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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어느 날, 아무런 징조도 없이 윤석은 게임 속으로 들어왔다. 게임의 이름은 지고의 옥좌.

중세 시대를 배경으로 한 판타지로, 군벌 중 하나가 되어 정복전을 벌이는 게임이었다.

게임이 윤석에게 제시한 목표는 간단했다.

[ 승리 목표 : 한 영지의 지배자로 삶을 마치세요 ]

조건은 빡빡했다. 태어난 건 한 시골 마을. 일단 혈통은 귀족이지만 서자의 신분. 심지어 특출난 재능도 없다.

시작부터 여러모로 하자가 많은 상태였다. 난이도로 따지면 상급 이상. 그러나 윤석은 오히려 웃었다.

"별 것 아니네."

지금까지 수백 번을 넘게 돌리고 또 돌린 게임이었다. 한 영지의 지배자가 되는 것 쯤이야 문제 없었다.

왕이 되라는 것도 아니고, 기껏해야 영지딸린 귀족 아닌가. 남작이나 자작 정도만 되어도 충분한데 어려울 게 뭐가 있나.

그렇게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허억, 허억!"

윤석, 아니 이 세상에서 루크의 이름을 부여받은 남자는 미친 듯이 말을 달렸다.

방금 전까지 격전을 치른 탓에 몸에는 상처가 가득했고, 몸은 제발 쉬게 해달라고 비명을 질렀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 쓰러져서 자고 싶었다. 문제는 뒤에서 쫓아오는 놈들이었다.

"잡아! 저쪽으로 갔다!"

"다른 놈들에게도 알려! 놓치면 절대 안돼!"

철저한 새끼들 같으니. 루크는 용병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이를 갈았다. 조금 어설픈 놈들이면 좋았으련만.

하는 행동을 보아하니 이런 일에 이골이 난 베테랑이 확실했다.

예상대로 주변에서 갈수록 발소리가 많아지기 시작했다. 서서히 포위망을 좁히고 있다는 증거였다.

'시발, 억울해 미치겠군.'

지금 루크가 이런 꼴이 된 건 본인 탓이 아니었다. 번스타인 가문이 거하게 삽질을 해서 황제의 분노를 샀기 때문이다.

황제는 번스타인 가문을 모조리 죽이겠다고 방방 뛰었다. 가문에서 진즉 나왔던 루크 입장에선 날벼락이나 다름없었다.

'염병할 황제놈.'

아무리 연좌가 있는 시대라지만, 어지간해서는 가문 몰살 같은 명령을 내리진 않는다.

실제로 황제의 지나친 명령에 반발한 귀족들도 많았다. 하지만 황제는 모든 반발을 무시하고 멸문을 강행했다.

덕분에 죄도 없이 이꼴이 되었으니 돌아버릴 것만 같았다. 그때 저 멀리서 어떤 기사가 외쳤다.

"루크 번스타인! 기사로써 부끄럽지도 않느냐? 쥐새끼처럼 도망치지 말고 당당히 나와 내 검을 받아라!"

'아니, 저런 양심없는 새끼가?'

1대 1로 붙으면 모를까 용병을 잔뜩 끼고 와서 저딴 소리를 하는 게 말이 되나? 어처구니가 없어서 쌍욕이 나왔다.

"지금 소리친 새끼는 누구냐? 용병 뒤에 숨어서 고개만 내미는 주제에 누가 보면 명예로운 기사라도 되는 줄 알겠구나!"

"저, 저놈이!"

루크의 도발이 제대로 먹혔는지 기사가 부들거렸다. 그 모습을 보며 루크가 욕을 표현하는 손가락 동작을 쓱 내밀었다.

이성을 잃은 기사에게서 고함이 터져나왔다.

"잡아라! 아니, 그냥 죽여라! 어차피 몸값도 못 받을 놈이다!"

'이런 시발!'

기사의 말에 루크가 기겁했다. 모든 전투에서 상대편의 귀족은 기본적으로 죽이기보단 사로잡는 걸 선호한다.

이유는 간단했다. 죽이면 원한만 사고 돈이 안 되지만, 살려놓으면 어떻게든 두둑히 뜯어낼 수 있으니까.

물론 전투 도중에 죽는 건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치명상은 피하려고 한다는 이야기다.

설령 반역자라는 낙인이 찍혀도 나중에 황제 기분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니, 일단 잡고 보는 게 보통일 터.

하지만 작정하고 죽이려 든다면 이야기는 달랐다. 기사의 명령에 용병들의 눈빛이 바뀌었다.

"쏴라!"

지금껏 그물망을 쓰던 용병들은 거리낌없이 쇠뇌를 쓰기 시작했다. 볼트가 뺨을 스치고 지나가자 뜨뜻한 피가 흘렀다.

루크는 등골이 차가워지는 걸 느끼며 활을 꺼내 시위를 매겼다. 어떻게든 뚫고 지나가야 한다!

"컥!"

나이스 샷! 쓰러지는 용병 하나를 보며 루크가 쾌재를 불렀다. 움직이는 말 위에서 쐈는데도 이렇게 제대로 들어간 건 오랜만이었다.

[ 완벽한 사격으로 인해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

[ 특성 '범재'로 인해 숙련도가 제한됩니다. ]

[ 한계에 도달하여 사격 숙련도는 오르지 않습니다. ]

잠깐 좋았던 기분이 다시 나락으로 떨어졌다. 범재. 모든 능력치를 '숙련자' 이상으로 올릴 수 없게 되는 마이너스 특성.

루크가 이 세계에서 대성할 수 없었던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 범재 특성 때문이었다.

아무리 죽어라 익혀도 일정 이상 능력을 올릴 수 없는데 뭘 어쩌란 말인가?

'대체 이딴 걸 왜 넣은 거냐고!'

속으로 분통을 터트리며 루크가 말을 달렸다. 다행히 방금 전 사격으로 인해 용병들이 조금 주춤해졌다.

이대로 말을 달려서 도망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놓치지 마라! 놈의 목을 가져오면 금화를 두둑히 얹어주마!"

"저 개새끼...!"

겨우 빠져나가나 했더니 기사놈이 용병들을 부추겼다. 잠깐 물러서려던 용병들은 금화라는 소리에 눈을 뒤집고 다시 달려들기 시작했다.

쇠그물과 볼트가 사방팔방 쏟아지고, 창이 연신 나타나 찔러왔다. 어떻게든 피하고 또 피했으나 그것도 한계였다.

퍼억

"컥!"

볼트 하나가 루크의 등에 적중했다. 몸이 휘청거리자 말 역시 기수의 상태를 눈치채고 움찔거렸다.

그 작은 틈이 치명적이었다.

"쏴라!"

파파파팍

용병 대장의 신호에 따라 사방팔방에서 볼트가 날아들었다. 피할 틈도, 살아날 방법도 없었다.

루크는 멍하니 느릿하게 다가오는 죽음을 느끼며 눈을 질끈 감았다. 가슴 속에 줄곧 품어왔던 한마디가 맴돌았다.

'딱 한 번만 더 기회가 주어진다면.'

수백 번을 넘게 플레이 했던 게임이라고 방심했었다. 뜻대로 되지 않자 나아가길 포기하고 안주하려는 실수를 범했다.

무엇보다 자신의 잘못도 아닌 연좌로 이렇게 죽어가는 게 너무나 억울했다.

다시 시작할 수만 있다면 두 번 다시 같은 실수를 범하지 않을 텐데. 모든 게 너무 늦은 후회였다.

퍼퍼퍼퍽

"....!"

온몸을 고슴도치처럼 꿰뚫리는 고통에 루크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점차 의식이 멀어지고, 루크의 몸뚱이가 말에서 떨어진 순간이었다.

[ 튜토리얼 목적의 '1회차'를 종료합니다. ]

[ 본편인 '2회차' 진입 준비 중. ]

[ 데이터 계승 완료. 1회차 전용특성 '범재'를 제거합니다. ]

[ 재시작 지점에서 2회차를 시작합니다. ]

'...뭐?'

죽어가면서 귀에 들려온 소리에 뭐라 반응하기도 전에, 새하얀 빛이 루크를 휘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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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루크는 조금씩 의식을 되찾았다. 눈을 뜨자 흐릿한 시야가 망막에 비쳤다.

'내가 살아있는 건가?'

이 세계에서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는 아직도 의문이었다. 또 다른 세계에서 환생하는 건지, 아니면 영영 사라지는 건지.

다행히 사라지는 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눈을 몇 번 껌뻑이고 나자 주변 풍경이 제대로 보였다.

무두질한 동물의 가죽, 사슴의 뿔, 벽에 세워둔 활과 화살. 너무나 익숙한 오두막이었다.

"사냥꾼 시절 오두막?"

루크는 이 세계에서 처음부터 귀족으로 태어난 게 아니다. 시작은 어디까지나 시골 사냥꾼이었다.

어머니는 진즉 돌아가셨고, 사냥꾼의 오두막에서 외할아버지와 함께 사냥 기술을 배우며 살았다.

귀족의 일원이 된 건 나중에 아버지가 루크를 찾고 나서였다. 지금 눈을 뜬 곳은 바로 그때의 오두막이었다.

루크는 꿈인가 싶어 뺨을 꼬집고 비틀어봤다. 얼얼한 통증에 눈이 찌푸려졌다.

'아픈 거 보니 꿈은 아닌데.'

벌겋게 된 뺨을 문지르며 마지막 기억을 떠올려 봤다. 분명 쇠뇌에 맞아 죽어가고 있었을 텐데.

'잠깐만, 그러고 보니 마지막에···.'

죽어가면서 무언가 목소리를 들었다. 조금 기억이 흐릿했지만 떠올리려고 하자 곧장 기억해낼 수 있었다.

[ 튜토리얼 목적의 '1회차'를 종료합니다. ]

[ 본편인 '2회차' 진입 준비 중. ]

[ 데이터 계승 완료. 1회차 전용특성 '범재'를 제거합니다. ]

[ 재시작 지점에서 2회차를 시작합니다. ]

'2회차!'

정신이 퍼뜩 들었다. 그렇다면 지금껏 경험한 건 1회차였다는 건가? 어디까지나 연습용으로 쓰이는?

그리고 지금이 진짜 본게임인 2회차의 시작이라고?

"하, 하하."

여러 감정이 섞여 헛웃음이 나왔다. 어이가 없으면서도 화가 나고, 안도가 되면서도 기뻤다.

어쨌거나 다시 시작할 수 있다. 꿈에도 그리던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다.

그것만으로 모든 게 용서되는 기분이었다. 루크는 옆에 걸린 활과 화살을 들고 밖으로 향했다.

휘이잉

"윽, 추워."

갑작스러운 찬바람에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렇지만 도로 오두막에 들어갈 생각은 없었다.

지금 바로 범재 특성이 사라졌는지 시험해보고 싶었으니까.

밖으로 나오자 마침 나무 위에 올라가 있는 새 몇 마리가 보였다. 루크는 조심스럽게 활을 겨누고 시위를 당겼다.

피잉, 퍽

-찌르륵!

달리던 말 위에서도 종종 활을 쏘던 루크다. 가만히 있는 새를 맞추는 건 어렵지 않았다.

중요한 건 새를 잡느냐 마느냐가 아니었다.

'제발, 제발!'

루크는 마음속으로 빌며 침을 삼켰다. 다행히 원하던 내용이 들려왔다.

[ 완벽한 사격으로 인해 경험치가 상승합니다. ]

[ 현재 사격 등급은 '숙련자'입니다. ]

"...!"

루크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범재로 인한 등급 제한이 사라져 있었다. 하마터면 너무 기뻐서 비명을 지를 뻔했다.

'그래, 이거지!'

지금껏 등급 제한에 얼마나 고통을 받았던가. 숙련자만 되면 멈추는 탓에 죄다 어중간하게 끝내야 했다.

그런데 그 망할 놈의 범재 특성이 사라졌다니.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고 싶은 심정이었다.

"후우우, 진정하자."

심호흡을 통해 루크는 감정을 억눌렀다. 기뻐하는 것도 좋지만 앞으로의 계획을 정리할 때였다.

뭣보다 우선해야 할 건 지금이 어느 시점인지 파악하는 거였다.

'일단 마을로 좀 내려가 봐야겠군.'

방금 전 잡은 사냥감을 집어 든 루크는 외출 준비를 했다.

****

브릭 마을. 루크가 이 세계에 환생한 이후, 15년간을 쭉 살아온 마을이었다.

말하자면 두 번째 고향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루크는 이 마을에 대한 애착이 전혀 없었다.

'쓰레기 같은 마을이었지.'

원래 이 시대 사람들에게 양심을 기대하는 게 잘못이다. 도덕률이 전체적으로 개판인 세상이니까.

외지인에게 바가지를 씌우는 건 당연하고, 연고 없는 여행자를 처리한 후에 금품을 훔치는 일도 흔하다.

하지만 그중에서 브릭 마을은 특히나 심했다.

'15년 동안이나 외할아버지를 등쳐먹었으니까.'

루크의 집안은 루크가 태어나기 직전에 브릭 마을로 이주한 이주자 집안이었다.

당연하게도 마을 주민들의 텃세에 시달렸다. 그에 대해선 불만 없다. 원래 이런 텃세는 어느 마을에나 있기 마련이다.

이주한 사람들이 어떤 자들인지 알 수가 없으니까. 골치 아픈 사연이라도 있으면 마을 전체가 해를 입을 수도 있으니 경계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다들 어느 정도는 지켜보다가, 적당히 세월이 흐르고 '성의'가 쌓이면 비로소 마을 사람으로 받아주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적당히 해야지.'

아무리 이주자 집안이라고 해도 정착해서 산 것만 15년이다. 그쯤 되면 슬슬 외지인이 아닌 마을 사람 중 하나로 인정해주기 마련.

그런데도 브릭 마을 사람들은 루크 일가를 계속 이주자 취급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사냥꾼인 외할아버지의 노동력을 값싸게 부릴 수 있다는 이유였다. 외지인이라면 어떻게든 마을 사람들에게 잘 보여야 한다.

당연히 짐승의 고기나 가죽도 값을 깎아서 팔아야 하고, 마을에 내려온 맹수 쫓기에도 별 보수 없이 협력할 수밖에 없다.

마을 사람으로 인정해주면 사냥꾼 같은 고급 인력을 마음껏 부릴 수가 없다. 그 결과가 15년에 걸친 외지인 취급이다.

'염병할 새끼들.'

혀를 차면서 루크는 마을을 둘러봤다. 아침 일찍이라 그런지 이제 일어나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그때 옆에서 중년 남자가 불쑥 튀어나왔다.

"루크? 네가 웬일이냐?"

"아, 빅터 아저씨."

나타난 사람을 보고 루크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 빅터는 나무꾼으로 곧잘 숲에 왔기에 잘 아는 사이였다.

물론 그게 사이가 좋다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질 좋은 나무가 있는 장소에서 망을 보라고 곧잘 강요했지.'

기본적으로 안전지대에 있는 나무 중 좋은 목재가 될 만한 건 일찍 사라진다. 보이는 족족 찍어가기 때문이다.

당연히 좋은 목재 대부분은 짐승과 몬스터가 출몰하는 지역에 있기 마련.

빅터는 곧잘 외할아버지와 루크에게 찾아와 나무할 때 호위 좀 서달라고 했다.

짧은 시간 안에 끝나는 일도 아니라 빅터가 찾아오는 날은 사냥을 공치고 도우러 가야 했다.

'다시 생각하니 열 받는군.'

혀를 차면서 루크는 표정 관리를 했다. 일단 지금은 대화를 하면서 상황 파악을 하는 게 우선이었다.

"네가 무슨 일이냐?"

"아침에 사냥감 하나를 잡았거든요. 혹시 사 줄 사람 없나 싶어서요."

"오호, 그래?"

빅터의 눈이 반짝였다. 보통 작은 마을에선 어지간한 날이 아니면 고기를 입에 대기 힘들다.

하지만 브릭 마을은 루크 일가가 잡은 고깃값을 꽤 싸게 후려칠 수 있었다.

그 덕에 마을 주민은 기름진 고기에 제법 맛이 들린 상태였다.

"뭘 잡았니? 어디 한번 보자."

"이놈이요."

"비둘기구나."

살이 통통하게 오른 비둘기를 보고 빅터의 입에 침이 고였다. 벌써부터 어떻게 요리해야 더 맛있을지 고민이 되었다.

"마침 잘 왔다. 이 비둘기 나한테 팔아라."

"얼마에 사실 건데요?"

"흐음, 글쎄다."

루크가 묻자 빅터는 비둘기를 연신 눈으로 훑었다. 애써 탐욕을 누르고 흠잡을 곳이 어디 없나 탐색하는 모양새였다.

안타깝게도 비둘기의 상태는 상당히 좋았다. 결국 트집거리가 보이질 않자 빅터의 입에서 아쉬움이 새어나왔다.

"에이, 어쩔 수 없지. 동화 일곱 닢이면 어떠냐?"

'이 새끼가?'

인심 썼다는 빅터의 말투에 루크는 헛웃음을 지었다. 당장 시장에 내다 팔면 열다섯 닢은 받을 수 있는 상태였다.

그런데 반이 넘게 후려치고는 착한 일이라도 한 듯이 말하다니. 어처구니가 없어서 말이 안 나왔다.

"무슨 일인가?"

"아, 촌장님!"

그때 옆에서 등장한 노인을 보고 빅터는 반색했다. 반대로 루크는 얼굴이 와락 일그러지려는 걸 애써 참아야 했다.

회귀 전 최악의 악연 중 하나가 바로 눈앞의 촌장이니까.

'쓰레기라는 말도 아까운 늙은이.'

겉으로 보기에는 푸근한 이웃집 할아버지 같은 외모지만, 실제로는 탐욕이 드글드글한 노인네.

사냥꾼을 부려먹을 수 있게 루크 일가를 쭉 외지인 취급하자고 주도한 것도 이 작자였다.

루크는 저도 모르게 올라갈 뻔한 손을 내리고 심호흡을 했다.

"안녕하세요, 촌장님."

"그래. 둘이 뭔가 대화를 하고 있던 것 같은데."

"아, 별거 아닙니다. 그냥 제가 고기 좀 사려구요."

빅터가 씩 웃으며 루크의 손에 든 비둘기를 가리켰다.

"비둘기라. 그래, 얼마에 사기로 했는데?"

"동화 일곱 닢으로 사기로 했습니다."

아직 판다고 말한 적도 없건만, 빅터는 이미 결정이 난 것처럼 얘기했다. 그 소리를 들은 촌장의 눈이 치켜 올라갔다.

"아니, 동화 일곱 닢이라니!"

"뭐, 뭔가 잘못된 거라도 있습니까?"

"당연히 잘못되었지!"

벌컥 화를 내는 촌장의 모습에 빅터가 쩔쩔맸다. 촌장은 냉큼 비둘기를 구석구석 가리키면서 말했다.

"자, 이걸 보게! 이놈은 제법 늙은 놈이야. 게다가 최근 제대로 먹지도 못했군. 깃털 상태도 별로인데 일곱 닢은 너무 많지!"

"그, 그렇군요!"

'이 미친놈들이···.'

이어진 촌장과 빅터의 대화에 루크는 이를 갈았다. 반값도 넘게 깎은 주제에 거기서 더 깎겠다고?

심지어 촌장이 주절대는 소리는 근거도 없을뿐더러, 사냥꾼인 루크가 보기엔 기가 차는 소리였다.

어부가 파는 생선에 농부가 훈수를 두는 꼴이 아닌가. 한참 이것저것 트집을 잡은 촌장이 근엄하게 수염을 쓰다듬었다.

"그러니 이 비둘기는 다섯 닢이 적정가야."

"음, 루크. 넌 어떻게 생각하냐?"

두 사람의 시선이 루크를 향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 가격에 안 팔면 나중에 안 좋은 일이 생길 줄 알라는 협박이었다.

루크는 냉큼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물론 그 가격에 팔아야지요."

"하하하! 그래, 사람이 정직해야지! 암!"

빅터는 실컷 웃으며 루크의 어깨를 두드렸다. 서로 눈을 찡긋거리는 빅터와 촌장을 보자니 한숨이 나왔다.

이쯤 되면 사람이 화도 안 나는 법이었다.

'잊고 있던 걸 떠올리게 해줘서 고맙다, 개새끼들아.'

회귀 전에는 정신없이 마을을 떠났기에 복수도 제대로 못 했다. 이후엔 가문에서 적응하느라 워낙 바빠 신경 쓸 틈이 없었고.

그 후 쭉 잊고 살았는데, 다시 이 상황을 마주하니 생각이 바뀌었다.

이번 생에서는 이 쓰레기들이 피눈물 흘리는 꼴을 봐야 성이 풀릴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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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촌장님!"

그때, 저 멀리서 마을 청년 하나가 달려왔다. 얼마나 급하게 온 건지 연신 숨을 헐떡였다.

"크, 큰일 났습니다!"

"큰일이라니? 무슨 일이길래?"

"기사가 왔습니다!"

청년의 말에 루크의 눈이 번쩍 뜨였다. 이런 시골 마을에 올 기사라면 하나밖에 없다.

'번스타인 가문의 기사!'

번스타인 백작가. 루크의 아버지가 가주로 있는 곳이자, 동부에서는 상당한 힘을 가진 귀족 가문 하나.

루크가 열다섯 살 때, 번스타인 가문에서는 두 번 브릭 마을로 찾아왔다.

서자인 루크를 찾아 가문으로 데려가기 위해서. 이번이 그 첫 번째 방문인 게 확실했다.

"기, 기사? 아니, 기사가 왜 여기까지 온단 말이냐!?"

루크와 달리 촌장의 얼굴은 창백하게 변해 있었다. 기사가 누구인가.

평민은 눈도 못 쳐다보는 귀족이자 병사 수십을 상대하는 인간백정이 아니던가.

심기를 거스르면 일개 촌장 정도야 파리 목숨처럼 죽여버릴 수도 있었다.

"병사는? 기사가 이끌고 온 병사는 얼마나 되느냐?"

촌장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기사가 병사를 이끌고 방문했을 때, 그 대접을 하는 건 오로지 마을의 몫이었다.

병사가 적다면 그나마 버틸 만하지만, 병사 수가 많으면 엄청난 부담이 된다.

마을에 얼마나 오래 머무느냐도 문제였다.

'잠깐이라면 상관없지만, 이유가 있어서 한참 머무를 생각이라면 마을이 거덜 난다.'

촌장의 입이 바싹 말라갔다. 병사들의 행패에다 나가는 비용을 생각하면 벌써부터 다리가 후들거렸다.

"병사는 없던데요."

"뭐? 병사가 없어? 기사 혼자라고?"

"예!"

"허어."

청년의 대답을 들은 촌장의 머리가 빠르게 굴러갔다. 그렇다면 특정 가문에 봉신으로 있는 기사는 아닐 가능성이 높다.

주군을 찾는 방랑기사나, 남의 전쟁에 끼어들어서 밥벌이를 하는 용병기사일 것이다.

"그럼 가문의 문양은 없었느냐? 동물의 그림 같은 거 말이다."

"아뇨, 그런 것도 없었어요."

"오호라!"

가문의 문양을 쓰지 않는다는 건 무언가 불명예를 안고 있다는 소리. 그렇다면 용병기사일 가능성이 현저히 높았다.

뒷배도 없고, 연줄도 없으며, 그저 하루하루 용병 일로 먹고사는 기사.

'그렇다면 이야기가 다르지.'

뒷배도, 연고도 없는 용병기사는 일개 여행자와 별다를 것 없었다.

신분과 무력의 차이는 클지 몰라도, 쥐도 새도 모르게 처리하면 찾는 사람이 없다는 소리였다.

눈을 이리저리 굴리는 촌장을 보고 루크는 속으로 혀를 찼다.

'몰래 죽이고 싹 털어버릴 속셈이군.'

실제로 여행자나 연고 없는 용병기사가 그렇게 사라지는 일은 드물지 않았다.

당장 브릭 마을부터가 여행자 상대로 몇 번 같은 짓을 했었다. 문제는 촌장이 지금 꽤 커다란 착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상대는 일개 용병기사가 아니라 번스타인 가문의 봉신기사였다.

"크흠, 루크. 너는 이만 가보거라."

촌장은 루크를 쫓듯이 손을 훠이훠이 저었다. 기사를 처리하고 물건을 나누는 데 끼워줄 생각이 없다는 제스쳐였다.

"네, 그럼 안녕히 계세요."

"그래. 나중에 사냥한 거 있으면 또 오고."

거기까지 말한 촌장은 홱 돌려서 쑥덕대기 시작했다.

자기 나름대로 목소리를 줄인 것 같지만, 루크의 예민한 귀에는 전부 들렸다.

"기사님 드릴 음식 좀 잘 준비해 두게. 약을 듬뿍 타는 거 잊지 말고."

"걱정하지 마십시오. 한 입만 들이켜도 바로 잠들 겁니다."

"좋군. 마침 내가 아는 장물아비가 있는데···"

루크는 무심코 비웃음이 터질 뻔했다. 자기 목숨줄을 조이는 줄도 모르고 탐욕에 빠진 모습이 한심했다.

'흔적을 지울 준비를 해둬야겠군.'

회귀 전의 일을 떠올리며 루크가 오두막으로 달려갔다. 오늘 밤이 기사가 탈출해서 오두막으로 오는 날이었다.

====

어두운 새벽. 루크는 오두막 주변에 불을 피워두고 도구를 정리했다.

발자국과 핏자국을 지우기 위한 물건들을 준비했고, 지하 은신처도 싹 정리해놨다.

'슬슬 올 때가 됐는데.'

-자, 잡아라!

-절대 놓치지 마!

생각이 끝나기 무섭게 마을에서 소란스러운 외침이 들려왔다.

마을 전체가 들쑤신 듯이 횃불이 밝혀지고 사람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그 와중에 한 그림자가 말을 타고 이쪽으로 향했다. 도중에 무언가에 맞은 건지, 말이 쓰러지고 사람도 땅을 뒹굴었다.

"크헉, 쿨럭!"

'왔군.'

오두막에 도착한 건 젊은 기사였다. 갑옷과 검을 빼앗겼는지 복장은 평복이었고, 어깨에는 쇠스랑에 상처를 입은 상태였다.

"거, 거기 있는 평민! 나를 숨겨라!"

'얼씨구.'

다 죽어가면서도 저런 말투라니. 귀족의 선민의식은 진즉 알고 있었지만, 고개가 절로 저어졌다.

"숨겨만 준다면 나중에 보상하겠다! 원한다면···!"

"됐습니다."

"뭣!? 아니···!"

거절로 받아들였는지 기사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루크는 오두막의 문을 열고 기사를 향해 손짓했다.

"보상은 필요 없으니 어서 들어오십시오. 숨을 장소가 있습니다."

"고, 고맙다!"

기사가 허겁지겁 오두막 안으로 들어왔다. 루크는 교묘하게 숨겨진 지하실의 문을 열었다.

"들어가십시오."

"이 은혜는 잊지 않으마. 내 이름에 걸고···"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닙니다."

감사 인사를 들을 시간도 아까웠다. 루크는 기사를 밀어 넣고 당부했다.

"절대 밖으로 나오시면 안 됩니다.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져도 가만히 계셔야 합니다."

"알았다. 내 맹세하지."

기사의 눈빛에 루크는 약간 안도했다. 가장 최악의 경우는 '이렇게 된 이상 싸우다 죽겠다!'라며 도중에 튀어나오는 거였다.

그렇게 되면 루크도 추궁을 피할 수 없었다. 다행히 이 기사에게 그 정도 분별력은 있는 모양이었다.

'서두르자.'

루크는 미리 준비해 둔 도구로 빠르게 주변을 정리했다. 핏자국을 없애고, 발자국을 지우고, 거짓 흔적을 몇 개 남겨놓았다.

마지막 작업이 끝나자마자 마을 사람들은 바로 루크의 오두막에 몰려왔다.

"루크! 이리 나와봐라!"

밖에서 촌장의 성난 목소리가 들려왔다. 루크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개를 내밀었다.

"이런 밤중에 무슨 일이세요?"

"방금 전에 여기 온 사람 없느냐?

"아, 그러고보니 누가 오긴 왔습니다."

"그래?"

촌장의 눈에 살기가 번뜩였다. 기사를 놓친 것때문에 신경이 잔뜩 곤두서있었다.

루크는 미리 준비해뒀던 대답을 풀어냈다.

"막 오두막 문을 두드리면서 나오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처음 듣는 목소리길래 누구시냐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대답을 안 하고 열라고만 하길래 수상해서 안 열어줬지요."

"끄응!"

대답을 들은 촌장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럼 어디로 갔는지도 못 봤다는 소리 아닌가.

"잠깐만, 너 혹시 뭔가 숨기는 거 아니냐?"

몇몇 의심스러운 눈동자가 루크를 향했다. 기사가 숨겨주는 대가로 보상을 얘기했다면, 충분히 넘어갈 수 있는 이야기 아닌가.

"의심이 가면 마음껏 뒤져보시죠. 막지 않을 테니까."

"커흠! 그럼 잠깐만 훑어보마."

당당한 태도에도 마을 사람들은 미심쩍은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그러나 루크로서는 무서울 것 없었다.

'실컷 찾아봐라. 추적술도 안 배운 주제에 찾는다고 뭐가 나오나?'

아니나 다를까, 마을 사람들은 흔적을 제대로 찾지도 못하고 이리저리 헤맸다.

심지어 지하실을 눈앞에 둔 채로도 입구를 몰라보고 넘어갔다.

평생 밭을 갈며 먹고 살던 사람의 한계였다.

"촌장님! 여기 발자국이 있습니다!"

"어디냐! 어디로 갔어!"

"숲으로 이어져 있습니다! 도중부터 낙엽을 밟고 가서 잘은 안 보이지만···"

'그거 내가 남긴 건데.'

하마터면 터질 뻔한 웃음을 애써 참았다. 전문가가 보면 바로 알아차릴 흔적이지만, 시골 마을 주민들은 철석같이 진짜라고 믿었다.

"루크, 이 발자국을 추적할 수 있겠냐?"

"예? 제가요?"

"그래, 넌 사냥꾼이잖니? 우리 좀 돕거라."

"이 밤중에 산에 들어가라고요? 지금 장난하십니까?"

루크는 일부러 정색하며 거절했다.

"한밤중의 숲이 얼마나 무서운지 모르시죠? 평생 사냥꾼으로 산 사람도 절대 안 들어가는 게 어두워진 숲입니다. 그런데 저보고 가라고요?"

"그 정도냐?"

"마을 사람들이 다 같이 들어가면 저도 가죠. 이렇게 많이 가면 세 사람 정도만 짐승에게 물려가는 걸로 끝나겠네요."

마을 사람들은 찌푸린 얼굴로 시선을 교환했다. 아무리 그래도 도망친 기사 잡자고 그 정도 위험을 감수하긴 싫었다.

"만약 기사가 밤에 숲을 들어가면 어떻게 될 것 같니?"

"기사가 아니라 기사 할애비가 와도 죽을 걸요. 잘 싸우는 것과 숲에서 살아남는 건 별개에요."

그 말에 마을 사람들은 안심한 듯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렇다면 굳이 찾아가서 죽일 필요도 없지 않나. 산짐승과 몬스터가 알아서 정리해줄 테니.

"이쯤 하고 돌아가도 될 것 같습니다, 촌장님."

"나도 그렇게 생각하던 차였네. 루크? 혹시 또 수상한 사람이 찾아오면 알려주거라."

"예. 바로 말씀드릴게요."

마을 사람들은 상황이 일단락되자 썰물 빠지듯이 오두막에서 사라졌다. 그 이후로도 한참 루크는 주변 낌새를 살폈다.

완벽히 인기척이 사라지고 나서야 지하실 문을 열었다.

'기절했네.'

스트레스와 피로가 심했는지, 아니면 수면제를 지나치게 들이킨 탓인지 기사는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루크는 우선 피를 닦아내고 약을 바른 뒤 붕대를 감았다. 간단한 치료지만 기사의 생명력과 상처의 얕음을 볼 때 이 정도면 충분했다.

[ 완벽한 응급처치로 인해 경험치가 상승합니다. ]

[ 현재 응급처치 등급은 '숙련자'입니다. ]

치료를 마치자 기분 좋은 알림이 들려왔다. 회귀 전에는 별로 올릴 생각도 없었는데, 하도 자신의 몸을 많이 치료하다 보니 오른 응급처치였다.

별거 없어 보이지만 이 스킬 덕에 살아남은 적이 꽤 여러 번 있었다.

'계획대로 되었군.'

지하실 문을 닫은 루크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맺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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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 전에도 똑같은 일이 벌어졌었다. 브릭 마을 주민들은 기사를 상대로 강도질을 벌였고, 기사는 도망쳐서 루크한테 왔다.

다만 그때는 워낙 경황이 없어서 기사를 숨겨줄 생각을 못 했다. 한창 자던 도중이라 나가는 데 오래 걸린 것도 있었고.

결국 기사는 들이닥친 마을 사람들에게 잡혀서 끌려갔다.

'나중에 번스타인 가문의 기사라는 걸 알게 됐지만 알릴 수도 없었지.'

어찌 됐건 돕지 못하고 살해당하는 걸 지켜만 본 셈이니까. 마을은 풍비박산 나겠지만 루크에게도 책임이 돌아갈 가능성이 높았다.

덕분에 마을 놈들은 완전범죄로 넘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 생은 회귀 전과 전혀 다르게 흘러갔다.

'제대로 숨겨줘서 은혜를 입히고, 마을 놈들과는 근본이 다르다는 걸 보여줬으니까.'

쓰레기 같은 마을과 한패로 엮이는 게 아니라, 까마귀 떼 사이에 있는 고고한 학이 된 셈이다.

설령 스스로 마을을 고발한다고 해도 이제 아무런 문제가 없다. 이제 남은 건 이 기사를 구워삶는 것뿐이다.

'앞으로 며칠 후에 번스타인 가문의 기사가 한 명 더 온다.'

다만 그때 오는 기사는 정실부인 헬레나의 입김이 강하게 들어간 작자다. 여기 오기 전에 서자를 압박하라는 명령을 은밀하게 받았을 터.

회귀 전처럼 온갖 괴롭힘을 받으며 백작가에 들어가지 않으려면, 미리 자신의 편을 하나 만들어놔야 했다.

루크는 구석에 숨겨두었던 비싼 양초를 꺼내며 배치하기 시작했다. 예부터 호감도의 기본은 분위기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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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기사가 깬 건 약 하루가 지나서였다. 붕대를 막 교환하는 와중 정신을 차린 기사가 바싹 마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무, 물···!"

"여기 있습니다."

루크가 물을 떠다 주자 바로 낚아채서 입에 들이붓기 시작했다. 기사는 두 사발을 연거푸 마시고서야 조금 나아졌는지 숨을 골랐다.

"고맙다."

"별거 아닙니다."

"아니, 너는 내 목숨을 구했다.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으마."

어제의 강압적인 태도와 달리 고개를 숙이는 기사를 보며 루크는 살짝 놀랐다. 이 정도로 순순히 은혜를 인정하는 기사도 드물었다.

자세히 보니 얼굴도 꽤 젊은 편이었다. 이제 막 종자 생활을 마치고 기사가 된 듯 보였다.

'기사도 신봉자인가?'

원래 기사는 기사도를 중요하게 여기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기사도에 목숨을 거는 자들이 있다.

루크가 볼 때 눈앞의 기사 역시 그런 부류인 것 같았다.

"내 이름은 로더릭 베일이다. 네 이름을 알려다오."

"루크. 리리아의 아들 루크입니다."

"루, 루크?"

기사, 로더릭이 흠칫 몸을 떨었다. 루크라니. 공교롭게도 자신이 찾던 이름과 똑같지 않은가.

그리고 리리아라는 이름도 귀에 익었다. 분명 주군께서 말씀해주셨던 여인의 이름 같은데.

로더릭은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루크에게 물었다.

"혹시 쭉 이 마을에 살았느냐?"

"저는 이곳에서 태어났습니다만, 외할아버지와 어머니께선 북쪽에 있는 반헤임에서 사셨다고 하더군요."

"반헤임!"

반헤임이라면 분명 본래 그 여인이 살던 장소가 아니던가! 어긋나 있던 퍼즐이 착착 끼워 맞춰지는 느낌이 들었다.

로더릭은 이 마을에 오게 된 경위를 떠올렸다. 시작은 백작의 한마디였다.

-내가 북부의 반헤임에 기사 수행차 방문했을 때, 몇 달 동안 한 여인과 함께한 적이 있다. 그녀에 대해 알아보거라.

원래부터 의무감과 책임감이 강하던 백작이다. 쭉 잊고 있다가 혹여나 그때 자신의 씨를 품지 않았나 걱정이 되었을 것이다.

설령 바깥에서 만든 자식이라도 생겼다면 의무를 다해야 하니까.

기사들은 북부로 내려가면서도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다.

백작의 자식을 낳았다면 진즉 와서 첩 자리라도 차지했지 지방에 머무를 리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안타깝게도 기사들의 생각은 빗나갔다.

-노먼이요? 떠난 지 좀 오래 되었습니다. 딸이 어느 기사님의 씨를 품었다고 하던데, 임산부의 몸으로 도대체 어딜 간 건지.

정황상 다른 남자가 집에 드나들지 않았다는 건 확실했다. 모든 마을 사람이 이구동성으로 아버지라면 백작밖에 없다고 한 것이다.

깜짝 놀란 기사들은 백작에게 돌아가 그대로 전달했다.

-그녀를 찾아라. 아니, 내 아이를 찾아라.

감히 누구의 명령이라고 어기겠는가. 기사들은 사방팔방 흩어져서 소식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다행히 로더릭은 늙은 사냥꾼과 임산부에 대한 소식을 접할 수 있었고, 정체를 숨긴 채 그들의 목적지였던 브릭 마을로 향했다.

백작가의 문장을 쓸 수도 있었지만 자칫하면 주군의 명예를 상하게 할 수도 있는 사안이니까.

'그런데 그 망할 마을 놈들이···!'

설마 용병기사로 오해하고 습격을 당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지금도 다시 생각하면 이가 갈렸다.

로더릭은 애써 분노를 가라앉히고 루크를 찬찬히 뜯어봤다. 다시 보니 얼굴이 제법 비슷했다.

특히 짙은 갈색 머리와 자색 눈동자는 백작과 똑같지 않은가.

"흠흠, 같이 사는 가족은 없느냐?"

"사냥꾼이신 외할아버지는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잠깐 인연이 있으셨다는데, 그것 외에는 잘 모릅니다. 갑옷에 붉은 용이 새겨진 기사님이었다고 하더군요."

"···!"

붉은 용은 번스타인 가문을 나타내는 문장이 아니던가! 게다가 외할아버지가 북부에 살던 사냥꾼이라니.

이쯤 되면 의심하고 싶어도 의심할 게 없었다. 로더릭은 떨리는 목소리로 마지막 확인을 했다.

"조, 조부의 이름이 어떻게 되느냐?"

"노먼. 노먼이라고 하셨습니다."

"오오!"

로더릭은 눈물이 왈칵 쏟아질 뻔했다. 주군의 명을 이행함과 동시에 이런 식으로 인연이 이어질 줄이야!

그 마을 사람들이 떼거리로 달려들 때 목숨을 걸고 자신을 구할 때부터 범상치 않은 아이라고는 생각은 했었다.

그렇지만 설마 주군의 핏줄이었다니. 역시 용의 피가 가진 비범함은 숨길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사 로더릭이 도련님께 인사 올립니다!"

"예? 도련님이라니요?"

다친 몸으로 힘들게 한쪽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이는 로더릭을 본 루크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 모습에 다 이해한다는 듯한 얼굴로 말을 이어갔다.

"당황스러우시겠지요. 제가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저는 본래 번스타인 가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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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대한 설명을 들은 루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이제야 상황을 알겠다는 것처럼.

"이해했습니다. 로더릭 경께서는 저를 데리러 오신 거군요."

"그렇습니다. 문제가 생겨서 이런 꼴이 되긴 했지만···."

로더릭이 말끝을 흐렸다. 마중을 나왔는데 일개 마을 무리에게 속아서 죽다 살아났으니 기사로서는 이런 망신이 없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분노와 수치심이 몰려들었다.

"사정은 알겠습니다. 하지만 일단 상처가 나을 때까지 쉬시지요."

"아니, 괜찮습니다. 이까짓 상처는 별거 아니니 당장이라도 옆 마을로 가서 백작가에 연락을···."

"로더릭 경."

루크는 로더릭에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비록 기사에 대해 아는 건 적으나, 몸이 재산이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 상처를 입은 몸으로 무리를 하게 둘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상황을 알게 된 이상 한시라도 빠르게···."

"저한테는 겨우 며칠 빨리 가는 것뿐입니다. 하지만 로더릭 경께서는 상처가 회복될 귀중한 시간 아닙니까. 언젠가 전장에 다시 설 분이니 몸을 소중히 하세요."

루크의 말에 로더릭의 가슴이 울렁거렸다. 이토록 기사의 마음을 잘 아는 한마디가 있었던가?

평민으로 살다 진정한 신분을 알게 되었으니 한시라도 빨리 백작가에 가고 싶어서 난리를 쳐도 이상하지 않다.

그런데 조금도 흔들림 없는 태도로 자신부터 배려하다니.

'보통 분이 아니다!'

로더릭은 침을 삼키며 루크를 바라봤다. 아까 전에도 그랬지만 역시 평범한 사람들과는 외모부터가 달랐다.

'이 험한 환경에서도 얼굴이 백옥 같고.'

아침에 여기저기 비춰보며 빡빡 문질러 닦았기 때문이다.

'불그스름한 빛이 도는 게 상서로운 기운이 있으며.'

비싼 양초를 아낌없이 태워 분위기를 잡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저 침착한 태도와 마음을 어루만지는 한마디!'

명예에 환장하는 기사는 회귀 전 지겹도록 다뤄봤기 때문이다.

'지금 나는 미래의 영웅을 보는 걸지도 모른다.'

자신의 착각을 깨닫지 못한 로더릭은 감동에 빠진 채 눈시울을 붉혔다. 루크는 말없이 식사 준비를 하며 입꼬리를 올렸다.

'쉽구먼.'

산전수전을 다 겪은 회귀자에게 젊은 기사를 다루는 일쯤이야 식은 죽 먹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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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닷새가 지났다. 로더릭의 상처는 일상생활에 지장이 없을 정도로 회복되었다.

루크의 약이 잘 들은 것도 있지만 본인의 회복력이 꽤 좋았던 덕이었다.

'후유증은 남지 않겠군.'

쇠스랑에 찔린 자리가 어깨라 자칫하면 검을 못 쓰게 될 수 있었는데, 운이 좋게도 신경과 힘줄은 피해갔다.

앞으로 보름 정도만 치료하면 검을 휘둘러도 문제없을 것 같았다.

"죄송합니다. 제가 발목을 잡게 될 줄은···."

"신경 쓰지 마십시오."

로더릭은 연신 면목이 없다는 듯 사죄했고, 루크는 가볍게 사죄를 넘겼다. 실제로도 크게 신경 쓸 문제가 아니었다.

상처가 완치되는 것보다 두 번째 마중이 더 빨리 올 테니까.

'그러고 보니 그 전에 촌장이 한 번 방문하지 않았던가?'

"루크! 지금 집에 있느냐!"

가물가물한 기억을 뒤지던 도중, 바깥에서 촌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스튜로 식사를 하던 로더릭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다행히 도착하기도 전에 소리친 거라 내부 풍경은 보지 못한 모양이었다.

'지하실로.'

'알겠습니다.'

루크는 서둘러 로더릭을 지하실로 돌려보내고 위장했다. 사전 준비를 철저히 해뒀기에 위장은 순식간에 끝났다.

감쪽같이 흔적을 없앤 루크가 촌장을 맞으러 나갔다.

"무슨 일이십니까?"

"잠깐 볼일이 있어서 왔다. 밥 먹던 중이었냐?"

촌장은 말을 얼버무리며 오두막에 들어와 앉았다. 마치 자기 집인 양 거리낌이 없는 모양새였다.

루크는 기가 찼지만 애써 내색하지 않고 마주 앉았다.

"요즘 사냥은 어떠냐? 통 마을에 내려오질 않더구나."

"사냥감이 적어서 저 먹을 것도 부족합니다."

"사람이 곡식을 좀 먹어야 하지 않겠니? 고기만 먹다간 병들기 딱 좋아."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소리였다. 요즘 고기 맛을 조금 안 봤더니 내심 아쉬웠던 모양이다.

정작 곡식과 교환할 때는 말도 안 되는 교환비로 후려치면서 하는 소리가 참 뻔뻔했다.

"그건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본론이나 말씀해주시죠."

"너 지금 말투가··· 쯧, 아니다."

얼굴을 찌푸린 촌장이 도중에 말을 끊었다. 루크의 태도가 영 마음에 안 들었지만, 앞으로 할 말을 생각하면 괜히 더 자극해서 좋을 것 없었다.

"사실 빚 문제 때문에 왔다."

"빚이라니요?"

"음, 네 할아버지가 생전에 마을 사람들에게 약간의 금전을 빌리셨거든."

거짓말이었다. 루크의 외할아버지, 노먼은 살아있을 적 마을에 조금이라도 빚을 지기 싫어했다.

계속해서 외지인 취급하는데 빚까지 생기면 십중팔구 불려서 이용해먹을 게 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꼬맹이는 그걸 모르지.'

원래 금전 문제라는 건 다 보호자가 처리하지 않던가. 성인이 아닌 이상 죽음이 임박했을 때나 알려주기 마련이다.

그러나 노먼은 얼마 전 급사했다. 당연히 빚에 관한 것도 전달받지 못했을 터.

'일단 있다고 우기기만 하면 돼. 마을 사람들이 죄다 있다고 하는 데 제 놈이 어쩔 거야?'

촌장도 진짜 돈을 받아낼 생각은 없었다. 중요한 건 젊은 놈이 마을을 떠나겠다거나 이제 제값을 받겠다고 난리 치는 걸 막는 거다.

이 집안은 앞으로도 값싼 고기와 가죽 공급처가 돼주어야만 했으니까.

"빚이라니? 정확히 어디에 얼마나 빚을 졌다는 겁니까?"

"일단 맥스랑 랄프에게 진 빚이···."

미리 생각해뒀던 목록이 줄줄 흘러나왔다. 하나하나는 별거 아니어도 합치면 상당한 액수였다.

한참 이어지던 목록에 루크가 냉소를 지었다.

"그것참 이상하군요."

"이상하다니?"

"할아버지께서는 제게 항상 빚 목록을 말해주셨는데 말이죠. 어째 일치하는 게 하나도 없군요."

"뭐, 뭐?"

촌장이 흠칫 몸을 떨었다. 아니, 그걸 평소에 말해주고 다녔다고?

'너 같은 놈이 올 걸 진즉 예상하고 계셨거든.'

촌장의 당황한 얼굴에 루크가 비웃음을 띄웠다. 평소 마을 사람들이 어떤 심보인지 너무 잘 알았던 외할아버지였다.

루크에게도 자신이 잘못되었을 경우 몇 가지 대비책을 알려줬다. 대표적인 게 바로 빚 문제였다.

"도리스 아저씨에게 가재도구 몇 개, 스벤에게 동화 두 닢 빌려온 게 전부였다고 했죠. 근데 정작 두 사람은 목록에도 없군요."

'이런 제기랄!'

계획이 망가진 촌장은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설마 빚에 대해 전부 알려줬을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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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루크는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을 지었다.

"지금 제 할아버지께서 거짓말을 하셨다는 겁니까?"

"있는 빚을 없다고 했으니 거짓말을 한 거겠지. 쯧쯧, 그래 봤자 빚이 사라지지도 않을 텐데."

촌장은 안쓰럽다는 표정으로 수염을 매만졌다. 누가 보면 정말 조부가 거짓말을 했다고 착각을 했을 만한 완벽한 연기.

그러나 루크에겐 어림도 없는 거짓말이었다. 사실상 '내가 거짓말을 할테니 순순히 받아들여라'라는 선고가 아닌가.

'아, 기억났다.'

그러고 보니 회귀 전에도 같은 일이 있었다. 촌장이 찾아와 없는 빚을 뒤집어씌우려고 했고, 참다못한 루크는 반발하여 한참 말싸움을 벌였다.

결국 촌장이 먼저 꺾여 오두막을 떠나긴 했으나, 그 이후 마을 사람들을 몰고 와서 단체로 빚을 인정하라며 겁박했다.

다만 그 와중에 번스타인 가문에서 두 번째 마중이 찾아와 흐지부지 끝난 일이었다.

'그날이 바로 오늘이었군.'

그렇다면 더는 참고 살 필요도 없다는 소리다. 루크의 입가에 날카로운 미소가 맺혔다.

"뭐, 뭐냐? 왜 그리 웃는 게야?"

"하하, 별거 아닙니다. 아무튼 제게 정말 빚이 있다는 말씀이시죠?"

"그렇다니까! 몇 번을 말하게 만들 셈이야?"

촌장은 잠깐 흠칫했으나 도로 철판을 깔며 당당히 주장했다. 얼굴 어디에도 부끄러운 기색이 없었다.

"과연.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요. 잠시 밖에서 대화하시죠."

"아니, 갑자기 왜···?"

촌장의 의문에도 루크는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갔다. 얼떨떨한 채로 촌장은 루크의 뒤를 따랐다.

밖으로 나간 루크는 옆에 굴러다니는 나무봉 하나를 집어들었다.

"촌장님, 이게 뭐로 보이십니까?"

"나무 막대기지, 뭐긴 뭐야?"

"글쎄요. 저는 조금 다르게 보이는데요. 없는 빚이 있다며 헛소리하는 늙은이를 두들겨 패기 딱 좋은 몽둥이로 보이지 않습니까?"

"뭐?"

무슨 말인지 순간 이해하지 못한 촌장이 잠깐 정지되었다. 몇 초가 지난 후에 말을 이해한 촌장이 새파랗게 질렸다.

농담으로 넘기기에는 루크의 사나운 미소가 너무도 생생했다.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촌장이 뒷걸음질 치며 손을 내저었다.

"잠깐, 잠깐만. 진정하거라."

"저는 진정한 상태입니다만."

"루크야, 내가 다 설명하마. 사실 빚 같은 건 전혀 중요하지 않아."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무척 중요하죠. 빚 가지고 헛소리하면 두들겨 패는 것도 용서될 만큼이나."

"일단 내 말을 들어보아아악!"

뻐억

휘두르는 몽둥이에 옆구리를 맞은 촌장이 땅을 데굴데굴 굴렀다. 분명 가볍게 친 것 같은데도 뼛속까지 스며드는 고통이었다.

적당히 힘 조절을 하면서도 아프기는 엄청나게 아픈 몽둥이질. 회귀 전의 경험을 통해 얻은 기술이었다.

[ 정확한 타격으로 인해 경험치가 상승합니다. ]

[ 현재 둔기술 등급은 '초심자'입니다. ]

"오, 보너스."

들려오는 메시지에 루크는 미소를 지었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완벽하게 힘 조절을 했다는 소리.

루크는 아까 전처럼 반복해서 연습을 해보기로 했다. 자칫 잘못해서 금방 끝나면 너무 아쉽, 이 아니라 경험치를 못 얻게 되니까.

"자, 잠깐! 너 이런 짓을 하고드어어억!"

[ 정확한 타격으로 인해 경험치가 상승합니다. ]

"지금이라도 그만두면 용서르아아악!"

[ 정확한 타격으로 인해 경험치가 상승합니다. ]

"내가 잘못했다! 사실 빚 같은 거느아아아악!"

[ 정확한 타격으로 인해 경험치가 상승합니다. ]

루크는 춤추는 것처럼 계속 몽둥이를 휘둘렀다. 비록 둔기는 잘 사용하지 않았지만 이렇게라도 올려두면 어딘가 쓸 곳이 있지 않겠는가?

결코 몽둥이를 휘두를 때마다 느껴지는 짜릿한 손맛 때문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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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확한 타격으로 인해 경험치가 상승합니다. ]

[ 경험치가 일정량을 초과하여 등급이 상승합니다. ]

[ 둔기술 등급이 '숙련자'로 바뀌었습니다. ]

"후우, 시원하다."

루크는 상쾌한 얼굴로 이마의 땀을 닦았다. 마치 보람찬 밭일이라도 끝낸 듯한 미소였다.

아래에서 꿈틀거리는 촌장과 피 묻은 몽둥이만 없으면 누구나 그렇게 봤을 것이다.

"사, 살려줘···!"

촌장의 퉁퉁 부은 얼굴로 두 손을 싹싹 빌었다. 아까 전의 당당함과 뻔뻔함은 진즉 내다 버린 지 오래였다.

이러다가 진짜 죽을 수 있겠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글쎄다. 댁을 살려줘야 할 이유가 있나?"

"내가 죽으면 마을 사람들이 가만있지 않을 게다!"

"살려줘도 가만있지 않을 거 같은데. 마을로 내려가자마자 사람들 모아서 습격할 생각 아니야?"

"그, 그럴 리가!"

루크가 정곡을 찌르자 촌장이 움찔했다. 어떻게든 살아남기만 하면 당장 떼거리로 몰려와 오두막에 들이닥칠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피식 웃은 루크는 촌장의 이마를 쿡 찌르며 말했다.

"이봐, 촌장. 사실은 내가 이제 마을을 떠나려 하거든."

'역시!'

촌장은 속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마을에 머무를 생각이면 어찌 감히 이런 짓을 하겠는가.

"당신에겐 두 가지 선택지가 있어."

"두 가지···?"

"첫째. 이대로 마을로 내려가 집에 얌전히 처박혀 있는다. 할아버지랑 나를 등쳐먹은 일을 반성하면서 말이지."

"나, 나머지 하나는?"

"둘째. 아까 전에 생각한 대로 마을 사람들을 불러모아 쳐들어오는 거지. 그리고 나중에 피눈물을 흘리면서 대가를 치르는 거야."

루크의 말에 촌장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면 일단 살려주겠다는 소리니까.

하지만 동시에 분노가 속에서 치솟았다.

'대가? 이 시건방진 애송이 놈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꼬맹이가 마을의 촌장인 자신에게 대가를 운운하다니. 생각 같아서는 헛소리 말라고 일갈하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은 일단 여기서 벗어나는 게 우선이었다.

"당연히 첫 번째지. 내 잘못으로 이런 일이 벌어졌는데 어찌 널 원망하겠느냐? 이게 전부 평소의 악업이 돌아온 대가다 싶더구나."

진심으로 개과천선한 것처럼 촌장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누가 봐도 껌뻑 속아 넘어갈 연기였다.

촌장을 빤히 바라보던 루크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몽둥이로 마을을 가리켰다.

"좋아, 믿어보지. 살려줄 테니 얼른 가봐."

"고, 고맙다! 네 자비로운 마음에 여신께서 축복을 내리실 거다!"

촌장은 몇 번이나 루크에게 고개를 숙인 후 마을로 달려갔다. 오두막에서 어느 정도 멀어진 순간 촌장의 표정이 바뀌었다.

눈물은 쏙 들어가고 분노에 가득 찬 악귀 같은 얼굴이 드러났다.

'두고 보자, 놈! 오늘 안에 내 앞에서 무릎 꿇고 빌게 해주마!'

촌장은 뿌드득 소리가 나도록 이를 갈며 언덕 너머로 사라져갔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루크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맺혔다.

"두 번째를 고르셨나. 그럼 대가를 치르셔야지."

====

오두막에 돌아온 루크는 로더릭에게 상세히 사정을 설명했다. 방음이 잘 되어있는 탓에 지하실에서 내용까지 들을 수는 없었던 탓이다.

"이런 찢어 죽일 놈들이!"

앞뒤 사정을 들은 로더릭은 분노했다. 설령 진짜 빚이 있더라도 이자를 잔뜩 받아먹는 것 자체만으로 악덕이다.

그런데 아예 없는 빚을 만들어서 두고두고 묶어두려고 했다니!

"내 결코 이놈들을 용서치 않으리라!"

"진정하십시오, 로더릭 경."

"어찌 제가 진정하겠습니까!"

루크의 만류에도 로더릭의 화를 가라앉히지 못했다.

"당장 때려죽여도 모자랄 억지를 부린 놈이 아닙니까! 그런데 도련님께서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고 보내줬음에도 나중에 후회할 줄 알라는 겁박을 하다니!"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괘씸했다. 습격을 당할 때부터 예상은 했지만, 마을 전체가 근본부터 썩어빠진 놈들이 아닌가.

분노하는 로더릭과 달리 당사자인 루크는 씁쓸히 웃을 뿐이었다.

"저는 괜찮습니다만, 경이 걱정입니다. 촌장이 마음에 없는 말을 하는 사람은 아니니, 분명 오늘 내로 뭔가 문제가 생길 겁니다."

"만약 그 늙은이가 다른 놈들과 함께 온다면 저도 싸우겠습니다!"

로더릭이 호기롭게 외쳤다. 주군의 핏줄에게 그런 꼴을 당하게 만드느니 차라리 싸우다 죽는 게 낫겠다는 의기였다.

하지만 루크는 고개를 저었다.

"그만두세요. 경은 제 손님이 아닙니까? 접대의 관습에 따라 경을 보호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제가 어찌 죽어서 어머니의 얼굴을 보겠습니까."

"···!"

접대의 관습. 신성한 전통 중 하나로 손님을 맞았으면 주인이 최선을 다해 대접하고 보호해야 한다는 관습이다.

이를 지키지 못한다면 더없는 불명예. 그러나 정작 접대의 관습을 제대로 지키는 사람은 드물었다.

명예를 중시하는 귀족조차 강대한 이가 손님을 내놓으라고 겁박하면 그대로 잡아서 내주기도 하니까.

평민은 아예 말할 것도 없다. 당장 로더릭부터가 손님으로 찾아왔음에도 강도질을 당한 경우니까.

'그런데 평민들 사이에서 자란 분이 이토록 전통을 철저히 지키시다니.'

이 얼마나 명예로운 분이란 말인가? 어지간한 귀족에게서조차 보기 힘든 미덕이었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도련님이 위험에 처하신다면 저도 나서겠습니다. 도련님을 무사히 모시고 오는 게 제 임무니까요."

"그걸 막는다면 불충을 강요하는 일이 되니 어쩔 수 없군요."

루크의 허가가 떨어지자 로더릭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만약 정말 그 촌장이 다시 찾아온다면 가만두지 않을 생각이었다.

도련님이야 맞아 죽을 소리를 하고도 얌전히 보내줬다지만 자신은 그리 자비로운 성격이 아니니까.

그때 로더릭의 눈에 구석에 있는 나무 막대가 들어왔다.

"도련님, 저 나무 막대는 뭐에 쓰는 겁니까?"

"아, 야생동물을 쫓을 때 쓰던 겁니다. 신경쓰지 마세요."

루크는 빙긋 웃으며 나무 막대를 구석에 밀었다. 로더릭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나무 막대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봤다.

주변에 묻은 피를 보니 여우 같은 놈이 내려오면 때려서 쫓기라도 한 건가?

'그런 것 치고는 어째 방금 묻은 거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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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촌장은 마을로 도착하기 무섭게 주민들을 모았다. 그리고는 가장 건장한 사람 스무 명을 모아 루크의 오두막으로 향했다.

주민들에게는 낫, 쇠스랑, 곡괭이 같이 무기로 쓸 수 있는 농기구들도 들려줬다.

"촌장님, 이건 좀 과한 거 아닙니까?"

마을 청년 중 하나가 촌장을 흘겨보며 말했다. 열다섯 살 소년을 제압하는 데 스무 명이 몰려가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과잉 전력이었다.

"과하긴 뭐가 과해! 이 정도는 되야지!"

청년의 말에 촌장이 벌컥 화를 내며 자신의 퉁퉁 부어오른 얼굴을 가리켰다.

"이거 안 보이나? 루크 그놈이 나한테 몽둥이질을 했다니까! 온몸에 멍이 안 든 곳이 없을 지경이야!"

"루크가 진짜로 그랬다고요?"

"아니, 지금껏 얌전히 지내던 녀석이 대체 왜···"

루크에 대한 마을의 평가는 간단했다. 마을에 대한 불만은 있을 지언정, 대놓고 그걸 드러내지 않을 정도의 눈치도 있는 녀석.

그런 루크가 촌장을 두들겨 팼다니. 아직도 좀처럼 믿기지가 않았다.

"놈에게 빚 이야기를 했더니 아주 발광을 하더군! 있다면 있는 걸로 치면 될 것이지 감히 이런 짓을 해? 괘씸한 놈 같으니!"

"그러길래 왜 쓸데없이 빚 얘기는 하셨습니까? 덕분에 이 난리 아닙니까."

제분소 주인인 랄프가 촌장에게 투덜거렸다. 지금껏 잘 후려쳐먹고 있었는데 왜 괜히 분란을 일으키냐는 어조였다.

그 말에 촌장의 눈이 꿈틀거렸다.

"이런 멍청한 작자 같으니! 내가 그놈한테 겨우 가죽 하나 더 뜯어내자고 빚 얘기를 한 줄 아나?"

"다른 이유라도 있습니까?"

"그놈이 마을을 떠나지 못하게 하려던 거 아닌가!"

촌장은 답답하다는 얼굴로 가슴을 두드렸다.

"생각해보게! 그놈이 지금이야 우리 말에 따르고 있지만 그게 언제까지 가겠나? 마지못해 따르는 티가 역력한 놈인데!"

"그래도 저희 마을 아니면 어디에서 팔겠습니까? 다른 곳까지 발품을 파는 게 몇 배는 더 힘든데요."

"아예 마을을 떠나버릴 수도 있어. 노먼이 외지인이었던 걸 벌써 다 잊은 게야?"

촌장의 일갈에 마을 주민들이 흠칫했다. 분명 15년 전 노먼 일가는 북쪽에서 찾아왔다.

비록 루크가 이곳 토박이라지만 노먼처럼 떠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었다.

"물론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안 떠나는 게 맞지. 떠나서 다른 마을에 정착하는 건 보통 힘든 일이 아니니까. 하지만 피 끓는 어린 놈이 앞뒤 일을 생각하고 행동하던가?"

"그렇긴 하죠."

서른이 넘은 주민들은 저마다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들도 어릴 때는 혈기가 넘쳐 주체 못하던 시절이 있었으니까.

"그래서 내가 빚을 지워두려던 거였네. 그럼 빚에 묶여서 마을에서 못 떠나니까. 그런데 그놈이 그렇게 나올 줄 누가 알았겠나?"

"으음."

마을 사람들의 얼굴이 굳어졌다. 확실히 이건 문제였다. 촌장에게 몽둥이를 휘둘렀다면 마을을 떠나기로 마음을 굳혔다는 소리.

그렇게 되면 이제 값싼 고기와 가죽은 누구한테서 얻는단 말인가?

"생각해보니 이거 문제가 심각하군요."

"그렇네. 하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차라리 잘 됐어."

"예? 잘됐다니요?"

이미 마음이 떠났다면 언제든 도망칠 준비나 하고 있을 터. 그런데 잘됐다니.

어리둥절해하는 마을 사람들을 향해 촌장이 설명했다.

"더 이상 루크놈에게 의존할 필요는 없겠지. 두들겨패서 쓴맛 좀 보여주고, 용서해주는 대신 애들에게 사냥을 가르치라고 해야겠네."

"사, 사냥을요?"

이 시대에 기술이란 자식이나 제자 외에는 절대 가르쳐주지 않는다. 잘 배운 기술 하나로 평생 먹고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남에게 기술을 가르치면 전체적으로 경쟁자가 늘어나고 희소성은 줄어든다.

당연히 기술의 노하우는 엄중하게 비밀로 부치고, 기술을 훔쳐배우려는 사람이 있으면 살인도 감수한다.

노먼 일가처럼 마을에 등골을 빼먹히면서도 충분히 생계를 유지할만큼 사냥이 가능한 기술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녀석이 순순히 가르쳐 줄까요?"

"제깟 놈이 안 가르치면 어쩌겠나? 도망치지 못하게 다리 하나 분질러놓고 위협하면 그만이야. 죽기 싫으면 결국 뱉어놓게 되어있어."

"오호라."

마을 주민들의 얼굴이 밝아졌다. 사냥꾼이 늘어나면 당연히 고깃값도 싸지고, 마을 전체의 수입도 늘어난다.

비록 이전처럼 가격을 후려치진 못하겠지만 장기적으로 봤을 때는 더 이득이었다.

"이야, 이거 촌장님의 큰뜻을 몰라봤습니다."

"크흠! 알았으면 됐네. 이제 거의 다 왔으니 준비하자고."

"예!"

상식을 가진 사람이 들으면 기겁할만한 소리들. 하지만 브릭 마을 주민 중 누구도 그걸 지적하는 이는 없었다.

이미 마을 전체가 썩어버린지 오래였기에.

====

루크의 오두막은 마을 외곽에 위치해 있었다. 사냥터와 가까운 것도 있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마을 주민 탓이었다.

외지인으로 취급하기 위해 마을 안에 집을 짓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다.

마을 외곽에 도착한 촌장 일행은 언덕 위의 오두막을 쳐다봤다.

"좋아. 이제 다 왔군."

"어떻게 할까요? 바로 들이닥칠까요?"

"일단 겁부터 줘야지. 내가 신호를 하면 다 같이 놈을 부르면서···"

촌장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 언덕 위에서 화살 하나가 주민들 사이로 날아들었다.

쐐액, 퍽

"끄아아아악!"

"무슨 일이야!?"

"릭이 화살에 맞았어!"

릭이라 불린 청년은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허벅지를 쥐어잡았다. 작은 화살 하나가 정확히 허벅지 부분을 꿰뚫고 있었다.

"루, 루크다!"

"저놈이 쏘고 있··· 으아악!"

쐐애액

또 한 번 화살이 날아들자 사람들 사이에서 비명이 울려퍼졌다. 마을 사람들은 여기저기로 흩어져 엄폐물 뒤에 숨었다.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빅터가 바위 뒤에서 악을 썼다.

"루크, 이 새끼가! 지금 뭐하는 짓이냐!"

"뭐하기는. 남의 집 안마당에 무기를 들고 몰려온 불한당들을 쫓아내는 중이지."

"무기라니! 이게 무기로 보이냐!"

빅터가 위로 슬쩍 농기구를 들어보였다. 그걸 본 루크는 피식 웃었다.

"낫과 쇠스랑, 곡괭이라. 사냥꾼 집에 밭이라도 매주려고 오셨나? 응?"

"···."

직설적인 비아냥에 빅터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사실 죄다 무기로 쓰는 농기구였으니 먹히지도 않을 변명이었다.

"이놈! 이러고도 곱게 넘어갈 거라 생각하지 마라!"

"애초부터 곱게 넘어갈 생각 없었으면서 무슨 소리야? 촌장이 얻어맞은 거 빌미로 사냥술이라도 토해내라고 할 작정이었지?"

"아니, 그게···."

계속 팩트를 명치에 꽂아넣자 점점 말이 궁해졌다. 마치 옆에서 보기라도 한 것 같은 말투였다.

"쓰레기들 생각하는 게 다 거기서 거기지. 15년간 쭉 등쳐먹고서는 이젠 기술까지 빼먹고 버리시겠다? 지옥에서 올라온 악마들도 너희들을 보면 역겨워서 도망칠 거다."

"저, 저놈이!"

루크의 비아냥에 마을 주민들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다들 당장이라도 때려죽일 듯이 손이 부들거렸지만 차마 나가지는 못했다.

엄폐물에서 나간 순간 화살이 박힐 게 뻔했으니까.

"아무튼 경고를 했는데 어겼으니, 대가를 받으셔야지."

"멍청하기는! 너 혼자 우리 전부를 당해낼 수 있을 거 같냐!"

"못하겠지. 다 같이 달려들면 네 명 정도나 죽일 수 있겠네. 그래서 누가 먼저 달려들 건데?"

"···."

마을 주민들은 서로를 쳐다봤다. 누가 먼저 나서긴 해야하는데 자신이 나서기는 싫다는 티가 역력했다.

서로 선두를 미루는 모습에 루크가 피식 웃었다.

"하여간 자기들 몸은 끔찍하게 아낀다니까. 그런데 이미 늦었어."

"늦다니? 무슨 헛소리냐?"

멈-춰-라!

그때, 커다란 고함이 숲 전체를 뒤흔들었다. 깜짝 놀란 마을 주민들의 시선이 모조리 진원지로 향했다.

"뭐야? 누구야?"

"헉, 기사다!"

고함을 지르며 말을 달리는 건 전신갑옷을 입은 기사였다. 이전 기사와는 다르게 뒤에는 열 명 정도의 용병도 거느리고 있었다.

촌장을 포함한 모든 주민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기사가 혼자도 아니고 용병을 줄줄 거느리고 왔다면 그야말로 재앙이었다.

기사는 천천히 속도를 줄이더니 마을 사람들을 깔아보며 거만하게 말했다.

"네놈들이 저 마을에 사는 놈들이렸다?"

"그, 그렇습니다, 나으리."

촌장은 냉큼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이전에 털어먹은 기사도 오만한 편이긴 했지만 사납지는 않았다.

그에 비해 이번 기사는 말 한마디 잘못한 순간 때려죽일 기세가 아닌가.

"묻겠다. 네놈들 마을에 루크라는 소년이 있느냐?"

"예? 루크 말씀이십니까?"

"두 번 말하게 만들지 마라."

"죄, 죄송합니다! 저놈이 바로 루크입니다!"

으르렁거리는 목소리에 겁을 먹은 촌장이 허겁지겁 언덕 위를 가리켰다. 루크를 바라보는 기사의 눈이 번뜩였다.

====

짙은 갈색의 머리칼. 그리고 대륙에서 매우 드문 자색 눈동자. 그리고 자신의 주군과 너무도 비슷한 얼굴형.

'젠장. 틀림없는 친자식이군.'

번스타인 가문의 기사, 가이든은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일의 시작은 백작의 명령이었다.

갑자기 자신의 서자를 찾아오라니. 영지 내에서 안락히 지내던 가이든에겐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거기까지라면 괜찮았다. 설렁설렁 찾으면서 지원받는 수색 비용으로 비교적 안락하게 지낼 수 있었으니까.

진짜 문제는 시궁창에 처박힌 백작 부인의 기분이었다.

-서자라니! 서자라니!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이가!

서자 찾기를 아무리 비밀리에 진행한다고 해도 가문 내에서까지 숨길 수는 없다. 소식을 접한 백작 부인은 불같이 화를 냈다.

서자가 존재한다는 건 다른 여자랑 뒹굴었다는 소리가 아닌가? 심지어 귀족의 여식이 아닌 천한 평민과!

분노한 백작 부인은 연줄이 있는 기사들을 불러 따로 당부를 했다. 가이든도 그중 하나였다.

-가이든 경, 그 서자를 찾는다면 그냥 데려오지 마세요. 제 주제를 알게 해줘요.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천것이 귀족이라도 된 것 마냥 여기게 하지 마시란 말입니다. 적당히 겁을 주면서 주눅들게 만들라고요. 그이가 실망하도록 말이에요.

로더릭은 전형적인 무인형 귀족. 무가로 유명한 번스타인 가문이기에 명예와 기개를 더욱 중요시하는 면이 있었다.

서자가 당당히 굴면 백작의 평가는 올라가고, 백작 부인은 더더욱 속이 뒤틀릴 터.

첫인상을 망쳐놓음과 동시에 자신의 속이 조금이나마 풀리도록 조치를 하란 소리였다.

백작 부인에게 얻어먹은 것들이 제법 많은 가이든은 거부할 수 없는 요구였다.

'어려운 주문이 아니라서 다행이지.'

백작이 인지를 했다면 모를까, 아직 존재조차 확실치 않은 서자다. 죽이거나 상처를 입히는 건 어림도 없지만 겁을 주는 건 어렵지 않았다.

적당히 농노 취급하면서 간간히 호통을 쳐주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평민 입장에서는 그것만으로 제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줄 알고 질겁할테니까.

"저, 나으리. 어째서 루크를 찾으시는지...?"

이어지던 상념을 깨뜨린 건 촌장의 물음이었다. 가이든은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촌장을 노려봤다.

"네놈이 알아서 뭘 어쩌겠다는 거냐? 썩 꺼져라!"

"예, 예에!"

마을 주민들은 부상자를 부축하고는 허겁지겁 도망쳤다. 괜히 기사와 용병들 사이에 있다가 불벼락을 맞기보단 멀어지는 게 나았다.

촌장과 마을 주민들이 사라지자 가이든은 말을 몰아 루크에게로 다가갔다.

"네놈이 루크냐?"

가이든이 잔뜩 목소리를 깔고 도끼눈을 뜬 채 루크를 노려봤다. 보통의 평민이라면 기겁하며 무릎을 꿇을 만한 위협.

그러나 루크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이놈 봐라?'

예상했던 반응이 안 나오자 가이든의 눈이 꿈틀거렸다.

"이놈! 평민 주제에 시건방지구나! 당장 무릎을 꿇지 못할까!"

"이상하군요. 번스타인 가문에서 절 찾으러 나오신 게 아닙니까?"

"뭐, 뭣?"

"검집에 새겨진 붉은 용을 봤습니다. 아버지께서 절 찾으러 보내신 줄 알았습니다만."

'이런 빌어먹을!'

루크의 말에 가이든은 와락 얼굴을 찌푸렸다. 서자가 자신의 신분을 이미 알고 있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이미 해치지 않을 거란 확신이 있는 상대에게 겁을 주기는 힘들어지니까.

'지금이라도 도련님 대접을 해줘야하나?'

하지만 자꾸 눈앞에 백작 부인의 뇌물이 아른 거렸다. 여기서 물러나면 앞으로 두둑히 챙겨주는 뒷돈은 없어질 터.

생각만해도 너무 아까웠다. 한참 고민하던 가이든은 결론을 내렸다.

'할 수 없지. 조금 거칠더라도 원래 계획대로 가는 수밖에.'

어차피 적자도 아닌 서자다. 뭔짓을 하건 나중에 시치미를 떼고 백작 부인의 옹호만 얻으면 어떻게든 된다.

생각을 마친 가이든이 루크를 노려보며 큰소리를 쳤다.

"이런 발칙한 놈! 어디서 소문을 듣고 도련님 행세를 하려 드느냐? 놈을 잡아서 내앞에 무릎 꿇려라!"

"예!"

고용주의 명령에 따라 용병들이 루크에게 다가왔다. 루크는 가만히 서서 가이든을 차갑게 노려봤다.

'그럴 줄 알았다, 이 돈벌레 놈.'

가이든 보렐. 번스타인 가문의 기사면서도 돈에 넘어가 백작 부인의 수족 노릇을 한 작자.

회귀 전에도 백작 부인의 지령으로 루크를 많이 괴롭혔던 인물이었다.

'백작 부인에게 밉보여서 돈줄이 끊기긴 싫으니, 어떻게든 트집 거리를 만들어야겠지.'

회귀 전에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가이든은 일부러 멀리 돌아가면서 루크를 엄청나게 몰아붙였다.

반말은 기본이요, 백작의 진짜 자식이 아니면 목이 잘릴 거라는 공갈이나 목에 칼을 겨누는 등의 위협도 서슴없이 저질렀다.

'나중에 오리발을 내민 것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백작에게 제대로 인지를 받은 후, 루크는 놈을 고발했다. 하지만 가이든은 뻔뻔했다.

아예 그런 일이 없었다며 시치미를 뚝 뗀 것이다.

-제가 어찌 백작 각하의 친자일지도 모르는 분께 그러겠습니까?

심지어 기사의 명예까지 걸고 맹세한 덕에 루크가 모함을 했다며 욕을 먹어야 했다.

한마디로 명예 따윈 금화 몇 개와 바꿔먹는 쓰레기가 가이든이었다.

다만 그때와 지금은 다른 게 하나 있었다. 루크가 잡히기 직전, 오두막의 문이 벌컥 열렸다.

"누가 감히 도련님께 해코지를 하려 드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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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누구냐!?"

가이든은 갑자기 튀어나오는 그림자를 보고 깜짝 놀라 검을 잡았다. 웬 불한당의 습격인 줄 알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친 순간 양측은 멍하니 서로를 바라봤다.

"아니, 가이든 경 아니시오?"

"로더릭 경?"

두 사람 다 번스타인 백작가에서 봉신기사로 있던 사이. 가문으로 들어온 시기도 거의 차이가 안 나는 동기였다.

서자를 찾기 위해 가문에서 나올 때도 같이 나왔으니 서로의 얼굴은 잘 알고 있었다.

먼저 정신을 차린 건 주변 상황을 살핀 로더릭이었다.

"가이든 경! 이게 대체 무슨 짓이란 말이오? 어찌 도련님께 해를 끼치려 하는 거요!"

"그, 그게···"

예상치 못한 사태에 당황하면서도 가이든의 머리가 빠르게 굴러갔다.

왜 서자가 자신의 신분을 알고 있었나 했더니 먼저 로더릭이 와 있었기 때문이었나.

'제기랄, 갈수록 상황이 꼬이는군.'

눈을 질끈 감은 가이든은 자신의 거짓말을 밀고 가기로 했다. 어차피 오해로 뭉개려면 착각한 척을 하는 수밖에 없으니까.

서자가 맞다면 착각해서 무례를 저질렀다고 사과 한마디 하면 될 일이다.

"커흠, 로더릭 경께서 뭔가 착각을 하신 모양이오."

"착각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요?"

"저 소년이 도련님이라는 확증이 어디 있단 말이오? 내가 보기엔 그저 적당히 귀족 흉내를 내는 꼬맹이···"

"가이든 보렐! 네가 감히 도련님을 모욕할 작정이더냐!"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분노가 폭발한 로더릭이 포효했다. 어찌나 강렬한 외침이었는지 용병들 전체가 놀라 뒤로 물러설 지경이었다.

놀란 가이든은 어리벙벙한 얼굴로 로더릭을 쳐다보았다.

'아니, 이 사람 왜 이래?'

원래 계획은 가이든의 말에 로더릭이 반박하며 증거를 대는 거였다. 그런 후에 자신의 실수라며 가볍게 사과하고 끝나는 거다.

근데 지금 로더릭은 마치 자신의 주군이 모욕당한 것처럼 화를 내는 게 아닌가?

"지, 진정하시오, 경. 그럴 생각은 없었소."

"그럴 생각이 없었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나온 모욕이라는 소리인가? 제대로 설명해라!"

가이든이 저자세로 나와도 로더릭의 분노는 수그러들지 않았다. 오히려 검만 있었으면 당장 빼들어 달려들 태세였다.

"진정하십시오, 로더릭 경."

쩔쩔 매는 가이든을 구해준 건 다름아닌 루크였다.

"상황을 보니 이분께서 착각을 하신 것 같습니다. 제가 아버지의 아들을 사칭하는 자라고 생각하셨겠지요."

"그렇습니다! 참으로 부끄러운 실수지요!"

갑자기 내려온 동아줄에 가이든은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말에서 내려 고개를 숙였다.

"제 착각으로 인한 무례를 사죄드립니다, 도련님. 번스타인 가문의 기사인 가이든입니다."

옆에서 보는 사람이 부끄러울 정도의 태세 변환. 하지만 당장 동기와 드잡이질을 하게 생겼는데 그딴 걸 신경쓸 틈은 없었다.

여기서 더 문제가 생기면 얼버무릴 수 있는 수준을 아득히 넘게 된다.

"보십시오. 가이든 경께서도 저리 말하시지 않습니까? 분노를 가라앉히세요."

"도련님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야···"

루크의 말에 수그러든 로더릭은 다시 뒤로 물러섰다. 그 모습에 가이든의 머릿속은 뒤죽박죽이 되었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 마치 자기 가신을 다루는 것처럼 손바닥 안에서 굴리고 있잖아?'

가이든이 알고 있는 로더릭은 기사도 신봉자. 달리 말하자면 기사 특유의 오만함과 권위도 유난히 강한 인물이다.

그런데 지금 로더릭이 보여주는 태도는 뭐란 말인가? 적자나 서자 수준을 넘어서 섬기는 주군처럼 대하고 있지 않은가?

"자, 안에 들어오셔서 이야기를 하시죠. 바깥에서 얘기하기엔 날씨가 찹니다."

루크의 말에 로더릭은 군말없이 안에 들어왔다. 가이든은 얼떨떨해하면서도 뒤를 따랐다.

일단 어떻게 된 일인지 상황부터 파악해야 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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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놈들이 습격을?"

가이든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분노보다는 '그것들이 미쳤나?'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감히 귀족을 건드리다니? 실수로 알려지는 순간 마을 전체가 쑥밭이 되고도 남을 텐데.

"그래서 무기와 갑옷도 빼앗기고, 내 애마마저 잃었지. 수치스러워서 얼굴을 들 수가 없소."

로더릭이 차를 든 손을 부들부들 손을 떨었다. 만약 여기가 루크의 집만 아니었다면 당장 손에 든 컵부터 부숴버릴 것 같았다.

"하지만 다행히 도련님께서 날 숨겨주셨고, 그후 대화를 나누어보니 모든 정황이 일치했지. 참으로 운명과 같은 만남이었소."

"그, 그랬었구려."

이제야 로더릭이 극도로 공손한 게 조금은 이해가 갔다. 주군의 자식이자 생명의 은인이라고 생각하면 그럴 만도 했다.

거기에 그럴 듯한 만남까지 있었으니.

"그런데 경은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무슨 짓을 하려고 한 거요? 당장 저 자색 눈동자만 봐도 한번에 알아봤어야지!"

"아니, 그게 은근히 잘 안보여서···"

"로더릭 경."

또 로더릭이 발작하려고 하자 루크가 멈춰세웠다.

"그만하세요. 일부러 그러신 게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조금만 늦었어도 큰일이 벌어질 뻔 했습니다."

"가이든 경께서 아셨다면 어찌 감히 그런 참람한 일을 벌이려 했겠습니까? 다 오해에서 비롯된 일입니다."

얼핏 들으면 감싸주는 것처럼 들리는 말. 그러나 가이든의 등에서는 소름이 우수수 돋았다.

'감히? 참람? 저거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인가?'

분명 얼굴은 담담한데, 단어 선택이 심상치가 않았다. 차는 아직 마시지도 않았건만 목구멍에서 침이 꼴깍 넘어갔다.

다시 얌전해진 로더릭은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 가이든을 쳐다보며 물었다.

"그러고보니 용병은 왜 데리고 오셨소? 수색하기엔 레인저가 더 쓸만할 텐데."

"소문도 잘 알고 머릿수도 많으니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해서···"

말은 그렇게 했지만, 실제로는 서자를 압박하기 위해서였다. 험악한 인상의 남자들이 잔뜩 있으면 겁을 먹지 않겠는가.

이제와서는 절대 밝힐 수 없는 이유다.

"아무튼 용병을 데리고 오셨으니 이참에 잠깐 빌립시다."

"용병을?"

"마을을 처벌해야 할 것 아니오? 그냥 두실 생각이었소?"

"그, 그럴리가. 나도 그러려고 했소."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속으로는 쌍욕을 내뱉었다. 결국 용병을 부리는 것도 전부 돈이다.

일이 생기면 추가금이 드는데, 왜 남의 복수를 위해서 내가 돈을 내야 한단 말인가?

'일이 끝나면 떼어먹어야 겠군.'

어차피 천한 용병. 일개 방랑기사라면 모를까 번스타인 가문의 봉신기사에게 따질 담력은 없으리라.

====

이야기를 마친 가이든이 오두막에서 나왔다. 로더릭과 루크는 아직 안에서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가이든은 지금껏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용병들을 향해 소리쳤다.

"일이 추가로 생겼다. 저쪽에 있는 마을을 좀 손봐줘야 겠다."

"기사 나리, 그럼 돈이 더 듭니다만."

"알고 있다! 가만히 있으면 내가 알아서 챙겨줄 것을 왜 그리 난리냐!"

용병의 말에 가이든이 짜증을 내며 소리쳤다. 자꾸 돈을 입에 담는 게 마음에 안 든다는 태도였다.

"닥치고 준비나 해라! 돈은 줄테니까 쓸데없는 걱정 말고!"

뒷말은 듣지도 않고 가이든이 등을 돌렸다. 그 모습에 용병대장 에릭은 이를 갈았다.

"대장, 어떨 거 같소?"

"뻔하지. 저 지랄하는 놈 중에 제대로 돈 주는 놈을 못 봤다. 카악, 퉤!"

부하의 말에 에릭이 가래침과 함께 욕설을 내뱉었다.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이 바닥에서 구르며 칼밥을 먹었다.

당연히 고용주 역시 별에 별놈을 다 만났다. 돈을 아끼려는 자와 씀씀이가 후한 자는 태도부터가 다른 법이었다.

"어쩔거요? 추가금도 안 받고 공짜일이나 해줄 거요?"

"그러면 다른 방도라도 있냐? 선금은 받았고, 신분은 확실하고, 게다가 번스타인 가문인데!"

번스타인 가문은 동부에서 꽤 힘이 있는 가문. 그리고 에릭의 용병단이 주로 활동하는 지역이 동부였다.

한번 찍히면 이후 활동에 지장이 생길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다고 저놈이 영주는 아니잖소."

"멍청한 소리 그만해라. 나중에 우리 이름이 들릴 때 영주 옆에서 속삭이는 놈이 누구일 거 같냐?"

"···제기랄!"

에릭의 말에 할말이 궁해진 부하가 바닥을 차며 화풀이를 했다. 에릭도 마음만 같아서는 당장 때려치고 싶었다.

쉬운 일인만큼 돈도 짜게 받았건만 바가지를 쓸 상황이 아닌가.

"그대들은 용병인가?"

옆에서 갑자기 들려온 소리에 용병들이 흠칫했다. 어느새 루크가 다가와 말을 걸고 있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 지 몰라 갈팡질팡하고 있자 뒤에 서 있던 로더릭이 호통을 쳤다.

"도련님이 묻고 계시지 않느냐!"

"예, 예! 맞습니다!"

에릭과 용병들은 냉큼 고개를 숙였다.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는 못했지만 오랜 경험에 의한 눈치가 어디 가는 건 아니다.

적어도 눈앞의 꼬맹이가 귀족의 씨앗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지금 가이든 경에게 고용되어 있나?"

"그렇습니다."

"과연. 경이 돈은 제대로 주던가?"

"···."

직설적인 질문에 용병들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제대로 돈을 주냐고?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 일로 욕을 하지 않았던가.

밉보이지 않으려면 빈말로라도 잘 준다고 대답해야겠지만, 차마 그리 말하고 싶지가 않았다.

"제값을 치르지 않으시나?"

"그, 그것이···"

"가이든 경께서 수전노 기질이 있으셨군."

'미치겠네. 왜 이런 소릴 하는거야?'

루크의 말에 용병들의 입술이 바싹 말랐다. 윗사람들이 서로 흉을 보는 것만큼이나 골치 아픈 일이 없다.

호응을 잘못 했다가 무슨 일이 일어나라고? 그렇다고 아예 아무 말도 안하면 그것도 밉보이기 좋은 일이었다.

용병들이 갈팡질팡하고 있을 때, 루크가 살며시 속삭였다.

"어쩔 수 없지. 내가 자네들 몫을 조금 챙겨주겠네."

"예? 도련님께서 말씀이십니까?"

에릭이 어리둥절하게 되물었다. 그야 준다면 감사히 받겠지만 대체 왜?

"그렇네. 고생을 했으면 대가를 받아야지. 지금 당장 주긴 힘드니 잠시 기다리게."

"예에."

용병들은 멀뚱히 서로를 쳐다봤다. 왜 이런 제안을 하는 건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루크가 용병들을 챙겨주려는 이유는 간단했다.

'어차피 내 돈 아니거든.'

자기가 직접 가져가면 탐욕스러워 보이지만, 누군가에게 넘겨주기엔 좋은 남의 돈.

그 돈주머니가 바로 눈앞에 있지 않은가. 브릭 마을 바라보는 루크의 입가에 날카로운 미소가 맺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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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크 일행은 그대로 오두막에서 내려와 브릭 마을로 향했다. 기사가 오는 걸 본 마을 주민들은 기겁하며 밖으로 뛰쳐나왔다.

"어이쿠, 나으리! 어서 오십시오!"

가장 먼저 나온 촌장이 이마가 바닥에 닿을 듯 허리를 굽신거렸다. 긴장으로 인해 몸이 움츠러들었으나, 내심 이 상황을 넘길 자신감이 있었다.

'접대 준비도 마쳤고, 반반한 처녀도 준비해 놨다. 꼬투리만 안 잡히면 돼.'

촌장은 지금 이때까지 살아남은 자신의 연륜을 믿었다. 최대한 기사가 만족할만한 비굴함을 보이면서 손을 싹싹 비볐다.

"나으리를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식사부터 하시겠습니까? 아니면 목욕을? 말씀만 하십시오."

"그런 건 필요없다. 네놈이 뭔짓을 해놓았을 줄 알고 음식을 먹고 쉬란 말이냐?"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글쎄다. 자세한 건 여기 있는 사람에게 물어보면 어떠냐?"

가이든이 서늘한 미소를 지으며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지금껏 말에 가려져 있던 로더릭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 얼굴을 확인한 촌장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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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내 얼굴을 기억하는 모양이로구나."

"아, 아니, 어, 그게···!"

으르렁거리는 로더릭을 앞에 두고 촌장이 금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렸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해서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다른 마을 주민들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이는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고, 어떤 이는 온몸을 떨었다.

"내 생각 같아서는 곱게 죽이고 싶지가 않으나, 시간이 없으니 별수 없지. 나무에 목을 매다는 정도로 끝내줄 테니 감사히 여겨라."

"억, 어억! 잠시만! 제발 용서를!"

"뭣들 하느냐? 매달아라!"

"예!"

촌장의 애원은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로더릭의 명령에 용병들은 그대로 촌장의 어깨를 잡고 내리눌렀다.

그리고는 목을 매기 위한 밧줄을 꺼냈다. 목에 밧줄이 휘감기려고 하자 촌장이 발작했다.

"기, 기사님! 절 죽이시는 건 상관없으나 영주님께 말씀이라도 전하고 죽여주십시오!"

"뭐? 영주?"

로더릭이 얼굴을 찌푸렸다. 영주라면 누군가 세금을 걷고 있다는 소리 아닌가?

그렇게 되면 일이 조금 골치가 아파졌다. 아무리 죽어도 싼 놈들이지만 영주에겐 세금 나올 구멍이니까.

아무리 작은 마을이라도 사망자가 많으면 영주 측에서 항의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 그렇습니다! 이 땅은 자작님, 루드거 백작님의 땅입니다!"

자신의 살길을 찾았다고 여긴 촌장이 냉큼 말을 덧붙였다. 촌장의 말에 로더릭은 고민에 빠졌다.

루드거 백작이라면 로더릭도 본 적이 있는 귀족이었다. 꽤 탐욕스럽고 권위 의식이 강한 귀족.

이대로 처형을 강행한다면 십중팔구 번스타인 가문과 충돌이 생길 게 뻔했다.

'골치 아프군. 서신을 보내 처형 허가를 받아야 하나?'

허가 자체는 즉시 해줄 것이다. 다름 아닌 귀족을 죽이려 한 놈들이니.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그때까지 이놈들을 지켜보고 있을 수는 없다.'

허가를 받기 위해서는 멀리 떨어진 루드거 백작의 성에서 브릭 마을까지 왕복해야 한다. 당연히 낭비되는 시간도 상당하다.

그 시간 동안 용병들을 계속 고용할 만한 돈도 없다. 그렇다고 감시를 느슨히 하면 십중팔구 도망칠 터.

게다가 아무리 큰 잘못을 저지른 놈들이라도 백작에게 세금을 내는 놈들이라면? 주모자 몇 명으로 끝내라고 할 가능성이 높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구나!'

고민하는 로더릭의 모습에 촌장은 속으로 만세를 외쳤다. 일단 질러본 것인데 이렇게 잘 먹힐 줄이야.

역시 자신에게는 운이 따르고 있는 게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짓말입니다."

"...!"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집중되었다. 말을 꺼낸 루크는 수많은 시선 속에서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이 마을에 영주는 없습니다. 당연히 처형 허가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 이 외지인 사냥꾼 놈이! 어디서 감히 기사님께 거짓, 커흑!?"

삿대질하던 촌장이 뒤로 벌렁 넘어갔다. 분노한 로더릭이 달려와 턱을 걷어찬 탓이었다.

"이놈! 어디서 도련님께 손가락질이냐!"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이분은 번스타인 백작가의 피를 이으신 분이다! 똑바로 예를 갖춰라!"

촌장을 포함한 마을 사람들은 멍하니 눈을 껌뻑였다. 그리고 잠시 후, 앞뒤 사정을 이해하고는 경악성을 터트렸다.

서자. 아주 드물지만 귀족을 모신 여인이 잉태했을 때, 귀족이 직접 자신의 자식이라 인정하고 가문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있다.

설마 루크에게 그런 행운이 찾아올 줄이야!

"그, 그럼 루크가 변호해주면 우리 다 살 수 있는 거야?"

"그렇지! 15년이 넘게 같이··· 살았는데···."

저들끼리 떠들던 마을 주민들의 얼굴이 점점 더 굳어졌다. 지금껏 루크에게 해왔던 일들이 떠올랐다.

고기와 가죽값을 후려치고, 마을 안에서 살지 못하게 했으며, 필요할 때마다 아무런 보수 없이 부렸다.

마지막엔 심지어 없는 빚까지 씌우고 협박하려 하지 않았나. 변호는커녕 죽이려고 들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마을 주민들이 창백해진 사이에도 루크의 말은 계속되었다.

"이 마을은 30년 전에 만들어진 개척 마을입니다. 너무 멀고 외진 곳이라 아무도 자신의 땅으로 선포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방금 전 저놈이 한 말은 대체···?"

"급한 대로 주변에 있는 영주 중에서 가장 힘 있는 사람을 얘기한 겁니다. 어찌 됐건 처형 허가를 받으러 가면 그쪽 영주는 당연히 자기 땅이라 할 테니까요."

비록 작은 마을이라지만 세금을 낼 수 있는 땅이다. 거리가 너무 멀어서 관리하기가 힘들어 버려뒀던 것일 뿐.

그런데 마을 쪽에서 '아무것도 해줄 필요 없으니 영주님을 섬기고 세금을 내겠습니다'라며 스스로 가져다 바친다면?

당연히 얼씨구나 좋아하며 냉큼 자기 땅이 맞다고 할 게 뻔했다.

"사실이냐?"

"아니, 아닙! 그것이 아니라!"

모든 게 간파되자 촌장이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변명하려고 해도 더 이상 낼 수 있는 꾀가 없었다.

로더릭은 싸늘한 눈으로 촌장을 내려다보았다.

"놈을 나무에 매달아라. 하루가 지나면 시체는 찢어서 숲에 던져버려."

"아, 안돼! 기사 나리! 아니, 도련님! 제발 살려주십쇼, 도련님!"

촌장은 뒤늦게 루크에게 매달렸다. 하지만 루크는 차갑게 미소지을 뿐이었다.

"대가를 치를 거라고 했잖아."

"도, 도련님! 부디 용서를! 아아아악!"

용병들은 능숙하게 촌장의 목에 밧줄을 휘감았다. 억센 손아귀에 눌린 촌장은 비명을 지르며 저항했지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곧 밧줄이 나무에 걸리고, 도르래처럼 촌장이 허공으로 올라갔다. 한동안 꺽꺽거리며 버둥거리던 몸은 얼마 지나지 않아 멈췄다.

남은 건 나무에 매달린 채 대롱거리는 늙은 시체뿐이었다.

====

촌장이 매달리고 나자 마을 전체가 얼어붙었다. 막연히 죽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눈앞에서 직접 처형을 보는 건 천지 차이였다.

"촌장 외에도 제법 눈에 띄는 얼굴이 많구나."

"...!"

로더릭의 한마디에 주민들은 몸을 떨었다. 비록 숫자는 마을 사람들이 더 많다지만 대다수가 농부일 뿐이었다.

얼마 안 되는 용병과 기사 한 명만으로 이 자리에서 시체의 산이 생겨날 수도 있었다.

"위대하신 기사님! 부디 자비를!"

"전부 죽은 촌장이 하자고 했던 겁니다!"

"저흰 강요에 못 이겼을 뿐입니다!"

마을 사람들은 냉큼 무릎을 꿇고 무죄를 주장했다. 로더릭과 가이든은 물론 용병들까지 기가 찬다는 표정으로 주민들을 바라봤다.

귀족이라면 모를까 겨우 촌장 한 명이 뭘 한단 말인가? 마을 전체가 동의하지 않고서야 벌어질 수 없는 일이었는데.

역겨운 자기변호에 로더릭은 머리에 핏대가 솟을 정도로 분노했다.

"내 이놈들을 지금 당장···!"

"로더릭 경. 진정하세요."

이번에도 로더릭을 멈춰 세운 건 루크였다. 마을 사람들은 화색이 도는 얼굴로 루크의 발치에 매달렸다.

그들의 눈에 보기엔 루크가 마지막 희망이었다.

"루크야! 아니, 도련님! 살려주십시오!"

"옛정을 봐서라도 제발!"

옛정이란 소리에 루크가 혀를 찼다. 바로 조금 전에 오두막을 습격해놓고 벌써 잊은 건가?

공포에 눈이 돌아가니 이젠 되는대로 내뱉는 모양이었다.

지금껏 루크의 말을 충실히 따르던 로더릭이었지만 이번만큼은 물러서지 않았다.

"도련님, 부디 말리지 마십시오. 이건 제 복수입니다."

"맞습니다. 하지만 굳이 아직 낫지도 않은 몸을 써가며 무리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 말씀은?"

"용병들에게 맡기시지요."

루크의 시선이 용병들에게 향했다. 아직 무슨 소리인지 파악하지 못한 용병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저들끼리 시선을 교환했다.

"방금 전 내가 했던 말 기억하나?"

"예에. 그야 기억하고 있습죠."

"사정은 들었지? 이 사악한 마을에 천벌을 내려주게나. 챙길 건 알아서 다 챙기고."

"...!"

짧은 말이 끝나자 용병들의 얼굴엔 환희가, 마을 사람들의 얼굴엔 절망이 나타났다.

루크의 선언은 약탈의 허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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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탈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지휘관인 귀족의 감시 아래에서 하는 약탈, 다른 하나는 완전 방임 상태의 약탈이다.

똑같은 약탈인데 뭐가 다르냐고 할 수 있지만, 사실 이 두 가지는 완전히 다른 개념이었다.

귀족 입장에서 점령지는 곧 자신의 영지. 당연히 쑥대밭을 만들면 이후 세금 걷기가 힘들어진다.

그렇다고 용병이나 병사들에게 포상을 적게 하면 불만이 쌓이니 적당한 수준으로 약탈을 허가하는 거다.

이때는 아예 마을 주민들이 재물을 자진 납세하는 경우도 있다. 일종의 짜고 치기인 셈이다.

마을 입장에선 약간의 손해로 안전을 보장받고, 병사들의 불만은 적당한 금품으로 억누른다.

하지만 점령할 생각이 없는 영지나, 용병들의 불만이 폭발 직전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아예 손을 놓아버리고 약탈을 방조한다.

당연히 용병들은 마을 전체를 쑥대밭으로 만들며 기둥뿌리를 뽑는다. 약탈한 것 전부가 자기 재산이 되니까.

지금 브릭 마을에서 벌어지는 풍경이 바로 후자의 약탈이었다.

"이야, 이 목걸이 좋은데? 제법 값이 나가겠어."

"그, 그건 나중에 딸 혼수품···."

"뭐라고? 지금 딸까지 나에게 주겠다고?"

"죄송합니다! 얼마든지 가져가십시오!"

용병들은 마을 구석구석을 뒤지며 재물이란 재물은 싹 털기 시작했다. 마을 사람들은 온 힘을 다해 숨겼지만 소용없었다.

용병 생활하면서 약탈을 한두 번 해봤던가? 숨길만 한 장소는 뻔했다.

챙겨갈 수 없는 가축도 예외는 아니었다.

"지금 이걸 먹으라고 내놓은 거야? 누굴 돼지 새끼로 아나?"

"아이고, 저희 마을 사정엔 이게 최선입니다!"

"내 눈이 망가졌나? 저기 먹음직스러운 거위가 보이는데?"

"그 거위는 봄에 팔려고··· 아닙니다! 당장 만들어 바치겠습니다!"

작고 값나가는 것들은 모조리 쓸어가고, 큼지막한 가축들은 죄다 용병들의 뱃속으로 들어갔다.

차라리 한 번 휩쓸고 지나갔으면 버틸 만했겠지만, 용병들은 아예 터를 잡고 나가질 않았다.

-로더릭 경이 완치될 때까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조금 더 머물다 갑시다.

루크의 의견 때문이었다. 일단 치료가 핑계긴 했지만 작정하고 마을을 벌주려 하는 의도인 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당연히 로더릭은 두말하지 않고 찬성했고, 용병들도 더욱 신나게 날뛰었다.

"크흐흐, 의뢰주 때문에 바가지 쓰게 생겼나 싶었는데 이게 웬 떡이야."

"작은 마을치고는 제법 짭짤한데? 이 정도면 본전은 충분히 건지겠어."

"도련님 만세! 그리고 기사를 습격하려던 이 마을의 멍청함에 건배다!"

용병들은 시시덕거리며 기름진 음식을 입에 쑤셔 넣었다. 덕분에 앞으로 며칠 동안은 호사를 누리게 생겼다.

신나게 먹고 마시던 용병 하나가 생각에 잠긴 용병대장 에릭을 바라봤다.

"그런데 대장은 뭘 그리 생각중이쇼?"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단 말이지."

"이상하다니? 뭐가 말이오?"

"이 마을, 구석진 곳에 있는 것 치곤 꽤 풍족하지 않냐? 특히 기름과 가죽옷이 상당히 많던데 어떻게 구한 거지?"

에릭의 말에 몇몇 용병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나도 이상하긴 했수. 희한하게도 고기 요리를 꽤 잘하더라고. 평소에도 자주 먹지 않고서야 요리법을 모를 텐데."

"그러니까 말이야. 마을 사람 중 반이 사냥꾼이거나, 누가 공짜로 고기를 뿌린 게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인데."

"모르지. 솜씨 좋은 사냥꾼이 몇 놈 있다가 한꺼번에 급사한 거 아뇨? 우리가 털어가기 좋으라고."

시덥잖은 농담에 용병들이 일제히 폭소를 터트렸다. 그리고는 이내 흥미를 잃었다는 듯 다른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유야 어찌 됐건 털어갈 게 많으면 좋은 일이었으니까.

'그러고 보니 그 도련님도 사냥꾼 같던데···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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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용병들이 한창 약탈에 열중하고 있을 때, 루크와 로더릭은 촌장의 집에서 머물렀다. 이 마을에서 그나마 제일 좋은 집이었던 탓이다.

루크는 로더릭의 상처 부위를 살펴본 후에 말했다.

"상처는 거의 회복되었으니 완치까지 얼마 걸리지 않을 겁니다."

사실 이젠 약을 바를 필요도 없었다. 이미 자연 치유에 맡겨놓기만 해도 일주일 정도면 충분히 완치될 수준으로 회복된 상태니까.

"다행입니다. 이제 도련님을 모시고 갈 수 있게 되었군요."

로더릭이 꽤나 밝아진 얼굴로 대답했다. 마을을 뒤지던 도중 본인의 애마와 장비를 찾은 덕에 제법 여유가 생긴 듯했다.

값이 많이 나가는 물건이라 촌장이 빨리 팔아버리지 못한 덕이었다. 그때 로더릭이 무언가 생각난 듯이 가이든을 향해 물었다.

"그러고 보니 가이든 경, 마차는 없소?"

"마차?"

"도련님을 이대로 걸어가게 하실 순 없잖소."

그 말에 가이든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로더릭을 쳐다봤다.

"내가 점쟁이라도 되는 줄 아시오? 도련님을 찾기도 전에 미리 알고 마차를 구해놓게."

"으음. 그것도 그렇군."

어디까지나 두 사람은 루크를 찾기 위해 수색을 하고 있었다. 미리 마차를 구해서 이리저리 끌고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다만 가이든의 실제 속내는 조금 달랐다.

'제기랄, 사실은 걷게 만들 셈이었는데.'

원래대로라면 백작 부인의 명령에 따라 온갖 수모를 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젠 대접이란 대접은 다 해주게 생겼다.

생각할수록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로더릭은 그런 가이든을 더욱 미치게 만드는 한마디를 건넸다.

"어쩔 수 없지. 마차를 구해오셔야겠소."

"뭐요?"

"마차 말이오. 당장 필요하지 않소."

"아니, 대체 왜 내가···."

가이든은 황당한 얼굴로 로더릭을 바라봤다. 하지만 로더릭은 오히려 뭐가 문제냐는 듯한 태도로 반문했다.

"나는 상처 때문에 직접 나설 수 없고, 도련님은 처음부터 논외요. 그러니 그대가 용병을 부려서 가지고 올 수밖에."

"그 돈은 어디서 나오고? 마차 가격이 한두 푼인 줄 아시오?"

"어음이라도 내준 다음 주군께 말씀드리면 되잖소. 경비에 인색하신 분도 아닌데."

"···."

지극히 상식적인 답에 가이든은 할 말을 잃었다. 사실 로더릭의 말이 맞기는 했지만, 그 귀찮은 과정을 감수해야 한다는 게 싫었다.

안 그래도 백작 부인의 명을 완수하지 못해서 돌아가면 불호령이 떨어지게 생긴데다, 돌아가는 내내 서자에게 굽신거려야 하는 상황 아닌가.

그런데 인제 와서는 서자 놈이 편하게 가기 위한 마차까지 구해 와야 한다니!

가이든이 불편한 표정으로 어물거리자, 가만히 있던 루크가 입을 열었다.

"전 그냥 걸어가도 괜찮습니까."

"오, 정말 그러셔도 되겠습니까?"

"예. 추레하게 보이겠지만 경에게 폐를 끼칠 수 있나요."

"···."

빙긋 루크를 보고 가이든은 할말을 잃었다. 저렇게 말하면 안 구해올 수가 없지 않은가.

정말 배려해서 하는 소리인지, 아니면 일부러 노리고 명치를 후려치는 건지 모를 말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 말을 들은 로더릭이 도끼눈을 뜨고 가이든을 쳐다보고 있었다.

"···마차를 구해오겠습니다."

양쪽에서 가해지는 압박에 가이든은 백기를 들었다.

****

"염병할. 용병 놈들만 신났군."

집에서 나온 가이든은 왁자지껄 떠드는 용병들을 보며 이를 갈았다. 기껏 고용했더니만 일은 안 하고 저따위 놀자판이라니.

그렇게 약탈하고도 자신에겐 바치는 것 하나 없는 데다 연신 '도련님 만세'를 외치는 꼴도 참으로 보기 싫었다.

"어이, 거기 용병! 시킬 일이 있으니 이쪽으로 와라!"

"시발···."

"뭐라고?"

"아무것도 아닙니다. 무슨 일이십니까?"

재수 없게 걸린 용병 하나가 얼른 똥 씹은 표정을 감추며 웃는 얼굴을 만들었다.

잠시 용병을 미심쩍게 바라보던 가이든은 품속에서 어음 한 장을 용병에게 내밀었다.

"가장 가까운 도시나 큰 마을로 가서 마차를··· 아니, 잠깐만."

말을 하던 도중 가이든의 머릿속에 계략 하나가 떠올랐다. 잘만 하면 마음에 안 드는 서자 놈에게 망신을 줄 수 있을 거 같았다.

"나리? 마차가 뭐라굽쇼?"

"아니, 마차가 아니다. 가까운 곳에서 조랑말을 좀 구해와라."

"조랑말이요?"

"그래. 가능하면 순한 놈으로 말이다."

용병은 얼떨떨해하면서도 어음을 받았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고용주가 시켰으니 따를 수밖에.

멀어지는 용병의 뒷모습을 보며 가이든은 히죽 웃었다.

'놈, 지금까지 잘도 설쳤겠다. 한번 당해봐라.'

굳이 악의를 드러낼 필요는 없다. 적당한 '실수'가 몇 번만 생기면 망신은 망신대로 주면서 추궁은 불가능해지는 법.

설령 일이 벌어져도 서자와 로더릭은 자신을 추궁하지 못하리라.

****

다음 날 아침, 가이든의 말을 들은 로더릭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도련님께 말 타는 법을 가르쳐 드리자?"

"그렇소."

뜬금없는 제안에 로더릭은 어리둥절했다. 승마는 귀족에게 있어 필수인 덕목이다.

가문으로 가면 싫어도 배워야 할 터. 왜 굳이 지금 가르쳐주자는 말인가?

"용병에게 마차를 구해오라고 말은 했지만, 적당한 마차가 있을지 없을지 모르잖소. 그래서 정 마차가 없으면 말이라도 구해오라고 했소."

"마차가 없으면 다른 곳에 가서 찾아야 할 거 아니오?"

"이보시오, 로더릭 경. 우리가 이 벽지에 천년만년 있을 건 아니잖소? 제대로 된 마차를 찾기까지 얼마나 시간을 낭비해야 하오?"

"으음."

타당한 반론에 로더릭이 입을 다물었다. 확실히 마차 하나 찾자고 한 달이 넘게 시간을 보낼 수는 없었다.

마을에서 털어먹을 게 사라지면 용병들도 불만이 쌓일 테니.

"비록 마차는 아니더라도 말은 위엄이 있어 보기에 나쁘지 않잖소. 달리는 거라면 모를까, 가볍게 타는 정도라면 충분히 가르쳐 드릴 수 있고."

"그건 그렇소만."

"정 신경이 쓰이면 근처까지만 말을 타고, 가까운 도시에서 마차를 따로 구하면 될 거요. 일단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말 타는 법만 가르쳐 드립시다."

"...알았소."

잠시 고민하던 로더릭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여기서 급히 승마를 가르치는 것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초보자는 항상 낙마의 위험이 존재하지 않나. 그렇지만 마차를 못 구해왔을 때 도련님을 걷게 만들 수도 없는 일이었다.

"문제는 내 말이 꽤 사나운 놈이라는 거요. 초심자가 타기엔 부적합하오."

"걱정하지 마시오. 마침 내가 타는 녀석이 순한 놈이니. 초보자라도 문제없이 몰 수 있소."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자자, 어서 도련님께 갑시다."

가이든은 머뭇거리는 로더릭을 일으켜 루크에게로 향했다. 모든 게 계획대로 착착 진행되자 웃음이 절로 나올 지경이었다.

한창 활과 화살을 정비하고 있던 루크는 두 사람의 말에 눈을 껌뻑였다.

"말 타는 법을 배우라고요?"

"예. 사정이 생겼습니다."

로더릭은 아까 전 가이든이 했던 말을 그대로 옮겼다. 마차를 구하지 못하면 말을 탈 수도 있다는 것.

어차피 배워야 할 귀족의 덕목이니 이참에 배워두는 게 좋겠다는 것까지. 사정을 들은 루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그렇다면 확실히 배워두는 게 좋겠습니다."

"맞습니다. 이왕 배우실 거 미리 배우셔서 위풍당당하게 돌아가신다면 위엄이 살지 않겠습니까?"

루크의 긍정적인 대답에 가이든은 냉큼 추임새를 넣었다. 그리고는 잽싸게 자신의 말을 앞으로 들이밀었다.

제법 덩치가 크고 위풍당당한 갈색 군마였다.

"제가 아끼는 놈입니다. 순해서 말도 잘 듣고, 사람도 잘 안 가리는 놈이라 타기 좋지요. 어지간한 일이 없는 한 도련님도 순순히 태워줄 겁니다."

"몇 번이나 봤지만 역시 멋진 말이군요. 그럼 감사히 빌리겠습니다."

가이든에게 고삐를 받아든 루크가 말 안장 위로 올랐다. 옆에서 로더릭은 조심스럽게 타는 걸 보조해줬다.

그 모습을 보던 가이든이 속으로 비웃음을 띄웠다.

'순한 놈이긴 하지. 그런데 그놈이 사람은 꽤 가리거든.'

말 중에서는 사납지 않더라도 기수가 바뀌면 유난히 까탈스러워지는 녀석이 있다. 가이든의 말도 그중 하나였다.

갑자기 낯선 기수가 올라오면 당황해서 말을 듣지 않을 터. 당연히 초심자가 말을 제어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날뛰어서 낙마시키진 않겠지만, 네놈 뜻대로 움직이지도 않을 거다.'

안 그래도 짧은 시간 내에 배우기 힘든 승마다. 어설프게 몰다가 결국엔 내려오는 수밖에 없을 터.

그리고 나중에 용병이 조랑말을 가지고 오면 말이 저것밖에 없었던 모양이니 조랑말이라도 타면서 배우는 수밖에 없다고 얘기하면 된다.

위풍당당한 군마 사이에 조랑말을 타고 가든, 용병들 사이에 섞여서 걸어가든. 어느 쪽이든 참 보기 흉한 꼴이 되리라.

푸르륵!

"진정해라. 잠시 등 좀 빌리자."

예상했던 대로 낯선 사람이 타자 말은 고개를 흔들며 저항했다. 루크가 천천히 갈기를 쓰다듬으며 진정시키려고 시도하는 모습에 가이든은 코웃음을 쳤다.

'멍청하긴. 낯선 손길을 싫어하는 녀석에게 그래봤자···?'

가이든의 얼굴이 점점 굳어졌다. 지금껏 낯선 이가 쓰다듬으면 고개를 돌리던 놈이 쓰다듬을 때마다 얌전해지고 있었다.

나중에는 아예 저항을 멈추고 루크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말이 진정하자 루크는 스스로 고삐를 잡고 나아갔다.

"이렇게 하는 건가?"

"지금 움직이면 위험합니다! 일단 가볍게 나아가는 것부터···!"

기겁한 로더릭이 외쳤으나 루크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몰았다. 말은 루크가 가자는 대로 천천히 순응하며 적당한 속도를 유지하며 따라왔다.

때로는 속도를 조금 높이기도 하고, 다시 줄이기도 하면서 주변을 돌았다.

다섯 바퀴를 돌고 멈춘 루크를 바라보며 두 기사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도저히 초심자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움직임이었다.

"도, 도련님. 말을 타 보신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아니, 그러면 어떻게···"

루크가 두 기사의 의문에 말의 갈기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사냥꾼으로 오래 살다 보면 사냥감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지요. 짐승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손에 잡힐 듯이 알게 됩니다. 일종의 교감이라고 할 수 있지요."

"교감···?"

"사람을 많이 태우고 다닌 녀석 아닙니까. 마음을 이해해주고, 몸을 맡기면 알아서 기수를 배려하기 마련입니다. 저는 말이 인도하는 곳으로 따라갔을 뿐입니다."

"아!"

로더릭은 감탄했다. 밭을 가는 농부에게도 심원한 지혜의 조각이 깃들어 있다고 했다. 지금 루크가 보여주는 게 바로 그렇지 않은가.

짐승을 쫓고, 짐승의 마음을 읽고, 짐승과 교감하는 것으로 일체가 되다니. 그 범상치 않음에 절로 감탄이 나왔다.

루크는 우수에 젖은 눈으로 숲을 바라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교감은 개뿔. 그딴 게 어딨어?'

사실 지금 한 말은 듣기 좋으라고 지어낸 거다. 사냥꾼이 사냥감과 교감을 해? 그냥 습성을 읽어내고 앞서서 잡을 뿐이다.

사냥이란 건 결국 두 생물의 눈치 싸움이다. 교감 같은 거창한 게 있을 리가.

'그냥 회귀 전에 지겹도록 탔지.'

기본적으로 떠돌이 신세라 말은 항상 끌고 다녔고, 황제의 군대에 쫓길 땐 말안장 위에서 하루를 보낸 적도 있다.

심지어 밥도 말안장 위에서 먹었을 정도다. 당연히 말에 대한 이해는 어지간한 유목민 수준으로 빠삭했다.

[ 처음 보는 말을 완벽히 다루어냈기에 경험치가 상승합니다. ]

[ 현재 기마술 등급은 '숙련자'입니다. ]

기분 좋은 메시지를 들으며 루크가 슬쩍 고개를 돌렸다. 승마를 권한 가이든은 아직까지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앙심으로 엿 좀 먹여보려던 것 같은데, 생각하는 게 너무 뻔하구만.'

루크의 입꼬리가 올라가자 가이든이 움찔 몸을 떨었다. 그런 가이든을 향해 루크는 부드럽게 말했다.

"가이든 경."

"예, 예?"

"애마를 빌려줘서 고맙습니다. 제가 배우는 동안 걸어 다녀야 하실 텐데, 경의 배려는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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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말이 좋아서 승마 교육이지, 루크에게 가르칠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이미 시작부터 능숙하게 타고 다녔으니까.

하지만 루크는 고개를 저었다. 어설픈 흉내에 불과하니 더 배워야겠다는 게 이유였다.

"도련님, 이제 그만하셔도 됩니다."

"아닙니다. 슬슬 감이 잡히기 시작하는 수준입니다."

"누가 보기에도 충분하니까 그만 제 말을···."

"배움이 부족하니 더 타고 오겠습니다. 이럇!"

가이든이 말 좀 돌려달라는 소리를 하려고 할 때마다 루크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계속 말을 타고 다녔다.

덕분에 진짜로 가이든은 말 없는 기사 꼴이 되어야 했다.

물론 마을 안에서 말을 타고 다닐 일이 없기는 했다. 하지만 적어도 조랑말이 도착할 때는 돌려받아야 할 거 아닌가.

"로더릭 경, 도련님께 나 대신 부탁 좀 해줄 수 없소?"

"이제 승마에 재미를 붙이셨는데 왜 산통을 깨려는 거요? 즐기시게 두시오."

"...."

로더릭에게 부탁을 해도 돌아오는 대답은 매번 같았다. 덕분에 가이든은 애먼 가슴만 두드려야 했다.

그리고 며칠 후, 슬슬 마을에서 털어먹을 게 다 사라졌을 무렵 보냈던 용병이 돌아왔다.

가이든의 얼굴에 화색이 돌며 냉큼 용병에게 다가갔다.

"기사 나리. 말씀하신 대로 조랑말을···."

"이놈! 내가 전마를 사 오라고 했는데 왜 조랑말을 가지고 왔느냐!"

"예? 아니, 나리가 저한테."

"아무리 말이 없어도 그렇지! 하지만 네놈이 애쓴 걸 봐서 더 추궁하진 않겠다!"

가이든은 정신을 못 차리도록 용병에게 일갈한 후, 냉큼 조랑말의 고삐를 뺏었다.

옆에서 대화를 듣던 로더릭은 조랑말을 보고 눈을 찌푸렸다.

"조랑말? 지금 도련님께 조랑말을 드리자는 거요?"

"나도 답답하오. 하지만 더 기다릴 수도 없으니 어쩌겠소?"

로더릭의 추궁에도 가이든은 시치미를 뚝 뗐다. 비록 자기 말을 뺏기긴 했지만, 어차피 저건 본래 자신의 말이 아닌가.

게다가 처음부터 승마를 가르칠 때만 빌려주기로 했던 말이다. 기껏 마련한 성의를 무시하고 남의 것을 뺏어 탈 수는 없을 터.

'중간에 잡음이 있긴 했지만 이대로 밀어붙이면 된다.'

로더릭의 불만을 사게 되겠지만 그 정도야 감수하면 된다. 이대로 말을 뺏긴 채 걷느니 그편이 훨씬 나았다.

마침 말을 타고 한 바퀴 돌고 오는 루크를 향해 가이든이 소리쳤다.

"도련님, 용병 놈이 마차가 없어서···!"

"참으로 볼품없는 조랑말이군요. 저걸 타고 다니느니 혀를 깨물고 죽는 게 나을 거 같습니다."

루크의 말에 가이든의 입이 딱 다물렸다. 대뜸 저런 소릴 하니 권하려고 해도 권할 수가 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루크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보면 볼수록 한심하게 생긴 놈이군요. 끌고 다니는 것만으로 세상 사람들이 다 비웃겠어요. 가이든 경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아, 아니··· 그래도···."

"저런 못난 조랑말은 여기서 본 적이 없는데, 어딘가에서 헤매다 들어온 모양입니다. 도저히 탈 만한 건 아니지만 팔면 값은 제법 나오겠군요."

"······."

이젠 조랑말을 대신 타라고 권했다가는 역적이 될 분위기였다. 잠시 입을 뻐끔거리던 가이든은 고개를 푹 숙였다.

루크는 완전히 침몰한 가이든을 보며 피식 웃었다.

'상대도 안 되는 게 어디서 얄팍한 수작질이야?'

아무리 꾀를 내는 데 자신이 있다고 해도 결국은 젊은 기사. 회귀 전에 산전수전 다 겪어 온 루크의 상대가 아니었다.

루크는 그대로 말을 몰아 저 멀리 사라졌다. 로더릭도 코웃음을 치더니 루크의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이 떠나자 용병은 머리를 긁적이며 가이든에게 다가갔다.

"저, 기사 나리? 이 조랑말은 어쩔까요?"

"···알 게 뭐야, 새끼야! 잡아먹든 도로 팔든 네놈 멋대로 해!"

****

조랑말이 도착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루크 일행은 마을을 나섰다. 로더릭이 완치되고 마차도 없으니 더 머물 이유도 없었다.

용병들도 털어먹을 건 죄다 털었기에 아무 미련 없이 뒤를 따랐다.

남은 건 희망을 잃고 주저앉은 마을 사람들뿐이었다.

'당장 먹고살 만한 게 없으니 떠나겠지.'

내년에 곡식을 수확할 때까지 버틸만한 재물은 싹싹 긁어갔다. 살려면 마을을 떠나 각자 흩어지는 수밖에 없을 거다.

도시로 가서 빈민으로 살거나, 아니면 다른 마을에 사정해서 외지인으로 정착하는 것만이 살 수 있는 길이다.

그리고 외지인이 된다면 루크의 가족이 그랬던 것처럼 오랜 세월을 푸대접을 받으리라.

'인과응보구만.'

기사의 분풀이로 몰살당할 수도 있었던 마을이다. 이 정도면 싸게 끝난 셈이니 안타까울 것도 없었다.

루크는 두 번 다시 방문할 일 없는 마을에서 등을 돌려 떠났다.

****

가이든은 끝까지 말을 돌려받지 못했다. 조랑말을 권할 수 없게 되었으니 남은 건 두 가지뿐이었다.

가이든이 말을 뺏기고 걸어가던가, 아니면 루크가 양보해서 걸어가던가.

후자를 고르면 로더릭이 발광할 게 뻔했다. 어쩔 수 없이 가이든은 제 꾀에 빠진 꼴이 되어 걸어가야 했다.

'염병할 반쪽짜리 서자랑 기사도에 환장한 촌놈이···!'

가이든은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설마 기사 서임을 받고도 용병들처럼 걷게 될 줄이야.

수치와 분노가 뒤섞여서 걷는 내내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사실 원인을 따지자면 가이든이 먼저 모략을 꾸민 탓이었으나, 그런 사실은 이미 머릿속에 없었다.

있는 거라곤 천한 피가 섞인 서자와 서자 곁에 붙은 로더릭에 대한 원망이 전부였다.

'이대로 끝낼 수는 없지.'

이젠 백작 부인의 명령 따윈 아무래도 좋았다. 저 서자 놈이 울상짓는 꼴을 보지 않으면 속이 터져서 잠을 못 잘 것 같았다.

가이든은 은밀하게 루크와 로더릭에게서 떨어져 용병대장 에릭을 불렀다.

"어이, 용병대장. 할 말이 있으니 가까이 와라."

"또 뭘 시키시려고 그러십니까, 기사 나리."

에릭은 한숨을 내쉬며 가이든에게 다가갔다. 가이든이 불렀을 때 좋은 일이 없었던 탓이다.

건방진 태도에 가이든의 눈썹이 꿈틀거렸으나 애써 참았다. 지금 당장은 놈들의 협조가 필요했으니까.

"별거 아니다. 일행을 원래 가려던 길이 아닌 몬스터 출몰 지역으로 안내해라."

"예? 그게 대체 무슨 소립니까?"

에릭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왜 안전한 길을 내버려 두고 굳이 위험한 길로 간단 말인가?

"시끄럽다. 내가 다 생각이 있어서 시키는 거니 그런 줄 알아라."

"나리,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닌 것 같습니다. 이유라도 설명해 주십시오."

"내가 너희들의 고용주인 걸 잊었나? 돈 받고 싶으면 닥치고 시키는 대로 해!"

'도련님 덕에 네놈이 약속했던 보수보다 더 벌었다, 새끼야!'

에릭은 냅다 고함을 지르고 싶은 걸 꾹 참았다. 기사만 아니었다면 진즉에 도끼를 뽑아 들고 결별했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귀족이고, 원한을 품었을 때 보복할 수 있는 수단이 너무 많았다.

'망할. 말을 맞춘 건지 아닌지 알 수가 없으니.'

에릭이 로더릭과 루크를 힐끔 쳐다봤다. 이 기사의 독단이라면 그냥 여기서 고발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다른 기사랑 말을 맞추어 뒀다면 골치가 아파진다. 결국 에릭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너무 위험한 곳은 천금을 줘도 못 갑니다."

"누가 죽을 곳으로 가라 했더냐? 적당한 장소면 충분하다."

굳이 위험할 필요는 없다. 전투를 경험하지 못한 서자가 겁먹고 덜덜 떨만한 수준이면 된다.

적어도 저 같잖은 귀족 흉내만 무너뜨리면 속이 풀릴 것 같았으니까.

****

'몬스터 출몰 지역으로 가는군.'

루크는 용병들이 가는 방향을 보고 혀를 찼다. 사냥감을 구하기 위해 왕복 사흘 거리까지 오락가락 했던 루크였다.

당연히 어디가 짐승이 많은지, 몬스터가 서식하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용병들 얼굴이 죽상인 걸 보니 돈벌레가 억지로 시켰군.'

번번이 제 꾀에 넘어가서 욕을 보고도 포기하지 않는 근성이 참 대단했다. 어지간히 썩어빠진 게 아니라면 저렇게 반성 없이 살기도 힘들었으니까.

다행히 로더릭은 아직 모르는 눈치였다. 정황을 파악했다면 길길이 날뛰었을 테니까.

루크가 한창 야영 준비를 하는 용병들에게 다가가자, 에릭이 흠칫 놀라서 일어섰다.

"도련님? 무슨 일이십니까?"

에릭의 이전보다 더 공손해져 있었다. 루크가 명령으로 마을에서 실컷 털어먹게 해준 덕이었다.

"내가 알기론 이 주변이 몬스터가 나오는 곳인데, 맞게 가고 있는 건가?"

"예!? 그, 그렇긴 합니다만 여기가 지름길입니다. 나오는 몬스터도 약한 놈들뿐이니 신경 쓰실 필요 없습니다."

정곡을 찔렀는지 깜짝 놀란 에릭이 변명을 늘어놓았다. 사실 틀린 말도 아니었다.

실제로 이 부근엔 약한 몬스터만 몇 마리 튀어나오는 정도였으니까.

방향을 잘못 잡아서 영역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지만 않으면 괜찮았다.

"그렇긴 하지. 그런데 시기가 안 좋을 때 왔군."

"안 좋을 때? 무슨 일이 있습니까?"

"최근 여기에 트롤이 둥지를 틀었거든."

"트롤!?"

에릭이 기겁했다. 트롤이라면 기사 셋이 죽을 각오로 싸워야 간신히 잡는 괴물이 아닌가?

그마저도 승산을 최소한으로 잡았을 때다. 확실히 이기려면 기사 다섯은 필요하다는 게 중론이었다.

"여기까지 내려오진 않겠지만, 혹시 모르니 알려줘야 할 것 같아서 왔네."

"가, 감사합니다. 당장 애들한테 주변을 둘러보라고···"

-크워어어어어!

멀리서 들리는 포효에 야영지에 있던 모든 사람의 몸이 굳었다. 그저 소리만으로도 심상치 않은 놈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잠시 후, 쿵쿵거리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무언가가 야영지에 다가왔다.

"전원 전투 준비!"

우지끈

에릭의 고함과 함께 거대한 그림자가 나무를 꺾으며 나타났다. 그 모습을 본 한 용병이 비명처럼 외쳤다.

"트, 트롤! 트롤이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루크는 냉큼 뒤로 물러나 옆에 두었던 활과 화살을 집어 들었다.

용병들 대부분은 트롤을 보고 완전히 얼어버린 상태였다. 그나마 지휘관인 에릭은 정신줄을 잡고 있었지만 그뿐이었다.

제대로 상황을 파악하고 몸을 움직이는 건 루크와 로더릭이 전부였다.

"가이든 경, 검을 뽑으시오! 어서!"

"아, 알고 있소! 나도 안단 말이오!"

로더릭의 재촉에 가이든이 검을 뽑았지만 거기까지였다. 검을 쥔 가이든은 몸을 떨면서 슬슬 뒤로 물러섰다.

여차하면 당장 도망갈 태세였다. 그 모습에 로더릭은 이마에 핏대가 솟았다.

"제기랄! 물러서지 말고 도련님을 지키란 말이오!"

-크우우우

갑자기 벌어진 난리 통에 트롤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마치 기겁한 사냥감을 보고 즐기는 듯한 모양새였다.

로더릭을 제외하고는 다들 움직이는 순간 트롤을 자극할까 싶어 꿈쩍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때, 작은 화살이 트롤에게 날아갔다.

쐐애액, 퍽

-크워어어어억!

트롤이 고통에 찬 신음성을 내지르며 눈을 부여잡았다. 모두의 입이 떡 벌어지고 화살이 날아온 방향을 바라봤다.

화살을 쏜 루크는 냉큼 두 번째 화살을 메기며 용병들에게 호통을 쳤다.

"뭣들 하는 거냐? 정신 차리고 무기를 들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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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어, 어어···?"

용병들은 눈을 껌뻑거리며 트롤과 루트를 번갈아 바라봤다. 너무 갑작스러워서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갈피를 잡지 못한 상태였다.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건 이번에도 에릭이었다.

"도련님 말씀 못 들었냐, 이것들아! 무기 들어! 정신 차리고 무기 들란 말이다!"

"그, 그래! 무기!"

그제야 정신을 차린 용병들이 창칼과 도끼를 손에 쥐고 전투태세를 취했다.

아무리 겁을 먹었다 하더라도 오랜 세월에 의한 경험은 어디로 가지 않았다.

'저 도련님 덕에 최악의 사태는 넘겼군.'

에릭은 식은땀을 흘리며 자신의 도끼를 꽉 쥐었다. 최악의 사태는 공포에 질려 그대로 사방으로 흩어지는 일이었다.

그런 일이 벌어졌다면 트롤이 들이닥쳐 단숨에 쥐를 잡듯이 모조리 쓸어버렸을 터.

하지만 적절한 루크의 호통 덕에 모두가 대열을 유지할 수 있었다.

'시발, 문제는 내가 트롤을 잡아본 적이 없다는 건데.'

어떻게든 대열을 유지하긴 했지만, 그게 에릭의 한계였다. 지금 당장 에릭도 정신줄 잡고 있는 것만으로도 벅찼으니까.

입술을 잘근잘근 깨문 에릭에게 루크의 호통이 들려왔다.

"겁먹은 기색을 보이지 마라! 놈을 똑바로 쳐다봐!"

에릭과 용병들은 흠칫거리면서도 루크의 말에 따랐다. 화살을 맞은 트롤은 상처를 어루만지며 물러서고 있었다.

아까 전과 달리 확연하게 여유가 사라진 모습이었다. 루크는 트롤을 활로 겨눈 채 계속해서 외쳤다.

"크기를 보니 성체가 된 지 얼마 안 된 놈이다! 이대로 위협하면 충분히 쫓을 수 있어! 자리를 지키고 내가 신호를 하면 온 힘을 다해 소리쳐라!"

흔들림 없는 루크의 목소리에 용병들은 조금씩 자신감을 찾았다. 명령하는 자의 확신은 휘하 장병에게 용기를 주는 법.

지금 루크는 전장의 지휘관 자체였다.

"로더릭 경! 용병들 앞에 서서 검을 겨눠주십시오! 놈이 함부로 접근할 수 없도록!"

"도련님의 명을 받듭니다!"

로더릭은 왠지 모를 벅찬 감정을 억누르며 앞으로 나섰다. 번쩍거리는 갑옷과 검이 나타나자 트롤은 더욱 주춤거렸다.

하지만 이내 사납게 이를 드러내며 한 걸음 나섰다. 사냥감에게 질 수 없다는 오기였다.

-크와아아아악!

"···!"

코앞에서 내질러지는 포효에 용병들 전체가 확 굳어버렸다. 다리에 힘이 쭉 빠지는 게, 잠깐만 흔들려도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루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저 정도의 위협 쯤은 회귀 전에 질리도록 경험해 봤으니까.

포효를 내뱉는 동안 벌린 입을 향해 루크가 시위를 당겼다.

쐐애액, 퍽

-크워억! 워어어억!

벌어진 트롤의 입에 화살이 정통으로 꽂혔다. 괴로워하며 뒤로 물러서는 놈을 본 순간 루크가 외쳤다.

"물러서지 마라! 놈이 했던 것처럼 있는 힘껏 소리를 질러!"

"이, 이야아아아!"

"우아아아아!"

용병들 전체가 온 힘을 다해 괴성을 질렀다. 여러 명이 일제히 고함을 내지르자 트롤의 포효에 맞먹는 메아리가 울렸다.

한쪽 눈과 입속에 화살이 꽂힌 트롤은 기가 죽어서 점점 뒤로 물러섰다.

-그워어억···.

"좋아, 잘하고 있다!"

루크는 용병들을 독려하면서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사실 저 트롤에 대해선 회귀 전에도 잘 알고 있었다.

천적이 없는 편한 환경에서 살다 보니 싸움을 극도로 피하는 겁쟁이.

겉보기엔 무시무시하게 생겼지만, 실제로는 조금만 위험하다 싶으면 도망치는 놈이었다.

회귀 전에도 루크가 죽을 각오로 화살을 날려대자 금방 도망쳤다.

'지금까지 버티고 있는 건 용병들의 첫인상 때문이겠지.'

아무리 무식한 트롤이라도 자신을 보고 겁을 먹었는지 아닌지 정도는 구분한다.

아마 처음에 만난 용병들의 겁먹은 태도를 보고 기세가 올랐을 터. 그러나 루크와 용병들의 대처로 인해 그 기세도 다 죽었다.

남은 건 완전히 의지를 꺾을 한방이었다. 루크는 재빠르게 화살을 시위에서 쏘아냈다.

쐐애액, 퍽

-크와아악!

"제대로 들어갔다!"

또 한 발의 화살이 트롤의 눈에 꽂히자, 용병들이 환호했다. 아까 첫 번째로 맞았던 장소와 똑같은 왼쪽 눈이었다.

두 발의 화살이 정통으로 꽂힌 탓인지 놈이 계속해서 뒷걸음질 쳤다.

"놈이 기가 죽었다! 다시 한번 나서서···!?"

이어서 명령을 내리려던 루크는 뭔가 이상함을 깨달았다. 뒤로 물러서려던 트롤이 휘청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한참 이리저리 술에 취한 사람처럼 움직이던 놈은 이내 머리부터 뒤로 넘어갔다.

쿠웅

트롤의 거체가 바닥에 쓰러지자, 모든 사람이 침묵했다. 루크마저도 당황해서 말을 잃었다.

재생력과 두꺼운 살가죽 때문에 어지간해서는 고슴도치가 되어도 안 죽는 트롤이다. 그런데 화살 세 방에 죽었다고?

혹시 죽은 척을 하는 건가 싶었지만 꿈쩍도 할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어떻게 된 거야? 죽은 건가?"

"누가 확인 좀 해봐."

수군거리던 용병들 사이에서 한 명이 나와 트롤에게 다가갔다. 용병이 조심스레 다가가 발로 트롤을 툭툭 걷어찼지만, 놈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놈의 얼굴을 자세히 확인한 용병은 넋이 나간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주, 죽었어."

[ 완벽한 사격으로 본인보다 강력한 몬스터를 처치했습니다. ]

[ 90% 이상의 공헌도를 올렸기에 경험치가 대폭 상승합니다. ]

[ 사격 등급이 '숙련자'에서 '전문가'로 상승합니다. ]

메시지가 루크의 귓가에 들려오는 것과 동시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리고 잠시 후, 일제히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시발! 이번엔 진짜 죽는 줄 알았네!"

"세상에, 트롤과 마주치고 살아남을 줄이야!"

"꼴 좋다, 염병할 몬스터 새끼!"

용병들은 서로 얼싸안고 구사일생한 기쁨을 만끽했다. 일부는 긴장이 풀려 주저앉고, 또 일부는 트롤의 시체를 걷어차며 침을 뱉었다.

로더릭은 감동한 얼굴로 루크에게 다가와 무릎을 꿇었다.

"대단하십니다! 트롤을 겨우 화살 세 방으로 죽이시다니! 실로 서사시에 나올 만한 업적입니다!"

"아니, 그게···."

루크는 할 말을 못 찾고 혀를 굴렸다. 사실 그냥 상처를 입혀 쫓을 용도로 쐈을 뿐이다.

아무리 눈에 맞았다지만 그게 뇌까지 직통으로 들어가서 끝내버릴 줄은 누가 알았겠나.

회귀 전에 상대한 몬스터 중에는 머리의 반이 날아가고도 살아 움직이는 놈들도 있었는데.

잠깐 생각하던 루크는 이내 얼굴을 굳히고 말했다.

"···눈은 모든 생물의 약점. 아무리 재생력이 강한 트롤이라도 집중적으로 노리면 쓰러질 거라 여겼습니다."

"오오, 역시! 그렇다면 용병들에게 소리를 지르며 위협하도록 지시하신 건?"

"놈을 멈춰 세우기 위해서였지요. 만약 트롤을 쓰러뜨릴 수 있다고 말했다면 용병들은 믿지 않고 따르기를 거부했을 겁니다. 그렇기에 위협하여 트롤을 쫓는 게 첫 목표인 것처럼 말했습니다."

"실로 냉철한 판단이십니다!"

어차피 죽은 트롤이다. 공적을 조금 부풀린다고 문제 될 건 없지 않은가.

****

트롤이 죽고 나자 남은 건 시체를 어떻게 하느냐였다. 몬스터의 시체에서 나오는 부산물은 제법 돈이 되니까.

이 문제는 최우선권이 있는 루크의 한마디로 간단히 끝났다.

"트롤 시체는 용병들에게 넘기지."

"예!?"

에릭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트롤이 어떤 놈인가. 피는 연금술 재료로 값비싸게 팔리고, 가죽도 상당한 수요가 있다.

오죽하면 트롤 하나를 온전히 해체하면 저택 두 채가 나온다는 소리가 있겠나.

그런데 그걸 통째로 넘겨주다니?

"저, 정말 가져가도 되는 겁니까?"

"그래. 자네들의 협조가 없었다면 힘들었을 테니까. 수고한 만큼 보상은 받아야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에릭은 몇 번이나 땅에 머리를 조아린 후 용병들에게 달려갔다. 잠시 후, 환호성과 함께 용병들이 트롤 시체에 달려들었다.

차례차례 해체되는 트롤을 보며 로더릭이 조금 아쉬운 듯이 중얼거렸다.

"아깝군요. 저걸 온전히 가져갈 수만 있다면 도련님의 업적을 알릴 수 있었는데."

"저는 괜찮습니다."

루크는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빈말이 아니라 정말 아쉬울 거 없었다.

'옮길 인력도 부족하고, 해체할 도구도 없고, 용병들에게 추가금도 나가는 데 차라리 주는 게 낫지.'

거대한 몬스터의 해체 작업은 쉬운 게 아니다. 피를 뽑을 도구와 보관용 용기, 썩지 않게 후속 처리 등 신경 써야 할 게 많았다.

당연히 미리 준비를 하지 않고 대충 해체하면 부산물 대부분을 못 쓰게 된다.

아마 저 트롤을 해체해도 부산물 중 7할은 땅에 버리게 될 거다.

추가로 드는 비용과 고생까지 생각하면 차라리 용병들에게 인심을 쓰는 게 나았다.

"흠흠, 그래도 용병 놈들에게 너무 과분한 선물 같습니다. 제가 일부라도 가져오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때 옆에서 스리슬쩍 튀어나온 가이든이 한마디를 보탰다. 방금 전의 추태는 진즉 잊어버렸다는 태도였다.

로더릭이 도끼눈을 뜨고 노려봤으나 가이든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대로 없던 일로 치고 섞이겠다는 결심이 빤히 보였다.

루크는 그 모습에 피식 웃으며 말했다.

"가이든 경, 저건 전혀 아까워할 만한 게 아닙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어차피 가이든 경은 아무것도 못 받아갔을 테니까요."

싸울 때 한 것도 없는 주제에 무슨 떡고물을 먹겠다고 기어왔냐는 뜻이었다. 직설적인 비아냥에 가이든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어떻게든 변명거리를 찾으려고 했으나, 루크와 로더릭은 듣지도 않고 자리를 떴다.

혼자 남은 가이든은 뿌득 소리가 나도록 이를 갈았다.

'빌어먹을! 싸울 때 조금 물러섰다고 이런 수모를 주다니!'

목숨이 위험한 상황 아니던가? 하물며 상대는 자칫하면 순식간에 기사를 짖이기는 트롤이다.

기사라 하더라도 혼란에 빠져 정신을 못 차리는 일이야 충분히 있을 수 있다. 그런데 고작 그 정도로 면전에서 저딴 소리를 하다니.

사그라들던 복수심이 다시 불타올랐다.

'이걸로 끝난 줄 아느냐? 아직이다!'

가이든은 서자에게 복수할 방법을 찾아 머리를 굴렸다. 번스타인 백작가까지는 한참 더 가야 한다.

그동안 할 수 있는 일은 아주 많았다. 계획을 정리한 가이든이 한창 해체 작업 중인 에릭을 불렀다.

"용병대장! 시킬 일이 있다!"

"싫수다."

"뭐, 뭣?"

"계약 끝났수. 일 있으면 댁이 직접 하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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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

일방적인 계약 파기에 가이든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이놈! 네가 이러고도 무사할 것 같으냐?"

"무사하지 않으면? 어찌 되는데?"

가이든의 협박에도 에릭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용병이 고용주에게 반발하는 건 드물지 않은 일이다.

봉급이 계속 밀리거나 약속을 뒤집는 경우, 그리고 신용이나 인망을 완전히 잃어버린 경우 등.

아무리 봐도 글렀다고 판단하면 그 자리에서 다 뒤집어엎기도 한다. 에릭이 보기에는 지금이 딱 그런 때였다.

"내가 누구인지 잊었더냐? 번스타인 가문의 봉신, 가이든 보렐이다!"

그러나 가이든은 여전히 큰소리를 쳤다. 고용주의 뒷배나 세력이 압도적이면 아무리 막 대하더라도 함부로 굴 수 없는 법.

지금까지 용병을 마음껏 부릴 수 있었던 것도 이 번스타인 가문이라는 배경 덕이었다.

"이런 일방적인 계약 파기는 백작 각하께서 용서치 않는다!"

"오, 그러셔? 참 부하를 아끼시는 분이군. 그런데 그 봉신이 자기 아들을 죽이려 했다는 걸 알아도 계속 아끼실까?"

"뭐, 뭐?"

가이든의 눈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죽이려 하다니? 비록 겁을 줄 의도긴 했지만 죽일 생각은 손톱만치도 없었다.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거냐!"

"도련님을 몬스터 출몰 지역으로 데려가라며?"

"내가 언제 그런···!"

"이봐, 겁쟁이 기사 양반."

언제나처럼 시치미를 떼려는 가이든에게 에릭이 속삭였다.

"사실이야. 우리 용병단이 죄다 들은 사실이라고. 도련님과 저 기사 나리께 얘기하고 백작가까지 증인으로 따라 갈까? 응?"

"······."

가이든은 그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금껏 마음대로 굴 수 있었던 건 어디까지 자신의 발언권이 우위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트롤 사건을 거쳐 가이든의 발언권은 땅에 떨어졌다. 이젠 서자와 로더릭, 용병들 전부가 가이든을 백안시하는 상황.

'여기 있는 모든 이가 합세해서 이놈의 주장에 힘을 실어준다면···.'

가이든에게 남은 건 파멸뿐이었다. 현실을 직시하자 전신에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에릭은 히죽히죽 웃으며 입맛을 다셨다.

"어이구, 입이 간지러워라. 이거 왜 이러지? 갑자기 누군가의 명령을 마구 떠벌리고 싶어지는데?"

"이, 이보게."

"으윽! 이거 도저히 못 참겠군! 도련···!"

"알았네, 알았다고! 계약이든 뭐든 자네 마음대로 하게!"

가이든은 에릭의 팔을 붙잡으며 꽥 소리쳤다. 그러나 에릭은 가볍게 어깨만 으쓱했다.

"그걸로 끝내려고?"

"뭐?"

"잔금은 지급하셔야지. 성공적으로 임무를 완수했잖아?"

"그게 무슨!"

"으헙! 또 입이 간질거린다!"

"······."

몸을 들썩이는 에릭의 모습에 가이든이 얼굴을 구겼다. 가이든에게 선택권따윈 없었다.

****

이후의 여행길은 순탄했다. 가이든은 다른 수작을 부릴 엄두도 내지 못했고, 루크 일행은 최단 거리로 백작가에 향했다.

이 시기 동부 지역의 치안이 상당히 안정되어 있던 것도 이유 중 하나였다.

용병단은 루크 일행이 번화한 도시에 이르렀을 때 해산했다. 더는 가는 길에 위협이 될 게 없었으니까.

"수고했네."

"천만의 말씀입니다. 앞으로 또 용병을 쓰실 일이 있다면 저희 검은 도끼 용병단을 기억해 주십시오."

에릭은 루크에게 극도로 공손한 자세를 유지했다. 씀씀이가 넉넉해야 하고, 무리한 명령을 시키지 않고, 용병의 체면을 지켜주는 도련님.

루크는 용병에게 있어서 이 이상 없을 만큼 최고의 고용주였다. 가능하면 좋은 인상을 남겨서 나중에 또 고용되고 싶을 만큼.

"알겠네. 꼭 기억해두지. 다른 일이 생기면 가장 먼저 부르겠네."

"감사합니다!"

긍정적인 대답에 에릭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루크 입장에서도 용병단과의 연줄이 생기는 건 나쁠 거 없었다.

'이 세계는 용병 고용할 일이 자주 생기니까.'

분쟁에서 무력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게 바로 용병이다. 귀족 입장에서 가장 좋은 건 당연히 상비군이지만, 상비군은 그 자체로 돈 먹는 하마.

겨우 수백 명의 상비군을 몇 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어지간한 영지의 기둥뿌리가 뽑힌다.

때문에 귀족들은 분쟁이 일어날 때만 돈을 써서 용병을 고용하곤 했다.

'저 녀석들 정도면 꽤 괜찮은 용병이지.'

용병단도 구성원의 성향에 따라 천차만별. 명령을 더럽게 안 듣고 천방지축인 놈들이 있는가 하면, 군대 못지않게 규율이 철저한 놈들도 있다.

루크가 볼 때 검은 도끼 용병단은 충분히 합격점이었다. 돈만 잘 쥐여주면 명령에 충실히 따르는 데다 트롤과 마주치고도 도망치지 않았으니까.

검은 도끼 용병단이 떠난 후, 여행은 이전보다 더 쾌적해졌다. 도시가 연달아 나와서 가는 곳마다 질 좋은 여관이 많았던 덕이다.

"가이든 경, 숙박비를 내주십시오."

"도련님, 대체 왜 저보고만 내라 하십니까? 로더릭 경도 있지 않습니까."

"싫습니까? 검도 휘두르기 싫고 돈도 내기 싫으면 도대체 경이 하는 게 뭡니까?"

루크의 일갈에 가이든은 입다물고 숙박비를 지불했다. 어떻게 그런 모욕을 하냐며 소리치기엔 저지른 잘못이 너무 컸다.

트롤에게서 서자를 지키기는커녕 뒤로 물러섰으니 잘해봤자 좌천, 최악의 경우 불명예를 떠안고 추방당할 수 있었다.

"그, 그럼 제 말이라도 돌려주십시오. 도련님께는 더 어울리는 군마가 있지 않겠습니까? 예를 들면 저 커다란 말이라던가.

"글쎄요, 전 이 녀석이 더 마음에 드는군요. 그냥 경이 저 말을 사는 게 어떻습니까?"

"······."

말을 돌려받기 위한 마지막 시도도 격침되었다. 말은 종류에 따라 가격이 천차만별이지만, 군마는 특히나 가격이 엄청나다.

그렇기에 원래 말을 돌려받고 서자가 탈 말은 가문에 경비로 청구할 생각이었다. 그럼 루크의 사치로 떠넘길 수 있으니까.

당연히 그 노림수를 못 알아챌 루크가 아니었다.

"경께서 불만이 참 많으신가 봅니다. 아버지께 경의 용감한 모습을 알려드리면 만족하실까요?"

"도련님께서 원하신다면 제가 증인이 되도록 하지요."

"아, 아닙니다! 불만 따윈 전혀 없습니다!"

루크의 최후통첩과 로더릭의 호응에 결국 가이든은 백기를 들었다. 어깨를 푹 숙인 가이든의 모습을 보며 루크는 신나게 닭다리를 뜯었다.

'크, 보기 좋구만.'

회귀 전에는 얼마나 자신을 괴롭히던 놈이었던가? 저 꼴을 보니 십 년 묵은 체증이 쑥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이후로도 가이든은 물주 역할을 톡톡히 했다. 일부러 경비 청구가 불가능할 만큼 비싼 여관으로 골라갔기에 갈수록 가이든의 얼굴은 죽어갔다.

가이든의 주머니가 이내 은화 몇 닢 남기고 바닥을 드러냈을 무렵, 드디어 루크 일행은 번스타인 백작가에 도착했다.

****

번스타인 영지는 백색의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고대의 석공술로 만들어졌다는 성은 웅장한 위용을 자랑했다.

루크 일행이 성에 다가서자 세 사람을 발견한 경비병이 앞으로 나섰다.

"멈추십시오. 어느 영지에서 오신 분들··· 흡!"

로더릭과 가이든을 알아본 경비병은 기겁하며 고개를 숙였다.

"로더릭 경과 가이든 경께 인사드립니다!"

"수고하는군. 주군의 명에 따라 임무를 마치고 오는 중이니 문을 열도록."

"예! 그런데 이 분은···?"

"네가 알 필요 없는 분이지. 열어라."

"죄, 죄송합니다!"

로더릭의 말에 창백해진 경비병은 허겁지겁 성문을 개방했다. 루크 일행이 안으로 들어가자, 세 사람의 특이한 모습에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그 시선에 가이든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말을 탄 두 사람 사이에 끼어서 혼자 걷는 중이지 않은가.

"가이든 경은 이제 쉬시는 게 어떻습니까? 안내는 로더릭 경만 계셔도 충분할 것 같습니다."

"그, 그러겠습니다."

루크의 마지막 자비에 가이든이 냉큼 뒤로 빠졌다. 루크는 피식 웃고는 로더릭과 함께 성으로 향했다.

사람들은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며 저들끼리 숙덕댔다.

"옆에 분은 로더릭 경인데, 다른 사람은 누구지?"

"옷차림은 귀족 같지 않은데 말은 타고 있고."

"거, 있잖아. 영주님의 바깥 자식을 찾는다는 이야기."

"허어. 그럼 저 소년이?"

수군거림을 들은 로더릭이 도끼눈을 뜨자, 사람들이 깜짝 놀라 흩어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두 사람이 멀어지면 다시 모여서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저 무지렁이 놈들이···!"

"그냥 두십시오. 신기하니 저러겠지요."

빈말이 아니라 루크는 정말로 신경 쓰지 않았다. 안 그래도 놀 거리가 적은 세계다.

관심을 끌 만한 화젯거리가 있으면 신이 나서 떠들기 마련. 저런 수군거림에 일일이 반응하면 끝이 없었다.

두 사람이 영주 저택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마중이 나와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로더릭 경."

"고든 공!"

늙은 집사를 본 로더릭이 깜짝 놀라 말에서 내렸다. 집사장 고든. 선대 백작 때부터 가문을 섬긴 충신이자 사실상 백작의 최측근.

실질적인 지위로 따진다면 어지간한 기사보다 훨씬 높은 이가 바로 고든이었다. 로더릭은 고든에게 공손히 인사를 올렸다.

"기사 로더릭이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왔습니다. 주군께서는 지금 계십니까?"

"격무에 지치셔서 휴식 중이십니다. 임무를 완수하셨다면 그분이 바로···?"

고든의 시선이 루크에게로 향했다. 로더릭이 소개를 하기 직전, 루크가 직접 나서서 고개를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고든 공. 노먼의 손자이자 리리아의 아들인 루크라고 합니다."

루크의 인사를 받은 고든의 눈이 이채를 띠었다. 당당하지만 건방지지 않고, 공손하지만 비굴하지 않다.

그러면서도 동작에는 절도가 있어서 왠지 모를 기품이 느껴졌다. 비록 예법에는 걸맞지 않지만, 그야 배운 적이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허, 정말 평민들 사이에서 자란 게 맞단 말인가?'

고든은 내심 감탄했다. 예법만 제대로 갖춘다면 여느 귀족 집안 도련님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지 않은가.

'역시 용의 피는 속일 수 없는 건가.'

설령 평민들 사이에서 자랐다고 해도 용의 새끼는 용으로 자랄 수밖에 없는 법.

고귀한 핏줄은 뭐가 달라도 한참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루크가 들으면 코웃음 칠만한 생각이었다.

'내가 이놈의 분위기 잡는 거 배우느라 10년이 걸렸다.'

처음 서자로 가문에 왔을 때는 돌아버리는 줄 알았다. 뭔 실수만 하면 '천한 피는 어쩔 수 없군' 같은 개소리를 들어야 했으니까.

심지어 양쪽 다 귀족 핏줄인 놈들은 망나니짓을 해도 '철없는 녀석' 정도로 끝나니 더 빡쳤다.

그놈의 천한 피 소리 안 들으려고 죽어라 '귀족적인 분위기 잡기'를 연습한 지 10년.

이젠 어지간한 귀족보다 더한 고귀함을 연기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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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집사장 고든이 도련님을 뵙습니다. 실로 헌헌하신 분이시군요."

"과찬이십니다."

루크의 마음을 알 리 없는 고든은 감탄하며 마주 인사했다. 서로 간의 인사가 끝나자 고든 쪽에서 노을이 지는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도련님이 오셨으니 바로 백작 각하께 알려드리는 게 맞겠으나, 오늘은 이미 날이 저물었군요. 여독이 쌓이셨을 테니 푹 쉬시고 내일 뵈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기꺼이 그러겠습니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고든의 제안에 루크는 선선히 수긍했다. 사실 날이 저물었다는 소리는 핑계에 가까웠다.

중요한 일이라면 얼마든지 시간을 낼 수 있으니까. 그럼에도 굳이 하루를 미룬 건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나보고 좀 꾸미고 오라는 거겠지.'

겸사겸사 백작이 아들을 만나기 전에 마음의 준비도 하고 말이다. 루크에게도 나쁠 거 없는 제안이었다.

아무리 얼굴과 태도가 좋아도 차림이 후줄근하면 매력의 반절은 깎아 먹는 법.

첫 만남의 중요성을 생각하면 오히려 먼저 부탁하고 싶은 제안이었다.

"하인들이 욕실로 안내해 드릴 겁니다. 그 이후 객실에 모시겠습니다."

"예. 그럼 나중에 또 뵙겠습니다."

마지막까지 정중한 몸가짐을 유지하며 루크는 등을 돌렸다. 그 모습에 고든은 눈을 반짝이며 수염을 쓰다듬었다.

'참으로 비범하시구나. 바깥에서 자라신 분이 오히려 다른 도련님들보다··· 어이쿠, 이러면 안 되지.'

이어지던 상념을 끊기 위해 머리를 흔들었다. 그 이상 깊게 생각하는 건 불충이었다.

지금 해야 할 일은 다른 사람과의 비교가 아니라, 자신의 주인께 전할만한 정보였다.

고든은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온 로더릭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로더릭 경께서도 수고하셨습니다. 고생이 많으셨겠지요."

"주군의 임무를 수행하는데 어찌 고난을 두려워하겠습니까?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을 뿐입니다."

당당한 대답에 고든이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젊은 기사이긴 하나 로더릭은 충성심이 깊고 성실한 이였다.

그렇다면 하는 말에 거짓이 없다고 봐도 될 터.

"도련님을 모셔오며 가까이서 보셨을 텐데, 어떤 분이셨습니까?"

"대단하신 분이셨습니다! 용의 피를 이으신 분이 틀림없더군요!"

"그, 그렇습니까?"

로더릭의 말에 고든이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지금까지 점잖게 굴던 기사가 이리 흥분하다니.

마치 서사시에 나오는 영웅이라도 만난 것 같은 태도가 아닌가?

한 번 이야기를 시작한 로더릭은 흥분에 젖은 채 계속 떠들었다.

"그 여정은 모험이었습니다. 모든 일은 제가 저 벽지의 마을에 도착하면서 시작되었지요."

"흠흠, 그것참 궁금하군요.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예. 저는 아무런 낌새를 눈치채지 못하고 마을로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비열한 마을 놈들에 의해···."

고든의 입가에 쓴웃음이 맺혔다. 로더릭은 좋은 기사이긴 했으나 그만큼 기사도와 서사시를 동경하는 면이 컸다.

이런 기사들은 작은 모험도 크게 부풀려서 대단한 것처럼 여기고는 했다.

'보아하니 이야깃거리가 될 만한 일이라도 있었나 보군.'

그렇게 생각한 고든은 가벼운 자세로 이야기를 경청했다. 그리고 이야기가 다 끝났을 때.

고든의 눈은 불신과 혼란으로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

"으허, 좋다."

뜨끈한 목욕물에 잠긴 루크의 얼굴이 사르르 풀렸다. 넓은 탕을 혼자 차지하고 몸을 담근 게 얼마 만인지.

사실상 회귀 전에 가문을 나온 후에는 한 번도 못해 본 사치였다.

'내가 그 고생 한 거 생각하면 지금도 이가 갈린다.'

안 그래도 빈부에 따라 생활 수준이 극과 극인 세계다. 호기롭게 가문을 나왔을 때는 이왕 이렇게 된 거 모험이라도 즐기자고 생각했다.

며칠이 지나고 나서야 그게 다 헛생각인 걸 알았다. 모험이고 자시고 사는 게 불편해서 미쳐버릴 지경이었다.

'식사는 더럽게 맛없고, 벌레는 미친 듯이 꼬이고, 무기는 관리 좀 소홀히 하면 금방 못쓰게 되고.'

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면 몸이 떨렸다. 두 번 다시 그런 밑바닥 생활을 할 생각은 없었다.

회귀 전에 온갖 고생을 한 만큼, 이번 생에서는 가능한 한 위로 올라가서 말년을 편하게 살 생각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첫인상이지.'

원래 사람이라는 게 다 그렇다. 딱히 특출난 게 없으면 '평범하게 지원해주면 되겠지'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놈이 천재라면? 지원을 쏟아부으면 역사에 남을 인물이 될 것 같다면?

'이놈이 어디까지 가나 한번 보자!'라는 호기심 때문에라도 팍팍 밀어주기 마련.

루크는 그런 비범함을 어필하여 있는 대로 백작가의 지원을 땡겨올 생각이었다.

'뭐, 이미 떡밥은 다 뿌려뒀지만.'

멍청한 가이든 덕에 활약은 넘칠 만큼 했다. 나머진 로더릭을 통해 아버지한테 전해질 터.

이제 첫인상만 제대로 박으면 된다.

"도련님, 몸을 닦아드리겠습니다."

"알았다."

하녀의 말에 루크는 담그고 있던 몸을 일으켰다. 조금 부끄럽지만 이 세계의 귀족들은 몸을 닦는 것도 하인에게 맡기는 게 보통.

이럴 때 의연하게 있는 일 역시 귀족의 품격 중 하나다. 창피하다고 하면 오히려 '평민의 피는 어쩔 수 없군' 같은 소리나 듣는다.

"그럼 실례하겠··· 어머나."

"무슨 일이지?"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녀들은 잠시 멈칫했지만 곧 루크의 몸을 세심하게 닦았다. 물기를 닦아낸 루크는 개운함에 미소 지으며 욕탕을 나갔다.

잠시 후, 루크가 사라진 욕탕에서 하녀들은 저들끼리 속닥였다.

"세상에, 아직 나이도 다 안 차신 분이 튼실하시네."

"역시 귀족은 작은 토막도 귀족인 걸까?"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귀족의 품격을 과시하고 있던 루크였다.

****

고든은 백작의 집무실로 향하고 있었다. 들을 만한 건 모두 들었으니 자신의 주인에게 전달해야 했다.

하지만 동시에 반신반의하는 마음이 아직 있었다.

'정말 진실이란 말인가?'

로더릭의 이야기는 과장없이 모험이라 부르기에 적합했다. 함정에 빠져 죽을 뻔했던 것. 운명적인 만남으로 도련님에게 구해진 것.

우연히 가이든이 용병을 거느리고 찾아와 마을을 극적으로 처벌한 것. 트롤과의 전투 및 루크가 화살로 놈을 쓰러뜨린 것까지.

겨우 한 사람을 찾기 위해 벌어진 사건치고는 지나치게 많았다.

'로더릭 경만 아니면 허무맹랑한 이야기라 생각했을 것을.'

처음부터 범상치 않다고 여기긴 했지만, 이건 좀 심하지 않은가. 서사시에 나오는 영웅의 소년기에 비견되는 수준이다.

로더릭이 그렇게 매료된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갔다.

집무실에 다다른 고든은 조심스레 문을 두드렸다.

"백작 각하, 고든입니다."

"들어오게."

허락과 함께 집무실의 문이 열렸다. 자색 눈동자와 짙은 갈색 머리칼을 가진 중년의 남자.

그가 바로 당대 번스타인 가문의 가주, 레너드 번스타인이었다.

레너드 백작은 한창 보던 서류를 내려놓고 고든에게 시선을 돌렸다.

"내 아들을 찾았다고 들었네. 어떻게 되었나?"

"여독으로 피로하신 것 같아 객실에 안내해드렸습니다. 내일 낮에 접견 예정을 잡고자 합니다만."

"그렇게 해주게. 일단 만나 봐야지."

백작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심란함이 아니라 어깨를 누르던 짐을 내린 것 같은 안도의 한숨이었다.

이제야 비로소 아비의 책무를 다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자네가 보기엔 어떤가."

"도련님 말씀이십니까?"

"그렇네. 평민들 사이에서 컸다고 들었네만 조금 볼만 하던가?"

물어보면서도 백작은 딱히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사람은 자리가 만드는 법. 평민으로 자랐다면 행동거지도 평민일 가능성이 높았다.

'귀족으로 살기 위해 많은 걸 가르쳐야겠지.'

백작은 미리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백작의 예상과 달리 고든은 애매모호한 표정을 지었다.

"솔직히 제가 뭐라 하기 힘듭니다."

"무슨 소리인가?"

"도련님을 모셔온 로더릭 경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만···."

고든은 방금 전 로더릭의 설명을 똑같이 반복했다. 한바탕 긴 이야기가 끝나자 백작은 멍하니 입을 벌렸다.

"그게 정말인가? 착각이나 꾸며낸 건 아니고?"

"로더릭 경이 그리 말씀하셨습니다. 적어도 거짓말을 할 분은 아니지요."

"그렇지. 그는 기사도를 목숨처럼 중히 여기는 진정한 기사니."

로더릭에 대해서는 백작도 잘 알고 있었다.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요즘 보기 드문 충직한 기사.

자신의 감정을 부풀려 말할지언정, 과장해서 없는 일을 만들어 낼 사람은 절대 아니었다.

"허어, 그럼 그게 모두 사실이란 소리군."

백작의 입가가 씰룩였다. 비록 얼굴도 보지 못한 자식이지만 영웅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아비로서 왠지 모를 기쁨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무리 평민들 사이에서 자라셨다 한들, 용의 피는 숨길 수 없다는 거겠지요."

"크흠. 아무렴 내 자식이라면 그래야지."

가려운 곳을 살살 긁어주는 말에 백작이 헛기침을 하며 감정을 숨겼다. 그때, 집무실 바깥에서 한 발소리가 빠르게 다가왔다.

"여보!"

쾅, 소리가 나도록 문을 열어제낀 건 백작 부인 헬레나였다. 중년의 나이에도 여전히 아름다움을 간직한 귀부인.

그러나 날카롭게 치켜뜬 눈과 자주 찡그린 탓에 생긴 미간의 주름이 미모를 해치고 있었다.

"부인, 무슨 일이시오?"

"들었어요! 그 천한 피가 섞인 녀석이 왔다면서요!"

헬레나의 말에 백작이 눈을 찌푸렸다.

"말을 조심하시오. 비록 바깥에서 태어났지만 그래도 내 자식이오."

"그게 자랑인가요? 나를 놔두고 딴 여자랑 뒹굴어서 서자를 만든 게?"

"크흠, 크흐흠!"

헬레나의 직설적인 말에 백작은 연신 헛기침을 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순전히 자신의 책임이 맞았으니까.

가정에 충실하지 못했으니 부인의 원망 정도는 받아들여야 했다.

"긴말할 것 없어요. 그놈을 당장 내보내세요."

"말도 안 되는 소리 마시오."

"평민을 평민이 사는 곳으로 쫓아내라는 게 말이 왜 안 되죠? 설마 귀족으로 키울 생각은 아니겠죠?"

"아니, 그럴 생각이오."

"당신 미쳤어요? 천한 피로 가문을 더럽힐 생각이에요?"

핏발이 선 눈으로 추궁하는 헬레나의 모습에 백작이 눈을 찌푸렸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나갔다.

"내 자식이라고 했잖소."

"나는 인정 못 해요. 그건 당신의 실수 그 자체···."

"헬레나!"

분노한 백작의 외침에 헬레나가 움찔거렸다. 아무리 여자의 한이 깊다고 한들 전장에서 수십 년을 보낸 기사의 압력만큼은 아니었다.

백작은 헬레나와 시선을 마주친 채 또박또박 말했다.

"확실히 나는 가정에 소홀했지. 그건 내 실수고 나의 잘못이오. 그러니 당신은 나를 책망해도 마땅한 이유가 있소."

"그럼···."

"하지만 동시에 나는 아버지의 책임도 지고 있소. 그건 당신에게 한 잘못과는 별개이며, 당신이 끼어들만한 것도 아니오. 그걸 명심하시오."

백작의 단호한 말에 헬레나가 입술을 깨물었다. 안 그래도 책임과 의무에 집착하는 레너드 백작이다.

서자를 키우는 걸 책임으로 인식한 순간 이제 무슨 소릴 해도 안 통할 게 뻔했다.

"좋아요. 그럼 나도 그 녀석을 같이 만나겠어요."

"당신이?"

"안 되나요? 나는 번스타인 가문의 안주인이에요. 당신이 가족을 새로 들이겠다고 한다면 만날 권리가 있어요."

"으음."

백작은 눈을 찌푸렸으나 그녀의 말을 부정하진 못했다. 틀린 소리는 아니었으니까.

"알겠소. 하지만 당신의 말대로라면 그 아이는 이미 가족이오. 자신의 말을 어겨가며 상전 노릇을 하려 들지 마시오."

"물론이죠."

입으로는 수긍했지만 헬레나의 속마음은 달랐다. 비록 가문으로 들어오는 건 막지 못하겠지만 순순히 가족 취급해줄 생각도 없었다.

'차라리 평민으로 살아가는 게 나았다고 생각하게 해주마.'

전쟁터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기사라면 모를까, 겨우 열다섯 먹은 꼬맹이 하나 손에 쥐고 흔드는 건 쉬운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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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다음 날 아침. 객실에서 숙면을 취한 후 아침 식사를 마친 루크에게 고든이 찾아왔다.

"어젯밤은 잘 주무셨습니까?"

"배려해주신 덕분에 푹 쉬었습니다."

"다행입니다. 백작 각하께서 도련님을 만나고자 하십니다."

드디어! 루크의 눈이 반짝였다. 이전까지의 모든 준비는 바로 이때를 위해서였다.

사실상 이 앞이 인생의 분기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고든이 손뼉을 치자 하인들이 공손하게 옷을 들고 들어왔다.

"백작 각하를 만나기 전에 착용하실 예복을 준비했습니다. 조금 불편하시더라도 예복을 착용해 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오히려 제가 감사하지요. 이런 준비까지 해주셨으니."

루크는 기꺼이 예복으로 갈아입었다. 능력과 성격만큼이나 외견도 중요시하는 세상이다.

거기에 날개를 달아준다는 데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예복은 단아한 흑색에 금실로 자수가 새겨진 옷이었다. 정갈한 아름다움 사이에 숨은 화려함이 목적인 것 같았다.

하인들의 도움을 받아 옷을 갈아입자 그 모습을 본 고든이 감탄했다.

"이렇게 꾸미시니 실로 빛이 나는 것 같습니다. 진부한 표현일지 모르지만, 동화 속 왕자님 같으시군요."

"과찬이십니다."

진심이 담긴 고든의 칭찬에 루크는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이 세상에서 환생하고 득을 본 게 있다면 바로 외모였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유전자 덕에 루크의 외모는 미남에 가까운 편이었다.

거기에 멋들어진 옷까지 더해지니 정말 귀공자라 해도 위화감이 없을 지경이었다.

"그럼 백작 각하께 안내해드리겠습니다."

고든은 루크를 데리고 백작의 집무실로 안내했다. 루크는 흘낏 저택을 훑어봤다.

회귀 전에 질리도록 봤던 저택이지만 다시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귀족이니까 당연하다고 여겼던 양탄자와 장식물들. 저 하나하나가 다 가난한 기사는 엄두도 못 내는 고급품이 아닌가.

'내가 이번 생에는 반드시 이보다 더 성공하고 만다.'

루크는 주먹을 꽉 쥐고 인생 목표를 되새겼다. 그러기 위해서 중요한 게 바로 지금 있을 만남이었다.

잠시 후, 집무실에 도착한 고든이 문을 두드렸다.

"백작 각하, 도련님을 모시고 왔습니다."

"들여보내게."

고든은 거기서 멈춰 서서 루크에게 고개를 숙였다. 루크는 살짝 마주 인사하고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어서 오거라."

"······."

집무실에는 두 사람이 있었다. 한 사람은 갈색 머리칼과 자색 눈동자를 가진 미중년의 귀족, 레너드 번스타인.

또 한 사람은 백작 부인인 헬레나였다. 두 사람을 빠르게 훑어본 루크가 깊게 고개를 숙였다.

"노먼의 손자이자 리리아의 아들, 루크가 아버지와 백작 부인을 뵙습니다."

****

'허어, 사냥꾼으로 살았다고 들었거늘.'

레너드 백작은 자신도 모르게 흘러나오려던 감탄성을 삼켰다. 명문 귀족가의 적장자라고 해도 믿을 만한 분위기다.

단순히 생김새만 그럴싸한 게 아니었다. 아무리 껍데기를 잘 꾸며도 내면은 몸가짐으로 알 수 있는 법.

루크의 몸가짐은 완벽한 귀족의 품격을 갖추고 있었다.

'예법만 갖춘다면 누가 이 아이를 평민으로 보겠는가?'

당장 백작 자신부터가 구분하지 못할 것 같았다. 감탄을 삼키는 백작과 달리 헬레나는 부채로 가린 입술을 깨물었다.

평민의 피가 섞인 주제에 저런 품격을 보여주는 것 자체가 그녀의 화를 돋구었다.

백작은 헬레나의 속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미소지었다.

"그래, 내가 네 아비다. 이리 만나게 되어 기쁘구나. 리리아에게서 내 얘기를 들은 게 있느냐?"

뿌직

레너드 백작의 말에 무언가 부러지는 소리가 울렸다. 헬레나가 너무 힘을 세게 줘서 부챗살 하나가 나간 탓이었다.

아무런 악의 없이 헬레나의 역린을 건드리는 모습에 루크가 쓴웃음을 지었다.

'여전히 눈치가 없으시네.'

레너드 백작에 대한 루크의 평가는 간단했다. 자신의 책임과 의무를 철저히 지키는 고귀함의 화신이자 감수성 풍부한 로맨티시스트.

하지만 동시에 타인의 음습한 감정에는 유난히 눈치가 없고 둔감한 남자기도 했다.

오죽하면 회귀 전에 고발당한 가이든이 '제 명예를 걸고 도련님을 괴롭힌 적 없습니다'라고 하니 덥석 믿었겠는가.

'덕분에 고생도 많이 했는데.'

루크가 귀족이 된 건 백작의 정의로운 성격 덕이었지만, 동시에 그놈의 성격 때문에 내부의 괴롭힘에서 못 벗어나기도 했다.

가해자 측에서 '제가 그런 추잡한 짓을 왜 하겠습니까?'라고 하면 '그래, 인간이라면 그딴 짓은 안 하겠지.'라며 넘어갔으니까.

헬레나는 백작의 이런 성격을 이용해서 루크에게 실컷 괴롭힘을 가했다.

'하지만 이젠 아니지.'

회귀 전에는 헬레나가 이용한 백작의 성격이지만, 이젠 반대로 루크가 써먹을 차례였다.

루크는 살짝 아련한 눈빛을 지으며 눈을 내리깔았다.

"아버지에 대한 건 많이 들었습니다. 어머니께서 입만 여시면 아버지 얘기를 하셨으니까요."

"리리아가?"

"예. 언제나 자기 인생에서 그처럼 멋진 분을 본 적 없으시다면서, 그 추억 하나로도 평생을 힘내서 살아갈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으음."

루크의 말에 백작의 눈이 가라앉고 침음을 흘렸다. 스쳐 지나간 인연이건만 그렇게 자신을 생각하고 있었을 줄이야.

새삼 일찍 챙겨주지 못한 것이 안타까웠다.

'사실 들은 건 하나도 없지만.'

루크의 어머니는 산욕열로 루크를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당연히 살아서 해준 이야기 따윈 없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아는 브릭 마을은 이미 통째로 날아갔다.

"리리아가 남긴 유언을 알려줄 수 있겠느냐?"

"소중히 보관하시던 동백꽃을 같이 태워달란 말만 하셨습니다.

"동백꽃이라니 설마···!"

"다 말라비틀어진 꽃이었습니다. 제가 태어나기도 전에 받은 거라며 항상 소중히 하셨지요."

백작이 울컥거리는 감정을 숨기며 눈을 가렸다. 그저 가볍게 준 선물이었을 뿐이거늘.

아이가 태어나고 꽃이 바스러질 때까지 가지고 있었을 줄이야.

루크의 창작만 아니라면 정말 감동적인 일화였다.

'동백꽃 줬더니 네 어머니가 기뻐하더라는 얘기 참 많이도 들었다.'

어머니 얘기만 나오면 항상 나오던 말이 동백꽃이었다. 덕분에 그 소문을 들은 헬레나가 동백꽃만 보면 다 뽑아버리기도 했었다.

한창 감동에 빠진 백작을 보다못한 헬레나가 폭언을 토했다.

"참 대단합니다. 하긴, 그런 의지가 있으니까 감히 당신을 유혹했겠지요."

"부인."

강도 높은 발언에 백작이 눈을 찌푸렸으나 헬레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닙니까? 그럼 당신이 먼저 다가섰습니까?"

"크흠, 이야기가 왜 그렇게 되오."

"역시 그년이 먼저 유혹한 거로군요."

"부인!"

"아니, 맞습니다."

"···!?"

루크의 말에 두 사람이 눈을 껌뻑였다. 유혹이니 뭐니 하는 소리를 하는데 그 자식이 선선히 수긍하다니?

"제가 듣기로는 어머니께서 아버지가 드릴 음식을 싸 오신 게 첫 만남이었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그랬지. 파견 임무에서 돌아올 때 네 어머니가 아직 따뜻한 스튜를 전해줬었다."

"어머니께서는 그러셨습니다. 그게 태어나서 처음으로 했던 유혹이라고요."

루크는 머나먼 추억을 회상하듯 눈을 내리깔았다.

"말괄량이처럼 살며 요리 한 번 해보신 적이 없는 분이, 아버지를 보고 첫눈에 반했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다가갈 구실을 찾고자 처음으로 해본 적도 없는 요리를 시도하셨죠."

"허어."

"몇 번이나 손이 상처투성이가 되면서 고기를 썰고, 간을 맞추고, 실패하고. 그런 고생 끝에 완성하신 스튜였습니다. 그렇게 만든 스튜를 아버지께서 맛있게 드시는 걸 보니 세상을 다 얻은 것 같다고 하셨죠."

"그랬었나, 그랬던 건가···."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헬레나는 눈을 껌뻑였다. 분명 천박한 유혹으로 시작했는데 어느새 풋풋한 소녀의 첫사랑 이야기가 된 거지?

백작은 다시 혼자만의 추억에 잠겨 중얼거렸다.

"지금도 떠오르는구나. 그때 내가 맛있다고 했더니 환히 웃던 그녀의 얼굴이. 검댕이 덕지덕지 묻었음에도 참 아름다웠지."

"호오, 아름다웠다?"

헬레나의 이마에 핏대가 솟았다. 자신의 아내를 옆에 두고도 그딴 소리를 하다니.

그때 한 가지 좋은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헬레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흐음, 하기야 얼굴은 예뻤겠지요. 루크라고 했느냐?"

"예, 부인."

"네 어머니가 아름다웠다면 그만큼 남자도 많이 꼬였겠구나. 안 그러냐?"

"부인!"

"예, 맞습니다."

"···!"

백작의 얼굴이 굳어지고, 헬레나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역시나 꼬맹이는 어쩔 수 없었다.

숨겨야 할 일과 솔직히 말해야 할 일조차 구분하지 못하다니.

"역시 그렇구나. 그럼 네게 새아버지가 생겼느냐?"

"아니요. 전부 어머니께 집적거리다가 쫓겨났습니다."

"쫓겨나?"

"사냥꾼의 딸이셨으니까요. 남자들은 여자라고 우습게 봤다가 몽둥이에 두들겨 맞고 도망치곤 했지요."

거기까지 말한 루크는 다시 슬픈 표정을 지었다.

"그럴 때마다 남자들은 말했습니다. 네깟 년이 정조 하나 지킨다고 그놈의 낭군이 알아줄 것 같냐고, 어차피 너 버리고 간 사람 아니냐고."

"···그래서?"

"어머니께서는 항상 똑같이 대답하셨습니다.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고요. 설령 자신이 잊혔다 하더라도, 어머니께서는 잊지 않겠다고. 오직 그분만이 인생의 유일한 남자라고요."

"아, 리리아!"

감정을 참지 못한 백작에게서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그 모습에 헬레나의 얼굴이 벌겋게 물들었다.

헤픈 여자로 몰아가고 있었는데 어느새 죽을 때까지 정조를 지킨 미담이 된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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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이대로 가면 위험하다.'

위기감에 헬레나가 입술을 깨물었다. 분명 가문에 들어오기 전에 입지를 좁혀둘 생각으로 참가했건만, 갈수록 좋은 인상만 주고 있다.

어떻게든 이 좋은 분위기를 망가뜨릴 필요가 있었다.

맹렬하게 머리를 굴리던 헬레나가 이내 눈을 반짝였다.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의 대화에서 흠잡을 만한 구석이 딱 하나 있었다.

헬레나는 빙긋 웃으며 루크를 바라봤다.

"네 어미가 참 많은 걸 이야기해준 모양이구나."

"예, 항상 아버지에 대해 말씀하셨지요."

"이제야 네 행동거지가 이해가 간다. 아버지에 걸맞는 자식이 되려고 노력한 결과가 아니더냐? 훌륭하구나."

얼핏 보면 덕담. 하지만 속내는 달랐다. 귀족인 아버지를 따라 하려 했다는 건 자기도 귀족으로 인정받을 줄 알았다는 뜻.

백작의 성격을 보면 틀린 소리는 아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레너드 백작이기에 성립되는 말이다.

'네놈처럼 운 좋은 서자가 얼마나 되는지 알기나 하느냐?'

실제로 서자들의 대접은 썩 좋지 않았다. 루크처럼 바깥에서 태어났음에도 자식으로 인정받는 경우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가문 내에서 공식적으로 태어난 서자들조차 집안사람들에게 백안시당하면서 숨죽이고 사는 게 보통.

그중에는 아예 인지를 안 해준 탓에 그저 '하인의 자식'으로 사는 경우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심지어 인간말종인 귀족들은 자신의 추문을 감추기 위해 몰래 서자를 죽여버리기도 한다.

'이 천것은 예외 중의 예외지.'

루크가 이렇게나 대접받는 건 어디까지나 아버지가 레너드 백작이기에 일어날 수 있었던 기적.

당연히 루크는 레너드 백작에게 수천 번 감사 인사를 해도 부족하다.

그런데 당연히 귀족이 될 줄 알고 평소부터 의기양양한 자부심을 숨기고 다녔다?

그 자체만으로 괘씸한 일이 아닌가.

'어디 대답해봐라. 자랑스러운 아비에 걸맞는 자식이 되고 싶었다고.'

부채로 덮은 얼굴 뒤로 헬레나가 입꼬리를 올렸다. 아무리 좋은 말이라 한들 상황에 따라서는 주제를 모르는 악담이 될 수도 있는 법.

노련한 귀족이 아니고서야 걸릴 수밖에 없는 외통수였다. 한창 감동 중이던 백작도 헬레나의 속내를 깨달았는지 표정이 살짝 미묘해졌다.

그러나 루크는 담담한 얼굴로 살며시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사실 아버지와의 연을 완전히 끊으려 했습니다."

"뭣이?"

백작은 물론이고 헬레나까지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어머니께서 누누이 평소에 하시던 말씀이 있습니다. 그분과 너는 사는 세계가 다르니 함부로 다가가면 안 된다고. 분명 그분께 폐를 끼칠 거라고요."

"호오."

루크의 말에 헬레나가 속으로 웃음을 참았다. 요망한 계집인 줄 알았더니 주제 파악은 할 줄 알았던 모양이군.

"아버지께서는 책임감이 강한 분이니 분명 절 찾으실 거라 했습니다. 그리고 고난이 기다린다 하더라도 받아들여 주실 거라고요. 하지만 그건 아버지에게 많은 짐을 지우는 일이니 꼭 거절하라는 말도 하셨습니다."

거기까지 말한 루크는 잠시 말을 멈추고는 서글프게 웃었다.

"사실 어머니의 뜻에 따르고자 한다면 처음부터 오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절 보고자 하시는 아버지께 실망을 안겨드릴 수 없었고, 저 역시 아버지를 뵙고 싶은 마음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어쩔 생각이냐? 듣자 하니 이제 네 목적은 다 이룬 것 같다만?"

"아버지를 뵈었으니 이제 여한이 없습니다. 도로 돌아가 제게 어울리는 삶을 살 생각입니다."

헬레나는 부채를 올려 귀에 걸린 입을 감춰야 했다. 눈엣가시 같은 모자지만 적어도 제 주제를 파악할 머리는 있던 모양이다.

태생부터 괘씸한 녀석이긴 해도, 스스로 떠난다면 얌전히 보내줄 생각은 있었다.

"네 뜻이 그렇다면야···."

"그게 무슨 말이냐!"

고개를 끄덕이려 했던 헬레나가 깜짝 놀라 백작을 바라봤다. 레너드 백작은 흥분을 참지 못하고 쾅, 소리가 나도록 책상을 후려쳤다.

"짐이라니! 자식을 짐이라고 여기는 아비가 어디 있더냐? 드디어 아비로서의 책무를 다할 수 있게 됐거늘 연을 끊다니!"

'아차···!'

백작의 호통에 헬레나의 얼굴이 굳어졌다. 생각해보면 애초부터 백작 본인이 책무를 다하기 위해 데려온 서자가 아니던가.

아무리 본인이 괜찮다고 한들 순순히 받아들일 백작이 아니었다.

하물며 지금 발언은 어떤가. 마지막까지 정조를 지킨 옛 여인은 자식보다 정인을 우선시하여 짐을 지우지 말라고 했다.

잘난 자식마저 어미의 뜻을 받들어 아버지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자 했다.

감수성이 폭발한 상태에서 온갖 배려는 다 받았으니 오히려 불에 기름을 끼얹은 꼴이 되었다.

"이제 됐다! 내일 네 이름을 가계도에 올릴 테니 더는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라!"

"여보!"

헬레나는 무심코 비명을 내질렀다. 단순히 귀족 명부에 이름을 올리는 것과 가계도에 이름을 올리는 건 천지 차이였다.

전자는 그저 신분이 귀족으로 상승할 뿐, 가문 내에서 공식적인 지위를 가지는 게 아니다. 당연히 가문에서 그 어떤 권리도 없다.

하지만 후자는 다르다. 혈족으로서 가지는 모든 권리를 인정받을 뿐만 아니라, 적자가 모두 사망한 경우에는 계승권까지 인정된다.

"지금 그게 말이 되는···!"

"안됩니다, 아버지!"

헬레나가 반박하기 전 루크가 냉큼 크게 소리치며 말을 끊었다. 그리고는 즉시 바닥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제가 어찌 어머니의 유언을 어기고 아버지께 누를 끼치겠습니까? 부디 지금 하신 말씀을 거둬주십시오!"

"답답하구나! 오히려 네가 하는 행동이 내 가슴에 대못을 박는다는 걸 모르겠느냐? 아니면 그저 가문에서 벗어나고자 핑계를 대는 것이냐?"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결코 아닙니다."

"그럼 왜 그리 고집스럽게 구는 것이냐?"

레너드 백작은 야속한 눈빛으로 루크를 바라봤다. 어찌 그리 아비의 마음을 몰라주냐는 책망이었다.

루크는 대답하기 전 잽싸게 자신의 허벅지를 꼬집어 90도로 비틀었다.

'고통으로 깨어나라, 나의 눈물샘이여!'

눈가를 적신 루크가 백작과 눈을 마주쳤다. 그렁그렁한 눈망울에 백작이 움찔 몸을 떨었다.

루크는 그 상태에서 최대한 자연스럽게 목소리를 떨었다.

"제가, 제가 어찌 아버지와 같이 있고 싶지 않겠습니까? 한낮 짐승조차 부모를 그리워하는 법이거늘."

젖은 눈에서 기어코 눈물 한 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하지만 전 이미 어머니께서 돌아가실 때 아무것도 해드리지 못한 불효자입니다. 생전 남기신 말씀마저 어기며 아버지께 폐를 끼친다면 제가 죽어서 어찌 어머니를 보겠습니까?"

촉촉하게 젖은 눈동자, 슬픔에 잠긴 바이브레이션, 그리고 안타까움과 그리움을 담은 포엠.

지금 보여준 연기는 단순한 효자처럼 보이지만 자그마치 3개의 기술이 합쳐진 컴비네이션!

루크는 여기서 마지막 화룡점정을 더했다.

"그리고 평민인 제가 아버지 곁에 있다면 구설수가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 모든 게 아버지의 짐이 될 것을 압니다. 그걸 알고도 제 욕심을 우선할 수는 없습니다."

"구설수라니! 이 레너드 번스타인이 소인배들의 험담 따위를 두려워할 것 같으냐!"

레너드 백작이 우렁찬 포효를 터트렸다. 어찌나 크게 소리쳤는지 집무실 바깥의 다른 이들조차 깜짝 놀랄 정도였다.

"좋다! 네가 끝까지 고집을 피우겠다면, 나 역시 이리 하는 수밖에!"

촤앙

백작은 뒤로 걸어가더니 옆에 걸려 있던 검을 뽑아 들었다. 벨베르크. 번스타인 가문에 대대로 내려온 보검이자 가주의 상징.

과거 흑룡을 베어 죽였다는 전설의 검을 든 채 백작이 선언했다.

"나, 레너드 번스타인이 이 자리에서 선조들 앞에 맹세하노라! 루크는 내 아들이자 번스타인의 일원임을 공언하노니, 이를 의심하는 자는 그 누구도 용서치 않으리라!"

엄숙한 맹세에 그 누구도 입을 열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다시 벨베르크를 검집에 꽂은 백작은 루크에게 다가와 양어깨를 붙잡았다.

"나는 이제 맹세를 했으니 결코 어길 수 없다. 너 역시 마찬가지다. 이래도 내 아들임을 거부할 생각이더냐?"

잔잔하면서도 부성이 담긴 목소리에 루크가 눈을 떨었다.

"정말 제가 그래도 되겠습니까? 아버지의 아들이 되어도 괜찮겠습니까?"

"그 누가 안 된다고 하겠느냐? 아비인 내가 허락한다 했거늘!"

"아버지!"

두 부자가 감동의 포옹을 나누는 동안 헬레나는 입을 뻐끔거렸다. 이젠 반박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다.

의무와 맹세에 관한 건 반드시 지키는 게 레너드 백작이었으니까. 설령 부인인 헬레나도 맹세의 대상에서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

"그리되었으니 부인께서도 루크에게 신경을 써주시오. 이제 가족 아니오."

"...."

자신의 속도 모르고 다정히 말하는 남편의 모습에, 헬레나는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백작에게 안긴 루크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간 것도 보지 못한 채.

****

"아아아악!"

와장창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헬레나는 손에 집히는 걸 닥치는 대로 집어 던졌다. 주변 하인들은 벌벌 떨며 그녀의 발광을 바라봤다.

"마, 마님. 부디 고정을···."

"내가 고정하게 생겼느냐!"

오랜 세월 자신을 섬긴 하녀의 말에도 헬레나는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그 천한 것이 가문에 이름을 새기다니?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단 말이냐!"

가계도에 이름 좀 올린다고 큰일 나는 건 아니다. 굳이 따지자면 제대로 된 귀족 대접을 해주는 것뿐이니까.

계승권이 생기기는 하지만, 어차피 가주 계승에서는 서자보다 적자들이 우선권을 가진다.

두 자식이 하늘에서 떨어진 벼락이라도 맞고 죽지 않는 한 루크가 가문을 이을 일은 없을 터.

하지만 서자 주제에 '동등한 가문의 일원'이라는 명함이 생긴다는 것 자체가 헬레나에겐 참을 수 없는 모욕이었다.

"가이든 경은 어디 있다더냐!? 같이 왔다면서 왜 보이질 않아!"

"그, 그게··· 요즘 몸이 아프시다고···."

헬레나의 부름에도 가이든은 꾀병을 부리며 응하지 않았다. 평소에 주는 돈을 잔뜩 처먹고도 의뢰를 실패한 상황.

불려가면 온갖 화풀이의 희생양이 될 게 뻔하지 않나.

어차피 만나든 안 만나든 끝장난 연줄이니 굳이 불려가서 온갖 수모를 당할 이유가 없었다.

"그 무능한 작자가 마지막까지!"

화풀이할 대상이 없어진 헬레나가 이를 갈았다. 그녀의 손에 또 하나의 도자기가 박살나기 직전이었다.

바깥에서 무언가를 받은 하녀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마님, 편지가 왔습니다."

"편지? 누가?"

"마르티나 부인께서 보내신 편지입니다."

헬레나는 눈을 찌푸렸다. 마르티나 발렌트. 옛 수도에 방문했을 때 만나서 알게 된 미망인.

사교계에선 귀족 자제들의 예절 교육 선생으로 이름이 꽤 알려진 여인이었다.

친구라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수도에 올라갈 일이 생기면 한 번쯤 만나서 대화를 나누는 사이다.

'마르티나 부인이 왜 갑자기 편지를?'

의문을 느끼며 헬레나는 편지를 받아 펼쳤다. 지인의 조문을 위해 수도에 올라갔는데, 돌아갈 때 번스타인 영지를 지나쳐 가고 싶다는 것.

그리고 겸사겸사 오랜만에 얼굴 한번 보자는 가벼운 내용이었다.

헬레나가 한숨을 쉬며 알겠다는 답장을 쓰려고 했을 때였다.

'잠깐, 마르티나 부인? 예절 교육?'

문득 머릿속에 마르티나 부인의 평판이 떠올랐다. 가르친 결과는 더없이 완벽하지만, 배우는 입장에선 너무나도 혹독한 철의 여인.

그리고 마침 번스타인 가문에 귀족의 예절 교육이 절실한 누군가가 있었다.

헬레나의 입가에 날카로운 미소가 맺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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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