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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산길을 걸으며 레펜하르트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연신 허리춤의 백 팩을 만지는 모습이 아주 신 나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좋아! 이제 우리 시리스 만날 일만 남았다!'

돈도 두둑하게 마련했으니 이제 남은 것은 후딱 차탄 공국으로 달려가 사랑하는 님과 재회하는 것뿐이다. 신이 안 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게 발걸음도 가볍게 레펜하르트가 길을 가는 중이었다. 뒤에서 도도도 달려오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응?"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는 바로 누구인지 눈치챘다.

'이거, 실란이잖아? 얘가 왜 쟤들 안 따라가고 이쪽으로 오지?'

레펜하르트는 의아해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약속한 보상을 받으려면 저쪽을 쫓아가야 한다. 그래서 토드도 지금 못 타는 말 억지로 몰면서 졸졸 알티온 후작가를 따라가고 있는 것 아닌가?

호기심이 생겨 잠깐 기다리니 아니나 다를까, 곧 길 저편에서 붉은 머리를 나부끼며 금안의 미소년이 이쪽으로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열심히 뛰어온 실란이 레펜하르트 앞에서 멈추더니 헉헉 숨을 골랐다.

분명해졌다. 그냥 행로가 같은 게 아니라 분명 그를 따라온 것이다.

"뭐냐?"

겨우 숨을 고른 실란이 빙그레 웃더니 대답했다.

"혹시 아세요? 신관들 중에는 세상을 여행하면서 여신의 은혜를 펼치고 신도를 보살피는 경우가 있다는 걸?"

"알지, 순례자잖아?"

레펜하르트도 잘 알고 있었다. 보통 혈기 넘치는 젊은 신관들이 종종 하는 짓이다.

'그리고 그 와중에 꽤나 죽어 나가고 말이지.'

"저도 원래 이번 일을 마치면 교단에 복귀하지 않고 바로 순례자의 길을 걷기로 했거든요."

실란이 가슴을 펴고 자랑스레 말을 이었다.

"그래서, 이왕이면 제가 본 가장 강한 당신과 함께 다니고 싶어서요."

레펜하르트는 물끄러미 이 예쁘장한 소년을 내려다보았다. 계속 느껴온 것이지만 이놈 눈빛 꽤나 요상하다. 뭐, 그냥 별 생각 없이 보면야 강한 무인을 동경하는 10대 소년의 눈초리라 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도 좀 다른 것 같고.

뭐랄까, 제라드나 토드와 비슷한 느낌이랄까? 왠지 이놈도 다른 의미로 몸밖에 안 보는 부류인 것 같다는 느낌이 계속 드는 것이다.

'아니, 무슨 저주라도 받았나. 내 주위엔 왜 이런 놈들뿐이야?'

아, 어서 시리스를 만나고 싶다. 사랑스러운 우리 시리스.

어쨌거나 굳이 동행할 이유는 전혀 없다. 그래서 막 거절을 하려던 찰라, 문득 뇌리에 스치는 것이 있었다.

'가만, 이 녀석 성직자잖아?'

성직자.

신의 의지를 대행하는 자. 기적으로써 사람들을 보살피고 신의 가르침에 따라 사람들을 이끌며 올바른 삶을 유도하는 목회자이자 인도자.

뭐, 대충 정의하자면 저런 것이겠지만 마법사였던 레펜하르트는 신의 가르침 따위는 별로 믿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 성직자란 단어가 의미하는 바는 단 하나뿐이다.

최고급 약통.

병도 상처도 대충 갖다 비비면 싹 낫는 최상급 붕대.

'생각해 보니 우리 시리스, 데리고 다니다 보면 어디 다치거나 아플 일이 생길 지도 모르잖아? 챙겨 줄 놈 하나 있어서 나쁠 것 없겠는데?'

예전엔 마법이 경지에 이르러 힐링 계열까지 익혔으니 레펜하르트가 직접 치료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이 불가능하다. 뭐, 짐 언브레이커블의 오러가 있으니 치유 약물과 병행해 비슷한 효과를 낼 수야 있겠다만, 그건 너무 단가가 비싸고.

'약통 들고 다녀서 손해 볼 건 전혀 없지?'

별 생각 없었는데, 막상 눈앞의 이 소년이 얼마나 효용 가치가 있는지 깨닫고 나니 욕심이 생겼다. 레펜하르트는 부드럽게 웃었다. 갑자기 태도가 싹 바뀌어서 실란이 살짝 경계 어린 눈빛을 보인다. 그가 어깨를 으쓱이더니 손짓을 했다.

"마음대로 해라. 따라오든지 말든지."

승낙한 뒤 레펜하르트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실란이 좋아라 옆에 달라붙더니 이것저것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복근을 선명하게 만들고 싶은데 그냥 윗몸일으키기만 해선 힘들더라고요 역시 상복근, 중복근, 하복근을 따로 부하를 줘야 제대로 식스 팩이 윤곽이 생기는 걸까요?"

"몰라, 내가 아는 건 죽도록 맞고 죽도록 바위 드는 것뿐이야."

걸어오는 말을 대충대충 주워 넘기며 그는 이 골수 근육 마니아 미소년 성직자를 데리고 길을 떠났다. 자, 어서 가야지. 차탄 공국으로.

'시리스, 내가 간다!'

"그러고 보니 연금술사 중 누군가가 근육 증강에 특효인 시약을 연금했다는 소문이 있어요. 이름을 프로틴이라고 붙였다든가?"

"아, 관심 없다니까?"

구시렁대는 두 사람의 머리 위로 겨울 석양이 천천히 내려오고 있었다.

제4장 엘븐하임

1

거대한 대리석으로 된 저택, 규모만도 3층 높이에 수많은 별실들이 딸린 그 화려한 저택의 한 침실에서 청년이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젠장! 아직도 이년 태도가 그대로잖아! 대체 어떻게 교육을 시킨 거야?"

청년 앞에 무릎 꿇은 덩치 큰 사내 하나가 쩔쩔매며 변명을 해 댔다.

"죄송합니다, 베레트 도련님! 저도 최선을 다 했습니다만...."

사내가 이를 갈며 옆을 돌아보았다. 침실 한구석에 가무잡잡한 피부를 가진 미모의 엘프 소녀가 싸늘한 얼굴로 서 있었다. 청년, 베레트가 보름 전 구매한 슬레이어였다.

이미 많은 엘프 노예들을 가지고 놀아 본 베레트였지만 슬레이어만큼은 손에 넣지 못했다. 안 그래도 엘프 노예는 다른 노예들에 비해 눈 돌아갈 만큼 비싼데, 슬레이어는 그 엘프 노예들 중에서도 엄청난 고가를 자랑하는 것이다. 차탄 공국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대상단 카론의 후계자인 베레트였지만 그래도 슬레이어를 구입하는 것은 정말 크게 각오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던 중이었다. 때마침 슬레이어치곤 이상할 정도로 싼, 평범한 엘프 노예 수준의 매물이 나온 것이다. 너무 싸기에 좀 수상하게 여겨서 물어봤더니, 성격이 너무 까탈스러워서 잘 팔리지 않은 엘프였단다.

그래도 슬레이어답게 전투력도 확실하고 성노로 쓰기에도 충분히 아름다운 외모여서 그냥 속는 셈 치고 구입했다. 까탈스러운 성격 정도는 직접 교육시키면 된다고 생각했다. 이미 많은 엘프 노예를 거느리고 있는 베레트였기에 별 걱정을 하진 않았다. 성격이 까칠해 봤자 노예 아닌가? 명령에만 충실히 복종하면 그것으로 족했다.

그런데 막상 사 와 보니, 왜 그리 싼지 바로 이해가 가 버렸다. 이 엘프 소녀는, 기가 세도 너무 셌다.

"아, 저 재수 없는 눈깔...."

이름도 붙이지 않은 저 슬레이어 소녀를 노려보며 베레트는 인상을 구겼다. 그녀는 발가벗은 전신을 얇은 홑이불로 감싼 채 차가운 눈으로 청년을 직시하고 있었다. 무심하면서도 묘하게 신경을 건드리는, 은은한 경멸을 담은 눈초리였다. 그래서 지금도 성질이 뻗쳐서 확 강간해 버리려다 흥이 식은 베레트였다.

이 엘프 소녀가 딱히 명령을 거부하는 것은 아니었다. 시키면 시키는 대로 순순히 하기는 한다.

하지만 그때마다 대놓고 싸늘한 시선을 보내는 것이다. 엘프 주제에 마치 인간이라도 된 것처럼 도도한 표정이라니? 엘프라면 당연히 주인께 충성하고 애교를 부리며 몸도 마음도 모두 바쳐야 하는 것이다. 그러라고 일부러 비싼 돈 주고 구입한 것이 아닌가?

그래서 수하를 시켜 '교육'도 시도해 보았다. 밥도 굶기고 즉신 두들겨 패기도 했다. 보통 이 정도 하면 어지간히 말 안 듣던 노예라도 금방 꼬리를 내리며 노예다운 모습을 되찾곤 한다.

하지만 이 소녀에겐 교육이 영 효과가 없었다. 죽도록 두들겨 맞고 사흘을 내리 굶으면서도 도도한 태도를 버리지 않았다. 뭐, 이대로 시간을 두고 구슬려 천천히 마음을 열게 한다는 선택지도 있기야 하겠다만, 베레트는 굳이 그럴 생각은 없었다. 그럴 바에야 그냥 연애를 하지 뭐하러 노예를 비싼 돈 주고 사냐?

베레트가 열불이 터져 버럭 소리를 질렀다.

"젠장, 그놈의 눈깔 좀 어떻게 해 보라니까?"

엘프 소녀가 무심한 어조로 대답했다.

"타고난 눈입니다."

말투는 무심하지만 누가 들어 봐도 비아냥거리는 기색이 완연하다.

"엘프 주제에 이년은 도대체 왜 이리 건방진 거야?"

"타고난 성격입니다."

노예 주제에 주인이 불같이 화를 내고 있는데도 꼬박꼬박 말대꾸를 해 댄다. 울화통이 터져 베레트는 엘프 소녀를 후려갈겼다.

퍼억!

소녀의 가녀린 몸이 고급 양탄자 위를 뒹군다. 하지만 비명은 없다. 입안이 터졌는지 핏물이 흘렀지만, 슥 닦을 뿐 신음조차 흘리지 않았다. 그저 한없이 차가운 눈으로 베레트를 노려볼 뿐.

"아으...."

얼굴이 시뻘게진 베레트를 곁에 있던 두 명의 엘프 노예들이 열심히 말렸다.

"주인님, 진정하세요. 저 아이가 너무 어리석어 주인님의 자비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그래요, 주인님. 저런 불량품 엘프 따위 신경 쓰지 말고 저희를 사랑해 주세요."

둘 다 얇은 천으로 비부만 간신히 가린 야하기 그지없는 모습이었다. 애교 어린 목소리로 속삭이는, '바람직한' 엘프다운 모습을 보이는 두 노예의 태도에 화가 조금 가라앉았다.

"후우...."

베레트가 씩씩대다가 소리를 질렀다.

"집사!"

문 밖에서 전전긍긍하고 있던 중년인이 허겁지겁 방으로 들어왔다.

"예, 도련님!"

"저거 반품해 버려. 젠장, 싼 맛에 샀더니 완전 불량품이잖아?"

원래 슬레이어는 가격에 비해서 사실 실질적으로 큰 쓸모는 없다. 성적 노리개의 용도라면 그냥 보통 엘프 노예를 사면 된다. 호위 용도라면 검투사 출신의 오크 투사들을 거두면 된다. 주인을 자기 몸처럼 아끼고 사랑하는 미모의 여검사라는 마초적 망상이 충족되어야 비로소 가치가 있는 것이다.

집사가 쓰러진 엘프 소녀를 부축해 일으켰다. 그리고 내심 안도했다.

'반품하라 하시는 걸 보면 덮치진 않았나 보군. 다행이다, 돈 굳었네.'

처녀성을 잃은 슬레이어는 반품 불가다. 애초에 남자들의 멍청한 로망 때문에 태어난 직종(?)이다 보니 처녀가 아니면 팔리지도 않는 것이다. 노예상들은 특히나 엘프들의 처녀성에 민감하다. 몰래 덮치고 슬쩍 반품하려는 얌체 손님들이 많다 보니 다들 그쪽 감별안은 신의 경지에 다다라 있었다.

그래서 열이 뻗친 베레트도 결국 이 엘프 소녀를 건드리질 못했다. 아무리 싸게 샀다곤 해도 슬레이어치고 싸단 소리지, 거액인 것은 틀림없었으니까.

"역시 돈 좀 더 보태서라도 제대로 된 걸 사야겠어."

"알겠습니다. 도련님."

고개를 숙인 뒤 집사가 엘프 소녀에게 손짓을 했다.

"따라오너라."

여전히 냉기가 줄줄 흐르는 얼굴이지만, 소녀는 반항하지 않고 순순히 집사를 따라갔다.

"...."

그렇게 차탄 공국 내에서도 역사와 전통이 깊은 엘프 전문 노예 경매장, 엘븐하임에서 148번이라 불리던 이 엘프 소녀는 세 번째 반품을 당하게 되었다.

☆ ☆ ☆

회색빛 도시, 수많은 마차들이 짐을 싣고 오가고 그 사이로 행상들이 어지러이 걸음을 옮긴다. 빽빽하게 세워진 석조 건물들은 모두 1층에 상점을 열고 각종 물건들을 판다. 자신의 상점이 없는 이들도 가판대를 설치하고 호객 행위에 열심이다. 다리, 광장, 거리 할 것 없이 가격을 흥정하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진다.

그 요란한 거리 위를 두 사람이 걷고 있었다. 두꺼운 코트를 걸친 덩치 좋은 청년, 레펜하르트와 새하얀 법복 차림에 머리를 허리까지 기른 아름다운 소녀, 사실은 소년인 실란이었다.

"정말 혼잡한 곳이네요. 대륙에서 제일가는 상업 도시라더니...."

실란이 주위를 둘러보며 혀를 내둘렀다. 다들 추위 따위는 느끼지도 못하는 표정이다.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거리 전체가 활기로 가득 찼다.

그들은 지금 차탄 공국 수도, 제플린에 도착해 있었다.

차탄 공국은 세 왕국, 그라임과 크로방스, 바실리 왕국의 접점에서 무역으로 탄생한 나라다. 3개국 교역으로 큰돈을 번 차탄 상회의 주인이 그라임 왕국으로부터 대공의 칭호를 받고 이 땅을 구입, 공국으로 독립한 것이다.

그런 만큼 차탄 공국은 상인들에게 특히나 많은 특혜가 있었다. 등록된 상인에겐 세금도 적게 걷고 영지 통과세도 면제된다. 상업을 국가의 기틀로 내세운 차탄 공국의 수도, 제플린은 상인들에게 있어 꿈의 도시였다. 대륙을 떠도는 행상들의 대부분의 꿈이 바로 이 도시에 자신의 상회를 차리는 것일 정도였다.

"쉽게 말해 돈독 오른 동네란 소리지."

시큰둥한 눈초리로 주위를 둘러보며 레펜하르트는 계속 걸었다. 하탄 산맥에서 이곳까지 오는 데 열흘 정도가 걸렸다. 그 혼자였다면 사흘도 안 걸릴 거리였지만 실란이 있으니 어쩔 수가 없었다. 그래도 중간에 짐마차 하나를 얻어 타서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더 걸렸을 것이다.

'이곳에 시리스가 있다.'

마음이 급했다. 걸음이 빨라졌다. 실란이 허겁지겁 뒤따르며 소리쳤다.

"아유, 천천히 좀 가요! 다리 길다고 자랑하는 거야 뭐야?"

잠깐 눈살을 찌푸렸지만 레펜하르트는 순순히 속도를 늦췄다.

비록 실란 때문에 좀 늦어지긴 했어도 그가 있어 득 된 것이 더 많았다. 귀족도 아닌 레펜하르트가 바실리 왕국의 국경을 넘기란 사실 쉽지 않다. 용병 길드 같은 곳에 소속된 것도 아니고, 확실한 신분이 없으니 국경 경비대가 순순히 보내 줄 리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원래는 몰래 밀입국할 작정이었다. 하지만 실란의 한마디로 모든 것이 해결됐다.

-필라넨스를 섬기는 순례자입니다.

순례자에겐 모든 국경이 열려 있다. 간단한 치유술로 경비대원들의 고질병 몇 개를 치료해 주니 모두가 반색하며 통과를 허락해 주었다. 치유술을 구사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신관임을 증명하고도 남았으니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알았다, 천천히 갈게."

다시 나란히 길을 걸으며 두 사람은 계속 움직였다.

할 일이 많았다. 일단 팔톤에서 얻은 기물들을 현금화해야 한다. 그래야 시리스를 구하러 갈 수 있다. 정확히는 구매하러 가는 것이지만, 역시 저 표현은 거부감이 들어 애써 무시하는 레펜하르트였다.

상인 거리를 지나 숙박 거리 쪽으로 열심히 걷던 중이었다. 거리 한쪽에 세워진 한 태버언tavern에서 소동이 일어나는 것이 보였다.

"사, 살려 주십쇼!"

웬 허름한 50대 남자가 건장한 사내 둘에게 붙잡혀 애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서 뚱뚱한 20대 청년이 몽둥이를 든 채 인상을 구긴다.

"야, 꼭 잡고 있어!"

버둥대는 50대 남자를 향해 청년이 연거푸 몽둥이질을 했다. 꼼짝도 못하고 남자가 계속 얻어맞는다.

"악! 아악!"

레펜하르트와 실란이 당황해 걸음을 멈췄다. 처참하게 얻어맞은 남자가 얼굴 가득 피를 흘리고 있었다.

"뭐, 뭐죠?"

둘 다 당황해 주위를 둘러보았다. 벌건 대낮에 길거리 한복판에서 사람이 맞아 죽어 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아무도 말리는 이가 없다. 그냥 혀를 차며 제 갈 길을 갈 뿐. 상황을 모르니 끼어들지 말아야 할지 판단이 안 서 둘은 잠시 주춤했다.

"사, 살려 주십쇼! 악! 아악!"

연거푸 비명이 터져 나온다. 안 되겠다 싶어 레펜하르트가 막 나서려던 차였다. 뚱뚱한 청년이 몽둥이질을 멈췄다. 속이 풀렸는지, 꽤나 이죽대는 표정이었다.

"이제 좀 주제 파악을 하겠나? 거렁뱅이 주제에 감히 롤페인 상회를 욕해?"

보아하니 저 남자가 롤페인 상회에 대한 욕을 했다가 저 청년에게 걸린 모양이었다. 롤페인 상회라면 공국 2위의 대상회다. 레펜하르트는 눈살을 찌푸리며 뚱뚱한 청년을 노려보았다.

확실히, 의복이며 걸친 보석들이 하나같이 고가의 것뿐이었다. 전체적으로 비싸 보이는 놈이랄까? 몸도 잔뜩 살이 오른 것이 비싸다면 비싼 몸이었다. 어지간히 잘 살지 않고서야 저렇게 살찌기도 힘들다.

건장한 사내들이 사내를 내팽개친다. 청년이 쓰러진 50대 남자를 내려다보며 오만하게 웃더니, 곁에 둔 호위병에게 손짓을 했다. 호위병이 허리춤에서 돈 자루를 끌렀다.

"자, 30대 때렸으니 금화 서른 닢 주면 되겠지?"

쓰러진 남자에게 금화를 던진 뒤 낄낄대며 청년이 자리를 떴다.

"이제 좀 주제 파악을 했을 것이다. 거렁뱅이."

레펜하르트는 입을 쩍 벌렸다. 전생에 온갖 잡놈들 많이 만나 본 그였지만, 저런 개잡놈은 처음이었다. 사람을 죽도록 패고 돈 던져 주고 떠나 버려? 후환 같은 것은 생각지도 않는 모습이었다.

그렇게 레펜하르트가 기막혀하는 동안, 실란이 재빨리 쓰러진 남자를 부축하며 치유술을 펼쳤다. 남자가 신음을 흘리며 정신을 차렸다.

"괜찮으세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울먹이며 감사를 표하는 모습을 보니 예쁜 얼굴이 팍 일그러진다. 실란이 화를 내며 일어났다.

"뭐예요, 저 인간? 당장 치안대를 찾아가죠!"

백주 대낮에 사람을 팼으니 증인도 수두룩하다. 아무리 저 뚱뚱한 청년이 고위 귀족이라 해도 이 정도면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그, 그래도 이것이면 자리 잡을 밑천이 되어 줄 겁니다."

아파하면서도 남자가 떨어진 금화를 열심히 줍는다. 그 모습이 너무도 비굴해 실란은 말을 잃었다. 금화를 다 줍더니, 남자가 연신 고개를 숙이며 자리를 떠났다.

실란이 허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니, 그럼 돈 받았으니까 그냥 넘어가는 거예요? 그런 거예요?"

"이 동네가 원래 그래."

기막혀하는 실란의 어깨를 두드려 주며 레펜하르트가 쓴웃음을 지었다.

"납득이 안 가요."

계속 걸음을 옮기면서도 실란은 연신 투덜대고 있었다.

높은 신성력을 가진 덕에, 어린 나이지만 실란은 꽤 세상을 돌아다녀 본 경험이 있었다. 너무 어리다보니 나이 많은 다른 신관과 함께 다니긴 했지만 그래도 바실리 왕국 남부 지역은 꽤 많이 가 본 몸이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 힘없는 이들이 당하는 모습도 많이 봐 왔다. 권력을 가진 이들의 횡포는 세상 어디가나 마찬가지였다. 손 닿는 대로 그들을 돕고, 가능하면 억울함을 풀어 주려 노력하기도 했다.

그런 실란의 사고방식으로는, 저 얻어맞은 사내의 태도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아무리 상대가 권력자라지만 이 정도 상황이면 충분히 고발할 수 있었다. 당당히 자신의 피해를 알리고 처벌을 받게 할 수 있었다. 물론 그래 봤자 권력자가 무슨 큰 처벌을 받기야 하겠냐마는, 그래도 억울함을 풀 수는 있지 않겠는가?

그런데 저 남자는 그저 돈에만 관심이 있을 뿐, 억울함을 풀 생각도 안 하는 것처럼 보였다. 레펜하르트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니까, 이 동네는 그 처벌이란 것도 벌금이거든. 돈 내면 그냥 해결돼. 감옥에 가지도 않아."

그리고 그 벌금은 국가가 날름 먹는다. 얻어맞은 이에겐 땡전 한 푼 안 돌아간다. 남자 입장에서 그나마 치료비라도 건지려면 돈을 줍는 쪽이 더 나은 것이다.

"뭐 이런 나라가 다 있어요?"

"그래서 말했잖아, 돈독 오른 동네라고."

"거참...."

씁쓸한 기분을 안은 채 두 사람은 숙박 거리로 들어섰다. 길 좌우로 온갖 여관들이 성업 중이었다. 적당한 숙소를 찾아 걷던 중, 문득 실란이 물었다.

"그러고 보니 레펜 씨, 이 도시엔 대체 무슨 일로 온 건가요?"

그동안은 조금 서먹서먹해 상대의 일을 묻는 것이 좀 꺼려졌다. 하지만 함께 여행하며 꽤 친해지기도 했고 목적지에도 이미 도착했으니, 슬슬 물어봐도 되지 않을까 싶다.

레펜하르트가 잠깐 난처해하는 표정을 짓더니 작게 중얼거렸다.

"...를 사러 왔다."

"네?"

"엘프를 사러 왔다고!"

순간 실란의 눈초리가 요상하게 변했다.

"흠, 레펜 씨도 결국 남자였군요."

솔직히 엘프 노예 탐내는 놈들은 목표가 다 똑같다. 레펜하르트가 머리를 벅벅 긁었다.

"왜 그런 눈으로 보는 지도 알겠고, 솔직히 그렇게 보인다는 것도 인정하지만 그런 건 아니야."

"아니면 뭔데요?"

"으음...."

차갑게 되묻는 실란을 보며 레펜하르트는 더더욱 머리를 세차게 긁었다. 전생을 설명할 수가 없으니 어떻게 변명을 할 수가 없다.

"그래, 그런 거 맞아. 그냥 그렇다고 해 두자고."

"으이그, 하여튼 남자들이란."

"꼭 자기는 남자가 아니란 것처럼 말한다, 너?"

"윽? 그런가요?"

여자 같다는 점이 지극히 콤플렉스인 실란은 당황해 중얼거렸다. 그런가? 남자라면 당연히 여자를 대하며 껄떡대야 정상인 건가? 그러고 보니 무투승 아저씨들도 치마 두른 여자만 보면 쉴 새 없이 껄떡댔었어. 아, 혹시 내가 근육이 안 불어나는 이유가 껄떡댐이 부족해서였나!

엉뚱한 데서 요상하게 자아비판을 해 대는 실란을 내버려 둔 채 레펜하르트는 계속 거리 좌우를 살폈다. 2층으로 된 커다란 건물이 눈에 들어오자 그가 손가락질을 했다.

"아, 저기 괜찮아 보인다."

상당한 고급 석재로 지어진, 입구에 '황금의 휴식처'란 간판이 걸려 있는 여관이었다.

여관은 깔끔했다. 그리고 화려하기도 했다. 이름부터가 황금의 휴식처더니, 정말 주머니에 황금 좀 두둑하지 않으면 들어올 엄두도 안 날 곳이었다. 1층 홀의 테이블들도 모두 정교하게 세공된 고급품이었고 벽에 걸린 그림도 우아했다.

실란이 두리번거리며 혀를 찼다.

"엄청 고급스러운 곳인데요? 아무리 팔톤에서 돈 많이 벌었다지만 아껴 쓰지 않으면 금방 거덜 날 텐데...."

레펜하르트가 본 실력을 보인 후, 에드워드 경은 그에게도 따로 팔톤에서 건진 기물들을 몇 개 나눠 주었다. 실란은 그것을 염두에 두고 말한 것이었다. 그 기물들의 가격이면 어지간한 중산층 1년 생활비가 나올 정도의 금액이겠지만, 그래도 이렇게 사치하면 얼마 못 간다. 실제로 물어보니 이곳의 하루 숙박비는 은화 열 닢씩이나 되었다.

"괜찮아, 괜찮아."

물론 따로 두둑하게 챙겨 둔 레펜하르트에게야 무시할 수준의 금액이다. 은의 시대 금화로 통 크게 실란 몫까지 계산한 뒤, 그는 2층으로 올라갔다. 의외로 돈 많은 집안이었나 보다고 혀를 내두르며 실란도 뒤를 따랐다.

큰 거실과 작은 방 두 개가 딸린 화려한 룸에 여장을 푼 뒤, 레펜하르트가 백 팩을 챙기며 실란에게 말했다.

"아, 그럼 나 잠시 좀 다녀올 데가 있으니까 여관에서 기다리고 있어."

"응? 그냥 같이 가죠?"

"아, 이건 좀 같이 가기 곤란해서...."

레펜하르트가 난처해하며 말미를 흐렸다. 지금 그는 팔톤에서 몰래 챙긴 기물들을 싹 팔러 가는 것이다. 몰래라는 부분이 중요하다. 절대 실란을 데리고 갈 수가 없다.

'어떻게 핑계를 대야 하나?'

레펜하르트가 이런저런 핑계를 떠올리고 있는데, 의외로 실란이 더 캐묻지 않았다.

"그래요. 그럼 다녀오세요."

웬일로 순순히 넘어간다? 내심 안도한 레펜하르트가 손을 흔들며 잽싸게 방을 나섰다. 텅 빈 방에 홀로 남은 실란이 갑자기 법복을 벗고 늘씬한 상체를 드러냈다. 몸을 풀며 실란이 싱긋 웃었다.

"그럼 난 방에서 운동이나 해야겠다."

굳이 실란이 따라가겠다고 나서지 않은 이유였다. 그동안은 이동하느라 바빠 채 운동할 시간을 못 냈다. 뭐가 그리 급한지 레펜하르트는 하루 종일 걷고 또 걷기만 했던 것이다. 신성력으로 계속 체력을 보충하지 않았다면 따라갈 수도 없을 만치 강행군이었다. 그러고 숙소 잡으면 바로 잠들어 버렸으니 운동할 시간도 체력도 없었다.

자고로 몸을 만들려면 이미지 트레이닝도 중요한 법, 레펜하르트의 멋진 몸매를 떠올리며 실란이 열심히 팔굽혀펴기를 시작했다.

"하나~! 두울~ 서이~ 너이~!"

풀썩!

고작 네 번 하자 팔이 후들거리더니 바닥에 쓰러진다. 참으로 부실한 몸인 것이다. 하지만 실란은 포기하지 않았다. 신성력으로 몸을 치유하며 다시 운동을 시작했다.

"포기하지 말자! 실란! 너는 할 수 있어!"

화려한 객실 안에서 우렁찬 숫자 세는 소리가 연달아 메아리쳤다.

2

제플린 중심가의 한 카페.

대리석으로 벽을 올리고 은제 세공품으로 실내 장식을 한 이곳은 차탄 공국에서도 가장 고상한―이 동네에서 저 단어는 '돈이 많은'과 동일어로 쓰인다― 손님들만 들르는 곳이었다.

한 뚱뚱한 청년이 테이블에 앉아 티타임을 가지고 있었다. 차탄 공국 2위의 대상회, 롤페인 상회의 당대 회주인 테리크였다. 오랜만에 거리를 나온 그는 홍차를 홀짝이며 기분 좋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역시 가난한 것들의 시기심이란, 쯧."

조금 전 불쾌한 일이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산책을 하던 도중인데 태버언에서 웬 나이 든 행상 하나가 롤페인 상회를 욕하는 걸 발견한 것이다. 롤페인 상회가 금력을 앞세워 중소 행상들을 등쳐 먹는다며 사내는 대낮부터 술을 마시며 소리 지르고 있었다.

롤페인 상회의 주인으로서 어찌 그 모습을 그냥 볼 수 있겠는가? 당연히 가르침을 내렸다. 덕분에 금화 서른 닢이라는 예상 외 지출이 있었지만 그 정도야 푼돈에 불과했다.

"억울하면 지들도 돈을 벌면 될 것을 가지고 길거리에서 욕이나 하고 있다니. 안 그러느냐?"

"그럼요, 주인님."

곁에 앉은 엘프 소녀가 재롱을 피우며 맞장구를 친다. 호위로 데려온 사내들은 카페 분위기 흐린다는 이유로 밖에서 대기하고 있고, 전용 슬레이어만 대동한 채 차를 마시고 있는 테리크였다.

그러고 있는데 문득 카페 문을 열고 익숙한 얼굴이 들어왔다. 카론 상회의 후계자, 베레트였다. 야시시한 옷을 걸친 엘프 노예와 함께 들어오는 그의 모습에 테리크는 잠시 의아해했다.

저 엘프 노예, 복장을 보니 결코 슬레이어가 아니다. 슬레이어라면 지금 그의 곁에 앉은 이 엘프 소녀처럼 폼 나는 검사의 복장을 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뭐, 너무 슬레이어를 갖고 싶어서 그냥 엘프 노예를 검사 복장 시키는 바보들도 가끔 있긴 한데 그건 꼴불견이라 양식 있는 차탄 공국인이라면 결코 하지 않을 일이었다.

"오랜만이군, 베레트?"

"테, 테리크?"

테리크를 본 베레트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테리크가 베레트 곁에 선 엘프 노예를 보며 비웃음을 던졌다.

"뭐야, 베레트? 슬레이어 샀다더니 어디 놔뒀냐? 집에 모셔두고 치성 드리냐?"

'젠장, 하필이면 여기서 저놈을 만나다니!'

베레트는 이를 갈았다. 그가 슬레이어를 사고 싶어서 난리친 이유 중 대부분은 사실 눈앞의 테리크가 하도 잘난 척을 해 대 꼴 보기 싫다는 점이 컸다. 그렇다고 없는 슬레이어를 만들 수도 없는 노릇, 베레트가 한숨을 쉬며 대꾸했다.

"그거, 한 보름쯤 전에 반품했다."

"잉? 반품?"

의아해하는 테리크에게 하소연하듯 베레트가 설명을 이었다. 이야기를 다 들은 테리크가 폭소를 터트렸다.

"푸하하핫!"

"왜 웃어?"

"고작 엘프 노예 하나 못 길들이냐? 그래서 카론이 아직도 공국 10위를 왔다 갔다 하는구먼. 후계자가 이 모양이니."

"크윽!"

모멸감에 베레트는 이를 갈았다. 하지만 틀린 말이 없으니 반박할 수가 없다. 애써 베레트가 변명하듯 중얼거렸다.

"넌 뭐 할 수 있을 것 같으냐? 알고 보니 벌써 세 번이나 반품된 물건이더라. 어쩐지 너무 싸더라니."

테리크의 머리에 순간 멋진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안 그래도 베레트와 그는 서로 자존심 싸움을 해 대며 상대를 깔아뭉개려 노력하던 사이였다. 여기서 저 반품 슬레이어를 자신이 멋지게 조련해 낸다면 이놈의 표정이 과연 어떨까?

"훗, 두고 보라고."

의기양양하게 베레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거, 오랜만에 엘븐하임에 가 봐야겠네."

☆ ☆ ☆

여관을 나선 레펜하르트는 바로 상업 거리로 향했다.

은의 시대 기물은 워낙 고가이다 보니 어지간한 곳에선 구입할 엄두도 못 낸다. 하지만 이곳은 차탄 공국의 수도 제플린이다. 금화 몇천 닢쯤 바로 지급할 수 있는 현금 동원력을 가진 대상회가 수두룩한 곳이다.

적당히 근처의 큰 상회나 들어가 레펜하르트는 바로 보물들을 현금화했다. 과연 닳고 닳은 상인답게 상대도 열심히 흥정을 했지만 그에겐 씨도 먹히지 않았다. 이 기물들은 이미 전생에도 팔아 본 물건이었다. 적정가쯤은 뻔히 꿰고 있었다.

차탄 금화로 이천 닢에 달하는 거액을 들고 희희낙락하며 레펜하르트는 상회를 나왔다. 보통 이 정도 금액이면 환어음으로 대신 처리하곤 하지만―금화 이천 닢이면 보통 사람이 쉽사리 들고 다닐 무게는 아니다― 그는 모조리 현금으로 받았다. 금화 이천 닢 무게쯤이야 그거 소년 시절 한 손으로 들던 바위만도 못한 것이다. 게다가 무한의 백 팩까지 있으니 전혀 문제 될 것이 없었다.

"후후,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백 팩을 만지며 레펜하르트는 빙그레 웃었다. 평소 같으면 이렇게 전부 현금화하는 짓은 잘 안 하지만, 보통 슬레이어의 평균가가 금화 천 닢 정도다. 반드시 시리스를 구해야 하니 싹 다 돈으로 바꿔 넉넉하게 준비한 것이었다.

레펜하르트는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이대로 바로 시리스를 만나러 갈까 하다가, 그래도 동행이 있는데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는 것도 아니다 싶어 일단 여관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막 객실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서는 참이었다.

"응?"

측백나무로 된 질 좋은 마루 위에서 실란이 땀을 뻘뻘 흘리며 팔굽혀펴기를 하고 있었다. 물이라도 쏟은 것처럼 바닥이 땀으로 흥건한 것이 이미 한참 동안 한 모양이었다. 레펜하르트가 들어오자 실란이 일어나지도 않은 채 고개만 까닥거렸다.

"왔어요? 볼일 다 봤나 보네요?"

"...너 뭐 하냐?"

"운동하잖아요?"

보면 모르냐는 듯 실란이 퉁명스레 대답했다. 그리고 다시 앙상한 팔로 푸시 업에 열중한다. 그 모습을 레펜하르트는 멍하니 바라보았다. 함께 동행하며 실란이 남자다운 몸을 얼마나 동경하는지 익히 들었지만 막상 눈으로 보니....

'어이고, 저거 진짜 말랐네.'

실란이 왜 저리 근육 마니아가 되었는지 이해가 가고도 남았다. 정말이지, 전생의 자신과 비교해도 진짜 빈약하기 짝이 없는 몸이었다. 여린 팔다리에 얇은 어깨선, 툭 치면 부러질 것 같은 가는 목, 법복을 벗은 차림인데도 남자애 몸이 아니라 너무 말라 가슴이 없는 여자애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래도 전생의 그는 그럭저럭 마른 소년 수준이긴 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굉장히 열심히 하잖아?'

문득 레펜하르트는 의아해했다.

원래 근육이란 누구나, 어떻게 해도 가장 확실하게 늘어나는 것 중 하나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아무리 몸이 부실한 이라도 노력하면 어느 정도는 반드시 대가를 받게 되어 있다.

그런데 하루 이틀도 아니고 5년 넘게 매일매일 운동했는데도 근육이 안 붙는다기에, 속으로 끽해야 팔굽혀펴기 몇 번 하고 말았거니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하는 걸 보니 바닥이 땀으로 흥건히 고여 있는 것이 보통 노력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그런데 왜 근육이 안 붙지?'

진짜 여자애라도 이 정도로 열심히 트레이닝하면 제법 근육선이 나와 줘야 정상이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실란은 열심히 팔을 굽혔다 폈다 하고 있었다. 이제는 숫제 팔이 아니라 전신이 파들파들 떨리는 것이 꼭 간질 환자 같다. 아무리 봐도 오버 워크라 레펜하르트가 그를 말렸다.

"야야, 몸에 무리가 가면 역효과야."

열심히 하는 것도 정도껏이지, 저런 허약한 몸에 무리하다간 골병들기 십상이다. 바닥에 풀썩 쓰러진 실란이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부축해 주며 레펜하르트가 눈살을 찌푸렸다.

"야, 너 근육통 때문에 며칠 꼼짝도 못하는 거 아냐?"

"괜찮아요, 여정에 지장이 생기진 않을 테니까."

숨을 몰아쉬면서 실란이 희미하게 웃었다. 그는 동행에 대한 배려심이 있는 소년이었다. 다 생각해 둔 바가 있는 것이다.

실란이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의 전신에서 핑크색 성광이 반짝 빛났다. 지친 소년의 전신을 여신의 가호가 어루만진다. 레펜하르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야, 너 지금 뭐해?"

잠시 후, 산뜻해진 얼굴로 실란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조금 전의 피로한 모습이 거짓말 같았다.

"어때요, 말끔해졌죠?"

"...."

순간 레펜하르트는 왜 이 꼬맹이가 그토록 열심히 운동했는데도 근육이 안 붙었는지 확실하게 이해해 버렸다.

'야, 이 등신아! 기껏 운동하고 신성력으로 치유해 버리면 뭔 의미야, 그게!'

원래 신관의 치유 주문과 마법사의 힐링 주문은 그 체계가 전혀 다르다.

마법사의 힐링 주문이나, 트롤의 피를 정제해서 만든 힐링 포션, 그리고 의사나 연금술사들이 쓰는 회복용 약초는 육체가 지닌 자체 치유력을 증폭시키는 것이다. 즉, 내버려 두면 나을 것을 빨리 낫게 하는 개념에 가깝다.

그에 비해 신관의 치유 주문은 인간이 가져야 할 원래의 모습을 되돌려주는, 어떻게 보면 시간을 되돌리는 것과 개념이 비슷했다. 상처를 빨리 낫게 하는 것이 아니라 상처를 입기 전으로 돌이키는 것이 신관의 치유 주문이었다.

'즉, 이 녀석은 5년 내내 뻘짓만 했다는 소리네?'

원래 근육이란 잔뜩 혹사당하고 파괴된 부분이 재생하며 더더욱 크고 굵어지는 법이다. 그런데 그걸 신성력으로 원상 복귀시킨다? 그럼 운동하기 전으로 돌아갈 뿐인 것이다.

신성력으로도 육체를 단련할 수 있었으면 짐 언브레이커블이 뭐하러 그 비싼 돈 들여 가며 힐링 포션이며 회복 약초를 잔뜩 사다 제자를 담궜다 뺐다 하겠는가? 그냥 고위 신관 한 명이랑 계약해서 치유시키지. 그게 훨씬 싼데.

'어쩐지 뭔가 이상하더라니....'

실란의 무지에 레펜하르트는 혀를 찼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저 신관의 치유술을 개념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이는 대륙에서도 레펜하르트 한 명 정도였다.

신성력을 가진 신관 본인조차도 그냥 '신의 기적으로 사람이 나았다.' 정도로만 이해하지 그 치유 개념까지 신경 쓰진 않는다. 마법사야, 힐링 주문 자체가 7서클의 고위 주문이니만큼 거기까지 이른 자 자체가 별로 없다. 짐 언브레이커블도 초기에 신성 주문으로 제자들 치료해 보다가, 영 효과가 안 나와서 관뒀을 뿐이지 저 개념을 이해하고 그런 수련법을 만든 것은 아니었다.

전생의 삶에서 성녀라 불렸던 엘린은 그 가공할 신성력으로 잘린 팔다리조차도 되돌리는 이적을 보였다. 그 위력에 놀란 레펜하르트는 마법으로도 저 신성 주문의 효과를 내 보려고 한동안 연구했었고, 그러다가 결국 이 개념을 깨달은 것이다.

'그러니 실란이 모르는 것도 당연하겠지만....'

왜 근육이 안 붙는지, 왜 실란이 열아홉이나 되는 나이에 아이처럼 작은지 전부 이해가 갔다. 열두 살부터 매일 저 짓을 했으면 그나마 저만큼 큰 것도 용하다. 레펜하르트는 이걸 설명해 줘야 하나 하고 잠시 고민했다. 그리고....

'에이, 내버려 두자.'

어쨌거나 저 짓 해서 신성력이 펑펑 늘어난 것만은 틀림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실란에게 원하는 것은 저 강력한 신성력이지 근육 따위가 아니다.

어째 레펜하르트의 표정이 굳어 있으니 실란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왜 그래요? 뭐 잘못됐어요?"

레펜하르트는 잽싸게 표정을 관리했다. 그리고 부드럽게 웃었다.

"응? 아냐, 생각보다 굉장히 열심히라 조금 놀라서 그래."

"으히히."

칭찬해 주니 좋다고 웃는다. 슬쩍 양심이 찔러 레펜하르트는 실란을 외면했다. 아무래도 내버려 두긴 좀 그렇고, 틈틈이 지도나 좀 해 줘야겠다. 그냥 신성력으로 몸 치유하는 것만 그만두게 시켜도 금방 변화가 생길 것이다.

'그리고 호감도도 올라가겠지? 드디어 근육이 생기기 시작할 테니까.'

레펜하르트는 속으로 음흉하게 웃었다. 실란 정도의 고위 성직자는 이래저래 쓸모가 많으니 친하게 지내서 손해 볼 것은 전혀 없다.

"내가 좀 더 효과 좋은 단련법을 아니까, 나중에 가르쳐 줄게."

"앗! 정말요? 고마워요!"

음흉한 속생각도 모른 채 실란이 좋다고 날뛴다. 다시 한 번 양심이 찔려 레펜하르트는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화제를 바꿨다.

"아, 그리고 나 노예 경매장 좀 다녀올게."

"응? 이번에도 혼자 가려고요? 저도 같이 가요!"

실란이 법복을 걸쳐 입으며 달라붙었다. 운동도 할 만큼 했으니 수도 구경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뭐, 이건 굳이 몰래 처리할 일도 아니니 반대할 필요도 없다. 레펜하르트도 흔쾌히 승낙했다.

"그래, 같이 가자."

☆ ☆ ☆

자고로 노예 종족 중 최강의 인기를 구가하는 것은 단언컨대 엘프다. 일단 오크나 드워프에 비해 인간의 미적 기준을 충실히 만족시켜 주니까, 성능은 둘째 치고 그 미모만으로도 당연히 값어치가 상승하는 것이다.

원래 인간이란 입으로 한 말과 행동이 항상 다른 법인지라, 외모 지상주의를 통렬히 비판하는 지성인도 '엘프랑 오크 중 누구를 택할래?'라고 물으면 무조건 엘프를 택하게 되어 있다. 인간이란 그런 생물인 것이다.

그리고 엘프 노예의 가격은 상상을 초월했다. 어지간한 오크 검투사 열 명 가격을 합쳐 봐야 제일 싸구려라는 어린 엘프 소년 가격이 되지 않았다.

엘프는 특유의 긴 수명 때문에 인기가 있지만, 그 긴 수명이 바로 상품화하는 가장 큰 단점이기도 했다. 엘프의 수명은 인간의 네 배, 게다가 그 성장 비율이 인간과 똑같아 유년기 역시 네 배로 길었다. 어린 엘프를 키우고, 어느 정도 상품 가치가 생겨 쓸 만한 노예가 되려면 족히 몇 십 년은 걸린다. 어리석은 상인 하나가 돈 벌어 보겠다고 엘프 경매장을 세우고 아기 엘프들 젖병 물리다 늙어 죽었다는 이야기는 차탄 공국 내에서 유명한 농담이다.

그래서 엘프를 다루는 노예 경매장은 대부분 수백 년의 전통을 지닌 곳이 대부분이었다.

엘븐하임은 차탄 공국 내에서도 300년의 역사와 전통을 지닌, 실로 유서 깊은 엘프 전문 노예 경매장이었다. 엘프를 노예로 파는 경매장 이름을 엘프들의 낙원, '엘븐하임'이라고 짓다니, 그야말로 아이러니의 극에 달한 명칭이라 하겠다.

하지만 이 경매장 입장에선 진짜로 진지하게 붙인 이름이었다. 엘븐하임은 오랜 역사와 전통이 쌓아 온 노하우로 가장 건강하고 성능 좋은 최상의 엘프들을 길러 낸다는 높은 자부심이 있었다. 가끔 엘프 암컷들을 자신들이 강간한 뒤 처녀인 척 훈련시켜서 판매하는 악덕 경매장도 있는데, 엘븐하임은 언제나 우량 처녀 엘프 암컷만을 팔아 신용도가 높았다.

충실한 노하우를 바탕으로 높은 교육을 받게 하고 건강 상태 또한 최선을 다해 살피며 성실하게 최상의 엘프 노예를 생산하는 곳, 엘븐하임의 노예상들은 이곳이야말로 엘프들의 낙원이란 이름이 부끄럽지 않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라고 진지하게 믿고 있다는 점이 정말 무섭지."

주위를 둘러보며 레펜하르트가 굳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지금 그는 한 화려한 응접실에 앉아 있었다. 금박을 입힌 가구와 실크로 된 양탄자, 화려한 세공이 된 기둥들로 둘러싸여 무슨 귀빈이라도 대접하는 곳인가 싶을 정도지만, 엘븐하임 경매장에서는 평범한 접대실일 뿐이었다. 애초에 엘프 노예를 살 정도의 재력가라면 모두가 귀빈인 것이다. 이 정도 대접은 당연했다.

소파에 앉은 실란이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저 엘프 경매장은 처음 와 봐요."

바실리 왕국에도 오크 경매장은 제법 있지만, 엘프나 드워프 경매장은 없다. 인간과 수명이 비슷하고 빨리 성년이 되는 오크야 어느 곳에서건 사육, 판매할 수 있었지만 수명이 긴 엘프나 드워프는 어지간히 재력이 받쳐 주고 인정받은 곳이 아니면 힘들다. 그래서 실란도 차탄 공국에 오기 전까지 엘프 노예 경매장은 구경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래도 여긴 제법 잘 보살펴 주는 곳인가 보네요."

응접실 창문을 통해 경매장 안쪽을 살펴보며 실란이 흐뭇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오크 경매장 같은 경우는 워낙 더럽고 허름해 아무리 노예라지만 너무 막 다룬다는 느낌을 받는 곳이 많았다.

그에 비해 엘프 경매장은 건물부터가 화려하고 깔끔한 것이 무슨 왕궁이라도 온 것 같았다. 이런 곳이라면 엘프들도 행복하게 살 수 있겠구나란 생각이 드는 실란이었다.

그리고 레펜하르트는 갑갑한 마음에 연신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무심코 물었다.

"아무리 잘 보살펴 줘 봤자 노예의 삶이다. 그것이 진짜 행복할거라 여기는 거냐?"

"응? 원래는 숲 속에서 야생의 삶을 살던 것들이잖아요. 오히려 인간에게 길러져서 굶을 걱정, 죽을 걱정 없이 사는 게 더 행복하지 않나요?"

"으음...."

레펜하르트는 입을 닫았다. 저 착한 실란조차도 엘프가 노예로 팔리는 이 현실 자체에는 전혀 의문을 갖지 않는다. 이러니 전생의 그가 마왕으로 불리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전생의 실수도 깨달았다.

그에게 있어 이종족은 보살펴야 할 대상이었다. 그는 강했고, 절대적인 마법사였으니까. 세계의 불합리함을 볼 때 바로 응징할 수 있는 권능의 소유자였으니까.

예전의 그였다면 바로 이 경매장을 날려 버리고 엘프들을 해방시켰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마법의 힘이 없으니 불합리를 느끼면서도 참아야 한다. 그것은 분한 일이었지만, 동시에 새로운 깨달음도 안겨 주었다.

'그래, 아무리 힘으로 눌러 봐야 사람들 인식은 바뀌지 않아. 그저 공포를 느낄 뿐.'

이종족을 품속에 넣고 보듬어 안는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가 자신을 지키고, 자신이 노예가 아님을 주장했어야 했다. 물론 전생에서도 이종족들은 그리했지만 그 앞에 절대적인 마신 레펜하르트가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레펜하르트만을 보았지, 그 뒤에 있는 이종족들을 보지 못했다.

'다른 제국을 세워야 해. 전생과는 다른 제국을.'

마왕 레펜하르트의 암흑제국이 아니라 이종족들의 국가, 안타레스 제국이어야 비로소 사람들의 이 오랜 인식도 바뀌리라.

'뭐, 어느 쪽이건 간에 일단은 마법의 힘을 되찾는 것이 우선이지만.'

그렇게 머릿속으로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던 중이었다. 문이 열리고 중후하게 생긴 중년인이 방으로 들어왔다. 이곳까지 레펜하르트와 실란을 안내한 엘븐하임의 노예상 중 한 명이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손님."

그 뒤를 따라 스무 명의 엘프 여성이 차분하게 걸어 들어왔다. 엘프들을 일렬로 세우며 노예상이 자랑스레 소개했다.

"저희 엘븐하임 경매장이 자랑하는 슬레이어들입니다."

엘프 여인들은 모두 얇은 망사 옷만을 걸치고, 간신히 비부를 가리고 있었다. 원래 슬레이어를 구입하려는 놈들의 목적이 뻔하다 보니 몸매를 보여 주는 것 역시 중요한 상도(?)인 것이다. 이 노골적인 여체의 향연에 실란이 흠칫하며 눈을 가렸다.

"으, 으힉!"

"이거, 어린 아가씨에게 너무 과한 모습이었나요? 죄송합니다."

노예상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원래는 이런 망사도 안 입히고 그냥 나체로 선보이는 것이 정석인데, 하필 이 손님이 소녀를 동행하고 와서 어쩔 수가 없었다. 그래도 자기 딴에는 많이(?) 입혔는데도 저런 반응이다. 평소 같으면 아가씨가 아니라고 발끈할 법도 하건만, 실란은 여전히 눈 둘 곳을 찾지 못하고 허공을 둘러볼 뿐이었다.

'아니, 저 양반은 뭐 이런 데에 여자애를 다 데리고 온 거야?'

겉은 멀쩡하게 생겨서 은근 변태 같은 구석이 있는 손님인 것 같았다. 노예상은 속으로 혀를 찼지만, 그래도 베테랑답게 티 내지 않고 상품 설명을 시작했다.

"하나같이 고도로 단련되었고 잡일에도 능하고 밤일에도 충실합죠. 다들 처녀인 것은 물론입니다. 저희는 차탄 공국에서도 가장 신용이 높다고 자부하는 곳이니까요."

마치 어시장 생선들처럼 속살을 드러낸 채 수치스러운 표정조차 짓지 못하는 엘프 여인들, 그 추악한 광경에 레페하르트는 한탄했다.

'위대한 정령의 후손인 숲의 요정이 저런 모습이라니!'

하지만 지금의 그는 이 체제를 바꿀 만한 힘은 없다. 그의 무력은 분명 강인했지만 체제 전체를 바꾸려면 보다 강대한, 마법의 힘이 필요하다.

'일단은 시리스부터 구하고 보자.'

모든 일은 차근차근. 그렇게 다짐하며 레펜하르트는 도열한 엘프들을 살폈다. 그리고 의아해하며 노예상을 돌아보았다.

"이들이 엘븐하임의 모든 슬레이어들입니까?"

"물론입니다."

시리스의 모습이 없었다. 분명 이 경매장의 슬레이어로 살고 있었을 텐데? 당황하며 레펜하르트는 기억을 더듬었다. 틀림없었다. 이 시기라면 시리스는 분명 이곳에 있어야 했다.

레펜하르트의 표정을 다르게 해석한 노예상이 조심스레 물었다.

"마음에 안 드십니까?"

마음에 들고 안 들고의 문제가 아니다. 그가 원하는 것은 오직 시리스뿐이니까.

'하지만 대체 어떻게 시리스를 찾아야 하나?'

시리스라는 이름 자체가 그가 직접 붙여 준 것이니, 이곳에서는 그저 번호로만 불리고 있을 터였다. 고민하며 레펜하르트가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음, 좀 까무잡잡한 피부를 지닌 슬레이어는 없습니까?"

"아, 저희는 그레이 엘프 쪽은 다루질 않습니다만."

"그레이 엘프가 아니라, 하이엘프이지만 좀 까무잡잡한... 그런 타입은 없나요?"

어째 말하다 보니 제대로 엘프 노예 고르는 놈처럼 되어 버렸다. 과연 노예상은 참 별 놈 다 보겠다는 눈으로 레펜하르트를 보고 있었다.

'어쩐지 은근 변태 같은 구석이 있더라니.'

엘프 노예 사러 온 손님은 많고 많았지만 이렇게 괴상한 주문은 처음 들어 본 것이다. 얼마나 골수 엘프 마니아이길래 이렇게 까다로워?

"독특한 취향을 지니셨군요. 하이엘프를 원하는데, 하얀 피부는 싫으신 겁니까?"

"그, 그러니까 그건 아니고...."

레펜하르트는 쩔쩔 매며 되도록 변태처럼 보이지 않으려 노력했다. 물론 그래 봤자다. 실란이 기가 찬다는 듯 그를 째려보았다.

"아니, 엘프 노예 제도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하더니 이젠 타입도 따지는 거예요?"

"그, 그런 게 아니라...."

"흥! 그럼 그렇지. 엘프 사러 온다고 할 때 알아봤어."

실란은 레펜하르트를 흘기며 콧방귀를 흘렸다. 입으론 노예의 생활이 행복할 거냐니 어쩌니 하더니, 정작 구입 상황이 되자 제대로 취향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문득 필라넨스 고아원 수녀님이 하신 말이 떠오른다.

-남자는 크건 작건 모두 변태입니다.

과연 그렇구나! 득도한 기분이 되어 실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좌절 속에서 레펜하르트는 애써 실란을 외면했다. 노예상이 쓴웃음을 짓다 말고 뭔가 생각난 듯 손을 쳤다.

"아, 그런 슬레이어가 하나 있기는 합니다만...."

레펜하르트가 반색을 하며 되물었다.

"있습니까?"

"음, 데리고 와 보겠습니다만... 아니, 그냥 가서 보시겠습니까? 그게 지금 데리고 오기가 좀 애매한 상태라, 오래 기다리시게 하기가 좀 그렇군요."

"상관없습니다."

바로 레펜하르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시라도 빨리 시리스를 찾고 싶었다. 노예상이 그를 안내하며 방을 나섰다.

☆ ☆ ☆

경매장 안쪽의 커다란 회랑, 레펜하르트와 실란은 연신 주위를 둘러보았다. 실란은 그저 신기해서 그런 것이고, 레펜하르트는 혹시나 시리스가 보이지 않을까 해서였다.

회랑 중앙의 정원에서 어린 엘프들이 나이 든 엘프 여인을 따라 체조를 하는 모습이 보였다. 노예상이 친절히 설명을 해 주었다.

"어릴 적부터 적절하게 운동을 시켜 주어야 늘씬한 몸매로 자라거든요. 저희는 독자적인 운동법으로 청순가련한 타입부터 풍만한 가슴에 늘씬한 허리를 지닌 타입까지 다양한 상품을 개발하고 있습니다."

무심코 레펜하르트가 인상을 구겼지만 앞장 선 노예상은 미처 보지 못했다. 그들은 계속 회랑을 따라 걸었다. 회랑과 연결된 건물을 들어가니 식당이 나왔다. 노예용 식당인 듯했다. 식사 때가 아니어서 식당은 비어 있었지만, 안쪽에 몇몇 엘프 노예들이 열심히 음식을 만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저희 엘븐하임은 언제나 신선한 채소와 질 좋은 건과류로 엘프들을 먹이고 있습니다. 질 좋은 먹이를 먹여 키워 낸 엘프들은 피부에서 은은하게 과일향이 나지요."

"설명은 됐으니 어서 안내나 해 주시죠."

결국 울화통이 터진 레펜하르트가 한마디 던졌다. 노예상이 머쓱해하는 표정을 짓더니 걸음을 빨리했다. 이윽고 건장한 사내 두 명이 지키고 있는 커다란 철문이 나왔다. 노예상이 빠르게 말했다.

"148번을 보러 왔다."

문이 열리고, 커다란 투기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타앗!"

"하압!"

낭랑한 기합 소리와 함께 금속성이 요란히 울려 퍼졌다. 투기장 안에서 십여 명의 어린 엘프들이 무기를 들고 싸우고 있었다.

"아직 자라지 않은 슬레이어 후보들입니다. 저렇게 전투 연습을 시킨답니다."

순간 레펜하르트의 눈동자가 커졌다. 투기장 한가운데, 엘프 아이들을 상대하는 무표정한 엘프 소녀가 보였다.

"그리고 저 암컷이 그 슬레이어입니다만."

엘프 소녀가 아이들의 칼날을 피해 몸을 튼다. 섬세한 백금발이 나부껴 빛을 낸다. 레펜하르트의 두 눈에 눈물이 고였다.

'아아!'

기억 속의 긴 머리 대신 어깨까지 닿는 단발머리였지만, 전신에 누더기를 걸친 더러운 차림이지만 그럼에도 저 눈부신 광채는 빛을 잃지 않았다.

"뭐가 잘못되었는지 영 교육에 실패해서요, 세 번이나 반품된 결함품이라 손님 앞에 내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엘프 아이들이 연거푸 합공을 해 간다. 아이들이 든 것은 차가운 강철의 검, 하지만 소녀가 든 것은 목검도 아닌 종이를 돌돌 말아서 붙인 몽둥이가 전부다. 귀한 상품에게 혹시 멍이라도 들세라, 목검조차 쥐여 주지 않은 것이다.

"실력은 좋은데 성격이 너무 차갑고 대가 세서 아무래도 상품성이 떨어지거든요."

이 종이 몽둥이로는 검을 막을 수조차 없다. 소녀가 애써 피해 보지만 그때마다 전신에 칼날이 스친다. 그때마다 선혈이 흐르며 피부를 물들인다. 하지만 얼굴도 찡그리지 않는다. 그저 무심하게 공격을 피하고 허점을 노릴 뿐.

"결함품을 팔 순 없고, 그렇다고 돈 들여 키운 건데 처분할 수도 없어서 저렇게 애들 상대로 실전 감각을 익힐 허수아비 용도로 쓰고 있습니다요."

제대로 먹지 못해 비틀거리는 몸으로, 지극히 불리한 상황 속에서도 엘프 소녀는 투지를 잃지 않은 채 대련에 임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검술을 가르치려면 직접 살을 때리고 베어 보는 것이 중요한 경험 아니겠습니까?"

전신에 자상이 나 피 흘리면서도, 제대로 걸을 수도 없으면서도 그녀는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충실히 현재에 임한다.

레펜하르트가 신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시, 시리스...."

<2권에서 계속>

2권

제5장 과거의 인연

1

어두운 지하실, 각종 약병들과 기괴한 약초들, 동물들의 시체며 희귀한 광석들이 선반마다 꽉꽉 들어찬 곳이었다. 그곳에서 중년의 남자와 엘프 여인이 플라스크에 조심스레 시약을 옮겨 담고 있었다. 한창 마법 실험에 열중인 레펜하르트와 시리스였다. 평소의 깨끗한 옷 대신 둘 다 허름한 차림으로 두꺼운 서적을 연신 넘기며 진지하기 그지없는 표정으로 시약을 섞는다.

갑자기 시리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외쳤다.

"어? 거기에 지금 그거 섞으면 안 돼요!"

"응?"

외침이 조금 늦었다. 레펜하르트는 이미 유리관을 기울이는 도중이었다. 붉은 액체가 녹색의 광석 위로 떨어졌다.

펑!

가벼운 폭발과 함께 시꺼먼 연기가 자욱하게 퍼진다. 콜록대며 시리스가 연기를 휘저었다.

"아유, 레펜하르트 님! 결국 터졌잖아요!"

"어, 이게 왜 터지지?"

레펜하르트는 머리를 긁었다. 폭음이 일어났는데도 지하실 밖에선 전혀 반응이 없었다. 마법사의 실험실에서 뭔가가 터지는 일은 하도 비일비재해서, 마탑 밖에서 경비를 서고 있는 드워프 병사들도 그러려니 하고 있었다.

'아이고, 우리 폐하. 또 터트려먹었네?'

'매번 터트리면서 왜 항상 저러시는 거야?'

'몰라, 마법사는 원래 그러고 산대.'

자욱한 연기 속에서 시리스의 잔소리가 따발총처럼 이어졌다.

"그러게 화염초 추출액을 시드암에 섞으면 어떡해요? 내가 그렇게 하지 말라고 했는데!"

본격적으로 허리에 손을 얹고 시리스가 삿대질을 해 댄다. 꼬리를 만 채 레펜하르트가 손바닥을 비볐다.

"미, 미안하다... 될 것 같았는데, 쩝."

"어제도 그 소리 하시고 바로 터트려 먹었잖아요!"

낑낑깽깽.

혼나는 강아지 모드가 된 레펜하르트가 슬금슬금 눈치를 본다. 그 모습에 결국 시리스가 키득 웃어 버렸다.

'아이, 이 사람은 나이도 지긋해서 왜 이리 귀여운 거야!'

참고로 여자의 귀여움은 남자와 상당히 기준이 다르다. 아니, 다른 정도가 아니라 아예 남자는 이해 불가능한 영역에 속해 있다고 하겠다. 풀 죽은 반백의 중년남을 진심으로 귀엽다고 생각한 시리스가 빙그레 웃으며 손수건을 꺼냈다.

"이리 와요, 얼굴이 까매요."

"으음...."

그리고 애써 딴청 피우는 레펜하르트의 얼굴을 슥슥 닦는다. 못 이기는 척 그녀의 손길에 얼굴을 맡기던 중, 문득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데 언제까지 님이란 호칭을 붙일 것이냐? 그냥 이름을 부르래도."

불만스러운 레펜하르트의 말에 시리스가 다소곳이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순 없어요."

"왜?"

시리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갸웃거리는 연인을 향해 부드럽게 웃기만 했다.

그 미소가 너무 아름다워 레펜하르트는 불만을 잊었다. 자신을 향한 저 애정 가득한 표정만으로도 모든 것이 만족스러웠다.

☆ ☆ ☆

사랑하던 이가 눈앞에 있다.

그토록 그리워하던 이가 바로 앞에 서 있다.

기억 속보다 훨씬 앳된 얼굴이지만, 그럼에도 어느 곳 하나 낯선 부분이 없는 그녀.

하지만 저 싸늘한 목소리는 너무도 낯설다.

"당신이 제 새 주인님이군요."

노예상의 부름에 따라 검투를 끝내고 올라온 시리스는 차갑게 레펜하르트를 노려보고 있었다. 무심해 보이지만 눈동자 깊숙한 곳에 무한한 경멸을 담은 시선, 그는 한탄하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아아....'

전생의 모습이 겹쳐지며 가슴속에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한 번도 그녀는 자신에게 이런 눈빛을 보인 적이 없었다. 터질 듯한 그리움으로 겨우 연인을 앞에 두었는데, 그 연인은 더러운 벌레라도 보는 것처럼 자신을 노려볼 뿐이었다.

'얼마나 고생을 했으면....'

어서 시리스를 데리고 나가야겠다. 결심한 레펜하르트를 향해 노예상이 눈치를 보며 물었다.

"그 아이를 구입하시겠습니까?"

"물론!"

단호한 대답에 노예상이 더더욱 의아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솔직히, 눈앞의 이 엘프 소녀는 여기저기 흠집도 나고 차림도 더러워 도저히 구매욕을 느낄 모습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저렇게 단호한 태도를 보이다니?

'역시 변태는 뭐가 달라도 다르군.'

변태건 뭐건 귀중한 손님이다. 그것도 재고 떨이를 처리해 주는 고마운 손님! 노예상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금화 삼백 닢 되겠습니다."

사실은 이백 닢이지만 눈치를 보니 이 148번 슬레이어가 아주 마음에 쏙 든 것 같았다. 이참에 슬쩍 남겨 먹을 욕심이었다.

곁에 있던 실란이 놀라 되물었다.

"고작 근화 삼백 닢이요? 엄청 싸네요?"

"그야 제대로 된 물건이 아니니까요. 손님이 하도 원하시기에 판매는 합니다만, 저도 추천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노예상은 의외로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는 상도를 지키는 선량한 상인인 것이다. 슬쩍 금화 백 닢 더 붙이긴 했지만 원래 물건의 가치란 사람마다 다른 법, 진짜 원하는 이에겐 돈 더 받는 것이 진정한 상도인 법이다.

물론 레펜하르트는 금액 따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빨리 시리스를 이곳에서 빼내고 싶을 뿐이었다.

"데리고 가겠소."

서두르는 그를 향해 노예상이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아, 신관을 불러 드릴까요? 흠집 제거 정도는 당연히 해 드려야...."

최상의 엘프를 제공하기 위해 엘븐하임 경매장은 바다와 포용의 여신, 넵퓨리아스를 섬기는 넵튠 교단과 장기 계약을 맺고 있었다. 호출만 하면 바로 달려와서 148번 슬레이어의 상처를 말끔히 치료해 줄 것이다. 원래는 못 파는 상품이라 생각해서 치료도 안 해 놓았지만, 일단 팔렸으니 최대한 좋은 물건을 제공하는 것이 상인의 도리가 아니겠는가?

"필요 없소!"

하지만 그는 바로 거절했다. 이 더러운 장소에서라면 그 어떤 것도 받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실란이 있으니 상처 치유쯤은 문제도 아니었다.

레펜하르트가 시리스를 돌아보았다. 차갑던 표정이 놀라울 정도로 부드러워진다. 그가 온화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가자."

"네."

세상 모든 것에 희망을 잃은 눈빛으로, 그녀는 레펜하르트의 뒤를 따랐다.

레펜하르트 일행은 곧바로 엘븐하임 경매장을 빠져나왔다. 마치 쫓기듯 허겁지겁 뛰어나온 것이라 실란이 왜 이리 서두르느냐고 투덜댈 정도였다.

경매장 문을 나와 거리로 나서자 그제야 좀 정신이 든다. 레펜하르트는 숨을 골랐다.

"후우...."

티는 안 냈지만, 그는 사실 시리스를 본 순간 대단히 분노한 상태였다. 상처 입고 피 흘리는 그녀를 본 순간 머리끝까지 피가 올라 눈에 보이는 것이 없었다. 사실 순간적으로 주먹이 10센티미터 정도 움직이기도 했다. 거기서 30센티미터만 더 움직였어도 그 노예상은 머리 없는 신세가 되었을 것이다. 살아온 세월이 헛되지 않아 간신히 냉정을 되찾아 망정이지, 그렇지 못했다면 대학살을 일으킬 뻔했다.

그래도 밖에 나와 찬 공기를 쐬니 꽤 머리가 맑아졌다. 그는 시리스를 돌아보았다. 허겁지겁 데려온 탓에 그녀는 피투성이에 허름한 차림 그대로였다.

"실란, 치유술 좀 부탁해."

"이미 하고 있어요."

실란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순식간에 다 나은 시리스가 한결 편안해하는 표정을 짓는다. 그래도 몸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잠깐 의아해하다가 레펜하르트가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 지금은 추위를 느끼겠구나.'

엘프가 자연과 조화를 이루어 더위와 추위를 모른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숲 속의 요정으로 살며 정령술에 통달했을 때의 이야기지 노예로 살아온 시리스에겐 아직 그런 재주가 없었다.

레펜하르트가 바로 코트를 벗어 주었다.

"춥겠구나. 미안하다, 일단 이거라도 걸치고 있어."

속으로 시리스는 비웃음을 흘렸다. 주인께서 감격스럽게도 노예에게 입던 옷을 건네주셨으니 응당 감동으로 몸을 떨며 거절해야 하나? 뭘 기대하는지는 뻔히 알겠는데, 그 기분 맞춰 줄 생각 따윈 전혀 없다.

노예다운 행동은 해 주겠다. 하지만 마음마저 노예로 살진 않겠다. 그렇게 다짐하며 그녀는 대뜸 손을 뻗어 코트를 받아 걸쳤다. 노예답게 시키는 대로 바로 행해 버린 것이다.

'이 추위에 폼 좀 내려나 본데, 어디 계속 내 보시지?'

그런데 어째, 간단한 모직 상의만 입고도 이 덩치 좋은 새 주인은 전혀 추운 티를 내지 않았다. 강물이 꽁꽁 얼 정도로 강추위이건만 봄바람이라도 되는 양 한풍을 서슴없이 맞고 있는 것이다. 표정을 보니 그저 시리스가 춥지 않게 된 것이 마냥 좋다는 얼굴이었다.

'정말 안 추운가?'

허세라고 하기엔 정말 피부에 소름 하나 안 돋아 있다. 시리스는 살짝 혀를 내둘렀다. 레펜하르트가 앞장서 걸으며 말했다.

"일단 옷부터 사러 가자."

셋은 상업 거리로 걸음을 옮겼다. 한풍이 부니 절로 걸음이 빨라진다. 사실 추위로 걸음이 빨라진 것은 실란과 시리스고, 레펜하르트는 그냥 평소처럼 걸었다. 다리 길이 차이가 있으니 셋의 보행 속도가 비슷해졌다.

걸음을 옮기며 문득 레펜하르트가 물었다.

"저기, 아직 이름이 없지?"

"네."

세 번이나 반품되며 이름을 받은 적도 한 번 있기야 하지만, 이미 기억에서 지워 버린 후였다.

"음, 저기... 시리스라는 이름 어때?"

"제 이름은 시리스군요. 알겠습니다."

시리스는 무뚝뚝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째 기분 나빠 보이는 얼굴이라 레펜하르트가 슬금슬금 눈치를 봤다.

"괜찮아? 마음에 들어?"

"...?"

시리스는 이해 못 하겠다는 얼굴로 레펜하르트를 바라보았다. 노예에게 이름이 마음에 들고 안 들고가 무슨 상관인가? 안 들면 바꿔 주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제 이름은 시리스. 기억했습니다."

여전히 차가운 그녀의 태도에 레펜하르트는 전전긍긍했다. 저게 마음에 든다는 의미로 한 소린가? 아, 전생이나 현생이나 여자 마음 이해하기 힘든 것은 여전하구나!

하여튼 별 반대가 없으니 그는 '전생'에서처럼 그녀의 이름을 지어 주었다.

"그럼 넌 이제부터 시리스 발렌시아다."

전생의 그녀는, 이 순간 굉장히 감격해했다. 노예에게 성을 주는 주인 따윈 세상에 없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의 시리스는 마냥 시큰둥한 얼굴이었다.

"노예에게 성은 필요 없습니다. 혹시 주인님의 성입니까?"

"아니, 네가 가져야 할 성이다."

"...?"

이건 또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잠깐 호기심이 일었지만 시리스는 바로 의문을 지웠다. 어차피 이놈도 분명 며칠 지난 다음 신경질 벅벅 내면서 자신을 반품할 것이다. 상관없는 인간에게 관심을 할애할 이유는 없다.

레펜하르트가 자신과 실란을 가리키며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난 레펜하르트. 얘는 실란이고 필라넨스의 성직자다."

"알겠습니다."

무뚝뚝한 얼굴로 시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 ☆ ☆

엘븐하임 경매장의 주인, 라쿠스는 하루 일과 중 가장 즐거운 행위를 하고 있었다.

바로 금고 속의 금화를 세는 일이었다. 엘프 노예 사업은 투자비가 엄청나게 들어가긴 하지만 그만큼 얻는 이득도 어마어마했다. 시작이 힘들어서 그렇지 일단 궤도에 오르고 나면 망할 일은 절대 없다.

'세상 남자들이 모두 고자가 되거나 성자가 되지 않는 한은 말이지.'

300년이란 전통 속에 14대 후계자로 경매장 주인이 된 라쿠스는 그래서 인생이 행복했다. 초기에 경매장을 세운 조상님들이야 고생깨나 했다고 들었지만, 편하게 사업을 물려받은 그는 고생 따위 할 일이 없었다.

아무리 훌륭한 가르침을 각 교단에서 펼쳐도 세상 남자들은 결코 성자가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의 사업도 영원토록 번창하리라!

그렇게 한창 라쿠스가 신을 낼 때였다. 시종 중 하나가 귀한 손님의 방문을 알렸다. 이름을 듣는 순간 그는 화들짝 놀라 금화 세는 일도 중단하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접대실에는 이미 화려한 복장의 뚱뚱한 청년이 인상을 쓰며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라쿠스가 허겁지겁 고개를 숙였다.

"아이고, 테리크 님. 어서 오십시오."

공국 2위의 대상회, 롤페인 상회의 후계자이자 엘븐하임 경매장 최대의 고객이기도 한 그가 왔으니 지금 금화 세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깍듯한 라쿠스의 인사에 테리크가 표정을 풀었다.

"잘 지내셨소, 라쿠스."

"석 달 만에 뵙는 것 같습니다. 요새 하시는 일은 잘 되시는지요?"

"타오반이란 새 상회가 생겨서 조금 거슬리긴 하지만, 별문제는 없소."

타오반은 요 근래 새롭게 두각을 나타나는 상회였다. 주로 곡물을 전문으로 다루는지라 롤페인 상회와 자꾸 사소한 다툼이 생기곤 했다. 기본적으로 안 다루는 것이 없긴 하지만 롤페인 상회의 주력은 곡물과 소금이다. 영역이 겹치니 이놈들이 자꾸 그의 상권에 숟가락을 들이밀고 있었다.

"그래서 적당히 압박을 가하고 있던 참이지."

자고로 거슬리는 것들은 돈으로 누르는 것이 정석인 법, 라쿠스가 바로 알아듣고 너털웃음을 흘렸다.

"그야 테리크님의 수완이라면 어련히 잘 하시지 않겠습니까? 허허."

그렇게 두 사람은 간단히 서로의 안부를 교환했다. 슬슬 분위기가 무르익자 라쿠스가 바로 본론으로 돌아왔다.

"마침 잘 오셨습니다. 이번에 공들여 키우던 엘프 암컷이 하나 있어서요. 안 그래도 선보여 드리려던 참입니다."

그런데 의외로, 테리크가 고개를 저었다.

"아, 이번엔 됐소. 따로 사고 싶은 게 있어 왔으니."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뚱뚱한 청년이 라쿠스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왜 그, 얼마 전에 베레트가 반품한 슬레이어가 하나 있다면서?"

라쿠스는 바로 알아들었다. 기껏 슬레이어로 키웠는데 세 번이나 반품당한 대실패작을 모를 수가 없었다. 결국 본전도 못 건지고 싸게 팔지 않았던가? 그 보고 들으면서 참 속이 쓰렸다.

"148번 말입니까?"

"댁들이 붙인 번호 따위를 내가 알 리가 없잖소? 하여튼 그거. 그거 내주시오."

찬장에서 술병이라도 가져오라는 식의 태도로 테리크가 손가락질을 했다. 평소라면 만세를 불렀을 일이겠지만....

"아, 저, 그게."

난처해하는 라쿠스를 보며 테리크가 의아해했다.

"응? 문제라도 있소?"

"그게, 148번은 이미 팔려 버렸습니다만."

"에엥?"

"그것도 막 방금 팔렸습니다.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았는데."

테리크는 황당해했다. 원래 슬레이어는 워낙 고가라 쉽게 팔리지 않는다. 1년에 세 마리 팔면 대박이라 할 정도였다. 뭐, 엘프들이야 워낙 유통기한(?)이 기니까 결국 다 팔 수야 있지만.

'그런데 그것이 벌써 팔렸다고? 이런 공교로운 일이?'

"설마 베레트가 내 심중을 눈치채고 다시 사 간 건가?"

"아뇨, 베레트 님이 아니라...."

라쿠스가 고개를 저었다.

"그냥 처음 보는 청년이었습니다."

"잉? 이름이 어떻게 되는데?"

"모르겠습니다."

"모르다니? 환어음 결제할 때 서명을 했을 것 아니오?"

"그게, 전부 현금으로 계산해서요."

"허, 슬레이어를 현금으로 구매할 정도로 돈을 들고 다닌단 말인가?"

아무리 돈이 넘치는 그라도 금화 몇백 닢을 현금으로 가지고 다니진 않는다. 어차피 신용 높은 롤페인 상회의 환어음으로 모두 결제가 가능하니 굳이 무거운 짐 지고 다닐 이유가 없는 것이다. 슬레이어를 구매할 정도로 잘 사는 이들이라면 모두 마찬가지다.

"그 슬레이어는 워낙 결함품이라 그냥 헐값에 넘겼습니다. 그래서 그런 것 같습니다만."

"에잉...."

현찰로 계산했다는 걸로 보아 뜨내기 모험가가 운 좋게 대박을 터트려 평소의 로망을 이룬 모양이다. 아마도 싸다는 소리에 덜컥 넘어갔겠지.

"그럼 그 사간 놈 인상착의를 알려 주시오."

테리크는 반품 엘프를 다시 사 와야겠다고 생각했다. 원래는 베레트를 놀릴 목적이었지만, 이미 다른 이에게 넘어갔다는 소리를 듣더니 욕심이 덜컥 생겼다. 언제나 원하는 것은 모두 가질 수 있었던 테리크였다.

'적당히 웃돈 주면 고마워하면서 넘기겠지. 세상에 돈으로 안 되는 게 어디 있어?'

테리크의 요구에 라쿠스가 잠시 주저했다. 원래 고객의 신상명세는 알리지 않는 것이 상인의 법도다. 자칫하면 엘븐하임의 신용도가 떨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엘븐하임이 아무리 유서 깊은 경매장이라도 롤페인 상회와 비견할 수는 없다.

'뜨내기 같았으니까 큰 문제는 안 생기겠지.'

"찾기는 쉬울 겁니다. 워낙 덩치가 큰 청년이었으니."

결심한 라쿠스가 레펜하르트의 외모를 천천히 묘사했다.

☆ ☆ ☆

제플린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의류점을 찾은 레펜하르트는 바로 주인을 닦달해 돈이 얼마나 들어도 좋으니 시리스가 입을 만한 건 몽땅 가져오라며 으름장을 놨다. 돈 냄새를 맡은 의류점 주인이 희희낙락하며 각종 값비싼 여성용 의복들을 연신 가져왔다.

"어때? 마음에 드는 거 있니?"

레펜하르트가 그녀의 의견을 물었다. 물론 시리스는 무심하게 대꾸할 뿐이었다.

"주인님 뜻대로 하세요."

"아니, 네 마음에 들어야지 내 마음에 들어 봤자...."

"주인님 뜻대로 하세요."

난처해하는 레펜하르트에게 시리스는 앵무새처럼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노예로 살던 그녀에게 화려한 옷을 사 주고 감사를 받고 싶은 모양인데, 솔직히 가소로웠다.

'비싼 옷이라도 사주면 감동할 줄 알았나 보지?'

노예인 그녀에게 이런 비싼 옷을 사 주는 것에 대해선 전혀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엘프 노예를 산 뒤 화려한 옷으로 치장하는 경우는 흔하디흔한 일이었다. 애초에 예쁜 엘프들을 사다가 인형처럼 입혀 놓고, 눈요기를 한 뒤 벗기려는 놈들은 세상에 쌔고 쌨다.

얼음 같은 그녀의 태도에 레펜하르트가 속으로 혀를 찼다.

'하긴, 바로 마음을 열 리 없지.'

자신에게 있어 시리스는 몇십 년간 사랑해 온 연인이지만, 그녀에게 있어 그는 오늘 처음 본 생판 남인 것이다. 저런 태도를 보이는 것도 당연했다. 서운하긴 했지만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나아지겠지.'

어쨌거나 옷을 사긴 사야 한다. 그는 진지한 얼굴로 직접 이것저것 옷을 고르기 시작했다.

'시리스가 무슨 색을 좋아했더라?'

레펜하르트는 전생의 그녀의 취향을 떠올리며 마음에 들어 할 만한 옷을 하나하나 골랐다. 남자는 보통 연인이라도 여자의 옷 취향에 대해서는 그저 좋아하는 색상 정도나 알면 다행이지, 자세히 기억하지 못하는 법이다. 그렇다 보니 그냥은 생각이 안 나 무려 인공 주마등까지 써 가며 기억을 열심히 더듬었다.

덩치 큰 사내놈이 여자 옷가지들을 하나하나 정성껏 감정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의도야 좋았지만 남이 보기엔 참 변태스러운 광경이었다. 실란은 낯부끄럽다고 아예 멀찌감치 떨어져 있었다.

"아, 대충 좀 골라요."

저게 어떻게 보이냐면, 노예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철저하게 자기 취향으로만 꾸미겠다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게 아니면 왜 옷 하나하나를 고를 때마다 저리 시간이 걸린단 말인가? 연인에게 옷을 사 주는 거라면 사랑하는 이의 취향을 고려하는 성실한 모습이겠지만(그리고 사실이 그렇긴 하지만) 입힐 상대가 엘프 노예다.

하지만 레펜하르트는 무섭도록 진지한 태도를 고수할 뿐이었다. 실란의 불만 따윈 들리지도 않는 것 같았다. 열심히 옷을 고르는 그의 모습에 시리스가 문득 고개를 갸웃거렸다.

'조금... 이상하긴 하네?'

레펜하르트가 고르는 것은 전적으로 착용자의 편의성에 맞춰 있었다. 겉보기에 야하고 섹시한 옷은 철저히 배제하고, 실용적이면서도 튼튼하고 착용감이 편안한 것 위주로 고르는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차피 벗길 거, 왜 굳이 착용감을 신경 써 준단 말인가?

결국 레펜하르트는 색색별의 속옷과 평상복으로 입을 질 좋은 원피스 몇 벌, 그리고 여행용으로 블라우스와 검은 바지, 사슴 가죽으로 만든 부츠와 재킷을 두 벌씩 구입했다. 모두 최상급으로, 어지간한 귀족이나 입을 법한 물건들이었다. 시리스가 안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허름한 노예의 모습은 사라지고 갓 여행을 나선 귀족가 영양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어때? 몸에 맞아?"

살짝 몸을 움직여 보며, 시리스는 솔직히 감격했다. 그동안 여기저기 팔려 가면서 화려한 드레스는 많이 입어 보았지만, 이렇게 편안하고 몸에 달라붙는 것 같은 좋은 옷은 입어 본 적이 없었다. 진정한 의미의 고급품이었다. 다른 놈들은 죄다 벗길 생각밖에 없어, 겉으론 화려한 드레스였지만 실제로는 싸구려만 입히곤 했다.

게다가 색상도 디자인도, 신기할 정도로 마음에 들었다. 마치 자신의 취향을 완전히 꿰고 있는 것 같았다.

'좋다....'

하지만 마음속과 달리 그녀의 표정은 여전히 냉랭했다. 조금 예상과 다르긴 해도, 그것이 이 청년을 좋게 평가할 이유는 못 된다.

여전히 냉랭한 시리스의 모습에 레펜하르트가 뭔가 오해했는지 머리를 긁었다.

"으음, 나중에 더 좋은 것들로 구해 줄게. 지금은 아쉬운 대로 그거라도 입고 있어."

이런 고급품을 사 줘 놓고 무슨 엉뚱한 소린가 싶어 시리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또 허세를 피우는 건가 싶었다. 하여튼 남자들이란!

하지만 레펜하르트는 진심이었다.

전생의 시리스는 여행을 다닐 시 아예 인간이 만든 물건은 몸에 걸치지도 않았다. 전신을 죄다 은의 시대 유적에서 나온 아티팩트로 도배를 했던 것이다. 공간 이동 마법이 걸린 부츠라든가, 포스 필드가 발동되는 바지라든가, 절대 생존 주문이 걸린 서바이벌 재킷이라든가 하는 식으로. 심지어는 속옷조차도 레펜하르트가 한 달 동안 낑낑대며 인챈트해 모든 습기와 노폐물을 완벽하게 흡수하며 착용자에게 최상의 촉감을 제공하는 1급 마도구였다. 급수만 따지면 마검 알티온보다도 높은 것이다. 그야말로 성을 입고 다녔다 할 수 있겠다.

그러니, 그것이랑 비교하면 마법 하나 안 걸린 이 옷들이야 부실할 수밖에 없지. 미안해하며 레펜하르트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조금만 참아라, 시리스. 금방 던전들 뒤져서 싹싹 긁어 올 테니까.'

남은 옷가지들을 챙긴 뒤 레펜하르트는 짐을 직접 들고 나왔다. 노예인 시리스를 내버려 두고 직접 짐을 들다니, 다시 이상하게 느꼈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곧 헤어질 인간이니 어떤 기행을 부려도 무시한다는 생각이었다.

"시리스, 배는 고프지 않니?"

가게를 나선 레펜하르트가 다시 질문을 던진다. 시리스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역시 이번 주인은 뭔가 이상해도 많이 이상했다. 계속 노예인 그녀의 의사를 묻다니?

'무슨 인간 여성을 대하는 것 같잖아?'

물론 그녀가 신경 쓸 바는 아니다. 이번에도 시리스는 앵무새처럼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주인님 뜻대로 하세요."

"음, 그러니까 딱히 주인님이라는 생각은 하지 말고...."

"반품하시겠습니까?"

"아니, 그런 의미가 아니라...."

대뜸 나오는 반품 타령에 레펜하르트는 혀를 찼다. 아, 이걸 뭐라 설명해야 하나?

"그냥 함께 여행하는 동료로 대해 주면 좋겠는데 말이다. 그러니까 주인님이라 하지 말고 이름으로 불러 주면 안 될까?"

진심 어린 레펜하르트의 말에 시리스는 그 순간 모든 의혹이 햇살 만난 안개처럼 걷혀 가는 걸 느꼈다.

'아, 그런 설정이었냐?'

뭔가 아까부터 이상하다 했더니 드디어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 덩치 큰 청년은 자신을 지금 옛 모험담에서 나오는 동료 여검사로 취급하고 있었던 것이다.

모험담이 애들을 참 많이 버려 놔서, 모험가를 꿈꾸는 애들 중에는 미모의 여검사 동료를 동경하는 이들이 꽤 된다. 슬레이어라는 직종이 나온 이유이기도 하다.

물론 어떤 모험담에도 그 여검사로 노예 종족인 엘프가 등장하는 경우는 없지만, 현실적으로 미모의 여검사란 건 거의 존재하지 않으니 엘프로 대체하는 변태들이 꽤 있다고 들었다. 이놈도 아무래도 그런 역할 놀이에 푹 빠진 종류 같았다.

'뭐, 괜찮은 옷 선물해 준 대가로 잠시 따라 주는 것 정도는 나쁘지 않겠지? 어차피 며칠 지나면 망상과 현실이 다른 걸 깨닫고 반품하겠다며 난리 칠 테니까.'

시리스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레펜하르트 님이라고 부를게요."

'아....'

그토록 그리워하던 그녀의 목소리다. 비록 쌀쌀맞긴 하지만, 그래도 기억 속의 칭호였다. 아련한 추억이 밀려오며 가슴이 들뜬다.

레펜하르트는 식당을 찾아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는, 뒤를 따르는 시리스가 한심하단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하여튼 인간은 다 똑같은 놈들이야.'

2

'레단티의 은혜'는 제플린에서 가장 유명한 레스토랑 중 하나였다.

대지와 풍요의 여신, 레단티의 이름을 건 이 레스토랑은 감히 여신의 이름을 걸 만큼 명성 높은 곳이었다. 대륙 각국의 국왕 직속의 요리사였던 이만도 셋인 데다가 마법사 길드와 계약을 해 제철 아닌 재료들도 싱싱하게 보존해 요리에 쓰니, 각국의 미식가로부터 명성이 높았다.

물론 그만큼 가격도 상상을 초월했다. 일단 마법을 이용해 보존하다 보니 재료비부터가 차원이 다른 데다가 요리사 역시 어지간한 귀족 수준의 봉급을 받는 이들이 대부분이니, 한 끼 식사로 금화 외의 다른 화폐로는 계산조차 불가능할 정도였다.

신성모독이라고 해도 좋을 저 무엄한 간판을 대놓고 걸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이 레스토랑을 경영하는 곳이 레단티 교단의 제플린 교구인 탓이었다. 뭐, 교리 상으로는 레단티의 은총인 대지의 산물을 가공해 사람들에게 베푸는 것이야말로 여신을 섬기는 자신들의 의무이기에 그렇다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냥 돈 잘 벌리니까 계속 하는 것 같았다.

"정말 베풀려면 음식을 무상으로 공급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테이블 위로 차려진 성찬들을 바라보며 실란은 투덜거렸다. 필라넨스의 성직자인 그는 레단티 교단의 이 돈독 오른 교리 해석에 꽤 불만이 많았다.

레펜하르트가 피식 웃었다.

"필라넨스 교단도 비슷한 사업 하지 않아?"

사랑과 미, 자애의 여신 필라넨스 교단은 각 교구마다 에스틱 살롱을 하나씩 마련해 놓고 귀부인들을 대상으로 미용 사업을 하고 있었다. 솔직히 레단티 교단을 욕할 처지는 못 되는 것이다.

"그건 사랑과 미의 여신으로 당연히 해야 할 일이고, 교리에도 어긋나지 않는다고요. 그런데 여긴 그게 아니잖아요?"

"필라넨스 에스틱 살롱도 금화 꽤 받는다고 들었는데?"

"그, 그렇긴 하지만...."

말문이 막힌 실란이 다른 트집을 잡았다.

"아니, 바닷가재가 왜 대지의 산물이에요? 교리를 지킬 거면 아예 해산물은 메뉴에서 뺐어야죠."

하지만 맛있으므로 계속 먹는다. 냠냠.

지금 그들은 레단티의 은혜 2층에 앉아 코스로 나오는 요리를 한창 즐기는 중이었다.

과연 요리는 훌륭했다. 나름 고위 성직자로 괜찮은 식사를 해 온 실란조차도 여기서 처음으로, 고기 요리가 민트 없이도 맛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정도였다.

향초를 넣고 구운 사슴 넓적다리 구이, 입에 넣으면 살살 녹는 살구 빵에 한겨울임에도 갓 잡은 듯 싱싱한 농어 요리 등이 연달아 나왔다. 실란은 연신 입으로 불만을 토하고, 그 빈자리에 요리를 집어넣고 있었다.

스테이크를 듬뿍듬뿍 썰어 입으로 가져가며 레펜하르트는 계속 시리스를 힐끔거렸다. 그녀는 엘프답게 신선한 채소로 만든 샐러드와 흰 빵, 그리고 꿀에 절인 사과와 무화과를 먹고 있었다. 빵을 씹으며 레펜하르트가 말을 걸었다.

"슬레이어 훈련을 받았지? 그럼 주로 무슨 무기를 배웠니?"

이미 알고 있는 대답이지만, 뭔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꺼낸 화제였다. 채소를 삼킨 뒤 그녀가 조용히 대답했다.

"단검과 장검술, 비도술, 궁술을 배웠습니다."

"그럼 무기를 준비해야겠네?"

"네."

단답형 대꾸를 끝으로 다시 시리스가 식사에 열중한다. 참 말 붙이기 어려운 분위기라 레펜하르트는 혀를 찼다.

'쩝, 여기도 마음에 안 드나?'

사실 이곳은 전생의 시리스가 참 좋아하던 곳이었다. 특히 지금 먹고 있는 메뉴를 굉장히 즐겼다. 그래서 둘이 처음 만났던 날을 기념하며 1년에 한 번씩 이곳에 와서 식사를 즐기는 것이 그들의 작은 즐거움이었다. 안타레스 제국을 세운 뒤 그가 마왕으로 불리게 되자, 이곳을 못 오게 되어 그녀가 참 아쉬워했던 기억이 있다.

그녀가 좋아하던 곳에 와서 그녀가 즐기던 음식을 시켰는데도 테이블 위는 찬바람만 쌩쌩 분다.

'거참, 너무 차갑네....'

사랑을 속삭이던 전생의 모습과 겹쳐지니, 지금의 시리스가 너무 낯설다. 전생의 그녀 역시 처음 만날 땐 웃음을 잃은 상태였다. 하지만 눈빛이 다르다. 허무하긴 했어도, 저런 적의와 경멸의 감정은 담겨 있지 않았다.

'역시 너무 일찍 만나서 그런 건가?'

하지만 레펜하르트가 미처 생각지 못한 것이 있었다.

예전의 그는 구원자로서 시리스 앞에 나타났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구매자로서 시리스 앞에 나타났다.

한 글자 차이지만 의미는 하늘과 땅이다. 솔직히 시리스가 뭐가 예쁘다고 레펜하르트를 좋게 봐 주겠는가? 전생에서야 학대받다가 구함받았으니 당연히 적의 따위 느끼지 않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른 것이다.

그것도 모르고 레펜하르트는, 아무래도 시리스가 아직 소녀 시절이다 보니 남자에 대해 본능적인 거부감 같은 게 있어 그런 것 같다며 지레짐작을 하고 있었다.

'음, 뭐 그래도 언젠가는 진심을 알아주겠지?'

전생이건 지금이건 시리스는 시리스일 뿐. 그가 사랑할 수밖에 없는 운명의 연인이다. 그렇다면 결국 운명대로 흘러가리라.

기대했던 재회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레펜하르트는 실망하지 않았다. 자신을 대하는 태도는 차가웠지만, 무화과 절임을 먹고 있을 땐 살며시 표정이 풀리는 걸 보면 음식이 마음에 안 드는 것은 아닌 듯했다.

레펜하르트는 부드럽게 웃었다. 맛있게 먹고 있는 시리스를 보고 있으니 마냥 좋았다.

'지금은 이걸로도 충분해.'

식사를 마치고 레펜하르트는 바로 무기상을 찾았다. 시리스에게 무기를 사 주려는 것이었다. 이번에는 시리스도 직접 무기를 골랐다. 옷가지와 달리 무기는 얼마나 손에 맞는지 직접 확인하는 것이 상당히 중요하다.

게다가 이러니저러니 해도 레단티의 은혜에서 사 준 음식은 맛있었다. 정말 맛있었다.

애초에 그녀가 가장 좋아하던 메뉴만 골라 주문했던 레펜하르트였다. 입에 안 맞을 수가 없는 것이다. 겉으로야 차가운 태도를 고수한 시리스였지만 속으로는 너무 맛있어서 눈물이 핑 돌 정도였다.

그렇다 보니 스스로는 인정하지 않았지만, 무의식중에 이 '정신 나간 덩치 큰 변태 주인'에 대한 호감도도 살짝 올라간 상태였다. 그래서 이번엔 시리스도 순순히 레펜하르트의 역할 놀이(?)에 맞춰 주고 있었다.

"자, 손님. 이게 저희 가게에서는 최상급품입니다요. 다른 곳에선 구하지도 못할 겁니다. 으하하."

주인장이 그녀가 쓸 만한 세검류와 단검류, 그리고 대거 등을 연거푸 들고 나오며 자랑스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번에도 레펜하르트의 돈지랄은 여전하여, 하나같이 최상품들뿐이었다. 가장 가격이 싼 대거조차도 마법 금속 미스릴을 섞어 제련한 드워프제였다. 몇백 년 전 같았으면 어지간한 귀족이나 왕족만 쓸 수 있었을 귀한 물건이겠지만, 현 시대엔 대부분의 드워프가 노예화되어 인간 밑에서 대량 생산형 체제를 갖추고 있기에 미스릴로 된 물건들도 그럭저럭 시장에 풀리고 있었다.

물론 그렇다 해도 귀하긴 마찬가지다. 제플린 정도 되는 대 상업 도시이기에 이런 물건도 구할 수 있는 것이다.

"어때, 시리스? 쓸 만한 게 있니?"

레펜하르트가 슬금슬금 시리스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 그녀는 미스릴과 강철 합금으로 제련된 레이피어를 들고 한창 무게 중심을 가늠하고 있었다. 그걸 보고 레펜하르트가 문득 말했다.

"으음, 이왕이면 그것보다는 이쪽이 더 낫지 않아?"

그가 가리킨 것은 펼쳐 놓은 무구들 왼쪽에 위치한 은회색의 시미터였다. 역시 레이피어와 마찬가지로 미스릴과 강철 합금으로 제련된 물건이었다. 시리스가 잠시 놀랐다.

'아니?'

원래 슬레이어라면 레이피어를 쓰는 쪽이 압도적으로 많다. 모험담에 나오는 대부분의 여검사들이 레이피어를 사용하는 탓이다. 그렇다 보니 그녀도 무심코 그걸 골랐다. 딱히 역할 놀이에 맞춰 주려는 건 아니었는데, 무의식중에 레펜하르트가 이런 취향을 원할 것이라 생각해 버린 것이다.

"어째서 이걸 권한 건가요?"

의심스러운 눈으로 시리스가 물었다. 레펜하르트가 아무 생각 없이 대꾸했다.

"응? 원래 시미터 쓰지 않았어?"

실제로 시리스가 가장 잘 다루는 무기는 시미터 같은 환도 계열이었다. 찌르기 위주인 레이피어는 사람이나 인간형 이종족들 상대로는 쓸모가 있지만 거대 몬스터들 상대론 그리 유용하지 않았기에 배워 두긴 했어도, 별로 좋아하진 않았다.

'하지만 이 사람이 그걸 어떻게 알고?'

마치 시리스의 실력을 잘 알고 있는 것 같은 말투였다. 안 그래도 옷가지 고를 때라든가 레스토랑 메뉴 시킬 때도 신기할 정도로 그녀의 취향을 잘 알고 있었다. 분명 오늘 처음 본 사람인데!

수상쩍어하는 시리스의 표정에 레펜하르트도 아차 싶었는지 얼굴을 굳혔다.

'으, 실수했다. 뭐라고 변명하지?'

스토커가 아닌 한에야 어찌 오늘 처음 본 여자의 취향이며 실력을 알고 있겠는가? 레펜하르트는 난감해하며 스스로를 탓했다. 안 그래도 영 이미지가 안 좋은 것 같은데 거기에 스토커 누명까지 쓰면 어쩌자고?

물론 시리스는 거기까진 생각하지 않았다. 그 경계 엄중한 엘븐하임을 침투해 스토킹을 할 정도 수준이면 이미 전설의 시프 마스터일 것이다. 설마 그 정도의 은신술 달인이 고작 엘프 노예 스토킹이나 하고 있겠는가?

하지만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여전하다. 의아해하는 시리스를 보며 레펜하르트가 낑낑대고 있던 차였다. 실란이 구원의 동아줄을 던져 주었다.

"우와, 경지에 오른 무인은 손만 보고도 익숙한 무기를 알아볼 수 있다더니, 정말 대단하네요, 레펜 씨?"

"아...."

시리스가 납득한 얼굴을 했다. 당연히 그런 재주 따윈 없었지만, 레펜하르트도 그런 거란 표정을 열심히 지어 주었다. 그리고 속으로 실란에게 감사했다.

'고맙다, 실란.'

그렇게 무장을 마치고 레펜하르트 일행은 무기상을 나섰다. 도와준 것에 대한 보답으로 레펜하르트는 실란에게도 미스릴제 단검을 하나 사 주는 통 큰 모습을 보였다.

물론 실란은 단검술 따윈 몰랐지만, 그래도 단검은 가지고 있으면 여러모로 쓸모가 있는 데다가 무려 드워프제 미스릴 무기다. 실란이 희희낙락하며 의외의 수확에 신을 냈다.

"우와, 구경은 많이 했어도 제가 미스릴제 무기를 손에 넣는 건 처음이에요."

레펜하르트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야... 넌 프리스트인데 무기 들 일이 뭐가 있겠냐."

무투승 몽크나 성전사 클레릭, 성기사 패러딘이면 모를까 순수 신관, 프리스트인 실란이 무기 들 상황이면 이미 막장 직전까지 갔다고 봐야지.

그래도 실란은 단검을 이리저리 만지며 연신 싱글벙글 웃었다. 역시 아직 소년인지라 귀한 무기를 얻으니 기분이 좋은 것 같았다.

그렇게 무기상을 떠나 여관으로 향하던 중이었다. 막 사거리를 지나치는데 건장한 한 무리의 사내들이 그들 앞을 가로막았다.

"잠깐 귀하에게 할 말이 있소."

하나같이 인상이 험악한 것이 얌전한 일 하고 살아온 인생은 확실히 아니었다. 게다가 전원이 무장을 하고 있었다. 레펜하르트가 경계하며 앞으로 나섰다.

"무슨 일입니까?"

일행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중년 사내가 슬쩍 그의 뒤를 보며 입을 열었다.

"저 노예가 오늘 엘븐하임에서 구입한 슬레이어요?"

"...그런데?"

사내가 턱을 매만지며 레펜하르트를 훑어보았다. 그러더니 거만하게 말을 이었다.

"귀한 분께서 저 엘프 암컷을 원하고 계시오."

시리스를 칭하는 호칭에 순간 혈압이 올랐다. 하지만 여기서 이놈들을 상큼하게 때려눕히기엔 너무 보는 눈이 많다. 애써 참으며 레펜하르트가 퉁명스레 대꾸했다.

"그래서 어쩌라고?"

"값을 잘 쳐줄 테니 그 노예를 다시 파시오. 귀하가 원한다면 다른 제대로 된 슬레이어와 교환해 줄 수도 있다 하셨소. 여기, 인증된 환어음이 있으니 확인해 보시오."

그리고 사내가 엘븐하임의 환어음을 펼쳤다. 인장이 확실히 찍혀 있어 사기가 아닌, 제대로 된 환어음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제플린 시내에서 감히 위조 환어음을 사용하다가는 사지가 찢겨서 죽게 된다. 살인은 돈으로 무마되지만 어음 위조는 최악의 중범죄인 이곳은 차탄 공국, 금화를 섬기는 나라다.

말을 마치며 사내가 일행에게 엘프를 데려오라며 손짓을 했다. 아예 상대가 거절할 것이라고는 생각도 않는 태도였다. 레펜하르트가 시리스 앞을 가로막으며 인상을 팍 썼다.

"일 없다."

순간 사내가 어이없어하는 얼굴로 바뀌었다. 생각도 않았던 반응이기에 혹시 자기가 잘못 들었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응? 거절한다는 의미요?"

"그렇다."

단호한 레펜하르트의 태도에 중년 사내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세 번이나 반품된 결함품 슬레이어를 훌륭한 완성품과 바꿔 준다는데 설마 마다할 사람이 있을 것이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기가 막혀 사내가 혀를 찼다.

"말귀를 못 알아듣는군. 더 좋은 물건으로 바꿔준다 하지 않았소?"

"말귀를 못 알아듣는군. 일 없다고 하지 않았소?"

일부러 말을 따라 하며 레펜하르트가 비아냥을 던졌다. 사내의 얼굴이 왕창 일그러졌다.

"이 자식이...."

사내를 따라온 다른 일행들도 마찬가지로 얼굴이 시뻘게졌다. 아무래도 한판 붙겠구나 싶어 레펜하르트가 슬그머니 실란과 시리스를 감쌌다.

그런데, 의외로 사내가 금세 꼬리를 내렸다.

"음, 특이한 친구로군. 그렇다면 강요할 수는 없겠지. 그 엘프 노예가 아주 마음에 든 모양이구려?"

그리고 순순히 물러선 것이다. 일행을 이끌고 중년 사내가 그대로 발길을 돌려 거리 저편으로 걸어가 버렸다. 오만한 말투와는 너무도 다른 모습이었다.

"뭐야, 저놈?"

레펜하르트가 허탈해하며 웃음을 흘렸다. 긴장했던 실란도 기가 막혀 피식거렸다.

"별 웃긴 양반 다 보겠네요."

☆ ☆ ☆

제플린 시외의 롤페인 저택.

테리크가 인상을 쓰며 중년 사내에게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뭐야? 왜 빈손이냐, 로마드!"

로마드가 고개를 숙이며 차분히 상황을 이야기했다. 그 덩치 큰 뜨내기 모험가를 만나고, 그자가 어떤 태도를 보였는지에 대해 설명을 마치며 로마드가 고개를 저었다.

"제대로 애송이입니다. 돈을 얼마를 주건 팔 놈이 아닙니다. 세상 물정을 몰라요."

"그렇다면 대충 패 버리고 환어음 던져 주고 오면 될 것 아닌가?"

"그, 그건 좀...."

로마드는 쩔쩔매며 머리를 긁었다. 돈 많은 테리크야 백주 대낮에 사람을 패도 금화로 무마가 되지만, 그는 그저 고용인일 뿐이다. 그럴 돈 따위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저 테리크가 수하의 패악까지 돈으로 덮어 줄 만큼 관대한 놈도 아니다. 오히려 쓸데없는 지출 따위 필요 없다며 자신을 내칠 가능성이 훨씬 컸다.

그가 말을 이으며 테리크를 달랬다.

"괜히 보는 눈 많은데 난리 피우면 돈 들잖습니까? 그냥 상도에 따라 해결을 보시지요."

돈 든단 소리에 씩씩대던 테리크가 조금 진정을 했다. 생각해 보니 로마드의 말이 옳았다. 불필요한 지출은 할 필요가 없었다. 그냥 상도에 따라 해결하면 된다.

"그냥 그 슬레이어를 잡아 온 다음에, 죽었다고 하고 배상금으로 두 배를 건네면 됩니다. 그래 봤자 금화 육백 닢이니 제대로 된 슬레이어로 바꿔 주는 것보다 훨씬 싸게 먹히지 않겠습니까?"

제대로 된 상인이 들으면 비분강개할 상도(?)였지만 테리크는 만족했다. 확실히 차탄 공국의 법상으로는 저것이 제일 저렴하고 뒷문제도 없었다. 뭐, 슬레이어 빼앗긴 그 뜨내기 놈이 난리 칠 가능성이 높긴 하지만 그때는 그냥 부담 없이 패 버려도 이쪽이 정당방위이므로 벌금 따위 낼 필요가 없다.

아주 만족스러운 아이디어였다. 테리크가 흡족해하며 웃었다.

"괜찮군. 적당히 처리하도록. 믿겠다."

"네, 도련님."

방을 나서려는 로마드를 향해 테리크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말을 이었다.

"아, 그리고 란타스 경도 좀 데리고 가. 그 양반 요새 놀기만 하는데 이렇게라도 월급 좀 뽑아 먹자."

로마드의 표정이 살짝 밝아졌다. 안 그래도 그 역시, 엄청난 보수를 받음에도 그저 매일같이 놀고만 사는 란타스 경에게 불만이 있는 상태였다.

"훌륭한 판단이십니다."

고개를 숙이며 로마드가 피식 웃었다.

☆ ☆ ☆

여관으로 돌아온 레펜하르트는 한창 고민에 빠져 있었다.

'이거, 돈이 너무 많이 남았는데?'

비싼 옷 사고 비싼 밥 먹고 비싼 무기만 골라 샀어도 돈이 남았다. 애초에 그는 시리스 구입 대금으로 금화 이천 닢을 각오하고 엘븐하임을 갔다. 그런데 고작 삼백 닢으로 해결을 본 것이다. 그렇다 보니 물품 구입비를 빼고도 현재 금화가 천육백 닢 가까이 남아 있었다.

'그냥 들고 다니면서 여행 경비로 써도 되기야 하겠지만....'

솔직히 아무리 사치를 하고 다녀도 금화 백 닢이면 뒤집어쓴다. 그만큼 슬레이어의 가격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다. 사실 금화 천육백 닢이면 야심 있는 상인이 팔자를 바꿔 볼 만큼 어마어마한 거금이다.

'가만있자, 이걸 굳이 들고 다닐 필요는 없잖아?'

레펜하르트 개인이 쓰기에 저 금액은 평생 부귀영화를 누릴 큰돈이다. 하지만 그는 안타레스 제국을 재건해야 할 막중한 임무가 있는 몸! 한 나라를 세우려면 자금은 아무리 많아도 부족하다.

그래서 그는 적당히 여행 경비를 제외하고는 재투자를 하기로 결심했다. 마침 이곳은 대륙의 쟁쟁한 상회들이 모두 모여 있는 제플린이었다. 적당한 투자 대상을 찾기에 가장 적합한 곳이다.

'자, 그럼 무엇에 투자를 해야 할까?'

레펜하르트는 기억을 더듬었다. 미래를 알고 그것을 이용해 한몫 챙겨 보겠다는 상상쯤은 누구나 하는 법이다. 그리고 그는 진짜로 그 미래를 알고 있는 몸이다.

'지금 시기가 아마 그때지?'

과거 크로방스 왕국에 심각한 기근이 든 적이 있었다. 원래 크로방스 왕국은 대지의 여신, 레단티의 축복을 받아 거의 흉년이 없는 비옥한 땅이었다. 봄의 보리, 가을의 추수 양쪽 모두 풍성한 수확을 자랑해 남은 곡식을 수출하는 농업 국가였던 것이다.

그렇다 보니 어느 누구도 흉년에 대한 대비를 하지 않았다. 그러다 덮친 대기근, 예상했던 보리 수확이 전멸해 버리고 겨우내 비축한 곡식을 모두 먹어 버린 크로방스 왕국의 운명은 뻔했다. 수만 명의 아사자가 속출하고 왕국 전역에 부모가 자식을 잡아먹는 지옥도가 펼쳐졌다.

날짜를 헤아려 보니 그것이 딱 이번 겨울 후의 봄이었다.

'곡식 쪽을 투자하면 되겠군.'

그는 빙그레 웃었다. 안 그래도 어릴 적에, 저 기근 이야기를 미리 알았더라면 크게 벌 수 있었을 거라고 어른 마법사들이 술 먹고 떠들던 걸 들은 기억이 있었다. 돈도 벌고 사람들도 구하고 일석이조다.

잽싸게 머릿속으로 곡물을 전문으로 다루는 차탄 공국의 상회 리스트를 넘겨 보았다.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당연히 롤페인 상회였지만, 솔직히 그는 롤페인 상회에는 악감정이 많았다. 시리스를 학대하던 전생의 주인이 바로 롤페인 상회의 회주였으니까. 그렇다 보니 그쪽으로는 발 디디기도 싫었다.

그다음으로 떠오른 것이 롤페인 상회와 경쟁하던 또 다른 곡물 전문 상회였다. 롤페인 상회의 자금 압박에도 불구, 훌륭히 상회를 경영해 결국 대륙 3위의 대상회까지 올라갔던 곳이다.

'이름이... 타오반 상회였지, 아마?'

결정을 내리고 레펜하르트가 몸을 일으켰다.

둘러보니 시리스는 방 안에서 새로 구입한 무기들을 손에 익도록 이리저리 다뤄 보고 있었고, 실란은 사 준 단검을 들고 어설프게 그걸 따라 하고 있었다.

'굳이 쟤들을 데리고 갈 필요는 없겠고.'

시리스는 오늘만이라도 편한 여관에서 푹 좀 쉬게 해 주고 싶었다. 어차피 내일이면 또 길을 걷는 강행군을 해야 할 테니까.

"실란, 시리스랑 쉬고 있어. 나 좀 나갔다 올게."

한참 신나게 단검으로 허우적대던 실란이 눈살을 찌푸렸다.

"또 어딜 가요?"

"상회 좀 들를 곳이 있다."

코트를 챙겨 입는 레펜하르트를 보며 실란은 잠시 따라갈까 고민했다. 하지만 방금 제플린을 한 바퀴 돌았더니 피곤하기도 했고 또 단검 가지고 노는 재미가 쏠쏠해 굳이 나가고 싶진 않았다. 시리스야 굳이 명령이 없었으니 따라나서겠다는 생각도 안 했고.

"다녀오세요."

손 흔드는 실란을 향해 레펜하르트가 첨언했다.

"혹시 먹고 싶은 것 있으면 얼마든지 시켜. 시리스 것도 빼놓지 말고!"

시리스 성격에 자기가 룸서비스를 시킬 리는 절대 없으니 실란에게 당부한 것이었다. 실란이 혀를 찼다.

"지극 정성이다, 정말. 걱정 말고 갔다 와요."

그렇게 두 사람을 여관에 놔두고 레펜하르트는 다시 상회 거리로 발길을 옮겼다.

☆ ☆ ☆

회반죽으로 벽을 칠한 작은 방, 목재 책장과 테이블이 전부인 그 간소한 방 한가운데서 30대 초반의 한 남자가 서류를 붙잡고 인상을 쓰고 있었다.

남자 앞에는 이미 수많은 서류들이 산을 이루고 있었다. 연신 서류에 사인하고, 또 고뇌하며 한창 계산을 하고 있던 중이었다. 방 밖에서 비슷한 연배의 사내가 들어와 울상을 지었다.

"시볼트 회주님, 롤페인 상회가 밀과 보리를 반값에 팔기 시작했습니다!"

타오반 상회의 회주인 30대의 사내, 시볼트 타오반은 오만상을 찌푸리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크윽, 빌어먹을 놈들."

현 타오반 상회는 롤페인 상회와 곡물로 경쟁 중이었다. 공정 거래법 따위는 개념도 없는 시대다. 큰 쪽이 손해를 감수하고 돈으로 밀면 자연스럽게 작은 상회는 말라 죽기 마련, 그래도 상도를 안다면 그렇게까지 비열하게 나오진 않을 것이라 기대했다. 하지만 역시 롤페인 상회의 악명은 헛소문이 아니었다. 이대로라면 타오반 상회는 모든 거래처를 빼앗기게 된다.

"젠장, 그따위 상회가 대륙 2위의 대상회라니...."

시볼트는 두통을 느끼며 머리칼을 움켜쥐었다. 정말 세상이 얼마나 썩었는지 실감이 들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물러설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당장 돌아오는 환어음만 막아도 어떻게든 살 길이 나는데....'

그렇게 한참 고민하던 참이었다. 또 다른 부하 하나가 조심스레 방문을 열고 그를 불렀다.

"저기, 시볼트 회주님."

"왜?"

심기가 불편하니 말투가 절로 퉁명스럽게 나온다. 부하가 눈치를 살피며 말을 이었다.

"투자자가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돈 몇 푼 투자받아 봤자 당면한 문제는 해결이 나지 않는다. 오히려 귀찮은 일거리만 늘리는 격이다. 게다가 그쪽은 부하가 전담하고 그는 보고를 받는 부분이었다. 왜 이 시기에 직접 알린단 말인가?

과연 이유가 있었다.

"그게, 금액이 자그마치 금화 천오백 닢입니다."

"뭣이?"

대상회 기준으로 금화 천오백 닢이면 결코 큰돈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의 타오반 상회에게는 그야말로 죽어 가는 상회를 살릴 수 있는 거금이었다.

일단 이 겨울만 보내고 대륙 각지의 곡물들이 현물로 들어오기만 하면 충분히 손해를 메우고도 큰 이익이 나는 것이다. 그걸 아니까 롤페인 상회도 이 겨울을 못 넘기도록 저런 출혈 정책을 쓰는 것이지만.

눈이 번쩍 뜨여 시볼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뉘, 뉘시냐! 내가 직접 만나 뵈어야겠다!"

레펜하르트는 안내한 작은 응접실에 앉아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흐음, 꽤나 간소한 방이군. 별로 형세가 안 좋은가?'

사실 여기까지 찾아오기도 꽤 힘들었다. 그가 기억하는 타오반 상회는 대륙 3위의 거대 상회, 그렇다 보니 으리으리한 건물을 기대했다. 그런데 제플린 시의 타오반 상회는 고작 2층의 작은 벽돌 건물이었다. 이 동네 땅값을 생각하면 어지간한 외곽에 저택을 세울 금액이 들었겠지만 그래도 다른 상회 건물과 너무 비교가 된다.

그리고 사실은 그렇게 초라하지도 않았다. 괜찮은 벽지에 우아한 가구, 손님을 대하기에 부족함 없는 인테리어였다. 하지만 엘븐하임이며 여관 황금의 휴식처에서 너무 화려함에 익숙해져 있다 보니 뭔가 가난해 보이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끙, 그동안 너무 호사를 부리고 다녔나? 자제해야겠네.'

내심 반성하며 레펜하르트는 타오반 상회의 회주, 시볼트 타오반을 기다렸다. 잠시 후 30대 사내가 허겁지겁 응접실로 들어왔다. 기억 속의 노인은 아니었지만, 고집스러운 입매나 또렷한 눈빛에서 바로 시볼트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손님."

"레펜하르트라고 합니다."

인사를 나눈 뒤 바로 레펜하르트가 본론으로 들어갔다. 금화가 가득 든 자루, 세 개를 테이블에 척 내려놓으며 그가 말했다.

"금화 천오백 닢, 모두 곡물에 투자하고 싶습니다. 장소는 크로방스 왕국, 시기는 내년 봄 보리 추수 때."

금화의 무게에 잠시 넋이 나가 있던 시볼트가 놀라 되물었다.

"네에? 크로방스 왕국요?"

크로방스 왕국은 대륙 최대의 곡창 지대, 게다가 레단티의 축복을 받아 결코 흉년이 들지 않는 땅이었다. 거기에 곡식을 판다는 것은 열대 지방에 난로를 판다는 소리랑 같았다. 어이가 없어 시볼트가 입을 쩍 벌렸다.

"저, 손님. 이런 말씀 드리긴 좀 그렇습니다만 크로방스 왕국에 곡물을 판다는 건 오크에게 비누를 파는 격입니다. 도저히 팔리질 않아요."

"오크들도 익숙해지면 비누 잘 씁니다."

"네?"

"아,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무심코 전생 이야기를 꺼내 버렸군. 레펜하르트는 쓴웃음을 지었다. 솔직히 시볼트의 태도도 이해가 갔다. 그 역시 미래를 몰랐다면 이런 투자를 하겠다는 소릴 듣고 천하의 바보로 여겼을 것이다.

"망해도 내가 망하는 것 아닙니까? 반면 이득이 나면 그쪽도 꽤 이익을 건질 텐데요?"

"그렇긴 합니다만...."

시볼트가 난처해하며 입술을 매만졌다. 저 돈이면 확실히 현재의 고난을 해결할 수 있었다. 하지만 눈앞의 투자자에게 맞장구치기에는 그의 상인 정신이 도저히 용납하지 않았다.

"그래도 망할 것이 뻔한 투자를 손님에게 권할 수는 없습니다. 재고를 고려해 보심이 어떤지...."

"싫으면 딴 데 가고요."

어차피 타오반 상회에 큰 미련이 있던 것도 아니었다. 그저 롤페인 상회와 사이가 안 좋다는 이유만으로 처음 선택한 것이니 다른 상회를 택해도 레펜하르트 입장에선 전혀 문제가 없었다.

그러자 시볼트가 놀라 헛소리를 흘렸다.

"그, 그건 안 됩니다!"

그리고 그는 아차 싶어 혀를 찼다. 너무 상황이 다급해 상인답지 않은 모습을 보인 것이다. 레펜하르트가 조금 놀란 눈으로 시볼트를 살펴보았다.

'되게 아쉬운 상황인가 본데?'

어째 제대로 찾아온 건지 의심이 간다. 이거 투자한 거 건지기도 전에 야반도주하는 거 아냐?

자신의 실수에 시볼트가 한숨을 푹 쉬더니, 솔직하게 이야기를 꺼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희 상회가 현재 좋은 상황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이 돈이 있다면 충분히 이 시기를 이겨 내고 커질 수 있는 시점이기도 하지요. 그러니, 되도록 다른 투자를 권하고 싶습니다만."

"망해도 내가 망한다니까 그러네."

레펜하르트는 혀를 찼다. 이 양반, 전생에도 깐깐하더니 원래 천성이었군. 그래도 이런 모습을 보니 점점 더 믿음이 간다.

"내 돈이고, 내가 쓰는 거요. 자! 계약서나 가지고 와요."

금화를 밀어붙이며 그는 강압적으로 나갔다. 이쯤 되니 시볼트도 더 이상 거부할 수 없었다. 모든 위험을 설명하고도 상대가 받아들였으니 상도에 어긋남도 없었고, 무엇보다 눈앞의 금화가 너무도 탐났다. 그가 부양하는 수많은 타오반 상회의 식솔들을 생각하면 거절하는 것 또한 죄악이었다.

"알겠습니다, 레펜하르트 님. 바로 계약서를 준비토록 시키지요."

시볼트가 수하를 불러 서류 작성을 명했다. 레펜하르트가 부드럽게 웃었다.

"내가 원하는 건 단 한 가지, 괜히 지레짐작해서 내 돈을 다른 곳에 투자하지만 않으면 됩니다."

"물론입니다."

일단 받아들인 이상, 철저하게 이행하는 것이 상인의 도리였다. 역시 전생의 기억이 믿을 만하다며 레펜하르트는 흡족해했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사실이 있었다.

"아, 그리고 이건 좀 별개의 문제인데...."

"필요하신 것이라도?"

"타오반 상회가 그라임 왕국에도 지부가 있죠, 아마?"

시볼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얼마 전에 그라임 왕국 북부 쪽으로 상로를 개척한 적이 있었다.

"그럼 델피아의 마탑 근처에 있는 지부가 혹시 있습니까?"

"델피아에는 없지만 론타 지방의 지부가 델피아를 경유하긴 합니다. 무슨 일이신지?"

"거기서 사람을 하나, 좀 알아봐 줄 수 있겠습니까?"

이 기회에 현 시대의 레펜하르트에 대한 정보를 얻으려는 것이었다. 어떻게 지내는지, 뭔가 이상한 점은 없는지, 특히 요 몇 년간 어떻게 지냈는지에 대한 정보가 필요하다고 구체적으로 요구했다.

"이건 따로 수고비를 드릴 테니...."

"필요 없습니다. 바로 연락을 취하겠습니다."

시볼트가 단호하게 손을 저었다. 이 투자자 손님과의 거래라면 따로 사람을 부려 그 정도 정보를 구하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무슨 왕족이나 귀족의 기밀 정보도 아니니 그냥 그 근처 상인에게 소식만 좀 알아보라고 해도 된다.

'좋아, 이걸로 토드에게서 못 건진 정보도 얻을 수 있겠다.'

싱글거리며 레펜하르트는 깃털 펜에 잉크를 묻혔다.

3

백은의 단검이 허공을 누빈다. 섬세한 검광을 흩뿌리며 베어올리고 내리치고 찔러 가며 휘둘러 벤다. 손에 감기는 칼자루의 촉감을 느끼며 시리스는 희미하게 웃었다.

검은 좋았다. 검을 휘두르는 순간만큼은 자신이 노예라는 사실을 잊을 수 있었다.

시리스는 경매장의 다른 엘프들처럼 노예로 태어나지 않았다. 그녀가 태어난 곳은 대륙 서쪽의 황무지, 단하임 숲의 일족이 통곡의 땅이라 이름 붙인 곳이었다. 위대한 고향인 엘프들의 숲을 잃고 수백 년간 쫓기고 쫓겨 간신히 도착한 안주의 땅. 너무도 척박해 그저 살아가는 것 자체가 고행인 황야에서 그녀는 나고 자랐다.

이제는 기억조차 희미한 어린 시절.

어른들은 항상 말하곤 했다.

"원래 우리 하이엘프들은 숲의 보호자였단다. 세계수 엘븐하임의 가호 아래 모든 엘프들은 영원한 행복 속에서 살고 있었단다. 모든 동물들은 엘프의 친구였고 모든 나무에서 과실이 열려 끝없이 양식을 공급해 주었지."

척박한 땅에서 매일 입에 풀칠하기도 힘든 삶을 살아가던 자신들을 보면 도저히 믿기지 않는 이야기였다. 숲의 요정으로서 자연과 함께하며 고상한 삶을 보내던 과거의 엘프들 이야기는 마치 꿈이나 환상 같았다.

"비록 비열한 인간들의 세력에 밀려 이 처지가 되었지만, 언젠가 엘디아께서 우리를 보살펴 다시 낙원으로 향하게 해 줄 거란다."

엘프들의 여신, 엘디아.

그녀가 언젠가 위대한 여신의 대리자를 세상에 내려 모든 엘프들을 구원할 것이라는 믿음은 단하임 일족 전체에 퍼져 있었다. 어린 시리스 역시 그것을 굳게 믿었다.

"우리는 위대한 요정의 후예란다. 우리의 사랑하는 딸아, 너는 결코 그 긍지를 잊어서는 안 된단다."

모든 엘프 어른은 아버지였고, 어머니였다. 수많은 부모들의 사랑 속에서 그녀는 자라났다. 가난하고 굶주렸지만 그래도 행복하던 삶이었다.

그것이 깨진 것은 그녀가 스무 살이 되던 해, 인간으로 치면 다섯 살 때였다.

값비싼 엘프들이 '야생화'된 지역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노예 사냥꾼들은 막대한 병력을 동원해 그녀의 고향을 침입했다. 갑작스레 쳐들어온 인간들의 군대 앞에 엘프들은 열심히 저항했다. 모두가 목숨을 아끼지 않고 미래를 위해 싸웠다.

하지만 병력 차가 너무나 심했다. 결국 사투 끝에 어른들은 모두 죽고, 아이들은 노예 사냥꾼에 의해 노예로 팔려 가는 신세가 되었다.

아무것도 몰라 그저 울기만 하던 어린 시절, 경매장으로 끌려와 다른 엘프들을 만나며 느꼈던 충격은 아직도 기억 저편에 흐릿하게 남아 있었다.

그들은 단하임 일족을 비웃었다. 노예 종족인 엘프들에게 그런 과거가 있을 리 없다고 했다. 단하임 일족이 믿었던 것은 애타게 바란 나머지 생겨난 전설일 뿐이라 했다. 세상 어딜 가도 그런 '구원자 전설'은 흔하다며 비슷한 이야기를 연거푸 주워 넘겼다.

엘븐하임에서 만났던 나이든 엘프 여인이 그녀를 달래며 말했었다.

"이제라도 세상을 알게 되었으니 다행이지 않니? 넌 예쁘니까 좋은 곳에 팔릴 수 있을 거야. 나이가 어리니, 지금부터라도 이곳에서 충성과 공손함을 배우면 좋은 엘프가 될 수 있을 거란다."

그리고 세월이 지났다. 시리스 역시 과거를 잊어 갔다. 세상은 그녀가 듣던 것과 달랐다. 엘프는 노예였다. 그것을 모두가 당연하게 여겼다. 반항하던 그녀 역시 점차 엘븐하임에 길들여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시리스는 결코 마음속까지 굴복하진 않았다. 명령에 복종하면서도 그녀의 눈동자는 언제나 반항심으로 빛나고 있었다. 수없이 굶고 매질을 받아도 그 눈빛은 변하지 않았다.

다른 엘프들은 그런 그녀를 비웃었다. 순혈의 하이엘프란 사실조차 그곳에서는 비웃음의 대상이었다. 엘프들 중에서도 가장 고귀하게 빛나던 순백의 일족, 하지만 황야의 태양에 그을려 까무잡잡한 그녀의 피부는 그런 하이엘프의 몰락의 상징이나 다름없었다.

노예들 사이에서조차 겉돌던 그녀에게 구원이 된 것은 단 하나, 검뿐이었다. 시리스의 자질을 알아본 엘븐하임의 검술 교관은 그녀를 슬레이어 커리큘럼에 집어넣었다. 그래서 그녀는 다른 노예들과 달리 검술을 익힐 수 있었다.

슬레이어가 아닌 엘븐하임의 엘프들은 검을 익히지 않는다. 그들이 익히는 것은 오로지 인간을 기쁘게 하는 온갖 잡기뿐이다.

하지만 기억 속 어른들은 모두 검을 들었다. 그들은 검을 들어 스스로를 지킬 줄 아는 자유로운 엘프들이었다. 모두가 용맹했고 긍지 높게 싸우다 죽어 갔다. 붙잡혀 가며, 노예 사냥꾼 중 하나가 심각한 손해를 봤다며 울상을 짓던 걸 본 기억이 아직도 희미하게 남아 있다.

그래서 검은 좋았다. 검을 휘두르면 긍지 높던 아버지,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었다. 고립된 세상 속에서 검만이 유일한 즐거움이었다. 비록 그것이 더 값비싼 노예가 되기 위한 노력이란 걸 알면서도 그녀는 홀린 듯 검술에 매진했다.

그렇게 50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어린아이는 성숙한 소녀가 되었다. 50년은 엘프에게도 긴 시간이었다. 이미 과거의 대부분은 잊힌 지 오래였다. 노예로서 살아가는 것에도 익숙해졌다. 이제 자유롭게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너무도 오랜 옛날이야기이기에 기억조차 희미하지만....

흐릿한 기억 한 구석에 간직한 작은 한마디.

"우리의 사랑하는 딸아, 너는 결코 긍지를 잊어서는 안 된단다."

검을 휘두를 때면, 그 목소리가 아련하게 들리는 것 같았다.

☆ ☆ ☆

"후우...."

검무를 마치고 시리스는 가볍게 숨을 골랐다. 시리스가 펼친 단검술 연무를 정신없이 지켜보고 있던 실란이 감탄사를 터트렸다.

"와, 멋지다!"

시리스와 실란은 여관 정원에 나와 있었다. 미스릴제 단검을 손에 넣은 실란이 단검술 좀 가르쳐 달라고 시리스를 졸라 댔던 것이다. 아무래도 객실에서 검무를 추긴 좀 그래서―최고급 방을 잡았다 보니 가구들에 흠집이라도 날까 두려웠다― 정원으로 자리를 옮긴 것이었다.

한겨울임에도 둘 다 가벼운 코트만 걸친 차림이었다. 하지만 그리 추워하는 기색은 없었다. 코트 자체도 방한성이 뛰어난 고급품인 데다가, 이 황금의 휴식처는 ㅁ자 형태의 건물이어서 중앙에 정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사방이 건물이라 외풍을 막아 주니 체감 온도가 상당히 높았다.

시리스에게서 단검을 건네받으며 실란이 물었다.

"어떻게 그런 동작들을 하는 거야?"

"열심히 하면 돼요."

쌀쌀맞은 목소리였지만 실란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우와, 레펜 씨랑 대답이 똑같아. 원래 무술 하는 이들은 다 그래?"

"그렇다기보다는...."

시리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제대로 기초부터 가르치면 모를까, 그냥 어떻게 그 동작을 하냐고 물어보면 저 대답 말고 할 것이 뭐가 있겠는가?

"웅, 이렇게 하는 거였나?"

실란이 단검을 받아 들고 시리스의 검무를 흉내 내기 시작했다. 예리한 궤적은 사라지고 단검이 열심히 허공을 허우적댄다. 그러더니 머리를 벅벅 긁는다. 결 좋은 붉은 머리카락이 제멋대로 나부꼈다.

"아, 보기보다 힘드네."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에요."

어투가 차가운 것치고는 시리스는 실란의 말에 꼬박꼬박 대꾸해 주고 있었다. 레펜하르트를 대할 때와는 꽤나 태도가 다르달까?

실제로 시리스는 이 작고 아름다운 미소년 신관이 꽤 마음에 든 상태였다. 그녀도 여성인지라 예쁜 것을 보면 일단 호감이 갈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성격도 좋아 노예인 그녀에게도 꽤나 살갑게 대한다. 왠지 살짝 어려워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동안 시리스가 만난 인간들과는 반응이 전혀 다른 것이다.

물론 저 모습은 실란이 시리스를 인격체로 대우한다기보다는, 돈 없는 서민이 귀한 품종의 고양이를 보며 신기해하고 조심하는 것에 가깝다. 하지만 시리스 입장에서야 어찌 되었건 마음에는 들었다.

"음, 기본적인 것부터 배우는 게 좋을까? 어떻게 해야 돼?"

"일단 검 쥐는 법부터 익숙해져야겠네요."

시리스가 실란의 손을 잡고 자세를 교정해 주었다. 인간 남자의 손을 먼저 잡다니, 그녀답지 않은 모습이지만 그녀는 이 어린 소년에겐 전혀 경계심을 품지 않고 있었다.

사실 종족 나이로 치면 시리스는 이제 열일곱이 넘었고 실란은 열아홉이니 어리다고 하기엔 어폐가 있다. 하지만 레펜하르트는 실란이 남자란 건 가르쳐 줬어도 몇 살인지는 알려 주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시리스는 실란이 잘해 봐야 열서너 살 정도라 착각하고, 귀여운 동생처럼 대하고 있었다.

그렇게 두 사람이 여관 중앙의 정원에서 노닥거리고 있을 때였다.

"이곳에 있었군."

요란한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주랑柱廊을 통해 한 무리의 사내들이 정원으로 들어왔다. 선두에 선 칼 찬 중년인을 보며 실란이 눈살을 찌푸렸다.

낯익은 얼굴이었다. 아까 거리에서 만났던, 시리스를 팔라던 그 작자였다.

"무슨 일이죠?"

실란이 시리스 앞을 가로막으며 경계심을 띄웠다. 그 모습을 보며 로마드는 일이 잘 풀린다며 흡족해하는 미소를 지었다.

'정말 애송이로군. 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설마 뒷생각도 안 했다니.'

원래 그는 따로 사람을 부려 레펜하르트를 불러내고, 그 틈에 저 엘프 노예를 낚아챌 생각이었다. 어쨌거나 나중에 오리발 내밀려면 본인 앞에서 노예를 납치할 순 없으니까. 그런데 정작 여관에 와 보니 제가 알아서 자리를 비운 것이다.

"네겐 볼 일 없다. 비켜라!"

버럭 소리를 지른 뒤 로마드가 손짓을 했다.

"따라와라, 엘프 암컷. 진짜 주인께 데려다 주마."

실로 뻔뻔한 목소리였다. 로마드 뒤에 있던 건장한 장한 세 명이 손에 밧줄이며 단봉을 들고 시리스의 좌우를 포위하듯 다가왔다. 실란이 다급해하며 다시 외쳤다.

"이봐요! 당신들 뭐예요?"

소리를 지르며 실란은 힐끔 여관 창문들을 바라보았다. 이상했다. 이 정도 소동을 일으켰는데도 누구 하나 창밖을 내다보는 이가 없는 것이다. 로마드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뭘 기대하는지는 알겠는데, 지금 여관 손님들은 전부 홀에 가 있을 거다."

그는 이미 여관 주인을 매수해, 저녁 성찬을 무료 제공한다는 평계로 여관 손님들을 전부 1층 홀에 옮긴 후였다. 이곳에 묵을 정도면 다들 어지간히 돈 많은 이들이겠지만 그렇다 해도 공짜 저녁 마다할 이는 없었던 것이다.

"아니, 이미 팔지 않겠다고 했는데 대체 이게 무슨 행패입니까!"

당황하며 악을 쓰는 실란을 향해 사내 하나가 대뜸 단봉을 휘둘렀다.

"아, 어린놈이 더럽게 시끄럽네!"

순간 시리스가 앞으로 나섰다. 순식간에 실란의 앞을 점유하며, 동시에 그가 들고 있던 단검을 낚아챈다. 단검을 빼앗긴 실란조차도 뭘 어떻게 했는지 모를 정도로 날랜 동작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녀가 낮은 자세로 몸을 날렸다.

"으윽?"

사내가 놀라 대뜸 단봉을 내려친다. 어설픈 몽둥이질이 아니라 제대로 봉술을 배운 절도 있는 공격이었다. 그러나 시리스는 바로 단검으로 공격을 걷어 내며 반대쪽 주먹으로 상대의 목젖을 후려갈겼다. 중지 마디를 살짝 든, 일명 밤주먹이다.

"캐액!"

그야말로 전광석화 같은 움직임이었다. 사내가 캑캑대며 바로 쓰러졌다. 좌우의 두 놈이 당황하며 달려왔다.

"이, 이년이!"

두 사내가 바로 시리스에게 달려가 좌우를 공격해 갔다. 손목 스냅을 교묘히 쓰며 봉을 휘둘러 상하와 좌우를 동시에 후려갈긴다. 공격이 꽤나 절묘해 도망갈 곳을 완전히 차단해 버렸다.

하지만 시리스는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예의 무표정한 얼굴을 고수한 채, 그녀는 제자리에 서서 몸을 틀었다. 아슬아슬하게 좌측 공격을 어깨 너머로 흘리며 반대쪽 단봉을 검면으로 받아 낸다. 그리고 그대로 봉을 타고 가며 사내의 손목을 베어 갔다.

"크억!"

선혈이 솟구치며 사내가 손목을 잡고 쩔쩔맸다. 그 틈에 시리스는 바로 반회전하며 반대편을 단검을 크게 휘둘렀다. 꽤 동작이 크다 보니 반대편 남자가 쉽게 공격을 피하고 바로 반격에 나섰다.

그 순간 그녀는 회전한 기세를 살려 남자의 명치에 뒤차기를 꽃아 넣었다. 애초에 단검을 휘두른 것 자체가 미끼였던 것이다.

"컥!"

위장이 뒤집히는 고통 속에서 남자가 신음을 흘렸다. 시리스의 단검이 이어서 춤을 추며 상대의 급소를 노려 갔다. 순식간에 미스릴제 검날이 남자의 어깨를 깊숙이 찔렀다.

"아악!"

검을 뽑자 붉은 피가 옷자락을 가득 적신다. 고통에 겨워 사내들이 비틀비틀 뒤로 물러섰다. 순식간에 거구의 장한 셋을 간단하게 처리하는 시리스의 모습에 로마드가 당황해 표정을 굳혔다.

'어, 어라?'

하도 쉽게 당해 별 볼 일 없어 보이긴 했지만, 사실 지금 나선 세 부하들은 결코 녹록한 실력이 아니었다. 로마드는 시리스가 슬레이어, 전투 기술을 제대로 익힌 엘프 노예란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충분히 슬레이어를 상대할 만한 실력자를 골라 이곳에 왔다. 테리크 역시 세 명의 슬레이어를 거느리고 있었다. 그들을 바탕으로 슬레이어의 전투력쯤은 익히 파악하고 있는 로마드였다.

그런데 시리스의 실력이 지나치게 예상 밖이었다.

'저거 너무 세잖아?'

단숨에 공격의 허점을 파고드는 솜씨 하며 공방이 바뀌는 스피드가 제대로 보이지도 않을 정도였다. 저 정도면 로마드 자신이 나서도 상대가 안 될 것 같았다. 게다가 피를 보는데 전혀 거리낌이 없는 심성이라니? 저건 실력 있는 기사와 함께 풍부한 경험을 쌓은 노련한 슬레이어들이나 보일 법한 무위였다. 결코 갓 출고(?)된 슬레이어가 가질 실력이 아닌 것이다.

"뭐, 뭐야?"

"당한 거야? 스미스 형님이?"

로마드와 함께 온 다른 사내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직 여섯 명의 수하가 남아 있었지만, 저들은 모두 방금 쓰러진 저 세 사람에 비해 실력이 한참 떨어졌다. 저들의 용도는 보통 망을 보거나 쪽수로 위협을 하는 역할이어서 저 엘프 소녀에게 붙여 봤자 나가떨어질 것이 뻔했다.

"이런...."

혀를 차는 로마드의 목소리에 그제야 정신이 든 실란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한껏 흥분한 것이다. 실란이 신성력을 끌어 올리며 고함을 질렀다.

"이 무뢰한들이! 칵 염산으로 세수시켜 버릴라!"

예쁘장한 겉보기와 달리, 실란은 꽤 성깔이 있다. 게다가 그는 필라넨스 교단에서도 고위의 프리스트인 것이다. 그런 자신에게 대뜸 몽둥이를 휘둘러?

실란이 바로 기도를 올렸다.

"필라넨스시여, 저 불경한 자들에게 당신의 철퇴를...."

그 순간 시리스가 실란을 붙잡고 옆으로 확 당겼다. 당황해 기도를 실패한 실란의 귓가로 바람 소리가 쌩 하고 지나갔다. 어느새 뒤에 있던 마른 고목에 한 자루 대거가 깊숙이 박혀 있었다. 신성 주문을 쓰려는 실란을 보고 로마드가 대뜸 대거를 날린 것이었다.

실란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주, 죽이려고?'

로마드가 굳은 얼굴로 실란을 노려보며 말했다.

"아가리 닥쳐. 중얼거리는 기색만 흘려도 칼 날아간다."

섬뜩하기 그지없는 목소리였다. 짙은 살기에 위축되며 실란이 기막힌 듯 소리쳤다.

"난 필라넨스를 섬기는 자다!"

아무리 막돼먹은 인간이라도 여신을 섬기는 이에게 함부로 손을 대는 경우는 없었다. 실란의 외침에 로마드가 콧방귀를 꼈다.

"흥, 어차피 순례자 애송이. 시체 한둘쯤 치운다고 뭐랄 사람도 없다."

실제로 로마드는 실란의 생사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성직자란 건 거리에서 만났을 때 복장을 보고 이미 파악했다. 하지만, 실란이 입고 있던 법복은 필라넨스 교단의 것이었다. 필라넨스 교단은 주로 대륙 남부에서 교세가 흥하고 차탄 공국엔 아직 신전이 없었다. 그렇다면 이 꼬맹이는 보나마나 순례자일 터, 죽여도 찾을 이 하나 없는 처지다.

"뭐 이런 작자들이 다 있어?"

분노로 이를 갈긴 했지만, 실란의 안색은 창백해져 있었다. 순례자가 길거리에서 대부분 객사한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었다. 하지만 설마 자신이 그런 꼴이 될 줄은 몰랐다.

그때 시리스가 속삭이듯 실란을 달랬다.

"괜찮아요."

실란이 놀라 고개를 돌렸다. 여태까지의 쌀쌀맞은 목소리가 아니었다. 부드러운, 다정하게까지 들리는 음성이었다.

"시리스?"

그녀가 자세를 취했다. 살짝 무릎을 굽히고 단검을 로마드에게 겨냥하며, 반대쪽 손을 턱밑으로 가져간다. 결연한 태도로 그녀가 중얼거렸다.

"문제없어요."

실란은 조금 놀랐다. 지금 시리스가 보이는 모습은 그가 알고 있는 어떤 슬레이어와도 달랐다. 오로지 주인의 칭찬을 듣기 위해 검을 휘두르는 슬레이어들은 결코 저런 눈빛을 하지 않는다.

지키겠다는 의지가 담긴, 결의와 긍지가 맴도는 결연한 눈빛.

그것은 전사의 눈이었다.

☆ ☆ ☆

로마드는 분명 시리스의 실력에 당황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난처해하지도 않았다.

그는 신중한 성격이었고, 혹시나 일이 꼬여 레펜하르트를 상대해야 할 경우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비록 뜨내기 모험가라고는 해도 슬레이어 값으로 금화 삼백 닢을 벌 수 있을 정도면 꽤나 실력자임이 분명했다. 그래서 그는 만일을 대비해 또 다른 강자를 준비해 두었다.

'단지, 그걸 초짜 슬레이어 따위에게 쓰게 될 줄은 몰랐지만 말이지.'

혀를 차며 로마드가 소리를 쳤다.

"일할 시간이다. 탈카타!"

"네, 주인님."

굵은 음성과 함께 주랑 뒤편, 기둥 그림자에 서 있던 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적회색 피부에 납작한 코, 굵직한 뻐드렁니를 지닌 오크 사내였다. 로마드와 비슷한 키였지만 덩치는 전혀 달랐다. 어깨 넓이만도 엄청난데다가 전신이 터질 듯한 근육으로 덮여 있었다.

실란이 오크의 정체를 바로 알아챘다.

"오크 검투사...."

레더 아머로 급소를 보호하고 있었지만, 드러난 부분만으로도 흉터가 엄청났다. 노예 종족인 오크가 저 정도로 상처가 많다는 것은, 그리고도 살아 있다는 것은 저자가 전문 검투사로 양성된 오크임을 증명한다.

"탈카타. 일합니다. 저 엘프 잡습니다."

"그래, 일이다. 당장 잡아 와!"

"네, 주인님."

어슬렁어슬렁 걸어가는 탈카타의 뒷모습에 로마드가 믿음직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슬레이어나 오크 검투사나 똑같이 전투 기술을 전문적으로 배운 것은 같지만, 엘프와 오크는 기본 전투력이 전혀 다르다. 어릴 적부터 세뇌 교육을 통해 흉성을 제거당한 보통 오크 노예들과 달리 검투사로 키워진 오크들은 야만적인 강함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었다.

'게다가 암컷이 수컷을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잖아?'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로마드가 소리쳤다.

"빨리 처리해라! 시간 끌면 곤란해!"

슬슬 저녁 식사 시간이 끝날 때였다. 여관 손님들이 다시 방으로 돌아오면 곤란했다.

오크 검투사, 탈카타가 시리스 앞으로 걸어가며 표정을 굳혔다. 비록 노예의 삶이지만, 그는 검투사로서 오로지 전사와만 싸워 왔지 여자나 어린아이를 핍박한 적은 없었다. 이런 추잡한 명령 따윈 듣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인간의 명이니 거역할 수는 없다. 그가 뻐드렁니 사이로 침울한 음성을 흘렸다.

"미안하다. 네 팔자다."

사실은 '미안하게 되었구나, 어린 엘프 소녀여. 하지만 이것도 네 운명이니 어쩔 수 없다. 그냥 받아들이도록 하거라.'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오크의 성대로는 저런 복잡한 인간어를 구사할 수가 없다. 속으로 혀를 차면서 탈카타는 검을 뽑았다.

스르릉!

로마드가 기겁하며 외쳤다.

"야, 임마! 흠집 내면 안 돼!"

"상처 안 냅니다. 탈카타, 그냥 잡습니다."

예리한 롱 소드가 겨울 햇살을 반사해 빛을 발한다. 시리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저 인간들이 상대라면 문제없이 이길 자신이 있었지만, 이 오크는 달랐다. 본능적으로 경각심이 느껴지는 상대였다.

'하지만 물러설 순 없지.'

시리스는 힐끔 실란을 바라보았다. 이 작은 소년은 겁에 질려 떨고 있었다. 마치 어렸던 자신, 마을을 습격한 노예 사냥꾼을 보며 떨던 그때의 자신처럼.

그리고 그녀는 지금 그때의 부모들처럼 검을 들고 그 앞을 지키고 있었다.

문득 미소가 흘렀다.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았다.

"타앗!"

낭랑한 기합과 함께 시리스가 먼저 몸을 날렸다.

탈카타는 조금 당황했다. 시리스의 움직임이 예상보다 더 빨랐다.

"호오?"

하지만 그는 제플린 투기장에서 80승 이상을 거둔 베테랑 검투사였다. 당황과는 별개로, 탈카타의 롱 소드는 이미 착실하게 투로를 밟고 있었다.

"파타!"

예리한 섬광이 허공에 빛을 남기며 벼락처럼 내리쳐진다. 그야말로 정수리를 쪼갤 듯한 강격에 시리스가 당황하며 몸을 틀었다. 그 순간 예상했다는 듯 탈카타가 바로 검을 옆으로 휘둘렀다.

"윽!"

검면에 어깨를 두들겨 맞은 시리스가 신음을 흘리며 옆으로 몸을 날렸다. 곧바로 공격이 이어졌다. 대지를 파헤치듯 탈카타가 롱 소드를 크게 베어 올렸다. 동작이 커 시리스도 피할 순 있었지만, 그것 역시 그가 노리는 바였다. 검을 쥐지 않은 왼 주먹으로 탈카타가 그녀의 복부를 노리고 펀치를 뻗었다.

간신히 피했지만 다리가 꼬였다. 연거푸 뒤로 물러나고서야 시리스는 간신히 자세를 바로잡을 수 있었다.

"미안하다!"

사과의 말을 날리며 탈카타가 연신 공세를 퍼부었다. 단검과 장검의 검광이 황량한 겨울 정원 위를 가득 메웠다. 수십 차례나 검격을 교환하며 시리스는 진땀을 흘렸다. 겉보기엔 제법 공격을 잘 막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당하는 입장에서는 그게 아니었다.

'...강해!'

탈카타는 딱 그녀가 막을 수 있을 만큼만 공격을 퍼붓고 있었다. 간신히 막을 수는 있지만 도저히 반격의 실마리를 찾을 수가 없다. 게다가 들고 있는 무기 차이도 심했다. 고작 단검 한 자루로 롱 소드를 상대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게다가 단검술은 그녀의 전공도 아니었다.

'방에 시미터를 두고 오는 게 아니었는데!'

롱 소드가 춤을 추며 사방을 점유한다. 화려하게 날아드는 수많은 칼날의 궤적, 하지만 그중 어느 것 하나 살기를 띄운 것은 없다. 애초에 탈카타는 그녀를 상처 없이 잡아야 하는 것이다. 즉, 일부러 상대의 체력을 소모시키는 방향으로 전투를 진행하고 있었다.

물론 이런 탈카타의 심오한 전법을 로마드는 알아주지 않았다. 그저 신경질만 계속 낼 뿐이었다.

"뭐 하는 거냐? 탈카타! 이 무능한 놈! 고작 엘프 암컷 하나 잡지 못해?"

정작 본인은 실력도 없는 주제에 목청은 아주 쩌렁쩌렁하다. 하지만 탈카타는 신경 쓰지 않았다. 인간이 주제 파악 못 하는 것은 종족 특성인 모양이었다. 저런 인간을 워낙 자주 봐 왔기에 화도 나지 않았다. 그저 난감해할 뿐이었다.

'쩝, 오늘 저녁도 굶겠군.'

그래도 이 엘프 암컷에게 흉터 남기는 것보다는 그냥 그가 하루 굶는 것이 나았다. 탈카타는 신중하게 계속 공세를 펼쳤다.

반면, 실란은 초조해 미칠 지경이었다.

"조심해! 시리스!"

"떠들지 말라고 했지!"

기도를 올리는 것도 아니고, 그냥 외친 것인데도 로마드는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실란이 의미에 핏줄기가 섰다.

'아, 저것들 보기 좋게 한 방 먹이고 싶은데....'

시리스는 실란이 겁에 질려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가 벌벌 떨고 있는 것이 사실이기도 했다. 하지만 실란이 떨었던 것은 겁에 질려서가 아니었다. 한마디로 열받아서였다.

'젠장, 기회가 안 나네.'

도저히 신성 주문을 쓸 기회가 없다. 모든 신성 주문은 모시는 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필수 불가결이기에 필라넨스의 필 자만 나와도 로마드는 바로 대거를 던져 댈 것이다. 작게 중얼거려 볼까도 생각했지만, 신성 주문 역시 마법과 마찬가지로 언령의 지배를 받기에 어느 정도의 성량은 꼭 필요했다.

"으윽!"

열심히 피하던 시리스가 결국 허벅지에 한 대 맞고 비틀거렸다. 이번에도 절묘하게 검을 비틀어 면으로 때렸기에 피는 보지 않았다. 역시 탈카타는 노련한 검투사였다. 시리스가 이를 악물었다.

'이렇게 되면....'

갑자기 시리스가 탈카타의 정면으로 무식하게 달려들었다. 놀라며 탈카타가 그녀의 목을 횡으로 베어 갔다. 당연히 피할 수 있을 정도로 느린 검격이었다. 하지만 시리스는 피하는 대신, 오히려 칼날로 목을 가져가며 돌진력을 높였다.

"타앗!"

"크륵?"

기괴한 괴성을 흘리며 탈카타가 억지로 검을 멈췄다. 갑자기 공세를 뒤틀려니 근육에 무리가 간다. 그 틈에 시리스가 탈카타의 가슴팍을 길게 베었다. 역시 미스릴제 단검, 두꺼운 갑옷을 간단히 자르고 근육에 상처를 입혔다.

"크윽!"

피를 흘리며 탈카타가 뒷걸음질을 쳤다. 그는 당황하며 눈앞의 엘프 소녀를 노려보았다.

'아니, 내가 궤도를 못 비틀었으면 어쩌려고?'

그랬다간 저 여린 모가지가 바로 뎅겅 잘려 나갔을 것이다.

설마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은 몰랐다. 차라리 문외한이 저런 짓을 저질렀다면 이해가 갔다. 하지만 저 정도 실력이면 내려치던 공세를 멈추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모를 리가 없었다.

시리스가 희미하게 웃었다.

'그쪽 실력을 믿고 한 짓이지.'

그녀도 미친 짓이란 건 실감하고 있었다. 지금도 심장이 요동쳐 터질 것 같았다.

그래도 덕분에 거리를 벌렸다. 잠시 소강상태가 되었다. 초조하게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실란이 갑자기 머리를 벅벅 긁었다.

"아, 씨...."

뭔가를 각오한 얼굴로 실란이 시리스에게 소리쳤다.

"시리스! 날아오는 단검 막을 수 있어?"

"예? 한 번쯤은...."

왜 묻는지 의아해하며 시리스가 무심코 대꾸했다. 그러자 실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믿을게!"

그리고는 대뜸 기도에 들어가 버렸다!

"필라넨스시여!"

당연히 로마드가 놀라 대거를 던졌다. 아니, 이미 필 자 나오는 시점에서 이미 대거는 날아가고 있었다. 육중한 대거가 실란의 머리통을 노리고 똑바로 날아갔다. 저것에 꽂히면 연약한 실란의 머리쯤은 바로 두 쪽이 날 것이다.

"실란!"

시리스가 기겁하며 몸을 날려 단검을 ∞자 형태로 휘둘렀다. 막을 수 있다곤 했지만, 그건 시미터나 롱 소드를 들고 있을 때 이야기였다. 원래는 장도로 펼치는 소드 패링을 단검으로 펼치니 그녀 역시 제대로 막을 것이란 자신이 없었다.

탕!

운이 좋았는지 대거가 단검에 부딪혀 다른 곳으로 날아갔다. 실로 운이었다. 절대 두 번 할 자신은 없었다.

'무슨 짓을!'

사색이 되어 시리스는 실란을 돌아보았다. 그는 대거가 날아오건 말건 꿋꿋하게 기도문을 외우고 있었다. 엄청난 강심장이다. 하긴, 구울의 손톱을 눈앞에 두고도 흔들리지 않았던 실란이었다.

"...저 썩을 놈에게 매타작을 신명 나게 가하소서!"

뭔가 개인감정이 담뿍 담긴 기도문이 완성되었다. 신관다운 품위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어휘력이었다. 저러고도 신성 주문이 발동되다니? 필라넨스께서 사랑과 미의 여신이라더니 과연 미소년에 대한 총애가 지극한 모양이었다.

우우웅!

분홍빛 철퇴가 수두룩하게 실란의 주위로 떠올랐다. 동시에 철퇴가 로마드 일행을 노리고 무섭게 날아들었다. 탈카타가 놀라 검을 휘둘렀지만, 실란의 가공할 신성력이 담긴 저 성광 철퇴의 힘은 과연 대단했다. 순식간에 검을 놓치고 탈카타의 전신을 철퇴가 두들겼다.

퍼퍼퍼퍽!

"끄으으윽!"

탈카타조차도 비명을 지르며 버틸 수밖에 없는 위력이었다. 다른 이들은 뭐, 더 할 말이 없었다. 다들 여기저기 두들겨 맞고 연신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하지만 다행히 그들이 서 있는 곳은 주랑, 기둥들이 나란히 세워진 곳이다. 다들 허겁지겁 기둥 뒤로 피해 간신히 공격을 피하고 있었다.

그 틈에 실란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원래 신성력은 악마나 언데드 계열에겐 강해도 생명체에겐 위력이 반감되는 법이다. 게다가 고위급이라곤 해도 실란은 순수 신관이라 공격 쪽은 취약한 면이 있었다. 거기에 대부분 기둥 뒤로 숨어 치명타를 피했으니, 여전히 저쪽이 수적으로 우세했다. 이틈에 도망가야 했다.

"젠장, 어디로 도망가지?"

사방이 건물이다 보니 포위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유일한 입구를 바로 저 로마드 일행이 점거하고 있는 것이다. 그때 시리스가 대뜸 탈카타가 떨어뜨린 롱 소드를 발로 차 올렸다.

"타앗!"

그리고 허공에 뜬 롱 소드의 자루를 향해 돌려 차기를 가한다. 휘익! 롱 소드가 날아가 건물 벽면에 깊숙이 박혔다. 시리스가 소리쳤다.

"실란!"

"응?"

무심코 고개를 돌리는 실란은 갑자기 몸이 붕 뜨는 느낌을 받고 비명을 흘렸다.

"우엑!"

시리스가 실란의 허리를 감싸 안고 벽으로 뛰고 있었다. 원체 가벼운 실란이다 보니 아직 소녀인 그녀의 힘으로도 충분히 들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상태로 시리스가 몸을 날렸다.

"타앗!"

도움닫기한 힘을 모두 실어 몸을 날려 박힌 칼자루를 쥐고, 그 기세를 살려 탄력을 붙이며 몸을 돌린다. 공중제비를 넘어 몸을 반전시킨 시리스가 다시 칼자루를 박차고 날아올랐다. 허공에서 빙빙 도니 실란이 연신 신음을 흘렸다.

"으에에에~."

그렇게 단숨에 2층 난간으로 올라간 뒤, 시리스는 바로 창문을 깨고 안으로 돌입했다. 도망가는 둘을 보며 탈카타가 입을 쩍 벌렸다.

'빠, 빠르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아무리 엘프들이 몸이 가볍다고는 하지만 이 긴박한 순간에 저런 아크로바틱한 묘기가 가능하다니? 저 시리스란 소녀의 실력은 예상보다도 더 높았던 것이다. 아마도 단검만을 지니고 있어 그 정도였지, 제대로 무기를 들고 있었다면 탈카타라 할지라도 승부를 가늠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워메...."

입을 벌리고 있는 것은 기둥 뒤에 숨어 있던 로마드 일행 역시 마찬가지였다. 물 찬 제비처럼 움직이는 시리스의 동작에 어안이 벙벙해 있던 로마드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 소리쳤다.

"쪼, 쫓아!"

무심한 눈으로 탈카타가 로마드를 돌아보았다.

"탈카타, 묻습니다. 무슨 수로?"

아무리 그가 베테랑 검투사라지만, 저런 흉내는 내지 못한다. 로마드도 그걸 깨달았는지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천한 노예에게 자신의 실수를 드러낼 순 없다.

"크윽! 아, 뒤에 계단 있잖아! 계단으로 쫒아가란 말이다!"

그렇게 로마드가 있는 신경질, 없는 신경질 다 내며 길길이 날뛰고 있을 때였다.

그들이 들어온 입구를 통해 한 50대 중년인이 슬그머니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정원 안 상황을 둘러보더니 낄낄 웃었다.

"뭐야, 네놈들 실패했냐?"

"...란타스 경."

굴욕에 찬 얼굴로 로마드가 중년인을 바라보았다. 중년인은 여전히 오만한 태도로 비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으이그, 등신들. 고작 엘프 암컷 하나 못 잡고 이 난리야?"

"그, 그게 예상보다 더 강해서...."

그저 계급이 깡패다 보니 속으론 열받아도 겉으론 설설 길 수밖에 없다. 로마드가 쩔쩔매며 변명을 했다. 그 뒤에 말없이 선 오크 검투사를 보며 중년인도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탈카타로도 못 잡았어? 초짜 슬레이어 주제에 그렇게 센가?"

그의 상식으로 엘프 슬레이어가 베테랑 오크 검투사와 자웅을 결하려면, 어지간히 경험 많고 노련하지 않으면 힘들었다. 하지만 분명 이제 갓 팔린 노예라 하지 않았던가?

중년인의 눈동자에 호기심이 떠올랐다. 그가 물었다.

"밥값은 해야겠지. 어디로 갔냐?"

"저쪽입니다."

"그래?"

잠시 그쪽을 노려보더니 중년인이 바로 날아올랐다. 그것은 도저히 점프라는 단어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가볍게 발을 구르는 것만으로 새처럼 날아올라 정원을 가로지르는 그 움직임은 중력의 법칙조차 거스르는 것 같았다.

초인적인 몸놀림으로 2층에 도달한 중년인이 바로 깨진 창문 사이로 사라졌다. 그토록 더러운 기분이었음에도 그 모습을 보니 절로 감탄이 나왔다. 로마드가 부러움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저것이 오러 능력자...."

제6장 단죄의 자격

1

여관 2층으로 올라간 시리스는 곧바로 실란을 데리고 복도로 나섰다. 짐짝처럼 들려 다닌 실란이 어지럽단 얼굴로 비틀거리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시리스가 엘프다운 몸놀림으로 일시 거리를 벌리긴 했지만, 저들도 바보는 아니니 금방 계단을 통해 쫓아올 것이다.

실란이 의견을 내며 뛰기 시작했다.

"일단 방으로 돌아가서 무장을 하자."

따라 달리며 시리스가 고개를 저어 반대했다.

"그쪽에도 사람이 있을 거예요."

엘븐하임은 슬레이어에게 전투 기술 외에도 각종 상황에 대한 대처법 역시 착실히 가르친다. 그래야 제대로 주인을 충실하게 보필할 수 있는 것이다.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하며 그녀가 실란을 말렸다.

"게다가 쫓아오는 이들도 바로 우리 객실부터 찾겠죠. 너무 위험해요."

역시 어려서 뭘 모른다. 그렇게 생각한 것인데 의외로 실란이 고개를 저었다.

"그쯤은 나도 알아. 그래도 지금은 무장부터 찾는 게 더 중요해. 시리스 실력이면 우리 객실 지키는 놈 한둘은 처리할 수 있을 거 아냐? 설마 거기에까지 오크 검투사를 세워 놓았을 리는 없을 테니까."

복도를 달리며 실란이 빠르게 설명을 이었다.

"어차피 저놈들은 우릴 쫓아올 거잖아? 그러면 단검 하나만 들고 도망치는 것보단 조금 지체하더라도 무장을 제대로 하는 쪽이 나아."

"그, 그런가요?"

듣고 보니 그럴듯한 말이었다. 뒤를 따르며 시리스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실란을 바라보았다. 세상 물정 모르는 귀여운 아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위기 상황이 닥치자 놀라운 판단력을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실란은 어린 나이에 비해 세상을 돌아다녀 본 경험이 풍부했다. (사실은 별로 어리지도 않고.) 엘븐하임 안에서만 살며 이론만 익힌 시리스보다 실란이 오히려 현실을 더 잘 파악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곧바로 객실로 향했다. 예상대로 사내 하나가 객실 앞을 지키고 있었다. 사내가 놀라 막 몸을 일으키려는 찰나, 시리스가 뛰어올라 벽을 박차고 삼각 뛰어차기를 날렸다.

"어? 뭐여? 크에엑!"

그렇게 간단히 상대를 쓰러트린 뒤 시리스와 실란은 잽싸게 객실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실란이 허겁지겁 자신의 법복과 성물을 챙겨 들었다.

그동안 시리스는 옷장을 열고 레펜하르트가 사 준 옷가지를 꺼낸 뒤, 무기도 챙겨 들고, 옷을 펼쳐 갈아입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명색이 실란도 남자애인데 그 앞에서 옷 갈아입어도 되나? 라는 속 편한 생각도 잠시 했다.

쫓기는 주제에 참 느긋한 모습이었다. 실란이 기막혀하며 외쳤다.

"시리스! 지금 한가하게 옷 갈아입을 시간이 어디 있어?"

"예? 그럼 어쩌라고...."

엘븐하임에서 습격에 대한 대비는 가르쳐 줬지만 도망치는 와중에 무장 챙기는 것까진 알려 주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 보니 무심코 평소처럼 무장을 하려던 시리스였다.

"당연히 들고 뛰어야지...."

이 시리스란 엘프, 굉장히 차갑고 성숙해 보이는 인상인데 은근 꺼벙한 구석이 있다. 한숨을 쉬며 실란이 어서 손으로 들라는 시늉을 했다. 그제야 아차 하며 시리스가 무기며 재킷을 대충 뭉쳐 들었다. 그동안 실란이 기도를 올렸다.

"필라넨스시여, 우리의 자취를 지워 위기로부터 구하소서."

흔적을 지우는 신성 주문을 자신과 시리스에게 씌운 뒤 재차 기도문을 외운다.

"필라넨스시여, 당신의 숨결을 우리에게 깃들게 하소서."

핑크빛 입자가 살랑살랑 일어나 두 사람의 발치를 감쌌다. 그 상태로 실란이 객실 창문을 벌컥 열고 대뜸 뛰어내렸다. 시리스가 놀라 외쳤다.

"실란!"

아니, 쟤가 왜 갑자기 투신자살을? 당황해 창밖을 내다보니 실란이 마치 깃털처럼 사뿐히 지상으로 내려앉고 있었다. 방금 실란이 외운 것은 높은 곳에서 안전하게 몸을 지키는 기도문이었다. 마법으로 치면 페더 폴과 비슷한 효과라 하겠다. 착지한 실란이 어서 뛰어내리라는 듯 손짓했다.

"아...."

이해한 시리스도 바로 밖으로 몸을 날렸다. 한겨울인 데다가 저녁때가 지난 늦은 시간이라 거리엔 그리 행인이 없었다. 그렇다 보니 2층에서 뛰어내렸음에도 딱히 시선을 집중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이제 어쩌죠?"

무슨 그런 뻔한 걸 묻느냐는 얼굴로, 실란이 대꾸했다.

"튀어야지."

☆ ☆ ☆

50대의 중년인, 란타스는 느긋하게 복도를 걷고 있었다. 추적자라기엔 지나치게 느긋한 모습이지만 그에겐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란타스는 위대한 검의 경지, 오러를 각성한 검사였다. 오러 능력자의 감각권은 실로 가공하다. 그는 이미 이 반경 30미터 내의 모든 생명체의 움직임을 눈으로 보는 것처럼 생생히 감지하고 있었다. 상대가 어디에 있는지 뻔히 아는데 굳이 서두를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음, 뭐야, 저것들? 방에 들어가서 숨을 셈인가?'

엘프와 소년의 기척이 2층 여관 객실로 향하는 걸 느끼며 란타스는 실소했다. 당장 이 여관을 벗어나도 모자랄 판에 오히려 자기 방으로 기어들어 가다니, 정말 애송이는 어쩔 수 없는 애송이다. 한껏 상대를 무시하며 천천히 인기척을 따라가던 중이었다.

갑자기 란타스의 표정이 굳었다.

'뭐지?'

인기척이 사라졌다! 분명 2층 객실에 생생히 느껴지던 그 기척이 어느 순간 소멸해 버린 것이다.

란타스는 당황했다. 이런 경험을 그는 해 본 적이 있었다. 고위 마법사나 위계 높은 성직자의 경우, 특유의 술법으로 자신의 자취를 감출 수 있다.

'뭐야? 그 애송이가 기척 제거의 술을 쓸 정도로 고위 성직자였어?'

이런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었다. 중년인의 표정에 당혹감이 떠올랐다. 느긋하던 란타스의 몸이 파공음을 남기며 사라져 버렸다. 순식간에 복도를 지나쳐 객실 문을 열고 들어간 란타스가 안을 살폈다. 객실은 텅 비어 있고 창문은 활짝 열려 차가운 겨울바람이 쌩쌩 불고 있었다.

"이, 이런...."

자신만만하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애송이들이라고만 들었는데 이런 재주가 있었을 줄이야.

그는 혹시나 싶어 기감을 끊고 오러를 청력에 집중했다. 혹시 기척을 지운 뒤 방 안에 숨어 있지 않나 해서였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속담을 믿는 이들이 가끔 이런 식으로 추적자를 따돌리곤 하기에 대비한 것이었다.

아무리 기척을 지우고 숨을 멈춰도 심장 고동 소리마저 숨기진 못한다. 아무리 강력한 마법이나 신성 주문도 뛰는 심장을 멈춘 채 살 수 있게 해 주진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소리에 귀 기울인 것인데....

"젠장, 밖으로 튄 게 맞구먼."

방은 확실히 텅 비어 있었다. 그때 로마드와 수하들이 뒤늦게 객실로 들어왔다. 열심히 계단 오르고 복도 달려가며 이제야 란타스를 따라잡은 것이었다.

"놈들은 어디 있습니까, 란타스 경?"

로마드가 주위를 둘러보며 질문한다. 평범한 어조였지만, 왠지 힐난하는 것처럼 들려 란타스는 더더욱 미간을 찌푸렸다.

"설마... 놓치신 겁니까?"

"시끄럽다! 이 근처일 테니까 애들 풀어!"

버럭 소리를 지르며 란타스는 창가로 걸어갔다. 그냥 가볍게 몸이나 풀고 생색이나 낼 생각으로 따라온 것이었는데 이쯤 되니 열이 올랐다. 그가 새처럼 창밖으로 몸을 날렸다.

☆ ☆ ☆

이미 해가 저문 제플린 시내. 그믐이어서인지 도시 곳곳은 어둠에 싸여 있었다.

상업 도시답게 대로 쪽 거리는 가로등과 가게의 불빛으로 환하지만 골목으로 몇 발자국만 들어가면 칠흑 같은 암흑이 자리하고 있다.

그 어둠 속을 두 사람이 조심조심 걷고 있었다. 황금의 휴식처를 빠져나온 실란과 시리스였다. 둘 다 이 어둠을 이용해 골목 사이사이를 걸어 여관으로부터 멀어지고 있었다.

"으, 안 보여."

"이쪽이에요."

"응응...."

밤눈이 밝은 시리스는 그럭저럭 사물을 구별할 수 있었지만 실란은 완전 장님 신세였다. 계속 뭔가에 걸려 비틀거리며 그는 그저 시리스의 손만을 의지해 움직이고 있었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는 것 같아요."

로마드 일행이 아니더라도 어두운 골목길은 그 자체로 우범지대다. 그녀는 시미터를 쥔 채 연신 주위를 경계하고 있었다.

"저들이라도 보는 눈이 많다면 함부로 덤빌 수 없겠죠. 차라리 거리로 나가는 게 좋지 않을까요?"

엘븐하임에서 배운 대로 시리스가 상식적인 제안을 꺼냈다. 저들이 아무리 막 나가는 놈들이라도 사람들 눈은 꺼리는 것 같았다. 여관에서도 일부러 손님들을 따로 옮기지 않았던가?

그러나 현실을 아는 실란은 그 제안을 거부했다.

"소용없어. 오히려 최대한 시선을 피해야 해."

"어째서?"

"저놈들, 분명히 도망친 노예 잡으러 왔다고 할 테니까."

지나가던 행인 입장에서 시리스가 도망친 노예인지, 아니면 남의 노예인데 멋대로 빼앗으려 하는 것인지 구별할 재간이 있을 리 없다. 다들 그러려니 하고 신경 끌 것이 뻔했다.

"오히려 우리 위치만 알려 주게 될 걸? 지금은 최대한 눈을 피하는 게 중요해."

혀를 차며 실란은 다시 어둠을 더듬었다. 문득 한숨이 나왔다.

"휴우...."

세상을 떠돌았다고는 하지만, 주로 바실리 왕국 쪽만 돌아다녔던 그였다. 필라넨스 교단의 교세가 강한 바실리 왕국은 어디에나 필라넨스 신전이 위치했다. 그때는 실란 역시 권력자 층이었고, 그래서 불합리를 보면 얼마든지 대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순례자가 되어 바실리 왕국을 벗어나니 참 세상 험하다는 걸 뼈저리게 느끼게 된 것이다. 왜 순례자들이 그리 죽어 나가는지 이해가 갔다. 몸 편하고 마음 편한 자신의 교단으로 돌아가고 싶단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여기서 포기하면....'

실란은 교단에서 기다리고 있는 '그녀'를 떠올리며 이를 악물었다. 그가 순례자의 길을 택한 가장 큰 이유인 '그녀'. 여기서 돌아가면 다시 '그녀'에게 붙잡히게 된다.

그건 싫었다.

'차라리 위험해도 세상을 떠도는 게 낫지! 남자다운 몸이 되기 전엔 절대 안 돌아갈 거야!'

각오를 다지며 실란이 두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시리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

그렇게 골목길을 한참 동안이나 헤매다 보니 제법 밝은 곳이 나왔다. 어둡긴 매한가지였지만, 제법 잘사는 집이었는지 밤에도 불을 켜 2층 창문을 통해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간신히 사물의 윤곽이 보일 정도가 되자 실란이 안도하며 벽에 기댔다. 눈을 감은 채 걷는 것은 상상 이상으로 심력 소모가 심했다. 숨을 고르며 실란이 신경질을 냈다.

"아우! 레펜 씨만 있었으면 아무 문제 없었을 텐데! 이 양반 대체 어디를 싸돌아다니는 거야?"

오러 능력자가 곁에 있다면 무서울 것이 없다. 저딴 패거리가 몇이 몰려오건, 오크 검투사가 군대로 쳐들어오건 전혀 문제가 안 된다.

"어떻게든 레펜 씨랑 합류해야 하는데, 끙...."

시리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가 본 레펜하르트는 덩치 크고 역할 놀이에 빠진 이상한 청년일 뿐이었다. 그런데 고위 성직자인 실란이 이토록 깊은 신뢰를 보이는 것이다.

"레펜하르트 님이 그렇게 강한가요?"

'아, 시리스는 모르지, 참.'

막 실란이 레펜하르트가 오러 유저란 사실을 말해 주려던 차였다. 시리스가 먼저 화제를 바꿨다.

"어쨌건 합류는 해야겠지요?"

"그렇지. 아무리 봐도 저놈들, 이 동네 권력층 부하들인데 부딪쳐 봐야 골치만 아프지."

레펜하르트의 무력이라면 당면한 문제쯤은 쉽게 주먹으로 해결할 수 있겠지. 하지만 그렇다 해도 권력자가 힘으로 밀고 나오면 일개 개인은 감당할 수가 없다. 실란 자신이 권력층이었던 터라 잘 알고 있었다.

제일 좋은 선택지는 어떻게든 레펜하르트를 만나 이대로 제플린을 벗어나는 것이다. 죄도 없이 도망치는 것이니 기분이야 더럽겠지만, 현실적으로 방법이 없으니 별수 있나?

"그러면 사람을 시켜서 서신을 보낸 뒤 합류 장소를 정하죠."

상식적인 제안이었지만 이번에도 실란은 고개를 저었다.

"글쎄? 이 동네 인심을 보니 그 서신 들고 바로 그놈들에게 달려갈 것 같은데?"

이미 실란은 이 차탄 공국이라는 어이없는 나라에 대해 뿌리 깊은 불신이 박혀 있었다. 딱히 편견이라 할 수도 없었다. 이 제플린이란 도시에는 실제로 그럴 놈들이 수두룩한 것이다.

"그럼 다른 방법이 있나요?"

의견을 내는 족족 거절당하니 시리스도 살짝 기분이 상했는지 다시 목소리가 싸늘해졌다. 물론 둔한 실란은 여전히 못 느끼고 있었지만.

실란이 잠시 고민하다가 뭔가 생각났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 방법이 있긴 있네...."

방법은 떠올랐는데 별로 마음에는 안 든다는 얼굴이었다.

한숨을 쉬며 실란이 일어났다. 그리고 조용히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필라넨스시여, 당신의 자애 어린 가호가 인연의 실을 허락하시니 안타까운 헤어짐을 굽어살피사 만남으로 이어지게 하소서...."

평소와 달리 꽤 기도문이 길었다. 게다가 정상적이기도 했다. 신기해하며 시리스는 실란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여신을 향해 기도를 올린 실란이 눈을 감고 잠시 서 있었다. 문득 그가 몸을 떨었다.

"아, 됐다...."

성공한 것치고는 그리 탐탁찮아하는 표정이었다.

지금 실란이 구사한 것은 '운명의 교차점'이라 불리는 신성 주문이었다.

사랑은 우연을 운명으로 이끄는 것.

우연한 만남은 사랑을 통해 운명적 만남이 된다. 한 남자가 한 여자를 만나며 말한다. 대륙의 수많은 남자와 수많은 여자 중에서 우리가 만난 것은 기적 같은 우연이라고. 이것이야말로 운명이라고. 그저 필연에 가까운 확률 상의 우연일 뿐이지만, 그것에 필라넨스의 가호가 깃들면 운명이 되는 것이다.

실란이 눈을 감은 채 중얼거렸다.

"그래, 어느 쪽으로 가야 하는지 알 것 같아."

'운명의 교차점'은 반드시 만나야 할 운명의 상대에게 우연을 통해 길을 이끌어 주는 권능을 가진 주문이었다. 원래는 궁합 맞는 커플들끼리 맺어 주는 용도로 쓰는 신성 주문이지만, 해석을 좀 폭넓게 하면 헤어진 동료와 재회하는 수단으로도 쓸 수 있었다.

문제는 레펜하르트도 실란도 둘 다 남자다 보니 영 기분이 더럽다는 점이지만.

"에휴, 이런 식으로는 별로 쓰고 싶지 않았는데...."

실란은 머리를 벅벅 긁었다. 필라넨스의 사랑은 실로 그 폭이 넓어서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다. 게이 커플이나 레즈비언 커플도 얼마든지 인정하는 여신다운 관대함을 보이시는 것이다. 물론 미의 여신답게 겉보기에 괴로운 커플이면 잘 발동되지 않는 주문이긴 했는데, 이번엔 보시기에 흡족하셨는지 그냥 넘어가신 듯했다.

따지고 보면 여신 상대로 사기 친 셈인지라 실란도 어지간한 상황이 아니고서는 이 주문은 쓰고 싶지 않았다.

"가자, 시리스."

기운 빠진 표정으로 실란이 터벅터벅 걷기 시작했다. 주문이 발동된 이상, 그냥 기분 내키는 대로 걷기만 하면 된다. 그럼 운명적으로 레펜하르트와 조우할 수 있게 우연이 도와줄 것이다.

그래도 목적지가 확실해졌으니 한결 기분이 나아지긴 했다. 느긋해진 두 사람이 조곤조곤 이야기를 나눴다.

"그런데 시리스, 무지 세더라?"

"슬레이어니까요."

"아니, 그 정도가 아니던데? 렐시아라고 다른 슬레이어를 본 적이 있긴 한데 시리스는 그 이상인 것 같아."

"남들보다 조금 열심히 하긴 했어요. 그러는 실란이야말로 나이에 맞지 않게 굉장히 고위 성직자잖아요?"

"아, 그게 좀 웃기는 일인데...."

그렇게 시리스와 대화를 나누며 실란은 문득 묘한 기분을 느꼈다. 자신의 생각을 뚜렷하게 말하고, 상대의 의견을 진지하게 들어 주고, 가끔은 의구심도 가진다. 분명 노예 종족인 엘프인데도 마치 인간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았다.

'시리스가 특이한 걸까?'

하지만 실란은 다른 엘프들과 이렇게 진지하게 이야기를 해 본 적이 없었다. 엘프 노예가 귀하긴 했지만 지위상 몇 번 만날 일은 있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그저 명령을 내리고 대답을 들었을 뿐이다. 비교 대상이 없으니 특이한지 아닌지조차 모르겠다.

문득 실란은 더 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는 걸 느꼈다. 실란이 걸음을 멈추자 시리스가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여기인가요?"

그곳은 공용 우물이 있는 작은 공터였다. 사방이 건물 뒤쪽 벽으로 가로막혀 있고 작은 뒷문만 몇몇 보이는 으슥한 장소다.

"응, 여기라고 점지해 주셨어."

실란이 자신 있게 대꾸했다. 괴상망측한 기도문으로도 신성 주문이 발동할 만큼 여신의 사랑을 받고, 또 여신에 대한 신앙이 돈독한 실란이었다. 그런 만큼 그는 이곳이 '운명의 교차점'이 가리키는 곳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과연, 얼마 안 있어 공터 저편에 인기척이 느껴졌다. 발소리에 실란이 활짝 웃었다.

"아? 레펜 씨인가?"

하지만 시리스는 마주 웃지 않았다. 대신 시미터를 뽑아 들었다. 실란이 놀라 되돌아보았다.

"시리스?"

"레펜하르트 님이 아닙니다."

자세를 취하며 시리스가 안색을 굳혔다. 레펜하르트의 발소리쯤은 이미 기억하고 있었다. 딱히 주인이라서는 아니었다. 엘프의 청력은 워낙 섬세해, 싫어도 사람들의 발걸음 차이를 절로 기억하게 되는 것이다.

잠시 후, 흐릿한 어둠 사이로 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실란의 안색 역시 굳었다. 나타난 것은 허리에 칼을 찬 50대 남자였다.

중년인, 란타스가 시리스와 실란을 노려보며 차갑게 웃었다.

"찾았다, 이 애송이들."

☆ ☆ ☆

"잘도 도망쳐 다니더구나. 덕분에 오랜만에 좀 뛰어 봤네."

란타스가 시리스와 실란을 번갈아 보며 뇌까렸다. 그리고 허리춤에서 작은 봉지 같은 것을 꺼냈다.

"아, 이 바보들도 불러야지."

엄지를 튕기는 것만으로, 손에 든 봉지가 슬링으로 발사된 것처럼 무섭게 날아올랐다. 상공에서 싯누런 불꽃이 펑 하고 터지더니 사그라졌다. 봉지 안에 연금술사들이 만든 폭죽 시약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쳇....'

시리스는 인상을 쓰며 란타스를 노려보았다. 저 불꽃으로 자신들의 위치가 발각되었다. 당장 이 자리를 벗어나야 했다.

힐끔거리며 공터와 연결된 골목길을 살펴보는 시리스의 모습에 란타스가 피식 웃었다.

"도망가 볼 테냐? 말리고 싶다만."

확실히 적을 눈앞에 두고 등을 돌리는 것은 그리 권장할 짓이 못 된다. 등 돌린 상태에서는 뭐가 날아올지 알 수 없는 것이다. 도주도 어디까지나 적을 흔들고 나서나 가능한 짓이다.

시리스가 시미터를 뽑았다.

시간을 지체해선 안 된다. 당장 눈앞의 적을 베고 이 자리를 벗어난다!

"타앗!"

그녀가 시미터를 늘어뜨린 채 연신 땅을 박차며 달렸다. 단숨에 10여 미터가 넘는 거리를 좁힌 시리스가 바로 검을 올려 벴다. 갑작스러운 기습이라 상대도 미처 반응하지 못했는지 멍하니 날아오는 검날을 보고만 있었다.

은빛 섬광이 란타스의 옆구리부터 어깻죽지까지 길게 그었다. 순간 시리스는 확신했다.

'베었다!'

그때였다. 분명 베었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적이 눈앞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녀가 벤 것은 잔상이었던 것이다. 등 뒤에서 흥미로워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생각보다 빠르구나."

'아?'

당황하며 시리스는 반회전해 등 뒤로 시미터를 휘둘렀다. 하지만 이미 그 자리에 란타스는 없었다. 텅 빈 뒤를 확인하며 눈을 동그랗게 뜨는데, 시리스의 귓가에서 다시 목소리가 들렸다.

"신품 슬레이어 솜씨가 아닌데, 이거?"

"히익!"

란타스는 어느새 뒤에 선 채, 시리스의 어깨에 턱을 얹고 능글맞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소름이 돋아 시리스가 겨드랑이를 통해 칼날을 찔러 갔다. 하지만 역시 소용없었다. 칼을 날리는 그 순간 이미 란타스는 그녀의 시야를 벗어나 전혀 다른 곳에 존재하고 있었다.

"재능도 제법 있는 것 같고."

"타앗!"

기합을 터트리며 이번에는 찌르기 후 바로 2회전해 연격을 날리는 복잡한 검술을 구사했다. 상대의 도주 경로를 예측해 칼을 날린 것인데, 그래도 란타스의 옷깃 하나 스치지 못했다.

"꽤나 성실하게 노력한 모양이구먼. 노예치곤 특이하네."

란타스는 마치 신기루처럼 시리스의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태연자약한 얼굴에 긴장감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다.

"으윽!"

굴욕감에 시리스는 이를 악물었다.

그녀는 엘븐하임의 다른 슬레이어와는 차원이 다른 실력의 소유자였다. 엘븐하임에서 오지게 말 안 듣는 시리스를 왜 그리 끈질기게 슬레이어로 키우려 발악했겠는가? 종이 몽둥이만을 든 채 십여 명의 슬레이어 후보들과 싸우는, 말도 안 되는 불리한 상황에서조차 밀리지 않았던 그녀다. 말만 잘 들었다면 역사상 최강의 슬레이어가 되었을 테니 엘븐하임이 그토록 미련을 못 버리고 계속 다그친 것이다. 뭐, 결국은 실패했지만.

다른 슬레이어들은 물론이고, 검술 교관이나 검투사 출신 오크 호위병들도 일단 검을 들기만 하면 모두 눕힐 자신이 있었다. 탈카타와 싸우며 밀렸던 것은 익숙하지 않은 단검 하나만 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제대로 무장을 하고, 익숙한 무기를 든 상태인데도 상대에게 농락당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상대는 아직 검조차도 뽑지 않았다!

'대체 뭐야, 이 인간은!'

한편 실란은 놀란 얼굴로 두 사람의 검투를 보고 있었다.

'맙소사! 어째서 저런 실력자가 이런 일에 낀 거야?'

그토록 빠른 시리스의 공격을 저 중년 사내는 참으로 쉽게도 피하고 있었다. 그냥 피하는 것도 아니고 슬쩍슬쩍 칼날만 피하며 계속 거리를 유지한다. 실력 차가 엄청나게 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저 정도 경지면 어지간히 이름 높은 기사나 검사임이 분명할 텐데, 이런 추잡한 일에 끼어든단 말이야?'

어쨌거나 이대로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실란이 성력을 끌어 올려 기도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필라넨스시여...."

슬쩍 기도문을 외우며 실란은 란타스의 눈치를 보았다. 혹시 단검이라도 던지면 바로 기도 때려치우고 우물 뒤로 숨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웬일로 별 신경을 안 썼다. 실란은 안심하고 기도문을 이었다.

"당신의 종에게 사자의 용맹을 허락하소서. 검 든 두 팔에 거인의 힘이 깃들고 그 눈이 매처럼 매서워지며 두 다리가 굳센 수소가 되어 적을 치게 하소서!"

실란의 신성력이 시리스의 전신에 쏟아졌다. 그녀가 든 시미터가 핑크빛으로 반짝였다. 필라넨스의 성스러운 검, 홀리 스트라이킹이 걸린 것이다.

"이건?"

시리스는 전신을 휘감는 놀라운 활력과 권능에 경악해 몸을 떨었다. 신성력 하나는 넘쳐흐르는 실란이 아주 시리스의 근력, 방어력, 스피드와 민첩함에 반사 신경까지 모조리 끌어 올려 준 것이다. 란타스도 이번엔 정말 놀란 듯 표정이 굳었다.

"뭐야? 이 많은 신성 주문을 한 번에 걸어? 저 나이에 주교급 신관이었나?"

실란이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이래 봬도 바실리 남부에서는 잘나가던 몸이었다고! 시리스! 조져 버려!"

"네, 실란!"

시리스가 바로 몸을 날리며 참격을 날렸다. 이제까지완 차원이 다른 스피드라 란타스도 잽싸게 뒤로 몸을 날렸다. 더 이상 주위를 맴돌며 노닥거릴 상황이 아니었다.

"이크크!"

필라넨스의 성광이 깃든 시미터가 반짝거리는 핑크빛 궤적을 허공에 남겼다. 레펜하르트 때는 참 꼴불견이더니, 미녀 엘프가 구사하는 상황이 되자 꽤나 어울려 보였다. 물론 시리스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지만.

"타앗!"

시리스가 계속 란타스를 압박해 갔다. 환영 같던 상대의 움직임이 모두 보였다. 방금 전까지의 피로가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손발이 자유롭게 움직인다.

'윽!'

란타스는 당황했다. 핑크빛 칼날이 연신 급소를 노리고 날아오고 있었다. 도저히 피할 틈이 없어 결국 그도 검을 뽑았다. 칼날과 칼날이 부딪치며 요란한 금속음을 울렸다. 두 사람이 쉴 새 없이 검격을 교환했다. 강철의 빛깔 위로 분홍의 색채가 덧입혀지며 요란한 검광이 공터 위를 사정없이 유린한다.

'이런....'

신들린 듯한 시리스의 움직임에 란타스는 혀를 찼다. 방금 전까지 가지고 놀던 상대가 신성 주문 좀 받았다고 이렇게 달라진 것이다. 이래서 강력한 신관의 가호가 있고 없고는 전투에서 크게 차이가 난다. 입맛이 썼다.

실란이 신바람을 냈다.

"잘한다, 시리스!"

갑자기 란타스가 인상을 구겼다.

"에잉, 이것들이 좀 놀아 줬더니 기가 살아서!"

신경질을 내며 그가 검을 내리그었다. 막 공격을 이으려던 시리스의 눈동자에 붉은 섬광이 가득 비쳤다. 미스릴 시미터가 두 동강 나며 그녀가 마차에 치인 것처럼 뒤로 날아가 버렸다.

"아악!"

신을 내던 실란이 그 자세로 굳어 버렸다.

"어...?"

단 일격이었다. 엇비슷하게 상대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단 일격에 승부가 갈려 버렸다. 실란은 경악한 얼굴로 란타스를 바라보았다.

란타스의 검, 그것은 피처럼 붉은 광채로 빛나고 있었다.

"...오러 능력자?"

"쳇, 고작 슬레이어 따위에게 오러를 쓰다니...."

란타스가 입술을 뒤틀며 불쾌한 얼굴로 두 사람을 노려보았다. 실란이 허겁지겁 쓰러진 시리스에게 달려갔다.

"괘, 괜찮아, 시리스?"

"으음...."

신음을 흘리며 시리스가 몸을 일으켰다. 비틀거리긴 했지만 크게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실란의 신성 가호가 그녀를 보호해 대부분의 충격을 흡수한 덕분이지만, 그 대가로 실란이 열심히 걸었던 수많은 가호의 권능은 싹 날아간 후였다.

"아니, 오러 능력자가 왜 이런 곳에...."

시리스를 부축하며 실란이 기가 막혀 중얼거렸다. 오러를 각성한 자라면 세상 어디를 가도 대접받으며 살 수 있다. 고작 엘프 노예 잡아오는 임무 따위에 투입될 전력이 아닌 것이다. 그야말로 스프 끓이는 데 드래곤이 불 뿜는 격이다.

그때 공터 곳곳의 골목을 통해 그림자가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신호를 받은 로마드와 그 일행들이 뒤늦게 이곳으로 찾아온 것이다. 로마드는 탈카타에게 쓰러진 동료들을 챙겨 저택으로 돌아가게 한 뒤, 남은 인원으로 거리를 뒤지고 있었던 차였다. 어차피 란타스가 나섰으니 오크 검투사의 힘은 더 이상 필요가 없었다.

로마드가 실란과 시리스를 보더니 기뻐하며 외쳤다.

"잡으셨군요, 란타스 경!"

그 이름에 실란은 저 중년인의 정체를 깨달았다.

'저자가 란타스? 그 더러운 변태 기사였단 말이야?'

2

란타스 폰 칼파나드.

그는 원래 바실리 왕국 옆에 붙어 있는 테이칸 왕국의 이름 높은 기사였다.

명가의 후손으로 자라나 기사의 길을 걸은 그는 타고난 재능에 훌륭한 가르침, 자신의 노력에 힘입어 30대 후반에 오러를 각성하는 놀라운 무위를 보였다. 테이칸 왕국의 모든 이가 새로운 오러 능력자의 탄생을 기뻐했다.

하지만 란타스에겐 남들에게 알릴 수 없는 추악한 취미가 있었다. 그는 아직 자라지 않은 어린아이에게만 성욕을 느끼는 소아 성애자였다.

젊을 때는 무술에 매진하느라, 그리고 남들 눈치를 보느라 숨기고 있었지만 오러 능력자가 되고 비견될 수 없는 강자의 처지에 놓이니 슬슬 본성이 드러난 것이다. 처음에는 어린 엘프들을 사다가 성욕을 풀곤 했던 란타스의 패악은 시간이 지나며 점점 도를 더해 갔다. 왕도의 어린아이를 납치해 간살하기 시작하더니, 나중에는 귀족의 어린 여식에게까지도 손을 댔다.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 수상하게 여긴 한 정의로운 기사에 의해 결국 그의 추악한 범죄가 만천하에 드러났다. 수도 기사단이 란타스의 저택을 쳐들어갔고, 저택 지하실에서 본 참상에 이를 갈았다. 그곳엔 어린 나이에 능욕당한 아이들의 시체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테이칸 왕국의 자랑은 역사상 가장 추악한 수치가 되었다. 당연히 그를 잡기 위해 왕국 전체가 들고일어났다. 하지만 오러 능력자인 그는 쉽게 잡히지 않았다. 수백 명을 학살하며 결국 테이칸 왕국에서 도망친 것이다.

그 악명은 테이칸 왕국을 넘어 바실리 왕국에까지 펼쳐져 있다. 실란도 어렸을 적, 함부로 밤에 돌아다니면 란타스가 잡아간다는 식으로 혼난 적이 있을 정도다.

실란이 분노해 외쳤다.

"이 더러운 괴물! 차탄 공국에 숨어 있었나!"

란타스가 실란을 힐끔거리며 빙그레 웃었다.

"호오? 나를 알고 있나?"

"명색이 오러 능력자가 이런 추악한 일에 끼어들다니, 정말 소문대로 더러운 놈이구나!"

경멸 가득한 외침이 이어졌지만 란타스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애초에 그렇게 신경 예민한 놈이었으면 어린아이들을 간살하는 죄악을 저지를 리도 없다.

란타스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뭐, 일단은 봉급 받아먹고 사는 처지인지라 말이지."

테이칸 왕국에서 도망친 그는 쫓기고 쫓기다 결국 이곳 차탄 공국에까지 흘러왔다. 대륙 어느 나라도 추악한 변태 강간마인 그를 받아 주지 않았다. 하지만 롤페인 상회는 달랐다. 오러 능력자의 가치를 금전적으로만 판단한 롤페인 상회는 사소한(?) 악명쯤은 관대하게 넘어가 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곳에서 란타스는 어린 노예들을 간살해 가며 행복한 성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오러 능력자답게 봉급도 두둑했고, 제플린이 노예 산업의 본고장이다 보니 노예를 원가로 구매할 수 있어 경제적으로 여유도 생겼다.

가끔 색다른 걸 즐기고 싶을 땐 뜨내기 행상들을 죽이고 아이들을 납치해 오면 되었다. 테이칸 왕국과 달리 유동 인구가 워낙 많은 이곳에선 사람 한둘 없어진다 해도 알아채는 인간이 전혀 없었다. 천국이었다.

물론 롤페인 상회에도 란타스의 존재는 큰 이득이었다. 뒤로 온갖 더러운 짓을 일삼는 롤페인 상회는 그만큼 무력을 써야 할 일도 많았다. 그리고 오러 능력자는 그 무력의 정점에 위치한 존재다. 롤페인 상회가 10년 만에 차탄 공국 2위의 대상회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란타스의 덕도 컸다. 1위인 차탄 상회는 이름 그대로 이 나라의 왕족들이 직접 경영하는 곳이니 사실상 1위나 다름없었다.

서로가 이득이 되니 대우도 좋았다. 테이칸 왕국이 열심히 추적자를 보내긴 했지만 롤페인 상회가 그를 비호하니 자다 칼 맞을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그래서 란타스도 지금은 그냥 가명 대신 본명을 드러낼 정도로 뻔뻔해져 있었다.

"여신께서 용서치 않을 것이다!"

실란이 분노해 외치며 두 손을 모았다. 가진 신성력을 모두 시리스에게 퍼부어 그녀를 강화시키려는 것이었다. 그는 프리스트라 직접적인 전투력은 거의 없다. 하지만 회복과 증폭력만큼은 자신 있다.

'모든 신성력을 깡그리 퍼부으면 잠시간은 오러 능력자와 싸울 힘을 시리스에게 부여할 수 있을 거야!'

그 대가로 둘 다 며칠은 골골대야겠지만, 그래도 여기서 잡혀 가는 것보단 낫다. 그렇게 실란이 막 여신의 이름을 외치려던 차였다.

"필라넨스시여...."

"아차! 그렇게는 안 되지!"

란타스가 흠칫하며 허공에 검을 휘둘렀다. 안 그래도 실란의 신성력에 놀란 터라 대비를 하고 있었다. 붉은 오러의 산탄이 비산하며 두 사람에게 날아들었다. 적색 섬광이 다트처럼 날아가 시리스와 실란의 사지 곳곳에 틀어박혔다.

"크윽!"

"아악!"

둘 다 사지에서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란타스가 오러의 칼날을 날려 둘의 팔다리 힘줄을 끊어 버린 것이다. 애들만 덮치는 변태치곤 무서울 정도로 정교한 기술이었다.

"고위 성직자 입 놀리게 놔두면 무슨 꼴 당하는지는 잘 알거든."

란타스가 검을 빙빙 돌리며 이죽거렸다. 옆에서 로마드가 호들갑을 떨었다.

"아이고, 란타스 경! 상처를 입히면 어떡합니까! 테리크 님께서 노하실 겁니다!"

"시끄러, 신관 하나 데려와서 치유시키면 되잖아? 넌 왜 그리 융통성이 없냐?"

혀를 차며 란타스가 턱짓을 했다.

"가서 묶기나 해."

로마드 일행이 밧줄을 들고 다가오기 시작했다. 시리스가 고통을 이기고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그저 꿈틀거릴 뿐이었다. 그녀의 정신력은 분명 놀라운 것이었지만, 애초에 신체 구조적으로 힘줄이 끊겼으니 근성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그걸 보며 실란이 안타까워했다.

"시, 시리스! 어떡하지, 으으...."

입이야 멀쩡하니 기도문은 올릴 수 있겠지만, 그랬다간 바로 또 칼 날아올 것이다. 하지만 이대로 시리스를 잡혀 가게 할 순 없다.

'어쩌지, 어쩌지, 어쩌지?'

함께 쓰러진 상태지만 실란은 그저 시리스의 안위만 걱정하고 있었다. 뭐, 저놈들의 목표야 시리스고 실란은 그냥 버리고 갈 것이 분명하니 자기 안위 걱정하지 않는 것도 당연하다.

그런데 어째 상황이 좀 이상하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쓰러진 실란을 무심히 보던 란타스가 문득 입맛을 다신 것이다.

"그러고 보니 상당히 예쁘게 생긴 아이로구나."

어두워서 미처 눈치채지 못했는데 지금 보니 엄청난 미인이었다. 그의 취향에서 살짝 서너 살 넘기는 했지만, 그래도 워낙 앳되어 보이고 또 미모가 굉장했다. 란타스가 로마드를 향해 외쳤다.

"로마드, 저것도 데리고 가자."

그리고 턱을 매만지며 음흉한 얼굴로 중얼거린다.

"조금만 더 어렸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지만 뭐, 저것도 나름대로 맛이...."

불길한 소릴 중얼거리는 란타스를 보며 실란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맛? 무슨 맛?'

그는 란타스가 어떤 놈인지 잘 알고 있었다. 이거 시리스 걱정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자, 잠깐! 난 남자야!"

실란의 필사적인 호소에 순간 란타스는 실망했다.

"그래?"

하지만 금세 표정을 되찾았다.

"음, 하지만 그것도 나름대로 색다른 느낌이...."

예상 못 한 란타스의 반응에 실란은 기겁했다. 생각해 보니 란타스가 노소 가린단 소린 들었어도 남녀 가린다는 말은 못 들은 것 같았다.

오십이 넘은 중늙은이가 자신을 바라보며 주름 진 웃음을 보낸다.

"후후후, 귀여워해 주마."

성직자, 그것도 남자를 강간하겠다는 천인공노할 소릴 막 해 대는 란타스의 모습에 실란이 시퍼렇게 질렸다.

"으히힉!"

로마드 일행이 '저 양반, 또 시작이네.'라는 경멸 어린 표정을 짓는다. 초조함으로 실란의 금색 눈동자가 마구 흔들렸다. 아니, 여신님. 레펜 씨 만나게 해 달라고 빌었는데 왜 저런 변태를 만나게 하신 건가요? 제가 기도문 잘못 올려서 그런가요? 그렇지만 평소엔 대충 외워도 척척 응답해 주셨잖아요?

'헉! 설마 필라넨스께서 내 운명의 상대로 저 변태 늙은이를 택하신 건가? 그런 거야, 혹시?'

잠시 무엄한 생각마저 들 정도로 실란은 공황에 빠져 있었다.

두 사내가 각자 손에 밧줄을 들고 다가왔다. 힘줄이 잘렸으니 아무리 무서운 슬레이어라도 반항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래서 안심하고 막 손을 뻗으려던 차였다.

검광이 번뜩이며 사내의 팔을 베었다.

"윽!"

사내들이 놀라 뒤로 물러섰다. 벌써 시리스가 일어난 건가 싶어 깜짝 놀란 것이다. 그런데 일어난 것은 시리스가 아니었다.

실란이었다.

"웃기지 마...."

저 가녀린 소년이 한 손에 은색 단검을 든 채 무서운 눈으로 사내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미스릴 칼날 위로 선혈이 아롱져 떨어진다. 란타스가 두 눈을 부릅떴다.

"어엉?"

이번에는, 산전수전 다 겪은 그조차도 도저히 겪어 보지 못한 상황이었다. 힘줄 잘린 지 몇 분이나 되었다고 벌써 일어난단 말인가? 기도를 올리지 않았으니 치유술을 쓸 수도 없었을 텐데?

"뭐야? 저거 무슨 좀비 같은 거였어?"

하도 기가 막혀 어이없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렇다면 저건 세상에서 가장 생기 넘치고 아름답고 허약한 좀비일 것이다.

"...절대 내 몸에는 손 못 대!"

단검을 든 채 실란이 눈을 부라렸다. 핏발이 선 금색 눈동자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 독한 모습에 사내들이 무심코 뒷걸음질을 쳤다.

그때였다.

부우우웅!

광풍이 불었다. 동시에 뭔가가 바람을 가르며 날아들었다. 실란 앞에 섰던 남자 둘의 모습이 일순간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옆에서 폭음이 울렸다.

콰아아앙!

눈앞을 가로막던 사람들이 순간 이동이라도 한 것처럼 사라지는 진귀한 광경, 실란이 멍하니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라?"

공터를 둘러싼 건물, 그 외벽에 커다란 나무판자 하나가 박혀 있었다. 문고리가 달려 있고 금속으로 모서리를 마감한 걸 보니 원래는 어느 집 문짝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문짝과 건물 벽 사이에 시뻘건 뭔가가 뭉쳐 있는 것이 보였다.

잠시 멍해 있던 실란은 순간 욕지기를 느꼈다.

"우욱!"

저건 핏물과 살점 덩어리였다! 방금 전까지 살아 숨 쉬던 사내들의 현재 모습인 것이다!

로마드 일행은 모두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난생 처음 보는 끔찍한 살해 방식이었다. 로마드가 문짝이 날아온 쪽을 돌아보았다.

흑갈색 머리에 건장한 체구를 지닌 청년이 오른손을 앞으로 뻗은 채 공터를 노려보고 있었다. 마치 지옥에서 들려오는 듯한 섬뜩한 살기를 담아, 청년이 입을 열었다.

"찾았다, 이 개자식들...."

욕지기를 하다 말고 실란이 반색을 하며 외쳤다.

"레펜 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