼자 받아낸 걸로도 모자라, 수행자들 전원을 꺾었다.
저 초월적인 검기를 당해낼 수가 없었다.
초월자도 두려워하는 108천령진이건만.
락투샤는 그렇다면 초월자도 넘어서는 초월자란 말인가?
"시시하군."
천천히 걸어나간 락투샤가 이내 정상에 섰다.
정상에 놓인 거대한 벽.
그 벽에는 수많은 검흔들이 있었다.
"아리아, 이 벽에 검흔을 남긴 자가 두 번째 시련의 통과자가 된다지?"
"······."
그 옆에서 아리아가 조용히 락투샤를 노려보고 있었다.
벽은 오직 숙련도 레벨에만 반응한다.
높은 무기 숙련도 레벨을 지닌 자만이 검흔을 남기는 게 가능하다.
락투샤가 흥미롭다는 눈빛으로 말했다.
"제일 깊은 검흔은 이건가? 검선? 오래되어보이는군."
벽의 중심부에 나있는 깊은 검흔.
처음 이 산의 주인이 된 자, '검선'이라 불리는 존재가 남긴 검흔이었다.
이 산에서 가장 강했다 전해지는 특별한 존재 말이다.
락투샤는 천천히 검흔을 매만졌다.
"아리아, 백왕의 딸아. 내가 재밌는 걸 알려줄까?"
"······."
"백왕은 너를 구할 생각이 없다. 밑에서 한참을 기다렸는데도, 아무도 안 오더군. 크람델의 사주력조차도 말이다."
락투샤는 일부러 산에 늦게 올랐다.
준비도 준비지만, 그보단 아리아를 구하려는 백왕 산하의 사주력을 잡을 생각이었다.
헌데 아무리 기다려도 사주력은커녕 개미새끼 한 마리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서 아쉬웠다.
그 유명한 사주력을 직접 절단낼 기회였는데 그러질 못해서.
"겁을 먹었겠지. 자신이 죽는 미래를 봤을 테니."
락투샤가 작게 웃었다.
백왕은 자신의 위험을 감지하는데 도가 텄다.
미래를 읽는 수준으로.
그런 백왕을 잡으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아리아를 납치하는 건 수많은 방법 중에 하나일뿐이다.
딸을 납치할 기미를 대놓고 보였음에도 사주력을 보내지 않았다는 건, 딸을 포기해서라도 자신의 안위를 살피겠다는 의도가 아니겠나.
"백왕이 너를 버린 시점에서, 너의 목숨은 사실 의미가 없다."
죽여도 그만, 죽이지 않아도 그만.
락투샤는 곰곰이 고민하다가 대검을 들었다.
"그러니 내 검이 이 '검선'의 검흔보다 얕다면 살려주마."
지이이이이이이이-!!
맹렬하게 대검에서 검기가 피어올랐다.
락투샤는 주저없이 검을 휘둘렀다.
쩌정!
한차례 크게 벽이 흔들렸고, 검선의 검흔 옆에 락투샤의 검흔이 새겨졌다.
그것을 본 락투샤가 웃어보였다.
"내가 조금 더 깊구나."
검선의 검흔보다 락투샤의 검흔이 조금 더 깊다.
이 이상 깊은 검흔도 존재하지 않았다.
자신보다 강한 자가 이 산에 없다는 의미다.
그것을 본 아리아의 두 눈이 작게 흔들렸다.
검선의 검흔보다 깊다니!
소드마스터 락투샤의 실력이 진짜라는 것이다.
요행이나 다른 요소에 의해 강해진 게 아니라 순수하게 수련한 힘이 검선을 뛰어넘는다는 뜻이었다.
"백왕의 딸, 불세출의 천재라 불리는 기재여. 부디 나를 재밌게 해다오."
*
처음부터 상대가 되지 않았다.
락투샤는 하늘 밖의 하늘이었다.
그의 검술은 진짜였고, 비슷한 체급으로 상대해줬음에도 역부족이었다.
한 마디로, 유린당했다.
장난감처럼 락투샤는 아리아를 갖고 놀았다.
백왕과 다른 길. 단순한 짐승으로서의 길이 아닌 검의 길을 걷고자 했고, 자신의 넘쳐나는 재능에 취한 것도 사실이었다.
"확실히 재능은 있으나, 부족하다. 내 성에는 차지 않는군."
그러나 그것도 락투샤 앞에선 무용지물이었다.
락투샤가 대검을 들었다.
약속대로 죽이기 위함이다.
"음?"
쓰러진 아리아의 명줄을 끊으려던 순간.
락투샤는 고개를 갸웃했다.
쿠릉!
쿠르르릉!
산이 급격하게 흔들린 탓이다.
흔들림은 빠르게 커져갔다.
콰르르릉!
쾅! 쾅! 쾅!
이내 지진이 나며 산이 갈라지고 있다.
그리고 산의 갈라진 틈에서 무언가 거대한 것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거대하고, 압도적인 무언가가.
그것을 본 락투샤가 인상을 구기며 말했다.
"······ 뭐냐, 저건."
*
"'저주받은 기천석(100)'을 파괴했습니다."
"'신전의 봉인'이 풀리기 시작합니다."
"'사흉'이 깨어납니다!"
"······?"
사흉
······ 뭐냐 이건.
저주받은 기천석 100개를 파괴하자 떠오른 메시지.
신전의 봉인이 풀리며 사흉이 깨어났다는 말이었다.
'이 기천석들이 다 봉인석이었다고?'
나를 위한 안배가 아니라, 사흉을 가두기 위한 봉인석이라니.
그런데 사흉은 먼 옛날 전부 토벌당하지 않았던가?
'이 신전은 봉인이 아니라, 부활을 위해 만들어진 장소다.'
신전에 놓인 수많은 바알의 석상들.
그것들은 '나쁜 것'을 '가두고자' 만들어진 게 아니라 누가 보더라도 '기리고자' 세워진 것이었다.
사흉을 숭배하는 무리가 사흉의 부활을 위해 만든 신전이라는 뜻이다.
아니면 바알 본인이 세웠을 수도 있고.
뭐가 됐든,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임은 확실하다.
"봉인의 해제가 완전하지 않습니다."
"봉인의 해제가 완전하지 않습니다."
"봉인의 해제가 완전하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떠오르는 문구들.
100개의 기천석을 부쉈지만, 아직 신전 내부에는 저주받은 기천석이 20개쯤 남아있었다.
'남은 기천석을 전부 부수면 완전하게 부활하는 건가?'
정상적인 경우라면 여기서 멈추는 게 맞다.
사흉의 부활이라니.
그 전승이 절반만 맞아도 재난이 따로 없다.
하물며 부활한 사흉을 내가 따로 조종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 불완전한 상태로 부활시키는 게 그나마 더 큰 재해를 막을 방법이리라.
'숙련도 레벨이 아쉬운데.'
문제는 내 숙련도 레벨이다.
남은 20개를 부수면, 레벨을 한 단계 더 올릴 수 있을 것 같다.
게다가 기천석을 부순다고 완전하게 부활하리라는 확신도 없었다.
'남은 기천석을 마저 부수는 게 나을 수도 있다.'
기천석에는 바알이 담아둔 막대한 숙련도 경험치가 존재한다.
그것을 단순한 미끼로 사용하려고 담아뒀다는 건 어불성설, 말이 안 된다.
그러기엔 너무나도 막대했던 탓이다.
부활한 사흉 본인이 사용하려고 담아뒀을 가능성이 오히려 더 크다.
'나를 제외하면, 기천석에 담긴 숙련도 경험치를 전부 활용할 수 있는 존재가 있을 리가 없지.'
기천석을 부순 자가 아무리 많은 숙련도 경험치를 먹어봤자 한계가 있다.
30의 맥스 레벨을 보유한 클래스가 이 세계에 몇이나 되겠나.
생각을 달리한다.
만약 여분의 경험치가 부활하는 사흉에게 전달되는 방식이라면?
미끼임과 동시에 부활의 재료라면?
'남은 저주받은 기천석의 표면이 벗겨지고 있다. 경험치가 사흉에게 흘러 들어가고 있는 거다.'
내 생각을 뒷받침해주듯 남은 20여 개의 기천석에 변화가 생겼다.
표면이 벗겨지고 갈라지며 그 틈에서 새 나온 숙련도 경험치가 부활한 사흉을 향해 흐르기 시작하는 것이다.
쿠릉! 쿠르릉!
신전이 흔들린다.
신전 또한 무너지고 있었다.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
이제, 결정을 내릴 시간이었다.
부수거나, 부수지 않거나.
머리가 빠르게 돌기 시작했다.
*
구미호 흑요는 100여 명의 사람을 수련자의 산에 풀었다.
그중 일곱을 흑요가 직접 조종하고 있었다.
그녀가 가진 구미호의 아홉 꼬리는 아홉 명을 직접 조종할 수 있는 능력.
하지만 도저히 산에 올라갈 수가 없었다.
'빌어먹을 락투샤! 혼자서 올라갔다고?'
소드마스터 락투샤가 혼자서 산을 정복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를 따르던 괴물병단은 다른 자들이 산을 오르고 빠져나가는 것만 막고 있었다.
그래서 이도 저도 못하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이러면 백왕의 딸과 팬텀을 찾을 수가 없잖아!'
락투샤가 괴물병단과 함께 산을 총공격하면, 정신이 팔린 그 틈에 납치하려고 했다.
팬텀으로 추정되는 자도 한 번 떠보고 말이다.
하지만 이래선 산을 오르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마스터한테 큰소리는 뻥뻥 쳐놨는데, 실패한다면 면목이 없다.
흑요가 잘근잘근 손톱을 깨물었다.
쿠릉!
쿠르르릉!
그때였다.
미친 듯이 산이 흔들리며 산 자체가 갈라지기 시작했다.
"뭐, 뭐야?"
"산이 왜······!"
수련자의 산에 입산한 사람들이 당황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단순한 지진이라 하기엔 너무 강력하다.
"저건······!"
"컥! 저, 저게 뭐야?!"
곧이어 산의 정상을 가리키며 사람들은 경악했다.
이에 흑요도 조종하는 인간들의 시선을 돌려 정상을 바라보았다.
"······ 저게········· 뭐야?"
그리고 흑요 역시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당연한 일이다.
거대하기 짝이 없는, 흉악한 고대의 괴물.
그간 수많은 괴물을 접해온 흑요도 처음 보는 종이었다.
하물며 저토록 흉흉한 기운을 떨치는 괴물 역시 처음 보았다.
검은 염소의 얼굴과 짐승의 몸통, 세 개의 꼬리를 가진 거대한 괴수가 산을 열고 나타났으니!
"어딘가에서 사흉 '바알'이 부활하고 있습니다."
"사흉 '바알'이 주변 공간을 침식하기 시작합니다."
"사흉 '바알'을 저지하십시오. 저지하지 않을 시 주변의 모든 도시가 침략당하고 황폐화합니다."
*
-지금 뜬 메시지 봄?
-사흉 바알? 미친... 사흉이 갑자기 왜 나와?
플레이어 톡은 돌연이 떠오른 공지사항으로 인해 시끄러워졌다.
-어떤 미친놈이 사흉 바알 부활시킴?
-사흉이 뭐냐?
-고대 퀘스트 진행하면 무조건 나오는 이름임. 태초에 존재했던 네 괴수를 사흉이라 부름
-그 강성했던 구제국 절반 무너트린 게 저 사흉임
-구제국이 현제국보다 강함?
-당연히 비교가 안 되지;; 그땐 대륙 전체가 있었던 때고 지금은 대륙 절반 이상이 심연에 가라앉아 있는데 그때랑 비교가 되겠냐
-그래서 어디서 부활했다는 건데?
-모름
-수련자의 산이다 지금 연결된 도시들 죄다 난리 남
-수련자의 산에서 바알이 왜 부활을 해?
-몰라.... 근데 주변 도시 파괴면 워프 연결된 도시 말하는 건가?
수련자의 산과 연결된 도시는 다섯 곳.
용병도시 카르텔을 포함하여 모두 중립인 도시들이다.
사흉 바알의 부활 소식에, 수련자의 산과 연결된 모든 중립 도시가 비상이 걸렸다는 말이었다.
-그럼 플레이어들 도시랑은 거리가 멀지 않음?
-일단은 다행이네
-다행은. 사흉이 좆으로 보이냐.... 제국이나 여신교가 전면에 안 나서면 못 잡을걸
-근데 수련자의 산이면 지금 팬텀 있는 곳 아님? 생각해보니까 메인 퀘스트 7하러 들어갔을텐데
-에이 설마
-이미 깨고 내려왔겠지
-맞아ㅇㅇ 어차피 숙련도 레벨이라 대충 15만 찍고 내려왔을 듯
-아예 사흉 바알 깨운 것도 팬텀이라 하지 왜ㅋㅋㅋㅋ
-팬텀이 아무리 기상천외해도 설마 사흉을 깨우려고
-그래도 명색이 기사왕이라 불렸던 사람인데 그딴 짓을 하겠냐
-우리 팬텀신께선 명예로우시다!
-믿습니다, 팬텀신!
-팬텀신!
-팬텀신!!!!
*
콰릉!
바닥에 처박힌 락투샤가 다시 몸을 일으켜세웠다.
"쿨럭!"
동시에 피를 토해냈다.
검게 물든 피.
"······ 재밌군."
락투샤가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과연 사흉이라 불렸던 존재.
백왕이나 흑왕보다도 강력한 괴수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닌 듯싶다.
'확실히 강하긴 하다만.'
자신의 검기를 튕기며 폐부 깊숙하게 저주를 꽂아넣었다.
정신이 아찔해졌다.
한순간 반탄의 강기를 사용하지 않았다면 순살당했을 것이다.
'한낱 미물 따위가 흑왕님보다 강할 수는 없다.'
락투샤의 전신에서 더욱 짙은 검기가 흘러나왔다.
결국 자신을 죽이지 못했다. 그렇다면 사흉은 자신에게 죽으리라.
락투샤가 검기를 더욱 집중시켰다.
빠득!
빠드득!
전신의 근육이 폭발할 듯 늘어나며 덩치가 불어나기 시작했다.
쩌어어억!
흑왕의 은혜로 말미암아, 락투샤는 오크의 한계를 벗어났다.
이내 거인의 신체를 갖게 된 락투샤는 천천히 몸을 풀었다.
'역시. 이 은혜는 대단하군.'
거인의 신체와 항마력을 갖게 되자, 더 이상 사흉의 저주가 두렵지 않다.
한낱 미물의 저주는 자신에게 그 어떤 영향도 줄 수 없었다.
모두 종을 초월하는, 대격변의 힘을 주는 흑왕의 은혜 덕이다.
구오오오오오오-
그러자 흉악한 사흉 바알의 눈이 락투샤에게 향했다.
*
"······."
신전을 나오자 수련자의 산 정상과 연결되었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곤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난장판도 이런 난장판이 없었기 때문이다.
곳곳에 쓰러진 수행자들과 황폐화하여 파괴된 산.
저 멀리선 사흉 바알로 보이는 거대괴수와 웬 거인 하나가 싸우고 있다.
"거인?"
잠깐. 거인이 왜 여기있지?
아니, 그리고 저걸 싸운다고 표현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 샌드백이로군."
맷집 좋은 샌드백이라는 표현이 더 맞을 것 같았다.
면적이 넓어서 그런가 사흉에게 신나게 얻어터지고 있었다.
잠시 어지러워서 미간을 문질렀다.
[Lv. 13]
거인의 레벨이 무려 13이었다.
이 산에 있는 전부가 달려들어도 어찌 못할 레벨 말이다.
얻어맞고 있어서 그렇지 크람델의 사주력보다 한끗 더 강한 진짜 괴물이었다.
그런 거인도 사흉에게 쩔쩔매고 있다.
[???]
사흉의 레벨은 물음표.
알 수 없다.
하지만.
'저게 불완전한 부활 맞나.'
······ 저게 불완전하게 부활한 사흉이라는 게 더 소름돋을 지경이었다.
완전한 사흉은 그럼 얼마나 강한 걸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수준을 넘었다.'
당장은 방법이 없었다.
일단······ 벗어나자.
발을 옮겨 걷자 머지않아 뭔가 눈에 익은 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백왕의 것과 같은 가죽을 한 수인.
'백왕의 자식인가?'
본 순간 든 생각이었다.
이 정도로 깨끗한 백호의 가죽을 지닌 수인은 백왕밖에 없었다.
게다가 주변에서 수행자들이 지키려다가 쓰러진 자국들이 즐비했다.
특별한 존재임은 틀림없었다.
천천히 들쳐맸다.
"기천석?"
그러자 멀지 않은 곳에 세워진 기천석에도 눈길이 간다.
분명히 신전의 것과 비슷한 재질의 기천석이다.
울퉁불퉁하고 검흔 같은 게 많은 걸 보아, 미묘하게 다른 것 같긴 하지만, 확인해볼 필요는 있었다.
천천히 검을 들어, 베어냈다.
그러자.
쿠르릉!
기천석으로 추정되는 돌이 깔끔하게 갈라지고 부숴졌다.
"흠. 아닌가보군."
신전의 것과 같은 기천석이 아닌가보다.
작게 혀를 차며 조금 더 발을 움직이자, 창과 함께 널브러진 남자 한 명이 시야에 들어왔다.
'이놈이 창술사다.'
본능적으로 알았다.
창의 형태가 내가 어둠 속에서 마주한 윤곽과 같았기 때문이다.
창술사도 들쳐 맨 뒤, 나는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
"꺼헉!"
락투샤가 검은 피를 한움큼 뱉어냈다.
"빌어먹을."
아무래도 사흉을 혼자 상대하는 건 무리인 듯싶었다.
은혜로 종을 초월하기까지 했지만, 상대는 사흉이었다.
'나 혼자선 무리다.'
확신했다.
저 괴수를 죽이려면 적어도 자신과 같은 급의 무력을 지닌 자가 두 명은 더 필요하다.
흑왕에게 보고를 한 뒤 사흉의 처리에 대해선 따로 고민을 해봐야할 것 같았다.
'일단 후퇴한다.'
락투샤가 산의 정상을 바라봤다.
맨손으로 후퇴할 순 없었다.
최소한 백왕의 딸이라도 데려가야 면이 서지 않겠는가.
빠르게 산에 오른 락투샤는 이내 인상을 구길 수밖에 없었다.
"······ 어딜 간 거지?"
아리아가 없다.
그리고 창잡이도 보이지 않는다.
그 사이에 정신을 차리고 도망친 걸까?
허나 산의 밑에는 자신의 부하들이 널려있다.
도망치는 것도 쉽지는 않을 터.
"········· 저건?"
그때, 락투샤의 두 눈에 동강난 비석이 들어왔다.
평범한 돌이었다면 그냥 무시했을 터이나.
저 비석은, 분명히 자신이 '검흔'을 새겨놓은 것이었다.
그게 왜 반으로 나뉘어 부서져있는 걸까?
'사흉이 부순 건가?'
즉시 고개를 저었다.
사흉이 부쉈다면 흔적이 저렇게 깔끔할 리 없었다.
비석이 잘려나간 흔적을 살핀 락투샤가 표정을 굳혔다.
"·················· 일격에, 검으로, 베어냈다."
이건 검으로 베인 흔적이다.
그것도 일격에.
자신조차 검흔을 새기는 게 전부였던 비석을, 단번에 잘라냈다.
대체 누가?
검선도 넘어선 자신의 검술마저, 뛰어넘은 자가 있다고?
"말도 안 되는······!"
말이 안 된다.
불가능하다.
락투샤의 두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렸다.
사흉을 상대할 때보다도 훨씬 더 당황한 눈빛으로.
사흉의 제어 방법
오크 최고의 전사이며 소드마스터로 추앙받던 락투샤.
이미 성인이 되기 전부터 차기 오크로드로 명성이 드높았던 그다.
적어도 '검'을 쥔 자라면 그 누구에게도 패배하지 않았다.
불세출의 천재?
그런 수준이 아니다.
전무후무.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을 유일무이한 검사.
락투샤의 검술을 본 모두가 입을 모아 칭송했다.
락투샤 역시도 '최고의 검사'가 누구냐 묻는다면 자신 외엔 없다고 생각했다.
'검신······.'
······ 없다고, 생각했다.
헌데 비석을 자른 검의 자국이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검신.
있다면 그것은 분명히 검의 신이라 불리는 존재.
하지만 그런 자가 수련자의 산에 나타나서 비석만 자르고 사라졌다는 건 확실히 이상한 일이었다.
혹, 백왕이 보낸 자일까?
'백왕의 수하 중에 검을 깊이 있게 다루는 자는 없다.'
사주력도 마찬가지다.
대토룡도, 사왕도, 궁기도, 메두사도, 모두 무기를 다루는 자들은 아니었다.
그럼 누구일까.
백왕이 보낸 자가 아니라면.
백왕의 딸을 구하고, 비석을 단칼에 갈라놓은 자는 대체?
'백왕의 딸, 아리아라면 알 것이다.'
이 궁금증을 해결해야만 한다.
락투샤의 자존심이 뭉개졌다.
평생을 갈고 닦은 검사로서의 자존심이.
검신의 정체를 밝혀야만 이 뭉개진 자존심을 되돌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구오오오오오!
저주를 담은 꼬리가 순간 락투샤를 감쌌다.
얌전히 벗어나게 두지는 않겠다는 듯.
세 개의 꼬리에서 흘러나오는 지독한 저주가 거인의 항마력을 뚫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빠드득!
"······ 이 빌어먹을 새끼가!"
락투샤가 흑왕의 은혜를 최대치로 사용했다.
*
아리아는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락투샤에게 제압된 뒤, 갑자기 나타난 사흉 바알로 인해 저주를 온몸에 품었다.
사흉이라니.
태초의 네 괴물이라 일컬어지는 거대괴수가 왜 갑자기 수련자의 산에서 나타난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저항할 수도 없었다.
저 저주는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을 황폐화하는 힘.
아직 수련자의 길을 걷고 있는 아리아가 저항하기엔 너무나도 흉악한 힘이다.
'나는 천재가······.'
그러나 더욱이 그녀를 절망에 빠트린 건 락투샤다.
소드마스터 락투샤는 아이 다루듯 그녀를 가지고 놀았다.
단순히 능력치의 압도적인 차이로 인한 굴욕이 아니다.
락투샤는 도리어 자신의 능력을 낮추고, 맞춰주며 아리아를 순수 검술로만 상대했다.
게다가 검선보다도 더 깊은 자국을 남겨 압도적인 실력의 차이를 보였다.
하늘 위의 하늘.
락투샤야말로 진정한 천재가 아닐까.
'분명히··· 비석이, 잘렸어······.'
헌데, 그런 락투샤를 넘어선 검신을 보았다.
오로지 검 숙련도 레벨에만 반응하는 수련자의 비석.
그 비석이 단칼에 반으로 깔끔하게 잘려나간 것이다.
'혼돈 수련자 영역에서 봤던 인간.'
창술사를 꺾고, 찬란한 검기를 흩뿌렸던 인간이다.
쫓아가려 했지만, 어느 순간 절벽의 아래로 사라져 쫓을 수 없었던.
그랬던 인간이 갑자기 나타나서 자신을 구하고 비석을 잘랐다.
비석을 잘랐다는 것은, 검선이나 락투샤보다도 훨씬 더 높은 상승의 경지에 있다는 뜻이었다.
-'수련자의 비석'을 가르는 자가 곧 '검의 주인'이다.
수련자의 산에 내려오는 전승.
검선이 남겨놓은 수기에 적힌 내용이다.
아리아는 한동안 수련자의 산에서 주인 노릇을 했기에, 검선과 관련된 서적을 접할 수 있었다.
그곳에는 분명히 '비석을 가르는 자'에 대한 것도 적혀있었다.
-가장 강력한 '검'은 이 산에 묻혀있으며, '비석을 가르는 자'만이 그 '흉악한 검'을 다룰 수 있다.
처음에는 이게 무슨 내용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 수련자의 산 어딘가에 엄청난 검이 묻혀있기라도 한 건지.
하지만, 검선은 알고 있었던 게 아닐까.
가장 강력하며 흉악한 검.
그건 바로 저 괴수, 사흉 바알이 아닐는지.
오직 수련자의 비석을 잘라내는 자만이 사흉 바알을 다룰 수 있다고 검선은 말한 것이다.
물론 단순히 비석을 자른다고 사흉을 다룰 수 있지는 않을 터.
-'검'을 막을 갑옷과 투구, 그리고 정수가 갖춰지면 진정한 '검의 주인'으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검의 주인은 자신을 들쳐맨 남자를 말하는 게 분명했다.
아리아는 다시 기절하기 직전, 품에서 검선이 남긴 서책 한 권을 꺼내어 남자에게 넘겼다.
*
세상에 종말이 다가오고 있었다.
두 괴물의 격돌.
산이 무너지고, 전역에 검은 먹구름이 몰려들었다.
"우, 우리를 풀어줘!"
"이대로 있으면 다 죽는다고!"
혼비백산.
인간과 괴물 할 것 없이 모두가 혼란한 상태였다.
산을 점거했던 괴물병단도 락투샤가 밀리자 당황하고 있었다.
빠져나갈 수도 없다.
그렇다면, 락투샤를 돕는 것 외엔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문제는 산을 오르는 수련자들이었다.
락투샤의 말대로 전체를 구류시켰지만 뒤에 혹을 단 채로 사흉과 싸울 수는 없는 노릇.
"엔카사님. 저들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다 죽여라."
괴물병단은 수련자들의 몰살을 택했다.
"아악!"
"사, 살려줘!"
결국, 수련자들을 제대로 된 저항도 못 한 채 죽음을 맞이했다.
엔카사. 락투샤를 따르는 최강의 검투사.
락투샤의 실력에 끌려 평생 그를 떠받들기로 맹세한 사자 얼굴의 수인이었다.
"지금부터 전원 락투샤님을 돕는다."
"하, 하지만 상대는 사흉······!"
촤악!
괴물병단 중 한 명이 겁에 질려 입을 열자,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목이 잘려나갔다.
이후 엔카사가 황금빛 검기를 흩날리며 무표정하게 말했다.
"겁에 질린 자가 더 있느냐?"
"······."
있을 리가 없었다.
엔카사가 고개를 돌렸다.
락투샤는 수련자들을 구류시키라고 했지만, 구류 시킬 수련자가 없으니 명령을 어긴 것은 아니었다.
그때였다.
'음?'
주변에서 느껴지는 또 다른 기척.
엔카사가 시선을 돌리자, 누군가가 산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산의 상층부에 있던 수련자나 수행자일까?
"인간이 들쳐매고 있는 게 백왕의 딸 아닙니까?"
"마, 맞습니다! 분명히 백왕의 딸입니다."
백왕의 딸과 웬 남자를 들쳐맨 인간이었다.
엔카사가 인상을 찌푸렸다.
'혼란한 틈을 타서 도망치려했군.'
그러나 운이 나빴다.
하필이면 정면에서 딱 마주쳤으니.
락투샤를 도울 때 돕더라도, 원래의 목표였던 백왕의 딸 역시 놓칠 수는 없는 노릇.
"엔카사 부대장님. 당장 죽이고 빼앗죠."
"······ 잠깐."
일만에 달하는 괴물병단.
고작 인간 한 명 죽이는 거야 일도 아니다.
헌데, 왜일까.
뭔가 이상하다.
굉장히 찝찝했다.
이윽고 그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 산의 정상에서 저 저주를 뚫고 멀쩡하게 내려왔다고?'
산의 정상, 사흉과 락투샤가 전투를 벌이는 곳.
그곳에서 내려온 게 분명할텐데 저주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락투샤조차 바알의 저주에서 자유롭지 못하건만.
심지어.
"비켜라."
"······."
뭐지, 이 당당함은?
1만의 대군을 앞에 두고서도 눈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도리어 죽기 싫으면 비키라는 듯 강한 어조로 말하고 있었다.
엔카사가 자신의 갈기와 같은 황금빛의 검기를 일으켰다.
찝찝한 놈이지만 시간을 지체할 순 없었다.
빠르게 죽여서, 빼앗······.
후우우우웅!
그 순간이었다.
인간의 전신에서 더욱이 찬란한 황금의 기운이 떠올랐다.
기운은 이내 실타레처럼 엮이며 하나의 형상을 만들었다.
바로, 검.
'저, 저건······!'
꿀꺽!
엔카사가 당황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저건 검기가 아니다.
단순한 검기였다면 이처럼 당황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저 기운을 검에 씌울 뿐인 검기와는 차원이 다르다.
저건.
저건······.
'검강·········!'
검기를 실처럼 엮어, 하나의 완성된 형태로 만드는 기술.
착각할 리 없다.
전설처럼 내려오는 검강이 바로 저것이었으니!
허나, 락투샤도 펼칠 수 없는 게 검강의 영역이다.
엔카사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가짜라면 알아차렸을 것이다.
하지만 진짜다. 이 압박감이 결코 거짓일 리 없었다.
"부대장님?"
부하들은 의아해하고 있다.
저 검강의 두려움을 모르기 때문이다.
구오오오오오오!
쾅! 쾅! 콰르릉!
사흉의 소리가 더 크게 퍼져간다.
시간이 지날수록 락투샤는 크게 밀리는 와중이었다.
사흉의 공격에서 빠져나갈 수 없는 것이리라.
"······ 비켜줘라."
"부, 부대장님?"
"우리는 락투샤님을 돕는다."
저 끝을 알 수 없는 인간을 상대하려 들었다간 락투샤는 죽고 말 터.
게다가 백왕의 딸보단 락투샤의 생존이 더 중요하다.
자신들 전부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락투샤 하나를 살리는 게 훨씬 의미있었다.
*
용병 호아킨과 숀, 말리부는 정신이 나갈 것만 같았다.
"대, 대장. 이거 담력훈련 아니죠? 저거 다 진짜죠?"
"이제 진짜로 도망쳐야할 것 같은데요?"
동료 부하들의 물음에 호아킨은 워프를 바라봤다.
수련자의 산으로 락투샤를 비롯한 괴물병단이 넘어가더니, 머지않아 갑자기 사흉이 등장했다.
워프가 타오르며 보이는 내부의 상황은 최악이었다.
"이정도면 그 남자도 분명히 죽었을 거라니까요!"
"사, 사흉이라니, 미친 거 아닙니까 진짜?"
확실히 저 정도 소란이면 남자는 죽었을 것이다.
아무리 남자가 대단한 사람이라도 사흉과 락투샤의 사이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호아킨이 작게 혀를 찼다.
이제는 돌아갈 시간이었다.
지금쯤 용병도시도 난리가 났을 테니까.
"잠깐."
그때 불현 듯 저 멀리서 보이는 인영이 있었다.
워프 가까이로 다가온 인영은 바로 자신들을 고용한 남자였다.
"고용주님?"
저 상황에서 어떻게 살아온 걸까?
게다가 남자는 혼자가 아니었다.
분명히 들어갈 땐 두 명이었는데, 나올 땐 네 명이었다.
"한 명씩 업어라."
"예?"
"한 명씩 업고 이곳을 벗어난다. 최대한 멀리. 머지않아 워프가 터질 거다."
"아······!"
워프가 터진다.
말인 즉, 이 땅이 심연에 가라앉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심연에 가라앉으면 그때부턴 이 땅을 벗어날 수 없다.
'미친!'
살려거든, 땀띠나도록 뛰어야 했다.
*
사흉의 등장으로 인해 워프가 망가졌다.
텔레포트 북도 사용할 수 없는 상황에서 벗어날 방법은 그냥 무작정 뛰는 것뿐이다.
다음 도시와 연결된 워프가 있는 곳까지 말이다.
'세아 이 녀석은 대체 왜 기절해 있는 거지?'
세아 성녀도 발견해서 다행이긴 한데, 문제는 워프 부근에서 기절해있었다는 것이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살아야했다.
용병 호아킨의 안내를 받으며 기적적으로 용병도시 카르텔의 워프를 통과하였다.
"헉! 헉! 커허헉!"
"허억! 허억!"
진땀나는 상황이다.
동시에.
쿠우우우웅.
워프가 들썩인다.
곧이어 수련자의 산과 연결된 워프가 정전이 되듯 까맣게 물들었다.
"······ 워프, 가라앉았습니다."
"조금만 늦었어도······."
영역 전체가 잠겼다.
용병들은 긴장한 채 침을 삼켰다.
조금만 늦었어도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뻔했으니까.
'역시 역부족이었나보군.'
락투샤와 괴물병단만으로는 사흉을 막기 역부족이었다.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몰라도 사흉의 제거 자체는 실패한 듯싶다.
"이,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요?"
숀이 물었다.
이제 어떻게 될까.
확실한 건 사흉은 죽지 않았다.
사흉이 죽지 않았다면, 머지않아 다른 영역을 침략할 것이다.
아마도 이곳 카르텔을 포함한 다섯 중립 도시 중 한 곳을.
막으면 다행이지만, 못 막으면 재앙이다.
몇 개의 도시가, 왕국이 파괴될지 모른다.
'백왕의 딸이 책을 넘겼지.'
괴물병단을 마주하며 백호의 수인이 누구인지 확신할 수 있었다.
역시 백왕의 딸이었다.
헌데 그녀가 재차 기절하기 전에 나한테 책 한 권을 건넸었다.
나는 품에서 책을 꺼내 펼쳤다.
'검선일기.'
검선일기라 이름 적힌 책.
동시에.
"검선의 안배를 깨우쳤습니다."
"'사흉 바알'을 제어하기 위해선 '검선일기'와 '바알 투구', '바알 갑옷', '바알 탈리스만'이 필요합니다."
"'사흉 바알'을 제어하기 위한 준비 중 한 가지가 부족합니다."
"'바알 갑옷'의 위치가 서책에 표시됩니다."
책의 위로 지도가 나타났다.
그 사이에 있는 붉은 점.
'제국.'
분명히 아르혼 제국의 어딘가다.
바알 갑옷이 저곳에 있다는 말이다.
갑옷만 구하면 사흉 바알을 제어할 수 있게 되는 걸까?
헌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메인퀘스트 7 : 수련자의 산에서 숙련도 레벨 15 달성하기'를 완료했습니다."
"내용을 정산합니다."
수련자의 산을 완전하게 벗어나자, 메인 퀘스트 7이 종료되며 정산이 시작되었다.
끝나지 않는 정산
넓은 회의실.
자그마치 서른 명의 '지배자'들이 한곳에 모였다.
그들은 모두 각 도시를 대표하는 주인이며 막강한 권력과 권한을 지닌 최강자들.
수련자의 산과 이어진 다섯 도시와, 그 도시와 연결된 스물다섯 도시의 지배자들이 지금 이 회의실에 모여있는 것이다.
그 광경은, 그야말로 진풍경이었다.
모두가 지배자의 신비를 두른 채 심각한 표정으로 날 선 말을 나누며 작금의 사태에 관해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지금 뭐라고 하셨소? 워프를 끊고 단교하겠다고?"
용병도시 카르텔의 주인, '붉은 삵 제라프'가 언성을 높였다.
그러자 다른 도시의 주인들이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어댔다.
"사흉이 다음으로 노릴 건 '수련자의 산'과 연관된 다섯 도시 중 한 곳일 터."
"단순히 워프가 이어져있다는 이유만으로 우리까지 위험을 감수할 수는 없지 않소?"
"음. 제라프, 대신 물적 지원을 아끼지 않으리다."
힘을 합쳐 대비해도 모자란 판국에 워프를 끊겠다는 소리가 나오는 것이다.
워프를 끊는다는 건 단교를 뜻했다.
도시 간의 왕래 자체를 없애고, 동맹을 파기하겠다는 의미다.
이유는 하나.
사흉의 침략으로부터 멀어지기 위해서!
"그게 지금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쿵!
제라프가 원탁을 강하게 내리쳤다.
도저히 말이 안 됐기 때문이다.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하기도 싫다.
도시 간에 이어진 워프의 중요성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당연히 워프가 이어진 도시끼리는 암묵적인 동맹으로 간주가 될 정도였다.
그도 그럴 게, 최소 세 개의 워프를 잇지 않으면 도시는 심연에 가라앉는 탓이다.
"워프를 모두 끊으면! 카르텔을 심연에 처박겠다는 말이오?"
"그대들 중립 도시끼리 이으면 되지 않나."
"음. 다섯 도시가 이어지면 심연을 걱정할 필요는 없지."
제라프가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니까 우리끼리 해결하라는 말인가? 수련자의 산과 연결된 다섯 중립 도시끼리 알아서 지지고 볶으라?"
"꼭 그런 말이 아니라··· 제국이나 여신교에 도움을 청하는 것도······."
"커험. 용병이라서 그런가 너무 극단적이군."
그들의 의도는 간단했다.
수련자의 산과 연결된 다섯 도시가 힘을 합쳐 알아서 사흉을 막으라는 게다.
설령 실패해도, 이어진 다섯 도시가 함락되면 사흉의 힘도 상당히 빠지게 될 것이었다.
중립 도시들의 희생을 강요하고 있었다.
그 뻔한 의도를 제라프가 모를 리 만무했다.
"다섯 도시가 함락되면, 그대로 끝날 것 같나? 워프가 이어지지 않았다고 사흉이 침략하지 않을 것 같소?"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소리다.
이미 수련자의 산이 가라앉았다.
그리고 아주 높은 확률로 사흉은 '심연의 주인'이 될 것이다.
그것도 '심연 그 자체인 자'가 될 가능성이 크다.
"사흉이 '심연 그 자체인 자'가 되면 어차피 워프가 이어지지 않아도 마음대로 침략할 수 있소. 게다가 저 괴물은 오직 파괴만을 위해 존재하는 파괴자요. 대비하려 해도 대비할 수 없어질 테니, 나중에 막으려면 이미 늦다는 걸 진정 모른단 말인가?"
제라프의 말은 일견 타당했다.
심연 그 자체인 자가 되면 무작위 도시가 침식당한다.
침식당한 순간 이어져 있는 도시들 역시 침략의 대상이 된다.
대비할 수 없고, 도리어 더 힘겨워질 터.
차라리 정해진 도시들을 공격할 때 힘을 모아 퇴치하는 게, 최소한의 피해로 사흉을 막을 방법이다.
하지만 도시의 지배자 대다수는 이 발언에 회의적이었다.
"사흉이 '심연 그 자체인 자'가 된다는 보장도 없지 않소."
"으음. 다른 심연의 주인들이 사흉을 견제할 수도 있지."
"아예 침략을 안 할 수도 있고."
"내 말이. 제라프 그대의 의견은 너무 '최악'만을 가정하는 것 아닌가?"
부르르르!
제라프가 전신을 떨었다.
'이 개새끼들이!'
말이 안 통한다.
처음부터 팽할 목적으로 회의를 연 것이다.
이미 연결된 도시의 워프를 끊으려면 어느 정도 동의가 필요하니까.
"······ 워프를 끊는다고, 그대들의 도시에 피해를 줄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
침묵하고 있던 중립 도시의 주인 중 한 명이 입을 열었다.
주황색의 수도승 차림을 한 대머리의 승려.
그가 얌전한 어투로 계속해서 말했다.
"허락이 필요 없는 주인 없는 지역의 워프와 연결하면 그만. 사흉이 '심연 그 자체인 자'가 되지 않아도 무한하게 뻗어 나갈 발판이야 만들어주면 되는 것 아닌가?"
"······ 다 죽자는 건가?"
"그딴 짓을 했다간 도시가 무사하지 못할 텐데!"
승려가 작게 비웃었다.
"어차피 이리 죽으나, 저리 죽으나 우리는 죽은 목숨 아니오? 그대들이 이기심을 부리겠다면 나 역시도 이기적으로 굴 수밖에."
일방적으로 단교를 행하면 물귀신이 되어주겠다는 말이었다.
정 안전해지고 싶다면 모든 워프를 끊고 심연에 가라앉으면 된다.
그럼 사흉 대신 다른 심연의 주인이 반겨줄 테니까.
"허어."
"이것 참······."
결국, 회의는 원점으로 되돌아갔다.
도저히 끝이 보이지 않는 타협점에 도달하고자 쉬지 않고 설왕설래가 이어졌다.
*
"······ 변명은 준비됐나, 흑요?"
흑요의 은둔지를 직접 습격한 마스터가 인상을 구겼다.
무려 5천만 골드를 받아먹고 입을 싹 닫아버린 탓이다.
"그게··· 갑자기 '사흉'이 나타날 줄은······ 나도 몰랐지·········."
잠적하려다가 잡힌 흑요가 온몸을 베베 꼬았다.
"그래서 팬텀에 대한 정보도, 백왕의 딸을 납치하지도 못했다?"
"아하하하."
"농담하는 거 아니다. 흑요."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마스터의 두 눈에서 느껴지는 살기.
흑요는 침을 꿀꺽 삼켰다.
"아무것도 못 건진 건 아니거든? 흑왕과 사흉에 대한 정보는 비싸게 팔리지 않겠어?"
"지껄여봐라."
"흑왕의 직속 부하 락투샤가 사흉과 직접 붙었어."
"락투샤라······ 소드마스터 락투샤, 그 오크 대전사 말이냐?"
"그래! 더 놀라운 게 뭔 줄 알아? 그 오크가 갑자기 거인화 한 거야. 내가 그간 얻어온 정보에 의하면, 흑왕은 직속 부하들에게 '히든 특성'을 부여할 수 있는 것 같거든?"
마스터가 턱을 쓸었다.
거인의 특성은 '거인의 항마력'을 말하는 것일 테다.
흑왕이 히든 특성을 부여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니.
백왕을 자신 있게 노리는 이유가 이거 때문이었나?
'현재까지 알아낸 히든 특성은 일곱 개. 흑왕이라면 더 알고 있을지도.'
히든 특성을 알아내는 것만 하더라도 흑왕과의 접선은 가치 있는 일이다.
히든 특성의 종류와 히든 특성과 연계된 재능을 알아낼 수만 있다면 천만금을 줘도 아깝지 않았다.
마스터가 몇 년간 공들여 알아낸 히든 특성은 고작 7종.
―허무
―손재주
―웨폰 마스터
―비스트 로드
―거인의 항마력
―황금의 은총
―대식가
이 외에도 다른 히든 특성이 더 있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허나, 아무리 노력해도 알아낼 수가 없었다.
흑왕이 나머지를 알고 있다면 무리해서라도 접선할 만한 가치가 있다.
"문제는 그러고도 사흉한테 락투샤가 패배했다는 거야. 락투샤의 레벨이 13인데도 불구하고."
"사흉은 그 이상이란 말이냐?"
"그래. 14레벨 이상의 존재라니. 백왕이나 흑왕급의 괴물을 어떻게 막겠어? 여신교의 '성배 기사단'이 직접 나서는 게 아닌 이상이야."
이건 꽤 쓸만한 정보였다.
사흉의 레벨이 14 이상이라는 건, 제법 요긴하게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당장 수련자의 산과 연결된 도시들에 이 정보를 팔 수도 있고.
하지만 여전히 오천만 골드 어치의 정보는 아니다.
심상찮은 낌새를 느꼈는지 흑요가 재빨리 입을 열었다.
"그리고 팬텀은 수련자의 산에 이미 없었던 것 같아."
"왜 그렇게 생각하지?"
"있었다면 이미 내가 알거나 죽었을 테니까?"
산의 초입부엔 흑요가 깔아둔 눈이 많았다. 중심부엔 괴물병단이 자리했으며, 상단에는 락투샤와 사흉이 있었다.
있었다면 어떤 식으로든 발견이 되었을 것이라는 말이다.
과연 그럴까?
'숙련도 레벨의 최대치는 한계가 있으니······.'
검성 그라시아가 24레벨로 1위였다.
자신 역시 22레벨로 3위였고.
그 이상을 산에서 올리는 건 아무래도 쉽지 않은 일이다.
차라리 적당히 올리고 다음 퀘스트를 대비하는 게 효율적이리라.
"무엇보다 수련자의 산이 가라앉았잖아. 숙련도 레벨을 더 높게 올리기는 아무래도 시간이 부족하지 않겠어?"
이 역시 맞는 이야기다.
공을 들이는 시간과 숙련도 레벨은 비례하므로.
아무리 역대급의 재능을 지녔다한들 산이 가라앉은 이상 수련할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그럼 정말 전당에 욕심 없이 15레벨만 찍고 내려온 건가?'
메인 퀘스트 6까지 압도적인 1위를 달리던 란돌프다.
그 란돌프가 느닷없이 7에서 타협을 했다?
의아하긴 하지만, 상식적으로 이게 맞기는 하다.
란돌프가 정말 심연 미궁에 참가하지 않았다면 수련자의 산에서 수련한 시간은 기껏해야 한 달 전후일 것이다.
그 시간에 24레벨을 넘게 찍는 건 불가능하다.
아무리 압도적인 재능과 좋은 클래스를 지녔대도 마찬가지.
'그래. 그렇단 말이지······.'
묘하게 안심이 된다.
흑요가 확신하며 말하자 더욱 마음이 편안해지는 기분이다.
그래.
천하의 팬텀이라도, 할 수 없는 게 있는 것이다.
아무리 기상천외한 방식의 버그성 플레이를 하더라도, 팬텀이 모든 걸 가질 수는 없는 것이었다.
팬텀 역시 인간이다.
누군가의 말마따나 팬텀을 신으로 여기는 자들이 있지만, 팬텀은 결코 신이 아니었다.
'팬텀도 인간이다.'
인간이라면, 경쟁할 수 있다.
인간이라면 충분히 이길 수 있다.
그간의 피해와 압도적인 점수로 인해 잠시 눈이 멀었을뿐.
드디어!
······ 그 인간 같지도 않던 놈이 인간임이 확정되는 순간이었다.
자신의 제국을 고작 인간이 무너트릴 수는 없으니까.
그것을 안 것만으로도 오천만 골드의 가치는 충분하다.
먹고 잠적해서 죽여버리려고 했지만, 넓은 아량으로 살려주기로 했다.
'아! 살았다!'
마스터의 눈빛을 본 흑요가 내심 안심했다.
자신이 내뱉은 정보들이 제법 요긴했던 모양이다.
마스터가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흑요도 함께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명예의 전당 순위가 변경되었습니다."
"······."
"······?"
"메인 퀘스트 7의 전당 순위가 3위 -> 4위로 변경되었습니다."
"······."
"······??"
"1위 – 란돌프(500)"
"2위 – 그라시아(420)"
"3위 – 민트초코맛있어요(410)"
"4위 – 마스터(400)"
"······."
"······???"
흑요가 당황했다.
거친 생각, 불안한 눈빛.
'아, 잠깐만.'
그걸 지켜보는, 무저갱의 지옥에서 나온 듯한 마스터.
············ 아무래도 좆된 것 같았다.
*
"내용을 정산합니다."
"정해놓은 규격을 한참이나 초과한 레벨입니다."
"검 숙련도 레벨 30, '천상의 경지'를 달성했습니다."
"총점 500점!"
"'황금률의 가장 큰 조각(300h)'을 획득합니다."
"이권점수 100점을 획득합니다."
"이권점수로 이권을 강화할 수 있습니다."
"당신을 지켜본 성좌 전원이 보상의 규격을 올리는데 강제 동원됩니다."
"행운 주사위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도합 101단계의 보상목록 등급이 올라갑니다."
"아래 다섯 자루의 '검' 중 한 자루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대참격", "용살검", "골통파괴자", "루-", "초월지검"
검의 숙련도로 달성한 레벨이어서일까.
보상 전부가 검이었다.
심지어, 다섯 자루 모두 눈이 돌아갈만한 수준의 검이었다.
'······ 검 숙련도의 맥스 레벨을 올려주는 격의 것들이다.'
클래스와 별, 그리고 아주 희귀하게 '무기'에 의해 숙련도 레벨 맥스치가 올라가는 경우가 있었다.
특히 유일급이 아닌 무기가 숙련도 레벨의 맥스치를 올려주는 경우는 더더욱 적었다.
그런데 지금 나타난 다섯 자루의 검은 모두 검의 숙련도 레벨 맥스치를 올려주는 옵션을 갖고 있었다.
'모두 사용 용도가 거의 정해진 검들이다. 신중하게 고를 필요가 있다.'
또한, 특성화 된 검이었다.
그냥 써도 강력하긴 하지만 특정 조건에서 더욱 큰 위력을 발휘하는.
나는 가만히 턱을 쓸었다.
허나, 입가엔 절로 미소가 맺혔다.
'더 연장해도 되겠군.'
이게 전부가 아니었으니까.
"히든 퀘스트(6)의 보상을 거절합니다."
"더 높은 숙련도 레벨에 도전합니다!"
"업적 '숙련도 레벨의 신화를 쓰는 도전자'를 달성했습니다!"
"명예가 300 상승합니다."
산의 주인이 내건 히든 퀘스트!
검 숙련도 레벨 30을 달성하여 무려 여섯 번이나 보상이 격상했지만, 맥스 레벨을 더 올릴 수 있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업적이 떴다는 건, 이 이상을 달성하면 오롯이 나만의 '신화'를 완성할 수 있다는 뜻.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로군.'
31레벨을 넘으면 뭘 줄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신화의 관에서 모든 시련을 넘어서며 규격외의 신비를 얻었던 것처럼, 나 자신이 이룩한 신화의 완성은 최소 유일급 보상을 뜻했으니!
제국에서 보낸 편지
심연 미궁을 클리어하며 생존보상을 받았을 때.
찬란한 빛의 옥좌로 말미암아 검성 라일리의 영혼을 소환한 뒤, 천 시간이 넘는 황금률을 사용하고 열일곱 성좌를 성불시켰을 그때!
바알 투구와 우로보로스의 낙인을 골랐던 그 당시보다도, 나는 확실하게 긴장하고 있었다.
'"대참격", 이름그대로 참격의 효과를 지닌 검이다.'
판게니아의 개념에서 타격과 참격의 차이는 '깊이감'에 있다.
타격은 치고, 때리는 다소 얕은 공격을 의미하지만 참격은 '깊은 상처'를 내며 치명적으로 작용하는 공격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대참격"은 검을 이용한 타격에 '관통' 효과를 5% 부여한다.
그리고 관통한 공격에 대하여 재생불가의 피해를 추가로 남긴다.
관통의 효과야 두말할 것 없이 챙길 수 있을 때 반드시 챙겨야만하는 옵션이었다.
'"용살검", 용종을 상대할 때 강력한 관통 효과를 지닌다.'
허나, 용살검은 용종을 대상으로 무려 10%의 관통 옵션을 갖고 있었다.
용종 한정으로 대참격의 두 배다.
용종은 하나같이 강력하기에 두고두고 요긴하게 사용할 건 자명했다.
앞으로도 필연적으로 만날 용종들이 몇 있었다. 예컨대 메인 퀘스트 10을 진행하다가 만나게 될 '광룡 아인하사르'라거나.
'"골통파괴자", 둔기형 대검이지. 검기에 추가 효과를 준다.'
이름이 골때리지만 거인족의 최고전사가 사용하는 무기다.
내 몸집보다 큰 대검인데, 둔기처럼 타격용으로 쓸 수도 있다.
검기를 다루는 자만이 가볍게 사용할 수 있기에, 검기의 피해량을 늘려주는 추가효과가 있었다.
'"루-", 조합형 성검. 조합만 되면 유용하겠지.'
루-는 그 이름처럼 완성되지 않은 성검이다.
또한 성검이기에 당연히 신성력과 연관이 있다.
성기사 관련 클래스가 사용하면 '신성효과'를 50%나 증대시켜주는 미친 성능을 지녔다.
다른 검과 함께 조합하면 추가효과를 내는데, 문제는 내가 성기사나 신성력과는 상관이 전혀 없는 클래스라는 것이다.
다만, 루-와 조합되는 검에 따라선 나도 사용할 수가 있다.
그러나 루-를 완성시키려면 이름 앞에 –가 붙은 검이 필요하다.
'-라'나, '-아이에'처럼.
당장은 아니어도 골라놓으면 완성한 즉시 확실한 성능을 발휘할 건 자명했다.
'마지막으로 "초월지검", 성장형 검.'
성장형 검이다.
성장한 뒤 특정 구간에 도달하면 제알아서 강화를 이루어 '극, 진, 멸, 참'의 효과를 지니게 된다.
그리고 네 번의 강화를 모두 달성하면 다섯 번째 초월효과를 지니고 '완성'되는 검이었다.
'······ 이중에 하나.'
모두 색깔이 확실한 검들이다.
이중 단 하나만 고를 수 있다.
앞으로 내가 향할 길을 살피고 그중 가장 효과적인 검을 골라야만 했다.
당장 향할 곳은 정해져 있었다.
'제국.'
제국으로 가서 바알 갑옷을 구할 때 전투가 벌어질 수도 있었다.
제국의 병사와 기사들을 상대해야할 가능성은 상당히 높다.
바알 갑옷을 구한다 하더라도, 사흉이나 그에 준하는 괴수와 전투가 벌어질 경우 또한 상정해둬야했다.
모든 변수에서 가장 확실하게 성능을 발휘할 수 있는 검.
'성장형, 조합형 검은 제외시켜야겠지.'
당장 강해져야 한다.
이 대전제를 나는 지금까지 어긴 적이 없었다.
두가지를 선택할 수 있다면 하나 정도는 여유롭게 미래를 대비하겠지만, 단 한 자루의 검만 고를 수 있는 이상 즉각적으로 강해질 무기가 필요했다.
루-와 초월지검, 이 두 자루는 전제조건을 만족시키지 못한다.
살짝 아쉽긴 하지만 언젠가 다시 만날 기회가 있을 것이다.
'두루두루 쓸만한 대참격, 용 자체에 엄청난 효과를 지니니는 용살검, 거인의 무기 골통파괴자.'
남은 후보군은 이 셋.
고르기 쉽지 않다.
한참의 고민 끝에 나는 결정을 내렸다.
"'골통파괴자'를 선택했습니다!"
*
플레이어 톡은 다시 팬텀의 이야기로 게시판이 도배되는 중이었다.
-600점······?
-2등이랑 180점 차이 실화냐?
-내가 지금 뭘 본 거지?
메인퀘스트 7을 진행한 모든 플레이어들은 순위가 바뀌는 순간을 목격했다.
메인퀘스트를 진행하는 플레이어들의 달성 점수를 모아둔 명예의 전당.
그곳에서 1위가 바뀐 것이다.
그것도 압도적인 차이로.
그라시아가 420점으로 오랜시간 1위의 자리에 군림했건만.
난데없이 600점이란 말도 안 되는 점수가 나타나며 1위를 탈환했으니, 난리가 날 수밖에 없었다.
-그라시아가 검 숙련도 24레벨 달성하고 산 내려온 거 아니었음?
-맞음ㅇㅇ 그래서 420점이고
-600점이면 대체 몇 레벨을 찍은 거야?
-600점이 존재하는 점수였어?
-;;; 버그 아니냐?
-진짜 미쳤네.... 메인퀘스트 6 파티 던전 깬지 얼마나 됐다고
-데미갓 특성 던전이었나... 그것도
-이게 말이 됨? 그라시아도 24레벨 찍는데 한 세 달 걸렸다고 들었는데
-24레벨이 420점이고 23레벨이 410점이고 22레벨이 400점이니까 180점 차이면 42레벨 찍었다는 거임?
-???????
-600점 어케했누
-어떤 놈이 아무리 팬텀이라도 메인 퀘스트 7은 1등 못한다고 하지 않았나ㅋㅋㅋ
-솔직히 다들 그렇게 생각했잖아
-... 아니 이게 진짜 가능한 거임?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점수와 속도.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하는 결과에 모든 플레이어는 물음표를 그릴 수밖에 없었다.
-심연 미궁이야 이름만 같은 오주력 란돌프라고 쳐도, 그냥 란돌프 자체가 이제 넘을 수 없는 벽임을 완벽하게 증명했네
-그라시아 좆밥행ㅋㅋㅋㅋ
-랭커들 다 반성해야된다 그간 쌓아둔 것들이 어째 팬텀 하나만 못하냐?
-다 거품이었던 거지ㅋㅋㅋ
-쌉거품 ㅇㅈㅇㅈ
-야 진짜 사흉 바알이랑 팬텀이랑 관계 있는 거 같은데?
-바알이 숙련도 레벨이랑 관련이 있는 괴물인가?
-구제국 육각의 영웅들이 바알 소탕하면서 한꺼번에 확 강해진 기록이 있음
-뭔가 있기는 한가보네
-진짜 사흉 소환한 게 팬텀이라고?
-;;; 존나 무섭네 팬텀이 그럼 나머지 사흉 봉인 깨는 방법도 알고 있는 거 아님?
-사흉 봉인 전부 풀리면 판게니아 멸망각 아니냐?
-그랬다간 지구도 멸망임ㅋ
-지금이라도 마스터는 팬텀의 음해를 멈추고 대가리를 박아야한다
-마스터 뿐이냐ㅋㅋㅋ여기도 대가리 박아야할 놈들 많아보이는데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대원정 실패하자마자 빌헬름 욕한 놈들 여기 한트럭 아님? 괜히 벌집만 건드렸다고?
-별이랑 유일급 독식한다고도 말 많았지
-지들이 부족해서 못 얻은 걸 팬텀한테 뺏겼다고 생각하던 사람 한, 둘 이었겠냐?
-'팬텀 방해하기 캠페인' 대놓고 하던 곳 아님 여기? 그랬던 놈들이 가면쓰고 팬텀신, 팬텀신 거리는 거 역겹긴 해ㅋㅋㅋㅋㅋ
-팬텀이 숙청 시작하면 어케됨?
-...이젠 진짜 좆될 거 같은데
-피가 강을 이루고 시체가 산을 쌓음
-아니 팬텀이 사흉을 왜 푸냐고요;;; 말이 되는 소릴하세요들
-명예로운 팬텀신을 모욕하지 마라!
-팬텀신!
-팬텀신!
*
텔레포트 북을 사용해 미궁도시로 돌아오자 풍경이 많이 달라져 있었다.
'워프공학자들.'
열 명이 넘는 워프 공학자들이 워프를 세우고 있었다.
이미 완성된 몇몇 워프는 입구 곳곳에서 위용을 내뿜었다.
'워프가 전부 고장나서 가라앉을 일은 없겠군.'
눈에 보이는 워프만 다섯 개가량.
워프 하나를 설치하는데 500만 골드 정도가 들어가는 걸 감안하면 수천만 골드를 사용하고 있는 셈이었다.
"다녀오셨습니까, 영주님."
그리고 그 가운데에 허드슨이 있었다.
도시의 총괄을 맡겼기에, 이 워프 공사도 허드슨이 주도하고 있는 듯싶었다.
나를 발견한 허드슨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전당의 변화 잘 봤습니다. 역시 영주님이십니다!"
영주님이라.
틀린 말은 아니지만 아직은 낯간지럽다.
어깨를 으쓱하며 공사현장을 바라봤다.
"워프가 너무 많은 거 아닌가?"
"도시에 있는 워프의 숫자는 곧 그 도시의 경쟁력입니다. '심연'으로부터 안전하다는 보증수표와 같습니다."
확실히.
도시를 건설하려거든 '안전'을 증명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가장 먼저 보이는 워프의 숫자가 곧 도시의 경쟁력이라는 허드슨의 말은 틀림이 없었다.
허드슨이 슬며시 말했다.
"··· 줄일까요?"
"음. 아니다. 들어보니 맞는 말이로군."
"그런데 세아 성녀님은 어디 가셨습니까?"
"용병도시 카르텔에 있다."
"아, 거기서 따로 할 일이 있으신가보군요?"
고개를 끄덕였다.
카르텔에서 세아는 백왕의 딸 아리아를 치료하는 중이다.
호아킨과 다른 용병들은 자신이 본 것들을 보고하고자 도시의 영주에게 달려갔다.
"영주님. 영주님께서 맡기신 구제국의 보물은 모두 성공적으로 처분했습니다. 자세한 사항은 여기 보고서에 적혀있습니다."
허드슨이 서류 한 뭉치를 건넸다.
단순히 구제국 보물의 판매에 대한 서류는 아닌 것 같았다.
나는 천천히 보고서를 살피곤 고개를 갸웃했다.
"금액이 예상한 것보다 늘어났군."
구제국의 보물을 판매해서 얻은 이득이 15억 골드.
내 예상을 웃도는 금액이라 되묻자 허드슨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아르카나의 시의회와 거래가 잘 트였습니다."
"15억 골드가 전부가 아닌 듯싶은데."
"아르카나는 이곳 미궁도시와의 전면적인 거래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걸 빌미로 제가 몇 가지 이권을 좀 뜯어냈죠."
이 정도로 많은 구제국의 보물을 정체를 숨기고 팔 수는 없다.
분할판매도 불가능하다.
필연적으로 심연 미궁과 관계되어 있다는 걸 눈치챌 수밖에 없는데, 아예 그 정보를 오픈하고 대신 이권을 뜯어냈다는 말이었다.
카지노 허드슨, 그리고 은행과 관련된 사항들.
하기야 이곳엔 구제국의 보물만이 묻혀있는 게 아니다.
백왕의 은혜를 직접적으로 입은 도시.
백왕과도 연을 지어놓고 싶다는 발로이리라.
이윽고 허드슨이 품에서 편지 한 장을 꺼냈다.
"그런데 시의회 시의원 중 한 명이 제국인이더군요. 제게 몰래 접선해왔습니다."
"······ 제국인이?"
제국인이 황금도시 아르카나의 시의원 중 한 명이라는 것도 의외인데, 허드슨에게 몰래 접선까지 했다는 말은 더욱 의외였다.
"예. 제게 상당히 흥미가 깊었나봅니다. 제국에서 열리는 '특급 경매'에 참가할 의사가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럼 이 편지는?"
"참가할 생각이면 편지를 뜯어보라고 했습니다. 아직 뜯지는 않았습니다만······."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의미다.
천천히 허드슨에게서 편지를 건네받았다.
쫘아악!
인두를 제거하고 편지를 뜯자, 고풍스러운 편지지 한 장이 담겨있었다.
편지지에 적힌 내용을 확인한 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 판매되는 물건들이 엄청나군.'
편지지에 적힌 내용은 특급경매가 열리는 위치와, 경매에 나오는 물건 몇 가지에 대해서였다.
대표적으로 나오는 물건들을 확인하곤 그 수준에 나는 제법 놀랄 수밖에 없었다.
'잘하면 바알 갑옷이 나올지도.'
이 정도 수준이면, 바알 갑옷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것만 같았다.
설령 나오지 않더라도 제국에 잠입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평범한 방식으로는 제국에 접근할 수 없으니까.
물론 은여우 가면에게서 받은 황제의 인장이 있긴 했지만, 그런걸 내보였다간 그 즉시 엄청난 관심과 함께 내 정체가 탄로날 것이다.
그러니 이 기회를 절대로 놓칠 수는 없었다.
제국, 다르칸 영지
"······ 음?"
"왜 그러십니까?"
의아해하는 내 반응을 보며 허드슨이 물었다.
나는 다시 허드슨에게 편지지를 넘겼다.
"읽어봐라. 뭔가 이상한 부분이 보이지 않나?"
"제, 제가 읽어도 되겠습니까?"
"어차피 너한테 보낸 초청장 아니냐."
애당초 내 것이 아니라 허드슨의 것이다.
허드슨이 떨리는 손으로 편지지를 받아들곤 쭉 읽어나갔다.
"··· 특급경매에 올라오는 대표적인 물건들이 적혀있군요. '앗쉬무트의 혁도', '디아로스의 투구', '버서커 세트'······ 컥! 하나같이 전설 등급 이상의 보물들 아닙니까?"
"일반적인 루트로는 구할 수 없는 것들이지."
모두 천운이 닿지 않는다면 구할 수 없는 보물이다.
그걸 골드를 이용해 구매할 수 있는 경매 물품으로 내놓는다는 것이다.
"역시 제국은 제국인가 봅니다. 스케일도 제국 스케일입니다."
"계속 읽어봐라."
"······ 어디 보자. 이번 특급 경매는 다르칸 가문과 데르시안 가문이 공동으로 주체한다는 내용 외엔 크게 이상한 점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 외엔······ 아, 물건을 경매에 부칠 수도 있다는데 위에 예시로 들어준 정도의 등급이 아니면 꿈도 꾸지 말라는 뜻이로군요."
"다르칸, 데르시안. 익숙하지 않나?"
내 물음을 듣고 허드슨이 턱을 쓸었다.
"다르칸은 제국에서도 유명한 검술명가 중 한 곳입니다. 제국의 수많은 정규기사를 배출한 곳이고요. 데르시안은······ 데르시안이라. 처음 들어봅니다만·····."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자 허드슨이 고개를 갸웃했다.
다르칸 가문은 검술명가로 이름이 드높지만 데르시안은 생소했던 탓이다.
하기야, 허드슨은 모를 수도 있었다.
'이자벨라의 성.'
이자벨라 폰 데르시안.
이자벨라의 뿌리는 데르시안 가문에서 왔다.
사막에 납치되어 뱀공주라 불렸으나, 그 본질은 데르시안 가문의 핏줄이었다.
하지만 현재 이자벨라는 사막여왕이 죽은 틈을 타 사막도시 파이살메르로 혼자서 향한 상태.
사막을 계승한 뒤 돌아오겠다며 떠난 상황이다.
'공교롭군.'
특급경매의 주체가 하필이면 데르시안이라.
그 이름이 제국에 있는 건 알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빠른 접촉이었다.
이자벨라를 기다려야 할까?
내심 고개를 저었다.
'내가 먼저 접촉해보는 게 맞다.'
이름 외엔 나 역시 데르시안 가문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왜 제국인인 이자벨라가 사막에서 눈을 뜬 건지, 뭔가의 사연이 있는 건지는 내가 먼저 파악해보는 게 나을 수도 있었다.
"혹시 두 가문과 엮인 일이 있으십니까?"
"유명한 검술 명가가 사람을 끌어모아 '경매'를 한다는 게 다소 이상해서 말이다."
"으음. 확실히······ 게다가 그 폐쇄적인 제국이 외지에서 유망해 보이는 자들을 초청해 진행하는 거 보면, 단순한 경매가 아닐지도 모르겠군요."
단순히 물건을 사고파는 게 전부인 경매가 아니다.
제국식 사교의 장.
유망한 자들을 모아, 그중에서도 눈에 띄는 자들과 따로 접선하는 게 아닐는지.
다르칸 정도의 제국 명가가 주체로 끼어있다면 추가적인 무언가가 더 있다고 봐야 했다.
그들은 단순히 돈으로만 움직이는 자들이 아니니까.
"물건을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파는 것도 중요할 것 같습니다."
"살 엄두도 내지 못할 물건을 보여줘야겠지."
요컨대 다르칸이나 데르시안 가문과 접촉하기 위해선, 물건을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판매대에 올려 '보여주는 것' 역시 중요하다.
두 가문과 접촉하면 제국의 더 깊은 내부로 들어가는 것도 가능할 터.
물론, 그 과정에서 운이 좋으면 바알 갑옷을 구할 수도 있을 테고 말이다.
"경매대에 올릴 물건이 있으십니까?"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있기는 있다.
바알 투구를 올려서 바알 갑옷의 소유자를 찾는 것도 고려해볼 일이다.
바알 갑옷의 소유자라면 반드시 바알 투구를 구매하고 싶을 테니.
이번에 얻은 골통파괴자 역시 등장하면 난리가 날 건 자명했다.
아니면 아예 '빛의 옥좌'를 올려 제국의 모든 시선을 모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굳이 경매대에 안 올려도 두 가문에서 접선해올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골드가 많아서 말입니까?"
"그들은 우리를 백왕의 관계자로 여기지 않겠느냐?"
"아. 하긴······ 그것도 그렇습니다."
허드슨이 동의했다.
그들이 자신을 초청한 배경에는, 이곳 미궁과 백왕이 연관되어 있을 공산이 크다.
그것을 보고하지 않을 리 만무하니 굳이 경매에 참여하지 않아도 두 가문이 접선해올 확률은 높았다.
백왕과 제국은 서로 교류가 전무했으므로.
헌데 갑자기 출현한 오주력의 도시에서 허드슨이란 인물이 나타나 미궁의 물건을 판매하고 있으니, 제국에선 떡밥을 던져볼 만하다.
내가 그 떡밥을 문 이상, 제국은 다시 고민에 빠질 것이다.
우리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
오주력과 백왕의 의도를 파악하려고 무던 애를 쓸 게 틀림없었다.
"그런데 영주님.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사흉 바알'······ 깨우셨습니까?"
"의도한 건 아니다."
"······ 쿨럭! 쿨럭!"
허드슨이 사레가 들렸다.
설마설마했건만, 설마가 사람을 잡았다.
"걱정하지 마라. 제어할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니."
본의는 아니지만 사흉을 깨운 이상 최대한 처리는 해볼 생각이었다.
바알 갑옷만 구하면 일단 제어가 된다고 했으니, 여기에 걸어볼 수밖에.
그리고 내가 나서지 않아도 토벌단에 토벌될 수도 있었다.
머리가 모자라지 않은 이상, 주변 도시들이 십시일반 하여 토벌단을 꾸릴 것이다.
수련자의 산과 연결된 중립도시 다섯 곳 중 한 곳만 막으면 되는 쉬운 일이니까.
'워프를 끊고 단교를 한다거나 하는 멍청한 짓은 안 하겠지. 그래도 명색이 도시의 주인들인데.'
중립도시 선에서 막지 않으면 사흉이 어디로 튈지는 아무도 알 수 없게 된다.
사흉이 갈 수 있는 선택지가 수십, 수백 가지로 늘어나는 순간 힘을 모으기도 힘들어진다.
그리하여 제국이나 여신교가 나서게 되면 처음 중립도시를 단교했던 도시들은 책임을 면하기 어려워질 터였다.
억지로 도시를 빼앗길 가능성도 농후했다.
그러니, 괜히 일 커지기 전에 힘을 모으는 게 현명한 선택이다.
"헌데 아이작은 어디갔지?"
"아······ 그게."
허드슨이 머리를 긁적였다.
말하기 껄끄러워하는 태도.
내가 유심히 지켜보자, 허드슨이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 가출했습니다."
"············?"
*
백왕전.
백왕은 가만히 자신의 앞에 선 자를 바라보았다.
"······ 살아돌아왔구나."
"제가 돌아오지 않기를 바라셨습니까?"
백왕의 딸, 아리아.
그녀가 정신을 차린 뒤 크람델로 복귀한 것이다.
백왕은 고개를 저었다.
"쉽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가장 빠른 궁기를 보내려 했지만, 이미 한 발 늦었더구나."
"흑왕이 두려우셨겠죠."
"두렵지 않다."
"저는 두려웠습니다."
"무엇이 말이냐?"
"락투샤. 그는 사주력보다도 강했습니다. 다른 흑왕의 직속들도 마찬가지이겠지요."
본래, 비슷했다.
하지만 지금은 흑왕 쪽의 전력이 백왕을 넘어섰다는 말이다.
락투샤는 흑왕의 직속들 중에서 가장 강한 자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사주력을 넘어섰다.
아리아가 그렇게 보았다면, 그게 맞을 것이다.
"걱정말거라. 나 역시 가만히 있지는 않을 테니."
"대비하고 있으신 겁니까?"
"음. 사주력 모두 강해질 거다. 그리고, 오주력 역시 추가되었지."
"··· 오주력, 말입니까?"
아리아 역시 크람델에 오며 들은 이야기가 있었다.
다섯 번째 주력이 새로 탄생했노라고.
신화의 관을 넘어서며 신비를 파괴하는 능력을 지녔다고.
백왕조차도 넘어설지 모르는 진짜 괴물이라고!
······ 하지만, 소문은 와전되는 법이다.
"그래. 그는 나를 죽일 가능성을 지닌 자다."
"······!"
그런데 백왕이 순수히 인정했다.
그가 '자신을 죽일 수 있는 자'라는 표현을 쓰는 것 자체를 아리아는 처음 보았기에 다소 놀랄 수밖에 없었다.
소문이 사실이란 말일까?
"너도 오주력을 만나게 된다면 마음에 들어할 것이다."
말투가 묘하다.
마음에 들어한다?
자신이 오주력을 마음에 들어해야할 이유가 있나?
'설마?'
아리아는 인상을 구겼다.
"관심없습니다."
"관심을 가져야할 것이다."
"······."
"오주력은 현재 심연 미궁의 주인이 되어있는 바, 그곳의 정리가 끝나면 만날 수 있을 터. 자리를 마련해주마."
불길한 예감은 틀리질 않았다.
백왕은 오주력이란 자에게, 그 까마귀의 왕에게 그녀를 바치려고 하고 있었다.
한 번 정해진 백왕의 말은 절대적이다.
그게 싫어서 아리아는 수련자의 산에 박혀있던 것이었다.
"······ 마음에 둔 자가 있습니다."
"잊어라."
"그는 락투샤를 뛰어넘는 강자입니다. ······락투샤에게서 저를 살렸으며, 어쩌면 사흉조차 제어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녀가 본 게 확실하다면 그는 분명히 락투샤를 뛰어넘는 검신이다.
수련자의 비석을 단칼에 베어냈으니.
무엇보다 검선이 남긴 책을 넘겼다. 책에 적힌대로 그는 비석을 자르고 가장 흉흉한 검, 사흉 바알을 제어할 자격을 지니고 있었다.
역시나 사흉의 이야기가 나오자 백왕의 귀가 솔깃해졌다.
"그렇다면, 데려오거라. 내 눈으로 확인해야겠다."
자신이 직접 오주력과 그 남자의 실력을 저울질하겠다는 거다.
게다가 정말로 사흉 바알을 제어할 수 있다면 그건 엄청난 일이다.
사실일 경우 오주력을 뛰어넘는 가치를 지니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리아가 의지를 담아 말했다.
"그 전에, 북천검을 깨우겠습니다."
"··· 북천검을?"
북천검은 북부에 봉인된 유래를 알 수 없는 검이다.
하지만 워낙에 위험하고 강력하여 백왕이 직접 봉인해둔 것이었다.
"그의 관심을 끌려거든, 저 역시 더욱 강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궤변이군."
"사실입니다."
아리아는 한 치도 물러나지 않았다.
자신이 우물안 개구리였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천재가 많다.
천재를 뛰어넘는 진정한 천재들이 말이다.
그들과 마주하려면 모든 도전을 두려워해선 안 된다.
'락투샤보다 강하고, 사흉마저 제어할 수 있는 자라.'
궤변임을 알지만 구미가 당기는 것도 사실이다.
게다가 흑왕이 자신을 노리는 게 확실해진 이상 백왕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이미 대비는 하고 있지만, 수는 많을수록 좋으니까.
'한 번 만나보고싶군.'
*
젠장할.
입안이 쓰지만, 달리 방도가 없었다.
팬텀의 정체도, 백왕의 딸도 납치하지 못한 이상, 마스터에게 남은 건 제국에서 열리는 특급경매뿐이었다.
'엄청나군.'
경매의 주체가 되는 다르칸의 영지에 들어서자 가히 절색이었다.
검술 명가라는 소문은 익히 들었지만 워프 앞에서부터 수많은 예술품이 즐비하게 널려있었다.
건물은 어찌나 큰지.
하나같이 아름다운 양식에 압도되어버릴 것 같았다.
워프를 지키는 병사들조차도 심상치가 않아보였다.
"더 화려하게 올 걸 그랬나?"
"이거보다 더 화려하게 오는 게 가능해?"
마스터의 말을 흑요가 받았다.
흑요는 반쯤 체념한 얼굴로 마스터를 서포트하고자 따라왔다.
황제가 탈법한, 황금으로 만들어진 팔두마차를 끌고온 마스터는 당당하게 허리를 폈다.
'··· 여기서부터가 진짜다.'
최대한 이목을 끌어, 제국의 귀족들과 접선해야만 된다.
주변 곳곳에 있는 마차들도 자신의 것보다 화려하진 못했다.
아마 저들 중 몇몇은 특급 경매에 초대받은 자들이리라.
다르칸 영지에서 경매가 열리기 전에 정보를 파악하려고 먼저 온 게 분명했다.
"플레이어 중엔 우리가 최초로 참가하는 거 맞지?"
"······ 닥쳐라."
"아, 여기선 그 단어 말하면 안 되나?"
이곳은 제국이다.
제국은, 플레이어를 대놓고 꺼려한다.
아마도 사신교가 제국 어딘가에 뿌리를 두었을 가능성이 있었다.
괜히 찍혀서 죽기 싫으면 입조심을 해야함이었다.
"하여간 대단하네. 제국 휘하 가문의 영지가 이 정도인데, 황실은 어떨까?"
황실이라.
상상도 가질 않았다.
하지만 만약 황실까지 닿을 수만 있다면, 모든 손해를 만회하고 더 높이 올라설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황금의 팔두마차는 이곳에서도 제법 눈에 띄는 모양이었다.
제국시민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으며 마차가 천천히 걸었다.
'마음껏 쳐다봐라. 이 마차를 준비하는데 삼천만 골드나 들어갔으니.'
물론 그 삼천만 골드는 흑요에게서 회수한 것이었다.
어쨌거나, 시선을 만끽하며 마스터는 한껏 콧대가 올라가 있었다.
"뭐, 뭐야?"
"히드라곤?"
"괴물이 어떻게 워프를······!"
그때, 워프의 주변이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고개를 돌리자 거대한 괴물 하나가 워프를 넘어서 있었다.
······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제국으로 넘어오는 워프는 철저하게 감시, 감독된다.
강력한 제국의 기사들이 직접 지키고 있었다.
그것을 넘어서 괴물이 워프를 타고 넘어왔다?
백 번 양보해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평범한 히드라곤이 아닌데?"
"······ 히드라곤의 혼으로 소환한 히드라곤이다."
미친.
히드라곤의 혼이라니!
그라시아가 판게니아와 지구를 다 돌면서 찾고 있는 물건 아니던가.
허나 확신했다.
뿔이 달려있긴 했지만 저토록 이질감없는 히드라곤은, 히드라곤의 혼으로 소환된 개체 말곤 없었다.
대체 누가?
어떤 간 큰놈이 히드라곤의 혼을 소환해 다르칸 영지를 밟은 거지?
정신이 나가지 않고서야 히드라곤을 소환하고 그 뒤에 마차를 달아서 올 생각은 못할 텐데.
"정지!"
"멈추십시오!"
더욱이 놀라운 건 병사들의 태도다.
곧장 공격해도 부족할 판국에 무언가를 알고 있는 듯 행동하고 있었다.
이윽고 마차에서 한 남자가 내렸다.
"'골통파괴자'······?"
"저거 거인족 전용무기 아니야?"
남자가 든 무기가 유독 눈에 익다.
골통파괴자.
분명히 거인족의 최고전사가 사용하는 검이다.
거인족 전용무기를, 인간으로 보이는 자가 착용하고 있었다.
"저 검은 염소 투구는 뭐야? 패션 한 번 끝내주네."
흑요가 중얼거렸다.
쓰고 있는 투구는 뭔지 모르겠다.
하지만, 거인족 전용무기인 골통파괴자를 든 강력한 전사임은 분명했다.
그 모습은 뭐라고 해야할까, 압도적이었다.
3m가 넘는 대검을 한손에 쥔 채 검은 염소의 탈을 쓰고 있었다.
상의는 아예 입지도 않았다.
완벽한 야생마의 몸매. 넋이 나갈 것만 같다.
"우리도 통과하는데 30분은 걸렸는데. 저걸 통과시킬까?"
"······ 통과 못하겠지."
아무리 봐도 인간이 아니다.
인간의 탈을 쓴 무언가가 분명하다.
변신한 거인족이거나.
당연히 제국이 저 정체모를 자를 받아줄 리 없었다.
초대장을 든 자신들도 신원확인을 하고 통과하는데 30분이 걸리지 않았나.
하물며 제국 도심에 히드라곤을 끌고 왔다?
그걸 묵인할 리가.
"통과!"
"통과하십시오!"
"······ 뭐야."
흑요가 어이없어 했다.
품에서 종이 한 장을 내밀자, 그 즉시 통과된 것이다.
아무런 확인 절차도, 조치도 없이.
히드라곤을 앞세운 마차는 자유롭게 도시로 들어왔다.
주변의 모든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면서.
무력(武力)
"크게 의심은 사지 않은 것 같습니다."
워프를 벗어난 허드슨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만에 하나 통과를 못하면 어쩌나하는 걱정을 계속하고 있었던 탓이다.
나는 그런 허드슨의 태도를 보며 피식 웃곤 말했다.
"걱정하지 마라. 완벽하게 넘어갔다."
초청장을 보이자마자 통과했다는 건, 다르칸의 영주가 직접 승인했다는 의미.
허드슨을 백왕의 관계자로 여기는 게 분명했다.
여기까지 왔으면 이제 영지 내에서 책을 잡힐 일은 없었다.
"그나저나, 제 호위로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으니 말을 놓도록."
"······ 제가 감히 어찌."
"다르칸 영지에 초대받은 사람은 너다. 나는 호위로 충분해."
"노, 노력해보겠습니다."
적응해야할 일이다.
나는 어디까지나 허드슨의 호위로 이곳에 참가했으니까.
"············ 저기."
그때였다.
마차 안에서 불현듯 끼어든 음성.
고개를 돌리자, 멀뚱멀뚱 눈을 뜨고 양손에 창을 쥔 남자가 어색하게 볼을 긁적이는 중이었다.
"여, 여긴 제국 아닙니까? 제가 따라와도 되는 건가요?"
창술사 발테!
수련자의 산에서 주워온 부캐다.
장장 2년간 제한을 최대치로 올린 채, 혼돈 수련자 영역에서 창만 휘두르던 녀석.
외기의 개화에 성공한 캐릭터를 버리긴 아깝지 않나.
"좋은 경험이 될 겁니다."
허드슨이 별거 아니라는 듯이 답했다.
허드슨 역시 발테가 나의 부캐릭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아이작, 이자벨라와 마찬가지로.
"조, 좋은 경험이요? 제가 도움이 될까요?"
미친 듯이 떨어대는 발테를 보고 시선을 돌려 허드슨과 눈을 맞췄다.
'숙맥이군.'
'숙맥이로군요.'
아무래도 창술사 캐릭터는 부끄러움이 많은 것 같았다.
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Lv. 10]
놀랍게도, 창술사 발테의 레벨은 10이었다.
모든 제한이 풀리자 본연의 레벨이 나타난 것이다.
레벨 7에 수련자의 산에 올랐는데 10이 되어있는 건 2년간 상당한 경험을 축적했음을 의미했다.
백왕의 딸과 매일 대련을 한 게 도움이 된 걸까?
정작 본인은 자신을 괴롭힌 게 백왕의 딸이라는 걸 전혀 눈치 못 채고 있는 듯했지만.
"저, 저의 형편없는 실력이 누가 되지 않을지요······."
"너는 훌륭하다."
"아, 아닙니다. 저따위가 어떻게."
발테는 자신의 가치를 완전히 모르고 있었다.
레벨 10에 외기를 개화한 창술사.
별을 먹어 초월할 압도적인 가능성을 지닌 예비 초월자나 다름이 없다.
만약 누군가가 발테의 잠재력을 알아차렸다면 어떻게든 데려가려 할 것이었다.
포기하지 않는 근성까지 갖췄으니 그야말로 대기만성형의 인재다.
'2년간 패배만 한 탓에 이런 성격이 되어버렸군.'
아리아한테 매번 쥐어터진 덕에 소심해진 듯싶었다.
물론, 그 외에도 내가 버려두고 간 게 결정적인 원인이었을 터다.
방치만 안 했으면 그럴 일도 없었을 테니.
'묘하게 나사 하나 빠진 캐릭터만 만나는 기분이 드는데.'
판게니아를 플레이할 때의 나는 실험적으로 많은 캐릭터를 육성했다.
족히 수백 개의 캐릭터가 방치되었고 발테도 그중 하나일 따름이다.
이자벨라, 아이작, 발테······ 아이러니하게도 하나씩 하자가 있어서 내버려 둔 캐릭터들을 계속 만나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정작 심혈을 기울여 키운 캐릭터는 소식조차 들려오지 않았다.
빌헬름에게 별을 몰아주긴 했지만, 그렇다고 다른 캐릭터가 초월을 하지 않았던 것도 아니다.
'명란젓고난, 사람낚는어부, 뇌신강림.'
SP를 1만 포인트나 들여서 공들여 키운 검술의 대가, 명란젓코난을 계승한 후계 캐릭터.
명란젓고난.
녀석은 어디 있을까?
'사람낚는어부'는 바다의 주인, 멸어(滅漁)도 낚는 낚시꾼이다.
'뇌신강림'은 전격의 대마법사고······.
좋은 아이템을 전부 빼놔서 빌헬름에게 옮긴지라 빈껍데기긴 하지만, 초월하여 능력 자체는 출중했던 강력한 부캐들.
다 어디 간 걸까?
'죽었나?'
살아만 있으면 어떻게든 소식을 들리게 만들 캐릭터들이다.
이 정도로 소식이 없는 걸 보면 정말 죽은 건가 싶었다.
"발테. 영주님의 말씀에 토를 달지 마십시오. 영주님께서 훌륭하다면, 훌륭한 겁니다. 따라 하십시오. 나는 훌륭하다."
"예, 옙. 나는 훌륭하다."
"좋습니다. 영주님께서 주신 은혜를 항상 잊으면 안 됩니다."
"이, 잊지 않겠습니다."
허드슨이 발테의 기강을 잡기 시작했다.
외기를 개화하는 데 도움을 준 게 나라는 걸 발테도 깨닫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재차 상기시키는 것이다.
이윽고 마차를 멈춰세운 허드슨이 나를 보며 말했다.
"영주님. 출출한데 식사부터 하시죠?"
"여긴?"
"다르칸 영지에서 가장 비싼 음식점입니다. 제국의 귀족이나 도시의 주인들만 이용한다는군요."
"들어가지."
고개를 끄덕였다.
특급경매까진 시간이 꽤 남았다.
그 전에 미리 도착한 건 다르칸 영지를 탐색하기 위함이다.
특급경매를 위해 제국의 귀족들과 다른 도시의 주인들도 대거 다르칸 영지에 들어왔을 터.
미리 그들을 살필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다르칸의 오후.'
4층 건물 전체가 음식점으로 활용되고 있었다.
허드슨의 말마따나, 그 앞엔 수많은 형형색색의 마차가 놓인 상태다.
제국의 귀족들과 초대된 도시의 지배자들.
그들이 이곳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 것이다.
"히드라곤?"
"······ 뭐야, 저건."
"마차를 끌고 온 것 같은데?"
"그럼 히드라곤이 말이라고? 저걸 영지에서 허락해 준건가?"
아무런 치장 없이도 히드라곤은 시선을 끌기에 아주 좋았다.
건물의 바깥쪽에 자리한 채 식사를 하던 이들도 모두 이쪽을 바라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우리는 느긋하게 다르칸의 오후로 발을 옮겼다.
*
'다르칸의 오후'는 음식점치곤 시스템이 특이했다.
먼저 돈을 주면, 그 돈에 따른 음식을 준비해주는 식이다.
당연히 층수에도 차이가 났다.
"최고로 대우해드리겠습니다!"
100만 골드를 쥐어주자, 1층에 있던 종업원 전부가 고개를 숙였다.
이어 4층의 창가자리로 안내를 받았다.
가장 커다란 식탁.
12인이 앉을 수 있는 자리에 셋이 앉았다.
"저희 다르칸의 오후를 이용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혹시 못 드시는 종류의 음식이 있으십니까?"
깔끔한 양복차림을 한 종업원의 물음에 허드슨이 고개를 저었다.
"없다."
"그럼 먼저 '레비아탄의 콧물'로 만든 특제 쥬스를 맛보시지요. 저희 가게의 자랑이자 특급 손님에게만 선보이는 특별한 음료입니다."
"······?"
레비아탄의 뭐?
레비아탄은 용종의 괴물이다.
그렇다는건 용의 콧물로 만든 쥬스라는 뜻이었다.
잠시후 종업원이 하얀 액상의 쥬스를 긴 컵에 따라 내왔다.
······ 뭐냐 이 걸쭉한 건.
못 먹는 게 없는 사람도 못 먹을 거 같은 비쥬얼.
이걸 진짜 마시라고 갖다준 건가?
한창을 고민하고 있을 때, 옆자리가 소란스러워졌다.
"잠깐. 저 자리 우린 안 줬잖아? 장난해?"
"데르시안 영애님. 저 자리는 50만 골드 이상 소모하신 손님분들에게만······."
"닥쳐. 평민 주제에 누구한테 토를 다는 거야?"
"죄, 죄송합니다."
"당장 우리도 같은 자리로 옮겨줘."
"그, 그건 가게 원칙상······."
짜악!
종업원의 얼굴이 반쯤 돌아갔다.
이어 뺨을 쥐고 어안이 벙벙해하는 종업원을 향해 소녀가 폭언을 내뱉었다.
"쓰레기같은 놈. 네가 죽고싶어서 환장했구나? 내가 돈이 없어서 이러는 거 같아?"
"죄, 죄송합니다."
"됐고. 저 자리, 우리한테 줘."
"그건 곤란······."
"알트. 한 마디만 더 하면 베어버려."
"예."
스릉.
옆에 서있던 검사가 검을 겨눴다.
그러자 종업원의 얼굴이 백지처럼 하얘졌다.
촌극이 따로없지만, 절로 시선이 갔다.
'데르시안?'
이자벨라의 성, 데르시안.
··· 저 철없는 소녀가 그 데르시안 가문의 영애라고?
다르칸과 함께 특급 경매를 주체하는?
그래서 주변에서도 찍소리 못하고 있는 건지.
무엇보다.
'동여우가면이라.'
데르시안 영애의 옆에 선 검사가 동색의 여우가면을 쓰고 있었다.
일전 심연미궁에서 2성 초월자가 은색의 여우가면을 쓰고 있던 것과 같은 모양이다.
[Lv. ♠]
다만, 은여우가면과 다른 게 있다면 그건 동여우가면 검사의 머리 위로 떠오른 레벨이었다.
숫자도, 별도 아니고 스페이드다.
저 이상한 표기가 이곳에 들어올 때부터 나의 시선을 강탈해가고 있었다.
'초월자임은 틀림없는데.'
초월한 건 분명한데, 별을 먹고 초월한 게 아닌 것 같다.
하지만 내가 아는 인간의 초월방법은 오직 별을 먹는 것뿐이었다.
아니면 아예 '인간'을 벗어난 다른 방식으로 레벨을 올리던가.
인외 취급 받는 성녀나, 데몬하트를 이용해 10.5레벨을 달성한 막심처럼 말이다.
제국은 별을 먹는 것 외의 다른 방식으로 초월하는 방법을 찾아낸 건가?
"······."
허드슨이 미간을 찌푸렸다.
발테와 함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밥먹는 곳에서 저런 행태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는 것이다.
하물며 허드슨은 영국의 귀족.
저런 버릇 없는 짓을 가만히 묵과하긴 어려울 것이었다.
다만, 내가 있어서 나서지 못하고 있을뿐.
내게 해가 될까봐 참고 있을 따름이다.
'처음에는 연기인가 싶었다만.'
너무나도 어이가 없는 촌극에, 처음에는 우리를 떠보기 위한 연극인 줄 알았다.
하지만 이 가게에 온 것도 4층에 오른 것도 모두 즉흥적이었다.
미리 대비하고 데르시안 가문의 영애를 배치해두는 건 이치에 맞지 않다.
말인 즉, 저 데르시안 가문의 소녀는 진짜로 맛이 갔다는 의미다.
'마음대로 해라.'
하여, 나를 보는 허드슨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네 마음대로 하라고.
참는 것도, 참지 않는 것도 허드슨의 자유다.
초대장을 받고 온 자는 내가 아니라 그였으니.
"3초 줄게. 제대로 답해야할 거야."
"······!"
그 순간 데르시안 영애가 카운트다운을 시작했다.
"3."
숫자를 세자 종업원의 얼굴은 새하얌을 넘어 파래졌다.
진짜로 죽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2."
"자, 잠깐······!"
"1. 알트, 베어버려."
알트라 불린 동여우가면의 검사가 검을 휘두르려던 찰나.
"제발 좀 닥쳐라, 철없는 꼬마야."
허드슨이 외쳤다.
동시에, 데르시안 영애의 표정이 잔뜩 굳어버렸다.
"······ 지금 그거 나한테 하는 소리야?"
"밥을 먹을 땐 조용히 하는 거라고 부모한테 배우지 않았나? 아, 부모가 안 계신가보군."
"뭐, 뭐?"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 부디 사람이 되거라."
"알트······! 저 새끼 죽여버려!"
데르시안 영애가 악을 질렀다.
그런데 허드슨, 설마 내 말투를 따라하는 건가?
쉬이이익!
채엥!
허드슨을 향해 날아오는 검을 가볍게 쳐냈다.
'제법.'
손이 얼얼하다.
역시, 저 스페이드가 초월자의 표식이 맞는 모양이었다.
초월자를 상대로 정면에서 정식으로 맞붙어본 적은 여태껏 없었다.
그리고 진정으로 저 동여우가면이 초월자라면 10.5레벨의 막심 따위와는 차원이 다르다.
아무런 대비 없이 상대할 수 있는 자가 아니다.
수련자의 산을 오르기 전이었다면 빛의 옥좌 같이 최대한 다른 수를 사용했겠으나.
'할만하다.'
지금의 나는 초월자조차도 있는 그대로 상대할만 했다.
탐욕을 상대할 때처럼 가치를 걸고 내기를 하거나, 사막여왕의 신비를 파괴했을 때와 달리, 오롯이 나의 '무력(武力)'만으로 말이다.
그 정도 수준의 성장과 성과는 이뤄냈다고 자부한다.
그러니, 그간 쌓은 나의 노력이 어디까지 닿을 수 있을지, 나 역시도 궁금했던 참이다.
오히려 잘됐다.
데르시안의 가문과 스페이드 표식의 초월자.
이 궁금증을 모두 해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
"······ 죽고싶나보군."
나는 골통파괴자를 쥔 채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참교육(1)
"······ 죽고싶나보군."
나는 골통파괴자를 쥔 채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동여우가면의 검사가 어느덧 눈앞에서 검을 들이밀고 있었다.
슈아아악!
정확히 내 목줄기를 노리고 달려드는 검.
콰아아아앙-!!
순간적으로 발을 들어 차내자 동여우가면의 검사는 벽을 뚫고 그대로 날아갔다.
그야말로 종이 한 장 차이.
예상하지 않았다면 그대로 목이 잘렸을 터.
초월자의 속도를 처음 경험하는 자는 자신이 어떻게 죽는지도 모르고서 죽었으리라.
하지만, 예상했다.
초월자와의 대결 경험 자체는 나보다 많은 자가 없을 것이기에.
처음 가게에 입장했을 때부터 나는 동여우가면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
주변의 경악 어린 눈빛을 뒤로한다. 빠르게 바닥을 박차고 뚫린 벽을 넘었다. 이어 허공을 날며 골통파괴자를 양손에 쥐자 검기의 실이 검을 감쌌다.
"'검강'이 발현되어 피해량이 50% 증폭합니다."
"'골통파괴자'의 효과로 검강의 피해량이 30% 증가합니다."
도합 80%의 피해량 증가!
골통파괴자는 검 숙련도 레벨에 따른 검기의 피해량을 늘려줬고, 그 결과 거의 두 배에 달하는 파괴력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전신의 근육이 팽창하는 느낌과 함께 있는 힘껏 동여우가면의 검사를 꽂아 넣었다.
꽈아아아앙-!
바닥이 움푹 패며 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감촉.
동여우가면의 검사가 곤죽이 되어 박살 난 게 먼지 사이로 보였다.
가면이 으스러지고, 괴물같이 주름이 자글자글한 남자의 얼굴이 나타났다.
쉬이익!
그 순간 뒤에서 느껴지는 기척.
날아오는 검을 맨손으로 낚아챘다.
일순간 살점이 튀었으나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어 잡은 검을 끌어당기자 중심을 잃은 상대가 주춤거렸다. 그 찰나를 놓치지 않고 가까이 다가온 상대의 얼굴을 이마로 때려 박았다.
쩌적!
동여우가면이 깨지며 얼굴이 드러났다.
조금 전 검으로 곤죽을 만든 자와 똑같은 얼굴.
똑같은 자가 한 명이 더 있다.
'한 명이 아니군.'
주변으로 동여우가면을 쓴 자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 숫자가 열하나.
[♠]
하물며 모두가 스페이드 표식의 초월자다.
그러나 방금 확인한 두 명의 얼굴로 확신할 수 있었다.
'분신. 초월하여 얻은 권능이다.'
초월자들이 지닌 특별한 권능.
동여우가면의 권능이 바로 이 분신술인 듯싶었다.
허나 권능이라면 저것들은 분신이되 분신이 아니다.
저것들 전부가 진체(眞體)였다.
도합 열둘의 진체를 전부 박살 내야, 마침내 죽일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죽인 건 한 명.
남은 숫자는 열하나.
귀찮기 그지없는 권능이었다.
하기야, 초월자가 한 방에 끝났다면 그건 그것대로 시시했을 테다.
게다가 검강을 봐놓고도 반응이 없다.
분신 한 명이 죽을 때도 얼굴에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
마치 인형처럼.
'전부 박살 내주지.
분신을 전부 박살 내도 지금처럼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을까?
진정으로 궁금했다.
*
"알트! 죽여! 죽여버려! 뭐 하는 거야!"
데르시안 영애가 건물 안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악을 질렀다.
알트라 불린 그녀의 호위는 패배를 모르는 강자였다.
열두 개의 목숨을 지닌 괴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광전사!
여태껏 저 '열두 목숨'을 모두 거둬간 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상대 역시 괴물이었다.
알트와 마찬가지로 타격을 도외시하며 미친 황소처럼 맞붙고 있었다.
"······ 지금 내가 뭘 보고 있는 거지?"
"저건 검기가 아니라······ 검강 아닌가?"
"검강? 검강을 구사할 줄 아는 자라고?"
이 가게에 모인 자들은 모두 최소 한 도시의 지배자들이다.
그들을 따르는 기사들 역시도 지금의 광경을 보며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검강이라니!
검기는 그저 기운을 덧씌워 파괴력을 올리는 용도다.
하지만 검강은, 그 기운을 정형화하여 틀을 입힌 지고의 경지였다.
단순히 비교해도 검기와는 파괴력 자체가 차원이 다르다.
그때 데르시안 영애의 귀로 또 다른 자들의 말이 들려왔다.
"저 거대한 검은 무엇이냐?"
"골통파괴자. 거인족 전용의 무기입니다. 거인족의 최고전사들만이 사용할 수 있는 장비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럼 저자가 거인족이란 말이냐?"
"아무래도······."
"거인족치고는 작은데?"
"간혹 거인족 중에서도 몸을 작게 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자가 있습니다. 최고전사라면 필히 그 능력을 지니고 있을 겁니다."
거인족의 최고전사라니.
그게 무슨 생뚱맞은 소리인가.
'거인족이 여기에 왜 있는 거야?'
거인족은 신화종이다.
인간을 압도하는 괴물이지만 이 세상에 극소수만이 남아있다.
또한, 거인족은 여신의 수호를 자처하는 지상 최강의 종족이었다.
감히 그 강력함은 용족에 비견할 만했다.
심지어 어지간한 용족보다도 강력하다고 알려진 게 거인족이었다.
그런 거인족의 최고전사라면 그 무력은 두말할 필요가 없으리라.
혹여나 착각일 수도 있지만, 기사들은 확신했다.
저 검강이 바로 그 증거였다.
경지에 오른 기사들 모두가 선망하는 증표!
"검강을 휘두르는 거인족 최고의 전사라······."
"저런 존재를 호위로 쓴다?"
"바깥의 히드라곤 마차도 저자의 것 아니었나?"
"··· 대체 누구지?"
모두의 시선이, 허드슨에게로 향했다.
대관절 누구이기에 거인족 최고의 전사를 그저 호위로 쓸 수 있단 말인가?
태도는 더 가관이었다.
후루룩!
여유롭게 앉아, 특제 음료를 마시며,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당연히 이길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대단한 여유로군.'
'저 데르시안 가문의 광전사를 상대로······.'
물론, 그런 그들의 생각과 달리, 허드슨은 가시방석이었다.
헛구역질이 나오려는 걸 겨우 인내하며 식은땀을 삐질 흘렸다.
'이딴 걸 돈주고 누가 마신다는 거지?'
걸쭉한 레비아탄의 콧물.
생긴 것 그대로의 맛이었다.
영국의 수많은 음식들을 맛봤던 허드슨이지만, 이 맛은 정말 불쾌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여유를 잃어선 안 된다.
주변에 보이는 자신의 품격이 곧 영주인 란돌프의 품격이니까.
쿵!
콰콰쾅!
다시금 들려오는 소란에, 허드슨을 제외한 모두가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시선을 돌린 모두가 할 말을 잃은 채 입을 꾹 닫아버렸다.
그건 그야말로 폭력이라 할 수밖에 없는 광경이었으니.
저 괴물은, 데르시안 가문의 광전사를 압도적으로 찍어누르고 있었다.
찰나와 같이 짧은 순간에 여섯이 더 박살난 것이다.
"······ 알트!"
데르시안 영애의 두 눈이 크게 벌어졌다.
알트가 이 정도로 고전한 상대는 처음이다.
게다가 저 정도로 모든 걸 파괴하는 상대도 처음이었다.
상처가 늘어나는 것따윈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상대를 죽이는데에만 집중하고 있다.
걸리는대로 부수고 파괴하며 쉴 틈을 주지 않았다.
저 파괴력을 검사는 감당할 수가 없다.
그 누가 됐더라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아······!"
그녀는 지금 상황을 믿을 수가 없었다.
이제 남은 건 고작 하나뿐이었다.
그 남은 한 명마저도 목이 잘리기 직전이었다.
"멈춰라!"
그때였다.
굉음을 들은 경비대가 속속들이 도착하고 있었다.
모두 다르칸 영지의 정예병사들.
데르시안 영애가 그들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막나가는 놈이라도, 이곳은 다르칸 영지.
다르칸 영지 내에서 더 소란을 피웠다간 저놈도 살아나가지 못할 테니까.
한 명만 살아있으면, 알트는 죽지 않는다.
불사조처럼 다시 부활할 수 있다.
'살았······.'
콰득!
하지만, 데르시안 영애의 기도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상대가 거대한 대검을 들어 마지막 남은 알트의 머리를 박살낸 것이다.
"아아······."
휘청!
데르시안 영애가 휘청이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호위가 죽었다.
데르시안 가문의 광전사가, 절대로 패배하지 않던 검사가 죽어버렸다.
빠드득!
영애가 이내 바닥을 짚고 일어났다.
저놈을 용서할 수가 없었으니까.
데르시안 영애가 즉시 건물을 나서자, 경비대 대장이 나섰다.
"데르시안 영애님 아니십니까?"
"그래. 내가 데르시안 가문의 독녀 이자벨라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입니까?"
"저놈은 감히 데르시안 가문을 건드렸다. 그걸로도 모자라 내 호위를 죽이고, 나를 욕보였다."
데르시안 가문을 건드린 저자를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
경비대장의 눈이 다시 이 소란의 중심으로 향했다.
커다란 검을 든 채 서있는, 마치 바바리안 같은 남자.
'데르시안 가문이면 다르칸의 영주님과도 각별한 사이이지.'
하물며 이번 경매를 함께 진행하는 가문이다.
데르시안 가문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설령 그녀가 잘못을 저질렀어도 감싸주어야할 정도로.
"워, 워! 무슨 소란이냐?"
"······ 파멜님!"
다르칸 영지의 수호기사 파멜.
그가 기사들과 함께 자리에 나타났다.
병사들이 정렬하여 그를 맞이하자 파멜은 한 차례 고개를 끄덕이곤 시선을 돌렸다.
"음? 데르시안 영애님?"
그를 본 데르시안 영애의 기세가 더욱 등등해졌다.
"수호기사 파멜경. 저자가 저를 욕보이고, 제 호위를 죽였습니다. 가만히 지켜만 보실 겁니까?"
"저자가 그 광전사를 말입니까? 아니······ 잠깐만."
파멜이 남자를 보다가, 마침 건물에서 나온 허드슨을 발견하곤 고개를 갸웃했다.
"혹시, 허드슨님이십니까?"
"그래."
"초청장을 보여주실 수 있습니까?"
말에서 내린 파멜이 허드슨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허드슨이 품에서 초청장을 꺼내들었다.
그를 확인한 파멜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군요. 혹시 이 사건과 관계되어 있으십니까?"
"저기 서있는 남자가 내 호위다. 그리고 저 여자의 말과는 반대로, 먼저 공격당한 건 나다."
"······ 그 말이 사실입니까?"
"같은 층에 있던 자들이 모두 봤을테니, 원한다면 직접 물어보도록."
파멜이 미간을 구겼다.
이번에 초청된 사람들의 신상은 모두 파멜의 머릿속에 있었다.
허드슨도 그중 하나였다.
하지만, 상대가 데르시안 가문이다.
"이번 일은 영주님께서 직접 판단할 문제인 것 같습니다."
"파멜경! 데르시안 가문보다 저 정체모를 자가 더 중요하다는 겁니까?"
"데르시안 영애님. 이분은 영주님께서 직접 초대하신 분이십니다. 워프를 넘었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달려오는 중이었는데 그 사이에 이런 문제가······."
"······ 파멜경이 저자를 마중하러 나왔다고요?"
"예. 아무튼, 이 문제는 제 권한을 넘어선 문제 같습니다. 영주성까지 함께 가시지요."
그러자 데르시안 영애의 두 눈이 복잡해졌다.
수호기사 파멜은 영지를 대표하는 기사이며, 영주가 없을시 영주대행의 권한마저 갖은 직속 중의 직속이었다.
사건이 벌어지면 즉결처형할 권한 따위야 넘치도록 갖고 있었다.
그런 자가 자신의 권한을 넘어선 일이라며 선을 그었다.
도시를 파괴하고 데르시안 가문의 호위를 죽인 자를 두둔하고 있는 것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더욱이 놀라운 건 워프를 넘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하멜경이 직접 마중을 나온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내가 올 때도 기껏해야 경비대장 정도였는데······.'
어지간한 귀족들의 출현에는 꿈쩍도 하지 않는 게 다르칸 영주다.
대체 저자들이 누구기에?
누구기에 수호기사 파멜을 직접 보내고, 그 파멜마저 이 상황을 묵인한단 말인가?
처음 보는 자들.
제국의 귀족이라면 자신이 모를 리가 없다.
제국인조차 아닌 자들을 제국인이 감싼다고?
"······ 좋아요. 영주성까지 가죠. 명예로우신 다르칸의 영주께서 확실하게 저놈들을 벌 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영주께서 데르시안 가문과 계속 함께 하고 싶으시다면 말입니다."
그래서 겁박을 했다.
이 상황을 외면하면 데르시안 가문과의 사이가 나빠질 것이라고.
다르칸의 영주는 결코 데르시안 가문과의 손을 놓지 못할 것이니!
특급경매
동색의 여우가면을 쓴 스페이드 표식의 초월자를 죽이자, 눈앞에 또 다른 메시지가 떠올랐다.
"막대한 경험치(27%)를 획득했습니다."
"업적 '초월자 살해'를 달성했습니다."
"명예가 250 상승합니다."
"죽은 초월자의 별이 흩어집니다."
"'♠'가 대륙의 어딘가에 떨어졌습니다."
······.
거의 정지 상태나 다름없었던 경험치의 대량획득.
업적과 초월자 사냥 시 나타나는 추가적인 글귀들까지.
이 정보의 집약체를 보며 나는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스페이드가 정상적인 별의 취급을 받는군.'
별이란, 여신의 신체다.
흩어진 신체가 별로 취급되며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게 해주는 것이다.
한데, 지금 죽은 초월자의 스페이드 표식 역시 같은 '초월자의 표식'으로 인정을 받고 있었다.
죽이자 흩어지고 어딘가에 떨어졌다면, 혹시 다른 신의 신체 같은 게 존재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어떤 신이 죽은 걸까?
'성각자들은 알고 있을진대.'
진짜 성각자라면 저 초월자의 표식에 대해 알고 있을 것이다.
허나 성각자는 찾고 싶어도 찾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당장은 그럴 여유도 없거니와, 그들 스스로가 찾아오게 만드는 게 더 빠르다.
문제는 내 레벨이 10에 도달하려거든 갈 길이 멀다는 점이었다.
차라리 부캐릭터들을 육성해서 성각자를 찾고, 묻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저 스페이드 표식의 초월자를 데리고 있는 데르시안 가문을 조사하거나.
'데르시안. 데르시안 폰 이자벨라.'
나는 악다구니를 쓰는 여자에게 눈길을 주었다.
분명히 경비대장을 향해 자신을 '이자벨라'라고 말했다.
하지만 내가 아는 이자벨라 폰 데르시안은 저 여자가 아니다.
지금쯤이면 사막에서 사막여왕의 자리를 차지하고자 고군분투하고 있을 이자벨라.
그녀뿐이었다.
'······ 그럼 저 여자는 가짜인가?'
의아한 일이다.
같은 가문에 같은 이름을 지닌 독녀라.
우연일 리는 없다.
납치당한 이자벨라가 그리워 새로이 태어난 아이에게 같은 이름을 준 게 아닌 이상에야, 다른 의도가 있는 것으로밖엔 보이지 않았다.
나이대는 얼추 비슷해 보인다.
"워, 워! 무슨 소란이냐?"
"······ 파멜님!"
그때 돌연히 나타난 기사단.
그중 파멜이라 불린 남자를 보곤 내심 놀랐다.
[Lv. 13]
그는 별을 먹은 초월자가 아니라, 레벨을 높인 괴물이었기 때문이다.
빌헬름으로 플레이할 적에도 제국과는 연이 없었기에, 이들의 방식이 내게는 제법 생소했다.
제국은 가문마다 격을 높이는 방식이 다른 건지.
'날 가늠하고 있군.'
수호기사 파멜은 데르시안 영애와 대화를 하고 있으나, 그 신경은 온전히 내게 쏠려있었다.
언제든지 검을 뽑아 휘두를 수 있게끔 대비하고 있는 자세.
조금의 수상함이라도 보이면 베어내겠다는 뜻이다.
하지만 개의치 않았다.
나를 경계한다는 건 결국 나를 가늠하지 못했다는 의미이므로.
나로서도 변칙적인 초월자보단 단순히 레벨만 높은 괴물이 상대하긴 더 편했다.
"······ 영주성까지 함께 가시지요."
수호기사 파멜이 허드슨에게 말했다.
"그러지."
허드슨이 경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르칸 영주에게 잘잘못을 따지자는 건데.
영주성까지 가는 내내 데르시안 영애가 나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