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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화

"왜 망설이고 계십니까, 아버지."

옆에서 들려온 소리에 백작이 몸을 움찔 떨었다. 레이는 조금의 감정도 담기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주군께서, 아니 루크 경께서 무사하다고 하십니다. 당장이라도 협상을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허, 그리 가볍게 볼 문제가 아니다. 함정일지도 모르잖느냐."

백작은 짐짓 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언뜻 보면 신중한 것 같지만 사실상 결정의 보류였다.

물론 루크 일행은 그렇게 놔둘 생각이 없었다. 브루노가 백작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럼 협상을 거절하실 생각입니까?"

"거절한다고 한 적은 없네."

"받아들이신다는 소리군요."

"왜 그리 성급하게 구는 건가?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단 말일세."

백작은 눈을 찌푸리며 브루노를 쳐다봤다. 그러나 백작의 시선은 브루노에게 아무런 위협도 되지 못했다.

"시간 같은 건 없습니다. 제 주군을 버리실 건지, 아니면 구하실 건지를 알려 주십시오. 그래야 저도 선택을 하지 않겠습니까."

냉담한 대답에 백작이 입술을 깨물었다. 이게 문제였다. 여기서 협상을 거부한다는 건 루크를 버리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제기랄, 차라리 죽기를 바랐건만.'

루크가 엘프에게 살해당했다면 그나마 나았다. 레이와 브루노의 분노는 엘프에게 돌아갔을 테고, 교단과 번스타인에도 원군을 요청할 수 있었다.

설령 지금 엘프에게서 물러난다 해도 재기할 희망이 있었던 셈이다. 하지만 루크가 산 채로 포로가 되면서 모든 게 일그러졌다.

'여기서 협상을 거부하면 오히려 내가 표적이 된다.'

능력이 안 돼서 인질을 구하지 못한 것과 구할 수 있음에도 버린 건 하늘과 땅 차이다.

협상을 거부하는 건 누가 봐도 후자였다. 교단과 번스타인 가문의 분노는 엘프 이전에 백작을 향하리라.

"그대들의 생각은 어떤가? 협상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하나?"

궁지에 몰린 백작이 다른 네 가문의 자제들을 바라봤다. 귀족 자제들은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 협상을 받아들이라고 하고 싶었다. 저 엘프 군대랑 대치하는 건 악몽 같은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랬다가는 두고두고 백작에게 찍힐 게 뻔했다.

'쯧, 기개 없는 놈들 같으니.'

원하는 대답이 없자 백작이 속으로 혀를 찼다. 그래도 나쁜 결과는 아니었다. 침묵은 결국 보류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이 정도만 해도 백작의 책임을 다른 가문으로 분산시킬 수 있었다. 느긋한 표정으로 백작이 브루노를 쳐다봤다.

"다들 대답이 없는 걸 보니 조금 더 생각할 시간이...."

"협상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순간 백작의 얼굴이 굳어졌다. 고개를 돌려보니 리온이 앞에 나와 있었다.

"루크 경께서는 스스로를 희생하여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그런데 어찌 그분을 살릴 기회가 왔음에도 망설이시는 겁니까?"

공기가 얼어붙었다. 다른 세 가문의 자제들은 멍한 표정으로 리온을 쳐다봤다.

'이게 지금 미쳤나?'

윈슬로우 가문과 레이, 그리고 루크가 가깝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줄타기도 상황을 보고 해야 하는 법.

하물며 헤르닝 백작가처럼 계속 함께해야 하는 상전이면 말할 것도 없다. 백작의 시선이 싸늘해졌다.

"그게 윈슬로우 가문의 뜻인가?"

단순히 되묻는 것뿐인데 후회하지 않겠냐는 뒷말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리온이 눈을 질끈 감았다.

어젯밤에 있었던 일이 다시금 떠올랐다.

* * *

루크가 인질극을 벌여 다른 이들을 탈출시킨 날. 우중충한 분위기 속에서 레이는 리온을 찾아왔다.

리온은 깜짝 놀라 레이를 맞이했다. 주군이 잡혀갔음에도 레이의 얼굴빛은 더없이 침착했다.

-누님? 어쩐 일로 여기에....

-리온, 주군과 나눈 대화를 기억 하느냐?

리온은 담담한 목소리에 흠칫했다. 지금껏 계속 리온을 상대로 존대를 해 온 레이다.

그런 레이가 처음으로 존대를 때려치웠다. 가족 간의 정 때문이 아니라 진솔한 경고를 위함이었다.

-너는 무슨 일이 있어도 주군을 지지하겠다고 했지.

-그, 그렇습니다.

-주군께서 발데마르 백작과 대립하더라도 그러겠느냐?

리온이 입을 다물었다. 어려운 질문이었다. 다른 세 가문과의 대립이라면 고민할 것도 없겠지만 백작이라니.

레이는 리온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말을 이었다.

-어느 쪽이건 상관없다. 다만 네가 백작을 선택한다면 어머니는 데리고 가겠다.

-자, 잠깐만요, 누님.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간단한 일이다. 망해서 사라질 가문에 어머니를 맡겨 둘 필요가 없으니까.

-...!

리온의 얼굴이 굳어졌다. 도대체 무슨 일을 벌이면 백작의 지지가 가문의 몰락으로 이어진단 말인가?

답은 하나였다. 루크 경과 백작이 대립 중이라는 것과 이미 백작을 쳐 내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는 것.

목이 바싹 마르고 식은땀이 흘러나왔다.

-루크 경께서는 무슨 생각이십니까? 설마 인질로 잡히셨던 것도 일부러 그러신 겁니까?

-알 필요 없다.

-누님, 제발.

-알고 나서 가능성이 보이면 지지할 생각이냐? 추하구나. 네가 잘도 입에 담던 신의는 어디 있느냐?

싸늘한 레이의 눈빛에 리온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레이는 그대로 등을 돌리며 한마디를 남겼다.

-지금 아버지의 대리는 너다. 너 때문에 가문이 망한다면 그것 역시 아버지의 자업자득이란 소리겠지.

* * *

리온은 알 수 있었다. 여기가 선택의 기로였다. 리온은 자신의 감을 믿고 루크에게 배팅했다.

"예, 제 대답이 윈슬로우 가문의 뜻입니다."

"그렇단 말이지."

리온을 쳐다보는 백작의 눈빛이 더욱 스산해졌다. 그러나 리온은 꿋꿋하게 버티며 말을 물리지 않았다.

백작이 그 모습을 보며 이를 갈았다.

'빌어먹을 새끼. 하필 이럴 때 망쳐 놓다니!'

한번 말이 나온 이상 책임을 덜어 낼 방법이 없었다. 의견이 나왔음에도 백작이 무시한 그림이 그려질 테니까.

결국, 백작은 입술을 짓씹으며 말했다.

"협상을 받아들이도록 하지."

"현명하신 선택입니다."

브루노의 말에 백작이 더더욱 똥 씹은 얼굴이 되었다. 회의가 파하고 각자 돌아가는 길에 리온은 한숨을 쉬었다.

이제 어찌될지는 리온도 알 수가 없었으니까. 하늘을 보며 답답한 속을 달래던 리온에게 누군가 다가왔다.

"리온 도련님?"

"누구냐?"

리온이 날카롭게 말을 건 자를 쳐다봤다. 다시 보니 낯이 익은 자였다. 루크의 곁에서 수발을 들던 종복이었다.

"맥스입니다. 절 기억하십니까?"

"기억이야 한다만, 무슨 일이냐?"

"현명한 선택을 하신 분께 전달할 쪽지입니다."

맥스는 접힌 쪽지를 리온에게 건넸다. 리온은 얼떨떨하게 쪽지를 받아 내용을 읽어 보았다.

내용을 전부 읽은 리온의 눈이 세차게 흔들렸다. 그런 리온을 향해 맥스가 속삭였다.

"제 주인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현명한 선택에는 언제나 보상이 따르는 법이라고요."

리온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맥스가 떠나자 리온이 방금 받은 쪽지를 구겨서 꿀꺽 삼켰다.

그리고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루크를 지지했던 게 천만다행이었다고.

* * *

엘프측이 협상을 위해 제시한 조건은 간단했다.

첫째, 양측은 인질을 교환한다. 숫자에 상관없이 전부다.

둘째, 양측은 서로 대표끼리 만나 타협점을 찾는다.

셋째, 양측의 대표는 두 명까지 호위를 거느릴 수 있다.

사실 인질 교환 빼고는 만나서 정하자는 소리였다. 특별할 것도 없는 제안이었지만, 상대방의 군사력이 압도적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대화를 시도하는 것만으로 자비가 되는 셈이니까. 백작이 보기엔 그 자체만으로 이상할만치 후한 제안이었다.

'어째 내 수법과 닮았는데.'

상대방이 도저히 거부하지 못할 미끼를 깔아 두고, 냉큼 문 순간 미끼째로 회수한다.

루크를 상대로도 써먹은 수법 아닌가. 엘프의 협상 제안에는 그런 냄새가 풀풀 풍겼다.

'아니, 아니지. 아직 협상 전이다. 미리 불안해할 필요는 없어.'

자신이 써먹던 수법이라면 함정을 찾는 것도 쉬울 터. 협상장에서만 정신을 똑바로 차리면 된다.

그리 결심한 백작은 협상장에 나설 준비를 했다.

'문제는 호위로군. 딱 두 명밖에 데리고 갈 수 없으니.'

백작은 한참을 고민했다. 신뢰도를 우선시한다면 자신의 기사를 데리고 가는 게 맞다.

문제는 자신의 기사가 엘프에 대적할 무력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단숨에 살해당할 터.

결국 백작은 어쩔 수 없이 레이와 브루노를 불렀다.

-레이, 나와 함께 가자꾸나. 브루노 경도 호위를 맡아 주시겠소?

-예, 아버지.

-기꺼이 그러겠습니다.

엘프와 맞설 수 있는 기사는 두 사람 뿐이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두 사람은 선선히 백작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모든 준비를 마친 백작은 다음 날을 기다렸다. 그리고 날이 밝기 무섭게 엘프의 군대가 성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엄청나군. 전신을 마도구로 도배한 건가?"

"제기랄, 이거 성을 끼고 있어도 질 거 같은데."

"쉿,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말고."

병사들이 웅성거리는 소리에도 백작은 제지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어제도 봤던 군대지만 다시 보니 간담이 서늘했다.

이 난공불락의 이중 성벽과 깊은 해자로도 막을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어쩌면 내 선택이 옳았을지도 모르겠군.'

백작은 마른침을 삼키며 두 사람의 호위와 함께 성벽 앞으로 나아갔다. 엘프 측에서도 두 명의 엘프를 거느리고 대공이 나왔다.

두 사람은 군대를 물린 채 딱 중앙에서 말을 탄 채로 만났다.

"이렇게 나왔다는 건 협상을 받아들이기로 한 건가?"

"그렇소."

"좋아, 그렇다면 인질 교환부터 하지."

"잠시만, 그 전에...."

"수작 부릴 생각 마라 인간. 네놈이 내 딸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난 잊지 않았다."

차갑게 내뱉는 대공의 말에 백작은 식은땀을 흘렸다. 공녀의 혀를 자르고 팔다리의 힘줄을 끊은 건 백작 본인이었다.

여기서 이것저것 따지면 대공의 마지막 인내심이 바닥날지도 몰랐다.

"아, 알았소."

"우리 쪽 인질을 먼저 보내지. 너희들도 잡아간 엘프들을 보내라."

백작의 시선에 병사들이 엘프 일곱 명을 성벽 밖으로 내보냈다. 영양 상태가 안 좋았는지 수척해져 있었지만 다들 비교적 멀쩡했다.

뒤이어 대공도 루크를 보여 줬다. 양측은 서로의 인질이 다른 쪽을 향해 걸어가는 방식으로 인질을 교환했다.

루크는 바로 성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백작에게 향했다.

"주군."

"수고하셨습니다."

"수고는 무슨."

피식 웃으며 루크가 두 명의 가신과 반갑게 재회했다. 백작은 눈을 찌푸리며 루크를 쳐다봤다.

"루크 경, 여긴 왜 오신 거요?"

"못 올 이유라도 있습니까?"

"안전한 성으로 돌아가지 왜 이쪽으로 왔냐는 거요. 여긴 협상 장소지 않소."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냥 구경하러 왔을 뿐입니다."

"무슨 헛소리를...!"

막 뭐라고 하려던 백작이 흠칫했다. 뭔가가 이상했다. 루크에게서 형식적으로라도 있었던 예의가 사라진 상태였다.

마치 이제 너랑 볼 일은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쎄한 느낌을 떨쳐 내듯 백작이 헛기침을 했다.

"크흠, 구경만 하고 계시오. 결정권자는 나니까."

"당연한 말씀."

루크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백작은 다시 대공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슬슬 협상을 시작하고 싶소만."

"그러도록 하지. 일단 우리의 요구 조건은 간단하다."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도중 루크가 백작의 뒤로 돌아갔다. 루크와 레이, 그리고 브루노.

이 중에 백작에게 충성을 바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백작은 그 사실을 어렴풋이 눈치채면서도 애써 무시했다.

협상이 끝날 때까지 아무 일도 없으리라 스스로를 안심시키며.

64화

백작의 불안감은 곧 사라졌다. 협상이 진행되며 경악이 불안을 대체했다. 모든 조건을 들은 백작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정말 이 조건으로 협상을 하자는 거요?"

"마음에 안 드나?"

"아니! 절대 아니오!"

대공의 눈빛에 백작이 냉큼 고개를 저었다. 마음에 안 든다? 그 반대였다. 지금 이 상황에서 바랄 수 있는 최고의 조건이었다.

'몬스터가 득실거리는 숲 일부를 내주고 무역이라니.'

백작은 떨리는 눈으로 엘프가 내미는 협정서를 응시했다. 적힌 내용은 아까 대공이 말한 대로였다.

이번 일의 불상사로 백작은 본인이 보유한 영토 일부분을 내놓는다. 대신 지금까지 가져간 마도구는 반환하지 않아도 좋다.

이 모든 건 소통의 부재로 일어난 사고이니 이를 방지하기 위해 백작과 대공은 정식 무역로를 개설한다.

'내가 처음 요구했던 기술보다 차라리 이쪽이 낫다.'

아무리 마도구 기술이라도 체득할 때까지는 한세월이 걸린다. 아마 백작이 살아 있을 때는 조악한 물건을 찍어 내는 게 고작이었겠지.

그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백작이 기술을 원한 건 지속적으로 이윤을 창출해 내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식으로 무역을 할 수 있다면, 굳이 힘겹게 기술을 배우지 않고 중개 무역으로 몇 배의 이득을 얻을 수 있다면.

조악한 마도구를 파는 것보다 몇 배는 이득이었다.

"크흠, 나쁘지 않군. 달리 더할 건 없을 것 같소만."

"그럼 여기서 바로 서명하고 선포하도록 하지."

"그러시오."

애써 담담한 척을 하며 백작이 말을 받았다. 서로의 서명이 적힌 협정서가 오간 후, 대공이 크게 소리쳤다.

"여기에 지금 나, 대공 아라티온과 인간의 영주 발데마르 헤르닝 사이에 협정이 맺어졌다. 그대들은 이 서약의 증인이 되리라!"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가 성벽 전체를 울렸다. 성벽 위에 올라가 있는 지휘관부터 아래에 대기 중인 병졸까지 다 들릴 성량이었다.

모두가 집중해서 듣는 가운데 대공은 차례차례 협정서에 적힌 내용을 읊었다.

"…이 모든 문제는 소통의 부재로 인함이니, 양측은 서로 무역로를 개설하여 다시는 똑같은 일이 없도록 하리라! 나 대공 아라티온이 동의하며!"

말을 도중에 끊은 대공이 백작을 쳐다봤다. 백작은 성벽을 향해 뒤를 돌아 소리쳤다.

"나 발데마르 헤르닝이 이에 동의한다! 지금 이후로 우리 두 사람은 협정을 준수할 것을 맹세하노라!"

와아아아!

조용한 엘프와 달리 성안에는 환호가 터져 나왔다. 꼼짝없이 죽나 했더니만 너무도 좋게 끝나지 않았나.

특히 각 가문의 자제들과 백작에겐 최상의 결과였다. 흐뭇하게 미소지은 백작이 인사를 마치고 돌아가려 할 때였다.

"하나, 그 전에 한 가지 끝낼 일이 있다!"

"...?"

백작이 눈을 껌뻑이며 뒤를 돌아봤다. 뭐지? 이제 이걸로 협정은 끝난 게 아니던가?

"두 종족의 협의와 상관없이, 한 명의 엘프로서 말한다! 나 아라티온은 발데마르 헤르닝에게 결투를 신청한다!"

"...!"

예상치 못한 소리에 백작의 눈이 부릅떠졌다.

* * *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다. 백작이 한 일은 엘프들이 보기에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짓이었다.

납치해서 인질을 잡고, 그걸 빌미로 파산 직전까지 마도구를 뜯어냈으며, 공녀의 혀와 힘줄을 잘라 내 노예로 삼았다.

응어리가 남지 않았다면 거짓일 터. 백작은 이를 갈며 대공을 쳐다봤다.

'빌어먹을, 내가 너무 쉽게 생각했군.'

대공이 제시한 협정서를 볼 때는 이해가 안 갔지만, 백작 나름대로 예측은 해 보았다.

생각만큼 딸을 사랑하지 않거나, 아니면 딸의 고통을 무시해야 할 정도로 중요한 사정이 있는 거라고.

하지만 아니었다. 대공은 잊지도 않았고 묻어 둘 생각도 없었다. 오직 이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참았을 뿐이다.

"나는 강요하지 않는다! 오직 우리 두 사람의 응어리를 풀기 위해 도전할 뿐! 원치 않는다면 물러서라! 그대의 안락한 성으로 돌아가 우리의 협정을 준수하라!"

무서우면 네 집무실로 도망쳐서 무역로나 마련하러 가든가. 그 도발에 백작이 코웃음을 쳤다. 지금 저걸 도발이라고 하는 건가?

'내가 못 할 줄 아느냐?'

미치지 않고서야 저 결투를 받아 줄 이유가 없었다. 백작은 오만함과 자존심으로 목숨을 가져다 바치는 엘프가 아니었다.

현명하게 이해득실을 따져 합리적 결정을 내리는 인간이다. 대공이 인간에게 엘프의 관념을 요구한 거라면 크나큰 실수였다.

"다시 말한다! 결투를 받아들이지 않겠다면 돌아가라! 하나, 받아들이겠다면 내 앞으로 나오라! 어찌할 테냐!"

"나는...!"

거부를 위해 백작이 입을 연 순간이었다. 옆에서 누군가가 퍽, 하고 백작이 탄 말 엉덩이를 후려쳤다.

-히히힝!

"헉!?"

말이 울면서 앞으로 터벅터벅 뛰쳐나갔다. 백작은 얼른 말고삐를 쥐었으나, 기어코 말은 대공 앞까지 가서 섰다.

사색이 된 백작이 대공을 쳐다봤다. 대공은 살기등등한 눈빛으로 미소를 지었다.

"역시 명예를 아는 자로구나, 발데마르 헤르닝! 결투를 받아들이다니!"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보라!"

커다란 루크의 외침이 백작의 말을 막았다. 루크는 그대로 등을 돌려 성벽 위를 바라보며 소리쳤다.

"백작께서 결투를 받아들이셨으니, 이건 정당한 싸움이다! 설령 누가 목숨을 잃더라도 협정은 지켜지며 전쟁은 없을 것이다!"

"...!"

백작은 사색이 된 얼굴로 루크를 쳐다봤다. 설마 방금 말 엉덩이를 찬 게 저놈인가!?

'아니야! 누가 놈의 말을 반박하란 말이다!'

좌우를 둘러보던 백작이 멈칫했다. 근처에 있는 건 루크와 레이, 그리고 브루노. 백작의 기사는 한 명도 없었다.

레이와 브루노는 덤덤하게 백작의 시선을 받았다. 뭐 어쩌라는 건데? 그 시선에 백작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함정이다!'

어디부터 함정이었지? 저놈이 공녀를 인질로 삼았을 때부터? 아니면 잡힌 후 회유당한 건가?

아니, 그건 지금 중요치 않았다. 어떻게든 결투를 부정하고 되돌아가야 했다. 명예가 바닥에 떨어지고 추하게 비추어지겠지만, 죽는 것보단 나았다.

"아니다! 이건...!"

"각하께서 결투에 나서셨다!"

하지만 백작의 결심은 성벽 위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파묻혔다.

"위대한 용기에 찬사를! 각하의 검에 축복을! 다들 칭송하라!"

"...!?"

어처구니가 없어서 백작이 위를 돌아봤다. 고래고래 소리치는 당사자를 보고 백작의 얼굴이 구겨졌다.

* * *

"뭣들 하느냐!? 어서 각하를 응원하지 않고!"

귀족 자제들은 황당한 눈으로 리온을 쳐다봤고, 병사들 역시 약간 어리둥절한 상태였다.

백작을 비롯한 세 사람은 성벽과 너무 가까웠다. 당연히 백작이 나서는 광경도 충분히 볼 수 있었다.

'저거 어째 실수로 나가신 것 같은데.'

'옆에서 루크 경이 말 엉덩이 때리지 않았나?'

그러나 리온은 얼굴에 철판을 깔았다. 어떻게든 여기서 밀어붙여 응원하는 분위기로 만들어야 했다.

리온이 눈을 부릅뜨고 자신이 데려온 군사들을 노려보았다.

"뭣들 하느냐! 소리치란 말이다! 얼른!"

"마, 만세! 백작 각하 만세!"

"각하께 승리의 영광이 있기를!"

병졸들이 뭘 어쩌겠는가. 자신들이 모시는 리온의 명령이다. 석연치 않음을 느끼면서도 냉큼 응원을 시작했다.

"백작 각하께 영광을! 결투에서의 승리를!"

"백작 각하께 영광을! 결투에서의 승리를!"

리온이 계속해서 구호를 외치자 일제히 서른 명의 병력이 따라서 외치기 시작했다. 외침이 이어질 때마다 조금씩 구호가 퍼져 나갔다.

다른 가문의 병력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군중 심리로 저도 모르게 구호를 따라 하며 불러 댔다.

'어, 뭐야? 이대로 소리치면 되는 건가?'

'아니면 멈추겠지. 일단 따라 하자.'

단숨에 들불처럼 붙은 구호는 성 전체를 울렸다. 백작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이게 도대체 어찌된 일이란 말인가?

윈슬로우 가문의 애송이는 그렇다 치자. 하지만 왜 다른 가문에서 나온 놈들은 저 외침을 안 막는 거지?

'설마 모두 한통속인가!?'

불길한 상상이 머릿속을 헤집었다. 실제로 한통속은 아니었다. 다른 가문 자제들은 넋을 놓고 있을 뿐이었다.

'뭐야, 이거? 갑자기 왜 이래?'

'말려야 하나? 그렇지만 진짜로 각하께서 결투에 응하신 거라면....'

확실하지 않은 상황이 결정을 어렵게 했다. 특히 자기 가문의 일이 아니라 남의 일이란 생각에 자꾸 망설여졌다.

이대로 얼렁뚱땅 결투가 성사될 기미가 보이자, 백작은 필사적으로 부정하며 소리쳤다.

"아니다! 아니란 말이다! 이건 실수다!"

-백작 각하께 영광을! 결투에서의 승리를!

-백작 각하께 영광을! 결투에서의 승리를!

백작의 외침은 병사들의 구호에 묻혔다. 어떻게든 도망가려는 백작의 뒤로 대공이 다가왔다.

"자, 이제 슬슬 시작하지. 시간을 너무 오래 끌었군."

"잠깐, 잠깐만!"

"추하게 굴지 말고 여기서 죽어라."

대공이 본심을 내뱉으며 말을 달렸다. 백작은 사색이 된 채 검에 손을 가져다 댔다.

스스로의 검에 자신이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은 늙었고, 목숨을 건 실전은 겪은 지는 한참 됐다.

뭣보다 '검의 대공'이라 불리는 작자에 비하면 초라한 수준에 불과했다.

"나, 난 검을 뽑지 않겠다! 비무장인 자를 벨 셈이냐!"

"그럼 발검 대결이군. 내가 좋아하는 방식이지."

마지막 발버둥은 허망하게 끝났다. 대공은 무기를 뽑지 않고 말을 달려 백작에게 향했다.

멀리서 볼 때는 일격으로 승부를 결정지으려는 발검술 대결로 보이리라. 백작은 검에 손을 가져가며 이를 갈았다.

"제기랄! 이 망할 새끼들! 협상은 무슨!"

"닥쳐라."

욕설과 동시에 백작과 대공의 검이 뽑혔다. 번뜩이는 검광이 빛나고, 백작의 목이 하늘을 날았다.

의식이 없어지기 직전, 날아가는 백작의 목은 루크를 눈에 담았다. 루크는 더없이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 * *

처음 루크의 책략을 들었을 때, 대공은 황당해했다.

-결투로 불러내 죽이자고? 강제로 떠밀어서?

-예, 막무가내든 뭐든 명분만 챙기고 죽이면 됩니다.

-대체 무슨 헛소리냐? 책략이라 부를 수도 없는 졸속한 계획이다!

-그 말대로입니다.

맞다. 책략이라 부를 수도 없는 졸속한 계획. 대강 결투 분위기만 조성해서 도망을 못 치도록 하고 목만 따면 그만이라니.

-하지만 이런 계획이 의외로 먹힌단 말이죠.

-뭐라고?

-한번 해 보십시오. 모든 책임은 제가 지겠습니다.

백작에겐 후계자가 없다. 심지어 이인자라고 할 수 있는 가신도 없다. 오직 영주인 본인 앞에서 모든 가신이 평등했다.

광적일 정도의 권력에 대한 집착이 엿보이는 구조. 본인이 멀쩡할 때는 이런 기형적 구조에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으리라.

하지만 백작이 간과한 게 하나 있었다.

'자기한테 명령권이 상실되면 대신 판단을 내려 줄 사람이 없다는 것.'

명령이라는 것도 권력을 쥐어 본 사람이 하는 법이다. 아무리 충신이라도 명령을 내려 본 적이 없으면 우물쭈물할 수밖에 없다.

어떻게 판단을 내려야 하는지 모르니까. 그리고 백작이 죽은 지금,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뿐이었다.

"들어라."

레이가 조용해진 성을 향해 아무 감정도 담기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으니 이젠 내가 백작위를 이어받겠다. 정당한 결투를 하시다 돌아가셨으니 이는 원한을 가질 일이 아니다."

레이의 말에 모든 이가 침묵했다. 대꾸할 말이 없다기보다는, 상황이 어찌 돌아가는지 다들 알 수가 없었던 탓이다.

그사이에 레이는 계속 이야기를 진행했다.

"아버지의 유해를 수습하고, 대공을 성에 초대하리라. 이걸로 우리의 원한은 사라졌으니 아버지의 호적수였던 분께 경의를 표하고자 함이다."

헛소리다. 언제부터 백작이 대공의 호적수였던가? 또 며칠 전에 양녀로 들어온 레이가 느낄 원한은 어디 있고?

하지만 반박하는 자는 누구 하나 없었다. 백작은 후계자를 지정했고, 레이 스스로 백작을 죽인 게 아닌 이상 정당한 후계자였다.

"성문을 열어라."

"예, 예!"

레이의 명령에 따라 성문이 간단하게 열렸다. 아니라고 외치며 반대 세력을 규합할 수 있는 자는 누구 하나 없었다.

그저 명령에 따를 뿐이었다. 백작이 살아 있을 때 그랬던 것처럼.

65화

레이는 연기를 못 한다.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연기를 잘하는 사람은 두 가지 중 하나였으니까.

하나는 역할에 몰입하는 재능이 있는 사람. 또 하나는 철면피다. 레이는 어느 쪽도 아니었다.

뭔 소리를 해도 딱딱한 어투가 되자, 브루노가 해결책을 내놓았다.

-연기하려고 하지 말고 대사나 읊으시오.

-무슨 뜻입니까?

-책 읽는 것처럼 하라고. 고저 없이, 억양 없이. 차라리 그게 낫겠소.

-이상하게 보일 것 같습니다만.

레이의 반박에 브루노가 웃음을 터트렸다.

-근데 그쪽이 더 자연스럽단 말이지. 레이 경 연기 실력이 너무 처참해서.

-....

불만 어린 시선이 브루노에게 향했으나, 달리 방법을 못 찾은 레이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

의외로 브루노의 해결책은 먹혀들었다. 평소부터 무뚝뚝했던 레이라 가능한 일이었다.

레이는 성안에 들어오자마자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지금부터는 내가 가주다."

"...."

대답하는 자는 없었다. 레이는 답을 기다리지 않고 말을 이었다.

"아버지의 유해를 안치하고 손님 맞을 준비를 해야겠다. 다들 움직이도록."

"인정할 수 없소!"

그때, 누군가가 외쳤다. 제법 혈기가 넘쳐 보이는 젊은 기사였다. 레이가 물끄러미 젊은 기사를 바라봤다.

"뭘 인정할 수 없다는 거지?"

"각하의 원수를 손님으로 맞으라는 것, 그리고 그런 당신이 가주가 되는 것 둘 다! 이게 말이 되는 소리요!?"

다들 침을 꿀꺽 삼켰다. 일부 기사가 하고 싶은 말이었지만 차마 꺼내지 못한 말이었다.

"그대가 진정 각하의 후계자라면 저 귀쟁이 놈들을 용서해선 안 되오! 그게 바로 올바른 도리이자 자식의 책무! 의무를 다하지 못한다면 난 당신을 가주로 인정할 수 없소!"

당당한 외침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야말로 기사의 귀감이자 충신의 본보기 같은 자였다.

다들 레이에게 시선을 돌렸다. 저 지극히 당연하고도 원론적인 소리에 레이는 어찌 반박할 것인가?

레이는 조금의 고민도 없이 말했다.

"인정하지 않으면 어떻게 할 거지?"

"뭐요?"

"내 명령을 못 따르겠으니 가문에서 나가겠다는 소린가? 아니면 결투를 신청한다는 소린가? 확실히 해라."

"...."

젊은 기사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그런 건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저 상식적으로 말도 안 된다는 소릴 하고 싶었을 뿐.

하지만 레이가 한 건 해명이 아니었다.

-그래서 어쩌라고.

터무니없이 막 나가는 행동. 보통 이쯤 되면 후계자를 갈아치우고 다른 후보를 세우자는 여론이 생긴다.

'그런데 없잖아.'

후계자의 권리도 없는 자가 칼을 들고 맞선다면 그저 반역일 뿐. 그러니 이 상황에서 남은 건 레이가 제시한 두 가지 길밖에 없다.

떠나거나, 결투를 신청하거나. 전자를 고르면 백수 신세로 떠돌아다녀야 하고, 후자를 고르면 레이에게 베여 죽으리라.

"어느 쪽이냐고 물었다만."

"…떠나겠소."

기사는 고개를 푹 숙였다. 사실상 그에게 남은 유일한 선택지였다. 기사가 터덜터덜 사라지고 나자 레이가 다시금 명령했다.

"아버지의 유해를 수습하고 손님 맞을 준비를 해라."

반발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 * *

충격과 별개로 그 뒤의 일은 빠르게 끝났다. 백작의 시신은 생전에 준비해 둔 석실에 안치되었고, 장례는 전쟁 중에나 할 법한 약식으로 마쳤다.

대공은 스무 명의 친위대만 이끌고 성을 방문했다. 살얼음판과 같은 긴장감 속에서 정작 당사자들은 태연히 대화를 나누었다.

"술은 없나?"

"찾아보겠습니다."

대공의 말에 레이는 집무실을 뒤져 고급스러워 보이는 술병 하나를 골라 가져왔다.

태연히 술잔이 대공과 루크 일행, 네 가문의 자제들에게 술잔이 돌아가고 건배사가 이어졌다.

"엘프와 인간의 평화를 위하여."

"그리고 이어질 양측의 발전을 위하여."

건배사가 끝나고 다들 잔을 비웠다. 대공과 루크 일행이 태연한 가운데 안절부절못하는 건 다른 가문의 자제들뿐이었다.

'뭐야? 이거 어떻게 된 거야?'

'각하는 죽었고, 레이 경이 새 백작이라고?'

'그럼 거래는? 우리가 받을 마도구는?'

자제들은 혼란스럽게 대공과 레이를 쳐다봤다. 백작이 죽었으니 레이 쪽에서 거래를 이어받아야 할 터.

그런데 이제껏 레이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그들을 부르지도 않았다. 당연히 무슨 생각인지 알 수도 없었다.

가문의 자제들이 눈동자를 굴리는 와중, 대공이 레이를 향해 입을 열었다.

"아까 전에도 말했듯 이제 우리 사이에 원한은 없네."

"네."

"백작의 죽음은 너무 마음에 두지 말게. 정당한 결투였으니."

"네."

"…대리인 없나?"

"제가 대신하죠."

레이가 말을 이어가질 못하자 루크는 쓴웃음을 지으며 나섰다. 더 이상 눈가리고 아웅할 필요가 없긴 하다만 이 정도일 줄은.

"원한이 해소되었다면 무역에 관한 일만 조정하면 되겠군요."

그 말에 귀족 자제들의 눈이 번쩍 뜨여졌다. 엘프와의 무역이라니. 마도구만큼이나 매력적인 제안이 아니던가.

처음에 마도구를 약속했던 백작은 죽었다. 그럼 이제 레이 쪽에서 대신할 당근을 제시해 줘야 할 터.

다들 두근거리며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을 때, 엘프 대공이 찬물을 부었다.

"아니, 그 전에 해결해야 할 일이 있지."

"해결해야 할 일?"

"난 헤르닝 가문과의 원한을 청산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다른 가문과의 원한도 청산하겠다고 한 적은 없지."

대공의 싸늘한 시선이 귀족 자제들을 쓱 훑었다.

"동포가 저토록 험한 일을 겪은 데는 네놈들의 지분도 포함되어 있으렷다."

"...!?"

갑자기 시선을 받은 자제들의 낯빛이 새파랗게 변했다. 지금 여기서 왜 자신들에게 불똥이 튀는 거지?

"오, 오해이십니다!"

"선대께서 벌이신 일은 저희와 관계가 없습니다!"

"군대를 이끌고 온 주제에 웃기지도 않는 변명을."

어떻게든 해명하려던 시도는 무위로 돌아갔다. 사실 이런 애매한 책임 문제는 당사자의 의향에 따라 갈린다.

즉, 대공이 용서해 줄 생각이 없다면 아무리 이유가 타당해도 소용없는 것이다.

"레, 레이 경. 아니, 각하!"

자제들이 레이를 쳐다봤다. 엘프가 진군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헤르닝 가문의 성을 통과해야 한다.

레이가 길을 열지 않으면 군대를 움직이지 못할 터. 다른 가문과의 관계를 생각하면 당연히....

"길을 열어 주겠나?"

"예."

"각하!?"

아무렇지도 않은 대답에 다들 기겁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레이는 신경 쓰는 기색조차 없었다.

대공은 잠깐 귀족 자제들을 쳐다보다 말했다.

"괜찮나? 이들 중 충성을 맹세한 가문이나 가신을 자처한 사람은 없고?"

"없습니다."

레이 대신 대답한 건 루크였다.

"헤르닝 가문과 이들의 관계는 어디까지나 가까운 이웃 사이의 관계입니다. 누구도 충성을 바치지 않았고, 가신으로 거둔 가문도 없습니다."

"그럼 멸문시켜도 상관없겠군."

멸문. 악몽 같은 소리였다. 다른 사람이 저런 말을 했다면 코웃음을 치고 넘어갔으리라.

설령 황실이라도 멸문은 쉽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하지만 엘프 대공에겐 그 자격이 있었다.

백작가조차 어렵지 않게 멸문시킬 수 있는 군대의 보유자였으니까.

'만약 저 말이 진심이라면, 우리는 끝장이다.'

식은땀이 귀족 자제들의 옷을 축축하게 적셨다. 네 가문의 연합군 따윈 저 엘프 군대 앞에서 무용지물.

각개격파 당하며 모조리 쓸려 나가는 가문의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 했다.

"잠깐 기다려 주십시오."

그때, 리온이 앞에 나섰다.

"지금 말씀을 들어 보니 헤르닝 백작가에 충성을 맹세한다면 용서해 주시겠다는 소리 같습니다만."

"그렇다."

대공은 리온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헤르닝 백작가와 엘프 사이의 원한은 청산되었다. 가신은 주인의 공과 과를 함께하는 법. 원한 역시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숨을 한 차례 들이쉰 리온이 앞에 나와 레이를 향해 한쪽 무릎을 꿇었다. 가신이 주군에게 취하는 예법이었다.

"리온 윈슬로우가 가문을 대표하여 헤르닝 가의 주인께 충성을 맹세하나이다. 부디 받아들여 주십시오."

"받아들이겠다."

무덤덤한 레이의 말이 끝나자, 리온은 일어서서 레이의 옆으로 향했다. 어안이 벙벙한 세 사람을 향해 루크가 입을 열었다.

"세 분은 어쩌시렵니까?"

세 가문의 귀족 자제들은 멍하니 루크를 쳐다봤다. 다들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이제야 일이 어떻게 돌아간 건지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다.

'각하가 없으니 지금 헤르닝 가문의 주인은 레이 경. 하지만 레이 경은 가문의 수장보다 기사에 가까운 사람이다.'

'설령 백작위를 이어도 주군인 루크 경이 명령한다면 그대로 따르겠지. 사실상 이건 루크 경을 향한 충성 맹세다.'

모든 게 루크가 깔아 놓은 포석이었다. 도대체 언제부터였을까? 그저 운 좋게 뛰어난 기사를 손에 넣은 애송이라 여겼거늘.

루크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대답이 없는 걸 보니 다른 분들께선 황실에 대한 충성을 지키시려나 봅니다."

"훌륭하군."

대공의 입매가 비틀렸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그렇다면 충성을 간직한 채 사라지거라. 두고두고 미담으로 남을 테니."

"...!"

"슬슬 나는 돌아가야겠군. 군대란 그 자리에 세워 두는 것만으로도 돈이 드는 법이니."

한마디로 곧장 네놈들 가문으로 쳐들어가겠단 소리였다. 세 가문의 자제 중 데미안은 눈을 질끈 감았다.

'어차피 그것밖에 방법이 없다면.'

대공이 막 일어서려던 찰나, 데미안이 앞으로 나서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데미안 오르후스가 가주 대리로서 헤르닝 가주께 충성을 맹세합니다!"

"뭣...!"

"부디 휘하에 받아들여 주십시오!"

경악하는 두 사람을 무시하고 데미안이 소리쳤다. 레이는 무뚝뚝한 시선으로 데미안을 쳐다봤다.

"그대에게 충성하는 자를 바꿀 권한이 있는가?"

"제 이름을 걸고 설득해 보이겠습니다."

"그렇다면 좋다."

레이의 허락과 함께 데미안이 성큼성큼 나아가 루크 일행 근처에 섰다. 이제 남은 건 두 사람.

"두 분은 여전히 황실에 대한 충정을 지키시렵니까?"

루크가 다시 한번 물었다. 두 사람의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그날, 헤르닝 가문은 네 가문을 휘하에 들였다.

* * *

모두가 떠나간 야심한 시각. 응접실에 남은 루크와 대공은 서로 잔을 기울였다.

"저걸로 충분한 건가? 언제 반기를 들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만."

"떡고물이 없으면 언젠가 터지긴 하겠죠."

"있다는 소리군."

"무역 하나만으로 충분합니다."

루크가 잔에 담긴 포도주를 홀짝이며 말했다.

"대공께선 잘 모르겠지만 엘프와 인간의 정식 무역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그렇지."

"그건 곧 이 무역으로 얻는 이득이 엄청날 거라는 소리죠."

일종의 프리미엄이다. 아직 마법 기술을 보유한 종족이 만든 물건. 빼앗은 게 아니라 온전한 신상품.

아마 헤르닝 가문을 거쳐서 중개 무역만 해도 떨어지는 이득은 헤아릴 수 없을 거다.

추측이지만 각 가문의 총재산이 최소 두 배는 불어나지 않을까.

'여차하면 가문을 멸문시킬 수 있는 엘프 군대, 사이가 틀어지면 반토막 이상 줄어드는 재산까지. 미치지 않고서야 반기를 들 수가 없지.'

지금이야 굴욕감에 몸을 떨겠지만, 나중에 들어오는 금화를 맛보고 나면 굴욕이고 나발이고 아무래도 좋아질 거다.

자신의 가문에 할당되는 상품을 더 넣어 달라고 오히려 싹싹 빌겠지.

"그리고 이 무역에서 엘프 역시 자원을 충당할 수 있고?"

"예, 아마 대공께서 원하시는 자원의 세 배는 금방 충당하실 수 있겠죠."

"정말인가? 조금 믿기 어렵군."

대공이 약간 미심쩍은 눈으로 루크를 쳐다봤으나, 루크는 그저 미소만을 돌려줬다.

"믿으십시오, 그게 무역이라는 겁니다."

아라티온은 거의 모든 면에서 완벽에 가까웠으나 무역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다. 그로 인해 발생되는 이득 역시 마찬가지.

오랜 세월 고립된 상태였으니 당연한 일이다. 아마 무역으로 돌아오는 자원의 양을 보면 대공 역시 무역을 끊지 못하게 될 거다.

서로에게 좋은 상호 의존 관계의 완성인 셈이다. 루크의 속내를 전부 알지 못하는 대공이 한숨을 쉬었다.

"무역이라, 나도 처음으로 접하는 분야지. 가능하면 네게 좀 더 조언을 듣고 싶건만."

"죄송합니다. 여러모로 바쁜 터라."

"이만큼 이득을 설명해 두고서도 떠나는 걸 보니 무척 중요한 일인가 보군."

루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섯 가문의 멸문은 저지했으나, 아직 중요한 과제가 남아 있었다.

"북부로 갈 생각입니다."

야만족의 왕이 나타나는 걸 막기 위해서.

66화

발데마르 백작의 죽음으로부터 이틀 후. 레이는 가신의 맹세를 마친 네 가문의 자제들을 불러들여 말했다.

"급한 볼일이 있어 가문을 떠나 있어야 하니 영주 대리를 임명하겠다."

"예?"

"영주 대리는 리온이다."

"...!"

아닌 밤중에 홍두깨 같은 소리였다. 워낙 주변 상황이 정신없이 돌아가다 간신히 안정되었나 했더니 레이가 자리를 뜨다니?

심지어 그 대리라는 게 자신들과 동등한 위치던 리온이다. 자제들의 얼굴이 찌그러졌으나 반대 의견은 나오지 않았다.

'제기랄, 생각 같아서야 뜯어말리고 싶지만…'

'십중팔구 사전에 이야기가 오갔던 거겠지.'

리온은 이전 대결에서 뜬금없이 백작을 응원하며 결투로 몰아붙였다. 루크와 사전 모의를 했던 게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번 영주 대리의 임명은 그때의 공로로 얻는 보상일 것이다.

'약속이 오간 이상 레이 경, 아니 각하가 말을 바꿀 가능성은 없다.'

'어차피 정해진 거 반대하다 밉보이지나 말아야지.'

불만은 있지만 현 상황에서 그걸 드러낼 정도로 멍청한 이는 없었다. 안 그래도 반쯤 강압적인 방식으로 가신이 된 이들이다.

루크도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을 테니 여차하면 본보기를 보이려 하리라. 지금은 납작 엎드려 있는 게 제일이었다.

레이는 분위기를 확인한 후, 루크가 미리 준비해 둔 당근을 꺼냈다.

"다만 무역 물품의 배분 비율은 내가 떠나기 전 동등하게 나눠 두겠다."

"...!"

그 말에 일그러졌던 자제들의 얼굴이 도로 피었다. 사실상 그게 가장 중요한 문제 아닌가.

무역 물품의 분배권을 손에 쥐고 휘두른다면 모든 가문이 윈슬로우 앞에 쩔쩔매야 하니까.

하지만 레이가 떠나기 전 지분을 정해 둔다면 리온도 손대지 못할 터.

"진실로 현명하신 결정입니다, 각하!"

"부디 귀환하실 때까지 보중하시길!"

언제 불만이 있었냐는 듯 자제들이 웃는 낯으로 고개를 숙였다. 리온 역시 미리 언질을 받은 터라 큰 불만은 없었다.

헤르닝 백작가에 막대한 영향력을 투사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고도 남는 보상이었으니까.

'그래 봤자 누님은, 아니 루크 경은 거역하지 못하겠지만.'

이 기묘한 공생 관계는 전부 엘프 대공과 루크를 주축으로 한다. 달리 말하자면 두 사람과 사이가 틀어지는 순간 모든 게 끝이다.

아마 리온이 헛된 욕심을 부려 헤르닝 가문을 차지하려고 하면, 그 순간 엘프 대공이 달려와 목을 날려 버리겠지.

'결국, 루크 경의 손 위에서 춤출 뿐인가.'

리온의 입가에 쓴웃음이 맺혔다. 그래도 그 대가로 넘쳐흐르는 꿀을 얻어먹을 수 있다면 나쁘지 않았다.

적으로 만났을 때 재앙이 되는 자라면, 차라리 아래로 여겨지더라도 아군인 편이 훨씬 나았으니까.

* * *

다시 이틀이 지났을 때, 루크 일행은 헤르닝 백작가를 떠날 준비를 했다. 그중에는 레이도 섞여 있었다.

가주가 가문을 뒤로하고 기사행을 하는 초유의 사태였지만, 리온의 빠른 정리 덕에 큰일은 없었다.

레이는 리온에게 딱 하나만을 당부했다.

"어머니를 헤르닝 성에 모시고, 잘 돌봐드려라."

"꼭 그리하겠습니다."

"만약 아버지께서 정을 핑계로 붙잡는다면, 다음번엔 내가 군대를 이끌고 윈슬로우에 향할 것이다."

"결코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리온은 몇 번이고 확답하며 고개를 숙였다. 지금 영주 대리를 맡게 된 건 루크의 의향일 뿐이다.

레이에게는 가문에 대한 신뢰가 조각만치도 없었다. 리온 역시 그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자칫해서 루크 경이 잘못되면 가문이 풍비박산 나더라도 이상할 거 없다."

그렇다면 더 늦기 전에 신뢰의 부스러기라도 주워야 했다. 그 시작은 레이의 어머니를 극진히 대접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하리라.

리온이 결의를 불태우는 와중, 루크는 맥스를 불러 말했다.

"넌 우리가 다시 올 때까지 여기 남아라."

"예!?"

생각지도 못한 말에 맥스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아니, 번스타인 가문에서 여기까지 잘 데려와 놓고 왜 지금 와서?

"일단 첫째로 여기 동향 좀 살펴봐."

"동향이요?"

"대리를 맡겨 놓은 리온은 제법 재능 있는 녀석이고, 다른 가문의 녀석들도 멍청이는 아니야. 하지만 만에 하나라는 게 있으니까."

말하자면 만약을 위한 감시원. 딴짓을 하면 루크가 오면 죄다 보고할 수 있다는 무언의 협박이 되는 셈이다.

맥스의 존재만으로 이거 잘만 하면, 이라는 생각이 들다가도 흠칫하며 생각을 고쳐먹게 만들 수 있다.

"일종의 보험이지."

"첫 번째라면 두 번째도 있습니까?"

"그래, 두 번째는 목적지 때문이다."

사실 첫 번째보다는 이게 더 중한 이유였다.

"우리가 갈 곳이 북부거든."

"북부가 왜요?"

"너, 나랑 싸우면 얼마나 버틸 것 같냐?"

맥스는 루크와 처음 암살자로 오해받았을 때 검을 맞대 본 적이 있다. 하지만 그때의 루크는 명백히 힘을 빼고 싸웠다.

정말 루크가 작정하고 죽이려 든다면 순식간에 죽었을 것이다. 대강 계산을 끝낸 맥스가 입을 열었다.

"많아 봤자 세 합이나 받아 냈겠죠."

"그렇지?"

"하지만 저에게 무력은 딱히 필요 없지 않습니까."

"아니, 지금부터는 필요해."

단순한 북부행이라면 맥스 수준의 무력으로도 충분하다. 힘을 숭앙하는 북부지만, 종복마저 강할 필요는 없으니까.

그러나 지금 가려는 곳은 북부의 애매한 장소가 아니었다.

"우린 야릉그림으로 갈 거니까."

"...!"

갑자기 튀어나온 야만족 성지의 이름에 맥스가 기겁했다.

* * *

사정을 들은 맥스는 순순히 포기했다. 어지간하면 자신의 몸 정도야 충분히 지킬 수 있었다.

하지만 루크가 향하려는 곳은 어지간한 수준이 아니었다. 맥스의 무력으론 방해만 될 게 뻔했다.

-귀환하실 때 잊어버리시면 안 됩니다.

그 말을 남기며 맥스는 루크 일행을 배웅했다. 루크는 그대로 말을 달려 북부로 향했다.

엘프들의 진군이 멈춘 덕인지, 가는 길에 몬스터들의 출현은 현저히 줄어든 상태였다.

"북부는 어떤 곳입니까?"

가는 길이 심심했는지, 브루노가 루크에게 물었다.

"서부만큼 지랄맞은 곳은 아니겠죠?"

"글쎄."

루크는 회귀 전의 북부를 떠올렸다. 확실히 몬스터가 그리 많지는 않았다. 대신 강한 개체가 자주 나오곤 했다.

그리고 그 강한 개체는 대부분 인간의 손에 도륙이 났다.

"몬스터보다는 사람이 무서운 동네였지."

"남부처럼 정치질이라도 심합니까?"

"아니, 오히려 정치질은 형편없지."

북부라고 정치질이 없는 건 아니지만, 다른 지역에 비하면 수준이 낮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먹고살기 힘드니까. 정치질도 어느 정도 여유가 될 때나 하는 거지, 제 코가 석 자인 마당에 뭔놈의 정치질인가.

"그럼 뭐가 무서운 겁니까?"

"거기 사는 사람들."

"...?"

"가 보면 알 거다."

어리둥절해하는 브루노를 보며 루크가 피식 웃었다. 이건 직접 보지 않으면 설명할 방도가 없었다.

며칠 동안 말을 달려 루크 일행은 북부의 경계를 넘었다. 그리고 하루도 되지 않아 브루노가 소리쳤다.

"이런 미친, 여기 기온이 왜 이래?"

브루노는 부르르 떨며 양손으로 팔을 미친 듯이 비볐다. 레이 역시 하얀 입김을 내뿜으며 중얼거렸다.

"춥군요."

"북부니까."

"그 한마디로 끝낼 수준이 아닌데요."

브루노가 주변을 둘러봤다. 녹을 기미조차 안 보이는 눈들이 대지를 뒤덮고 있었다.

"봄에도 눈이 안 녹는 지방이라니."

남부 출신인 브루노에게는 너무 생소한 광경이었다. 루크는 그 반응을 즐기며 말을 덧붙였다.

"이 정도로 놀라면 곤란한데."

"더 놀랄 게 있습니까?"

"많지. 오늘 묵을 여관이라든가."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한 두 가신이 서로를 쳐다봤다. 그리고 잠시 후, 여관에 도착한 브루노가 기염을 토했다.

"하루 묵는 데 은화 두 닢이라고!?"

상상을 초월하는 가격에 입이 쩍 벌어졌다. 번쩍거리는 고급 여관이면 모를까, 일반 여행가들이 묵을 만한 보통 여관이다.

그런데 받는 가격은 어지간한 고급 여관보다 더했다. 흥정에 둔한 레이조차 눈살을 찌푸렸다.

"바가지가 심하군."

"그렇게 생각하시면 딴 데로 가시면 됩니다."

여관 주인은 아쉬울 거 없다는 태도로 으쓱였다.

"다른 곳도 가격은 다 비슷합니다. 나리들께서는 모르겠지만, 북부 물가는 원래 이 정도입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됐다. 여기 숙박비."

더 뭐라 하려던 두 가신을 막으며 루크가 은화를 내밀었다. 여관 주인은 냉큼 은화를 챙기며 고개를 숙였다.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리."

"식사도 하려 한다만."

"은화 반 닢만 더 주시면 됩니다."

흔쾌히 잔금을 지불하자, 주인은 손바닥을 싹싹 문지르며 루크 일행을 방으로 안내했다.

방은 나쁘진 않았지만 크게 좋을 것도 없었다. 브루노는 기가 차서 헛웃음을 내뱉었다.

"사기꾼이 따로 없군요. 왜 넘어가 주신 겁니까?"

"사기가 아니야. 담합이지."

"네?"

"주인장의 말대로 이 부근은 대체로 저 가격일걸."

원래부터 북부의 물가는 높지만, 외지인에게는 살인적인 추가금이 붙는다. 특히 그게 돈 좀 있어 보이는 기사라면 더더욱.

부유한 상대에게 가격을 올려치는 건 다른 지방도 드물지 않다. 다른 점은 북부의 경우 지방 전체가 담합을 한다는 점이다.

이 가격에 안 살 거면 그냥 안 팔고 만다는 거다.

"그러니 어딜 가든 마찬가지야. 이리저리 옮겨 다니느니 군말 없이 지불하는 편이 오히려 싸게 먹히지."

"경쟁이 없는 겁니까?"

레이가 루크를 향해 물었다. 아무리 담합을 한다고 해도 한 명쯤은 조금 더 싼 값에 팔려고 하는 법이다.

아무것도 못 파는 것보단 하나라도 파는 게 더 나으니까. 그러나 북부는 예외였다.

"북부에서는 그런 일 없어."

"어째서죠?"

"역설적이지만, 살아남기 위해서지."

북부는 험한 땅이다. 일부를 제외하면 작물이 거의 자라지 않고, 가축을 키울 만한 환경도 되지 않는다.

그나마 보석의 산지이기에 교역으로 먹고살고는 있지만, 그나마도 쉽지 않다. 황실에서 거래를 엄격히 통제하기 때문이다.

"북부에서 순순히 황실 말을 듣는다고요?"

"대규모로 곡물을 수출할 수 있는 무역로를 쥐고 있으니까."

"아!"

그제야 알겠다는 듯 브루노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대량의 곡물 수출이 가능한 건 인접한 지역 중 황실뿐이다.

동부는 안정되어 있지만 여러 가문으로 나뉘어 있다. 대규모 무역 같은 일을 도모하기엔 규모가 부족하다.

서부는 몬스터로 고생하는 중이니 말할 것도 없다. 남부는 인접해 있지도 않으니 논외.

오직 중앙에 있는 황실만이 대규모 곡물 수출이 가능하다.

"결국 황실에 목줄이 잡혀 있는 거지."

그리고 황실은 북부가 크도록 내버려 둘 생각이 없다. 그러다 보니 딱 숨통이 트일 만큼만 곡물 수출량을 조절한다.

반항하는 순간 바로 무역로를 끊어버리고, 다른 곳에서 조달하기 전에 말라죽게 될 수준만.

"북부인들 입장에선 죽을 맛이지. 그러다 보니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으로 뭐든 긁어모으는 거야."

가격 담합도 그중 하나다. 물자가 부족한 북부에서 경쟁을 했다간 오히려 다 죽는다.

그러느니 가격 통일로 살 사람은 살자고 합의를 본 거다.

'쓰레기 같은 황제 놈들.'

설명하던 루크가 속으로 혀를 찼다. 황제라면 황권을 강화시키고 지방 영주를 억누르는 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게 일반 영민들까지 말라죽게 하는 거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도대체 어느 미친놈 머리에서 나온 발상일까.

'그러니 더더욱 살려야 한다.'

안 그래도 중앙에 불만이 많은 북부다. 여기서 야만족의 왕을 탄생하지 못하게 막는다면 필시 든든한 아군이 되리라.

아니, 단순히 야만족의 왕을 막는 정도로 끝내서는 안 된다.

'북부인의 왕을 세운다.'

야만족의 왕이 아니다. 북부 전체를 통합하고 모든 뜻을 한데 모아 황실에 대적할 수 있는 자가 필요했다.

루크의 눈이 창문 너머 먼 곳을 향했다. 회귀 전에 만난 인연이 이 북부에 있었다.

왕이 되기에 충분한 자질을 가진 자가.

67화

루크 일행은 며칠 동안 마을 여러 개를 지나쳤다. 작은 마을도, 큰 마을도 있었으나 물가는 비슷했다.

한 번 묵을 때마다 돈이 뭉텅이로 떨어져 나갔다. 출발 전에 챙겨 둔 금화가 아니었으면 진즉에 떨어졌을 거다.

"염병할, 저 여기 싫어지려 합니다."

일곱 번째 여관에 묵었을 때 브루노에게서 볼멘 소리가 나왔다. 레이 역시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왜? 비싸서?"

"그 전에 태도가 맘에 안 들어요."

"뻔뻔합니다."

두 사람의 말에 루크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겠지. 그리 비싸게 받아먹고도 미안한 기색 하나 없으니.

하지만 루크는 이 뻔뻔함이 그리웠다. 문득, 옛 친구와의 대화가 떠올랐다.

-북부인들은 다 얼굴에 철판 깔고 다니냐? 미안한 시늉이라도 해라.

-이건 철판을 깐 게 아니오, 대장. 긍지요.

-비싸게 받고도 당당할 수 있는 긍지?

-아니, 당장 내일 굶어 죽어도 빼앗지 않고 바가지로 해결하는 긍지.

그 말이 어찌나 황당하던지. 세상에 긍지 다 죽었냐고 소리치면 그냥 웃음을 터트리던 놈이었다.

루크가 녀석의 말을 이해한 건 한참 뒤였다. 옛 기억을 떠올리던 루크의 눈에 표지판이 들어왔다.

<팔룬>

다 낡아빠져서 떨어지기 직전의 나무판이 흔들렸다. 오랫동안 보수 하나 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때, 표지판 반대쪽에서 오던 중년 남성이 루크 일행과 마주쳤다.

"누구쇼?"

날카로운 눈빛에는 명백한 경계심이 서려 있었다. 짧은 말투에 레이가 눈을 찌푸렸다.

평민치고는 기사한테 말이 너무 짧았다.

"말을 조심해라."

"카악, 퉤."

레이의 말에 남자가 침을 뱉었다. 분노한 레이의 손이 검으로 향한 순간이었다. 남자가 품에서 금속패 하나를 꺼내 보여 줬다.

"…명예 기사?"

"그렇수다. 나도 기사요. 이제 됐지?"

명예 기사. 전장에서 공을 세운 평민에게 주는 기사직이다. 일단 실권은 없으나 받는 순간 귀족으로 취급되긴 했다.

잠시 우물거리던 레이가 검집에서 손을 뗐다. 무례하긴 해도 상대 역시 기사라면 베어 버릴 수준까지는 아니었다.

그 모습을 본 남자가 눈을 껌뻑였다.

"의외로군."

"뭐가?"

"난 '어디서 감히 명예 기사 따위가!'라면서 달려들 줄 알았는데."

명예 기사가 귀족이라지만, 실제 인식은 시궁창이나 다름없다. 줄 게 없어서 던져 주는 명예직 같은 거니까.

아무 힘도 없는 귀족이란 평민만도 못한 법. 영지도 돈도 없는데 귀족 직함만 얻어 봤자 뭘 하겠나.

귀족들 사이에선 무늬만 귀족이고, 평민들 사이에서도 빛 좋은 개살구 취급받는 게 명예 기사다.

"그래도 기사는 기사지."

"허."

진심으로 놀란 듯 남자가 입을 벌렸다. 이런 대접 자체를 처음 받는 듯했다.

"팔룬으로 가는 길이오?"

"그렇소만."

"내가 안내해 주겠소. 도중에 길이 눈에 파묻혀서 잘못하면 헤맬 거요."

루크는 기꺼이 호의를 받아들였다. 좋은 일 해 주겠다는데 굳이 거부할 이유도 없었다.

"그러고 보니 통성명도 아직 안 했군. 헨릭이오."

"성은?"

"말해 무엇 하겠소?"

헨릭이 씁쓸하게 웃었다. 자신이 명예 기사라는 것에 아무런 자부심도 없는 것 같았다.

본인 스스로 원해서 받은 게 아니라, 다른 보상 대신 떠넘겨 받은 작위라는 소리다.

"그쪽은?"

"루크 번스타인. 이쪽은 내 가신들인 레이 헤르닝과 브루노 바스톤."

"이런 구석 마을까진 무슨 일로 온 거요?"

잡담에 섞어서 물어보고 있었으나 아직 사라지지 않은 경계심이 느껴졌다. 루크는 모르는 척 간단히 대답했다.

"수행 기사 일로."

"…수행 기사? 요즘 시대에?"

"드물기에 더욱 명예로운 일이지. 내 아버지도 하셨던 일이고."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숨은 목적이 있는 것만 빼면 모두 진실이고.

"북부는 야만인들이 많은 땅이니 수행 기사가 꼭 필요할 것 같은데."

"하하."

루크의 말에 헨릭이 영혼 없는 웃음으로 화답했다. 비웃음이 아니라 허탈함이 담긴 웃음이었다.

"안타깝게도 팔룬에는 당신이 물리칠 야만인이 없소."

"안전한 마을인가?"

"그럴 리가. 틈만 나면 놈들이 쳐들어오는 마을인데. 그저 당신이 쓰러뜨릴 수 있는 야만인이 없을 뿐이지."

무슨 뜻이냐는 표정으로 루크가 헨릭을 쳐다봤다. 헨릭은 대답 대신 고개를 저었다.

"가 보면 알 거요."

그 말을 끝으로 대화는 더 이어지지 않았다. 헨릭이 말했던 것처럼 길 중간중간이 눈으로 덮여 있었다.

주변에 나무도 듬성듬성 나 있었기에 자칫하면 길을 잃기 딱 좋았다. 안내를 받은 일행이 팔룬에 거의 도착했을 때였다.

마을 입구를 본 헨릭의 눈이 찌푸려졌다.

"제기랄."

"무슨 일이오?"

"조금 문제가 생겼소."

"야만인이라도 나왔나?"

"그리 큰일은 아니고."

헨릭은 깊게 한숨을 쉬며 루크를 쳐다봤다.

"해결은 내가 할 테니, 가능하면 끼어들지 말아 주시오."

"그러지."

루크의 대답을 들은 헨릭이 굳은 얼굴로 나아갔다. 잠시 후, 마을 앞에 있는 경비병이 헨릭을 보고 웃음을 터트렸다.

"이게 누구야? 우리 친구 헨릭 아니야? 방금 나갔는데 왜 또 금방 오시나?"

비아냥이 담긴 목소리에 헨릭의 얼굴이 형편없이 구겨졌다.

* * *

'이런 마을에 경비병이라니.'

팔룬은 구석진 곳에 있는 마을이다. 도시는커녕 마을 규모로만 봐도 꽤 작은 축에 속했다. 그런 마을에 경비병이 있었다.

그럴 때는 대부분 상황이 두 가지 중 하나였다.

'더럽게 위험해서 꼭 필요하거나, 경비병을 가장한 감시병이거나.'

최악의 경우는 양쪽 모두일 수도 있다. 헨릭과 경비병의 표정을 볼 때, 적어도 후자는 확실한 것 같았다.

같은 마을 사람이라면 경비 업무를 맡은 사람과 저렇게 사이가 나쁘지는 않으니까.

"제기랄, 쓸데없는 소리 말고 비키기나 해라. 객이 있으니까."

"흠."

경비병이 루크 일행을 슬쩍 돌아봤다. 훑어보는 눈초리가 영 보는 사람을 짜증나게 만들었다.

"보아하니 용병 기사 나리들 같은데, 여긴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헨릭이 나리들을 고용한 겁니까?"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추궁과 같은 말에 헨릭이 버럭 소리쳤다. 하지만 경비병은 꿋꿋하게 자리를 지켰다.

말하지 않으면 길을 열 수는 없다는 의사 표시였다. 루크는 픽 웃으며 경비병을 내려다보았다.

"경비가 참으로 삼엄하군. 사령관이 암살당했나?"

조그마한 마을 경비 주제에 전쟁터 한복판처럼 구는 게 우습다는 비아냥이었다. 경비병의 얼굴이 단박에 굳어졌다.

"말을 조심하십시오, 나리."

"평민이 귀족에게 할 소리가 아닌 거 같은데."

"하지만 벨다인 가문 소속의 병사가 용병 기사에게 할 소리는 되겠지요."

위협하듯 경비병이 루크를 향해 쏘아붙였다. 한마디로 빽도 없는 놈이 빽 있는 자신에게 까불지 말란 소리였다.

루크도 벨다인 가문은 들어 본 적이 있다. 지금이 아니라 회귀 전의 동료에게서지만.

-그 지역에서는 행세깨나 하는 자작가였소. 존경도 많이 받았지.

경비병의 위세를 보니 가문의 영향력을 알 만했다. 다름 아닌 평민이 귀족에게 뻗대고 있으니.

이 주변에서는 다른 귀족들 사이에서도 무소불위라는 거겠지. 경비병은 가슴을 쫙 펴고 말했다.

"다시 말씀드리지요. 무슨 일로 방문하신 겁니까?"

두 번은 없다는 듯한 자신만만한 목소리였다. 슬쩍 고개를 돌리자 주먹을 부르르 떨고 있는 헨릭이 보였다.

사실상 루크 일행은 헨릭의 손님. 경비병의 이런 행동은 루크 일행뿐만 아니라 헨릭에 대한 모욕이기도 했다.

루크의 목소리가 자연스레 싸늘해졌다.

"루크 번스타인. 수행 기사로 왔다."

"번스타인이라니, 그건 또 어디에 있는 가무… 잠깐만요, 번스타인?"

미리 준비해 둔 코웃음으로 대꾸하려던 경비병이 움찔했다.

"설마 동부에 있는 그 번스타인은 아니겠지요?"

"용살자 레오닉이 세운 가문이라면 맞다만."

경비병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뭔가 잘못됐다는 걸 느낀 경비병이 부르르 떨면서 옆으로 비켜섰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감히 몰라뵙고!"

"길이나 비켜라."

"옙!"

냉큼 경비병이 물러섰다. 아까 전의 기세등등한 태도는 찾아볼 수도 없었다. 루크 일행이 안에 들어가자, 헨릭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유명한 가문 사람이었소?"

"좀 유명하지. 못 들어 봤나?"

"원체 배운 게 없어서."

머쓱하게 헨릭이 뒷머리를 긁었다. 어지간하면 태어난 고향에서 평생 살다 죽는 세상이다.

대륙에서 기본적인 상식 취급하는 것도 마을에 따라서는 전혀 모를 수도 있었다.

"뭐, 모를 수도 있겠지."

"그리 말해 주니 고맙소. 여관은 저쪽이요. 안내가 더 필요하다면...."

"아니, 충분하오."

루크는 헨릭과 헤어져 여관으로 향했다. 가까이 갈수록 루크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옛 친구는 자주 말했었다. 좀이 쑤시다 보니, 하지도 못하는 여관 주인 일을 맡았다고 했다.

그거라도 하고 있으면 차라리 나았다고.

'지금쯤 여기에 있겠지.'

루크가 여관에 다다랐을 때였다. 안에서 소란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 싸우는 소리처럼 들렸다.

레이가 입구 근처에서 멈춰서 루크를 바라봤다.

"조금 있다가 들어갈까요?"

"아니, 무슨 일인지 좀 보자."

루크는 덜컥 여관 문을 밀어젖혔다. 밖에서 드문드문 들리던 목소리가 확 귀에 들어왔다.

싸우는 사람은 두 패거리였다. 하나는 여관 주인과 근처에 있는 중년 남자들. 또 하나는 멀끔한 남자와 병사들이었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나?"

"말이 아니면 뭐란 말이오?"

으르렁거리는 여관 주인의 말에 멀끔한 남자가 어깨를 으쓱했다. 여관 주인은 분노한 얼굴로 탁자를 움켜쥐었다.

"안 그래도 지금 있는 식량으론 아사자가 나올 지경이다. 그런데 밀 다섯 포대라고? 그걸 누구 코에 붙인다는 말이지?"

"그건 내 알 바가 아니고."

"네놈이!"

중년 남자 중 한 사람이 달려들려는 걸 여관 주인이 어깨를 붙잡았다. 씩씩거리며 남자가 물러서자, 멀끔한 놈은 더욱 의기양양하게 소리쳤다.

"이건 남작 각하의 뜻만이 아니오. 벨다인 자작가의 뜻이기도 하지."

"그걸 지금 자랑이랍시고 하는 거냐? 제 가문 건사도 못 하고 다른 가문의 뜻대로 좌지우지되는 게?"

정곡을 찌르는 소리에 의기양양하던 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할 말이 없었는지, 놈은 이내 등을 홱 돌렸다.

"아무튼 할 말은 다 했소. 이번 배급은 밀 다섯 포대요. 더 늘려 달라 해도 어림없소."

"이 개자식!"

"마음에 안 들면 반란이라도 일으키시오. 그럴 배짱이 있다면야."

멀끔한 놈은 성큼성큼 병사와 함께 입구로 다가갔다. 루크 일행과 눈을 마주치자 히죽 웃고는 안을 향해 소리쳤다.

"손님들이 오셨군. 참으로 다행 아니오? 이분들 덕에 한 명은 더 살릴 수 있을 테니까."

여관 주인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레이와 브루노 역시 멀끔한 놈의 말에 눈을 찌푸렸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모욕에, 이용당했다는 사실은 알 수 있었으니까. 놈들이 일제히 우르르 빠져나가자 안쪽에서 고성이 튀어나왔다.

"개자식들!"

"도련님, 결단을 내려 주십시오!"

"명령만 내려 주시면 놈들을 당장!"

"그만!"

여관 주인은 중년 남자들의 아우성을 고성으로 억눌렀다. 단숨에 조용해진 가게 안에서 여관 주인은 루크 일행을 쳐다봤다.

"손님이다. 나중에 얘기해라."

씨근덕거리면서도 남자들이 물러갔다. 루크는 가까이 가서 여관 주인을 쳐다봤다.

가죽옷 위로도 알 수 있는 근육질에 덥수룩한 수염. 나이에 비해 열 살은 더 겉늙어 보이는 외모.

'비요른.'

루크가 점지한 북부의 왕이자 옛 동료가 눈앞에 있었다.

68화

"가게 문 열었으니 들어오시오."

"그럼 사양 않고."

루크는 성큼성큼 걸어가 탁자 한 곳에 자리 잡았다. 중년 남자들은 뭔가 더 말하고 싶은 얼굴이었지만, 잠시 우물거리다 뒤로 물러섰다.

두툼한 근육이 올라온 팔로 비요른이 팔짱을 꼈다.

"숙박하고 식사 중 어느 쪽이오?"

"그대도 귀족인가?"

당연한 듯한 하오체에 레이가 물었다. 감히, 라고 하기엔 아까 전 헨릭의 선례가 있었다.

비요른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비요른 벨다인이오."

"벨다인?"

"무슨 문제 있소?"

"아까 전 당신과 싸우던 사람도 벨다인 가문을 들먹인 것 같은데."

브루노의 물음에 비요른은 씁쓸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사정이 좀 있소. 친가랑 사이가 뒤틀려서."

"음."

레이는 더 묻지 않았다. 복잡한 사정은 먼저 말하지 않는 한 묻는 게 실례였다. 브루노가 물이 담긴 잔을 턱 내려놓았다.

"하여간 식사와 숙박 중 어느쪽이오?"

"가격부터 말해 주지."

"숙박은 은화 세 닢, 식사는 은화 한 닢."

"뭐?"

브루노와 레이가 아연한 표정으로 비요른을 바라봤다. 물가가 비싼 북부라지만 이건 상상을 초월하는 가격이었다.

비요른도 자각은 하고 있는지, 두 사람의 시선을 애써 피했다.

"크흠, 어쩌실 거요? 식사? 숙박?"

"둘 다."

"주군!"

"선불로 내지."

두 사람의 만류를 무시한 채 루크가 은화를 튕겼다. 허공에서 은화를 낚아챈 비요른은 멍하니 루크를 바라봤다.

설마 진짜 지불할 줄은 생각지도 못한 모양이었다. 루크는 그런 비요른에게 추가타를 넣었다.

"따뜻한 목욕물까지 더하면 얼마나 들지?"

"…은화 다섯 닢?"

"이 양반이 진짜!"

탕, 소리가 나도록 브루노가 책상을 박차고 일어섰다. 하지만 비요른 자기가 말해 놓고도 얼떨떨한 듯했다.

돈이 많아 보이니 앞뒤 생각 안 하고 일단 질러 본 게 뻔했다. 루크는 다시 동전을 튕겼다.

"금화 반 닢이야."

"어, 어어."

말갛게 빛나는 금화에 비요른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두 가신 역시 루크의 씀씀이에 반쯤 말을 잃은 상태였다.

중년 남자들도 다들 뜨악한 얼굴로 이쪽을 주목하고 있었다. 저거 대체 뭐 하는 놈이야?

"식사 전에 한 가지 물어봐도 되나?"

"뭐, 뭘?"

"이 영지에 무슨 일이 있었지?"

함축이 담긴 질문에 비요른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어지간해서는 말하고 싶지 않은 치부.

하지만 이만큼 돈을 내준 사람에게 입을 다무는 것도 찔리는 일이었다.

"뭐가 궁금하시오?"

"전부다."

명예 기사도 아니고 태생부터 귀족인 작자가 왜 여기서 여관 주인 행세를 하고 있는지.

어째서 방금 전에 벨다인 가문을 언급하며 싸운 건지. 그리고 헨릭이란 양반은 왜 이상한 소릴 했는지.

"헨릭을 만났소?"

"어쩌다 보니 인연이 생겼지"

"그 친구, 쓸데없는 소릴 했군."

한숨을 쉰 비요른이 의자 하나를 끌어다 앉았다.

"뭐부터 알고 싶소?"

"처음부터 말해 주면 좋겠군. 가능하면 당신이 왜 여기서 여관 주인으로 있는 지부터."

이미 알고 있기는 하다. 회귀 전에 비요른이 사정을 전부 설명해 주었으니까. 그래도 듣고 싶었다.

지금 이 시기의 비요른이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를. 비요른은 씁쓸한 얼굴로 사정을 설명했다.

* * *

벨다인 자작가는 작위치고는 꽤 역사가 깊은 가문이었다. 그 옛날 제국으로 편입되기 전, 부족 체제 시절부터 존재했으니까.

그만큼 주변 지역 사람들에게서도 많은 존경을 받았다. 하지만 비요른이 성년식을 맞이한 때부터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재수가 없었지. 불행이 그때 한꺼번에 몰려온 것 같았으니까."

비요른의 아버지는 늙어서 얻은 병으로 골골거렸고, 숙부는 비요른 대신 가주의 위를 원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접한 야만 부족에서 굉장히 음흉한 놈이 나타났다. 놈은 은근슬쩍 숙부에게 연합을 제의했고, 숙부는 받아들였다.

"야만족과 손을 잡아? 그게 가능한 거요?"

"못 잡을 것도 없지. 야만족이라고 해 봤자 몬스터도 아니고 인간인데."

"아니, 그래도 야만족은 기본적으로 생각을 안 하잖소?"

북부 야만족에 대한 인상은 대부분 비슷했다. 문명권으로 쳐들어와 약탈을 벌이고 도로 튀는 걸 반복하는 야만인들.

그런데 손을 잡고 계략을 꾸몄다? 브루노의 생각을 이해한 비요른이 쯧 소리가 나도록 혀를 찼다.

"뭔가 착각하는 것 같은데, 따지고 보면 북부인 대부분이 야만족과 같은 핏줄이오. 크게 다를 것도 없소."

"어? 그런 거요?"

"차이점은 우리와 달리 초대 황제 폐하가 제국을 건설할 때 합류하지 않았다는 점이겠지."

야만족 역시 계략을 쓰려면 얼마든지 쓸 수 있다. 무력을 지나치게 숭앙하는 습속이 그걸 막고 있는 것뿐.

그런데 이번에 새로 부족장이 된 놈은 굉장히 교활한 작자였다. 야만인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이나.

"놈이 숙부에게 약속한 건 간단했소. 내부 사정을 낱낱이 알려 주기만 하면, 숙부에게 충성하는 세력은 건들지 않겠다고 했지."

안 그래도 가주의 위를 노리고 있던 숙부에겐 꿈 같은 소리였다. 반란하기 딱 좋은 상태로 만들어 준다는 말이었으니까.

"숙부는 놈과 거래했소. 그리고 놈은 우리 영지에 쳐들어왔고."

"당신 아버지와 당신은 박살이 났겠군."

"말할 필요도 없지. 내부 정보가 줄줄 새어 나가고 있는데."

비요른은 그때가 떠오르는지 뿌득 소리가 나도록 이를 갈았다.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었소. 아버지께선 돌아가셨고, 나 역시 충성스러운 병사 대부분을 잃었지."

나머진 일사천리였다. 숙부는 비요른에게 가주 자리를 넘기라 종용했다. 사실상 협박이나 마찬가지였다.

뒤늦게 사정을 안 비요른은 분노했지만,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거부하면 내전이 일어날 게 뻔했다.

같은 고향 사람들끼리 창칼을 겨누고 피를 흘리는 것만큼 끔찍한 일이 어디 있겠나.

결국, 비요른은 가주 자리를 숙부에게 넘겼다.

"숙부는 날 이곳으로 보냈소. 한참 전에 폐허가 된 팔룬에. 야만인들을 감시하라는 게 명목이지만 그럴 리가."

실제로는 유배나 다름없었다. 비요른을 따르던 병사들도 마찬가지. 폐허가 되었던 팔룬이 유배지로 되살아난 셈이다.

거기에서 끝이 아니었다. 숙부는 팔룬과 가장 가까운 그레베 남작가와 밀통하여 충실한 감시인까지 만들었다.

"팔룬은 그레베 남작가를 통하지 않으면 식량 수입을 할 수 없는 구조요. 숙부의 사주를 받은 놈들이 기세등등할 수밖에 없소."

"그 경비병과 멀끔한 놈이 그쪽 출신인가 보군."

"맞소. 남작가가, 아니 숙부가 보낸 놈들이지"

미간을 일그러뜨린 비요른이 방금 따라 놓은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탁, 하고 컵을 내려놓는 동작에 분노가 느껴졌다.

"더 열불이 터지는 건 숙부가 아직도 야만족 놈들과 내통하고 있다는 거요. 우리의 불만이 지나치게 쌓이는 것 같으면 놈들을 시켜 공격하더군."

미리 야만족을 선제공격해서 쓸어버리는 것도 불가능했다. 그럴라 치면 '반란이냐?'라는 물음이 바로 날아왔다.

덕분에 야만족이란 위험 요소를 코앞에 두고도 비요른은 가만히 있어야 했다.

-안타깝게도 팔룬에는 당신이 물리칠 야만인이 없소.

헨릭의 말이 다시금 귀에 들려왔다. 야만인은 있지만, 먼저 공격하면 오히려 비요른 쪽에 문제가 생긴다.

루크가 무상으로 처리해 준다고 해도 뜯어말려야 할 판이었다.

"그러고도 가만히 있었나?"

"그럼 나더러 어쩌라는 거요?"

비요른이 루크를 노려보며 토해 내듯 소리쳤다.

"그때 싸웠다면 내전이었겠지, 지금 싸우면 다 죽을 테고! 어느 쪽이건 최악의 선택지였소. 차라리 이렇게라도 피가 덜 흐르는 게 낫지."

어쩔 수 없이 비요른은 상황에 순응하기로 했다. 숙부의 경계를 풀기 위해 무기를 내려놓았고, 할 일이 없다 보니 여관 주인 행세를 했다.

찾아오는 손님은 극히 적었으나 지루함을 달랠 정도는 되었다. 다만 그 와중에 그레베 남작가의 갑질로 인한 신경전은 계속해서 벌어졌다.

"그래도 이젠 피는 안 흘리게 되었지. 그게 어디요."

자신에게 타이르는 듯한 한마디와 함께 비요른의 말이 끝났다. 브루노와 레이는 가만히 있었다.

나름 구구절절한 사연이었다. 루크는 가만히 있다가 금화 두 닢을 더 내밀었다.

비요른은 난데없는 금화에 눈을 껌뻑였다.

"이게 뭐요?"

"이야기값."

비요른의 눈이 흔들렸다. 어찌 보면 동정으로 주는 돈이었다. 가슴에 남은 자존심이 꿈틀거렸다.

하지만 곧 벼랑 끝의 현실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이 돈이면 조금이라도 더 식량을 구입할 수 있었다.

애써 자존심을 굽힌 비요른이 동전을 챙겨 넣었다.

"고맙소."

"고맙긴 뭘."

루크는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거지한테 적선 좀 주는 게 뭐 그리 대수라고."

그 말에 여관 전체가 얼어붙었다.

* * *

얼어붙은 여관에서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건 브루노도, 레이도, 비요른도 아니었다.

저 멀리서 이야기를 잠자코 듣고 있던 중년 남자들. 과거 비요른의 부하들이 고성을 내질렀다.

"저 빌어먹을 새끼!"

"죽여 버려!"

"어디서 도련님을!"

귀족인 걸 알면서도 쌍욕이 줄줄 쏟아졌다. 여차하면 당장 달려들어 토막 낼 기세.

"그만."

"도련님!"

그들을 막은 건 비요른이었다.

"괜한 짓 말고 물러서 있어라."

"하지만 이놈이!"

"죽여도 내가 죽인다."

살벌한 비요른의 눈초리에 움찔한 부하가 뒤로 물러섰다. 비요른은 살기가 깃든 눈으로 루크를 쳐다봤다.

"지금 나보고 거지라고 한 건가?"

"그래."

루크는 부정하지 않고 선선히 수긍했다. 옛 친구의 얼굴이 떠오르고, 그 말이 루크의 입을 통해 흘러나왔다.

"너는 거지다."

-난 거지였소, 대장.

우지직 소리와 함께 탁자 일부가 뜯어졌다. 브루노나 레이처럼 고대의 혈통이 아님에도 굉장한 악력이었다.

"설명해 봐라. 어째서 내가 거지라는 거냐."

죽이기 전에 모욕의 이유라도 듣자는 말투였다. 루크는 웃음기를 싹 지운 채 비요른을 쳐다봤다.

"그럼 뭐라고 해야 하나? 저항할 힘이 있음에도 굴복하고, 한 끼 식사를 위해 비굴하게 굴며, 남이 때리지 않는 걸 감사히 여기는 놈을 보고."

"피를 흘리는 길을 피했을 뿐이다!"

분노하는 브루노 옆에 친구의 얼굴이 겹쳐졌다. 비요른이 입을 열 때마다 옛 친구도 입을 열어 말했다.

"그렇다면 내가 어찌했어야 했단 말이냐? 그 자리에서 서로 내전을 벌여 가족과 친구끼리 죽고 죽이는 길을 택했어야 했나!?"

-거지로 사는 길을 선택했음에도 은근히 스스로가 자랑스러웠소. 나 하나가 희생해서 모두가 피 흘리는 길을 피했다면서. 난 거지새끼면서 멍청하기까지 했던 거요.

루크는 고개를 저었다. 친구의 말이 맞았다. 녀석은 정말 멍청이였다. 자신이 멍청이란 걸 깨달았을 때는 너무 늦었겠지.

그러니 이번 생에서는 루크가 좀 더 일찍 깨우쳐 줄 생각이었다. 루크는 비요른을 쳐다보며 고개를 까딱였다.

"내 말이 꼬우면 덤벼 보든가. 싸움을 피한 네게 그럴 배짱이 있는지는 모르겠다만."

명백한 도발에 비요른의 눈이 꿈틀거렸다.

69화

가게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은 동시에 같은 생각을 떠올렸다.

'제정신인가?'

비요른의 시선이 루크를 훑어봤다. 몸은 근육이 적당하게 자리 잡았고, 손에는 검사 특유의 굳은살이 있었다.

적어도 탱자탱자 놀고먹는 놈은 아니란 소리.

'하지만 딱 그 정도다.'

저 정도의 노력은 향상심이 있는 기사라면 누구나 한다. 루크는 그들보다 딱히 특출나 보이는 게 없었다.

저 상처 하나 없이 깨끗한 피부를 보면 실전을 겪었을지도 의문이었다.

"대리인이라도 내보낼 셈이냐?"

귀족들 사이에서 대리인을 내세우는 결투는 드물지 않다. 모든 귀족이 검술에 조예가 있는 건 아니니까.

진짜 목숨과 명예가 걸린 결투에는 으레 대리인을 내세우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루크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내가 직접 나선다."

"...."

"왜? 무서워?"

"미친놈."

비요른이 저도 모르게 욕설을 내뱉었다. 아무리 수련 좀 했다지만 저 조막만 한 몸으로 자기랑 겨루자니.

처음엔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갈수록 머리에 열이 올랐다. 자신이 그리도 우습게 보였단 말인가?

"후회하지 마라."

"무기나 가지고 와."

그 말을 끝으로 루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따라오라는 듯 앞장서서 여관을 나가자 비요른이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도대체 뭘 믿고 저러는 걸까. 제 영지에서 한가락 하던 검술의 수재였나?

'어느 쪽이든 상관없겠지.'

저 자신감의 원천이 무엇이든 놈이 자신을 모욕했다는 건 바뀌지 않았다. 그렇다면 할 일도 하나뿐이었다.

"알렉."

"예, 도련님."

"내 도끼를 가져와라."

* * *

두 사람은 여관 밖에서 거리를 벌리고 마주 보았다. 한쪽은 이제 막 성년을 넘긴 애송이.

다른 한쪽은 아우라부터 외견까지 역전의 용사였다. 도박판을 벌인다면 백 중 백이 비요른에게 걸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마. 모욕을 철회하고 사과해라."

비요른 나름의 자비였다. 결투란 신성한 것. 쉽게 벌이면 안 되며, 시작되면 결코 대충 끝내서는 안 된다.

그러니 험한 꼴 보기 전에 기회를 주겠다. 인정 넘치는 배려에 루크가 귀를 후벼 팠다.

"엉덩이 그만 빼고 도끼나 잡아. 보기 흉하다."

"...."

비요른의 이마에 핏대가 튀어나왔다. 이 새끼가.

'어디 한 군데 부러뜨려 놔야 정신을 차리겠군.'

비요른은 한 쌍의 도끼를 각각의 손에 고쳐 잡았다. 오랜만에 느껴지는 묵직한 감각.

반년 가까이 잡지 않은 무기이건만, 어제 휘두른 것처럼 몸에 친숙했다.

"준비됐나?"

"언제든지."

여신께 부끄러움이 없는 결투가 되기를, 같은 미사여구는 넣지 않았다. 그딴 형식은 북부에서 거추장스러울 뿐이었다.

비요른이 바닥을 박차서 뛰쳐나갔다. 쿵, 하고 바닥에 족적이 깊게 파였다.

"흡!"

기합성과 함께 도끼가 휘둘러졌다. 깔끔한 참격이 루크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막기 위해서 검을 드는 루크를 보며 비요른이 웃었다.

'어디 막아 봐라, 애송아.'

저 체중으로 막았다간 십중팔구 자세가 무너질 터. 그때 몰아쳐서 정신을 못 차리게 해 주지.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뻐억.

"꺽!?"

무언가에 얻어맞은 비요른의 눈이 번쩍였다. 비요른은 냉큼 정신을 차리며 다시 루크를 바라봤다.

'칼자루로 후려쳤나!'

자세를 보니 바로 알 수 있었다. 그 짧은 사이에 안쪽으로 파고들어 안면을 가격한 모양새였다.

"끝났냐?"

"아직이다!"

루크의 도발에 비요른이 울컥하며 다시 도끼를 잡았다. 터질 듯 붉어진 얼굴과 달리 속은 서늘하게 식은 상태였다.

'전투를 아는 놈이다.'

자칫하면 도끼로 머리부터 쪼개질 상황이었다. 그런데 물러나긴커녕 앞으로 나아가다니.

목숨을 건 전투를 여러 번 거친 자가 아니라면 불가능한 판단. 단 한 방으로 방심이 싹 사라졌다.

'그렇다면 봐줄 필요 없겠지!'

두 눈을 번뜩인 비요른이 두 다리를 움직여 근접했다. 아까 전과 달리 신중하면서도 상대를 간격에 넣기 위한 움직임.

도끼의 사정거리에 루크가 들어오기 무섭게, 비요른의 양손이 움직였다.

후우웅.

도끼가 바람을 가르며 루크의 좌우로 쇄도했다. 얼핏 보면 양쪽에서 쪼개려는 듯한 참격.

그러나 그건 착시에 불과하다. 실제로는 간격 차이를 둬서 파고드는 걸 방지하는 기술.

'들어오면 바로 끝장나겠지. 막으면 비틀거리는 사이에 연격을 날려 주마.'

버티다 못해 무너지면 그때 눈물이 쏙 빠지도록 두들겨 주마! 그렇게 생각했을 때, 루크의 검이 움직였다.

떠엉.

"큭!?"

검은 정확히 힘이 균형을 이루고 있는 위치를 쳐 냈다. 비요른의 자세가 무너지고, 칼자루가 또다시 날아왔다.

뻐억.

"...!"

"도, 도련님!"

급소인 명치에 폼멜이 꽂히자 숨이 턱 막혔다.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서는 모습에 뒤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쿨럭, 쿨럭! 커흑!"

몇 초가 지나고 나서야 간신히 숨통이 트였다. 어떻게든 다시 자세를 잡으려고 했으나, 그보다 빠르게 루크가 치고 들어왔다.

뻐버벅.

"...!"

뼛속까지 시린 타격이 사방에서 날아왔다. 어떻게든 비요른이 저항하려고 했지만, 그때마다 절묘한 공격으로 저지되었다.

팔을 휘두르는 순간 팔에, 발을 내미는 순간 무릎에. 속절없이 맞던 비요른은 타격이 그치기 무섭게 뒤로 쓰러졌다.

털썩.

"도련님!"

"이놈!"

"그만두지 못해!"

쓰러진 채 내지른 비요른의 고함에 부하들이 멈칫했다. 비요른은 비틀거리며 간신히 일어섰다.

"아직 안 끝났다!"

"지랄."

루크는 검으로 땅바닥을 툭툭 쳤다. 어느새 검은 검집에 들어간 상태였다.

"검으로 휘둘렀으면 넌 진즉 죽었어."

"...."

맞는 말에 비요른의 입이 다물렸다. 정당한 결투인 이상 루크가 죽여도 비요른은 할 말이 없었다.

결과에는 승복해야 하는 법. 하지만 비요른의 가슴에서는 아직도 울분이 치솟았다.

-거지한테 적선 좀 하는 게 뭐 그리 대수라고

뿌득.

다시 생각하자마자 이가 갈렸다. 결투에 승복한다는 건 놈의 말을 인정하라는 뜻.

'죽으면 죽었지 그렇게는 못 하겠다.'

코에서 뜨근한 액체를 줄줄 흘리면서 비요른이 다시 일어섰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루크가 검을 다시 허리춤에 찼다.

"…무슨 짓이냐!"

"더 할 생각이면 내일 이어서 하지."

"뭐?"

"결투 연장이다. 못 들어 봤나?"

들어는 봤다. 해가 지도록 승패가 가려지지 않을 경우, 잠깐 결투를 멈추고 다음 날 이어서 하는 행위.

하지만 그건 고대의 영웅들이나 하던 것 아닌가. 지금처럼 하루 종일 싸우면 탈진해 죽는 인간들이 할 짓은 아니었다.

하물며 아직도 해가 중천에 뜬 상황이라면 더더욱.

"헛소리!"

비요른이 루크를 노려보며 외쳤다. 루크의 의도가 동정인지 비웃음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어느 쪽이든 굴욕이었다.

"닥치고 검이나 뽑아라! 아직 끝나지 않았다!"

"더 맞고 싶다고?"

"어디서 그딴 소릴… 크윽!"

막 일어서려던 비요른이 다시 주저앉았다. 맞은 곳 중에서 안 쑤시는 곳이 없었다.

이대로 싸워 봤자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고 일방적으로 당할 게 뻔했다. 그런 비요른을 향해 루크가 쏘아보며 말했다.

"내일 이어서 할래? 아니면 더 맞을래?"

"...."

차라리 죽일 생각이었다면 계속하자고 했을 거다. 그런데 어째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계속 두들겨 팰 속셈인 것 같았다.

비요른이 이를 갈았다. 저놈의 연장 신청도 굴욕이었지만, 부하들 앞에서 계속 두들겨 맞는 꼴을 보이는 것보단 나았다.

"…내일 이어서 하겠다."

"좋아."

비요른의 대답에 루크가 만족스레 웃었다.

"그럼 이제 식사랑 목욕물 좀 데워 주고. 돈 받았으면 일해야지?"

"...."

* * *

다음 날, 잘 먹고 잘 잔 루크에게 비요른이 씩씩거리며 다가왔다. 부상이 완치된 건 아니지만 움직이는 데는 지장이 없어진 모양이었다.

"어제에 이은 결투다!"

"오냐."

루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검을 들었다.

뻐억, 퍽, 퍼벅.

"컥! 크헉!"

그리고 일방적으로 두들겨 팼다. 실컷 패고 땅을 뒹구는 비요른에게 똑같은 선택지가 날아들었다.

"연장이냐? 끝장이냐?"

"끝장을 고르면 죽여 주는 거냐?"

"아니, 기절할 때까지 맞는다."

비요른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어쩔 수 없이 또다시 전자를 골랐다. 그리고 마찬가지였다.

"이번에야말로...."

뻐억.

"켁!"

쓰러진 비요른에겐 다시 똑같은 문답이 날아들고, 다음날 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그렇게 일주일 동안 똑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갈수록 비요른의 몸에는 멍이 늘어가고 얼굴은 퉁퉁 부었다.

"결푸!"

"쯧."

발음도 제대로 안 나는 입술을 보고 루크가 혀를 찼다. 덜 나은 몸으로 계속 상처를 늘려서 또 도전한다.

이길 수 있을 리가 있나. 본인도 진다는 걸 알고 있을 거다. 그런데도 무식하게 도전한다.

'인정할 수 없다.'

그 우직함이 온몸으로 전해져 왔다. 다시금 옛 친구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난 병신이었소.

'안다.'

-그러니 전부 대장에게 맡기겠소.

'망할 놈.'

입맛이 씁쓸했다. 저 고집은 비요른의 긍지였다. 그리고 그 긍지가 헛된 것이라 깨달았을 때, 그대로 꺾여 버렸다.

-다 대장이 결정하시오. 나는 그저 따를 테니.

황당한 놈이었다. 전투 도중 의견을 물어보면 신들린 듯한 판단을 제시하면서도, 자긴 결코 지휘봉을 잡지 않았다.

오히려 아무리 바보 같은 명령이라도 자기 뜻을 꺾고 그대로 따랐다. 스스로 결정하는 걸 포기한 삶이었다.

-나 같은 놈이 결정하면 안 되오.

그렇게 스스로가 밉더냐. 잘못된 판단에 자긍심을 가졌던 자신이 그리도 혐오스럽더냐.

일신에 갖춘 군주의 재능조차 다 바닥에 파묻고 썩어 버리라 저주할 만큼.

"결푸 하자거!"

그런 친우의 얼굴을 한 놈이 소리쳤다. 그렇게 맞고도 자긍심이 살아 있었다. 피식 웃은 루크가 입을 열었다.

"하루 더 미루지."

"머라거?"

"오늘 몸이 조금 안 좋아서."

"…그러타면 어쩔 스 업지!"

혀를 찬 놈이 뒤돌아섰다. 하루 쉬어서 잘 됐다는 게 아니라, 그만큼 결투를 미루게 된 게 아쉬운 모양새였다.

'과거의 자신이 마음에 안 들었다면, 내가 고쳐 주마.'

녀석의 의사는 상관없다. 듣지 않는다면 두들겨 패고 또 패서라도 그렇게 만들어 줄 생각이었다.

* * *

결투를 하루 쉰 그날 밤. 루크 일행에게는 생각지 못한 손님이 찾아왔다.

"안녕하시오. 마리우스 그레베올시다."

루크는 눈앞의 멀끔한 남자를 쳐다봤다. 분명 그레베 남작가에서 나온 놈이라고 했던가.

입고 있는 꼴을 보니 문관 귀족 같은데, 생긴 게 참 재수 없었다. 자연스레 말이 거칠게 나갔다.

"루크 번스타인이다."

"크흠, 말이 조금 짧으시군."

눈치를 주는 마리우스를 보며 루크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꼬우면 댁도 반말 쓰든가."

"…교양을 아는 귀족이 그럴 수야 있나."

마리우스가 루크의 눈초리를 피하며 중얼거렸다. 슬쩍 자신을 높이고 루크를 낮추는 솜씨가 일품이었다.

새끼, 딱 봐도 저따위로 말하는 게 입에 붙었구만.

"아무튼 무슨 볼일이지?"

"간단한 일이오. 요즘 비요른과 결투를 벌인다고 하던데."

"그걸 모르는 사람도 있나?"

맨날 그렇게 두들겨 패는 데도 모르면 바보다. 이미 팔룬에서는 결투 시간인 아침마다 구경꾼이 몰려들었다.

루크를 응원하는 소리가 하나도 없는 것과, 이길 때마다 사방에서 죽일 듯이 노려보는 게 단점이었지만.

"거, 말투하고는...."

"본론만 꺼내. 괜히 말 길게 늘이지 말고."

"그걸 원하신다면야."

한숨을 쉰 마리우스는 바짝 얼굴을 들이대며 속삭였다.

"내일 결투에서 비요른, 그 작자를 죽여 줄 수 있겠소?"

70화

루크가 미간을 좁히며 마리우스를 쳐다봤다.

"갑자기 뭔 소리야?"

"흠, 설명이 부족했군."

마리우스는 다 이해한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털썩 의자에 앉았다.

"저 작자에게서 얼마나 들었소?"

"후계자 경쟁에서 숙부에게 자리를 뺏기고 여기까지 유배 왔다는 것까지."

"뺏기기는 무슨, 그건 정당한 계승이었소. 당시 상황을 보면...."

"본론만."

한창 장광설을 늘어놓으려는 마리우스를 또다시 루크가 틀어막았다. 마리우스는 루크를 흘겨보고는 본론을 꺼냈다.

"자작께서는 놈이 없어지기를 바라시오."

"그 자작이라는 사람이 비요른의 숙부를 말하는 건가?"

"왜 아니겠소?"

"지금까지 가만히 내버려 두다가 왜 이제야?"

"정확히는 내버려 둘 수밖에 없으셨던 거지."

비록 찬탈에는 성공했다지만, 여전히 비요른의 지지자는 남아 있다. 아오히려 순수한 지지자 숫자는 자작보다 많을 것이다.

자작이 가주 자리를 차지한 건 어디까지나 가진 힘이 우세했기 때문. 그리고 비요른이 순순히 자리를 양보한 덕이다.

"달리 말하자면 놈이 마음을 바꾸는 순간 내전이 일어난다는 거지. 실로 무서운 일 아니오."

"그렇군."

"그렇군? 감상이 그것밖에 없소? 내전이라니까."

많은 사람이 죽는다는데 왜 그런 태도냐는 힐난. 같잖은 수작에 루크가 피식 웃었다.

"그렇게 내전을 걱정하는 사람이 도발은 잘도 하던데. 내전을 막기 위해서라면 조금 더 비위를 맞춰 주는 게 좋지 않나?"

"크흐흠! "

마리우스가 헛기침을 하며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일부러 도발해서 반항할 징조가 보이면 꼬투리를 잡을 생각이었다, 고 할 수는 없으니까.

"아무튼, 나는 내전을 막기 위해 당신의 협력을 받고 싶소."

"그러니까 결투를 빙자해 비요른을 죽여 달라?"

"결투를 빙자하는 게 아니라 정당한 결투로 죽여 달라는 거요! 정당한 결투!"

몇 번이고 마리우스는 '정당한'을 강조했다. 눈 가리고 아웅에 불과하나 이런 단어 하나에 명예가 뒤집히는 법.

루크는 잠시 고민하는 척하다 입을 열었다.

"거절한다면?"

"그러지 않는 편이 좋을 거요."

"협박인가? 감히 번스타인을?"

"아무리 무시무시한 용이라도 둥지를 떠나지 못한다면 무용지물이지."

마리우스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여긴 북부 끝자락이오. 동부에서 여기까지 오려면 통과해야 하는 영지가 얼마나 되는 줄 아시오? 그중에는 헤르모드 후작 각하의 영지도 있소."

당연하지만 자기 영지에 군대가 통과하는 걸 좋아하는 영주는 없다. 그 과정에 어떤 피해가 생길지 모르니까.

약한 영주라면 그러고도 찍소리 못 하겠지만, 후작쯤 되면 상황이 다르다.

"그리고 딱히 해를 끼칠 것도 아니요. 그저 안 좋은 소문이나 조금 퍼트려 줄 요량이니까."

"안 좋은 소문?"

"예를 들면 수행 기사가 약탈을 벌이고 다닌다든지, 야만인이랑 붙어먹었다든지. 만들어 내려면 얼마든지 만들어 낼 수 있지."

즉, 거절하면 수행 기사의 이름을 더럽히겠다는 소리다. 치졸하지만 효과적인 앙갚음이다.

수행 기사 자체가 명예를 얻기 위한 여행이니까. 한번 이름이 더럽혀지면 지금까지의 고생이 허사가 된다.

"자, 어쩌시겠소? 위대한 붉은 용께서는 당연히 정의를 위해 싸워 주시겠지?"

"하."

넉살 좋은 목소리에 루크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저 다 이긴 듯한 표정이 진심으로 가소로웠다.

'병신 같은 놈.'

루크는 이런 유형을 여러 번 봤다. 촌구석에서만 행세하다가, 우연히 진짜 권력의 부스러기를 맛본 놈들.

이런 놈들은 권력자 곁에서 상황 돌아가는 꼴을 보고는 자기도 정치를 터득했다며 으스대곤 한다.

'웃기지도 않는 소리지.'

이런 멍청이들의 대처법은 간단했다. 꿈에서 깨워 주는 것.

"마리우스 그레베라고 했나?"

"그렇소."

"결투를 신청한다."

마리우스의 얼굴이 멍해졌다. 지금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싶은 표정이었다.

"뭐라고 했소?"

"결투를 신청한다."

"내, 내가 아니오!"

"당신 맞아. 비요른 말고 댁한테 신청하는 거야."

"아니, 왜...!"

"같잖은 태도로 날 모욕했으니까."

살기 어린 눈에 마리우스가 몸을 떨었다. 결투하는 순간 살려 줄 생각이 없다는 건 바보라도 알 수 있었다.

"거부하겠소! 결투는 없소이다!"

"그럼 내가 일방적으로 죽일 뿐이지."

스르릉

검신이 뽑혀 나오자 마리우스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사라졌다. 자리에서 일어난 마리우스가 뒷걸음질 쳤다.

"이, 이보시오."

"저항이라도 하고 죽으려면 검 뽑아."

"내가, 내가 잘못했소. 그러니...!"

"검 날아든다. 휘이익!"

"으아아악!"

슬쩍 루크가 검을 내밀자 우당탕 소리와 함께 마리우스의 몸이 넘어갔다. 놈은 허둥지둥 문을 열고 도망치며 소리쳤다.

"거, 거기 누구 없느냐!"

"무슨 일이십니까!?"

"암살자다! 나를 보호해라! 어서!"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병사들이 냉큼 여관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병사들은 물론 비요른의 부하들까지 기겁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그 의문에 답하듯 루크가 2층에서 내려왔다.

"결투하자니까 왜 도망가고 있어? 이리 와라."

"저런 미친놈이!"

마리우스가 병사들 뒤로 빠지며 손가락으로 루크를 가리켰다.

"놈을 죽여라!"

"예? 하지만 저 기사는...."

"닥치고 죽여!"

번스타인 가문이고 나발이고 이젠 상관없다. 일단 자신이 살고 봐야 할 것 아닌가.

창을 들고 몰려오는 병사들을 보며 루크가 입을 열었다.

"레이, 브루노."

"예, 주군."

"해치워."

* * *

"끄르륵...!"

피거품 끓는 소리와 함께 마지막 병사가 쓰러졌다.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은 마리우스는 창백한 얼굴로 뒷걸음질 쳤다.

모든 경호원이 전멸할 때까지는 차 두 모금 마실 시간조차 되지 않았다.

"이봐."

"히이익!"

루크가 말을 걸자마자 마리우스는 비명을 지르며 물러섰다. 하지만 곧 여관 벽에 등이 닿았다.

더 물러설 곳이 없는 상태. 루크는 검을 뽑은 채 천천히 다가갔다.

"죽기 전에 할 말은?"

"사, 살려, 살려 주...!"

"추하다."

루크의 검이 휘둘러지기 직전이었다. 턱, 하고 비요른이 루크의 손을 잡았다.

"그만두시오."

"...."

슬쩍 루크의 시선이 비요른을 향했다. 비요른은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루크를 노려보고 있었다.

"왜 그리 죽상이지?"

"제기랄, 몰라서 물어보시오? 당신 덕분에 나만 골치 아프게 됐소."

비요른이 머리를 벅벅 긁으며 피바다가 된 여관 바닥을 바라봤다.

"난 숙부가 내 목을 원한다는 것을 아오. 그래서 최대한 구실을 주지 않았는데."

이제는 당신 때문에 꼬투리가 잡히게 생겼다. 이제 어떻게 책임질 거냐는 뒷말이 생략되어 있었다.

루크는 비요른을 보며 혀를 찼다.

"이놈이 나한테 뭐라고 했는지 아나?"

"모욕이라도 했겠지! 평소부터 입만 잘 돌아가는 놈이었으니까!"

"그래, 결투에서 널 죽여 달라고 암살 사주를 하더군."

비요른의 눈이 세차게 흔들렸다. 루크를 잡고 있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루크의 검 끝이 다시 마리우스를 향하자, 놈이 반쯤 거품을 물고 소리쳤다.

"제발! 제발 살려 주시오!"

"싫다면?"

"비, 비요른 경! 막지 않고 뭣 하오! 내가 죽으면 어찌 될지 알고 있는 거요!"

씨알도 안 먹히자 마리우스는 비요른에게 호소했다. 잠시 입을 다물고 있던 비요른은 한숨을 내쉬었다.

"살려 주시오."

"난 네 부하가 아니다만."

"부탁하오."

털썩, 하는 소리와 함께 비요른이 무릎을 꿇었다. 죽도록 두들겨 맞으면서도 꺾지 않았던 자긍심이 지금은 너무나 쉽게 꺾였다.

"놈이 죽는다면 십중팔구 숙부는 여길 공격할 거요."

"...."

"그러니 제발 놈을 죽이지 마시오. 내가 대신 뭐든 하리다."

우습지도 않은 광경이었다. 자기 암살을 사주한 놈을 암살 대상이 살려 달라고 빌고 있다.

미간을 좁히는 루크를 향해 조금 기운을 되찾은 마리우스가 소리쳤다.

"들으셨소? 날 죽이면...!"

"입 닥쳐."

뻐억.

"꺼억!"

뭐라 하기 직전, 검집이 마리우스의 입을 후려갈겼다. 하얀 이빨이 우수수 쏟아지자, 마리우스가 신음을 내며 몸을 비틀었다.

입 안에서 올라오는 고통에, 다시 올라오려던 기세가 쑥 들어갔다.

"부탁이고 자시고 여기서 죽여 버릴까?"

"흐윽, 흑! 사, 사여 주!"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마리우스가 매달렸다. 잠시 비요른을 바라보던 루크가 입을 열었다.

"꺼져라."

"고, 고마오! 고마오오!"

괴상한 발음으로 고개를 숙이던 놈이 냉큼 여관 밖으로 빠져나갔다. 상황이 일단락되자 비요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맙소. 죽이지 않아 줘서."

"병신 같은 놈."

비요른이 흠칫했다. 루크의 눈에 경멸이 어려 있었다. 마리우스가 아니라 비요른을 향한 경멸이었다.

"고마워? 뭐가 고맙다는 거냐. 자기 죽이려던 놈을 살려 줘서 고맙다고?"

"…그렇소."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나?"

"어쩔 수 없지 않소."

고개를 푹 숙인 비요른이 입술을 깨물었다.

"나만 참으면 될 일이오. 다른 이들까지 죽게 할 수는 없소."

"그들이 널 희생시키더라도 살고 싶다고 했나?"

"뭐요?"

"명예는 귀족만의 것이 아니다."

그 말을 끝으로 루크가 홱 돌아섰다. 고집 센 멍청이였고, 아직 자신의 희생에 취해 있는 놈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 끝이었다. 루크가 마리우스를 건드렸으니 곧 신호가 오리라.

* * *

그날 이후 이틀 동안 루크 일행은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대결도 없었다. 비요른 역시 입을 다물었다.

그저 아무 대화 없이 음식만이 오갔다. 그리고 이틀째 되는 날 밤, 비요른이 루크에게 말했다.

"야만족이 오고 있소."

"그런 모양이군."

루크가 저 멀리서 반짝이는 횃불을 응시했다. 두꺼운 가죽옷으로 몸을 감싸고 갖가지 문신을 새긴 전사들이 약 백여 명.

대놓고 모습을 드러낸 걸 보니 정면에서 부딪칠 생각인 것 같았다.

'기대를 배신하지 않는구만.'

마리우스가 도망쳐서 곧바로 보고했다고 치면 딱 알맞게 도착할 시간이다. 아마 돌아가자마자 발광했겠지.

"도와주실 수 있겠소?"

"이 모든 원인이 우리 탓이라서?"

"아니, 그대들이 강하니까."

비요른은 루크 뒤에 있는 레이와 브루노를 응시했다. 루크 역시 보기 드문 실력자였다.

그건 몇 번이고 얻어터진 비요른이 가장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저 두 사람은 차원이 달라.'

인간 같지 않은 무력의 두 기사. 합류해 주기만 한다면 부하들의 희생을 크게 줄일 수 있겠지.

어쩌면 아무도 죽지 않을지도 모른다. 침을 삼킨 비요른이 무릎을 굽히며 입을 열었다.

"부탁이오. 원하는 게 있다면...."

퍼억.

"컥!?"

무릎 꿇으려던 비요른이 휘청거렸다. 루크가 허벅지를 걷어찬 탓이었다.

"무슨 짓이오!?"

"무릎 함부로 꿇지 마라."

"뭐...?"

"도와줄 테니까 준비나 해."

루크는 혀를 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뒤를 따라 레이와 브루노가 일어서자, 비요른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고맙소! 정말 고맙소!"

"시끄럽다."

마음에 안 든다는 듯한 얼굴로 루크가 여관 문을 연 순간이었다. 팔룬의 모든 사람들이 여관 앞에 모여 나오는 루크를 주시했다.

루크가 나오자 사방에서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왔다!"

"저 나리가 그 재수 없는 놈을 두들겨 팼다고?"

"도련님과 대결할 때부터 내 그럴 줄 알았지!"

웅성거리는 소리에 비요른의 몸이 굳었다. 팔룬에 머무는 사람들 입장에선 루크 일행은 이 모든 일의 원인이나 마찬가지.

모든 원망이 루크에게 향해도 이상할 것 없었다.

'큰일 났다!'

일이 커지기 전에 어떻게든 중재를 해야 했다. 서둘러 비요른이 마을 사람들 사이로 나서려던 순간.

-와아아아아!

마을 사람들이 루크를 향해 환호성을 터트렸다.

71화

비요른은 눈앞의 광경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멋지십니다요, 나리!"

"지금까지 욕해서 죄송했습니다!"

"덕분에 속이 뻥 뚫렸습니다!"

팔룬의 사람들은 일제히 루크를 찬양하고 있었다. 그중 욕설이나 원망을 내뱉는 이는 없었다.

비요른은 저도 모르게 튀어나오려던 말을 삼켰다.

'어째서?'

따지고 보면 이 모든 일의 시발점은 루크가 마리우스를 죽이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야만족이 쳐들어왔고, 그들의 가족이 목숨을 걸고 싸우게 되었다. 그런데 왜?

'왜 저리 기쁜 얼굴이란 말인가.'

어쩔 수 없다며 한탄했다면 이해하겠다. 또 누군가 죽을 거라며 불안해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이런 광경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때, 누군가가 비요른의 어깨를 툭 두드렸다.

"도련님, 뭐 하십니까?"

"헨릭?"

"싸울 준비 하셔야죠. 전투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비요른은 헨릭을 쳐다봤다. 평소에 항상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출정하던 헨릭이다.

그런데 지금 헨릭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기쁨이 가득했다.

"도련님 만세! 수행 기사 루크 경 만세!"

"저 야만족 놈들에게 본때를 보여 주십시오!"

비요른은 얼떨떨한 얼굴로 나아갔다. 전투가 코앞이건만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이상한가?"

루크의 물음에 비요른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렇소."

"다들 욕설이라도 내뱉을 줄 알았나 보군."

"당연하지 않소."

"왜?"

"이건 그들의 전쟁이 아니오."

그들은 영지민이었다. 힘 있는 자의 결단에 휩쓸려 전쟁에 동원되고 피를 흘리는 자들.

이들 중 전쟁에 책임이 있는 자가 누가 있겠는가. 모든 책임은 전쟁을 일으키는 자에게 있거늘.

"그러니 이해가 가지 않소. 휘말린 피해자에 불과한 이들이 왜 저리 전쟁에 열광하는지."

"누가 휘말린 피해자라더냐?"

루크가 조용히 일갈하며 비요른을 쳐다봤다.

"그들은 모두 당사자였다. 직접 싸우고, 모욕을 듣고, 화를 냈다. 그런데 남의 일에 휘말렸다고?"

"그건 전부 나 때문이잖소."

"그들에게 너는 남이 아니었겠지."

비요른의 눈이 흔들렸다. 뭔가 감을 잡을 듯한 간지러운 감각이 가슴께에서 느껴졌다.

"다들 참고 싶지 않았을 거다. 이따위로 목숨 줄을 쥐고 흔들었으니 반발하고 싶었겠지. 죽더라도 싸우다 죽는 게 나았을 테니까."

"그럴 리가. 한 번도 그런 소리를 한 적이 없는데."

"네가 막았잖아."

비요른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머리에 벼락이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루크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싸우자고 하는 건 네 희생을 무의미하게 만든다고 여겼겠지. 그러니 싸우고 싶어도 말 한마디 못 한 거다."

"...."

"그들은 목숨을 아까워한 적이 없다. 전부 네 착각이지."

비요른이 눈을 질끈 감았다. 이틀 전에 루크가 했던 말이 기억났다. 명예란 귀족만의 것이 아니다.

그때는 경황이 없어 반쯤 흘려들었던 말. 이제야 그 말뜻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싸우고 싶었다.

비요른과 함께 무시당하고 멸시받느니, 비요른의 도끼 곁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길 원했다.

그 모든 바람을 외면한 건 정작 비요른이었다.

'내가.'

"도끼 들어."

자책감에 빠지려던 비요른을 향해 루크가 일갈했다.

"전투가 코앞이다. 지휘관이란 놈이 징징거릴 상황이냐?"

"...."

"다들 널 쳐다보고 있다. 원하는 말을 해 줘."

비요른이 뒤를 돌아봤다. 병사를 그만두고 팔룬의 영지민이 된 지 어느덧 3년이 지났건만, 그들의 눈은 조금도 죽지 않았다.

전장을 달리던 그 시절과 똑같은 눈빛. 비요른은 숨을 크게 들이켜고 소리쳤다.

"북부의 아들들아!"

-....

"모조리 죽여라!"

-와아아아아아아!

너무도 단순하고 멋없는 연설. 그러나 그 한마디에 귀가 얼얼해질 정도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그들의 주인이 허락한 것이다. 더는 참지 말라고. 그렇다면 해야 할 일은 하나뿐이었다.

사방이 울리는 함성 속에서 비요른이 말했다.

"루크 경, 마을에 머물면서 혹시 모를 별동대를 막아 주시오."

"우리는 싸움에 참여하지 않아도 되나?"

"생각해 보니 필요 없을 것 같소."

처음엔 루크의 힘을 빌려 희생자를 줄이려 했다. 그렇지만 이젠 알겠다. 이들에겐 원한을 풀 적이 필요했다.

굳이 그 적을 누군가 줄인다면 오히려 만족하지 못하리라.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가 하나.

"팔룬을 우습게 보고 쳐들어온 놈들에겐 팔룬의 힘을 보여 줘야겠지."

비요른의 두 눈이 번뜩였다.

* * *

검은 발톱 부족의 부족장인 에릭슨은 심기가 불편했다. 가장 원치 않던 임무를 대족장에게 받은 탓이었다.

'하필이면 팔룬 공격이라니, 재수 더럽게 없군.'

팔룬은 에릭슨이 보기에 최악의 공격 대상이었다. 촌구석이라 집어먹을 것도 없는 주제에 주민들 대부분이 전쟁을 겪은 병사들.

공격해 봤자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더 많은 곳이다. 대족장과 자작의 계약만 아니었다면 얼씬거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제기랄, 왜 하필 이딴 임무를 맡아서는."

"그야 대족장께 밉보이셨기 때문이죠."

"뭐야!?"

옆에서 투덜거리는 부관을 향해 에릭슨이 눈을 부라렸다. 그러나 부관은 기죽은 기색 하나 없이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그러길래 대회의에서 왜 반대 의견을 내셨습니까? 덕분에 부족 전체가 눈 밖에 나지 않았습니까."

"그건 충언이었다! 모든 씨족의 미래를 생각해서 한 말이었단 말이다!"

"거짓말하지 마십쇼. 은근슬쩍 입지 높이려고 한 거 다 압니다."

에릭슨의 얼굴이 수치심에 붉어졌다. 부관의 말이 맞았다. 남들이 다 찬성하는 곳에서 혼자 반대한다면 그건 용맹이다.

자연스럽게 부족장들 사이에서 눈에 띌 테고, 대족장의 의견에 반대한 자로서 입지도 올라가리라 여겼다.

잘만 하면 충신이라 봐 주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도 사실이다.

'근데 오히려 앙심을 품고 이딴 임무에 보내다니.'

지금 생각해도 이가 갈렸다. 대족장이라면 너른 마음을 가지고 충언을 새겨야 하는 것 아닌가?

대놓고 주는 것 하나 없이 손해만 보는 사지로 가라니!

'빌어먹을, 골치 아프게 됐어.'

에릭슨은 힐끗 부관을 쳐다봤다. 아직도 표정이 부루퉁한 게 대놓고 불만을 표시하고 있다.

그만큼 부족 내에서 자신의 입지가 흔들리고 있다는 소리다. 괜히 대족장에게 반대했다가 부족 전체가 곤란해졌으니.

'이번 전투에서 어떻게든 만회해야 한다.'

족장으로서 활약을 보여 주지 못한다면 족장 자리를 위협받을 수도 있었다. 끔찍한 상상에 몸이 부르르 떨렸다.

하지만 북부는 전사의 땅. 전사로서의 힘을 보여 준다면 어떻게든 잃어버린 입지를 되찾는 게 가능했다.

그때, 앞서 보낸 전사가 급하게 돌아왔다.

"족장! 놈들이 이리로 오고 있습니다!"

"좋아, 모두 방진을 짜라!"

에릭슨이 크게 소리쳤다. 놈들이 마을에 다가오기 전 미리 요격을 시도하는 건 알고 있었다.

다른 부족이 공격했을 때도 매번 마찬가지였으니까. 에릭슨은 그 정보를 바탕으로 미리 작전을 세워 둔 상태였다.

'상대 쪽에서 먼저 공격한다면 방진이 최고지.'

최근 대족장이 모든 씨족에게 알려 준 '전투 진형'이란 게 참으로 쓸모 있었다. 그중에 가장 좋은 건 바로 방진이었다.

형태는 간단하면서 난전을 걸어오는 상대에겐 최고의 효율을 보였다.

'이대로 기다리고 있으면 그대로 와서 방진에 가져다 박겠지. 그럼 우리의 일방적인 승리다.'

에릭슨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아예 여기서 팔룬을 반쯤 폐허로 만든다면 어떻게 될까.

난공불락으로 소문난 이 마을을 휩쓴다면? 자연스레 에릭슨의 입지도 올라갈지 몰랐다.

"그, 그런데 족장, 뭔가 이상합니다."

"이상하다니?"

"놈들의 기세가 심상치가 않습니다. 상당히 위험해 보입니다."

에릭슨이 미간을 좁혔다. 한껏 장밋빛 미래를 상상하고 있는데 저따위 불길한 소리를 하다니.

"시끄럽다! 기세는 무슨 놈의 기세란 말이냐? 겁먹은 걸 착각한 거겠지!"

"하지만 진짜로...."

"어허! 괜히 헛소리하지 말고 싸울 준비나 해라!"

그나마 남아 있는 족장의 권위로 찍어 누르자 전사가 입을 다물었다. 뒤로 물러서는 전사를 보며 에릭슨은 혀를 찼다.

전투를 앞에 두었으면 열심히 싸울 생각이나 할 것이지 기세는 무슨. 그때, 적들이 일제히 이쪽으로 달려왔다.

"족장! 적들이 옵니다!"

"좋아, 왔다! 다들 자리를 지키고, 놈들이 오면 본때를 보여 줘라!"

호기롭게 외친 에릭슨이 무기를 쥐어 잡았다. 저 무질서한 돌격을 보니 다 이긴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양측의 병력이 맞붙는 순간.

"모조리 죽여라!"

팔룬 사람들의 외침과 함께, 학살이 시작되었다.

* * *

에릭슨은 악몽을 꾸는 것 같았다. 번뜩이며 칼과 창이 날아들 때마다 전사들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왜 이렇게 된 거지?'

분명 모든 게 유리했다. 상대는 무질서한 돌격을 감행했고, 자신들은 그에 최적의 진형인 방진을 짰다.

게다가 병력 숫자도 비슷했다. 지려야 질 수가 없는 싸움이었는데.

'단숨에 방진이 무너졌다.'

그 흉흉한 기세에 전사들은 제자리를 지키지 못했다. 무심코 주춤거렸고, 그 주춤거림이 전체로 퍼져 나가자 단숨에 진이 무너졌다.

그 결과가 눈앞의 일방적인 패배였다.

"죽어라!"

"흡!"

상념을 깨는 공격에 에릭슨이 기겁하며 방패를 들었다. 휘둘러진 검이 그대로 방패를 찍었다.

꽈앙.

"크윽!"

무심코 한쪽 무릎이 굽혀질 뻔했다. 그만큼 무식한 공격이었다.

'이게 일개 병졸의 힘이라고?'

황당함에 말이 안 나올 지경이었다. 방패를 내리자 흉흉한 병졸의 눈빛이 보였다.

섬뜩함에 침이 꼴깍 넘어갔다.

'기세가 심상치 않다더니, 이걸 말하는 거였나?'

개개의 병졸들이 독기를 가득 품은 채 싸우고 있었다. 이전과 같은 살기 위한 싸움이 아니다.

불구대천의 원수를 도륙 내려는 듯한 기세. 수많은 전투를 거친 에릭슨조차 찔끔거릴 정도였다.

"제기랄! 이것들이 뭘 잘못 먹었, 헉!"

반격을 하려던 에릭슨은 옆에서 날아오는 도끼에 기겁했다. 반사적으로 들어 올린 방패가 시간에 맞은 건 천운이었다.

꽈아앙.

"크헉!"

"조, 족장!"

강력한 힘에 에릭슨이 뒤로 굴렀다. 서둘러 도로 일어나자 거구의 곰 같은 놈이 보였다.

"네놈이 족장이냐?"

"누구냐!"

"비요른 벨다인이다."

"자작의 조카!?"

에릭슨이 기겁했다. 전투 경험이 있는 놈이라고는 했지만, 이렇게 강하다는 건 듣지 못했다.

'분명 부하들 목숨이 아까워 뒤로 살살 빼는 놈이라 들었는데!'

막상 만나 보니 부하들과 함께 전면에 나서는 맹장이 아닌가. 이것들이 설마 내게 의도적으로 잘못된 정보를 줬나?

"보아하니 이전까지 온 놈들과 다른 녀석이구나."

비요른의 말에 에릭슨이 반색했다. 이거 잘만 하면 살려 주려나?

"그렇다! 우리는...!"

"됐다."

하지만 비요른은 차갑게 에릭슨의 말을 끊었다.

"너 먼저 저승으로 가라. 이전에 공격한 놈들도 나중에 같이 보내 주마."

"그게 뭔! 잠깐만!"

"전사가 혓바닥이 길구나."

비요른의 도끼가 휘둘러지고, 허둥지둥 에릭슨이 검을 들어 막았다. 그러나 애초부터 실력도, 기세도 한참 밀리는 상황.

열 합도 지나지 않아 도끼가 에릭슨의 목을 파고들었다.

퍼어억.

"끄르르륵!"

"조, 족장!"

"족장이 당했다!"

간신히 저항하던 전사들이 비명처럼 외쳤다. 그대로 족장의 목을 베어서 들어 올린 비요른이 포효했다.

멀리서 루크는 그 포효를 들으며 웃었다. 그날, 습격한 야만인 중 살아 나간 자는 한 명도 없었다.

72화

전투가 끝난 후, 팔룬은 축제 분위기였다. 사람들은 승전보를 가지고 온 비요른과 병사들을 열렬히 환호했다.

마을 주민들은 아예 즉석에서 조촐한 승전 연회를 벌였다. 비록 물자가 부족한 마을이나 박박 긁으면 한 번 정도는 못 할 것도 없었다.

"우리들의 도련님을 위하여!"

-위하여!

우렁찬 건배사와 함께 술잔이 서로 부딪쳤다. 병사들은 서로 얼싸안고 노래를 부르며 승리를 축하했다.

승전 연회에는 루크와 두 기사도 끌려 나왔다. 병사 한 명이 넉살 좋게 루크를 향해 음식과 술이 담긴 쟁반을 내려놓았다.

"자, 나리도 맛 좀 보십시오! 제 마누라가 만든 겁니다요!"

"난 딱히 한 것도 없는데."

"무슨 소리를 하십니까! 나리께서 있으신 덕에 저희가 안심하고 싸운 거죠! 나리께서 없었다면 가족이 습격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어후!"

병사는 호들갑을 떨며 양팔을 쓰다듬었다. 그 모습에 피식 웃은 루크가 술잔을 들었다.

"그럼 고맙게 받지."

"부족하시면 언제든지 말씀하십시오!"

병사가 사라지고 나자 루크가 잔을 들었다. 추운 지방이라 그런지 술이 굉장히 독한 편이었다.

레이는 연회 속에서 곤란한 듯이 연신 권해지는 술잔을 받았고, 브루노는 동이째 술을 들이켜 찬탄을 받고 있었다.

두 가신을 바라보던 루크의 옆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궁상맞게 혼자 마시는 거요?"

"분위기 있게 혼자 마시는 거지."

"똑같은 거 같소만."

"네가 무식해서 차이를 모르는 거다."

"뭐, 그런 거로 칩시다."

털썩, 소리와 함께 비요른이 옆에 주저앉았다. 그 손에는 술병만 다섯 병이 들려 있었다.

비요른은 옆에 있던 잔 하나를 집어 술병을 기울였다.

쪼르륵.

"내 술 받으시오."

가득 술을 따른 비요른이 찰랑이는 술잔을 내밀었다. 루크는 단숨에 술잔을 벌컥이며 들이켰다.

독한 술이 혀끝부터 목구멍 아래까지를 화끈하게 태우는 느낌이었다.

"크으으!"

"마실 줄 아는군!"

"이번엔 네가 받아라."

"기꺼이!"

루크 역시 잔을 가득 채웠고, 비요른은 단숨에 비웠다. 그렇게 두 차례 주거니 받거니 했을 때였다.

턱으로 흘러내리는 술 방울을 닦아 낸 비요른이 중얼거렸다.

"고맙소."

"뭐가?"

"멍청한 거지새끼 하나 두들겨 패서 깨우쳐 준 것 말이오."

"말로 깨우쳤지. 정작 맞을 때는 때려죽여도 모를 놈이었던 주제에."

"신랄하구만."

비요른이 멋쩍게 웃으며 다시 술잔을 들이켰다. 빈 술잔에 루크가 술을 따르며 말했다.

"사상자는 얼마나 나왔냐?"

"죽은 건 셋이고 목숨은 건진 게 다섯. 나머지는 별거 없소."

놀랄 만한 수치였다. 그 많은 야만인을 상대하고도 사망자 세 명과 중상자 다섯 명으로 끝나다니.

그래도 사상자가 나왔다는 건 변함이 없었다. 비요른이 그렇게도 막고 싶었던 죽음이었다.

그렇지만 비요른의 얼굴은 담담했다.

"이상한 일이오."

"뭐가?"

"누구 하나 죽을지 몰라 마음 졸이던 게 엊그제였는데, 지금은 죽은 부하를 보고도 전혀 슬프지가 않아."

루크는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한참 침묵이 이어지자, 비요른이 입을 열었다.

"왜 그런 것 같소?"

"내가 네 마음을 뭔 수로 알아?"

"아무 말이라도 좋소. 한마디만 해 주시오."

"글쎄다."

루크의 시선이 한창 웃으며 떠드는 병사들에게 향했다. 비록 전투에서 이겼다지만 이걸로 모든 게 끝난 건 아니다.

그레베 남작가, 벨다인 자작가에서 필시 또 꼬투리를 잡아 오겠지. 그런데도 그들의 얼굴에는 그늘 한 점 없었다.

"너도 저들의 마음을 조금은 알게 되었기 때문이겠지."

"…그런가."

그 말을 마지막으로 대화는 더 이어지지 않았다. 조촐한 연회 속에서 서로의 술잔만이 오갈 뿐이었다.

만취해서 어느 쪽인가 쓰러질 때까지.

* * *

다음 날, 루크는 눈 그늘이 진 상태로 침대에서 일어났다.

"제기랄, 머리에서 종이 울리네."

술은 옛날부터 굉장히 강한 편이었지만 북부의 술은 꽤나 독했다. 몸이 옛날에 비해 어려진 탓도 있는 것 같고.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냉큼 중년 남자 중 하나가 달려와 인사했다.

"나리, 일어나셨습니까."

"그래, 꿀물 있나?"

"당장 가져오겠습니다."

남자는 후다닥 주방 안으로 들어갔다. 꿀은 꽤 비싼 편인 데다 여기라면 더욱 귀할 텐데 망설임이 없다.

잠시 후, 주방에서 미적지근하게 데워진 꿀물이 나왔다. 꿀물을 한 잔 들이켰을 때, 브루노와 레이도 내려왔다.

"주군, 잘 주무셨습니까?"

"잘 자긴 했는데."

루크가 두 사람을 훑었다. 어제 그렇게 퍼마시고도 브루노와 레이의 안색은 말짱했다.

"아무렇지도 않나?"

"남부 사나이에게 이 정도야 끄떡없죠."

"저도 괜찮습니다. 브루노 경이 알려 준 방법 덕분에."

"무슨 방법?"

"해장술이 좋다고 하더군요. 정말 한잔하니까 좋아졌습니다."

미친, 그렇게 퍼마시고도 또 마셨다고? 그런데도 말짱한 걸 보니 진짜 인간이 아닌 수준이었다.

절레절레 고개를 흔든 루크가 꿀물을 싹 비우자, 옆에서 냉큼 빈 그릇을 받아 치웠다.

"더 필요하신 건 없습니까?"

"비요른은?"

"도련님이시라면 묘지에 계십니다."

예상대로군. 비요른을 만나기 위해 루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굳이 묘지까지 갈 필요는 없었다.

중간까지 가기도 전에 돌아오는 비요른과 만났기 때문이다. 루크의 안색을 보고 비요른이 씩 웃었다.

"술이 약하군."

"쓰읍."

쌩쌩한 비요른을 보고 루크가 혀를 찼다. 얼굴색이 멀쩡한 걸 보니 어제 먼저 쓰러진 건 루크인 듯했다.

잠시 비요른을 훑어보자 옷 이곳저곳에 묻은 흙이 눈에 들어왔다.

"죽은 이들을 매장하고 온 건가?"

"오래 걸리지는 않았소. 매번 하던 일이기도 하고."

"장례는 안 치렀고?"

"못 하겠지.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면."

루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정신을 차리고 나니 제법 먼 곳까지 보이는 모양이었다.

잠시 대화를 나누고 있으려니 옆에서 헨릭이 다가왔다.

"도련님."

"무슨 일이지?"

"그레베 남작가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비요른의 눈이 살짝 찌푸려졌다. 예상했지만 달갑지 않은 방문이었다. 헨릭의 전달이 끝나기 무섭게 고풍스러운 차림의 귀족이 나타났다.

이제 막 스물을 넘겼을 법한 젊은 귀족이었다.

"누구야?"

"래리우스 그레베, 현 남작의 아들이오."

"비요른 경!"

래리우스는 다가와 냉큼 호통을 쳤다. 잔뜩 구긴 얼굴은 진정 분노했다기보다 인위적으로 만든 표정으로 보였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오!? 우리 가문의 병사들을 죽이고 외숙에게 폭행을 저지르다니!"

"내가 한 게 아니오."

"거짓말 마시오! 내 다 들었거늘 어디서 오리발을!"

아하, 그러니까 아예 내가 한 짓이 아니라 비요른이 한 짓으로 몰고 갈 셈인 건가. 나쁘지 않은 책략이다.

여기에 당사자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그거 내가 한 짓인데."

"뭐요?"

"내가 한 짓이라고."

"그대는 누구길래!"

"루크 번스타인이다."

번스타인, 이라는 이름을 들은 래리우스가 입을 꾹 다물었다. 이전에 두들겨 터진 놈보다는 현실 감각이 있는 듯했다.

잠깐 눈동자가 하늘을 헤엄치다가, 이내 화사한 미소가 맺혔다.

"하하, 번스타인 가문의 자제께서는 실로 자비롭군요."

"뭐가?"

"자신이 하지도 않은 일을 이렇게 끼어들어서 해결하려 하시다니. 굳이 변호해 주실 필요 없습니다."

"변호가 아니라 진짠데."

너도 다 아는 주제에 어디서 오리발을. 서늘하게 루크가 노려보자 이내 래리우스의 눈이 살짝 올라갔다.

"하하하! 그럴 리가요! 경계서 병사들을 죽이셨다면 저희가 어찌 경을 못 본 체하겠습니까!"

네가 진짜 범인이라고 계속 주장하면 우리도 제대로 하는 수가 있다. 여기 우리 홈그라운드인 거 알지?

"그러니 굳이 변호해 주지 마십시오. 그럴 필요가 없는 일입니다."

알았으면 그만 나서라, 괜히 이 일에 끼어들지 말고. 함축이 잔뜩 담긴 말에 루크가 입꼬리를 올렸다.

"변호가 아니라 진실이다. 정확히는 내 기사들에게 명령했지. 네 외숙이었던가? 마리우스의 이빨을 몽땅 털어 버린 건 나지만 말이야."

뭐, 어쩌라고. 협박에 대한 루크의 답변이었다. 래리우스의 얼굴이 단번에 굳어졌다.

범죄자가 대놓고 범죄를 시인한 셈이다. 여기서 처벌하지 않으면 남작가의 체면에 똥칠을 하는 셈이다.

'제기랄, 이 새끼는 갑자기 왜 이래?'

도대체 비요른과 무슨 인연을 맺었길래 이리 참견을 한단 말인가. 래리우스가 갈팡질팡하는 사이 비요른이 끼어들었다.

"루크 경은 내 손님이었으니 따지고 보면 내 책임이기도 하지."

"…그, 그렇소!"

빠져나갈 구멍이 열리자 래리우스는 냉큼 거기 달라붙었다. 아무리 멀리 있다지만 번스타인과 대놓고 싸우자고 하기엔 부담스러웠으니까.

"크흠, 아무튼 그대의 책임에 대해 그레베 남작가는 죄를 묻고자 하오!"

"말해 보시오. 뭘 원하오?"

"금화 스무 닢으로 용서해 주겠소!"

래리우스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당연히 팔룬에 금화 스무 닢을 지불할 재력이 있을 리 없다.

애걸복걸하면서 어떻게든 깎으려 들겠지. 물론 깎아 봤자 결국 어느 정도는 지불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조금씩 말라죽어 가는 거다.'

그것이 그레베 가문에 자작이 의뢰한 내용이었다. 천천히 힘을 빼서 저항할 기력을 완전히 없애 놓는 것.

이번 명분은 비요른에게 치명타가 될 게 분명했다. 자작가에서 주는 보상도 짭짤하리라.

그런 상상을 와장창 깨부순 건 비요른의 한마디였다.

"싫소."

"...?"

뭐지? 내가 지금 잘못 들었나?

"지금 뭐라고 하셨소?"

"싫다고 했소. 이번 일은 어디까지나 그대 외숙의 책임이니 내가 내줄 것은 아무것도 없소."

"...!"

래리우스가 눈을 부릅떴다. 이 작자가 미친 건가? 지금 이 코딱지만 한 마을로 남작가, 아니 자작가와 정면으로 붙겠다고?

"진심이오?"

"그렇소."

"지금 그 말에 책임을 질 수 있소?"

비요른이 잠시 눈을 감았다. 언제나 무서워서 회피하던 전쟁이었지만 이젠 알 수 있었다.

다들 전쟁을 원했다. 피를 보고 싶어서가 아니다. 눈을 뜨자 사방의 시선이 보였다.

'이대로 말라 죽느니, 차라리 싸우다 죽고 싶습니다.'

'말해 주십시오, 도련님. 싸우겠다고.'

'놈들한테 한 방 먹일 수 있다면 죽어도 좋습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전혀 알 수 없었던 눈빛. 하지만 이제는 속마음 하나하나가 잡힐 듯이 느껴졌다.

비요른은 래리우스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전쟁을 준비하시오."

"...!"

"나는 그대에게 영지전을 신청하오."

* * *

래리우스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창백하게 질려 돌아갔다. 설마 진짜로 싸우자고 할 줄은 몰랐겠지.

"미리 말해 줘도 괜찮은 거냐?"

"어차피 입 다물고 있으면 저쪽이 쳐들어올 거요."

어차피 싸울 거라면 비겁자가 아니라는 명분이라도 챙기겠다는 소리다. 비요른은 루크를 쳐다보며 말했다.

"도와주실 수 있겠소?"

"전엔 집만 지켜 달라더니."

"야만인의 토벌과 영지전은 전혀 다르오."

그저 격돌해서 전투력이나 사기만으로 결정되는 게 아니다. 아주 작은 성이라도 끼고 있으면 피해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니까.

오죽하면 '공성은 어지간하면 하지 마라'라는 말을 전략가들이 신신당부하겠나.

"그대의 힘을 빌리고 싶소."

"맨입으로?"

"뭘 원하오?"

"글쎄, 형님으로 대접받는다면 모르지."

루크가 씩 웃었다. 형제의 맹세, 의형제라고도 불리며 북부에서는 예부터 내려온 신성한 맹세 중 하나.

서로를 형제처럼 여기며 결코 배반하지 않을 것을 맹세한다. 사실상 군신 계약 바로 아래에 있는 맹세다.

"할 수 있겠나?"

"그 정도로 되겠소?"

"뭐?"

되묻는 루크를 향해 비요른은 양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나 비요른 벨다인이 이 땅과, 내 피와, 모든 걸 살피는 여신께 맹세하노니."

모두가 보고 있는 가운데, 비요른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당신을 주군으로 섬기고자 하나이다. 부디 받아들여 주십시오."

73화

루크는 가만히 비요른을 바라봤다. 예상치 못한 충성 맹세. 지극히 냉정한 얼굴을 하고 있으나 가슴은 크게 뛰었다.

'영주의 충성 맹세.'

기사에게서 받는 맹세와는 다르다. 기사란 어차피 주군을 섬기는 존재. 자신이 아니면 누군가 다른 이를 찾아 섬길 것이다.

하지만 영주는 기사가 아니라 군주. 누군가한테 쓰이는 자가 아니라, 누군가를 쓰는 자다.

그런 영주의 충성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를 의미한다.

'왕으로 섬기겠다는 것.'

루크는 살며시 눈을 감았다. 서부처럼 눈 가리고 아웅으로 받은 형식적인 충성이 아니다.

비요른은 진심을 담아 루크를 왕으로 섬기고자 하고 있었다.

"네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아나?"

"잘 알고 있소."

"부하들이 좋아하지 않을 거다."

주군의 주군이란 건 애매한 존재다. 자신이 섬기고자 했던 자가 또 누군가를 섬긴다.

신하가 볼 때는 골 때리는 광경이다. 왜 주군이 충성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말할 것도 없다.

'왕과 같은 권위가 없다면 반발만이 있을 뿐.'

루크에겐 땅도 없고, 지위도 없다. 있는 거라곤 허울 좋은 수행 기사 직함과 강력한 두 기사가 전부다.

비요른의 가신들이 반발할 이유가 충분을 넘어 넘칠 정도였다. 하물며 형식적 충성이 아니라 진심이라면 더더욱.

"그러느니 차라리."

형제의 맹세 정도로 끝내라. 그렇게 말하려고 했을 때였다. 지켜보던 관중 속에서 누군가 튀어나왔다.

"헨릭?"

"무식한 놈이라 예법을 모르니 용서하십시오."

헨릭은 눈을 똑바로 뜨고 루크를 쳐다봤다. 그래, 반발이 있을 줄 알았지. 아무리 도움을 줬다 한들 주군은 너무했을 거다.

어디 비요른의 가신으로서 속 시원하게 말해 봐라. 헨릭은 심호흡을 크게 하더니, 그대로 무릎을 꿇고 소리쳤다.

"배신이 위대한 분께 인사 올립니다!"

"...!"

"부디 주군을 받아 주십시오!"

루크의 눈이 세차게 흔들렸다. 배신(陪臣). 가신의 가신을 일컫는 말. 헨릭은 자신의 주군을 루크의 가신으로 칭하고 있었다.

침묵 속에서 또 한번 털썩 소리가 울렸다. 이번엔 비요른과 함께 여관에 머물던 부하 중 하나였다.

"주군을 받아들여 주십시오."

그게 신호탄이었다.

털썩.

털썩.

연신 사람들이 무릎을 꿇기 시작했다. 가까이 두던 부하가, 일반 병사가, 그 병사의 가족들이.

이윽고 팔룬 사람들 전체가 무릎을 꿇었다. 조용한 가운데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렸다.

"도련님을 받아들여 주십시오."

모두가 침묵하고 있으니 그 작은 소리가 천둥처럼 크게 들렸다. 그리고 끝이었다. 더 이상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 이유는 쉽게 알 수 있었다.

'두려운 거겠지.'

다 못 배운 사람들이었다. 예법이고 자시고 모른다. 그러니까 차라리 입을 다무는 쪽을 택했다.

혹여라도 잘못 말했다가 루크가 비요른을 받아 주지 않을까 싶어서.

-왕이시여.

이 자리의 모든 이가 그리 말하고 있었다. 많은 이에게 왕으로 여겨지는 감각은 말로 할 수 없을 만큼 짜릿했다.

"후우."

루크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가슴속의 열기를 진정시키기 위한 한숨이었다.

"일어나라."

"받아 주실 겁니까?"

"가신 하나 늘어난다고 달라질 것도 없겠지."

비요른이 흠칫 몸을 떨었다. 고개를 들자 똑바로 비요른을 바라보던 루크와 시선이 마주쳤다.

루크는 담담히 입을 열었다.

"비요른 벨다인."

"예, 주군."

"너는 이제부터 내 검이자, 북부의 왕이 될 자다."

"...!"

충격적인 말에 비요른은 물론 헨릭조차 굳어 버렸다. 가신을 왕으로 만든다면 그 주군이 노릴 자리는 단 하나.

"꿈이 너무 무겁다면 그만둬도 괜찮다."

"절대 아닙니다."

비요른은 벌떡 일어서서 소리쳤다.

"따라가겠습니다. 어디까지라도."

루크는 미소 지었다. 그래, 그래야지. 여관 안쪽으로 들어가는 루크의 뒤를 비요른이 따랐다.

뒤이어 마을 사람들이 환성이 터져 나왔다. 북부의 왕과 그 주군의 첫 만남이 기록되는 순간이었다.

* * *

여관에 들어가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작전 회의였다. 선전 포고를 한 마당이니 그레베 남작가가 곧 쳐들어올 터.

"어떻게 할 생각이냐?"

"먼저 칠 겁니다."

루크의 물음에 비요른이 즉답했다.

"기다리면 분명 증원이 옵니다. 그러기 전에 먼저 쳐야 합니다."

"적은 성을 끼고 있다만?"

"해자 하나 없는 작은 성입니다."

남작가가 얼마나 대단한 성을 가지고 있겠나. 성으로서 구색만 갖추어 놓은 수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루크만 손을 빌려준다면 충분히 함락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식량이 부족합니다. 질질 끌면서 싸울 상황이 아닙니다."

"어느 정도나 있지?"

"바닥까지 긁으면 보름 정도 쓸 군량미는 나오겠지요."

그나마도 병사가 적어서 보름이나 버틸 수 있는 거다. 숫자가 많았다면 반대로 식량 소모를 감당하지 못해서 공격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다행인 건 우리도 숫자가 빈약하지만, 저쪽도 빈약하다는 겁니다."

"하기야, 남작가니까."

병사, 특히 상비군이라는 건 돈 먹는 하마다. 남작가라면 상시 운용하는 병력은 경비병이 고작일 것이다.

그에 비해 비요른 휘하 병력은 전쟁을 거친 정예들. 제대로 회전을 한다면 단숨에 물리칠 수 있다.

"문제는 명분입니다만."

"이 상황에서 명분까지 필요한가?"

"싸울 명분은 충분합니다만, 점령할 명분이 부족합니다."

"아."

루크도 그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었다. 단순히 전투를 벌이는 것과 그 땅을 점령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다.

어쨌거나 영주란 건 황실에 의해 인정을 받은 지배자. 아무런 명분 없이 함부로 쫓아내고 먹으면 명분에서 밀린다.

'가장 좋은 방법은 친척이라도 데려오는 건데.'

계승권이 있는 혈족을 찾아내 꼭두각시 대리인으로 삼는 것. 앞으로 몇 년 후에는 일반적으로 쓰이는 방법이다.

일단 정당한 혈족에게 물려준다는 명분은 충족되니까.

'하지만 처음엔 욕도 어마어마하게 먹었지.'

어디까지나 나중에 가서 '남들 다 하니까 나도' 하면서 널리 퍼진 것뿐이다. 처음 저지른 놈은 죽을 때까지 욕을 처먹었다.

더럽게 안 좋은 선례를 대륙의 역사에 남겼다면서. 결과적으로 자신이 저지른 짓 때문에 사방에서 공격받다 살해당했다.

"골치 아프군."

싸우면 이기지만 점령할 수가 없다. 점령을 못 하면 당연히 병력 충원도, 군량 보급도 힘들다.

그 상태로 자작가와 싸우면 필패다.

"지도 있나? 그레베 남작가 위치 좀 알려 줘."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헨릭이 품속에서 작은 지도 한 장을 꺼냈다. 군략에 쓰기에는 형편없는 여행 지도.

그래도 영역 구분과 자잘한 길은 적혀 있었다. 헨릭은 손가락으로 한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팔룬이 여기 보이는 곳이고, 그레베 남작가가 여깁니다."

"...?"

루크가 눈을 껌뻑이며 지도를 쳐다봤다. 뭐지? 내가 지금 잘못 봤나?

"여기가 그레베 영지라고?"

"예."

"내가 알기론 땅 이름이 달랐는데."

엘름홀트. 그게 회귀 전 붙여졌던 이 땅의 이름이다. 그런데 지금 적힌 이름은 전혀 달랐다.

"아, 원래 이름은 엘름홀트가 맞습니다."

"그런데 왜 바뀌었지?"

"남작이 땅 주인이 되면서 바뀌었습니다. 이름이 마음에 안 든다더군요."

"아하."

태어날 때부터 영지 귀족이 아니라 나중에 영지를 갖게 된 케이스인가. 그런 거라면 충분히 이해가 갔다.

원래 영지 주인은 아마 황실과 주변 영주들에게 밉보여 쫓겨났겠지.

"잘됐군. 명분은 더 필요 없겠어."

"예? 방법이 있는 겁니까?"

"있지, 끝내주는 방법이."

정석은 아니지만, 그래도 남에게 비난받을 수준은 아닌 명분이 있다. 오직 이 땅에서 루크만 가능한 명분이.

* * *

"놈이 진짜 그랬다고?"

"예, 아버지."

그레베 가문의 현 가주, 필리프 그레베는 아들 래리우스의 보고를 받고 눈을 찌푸렸다.

"제정신이 아닌가 보군. 겨우 팔룬 하나 가지고 싸움을 걸다니."

물론 팔룬 자체가 유배지에 가까운 터라, 성인 남자 모두가 전쟁 경험이 있는 병사기는 했다.

하지만 그걸 고려해도 가용 전력이 너무 적었다.

'그런데 그 숫자로 공성을 하겠다니.'

어처구니가 없다 못해 말이 안 나올 지경이었다. 래리우스가 조금 불안한 눈빛으로 아버지인 필리프를 쳐다봤다.

"아버지, 자작 각하께 구원을 요청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구원은 무슨, 우리로 충분하다."

"하지만 혹시 모르니...."

불안해하는 아들을 보고 필리프가 혀를 찼다. 분명 자질은 나쁘지 않은 아들이나 보신에 집착하는 게 문제였다.

"정말 위기라면 나도 구원을 청하겠다. 그렇지만 지금이 위기라고 할 수준이더냐? 겨우 저 정도 숫자도 막지 못한다면 자작께서 우리를 어떻게 여기시겠느냐?"

"그건 그렇습니다만."

숫자는 우리도 적은데, 라는 뒷말을 래리우스가 삼켰다. 그런 아들을 향해 필리프가 차분히 설명했다.

"전쟁은 전투력과 병력만으로 판가름 나는 게 아니다. 잘 생각해 봐라. 네 외숙인 마리우스가 뭣 때문에 팔룬으로 갔더냐?"

"식량을… 아!"

"그래, 놈들에겐 식량이 없다."

필리프는 히죽 웃었다. 귀족이라면 전투에서 보급의 중요성 정도는 다 알고 있다.

수많은 군주가 보급 때문에 운명을 뒤바꿀 수 있는 전투에 진 적이 한두 번이던가.

"식량 없는 군대란 가만히 있어도 무너지지. 우리는 성을 끼고 방어만 하면 된다."

"하지만 번스타인 가문의 자제가 협력하면 어떡합니까? 외숙 말로는 본인도 상당한 실력자인 데다, 휘하의 두 기사가 엄청나게 강하다던데."

대규모 접전에서야 기사의 존재감도 희미해진다. 그러나 이런 소규모 전투라면 기사 하나의 활약상이 압도적이다.

한 명이라도 성벽 위로 올라와 검을 휘두르는 순간 악몽이 시작되리라. 그러나 필리프는 여유로웠다.

"괜찮다. 정신이 제대로 박혀 있다면 전쟁에 참여할 일이 없으니까."

"어째서 그리 생각하시는 겁니까? 비요른이 보상이라도 약속했다면...."

"그 이전의 문제다. 놈들에겐 이 영지를 점령할 명분이 없잖느냐."

전투에서 이겨 봤자 아무런 명분 없이 점령을 시도하면 침탈이다. 북부 이전에 황실에서 분노할 것이다.

아무리 황실과 사이가 틀어진 북부라도 '황명'은 중요한 명분. 반역자가 되는 순간 사방에서 군침을 흘리며 공격하리라.

"그렇다고 해서 우리 영지를 점령하지 않고 자작께 바로 도전한다? 그 역시 미친 짓이지."

결국, 비요른은 어느 쪽을 고르건 필패할 수밖에 없다. 교육을 조금이라도 받았다면 당연히 비요른에게 가세하지 않으리라.

"그러니 걱정할 건 아무것도 없다."

"그, 그렇군요!"

모든 설명을 들은 래리우스가 반색했을 때였다. 밖에서 전령이 급하게 뛰어 들어왔다.

"가, 각하! 큰일 났습니다!"

"뭐냐? 비요른이 왔더냐?"

"아닙니다! 루크 번스타인이라는 자가 각하께 선전 포고문을 보냈습니다!"

"뭐!?"

필리프는 물론 래리우스까지 기겁해서 일어났다. 아니, 비요른이 아니라 번스타인 가문의 자제가 왜 선전 포고를?

"어서 내놓아라!"

"예!"

전령의 손에서 선전 포고문을 낚아챈 필리프는 쭉 내용을 읽었다. 내용 자체는 형식적이었다.

-영토를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니 황실의 권위를 떨어뜨리는 꼴이다. 그러니 마땅히 그 땅을 회수하겠다.

문제는 땅을 차지할 권리랍시고 적어 놓은 내용이었다.

"노먼의 손자이자 리리아의 아들이 가진 권한으로? 선조의 고향을 더럽히는 영주를 내쫓겠다? 그 두 명이 도대체 누구란 말이냐!"

74화

필리프의 예상대로라면 선전 포고문은 비요른이 보냈어야 했다. 그것도 자신들이 저지른 일을 정당화하는 장문의 변명과 함께.

그런데 막상 온 것은 전혀 생뚱맞은 내용인 데다, 보내는 주체도 비요른이 아닌 다른 자였다.

"대체 번스타인 가문의 혈통이 이 땅과 무슨 연관이 있기에!"

필리프가 기함하며 선전 포고문을 내동댕이쳤다. 노먼과 리리아라니? 들어 본 적도 없는 이름이다.

그런데 그 두 사람의 고향이 이 땅이라니.

"당장 노먼과 리리아가 누군지 조사해 봐라!"

"예, 옛!"

영주의 분노에 행정관이 허둥지둥 서류를 뒤졌다. 꼬박 하루 가까이 서류 더미를 뒤적인 끝에 두 사람의 이름을 찾아낼 수 있었다.

행정관은 창백한 안색으로 필리프에게 보고했다.

"차, 찾았습니다, 각하. 인명록에 이름이 남아 있습니다."

"그래, 어디 들어 보자. 뭐 하던 작자라더냐? 기사? 전대 영주의 친척?"

"그것이...."

필리프의 물음에 행정관은 한참 동안 입을 우물거렸다. 분노한 필리프가 노성을 내지르기 직전,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여, 영지민입니다."

"뭐라고?"

"귀족이 아닌 일개 영지민입니다. 17년 전 사냥꾼으로 일했던 자가 노먼이고, 그 딸이 리리아라는 기록이...."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거냐!"

필리프의 노성에 행정관이 움츠러들었다. 자기가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이야기였으니까.

번스타인 가문의 자제인데 그 혈통이 사냥꾼이라니?

"하, 하지만 아비가 노먼이고 딸이 리리아라는 이름을 가진 경우는 이게 전부입니다. 그 외엔 없습니다."

"이놈이… 후우!"

뭐라 하려던 필리프는 애써 속을 진정시켰다. 그래도 제 실수를 감추고자 변명은 안 하는 행정관이다.

뭔가 착오라도 있었던 거겠지. 조사하면 금방 드러날 일이다.

"혹시 모르니 영지민들에게 물어나 봐라."

남작령은 작은 영지다. 사는 주민들 모두가 서로의 얼굴 정도는 알고 있고, 사냥꾼 같은 독특한 직업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물어보면 금방 사실인지 아닌지 드러나리라. 그리고 결과는 예상 밖이었다.

"노먼 말입니까? 예, 압니다. 사냥 솜씨가 좋은 친구였습니다."

"뭐? 진짜로 있었던 자라고?"

"그렇습니다요. 딸애 이름이 리리아인데 참한 처자였습죠. 오죽하면 귀부인들을 잔뜩 본 기사님도 혹하셨으니."

"그, 그 기사의 이름은 뭐라고 하던가?"

"성함은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뻘건 용이 새겨진 갑옷을 입으셨던 건 기억합니다."

보고를 들은 필리프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붉은 용이라면 번스타인 가문의 상징이 아닌가.

듣자 하니 그게 벌써 17년 전이란다. 그때는 아직 필리프가 이 땅을 차지하기 전이었다.

'모종의 이유로 그때 번스타인의 현 가주가 이 땅을 방문했다면.'

그리고 지금 저 웃기지도 않는 명분을 주장하는 자제가 서자라면. 모든 정황이 맞아떨어졌다.

상황을 파악하고 나자 밀려드는 건 당혹스러움이었다.

"이런 미친! 그래서 내세운 게 이따위 명분이라고!?"

정당한 권리가 없는 귀족은 애초부터 이런 명분을 내세울 수 없다. 권리가 조금이라도 있는 영지민은 피지배 계층이라 반항 자체를 못 한다.

그런데 이 서자는 그 두 가지를 융합해 버렸다. 영지민이었던 조상의 미미한 권리에 귀족이란 신분을 섞어 몇 배는 부풀린 거다.

'더 미치겠는 건 논리가 성립한다는 거다.'

실제로 말이 되느냐 안 되느냐는 상관없다. 일단 명분으로 기능할 정도의 요건만 갖추면 그만이다.

그리고 루크의 주장은 턱걸이로 그 문턱을 넘었다.

"제기랄, 골치 아프군."

"아버지! 아버지!"

지끈거리는 이마를 필리프가 감싸 쥐는 것과 동시에 래리우스가 뛰어 들어왔다. 미덥지 않은 아들의 모습에 짜증이 절로 나왔다.

"또 무슨 일이냐?"

"버, 번스타인의 자제가 왔습니다!"

"뭐라고?"

이건 또 무슨 소리란 말인가? 정신을 못 차리는 필리프를 향해 래리우스가 설명했다.

"번스타인 가문의 자제가 회담을 요청했습니다! 지금 우리 성문 앞에서요!"

* * *

루크에 대한 필리프의 첫인상은 간단했다.

'어리군.'

이제 막 성인식을 치렀을 앳된 얼굴. 저 얼굴로 이런 대담한 선전 포고문을 날렸다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응접실까지 온 루크는 턱을 추어올리며 필리프를 내려다봤다.

"그대가 필리프 남작인가?"

"뭣이?"

난폭하고도 거만한 어투에 필리프의 얼굴이 찌그러졌다. 아들보다도 어린놈이 하오체라니!

심지어 루크는 작위 하나 없는 평귀족. 아무리 대가문의 자제라도 영주에겐 존대가 기본이거늘.

"이런 시건방진! 그대는 예법도 모르는가!?"

"잘 알고 있다. 하나 자격이 없는 자에게도 예법을 지킬 필요가 있는가?"

아하, 명분 싸움을 하겠다, 이건가. 확실히 루크의 발상은 신선했다. 자신의 혈통을 이용해 참신한 명분을 이용하다니.

'하지만 아직 애송이군.'

아무리 싹수가 있어도 연륜 부족은 어쩔 수 없나. 명분을 얻겠다고 더 큰 약점을 노출하다니.

필리프는 입가를 뒤틀며 루크를 노려봤다.

"오히려 내가 묻고 싶군. 네놈이야말로 감히 내 자격을 묻는가?"

"무슨 뜻이지?"

"네놈은 제대로 된 귀족이 아니지 않나? 일개 서자 주제에."

혈통에 대한 열등감. 서자라면 결코 벗어날 수 없는 멍에다. 뭣보다 가문 자체가 벗어나는 걸 허용하지 않는다.

자칫해서 서자가 가주 자리에 야망이라도 가지면 골치 아프니까. 적자와의 차별 대우는 당연하다 못해 상식이다.

"백작가에서는 이 사실을 아는지 궁금하군. 서자가 영지를 얻고 싶어 천방지축 날뛰는 것 같은데 말이야."

일반적인 가문이라면 서자가 날뛰는 것 자체를 못마땅하게 여긴다. 잘하면 적자의 존재감이 희미해지고, 못하면 가문의 위신이 추락한다.

그런데 여기서 필리프가 편지라도 한 장 보내서 본가에 알린다면?

'가문에서의 네 입지도 좁아지겠지.'

멍청한 녀석. 서자라는 게 얼마나 큰 약점인지도 몰랐다니. 이제 주도권을 쥔 건 나다!

"가문에 알려지기 싫으면 우선 예의부터...."

"우습군."

"뭣?"

"나는 이미 가계도에 이름을 올렸고, 비전 검법을 배웠다. 그런데 서자라서 뭘 어쩌란 말이냐?"

"...!"

예상치 못한 소리에 필리프가 우뚝 멈춰 섰다. 뭐? 가계도에 이름을 올려? 비전 검법까지 배웠다고?

그럼 적자와 대우가 크게 차이 나지도 않는다는 소리다. 심지어 계승권까지 보유하고 있다는 거 아닌가!

'설마 총애받는 서자였나?'

필리프의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서자의 위치는 가문마다 가주의 총애에 따라 널을 뛴다.

보통은 찬밥 신세지만, 그중 일부는 적자 못지않게 총애받는 서자도 있다. 만약 루크가 그 경우라면.

'망했다.'

"왜 그러지? 안색이 나쁘군."

루크의 비아냥에도 필리프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가문에게 사랑받는 자식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니까.

지금껏 상정했던 것보다 루크를 상대하는 난이도가 몇 배는 뛰었다.

"크흠, 크흠! 별거 아니오."

"그런가? 그럼 얘기를 계속하지."

제기랄, 새파랗게 어린놈이! 필리프가 속으로 이를 갈았지만, 루크는 신경도 쓰지 않고 입을 열었다.

"내가 여기 온 이유는 간단하다. 선전 포고문에 쓰인 것처럼 그대가 영지를 망치고 있으며, 이는 곧 내 어머니의 고향에 대한 모독이기 때문이다."

"웃기지도 않는 소리!"

"내 말이 웃기고 말고는 알아서 정하시고."

필리프의 항의를 찍어 누른 루크가 말을 이었다.

"다음과 같은 조건을 들어준다면, 그대의 안전은 보장하겠다."

"조건?"

"우선 첫째로...."

* * *

루크가 내건 조건은 간단했다.

첫째, 그레베 남작가는 영지의 소유권을 루크에게 넘긴다.

둘째, 영지를 떠나면서 식량에는 일절 손대지 않는다.

셋째, 양측의 합의로 이루어지는 협정이니 후일 항의하지 마라.

정신을 못 차리는 필리프를 남겨 두고 루크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떠나면서 남긴 말이 아직까지도 귀에 남았다.

'고민이 될 테니 사흘 동안 머물며 기다려 주지. 그때까지 답이 나왔으면 좋겠군.'

"고민은 개뿔!"

환청처럼 들려오는 메아리에 필리프는 협정서를 구겨 버렸다. 이걸 지금 조건이랍시고 넣은 건가?

한마디로 영지 내놓고 꺼지라는 소린데, 미치지 않고서야 받아들일 리가 없었다.

"애송이가 어지간히도 우습게 보는군!"

백작가에서 생활해서 그런지 남작가 따윈 눈에도 안 찬다는 태도가 심히 거슬렸다.

"그놈은 지금 뭘 하고 있느냐?"

"마을 주변을 둘러보고 있습니다. 외조부와 어머니의 고향을 보고 싶다면서...."

"가지가지 하는군."

필리프가 혀를 찼다. 대놓고 침을 바르는 꼴이 기가 막혔다.

"어찌할까요?"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 둬라! 사흘 후면 돌아가겠지!"

"막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전쟁 전인데 내부를 들쑤시고 다니게 해도 괜찮겠냐는 의미. 필리프는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볼 것도 없다."

큰 마을 하나 수준인 영지다. 산 위로 올라가서 내려다보기만 해도 군사가 얼만지, 배치가 어떤지 정도는 훤히 보인다.

하물며 팔룬은 바로 옆에 있는 동네. 성벽 벽돌 개수도 다 알고 있는 마당에 정보 수집은 무슨.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 필요는 없지. 사흘간 밥만 먹이고 내보내."

"예, 각하."

이렇게 된 거 사흘 동안 싸움을 미루며 적의 군량이나 축내게 하자. 그리 생각하며 필리프는 신경을 꺼 버렸다.

자신의 결정이 무슨 결과를 초래할지도 모른 채.

* * *

"내가 바로 노먼의 손자이자 리리아의 아들이다! 두 분을 아는 자는 어디 없는가!"

그레베 영지 안에서 루크는 여기저기 소리치며 돌아다녔다. 그 행동에 놀란 일부 병사들이 막으려고도 했지만, 그때마다 루크는 항변했다.

"나는 그저 외조부와 어머니의 지인들을 찾으려고 했을 뿐이다. 그게 뭐가 문제란 말이냐?"

"그, 그래도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뭐가 곤란하다는 거냐? 내가 우물에 독이라도 풀었느냐? 아니면 무기고에 불이라도 질렀느냐?"

루크의 강경한 태도에 결국 병사들은 뒤로 물러섰다. 멀리서 감시는 이어졌으나 누굴 만나는 것까진 막지 못했다.

그러자 지금껏 뒤로 물러서 있던 영지민들이 슬금슬금 기어 나왔다. 그중 나이가 들어 보이는 남자가 루크에게 다가왔다.

"저, 나리."

"무슨 일이냐?"

"정말 나리께서 그, 노먼 아저씨의 손자십니까요?"

"그렇다. 여기가 외조부의 고향이라 들었다만."

"노먼 아저씨께서 저에 대해 뭔가 말씀하신 거 없습니까? 제 이름은 앤더스인데, 그분과 조금 친하게 지냈거든요."

말씀하신 적은 없지. 하지만 앤더스는 아주 잘 알고 있다. 회귀 전에 방문해서 한참 대화한 적이 있으니까.

루크는 고민하는 척 눈을 감았다.

"음, 기억이 나는군. 분명 외조부께서 사냥 기술을 몇 개 알려 주셨다지? 떠나기 전에 단검 하나 선물하셨고."

"마, 맞습니다."

"딸은 잘 있나? 외조부께서 떠나오시기 전에 핏덩이였다고 들었는데."

"...!"

깜짝 놀란 앤더스가 눈을 크게 떴다. 고향 사람이 아니고서는 절대 알 수 없는 정보였다. 확신을 얻은 앤더스는 뒤로 돌아 소리쳤다.

"다들 나와 봐! 이 나리 말씀은 진짜야! 노먼 아저씨 손자라고!"

그 소리에 사방에서 그림자가 불쑥이며 튀어나왔다.

75화

"저 나리가 노먼의 손자라고?"

"세상에, 그 기사님이 보통 분이 아니었구만!"

지금껏 숨어서 지켜보던 마을 사람들이 속닥거렸다. 루크는 적당히 풀어진 분위기를 타서 외쳤다.

"외조부와 어머니의 고향 사람들을 만나게 돼서 반갑구나! 그분들의 옛이야기를 해 줄 사람은 어디 없는가?"

마을 사람들이 쭈뼛거리며 앞으로 나섰다. 가까이 올 엄두도 못 내던 아까 전보단 두려움이 옅어진 것 같았다.

그중 몇 사람이 루크에게 다가와 입을 열었다.

"나리, 저는 하이네라는 놈입니다만."

"아, 물건 고치는 솜씨가 쓸 만하다고 들었지."

"로이라는 이름은 못 들어 보셨습니까?"

"어머니께 청혼했다가 시원하게 차였다던데."

"아니, 아저씨는 왜 그런 일까지...."

한번 대화의 물꼬가 트이자 그다음은 일사천리였다. 사방팔방에서 사람들이 모여와 루크를 감쌌다.

루크는 조금씩 시끄러워지기 시작하자 돈주머니를 풀었다.

"이거 이대로 대화를 나누긴 힘들겠군. 누가 술과 고기를 사 오거라! 돈은 내가 내마!"

-와아아아!

마을 사람들의 환호성이 울리고, 곧 마을은 잔치판으로 바뀌었다.

* * *

엘름홀트는 팔룬과 달리 제법 교역이 활발한 영지다. 덕분에 사람들에게 돌릴 고기와 술을 구하는 건 문제 없었다.

술과 고기를 올린 접시가 사람들에게 돌아가자, 앤더스가 잔을 올리며 건배사를 외쳤다.

"노먼의 손자이자 리리아의 아들, 그리고 용살자의 후손이신 루크 나리를 위하여!"

-위하여!

술이 들어가자, 이어지는 건 질문의 폭풍우였다. 마을 사람들은 언제 무서워했냐는 듯 루크에게 모여 소란을 떨었다.

그때마다 루크는 유들유들하게 아는 척도 조금 해 주고, 진실과 듣기 좋은 소리를 반씩 섞어서 대답해 줬다.

'회귀 전에 온 적이 있어서 다행이군.'

루크가 엘름홀트를 방문했던 건 순 변덕이었다. 그저 외조부 고향이라길래 한번 방문해 봤을 뿐이다.

생각지도 못한 건 마을 사람들이 루크에게 꽤 잘 대해 줬다는 거다. 알고 보니 외조부의 인덕이 상당했다.

"노먼 아저씨가 그리 가시다니. 참 좋은 분이셨는데."

"사냥감 하나 훔치다가 걸렸는데도 못 본 척 보내 주셨죠."

"추운 집에는 오다 주웠다며 가죽 한 장 던져 주기도 했고."

씁쓸히 추억을 곱씹는 마을 사람들을 보며 루크가 웃었다.

'하여간 브릭 마을이랑은 천지 차이라니까.'

적어도 이 마을 사람들은 외조부가 입힌 은혜를 확실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렇게 시작된 추억담은 밤새 계속되었다.

이윽고 새벽이 가까워지고, 사람들이 대부분 곯아떨어진 시각. 꾸벅꾸벅 조는 감시병의 모습을 훑어 본 루크가 속삭였다.

"그래, 여긴 최근 어떻지? 살 만한가?"

"살 만하다니요?"

"저 영주가 부임해 온 뒤로 말이다. 썩 좋아 보이는 영주는 아니던데."

그 말에 아직 깨어 있던 마을 사람들이 기겁했다. 영주의 욕을 함부로 했다가 무슨 꼴을 당하려고.

루크라면 모르겠지만, 본인들은 가만두지 않을 게 뻔했다. 하지만 모든 이의 눈치가 빠른 건 아니었다.

"죽겠습니다. 악마는 저런 거 안 잡아가고 뭐 하는지, 원."

"이, 이봐!"

"말리지 마십쇼. 어차피 듣는 사람도 없는데."

투덜거리는 중년 남자를 노인이 뜯어말리려고 했지만, 남자는 멈추지 않았다. 얼굴을 보니 제법 거나하게 취한 것 같았다.

"일하라는 건 그렇다 쳐도 세금 때문에 허리가 휠 지경입니다. 세상에, 10년 사이에 인두세 두 배가 말이 됩니까?"

"그 정도로 올렸다고?"

이건 루크도 깜짝 놀랐다. 인두세는 사실상 세금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달리 말하자면 세금 전체가 두 배로 올랐다는 소리다.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자잘한 세금은 또 엄청나게 뜯어 갑니다. 옛날에는 가끔 축제도 하고 푸지게 먹었는데 요즘에는 꿈도 못 꿉니다. 후우우!"

중년 남자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자, 주변 노인들도 고개를 푹 숙였다. 본인들 역시 차마 내뱉지만 못할 뿐 공감하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어두운 분위기에 루크의 눈이 반짝였다.

'이거 예상 이상으로 잘 풀릴 것 같은데?'

사실 루크는 마을 사람 중 극히 일부만이라도 협력하면 최고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보니 영지민 전체가 불만이 꽤 큰 것 같았다.

회귀 전에도 영주가 바뀐 데다, 딱히 마을 사람들의 언급이 없어서 좋은 영주가 아닐 거란 생각은 했다만.

"그거 안타까운 일이군. 내가 영주였다면 그런 일은 없었을 텐데."

"하지만 나리는 여기 영주님이 못 되잖습니까."

아무리 못 배운 평민이라지만 계승권이라는 것 자체는 어렴풋이 알고 있다. 그러나 루크는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아니, 될 수 있다. 나한테도 약간의 권리는 있거든."

"어? 그렇습니까?"

"그래, 내가 영주라면 세금 따윈 반으로 깎아 버렸겠지. 그런데 지금 영주는 오히려 반대로 하는군."

"...!"

루크의 말에 주변 사람들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인상하기 전의 원래의 세금에서 반으로 깎아 준다.

사실상 현재 세금에서 사분지 일로 깎아 준다는 소리가 아닌가. 누군가 마른침을 삼켰다.

"그, 그렇지만 지금은 못 되시는 거죠?"

"당장이라도 될 수 있다."

"예?"

"이번에 전쟁 난다는 소식 들었겠지?"

"듣기야 했습니다만...."

분명 촌구석에 있는 마을 하나가 반란을 일으켰다고 들었다. 이게 웬 날벼락이냐, 전쟁 나가게 생겼다며 한탄한 게 엊그제다.

"그게 사실 내가 일으킨 군대다."

"예!? 흡!"

순간 목소리를 높인 노인이 자신의 입을 턱 막았다. 고개를 돌리자 아직 쿨쿨 조는 경비병이 보였다.

안도의 한숨을 쉰 사람들 사이에서 루크가 말을 이었다.

"이곳 영주가 외조부의 고향을 잘 다스리지 못한다는 소리를 들어서 군대를 일으켰지. 그러느니 내가 영주가 되는 게 낫겠다 싶어서."

"그, 그럼 이제 어떻게 되는 겁니까? 여길 공격하실 겁니까?"

"나는 꼼짝없이 싸울 줄 알았다만, 너희들이 협조해 준다면 이야기가 좀 다르지 않겠느냐?"

"협조라 하시면...."

말꼬리를 흐리는 마을 청년을 향해 루크가 웃었다.

"방법이야 많지. 병사들이 다 이곳 사람들 아니냐."

보통 영주가 전투를 벌일 때는 용병을 고용한다. 하지만 이번 전쟁은 워낙 갑작스럽게 일어나 그럴 틈이 없었다.

현재 병사들은 죄다 영지에서 긁어모은 징집병이다. 입만 맞추면 할 수 있는 건 무궁무진하다.

"예를 들면 성문을 그냥 열어 준다거나, 아니면 바로 항복을 한다거나."

움찔, 하고 마을 사람들의 몸이 떨렸다. 쉽지 않은 선택이다. 까딱하면 뒤에서 기사의 칼을 맞을 수 있으니.

루크도 그걸 이해했기에 가만히 대답을 기다렸다.

'가능하면 아예 창을 거꾸로 쥐거나 반란을 일으키라 하고 싶지만.'

그 수준까지 가면 겁을 집어먹고 아무도 나서지 않을 거다. 루크는 딱 적당한 때에 자르기로 했다.

"뭐, 잘 생각해 보게나."

* * *

루크는 그날 이후 이틀간 더 머물며 마을 사람들을 만나고 다녔다. 그리고선 필리프 남작의 정책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봤다.

"세율이 어느 정도나 되지?"

"이만큼은 됩니다."

"그럴 수가! 나라면 절대 그러지 않을 텐데!"

대부분의 대화는 이런 식이었다. 조금이라도 과도하게 매긴 게 있으면 놀라면서 '만약 나라면' 하는 과정을 덧붙였다.

전날의 사정을 모르는 자들은 그저 쓴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하지만 루크의 유혹을 들은 이들은 그때마다 움찔거렸다.

"말씀만이라도 고맙습니다요."

"정말 안타깝군. 진심이네."

그 짓거리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마지막 사흘째에는 결국 기사에게 꼬리가 잡혀서 막혔다.

제법 나이가 있는 기사는 루크를 노려보며 앞을 막았다.

"그만두십시오."

"뭘 말인가?"

"제 주군의 정책에 트집 잡는 것 말입니다."

"나는 감상을 피력한 게 전부다만."

"영지에 혼란을 주고 계십니다."

한 치도 안 물러나는 기사의 모습에 루크는 입맛을 다시고 물러섰다. 그날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지만 큰 문제는 아니었다.

이미 씨는 충분히 뿌렸으니까. 사흘이 지나고 떠나는 날, 루크는 마지막으로 필리프를 만났다.

"생각은 잘 해 보셨소?"

"그냥 가시오."

"후회할 텐데."

"가라고 했소!"

씩씩거리는 필리프에게 콧방귀를 날린 후, 루크는 성문을 나섰다. 루크가 돌아오자 비요른이 달려왔다.

"주군."

"다녀왔다."

"성과는 있으셨습니까?"

"그 전에 지금 병사들 상태는 어때?"

루크가 주변을 훑었다. 비교적 안정된 엘름홀트 내부와 달리 비장한 분위기가 가득했다.

비요른은 씁쓸한 얼굴로 대답했다.

"사기는 높습니다만, 다들 희생이 만만치 않을 거라 여기는 모양입니다."

"성 때문에?"

"예, 사실 저도 그리 생각합니다."

한마디로 '여기서 목숨을 바치리라' 같은 상태인가.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는 건 좋다만 계속 이러면 곤란하지.

루크가 원하는 건 저 강병들을 최대한 살려서 비요른의 정예로 삼는 거니까.

"마침 잘됐네."

"무엇이 말입니까?"

"이번 전투는 손쉽게 이길 것 같거든."

"...!"

놀라는 비요른을 뒤로하고 루크가 병사들을 바라봤다. 목숨 아까운 줄 모르는 결사대에게 기적을 보여 주도록 할까.

* * *

그로부터 이틀 후, 루크는 군대를 소집했다. 오와 열을 갖춘 소규모 군대에 불과했지만 기백 하나만큼은 엄청났다.

"공격하는 겁니까?"

"아니, 성문 앞까지 천천히 진군한다."

"화살을 쏠 텐데요."

전문 군대가 아니라 징집병이어서 수는 적겠지만 활잡이는 있을 터. 이런 소규모 군대의 접전이라면 그것만으로도 치명적이다.

그러나 루크는 미소와 함께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안 쏜다."

"화살이 없는 겁니까?"

"활잡이가 쏠 마음이 없거든."

대체 무슨 소리인가 싶은 비요른을 냅 두고 루크가 앞에 나섰다. 어쩔 수 없이 비요른은 진군 명령을 내렸다.

목숨을 건 결사대라 그런지 명령 자체는 충실히 따랐다.

'곧 화살의 사거리다.'

'젠장, 몇 명 죽겠군.'

다들 몇 번 전투를 경험해 본 덕에 사거리 정도는 알고 있었다. 모두 침을 삼키며 날아올 화살을 기다렸다.

방패를 꽉 잡고 성문 앞까지 나아갔을 때였다.

"…안 날아오네?"

병사들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젠 화살이 아니라 창을 던져도 맞을 거리. 그런데도 공격은 전혀 없었다.

놀란 병사들이 웅성거리며 서로를 바라봤다. 하지만 그들보다 몇 배로 놀란 건 성벽 안에 있는 지휘관이었다.

"도대체 왜 화살을 안 쏘는 거냐!?"

이전 루크를 쫓아냈던 기사가 기가 막혀 고참병 하나를 돌아봤다. 고참병은 쩔쩔매며 대답했다.

"그, 그게 다들 쏘려고 하질 않습니다."

"다시 명령해!"

"몇 번이고 말했습니다만 마찬가지입니다."

"이것들이 전부 돌아 버린 건가!?"

씩씩거리던 기사가 궁수를 배치한 곳을 향해 목청껏 소리쳤다.

"쏴라! 다들 쏴! 멀쩡한 화살 내버려 두고 뭐 하는 짓이냐!?"

"...."

기사의 닦달에도 호응은 없었다. 궁수들은 식은땀을 줄줄 흘리면서도 차마 활시위를 당기지 못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이거 쏴야 하는 거 아니야?"

"쏘면 나리도 우릴 죽이려 할 거 아냐."

"영주가 되면 세금도 깎아 준다던 나리인데."

자신의 의지로 배반한 병사가 삼분지 일이고.

-아들, 절대 나리에게 화살 쏘면 안 된다.

-명령 내려오면 안 쏠 수가 없다니까요! 제가 죽는다구요!

-이 멍청한 것아! 나리가 영주 되셨을 때를 생각해야지!

가족의 당부로 갈팡질팡하는 병사가 또 삼분지 일이며.

"절대 쏘면 안 돼! 다들 활 내려!"

"야, 그러다 다른 놈들이 쏘면 우리만 죽어!"

"이미 우리 이웃들은 다 가담했어. 다른 집은 안 했을 거 같아?"

가만히 있다 선동당한 병사가 나머지 삼분지 일이었다. 이러다 보니 당연히 전투가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몇 번이나 명령이 무시당하자 기사가 시뻘건 얼굴로 칼을 뽑았다.

"이놈들이 감히 항명을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