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상도(上都)의 귀인 (5)
“네가 셋째 누님의 시녀라 하였나?”
묵자의 입에서 구수운이 언급된 이후로, 구명의 얼굴에는 짙은 먹구름이 드리웠다.
“맞습니다.”
묵자는 구명의 표정을 보지 않아도 그가 불쾌해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씨께서 저를 바깥채로 보내 심부름을 시키셨습니다. 일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집사장께서 저를 불러 세우시고는 넷째 나리께 찻물을 내어드리라 하셨습니다.”
“셋째 누님 옆에서 너를 본 적이 없는데…….”
구명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 시녀를 본 기억이 없었다.
“저는 그저 이등 시녀라, 주로 아씨 처소에서 찻물을 나르거나, 잔심부름을 하였습니다.”
언젠가 마주친 적이 있긴 하지만, 구명이 워낙 거만한 데다 묵자 또한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특히 조심하였기 때문에, 그가 묵자를 기억할 리 없었다.
구명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묵자의 말도 틀린 건 아니었다. 가문에서 일하는 시녀가 워낙 많다 보니, 자신과 마주치지 않은 시녀도 분명 있을 터였다.
“어? 형님, 깜짝 놀랐습니다.”
그때, 위씨 가문의 둘째 아들이 갑자기 큰 소리로 말했다.
“셋째야 먼저 계집을 칭찬하였으니 그렇다지만, 형님께서도 저 계집이 뛰어난 재주를 지니었을 것 같으세요?”
알고 보니, 묵자가 이긴다는 것에 은자 5냥이 더해진 것이다. 이번에 걸린 은자는 바로 위씨 가문 첫째 아들의 몫이었다.
“모험을 해야 부를 얻는 법이지.”
위씨 가문의 큰형님은 제 아우를 무시하며 차를 마셨다.
그의 태도에 묵자는 이들 중 위씨 가문의 첫째 아들이 가장 세상 물정에 밝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구 씨, 이제 자네만 남았네.”
위씨 가문의 둘째 아들은 정말 나서는 데 일가견이 있는 인물이었다.
“저희 집안의 시녀인데, 이 계집이 아니면 누구에게 걸겠습니까?”
구명이 소매에서 정확히 은자 5냥을 꺼내 위씨 가문의 둘째 아들에게 건넸다.
“좋아, 이제 더는 바꿀 수 없네.”
위씨 가문의 둘째 아들이 큰 소리로 외쳤다.
자리에 앉은 사람들의 시선이 묵자에게 쏠렸다.
“이봐! 수주 낭자가 부르는 노래는 방금 들었겠지? 넌 무슨 노래를 부를 생각인가?”
위씨 가문의 둘째 아들은 이제 진행자 역할까지 도맡아서 했다.
‘이게 무슨 일이지?’
묵자는 속으로 탄식했다.
그녀는 그저 차를 따랐을 뿐이었다. 시를 지은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에게 칭찬을 받을 생각도 없었으며, 수주를 첩으로 팔겠다는 것도 그녀의 생각이 아니었다. 게다가 위씨 가문의 셋째 아들에게 수주를 거절하라 한 것도 그녀가 아니었다.
‘근데 어찌 내가 다른 사람과 대결을 하게 된 걸까. 게다가 내가 이겨서 좋을 게 뭐가 있단 말이야?’
그런다고 수주라는 가희가 원망을 멈추겠는가? 이겨봤자 묵자에게 은자 한 조각이 떨어지긴커녕, 외려 다른 사람에게 욕이나 들을 게 뻔했다.
‘제발 쥐구멍에라도 들어갈 수 있다면!’
구명이 지겹다는 듯 크게 헛기침을 했다.
묵자가 드디어 고개를 들었다. 뉘엿뉘엿 지는 노을이 창 틈새로 들어와 그녀의 옆태에 내려앉았다.
그 모습을 보고 모두가 넋을 잃었다.
묵자는 결코 못생기지 않았다. 진주알처럼 고운 피부에 호수처럼 맑은 눈동자, 거기에 숯처럼 검은 눈썹과 앵두처럼 빨간 입술까지. 다소 굳은 표정과 살짝 굽은 자세, 느릿느릿한 동작만 빼면 미인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여태껏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으니, 사람들이 주목할 리 없었다.
묵자의 외모는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웠지만, 손짓과 몸짓이 야무지지 못했다. 뭐랄까, 단아한 맵시가 떨어진다고나 할까.
하지만 지금은 자태가 얼마나 단정치 못하든 간에, 고운 얼굴 하나만으로도 모두가 묵자를 아리땁다고 느끼기 충분했다.
묵자가 또다시 뒤로 반걸음 물러나며 고개를 푹 숙였다. 방 안의 그림자가 그녀의 두 뺨을 가리자, 그제야 그녀가 입을 뗐다.
“어렸을 적 집이 가난하여, 동작이 매우 서툴고 엉성합니다. 기예는 배워본 적도 없습니다.”
노래를 부르라고? 겸손을 떠는 게 아니라, 그녀는 정말로 음치였다.
묵자가 고개를 숙이자, 그녀의 이목구비가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빛이 사라진 것 같았다. 사람들은 다시 그녀를 수려한 여인이 아닌, 평범한 시녀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이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조금 전 보았던 묵자의 어여쁜 얼굴을 빠르게 잊으려 애썼다. 다만 구명과 위씨 가문의 셋째 아들은 자신들의 눈을 의심하지 않은 채, 기묘한 표정을 드러내었다.
“노래는 못해도 다른 재주는 부릴 줄 알겠지?”
위씨 가문의 둘째 아들이 묵자 옆으로 걸어가 말했다.
“위씨 가문의 집안에는 자수를 놓을 줄 모르는 계집이 없던데. 이 또한 재주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렇지 않은가, 수주 낭자?”
수주가 입을 잔뜩 삐죽이며 말했다.
“나리께서 그리 말씀하시면 그런 것이겠지요. 남덕국 자수방에서 배운 적이 있어서, 저도 조금은 할 줄 압니다.”
“저는 자수를 놓을 줄 모릅니다.”
이번 역시 괜한 겸손을 떠는 게 아니었다. 만약 그녀가 위씨 가문 둘째 아들의 옷을 찢었다가 이어 붙인다면, 누가 봐도 손으로 꿰맨 게 티가 날 것이다. 위에 덧붙일 헝겊 조각이 있다면 그나마 구멍을 더 키우진 않을 것이다.
“아이고야! 그럼 고금이나 장기, 서예, 그림은?”
탄식하며 묻던 위씨 가문의 둘째 아들이 말을 이었다.
“구삼랑(*구씨 가문의 셋째 낭자라는 뜻으로, 구수운을 뜻함)은 못하는 게 없는데 말일세.”
“전 하나도 할 줄 모릅니다.”
묵자는 절대 다른 사람이 자신을 평가하게 내버려 둘 생각이 없었다.
“시를 지을 수는 있는가?”
위씨 가문의 둘째 아들은 생각나는 대로 질문을 던졌다.
“저는 책을 읽어본 적이 없습니다.”
이 당시에는 여인이 글을 몰라도 흉은 아니었지만, 문맹인 게 그리 좋아 보이진 않았다.
“…….”
위씨 가문의 둘째 아들은 할 말을 잃었다.
끝까지 이들을 속이려던 묵자는 구명과 위씨 가문의 셋째 아들의 알 수 없는 시선 탓에 생각을 바꾸었다.
위씨 가문의 셋째 아들은 상중이라 첩을 들일 수 없다 했다. 그러나 상(喪)은 언젠가 끝날 터였다.
묵자는 그가 자신의 부인을 경애하는 것처럼 행동하지만, 사실은 위씨 가문의 둘째 아들의 말대로 제 부인이 무서워서 행동을 조심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구명은 수주가 괜찮다면 그녀를 속량해 위씨 가문의 셋째 아들에게 보내준다고까지 했었다.
묵자가 보기에 위씨 가문의 셋째 아들이 노래를 너무 열심히 들으니, 그가 수주에게 관심이 있다고 생각한 구명이 오품 대인인 그에게 호의를 베풀려던 것 같았다.
그렇다면 이제 자신의 처지를 저울질 해봐야 했다.
만약 위씨 가문의 셋째 아들이 정말 첩을 들일 계획이라면, 자신은 스스로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그를 단념시켜야 했다. 그러나 저 가희에게 진다면 그의 관심을 벗어나지 못할지도 몰랐다. 구명에게, 가희와 견줄 상대도 되지 않는 계집을 남에게 보내는 건 손가락 까딱하는 것만큼이나 쉬운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잠시 후, 묵자가 결단을 내리고 입을 열었다.
“저는 비록 우둔하지만, 이야기를 잘하는 편입니다. 이것도 재주로 쳐주시겠습니까?”
“이야기라니요? 소녀는 그런 재주는 처음 들어봅니다.”
수주가 날이 선 어투로 입을 열었다.
“하물며 이야기할 줄 모르는 사람도 있답니까? 세 살짜리 아이도, 연세 지긋한 노인도 할 줄 아는 게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야기를 잘할 수 있습니다.”
묵자가 여유로운 목소리로 대답을 했다. 그녀는 이미 마음의 준비를 하였기에, 괜한 훼방에 흔들리지 않았다.
“여러분께서 제 이야기가 재미없다고 느끼신다면, 이번 대결에서 제가 진 것으로 하지요.”
“그냥 이야기는 안 되지만, 이야기를 잘한다고 하니 한번 들어보자. 만약 네 이야기가 수주의 노래보다 더 흥미롭다면, 네가 이긴 거로 하지.”
겨우 발견해낸 묵자의 재주에 위씨 가문의 둘째 아들이 빠르게 입을 열었다. 묵자가 할 수 있다는 건 아무리 사소한 재주라도 놓칠 수 없었다.
그의 말에 아무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묵자가 차분하게 허리를 숙이며 맑은 목소리로 말했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수주는 이러한 결정이 못마땅했다. 하지만 고작 이야기 따위로 자신을 이길 리 없을뿐더러, 위씨 가문의 나리들께 미움을 살 수도 없으니, 그저 결정에 따라 자리를 잡고 앉아 냉정한 눈으로 묵자를 바라볼 뿐이었다.
“아주 먼 옛날, 한 부부가 있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혼인한 두 사람은 서로 허물없이 지냈지요. 신분이 고귀한 남편 조(趙) 씨는 대학사(*大學士: 비서관 격의 장관) 출신에, 이름난 시인이자 화가, 서예 대가이기도 했습니다.
한편 그의 부인 관(管) 씨 또한 명문가 출신이었고, 고금, 장기, 서예, 그림까지 못하는 것 없는 팔방미인이었지요. 심지어 황제 폐하마저도 총애하는 재능 있는 여인이었습니다. 부부의 연을 맺은 두 사람은 깨를 볶으며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나날을 보냈지요.”
묵자는 음치였지만, 이야기할 때만큼은 듣기 좋은 목소리와 감칠맛 나는 어조로 듣는 이를 빠져들게 했다.
위씨 가문의 둘째 아들과 셋째 아들은 그녀의 이야기에 완전히 매료되었고, 위씨 가문의 큰형님은 손에 들고 있던 찻잔까지 내려놓고 귀를 기울였다.
“관 씨는 대나무 그리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녀가 그린 대나무는 매우 섬세하고도 강인했죠. 한편 조 학사는 부인이 그린 대나무에 큼직한 잎사귀를 더하는 것이 취미였습니다. 마른 대나무에 커다란 잎이 그려지면, 놀라우리만치 아름다운 운치를 띄었지요. 두 사람 또한 이 대나무 그림처럼 서로를 의지하며 애정을 쌓았습니다.”
묵자의 이야기에 가희들의 얼굴에 부러운 기색이 물씬 드러났다. 수주 또한 그녀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두 사람이 혼인한 지 수십 년이 지나니, 아름다운 외모를 지녔던 관씨 부인은 서서히 늙어서, 젊은 날의 고운 모습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조 학사와 부인의 사이는 여전히 좋았지만, 이제는 하늘 아래의 다른 부부들처럼 연인보다는 가족에 가까운 사이였지요. 한편 조 학사의 명망은 날이 갈수록 높아지고, 그의 재능과 학문을 우러러보는 자 또한 나날이 많아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객지를 찾은 조 학사는 부유한 상인을 하나 만나게 됩니다. 이 상인은 조 학사에게 집에 스무 살 난 여식이 하나 있는데, 평소 조 학사의 시와 서예, 그림을 무척이나 좋아한다면서, 조 학사가 원한다면 이 여식과 혼약을 맺어도 좋다고 하였습니다. 첩으로 들어가도 상관없다며 말이지요.”
묵자가 잠시 뜸을 들이자, 가희 하나가 다급하게 물었다.
“그래서요?”
묵자가 생긋 웃음을 지었다. 위씨 가문의 둘째 아들과 셋째 아들은 이야기에 빠져든 나머지, 가희가 끼어들어도 전혀 개의치 않아 했다.
“조 학사는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집에 어진 처가 있긴 하지만, 스무 살 난 재주 좋은 여인이 아름다운 벗이 되어준다니, 마다할 까닭이 없었지요.”
사내들은 대부분 고개를 끄덕였고, 여인들은 낙담에 젖은 표정이었다.
“그러나 이 조 학사는 덕망이 높은 사람이었습니다. 관 씨와 수십 년을 함께 한데다가, 그는 아내를 무척 존경하였거든요. 집에 돌아와 관 씨의 방으로 들어간 조 학사는 반나절을 망설인 끝에 결국 사실을 털어놓지 못했습니다. 대신 재능 있는 조 학사는 영리하게도 붓을 들어 짧은 시 한 편을 남긴 뒤, 방을 빠져나갔습니다.
관 씨는, 어물쩍대며 말을 않더니 갑자기 먹과 종이를 찾아 무언가를 적는 제 부군의 행동을 수상하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부군이 방을 나서자, 그녀는 부군이 남긴 종이를 들어 위에 적힌 글을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