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개인 교습
'허무의 마탑이라.'
허무의 마탑은 최초의 마법사가 처음으로 세운 4개의 마탑 중 중 공간을 담당했던 마탑이었다.
이제는 전설로 남은 이야기였다.
정보국 때 그렇게 찾아도 나오지 않았던 것이 이렇게 대뜸 나타날 줄이야-.
'역시 북부로 오기를 잘했군.'
"······업화의 마법을 어떻게 알고 있지? 업화의 마탑은 진작에 타서 사라졌을 텐데!"
여우 가면의 반응이 상당히 날카로웠다. 업화의 마법이 생각보다 더 무거운 듯했다.
"선물 받았네."
"말도 안 되는 소리!"
"공허에 빠졌다는 허무의 마탑도 이렇게 있지 않나?"
갈라하드의 지적에 여우 가면이 으드득- 소리를 냈다. 행동이 정말 여우 같았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여우-.
"어디서 얻었는지 말해."
여우 가면이 낮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여전히 여우 가면에게서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가면 때문에 놈의 시선도 안 보였다.
대충 짐작하자면-.
'머리를 보고 있군.'
머리를 날릴 생각인가-. 갈라하드는 지옥불을 슬쩍 돌렸다.
"말하지 않았나. 선물 받았다고."
갈라하드는 입꼬리를 올렸다.
[쓰레기라니. 그게 무슨 실례되는 소리니. 내가 얼마나 어렵게 구한 건데.]
마법서가 아닌 돌에 새겨진 괴상한 유물이었는데, 손상이 얼마나 심했는지 처음에는 쓰레기인 줄 알았다.
갈라하드조차 꽤 오랜 세월을 붙잡고 있어야 했을 정도였으니까. 정보국이 아니었다면, 그 해석도 어려웠을 것이다.
결국 지옥불을 배웠지만, 딱히 쓸모 있는 마법은 아니었다.
요원 시절 갈라하드에게 필요했던 건, 빠르고 조용한 마법이었다.
지옥불은 그 위력이 확실했지만, 속도가 너무 느리고 들어가는 집중력도 상당했다. 요원으로서 그다지 좋은 마법이 아니었다.
때문에 요원 시절에는 그다지 선호하는 마법이 아니었다.
갈라하드는 슬쩍 지옥불을 내밀었다. 여우 가면이 경기를 일으키며 뒤로 물러났다. 갈라하드는 그 유별난 반응을 눈여겨봤다.
"지옥불을 두려워하는군."
"미친-. 지옥불을 들이미는데, 안 무서워하는 게 이상하지!"
여우 가면이 뾰족하게 소리쳤다. 어찌 보면 당연한 말이었지만, 상대는 공간을 마음대로 움직이는 여우 가면이었다.
이런 느려터진 지옥불이 위험이 될 리가 없었다.
여우 가면은 굳이 걸어서 뒤로 물러났다. 방금까지 신나게 공간을 움직이던 것과 상반된 반응이었다.
그건-.
"아, 그거였군."
지옥불은 모든 걸 태웠다.
말 그대로 모든 거였다.
가령-.
"공간도 태우는군. 그런 탓에 이 주변에서 공간 마법 쓰는 걸 꺼리는 거고."
갈라하드의 말에 여우 가면이 뚝- 하고 멈췄다. 별다른 반응은 없었다.
"웃기는 소리."
지옥불 주변이 크게 일렁였다. 그에 지옥불이 거칠게 흔들렸다. 일렁임이 조금 더 강해졌다.
"음?"
여우 가면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일렁임이 더욱 거칠어졌다. 지옥불이 크게 흔들렸다.
지옥불의 크기가 조금 작아졌다.
여우 가면이 대놓고 혀를 찼다.
"이건 지옥불이 아닌데?"
여우 가면의 고개가 반대쪽으로 꺾였다.
"지옥불은 이렇게 작지 않아. 애초에 이 정도로 밀리지도 않고-. 애초에 마법사가 지옥불을 쓸 리가 없잖아?"
여우 가면의 말이 점점 빨라졌다. 이내 여우 가면의 고개가 뚝- 하고 멈췄다.
"내가 만든 지옥불일세."
"그러니까 직접 개정하셨다?"
"개정보다는 복원이 맞는 표현일세."
하! 여우 가면이 뾰족하게 웃었다.
"어이가 없군. 업화의 흔적을 어떻게 구했는지 모르겠지만, 거기서 지옥불을 구현했다-? 최초의 마법사라도 되나 보군."
"미안하지만, 나는 젊네."
여우 가면의 웃음이 뚝 하고 멈췄다. 정적이 잠시 흘렀다. 갈라하드는 목덜미가 서늘해졌다.
"너, 도대체 뭐죠?"
여우 가면의 목소리에 전과 달리 웃음기가 하나도 없었다.
"말하지 않았나. 특무대 대장 갈라하드라고. 기억력이 별로군."
여우 가면이 이번에는 웃지 않았다.
"그래, 흥미가 좀 생겼나?"
"흥미? 하!"
여우 가면이 크게 코웃음 쳤다.
"업화의 마법이 흥미 수준일 거 같나? 당신, 지금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르는군."
"그래서-."
갈라하드가 여우 가면의 말을 잘랐다.
"바꿀 건가?"
정적이 잠시 이어졌다. 갈라하드는 여우 가면의 검은 부분을 보며 계산했다.
지옥불은 공간도 태웠다. 틀어지면 일단 그 시선이 향할 만한 곳에 지옥불을 밀어 넣는다.
그때, 여우 가면이 코웃음 쳤다.
"재밌네요. 다만-."
지옥불 주변에 일렁임이 거칠게 일어났다. 지옥불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그 열기가 옅어졌다.
마나가 뒤틀렸다, 그에 갈라하드의 입가로 신음이 흘렀다.
이내-.
"조금 건방지네."
지옥불이 사라졌다.
마나의 뒤틀림이 갈라하드를 엄습했다. 몸이 크게 휘청였다. 갈라하드는 금색 봉을 잡으며 중심을 세웠다.
'대단하군. 공간 마법-.'
마른기침을 연신 터뜨리며 여우 가면을 살폈다.
"뭐 괜찮아요. 그 정도 했으면 건방질 수 있지. 근데 이건 가르친다고 배울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설령 배운다고 해도-."
여우 가면의 목소리에 조소가 가득했다.
"인간인 그쪽은 버틸 수 없어요."
여우 가면이 천천히 돌아갔다. 구십 도에서 멈추지 않고 부드럽게 한 바퀴 돌았다.
"유연하군."
갈라하드의 칭찬에 여우 가면이 뚝- 하고 멈췄다.
가면의 눈 부분에 위치한 깊은 심연이 갈라하드를 응시했다.
갈라하드는 고개를 숙여, 여우 가면 가까이 들이밀었다. 그를 마주하며 입꼬리를 올렸다.
"설마 내가 배울까 봐 겁이라도 나는가? 이런."
아주 잠깐 정적이 이어졌다.
풋. 여우 가면이 작게 웃었다.
"유치한 도발을 자꾸 하시네."
그때, 어깨에서 화끈한 통증이 느껴졌다. 어깨에 자그마한 구멍이 뚫렸다.
두근! 두근! 두근!
고통의 알이 격하게 떨었다. 그 공포가 퍼졌다.
갈라하드는 방금의 통증을 되새겼다. 찰나였지만, 분명히 표면부터 느껴졌다. 공간이 단순히 삭제된 게 아니었다.
"아, 그래, 기회를 줄게요."
"기회?"
"지배자를 그냥 둘 수는 없으니까. 겨룰 정당한 기회를 줄게요. 해가 열 번 떠오른 뒤에."
안 그래도 지배자를 처리할 생각이었는데, 직접 길 안내까지 해준다니-. 이렇게 친절할 수가 있나. 갈라하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길 안내까지 해주는 건가? 상당히 친절하군."
여우 가면이 잠시 멈췄다가 말을 이었다.
"대공이나 아드리안나 뒤에 숨어도 소용없어요. 상당히 귀찮아질 뿐이지. 그 옆에 있다고 못 건드리는 건 아니니까."
여우 가면이 어느새 다섯 걸음 뒤에 있었다.
'지옥불을 지우니까 다시 공간 마법을 쓰는군.'
갈라하드는 방금 본 걸 되새겼다.
그때, 여우 가면이 손을 번쩍 들었다.
"그건 왜 가져간 거예요?"
여우 가면이 갈라하드의 금색 봉을 가리키며 물었다.
"기념품일세."
갈라하드의 가벼운 대답에 여우 가면이 거칠게 웃었다.
"역시 재밌어."
여우 가면이 그대로 사라졌다. 나타났을 때처럼 어떤 흔적도 없었다.
갈라하드는 다시금 마나를 뿌렸다. 여우 가면은 자리에 없었다.
그제야 갈라하드는 거친 숨을 터뜨렸다. 금색 봉에 기대어 휘청였다.
무리하여 지옥불을 일으킨 터라, 탈력감이 가득 올라왔다.
갈라하드는 금색 봉에 기대어 연초를 입에 물었다. 레몬 향이 깊게 퍼졌다.
들끓던 마나가 그제야 조금 안정화됐다. 갈라하드는 연초를 깊게 마시며 방금 본 여우 가면을 떠올렸다.
박제한 듯한 여우 가면을 쓴 놈, 놈은 분명 허무의 마탑쪽 마법사였다.
그게 아니라면, 공간 마법을 사용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문제는-.
'마법사가 아니라 마족이다.'
놈이 쓰는 그 능력은 마법보다 권능에 가까웠다. 그렇다고 권능은 아니었다.
그건 마치-.
'권능에 마법을 더한 느낌이군.'
갈라하드의 눈이 가라앉았다.
허무의 마탑 출신은 분명했다. 그런데 마족이라니-. 다소 말이 되지 않았다.
마법사인 놈이 마족이 되었다는 거니까.
인류 최악의 배신자라 불리는 최초의 마법사가 세운 마탑의 마법사가 마족이 되었다-.
'좋은 느낌은 아니군.'
갈라하드는 연기를 길게 뱉었다.
상황이 상당히 어지러웠다.
다만, 지금 중요한 건 놈의 정체가 아니었다.
갈라하드에게는 놈이 보여준 공간 마법이 더 중요했다.
여우 가면은 가르친다고 배울 수 없다고 말했다. 그건 아마 진심일 것이다.
공간 마법은 원시 마법이라 부르는 무식하고 파괴적인 마법이었다.
그에 반해 현재의 마법은 놈의 말처럼 인간에 맞춰서 '개정'된 마법이었다.
마족의 것이었던 걸 인간에 맞췄으니, 위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대신 그 안정성과 활용도는 더 말할 것도 없었지만-.
현재의 마법사가 원시의 마법을 배우는 게 불가능할 수도 있었다.
다만, 이미 지옥불을 복원한 갈라하드였다.
그런 갈라하드에게 다섯 번이나 보여준 건, 개인 교습이나 다름없었다.
단서는 제법 많았다. 귓불과 어깨의 구멍, 더불어 지옥불까지-.
'친절하군.'
마법은 흔적을 남겼다. 놈의 공간 마법이 권능에 가깝다고 한들, 흔적은 남을 수밖에 없었다.
몸에 남긴 흔적은 더욱 효과적이었다. 갈라하드가 자기 몸에 직접 실험하는 걸 선호하는 이유였다.
'후-.'
갈라하드는 이를 질끈 깨물며 뚫린 구멍에 손가락을 넣었다.
끔찍한 고통이 엄습했다. 정신이 더욱 날카로워졌다. 갈라하드는 손가락에 담긴 마나를 천천히 움직이며 흔적을 살폈다.
상처는 깔끔했다. 정말 공간을 지운 것처럼-.
갈라하드는 포기하지 않고 그 상처에 집중했다. 지옥불이 사라졌을 때를 되새겼다. 둘 사이의 공통점은-.
'공기였군.'
마법에서 공기는 매개체 역할이었다. 그런 공기에 속성이 있다는 건 상상하기 힘들었다.
다만, 지금은 명백한 증거 앞이었다.
갈라하드의 사고가 계속해서 돌았다.
'어떻게?'
계속 가늠했다. 상상했다. 계산했다. 그리고-.
도출했다.
'이렇게.'
갈라하드는 손가락을 튕겼다.
조금 떨어진 공간이 살짝 뒤틀렸다.
순간에 아주 조그마한 균열에 불과했지만-.
명백한 뒤틀림이었다.
'이거였군.'
갈라하드의 입꼬리가 깊게 올라갔다.
****
'왜 연락이 없지?'
팔호는 불안함에 손톱을 뜯었다.
모인 마법사의 수가 제법 많았다.
마법사는 그 성격이 괴팍했다. 아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북부까지 온 마법사는 중앙에서 밀린 놈들이니까. 그런 놈들이 모였으니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마법사들이 데리고 온 용병의 수도 상당했다. 마법사에 용병들이 합쳐지니 수가 상당했다.
7대대에도 위협적일 수준이었다.
그런데도 마법사들이 가만히 있는 이유는 단순했다.
'다른 마법사를 못 믿으니까.'
뒤통수를 걱정하는 거였다. 애초에 마법사는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족속이었다.
별 다른 일만 없으면 조금 더 버틸 수 있을 것이다.
'그래, 무슨 일이 생기겠어.'
그때-.
"크··· 큰일 났습니다!"
수하의 다급한 보고가 올라왔다. 팔호는 묘한 불안함을 느꼈다.
"마법사들이 마경 훈련소로 움직입니다!"
"움직인다고? 아직 때가 아닐 텐데?"
"그게······."
수하의 떨떠름한 반응에 팔호는 눈을 찡그렸다.
"빨리 말해."
"코르튼 지부장이 7대대의 정문을 몰래 열어서···."
"몰래 열다니?"
"코르튼 지부장이 무식한 곡괭이 질을 더 못하겠다면서 마법사들을 데리고 7대대로 향했습니다. 오늘 출입 담당이 코르튼이라서 벌써 정문을 통과하여 마경 훈련소로 향하고 있다고-."
이어진 보고에 팔호의 얼굴이 가득 구겨졌다.
'코르튼! 이 쓰레기 같은 놈! 기어코 사고를 치는구나!'
학회장이 될 기회가 생겼는데, 곡괭이질이 싫다고 모인 마법사들을 데리고 돌진하다니-. 이 얼마나 쓰레기 같은 놈인가!
다만,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아무리 코르튼이 담당이었어도, 7대대 대장이 가만히 뒀을 리가 없는데?
모인 수가 제법이었지만, 성을 끼고 싸우면 이렇게 밀리지는 않을 것이다.
너무 속도가 빨랐다. 마치 문을 열어준 것처럼-.
'아, 갈라하드겠군.'
갈라하드가 따로 명령을 내려둔 게 분명했다.
아마 저번처럼 활짝 열라고 했겠지. 그 이유는 뻔했다.
'어차피 이 새끼들 마경에서 마법 못 쓰잖아?'
마경의 마나 농도는 북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았다.
마나는 늘 농도가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흘렀다. 마경처럼 농도가 지나치게 높으면, 마법의 마나가 오히려 흩어졌다.
마법사 중 열에 아홉은 마경에서 마법을 쓸 수 없을 게 분명했다.
마법을 쓸 수 없는 마법사만큼 쓸모없는 게 있을까.
문제는-.
'···이건 코르튼도 알고 있을 텐데?'
팔호는 진지하게 감탄했다.
*
"나를 따르라아악!"
코르튼은 목청 높여 소리쳤다. 그 뒤로 마법사들이 가득 있었다.
저리 많은 마법사가 자신의 통솔을 따르다니! 코르튼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짜릿함을 느꼈다.
마석으로 학회장을 가린다는 말에 코르튼도 처음에는 열심히 곡괭이질을 했다.
그러던 중 코르튼은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이 원한 건 공정한 기회가 아니라-. 빠르고 편한 출세라는 걸!
'노력 없이 출세하고 싶다!'
다만, 바뀐 제도는 그게 불가능했다.
학회장이 되기 위해서는 열심히 땀을 흘려야 했다. 아주 악랄한 제도였다.
그에 고통을 호소하던 코르튼에게 마침내 기회가 왔다. 잔뜩 모인 마법사, 늘어나는 갈등과 첨예하게 대립하는 욕망!
'때가 왔다!'
코르튼은 뇌물을 먹여 병사를 물렸다. 평소 그렇게 까칠하던 병사들이 가벼이 물러났다. 심지어 중대장들까지 움직였다.
코르튼의 계획이 완벽했다는 증거였다.
이내 마경 훈련소에 도착했다. 평소 경비가 가장 삼엄한 곳인데 오늘은 경비가 하나도 없었다.
"왜 이렇게 허술해. 이거 함정 아니야?"
뒤에서 자그마한 의문이 터졌다. 마법사가 데려온 용병이었다. 코르튼은 신경 쓰지 않았다.
마법사는 마경을 본 순간 의문 따위 품지 않을 테니까.
실제로 마법사들은 멈추기는커녕 더 빨리 달렸다.
마경 훈련소에 진입했다. 마법사들이 각기 다른 탄성을 터뜨렸다. 어떤 놈은 무릎 꿇고 땅에 입을 맞췄다.
코르튼은 그 제일 앞에 당당히 섰다.
"내가 그대들을 이곳으로 이끌었다! 마법사라면 느끼고 있을 것이다! 이곳의 힘을! 그 가능성을! 나를 믿고 따라와라!"
기대한 반응은 없었다. 마법사들은 다들 감격하기 바빴다.
그에 코르튼이 다시 말하려는 순간-.
"문 닫도록."
짤막한 명령이 들렸다. 성문이 거칠게 닫혔다.
어느새 그들의 주변을 발가벗은 병사들이 에워싸고 있었다. 허리에 무기만 달랑 맨 사내들이었다. 벗은 사내들이 둘러싼 건 상당한 압박이었다.
심지어 그 상대가 중대장들이었다. 그 뒤에는 대장까지 있었고-.
'7대대 중대장들이 여기 왜?'
저 중대장들은 매일 마경 훈련소에서 맨몸으로 뒹구는 변태들이었다. 그 실력은 말할 것도 없었다.
다만-.
"우리의 수가 더 많다! 마법의 위대함을 보여주겠다!"
코르튼은 용감하게 소리쳤다. 학회장다운 기개였다.
문제는-.
"어? 마나가 안 움직여-."
"이··· 이 정도로 짙은 농도라니. 마법을 쓸 수 있을 리가 없잖아!"
"함정이다! 함정이야! 젠장! 어떤 새끼가-."
마법사들이 마법을 못 쓴다는 점이었다.
'아하! 그랬었지! 맙소사!'
코르튼은 뒤늦게 깨달았다. 높은 마나 농도에서는 마법을 못 썼지!
그때-.
"훌륭한 연기였소."
중대장이 코르튼의 어깨를 두드렸다.
'···연기?'
잠시 갸웃거리던 코르튼은 이내 가슴을 쭉- 폈다.
"하하하! 멍청한 놈들! 전부 내 계책에 당했구나!"
코르튼의 목소리에는 진심이 가득했다.
91화 가르치다
'음······.'
갈라하드는 연초를 털며 침음성을 흘렸다.
마법은 품은 마나를 이용하여 대기 중의 마나를 계산해서 움직이고, 속성을 더하여 기적을 행하는 거였다.
공간 마법은 그 원리가 달랐다. 대기 중의 마나를 쓰지 않았다.
'해당 공간을 움직이는 게 아니라, 마나로 공간을 밀어 넣는 거였군.'
마나는 농도가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흘렀다. 그에 공간 마법은 고농도의 마나를 시선이 향하는 위치에 옮겼다.
갈라하드의 얼음송곳이 허무하게 막힌 이유였다. 여우 가면은 몸 주변에 고농도의 마나로 된 공간 마법을 두르고 있었다.
마법의 조준과 흡사했다. 가령 천벌을 쓸 때, 번개가 떨어지는 위치를 조준하는 것과 비슷했다.
'아니, 이게 조준의 시초겠군.'
오, 갈라하드는 작게 감탄했다. 마법의 원류라니-. 흥미로웠다. 아니, 흥미롭다는 설명으로 부족했다. 미치도록 흥미로웠다.
결국, 문제는 원점으로 회귀했다.
'고농도의 마나가 필수군.'
여우 가면이 왜 가르쳐도 쓰지 못할 거라고 장담했는지 알 것 같았다.
이건 마법사를 위한 마법이 아니었다.
마족을 위한 마법이었다.
'어이가 없군.'
마족은 권능이라는 걸 사용했기에, 마법이 필요 없었다. 아니, 애초에 마법의 시초가 마족 아닌가. 그런데 마족을 위한 마법이라니-.
"여기서 뭐 하십니까?"
길버튼의 목소리에 상념이 깨졌다.
"아니, 귓불은 또 어디 갔습니까? 이 구멍은 또 뭐고?"
"수업료일세."
"예? 일단 이거 좀 바르십쇼."
"이게 뭔가?"
"뼈사라기 마물의 똥입니다. 상처 회복에 좋습니다."
길버튼이 하얀 점성 액체를 내밀었다. 갈라하드의 눈이 가득 구겨졌다.
"저리 치우게."
"투정 부리지 마시고 바르십쇼."
"됐네만."
갈라하드는 안쪽 주머니에서 병을 하나 꺼냈다. 황녀가 주고 간 포션이었다.
"이게 뭡니까?"
"포션이라는 걸세."
"아, 이게 그겁니까? 엄청 비싸다는-."
"아주 비싸지. 금을 녹인 것보다 비쌀 걸세."
"비싼 거 바르기에는 아쉽지 않습니까? 고작 귓불이랑 구멍 뚫린 게 전부인데."
길버튼이 입맛을 쩝- 다시며 물었다. 갈라하드는 혀를 차며 손에 포션을 찍었다. 먼저 귓불에 바르고, 남은 포션을 어깨에 생긴 구멍에 뿌렸다.
포션의 회복력은 말할 것도 없었다. 교단의 존재 이유였으니까. 다만, 포션에는 한 가지 단점이 있었다.
아주 지독할 정도로 고통스럽다는 거였다. 상처에 소금을 뿌리고 불로 지지는 것과 비슷했다. 그에 포션을 기피하는 자들도 제법 있었다.
"음-."
갈라하드는 낮은 신음을 흘렸다. 몸이 작게 떨렸다. 이를 질끈 깨물며 마나를 가득 돌렸다. 마나가 그 회복을 더욱 북돋웠다.
"왜 이상한 소리를 내십니까?"
길버튼의 깐족거림을 한 귀로 흘렸다.
찰나였지만 영원 같았던 고통이 천천히 잦아들었다. 갈라하드는 길게 숨을 뱉으며 자세를 곧게 했다. 헝클어진 앞머리를 손으로 쓸어 넘기고, 옷깃을 정리했다.
상처에 새 살이 돋아 있었다.
"와- 이게 말이 됩니까?"
"비싼 이유가 있는 걸세. 거기에 나는 마법사니까 회복이 더 빠르지."
"마법사는 회복이 빠릅니까?"
"마나를 쓰니까."
"아하, 마나."
"괜히 이해한 척하지 않아도 되네. 길버튼 경."
길버튼이 입을 씰룩거렸다. 갈라하드는 몸을 확인했다.
마나를 과도하게 사용한 탓에 속이 엉망이었지만, 최악은 아니었다. 최악만 아니라면 충분했다.
'열흘이라.'
갈라하드는 슬쩍 고개를 돌렸다. 여우 가면을 열흘의 시간을 준다고 했다.
'부지런하게 움직여야겠군.'
갈라하드는 걸음을 재촉했다. 그 뒤를 길버튼이 보좌했다.
"아, 가서 그웬 좀 불러오게."
왜 갑자기 그웬을 부르는지 의문이었지만, 길버튼은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
"나는 마법사다! 폭력에 굴복하지 않는다!"
"젠장! 함정이었다니! 이 파렴치한 놈들!"
7대대 중대장들의 구령에 마법사들이 우스꽝스럽게 굴렀다.
'이런 방식으로는 안 될텐데.'
팔호는 눈을 찡그렸다.
마법사는 자아가 강했다. 단순히 육체적인 방법으로 누를 수 있는 놈들이 아니었다.
흑마법학회의 마법사가 마석장에 들어간 건, 많이 캔 놈에게 학회장을 주겠다는 공약과 마경 덕분이었다.
지금 모인 놈들은 각기 다른 곳에서 온 마법사들이었다. 놈들에게 흑마법학회 학회장 자리를 내걸어 봤자 효과가 없을 것이다.
그나마 마경이 있지만 다소 부족했다. 육체적으로 굴리는 건 단기적인 해결책이었다.
"제법 많군."
그때, 여유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꼭 통발에 걸린 물고기를 보는 듯한 건조한 감상이었다.
팔호는 황급히 까마귀 가면을 매만지며 고개를 숙였다.
갈라하드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를 지나쳤다.
"대공의 인정을 받은 자!"
중대장들이 격한 경례를 올렸다. 그에 구르던 마법사들의 시선이 갈라하드에게 향했다.
"반갑네. 특무대 대장 갈라하드일세."
갈라하드가 여유롭게 인사를 올렸다.
"갈라하드-?"
"그 갈라하드인가?"
마법사들이 삐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들 갈라하드를 아는 눈치였다.
당연한 이야기였다. 갈라하드는 현재 북부에서 가장 뜨거운 이름이었으니까. 특히 마법사들에게는 더욱 유명했다.
"그대들이 아는 갈라하드가 나일세. 자, 다들 일어나게."
갈라하드의 명령에 마법사들이 홀린 듯이 일어났다.
마법사들의 시선은 다양했다. 선망 어린 시선도, 반대로 삐딱한 시선도 있었다.
"나는 갈라하드라고 하네. 대부분 알겠지만, 아카데미 최연소 입학, 최연소 졸업자지. 한 마디로 굉장히 대단한 마법사라는 걸세."
당당한 소개에 작은 소란이 일어났다. 갈라하드는 개의치 않고 이어갔다.
"현재는 북부 대공의 사위일세. 대공의 인정을 받았고, 특무대 대장도 역임하고 있지."
여기 있는 마법사들은 북부에서 직접 구른 이들이었다. 북부에서 마법사의 취급이 얼마나 나쁜지 알았기에, 대공의 인정이 크게 와닿는 듯했다.
"마법의 위대함을 모르는 북부에서 얼마나 힘들었나. 그대들의 노고야 이미 알고 있네. 그저 마법을 추구했을 뿐인데, 얼마나 많은 핍박과 괄시를 받았나."
갈라하드는 막힘없이 말을 이어갔다. 그에 마법사들이 크게 동요했다.
'······지금이 제일 심하지 않나?'
북부의 차별이 심해도, 지금처럼 나체의 사내들에게 둘러싸여 굴러지진 않았다. 그 명령을 내린 갈라하드가 저런 말을 하는 게 의문스러웠다.
다만, 팔호는 갈라하드와 관련된 의문은 의문으로 남기는 게 좋다는 걸 알고 있었다.
"북부는 기회의 땅일세. 아니, 내가 그렇게 만들걸세."
갈라하드의 목소리에는 힘이 있었다. 그 당당한 태도와 곧은 자세, 갈라하드의 위치가 더해지니 무게가 있었다.
'맞는 말이군.'
애초에 북부는 마법 불모지였다. 그런 북부에서 대공과 이어진 마법사는 갈라하드가 유일했다.
그제야 상황을 깨달았는지 마법사들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갈라하드는 가만히 연초를 털었다. 그 모습에서 여유가 흘러넘쳤다.
정적이 잠시 이어졌다.
다만, 마법사들은 삐뚤어진 놈들이었다. 납작 엎드린 놈도 있지만, 오히려 반발하는 놈도 있었다.
"그대는 아카데미 졸업 후에 소식이 없었잖소! 정치적인 이유로 대공이 인정한 것 아니오?!"
제법 타당한 의견이었다. 그에 다른 마법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정보국에서 요원으로 있었지만, 표면적으로는 행보가 없었다. 그들의 의문은 타당했다.
'불법 마법사군.'
아카데미에서 정식으로 배우지 않은 이를 불법 마법사라 불렀다. 놈들은 아카데미 출신에 대한 반감이 상당했다. 아카데미를 그저 핏줄 좋은 놈들이라고 욕했다.
그에 마법사들이 따라서 일어났다.
"맞는 말일세. 의심은 마법사의 덕목이지. 마법사가 굳이 길게 말할 필요 없지. 자, 마법을 써보게."
갈라하드가 사내를 지목하며 말했다. 그 지목에 사내의 얼굴이 가득 구겨졌다.
"함정에 빠뜨려놓고 마법을 쓰라니! 조롱이라도 하는 건가!"
"함정이라니? 설마 마나 압축을 못 하는가?"
대놓고 혀를 차는 갈라하드에 사내가 멈칫거렸다.
"아무리 압축해도 이런 농도에서 마법을 쓸 수 있을 리가 없다!"
합리적인 말이었다. 최초의 마법사가 내린 마법진이 아니라면, 마나 농도가 짙은 마경에서 마법을 쓰는 건 불가능했다.
"그래? 그러면 이건 뭔가."
갈라하드의 대답은 간단했다. 갈라하드는 손가락을 튕겼다. 그 앞에 굵직한 창이 하나 떠올랐다. 얼음송곳이었다.
선명한 증거에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아, 멀어서 안 보이나? 자세히 보게."
갈라하드가 여유로운 목소리로 말하며 손을 휘저었다. 인사하는 듯한 가벼운 손짓에 얼음송곳이 마법사를 향해 빠르게 날아갔다.
"으악! 미친!"
순식간에 쏘아진 얼음송곳에 무게를 잡던 마법사가 질겁하며 뒤로 엎어졌다. 주변에 있던 이들도 비명을 지르며 물러났다.
얼음송곳은 쓰러진 마법사의 얼굴 바로 앞에 멈췄다. 손가락 마디 정도의 거리를 두고 멈춘 얼음송곳에 마법사가 입을 벙끗거렸다.
이곳에서 마법을 쓸 수 있다는 것부터 압도적인 실력 차이인데, 심지어 바로 앞에서 멈추는 마나 민감도라니-.
완벽한 실력 행사였다.
더 반발하는 마법사는 없었다.
대신 마법사들의 눈에 열망이 깃들었다. 마법이라면 영혼까지 파는 게 마법사였다. 갈라하드에게 뜨거운 시선이 가득 쏠렸다.
연초의 미약한 불이 갈라하드의 얼굴을 밝혔다.
"다시 한번 소개하겠네. 내가 그 갈라하드일세."
무거운 정적이 잠시 이어졌다.
갈라하드는 아무렇지 않게 연초를 털며 말을 이었다.
"아, 그리고-."
갈라하드의 입꼬리가 깊게 올라갔다.
"북부에 세워질 마탑의 주인일세."
북부의 마탑이라니-.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파격적인 내용과 달리 목소리는 무미건조했다. 마치 아무 일도 아니라는 것처럼-.
"북부에 마탑? 어떻게-."
"대공의 인정을 받았다는 게 그 뜻이었나?!"
파란이 가득 일어났다. 마탑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북부의 성향을 생각하면, 아마 유일한 마탑이 될 게 분명했다.
품질 좋은 마석이 가득한 북부의 유일한 마탑이라니-.
그 가치를 모르는 이는 여기 없었다.
"기회를 잡을 건가?"
갈라하드의 건조한 물음에 다들 조용해졌다.
그 험한 훈련에도 꺾이지 않던 마법사들의 눈이 순해졌다. 그저 말 몇 마디와 마법 한 번이 전부였다.
그건 협박이 아니었다.
거절할 수 없는 완벽한 회유였다.
무거운 정적을 깬 건-.
"자··· 잡겠다!! 나 코르튼! 우리 아카데미 동문이잖아!"
양손에 곡괭이를 든 코르튼이었다.
보는 이조차 다급해질 정도로 절실한 뜀박질에 마법사들이 헐레벌떡 움직였다.
*
"중앙의 썩은 마탑들과 달리 내 마탑은 투명하게 운영될 것이네. 가져오는 마석의 양에 맞춰서 등급이 나뉘지. 땀의 무게로 판단할 걸세. 더불어 밖에서 마법사를 데려오면······."
이야기는 순조롭게 이어졌다. 마법사들에게 이게 얼마나 좋은 기회인지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대부분 불법 마법사에다가 전부 마탑을 못 들어간 마법사들이었다. 갈라하드는 그 부분을 정확히 공략했다.
아카데미 최연소 졸업자가 직접 세운 마탑에 들어갈 수 있다니-. 심지어 북부였다. 북부에서 구른 이들에게는 절실한 기회였다.
다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
"마탑은 황제 폐하의 허락을 받아야 하지 않소?"
마탑의 설립은 황제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그게 아니라면, 마탑이 마구잡이로 올라갔을 것이다.
"아, 그건 걱정하지 말게. 허락받은 것과 다름없으니까."
묘한 대답이었지만, 그 목소리에 확신이 가득한 터라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가르침 좀 줄 수 있소?"
그때, 마법사 하나가 불쑥 목소리를 높였다. 그에 주변의 마법사들이 대놓고 혀를 찼다.
합당한 반응이었다. 마법사들은 대부분 그 지식을 보물처럼 아끼고 숨겼다. 불법 마법사들이 아카데미 출신에 반감을 가지는 이유였다.
"마탑이라고 하지 않았소! 가르침을 청할 수도 있지!"
그 뻔뻔한 말에 다들 혀를 찼지만, 정작 갈라하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 재밌겠군. 백 명이 있으면 백 가지 맛의 마법이 있는 법이니까."
갈라하드가 가벼이 긍정하자, 마법사들 사이에서 다시금 파란이 일어났다.
그 갈라하드가 직접 가르침을 주겠다니-. 이건 값으로 매길 수 없었다.
"자, 그러면 밖으로 가지. 문 좀 열어주겠나."
"예, 대공의 인정을 받은 자!"
갈라하드가 병사에게 명령을 내렸다. 그에 병사들이 요란하게 문을 열었다.
갈라하드는 길쭉한 다리로 성문을 나섰다. 마법사들이 허겁지겁 뒤를 따랐다. 그 눈이 가득 반짝였다.
적당한 공터에 도착한 갈라하드가 돌아섰다.
사정을 모르는 마법사들이 먼저 가르침을 받겠다며 거칠게 뒤엉켰다. 팔호는 슬쩍 뒤로 빠졌다.
"내가 먼저 요청했다! 이놈들아!"
"먼저 선 놈이 임자지!"
늘 배움에 목마른 게 마법사였다. 심지어 여기 놈들은 중앙에서 쫓겨난 이들이었다. 제대로 된 가르침을 받아본 적 없는 놈들이었기에 더욱 절실했다.
그 갈라하드가 가르침을 주겠다니, 난리가 벌어지는 게 당연했다.
"다들 진정하게. 전부 봐줄 테니."
전부 봐주겠다니-. 마법사들이 다시금 감동했다. 팔호는 한 걸음 더 물러섰다.
가르침을 청했던 이가 먼저 나섰다. 대머리 마법사였다.
"벨제를 스승으로 둔 하무르요."
"갈라하드일세. 가장 자신 있는 마법을 펼치게나."
"그대를 상대로 말이오? 내 특기는 불 마법이라 위력이 상당하오."
"아, 괜찮네. 최선을 다하게."
갈라하드가 가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하무르라는 사내의 미간이 구겨졌다. 자존심이 상한 듯했다.
확실히 그럴만했다. 마법을 가르칠 때는 표적을 세워두고 그 결과를 이야기하는 게 보통이었으니까.
하무르가 지팡이를 고쳐 잡았다. 그 펑퍼짐한 로브가 펄럭였다.
"지옥에서 올라온 불, 모든 걸 태우는 불-."
"잠깐 설마 그거 주문인가?"
"······맞소만?"
"주문은 연상하기 좋은 단어로 하는 게 좋네. 어떤 마법을 사용할 생각이었나?"
"일렁이는 불이오."
"고작 4 위계 마법에 그런 거창한 주문을 읊나?"
신랄한 지적에 하무르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주문은 자유 아니오."
하무르는 입술을 꾹 씹으며 대답했다. 자존심이 상당히 상한 눈치였다.
"자네가 방금 한 건 자유가 아니라 방만일세. 그래, 말해도 모르겠군. 일단 해보게."
얼굴이 벌겋게 된 하무르가 입을 뻐끔거렸다. 이내 다시 주문을 읊었다.
"지옥에서 올라온 불, 모든 걸 태우는 불-."
그 목소리가 전보다 작았다.
"일렁이는 불!"
하무르의 손에 거대한 불이 타올랐다. 퍼지는 열기가 상당했다. 팔호가 보기에도 괜찮은 마법이었다.
지켜보던 마법사들이 작게 감탄했다. 그에 하무르의 어깨가 살짝 올라갔다. 정작 갈라하드는 혀를 찼다.
"따뜻하겠군. 안쪽 주머니에 넣기 좋겠어."
갈라하드의 괴상한 평가에 하무르가 손을 휘둘렀다.
거대한 불이 바람을 타고 빠르게 날아갔다. 꼭 산불이 일어난 것처럼 화려한 마법이었다. 몸집을 불린 불이 당장이라도 갈라하드를 잡아먹을 것 같았다.
"아니, 내가 잘못 생각했군. 이건 핫팩으로도 못 쓰겠네."
갈라하드가 혀를 차며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갈라하드에게 향하던 불이 우뚝 멈췄다. 갈라하드의 뒤쪽에서 분 바람이 불을 부드럽게 밀어냈다.
잠시 멈칫거린 불이 이내 하무르에게 되돌아갔다.
"이··· 이게 무슨······!"
하무르가 깜짝 놀라며 뒤로 엎어졌다. 불이 그 위를 아슬아슬하게 지나쳤다. 화끈한 열기가 주변을 달궜다.
"아무리 북부가 추워도, 이런 따뜻한 마법을 쓰나. 추위를 많이 타나 보군."
갈라하드의 신랄한 말에 하무르의 얼굴이 푸르죽죽해졌다. 하무르가 이를 바드득 갈며 지팡이를 잡았다.
"지옥에서-."
"지옥 참 좋아하는군."
"······지옥에서 뭉친 돌."
하무르의 얼굴이 점점 붉어졌다.
"폭발화구-."
폭발화구! 방호벽으로 막으면 폭발로 2차 피해를 주기에, 상당히 까다로운 마법이었다.
마법사들이 작게 감탄했다.
다만, 갈라하드의 반응은 신랄했다.
"이 거리에서 폭발화구라니. 공놀이라도 하자는 건가?"
갈라하드가 혀를 차며 손가락을 튕겼다. 얼음 화살이 빠르게 쏘아졌다.
얼음 화살은 폭발화구보다 낮은 위계의 마법이었다. 그런 얼음 화살이 폭발화구를 정확히 찌르니 이야기가 달라졌다.
폭발화구가 하무르 앞에서 터졌다. 정통으로 맞은 하무르가 뒤로 데굴데굴 굴렀다.
"겉멋 든 주문을 외우니까, 응집력이 형편없지 않나. 그건 터지는 쓰레기일세."
아무리 폭발화구가 느리다고 한들, 날아오는 마법을 마법으로 맞추다니-. 신기에 가까운 묘기였다.
정작 그를 행한 갈라하드는 불만스러운 눈이었다.
"아주 나쁘고 괴상한 습관이 들였지만, 가르치는 내가 유능하니 괜찮네. 자네는 3급일세. 마석 백 개와 신규 회원···. 아니, 신규 마법사 셋을 데리고 오면 쓸만해 질 걸세."
갈라하드가 괴상한 말을 했다. 그에 까맣게 때가 탄 하무르의 고개가 깊게 꺾였다.
"자, 다음 나오게."
나서는 이가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방금의 그 신랄한 광경을 봤는데, 어찌 나서겠나.
다만, 갈라하드는 동의를 구하지 않았다.
"이런 부끄럼이 많군. 그러면 왼쪽부터 나오게."
"생각해보니 저는 괜찮······."
"오, 방어 마법을 보여줄 생각인가?"
"아니-. 괜찮다고···. 으악!"
"자, 가벼운 얼음송곳일세."
"얼음송곳이 가볍다니-. 끄아아악!"
"음, 자네도 3급일세. 열심히 활동해야겠군. 자, 다음은-."
배움을 위해서 목숨까지 거는 게 마법사였다.
그런 마법사들이-.
갈라하드의 시선을 필사적으로 피했다.
92화 마나통
'이게 무슨······.'
길버튼은 앞에 펼쳐진 모습에 입을 쩍 벌렸다.
갈라하드가 뛰어난 마법사라는 건 알고 있었다.
다만, 그것도 정도가 있는 법이었다.
"실력이 다들 변변찮고 소박하군. 간에 기별도 안 가겠어."
갈라하드가 대놓고 혀를 찼다. 그 목소리에 옅은 짜증이 서려 있었다.
그에 마법사들이 움찔거렸다.
갈라하드가 눈을 찡그리며 손짓했다.
"전부 나오게."
아무리 갈라하드라도 전부 나오라니-. 마법사들의 얼굴이 가득 구겨졌다.
"아직도 주제를 모르나?"
갈라하드의 도발에 마법사들이 분개하며 앞으로 나섰다.
갈라하드가 수십의 마법사를 혼자 마주하는 모습은 꽤 멋있었다.
마법사들이 일제히 마법을 주문했다. 수많은 마법이 하늘을 가득 채웠다. 상당히 위협적인 모습이었다.
정작 그 대상인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렸다. 길버튼이 덜 익은 고기를 내밀었을 때, 짓는 표정이었다.
갈라하드가 쏟아지는 마법을 하나씩 부수며 평가했는데, 그 평가가 상당히 신랄했다.
"자네, 서릿발 손길을 쓸 거면 차라리 눈을 뭉쳐서 던지게. 그쪽이 더 빠르고 정확할 것 같군. 마나도 안 아깝고."
"음, 불타는 손이 이렇게 따뜻할 수가 있나. 자네는 마사지 쪽으로 가면 대성하겠군."
"튕기는 번개? 오, 자네도 저 친구와 같이 마사지 쪽으로 가게나. 귀족들이 아주 좋아할 걸세."
갈라하드는 마법을 하나씩 부수면서 평가했다. 길버튼이 듣기에도 상당히 적나라한 평가였으니, 마법사들의 반응은 말할 것도 없다.
분개한 마법사들이 더욱 몰아쳤지만, 갈라하드는 자리에서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았다.
'압도적이군.'
갈라하드는 다른 마법사들과 궤가 달랐다.
"대공의 인정을 받은 자!는 정말 대단하군!"
"그냥 마법사가 아니다! 대공의 인정을 받은 마법사다!"
주변에서 투박한 감탄이 연신 터졌다. 그에 길버튼은 묘한 뿌듯함을 느꼈다.
부풀리기 좋아하는 북부의 사내들 앞에서 삼십 정도 되는 마법사와 전투하여 이겼으니, 어떤 소문이 돌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이내 서른에 가까운 마법사들이 무릎을 꿇었다. 그들의 얼굴에 서린 건 깊은 절망이었다.
정작 갈라하드는 묘하게 개운한 얼굴이었다. 조금 피곤한 기색이 전부였다.
"음, 정말 형편없군."
갈라하드의 입에서 짜증 섞인 평가가 나왔다.
"자네들은 마법이 뭐라고 생각하나?"
갈라하드가 연초를 입에 물며 물었다. 대답하는 마법사는 없었다. 그저 입만 벙끗거렸다.
"기적을 만드는 힘일세. 허공에서 불을 지피거나 번개를 떨어뜨리는 기적이지."
그 목소리가 참으로 덤덤했다. 마법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왜 자네들의 마법은 형편없을까. 내 마법은 이렇게 대단한데 말이야."
참으로 거만한 말이지만, 누구도 부정하지 않았다. 이미 압도적인 격차를 본 뒤였기에-.
"자네들의 마법에는 목적이 없네. 발정기의 짐승처럼 그저 크고 화려하게 부풀리는 게 전부지."
갈라하드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 손가락 사이로 스파크가 연신 튕겼다.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자유롭게 움직인 스파크가 크기를 부풀렸고-.
이내 번개로 된 거대한 꽃이 되었다. 얼마나 정교한지 마법을 모르는 길버튼도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번개 꽃이 크기를 더욱 부풀리더니 이내 앞을 가득 채웠다. 이제껏 마법사들이 퍼붓던 마법을 다 합친 것과도 비교되지 않는 화려함이었다.
마법사들이 소리 내어 감탄했다.
"만약 화려하고 큰 마법 대결이었다면, 자네들의 방식이 맞았겠지. 물론, 그래도 입상 못 했겠지만."
신랄한 말이었지만, 마법사들은 입을 꾹 다물었다.
"마법이 커지면 응집력이 필연적으로 낮아질 수밖에 없네. 가령 내가 표적이면, 일렁이는 불보다는 불타는 화살이 더 위협적이지. 특히 목과 심장."
갈라하드가 손가락을 튕겼다. 쏘아진 얼음 화살이 거대한 번개 꽃을 흐트러뜨렸다. 상당히 장관이었다.
갈라하드의 말은 기사 수업에서 나올 법한 이야기였다. 큰 행동을 줄이고 급소를 노려라-. 당연한 이야기였다.
그때, 마법사 하나가 비틀거리면서 일어났다. 가장 먼저 덤빈 놈이었다.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범위가 낮은 마법은 그 특성상 명중하는 게 어렵습니다. 더불어 상대가 피하기도 쉽습니다."
마법사가 이를 악물며 말했다. 다른 마법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네, 어렵지. 그래서?"
갈라하드의 반문에 마법사의 표정이 굳었다.
"명중이 어려우면, 될 때까지 쏘게. 상대가 피하기 쉬우면, 빠르게 던지게. 간단하지 않나?"
갈라하드의 대답에 길버튼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한 말 아닌가? 어려우면 될 때까지 해야지. 기본적인 이야기였다.
마법사들의 반응이 상당히 격렬했다. 여기저기서 침음성이 터졌다. 질문했던 마법사의 얼굴은 잔뜩 구겨졌다. 마법사가 악에 받친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거야 당신이 천재니까 가능한 거 아닙니까!"
순간 정적이 흘렀다. 마법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네, 나는 천재일세."
갈라하드가 순순히 인정했다. 오히려 질문한 마법사가 무색할 정도로 가벼운 인정이었다.
아무리 천재라도 자기 입으로 저리 뻔뻔하게 말하다니-. 길버튼은 작게 혀를 내둘렀다.
"천재인 나도 마법을 배우기 시작한 뒤로 아카데미 졸업할 때까지 매일 마나 탈진을 겪었네."
마법사 사이에서 큰 동요가 일어났다. '마나 탈진'이라는 게 상당히 충격적인 단어인 듯했다.
"거짓··· 거짓이다! 어찌 그 끔찍한 걸···."
"다들 마법 쓰다가 한 번쯤 마나 탈진을 겪지 않나?"
갈라하드의 되물음에 마법사들이 입을 벙끗거렸다. 마법사들의 얼굴에 경악이 깃들었다. 아까와 달리 미친놈을 보는 듯한 경악이었다.
"천재인 나도 이렇게 열심인데, 둔재인 그대들은 무슨 자신감으로 뻗대나?"
적나라한 지적에 마법사들이 조용해졌다. 마법사들의 얼굴에 다시 패배가 떠올랐다.
"그래도 걱정하지 말게. 가르치는 내가 뛰어나니까. 달에 한 번 급수에 맞는 수업을 열 걸세. 급수가 높으면 더 알차지."
갈라하드가 시원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에 마법사들이 거칠게 끄덕였다. 열기가 가득 일어났다.
"정말이냐! 아카데미의 강의 요청도 거절했던 갈라하드 네가?!"
그때, 누군가 소리쳤다. 그 목소리가 카랑카랑하여 귀에 쏙쏙 들렸다.
"나는 거짓을 말하지 않네."
"젠장! 아카데미에서도 줄을 섰던 갈라하드의 강의라니!"
그 분개에 마법사들의 분위기가 묘해졌다. 그들의 눈에 열망이 가득 깃들었다.
"2급으로 배정된 이들은 마석 오십 개와 신규 마법사 하나고, 3급은 마석 백 개와 신규 마법사 세 명일세."
"고작 백 개면 된다는 거냐! 그 값진 가르침을 고작 마석으로?! 젠장! 당장 들어가겠다!"
엄청난 바람잡이였다. 바람잡이까지 심어두다니-. 길버튼은 갈라하드의 치밀함에 혀를 내둘렀다.
"자, 마지막으로 말하겠네."
갈라하드가 옷깃을 정리하며 자세를 곧게 했다.
"나는 아카데미 최연소 입학, 졸업자이며, 북부 대공의 사위이고, 대공의 인정을 받은 자일세. 또한 북부의 유일한 마탑의 마탑주지. 그 가치는 굳이 설명하지 않겠네."
갈라하드가 앞머리를 뒤로 넘겼다. 시원한 미소 위로 강한 자신감이 떠올랐다.
"다들 열심히 캐게."
갈라하드의 목소리는 건조했다. 마법사들이 몸을 작게 떨었다.
갈라하드는 가벼이 뒤돌아섰다.
길버튼은 괜히 콧구멍에 힘을 줬다.
"길버튼 경, 왜 그런 표정을 짓고 있나?"
"······제가 무슨 표정을 지었다고 그럽니까."
"굉장히 흉측한 표정이었네."
길버튼은 거칠게 기침하며, 얼굴에 힘을 줬다.
[나는 기사 길버튼이다. 특무대의 부대장이지. 또 -.]
수십의 기사를 꿇린 뒤에, 저 대사를 하는 자신을 상상했다고 절대 말할 수 없었다.
*
"그웬, 잘 봤나? 오, 정상 작동 중이군."
갈라하드는 그웬을 확인했다. 그웬의 뒤에 마법이 가득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 눈이 몽롱한 걸 보니, 마법에 푹 빠진 듯했다.
마법사들을 가르치겠다고 한 이유 중 그웬의 비중이 컸다. 쓸모없는 마법이라도 일단 많이 보여주면, 그웬에게는 효과적이었으니까.
"그웬 님의 상태가 이상합니다."
"그웬은 원래 이상하니 정상일세."
갈라하드는 그웬의 얼굴을 살폈다. 그웬의 볼이 파들파들 떨렸다. 그 주변으로 마나가 연신 일렁였다.
그웬은 갈라하드가 경험한 적 없는 유형의 마법사였다. 감정에 영향을 받는 마법이라니-. 이걸 마법사라고 불러도 될까.
마법은 본래 계산과 지성의 영역이었다. 감정은 오히려 악영향을 주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그웬은 감정을 빌미로 마법을 사용했다. 심지어 권능까지 썼다.
'감정으로 마법을 쓰는 마법사라니.'
갈라하드의 마법 개념과 정반대의 인물이었다. 그렇기에 더 흥미로웠다.
지금까지의 개념을 뒤엎는 이단아 같은 존재였다. 무시하기에는 그웬이 보여준 것들이 놀라웠다.
마법뿐만이 아니었다. 그웬은 한 번 본 것으로 마족의 권능도 사용했다. 오히려 권능에 특화된 느낌이었다.
멀리 갈 것도 없었다. 당장 그웬의 뒤에 떠오른 마법들이 증거였다.
갈라하드가 대마법사의 후보로 여기는 황혼의 마탑주도 이런 재능은 없었다.
지금 궁금한 건 하나였다.
'지옥불도 쓸 수 있나?'
원시 마법이라 불리는 지옥불이나 공간 마법도 쓸 수 있는지가 궁금했다.
그를 위해서 그웬을 부른 것이다. 수많은 마법을 보고 머리가 말랑해지게 만들기 위해서-.
'쓸 수 있겠지.'
지옥불은 갈라하드가 본 그 어떤 마법보다 아름다웠으니까. 그웬이 푹 빠져서 사용할 가능성이 컸다.
'조금 뻐근하군.'
갈라하드는 혀를 차며 수통을 홀짝였다. 마족의 피가 퍼지며 마나가 다시금 돌았다.
천천히 주문을 준비했다. 지옥불은 적당한 크기가 불가능했다. 온 집중력을 가져다 쏟아야 했다. 마나의 압축에 심장이 뻐근해졌다.
두근, 두근, 두근. 고통의 알이 연신 뛰기 시작했다. 마족의 피에서 추출한 고농도의 마나가 돌았다.
공간 마법을 봤기 때문일까. 오히려 지옥불을 펼치는 게 전보다 까다로웠다.
이내-.
"지옥불."
갈라하드의 손가락 위에 자그마한 불이 떠올랐다. 주변의 공기조차 녹이는 존재감을 지닌 불이었다.
무리한 마나 운용에 입가로 신음이 절로 터졌다. 갈라하드는 그를 애써 삼키며 지옥불을 그웬의 앞으로 밀었다.
그웬의 눈이 또렷해졌다. 그웬의 입이 쩍 벌어졌다. 그리고-.
"우와."
감탄했다. 아주 크게-.
이제까지와 다른 반응이었다. 그에 갈라하드의 눈이 구겨졌다.
"우와가 아닐세. 따라 해보게."
"이걸요?"
"그래, 지옥불일세."
"어떻게요?"
그웬의 목소리에는 진심이 가득했다. 가령 사람에게 날아보라고 시켰을 때 나올 법한 반응이었다.
"자네, 멋진 마법을 보면 따라 하지 않나. 이것도 따라 하게."
"예에? 이거를요?! 절대 못 해요! 이걸 어떻게 해요? 아니, 어떻게 하셨어요?!"
그웬의 반응이 격렬했다. 그에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렸다. 원시 마법이라 그런가?
"가까이에서 보게. 자네는 할 수 있네."
"으음."
잠시 들여다본 그웬이 입을 쩍 벌렸다.
"정말 대단하시네요! 이런 마법을 어떻게 쓸 수 있는 거예요? 와아-."
"감탄하지 말고 해보라니까."
"예? 절대 안 될 거 같은데요! 그런 느낌!"
그웬의 격렬한 거부에 갈라하드는 손을 털었다. 지옥불이 녹아서 흩어졌다.
'권능은 되면서 원시 마법은 안 되는군.'
이건 예상치 못했다. 의문이 더욱 커졌다.
"왜 못 하지?"
"그걸 어떻게 해요?"
그웬은 무슨 괴상한 소리를 하냐는 듯 되물었다.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렸다.
"그리고 얘가 그만 좀 혹사하라는데요!"
그웬이 갈라하드의 가슴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확실히 몸 상태가 안 좋기는 했다.
여우 가면에 이어서 바로 마법사들을 상대하고, 또 지옥불을 펼친 것이니까.
다만-.
"고작 이 정도로 혹사라니. 순하게 컸군."
갈라하드에게는 고작이었다.
'권능도 마법도 따라 하는 그웬이 정작 원시 마법은 못 한다-.'
이건 의미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갈라하드는 가만히 그웬을 응시했다.
"그······ 좀 드릴까요?"
"뭘 말인가?"
"이거요!"
그웬이 자신을 가리켰다. 아니, 정확히는 마나통을 가리켰다.
"준다니?"
전에 마석 대신 그웬을 썼지만, 마나를 준다는 건 다른 의미였다.
"줄 수 있을 것 같은데요! 풀악셀 그거로!"
"······프록셀말인가?"
"맞아요! 쁘락치!"
"음, 프록-. 아닐세, 해보게."
그웬이 냅다 머리를 갈라하드의 가슴에 박았다. 얼마나 세게 박았는지 몸이 작게 흔들릴 정도였다. 그웬의 이마를 타고 뭔가 넘어왔다.
그건-.
'······마나?'
선명한 마나였다. 농도는 평범했지만, 문제는 그 양이었다. 갈라하드조차 버거울 정도로 마나가 쏟아졌다.
갈라하드는 마나를 천천히 돌렸다. 탈력감이 빠르게 사라졌다. 기운이 다시 차올랐다.
이내-.
"충분하네."
방금까지 있던 탈력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갈라하드의 마나가 가득 찼다.
"어때요?"
그웬이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자네, 쓸모가 있군."
"······네에?!"
그때, 데미안이 옆으로 다가왔다.
데미안의 손에 검이 아닌 지팡이가 들려 있었다. 데미안의 표정이 묘하게 진지했다.
"···데미안, 지팡이를 든다고 마법사가 되는 게 아닐세."
데미안이 다급하게 뒤를 돌아봤다. 거기에는 이상한 상상이라도 하는지 음흉한 웃음을 흘리는 길버튼이 있었다.
데미안이 다급하게 로브를 뒤집어썼다.
"로브를 써도 안 되네."
데미안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
6대대의 마르한은 길게 하품했다. 야밤의 경비는 병사들이 가장 기피하는 임무였다.
살이 에릴 정도로 추운 것도 문제였지만, 그것보다 더 큰 문제는 아주 따분하다는 것이었다.
마물이 가끔 출몰하지만, 경비소까지 들이닥치는 일은 아주 드물었다. 특히 6대대는 더 적었다.
원래는 술을 홀짝이거나 간단한 주사위 놀이를 하며 시간을 보내는데, 최근 헬오브에서 일어난 일 때문에 빡빡해졌다.
"대장, 나쁘지 않았는데 말이야."
동료 칼의 중얼거림에 마르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6대대 대장은 별다른 간섭이 없었다. 병사들 입장에서는 나쁘지 않았다.
"대공 전하한테 머리가 뽑혔다던데, 끔찍하군."
마르한은 혀를 내둘렀다.
대장은 분명한 강자였다. 그런 대장의 머리를 뽑다니-.
"대공 전하는 정말 대단하신 분이군."
"나도 손 힘 좀 늘려야겠어. 테드, 머리 좀 뽑아버리게."
"미끄러지지 않게 장갑을 끼게."
"그나저나 고위 마족이라니. 내 손에 걸리면 끝장인데."
칼이 굵직한 검을 빙글 돌리며 말했다. 그러다가 금세 재미가 떨어졌는지, 여자 이야기나 떠들었다. 다음은 부대 이야기였다.
"다음 대장은 누가 오려나."
대공이 부대장을 대장으로 올렸지만, 그건 임시였다. 부대장은 실력자였지만, 대장은 아예 격이 다른 존재였다. 후에 대공이 대장을 정식으로 임명할 게 분명했다.
"갈라하드가 오면 좋겠군."
"마법사잖아? 나보고 마법사 아래로 들어가라고?"
"대공 전하의 인정을 받았는데, 마법사인 게 무슨 상관이야."
"아무리 인정을 받았어도 마법사인 건 변치 않는다."
"그래서 네가 뭘 할 수 있지?"
금세 다툼이 번졌다. 갈라하드의 이름에 관한 흔한 반응이었다. 마르한은 '대공 전하의 판단에 따른다'로 결론이 날 것을 알기에, 슬쩍 시선을 돌렸다.
북부의 밤은 지독할 정도로 어두웠다. 횃불이 아니었다면 한치 앞도 안 보일 정도였다.
소복하게 쌓인 눈과 깡마른 나무들이 전부였다. 마르한은 길게 하품했다. 참으로 따분한 광경이었다.
그때, 시선에 뭔가 잡혔다. 나무 사이로 난 길에 뭔가 있었다. 자그마한 걸 보니 마물은 아니었다. 그에 마르한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건-.
'······꼬마?'
망토를 두른 꼬마였다. 머리에 보석이 안 박힌 왕관을 쓴 아주 우스꽝스러운 모습의 꼬마-.
꼬마가 가득 쏟아지는 눈 사이를 맨발로 걸었다. 그런 꼬마의 뒤로 줄이 길게 있었다. 전부 표정이 없었다. 그들은 마치 한 몸처럼 걸었다. 발자국이 하나밖에 없었다.
'고위 마족-.'
마르한은 다급하게 종을 치려고 했다.
땡-. 마르한의 몸이 그대로 굳었다. 눈동자조차 움직이지 않았다.
사박사박. 눈을 밟는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수없이 많은 발소리가 한 번에 들렸다.
"높다."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들렸다. 마르한은 어느새 조아리고 있었다.
마치 주인을 마주한 것처럼-.
안쪽이 시끄러워졌다. 성벽 위로 병사들이 나타났다.
"누구냐! 고위 마족-."
그때, 꼬마의 입이 열렸다.
"높다."
여전히 무미건조한 목소리였다.
쿵! 쿵! 묵직한 소리가 연달아 들렸다. 성벽 위의 병사들이 바닥에 떨어졌다. 목이 꺾인 병사들의 얼굴에는 공포도, 고통도 없었다.
성문이 부드럽게 열렸다.
"감히 내 것을 가져가다니-."
지배자의 목소리에 분노가 가득했다.
93화 아빠
'꺾였군.'
팔호는 삼십이 넘는 마법사들을 보며 침음성을 흘렸다.
원래 마법사들은 자존심이 강했다. 그런 마법사들이 지금은 조용했다. 얼굴이 가득 구겨져 있었다.
다 같이 덤볐는데도 갈라하드의 옷자락 하나 건드리지 못했으니, 충격이 클 수밖에 없었다.
완벽한 패배를 안겨주고 마탑을 권유한다-. 소름끼칠 정도로 치밀한 계획이었다.
북부로 밀린 마법사들은 갈라하드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 기세가 완전히 꺾인 게 문제였다. 갈라하드는 그들을 마석 캐는 광부 정도로 생각하는 듯했기에, 큰 상관은 없었지만-.
'조금 아쉽군.'
갈라하드는 거짓말하지 않는 사내였다. 마탑을 세운다고 했으니 마탑을 세울 것이다.
저들은 그 마탑에 들어갈 마법사들이었다. 그런 마법사들의 의지가 꺾인 건 좋지 않았다. 효율의 문제였다.
마탑을 키우기 위해서는 그 의지가 필요했다.
그때-.
"이 썩어 빠진 아카데미 교수 놈들! 나한테 쓸모없는 마법만 가르쳤구나!"
코르튼이 크게 소리쳤다. 뜬금없는 남 탓에 팔호는 눈을 찡그렸다. 자기가 진 걸 왜 아카데미 교수를 탓하지?
"쓸모없는 마법만 가르친 교수 놈들 잘못이다! 그저 마도구 만드는 일꾼을 원한 거겠지! 교수들이 갈라하드를 유독 아낄 때부터 이상했지! 갈라하드에게만 진짜 마법을 알려준 게 분명하다! 놈들이 이 패배의 원인이다!"
코르튼은 핏대까지 세우며 열심히 남 탓을 했다. 졸업한 지 꽤 된 놈이 교수를 탓하다니-. 팔호는 작게 경악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교수도 내 눈을 가릴 수 없다! 내 눈은 새로 뜨였다. 껍데기는 가라! 더는 나를 막을 수 없다!"
코르튼은 정말 자신의 패배가 아카데미 교수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 기득권에 대한 절절한 분노에는 울림이 있었다.
남 탓은 달콤했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는 더욱 달콤했다-.
"고작 마석에 가르침을 넘겨준다니-. 오만하구나. 갈라하드여! 이날을 후회하게 만들어 주마!"
코르튼이 곡괭이를 번쩍 들며 소리쳤다. 그 절절한 남 탓에 마법사들이 하나둘 곡괭이를 잡았다.
"껍데기는 가라! 으하하하!"
팔호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코르튼을 학회장으로 올려야겠다.'
혹 여명에서 나오면, 여명이 코르튼을 데려가도록-.
****
'화가 단단히 났네.'
여우 가면은 슬쩍 주변을 둘러보며 혀를 찼다.
6대대는 뾰족한 건물로 이루어진 곳이었다. 사방에 병사들이 엎드려 있었다. 마치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서 움직이지 않았다.
'지배자라-.'
지배자의 권능은 그보다 낮은 이에게 절대적인 영향력을 발휘했다. 대장이 없는 6대대는 막아낼 수가 없었다. 그 앞에서 수는 무의미했다.
여우 가면은 눈을 구겼다. 성 안쪽으로 움직였다.
검에 찔려 죽은 시체가 몇 개 있었다. 기사였다. 오러를 일으켜 저항한 듯했다. 결과는 형편없었다. 그 주변에 반으로 잘린 병사들이 가득했다.
'동료를 밀어 넣었구나.'
참으로 지배자다운 추잡한 방식이었다. 여우 가면은 작게 혀를 찼다.
결국, 6대대가 통으로 넘어갔다.
'이걸 어떻게 한다-.'
지배자의 행보에 여우 가면의 머리가 지끈거렸다.
지배자는 쉽게 버릴 수 없는 패였다. 지배자의 권능은 때에 따라서 상당히 유용했다. 지금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다수를 상대할 때는 지배자만한 것이 없었다.
상황을 해결할 방법은 갈라하드를 지배자에게 주는 것이었다.
다만-.
'업화를 쓰는 놈이라니.'
정확히는 업화가 아니었다. 진짜 업화였다면, 놈이 그걸 꺼낸 순간 공간이 녹아 흘렀을 것이다.
그건 업화가 아니었다. 업화를 흉내 낸 마법이었다. 진짜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무시할 수준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더 문제였다.
놈은 마법사였지만, 마족은 아니었다. 그런 놈이 업화 흉내를 냈다-. 그건 결코 가볍지 않았다.
최초의 마법사가 말했던 실패작이 부정되는 것이니까.
'도대체 뭐 하는 놈이지.'
여우 가면은 가장 뾰족한 탑을 보며 눈을 찡그렸다.
지배자는 높은 곳을 좋아했으니까. 예상대로 지배자는 가장 높은 탑에 있었다.
지배자는 사람으로 뭉쳐진 의자에 앉아있었다. 그런 지배자의 뒤로 마족들이 줄을 맞춰 있었다. 지배자가 자랑하는 컬렉션이었다.
왕국을 차린 듯한 모습이지만, 그 얼굴에 화가 가득했다.
"아직도 못 잡았나?"
지배자가 짜증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그에 여우 가면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공이랑 같이 있어서요."
"대공은 어차피 묶인 놈 아니더냐."
"가끔 목줄을 푸니까요."
"나는 놈이 두렵지 않다."
같잖은 허세였다. 지배자의 권능은 그 아래의 것들에게만 통했다. 자기보다 높은 급을 만나면, 아무런 힘도 못 쓰는 게 지배자였다.
대공은 분명히 지배자보다 위에 있었다. 아니, 대공은 위치가 없는 괴물이었다. 여우 가면이 괜히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게 아니었다.
다만, 지배자를 자극할 필요는 없었다. 꼬마의 형태를 한 지배자는 치기 어렸다. 괜히 찔렀다가 문제를 키울 수도 있었다. 최대한 달래는 편이 좋았다.
"그래도 꼬드겼으니 곧 나올 거예요. 조금만 더 참아주시죠. 금방 데려올 테니까."
"참으라니-! 하!"
지배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놈이 가져간 지휘봉이 뭔지 아나?"
지배자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그에 여우 가면은 눈을 찡그렸다.
"알고 있습니다. 열쇠 아닙니까."
"그래, 그런데 나보고 참으라고?"
지배자의 기세가 여우 가면을 압박했다. 그에 여우 가면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여우 가면의 시선이 지배자에게 향했다. 지배자의 움직임이 뚝- 하고 멈췄다.
"그래, 열쇠를 잃어버렸으니 화가 나는 건 이해합니다."
여우 가면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지배자의 어깨에 일그러짐이 일어났다. 지배자의 눈이 작게 구겨졌다.
"근데 제가 잃어버렸습니까? 그쪽이 당한 거지. 멍청하게."
지배자가 얼굴을 찡그렸다. 그 뒤에 있던 마족들이 한 걸음 전진했다. 쿵-. 묵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여우 가면은 고개를 저었다.
"적당히 합시다. 적당히. 누가 안 가져온답니까?"
"반드시 데려와야 할 것이다."
지배자의 무거운 목소리에 여우 가면은 고개를 끄덕였다.
"같이 있던 놈들도 전부-. 내 컬렉션에 넣을 것이다."
지배자의 고개가 돌아갔다. 마족과 마물들이 가득 서 있었다. 박제된 것처럼 무표정이었다. 악취미군. 아니, 영특한 건가. 여우 가면은 한숨을 내쉬었다.
"예, 아드리안나는 안 됩니다. 이유는 아시죠?"
지배자가 끄덕였다.
"제물이니까."
"예, 제물이니까요."
"짐은 기다리는 자가 아니라, 군림하는 자다."
그를 끝으로 지배자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 아래에 있던 사람 하나가 제 혀를 길게 뽑았다. 퍽, 경쾌한 소리와 함께 사람이 터졌다. 괜한 분풀이였다.
"내 지휘봉을 가져가다니-. 그래, 보는 눈은 좋구나."
지배자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기념품일세.]
여우 가면은 웃음을 꾹- 참았다.
역시 재밌다니까.
흥미가 자꾸 동했다.
여우 가면의 고질병이었다.
****
'음.'
갈라하드는 금색 봉을 내밀며 눈을 찡그렸다. 금색 봉 끝을 보며 거리를 가늠했다.
'이 정도인가.'
금색 봉의 끝을 잡고 길게 내밀었을 때가 공간 마법의 사정거리였다.
공간 마법을 계속해서 연습하는 중이었는데, 그 위력과 거리가 늘어나지 않았다.
'마나 농도가 짙을수록 사정 거리가 길어진다.'
몇 번의 연습을 통해 도출한 결론이었다. 지금 갈라하드는 길게 뻗은 금색 봉의 길이 정도가 한계였다.
'여우 가면을 쓴 놈의 마나는 얼마나 짙은 거지?'
아니, 단순히 농도의 문제가 아니었다. 공간을 구기는 게 전부인 갈라하드와 달리 여우 가면은 그를 통해 자유자재로 움직였다.
그게 가능한 이유는-.
'마족은 피에 농도 짙은 마나가 흐르니까.'
그를 응용한 방식일 것이다.
'놈은 마법사 출신이다. 그것도 아주 뛰어난 마법사.'
갈라하드는 다시금 확신했다. 고위 마족이라도 그렇게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마나 압축을 쓰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공간 이동은 불가능한가.'
갈라하드가 짙은 농도의 마나를 지녔어도, 마족처럼 피에 새겨진 게 아니었다. 인간의 마나는 심장 주변에 자리했다.
'마족이 피에 고농도의 마나가 있어서 가능한 거라면-.'
갈라하드는 전제를 되새기며 잠시 고민했다. 이마의 땀이 콧등을 타고 길게 흘렀다.
이내 적합한 결론을 도출했다.
'나도 피에 고농도의 마나를 머금으면 되겠군.'
깔끔한 결론이었다. 그게 가능한지는 확인해보면 될 문제였다.
'그러고 보니 5대대의 흑마법학회의 지부에 연구를 맡겨뒀는데-.'
코르튼을 따라서 흑마법학회의 5대대 지부에 들어갔을 때, 만났던 이들을 떠올렸다.
'셰른과 파른탈이라고 했었나.'
저번 사태 때 안 나왔던 걸 보면, 아직 연구 중일 가능성이 컸다.
마족의 피를 마시면서 연구했을 테니, 지금이면 결과가 나왔을 것이다.
'한 번 들러야겠군.'
두근! 두근! 고통의 알이 격하게 떨렸다.
"인간의 피랑 마족의 피는 다르대요! 엄청 위험하대요!"
"그건 해봐야 알지."
"미친 인간이래요! 어머! 비밀이었어? 그걸 미리 말해야지! 미안해."
인간의 피와 마족의 피가 다른 건 사실이었다.
다만-.
'자네, 반응이 꽤 격렬하군.'
두근! 고통의 알이 작게 떨었다.
고통의 알이 저렇게 격한 반응을 보이는 이유는 뻔했다.
갈라하드가 피에 짙은 농도의 마나를 머금게 되면-.
'자네는 필요가 없어지니까.'
두근! 두근! 두근! 고통의 알이 다급하게 심장을 꾹꾹 눌렀다.
"섭섭하대요!"
'괜찮네, 자네도 언제까지 여기 있을 수는 없지.'
두근! 두근! 두근!
"여기가 좋대요! 마사지도 열심히 하고, 꽁쳐 먹지도 않겠다고-."
'아직도 챙기고 있었나?'
두근! 고통의 알이 크게 흔들렸다. 다급함이 가득 올라왔다.
"최소한 부화할 때까지만이라도 봐달라는데요? 어머, 너 부화하니?"
부화? 묘한 단어에 갈라하드의 미간이 구겨졌다.
부화라니-. 갈라하드는 불현듯 꿈에서 봤던 꼬마 아드리안나가 떠올랐다.
"갈라하드 님이 낳으면 아빠예요? 낳았으니 엄마인가?"
"그웬-, 그게 무슨 소리인가."
그때, 탈력감이 가득 올라왔다. 타는 듯한 끔찍한 고통이 가득 퍼졌다. 마나 탈진이었다.
공간 마법에 드는 마나는 상당했다. 지옥불만큼은 아니었지만, 네 번 쓰면 마나 탈진이 오는 정도였다.
"그웬!"
"네엣!"
그웬이 냅다 머리를 박았다. 그웬의 이마를 타고 마나가 차올랐다.
그웬의 마나는 정순했다. 산속 깊은 곳에 있는 샘물처럼 깨끗했다. 바닥났던 마나가 순식간에 차올랐다.
본래 마나를 채우는 건 시간이 제법 걸렸다. 어떤 놈들은 일주일이 걸릴 정도였다.
어릴 때부터 매일 마나를 비운 갈라하드도 다섯 시간은 걸렸다.
이제는 마족의 피를 마셔서 마나를 채웠기에 오래 걸리지 않았지만, 그 방식은 부작용이 있었다.
정신이 흔들리거나, 고통의 알이 건방져지거나, 마나 통로가 팽창하거나 같은 사소한 문제들이 있었다.
그런데 그웬의 마나 충전 방식은 달랐다. 그웬의 충전은 갈라하드가 마나를 자연적으로 회복하는 것과 비슷한데, 그 속도가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빨랐다.
심지어 마나 탈진조차 회복시켰다. 마족의 피로 얻는 게 고농도의 마나라면, 그웬에게서 얻는 건 마나 회복이었다.
둘을 동시에 사용하면-.
'계속 마법을 수련할 수 있군.'
갈라하드는 입꼬리를 깊게 올렸다. 이 얼마나 좋은 환경인가.
"그··· 고통스러워 보이는데, 미리 회복하면 되지 않아요?"
"마나 탈진 말인가?"
"예, 그거요. 몸을 막 바들바들하잖아요. 그게 오기 전에 마나를 달라고 하시면-."
맞는 말이었다. 마나 탈진이 오기 전에 마나를 받으면 마나 탈진을 겪지 않을 것이다.
다만, 그렇게 되면-.
"효율이 떨어지지 않나."
"······예?"
"자네를 효율적으로 쓰려면, 내가 바닥까지 마나를 쓰고 회복을 받는 게 맞네."
"고··· 고통스럽잖아요?!"
"고통이야 익숙하네."
그웬이 질린 표정을 지었다. 갈라하드는 가벼이 무시하며 집중했다.
온전히 집중하자, 주변의 소음이 사라졌다.
시야가 크게 확장됐다. 눈도 끔벅이지 않았다. 마나를 최대한 압축했다. 심장 주변이 가득 뻐근해졌다.
두근! 두근!
고통의 알이 연신 마나를 뿌려댔다. 평소보다 더 열심이었다. 마나를 뿌리고는 심장까지 꾹꾹 눌렀다.
물론, 압축에 도움이 되는 행위는 아니었다.
시점이 한 곳에 꽂혔다. 갈라하드는 천천히 금색 봉을 내밀었다.
주문은 연상하기 쉬울수록 좋았다. 고농도의 마나를 한 번에 옮겨야 하는 공간 마법이었으니까-.
"상자, 고양이, 균열."
조금 떨어진 곳의 공간이 일렁였다.
전과 같은 거리였지만-.
"크기가 조금 더 커졌군."
갈라하드는 헝클어진 앞머리를 넘기며 시원하게 웃었다.
바로 다시 집중했다. 몇 번이나 마법을 썼을까-. 끔찍한 고통에 멈췄다. 마나 탈진이었다.
"그웬."
갈라하드는 수통을 홀짝이며 그웬을 불렀다. 그웬이 다급하게 머리를 부딪혔다.
고통이 사라졌다. 마나가 충만하게 찼다. 갈라하드는 만족스럽게 끄덕이며 수통을 홀짝였다.
다시 집중하려고 할 때, 그웬이 앞을 막았다.
"코에서 피가 나요?!"
"괜찮네. 비키게."
"상태가 안 좋아요! 일단 좀 쉬다가-."
"그웬."
그웬은 갈라하드를 쳐다봤다. 안 그래도 하얗던 갈라하드의 피부가 창백했다. 코에서는 피가 흘렀고 눈은 실핏줄이 터져서 붉었다.
누가 봐도 위태로운 상태였다.
여기서 더 연습하겠다니, 말려야 했지만-.
"괜찮네. 이 정도로는 안 죽네."
죽는 게 문제가 아니잖아요!
어이가 없었지만, 그웬은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갈라하드가 정말 즐겁다는 듯 활짝 웃고 있었기에-.
****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간다.'
흑마법학회 5대대 지부의 바트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흑마법학회는 본디 상승을 숭상하는 곳이었다. 그를 위해서라면 어떤 것도 가리지 않는 게 흑마법학회였다.
그런데 최근 흑마법학회가 이상하게 돌아가는 중이었다.
"오늘도 알차게 일하자고."
"점심 챙겼나? 두둑하게 먹어야 더 잘 캐는 걸세."
흑마법사들이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며 지나갔다. 마법서를 들고 있어야 할 손에 곡괭이를 들고-.
"뭐 하는 거냐! 왜 마법이 아닌 마석을 캐고 있는 거냐고!"
"바트, 아직 소식 못 들었나? 마석을 제일 많이 캐는 이가 학회장이 된다고. 자네도 캐게. 학회장이 되네."
마석을 많이 캔 놈이 학회장이라니!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바트는 입술을 질끈 씹었다.
모두가 미쳤다. 마석 캐면 돈이 나오고 학회장이 된다며 좋아했다.
모두가 마석을 캐러 나간 건 아니었다. 안쪽의 연구실에서 묵묵히 연구를 이어 나가는 이도 있었다.
"끄아아아악!"
끔찍한 비명에 바트는 다급히 들어갔다. 연구원 파른탈이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큰일이라도 난 듯했지만, 그 옆의 셰른은 침착했다.
"어때? 많이 아파? 중급 마족은 무리였나? 그분은 와인처럼 드셨는데-."
"계수를! 하급의 다섯 배-."
둘은 바트가 헛기침하자 그제야 쳐다봤다. 둘의 시선이 묘했다. 어딘가 어긋나고 퀭했다.
"잠깐 시간 좀 되나?"
"바빠. 우리는 본회에서 직접 내린 연구를 하는 중이야."
"······본회?"
본회는 흑마법학회의 전설 같은 이야기였다. 다만-.
"학회장은 진작에 바뀌었어. 그때부터 학회가 이상해졌다고."
"아니, 너는 모른다. 그건 가짜야. 진짜 본회는 드러나지 않았다. 그에게 마족의 피는 와인이라고."
"그게 무슨 개 같은 소리야?"
"모르는 게 좋아."
파른탈이 투명한 잔을 흔들며 말했다. 마족의 피가 찰랑였다. 손목에 번개 모양의 흉터가 보였다.
'이놈들 상태가···.'
바튼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에 슬쩍 뒷걸음질 칠 때, 갑자기 둘이 성큼 다가왔다.
"마침 잘 왔어."
"맞아, 이제 마족의 피에 관한 연구가 끝났거든."
"인간의 피도 끝냈고-."
"바트, 마족의 피와 인간의 피의 차이점을 알아?"
"······차이점?"
"인간의 피에는 마나가 없어. 마족의 피에는 고농도의 마나가 있는데 말이지."
"그게 무슨 소리냐. 인간의 피에는 마나가 있다."
"아니, 정확히 말해야지. 인간이 아니라-."
셰른이 고개를 들었다. 그 눈이 붉었다. 실핏줄이 터진 게 아니었다. 그냥 붉었다. 바트의 입이 쩍 벌어졌다. 저런 흉측한-.
그때, 셰른의 입이 열렸다.
"마법사의 피에 마나가 있는 거지."
"자, 그러면 여기서 문제."
"마법사는 인간일까, 마족일까?"
94화 손주
'꿀꺽-.'
베네시스는 마른침을 삼켰다. 괜히 목이 칼칼했다.
"긴장되느냐?"
옆에서 후드를 깊게 쓴 이가 물었다. 그 목소리에 노쇠한 현명함이 가득했다.
"예, 당연히 긴장됩니다. 그 대공을 만나는데, 어떻게 긴장이 안 되겠습니까. 마족의 고기를 씹어 배를 채우고, 제국이 보낸 사신의 허리가 뻣뻣하다고 반으로 꺾은 인물 아닙니까-."
"하하, 그럴만했기에 그랬겠지. 그리 나쁜 인물은 아니다."
"······진짜였습니까?"
"음-."
침음성에 베네시스는 황급히 자세를 점검했다. 허리를 최대한 곧게 폈다. 그를 본 옆에 있는 이가 나지막하게 웃었다.
"걱정하지 마라. 제국이나 마족, 마법사만 아니면 머리를 뽑지 않으니까."
"다행이네요. 제가 왕국 연합에 인간 기사라서."
그제야 베네시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서늘한 칼바람이 베네시스를 간질였다. 베네시스는 코트를 여몄다.
"북부는 정말 춥군요. 이런 곳에 어떻게 사는지-."
"추위가 문제겠느냐."
그때, 성문이 거칠게 열렸다. 거대한 성문이 열리며 눈이 길게 뿌려졌다. 그 성벽 위로 병사들이 가득 나타났는데, 압박감이 상당했다.
'기세가 대단하군.'
병사들의 기세가 다른 곳과 달랐다. 눈은 불이라도 나올 것처럼 이글거렸고, 당장이라도 검을 휘두를 것처럼 팽배했다.
'이게 대륙의 방패, 북부구나.'
그들은 제국의 눈을 피하고자 상단의 마차를 끌었고, 호위와 하인도 최소한으로 줄였다.
병사를 따라서 안쪽으로 향했다. 그들은 가는 동안 옷을 두 번 바꿔 입었다. 마지막에는 병사처럼 갑옷까지 입어야 했다. 굉장히 번거로웠지만, 누구도 불평하지 않았다.
이제 만날 상대가 그 대공이었기에-.
"대륙의 방패에 존경을 표해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예, 알겠습니다. 저 베네시스입니다. 왕국 연합국의 요원이라고요."
베네시스는 제 가슴을 탕탕 두드렸다. 장난이 섞인 장담이지만, 농담은 아니었다. 대공이 강자라고 한들, 베네시스도 나름 실력자였다. 기가 죽을 일은 없었다.
"그가 있었더라면-."
작은 중얼거림에 베네시스는 침음성을 흘렸다. 종종 들었던 이야기였다.
어느 날 갑자기 왕국에 나타난 사내였다. 그 사내가 얼마나 유능했는지, 약소했던 왕국이 왕국 연합의 주축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사라졌다.'
왕국 전체에 비상이 내려졌을 정도로 큰일이었다. 그 이후로 줄곧 찾았지만, 그의 이름조차 알아내지 못했다.
그는 나타났을 때처럼, 조용히 사라졌다.
그런데 최근 정보 하나를 얻었다. 그가 정보국 출신이었다고-.
결국, 제국 측의 작전이었다는 걸 알았지만, 그들은 여전히 그를 찾고 있었다.
"이제 곧 찾을 수 있다."
그때, 문이 거칠게 열렸다. 쾅! 안쪽에 찐득한 어둠이 깔려있었다.
'분위기가 상당하네.'
베네시스는 앞장서 들어갔다. 그런 베네시스 앞에 거대한 괴물의 머리가 나타났다. 고통이 가득 섞인 끔찍한 모습이었다.
'대공은 방에 마물과 마족의 머리를 전시해둔다-.'
오기 전에 몇 번이나 들었지만, 실제로 보니 그 느낌이 달랐다. 그런 머리가 한둘이 아니라 방에 가득했다.
상당한 압박감이었지만-.
'나는 왕국 연합의 얼굴이다.'
베네시스는 오히려 입꼬리를 올렸다.
이 정도로 압박할 생각이었나. 유치하군.
그때, 옆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짐승의 울음소리였는데, 그 울림이 상당했다. 그에 고개를 돌리자-.
거대한 마물이 있었다. 형태는 말처럼 네 발이었지만, 그 네 개의 발이 불에 휩싸여 있었다.
또 눈이 다섯 개였는데, 얼마나 흉흉한지, 마주한 것만으로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심지어 그 입가를 타고 붉은 피가 뚝뚝 흘렀다.
분명한 마물이었다.
살아있는-.
문제는 그 위에 타고 있는 무언가였다.
벗은 상체에 두꺼운 근육이 가득했는데, 그 근육이 철 갑옷보다 단단해보였다. 그 위에 거친 흉터가 가득했다.
덩치는 또 얼마나 거대한지 고개를 위로 들어야 했다. 그 풍기는 압도감에 베네시스는 본능적으로 칼자루를 잡았다.
다만, 칼을 뽑지는 못했다.
"음."
맹수의 숨소리처럼 나지막한 침음성이 흘렀다.
괴물의 시선이 베네시스에게 향했다. 그 굵직한 눈이 꼭 베네시스를 뜯어 먹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오랜만이오. 대공."
'······대공?'
베네시스는 그제야 그게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 사람의 형태기는 했다. 다리가 두 개, 팔이 두 개였으니까. 다만, 사람이 어찌 저렇게 거대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리고-.
'왜 방에서 마물을 타고 있지?'
자세히 보니 그 천장이 전부 허물어져 있었다. 꼭 저 마물을 타기 위해서 허문 것처럼-.
"왕이 직접 올 줄은 몰랐군."
대공의 조소 섞인 목소리에 옆에 있던 이가 후드를 벗었다. 지고한 흰색 머리에 굵직한 수염을 가진 이, 왕국 연합의 왕들 중 하나였다.
"동부는 너무 더워서 말이오. 늙으니 열이 많아졌소."
파르한스타가 허허 웃었다. 그에 대공이 입꼬리를 올렸다. 그 거대한 송곳니가 스산했다.
베네시스는 긴장에 마른침을 삼켰다.
"본론만."
대공의 말은 짤막했다.
아무리 대공이라지만, 파르한스타는 왕이었다. 그런데 저런 태도라니-. 파르한스타의 안색이 살짝 굳었다.
다만, 금세 다시 웃음을 찾았다.
"약혼식을 한다고 들었소."
대공이 고개를 까닥거렸다.
'진짜였군.'
그에 파르한스타는 작게 놀랐다. 대공이 제 딸을 아끼는 건 유명한 이야기였다.
"제국의 압박 때문이라면, 왕국 연합이 도와드리겠소."
대공이 눈을 찡그렸다. 눈을 구겼을 뿐인데, 공기가 급격하게 싸늘해졌다.
"제국의 압박이라."
대공이 마물의 머리를 부드러이 쓰다듬었다. 마물이 길게 비명을 질렀다. 입가로 불이 길게 뿜어졌다.
예상하지 못한 반응이었다. 파르한스타는 눈을 찡그렸다.
대공녀의 약혼자는 제국의 귀족이자 마법사였다. 대공이 싫어하는 요소는 전부 섞인 놈이었다. 그런 놈과 약혼식을 한다기에 제국의 압박이 있었을 것으로 예상했다.
평소 절대 움직이지 않던 북부였다. 그에 이번이 기회라고 생각하여 파르한스타가 직접 움직였다.
그런데 저런 반응이라니-.
파르한스타는 눈을 찡그리며 말을 이었다.
"황제가 모습을 감춘 지, 벌써 몇십 년이 흘렀소. 제국은 머리를 잃었지. 그에 반해 왕국 연합은 더욱 공고해졌소. 더는 옛날의 왕국 연합이 아니오."
파르한스타는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대공의 눈이 파르한스타를 응시했다. 파르한스타는 그를 피하지 않았다.
왕국 연합의 힘을 보여줘야 했다. 가령-.
"최근 제국에서 황녀와의 결혼을 명령했소. 하지만 우리가 거절했소."
제국의 청혼을 거절했다는 건, 이쪽의 응집력이 그만큼 견고하다는 뜻이었다. 동시에 제국의 명령을 거절할 힘이 있다는 뜻이었다.
물론, 그 아래에 이런저런 정치적인 이유가 있지만, 굳이 그것까지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충분한 설명이 되었겠지.'
파르한스타가 입꼬리를 올리려는 찰나-.
대공의 눈이 더욱 구겨졌다. 마치 황녀의 파혼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처럼-.
'황녀의 파혼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왜?'
또 예상과 다른 반응에 파르한스타는 다급해졌다.
"대공녀의 약혼 상대가 마법사라고 들었소. 대공녀가 마나를 불태우는 성질을 지녔는데, 너무한 억지 아니오? 최근 우리 측에서 마나가 현저히 적은 이가 나왔소."
조급해진 파르한스타는 가진 패를 빠르게 꺼냈다. 대공의 눈이 가늘어졌다.
"손주는 봐야 할 것 아니오."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파르한스타는 침을 꿀꺽 삼키며 대공을 살폈다.
대공의 얼굴은 여전히 무심했다. 그 가죽이 두꺼워 어떤 생각을 하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때, 대공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상대는 그 아이가 정한다. 나는 기회를 줄 뿐."
그리 말하는 대공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찔러볼 여지가 전혀 없었다.
"그 아이가 정했다면 노예든, 제국이든, 마법사든-. 설령 마족이라도 상관없다."
이어진 말은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결혼은 중대사였다. 혈연만큼 끈끈한 동맹이 없었다. 동맹은 결혼의 제일 가치 있는 사용법이었다.
그런 결혼을 그저 대공녀에게 맡긴다니-.
파르한스타는 이해할 수 없었다.
대공은 입을 닫았다.
명백한 축객령이었다.
"약혼식 때, 다시 오겠소. 마나가 없는 이를 데리고."
파르한스타는 조용히 물러났다.
*
'멍청한 놈. 고작 이런 취급을 받다니.'
대공은 물러나는 왕국 연합의 왕을 보며 눈을 찡그렸다.
문득 방금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손주라.'
아드리안나를 닮은 손주라면 참 이쁠 텐데-.
대공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러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손주가 있으려면-.
[하하, 장인어른.]
대공은 눈을 가득 구겼다.
****
"이 정도면 되겠군."
갈라하드는 손에 깃든 일렁임에 옅게 웃었다. 완벽하다고 볼 수 없지만, 이 정도면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손을 털어 일렁임을 지웠다.
종일 마법을 썼는데, 몸 상태는 오히려 좋았다. 개운했다. 그웬 덕분이었다.
그웬의 마나 충전은 상당히··· 아니, 놀라울 정도로 쓸모 있었다. 길버튼의 봉급을 떼서 그웬에게 주고 싶어질 정도였다.
다만-.
"그대는 나의 즐거움~. 그대는 나의 파란 꽃~."
가슴에 대고 꾀꼬리 같은 노래를 부르는 건 상당히 당혹스러웠다.
"그웬, 지금 뭐 하는 거지?"
"아이를 가졌을 때는 이렇게 노래를 불러주면 좋대요!"
눈을 반짝이는 그웬에 갈라하드는 침음성을 흘렸다.
"음, 이건 아이가 아닐세. 그리고 나는 성인 사내고."
"네? 그래서요?"
갈라하드의 말문이 잠시 막혔다.
"······자네, 가치관이 상당히 열려있군."
"헤헤."
어디부터 지적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갈라하드는 혀를 차며 연초를 털었다.
그때, 허기짐이 올라왔다. 몸이야 그웬 덕분에 좋았지만, 허기짐은 숨길 수 없었다. 술집으로 들어가니 향긋한 냄새가 가득 풍겼다.
"아. 앉으시죠."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스튜가 앞에 놓였다. 톰이었다. 아까 길버튼과 데미안이랑 검술을 배우는 듯했는데, 요리까지 했다니-.
"톰, 자네는 최고일세."
"말씀만이라도 감사합니다."
"진심일세."
톰이 어색하게 웃으며 물러났다. 갈라하드는 숟가락을 들었다. 스튜를 먹으려는 순간, 문이 거칠게 열렸다. 잔뜩 굴렀는지 꾀죄죄해진 데미안이었다.
데미안이 다급하게 뛰어와서 그릇부터 집었다. 그러다 갈라하드와 눈이 마주치자 뚝- 멈췄다.
"앉아서 숟가락으로 먹게."
"네, 형."
"손도 씻고."
침을 꿀꺽 삼킨 데미안이 자리에 앉았다. 그웬이 데미안에게 붙어서 손목을 걷어주고, 그 손에 물을 부었다.
문이 다시 열리고 길버튼이 들어왔다. 데미안과 달리 조금 흐트러진 게 전부였다.
그래도 피곤한 기색이 미세하게 있었다. 전에 데미안을 상대했을 때와 다른 모습이었다.
"망할 꼬맹이. 검을 던지고 가냐? 검은 네 애인이라니까."
길버튼이 투덜거리면서 자리에 앉았다.
"저는 여자랑 사귈 건데요. 검은 궁상맞아요."
"뭐?"
"저는 잘생겼잖아요."
"······저는? 너 그거 무슨 뜻이냐?"
안 그래도 가느다란 길버튼의 눈이 더욱 가늘어졌다.
"길버튼 경, 왜 애랑 싸우나."
"아니, 이 망할 꼬맹이가-."
"꼬맹이가 아니라 데미안인데요."
길버튼이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데미안은 식사에 열중했다.
"요즘 데미안의 말이 부쩍 늘었어요!"
"말이 늘기는-."
그웬이 잔뜩 신난 목소리로 말했다. 그에 길버튼의 눈이 구겨졌다. 그때, 톰이 길버튼 앞에 맥주잔을 놓았다. 길버튼이 괜히 헛기침하더니 맥주잔을 잡았다.
"저거 싹수가 없어졌습니다."
길버튼이 갈라하드에게 투덜거렸다. 그에 갈라하드는 끌끌 웃었다.
"그래도 아직 애잖나."
"제가 쟤 나이 때는 얼마나 깍듯했는지 아십니까? 미리 장화도 닦아두고, 검도 도맡아서 관리했습니다."
데미안은 이미 그릇에 얼굴을 박고 있었다. 마지막 이성이 남았는지, 숟가락을 들고 있기는 했다. 거의 무용이었지만.
"왜 잘하고 있는 애한테 뭐라 그래요!"
"말이 그렇다는 거지. 말이-."
그때쯤 갈라하드는 그릇을 깔끔하게 비운 뒤였다.
갈라하드는 그릇을 보며 손가락을 튕겼다. 자그마한 물이 그릇을 깨끗하게 닦았다. 데미안의 눈이 반짝였다.
"왜 굳이 그럽니까?"
"훌륭한 사람은 머문 자리도 아름다운 걸세."
"······스스로가 훌륭하다고 말 하는 사람은 대장밖에 없을 겁니다."
"사실이니까. 잘 먹었네. 톰. 늘 훌륭하군."
갈라하드는 옷깃을 정리하며 일어났다.
"또 마법 쓰러 가십니까?"
길버튼이 조금 질린 목소리로 물었다. 그에 갈라하드는 고개를 저었다.
"아닐세, 마경 훈련소 좀 다녀오겠네."
"거기는 왜 가십니까?"
"뭐 좀 받을 게 있어서 말이지."
"······받을 거 말입니까? 거기 누가 있습니까?"
"비밀일세."
갈라하드의 대답에 길버튼의 얼굴이 구겨졌다. 그때, 데미안이 벌떡 일어났다.
"저도 갈래요."
그 그릇에 스튜가 남았는데, 따라오겠다니-. 데미안 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갈라하드는 입꼬리를 올렸다.
"미안하지만, 혼자 갈 생각일세."
갈라하드의 거절에 데미안이 급격히 시무룩해졌다.
"마저 먹게나. 금방 올 테니까."
갈라하드는 술집을 벗어나서 마경 훈련소로 향했다.
주변의 병사들이 기합이 가득 담긴 경례를 올렸다. 갈라하드는 그를 하나씩 받아주며 걸음을 옮겼다.
이내 마경 훈련소 앞에 도착하자, 7대대 대장인 노인이 있었다.
"안에 있는 인원 다 물렸나?"
노인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네, 아무도 들이지 말게."
갈라하드는 잠시 열린 문을 쳐다봤다. 마경 훈련소의 범위가 확실히 전보다 작았다. 그 재의 농도도 저번보다 옅어진 듯했다.
'진짜 마셔서 없앴나.'
퍼스트의 무식한 훈련법에 작게 혀를 찼다. 갈라하드는 가만히 연초를 털었다.
여우 가면은 10일 뒤에 갈라하드를 지배자에게 데려간다고 했다. 자신이 있다는 소리였다.
물론, 갈라하드도 거절할 생각 없었다. 고위 마족을 잡을 기회를 준다는데, 왜 거절하겠는가.
그렇다고 보고를 올릴 생각은 없었다.
애초에 보고를 올려도 의미가 없었다. 여우 가면은 아드리안나와 대공이 있어도 상관없다고 장담했다.
그건 거짓이 아닐 것이다. 공간 마법을 알기에 확신할 수 있었다.
여우 가면이 그 둘을 잡지는 못하겠지만, 그 주변에 있는 갈라하드를 처리하는 건 가능했다. 그게 공간 마법이었으니까.
다만, 보고를 올리지 않은 건, 여우 가면이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놈은 내 것이다.'
갈라하드의 눈이 가라앉았다.
고위 마족이라고 한들 한 번 경험한 상대였다. 갈라하드는 승산이 있음을 확신했다.
지배자는 저번에도 흔적 없이 사라진 놈이었다. 괜히 보고를 올렸다가 지배자가 도망칠 가능성도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무모하게 들어갈 생각은 없었다.
'10 일이었나.'
갈라하드가 얌전히 기다릴 것이라 생각했나. 우스운 이야기였다.
'먼저 내가 위치를 찾는다.'
지원은 그다음이었다. 그게 가장 깔끔하고 효율적인 방법이었다.
갈라하드는 늘 그렇듯 최선의 선택지를 고를 뿐이었다. 설령 자신의 목숨이 걸려있어도.
그리고 이렇게 해야-.
"뭘 좀 내놓겠지."
갈라하드는 마경으로 걸음을 옮겼다.
짙은 어둠이 갈라하드를 감쌌다. 갈라하드는 연초를 입에 물었다.
그리고 연초를 깊게 빨면서-.
"이런... 황제를 잡고 싶은데, 아주 큰 문제가 생겼네. 지배자라는 악독한 놈이 나를 노리고 있네. 이러다가 황제를 못 잡게 생겼어. 아, 난감하군."
가득 웃었다.
갈라하드가 양손을 번쩍 들고 투덜거리자-.
재로 가득한 곳이 푸른 수풀로 바뀌었다.
[네놈, 도대체 나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냐?]
95화 연옥
'음.'
갈라하드는 작게 침음성을 흘렸다.
자신을 '그분'이라고 칭하는 네발 마족은 그 먼 거리를 넘어서 지배자를 묶었다. 지배자보다 강한 게 분명했다.
그런 네발 마족이 갈라하드에게 원하는 건 명확했다.
황제의 죽음-. 목적이 뚜렷하면 다룰 수 있었다.
물론, 그리 간단한 건 아니었다.
'징하군.'
깊은 심연에 처박혀서 상어에게 뜯어 먹히는 건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다. 그 고통이 저번보다 끔찍했다.
"확실히 수장보다 화장이 더 고통스럽군."
네발 마족이 가만히 갈라하드를 내려봤다. 상어가 뒤로 물러났다. 심연이 사라졌다. 갈라하드는 쫄딱 젖은 채로 수풀 사이에 누워있었다.
거칠게 기침하자 입에서 물이 끊임없이 나왔다. 물고기가 파닥파닥 뛰었다. 갈라하드는 입에서 나온 붉은 금붕어를 멀리 던졌다.
네발 마족이 미간을 찡그렸다. 갈라하드는 젖은 머리를 뒤로 넘기고, 연초를 입에 물었다. 손가락을 튕겼지만, 불이 일어나지 않았다.
짜증스럽게 손가락을 흔들었다. 다섯 번 정도 흔들자 불이 붙었다. 레몬 향이 깊게 풍겼다.
두근! 두근! 두근! 고통의 알이 뛰는 소리가 들렸다. 참으로 쓸모없는 놈이었다.
네발 마족이 뱀처럼 찢어진 눈으로 갈라하드를 내려봤다. 눈이 참 신기하게 생겼다. 보석 같기도, 독사의 눈 같기도 했다.
[연옥에서 웃다니. 미쳤구나.]
'연옥이라.'
제법 살벌한 이름이었다.
벌레한테 뜯어 먹히고, 불에 타서 재가 되었다가 심연에서 수장당했다. 끔찍한 죽음을 순간에 연속으로 경험했으니, 연옥이라는 칭호가 아깝지 않았다.
다만-.
"더 할 건가? 괜히 힘 빼는 걸세."
갈라하드는 오히려 입꼬리를 더 올렸다.
네발 마족 뒤의 수풀이 거칠게 흔들렸다. 나무들이 더욱 무성해졌다. 숲의 크기가 순간 커졌다.
네발 마족이 갈라하드를 내려봤다. 그 눈동자가 꼭 타는 것처럼 뜨거웠다.
"내가 나 좋자고 이러는 건가? 황제를 잡으러 가는데, 지배자란 놈이 방해하는 걸 어떻게 하라는 건가. 따지고 보면 자네 잘못일세. 자네가 제대로 맡았으면, 이런 일이 없었지."
실제로 네발 마족이 놈을 처리하지 못해서 갈라하드가 귀찮아진 건 사실이었다.
"황제를 죽이라고 했으면 최소한 지원은 해줘야 하지 않나? 황제가 옆집 제임스도 아니고 말이야. 어이가 없군."
갈라하드는 대놓고 혀를 찼다. 그러자 아래에서 불이 올라왔다. 뜨거운 통증에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리며 연초를 흔들었다.
"기왕이면 연초에 불을 붙이기 전에 해주지 그랬나. 배려가 부족하군."
네발 마족이 한발 다가왔다. 푸른 숲 내음이 가득 퍼졌다. 존재감이 성큼 커졌다.
[고작 놈이 문제인가.]
'고작-.'
갈라하드는 작게 중얼거렸다. 고위 마족인 지배자를 고작이라고 칭하다니-.
"고작이면 진작 치워 주지 그랬나."
[불가하다.]
예상한 대답이었다.
그 거리를 넘어서 지배자를 묶어둔 것도 충분히 경악스러운 일이었지만-.
"입만 살았군."
갈라하드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벌레들이 가득 올라왔다.
이번에는 벌레들에게 뜯어 먹혔다. 갈라하드는 벌레들을 살폈다. 그 작은 털과 뾰족한 이빨까지 세밀했다.
이 정도의 정신 간섭이라니-. 갈라하드는 감탄했다.
이내 벌레가 떨어져 나갔다.
"음, 이번 황제는 호상이겠군. 이것 참 제국의 축복일세."
갈라하드는 벌레의 흔적을 털었다. 네발 마족의 기세가 더욱 강해졌다.
이제 갈라하드가 흐릿함을 느낄 정도였다.
굉장한 압박이었지만-.
"괜히 꺼드럭거리지 말게. 그쪽도 내가 아니면 선택지가 없지 않나."
북부로 밀린 갈라하드를 찾아온 네발 마족이었다. 다른 선택지가 없을 가능성이 컸다.
더불어 황제의 죽음에 관하여 갈라하드만큼 적합한 인물도 없었다.
네발 마족의 기세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압박감이 더는 느껴지지 않았다.
"이제야 말이 통하는군."
[······황제를 죽이겠다고 맹세해라.]
"황제를 죽이겠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에 네발 마족이 미간을 구겼다.
"어차피 나도 황제를 처리할 생각일세. 일종의 동업이라고. 서로 돕고 살자는 거지."
네발 마족이 손을 천천히 내밀었다. 손가락에 이끼가 가득했다. 이끼 사이로 꽃이 벌겋게 피었다. 이내 화려한 꽃송이로 변한 손가락이 다가왔다.
두근! 두근! 두근! 고통의 알이 격하게 뛰었다. 하악질이라도 하는 것처럼 그 뜀박질이 날카로웠다.
네발 마족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고통의 알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화려한 꽃송이가 갈라하드의 이마를 두드렸다. 정신이 또렷해졌다. 시야가 트였다. 뭔가 형용하기 힘든 게 깃들었다.
마나는 아니었다. 정신 쪽에 가까웠다.
방벽인가? 정체를 알 수 없지만, 갈라하드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지배자를 상대할 방패군.'
"어차피 줄 거면서 진작 주면 좋지 않나. 괜히 서로 힘만 빼고."
고개를 들던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렸다.
"자네, 조금 작아졌군."
네발 마족의 크기가 살짝 줄어 있었다.
[황제를 죽여라.]
네발 마족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 목소리가 묘하게 까칠했다.
그를 끝으로 네발 마족이 물러났다.
용건이 끝났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지배자를 상대할 무언가를 얻었으니, 목적은 달성했다.
다만-.
아직 받을 게 더 남았다.
"잠깐,"
갈라하드는 물러나는 네발 마족을 불렀다. 네발 마족의 미간이 가득 구겨졌다.
[욕심은 인간의 근본이지만, 동시에 가장 큰 죄악이다,]
살벌한 기세가 갈라하드를 가득 눌렀다. 갈라하드에게 휘둘렸다는 사실이 심기를 상당히 긁은 듯했다.
'줄 거면 시원하게 주던지. 주고 나서 틱틱거리는군.'
갈라하드는 혀를 차며 주변을 둘러봤다.
여기는 놈이 '연옥'이라 부르는 괴상한 공간이었다. 수십 번 죽어도 밖에서는 순간이었다. 정신적인 공간이라서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마법을 연습할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쓸모가 없는 건 아니었다.
그러니까-.
"여기에 좀 있어도 되나? 제법 쓸만하겠군."
네발 마족의 미간이 구겨졌다.
연옥은 무한한 형벌의 장소였다. 마족도 두려워하는 게 연옥이었다. 그런 연옥이 쓸만하다니-.
[미친놈.]
"내가 나 좋자고 이러겠나? 황제를 잡아야 하니까 그러는 거 아닌가. 참 야박하군."
[······야박?]
"최대 얼마나 가능하지?"
이어지는 물음은 더 어이가 없었다. 연옥이 얼마나 가능하냐니-.
[무한하다.]
"좋군. 끝나면 알려주겠네."
환히 웃는 갈라하드에 네발 마족은 눈을 찡그렸다.
아니, 오히려 잘 됐다.
놈이 필요한 건 사실이었지만, 기를 꺾어줄 필요가 있었다.
거기에는 무한한 죄악의 감옥, 연옥만 한 게 없었다.
[멍청한 놈.]
*
'음흉하게 숨어서 지켜보고 있군.'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차며 주변을 둘러봤다.
주변은 하얀색으로 가득한 공허였다.
시간이 마냥 많은 건 아니었다. 어찌 됐건 정신 간섭에서 이어진 곳이었다. 길어질수록 갈라하드의 정신에 부하가 걸릴 게 분명했다.
처리할 일도 많으니, 최대한 빨리 끝내야 했다.
갈라하드가 네발 마족에게 연옥을 요구한 이유는 하나였다.
'공간 마법.'
공간 마법은 그 수식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려웠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최초의 마법이라서.'
현재의 마법은 세대를 거치면서 개정된 마법이었다. 천재와 범재, 둔재가 모두 붙어 해석하고 발전시킨 게 현재의 마법이었다.
수식이 쉬울 수밖에 없었다. 인간에게 맞춰서 개정된 것이니까.
그에 반해 원시 마법은 마족이 사용하는 권능의 해석판 정도였다.
마법이라 칭하기에는 다소 부족했다. 애초에 인간이 사용할 수 없는 마법이었다.
'지옥불이 그래서 어려웠군.'
갈라하드는 천재였다. 그건 자신할 수 있었다. 물론, 그 내막에는 꽤 복잡한 사연이 있었다.
가령 세 살 때부터 마법을 배우기 위해서 발악을 했다는 것과 전생이 이과였기에 수식에 능하다는 것, 또 무식한 마법 반복으로 이해를 강제로 끌어올렸다는 것까지-.
꽤 다양한 이유가 있었지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천재였다. 그건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런 갈라하드도 몇 년이나 애를 먹은 게 지옥불이었다.
지옥불이 등급을 매길 수 없을 정도의 고위계 마법이기에 어려운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지옥불은 애초에-.
'풀 수 없는 문제였군.'
인간을 위한 마법이 아니라, 마족을 위한 마법이었다.
그 사실을 모르는 갈라하드는 지옥불을 위해 몇 년이나 골머리를 앓았다. 그에 들인 노력이 얼마인가.
[안 된다고 하지 않았나! 이건 마법이 아니라고! 젠장! 내가 무슨 만능이냐?!]
'농땡이 핀다고 생각했는데, 괜히 갈궜군.'
갈라하드는 작게 침음성을 흘렸다.
'뭐 결과는 좋으니까.'
결국, 갈라하드는 답을 찾아냈다. 아니, 답을 만들어냈다.
답이 없음을 몰랐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 덕분에 여우 가면에게서 공간 마법을 빼낼 수 있었다. 그렇다고 공간 마법을 완벽히 이해한 건 아니었다.
공간 마법은 지옥불과 달랐다. 지옥불은 마나를 끔찍할 정도로 잡아먹지만, 위력은 확실했다.
그에 반해 공간 마법은-.
'그 자체는 쓸모가 없다.'
여우 가면이 사용한 공간 마법은 굉장히 위협적이고 강력했지만, 그건 놈이 고위 마족이라 가능한 일이었다.
마법사인 갈라하드는 놈처럼 사용할 수 없었다. 물론, 피에 농도 짙은 마나를 담으면 흉내 낼 수 있겠지만, 당장 가능한 방법이 아니었다.
지금에 맞춰서 개정할 필요가 있었다.
수식을 분해하여 그 하나하나를 이해하여 다시 조립, 계산, 또 분해한다.
복잡한 원시 마법을 완전히 이해할 때까지-.
시간이 상당히 많이 걸릴 게 분명했다.
'연옥이라-.'
갈라하드는 입꼬리를 가득 올렸다.
[미친놈.]
****
'늦으시네.'
톰은 마경 훈련소의 입구를 보며 중얼거렸다.
갈라하드가 마경 훈련소로 혼자 들어간 지 벌써 삼 일이나 지났다. 안에서 무슨 일이라도 일어난 건가.
그에 들어가서 확인하고 싶었지만-.
"아무도 들어갈 수 없네."
7대대 대장 벨로그라임이 앞을 지키고 있었다. 벨로그라임은 누구도 들여보내지 않았다.
마경 훈련을 하지 못하여, 몸을 뒤트는 맨몸의 중대장과 병사들도, 갈라하드를 찾는 특무대도 막았다.
"대장이 무사한지만 확인하겠습니다."
"길버튼,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했네."
"하지만 벌써 삼 일이나 지났습니다. 안에서 무슨 일이라도 있으면-."
"나는 명령을 받았네. 누구도 들여보내지 말라고."
벨로그라임이 단호하게 길버튼의 말을 잘랐다. 길버튼은 끈덕지게 붙었지만, 벨로그라임은 단호했다.
"젠장! 빌어먹을!"
"어허, 호로 새끼군."
마경 훈련소가 얼마나 끔찍한지 톰도 알았다. 그런 마경 훈련소에서 삼 일이나 안 나오는 건, 상당히 위험한 일이었다.
다만, 도움이 필요한 일이었다면, 갈라하드는 특무대를 데리고 갈 것이다. 갈라하드가 혼자 간 건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게 분명했다.
'대장이 잘못되는 건 상상이 힘든데.'
톰은 작게 중얼거렸다. 조금 우려스러웠지만, 갈라하드가 걱정되지는 않았다. 애초에 누가 누구를 걱정한다는 말인가.
"마법은 말이야! 이렇게 하는 거야!"
"뭐?"
"이렇게! 이렇게!"
그웬과 데미안도 걱정하지 않는 눈치였다. 데미안은 그웬에게 마법을 배우는 중이었다.
그웬이 손을 쥐었다 펴자 손에 불길이 일어났다가 사라졌다. 데미안이 따라 했지만, 어떤 것도 생기지 않았다.
"어라, 이게 왜 안 되지? 제대로 주먹을 쥔 거 맞아?"
"쥐었잖아."
"그럼 펴! 힘껏!"
데미안이 주먹을 쫙 폈다. 물론, 그런다고 손에서 불이 나올 리가 없었다.
"안 되잖아."
"그러게? 안 되네?"
데미안의 눈썹이 작게 구겨졌다. 그에 그웬이 부드럽게 웃었다.
"사람마다 가진 재능이 다르니까. 대신 데미안은 검을 잘 다루잖아! 아주 훌륭한 기사가 될 거야!"
"기사 싫어."
데미안의 얼굴이 불퉁해졌다.
북부에서 기사는 모든 사내의 꿈이었다. 가장 명예로운 직업이었다. 검을 든 모든 이가 원하는 게 기사인데, 기사가 싫다니-.
톰은 쓰게 웃었다.
"톰!"
그웬이 도와달라는 얼굴로 톰을 불렀다.
"데미안, 기사가 왜 싫습니까?"
"길버튼이니까."
대답이 명료했다. 그 길버튼이 이런 취급을 받나니-. 톰은 작게 웃었다.
"길버튼님은 전선에서 유명한 분이셨습니다. 아드리안나님을 보좌하는 훌륭한 기사로 소문이 나셨죠."
"그래도 길버튼이잖아요."
부드럽게 설명했지만, 데미안의 얼굴은 여전히 불퉁했다.
데미안은 마법사가 되고 싶어 했다. 그를 위해서 최근 톰에게 따로 글도 배울 정도였다.
데미안이 마법사가 되려는 이유는 뻔했다.
'대장 때문이겠지.'
갈라하드는 늘 자신감 넘치고 당당하며 신사적이고 여유가 넘쳤다. 성장기의 소년에게는 치명적인 멋있음이 넘쳤다.
더불어 데미안을 거둬준 인물이었다. 데미안은 갈라하드처럼 되고 싶은 게 분명했다.
톰이 보기에 데미안은 대장님보다 길버튼에 가까웠지만, 그걸 굳이 말할 필요는 없었다.
대신 길버튼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애초에 길버튼도 유명한 기사였다. 조용하고 과묵한 기사. 존경하는 이도 많았다.
물론, 대화를 길게 나눠보면 조금··· 아니, 꽤 달랐지만, 그래도 길버튼이 대단한 기사인 건 변치 않았다.
"늘 선두에 서는 길버튼 님의 용기는 모든 기사의 모범이 되는 용감함입니다. 물론, 조금 투박하지만-."
톰은 길버튼에 대해서 진심을 담아서 말했다. 길버튼은 늘 앞장서는 이였다. 투박하지만, 늘 진심인 이였다. 데미안의 눈썹이 흔들렸다.
"데미안이 위험에 빠졌을 때도 가장 먼저 움직이신 분입니다. 언뜻 무식해 보이지만, 그건 매사에 진심이기 때문입니다."
데미안의 표정이 묘해졌다. 구겨진 눈썹이 조금씩 풀렸다.
톰이 이어서 설득하려고 할 때-.
"젠장! 그러면 기사답게 해결합시다! 까짓거 함 붙읍시다."
길버튼이 검을 뽑아 벨로그라임을 가리켰다. 말로 안 되니까 바로 검부터 뽑다니-.
"좋다! 그래야 기사지!"
벨로그라임이 냉큼 받았다. 그 주변으로 마경 훈련에 대비하여 벗은 중대장들이 우르르- 모였다. 순식간에 작은 경기장이 만들어졌다.
"영광스러운 기사의 전투다!"
화끈한 열기가 가득 올라왔다.
"기사- 길버튼-!"
길버튼이 용감하게 외치며 검을 고쳐 잡았다.
평범한 북부의 의견 조율이지만, 밖에서 보기에는 그저 무식한 결투였다.
상황이 좋지 않았다.
"마법··· 마법 알려줘."
데미안의 얼굴에 다급함이 가득했다. 데미안이 드물게 말을 더듬었다.
'이건 안 되겠군.'
톰은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그때, 한쪽에 가만히 앉은 거대한 흰색 매가 보였다.
1대대 대장 아드리안나의 매였다. 갈라하드가 마경 훈련소에 들어간 날부터 저러고 있었다.
삼 일이나 저 자리에서 기다리는 중이었다.
갈라하드가 아드리안나의 편지에 바로바로 답장하던 게 떠올랐지만-.
'괜찮겠지?'
북부의 영웅 아드리안나가 답장을 기다리기라도 하겠는가.
****
'음.'
아드리안나의 고운 이마가 작게 구겨졌다.
평소 갈라하드의 답은 상당히 빨랐다. 편지를 읽고 아무 고민도 없이 보냈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답이 빨리 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4일이나 지났는데도 답이 없었다.
'내용이 이상했나?'
혹여 심기를 거스르는 말이 있었나.
아드리안나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다섯 번에 걸쳐서 수정한 편지였다. 소속을 명확히 밝혔고, 목적도 있었다. 원칙에 따른 완벽한 편지였다.
'바쁘신가.'
갈라하드야 늘 바빴다. 북부에 온 뒤로 계속 공을 세우는 사내였으니까. 그래도 4일이나 답장이 없는 건-.
'부담이 됐나.'
생각해보니 편지를 너무 자주 보낸 것 같기도 했다. 그게 부담일 수도 있었다. 다만, 멋대로 손을 잡는 사내였다. 그에 비하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니면 매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
그렇다면 매를 빌려서 편지를 새로 보내야 할까. 매를 잃어버렸다고.
아드리안나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만약 위의 것들이 아니라면-.
'이제 포기한 건가.'
그럴 수도 있었다. 아드리안나가 밀어낸 게 있었으니까.
분명 원하던 일인데, 묘하게 답답했다.
그때, 창문으로 매가 들어왔다.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쭉- 올라갔다.
다만, 아드리안나의 매가 아니었다.
붉고 거대한 매, 대공의 것이었다.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다시 내려갔다.
"안 열어 보십니까?"
보좌관의 물음에 아드리안나는 고개를 저었다.
꼭 읽어야 할 편지였으면, 붉은 편지였을 것이다.
톡톡, 아드리안나는 가만히 창문을 내다봤다.
그러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무슨 일이 생겼을 수도... 아직 지배자를 잡지 못한 상황이다. 지배자가 갈라하드 대장을 노렸을 수도 있지. 나는 대장으로서 확인할 의무가 있다."
아드리안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누구한테 말씀하신 거지?'
아드리안나의 어색한 혼잣말에 보좌관 루시엔느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
"조금만 더 부탁하겠네."
[그 말만 몇 번째냐.]
"진짜 마지막일세."
[저번에도 그랬다.]
"진짜로."
네발 마족의 얼굴이 가득 구겨졌다.
96화 믿어
'쓸만하군.'
7대대 대장, 벨로그라임은 거친 숨을 토해내는 길버튼을 보며 중얼거렸다.
길버튼은 아드리안나의 직속 부대 기사였다. 검 실력이 뛰어난 건 말할 필요도 없었다.
다른 것보다 길버튼은 기사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을 가지고 있었다.
"감 잡았습니다. 한 번 더 하시죠."
길버튼은 우직하게 무식했다. 몇 번을 팼는데도 여전히 달려들었다. 오히려 즐기고 있었다.
'싹수가 있군.'
벨로그라임은 가벼이 봉을 휘둘러 길버튼을 막았다. 봉과 검이 여러 번 얽혔다.
"자네의 검은 너무 투박해."
"예."
어쩌다 보니 길버튼을 가르치는 형태가 됐다. 길버튼은 가르침을 거부하지 않았다.
그때, 한쪽이 시끄러워졌다. 구경하던 병사들이 갈라지며, 백색의 갑주를 입은 아드리안나가 등장했다.
"아드리안나님!"
아드리안나가 길버튼의 경례를 가벼이 받았다.
"아드리안나 님이 여기는 무슨 일이십니까?"
길버튼의 물음에 아드리안나가 잠시 숨을 골랐다.
"갈라하드 대장의 연락이 끊겼다. 갈라하드를 노렸던 지배자가 아직 잡히지 않은 상황이기에 문제가 생겼을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아드리안나의 대답은 막힘이 없었다. 꼭 준비라도 한 것처럼 치밀했다.
다만, 상대는 길버튼이었다.
"아, 갈라하드 대장의 답장이 없으니까 걱정돼서 오신 겁니까?"
"······!"
잠시 멍해진 아드리안나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평소 답장이 매우 빨랐던 갈라하드 대장인데, 이번에 유독 느렸으니 무슨 문제가 발생했을 가능성이 크다. 거기에 지배자가 아직 잡히지 않았으니까. 나는 대장으로서 불안 요소를 확인할 의무가 있다."
대답이 상당히 빠르고, 발음도 똑 부러졌다. 확실히 그럴듯한 이유였다. 다만, 상대가 길버튼이었다.
"아하! 그러니까 저희 대장님 연락이 없어서 걱정돼서 급하게 오셨다는 겁니까?"
"······급하지 않았다."
또 뭔가 말하려는 길버튼에 벨로그라임은 작게 기침하며 나섰다.
"갈라하드 대장은 스스로 마경 훈련소로 들어가셨소. 안에서 뭐 하는지 모르겠지만, 누구도 들이지 말라고 명령했습니다."
벨로그라임은 봉으로 땅을 찍었다. 그에 길버튼이 검을 다시 잡았다.
"길버튼 경, 왜 벨로그라임 대장에게 검을 겨누지?"
"아, 벨로그라임 대장님이 못 들어가게 막아서 말입니다. 기사의 명예로운 의사 결정 중이었습니다."
"아-."
길버튼의 대답에 아드리안나가 작게 탄식했다.
"갈라하드 대장이 그랬다면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내 아드리안나가 벨로그라임 앞에 섰다.
"기사들의 방식으로 합시다!"
길버튼은 냉큼 아드리안나에게 달려들었고-.
이내 두들겨 맞기 시작했다.
물론, 아드리안나의 검은 여전히 차분했다. 그저 평소보다 조금 더 힘을 실었을 뿐이었다.
'벌써 5일째인데, 진짜 문제라도 생긴 건가.'
****
마법의 분해는 상당히 어렵고 까다로운 작업이었다.
수식의 결과를 두고 역순으로 추적하는 건데, 수식의 겹침이 늘어날수록 그에 걸리는 시간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원시 마법인 공간 마법은 말할 것도 없었다. 복잡한 반복 작업이었다. 끈질긴 집중력과 막대한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단순히 분해가 전부는 아니었다.
분해 후에 갈라하드에 맞춰 다시 조립해야 했다. 현재의 마법 사용 방식으로 '개정'하는 거였다.
개정은 분해보다 어렵고 시간이 더 많이 걸렸다.
다만, 갈라하드는 그 정도로 여유롭지 않았다.
그에 갈라하드는 네발 마족을 떠올렸다. 놈이 갈라하드를 수십 번 죽여도 정신 간섭이라 걸리는 시간은 짧았다.
즉-.
'완벽한 연구 환경이지.'
갈라하드는 고개를 들었다.
사방에 수식과 마법식이 가득했다. 수식이 끝이 없을 정도로 펼쳐진 모습은 꽤 멋들어졌지만, 갈라하드는 탐탁지 않았다.
도출된 결론이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았다.
'공격용으로 쓰는 건 불가능하다.'
여우 가면처럼 공간을 일그러뜨려서 그 자체로 공격을 하는 건 까다로웠다. 마나 농도의 차이 때문이었다.
여우 가면은 고위 마족에 마나 압축까지 해서 공간 마법을 그렇게 쓸 수 있는 것이었다.
갈라하드가 공간 마법을 여우 가면처럼 다룰 수는 없었다.
고위 마족의 피를 마셨을 때는 가능하겠지만, 거기에는 변수가 너무 많았다. 더불어 그런 일시적인 효과를 얻자고 여기 있는 게 아니었다.
애초에 그런 노력을 들일 거라면 지옥불이 더 효율적이었다.
그에 갈라하드는 다른 활용 방법을 강구했다.
'굳이 공격할 필요가 없지.'
가령-.
'다른 마법의 보조 역할로 쓴다면.'
두 개의 마법을 동시에 시전할 수 있는 갈라하드였다. 공간 마법으로 다른 마법을 이동시킨다면-?
'재밌겠군.'
갈라하드는 만족스럽게 연초를 털었다.
그때, 네발 마족과 눈이 마주쳤다.
"아, 이번이 진짜 마지막일세."
뱀 같기도 보석 같기도 한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아니, 끝이다.]
전과 달리 그 목소리가 단호했다.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찼다.
"아니, 자네가 먼저 무한이라고 하지 않았나. 분명 '무한하다-.' 이래 놓고서는."
네발 마족의 얼굴이 험하게 구겨졌다. 질린 기색이 가득했다.
[인간이 버틸 정신의 간극을 넘어섰다. 이 이상은 네가 못 버틴다.]
합당한 지적이었다. 아무리 정신 간섭이라고 한들, 정신도 마모되는 건 당연했으니까.
다만-.
"괜찮네. 처음이 아니니까."
네발 마족의 얼굴이 다시금 구겨졌다.
[이번이 진짜 마지막이다.]
네발 마족이 한발 물러섰다.
****
'징한 놈이군.'
벨로그라임은 아드리안나의 검에 기절한 길버튼을 보며 진지하게 감탄했다.
벨로그라임에게도 이기지 못했던 길버튼이었다. 아드리안나의 상대가 될 리가 없었다. 하지만 길버튼은 포기하지 않았다. 아드리안나에게 계속 대결을 요청했다.
'참 훌륭한 기사다.'
벨로그라임은 시선을 돌렸다. 그 뒤에 굳게 닫힌 성문이 있었다.
'들어간 지 7일이나 되었거늘.'
아직도 나오지 않았다. 무슨 일이 생겼을 가능성이 컸다.
그때, 길버튼이 앞으로 엎어졌다. 톰이라는 병사가 길버튼을 익숙하게 챙겼다.
아드리안나가 벨로그라임에게 다가왔다. 아드리안나의 얼굴은 늘 그렇듯 무표정이었다.
어릴 때는 좀 웃었거늘-. 벨로그라임은 쓰게 웃었다.
"괜찮으십니까?"
"예, 적당한 운동은 필수입니다."
길버튼을 '적당한 운동'이라고 표현하는 것에 벨로그라임은 끌끌 웃었다.
아드리안나가 특유의 무심한 눈으로 마경 훈련소의 입구를 쳐다봤다. 길버튼과 검을 섞을 때가 아니면, 아드리안나는 문을 보고 있었다.
"들어가 보시겠습니까?"
벨로그라임은 슬쩍 물었다. 아드리안나가 바로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그가 그렇게 하겠다고 했으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겁니다."
아드리안나의 대답은 차분했다. 벨로그라임은 그 얼굴을 잠시 쳐다봤다. 어릴 때의 얼굴이 옅게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예의 무표정이 덧씌워졌다.
"무식한 북부 놈들보다는 나을 겁니다."
"예?"
"재수 없는 면이 있지만, 신사답고 잘 생기지 않았습니까?"
"아-. 제가 있을 곳은 전선입니다."
아드리안나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그 대답이 단단했다.
벨로그라임은 쓰게 웃었다.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오지랖이 심해졌다.
"아가씨."
오랜만에 불러보는 호칭이었다. 그에 아드리안나가 벨로그라임을 응시했다. 조금 놀란 얼굴이었다.
"괜찮은 사내입니다."
"예, 알고 있습니다."
대답과 반대로 아드리안나의 눈 끝이 내려갔다. 아드리안나가 고개를 돌렸다. 늘 그렇듯 무심한 표정이었다.
"······그게 문제입니다."
담담한 대답이었다. 순간 깨어진 아드리안나의 편린은 짙은 자기혐오였다.
자기혐오라니. 완벽한 외모와 북부에서 가장 뛰어난 명예를 지닌 이에게 가장 어울리지 않는 감정이었다.
다만, 벨로그라임은 이해할 수 있었다.
'어미를 불태우며 태어난 아이.'
아드리안나의 성질 때문이었다. 그건 그녀의 잘못이 아니었지만, 아드리안나는 그를 인정하지 않았다.
벨로그라임은 쓰게 웃으며 시선을 돌렸다.
그러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 갈라하드라면-.
'근거를 따박따박 들어서 주장하지 않을까.'
다른 건 몰라도 말재주 하나만큼은 뛰어난 놈이었으니까.
****
"진짜 진짜 마지막일세."
[나가라.]
"진짜로."
네발 마족은 갈라하드의 말을 듣지도 않고 손을 휘저었다.
이런-. 공간이 차곡차곡 무너졌다. 갈라하드가 적어뒀던 수식들이 흩어졌다.
"자네가 먼저 무한하다고 하지 않았나. 무한하다더니 이게 무슨 무한인가."
[나가!]
네발 마족의 언성이 처음으로 뾰족해졌다.
이내 시야가 점멸했다.
[황제를 죽여라.]
마지막으로 당부하듯 덧붙였다.
'쪼잔하군.'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렸다. 시야가 점차 돌아왔다.
정신이 한 번에 몰아쳤다. 갈라하드는 지그시 눈을 감고 정신의 간극을 차분하게 받았다.
정신 간섭에 너무 오래 노출되면, 정신이 붕괴할 가능성이 높은 건 사실이었다. 그에 갈라하드는 온전히 마법에 집중했다. 일부러 다른 생각을 전부 접었다.
그저 마법을 계산하고 분해하는 것에 온전히 집중했다. 마법은 흥미롭고 재밌었기에 집중하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그래도 좀 어지럽군.'
갈라하드는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몸 곳곳이 삐꺽거렸다. 생각보다 시간이 더 많이 지난 듯했다.
몸 상태는 좋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움직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마나 덕분에 마법사의 몸은 튼튼했다. 마나만 돌리면 충분했다.
수통을 꺼내서 입에 물었다. 마족의 피를 홀짝이자, 고통의 알이 연신 꿀렁거렸다. 마나가 가득 돌았다.
마나를 움직이자, 무거웠던 몸이 풀렸다. 갈라하드는 연초를 입에 물며 주변을 살폈다.
들어가기 전보다 재가 옅었다. 네발 마족이 이쪽의 마경을 쓴 듯했다.
'새로 채워야겠군.'
손가락을 튕겨 연초에 불을 붙였다. 레몬 향이 갈라하드의 정신을 두드렸다.
허기짐이 가득 올라왔고, 육체가 고통을 호소했지만, 갈라하드는 안에서 얻은 깨달음에 집중하는 중이었다.
목표했던 것들은 끝낸 상태였다. 공간 마법을 개정하는 것도, 그를 이용하는 것도 이론적으로 정립했다.
'뻐근하군.'
갈라하드는 작게 중얼거리며 헝클어진 머리를 넘겼다. 옷에 묻은 재를 털고 옷깃을 바로 세웠다.
'삼일 정도 지났나?'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정확히 가늠되지 않았다.
계속해서 마나를 돌렸다. 그때 멀리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문 쪽이었다.
'좀 기다리라니까. 성미가 급하군.'
갈라하드는 옷을 가다듬으며 문으로 향했다. 어차피 이곳의 볼일은 끝났다.
문에 가까이 가니 대화가 들렸다.
"아드리안나님도 걱정돼서 오신 거 아닙니까! 비키십쇼!"
'아드리안나가 여기에 왔어?'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렸다. 1대대에서 접견 지역을 지키고 있어야 할 아드리안나가 왜 여기에-?
"벌써 10일이나 지났습니다. 10일이나!"
길버튼의 외침에 갈라하드는 예상보다 시간이 많이 지났음을 깨달았다.
다소 이상한 일이었다. 마법사의 신체가 아무리 회복이 잘 된다고 한들, 10일이나 고립되어 있었는데 몸이 괜찮았다.
그 원인은 뻔했다.
'마경이라서-.'
마경에 들어설 때마다 고향에 온 것 같은 느낌을 괜히 받는 게 아니었다.
그때-.
"이런 도망치려는 줄 알았잖습니까."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웃음기가 옅게 섞인 목소리였다. 여우 가면이 고개를 까닥거리고 있었다.
"어떻게 부를까 고민 중이었는데, 알아서 나타나는군."
갈라하드는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허세는-. 여기 숨어 있으면 못 찾을 줄 알았어요? 아니면 또 잊혀진 존재라도 불러서 막을 속셈이었나?"
여우 가면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갈라하드가 마경 훈련소에 박혀 있던 걸 숨은 것이라 여긴 듯했다.
자세한 내막을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다만-.
'흥미를 끌 필요는 있지.'
'재미'가 말버릇인 놈이었다. 여우 가면이 물러난 것도 갈라하드의 지옥불이 놈의 흥미를 자극했기 때문이었다.
네발 마족을 다루는 방법이 '황제'였다면, 여우 가면은 '흥미'였다.
여우 가면의 흥미를 건드리는 방법은 간단했다.
갈라하드는 숨을 깊게 내쉬며 천천히 마나를 응집했다.
"개수작을 부리려고? 이러면 재미없는데."
여우 가면이 작게 투덜거렸다. 다만, 별다른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기다려주는 눈치였다.
갈라하드는 급하지 않게 천천히 수식을 정리했다.
실제로 써본 적은 없었지만, 이론은 끝낸 상황이었다. 갈라하드는 성공을 확신했다.
'뻐근하군.'
갈라하드는 고급 요리를 음미하듯 느긋하게 마나를 움직였다.
이론적으로는 완벽했지만, 그걸 펼치는 건 또 다른 재미였다.
'됐군.'
갈라하드는 여우 가면을 향해 양쪽 손가락을 동시에 튕겼다. 갈라하드의 앞에 얼음송곳이 생겼다.
"또 마법이야?"
여우 가면의 목소리에 뾰족한 짜증이 깃들었다. 이래서야 기다린 시간이 아깝잖아. 작게 혀를 찬 여우 가면이 눈에 힘을 주는 순간-.
얼음송곳이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에 여우 가면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 방금 얼음송곳이-.'
그때, 왼쪽에서 서늘함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린 여우 가면은 제 눈을 의심했다.
사라진 얼음송곳이 여우 가면의 귓불을 꿰뚫고 있었다.
여우 가면의 권능을 뚫지는 못했다.
다만, 결과적으로 여우 가면의 흥미를 가득 일으켰다.
'내 권능이잖아?'
갑자기 나타난 얼음송곳- 그건 여우 가면의 권능이었다. 아니, 마법이었다. 여우 가면의 권능에서 비롯된 마법.
'최초의 마법사였나?'
아니, 최초의 마법사는 분명 실패했다. 괜히 실패작이라고 부른 게 아니었다.
줄곧 이곳에 있었으니, 혼자 허무의 권능을 마법으로 만들었다는 이야기였다.
'지옥불을 자신이 만들었다는 것도-.'
여우 가면의 고개가 홱- 하고 돌아갔다.
갈라하드는 옅게 웃고 있었다.
"너······ 뭐야."
여우 가면의 진짜 목소리가 나왔다. 여우처럼 간드러지는 목소리였다.
그 경악이 깃든 물음에 갈라하드는-.
"특무대 대장, 갈라하드일세."
여유롭게 연초를 털었다.
"어때, 이제 좀 흥미가 생기나?"
느긋한 물음에 여우 가면은 '켕-!' 하고 웃었다.
흥미가 생기냐고? 아직 본인이 어떤 짓을 한 지 모르는 듯했다. 놈이 저지른 짓은 단순히 흥미 수준이 아니었다.
이건-.
"당신, 사랑스럽네요."
여우 가면은 입꼬리를 가득 올렸다. 놈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그에 여우 가면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배자는 내가 처리할게요."
지배자는 중요한 패였지만, 저 괴상한 놈보다는 아니었다.
'잔소리 좀 듣지 뭐.'
갈라하드는 그 모든 귀찮음을 더한 것보다 흥미로웠다.
그때, 갈라하드가 눈을 찡그렸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목소리가 묘하게 뾰족했다. 꼭 모욕이라도 받은 듯한 반응이었다.
꽤 격렬한 반응에 여우 가면은 괜히 조바심이 들었다.
이해를 잘못한 건가 싶어 설명하려는 순간-.
갈라하드가 연초로 여우 가면을 가리켰다.
그리고 경고하듯-.
"놈은 내 걸세."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고위 마족인 지배자가 자신의 것이라니! 아찔할 정도로 흥미로운 발언이었다. 여우 가면은 참지 못하고 '켕-!'하고 웃었다.
"그쪽 정말 사랑스럽네요."
"미안하지만, 나는 약혼자가 있어서. 마음도 안 받겠네."
단호한 거절에 여우 가면은 다시금 웃었다. 사내에게 거절 당하다니-. 생전 처음 겪는 일이었다.
"이래도요?"
여우 가면은 가면을 벗으며 물었다.
그 목소리에 자신감이 가득했다.
"아름답군."
갈라하드는 순순히 끄덕였다.
다만-.
"아드리안나 보다는 못생겼지만."
여우 가면의 고운 이마가 가득 구겨졌다.
****
"들어가야 합니다!"
"맞다, 이제 확인해볼 필요가 있네. 시간이 너무 지났다."
"형! 형!"
사방에서 요청이 쏟아졌다. 7대대 대장 벨로그라임까지 합세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오늘이 들어간 지 10 일째 되는 날이었으니까.
본래라면 들어 갔을 것이다.
다만-.
[그녀가 나를 안 믿었네.]
...참으로 믿기 힘든 사내였다.
"갈라하드 대장이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유가 있을 겁니다."
아드리안나는 검을 고쳐 잡으며 단단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들 한 발짝 물러섰다.
그때-.
끼이익. 성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그에 모두의 시선이 돌아갔다.
'드디어 나오셨구나.'
하마터면 고개가 홱- 하고 돌아갈 뻔했다. 아드리안나는 목에 힘을 주고 천천히 돌아봤다.
열린 문 너머에 예상대로 갈라하드가 있었다.
그런데 갈라하드의 모습이 평소와 달리 상당히 퀭했다. 눈 밑에 거뭇한 어둠이 가득했고, 볼도 바짝 말라 있었다.
문제는-.
갈라하드 옆에-.
"어머, 다들 쳐다보네. 맨 얼굴은 좀 민망한데."
알록달록한 화장을 한 미인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녀가 나를 안 믿었네.]
'·········!'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그 어느 때보다 격하게 흔들렸다.
97화 지원
'전부 있군.'
성문 앞에 아드리안나부터 특무대, 7대대 대장까지 전부 모여 있었다.
"······옆에는 누굽니까?"
길버튼이 갈라하드의 옆을 가리키며 물었다. 가면을 벗은 여우 가면이었다.
'지젤이라고 했나.'
여우 가면은 자신을 지젤이라고 소개했다. 누가 봐도 급하게 지어낸 이름이었지만, 갈라하드는 굳이 묻지 않았다.
알록달록하게 칠해진 여우 가면의 눈이 보기 좋은 호선을 그렸다.
예상대로 공간 마법은 여우 가면의 흥미를 끌었다. 아니, 단순히 끌어낸 정도가 아니었다. 여우 가면이 먼저 지배자를 치워주겠다고 제안할 정도였다.
지배자를 처리해준다는 건 상당한 호의겠지만, 갈라하드는 거절했다.
고위 마족을 직접 잡을 기회를 남에게 줄 생각은 없었다.
대신 갈라하드는 여우 가면에게 길 안내를 부탁했다.
여우 가면은 거절하지 않았다. 오히려 좋아했다.
"저는 지젤이예요."
여우 가면이 콧소리가 가득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길버튼과 7대대 대장, 아드리안나에게 포위된 상황인데, 여우 가면은 여유로웠다.
당연한 이야기였다.
'공간을 마음대로 다니는 고위 마족이니까.'
여우 가면은 어디에 묶일 존재가 아니었다.
그때, 길버튼이 손을 번쩍 들었다.
"말하게. 길버튼 경."
"그러면 여자랑 같이 10일이나 안에 있었던 겁니까?"
길버튼이 큰소리로 물었다. 그 투박한 물음에 갈라하드는 상황이 미묘하다는 걸 깨달았다.
갈라하드는 마경 훈련소에서 10일이나 있었다. 그런 갈라하드가 여인과 같이 나왔으니 이상하게 보일만 했다.
'확실히 이상해 보이겠군.'
상황을 되짚은 갈라하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해는 빨리 푸는 게 좋았다.
"아, 나오다가 만났네."
"······예?"
길버튼이 멍청하게 되물었다. 갈라하드는 혀를 차며 설명을 보충했다.
"나오는데 나를 기다리고 있더군. 그래서 같이 나왔네."
"그러니까 저 여인이 마경 훈련소 안쪽에 있었다는 겁니까?"
"길버튼 경, 몇 번이나 설명해야 하나."
갈라하드의 지적에 길버튼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아드리안나가 한 발짝 나섰다.
해명과 설정을 준비했지만, 정론인 아드리안나는 까다로웠다.
갈라하드는 가만히 아드리안나를 응시하며, 대답을 계산했다.
아드리안가가 가장 먼저 꺼낸 말은-.
"몸은 괜찮으십니까?"
걱정이었다.
예상과 다른 질문에 갈라하드는 잠시 멈췄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네, 오랜만에 마법 연구를 했을 뿐이네."
"아,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아드리안나가 성큼 나섰다. 그 검이 여우 가면을 향했다.
"교대로 앞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들어갈 수 있었습니까?"
자신을 겨눈 검에 여우 가면이 살짝 물러나며 눈을 찡그렸다. 줄곧 여유롭던 여우 가면이 보인 첫 반응이었다.
공간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고위 마족까지 긴장하게 만들다니-.
'확실히 마족의 천적이군.'
갈라하드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들이 교대로 경비를 섰는데, 어떻게 들어왔냐?
그 의심을 지울 방법은 간단했다.
"성에 몰래 들어올 수 있었던 건, 이 자가 마법사라서 일세."
마법사니까. 마법사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북부였다.
마법에 관해서 갈라하드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예상대로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이라서 가능하다는 겁니까?"
"마법은 물리적인 수단으로 막을 수 없네. 그 때문에 제국에서는 마도구를 이용한 보안이 필수지."
"아, 갈라하드 대장이 그렇다면 그런 것이겠죠."
작게 탄식한 아드리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본인이 모르는 영역이라 조심하는 듯했다. 현명한 여인이었다.
다만, 아드리안나의 검은 여전히 여우 가면을 겨누고 있었다.
"몰래 잠입했다는 사실은 변치 않습니다."
또다시 정론이었다.
이럴 때 필요한 건-.
"지배자의 위치를 안다는 군. 그래서 급하게 들어온 걸세. 북부에 지배자의 끄나풀이 있다고 여겨서 말일세."
더 자극적인 요소였다.
지배자라는 강렬한 단어에 분위기가 순식간에 바뀌었다. 관심이 지배자로 가득 쏠렸다.
다만, 아드리안나는 흔들리지 않았다.
"지배자의 행적을 알다니, 더욱 수상합니다."
아드리안나의 검에 흰색 오러가 잔뜩 일렁였다. 그를 본 여우 가면이 움찔하며 눈을 가늘게 떴다.
정론이었지만, 이미 준비한 부분이었다.
"제가 거기서 탈출했습니다. 도움을 청하려 했지만, 북부는 마법사의 이야기를 듣지 않으니까-. 갈라하드의 도움을 구하기 위해서 왔어요. 또 어디에 지배자의 끄나풀이 있을지도 모르고."
"······아, 그렇군요."
아드리안나의 오러가 서서히 작아졌다. 다만,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의문이 남을 게 있나?'
잠시 머뭇거리던 아드리안나가 이내 입을 열었다.
"······나오다가 만났다는 것도 진실입니까?"
뜬금없는 물음이었다. 그에 갈라하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알겠습니다."
아드리안나가 그제야 한 발짝 물러섰다.
"준비하게. 바로 출발할 테니까."
갈라하드는 연초를 입에 물며 시원하게 웃었다.
"피곤해 보이시는데, 쉬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괜찮네. 나는 마법사니까."
"마법사가 만능은 아닙니다."
아드리안나가 진지하게 말했다. 그에 갈라하드는 작게 웃었다.
"가면서 쉬겠네. 특무대 마차는 상당히 푹신하니까."
"예, 알겠습니다. 대공 전하에게 보고를 올려야 합니다."
"그건 안 되네. 또 도망칠 가능성이 있어. 이번에도 놓치면, 절대 잡을 수 없을 걸세."
"보고가 원칙입니다."
아드리안나가 또렷한 눈으로 갈라하드를 쳐다봤다.
그때, 사이로 여우 가면이 끼어들었다.
"올리면 도망칠 거예요. 대공 전하 주변에 귀가 많아서요."
아드리안나가 여우 가면을 보며 눈썹을 살짝 구겼다. 여우 가면도 물러서지 않았다.
둘의 대치에 묘한 긴장이 감돌았다.
갈라하드는 작게 손을 휘저어 둘의 관심을 끌었다.
"보고는 올릴 걸세. 단지 천천히 올리는 거지. 놈이 도망가지 못하게 딱 잡아둔 뒤에-. 사냥처럼."
갈라하드는 입꼬리를 가득 올렸다.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작게 흔들렸다.
"지배자는 고위 마족입니다. 간단하게 말할 상대가 아닙니다."
"뭐가 문제인가. 자네가 있는데. 나는 자네를 믿네."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작게 흔들렸다. 이내 아드리안나가 굳게 끄덕였다.
"그러면 저도 같이 움직이겠습니다."
"그러면 나만 지배자에게 보낼 생각이었나?"
"······예?"
"농담일세."
"준비 끝났습니다!!"
그때, 뒤에서 톰이 외쳤다. 그에 고개를 돌리니 마차가 준비되어 있었다. 마부석에 이미 길버튼이 앉아 있었다.
갈라하드는 연초를 털며 마차로 향했다. 톰이 마차 문을 열어줬다. 그러자 여우 가면이 냉큼 먼저 탔다.
"어머, 고마워요."
"별말씀을."
톰이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뒤로 물러났다. 갈라하드도 따라서 마차에 탔다.
여우 가면의 반대쪽에 앉자, 여우 가면이 슬쩍 일어나서 갈라하드의 오른쪽으로 옮겼다.
"정면에 앉게."
"왜요? 제 얼굴을 보는 게 좋아요?"
"그래야 목이 잘 보이니까."
갈라하드의 말에 여우 가면의 미간이 잠시 구겨졌다. 여우 가면이 눈웃음을 쳤다.
"농담도 짓궂어라."
"농담 같나."
여우 가면은 웃을 뿐, 움직이지 않았다. 애초에 다른 이의 말을 듣는 성격이 아닌 듯했다. 슬그머니 붙는 여우 가면에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찼다.
그때, 아드리안나가 마차에 탔다. 마차가 작게 끼익- 소리를 냈다.
갈라하드의 오른쪽에 앉은 여우 가면에 아드리안나가 잠시 멈췄다. 아드리안나가 갈라하드의 왼쪽에 앉았다.
"다른 이들도 타야 합니다."
아드리안나가 문을 가리켰다. 어디서 주웠는지 지팡이를 든 데미안이 타는 중이었다. 그때, 톰이 데미안을 붙잡았다.
"왜요? 여기 자리 많은데."
"하하, 저희는 마부석에서 가겠습니다."
"마부석은 불편한데요. 길버튼 냄새나요."
하하! 톰이 어색하게 웃으며 마차 문을 닫았다.
문이 닫히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갈라하드를 두고 양쪽에 여우 가면과 아드리안나가 앉은 모양새였다.
아드리안나가 혼자 움찔거렸다.
"특무대 대원들이 탈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마부석에는 보통 길버튼 경이 앉으니까요. 그렇게 되면 세 자리가 필요한데, 제가 이쪽에 앉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판단했습니다."
묻지도 않았는데, 아드리안나가 빠르게 말했다.
"음, 합리적이군."
"예."
아드리안나가 냉큼 끄덕였다.
"좁은 마부석에 왜 다 오는 거야!"
밖에서 들린 길버튼의 호통에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흔들렸다.
"좁군."
"아, 그러면 제가-."
"됐네."
"······예?"
갈라하드는 일어나려는 아드리안나를 말렸다.
"불편한 사람이 가야지."
갈라하드는 일어나서 둘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렇게 되자 여우 가면과 아드리안나가 나란히 앉고, 갈라하드 혼자 앉은 모양이 됐다.
졸지에 여우 가면과 앉게 된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흔들렸다. 여우 가면은 오히려 생글생글 웃으며 아드리안나를 살폈다.
묘한 긴장감이 돌았지만-.
정작 갈라하드는 이미 공간 마법에 관한 이론을 되새기는 것에 푹 빠져 있었다.
*
'피곤하셨구나.'
아드리안나는 눈을 감은 갈라하드를 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갈라하드는 흔들리는 마차에서도 정자세로 앉아 있었다. 등에 나무라도 묶은 것처럼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잘 수 있지. 아드리안나는 작게 감탄했다.
"잘 생겼죠?"
옆에서 짓궂은 목소리가 들렸다. 눈에 알록달록한 화장을 한 지젤이라는 여인이었다.
"잘 생기지 않았어요?"
무슨 의도를 지닌 질문인지 알 수 없지만, 아드리안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잘생겼습니다."
"······어머, 이렇게 순순히 인정할 줄은 몰랐는데요."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아드리안나의 물음에 지젤은 슬쩍 뒤로 몸을 기댔다. 자연스러운 행동이었지만, 아드리안나는 그 거리를 습관적으로 기억했다.
"약혼식 하신다고 들었어요. 축하해요."
짝짝. 지젤이 과장되게 박수쳤다. 아드리안나는 눈썹을 작게 구겼다.
"······안 합니다."
"어머, 왜요? 마음에 안 들어요?"
아드리안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지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면 내가 가져도 되나?"
"그건 안 됩니다."
아드리안나는 올라간 언성을 황급히 눌렀다.
"사람은 소유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러면 내가 약혼식을 할게요. 어차피 그쪽이 안 하니까."
"그게 무슨-."
"어머, 자기가 갖기는 싫고 남 주는 건 아깝고 뭐 그런 건가요?"
이어진 말에 아드리안나는 순간 반발하려다가 삼켰다. 이내 그 말을 천천히 되새겼다. 그리고 순순히 인정했다.
"예, 그런 것 같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아드리안나에 지젤은 눈을 찡그렸다. 여기서 인정한다고?
"그는 제국과 교류의 증거입니다. 더불어 북부에서 연달아 업적을 세운 인물입니다. 대공 전하의 인정을 받았으며, 부대를 이끄는 대장입니다. 영향력을 이렇게 빠르게 얻은 인물은 지금까지는 대공 전하가 유일했습니다."
아드리안나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제 북부에 필요한 존재입니다. 그가 북부에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다만, 저는······."
아드리안나는 마지막 말을 애써 삼켰다. 하마터면 뱉을 뻔했다.
이내 숨을 천천히 내쉬며 말을 이었다.
"제가 있을 곳은 전선입니다."
그까지 묶어둘 수 없었다.
말을 끝마친 아드리안나는 깨달았다.
"제가 참 이기적이군요."
아드리안나는 쓰게 웃었다.
원래 이렇게까지 할 생각 없었다. 제국이 정해준 약혼자였지만, 그냥 적당히 흉내만 낼 생각이었다.
그런데 어쩌다 이렇게 얽혀버렸다.
이건 전부-.
"그가 잘난 탓입니다."
아드리안나는 쓰게 웃었다.
지젤은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치 너무 재밌어서 못 참겠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설마.'
아드리안나는 다급하게 갈라하드를 살폈다.
갈라하드는 여전히 같은 자세로 자고 있었다.
아드리안나는 진심으로 안도했다,
"진짜 재밌네."
지젤이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
'6대대라.'
갈라하드는 마차에서 내리며 옷깃을 세웠다. 싸늘한 칼바람이 스쳐 갔다.
주변은 어두컴컴한 산이었다. 마차에 달린 위태로운 랜턴만이 어둠과 싸우고 있었다.
지배자는 6대대를 점거하고 있었다. 대공에게 머리가 뽑혀서 대장이 없는 부분을 공략한 듯했다.
'군림하는 척하더니 영악한 놈이었군.'
하긴 도시를 버리고 도망갈 때부터 그 싹수가 보였다.
"지배자가 6대대를 점거하고 있다면, 공격하는 건 무리입니다."
아드리안나가 진지하게 말했다. 갈라하드는 슬쩍 시선을 피하며 끄덕였다.
맞는 말이었다. 도시와 대대의 성은 달랐다. 북부의 성들은 마물과 마족을 막는 역할이었다. 수성에 최적화된 성이었다.
공성은 올바른 선택지가 아니었다.
"바로 쳐들어갑니까?"
"길버튼 경, 진정하게."
"마족 놈이 감히 부대를 점거했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습니까."
"일리가 있습니다. 지원을 요청해야 합니다."
아드리안나가 길버튼의 주장에 합세했다.
단순히 지배자와 전투라면, 이쪽의 인원으로 처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성을 점거하고 있다면 이야기가 달랐다.
"음, 지원이 필요하긴 하겠군."
갈라하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대공 전하에게 보고를 올리겠습니다."
"아, 내가 써도 되겠나?"
"예? 예."
"펜. 여기 있습니다."
"고맙네, 톰."
갈라하드는 종이에 냉큼 휘갈겼다. 그 펜에 막힘이 조금도 없었다. 그를 본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조금 내려갔다.
"······원래 편지를 빨리 쓰십니까?"
"음, 상황마다 다르네만. 자, 여기 있네."
아드리안나가 편지를 매에 묶었다. 매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참으로 시원했다.
"이제 올 때가 됐는데."
"뭐가 말입니까."
"지원 말일세."
"···예? 방금 보내시지 않으셨습니까?"
갈라하드의 물음에 아드리안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편지를 방금 보냈다. 아드리안나의 매가 아무리 빨라도, 어떻게 벌써 지원이 온다는 말인가.
그때, 조금 떨어진 곳에서 대화가 들렸다.
"꼭 여기까지 와야 합니까? 충분히 잡았잖습니까. 십 일 넘게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씻지도 못하고!"
"6대대에서 마법사들이 사라지고 있어. 내 눈은 속일 수 없지. 뭔가 있는 게 분명하네. 이거라면 승리할 수 있을 걸세. 그리고 펌킨, 자네는 땀 냄새도 향기로우니. 걱정하지 말게나."
"시발, 냄새 맡지 마십쇼."
"킁킁!"
"미친! 떨어져! 이 새끼야!"
틱틱거리는 여자 목소리와 어색하게 갈라하드의 말투를 흉내 내는 사내-.
'······퍼스트와 펌킨?'
갈라하드와 마법사 잡기라는 괴상한 내기를 했던 이들이었다.
'그들이 왜 여기에?'
갈라하드는 줄곧 자거나 일어나서 눈을 감고 뭔가를 계산한 게 전부였다. 갈라하드가 연락을 넣었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 저들이 여기서 나온다니-.
"아, 제법 쓸만한 이들이라서 말일세."
갈라하드가 연초를 입에 물며 웃었다.
"저들이 찾아올 걸 예상하신 겁니까?"
본부에서 연락이 내려오지 않았다. 아직 본부에서 6대대의 이변을 알아채지 못했을 가능성이 컸다.
그런데 외부인인 저들이 먼저 찾아내다니-.
"저들은 코가 아주 좋은 사냥개니까."
갈라하드가 자기 코를 톡톡 두들겼다.
"아, 본부는 오히려 눈치채기 어려울 걸세. 가장 경계할 상대니까. 더 신경을 썼겠지. 저들은 마법사를 추격했기에 온 것이고."
아드리안나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갈라하드가 덧붙였다.
"음, 어디서 갈라하드의 냄새가 나는군."
"그게 무슨 좆같은 소리입니···."
"쉿."
그때, 대화 소리가 뚝 끊겼다. 기척이 사라졌다. 마치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것처럼-. 아드리안나는 작게 놀랐다.
"나일세."
갈라하드가 연초를 흔들며 말했다.
"역시 갈라하드였군. 너도 눈치챘나?"
어느새 바로 앞까지 온 퍼스트가 웃으며 말했다.
그들의 몰골이 상당히 처참했다. 전에 봤을 때는 깔끔했는데, 지금은 거지꼴이었다.
"후후, 네놈도 열심이었나 보군."
퍼스트가 갈라하드를 보며 웃었다.
그 말처럼 갈라하드의 상태도 좋지 않았다.
다만, 내기 때문이 아니었다. 갈라하드는 마법사를 잡으러 돌아다닌 적이 없었다.
"자네와 내기 아닌가. 나도 최선을 다했네."
"후후, 이번에는 내 승리일 것이다. 내가 잡은 마법사만 서른이다."
"오, 대단하군."
퍼스트의 자신감 넘치는 말에 아드리안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갈라하드가 마경 훈련소에서 첫날에 잡은 마법사만 서른이 넘었다. 그들이 데려온 마법사까지 더하면 이미 끝난 승부였다.
다만, 갈라하드는 별 다른 말 없이 끄덕였다.
"갈라하드, 네가 있는 걸 보니, 여기서 승부가 판가름 나겠군."
퍼스트가 검을 빙글- 돌리며 진지하게 말했다. 그 눈에 부담스러운 열기가 가득했다.
"오랜만에 일 하나 같이 하겠나?"
"좋다, 경쟁자여."
퍼스트가 뜨거운 콧김을 뿜어댔다.
"오, 동료인가 보네요?"
그때, 여유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지젤이었다. 지젤을 본 퍼스트의 고개가 삐걱거렸다. 퍼스트가 지젤과 아드리안나를 번갈아봤다.
천천히 뜨거운 콧김을 뿜어댔다. 시동을 거는 퍼스트에 펌킨은 아찔함을 느꼈다.
황급히 퍼스트의 입을 막으려 했지만-.
"그래도 펌킨의 승모근이 제일이다! 펌킨! 승모근! 빨리!"
다급하게 재촉하는 퍼스트에-.
펌킨은 제 얼굴을 가렸다.
"봤는가? 저 우람한-."
제발-.
"승모근을!"
퍼스트가 호탕하게 웃었다.
진심이었다.
98화 견적
"표적은?"
퍼스트가 코를 벌렁거리며 물었다. 그 얼굴에 흥분한 기색이 만연했다.
"지배자라는 고위 마족일세."
"고위 마족? 흥미롭군."
"중앙에서 봤던 마족과 다를 걸세."
"다르다?"
"마족은 마나 농도가 짙을수록 강해지네. 여기로 비교하면······."
갈라하드는 손가락을 튕겼다. 투명한 마나 화살이 떠올랐다. 그 크기로 농도를 가늠했다.
"대략 네 배 정도 될 걸세."
"네 배라···. 음."
퍼스트가 침음성을 흘렸다. 그 목이 뿌드득거렸다. 옆에 있던 펌킨이 지레 놀라서 한 발짝 물러섰다.
"재밌겠군."
퍼스트가 뜨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 목소리에 진심이 가득했다. 그에 갈라하드는 끌끌 웃었다.
"마족은 각기 다른 권능을 지녔네. 지배자의 권능은 자기보다 약한 자를 다스리는 걸세."
"후후, 나는 해당되지 않겠군."
퍼스트가 자신감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럴 수 있겠군.'
기사가 가진 오러는 신념의 힘이었다.
오러를 일으킨다면, 지배자의 권능에 안 눌릴 가능성이 컸다. 퍼스트는 평범한 기사가 아닌 정보국의 기사였으니까.
그와 반대로 갈라하드는 마법사라서, 지배자의 권능에 더 취약했다.
'이제는 아니지만.'
갈라하드는 연초를 털며 설명을 이어갔다.
"지배자는 6대대를 점거하고 있네. 병사도 부리겠지. 마족도 가득 있을 걸세."
"그렇군. 음, 잠입으로 가야겠군."
"동의하네."
퍼스트도 유능한 요원인 터라, 확실히 대화가 빨랐다.
그때, 아드리안나가 한 발짝 끼어들었다.
"고위 마족의 감각은 극도로 예민합니다. 바로 눈치챌 겁니다."
타당한 지적이었다. 갈라하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드리안나의 말도 일리가 있네. 놈은 눈치가 상당히 빠르다네."
"이런, 조심해야겠군."
갈라하드와 퍼스트의 말이 빠르게 이어졌다. 그에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작게 내려갔다.
"고위 마족은 눈치가 빠른 정도가 아닙니다. 기척을 느끼고 반응할 겁니다. 포위당하여 오히려 더 위험할 겁니다."
아드리안나의 말은 늘 그렇듯 정론이었다.
다만-.
"······아직 모르나 보군?"
퍼스트가 아드리안나를 가리키면서 물었다. 정보국에 관해 말하지 않았냐는 물음이었다. 그에 갈라하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북부로 밀려났지만, 퇴직은 아닐세."
"하긴 감찰실은 귀찮지. 아, 잠입은 걱정하지 말게. 우리 전문이니까."
퍼스트의 단언에 아드리안나의 시선이 갈라하드에게 향했다. 갈라하드는 가만히 끄덕였다.
"괜찮을 걸세. 아. 마법과 오러에 민감하게 반응하네."
"그런가? 참고하겠네."
퍼스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둘의 대화가 빠르게 이어졌기에, 아드리안나는 끼어들 수 없었다.
퍼스트가 허리춤을 톡톡 두드렸다. 굵은 가죽 벨트가 찡그렁- 소리를 냈다.
짧은 정적 뒤에-.
"그러면-."
퍼스트가 운을 띄웠다.
그에 갈라하드는 연초를 털며 끄덕였다.
"견적부터."
둘의 입꼬리가 동시에 올라갔다.
****
"······견적이 뭡니까?"
아드리안나는 펌킨에게 물었다.
"아, 말 그대로 견적입니다. 임무에 들어가기 전에 상황과 동선을 살피는 겁니다."
"···상황과 동선?"
"예, 가령 이쪽의 경비는 몇인지, 또 그들의 상태와 배치, 무력을 파악하는 겁니다."
"아, 척후군요."
"비슷하지만, 좀 더 자세합니다."
아드리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북부에도 척후라는 개념이 있었다. 물론, 북부의 척후는 '첫 교전'이었다.
"둘이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갈라하드는 퍼스트만 데리고 6대대로 향했다. 아드리안나가 따라가려고 했지만, 갈라하드가 방해된다며 막았다.
'아무리 그래도 방해라니-.'
생전 처음 들어보는 단어였다. 아드리안나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갈라하드는 퍼스트와 사라졌다.
"아, 괜찮을 겁니다. 둘 다 업계 최고니까요. 물론, 그 차이가 좀 많이 크지만."
'······업계?'
참으로 묘한 단어였다. 아드리안나의 미간이 작게 구겨졌다.
아드리안나는 갈라하드가 전에 무슨 일을 했는지 알지 못했다. 예전에 황녀랑 얽혔으며, 아카데미의 최연소 졸업자라는 것, 앰버르탄 백작의 셋째 아들이라는 것 정도가 전부였다.
처음에는 궁금하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은-.
"······하여튼 갈라하드님만 끼면 눈이 돌아간다니까요. 지금도 저 바로 버리고 가는 거 봤습니까?"
펌킨의 물음에 아드리안나의 상념이 깨졌다.
"적당한 경쟁은 능력 향상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합니다."
그저 농담에 진심을 담아 대답하다니-. 펌킨은 찔끔 놀랐다. 펌킨은 금세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퍼스트의 집착은 적당한 수준이 아닙니다. 갈라하드 님의 결혼 이야기를 듣자마자, 저한테 청혼하는 걸 보셨어야 합니다."
펌킨은 괜히 너스레를 떨었다. 아드리안나는 여전히 무표정이었다. 표정이 전혀 없었다. 신이 정성껏 깎아 만든 조각 같았다.
"혼인은 중대사입니다. 경쟁심이 있다고 아무에게나 혼인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 겁니다. 마음에 있으니 했을 게 분명합니다."
아드리안나의 진지한 대답에 펌킨은 작게 경악했다. 이거 상당히 껄끄러운 성격이었다.
"크흠, 저희는 그런 사이가 아닙니다. 머리에 구멍이 뚫린 상태라서 그랬을 겁니다."
"혼인으로 농담을 하는 건 옳지 않습니다. 듣는 이를 우롱하는 겁니다."
왜 저렇게 몰입하는 건지-. 펌킨은 분위기를 풀고자 웃으며 농담했다.
"하하, 아드리안나님도 제법 당하셨나 봅니다."
"······."
아드리안나가 입을 꾹 다물었다. 더욱 불편해진 분위기에 펌킨은 황급히 웃었다.
"농담입니다. 죄송합니다."
"······예, 혼인으로 농담하지는 않을 겁니다."
진지하게 말하는 아드리안나에 펌킨은 눈을 찡그렸다.
자꾸 저런 말을 듣다 보니 괜히······.
'진짜 퍼스트가-?'
펌킨은 작게 중얼거렸다. 퍼스트는 펌킨의 첫 사수였다. 요원이 된 후부터 쭉 붙어 다녔고-. 요원은 늘 사선을 걷기에, 그런 생각은 해본 적도 없었다.
다만-.
[펌킨- 자네, 미혼이지?]
"지랄."
"······예?"
"아! 아닙니다. 끔찍한 상상이 떠올라서."
펌킨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퍼스트는 동료였다. 사수였고, 전우였다. 이성이 아니었다.
잠시 정적이 이어졌다. 아드리안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시 갈라하드 대장이 원래-."
아드리안나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펌킨은 작게 긴장했다.
정보국에 관한 건 기밀이었다. 괜히 떠벌렸다가 감찰실에서 나올 수도 있었다.
이어진 아드리안나의 말은 펌킨의 예상과 달랐다.
"도둑이었습니까?"
"······예?"
"잠입에 능하다. 업계 최고다. 견적을 낸다-. 도둑이 사용할 법한 단어 아닙니까? 갈라하드 대장이 그럴 것 같지는 않지만, 사정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펌킨은 아드리안나를 살폈다. 표정이 없어 무슨 생각인지 전혀 안 보였다.
'농담이겠지.'
농담은 농담으로 받아야지. 펌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도둑이라니. 이거 아드리안나님의 마음이라도 훔쳤습니까? 하하!"
농담을 던진 펌킨은 바로 깨달았다. 방금 던진 농담이 퍼스트나 할 법한 농담이었다는 걸-.
'퍼스트. 이 개새끼······.'
펌킨은 제 얼굴을 감싸 쥐었다.
정적이 한참이나 이어졌다. 펌킨은 고개를 깊게 숙였다.
"마음은 훔칠 수 없습니다."
"······예."
"훔쳐지지 않았습니다."
"예."
조금 뒤에 퍼스트와 갈라하드가 돌아왔다. 둘의 분위기가 미묘했다.
"성벽 위를 병사로 가득 채웠다. 권능으로 통제하는지, 작은 움직임도 없이 내내 서 있군. 작은 소리에도 반응하는데, 바로 마족이 나온다. 이 정도의 경계라니, 상당히 까다로운 놈이다."
퍼스트가 담담하게 말했다. 그 목소리에 장난기가 전혀 없었다.
"맞네, 그 사이에 마족도 있어. 마족은 마법에 민감하니, 바로 반응할 걸세."
"놈의 예상 전력은?"
"최소한 나와 아드리안나가 있어야 하네."
"잠입으로는 불가능하겠군."
갈라하드가 끄덕였다. 그에 퍼스트가 눈을 지그시 구겼다.
"정면으로 들어간다면?"
"저쪽의 수가 너무 많네. 그리고 설사 밀어내도-."
"도망칠 가능성이 있군."
"이미 도시에서 도망쳤던 놈일세. 처음이 어렵지, 두 번은 쉽네."
둘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퍼스트가 톡톡 손가락을 튕겼다. 갈라하드는 가만히 연초를 털었다.
퍼스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이번 임무는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
퍼스트가 담담하게 판단했다.
갈라하드와의 승부에 진심인 퍼스트였지만, 그렇다고 감정에 휩쓸려서 그릇된 판단을 내리는 이는 아니었다.
"동감일세. 생각보다 더 까다로운 놈이군."
갈라하드가 동조했다.
"예?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말 그대로일세. 길버튼 경."
갈라하드가 연초를 톡톡 털었다.
"치밀한 놈일세. 병사 사이에 마족까지 뒀어. 마법으로 병사를 건드리면 놈이 눈치채겠지. 그렇게 되면-."
갈라하드가 발로 아래에 쌓인 눈을 밀었다. 눈이 소복하게 뭉쳤다. 퍼스트가 말을 받았다.
"전체를 상대해야겠지. 설사 정면으로 밀어내도-."
"도망칠 수도 있고."
"이걸 전문 용어로-."
"칼자루가 상대에게 있다고 하지."
갈라하드가 뭉친 눈을 퍼스트가 찼다. 눈이 길게 뿌려졌다.
"성의 마족 전체를 상대하는 건 가장 피해야 하네. 설령 성공해도 지배자는 도망쳐서, 다른 대대로 가겠지. 아니면 마을이나."
"순찰 중인 병사를 습격할 가능성도 있네. 보니까 순찰이 닿지 않는 곳도 제법 있더군."
"결국, 임시방편이라는 걸세."
둘의 대화에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대공 전하에게 지원을 요청했으니, 그를 기다리는 건-."
"6대대의 이상도 눈치채지 못했네. 대공 주변에 귀를 막은 인물이 있겠지. 지원이 출발하는 순간, 지배자가 도망칠 걸세."
"내가 지배자라면 6대대의 병사를 전부 자결시킬 걸세. 흔적을 지우기 좋으니까."
"동의하네."
퍼스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와 전혀 다른 퍼스트의 분위기에 모두가 작게 놀랐다.
"이번 임무는 불가능하다. 실패할 수밖에 없어."
퍼스트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에 모두가 마른침을 삼켰다.
"두 번째 굴이 없다면."
퍼스트가 갈라하드를 보며 운을 띄웠다. 그 뻔뻔함에 갈라하드는 작게 웃었다.
모두의 시선이 갈라하드에게 쏠렸다. 갈라하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네, 방법이 하나 더 있지."
퍼스트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갈라하드는 다 핀 연초를 던졌다. 꽁초가 가루로 변해서 휘날렸다.
"지배자가 원하는 건 나일세. 정확히 말하자면, 나와 이 금색 봉이지."
갈라하드가 금색 봉을 빙글 돌렸다.
"초대장이 하나 있지 않나?"
갈라하드는 뒤쪽을 보며 물었다. 지젤이라는 여인이 짙게 웃으며 끄덕였다.
"내가 들어가서 지배자를 묶겠네. 지배자가 그대들의 침입을 눈치채지 못하도록-. 신호를 보내면 그때 잠입하게."
갈라하드의 말은 단조로웠다. 마치 타인의 작전을 설명하는 것처럼-.
"그렇군, 묶어둘 생각인가? 나쁘지 않은 계획이야. 아니, 오히려 좋군."
퍼스트가 작게 감탄했다. 이내 계산을 하는 듯 손가락을 튕겼다.
그때, 아드리안나가 성큼 앞으로 나섰다. 그 눈썹이 가득 구겨져 있었다.
"···혼자 들어가겠다는 소리입니까?"
"정확히 말하자면 둘일세."
"아,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아드리안나가 칼자루를 잡으며 끄덕였다.
다만, 갈라하드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건 아드리안나가 아니라-.
"어머, 기뻐라."
지젤이었다.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작게 구겨졌다. 도끼눈이 됐다.
"고위 마족을 상대하시겠다는 겁니까? 무모합니다. 위험합니다. 허락할 수 없습니다."
아드리안나가 빠르게 말했다. 그 목소리가 살짝 올라가 있었다.
"자네가 말하지 않았나. 대장끼리는 명령을 내리지 않는다고. 자네의 허락은 필요 없네."
이어진 갈라하드의 냉정한 말에 아드리안나의 입이 잠시 멈췄다.
"그리고 이 방법이 가장 가능성이 높네. 그렇지 않나. 퍼스트?"
"확실히 합리적이군. 자네가 고위 마족을 묶을 수만 있다면. 이쪽에서 잠입할 수도 있고-. 영특한 수일세."
퍼스트는 오히려 갈라하드의 계획을 칭찬했다. 그 평온한 대화에 아드리안나는 기묘함을 느꼈다.
정말 그 계획이 괜찮다고? 혼자서 고위 마족의 성을 들어가겠다는 게? 아무리 갈라하드라도 이건 아니었다.
"갈라하드 대장은 마법사입니다. 혼자서 고위 마족을 묶는 건 불가능합니다."
늘 평온했던 아드리안나의 목소리가 묘하게 높아졌다.
"여기는 마경이 아닐세. 놈을 상대할 방법은 이미 마련해뒀네."
갈라하드의 목소리는 늘 그렇듯 차분했다.
갈라하드는 이게 아무렇지 않은 일처럼 여유롭게 웃었다.
"그러니 나를 믿게."
아드리안나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참으로 치사한 사내였다.
"견적이 끝났군."
퍼스트의 입꼬리가 사납게 올라갔다.
****
'늦군.'
지배자는 눈을 찡그렸다. 약속한 기한은 오늘까지였다.
이상한 일이었다. 여우 가면이 괴상한 놈인 건 알았지만, 지배자는 놈의 조직과 얽힌 관계였다.
그쪽에서 지배자를 버릴 리가 없었다.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그럴 가능성이 가장 컸다. 여우 가면이 지배자를 배신할 리가 없었으니까.
'계획을 당겨야겠군.'
지배자는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 무저갱처럼 어두운 구멍이 있었다.
6대대와 가까웠던 헬오브에 도시를 세웠던 것도, 결국 다시 6대대에 돌아온 것도, 그 조직이 지배자를 도왔던 것도 전부 이것 때문이었다.
'경계의 구멍.'
준비가 완벽하게 끝난 건 아니었지만, 더는 미룰 수 없었다.
'감히 나를 내쫓아?'
지배자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이제 영역이 무너질 것이다.
그때, 지배자는 권능의 반작용을 느꼈다. 무슨 일이 일어난 듯했다. 권능에 집중하자, 상황이 보였다.
거기에 놈이 있었다.
감히 지배자의 지휘봉을 훔쳐 간 놈이 지친 기색으로 있었다. 그 옆에 여우 가면이 있었고-.
지배자는 속단하지 않았다. 다른 눈을 빌려 상황을 살폈다. 놈이 유일했다.
"배신은 아니었군."
지배자의 입꼬리가 가득 올라갔다.
지배자는 권능을 움직여 길을 열었다.
어떤 벌을 줄까 행복한 고민에 빠진 지배자는-.
놈의 입꼬리가 올라간 걸 보지 못했다.
99화 맛있다
대공은 늘 있는 자리에 있었다.
고개를 깊게 숙인 테오도르는 천천히 보고를 올렸다.
"명령하신 마탑 공사에 병사가 좀 더 필요합니다. 속도를 올려야 하면-."
"마탑?"
대공의 나지막한 물음에 테오도르는 고개를 더 깊이 숙였다.
"내가 마탑을 명령했다-?"
맹수의 울음 같은 거친 목소리에 참모진이 작게 떨었다. 테오도르는 무거운 입술을 필사적으로 움직였다.
"갈라하드 대장이 허락하셨다고-."
"음."
대공의 침음성은 맹수의 포효보다 거칠고 위협적이었다. 참모진이 바들바들 떨었다.
참모진 중 유약한 이들 몇의 숨이 거칠어질 때쯤, 대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만 늦었으면, 참모진 중 몇은 기절했을 것이다. 테오도르는 작게 안도했다.
창문으로 거대한 흰색 매가 들어왔다. 대공의 눈이 사나워졌다. 험악하게 얼굴을 구긴 거지만, 테오도르는 저게 대공의 미소라는 걸 알았다.
매가 대공에게 편지를 건넸다. 대공이 봉투를 조심스럽게 열었다.
대공의 눈이 가득 구겨졌다. 거친 숨이 새어 나왔다. 저건 미소가 아닌 분노였다.
'······분노?'
아드리안나의 편지에 대공 전하가 분노하다니? 분위기가 순식간에 무거워졌다. 참모진들은 다시 바들바들 떨었다.
그때, 대공의 입이 열렸다.
"전 부대에 명한다. 6대대로 집결한다."
전 부대에 명한다니-. 대공이 오랜만에 내리는 큰 명령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길래-. 의문이 들었지만, 참모진은 일단 움직였다.
대공이 편지를 그대로 구겼다. 제일 가까이에 있던 테오도르는 그 내용을 슬쩍 볼 수 있었다.
[6대대로 이사 온 고위 마족이 집들이를 한다고 합니다. 10일이나 지난 집들이라니······.]
테오도르의 입이 쩍 벌어졌다.
갈라하드의 것이 분명했다. 그가 아니라면, 누가 감히 대공에게 저런 미친 편지를 보낸다는 말인가.
'6대대에 고위 마족이라니-.'
6대대는 현재 대장이 공석이었다.
그에 다급히 움직이던 테오도르는 묘한 느낌을 받았다.
참모진 중 하나의 행동이 미묘했다.
어딘가-.
어색했다.
테오도르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
"정말 혼자 갈 생각이에요?"
도로 여우 가면을 쓴 지젤의 물음에 갈라하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왜요? 아, 저는 도와줄 생각 없어요."
"그게 가장 가능성이 높으니까. 그리고 도와달라고 한 적 없네."
여우 가면이 켕- 하고 웃었다. 신기한 웃음소리였다.
갈라하드는 연초를 꺼내 입에 물었다. 안쪽의 수통을 허리에 꽂았다. 언제든 꺼낼 수 있도록 준비했다.
"부탁 하나 하겠네."
"다시 말하지만, 도와줄 생각 없어요."
"알고 있네. 그게 더 재밌으니까-. 맞나?"
"어머, 들켰네."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차며 손가락을 튕겼다. 연초에 불이 붙었다. 레몬 향이 퍼졌다.
6대대의 성벽은 굵고 거대했다. 성벽 위에는 멍하니 있는 병사들이 가득했다. 병사들은 표정도, 작은 미동도 없었다.
마치 성벽의 일부처럼 보일 정도였다.
척-. 성벽 위의 무심한 눈동자들이 동시에 갈라하드를 향했다.
성벽에서 뭔가 뛰어내렸다. 퍽. 붉은 피가 가득 튀었다. 병사였다. 고개가 꺾인 병사가 갈라하드를 올려 봤다. 탁한 눈동자 뒤의 뭔가가 느껴졌다.
"손맛이 좋더군."
갈라하드는 그에 대고 금색 봉을 흔들었다. 병사의 입이 쩍 벌어졌다. 손가락을 튕겼다.
퍽-. 병사의 목에 얼음송곳이 깊게 박혔다. 병사의 눈이 그제야 감겼다.
끼익-.
성문이 끔찍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쌓인 눈이 밀려 흩어졌다. 이내 활짝 열린 성문 너머는 어두웠다.
그 어둠 속에 눈동자가 가득했다. 병사, 마족, 마물까지-. 다양한 눈들이 갈라하드를 응시했다.
'정면으로 갔으면 고생 좀 했겠군.'
수가 예상보다 더 많았다. 6대대를 꽤 깔끔하게 접수한 듯했다.
"그래서 부탁이 뭐예요?"
여우 가면이 성큼 다가왔다. 가까운데도 어떤 체취도 나지 않았다. 작은 향기도 없었다.
"아 별건 아닐세. 절대 나서지 말아주게나."
예상 못 했는지, 여우 가면의 고갯짓이 뚝 멈췄다.
여우 가면의 무력은 가늠할 수 없었다. 그녀의 성격이 까다로웠다. 변수였다. 통제할 수 없는 변수는 배제하는 게 원칙이었다.
이내 여우 가면이 고개를 끄덕였다.
"재밌네. 알았어요. 마나에 맹세할게요. 절대 안 나서겠다고."
여우 가면이 손을 까닥거리며 말했다. 그 주변으로 뭔가 일렁였다.
'마나의 맹세라.'
역사로 남은 이야기였다. 아주 오래전에는 마법사들이 마나에 대고 맹세를 했다고-.
마나보다 마석과 마도구에 더 의지하게 되며 사라진 전통이었다.
"자네, 나이가 많군."
여우 가면의 움직임이 뚝- 멈췄다. 그에 갈라하드는 끌끌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성에 들어서니 사방의 시선이 갈라하드를 따라서 움직였다. 갈라하드는 허리에 힘을 줘서 자세를 바로 했다.
"반갑네. 특무대 대장 갈라하드일세."
웃으며 금색 봉을 흔들자, 놈들의 눈이 동시에 구겨졌다.
'엄청난 장악력이군.'
정신 간섭은 아닐 것이다. 저 많은 수를 전부 정신 간섭하여 조종하는 건 아무리 놈이라도 불가능할 것이다. 더불어 놈들의 행동이 투박했다. 마치 인형처럼-.
주변을 가득 두른 놈들이 갈라졌다. 마족과 마물, 인간으로 구성된 괴상한 길이 만들어졌다. 걸으면 양쪽의 숨결이 닿을 정도로 조그만 길이었다.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차며 걸음을 옮겼다.
"그거 알아요?"
뒤쪽에서 여우 가면의 목소리가 들렸다. 갈라하드는 정면을 보며 반문했다.
"뭐를 말인가."
"마족은 감정이 없어요."
여우 가면이 뜬금없는 소리를 했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마족은 목에 얼음송곳을 꽂는 순간에도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목을 꺾기 직전에도 이를 드러내는 게 마족이었다.
"그런데 피가 진해지면···. 아, 그쪽 말로 고위 마족이 되면 감정이 하나 생겨요."
"감정이 생긴다?"
흥미로운 주제였지만, 갈라하드는 관심 없다는 듯 고개만 까닥거렸다. 실제로 주변을 살피느라 바빴다.
"네, 지배자는 소유욕이죠. 지배자는 마음에 들었다면 뭐든 가지고 싶어 해요. 인간도 마족도, 보물도."
"그렇군."
갈라하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째서 이렇게 집착하나 싶었는데, 소유욕 때문이었군.
'여우 가면은 흥미인가.'
여우 가면이 성큼 다가왔다. 고개를 까닥거리며 물었다.
"그쪽이 마족이 되면 무슨 감정이 남을 거 같아요?"
목소리에 들뜬 기색이 가득했다. 뭐가 저리 신난 건지-.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찼다.
"내가 마족이 될 일은 없네. 하등 쓸모없는 고민이지."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요?"
여우 가면이 속삭였다. 대답하지 않으면 안 물러날 듯했다.
'귀찮군.'
"내게 마지막으로 감정이 하나 남는다면-."
갈라하드의 고민은 짧았다.
어차피 하나밖에 없었기에-.
"학구열일 걸세."
확신이 가득 담긴 갈라하드의 대답에 여우 가면의 고개가 뚝- 멈췄다.
갈라하드는 신경 쓰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사방의 미약한 숨결이 계속 간질였다.
무표정의 인간과 마족으로 구성된 길이 안내한 곳은 다소 의외였다.
'내성이 아니었군.'
갈라하드는 놈이 내성에 있을 것이라 짐작했다. 내성이 더 수성에 용이하니까-.
그런데 안내된 곳은 오히려 외성 쪽이었다.
'창고인가?'
후문에 가깝고, 주변에 무너진 창고들이 둘러싼 곳이었다. 접근하기 쉬우면서 동시에 타인의 시선을 끌지 않는 그런 절묘한 위치였다.
꼭-.
'정보국 안가 같군.'
갈라하드의 눈이 깊어졌다. 이건 당장 구한 게 아니었다.
'6대대에서 뭔가를 시도하고 있었군.'
끼익.
창고의 문이 거칠게 열렸다. 문 안쪽이 무저갱처럼 어두웠다. 그 작은 문 사이에도 마족이 있었다. 절대 들어가고 싶지 않은 외관이었다.
'음-.'
갈라하드는 잠시 하늘을 쳐다보다가 문으로 향했다.
안쪽에는 진득한 어둠이 가득했다. 사방에서 미약한 숨소리가 동시에 들렸다. 방 전체가 숨을 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찝찝하군.'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차며 마나를 돌렸다. 두근! 두근! 두근! 고통의 알이 열심히 뛰었다. 상황의 심각성을 느꼈는지, 연신 마나를 뿜어댔다.
이내 농도 짙은 마나가 팽팽히 돌았다.
창고 안은 밖보다 밀도가 더 높았다. 마족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었다. 걸음마다 시선이 따라붙었다. 수많은 고개가 갈라하드를 따라서 움직였다.
"좀 부담스럽군."
갈라하드는 농담을 중얼거리며, 안으로 향했다.
그 창고의 끝에 사람이 가득 뭉쳐 있었다. 자세히 보니 사람을 조립하듯 구겨 넣어 만든 괴상한 의자였다.
중간이 휑한 왕관을 삐딱하게 쓴 어린 아이-.
"놈."
지배자가 갈라하드를 보며 짙게 웃었다.
동시에 방의 공기가 무거워졌다. 꼭 공기가 무거워진 것처럼 어깨를 가득 눌렀다. 실로 거대한 존재감이었다,
"높다."
동시에 중압감이 더 무거워졌다. 순간 갈라하드가 휘청일 정도였다. 무릎이 절로 굽혀졌다.
정신이 아닌 본능 자체가 놈에게 굴복하는 느낌이었다. 경악스러운 권능이었지만-.
'저번보다 덜하군.'
당연한 이야기였다. 마족이 가득 찬 창고였지만, 이곳은 마경이 아니었다.
지배자의 힘이 약해진 건 당연했다.
순간 정신 아래에서 뭔가 올라왔다. 푸른 숲내음이었다. 초록의 상쾌함이 갈라하드의 정신을 깨웠다.
'이거였군.'
네발 마족이 갈라하드의 이마를 만지면서 줬던 정체모를 힘이 분명했다.
마경이 아니라 약해진 지배자의 권능, 거기에 네발 마족이 준 정체 모를 힘까지-. 저절로 굽혀지던 무릎이 멈췄다.
'음-.'
지배자의 권능은 굴복시키는 힘이었다. 여우 가면의 말처럼 아래의 것들이 반항할 수 없을 때, 압도적인 위력을 발휘했다.
가령 지금의 6대대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다만, 지금은 조금 달랐다.
무릎이 조금 뻐근했지만, 갈라하드는 굴복하지 않았다. 지배자의 권능을 버틸 수 있었다.
더불어 지배자의 피를 담은 수통도 있었다.
'이러면 이야기가 달라지는데.'
그때-.
두근! 두근! 두근! 두근!
고통의 알이 거칠게 뛰기 시작했다. 고통의 알이 열기를 가득 뿜어댔다. 거친 충동이 그대로 넘어왔다.
고통의 알은 철저히 강약약강이었다.
그 고통의 알이 저런 반응을 보인다는 건-.
'할만하다는 거군.'
갈라하드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그때, 지배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갈라하드는 천천히 숙였다.
*
"건방진 것,"
지배자는 납작 엎드린 갈라하드를 보며 입꼬리를 비틀었다.
힘을 꽤 집중했는데도, 놈은 제법 버텼다. 솔직히 조금 놀랐다.
다만, 그것도 순간이었다.
지배자가 권능을 집중하자, 놈은 그대로 허물어졌다.
결국, 놈은 지배자를 향해 경배하듯 엎드렸다.
기사가 아닌 놈이었다. 심지어 놈은 마법사였다. 마족의 하수인인 놈이 어찌 주인인 지배자를 거역하겠는가.
지배자가 경계한 건 놈이 아니었다.
놈의 뒤에서 나왔던 잊힌 존재였다. 구렁텅이에 있어야 할 잊힌 존재가 저번처럼 나타나면 껄끄러웠다. 그에 지배자는 마경을 펼치지 않았다.
애초에 마법사인 놈 하나 처리하는데, 마경은 필요 없었다.
"늦었다."
지배자는 놈의 뒤에 있는 여우 가면을 보며 읊조렸다.
"늦었다니? 섭섭하네요. 정확히 10일이잖아요?"
"쯧, 짐이 늦었다면 늦은 것이다. 하마터면 계획을 실행할 뻔했어."
순간 공기가 가라앉았다. 여우 가면이 지배자를 응시했다.
"설마 연 거 아니죠?"
여우 가면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에 지배자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네놈이 조금만 더 늦었다면 열렸겠지."
지배자는 여우 가면을 지그시 쳐다봤다. 전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감히 자신에게 뻗대다니-.
"하아, 그래도 다행이네요. 안 열어서."
여우 가면이 양손을 들며 한 걸음 물러섰다. 그에 지배자는 입꼬리를 올렸다.
지배자의 시선이 다시 놈에게 향했다. 지배자의 앞으로 무표정의 사람들이 납작 엎드렸다. 지배자는 그를 계단처럼 밟으며 나아갔다.
"감히 짐의 지휘봉을 가져가? 빌어먹을 배신자의 제자라 그런지 행실이 비슷하구나."
놈에게서 빌어먹을 배신자의 냄새가 났지만, 제자라는 말을 완전히 믿지 않았다. 인간은 늘 거짓을 입에 담는 영악한 존재였으니까.
하지만 잊힌 존재가 놈을 도우러 나온 순간, 지배자는 확신했다.
놈이 빌어먹을 배신자의 제자라는 걸.
"빌어먹을 배신자에게 아주 제대로 배웠구나. 아주 제대로 배웠어."
지배자는 놈을 가만히 내려봤다. 놈은 납작 엎드려서 미동도 하지 않았다.
"내가 왜 널 살려서 데리고 오라고 한 줄 아느냐?"
지배자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너는 미끼다. 감히 내 보석을 가져간 배신자를 불러올 미끼."
지배자는 왕관의 빈 부분을 매만졌다. 원래 보석이 박혀 있어야 할 곳이 허전했다. 얼마나 오랜 기간 찾았는가.
지배자의 입꼬리가 사납게 비틀렸다. 놈을 통해서 빌어먹을 배신자를 불러내서, 왕관을 다시 채울 것이다.
뺏긴 힘과 영광을 되찾을 시간이었다.
"제자는 제자구나. 똑같이 내 물건을 탐하다니."
지배자는 놈이 내민 지휘봉을 잡았다. 서늘한 촉감에 지배자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감히 열쇠를 가져가다니. 경험할 수 있는 모든 고통을 벌로 내리겠다. 짐의 벌을 받을 수 있다는 것에 기뻐하거라."
지휘봉을 당기던 지배자는 눈을 찡그렸다. 지휘봉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 놈의 손이 지휘봉의 끝을 잡고 있었다.
'권능이 너무 강했나.'
지배자는 작게 혀를 찼다.
권능을 너무 세게 사용한 듯했다. 지배자의 권능은 고귀하여 영역적이기에 세심한 조절이 힘들었다.
권능을 줄이고 다시 지휘봉을 당겼는데-.
'왜 안 움직이지?'
지배자의 미간이 구겨졌다.
"놓거라."
그때, 놈이 고개를 들었다. 실핏줄이 전부 터져 눈이 붉었다. 입가에 붉은 피가 뚝뚝- 흘렀다. 비릿한 피 냄새가 가득 풍겼다.
그건 지배자의 피였다.
'이게 무슨-.'
놈이 손가락을 튕겼다.
지배자는 눈을 찡그렸다.
고작 마법이 저런 무게를 지녔다니-.
놈의 앞에 서늘한 얼음창이 떠올랐다. 인간의 마법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강렬하고 날카로웠다.
다만, 그래봤자 마법이었다.
지배자가 맞아줄 리가 없었다.
그 순간-.
'위험하다.'
지배자는 본능적으로 몸을 비틀었다.
서늘한 얼음이 지배자의 목을 뚫었다. 지배자의 목이 반쯤 뜯겼다. 피가 가득 뿌려졌다. 지배자는 다급하게 머리를 잡았다.
'무슨-.'
지배자는 황급히 뒤로 움직였다. 지배자의 어깨에 굵직한 얼음이 꽂혔다.
그제야 지배자는 상황을 깨달았다.
놈의 마법은-.
'공간을 넘는다.'
사방에서 얼음이 튀어나왔다. 어깨, 발, 허벅지, 허리-.
얼음이 곳곳에 박혔다.
공간을 넘는 마법이라니-. 확실히 까다로웠지만, 지배자는 고위 마족이었다.
지배자는 찰나의 마나를 감지하여 몸을 비틀었다.
뾰족한 얼음이 지배자의 목을 아슬아슬하게 스쳤다.
순간 뚜렷한 위기감이 올라왔다. 지배자는 망설임 없이 권능을 당겼다.
수하 수십을 포기하고 권능을 집중했다.
언제 만들었는지 모를, 굵직한 얼음 창이 정확히 심장을 겨누고 있었다.
그제야 지배자는 놈이 자신을 유도했음을 깨달았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첨예한 계산이었다.
이건 피할 수 없었다.
가슴에 얼음 창이 길게 꽂혔다.
지배자의 신형이 거칠게 흔들렸다.
다만, 지배자는 쓰러지지 않았다.
"내가 권능을 꺼내게 만들다니-. 대단하구나."
얼마 만에 꺼낸 권능인가.
지배자가 후퇴할 경로까지 예측하여, 비장의 수를 준비했다니-. 확실히 날카로운 공격이었다.
방금의 것으로 팔십의 수하를 버렸을 정도였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결국, 놈의 노림수는 실패했다.
"회심의 일격이었는데, 아쉽겠군."
지배자는 입꼬리를 올리며 놈을 살폈다.
놈의 절망을 음미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놈의 반응이 지배자의 예상과 달랐다.
놈은 지배자를 보며-.
"자네, 맛있군."
입가에 묻은 피를 핥았다.
*
'지배자를 혼자 묶겠다니-.'
아드리안나는 저 멀리 성을 보며 눈을 찡그렸다.
갈라하드가 대단한 마법사인 건 알지만, 결국 마법사였다. 그 상대는 고위 마족인 지배자였다. 갈라하드가 지배자를 묶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저번에는 다른 마족 덕분에 탈출할 수 있었다. 아드리안나는 눈을 찡그렸다. 당시에 성질이 너무 날뛰었던 탓에 기억이 온전하지 못했다.
분명 반대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너무 무모했지만-.
[나를 믿게나.]
아드리안나는 입술을 씹었다.
"괜찮을 거다."
그때, 옆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퍼스트였다. 아드리안나는 눈썹을 작게 구겼다.
"상대는 고위 마족입니다. 어떻게 괜찮을 수 있습니까?"
"지배자라는 놈과 이미 한 번 마주한 것 아닌가?"
"······맞습니다."
"갈라하드는 과감하지만, 무모한 사내는 아닐세."
퍼스트가 손가락을 까닥거리며 말했다.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내려갔다.
"그가 된다고 했으면, 되는 걸세."
퍼스트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가득했다. 그 옆에 있던 펌킨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우리가 맡은 것이나 제대로 하면 되는 거고."
그 괴상할 정도로 단단한 확신에 아드리안나는 눈썹을 구겼다.
여기도, 저기도, 그저 믿으라는 말뿐이었다.
'답답해.'
아드리안나는 기다리는 이가 아니었다.
선두에서 앞장 서는 기사였지-.
다만, 이미 갈라하드가 들어간 뒤였다.
이쪽에서 할 수 있는 건 믿는 것밖에 없었다.
문제는-.
"······늦는군."
아무리 기다려도 신호가 없었다.
100화 술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