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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 강탈과 뒤바뀐 대우 >

어두컴컴하고 좁은 통로 안으로 불꽃이 피어난다.

천장을 받치는 기둥, 그리고 광차까지.

광산은 제법 체계적으로 관리되고 있었다.

물론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물건들이 그때의 위급했던 상황을 알려주고 있지만 말이다.

헤카테가 선두에서 길잡이를 하고 유신과 에피가 중간.

마지막으로 파수꾼 대장이 후위를 맡았다.

저벅.

울퉁불퉁한 길과 언제쯤 괴물이 나올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일까?

헤카테의 걸음은 느릿했다.

그럴 때마다 파수꾼 대장이 날 선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제는 길 안내 하나 제대로 못 하나?"

"지금 뭐하는 거냐? 네 행동으로 인해 동족 전체가 피해받고 있다."

"아, 진짜··· 저기 아줌마. 꼭 그렇게 쥐잡듯이 잡아야 돼? 동료잖아."

참지 못한 에피가 쏘아붙였다.

파수꾼 대장은 헛웃음을 지었다.

"동료?"

"그래, 동료. 아까 아줌마는 저 언니가 우리한테 붙잡혔다고 전사의 자격이 없다고 했지만. 그건 아줌마도 마찬가지잖아. 그럼 쌤쌤 아니야?"

"흥. 웃기지도 않는군. 그런 문제 따위가 아니다."

일목요연한 소녀의 말을 파수꾼 대장은 콧방귀로 흘려 넘겼다.

"총기도 제대로 못 다루는 녀석 따위··· 성인식조차도 족장님의 배려로 인해 통과한 녀석 따위··· 동료로 인정하지 않는다."

"하아. 그러니까···"

"그, 그만해라 인간. 다 내가 부족한 탓이니."

헤카테가 에피를 말렸다.

잔뜩 주눅들어 있는 모습.

방금 전 죽이라고 꽥꽥 대던 모습과는 대조된다.

저게 그녀의 본 모습일까?

그 때.

"멈춰."

유신이 속삭였다.

헤카테가 걸음을 멈췄다.

울퉁불퉁한 자연동굴의 벽면에 뭔가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꾸물꾸물

마치 어둠을 뭉쳐 찰흙처럼 만들어 놓은듯한 형상이었다.

두 엘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저, 저거다··· 놈이 사용하는···"

유신의 짐작 역시 맞아떨어졌다.

'예상대로 나이트 워커로군.'

변수는 없다.

그렇다면···

지이이잉!

유신의 주변에서 날아다니던 구슬이 파괴적인 빛을 내뿜었다.

이에 직격당한 어둠이 순식간에 타들어 가더니 한 줌 재가 되었다.

남은 것은 손쉬운 사냥이다.

유신이 손을 털자 파수꾼 대장이 눈을 부릅떴다.

저 어둠은 결코 함부로 없앨 수 있는 물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분명 총탄을 맞아도 계속 분열했는데···"

"그럴 수 밖에 없지. 이놈은 에스트가 담긴 물건이 아니면 죽일 수 없거든."

잘난 듯 미소 짓는 그 모습.

뭉개진 자존심.

파수꾼 대장은 분명 좋아해야 하는 상황이건만 무력감과 자괴감에 휩싸였다.

그렇기에 삐뚤어지게 말했다.

"흥. 방심은 금물이다. 저건 놈의 일부분일 뿐이니까. 이 광산에는 저런 것들이···"

지이이잉!

그 말이 끝나기도 전.

구슬들이 쉴 틈 없이 빛을 사출했다.

곧 그것은 광산 내부를 뒤덮고 있던 수많은 어둠 뭉치들을 순식간에 불태우기 시작했다.

"뭐라고?"

유신은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고개를 갸웃거렸다.

"···"

파수꾼 대장은.

"아니다."

이 말 한마디 밖에 할 수 없었다.

***

"그쪽 역시 이곳이 목표는 아니겠지?"

검은 롱코트에 마스크를 쓰고 있던 사내가 내뱉었다.

"음. 아무리 봐도 그런 것 같지는 않은데···"

털복숭이 사냥꾼 게릭이 그 말을 받았다.

"애까지 끼고 어떻게 작업을 하겠어?"

게릭은 부지런히 손을 놀리며 도축을 이어나갔다.

굵직한 근육을 가르고 갈비뼈를 헤집고 마침내···

"아오 참. 하여튼 이 새끼들 질긴 건 알아줘야 해."

진저리를 치며 핏물이 줄줄 흐르는 심장을 아이스박스에 집어넣은 게릭은 수건으로 손을 닦았다.

"물량은 이 정도면 충분한 것 같고···"

"읍읍!"

게릭의 시선은 주머니 속에 저 짐승새끼들을 넣고 있는 동료에게 향했다.

"애완용도 충분한 것 같으니. 이쯤에서 철수할까?"

"그러지."

"나도 동의한다. 오늘따라 경계가 얕았기에 작업은 수월했다만··· 무슨 변수가 벌어질지도 몰라."

게릭과 동지들은 의뢰물품을 챙기고는 자리를 박찼다.

피에 젖은 길다란 귀가 축 늘어졌다.

그들이 떠나간 자리에는 철저하게 해체된 시신들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

혼자서 중소규모 타운 하나 정도는 멸망시킬 수 있는 등급이 3급 위험종이다.

그리고 갓 클레이모어 임명을 받는 능력자들의 등급 역시도 3위계로 측정된다.

바꿔말하면 이것은 하나의 척도였다.

이 세상을 움직이는 평균적인 강함의 척도.

하지만 이 척도 역시 3등급부터 기하급수적으로 달라지는데.

그건 3등급부터는 등급이 하나씩 오를수록 괴물이든 능력자든 그 수준이 비약적으로 높아지기 때문이다.

마치 어린아이와 어른 정도의 차이랄까?

그리고 지금 유신이 상대하고 있는 괴물 역시 이 범주에 속해있는 존재였다.

4등급 위험종 나이트 워커.

어둡고 습한 공간에서 드문 확률로 나타나는 침식형 괴물.

일정한 형태란 게 없이 떠돌아다니다가 제 기호에 맞는 장소에 자리를 틀고, 주변의 마이너스적인 에너지를 강탈하며 힘을 키운다.

그리고 점점 더 강해지고 위와 같은 행동을 반복하는 것이다.

지이이잉!

투명한 장벽 너머로 빛줄기가 쉴 틈 없이 번뜩인다.

광산의 공동을 가득 채우고 있던 어둠이 격렬하게 요동쳤다.

키아아아악!

나이트워커가 제 몸을 변이시켰다.

녀석은 주변에 있는 바위와 종유석들을 흡수해 몸집을 부풀리더니 마치 해일처럼 유신을 덮쳤다.

그 순간.

딱. 유신이 손가락을 튕겼다.

세 개의 구슬이 현란하게 움직이며 장벽에 위협적인 거대한 바위들을 우선 깨부쉈다.

지이이잉!

그 다음은 종유석.

그 다음은 놈의 몸체를 연결하고 있는 연결부위였다.

"..."

동요 따위는 없다.

유신은 철저하게 상대를 분석하고 갉아먹으며 힘을 빼고 있었다.

나이트워커는 결국 본전도 건지지 못한 채 더더욱 궁지에 몰리고 말았다.

꾸물.

"어어, 저 자식 뭔가 이상해! 하나로···"

에피가 소리쳤다.

유신은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렇게 해주면 더 좋지."

공동을 가득 채우고 있던 어둠이 한 곳으로 집중된다.

곧 그 속에서 거대한 늑대 한 마리가 태어난다.

크아아아아!

2미터는 될법한 늑대가 잔상을 남기며 사라졌다.

직후 눈앞에서 튀어나온 녀석의 박치기에 유신의 장벽에 대번에 금이 간다.

콰직.

총탄으로도 못 뚫는 유신의 견고한 장벽에 이 정도 피해를 입히다니.

하나로 뭉쳐진 어둠의 물리력은 굉장했다.

과연 4급 위험종이었다.

"이런 씹!"

리볼버를 뽑아든 에피가 장벽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변신을 하고서 더 날렵해진 것인지 저 요상한 구슬도 늑대의 움직임을 쫓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런 공격을 한 번만 더 맞으면···'

그 전에 시간이라도 끌 속셈이었다.

"가만히 있어라. 다 됐으니까."

하지만 유신은 덤덤하게 에피를 말렸다.

그리고 늑대의 움직임을 주의 깊게 주시하다가.

크르르··· 크악!

녀석이 땅을 박차는 그 순간.

한 손을 뻗었다.

[징벌의 심판]

결코 피할 수 없는 낙인이 새겨진다.

빛을 머금은 주먹이 늑대가 도약한 정확한 타이밍에 작렬한다.

깨갱.

제 힘까지 더해져 바닥을 구르는 어둠의 늑대.

그리고···

[신비술사의 법칙을 뒤흔드는 벼락]

꽈르릉!

고막이 터질듯한 굉음과 함께 작렬하는 섬광.

···

매캐한 연기가 치이이 피어오른다.

돌바닥에는 새카만 잿더미만이 흩날릴 뿐이었다.

녀석은 죽었다.

결코 손쉽게는 아니었지만 허무하리만치 무력하게.

"와우!"

"···"

환호하는 에피.

입을 쩍 벌리고 있는 파수꾼 대장과 헤카테.

그들을 뒤로한 채 유신이 잿더미로 손을 가져갔다.

[나이트워커의 형태 없는 어둠]

[과도한 능력 흡수!]

[그릇이 넘칩니다!]

[사용자의···]

기존과는 달리 가지고 있던 능력을 지우지는 않는다.

유신은 이제 비어버린 탐욕의 에스트 병에 이 새로운 힘을 담는다.

어차피 강탈의 조건인 상대를 죽인다는 조건은 달성했으니.

'그릇을 강화하고 채워넣으면 되니까.'

머릿속으로 이 새로운 능력의 사용법들이 주르륵 떠오른다.

그리고 기존의 능력들과 융화시켜 최고의 시너지를 낼 수 있는 방법 역시도.

'제약은 있지만··· 이것 역시 쓸만하지.'

주먹을 꽉 쥔 유신은 가방에서 유리병을 꺼내 잿더미 역시 채집했다.

증거품도 되고 나이트워커의 부산물은 훌륭한 연금술 재료였기 때문이다.

손을 툭툭 턴 유신이 파수꾼 대장을 바라봤다.

"···"

그녀는 여전히 경악한 얼굴 그대로였다.

그래, 날 무시하던 사람··· 아니, 깐프지.

녀석의 콧대를 눌러주는 것은 언제나 기분 좋은 일이지.

유신은 삐뚤어지게 웃었다.

"어떤가? 이 정도면 의뢰는 충분히 달성한 것 같은데."

"족장님께 보고드리겠다..."

파수꾼 대장은 그 말을 끝으로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그녀의 흔들리는 동공은 방금 전 유신이 보여준 신위의 놀라움을 연신 증명했다.

"좋다."

그 말을 끝으로 일행은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저벅저벅

구불구불하고 좁은 통로를 올라가는 와중.

"어떻게 하면··· 너처럼 그렇게 강해질 수 있지?"

헤카테가 물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이제 꺼림칙함 대신 감탄과 부러움만이 가득했다.

그건 순수한 무에 대한 갈망이었다.

유신은 일단 네 손에 있는 그 총부터 집어던지라고 말을 하려다가 입을 닫았다.

입구에서부터 풍겨오는 이건···

"피 냄새?"

심상치 않음을 감지한 일행이 다급히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리고 깜짝 놀랐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요정들이 죽어있었기 때문이다.

하나같이 가슴이 쩍 갈라진 채.

"대, 대장···"

그 때 수풀이 갈라지며 한 요정이 튀어나왔다.

유일한 생존자인 그녀는 온몸에 총상을 입고 있었다.

"이게··· 이게, 어떻게 된 거냐!"

파수꾼 대장이 소리쳤다.

"인간들이··· 습격을. 아이들도 납치··· 크흑."

요정이 정신을 잃었다.

유신은 재빨리 응급처치부터 하면서 말했다.

"얼마 되지 않았다."

"일부러 생존자를 남겨놨군."

"시간을 끌 속셈으로. 아마 사냥꾼들의 소행 같은데···"

'소음기를 소지한 것은 물론. 능력자 역시 섞여 있군.'

타이밍이 안 좋았다.

유신에 의해 한바탕 난리가 난 덕분에 파수꾼들 대부분이 자리를 비운 탓이다.

"···"

인간, 인간, 인간.

또 인간이 침입했다. 게다가 이번에는 동족을 쳐죽이고 심장을 약탈했으며 아이들 역시 납치했다.

파수꾼 대장은 이를 뿌득 물며 분노했다.

그러다 곧 깨닫는다.

자신의 옆에서 동족을 치료해주고 있는 이자 또한 인간이라는 걸.

그리고···

"인간."

"너한테 의뢰를··· 아니, 부탁할 게 있다."

지금의 이 사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열쇠 역시 이 자란걸.

"그 침입자를 추격하는 것을 도와다오. 그리고··· 납치된 아이들을 구하는 것을 도와다오."

"부탁하겠다."

고초를 겪을 때도 뻣뻣하던 허리가 숙여진다.

이 자존심 강한 전사는 기어이 그 자존심마저 내려놓았다.

"···"

유신은 잠깐 침묵했다.

그는 지금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지금 사태를 일으킨 녀석들은 보나마나 그놈들이다.

그것도 엘프헬름에서 엘프들을 사냥할 만큼 실력도, 노련함도, 깡도 있는 자들.

과연 그 친구들과 척을 지면서까지 이들을 돕는 게 더 이득일까?

'사냥꾼과는 쉽게 안면을 트고 고용할 수 있지만···'

'언제나 이득에 따라 움직이며 자신의 안위에 충실하지.'

'하지만 이 대쪽같은 놈들은 그 마음에 파고들기가 어렵지만···'

'한 번 그 영역 안으로 들어갈 수만 있다면 그 누구보다도 믿음직스럽다.'

그게 오크. 아니, 엘프라는 것들이니까.

후일을 대비해 미리 세력을 일궈놓는 것 역시 좋을 터.

유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보수는 나중에 족장에게 청구하겠다."

"고, 고맙다! 고맙다 인간!"

"감사인사는 됐으니 추격이나 부탁하지. 그 쪽은 내 전문분야가 아니라서."

"알았다!"

파수꾼 대장이 뛰쳐나갔다.

헤카테 역시 그 뒤를 따르려다가 유신이 붙잡자 고개를 돌렸다.

"뭔가?"

"따라올 생각인가?"

"당연하다! 나도 전사다!"

네 수준으로는 힘들 텐데 라는 말 대신.

"그렇다면 그 총부터 내려놔라."

"···?"

유신은 헤카테의 손에 들려있던 k2를 뺏었다.

그리고는 오히려 자신의 배낭에 처박아두었던 낡은 손도끼를 쥐여주었다.

"지금 이것 가지고 뭘 하라는···"

인상을 구기던 헤카테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 도끼를 쥔 순간.

어째선지 기묘한 감각이 온몸을 타고 흘렀기 때문.

"에, 에?"

"잘 알겠지?"

유신은 단호하게 말했다.

"넌 총을 써서는 안 된다. 너한테 맞는 건 이거다."

학살자.

맨손으로 피바람을 일으키는 자.

엘프헬름의 또 다른 네임드 npc헤카테.

본인은 모르고 있었지만 이 녀석에게는 총기 알레르기가 있다.

반면에 냉병기에는 천부적인 자질이 있다.

즉···

'넌 근딜이야.'

타고난 근접 전사이자 엘프 사회의 이레귤러다.

< 각성과 뒤바뀐 대우 >

무성한 수풀 사이로 네 개의 인영이 스쳐 지나간다.

긴 롱코트와 양손에 꽉 쥐여진 총기가 그 움직임에 따라 흔들린다.

"추격당하고 있다."

후위를 맡고 있던 사냥꾼 카심이 말했다.

"숫자는?"

"많지는 않아. 그렇지만 따돌릴 수 있을 것 같지도 않다."

엘프헬름 곳곳에는 폭발물들이 깔려있다.

이를 피하기 위해서는 멧돼지나 사슴 같은 덩치가 큰 동물들의 발자국이 나 있는 길 위주로 가야하는데.

부스럭부스럭.

의뢰품을 달고 있는 상태에서 이런 까다로운 길까지 걸으며 추격자를 떨쳐내기는 힘들었다.

선두를 맡고있던 게릭이 태연하게 말했다.

"잡고 가자고~"

숲을 빠져나오기까지는 아직 조금 더 남았다.

그동안 위험하게 꼬리를 달고 다니느니 차라리 과감하게 정리한다.

게릭의 의견은 합리적이었다.

고개를 끄덕인 사냥꾼 셋이 산개했다.

사박.

매설된 폭발물에 유의하며, 추적자의 위치를 가늠한다.

곧 이쪽의 위치는 숨긴 채 녀석들을 저격할 수 있는 최적의 포지션을 잡는다.

엘프들은 자신들의 육체를 맹신한다.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용맹을 맹신한다.

그리고 늘 압도적인 화력과 환경을 바탕으로 일방적인 사냥만을 해온 경험을 맹신한다.

그렇기에 반대로 자신들이 사냥당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그 간극은 치명적이다.

덕택에 이번 의뢰를 위해 오랫동안 준비해온 사냥꾼들은 손쉽게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다.

엘프들에게 있어 사냥꾼들은 천적이나 다름없다.

사사사삭.

'소리가 거칠다. 아마 나무를 타고 접근하고 있는 거겠지. 애새끼들만은 끔찍하게 생각하는 놈들이니까.'

사냥꾼 지미는 저격총을 견착하며 나무 위를 겨눴다.

'저건 미끼일 수도 있다. 오히려 틈을 찌를 수도 있어."

태준은 나무가 아닌 주변의 수풀들을 겨냥했다.

'애새끼들이 이쪽에 있는 이상 유탄 같은 걸 맞을 걱정은 안 해도 된다.'

게릭과 카심은 폭넓게 주변을 둘러보며 그런 두 사람의 시선이 닿지 않는 사각마저 살폈다.

···

말 한 마디 하지 않았음에도 손발이 딱딱 맞는다.

일말의 변수마저 차단하며 방심 따위는 하지 않는다.

네 사냥꾼은 실로 훌륭한 협동을 보여주고 있었다.

엘프들은 이 견고한 성벽을 깨트릴 수 없었을 것이다.

실패로부터 교훈을 얻기에는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이 너무도 짧았으니까.

물론.

유신이라는 존재가 없었다는 가정하에 말이다.

사삭!

수풀이 흔들리며 실루엣이 힐끔 드러났다.

태준이 라이플의 방아쇠를 당겼다.

탕!

그와 동시에 나무 위를 겨냥하던 지미 역시 방아쇠를 당겼다.

"양동이다!"

소리친 게릭과 카심이 두 지대 쪽으로 손을 보탰다.

울려퍼지는 총성과 빗발치는 탄피.

그 적의에 깜짝 놀라 날아오르는 새들.

고요했던 숲은 삽시간에 전장이 되었다.

힐끔.

사냥꾼들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상대를 살핀다.

수풀 쪽에 있는 실루엣들은 멀쩡하다.

아니, 자세히 보니 저건 엘프가 아니다. 그렇다고 인간도 아니다.

그렇지 않다면 저 기이한 외양과 총탄을 맞고도 멀쩡할 수가 없···

"능력자다!"

타타타탕!

방아쇠를 당기며 달려드는 에스트 인형들을 보며 태준이 엄폐하며 소리쳤다.

나무 위로 다가오던 적을 향해 방아쇠를 당기던 지미 역시 소리쳤다.

"이쪽 역시! 방호계열···"

사냥꾼들은 다급히 상황을 파악하고 대응법을 모색하고자 했다.

백린탄이나 고속철갑탄, 유탄같이 더 강력한 화력으로 저걸 뚫을지. 아니면 우선 도주하며 다시금 포지션을 잡을지.

그 순간.

쾅!

거친 파열음과 함께 바람과 흙먼지가 휙 불었다.

에스트 인형들이 매설되어 있던 지뢰를 밟았기 때문이다.

"···!"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

찰나의 순간 흐트러진 집중력.

쉬익.

사냥꾼들의 반대편에서 빛이 번뜩였다.

"컥."

태준의 얼굴에 뜨뜻한 뭔가가 튀었다.

근처에 있던 동료 지미의 머리에 도끼가 박혀들면서 생겨난 흔적이었다.

이를 인지한 순간 태준의 의식 역시 끊겼다.

미간에 화살이 박힌 채 기우뚱 넘어가는 망자가 본 것은 온몸에 총상을 입은 채 쓰러진 또 다른 동료였다.

털썩.

***

유신의 신체능력은 일반인 수준··· 아니, 이제는 그에 미치지도 못한다.

그런 상황에서 숲을 누비며 저 날랜 사냥꾼들을 추격하는 건 힘들다.

지금 유신의 능력은 어디까지나 가진 다양한 권능을 이용.

상대를 분쇄하고 대응하는 것에 특화되어 있으니.

그렇다보니 이번 작전에서 유신은 서포트에 치중하기로 했다.

-내가 틈을 만들겠다. 신호하면 그때를 노려라.

그리고 그 작전은 훌륭하게 먹혀들어갔다.

"해냈다! 내, 내가 맞췄다!"

헤카테가 나무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그 거리에서 도끼를 맞추다니. 역시...'

"크으."

유신과 그를 업고 있던 파수꾼 대장은 비틀거리면서 떨어져 내렸다.

쿠당탕. 유신은 자신의 어깨에 박혀있는 총알을 보며 방금 전의 상황을 복기했다.

이건··· 야경에서 생산되는 고속 철갑탄이다.

장갑차나 대전차용으로 개발된 녀석이지.

당연히 방호 능력을 가진 능력자에게도 효과가 있다.

그 찰나의 순간.

사냥꾼들이 유탄과 함께 쏘아 보낸 이 탄환이 유신의 방벽을 깨부수고 타격을 가한 것이다.

숙련된 사냥꾼들의 머릿속은 지혜의 보고다.

그렇기에 그들은 능력자를 사냥하는 방법을 안다.

대응법 역시 안다.

역시나···

'까다롭다.'

"괜찮··· 은가?"

떨어지는 그 순간에도 제 몸을 쿠션처럼 받쳐 유신을 지킨 파수꾼 대장이 말했다.

그녀는 걱정스런 눈으로 유신의 상처부터 보고 있었다.

'이거 분위기가 휙 바뀌니 당황스럽군.'

유신은 피식 웃으면서 시체들의 틈에 있는 주머니를 가리켰다.

"나보다 동족들부터 챙기지그래."

"···고맙다."

파수꾼 대장과 헤카테가 납치당했던 아이들을 살폈다.

에피가 활을 어깨에 멘 채 다가왔다.

"괜찮아?"

"한 놈 놓쳤지?"

"엉. 그 털보."

게릭이라 자신을 소개한 사냥꾼.

유쾌하게 웃으며 합석을 제안하고 이쪽의 동향을 캐묻던 폭우 속의 인연.

유신이 무겁게 물었다.

"잡을 수 있겠나?"

게릭은 우리들의 얼굴을 봤다.

그가 야경으로 돌아가 이쪽에 대해서 이야기했다간 곤란해진다.

유신의 목적지 역시 야경이 존재하는 그곳이었기에.

"···"

에피는 머리를 긁적거리다가.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어떻게 못 한단 소리를 해."

푸후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을 따라다니려면 이 정도는 해야 되잖아?"

에피는 활시위를 퉁퉁 튕구더니 그걸 내려놓았다. 이윽고 사냥꾼이 쏘던 저격총을 대신 집어들더니.

"병자는 얌전히 누워서 쉬고나 있으라구."

발자국을 쫓아 게릭을 추격했다.

그 뒷모습을 보면서 유신은 생각했다.

저 꼬맹이 언제···

"저렇게 컸지?"

***

복잡하다면 한없이 복잡하지만 단순하게 들어간다면 또 한없이 단순해지는 게 총잡이들간의 싸움이다.

누가 더 고지대를 잡고 상대의 위치를 먼저 파악하는가?

누가 더 훌륭한 엄폐물을 보유했는가?

누가 더 뛰어난 사격실력과 집중력을 가졌는가?

"허억, 허억."

게릭은 달렸다.

'분명 그 녀석들이다. 그 때 마주쳤었던···'

동지들을 잃은 뼈아픈 실책과 이를 만들어낸 변수들에 대해서 생각하며.

그 순간.

타앙!

익숙한 격발소리.

"크윽."

그리고 치미는 고통.

게릭은 다급히 바닥을 구르며 대응사격을 했다.

탕탕탕!

총탄은 허무하게 풀숲을 갈랐다.

하지만 게릭은 그 찰나의 순간 금색 머리통이 사삭 움직이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다행이 옆구리만 긁혔다. 거리 역시··· 상당해.'

우선 부상정도를 파악한 후 상대를 파악한다.

"어이, 꼬맹이!"

"···"

"왜 우리들을 습격한거냐!"

"그날 밤 우리 사이에 무슨 악감정은 없었던 걸로 기억한다만!"

동지. 동지. 하며 손발은 맞췄지만 사냥꾼들은 근본적으로 무리를 짓지 않는다.

현재 게릭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복수도, 의뢰의 완수도 아닌 살아나가는 것이다.

그 때.

저 편에서 에피의 목소리가 들렸다.

"대답해주기 전에 우선 물을게. 그럼 아저씨는 저 귀쟁이들을 왜 죽였어?"

숫자는 우선 하나로 추정.

부상을 입은 녀석들은 물론, 그 도끼를 던진 무식한 엘프는 따라오지 않은 것 같군.

게릭의 주변으로 바람이 일렁거렸다.

그는 소총대신 스코프가 달린 저격총으로 무장을 바꾸며 한 손을 들어올렸다.

"의뢰 때문이다! 놈들의 부산물을 가져와 달라는 의뢰를 받았거든!"

게릭의 목소리에 죄책감은 없다.

거기서 에피는 생각한다.

"마치 괴물을 사냥했을 뿐이라는 듯한 말투네. 존나게 태연해."

"그럼 네 눈에는 저게 인간으로 보이냐? 사람만 보면 죽이고 보는 저 야만인 새끼들이?"

핀을 뽑고.

"대체 무슨 바람이 불어 저놈들 쪽에 붙어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어리석은 짓이다!"

던진다.

붉은색 쇳덩어리는 인간의 힘으로 던졌다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빠르게 날아들었다.

바로 에피의 목소리가 울리던 방향으로.

푸화아악!

폭발음과 함께 화염이 치솟았다.

게릭은 지금 던진 이 소이 수류탄이 자신의 불안감을 해결해주기를 바랐다.

"거 존나게 훌륭한 답변이네. 그럼 이제 답해줄게."

하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사사로운 감정은 없어. 이쪽 역시 의뢰를 받았지. 그뿐이야."

타앙!

대신에 귀를 찢을듯한 총성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크으."

바위 뒤에 숨어 총격을 피한 게릭이 저격총을 들어올렸다.

곧 와하하하 웃었다.

"흐흐흐흐! 정녕 드잡이질을 해보자 이거구나! 꼬맹아! 야경의 베테랑 사냥꾼인 이 게릭하고!"

"못 할 것 없지 뭐..."

하지만 소녀는 유신에게 배웠던 대로 콧방귀를 뀌며.

"시간은 아저씨 편이 아니니까."

심리전까지 건다.

"..."

여유를 가장하던 게릭의 얼굴이 굳었다.

곧 그는 이를 뿌득 물고는 전력으로 능력을 끌어올렸다.

쉭.

순식간에 땅을 박차며 나무 위로 올라간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며 상대를 파악 곧바로 방아쇠를 당긴다.

타앙!

피하고.

장애물 뒤로 엄폐하고.

연기 속으로 숨어들고.

타앙!

또 다시 쏘고.

화마로 이글거리는 숲의 한복판.

찰나의 순간 게릭과 에피는 연신 총격전을 벌였다.

한 발 한 발이 치명적인, 목숨을 내놓고 벌이는 데스게임이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잡았다!'

바람을 사출하며 에피의 뒤를 잡은 게릭이 총구를 겨눴다.

그가 방아쇠를 당기는 그 순간까지도 소녀는 멍하니 서 있었다.

마치 무언가를 보고 놀란 듯.

게릭은 신경쓰지 않았다.

그저 침착하고 냉정하게 방아쇠를 당겼다.

소녀가 허공에 대고 방아쇠를 당기는 그 순간까지도 말이다.

타앙!

한 발의 총성이 울렸다.

"···컥."

하지만 쓰러진 것은 에피가 아니라 게릭이었다.

그는 비틀거리면서 지상으로 떨어졌다.

"어, 어떻게···"

붉게 물든 사냥꾼의 얼굴은 죽어가는 그 순간까지도 의문을 담고 있었다.

물론 게릭은 영원히 그 의문을 풀 수 없을 것이다.

[일곱 번째 기회]

소녀의 각성은 그만큼 특별한 것이었으니.

***

──────!

바깥이 시끄럽다.

그러든 말든 유신은 아랑곳 않고 테이블에 놓여 있는 열매를 바라봤다.

[세계수의 열매]

거창한 이름과는 달리 붉고 앙증맞은 것이 그냥 흔한 사과같이 생겼다.

하지만 유신은 긴장한 얼굴로 그 열매를 바라보더니.

사각.

한톨도 남기지 않고 먹어치웠다.

"···"

입안에서 퍼져나가는 과육을 느끼며 유신은 생각했다.

기껏 몸을 좀 회복시켜 놓으면 다시금 전투를 벌이고, 태동하는 악을 짓밟기 위해 또 싸우고.

담금질에 견디다 못한 이 나약한 육신은 결국 한계를 맞이했다.

아무리 강대한 능력과 에스트를 가지고 있으면 뭐하는가?

이대로 가다가는 이를 담고 있는 그릇이 먼저 부서질 것이다.

유신은 생각했다.

부디 이 영약이 자신에게 내재된 문제를 해결해주기를.

'적어도 2위계··· 아니, 1위계 신체강화 능력자 수준까지만 되면 좋겠는···'

영약의 효능 탓일까?

아니면 혹사한 육신 때문일까?

온 몸에서 열기가 치솟았다.

유신의 정신이 흐려졌다.

두근두근.

강렬하게 맥동하는 심장.

그는 인지하지 못했지만 온몸의 땀샘으로 빠져나가고 있는 노폐물.

'이거 제대로 된···'

기절하기 전의 그 찰나의 순간.

유신이 유일하게 인지하고 느낀 것은···

[새로운 그릇]

그것도.

[새로운 그릇]

두 개?

"응?"

차오르는 충만감과 함께 유신은 그만 정신을 잃었다.

< 각성과 뒤바뀐 대우 >

어두컴컴한 공간에 별빛들이 반짝였다.

펼쳐진 은하수의 중심에는 네 개의 고리가 느릿하게 회전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막.

고오오오

섬광과 함께 두 개의 새로운 그릇들이 탄생한다.

마치 신이 피조물을 살피듯 드높은 곳에서 이를 관조하던 유신은 생각했다.

어째선지 별의 갯수가 줄어든 것 같다고.

그리고 그 줄어든 별의 갯수만큼 새로운 그릇이 생겨나 있는 것 같다고.

아아··· 그렇군.

이 세상의 주인인 유신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이 별무리들은 자신의 내면에 내재된 찬란한 가능성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건···

'이렇게나 많이 남았다고?'

샐 수 없을 정도로 빼곡하게 이 공간을 채우고 있다는 것을.

***

──────!

소란스러움이 방금전보다 더 심해졌다.

"후우."

유신은 얼굴을 쓸면서 몸을 일으켰다.

뜨거웠던 몸은 여전했다. 하지만 전처럼 심장이 거세게 뛰지는 않았다.

'이 몸뚱이의 활력은···'

좋아진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유신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리 한 개의 그릇이 구축되기 직전이었다고는 하나. 세계수의 열매를 섭취하는 것만으로 그 경지를 뚫고 또 다른 그릇 역시 구축해냈다. 내면에 있는 에스트의 총량 역시 가시적으로 증가했다.

하지만.

'육체는 모르겠다.'

이 몸뚱이는 도저히 가늠할 수가 없다.

어디 목검이라도 휘둘러봐야 하나?

유신이 자리에서 일어나 벽면에 장식처럼 걸려있던 총기로 손을 뻗은 순간.

똑똑.

"유신. 잠깐 괜찮겠습니까?"

저 정중한 목소리.

아브라함이다.

유신이 허락하자 문이 열렸다.

예상대로 아브라함과 그 뒤에는 파수꾼 대장이 서 있었다.

──────!

왁자지껄함이 더 커졌다.

"이런··· 벌써 세계수의 열매를 섭취하신 모양이군요."

아브라함의 목소리에는 당황이 섞여 있었다.

유신은 무슨 문제될 거 있냐고 물어보려다가 곧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킁킁.

집안에서 땀 냄새를 수십 배는 응축한 듯한 고약한 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 근원지는 나다.

유신이 자신을 살폈다.

그 잠깐 사이에 입고 있던 옷이 누렇게 변색되어 축 늘어져 있었다.

"이거··· 내 몸에서 나온 건가?"

"세계수의 열매는 복용자의 체력 증진과 기력을 회복시켜주지만··· 그 본질은 체질 개선에 있습니다. 당신이 방금 전에 겪은 상황은 그 과정에서 생겨난 부작용인 것 같군요."

"몸이 가벼워진 것도. 힘이 강해진 것 같지도 않은데···"

"에스트의 총량은 확실히 증가했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다만."

"그리고 살아있죠."

전투의 피로와 총상. 후유증을 앓고 있던 몸으로 영약을 섭취했다.

이는 사실 굉장히 위험한 상황이었다.

"세계수의 열매쯤 되니까··· 그리고 당신 정도나 되니까 눈을 뜰 수 있었던 겁니다. 정상인이라면 결코 그런 상태에서 영약을 섭취하지 않아요. 아니, 안 됩니다."

족장은 단호하게 유신의 무모함을 꼬집다가.

"어쨌든 열매는 아주 잘 들었군요. 뭐, 사람마다 특출난 부분은 다른 거니까요."

빙긋 웃어 보였다.

'결국 이 몸뚱이는 제 부족한 부분을 채우는 대신 또 한 번 장점을 극대화시켰다는거군.'

유신은 장식용 총을 들고는 휙휙 휘둘러보았다.

확실히··· 에스트 뿐만이 아닌 육체적으로도 변화가 있기는 했다.

전이라면 몇 번 휘둘렀으면 팔이 후들거렸을 텐데.

지금은 그 정도는 아니다.

한 0.5위계 강화 능력자··· 정도?

유신은 유리 대포에서 강화 유리 대포가 됐다.

'세계수의 열매로도 이 정도라면··· 대체 뭔 약을 구해야 되지? 엘릭서?'

유신은 머리를 긁적거리다가 축축한 바닥을 훑어보면서 말했다.

"집을 어지럽힌 건 미안하게 됐군. 곧바로 치우···"

"가만히 놔둬라."

그 때 파수꾼 대장이 말했다.

음?

"내가 치우겠다. 그리고 네 그 옷도··· 내, 내가 빨아주겠다. 그러니 어서 벗어라."

"···?"

유신은 의아함을 느꼈지만 뭐 좋게 받아들였다.

마을의 문제를 해결해주고 침입자를 격퇴하고 아이들까지 구해준 그는 더 이상 이들의 적이 아니었다.

족장의 언변에 힘입어 은인 취급을 받고 있었다.

"그래 준다면야."

유신은 옷을 벗어서 파수꾼 대장에게 건네줬다.

검은 머리칼의 엘프는 이를 바라보다가 유신과 시선이 마주치자 후다닥 달려나갔다.

기다란 귀가 빨겠다.

"하하하. 엘프리데의 저런 모습은 처음 보는군요."

파수꾼 대장의 본명인 모양이군.

거참 엘프스러운 이름이야.

유신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서 날 찾아온 용무는?"

"광산에 대한 대가는 지급했으니. 이번에는 두 번째 보수에 대해 논하고자 왔습니다."

의뢰주 쪽이 먼저 다가와서 돈을 준다고 하다니···

역시 엘프 놈들은 한 번 신뢰를 얻어놓으면 훌륭한 친구가 될 수 있다.

그걸 얻기가 힘들어서 그렇지.

"그렇다면 세계수의 열매를 하나 더···"

"그건 아쉽게도 다 떨어졌습니다. 빈말이 아니라 정말로요."

유신은 입맛을 다셨다.

그릇을 좀 더 늘리고 싶었는데···

'그렇다면 제안할 만한 것이.'

"그럼 너희들이 사용하는 화기들을 받고 싶은데."

물론 게릭 일당으로부터 노획한 장비들이 있다. 하지만 그건 야경에서 생산된 물건이다.

앞으로 유신이 향할 목적지에 사냥꾼들의 본거지가 있는 이상. 이를 사용하는 것은 부담이 컸다.

'엘프제 장비들보다 그 수준이 좀 더 떨어지기도 하고.'

"물론입니다. 원하시는 걸로 얼마든지 내어 드리죠."

"대답이 시원시원해서 좋은데. 마치 다른 속내라도 있는 것처럼."

유신은 씨익 웃었다.

족장 역시 마주 웃다가···

"티 났나요?"

툭 내뱉었다.

"그쪽에서 먼저 찾아온 게 결정적이지. 안절부절해 하는 게 느껴졌거든."

족장은 점잖게 웃다가 슬쩍 얼굴을 굳혔다.

"실은 저도 당신께 한 가지 거래를 제안드리고 싶기 때문입니다."

뭔지 예상은 간다만···

"내용부터 들어보지."

족장은 목을 가다듬더니 입을 열었다.

"당신도 잘 알고 있을 겁니다. 우리 엘프들은···"

"너무 나약하다는 것을."

크레이모어와 박격포를 비롯한 최신식 장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뛰어난 신체능력을 가진 전사들.

족장이 말하는 것은 당장 그들이 가진 힘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우리는 너무 무지합니다. 이 세상에 태동하고 있는 가공할 신비. 에스트라는 것에 대해. 그리고 강대한 적을 상대하는 데에 있어 꼭 필요한 영악함과 지혜에 대해."

단 한 명.

유신에 의해 엘프헬름이 자랑하는 파수꾼들이 제압당했다.

비록 상황이 안 좋았다고는하나 철저하게 준비된 사냥꾼들의 습격에 허무하게 동료들을 잃었다.

"···"

끼이익.

어느새 되돌아온 파수꾼 대장 엘프리데 역시 조용히 입을 다문 채 경청하고 있었다.

"물론 이번 사태를 계기로 동족들 역시 깨달았을 겁니다. 인간들은 결코 쉽게 볼 수 없는 상대이며 우리들은 우물 안의 개구리였다는 것을. 하지만···"

"시간이 없지."

"네. 우리에게는 주어진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미래를 엿볼수 있기에.

그렇기에 더 알 수 있는 끔찍한 사실들도 있다.

예언자는 허탈하게 내뱉었다.

사냥꾼들은 분명 의뢰라고 했다.

그건 곧 이들을 움직일 만큼의 힘과 재력을 가진 자가 엘프들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이는 지금 같은 상황이 앞으로 비일비재하게 벌어질 것을 뜻한다.

유신은 생각했다.

그러고보니 이맘때쯤···

'엘프들의 심장이 보양식이다. 어릴 때부터 길들이면 훌륭한 애완동물이다. 라는 유행이 펑크시티의 상류층들 사이에서 퍼졌었지.'

암약하고 있는 은둔자에 의해.

"물론 한동안은 막을 수 있겠지요. 하지만 점점 더 소문이 퍼지고 우리들에 대해서 인간들이 알아갈수록 우리들은 점점 더 궁지에 몰릴 겁니다."

엘프들은 폐쇄적인 성향과 그 무지비한 손속으로 공포스러우며 신비로운 이미지를 구축했다.

모든 외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 견고한 장벽이 깨어지려고 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에스트라는 신비에 대해."

자신이 알기로 유신 정도의 재능을 가진 자는 이 세상에서도 결코 흔치 않다.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인간의 지혜와 영악함을."

자신이 알기로 유신 정도로 영악하며 현명한 자는 흔치 않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알려줄 수 있는 존재가 내 눈앞에 있습니다."

털썩.

모든 엘프들의 지도자인 족장이 무릎을 꿇었다.

전사들을 이끄는 엘프리데 역시 무릎을 꿇었다.

마치 신을 영접하는 듯한 태도.

그 경건하면서도 안쓰러운 분위기 속에서도 오히려 유신의 눈동자는 차갑게 빛났다.

"지금 너희들이 해야할 것은 부탁이 아니다."

"···"

"나한테 뭘 줄 수 있느냐지."

엘프리데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브라함은 말했다.

눈앞에 있는 사내의 찬란하고도 격동하는 운명을 알아봤다고.

이 세상 전체의 운명이 걸린 거대한 격류라고 했다.

그렇다면···

'저 정도의 사내에게 대체 무엇을 안겨줘야 만족시킬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친우나 동맹이 아닌."

미래를 대비하던 현명한 지도자는.

"당신을 우리의 형제로서 대우하겠습니다."

이미 대가를 생각해뒀다.

"···"

그리고 이는···

"좋다."

유신의 마음에 쏙 들었다.

***

돌연변이 트롤 카쿨과 레자드 브라키.

광명교와 더스트 봄. 그리고 인형사까지.

초창기에는 그저 악의 씨앗들이 작게 태동할 뿐이다.

하지만 후반. 아니 중반 정도만 되어도 이 망가진 세상은 급격하게 격변하며 실시간으로 지옥도가 되어간다.

그것도 전 세계적으로.

그런 상황에서 유신이 아무리 강탈자로서 일당백, 아니 천의 무력을 가진다 한들.

그 혼자서 이 모든 구멍을 틀어막을 수는 없다.

인간 개인의 힘이라는 것은 결국 한계가 있으니까.

그렇기에 필요한 것이 믿을 수 있는 동료. 그리고 세력이다.

유신은 방금 그 세력 중 하나를 얻었다.

엘프들이 형제로써 대우하겠다는 것은 곧 피보다 진한 맹세.

목숨을 바쳐 지옥까지 함께할 전우로서 너를 대하겠다는 뜻이니.

"고맙습니다. 유신."

"고맙다! 고맙다! 인간··· 아니, 유신!"

유신은 두 엘프를 일으켰다.

곧 턱을 쓰다듬었다.

"사냥꾼이나 약탈자같은 인간들의 약점이 뭔지. 능력들이 어떤 식으로 나뉘어지는지. 그리고 어떤 것들을 유의해야 하는지는 알려줄 수 있다.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군."

유신의 시선이 족장을 향했다.

"너를 제외한 엘프들은 에스트를 다루지 못하지 않나?"

물론 게임상에서는 이걸 해결하는 방법 역시 있다. 하지만 그건 특정한 유물이나 생체실험을 통해서만 발현되었다. 즉 이 자리에서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말.

이에 대한 족장의 대답은···

"미래를 보았습니다."

"응?"

"당신이 우리들의 잠재력을 깨워주던 미래를."

황당하고도 뒤 없는 태평한 말이었다.

하지만···

"그래?"

아브라함은 예언자다.

즉 그의 말은 제법 신빙성이 높다는 뜻이다.

유신은 턱을 쓰다듬더니···

엘프리데를 향해서 다가갔다.

'까짓거 한 번 해보지 뭐.'

세계수의 열매를 먹고 안 그래도 높던 에스트 감지능력과 운용능력이 더 상승했다.

근거 없는 시도는 아니었다.

지고의 노력과 자본, 기술이 필요한 일이었지만 유신은 자신 있었다.

이 몸뚱이에 내재된 재능은 그 정도로 대단했다.

'무언가가 혈을 강제로 틀어막고 있는 느낌.'

"왜, 왜 그러나?"

"잠깐만 가만히 있어라."

"에?"

유신이 에스트를 끌어올렸다.

엘프리데는 불길함을 느끼며 뒷걸음질쳤다.

"아, 아직 난 마음의 준비가···"

아무리 머리론 안다고 한들 생리적인 거부감이란 건 여전했다.

엘프들은 한평생 에스트를 혐오하며 살았으니까.

"···!"

엘프리데가 움찔 멈췄다.

어느새 족장이 뒤에 선 채 그녀를 붙들었기 때문이다.

"조, 족장!"

"가만히 있으십시오 엘프리데. 이 모든 것은 다··· 동족을 위해섭니다."

선량했던 족장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는 애초에 맹인이 아니라 실눈이었다.

엘프리데는 배신감과 두려움에 치를 떨다가 그만.

"엘프프픗!"

꽥 비명을 질렀다.

< 각성과 뒤바뀐 대우 >

어둠이 내려앉은 공터 위로 시뻘건 화염이 피어오른다.

미려한 얼굴의 엘프들은 그 중심에 아무렇게나 앉아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한 밤의 숲에서 벌어진 축제였다.

"하여-! 우리들은 오늘부터 여기 있는 유신을 형제로서 대우하기로 한다!"

아브라함이 소리치자 엘프들이 일제히 환호했다.

그건 그의 정치적인 능력과 이 공동체에 대한 지도력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주는 장면이었다.

물론 파수꾼 대장인 엘프리데와 유신의 무력을 직접 본 요정들의 협조가 있었기 때문이지만.

"어떻게 인간 따위를···!"

물론 세상사가 다 그렇듯 모든 사람들 만족시킬 순 없었다.

경멸어진 표정을 지으며 자리를 박차는 엘프들도 있었다.

"와하하하! 환영한다! 유신!"

하지만 그건 저들이 감당해야 할 문제였다.

유신이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확실히 몸 상태가 더 좋아진 것 같은데.'

유신은 제 몫으로 나온 과일주를 홀짝거렸다.

이 약해빠진 몸은 취기도 빨리 돌았다. 그러나 오늘따라 좀처럼 술이 취하지 않았다.

세계수의 열매가 육체의 강도에 있어서도 마냥 효과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우리들은 변화해야 한다! 상대에 대해서 더 파악하고···"

이 자리는 단순히 먹고 마시는 축제가 아니었다.

족장의 정치적 생명을 건 연설장임과 동시에 동맹이 맺어지는 회담장이었다.

그러므로 그 주체자인 유신 역시 필히 참석하여 의연함을 보여줘야 한다.

'술이 달다.'

뭐, 반쯤은 즐긴다는 기분도 있었지만 말이다.

앞으로 언제···

이런 풍경을 다시 볼 수 있겠어?

떨어지는 달빛 아래.

화르르륵

피어오른 횃불을 중심으로 엘프들이 춤췄다.

그 춤은 격식이 없었으나 흥이 있었고, 투박했지만 진심이 담겨있었다.

총과 적의를 내려놓은 숲 속의 야만인들은 꽤나 운치 있었다.

피식.

유신이 웃자 옆에 있던 에피가 말했다.

"취했어?"

"그래보이냐?"

"취했네."

소녀는 술 대신 과일을 쩝쩝거리며 말했다.

"나, 그 사냥꾼을 죽였을 때 말이야."

'능력을 각성했을 때 말이군.'

"녀석이 말했어. 왜 이들을 인간으로 보냐고. 사람도 가차 없이 죽이는··· 그냥 괴물일 뿐이라고."

거대한 횃불 위로 촘촘하게 짜인 관이 휙휙 던져졌다.

그리고 죽은 엘프들의 이름이 울려 퍼지며 몇몇 엘프들이 눈물을 흘렸다.

이건 축제이자 장례식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내 눈앞에 있는 광경은 뭐지?"

에피는 동료의 이름을 부르며 슬픔을 삭히는 아인종들의 모습, 유신에게 다가와 술잔을 권하며 웃옷을 벗고 유혹하는 여인의 모습, 도와줘서 고맙다며 고개를 숙이는 소년, 소녀들을 바라봤다.

그리고 생각했다.

아프면 슬퍼하고, 기쁘면 웃고, 제 감정에 충실하며 이 엿 같은 세상을 살아나가는 생명체들.

이들은 괴물인가?

인간과 다르며 인간에게 해를 입혔다고 해서 괴물인가?

그렇다면 인간은 뭐지?

'인간과 더 닮아서 이런 생각을 하는 걸지도.'

밴디트, 광명교, 권력자.

그 누구보다도 동족을 악랄하게 취급하는 건 인간인데?

에피는 어디까지 인간의 범주로 봐야 할지.

대체 인간이란 정의는 무엇인가에 대해서 고민했다.

단순한 에피가 생각하기에는 꽤나 깊은 주제였지만···

막 사춘기에 접어들고 있는 소녀가 하기에는 나름 어울렸다.

이에 대한 유신의 답은···

"네가 스스로 판단하는 거다."

이거였다.

이 엿같은 세상에 인간이 탈을 쓴 괴물은 얼마든지 존재한다.

반면에 선량한 마음씨를 가진 괴물도.

자신의 신념과 목적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투쟁을 택하는 자들도 있다.

이를 판단하는 것은 전적으로 자기 자신의 몫이다. 라고 유신은 주장했다.

"넌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왔잖냐."

"흐음···"

에피는 눈을 내리깔더니 핏 소리를 냈다.

"하지만 난 유신 네가 죽이라면 죽였는걸?"

"인간을 죽인 것과 괴물을 사냥했다는 차이는 여전하지."

"그럼 당신이 죽인 녀석들은 다 괴물이야?"

"아니, 그렇지는 않다."

"···"

"내 목적과 부합하지 않기에 죽인 적도 있다. 살아남기 위해서 죽였다. 그 안에 괴물과 인간의 구분은 없어."

나는 나의 방식대로 판단한다.

"앞으로는 다를 거다. 내가 모든 것을 지시할 수도 없고, 넌 네 선택에 따라 그 결과를 감당하게 될 날도 올 거다."

그러니 너는 너의 방식대로 판단해라.

정론이었지만 때때로는 책임지기 싫은자의 비겁함도 느껴지는 방조였다.

"···"

피식.

하지만 에피는 웃더니.

"거 좋은 말이네."

돌연 콧방귀를 꼈다.

"하지만 옆에 여자 끼고 그런 말 해봐야 하나도 그럴듯하지 않거든?"

"응?"

유신이 고개를 돌렸다.

"한 잔··· 더 하겠는가?"

파수꾼 대장 엘프리데가 어느새 자신의 옆에 팔짱을 끼고 붙어있었다.

그리고 그 옆과 뒤편에는 여자 엘프들이 손톱을 씹어대고 있었다.

"흐하하하하! 자유다!"

카록을 중심으로 한 남자 엘프들은 덩실덩실 춤추며 자기들끼리 비비적거렸다.

-암컷 엘프들은 우수한 수컷의 씨를 받아내는 것을 좋아한다. 그건 그들의 생존과도 직결되어 있는 일생일대의 목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높은 성욕을···

머릿속으로 엘프들의 생테에 관한 컴퍼니의 보고서가 떠오른다.

"···"

유신은 술맛이 싹 달아나는 것을 느꼈다.

본능적인 공포였다.

"먼저 일어나겠다."

"흐으응~"

거나하게 취했는지 마치 고양이처럼 비비적거리던 엘프리데가 눈을 번뜩였다.

"발걸음이 이상하다. 부축해주겠다."

그 목소리는 태연했다.

"괜찮다."

"부축해주겠다."

"괜찮···"

"부축해주겠다."

"···"

"난 아내가 있..."

"상관없다."

"아니, 내가 상관···"

"정 마음에 걸린다면 손과 발. 그리고 입만 쓰겠다."

이런 미친.

탄탄한 복근과 근육을 제외하고서라도.

엘프리데는 객관적으로 봐도 아름답다.

하지만 실수는 한 번으로 족했다.

유신은 취한 와중에도 에스트를 끌어올렸다.

그러나.

[뜻에 따르는 자연의 축복]

어느새 유신은 기괴하게 자라난 덩쿨에 온몸이 꽁꽁 묶여있었다.

"···!"

빠르다.

점심까지만 해도 분명 사출도 제대로 못했···

이건 생존과도 직결된 암컷의 은밀하면서도 필사적인 계략이었다.

문이 열리고 유신이 풀 침대로 위로 휙 던져졌다.

씨익.

엘프리데는 사냥에 성공한 암사자 같은 미소를 지으며 패배자들에게 경고했다.

"들어오는 녀석 죽인다."

-치사하다!

-걸레같은 년! 같이 좀 쓰면 덧나나!

아마조네스들이 발을 동동 굴렀다.

에피는 낄낄거리며 과일을 씹어댔다.

유신은···

엘프들의 무서움을 절절히 깨달았다.

***

수류탄과 섬광탄, 소이수류탄, 설치형 크레이모어와 발목지뢰, RPG와 전용탄두.

부무장으로는···

기관단총과 매그넘 탄 규격의 리볼버가 좋겠군.

아, 에스트 인형용 권총도 몇 자루 챙기고.

'어차피 저격수는 에피가 있으니까.'

기름 냄새가 물씬 풍기는 창고 안.

유신은 롱코트와 배낭 안에 총기들을 수납하며 말했다.

"그걸로 할 거냐?"

"응. 이게 그나마 제일 가벼워서 다루기 쉽네."

에피는 목재로 된 개머리판과 길쭉한 총구가 결합된 총을 어깨에 멨다.

M40이라 불리던 볼트액션 방식의 저격총이다.

"다 챙겼으면 가자."

무기고를 빠져나오자 수많은 엘프들이 주르르 서 있었다.

족장 아브라함이 점잖게 말했다.

"그것 가지고 되겠습니까?"

"족장 말이 맞다. '고작' 그 정도로 어떻게 황야를 헤쳐나가려고 그러나."

엘프리데 역시 걱정스러운 얼굴로 붙었다.

윽.

유신은 반사적으로 물러났다가 침착함을 되찾았다.

"이거면 충분하다. 너무 거추장스러우면 오히려 여행길에 방해가 될 뿐이야."

엘프들의 말과는 달리 두 사람의 배낭은 빵빵했다.

당장에 웬만한 타운 정도는 가볍게 박살 내버릴 정도의 화력이다.

일행의 전력은 대번에 대폭 상승했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만···"

족장은 험험 헛기침을 하더니 손을 내밀었다.

"아무튼 유신. 우리의 형제여. 당신의 여정이 무사히 끝나기를 게헬라께 빌고 또 빌겠습니다."

유신은 마주 악수를 하다가 손바닥을 살폈다.

풀잎을 엮어 만든 반지가 하나 올라가 있었다.

이건···

"약조의 증표입니다. 그걸 끊으면 당신이 어디에 있든 우리가 도우러 가겠습니다."

[깐프 호출기]

게임상에서는 이렇게 불리던 아이템이다.

대단위의 화력지원을 받을 수 있는 폭격기 같은 거였지.

유신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고맙다."

"별말씀을."

물론 엘프들이 위기에 처한다면 유신 역시 나서야 한다.

혈맹이란 그런 것이니까.

하지만 이는 충분히 감내할만한 페널티다.

유신은 단숨에 (구)시대의 최신신 병기로 무장한 수많은 게릴라 병력들을 얻게 되었으니.

'능력들 역시 점점 개화할 테고.'

그쯤되면 이 세상의 어지간한 무력단체들과도 자웅을 겨룰만하다.

에스트를 다루며, 인간의 전술과 지혜, 영악함을 터득한 엘프들은 절대 쉬이 볼 수 없다.

"심상찮다 싶으면 바로 끊어라! 곧바로 가겠다! 뱃속의 네 아이와 함께!"

엘프리데가 소리쳤다.

"끄히히히히."

에피가 낄낄거렸다.

유신은 후우 한숨을 쉬었다.

"그래··· 고맙다."

그럼 이만 가보겠다.

"귀쟁이 동지들 안녕~"

유신과 에피가 손을 흔들며 멀어졌다.

사박사박

곧 숲이 끝나가는 경계선에 다다랐을 때.

두 사람의 걸음이 멈췄다.

에피가 조용히 저격총을 들어 올렸다.

유신은 그녀를 만류하며 어느 한 곳을 주시했다.

"용무라도 있나?"

수풀이 흔들리며 누군가가 튀어나왔다.

은발 머리칼에 가벼운 복장.

소중하게 들린 낡은 손도끼.

마을의 말썽쟁이 헤카테였다.

그녀가 말했다.

"나, 나도 데려가라."

"···?"

"무슨 일이든 다 하겠다. 그러니까 나도 데려가라."

"그게 무슨···"

에피가 당황했다.

하지만 유신은 태연하게 물었다.

"족장에게 허락은 받았고?"

"편지를 남겨두고 왔다. 언니한테도 남겨뒀으니 아무 문제 없을 거다."

"언니?"

"아, 몰랐나? 엘프리데는 내 언니다."

'그렇다면 이 녀석도 설마?'

잠시 꺼림칙하게 헤카테를 보던 유신이 눈을 가라앉혔다.

흠.

높은 자리에 있는 가족과 천덕꾸러기 동생.

이제서야 엘프리데와 헤카테의 관계가 이해가 간다.

책임질 게 많은 사람은 내부단속을 더 철저히 하는 법이지.

'이것까지는 몰랐는데.'

현실판 변수라는 거군.

"그렇다면야···"

유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해."

"엑?!"

에피가 깜짝 놀랐다.

이 냉혈안이, 뭐든지 의심부터 하고 보는 사람이 이리 쉽게 동행을 허락한다고?

"고, 고맙다! 고맙다!"

헤카테가 실실 웃으며 뒤따라붙었다.

유신은 생각했다.

계획대로라고.

'게임상에서도 분명 각성의 빌미를 제공해주기만 한다면··· 이에 감화되어 플레이어를 따르지.'

'만약 제 시간 안에 엘프헬름을 인간들의 마수에서 구해내지 못한다면···'

마을은 불타고 엘프들은 관상용 노예와 약재가 되어 메트로폴리스로 팔려나간다.

그리고 헤카테는 그때 각성.

펑크시티에서 피바람을 일으킨다.

'지성 종족들의 세력은 더욱 약화되고 말이지.'

유신은 능청스럽게 상황을 유도하며 그 비극적인 미래를 막았다.

오히려 그녀를 동료로 맞이하며 일행의 전력을 증강시켰다.

이 녀석은···

'괴이를 깨는 데에 있어서 없어선 안되는 친구니까.'

"시키는 건 분명 다 한다고 했지?"

"그렇다!"

"그럼 이것부터 들어라."

"맡겨줘라!"

"언니. 내 것도."

"물론이다."

헤카테는 수십 킬로가 가뿐히 넘는 군장 두 개를 가볍게 맸다.

말 잘 듣고 힘 잘 쓰는 짐꾼도 생겼고 말이지.

유신은 피식 웃으며 가벼워진 걸음을 재촉했다.

능력의 강탈과 그릇의 개화.

꼬맹이의 각성과 화력보충. 거기다가 새로운 검의 수집까지.

얻은 것이 많은 날이었다.

***

-바깥세상은 이렇게 생겼군! 아무것도 없는 게 멋지다!

-이건 처음 보는 괴물인데··· 먹어도 되나?

-크흠흠. 유신. 그, 새로운 날붙이는 없나? 이것만 쓰다보니 허전해서···

헤카테는 엘프 특유의 털털함과 무심함으로 금세 일행에 동화됐다.

유신이야 애초에 낯선 자도 아니니 별 신경쓰지 않았고, 에피 역시 엘프 특유의 성격과 죽이 잘 맞았다.

"그래서 유신이 얼마나 쫌생이고 음험하냐면···"

"어떻게 그럴 수 있나! 그건 전사답지 않다!"

금세 유신의 뒷담까지 같이 할 정도가 되었다.

이놈들이 진짜.

유신은 미간을 찌푸렸다.

"집중해라. (구)한국을 완전히 넘어왔으니 이제 안전지대는 없다고 봐야 한다."

"네이, 네이."

고개를 대충 끄덕거린 에피가 물었다.

"그래서 우린 이제 어디로 가?"

"메트로폴리스로 간다."

컴퍼니의 아시아 지부.

증기와 예술의 도시라고 불리는 펑크시티로.

클레이모어와 사냥꾼, 돈과 권력에 영혼마저 팔아버린 부르주아들과 암약하는 악이 태동하는 대도시로.

단 그 전에.

"이곳을 먼저 털어야 한다."

저벅.

유신의 걸음이 멈췄다.

황폐화된 땅과 민둥산, 구릉지 너머의 경계선 근처.

상체만 남은 올백머리의 뚱뚱한 석상이 바닥을 굴러다닌다.

그리고 반파된 벽과 철조망 너머에는 쇠창살 달린 건물들이 즐비하게 깔려있다.

[정치범 수용소]

막 (구)한국을 넘어 북쪽으로 접어든 유신의 눈앞에 나타난 광경이다.

물론 유신에게는 그 악명보다도 저 보물창고 속에 잠들어 있을 유물에 더 관심이 갔다.

< 수용소의 그리폰 >

괴물과 모래 폭풍, 광신도와 식인종들이 즐비하다고는 하나 (구)한국은 어디까지나 살기 좋은 땅이다.

한반도를 벗어나 대륙으로 가면.

아니, 당장에 북쪽으로만 가도 환경은 더욱 척박해지고 괴물들의 수준도 높아진다.

그렇게 보기 힘들었던 3급 위험종은 물론 그 이상도 심심찮게 돌아다니니까.

그런 상황에서 유신이 이 유적으로 향한 이유는 두 개다.

내부에 잠들어 있는 유물 무형갑의 강탈.

그리고···

이를 지키는 파수꾼의 능력을 강탈해야 한다.

'괜찮은 아티팩트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유사시에 훌륭한 보험이 되는 것은 물론.

어중간한 능력은 아티팩트로 대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유신은 더 많은 능력을 자유롭게 다룰 수 있다.

결정적으로.

"메트로폴리스 펑크시티에는 컴퍼니가 있다."

클레이모어들의 본거지이자 이 망가진 세상 제일의 권력과 힘을 가진 기관.

좋든 싫든 유신은 앞으로 그들과 얽힐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그들은 나를 재생력과 화염 능력자로 알고 있지."

이예르폴에서 아이언 나이트와 마주친 것이 결정적이다.

그게 아니었다면 좀 더 유동적으로 판을 짤 수 있었을 텐데···

'뭐, 덕분에 광명교를 손쉽게 처단했으니 다행인가?'

"아하. 즉 컴퍼니를 속여 넘기려면 그 괴물을 쳐죽이고 능력을 흡수해야 된다 이거네? 상황으로 봐서 그건 화염 계열이고."

"오···"

요 꼬맹이. 이해력이 제법 늘었다.

옛날에는 한참 설명해줘야 됐을 텐데···

역시 사람은 진화하는 생물이다.

유신은 기특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유물 수호자는 그리폰이거든."

"...뭐야. 그 시선? 어쩐지 기분 나쁜데."

에피는 핏 입을 내밀었다.

"그리퐁은 모르겠고. 암튼 목적은 잘 알았어."

"···"

입을 헤 벌리고 있는 헤카테한테는 나중에 따로 설명을 해줘야겠군.

우선은···

"그냥 다 쳐죽이고 부수면 된다."

"그렇군! 맡겨둬라!"

엘프 바바리안이 가슴을 두드렸다.

그래, 이렇게 알고 있으면 된다.

이 얼마나 훌륭한 동료인가?

***

멸망 후.

콘크리트도 철골도 다 때어가서 자원으로 삼는 게 이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이다.

그건 저 북쪽의 동무들도, 남쪽 사람들도 하등 다를 게 없었다.

하지만 그런 때에 저렇게 온전하게 건물이 남아있다는 말은 하나를 암시했다.

주인이 있다는 것.

그것도 아주 위험한 주인들이.

고오오오오!

기묘한 울림과 함께 거대한 바윗덩어리가 날아온다.

"내부에 있는 핵을 부숴야 한다!"

땅을 박찬 유신이 파라오의 눈을 조종했다.

지이이잉!

파괴적인 빛이 번뜩였지만 그건 녀석의 표면만 일부분 갉아냈을 뿐이다.

골렘이 다시금 팔을 휘둘렀다.

강렬한 풍압이 안에 담긴 힘을 가늠하게 한다.

마치 거대한 트럭이 날뛰는 것 같다.

유신은 다급히 상체를 땅에 닿을 듯이 숙였다.

탁월한 선택이었다.

신비가 깃들어 조립된 녀석의 팔은 보이는 것보다 더 길었다.

베리어를 펼쳤다면 어지간히 에스트를 때려 박지 않는 이상 곧바로 깨졌을 것이다.

어디냐. 핵은··· 위치는···

유신은 그 찰나의 순간에도 녀석의 공격을 피하며 구슬을 조종했다.

뜀박질을 하면서. 양손으로 각기 다른 도형을 그리는 정도의 기예였다.

'저곳이군!'

이에 힘입었을까? 마침내 골렘의 왼쪽 다리가 갈라지며 그 안의 핵이 모습을 드러냈다.

유신이 이를 파괴하려는 그 순간.

탕!

거친 화약 소리가 울렸다.

파삭.

핵이 파괴당한 골렘은 천천히 비틀거리다가 쓰러지며 돌무더기로 화했다.

"후우. 이거 쉽지 않구만."

3급 위험종 골렘.

죄수들 대신 새롭게 이 수용소의 주인이 된 존재들이다.

일정 영역에 접근하지 않는 한 휴면상태를 유지한다는 점은 확실한 메리트였지만.

그 방어력과 공격력, 저돌성은 까다롭다.

'신비로 움직이는 녀석이라 그런가? 확실히 일반 돌덩이와는 강도 자체가 달라.'

골렘의 몸체를 구성하고 있는 바위에는 채 지워지지 않은 핏물이 묻은 것도 있고, 사람의 두개골이 광물처럼 굳혀진 것도 있었다.

저 무감정한 괴물들의 외양은 꽤나 끔찍했다.

[살아 움직이는 바위의 스톤스킨]

물론 유신에게는 그저 훌륭한 능력 창고일 뿐이다.

우선 임시로 쓸만한 능력을 흡수하고 있자.

반쯤 무너진 경비탑에서 자리를 잡고 저격을 한 에피가 다가왔다.

"더럽게 튼튼하네."

소녀는 무너져내린 바윗덩이들을 질린 얼굴로 보다가 침을 퉤 뱉었다.

"폭탄도 많겠다. 그냥 몇 개 쓰면 안 돼?"

물론 엘프헬름에서 챙겨온 병기.

로켓런처와 c4정도면 한 방에 놈을 침몰시킬 수 있을 거다.

하지만 그래서는···

"도저히 수지가 맞지 않아."

그리폰이 있는 곳까지 도달할 때 동안 상대하게 될 골렘의 숫자는 상당하다.

그때마다 폭발물을 쓴다면 기껏 전력을 보강한 것이 아깝게 일행은 순식간에 빈털터리가 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수호자인 녀석을 상대하게 될 때는 물론. 혹시나 발생할지도 모를 변수를 차단하는 것이 힘들어진다.

유신은 우리의 지금 행위는 생존을 위한 투쟁이 아니라 철저한 사냥임을 강조했다.

"으으. 이해했어. 어쨌든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싸워야 한다는 거네."

"그렇지."

사실 아무리 3급 위험종이라고는 하나 유신 일행이 이렇게 고전하는 것은 상성 탓이 컸다.

에스트 인형.

징벌의 심판.

베리어.

악몽의 나락.

나이트워커의 녹진한 어둠.

지금 유신이 가진 능력들은 극단적일 정도로 대인전과 특수전에 치중되어 있다.

이는 저격수인 에피 역시 마찬가지.

헤카테는 아직 제대로 된 무장도, 경험도 없으니 예외.

'이러니까 컴퍼니에서 전담팀을 운용하는 거지.'

유신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뭐, 자본도 힘도 딸린다면 어쩔 수 있나?

몸으로 때워야지.

물론···

"앞으로는 좀 더 수월하게 풀릴 거다. 우리 모두 다 경험이 쌓였으니···"

"확실히 이건 너무 비효율적인 것 같다."

그 때 헤카테가 다가왔다.

그녀는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냅다 골렘에게 달려들었다가 얻어맞고 건물 속에 처박혀있었다.

주륵.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약간의 타박상과 입술만 조금 찢어졌을 뿐이다.

나였다면 산산이 조각났을 텐데···

그야말로 전율이란 말이 걸맞는 육체였다.

헤카테는 움직임을 멈춘 골렘을 슬쩍 바라봤다.

곧 그 돌덩이를 들어 올리며 무게를 가늠하더니.

"이 정도인가? 흠. 가능할 것도 같다."

혼자서 중얼거리며 씩 웃었다.

"···?"

'저거 왜 저래?'

'몰라. 머리를 다쳤나?'

유신과 에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곧 헤카테가 짓는 미소의 뜻을 알아차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

"게헬-라아아아아아!"

콰아앙!

굉음과 함께 울긋불긋한 근육이 선명하게 갈라진다.

그 주인인 헐벗은 야만인은 흉흉한 미소를 지은 채 태산을 바치듯 버티고 서있었다.

그 투쟁심에 감화라도 된 걸까?

오오오오!

돌무더기의 주인 역시 온 힘을 다해 상대를 짓밟고자 한다.

"크아아아아!"

하지만 야만인은 절대 물러서거나 꺾이지 않았다.

꺾여나가는 것은 그녀가 밟고 있는 지면과 균열뿐이었다.

지이이잉!

그러는 와중에도 사출되던 죽음의 광선.

파삭.

속박되어 있기에 제 심장이 갉아 먹히는 지도 몰랐던 괴물의 최후.

골렘이 무너져 내렸다.

"후우우."

헤카테는 몇 톤짜리 돌덩이를 끙끙거리며 던지더니.

"하하하하! 역시 내 감은 틀리지 않았다!"

땀을 닦으며 개운하다는 듯 웃었다.

"···"

'어그로 미쳤네.'

유신은 질린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신체강화 능력자도 아니다.

그렇다고 무슨 유물을 소지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그녀는 방금 전 골렘의 육탄공격을 맨몸으로 저지했다.

저돌성으로는 동급의 어떤 괴물보다도 강력한 녀석을 말이지.

그 육체능력은 가히···

'4위계 최상급. 힘만 따져본다면 5위계 초입 수준.'

학살자. 학살자 했는데.

설마 벌써부터 저런 기행이 가능할 줄이야.

이거···

'내가 너무 얕봤군.'

저게 네임드 npc의 잠재력인가?

헤카테가 저 정도면 영웅이라고 불리는 그 노망난 노인네나 그 실눈 녀석은 어느 정도인 거지?

"사람 맞아?"

에피 역시 입을 쩍 벌렸다.

유신은 그러는 와중에도 소녀의 잘못을 정정해줬다.

"사람 아니다."

"···?"

"깐프. 아니, 엘프잖나."

"···"

"다음에는 더 잘 할 수 있을 것 같다! 가자!"

헤카테의 활약에 힘 입어 탐사는 수월하게 진행됐다.

나중에 수용소 내부로 들어가서는 [나이트 워커의 녹진한 어둠]

유신의 이 새로운 힘 역시 사용할 수 있었기에 파티는 더욱더 안정성을 띄웠다.

"대체 그 유물이랑 괴물은 어디 있는 거야?"

에프가 스코프로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조국··· 헌신···!]

[내보내 줘! 살려···]

하지만 보이는 것은 마치 축사처럼 생긴 폐건물들과 알아볼 수 없는 빛바랜 글씨들.

무너져 내린 철조망과 감시탑들뿐이다.

유신은 턱을 쓰다듬었다.

직접 둘러보니 알겠다. 정치범 수용소는 그냥 감옥 수준이 아니다.

과하게 넓다.

연좌제와 극한의 노동환경, 사람 아닌 것들을 격리시키기 위한 생지옥.

이를 만족시키기 위한 룰은 평범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됐으니까.

아무리 봐도 이 거대한 곳을 다 뒤지는 것은 심력과 체력 낭비다.

그렇다면···

생각하던 유신의 머리칼로 물방울이 한두 방울 떨어졌다.

툭, 투둑.

곧 그것이 시작이라는 듯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쏴아아아아!

'마치 그때가 생각나는군.'

"좋지 않은데."

열병기를 다루는 사수에게 물은 치명적이다.

이는 가장 앞에서 전위의 역할을 수행하는 헤카테 역시 마찬가지.

"하하하! 마침 더웠는데 잘 됐다!"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지만 말이다.

뿐만 아니었다.

오-오오오오!

빗소리 사이로 들리는 익숙한 괴성과 무언가가 무너지는 소리.

에피와 헤카테의 눈이 가늘어졌다.

"유신. 이거···"

"그래. 우리 말고도 손님들이 있군. 그것도···"

"가까운 곳에."

말이 끝나기 무섭게 폭우 속에서 실루엣들이 다가온다.

마치 그들이 여기 있다는 것을 안다는 듯 거침없는 행보였다.

유신은 에스트를 끌어올리며 언제든 능력을 사출할 준비를 했다.

찰팍.

고인 흝탕물이 흔들리며 파문이 졌다.

이를 짓밟고 서 있던 것은 네 명의 남녀였다.

"이런 곳에서 사람을 보게 될 줄이야."

***

말을 꺼낸 자는 가라앉은 눈매가 인상적인 도복을 입은 동양인 사내였다.

허리춤에는 그 옷과 비슷한 양식의 검이 한 자루 매달려 있었다.

그 밖에도 프릴이 달린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한 명.

검은색 코트와 깃털 모자를 쓴 총잡이가 또 한 명.

거대한 덩치의 근육질 사내가 또 한 명.

우연히 마주치게 된 이 낯선 자들은 유신 일행 못지않은 특색을 보여주고 있었다.

쏴아아아.

그들은 몰아치는 폭우에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은 채 유신 일행을 바라보다가.

"너희들은 클레이모어들인가?"

툭 내뱉었다.

선두에 있던 동양인 사내의 말이었다.

'이건 내가 알고 있던 미래에서는 없던 거다. 하지만···'

유신은 사내의 특이한 복장과 허리춤의 검으로 그 정체를 짐작하고 있었다.

'설마하니 네가 이곳에 있었을 줄이야.'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잘못하면 목이 달아날 수도 있다는 것도.

"묻지 않나? 너희들은···"

"우린 클레이모어가 아니다. 그냥 지나다니는 스케빈저들이지."

찌르르 울리는 감각의 경종을 무시한 채 유신은 침착하게 답했다.

"그런가?"

도복 사내는 금세 수긍했다.

"그러면 우리는 경쟁자로군."

곧 분위기를 잡으며 등장한 것과는 달리 그 한 마디를 남긴 채 빗속으로 사라졌다.

드레스를 입은 여자와 코트를 입은 사내도 금세 그 뒤를 따랐다.

"어이, 좋은 말로 할 때 꺼지는 게 좋을 거다. 죽고 싶지 않으면···"

거대한 덩치의 사내만이 유신 일행을 향해 으르렁거리다가.

흠칫.

빗속에서 이쪽을 주시하던 도복 사내와 눈이 마주치자 깜짝 놀라며 떠나갔다.

"하나같이 잘 단련되어 있다."

"유신. 저 녀석들 아무래도···"

"그래, 저쪽 역시 유물이 목적이다."

찰나의 순간.

유신은 저들에게서 풍기는 에스트를 느낄 수 있었다.

본인들은 철저하게 숨겼지만, 그는 파악할 수 있었다.

'강하다.'

'멤버들 대부분이 4위계 최상급. 녀석은··· 5위계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

하긴 그럴만도 한가?

[스승 살해자 백휘도]

[제 칠검 악귀나찰의 주인]

[언더 캐슬의 창립 멤버]

[결코 이뤄질 수 없는 야망을 꾸는 자]

흉흉한 이명을 주렁주렁 달고 있는 저 녀석은 에피나 헤카테와 같은 멸세생의 네임드 npc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그것도 실력 하나만큼은 손가락에 꼽히는.

괴물들의 세상에서조차 천재라고 불리는 존재.

저런 녀석과 유물을 두고 경쟁하게 되다니.

이거···

"귀찮게 됐군."

또 한 번 벌어진 변수에 유신은 쯧 혀를 찼다.

하지만.

그 얼굴에 체념이란 감정은 없었다.

내재된 재능이라면 이쪽 역시 만만치 않았으니까.

'어디 한 번 해보자고.'

< 유물 쟁탈전 >

"그 녀석들 가만히 놔둘 겁니까?"

근육질 덩치의 사내가 말했다.

푸르스름한 주먹을 가진 그의 아래에는 막 짓이겨진 골렘이 부스스 흩어지고 있었다.

백휘도는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우리는 무분별한 살인귀가 아니다. 로이드."

"하지만 녀석들이 클레이모어라면··· 아니, 설령 아니라고 한들 유물을 먼저 빼앗긴다면···"

"그 자존심 강한 돼지들이 이런 날씨에 그런 복장으로 돌아 다닐 리가 없다. 유물의 강탈에 관해서라면···"

턱을 쓰다듬던 백휘도가 피식 웃었다.

"뭐, 먼저 주운 사람이 임자 아니겠는가."

언더 캐슬에는 언더 캐슬만의 신념이 있다.

세간에서는 악귀라고 불리는 이 사내에게도 자신의 신념은 존재한다.

"···"

로이드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얼굴을 구겼다.

하지만 드레스를 입은 여인과 검은 코트의 사내는 태연했다.

그건 조직의 신념을 준수한다는 사명의식도 있었지만, 본질적으로는 로이드의 말이 실현될 가능성이 0에 가깝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백휘도와 손발을 맞춰온 그들은 알고 있었다.

아무리 저 세 명이 날고 긴다고 한들.

'우리보다 빠를 순 없어.'

'휘도가 있는 한 말이지.'

바로 눈앞의 사내 백휘도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

스릉.

강하하던 물방울 사이로 한 줄기 빛이 스쳐 지나간다.

순간 일렁거리던 물방울은 마치 폭탄처럼 터져나갔다가 금세 제 형태를 되찾았다.

검날 위를 타고 흐르는 빗방울.

양쪽으로 나 있는 칼날과 용 문양의 손잡이.

신비로운 양식의 그 검을 쥐고 있는 자는 날카로운 눈동자의 사내였다.

그리고 그의 앞에는.

쿠르르르르.

일제히 무너져 내리고 있는 수많은 바위 거인들이 있었다.

***

"어떻게 할 거야?"

"우리가 할 일은 변하지 않는다."

만약 이것이 저 그룹과 벌이는 전투였다면 유신은 도주를 택했을 것이다. 승산도 희박할뿐더러 이긴다고 해도 상처 가득한 승리가 될 뿐이니까.

하지만 이건 강탈전이었다.

유적의 파수꾼을 처리하고 유물을 입수한다.

라는 명제를 저들보다 먼저 달성하기만 하면 끝이다.

에피는 이 세상의 당연한 법칙을 물었다.

"우리가 먼저 찾았다고치자. 하지만 저 새끼들이 뒤통수 칠 가능성은?"

"그 전에 모든 볼일을 끝마치면 그만이다."

"당신답지 않게 많이 과감한대?"

그런가?

하긴 그럴 수밖에 없다.

유물도 유물이지만. 지금 여기서 그리폰을 처리하지 못하면 화염계열 능력을 얻을 가능성이 희박하다. 유신으로서는 펑크시티에 입장하기도 전에 난항을 겪게 되는 것이다.

(구)동아시아 지역의 메인 시나리오.

7대 재앙 중 하나인 여왕과 이 세상을 악으로 물들이려는 암약자들.

갖가지 권력 기관들과 야심가들의 모든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그 순간.

그 황금 같은 타이밍을 한 번이라도 놓칠 수는 없다.

그러면 이 망겜의 클리어 확률은 기하급수적으로 내려가게 될 테니.

물론.

'죽음의 사막으로 가서 살아 움직이는 불꽃을 잡는다는 선택지도 있지만···'

2등급 위험종의 능력은 한계가 명확하다.

그렇다고 희귀한 원소계열 그것도 화염쪽 능력자를 찾아서 죽일 수는 없으니.

결국 유신으로서는 다소 무모하더라도 이 선택지밖에 답이 없다.

"뭐, 좋아. 그 새끼들이 수작질을 부린다면 이걸로 족쳐주겠어."

에피는 새로 얻은 장비와 각성한 능력에 대한 자신감 덕분인지 씩 웃었다.

유신은 낙관적이지 못했다.

백휘도 그 자식 정도라면···

'총탄도 튕겨낼 테니까.'

검에 한해서 만큼은 녀석은 천재다.

전에 봤던 칼잡이 존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그렇기에 전투는 후순위다.

가급적이면 안 싸우게 되길 바랄 뿐이다.

다행이.

무장은 충분하다.

가방 사이로 삐죽 튀어나온 RPG와 C4같은 폭발물들은 든든하기 그지없다.

"그렇다면 어서 움직이자! 우리가 먼저 잡아야 하지 않나!"

헤카테가 소리쳤다.

"잠깐. 함부로 움직인다고 될 상황이 아니다."

조급함 대신 유신은 침착하게 머리를 굴렸다.

'그리폰의 특성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우선 거대한 몸뚱이와 날개가 있지.

이를 용이하게 움직일 수 있으면서도 둥지 같은 아늑한 공간.

그곳에 놈이 있을 가능성이 컸다.

'아마도 이런 장소겠지···'

그동안 마주쳤던 건물들의 구조와 양식을 떠올리며 그리폰의 특성과 대입해본다.

정도를 넘어선 유신의 집중력과 상상력이 결합되며 마치 3D 입체도처럼 목표물과 주변 환경을 그려낸다.

그 안에서 또 추려내고, 그중에서 가장 가능성이 높은 장소를 또 고려하고.

마침내.

딱.

유신이 손가락을 튕겼다.

어딘지 알겠다.

짐작일 뿐이었지만 유신은 거의 확신시하고 있었다.

그동안 수없이 쌓아온 생사를 넘나드는 경험들이 이를 뒷받침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자. 이런 건물을 찾아야 한다."

마치 수십 년 묵은 스케빈저처럼 유신이 일행을 이끌었다.

쿠르르르.

그러는 동안에도 하늘은 요란하게 반짝이며, 폐허가 된 수용소는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풍겼다.

***

세상이 망하고 괴물과 신비가 범람하게 될 무렵.

에스트는 인간 내면의 잠재력을 개화시켰다.

그런데 이 에스트는 꼭 생물을 한정으로만 발현되지 않았는데.

간혹 특정한 물건에 에스트가 서려 기이한 특색을 띠게 되는 경우가 있다.

유물.

아티펙트.

혹은 신의 선물이라고 불리는 것이 그것들이다.

칠검사가 소유하고 있는 일곱 자루의 마검.

에린교의 성기사장 팔라딘의 성서.

노스트라의 단장이 거느리는 악룡 재버워크 등.

몇몇 특정한 유물들이 시사하듯.

이 신비가 깃든 물건들은 기본적으로 전율적인 능력을 자랑한다.

인간의 탐욕과 호기심을 절로 자극할 만큼.

하지만 이 글을 보고 있는 자라면 명심할 사안이 한 가지 있다.

유물의 곁에는 꼭 이를 지키는 파수꾼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유물이 풍기는 에스트가 그들을 끌어들인 걸까?

아니면 근처의 괴물들이 유물의 영향으로 변이된 걸까?

컴퍼니의 수많은 학자들이 연구했고 또 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정확한 사실은 밝혀지지 않았다.

단.

그런 미스테리한 사실 중에서도 밝혀진 사안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바로···

유물 파수꾼들은 일반적인 괴물들과는 격이 다르다는 것이다.

[위대하신 수령동지의 뜻 아래. 우리조국! 천년만년 빛내여가리!]

광장의 한 켠에 세워진 간판은 빛이 조금 바래있을 뿐.

그 뜻과 열광은 여전히 제 존재감을 우뚝 드러내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저 뜻을 받들 주민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무도.

쏴아아아.

사상검증을 위해 마련된 광장.

철골을 드러내는 천장과 그 사이로 스며드는 빗물 아래에는 독재자의 사진 대신 거대한 석상이 우두커니 놓여있었다.

"조, 존나 크네···?"

놈을 보자마자 에피가 대뜸 한 말이다.

유신은 긍정했다.

얼추 봐도 체고만 팔 미터.

몸길이는 그 배 이상은 되는 것 같은데···

'날개를 펼치면 더 커지겠군.'

역시나 용의 아종.

그것도 유물 파수꾼답다.

저건 이제 괴물이 아니라 괴수 수준이다.

4급 위험종부터는 조금 다르다 이거지.

"조심해라. 스치기만 해도 치명적일테니."

헤카테가 의문을 제기했다.

"그런데 저 녀석은 왜 돌인가? 분명 야수형 괴물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송곳처럼 튀어나온 부리와 두툼한 사자의 앞발.

번뜩이는 눈동자는 당장에 살아 움직일 것만 같은 생생함을 자랑했다.

하지만 놈은 움직이지 않았다.

몸체를 구성하는 회색빛 피부처럼 석상의 형태를 하고 있는 것이다.

유신이 답했다.

"휴면 상태다."

"휴면?"

"겨울잠 같은 거라고 보면 된다. 가까이 가면 깨서 공격할 거다."

4급 위험종 쯤 되면 갖가지 기괴한 이능을 부리기 시작한다.

"그렇군."

유물은 지켜야겠는데.

주변에 마땅히 영양분을 섭취할 게 없었나 보지?

유신은 석상의 아래 짚더미 속에서 반짝이고 있는 깊은 에스트를 풍기는 목걸이를 보면서 웃었다.

오히려 잘 됐다.

지금 일행의 전력은 준비를 거치면 거칠수록 강해진다.

현대병기란 마법과도 상통하는 부분들이 많다.

인내, 영역구축, 정확한 타이밍 같은 것.

"그럼 저 석상 채로 부숴버리면 안 돼?"

돌이잖아?

마침 에피가 그렇게 생각했는지 물었다.

유신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 놈의 몸뚱이는 합금보다도 단단한 상태다."

"무슨 그런···"

유신이 쏴보라는 신호를 했다.

탕! 에피가 저격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석상은 스크레치조차 나지 않았다. 당연히 아무런 미동도 없었다.

"..."

"명심해라. 괴물에게 상식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오늘도 소녀에게 이 세상을 살아가는 법을 알려준다.

[에스트 주입 인형1호]

딱.

직후 손가락을 튕기자 미니어처 인형들이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다.

그 숫자는 자그마치 아홉.

광명교와 싸울 때보다 훨씬 더 늘었다.

'너는 여기에. 너는 저곳으로··· 아니, 거기 말고. 이 멍청한···'

에스트 인형들의 단점 하나.

섬세한 조정이 불가능하다.

대체 브루노 그놈은 이 자식들을 어떻게 다뤘지?

유신은 답답함을 삼키며 인형들을 무장시키고 포지션을 잡게 했다.

철컥.

그리고 본인 역시 RPG에 탄두를 결합하면서 말했다.

"에피 너는 저 경비탑에서 자리를 잡고 놈의 눈을 노려라."

"헤카테. 너는 기회를 봐서 녀석의 목에 이걸 걸어라."

[나이트워커의 형태 없는 어둠]

능력을 발동하자 주변에 있던 그늘에서 끈적한 어둠이 꾸물꾸물 기어나왔다.

곧 그것들은 유신의 손에 모여 웬 올가미 같은 형태를 만들어냈다.

"맡겨둬라."

부두에서나 쓸법한 굵직한 사슬.

야만전사와 아주 잘 어울린다.

헤카테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간다."

한 쪽 무릎을 꿇은 유신은 그리폰을 향해 RPG를 겨눴다.

사사삭.

에스트 인형 한 기가 은밀하게 석상으로 다가갔다.

순간 석상의 눈동자가 번뜩였다.

강제적으로 잠에서 깬 짐승은 성격이 좋지 않다.

그리폰은 제 기분을 여과 없이 뽐내며 우렁찬 포효를···

────────!

하지 않았다.

그 대신에 곧바로 석화를 해제.

푸화아악!

냅다 입에서 불꽃부터 뿜어냈다.

"이런 시발? 뭐, 뭐 저렇게 빨라?"

저격을 준비 중이던 에피가 당황했다.

무슨 전조증상도 없이 무자비한 공격부터 날아온 것이다.

저 괴수가 뿜어낸 브레스는 가히 불기둥이라고 칭할만했고, 이에 휩쓸린 에스트 인형은 물론 그 주변은 잿더미가 되었다.

어마어마한 화력이다.

피어오르는 수증기 너머에서 유신이 쓰게 웃었다.

"내가 말했지? 괴물을 우리들의 상식으로 이해하지 말라고."

석화의 해제도, 외부 자극에 대한 반응도, 찰나의 순간에 이뤄진다.

괴물에 대한 특성을 모른다면 가차 없는 죽음이 들이닥칠 뿐이다.

하지만.

"그래, 브레스를 뿜을 줄 알았지."

이곳에는 그런 괴물과 신비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아는 자가 있었다.

변수는 없고. 준비는 완벽하다.

그렇다면···

일방적인 사냥이 될 뿐이다.

유신이 방아쇠를 당겼다.

그 신호에 따라 에스트 인형들 역시 방아쇠를 당겼다.

투쾅.

열압력탄두가 꼬리를 달며 일제히 날아갔다.

그 안에는 타이머가 반짝이는 C4도 있었고 크레이모어도 섞여 있다.

그 모든 공통점은 하나.

이 차가운 현대병기들은 눈앞에 있는 존재의 죽음을 원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건.

──────!

강력한 열폭발과 섬광.

끼-아아아아악!

고통스러운 포효로 보답 받았다.

유물 파수꾼은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빈사상태에 빠졌다.

"지금!"

"게헬-라아아아아아!"

타앙!

쇠사슬을 휙휙 돌리며 용맹하게 돌진하는 야만인.

호흡조차 흐트러트리지 않은 채 침착하게 방아쇠를 당기는 소년병.

[에스트 장벽]

[나이트워커의 형태 없는 어둠]

[징벌의 심판]

온갖 권능을 사출하며 괴수를 압박하는 검은 머리칼의 사내.

한 번 목표를 정하고 제대로 화력투사를 시작한 유신 일행의 전력은 경이적이었다.

강탈자는 그 어떤 변칙적인 상황에서도 유동적인 대응이 가능했으니까.

결국···

쿠웅!

[능력을 흡수합니다]

[아룡의 불태우는 화염]

백휘도 일행이 본 것은 이글거리는 화마와 매캐한 연기 속.

구슬프게 무너지는 괴수와 손을 뻗고 있는 유신의 모습이었다.

"···!"

전투는 결코 무력만으로만 행하는 것이 아니다.

정신력과 전장을 보는 안목, 가진 제반 지식과 지혜 등.

보이지 않는 수 많은 요건들의 영향을 받는다.

유신은 백휘도 일행보다 이것에서 앞섰고, 경쟁에서 이겼다.

단지 그뿐이다.

비록 그 상대가 훗날 검귀라고 불리우는 희대의 괴물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 의도치 않은 휘말림 >

-허허. 내 지금껏 수많은 문하생들을 받았건만 너 같은 놈은 처음이다.

-휘도야. 너는 칼로 물을 벨 수 있느냐? 불가능하다고? 하하. 너라면 곧 그 경지에 다다를 수 있을게다.

-난 놈은 난 놈이로고··· 내 단언하겠다. 전 세계 어디를 둘러봐도 또래 중에서 네 적수는 없다.

백휘도는 천재였다.

어릴 때 부모를 여의고 나뭇가지 하나만으로 괴물과 벤디트를 도륙했을 때도.

스승에게 거둬져 수많은 사제들과 경합하게 되었을 때도.

그는 늘 두각을 드러내며 종래에는 찬란한 별처럼 빛났다.

이는 백휘도가 스승과 사제들을 살해하고 악귀나찰을 손에 넣었을 때도.

제 목적을 이루기 위해 뜻이 같은 자들과 조직을 결성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백휘도에게 있어 실패란 있을 수 없다.

아니, 경험해본 적 없다.

그런 백휘도가 오늘 처음 실패를 겪었다.

"···빠르군."

태연하게 말했지만 백휘도는 상당한 충격을 받고 있었다.

"어떻게··· 분명 그렇게 높아 보이는 경지는 아니었는데···"

이는 드레스를 입은 여자와 다른 동료들 역시 마찬가지.

단 3분.

유신이 그리폰과 조우하고 놈을 처리하는데 걸린 시간이다.

동급보다 더 강력한 유물 파수꾼의 특성과 비행형 괴물이라는 특성을 생각해볼 때 과하게 빠른 시간이다.

하지만.

'너무 오래 잡아먹었군.'

유신은 혀를 찼다.

그리폰의 마지막 발악 때문에 시간이 좀 걸렸다.

포효하며 일으킨 소닉붐으로 두 번째 화력투사가 무력화 된 것이 결정적이다.

헤카테가 제때 쇠사슬을 걸고 끌어당기지 않았다면 사냥은 더 오래 걸렸겠지.

휙.

그때 에피가 무언가를 휙 던졌다.

유신이 받아들고 보자 투명한 보석이 박힌 동그란 형태의 목걸이다.

느껴지는 이 힘.

그리고 외양.

그리폰이 지키고 있던 유물 무형갑이다.

에스트 장벽과는 달리 설치형이 아니라 갑옷처럼 걸칠 수 있는 원리이며.

그 강도와 에너지 효율 역시 비교도 안 된다.

지이이잉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며 무형갑에 에스트부터 밀어 넣는다.

유신이 말했다.

"또 만났군."

"너는 사냥꾼인가?"

백휘도는 주변에 널려있는 탄피들과 폭발흔들을 살피면서 말했다.

뭐, 엘프제 무기가 대단하기는 하지.

크레딧을 가공한 게 아니라 순수 화약으로 만든 거니까.

"정식은 아니고. 겸사겸사?"

"그렇군."

"볼일이 끝났다면 서로 갈 길 가자고."

여유를 가장하고 있지만 유신의 머릿속은 지금 팽팽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물론 능력자들간의 싸움이란 게 위계란 것에 딱딱 맞출수는 없다지만.

단순히 무력으로만 따져볼 때 자신의 전력은 4위계 수준이다.

이번에 그리폰을 죽이고 능력을 강탈했으니 중상급 수준은 되겠지.

하지만 눈앞에 있는 녀석들은 하나같이 다 그 이상이거나 비슷한 경지를 이루고 있다.

특히나 저들의 리더인 백휘도는 단신으로 4급 위험종을 쳐죽일 실력자.

만약 녀석들이 헛된 마음을 먹는다면···

'전투는 피할 수 없다.'

또한 싸움이 벌어진다고 하더라도.

'승산은 점칠 수 없더라도··· 우리 셋 중에 누구 하나는 반드시 죽는다.'

에피나 헤카테.

이 엿같은 세상에서 힘겹게 모은 믿을만한 동료들.

혹은 유신 자신의 목숨.

얻는 것보다 잃는 게 과하게 컸다.

"그러지."

다행이도 백휘도는 놀라움 말고는 아무런 생각도 없어 보였지만.

유신은 방심하지 않았다.

"이봐요."

그래, 집단이라는 것은, 어느 한 사람의 독단으로만 이뤄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왜 그러지?"

에피와 헤카테한테 신호를 보내며 유신이 답했다.

드레스를 입고있는 여자가 이쪽을 째려보고 있었다.

"유적에 언제쯤 출입했죠?"

아아. 그런 식으로 나오겠다?

"잘 모르겠는데. 시계 같은 걸 들고 다니지는 않아서."

유신이 어깨를 으쓱였다.

백휘도가 여자를 바라봤다.

"클레르."

클레르라 불린 여자는 애써 백휘도의 시선을 무시한 채 말했다.

"뭐, 좋아요. 이 땅이 우리들의 영역도 아니고 소유권을 주장할 생각은 없으니까. 대신에."

클레르가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그거 우리한테 팔지 않겠어요?"

"···"

클레르는 자신들이 내어줄 수 있는 것들을 말했다.

그 안에는 수많은 액수의 크레딧, 연금공방제 특별 장비나 구하기 힘든 영약등 희귀한 물품들도 더러 있었다.

하지만.

"거절하지."

그 어떤 것도 지금 목에 걸고 있는 이 유물.

무형갑과 비교하면 질이 확연히 떨어진다.

'이 년이 어디서 날로 먹을려고?'

'유물을 가지려면 적어도 이와 비등한 유물은 제시해야지.'

유신이 눈가를 찌푸렸다.

클레르가 콧소리를 냈다.

"흐음. 그렇게 나오시겠다?"

많은 뜻을 내포하고 있는 말이었다.

···

추적추적 내리는 비 사이로 싸늘한 한기가 퍼져 나간다.

에피는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었고, 헤카테는 손도끼를 만지작거렸다.

물론 이는 상대 역시 마찬가지.

단.

"클레르 코스탄자. 더 이상 선을 넘지 마라."

저들의 리더인 백휘도만은 예외였다.

고오오오.

백휘도의 주변으로 물안개가 휘몰아쳤다.

피어오르는 에스트와 살기에 빗물이 증발하며 발생하는 신비로운면서도 두려운 광경이었다.

"···꿀꺽."

그 살기를 정면으로 맞고 있는 클레르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하지만.

"휘도. 잘 생각해요."

그녀는 제 욕망을 포기하지 않았다.

"우리들한테는 지금 힘이 필요해요. 조직에게는 힘이 필요하다구요."

아니, 그것은 대의를 위한 신념이었다.

"···"

"우리가 무너뜨려야 할 아성은 너무도 높고 견고해요. 반면에 우리들은 아직 미약하죠. 그런 때에 필요한 것이 뭐겠어요? 그건 바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과감함! 신의나 양심의 가책 따위는 얼마든지 내려놓을 수 있는 덤덤함이에요!"

빗물 속에서 열정적인 연설이 울려 퍼진다.

"당신이 조직을 결성했을 때 했던 그 다짐! 그걸 설마 잊은 건 아니겠죠?!"

두려움은 어디가고 여인에게 남은 것은 광기뿐이었다.

"클레르의 말이 맞다 휘도."

"어차피 이렇게 할 거. 그냥 처음부터 죽이고 뺏자니깐."

언짢아하던 깃털모자 사내까지 그녀를 두둔했다.

근육질 사내는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후우."

백휘도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것은 무거운 중압감에 짓눌려 끝내 자신의 신념을 꺾은자의 한탄이었다.

백휘도는 음울한 눈동자로 유신을 바라봤다.

"유물을 팔아주지 않겠나?"

"앞서 말했던 것들로 부족하다면 더 값을 치르겠다. 믿을만한 정보통이 있으니 다른 유물을 구해다 줄 수도 있다."

말만 거래 제안이지 실은 겁박이나 다름없다.

저들의 몸에서 풍겨오는 적의와 결의가 이를 증명하고 있었으니.

키득.

백휘도의 뒤편에서 입가를 가리며 웃고 있는 클레르를 보며 유신은 생각했다.

뭔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하나 했더니.

저년의 목적은 처음부터 백휘도를 움직여 유물을 강탈한다였다.

백휘도는 제 목적을 위해 스승과 동문들마저 베어버린 광인.

자신의 대의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잔혹해질 수 있는 남자니까.

이것 참.

"개짓거리도 이딴 개짓거리가 따로 없군."

'역시 준비를 해두기를 잘했...'

에스트를 끌어올린 유신이 말하기도 전에 헤카테가 으르렁거렸다.

"인간들은 원래 저렇나?"

곧 그녀의 오른손이 흐릿하고 사라졌다.

촤아악.

도끼가 빗물을 가르며 벼락처럼 날아들었다.

웃고 있던 클레르의 머리가 홱 젖혀졌다.

***

"어?"

유신도 에피도, 사냥꾼인 깃털모자 사내도, 신체강화 능력자인 거한도 그 누구도 반응하지 못했다.

그저 헤카테의 손이 사라졌고 도끼가 번뜩였다.

털썩.

쓰러진 클레르의 치맛자락이 빗물과는 다른 의미로 물든다.

"허억, 흐으, 흐으."

가슴을 오르락 내리락 하고있는 그녀의 얼굴은 백짓장처럼 새하얬다.

클레르는 만용에 대한 대가를 철저히 치렀을 것이다.

백휘도가 휘두른 검이 헤카테의 도끼를 막지만 않았더라면.

저릿.

검집을 쥐고 있던 백휘도가 눈을 찌푸렸다.

"무식한 힘이군. 그게 너희들의 답인가?"

뭐,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기는 한데···

'오히려 더 좋군.'

나이스 헤카테.

씨익 웃은 유신이 코트 자락으로 손을 가져갔다.

"그래. 이 약탈자 새끼들아."

"내가 말-했지?! 그냥 처음부터 다 죽이고 뺏···!"

탕!

방아쇠를 당긴 에피와 빗물을 가르는 총탄.

소리치다가 푸르스름한 주먹으로 이를 막아낸 거한.

"함정이 있을지도 모른다! 유의해!"

세심하게 주변을 살피다가 연발 보우건을 당기는 검은 코트의 사내.

"게헬-라아아아아!"

녹슨 간판을 휙 던지며 그 사격을 막아내는 헤카테.

찰팍.

단 한 걸음 만에 유신의 눈앞에 나타나며 검을 휘두르는 백휘도.

화르르륵.

마령갑의 반투명한 역장으로 이를 막아내며 왼손으로는 불꽃을. 오른손으로는 숨겨둔 크레이모어의 격발기를 누르는 유신.

찰나의 순간.

이 모든 상황이 순식간에 벌어졌다.

그 악의와 적의.

분노와 생존의 몸부림은 곧 참혹한 결과를 피워낼 듯했다.

고오오오오.

갑작스레 그들의 목덜미를 침범하는 섬뜩한 한기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

이를 인지한 순간.

마치 안개라도 낀듯 눈앞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곧 그들이 사라진 자리 위로 거대한 구조물들이 신기루처럼 모습을 드러냈다.

[할즈버그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낡아빠진 간판과 추적추적 울리는 빗소리만이 음산하게 울려퍼졌다.

***

온 몸이 축축하다.

마치 바닷물에 푹 빠졌다가 방금 막 빠져나온 듯한 느낌.

유신이 눈을 끔뻑 감았다 떴다.

곧 당황을 금치 못했다.

역장을 찢어발길 듯이 날아들던 칼날이 사라졌다.

하지만 자신의 손에는 여전히 크레이모어의 격발기가 들려있다.

그리고 눈앞에는.

'없다?'

동료도 적도 아무도 없다.

그저 뿌연 안개만이 시야를 가득채우고 있다.

이건···

'아공간 계열 능력에 휘말린 건가?'

백휘도의 일행 중 한 명의 소행?

'아니다.'

떠오르는 가능성을 곧바로 배제한다.

만약 아공간 계열 능력에 휘말린 거라면 그 특유의 뒤틀림을 느꼈어야 한다.

내가 이를 못 알아챌 리 없다.

'그렇다면 공간 이동일까?'

고개를 흔들어봤지만 감각의 교란 역시 일어나지 않는다.

이것 역시 배제.

그렇다면···

'짙게 깔린 안개와 갑작스레 사라진 사람들. 그리고···'

"호흡조차도 힘든 이 무거운 공기."

퍼즐을 짜맞춘 유신이 헛웃음을 지었다.

지금 상황을 좋아해야 할까? 아니면 낭패감을 느껴야 할까?

뭐가 됐든···

찰팍.

어-어어어어어

가만히 있어야 될 상황이 아니란 건 분명하군.

안개 너머에서 비틀거리는 실루엣을 피하며 더블배럴 샷건을 꺼내 든다.

직후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꺄아아아아악!

곧바로 비명소리가 들려온다.

가깝다. 그리고 이쪽으로 오고 있다.

뭉클거리는 안개를 향해 유신은 방아쇠를 당기려다가.

"···"

행동을 멈췄다.

"허억, 허억."

눈앞에 나타난 실루엣이 생각하던 괴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퍽 반가운 쪽도 아니었다.

도도해 보이는 얼굴과 헝클어진 드레스 자락.

나타난 자는 클레르였다.

불과 방금전까지만 해도 목숨을 걸고 총구를 겨눴던 상대.

"다, 당신은···"

창백한 낯빛의 클레르는 유신을 보며 다급히 가슴께로 손을 가져갔다가.

어-어어어···

찰팍, 찰팍.

저 너머에서 들리는 공허한 소리에 고개를 저으며 양손을 들어 보였다.

"이봐요··· 혹시 지금 상황이 어떤지 알고 있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헤카테의 도끼가 미간으로 날아들던 그 때보다도 더 격렬하게.

웃기게도 유신은 그녀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잘 알지. 어쩌면 너희들보다도 더."

"그럼 이야기가 빠르겠네요. 지, 지금 우리끼리 다툴 때가 아니라는 것도 잘 알 테니까."

"···"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앙금은 그리 쉽게 사그라들지 않는다.

하물며 서로 날붙이까지 맞댔다면야.

하지만.

유신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짓했다.

클레르는 방금 전까지 적이었다는 사실도 잊은 양 곧바로 붙으며 사주를 경계했다.

"이, 일단 여기서 벗어나죠. 잠깐 숨 돌릴 장소라도 찾아서···"

"상황을 파악하고. 작전을 짠다. 이의 있나?"

"없어요."

한 걸음, 또 한 걸음.

의도치 않은 동행을 이룬 두 사람은 신중히 걸음을 옮기며 안개 속을 헤쳐나가기 시작했다.

***

끼이익, 끼이익.

낡아빠진 바닥이 꺼림칙한 소리를 냈다.

화장실과 부억. 그리고 안방까지.

2층짜리 오래된 목조건물을 샅샅이 수색한 유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은 안전한 것 같군."

달려있던 커튼을 쳐서 창문을 가리고. 문에 걸쇠까지 걸어둔 클레르가 식은땀을 닦았다.

"젠장할···"

직후 그녀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이었다.

"어떻게, 어떻게, 어떻게, 어떻게 이런 일이··· 흐윽. 운도 지지리도 없기도 하지."

곧바로 주저앉으며 어깨를 들썩거린다.

손가락 사이로 주르륵 흐르는 저 액체.

눈물이다.

저년 지금 눈물을 흘리고 있다.

방금 전에 목숨을 걸고 싸울때는 공포를 극복하며 이를 악물었으면서 말이지.

유신이 비아냥거렸다.

"그렇게 질질 짜기나 하려고 동행을 제안했나?"

"···"

클레르가 뭐라고 말했다.

하지만 미세한 소리라 들리지 않았다.

"뭐라고?"

유신이 다시 되묻자.

"당신 같으면 진정이 되겠냐고요!"

클레르는 물기 어린 눈으로 와악 소리쳤다.

"우리는 지금 모든 힘을 잃고 노멀이 되었는데!!!"

< 괴이 : 미스트 시티 >

불사자와 아크의 잔재.

데몬과 심해의 이물.

마녀와 여왕. 그리고 숨겨진 그 녀석까지.

멸세생의 해피엔딩을 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던 때에 내 골머리를 썩히던 것은 7대 재앙이라는 최흉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부패한 컴퍼니나 클레이모어들. 혁명을 부르짖으며 헛된 꿈을 꾸던 볼셰비키들도 아니었다.

바퀴벌레처럼 번식하는 밴디트들, 순전히 재미로 혹은 제 목적을 위해 온갖 악행은 다 저지르고 다니는 빌런들이나 광신도들 역시 아니었다.

늘 나를 가장 괴롭히던 난관은 '괴이'였다.

그럴 수 밖에...

앞서 말했던 적들은 수준이란 게 있다.

그리고 이 세상의 주인공인 플레이어블 캐릭터들은 죽지 않는한 꾸준히 강해지며 결국 최종 보스들의 영역까지 다다르기 마련이다.

하지만 괴이는 달랐다.

강력한 유물들과 권능을 둘둘이 두른 캐릭터들도.

극한까지 단련시킨 동료들도.

이 녀석을 상대로는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신이 말했다.

"괴이··· 마녀가 이 세상에 피워올리고 있는 악의 씨앗."

7대 재앙중 하나인 마녀는 온 세상을 방랑하며 차원을 찢고 균열을 만든다. 그리고 거기서 탄생한 차원 침식이 괴이라고 불리우는 미스테리한 현상이다.

공교롭게도 엘프헬름으로 가던 도중 만났던 그 괴이가 이번에 유신 일행을 집어삼켰다.

"그런 괴이의 특징은 네 가지죠."

클레르가 말을 이었다.

하나. 몇몇 고정되어 있는 녀석들도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유동적으로. 마치 신기루처럼 전 세계 곳곳에서 나타났다 사라졌다 한다는 것.

둘. 이런 괴이에 가까이 접근하는 순간 그 세상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는 것.

셋. 괴이 내부에서는 능력자들이 부리는 아공간 계열 능력처럼 어떤 특별한 법칙을 강요한다는 것.

마지막으로 넷.

"이곳에서는 그 어떤 능력도 에스트도 사용할 수 없다는 것."

그래, 이게 가장 결정적이다.

이 마지막 법칙 때문에 모든 능력자들은 괴이를 기피하고 두려워한다.

이는 난다긴다하는 클레이모어들 역시 마찬가지다.

아무리 주먹으로 태산을 부수고 벼락을 불러일으키는 능력자들이라도 그 능력 자체가 봉인 당한다면 그저 지나다니는 황무지인1과 다를바가 없을 테니.

그렇기에···

"모든 능력자들의 무덤이자 생환율 0%의 지옥. 우리는 지금 막 그 지옥 속으로 발을 들이민 거라구요."

즉 이곳에서 살아나가고 싶다면 앙금은 잠시 접고 서로 손을 잡아야 한다.

죽음 앞에선 영원한 적도 아군도 없는 법이니.

'0%는 아닌데.'

몇 명 정도는 생존자가 있다.

잠시 노망난 영감과 선글라스를 쓴 붉은 머리칼의 여자를 떠올리던 유신은 굳이 클레르의 말을 정정하지 않았다.

"아는 것이 많군."

"당연하죠. 조직에서 맡고있는 내 역할이 이런거니··· 지금 이렇게 한가한 소리나 할 때에요?"

자존심은 높으나 어벙한 면이 있군.

태연하게 상대에 대해서 파악한 유신이 어깨를 으쓱였다.

"엿같은 상황이지만 우리가 할 일은 간단하지."

"우선 이 괴이의 특성과 룰을 파악하고, 흩어진 동료들을 규합한다."

헤카테는 무사할 것이다.

에피 역시 특성상 능력에 그렇게 의지하지 않던 아이.

거기다가 약삭빠름과 눈치 역시 겸비했으니 무사하겠지.

혹여 일어날 수 있는 백휘도와 일행 간의 트러블이 문제이기는 한대···

"휘도와 로이드, 카라짐은 멍청이가 아니에요. 괴이에 대해서도 어느정도 알고 있으니. 지금 같은 때에 칼을 들이밀 리가 없어요. 뭐, 당신들 일행은 모르겠지만."

이를 읽은건지 클레르가 말했다.

유신은 어깨를 으쓱였다.

"내 친구들도 바보는 아니야."

아마도.

"결정됐군. 그럼 힘을 합쳐 여기서 빠져나가자고."

물론 유신은 이곳 미스트 시티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고 있다.

여기서 얻을 수 있는 귀물들 역시도.

하지만 현실판 변수는 늘 유의해야 하는 법이다.

그동안 이곳을 게임과 동일시 했다가 얼마나 통수를 맞았던가?

"말은 쉽지···"

클레르는 한숨을 토해냈다.

유신의 말은 빌어먹을 정도로 정론이다. 하지만 그걸 해낼 수 있느냐는 또 다르다.

내면의 에스트가 산산이 흩어진 지금.

숨을 쉬는 것 만으로도 호흡이 턱턱 막혀왔기 때문이다.

마치 강철로 된 속박구에 온몸이 결박당한 듯한 기분.

힘을 잃어보지 않은 자는 모른다.

자신이 한없이 무력해지는 이 기분을.

그런데···

'이 자는 왜 이렇게 태연하지?'

클레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고 보니 처음에도 그랬고, 용케 이 집을 찾았을 때 역시 그랬다.

이 남자는 지금의 상황에 당황이라고는 없어 보였다.

마치 지금의 상황이 익숙하다는 것처럼.

"···"

아무렇지 않은 것은 아니다.

유신은 그 자리에 있던 누구보다도 수많은 에스트와 능력을 다루던 자니까.

하지만.

'그때에 비한다면야···'

강탈자가 되어 이 낯선 세상에서 눈을 떴을 때.

황무지와 무너진 폐허더미에서 눈을 떴을 때.

유신이 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거적대기를 두른 육체는 연약하기 그지 없었으며 현대인의 정신력은 더더욱 한미했다.

하지만 그는 그런 상황에서조차.

-으적으적

벌레를 씹으며 허기를 채우고.

손톱이 빠지고 살점이 짓무를 때까지 괴물과 아귀다툼을 벌였다.

결국 살아남아 이 자리까지 기어 올라왔다.

정말이지 그 때에 비한다면···

'해볼만 해.'

무장도 정신력도 비할 바가 못 된다.

육체 역시 마찬가지지.

역시 엘프헬름에서 장비들과 세계수의 열매를 챙긴 것은 신의 한 수였다.

달그락.

더블배럴 샷건과 리볼버, 기관단총과 혹시 모를 챙겨둔 수류탄과 섬광탄까지.

유신은 낡은 탁자 위에 코트 속에 수납해뒀던 무기들을 올려두며 정비를 시작했다.

능력을 사용하지 못하는 지금.

자신의 비수가 되어줄 것은 권능이 아니라 이 화약 무기들이니.

실제로 모니터 밖에서 괴이의 생환율 역시 사냥꾼과 기계인, 고대 인류의 실험체 등이 가장 우수했다.

"그, 흠흠. 저기···"

클레르가 유신이 내려놓은 무기들을 힐끔거리며 헛기침을 했다.

"양손으로 두 자루를 쏘는 것보다 양손으로 한 자루씩 쏘는 게 더 효율적이지 않겠어요?"

거 말하는 거 한 번 신박하네.

"거절하지. 너도 이미 한 자루 가지고 있지 않나?"

유신은 피식 웃으며 그녀의 가슴께를 주시했다.

"···"

클레르는 들켰다는 표정을 짓다가 후 한숨을 쉬었다.

곧 가슴 사이에서 권총 한 자루를 꺼냈다.

"그럼 호환되는 탄환이라도 조금 주지 않겠어요? 이거 호신겸 자결용이라 몇 발 없는데."

"맨입으로?"

"···한 발당 100크레딧을 쳐드리죠."

야경제 총탄 하나의 가격은 10크레딧.

제법 머리 좀 썼군.

지금 이 상황의 주도권이 누구에게 있는지는 확실히 인지하고 있어.

하지만···

"한 발당 1000크레딧."

"에엑?!"

넌 나를 너무 얕봤어.

"없으면 물건도 받는다."

"무, 무슨 그런 폭리를···"

"물건의 가격은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따라 달라지지."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건 너무 하잖아요! 괴이를 빠져나가려면 서로 힘을 합치는 게 유리하다구요!"

정론이다. 능력을 사용하지 못하는 지금 여기서 중요한 것은 머릿수니까.

하지만.

유신은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 지금 보니까 네가 나보다 뭘 더 많이 알고 있는 눈치는 아니던데. 그럼 넌 그냥 연약한 여자1. 잉여인간1 아닌가?"

그렇다고 내가 유리한 고지에서 내려올 수는 없지.

"하윽···"

가슴을 후벼파는지 클레르가 비틀거렸다.

"꼬우면 사지 말던지. 아, 참고로 네가 쓸모없다고 판단되면 곧바로 버리거나 미끼로 쓸 거다."

유신이 피식 웃었다.

"이, 이익."

클레르는 얼굴을 붉히며 분노하다가···

"흑."

눈물을 주륵 흘리며 매고 있던 배낭에서 크레딧들을 꺼내들었다.

저 모습을 보니 좀 불쌍하··· 지는 않다.

애초에 네가 자초 한거잖아.

마음 좀 곱게 쓰지 그랬어?

유신은 거침없는 폭리를 취하며 크레딧과 연금공방제 활력 포션을 챙겼다.

***

낡아빠진 창문이 바람에 덜컹거린다. 더러운 커튼 사이로 튀어나온 망원경이 주변을 은밀히 훑고 있다.

보도블럭과 아스팔트가 깔린 도로 위로 내려앉은 흐릿한 안개.

흐릿하게 점멸하는 가로등까지.

"역시나 (구)시대의 건물 양식이네요. 도시는 아니고 시골이라고 불리던 장소 같아요."

"이 주변으로는 다른 집들이 안 보이는 것으로 보아 여기는 마을에서도 외곽쯤 되겠죠."

괴이는 결코 친절하지 않다.

무슨 행동을 하면 상황을 해결하고 이곳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지.

무슨 행동을 해서는 안 되는지 그 어느 것도 알려주지 않는다.

그렇기에.

탐색에 앞서 행해야 될 것은 심도 깊은 관찰이다.

주변에 남겨진 흔적으로부터 상황을 추론하는 것.

"전기가 통하고 있다니··· 황당하긴 한데. 이것 역시 쓸만한 정보에요. 어쩌면 기기를 조작해야 될 상황이 발생할지도 몰라요."

'제법인데.'

클레르의 말대로 괴이 미스트 시티는 20세기 말.

서양권 쪽의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특색은···

찰팍.

어-어어어어어

공허한 울림과 함께 안갯속에서 무언가가 빠져나왔다.

가로등 아래에서 비틀거리고 있는 것은 사람의 형태를 한 무언가였다.

진한 얼룩과 해진 옷은 분명 인간의 양식이 맞다.

그러나 그 옷가지 위로 드러난 얼굴은 무슨 녹아내린 살더미들을 한대 뭉쳐놓은 듯 일그러져 있다.

다른 한쪽 손 역시 기괴할 정도로 길었으며 날카롭다.

그래, 괴이 미스트 시티는 미스테리 호러 서바이벌물이다.

무기력한 주인공이 정체불명의 마을 속으로 빠져들어가 공포와 맞서 싸우면서 끝내 탈출하는 것을 모티브로 잡았다.

이는 이 괴이를 구성할 때 사용한 매개체의 특징 때문이기도 한데···

뭐, 마녀의 취향 중 하나다.

'이렇게까지 과거를 그리는가?'

"역시 잘못 본게 아니었네요. 이곳에도 괴물이 존재하고 있었어요."

흔들흔들.

클레르는 굳은 얼굴로 괴물의 행동을 유심히 관찰했다. 현재 능력이 봉인당한 그들의 입장에서 저 녀석은 4급 위험종보다 위험할 수도 있었으니.

'그냥 평범한 주민이다. 별 다른 위협은 아니야.'

유신 역시 혹여 발생할 수 있는 변수를 대비 주변을 유의 깊게 관찰했다.

'아직까지는 내가 알던 그대로인데.'

저 정도까지는 총으로 잡을 수 있다.

"녀석이 이쪽으로 오고 있어요."

그 때 클레르가 속삭였다.

가로등 아래에 있던 주민이 코를 킁킁 거리더니 슬그머니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생긴 걸로 봐서 시각이나 후각은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데. 숨겨진 감각 기관이라도 있는 걸···"

클레르가 입을 닫았다.

철퍽철퍽

이곳으로 다가오고 있는 주민의 뒤로.

녹진하게 깔린 안개 너머로 또 다른 주민들 역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어어어어

[루나]라는 더러운 명찰을 달고 있는 치마를 입고 있는 소녀였던 것.

개체마다 차이가 있는 것인지. 얼굴을 덮고 있는 살점 사이로 핏줄 선 눈깔 한 짝을 힐끔거리는 중년이었던 것.

수 없이 많은 주민들이 이 집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마치 유신 일행이 여기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양.

침을 꿀꺽 삼킨 클레르가 권총을 뽑아들었다가 깜짝 놀랐다.

"이, 이게 뭐야? 언제 생긴 거야?"

새하얀 손등 위로 불길해 보이는 보라색 낙인이 반짝이고 있었다.

이곳 미스트 시티의 룰 중 하나. 제물의 낙인이란 거다.

한 장소에 오래 머무르고 있으면 생겨나며 주변의 악귀들을 끌어들이지.

"아마 그 문양이 저놈들을 끌어들이는 게 아닌가 싶은데."

유신은 조금씩 정보를 풀면서 이 상황을 주도했다.

"지금 우리한테 중요한 건 그게 아닌 것 같군."

쿠웅!

경첩이 젖혀지는 소리.

계단의 삐걱거림.

어-어어어어어!

비틀거리며 올라오던 주민들은 유신과 클레르를 발견하자 마치 먹이를 노리는 짐승처럼 재빨리 달려들었다.

쾅!

유신의 더블배럴 샷건이 불을 뿜었다.

10게이지 납탄의 세례가 뭉개진 살점을 가차 없이 해집었다.

치명상을 입히기에 충분한 지근거리 사격이었고, 효과는 대단했다.

달려들던 주민들은 붕 날아가더니 한대 뭉쳐서 계단을 데구르르 굴렀으니까.

하지만.

"뭐, 뭐야. 저 자식들!"

클레르가 당황했다.

가장 선두에서 달려들던.

머리가 반쯤 날아갔던 루나라는 소녀가 제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어어어어!

꾸물꾸물 상처 부위를 재생시키며 다시 달려드는 것 아닌가?

"트롤?"

트롤이 아니라 불멸이다.

이 마을에서 저 녀석들을 죽일 방법은 없다.

그저 잠깐 무력화시킬 수 있을 뿐.

아니면 내가 왜 계속 총을 쏘는 것을 망설였겠는가?

이것 역시 미스트 시티의 불합리한 룰 중 하나.

"이, 이봐요! 한 발 더···"

"쏘긴 뭘 쏴.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따로 있는데."

죽지 않는 불사의 괴물을 상대로 가장 훌륭한 대처법이 뭐겠는가?

"튄다."

그건 바로 도주다.

쨍그랑.

유신은 개머리판으로 창문을 깨부쉈다.

이윽고 2층 방에 있던 침대의 매트리스를 도롯가로 휙 던지며 자신 역시 몸을 날렸다.

젠장.

나는 이래서 괴이가 싫다.

한 순간에 장르가 바뀌어 버리잖아. 장르가.

이 세상은 어디까지나 포스트 아포칼립스 이능력자 배틀물 괴수와 좀비에서 그쳤어야 했다.

'가만···'

유신은 생각했다.

그러면 장르 드리프트는 아닌가?

진짜 드리프트란 추천 요정의 낙원이나 살아남기 시리즈, 스페이스 오페라, 그리스 로마 신화, xx타이쿤 같은 괴이들을 말하는 게 아닐까?

철컥.

주인의 의문 따위 나는 모르겠다는 듯 더블배럴 샷건은 붉은 탄피만을 내뱉었다.

< 괴이 : 미스트 시티 >

어두컴컴한 천장 아래.

지이이잉.

달려있던 수은등이 흐릿하게 점멸하고 있다.

"뭔데?"

에피는 안개 같은 것에 휩싸이자마자 자신을 맞이하고 있는 것이 이 낯선 천장이라는 것에 당황했다. 곧 벌떡 일어나려다가 흡 숨을 들이켰다.

'안 움직여?'

제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는 몸뚱이에 에피가 고개만 슬쩍 내렸다.

그러자 보이는 광경들.

자신은 지금 웬 쇳덩어리로 된 침대 위에 누운 채 결박되어 있었다.

'묶여있다? 납치? 어느 틈에?'

상대측의 능력자한테 당한 걸까? 아공간 계열 능력?

'그리고 이 냄새는···'

머릿속으로 수많은 의문들이 지나간다.

그러나 에피의 상념은 오래가지 않았다.

음흠흠.

흥겨운 콧소리와 함께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근처에서 들려왔기 때문이다.

에피가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음산하게 점멸하는 전등 아래.

원래는 하얀색이었을 타일이 누렇고 시뻘겋게 물들어있다.

그리고 그 앞의 트레이에 누군가가 선 채 부지런히 손을 놀리고 있었다.

짧은 미니스커트와 쓰고 있는 두건.

그리고 하이힐까지.

여자였다. 사람이었다.

하지만 에피는 본능적으로 저게 인간이 아니란 사실을 깨달았다.

그야 사람은 한쪽 발목이 기괴하게 돌아간 상황에서 저렇게 태연할 수가 없고.

온몸에 피칠갑을 한 채로 해체용 칼 같은 것을 만지작거리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아. 깨셨네요."

뿌득. 뼛소리와 함께 여자가 고개를 돌렸다.

얼굴은 온통 피투성이의 붕대로 감싸여져 있고. 그 아래의 건치는 씨익 미소를 짓고 있다.

"조금만 기다려 커걱. 주세요. 환자분."

에피는 깨달았다.

방안을 둘러싸고 있는 이 비릿한 냄새의 정체는 피비린내였다.

그리고 그 냄새는 저 여자와 이 공간 전체에서 풍겨오고 있었다.

'시발. 뭔데?!'

에피에게 좀 더 지식이 있었더라면 이곳에 수술실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그리고 저게 간호사의 복장을 하고 있다는 것도.

하지만 그건 중요치 않았다.

"자아. 환자분. 주사. 커걱. 맞을 시간입니다아아아."

제 덩치만 한 주사기를 든 채.

또가각가가각!

춤을 추듯 기괴하게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는 저 괴물에게서 빠져나가는 게 더 중요하지.

"미친!"

에피는 다급히 몸을 뒤틀었다.

하지만 이 낡은 결박구는 기우뚱 흔들거리면서도 충실히 제 역할을 다하고 있었다.

"빠져! 빠지라고오!"

악을 쓰던 그녀의 시선이 닿는 곳은 옆에 있던 선반이다.

공교롭게도 그곳에는 예리한 메스가 올려져 있었다.

결박당한 상태에서도 안간힘을 쓰면 닿을 수 있을 정도로 절묘한 위치에.

마치 이걸 사용하라는 듯.

소녀는 결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툭투둑.

순식간에 메스를 잡아 구속구를 잘라내며 냅다 몸을 날린다.

탱그렁.

텅 빈 쇠침대 위로 거대한 주사기가 박혀 들었다.

"나쁜 커컥. 아이. 얌전히 있···"

탕!

웃고있던 간호사의 머리가 홱 젖혀졌다.

얼굴을 감싼 간호사가 비틀거리자 붕대가 벗겨진다.

드러나는 살점으로 뒤덮힌 기괴한 얼굴.

지이이잉.

음산하게 점멸하는 전등 아래.

하나 남은 시뻘건 눈동자가 에피를 주시하고 있다.

섬뜩한 광경이었다.

"거거거거걱!"

망가진 다리로 춤을 추듯 덤벼드는 모습 역시 마찬가지.

하지만.

탕탕!

소녀는 리볼버의 실린더를 돌리며 침착하게 방아쇠를 당겼다.

한 발은 다리를 쏴서 움직임을 제약시키고. 나머지 한 방은 드러난 약점인 눈깔을 쏜다.

결국.

"키이이익."

간호사는 짐승 같은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허억, 허억."

에피는 유신에게 받은 리볼버의 약실을 열어 남은 탄약을 세어봤다.

단 세 발.

품을 뒤져봤지만 넣어두었던 예비용 탄환은 없다.

'저격총도 어디로 갔는지 안 보여."

'이 새끼들이 숨겨둔 건가? 리볼버는 가만히 놔둔 채?'

방안을 뒤져봐도 나오는 게 없는 건 마찬가지.

'그러고 보니 에스트도 사라졌잖아?'

호흡이 힘든 것은 구속구 때문이라 생각했는데 그것 역시 아니었다.

뚝뚝.

의문은 증폭된다.

그 사이로 혼란과 당황. 그리고 이 기묘한 공간이 주는 음산한 분위기가 섞여든다.

괴이는 이 당찬 소녀의 목을 천천히 죄어오고 있었다.

"퉤."

물론 에피의 정신에 타격을 주기에는 아직 역부족이다.

소녀는 침을 찍 뱉으며 최선의 대응이 뭔지 생각했다.

"우선 여기를 빠져나가서 유신하고 깐프 언니를···"

에피가 흠칫 놀랐다.

찰팍.

뒤쪽에서 들려오는 발소리 때문이다.

마치 뭉개진 살점들이 마찰하는 듯한 방금 전까지 들었었던.

"···"

소녀는 고개를 돌렸고.

"아파아···"

죽지 않는 불사의 괴물을 마주했다.

"이런 시발!"

에피가 다급히 문고리를 돌리며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러자 그녀를 맞이하는 것은 피칠 된 시뻘건 복도와 어둠.

그 사이로.

또가가가각!

기괴하게 비틀거리며 다가오는 간호사들이었다.

"환자부우운···"

"으아아아아악!"

소녀는 타오르던 투지 따위는 집어던진 채 달리기 시작했다.

괴이 미스트 시티의 룰 중 하나.

이곳은 어디까지나 서바이벌 생존 호러물이다.

건 서바이벌이 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

***

"그 녀석 설마 병원에서 깨어나지는 않았겠지."

'거기 난이도 진짜 엿 같은데.'

안개로 가득 찬 도로를 걸으며 유신이 내뱉었다.

클레르가 되물었다.

"뭐라구요?"

"아무것도 아니다."

이 마을을 둘러싼 안개는 수시로 옅어졌다가 진해졌다가를 반복했다.

그렇기에 집을 탈출한 그들은 안개가 옅어지면 조금 더 빠른 보폭으로 이동을.

안개가 진해진다면 속도를 늦추고 보다 면밀하게 사주경계를 하며 조금씩 나아가고 있었다.

지금은 강력한 권능을 봉인당한 채 한낱 범인이 된 상황.

가시거리의 제약은 치명적이다.

유신은 생각했다.

'역시 우리가 있던 곳은 마을 외곽이 맞다.'

괴이 미스트 시티는 빨려 들어오는 순간 일행들마다 겪게 되는 시작지점이 각각 다르다.

그 중 유신과 클레르가 깨어난 곳은 스타팅 포인트 중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다.

괴물들도 약하고, 무장도 뺏기지 않으며 만전의 상태에서 시작할 수 있는 곳이지.

운이 좋았다고 밖에 볼 수 없다.

뭐, 덕택에 다른 사람들은 꽤나 힘든 장소에서 시작했겠지만···

어디까지나 제 코가 석자다.

'분명 마을 중심부로 가야 했었지. 그리고 봉인진을 가동시켜야 돼.'

저벅.

생각하던 유신의 걸음이 멈췄다.

흐릿한 안개 사이로 여러 개의 실루엣들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쪽을 알아보고 접근하는 것은 아니다.

으적으적.

그저 제 자리에 멈춰선 채 몸을 흔들어대고 있다.

형태로 봐서 곤충계열.

'헤비 비트인가? 우선 보이는 숫자는 셋.'

우회하기는 좀 그렇다.

확인해봐야 될 것이 있었다.

유신은 클레르한테 손짓했다.

자신이 먼저 제압 사격을 할 테니 혹여 발생할 빈틈을 메꿔달라는 뜻이었다.

'맡겨둬요.'

유신은 실루엣들을 조준한 채 곧바로 방아쇠를 당겼다.

쾅!

안개를 가르며 날아든 산탄이 목표물을 찢어발겼다.

붕 날아가서 미동도 없는 놈이 한 놈.

달각달각.

비명을 지르며 버둥거리는 놈이 또 한 명이다.

좋아. 하나는 침묵시켰고, 하나는 무력화시켰다.

그렇다면 이 상황에서 남은 것은 한 놈.

그리고 놈이 취할 행동은.

부우우우웅!

눈 깜짝할 사이에 안개를 가르며 날아오는 거대 벌레.

등 뒤에는 알집이 매달려 있으며 입가에는 날카로운 촉수가 있다.

물장군 같이 생긴게 헤비 비트가 맞다.

꾸드드득.

놈이 알집에서 새끼들을 토해내기 전.

쾅!

유신은 침착하게 또 한 번 방아쇠를 당겼다.

영거리 사격의 산탄의 위력은 더없이 강력하다.

더군다나 웬만한 갑각류들이 그렇듯. 등껍질 아래의 내피는 연약하기 그지없다.

헤비 비트는 새하얀 핏물을 뿜으며 날아갔다.

끝이 아니었다.

탕탕탕!

뒤를 이어 또 한 번 화약 소리가 울렸다.

유신이 고개를 돌리자 클레르의 권총 아래 죽어있는 괴물이 보였다.

자이언트 렛.

아마 이 근방에서 헤비 비트가 씹던 저 먹잇감의 뒤처리를 노리다가 일행의 기척을 느끼고 접근했던 모양.

털이 수북히 달린 녀석의 은밀한 발바닥과 짐승 특유의 교활함은 치명적이다.

'잘못하면 암습 당했겠군.'

역시 사주경계를 부탁하길 잘했다.

지금은 꼴이 이렇지만 두 사람 다 이 망가진 세상에서 지금껏 살아남은 실력자들이자 프로들.

손발은 꽤나 잘 맞았다.

"후훗."

입가를 가리며 짓는 저 우쭐한 미소만 아니었다면 완벽했을 텐데.

'저런 캐릭터로군.'

한숨을 쉬며 샷건을 재장전한 유신은 해비 비트들이 씹던 무언가로 다가갔다.

그리고 눈을 가늘게 떴다.

"이건···"

***

파해처진 내장에서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른다.

이를 덮고 있었을 육신은 마치 강철처럼 단단해 보였다.

고통스럽게 치켜떠진 눈의 사내를 보며 클레르가 입가를 가렸다.

"로, 로이드···"

백휘도의 일행이자 신체 강화 능력자였던 사내.

3급 위험종 따위는 가볍게 으스러트렸으며 저격총의 총탄마저 튕겨낸 전사.

그런 그가 지금 이렇게 비참하게 죽어있었다.

"어떻게··· 어떻게 당신이···"

이것이 바로 괴이의 위험성이다.

아무리 강력한 능력자라 할지라도.

생사를 넘나들며 쌓은 경험과 냉철한 판단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까딱하면 죽는다.

이 미스테리 앞에서 인간은 너무도 무력하다.

"움직이지."

동료의 죽음 앞에 선 자 앞에서 유신은 이 말 한 마디 밖에 할 수 없었다.

애도할 시간 따위는 없다고.

속으로는 저기 죽어있는 것이 에피나 헤카테가 아니라 다행이라 생각하며.

저들의 전력이 줄었으니 앞으로 더 다루기 쉽겠다고 생각하며.

"···"

클레르는 로이드의 시신을 뒤져 쓸만한 소지품을 챙겼다.

그리고 부릅뜬 눈을 감겨주었다.

함께 싸워왔던 동료에 대한 애도는 그렇게 간단히 끝났다.

"가죠."

이런 세상이었다.

어-어어어어!

소란을 듣고 쫓아온 악귀들의 아우성이 그 뒤를 이었다.

***

가로등의 형태로 잉태하고 있다가 지나다니는 자를 한 입에 삼키는 카멜레온 라바.

후각이 과할 정도로 발달 된 스멜독.

입에서 산성침을 내뱉는 스피터까지.

미스트 시티는 그야말로 괴물 천지였다.

그들은 안개 너머로. 자동차 아래와 건물들의 사각지대에서 끝없이 나타나며 유신을 몰아붙였다.

두 사람이 그 습격을 헤치고 마을의 중심부에 닿을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유신이 가진 방대한 지식과 약간의 운 덕분이었다.

[총포상 휘슬]

유신의 눈에 한 건물이 들어왔다.

좋아. 의도한 대로 도착했다.

그가 그곳을 손짓했다.

"저곳에서 재정비하지."

"총··· 포상? 좋은 판단이네요. 물자가 남아있을지도 몰라요."

클레르는 (구)시대의 언어. 그 중에서도 영어와 한글을 읽을 줄 알았다.

아마 그 방대한 지식과 판단력이 그녀의 무기일 것이다.

두 사람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가게 내부는 텅텅 비어있었다.

유리로 된 진열대 안에는 권총과 샷건용 탄환만 조금씩 남아있을 뿐이다.

"이렇게 큰 건물에 이것밖에 안 남아있다니··· 역시 여기는 이상해요."

클레르는 의문을 표시했다.

가져갈거면 아예 다 털어갔던지.

아니면 그 흔적이라도 남아있었어야 한다.

하지만 건물 내부는 깔끔했다.

마치 처음부터 이것 밖에 준비해두지 않았다는 듯.

'그야 그럴 수 밖에. 미스트 시티의 모토는 어디까지나 생존이니까.'

마녀가 이 세상을 구성하기 위해 사용한 매개체의 원작이 그랬다.

그냥 원래부터 그렇게 만들어진 거다.

하지만 이를 설명하는 건 시간 낭비다.

"괴이를 이해하려 들지 마라. 신비를 이해하려 들지마라. 이 망가진 세상의 법칙 아니던가?"

유신은 탄환들을 정확히 반으로 나눠 클레르에게 건네줬다.

그 수량 역시 바깥의 저 괴물들을 다 상대하기에는 부족하지만 따돌릴 정도의 수량이다.

공교롭다.

"···그건 그렇네요. 멍청한 짓이었어요. 하지만."

클레르는 고개를 젓다가 카운터에 기대어 있는 백골을 바라봤다.

"이것마저 그러지는 않겠죠. 마치 꼭 봐줬으면 좋겠다는 듯 노골적이잖아요?"

풍화된 해골의 손에는 반짝이고 있는 보석과 낡은 일지가 들려있었다.

'이제 남은 봉인석은 두 개.'

유신은 보석에는 손도 대지 않은 채 일지부터 펼쳤다.

< 괴이 : 미스트 시티 >

1998년 5월 6일 날씨 맑음.

-그 목사라는 놈이 온 뒤부터 마을이 점점 더 이상해져 간다. 식료품 가게의 세인도 카센터의 호프만도 가게 문도 열지 않은 채 그 교회를 찾아가는 일이 잦았다. 나는 이웃인 진과 이 사태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 역시도 의아함을 느끼고 있···

5월 8일 날씨 흐림.

-진이 사라졌다. 그의 가족들 역시. 나는 두려움에 빠졌다. 동시에 이렇게 있으면 그다음 차례는 내가 될 것이라는 사실도 깨달았다. 그래서··· 교회로 가서 그 목사를 찾아 말씀을 들었다.

5월 15일 날씨 비바람.

-미친 새끼들. 저 미친 새끼들이 기어이 일을 저질렀다. 동물을 가져다 의식을 치르는 게 아닌, 아이들로 의식을 치렀다! 부모란 것들은 웃으면서 자기 아들 딸들을 바쳤다! 나가야 한다! 나가야···

5월 18일 날씨 안개.

-다 틀렸다. 의식은 성공했고 마을은 이계와 융합됐다. 혹여 이 일지를 발견하는 사람이 있다면···

유신이 피 묻은 일지를 덮었다.

변수는 없구만.

"흐음. 이 괴이가 대충 어떤 식으로 돌아가는지 알 것 같네요."

클레르는 유신의 손에서 일지를 가져가 다시 한 번 빠르게 정독하더니 말했다.

"저 괴물들은 본래 마을 주민들이었고, 웬 광신도 놈들이 그 배후. 여기 있는 이 보석은 그 광신도 놈들이 원하는 물건이거나. 그들을 약화시킬 수 있는 물건 같아요."

정확하다.

"광신도와 주민들이야 그렇다 치고 보석의 용도를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너무 노골적이며 클리셰 적이라서?"

클레르가 웃었다.

"많이 읽어 봤거든요. (구)시대의 소설들. 거기 보면 딱 이런 내용들이 많았어요. 보급품을 건네주고 죽는 엑스트라라던지. 각 구역에 놓인 메모장과 장비들을 모아 최종 보스를 쓰러트리는 것들."

"호오."

"빌어먹을 정도로 생생하며 하나의 끔찍한 현실이지만. 괴이는 분명 마녀가 만들어낸 허구의 세상. 지금껏 이 마을이 우리에게 보여준 정황으로 볼 때 이렇게 추론하는 게 합리적이지 않을까요?"

"그럴 듯하군."

유신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속으로는 놀랐다.

그녀가 괴이의 법칙을 정확히 꿰뚫어봤기 때문이다.

괴이는 분명 불합리함 투성이의 미저궁이다.

그러나 마냥 사람들을 죽음으로만 몰고 가지는 않는다.

실마리가 존재하며 살길을 열어준다. 비록 그 확률이 해변에서 동전 찾기 쯤이라고 할지라도.

'이게 얼마 만에 보는 지능형···'

"보석이 하나일지 여러 개일지는 몰라요. 뭐, 다른 장소들을 뒤져보면 알겠죠."

그런 유신의 생각은 클레르가 해골이 쥐고 있던 보석을 툭 뺏어들면서 끝났다.

달각달각.

"응?"

해골의 손에 있던 보석을 건드린 순간.

끄-아아아아악!

움찔거리던 녀석이 성대도 없이 냅다 비명을 질렀기 때문이다.

"큭!"

순간 마음에 동요가 퍼져 나간다. 비틀거리던 유신과 클레르의 손등에 예의 그 낙인이 생겨났다.

"넌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군."

퍽. 유신이 클레르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켁."

"이런 장르에서 원래 키카드를 건드리면···"

챙그랑!

"웨이브가 시작되지."

총포상의 창문이 깨지며 기괴할 정도로 목이 긴 여인이 나타났다. 입이 쩍 찢어진 그녀의 배가 올챙이처럼 부풀어 올랐다. 악귀가 죽음을 토해내기 전.

투타타타타!

유신의 기관단총이 불꽃을 뿜었다.

괴물의 단말마. 요란스럽게 깨져나가는 창문들.

찰팍. 그리고 안개 너머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또 다른 괴물들.

괴물들. 괴물들.

"으아···"

"뒷문으로 가지. 저걸 다 잡다간 날 새겠어."

이제부던 타임어택 시작이다.

***

괴이 미스트 시티를 빠져나가는 방법은 단순하다.

흩어져 있는 세 개의 봉인석을 찾고, 교회로 가서 이를 이용해 봉인진을 완성시킨다.

그리고 나타나는 최종 보스를 잡으면 클리어.

물론 늘.

말은 쉽다.

건물의 벽면에서 그림자가 떨어져 내렸다.

인간의 머리가 기괴하게 일그러지며 악을 썼고, 그 아래 거미의 몸통과 다리가 징그럽게 삐걱거렸다.

탕탕!

"윽!"

방아쇠를 당기던 클레르를 밀치며 이쪽 역시 당긴다.

격발된 산탄이 주민들의 다리를 박살 낸다.

그 옆에서 달려드는 놈은 개머리판으로 후려치고.

카아악!

틈을 노린 채 달려드는 머리가 갈라진 들개한테는 매그넘 리볼버를 쐈다.

켕. 소리를 내며 날아가는 들개. 먹이를 놓치고 바닥을 구르는 거미 괴물.

"다리를 노려라! 따돌리는 게 최우선이야!"

"거미는 다리가 여덞개인데요?"

"농담할 정신도 있나 보군."

"농담 아니··· 으악!"

탕탕!

지금 유신의 상황을 한 마디로 설명하자면 중과부적이다.

이쪽이 가진 화력에 비해 너무 많은 숫자가 몰려든 것이다.

모니터 밖에서 이런 상황을 맞이했다면 그냥 겜을 껐었다.

되도않는 활로를 찾아낸다고 안간힘을 쓰느니 그냥 새로 하나 더 키우는 게 편했으니까.

하지만 이곳은 현실.

로그아웃 따위는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유신 역시 발버둥쳐야 한다.

지옥 끝까지.

핑.

유신은 수류탄의 핀을 뽑은 채 굴렸다. 괴물들의 발아래로 절묘하게 굴러가던 수류탄이 터지며 포위망에 구멍이 뚫렸다.

"달려!"

그 속을 파고들면서 방아쇠를 당기고. 번갈아가며 재장전하고. 서로 사각을 봐주며 피하고.

"후우, 후우."

"헥헥."

입에서 쇠맛이 날 정도로 다리를 놀리니 포위망은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찰팍.

어-어어어어어!

그럴 때마다 안개 너머에서 또다시 새롭게 나타나는 괴물들.

문제는 이거다.

"도저히 뭘 할 수가 없어요!"

봉인석을 찾거나 동료를 찾거나 할려면 먼저 수색을 감행해야 한다. 그런데 이 녀석들은 그럴 틈을 안주며 조금씩. 약간만 지체하더라도 개떼처럼 몰려든다.

두 사람은 천천히 말라죽어가고 있었다.

"염병."

기분 나쁜 안개 사이로 유신이 식은땀을 닦을 때였다.

스르르르.

또 한 번 안개 너머에서 실루엣이 나타났다.

괴물. 동료? 이쯤에서 나타나주면 좋겠는데···

그런 유신의 기대는 안개 너머의 실루엣의 크기가 3미터가 넘어가자 사그라들었다.

거거거걱

갈라진 안개 사이로 절지류의 다리가 채찍처럼 날아들었다. 쾅! 유신이 그 공격을 저지할 수 있었던 것은 예리하게 날 선 감각과 산탄총의 특성. 약간의 운 덕분이었다.

비명을 지르던 괴물이 안개를 가르며 튀어나왔다. 방금 전에 봤던 거미 인간을 몇 배는 확대시킨 듯한 괴물이었다. 흑요석처럼 박힌 눈도 여덞 개. 부풀어 오른 젖가슴도 여덞개.

암컷.

그 중에서도 꽤나 강해보이는 녀석.

"저 총알··· 다 떨어졌어요. 후우, 후우. 한 발 빼고."

클레르의 말은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었다.

유신은 생각했다.

얼마 없는 총탄을 써서 저걸 제압할까? 아니면 그냥 반쯤 삶을 포기한 저 여자를 미끼로 삼아 도망칠까?

끼아아아아악!

달려들던 거미 인간이 우뚝 멈췄다.

곧 녀석의 얼굴 위로 실선이 그어졌다.

뒤를 잇는 터져나가는 살점과 핏물의 세례.

그 너머에서 나타난 것은.

"휘도!"

백휘도와 깃털 모자를 쓴 사내였다.

***

"무사해서 다행이군. 클레르. 그리고··· 그쪽도."

백휘도와 카라짐은 유신에게 적의를 내보이지 않았다.

그저 동료와 재회하게 된 반가움과.

"···후우."

지친 피로감을 내보일 뿐이었다.

클레르의 말대로 그들 역시 이 괴이의 위험성에 대해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하긴 그럴 수밖에 없나?

유신은 백휘도의 모습을 상세히 살폈다.

폭우와 골렘들을 상대할 때도 한점 흐트러지지 않았던 도복이 지금은 엉망이다.

오르락 내리락 하며 거친 숨을 토해내는 모습은 또 어떤가?

놈의 손에 들린 유물 악귀나찰은 여전히 섬뜩한 예기를 뿜어내고 있었지만 말이다.

비록 에스트를 사용하지 못하기에 그저 튼튼하고 날카로운 검일 뿐이겠지만...

'그래도 역시 괴물은 괴물이로군. 이 녀석을 아무런 능력도 없이 단칼에 처리하다니.'

굳이 능력만이 아닌 육체의 단련 역시 소홀히 하지 않았단 증거였다.

유신이 맨 후방을 자처하며 말했다.

"자세한 이야기는 이동하면서 하지."

상대에게 적의가 안 보인다고 한들 방심은 하지 않는다.

이제 이쪽은 하나. 저쪽은 셋이 되었으니.

유신은 절로 몸을 사릴 수밖에 없다.

"그렇군··· 로이드가 죽었군."

"보석이라··· 그건 봉인석이라는 물건인 것 같다. 근처를 수색하는 도중 입수한 일지에서 그런 글귀를 봤거든. 총 세 개가 있으며 하나는 병원에. 또 다른 하나는 학교에 있다더군. 나머지 하나는···"

"우리 손에 있어요."

정보와 상황을 공유하고 다시금 수색을 개시한다.

네 사람이 되니 몰려드는 괴물들을 따돌리는 것도 수월해졌다.

깃털 모자의 사격 솜씨는 물론 단칼로 괴물들을 썰어버리는 백휘도의 솜씨 덕분이다.

"그럼 이제 두 개 남은건가? 학교와 병원의 지리는 알고 있다. 지도 역시 입수했거든."

백휘도가 지도를 펼쳐 보였다.

마을의 곳곳에 단서들과 장비들을 뿌려놓는다.

굳이 봉인석만이 아닌 약국으로 가서 진통제를 챙길 수도 있고.

공구점으로 가서 빛이 안 드는 공간을 대비 플래시를 챙길 수도 있다.

전형적인 파밍형 구조라는 거다.

"헤카테와 에피는 보지 못했나?"

"전혀. 한 번씩 총소리 같은 것을 듣기는 했다만 그뿐이다."

거짓을 말하는 것 같지는 않다.

애초에 저 녀석 성격은 대쪽 같은 면도 있고.

"그렇다면 우선 둘씩 나눠서 병원과 학교를 수색하는 것은 어떻겠나? 네 일행 역시 그곳에 있을지도···"

백휘도가 말하던 그 순간.

──────────!

"큭!"

안개 너머에서 거대한 포효소리가 울렸다.

"빠르기도 하군."

백휘도의 얼굴에 곤란하다는 감정이 떠올랐다.

그가 속도를 높이자 클레르가 당황했다.

"휘도?"

"사실 너희들과 만나기 전 우리 역시 쫓기고 있었다."

"다, 당신이요?"

"이곳에서는 도저히 상대가 불가능한 괴물이다. 나찰도도 통하지 않···"

쿵.

진동이 가까워졌다.

순간 백휘도가 일행의 앞을 가로막으며 악귀나찰을 휘둘렀다.

"컥."

날카로운 검명 대신 폭탄 터지는 소리가 울린다.

백휘도가 피를 토하며 바닥을 굴렀다. 날아가던 거대한 무언가가 도로에 박혔다.

그건 도끼였다. 손잡이부터 날까지 3미터는 족히 되어 보이는 가히 철퇴라고 불러야 할 흉기.

그 앞에는.

크르르르르···

3미터는 가볍게 넘을 듯한. 거인이라고 칭하기에 부족함이 없을 정도의 사내가 서 있었다.

머리에는 못이 박힌 더러운 헝겊을 쓴 채. 도축용 치마를 입고.

'처형자···'

감각을 교란하는 안개와 공포. 죽지 않고 끝없이 몰려드는 괴물들로도 부족했는지.

미스트 시티에는 한 가지 더 끔찍한 난관이 존재한다.

바로 마을을 배회하는 저 괴물 처형자다.

보이는 것보다 더 단단하고 빠르며. 집요하다.

녀석은 저 집채만 한 덩치와 흉기로 건물 채로. 바리케이트 채로 모든 것을 부수며 생존자들의 목숨을 위협한다.

실로 불합리한.

타임어택으로 설계된 제압도 못하는 기믹이란 거지.

"휘도!!!"

"젠장!"

클레르와 카라짐이 방아쇠를 당겼다.

하지만 처형자는 보우건과 총탄 따위 간지럽지도 않다는 듯 몸으로 버텨내며 도끼를 집어들었다.

그르르륵.

쇠가 마찰하는 소리.

벌떡 일어나며 검을 휘두르는 백휘도.

그냥 몸으로 이를 받아내며 냅다 도끼를 내려찍는 처형자.

"큭! 도망친다!"

백휘도가 뒤로 물러나며 소리쳤다.

카라짐이 수류탄을 꺼내 들었다.

유신 역시 얼마 안 남은 폭발물을 꺼내 들려다가.

───────!

저 멀리서 아련하게 들려오는 소리에 행동을 멈췄다.

"거기서 멍청하게 뭐해요?! 어서 가자구요!"

클레르가 유신의 팔뚝을 잡았다.

하지만 유신은 묵묵부답이었다.

"클레르! 그 녀석은 두고 어서···"

카라짐이 소리치던 그때.

"도망칠 필요 없다."

유신이 피식 웃었다.

"···뭐?"

오-오오오오오!

처형자가 달려들던 그 순간.

유신이 말했다.

"이쪽이다!"

동시에 도끼가 휘둘러졌다.

하지만 그 도끼가 유신을 갈라버리는 일은 없었다.

안개 너머에서 휙 튀어나온 인영이 그 도끼를 막아냈기 때문이다.

꾸우우우욱!

그것도 맨손으로.

"나이스 타이밍이다 헤카테."

말도 안 되는 기행을 앞에 둔 채 유신이 엄지를 치켜올렸다.

피에 절은 야만인이 씨익 웃었다.

"무사했구나! 유신!"

오오오오?

아무리 이계의 괴물이라고는 하나. 지금 같은 상황은 처음 맞닥뜨린 걸까?

처형자가 당황했다.

헤카테는 아랑곳 않고 와악 괴성을 지르더니.

"게-헬라아아아아!"

도끼를 휙 비틀어서 던지며 맹수처럼 달려들었다.

그리고 처형자의 머리 위로 올라탄 후 놈의 목에 제 팔을 휘감았다.

질식?

비틀기?

아니, 다 틀렸다.

헤카테는···

"크아아아아아!"

뿌드드득.

단순히 완력만으로 녀석의 목과 머리통을 분리시켰다.

"···!"

"이런 미친?!"

백휘도 일행이 입을 쩍 벌렸다.

유신은 와하하하 웃으며 박수를 쳤다.

그래, 이거지. 이거야!

이것이 내가 헤카테를 영입한 이유다.

능력도 에스트도 없이 발휘되는 미친 신체능력.

이 녀석이 있으면 무력이 필요한 괴이의 난이도가 확 떨어지거든.

역시...

"육체가 똑똑하면 머리를 쓸 필요가 없다니깐."

이제 고생은 끝났다.

꿀이나 빨고 얼른 보상 챙겨서 떠나자.

< 괴이 : 미스트 시티 >

이것도 못 맞춰?

이런 쓸모없는 녀석.

어릴 때부터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은 말이다.

이를 악물며 떨리는 손을 가라앉히고.

본능적인 꺼림칙함을 애써 무시하며 다섯 살 배기 정도로 총을 쏠 수 있게 됐을 때.

헤카테는 새로운 세상을 볼 수 있었다.

그것도 자신들의 성지를 침입한 한 인간에 의해.

헤카테는 잊지 못했다.

총 대신 날붙이를 쥐었을 때의 그 오묘한 감각을.

헤카테는 잊지 못했다.

일족의 전사들도 애를 먹던 그 인간들의 골통을 자신이 깨부쉈을 때의 희열을.

한 순간에 달라진 위치.

더 이상 천덕꾸러기가 아닌 비로소 한 명의 전사가 됐을 때의 그 충족감.

헤카테는 자기 자신을 증명하고자.

보다 더 강해지고자 유신을 따라나섰다.

그리고 지금.

"게-헬라아아아아!"

전사의 포효성과 함께 그 가치가 드러났다.

뚝뚝.

돌덩이 같은 주먹 아래 핏물과 살점이 흐른다.

재생에 오랜 시간이 걸릴 정도로 이면 세계의 마물을 산산조각낸 헤카테가 콧김을 흥 뿜었다.

"헤카테 넌 어디서 눈을 떴나?"

"웬 광장 같은 곳이었다. 기둥에 묶인 상태였는데. 사방에는 괴물 놈들이 그득하더군."

햐.

걸리면 백이면 백 사망하는 처형자의 광장에서 눈을 뜬 것도 모자라 몸 성히 탈출했다고?

유신이 감탄할 때 헤카테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 인간 녀석들은 도망쳤군. 추격할까?"

"흠."

유신이 고개를 돌렸다.

방금 전까지 있던 백휘도 일행이 있던 자리에는 메모지 한 장이 놓여있을 뿐이었다.

유신이 메모지를 주웠다.

[우린 그럼 학교로 가서 봉인석을 찾아올게요~ 나중에 교회 앞에서 뵙죠. 물론 그 사이에 오해는 좀 풀어주시는 걸로 ㅎㅎ]

"감히 너를 인질로 잡다니. 실로 비겁한 술수다. 지금 당장 쫓아가서 사지를 찢고···"

당장에 달려가려는 헤카테를 만류하며 클레르로부터 강탈한 활력 포션을 건넸다.

엘프 야만인은 지친 육신을 회복시키면서도 이해를 하지 못했다.

"왜 살려둬야 하나? 녀석들은 적이지 않나?"

"그게···"

유신은 생존 앞에서 원수끼리 손을 잡는 것이 필수불가결한 상황이었음을.

감성을 배제한 채 실리적으로 볼 때 이게 최선의 이익을 추구할 수 있었음을 주장했다.

이에 대한 헤카테의 답은 간단했다.

"그럼 이 상황이 끝나면 죽여도 되나?"

"물론."

"알았다."

***

끼-아아아악!

그 무렵 백휘도 일행은 학교로 침입해 괴물들과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섬뜩한 검광을 번뜩이며 그가 말했다.

"왜 도망친 건가?"

"당연한 거 아니에요? 지금 상황에서 우리가 저걸 어떻게 감당해요?"

"여기서 탈출할 때까지 동맹을 맺었지 않나?"

클레르는 방아쇠를 당기며 콧방귀를 꼈다.

"그걸 어떻게 믿어요?"

"···"

"우리는 동맹을 고수할 의도가 있다고 한들. 상대 역시 그러리란 법은 없잖아요? 전력차이가 너무 나는데."

안개가 서린 복도를 지나 교실로 들어선다.

반짝이고 있는 보석이 놓여 있는 교탁 앞에는.

흑흑.

교복을 입은 채 피눈물을 흘리고 있는 소년이 있었다.

소년의 몸이 뒤틀리며 우화를 준비 중이던 그때.

백휘도는 검을 휙 털며 한숨을 쉬었다.

"애초에 네가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면 이런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을 터인데."

"윽."

"동감한다. 이번만큼은 상대를 잘 못 건드렸어."

카라짐까지 두둔하고 나서자 클레르가 꽥 소리쳤다.

"다, 다들 동의해놓고 왜 나한테만···"

백휘도는 한숨으로 답하며 땅을 박찼다.

괴물의 악의와 현란하게 펼쳐지는 검무가 뒤엉키기 시작했다.

***

거거거걱!

시뻘건 조명 아래 기괴하게 뒤틀린 괴물들이 득실거린다.

환자의 목숨을 구하던 간호사들은 이제 갖가지 연장을 쥔 채 죽음을 퍼트리고자 달려들었다.

물론.

"환자아··· 켁!"

야만인의 강철같은 주먹 아래에서는 모든 것이 무의미였다.

"흐읍!"

피하고, 튕겨내고, 버티고, 반격하고. 또 깨부수고.

헤카테는 맨몸뚱이로도 3급 위험종을 저지하던 괴물.

아무리 이계의 마물이라고 하더라도 그녀를 막아낼 순 없었다.

헤카테가 지나가는 자리에는 재생조차 힘겨울 정도로 산산히 부서진 육편들 뿐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에피를 찾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소란을 좀 일으켜주자 본인이 먼저 이쪽으로 달려왔기 때문이다.

"유시이이이인! 깐프 언니이이이!"

한 손에는 누가 봐도 수상해 보이는 보석을 쥔 채.

끼-아아아아악!

뒤편으로는 그 보석을 지키는 네임드와 괴물들을 주렁주렁 단 채로.

유신이 피식 웃었다.

"살아있을 줄 알았다."

그 상황에서 그걸 또 챙겼어?

"시발. 지금 그딴 소리 할 때야? 어서 튀···"

"게-헬라아아아아!"

에피의 다급함은 벼락처럼 달려나간 헤카테.

그녀의 주먹 아래 다져지는 괴물들의 구슬픈 비명과 함께 사라졌다.

툭.

에피는 보석을 떨구며 입을 헤 벌렸다.

"이 뭔···"

속으로는 억울한 마음도 들었다.

이게 이렇게 쉽게 해결된다고? 그럼 내가 지금까지 한 고생은 뭔데?

***

쿠르르르르.

오래 된 나무문이 저절로 움직이며 아가리를 닫는다.

아우성을 치며 달려들던 악귀들은 그저 허무하게 문짝만 두드릴 뿐이었다.

제 역할을 못하고 있는 스테인드글라스 아래.

일렬로 놓아진 예배석들.

그 앞의 단상과 불길한 빛으로 점멸하고 있는 마법진까지.

교회 안은 쥐죽은 듯이 조용했다.

괴물도 주민도 아무도 없었다.

그렇기에 더 기괴하며 음산했다.

저벅.

그리고 그런 교회 내부로 들어선 여섯명의 생자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클레르는 마법진 사이로 나 있는 세 개의 홈을 가리켰다.

"저기! 저곳에 꼽으면 딱 될 것 같은 크기인데요!"

"그럼 아줌마가 가서 꼽으면 되겠네."

에피가 저격총을 쥔 채 비아냥거렸다.

클레르가 마주 응대하려던 그 때.

"내가 하지."

백휘도가 나섰다.

유신은 턱을 쓰다듬었다.

"흠."

괴이 미스트 시티의 클리어 조건.

이계의 틈을 닫기 위한 봉인 시도.

그건 봉인구들을 마법진의 홈 사이에 끼워 넣는 것이 맞다.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다.

이에 나선 자는 저주에 걸린다는 것이다.

게임 상에서는 기력저하, 고통 극대화, 상처 악화. 뭐, 이런 거였지.

물론 이들은 저 사실을 모른다.

하지만 딱 봐도 위험해보이는 느낌은 풀풀 풍긴다.

그런 때에 나서겠다고?

"안 돼요 휘도! 차라리 각팀끼리 공평하게 가위바위보로···"

"내가 나서겠다."

물론 숙련된 전사들이 그 사실을 모를 리가 없다.

백휘도의 동료들이 만류하며 앞다투어 나섰다.

하지만 백휘도는 고개를 저으며 손을 내밀었다.

"내가 하겠다. 봉인구를 다오."

유신은 어깨를 으쓱였다.

"감당할 수 있겠나?"

"감수하겠다. 너희들한테는 실수한 게 있으니."

"그렇게 점수 따도 안 봐줄 건데?"

"상관없다. 최악의 상황이 도래하더라도 감내할 것이다."

다진 결의 아래 무인의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다.

'그래, 저 녀석은 이런 놈이었지.'

유신은 병원과 총포상에서 챙겨온 봉인구 두 개를 휙 던졌다.

백휘도는 그것을 받아들고는 단상으로 걸어가 마법진의 홈에 끼워 넣었다.

끼리릭.

고오오오오.

분명 폐쇄된 공간이건만 예배당 내부로 바람이 분다.

스테인드글라스가 텅텅 흔들리다가 돌연 번쩍였다.

"큭!"

백휘도가 나가떨어지며 몸을 뒤틀었다.

그의 가슴에는 제물의 낙인이 그 어느 때보다도 크게 새겨져 있었다.

-흐흐흐흐.

-그 누구도 우리를 방해할 순 없다.

갖가지 목소리가 한대 뒤섞여 색색거린다.

불처럼 타오르고 있는 마법진에서 솟아오르고 있는 것은 거대한 두 개의 손이었다.

소년과 소녀, 젊은 아가씨와 청년, 중년부부와 황혼에 접어든 노인들.

본디 미스트 시티의 주민들이었을 그들이 마치 고깃덩이처럼 뭉쳐져 저 손을 구성하고 있었다.

-아파, 아파, 아파아아아!

피눈물을 흘리며 처절하게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시체들의 한편. 그곳에는 기괴한 로브를 쓴 인간들이 미소 짓고 있었다.

지금껏 일행을 숱하게 괴롭혀온 제물의 낙인.

그것과 같은 양식의 로브를 쓴 자들이.

괴이 : 미스트 시티의 최종난관.

악신의 뒤틀린 왼손과 오른손.

────────!

광신의 집도 아래에서 태어난 수백 명의 망자들이 제각기 다른 목소리로 울부짖었다.

***

거체에서 나오는 압도적인 물리력과 정신을 뒤흔드는 충격파와 저주.

예배당 내부라는 협소한 공간이 주는 장소적 페널티까지.

괴이 : 미스트 시티는 별다른 트릭없이 친절하게 제시된 길을 알려주는 만큼 마지막 난관이 꽤나 까다롭다.

철저한 무력과 정신력을 담보로 하는 것이다.

"시체들의 틈 로브를 입은 녀석들이 수상해 보인다!"

소리 친 유신이 방아쇠를 당겼다.

곧게 뻗은 팔과 어깨가 흔들리며 50구경 매그넘 리볼버가 굉음을 토해냈다.

"컥."

신도가 몸통 채로 터져나간 순간.

손을 구성하고 있던 시신들의 일부가 부스스 흩어졌다.

"아하!"

창가에 기대어 있던 소녀는 그 이변을 알아챘다.

곧바로 스나이퍼 라이플이 불을 뿜었다.

탕!

이번에는 좀 더 은밀한 곳에 숨어있던 신도의 머리가 터졌다.

역시나 시신들의 일부가 부스스 흩어졌다.

끼아아아아악!

물론 손바닥들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마법진에서 기어나온 그 흉물은 손가락을 개구리처럼 튕겨 하늘로 떠오르더니 바윗덩이처럼 강하했다.

그 위치는 당연히 최초의 일격을 가한 유신과 에피였다.

하지만.

"우오오오오오!"

녀석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 있었다.

바로 헤카테의 존재 여부였다.

그녀는 에피의 앞을 막아서며 양팔과 다리를 벌렸다.

이윽고 떨어져 내리던 손바닥 하나를 턱 잡고는.

"합!"

쓰레기처럼 휙 던져버렸다.

쿵! 정신나간 기행의 힘겨루기와 바닥을 구르는 괴물.

탕! 이미 손바닥의 강하지점에서 벗어나 침착하게 교단원들의 몸에 납탄을 박아넣던 유신.

이 괴물 사냥의 달인들은 최적의 동선과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 순간.

쩌억.

매달려있는 시체 중 한 구가 혓바닥을 채찍처럼 찔러왔다.

"쯧."

유신은 혀를 찼다.

이건 저 고깃덩이 녀석들의 까다로운 점 중 하나다. 몸체를 구성하고 있는 시신들 하나하나가 제각기 특이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

어떤 녀석은 이렇게 혓바닥을 채찍처럼.

촤악.

어떤 녀석들은 산성침을.

어떤 녀석들은 독연이나 비대한 양팔을 망치처럼 휘두른다.

이미 지근거리에서 손바닥과 난투를 벌이던 헤카테는 온몸이 상처투성이였다.

'염병.'

한 손으로 쏘면 명중률이 좋지 않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걸 고려할 시간 따위 없다.

유신은 샷건을 파지하며 리볼버를 꺼내 들었다.

하지만 그가 혓바닥을 향해 사격을 가하기 전.

스릉.

섬뜩한 검광이 그 사이로 끼어들었다.

살점을 짓밟으며 자세를 다잡는 그는 백휘도였다.

"보조하지."

"좋다."

그런 두 사람의 사각을 노리는 마물의 공격은 또 다른 납탄이 저지한다.

그 주인은 엉망이 된 드레스를 입고 있는 여자였다.

"후우, 후우."

사냥꾼 카라짐은 천장의 샹들리에에 갈고리를 걸어 마치 타잔처럼 예배당을 가로지르더니.

"이거나 처먹어라."

대담하게 플라스틱 폭약을 꺼내들어 시체의 입속에 던져넣는 기행을 보여줬다.

콰아아앙!

고성과 녹진한 화약 내음이 예배당을 가득 채운다.

"유신! 더 이상 그 신도 녀석들이 안 보여!"

"시체 속에 파묻혀 있을 거다. 헤카테! 놈의 몸뚱이를 파내고 수류탄을 터트려라!"

일행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유신의 날카로운 지시가 적절하게 날아든다.

끄-아아아아아!

악귀의 포효와 함께 공간이 뒤틀린다.

예배당의 모습은 이제 시뻘건 핏물로 된 방과. 벽면에서 얼굴을 내밀며 절규하는 인간들로 가득찬 마굴이 되어있었다.

하지만.

"게-헬라아아아아!"

"···"

그 어떤 심리적인 압박도, 사념을 담아 윽박지르는 저주도, 기괴하게 뒤틀린 흉물의 적의도 이들의 의지와 투지를 꺾지는 못했다.

결국.

아, 안··· 돼애애애애!

쾅! 유신의 총구 아래 흉물을 구성하던 마지막 신도.

교주의 머리통이 박살났다.

그러자 마법진에 박혀있던 보석들이 반짝이며 예배당을 둘러싼 어둠과 탁한 기운이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그 이변이 시사하는 바를 예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예쓰!"

"해, 해냈다! 우리가 해냈어요!"

"흐하하하하하!"

클레르와 에피가 폴짝 뛰었다. 헤카테가 가슴을 내밀며 웃어 재꼈다.

서로 얼싸안고, 안도하는 각양각색의 사람들 사이로.

철컥.

난대없이 유신이 시커먼 총구를 내밀었다.

"···"

그 너머에는 검을 땅바닥에 박은 채 거친 숨을 몰아쉬던 백휘도가 있었다.

"네가 먼저 말했었지? 원망하기 없다고."

삐뚜름하게 웃은 유신이 방아쇠를 당겼다.

탕!

< 신비로운 부산물과 여정 >

공이가 힘차게 당겨지며 장전되어 있던 탄피가 터져나간다.

우렁찬 화약소리와 함께 거칠게 회전하는 납탄이 이빨을 날름거렸다.

"···!"

배신당했다는 듯 눈을 치켜 뜬 클레르.

몸을 날리는 카라짐.

이를 악무는 백휘도.

범인을 벗어난 초인들의 인지는 더없이 느릿하게 흘러간다.

그러든 말든 총탄은 아무런 제지 없이 목표를 향해 날아들었다.

유신의 사격은 정확했다.

고오오오.

난대없이 세상이 흔들리며 지면이 무너져 내리지만 않았더라면.

팅! 불꽃이 튀며 도탄된 총탄이 백휘도의 뺨을 스쳤다.

그의 긴 머리칼이 하늘로 떠올랐다.

이제보니 땅은 무너져 내리는 것이 아니었다.

하늘로 솟아오르고 있었다.

"휘도!"

"이, 이건?!"

"으아아앗!"

비틀거리며 중심을 잃는 사람들이 고개를 들었다.

뻥 뚫린 천장 너머 하늘 위로 거대한 블랙홀이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그리고 녀석은 게걸스럽게 모든 것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피와 악의로 가득 찼던 예배당도, 바깥에서 아우성치던 악귀들도, 폐허가 된 마을도,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안개들도.

고오오오.

이 세상을 구성하고 있던 모든 요소들을 말이다.

시작이 있다면 끝이 있는 법.

세상을 좀 먹고 있던 괴이가 하나 사라졌다.

일행은 파편들 사이에 섞여 허우적거리다가 중력에 몸을 맡겼다.

***

쏴아아아아.

망막과 옷가지가 빗물에 젖어든다.

소나기가 내리는 폐허 광장.

괴이에 처음 휘말렸을 때처럼 인지와 동시에 어느새 수용소로 되돌아와 있었다.

'겪어봐도 신기하군.'

내면의 에스트 역시 돌아왔다.

유신은 몸 안을 타고 흐르는 이 충만한 힘과 해방감을 느끼다가 고개를 돌렸다.

순간 기묘한 에스트의 흐름을 감지했기 때문.

"──────!"

떨어지는 빗물과 어둠 사이. 빛으로 펼쳐진 길이 하늘까지 뻗어있다.

그 위에 올라타 있는 것은 주저앉아 있는 백휘도와 그를 부축한 카라짐.

마지막으로 이쪽을 보면서 삿대질을 하고 있는 클레르였다.

척.

클레르가 뻗은 중지와 함께 백휘도 일행의 모습이 순식간에 멀어진다.

"어딜!"

헤카테가 달려들었다. 그러나 클레르가 손을 휘젓자 빛의길이 중간에 깨어지는 바람에 그 목적을 이루지는 못했다.

"라이트 플로어라··· 조형능력인가? 꽤나 희귀한 걸 가지고 있었군."

탕!

유신은 피식 웃으며 리볼버의 방아쇠를 당겼다.

전혀 엉뚱한 방향이었지만 클레르는 욕을 하던 것도 멈춘 채 움찔 고개를 숙였다.

백휘도 일행은 그렇게 먹구름 사이로 사라졌다.

철컥. 막 저격총의 재장전을 끝내고 이를 조준하던 에피가 혀를 찼다.

"놓쳤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다들 고생 많았다."

유신은 두 사람을 타이르고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곧 자신이 찾고 있던 목표물을 발견하고는 그것을 주워들었다.

'이걸 이렇게 빨리 얻게 될 줄은 몰랐는데···'

유신이 쥐고 있는 것은 웬 시디 케이스였다.

꽤나 음침한 색감과 정면에는 포효하는 악마가 그려져 있었다.

"그게 뭐야?"

에피와 헤카테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괴이를 구성하기 위해 마녀가 사용한 매개체."

20세기 말의 양판 게임.

두 사람은 유신의 마지막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저 안에 담겨있는 힘이 굉장히 강력하며 특별하다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미스트 소드나 안개 망령의 가호를 만들기 위해서는 바로크 그 난쟁이가 필요하다.'

'괴이의 부산물을 가공할 수 있는 건 이 세상에서 오직 그자 뿐이니까. 하지만···'

지금 내 상황에서 그자와 접촉하는 건 너무 위험부담이 크다. 그렇다고 이걸 가지고 돌아다닐 수도 없지. 이건 지금 능력자들의 이목을 대번에 집중시킬 정도의 보물이니까.

그렇다면···

생각을 마친 유신은 미스트 시티의 부산물을 쥔 채 힘을 끌어올렸다.

곧 매개체 안으로 에스트를 투사하기 시작했다.

매개체를 감싼 마녀의 힘을 뚫기 위해 틈을 찾고, 그 사이로 자신의 에스트를 집어넣으며 의지를 강요하고. 그것이 마녀의 힘과 충돌하여 소멸되지 않게 극도로 섬세한 조정을 거친다.

고오오오.

말은 쉽지. 바늘구멍에 한 땀 한 땀 실을 꿰는 행위를 수천 번은 반복해야 할 정도의 집중력과 인내심이 필요했다.

쿠르르르!

벼락과 폭풍우가 치는 폐허 속에서 한참 동안 안간힘을 썼을까?

마침내.

"···"

유신의 손에서 새하얀 빛이 피어올랐다.

곧 그의 손에 들려있는 것은 내부에 연기를 담고 있는 신비로운 보석이었다.

"후우."

그건 가공이었다.

아니, 재창조라고 불러야 될 정도의 기행이었다.

망가진 세상의 이름 높은 장인들이 봤다면 눈을 부릅떴을 놀라운 광경.

식은땀을 줄줄 흘리던 유신이 비틀거렸다.

에스트의 총량과 운용 능력만 따진다면 자신은 거의 6위계에 버금간다.

하지만 방금 전 벌인 행동으로 인해 내면의 에스트가 전부 바닥났다.

단지 마녀가 남긴 부산물 중 하나를 가공하는 것에.

그것도 제대로 된 방식이 아닌 야매로 손을 썼음에도 이 정도라니.

'새삼 벽이 느껴지는군. 역시 7대 재앙인가?'

전문적인 장비나 지식도 없이 즉석에서 유물을 만들어낸 주제에. 황당하게도 유신이 느낀 것은 조급함이었다.

"그게 그렇게 좋은 거야?"

에피는 보석을 보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숨겨둔 한 수로 쓸 수는 있지."

유신은 보석을 소중하게 품에 갈무리했다.

"뭔 능력인데?"

"봉인."

"봉인? 설마···?"

우릴 그 고생을 시켰던?!

"그래, 이걸 쓰면 일정 영역 내의 모든 능력과 에스트가 봉인된다."

[응축된 괴이의 신비]

즉사기를 가진 까다로운 네임드나 강력한 보스를 잡을 때 쏠쏠히 이용하곤 했다.

유신은 입을 헤 벌리고 있는 소녀와 하품을 하고 있는 엘프를 툭툭 쳤다.

"여기서 할 건 다 했다. 이동하자."

"에, 에취! 드,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 나 몸이 으슬으슬 떨려."

"연약하구나 에피. 단련을 게을리했다는 증거다."

"뭔 엿 같은 소리야 언니. 우리가 지금까지 한 고생들을 생각해. 시발. 평범한 사람이라면 진작에···"

"그래서 네가 연약하단 거다."

"이익! 유신! 뭐라고 말 좀···"

"말들이 무사해야 할 텐데. 콜록, 콜록."

두 명의 인간과 요정은 폐허가 된 광장 속을 추적추적 걸었다.

***

무지개처럼 뻗어 나가던 빛의 길이 우뚝 멈췄다.

수용소와 꽤나 떨어진 절벽 앞에서 백휘도가 휙 뛰어내렸다.

"이제 괜찮다 클레르. 어느정도 추슬렀다."

"정말이지 어떻게 그렇게 비겁할 수가 있는지!"

클레르는 능력을 거두면서도 유신을 욕했다.

카라짐은 침묵을 고수했고. 백휘도는 방금 전의 상황을 가늠했다.

-운 좋네.

유신이 마지막에 내뱉었던 말.

그리고···

'애초부터 머리나 심장을 노리지 않았다.'

그의 행동.

백휘도는 얼굴을 쓸면서 피식거렸다.

"봐줬다는 거냐?"

"뭐라고?"

"하여튼 닝겐들은 못 믿어요! 다음에 만나면 아주 그냥 분쇄를···"

백휘도 일행이 그렇게 각자의 감상에 잠겨들 때.

부아아아앙!

거친 흙먼지와 함께 몇 대의 차량들이 절벽 쪽으로 다가왔다.

달칵.

문이 열리며 나타난 것은 일단의 사람들.

그 선두에 있는 것은 가죽 재킷을 걸친 거친 인상의 중년인이었다.

그가 말했다.

"갑작스레 신호가 끊겨서 찾아와 봤는데. 그게 무슨 꼴이냐 휘도."

"흑염···"

백휘도가 눈매를 굳혔다.

"별것 아니다. 임무수행 도중 잠깐 예상치 못한 상황을 맞닥뜨렸을 뿐이야."

"변수? 천하의 백휘도를 애먹일 정도라면 꽤나 난관이었나보군. 당연히 유물도 회수하지 못했을 테고."

"비아냥대려고 온 건가?"

"그럴리가. 그랬다면 애초에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어. 타지. 다들 고생했다."

흑염이라 불린 중년인은 피식 웃으며 고갯짓했다.

곧 여러 대의 차량이 망가진 세상을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치익.

조수석에 앉아있던 흑염은 손가락에서 피워낸 검은 불꽃으로 담배를 태우다가 헛웃음을 지었다.

"괴이에 빠졌었다고? 그리고 거기서 살아나와? 하하하! 네가 하는 말이 아니었다면 침을 뱉어 줬을 거다."

"진짜라니까요! 우리가 얼마나 고생했는데··· 로이드도 죽고···"

클레르가 울상을 짓던 그때 운전석에 있던 사내가 옆을 힐끔거리더니 말했다.

"당신들이 말하는 그 무뢰한들. 저자들 아닙니까?"

운전석 사내의 능력은 위성정찰과도 비슷했다.

공중으로 뿌려둔 여러 개의 눈 중 하나로 그는 막 유신 일행을 포착했다.

꽤나 먼 곳에 있었지만 말이다.

흑염이 턱을 쓰다듬었다.

"낮짝이나 한 번 볼까? 겸사겸사 유물도 강탈하고."

"좋아요! 감히 우리 언더캐슬을 건드린 본 때를···"

클레르가 동조하던 그 때.

"그만두지."

백휘도가 툭 내뱉었다.

"휘, 휘도?"

"오호. 뭐야? 그새 정이라도 든 거야?"

백휘도는 팔짱을 턱 낀 채 눈을 감았다.

"하나같이 보통 내기들이 아니었다. 고작 유물 하나 가지고 얼굴을 붉히기에는 셈이 맞지 않아."

흑염은 백휘도의 말에 담긴 뜻을 알아채고 웃었다.

"그 말은 놈들을 멤버로 영입하자?"

"···기회가 된다면."

"흐하하하하! 네가 이렇게까지 말을 하다니. 나까지 궁금해지잖아?!"

광소를 터트리는 흑염의 주변으로 시커먼 불꽃이 피어올랐다.

"어어, 대장! 시트! 시트!"

그는 한 번 리미트를 넘은 이 힘을 주체하지 못하다가···

창문을 열고는 휙 손을 뻗었다.

화르르륵!

일순 하늘을 꿰찼던 어둠이 사그라들며 빛이 퍼져 나갔다.

증발된 빗물들이 자욱한 수증기들을 일으켰다.

사출된 검은 불꽃은 한동안 주변 지형의 날씨를 바꿀 만큼 강맹했다.

과연 언더캐슬의 창립 멤버이자 리더.

현 6위계 능력자다운 힘이었다.

그러든 말든 백휘도는 생각했다.

설마 지금의 상황마저도 다 예측하고 판을 짜둔 걸까?

그렇다면 그자는 정말···

'보통내기가 아니다.'

이 망가진 세상 속 갖가지 야욕가들이 유신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

다각다각.

말발굽이 일정한 리듬을 가지고 흔들거린다.

탕!

그 사이로 거친 화약 소리가 섞여든다.

이건 소녀가 은신하고 있던 밴디트들의 머리를 꿰뚫을 때 난 소음이었다.

그러든 말든 유신은 정신을 집중하며 상념에 빠져들었다.

이번에 얻은 유물인 무형갑은 몸 전체에 갑옷처럼 에스트로 된 실드를 두를 수 있는 형태다.

설치형인 에스트 방벽과는 달리 거동에 제약이 없으며.

총탄이나 투사체 역시도 마음껏 막아내는 동시에 쏘아낼 수 있다.

그렇다면 이걸 기존의 능력과 어떻게 융합시킬 수 있을까?

'무형갑이 생긴 이상 에스트 장벽을 굳이 방패로만 쓸 필요는 없다. 오히려 상대의 퇴로를 차단하는데도 쓸 수 있지 않을까?'

다각다각.

말발굽이 흔들거린다.

그 보폭이 옛날보다는 좀 더 느릿하며 힘이 없다.

-게헬-라아아아아!

이건 헤카테가 내지르는 전투의 괴성이다.

그녀는 막 굶주림에 덤벼들던 3급 위험종의 머리통을 깨부쉈다.

그러든 말든 유신은 정신을 집중했다.

'나이트 워커의 형태 없는 어둠은 어둠을 물리력으로 변환시키는 능력이지. 기존의 능력과 이걸 융합할 수 있지도 않을까? 예를 들어···'

'에스트 인형이라 던지. 장벽이라 던지.'

히히히힝.

왕복하던 말발굽이 좀 더 느려진다.

종종 비틀대기도 하고, 색색 마른 숨이 섞여들기도 한다.

그러든 말든 유신은 정신을 집중했다.

'에스트 장벽의 패턴과 형태를 바꿨던 것처럼 내가 가진 능력을 보다 더 강화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어떤 식으로? 뭐가 최선이지?'

저벅저벅.

이제 더는 말발굽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유신은 훈제향이 배어든 고기를 씹어대며 조금은 튼튼해진 두 다리를 연신 움직였다.

그렇게 얼마나 많은 메마른 풍경을 지나치고, 얼마나 오래토록 이 멸망한 세상을 유랑했을까?

저벅.

마침내 유신의 걸음이 멈췄다.

푸쉬이익.

그의 눈앞에는 거대한 증기 터빈과 톱니바퀴.

파이프관들로 이루어진 음울한 분위기의 기계 도시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드디어 도착했군.'

전 세계에 단 일곱 개밖에 남지 않은 대도시 중의 하나이자 동아시아 대륙의 관문.

이 세상 제일의 권력 기관인 컴퍼니의 지사가 지배하는 땅 중 하나.

멸망 이전의 추억과 악의를 여실히 느낄 수 있는 환락과 예술, 그리고 증기의 도시.

"펑크시티에."

유신은 피식 웃으며 얼굴을 쓸었다.

지금부터는 노는 물 자체가 달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