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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린 겨울바람이 휘몰아치는 헐벗은 골짜기, 얼어붙은 개울가에서 한 무리의 일행이 저마다 바닥에 퍼져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헉헉헉...."

에드워드 경은 가쁜 호흡과 함께 일행을 살펴보았다. 자랑스러운 알티온 기사단의 일원들이 지금은 완전 패잔병의 모습이었다. 번쩍이던 갑옷은 찌그러지고 흙먼지로 더럽혀져 고철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다, 다들 휴식을 취하도록 하라!"

그들은 방금 전까지 스무 마리가 넘는 오우거들과 싸우며 간신히 여기까지 물러난 후였다. 하필이면 길목에 오우거 부락이 하나 있었던 것이다. 그 전에도 하피며 바실리스크, 다이어울프 등 강력한 괴물들과 쉴 새 없이 싸웠으니 천하의 알티온 기사단이라 하더라도 지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마법사 토드도 성직자 실란도 전신이 땀과 흙먼지 범벅이 되어 탈진하기 직전이었다.

기사들 중 하나가 하소연하듯 사방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아니, 이 작은 산맥에 뭔 몬스터들이 이리 많은 거야?"

'왜긴, 유적 방향으로 그냥 무식하게 직진했으니까 그렇지.'

스테반이 대놓고 '길 안내만이 너의 존재 가치다!'라고 외쳤으니, 레펜하르트도 그의 의사를 존중해 주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원래는 몬스터들의 서식지 사이로 길을 타고 가서 유적에 도착하는 것이 정석이거늘 그걸 무시하고 죽 직진했으니 각종 몬스터들을 안 만날 수가 없었다.

'난 거짓말 안 했어. 이게 제일 빠른 길이라고.'

물론 몬스터와 싸우느라 늦춰진 시간은 신경 껐다. 중간에 일 생겨서 늦어지는 건 안내자의 책임이 아니다.

그는 마법사였다. 자고로 마법사란 인종은 편협하고 치사한 법이다.

'절대 괴롭히려고 한 거 아니야. 열심히 시키는 대로 했잖아?'

할딱대는 기사들을 고소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다 말고 레펜하르트는 슬쩍 오크 노예들의 상태를 살폈다.

오크들도 지치긴 마찬가지였지만, 기사들과 달리 꽤 기력이 남아 있었다. 앞장서 전투를 한 것이 아니라 뒤에서 숨어만 있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물론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전투 와중에 다 죽어 나갔겠지만, 레펜하르트가 티 안 나게 돌봐 준 덕에 다들 찰과상 하나 없이 이 자리까지 와 있었다.

기사들조차 지친 상태인데 고작 길잡이와 노예들이 멀쩡한 걸 보고 의아하게 여길 법도 하건만, 아무도 그것에 대해선 의문을 갖지 않았다. 이들이 노예와 평민에게 얼마나 무관심한지 단적으로 증명하는 부분이었다.

한편, 스테반은 엘프 렐시아의 시중을 받으며 바위에 앉아 쉬고 있었다. 그는 파리해진 안색으로 숨을 고르며 계곡 저편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과연 클로드 경께서 죽음을 당한 곳답군. 이런 작은 산맥에 이렇게나 많은 몬스터들이 서식하고 있었다니...."

새삼 자신의 임무가 얼마나 막중한지 실감이 난다. 스테반이 다시 한 번 위대한 가문의 영광을 위해 각오를 다지고 있을 때였다.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될 겁니다. 설마 휴식이 필요하십니까?"

스테반은 얄미울 정도로 멀쩡한 이 길잡이 청년을 보며 이를 갈았다. 분명 말투는 정중한데, 어째 '천하의 기사분께서 고작 이 정도로 지쳤을 리는 없겠지요?'라고 비꼬는 것처럼도 들린다.

"모두 일어나라!"

억지로 몸을 일으키며 스테반이 여기저기 퍼져 있는 수하 기사들에게 호통을 쳤다. 기사들과 마법사, 성직자 소년이 모두 질린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길잡이 청년이 태연스레 계곡 안쪽을 가리켰다.

"슬슬 다 왔습니다. 이제 이 얼어붙은 개울을 따라 올라가기만 하면 되지요."

스테반이 걷기 시작했다. 그걸 보며 레펜하르트는 빙긋 웃었다.

'그럼 슬슬 도착해야겠네.'

어차피 주변에 더 이상 들이댈 몬스터도 남아 있지 않았다.

스테반 일행은 한껏 경계하는 모습으로 골짜기를 타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대략 30여 분쯤 후.

"오오! 이곳인가!"

스테반이 감격에 겨워 외쳤다.

"틀림없습니다, 스테반 공자님."

에드워드도 감동한 얼굴로 목소리를 보탰다.

그들의 앞, 좁아진 골짜기 사이에 반쯤 무너진 거대한 건물이 하나 있었다. 현 대륙의 건축 양식과는 전혀 다른 특이한 형태였다. 마름모꼴로 좁아지는 건물 외벽 위로 원형의 천장이 얹혀 있었다. 재질은 평범한 화강암, 오랜 풍상으로 외벽 여지저기가 벗겨진 것이 보인다.

틀림없었다.

그들의 목적지, 위대한 기사 클로드 경이 눈을 감은 곳.

고대의 유적, 팔톤이었다.

흥분을 가라앉히고 스테반은 건물을 살폈다. 건물 좌측에 반쯤 허물어진 통로가 있었다. 토드가 눈을 감고 잠시 마법을 구사하더니, 확신에 찬 말투로 말했다.

"입구입니다."

시야를 공유하는 마법의 오브를 통로 안으로 보내 대략적인 탐색을 한 것이었다. 에드워드 경이 실란을 재촉했다. 성직자 소년이 빛의 구체를 띄워 시야를 밝히자 일행은 일제히 통로 안으로 들어갔다.

안쪽은 커다란 직사각형의 석실이었다. 벽돌 사이사이 이끼가 끼어 있고 공기가 습했다. 사방의 벽에는 이해할 수 없는 각종 문양이 양각으로 새겨져 있었다. 크기도 상당히 커, 어지간한 귀족 저택의 파티장 정도 되는 규모였다. 들어온 입구와 마주해 또 다른 입구가 있었고 그 너머로 긴 통로가 이어져 불길한 어둠을 담고 있었다.

토드와 에드워드 경이 석실 내를 유심히 살펴본 후 보고했다.

"이곳은 안전해 보입니다. 공자님."

"좋아, 다들 준비해라."

이곳을 베이스캠프로 삼기로 마음먹고 다들 짐을 풀었다. 오크 노예들이 쉴 새 없이 안팎을 오가며 굵은 나뭇가지를 주워 와 양쪽 입구에 간단한 목책을 설치했다. 렐시아가 모닥불을 피우고 기사들도 육포 등을 꺼내 배를 채운 뒤 장비를 점검했다. 토드와 실란도 각자 명상 및 기도에 들어갔다. 이제 던전 안으로 진입해야 하니 다들 최상의 몸 상태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그 모습을 무심히 보던 레펜하르트가 스테반에게 말을 걸었다.

"저는 그럼 여기서 기다리겠습니다요."

"응? 그대는 이제 마을로 돌아가도 된다."

의아해하며 스테반이 손을 대충 내저었다. 여기까지 안내한 시점에서 더 이상 저 길잡이 청년의 효용 가치는 없는 것이다. 그러니 어서 꺼지라는 의미의 손짓.

레펜하르트가 비굴하게 웃으며 손을 비볐다.

"아니, 저 혼자 마을로 돌아갈 방법이 없어서 말입니다."

생각해 보면 자신들도 여기까지 오는데 그 고생을 했었다. 그걸 저 일개 여행자가 통과할 수 있을 리가 없는 것이다. 스테반은 빙그레 웃었다. 건방져 보이던 이 덩치 큰 놈도 결국 기사들의 위대함을 깨달은 것이군!

기분이 좋아지니 절로 자상한 말투가 나왔다.

"그렇군. 그렇다면 여기까지 안내한 대가로 돌아갈 때 그대를 보호해 주도록 하마."

스테반은 큰 친절을 베푼답시고 한 소리지만 듣는 레펜하르트는 기가 찬다. 지금 저거 감사하라고 하는 소린가? 애초에 자신들이 아니었다면 길잡이가 여기까지 올 일도 없었을 거란 사실은 뇌리에 있지도 않은 것 같다.

'그럼 안 데려다 주려고 했냐? 인간으로서 당연한 도리 아냐, 그거?'

올 때 그토록 고생시켰으니 혼자 내려간다고 하면 혹시 의심받을까 봐 한 소리였는데, 그럴 필요도 없었던 것 같았다.

레펜하르트가 멀뚱히 있자 스테반은 살짝 인상을 썼다. 기사인 자신이 자비를 베풀었는데 고마워할 줄도 모르다니.

'역시 명예를 모르는 것들은... 쯧.'

혀를 차며 스테반는 발길을 돌렸다. 그걸로 그는 이 길잡이 청년의 존재를 싹 지웠다. 그리고 다시금 용맹한 모습을 되찾은 자신의 기사들을 바라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이제, 이 용감한 기사들과 함께 저 저주받은 고대의 던전을 탐험할 시간이 온 것이다. 마검 알티온을 되찾아 화려하게 왕도로 개선하는 자신의 모습이 절로 떠올랐다.

스테반은 검을 뽑았다. 그리고 용맹하게 외쳤다.

"저 안에 위대한 분이 잠들어 계신다. 그분의 유지를 잇는 것이다!"

"와아아!"

제 잘난 맛에 설치다 죽은 양반이 뭐가 그리 위대한지는 잘 모르겠다만, 하여튼 기사들은 저 연설에 착실히 반응해 주고 있었다.

"가자! 용맹한 알티온의 기사들이여!"

스테반이 통로로 달려갔다. 렐시아와 에드워드, 다른 기사들도 기세등등하게 뒤를 따른다. 토드와 실란이 저것들 원래 저런 인종이려니 하는 무심한 얼굴로 발걸음을 옮기고, 오크 노예들도 던전 탐사에 필요한 짐들을 따로 챙겨 어깨에 멘 뒤 석실로 향했다.

"수고하십셔~."

석실 안쪽으로 들어가는 그들을 레펜하르트는 친절히 배웅했다. 발걸음 소리가 점점 멀어지자 그가 허리를 폈다.

"자, 그럼 나도 내 볼일 봐야지?"

☆ ☆ ☆

고대 유적, 팔톤은 원래 은의 시대에 사용되던 병참기지 같은 것이었다. 차원에 걸쳐진 지금은 각종 마물과 사령이 들끓는 마굴이 되어 버렸지만, 은의 시대에서는 그냥 평범한 군사용 건물 중 하나란 소리다. 물론 은의 시대에 사용되던 모든 도구는 전부 지금의 마학 수준으로 볼 땐 기적 같은 유물들뿐이니 그 당시 평범했다 해서 그 가치를 폄하할 순 없다.

"후, 진짜 오랜만이구나."

주위를 둘러보며 레펜하르트는 감회 어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여기가 병참기지라는 학설을 끌어낸 것은 레펜하르트 본인이었다. 이곳을 탐사하며, 강력한 마법의 힘으로 방어 시스템을 절반 이상 파악하고 내린 결론이었다.

과거에 그는 시리스와 단둘이 이 유적을 탐사했었다. 행복했던 시간이었다. 긴장한 가운데에서도 둘만의 오붓한 시간을 보냈던 기억이 난다.

문득, 눈앞에 아리따운 엘프 여인의 환영이 나타났다.

-레펜하르트 님! 여기 실프가 속삭이고 있어요!

작은 새처럼 지저귀던 그녀의 목소리가 귓가에 생생하다. 바람의 정령을 다루던 그녀는 쉽사리 벽으로만 보이던 비밀 통로를 찾아내 주었다.

-잘했다, 시리스! 역시 넌 나의 여신이구나!

-우웅, 부끄러워요.

-부끄럽긴. 이리 와 보렴, 시리스. 잘했으니까 상으로 키스를 해 주마.

-아잉~.

"으으음...."

어째 회상을 하다 보니 미성년자 관람불가의 영역으로 넘어가 버렸다. 레펜하르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지금 이런 생각 할 때가 아니지. 아, 그런데 과거의 나는 대체 이 위험한 던전 한복판에서 시리스랑 뭔 짓을 한 거냐? 용자였구나, 나.

'조금만 더 기다려 다오, 시리스. 내가 곧 만나러 간다.'

레펜하르트는 문양이 새겨진 석벽을 더듬었다.

'분명 천칭의 좌를 기본으로 아쿠아와 테라의 인印이 역순으로 섞여서 암호화되어 있었지?'

벽에 새겨진 이 문양은 은의 시대 고대어 중에서도 '데스틴'이라 불리는 문자였다. 과거, 레펜하르트는 전 대륙의 모든 종족의 언어를 모두 익히고 있었고, 고대어도 데스틴, 랄핀, 페스탈, 알카타의 네 개를 해독할 수 있었다. 물론 예전에야 해독하는 데 반나절 이상 걸렸지만....

'지금은 답안지를 들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지.'

주저 없이 레펜하르트는 벽에 박힌 타일을 움직였다. 벽에 붙은 채 문양 일부분이 스르륵 미끄러진다.

'끙, 만만찮네.'

기억은 다 나는데, 정작 타일을 움직이기가 힘들었다. 보통 은의 시대 대부분의 방어 시스템은 마법의 힘 없이는 쉽사리 작동하지 않는다. 얼마 안 되는 마력을 총동원하고 모자라는 부분은 근력으로 때워 한참동안 끙끙거리며 타일을 옮긴다.

그렇게 몇 차례 타일을 조작하자 자연스럽게 문양을 이루고 있던 벽의 타일이 완전히 새로운 문양이 되었다.

"아, 됐다."

우르르릉!

벽이 흔들리며 먼지가 쏟아져 내려왔다. 이것이야말로 과거 토드는 미처 몰랐던, 레펜하르트가 직접 발견한 유적 팔톤의 진짜 유물로 향하는 통로였다.

그는 감개무량한 얼굴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하하하...."

수천 년간 숨겨져 있던 비밀의 문이 지금 열리고 있었다.

☆ ☆ ☆

통로를 앞에 두고, 레펜하르트는 일단 목도리와 털가죽 코트부터 벗었다. 앞으로 전투를 벌어야 하니 은화 열 닢이나 주고 산 이 의복을 험하게 굴릴 순 없는 것이다. 이제 곧 돈 따윈 얼마든지 벌 수 있을 텐데 고작 코트 값에 연연하는 것도 우습긴 하지만....

'그렇다고 멀쩡한 옷 일부러 버릴 필요도 없잖아? 어차피 안 입는다고 추위 타는 몸도 아니고.'

그렇게 간단한 조끼와 바지만 걸친 조촐한 차림으로 그는 가볍게 몸을 풀었다. 자, 이제 6년간 그토록 고생한 이 육체 성능을 시험해 볼 때다!

그렇게 한창 레펜하르트가 신바람을 내던 차였다.

"으아아아악!"

갑자기 어둠 저편에서 흐릿하게 비명이 들려왔다. 아득히 멀리서 들리는, 청력이 높아진 지금의 그도 미처 식별이 힘들 정도로 작은 소리였다.

"응?"

잘못 들었나 싶어 레펜하르트는 무심코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째 비명이 낯익었다. 아무래도 저거 토드의 목소리인 것 같은데....

"으악! 으악! 으아악!"

비명이 뒤를 따랐다. 이번엔 실란이랑 그 에드워드인가 하는 작자다.

'아니, 저쪽으로 들어간 애들 비명이 왜 이쪽에서 들려?'

어이가 없어진 그가 멍하니 자신 앞에 뚫린 통로를 바라보았다.

'가만있자, 이 통로가 뭐더라? 원래 여기는 은의 시대 병참기지. 그리고 이 비밀 통로는 지하 3층과 직통으로 연결되는 백 도어였지? 그리고 그 백 도어가 열린다는 건 일종의 침입 상황이라는 거고....'

기억이 났다. 병참기지라는 것은 이곳이 군사 용도로 쓰였다는 의미. 그리고 침입 상황이 되었을 때 팔톤의 잔재 마력 시스템은 침입자를 격퇴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총동원하게 된다. 그래, 과거에도 이랬다.

'그래서 모든 유적의 비밀 트랩이 일제히 작동을 했지 아마?'

"오마나?"

그제야 레펜하르트는 자신이 뭔 실수를 했는지 깨달았다. 그저 예전 기억대로 문을 연 것은 좋았는데, 현 상황이 그때랑 다르다는 걸 망각했다. 그때는 시리스와 단둘이서만 왔었으니 팔톤 지하 1,2층 트랩이 작동하건 말건 전혀 상관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곳에 토드 일행이 가 있지 않은가?

보나마나 함정에 걸려 다 같이 사이좋게 지하 2층으로 떨어진 것이 분명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저들 목소리가 엉뚱하게 이쪽에서 들릴 리가 있나?

"이런...."

레펜하르트는 혀를 찼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 일행의 전력으로 지하 2층의 마물들을 상대할 수 있어 보이지 않는 것이다.

원래 팔톤 지하 1층과 2, 3층의 위험도는 차원이 다르다. 그리고 토드에게 들은 기억이 정확하다면, 저들이 탐사한 지역은 고작 지하 1층이었다. 마검 알티온의 그림자도 보지 못하고 몇 개의 유물만 챙겨서 돌아왔다고 했다. 그 후 알티온 후작가에서 몇 차례나 더 탐사대를 보낸 끝에야 지하 2층을 발견하고 검을 발견해 회수하게 된다. 그건 앞으로 5, 6년 후의 이야기.

"실수했다. 쩝."

레펜하르트는 뺨을 긁었다. 은근슬쩍 양심에 찔린다. 뭐, 전생에 마왕씩이나 불렸던 몸이긴 했지만, 그래도 레펜하르트 본인은 나름 양심적으로 살았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자신이 원인이 되어 남이 죽는 상황은 그리 달갑지 않았다.

솔직히 저 오만불손한 기사 놈들이야 별로 마음에 드는 것들도 아니었으니 저기서 죽어 나간다고 딱히 양심의 가책 느낄 것은 없겠지만... 게다가 토드도 다시 만나고 보니 영 구해 주고 싶지 않은 인간이었지만....

'그래도 그 신관 꼬맹이랑 죄 없는 노예 애들이 죽어 버리면 꿈자리가 좀 사납겠지?'

안 되겠다.

레펜하르트가 가볍게 발을 굴렀다. 단련된 육체가 놀라운 도약력으로 앞으로 나아간다. 그렇게 툴툴거리며 그는 통로의 어둠 속으로 순식간에 사라져갔다.

"아, 제대로 꼬였네."

☆ ☆ ☆

한 줄기 섬광이 어둠을 가르며 날아온다.

"으아악!"

비명이 좁은 석실 복도를 메아리쳤다. 붉은 선혈이 석벽 위로 가득 튀며 찐득하게 흘러내린다. 섬광의 정체는 날카로운 붉은 낫이었다. 피를 뿌린 기사가 어깨를 움켜쥐고 비틀거리며 뒷걸음질을 쳤다.

"토마스 경!"

다른 기사들이 동료의 부상에 격정 어린 외침을 터트렸다. 하지만 감히 방패를 들고 용맹하게 동료를 감싸는 이는 없었다. 그만큼 눈앞의 적은 무섭고, 공포스러웠다.

기사들은 절망적인 눈빛으로 정면을 바라보았다. 사악한 웃음소리를 흘리며 이계의 마물이 통로 저편에서 다가온다.

"크크크크...."

2미터에 달하는 거구에 뒤틀린 근육으로 뒤덮인 붉은 몸체, 흉악한 입가에 누런 불길이 맴돌고 공허한 눈동자는 심연을 담아 끝없이 검을 뿐이다. 인간의 스무 배의 힘과 권능을 지녔다 알려진 이계의 악마, 베이터였다. 그 악마가 지금 돋아난 네 개의 팔에 각자 칼이며 낫, 도끼 등을 들고 그들을 압박해 오고 있었다.

기사 중 하나가 절규했다.

"아! 인간이 어찌 저런 악마를 상대할 수 있단 말이냐!"

'우와, 아주 저 말투가 뼛속까지 박혔구나.'

절규마저 고풍스러운 알티온 기사를 보며 실란은 혀를 내둘렀다. 공포로 제정신이 아닌 상황에서도 저런 말투가 자연스레 나오다니 어떤 면에선 감탄이 나올 지경이었다.

'이크, 지금 이런 잡생각 하고 있을 때가 아니지.'

실란은 고개를 저으며 쓰러진 토마스 경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어깨에 손을 얹으며 기도를 올렸다.

"필라넨스시여, 당신의 치유의 빛이 깃들기를 원하나이다."

과연 사랑의 여신답게 분홍빛(!) 성광이 솟구쳐 상처를 매만지기 시작했다. 갈라진 뼈와 근육이 급속도로 아문다. 이 정도로 빠른 치유력을 보이는 이는 필라넨스 교단에서도 드물었다. 나이와 맞지 않게 그는 굉장히 높은 위계를 지닌 신관이었던 것이다.

고통이 잦아든 토마스 경이 감사를 표한다.

"고맙습니다, 신관님."

'고마울 것까지야. 댁이 죽으면 다음엔 내 차례잖아?'

속마음과 달리 실란은 자애롭게 미소 지었다. 그의 태도가 교단의 평판과 연결이 되니 어떤 경우에도 성직자다운 모습을 잃을 수는 없는 것이다. 이 예쁘장하고 착해 보이는 성직자 소년은 사실 꽤나 음흉한 구석이 있었다.

"으아아!"

다시 일어선 토마스 경이 검과 방패를 들고 일어나 괴성을 지른다. 애써 고함을 질러 없는 용기를 끌어내려는 것이다. 저렇게까지 하고도 채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여전히 공포에 질려 있다. 실란은 남들 모르게 손톱을 깨물었다.

'젠장, 초반엔 쉬워 보였는데....'

처음엔 그리 어렵지 않았다. 과연 던전답게 온갖 마물과 기형화된 짐승들, 사령들이 나왔지만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마물들이라 봐야 카비치나 그렐린 정도의 하위 악마였고 기형화된 짐승들도 거대한 쥐나 벌레 정도였으며 스켈레톤 몇 구가 삐걱거리며 덤벼드는 수준이었다. 내심, 고작 이 정도 유적에서 오러 유저씩이나 되는 클로드 경이 왜 죽었는지 의아해하기도 했다.

이변이 생긴 것은 통로를 세 개 정도 지나 둥근 석실에 들어섰을 때였다.

-켈 하인 스페르타차카나!

요상한 목소리와 함께 석실 좌우 문이 닫히며 갑자기 바닥이 무너진 것이다. 정확히는 무너진 것이 아니라 벌컥 열린 것이지만 당하는 입장에선 그게 그거였다.

비명과 함께 스테반 일행은 일제히 10여 미터나 아래로 자유 낙하했다. 중간에 토드가 빠르게 마법을 외워 바닥에 부드러운 공기층을 형성하지 않았다면, 가벼운 엘프와 기사들은 모를까 실란과 오크 노예들은 그대로 추락사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부터 지옥이 시작되었다. 위층과는 차원이 다른 괴물들이 속속 등장했고 스테반 일행은 필사적으로 반대편 통로로 도주하고 또 도주했다. 그러기를 10분여, 결국 그들은 통로 좌우로 다가오는 악마들에 의해 포위당해 버렸다.

"크르르르...."

"크으으...."

좌우에서 악마의 숨소리가 섬뜩하게 들려온다.

"헬트로!"

갑자기 베이터 하나가 괴성을 지르자 그의 주위에서 수십의 구울들이 바닥을 부수고 솟아 나왔다. 추악하기 그지없는 구울들이 일제히 손톱을 세워 달려들었다. 기사들이 절로 비명 섞인 신음을 흘렸다.

"괴, 괴물들!"

"오! 신이시여!"

실란이 이를 악물며 다시 기도를 올렸다.

"필라넨스시여, 저 그릇된 존재에게 빛의 철퇴를 가하소서!"

의외로 실란은 담이 셌다. 아니, 코앞에서 칼날 같은 손톱이 찔러 오는데도 눈 하나 깜박 않고 기도문을 끝마칠 수 있을 정도면 담이 세다 정도가 아니긴 하다.

콰아앙!

분홍색 빛의 망치가 허공에 생성되어 달려오는 구울 하나를 박살 내 버렸다. 색상이 참 괴상하긴 하지만 그래도 신성 주문답게 위력은 좋았다. 그렇게 한 놈을 처리한 뒤 실란은 잽싸게 기사들을 돌아보았다.

"으아으아으아으~."

기사들은 다른 구울들과 맞붙어 허우적대고 있었다. 저들의 실력이라면 이 정도 구울은 쉽게 해치울 수 있을 텐데도, 그저 방패로 공격을 막기만 하며 계속 후퇴한다. 아주 제대로 패닉에 빠져 있는 것이다.

'아니, 벌써 정신줄 놨어? 나도 아직 멀쩡한데? 이그, 근육이 아깝다.'

다들 덩치는 좋은 주제에 정신은 참 심약하다. 속으로 한숨이 나왔지만 그래도 저들은 소중한 방패, 깨지게 내버려 둘 순 없다. 실란이 두 손을 번쩍 들고 여신께 기원했다.

"필라넨스시여, 이들에게 불굴의 용기를 허락하소서!"

기력과 용기를 주는 정신계 신성 주문이 기사들에게 시전되었다. 하지만 그래도 기사들은 계속 머뭇거리고 있었다. 워낙 공포가 커 이 정도로는 먹히질 않는 것이다.

실란이 이를 악물며 다시금 기도했다.

"필라넨스시여, 이들에게 불굴의 용기를 푸짐하게 허락하소서!"

뭔가 기도문이 요상해졌지만 어차피 신성 주문은 기도하는 신관의 신앙심으로 그 위력이 판가름 나는 법, 신관의 어휘력과는 별 관계가 없다.

그제야 기사들이 맹렬히 반격을 해 대기 시작했다.

"으아아아!"

좀 과하게 신성력을 퍼부었는지 다들 광전사가 되어 버렸다. 눈이 벌게져서 침을 질질 흘리며 구울을 후려갈기는 모습이 어째 환각제 과잉 중독 수준이랄까? 여신께서 '푸짐하게'의 의미를 꽤 과대 해석하신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덕분에 상황이 나아진 것은 사실이었다. 용기를 얻은 에드워드 경이 앞장서서 구울들을 쳐부수며 소리를 질렀다.

"용맹한 알티온의 기사들아! 저 사악한 마물에게 우리의 용기를 보여 주어라!"

에드워드 경은 커다란 바스타드 소드를 들고 악마에게 돌진해 갔다. 베이터가 포효하며 네 팔을 연신 휘둘러 댄다. 하지만 에드워드는 과연 경험 많은 기사답게 공격을 피하며 또는 방패로 막아 가며 악마를 붙잡고 있었다.

"세피로 디 크로텔, 대지여, 그 손을 뻗어 그대에게서 비롯된 것을 거두라! 아이언 스틸!"

기회가 생긴 토드가 잽싸게 4서클 주문, 아이언 스틸을 외웠다. 금속의 중량을 증가시켜 강제로 무장 해제를 시키는 이 마법이 악마가 든 무기에 적중했다. 베이터들은 다들 강한 마법 저항력을 지녀 마법이 잘 통하지 않으니, 대신 들고 있는 무기를 노린 것이었다.

탕! 타탕!

베이터들이 무기를 놓치며 일순 당황한다. 그 틈을 타 통로 반대편에서 싸우고 있던 렐시아가 악마의 등 뒤로 돌아갔다.

휘릭!

기합 소리조차 없이 그녀의 롱 소드가 베이터의 날갯죽지를 깊게 벴다. 베이터가 분노하며 몸을 돌려 후려갈겼다.

"꺄아악!"

렐시아의 여린 몸이 벽 저편으로 날아갔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그녀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흐릿한 시야 속에 소중한 주인님이 악마의 품으로 파고드는 것이 보였다.

'도움이... 되었나요, 주인님...?'

"잘했다, 렐시아!"

기회를 잡은 스테반이 날카로운 기합과 함께 검격을 뿌렸다.

"타앗!"

칼날이 단숨에 베이터의 네 팔뚝을 찔러 가더니 이내 궤적을 바꿔 좌우 사선 베기로 바뀌었다. 악마의 가슴팍에 X자 상처가 깊게 파이며 마혈이 솟구쳤다. 상대의 균형을 흩트리고 치명적 일격을 넣는 슈팅 크로스. 스테반에게 '단호의 기사'란 칭호를 부여해 준 알티온 가문의 비검이 제대로 들어간 것이다.

베이터가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엎어진다. 인간이 저런 악마를 쓰러뜨리다니! 기사들이 경탄하며 외쳤다.

"오오!"

"역시 스테반 공자님!"

"과연 단호의 기사!"

하지만 착지하는 스테반의 표정을 결코 밝지 않았다. 지금 그의 눈에는, 어두운 통로 저편에서 또 다른 악마가 다가오는 것이 똑똑히 보였던 것이다.

"이 더러운 마물들!"

소리치며 그는 다시 악마에게 돌진했다. 피와 비명이 사방에 퍼져 갔다.

☆ ☆ ☆

악몽은 끝이 없었다. 스테반의 분투에 용기를 얻은 에드워드 경과 다른 기사들이 베이터 하나를 더 처치할 수 있었지만, 그 이후 나타난 또 다른 악마에 의해 그들의 용기는 바로 꺾여 버렸다.

이번에 나타난 것은 타그렐, 베이터보다도 고위급인 거대한 악마였다. 크기만도 2.5미터에 바위조차 부수는 괴력과 칼날이 들어가지 않는 금속질의 육체를 지닌 마물, 그것이 양팔에 이계의 불꽃을 머금은 채 기사들에게 달려오고 있었다.

화르르르.

불타는 흉악한 살의가 전신을 옥죄어 온다. 기사들은 모두 벌벌 떨었다. 실란이 다시 한 번 신성력으로 그들에게 용맹을 부여했지만, 이번에는 먹히질 않았다. 원래 마약도 자주 하면 약발 떨어지듯 신성 주문도 자주 쓰면 효과가 없어지기 마련이다.

"다들 정신 차려라! 위대한 기사, 클로드 경마저 쓰러진 곳이다. 쉽지 않을 것이라는 건 이미 각오하지 않았더냐? 너희들이 그러고도 용맹한 알티온의 기사란 말이냐!"

노한 주군의 호통 소리에 기사들이 자기도 모르게 타그렐을 향해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용기가 솟아났다기보다는, 조건반사적인 행동이었다.

"크오오오!"

분노한 타그렐이 기사들에게 불꽃을 퍼붓기 시작했다.

지옥에서 올라온 붉은 피부의 악마가 손발에 불꽃을 머금고 달려온다. 검을 휘둘러도 저 두꺼운 가죽을 찢을 수가 없다. 주먹을 휘두르면 방패를 들어 막아도 방패 채 날아가며 박살 나 버린다.

토드의 마법도 소용없었다. 그는 수준 높은 마법사였지만 타그렐의 마법 저항력이 너무 높았다. 어떤 마법을 써도 저 악마의 항마력장을 뚫을 수가 없었다.

"아아아악!"

결국 비명을 지르며 기사 하나가 벽에 처박혀 버렸다. 머리가 통째로 처박히고, 갑옷 사이로 피가 주르륵 새어 나오는 모습이 아무리 봐도 즉사였다.

이번엔 실란도 공포에 질렸다.

"으아아...."

눈앞에서 사람들이 죽어 가고 있었다. 다른 기사 하나가 타그렐의 뒤를 노리다가 불길에 휩싸여 타 죽어 버린다. 타그렐이 내려친 주먹에 기사의 머리가 몸속으로 파묻히며 피분수를 쏟는다.

끔찍했다. 진정 지옥의 광경이었다.

"으에으에으에에...."

토드는 구석에서 다른 오크 노예들처럼 머리를 감싸 쥐고 웅크려 앉아 눈과 귀를 막고 있었다. 벌벌 떠는 것이 그야말로 현실도피 상태였다. 유적 탐사 경험이 많은 그였지만, 이렇게까지 강한 마물은 만나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자신의 마법에 긍지를 가진 마법사였기에, 자신의 마법이 전혀 통하지 않는 상대를 만나니 보통 사람보다도 더 빨리 패닉에 빠져버린다.

"제길, 제길, 제기랄!"

피를 흘리며 스테반은 연거푸 욕설을 내뱉었다. 어느새 세 명의 기사가 시체도 남기지 못하고 고혼이 되었다. 제일 먼저 달려든 에드워드 경은 주먹질 한 방에 날아가 저만치 쓰러져 있었다. 살아 있는지 죽었는지 확인할 여유도 없었다.

이런 큰 피해를 보았는데도, 눈앞의 저 악마는 생채기 하나 없었다. 소중한 부하의 죽음 앞에서 아무것도 못한다는 무력감이 그의 자존심을 미치도록 찢어발기고 있었다.

이대로 당할 수는 없다.

이대로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다!

"나는 알티온의 이름을 잇는 자...."

스테반은 검 쥔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얼굴 가득 각오가 떠올랐다.

"단호의 칭호를 얻은 자다!"

스테반의 신형이 놀라운 속도로 타그렐에게 쇄도해 갔다. 전신의 탄력을 모두 실어 단 한 점 찌르기에 집중하는 알티온 가문 최강의 비검, 슈팅 스트라이크가 섬광처럼 타그렐에게로 쏟아졌다. 그리고....

퍼억!

타그렐은 '단호하게' 날아드는 스테반을 후려갈겨 버렸다. 미스릴을 섞어 만든 값비싼 갑옷이 박살이 나며 스테반이 처량하게도 휭휭 날아갔다. 벽에 퉁 부딪히고 바닥에 퉁 부딪히더니 그대로 침묵.

내심 기대하고 있던 실란이 속으로 악을 썼다.

'아니, 저 양반은 왜 대뜸 저런 큰 기술을 쓰는 거야!?'

자고로 무술이란 건 공방 속에서 상대를 견제해 가는 '과정'이 더 중요한 법이다. 그걸 싹 무시하고 대뜸 몸부터 날리면 어쩌라고? 어딜 어떻게 노리고 오는지 뻔히 다 보이잖아!

"크르르...."

화염의 숨결을 내뱉으며 타그렐이 고개를 돌린다. 귀찮은 기사들을 다 처리했으니 남은 이들, 토드와 실란 그리고 오크 노예들을 마저 처분하려는 것이다.

"피, 필라넨스시여, 당신의 빛으로 사악한 존재를 멸하소서!"

공포에 질린 채 실란이 애써 신성력을 끌어 올린다. 분홍색 성광이 타그렐을 정통으로 가격했다. 하지만, 몸에 휘감은 불꽃이 이내 성광을 집어삼키고 더더욱 타오른다.

"크아아!"

악마의 포효가 귀청을 찢는다. 두 다리가 덜덜 떨린다. 머릿속이 텅 빈다. 실란은 벌벌 떨며 뒷걸음질을 쳤다. 이내 등에 벽이 닿았다.

"아아아아...."

악마가 코앞까지 닥쳐왔다. 실란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눈앞의 공포를 직시할 때였다.

파앙!

파공음이 들리며 광풍이 몰아친다. 머리칼이 어지럽게 나부낀다. 실란은 자기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으윽!"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검은 그림자가 자신과 악마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다. 놀라며 실란은 눈을 깜박였다. 시야 가득 거대한 무엇인가가 방패처럼 그를 가리고 있다.

'뭐, 뭐지?'

그것은 거대한, 듬직하기 그지없는 커다란 남자의 등이었다.

제3장 크고 아름답다!

1

"후우우...."

레펜하르트는 호흡을 골랐다. 워낙 서둘러서 왔더니 단련된 그라도 호흡이 꽤 가빠져 있었다. 일부러 트랩 안 건드리고 마물들 눈 피해서 오다 보니 필요 이상으로 움직임이 많았던 것이다.

느닷없는 그의 등장에 타그렐도 당황했는지 공격을 거두고 한 걸음 물러난다. 그 틈에 레펜하르트는 슬쩍 일행들의 상태를 살펴보았다.

스테반과 다른 기사들은 여기저기 찌그러진 깡통이 되어 나뒹굴고 엘프 여인은 부서진 인형처럼 축 늘어져 있었다. 그나마 토드와 실란, 오크 노예들은 다치지 않은 것 같지만 반쯤 넋이 나간 상태다.

'쩝,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더 비참한 모습이로세....'

등 뒤에서 실란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 당신은 길잡이 씨님?"

그냥 길잡이 씨라고만 부르다 존칭을 붙이니 꽤나 괴상한 칭호가 되어 버렸다.

'그러고 보니 이름을 알려 준 적도 없었구나. 뭐, 다들 물어보지도 않았으니까.'

피해 있으라며 대충 손을 저어 준 뒤 레펜하르트는 눈앞의 악마를 노려보았다.

이계 중에서도 어비스의 악마, 타그렐.

'저거 어떻게 잡는 거더라?'

그는 재빨리 과거의 기억을 더듬었다. 원래 악마를 상대할 때는 성직자의 신성 주문 계열이 제일 좋고, 그게 아니면 생명 계열 마법이나 아예 동류의 사령술 계열 마법이 제일 잘 먹힌다. 물론 왕년의 레펜하르트는 양쪽 모두 극한까지 익혔으니 이따위 악마 한둘쯤은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으, 죄다 마법으로 처리해 버려서 근접전 약점 같은 거 모르는구나, 나.'

레펜하르트는 신중한 태도로 주먹을 쥐고 자세를 취했다. 긴장한 것은 아니었다. 타그렐 정도면 다른 오러 유저가 쉽게 잡는 걸 본 적이 있으니 자신이 당할 것 같진 않았다.

하지만 그는 무투가로서의 실전은 이번이 처음이다. 방심할 처지가 아닌 것이다.

"크아아아!"

잠깐 주저한 타그렐이 다시 침입자를 격퇴하기 위해 돌진해 온다. 제라드와의 대련을 떠올리며 레펜하르트는 신중하게 상대의 주먹을 오른 팔뚝으로 튕겼다. 혹시 몰라서 오러를 끌어내 회전시키는 최강의 가드 스킬, 스파이럴 가드까지 구사했다.

우우웅!

황금빛 오러가 회전하며 악마의 주먹을 막아 냈다. 하지만 튕겨 내지는 않았다.

드드드득!

"크아악!"

처절한 비명과 함께 회전 실린 오러가 타그렐의 주먹을 팔뚝까지 갈아 버렸다! 피와 살점이 사방으로 터져 나가며 허공 가득 피안개가 자욱하게 맺힌다. 순간 레펜하르트는 당황했다.

'쿨럭!'

그냥 막으려고 한 것뿐인데 이런 잔혹한 결과가? 아니, 사부는 이런 흉악한 수법을 방어 기법이랍시고 가르쳤단 말인가! 당황하면서도 그는 무심코 텅 빈 타그렐의 안면에 펀치를 꽂아 넣었다. 그야말로 무심코, 6년 넘게 들들 볶이다 보니 허점을 본 순간 몸이 알아서 반응해 버렸다.

파아앙!

가공할 파열음과 함께 타그렐의 상반신이 사라져 버렸다.

"...얼레?"

뭉개진 정도가 아니라 아예 박살이 난 것이다. 처음이다 보니 진지하게, 그러니까 제라드를 때린다는 느낌으로 (안 그래도 덩치도 비슷했다.) 있는 힘껏 주먹을 내뻗었더니 지나치게 파괴력이 좋았다.

"...."

어두운 통로 가득 침묵이 흘렀다. 상체가 날아간 타그렐의 시체가 기우뚱하며 바닥으로 쓰러진다. 레펜하르트는 멍한 얼굴로 자신의 주먹을 내려다보았다.

"하하...."

질렸다. 그는 자신이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괴물이 되어 있었다. 앞으로 사람 상대할 때는 진짜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나마 상대가 이계의 마물이라 다행이지, 자칫했으면 전설적인 살인마로 이름을 남길 뻔했다.

'이러니 내가 테스론의 주먹 한 방에 사경을 헤맸지....'

과거의 죽음을 떠올리며 레펜하르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고 있는데 다시 통로 저편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침입자의 존재를 느끼고 던전의 다른 마물들이 속속들이 모이는 것이다.

'일단 얘들을 안전한 데로 옮겨 놔야겠다.'

실란과 오크 노예를 흘겨보며 그는 다시 자세를 취했다. 이내 악마들이 속속 나타나 덤벼들기 시작했다. 황금빛 오러로 몸을 감싼 채 레펜하르트도 맞서 싸우기 시작했다.

☆ ☆ ☆

실란은 그저 멍하니 레펜하르트의 전투를 바라보고 있었다.

두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지금 눈앞에서 수많은 악마들을 잔혹하게 분쇄하고 있는 저 청년은 분명 길잡이 역할을 자처했던 무명의 여행자였다. 별로 이야기를 나눈 적도 없어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있던 존재였다.

그런데 그가 이토록 엄청난 무인이었다니!

악마가 이빨을 드러내고 흉악하게 돌진해 온다. 달려드는 상대의 모가지를 붙잡고 가볍게 비틀어 뽑아 버린다. 피 분수 사이로 재차 몸을 날리며 다음 악마의 쇄골에 수도를 내려친다. 기사들이 그토록 찔러 대도 끄떡없던 강철의 육체가 치즈처럼 뭉개지며 좌우로 쪼개진다.

"크아아악!"

악마 하나가 포효하며 불길을 내뿜었다. 하지만 저 지옥의 불길도 레펜하르트의 육체를 태울 순 없었다. 마치 이 화염이 환영이라도 되는 양, 그는 가볍게 불길을 헤치고 나아갔다. 물론 그가 입은 상의는 그냥 천이므로 당연히 불에 탔다. 새삼 코트 벗고 오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레펜하르트는 불타는 상의를 북 찢어 던졌다. 잘 단련된 구릿빛 근육이 여실하게 드러났다.

"흡!"

짧은 기합과 함께 레펜하르트가 악마의 복부에 단순한 앞차기를 찔러 넣었다. 공성추에라도 맞은 것처럼 악마가 뒤로 날려 가 벽에 파묻혔다. 우르릉 하며 통로가 흔들리고 흙먼지가 가득 떨어져 내렸다.

'우와....'

감탄과 경외, 동경의 시선으로 실란은 계속 눈앞의 전투를 바라보았다. 악마 하나가 두꺼운 팔뚝으로 레펜하르트의 팔을 붙잡는다. 그 순간, 강철 같은 이두박근과 삼두박근이 불끈거리며 악마를 한 팔로 들어 버린다. 그리고 그대로 바닥에 메치기! 패대기쳐진 악마의 머리통을 질끈 밟자 그대로 터지면서 피 웅덩이가 가득 고인다.

정말이지 굉장하다는 말 외엔 표현할 길이 없었다. 마치 투신처럼 용맹하고 잔혹한 전투, 그리고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단련된 저 거대한 근육질의 육체!

'우와아...!'

심지어 저 뚜렷한 식스팩 복근은 칼날도 씹어 먹고 있었다. 관용적 표현이 아니라, 정말 복근 사이로 악마 칼 하나를 붙잡더니 그대로 부러뜨려버린 레펜하르트였다. 꽁꽁 묶여 늑대굴에 던져졌을 때 익힌 요령이었다. 짐 언브레이커블의 가르침 중엔 정말로 근육으로 이빨 부수는 용법도 있었던 것이다.

"우와아아!"

긴장이 풀려서인지 속으로만 하던 감탄이 입 밖으로 새어 나와 버렸다. 하지만 실란은 자신의 실수를 눈치채지 못했다. 소년은 그만큼 저 눈앞의 저 근육질 청년에게 매료되어 있었다.

약동하는 근육, 섬세한 힘줄, 딱 벌어진 어깨, 첨탑처럼 굳건한 육체.

실란이 몽롱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크고... 아름다워...."

☆ ☆ ☆

'응?'

문득 소름이 돋아 레펜하르트는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육체를 단련한 후 온갖 기척을 느껴 보았지만, 이렇게 요상 야릇한 느낌은 처음이었다. 대체 어떤 가공할 마물이 나타났기에 이런 감각이?

그런데 막상 돌아보니 악마는 없고 대신 얼굴을 한껏 붉힌 채 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계집애 같은 소년이 있을 뿐이다.

'컥! 저 새끼 표정 왜 저래?'

순간 레펜하르트는 전신에 개미로 기어 다니는 듯한 느낌에 치를 떨었다. 이유는 모르겠다. 그런데 왠지 기분이 이상하게 좋지 않다. 뭐랄까, 덤벼드는 악마들보다도 저 얼굴 붉히는 예쁘장한 소년이 더 무섭달까?

뭐, 실란이 오해의 소지가 다분한 말을 내뱉은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고 그가 남들과 다른 성적 취향을 지닌 것은 아니었다. 단지 이 소녀 같아 보이는 소년은 순수하게, 정말 순수하게 남성적 향기가 풀풀 넘치는 레펜하르트의 몸을 보고 감탄한 것뿐이었다.

실란 필 마르시스.

필라넨스 교단의 고위 성직자인 이 소년은 어릴 적 부모를 잃고 운 좋게 교단의 고아원에 거두어져 유년기를 보냈다. 어릴 적부터 병약하고 여자애처럼 생겼던 덕분에 다른 고아들의 놀림도 많이 받았다. 하지만 생긴 것과 달리 어린 실란은 은근히 독종이었다. 한 대 맞으면 두 대 때리고, 두 대 맞으면 세 번 물고 늘어지는 독사 같은 성격의 소유자였다.

성깔 덕분에 실란은 그럭저럭 평온했던 어린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그리고 10대의 나이에 접어들었다.

10대라면 누구나 미래의 꿈을 가지는 시기다. 그리고 교단의 고아들 대부분이 그렇듯, 실란의 꿈 역시 필라넨스를 섬기는 성직자가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꿈은 다른 소년들과는 조금 달랐다.

워낙 여자 같다는 소리만 듣고 자란 실란은 교단의 무투승, 육체로 신앙을 증거하는 몽크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남성미 가득한 육체, 호탕한 웃음소리, 굵은 음성, 모든 것이 그가 갖지 못한 것이었다. 사실 사랑과 미의 여신, 필라넨스 교단 내에서 몽크의 지위는 꽤나 낮은 것이었지만 (아름답지 않으니까!) 어린 실란에겐 그들이야말로 이상형 중의 이상형이었다.

그런데 다들 성장기로 들어서며 문제가 생겼다.

2차 성징, 사춘기에 들어선 남자애라면 당연 키가 숙숙 크고 골격이 커지며 몸이 단단해지기 마련이다. 좀 이른 아이들은 거뭇하게 수염이 나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다른 아이들이 모두 남자다운 몸이 되고 변성기가 찾아올 때에도 실란은 여전했다. 얇고 부드러운 몸매, 가는 목소리, 여전히 미모의 소녀처럼만 보일 뿐이었다.

이윽고 열두 살이 된 실란은 신성력의 소질을 보여 견습 신관으로 필라넨스 교단에 입교하게 되었다. 신관의 위계를 받은 그는 모든 고아들의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남들 모두 축하한다며 기뻐할 때, 실란 혼자 좌절하며 몰래 울었다. 그토록 꿈꾸던 몽크로의 길이 아득히 멀어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어린 나이에도 실란은 그저 좌절하고만 있지 않았다.

여신께서도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세상은 노력하는 자에게 보답하는 법이라고.

그는 진취적인 성격이었다. 열심히 노력하면 언젠가 자신도 근육질의 남자다운 몸매로 변할 것이라 생각했다.

틈만 나면 몰래몰래 몽크들이 훈련하는 곳을 훔쳐보았다. 그리고 그들의 근육 트레이닝을 열심히 보고 배웠다.

그리고 배운 대로 행했다. 허약한 몸임에도 불구하고 정말 죽어라 근육 단련에 힘을 쏟았다. 매일매일 근육 트레이닝을 하고 몸이 망가지면 그때마다 신성력으로 다시 치유하며 또 오버 트레이닝을 해 갔다.

그러기를 5년째, 과연 여신께서 빈말하시진 않았다. 그의 노력은 확실한 보답으로 돌아왔다.

단, 그 보답이 꼭 원하는 대로 돌아오지는 않았다.

정작 늘라는 근육은 안 늘고, 대신 매일매일 필사적으로 시전해 온 신성력이 어마어마하게 늘어 버린 것이다. 이것이 고작 10대 나이에 가공할 신성력을 가져 고위 성직자가 된 실란의 비밀 아닌 비밀이었다.

그런 실란의 눈에 지금 이제껏 봐 왔던 몽크승조차도 아득히 능가하는 완벽한 몸이 나타난 것이다. 원체 허구한 날 남의 근육 부러워하며 몸 좋은 사람만 나타나면 뚫어져라 쳐다보던 실란이었다. 근육은 없어도 보는 안목만은 날로 늘어, 레펜하르트의 몸이 얼마나 강력하고 얼마나 완벽한지 단숨에 알 수 있었다. 눈이 돌아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물론 실란의 저 기나긴 과거지사 따위 레펜하르트는 전혀 모른다. 당연히 기분이 찜찜할 수밖에 없다.

'끄응....'

한창 자신이 익힌 무술의 위력을 실험하며 갈고 닦는 재미에 빠져 있던 레펜하르트였다. 흥분한 나머지 꽤나 정신없이 날뛴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데 저 눈빛을 보니 바로 등골이 시원해지며 머리가 차가워진다.

그는 혀를 찼다.

'끙, 마법사는 언제나 냉정해야 하거늘 이 무슨 추태인가.'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실란은 레펜하르트에게 도움을 준 셈이 되었다. 냉정을 되찾은 그가 간결한 동작으로 남은 악마들을 분쇄해 가기 시작했다.

☆ ☆ ☆

악마들을 처리한 뒤, 레펜하르트는 남은 일행을 이끌고 안전 구역으로 향했다.

던전 내에 정해진 안전지대라는 것이 있을 리 없지만, 그래도 중간중간에 차원 간 기류의 흐름이 꼬여 마물들이 가까이 하기 꺼려하는 구역은 분명 있다. 이미 이곳 팔톤의 모든 시스템을 다 파악하고 있는 그였다. 쉽게 근처에 있는 안전한 장소를 찾을 수 있었다.

기절한 토드와 에드워드 경을 레펜하르트가 짊어지고, 오크 노예 셋이 각자 스테반과 살아남은 두 기사를 한 명씩 옮겼다. 석실 안으로 들어와 부상자들을 뉘이고 모닥불을 피워 온기를 확보하고 나니, 그제야 기사들이 하나둘 깨어나기 시작했다.

"으으음... 대체 여기는?"

체력 좋은 에드워드 경이 먼저 일어나 주위를 살핀다. 의아해하는 그에게 실란이 잽싸게 방금 있었던 일을 설명해 주었다.

"허어!"

에드워드 경은 감탄을 터트리며 새삼스러운 눈으로 레펜하르트를 바라보았다. 두껍게 옷을 껴입고 있어 그냥 덩치 좋은 정도로만 봤는데, 지금 보니 전신이 극한까지 단련된 것이 결코 예사로운 몸이 아니었다.

"무인을 몰라 뵈었군. 이름을 물어도 되겠소?"

육포를 뜯으며 쉬고 있던 레펜하르트가 시큰둥한 얼굴로 중년 기사를 바라보았다.

"내 이름? 레펜...."

막 이름을 말해 주려는데, 생각해 보니 이미 토드에게 이 이름을 말해 버렸다. 아무래도 수상쩍게 여길 것이 뻔하다. 그는 슬그머니 뒷말을 흐렸다.

"...이다."

반말로 끝맺은 말투였지만, 너무 자연스러워 에드워드 경은 미처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다. 그는 알고 있던 바실리 왕국 내의 무투가들을 떠올려 보았다.

'레펜...이라?'

레펜이라는 무투가의 이름은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진정한 강자라면 이름이 알려지지 않을 리가 없는데?

그때 의식이 돌아온 스테반이 신음을 흘렸다.

"으으으...."

스테반은 주저앉아 머리를 감쌌다. 아직도 골이 울렸다. 그토록 호쾌하게 날아가 돌벽이랑 포옹을 했는데 멀쩡할 리가 없는 것이다. 미스릴 합금 갑옷이 박살 날 정도의 위력이었다. 큰 부상이 없다는 것부터가 이미 그가 얼마나 단련된 기사인지 증명해 주는 것이나 다름없다.

"스테반 공자님!"

"아, 에드워드 경. 상황이 어찌 된 거요?"

에드워드가 그를 부축하고, 상황을 설명한다. 이야기를 들은 스테반이 인상을 쓰며 레펜하르트에게 물었다.

"그대의 가문을 물어도 되겠나?"

"가문? 그딴 것 없는데."

"...평민이었나?"

혹시 귀족가의 무인이 수행차 여행을 다니는 것인가 했더니 그냥 야인野人이었나 보다. 스테반의 표정이 더더욱 일그러졌다. 고귀한 기사가 야인의 도움을 받다니, 있을 수 없는 수치였다.

수치와 함께 혼란이 찾아왔다. 뿌리도 없는 평민이 위대한 무의 가르침을 제대로 받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 자신들이 감당하지 못한 악마들을 홀로 해치웠다고?

'아무래도 우리가 다 해치워 놓은 그 악마 놈을 마무리만 했나 보군.'

스테반은 힐끔 실란을 바라보며 상황을 파악했다. 저 어린 성직자 소년이 무인의 전투를 제대로 볼 안목 따위 있을 리 없다. 그저 죽을 뻔하다 구원을 받았으니 어설픈 주먹질, 발길질도 투신처럼 보였겠지. 이후에 나타났다는 악마는 전부 하급한 놈들이었을 테고.

공격 한번 제대로 명중시키지 못했던 주제에 스테반의 머릿속에 타그렐은 어느새 자신들이 거의 다 해치운 악마로 둔갑해 있었다. 만족할 만한 결론을 내리자 스테반의 표정이 풀렸다.

"한 수 재간이 있었던 모양이군. 도움이 되었다."

뿌리 없이 떠도는 야인이지만 그래도 도움을 받은 것은 분명하니, 기사로서 그 공을 인정해 줄 아량은 있었다.

물론 스테반 딴에는 감사를 표한 것이지만 듣는 레펜하르트 입장에선 그게 아니다.

자연히 대답이 퉁명스러워졌다.

"그러는 그 쪽은 그 한 수 재간도 없었나 보군."

"뭣이?"

기사의 감사를 듣고도 감격하진 못할망정 저런 태도라니! 발끈하며 스테반이 허리로 손을 가져갔다. 그리고 아차했다. 그의 검은 조금 전 타그렐에게 처맞을 때 어디론가 날아가 버린 것이다.

머뭇거리는 사이 에드워드 경이 나섰다.

"무례하오! 알티온 후작가에 경의를 갖추시오!"

"...."

들은 척 만 척 레펜하르트는 육포만 뜯었다. 신경 쓰기도 귀찮았다. 혹시나 저들이 열 받아서 공격할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긴 했지만.

'어차피 이 몸뚱이는 칼도 튕기는데, 뭘.'

그래도 에드워드 경은 은인에게 칼질할 정도로 몰상식한 인간은 아니었다. 그는 꽤나 경우가 바른 인간이었던 것이다.

에드워드 경이 스테반을 돌아보며 그를 달랬다.

"야인이 어찌 제대로 된 예법을 알겠습니까? 참으시지요."

문제는 그 경우라는 게 기사 기준이라는 것이지만.

"어쨌건 저자가 도움을 준 것은 분명하지 않습니까?"

신음을 흘리며 스테반은 고개를 돌렸다. 듣고 보니 에드워드 경의 말이 옳았다. 진정한 뒤 그는 눈앞의 야인을 '용서'하기로 결심했다.

"무지가 죄는 아닐 테지. 공이 있으니 그대의 무례, 관대하게 용서토록 하겠다."

"...그러시든가."

다시 스테반이 발끈했지만 레펜하르트는 무시했다. 솔직히 건방진 귀족가 기사가 설치는 꼴은 전생에도 수두룩하게 봐 와서 그리 화가 나지도 않았다. 그리고 까놓고 말하면....

'나도 어릴 적엔 저랬으니까.'

너무 어린 놈이 재능을 타고나서 주위에서 마냥 떠받들어 주면 어쩔 수 없이 저렇게 된다. 레펜하르트 자신도 나이 먹고 철들기 전까진 한없이 오만불손한 놈이었다. 남 탓할 자격이 없달까?

'나이 먹으면 철들겠지.'

안 들면 말고. 자기 새끼도 아닌데 왜 신경 쓰나? 저렇게 살다 죽겠지.

더 이상 레펜하르트와 상종하기 싫었는지 스테반이 렐시아가 있는 쪽으로 걸어가 버렸다. 반면 에드워드 경은 눈앞의 이 여행자에게 계속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경험 많은 기사인 그에겐 레펜하르트의 저 탄탄한 몸이 단순 노동만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임을 알아볼 안목이 있었다.

"가문이 없다라. 그렇다면 어느 분에게 가르침을 받았는지는 알려 줄 수 있겠소?

"그냥 오며 가며 익힌 정도다."

레펜하르트는 굳이 제라드의 이름을 숨겼다. 제라드의 명성은 너무 높다. 마법의 힘을 되찾기 전에 과하게 주목받는 상황은 피하는 것이 좋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인간에게 내 행적 알리고 싶지 않아!'

혹시나 사부란 작자가 '제자야! 새로운 수련법을 개발했다!'라며 찾아올지도 모르는 것이다. 하도 고생을 해서인지 레펜하르트의 제라드 기피증은 거의 피해망상 수준이 되어 있었다.

"그래도 그런 것치고는 너무...."

"아아, 신경 끄고 부상자나 돌보지? 지금 저들이 더 급하지 않나?"

귀찮아진 레펜하르트가 말을 막고 손사래를 쳤다. 안 그래도 아직 살아남은 기사 두 명은 정신을 차리지 못한 상태였다. 실란이 열심히 치유술을 펼치고 있었지만 여전히 혼절 중이다.

"그건 그렇구려. 다시 한 번 알티온의 이름으로 도움에 감사하는 바이오."

더 이상 말을 섞지 않고 에드워드 경은 손을 가슴에 올려 예의를 보였다. 그리고 물러나며 미심쩍은 눈으로 레펜하르트를 바라보았다.

슬슬 그도 이 여행자 청년이 반말로 기사인 자신들을 대하고 있다는 것은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딱히 지적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너무 자연스럽군.'

일단 마각을 드러내니 엄청나게 오만한 말투. 게다가 본인은 자신의 말투가 오만하다는 자각도 없어 보인다. 마치 스테반 같달까? 저건 높은 자리에서 아랫것들만 부리다 보니 자연스럽게 생긴 습관이다.

'하지만 젊은 놈이 저렇게까지 오만할 수 있나?'

저 스테반조차도 에드워드 경에겐 반공대를 한다. 일단 나이가 있으니까.

그런데 저놈은 20대 초반인 주제에 마흔이 넘은 에드워드에게도 막말을 하는 것이다. 나이조차 무시할 정도면 엄청나게 막돼먹은 인간이거나....

'혹시 다른 나라 왕족 정도 될지도 모르지.'

어느 쪽이건 상대해 봐야 피곤할 뿐이다. 적어도 저 청년이 자신들조차 감당하지 못했던 악마를 처리할 만큼 강하다는 것만은 분명하니까, 지금 상황에서 적으로 돌려서 좋을 것이 없었다. 스테반과 달리 꽤나 주제 파악을 하고 있는 에드워드 경이었다.

'하지만 저 말투는 오만하다기보다는 차라리....'

그래, 뭔지 알 것 같다. 저건 자신보다 나이 어린 이를 대하는 말투다.

신기한 자다. 새삼스러운 눈으로 에드워드는 육포를 뜯고 있는 레펜하르트의 등을 바라보았다.

☆ ☆ ☆

실란이 땀을 뻘뻘 흘리며 치유술을 쓴 덕분에, 기사들도 슬슬 정신을 차렸다. 죽어 간 동료들을 생각하며 기사들이 눈시울을 붉혔다.

"무사하셨군요! 다행입니다, 스테반 공자님!"

"크윽! 베르토 경이 죽다니!"

"이 더러운 악마 놈들!"

슬퍼하는 기사들을 보며 스테반이 부하들을 위로하고 독려한다.

"슬퍼 마라. 그들은 기사답게 싸우다 죽었다. 그들의 용맹함을 아레스께서 기억하실 테니 그 넋이 구원받을 것이다. 또한 그들의 용기를 알티온 후작가가 세세토록 기릴 것이다. 그들은 죽었으되, 기사의 명예는 영원하리라."

주군의 위로에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고, 공자님!"

"알겠습니다, 흐, 흐흑!"

살아남은 기사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투신 아레스에게 기도를 올리고 죽은 이들의 넋을 위로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토드도 한숨을 쉬며 명상에 잠겨 마력을 다시 채웠다. 전체적으로 침울한 분위기가 석실을 가득 맴돌았다.

'으음....'

실란은 뭘 해야 할지 몰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치유술을 다 쓰고 나자 할 일이 없어진 것이다. 주신 세이어나 투신 아레스의 신관이었다면 저기서 예배를 주관, 죽어간 기사들의 영혼을 기리는 미사를 올렸겠지만 실란은 사랑과 미, 자애의 여신 필라넨스를 섬기는 성직자였다. 여인의 죽음이라면 모를까 전사의 죽음 앞에서는 할 일이 없다.

'그렇다고 저 사이에 껴서 같이 슬퍼하자니 또 이상하고.'

사람이 죽었는데 너무 태연해하는 것도 좀 그렇긴 하지만, 실란은 저 기사들의 죽음에 별 감흥이 없었다. 직업상 원체 죽는 사람들을 많이 봐 온 데다 별로 친하지도 않았던 이들이다. 죽은 이들이 필라넨스를 섬기는 신도였다면 이야기가 다르겠지만, 기사들은 보통 투신 아레스를 섬긴다.

그리고 그에겐, 아까부터 관심이 지대해 어떻게든 말 걸 기회만 노리고 있는 대상이 있었다. 실란이 슬그머니 레펜하르트에게로 다가갔다.

"저기, 레펜 씨라고 하셨죠?"

"응? 왜?"

갑자기 다가와 질문을 하는 실란을 보며 레펜하르트는 자기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안 그래도 아까의 그 이상야릇한 느낌 때문에 영 꺼려지던 놈이었다.

'얘가 왜 이렇게 갑자기 친한 척을 하지?'

레펜하르트를 올려다보며 실란이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물었다.

"키가 얼마나 되세요?"

"192쯤 될라나...."

"체중은요?"

"그, 글쎄 제대로 안 재 봐서 그건 잘...."

음, 한 110에서 120 정도는 되겠지? 대충 바위 같은 거 들다 보면 신체 균형 잡으면서 자기 체중이 대충 감이 온다. 겉으로는 전혀 살쪄 보이지 않지만, 우락부락한 근육이 알차게 박혀 있어 보기보다 훨씬 더 나가는 몸이었다.

'우와, 내 몸이지만 정말 우악스럽구나.'

막상 수치로 옮기고 나니 실감이 난다. 체중이 0.1톤이 넘다니! 왠지 사람 몸무게 같지 않잖아? 이 정도면 예전 몸의 두 배에 가깝다.

"어떤 수련을 해서 그런 몸을 만드신 건가요?"

"그냥... 많이 맞고 많이 먹고 많이 들었는데?"

진실을 꿰뚫는 솔직 담백한 답변이었지만 실란은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역시, 무인들은 자기 수행법을 함부로 외부에 알리지 않는다더니...."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지만 굳이 시정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레펜하르트는 몸을 일으켰다. 애들도 대충 구출했으니 이제 여기 온 목적을 달성해야 할 차례다.

'돈 벌어야지, 돈!'

그래야 사랑스러운 시리스를 데리고 올 수 있는 것이다. 레펜하르트는 돈독이 올라 벌게진 눈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물론 겉보기론 참 진지한 표정이었다.

"그럼 난 출구를 정찰하고 오겠다."

그러자 기사들 대부분이 감탄한 눈으로 레펜하르트를 바라보았다. 이 위험한 마굴 속에서 동료를 위해 척후라는 위험한 역할을 자청하다니! 천한 혈통인 주제에 제법 기사의 도리를 알고 있지 않은가?

실란이 반색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저도 같이 갈게요!"

"뭔 일 생겨서 여기 부상자라도 나오면 어쩌려고?"

시큰둥한 대꾸에 실란이 풀 죽어 다시 주저앉았다.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치유술사는 본진에 있어야지 척후를 따라가서는 안 되는 것이다. 물론 레펜하르트는 이들 몰래 던전을 털 생각이었으니 누군가 따라오면 곤란해서 한 소리였지만.

그때, 스테반이 몸을 일으켰다.

"내가 가지, 렐시아는 여기서 이들을 돕거라."

"네, 주인님."

엘프 여인이 공손이 고개를 숙인다. 스테반이 레펜하르트를 노려보았다.

"문제없겠지?"

'얘는 왜 갑자기 따라오겠다는 거야?'

레펜하르트는 속으로 혀를 찼다. 하지만 여기서 딱히 스테반을 제지할 핑계가 떠오르질 않는다. 그는 머리를 긁다가 대충 대꾸하며 몸을 돌렸다.

"뭐, 좋을 대로."

2

스테반이 굳이 레펜하르트를 따라나선 것은 혼자 정찰을 하면 위험할 수 있으니 돕겠다든가, 아니면 수하들을 지위하는 몸으로서 직접 위험한 곳을 앞장선다든가 하는 그런 대견한 이유가 아니었다.

'야인에게 도움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할 순 없다!'

아무리 우연이라고는 해도, 자신이 비천한 혈통에게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은 지워지지 않는다. 이대로 아무 일 없이 지나가 버리면 저 야인은 자신이 정말로 기사에게 도움을 준 줄 알고 있을 것이다. 주제도 모르고 혼자 척후를 나가겠다는 것부터가 기사들을 얼마나 우습게 보고 있는지 증명해 주고 있다.

안 그래도 인간이 건방지게 변해 버린 것이 영 거슬리던 참이었다. 하지만 그는 경우 바른 기사, 여기서 저놈의 무례함을 직접 징치하는 것은 기사답지 못했다. 그래서 따라왔다. 악마를 만나 허우적대는 저놈을 구해 주고, 주제 파악을 시켜 줄 생각이었다.

검을 쥔 채 (에드워드 경이 챙겨 둔 예비 검을 들고 온 상태였다.) 스테반은 연신 속으로 되뇌었다.

'어서 아무 악마나 하나 나와라. 잽싸게 해치워 주마.'

물론 레펜하르트는 스테반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몰랐다. 정확히 말하면 관심도 없었다.

그저 예전의 기억을 따라 돈 되는 석실을 열심히 찾을 뿐이었다.

횃불을 든 채 어두운 통로를 조심조심 이동한다. 그러던 중 문득 레펜하르트의 표정이 밝아졌다.

'오! 저기군!'

통로 왼쪽에 반쯤 무너진 암실이 보인다. 그리고 그 속에서 마물들이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 스테반이 반색을 하며 검투 자세를 취했다.

"나왔구나!"

알티온 가문의 화려한 검술을 보여 주마! 라며 스테반이 막 몸을 날리려던 찰나였다.

퍽!

뒷목에 강렬한 충격이 오며 바로 의식이 흐려졌다.

'뭐, 뭐지?'

☆ ☆ ☆

'좀 자고 있어라.'

가벼운 뒷목 치기 한 방으로 레펜하르트는 이 귀찮은 짐덩이를 혼절시켰다. 그리고 덤벼드는 마물들도 마저 처리했다. 전투랄 것도 없었으니 묘사할 것도 없다. 대충 퍽퍽 패 버리고 그는 바로 방 안으로 뛰어들었다.

석실은 반쯤 허물어져 있고 사방에 금속으로 된 옷장 비슷한 것이 놓여 있었다. 아마도 고대에 창고로 쓰이던 곳인 듯했다. 규모가 상당해, 베이스캠프로 삼았던 그 석실의 열 배도 넘는 곳이었다.

제일 먼저 문 옆에 쌓인 상자들부터 까 본다. 오랜 세월 많은 것들이 풍화되었지만 그중에서도 여전히 빛을 발하는 것들이 있다.

"좋아, 좋아. 은의 시대 금화가 쉰 닢에...."

은의 시대 금화는 순도가 높은 데다 고고학적 가치가 있어 현 시대 금화의 대여섯 배 가격으로 거래된다. 슥슥 쓸어 모은 뒤 레펜하르트가 금속 테이블 서랍을 하나하나 열어 보았다.

"분명 여기였는데...."

잠시 후, 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있다! 무한의 주머니."

어린아이 머리통만 한 백 팩 하나를 들고 레펜하르트는 싱글벙글 웃었다.

은의 시대 기물 중에서도 특히 고가에 거래되는 유물. 무한의 주머니.

정확히는 무한으로 들어가는 것은 아니고 그 안에 공간 왜곡이 걸려 있어 원래 주머니 부피의 열 배까지 물품을 넣을 수 있었다. 무게 역시 10분의 1로 줄어드는 이 마도구는 현 시대의 마학으로는 결코 재현할 수 없는 물건이었다.

현 시대의 마법이 결코 건드릴 수 없는, 신에게만 허용된 영역이 있으니 바로 시간과 공간, 물질에 직접 개입하는 부분이다.

은의 시대에는 시간도 되돌리고 공간을 뛰어넘고, 물질 그 자체를 변화해 새로운 형질로 변하는 엄청난 마법이 흔했다고 하지만 9서클이 한계인 현 대륙의 마법학으로는 절대 불가능했다. 왕년 10서클의 경지에 올랐던 레펜하르트만이 몇 년을 연구한 끝에 간신히 부분 공간 왜곡으로 부피를 두 배로 늘려 주는 무한의 주머니를 만들어 본 정도다.

"흐흐, 분명 이 옆에 하나 더 있었는데?"

방을 마저 뒤져 레펜하르트는 백 팩을 더 찾아냈다. 이 무한의 주머니가 엄청난 마도구이긴 하지만 아티팩트(단 하나밖에 없는 유물)라 할 정도는 아니고, 어지간한 던전이면 한두 개씩은 나오는 물건이었다. 은의 시대에선 모든 군인들에게 기본 장비로 제공된 탓이다.

레펜하르트는 허리 뒤춤에 무한의 주머니를 착용했다. 그리고 근처 굴러다니는 천으로 허리를 감싸 백 팩을 감췄다. 자신이 몰래 유물들을 챙긴 것이 들통 나면 안 되는 것이다. 손바닥만 한 백 팩이라―그의 손바닥은 어린아이 머리통보다 크다― 천으로 감싸니 전혀 티가 나지 않았다. 어차피 전투 중에 바지도 여기저기 찢어져 있었기에 허리에 천을 두른다 해도 어색하게 여길 사람은 없었다.

준비를 마치고 다시 열심히 방 안을 뒤적뒤적. 석실이 넓다 하지만 어디에 뭐가 있는지 알고 있으니 뒤지는 속도도 장난 아니게 빨랐다.

'천상의 화로에, 회수의 단검에, 마정의 사파이어에... 후후, 비싼 거 많구먼.'

은의 시대 유물들을 보이는 대로 챙겨 허리 뒤의 백 팩에 넣는다. 원래대로라면 잡동사니나 좀 넣고 말 사이즈이지만 사실은 어지간히 큰 배낭보다도 부피가 더 크다. 넣는 족족 쏙쏙 들어갔다.

그렇게 레펜하르트는 열심히 유물들을 쓸어 담았다. 이 방 안에 있는 것만 갖다 팔아도 어지간한 엘프 노예 대여섯 명은 살 수 있을 거금이 되겠지만....

'이왕이면 시리스 좋은 거 먹이고 예쁜 거 입혀야지. 좀 더 챙기자.'

다음 장소로 향하기 위해 석실을 나서는데, 때마침 으으 하는 신음과 함께 스테반이 몸을 일으켰다.

"무, 무슨 일이지?"

레펜하르트가 천연덕스럽게 바닥을 가리켰다. 조금 전 그에게 덤벼들었다 뼈와 살이 분리된 악마들의 잔해가 흥건히 고여 있는 곳이었다.

"이놈들이 그쪽 뒤통수를 치더라고. 한 방에 기절했어, 댁."

"으윽...."

스테반은 신음을 흘렸다. 이 악마들이 비겁하게 뒤에서 기습을 했다니! 절로 이가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또 야인에게 도움을 받아 버렸다. 수치로 가슴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젠장, 오늘따라 왜 이리 일이 꼬이는지 모르겠네.'

저 여행자 청년이 저리 간단히 처리한 걸 보면 보나마나 저급한 악마라고 생각했다. 그 저급한 악마가 자신을 한 방에 기절시켰다는 점은 싹 무시했다. 그저 자신이 방심한 탓이라고만 여겼다. 당연히 자신을 기절시킨 게 저 야인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은 존재치도 않았다.

레펜하르트가 앞장서 통로를 걷기 시작했다. 뒤를 따르며 스테반이 계속 이를 갈며 띄엄띄엄 말했다.

"도, 도움에 감사한다."

어떤 경우에도 도리는 지켜야 하는 법, 그것이 그가 배운 기사도였다. 후딱 인사하고 스테반은 통로를 앞장서 나갔다. 역시나 또다시 마물들이 나타났다. 그의 두 눈이 불타올랐다. 이번에야말로, 이놈들을 해치워 진정한 기사의 힘을 보여 주겠다!

"아니, 뭐 별로...."

앞장서는 스테반과 나타난 악마들을 번갈아 보며 레펜하르트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자기가 후려갈겨 놓고 감사 인사를 받자니 참 겸연쩍었다. 특히나....

'또 기절시켜야 하는 판에 말이지.'

퍼억!

"꾸에엑!"

다시 스테반은 혼절해 버렸다. 나타난 악마의 등 뒤에 새로운 석실, 레펜하르트의 다음 목적지가 있었던 것이다. 응당 시선 차단하고 물건을 챙겨야 하지 않겠는가!

뭐, 자꾸 이렇게 연수에 충격을 주다 보면 척추 신경 쪽에 흔적이 남아 어디 잘못될 가능성도 많지만....

'잘사는 놈이니까 별문제 없겠지.'

그렇게 레펜하르트는 다시 지하 2층을 싹싹 뒤져서 쓸 만한 것들을 건져 냈다. 그 와중에 스테반은 세 차례나 더 기절해야 했다. 이 정도 당했으면 슬슬 의심할 법도 하건만 이 자신만의 세상에서 사는 청년 기사는 '이상하다. 방심도 안 했는데 왜 기척을 못 느끼지? 요새 내가 몸이 허한가? 돌아가면 보약 좀 지어 먹어야겠군.' 정도의 생각밖에 하지 못했다.

2층을 반쯤 돌자 백 팩이 꽉 찼다. 일부러 비싼 것들만 챙겼는데도 그렇다. 아무리 무한의 주머니라지만, 원체 기본적으로 작은 백 팩이라 허용 용량이 얼마 안 되었던 것이다. 예전에야 스무 배까지도 들어가는 커다란 무한의 배낭을 짊어지고 와 별문제 없이 다 챙길 수 있었지만 지금은 아무래도 무리였다. 더 이상은 숨길 방도가 없다.

'나중에 다시 오지, 뭐.'

레펜하르트는 미련을 버렸다. 어차피 지금도 목표 금액은 한참 초월했다. 게다가 이곳 지하 3층은 시리스와의 추억이 어린 곳이었다. 나중에 둘이 다시 탐사하면서 과거의 추억을 재현하는 것도 나름 로맨틱하지 않겠는가!

살벌한 던전 한복판에서 로맨틱을 찾겠다는 얼토당토않은 생각을 하며 레펜하르트는 발걸음을 돌렸다.

'슬슬 얘들도 밖에 내보내 줘야지.'

"대충 통로가 확보된 것 같군. 돌아가자."

"그, 그러지."

한 것이라곤 기절뿐인 스테반이 어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 ☆ ☆

어두운 통로 사이로 조심스러운 발걸음 소리가 이어진다. 기사들이 앞장서고 토드며 실란, 레펜하르트와 오크 노예들이 뒤를 따르는 대형이었다. 비록 레펜하르트의 도움을 받긴 했지만, 이 유적 탐사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알티온 후작가였다. 정체 모를 뜨내기에게 전방을 맡길 수는 없는 것이다.

레펜하르트는 후위에서 실란과 나란히 걷고 있었다. 이 미소녀틱한 미소년은 아까부터 계속 그를 살갑게 대하며 이것저것 물어 그를 귀찮게 하는 중이었다.

"레펜 씨. 혹시 어느 나라 왕족이신가요?"

"아니, 그냥 평민인데?"

"그래요? 하지만 그런 것치고는...."

"왜? 평민이 실력이 높은 것이 이상한가?"

얘도 계급의식이 뿌리까지 박혀 있는 놈인가 싶어 레펜하르트가 인상을 쓰려던 차였다. 실란이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게 아니라 레펜 씨 태도가 너무 자연스러워서요."

"응?"

"무인이니까 자신감이 있는 것이야 당연하지만, 그래서 스테반 경에게 하대하는 건 이해하겠지만...."

실란이 본 레펜하르트의 무위는 단호의 기사라는 저 스테반보다도 훨씬 위였다. 높은 경지에 오른 비천한 출신의 무인이 귀족 출신의 하수를 대할 때 무례해지는 것은, 흔하다 할 정도는 아니어도 그렇게 보기 드문 일만도 아니다. 이해할 수 있다.

그렇지만 에드워드 경을 대할 때도 하대하는 것은 좀 어색했다. 성직자인 자신에게 하대하는 것이야 나이가 어려서 그렇다 쳐도, 나이 많은 에드워드 경에게 반말할 정도로 막 사는 인간처럼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 그런가?"

새삼 성찰의 기회가 되어 레펜하르트는 자신을 되돌아보았다. 죽을 때 그의 나이가 이미 50대, 그렇다 보니 저 중년의 에드워드 경도 어려 보였다. 그래서 평소처럼 대했는데 생각해 보니 얼마나 어이없어 보였을지 새삼 깨달았다.

'그래, 난 이제 스물두 살이지.'

그는 순순히 실란의 말에 동의했다. 그리고 대충 핑계를 댔다.

"내가 워낙 사람을 안 만나고 살아서 예법에 좀 약해서 그래. 앞으론 조심해야겠네."

다행히 실란도 별 의심은 안 하는 것 같았다.

"그래요? 하긴,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렇게 스테반 일행은 조심스레 팔톤 유적, 지하 2층을 탐사하며 지나갔다. 그 와중에 레펜하르트가 '버리고' 간 유물들을 챙기며 돈 벌었다고 좋아하기도 했다. 살짝 아까운 기분도 들었지만 그냥 내버려 두었다.

'어차피 알맹이는 다 챙겼고, 이것들도 본전은 뽑아야지.'

레펜하르트가 쓸어버린 지역을 지나니 다시 마물들이 출현하기 시작했다. 기사들도 이번엔 방심치 않고 침착하게 악마들을 상대하며 길을 뚫었다. 딱히 그가 손을 쓸 필요는 없었다. 이미 지하 2층에서 제일 강한 베이터나 타그렐이 처리되어 급수가 낮은 악마들만 남아 있었던 덕이었다.

마침내 통로 끝에 커다란 문양이 새겨진 금속의 문이 나타났다. 지상으로 통하는 계단이 있는 곳이었다.

스테반이 긴장한 얼굴로 문을 열고, 다른 기사들도 한껏 경계하며 안을 살핀다. 물론 레펜하르트는 전혀 긴장하지 않았다. 그는 이미 저 안이 텅 비었다는 걸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에엥?'

안을 들여다본 레펜하르트가 당황해 눈을 크게 떴다.

"크아아아!"

위로 향하는 계단, 바로 앞에 거대한 염소 머리의 악마가 빛의 사슬에 묶인 채 포효를 터트리고 있었다.

☆ ☆ ☆

염소 머리의 악마가 머리를 흔든다. 굽어진 두 뿔 사이에서 푸른 전격이 방전한다. 악마가 몸부림칠 때마다 주위로 선홍색 화염이 일어나 화끈한 열기를 뿌렸다. 오른손에 든 검에서 시꺼먼 연기가 쉴 새 없이 흘러나온다.

"크오오오!"

거구로 유명한 몬스터, 오우거보다도 더 거대한 육체에서 검붉은 마기가 사정없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눈에 보일 정도로 구체화된 어마어마한 마기였다. 마의 기운이 해일처럼 스테반 일행을 덮쳐 가자 다들 비명을 질렀다.

"으힉!"

"으아악!"

그 가공할 마기에 싸이니 절로 공포가 일어난다. 실란이 재빨리 기도를 해 일행의 정신을 보호했다. 덕분에 패닉에 빠지진 않았지만, 다들 두려움에 젖어 뒷걸음질을 쳤다. 이미 오크 노예들은 거품을 물고 기절해 있었고 기사나 토드도 간신히 정신을 부여잡는 것이 전부였다. 신성력의 주체이기에 남들보다 공포에 강한 실란조차도 이빨이 딱딱 부딪히고 있었다.

스테반이 경악에 차 소리쳤다.

"그렐비스트!"

이계의 마물 중에서도 최상위에 속하는 악마 중의 악마가 그들의 출로를 막고서 포효하고 있는 것이다. 잘 보니 사지에 빛의 사슬이 묶여 있고, 그 사슬이 계단 뒤쪽의 마법진과 연결되어 있었다. 덕분에 그렐비스트는 스테반 일행에게 공격을 가하지 못하고 그저 울부짖으며 분노만 터트리고 있었다.

에드워드 경이 상황을 파악하며 외쳤다.

"크윽! 저 악마가 이곳의 수호자였나!"

레펜하르트가 인상을 썼다.

'어라? 저게 왜 여기 있지?'

차원 틈새에서 고장 나 버린 은의 시대 유적은 가끔 그 강력한 마력으로 차원 간의 존재를 끌어당겨 방어 시스템에 흡수시키는 경우가 있다. 원래는 시스템 상의 모자란 부분을 자체적으로 보충하는 마법적 기능인데, 이것이 오작동되어 이계의 마물을 붙잡아 그 자리를 채워 버리는 것이다.

은의 시대에 잘 모르는 보통 유적 탐사자들은 유적을 지키려는 그 존재들을 던전의 수호자라 부르며 공포의 대상으로 여겼지만 레펜하르트는 진실을 알고 있었다. 저놈들, 사실은 잘 살다가 덥석 납치되어 무보수로 부려 먹히는 꽤나 서글픈 신세다.

'분명 예전에 왔을 땐 저런 놈이 없었는데?'

문득 그의 표정이 굳었다.

'아, 지금은 저게 아직 퇴치가 안 된 시간대구나!'

레펜하르트는 잠시 고민했다. 이대로 뚫고 가야 하나? 저 악마는 결코 만만한 놈이 아니었다. 유적의 시스템과 결합되어 버린 악마는 그냥 나타나는 마물과는 차원이 다른 강력한 존재가 된다. 그렐비스트 자체도 타그렐보다 훨씬 고위의 악마인데, 수호자가 된 지금은 더더욱 가공할 마기를 뿜고 있었다.

게다가 저놈은 과거에 오러 유저였던 클로드 경을 죽인 악마이기도 하다. 자신과 클로드 경 사이에 얼마나 실력 차이가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오러를 각성했다는 것만으로 속 편히 덤빌 상대는 아닌 것이다.

'으음....'

고민은 잠시 뿐, 레펜하르트는 깔끔하게 이쪽 길을 포기했다.

딱히 건질 것도 없는데 굳이 저놈을 상대할 필요가 없었다. 안 되면 그가 들어왔던 쪽으로 그냥 나가도 된다. 그쪽은 지하 1, 2층과 달리 직접 탐사했던 지역이라 마물들의 출현 조건이나 위치에 빠삭했다. 잘만 하면 전투 한번 안 하고 지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

"돌아갑시다. 이 전력으로 저놈을 상대하긴 힘들어요."

갑자기 도로 존댓말을 쓰는 레펜하르트를 보며 에드워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태도가 바뀌었지? 어쨌거나 지금은 그런 걸 신경 쓸 상황이 아니다. 경험 많은 기사답게 에드워드 경도 저 악마의 기세가 보통이 아님을 느낄 수 있었다. 피부로 느껴지는 마기부터가 비에타나 타그렐과는 차원이 달랐다. 하늘 높은 줄 모르는 스테반조차도 차라리 다른 출구를 찾자고 할 정도였다.

그렇게 처음으로 레펜하르트와 스테반 일행의 생각이 일치했다. 다들 미련 없이 발길을 돌리려던 차였다. 그때 기사 중 하나가 분위기 파악 못 하고 소리를 질렀다.

"공자님, 저 악마가 든 검을 보십시오!"

"응?"

의아해하며 스테반이 무심코 수하가 가리키는 방향을 본 순간이었다. 그렐비스트가 든 한 자루 롱 소드를 본 그가 경악하며 외쳤다.

"마검 알티온!"

검신을 장식한 보석과 세밀한 세공, 미스릴을 제련해 세운 섬세한 칼날. 검은 연기를 끝없이 내뿜고 있지만 그것은 틀림없는 알티온 가문의 보검이었다.

스테반이 걸음을 멈췄다.

드디어 찾아냈다. 그들이 그토록 바라던 것을.

"오오...!"

주저 없이 스테반이 검을 뽑고 전투태세를 갖췄다. 에드워드 경이 놀라 물었다.

"공자님? 설마 저 악마와 대적하실 생각이십니까?

"당연하지 않은가?"

"하, 하지만...."

에드워드 경은 다시 그렐비스트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가공할 마기였다. 사슬 덕에 무사한 것이지, 만약 저놈이 자유로웠다면 자신들은 한순간에 전멸했을 것이란 확신이 들 정도다.

"상대가 너무 강합니다. 일단 위치를 파악했으니 가문으로 돌아가서 좀 더 전력을 갖추는 것이 어떨지요?"

주군의 안위를 염려하는 충정의 목소리에 스테반이 버럭 성을 냈다.

"무슨 소리인가? 설마 그대는 저 악마의 손에 위대한 기사의 검이 더럽혀지고 있는 것을 그냥 두고 보겠단 말인가!"

스테반은 두 눈을 불태웠다. 이대로 가문으로 돌아가 손을 벌리자고? 그렇게 하면 더 이상 이 영광은 그의 것이 아니게 된다. 지금, 여기서 저 보검을 들고 귀환해야 진정한 명예와 영광을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이다!

물러설 수 없다.

절대 이대로 돌아갈 수 없다.

반드시 저 검을 되찾아야 한다.

비록 그것이 절대적 죽음의 손에 들려 있을지라도!

"다들 검을 들어라!"

항명을 용납지 않는 단호한 목소리가 기사들의 귓가를 때렸다. 기사들이 머뭇거린다. 겁쟁이들 같으니! 속으로 욕을 내뱉으며 스테반이 말을 이었다.

"저 괴물은 사슬에 묶여 있다. 위험하다면 안전권 밖으로 빠져나갈 수 있단 말이다. 네놈들은 묶여 있는 상대조차 두려워하는 겁쟁이란 말이냐!"

비록 욕심에 눈이 멀어 앞뒤 안 가리는 상태긴 하지만, 그래도 스테반은 유능한 기사였다. 그는 저 악마가 사슬에 묶여 행동반경이 좁다는 걸 인식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아주 승산이 없는 것도 아니다!

주군의 외침에 기사들도 용기를 얻었다. 다들 싸울 준비를 한다. 레펜하르트가 기가 막혀 에드워드를 말렸다.

"이봐요, 정말 저 괴물과 싸울 작정입니까?"

아무리 저 악마가 묶여 있다 해도, 사람의 목숨은 정작 전투에 들어가면 앗 하는 순간에 날아가는 법이다. 위험을 인지하고 도망갈 여유를 저 악마가 줄 것 같은가?

"승산이 없어요. 다들 죽을 텐데요?"

하지만 기사들의 고집은 꺾이지 않았다. 에드워드가 물끄러미 레펜하르트를 바라보았다.

"그대의 도움은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소. 하지만 결국은 명예를 모르는 야인일 뿐이구려."

그리고 무심하게 중얼거렸다.

"세상에는 목숨보다 우선시해야 할 것이 있는 법이오."

'아니, 그러니까 상대가 안 된다니까?'

타그렐도 못 잡은 것들이 저걸 무슨 수로 상대하려고? 참 말 어지간히도 안 들어먹는다.

스테반이 검을 세우고 기사들에게 소리 질렀다.

"알티온의 기사들아, 목숨을 걸고 그대들의 용맹을 보여라!"

"으아아아!"

"마법사 토드여, 원호를 준비하라!"

토드가 양손에 마력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마법사답게 안전한 원거리에서 마법만 난사하는 상황이 되니 도로 용기가 솟아난 모양이었다.

"필라넨스의 성직자여, 여신의 가호를!"

실란도 스테반의 말에 설득되었는지, 용감해진 얼굴로 기도를 올리기 시작한다. 여신의 축복이 기사들을 뒤덮고, 강력한 마법의 수호가 그들의 갑옷에 깃든다. 그 상태로 기사들이 용맹하게 그렐비스트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사라져라! 이 사악한 악마여!"

그리고 레펜하르트는 한 걸음 물러나 연신 혀를 차고 있었다.

'아, 거참. 안 된다니까 그러네....'

☆ ☆ ☆

"우오오오!"

용맹한 외침을 터트리며 기사가 돌진한다. 사슬에 묶인 그렐비스트가 그대로 오른팔을 크게 휘둘러 친다. 단순한 동작이지만 덩치가 덩치다보니 범위가 너무 넓다. 채 피하지 못하고 정통으로 얻어맞았다.

터어엉~!

요란한 쇳소리와 함께 돌진한 기세 그대로 뒤로 날아가 통통 튕긴다.

'아이고, 또 날아간다.'

석실 구석에 숨어 레펜하르트는 한심한 눈으로 기사들을 바라보았다. 나가떨어진 기사가 신음을 흘리며 몸을 일으킨다. 잔뜩 부서지고 찌그러지긴 했지만, 그래도 아직 갑옷은 원형의 모습을 비교적 유지하고 있었다. 저건 갑옷 성능이 좋아서라기보다는 실란의 신성 가호의 힘이라고 봐야 했다.

"네 이놈!"

동료가 쓰러지는 걸 본 다른 기사가 분노하며 방패를 세운 채 달려 나갔다. 그렐비스트의 등 뒤를 노린 것인데, 아무래도 소용은 없어 보였다. 금세 접근을 알아챈 악마가 굵은 꼬리를 창처럼 휘둘러 기사의 방패를 때렸다. 방패가 쩍쩍 금이 가며 다른 기사 역시 저만치 날아가 버렸다.

내 이럴 줄 알았단 얼굴로 레펜하르트는 뺨을 긁었다.

'펑펑 처맞는구먼.'

그래도 생각했던 것보단 스테반과 다른 기사들은 잘 버티고 있었다. 덫에 걸린 호랑이를 상대하는 투견들처럼 외곽을 빙빙 돌며 계속 그렐비스트의 허점을 노린다. 제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하니 공격을 이을 수가 없어 저 악마도 그저 울분만 삼킬 뿐이다. 그러고 보면 스테반의 판단도 아주 틀린 건 아닌 모양이었다.

스테반이 검을 들고 부하들의 사기를 올리는 소리가 들렸다.

"전의를 잃지 마라! 우리는 알티온의 기사다! 저 악마도 우리의 용기에 겁에 질려 있노라!"

적절하게 그렐비스트의 울부짖음이 뒤를 이었다.

"크아아아!"

세상에 어느 악마가 겁에 질리면 저렇게 광포한 포효를 터트리는지는 모르겠다만, 하여튼 기사들은 용감하게 그렐비스트를 상대하고 있었다.

저들 역시 알티온 후작가에서 고르고 고른 기사들, 아무리 상대가 강해도 첫 한 방 정도는 막을 기량의 소유자다. 보통이라면 첫 방 막아 봤자 자세가 흐트러져 이어지는 후속타의 밥이 될 뿐이지만, 지금은 데굴데굴 굴러서라도 어떻게든 악마의 공격 범위 바깥으로 나가기만 하면 살 수 있다. 일단 죽음의 공포가 사라지니 타그렐을 상대할 때보다 오히려 이쪽이 더 쉬웠다.

그래서 레펜하르트는 난처해했다.

'끙, 저 애송이만 날뛰다 쓰러지면 바로 데리고 나가려고 했는데.'

그동안 섞은 대화만으로도 스테반이 어떤 놈인지는 쉽게 알 수 있다. 아무리 설명해 봐야 들어 먹을 놈이 아니다. 그래서 그는 저 귀족가 공자님이 쓰러지면 바로 에드워드 경을 설득해 이 자리를 벗어날 생각이었다. 그래도 에드워드 경은 비교적 현실 감각이 있으니 그의 말을 들어 줄 것 같았다.

그런데 의외로 저 스테반이 실력이 있어 용케 그렐비스트를 상대하는 것이다.

절묘하게 스텝을 밟으며 날아오는 공격의 틈새로 칼질을 해 댄다. 좋게 말하면 나비처럼 날아 벌처럼 쏘는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쪼잔하게 깔짝대는 것이지만 어쨌건 잘 버티고 있다는 점만은 분명했다.

"타아앗!"

날카로운 외침과 함께 그렐비스트의 좌측으로 파고들어 허벅지를 베어 간다. 희미하게 상처가 나며 피가 흐른다. 그 틈에 렐시아가 우측으로 날아올라 악마의 머리를 노린다. 그렐비스트가 팔을 들어 공격을 막는 사이, 스테반이 잽싸게 검을 올려쳐 옆구리를 베어 갔다.

꽤 깊이 들어간 듯, 검은 피가 솟구치며 그렐비스트가 비명을 질렀다.

"크아아아아!"

재빨리 거리를 벌려 사정권 밖으로 도망치며 스테반이 칭찬을 해 댔다.

"잘했다, 렐시아!"

"감사합니다, 주인님!"

레펜하르트가 문득 혀를 내둘렀다.

'저 렐시아란 아이, 실력이 상당한데?'

스테반을 제외하면 확실히 이 일행의 2인자랄까? 에드워드 경보다도 나은 것 같았다. 게다가 둘의 호흡도 딱딱 맞았다. 예전부터 서로 자주 함께 싸워 온 솜씨였다.

'뭐, 저 애송이의 슬레이어라면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멀리서 원호하는 토드와 실란도 한층 냉정하게 그렐비스트를 상대하고 있었다.

"필라넨스시여, 저 사이한 존재에게 성스러운 철퇴를 내리소서!"

실란의 등 뒤로 분홍빛 망치가 형성되어 그렐비스트를 가격한다. 당연히 저 염소 머리 악마는 전신의 불꽃으로 성광의 해머를 분쇄했다. 타그렐도 할 수 있었던 일이니 그렐비스트가 못 할 리 없었다.

그러자 실란이 인상을 구기며 재차 신성력을 끌어 올렸다.

"필라넨스시여! 저 사이한 존재에게 성스러운 철퇴를 왕창 좀 갈기소서!"

또다시 괴상망측한 기도문이 흐르며 실란 주위로 수십 종류의 빛무리가 떠올랐다. 망치며 철퇴, 메이스 등등 참 종류도 다채로웠다. 대장간 차려도 될 것 같았다.

우두두두!

수십 개의 철퇴들이 분홍색 빛의 궤적을 남기며 악마의 전신을 연거푸 때려 댄다. 한두 개가 아니다 보니 이번엔 그렐비스트도 전부 막아 낼 수가 없었다. 사슬에 묶인 처지다 보니 피하지도 못한 채 악마는 모든 공격을 고스란히 맞아 버렸다.

"크어어억!"

고통 때문인지 분노 때문인지 그렐비스트가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하지만 실란은 두려워하지 않고 계속 신성 공격을 가했다. 꼼짝도 못하는 상대다 보니 이쪽은 안전하다. 아주 마음 놓고 신성 주문을 난사할 수 있는 것이다.

토드도 가만있지 않았다.

"라쿠아 디 알튠 바라스, 북풍의 한설이여, 내 손에 머물러 회오리쳐라! 블리자드 스톰!"

그는 연신 빙계 계열 마법을 구사해 그렐비스트의 불꽃으로부터 기사들을 보호하고 있었다. 보통은 마법사가 공격을 하고 성직자가 방어술을 펼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저 악마는 마법 저항력이 높아 마법이 전혀 통하지 않는다. 대신 신성 주문은 위력이 약해지긴 해도 먹히니 둘의 역할을 바꾼 것이었다.

물론 토드도 경험 많은 마법사답게 그저 방어술에만 열중하진 않았다.

"세피로 디 크로텔, 대지여, 그 손을 뻗어 그대에게서 비롯된 것을 거두라! 아이언 스틸!"

베이터의 무기를 떨어트리게 했던 바로 그 주문이었다. 순간 그렐비스트가 움찔했지만, 이 정도 증가된 중량을 못 버틸 만큼 허약한 악마는 아니었다. 다시금 검을 휘두르며 시꺼먼 안개를 사방으로 뿜어 댔다.

"크아아아!"

"쳇, 이번에도 실팬가?"

아쉬워하면서도 토드는 침착하게 다시 무장해제 주문을 준비했다.

'계속 틈을 노리면 언젠가는 먹히겠지.'

어차피 목표는 저 악마가 들고 있는 마검 알티온이니, 저것만 회수하면 굳이 계속 상대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꽤나 냉정한 판단이었다. 안전이 확보되자 과연 마법사다운 면모를 보이고 있는 토드였다.

하여튼, 의외로 전반적인 분위기가 괜찮았다. 묶여 있는 놈을 상대로 다들 열심히도 때려댄다. 동대륙에 고유의 미풍양속, 멍석말이라는 것이 있다던데 딱 그걸 보는 기분이었다. 이대로 잘만 하면 악마를 물리치는 것은 무리더라도 마검을 회수할 수는 있을 것 같았다.

'내가 얘들을 너무 무시했나?'

내심 레펜하르트가 긴장을 풀려는 때였다. 갑자기 그렐비스트를 감싼 사슬이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동시에 석실 전체가 웅웅 떨렸다.

"윽?"

"뭐지?"

모두가 당황하는 가운데, 그렐비스트를 묶고 있던 빛의 사슬이 벽에서 분리되더니 악마의 사지를 감싸 버렸다. 불길한 빛이 악마의 전신을 뒤덮었다. 석실 위쪽에서 알아듣기 힘든 음성이 울렸다.

-헤핀 랄타르 필로다. 렌 투 바이드 페이즈 타론.

다른 이들은 의아해했지만 레펜하르트는 바로 알아들을 수 있었다. 저 언어는 데스틴, 은의 시대에 사용하던 고대어였다. 그리고 그 의미는....

-현 방어 시스템 감당 불가. 페이즈 2로 이행합니다.

그의 표정이 다급해졌다.

"이런!"

3

그렐비스트가 두 팔을 높이 들었다. 그리고 광소를 터트렸다.

"크하하하!"

그의 사지엔 여전히 빛의 사슬이 묶여 있었다. 하지만 그 사슬은 더 이상 벽과 연결되어 있지 않았다. 비록 유적에서 풀려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저 악마는 이 순간 운신의 자유를 얻은 것이다. 심지어 그렐비스트의 전신엔, 그토록 열심히 입혔던 모든 상처마저 사라져 있었다. 유적이 페이즈 2를 이행하며 그의 부상을 말끔히 치유해 버린 것이다.

"크랄타!"

섬뜩한 목소리를 울리며 그렐비스트가 양팔을 좌우로 떨쳤다. 얽매여 있던 마력이 마음껏 사방으로 흐른다. 그는 이제 속박되어 있지 않다!

모두가 제 자리에서 굳었다. 그토록 용맹하던 기사들도 그토록 냉정하던 토드와 실란도 그 순간 얼어붙은 동상이 되어 버렸다.

"아아아...."

에드워드 경은 경악한 눈으로 저 악마의 변모를 바라보고 있었다. 머릿속이 텅 빈 기분이었다. 저 악마가 풀려났다. 저 가공할 괴물을 제지할 사슬이 더 이상 없다!

떠오르는 것은 단 한 가지뿐.

도망쳐야 한다.

반드시 도망쳐야 한다!

"공자니이임!"

막 스테반에게 고함을 지르다가 에드워드 경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다. 그의 소중한 주군이 지금, 저 끔찍한 악마를 향해 덤벼들고 있었다.

"죽어라, 이 악마야아아아아!"

처절하기까지 한 외침과 함께 스테반이 바닥을 박차고 날아오른다. 그렐비스트가 비웃음을 흘리며 불길을 머금은 수도를 내려친다. 스테반은 잽싸게 몸을 틀어 공격을 피했다. 그의 집중력은 지금 잘 벼린 칼날과도 같다!

'이 정도 공격은 피할 수 있어!'

하지만 그렐비스트는 더 이상 묶여 있는 신세가 아니다. 피한 스테반을 따라붙으며 악마가 바로 발을 뻗었다. 전신의 탄력이 실린, 악마답지 않게 제대로 된 미들 킥이었다. 웅장하기까지 한 미들 킥이 허공에 뜬 스테반을 그대로 후려갈겼다.

"커어억!"

"안 돼애애애!"

피를 토하며 날아가는 주군의 모습에 에드워드 경이 절규를 터트렸다. 나가떨어진 스테반이 처절하게 울부짖었다. 전신의 뼈가 박살 나는 끔찍한 고통 앞에선 기사의 긍지고 뭐고 없었다.

"으아아아악!"

그래도 비명이 나오는 걸 보면 즉사하진 않은 것 같았다. 에드워드가 허겁지겁 달려가 부축했다. 고통으로 신음하면서도 그의 어린 주군은 정신을 잃지 않고 있었다.

"으으, 에드워드 경...."

"다, 다행입니다, 공자님!"

울먹거리는 에드워드 경을 지나치며 충성스러운 노예, 렐시아가 앞뒤 안 가리고 그렐비스트에게 덤벼들었다. 하지만 이내 악마의 꼬리에 가격 당했다. 그 가녀린 몸이 ㄱ자로 꺾이며 피를 토했다.

"꺄악!"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렐시아가 채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그렐비스트가 입을 벌렸다. 자욱한 유황 냄새가 피어나며 싯누런 불길를 내뿜었다. 어비스의 불꽃이 사방을 태우며 토드와 실란에게로 쏘아졌다.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실란이 채 대비할 틈도 없었다. 순간적으로 소년의 눈동자가 커졌다. 금색 눈동자 위로 지옥의 불길이 아련하게 일렁이는 바로 그 순간.

"타아압!"

황금빛이 솟구치며 그 불길을 가로막았다. 어느새 전신에 오러를 감싼 레펜하르트가 그의 앞을 가로막은 것이다. 불길이 좌우로 갈라지더니 이내 사그라진다. 실란이 환희에 차 외쳤다.

"레펜 씨!"

"미안, 나도 좀 당황해서 반응이 늦었다."

악마의 불길을 스파이럴 가드로 튕기며, 레펜하르트가 미안한 목소리로 뇌까렸다.

☆ ☆ ☆

불길이 가라앉았다. 그렐비스트도 더 이상 다른 이들을 공격하지 않고, 레펜하르트에게 관심을 쏟고 있었다. 역시 고위 악마답게 눈앞의 이 덩치 큰 놈이 지금까지의 상대와는 전혀 다르다는 걸 느끼고 있는 것이다.

'으음....'

레펜하르트는 진지한 얼굴로 그렐비스트를 올려다보았다. 솔직히 궁금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과연 지금 자신의 전력이 어느 정도일까? 이 몸에 담긴 무武가 저 악마를 감당할 수 있을까?

마법사인 그는 승산 없는 도박은 피하자는 주의지만, 무투가인 그는 강자를 만난 희열을 느끼고 있었다. 전생에선 느껴 보지 못한 생소한 감각이었다.

'쳇, 나도 무인 다 됐네. 사부가 보면 좋아하겠군.'

잠시 소강상태가 흘렀다. 서로가 서로의 움직임을 파악만 하며 조금씩 좌우로 움직인다. 그렇게 석실을 돌다 말고 갑자기 레펜하르트가 몸을 날렸다.

-자고로 애매하다 싶을 땐 선빵이 최선이니라.

사부의 가르침을 떠올리며 그는 바로 그렐비스트에게 접근했다. 몸 허약한 동네에선 후발선제後發先制니 뭐니 해서 기다렸다가 받아치란 식으로도 가르치는 모양인데, 까짓것 카운터 좀 맞아도 버틸 수 있는 짐 언브레이커블에서는 그저 선제공격이 최고였다.

달려드는 레펜하르트를 향해 악마가 입을 벌렸다. 지옥의 불길이 눈앞 가득 쏟아졌다. 두 팔을 휘저어 그는 불길을 갈랐다. 단숨에 상대의 옆으로 돌아간 뒤 견제를 담아 로우킥 한 방!

황금빛 오러가 실린 정강이가 악마의 허벅지를 강타했다.

"크윽?"

그렐비스트의 표정이 바뀌었다. 가벼운 일격이었는데 와 닿는 충격이 보통이 아니었다. 이 작은 인간이 어떻게 이 정도의 위력을?

순간 비틀거리는 틈을 타 레펜하르트가 땅을 박찼다.

"타앗!"

몸을 날리며 바로 악마의 명치에 킥을 꽂는다. 뒤이어 턱에 무릎 차기 연격을 시도, 강렬한 점핑 니킥에 그렐비스트의 머리가 뽑힐 듯 뒤로 젖혀졌다.

"크억!"

신음을 흘리며 그렐비스트가 허겁지겁 검을 휘둘렀다. 마검 알티온이 새까만 기운을 감싸고 날아갔다. 검은 칼날이 공격한 반동으로 뒤로 물러나던 레펜하르트의 가슴팍을 스쳐 지나갔다.

'윽!'

레펜하르트는 순간, 손톱 같은 것이 가슴을 긁는 느낌을 받고 인상을 썼다. 그는 거리를 벌리며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정말 손톱으로 긁힌 것처럼 살짝 부어 있었다.

'어? 긁혔네?'

역시 그냥 강철검 정도는 튕겨도 마검까지 막을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다.

물론 보통 검도 아닌 마법검에 악마의 마기까지 실었는데 고작 이 정도라면, 인상 쓸 일이 아니라 감탄을 하는 것이 일반인의 감성이겠다. 하지만 이미 짐 언브레이커블에 물든 그는 자신의 '강인한' 육체에 생채기가 난 쪽이 더 충격이었다.

"이 자식이!"

분노하며 레펜하르트가 주먹을 뻗었다. 황금빛 오러가 대포처럼 쏘아져 그렐비스트의 가슴을 가격했다. 기격탄을 맞은 그렐비스트가 휘청거리며 균형을 잃는다. 그 틈에 그는 다시 악마에게로 덤벼들었다.

"타아앗!"

허공으로 몸을 띄운 채 오러가 실린 킥을 연달아 날린다. 두 팔을 들어 공격을 막은 그렐비스트가 연거푸 뒤로 물러났다. 방어를 해야 하니 두 팔을 쓰지 못하고, 중심을 잡아야 하니 두 다리를 땅에서 뗄 수가 없다. 가장 훌륭한 방어는 공격인 법이다. 쉴 새 없는 킥으로 레펜하르트는 그렐비스트의 공격까지 함께 막아 버린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 악마에게 꼬리가 있다는 걸 미처 잊고 있었다.

"카라타!"

외마디 괴성이 울리며 검붉은 꼬리가 채찍처럼 휘둘러져 레펜하르트의 옆구리를 강타했다.

퍼억!

타격음과 함께 그는 그대로 쏘아진 화살처럼 벽으로 날아가 처박혀 버렸다. 전신이 강철 같은 육체가 통째로 석벽을 부수며 파묻히니 석실 전체가 요동을 치며 흙먼지가 마구 일어 올랐다.

실란이 놀라 외쳤다.

"레펜 씨!"

맞고 날아간 인간이 벽을 부수고 파묻힐 정도의 위력이라니! 실란은 걱정 가득한 눈으로 뭉게구름이 피어오르는 석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경악했다.

"아아, 괜찮아."

전신에 황금빛 오러를 감싼 채 레펜하르트가 태연히 걸어 나오고 있었다. 기가 막혀 절로 탄성이 나왔다.

"맙소사...."

실란은 혀를 내둘렀다. 피와 살로 이루어진 인간이 몸으로 벽을 부쉈는데도 멀쩡하다니? 그것도 그냥 벽도 아니고 은의 시대 유적, 수천 년 동안의 풍상에도 끄떡없어 어지간한 망치로 후려갈겨도 금이나 좀 가고 말 저 단단한 벽을!

'이게 오러 능력자의 힘인가?'

목을 매만지며 레펜하르트가 표정을 굳혔다.

'이거, 실수했네.'

호쾌하게 날아간 것에 비해, 그는 거의 타격을 입지 않았다. 6년간의 수행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레펜하르트가 맥없이 날아간 이유는 그가 싸워 본 상대가 제라드뿐이라서였다.

'항상 사부 공격만 맞다 보니 알아서 공격 흘리는 습관이 붙어 버렸잖아, 이거.'

몸을 뒤로 날려 타격을 흘리며 충격을 줄이는 수법은 물론 훌륭한 방어 체술이다. 상대의 공격이 제라드 급이라면 응당 그렇게 방어해야 한다.

하지만 가끔은 버텨 낼 필요도 있는 것이다. 방금도 그냥 공격을 버텨 냈다면 오히려 반격의 기회를 잡았을 터였다.

최강자와 대련을 할 수 있다 해서 자신이 최강자가 되는 것은 아닌 법. 역시 경험이란 무시할 것이 못 된다. 새삼 깨달음을 얻으며 레펜하르트는 신중하게 그렐비스트의 주위를 돌았다. 딱 좋은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참에 습득한 기술들을 차분히 정리해야겠군.'

상대도 적절하니 하늘이 주신 기회란 생각마저 들었다. 레펜하르트는 두 주먹을 우드득거리며 투지를 불태웠다.

강철 같은 투기가 황금빛 오러에 실려 거친 불길처럼 일렁인다. 그렐비스트의 전신에서도 마기가 폭발적으로 솟구친다. 악마가 소리를 질렀다.

"팔카라!"

"뭔 소린지 몰라! 일단 붙어 보자고!"

마주 외치며 레펜하르트가 몸을 날렸다. 그렐비스트도 전신의 근육을 부풀리며 마주 돌격했다. 강인한 두 마리의 수소가 힘겨루기를 하듯, 한 인간과 한 악마가 미친 듯이 공방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스테반은 멍한 눈으로 눈앞의 광경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정신을 잃을 것처럼 고통이 극심했지만 그럼에도 기절할 수가 없었다.

"아아...."

미천한 야인이 악마와 대결하고 있다. 자신은 한 방에 나가떨어졌던 악마의 가공할 공격을 간단히 막고, 놀라운 몸놀림으로 파고들어 교묘한 일격을 연신 가한다. 한 방, 한 방이 치명적이라 타격당할 때마다 악마가 비명을 지른다.

저 명예를 모르는 자, 고귀한 자신과 비견할 수 없는 천한 혈통을 가진 이의 전신에서 황금의 빛이 일렁인다.

전신을 감싼 저 눈부신, 아름답기까지 한 찬란한 광휘.

검을 쥔 자, 무예를 닦는 이라면 누구나 갈구하는 파괴의 빛.

'오러....'

그의 표정은 허무함과 경악으로 물들어 있었다.

전혀 명성도 없는 상대가, 혈통도 가문도 없는 천한 자가 귀족 중의 귀족인 자신도 아직 발현 못한 오러의 힘으로 악마와 맞싸우고 있었다.

'뭐야, 이건....'

세상 모두가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말도 안 돼....'

믿고 있던 모든 것이 거짓인 것 같았다.

모두가 외쳤다. 그가 다음 대의 왕국 기사단장이라고. 그라면 바실리 왕국에서 네 번째의 오러 유저가 될 수 있다고. 누구나 그리 말했고 스테반 자신도 인정했다.

그는 위대한 가문의 후예로, 위대한 힘을 손에 넣을 자였다. 그 사실을 결코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미 비슷한 연배에 놀라울 정도로 쉽게 오러를 운용하는 괴물이 눈앞에 있었다. 그 위력도 굉장했다. 저 정도면 왕궁 기사단장 탈로스 경과 맞붙어도 결코 밀리지 않을 것 같았다.

혼란스러웠다. 머릿속이 뒤죽박죽이 되어 미친 듯이 절규를 내뱉고 싶었다.

대체 저놈은 뭐냐?

어디서 저런 놈이 나온 거냐?

대체, 저 나이에 저 엄청난 기량을 보이는 저 괴물은 도대체 뭐냔 말이다!

경악과 절망 속에서 그는 분노조차 하지 못한 채, 멍하니 레펜하르트의 등을 보고만 있었다.

☆ ☆ ☆

연신 공방을 주고받는 동안, 레펜하르트는 자신이 배웠던 것들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새삼 실감할 수 있었다.

악마의 공격은 강력했지만 그의 육체를 해할 수 없었다. 강철의 육체에 오러를 일깨운 이 몸은 실로 가공했다. 그나마 마검 알티온을 이용한 공격만이 생채기라도 낼 수 있을 뿐, 그 외에는 그냥 몸으로 때워도 무방할 정도였다.

하지만 레펜하르트는 착실하게 그렐비스트의 공격을 피하며 반격을 가하고 있었다. 어차피 실전 연습을 겸하는 것이니 이 기회에 무투가로서의 전투 방식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었다.

내려치는 알티온을 피하며 팔뚝을 붙잡고 꺾는다. 관절기 연습.

가슴 깊이 파고들어 명치와 목, 턱을 동시에 가격한다. 타격기 연습.

채찍처럼 날아오는 꼬리를 피해 몸을 날리며 돌려 차기. 공중전 연습.

그때마다 그렐비스트의 몸이 여기저기 부러지고 살이 터지며 피를 뿌린다. 하지만 유적과 연결된 수호자답게 이 악마는 계속 부상을 입으면서도 결코 쓰러지지 않았다. 상당한 부상을 입혀도 그때마다 유적에서 마력을 공급해 악마의 상처를 치유해 버리는 것이다.

처음에는 샌드백이 알아서 수선되니 참 좋다고 생각했는데....

'이, 이거....'

한참을 싸우고 나니 슬슬 레펜하르트도 지치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저 그렐비스트는 멀쩡하게 덤벼들고 있었다. 고대의 권능은 과연 가공해서, 저렇게까지 당한 악마에게조차도 놀라운 힘을 끊임없이 부여하는 것이다.

'...놀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

슬슬 위기감이 들어, 그는 손발을 놀리며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원래 이런 경우 해결법은 간단하다. 그냥 수호자가 아닌, 마력 그 자체를 공격해 잠깐 흐름을 흩어 놓으면 된다. 그리고 그사이 잽싸게 수호자를 처리해 박살을 내 버리면 해결된다.

'하지만 지금 저 양반 수준에 그걸 기대할 수는 없고....'

토드도 몰라서 이제껏 저 수법을 안 쓴 건 아니다. 실력이 안 되는 것이다.

아니면 아예 강렬한 공격으로 상처를 치유할 틈도 안 주고 일격에 분쇄해 버리는 수도 있다. 치유할 몸뚱이 자체를 날려 버리면 아무리 유적의 마력이 넘쳐흐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물론 쉬운 일은 절대 아니지만, 레펜하르트는 그 정도 위력을 지닌 기술을 익히고 있었다.

'캘러미티 혼을 써?'

짐 언브레이커블의 최종 비기, 4중첩의 경지라도 절벽에 구멍을 뚫고 호수를 뒤엎는 어마어마한 위력을 지닌 그 기술이라면 그렐비스트쯤은 한 방에 날릴 자신이 있었다.

단, 그럴 경우 심각한 문제가 생긴다.

'끙, 그랬다간 여기까지 깡그리 무너지고 다 같이 사이좋게 생매장이지.'

위력이 위력이니만큼, 그걸 지하에서 함부로 날렸다간 석실이 버틸 리가 없는 것이다. 아주 멋지게 매몰되겠지. 그리고 여기서 흙더미 파헤치고 기어 나올 수 있는 건 레펜하르트 한 사람뿐이다.

'짐덩이가 많으니 영 골치 아프네.'

레펜하르트는 계속 전투를 이어 갔다. 뭔가 딱히 치명적인 일격을 가할 방도가 안 떠오르니 자꾸 전투가 길어졌다. 양쪽 다 공격력에 비해 방어력이 압도적으로 높다. 보통 강자일수록 방어력에 비해 공격력이 높은 법인데, 유적의 마력과 다이렉트로 연결되어 있는 저 그렐비스트나 무식하게 몸부터 만든 레펜하르트나 세간의 상식을 깨고 있는 것이다.

이대로 죽어라 손발 놀려서 누가 누가 먼저 지치나로 승부를 가려야 하나? 솔직히 하려면 못 할 것이야 없겠다만....

'그랬다간 난 괜찮아도 딴 애들이 죽어 버릴 테고....'

안 그래도 이미 여기저기 환자가 많다. 물론 실란도 허겁지겁 치유술을 펼치고 있었지만, 워낙 마기가 자욱해 효율이 나와 주질 않았다. 공격술이나 방어술와 달리 치유술은 굉장히 고난이도의 신성 주문이라 환경 영향을 많이 받는다. 저들을 제대로 치료하려면 이 방을 나가야 한다.

그렇게 한참 난감해하던 차였다. 뒤에서 토드의 외침이 들렸다.

"이보게, 레펜 군!"

"응?"

의아해하며 레펜하르트는 힐끔 뒤를 돌아보았다. 마법사 토드가 땅에 떨어진 검을 가리키며 외침을 이었다.

"검을 들게! 오러를 씌운 검에 실란 군이 타격계 신성 주문을 가하면 저 악마를 해치울 위력이 나올 걸세!"

역시 유적 탐사자답게 그 역시 상황을 파악한 것이다. 확실히 마법사가 부실할 경우, 오러 유저가 던전의 수호자를 처리할 때는 저 방법이 정석이긴 했다.

신성력은 마력과 반발하는 법이라 제대로 공격하면 마력의 흐름을 끊을 수 있다. 하지만, 날카로움이 부족해 오러에 섞어야 마법 같은 효과가 나와 준다. 토드는 지금 그 방식을 쓰라고 충고하고 있었다.

'아, 누군 그걸 몰라서 안 하는 줄 알아?'

레펜하르트가 신경질적으로 마주 외쳤다.

"저기, 전 무기에 오러 씌울 줄 모르거든요?"

"엥 그게 무슨 소리인가?"

"난 육체에만 오러를 흘릴 수 있어요!"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토드는 당황하며 말미를 흐렸다. 오러 능력자의 가장 대표적 모습이 바로 번쩍번쩍 빛나는 칼날 아닌가? 그것이야말로 오러 능력자의 트레이드 마크인데? 가장 기초적인 거라 오러 유저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 아니었나?

"아, 원래 우리 무문이 좀 그래요!"

상대하고 있자니 자꾸 정신이 분산된다. 레펜하르트는 대충 대답해 주고 다시 악마와의 전투에 열중했다.

그때, 스테반에게 치유술을 펼치고 있던 실란이 그를 향해 고함을 질렀다.

"레펜 씨!"

"넌 또 왜?"

"그 몸, 경도 높죠?"

"엥?"

무슨 암석에다 쓸 표현을 사람 몸에 쓰다니 참 괴상한 질문이지만 레펜하르트는 이해했다. 맨몸으로 벽 뚫는 걸 봤으니 저럴 법도 하지.

"남들보단 좀 단단하다. 왜?"

"믿겠습니다!"

"뭘 믿어?"

의아해하는데, 갑자기 실란이 기도를 올렸다.

"필라넨스시여, 당신의 가호가 여신을 위한 검에 깃들게 하소서!"

"검?"

그리고, 눈부신 핑크빛 성광이 레펜하르트의 전신에 임했다. 순간 사레가 걸려 그가 헛기침을 했다.

"쿠, 쿨럭!"

"됐다!"

실란은 지금 타격계 신성 주문, 홀리 스트라이킹을 그냥 쌩으로 레펜하르트 몸에다 걸어 버린 것이다. 쇳덩이에 걸어야 할 걸 사람 몸뚱이에 걸어 버렸으니 당연히 주문이 먹히지 않아야 정상이겠지만...

"이, 이건 무슨...."

레펜하르트는 어이없어하며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신성 주문이 걸려 버렸다. 그의 강철 같은 육체를 정말 쇳덩어리로 인식해 버린 것이다.

"...."

할 말이 없었다. 구릿빛이던 자신의 몸이 지금, 참 예쁘장하게도 핑크빛으로 물들어 반짝거리고 있었다. 보기만 해도 전의가 팍 꺾이는 광경이었다.

"아, 아니... 이래도 되는 건가?"

실제로 그렐비스트도 어이가 없었는지 공격을 멈추고 멍하니 레펜하르트의 몰골―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다. 신장 190의 핑크색 거인에게 붙일 표현이 그것 말고 뭐가 있겠는가?―을 멀뚱멀뚱 바라만 보고 있었다.

"허허...."

허탈했다. 오래 살다보니 참 별 꼴을 다 당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레펜하르트가 허탈해하건 말건, 주문을 성공시킨 실란은 한껏 기뻐하고 있었다.

"좋아! 됐어! 될 거 같았어!"

그가 의기양양하게 소리쳤다.

"저 시러배 잡악마 놈! 당장 패 죽여 버려요!"

"생긴 건 예쁘장한 게 성깔 한번 죽이네...."

어쨌건 방법이 생겼으니 싸우긴 싸워야 한다. 우울한 얼굴로 레펜하르트는 그렐비스트에게 돌진했다.

핑크색 거인이 악마를 향해 달려간다. 주먹질, 발길질을 할 때마다 핑크빛 성광이 샤방샤방하게 반짝거리며 빛의 입자를 남긴다.

"...."

더더욱 우울해졌다. 조금 전까지 멋지게 사투를 벌이던 권술가는 사라지고 서커스단 삐에로가 대신 나타난 기분이었다.

'아, 씨. 빨리 끝내 버리자.'

성스러운 몸뚱이가 된 레펜하르트는 쉴 새 없이 공격을 가했다. 신성한 펀치와 신성한 킥, 성스러운 무릎 치기가 이어지며 악마가 사정없이 얻어터졌다. 겉보기야 어찌 되었건 신성력은 신성력이다. 효과 자체는 분명 좋았다. 더 이상 마력을 공급받지 못하는 악마가 빠르게 침몰해 갔다.

다 죽어 가는 악마의 정수리에 뒤꿈치 내려찍기! 핑크빛 반짝이를 흩뿌리며 악마가 마지막 절규를 터트렸다.

"크아아악!"

그리고 그렐비스트는 이곳, 물질계에 거할 힘을 잃고 서서히 사라져 갔다. 비록 죽임을 당했지만 그로 인해 유적으로부터 자유로워졌으니 저 악마에게 있어 이것은 일종의 구원이리라.

사라지는 악마를 보며 레펜하르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잽싸게 실란을 돌아보며 외쳤다.

"야! 빨리 이거 풀어!"

4

그렐비스트가 사라지며 석실에 고인 마기도 사라졌다. 실란은 부상자들에게 일제히 치유술을 펼쳤다. 기절한 렐시아도, 뼈가 박살 난 스테반도 그럭저럭 운신할 수준까지 회복이 되었다. 어지간한 성직자라면 불가능한 권능이었다. 오로지 근육만 바라며 노력해 온 실란의 신성력은 과연 가공했다. 뭐, 본인이야 슬픈 결과겠지만.

그동안 레펜하르트는 이놈의 핑크 성광, 언제 사라지냐며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간신히 신성력이 풀리고 안심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스테반이 절뚝거리며 그에게 다가왔다.

"그대, 레펜이라고 했던가?"

감사의 표시라도 하려나 싶어 레펜하르트가 고개를 돌렸다. 스테반이 인상을 구기며 말을 이었다.

"...잘도 정체를 숨겼더군. 우리가 그렇게 우습게 보였나?"

이건 또 뭔 소리야? 눈을 뻐금거리는 레펜하르트를 향해 스테반이 다시 말했다.

"그대가 강하다는 건 인정하겠다. 하지만 기사의 명예를 짓밟는 것은 용서할 수가 없다!"

뭘 짓밟아? 더더욱 이해가 안 간다. 뭔 소린지를 모르겠으니 대꾸도 못하겠다. 말이 없는 레펜하르트를 향해 스테반이 버럭 성을 냈다.

"허둥대는 우릴 보며 비웃으니 재미있던가?"

비웃어?

레펜하르트는 멍한 얼굴로 스테반을 바라보았다. 진심으로 맹세컨대, 그는 결코 이들을 비웃지 않았다. 비웃는 것도 관심이 있을 때나 가능한 감정이다. 아예 관심 자체가 없었는데 비웃긴 뭘 비웃어?

'하긴, 생각해 보면 비웃는 것보다 더 질이 나쁘지만.'

머리를 벅벅 긁다가 그는 그냥 등을 돌렸다.

"이놈!"

스테반이 검을 찔러 왔다. 레펜하르트는 무심코 몸을 돌렸다. 그토록 무자비한 제라드의 주먹도 피했던 그였다. 제법 자세가 잡힌 일격이었지만 피하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으으윽!"

허공에 검을 휘두른 스테반이 균형을 잃고 엉거주춤 쓰러진다. 대뜸 휘둘렀으니 발이 꼬인 것이다. 평소라면 있을 수 없는 추태, 하지만 제정신이 아닌 스테반은 그대로 균형을 잃고 쓰러졌다.

데굴데굴!

'얼씨구?

혼자서 칼질하다 제 멋대로 바닥을 구르는 모습을 보니 화도 안 난다. 레펜하르트는 쓴웃음을 지으며 걸어갔다. 그리고 저만치 땅에 떨어진 검을 주워 왔다.

마검 알티온. 그렐비스트가 사라지며 남긴 것이다.

'이놈이 감히 피해!'

시뻘게진 얼굴로 스테반이 재차 일어난다. 다시 덤벼들려는 찰나, 레펜하르트가 갑자기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이동이 너무 빨라 어떻게 움직인 건지 보이지도 않았다. 검 쥔 손이 마비된 것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실력 차를 실감하니 차마 다시 덤빌 엄두가 나질 않았다.

"이봐."

레펜하르트가 스테반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나, 너 안 비웃었거든?"

솔직히 말해서 아예 관심도 없거든? 그런데 왜 자꾸 시비를 거니? 응?

그리고 어깨를 꾹꾹 누른다. 무지막지한 힘이 어깨를 통해 실려 온다. 비틀거리며 스테반이 신음을 흘렸다.

"크으윽!"

"그러니까 이거나 챙겨 가라고. 이거 얻으러 이 난리 피운 거 아니었나?"

"아, 알티온...."

스테반의 표정이 더없이 굴욕적으로 일그러졌다. 마음 같아서는 이 따위 검 필요 없다고 뿌리치고 싶었다. 그것이 그에게 남은 마지막 자존심일 터다.

하지만, 그럴 수도 없다. 스테반이 떨리는 손으로 알티온을 받아 들었다.

'빌어먹을!'

그토록 소원하던 것을 손에 넣었는데, 남은 것은 절망감뿐이았다.

반면, 에드워드 경은 레펜하르트에 대한 인식을 싹 바꾼 뒤였다. 그동안 보였던 건방진 태도도 바로 이해가 갔다. 오러 능력자라면 어딜 가도 고위 귀족이 될 수 있으니 저런 모습을 보이는 것도 당연했다. 스테반을 막 대하는 모습에는 조금 울컥했지만, 솔직히 저런 강자를 상대로 따질 마음은 들지 않았다.

"검을 쥐지 않아도 그대는 기사도를 알고 있구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훌륭한 검을 보고도 조금도 욕심을 내지 않을 수 있나! 실로 놀라운 젊은이로다.

"기물을 눈앞에 두고도 무욕을 지키는 그 모습, 과연 진정한 강자가 아닌가!"

연신 감탄하는 에드워드 경을 보며 레펜하르트가 겸연쩍게 뺨을 긁었다.

'아니, 별로 그런 건 아닌데.'

돈독이 올라 스테반 기절시키고 던전 싹싹 긁은 레펜하르트가 무슨 얼어 죽을 무욕?

단지 그가 알티온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 이유는 간단했다. 별로 욕심이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검 알티온은 과연 뛰어난 마법검이었다. 그러니까 어느 정도냐면....

'왕년 내가 만들었던 2급 마법 무기 정도는 되네.'

그렇다. 그는 전생에 최강의 대마법사, 모든 마법의 극에 달한 자였다. 당연히 부여술enchantment도 높은 경지에 올라 있었다.

안타레스 제국을 세우며 귀한 부하들에게 좋은 무기 주고 싶어서 한때 참 열심히 마법 무기를 제작한 적이 있었다. 사천왕쯤 되면 각자 자신만의 무기가 있어 딱히 마법 무기에 연연하지 않지만 평범한 이종족 부하들은 달랐다. 잔뜩 만들어 공을 세운 이들에게 이래저래 나눠 주기도 했다. 뭐, 대량생산형이다 보니 성능은 좀 떨어졌지만.

물론 레펜하르트 기준에서나 성능이 떨어지는 것이지, 남들이 보기엔 어마어마한 마법 기물이었다. 10서클 대마법사가 만들어 낸 마검을 든 이종족 전사들의 힘은 대륙을 공포로 떨게 하기 충분했다.

그리고 이 알티온은 딱, 그때 레펜하르트가 만들었던 대량 생산품 수준이었다. 딱히 욕심 부릴 필요가 없는 것이다. 마법을 되찾으면 이따위는 얼마든지 만들 수 있으니까.

물론 갖다 팔면 이것도 한 재산 되기야 하겠지만....

'괜히 이딴 거 욕심냈다가 후작가랑 평생 척지느니 차라리 던져 주는 게 속 편하지.'

어차피 다른 유적에서 더 좋은 마법검이 얼마든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눈앞의 이익에 급급해 더 큰 것을 놓칠 수는 없지 않은가?

"어쨌거나 슬슬 돌아갑시다. 더 이상 여기에 볼일 없잖아요?"

머쓱해하며 레펜하르트가 화제를 돌렸다.

"그럽시다. 허허허."

여전히 존경스러운 눈을 한 채 에드워드 경이 헐헐 웃었다.

☆ ☆ ☆

일단 1층으로 올라가고 나니 그다음부턴 상황이 편했다. 스테반 일행은 죽은 기사들의 유품을 거두었고, 레펜하르트도 그토록 애지중지(?)하던 코트를 다시 챙겨 입었다. 그렇게 조심조심 통로를 빠져나오니 마침내 팔톤을 벗어날 수 있었다.

캐틀 마을로 돌아가 다들 돌아갈 준비를 했다. 그동안, 착하게도 실란은 유적에서 얻은 금화 몇 닢을 캐틀 마을 사람들에게 나눠 주기도 했다. 겨울 날 걱정이 태산이던 캐틀 주민들에겐 그야말로 여신의 사도가 강림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모두 필라넨스와 실란의 이름을 칭송했다.

아픈 마을 사람들 몇몇에게 치유술을 걸어 주며 바쁘게 돌아다니는 실란의 모습에 레펜하르트가 빙그레 웃었다.

'녀석, 영업 잘하네.'

이런 작은 산골에다 금화를 던져 주는 것이 일견 돈 낭비처럼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로 인해 필라넨스 교단이 얻는 이미지를 생각하면 이는 푼돈이나 다름없다.

소문이란 건 의외로 멀리 퍼진다. 이런 작은 마을에서 친절을 베풀었다는 소문이 사방으로 퍼지면 그야말로 훌륭한 광고 효과다. 어차피 대도시에서는 비싼 헌금 받아 가며 치유술을 펼치고 있으니 딱히 금전적으로 손해랄 것도 없다.

하지만 실란이 하는 짓을 보면 그렇게까지 깊이 생각하는 것은 아니고, 정말 마을 주민들이 딱해서 도와주는 것 같았다.

'눈빛이 요상해서 그렇지, 괜찮은 녀석이긴 하네.'

마을에 도착한 레펜하르트는 바로 알티온 기사단과 결별했다. 에드워드 경이 사의를 표하고 싶다며 왕도로 초청했지만 정중히 거절했다. 어서 시리스를 만나야 했다. 그리고 그 이유가 아니더라도....

'솔직히 저 애송이, 계속 이 득득 갈고 있는데 가서 대접이나 받겠어? 밤에 칼침이나 안 맞으면 다행이지.'

뭐, 맞아 봐야 박히지도 않겠지만.

하여튼 팔톤 유적에 대한 탐사는 전반적으로 행복하게 끝났다.

알티온 후작가는 마검을 되찾아 행복했고 토드는 고대의 유물을 얻은 데다 실란이란 아리따운 미소년까지 만났으니 더더욱 행복했으며, 실란은 꿈에 그리던 크고 아름다운(?) 근육남을 만나게 되어 행복해했다. 레펜하르트도 목적했던 대로 두둑하게 돈을 챙겼으니 당연히 행복했다.

모두가 행복했다. 단 한 사람, 스테반만 빼고.

"에드워드 경."

"무슨 일이십니까, 공자님?"

에드워드 경이 고삐를 쥔 채 스테반에게 다가갔다. 그들은 지금 하탄 산맥의 한 좁은 산길에서 말을 몰고 있었다. 다들 표정이 밝았다. 비록 소중한 동료들을 셋이나 잃긴 했지만 결국 가문이 내린 명, 마검 알티온을 되찾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로서 이들의 명성은 왕도를 떨쳐 울리리라!

그래서 한참 신이 난 에드워드 경은 미처, 자신이 섬기는 주군이 계속 굳은 표정을 짓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 레펜이라는 청년에 대해 좀 알아봐 주시오."

"음, 또래의 강자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은 좋은 일이지요. 가문에 돌아가는 대로 제가 힘을 써 보겠습니다."

역시 무인답게 강자를 보니 자극이 되신 모양이군! 에드워드 경은 단순하게 생각하고 넘어갔다. 그래서 보지 못했다. 고개를 돌리는 스테반의 얼굴이 차가운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도저히 인정할 수가 없었다. 자신과 비슷해 보이는 나이의 젊은이가 벌써 오러를 각성했다는 사실이.

"내가, 저런 놈에게 뒤떨어질 리가 없어."

무슨 수를 썼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저 미천한 혈통이 가능했다면 자신 역시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만약 불가능하다면....

"아냐, 불가능할 리가 없어."

스테반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그가 아는 세상은 결코 저런 일이 일어나선 안 되는 세상이었다. 그가 아닌 다른 젊은 오러 능력자의 존재 따윈 있을 수 없는 세상이었다.

그런 세상을 인정해서는 안 된다....

말을 모는 스테반의 표정이 점점 더 음험해지고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