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천양지차(天壤之差)
심모는 무슨 일인지 궁금해 죽을 지경이었다. 심모가 심수를 바라보자 심수가 웃으며 말했다.
“영천사까지 갔는데도 오늘 훤친왕비와 소군왕이 영천사에 간 것을 몰랐으니 아쉽게 됐네. 풍문에 훤친왕비께서 소군왕에게 군왕비를 간택하라 하셔서 적지 않은 규수들이 모두 떠들썩하게 모여들었다고 하던데.”
심수가 이야기 보따리를 풀었다. 심하가 말을 이었다.
“소군왕은 군왕 중에서도 경도(*京都: 수도)에서 신분이 가장 존귀하신 분이야. 훤친왕비의 동복 남동생이지. 올해 아직 열여덟이 안 되셨다 들었어. 게다가 황제 폐하와는 사촌지간이고. 타고나신 신분도 귀하신데, 황제께서 어렸을 때부터 소왕부(昭王府)에서 자라셨으니 소군왕의 신분이 더욱 높아지신 거지. 태도가 온화하고 거동이 우아해서 경도의 대갓집 규수 중에 그분께 시집가고 싶지 않은 사람은 하나도 없을걸?”
마지막 한마디를 뱉는 심하의 목소리가 작았다. 그녀들도 그 대갓집 규수들 중 하나가 아닌가? 심모는 자신도 함께 거기에 묶이기 싫었다. 심모는 모르는 사람에게는 흥미가 없었다.
심수가 계속해서 말했다.
“듣자 하니, 훤친왕비가 이번에 영천사에 납신 게 소군왕께 신붓감을 골라보라고 하셨기 때문이래. 사실 소군왕의 손을 빌려 훤친왕세자를 자극하려고 하셨던 거겠지. 똑같이 키운 자식들의 성격이 천양지차이니, 하나는 사람들이 모두 피하기만 하고, 다른 하나는 그렇게 사람을 따르니 착실히 반성해라, 이런 뜻 아니었을까?”
뭔가 이상하다 했던 것이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그렇게 많은 대가 규수들이 극처의 화를 당하는 것을 불사하는 줄만 알았는데, 그녀들이 좇아간 것은 훤친왕세자가 아니라 소군왕이었던 것이다. 심수는 심모에게서 무슨 소식이라도 들어볼까 하다가 원하는 답은 듣지 못하고 설명만 해주고 있었다.
심요는 심모를 경멸하는 듯 바라보더니 오늘 영천사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 오라고 시녀를 하나 보냈다. 그녀들이 영서원에 도착하기도 전에 그 시녀가 돌아와서 아뢰었다.
오늘 소군왕은 아예 영천사에 가지 않았고 훤친왕비만 행차했다는 말을 듣고 나서야 심요는 노기가 모두 사라졌다. 심지어 미소까지 지어 보였다. 훤친왕비만 왔었다니, 굳이 그 앞에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나았다. 혹시라도 그녀의 마음에 들어서 훤친왕세자와 혼인을 맺자고 하면 극처의 화를 입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거절할 수도 없고, 그리되면 그 억울함을 어쩔 것인가 싶었다.
기분이 좋아지자 심요는 더 이상 심모를 노려보지 않았다. 들어가서 노부인에게 인사를 드린 후 심요도 심모 이야기는 꺼내지 않고, 문곡성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려드리고, 사 온 지필연묵을 꺼내어 노부인께 보여드렸다.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대부인이 대단한 사람인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얼마나 물 한 방울 샐 틈 없이 집안을 꽉 쥐고 있었는지 노부인은 심모가 간 곳이 영천사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듯 보였다. 노부인도 모르고 있는 데다가 겉옷을 잃어버린 일이 있으니 심모도 할머니께는 그 일에 대해 함구했다. 심모는 그렇게 인사를 드리고 난 후에야 침향원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방에 돌아와서야 비로소 심모는 완전히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귀비탑(*貴妃榻, 중국 고대의 한족 여성들이 잠시 휴식할 때 사용한 침상의 한 종류)에 납작하게 퍼질러 누워 베개를 베고 오전에 있었던 일을 회상했다. 아무래도 그 모든 것이 꿈인 것 같았다.
자소는 담이 작았다. 심모야 주인이니 내실에서 편안하게 있었지만, 자소는 노비된 자로서 그럴 수 없었다. 그녀는 눈을 이리저리 굴리더니 뭔가 이상한 듯이 잠시 생각했다.
“반하는 어디 갔을까요?”
자소는 심모를 향해 물었다. 자소의 물음에 심모는 눈을 흘기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자소는 몸을 돌려 나갔다. 자소도 참으로 정신머리가 없었다. 심모도 그녀와 함께 있었으니 자신도 모르는 반하의 행방을 심모가 알고 있을 턱이 없었다.
주렴(*珠簾: 구슬 꿰어 만든 발)께에서 시녀 맥동(麦冬)에게 물었다.
“반하는?”
맥동이 대답했다.
“엄 어멈이 돌아왔는데, 기분이 좋지 않았는지 반하가 뭐라고 얘기하는 것을 듣더니 화를 내더이다. 엄 어멈이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반하의 뺨을 때리셨고 지금은 방에서 울고 있어요.”
자소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서렸다. 그녀는 심모가 있는 방 쪽을 바라보았다. 심모는 얼굴이 파래져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녀가 이 시대로 넘어온 후 아직 정식으로 엄 어멈을 만나지는 못했지만, 머릿속에 그녀에 대한 인상은 매우 깊었다. 몇 년 동안 심모는 그녀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따랐기 때문이다.
엄 어멈은 대부인의 앞잡이 노릇을 해 왔다. 심모에게 갖은 먹거리를 준비해준 것도 모두 그녀였다. 잘 먹는 것이 그녀의 입에 복이 있어서라며 최대한 많이 먹였다. 끼니마다 고기를 먹을 수 있는 것은 어른들이 집안 아가씨 중 심모를 가장 아끼기 때문이라며, 다른 아가씨들은 심모의 십 분의 일도 따라가지 못한다고 했었다. 그렇게 감언이설로 심모를 구워삶아 그녀에게 간도 쓸개도 빼 주도록 만들었다.
석 달 전, 그러니까 엄 어멈이 심모와 함께 외출하기로 한 하루 전날이었다. 자신이 상한(傷寒)에 걸려 심모에게 옮을까 걱정이 된다며, 집에 가서 병구완을 한 후 몸이 다 나으면 다시 돌아와서 심모를 모시겠다고 했었다.
그러나 심모에게 금족령이 내려지고 석 달 동안 엄 어멈은 한 번도 그녀를 보러 저택에 돌아오지 않았다. 이제야 돌아와서는 심지어 반하를 때리기까지 하다니. 제발 자신에게 경을 쳐 주십사 스스로 비는 꼴이었다.
“엄 어멈은 어디 있는가?”
심모는 차가운 얼굴로 물었다.
맥동이 대답했다
“엄 어멈은 주방에 아가씨 점심을 가지러 갔습니다.”
심모는 아무 말이 없었다. 자소가 말했다.
“소녀, 반하를 좀 살펴보고 오겠습니다.”
자소는 반하를 보고 와서, 맞은 얼굴이 크게 부었다며 심모에게 아뢰었다.
멀리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맥동이 주렴 밖에서 손짓하는 것을 보니 엄 어멈이 돌아온 것이 확실했다. 엄 어멈은 오자마자 그런 그녀부터 나무랐다.
“갈수록 눈치가 없어지는구나. 내가 무거운 걸 들고 오는 것이 보이면 냉큼 와서 손을 거들어야 할 것이 아니냐!”
맥동은 목을 움츠리며 엄 어멈을 도왔다. 엄 어멈은 맥동에게 찬함을 하나 건네고 자신도 하나를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심모를 본 그녀는 어리둥절해 했다. 아가씨가 살이 빠졌다는 말을 전해 듣기는 했으나 사람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이렇게까지 빠졌다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녀는 연기도 참 잘했다. 심모를 보더니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하여 말했다.
“쇤네가 겨우 석 달 자리를 비웠더니 아가씨가 이렇게까지 마르시고, 못 알아뵐 뻔 했습니다요.”
심모도 그녀를 바라보며 예전처럼 웃어주며 관심을 보였다.
“어멈도 살이 많이 빠졌구나.”
큰아가씨 성격이 그렇게 변했다고 하시더니 이전과 조금도 다름이 없는 모습에 엄 어멈은 깜짝 놀랐다. 대부인이 별거 아닌 일에 예민하게 놀랐던 것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긴 심모의 말도 틀리지는 않았다. 엄 어멈이 저택을 나간 석 달 동안 그녀도 살이 많이 내린 것은 사실이었다. 아들 며느리와 한집에서 모여 지낸다고는 하나 먹는 것은 심모 옆에 있을 때와 비할 바가 아니었다. 심모가 아무리 잘 먹더라도 그 많은 음식을 다 먹을 수 없었으니 늘 반이나 남겼다. 그러면 그것을 엄 어멈이 먹고, 엄 어멈이 남긴 것은 다시 반하와 자소에게 돌아갔다.
엄 어멈은 요 몇 년 적지 않은 돈을 모았다. 저택을 나간 석 달, 끼니마다 고기도 먹고 나쁘지 않은 식사를 하였지만 역시 온몸에 살이 내리기는 했다. 게다가 어제 보물 같은 손자가 다쳤으니 마음이 좋지 못하여 초췌한 기색도 있었다. 엄 어멈은 이렇게 저택에 돌아온 김에 실컷 잘 먹어야겠다는 심산이었다.
심모는 그녀를 보고 웃으며 물었다.
“어멈 병은 다 나았고? 만약 아직 온전히 회복되지 않았다면 수일 더 쉬도록 하게.”
엄 어멈은 웃으며 말했다.
“아가씨께서 기억해 주신 덕에 벌써 다 나았습니다.”
엄 어멈은 소나무 껍질 같은 얼굴을 만지며 씁쓸한 듯 말했다.
“아가씨, 제가 병색이 있다고 너무 싫어하지는 말아 주십시오. 어제 소인이 아가씨 생각을 하다가 정신이 팔려 태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소인의 귀한 손자놈을 다치게 했습죠. 그 바람에 걱정을 하느라 쉬지 못해 그런 것입니다. 며칠만 지나면 괜찮아질 겝니다.”
손자가 아파서 초췌해졌으면서 그것으로 자신의 낯을 세우고 공을 드러내려 해?
대부인의 계책도 모두 허사가 된 마당이었다. 엄 어멈 자신의 임무는 심모를 잘 먹여 살찌우는 것이었으나 지금 오히려 심모의 살이 빠졌으니, 그것은 엄 어멈의 실책이었다. 대부인께 아마도 적지 않게 질책을 당했을 것이다.
보배 같은 손자가 다치고, 대부인의 책망을 들었다고 화가 나서, 그 화를 반하에게 풀었다? 거기에 손자가 다친 것을 심모의 탓으로 돌리면서 심모에게 감동하고 또 보상까지 해 달라? 안됐지만 지금 심모는 매우 궁핍했다.
심모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배가 고픈 듯 배를 문질렀다. 엄 어멈은 어쩐 영문인지 금일봉이라도 내려야 할 아가씨가 그러지 않는 것을 보고 이마를 살짝 찌푸렸다. 아가씨 수중에 돈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그녀였기에, 혹여 오늘 외출했을 때 그 돈을 다 써 버린 것은 아닌지 의심했다. 엄 어멈은 미간을 좁히며 맥동에게 일렀다.
“얼른 음식을 차려 아가씨 식사 시중을 들거라.”
맥동은 찬합을 열더니 심모의 눈치를 살폈다. 심모는 입꼬리를 올리고 웃더니 아무 말 없이 손을 씻으러 갔다. 돌아온 심모는 식탁에 가득 차려진 기름진 고기와 생선을 보더니 미소가 싹 사라지고 얼굴이 무거워졌다.
“주방 것들이 간이 아주 배 밖으로 나왔구나. 앞으로 음식은 법도에 맞게 내어올 것이며 반푼도 정해진 양을 넘어서면 안 된다 했거늘 내 명을 허투루 들은 게야? 분부한 지 언제라고 벌써 귓가에 부는 바람처럼 들은 체를 안 해? 당장 할머님께 고하러 가야겠구나!”
심모는 이렇게 말하며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엄 어멈은 그 말을 듣고 급한 마음에 그녀를 붙잡았다.
“아가씨, 이것은 제가 주방에 준비하라고 시킨 음식입니다.”
심모는 고개를 돌려 그녀와 맥동을 바라보았다.
“엄 어멈은 석 달을 떠나 있어 내 기호가 바뀐 것을 몰랐겠지. 그런데 아무도 엄 어멈에게 그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다는 말이냐?”
맥동이 재빨리 대답했다.
“반하가 말을 하긴 했사온데…….”
그러고는 말을 잇지 못했다. 자소가 냉큼 그 말을 받아서 말했다.
“반하가 그렇게 말을 했사온데, 그 말을 듣고 엄 어멈이 반하가 아가씨께 성심을 다하지 않는다며 시녀로서 책임을 제대로 하지 못하였으니 이번 달 월전(月錢)에서 제할 것이라 하였습니다. 반하가 화가 나서 언쟁을 하자 엄 어멈이 반하의 뺨을 쳤습니다.”
그전에는 화를 잘 받아주고 참았던 반하였다. 무슨 일이 있으면 아가씨가 돌아올 때를 기다렸다가 아뢰어도 늦지 않을 일을 참지 못했다는 것이 이상했는데, 그녀가 엄 어멈을 상대해 보니 단지 조금 억울함을 당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인제 보니 이러한 사정으로 싸움이 난 것이었구나. 심모는 엄 어멈을 노려보고 물었다.
“내가 살이 빠지니 할머니, 아버지, 오라버니까지 모두 아주 잘했다고, 반하와 자소가 나를 참으로 잘 모셨다고 기꺼워하셨는데, 엄 어멈이 돌아와서 하는 말이, 그 아이가 시녀로서 책무를 다하지 못했다니 나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수고스럽겠지만 엄 어멈이 이게 무슨 뜻인지 나에게 설명해줄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