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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번스타인 백작가는 한창 루크의 얘기로 떠들썩했다. 성실함의 상징과도 같던 레너드 백작이 밖에서 자식을 만든 것만 해도 놀라운 일이다.

그런데 그 서자를 안에 불러들이고 자신의 자식으로 공언하다니.

"세상에, 처음엔 헛소문인 줄로만 알았는데."

"역시 영주님도 한창때는 어쩔 수 없으셨군."

대부분은 그저 백작의 옛 연애에 대한 수군거림 정도로 끝났다. 하지만 그중에서 일부는 민감한 화제를 입에 담기도 했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모실 도련님이 하나 더 생기는 건가?"

자식으로 인정받은 루크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 그저 백작의 새로운 자식으로 대하기엔 상황이 복잡했다.

"도련님은 무슨. 그래 봤자 평민 피가 섞인 반쪽짜린데."

"내가 다른 귀족 집안에서도 일해봤는데, 서자 대접은 다 거기서 거기야."

"괜히 가까이 갔다 마님에게 밉보일 바엔 무시하는 게 제일이지."

하인들의 결론은 대부분 비슷했다. 반은 자신들과 같은 평민이니 굽신거리기엔 고깝다.

알랑거려서 이득이 생긴다면 모르지만, 오히려 백작 부인에게 찍힐 위험만 높다.

게다가 다른 귀족 가문에서도 서자의 취급은 썩 좋지 않았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였다.

"적당히 무시하면서 없는 사람처럼 지내자고."

"그게 좋지. 어차피 우리한테 체벌할 권한도 없을 텐데."

"솔직히 평민 출신이면서 상전 노릇 하는 것도 기분 나쁘단 말이지."

하인들은 시시덕거리면서 대화를 끝내려고 했다. 하지만 그 전에 대화를 들은 늙은 하인이 혀를 찼다.

"쯧쯧. 젊은것들이 죽고 싶어서 환장을 했구만."

"아니, 영감님. 왜 갑자기 악담을 하십니까?"

"늬들 영주님 말씀 못 들었냐? 바깥 도련님 함부로 대하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하셨는데."

"예? 진짜로요?"

"그렇다니까! 잘은 몰라도 네놈들이 그따위로 굴면 모가지가 날아갈걸?"

"에이, 설마···."

처음 늙은 하인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하인들은 잘 믿지 못했다. 일개 서자를 위해서 그렇게까지 해준다고?

아무리 레너드 백작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은가. 늙은 하인이 잘못 들었다고 생각하는 게 더 신빙성 있었다.

그 의심이 싹 걷힌 건 고든의 발표 이후였다.

"새로 오신 도련님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감을 못 잡는 녀석들이 많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 그것이···."

"됐다. 내가 말할 건 그저 다른 도련님들과 똑같이 섬기라는 것뿐이다. 만약 그분께 무례를 저지른다면 용서치 않겠다."

하인들은 깜짝 놀라 서로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럼 정말로 서자가 아닌 적자로 대우하라는 건가?

혼란스러워하는 하인들을 보며 고든이 한마디를 더했다.

"혹시나 해서 말하겠다만, 채찍질 정도로 끝날 거라 생각하지 마라. 귀족모욕죄는 교수형과 참수형 뿐이다."

"....!"

하인들의 얼굴이 새파랗게 변했다. 백작의 최측근인 고든이 이렇게 말한다면 그건 곧 백작의 뜻이란 소리.

자칫하면 목이 달아날 뻔했다는 생각에 소름이 우수수 돋았다. 당연히 이후 루크에 대한 하인들의 태도도 급격히 공손해졌다.

"오늘 옷은 입기 편하군. 시중드느라 수고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머리카락을 빗을 때 조금 아프던데···."

"요, 용서를! 부디 용서를!"

"내가 널 잡아먹기라도 한다더냐?"

고든의 경고를 들은 하인들은 루크를 상대할 때 손짓 하나, 발짓 하나마저 주의했다.

바깥에서 찾아온 도련님의 성품이 어떤지를 모르니 모든 게 조심스러웠다. 별거 아닌 행동이라도 루크가 거슬려 한다면 큰일 날 수 있었으니까.

하인들의 행동과는 별개로, 기사단 쪽에서도 약간의 변화가 있었다. 원인은 로더릭이었다.

"내가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봤소. 도련님의 그 용맹한 모습을!"

로더릭은 자신이 겪은 모험을 기사들에게 알렸다. 처음엔 감탄하던 기사들이었으나,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표정이 애매모호해졌다.

"말에 타자마자 숙련자처럼 달리시고, 화살 세 발로 트롤을 잡으신 데다, 용병들 전체가 명령에 순순히 따랐다고? 정말이오?"

"난 거짓을 입에 담아본 적이 없소! 지금 나를 의심하는 거요?"

"그게 아니라 아무리 그래도 너무···."

"그렇다면 가이든 경에게 확인해보시오. 나와 함께 도련님을 모셨으니!"

로더릭의 말에 기사들은 반신반의하면서 가이든에게 물었다.

"가이든 경, 정말로 도련님께서 그러셨소?"

"그···렇소. 로더릭 경의 말은 전부 진실이오."

가이든은 소태를 씹는 기분을 느끼며 수긍했다. 그 서자를 띄워주긴 싫었지만, 문제는 로더릭이었다.

여기서 거짓을 고한다면 로더릭이 트롤 사건 때 자신이 저지른 추태를 밝힐 게 뻔했다.

"허어, 그렇다면 참으로 대단하신 분이군."

가이든이 수긍하자 기사들은 그제야 감탄성을 터트렸다. 거짓을 입에 담지는 않지만 유난을 떠는 경향이 있는 로더릭.

반대로 철저한 현실주의자라 거짓말은 해도 부풀려 말하진 않는 가이든.

이 두 사람의 증언이 일치한다면 진실이라는 소리였다.

"마치 영웅의 소년기를 듣는 것 같소."

"동화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각하께서도 그 비범함을 알아보신 게 아니겠소?"

기사들은 루크가 받는 특별대우를 다른 방식으로 납득했다. 언젠가 영웅이 될 싹이 보이니 저리 아끼시는 거라고.

동시에 기사들이 루크를 대할 때도 약간의 존경이 담겼다.

기사라면 명예와 용맹을 갖춘 자에게 그에 걸맞은 존중을 바쳐야 하지 않겠는가.

루크가 번스타인 저택에 찾아온 지 일주일. 이미 주변의 태도는 적자를 대하는 것과 별다를 게 없었다.

****

일주일 만에 백작은 루크를 다시 집무실로 불러들였다. 집무실에는 그때와 마찬가지로 백작과 헬레나가 같이 있었다.

무슨 일인가 싶던 루크는 백작의 말을 듣고 눈을 껌뻑였다.

"예절교육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렇다. 너도 이제 귀족이 되었으니 귀족의 예절을 배워야 할 게 아니냐."

적당히 예의 바르게 굴면 세세한 건 다 넘어가는 평민과 달리, 귀족의 예절은 정말로 까다롭다.

그 하나하나가 평민과의 차이이자 격을 보여주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식사 예절이나 간단한 인사에서부터 격식이 필요한 자리에서 취해야 하는 예법까지.

어지간한 건 자연스레 익히는 귀족 가문 태생이라도 모든 예절을 익히기까지는 몇 달이 걸린다.

"물론 예절만 익힐 건 아니다. 다른 것도 배워야겠지."

그저 혈통만 이어졌다고 귀족이 특별 취급을 받는 게 아니다. 복잡한 예법, 검술, 말타기, 궁술, 체스, 수사학, 신학 등등.

몇 년에 걸쳐 귀족에게 필요한 모든 지식을 배우고 나서야 진정한 귀족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제 막 귀족이 된 루크는 교육이 시급했다.

"안타깝게도 다른 선생은 금방 구할 수 없더구나. 다행히 예절교육은 마침 주변에 적임자이신 분이 있었다."

"어느 분입니까?"

"마르티나 부인이다. 사교계에서 훌륭한 예절 선생으로 유명한 분이지."

백작은 따로 설명을 덧붙이진 않았다. 얼마 전까지 평민으로 살던 루크가 들어본 적이 없는 이름일 테니까.

"이번에 지인의 조문을 다녀오면서 우리 영지를 들르셨다는구나. 부인과 아는 사이라 무리한 부탁에도 흔쾌히 응해주셨다."

"큰어머님께서?"

큰어머님, 이라는 말에 헬레나의 눈매가 잠시 꿈틀거렸다. 하지만 곧 언제 그랬냐는 듯 미소를 띄웠다.

"이제 가족이 되었으니 가문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행동거지를 익혀야지요. 이런 중요한 일에 연줄을 아끼면 되겠습니까."

"그 말이 맞소. 참으로 고맙구려."

헬레나의 말에 백작은 기꺼운 표정으로 감사를 전했다. 루크 역시 백작을 따라 깊게 고개를 숙였다.

"큰어머님의 배려에 진정 감사드립니다. 기대에 부응해 번스타인의 이름에 어울리는 아들이 되겠습니다."

"그래, 마르티나 부인은 훌륭하신 분이니 열심히 배우길 바란다."

'퍽이나 그러시겠지.'

자상함을 가장한 목소리에 루크는 속으로 콧방귀를 뀌었다. 마르티나 부인에 대해서는 회귀 전에 많이 들어봤으니까.

분명 예절교육 선생으로 유명한 건 맞지만, 결과를 잘 내는 만큼 혹독하게 가르친다는 얘기도 들었다.

일부러 철혈 교관을 골라서 선생으로 넣어준 게 빤히 보였다.

'아마 다른 선생도 이런 식이겠지.'

배워야 할 과목이 저리도 많은 데 겨우 예절 하나로 끝낼 리가 없다. 십중팔구 비슷한 성향의 선생을 계속 찾고 있을 터.

'뭐, 쓸데없는 노력이지만.'

이번에 부린 수작질은 딱히 대비할 필요조차 없었다. 그냥 가만히 있어도 루크의 명성을 높여줄 뿐이니까.

루크는 미소를 감추고는 다가올 예절교육을 기다렸다.

****

이틀 뒤, 마르티나 부인은 교육 준비를 마치고 루크를 찾아왔다.

"처음 뵙겠습니다, 루크 님. 마르티나라고 합니다."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인사를 건네는 건 기품있는 중년의 귀부인. 흠잡을 데 없는 격식에서 그녀의 노련함이 엿보였다.

루크는 예절과 맞진 않지만, 최대한의 존중을 보이며 고개를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마르티나 부인. 루크 번스타인입니다. 제대로 배우지 못해 예법에 어긋나는 걸 용서해주시길."

"어머나."

루크의 인사에 마르티나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비록 예법에 어긋나긴 하지만 정중함과 예의를 갖춘 인사가 아닌가.

예절의 가장 기본인 존중 그 자체를 보여주는 자세였다.

"배운 적이 없으시다고 들었습니다만, 루크 님을 보니 어렵지 않게 익히실 듯 하네요."

"과찬이십니다. 부디 부인께서 잘 이끌어 주십시오."

"최선을 다하지요. 우선 가장 기본이 되는 식사 예절부터 익혀보도록 하지요."

마르티나는 미리 백작과 상의해서 마련해 둔 식탁을 가리켰다. 이미 몇 가지 음식과 여러 종류의 식기가 놓여 있었다.

루크가 식탁에 앉자, 마르티나 부인은 옆에 걸려 있던 말채찍을 들었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저는 부인과 백작 각하께 체벌권을 양도받았습니다. 실수하면 가차 없이 사용할 테니 명심해두시길."

즉, 순번을 틀리면 저 말채찍이 손등에 날아든다는 소리다. 다른 귀족 자제들을 가르칠 때도 자주 사용했는지 잡는 자세가 매우 익숙해보였다.

루크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미숙한 모습을 보이면 기꺼이 혼내주십시오."

"좋습니다. 그럼 우선 식기를 손에 들고······."

****

헬레나는 부채로 입을 가리고 웃음을 참았다. 태생부터 귀족으로 태어난 아이들조차 괴로워하는 수업이다.

이제껏 평민으로 산 루크에겐 몇 배나 더 힘들게 느껴지리라.

'지금쯤 우는 소리를 참고 있겠군.'

마르티나 부인은 가르칠 때 무척 혹독하게 굴지만, 그건 본인의 명예욕이나 악의 때문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완벽을 요구하는 그녀의 성격에 기인한 것일 뿐이다.

아마 학생에게 완벽한 가르침을 주려는 선의도 포함되어 있으리라.

'그렇기에 항의할 수도 없지.'

차라리 교육자가 악의를 가지고 있었다면 루크는 지체없이 백작에게 고발하여 선생을 교체할 것이다.

그러나 악의 없이 오직 선의만으로 괴롭게 만드는 선생이라면?

백작에게 말해본들 유약하고 한심한 모습으로 비출 뿐이다.

그럼 남은 선택지는 두 가지 뿐이다. 죽자사자 고생하며 익히거나, 한심하게 보이는 걸 감수하고 포기하던가.

'좋을 대로 고르거라.'

전자를 고르면 오랫동안 체벌에 시달릴 테고, 후자를 고른다면 '역시 평민은 어쩔 수 없다'라는 말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때, 헬레나의 근처로 누군가가 다가왔다.

"어머나, 헬레나 부인."

"마르티나 부인!"

수업을 마치고 나오는 마르티나의 모습에 헬레나가 반색하며 일어섰다. 한시라도 빨리 수업의 결과를 듣고 싶었다.

"어떤가요? 루크는 수업에 잘 따라오고 있나요?"

"음, 그게···."

마르티나 부인은 할 말을 찾지 못한 채 잠시 뜸을 들였다. 역시나. 그 반쪽짜리가 귀족의 예법에 쉽게 따라올 수 있을 리가 없지.

헬레나의 입가에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괜찮으니 솔직히 말해주세요. 역시 많이 미숙한가요?"

"아니요, 그 반대에요."

"예?"

"루크 님은 더없이 완벽하시더군요. 제가 가르친 자제분들 중에 그처럼 빨리 배우시는 학생은 없었는데 말이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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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헬레나는 순간 자신이 뭘 잘못 들었나 싶었다.

저 평민 태생의 천것이 최고의 학생이라고? 지금껏 가르친 귀족 자제들보다 훨씬 뛰어나다고?

'아, 우리의 친분 때문이구나.'

마르티나 부인은 헬레나의 본성을 모른다. 루크를 가르치는 게 순수한 선의라고 알고만 있다.

그렇다면 듣기 좋은 소리를 조금 더한다고 해서 이상할 건 없었다.

의문이 풀린 헬레나가 활짝 웃었다.

"마르티나 부인, 굳이 그러지 않으셔도 된답니다."

"네? 무슨 말씀이시죠?"

"절 배려해주실 필요는 없어요. 저는 순수하게 루크가 어느 정도로 배웠는지 알고 싶을 뿐이에요."

"아니에요. 저는 조금도 과장하지 않았답니다."

헬레나의 말에 마르티나 부인은 오히려 단호히 부정했다. 자신은 남 듣기 좋으라고 꾸며낸 소리따윈 지금껏 한 적도 없다면서.

"루크 님께서는 뛰어난 기억력과 응용력을 가지고 계시더군요. 한 번 가르치면 그대로 따라 하시고 잊어버리시는 법이 없었어요. 누굴 가르치면서 동작을 하나도 정정하지 않은 건 오늘이 처음이랍니다."

"···!"

헬레나는 하마터면 손에 든 부채를 떨어뜨릴 뻔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

자신의 아들들도, 아니 자신조차 어릴 때 예절 교육에선 몇 번의 실수가 있었는데.

심지어 그러고도 교사에게 손에 꼽힐 정도로 우수한 학생이라는 칭찬을 들었다.

그런데 저 천것은 아무런 지적조차 듣지 않았다니?

"지금과 같은 속도로 배우신다면 두 달 이내에 모든 수업을 마칠 수 있을 정도예요. 부인께 실로 훌륭한 자제분이 새로 생겼군요."

"호, 호호··· 별말씀을···."

진심으로 루크를 위해 자신을 불렀다 알고 있는 마르티나 부인은 아무런 악의 없이 덕담을 건넸다.

헬레나는 썩어 문드러지는 속을 감추며 간신히 웃었다.

****

"우연이겠지. 어쩌다 한번 오는 상태가 좋은 날이었던 거야."

누구에게나 그런 날이 있다. 일이 술술 잘 풀리고 머릿속에 가르침이 쏙쏙 박히는 날.

헬레나는 우연히 그런 날에 첫 수업을 받았을 뿐이라고 스스로를 납득시켰다.

그러지 않고서는 설명이 되질 않으니까.

'기껏해야 하루 이틀. 그 이후로는 진짜 실력이 드러나겠지.'

그렇게 믿은 헬레나는 계속해서 루크의 수업을 지켜보았다.

언젠가는 루크가 좌절하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하지만 현실은 잔혹했다.

"생각보다 수업 종료일을 앞당겨야겠어요."

"예? 어째서죠?"

"너무나도 빨리 배우시거든요. 한번 가르쳐드리면 바로 체득하시니."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루크에 대해서 나오는 말은 칭찬 일색이었다. 오히려 시간이 지나자 마르티나 부인 쪽에서 푸념을 내뱉었다.

저렇게 뛰어난 학생이라면 누가 가르치건 마찬가지라면서. 교사로서 자신감을 잃을 것 같다고 말이다.

헬레나로서는 복장이 터지는 소리였다.

"백작 각하, 자제분의 수업이 끝났습니다."

"이제 겨우 한 달이 되었는데 끝났다니요? 부인께 급한 일이라도 생기신 겁니까?"

"아니에요. 진심으로 더 가르칠 게 없답니다."

기어코 한 달째 되는 날, 루크는 모든 예절과 예법을 익히고 수업을 끝마쳤다.

수재 소리 듣는 귀족 자제들이 일반적으로 석 달 정도 배운다는 걸 생각하면 엄청난 속도였다.

"그래도 너무 빠르지 않습니까? 부인의 가르침을 의심하는 건 아닙니다만, 원래 예법이란 게 배우기보단 실천이 중요한 법인데···."

"걱정되신다면 루크 님의 성과를 직접 보시는 편이 낫겠군요."

백작이 쉬이 믿지 못하자 마르티나 부인은 루크와 함께 왔다.

그리고 지금까지 배운 것 중 가장 복잡한 황궁 예법을 즉석에서 선보였다.

흠잡을 데 없는 완벽한 동작에 백작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허! 믿을 수가 없군!"

백작도 어린 시절에는 온갖 고생 끝에 간신히 익힌 황궁 예법이다.

지금이야 완벽하다지만, 미숙할 때는 배우고도 막상 하려면 실수를 연발했다.

그런데 겨우 며칠 배우고서 수십 년 묵은 궁정 귀족처럼 완벽한 예법을 선보이다니!

"제가 이제야 부인의 명성을 실감하겠습니다. 가르치는 솜씨가 실로 대단하시군요."

"아닙니다. 저는 정말로 한 게 없어요."

겸손이 아니라 진짜로 모든 걸 루크 혼자 다 했다며, 마르티나는 손사래를 쳤다.

수업을 끝낸 마르티나 부인은 영지를 떠나며 백작에게 덕담을 건넸다.

"두 아드님에 이어 저리 훌륭하신 분을 또 얻으셨군요. 번스타인 가문에 여신의 총애가 함께하니 부러울 따름이에요."

"감당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백작은 겸양을 떨면서도 뿌듯한 심정을 끝내 숨기지 못했다. 자식이 뛰어나다는 칭찬을 듣고 싫어할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물론 백작의 기쁨 이상으로 헬레나의 기분은 나락에 처박혔다.

"우연이야! 예절 교육이 우연히 그놈과 잘 맞았을 뿐이라고!"

헬레나는 포기하지 않고 다른 분야로 눈을 돌렸다. 귀족에게 배워야 할 건 예절뿐만이 아니니까.

승마, 수사학, 역사, 고대어, 철학, 문학, 수학 등등. 일부 등한시해도 문제없는 과목까지 전부 포함해 교사를 불렀다.

결과는 좋아도 수업 방식이 가혹하다는 평가의 교사들이었다.

"이건 지나치지 않소? 우리 아이들도 이 정도는 아니었던 거 같은데."

"처음부터 귀족으로 자란 아이들과 루크가 같나요? 어디에서 실수할지 모르니 엄격히 가르쳐야지요."

조금 질린 백작이 한마디 했지만, 헬레나는 끝까지 밀고 나갔다. 양자를 위하는 극성스러운 어머니를 연기하면서.

"으음, 그렇긴 하군. 당신에게 맡기겠소."

'됐다!'

헬레나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맺혔다. 아무리 그 녀석이 배움의 열정이 있다 해도 이만큼 많은 과목을 전부 소화할 수는 없을 터.

일부러 시간표까지 빡빡하게 조정해 놓았으니 어디선가 실수를 저지를 것이다.

한번 컨디션이 무너지면 도미노처럼 악화되는 법.

'그리고 내가 고른 교사들은 학생의 몸 상태를 일일이 배려해주는 사람들이 아니지.'

당연히 계속 루크를 끌고 수업을 계속할 테고, 모든 수업에서 혹평이 이어지리라. 그야말로 완벽한 계획이 아닌가.

길어봤자 보름이나 버틸 거라는 게 헬레나의 예상이었다.

그리고 예상은 참혹하게 무너졌다.

"제 평생에 저리 뛰어나신 분은 처음 봅니다."

"천재라는 말은 각하의 자제분을 위해 있는 말인 것 같습니다."

"아예 학문에 뜻을 두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루크는 모든 학문을 모조리 소화해냈다. 빡빡하게 잡은 시간표도 의미가 없었다.

죄다 예상 시간보다 훨씬 일찍 끝내고 편하게 쉬었으니까.

수많은 교사의 칭찬 일색에 백작은 헬레나의 속도 모르고 기뻐했다.

"당신에게 맡기길 잘했구려. 그대가 이리도 루크를 잘 돌봐주니 참으로 기쁘오."

"···당연히 제가 해야할 일이니까요."

미소를 짓는 그녀의 입꼬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분명 서자를 괴롭히기 위해 한 짓이거늘 갈수록 놈의 명성만 높아지고 있지 않은가.

잠시 눈을 감은 헬레나는 최후의 수단을 쓰기로 했다.

"여보, 이제 루크에게 남은 과목은 하나뿐이에요."

"신학 말이군."

"이번에도 제가 생각해둔 교사가 있어요. 당신의 허락을 받고 싶어요."

"이미 당신에게 맡겼거늘 허락이라니?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거요."

"네. 당신이 좋아하지 않을 사람이거든요."

헬레나의 입에서 나온 이름에 백작의 얼굴이 굳었다.

****

며칠 후, 번스타인 백작가에 초대받은 누군가가 마차에서 내렸다. 얼핏 보면 자상해 보이는 늙은 신관.

하지만 그를 보는 하인들의 눈에는 두려움이, 기사들의 눈에는 경멸이 서려 있었다.

오직 헬레나만이 반갑게 늙은 신관을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마티아스 경."

"허허. 이 늙은이를 이리 반갑게 맞아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리 자신을 낮추지 마세요. 교단에 헌신한 경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답니다."

헬레나의 말대로 이 자리에서 그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마티아스 메리노. 교단에서 가장 유명한 성기사 중 하나.

그리고 과격파 이단심문관의 대표 격 인사.

신의 적이라 판단되면 가차 없이 망치를 휘두르는 성격 때문에 '붉은 망치의 마티아스'라는 별명으로 잘 알려진 자였다.

"설마 제가 번스타인 가의 자제분을 교육하게 될 줄이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상상조차 못 했던 일이로군요."

마티아스의 말에 주변 기사들이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신앙의 힘으로 속세에 영향력을 끼치는 교단과 속세의 권력 자체인 귀족.

비록 필요성에 의해 공존하기는 해도, 서로의 사이는 썩 좋지 않았다. 하물며 마티아스 같은 광신도라면 더더욱.

당연히 백작도 처음 이야기를 꺼냈을 때는 심하게 반대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그와 같은 광신도를 어찌 부른단 말이오!

-잘 생각해 보세요. 그래도 영향력과 위치만큼은 무시할 수 없는 사람이에요. 비록 과격하지만 업적도 많이 세우긴 했잖아요?

-업적만큼 미친 짓도 많이 저지른 작자요.

마티아스는 뭔가 수상하다 싶으면 가로막는 평민을 때려죽이고, 귀족에겐 막무가내로 들어와 영지를 수색하곤 했다.

당연히 그런 작자를 좋아할 사람은 없다. 오죽하면 교단마저 한때 신실함과는 별개로 파문을 고려했을 정도다.

그런데 황당하게도 마티아스가 수상하다고 여긴 지역엔 정말 무언가가 있었다. 악마숭배자, 흑마법사, 심지어는 강령술사까지.

수색 도중 무고한 피해자도 많이 발생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보다 열 배는 더 많은 이를 구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래도 그 업적 덕분에 지지자가 많은 사람이에요. 그런 이가 루크의 스승이 되면 어떻게 되겠어요? 루크는 교단에 든든한 뒷배가 생기고, 교단과 번스타인 가문의 사이도 개선될 거에요.

-하지만 마티아스가 루크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다면···.

-지금껏 우리를 실망시킨 적이 없는 아이잖아요. 그런 걱정은 할 필요 없어요.

-후우. 정 그렇다면 뜻대로 하시오.

백작은 끝까지 걱정을 거두지 못하면서도 허락했다. 지금까지 헬레나의 교육법이 틀린 적은 없었으니까.

알고 보면 터무니없는 오해였지만, 그 덕분에 마티아스를 부를 수 있었다.

헬레나는 속마음을 숨기며 웃는 낯으로 마티아스에게 부탁했다.

"마티아스 경께서 부디 루크를 잘 이끌어주세요. 지금껏 신학에 관한 건 조금도 접해보지 못한 아이니까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여신의 말씀을 전달하는 일이라면 이 한 몸 불사를 각오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리고 이건 마티아스 경께만 말씀드리는 건데···."

헬레나는 마티아스의 귓가에 살며시 속삭였다.

"사실 우리 루크가 신심이 없는 것 같아요."

"뭣이!? 세상에 어찌 그런···!"

"쉬잇. 목소리가 너무 커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마티아스는 간신히 입을 다물었다. 루크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에게 교육을 맡긴 헬레나를 배려한 행동이었다.

신심이 없다는 게 공론화되면 교단의 적으로 몰리거나 파문당할 수도 있으니까.

"그 때문에 제가 요즘 걱정돼서 밤잠을 이룰 수 없답니다. 마티아스 경께서 그 아이에게 여신의 위대함을 알려주세요."

"당연합니다! 자제분께 철저히 여신의 말씀을 새겨드려야겠군요!"

씩씩거리는 마티아스의 모습에 헬레나가 웃음을 참았다. 이걸로 떡밥은 뿌렸다. 나머지는 고기가 낚이길 기다리면 된다.

'열성적인 가르침에 감화되어 교단으로 떠나도 괜찮고, 반발해서 교단에 찍혀도 좋지. 균형을 취한다 해도 어중간한 놈으로 혹평받을 뿐이야.'

가능하면 첫 번째나 두 번째이길 바랐다. 첫 번째는 두 번 다시 볼 일이 없게 될 테고, 두 번째는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고생을 하게 될 테니까.

헬레나는 오랜만에 숙면을 취하며 결과가 나오길 느긋이 기다렸다.

****

며칠 후, 헬레나는 급하게 뛰어들어온 하녀의 보고를 받았다.

"마티아스 경과 그이가 서로 다투고 있다고?"

"예, 마님. 심상치가 않습니다."

무슨 일이 생겼구나! 두 사람이 다투고 있다면 십중팔구 루크와 관련된 일일 터.

헬레나는 곧장 외출 준비를 마치고 집무실로 향했다.

하녀의 말대로 두 사람은 바깥에서 죄다 들릴 목소리로 서로 다투고 있었다.

"각하, 이건 신의 뜻입니다!"

"그대의 뜻이겠지! 말도 안 되는 소리 마시오!"

"자제분을 위한 일이기도 합니다!"

"그 아이가 원하지 않는다고 했잖소!"

예상이 진실로 드러나자 얼굴에 함박웃음이 맺혔다. 주변 하인들을 봐서라도 표정 관리를 하려고 했지만, 도저히 뜻대로 되지가 않았다.

"때로는 자식을 위해 부모의 결단이 필요할 때도 있습니다!"

"강권해서 교단으로 보낸들 그 아이가 행복할 것 같진 않소."

"백작 각하!"

"그만! 이 이야기는 끝이오!"

축객령을 들은 헬레나는 냉큼 문에서 멀리 떨어졌다. 대화를 들어보니 마티아스가 루크를 교단으로 보내라고 한 모양이었다.

본인이 거절한 걸 보면 감화돼서 스스로 가겠다고 한 건 아닐 것이다.

'신심이 없는 놈이라 교단에 데려가서 정신머리를 고치겠다고 한 모양이군.'

그렇다면 교단에 찍힌 쪽이라는 소리다. 헬레나가 냉큼 부채로 웃음을 가리는 것과 동시에 마티아스가 거칠게 문에서 나왔다.

모퉁이에서 기다리고 있으려니 얼굴이 벌게진 마티아스가 나타났다.

"마티아스 경, 무슨 일이 있으셨나요?"

"부인!"

헬레나의 얼굴을 본 마티아스가 눈을 번쩍 뜨고 다가왔다. 절박한 몸짓이 누가 봐도 도움을 청하는 듯했다.

"마침 잘 오셨습니다! 부군께 한 말씀 해주실 수 없겠습니까?"

"저희 루크 때문인가요?"

"그렇습니다!"

"대체 저희 루크가 무슨 짓을 한 거죠?"

짐짓 걱정된다는 어조로 헬레나가 묻자 마티아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차마 말로 하기가 힘듭니다. 제가 가르쳐보니 자제분은 참으로···."

"예. 말씀하세요"

"참으로 여신께서 내려보내 주신 분이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

마티아스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헬레나가 멍하니 눈을 껌뻑였다. 지금 뭐라고 한 거지?

"오래 대화를 나눠본 결과 자제분은 신심이 없는 게 아니었습니다. 경이로운 관점으로 여신을 섬기며 그 심도 깊은 이해는 교단의 사제들조차 쉬이 따라갈 수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

"자제분이 교단의 검이 된다면 그야말로 여신의 체현자로 이름을 알리실 겁니다. 분명 역사에 남아 천년이 넘는 세월 동안 광명처럼 일컬어지겠지요."

"······."

"그 미래를 예견한 저는 교단에 오시라 권유했건만, 자제분은 지나치게 겸손하신 탓에 제 제안을 거절하셨습니다. 너무나도 안타까운 나머지 각하께 말씀을 드렸는데 일언지하에 거절하시는 게 아닙니까!"

거기까지 말한 마티아스가 깊게 탄식했다. 손안에 든 보석 가득한 궤짝을 놓친 사람과도 같은 얼굴이었다.

"물론 세속에 있으셔도 충분히 이름을 알리시겠지만, 교단의 종으로서 너무 안타깝습니다. 그러니 부인께서 부군께 말씀을 올려주십시오. 자제분이 진정으로 있을 곳은 교단이라고요."

마티아스는 거듭 헬레나에게 부탁하고는 저 멀리 떠나갔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멍하니 있었다.

너무 참담한 분위기에 하녀들은 말조차 걸 수 없었다. 그리고 잠시 후, 헬레나의 몸이 서서히 뒤로 넘어갔다.

털썩

"꺄아아악! 마님! 마님께서 쓰러지셨어!"

"사, 사제를 불러라! 지금 당장!"

한창 위에서 난장판이 벌어지고 있을 무렵. 루크는 자신의 방에서 느긋하게 차를 음미하는 중이었다.

찻잔 옆에는 방금 전 수업에 썼던 교재가 널브러져 있었다.

루크는 감동의 눈물로 젖은 신학 교재를 팔랑거리며 피식 웃었다.

"껌이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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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헬레나는 회귀 전에도 똑같은 수작질을 부렸다. 다만 그때는 루크도 미숙하던 시절이라 지금처럼 교사가 한꺼번에 몰려오진 않았다.

한 과목이 끝나면 다음 교사가, 그 과목도 끝내면 또 다른 교사가.

시간표로 따지자면 지금보다는 널널했지만, 반대로 전체적인 수업 시간은 훨씬 길었다.

게다가 모두 스파르타식으로 가르쳤으니 수업이 끝나면 기진맥진하기 일쑤였다.

'전부 배우기까지 걸린 시간이 꼬박 1년이었지.'

루크를 괴롭게 하려던 헬레나의 의도는 성공한 셈이다. 다만 모든 게 헬레나의 뜻대로 술술 풀린 건 아니었다.

미숙한 어린애라면 모를까, 이미 한 번 인생의 쓴맛을 겪어본 루크다. 거기에 지구 살던 시절 불수능에 재수까지 경험했다.

암만 힘든 수업이라도 그 시절을 생각하면 그럭저럭 버틸 만했다.

'결과적으로 대부분의 수업은 수재 소리 들으며 끝냈고.'

따지고 보면 서로에게 한방씩 먹여준 셈이다. 헬레나는 루크를 괴롭게 했고, 루크는 좋은 평가로 헬레나를 엿 먹였으니.

그래도 고생하며 배운 보람은 있었다. 나중에 용병기사로 떠돌며 여기저기 써먹을 데가 참 많았으니까.

'뭐, 직접 써먹기보다는 그 분야에 관심 가진 사람들과 친해지는 데 이용한 거지만.'

누구나 자기한테 관심 있는 분야를 언급하면 기분이 좋아지는 법. 루크한테 지식은 처세 기술에 가까웠다.

결과적으로 단순 암기로 끝낸 게 아니라 응용 경험도 풍부해졌다. 어지간한 선생 노릇도 할 수 있을 만큼.

"그런데 이제 와서 가정교육은 개뿔."

오히려 모르는 척을 하는 게 힘들 지경이니 우습지도 않았다. 비장의 카드랍시고 불러들인 마티아스도 마찬가지다.

회귀 전, 마티아스는 늙어 죽기 전에 자신의 신학 이론을 집대성한 책을 냈다. 내용은 상당히 과격했으나 급진파들 사이에선 베스트 셀러였다.

루크는 혹시 급진파들과 문제가 생길 때 써먹으려고 그 책을 꼼꼼히 읽어봤다. 당연히 마티아스가 뭔 생각을 하는지는 빤히 알았다.

"후우, 차가 왜 이렇게 달지? 꿀이라도 탔나?"

지금쯤 돌아버리기 직전일 헬레나를 생각해서 그런 걸까. 이상하게 차 맛이 달달했다.

루크가 마지막 한 모금을 마시고 의자에 몸을 뉘었을 때, 바깥에서 하인이 들어왔다.

"루, 루크 도련님."

"무슨 일이냐?

"마님께서 쓰러지셨다고 합니다요."

"뭣이? 큰어머님께서?"

루크는 깜짝 놀라 벌떡 일어섰다. 울화통이 터질 거라곤 생각했지만 설마 쓰러질 줄이야!

너무 좋아서 폭소가 터지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크흠흠! 건강하시던 분이 왜 갑자기 쓰러지셨다고 하더냐?"

"그건 소인도 잘··· 지금 사제분이 오셔서 진찰 중이라 하십니다."

"그렇단 말이지?"

루크는 짐짓 침통한 표정으로 눈을 내리깔았다. 그리고 크게 결심했다는 듯 소리쳤다.

"걱정돼서 안 되겠구나. 큰어머님의 병세를 살피러 가야겠다."

"예? 도련님께서 직접이요?"

"당연하지 않으냐. 비록 낳아주신 어머니는 아니지만, 이토록 세심하게 보살펴주시는 분이다."

자식이라면 마땅히 문안을 드리고 병세를 살피는 게 자식 된 도리. 루크는 자식의 도리를 다하고 싶어서 참을 수가 없었다.

"어머니께서 계신 곳으로 안내하거라! 마음이 불안해서 한시라도 지체할 수 없구나!"

"예, 예!"

단호한 명령에 냉큼 하인이 앞장서서 나아갔다. 루크는 하인을 따라가며 조용히 옛 명언을 떠올렸다.

불꽃 효도의 완성은 티배깅이다.

**

늙은 여사제는 헬레나의 몸을 진찰한 후 말했다.

"울화병입니다."

무심코 헬레나는 '나도 알아!'라고 소리칠 뻔했다. 안 그래도 지금 복장이 뒤집혀서 죽을 지경이었으니까.

"울화병은 따로 약이 없는 병입니다. 그저 마음을 편하게 가지시고 요양하셔야 합니다."

"알겠, 어요."

헬레나가 간신히 입을 열어 대답했다. 몸에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빳빳하게 굳은 것처럼 움직이기 힘들었던 탓이다.

여사제의 말에 따르면 그것도 울화병의 증상 중 하나라고 했다.

"진정효과가 있는 약재를 처방해 드리겠습니다. 큰 효과는 없으나 화가 치솟을 때 억제하는 임시방편 정도는 될 겁니다."

이 세계에 사제들에게 치료의 기적 같은 건 없다. 신성력이라는 개념은 있지만, 어디까지나 악마나 언데드에게 치명적인 힘일 뿐이다.

굳이 따지자면 연금술사의 포션이 오히려 그에 가까웠다. 다만 그것도 해독이나 외상에 효과가 있는 거지 병을 낫게 하는 건 아니었다.

의사를 겸하는 일부 사제들은 약학과 의학 지식을 익혀 사람을 치료했다. 당연히 병을 순식간에 낫게 할 수도 없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화를 참으셔야 합니다.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신다면 병세가 더 심해질 겁니다."

신신당부하는 여사제에게 헬레나는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진료를 끝낸 여사제가 자리를 뜨자, 뒤이어 다른 누군가가 들어왔다.

"큰어머님!"

"···!"

루크의 목소리에 누워있던 헬레나가 눈을 바르르 떨었다. 다른 때도 아니고 하필 지금 이놈이 오다니!

"도, 도련님. 마님께서는 지금···."

"많이 편찮으시다는 이야길 들었다. 자식 된 도리로서 오지 않을 수 없었지. 낯빛이 안 좋으신 걸 보니 병세가 심하신가 보구나."

"그렇습니다. 그러니 지금은···."

"아! 어찌 이렇게 되었을까!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리 건강하셨던 분이!"

하녀가 조심스레 돌려보내려고 했지만, 그때마다 루크는 말을 끊어먹으며 기어코 의자에 앉았다.

그러고 나니 이젠 가라고 할 수도 없었다. 루크는 촉촉이 젖은 눈동자로 헬레나를 쳐다봤다.

"큰어머님, 어찌 이리되신 겁니까? 전에 뵈었을 때는 아무 병세도 없으셨잖습니까."

'네놈 때문이야! 네놈 때문이라고!'

몸이 굳은 게 차라리 다행이었다. 제대로 움직였다면 지금 당장 삿대질을 하면서 본심을 토해냈을 테니까.

루크는 아무것도 모른 척 계속해서 입을 놀렸다.

"큰어머님께서 제게 베푸신 은혜가 지금도 생생합니다. 마르티나 부인과 수많은 명사를 불러 그 어떤 귀족 자제보다 훌륭한 교육을 베풀어주시지 않았습니까."

과거를 회상하는 듯 루크가 조용히 눈을 감으며 중얼거렸다.

"스승이 되어주신 분들은 전부 명망 있으신 분들 아닙니까. 그런 분들이 절 좋게 생각해주시고 칭찬을 퍼뜨려주시고 있습니다. 이게 바로 얻기 힘들다는 인연 아니겠습니까."

네 덕분에 나 연줄 생겼다.

"게다가 하나같이 절 천재라 칭찬하십니다. 덕분에 사교계에 이름이 알려졌으며, 서자라는 제 태생에도 불구하고 호기심을 표하는 분들이 많다고 합니다."

그만큼 능력 있으면 서자라도 괜찮대.

"심지어 마티아스 경과 친해진 덕분에 교단과 친분이 생겼습니다. 이리도 큰 자산이 어디 있겠습니까? 교단의 지원이란 여느 대귀족도 받기 힘들거늘!"

심지어 교단까지 날 좋게 봐줘.

루크의 말이 이어질 때마다 헬레나의 눈썹과 뺨이 사정없이 떨렸다. 생각만 같아서는 당장 머리채를 잡아 흔들고 싶었다.

몸만 굳어있지 않았다면 무심코 지금 그리 했을 것이다.

'지, 진정하자. 평정심을 찾아야지, 평정심.'

저 가증스러운 놈의 말에 흔들리면 안 된다. 한시라도 빨리 회복해서 다음 계획을 짜야 하니까.

헬레나는 심호흡을 하며 화를 억눌렀다. 그런 그녀를 향해 루크가 소리쳤다.

"큰어머님께서 그분들을 부르시지 않았다면 제가 어찌 그런 과분한 선물을 받았겠습니까? 전부! 모조리! 처음부터 끝까지! 큰어머님이 그분들을 부른 덕이 아니겠습니까! 크흐흑!"

"···!"

헬레나의 두 눈동자가 뒤집혔다. 아무리 진정하려고 해도 저놈의 말이 이어질 때마다 피가 거꾸로 솟았다.

루크는 허옇게 뒤집힌 눈깔을 못 본 척 절절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게 없어서 안타까울 뿐입니다. 그저 큰어머님께서 주신 귀하고도 귀한 선물을 음미하며 언제나 감사를 잊지 않겠습니다."

거기까지 말한 루크는 등을 돌리고 헬레나의 방에서 나왔다. 그리고 잠시 후, 하녀들의 비명이 들려왔다.

커허억!

"마, 마님께서 피를 토하셨다!"

"약을 가져와! 어서!"

아무도 안 보이는 각도에서 루크가 히죽 웃었다. 완벽한 불꽃 효도의 완성이었다.

**

헬레나는 그 이후 절대 안정을 이유로 어떤 손님도 만나지 않았다. 예외는 남편인 백작과 최측근으로 있는 하녀들뿐이었다.

가능하면 매일 가서 티배깅을 해주려고 했던 루크에겐 아쉬운 소식이었다.

"울화병이라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모르겠구나."

"제 교육을 전담하시느라 심신에 피로가 쌓이신 거겠지요. 그저 죄송스러울 따름입니다."

"아니다. 그게 어찌 네 탓이겠느냐?"

자책 섞인 아들의 목소리에 백작은 어깨를 두드리며 위로했다. 친어머니가 아님에도 효를 다하는 모습이 대견스러운 듯했다.

"어쨌건 이걸로 네 기본 교육도 다 끝났구나."

귀족으로 갖추어야 할 지식은 모두 갖추었다. 이제 어디에 가더라도 귀족의 예법이나 지식을 몰라 창피를 당할 일은 없어진 셈이다.

"혹여 가고 싶은 곳이 있느냐? 이제 당당히 번스타인의 혈통을 자칭할 수 있게 되었으니 마음껏 외출해도 된다."

"감사합니다, 아버지. 하지만 지금은 괜찮습니다."

필요하다면야 나가겠지만, 지금 당장은 바깥에서 할 일이 없었다. 오히려 가문 내부에서 해야 할 일이 아직 산더미다.

나갈 틈이 있으면 가문에서 할 일부터 먼저 처리해야 했다.

"그렇지만 너도 바깥 공기를 쐬고 싶을 때가 있을 것 아니냐. 내 영지에서까지 외출 허락을 받을 필요는 없을 테니, 호위 기사를 붙여주도록 하마."

"···!"

루크의 눈이 번쩍 뜨였다. 호위 기사. 말 그대로 신변 보호를 위해서 붙여줄 뿐인 기사다.

충성하는 대상은 여전히 아버지인 레너드 백작이니, 자기 멋대로 부릴 수 있는 수족이 아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표면상의 이야기일 뿐이다.

'명목은 호위 기사지만 내 측근으로 삼을 수도 있다는 소리.'

사실상 가장 가까이 붙어서 오랜 시간을 보내는 호위 기사다. 당연히 측근으로 설득할 시간이야 차고 넘치게 있다.

설득이 성공하느냐 아니냐는 자기 역량 나름이지만, 성공한다면 자신을 주군으로 섬기는 수족이 생기는 셈이다.

암투가 횡행하는 대가문에서는 아예 자식들의 용인술을 시험하는 용도로 호위 기사를 붙여주기도 할 정도다.

'아버지가 그런 생각으로 호위 기사를 붙여주려고 하진 않았겠지만.'

다른 형제 없이 유일한 후계자로 자란데다, 워낙에 겉과 속이 똑같은 백작이다.

아마 순수하게 호위 기사를 붙여줄 목적으로 꺼낸 말이겠지.

하지만 그게 호위 기사를 측근으로 만들면 안 된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호위 기사로 로더릭 경은 어떠하냐? 널 데려오면서 꽤 친해진 것 같다만."

"배려에는 감사드립니다만, 로더릭 경은 호위에 지나치게 심력을 쏟다가 쓰러지실 분입니다."

반 진심, 반 핑계가 섞인 대답으로 백작의 추천은 거절했다. 대놓고 말할 수는 없지만 로더릭은 이미 낚은 고기다.

언제든지 측근으로 삼을 수 있는 사람을 호위 기사로 삼아봤자 아무 이득이 없다.

이 기회가 아니라면 측근으로 삼을 수 없는 사람을 골라야 하지 않겠나. 마침 딱 좋은 인재가 가문에 머물고 있었다.

"그럼 네가 달리 생각해 둔 사람이라도 있느냐?"

"예. 전 브루노 경을 호위 기사로 삼고 싶습니다."

"뭐? 그 망나니 같은 작자를?"

루크의 대답에 백작이 얼굴을 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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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다시 생각해 보거라. 브루노는 호위 기사에 어울리는 자가 아니다."

백작은 필사적으로 루크를 뜯어말렸다. 기사에게 붙여주는 '경'의 호칭을 빼버린 것만 해도 브루노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었다.

"충성심도, 명예도, 신념도 없지. 그저 돈을 밝히고 술에 환장하는 망나니일 뿐이야. 그런 자를 어떻게 호위로 삼을 수 있단 말이냐?"

사람들 가라사대 망나니 기사 브루노. 그 외에도 도박의 기사, 술독에 빠진 생쥐, 금화에 미친놈 등 불명예스러운 별명이 잔뜩 붙은 자였다.

당연히 백작은 물론 동료 기사들 중에서 그를 좋게 보는 사람은 없었다. 오죽하면 번스타인 기사단의 수치라고 불리겠나.

그 행실 때문에 번스타인 가문의 기사 중 유일하게 종신 계약이 아닌 기간 계약의 봉신이기도 했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 내쫓아도 시원치 않은 작자다. 호위 기사라니 말도 안 된다."

"하지만 아버지께서는 그를 계속 쓰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야 무력만큼은 특출나니까!"

백작은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소리쳤다.

"행실이야 어쨌건 전투에서 기사 다섯 사람 몫은 하고도 남는 자다. 덕분에 많은 영지민과 기사들의 목숨을 건질 수 있으니 곁에 두는 게지."

그게 아니었다면 진즉 내쫓고도 남았다며 백작이 한숨을 토했다. 루크는 미소를 감추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제가 원하는 게 바로 그 무력입니다.'

이 세계에는 검기나 소드마스터 같은 개념이 없다. 인간은 아무리 단련해봤자 인간이다. 그나마 단련했을 때 강해지는 폭이 지구보다 훨씬 높기는 하다.

극한까지 단련하면 트롤과 대등하게 싸울 수 있으니까. 그것만으로도 일반 병사들 사이에선 일기당천이지만, 혼자 전장을 휩쓰는 수준은 아니다.

자기보다 못한 기사 여럿이 사방에서 달려들면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정말 재수 없으면 병사가 쏜 화살 한 방에 골로 가기도 한다.

'하지만 극히 일부의 인간은 이 법칙에서 예외지.'

혈통에 인간보다 강력한 존재의 피가 섞인 이들. 혹은 신이나 정령에게 사랑받아 그들에게 힘을 받은 자들.

그런 사람들은 단련할수록 인간을 초월한 힘을 보유하게 되며, 신화적인 무력으로 불리한 전황을 뒤집곤 한다.

브루노 역시 그런 예외 중 하나였다. 그의 혈통에는 폭풍거인의 피가 섞여 있으니까.

'게다가 브루노는 1년 안에 가문에서 나간다.'

난봉질을 하느라 여러 문제를 일으킨 데다, 사고를 친 직후 레너드 백작에게 급여 인상까지 요구하기 때문이다.

결국 참다못한 백작은 그 무력에도 불구하고 브루노를 쫓아낸다. 지금이 아니면 그를 측근으로 삼을 시간이 없었다.

"아버지의 말씀은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전 역시 그를 호위 기사로 삼고 싶습니다."

"아니, 대체 왜 브루노란 말이냐?"

"그런 무력을 보유하고도 행실이 엉망인 게 심히 아깝지 않습니까. 잘 다듬기만 하면 세상을 뒤엎을 기사가 될 수도 있는데 말입니다."

루크는 열의에 불타는 얼굴로 백작을 향해 호소했다.

"저한테 그를 맡겨 주십시오. 제가 브루노 경을 꼭 갱생시켜 보이겠습니다."

"뜻은 가상하다만 마음을 고쳐먹을 작자가 아닌데···."

"아무런 시도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습니까."

"하기야 지금보다 나빠질 데도 없구나."

잠시 고민하던 백작은 루크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다. 혹시 모르지 않나. 그 망나니가 약간이나마 사람이 될지.

갱생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그놈의 난봉질만 조금만 자제해도 대성공이었다.

"좋다. 브루노를 네 호위 기사로 임명해주마."

"감사합니다."

"일단 이쪽으로 부를 테니 얼굴이나 보거라. 거기 누구 없느냐?"

레너드 백작은 하인을 시켜 브루노에게 소환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잠시 후, 명령을 받았던 하인이 혼자 돌아왔다.

얼굴이 시커멓게 죽은 하인을 보며 백작이 물었다.

"어째서 너 혼자 온 게냐? 브루노 경은?"

"그, 그게······."

"말해봐라. 외출이라도 했더냐?"

"술병이 나서··· 못 오시겠다고···."

백작이 얼어붙고 루크는 눈을 껌뻑였다. 아무리 종신 계약이 아니라지만 섬기는 주군의 명을 거부하다니.

심지어 이유가 숙취란다. 이건 상상 이상의 미친놈이었다.

잠시 후, 백작은 마른세수를 하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로더릭 경을 부르마. 같이 브루노에게 가 보거라."

"감사합니다."

"설령 네가 갱생시키는 걸 포기하더라도 탓하진 않겠다."

"아닙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루크는 속으로 생각했다. 오늘 내로 이놈을 내 앞에 무릎 꿇리고 말겠다고.

****

오랜만에 로더릭과 만났지만, 반가운 인사를 나눌 상황은 아니었다. 사정을 들은 로더릭은 분노를 토해냈다.

"어찌 감히 기사 된 자가 그럴 수 있단 말입니까?"

루크도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귀족에 부를 때 뻗대는 거면 몰라도 주군의 말에 뻗대는 건 지나치지 않은가.

이쯤 되면 본인을 기사라기보다 용병에 가깝게 여기는 것 같았다.

"그대가 보기에 브루노 경은 어떤 사람인가?"

정식으로 백작에게 인지를 받았기에 루크는 이전과 달리 하대를 했다. 로더릭 역시 자연스레 하대를 받아들이며 대답했다.

"소문이랑 똑같습니다. 돈을 밝히고, 여자에 탐닉하고, 술독에 빠져 사는 인간이지요."

이젠 거기에 주군의 명령을 거부한 불충한 놈이라는 호칭도 더해야겠다면서 이를 갈았다.

잠시 후, 두 사람은 브루노가 있는 숙소에 당도했다.

"브루노 경! 당장 나오시오!"

로더릭이 문을 쾅쾅 두드리며 외쳤다. 안에서 아무 대답도 들리지 않자 로더릭이 더욱 목소리를 높였다.

"나오지 않으면 이 문짝을 부숴버리겠소!"

"제기랄, 나갈 테니까 그만 좀 하쇼."

그제야 문이 덜컥거리며 열렸다. 안에서 나온 건 남부인 특유의 구릿빛 피부를 가진 기사였다.

머리가 사방으로 뻗치고 눈곱이 끼어있는 꼴을 보니 이제 막 일어난 듯했다.

브루노는 입을 쩍 벌려 하품을 하며 중얼거렸다.

"로더릭 경, 사람 자는 데 왜 난리요? 딱히 임무도 없는데 쉬게 냅두쇼."

"임무? 백작 각하의 소환령은 임무가 아니란 소리요?"

"그건 사정이 좀 있었소. 불호령이 안 떨어진 걸 보니 용서해 주신 모양이군."

천연덕스럽게 대답하며 브루노는 수통을 들이켰다. 얼핏 보면 물처럼 보였지만 입에서 흘러내리는 액체는 붉은색이었다.

루크가 어이없는 표정으로 브루노를 향해 말했다.

"술병이 나서 못 오겠다고 했으면서 포도주를 마시나?"

"음? 누구요?"

"루크 도련님이시다! 작작 좀 하지 못하겠나!"

브루노가 멍청히 되묻자 분노가 폭발한 로더릭이 경어를 때려쳤다. 브루노는 그 말을 듣고서 이제야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새로 오신 도련님이셨군. 기사 브루노가 도련님을 뵙습니다."

"그래, 브루노 경. 숙취라면서 포도주를 마시는 이유가 뭔가?"

"이건 해장술이라는 겁니다. 술은 술로 다스린다. 제가 태어난 고향의 격언이지요."

뭔 이열치열도 아니고. 신박한 개소리에 헛웃음이 나왔다.

"아무튼 일어났으니 통보하도록 하지. 지금부터 자네는 내 호위 기사일세."

"예? 그게 무슨 소립니까?"

"들은 그대로일세. 내가 자네를 호위 기사로 지명했거든. 아버지께서 방금 그것 때문에 부르려고 하신 걸세."

그 말에 브루노가 얼굴을 찌푸렸다. 엄청나게 하기 싫다는 감정이 그대로 드러났다.

숨길 생각도 없는 건지 브루노는 직설적으로 말했다.

"그거 거부할 순 없습니까?"

"이놈!"

"로더릭 경, 진정하게."

발작하려는 로더릭을 막으며 루크가 앞에 나왔다.

"내가 듣자 하니 자네 무력이 대단하다고 들었네. 그래서 내 호위 기사로 들이려고 했네만."

"뭐, 제 실력이 대단한 건 부정할 수 없지요."

브루노는 가슴을 펴고 어깨를 으쓱였다. 자신의 무력에 절대적인 자신감이 있는 사람만 보일 수 있는 반응이었다.

"그래? 내 옆에 있는 로더릭 경과 비교하면?"

"에이, 로더릭 경이야 한손으로 싸워도 이기죠."

"···!"

대놓고 자신을 무시하는 발언에 로더릭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루크는 못 믿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과장이 심하군. 내가 알기론 로더릭 경은 상당한 수준의 기사인데."

"그래도 저한테는 안 됩니다. 직접 보여드릴 수 없는 게 아쉽군요."

"아니! 직접 보시게 될 거다! 네놈에게 결투를 신청한다!"

분노가 폭발한 로더릭의 외침에 브루노가 씩 웃었다.

****

'일부러 도발했군.'

옆에서 보기에는 생각 없는 발언으로 화를 돋운 것처럼 보이는 장면. 하지만 루크는 알 수 있었다.

브루노가 명백히 의도적으로 로더릭을 자극했다는 걸.

'원한은 아니고, 심심풀이인가?'

브루노의 표정에는 좀이 쑤셨는데 마침 잘됐다는 수준의 감정밖에 없었다. 로더릭에게 낭패를 당할 거라곤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검을 들고 결투 준비를 마친 두 사람이 마주 섰다.

"난 준비됐으니 당장 시작하자구."

"좋다. 도련님께서 승패를··· 지금 뭐 하는 거냐?"

"뭐 하는 거냐니?"

"검을 왜 그따위로 잡느냔 말이다!"

양손으로 검을 잡고 정자세를 취한 로더릭에 비해, 브루노는 한손으로만 검을 잡은 상태였다.

브루노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자네는 한손으로 충분하다고 했잖아."

"끝까지 나를 모욕하는가!"

"진짜라니까."

"그 여유가 얼마나 갈지 보겠다!"

분노한 로더릭은 단숨에 거리를 좁히며 달려들었다. 그 깔끔한 동작에 루크가 속으로 감탄했다.

'이야, 진짜로 실력 괜찮구만.'

저 정도면 나이에 비해서 상당한 수준이다. 타고난 천재가 아닌 이상 같은 세대에서는 상대를 찾기 힘들 거다.

하지만 브루노는 입가에서 웃음을 지우지 않고 검을 들었다.

떠엉

"···!"

검이 부딪치는 소리에 로더릭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분명 양손으로 휘두른 검이 한손으로 받아내는 검에 막혀 있었다.

아무리 힘을 줘도 브루노의 검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이런 말도 안 되는··· 흡!"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던 로더릭이 날아드는 일격을 보고 냉큼 검을 들어 막았다. 직후, 두 개의 검이 충돌했다.

꽈앙

"컥!"

몸 전체에 울리는 충격에 로더릭이 뒤로 쭉 밀려났다. 얼마나 힘이 강력했는지 검신이 계속 떨렸다.

두 사람의 짧은 공방에 루크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이건 뭐 인간의 탈을 쓴 트롤도 아니고···.'

회귀 전, 루크는 상단 호위 일을 하면서 어느 용병단과 같이 머무른 적이 있다. 그때 용병단 내에 스승과 제자는 이런 대화를 나누었다.

-스승님, 상대가 쌍검을 쓰면 어떻게 대처해야 합니까?

-넌 양손검을 쓰잖냐. 그냥 있는 힘껏 휘둘러.

-그럼 상대가 한손으로 막고 다른 손으로 공격하잖아요.

-뭔 헛소리야? 검이 방패냐? 한손검으로 양손검을 막게?

-예? 못 막나요?

-당연히 못 막지! 세게 휘두르면 방어 뚫고 몸통까지 쪼개니까 조준만 잘해.

물론 그걸 피하거나 쳐낼 수준의 고수면 죽었다고 생각하라는 조언도 덧붙였다.

루크는 옆에서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며 참 좋은 가르침이라 생각했다.

한손으로 양손을 못 막는다는 건 상식이었으니까.

'그런데 그 상식을 간단히 깨부수는구만.'

화려한 기교도, 정확한 기술도 없다. 그저 인간을 초월한 근력만으로 브루노는 로더릭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가감 없이 모든 힘을 발휘하면 전장에서 재앙이 될만한 무력이었다.

'넌 꼭 내 밑에서 굴려주마.'

루크가 입술을 핥으며 한창 신나게 검을 놀리는 브루노를 쳐다봤다.

****

까앙

열두 번의 합을 나눈 끝에 로더릭의 검이 날아갔다. 손아귀가 찢어져 피가 나올 때까지 버텨봤지만 이제 한계였다.

더 버텼다가는 손목의 뼈가 부러질 판이니까. 브루노는 의기양양한 얼굴로 검을 어깨에 걸쳤다.

"이걸로 내 승리인가?"

"···그래. 나의 패배다."

로더릭은 고개를 푹 숙였다. 패자에게 말은 없다. 비록 마음에 들지 않는 상대지만, 놈은 자신의 강함을 증명했다.

그렇다면 기사로서 결과에 승복할 뿐.

"너무 실망하지 말라고. 상대가 나여서 그랬던 거지 다른 사람이었다면 흐읍!"

"뭐냐?"

"아니, 갑자기 오한이 들어서···."

브루노는 요즘 술을 너무 마신 탓이라 여기며 어깨를 문질렀다. 뒤에서 혀를 날름거리는 루크를 보지 못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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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두 사람의 결투가 끝난 후, 루크는 패배한 로더릭에게 다가갔다.

"로더릭 경은 손에 상처가 났으니 치료하러 먼저 가 보게."

"아닙니다. 그저 생채기일 뿐이니 도련님 곁을 지키겠습니다."

"우리가 처음 만난 날을 잊었나? 그때 내가 뭐라고 했었던가."

"···기사는 몸이 재산이라고 하셨지요."

그 대답에 루크가 말없이 빙그레 웃었다. 자기 생각은 그때와 다름이 없다는 암시였다.

로더릭이 감동한 표정을 짓자, 루크는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재차 당부했다.

"비록 가벼운 상처지만 검을 쥐는 손 아닌가. 얼른 치료하도록."

"진심으로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도련님."

로더릭은 깊게 고개를 숙인 후 떠나갔다. 로더릭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루크는 고개를 돌려 브루노에게 찬사를 보냈다.

"과연 대단한 무력이군. 소문 이상일세."

"으하하! 제가 좀 많이 강한 놈이지요."

한창 호탕하게 웃던 브루노는 은근한 눈빛으로 속삭였다.

"도련님, 사실 저는 이것보다 훨씬 강하답니다. 저주 때문에 제 실력을 못 내는 거지요."

"오호, 그렇단 말이지?"

"예. 한참 전에 어떤 귀쟁이 요술사랑 싸우다 저주에 걸린 적이 있거든요. 놈은 두 쪽으로 쪼개버렸지만, 놈이 죽어도 저주가 안 풀리지 뭡니까! 그 일 이후로 힘이 예전 같지가 않단 말이죠. 에휴!"

브루노가 깊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흔들었다. 과장된 움직임은 남자 특유의 허세처럼 보였다.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애가 아닌 이상 누구도 믿지 않을 소리.

'무서운 건 저게 진실이란 거지.'

그 사실이 밝혀진 건 한참 뒤다. 번스타인 가문에서 쫓겨난 브루노는 고향으로 내려갔다가 적대 가문에 의해 사로잡힌다.

잡는 과정에서 상당한 피해가 나오긴 했지만, 적대 가문의 원한 역시 녹록지 않았다.

브루노에게 쌓인 게 많았던 귀족 가문은 포로의 관습을 무시하고 온갖 모욕과 조롱을 그에게 퍼부었다.

'그 모욕 중 하나가 저주를 푸는 열쇠였다지.'

당연히 의도한 건 아니다. 설마 모욕하려고 한 행동에 해주의 비밀이 숨어있을 줄은 누가 알았겠나.

당사자인 브루노마저 저주가 풀린 걸 보고 얼이 빠졌다고 한다.

다만 그 직후 정신을 차린 브루노는 맨손으로 쇠사슬을 뜯어내 버렸고, 혼자서 가문 전체를 몰살했다고 한다.

그래서 붙여진 별명이 몰살의 브루노였다. 루크는 그 사실을 모르는 척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과연, 지금도 강한데 저주만 풀면 더 강해진다니. 역시 내 호위 기사가 될 자격이 있군."

실실 웃던 브루노의 얼굴이 그 말을 듣자마자 팍 구겨졌다.

"도련님, 그것 말입니다만 그냥 안 할 수는 없습니까."

"아까부터 호위 기사를 맡는 게 영 싫은 모양이군."

"그야 귀찮으니까요."

숨길 생각도 없이 브루노가 본심을 토해냈다.

"호위 기사라는 게 그런 거 아닙니까. 도련님 곁에 붙어 다니면서 온종일 암살자나 무뢰한이 없나 살피고 다니는 거."

"그렇긴 하지."

"저는 절대 못 합니다. 그냥 딴 사람 알아보시죠."

"흠. 내가 억지로 시킨다면?"

"부르실 때마다 도망쳐야죠, 뭐."

자기가 계속 도망치면 별수 없이 딴 놈을 호위로 삼지 않겠느냐고, 브루노는 너스레를 떨었다.

"내가 자네의 저주를 풀어줘도 안 되겠는가?"

"에이. 도련님이 저주에 대해서 뭘 아신다고. 수많은 전문가에게 찾아갔는데도 못 푼다고 하던 저주인데요."

"하긴, 내 주제에 저주를 무슨 수로 풀겠나. 그치?"

실없는 농담을 했다는 듯 루크가 웃자, 브루노도 따라 웃었다.

"자네 혈통에 폭풍거인의 힘이 깃들어 있고, 그 저주가 거인의 힘을 제한해서 바람의 힘을 못 쓰게 된 게 아니라면 내가 못 풀지. 내가 익힌 해주법은 겨우 그거 정도밖에 없는데. 하하하."

브루노의 몸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웃음을 뚝 그친 그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도, 도련님.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자네의 혈통이 거인이고, 그 저주가 거인의 힘을 제한하는 거라면 내가 풀 수 있다고 했네."

뒤통수를 망치로 얻어맞은 듯한 표정으로 브루노가 입을 벌렸다. 그리고 곧 핏발이 선 눈으로 루크를 쳐다보며 양어깨를 잡아챘다.

"대체 어디까지 알고 계신 겁니까?"

"뭔 소린지 모르겠군. 나는 그냥 해주법을 알고 있다는 소릴 했을 뿐인데."

루크는 어깨를 으쓱하며 시치미를 뗐다. 알려줄 생각이 없다는 암시에 한참 망설이던 브루노가 소리쳤다.

"좋습니다! 저주를 풀어주실 수 있다면 호위 기사든 뭐든 하지요!"

"아니, 생각이 바뀌었네."

"예? 그게 무슨 소립니까?"

"생각해보니 호위 기사로는 저주를 풀어준 대가가 너무 싸지 않은가? 종신 계약 정도는 돼야지."

"···!"

브루노가 입술을 깨물었다. 종신 계약이란 말 그대로 주군과 신하의 계약. 누군가를 평생에 걸쳐서 모시며 충성을 다 바친다는 맹세다.

한 번 종신 계약을 하면 주군과 주군의 후손 외에 다른 영주를 결코 섬길 수 없다. 죽든 살든 그 가문과 평생을 함께하게 되는 셈이다.

브루노 입장에서는 썩 마음에 들지 않는 조건이었다. 백작과 계약한다면 몰라도 자신의 영지 하나 없는 애송이 도련님을 섬기라고?

"그건 좀 지나친 것 같습니다만."

"그래, 내가 다시 생각해보니 역시 지나쳤어. 종신 계약을 하느니 그냥 평생 힘이 제한된 채 살아가는 게 훨씬 낫지. 이 제안은 잊어주게."

"······."

브루노는 속으로 쌍욕을 내뱉었다. 종신 계약을 하지 않으면 해주해 줄 생각이 없다는 소리가 아닌가.

이를 갈면서 브루노가 루크를 노려봤다.

"도련님, 그거 아십니까?"

"뭘 말인가."

"도련님도 아시겠지만, 평민이 같은 평민을 죽이면 사형 아닙니까."

"그렇지."

"그런 놈들 중 외도한 자기 마누라를 죽여서 오는 놈이 많습니다. 마누라 위에 다른 놈이 올라탄 꼴을 보니 꼭지가 돌아버리는 거지요."

외도 상대도 같이 죽이긴 합니다만, 하고 브루노가 덧붙였다.

"그런데 막상 죽일 때는 후련해하지만, 끌려오면 울고불고 난리도 아닙니다. 죽고 싶지 않다고요."

"그렇겠지. 누구나 죽음은 두려운 법이니."

"하지만 죽음이 무서운 놈들도 외도 현장을 목격할 때만큼은 꼭지가 도는 겁니다. 너무 화가 난 나머지 사형이고 뭐고 신경 안 쓰게 되는 거지요."

"그렇군. 그런데 그게 어쨌다는 건가?"

"제가 지금 그런 상태입니다."

콰득, 하는 소리와 함께 브루노의 손이 벽돌을 잡아 뜯었다. 어찌나 악력이 강했는지 돌가루가 푸스스 떨어졌다.

"이 저주가 걸린 기분, 다른 사람은 절대 이해 못 할 겁니다. 그나마 비슷한 비유를 하자면 날개가 잘린 기분이겠지요."

다른 사람들은 날 수 없을 테니 그 기분을 모르지만, 한 번이라도 날아본 사람은 안다. 그 기분이 얼마나 끝내주는지.

그런데 날개가 잘려서 두 번 다시 날 수 없다는 통보를 받은 거다.

"그건 정말 절망스럽습니다. 해주법이 있다고 했는데 알려주지 않겠다고 하면 꼭지가 돌 만큼요."

"협박인가?"

"진실입니다. 마누라를 때려죽이는 평민이 '죽여버리겠어'라고 말만으로 끝내지 않는 것처럼."

조금 전의 털털한 분위기가 거짓인 것처럼 브루노의 눈에 진한 살기가 맺혔다.

"도련님께는 두 가지 선택이 있습니다. 첫 번째, 얌전히 여기서 해주법을 말해주는 거죠."

"나머지 하나는?"

"그야 온몸의 뼈가 박살 날 때까지 두들겨 맞는 겁니다. 그러다 보면 해주법도 알아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기간 계약이라 해도 섬기는 주군의 아들에게 그딴 짓을 했다가는 기사 취급도 못 받는다.

평민 이하의 버러지 취급을 받을 수도 있고, 최악의 경우 황실이 아예 평민으로 강등시켜 버릴 수도 있다.

그런데도 브루노는 이리 말하는 거다. 꼭지가 돈 사람이 그딴 걸 생각하겠느냐고.

"자, 얌전히 말씀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죽기 직전까지 맞아보시겠습니까."

단호한 어조에 루크가 고민하는 듯 살며시 눈을 감았다. 브루노는 침묵하는 루크를 보며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좋아, 효과가 있어!'

브루노가 방금 했던 말은 죄다 공갈이었다. 아무리 개망나니 브루노라도 그런 짓까지 저지를 용기는 없었다.

귀족이라는 신분 덕을 본 게 어디 한두 번이던가. 세상 끝까지 알려질 불명예와 귀족 신분마저 박탈당하면 힘을 되찾은들 무슨 소용인가.

그렇지만 종신 계약으로 아무 세력도 없는 도련님에게 매여 살기도 싫다. 그럼 남는 건 공갈뿐이다. 성공만 하면 대가 없이 해주법만 날로 먹을 수 있으니.

'역시 아버지의 말씀대로야.'

무식한 용병기사라며 주변에서 욕을 먹었지만, 사실은 매우 지혜로웠던 분. 브루노는 그런 아버지의 옛 조언을 떠올렸다.

-브루노, 아비의 말을 잘 듣고 기억해둬라.

-예, 아버지.

-세상일은 대부분 폭력으로 해결할 수 있단다. 주먹에는 장사가 없어. 그러니 일이 복잡해지면 두들겨 패거라.

훌륭한 가르침이었다. 아버지의 말대로 세상사 대부분의 일은 폭력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 하지만 브루노는 혹시 몰라 한 번 더 물어봤다.

-그럼 폭력을 쓸 수 없는 상대라면 어떻게 하죠?

-두들겨 패거나 죽여버리겠다고 협박을 하렴. 사람이라면 누구든 제 몸은 아끼니까 굽히고 들어갈 거다.

-과연!

그때 물어본 게 행운이었다. 폭력을 써서는 안 되는 상대한테도 그냥 다 뒤집어엎을 듯한 분위기를 잡으면 대부분 통했으니까.

가끔 안 통해서 위험에 처할 때도 있었지만, 적어도 눈앞에 도련님한테는 확실히 통한다는 확신이 있었다.

'그래 봤자 귀족 도련님이지. 살기를 받아본 적이나 있겠어?'

전장을 경험해 본 사람과 경험하지 않은 사람의 차이는 크다. 살기를 처음 받으면 아무리 건장한 사내라도 몸이 떨리기 마련.

하물며 아직 소년인 루크라면 말할 것도 없다. 벌써 공포로 눈을 감고 있질 않나.

가만히 있던 루크는 눈을 살짝 뜨고는 말했다.

"브루노 경, 내가 대답을 하기 전에 여신께 기도를 올려도 되겠나?"

"얼마든지 하시죠. 다만 기도가 끝나시고도 대답을 못 한다면 제 주먹이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알겠네."

루크는 하늘에 손을 뻗고 기도하는 자세를 취하며 중얼거렸다.

"여신께 루크 번스타인이 어머니 리리아의 이름과, 외조부 노먼의 이름과, 아버지 레너드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나이다."

"···?"

이 시기에 갑자기 웬 맹세지? 이 상황에서 무언가를 맹세할 건덕지가 어디 있기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브루노는 다음에 나온 말을 듣고 기겁했다.

"눈앞에 있는 새끼가 저한테 해를 입혔는데도 제가 해주법을 말한다면, 스스로 양눈을 뽑아버리게 해주소서."

'뭐?'

브루노는 순간 자신이 뭘 잘못 들었나 싶었다. 하지만 의문을 해소할 틈도 없이 루크의 기도는 계속되었다.

"그리고 제 혀를 자르고, 귀를 자르고, 코를 자르고, 배를 갈라 내장을 꺼내고, 살을 발라 늑대와 개의 먹이로 주며, 그 모든 행위를 할 때까지 살아서 고통받도록 하시고···."

이어지는 건 브루노조차 헛구역질할 정도의 고문 퍼레이드였다. 도대체 어디서 저런 고문을 들은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한참을 주절거리던 맹세는 마지막 남은 뼛조각조차 몬스터 먹이로 주는 지점에서 멈췄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또한, 해를 입고도 해주법을 말한다면 육체를 떠난 제 영혼이 하늘에 올라간다면 안식을 취하지 못하게 하시고, 오직 어둠에서 떠돌게 하시며, 영원의 화염 속에 불타는 고통을 느끼게 하시고···."

육체적인 고통이 끝났나 했더니만 다음에 나온 건 영혼의 고문 퍼레이드였다. 이번에도 온갖 창의적인 고문이 튀어나왔다.

몸뚱이야 그렇다 쳐도 저런 영혼의 고문법은 또 어떻게 떠올리는 건지 신기할 지경이었다.

영혼을 고문하는 기나긴 맹세는 만신창이가 된 혼을 악마의 먹이로 주라는 내용으로 끝마쳤다.

"자, 이걸로 맹세가 끝났군."

루크는 생글생글 웃으며 넋을 잃은 브루노를 쳐다봤다.

"브루노 경"

"네, 네?"

"이제 쳐봐, 새끼야."

"······."

루크의 말에 브루노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방금 전 그 다채로운 고문의 조건은 오직 하나.

브루노가 해를 끼쳤는데도 해주법을 말해줬을 때였다. 당연하지만 저딴 맹세를 하고도 해주법을 말할 사람은 없었다.

천하의 겁쟁이라도 저런 맹세 뒤에는 입도 뻥긋하지 않을 것이다. 브루노는 눈을 감고 아버지의 옛 조언을 다시 떠올렸다.

-그런데 아버지, 협박해도 안 먹히는 독종이면 어떡하죠?

-그럼 그냥 독종의 말대로 해라.

-예? 왜요?

-왜긴 왜겠느냐.

아버지는 브루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얘기했다.

-독종 말대로 안 하면 그때는 네가 X 될 테니까 그렇지.

진정 지혜로운 분이었다. 진짜로 그렇게 됐으니까.

'시발, X 됐다.'

이게 백작의 귀에 들어가면 브루노는 끝장이었다. 쫓겨나는 수준이 아니라 분노한 기사들에게 둘러싸여 조각조각 찢길 수도 있었다.

설령 도망친다고 해도 끝까지 쫓아가서 죽여버리려고 할 게 분명하다. 전성기라면 모를까 지금의 약해진 힘으로는 살아남기 어려웠다.

'어떻게든 만회해야 한다!'

생존본능에 불이 붙은 브루노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그리고 이내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는 단 하나의 방법을 찾아냈다.

다시 눈을 뜬 브루노는 존경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루크를 마주보았다.

"훌륭하십니다. 역시 번스타인 가문의 혈통이시군요."

"···."

"사실 도련님을 시험해 본 거였습니다. 도련님께서는 제 주군이 될 자격이 있으십니다."

"···."

"일개 기사 주제에 시험을 했다며 섭섭하게 여기지 마시길. 기사라면 누구든 알맞은 주군을 찾고 섬기는 법입니다."

"여신이시여."

개소리를 늘어놓는 브루노를 무시하며 루크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 새끼가 30초 안에 무릎을 안 꿇었는데 해주법을 말한다면 제 눈알을 뽑으시고···."

"주군! 이 브루노가 무릎을 꿇었습니다!"

"여기에 더해서 이 새끼가 머리를 땅바닥에 안 박았는데 해주법을 말한다면 제 코를 자르시고···."

"보십시오! 이마가 땅바닥과 딱 달라붙었습니다!"

"더불어 이 새끼가 저쪽까지 온몸으로 기어가지 않았는데도 해주법을 말한다면 제 귀를 자르시고···."

"한때 제 별명이 갯지렁이 브루노인 걸 모르셨군요!"

브루노는 필사적으로 땅바닥을 기며 생각했다. 역시 아버지의 말씀은 틀린 게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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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화

브루노는 루크에 대해서 잘 모른다. 겨우 몇 달 전에 번스타인 가문에 온 데다, 딱히 관심도 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여러 방면에 천재적인 성과를 보인다는 소리는 들었다. 그 소문이 사실이라는 걸 지금 절절히 느꼈다.

루크는 갈굼에도 천재적인 재능을 보였다.

"발 내려간다. 똑바로 안 서지?"

"···!"

한 다리를 들고 땅에 이마를 박은 브루노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온몸이 저릿해서 힘을 빼는 순간 당장이라도 넘어질 것 같았다.

물론 그랬다가는 지금보다 더 고통스러운 무언가가 추가되리라. 아무리 힘들어도 죽어라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아니, 도대체 왜 이렇게 지치는 거지?'

전장에서 하루종일 검을 휘두른 적도 있는 브루노다. 어지간한 일로는 까딱도 하지 않을 체력이 있었다.

하지만 루크의 갈굼은 그 모든 체력을 금방 바닥내버렸다.

"어이, 브루노."

"예, 주군!"

"많이 힘들어 보이는데 이쯤에서 그만둘까?"

너무나도 자상한 목소리. 하지만 이건 함정이다. 이미 몇 번의 경험으로 깨달은 브루노가 소리쳤다.

"괜찮습니다!"

"어이쿠, 힘들 텐데도 계속하겠다고?"

"그렇습니다! 제 무례함은 그 무엇으로도 용서받기 힘든데 이 정도로 끝내주시지 않았습니까? 부디 마음껏 벌해주십시오!"

절절하고도 자책감 넘치는 목소리. 사악한 노예주조차 순간 마음이 약해질 만한 호소였다.

루크는 촉촉하게 젖은 눈동자로 가슴을 움켜쥐었다.

"네 충심이 나를 감동시키는구나."

"과분한 말씀입니다, 주군!"

"주군된 자로서 봉신의 마음을 무시할 수는 없는 법! 네 뜻대로 하마!"

"예?"

"자, 그 죄책감이 풀릴 때까지 굴러보자! 일단 30분 추가다!"

'시발···.'

상큼한 루크의 목소리에 브루노의 눈이 부르르 떨렸다. 갈굼이 끝난 건 그로부터 2시간 후였다.

****

"크헉! 흐어억!"

기진맥진한 브루노는 바닥에 몸을 눕혔다. 이젠 진짜 손가락 까딱할 힘도 없었다.

그 모습을 보며 루크가 피식 웃었다.

"이 정도로 끝난 게 다행인 줄 알아. 생각 같아선 더 굴리려다 말았다."

"흐헉! 주군의, 허억! 자비에, 감사드립니다!"

아니꼬운 소리였지만 브루노는 필사적으로 대답했다. 이미 코가 꿰였는데 어쩌겠는가. 설설 기는 수밖에.

호흡이 좀 진정되고 나자, 루크는 브루노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지. 나는 네게 해주법을 알려주는 대신, 너는 내게 충성을 맹세하는 거다. 어때?"

"그런데 주군, 제가 생각해보니 조금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만."

"또 구르고 싶다고?"

"아니요! 그게 아니라 현실적인 문제 말입니다!"

브루노는 손사래를 치면서 차근차근 설명했다.

"생각해보십시오. 제가 지금은 백작 각하를 섬기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

"주군께 충성을 맹세하면 당연히 각하와의 계약도 해지해야 할 거고요."

"그야 두 명의 주군을 섬기는 기사는 없으니까."

"그런데 주군께서는 제게 봉급을 주실 수 있습니까? 많이 받아먹겠다는 소리가 아닙니다. 정말 최소한이라도요."

"음."

타당한 지적에 루크가 턱을 쓸었다. 확실히 그건 맹점이었다.

"하긴, 주군의 의무를 다하기엔 내 여건이 조금 부족하긴 하지."

종신 계약은 죽을 때까지 일방적으로 헌신하겠다는 노예 계약이 아니다. 군주는 충성을 바치는 기사에게 걸맞은 대가를 줄 의무가 있다.

괜히 기사들이 대가문과의 종신 계약을 꿈꾸겠나. 다 받는 게 그만큼 있으니까 충성 맹세를 하는 거다.

종신 계약을 맺은 기사에게 최소한의 대접조차 해주지 못할 경우, 그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수치가 된다.

심지어 그 상태가 몇 년간 계속되면 기사 쪽이 일방적으로 충성을 거둬들여도 흠결로 여겨지지 않는다.

"뭐, 그건 금방 해결될 문제니까 상관없긴 하다만."

"예? 진짜로요?"

"그래. 적어도 받는 금화가 줄어드는 일은 없을 거다."

브루노가 눈을 껌뻑였다. 도대체 무슨 마법을 부려야 그런 일이 가능해진단 말인가.

종신 계약을 한 기사의 봉급은 귀족 도련님의 용돈 정도로 끝날 수준이 아니다.

그런데 그 액수를 하나도 안 깎고 똑같이 줄 수 있다니.

"아무튼 봉급 문제는 알아서 할 테니 걱정하지 말고."

"주군께서 그러시다면야···."

"그럼 슬슬 충성 맹세를 해라. 해주법 빨리 받고 싶으면."

"알겠습니다."

충성 맹세를 위해 한쪽 무릎을 꿇은 순간, 브루노의 눈이 번쩍 뜨였다.

'잠깐만. 이거 바로 해주법 알려주면 먹고 튀어도 되는 거 아냐?'

수많은 사람 앞에서 하는 종신 계약이라면 절대 못 벗어난다. 이름과 가문, 얼굴까지 다 알려지는데 무슨 수로 도망친단 말인가.

하지만 지금 이런 장소에서 은밀히 하는 계약이라면? 당연히 본인의 양심 외에는 아무런 구속력도 없다.

하지만 순간적으로 떠오른 희망은 바로 꺾였다.

"참. 충성 맹세할 때는 여신께 맹세하지 않아도 된다."

"예? 그럼 누구한테 맹세를 합니까?"

"누구에게 하긴. 네 위대한 선조와 거인의 혈통에 대고 맹세해야지."

"...."

브루노는 입을 다물었다. 그렇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혈통을 건 맹세는 자신의 힘과 연관이 되니까.

이유는 몰라도 과거 조상님 중 혈통을 들먹인 맹세를 어겼다가 힘을 모조리 잃은 분이 있다고 들었다.

그래서 아버지도 신신당부했었다. 혈통에 대고 한 맹세만큼은 어기지 말라고.

'제기랄. 외통수구만.'

하기야 해주법도 알고 있는 도련님이다. 그런 사실쯤이야 진즉 알았겠지. 자포자기한 브루노가 외쳤다.

"제 위대한 선조와 혈통에 대고 맹세합니다. 도련님께서 정확한 해주법을 알려주셔서 힘을 되찾는다면, 평생에 걸쳐 충성을 다 하겠습니다."

조건을 걸은 건 마지막 남은 사소한 저항이었다. 루크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이제 알려주지. 저주의 해주법이 궁금하다고 했지?"

"그, 그렇습니다."

"네 해주법은 말이지······."

****

루크가 떠나간 후, 브루노는 자신의 숙소에서 우두커니 서 있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기가 막혔다.

'염병, 진짜로 해주법이 그거라고?'

처음 들었을 때는 루크가 자길 놀리는 줄 알았다. 얼마나 복장이 뒤집혔는지 약점 잡혔다는 것도 잊어먹고 날뛰었다.

-도련님, 지금 장난하십니까?

-난 매우 진지한데. 그리고 주군이라 불러야지.

-정확히 해주법을 알려주셔야 충성을 바치죠!

-그게 해주법 맞아.

-데운 맥주를 마셔서 저주를 푸는 게 말이 됩니까!

주술에 대해 일가견이 있는 모든 사람을 찾아갔는데도 못 푼 저주다. 겨우 데운 맥주 마신다고 풀릴 리가 있겠는가.

지금까지 놀림을 당했다는 생각에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 모습에 루크는 혀를 차면서 설명했다.

-저주란 게 뭔지는 알고 있냐? 어떻게 작동하는지는 이해하고?

-그야··· 모르죠. 전 기사지 요술쟁이가 아니잖습니까.

-그럼 들어둬. 저주는 원래 푸는 조건이 빡빡할수록 강제로 해제하기 쉬워.

예를 들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꼭대기에만 열리는 꽃을 먹어야 풀리는 저주가 있다 치자.

당연히 저주에 걸린 사람은 평생 노력해도 풀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조건이 어려워진 만큼 저주의 '두께'는 약해진다. 구조를 아는 사람이 망치로 치면 팍삭 깨지는 거다.

일반적으로 저주를 강제로 푸는 건 이런 방식에 가깝다.

-그래서 저주를 거는 작자들은 달성하기 어려운 조건을 잘 안 걸어. 오히려 쉬운 해주 조건을 배배 꼬아서 걸지.

-배배 꼬아서 걸다니요?

-어떤 사람이 저주를 받았다고 치자. 그런데 해주법이 어린애를 걷어차는 거야. 무척 쉬운 조건이지.

-그렇겠죠. 애들이야 사방에 넘쳐나는데.

개인의 인성과는 별개로 마음만 독하게 먹으면 금방 풀 수 있는 저주. 이렇게 조건이 간단하면 반대로 저주의 두께가 강해진다.

외부에서 어지간한 망치로 두들겨도 절대 안 깨지는 거다. 이런 저주를 풀려면 본인이 직접 해주하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저주를 받은 당사자가 어린애들 좋아하는 사제라면? 자기도 모르게 저주를 풀 가능성이 있겠냐?

-....

브루노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확실히 그런 경우라면 조건을 모르는 이상 평생 풀지 못할 것이다.

말을 잃은 브루노를 보며 루크가 차분히 설명했다.

-너, 남부 출신이지?

-그렇죠.

-술은 맥주랑 와인 중 뭐가 좋지?

-북부 놈들 맥주따윈 말오줌입니다. 남부의 와인이 진정한 술이죠.

-뜨뜻한 맥주 있으면 마시겠냐?

-차가워도 맛이 없는 게 맥주인데 그딴 걸 왜··· 시발.

브루노는 자신의 얼굴을 양손으로 감쌌다. 생각해보니 자기 성격이라면 죽어도 안 풀릴 저주였다.

회귀 전에 브루노가 저주를 푼 것도 적대 가문에서 모욕을 주기 위해 데운 맥주를 줬기 때문이었다.

-브루노 경께서 갇혀 계시느라 목이 마르신가 보군! 데운 맥주라도 내어드려라!

-이 개자식들이! 와인을 못 주겠다면 물이라도 줘라! 데운 맥주라니, 개도 안 핥아먹겠다!

-흥, 네놈에게는 딱 어울리는 말오줌 아니더냐. 물은 치워라! 목이 마르면 그거라도 마시겠지.

-이 찢어 죽일 놈들! 열쇠 간수 잘해라! 내가 사슬에서 풀려나는 날이 네놈들 제삿날이다!

결과적으로 그놈의 모욕 때문에 저주가 풀리고 브루노의 학살극이 시작된 셈이다.

덤으로 루크도 이때 이야기가 널리 퍼지면서 해주법을 알게 되었다.

'제기랄. 괜히 그 귀쟁이한테 술 얘기를 해서는.'

당시 귀쟁이랑 싸우면서 얻은 약탈품 중에 유난히 질 좋은 와인이 많았다. 그에 비해 싫어하는 맥주는 전혀 없었다.

그래서 그나마 술 보는 안목이 있다며, 싹싹 긁어가서 잘 마셔주겠다고 도발 한 번 했었다.

설마 그 말을 귀담아들었다가 저주로 써먹을 줄이야.

"에휴. 그나마 지금이라도 알아서 다행인가."

루크한테 했던 '날개 잘린 기분'이라는 건 거짓말이 아니었다. 그때로 돌아갈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비록 팔자에도 없는 종신 계약을 맺게 되었지만, 저 정도 수완이 있는 도련님 아래에서라면 굶지는 않겠지.

그때, 다른 기사 몇몇이 숙소에 찾아왔다.

"브루노 경!"

"아니, 무슨 일들이시오? 평소에 안 오시던 내 숙소에 다 찾아오고?"

기사단에서 반쯤 왕따처럼 지내던 브루노다. 사고를 친 날이 아니라면 이렇게 많은 기사들의 방문을 받은 적이 없었다.

나도 모르게 뭔 사고라도 쳤나 싶던 브루노에게 한 기사가 불쑥 소리쳤다.

"브루노 경, 진짜요?"

"다짜고짜 진짜라고 하면 내가 어떻게 알겠소?"

"지금까지의 행실을 반성하고 진정한 기사가 되겠다며 도련님 앞에 맹세했다는 소릴 들었소. 그게 진짜냔 말이오."

브루노가 얼굴을 살짝 구겼다. 해주법을 알려주고 떠나기 전 루크가 당부한 말이 생각났다.

-주군으로서 첫 번째 명령을 내리지. 내숭 좀 떨어라.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행실을 완전히 고칠 필요는 없더라도, 최소한 고친 것처럼 보이란 말이다. 고결한 기사가 되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다고 하던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긴 했다. 솔직히 이제 와서 그래 봤자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그래도 일단 주군의 명령이니 시도는 해야 했다.

"그렇소. 내가 지난날의 행적을 보니 반성할 점이 많아서, 이참에 진정한 기사가 되어보기로 맹세했지."

브루노의 말을 들은 기사들이 눈을 껌뻑였다. 그 모습에 브루노가 피식 웃었다.

'하긴, 나 같아도 안 믿겠···.'

"정말 놀랍군. 브루노 경이 그런 원대한 결심을 하다니!"

"도련님께서 진정 그대를 변화시켰구려!"

"···!?"

격한 반응에 브루노가 흠칫했다. 예상과 달리 기사들은 개과천선 발언에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다.

'아니, 이 양반들이 왜 이러지?'

사정을 모르는 브루노가 고개를 갸웃했다. 자신을 신용할 요소가 어디 있기에 이리 잘 믿어준단 말인가.

브루노의 예상은 정확했다. 그들이 믿는 건 브루노가 아니라 루크였으니까.

'루크 도련님이 범상한 분이 아닌 줄은 알았지만···.'

'설마 그 브루노 경마저 개과천선하게 만드실 줄이야!'

'영웅의 씨앗이란 말이 과언이 아니로구나.'

번스타인 백작가에 도착한 뒤로 쭉 파란을 일으킨 루크다. 그런 루크가 이번에 '브루노 경 갱생 선언'을 한 것이다.

당연히 기사들 입장에선 도련님께서 또 업적을 이루셨구나, 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 사실을 모르는 브루노는 헛기침하며 말을 지어냈다.

"그렇소. 도련님께선 어둠 속을 방황하는 내게 광명을 주셨지."

"무슨 일이 있었던 거요? 그대가 마음을 바꾼 계기를 알고 싶소!"

"그건 오늘 아침의 일이었소. 준엄한 꾸짖음에 잠을 깬 나는 운명적인 만남을 예감했소. 문을 열어보니 그분이 태양을 등지고 서 계셨지···."

"오오!"

감탄하는 기사들을 못 본 척하며 브루노가 아련한 표정을 지었다.

분위기 잡고 그럴싸한 대사를 입 밖에 낼 때마다 감동하는 모습에 입매가 간질거렸다.

'이거 생각보다 재밌네.'

봉신이 주군을 완벽하게 이해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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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화

'루크 도련님께서 브루노 경을 갱생시키셨다!'

번스타인 가문에 또 한 번 폭풍이 몰아쳤다. 그 개망나니 기사라 불리던 브루노가 달라진 것이다.

도박에는 완전히 손을 떼고, 여자를 품거나 술을 마시는 횟수는 현저히 줄어들었다.

비록 완전무결한 기사가 된 건 아니지만, 그래도 '기사의 형상을 한 인간쓰레기'에서 '노는 거 좋아하는 기사' 정도로 격상된 셈이다.

평소 행실을 생각해보면 그것만으로도 천지가 뒤바뀔만한 변화였다.

"브루노 경이 저리 달라질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도련님께서 대체 무슨 조화를 부리신 거지?"

처음부터 범상치 않다는 평가는 많이 받았다. 뛰어난 학업으로 그 사실을 증명해내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좌학의 범주가 아니던가.

본인의 지능으로 학습에서 재능을 보이는 것과 자부심이 하늘을 찌르는 기사를 뒤바꾸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다.

전자가 학자의 재능이라면 후자는 군주의 재능이니까.

"설마 진짜로 성공할 줄이야···!"

가장 놀란 건 다름 아닌 백작이었다. 임시라지만 주군인 자신의 말조차 대충 흘려듣는 브루노다.

그런데 루크와 만난 뒤 완전히 새사람이 된 게 아닌가.

"진실로 네가 자랑스럽구나!"

"당연한 일을 했음에도 이리 칭찬하시니 부끄럽습니다."

"고개를 들고 가슴을 펴라! 네가 한 일은 단순히 기사 한 명을 구한 게 아니라, 그 기사가 앞으로 살릴 모든 이를 구한 것이니!"

개망나니를 기사로 만들었으니, 그 기사가 하는 선행의 반은 루크의 지분이 있다는 소리다.

누군가를 일깨운 사람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찬사였다.

"그나저나 브루노를 꾸짖을 때 찬란한 황금빛 노을이 비추고, 상서로운 붉은 기운이 네 주변을 감쌌다고 하더구나. 네가 무언가 한 것이냐?"

"...어찌 제가 자연을 마음대로 부리겠습니까? 그저 브루노 경의 내면이 변화하여 그렇게 보인 것이겠지요."

이 새끼, 양념을 좀 심하게 쳤군. 루크가 속으로 혀를 찼다. 이야기를 적당히 꾸미는 게 나쁘다는 건 아니다.

그렇지만 정도라는 게 있지 않은가. 이제 막 내숭을 떠는 시점이라 그런지, 브루노는 적절히 끊을 때를 몰랐다.

'나중에 설교 좀 해야겠군.'

루크의 속내를 모르는 백작이 기쁘게 말했다.

"바라는 것이 있다면 말해 보아라. 네가 진정 대단한 일을 했으니, 아비로서 상을 주고 싶구나."

"말씀드렸다시피 당연한 일···."

"겸양은 됐다. 이건 내가 주고 싶어서 주는 것이니, 거부하는 쪽이 오히려 실례다."

백작의 단호한 대답에 루크가 잠시 생각하고는 말했다.

"그렇다면 브루노 경의 계약이 끝났을 때, 그가 받던 봉급과 같은 액수의 금액을 매달 제게 주실 수 있겠습니까?"

"뭣이?"

생각지 못한 대답에 백작의 깜짝 놀랐다. 기사의 봉급과 같은 금액을 매달 달라니.

한두 번이면 모를까, 몇 달에 걸쳐서 쌓이면 무시할 수 있는 액수가 아니다.

"주기적으로 돈이 나갈 일이라도 생긴 것이냐?"

"정확히 말하자면 생길 예정입니다. 브루노 경을 꾸짖을 때, 그는 제게 이리 말하더군요. 가능하면 아버지와의 계약이 끝나면 절 주군으로 모시고 싶다고요."

"그 브루노 경이 너한테 말이냐?"

그 들판에 풀어놓은 망아지 같은 작자가 평생에 걸쳐 충성을 바친다고 하다니! 최근 들어 바뀐 행실만 아니면 믿지 못할 이야기였다.

"예. 하지만 저는 주군의 의무를 다할 수 없기에 그의 제안을 보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니 의무에 상응하는 금화를 원합니다."

"으음!"

백작이 크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유흥으로 소비하는 것도, 나중을 위해 저축하는 것도 아니다.

오직 기사의 충심에 보답해주기 위해서 재물을 원할 뿐이지 않은가.

이리도 순수한 의도라면 액수가 얼마든 기껍게 내줄 수 있었다.

"네가 한 명의 기사에게 진심에서 우러나온 충심을 얻었으니, 아비인 내가 어찌 기쁘지 않겠느냐? 바라는 대로 내어주마."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아버지."

루크가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만약 브루노가 이 광경을 봤다면 '이건 사기죠!'라고 소리쳤을 거다.

자기가 충성을 바친 게 루크의 업적이 되어서 봉급 문제가 해결되었으니.

사실상 중간 관리자로 루크가 생겨난 걸 제외하면 이전과 다를 것도 없었다.

"다만 이걸로는 네가 당연히 얻어야 했을 것을 채웠을 뿐이구나. 네 상으로는 부족하니 하나 더 말해 보아라."

"전 이미 충분히 받았습니다. 하지만 아버지께서 굳이 말하라 하신다면···."

잠시 뜸을 들인 루크가 본심을 내뱉었다.

"제게 검술을 가르쳐 주십시오."

****

레너드 백작은 흔쾌히 수락했다. 안 그래도 루크한테 검술을 가르칠까 말까 망설이던 시점이었다면서.

스스로 원한다면 더 망설일 이유도 없다고 말이다.

-베르너 경을 스승으로 붙여주마. 전대 기사단장이었던 사람이니 많은 걸 배울 수 있을 거다.

-감사합니다, 아버지.

다음 날, 루크는 곧바로 검술 훈련에 들어갔다. 예정대로 연무장에 나오자 백발에 주름진 늙은 기사가 루크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루크 도련님. 오늘부터 도련님을 가르칠 베르너 루만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베르너 경."

"편히 하대를 하시지요. 비록 늙었다고는 하나 저는 여전히 가문의 봉신입니다."

나이가 들었다고 해서 어려워하지 말고 기사처럼 부리란 소리. 하지만 루크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다른 젊은 기사라면 모를까 그토록 오랜 세월을 봉사한 경께 제가 어찌 하대를 하겠습니까?"

"허어."

루크의 말에 베르너가 감탄했다. 늙으며 산전수전 다 겪었기에 어지간한 일로는 꿈쩍도 하지 않게 된 베르너다.

그런데 저 사려 깊은 한마디에 절로 가슴 속 얼음이 사르르 녹는 것 같았다.

'소문대로 보통 분은 아니시구나.'

자연스러운 배려든, 아니면 노리고 한 말이든 대단한 건 변함없었다. 어느 쪽이든 군주가 가질만한 재능이니까.

"하대를 하면 제가 더 힘들 것 같으니 부디 베르너 경께서 이해해 주십시오."

"도련님께서 그러시다면야 가문의 봉신으로서 어찌 거부하겠습니까?"

물 흐르듯 이어지는 자연스러운 권고에 재차 놀라며 베르너가 고개를 끄덕였다. 궁정 귀족같이 노회한 말솜씨는 대단하다.

하지만 지금부터 시작하는 검술은 전혀 다른 재능이 필요한 세계였다.

"도련님께선 이전에 검술을 배운 적이 있습니까? 아니면 다른 무기술이라도요."

"전혀 없습니다. 오직 활만 만져봤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기초부터 알려드려야겠군요. 차라리 잘됐습니다."

어설프게 배우면 잘못된 버릇을 고치고 교정하는 시간이 더 든다. 처음부터 차근차근 가르치는 쪽이 오히려 나았다.

"그럼 우선 도련님의 체력부터 보겠습니다. 이 연무장을 달려주십시오."

"어느 정도나 달리면 되겠습니까?"

"뛸 수 없을 때까지 달리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루크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냉큼 연무장 바깥을 달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베르너의 눈이 반짝였다.

'허허, 불평은커녕 낯빛 하나 바뀌지 않으시는군.'

뛸 수 없을 때까지 달리라고 하면 보통 반응은 두 가지다. 왜 그래야 하냐는 반문을 하거나, 일단 뛰기는 하지만 얼굴을 구긴다.

오직 극소수만이 루크처럼 의문을 가지지 않고 바로 뛴다. 그런 사람들은 검술에 재능이 있건 없건 특정 분야에서 대성하고는 했다.

'하지만 진짜 중요한 건 지금부터지.'

체력을 보겠다고는 했지만 사실 그건 거짓말. 이건 배우는 사람의 의지력을 보는 시험이다.

베르너는 '지칠 때까지' 달리라고 한 게 아니다. '뛸 수 없을 때까지' 달리라고 한 것이다.

한계에 달하는 시간은 체력적인 면이 크지만, 한계를 맞이하고도 얼마나 더 나아가는지는 본인의 의지에 달린 법.

'과연 어디까지 가시려나.'

오기 있는 견습 기사 수준만 돼도 충분히 합격점이었다. 그보다 못하면 검술이든 뭐든 시간 낭비만 되리라.

베르너는 느긋하게 기다리기로 했다. 그리고 잠시 후 펼쳐진 광경은 그의 예상을 아득히 벗어난 것이었다.

"허억, 허억!"

뛰기 시작하고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루크의 심장은 터질 것 같았고, 두 다리는 후들거렸고, 입에서 단내가 풀풀 풍겼다.

그럼에도 루크는 계속해서 달리고 있었다.

"도, 도련님! 그만하십시오! 그만하셔도 됩니다!"

보다 못한 베르너가 결국 뛰쳐나와서 루크를 만류했다. 이러다간 죽을 때까지 달릴 판이다.

"저는, 계속, 달릴 수, 있습니다."

"도련님은 진즉에 한계를 넘으셨습니다."

루크는 고개를 흔들며 베르너의 말을 부정했다.

"아직, 몸이, 움직입니다."

"....!"

베르너는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이 정도로 강렬한 의지를 본 게 얼마 만이던가?

이대로 내버려 두면 죽을 때까지 계속 나아가려 할 터. 베르너는 난생처음 시험의 중단을 선언했다.

"도련님, 시험은 끝났습니다. 이제 안심하고 쉬십시오."

"...."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루크가 쓰러졌다. 의식은 남아 있지만, 온몸에 힘이 다 빠진 듯했다.

이 지경이 되어서도 의식을 유지하는 모습이 놀라웠다.

'실로 엄청난 의지력이다.'

만약 여기에 검술의 재능까지 있다면 어찌 될까. 번스타인 가문의 초대 시조, 레오닉 번스타인의 재림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베르너는 두근거림을 진정시키며 루크를 등에 업고 옮겼다.

'아오, 독한 영감탱이. 그놈의 의지력 시험한다고 뒤지기 직전까지 안 말리네. 내가 이미지 관리만 아니면 진짜···.'

등에 업힌 루크의 생각을 모르는 게 약이었다.

****

다음 날, 루크는 연무장에 도로 나왔다. 전날 밤 혹사했던 몸은 하루 만에 완벽히 회복되었다.

베르너가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던 포션을 쓴 덕택이었다.

루크는 짐짓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씁쓸히 말했다.

"그 귀한 포션을 어찌 제게 쓰셨습니까. 큰 상처도 나지 않았건만."

"아닙니다. 제가 말리지 않아 그리되셨으니 당연히 내드려야지요."

반은 진심이고 나머지 반은 핑계인 대답이었다. 실제로는 한시라도 빨리 루크의 재능을 확인해 보고 싶었다.

하지만 천릿길도 한 걸음부터인 법. 일단은 간단한 기초부터 시작해야 했다.

"지금부터 배우실 건 간단합니다. 절 보고 따라 하십시오."

베르너는 자세를 잡고 목검을 들었다. 그리고는 내려치기를 한 번 했다. 속도가 빠른 평범한 내려치기였다.

두 번째는 약간 느린 내려치기. 세 번째는 아주 느릿느릿한 내려치기였다.

"보셨습니까?"

"예. 검을 그저 내려쳤을 뿐인 것 같습니다만."

"그렇습니다. 직접 해보시지요."

루크는 베르너에게서 목검을 건네받고 자세를 취했다. 제대로 본 탓인지 처음 검을 잡는 사람치고는 번듯한 자세였다.

베르너는 그 모습에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시작은 썩 괜찮군. 이대로 사흘 정도 가르쳐보면 도련님의 재능 여부도 조금은 알 수···!?'

말을 하던 베르너의 눈이 부릅떠졌다. 루크는 방금 전 자신이 한 내려치기를 똑같이 따라 하고 있었다.

중요한 건 그 내려치기의 완성도였다.

팔을 휘두르는데 자세가 조금도 무너지지 않았고, 검은 흔들림 없이 일자를 그렸다.

심지어는 베르너가 세 번에 걸쳐 조절한 속도마저 완벽히 똑같았다.

"말씀하신 대로 따라 했습니다만."

"죄, 죄송하지만 다시 한번 해보시겠습니까?"

베르너의 말에 루크는 반복해서 내려치기를 했다. 이번에도 흠잡을 곳 없는 완벽한 내려치기였다.

십수 년 손에 피딱지가 앉도록 검을 휘두른 자만이 휘두를 수 있는 자세. 그걸 처음 잡은 검으로 해 보였다고?

"어떻습니까? 제대로 한 게 맞습니까?"

"아, 아주 좋습니다. 그럼 이제 이것도 한번 따라 해 보시겠습니까?"

베르너는 애써 동요를 억누르며 다시 눈앞에서 목검을 휘둘렀다. 번스타인 가문의 기본 검술인 '화룡검'의 검식 중 하나.

얼핏 보면 단순한 사선베기지만, 그 안에 검로를 틀어서 벨 수 있는 세 가지 변화가 섞여 있었다.

"자, 따라 해 보십시오."

"으음, 조금 어려운데··· 이렇게 하는 겁니까?"

"···!"

베르너는 터져 나오는 경악성을 간신히 삼켰다. 화룡검의 검식이 눈앞에서 그대로 펼쳐지고 있었다.

그것도 견습 기사 수준이 아니라, 숙련된 정예 기사들만 선보일 수 있는 완성도가 아닌가.

천재라는 말조차 부족한 수준이었다.

"도, 도련님. 대체 어떻게 하신 겁니까? 정말 검을 배우신 적이 없습니까?"

"예. 보십시오. 활을 잡은 흔적만 가득한 손 아닙니까."

루크가 웃으면서 손바닥을 펼쳤다. 검을 잡는 사람에게 생기는 굳은살은 하나도 없었다.

오직 궁수 특유의 엄지와 검지에 생기는 굳은살만 가득했다.

베르너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뻐끔거렸다. 루크는 그 모습을 못 본 척 가라앉은 눈으로 목검을 쓸었다.

"다만, 검을 잡은 순간 이상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이상한 기분···?"

검을 양손으로 잡은 루크가 눈을 감았다. 마치 검과 교감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저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검을 잡아봤습니다."

"예. 그리 말씀하셨지요."

[ 완벽한 내려치기로 인해 경험치가 상승합니다. ]

[ 같은 수련이 과도하게 반복되었습니다. ]

[ 상승치가 최소한으로 재조정됩니다. ]

"하지만 그 검술을 난생처음 본 순간, 무언가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무, 무언가라 하시면?"

[ 완벽한 검술을 선보여 경험치가 상승합니다. ]

[ 같은 수련이 과도하게 반복되었습니다. ]

[ 상승치가 최소한으로 재조정됩니다. ]

"아무것도 모르는 저를 검이 이끄는 것 같은··· 말로 하기 힘든 감각···."

"···!"

[ 검술 '화룡검'의 숙련도가 이미 MAX입니다. ]

[ 더 이상 숙련도가 성장하지 않습니다. ]

[ 추가적인 성장을 위해서는 상위 검술 '염룡검'이 필요합니다. ]

"그렇기에 본 적도 없는 검술을 그대로 따라 할 수 있었습니다."

"그, 그럴 수가···!"

[ 현재 기본 검술 등급은 '숙련자'입니다. ]

[ 화룡검은 '숙련자' 등급이 한계입니다. 상위 검술을 익히세요. ]

밀려있던 메시지가 쏟아지는 소리를 무시하며, 루크는 옛 지구의 명언을 떠올렸다.

초보자 코스프레야말로 고인물의 컨텐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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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루크가 검을 배우기 시작한 지 사흘째 되는 날. 베르너는 백작의 집무실을 방문했다.

"루크 도련님께 염룡검을 가르쳐드려야 합니다."

"···!?"

밑도 끝도 없는 말에 백작의 펜이 툭 떨어졌다. 갑자기 염룡검이라니?

"그게 무슨 소린가? 아직 화룡검도 익히지 못한 아이한테."

번스타인 가문의 검술은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기본 검식이자 종신 계약한 기사들에 한해 가르침이 허용된 화룡검.

그리고 가문의 직계나 가주가 허용한 극소수의 측근 기사만 익힐 수 있는 염룡검이다.

"그 아이는 내가 직접 가계도에 올렸으니 못 가르쳐 줄 것도 없네. 하지만 먼저 화룡검부터 배워야 하지 않겠나."

비록 검술 이름은 서로 다르지만 두 검술 사이에는 연결점이 있다. 화룡검이 기본기에 충실한 검술이라면 염룡검은 그 응용.

달리 말하자면 먼저 화룡검으로 기본기를 탄탄하게 다져야 염룡검을 배울 수 있단 소리다.

"그리고 화룡검도 간단한 검술은 아니지 않나? 다 익히려면 꽤 시간이 걸릴 텐데."

비록 기본 검술이라지만 용살자라 불리던 초대 시조가 창시한 검술. 그 진수까지 다 배우려면 최소한으로 잡아도 3년은 걸린다.

"자네가 그 아이에게 무슨 재능을 봤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화룡검은 다 가르치고 얘기하게."

"한 달이 걸리지 않을 겁니다."

"···뭐라고 했나?"

"도련님께서 화룡검을 전부 익히는 시간은 한 달 내로 충분합니다."

"···!"

자신도 모르게 백작이 벌떡 일어섰다. 너무나 충격적인 말에 의자가 쓰러져 뒹구는 소리는 귀에 들리지도 않았다.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이것도 길게 잡은 편입니다."

검의 움직임을 한 번 보자마자 완벽히 따라 하는 루크다. 순수하게 검식만 익힌다면 일주일도 걸리지 않을 거다.

하지만 검술이라는 건 실전에서 사용하기 위한 기술. 그저 형식만 배운다면 의미가 없다.

그렇기에 뒤에 3주를 덧붙인 거다. 순수하게 검식만 익히는 것보다 검술의 응용이 더 어려운 법이니.

"한 달 후에는 각하께서 직접 보실 수 있을 겁니다. 그분이 화룡검을 실전에서 쓰시는 모습을 말입니다."

"허어."

단호한 대답에 백작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한 달 내로 검술을 실전에서 써먹을 만큼 배운다? 그것도 어중이떠중이의 검술이 아닌 화룡검을?

베르너 경이 아니라 다른 기사가 똑같은 소릴 했다면 제정신이 맞는지를 먼저 의심했을 것이다.

"그 아이의 재능을 어디까지로 보고 있는가?"

"저의 좁은 식견으로 말씀드리자면···."

잠시 뜸을 들인 베르너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번스타인 가문의 시조이신 레오닉 각하의 재림을 볼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레오닉 번스타인. 용의 혈통과 사자의 심장을 가졌다고 전해지는 위대한 기사. 그리고 검 한 자루로 흑룡을 참살했다고 하는 용살자.

제국 사람들은 그를 신화시대의 마지막 잔재라고 부른다. 인간이 맨몸으로 위업을 달성할 수 있던 마지막 인물이라고.

'그런데 루크가 시조의 재림이 될 수도 있다니.'

백작은 가슴이 두근거리는 걸 느꼈다. 처음부터 범상치 않다고 여겼던 자식이다.

그 뛰어난 재능이 기꺼웠고, 미안함과 책임감도 더해져 어지간한 건 전부 해주려고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전혀 다른 감정이 울컥거렸다.

'그 아이가 어디까지 가는지 보고 싶구나.'

자신이 아버지여서가 아니다. 서사시를 동경하는 한 사람의 기사로서 궁금했다.

아낌없이 그 재능을 발휘한다면, 성인이 되었을 때 과연 어떤 존재가 되어있을까.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겨있던 백작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 자네 뜻대로 하게."

"그 말씀은?"

"염룡검 말일세. 원하는 대로 가르쳐 보도록."

"감사합니다, 각하!"

"내 자식을 가르치는 일인데 감사는 무슨."

검술에 조금이라도 재능이 있었다면 어차피 가르쳐줬을 검술이다. 베르너의 요구로 시기가 빨라졌을 뿐이다.

그래도 설마 이렇게나 과도하게 빨라질 줄은 몰랐지만.

대화를 마친 베르너가 집무실을 떠나려고 했을 때였다. 집사장 고든이 집무실로 들어오며 말했다.

"각하, 미하엘 도련님께서 돌아오셨다고 합니다."

"뭐? 미하엘이?"

갑작스러운 소식에 백작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미하엘 번스타인. 헬레나와의 사이에서 생긴 둘째 아들.

아카데미에 입학하는 제 형을 배웅하겠다고 수도로 따라갔다가, 그대로 눌러 앉아버린 게 반년 전의 일이다.

수도에서 지금껏 아무 기별도 없이 지내던 녀석이 돌아왔다니.

"그 녀석은 지금 어디에 있나?"

"그게···."

"아버지!"

고든이 대답하기 직전, 문이 벌컥 열리며 누군가가 뛰쳐 들어왔다. 백작을 닮은 자색 눈동자에 헬레나와 같은 금발을 가진, 루크와 동년배의 소년.

반년 만에 보는 둘째 아들의 얼굴이었다. 백작은 나오려는 한숨을 삼키며 억지 미소를 지었다.

"어서 오거라, 미하엘. 수도 구경은 잘 했느냐?"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않습니까!"

미하엘은 성큼성큼 다가가 책상을 쾅 쳤다. 그 무례한 행동에 백작은 물론이고 베르너, 고든까지 눈을 찌푸렸다.

하지만 미하엘은 주변의 반응을 깨닫지 못한 채 씩씩거리며 말했다.

"이 위대한 번스타인 가문에 천한 피를 가진 놈이 들어왔다고 들었습니다. 그게 사실입니까?"

"네 형제가 새로 생겼을 뿐이다."

"형제라니요? 제 발닦개로 쓰기에도 부족할 천것을 어찌 형제라 하십니까!"

"말조심하지 못하겠느냐!"

콰앙

지나친 폭언에 백작이 참지 못하고 책상을 후려쳤다. 너무 힘이 들어간 탓에 우지직 소리를 내며 책상의 한쪽 다리가 부러졌다.

그제야 미하엘은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백작은 화를 억누르며 미하엘을 쏘아보았다.

"네 마음에 들지 않을지라도 그 아이 역시 내 피를 이은 자식이다. 친하게 지내라고 하진 않겠지만 최소한의 선은 지키거라."

"···."

백작의 꾸중에 미하엘이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얼굴에는 숨기지 못한 불만이 가득했다.

그 모습에 레너드 백작은 깊게 한숨을 쉬었다.

미하엘의 마음도 이해는 한다. 사실상 아버지가 부정을 저질렀단 사실을 알게 된 거나 마찬가지니.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너무 심하지 않은가. 헬레나조차 저런 폭언은 하지 않았다.

"수도에서 돌아오느라 피곤할 테니 오늘은 푹 쉬어라. 대화는 내일 하자꾸나."

"···예."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대답한 미하엘이 집무실에서 떠나갔다. 한숨을 토한 백작이 베르너를 돌아보며 말했다.

"베르너 경."

"예, 각하."

"오늘은 루크 곁에 붙어있게. 가능하면 내일 서로 만나게 할 생각이지만, 저 녀석 성격에 얌전히 기다릴 것 같지가 않아. 혹여 루크에게 찾아갈지도 모르는 일이니 그대가 막아주게나"

"알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맡기겠네."

베르너 경은 깊게 고개를 숙이고는 집무실에서 떠나갔다. 혼자 남은 백작은 집무실을 훑어보았다.

다리가 박살 나서 기울어진 책상과 뒹구는 의자를 보니 재차 한숨이 나왔다.

****

루크는 한창 연무장에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베르너 경이 백작에게 가 있는 사이에 하는 자습이었다.

그 옆에는 이제 루크의 기사가 된 브루노가 입을 쩍 벌리고 하품을 했다.

"호위는 처음 해보는데 이거 상상 이상으로 지루하네요. 살살 잠이 옵니다."

"표정 관리 좀 해라. 남들이 보잖냐."

"에이, 보는 사람 있으면 바로 알아챕니다. 지금은 없어요."

걱정하지 말라는 듯 손을 저은 브루노는 다시 지루한 표정으로 루크의 검술을 구경했다.

한참 검을 휘두르는 걸 보던 브루노가 입을 열었다.

"주군, 어디서 화룡검 배우신 적 있습니까?"

"그건 또 왜 물어?"

"움직임이 완전 숙련자니까요. 한두 번 휘두른 것 같지가 않은데요."

"그냥 내 천재적인 재능으로 단숨에 익힌 거야."

"그거랑은 좀 다른 것 같은데···."

브루노는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뺨을 긁적였다. 한껏 무게를 잡고 검을 휘두르던 루크는 속으로 헛웃음을 터트렸다.

'이 자식, 설마 그냥 보는 것만으로 알아챈 건가?'

방금 브루노는 재능이란 소리에 '그거랑은 좀 다르다'고 했다. 노력으로 다져진 검술과 재능으로 얻은 검술을 바로 구분한다는 소리.

아마 거인의 혈통에서 나온 육체적 능력이 시력에도 영향을 줬기 때문이겠지.

'하여간 성격은 허당인데 알맹이는 무시무시하다니까.'

저주가 걸려 있을 때도 전도유망한 기사 하나를 가지고 놀던 실력이다. 저주가 풀린 지금은 얼마나 강할지 상상도 하기 힘들었다.

그때, 갑자기 브루노가 빳빳한 자세로 일어서서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주군, 옵니다."

"뭐가?"

"베르너 경이요. 볼일 끝났나 보네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저 멀리 다가오는 그림자가 보였다. 그 말대로 가까이 다가오자 베르너의 얼굴이 보였다.

사람의 얼굴이 보이지도 않는 거리건만 바로 구분해낸 것이다. 루크는 속으로 혀를 내두르며 베르너에게 인사했다.

"오셨습니까, 베르너 경."

"예. 검술 연습은 하실 만합니까?"

"영 익숙지 않습니다. 이끌어주실 스승이 없으니 그저 막대기를 휘두르는 것 같군요."

"그럴 리가요. 멀리서 보기에도 훌륭한 검술이었습니다."

덕담이 섞인 인사를 마친 후, 베르너는 살짝 가라앉은 눈으로 말했다.

"도련님, 오늘은 훈련을 조금 길게 할 생각입니다."

"알겠습니다."

"이유는 묻지 않으시는 겁니까?"

"저는 베르너 경을 믿습니다. 다 제 도움이 되라고 하시는 거겠지요."

루크의 말에 베르너가 쓰게 웃었다. 그 말은 틀리지 않지만, 검술과 전혀 관계가 없는 사정 때문이었으니까.

평소랑 똑같은 시간대에 끝내면 십중팔구 미하엘이 간섭할 터.

가능하면 문제를 일으키지 못할 만큼 늦은 시간대에 검술 수업을 끝낼 생각이었다.

"그리 말씀해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럼 오늘은···."

"추억이 담긴 연무장에 와봤더니 천한 놈의 더러운 냄새가 풀풀 풍기는구나!"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베르너의 얼굴이 굳어졌다. 고개를 돌려보니 사납게 웃는 미하엘이 세 사람을 응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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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화

'예상을 빗나가는 법이 없구나.'

베르너는 지끈거리는 두통을 느끼며 미하엘에게 고개를 숙였다.

"어서 오십시오, 미하엘 도련님. 연무장에는 무슨 일이십니까?"

"꼭 일이 있어야만 와야 하오? 가문에서 내가 어딜 가든 내 마음이잖소."

"그건 그렇습니다만···."

미하엘을 살살 달래던 베르너의 눈이 찌푸려졌다. 미하엘 뒤에 서 있는 기사를 본 탓이다.

처음 보는 얼굴에 낯선 갑옷 양식. 명백히 가문 외부에서 온 기사였다.

"도련님, 그자는 누구입니까?"

"아, 지노 경 말이군."

웃음을 띤 미하엘은 보물을 과시하는 것처럼 어깨를 으쓱거렸다.

"얼마 전 수도에서 만난 기사요. 전 금사자 기사단 출신인데, 나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싶다 하더군."

"지노 루블입니다. 베르너 경의 명성은 많이 들었습니다."

지노라 이름을 댄 기사는 베르너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인사는 정중했지만 쫙 핀 어깨와 밝은 미소에서 젊은 기사의 자신감을 엿볼 수 있었다.

두 사람을 응시하던 베르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종신 계약을 맺으셨단 말씀입니까?"

"뭐, 그렇게 되었소."

"실례입니다만 지노 경의 봉급은···"

"내가 알아서 마련했으니 신경 쓰지 마시오."

미하엘은 말을 다 듣지도 않고 도중에 끊어버렸다. 더는 말하지 말라는 듯 얼굴에 짜증이 가득했다.

사정을 짐작한 베르너가 한탄했다.

'외가에 손을 벌리셨나.'

헬레나의 친가, 빌로우 가문은 부유하기로 이름이 높다. 게다가 당대 빌로우 가주는 미하엘의 외조부다.

외손자의 부탁이라면 종신 기사의 봉급 정도는 가볍게 내줬을 것이다. 문제는 그다음에 미칠 여파였다.

'외부의 힘으로 고용한 기사가 어찌 자신의 기사란 말인가?'

아무리 기사도가 중요해도 현실은 로망스가 아니다. 기사 역시 반짝이는 황금에 유혹당하는 인간 중 하나.

기사들의 충성 중 반은 재물에서 나온다는 소리마저 있다. 그런데 자신의 재물이 아닌 다른 사람의 재물로 봉급을 주다니.

충성의 대상이 언제 물주로 바뀐다 해도 이상할 게 없지 않은가. 브루노 경처럼 주군의 사정을 알고도 충성을 바친 자가 아니고서야.

'그게 다 빌로우 가문의 영향력이거늘.'

베르너가 속으로 혀를 차고 있을 때, 미하엘이 눈을 감고 코를 킁킁거렸다.

"그나저나 베르너 경, 연무장이 왜 이리 지독한 냄새가 나는 거요?"

"냄새라 하시면···?"

"아까도 말했잖소. 천것의 냄새가 난다고. 신성한 연무장이 이리도 지독해서야 원."

코를 막는 시늉을 하며 미하엘은 슬쩍 루크를 쳐다봤다. 루크는 그 시선을 받으며 굳어진 베르너에게 물었다.

"누굽니까?"

"미하엘 도련님이십니다. 루크 도련님께서도 들어보셨겠지만···"

"아!"

루크는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 손뼉을 짝 치며 웃었다.

"누군가 했더니 내 동생이었군! 반갑구나, 동생아!"

루크는 쾌활하게 웃으며 양팔을 벌렸다. 마치 '이리 온'하는 모양새였다.

그 모습에 연무장의 모든 이가 굳어졌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린 미하엘의 얼굴이 시뻘겋게 물들었다.

"이 천것이! 누가 네놈의 동생이란 말이냐!"

"네 얘기는 들었다. 나랑 나이는 같지만 생일이 조금 늦다지? 그렇다면 내가 형이 되는 게 맞지 않느냐."

"닥치지 못해! 밭 갈고 짐승 가죽이나 뜯던 놈이 어디서 귀족 흉내냐!"

미하엘이 루크의 얼굴을 향해 삿대질하며 폭언을 토했다. 루크는 고개를 갸웃하며 안절부절못하는 베르너를 쳐다봤다.

"베르너 경."

"예?"

"제가 듣기로는 귀족이 평민을 양자로 들이는 경우가 있다 들었습니다. 맞습니까?"

"그, 그렇습니다."

매우 드물지만 없는 일은 아니다. 평민이 귀족으로 출세하는 길 중 하나가 양자가 되는 거니까.

"평민이 양자가 되면 본래 있던 친자들과의 관계는 형제가 되겠지요?"

"맞습니다."

"제가 잘 몰라서 그러는데 그때는 형제를 부르는 호칭이 조금 다릅니까?"

"···아닙니다. 똑같습니다."

"그런데 동생은 왜 아버지가 같은 저한테 저러는지 모르겠습니다."

어깨를 으쓱이는 루크를 보고 미하엘의 이마에 핏대가 올라왔다.

"이 멍청한 놈이! 그게 지금 상황과 같은 줄 아느냐!"

"다른 게 있나?"

"그래! 귀를 씻고 잘 들어라!"

귀족이 양자를 들일 때는 가문에 무언가 이득이 있을 때다. 예를 들면 모략이나 검술 등에서 천재적인 재능을 보이는 경우.

혹은 막강한 세력을 보유하고 있는 용병대장이나 군벌 같은 경우다. 이때 양자로 삼는 건 일종의 계약과 같다.

귀족 신분을 주고 가문에서 밀어줄 테니까 가문의 일원으로 봉사하라는 뜻. 당연히 자식들도 형 동생 호칭에 불만이 없다.

말이 자식이지 봉신이니까. 그리고 호칭 좀 바꾸는 거로 유대감을 얻을 수 있다면 더 바랄 것도 없지 않은가.

"그게 너와 같더냐? 아무것도 없이 아버지의 온정에 기대어 가문으로 들어온 놈 주제에!"

"음, 과연."

루크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안타까움이 가득 담긴 어조로 말했다.

"미안하다. 네게 줄 게 없구나."

"뭐?"

"내가 어찌 형의 의무를 다하고 싶지 않겠느냐? 하지만 재물도, 권력도 없으니··· 진정한 형제가 되고 싶었는데 말이다."

뜬금없는 말에 미하엘의 고개가 갸웃거렸다. 그리고 몇 초 후, 머릿속에서 앞뒤 정황이 맞추어졌다.

-우리는 아버지가 같으니 형제다.

-넌 평민이야, 천한 놈아.

-피 한 방울 안 섞인 귀족도 평민 양자한테 형이라 부르던데?

-걔넨 이득이 되잖아.

-아, 그럼 이득을 주면 기쁘게 형 대접을 해준다는 거네.

-어?

-근데 내가 너한테 줄 게 없어. 네가 좋아하는 돈과 권력이 없으니 형이 못 되겠네.

"···이런 개잡놈이!"

머리 끝까지 화가 난 미하엘이 주먹을 으스러져라 쥐었다. 자신을 이득에 따라 태도를 바꾸는 버러지로 몰아가다니!

심지어 아까 전에 한 말 때문에 부정할 건덕지가 안 떠오르는 게 더 미칠 노릇이었다.

"네놈을 지금 당장···!"

"미하엘 도련님!"

막 달려들려는 미하엘을 베르너가 막아섰을 때였다. 뒤에서 가만히 있던 브루노가 앞으로 나왔다.

"그쯤 하시지요, 미하엘 도련님."

"너는 누군데 날 막느냐!"

"브루노 바스톤입니다. 루크 도련님께 충성을 바친 기사지요."

"뭐? 이 천것이 종신 계약을?"

믿을 수 없다는 시선으로 미하엘이 루크를 쳐다봤다. 그러나 잠시 후, 얼굴에 있던 경악은 점차 비웃음으로 바뀌었다.

"아, 이제야 기억났군. 남부 기사 브루노. 아니, 돈벌레 브루노 경이던가?"

"도련님!"

"옛날에 그리 불린 적이 있었습니다."

지나친 모욕에 베르너가 만류했으나, 브루노는 신경도 쓰지 않고 수긍했다.

살면서 저 정도의 욕은 질리게 들어봤다. 애초에 욕설로 유명한 남부 지방에서 저 정도는 욕도 아니었다.

"그래, 딱 어울리는 주종이군. 그나저나 그쪽도 기사가 있단 말이지?"

미하엘의 미소가 짙어졌다. 생각 같아서야 당장 저 천것에게 결투를 신청하고 싶었다.

그러나 상대는 이제 막 검을 배우기 시작한 생초짜.

승패와 관련 없이 결투를 신청했다는 사실만으로 사방에서 욕을 먹을 게 뻔했다. 하지만 상대에게 기사가 있다면 사정이 다르다.

"루크라고 했던가? 네놈이 내 명예를 모욕했으니 결투를 신청한다."

"미하엘 도련님, 루크 도련님은···"

"검을 막 배우는 참이겠지? 하지만 기사가 있으니 대리인으로 내보내면 되겠군."

미하엘의 말에 베르너는 입을 다물었다. 확실히 대리 결투는 가능했다.

직접 싸우자는 것도 아니고 어디까지나 휘하 기사로 승부를 겨루자는 거니까.

'놈, 피할 방법이 없을 거다.'

역량이 안 되어 결투를 회피한다면 흠이 아니다. 하지만 충분한 역량이 있음에도 거절한다면 수치스러운 일.

더불어 제 기사의 실력을 못 믿는다겠다는 뜻도 된다. 자존심 강한 기사들은 그 자체만으로 크게 상처받을 터.

"만약 네가 이긴다면 널 형님이라 불러주지. 하지만 내가 이긴다면 나를 도련님이라 불러라. 어쩔 테냐?"

그럼에도 혹시나 회피할까 먹음직스러운 미끼를 더했다. 이러고도 결투를 피한다면 스스로가 겁쟁이임을 증명하는 꼴이다.

의기양양한 미하엘을 보며 베르너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고, 루크와 브루노는 뒤에서 속닥였다.

'야, 쟤는 니 실력 모르냐?'

'아마 모를 걸요.'

'왜?'

'제가 활약하기 전에 수도로 올라갔거든요.'

'그럼 악명밖에 모르는 거네?'

'말 들어보니 그렇겠죠···?'

생각을 정리한 주종이 서로를 바라보며 씩 미소를 지었다.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 베르너가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미하엘 도련님, 충고를 드리자면 그러지 않으시는 게 좋습니다."

"지금 놈을 감싸는 거요?

"그게 아니라 브루노 경은 매우 강···"

"말도 안 되는 소리! 결투라니!"

그때 루크가 냉큼 베르너의 말을 끊어먹고 잽싸게 나섰다.

"설령 결투를 한다고 해도 네가 약속을 지킬지 어떻게 안단 말이냐? 맹세라도 하지 않는 이상 믿을 수 없다!"

"호오, 그럼 맹세를 하면 결투를 하겠다는 소리냐?"

"아니, 그게···!"

어이쿠야, 이런 실수를! 당황이 가득한 루크를 보며 미하엘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역시 천것은 어쩔 수 없구나. 말실수 한 번에 목숨이 오가는 것이 귀족이거늘.

"좋다! 내가 보낸 기사가 진다면 너를 형님으로 부를 것을 위대한 시조 레오닉과 여신께 맹세한다!"

"허억!"

설마 진짜로 맹세를 하다니! 낭패다! 루크는 너무도 당혹스러워하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그 모습에 미하엘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자, 너도 맹세해라! 스스로 귀족을 칭한다면 자신의 말을 철회하진 않겠지?

"크윽! 나, 나는!"

"주군! 하십시오!"

후회가 가득한 루크 앞에 브루노가 나섰다. 죽음을 각오한 기사의 모습 그 자체였다.

"주군께서 모욕당하고 나서지 않으면 제가 어찌 기사라 할 수 있겠습니까! 목숨을 바쳐서라도 이길 테니 하십시오!"

"하지만 상대는 금사자 기사단이 아닌가! 나도 그 위명은 들어본 적이 있다! 너를 잃을 수는 없다!"

"어찌 기사가 유명세로 대결을 피하겠습니까!"

브루노가 털썩 무릎을 꿇으며 절절하게 외쳤다.

"비록 제가 남부 촌구석의 기사라 하나, 기사의 도리는 알고 있습니다! 싸우게 해주십시오!"

"크흑! 네가 정녕 원한다면···!"

봉신의 충성심에 눈가를 촉촉이 적신 루크가 일어섰다. 두 주먹을 꽉 쥔 모습에 비장미가 가득했다

"좋다! 만약 내가 진다면 널 도련님이라 부르며 정성을 다해 섬기겠다! 이를 위대한 시조 레오닉과 여신께 맹세하지!"

"하하! 용기만큼은 귀족 수준이구나!"

미하엘이 크게 웃음을 터트리며 지노에게 눈짓했다. 지노는 자신만만하게 앞으로 나섰다.

"주군, 어찌할까요?"

"기개 있는 기사다. 걸맞은 대접을 해주도록."

"알겠습니다."

얼핏 들으면 존중해주는 것 같지만, 속뜻은 실수를 빙자해서 죽여버리라는 소리였다.

굳이 꼴 보기 싫은 천것의 수족을 살려줄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두 사람의 대화를 들은 브루노는 운명을 예감한 듯 입술을 깨물고 베르너에게 다가갔다.

"베르너 경, 부디 결투를 멈추지 마십시오. 제가 어떻게 되더라도요. 그건 저에 대한 모욕입니다."

"아까부터 뭔 소리요? 당신 여기서 제일 강하···"

"슬슬 때가 된 것 같군요! 결투의 시작을 선언해 주십시오!"

멍한 얼굴의 베르너를 놔둔 채 두 사람이 서로 대치했다.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검을 뽑아 드는 브루노랑 여유만만한 지노.

이상하다. 최근에 노안이 오긴 했지만 사람 표정까지 반대로 보일 만큼 눈이 멀진 않았는데.

"베르너 경, 언제 시작할 거요? 이미 준비는 끝났는데."

미하엘의 재촉에 베르너는 생각을 포기했다. 둘 다 얼른 결투나 하자는데 뭐 어쩌겠는가.

"···여신 앞에 부끄러움이 없는 대결이 되기를. 검을 뽑으시오."

그냥 될 대로 되라지.

****

'실력을 보이기 딱 좋은 무대로군.'

미하엘의 기사, 지노는 현재 상황이 퍽 만족스러웠다. 종신 계약을 맺은 후 미하엘에게 능력을 보일 기회가 없었던 탓이다.

주군께 충성을 바치는 기사는 어떤 식으로든 자신을 입증해야 하는 법.

비싼 봉급을 축내면서 빈둥빈둥 노는 건 아무리 자비로운 주군이라도 눈총을 사기 마련이다.

'게다가 결투라니, 내 장기 분야 아닌가.'

금사자 기사단은 본디 몬스터보다 인간을 상대하기 위해 창설된 기사단. 지노는 기사단 내부에서도 평균 이상의 실력자였다.

비록 행실 때문에 쫓겨나긴 했지만, 대인 검술만큼은 자신이 있었다.

'좋아. 일격에 끝내자.'

남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는 데는 단판 승부만큼이나 좋은 게 없었다. 허리를 가라앉히고 검을 수평으로 세우자, 눈앞의 남부 기사도 자세를 잡았다.

멍청하게도 검을 받아치는 자세였다. 승리를 확신한 지노는 그대로 달려들어 있는 힘껏 검을 수평으로 베었다.

쩌엉

'이겼다!'

검이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지노가 승리를 확신했다. 처음 부딪치고 난 뒤 부드럽게 검이 스치고 지나갔기 때문이다.

비록 살을 가르는 감촉은 없었지만, 눈앞에 저리도 푸른 하늘이 보이는데!

"...하늘?"

잠깐만, 왜 하늘이 보이지? 의문이 해소되기도 전에 강한 충격이 지노의 온몸을 강타했다.

터더덩

"크허어억!"

몇 번이나 땅을 구르고서야 지노는 깨달았다. 처음 검끼리 맞부딪친 순간, 상대방이 자신을 검째로 하늘에 날려 보냈다는 것을.

그리고 이제야 추락해서 땅을 뒹굴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뭐 이런··· 끄으윽!"

말도 안 되는 근력에 기겁하던 지노가 몸을 부르르 떨며 기절했다. 그 무식한 힘을 막아서인지 팔은 부러져서 달랑거리고 있었다.

양팔이 부러진 상태로 땅에 떨어져 굴러다녔으니 기절할 만도 했다.

"···."

"···."

연무장 안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브루노는 검집에 검을 꽂아 넣으며 지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좋은 승부였소."

"···."

"그야말로 종이 한 장 차이로군. 상황 판단이 조금만 늦었다면 내 목이 달아났겠지···."

"지랄하지 마시오, 경."

참다못한 베르너가 결국 한마디 했다. 말이 되는 소릴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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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화

땅바닥을 뒹구는 지노를 보고 미하엘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금사자 기사단에서도 강한 편이었던 지노가 저 주정뱅이한테 날아갔다고?

'내가 지금 꿈을 꾸나?'

혹시나 싶어 볼을 쭉 잡아당겨도 돌아오는 건 통증뿐이었다. 뺨에 상처가 나기 직전까지 당겨보고 나서야 인정했다.

이 악몽은 현실 그 자체였다.

"너무나도 명예로운 결투로군. 그렇지, 동생?"

옆에 바짝 다가온 루크의 한마디에 미하엘이 움찔거렸다. 그제야 결투를 하기 전 했던 맹세가 떠올랐다.

'이런 시발...!'

당사자들만 보는 곳에서 맹세했다면 또 모른다. 베르너 경이라는 공증인까지 세웠다.

이제 와서는 빼도 박도 못할 맹세였다.

"동생, 대답이 없군. 동새앵?"

"...."

능글능글한 목소리에 미하엘이 입을 꾹 다물었다. 제기랄, 어쩌지? 그냥 아무 말도 안 하고 버틸까?

그 예상을 눈치챈 것처럼 루크가 귀에 속삭였다.

"형님이라 부르겠다고 맹세를 했으니 한 번도 안 부르면 맹세 파기야. 무슨 뜻인지 알지?"

미하엘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놈에게 형편 좋은 해석이지만, 대놓고 틀렸다고 할 수도 없는 소리였다.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던 미하엘은 굳건히 서 있는 베르너 경과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최대한 애달픈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베르너 경."

"맹세는 신성한 겁니다, 미하엘 도련님. 피할 방법을 찾으려 하지 마십시오."

"...."

맹세를 유리한 쪽을 해석해 달라고 부탁하려 했던 시도는 시작하기도 전에 박살이 났다.

더 말을 꺼냈다가는 오히려 루크 쪽에 유리하게 해석해 줄 판이었다.

미하엘은 몇 번 심호흡을 한 뒤에 간신히 입을 열었다.

"...니임."

"음? 지금 뭐라고 했나?"

"혀... 엉니... 임!"

한 마디를 입에 낼 때마다 창자가 끊어지는 것 같았다. 간신히 들리도록 형님 소리를 하고서 이걸로 됐느냐는 얼굴로 루크를 쳐다봤다.

루크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입을 벌렸다.

"아니, 네가 그걸 어떻게 아는 거냐?"

"...?"

원하는 대로 불러줬더니 이게 뭔 개소리지? 미하엘이 고개를 갸웃하자, 루크가 술술 입을 놀렸다.

"방금 혀-엉닢이라 하지 않았느냐. 아는 사람이 적은 채소지. 혓바닥을 닮은 잎사귀를 가졌는데 열매는 우엉처럼 생겨서 혀-엉닢이라는 이름이 붙었지. 특정 남부 지방에서만 자라서 아는 사람이 극히 적은 채소인데."

"...!"

"남부 지방에서 자라서 브루노 경은 알지도 모르겠군. 어떤가?"

"아, 알죠. 혀-엉닢. 그거참 보기 힘든 식물인데. 그나저나 미하엘 도련님이 혀-엉닢을 알고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그렇지? 참 놀랍군."

이 개새끼들이! 서로 끄덕이는 주종을 보며 미하엘이 눈가를 파르르 떨었다. 그냥 개소리처럼 들리지만 속내는 뻔했다.

'똑바로 말해, 새끼야. 혀 굴리지 말고.'

두 사람에게서 무언의 압박을 읽은 미하엘이 심호흡을 했다. 조금이라도 긴장을 늦추는 순간 맹세고 뭐고 달려들 것 같았다.

이를 뿌득뿌득 간 후에야 미하엘은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도록 또박또박 내뱉었다.

"형, 님."

"뭐라고? 혀-엉닢?"

"형님! 루크 형님!"

너무 힘을 준 탓에 기어코 입에서 피가 주르륵 흘러나왔다. 그 모습에 루크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양팔을 벌렸다.

"그래! 루크 형님이란다. 훌륭하구나, 동생아!"

"...!"

화를 억누른 미하엘은 루크에게서 등을 돌리고 연무장 바깥으로 향했다. 이 이상 여기에 있었다가는 울화병에 피를 토할 것만 같았다.

사라져가는 미하엘에게서 눈을 뗀 루크는 브루노와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잘했다.'

'식은 죽 먹기죠.'

씩 웃으며 주종이 엄지손가락을 세웠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베르너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루크 도련님께 저런 면모가 있었단 말인가?'

어디까지나 순수한 영웅의 모습만 보여준다고 생각했거늘, 계략을 쓰셔서 함정에 빠뜨리실 줄이야.

지금까지 쌓아온 이미지가 단숨에 무너졌다. 예상과 달리 루크는 순수한 기사가 아니다!

'사자의 심장에 여우의 꾀를 가진 분이셨군. 영웅적인 기사보다는 위대한 군주가 더 어울리실지도 모르겠어.'

...콩깍지는 한 번 씌면 어떤 식으로든 좋게 해석하는 법이었다.

****

대결 사건 이후, 미하엘은 한 번도 루크를 찾지 않았다. 백작이 직접 소개하려 할 때도 필사적으로 거부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맹세는 한 번 하면 뒤집을 수 없는 법.

어떤 식으로든 대화를 하게 되면 형님이라 불러야 하니 누가 만나고 싶겠는가. 눈앞에 있는데 영원히 입을 다물 수도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아무리 미하엘이 숨죽이고 있어도 주변 상황이 가만 내버려 두질 않았다.

"브루노 경의 대결 이야기 들었어?"

"미하엘 도련님의 기사가 완전히 박살이 났다던데."

"쯧쯧. 무식하면 용감하다더니."

맹세를 비롯한 상세한 내용은 퍼지지 않았으나, 지노와 브루노의 대결 및 그 결과는 알려졌다.

다른 기사들과 하인들은 호승심으로 인한 싸움으로 보고 지노를 비웃었다.

실력자도 못 알아보고 싸움을 건 멍청한 작자라며. 그때마다 미하엘은 돌아버릴 것만 같았다.

지노에게 대결을 시킨 건 미하엘이었으니, 사실상 저건 전부 미하엘이 들어야 할 욕이 아닌가.

'닥쳐, 닥치라고! 지금 네놈들이 날 모욕하는 거냐!'

그렇게 외치며 하인들 멱살을 틀어쥐고 싶은 충동이 수십 번도 더 떠올랐다. 하지만 그랬다간 앞뒤 사정과 맹세까지 다 밝혀야 할 터.

덤으로 번스타인 가문의 적자면서도 가문 내 기사의 실력조차 못 알아본 멍청이라 여겨질 게 뻔했다.

어쩔 수 없이 미하엘은 귀를 닫고 분노를 삭여야 했다. 문제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완치하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그, 그게 무슨 소리요?"

사제의 말에 미하엘의 두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기껏 지노의 팔을 치료하기 위해 불렀더니 완치 불가능이라니?

"치료하면 일상생활에 문제가 없는 수준까지는 회복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전장에서 검을 휘두르진 못하실 겁니다."

"...!"

하마터면 미하엘은 그 자리에서 주저앉을 뻔했다. 전장에서 싸우지 못하는 기사를 대체 어디에 써먹는단 말인가.

더 재수 없는 건 지노와 이미 종신 계약까지 나누었다는 사실이었다. 종신 계약은 말 그대로 평생에 걸친 계약.

기사가 목숨을 바쳐 충성하는 대신, 전장에서 불구가 되거나 늙어서 은퇴하게 되어도 끝까지 돌봐줘야 하는 게 주군의 의무였다.

"주, 주군. 저는 주군께 충성을 바쳤습니다."

"알고 있으니까 입 닥쳐라!"

미하엘은 피가 거꾸로 솟는 걸 느끼며 지노에게 일갈했다.

애초부터 사이가 나쁜 동료 기사를 대결로 죽이거나, 술에 취해 하녀를 그 자리에서 강간하는 등의 사고를 일으켜 기사단에서 쫓겨난 놈이다.

그나마 실력 좋은 거 하나 보고 영입했는데 써 먹어보지도 못하고 돈만 축내는 짐덩이가 되어버렸다.

'차라리 죽어버리지, 왜 살아서 불구가 됐단 말이냐!'

차마 말로 내뱉지는 못하고 지노를 쏘아보았다. 미하엘의 시선을 읽은 지노는 냉큼 시선을 피하며 입을 다물었다.

어쨌거나 계약을 나눈 이상 숨죽이고 있으면 노후는 보장되니까. 미하엘은 이를 갈면서 이 사태의 원흉을 떠올렸다.

'이게 다 그놈 때문이다!'

미하엘은 주먹을 움켜쥐면서 루크를 떠올렸다. 이대로 놈에게 일방적으로 당한 채 끝날 수는 없었다.

마침 이럴 때 쓰기 딱 좋은 장기말이 있었다. 미하엘은 옆의 하인을 향해 명령했다.

"창고지기 맥스를 불러라."

****

잠시 후, 미하엘의 방에 중년의 하인이 들어왔다. 한쪽 다리가 절뚝이는 것 외에는 평범해 보이는 인상의 남자였다.

"부르셨습니까요, 도련님."

"그래, 맥스. 내가 집에 와서 너부터 찾아야 했는데 바빠서 그러질 못했구나."

"어이쿠, 무슨 말씀을. 잊지 않으신 것만 해도 감사합니다요."

맥스는 양손을 싹싹 비비면서 바닥에 닿을 듯 고개를 숙였다. 미하엘이 맥스를 부를 때는 대개 뭔가 시킬 일이 있을 때였다.

단순히 일만 시킨다면 불만이었겠지만, 대가로 뒤따르는 부수입이 짭짤했다.

"너에게 시킬 일이 있다."

"말씀만 하십쇼."

역시나. 예상대로의 상황에 맥스가 미소지으며 가까이 다가갔다. 이전처럼 영지 아래 매음굴에서 질펀하게 놀고 싶으니 탈출로를 마련하라는 걸까.

그것도 아니면 창고에서 필요한 물품을 티가 안 나도록 적당히 빼돌려 두라는 걸까.

"분명 네 전직이 암살자였지?"

"그, 그렇습니다요."

갑자기 나온 전직 이야기에 몸을 움찔 떨었다. 이미 손 씻은 지 한참 되었지만, 그때 배운 것 덕에 뒷공작에는 꽤 자신이 있었다.

미하엘의 뒤처리를 하며 용돈을 벌 수 있는 것도 그때 익혀놓은 기술 덕이었다.

"그건 갑자기 왜 물으시는지...?"

"네 기술을 그 서자 놈에게 써줘야겠다."

"도, 도련님!"

맥스가 기겁하며 주저앉았다. 그냥 귀족도 아니고 백작의 총애를 받는 서자를 죽이라고?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지 않은가!

"그, 그것만은 못합니다요. 제발 봐주십쇼, 도련님."

"암살자란 놈이 왜 이리 겁이 많으냐?"

"암살자도 귀족은 무섭습니다!"

평민들은 암살자하면 다 비슷한 이미지를 떠올린다.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두 눈동자, 유령과 같은 움직임,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

주변에 득실거리는 호위대를 속이고, 단숨에 곁에 붙어있는 측근 기사를 처리한 후 표적의 목을 벤다.

그리고 유유히 그림자와 함께 사라지는 암흑의 존재. 그게 바로 암살자! 맥스 입장에선 웃기지도 않는 소리였다.

'싯팔, 암살자가 무슨 초인이냐? 그게 가능하면 흡혈귀나 귀쟁이지.'

실제로 암살은 좀 더 지저분하고 시끄러웠다. 일단 표적에게 들키지 않고 다가가는 것 자체가 난제다.

기껏 다가간다 해도 남들 눈에 안 띄게 죽이는 게 거의 불가능했다.

따라서 암살의 대부분은 표적에게 접근해서 어떻게든 죽이고, 잡히기 전에 있는 힘을 다해 도망쳐 나오는 게 요체였다.

'그리고 어느 미친 암살자가 귀족을 노려? 죽고 싶어서 환장한 게 아닌 이상.'

귀족 암살은 그 자체로 엄청난 문제였다. 암살을 묵인하는 순간 귀족 계급 전체가 암살될 수 있다는 전례를 남기니까.

그렇기에 귀족 대상의 암살이 벌어지면 주변의 모든 영지가 단결해서 암살자 개인, 혹은 조직을 뼈도 안 남기고 추려버리곤 했다.

이 와중에 의심이 간다 싶으면 죽이고 봤기에, 무고한 피해자가 많이 발생할지언정 살아나가는 암살자는 없었다.

당연히 암살자의 주 고객 및 표적은 부유한 상인이나 용병대장이지 귀족이 아니었다. 유일한 예외는 원한에 의한 암살뿐이다.

"아무튼 전 못합니다. 차라리 죽이십쇼."

"시끄럽다. 누가 네게 암살을 시킨다더냐? 끝까지 들어라."

"예? 암살이 아니면 대체 뭘...?"

어리둥절해하는 맥스를 보며 미하엘은 차갑게 웃었다.

"간단하다. 그저 서자 놈을 조금 괴롭혀주기만 하면 돼. 구체적으로는 잠을 못 자게 만들면 되겠군."

"잠을 못 자게 만든다?"

"유령의 흉내를 내도 좋다. 아니면 시끄러운 소리를 유발해도 괜찮고, 진짜 암살자에게 노려지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어도 좋지."

"아!"

그제야 말뜻을 알아들은 맥스가 무릎을 탁 쳤다. 한마디로 루크가 어떤 식으로든 신경과민에 걸리도록 만들라는 것이다.

확실히 그런 쪽이라면 위험 부담이 적었다. 밤에 못 자도록 적당히 소리나 내주고 도망치는 걸 반복하면 그만이었으니까.

"하, 하지만 걸리면 진짜 암살자로 몰리지 않겠습니까?"

"걱정도 팔자구나. 네가 무기라도 가지고 있더냐? 게다가 저택에서 일한 세월은 얼마고? 거기에 나 역시 변호를 해줄 텐데 뭐가 문제냐."

"그건 그렇습니다만...."

"참, 이번에 줄 네 보수를 얘기해주지 않았구나. 이게 선금이다."

맥스의 앞에 돈주머니가 툭 떨어졌다. 말갛게 빛나는 금화가 가득 찬 주머니를 보자 맥스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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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화

"다시 말하지만 이건 선금일 뿐이다. 네가 일을 성공적으로 마치면 이 액수의 두 배를 더 주마."

미하엘이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이러고도 거부할 수 있겠냐는 감정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다.

이미 받아들인 것처럼 여기는 모습에 맥스는 얼굴을 굳혔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목숨에 비할 바는 아닙니다.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많은 돈이었다. 선금에 잔금까지 전부 받으면 남은 생은 편히 쉬면서 살아도 될 만큼.

'미치겠군.'

차라리 의뢰가 암살이었다면 1초도 망설이지 않고 거절했을 것이다. 하지만 기껏해야 잠을 못 자게 괴롭히는 수준이 아닌가.

들킬 위험은 거의 없고, 설령 들킨다 하더라도 미하엘이 감싸준다면 해볼 만했다.

채찍질은 피할 수 없겠지만, 귀족 상대로 장난질을 한 것 치고는 싸게 먹히는 셈 아닌가.

"...알겠습니다. 도련님 말씀대로 하지요."

"잘 생각했다."

맥스의 대답에 미하엘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위험부담은 적고 대가는 많은데 안 넘어오고 배기겠는가.

"다만 작업 중 들키지 않는 건 제가 알아서 한다 해도, 창고지기인 제가 복도를 얼쩡거리면 다들 이상하게 생각할 겁니다."

"걱정하지 마라. 그 부분은 내가 알아서 얘기해 둘 테니."

복도 주변을 자주 오가는 종류의 심부름이라도 시켰다고 둘러대면 그만이다. 맥스가 미하엘과 가까운 사이인 건 다들 알고 있는 사실이니까.

"미리 말해두지만, 잔금을 받고 싶거든 들키지 마라. 어디까지나 성공했을 때의 추가 보수니까."

"명심하겠습니다."

굳이 말하지 않더라도 들킬 생각은 없었다. 아무리 목숨에 지장이 없다 한들 채찍으로 맞고 싶진 않으니까.

맥스가 사라지고 나자, 방에 혼자 남은 미하엘은 루크를 떠올렸다.

'놈, 어디 두고 보자.'

상당한 돈을 내주면서까지 맥스에게 일을 맡긴 건 단순한 장난질을 위해서가 아니다.

미하엘이 알아본 결과 루크는 이미 가문 내에서 상당한 신뢰를 쌓은 상태였다.

그렇다면 우선 그 신뢰를 무너뜨리는 것부터 시작할 생각이었다.

'네놈에게 광증이 생긴다면 과연 다른 이들이 이전처럼 믿어줄까?'

정체불명의 소음, 수면 부족, 그리고 의심스러운 정황들. 그러나 끝까지 꼬리가 잡히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아무리 제정신이 박힌 사람이라도 점차 이성을 잃기 마련이다.

끝까지 정신줄을 잡는다 해도 상관없다. 고통을 호소할 때 환청이나 정신병으로 몰아가면 그만이니까.

그쯤 되면 슬슬 신뢰는 사라지고 광증에 시달리는 서자의 이미지만 남게 될 것이다.

'길어봐야 두 달이겠군. 느긋하게 기다려 볼까.'

비록 맥스가 엄살이 심하긴 해도, 이런 종류의 뒷공작에는 도가 튼 인물이었다.

이대로 기다리면 만족할만한 결과가 돌아오리라.

****

충성을 바치는 봉신이라 해도 하루종일 주군 곁에 붙어있는 건 아니다. 아무리 충성스러워도 기사 역시 사람.

적절한 수면 시간과 여가 시간이 없다면 버틸 수가 없었다. 애초에 그 많은 봉급을 그저 저축이나 하려고 받는 건 아니니까.

보통 기사들은 주군의 사정에 맞춰 휴일이 정해졌고, 그날 하루는 아무 일 없이 푹 쉬곤 했다. 브루노 역시 마찬가지였다.

"한 달간 수고했다. 여기 네 봉급이다."

짤랑이는 금화 주머니를 받은 브루노가 입맛을 다셨다. 액수는 하나도 변하지 않았건만 주는 사람만 변했다.

"차라리 그냥 백작 각하께 직접 받으면 안 됩니까? 그게 더 편한데."

"뭔 소리야? 내가 너한테 봉급을 주는 건데 왜 아버지께 받아?"

"그거야 뭐... 에휴, 됐습니다."

루크가 봉급을 주는 건 요식 행위에 불과했지만, 그게 얼마나 중요한지는 브루노도 이해했다.

원래 명분이란 건 별거 아닌 것 같으면서도 꽤 큰 의미를 지니는 법이니까.

그 간단한 행위 하나로 브루노는 백작의 봉신이 아닌 루크의 봉신이 되지 않았던가.

"봉급 받았으니 술 마시러 갈 거냐?"

"당연하죠. 요즘 주군 경호하느라 입도 못 댔습니다."

"마침 잘됐네. 겸사겸사 내 심부름 좀 해라."

"그런 건 하인에게 시키시면..."

"술값 좀 더 얹어주지."

"뭐든 시켜만 주십쇼."

빠른 태세 변환에 피식 웃으면서 루크는 쪽지를 건네줬다.

"여기에 쓰인 것들 좀 사와. 일주일 분량이면 충분하겠네."

"어디 보자. 가시연꽃과 마름풀, 그리고 블랙 허브? 이게 다 뭡니까?"

"뭐긴, 약초로 쓰이는 것들이지."

정확히는 아직 조합법이 알려지지 않은 약초다. 지금은 관상용 식물이나 스튜의 조미료로만 여겨지고 있다.

하지만 위의 약초들을 정확한 분량으로 조합하면 꽤 강력한 수면제가 된다.

부작용은 거의 없고, 수면 유도 효과는 좋아서 귀족들 사이에서 상당히 자주 쓰였다.

"가능하면 약으로 사고 싶지만 지금 조합법을 아는 건 나밖에 없으니까. 알아서 만들어 먹는 수밖에."

"갑자기 수면제는 갑자기 왜요? 불면증이라도 생기셨습니까?"

"아니. 앞으로 필요할 것 같아서."

루크는 창고 쪽을 돌아보며 씩 웃었다.

"슬슬 잠을 방해할 놈이 찾아올 때거든."

****

사흘 후, 맥스는 작전을 결행하기로 했다. 마침 미하엘에게서 하인들의 포섭도 끝났다는 소리를 들은 참이었다.

만반의 준비를 마친 맥스는 어두운 복도를 소리 없이 걸었다.

"거, 거기 누구냐! 왜 이 시간에... 맥스 씨?"

"그래, 나야. 미하엘 도련님께서 심부름을 시켰거든."

"아아. 그랬다고 했죠."

가끔 마주치는 한두 명이 있긴 했지만, 이미 사전 작업을 끝내놓은 덕에 의심 없이 지나갈 수 있었다.

루크의 방에 도착했을 때는 한 명의 하녀만이 문을 지키고 서 있었다.

맥스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조그마한 쇠구슬을 옆으로 던졌다.

땡그랑

"뭐야!?"

갑작스러운 소음에 깜짝 놀란 하녀가 옆을 돌아봤다. 그와 동시에 쇠구슬 소리에 섞여 맥스가 슬쩍 루크의 방안으로 들어갔다.

애초부터 여닫는 소리가 거의 나지 않는 문이다. 맥스의 기술과 조합하면 무음에 가깝게 여닫을 수 있었다.

'좋아, 오랜만에 해보는데 실력 아직 안 죽었군.'

자화자찬하며 맥스가 슬쩍 루크의 침대를 돌아봤다. 루크는 세상모르고 쿨쿨 자고 있었다.

맥스는 조심스럽게 침대 아래로 기어들어 갔다. 그리고는 정확히 루크가 자는 배게 바로 아래를 툭툭 두드렸다.

'일단 시작은 가볍게 깨우는 거로 할까.'

진동으로 인한 소음은 붙어있는 사람에게만 크게 들리는 법. 준비해온 철조각을 붙이고 두드리면 더 효과가 좋다.

처음 일어났을 때는 기분 탓인가 싶어 다시 누울 거다. 그때부터가 진짜로 일을 시작할 때였다.

칭칭칭

'소리 좋고!'

쇳조각이 튕기는 소리에 맥스가 미소를 지었다. 이대로 몇 번만 더 두드려주면 시끄러워서 벌떡 일어날 것이다.

맥스가 그리 예상한 지 20분이 지났다.

'안 일어나잖아.'

이렇게 두드렸는데도 안 일어나다니. 나중엔 쇳조각을 너무 세게 두드려서 하마터면 바깥까지 들릴 뻔했다.

딱 달라붙은 사람 입장에선 천둥처럼 들릴 텐데도 저리 잘 잔다고?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참다못한 맥스가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매우 위험한 행동이었지만 도저히 확인을 안 해 볼 수가 없었다.

그리고 루크의 얼굴을 본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새애액, 새애액

"...진짜 잘 자네."

루크의 얼굴을 본 맥스는 어이가 없었다. 누가 업어가도 모를 정도로 잘 자고 있었다.

진짜 암살을 목적으로 하는 자가 왔다면 간단히 죽여버렸을 것이다.

'염병. 이러면 뭘 어쩌라고.'

소리로 반응하지 않는다면 맥스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몸에 직접 손을 댔다간 미하엘의 변호고 자시고 처형당할 게 뻔하니까.

한숨을 푹 내쉰 맥스는 그날 작전을 포기하고 다시 방에서 빠져나왔다.

어차피 장기간에 걸친 작전이다. 오늘만 날은 아니니, 다음을 노리면 된다.

****

그로부터 일주일 후, 맥스는 창고에서 혼자 절규했다.

"이런 시발, 인간이 저리 잘 자는 게 말이 돼!?"

처음엔 그날만 유난히 피곤한 날인가 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루크는 완전히 곯아떨어졌다.

그게 벌써 일주일이었다. 이젠 루크를 미치게 하기는커녕 맥스가 미칠 지경이었다.

'코앞에서 찻잔 깨지는 소리에도 안 일어나면 뭐 어쩌라고!'

엿새째 되는 날, 참다못한 맥스는 아예 근처의 찻잔을 밀어서 떨어뜨렸다. 이 정도면 일어나겠지 싶은 생각에서 한 짓이었다.

근데 안 일어났다. 하녀가 깜짝 놀라 달려 들어와도 쿨쿨 잠만 잘 자더라.

아무 성과가 없자 미하엘이 맥스를 도로 불러 질책했다.

"도대체 일을 언제 시작할 셈이냐? 놈이 늙어 죽을 때가 되면 시작할 생각이냐!"

"저... 사실 진즉 시작했습니다."

"뭐? 그런데 왜 아무 소식도 없어?"

"문제가 있습니다. 그 도련님이 너무 잘 잡니다."

"그게 뭔 개소리야!"

미하엘이 분통에 맥스는 몸을 움츠리며 앞뒤 사정을 설명했다. 한 번 자기 시작하면 누가 업어가도 모를 지경인 것.

아무리 크게 소리를 내도 반응을 하지 않는 것. 몸에 직접 손을 대지 않는 이상 깨울 방법이 없다는 것까지.

"솔직히 그래도 깨어날지 의문입니다. 세상에 인간이 약물의 도움 없이 그리 잘 자는 건 처음 봅니다."

"그렇단 말이지...?"

잠시 고민하던 미하엘의 입가에 곧 미소가 떠올랐다.

"그렇다면 계획 변경이다."

"변경이라 하시면...?"

"무슨 짓을 해도 안 일어난다면 소리로만 위협할 필요는 없겠지. 시각적인 위협이 더더욱 무서운 법이니까."

말을 이해하지 못한 맥스가 고개를 갸우뚱거리자, 미하엘이 근처에 있던 서랍에서 단검을 하나 꺼냈다.

"받아라."

"단검은 갑자기 왜 주시는 겁니까?"

"그걸 그 서자 놈의 베개 옆에 꽂고 와라. 그 정도는 가능하겠지?"

"예!?"

맥스는 기겁했다. 그건 진짜 빼도 박도 못하는 암살자 자체가 아닌가!

"못합니다! 절대 못 합니다!"

"내가 죽이라고 했더냐? 그냥 베게 옆에 꽂고 오라는 거다."

"위험 부담이 비교할 바가 아니지 않습니까!"

소음이야 잡히면 도련님이 명한 장난질로 넘어갈 순 있지만, 그건 걸리는 순간 바로 죽는다.

설령 바로 베어버리지 않는다 해도 배후가 누구냐며 고문당할 게 뻔했다.

'그리고 그땐 네놈도 모른 척할 거잖아!'

형제의 장난질로 넘어갈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맥스가 걸리면 십중팔구 미하엘도 꼬리를 잘라버릴 터.

그 정도의 위험부담까지 감수할 순 없었다.

확고한 의지를 알아챘는지 미하엘이 혀를 차며 새로운 조건을 제시했다.

"잔금을 다섯 배로 주마. 그리고 딱 이번 일만 끝내면 된다. 두 번 다시 이런 일은 시키지 않으마."

"...!"

미하엘의 말에 맥스의 눈이 흔들렸다. 딱 한 번만 위험을 감수하면 그 많은 금액을 다섯 배로 주겠다고?

바로 거절하려고 해도 무심코 망설여지는 조건이었다.

"네가 말하지 않았느냐? 업어가도 모른다고. 그렇다면 딱 한 번만 해라. 어쨌거나 한 번은 들키지 않을 거 아니냐?"

그건 그렇다. 바로 옆에서 건물이 무너져도 일어날지 알 수가 없는 도련님이다.

나중에야 어쨌건 처음 시도는 들키지 않을 거다.

그리고 그 들키지 않는 시도 딱 한 번으로 돈을 모조리 받아갈 수 있었다.

"딱 한 번입니다."

"그래, 그 한 번으로 족하다."

맥스는 미하엘의 확답에 한숨을 쉬었다. 돈을 받자마자 저택을 떠야겠다고 생각하면서.

****

그날 밤, 맥스는 평소처럼 루크의 방에 들어갔다. 여전히 루크는 세상모르고 자고 있었다.

맥스는 혹시 몰라 복면을 두르고 단검을 허리춤에서 뺐다.

누가 봤다간 바로 암살자라고 비명을 지르는 상황. 그렇지만 맥스는 걱정하지 않았다.

'그리도 잘 자는 도련님이 오늘만 딱 일어날 리가 있나.'

그저 옆에 단검만 꽂아 넣고 바로 튀면 된다. 조심스럽게 침대로 다가간 맥스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

'응? 그런데 왜 검이 침대 옆에 있지? 평소에는 없었는데...'

마치 언제라도 적이 오면 격퇴할 준비를 해둔 것 같았다. 과한 생각이라며 고개를 흔든 맥스가 단검을 베개에 꽂으려던 차였다.

"...."

"...."

눈을 뜨고 있는 루크와 맥스가 서로 시선을 마주쳤다. 그대로 얼어붙은 맥스를 보며 루크가 또박또박 큰소리로 말했다.

"암! 살! 자!"

"아니, 아닙! 그게 아니라!"

맥스의 변명이 끝나기도 전에, 루크가 검을 집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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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화

"이놈!"

"헙!"

맥스는 기겁하며 루크의 검이 미치는 사정거리에서 물러났다. 이미 어떤 변명을 해도 안 먹힐 상황이었다.

머릿속에 수백 개가 넘는 쌍욕이 떠올랐으나 그걸 내뱉을 시간도 부족했다.

'튀자!'

이젠 의뢰고 나발이고 아무래도 좋았다. 지금 당장 도망치지 않으면 기사들에게 잡혀 죽을 뿐이다.

그러나 맥스가 문을 열기 직전, 루크의 손에서 찻잔이 날아갔다.

쨍그랑

"켁!"

찻잔이 머리에 부딪혀 깨지는 충격에 맥스가 순간 휘청거렸다. 그 사이 루크는 잽싸게 뛰쳐나와 문을 틀어막았다.

"도망칠 수 없다!."

'이런 염병...!'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뒤로 물러선 맥스가 입술을 깨물었다. 이제 남은 탈출구는 뒤에 있는 유리창 하나뿐이었다.

맥스는 고민 끝에 등을 돌려 달리더니, 유리창을 향해 있는 힘껏 몸을 날렸다.

와장창

"크윽!"

2층에서 아래로 떨어진 맥스가 몸을 구르며 유릿가루를 털어냈다. 최고급 품질의 유리라 그런지 깨질 때도 파편이 날카롭지가 않았다.

천만다행이라며 순간 안도의 한숨을 쉬었지만, 더 큰 문제는 이후에 일어났다.

-무슨 소리야!?

-저쪽에서 났다!

'내 이럴 줄 알았지.'

이래서 유리창 탈출 같은 건 하고 싶지 않았다. 동네방네 자신의 위치를 알리는 꼴이었으니까.

다행히 루크와는 멀어질 수 있었다. 이대로 복면과 단검을 숨기고 아무것도 모르는 창고지기로 돌아가면 된다.

그렇게 생각하고 어둠 속에 숨으려던 순간.

"암! 살! 자!"

"...!"

옆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맥스가 철렁 심장이 내려앉았다. 고개를 돌리자 가장 만나고 싶지 않은 인물이 있었다.

'이런 미친! 이 주정뱅이가 도대체 왜 여기 있는 건데?'

브루노 바스톤. 망나니 기사라는 멸칭으로 불리지만, 무력만큼은 가문 내에서 1위를 다투는 인물.

그리고 맥스가 완벽한 조건에서 기습하더라도 이길 가망성이 전혀 없는 작자였다.

부르르 떠는 맥스를 향해 브루노가 씩 웃으며 말했다.

"안 건드릴 테니 걱정하지 마라. 널 상대할 사람은 내가 아니거든."

"...?"

저게 무슨 소리야? 주군을 습격한 암살자... 가 아니라, 그렇게 보이는 인물이 눈앞에 있는데 공격하지 않겠다고?

목소리를 들킬까봐 직접 물어볼 수 없는 게 한이었다. 다행히 맥스의 의문은 곧 풀렸다.

타악

"엇차."

뒤에서 들려온 소리에 맥스가 흠칫 몸을 떨었다. 고개를 돌려보자 어느새 검을 든 루크가 도착해 있었다.

보아하니 방금 전 유리창을 깨뜨린 곳에서 뛰쳐나온 모양이었다.

루크는 착지하면서 묻은 흙을 툭툭 털어내고는 검을 쥐었다.

"브루노, 도망 못 치게 제대로 막아라."

"걱정하지 마십쇼. 정 못 잡을 거 같으면 그냥 이걸로 꿰어버릴 테니."

창을 툭툭 두드리는 브루노의 모습에 맥스가 식은땀을 흘렸다. 저 괴물 같은 근력으로 창을 던진다면 피할 틈도 없이 꼬치가 될 것이다.

퇴로가 완전히 봉쇄된 맥스는 이를 악물고 단검을 고쳐잡았다.

'이젠 진짜 방법이 없다. 저 도련님이라도 인질로 잡아야 해!'

이미 해명은 불가능하다. 들키지 않고 탈출할 방법도 없다. 유일하게 남은 방도는 인질극뿐이다.

솔직히 그렇게 해도 살아날 수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손톱 때만큼의 가능성은 있지 않겠는가.

'다행히 브루노 경은 퇴로만 막고 있을 뿐이야. 검술 배운지 겨우 한 달 넘은 도련님쯤이야 충분히...!?'

벼락처럼 날아드는 검격에 맥스는 기겁하며 생각을 멈췄다. 반사적으로 올린 단검과 검이 부딪치며 불꽃을 튀겼다.

쩌엉

'크윽!'

심상치 않은 힘에 막은 팔이 부르르 떨렸다. 단검과 장검의 차이가 있다지만 이리 강맹한 일격이라니.

'이 도련님, 초심자가 아니야!'

맥스의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조금 손해를 각오하면 인질로 잡는 정도야 충분히 가능하다고 여겼다.

그런데 이제 보니 전력을 다해도 목숨을 걱정해야 할 판이 아닌가.

기습을 막아낸 맥스를 보며 루크가 마음에 든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오, 제법인데? 조금 더 강도를 높여도 괜찮겠어."

"...!?"

허세를 부리는 건가 싶었지만, 그 생각이 끝나기 무섭게 번개 같은 연속 찌르기가 날아들었다.

맥스는 온 힘을 다해 단검으로 찌르기를 쳐냈다. 지금은 다른 생각을 할 틈이 없었다.

도망이고 자시고 일단 코앞에 다가오는 칼날부터 막고 보는 수밖에.

****

맥스가 루크의 공격을 막고 있는 동안에도 시간은 계속 흘러갔다. 세 사람의 주변에는 어느새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브루노 경, 이게 무슨 일이오!"

"도, 도련님께서 전투를...!"

기사들은 상황을 보고 깜짝 놀라 입을 벌렸다. 정체불명의 괴한과 루크가 서로 검을 맞부딪치며 싸우고 있지 않은가.

"뭐 하는 거요? 어서 도와드립시다!"

"안돼! 다들 멈추시오!"

몇몇 기사들은 검을 빼 들고 가세하기 위해 뛰쳐나가려 했으나, 브루노가 그들의 앞을 막았다.

방해받은 기사들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노성을 토해냈다.

"브루노 경, 왜 말리는 거요!?"

"루크 도련님은 그대의 주군이잖소! 가장 먼저 도와드려야 할 사람이...!"

기사들의 호통에 브루노는 침중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나라고 왜 안 도와드리고 싶겠소? 하지만 저놈의 정체가 문제요!"

"저놈의 정체라니? 암살자 아니오?"

"그냥 암살자가 아니오! 저놈은... 동방의 이교도 출신 암살자요!"

"뭣!"

기사들은 기겁하며 서로를 쳐다봤다. 동방의 이교도 출신 암살자들은 제국 내에서도 악명이 높았다.

광신적인 믿음으로 목숨을 아끼지 않았고, 단 한 번을 위해 제 몸을 10년에 걸쳐 개조하기도 했다.

지금 루크가 상대하는 암살자가 그런 위험한 놈이라니!

"동방의 암살자라니! 그게 정말이오?"

'진짜겠냐! 저 망나니가 갑자기 뭔 개소리야!?'

경악하는 기사들보다 더 경악스러운 건 맥스 본인이었다. 제국 밖으로는 나가본 적도 없는데 동방은 개뿔이!

하지만 브루노의 입놀림은 멈추지 않았다.

"지금 저놈의 단검술을 보면 알 수 있소. 비록 약해 보이지만 무방비한 상대를 악랄하게 죽인다는 단검술, 라크비자요!"

"그럴 수가!"

'그게 뭔데, 미친놈아!'

라크비자 같은 괴상망측한 이름은 들어보지도 못했다. 그냥 스승에게서 배운 걸 자신이 경험으로 보완한 이름 없는 단검술일 뿐인데.

"저놈의 복면을 묶는 방식을 보니, 몸을 개조해서 독을 숨기는 분파가 틀림없소. 두 사람 이상이 붙는다면 자포자기하고 전신의 독을 터트려 모든 이를 길동무로 데려가려 할 거요."

"그, 그렇다면...!"

"도련님께 맡기는 수밖에 없소! 다행히 놈들은 일 대 일이라면 계율로 인해 절대 자폭하지 않으니까!"

'없어! 그딴 거 없다고! 내 몸에 종기 하나 째본 적 없는데 뭔 개조야!'

맥스는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처음엔 그냥 잠을 못 자게 하려던 장난질에서 암살자가 되더니, 이젠 전신을 독으로 개조한 미친놈이 되었다.

더 돌겠는 건 항의를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설득력이 없는 건 둘째치고, 입을 연 순간 목이 날아갈 판이니!

"하지만 도련님은 검을 배우신지 이제 막..."

"자, 잠깐. 자세히 보시오. 도련님께서 압도하고 있잖소."

"그게 무슨...!?"

그제야 기사들은 상황을 정확히 파악했다. 처음엔 선입견 때문에 루크가 간신히 방어만 하고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막상 보니 일방적으로 암살자를 밀어붙이고 있지 않은가.

"세상에! 이게 도대체 어찌 된 일인가?"

"실전 한 번 겪어보신 적 없는 분이거늘!"

"베르너 경이 극찬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기사들은 입을 쩍 벌리며 결투를 계속 지켜봤다. 이미 꽤 시간이 지났음에도 물 흐르듯이 공방이 이어졌다.

초심자라면 장기전에 빈틈을 드러내기 쉽건만, 갈수록 패색이 짙어지는 건 암살자 쪽이었다.

"시조 레오닉이시여..."

누군가 무심코 레오닉의 이름을 담으며 고개를 숙였다. 다른 기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때 맥스는 볼 수 있었다. 루크와 브루노가 짧은 찰나에 서로를 향해 눈을 찡긋거리는걸.

'잠깐만, 이 양반들 설마...!?'

한 가지 가설에 생각이 미친 순간, 맥스가 충격에 몸을 굳혔다. 1초에 목숨이 오가는 공방에서는 치명적인 틈이었다.

루크는 잽싸게 안으로 파고들어 폼멜로 관자놀이를 후려쳤다.

뻐억

"컥!"

번쩍거리는 충격과 함께 맥스는 의식을 잃었다. 이제 모든 게 끝났다는 절망과 함께.

****

"크윽...!"

잠시 후, 욱신거리는 통증과 함께 맥스가 눈을 떴다.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은 건지 아직 밤인 채였다.

맥스는 전신을 꽁꽁 묶인 채 아무도 없는 창고 구석에 놓여 있었다.

"지하감옥일 줄 알았는데..."

"다들 거기 보내자는 거 내가 말리느라 피똥을 쌌다, 이 자식아."

옆에서 들린 소리에 맥스가 흠칫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루크가 다리를 꼰 채 맥스를 지켜보고 있었다.

"동방의 이교도라고 하니 생각보다 잘 먹히더라. 미친놈들은 무슨 짓을 해도 이상하지 않으니까 다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봐."

루크의 말에 맥스는 잠시 눈을 껌뻑이다 한숨을 푹 쉬었다.

"보나 마나 교리가 어쩌고저쩌고 하셨지요?"

"잘 아네."

정확히는 희망을 잃어버린 순간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니까 감옥에 보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암살 가능성이 있으면 허튼짓을 하지 않을 테니 루크가 같이 있어야 한다는 핑계도 더했다.

백작이 있었다면 씨알도 안 먹힐 핑계였지만, 마침 볼일을 보러 영지에 내려간 참이었다.

"제기랄, 그냥 곱게 죽이시지 왜 그런 누명을 씌우셨습니까? 도련님을 돋보이게 하려고요?"

"내가 왜 그런 짓을 해?"

고개를 갸웃거리는 루크의 모습에 맥스가 코웃음을 쳤다.

"저도 바보는 아닙니다. 이거 다 도련님이 의도하신 거죠?"

루크가 어디까지 아는지는 모른다. 미하엘의 목적이 단순한 위협이라는 것까지 알고 있는 건지, 아니면 진짜 암살로 착각한 건지.

확실한 건 맥스가 올 걸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이 상황을 써먹어 자신을 돋보이게 하려고 했다는 것.

이 두 가지는 절대적인 확신이 있었다.

'미리 공모했다고 하면 모든 게 설명이 된다.'

평소에 잘만 자다가 그때만 깨어있던 것도, 미리 검을 준비해둔 것도. 그리고 브루노가 대기하고 있었던 것까지.

맥스는 아무것도 모른 채 함정에 걸려든 셈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동방의 이교도 암살자 누명은 너무한 거 아닙니까? 이름값 좀 높이시겠다고 사람을 지옥행으로 만드시네요."

이래 봬도 기도는 꽤 열심히 하는 편이었다며 맥스가 투덜거렸다.

"그러니까 내가 왜 그런 짓을 하겠냐고."

"끝까지 시치미를 떼시겠다? 좋을 대로 하십쇼."

"그게 아니라."

고개를 홱 돌린 맥스를 향해 루크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너, 암살자 조직 '검은 달' 출신이잖냐. 이름값 높이려면 그냥 네 태생을 그대로 말했겠지."

맥스는 척추에 고드름이 꽂히는 기분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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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화

검은 달. 15년 전까지만 해도 제국 최대 규모를 자랑하던 암살자 조직의 이름이다.

당시 대륙 내의 여러 거상과 용병대장 등을 암살하여 악명을 떨쳤다.

특히 유명한 건 그 집요함이었다. 보통 암살자들은 한 번 실패하면 거기서 끝이다.

하지만 검은 달은 몇 번이고 재시도하여 기어코 표적을 죽여버리곤 했다.

오죽하면 사람들 사이에서 이런 경구가 돌 정도였다.

-아무리 많은 재물과 부하도 목숨을 지켜줄 순 없으니, 검은 달의 표적이 되었다면 죽음을 준비하라.

오만하기 짝이 없는 소리였지만 그만큼 검은 달의 위세는 대단했다. 조직의 수장이 실수를 저지르기 전까진.

'귀족 암살에 손을 댄 게 문제였지.'

솔직히 살해당한 귀족은 별거 아니었다. 제국 끝자락 촌구석에 있는 시골 남작일 뿐이다.

다스리던 영지도 조그마한 촌락 하나가 전부.

당시 검은 달의 수장은 이 의뢰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고 한다.

-이 정도는 괜찮겠지. 겨우 시골 남작이잖아.

아무도 신경 안 쓰는 시골 귀족. 죽어봤자 중앙에서 신경 쓸 사람도 없다. 반대로 평민은 귀족도 죽였다며 더욱 검은 달을 두려워하리라.

실로 멍청한 생각이었다. 귀족 살해 행각은 즉시 모든 영주의 귀에 들어갔고, 대응은 즉각적이었다.

-이 미친놈들이 죽고 싶어서 환장했나?

그리고 검은 달은 말 그대로 갈려 나갔다. 모든 조직원에게 엄청난 현상금이 붙었고, 영주들은 자발적으로 영지 내 검은 달의 박멸을 명령했다.

제국 내 모든 영지에서 검은 달로 의심되면 그 자리에서 참살당했다. 특히 귀족인 기사들은 조직원을 보면 지옥 끝까지 추격해서 목을 잘랐다.

평민들 역시 팔자를 고칠 수 있다는 생각에 목숨을 걸고 검은 달을 찾았다. 그중에는 현상금에 눈이 뒤집힌 거지 떼의 습격으로 죽은 암살자도 있었다.

'조직이 폭삭 망하는 데 딱 2년 걸렸다던가.'

그동안의 명성에 비해 처참한 몰락이었다. 어찌나 당시의 박멸 작업이 지독했는지, 이미 망한 조직임에도 그때의 현상금이 아직 안 풀린 상태다.

당연히 검은 달의 조직원이었던 맥스 역시 마찬가지.

"무,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습니다."

"모르는 척하지 말자고, 21번."

"...!"

맥스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시치미를 뗐지만, 이어진 말에 표정이 와르르 무너졌다.

21번. 조직의 신참 암살자로 교육받던 시절 맥스가 부여받은 번호의 이름이 아닌가.

외부인은커녕 다른 지역의 조직원조차 모르는 정보인데!

"대체 어떻게 그걸...!"

"다 아는 수가 있지."

루크는 한껏 신비로운 분위기를 연출하며 벽에 몸을 기댔다. 검은 달 조직원들조차 잘 모르는 개인정보를 입수한 방법은 매우 간단했다.

'그야 네 일기에서 봤으니까 알지.'

회귀 전, 미하엘은 헬레나와 더불어 루크를 집요하게 괴롭혔다. 이번에 시도한 불면증 작전도 당했던 괴롭힘 중 하나였다.

지금에야 이미 알고 있어서 수월하게 넘겼지만, 당시엔 진짜 미치는 줄 알았다.

분명 소리가 나는데 원인을 알 수가 없지, 고통을 호소하면 미친놈이라고 사방에서 몰아가지.

한참 후에야 미하엘과 맥스의 합작이란 걸 알고 이를 갈았다.

'그래서 다시 만났을 때 죽여버렸지만.'

백작이 죽고 가문에서 쫓겨난 지 몇 년이 지났을 때, 루크는 서부의 어느 영지에서 맥스와 재회했다.

그때 맥스는 루크를 눈치채지 못한 상태였기에 몰래 미행하다 거주지를 알아내고 습격했다.

-이 망할 새끼! 너 잘 만났다!

-컥! 도, 도련님!? 크헉!

첫방이 제대로 들어간 탓인지 맥스는 변변한 저항도 못 하고 두들겨 맞았다. 그렇게 30분쯤 때렸을까.

어딘가 잘못 맞은 건지, 아니면 힘 조절을 안 해서인지 결국 맞던 도중 죽어버렸다.

다행히 루크는 귀족 신분이었기에 조금 무거운 벌금을 지불하는 걸로 풀려날 수 있었다.

'일기장도 그때 발견했지.'

맥스가 죽은 후, 놈이 대체 왜 여기까지 왔는지가 궁금해서 거주지를 뒤져봤다.

일기장은 그 와중에 얻은 물건이었다.

비밀이 담겨있는 만큼 꽤 엄중히 숨겨져 있긴 했지만, 임시거처였기에 보안의 한계는 어쩔 수 없었다.

"도련님, 죽여주십시오."

"보통 이럴 때는 살려주십시오 아닌가?"

"살 방도가 있긴 합니까?"

맥스는 모든 걸 포기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어쨌거나 귀족을 노린 암살자가 되었으니 죽은 목숨이다.

남은 건 곱게 죽느냐, 아니면 고통스럽게 죽느냐 뿐이다.

"살 방도가 있다면?"

"...!?"

하지만 이어진 루크의 말에 맥스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살 수 있다고? 이 상황에?

"지, 진짜로 방도가 있습니까?"

"있지.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알려주십시오!"

"그 전에 이거 하나 확실히 하자. 너한테 이런 짓 시킨 건 미하엘이지?"

"...예"

맥스는 잠시 망설이다 대답했다. 이 지경이 되었으니 이제 미하엘의 보복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죽이는 것보다 더한 보복을 어찌한단 말인가. 확답을 들은 루크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좋아, 일단 아버지가 돌아오실 때까진 이대로 둘 거다. 아침에 오시면 분명 너를 심문하실 텐데 이렇게 하도록."

루크는 차근차근 계획을 알려주었다. 꽤나 긴 이야기가 필요했기에 한참을 설명해야 했다.

처음엔 주의 깊게 듣던 맥스는 점차 얼을 빼더니, 마지막엔 어처구니없는 얼굴이 되었다.

"농담하시는 거죠?"

"아닌데. 진심이야."

"그게 통한다고요? 진짜로?"

"다른 데선 몰라도 여기선 통해."

피도 눈물도 없는 모략가 가문이면 모르지만, 낭만 가득한 기사인 레너드 백작에겐 통한다.

게다가 휘하 기사들도 죄다 백작을 닮은 이들이니 반발도 거의 없을 거다.

맥스는 한참 고민하다 한숨을 깊게 토하며 말했다.

"도련님의 말씀대로 하기 전에 부탁 좀 들어주십시오."

"뭔데?"

"주방 향신료 중에 갈아둔 고추냉이가 있습니다. 새끼손가락 마디만큼 둥글게 말아서 제 입에 넣어 주십시오."

눈물이 필요했다. 아주 많이.

****

"암살자라니! 다른 곳도 아닌 이 영지에서 암살자라니!"

아침에 돌아온 레너드 백작은 노성을 토해내며 광분했다. 지금까지 본 적 없는 주군의 분노에 기사들은 긴장한 모습으로 침을 삼켰다.

"루크는 어찌 되었는가!? 상처라도 입었다면...!"

"진정하십시오, 각하. 루크 도련님은 멀쩡하십니다."

최고참인 베르너가 총대를 메고 나서서 백작을 달랬다. 다행히 최악의 사태였지만 결과는 최상이었다.

"방금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도련님께서는 멀쩡하십니다. 오히려 홀로 암살자와 싸워 놈을 제압하셨지요. 그러니 진정하십시오."

"후우우! 후우!"

백작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꽉 잡으며 내면의 분노를 가라앉혔다. 조금 이성이 돌아오자 상황이 제대로 보이기 시작했다.

암살자가 침입했다는 건 둘째치고, 정작 습격을 당한 루크가 역으로 암살자를 제압했다고?

"다행히 암살자가 정면에서 싸울 줄은 몰랐던 모양이군."

암살자는 병사도, 기사도 아니다. 싸울 줄 몰라도 독을 쓰든 자는 사이에 습격하든 죽일 수만 있으면 그만.

이번에 루크에게 온 녀석은 후자인 모양이라며 백작이 안도했다.

"아닙니다."

"뭐? 아니라니?"

"비록 기사와 싸울 수준은 안 되지만 제법 실력이 있어 보였습니다. 경험 없는 견습기사나 일반 병사라면 위험했을 겁니다.

"...!"

백작이 눈을 부릅떴다. 이제 검술을 배운지 한 달 된 아이다. 그런데 실전을 겪은 병사와 정면에서 싸워도 이기는 수준의 암살자를 제압했다고?

"진짜인가?"

"수십 번의 공방이 오갔습니다. 저만이 아니라 목격한 기사들이 상당수입니다."

시선을 다른 돌려보자 다른 기사들이 맞다는 듯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백작은 헛바람을 삼키며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도대체 그 아이는 날 어디까지 놀라게 할 생각인가?"

"앞으로도 한참은 더 놀라게 하실 겁니다."

"농담 같지 않군. 녀석이 벌인 일이 오죽 많던가."

백작의 입가에 쓴웃음이 맺혔다. 이런 상황만 않으면 자식의 재능에 마음껏 기뻐하련만.

다시 암살자에 대해 떠올린 백작이 얼굴을 굳혔다.

"암살자의 정체가 맥스라고 했었지."

"그렇습니다."

"내가 모든 하인들에게 한 번도 소홀히 한 적이 없었거늘 그놈이 감히...!"

루크에 대해 알려지기 한참 전부터 가문에 봉사하던 하인이다. 임무를 위해 잠입한 건 아닐 터.

누군가의 의뢰를 받고 계획에 없던 암살을 시도했단 소리인데, 도대체 뭐가 부족해서 그랬다는 말인가?

"맥스를 불러와라! 모두가 보는 앞에서 심문을 시작하겠다!"

****

잠시 후, 창고에서 맥스가 끌려 나왔다. 꽁꽁 묶인 맥스는 기사들에 의해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쿠당탕

"컥!"

고통에 맥스가 신음했으나 불쌍히 보는 시선은 아무도 없었다. 백작은 좌우에 미하엘과 루크를 두고서 이를 갈았다.

"맥스! 네놈이 암살자였다니!"

"가, 각하..."

맥스는 백작과 눈을 마주쳤다가 부르르 떨며 고개를 숙였다. 차마 마주할 면목이 없다는 감정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 모습이 백작에겐 더 가증스럽게 느껴졌다.

"지금까지 절름발이인 척 잘도 숨어지냈구나! 루크를 죽이고선 또 누굴 죽일 셈이었느냐? 내 목이라도 노릴 셈이었느냐!?"

"아,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제가 어찌 각하께 그런 짓을 하겠습니까!"

"닥쳐라! 돈 때문에 의뢰를 받은 놈이 잘도 충신 흉내를 내는구나!"

"돈이 아닙니다, 각하! 제 과거를 아는 자가 협박만 하지 않았어도...!"

"뭐? 협박?"

생각지도 못한 소리에 백작이 눈을 껌뻑였다. 돈을 받은 의뢰가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협박을 당했다니?

삽시간에 주변에서 하인들과 기사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제가 암살자인 건 맞습니다. 암살 교육도 받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암살자를 그만둔 지 벌써 10년도 더 되었습니다."

"무슨 소리냐? 자세히 말해봐라!"

백작의 호통에 맥스가 힘겨운 표정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과거에 고아여서 암살자 조직에 의해 거두어졌던 것.

피와 살을 잡아 뜯는 괴로운 나날, 눈물 속에서 만났던 친구들, 그리고 차례차례 서로 죽여가며 통곡하는 맥스.

마지막 시험에서 친구들의 시체를 훼손하라 하는 피도 눈물도 없는 감독관. 못하겠다고 하자 날아오는 처분의 칼날.

그러나 그때 조직의 거점이 밝혀지고 병사들이 쳐들어온다. 극적으로 숨어서 도망치는 데 성공하여 친구들의 시체를 묻는 맥스.

무덤에서 눈물을 훔치고 등을 돌려 석양 속으로 사라진다. 원고지 200장 분량의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초단기 블록버스터!

"운 좋게 자유가 된 뒤로 남은 생은 평범하게 살고 싶었을 뿐인데... 그랬는데... 크흑!"

"으음."

생각 이상으로 구구절절한 사연에 백작은 치솟았던 분노가 조금 가라앉는 걸 느꼈다.

주변에 기사들은 살짝 혀를 차기도 했고, 감성이 여린 하녀는 훌쩍이며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네놈의 사정은 알겠다. 그런데 어째서 다시 암살에 손을 댔느냐?"

"협박을 당했습니다. 도련님을 죽이지 않으면 제 과거를 밝히고 친구들의 시체를 갈가리 찢어버린다고 하기에... 커흑, 꺼흐흡!"

이빨을 꽉 깨문 맥스는 참았던 감정이 북받친 것처럼 통곡했다. 콧물이 줄줄 흘렀고 이마를 땅에 박는 모습이 어지간히 괴로운 듯했다.

그리고 실제로도 괴로워 미칠 지경이었다.

'도련님, 새끼손가락만큼만 말아오라고 했는데 양을 너무 많이 떼어왔잖습니까!'

그놈의 고추냉이가 얼마나 독한데 이렇게 많이 떼어왔나. 한 번에 꽉 씹었다가 매워서 죽을 지경이었다.

"널 협박한 자가 누구냐? 배후를 말하거라."

"끄흐읍! 그, 그것이..."

맥스가 슬쩍 미하엘을 바라봤다. 미하엘은 눈꼬리를 치켜세우며 이를 갈았다.

'이 새끼가 감히 없는 소리까지 만들어내서 나에게 누명을 씌우려 들어?'

혼자 곱게 죽지 않을 건 예상했다. 하지만 이 정도로 물고 늘어질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러나 모략을 꾸미는 귀족은 언제나 뒷일을 준비하는 법.

'어디 한 번 내 이름을 말해봐라. 정면에서 부정해줄 테니.'

이미 알리바이는 완벽하게 세워놓았다. 지금 놈이 꾸며낸 이야기의 허점도 꼬집을 준비가 되었다.

미하엘의 이름을 말한 순간, 당황하는 사람들을 진정시키고 놈의 거짓을 만천하에 드러내리라.

속으로 미소지은 미하엘이 맥스의 말을 기다렸다.

"배, 배후는... 커흐흑! 백작 각하! 제발 죽여주십시오!"

하지만 맥스는 말을 중도에 끊으며 고개를 처박았다. 잘 나가다가 도중에 말이 끊기자 백작이 답답해서 가슴을 두드렸다.

"갑자기 무슨 소리냐? 배후를 말하래도!"

"하지만 그랬다가는 친구들의 시신이... 보복이..."

"네가 말한다면 그건 내가 막아주마! 나를 믿고 말해라!"

백작의 호소에 맥스가 다시 눈을 미하엘에게 향했다. 맥스의 입이 덜덜 떨리다 움찔거렸다.

"배후는... 크흐흡!"

말을 멈춘 맥스가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한번 미하엘을 보고.

"말했다가는... 어어엉! 각하! 제발...!"

울면서 하늘을 봤다가 또 슬쩍 미하엘을 보고.

"흑흑흑...! 배후, 배후가... 으엉엉!"

말하기 직전에 꺽꺽거리다 재차 미하엘을 보고.

"저를 협박한 자는... 크흡, 콜록콜록!

너무 울어서 기침이 나오기 직전까지 미하엘을 보고.

서서히 사람들의 시선이 미하엘에게 향했다. 하인들도, 기사들도, 심지어 백작마저 미하엘을 봤다.

모든 시선을 받게 된 미하엘의 뺨이 푸들거렸다.

"배, 배후의 협박이... 보복이... 어어엉!"

'그냥 말을 해! 이 미친 새끼야!'

한 대 후려치고 싶은 심정에 미하엘은 주먹을 꽉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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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화

증거도, 반박도, 알리바이도 다 준비되어 있다. 그냥 배후가 자기라고 지목만 하면 전부 되받아 칠 수 있다.

그런데 이 새끼가 암시만 주지 말을 안 한다!

-세상에, 설마 이런 일이...

-아무리 배 다른 형제라지만...

-쉿!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주변 하인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은 미하엘의 이마에 핏대가 섰다. 이젠 완전히 확실시하고 있지 않은가.

여기서 그냥 냅다 소리쳐서 반론이라도 해야 하나 싶었지만, 그러면 오히려 더 의심받을 게 뻔했다.

"크흡! 사실 배후는...!"

'제기랄, 빨리 말 좀 해라! 제발!'

"배후는... 미, 미... 미하...!"

미하엘이 양무릎을 콱 잡았다. 그래, 거의 다 왔으니까 얼른 말해!

"배후는 미하엘 도련...!"

"아버지!"

미하엘의 이름이 완전히 나오고 끝마치기 직전, 루크가 벌떡 일어섰다. 고함에 가까운 외침에 사람들의 시선이 다시 루크에게 쏠렸다.

루크는 맥스를 한 번 쳐다본 뒤, 무언가를 각오한 얼굴로 말했다.

"암살자의 배후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냥 넘어가시지요."

"뭣이!? 네가 지금 제정신으로 하는 소리냐!"

백작은 말도 안 된다는 듯 발작하며 간이 의자의 손잡이를 탕 두드렸다. 하인들과 기사들도 모두 웅성거렸다.

가장 중요한 배후를 이대로 묻어버리려고 하다니?

하지만 루크는 단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저는 알고 싶지 않습니다."

"네가 알고 싶은지 아닌지의 문제가 아니다!"

"아니요, 그런 문제입니다. 가족이 아닙니까."

의미심장한 소리였다. 자신이 백작의 아들이니까 들어달라고 하는 건지, 아니면 암살 사건의 당사자인 자신이 가족이니까 그렇다는 건지.

그것도 아니면 사주한 배후가 가족이기 때문에 안 된다는 건지.

"제발 부탁드립니다. 부디 배후를 캐는 건 여기서 그만둬주십시오!"

"크으윽!"

백작이 어깨를 떨며 의자 끝을 쥐었다. 너무 세게 쥔 탓에 뿌직거리는 소리를 내며 간이 의자의 손잡이가 부서졌다.

한참 고민하던 백작은 이내 한숨을 쉬었다.

"그래, 가족이지. 이런 짓을 했어도 가족이지."

"...!?"

미하엘은 찢어질 듯 눈을 크게 떴다. 이런 미친! 증거 다 준비해놨는데 왜 한마디도 못 한 채 범인으로 몰리는 건데!?

"아, 아버지."

"시끄럽다!"

어떻게든 반론을 하기 위해 입을 연 순간, 백작이 부리부리한 눈으로 미하엘을 노려봤다.

미하엘은 저도 모르게 찔끔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백작은 잠시 미하엘을 쭉 노려보다 지친 얼굴로 의자에 몸을 묻었다.

"루크, 말해보거라. 어찌하기를 원하느냐?"

"무엇을 말입니까?"

"이 모든 일을 말이다."

역시나 의미심장한 소리였다. 모든 일에 포함되는 범위가 어디까지인가. 맥스의 처분까지?

그것도 아니면 이 일을 사주한 배후에 관한 것까지 포함해서?

듣는 사람이 해석하기 나름이었다. 그리고 루크의 해석은 전자였다.

"맥스는 제가 거두겠습니다."

"허! 네 목숨을 노렸던 녀석이다!"

백작은 기가 찬다는 표정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아무리 사연이 구구절절해도 암살자 아닌가.

그런데 자신을 죽이고자 했던 암살자를 거두겠다니?

"새사람이 되고자 했던 남자입니다. 이미 암살자가 아니었지요. 벼랑에서 등을 떠밀렸을 뿐입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부탁드립니다."

털썩 무릎을 꿇고 부탁하는 루크의 모습에 백작이 몸을 떨었다. 옆으로 시선을 돌리자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된 맥스가 보였다.

백작은 분노와 안쓰러움이 뒤섞인 시선으로 맥스를 바라봤다.

"맥스. 하고 싶은 말이 있느냐?"

"끄흡! 죄인이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다만..."

"다만?"

"처형하실 때 제 머리는 따로 빼서 태워주십시오. 맹세를 어기고 다시 칼을 잡았으니, 죽어서도 친구들을 볼 면목이 없습니다. 크흐흑!"

시체에서 목만 분리해 뼛가루도 안 남도록 태우는 건 큰 형벌이다. 그렇게 하면 죽어서도 친지들이 알아보지 못해 서로 영원히 만날 수 없다고 한다.

교단에서는 그냥 미신일 뿐이라고 부정하는 말이지만, 시골이나 외진 마을에서는 꽤 널리 퍼진 낭설이었다.

달리 말하자면 본인이 믿는 미신 중 가장 큰 형벌을 스스로 내려달라 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아."

백작은 재차 한숨을 쉬었다. 차라리 살려달라고 했으면 망설이지 않고 목을 베었을 것을!

"맥스의 처분은 루크에게 맡기겠다."

"각하!"

"안 됩니다!"

주변 기사들이 만류했으나 백작은 말없이 기사들을 쭉 둘러봤다. 주군의 허탈한 눈빛에 기사들이 멈칫했다.

혼이 반쯤 빠져나간 모습이 방금 전의 광분한 모습보다 보기 힘들었다.

"이 이상 왈가왈부하지 말게. 워낙 많은 일이 일어나서 조금 지치는군."

"...."

반발하던 기사들은 일제히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주군이 저런 얼굴로 말하니 도저히 안 따를 수가 없었다.

고요해진 주변을 한 차례 둘러본 백작이 의자에서 일어섰다.

"심문은 여기서 끝내겠다. 다들 자신의 업무로 돌아가도록."

말을 끝내고 등을 돌린 백작은 미하엘을 스쳐 지나가며 한마디를 남겼다.

"루크에게 감사하거라. 네가 은혜라는 개념을 이해할 수 있거든, 마땅히 그래야 한다."

"아, 아버...!"

뒤늦게나마 입을 열어 반론하려 했지만, 백작은 미하엘의 말을 듣지도 않고 그대로 멀어졌다.

루크는 천천히 일어나 미하엘의 어깨를 두드렸다.

"진짜 가족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안타깝구나, 동생아."

"...!?"

너무 기가 막힌 나머지 말을 잃은 미하엘은 입만 뻐끔거렸다. 그 사이 루크는 맥스를 일으키고는 저 멀리 사라져갔다.

뒤이어 기사들이 하인을 해산시키고, 본인들 역시 스스로의 업무로 돌아갔다.

남은 건 휑한 바람을 맞으며 굳은 미하엘 뿐이었다.

****

루크와 브루노, 그리고 맥스 세 사람은 저택의 복도를 걷고 있었다. 이제 막 업무로 복귀한 하인들은 연신 힐끔거리며 시선을 던졌다.

그리고 이윽고 한적한 정원에 당도했을 때, 브루노가 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주군! 어째서입니까!"

"무엇을 말이냐?"

"우리는 맥스한테 이미 들었지 않습니까! 원흉은 미하엘 도련님...!"

"어허!"

루크는 냉큼 호통을 쳐 브루노의 말을 막았다. 하지만 하인들의 귀는 이미 이쪽까지 쫑긋거리며 서 있었다.

"말을 삼가라. 미하엘은 내 동생이다."

"그럼 속 시원하게 이유라도 알려 주십시오. 어째서입니까?"

답답하다는 듯 브루노가 가슴을 탕탕쳤다. 루크는 쓸쓸한 눈동자로 저 멀리 있는 구름을 쳐다보며 말했다.

"형제의 죄악을 밝히는 것도, 형제를 벌하라고 하는 것도 전부 아버지를 괴롭게 만드는 일 아니냐. 자식으로서 그런 불효를 저지를 순 없다."

"하지만 이렇게 넘어가면 또 무슨 일을 벌일지 모릅니다!"

"상관없다!"

단호하게 소리친 루크가 등을 돌려 브루노를 응시했다.

"내 몸을 안전하게 하려고 아버지를 고통스럽게 만드느니, 차라리 모든 업보를 내가 지고 가겠다. 그게 바로 자식 된 도리 아니겠느냐."

"도, 도련님...!"

"크흐흡!"

브루노는 감동에 그렁그렁한 눈으로 루크를 쳐다봤고, 잠시 진정했던 맥스는 다시 눈물을 터트렸다.

하인들은 안 들은 척을 하면서도 속에서 무언가 울컥 치솟아오르는 걸 느꼈다.

세 사람은 다시 복도를 지나쳐 어딘가로 향했다. 이번에는 화원 근처였다. 하인들이 드문드문 있는 장소에서 브루노가 입을 열었다.

"주군! 어째서입니까!"

"무엇을 말이냐?"

"우리는 맥스한테 이미 들었지 않습니까!"

그리고 똑같은 소릴 반복했다. 다음엔 마구간 근처로 향했다.

"자식으로서 그런 불효를 저지를 순 없다."

"하지만 이렇게 넘어가면 또 무슨 일을 벌일지 모릅니다!"

"상관없다!"

또 반복했다. 그다음엔 기사들 숙소 뒤편으로 갔다.

"그게 바로 자식 된 도리 아니겠느냐."

"도, 도련님...!"

"크흐흡!"

또 반복했다. 그리고서야 진짜로 사람이 없는 빈 공터로 향했다. 원래대로라면 루크가 검술 연습을 할 시간.

하지만 암살 사건 때문에 지금은 베르너 경을 포함해 아무도 없었다.

주변을 확인한 루크와 브루노, 맥스의 얼굴이 싹 바뀌었다.

"어때? 못 들은 놈 없지?"

"반응 보니까 제대로 들은 것 같은데요."

"내일이면 소문이 쫙 퍼질 테니 걱정마십쇼. 커흡!"

두 사람의 대답에 루크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암살자를 자신의 힘으로 제압하고, 형제를 향한 고발을 막고, 간지폭풍의 대효도로 마무리.

그야말로 완벽한 계획대로였다.

"그나저나 죽었다 살아났는데 기분이 어때?"

"흐윽! 세상이 아름답죠. 그냥 살아있는 게 이렇게 좋았나 싶습니다. 어흐흑!"

"내가 살려준 거 잊지 말라고. 도망치는 순간 알지?"

"강조하지 않으셔도 압니다. 앞으로 개처럼 일하겠습니다. 흐흑!"

루크가 미하엘의 고발을 막는 게 백작이 마음의 빚으로 남아 간신히 성공한 거다.

거기에 피해자 입장으로 암살하러 온 자를 용서한다는 미담이 받쳐준 덕이기도 하다.

여기서 도망쳤다가는 루크 이전에 분노한 백작이 쫓아와서 시체 조각도 안 남기고 찢어버리리라.

"알았으면 됐고. 앞으로 시킬 일 많으니까 준비하고 있어."

아무리 명예로운 영웅 코스프레를 한다 해도 한계는 있다. 언제까지 혼자 임기응변으로 넘길 수는 없는 법.

뒤에서 부리는 수작에 맞설 뒷공작 요원이 필요하던 차였다. 전직 검은 달 출신인 맥스라면 더없이 좋은 인재다.

게다가 루크에게 묶인 신세가 되가 되지 않았는가. 목줄을 잡았으니 마음껏 부려도 배신의 걱정은 없다. 본인이 은혜까지 느끼고 있으니 더더욱.

"아무튼 기쁜 건 알겠는데 그만 좀 울어라."

"크흡! 그게 아니라 아까 도련님이 가져온 고추냉이가 코에서 안 빠집니다. 커흐흑!"

"...."

****

미하엘은 돌아버릴 것만 같았다. 그놈의 '암살 사건'으로부터 겨우 사흘이 지났다.

그런데 집안 전체의 분위기는 천지가 뒤집힌 것처럼 바뀌었다.

하인들은 미하엘을 두려워하면서 한심하게 바라봤고, 기사들에겐 은근한 경멸이 묻어나왔다.

귀를 기울이면 항상 주변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어째 혈통이 반대로 된 거 같아.

-말조심 좀 하라니까. 걸렸다간 곱게 못 죽는다고.

-내가 틀린 말 했어? 순혈 귀족이란 작자는 형제를 죽이려고 하는데 반쪽짜리 서자라는 분은 성인이 따로 없어.

-피의 농도가 다른 건지도 모르지. 미하엘 도련님은 외가 쪽 피가 너무 진한가 봐.

"그놈들이 감히! 감히 그딴 소리를!"

사냥터 부근에서 미하엘은 빠드득 이를 갈았다. 누명도 억울하건만 그 서자놈보다 못하다는 소리를 듣다니!

그것도 재능이나 실력이 아닌 고귀함에서!

그 자리에서 다 베어 죽이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암살 사건'으로 심기가 불편해진 아버지가 가만있지 않을 터.

"으아아악! 그 개자식, 죽여버리겠어!"

파악

분을 참지 못한 미하엘이 미친 듯이 검을 나무에 대고 휘둘렀다. 제대로 자세도 잡지 않은 터라 검보다는 둔기를 휘두르는 것에 가까웠다.

이윽고 단단한 부분을 옆면으로 후려쳐 검날이 통째로 나갔다.

"그놈이! 그놈들이! 그 찢어 죽일 놈들이!"

땡그랑

그래도 화가 풀리지 않은 미하엘이 검을 내동댕이치고 발로 밟고 있을 때였다. 뒤에서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쯧쯧. 그 사이에 광증이라도 생겼느냐? 멍청한 거야 원래부터 그랬다지만 이젠 아예 미쳐버린 모양이구나."

"...!"

몸을 움찔 떤 미하엘이 뒤를 돌아보고 얼굴을 구겼다. 하필이면 지금 가장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었다.

"형님!"

미하엘의 친형, 율리히 번스타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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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