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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그날 밤, 백작의 성에서는 조촐한 연회가 벌어졌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거창하지는 않았으나 술과 고기만큼은 풍족하게 지급되었다.

갑작스러운 연회에 반사 이익을 얻게 된 건 다른 네 가문의 병력이었다.

"크하, 이게 웬 떡이야? 평소엔 볼썽사나운 모습 보이지 말라고 숨도 못 쉬게 하더니만!"

"그러게 말이야. 살다 보니 헤르닝 백작가에서 이런 대접을 받는 날도 다 있네."

아무리 루크를 위한 연회라고 해도 루크 일행은 겨우 넷. 나머지는 자연스레 끌고 온 병력의 입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병사들은 살판이 났고, 기사들 역시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정작 이들을 지휘하는 후계자들은 속이 불편했다.

'지금껏 우리에게는 연회 한 번 여신 적 없건만.'

사실 그게 당연한 일이었다. 원군으로 왔는데 전시 상황에 무슨 연회인가. 어지간히 귀한 손님도 아니고서야 기대하기 힘든 일이다.

문제는 그런 연회를 루크가 오자마자 벌였다는 점이었다.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작자이기에 저런 대접을 하신단 말인가!'

데미안이 짜증을 식히듯 벌컥벌컥 포도주를 들이켰다. 스테판 역시 별다를 것 없었다.

깨작깨작 씹는 고기의 맛은 느껴지지도 않았다. 이 거창한 대접은 대체 뭔가 싶을 뿐이었다.

루크 옆에 있는 리온을 제외하면 발터만이 속 편히 음식을 즐길 뿐이었다.

"거참, 각하께서 연회를 열어 주셨으면 즐길 줄 알아야지. 연회를 벌이는 건지 상을 당한 건지 모를 지경이군."

발터의 말에 스테판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제기랄! 발터, 네놈은 배알도 없냐? 참 잘도 먹는군."

"그럼 뭘 어쩌란 말이냐? 상이라도 뒤엎을까?"

"저놈의 허명을 벗겨 내서 각하의 눈을 뜨게 만들어야지!"

거칠게 대답한 스테판이 루크를 노려보았다. 루크는 바로 백작의 곁에서 술잔을 받는 중이었다.

그 모습에 다시금 이가 갈렸다. 굴러온 돌 주제에 상석에, 그것도 바로 백작 곁에 앉다니!

"백작 각하께서 뭔가 잘못 아신 게 틀림없어. 아니면 놈이 속임수를 썼던가."

"암, 그렇지 않고서야 열여섯 나이에 악마 살해자라는 게 말이 되나?"

고개를 주억거리던 두 사람이 이내 눈을 맞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이 보기에 루크는 운 좋게 허명을 얻은 꼬맹이였다.

조금만 상세하게 추궁해도 밑바닥이 드러날 터. 그땐 백작도 눈을 뜨고 사기꾼에게 걸맞은 대접을 해 주리라.

"각하, 드릴 말씀이...!"

-으아아아악!

데미안이 막 입을 연 순간, 가까운 곳에서 들려온 비명이 하늘에 울려 퍼졌다.

눈을 찌푸리는 백작을 향해 저 멀리서 전령이 헉헉거리며 달려왔다.

"가, 각하! 큰일 났습니다!"

"무슨 일이냐!"

"엘프! 엘프 놈들이 침입했습니다!"

"뭣!?"

전령의 말에 백작이 기함하며 일어섰다. 엘프라니! 지금쯤 숲에서 얼쩡거리고 있어야 할 놈들이 왜 여기 있다는 말인가.

병사들이 막 웅성거리며 들썩이기 시작할 때였다.

촤라라락.

"에, 엘프!"

광장에 난입한 그림자를 보고 한 병사가 기겁해 소리쳤다. 스무 개의 그림자는 병사의 말대로 엘프였다.

갑옷은 천처럼 얇으면서 룬 문자가 새겨져 있었고, 쌍검과 더불어 몇 개의 간단한 무장을 하고 있었다.

"막아라! 놈들을 결코, 컥!"

한 기사가 정신을 차리고 소리치기 무섭게 목에서 피 분수를 뿜었다. 어느새 다가온 엘프가 목을 그은 것이다.

대장으로 보이는 여자 엘프는 사방을 훑으며 소리쳤다.

"쎄-데반! 루가르 반 바하!"

"...?"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에 모든 이가 눈을 찌푸렸다. 엘프어라곤 들어 본 적도 없는데 뭐라고 하는 건지 알 수가 있나.

그 반응을 본 엘프는 혀를 차더니 냉큼 주변을 훑었다.

"카르-바하!"

"헉!"

대장으로 보이는 엘프의 시선이 백작에게로 향했다. 표적이 됐다는 걸 깨달은 백작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기사들 역시 분위기로 상황을 짐작하고 뛰쳐나왔다. 아니나 다를까 엘프들은 백작을 향해 질주했다.

"막아! 놈들이 가지 못하게 막아!"

"무, 무기가 없습니다!"

"이런 제기랄!"

기사들이 이를 갈았다. 기사야 무기가 목숨과 같이 소중하니 항상 소지하고 있지만, 평민인 병사는 아니었다.

연회를 위해서 전부 무기는 따로 보관해 둔 상황. 급한 대로 기사가 나설 수밖에 없었다.

"이놈들! 여기가 어디라고, 컥!?"

"조심해라! 이놈들 보통이 아니… 크악!"

그러나 기사들은 달려들기 무섭게 급소를 당하고 쓰러졌다. 기사가 아니라면 거의 눈에 보이지도 않을 속도였다.

"이 귀쟁이 놈이!"

후웅.

그때, 한 기사가 틈을 노리고 검을 휘둘렀다. 절대 피할 수 없는 위치. 한 놈 잡았다, 라고 생각한 순간.

터엉.

"뭣!?"

기사의 검이 뒤로 튕겨 나왔다. 검을 막은 팔목 보호대에는 은은한 룬 문자가 빛나고 있었다.

"마도구! 이런, 크헉!"

서걱.

기사의 경악이 끝나기도 전에 엘프의 검이 목을 훑고 지나갔다. 이윽고 엘프들이 거의 백작 가까이 도달했을 때였다.

"놈들이 못 가게 막아라!"

"각하를 지켜!"

다른 가문의 기사가 아닌, 헤르닝 백작가 직속 기사들이 나타났다. 엘프가 귀찮다는 듯 검을 휘둘렀을 때였다.

퉁, 소리와 함께 엘프의 검이 튕겨 나왔다. 기사의 팔목 보호대에는 엘프와 동일한 룬 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크흐, 마도구는 네놈들만 쓰는 게 아니지!"

"…바로이!"

의기양양한 기사의 얼굴에 엘프의 두 눈에서 불똥이 튀겼다. 단순히 공격이 막혔다기엔 지나치게 분노한 모습이었다.

"좋아, 이제부터 반격을… 어?"

-삐이이이.

호기롭게 기사들이 외치고 나서려던 때였다. 엘프들이 일제히 휘파람을 불었다. 그 엉뚱한 행동에 다들 멈칫했다.

한창 싸우던 도중에 저게 뭐 하는 짓인가. 의문은 곧바로 풀렸다.

스르륵.

"마, 마도구가...!?"

휘파람 소리에 새겨진 룬 문자에서 빛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몇 초가 지나자 마도구는 그저 보통의 도구로 전락했다.

"쎄-가란 바로이!"

"이, 이것들이, 크허억!"

마도구를 무력화한 엘프는 아까 전보다 더욱 맹렬하게 달려들어 기사들을 도륙했다.

방해물이 사라지자 대장으로 보이는 엘프가 백작에게 육박했다. 백작은 황급히 검을 찾았으나 허리춤이 허전했다.

"이런...!"

당황하는 백작을 향해 엘프의 검이 날아들었을 때였다.

떠엉.

"큭!?"

술잔이 날아들어 검의 옆면을 후려쳤다. 균형을 잃은 엘프가 휘청거리며 착지한 후, 방해물이 날아든 쪽을 노려봤다.

"미안하지만 그렇겐 안 되지."

"바로이!"

루크를 보고 얼굴을 일그러뜨린 엘프가 달려들었다. 그러나 그보다 빠르게 루크 뒤에서 굵직한 주먹이 튀어나왔다.

"흥!"

코웃음을 친 엘프가 팔목 보호대를 들었다. 이대로 튕겨 낸 다음 방해꾼의 목을 베어 버릴 생각인 듯했다.

가볍게 튕겨 낼 것 같았던 주먹이 팔목 보호대에 닿은 순간이었다.

꽈앙.

"꺼흑!?"

엄청난 충격과 함께 여자 엘프가 뒤로 날아갔다. 마도구의 반탄력 때문인지 10m를 넘게 날아가고도 더 멀리 굴렀다.

그 광경을 본 모든 이가 뜨악한 표정으로 입을 벌렸다, 검도 안 통하는 걸 맨주먹으로 날려 버리다니?

주먹을 날린 브루노가 어깨를 풀며 투덜거렸다.

"거, 모처럼 대접 잘 받고 있는데 방해하고 난리야."

"끄흑!"

엘프가 분한 표정으로 일어서서 브루노를 노려보며 일어섰다. 마도구 덕에 부러지진 않은 것 같으나 통증이 심한 것 같았다.

"데반-라...!"

후웅.

막 엘프가 뭐라 소리치기 직전, 또 하나의 그림자가 루크 뒤에서 튀어나왔다. 붉은 머리칼이 불꽃처럼 휘날리며 엘프에게 다가왔다.

"감히!"

"...!?"

분노한 레이와 눈이 마주친 여자 엘프가 기겁했다. 다른 엘프들이 깜짝 놀라 달려오며 칼을 날리자, 레이의 검이 번개처럼 휘둘러졌다.

쩌저저저저정.

"끄윽!?"

"...!"

사방팔방 휘둘러진 검에 일곱 명에 가까운 엘프가 뒤로 날아갔다. 그중에는 간신히 레이의 검을 막은 여자 엘프도 있었다.

엘프들은 전부 경악한 눈동자로 땅을 뒹굴며 레이를 쳐다봤다.

"주군께 검을 휘두르다니! 네놈들을 당장!"

"잠깐! 죽이지 말고 산 채로 포획해!"

바로 검을 휘두르려던 레이가 루크의 말에 멈칫했다. 잠시 망설이던 레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검을 고쳐 쥐었다.

뒤에 있던 브루노도 옆에 세워둔 창을 한 바퀴 휘두르며 레이의 옆에 섰다.

"이번에도 나누기 쉽군. 스무 명이라, 두당 열 명씩 맡읍시다."

"저 혼자 다 해치워도 됩니다만."

"아니, 해치우면 안 된다니까."

두 기사가 엘프를 막는 걸 보며 백작이 눈을 찌푸렸다. 아무리 대단한 기사라지만 겨우 두 명이 엘프 스무 명을 막다니.

하물며 그냥 스무 명도 아니다. 전신을 마도구로 무장했고 이 난공불락의 성에 잠입할 만큼의 기술이 있는 놈들 아닌가.

"루크 경, 굳이 위험을 감수하며 사로잡을 필요가 있나? 그냥 죽이게."

"위험이라뇨?"

"그야...!"

백작의 말문이 막혔다. 죽이는 것보다 사로잡는 편이 몇 배나 위험한 건 당연한 일 아닌가.

어지간한 실력 차이가 아니면 꿈도 못 꿀 일인데. 그런 백작의 의문에 루크가 웃으며 말했다.

"잘 보십시오. 무슨 위험이 있다는 말입니까?"

"...?"

루크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돌린 백작의 눈이 세차게 흔들렸다. 손가락이 가리킨 장소에서는 폭풍과 불꽃이 엘프들을 휩쓸고 있었다.

57화

제국 초창기의 어느 대학자는 이런 말을 했다.

-서부의 숲 너머에 사는 엘프들의 오만함은 끝이 없다. 그들은 모든 면에서 인간보다 뛰어나다고 믿으며, 인간들을 자신보다 열등하다고 여긴다.

여기까지 들으면 모든 인간이 비분강개한다. 제까짓 것들이 얼마나 잘나서 그따위로 구느냐고.

인간이 엘프보다 못난 게 얼마나 있느냐고 말이다. 그런데 이 격언에는 뒷말이 있다.

-비참한 건 그 말에 반박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언젠가 인간이 엘프를 뛰어넘으리라 의심치 않으나, 적어도 그날이 오늘은 아니다.

이미 전성기를 지나 인구가 계속해서 줄어들며 쇠퇴하는 종족. 그럼에도 인간은 엘프를 뛰어넘지 못했다.

육체적으로도 강인하고 민첩한 데다, 인간이 유실한 고대의 마법을 이어받았으며, 지금은 소실된 마도구 제작법도 내려오고 있다.

이러다 보니 엘프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은 극도로 전투를 피한다.

-인간보다 재빠른 놈들이 마도구로 무장하고 마법까지 날려 대는데 그걸 어떻게 이기라고? 최소 열 배 이상의 머릿수 없으면 싸우지 마.

열 배. 그나마도 승산을 최소한으로 잡았을 때이며, 안정적으로 이기려면 스무 배는 있어야 한다는 게 용병들의 중론이었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서 상식을 뒤집어엎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쩌어엉.

"아악!"

후려치는 창날을 간신히 방어한 엘프 전사가 뒤로 나가떨어졌다. 그 빈자리를 엘프 전사 셋이 메꾸며 달려들었다.

세 사람이 한 몸이 된 것 같은 날카로운 움직임. 그러나 결과는 별다를 것도 없었다.

꽈아앙.

"컥!"

"크흑!"

공격이 닿기도 전에 다시금 창대가 움직였고, 일제히 세 명의 엘프를 동시에 날렸다.

땅을 몇 바퀴 구른 이들이 다시 일어나려고 했지만, 욱신거리는 통증에 얼굴을 찌푸리며 비틀거렸다.

"아서라, 계속 막아 댔으니 온몸의 뼈가 비명을 지를 거다. 지금 부러지기 직전일걸?"

"...!"

브루노의 미소에 엘프가 이를 갈았다. 무슨 소린지는 알아듣지 못해도 여유로운 모습이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었다.

창으로 어깨를 툭툭 두드리는 브루노를 향해 레이가 다가왔다.

"브루노 경."

"어, 벌써 끝났소?"

"경께서도 제대로 하셨으면 진즉 끝내셨을 텐데요."

흠칫한 여자 엘프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레이를 공격했던 다른 전사들은 어느새 전부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흙먼지로 바닥을 뒹굴며 꿈틀대는 전사들의 모습에 여자 엘프의 눈이 뒤집혔다.

"쎄-데란!"

투확.

종아리에 찬 각반의 룬 문자가 빛나며 여자 엘프가 달려들었다. 지금까지와 비교도 안 되는 속도.

벼락처럼 쇄도하는 쌍검을 보고 기사들이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위, 위험하...!"

뻐억.

"케흑!"

"...!?"

하지만 걱정도 무색하게 브루노는 파리를 쫓는 것처럼 여자 엘프를 후려쳐 떨어뜨렸다.

그대로 기절해 버린 여자 엘프를 옆으로 툭 밀어서 치우며 브루노가 창을 휘둘렀다.

"그럼 나도 슬슬 끝내야겠군."

"바, 바로이...!"

엘프 전사들이 뭐라 더 소리치려 했으나 브루노는 듣지 않았다. 창이 몇 번 더 휘둘러지고 나자 마지막 전사들도 기절한 채로 쓰러졌다.

모든 엘프를 산 채로 제압한 걸 확인한 루크가 고개를 숙였다.

"각하."

"으, 응?"

"모두 제압했습니다."

"...."

아무렇지도 않게 담담히 말하는 루크를 보며 백작이 침을 삼켰다. 최소 열 배의 숫자가 있어야 제압한다는 엘프다.

엘프 전사라면 인간 기사 열 명이 달려들어도 공멸하지 않고 죽일 가능성이 없는 수준.

'그런데 그 엘프가 열 배의 숫자로 달려들었는데 산 채로 제압하다니.'

경외감에 백작이 마른침을 삼켰다. 엘프들과 싸우는 와중 이런 이들을 휘하에 둔 루크가 찾아오다니.

어쩌면 이건 여신의 인도 아닐까. 저 간악한 엘프 놈들을 무릎 꿇리고 인간의 시대를 열라는 계시.

'그렇다면 여신의 신도로서 기꺼이 따라야겠지....'

백작의 두 눈동자에 위험한 욕망이 번뜩였다.

* * *

연회는 최악의 형태로 끝났지만, 다행히 피해는 놀랍도록 적었다. 엘프의 앞길을 막느라 희생당한 기사 서른 명 정도에서 끝났으니까.

물론 이 정도도 가벼운 피해는 아니었으나, 엘프들의 침입에도 백작과 다른 가문의 자제들이 무사했다는 점에서 기적에 가까웠다.

"내 불민함에 모두를 위험에 처하게 했군. 이리 사과하겠네."

"아, 아닙니다, 각하!"

"고개를 들어 주십시오!"

다음 날, 루크와 다른 가문의 자제들을 불러 백작이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에 리온을 포함한 네 가문의 자제들은 쩔쩔맸다.

그야 습격을 당한 것 자체는 집주인에게 책임이 있으나, 누가 감히 백작에게 당신 책임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백작 역시 고개를 잠깐 숙이다가 못 이기는 척 슬그머니 머리를 올렸다.

"그나저나 감히 내 암살을 시도하다니. 이걸로 놈들과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군."

"으음...."

백작의 말에 네 가문의 자제들이 신음을 흘렸다. 어제 스무 명의 엘프 전사들에게 농락당했던 기억이 생생했다.

그런데 이번엔 귀쟁이 군대와 싸우자고? 그것도 평범한 국지전이 아니라 전면전으로?

'아무리 생각해 봐도 수지가 안 맞는데.'

'적당히 원조나 하려고 왔더니만, 이래서야 목숨을 걱정할 처지군.'

한참 머뭇거리는 자제들 사이에서 발터가 입을 열었다.

"각하, 애초에 이 전쟁은 왜 시작된 겁니까? 엘프 놈들과 소요가 있는 건 드물지 않지만, 놈들이 암살을 시도한 건 처음 봤습니다."

한마디로 '어지간해서는 안 하는 짓까지 하는데 대체 뭘 건드린 거냐'라는 추궁이었다.

어지간하면 그냥 넘기겠지만, 목숨까지 걸 상황이 되니 도저히 안 물어볼 수가 없었다.

백작은 눈을 확 찌푸리며 이를 갈았다.

"시작은 간단했네. 놈들이 사냥을 나온 내 기사들을 상대로 '인간 사냥'을 했기 때문이지."

"예? 인간 사냥이라 하시면...."

"말 그대로일세. 나중에 듣자 하니 재미로 그랬다더군. 열등종을 사냥하는 건 짐승 사냥하고 다를 것도 없다면서 말이야. 이게 말이 되는 소린가?"

백작이 분노하며 책상을 후려치자, 다른 가문의 자제들 역시 입술을 깨물었다. 인간 사냥이라니!

인간 자체를 무시하는 건 알고 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심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그 기사들은...."

"몇 명이 상처를 입기는 했으나 다행히 근처에 날 포함한 다른 이들이 있었다네. 우리는 놈들을 사로잡았지."

"죽이지 않으신 겁니까?"

"죽이고 싶었지. 하지만 분노로 죽이기엔 놈들의 기술이 너무 유용했지. 나는 거래를 제안했네. 마도구 제작 기술을 알려 주면 용서해 주겠다고 말일세."

"아!"

그제야 사정을 알게 된 귀족 자제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많은 마도구가 어디서 튀어나왔나 했더니만 엘프에게서 나온 거였나.

"그렇다면 기술은...."

"아직 다 배우진 못했네. 제대로 배우려면 한세월이 걸리겠더군. 자네들에게 준 물건들은 놈들을 시켜 만든 것일세."

주변 사람들의 눈이 반짝였다. 만약 이 말이 사실이라면 헤르닝 백작가는 자체적인 마도구 제작법을 소유하는 셈이다.

황실에서조차 실전된 비법이다. 그 가치는 환산할 수 없을 만큼 어마어마했다. 만약 그 편린이라도 배울 수 있다면 어떨까.

아주 가벼운 마도구라도 자체 제작이 가능하다면?

'만들어 파는 것만으로도 금화가 산처럼 쌓이겠지.'

'마도구를 구하려고 서부에 오는 유동 인구도 늘어날 거야.'

'결과적으로 서부 전체가 부흥하게 된다.'

귀족 자제들이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그저 물건만 어디서 얻은 게 아니라 자체 제작이 가능하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이건 가문의 명운을 걸고 도전해 볼 만한 과업이었다.

"그렇다면 그 암살 시도는 어떻게 된 겁니까?"

"놈들의 동포지. 빌어먹을, 그 귀쟁이 놈들은 배상이란 걸 이해하지 못하더군!"

백작은 분노가 폭발한 듯 책상을 후려쳤다.

"제 놈들 동포가 잘못한 건 모르고, 어디서 감히 열등종이 고귀한 엘프를 잡아 가두냐고 성질을 부렸지! 거부했더니 바로 공격했고! 그게 이 전쟁의 시작이었네!"

"...."

다들 할 말을 잃었다. 백작의 말에 따르면 아무리 봐도 이건 엘프 쪽의 잘못이었다.

한마디로 잘못은 먼저 했으면서 아무 보상도 안 하고 '인간 따위가 어딜' 하는 태도가 아닌가.

이래서야 백작이 분노하는 것도 당연했다.

'그게 진실이라면 말이지.'

날카롭게 쳐다보는 루크의 시선을 눈치채지 못한 백작이 크게 소리쳤다.

"이번 기회에 본때를 보여 주지 않으면 놈들은 끝없이 기어오를 게 뻔해! 자네들도 그리 생각하지 않는가?"

"실로 옳으신 말씀입니다!"

"이대로 물러난다면 한 가문이 아니라 인류의 수치가 될 겁니다!"

백작의 말에 귀족 자제들이 일제히 동의했다. 물론 순수하게 정의를 위해서 맞장구를 치는 건 아니었다.

이대로 물러서면 마도구 제작법도 유실될 터. 제국의 세력도를 바꿀 수 있는 기술을 어찌 포기하겠는가?

"실로 고맙네. 내 자네들의 이웃인 게 자랑스럽군."

"과분한 말씀이십니다."

"헤르닝 백작가의 일은 저희의 일이나 다름없습니다."

적극적인 동의에 백작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답을 받은 백작은 슬쩍 루크를 쳐다봤다.

"경께서도 힘을 보태 주겠는가?"

"저는 윈슬로우 가문의 조력자로 왔습니다. 윈슬로우 가문이 돕겠다고 하면 저 역시 기꺼이 나서겠습니다."

루크의 말에 리온의 어깨가 들썩이고, 나머지 세 가문의 자제가 몸을 움찔거렸다.

어제 인간 같지 않은 두 기사의 무력을 본 이들이다. 이젠 루크에게 반항은커녕 리온마저 함부로 대하기 힘들었다.

'제기랄,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설설 기던 놈인데.'

'염발경이 누님이라고 했지? 이거 계속 숙이고 살아야 하나?'

다른 이들의 머리가 팽팽 돌아가고 있을 때, 백작의 미간은 살짝 좁혀졌다. 마음에 드는 답변이 아니었다.

윈슬로우 가문이 결정을 철회하면 자신도 따라가겠다는 듯한 대답이니까.

'하기야 당연한가.'

이 상황에서 루크가 얻을 이득은 거의 없었다. 다른 가문이야 천문학적인 마도구를 지속적으로 공급받거나, 마도구 제작 기술의 일부라도 얻어 갈 것이다.

하지만 루크는 아니다. 얻는 건 오직 명예가 전부였다. 따로 챙겨 주려고 해도 여의치가 않았다.

'저 머나먼 동부까지 마도구가 온전히 도달한다는 보장도 없지. 기술같이 귀중한 지식은 말할 것도 없고.'

재보든 기술이든 어디서 유출될지 알 수가 없다. 설령 유출되지 않는다고 해도 서부의 다른 가문들이 못 가져가게 막을 것이다.

배분할 사람이 늘어난다는 건 그만큼 자기 몫도 줄어든다는 뜻이니까.

"루크 경, 그대에게만 긴히 할 말이 있는데 밤에 잠깐 와 주겠나?"

"그리하겠습니다."

백작의 말에 다른 가문의 자제들이 잠깐 움찔거렸으나, 이내 잠잠해졌다. 이젠 루크가 받는 특별 대우도 충분히 납득할 수 있었으니까.

오히려 이젠 처음에 깐족댔던 게 후회스러울 지경이었다.

'처음 관계만 잘 맺었다면 우리 편이 되었을 수도 있는데....'

다른 가문의 자제들은 아쉬움과 함께 회의는 끝났다. 백작은 나가는 루크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봤다.

전쟁에서 얻을 이득이 없다면, 아예 이득을 만들어서 주면 될 일이었다. 절대 거부하지 못할 이득을.

* * *

그날 밤, 루크는 약속했던 대로 백작을 만나기 위해 응접실로 왔다. 백작은 루크를 반기며 포도주를 건넸다.

가벼운 잡담과 마음에도 없는 덕담. 으레 귀족들이 하는 사교적 멘트를 날리던 도중이었다.

분위기가 무르익었다고 생각했는지, 백작이 본론을 꺼냈다.

"이보게, 루크 경. 나는 자식이 없다네. 아내는 일찍 죽었고, 자식은 여태껏 보지 못했지."

"새장가를 드시기엔 늦지 않은 나이지 않습니까."

"말은 고맙네. 하지만 격이 맞는 여인이 없어."

백작은 깊게 한숨을 쉬며 창문 밖을 바라봤다. 그 아래에는 네 가문의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서부의 균형을 위해서라도 저 네 가문은 안 돼. 격은 높지만 몰락한 가문이나, 서부 외에 다른 가문에서 찾아야 하지. 둘 다 불가능한 일이야."

어느 날 갑자기 몰락한 백작가나 자작가의 여식이 뚝 떨어질 리도 없다. 다른 지방의 여인은 몬스터투성이의 땅에 발도 들이기 싫어한다.

나이라도 젊으면 모를까 진즉에 쉰을 넘긴 나이다. 가문을 날로 먹을 야망이 가득한 여자가 아닌 한 올 이유가 어디에도 없었다.

"그럼 답은 양자뿐이지. 귀족 가문에서는 드문 일도 아니고."

루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후계가 사라진 귀족 가문에서 양자를 들이는 일은 분명 드물지 않았다.

"자네가 내 아들이 된다면 소원이 없겠지만...."

"과분한 말씀입니다. 부디 거둬 주십시오."

루크는 조금도 고민하지 않고 백작의 말을 거절했다. 번스타인의 이름을 써먹을 곳이 아직도 사방팔방 널려 있었다.

아무리 서부에서 행세 좀 하는 가문이라 하나, 유명세로는 한참 밀리는 헤르닝 백작가다.

굳이 번스타인의 이름을 버리고 들어갈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몬스터 득실거리는 땅이라 뭐 건져 먹을 것도 없고.'

속내를 숨기는 루크를 보며 백작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럴 것 같았네. 자네라면 더 먼 곳을 보고 있을 것 같았지."

"각하, 그게 아니라...."

"됐네. 나도 헤르닝이라는 이름이 자네를 품기에 너무 좁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거기서 잠깐 말을 멈춘 백작은 루크를 은근한 눈초리로 바라봤다.

"하지만 자네가 아닌 다른 이를 품기엔 충분하지 않겠나?"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레이 경이라고 했었던가? 그 별명처럼 가히 불꽃을 연상시키는 기사더군. 그 늠름하고도 아름다운 자태는 진정 서부의 딸이었어."

"그렇습니까?"

"서녀라 가문에서 많이 박대했을 텐데 그토록 고고하게 자랐다니. 보면 볼수록 대단해."

맞장구를 쳐 주면서도 루크는 이상함에 눈을 껌뻑였다. 여기서 갑자기 레이가 왜 나오지?

잠시 뜸을 들인 백작이 루크의 앞에서 폭탄을 터트렸다.

"그녀를 내 후계자로 삼을까 하네."

"...!"

58화

예상치 못한 제안에 루크가 마른침을 삼켰다. 루크가 아니라 루크의 기사를 후계자로 삼는다. 얼핏 듣기에는 최악의 제안이다.

아무리 종신 계약을 맺었다지만 레이는 루크 휘하의 기사. 군주보다 더 출세하는 모양새가 보기 좋을 리가 없다.

자칫하면 맹세가 파기되어 군신 관계가 뒤틀릴 수도 있다.

'분명 초대 황제도 자주 써먹은 방식이었지.'

유능한 가신과 군주의 사이를 망가뜨리고, 서로 원수로 만들어 견제함으로 황권을 강화하는 악랄한 방식.

그러나 이 모든 건 단 하나의 조건이 성사되면 압도적인 이득으로 변한다.

'휘하 기사의 절대적인 충성.'

주군보다 출세하더라도 절대적인 충성을 계속 바친다면. 자신이 얻은 모든 걸 주군을 위해 쓰려고 한다면.

군신 관계를 망치는 최악의 제안이 아니라 더할 나위 없는 최고의 제안으로 바뀌는 셈이다.

그리고 루크는 확신하고 있었다. 레이라면 틀림없이 그 모든 걸 자신을 위해 쓸 기사라는 걸.

"자네가 어디까지 가려고 하는지는 모르네. 하지만 아무리 작게 잡아도 변경백 아래는 아니겠지. 미리 힘 있는 가신을 손에 넣어도 나쁠 거 없지 않나?"

대담한 발언이었다. 서부의 패자에 가까운 백작가가 당당히 후일 누군가의 휘하에 들 것을 공언하다니.

이건 대놓고 먹으라며 가문을 건네주는 거나 다름없었다. 루크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아무리 봐도 함정인데 미끼가 너무 먹음직스럽군.'

서부의 네 가문을 당연한 듯이 깔아 보던 발데마르 백작이다. 그런 이가 아무리 크게 될 것 같다지만 누군가의 아래에 들어가겠다고?

분명 무언가 꿍꿍이가 있었다. 하지만 백작의 제안은 그 모든 꿍꿍이를 감수하고서라도 걸어 볼 만큼 매력적이었다.

"참고로 레이 경이 수락하겠다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어떻게 되긴? 즉시 내 양녀로 삼아 후계자 발표를 해야지."

"전쟁이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말입니까?"

"오히려 그러니 더더욱 서둘러야지 않겠나. 내가 잘못될 가능성도 있으니."

슬쩍 떠볼 때마다 백작은 루크에게 유리한 제안을 내놓았다. 이게 사실이라면 덥석 물어도 손해 볼 게 없었다.

"알겠습니다. 레이 경에게 말해 두지요."

"오오! 그렇게 해 주겠나?"

"다만 레이 경이 거부한다면 저도 어쩔 수 없습니다."

"상관없네. 부디 전달만 잘해 주게나."

뒤로 빠질 구멍을 남겨 두었지만, 백작은 웃음을 지우지 않았다. 이젠 거의 성사된 거나 마찬가지라고 여기는 것 같았다.

"얘기가 잘 진행되어 실로 기쁘군. 내 자네에게도 따로 선물을 하나 할까 하네만."

"선물이라니요?"

"보면 알 걸세."

짝짝.

백작이 손뼉을 두 번 두드리자, 바깥에서 두 명의 하인이 누군가를 끌고 들어왔다.

바닥에 힘없이 털썩 주저앉은 누군가의 모습에 루크가 눈을 크게 떴다.

'어제 싸웠던 엘프잖아?'

그것도 지휘관으로 보이던 여자 엘프였다. 다만 그녀의 모습은 어제와 전혀 달랐다.

룬이 새겨진 가죽 갑옷은 얇은 비단옷으로 바뀌었고, 손목과 발목에는 힘줄을 자른 듯한 자상이 나 있었다.

"자네에게 주는 선물일세. 어떤가, 마음에 드는가?"

"가, 각하...!"

루크는 감동한 얼굴로 백작을 쳐다봤다. 엘프 노예. 말로는 들어 봤지만 설마 살면서 직접 볼 줄은 몰랐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각하! 제가 이런 선물을 받을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허허, 이렇게나 기뻐할 줄이야. 진즉에 선물을 줄 걸 그랬네."

백작은 껄껄 웃으며 루크를 일으켜 세우며 어깨를 두드렸다.

"부디 레이 경에게 잘 좀 말해 주게. 내 나름의 뇌물이라네."

"여부가 있겠습니까, 각하!"

"하하하, 내가 지금까지 너무 붙들어 뒀군. 자, 숙소에 가서 푹 쉬게나!"

"예,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루크는 즉시 엘프를 거느리고 방을 나갔다. 여자 엘프는 나름대로 저항하려 했지만, 힘줄이 잘린 탓에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루크가 사라지고 방문이 닫히자, 그 즉시 백작의 눈이 싸늘해졌다.

"쯧, 결국 색욕에 휘둘리는 애송이였나."

이래서야 높이 평가했던 백작 자신이 우스울 지경이었다. 하지만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았으니 더 다루기 쉬워졌다.

'어쨌건 이걸로 놈은 전쟁에 확실히 붙들어 둘 수 있게 되었군.'

저 선물을 받아 든 이상 빠지려고 해도 빠질 수 없을 터. 이제 루크는 백작의 말 중 하나가 되어 쓰이게 되리라.

백작은 차갑게 루크를 비웃으며 포도주를 들었다. 남은 건 다가올 전쟁을 기다리는 일뿐이었다.

* * *

"…그래서 이 엘프를 받아 오셨다고요?"

"그렇다니까."

맥스가 아연한 얼굴로 엘프와 루크를 번갈아 가며 쳐다보았다. 표독스러운 눈동자는 당장이라도 씹어 죽일 듯한 살기로 가득 차 있었다.

조금도 기가 죽지 않은 엘프를 보고 브루노가 웃었다.

"주군께서는 이런 여자가 취향이셨습니까?"

"뭔 소리야?"

"에이, 아시면서. 정숙한 여자보다는 가시가 있는 여자 쪽이… 켁!"

빠악.

한창 조잘거리던 브루노의 눈에 별이 반짝였다. 옆에서 나무 컵을 집어 던진 레이가 하나도 미안하지 않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이런, 실수로 컵을 놓쳤군요."

"일부러 집어 던진 거 같은데!?"

"착각입니다."

냉기가 풀풀 날리는 목소리에 모든 남자가 움찔했다. 루크조차 얼음장 같은 표정을 보고 잠시 식은땀을 흘렸다.

"…오늘 뭐 기분 나쁜 일이라도 있었어?"

"없습니다, 주군. 제 기분은 평소와 다름없습니다."

"아닌 거 같은데."

"착각입니다."

더 물어봤다간 입에서 고드름이 튀어나올 기세였다. 루크는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렸다.

지금 레이는 안 건드리는 편이 좋아 보였으니까. 잠시 헛기침을 한 맥스가 살기 어린 눈동자의 엘프를 바라봤다.

"그나저나 어떻게 이 여자, 안 받는 게 좋았던 거 아닙니까?"

"왜?"

"왜라니요. 귀쟁이 놈들 동포애는 알고 계시잖습니까. 자칫하면 주군이 표적이 될 수도 있습니다."

어제 암살 시도로 볼 때, 엘프들의 증오는 백작 한 명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하지만 루크가 엘프 노예를 선물로 받은 이상 이야기가 달라진다.

한 명이라도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엘프의 분노는 루크에게도 향하게 될 터. 그러다가 루크가 큰 상처라도 입는다면 가볍게 끝날 일이 아니다.

"자칫하면 번스타인 가문까지 이 일에 끼어들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게 목적이겠지."

"예?"

"백작은 의도적으로 이런 선물을 한 거야. 내가 엘프들의 표적이 되도록. 그래야지 브루노와 레이를 마음껏 활용할 수 있고, 번스타인 가문도 합세하게 만들 수 있으니까."

"그걸 알면서 받으셨다고요?"

"왜냐면 받는 편이 이득이었거든."

루크는 피식 웃으며 엘프에게 다가갔다. 씹어 먹을 듯한 표정으로 노려보는 여자 엘프를 향해 루크가 말했다.

"알브-세덴. 데아란 로 르아."

"...!"

"...!?"

여자 엘프의 눈이 경악으로 치떠졌고, 다른 가신들도 기겁한 표정으로 루크를 쳐다봤다.

"주군, 엘프어 하실 줄 알았습니까!?"

"예전에 배운 적이 있지."

"방금 전 하신 말씀은...."

"내가 하는 말 알아듣겠냐고 했지. 다행히 잘못 배운 건 아닌 모양이네."

여자 엘프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루크를 보았다. 인간에게서 엘프어가 나왔다는 사실에 정신을 못 차리는 듯했다.

루크는 재차 엘프어로 물어봤다.

「알아들었으면 무슨 말이라도 해라. 언제까지 입을 다물고 있을 거냐?」

"...."

여자 엘프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그러더니 입을 크게 벌리고 안쪽을 보여 줬다. 입안을 들여다본 맥스가 눈을 찌푸렸다.

"혀가 잘렸군요."

"염병할 영감탱이."

루크가 백작을 떠올리며 욕설을 내뱉었다. 도망치지 못하게 하려는 손발의 힘줄은 그렇다 쳐도 혀까지 자를 줄이야.

"날 엘프의 적으로 만들려고 작정을 했구만."

"이래서야 전장에서 마주치면 해명도 못 하겠네요."

"그래도 다행이군. 지혈만 해 놔서 아직 아물진 않았어."

"예? 그게 어째서 다행입니까?"

"이걸 쓸 수 있으니까."

품속에서 루크가 엘릭서를 담긴 유리병을 꺼냈다. 깜짝 놀라는 가신들을 뒤로 하고 루크는 엘프에게 다가갔다.

「마셔라.」

"...!"

「엘릭서다, 이 머저리야. 독약 아니니까 거부하지 마. 잘린 혀랑 힘줄 재생시키고 싶으면.」

"...!?"

완강히 거부하며 고개를 돌리려던 여자 엘프가 경악하며 눈을 치떴다. 잠시 망설이던 엘프는 이내 마지 못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루크는 그대로 엘프의 입에 엘릭서를 따랐다. 꼴깍거리며 엘릭서가 목을 타고 넘어간 후, 괴로운 듯 엘프가 몸을 뒤틀었다.

"끄윽!"

"왜, 왜 저럽니까?"

"재생되는 과정이 아픈 거겠지. 혀는 좀 뭉텅이로 잘렸으니까."

루크의 예상대로 잠시 움찔거리던 엘프는 곧 진정하며 입을 벌렸다. 핏자국이 조금 있기는 했지만 잘린 혀는 어느새 재생되어 있었다.

팔다리의 힘줄도 나은 건지 제자리에 일어나서 몇 번 껑충거리며 뛰었다. 얼굴에 환히 미소를 짓기 직전, 루크를 인식한 엘프가 냉큼 얼굴을 굳혔다.

「감사 인사는 하지 않겠다, 인간. 네놈들한테 잡히지 않았다면 내가 다칠 일도 없었을 테니.」

「바라지도 않았으니 됐다. 그나저나 네 이름이 뭐냐?」

「너는 내 이름을 들을 자격이 없다.」

턱을 치켜들며 말하는 여자 엘프를 보고 루크가 헛웃음을 지었다. 이래서 귀쟁이들 상대하기가 싫었다.

오만함이 하늘을 찔러서 구해 줘도 감사할 줄을 모르니까.

「미안한데 내가 널 구해 준 건 죄책감을 느껴서도, 두려워서도 아니다. 너희와 이 가문의 가주가 왜 전쟁을 벌였는지가 궁금해서지.」

「뭐? 그럼 넌 이곳을 다스리는 성주의 부하가 아닌 건가?」

「그래, 하지만 네 그 태도가 날 망설이게 하는군. 가주가 잘못을 저질렀다면 이대로 빠지거나 너희들 편을 들려고 했는데 말이야. 그냥 협력해서 너희와 싸우고 보상이나 받을까?」

여자 엘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엘프는 기본적으로 소수 정예다. 듣기에는 거창하지만, 이건 엘프가 의도한 게 아니다.

하도 인구가 부족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소수 정예가 된 거다. 당연히 한 사람의 손실이 인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그런데 엘프 열 명도 간단히 제압하는 루크 휘하의 기사들이 전쟁에 낀다면? 전쟁의 향방을 좌우하는 무게추가 될 수도 있었다.

「말하지 않겠다면 어쩔 수 없지. 곧 있을 전투 준비나 해야겠어.」

「자, 잠깐만! 이름을 알려 주겠다!」

「글쎄다, 생각해 보니 이제 와서 듣는 것도 귀찮고....」

「엘디라! 검의 대공 아라티온의 첫 번째 자녀인 엘디라다!」

막 일어서려던 루크가 걸음을 멈췄다. 지금 이 귀쟁이가 뭐라고 한 거지?

「지금 뭐라고 했나?」

「내 이름은 엘디라라고 했다!」

「그 이전에 말이다! 네가 누구의 첫 번째 자녀라고?」

「검의 대공 아라티온이 내 아버지다.」

루크가 뺨을 푸들거렸다. 단박에 모든 게 이해가 갔다. 왜 인구 부족으로 허덕이는 엘프들이 엄청난 손해를 감수하고 다섯 가문을 멸문시켰는지.

왜 지금 몬스터가 사방팔방 튀어나올 정도로 엘프 군대가 주변을 쑥밭으로 만들고 있는지. 그리고 왜 백작이 이 엘프를 자신에게 떠넘겼는지까지.

'이 미친 영감탱이가 엘프 대공의 딸을 건드렸구나.'

59화

엘프에게는 왕이 없다. 개념 자체는 있으나, 고대 이후로는 옥좌에 누구도 앉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하다. 고대 이후 뿔뿔이 흩어진 엘프를 통합한 자가 아무도 없으니까.

그렇기에 각 영역에서 엘프들을 지배하는 자는 스스로를 왕이라 하지 않고 대공이라 칭했다.

즉, 대공이라면 사실상 왕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현재까지 살아남은 엘프의 나라가 서부 너머에 존재하는 단 한 곳뿐이라면 더더욱.

'그러니까 이 아가씨는 엘프의 공주인 셈인가.'

엘프들이 난리를 칠 만도 했다. 안 그래도 손이 귀한 엘프인데, 하물며 보통의 귀족도 아니고 공주라니.

대공만이 아니라 서부 너머 모든 엘프들의 눈이 뒤집혔겠지. 다만 아직도 풀리지 않는 의문이 몇 개 있었다.

「도대체 대공의 딸이 여기에는 왜 온 거냐?」

그토록 귀한 피라면 금이야 옥이야 길렀을 터. 그런 엘프 대공의 딸이 전장 한복판에 와서 암살 임무를 수행한다고?

말이 되질 않는 소리였다. 인간의 영역 근처에만 가도 다른 엘프들이 발작을 했을 텐데.

「지휘관이 대공인 이상 네 작전을 허락할 리가 없었을 텐데.」

「여기서 아버지가 왜 나오는 거냐? 이건 내 전쟁이다!」

「뭔 소리야? 전쟁을 지휘하는 건 네 아버지일텐데.」

「너야말로 무슨 소리냐? 성주와 나의 전쟁에 왜 아버지를 끌어들이지?」

루크와 엘디라는 서로를 바라보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쩐지 말이 맞물리지 않았다.

「잠시만 이야기 좀 정리해 보자. 그러니까 대공은 이 전쟁에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아까 전부터 그렇게 말했잖은가.」

「내가 듣던 것과는 조금 다른데.」

루크는 엘디라에게 백작이 말했던 내용을 그대로 읊어 줬다. 내용을 들을 때마다 엘디라의 얼굴이 점차 붉어졌다.

인간 사냥의 보상으로 마도구 제작 기법을 전수받기로 했다는 대목에 이르자, 더는 참지 못하고 소리를 빽 질렀다.

「거짓말이다! 애초에 우리들도 모르는 걸 어떻게 알려 주란 말이냐!?」

「모른다고?」

「당연히 모르지! 애초에 그들은 사냥꾼이자 전사다! 너희 인간은 기사가 직접 검을 제련하나?」

한마디로 백작이 잡아간 엘프 중 기술자는 하나도 없다는 소리였다. 엘디라는 분을 삭이며 사건의 전말을 입에 담았다.

* * *

시작은 엘디라의 가벼운 일탈이었다. 새장 속 새처럼 지내던 엘디라는 우연히 어느 소문을 들었다.

인간 영역 근처가 사냥의 명소이며, 젊은 엘프들이 그 주변에서 곧잘 사냥을 즐긴다는 이야기를.

흥미가 동한 엘디라는 편지를 남기고 궁정에서 몰래 빠져나왔다.

「…그러니까 가출했다고?」

「가, 가출이 아니다. 사후 승낙이다.」

그게 그거지 뭘. 루크가 쏘아보자 엘디라는 못 들은 척 말을 계속했다.

「나는 얼마 안 가 소문의 장소에 도착했다. 거기서 다른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지.」

처음에 다른 엘프들은 엘디라의 신분을 듣고 기겁했으나, 이내 같이 사냥을 하며 친해질 수 있었다.

그렇게 젊은 엘프들과 엘디라가 일탈을 즐기던 도중이었다. 어느날 백작의 기사를 목격한 엘디라의 친구 한 명이 제안했다.

'사냥 놀이'를 한번 해 보지 않겠느냐고.

「미쳤군.」

「진짜 사냥이 아니다! 사냥 놀이다! 최대한 안 다치게 하면서 한쪽으로 몰아가는 게 규칙이었고....」

「규칙 따윈 아무래도 좋아. 남의 집 안마당에서 대체 뭔 생각으로 그런 거냐?」

루크가 혀를 차자 엘디라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잡혀서 힘줄과 혀가 잘려 본 지금은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실감하고 있겠지.

「하고 싶은 말은 산더미지만 일단 계속 해 봐. 그래서 어떻게 됐지?」

「…사냥 놀이는 얼마 안 가서 성주에게 들켰다. 하지만 그때까진 별로 걱정하지 않았어. 크게 다친 인간도 없었으니까.」

아무리 화가 난다 한들 엘프와의 관계를 생각하면 불평만 하고 말겠지. 엘디라를 비롯한 모든 엘프는 그리 생각했다.

안일한 생각이었다. 백작은 아무 말 없이 다가와 그대로 엘프들을 제압했다.

엘프들은 저항하려 했으나, 처음 기습으로 잡힌 두 명의 인질 때문에 무기를 버릴 수밖에 없었다.

「나는 간신히 탈출했지. 친구들이 나만큼은 잡혀선 안 된다며, 억지로 떠밀어 보냈어.」

「그렇겠지.」

엘프의 공주가 잡히면 그 파급력은 장난이 아니다. 멍청한 어린 놈들이지만, 적어도 그 정도 분별력은 있었을 거다.

「그 이후엔? 대공에게 알렸나?」

「아니.」

「안 알렸다고? 그 지경이 되어서도?」

「무슨 수로 말씀을 드리란 말이냐? 밖에서 위험하게 놀다가 친구들이 인간에게 다 붙잡혔고, 난 혼자 도망쳤다고?」

엘디라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수치심과 부끄러움이 뒤섞인 얼굴이었다.

「난 그럴 수 없었다. 내 명예가 나락에 떨어질 테니까. 최소한 성주를 죽이고 친구들을 되찾은 후에 말씀드릴 생각이었지.」

「무슨 수로? 대공의 도움도 못 받았다며?」

「조금 떨어진 장소에 레인저 양성소가 있었거든. 내 권한을 써서 징발했다.」

"...."

이 미친년이. 루크는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소리를 간신히 삼켰다. 차라리 대공한테 말해서 군대를 이끌고 왔어야지.

그랬으면 최소한 백작이 겁이라도 먹었을 텐데. 그놈의 자존심 챙기겠다고 최악의 선택을 해 버렸다.

「그게 어제 습격이었고?」

「그래! 비록 실패했지만, 너희만 없었으면 성공했을 거다!」

「…마지막으로 묻겠는데 연회를 한다는 정보는 어디서 얻은 거냐?」

「연회? 아, 그러고 보니 어제 술판을 벌이고 있었지. 인간들의 연회였나?」

루크가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었다. 이제 모든 상황이 이해가 갔다. 진실이란 게 너무도 어이가 없었다.

"미치겠군."

"뭔가 알아내셨습니까?"

뒤에서 묻는 맥스를 향해 루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모여 봐. 나랑 상의 좀 하자."

* * *

"…그러니까, 이 모든 게 다 저 공주님의 가출 때문에 벌어진 일인 겁니까?"

"그리고 백작의 욕심 때문이지."

루크가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백작은 엘프들의 옷차림을 보고 신분을 짐작했을 거야. 기회가 온 김에 인질로 잡고, 마도구 제작법과 교환하려고 한 거지. 엘디라가 얼마나 거물인지 몰랐던 게 유일한 실수였어."

"전쟁이라면서 원군을 요청했던 건?"

"숫자를 늘리기 위한 구실이야. 어차피 한 번은 엘프들과 대치해야 하니 머릿수를 불려서 위협할 속셈이었겠지."

그리고 만에 하나 진짜 눈이 뒤집힌 엘프들의 공격 가능성도 염두에 두었을 거다. 여기까진 백작의 의도대로 되었다.

문제는 엘디라가 끼어들면서 판이 너무 커졌다는 거다. 이제 상황은 백작이 제어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섰다.

"들어 보니 어제의 연회 때 습격한 것도 순전히 우연이더군."

"예? 그럼 무작정 공격하고 본 겁니까?"

"그래, 겨우 스무 명이서."

회귀 전에는 그때 엘디라가 죽었겠지. 그토록 철통같이 경비를 서고, 혹시 모를 전투를 준비하던 백작이다.

어느 정도는 피해를 줬겠지만, 최종적으로는 모조리 살해당했을 거다. 그리고 대공은 딸의 시체를 돌려받았으리라.

'그야, 눈 돌아가서 싹 다 쳐 죽이지.'

루크가 엘디라를 산 채로 제압하지 않았다면. 엘디라의 잘린 혀와 힘줄을 치료하지 않았다면.

이번 생에서도 분노한 대공에 의해 다섯 가문은 멸문되었을 거다. 사실상 루크의 존재가 역사를 바꾼 셈이었다.

브루노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어, 그래도 이 정도면 괜찮은 거 아닙니까? 어쨌건 저 여자는 주군이 살려 냈고, 죽은 엘프도 없고, 거래만 무난하게 끝나면...."

"무난하게 끝날 리가 없으니 문제지."

"예?"

"다른 거 다 둘째 치더라도 백작의 욕심이 문제야. 내가 안 왔더라면 이쯤에서 만족했겠지만, 이젠 날 이용해서 더 뜯어내려 하겠지."

백작은 일방적으로 루크에게 엘프의 적개심을 몰아주고 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이참에 엘프한테 죽었으면 하는 거다.

그렇게 되면 번스타인 가문이 엘프에게 분노할 테고, 인연을 맺은 교단 역시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까.

여기에 승산이 있다고 본 황실까지 떡고물 좀 얻어먹겠다고 끼게 된다면?

'최전선을 담당하는 가문으로서 보급품을 꿀처럼 빨아 먹고 전리품도 마음껏 횡령하겠지.'

비록 루크를 죽게 했다는 책임은 피할 수 없겠지만, 일단 전쟁이 시작되면 가장 중요한 전초 기지가 되는 셈이니 막 대할 수도 없다.

거기에 자신의 죄를 통감하니 열심히 싸우겠다고 눈물 한번 뽑아 주면? 적개심을 모조리 엘프에게 돌리고 책임을 묻어 버릴 수 있다.

가신들의 얼굴이 단번에 굳어졌다.

"골치 아프군요."

"여기서 끝이 아닌데."

"더 있어요?"

"그래, 대공이 지금 쟤 찾겠다고 사방을 뒤엎고 있어."

설명이야 간략했지만 처음 헤르닝 백작가의 편지가 네 가문에 도착한 시간을 생각하면 한참 지나고도 남았다.

여기에 굳이 엘디라가 언급하지 않았던 '놀았던 시간'도 상당이 지났을 터. 대공은 지금 딸 걱정에 제정신이 아닐 거다.

지금 엘프 군대가 몬스터 서식지를 휩쓰는 것도 그 여파가 분명했다. 혹여라도 몬스터 영역에 들어갔다가 참변을 당한 게 아닐까 걱정하는 거다.

'나비 효과도 정도가 있지.'

도대체 일이 어떻게 꼬이면 이 정도로 엄청난 사태가 되는 걸까. 루크의 가신들도 다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건 자칫하면 정말로 제국 대 엘프 공국의 대전쟁이 될 수도 있었다.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어쩌긴 뭘 어째."

심각한 얼굴로 묻는 맥스를 향해 루크가 씩 웃었다.

"영감탱이한테 빨아먹을 거 다 빨아먹고 제물로 내다 버려야지."

"…그게 지금 가능합니까?"

여긴 백작의 성이자 영토 한가운데다. 그런데 백작이 군림하는 영지에서 본인을 엿 먹인 후에 없애 버리겠다고?

"못 할 것도 없지."

루크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인 후에 엘디라에게 다가갔다.

「이봐, 하나만 묻자. 네가 원하는 건 어느 정도까지냐?」

「무슨 소리지?」

「너라도 무사히 귀환하길 원하나? 아니면 친구들과 같이 돌아가길 원하나? 그것도 아니면 지금도 복수를 하고 싶나?」

「나는....」

엘디라의 두 눈동자가 흔들렸다. 혀가 잘리고 팔다리의 힘줄까지 베여 나락까지 떨어졌던 엘디라다.

복수고 뭐고 친구들과 함께 집에나 가고 싶다는 생각을 안 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생각할 때마다 가슴속에서 꿈틀거리는 분노를 막을 수가 없었다.

「…나는 복수를 원한다. 그 뱀 같은 늙은이가 가져간 모든 걸 되찾고 놈을 나락으로 떨어뜨리길 원한다. 그놈이 후회와 비명 속에서 죽어 가길 원한다!」

조금도 기가 죽지 않은 엘디라의 외침에 루크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거 잘됐네. 마침 나도 그런데.」

「뭐라고?」

「나도 그 작자에게 꽤 이용당한 몸이라서 말이야. 이용당한 만큼 복수를 해 주려고 하거든. 협력할 생각 있나?」

엘디라는 루크를 잠시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놈에게 당한 걸 돌려줄 수만 있다면야.」

「좋아, 그럼 나랑 연극 하나 찍자고」

「…연극?」

두 눈을 껌뻑거리는 엘디라를 향해 루크가 입을 열었다.

* * *

다음 날, 루크는 바로 레이와 함께 발데마르 백작을 알현했다. 백작은 반색하며 두 사람을 맞이했다.

"어서 오게나. 이리 두 사람이 찾아왔다는 건...."

"예, 레이 경이 각하의 제안을 받아들여 양녀가 되기로 했습니다."

"오오, 실로 기쁜 일이군!"

백작은 진심으로 기꺼워하며 웃음을 터트렸다. 이제 이걸로 루크는 결코 도망칠 수 없게 되었으니까.

자기 손에 있지도 않은 헤르닝 백작가를 스스로의 것이라 여기며 필사적으로 지킬 것이다.

'하기야 그렇겠지. 네가 안 먹고는 못 배길 미끼였다.'

작게는 헤르닝 백작가를, 넓게는 서부의 다섯 가문 전체를 손에 쥐여 준다는 제안이다.

수십 년을 정계에서 머무르는 능구렁이도 마음이 흔들릴 텐데 이런 애송이가 안 넘어갈 리가 있나.

"다만 각하께서 한 가지 부탁을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부탁? 그게 뭔가? 말만 하게."

환하게 웃는 백작을 향해 루크가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이전에 말씀하신 것처럼 오늘 바로 후계자 선언을 해 주셨으면 합니다. 다른 가문의 자제들과 모든 기사가 보는 앞에서 말입니다."

60화

루크의 말에 백작이 눈을 가늘게 떴다.

'나중에라도 철회할 생각 말라는 건가?'

백작은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억눌렀다.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는데 몸이 달아서 먼저 요구할 줄이야.

기꺼운 얼굴로 백작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야 당연한 일 아닌가. 이렇게 된 거 오늘 당장이라도 알려야겠군."

"감사합니다, 각하."

"허허, 감사는 무슨. 당연히 해야 할 일인 것을."

거기까지 말한 백작은 레이에게 시선을 옮겼다. 한 영지의 후계자로 삼는다는 말에도 표정 변화 하나 없었다.

루크가 고개를 까딱이자, 레이가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었다.

"레이 헤르닝이 아버지를 뵙습니다."

"이렇게 훌륭한 딸이 생겨 실로 기쁘구나. 서로 진실한 가족으로 거듭났으니 이 아비가 도와줄 일이 있다면 뭐든 말하거라."

"예, 아버지."

일말의 정도 느껴지지 않는 딱딱한 호칭. 하지만 백작은 '아버지'라는 호칭 자체에 만족했다.

원래 이런 건 겉으로 보여 주는 형식이 중요한 법이니까.

"그나저나 딱 좋을 때 왔군. 안 그래도 자네를 부를 생각이었는데."

"저를 말입니까?"

"그렇네. 용맹한 수행 기사의 힘이 필요할 때거든."

백작은 히죽 웃으며 말했다.

"엘프들이 협상을 요청했네."

* * *

백작은 루크를 비롯한 모든 지휘관과 가문 내에 존재하는 기사들을 끌어모았다. 그리고서는 크게 소리쳤다.

"오늘은 실로 기쁜 일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저 간악한 엘프 놈들이 우리에게 굴복하여 협상을 요구했다는 것이다!"

"오오!"

병사들 사이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엘프랑 싸운다길래 잔뜩 긴장했건만 먼저 꼬리를 내리다니!

피 한 방울 안 흘리고 집에 가는 거 아니냐며 다들 수군거렸다. 기쁜 건 지휘관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병력 낭비 없이 마도구만 꽁으로 얻을 수 있겠구나!'

'많이 데려오길 잘했군. 숫자만큼 지분도 커지겠지?'

이 모든 병력의 가문의 자산. 잃을 때마다 가문의 힘도 뭉텅이로 깎여 나가는데, 그 모든 걸 온존하고 전리품만 얻게 된 것이다.

각 가문의 자제들에겐 최적의 결과였다. 모든 이가 잿밥에 관심이 팔린 사이, 다시 한번 백작이 소리쳤다.

"그리고 이날, 또 다른 기쁜 소식이 있다! 바로 자식이 없던 내게 후계자가 생겼다는 것이다!"

"...!?"

충격적인 소식에 이번엔 모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협상에 대해선 미리 말해 줬지만, 이번 이야기는 다들 처음 듣는 소리였다.

그 반응에 백작이 만족스레 웃으며 루크가 있는 쪽을 향했다.

"내 딸아, 올라오거라!"

"예, 아버지."

레이가 단상 위로 올라가자 다들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루크의 기사를 자신의 후계자로 삼았단 말인가?

백작은 한쪽 무릎을 꿇은 레이를 향해 소리쳤다.

"너는 내 딸이 될 것을 맹세하겠느냐?"

"맹세합니다."

"이 가문을 이어 갈 후계자의 의무를 짊어지겠느냐?"

"기꺼이 짊어지겠습니다."

"좋다! 네 이름은 이제 레이 윈슬로우가 아닌 레이 헤르닝이다! 나의 후계자이며 딸이니, 일어나 자신의 이름을 밝히라!"

레이는 그대로 일어서서 사람들을 향해 소리쳤다.

"나는 이제 레이 헤르닝이며, 적법한 권리를 가진 헤르닝 가문의 후계자다. 오늘 그대들이 이 맹세의 증인이 되길 바란다."

"레이 헤르닝과 헤르닝 가문에 축복이 있으리!"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백작이 바람잡이로 넣어 뒀던 누군가가 소리쳤다. 이윽고 사방에서 비슷한 구호가 들불처럼 번져 나갔다.

"레이 헤르닝 만세!"

"헤르닝 가문에 축복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후계자 선언의 완성이었다. 모든 이가 같은 구호를 외치는 걸 본 백작이 루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 정도면 만족하나?'

'충분합니다.'

루크와 시선을 교환한 백작은 호기롭게 소리쳤다.

"오늘 나는 딸과 함께 놈들을 마주하리라! 놈들에게 인간의 위엄을 알려 주고 오겠다!"

와아아아!

병사들의 우렁찬 환호성이 대기를 울렸다. 그 환호성이 마치 장밋빛 미래를 축복하는 것 같아 더없이 기꺼웠다.

자신의 계획을 점검하며 백작은 장밋빛 나래를 상상했다. 옆에 있는 루크의 미묘한 눈빛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 * *

최종 결전을 벌여도 이상하지 않을 선언이었으나, 병력의 이동 자체는 덤덤하게 진행되었다.

전면전도 아니고 협상에 앞서 무력 시위를 위한 이동이다. 목숨을 걸 필요가 없으니 긴장할 것도 없었다.

"그래도 장관이긴 하군."

발터는 힐끗 뒤를 돌아보며 중얼거렸다. 병력도 병력이지만, 기사의 숫자가 장난이 아니었다.

"항상 협력할 수만 있다면 서부의 패권도 노려볼 수 있을 텐데."

"아직 잠이 덜 깼나? 헛소리를 하는 거 보면."

"시끄러워. 한번 해 본 소리야."

데미안의 핀잔에 발터가 투덜거렸다. 사실 이곳에 있는 모두가 알고 있다. 두 번 다시 이런 병력이 모이는 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아무리 헤르닝 백작가라도 마도구 같이 먹음직스러운 보상이 없었다면 나서지 않았을 것이다.

"후, 설마 우리끼리 무리를 이루게 될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는데."

"그러게 말이다."

"살다 보니 별꼴을 다 보는군."

스테판의 중얼거림에 다른 두 사람이 동의를 표했다. 원래 사이가 안 좋은 네 가문이지만, 특정한 가문이 유난히 튀면 다 같이 눌러 버리곤 했다.

중요한 건 그게 윈슬로우 가문이란 사실이었다. 지금 세 사람과 리온 사이에는 미묘한 벽이 존재했다.

루크와 레이가 윈슬로우 가문에 조력하고 있었으니까.

"제기랄, 저놈은 누나 하나 잘 둔 덕에 복이 터졌군."

"아무리 그래도 후계자라니. 루크 경과 친분을 다지기 위해서라지만 너무 나가신 것 아닌가?"

"쯧쯧."

스테판과 발터의 중얼거림에 데미안이 혀를 찼다. 마치 뭣도 모르는 꼬맹이를 보는 눈빛이었다.

"멍청하기는. 아직도 각하의 노림수를 모르겠나?"

"뭐?"

"아무리 후계자라고 한들 레이 경은 외부 인사. 생득권 없이 각하에 의해 임명받은 후계자다. 당연히 언제든 갈아 치울 수 있지."

생득권은 태어나면서부터 부여받은 권리를 의미한다. 예를 들면 혈통에 의한 유산의 지분, 아버지의 지위에 대한 계승권 등이 포함된다.

하지만 레이에게는 어떤 생득권도 없다. 비록 정당한 계승자라고는 하나, 백작의 마음이 바뀌면 바로 후계자 자리를 박탈당할 수도 있는 거다.

"애초에 헤르닝 가문에서 태어난 사람도 아니지 않은가. 가문 내의 영향력도 없다시피 하니 후계자 박탈도 쉽지."

"하지만 저렇게 공언하셨는데...."

"후계자 바꾸겠다고 하실 때 뭐라 할 사람은 어디에 있고?"

스테판이 입을 다물었다. 생각해 보니 그건 또 그랬다. 윈슬로우 가문과 루크 경이 불만 좀 품는다고 달라질 건 없었다.

번스타인 가문의 영향력까지 더해지면 모르겠지만 너무 멀지 않나. 정말 미친 척하고 다 엎어 버리면 또 모르지만, 그건 단순한 침략이다.

정당한 계승이 아니고 강탈일 뿐이니 아무도 인정하지 않을 거다.

"세월이 지나 각하께서 떠나신다면 레이 경은 헤르닝 백작가를 손에 넣겠지. 그러나 달리 말하자면 살아 계실 땐 평생 메여 있어야 한다는 소리야."

"그, 그건 그렇군."

후계자 자리를 보전하려면 결국 백작에게 잘 보여야 하니까. 레이는 물론 그 덕을 보려는 루크도 백작에게 끌려다닐 수밖에 없다.

"게다가 백작 각하께서는 아직 정정하신 나이 아닌가. 10년 정도로는 끄떡도 안 하실 텐데, 그동안은 각하께서 손에 주도권을 쥐실 수밖에 없지."

"으음."

"과연."

데미안의 설명이 끝나자 두 사람의 표정이 변했다. 언뜻 보면 루크에게 모든 걸 내어 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목줄을 잡은 건 백작이었다.

백작의 심계에 놀라던 와중, 발터가 불안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런데 각하께서 우연히, 그러니까 정말 우연히 잘못되시면 어떻게 되는 거지?"

순식간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발데마르 백작의 죽음은 함부로 입에 담을 수 있는 내용이 아니었으니까.

잠시 서로 눈치를 보던 세 사람은 한참 후에 입을 열었다.

"이 이야긴 여기서 끝내지."

"그, 그러지. 말이 너무 많았군."

세 사람은 서로 거리를 두며 뿔뿔이 흩어졌다. 멀어지는 두 사람을 보며 데미안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만에 하나라도 각하께서 급사하면 어떻게 되냐고?'

대답이야 뻔했다. 레이는 헤르닝 가문을 통째로 손에 넣고, 루크 역시 가신의 덕을 톡톡히 보게 되겠지.

데미안으로서는 여신께 기도할 뿐이었다. 절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부디 발데마르 백작이 장수하도록 말이다.

* * *

협상을 위해 떠나는 군사들 사이에는 어울리지 않는 존재가 둘 있었다. 하나는 이동식 철창 안에 존재하는 남자 엘프.

또 하나는 루크가 말 위에 실은 엘디라였다. 머리 위로 로브를 덮어써서 가까이서 보면 엘프란 걸 잘 눈치채지 못할 외형이었다.

처음 루크가 엘디라를 데려왔을 때 다른 기사들은 깜짝 놀랐다.

-루크 경, 굳이 그 엘프를 데리고 갈 필요가 있습니까?

-여차할 때 인질로 쓰기 위함입니다. 인질은 하나라도 많은 편이 좋지 않겠습니까?

조악한 변명에 기사들은 혀를 찼다.

'인질은 무슨, 말 타는 데 방해만 되겠지. 자랑이라도 하려고 데려온 건가?'

'전쟁터에 애첩이나 여종을 데리고 다니는 게 드문 건 아니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수행 기사라는 작자가....'

일부 기사들이 루크에 대한 평가를 낮추었지만, 루크는 신경 쓰지 않았다. 만에 하나를 대비해서라도 엘디라는 항상 곁에 두는 게 좋았다.

언제 대공이나 엘프 군대가 튀어나올지 알 수가 없으니까. 평가고 나발이고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그나저나 얼굴에 구멍 뚫리겠구만.'

루크가 철창 쪽을 슬쩍 돌아봤다. 남자 엘프는 루크를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처음 지하 감옥에서 나온 엘프는 엘디라를 보고 기겁했고, 그 이후로는 쭉 저 상태였다.

그래도 상황은 알아챈 건지 엘디라의 정체를 발설하거나 따로 말을 걸진 않았다.

'눈치가 빠른 놈이어서 다행이야.'

여기까지는 순조롭게 풀리고 있었다. 최상의 결과는 여기서 대공을 마주치는 거지만, 거기까지 기대하긴 힘들었다.

본격적인 전쟁이 벌어지거나 엘디라의 존재에 눈치채지 않는다면 만나기 힘들 테니까.

"도착했군."

백작의 말에 모든 병력이 일제히 멈춰섰다. 그건 숲 한가운데 있는 거대한 공터였다.

아니, 공터라고 하기에는 너무 컸다. 평지 전투에 버금가는 싸움도 한번 벌일 수 있을 정도였다.

"이렇게 넓은 곳이 있을 줄이야."

"누가 만든 건가?"

기사들이 그렇게 중얼거렸을 때였다. 반대편의 길에서 누군가가 다가왔다. 정갈한 복식에 여러 보석으로 된 장신구를 걸친 엘프들이었다.

인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화려함에 누구는 넋을 잃고, 누구는 혀를 찼다. 대표로 보이는 엘프가 나와 소리쳤다.

「인간의 영주여! 내 아들은 어디 있느냐!?」

그 대답에 백작이 미소 지으며 뒤에 있는 철창을 보여 줬다. 수척한 남자 엘프가 고개를 떨구자 대표로 나온 자의 눈이 세차게 떨렸다.

「아들아...!」

「거래를 잊지 마라, 엘프!」

떨리는 목소리로 뭐라 하려던 엘프를 백작이 제지했다. 그 모습에 루크의 눈이 가라앉았다.

'이 영감, 역시 엘프어 할 줄 알았군.'

하기야 다른 사람을 죄다 속이려면 그 정도는 해야겠지. 엘프어를 아는 자가 극소수니 여기서도 이렇게 당당할 수 있는 걸 테고.

앞에 나선 엘프는 이를 갈더니 뒤에 있는 병사들에게 시선을 줬다. 잠시 후, 엘프 병사들이 여러 상자를 날라 앞에 내려놓았다.

"세상에!"

"저게 다 마도구...?"

상자 안에 다 담지 못해 삐져 나온 것만 봐도 보통 양이 아니었다. 그 모습을 보며 백작이 중얼거렸다.

"흠, 놈들이 저 마도구로 우리를 홀릴 셈이군."

"홀릴 셈이라니요?"

"제작 기법을 가르쳐 주기 싫으니 한꺼번에 대량으로 주고 끝낼 셈인 거겠지. 하여간 영악한 놈들이야."

"그럼 거절하는 편이...."

"아니, 받을 건 받아 둬야지."

백작이 시선을 주자 뒤에 있던 병사들이 튀어나와 마도구를 인간 쪽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부들부들 떨며 그 모습을 보던 반대편의 엘프가 소리쳤다.

「제기랄! 그렇게나 마도구를 처먹고도 만족을 못 했더냐!? 이제는 더 줄 것도 없다! 그만 내 아들을 돌려 달란 말이다!」

"…뭐라는 겁니까?"

발터가 묻자, 백작은 심각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절대 마도구 제작 기법을 넘길 수는 없으니 이 정도로 만족하라는군. 예상대로야."

"역시나!"

"...."

루크는 눈을 껌뻑이며 백작을 쳐다봤다. 이 새끼 봐라?

61화

엘프어를 구사할 수 있는 자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가르쳐 줄 사람을 찾는 것조차 힘들 지경이니까.

덕분에 백작은 대놓고 개소리를 하고도 넘어갈 수 있었다. 이미 엘프어 구사가 가능한 루크를 빼면 말이다.

"각하, 어찌하시겠습니까?"

"놈들에게 주제를 가르쳐 줘야지. 주는 건 받겠지만 굳이 기술을 포기할 필요가 있겠나!"

"그 말씀대로입니다."

다들 일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화수분이 눈앞에 있는데 금괴를 가득 준다 한들 눈에 찰 상황이 아니었다.

백작은 앞에 나서서 당당히 소리쳤다.

「내가 몇 번이고 말했을 텐데. 마도구 제작 기술만 내놓는다면 네놈의 아들을 포함한 모든 포로를 풀어 주겠다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엘프 귀족은 백자의 말에 발작하듯 소리쳤다.

「마도구 제작 기술은 그리 간단한 게 아니다! 설령 가르쳐 준다고 한들 네놈이 재현할 수 있을 성싶으냐!?」

「그렇다면 가르쳐 주면 되겠군. 우리가 써먹지도 못할 기술을 넘긴다는 데 왜 망설이는 거냐?」

「이놈...!」

백작이 능글맞게 받아치자 엘프 귀족은 이를 갈며 이쪽을 노려보았다. 루크는 엘프의 속내를 짐작할 수 있었다.

'두렵겠지. 당장은 못 쓰더라도 수십 년에 걸쳐 연구하면 결국 이해해 버릴 테니까.'

엘프는 쇠퇴해 가는 종족이다. 그런데도 인간에게 밀려 사라지지 않고 버틸 수 있는 건 어디까지나 우월한 마법과 기술 덕분.

그런데 그중에서 일부라도 온전히 넘어간다면? 엘프의 턱 끝에 칼을 들이밀 수 있을 만큼 인간 세력이 성장해 버릴 수 있다.

'뭐, 백작은 인류고 자시고 황금알 낳는 거위를 갖고 싶은 것뿐이겠지만.'

엘프의 대답이 없자 백작이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이번에도 거부한다면 어쩔 수 없지. 네 자식은 도로 데려가겠다」

「이 개자식! 이미 건네준 마도구만으로도 네 성의 창고가 터질 거다! 일곱 가문이 파산 직전이란 말이다! 그런데 한 명도 풀어 주지 않겠다고!?」

「멍청한 소릴 하는군.」

분노한 엘프를 보며 백작이 비웃음을 띄웠다.

「마도구는 네놈들 자식을 살려 두는 대가지, 풀어 주는 대가가 아니야. 파산이라고? 그럼 더는 마도구를 공급 못 하는 놈들의 자식부터 죽여야겠군.」

엘프 귀족의 눈에 핏발이 서고, 철창에 있던 아들 엘프의 입에서 뿌드득 소리가 났다. 엘디라 역시 손안의 피부가 찢어질 듯 주먹을 쥐었다.

루크가 엘디라의 어깨를 꽉 잡았다.

"쉿, 가만히 있어."

"...."

"네가 나서면 더 골치 아파진다."

엘디라는 분노에 몸을 부르르 떨면서도 고개를 푹 떨궜다. 루크도 엘디라의 심정은 이해했다.

아무리 목줄을 잡고 있어도 저렇게 대놓고 깔아뭉개다니. 백작은 엘프의 시선에도 기죽지 않고 계속 소리쳤다.

「불만인가? 그렇다면 나와 싸우겠느냐? 이 군대와 싸워 보겠느냔 말이다!」

다섯 개의 깃발과 수많은 기사, 그리고 지금까지보다 훨씬 많은 병력. 그 모습에 엘프 귀족의 눈이 흔들렸다.

아무리 엘프 전사가 열을 도륙하더라도 저 숫자는 너무 많았다. 인질 없이 정면으로 붙어도 위험할 정도로.

엘프 귀족이 아무 말도 못 하는 모습에 백작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다음에 올 때는 이것보다 세 배는 마도구를 준비해라!」

「뭣!? 이미 파산 직전이라고 말을...!」

「그래서 어쩌라는 거냐? 만약 준비하지 못한다면 한 명은 본보기로 죽이겠다!」

반쯤은 최후통첩이나 마찬가지였다. 끝까지 기술을 내놓지 않으면 슬슬 진짜로 누군가 매달아 버리겠다는 선언.

설마 여기까지 나갈 줄은 몰랐는지 엘프 귀족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백작은 코웃음을 치고는 등을 돌렸다.

"각하! 협상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어떻게든 다음까지 마련해 볼 테니 시간을 달라고 하는군. 놈들도 이 병력을 상대로는 승산이 없음을 깨달은 게지."

"오오! 역시 각하십니다!"

천연덕스러운 거짓말에 다른 가문의 자제들이 환호했다. 그들 입장에서는 더없이 좋은 결과였으니까.

"자, 모든 게 잘 풀렸으니 돌아가서 축배를...."

「아들아, 내가 너에게 묻는다!」

그때, 엘프 귀족에게서 고함이 터져 나왔다.

「거짓 없이 솔직히 말하거라! 죽음이 두렵느냐!?」

"왜, 왜 저래?"

"지금 뭐라는 거야?"

말을 알아듣지 못한 병사들은 어리둥절하게 서로를 쳐다봤고, 백작은 당황하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갑자기 무슨 짓이냐!」

「대답하거라!」

백작의 항의에도 엘프 귀족은 멈추지 않고 소리쳤다. 철창 안에 있던 엘프 귀족은 흔들리는 눈으로 살짝 엘디라를 보았다.

그리고 아주 약간의 망설임 후에 숨을 들이켰다.

「두려움은 약자의 것! 그런데 어찌 제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오랜 감옥 생활 탓인지 목이 약간 쉰 목소리. 하지만 여기 있는 사람 중 못 듣는 사람은 없을 만한 성량이었다.

「티그리온의 아들 임라스는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그것이 엘프의 종족을 위함이라 한다면 더더욱!」

「닥쳐! 닥치라고!」

쾅, 소리가 나도록 백작이 철창을 걷어찼다. 하지만 모든 말은 전해진 후였다. 엘프 귀족, 티그리온은 가늘게 눈을 떨며 말했다.

「부탁드립니다, 대공.」

짤막한 말이 끝나기 무섭게 주변의 숲이 흔들렸다. 어지간한 규모의 군대가 이동할 때나 울리는 진동이 주변을 흔들었다.

그리고 잠시 후, 그림자 속에서 엘프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에, 엘프가 더 있다!"

"갑옷을 입고 있잖아!"

인간의 군대와 거의 엇비슷한 규모의 엘프 군대. 그것만 해도 위협적인데 무장 역시 보통이 아니었다.

입고 있는 갑옷은 어지간한 대가문의 기사보다도 훌륭했고, 무기는 단숨에 강철도 가를 만치 날카로웠다.

그런 엘프 군대가 한 몸처럼 움직이는 광경은 인간이 보기에 악몽과 같았다.

「훌륭한 아들을 뒀군, 티그리온.」

그 사이로 한 남자가 백마를 타고 등장했다. 잘 늙지 않는 엘프 특성상 얼굴은 젊어 보였지만 풍기는 연륜은 숨길 수 없었다.

「대공 전하.」

「대, 대공!?」

백작이 기겁하며 뒤로 물러섰다. 대공이면 사실상 이 서부를 다스리는 엘프의 왕이 아닌가.

엘디라의 아버지이자 검의 대공, 아라티온은 싸늘하게 백작을 쳐다봤다.

"쥐새끼처럼 내 영토를 잘도 헤집고 다녔더구나."

"...!"

유창한 제국어에 군사들이 흠칫 놀라며 대공을 쳐다봤다. 그 오만한 엘프가 인간의 언어를 할 줄 안다고?

그중에서 가장 놀란 건 단연코 백작이었다. 대공은 주변의 반응을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저 군대를 가지고도 인질극이라니. 인간의 천박한 품성은 어쩔 수 없나."

"아, 아니...!"

"변명할 게 있더냐? 말해 봐라."

백작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비아냥 때문이 아니었다. 제국어를 쓸 줄 안다는 건 이제 모든 이가 대화를 듣는다는 소리.

이 이상 소통의 부재를 무기로 휘두를 수 없게 된 것이다. 유일한 방법은 대화를 나누지 않고 바로 공격하는 것뿐.

'하지만 그랬다간 이쪽이 전멸한다...!'

상대는 대공이 직접 이끄는 정예. 엘프 중에서도 특출나게 강한 중앙군에다 장비의 질마저 압도적이다.

성을 끼고 싸워도 함락당할 가능성이 있는데 회전을 벌인다? 자살 행위나 마찬가지였다.

'이, 인질을 쓸까?'

백작이 슬쩍 철창에 갇힌 임라스를 바라봤다. 그렇지만 방금 전 대화를 볼 때 먹힐 거 같지 않았다.

인질을 최대한 살리려고 신경은 쓰겠지만, 정 상황이 안 좋게 흘러가면 포기하고 공격할 게 뻔했다.

우물쭈물거리는 백작을 보며 대공이 차갑게 말했다.

"할 말이 없다면 됐다. 네놈을 사로잡아 모든 인질과 교환해 주지. 전군 거창."

대공의 신호가 떨어지자 엘프 군대가 일제히 돌격 대형을 취했다.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대공의 입이 열리려는 순간.

"멈춰라!"

루크가 앞으로 뛰쳐나왔다.

* * *

'대공 아라티온!'

루크는 눈을 번쩍 뜨고 대공을 바라봤다. 주변인들은 기겁했지만 루크에게는 더없이 최상의 시나리오였다.

뒤를 돌아본 루크가 가신들과 눈을 마주쳤다. 이미 어제 이야기를 끝내 둔 터라 당황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가신들을 쭉 둘러보던 루크의 눈이 레이를 향했다.

'내가 없는 동안의 일은 부탁한다.'

'예, 주군. 부디 보중하시길.'

짤막하게 시선을 교환한 루크는 그대로 말을 몰아 앞으로 달려 나갔다. 떨어지지 않도록 매달린 엘디라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설마 진짜로 아버지께서 오실 줄이야!」

「놀라는 건 나중에 해. 어제 나눴던 대화 기억하지?」

「아버지를 속이는 건 내키지 않지만 어쩔 수 없지.」

「좋아, 그럼 작전대로 간다.」

빠르게 대화를 끝마친 루크가 양측의 군대 사이에서 정지했다. 그리고는 있는 힘껏 크게 외쳤다.

"모두 멈춰라!"

단숨에 모든 이의 시선이 루크에게 집중되었다. 대공 역시 마찬가지였다. 루크는 엘디라 위에 씌웠던 후드를 던져 버렸다.

엘디라의 얼굴을 확인한 엘프들 사이에서 비명이 울려 퍼졌다.

"엘디라!?"

「공녀님!」

엘프 중 일부가 이성을 잃고 달려나오려 하자, 루크는 냉큼 엘디라의 목에 검날을 들이댔다.

"물러서라, 엘프들이여! 너희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공녀의 목숨을 보전하고 싶다면!"

"네놈이 감히!"

대공의 눈에 살기가 어렸다. 당장이라도 찢어 죽일 듯한 눈빛이었으나, 그와 반대로 모든 엘프들이 움직임을 멈췄다.

루크는 냉큼 백작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각하, 군대를 이끌고 퇴각하십시오!"

"뭣이?"

"지금 여기서 붙으면 전멸입니다! 각하께서도 아시잖습니까!"

루크의 말대로였다. 여기서 전쟁을 벌이는 건 최악의 선택. 유효한 인질이 있다면 시간을 버는 사이 퇴각하는 게 최선이었다.

다급한 상황 속에서도 백작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저 엘프가 대공의 딸이었다고? 아니, 그걸 알았으면서 왜 나에게 이야기를 안 한 거야? 대체 무슨 속셈으로...!'

스스로의 계획이 아니라 다른 이의 계획에 놀아나는 불쾌한 느낌. 하지만 생각할 시간이 너무 짧았다.

"각하, 시간이 없습니다!"

"브, 브루노 경!?"

"주군께서 시간을 벌고 계십니다! 지금 철군하지 않는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릅니다!"

브루노는 분한 듯 입술을 깨물며 소리쳤다. 뺨에는 아까 수통에서 찍어 바른 물방울이 눈물 자국처럼 어른거렸다.

"가십시오, 어서! 지금 바로 가셔야 합니다!"

"하, 하지만 루크 경은 그대의 주군 아니오?"

"주군의 명령이십니다. 그렇다면 기사된 자는 따를 뿐!"

분한 듯 브루노가 고개를 푹 숙이고 어깨를 떨었다. 그 모습에 모든 기사의 숙연해졌다.

본인의 무력함을 느끼는 와중에도 주군의 명을 따르려는 충직함. 이게 바로 기사의 표본이 아니던가.

브루노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레이를 바라봤다.

"레이 경 역시 마찬가집니다. 레이 경, 안 그렇소?"

"예. 그.렇.습.니.다."

"...?"

순간 브루노의 어깨가 움찔하고 숙연하던 분위기가 와장창 깨졌다. 기사들은 멍한 얼굴로 레이를 쳐다봤다.

'이상하다, 레이 경 평소 말투가 저랬던가?'

'어쩐지 힘주고 말하는 것 같은데....'

기사들이 넋이 나가 있는 사이에 브루노가 발로 툭 레이를 건드렸다.

'연기 못 하면 그냥 슬픈 표정이나 짓고 있으쇼.'

'…네.'

레이가 입을 꾹 다물고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 얼굴을 본 기사들은 또 한번 흠칫 놀랐다.

'화, 화났나?'

'우는 것 같기도 한데....'

'대체 무슨 표정이지?'

제 딴에는 나름 연기라고 한 것 같지만 표정이 기괴해 알아보기가 힘들었다. 브루노는 다른 소리가 나오기 전에 냉큼 소리쳤다.

"각하, 시간이 없습니다!"

"아, 알겠네. 전군 퇴각!"

브루노의 재촉에 백작이 정신을 차리고 소리쳤다. 지금은 루크가 막아 주고 있다지만, 언제까지 갈지 모르는 대치였다.

이상한 점이 있든 없든 서둘러 퇴각할 필요가 있었다. 엘프 군대가 좌우를 감싸면 퇴각조차 어려워졌으니까.

"퇴각! 전군 퇴각이다!"

"루크 경의 희생을 헛되이 하지 마라!"

멀어지는 인간의 군대를 보며 엘프들은 이를 갈았다. 여기서 괴멸시킬 수 있었는데 루크로 인해 이리 눈 뜨고 보내야 하다니!

일부 군대가 슬쩍 움직이려고 했지만, 그때마다 루크는 귀신같이 알아차렸다.

"움직이지 말라고 했을 텐데! 공녀의 목숨이 아깝지 않은 거냐!"

"이 빌어먹을 인간 놈이!"

결국 엘프 군대는 루크의 시선 때문에 꿈쩍도 할 수 없었다. 백작이 꽤 멀어진 걸 확인한 루크가 엘디라에게 속삭였다.

「야, 너도 연기 좀 해 봐. 하기로 했잖아.」

「이 상황에서 굳이 필요한가? 내가 안 나서도 충분할 것 같다만.」

「목소리만 닿지 않을 거리까지 엘프들이 쫓아가려면 충분해. 군대의 퇴각이란 건 그만큼 시간이 오래 걸려.」

「음, 알았다.」

지금껏 혀가 잘려 있다는 설정 때문에 입을 다물던 엘디라였다. 이젠 인간의 군대도 멀어졌으니 소리쳐도 상관없을 터.

루크와 상의했던 대로 최대한 애절하게 소리쳤다.

「아.버.지! 도.와.주.십.시.오!」

"...."

"...?"

루크는 입을 다물고, 엘프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다, 공녀님이 원래 저렇게 말하던가?

그중에서 대공의 얼굴이 뭐라 할 수 없을 만큼 괴상해졌다. 루크는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넌 그냥 닥치고 있어라.」

「어째서!?」

62화

군대 앞에서의 인질극은 애초에 오래 갈 수가 없다. 시간이 갈수록 인질범의 집중력은 떨어지고, 군대는 모든 사각과 도주로를 차단하니까.

루크 역시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백작의 군대가 충분히 멀어진 걸 확인하자마자 바로 검을 집어 던졌다.

-항복!

-...!?

-포로 대우를 요구한다!

엘프들은 황당해하면서도 루크를 잡아 가두었다. 임시로 만든 나무 감옥 안에서 루크는 바닥에 누운 채 노래를 흥얼거렸다.

"구름아, 어디를 가느냐. 갈 곳도 없으면서 어딜 그리 바쁘게 가느냐...."

사방을 지키는 엘프 경비병 중 하나가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루크를 바라봤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미친놈인가?'

루크는 다른 이들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노려보면 뭐 어쩔 건데? 한참 시간을 때우다 보니 뱃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울렸다.

「배고픈데 밥 좀 주라.」

"...."

엘프 경비병이 잠깐 루크를 보다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아예 무시하기로 작정한 모양이었다.

「안 주면 엘디라한테 일러바친다.」

「공녀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마라.」

경비병 중 직급이 높아 보이는 녀석의 눈매가 올라갔다. 루크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본인은 불러도 뭐라 안 하던데.」

"...."

「그나저나 밥 좀 달라니까. 엘프는 포로 밥도 안 먹이나?」

인상을 쓰던 경비병이 옆에 있는 병사에게 시선을 줬다. 잠시 후, 나무 그릇에 담긴 스튜가 도착했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걸 보니 지금 막 만든 모양이었다. 루크는 말없이 건네는 스튜를 받으며 말했다.

「조미료는?」

"...."

「농담이야.」

이마에 핏대가 서는 걸 보고 얌전히 수저를 들었다. 더 놀렸다가는 감옥 안으로 쳐들어올 낌새였다.

스튜의 맛은 상당히 괜찮았다. 루크는 금방 스튜를 싹싹 비워 버렸다. 그릇을 치우는 것과 동시에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와라, 인간.」

철컥.

엘프의 말과 함께 나무 감옥이 열렸다. 자세히 보니 아까 전 대공 옆에 있던 측근 중 하나였다.

루크는 가볍게 일어나서 엘프의 뒤를 따랐다. 태연한 모습에 잠깐 인상을 쓰긴 했으나 뭐라 하진 않았다.

측근과 함께 향한 곳은 대공의 막사였다.

「들어가라」

「그래, 안내 수고했다.」

엘프의 얼굴이 확 구겨졌다. 그러니까 누가 명령조로 하래? 가벼운 복수를 마친 루크가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천막 안에는 대공과 엘디라가 있었다. 이전과 달리 공녀에 어울리는 화려한 복색의 엘디라가 루크한테 말했다.

「잉간, 어서 와라」

...?

뭔가 발음이 이상해서 루크가 엘디라를 쳐다봤다. 뺨이 잔뜩 부은 걸 보니 누군가한테 사정없이 꼬집힌 모양새였다.

「어딜 보능 거냐!」

「네 볼따구.」

「…거기능 안 바도 댄다!」

안 그래도 붉어진 뺨이 더욱 빨갛게 물들었다. 루크는 피식 웃으며 대공을 쳐다봤다.

분노로 일그러졌던 아까 전과 달리 더없이 담담한 얼굴이었다.

「자식에게 꽤 무르시군요.」

「그렇게 보이나?」

「저 같으면 다리 몽댕이를 부숴 놨을 겁니다.」

「나도 그러려다 말았다. 집에 가면 더 맞아야지.」

대공의 말에 엘디라가 몸을 움찔 떨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대공은 루크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엘릭서라, 실로 귀한 물건이지. 고대의 유산을 물려받은 우리들조차 엘릭서의 제조법만큼은 사라졌으니.」

「보물은 써야 할 곳에 써야 하는 법이지요.」

「네가 현명한 자라 진심으로 다행이군. 아니었다면 많은 인간에게 불행한 일이 벌어졌겠지.」

어투는 가볍지만 묵직한 뼈가 담긴 말이었다. 대공은 잠시 뜸을 들이다 엘디라를 쳐다보았다.

「너는 이제 나가 보거라.」

「예? 하지만....」

「지금부터는 나랏일이다.」

정식 직책이 없는 공녀는 나랏일에 참여할 자격이 없다는 뜻. 그 말에 엘디라가 눈썹을 치켜세웠다.

「그렇지만 전 아버지의 후계자입니다!」

「견학이라도 하게 해 달라 이거냐?」

「네! 최소한 배움을 얻게 해 주십시오.」

대공은 쓴웃음을 짓고는 루크를 향해 말했다.

"제국어로 말하지."

"저야 편하죠."

「아버지!?」

엘디라의 항의에도 두 사람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두 사람이 가볍게 몇 마디 대화를 나누자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선 엘디라가 나갔다.

제국어를 못 알아듣는 엘디라로서는 뭐라 하는지 알 수가 없었으니까. 잠시 딸의 등을 바라보던 대공은 진중한 얼굴로 본론을 꺼냈다.

"일단 딸을 구해 준 것에 대해 감사를 표하마."

"천만의 말씀이십니다."

"하지만 그것과 네가 한 제안을 받아들이느냐 마느냐는 별개다."

그렇겠지. 정에 휘둘려 결정을 한다면 지도자라고 할 수 없으니까. 이미 예상했던 답변이었다.

"엘디라에게서 들었다. 인간 영주의 목을 치고, 잡아간 동포들을 안전하게 해방할 수단이 있다고 말이다."

"대공께서 조금만 도와주시면 가능합니다."

"굳이 내가 널 도와야 할 필요가 있는지 의문이군."

대공은 막사 바깥을 향해 손을 뻗었다.

"너도 내 군대를 봤을 것이다. 정예이자, 엘프의 자랑이지. 설령 열 배가 넘는 인간 병력도 이 군대 앞에서는 허수아비나 다름없다."

루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틀린 말도 아니었으니까. 실제로 엘프 군대는 대단했다.

장비의 질부터 일사불란한 움직임까지. 최소라도 20년은 함께 훈련하며 실전을 겪은 게 확실했다.

"공성도 마찬가지다. 내 손으로 쉽게 놈을 무릎 꿇릴 수 있는데 왜 네 손을 빌려야 하지?"

"그렇군요. 저도 대공께서 데려오신 군대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루크는 짐짓 감탄하는 시늉을 하며 중얼거렸다.

"대공께서 압박하는 것만으로도 모든 인질은 풀려날 테고, 발데마르 백작은 두려움에 떨겠지요. 원하신다면 백작의 목도 언제든 치실 수 있을 겁니다."

"잘 아는군."

"이렇게 대단한 군대 아닙니까. 인간의 땅은 얻지 못하시겠지만, 그 외에는 모든 걸 이루시겠지요."

지금껏 냉철하던 대공의 몸이 우뚝 멈춰섰다. 루크는 그 약간의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역시나.'

예상대로였다. 엘프 대공 아라티온. 원 역사에서는 오직 딸의 복수로 반쯤 미쳐서 군대를 이끌었던 자.

하지만 딸이 죽지 않은 지금 그의 목적은 이전과 다를 수밖에 없었다. 루크는 그 목적을 헤아렸다.

대공은 인간의 땅을 원하고 있었다.

* * *

한참 동안 침묵이 내려앉았다. 1초가 10초로 느껴지는 숨 막히는 공기. 루크는 그 속에서 차분히 대공의 반응을 기다렸다.

대공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루크를 응시했다.

"이상한 소릴 하는군. 땅이라, 내가 인간의 땅을 원할 이유가 있던가?"

"없지 않겠습니까? 지금껏 인간의 영역으론 한 번도 오시지 않았으니까요."

"그래, 설령 원한다 하더라도 언제든 차지할 수 있다."

"아니요."

자신감이 넘치는 대공의 말을 루크는 단칼에 부정했다.

"땅은 아닙니다. 아무리 원하셔도 대공께선 인간의 땅을 얻을 수 없습니다. 단 한 뼘조차 말입니다."

후웅.

순간, 방 안에 칼바람이 휘몰아쳤다. 정확히는 그런 감각이 들었다. 대공에게서 나온 기세였다.

루크는 무심코 마른침을 삼켰다.

'검의 대공이란 호칭이 괜히 붙은 건 아니군.'

인간보다 오래 사는 엘프다. 당연히 검을 익히는 기간도 인간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

대공 역시 마찬가지일 터. 수십 년을 넘어 수백 년 동안 검을 익힌 자의 기세는 피부가 저릴 정도였다.

"입이 잘 돌아가는군."

"제 혀는 남들보다 잘 돌아가는 편입니다. 진실을 말할 때는 더욱더."

"말을 조심해라. 딸아이의 은인이라고 해도 한도가 있는 법이니."

루크는 어깨를 으쓱했다. 굳이 물어보지 않겠다면 자기도 대답하지 않겠다는 제스쳐였다. 먼저 백기를 든 건 대공이었다.

"설명해라. 어째서 내가 인간의 땅을 얻지 못한다는 거지?"

"간단합니다. 황실에서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하."

대공이 기가 찬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네놈은 날 바보로 아나? 인간의 사회 제도 따윈 진즉에 꿰뚫어 봤다. 설령 여기서 영주가 죽는다 한들 황제는 움직이지 않겠지. 오히려 좋아하는 거 아닌가? 반기를 들 만한 힘이 없어질 테니까."

"맞습니다. 백작이 죽건 말건 황제가 알 바 아니지요."

대공은 얼굴을 찌푸려졌다. 황실이 움직인다면서 이젠 백작이 죽어도 안 움직인다니?

"지금 날 기만하는 거냐?"

"황실에서 움직이는 건 백작 때문이 아닙니다."

"뭣이?"

"공격할 수 있는 사정거리에 엘프가 직접 왔기 때문이죠."

대공의 눈이 세차게 흔들렸다. 말에 담긴 속뜻을 알아차린 거다. 루크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생각해 보면 엘프는 참 탐이 나는 상대입니다. 인간보다 우수한 기술과 지금은 사라져 버린 마법까지 보유하고 있지요. 빼앗을 수만 있다면 당장 빼앗고 싶을 겁니다."

"그것참 이상하군. 우리는 이제껏 공격받은 적이 없다만."

"그야 이길 수가 없으니까요. 미치지 않고서야 누가 엘프의 영역에 군대를 이끌고 가겠습니까?"

엘프의 영역은 몬스터가 우글거리는 숲 너머이며, 아무도 그곳의 지리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

목적지까지 제대로 도착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고, 인적 손실을 감수하며 도착해 봤자 역습으로 전멸하기 딱 좋다.

"하지만 엘프가 인간의 영역까지 스스로 온다면 이야기가 다르지요. 황실부터 기뻐하며 군대를 몰고 올 겁니다."

"그리고 내 군대가 돼지처럼 도살하겠지."

"이미 아시지 않습니까. 인간은 엘프처럼 동포의 목숨을 중요시하지 않습니다."

하물며 지금의 황제나 황태자라면 말할 것도 없다. 황제의 경우 귀찮아서라도 안 오겠지만, 황태자는 흥분에 몸을 떨며 달려올 거다.

그 와중에 군대가 전멸한다 해도, 어떻게든 돈과 사람을 쏟아부어 새로운 군대를 마련해서 또 진격하겠지.

"처음 전멸당하면 그 손해를 메꾸기 위해, 두 번째로 전멸당하면 엄청난 손해를 메꾸기 위해, 세 번째로 전멸당하면 천문학적인 손해를 메꾸기 위해 달려들 겁니다."

"어리석군. 제정신으로 할 발상은 아닌데?"

"따서 갚으면 된다. 이득이 너무 크면 다들 그리 생각하는 법입니다."

실제로 엘프는 그 정도의 전리품을 지니고 있었다. 온전히 엘프의 영역을 차지할 가능성이 보인다면 손해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거다.

대공은 루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네 말은 일리가 있군."

"이해해 주셔서 다행입니다."

"네 충고를 받들어 인간 영역에는 앞으로 발도 들이지 않겠다. 이번 일이 끝나면 바로 엘디라와 함께 돌아가야겠군."

루크가 속으로 웃음을 터트렸다. 블러핑을 치시겠다? 그것도 통하는 사람한테 쳐야지.

"실로 대공께서는 이해가 깊으십니다. 그럼 슬슬 절 돌려보내 주시지 않겠습니까? 백작의 성에 남겨 둔 가신들이 걱정되는군요."

"...."

아무런 미련 없이 루크가 물러서자, 대공은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 그리고 잠시 후, 한숨과 함께 대공의 입이 열렸다.

"어떻게 알아낸 거지?"

"무엇을 말입니까?"

"내가 인간의 땅을 원한다는 것 말이다."

대공의 항복 선언에 루크가 미소를 지었다.

* * *

루크가 대공의 속내를 알아차린 이유는 간단했다.

"백작이 엘프와 인질극을 벌이는 게 이상하더군요."

"그게 어쨌다는 거지?"

"보통 엘프는 어지간해선 만날 일이 없을 만큼 멀리 있는 게 정상이라 들었습니다. 근데 너무 쉽게들 만났지요."

엘디라와 친구들은 인간의 앞마당을 헤집고 다녔다. 최소 근처에 하루 거리로 오락가락할 수 있는 숙소가 있다는 소리.

백작의 거래도 마찬가지다. 최소한 서로 안전이 확보된 거리에서 인질에 대한 소식을 주고받을 수 있다는 거다.

"인간의 영역이 넓어진 건 아니니 답은 하나지요. 엘프가 계속 영역을 넓히고 있는 겁니다."

"그래, 정확히는 넓힐 수밖에 없는 거지만."

씁쓸한 얼굴로 대공이 대답했다. 루크는 자신의 짐작을 입에 담았다.

"자원입니까?"

"거기까지 알아차렸나?"

"아무리 발전한 문명이라도 자원은 필요할 테니까요."

엘프가 서부에 자리 잡은 건 제국이 세워지기도 전이다. 인간의 영주가 다스리는 한 지역의 광맥이 모조리 고갈되기에 충분한 시간.

원시인처럼 사는 게 아닌 이상 자원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대공은 루크와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한 가지 묻지. 우리가 인간의 영역을 차지하지 않고도 자원 문제에서 해결될 방법이 있나?"

"당연히 있습니다."

루크는 씩 웃으며 단언했다.

"제가 이 땅을 손에 넣도록 도와주시면 됩니다."

* * *

다음 날, 헤르닝 백작가는 발칵 뒤집혔다. 엘프 대공에게서 온 두 개의 서신 때문이었다.

하나는 제국어로, 다른 하나는 엘프어로 적혀 있었다. 두 개의 문서를 읽은 백작이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재협상을 하자고?"

엘프 대공의 의도를 알 수가 없었다. 저 군대라면 그냥 공성을 시도해도 이길 수 있을 텐데 굳이 협상을 하자니?

수상하다. 너무나 수상하다. 무언가 숨은 의도가 있는 게 틀림없었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 거부하고 싶지만....'

백작이 슬쩍 눈동자를 옆으로 굴렸다. 그곳에는 도끼눈을 뜬 레이와 브루노가 백작을 응시하고 있었다.

63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