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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편지 쓰다 강해짐 53화

<53화 - 경력 있는 신입 팝니다(4)>

"으어어어허허허. 우리 선생님께서 조금 까칠하시긴 하지. 하지만 사람은 참 좋으신걸."

"좋은 사람은 사람을 괴롭히지 않을 것 같은데요."

"으어허허, 선생님이 사람을 괴롭히시지는... 않, 아니, 음. 않지 않을지 않을까?"

"제이슨 씨 언어 기능 고장 나셨어요."

제이슨 씨는 특유의 신음 소리인지 웃음소리인지 모를 소리로 웃었다.

나는 영감님을 만난 다음 날, 영감님의 연애사를 알기 위해 제이슨 씨와 그 동료 마법사들을 찾았다.

"그럼 그게 그냥 까칠하게 마음을 표현하는 방식이라는 거죠."

"아마?"

오늘도 제이슨 씨는 거대한 관을 옮기며 육체노동에 힘쓰고 있었다.

저 관, 얼핏 보아도 100kg은 넘을 것 같은데 힘든 기색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몸에 마법을 따로 건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이 사람, 오랫동안 3써클이라고 했지.

혹시 전공을 잘못 찾은 거 아닐까?

"혹시 탈리오 영감님이 사모님을 떠올리시거나 사모님에 대해서 이야기하신 적 있으신가요? 그립다거나, 보고 싶으시다거나."

내 말에 제이슨 씨는 뭔가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고개를 갸웃거리기 시작했다.

"있, 없, 음. 잘 모르겠는데. 있었던가. 없었던가? 잘 모르겠네."

"그런가요."

제이슨 씨뿐만 아니라 다른 마법사들도 고개를 내저었다.

어쩐다.

"혹시 마법사들 말고도 탑주님이랑 교류가 많은 사람은 없을까요?"

"교류라. 교류... 다른 탑의 탑주님들이나 아니면 오래된 마법사분들? 그런데 그런 분들은 만나기 어려울걸."

"훔볼트 씨는 어떨까요?"

그때 구석에 박혀 있던 한 여자 마법사가 입을 열었다.

"훔볼트 씨?"

"약초꾼이야. 우리 마탑의 연구 재료를 납품하시는 분이지. 선생님이랑은 40년 넘게 교류하고 거래하셨다고 했어. 친하시...인가?"

제이슨 씨는 꼭 말을 하다가 문장의 끝이 이상하게 되는 버릇이 있으시네.

"그런데 많이 힘드실걸요."

그때 처음 훔볼트라는 사람의 이름을 꺼낸 여성 마법사가 묘한 표정을 지으며 끼어들었다.

"왜요?"

"저희 선생님은 까칠해도 사람은 착하지만 훔볼트 영감은 사람도 나쁘거든요."

"...."

지금 영감님보다 더 까칠하고 나쁘다고?

왜 내 주변에는 성격 더러운 노친네들이 계속 끼어드는 걸까.

전생에 웃어른들에게 죄를 지었나?

"마침 내일 훔볼트 영감님이 약초 납품을 위해 탑에 오시겠군. 내일 만날 수 있게 시간을 마련해 볼게."

* * *

나는 영감님에게 오늘은 좀 더 영감님의 이야기나 들려 달라는 핑계로 다도 자리를 마련했다.

헬피온 공작의 편지 같은 경우는 밑도 끝도 없이 검술 이야기를 하고 있었으니 사랑의 달콤한 감정들을 채워 넣을 수야 있었지.

영감님의 경우는 도저히 무언가 쓸 자신이 없었거든.

"여기...."

앨리스가 영감님과 나에게 샐비너스 차를 한 잔씩 가져다주었다.

익숙한 향이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히기 시작했다.

"그래. 뭘 알고 싶으냐."

"당연히 연애 얘기죠. 제가 좀 알아봤는데 영감님 연애가 그렇게 순탄하지는 않으셨다면서요."

"쯧, 어디서 또 입 싼 녀석이 나불거렸나 보구만. 하라는 연구는 안 하고 말이야."

아뇨, 그건 제자분들이 아니라 저기 변방에서 식료품점을 하고 계시는 아주머니인데요.

"연애가 쉽진 않았지.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포르타민 마탑 출신이었고 나는 유니텔로 마탑 출신이었으니 사이가 좋을 수 없었지."

흔히 세계 3대 마탑이라 불리는 곳이 있다.

제국의 포르타민, 동방 엔틸 제국의 유니텔로, 그리고 북해의 청념.

3대 마탑은 각자 서로가 최고의 마탑이라 우겼고, 그렇다 보니 셋의 사이가 좋을 리 없었다.

"그녀를 처음 본 건 마탑 교류 경연대회에서였지. 이 몸은 어려서부터 천재적인 재능이 있었던 탓에 유니텔로 마탑의 대표로 출전했었고, 승승장구하며 준결승전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

그놈의 자기 자랑은 꼭 들어가는구나.

내버려 뒀다간 주야장천 자기 이야기를 떠들 것 같아 낼름 질문을 던졌다.

"그때 처음 사모님을 보신 건가요?"

"크흠, 뭐, 그렇지."

오, 어쩐지 이거 분위기가 요상한데.

"지셨죠?"

"크흠! 크흠! 내가 실력이 없었던 게 아니라 아내가 비겁했던 거야! 지난 결투에서 오른쪽 발목을 살짝 삐끗했는데 집요하게 거기만 노리고 마법을 쐈단 말이야!"

상대의 약점을 정확히 공략하는 건 되게 전략적으로 우수한 판단인데.

사모님이 현명하셨군.

"아하, 정말 억울하셨겠어요."

물론 나는 사회생활을 해야 하니까 입으론 다른 이야기를 내뱉고 있지만.

"그래! 그리 비겁하게 승리를 따갔단 말이야! 그러곤 나한테 와서 뭐라고 했는지 아는가?"

오, 그렇게 승부가 끝나고 뭔가 또 썸씽이 있었어?

"뭐라고 하셨는데요."

'수고하셨습니다.'

"...라고, 감히 나한테 수고했단 말을 던졌단 말이야!"

응?

지금 내가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 건지 누가 좀 설명해 줬으면 좋겠다.

경기 잘 끝내고, 진 사람한테 가서 좋은 경기였다고, 수고했다고 말하는 게 뭐가 잘못이야.

"어떻게 그렇게 뻔뻔한 표정으로 심한 말을 할 수 있냔 말이지!"

그런데 정말로 억울하다는 듯이 얼굴까지 빨갛게 달아올라서 역정을 내고 있으니.

"그게 그렇게 화가 날 일인가요?"

"뭬야? 뻔뻔하지 않냔 말이야! 자신의 실력으로는 천재적인 이 몸을 이길 수 없으니 비겁한 방법으로 이겨 놓곤 와서 한다는 게 미안하다는 사과도 아니고 수고했단 얘기라니! 그게 날 비웃는 게 아니면 뭐란 말이냐!"

지금 이 순간 영감님의 눈이 멀어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만약 영감님의 눈이 멀쩡했더라면 지금 나와 앨리스가 짓고 있는 이 어처구니없어하고, 황당해하는 표정을 볼 수 있었을 테니까.

오죽하면 저 앨리스가 신물 난다는 표정으로 영감님을 바라보고 있을까.

그리고 어쩐지 나는 이 영감님의 연애사가 어땠는지 알 것만도 같았다.

영감님, 어린 나이부터 천재 소리를 꽤나 들으며 산 모양인데 처음으로 패배란 강렬한 충격을 준 사모님에게 한눈에 반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사모님이 그냥 뻔하게 수고한단 말을 해서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거지.

"그래서 어떻게 하셨나요?"

"어떻게 하긴! 1년 동안 죽어라 수련을 했지! 이번에야말로 그따위 비겁한 협잡에 속지 않겠단 일념으로 말이야! 그리고 1년 후, 또다시 마탑 경연대회가 진행되었지."

"이번엔 이기셨나요?"

그렇게 영감님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기다리는 순간, 끼익 소리와 함께 연구실의 문이 열렸다.

"으어어어, 선생님. 준비 완료되었습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구만. 얼른 가세."

"네? 이렇게 이야기를 끊어 버린다구요? 하던 이야기를 중간에 끊으면 얼마나 답답하신지 아십니까."

"그깟 얘기가 뭐가 중요하다고. 하던 마나 실험이 중간에 끊기는 게 더 답답한 법이지. 얼른 일어나. 어제 못다 한 마나 반응 실험을 재개하러 갈 테니."

* * *

이번에 우리가 도착한 곳은 마치 연무장 같은 공간이었다.

이곳에 모인 사람은 영감님, 제이슨 씨, 나, 그리고 체칠리까지 총 넷이었다.

마탑에 도착한 후, 체칠리는 제이슨 씨 밑에서 허드렛일을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마탑으로 온 케이스가 아니다 보니 마탑의 일을 하기엔 기초가 부족했던 모양이다.

그래도 헬피온 영지에서 전쟁을 쫓아다니며 철이 좀 들었는지 잡무나 힘쓰는 일도 묵묵히 감내하며 수행한다고.

물론 수행을 하는 것과 체력이 버티는 것은 다른 이야기지.

사흘 만에 본 녀석의 표정은 반쯤 제이슨 씨를 닮아 있었다.

"오늘은 네놈들에게 마법을 가르쳐 줄 게다."

마법이라니 저절로 귀가 쫑긋하고 섰다.

"저번 조사 때 이야기했지. 네놈의 마나 친화력은 대단한 편이라고. 마법을 가르쳐 주면 곧잘 익힐 수 있을 게다. 네가 마법을 발현하는 데 성공하면 그때 마나의 움직임을 살펴볼 거다."

"그러면 제 몸 안에서 일어나는 마나 작용을 좀 더 확실히 볼 수 있겠군요."

"마침 저 애송이 놈도 제 몫을 하려면 이리저리 마법을 배워야겠지. 운이 좋은 줄 알거라. 무려 마탑주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기회는 드무니까."

"네네."

나는 영감님의 자랑을 대충 흘려들었다.

"마나는 대기에 존재하는 거대한 에너지라고 할 수 있지. 나는 마나가 이 세계의 생명, 호흡이라고 생각한다."

영감님은 천천히 마나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마법사는 그 호흡을 바탕으로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이다. 보아라. 이 세계는 얼마나 놀라운 이적으로 가득하냐? 특히 우리의 삶을 가장 강력하게 밝혀 주는 힘이 있지. 저것이다."

그의 손가락은 창밖의 태양을 가리켰다.

"밤을 밝히고 삿된 것들을 쫓는 힘! 마나는 자연의 성질을 닮으려고 하는 법이니, 가벼운 캐스팅만으로 태양 빛을 모방하는 것은 쉽다. 제이슨."

제이슨이 손을 들어 올리자 순식간에 그 위로 작은 발광체가 만들어졌다.

"1써클 기초 중 기초인 라이트 마법이다. 자신의 몸에 축적된 마나를 한 점에서 방출시킨 뒤 다시 허공의 한 점에 모으는 것만으로도 발현되지. 거기 꼬마. 너도 해 보거라."

체칠리는 조금 긴장한 듯 딱딱한 모습으로 라이트를 만들어 냈다.

"2써클이라고 했나? 마나의 움직임이 정순하고 깔끔하군. 좋다."

"가, 감사합니다."

"자, 앞으로 네가 익힐 것이 바로 라이트이니라. 마나를 잘 받아들이는 것과 그것을 몸 안에서 느끼고 움직이는 건 별개일 게야. 그러니 마나를 받아들일 때까지 이 두 사람이 옆에서 계속 번갈아 가며 라이트를 시전할 게다. 네놈이 재능이 있다면 일주일. 범재라면 한 달 정도가 걸리겠지."

"잠시만요."

영감님 말 중에 한 부분이 이해가 잘 안 되는데.

"왜 그러느냐."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하지?

나는 힐끗 제이슨 씨와 체칠리가 만들어 낸 라이트 마법을 바라보았다.

정확하게는 라이트 마법의 구성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그 마나의 흐름을 바라보았다.

마치 세계가 저 마법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가르쳐 주는 것만 같은 느낌이다.

"지금이라도 가능할 것 같은데요."

내 말에 세 사람의 표정이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변했다.

"애송아. 네놈이 지금 무슨 소릴 한 줄 아느냐?"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씀드렸죠."

"이놈!"

주변의 분위기가 일순 날카롭게 벼려졌다.

"내 네놈의 재주 탓에 오만방자한 것을 오냐오냐 넘겨주고 있더니 진지해야 할 부분과 아닐 부분을 구분 못 하는 천치 짓까지 하며 날 능멸하려는구나!"

"스, 스승님. 고정하십시오!"

"뭐? 할 수 있을 것 같아? 할 수 있을 것 같다고오? 마법이 장난인 줄 알아! 저 1써클 마법 한 번을 해 보겠다고 10년을 주야장천 매달리는 놈들도 있다고!"

영감님의 몸에서 서릿발 같은 기세가 끊임없이 뿜어 나왔다.

오죽하면 옆에 서 있던 체칠리가 오한이라도 든 것처럼 오들오들 떨고 있을까.

사실 나도 다리가 후들거리려고 하는 걸 필사적으로 버티고 있거든.

그만큼 단순히 화를 내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기세를 풍기고 있었으니까.

그렇다고 저 기세에 순순히 기가 죽으면 안 되겠지.

할 수 있다고 했으니까 직접 보여 주자.

나는 마음을 가다듬기 위해 심상 속에서 며칠 전, 아카식 레코드에서 보았던 거대한 마나의 흐름을 떠올렸다.

마치 거대한 대해를 보는 것만 같은 고고한 움직임.

그 집합에서 새어 나온 가느다란 선이 세상으로, 그리고 눈앞의 두 사람에게 이어진다.

영감님의 말처럼 라이트 마법은 그 선을 바깥으로 방출해 한 점에서 묶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대충....

이렇게?

"이래서 애송이들이란 오냐오냐해 주면 자기가 세상에서 제일 잘난 줄 알고 선현들이 만들어 놓은 마법을 무시하는 게라니까! 희대의 천재로 이름 높았던 이 몸조차도 무려 나흘씩이나 걸렸던 것이 라이트 마법의 발현인데 그게 그렇게 쉽게... 쉽게...."

아마 마나에 가장 예민하실 분이니까 빠르게 느끼셨겠지.

"쉽게... 되네?"

연애편지 쓰다 강해짐

연애편지 쓰다 강해짐 54화

<54화 -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마법이 깃든다(1)>

아마 마나에 가장 예민하실 분이니까 빠르게 느끼셨겠지.

"이게 이렇게 쉽게 되는 게 아닌데? 나, 나도 라이트 마법을 구현하는 데에만 1주일이 걸렸는데.... 심지어...."

"으어어어허?"

내 손 위에서 라이트가.

그것도 앞의 두 사람보다도 더 선명하고 큰, 아름다운 불빛의 라이트가 생성되는 데 성공했다는 것을.

"...어떻게?"

체칠리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잔뜩 갈라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무척이나 당황한 모양인데, 글쎄.

사람들이 옆에서 호들갑을 떨긴 하지만 진짜로 이게 대단한 일인지는 잘 모르겠다.

사실 헬피온 공작령에서 검을 휘두를 때도 그랬지.

아펠 집사장님도 그렇고 헬피온 공작도 그렇고 모두 내 재능이 뛰어나다고 칭찬해 줬다.

하지만 그게 진짜 내 재능일까?

검을 휘두르는 건 아카식 레코드에서 <신체활용비서>를 읽었기 때문이고, 지금 마법을 구현한 것도 알바트론의 마법 때문인데.

여러 가지 생각이 든다.

만약 아카식 레코드라는 기회가 내게 없었다면 나의 삶은 어떻게 되었을지.

그리고 아카식 레코드에 의해 다져진 내 재능은 어느 정도일지.

이대로 계속 검과 마법을 배우다 보면 제국의 위험 같은 건 그냥 벗어날 수 있겠지?

그리고 그 외신도....

"애송이, 스톱. 잠깐 멈춰 봐라. 네놈 지금 뭘 하고 있는 거냐?"

"네?"

"지금 손 위에 그거 뭐냐고."

손 위?

상념에 빠져 있던 나는 정신을 차리고 내가 만들었던 라이트 마법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이제 더 이상 라이트 마법이라고 할 수 없는 모습이었는데, 마나끼리 복잡하게 얽혀 만들어 낸 형상은 마치 빛으로 이루어진 검과 같았다.

자그마한 막대기 같은 손잡이 위로 2m 길이의 날카로운 검이 새하얗게 빛나고 있었는데 이걸 뭐라고 불러야 하나.

라이트 세이버?

"어... 이게 언제 이런 모습이 되었지? 아하하하."

나는 급히 마나를 묶은 매듭을 풀어 버렸고, 순식간에 검은 자취를 감추었다.

하지만 영감님의 눈초리나 다른 두 사람의 눈초리는 거둬질 줄 몰랐고, 이내.

"네 녀석, 잠시 날 좀 따라와라."

영감님이 날 연구실로 호출했다.

* * *

연구실에 도착한 영감님은 말없이 바로 지하 공간으로 성큼성큼 내갔다.

"중앙에 서서 아까 그 짓거리를 또 해 보거라."

"라이트 마법을...."

"그거 말고! 그 검! 그걸 뽑아 보란 말이다!"

슬쩍 넘어가 보려고 했는데 안 되는구나.

끄응, 그런데 그게 다시 될까?

나는 아까 연무장에서 펼쳤던 것처럼 천천히 라이트 마법을 시전했고, 손 위에 작은 광구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이제부턴 뭘 어쩌지?

라이트 마법을 펼친 상태에서 딴생각을 하다가 만들어진 건데.

지금이라도 솔직하게 말하고 우연히 만들어졌다고 이야기해야 하는 게....

"그만! 어디까지 검을 키울 셈이냐!"

어라, 그냥 하다 보니까 되네.

왜 이게 되지?

나는 멍하니 눈앞에 뜬 검을 바라보았다.

"허 참, 말이 안 되는군. 거기 가만히 있거라."

영감님이 가까이 다가오더니 스태프로 내 몸 곳곳을 툭툭 건드리기 시작했다.

이거 아프지는 않은데 뭔가 기분 나쁜데.

"음...."

그러나 영감님의 표정이 워낙 심각한지라 뭐라 이야기를 할 수도 없으니 원.

"애송이. 네놈, 검도 휘두른다고 했었지?"

"네."

"재주 좀 보여 봐라."

그렇게 이야기한 영감님이 갑자기 스태프로 마나를 모아 바닥을 툭 건드렸고 순식간에 풍경이 변했다.

이곳은 거대한 늪지대였다.

눅진한 공기가 살갗에 들러붙었고, 어디선가 매캐하게 타는 냄새가 흘러와 코끝을 자극했다.

이 감각은 진짜다.

무엇보다 늪지 아래에서부터 쏘아지는 거대한 투기와 살의가 피부를 저릿하게 만든다.

즉시 헬 파이어를 뽑았고 곧 세 마리의 리자드맨이 포효하며 뛰쳐나왔다.

그롸아악!

고함 소리와 함께 가장 선두에 서 있던 리자드맨이 자신의 무기를 휘두르며 돌격해 왔다.

급히 헬 파이어로 검을 쳐 내자 허공에서 뾰쪽한 선 하나가 내 정수리를 노리고 내리꽂혔다.

거의 눕듯 몸을 뒤로 날렸고, 동시에 악어마냥 입을 쩍 벌린 리자드맨이 바닥에 화살처럼 날아와 꽂혔다.

급하게 피하길 잠시, 데굴데굴 굴러 연속적인 공격들을 피하고 겨우 일어났다.

피하고, 튕겨 내고, 피하고, 튕겨 내고.

세 마리는 마치 한 마리인 것처럼 유기적으로 끊임없이 움직였다.

선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

선이 노리는 곳을 피했더니 선이 순식간에 목이나 발, 다리, 허리, 복부 등을 향해 수정되길 반복한다.

어마어마한 반사신경이 녀석들의 선을 사정없이 헝클어뜨리고 있었다.

겨우겨우 막아 내기가 고작.

이렇게 안일한 대처론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데.

어떻게 녀석들을 죽이지?

할 수 없지.

살을 주고 뼈를 취하자.

나는 의도적으로 회피하던 움직임을 멈추고 앞으로 한 발자국을 내밀었다.

리자드맨 한 녀석의 목을 날려 버리는 데 왼쪽 어깨를 희생시켰다.

한쪽 허벅지가 칼날에 관통당하는 대신 또 한 녀석을 반으로 갈라 불태웠고, 마지막 하나.

녀석의 칼과 내 칼이 교차되는 순간.

"이만 됐다."

머리에 찬물을 뒤집어쓴 것 같은 느낌이 들며 정신이 돌아왔고, 내 몸 역시 연구실에 돌아왔다.

팔도, 다리도 모두 멀쩡했고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보다 방금 인위적인 고양감은 뭐였지?

몸을 내주더라도 놈들을 죽여야 한다고?

"영감님, 방금...."

"일루젼 에어리어, 워리어 하트와 버서크, 그리고 이것저것이었다."

"정신마법?! 사람의 정신을 지배하는 마법은 법령으로 금지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제국에 신고라도 하려고?"

젠장.

나는 입술만 깨문 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영감님의 말처럼 일반인들에게 정신마법 시전을 금지하고 이를 처벌하기 위해 나선 사람들은 제국과 제국 휘하의 포르타민 마탑이었으니까.

제국마도학회.

그런 이름의 마법 자경단이었지.

날 죽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그곳에 가서 정신 마법에 당했다며 날 보호해 주는 영감님을 신고한다?

넌센스가 따로 없었다.

"까칠하게 굴지 말고 이리 와 봐라. 네놈의 몸이 왜 그런 상태인지 알게 되었으니."

탈리오 영감은 그렇게 자기 할 말만 던져 놓곤 다시 연구실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어쩌지?

화가 가라앉질 않는데.

이게 내가 힘이 약해서 그런 거겠지.

고작 소드 익스퍼트 최상급 정도가 되었다고, 그리고 1써클 마법사가 되었다고 너무 안일하게 있었는지 모르겠다.

힘이 더 필요했다.

후. 지금 욕을 내뱉고 짜증을 내봤자 바뀌는 건 없으리라.

어차피 아랫사람 부려 먹는 게 생활화된 저 노친네한테 아무리 따져 봤자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을 테니까

이를 악물고 버티자.

그리고 강해지자.

아카식 레코드를 잘 이용하면 나는 충분히 강해질 수 있어.

그때 이 일은 꼭 복수를 하자.

나는 그렇게 마음을 다잡으며 영감님이 올라간 까만 출구를 끊임없이 노려보았다.

* * *

연구실에 올라가자마자 영감님이 허공에 푸른색 마네킹을 만든 뒤 손을 까닥거렸다.

"이게 네 몸이다. 그리고 네놈이 마법을 쓸 때 마나의 흐름은 이러하지."

영감님의 말과 함께 하얀 점 같은 것들이 마네킹 위로 은하수처럼 펼쳐졌다.

곧, 하얀 점들은 마네킹의 정수리를 지나 내 온몸을 통로 삼아 이곳저곳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신기한 건 말이다. 이게 네놈이 검을 휘두를 때와도 비슷하더군. 이제 네가 얼마나 말도 안 되는 놈인지 알겠느냐?"

"갑자기 밑도 끝도 없이 그냥 알겠냐고 하면 누가 압니까."

"마검사라는 존재를 들어 본 적 있느냐?"

뜬금없이 갑자기 마검사?

물론 들어본 적 있다.

"네. 로망이잖아요."

"그래. 로망이지. 마검사가 왜 로망이냐면 그 누구도 마검사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응?

"저는 지금 마법도 쓰고 검술도 쓰는데요?"

"그러니까 신기하다고 한 게지. 보통 기사들은 단전에 마나를 쌓고 도를 따라 순환시키며 신체 능력을 강화시킨다. 그에 반해 마법사들은 심장에 써클을 생성하여 자연의 정기와 교감하지."

기사와 마법사가 그런 차이가 있구나.

"문제는 심장에 써클이 생기는 순간 단전에서 시작되어 순환되는 마나를 모두 빨아들인단 점이다."

"마나가 단전으로 돌아오지 않겠군요."

"그래. 때문에 마법을 한 번이라도 익히고 발현한 순간 검사는 검기를 발현할 수 없는 법이다."

"그럼 저는요?"

리자드맨이랑 싸울 때 검의 감각은 예전과 다름없었는데.

선도 잘 보였고.

"네놈의 모습을 다시 자세히 봐라. 거기에 써클이나 단전의 마나가 보이느냐?"

음.

없네.

내가 받아들인 마나는 그저 허공의 마나를 순환시키는 것일 뿐, 몸 어디에도 멈추지 않고 바깥으로 자연스럽게 흘러 나갔다.

"저는 외부의 마나를 그저 무한히 빌리고 있었군요."

"더 재미있는 건 이거다, 이놈아. 네놈, 정신마법에 걸렸을 때 어떤 기분이었냐?"

"더러웠죠."

일말의 고민 없이 대답이 나왔다.

"쯧, 멍청한 자식, 내가 그런 기분을 물어본 줄 아느냐? 네놈이 정신마법에 걸려 있는 그 순간 어떤 생각을 했고 어떤 기분이 들었냔 말이다!"

이걸 뭐라고 이야기해야 하나.

"다 죽이고 싶었죠. 그냥 순수하게."

"그래. 그 순수가 문제다. 네놈은 정신마법에 걸려 있으면서도 이성을 잃지 않고 냉철한 판단으로 싸웠단 말이지. 정신마법에 걸려 있을 당시 네 몸의 상태는 이러했다."

마네킹 심장 언저리에 붉은색의 마나가 갑자기 나타났다.

붉은색의 마나는 하얀 마나들을 천천히 물들이며 몸을 휘저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하늘에서 내려오던 하얀 마나의 양이 수백 배로 폭증해 내 머리부터 심장까지 진격하기 시작한 건.

붉은 마나와 하얀 마나는 목 언저리에서 맹렬히 싸웠고, 이내 하얀 마나가 다시 붉은 마나를 쫓아냈다.

"그거 아느냐? 나는 마법을 해제한 적이 없다. 그런데 네놈이 어느 순간 마법을 뚫고 제정신을 차리더군. 참 말이 안 되는 일이지. 단 한 가지 가정을 제외하면 말이야."

"가정이요?"

"네게 마나를 주는 존재... 또는 어떤 거대한 힘이 있다면 어떨까."

영감님의 지팡이는 마네킹의 머리 위.

거대한 흐름의 하얀 마나를 정확히 가리켰다.

영감님은 이 간단해 보이는 실험으로 아카식 레코드를 찾아낸 듯했다.

"도대체 이게 뭘까. 아니, 이게 뭔지는 몰라도 대충 짐작은 간다. 마나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고민해 본 적 있으니 말이지."

영감님이 누군가에게 질문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혼잣말로 되뇌는 것인지 구분되지 않을 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이내, 정확히 내 쪽을 향해 바라보았다.

낡은 두건 뒤에 있을 텅 빈 동공이 마치 나를 꿰뚫어 보는 것 같았다.

"이봐, 애송이. 받아라."

영감님이 손을 휘둘러 편지가 들어 있는 박스를 툭, 하고 내 쪽으로 던졌다.

"당분간 연구실은 폐쇄다. 나는 알아볼 게 있으니 알아서 편지를 쓰도록 해라. 수정? 편지의 메시지를 고치지 않는 선에서 적당히 수정하는 건 말리지 않겠지만 과도한 수정은 경을 칠 게야."

"알아볼 거라고 하심은...."

"네놈의 몸을 보다 보니 무언가 잡히는 게 있다. 거대한 흐름. 마나. 그 흐름을 잡아야겠다."

잠깐만, 그런데 이렇게 막연히 기약 없이 기다리고 작업을 해도 돼?

영감님의 과거 이야기 없이 편지를 그냥 엮어서 쓰라고?

이거 그냥 출판사에서 책을 펼쳐 내는 거랑 차이점이 뭐야?

"언제까지 연구실에 계실 건가요?"

"모른다. 대충 나올 때까지 기다리면 된다."

"제가 그렇게 한가한 사람도 아니고...."

"쯧, 어차피 제국을 피해 도망쳐 나온 녀석 아니냐. 갈 곳도 없는 거 그냥 글이나 쓰면 될 것 가지고 유세는. 알아서 해라."

몸이 허공으로 붕 뜨는 것이 느껴졌다.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 보니 나는 연구실 바깥으로 쫓겨나 있었다.

잠깐만요, 아 진짜 영감님 이 개 같은 노친네야!

나는 닫힌 연구실 문 바깥에서 허망한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연애편지 쓰다 강해짐

연애편지 쓰다 강해짐 55화

<55화 -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마법이 깃든다(2)>

생각이 복잡하다.

나도 이런 상황이 처음은 아니다.

아마 영감님은 아카식 레코드나 9써클에 관련된 진리의 편린을 붙잡은 거겠지.

하지만 바라건데 영감님이 깨달음을 얻는 것에는 실패했으면 한다.

물론 객관적으론 영감님이 깨달음을 얻어 9써클을 간다면 좋은 일이지.

제국으로부터 날 보호해 주는 사람이 더 강력해지는 거 아냐.

하지만 자신의 호기심을 충족시킨다고 통보도 없이 정신마법을 걸곤 그게 어떠냐는 식으로 배 째라 나온 사람을 도와주고 싶진 않았다.

그렇게 연구실을 나와 방으로 돌아가던 중, 나는 체칠리를 만났다.

날 발견한 체칠리가 다짜고짜 고개를 푹, 하고 숙였다.

"죄송합니다...."

"갑자기?"

"그냥 얼마나 같잖았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또 갑자기?"

"비웃어도 됩니다."

"이봐, 내가 지금 이야기 속도를 전혀 못 따라가고 있거든.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어쩌다가 이런 말을 꺼냈는지 육하원칙에 따라 이야기해 줄래?"

지금은 나도 머리가 복잡하고 정신상태가 좋지 않아 마냥 받아 주기가 힘들거든.

그랬더니 체칠리가 아랫입술을 잠깐 깨물고서는 입을 열었다.

"스콰렛 공작령에서 저는 누구보다도 재능이 넘쳤어요. 사람들은 모두 절 떠받들었고, 저는 제가 하는 모든 말이 맞고, 제가 하는 모든 일이 이루어질 거라고 생각했죠. 하지만 아니었어요."

룸펜 하운드가 와서 그야말로 스콰렛 영지를 박살 내 놓았으니까.

고작 2써클의 천재가 감당하기에 소드마스터 중급은 그야말로 악몽이었으리라.

사실 체칠리가 살아 있는 게 기적이지.

모에르 녀석이 지젤 선배에게만 신경을 쓴 덕분이랄까, 탓이랄까.

"하지만 헬피온 공작령에서도, 그리고 여기에서도 저는 아무것도 아니더라구요. 더군다나 제가 무시했던... 참모장님이 제일 무서운 사람이더라구요. 라이트 마법을 하루 만에 시전 해 버리는 천재에, 검술도 천재적이시고."

"그래서?"

"그냥요. 쪽팔리더라구요. 이불 속에 들어가 발버둥 치고 싶을 정도로. 그러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그런 이야기를 할 때 참모장님은 과연 무슨 생각이었을까."

그때?

그때라면 알바트론을 욕하고 있었지.

미치광이 마법사 같으니, 남의 몸이 얼마나 아플지는 하나도 생각 안 하고 제멋대로....

생각해 보면 8써클이고 9써클이고 마법사란 것들은 검사들에 비해 정말로 제멋대로 사는 것 같네.

"그러다 보니 제가 너무 초라해져서 사과하러 왔어요."

그것도 사람 나름인가?

성질을 내며 고집부리던 녀석이 기가 완전히 죽어 침울해 있는 걸 보니 생각이 많아지네.

"알았어. 어차피 감정 상하고 말고 할 것도 없었어. 다 잊었으니까 지금 사과로 그때 일은 모두 마무리한 셈 치자."

내 말에 체칠리가 맑은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녀석의 눈을 보자니 녀석이 여기에 와서 가지고 있었던 고민거리들이 하나둘씩 풀려 나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결과적으론 잘됐네.

워낙 재능 넘치는 녀석이니 탈리오 마탑의 가르침을 쑥쑥 흡수한다면 미래가 밝겠지.

어쩐지 마음이 복잡해졌다.

마냥 어리게만 본 녀석이 먼저 깨달음을 얻고 마음을 정리하는데, 정작 나는 영감님의 마법 때문에 심란해져 있는 상태니.

"이제 뭐 하실 건가요?"

그래서 나는 녀석의 질문에 고민 없이 대답했다.

"훈련하러."

원래는 방에 들어가 쉴 생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몸을 조금이라도 움직이지 않으면 못 견딜 것 같은 기분이 되어 버렸거든.

* * *

헬피온 공작령에 스콰렛 공작령, 그리고 탈리오 마탑까지.

어딜 가더라도 나는 야밤에 밤공기를 맞으며 훈련할 팔자인가.

그런 생각을 하고 연무장을 찾았는데 그곳엔 먼저 온 손님이 있었다.

쿵!

진각을 밟은 것마냥 강한 충격음이 울려 퍼졌다.

아무래도 이곳이 마탑이다 보니 밤늦게까지 수련하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안녕하세요."

"라워드네. 이 시간에는 어쩐 일이... 아. 라워드 군은 검사였지. 당연히 수련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까먹고 있었어."

"저야 그렇다 쳐도 제이슨 씨는요?"

"나야 뭐... 하하, 보면 알잖아?"

제이슨 씨의 몸이 좀 우람하긴 하지.

하지만 몸이야 타고난 성정이라고 치겠지만 이렇게 훈련까지 하는 건 그냥 전공을 잘못 선택한 거 아닌가?

지금도 봐라.

제이슨 씨는 평소의 펑퍼짐한 로브를 벗어 던지고 상체를 드러낸 채 훈련을 하고 있었다.

로브를 벗으니까 몸이 더 자세히 보이는데... 와. 엄청나네.

과장 없이 헬피온 공작령에서 종종 보던 전사들보다 좋은 몸이었다.

몸 곳곳에는 크고 작은 상처가 즐비했으며, 훈련을 오래 한 듯 땀이 잔뜩 맺혀 있었다.

"그럼 나는 좀 하던 거 계속할게. 흡!"

제이슨 씨는 날 슬쩍 보더니 다시 천천히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손끝부터 발끝까지 통일감을 갖고 움직이는 기묘한 저 흐름.

"무술을 연마하고 계시는 건가요?"

"으어허허, 알아보네. 원래 하던 걸 못 놓는 거지."

"원래는...."

"용병이었지. 이곳저곳을 떠돌던."

"용병 마법사요?"

"아니. 전사지. 마법은 철들고 나서 나중에 익혔어. 어릴 때 가난해 마나 적성 검사를 못 받았거든. 8년 정도? 세상을 떠돌다가 우연히 같은 용병대의 마법사가 알려 주더라고."

나는 제이슨 씨의 말을 들으며 근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스콰렛 영지의 후유증인가.

독특한 삶을 보면 대화를 나누고 싶어진다.

어쩌면 이건 핑계고 방금 체칠리와의 대화 때문에 마음이 조금 불편해진 탓일지도 모른다.

"질투 안 나시나요?"

그래서 나는 내 고민을 솔직하게 물어볼 수 있었다.

"으어어허허, 솔직히 안 난다고 하면 거짓말이지. 하지만 이렇게 몸을 움직이다 보면 그런 생각이 다 없어지더라구."

"나긴 나셨다는 거군요."

"나보다 재능 있는 사람들은 정말 많아. 지금 마탑에 있는 사람 중 텔마라는 녀석이 있네. 나랑 동기인데 무려 5써클이지. 엄청나지 않나? 어려서부터 마법을 익혔고, 마탑에 들어올 때 벌써 4써클이었어. 4년이 지나고 5써클이 되더군. 걔 말고 토미도 4써클 마스터고. 보리스 형님은 6써클을 곧 앞두고 있으시지."

이런저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늘어놓는 제이슨 씨의 표정은 그늘 한 점 없이 깔끔했다.

적어도 내 눈엔 속마음을 감춘 채 연기하는 것으로 보이진 않았다.

"예전엔 질투도 많이 했어. 하지만 어쩔 거야. 내 능력이 부족해서 그런 것을. 그런 마음에 오랫동안 잠식되어 실의에 빠져 있는 게 아무 도움도 안 된다는 걸 알고 나선, 대신 마음을 좀 달리 먹었지. 보여줄까?"

제이슨 씨가 씩 웃으며 주먹을 꽉 쥐곤 기합을 흩뿌렸다.

"흡!"

그의 주먹이 허공을 갈랐고, 동시에 훙, 하는 소리와 함께 마나가 사방으로 떨쳐지는 것이 느껴졌다.

이게 무슨?!

"방금 그거, 단순히 마나를 쓴 게 아니군요. 무술의 흐름에 따라 마나가 회전한 거 아닌가요?"

"오, 알아보는 건가? 여기 마탑에 들어온 사람 중 한 번 만에 알아보는 사람은 선생님 빼고 네가 처음이야."

제이슨 씨는 씩 웃더니 주먹과 발을 몇 차례 더 휘둘렀다.

그가 주먹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몸 전체에 깃든 마나가 사방으로 파동을 그리며 퍼져 나가는 게 느껴진다.

"심장에 써클이 생기면 무술을 할 수 없는 게 아닌가요?"

"흐흐. 이론으론 그렇지.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이론이잖아. 그래서 한 번 시도해 본다는 게 너무 이렇게 되었어."

이렇게 되었다니, 그 미묘한 어감에 나는 제이슨 씨에게 물었다.

"혹시 제이슨 씨의 클래스가 잘 안 오르는 이유가 이것 때문인가요?"

제이슨 씨는 대답 없이 흐흐, 하고 웃었다.

"그럴 거라고 생각해. 마나 호흡법을 익힌 것은 아니지만, 오랫동안 용병 생활을 하면서 단전에 마나가 쌓였던 거지."

"하지만 써클을 만들면 그건 완전히 없어지는 거 아니었나요?"

"아깝잖아."

제이슨 씨는 허공에 주먹을 한 차례 휘두르며 이야기했다.

"내가 마법사의 삶을 살기로 한 건 맞아. 하지만 그렇다고 용병으로 굴러먹던 삶이 부끄럽다거나 후회스러운 건 아니거든. 마법사도 용병일을 하다 보니까 된 거고. 그 차이인 것 같아."

"차이요?"

"다른 사람들은 어려서부터 조기교육을 받아 마법을 익힌 게 그들의 특징이라면, 나는 몸을 쓰다가 마법을 익힌 것뿐이야. 나의 성질은 약점이나 부족함이 아니라 나의 특징인 거지."

제이슨 씨는 생긋 웃으며 다시 허공으로 발을 차올렸다.

쿵, 하고 디딤발이 땅을 굳게 디디는 소리가 났다.

"그러니 내 특징을 계속 키워 나가다 보면 어느 순간 4써클이고 5써클이고 닿지 않을까? 스승님도 그걸 아시곤 날 타박하지 않으시는 거... 으어허, 맞겠지. 아님 말고 말이야."

가볍게 이야기하는 그의 말투였지만 그 내용은 울림이 있었다.

"좋네요."

"으어허허, 고맙다."

나는 그 울림을 따라 한참 제이슨 씨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왜일까.

그를 만나기 전까지 먹먹하게 안개 낀 것 같았던 마음의 상태가 맑게 개인 듯했다.

그의 말 속에 해답이 있었다.

"제이슨 씨."

"응?"

"여기에 마법을 기초부터 익힐 만한 도서관 같은 곳이 있나요?"

"으어어허, 도서관? 있지. 탑 7층으로 올라가면 거기 한 층이 모두 마법자료실이야."

"고맙습니다. 시간을 내서라도 가 봐야겠네요. 저는 먼저 들어가 볼게요."

방 근처에 도착했을 때, 갑자기 등 뒤에서 앨리스가 나타났다.

깜짝이야.

"저 사내도 깨달을 수 있게 도와주실...?"

"으엉?"

"현자님이시니까."

"그... 내가 깨달음을 마음대로 주고 말고 할 수 있는 게 아닌걸. 진짜 현자가 아니라는 건 모두 알고 있잖아."

"마음에 들었잖아.... 깨달음 줄 거잖아...."

아니 진짜 좀, 내가 그렇게 깨달음을 마구잡이로 줄 수 있는 전설 속의 황금고블린이 아니라니까?

우연히 이야기 좀 하다가 깨달음을 얻고 그런 것뿐인데.

그러나 앨리스는 뭔가 귀찮은 듯한 표정을 짓곤 슥 하고 사라진 것이다.

뭐야 진짜.

같이 다닌 지 꽤 되었지만 종잡을 수가 없는 사람이다.

하녀장님은 왜 저런 사람을 나에게 붙여 주신 걸까.

실력은 확실하긴 한데, 알면 알수록 정신 상태가 사차원 같단 말이지.

어후. 이런 거에 신경 쓰지 말자. 얼른 내일을 대비해서 자 둬야지.

내일은 마법을 배우러 갈 거다.

내가 늘 해 왔듯이 도서관에 있는 책을 읽고 그 마법들을 하나둘 내 것으로 만들어야지.

실험해 보고 싶은 것도 생겼거든.

제이슨 씨는 몸에 써클이 생겼음에도 불구하고 무술을 쓸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본다고 했지.

나는 그 반대잖아.

내 몸에는 써클이 없다.

검을 휘두를 때도, 마법을 쓸 때도 그저 허공에 널려 있는 마나를 끌어다가 사용하고 있다.

그렇다는 건 곧 써클 개념에서 자유롭다는 소리가 아닐까?

나는 혹시 3써클, 4써클 마법 등도 자유롭게 쓸 수 있는 거 아닐까?

어쩌면 그보다 더 높은 써클까지도....

아카식 레코드가 9써클 마법사들의 기록까지 가지고 있으니 이렇게 마법을 익히다 보면 9써클 마법도 펑펑 써 댈 수 있...지는 않겠지.

나는 폭주하는 생각을 다잡았다.

만약 저런 게 가능했다면 신체활용비서를 익힌 순간부터 헬피온 공작의 완벽한 검술, 그 선을 따라 할 수 있었겠지.

아마 어느 정도의 지식과 몸, 그리고 컨트롤할 수 있는 정신 등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래도 어디까지 되는지 충분히 실험할 가치가 있을 듯했다.

그러고 보니 내일은 훔볼트라는 영감님도 오신다고 했지.

이래저래 내일이 다가오는 게 기대된다.

나는 기대감을 한껏 안은 채 잠이 들었다.

* * *

"훔볼트 어르신이시죠?"

"누구지?"

"탑의 마법사분들이 탈리오 마탑주님과 오랜 관계라고 소개해 주셨거든요. 헬피온 영지에서 온 라워드 고르뎀이라고 합니다. 혹시 탈리오 마탑주님과 돌아가신 사모님의 연애 관계에 들을 수 있을까요?"

"일 없네."

훔볼트 영감은 날 단칼에 내치곤 그대로 문을 닫아 버렸다.

연애편지 쓰다 강해짐

연애편지 쓰다 강해짐 56화

<56화 -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마법이 깃든다(3)>

"큽, 크흡, 크흐흐흡."

누구냐.

누가 웃음소리를 낸 거냐.

뒤를 힐끗 쳐다보니 아직 어린 마법사가 입을 손으로 가린 채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고 있었다.

"소리 내서 웃어도 됩니다."

"아, 아닙니다, 크흡. 죄송합니다. 크흐흐흡."

그렇게 웃음소릴 필사적으로 참는 게 더 비참하니까 웃으라고 한 건데 말이지.

나는 한숨을 쉬며 문을 바라보았다.

"영감님 원래 성격이 저러십니까?"

"말씀드렸잖아요."

훔볼트 영감님의 이야기를 처음으로 꺼냈던 여마법사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녀는 로브를 벗고 어제보다 단출한 복장이었다.

갈색의 올림머리 뒤로 작은 막대기를 비녀로 꽂았고, 활동하기 편한 펑퍼짐한 셔츠에 바지에 슬리퍼까지.

마치 주변의 남자들이랑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었다.

하긴, 아카데미 시절에 대학원 간 누나들이 다 저렇게 입고 다니긴 했었지.

"저 영감님이랑 그나마 제대로 이야기하는 사람은 제이슨 오빠밖에 없어요. 그것도 어디까지나 그.나.마."

그녀가 강조하는 '그나마'가 무슨 뜻인지 잘 알 것 같다.

그를 만나고 내가 들은 거라곤 딱 다섯 글자, '누구, 일없네'밖에 없었으니까.

"그렇지만 아무리 성격이 나빠도 그렇지 정중하게 부탁하면서 말을 건넸는데 단숨에 그렇게 쫓아낼 건 없잖아요."

"아, 그, 백작님? 저기...."

"탈리오 영감님이 칩거에 들어갔으니까 이제 정보를 얻을 거라곤 여기 이 어르신밖에 없는데 이렇게 비협조적이라니 진짜 너무하잖아요. 말 한마디 정도는 들어볼 수 있을 텐데. 그런데 왜 다들 그런 표정이...."

아. 설마. 아닐 거야.

나는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어느새 열린 문과 곤란하다는 듯이 특유의 웃음소리로 웃고 있는 제이슨 씨와.

"성격이 나빠 미안하군."

단단하고 각진 턱, 날카로운 눈의 훔볼트 씨가 길가에 굴러다니는 쓰레기를 보는 듯한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아하하하, 어르신 그게 아니라요."

"가겠네."

"어르신, 잠깐, 잠깐만요!"

이렇게 그냥 가시면 어떡해요!

이대로 보낼 순 없어!

나는 급히 영감님의 바짓가랑이라도 붙잡고 늘어지기 위해 몸을 날렸고.

순식간에 날아갔다.

어라?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등에 뻐근한 통증이 올라왔다.

왜 사람들이 모두 거꾸로 서 있지?

"흠."

아, 저 사람이구나.

저 영감님이 날 단숨에 날려 버린 거구나.

그런데 내가 선조차 못 볼 정도로 단숨에 날려 버린다니, 그게 말이 돼?

영감님은 그 어떤 고민도 해결해 주지 않은 채 성큼성큼 탑 바깥으로 사라졌다.

그때 그 여자 마법사가 쪼르르 다가오더니 쪼그려 앉았다.

그녀의 얼굴엔 미세하게 삐죽거리는 웃음이 매달려 있었다.

"저 아저씨, 소드마스터 중급이에요."

"아니, 그걸 왜 이제 알려 줘요."

"달려들 줄 몰랐으니까?"

"저런 상황이면 당연히 매달리죠!"

"백작님 그... 어디 가면 혹시 상식이 부족하단 소릴 듣거나 한 적 없어요?"

와, 이건 또 새로운 형태의 모욕이네.

누가 누구한테 어쩌고 어째?

"게다가 먼저 알려 줬으면 이런 꿀잼 구경거리는 못 봤을 테니까."

"진짜 악질이시네."

"팍팍한 마탑 생활에 이런 재미라도 있어야죠."

"됐고, 저런 사람이 왜 약초꾼을 하고 있나요."

"그러게 말이에요."

진짜 세상일은 하나도 알 수 없는 것 같다.

* * *

"그 어르신한텐 어떻게 이야기를 걸어 봐야 할까요."

"글쎄요. 저희랑도 별달리 얘기를 하진 않아서. 백작님도 검을 쓴다면서요. 상대는 소드마스터니까 그냥 검을 다짜고짜 휘둘러 보면요?"

"저 정도의 분이시라면 단숨에 반격당해 끽, 하고 죽지 않을까요? 아니, 그 이전에 글레이시아 씨 머릿속에서 검사들의 이미지는 왜 그런 겁니까?"

나는 훔볼트 씨를 소개해 줬던 여성 마법사 글레이시아 씨에게 도서관을 안내받았다.

물론 순수하게 안내를 위해 움직였다기보다는, 자기도 도서관에서 자료를 찾을 게 있다며 동행을 해 준 것에 가까웠지만.

"여기가 도서관이에요."

"고맙습니다."

"안내 안 해 줬으면 잔뜩 삐져 있었을 것 같았으니까요."

"그렇진 않았을 겁니다."

"진짜요?"

"잔뜩은 아니고 조금 섭섭한 정도였겠지요. 섭섭."

"그래, 그렇다고 해 두죠, 섭섭 씨."

대화를 하면서 느낀 건데, 글레이시아 씨는 가벼운 말장난이라도 하고 싶은 정도로 심심하신 건가.

말 하나하나가 농담 따먹기라도 하는 듯 가볍다.

불쾌한 기분은 아니긴 한데. 

"어때요? 대 탈리오 마탑의 도서관을 본 기분이."

"음... 복잡하네요."

사실 이것도 많이 순화한 감상이었다.

여긴 내가 이때까지 찾아다녔던 도서관 중 제일 최악의 환경이었다.

마탑 7층 전체가 도서관인 모양인데, 도서관의 크기는 그렇게 크지 않았다.

장서는 얼핏 살펴봤을 때 1만 종 정도?

그런데 그 1만 권의 책 상태가 다 개판이다.

책은 어떠한 기준도 없이 제멋대로 가로세로를 넘나들며 꽂혀 있었고, 바닥에 쌓여 있는 책들도 잔뜩이었다.

무엇보다 책상 수북하게 쌓여 있는 스크롤에, 이리저리 널려 있는 책들까지.

심지어 펼쳐져 있는 책에는 제멋대로 필기를 하거나 낙서를 해 둔 흔적도 즐비했다.

"우리들이야 연구를 하는 사람들이지 도서관의 사서처럼 책을 싸고도는 사람들이 아니니까 어쩔 수 없죠."

글레이시아 씨는 뭐 어떠냐는 듯 어깨를 으쓱인 뒤 책장 한쪽을 가리켰다.

"초보 마법서는 아마... 저쪽? 보통은 그렇게 찾으면 쉬워요."

"보통이 아니면요?"

"그럼 최대한 책상 근처로 찾아보세요. 논문이나 마법서를 쓸 때 레퍼런스로 참고한 뒤에 가장 가까운 곳에 던져 놓으니까. 뭐, 기초마법들에 대한 이론서는 잘 안 건드니까 괜찮으려나?"

그렇게 말하곤 글레이시아 씨도 어기적거리며 책장 제일 끝에서부터 천천히 책등의 이름을 읽으며 필요한 책을 찾아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팔 위로 6권의 책이 올려지는 풍경을 보곤 시선을 돌렸다.

진짜 대학원 안 가길 잘했어.

이건 끔찍한 삶인 것 같아.

나는 그녀가 손짓으로 가리켰던 저어기쯤이라는 곳으로 가서 책들의 제목을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마법의 이해, 마법개론, 1써클 10일이면 쓸 수 있다, 누구든지 쉽게 시작하는 1써클, 집에서 배우는 1써클, 마법아 놀자....

제목을 보면 초보 마법서 같긴 한데, 이 중에 뭘 어떻게 봐야 하는 거지.

아무거나 보면 되나?

나는 그중에서 가장 무난한 '집에서 배우는 1써클'이라는 책을 집어 든 채 도서관의 구석에 있는 책상으로 향했다.

그곳엔 앞선 사람이 남긴 낙서인 듯 '얼른 도망쳐' 같은 글씨가 날카로운 칼 같은 걸로 파져 있었다.

정말로 장소와 책에 대한 어떤 존중도 이루어지지 않는 곳이구나.

이런 곳이다 보니 아카식 레코드가 아무 반응을 안 했던 게 아닐까.

나는 그런 잡다한 생각들을 정리한 채 마법책을 펼쳐 들었다.

* * *

마법사들은 빌어먹을 허세꾼들이 틀림없다.

뭐, 집에서 배우는 1써클이라고?

이거야 원,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반도 못 알아듣겠다.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거지.

내 예상으론 대략 두 시간 정도 이 책을 들여다본 것 같은데, 반의반도 못 읽은 것 같다.

용어는 다 고유명사인 데다 설명을 하면서 '이 정도는 어렸을 때 다 배우셨죠' 하면서 뛰어 넘어가기가 일쑤다.

도대체 마법사들의 유년기는 얼마나 고통으로 점철되어 있는 거냐.

이걸 어쩐다.

1써클 마법이 이 정도라면 4써클이나 5써클 마법도 상황이 비슷할 것 같다.

도움이 필요한데....

나는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았고, 마침 책장 사이를 배회하고 있는 글레이시아 씨와 눈이 마주쳤다.

"아!"

"응?"

무언가 이상한 기색을 감지한 것일까.

글레이시아 씨가 움찔하고 몸을 피하려는 순간, 나는 그대로 글레이시아 씨의 손을 붙잡았다.

"으힉?!"

"도와주세요!"

글레이시아 씨는 훔볼트 씨와 다르게 순수한 마법파.

그러니 내 손을 피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당황한 글레이시아 씨를 거의 질질 끌다시피 해 책상으로 끌고 왔다.

"자, 잠깐만, 놓고 말해도 되지 않을까요? 뭘요, 뭘 어쩌라구요?"

책상으로 도착한 나는 내가 방금 전까지 보던 책을 그녀에게 펼쳐 보였다.

"이것 좀 가르쳐 주세요."

"제가 왜요?"

"섭섭한 것도 풀게요."

"아니, 저는 섭섭 씨가 저한테 섭섭하게 평생 사셔도 되는데요."

"섭섭한 걸 푼다니까요. 좋은 기회잖아요."

내가 지금 억지를 부리는 건 알고 있지만 어쩔 수가 없는걸. 난 지금 절박하다고.

"아, 진짜."

글레이시아 씨는 정말로 귀찮다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깊은 한숨을 쉬었다.

"딱 한 번만이에요."

"고맙습니다!"

그때부터 글레이시아 씨의 특강이 시작되었다.

"마나로드는 말 그대로 마나의 길이 아니라 마나의 흐름을 뜻해요. 여기서 말하는 집중이나 컨트롤은 마나를 특정 형상으로 만들어 내는 감각을 뜻하구요."

"그래서 마법을 구현한다고 하는 거군요. 마나의 모습을 상상력으로 빚어내니까?"

"그렇죠."

"그런데 보통 마법사들이 쓰는 마법은 다들 비슷하잖아요. 1써클은 마나 애로우 쓰고, 3써클은 파이어볼 쓰고. 정형화된 모습이 있단 건가요?"

"사람의 상상력이라는 게 무한해 보이지만 사실 한 번도 본 적 없는 걸 상상할 수 없거든요. 자기가 경험해 본 적 있는 걸 빗대서 상상하죠."

아카데미에서 공부할 때 들은 적 있다.

예를 들어 바다를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은 바다를 묘사할 수 없다.

하지만 그 사람이 호수를 본 적 있다면 '아주 넓어서 끝이 보이지 않는 호수' 같은 식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지.

"그래서 스승과의 관계가 중요하죠. 머릿속에 이미지가 확실히 박힐 때까지 마법을 구현해 줘야 하니까요."

"그렇다면 고써클 마법은 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쓰는 거지. 아. 저써클 마법들이 발현되는 모습으로 상상력을 펼쳐 가는 건가요?"

내 말에 글레이시아 씨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헬피온 공작가의 참모장이라고 했죠? 확실히 똑똑하긴 한 모양이다. 이 정도로 이해를 빠르게 할 줄은 몰랐어요."

아, 아하하하.

무언가 좀 쑥스럽네.

"당신, 여기 마탑에 와서 마법 배울 생각 없어요?"

칭찬 속에 독이 숨겨져 있었구나.

선 넘네.

"싫습니다."

내 단호한 대답에 글레이시아 씨가 아깝다는 듯 쯧, 하고 혀를 찼다.

"그런데 굳이 마법을 모방할 필요가 있을까요?"

글레이시아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끔뻑였다.

"결국 마법도 자연을 모방한 거라면 마법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순수한 자연의 형태를 모방하는 것이 더 쉽고 강력하지 않을까요?"

"이론상으론 맞는 얘기죠. 단지 시전자의 마나량이 문제지. 예를 들어 태양 빛을 모방한다고 할 때, 우리는 태양 빛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라고 설명할 수 없죠. 그래서 수많은 마법사들이 여러 번 시도 끝에 공식을 만드는 거죠."

글레이시아 씨의 설명에 갑자기 뇌가 환하게 밝아진 느낌이 들었다.

길을 찾았다.

나는 마법을 쓰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모방하던 가장 근원의 행위로 돌아가야 했던 거였구나.

그 순간 눈앞으로 우주가 펼쳐졌다.

* * *

내가 도착한 곳은 아주 작은 서재였다.

어느 정도로 작았냐면 내가 바닥에 드러누우면 꽉 찰 것 같은 골방이었으니까.

낡은 풍경의 방은 나무판을 얼기설기 엮어 놓은 듯한 벽이었으며, 곳곳에 먼지가 자리 잡은 듯 퀴퀴한 냄새가 났다.

그 중앙에 작은 탁자와 의자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런데 이번 아카식 레코드는 이상하네.

어딜 둘러봐도 책 비슷한 게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기록의 관 같은 케이스인가?

저기 책상에 앉으면 정보가 머릿속에 막 줄줄 들어온다거나, 또는 예전에 편지가 있던 곳처럼 책상에 낙서가 써진다거나.

어쨌거나 지금과 같은 상황은 이제 제법 익숙해졌으므로 별다른 거부감 없이 자리에 앉아 보았다.

그러자 예상대로 책상 위에 누런색 종이들이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나는 하나둘 생겨난 종이를 들어 보았다.

[마법은 구현이다.]

[마법은 자연의 힘을 모방한다.]

[강한 마법은 마법에 사람의 상상력을 덧대는 것이다.]

이 문장들은 아까 내가 글레이시아 씨와 이야기 나누며 떠올렸던 글이잖아.

설마 내 깨달음이 그대로 아카식 레코드에 등재되는 것인가?

그런 생각을 하고 계속 종이를 읽어 나갔다.

[자연을 모방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태양이 빛을 내뿜는 건 자연스러운 것인데, 나는 빛을 내뿜을 수 없다. 빛을 뿜는다는 건 무엇일까?]

[바람처럼 분다는 것은 무엇일까?]

[물처럼 흐른다는 것은 무엇일까?]

[마나에 자유롭다면 마나 때문에 사용할 수 없었던 제한적 마법을 자유롭게 쓸 수 있지 않을까?]

수많은 질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종이를 가득 채워 간다.

고작 1, 2초에 불과한 시간 동안 종이가 질문으로 가득 차고 새로운 종이가 생겨났다.

순식간에 내 책상은 종이들로 뒤덮였고, 이내 종이는 분수처럼 사방팔방으로 솟구쳤다.

나는 그저 멍한 상태로 홀린 듯 그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질문 하나하나가 눈을 스친다.

이내 낡은 방은 모조리 종이로 가득 찼고, 그 종이의 바닷속에서 나는....

* * *

"축하해요."

나는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정신을 차려 보니 수많은 종이들은 사라져 있었다.

어느덧 도서관에 돌아온 모양이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그곳엔 묘한 미소를 지으며 글레이시아 씨가 날 바라보고 있었다.

"축하라뇨, 갑자기 무슨."

"방금 보고 오셨을 거 아녜요."

자, 잠깐.

글레이시아 씨가 그걸 어떻게 알지?

보통 아카식 레코드에 접속한 경우 현실의 시간이 완전히 멈춘 상태에서 내 정신만 방문하는 거였을 텐데.

저번에 지젤 선배와 대화를 하던 중 아카식 레코드에 접속했었지만 선배는 끝끝내 눈치채지 못 했었던 것도 그런 까닭이니까.

"깨달음을 얻었잖아요. 한 시간 정도 멍하니 있던데. 나도 몇 번 가 봤어요. 나름 4써클이니까."

"깨달음? 아, 아하! 아아... 이게 깨달음이란 것인가."

그건 아카식 레코드가 아니라 내 내면의 깨달음들을 정리한 것이었구나.

그걸 나는 심상 이미지로 보게 된 것이고.

"어머, 그게 무슨 소리람. 백작님은 소드 익스퍼트 최상급이라면서요. 소드 유저에서 익스퍼트 올라갈 때 깨달음 없었어요?"

나는 의심을 사기 싫어 그냥 아하하 웃으며 얼버무렸다.

"검을 깨닫는 거랑 그게 좀 다르네요."

"흐응, 그런가. 그거 좀 신기하네요. 하긴, 사람들마다 깨달음의 방식은 조금씩 다르다고 하니까."

"다른가요?"

"깨달음이라는 게 결국 자기가 알게 된 것을 심상 속에서 정리하는 거니까요. 백작님은 뭘 보셨어요?"

나는 천천히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하지만 수천, 수만 가지의 질문에 파묻혔다는 것만 기억이 날 뿐 자세한 내용은 마치 안개가 낀 것처럼 잘 보이지 않았다.

마치 공부를 하다가 갑자기 늘 외우고 있던 고유명사를 까먹어서 그, 그, 그 하며 끊임없이 기억을 더듬을 때의 답답한 느낌이었다.

분명 봤는데.

분명 아는데.

계기가 있으면 또 떠오를 것만 같은데, 그 계기가 없어서 답답한 느낌.

내가 대답을 못 하고 어버버하고 있자 글레이시아 씨가 알 법하다는 미소를 지었다.

"이제 막 깨어났으니 수습이 안 되었겠네. 그래도 깨달았으니까 잘됐네요. 그런데 이건 진짜 별일이네.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다 깨달음을 얻다니. 가끔 마도학자 계열의 교수들이 그렇단 얘길 들은 적 있는데. 백작님, 대학원을 싫어하는 척하지만 몸은 그 누구보다 마탑에 적합한 인재가 아닐까요?"

"아닙니다."

제가 아무리 막 깨달음을 수습한 터라 몽롱한 상태지만 악마의 속삭임을 구분 못하는 건 아니거든요.

내 정색을 본 글레이시아 씨가 풋 하고 웃었다.

"자, 그럼 삐지는 것도, 섭섭한 것도 없어졌죠? 오히려 내 가르침으로 깨달음을 얻었으니까 절 스승으로 예우하셔야겠네요."

그게 무슨 억지람.

그런 소리라면 전 아펠 집사장과 헬피온 공작의 스승이 되는데요.

세계 최강자의 스승이라니.

가슴이 웅장해지는 소리긴 한데, 그만큼 부담스러운 소리기도 하다.

"스승 대접은 바라지 마세요."

"그런 거 순순히 할 거란 생각은 안 했어요, 제자 씨. 어쨌거나 오늘 수업은 끝. 자, 이제 가요. 나 바빠. 논문 써야 해."

"아...."

"뭐죠, 왜 그렇게 날 불쌍한 눈으로 보는 거죠?"

"착각입니다."

"그런 것 치고는 표정이 안 풀리는데?"

"아뇨. 착각이 맞습니다. 전 논문을 쓴 적 없고 쓸 필요도 없어서 그 기분을 모르는데 어떻게 동정을 합니까."

"와... 뭔가 되게 나빴다."

나는 투덜거리는 글레이시아 씨에게 다시 한번 감사를 표하고 도서관을 나섰다.

* * *

"으어어허허. 자네 이상한 짓을 한다던데."

"제가요? 이상한 짓을요?"

"지금 하는 짓 같은 거 말이야. 그래서 확인하러 온 거거든."

이상한 짓이라니.

내가 지금 하는 거라곤 연무장 가운데 대자로 누워서 온몸으로 태양빛이 무엇인지 느끼며 광합성 중인데.

"동료들이 내기를 하더군. 자네가 스승님의 편지에 신물이 나 자포자기한 거다. 또는 훔볼트 영감님을 골탕 먹일 방법을 모색 중인 거다. 또는 정신마법의 후유증일 것이다."

"제이슨 씨는 어디에 거셨나요."

"나는 그냥 자네 천성이 게으르다는 쪽에 걸었지."

나는 피식 웃으며 상체를 일으켰다.

마침 잘됐네.

제이슨 씨가 찾아왔을 정도로 다섯 시간이나 무식하게 연무장에 누워 있었지만 별달리 진전이 없었거든.

"제이슨 씨. 궁금한 게 있는데요. 태양빛을 구현한다는 게 과연 뭘까요?"

"라이트 마법이 궁금한가?"

"아뇨아뇨, 그게 아니라...."

어차피 탈리오 영감님이 알고 있는데다 딱히 비밀이라고 한 건 아니니까 말해도 되겠지.

나는 제이슨 씨에게 외부의 마나를 빌려쓰는 내 상황을 설명해 준 뒤 조언을 구했다.

내 상태를 들은 제이슨 씨가 멍하니 입을 벌린 채 날 바라보았다.

"자네 인간은 맞지?"

"물론이죠."

"으어허, 내가 이곳에 있으면서 별별 천재들을 다 봤지만 자네만큼 특이한 재능을 가진 사람은 처음이야. 거기다 뭐? 자연을 구현한다고? 크흐, 미쳤군 미쳤어. 저기 있는 친구들 중 누구도 돈을 탈 사람이 없겠군."

"그건 누구도 돈을 잃지 않았단 소리기도 하죠. 그런데 제 생각이 그렇게 어처구니없나요?"

"자네 새처럼 날개짓을 하거나 개처럼 꼬리짓을 할 수 있나?"

그야 못 하겠지.

나는 날개도, 꼬리도 없으니까.

제이슨 씨가 말하려는 게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내가 태양빛은 느낄 수 있지만 태양처럼 스스로 빛을 발하는 건 한 번도 해 본 적 없지.

"마법에 써클이 있는 까닭은 마나 때문이기도 하지만 경험해 본 적 없는 감각에 다가가는 과정이기도 해. 작은 촛불부터 횃불, 모닥불, 강한 산불로 넘어가는 거지."

제이슨 씨의 말을 들으니 내가 처음부터 너무 욕심을 부린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하긴, 아무리 아카식 레코드의 도움을 받고 깨달았다고 하더라도 하루만에 어마어마한 마법을 펑펑 써 대는 것은 무리겠지.

내가 실망한 것을 본 제이슨 씨가 피식 웃었다.

"혹시 모르지. 자네가 태양빛에 대해 아주 자세히, 가장 작은 단위까지 이해할 수 있다면 얘기가 달라지겠지. 빛이 왜 발생하는지, 어떻게 빛이 우리에게까지 도달하는지, 그것이 어떤 느낌인지 등등?"

"아하하. 과연 인간이 그런 걸 알 수 있는 날이 올까요?"

"으어어허허, 그렇긴 하지?"

어라?

왜 방금 제이슨 씨의 이야기에서 머리가 근질거리는 느낌이 들지?

이런 느낌이 들 때마다 꼭 뭔가를 찾아내곤 했는데.

아까 깨달음도 그렇고 오늘 진짜 답답한 기운이 가시질 않는 날이네.

"그건 그렇고 난 참 자네가 부러워. 써클이 없는데도 마나를 자유롭게 쓰는 데다 검도 능숙히 다룬단 말이지. 나도 그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고 보니 그 점에 대해서 제가 생각해 본 게 있는데요."

"응?"

그때 앨리스가 제이슨 씨의 각성을 도와줄 거 아니냐고 따지던 것이 떠오른다.

이상하게 귓가에 그 말이 남더란 말이지.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

매번 우연한 기회에 고수들의 깨달음을 도와주었지.

그런데 그게 아니라 내가 적극적으로 나서 사람을 각성시킬 수 있지 않을까?

만약 이게 된다면 뒷배를 만들기 위해 이런저런 노력을 하는 게 아니라 각성에 목마른 사람들이 저절로 나를 찾아오게끔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연애편지 쓰다 강해짐

연애편지 쓰다 강해짐 57화

<57화 - I belive I can fly(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