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novel

13

극복법 -4-

혈왕은 꼿꼿한 인상의 중년 남자였다.

보이는 것만 그렇지, 실제로는 나이가 더 많다.

이미 여든을 넘겼다지?

나는 혈왕에게 정중히 인사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김전사입니다."

"반갑네. 첸웨이일세. 아까 잠깐 봤었지? 연맹 총재직을 맡고 있네."

"총재님의 헌신은 세계인이 모두 알고 있지요."

"허허. 말이라도 고맙네. 자, 앉게나."

연맹 총재실은 게임에서와 달랐다.

게임에서는 황금과 보석, 마법진이 온통 치덕치덕 발라져 있었다면 여기는 아무것도 없다.

그 흔한 기후조절 마법진은커녕 청결 마법진, 마력 안정 마법진도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에어컨이나 청소 드론도 없이 탁자 하나에 의자 몇 개, 옷걸이 두 개가 전부.

'심하네.'

소파도 없어서 불편한 나무 의자를 끌어당겨 앉아야 했다.

내가 총재실을 훑어보자 혈왕이 담담하게 웃는다.

"미력하게나마 사부님 서재를 흉내 내 보았네. 사부님께서는 헛된 욕망을 절제하는 것이야말로 무의 길을 걷는 첩경이라고 보셨거든."

사부.

그 단어가 나오자 내 자세가 저절로 경건해진다.

"천마님 말씀이십니까?"

"그래. 천마. 고금제일인이자 무가 하늘에 닿으신 분. 내 평생 그분의 발뒤꿈치는커녕 그림자 끝에도 닿지 못하고 있지만, 마음만은 사부님을 조금이나마 닮고자 노력하고 있다네."

9레벨은 아케인 서울에서도 드물다.

딱 4명이 전부.

신들이 살아 있던 중세시대까지는 심심찮게 나왔다고 하지만 신멸 전쟁으로 많은 신이 죽고 봉인된 지금은 극도로 희귀해졌다고.

나중에 에피소드가 진행되면서 다시 흔해지겠지만.

"천마님에 대해서는 많이 들었습니다."

"그래? 어떤 걸 들었나?"

"음, 신화 같은 이야기지요. 마왕과 단신으로 싸워 이겼다거나 악신의 화신을 물리쳤다는 정도?"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네."

"예. 당시 기록이 확실하게 있으니까요. 가끔 다시 보곤 하는데 그때마다 감탄하곤 합니다."

"허허허. 그 허접한 영상 기록 말인가? 그걸로는 사부님의 위대함을 헤진 터럭만큼도 표현하지 못한다네."

"총재님께서는 직접 보신 겁니까?"

"암. 직접 보았지. 그때의 신화적인 전투는 지금도 눈만 감으면 선명하게 떠오르네."

나이가 많긴 많네.

겉모습은 아저씬데 말투는 완전히 할아버지 말투다.

뜻밖에도 한국어가 유창해서 그 뉘앙스를 모두 알아들을 수 있었다.

혈왕이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쉬운 것은 사부님께서 폐관 수련 중이라 나도 수십 년째 얼굴을 못 뵈었다는 것이지. 지금도 활동 중이시면 아침마다 문후드리고 깨달음의 한 조각이라도 얻어들을 수 있었을 터인데. 후우, 나나 대사형, 사저가 마음에 들지 않아 그러신 거겠지. 우리 세 사형제가 나름대로 기재 소리를 들었지만 사부님의 눈에 차지는 않으셨을 테니."

신군, 마후, 혈왕.

셋 다 SSR 등급이고 NPC로는 8레벨.

성녀와 동급의 괴물들이지만 천마에 비하면 손색이 있지.

원탑이잖아. 혼자 0티어고.

"삼존께서 든든하게 뒤를 받쳐주고 계시니 천마님도 폐관에 드신 것 아니겠습니까?"

"아니야. 사부님은 완전한 신의 영역, 10레벨에 도달하시기 위해 폐관하신 거라네. 우리랑은 상관없이."

"10레벨······"

"어쩌면 사부님께선 이미 우화등선하신 것일지도 모르지."

"설마요."

"진짜라네. 그 증거로 출입구에 놔둔 벽곡단과 넥타르가 22년째 사라지질 않고 있어."

어? 뭐라고?

천마가 우화등선했어?

내가 놀란 눈으로 혈왕을 보자 혈왕이 손을 하나 들어보인다.

"우화등선하셨을지도 모른다고 했지, 우화등선하셨다고는 안 했네."

"벽곡단과 넥타르를 안 드시고 계신다면서요?"

"이미 인간의 탈은 벗으셨을 테니까. 하지만 존재감과 마력 파장만큼은 고스란히 느껴진다네. 천산 초입만 가도 느낄 수 있지."

"어, 그럼······"

"천산 비밀 연무관에 계신 것이 확실해. 이론상 육체에 모든 힘과 마력을 남겨놓고 영혼만 떠나셨다면 지금 현상이 설명되지만 설마 그럴 리가 있나? 옛 기록을 살펴보면 우화등선하거나 승천하신 분들은 대개 육체와 함께 떠나시거나 육체를 증발시키면서 하늘에 오르셨네. 지금은 우화등선의 전 단계일 확률이 높아."

어쩐지.

게임에서 4대 초인이 등장하지 않는 이유가 있었다.

천마, 리바이어던, 멀린, 지브릴.

만나서 대화할 수 없고 오로지 뽑기로만 볼 수 있는 캐릭터.

아마 천마처럼 폐관 수련 중이거나 그에 준하는 처지에 놓여 있을 것이다.

"아쉽습니다. 언젠가 천마님께 가르침을 받고 싶었는데요."

"그거야말로 모든 전사들의 꿈이지. 연맹의 수호자들도 천마님의 가르침 한 조각을 전해 받기 위해 목숨을 건다네."

천마한테 천마신공을 전승받으면 얼마나 좋을까?

최강의 특성이자 최고의 특성인 천마신공.

3대 검법보다도 훨씬 그 격이 높다.

이유는 간단하다.

천마신공은 궁극의 공격기이자 방어기인 동시에 마력 연공법이며 이동기이기 때문이다.

천마파천장 더하기 천마강벽 더하기 천마심법 더하기 천마군림보가 천마신공이라고 보면 되겠다.

3대 검법이 공격기와 마력 연공법을 포함하는 것과 비교해도 격이 달랐다.

'3대 검법만 해도 사긴데, 미쳤지. 아주.'

혈왕이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사부님께서도 자네를 보면 좋아했을 텐데 아쉽군."

"말씀이라도 감사합니다."

"아니야. 자네는 묘하게 사부님과 기질이 닮았어."

"예? 제가요?"

"그래. 말로 설명은 못 하겠군. 성격도 외모도 확실히 다른데 뭔가 비슷해. 자네 얼굴이 조금만 사부님을 닮았어도 친아들이라고 생각했을 걸세."

"영광입니다. 이런 말씀은 처음 들어봅니다."

"정말이야. 사부님께서 폐관 중만 아니셨으면 자넬 데려가서 막내 사제로 추천하고 싶을 정도야."

뭐지?

장난치는 건가?

눈을 보니 장난이 아니다.

혈왕은 진심 어린 얼굴로 말하고 있었다.

8레벨이라 내 특성 전환을 알아본 걸까?

내가 비록 어마어마한 속도로 레벨을 올리긴 했지만 이 정도는 아예 선례가 없는 것도 아니라고.

서우진만 해도 신열을 극복하자마자 5레벨이 됐잖아.

'조심해야겠어.'

성녀도 그렇고 마탑주도 그렇고 군단장도 그렇고 8레벨이 되면 나한테 뭐가 보이는 모양.

나는 그저 고개만 푸욱 수그렸다.

"말씀 감사합니다. 대대손손 영광으로 알겠습니다."

"흠, 그래서 말인데 자네 내 제자가 될 생각은 없나?"

"예에?"

"천마신공은 대사형에게 갔으니 못 가르쳐주네만 내 혈천신마권도 만만한 무공은 아니라네."

혈천신마권도 나쁘지 않지.

격투술에선 1티어.

3대 검법 바로 아래 단계를 차지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말이다······

격투술 최강인 [가루다]와 비교하면 확실히 부족하다.

굳이 따지자면 동부군 군단장의 묵호무적검법과 동급.

군단장의 제안도 뿌리치고 걸어 나온 나다.

그런데 혈천신마권을 배우라고?

나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말입니다. 정말로 큰 영광이고 감사한 말씀이지만 총재님의 말씀에 따르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어째서? 내가 자네 사부로 부족한가?"

"그럴 리가요. 하지만······"

나는 보란 듯이 허리에 찬 검을 툭툭 쳤다.

바로 묵호검.

혈왕이 눈썹 하나를 추어올렸다.

"그게 왜? 늙은이가 나한테 뭐라고 할 것 같나?"

"그래도 군단장님의 체면을 정면으로 뭉개는 일 아닙니까. 총재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군단장님은 대한민국에서 살아 있는 전설이자 역사적 위인입니다. 그런 분의 얼굴에 먹칠할 수는 없습니다."

독립 영웅이자 전쟁 영웅.

초창기 대한민국을 떠받쳤던 거인.

군단장이 한국에서 차지하는 위상은 천마 본인이라면 모르겠으나 그 제자와 비교할 수는 없다.

혈왕이 혀를 찼다.

"쯧. 간만에 똘똘한 제자감을 발견했나 했더니······ 늙은이 하나 때문에 망했군, 망했어!"

"죄송합니다."

"에잉. 됐네."

3대 검법 중 2개를 이미 확보했다.

그런 나한테 혈천신마권으로 만족하라는 건 있을 수가 없지.

천마신공을 주겠다고 하면 얼른 절부터 했겠지만.

'감사합니다. 군단장님.'

묵호검 아니었으면 꼼짝 못 하고 혈왕 제자로 들어갈 뻔했다.

이게 그거냐?

마탑주가 감탄하고 군단장이 경악하며 총재가 원한다는 그거?

"이거나 받게."

혈왕이 패 하나를 꺼내 던졌다.

거무튀튀하고 굉장히 무거운 직사각형 패.

나는 패를 받자마자 눈을 크게 떴다.

[천마군림 만마앙복]

만년한철로 만든 패에 많이 보던 한자가 적혀 있어서.

무협 소설 단골 멘트.

약간의 바리에이션은 있어도 크게 벗어나질 않는다.

"천마패일세."

"이, 이걸 왜 저한테 주십니까?"

"내 마음의 표시라네. 오로지 사부님과 우리 사형제, 직계 사손들만 사용할 수 있는 패지. 언제든 필요하면 쓰게나."

대신······ 알지?

혈왕이 흐릿하게 웃었다.

겉으로 보기엔 무덤덤해 보이는 얼굴.

그러나 무감정한 눈 깊숙이, 나는 어떤 감정을 하나 읽어냈다.

경쟁심이었다.

아마도 동부군 군단장을 향할 감정.

젊었을 때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러는 걸까?

나이 차이도 둘이 많이 나면서.

군단장은 백 살이 넘고, 혈왕은 여든 살을 조금 넘었잖아.

거의 스무 살 차이가 나는데······

"그만 가보게나. 다음에 볼 때는 사부님이라고 부르면 좋겠군."

"강녕하십시오."

인사를 하고 물러나왔다.

나름 편하게 대한다고 했는데 긴장했던 걸까?

등이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후우우!"

수호자 연맹 로비까지 나와서 한숨을 쉬자 따라왔던 시그문드가 씩 웃는다.

"고생하셨습니다. 쉽지 않지요?"

"이상하게 긴장되는 분이네요."

"초월자 아닙니까, 초월자. 우리 같은 평범한 초인과는 격이 다르지요."

"시그문드 씨도 5레벨인 시점에서 평범하다고는 못 합니다만······"

"여기서 5레벨이면 평범한 겁니다. 6레벨도 목에 힘을 못 줘요. 7레벨은 되어야 얼굴 쳐들고 다닙니다."

"용담호혈이 따로 없네요."

"어······ 드래곤 폰드 타이거 케이브요?"

내 번역이 이상했나?

직역하니까 이상하게 들리긴 한다.

내가 영미권 속담이랑 격언을 알아야 말이지.

"자, 자, 미스터 김 수호자 됐으니 축제를 벌입시다!"

"또요?"

"어허. 당연한 거 아닙니까? 지금 연맹 밖에 수호자들이 떼로 몰려와 있어요. 만인의 은인 아닙니까! 만인의 은인! 곧 도시 축제가 시작될 겁니다."

"도시 축제는 또 뭐에요?"

"말 그대로죠. 가족 축제나 형제단 축제로는 모자랍니다. 어쩌면 매년 오늘 미스터 김과 성흔 극복법을 기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건 너무 오버하는 거 아니냐?

성흔 전부, 혹은 중급 마신까지 극복법을 알려줬다면 그럴 수 있겠지만 겨우 6종 알려주고 땡이었잖아.

그 6종에서 규칙을 발견하고 108좌 마신 전부에게 확장시킨다면 가능하겠지만······

퍼엉! 펑펑!

갑자기 바깥에서 폭죽 터지는 소리가 났다.

시그문드가 엉덩이를 들썩이기 시작했다.

"아니 나만 빼놓고 시작해? 이 인간들이! 어서 갑시다! 어서!"

"자, 잠깐만요. 숨만 좀 돌리고······"

"가면서 숨 돌리면 돼!"

노르드 전사의 추진력에는 당할 수가 없었다.

시그문드에게 이끌려 밖으로 나왔다.

바깥은 이미 놀자판.

도시 전체가 들썩이고 있었다.

구아앙! 구아아앙!

20미터짜리 뿔피리를 혼자 들고 불어대는 초인.

쾅쾅! 콰콰쾅!

초거대 마력 역장 북을 마구 두들기는 초인.

찌이잉! 찌르르르!

수백 미터 마천루에 마력실을 걸어놓고 바이올린 켜듯이 신검으로 연주하는 초인.

온 도시가 춤판이었다.

다들 한 손에는 진은 술잔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커다란 고깃덩이를 들고 덩실덩실 춤을 추고 있었다.

고래고래 노래를 빙자한 고함을 지르는 것은 덤.

웃통 벗은 노르드 전사와 치마 갑옷 입은 스파르타 전사가 어깨동무를 하고 캉캉춤을 춘다.

사이보그 흑인 강화병이 브레이크 댄스를 추는 앞에서 마술사 복장을 한 마법사가 타로 카드를 사방으로 흩뿌리고, 카드가 꽂힐 때마다 화려한 마법이 발동하여 두 눈을 사로잡았다.

사제들이라고 다를 건 없다. 사제복을 거꾸로 입고 물구나무를 서서는 꽥꽥 대며 합창하고 있었다.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일.

"이, 이게 도대체······"

"수호자님은 처음 보시겠습니다."

시그문드가 환하게 웃었다.

"도시 전체가 축하할 일이 있으면 이런 축제가 벌어지곤 합니다. 정말로 오랜만이네요. 30년 전, 천마님께서 마지막으로 미궁 도시를 방문했을 때 이후로는 특별히 축하할 일이 없었는데."

"조금 당황스럽긴 하네요."

"하하하! 인생에 한 번 볼까 말까 한 축제입니다. 어서 가죠!"

이거 축제 맞아?

광란의 도가니 아니야?

하지만 나 또한 이내 광분하는 군중들 틈에 섞이게 되었다.

"미스터 김! 고맙습니다!"

"정말 감사해요!"

"덕분에 우리 딸이 살았어요!"

"미스터 김 아니었으면 오빠가 죽었을 거예요!"

순수하게 감사를 표하는, 또 전신으로 고맙다고 방방 뛰는 사람들 덕분에.

술을 죽기 직전까지 마셔야 했지만 괜찮았다.

[불굴][마약 저항][독 저항]

[시구르드 연공법][인내][결의]

나한텐 특성 전환이 있었으니까.

"으응? 우리 수호자님 술이 좀 세신데?"

"함 붙어보자!"

"끝까지 가보자고!"

술고래 노르드 전사.

괴수곰 생체 변이 강화병.

평생 술 마법만 연구했다는 마법사.

디오니소스에게 직접 포도주를 바쳤다는 사제.

모두 상대가 되지 않았다.

"우왜액!"

"아윽!"

"드르렁······ 푸우우······"

내 주변에는 전사한 사람들만 남았다.

꺽꺽대며 토사물을 쏟아내는 초인, 요란하게 코를 골며 자는 초인, 바닥을 벅벅 긁으며 기어가는 초인.

조금 아쉬웠다.

술이 술을 부른다고 해야 할까?

한 서너 병만 더 마시면 딱 좋겠는데.

"에라."

술은 무슨 술이냐.

나도 들어가서 자야지.

그렇게 호텔을 향해 발걸음을 옮길 때였다.

호텔 바로 옆 골목.

땅거미가 내려 으슥한 곳에서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있었다.

"형! 형!"

영어도 독일어도 아닌, 날 것 그대로의 한국어.

나도 모르게 멈칫하게 된다.

분명히 아는 목소리였기 때문에.

"어······ 사제야?"

후드티를 깊이 눌러썼지만 단숨에 알아볼 수 있었다.

순둥한 얼굴에 금속성 광택이 어린 하얀 머리.

바로 김사제였다.

대미궁의 김사제 -1-

대미궁의 김사제

"쉿!"

김사제가 손가락을 입술에 가져갔다.

주위를 빠르게 돌아보더니 내게 속삭이듯이 말했다.

"형. 어디 조용한 데 없을까요? 제가 지금 쫓기고 있어서요."

쫓기고 있다······

그럴 만하지.

김사제네 교단은 신멸 조약에 기재되지 않은, 명실상부한 사이비 교단이니까.

"알았어. 내가 부축해줄게."

김사제는 내 말을 찰떡처럼 알아들었다.

즉시 술에 취한 듯 연기하기 시작한다.

한쪽 어깨로 부축하고 호텔 입구에 접근하자 직원이 미소지으며 문을 열어주었다.

"영웅 귀환을 환영합니다!"

"축제도 못 즐기고 고생이 많으십니다."

"내년에는 연차 내고 꼭 즐길 겁니다."

"하하하······"

정말로 매년 정기 축제를 벌이는 건 아니겠지?

부끄러운 이름이 붙을 것 같아 조금 두렵다.

어색하게 웃으며 문을 통과했다.

눈 마주친 호텔 직원들이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했다.

며칠 전만 해도 공손하되 비즈니스적인 미소였다면, 지금은 아주 진심에서 우러나온 웃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형. 인기가 좋네요?"

로비를 지나쳐 엘리베이터에 타자 김사제가 속삭였다.

"그렇게 됐다."

"대체 성흔 치료법? 극복법? 그건 또 어디서 배워오신 거예요?"

"내가 들은 게 좀 많아. 깊이가 얕아서 그렇지."

"얕지도 않던데요? 예전에 우리 교단 번제법 교정해주신 것만 해도요."

"그건 내가 잘 아는 분야였으니까."

"도시 전체가 형을 좋아하는 느낌이에요."

내 객실은 호텔 꼭대기층.

원래는 평범한 디럭스룸을 잡았지만 극복법에 대해 밝히자마자 수호자 연맹에서 객실을 업그레이드해주었다.

프레지덴셜 스위트로.

나도 영화에서나 봤지 생전 처음 이용해 본 곳.

호텔 객실이 아니라 최고급 아파트인지 알았다. 커다란 침실이 세 개나 있고 대형 회의실에 응접실, 초대형 욕실이 딸려 있었으니까.

"우와!"

김사제가 나직이 감탄을 터뜨렸다.

"형 성공하셨네요! 하긴 레벨도 4레벨이나 되셨으니까 돈도 많이 버셨겠어요."

"내가 예약한 거 아냐. 수호자 연맹에서 준 거지. 이 호텔 자체가 수호자 연맹 거잖아."

"역시! 성흔의 수호자답네요."

"그건 또 뭐야."

"형 별명이에요. 인터넷에서 완전 떠들썩하던데요? 독일 뉴스도 그렇고요. 형 얼굴로 TV가 완전히 도배되고 있어요."

"하······ 이건 또 무슨. 아, 그나저나 5레벨 된 거 축하한다."

"헤헤, 감사해요."

보물 창고를 찾은 걸까?

다시 만난 김사제는 또 달라져 있었다.

내가 4레벨이 된 것처럼 5레벨이 된 것.

다만 꾀죄죄한 몰골이라 미니바를 털어 탄산음료와 과자를 가져다주었다.

이것도 다 무료랬지?

생각난 김에 나도 캔커피 하나를 빨았다.

"휴우, 살겠네요."

"그런데 아헨에는 어쩐 일이야? 난 너 레반트에 그대로 있는 줄 알았다."

"일단 보물 창고는 찾았어요."

"진짜? 축하해!"

"보물 창고는 찾았고, 그 안의 황금 공예품으로 제사 지내서 5레벨이 됐죠. 거기까진 좋았는데 보물을 거의 옮겼을 때쯤에 옛 아버지 교단에 발각됐어요."

또 옛 아버지 교단이야?

진짜 옛 아버지 교단은 어디서 빠지질 않네.

"옛 아버지 교단이 레반트 지역에 아직도 남아 있었어?"

"거기가 발원지니까요."

"신멸 전쟁 후로는 퇴출당한 줄 알았지."

"에이. 약해졌다는 거지 완전히 퇴출당할 수는 없죠. 지금도 레반트 지역에 옛 아버지 교단을 믿는 사람이 꽤 있어요."

그래서 고생을 꽤 했다는 모양.

보물 창고는 시나이 반도 구석에 숨겨져 있었다고 한다.

거기서부터 추격전을 벌였다고.

겨우 이집트 카이로로 도망쳤는데 쫓아오고, 알랙산드리아로, 키프로스로, 아테네로, 시칠리아 팔레르모로, 로마로, 스위스 제네바로, 독일 아헨으로 장대한 여정을 겪었다고 한다.

"고생했다."

"말도 마세요. 죽는 줄 알았어요. 그나마 남유럽이 가이아 교단이 강세여서 다행이었죠. 가이아 신전으로 몇 번이나 도망쳤어요."

"너희 교단은 가이아 교단이랑도 사이 안 좋은 거 아니었어?"

"신님이 부활하셔서 그런지 가이아 교단 사제들이 사정을 봐주더라고요."

거듭 말하지만 신멸 조약에 기재된 100좌 신격 외에는 사이비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신이 멀쩡히 살아 있고 힘을 발휘한다면 단순히 악마 취급하기도 힘들지.

옛 아버지 교단과의 관계를 고려해 가이아 교단이 관용을 베푼 모양.

"너희 신님은 완전히 부활하신 거야?"

"절반은요. 대신전 짓고 황금 신상만 만들면 부활하실 거예요."

"거의 다 갔네?"

"네······ 아. 제가 최소한 7레벨은 되어야 해요. 그래야 부활 의식을 진행할 수 있어요."

"그거면 진짜 쉽다. 다른 신들 부활 의식은 장난 아니던데."

"신님한테는 죄송하지만, 사실 저희 신님이 강한 신은 아니니까요. 더 거창한 부활 의식을 치르면 좋겠지만 신님께서는 소신격으로라도 부활하고 싶어하세요."

옛 아버지 부활 의식은 장난이 아니었지.

천만 단위 인신 공양이 필요했다.

고레벨 초인들도 시체의 산을 쌓다시피 해서 바쳐야 하고.

그래서 에피소드 3에서 옛 아버지 교단이 서울 전역을 공격하는 거다.

에피소드 1, 2도 옛 아버지 교단이 한 짓이고.

"내가 도와줄 게 있냐?"

"음······ 사실 있어요."

"뭔데?"

"실은······"

김사제가 입을 막 떼려고 할 때였다.

띵동.

객실 종소리가 울렸다.

누구지?

밤도 늦었는데 찾아올 사람이······

찌르릉.

무심코 원격으로 문을 열려는 순간 반지가 진동했다.

아울러 몸이 뻣뻣해지는 느낌.

위기 감지 반지의 경고였다.

급히 [육감][통찰]을 장착하자 퍼뜩 영감이 치솟는다.

'큰일 날 뻔했네.'

일어나면서 김사제에게 주의를 주었다.

[숨어.]

소리가 나지 않게 입만 벙긋거려 전달한 경고.

김사제의 눈이 커졌다.

막 입에 가져가던 과자도 내려놓고 살금살금 객실 구석으로 녹아 들어간다.

몇 초 후 다시 종소리가 울렸다.

띵동.

"예! 갑니다!"

나는 화장실에 있었던 것처럼 물을 내렸다.

"누구세요?"

문 앞에 가서 묻자 굵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쉬시는데 죄송합니다. 수호자님. 옛 아버지 교단 주교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옛 아버지 교단 주교님이요?"

"예."

"저는 옛 아버지 교단과는 할 말이 없는데······ 무슨 일이에요?"

밖에서 뭐라고 빠르게 대화하는 소리가 났다.

독일어라 알아듣기 힘들었다.

직원이 난처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게, 수호자님. 수색 영장도 들고 오셨고 수색 특권을 가진 분이 직접 오셔서 도시법 상 문을 안 열어드릴 수가 없습니다."

수색 영장에 수색 특권.

위기 감지 반지가 발동한 이유가 있었다.

이단심문관이다.

내 촉처럼, 김사제를 쫓아온 이단심문관이 여기까지 들어온 것이다.

버텨볼까?

나는 명예 성기사이자 정식 수호자.

더구나 내 입으로 말하긴 쪽팔리지만 성흔의 수호자이기도 하다.

두 교단과 수호자 연맹에 도와달라고 하면 충분히 할 수 있다.

'아니야. 명분에서 밀려.'

이단심문관의 수색 특권은 국제 협약으로 공인된 부분.

내가 인맥으로 막으려고 들면 결국 내가 욕을 먹는다.

법적으로도 문제가 되고.

차라리 김사제를 믿어보자.

신이 죽은 다음에도 3천 년 이상 존속한 비밀 교단이잖아.

이런 상황을 상정한 은신 방법이 있겠지.

"뭐······ 알겠습니다."

내키지 않는다는 눈치를 팍팍 주며 문을 열었다.

대나무처럼 비쩍 마른 여자가 들어온다.

주교복 위에 강철 흉갑을 덧입고 있다.

허리에는 전쟁 망치를 찼고 등에는 대구경 산탄총을 짊어졌다.

성기사는 아니지만 성기사처럼 차려입은 주교.

이단심문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정중히 인사를 한다.

"구원자를 뵙습니다."

이 여자는 또 왜 이래?

내 얼굴이 일그러지자 이단심문관이 환하게 웃었다.

"이번 일이 있고 성녀께서 성지를 내리셨습니다. 구원자께서는 언제든 입교만 하시면 성녀님과 동격, 사도의 예후를 받으실 것이며 오직 구원자님을 위해 설계된 성전 사도의 승천 과정을 밟게 되십니다."

미친.

이것들 이제 아예 대놓고 날 잡아먹겠다고 공표하고 있네.

토르 교단과 가이아 교단이 얽히니까 위기감을 느낀 걸까?

어쩌면 처음에는 내가 너무 하찮은 존재라 긴가민가하다가 내가 이룬 일들을 보고 확신을 가진 것일지도 모르겠다.

조심해야겠다.

지금 이렇게 환하게 웃는 이단심문관만 해도, 날 입교시킬 기회만 생기면 절대 주저하지 않을 테니까.

"누구 마음대로요?"

"옛 아버지께서 점지하신 일입니다. 인간의 자유의지란 고귀하면서도 허망하고, 위대하면서도 허약한 법. 구원자께서는 결국 옛 아버지께 몸과 혼을 모두 바칠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지옥 같은 지구에서, 고통의 바다인 인생에서 승천하게 될 지리니 그야말로 영세의 공덕이자 영원한 행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미친 새끼가 미친 소리 하고 앉아 있네.

정신분열증 환자냐?

광신도답게 앞뒤 전혀 안 맞는 말이다.

나는 팔짱을 끼고 이단심문관을 노려보았다.

"그 말 하려고 온 겁니까?"

"아, 구원자님을 뵈어 잠시 정신이 나갔나 봅니다."

정신은 항상 나가 있는 것 같다만?

이단심문관이 내 뒤로 드넓은 거실을 훑어보며 말했다.

"실은 제보가 있었습니다. 극악하고 사악한, 고대 마신의 음흉하고 음험한 추종자가 숨어들었다고요."

"추종자요?"

"예. 살아 있는 역병의 증거이자 타락의 우상 같은 존재입니다. 마땅히 박멸하여 불태워 죽여야 하는 악마지요. 부디 협조해주셨으면 합니다. 저희도 구원자님과 마찰하기는 싫습니다."

그놈의 구원자, 구원자.

나는 조용히 길을 터주었다.

이단심문관이 거침없이 객실 안으로 들어갔다.

호위하는 5레벨 성기사 둘은 물론, 성전사들까지 흙발로 들어가려 하자 나는 볼멘소리를 냈다.

"말만 구원자지, 그쪽 교단은 구원자에 대한 예의가 없나 봅니다? 성기사님들은 이해하지만 성전사들도 들어가게요? 당신네들 단원 중에는 성흔에 걸린 사람도 없나 봐?"

처음에는 존대로 시작했지만 집어치우고 반말을 날렸다.

성전사들이 멈칫하며 서로를, 앞서간 이단심문관을 쳐다본다.

이단심문관이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게 저희의 일입니다. 수색 영장도 받아 왔고요. 성전사들이 실무를 처리하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수색 영장과 특권이 있어서 문을 열어드렸잖습니까? 그 정도면 됐지, 도대체 몇 명이 더 들어오는 거예요? 하나 둘 셋······ 어이쿠, 열다섯 명이나 들어오시려고? 이러라고 수호자 연맹에서 이 좋은 방 내줬나 봅니다? 이단심문관이면 아주 다인가 봐요? 누가 보면 지금이 21세기가 아니라 17세기인 줄 알겠어요?"

내 말에 이단심문관이 멈칫했다.

17세기.

마녀사냥과 인신 공양이 최절정에 달했던 때이면서 옛 아버지 교단이 전 유럽을 적으로 돌리던 시대.

그 결과 신멸 전쟁이 발발했고 옛 아버지 교단은 유럽에서 쫓겨나 신대륙으로 건너갔다.

따라서 옛 아버지 교단에게는 흑역사로 기록되어 있었다.

"뭐라 말씀하셔도 수색은 예정대로 진행하겠습니다. 들어와."

"이야아, 과연 옛 아버지 교단! 정말로 감탄했습니다! 어휴, 그러시죠. 힘없는 제가 어떻게 옛 아버지 교단을 방해하겠습니까. 다 내어드리겠습니다. 몸도 마음도 영혼도요! 다 확인해 보세요. 그렇게 설렁설렁 보지 마시고 여기 소파도 들쳐 보시고 옷장도 열어보시고 침대 밑도 확인해 보셔야죠. 암요!"

이단심문관한테는 이빨도 안 들어간다.

성전사들을 따라다니며 노래 부르듯 고성을 질렀다.

사자후도 고함도 포효도 없지만 나는 4레벨 초인.

하도 소리를 질러대는 통에 호텔 전체에 내 목소리가 울려퍼질 지경이었다.

잠들어 있던 손님들이 하나둘 객실 밖으로 나왔다.

"뭔 일이야?"

"어, 우리 수호자님이네."

"아, 성흔의 수호자······"

"그런데 저것들은 뭐야?"

"이단심문관! 이단심문관이잖아!"

"뭐? 이단심문관이 왔다고?"

"이단심문관이 우리 수호자를 잡아가려고 한다!"

"미친 새끼가! 당장 내 검 가져와!"

이 호텔에 묵는 사람은 대부분이 초인.

더구나 최상층이다.

프레지덴셜 스위트와 그 아래 등급 객실밖에 없었다.

5레벨인 이단심문관을 뛰어넘는 6레벨 초인이 모습을 드러내자 이단심문관도 낭패한 얼굴이 되었다.

"이런······ 구원자님. 이건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이단 수색을 방해하시다니요!"

"방해라니요? 문 열어드렸고, 제대로 비켜드렸는데요? 제가 불평을 조금 하긴 했지만 방해라니요? 말이 심하십니다?"

니들만 꼼수 쓰냐?

나도 꼼수 쓴다.

지금도 호텔 전체로 웅성거림이 퍼지는 게 느껴졌다.

그런가 하면 밖에서는 대형 밴들이 달려오고 있다.

밴 옆에는 방송국 로고가 선명했다.

벌써 기자들이 냄새를 맡은 것.

아마 근처에서 도시 축제를 취재하던 기자들이겠지.

"주교님. 이만하시는 게 어떠십니까?"

보고 있던 호텔 측에서 중재에 나섰다.

나도 얼굴을 봤던 총지배인이 이단심문관을 말린 것이다.

"객실을 이미 확인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리고 제보가 들어왔다고 하셨지만 제보자를 밝히지도, 증거를 제시하지도 않으셨고요."

"제보가 있었던 것만은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제보자를 말씀해 주시지요. 주교님도 아시다시피 증인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는 큽니다."

"내부 제보자는 국제 협약으로 보호받습니다. 따라서 그 요청에는 답할 수가 없습니다."

"저희가 불이익을 줄 것 같아서 그러십니까? 토르께 맹세코 어떤 불이익도 주지 않겠습니다."

그렇게까지 말해도 이단심문관은 입을 꾹 닫고 있을 뿐 제보자를 밝히지 않았다.

총지배인도 알 만하다는 눈빛을 보냈다.

설마 제보자가 없나?

어쩌면 추적 능력으로 김사제 뒤를 쫓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들어오면서 김사제가 살살 신성력을 뿌려 흔적을 지우긴 했지만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는 법이니까.

"곧 기자들이 들이닥칠 건데, 그렇게 되면 주교님도 저희도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여기까지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위대하신 옛 아버지와 고귀하신 성녀님께 누가 될까 두려워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끄응!"

신과 성녀까지 들먹이자 이단심문관도 조금 부담스러운 모양.

안 그래도 욕 많이 먹는 옛 아버지 교단이니까.

성흔 극복법 때문에 내 주가가 상한가를 연속으로 치고 있는데, 객실 수색했다고 하면 난리가 나겠지.

어쩌면 이단 수색은 핑계고 날 잡아가려고 했다고 오해를 살지도 몰랐다.

"후우, 알겠습니다. 성녀님의 명예를 위해서, 또 구원자님께서 이리 싫어하시니 여기까지 하는 것으로 하지요."

"과연 영명하십니다! 그러믄요! 굳이 일 키울 필요가 뭐가 있겠습니까? 같이 내려가시지요. 제가 라운지에서 좋은 포도주 한 잔씩 대접하겠습니다. 정령수로 담그고 정령나무통에 보관하여 숙성한 최고급품입니다. 주교님께서도 마음에 드실 겁니다."

"흥."

이단심문관이 대놓고 코웃음을 쳤다.

뒤를, 객실을 쓰윽 둘러보며 차가운 목소리를 남겼다.

"악신의 추종자야. 우리는 반드시 다시 만나게 될 거다. 그 멍청한 머리로 찾아갈 곳은 뻔하지. 쥐새끼는 반드시 하수구로 돌아가는 법."

그러더니 손을 한 번 떨치고는 걸어 나갔다.

손을 비벼대는 총지배인도 싹 무시하고.

"실례했습니다."

"편히 쉬시기를."

이단심문관이나 성기사들은 아무 말이 없다.

성전사들만 내게 꾸벅 인사하곤 물러갔다.

속으로 미안하기는 했던 모양.

"편안한 밤 되십시오. 수호자님."

쿠웅.

총지배인이 문을 닫았다.

마법진 품은 문이 닫히고 겨우 적막이 찾아왔다.

비로소 모습을 드러내는 김사제.

그 자리에 주저앉으면서 겨우 한 마디를 토해놓는다.

"살았다······"

대미궁의 김사제 -2-

"사제야 괜찮냐?"

"휴······ 괜찮아요. 형 덕에 살았어요."

"운이 좋았지."

"헤헤. 형이 막 소리 지르고 안 그랬으면 그 새끼 진짜 먼지 하나까지 다 확인하고 갔을걸요. 방금도 걸리기 직전까지 갔어요."

김사제가 도피 생활로 는 건 은신 능력뿐이라며 웃었다.

다시 미니바를 털었다.

밥도 제대로 못 먹고 다닌 모양.

미니바에 비치된 초코바, 초콜릿, 쿠키, 감자칩을 모조리 결딴낸 후에야 김사제가 숨을 돌렸다.

"그런데 왜 너 혼자냐? 너 니네 교단에서는 총대주교된 거 아니었어?"

"총대주교는 됐죠. 공의회에서 정식으로 선출됐어요."

"축하한다. 하긴 5레벨 사도인데 총대주교 안 되면 그게 더 이상하지."

"원래는 수호자님들이랑 같이 다녔는데 지금은 잠깐 흩어졌어요. 보물 운반하느라요."

보물······

양이 많긴 많은 모양이다.

3천 년 전이라고는 해도 한때 융성하던 종교니까 그렇겠지.

김사제가 내 눈치를 한번 보고는 말했다.

"그래서 형한테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요."

"맞다. 부탁할 거 있다고 했지? 뭔데?"

"절 대미궁으로 데려다 주실 수 있으세요?"

"대미궁?"

"네. 10층에 있는 시작의 요새로요."

무슨 상황인지 알겠다.

김사제네 교단은 떳떳하게 공개하기는 어려운 처지다.

신이 3천 년 만에 부활했으니까.

신멸 조약에 기재되지 않은 이상 신이 힘을 쌓을 때까지는 숨어있을 필요가 있다.

존버해야 한다고.

그러려면 시작의 요새는 괜찮은 선택이다.

대미궁에선 지상의 법이 적용되지 않으니까.

"수호자들은 미리 시작의 요새에 가 있는 거야?"

"네. 제가 미끼에요."

"뭐? 장난해? 애가 무슨 미끼야?"

"저 정도는 되어야 미끼 역할을 하죠."

그건 그렇다.

수천 년 만에 등장한 5레벨.

더구나 사도.

옛 아버지 교단에서 눈에 불을 켜고 뒤쫓는 이유가 있었다.

나는 김사제를 빤히 쳐다보았다.

어린애가 고생한다 싶어서.

그 순진해 빠진 녀석이 미끼를 자처했다는 게 불쌍하기도 하고.

"맨입으로 데려다 달라는 건 아니에요. 제가 보물 창고에서 가져온 것 중에 형한테 어울리는 거 몇 개 드릴게요."

"그럼 고맙지. 너 5레벨이고 나도 정식 수호자니까 따로 인증은 안 거쳐도 되겠다. 조금 쉬다가 새벽 3시쯤에 바로 출발하자."

"네, 형."

"그 전에 확인할 게 있는데 너 어떤 능력 받았어? 기본적인 치유랑 축복은 가능할 거고······"

"어지간한 건 다 되는 것 같아요. 치유, 축복, 방어막, 공격······"

통찰로 김사제를 확인한다.

헤어진 지 몇 달이나 지났다고 특성창이 확 바뀌어 있었다.

[사도][완치][정화의 빛]

[신성한 영역][신의 분노][황금 축복]

치유의 손은 완치로, 정화는 정화의 빛으로, 신성 방어막은 신성한 영역으로, 빛의 화살은 신의 분노로.

거기다가 황금 축복?

김사제네 교단에서만 쓰는 고유 축복이다.

행운 수치를 크게 강화해서 치명타 확률, 회피 확률, 저항 확률, 아이템 획득 확률 등등을 많이 높여주지.

김사제는 자기 특성에 대해서는 잘 설명하지 않았다.

보아하니 본인도 잘 모르는 모양.

경험도 얼마 없고, 다른 사제들과 비교할 일도 없었을 테니 그럴 수밖에.

"좋아. 그 정도면 둘이서 10층까지 내려갈 수 있겠다."

"형도 5레벨 전사 정도는 되죠? 소식 들었어요. 5레벨 강화병을 일대일로 이기셨다고요."

"그 정도는 되지. 불안하면 다른 사람들한테 도와달라고 할까?"

시그문드나 효르디스는 내가 도와달라고 하면 도와줄 것이다.

둘 다 5레벨 전사니까 도움이 되겠지.

김사제가 머리를 흔들었다.

"아뇨. 우리 둘이서만 조용히 가는 게 낫겠어요. 이단심문관은 특수한 권능을 이용해서 그런지 금방 쫓아오더라고요. 폭로의 권능을 쓰는 것 같아요."

"폭로의 권능?"

"아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 빨리 추적하는 권능이에요. 아까도 호텔 직원들이 절 보고, 무의식에 남은 흔적을 종합해서 쫓아왔을걸요."

"그런 게 된다고?"

"저도 처음 알았어요."

사람들이 많이 알면 알수록 강해지는 존재에 대해선 들어봤지만 별 특이한 권능이 다 있네.

결국 김사제와 둘이서 떠나기로 했다.

정확히 새벽 3시.

온종일 들끓던 도시가 겨우 차분해진 시간에 몸을 뺐다.

최대한 직원들과 마주치지 않게 계단을 이용하고 뒷문으로 빠져나왔다.

"천천히 가자."

"네, 형."

어차피 대미궁은 호텔에서 멀지 않다.

유사시 수호자 연맹 본부와 소유 아파트, 소유 호텔이 방벽이 되게끔 설계된 것.

약 15분 정도 걷자 대미궁이 그 웅장한 자태를 드러냈다.

하늘 위에서 보면 달팽이 껍질처럼 생긴 대미궁.

지상에서 보자면 거대한 산이 따로 없다.

대미궁 앞에는 거대 마법 성벽이 서 있다.

거의 백 미터 이상 치솟은 성벽.

얼마나 두껍고 방어 마법을 치덕치덕 발랐는지 고레벨 마법사의 대단위 마법도 버틴다고.

경계가 삼엄했다.

초인들이 마법총과 마법검으로 무장한 채 사람 하나 겨우 들어갈 통로를 지키고 있었다.

"정지.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수고하십니다. 대미궁에 들어가려고 합니다."

"이 시간에요?"

"사정이 있어서요."

나도 김사제도 얼굴을 가린 상태다.

"흠."

초인이 특히 나를 보며 얼굴을 굳혔다.

"4레벨 초인인데 정식 수호자라······"

명예 성기사 휘장은 떼어놓았다.

그래도 대미궁에 들어가야 하니 수호자 휘장은 달았지.

거기서 나를 수상쩍게 생각한 모양.

몇 번이나 입을 달싹이다가 길을 비켜주었다.

"아시겠지만 대미궁 진입은 정식 수호자거나 5레벨 이상이면 누구나 가능합니다. 하지만 대미궁에서 나올 때는 신분 조회가 이뤄진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예. 알고 있습니다."

"또, 대미궁에서는 외부에서 무슨 일을 했든, 어떤 일을 벌였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라야 하는 법. 대미궁의 법에 따르지 않으면 즉각 사살한다는 점을 명심하십시오. 지상에서처럼 방종하게 놀아나다가는 목 위의 물건이 성하지 않을 겁니다."

나와 김사제를 도피하는 범죄자로 생각했나 보다.

사실 그게 맞지.

김사제는 일반적인 관점에서 보면 흉악범 중의 흉악범이라고.

"충고 감사드립니다."

"부디 평안을 찾으시길."

턱, 턱, 턱.

콘크리트 구조물을 따라 걷는다.

상당히 길었다.

거의 1 킬로미터 이상 걸은 다음에야 고대 룬 문자로 새겨진 입구가 나왔다.

[대미궁]

[타락한 신들의 봉인지]

1층은 외부와 다를 게 없다.

내가 몇 번 갔던 제 1 매립지를 연상시킨다.

오히려 관리가 잘 되어 깨끗하기까지 했다.

네모반듯한 콘크리트 통로가 이어지고 천장에 박힌 형광등은 밝기 그지없었으니까.

거기다 주기적으로 화장실이 보이고 쉬어갈 캠핑 장소도 있다.

"후아!"

김사제가 후드를 뒤로 젖혔다.

"겨우 들어왔네요."

"시작의 요새에서 갈 곳은 있어?"

"저희 사제님들이 많이 계세요. 요즘 레벨도 다 올리셨대요. 그분들이 마련한 아파트에서 살 생각이에요."

"대신전은?"

"고민 중이에요. 황금 많이 모아서 신전은 지을 예정이긴 한데 대신전을 대미궁에 짓는 건 좀 그렇지 않을까요?"

"가이아 교단이나 다른 교단에선 좋아할걸. 수호자 연맹도 그렇고. 전략적으로 대미궁에 대신전 짓고 힘 모아서 지상에 진출하는 것도 방법이야."

"듣고 보니 그러네요."

대미궁에 들어와서일까?

김사제는 확실히 긴장이 풀린 모습이었다.

2층으로 향하는 지금도 쫑알쫑알 입을 흔들고 있었다.

반대로 나는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았다.

[육감][통찰][민감]

[쫑긋 귀][밝은 눈][개코]

여기에 투구의 [탐지], 반지의 [위기 감지]까지 활용해서 주위를 살폈다.

긴장 풀고 걷기에는 너무 위험한 곳이다.

대미궁은.

객실을 나가며 흘렸던 이단심문관의 말이 마음에 걸리기도 했고.

"키이이······"

그래서였을까?

내 귀에 이상한 소리가 한 가닥 잡혔다.

더불어 코끝을 파고드는 희미한 유황 냄새.

"키릿, 키리릿."

"킥, 킥, 킥."

"키킷! 킷킷!"

유리에 쇠를 긁는 듯한 특유의 웃음소리.

이 효과음에 대미궁 1층이라면······

그놈이다.

우르릉!

나는 허리에 찬 묠니르를 뽑았다.

성검이 발하던 청아한 음색 대신 천둥소리가 울린다.

"형? 왜 그러세요?"

"앞쪽에 악마들이 있어."

"악마들이요? 어, 어쩌죠?"

"1층이니까 3레벨 악마들이 나올 거야. 너무 걱정하지는 마. 니가 간단히 빛의 화살만 날려도 다 죽을걸?"

내가 이 세상에 와서 알게 된 게 있는데, 이 세상 사람들은 게임 NPC와는 비슷하면서 달랐다.

가장 차이나는 게 보유 특성만 쓰진 않는다는 점.

예를 들어 김사제가 [신의 격노]만 가지고 있다고 [신의 격노]만 쓰지는 않는다.

그 하위 특성인 [빛의 화살][신성한 창]도 얼마든지 사용한다.

다만 추가 능력치나 각종 특전은 현재 보유 특성을 따라가는 것 같다. 특별한 상황이 아니고서는 현재 특성을 그대로 사용하고.

"좀 떨리네요."

"왜? 실전은 많이 안 겪어봤어?"

"전 도망만 쳤어요."

"아까 보니까 숨긴 진짜 잘 숨더라."

"신님께서 도와주셨으니까요."

천천히 걸어간다.

코에 파고드는 유황 냄새가 짙어진다.

앞에서 들리던 소리는 사라졌지만 기척은 또렷해졌다.

김사제도 코를 벌름거리기 시작했다.

"형, 이 냄새······"

"잘 알아둬라. 대미궁에선 악마들 출현하기 전에 반드시 유황 냄새가 나. 주변에 아무것도 없어도 이 냄새 나면 악마가 널 지켜보고 있다고 생각해야 해."

"조금 으스스하네요."

"뭐가 걱정이야. 넌 사돈데."

이미 악마들은 근처에 접근했다.

은신해서 다가오고 있지만 내 눈을 속일 수는 없다.

냅다 던지려다가 김사제에게 묠니르를 내밀었다.

"축복 부탁할게."

"네, 네!"

김사제가 묠니르에 손을 뻗었다.

콰콰콰, 거대한 빛의 기둥이 내리꽂힌다.

저 하늘에서 천장을 뚫고, 묠니르를 향해.

직경 10미터는 될 법한 빛의 기둥.

묠니르가 거기 반응하여 거칠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콰르릉! 콰쾅!

거의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뿜어내는 벼락 덩어리.

묠니르 자체가 번개 덩어리가 된 것 같았다.

제우스가 쓴다는 아스트라페가 이럴까?

벼락창처럼 변한 묠니르를 살짝 들었다.

얼마나 강대한 신성력이 넘쳐흐르는지 작은 신이 된 듯한, 산을 쪼개고 하늘을 뭉갤 듯한 전능감이 나를 고취시켰다.

'어마어마하네.'

SSR급 무기에 황금 축복이 꽂혔다고?

이건 뭐 강타도 뭣도 필요 없겠다.

[투척]만 장착하고 냅다 던졌다.

꽈르르릉!

번개가 쳤다.

온갖 탐지 계열 특성을 장착한 나인데도 순간 눈이 멀어버리는 듯했다.

어마어마한 광량이 튀고 벼락의 강이 흘렀다.

용처럼 뛰쳐나갔다가 정점을 찍고 돌아오는 묠니르.

가볍게 회수까지 성공.

그러나 그 결과물은 무시무시했다.

"헉!"

김사제가 경기하며 헛숨을 들이킬 정도.

눈앞의 콘크리트 복도가 모조리 불타 있었다.

회색 단단한 벽면이 몽땅 까맣게 타버린 것.

그리고 악마들.

은신해서 접근하던 그놈들이 펑펑 터져서는 잔해만 남았다.

"와······ 역시 묠니르는 묠니르네요."

"네 축복도 엄청났어. 치명······ 아니, 묠니르 성능이 100%, 200%로 터진 것 같다."

"헤헤. 저희 신님께서 힘을 많이 주시긴 하셨죠."

5레벨 축복이라 그런가?

공격력 추가에 속성 추가에 치명타까지 싹 터진 느낌이다.

나는 악마들을 지나치며 손을 뻗었다.

[추출] 특성 발동.

마력핵을 쏙쏙 뽑아내자 김사제가 신기하다는 눈빛을 보냈다.

"형은 재주도 많네요."

"밑바닥에서 기어 올라오다 보니 이렇게 됐다."

"맞다. 형은 청소부에서 시작했다고 했죠? 마수 사냥은 안 하셨어요?"

"마수 사냥도 했지. 대한민국 사냥꾼 협회 정회원이야."

"청소부에 사냥꾼, 수호자면 정석 트리 아니에요?"

"그런 셈이지. 자, 이거 받아."

수집한 마력핵은 총 스물두 개.

즉, 악마 스물두 마리가 묠니르 투척 한 방으로 재가 된 셈이다.

0레벨 마력핵 하나 뽑겠다고 삽질 열심히 하던 때와 비교하면 엄청난 발전.

김사제가 마력핵을 받아들곤 눈을 깜빡였다.

"어, 형? 형이 다 했는데 저도 받아요?"

"내가 다 하긴. 너도 축복 걸었잖아."

"그래도요······ 형이랑 저 사인데, 형이 다 가져가도 괜찮아요."

"친할수록 계산은 철저히 해야지."

"진짜 괜찮은데······"

"너 금 많이 필요하잖아. 3레벨 마력핵이면 가격 좀 나가. 시작의 요새 가서 황금이랑 바꿔."

[합성]에도 한계는 있다.

0레벨, 1레벨, 2레벨에는 실패 확률이 없지만 3레벨쯤 되면 슬슬 실패하기 시작한다.

아예 증발하기도 하고.

따라서 고레벨로 갈수록 급격히 비싸지니 김사제에게도 필요할 것이다.

김사제가 겸연쩍게 웃었다.

"그럼 감사히 받을게요."

"담아갈 건 있어?"

"그럼요."

역시 썩어도 준치라고 해야 하나.

김사제가 아공간에다가 마력핵을 쏙 집어넣었다.

고대 보물 창고에서 가져온 물건이라나.

크기는 작지만 게임 인벤토리 같은 아티팩트라 비밀리에 갖고 다니기 참 좋았다.

저벅저벅.

순식간에 대미궁을 주파한다.

10층까지는 초입이라 끽해야 3레벨, 4레벨 악마밖에 안 나온다.

층의 크기도 작아서 몇 시간이면 시작의 요새에 닿았다.

지리산 등산하는 느낌과 비슷하다고 보면 될까?

대충 5시간 코스.

밖에서는 아침이 밝아올 무렵이면 도착하겠지.

그렇게 4시간을 걸은 다음.

거의 시작의 요새에 도달했을 무렵.

9층 끝, 10층으로 내려가는 좁은 통로.

미리 점거하고 있던 무리와 마주쳤다.

"늦으셨습니다."

주교복 위에 강철 흉갑을 입은 여자.

이단심문관이었다.

대미궁의 김사제 -3-

어떻게 안 거지?

생각해 보면 뻔한 일이다.

김사제가 왜 레반트 지역에서 미궁 도시까지 도망쳤겠어.

대미궁에 숨어서 힘을 기르려고 한 거지.

옛 아버지 교단의 정보력이라면 내가 김사제와 인연이 있는 것도 알 터.

호텔 객실에서 아웅다웅하느니 미리 길목을 막는 게 합리적이었다.

나는 빠르게 이단심문관 무리를 살폈다.

성전사도 아니고 성기사 떼를 끌고 왔다.

이단심문관 양옆에 있는 것은 5레벨 성기사.

즉, 기사단장.

그 뒤로 성기사 20명이 줄을 맞추어 서 있다.

총 43명.

5레벨이 3명에 4레벨이 8명, 3레벨은 32명.

어딜 가도 목에 힘 주고도 남을 정도의 무력.

"형······"

김사제가 부들부들 떠는 게 느껴진다.

43명의 초인 앞에 맞서는 우리는 딱 둘.

내가 5레벨 1명, 어쩌면 2명까지는 상대할 수 있지만 그 이상은 힘들다.

그런데 아무리 사도라고 해도 실전 경험 없는 김사제를 데리고 이걸 돌파해야 한다고?

파아앗!

성기사 하나가 허공에 보석을 하나 던졌다.

보석이 저절로 깨지고 빛이 터지면서 결계가 쳐진다.

외부와 완전히 격리되고 마는 통로.

도망갈 수도 없고 시작의 요새에 있을 김사제네 교단에 SOS를 칠 수도 없게 되었다.

이단심문관이 흉악하게 웃었다.

"드디어 이 지긋지긋한 추격전을 끝낼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김사제에게 꽂혀 있던 눈이 나를 향한다.

"구원자께서도 마침내 입교하시게 됐고요."

"누구 마음대로?"

"구원자께서는 걱정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저희가 다 알아서 하겠습니다. 시작의 요새에 있는 우리 교단 신전에서 몇 년 머무르며 옛 아버지의 위대함을 공부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옛 아버지께 영육을 의탁하시게 될 겁니다."

"신멸 조약은 국 끓여 먹었나 봐? 옛 아버지의 맹세가 그렇게 값싼 모양이지?"

"여기는 대미궁입니다. 지상의 법에서 비껴간 곳이지요."

"아주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가 따로 없네."

이단심문관은 아무래도 좋다는 투.

나는 스스로 반성하는 시간을 가졌다.

'위기 감지 반지에 너무 의존했어.'

결계로 우리를 감싼 것처럼, 특수한 방법으로 숨어있던 게 분명했다.

그래서 9층을 주파하면서도 위기 감지가 작동하지 않은 거지.

투구의 탐지 특성에도 걸리지 않았고.

방법은 하나.

정면 대결뿐이다.

명예 성기사건 정식 수호자건 다 의미가 없었다.

이단심문관의 눈이 이미 벌게져 있으니까.

'될까?'

내가 가진 것을 모두 떠올린다.

우선 상위 특성들.

거인의 힘, 금강체, 불사, 불굴, 마법 저항, 마력혼, 호왕검법, 시구르드 연공법, 총잡이.

묵호검과 다산총, 묠니르, 아이기스.

태양 마탑에게 받은 엘릭서와 수호자 연맹에게 받은 넥타르.

'가능할지도······'

되짚어 보니 많다.

하나하나가 주옥 같은 특성에 아티팩트잖아.

상위 특성은 SR급 캐릭터는 되어야 달고 나온다.

더구나 통찰 특성을 통해서 보자 이단심문관도 기사단장도 특별히 강해 보이진 않았다.

<이단심문관 >

[신성 방어막][치유][고문]

[지휘][명령][비밀 사냥꾼]

<기사단장 A>

[광휘][방패 치기][돌진]

[빛나는 망치][치유의 손][정화]

<기사단장 B>

[광휘][방패 치기][도발]

[신성한 사격][재생][축복]

각각 이단심문관과 기사단장의 특성 세트.

나쁘지 않은 특성이지만 상위 특성은 아니다.

즉, N급 캐릭터.

그렇다면 나는 어떨까?

상위 특성 여섯 개를 꽉꽉 채운 나는 SSR급으로 평가해도 무방하다.

아니, SSR로도 모자라지.

그 위의 EX급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될 지도 몰라.'

이미 5레벨 [SR 흡혈마]를 삼위일체 빌드를 완성했을 때 일대일로 이긴 바 있다.

그럼 삼위일체로도 모자라 마력혼, 불굴, 호왕검법, 시구르드 연공법, 총잡이로 무장한 지금은?

검 전문가가 없어서 아쉽지만, 단월과 섬광을 장착한 지금은?

'할 수 있어.'

그것이 내 최종적인 결론이었다.

이단심문관과 기사단장이 R급만 됐어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아마도 모략에 능하고 추적에 능할, 그래서 실질적인 전투력은 떨어진다는 단점이 날 과감하게 만들었다.

대놓고 골프백에서 유탄 발사기를 꺼냈다.

이단심문관의 웃음이 짙어진다.

"끝까지 옛 아버지께 대적하시려는 겁니까? 얌전히 따라오시면 구원자에 걸맞은 대접을 하겠습니다. 하지만 계속 이렇게 나오시면 저도 제가 어떻게 변할지 모릅니다."

"흥."

우선 가볍게 수류탄 투척.

꽈르릉!

폭음이 터졌으나 간단히 막혔다.

이단심문관이 직접 신성 방어막을 전개한 것.

확실히 사제 계열은 달랐다.

전사는 자기 몸 주변에 마력 방어막을 두르는 게 전부인데, 이단심문관은 공중에서 떨어지는 수류탄에 신성 방어막을 걸어버린 것.

수류탄이 폭발했으나 쇠 파편은 방어막을 뚫지도 못했다.

성과라고 하면 약간의 시간을 번 게 전부.

나는 전광석화처럼 유탄 발사기에 따로 빼놓았던 유탄을 장전했다.

"고작 그딴 장난감으로······"

[총잡이][사격][조준]

[난사][통찰][흑염]

나라고 무방비한 상태로 다녔던 건 아니다.

항상 옛 아버지 교단을 의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골프백 한쪽에 특수한 유탄을 가지고 다녔지.

바로 강화 촉매 신살자를 섞은 유탄을.

"사제야, 축복."

"네? 아, 네!"

콰콰콰콰.

빛의 기둥이 내리꽂히고 유탄과 반응하여 서슬 퍼런 금빛 마력 파장이 퍼지기 시작한다.

여기에 흑염까지.

옛 아버지를 상징하는 흑금광이 피어오르는 유탄 발사기를 조준한 다음 연거푸 방아쇠를 당겼다.

퉁! 퉁! 퉁! 퉁! 퉁! 퉁!

6연발 모조리 발사.

이단심문관이 감탄하여 소리를 지른다.

"과연 구원자이십니다! 이토록 아름다운 흑금광이라니!"

열광적으로 두 손을 쳐든다.

성기사들 역시 마찬가지다.

"옛 아버지시어!"

"그대의 자식들을 보호하소서!"

"영과 육을 모두 당신께 바치리니!"

"지상에 재림하시어 전 인류를 그대의 양분으로 삼으소서!"

으, 광신도들 같으니라고.

신성 방어막이 겹겹이 새겨진다.

최소한 수십 겹.

신성 방어막이 없는 성기사들은 광휘를 뿜고, 혹은 신성력을 동료에게 전해주며 단체 방어막을 구현하고 있었다.

그 위에 흑금광 유탄이 내리꽂혔다.

꽈과과과광!

적대 관계에 있는 신의 축복.

옛 아버지를 죽였던 강화 촉매 신살자.

강제 세례를 극복한 초인만이 사용하는 흑염.

이 셋이 상승효과를 일으켰다.

그러나 수십 명의 성기사가 합동으로 만든 방어막도 만만치 않았다.

표면이 갈라지고 금이 가면서도 어떻게든 버텨냈다.

세상조차 부술 기세로 타오른 흑금광 폭발을 밀어내는 데 성공한 것.

이단심문관이 고양감에 휩싸여 소리쳤다.

"이것이 옛 아버지의 위력이십니다, 구원자여!"

글쎄.

고작 두 명의 합동 공격을 43명이서 막아놓고 할 말은 아닌 것 같다만?

그리고 이건 단순한 전초전에 불과했다.

인사차 잽 한 번 날린 거라고.

[거인의 힘][금강체][마력혼]

[호왕검법][시구르드 연공법][돌진]

진짜는 지금부터.

"흐읍!"

숨을 들이마신다.

시구르드 연공법과 마력혼이 반응한다.

무지막지한 마력이 유입되고, 혈관계와 신경계에 각인된 마력 회로가 번쩍 빛을 발한다.

파아아!

실제로 피가 끓었다.

한계를 넘은 마력량에 체내 수분마저 반응하는 것.

몸이 뜨겁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불타는 것 같다.

그러나 이성만큼은 온전하다.

오히려 전에 없이 차가워진 머리로, 어마어마하게 민감해진 감각으로 이 세상 전부를 낱낱이 파악하고 있었다.

느껴진다.

세상이.

또 저 앞에서 고슴도치처럼 날을 세우고 있는 성기사단도.

통찰을 쓰지도 않았건만, 육감을 장착하지도 않았건만 적들의 생각이, 의도가 하나하나 파악된다.

뭘 하려는지 알 것 같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간파한다.

그 상태에서 나는.

가장 취약한 지점을 향해서.

아닌 척 방패를 들었지만 실은 제일 연약한 성기사를 향해 몸을 날렸다.

쿠아앙!

땅거죽이 뒤집힌다.

거인의 힘과 마력혼이 함께 작용하여 무시무시한 위력을 뽐낸다.

흔히 더블 파워라고 불리는 빌드.

그 힘을 전부 끌어다가 묵호검으로 베었다.

그리고 공격 순간 특성 전환.

[단월]

번쩍!

초승달이 그어졌다.

도저히 4레벨 초인의 것이라 볼 수 없는, 5레벨 무사가 와도 곡하고 갈 위력의 검기가 공간을 찢어발겼다.

"끄아악!"

성기사가 둘로 쪼개졌다.

단체 방어막에 집중하고 있던 성기사로서는 제대로 대처하기 힘들었던 것.

"이, 이런!"

"샤를 경!"

성기사들이 급하게 동료를 부르지만 이미 늦었다.

분수처럼 피를 쏟으며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나는 이를 악물며 검을 휘둘렀다.

우에서 좌로 한 번.

좌에서 우로 한 번.

백두대간 호랑이가 양쪽 앞발을 연거푸 강타하는 듯한 동작.

호왕쌍격!

여기에 [단월] 특성이 발휘된다.

새하얀 검기가 호랑이 발톱처럼 허공을 수놓았다.

성기사들이 거기 휩쓸려 비명을 질렀다.

"으어억!"

"끄헉!"

막 호왕검법을 수습했을 때만 해도 호왕쌍격과 호왕비천은 쓰기 힘들었다.

그러나 꾸준히 호왕검법을 수련하고 마력혼과 시구르드 연공법을 얻은 지금, 나는 충분히 호왕검법을 실전에 쓸 정도로 성숙해 있었다.

이단심문관이 목청껏 고함을 질렀다.

"검 그림자 기사단, 방어진!"

"방어진!"

"창 그림자 기사단, 광휘!"

"광휘!"

눈빛이 달라진다.

내 주변 성기사들은 방패를 들고 어깨를 맞대고, 조금 떨어진 성기사들은 광휘를 뿌려 날 압박하고 있었다.

아군의 전투력은 강화하고 적의 전투력은 약화시키는 광휘.

그게 중첩되자 나도 정신이 아찔해졌다.

활활 타오르던 마력이 꽉꽉 억눌리는 이 느낌.

"흥!"

이를 갈며 묠니르를 왼손에 들었다.

묠니르에 포함된 [강화]와 [보호].

또 왼쪽 팔뚝에서 아이기스가 빛을 발하자 [수호]와 [증강]이 발동했다.

마지막으로 단월 대신 [투지]를 장착하자 날 압박하던 존재감이 씻은 듯이 사라진다.

"형!"

김사제도 멀리서 황금 축복을 내게 꽂고 있었다.

"하압!"

길게 검을 휘두른다.

호왕맹타.

방패가 쪼개지자 성기사가 넋이 나간 표정을 짓는다.

"조심해!"

"뒤로 가! 뒤로!"

성기사들이 한 마리의 괴수처럼 움직였다.

방패를 잃은 성기사를 뒤로 빼내고 자리를 채운 것.

나라고 구경만 하지는 않았다.

어느새 검을 짧게 찌르고 있었다.

호왕출세.

섬광처럼 빛이 이어지고 성기사 한 명이 또 방패를 잃었다.

"뒤로! 뒤로!"

"미친! 4레벨 맞아? 뭐가 이렇게 세!"

"방패 들어! 방패!"

평범한 성기사들은 내 일격조차 막을 수가 없었다.

검을 내리치면 내리치는 대로, 찌르면 찌르는 대로, 베면 베는 대로 방패를 잃든 어디 한 군데를 당하든 하며 뒤로 물러났다.

그나마 4레벨 상급 기사는 어느 정도 막아내지만 쉽지는 않았다.

급기야 몇 명이 목숨을 잃자 이단심문관이 고함을 질렀다.

"그만! 모두 물러나라! 거리를 벌려!"

성기사들이 빠르게 후퇴했다.

대신 지휘하던 이단심문관이, 기사단장들이 직접 나선다.

삼각형 진형을 갖추고 나를 포위한 셋.

나는 숨을 고른 후 진득하게 웃어 보였다.

"직접 싸우게? 아서라. 그러다 너 죽어. 차라리 인해 전술을 쓰지 그래?"

"형제들의 목숨을 덧없이 소모할 수는 없지요."

사실 그렇다.

날 잡으려면 성기사 40명 중 절반은 죽을 각오를 해야 한다.

어느 교단이 키우기도 힘든 성기사 20명을 던지려고 하겠어.

자기들이 생각하기에 날 잡을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고.

5레벨 셋이 나서면 4레벨 한 명쯤이야 쉽게 잡는다는 게 이 세상의 상식.

여기서 뒤로 뺐다간 성기사들의 신망도 잃고 상층부의 신임도 잃을 게 뻔하다.

나로서도 다행스러운 일.

성기사를 장기판의 졸처럼 내던지며 싸웠으면 나도 힘들었을 거다.

이단심문관이 상식 수준에서 나를 판단한 덕에 비로소 승리를 확신할 수 있었다.

"부디 살아남으시길. 죽으시면 안 됩니다."

이단심문관이 손을 들었다.

그게 신호였다.

두 기사단장이 황소처럼 내게 달려들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