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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6화. 비상飛上(4) >

고담덕의 지휘는 무척 빨랐다.

"노아, 셀틱스, 악소운, 구트룬 조가 1파티다. 파티장은 구트룬."

"예."

"일리아, 아델, 석호, 고주몽 조가 2파티다. 파티장은 고주몽."

"알겠다."

6명씩 1개 조로 묶인 당직조.

그들을 4조씩 묶어서 1개 파티로 분류한 것이다.

내가 속한 파티는, 조장인 구트룬이 이끄는 1파티.

"피닉스, 발롱, 워럭스, 고담덕 조가 3파티다. 파티장은 내가······."

파티를 나누는 고담덕을 뒤로하고,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예상했던 것보다 투입되는 전력이 너무 큰데?'

고위 플레이어 24명이면 한 개 군단급이다.

즉, 이번 공성전에서 총 다섯 개 군단 전력이 투입된다는 것.

성 하나를 공략하는 것 치고는 무척 과한 전력이었다.

'마계 쪽 저항이 만만치 않나 보군.'

플레이어들이 중간계를 정리하면서, 마계로 흘러 들어가는 영혼이 늘어난 상황.

그에 따라, 악마의 숫자가 크게 늘어나서 그런 모양이었다.

현재 천계와 마계의 비율로만 따지면, 악마의 숫자가 플레이어를 크게 상회할 테니까.

"작전을 알려줄 테니 파티장들은 모두 모이도록. 남은 플레이어들은 모두 출격 준비를 한다. 작전 시간이 끝나자마자 출발할 것이다."

펄럭! 펄럭! 펄럭!

두 쌍의 날개를 가진 네 명의 플레이어가 고담덕에게 향한다.

그사이 나는 볼티노, 스벤 등 조원들과 눈인사를 하며 심호흡했다.

어차피 들어오기 전에 모든 준비를 끝낸 상황.

'이번에도 납치 시도가 있겠지. 군주급이 또 나오려나. 여기 어디에 세이프티 포인트를 만들어 두면 좋겠는데······.'

내가 할 건, 앞으로 있을 전투를 미리 그려보는 것뿐이었다.

펄럭! 펄럭!

스타팅 포인트인 엘리사르 성의 지상으로 내려앉은 나는, 근처를 경계하던 한 플레이어에게 다가갔다.

이번 경기와 상관 없는, 엘리사르 성의 수비 당직조로 투입된 플레이어였다.

"······?"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슬쩍 무기를 들어 올리는 남성.

"아, 죄송합니다. 뭔가를 떨어트린 것 같아서요."

나는 몸을 숙이며, 남자의 그림자 끄트머리를 터치했다.

띠링!

[플레이어 '아르마니'의 그림자에 표식이 등록되었습니다.]

'이걸로 세이프티 포인트는 만들었고.'

"제 기분 탓이었군요. 그럼, 수고하십시오."

"예, 그대에게도 신의 축복이 있기를."

'신의 축복이라······.'

종교적인 발언에 웃음을 삼킨 나는 다시 조원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잠시 후 작전 회의를 끝내고 돌아온 구트룬.

"1분 후 출발하겠다. 노아 님, 셀틱스 님, 악소운 님도 준비 부탁드립니다."

"알겠어요. 모두 마지막으로 장비를 점검하세요!"

"저희 조원들은 준비 완료입니다."

그의 지시에, 집중력을 끌어올리고 있던 파티원들이 분주해졌다.

각자 머리와 어깨를 돌리며, 마지막으로 몸을 풀기 시작한 것이다.

―모두 출발하라!

펄럭! 펄럭! 펄럭!

'가 볼까.'

고담덕의 외침과 동시에, 플레이어들이 격렬하게 날갯짓하며 공중으로 몸을 띄웠다.

하얀 날개가 순식간에 창공을 뒤덮었다.

고위 플레이어만 무려 120명.

'어지간한 악마들은 만나자마자 녹아내리겠군.'

그들 하나하나가 가지고 있는 전력을 생각했을 때, 성城 서너 개쯤 공략하는 건 일도 아닐 것이다.

쐐애애애애애애애애액!

거센 파공음을 내며 창공을 가르길 십여 분.

저 멀리, 우뚝 솟은 거대한 빙벽이 모습을 드러낸다.

열두 명의 플레이어가, 절망의 협곡 앞에서 날갯짓하며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다.

협곡 입구를 지키는 당직 플레이어들이었다.

"따뜻한 소망 속에서 피어난 한 줄기 꽃이여, 그대의 씨앗이······."

"새벽녘에 아로새겨진 소슬바람이 눈을 뜨노라······."

"부서진 섬광이 싸늘함을 머금은 새벽 폭풍에 흩날려······."

절망의 협곡에 도달하니, 연합 파티 곳곳에서 영창이 울려 퍼진다.

다른 플레이어들도 각자 무기를 날카롭게 세우며, 전방을 노려봤다.

그리고 두 개의 당직조를 넘어서자 보이는, 협곡 반대편의 악마들.

―모두 전투 준비!

―적습이다! 어서 각 성에 전령을 보내!

우리를 발견한 악마들이 바글대며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때였다.

[흩날려라, 열화의 꽃잎이여!]

[핏빛 여명의 칼날!]

[초록빛 하늘의 파노라마!]

유성우처럼 형형색색의 마법들이 악마들 사이로 떨어져 내린다.

꽈아아아아앙! 꽈과과과과과광! 꽈아아아아앙!

마법이 떨어진 곳의 대기가 파도처럼 출렁였다.

'완전 폭격 수준이군.'

거대한 먼지구름이 피어오르고, 그 너머에서 사방으로 흩뿌려지는 떨어져 나간 팔다리나 날개 따위들.

그 광경을 보던 나는 간담이 서늘했다.

"끄아아아악!"

"젠장, 날개에 불이! 어어! 누, 누가 좀 잡아줘! 어어어!"

꽈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눈보라를 동반한 거대한 쇼크웨이브가 우리를 덮쳐왔다.

'진짜 말 그대로 녹아 내렸네.'

그리고 모습을 드러낸 지옥도地獄圖.

"모두 그대로 돌파한다!"

서걱! 서걱!

나는 살아남은 소수의 악마들을 베며, 구트룬의 뒤를 바짝 쫓았다.

[<달의 메아리> 가 외부 온도를 차단합니다.]

절망의 협곡을 벗어나자, 남극의 극야처럼 새벽의 소성이 잠긴 어두컴컴한 하늘이 보인다.

얇게 뭉친 눈발이 온몸을 두들기고, 칼날을 머금은 싸늘한 바람이 로브를 난도질하듯 펄럭였다.

'오랜만에 와보는 것 같군.'

얼음의 세계, 니플헤임.

―모두들 건투를 빈다!

사나운 눈보라가 불어닥치자마자, 연합 파티가 다섯 개로 찢어지며 편대 비행을 시작했다.

"1파티는 모두 나를 따라오도록!"

"다른 곳이랑 헷갈리지 마라! 2파티는 이쪽으로!"

"이봐, 라일! 어딜 가는 거냐! 정신 똑바로 안 차려! 4파티는 이쪽이다!"

엘린 쪽으로 가는 건 3파티 하나뿐.

'어딜 가는 거지?'

볼티노를 따라 구트룬을 뒤쫓던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구트룬이 헬하임까지 갈 기세로, 계속 뻗어 나가고 있었기 때문.

"광대 새끼들이 거점 쪽으로 간다! 죽여!"

니플헤임의 한가운데를 가르며 지나가자, 악마들이 실시간으로 모여들었다.

"놈들을 가장 많이 사냥하는 자에게 각성을 허락하겠다!"

악마들 전부 우리를 죽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상태.

"구트룬 님······?"

그에 따라 다른 조장들이 구트룬에게 우려를 표할 때였다.

꽈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꽈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

다른 파티들이 향한 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울려 퍼지는 굉음.

그걸 본 구트룬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도 사냥을 시작하지."

* * *

―드디어 전투다운 전투가 시작됐군요. 베론 님, 이번 경기는 어떻게 보십니까?

―이례적으로 120명이나 되는 고위 플레이어들이 출전했습니다. 한마디로 이번 경기에서 무조건 니플헤임에 영향력을 넓히겠다는 뜻으로 보이는데요.

―네에. 성공 확률은 얼마나 될까요?

―연합 파티장으로 고담덕을 채워 넣었으니, 저는 이번 경기에서 니플헤임 일부를 장악할 가능성이 크다고 여겨집니다.

'쯧, 렌이 싸우는 걸 보려면 시간 좀 걸리겠군.'

팀 '절망'의 주인, 대신大神 로키.

그는 홀로그램을 보며 혀를 찼다.

팀에 고위 플레이어가 한 명도 남지 않은 상황.

그런데도 그가 고위 리그를 챙겨보고 있는 건, 다름 아닌 렌이 싸우는 걸 보기 위함이었기 때문이었다.

'제발 잘 싸워줘야 할 텐데.'

로키는 요 근래 짜증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주소월로 인해서 팀의 주력 플레이어들을 모두 잃고, 울며 겨자 먹기로 팀 투지의 육성법까지 구입했다.

하지만 천만 골드나 주고 구입한 것 치고, 팀 투지의 육성법은 효용성이 떨어졌기 때문.

'스텟이 빠르게 오르면 뭐 하냐고. 전체적으로 수준이 높아져 버렸는데.'

이전과 달라진 건 아무 것도 없었다.

육성법을 구입한 건, 로키 혼자만이 아니었으니까.

다른 팀들에서도 팀 투지의 육성법으로 훈련한 플레이어들이 쏟아져 나온다.

그런 상황에서 로키의 팀이, 팀 투지의 육성법을 구매한들 아무런 효과를 볼 수 없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는 다른 팀들을 뛰어넘을 수 없어.'

팀 절망이 과거의 영광을 되찾는 것.

그게 로키의 목표였다.

그래서 이번에 구입한 팀 투지의 육성법을 조합해, 팀 절망 만의 육성법을 만들려고 했지만 역시나 실패.

'도대체 어떻게 육성을 시키는 거냐고.'

결국 아무 것도 달라진 게 없다.

지금처럼 해서는 과거의 영광을 되찾기란 어려운 상황.

'팀 투지는 여전히 승승장구하고 있어.'

로키는 팀 투지가 공개하지 않은, 나머지 육성법들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최근에 아세리안이 대신으로 승격하기 위해 막대한 빚을 졌다고 그랬지.'

사실 로키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었다.

지금 팀 투지의 상승세로 보면, 그녀가 오래되지 않아 대신에 오르는 건 필연적인 일.

시간의 차이만 있을 뿐인 상황에서, 아세리안은 굳이 포인트 대출을 받아 가면서까지 대신의 위에 오른 것이다.

'이게 기회일 수도 있어.'

그래서 최근, 로키는 빅딜을 준비 중이었다.

육성법을 공개했음에도, 여전히 다른 팀들을 크게 앞서나가는 팀 투지.

아마 아세리안은 모든 육성법을 공개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컸다.

'나머지 육성법을 얻으면 과거의 영광을 되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

물론 여기엔 한 가지 전제 조건이 필요하다.

팀 절망 이외에는 오픈하지 않을 것.

골드, 포인트, 아이템, 스킬 등등 협상 테이블에 앉기만 한다면 뭘 요구하든 자신이 있었다.

그렇기에, 일단 그녀를 협상 테이블에 끌어 앉히는 게 중요하달까.

하지만 지금이라면 충분히 가능성 있었다.

대출 포인트 이자에 대한 부담을 가지고 있을 것이기 때문.

'여기서 렌이 어떤 모습을 보이냐가 중요해.'

로키 입장에선 나름 올인을 베팅하려는 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팀 투지가 가진 모든 육성법의 정수를 집약한 결과물.

1년이란 공백을 가진 렌이 어떻게 달라져서 돌아왔느냐에 따라, 그 육성법의 정수가 어떤 가치를 가지고 있는지 체크할 수 있겠지.

결국 렌의 수준이, 그의 전략 향방이 바뀔 것이다.

―오, 굉장히 빠른 전술을 사용하는군요. 다섯 개 파티가 돌아다니면서 마구 폭격하고 있네요?

―확실히 고담덕이 굉장히 영리합니다. 지금 상황에선 어떤 전략을 사용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부분에서 영리한지, 시청자분들께 설명 좀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꽈아아아아아아앙! 꽈과아아아앙! 꽈과과과과광!

로키가 홀로그램을 보니, 제각기 다른 방향으로 흩어졌던 5개 파티가 돌아다니면서 악마들을 학살하고 있었다.

언뜻 보면 마구잡이로 돌아다니는 것 같지만, 유기적으로 뭉쳤다 떨어지기를 반복하며 니플헤임을 초토화시키고 있다 보니, 마계 입장에선 곤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성 공략을 시작하고 나서야 렌이 제대로 싸우는 걸 볼 수 있겠군.'

―현지 니플헤임에 있는 마계의 거점, 프레미어 근처에서 다섯 주신 님들과 초월 플레이어들이 대기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 탓에 마계 입장에선 고급 전력을 빼기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자칫 잘못했다간 거점을 뺏길 수도 있어서 그렇군요.

―맞습니다. 그래서 현재 고담덕 연합 파티는 이곳저곳 찌르고 다니면서 계속 소모전만을 펼치고 있죠. 마계 입장에선 남은 일부의 고위 전력으로 막아야 하는데, 어디로 보내야 할지를 알 수 없으니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는 거구요.

―하지만 고위 전력의 속도로 봤을 때, 아무 성에나 보내도 견제할 수 있는 거 아닙니까?

―플레이어 고담덕은 그걸 노리고 있을 겁니다. 다섯 개 파티로 나뉘어 있으니, 적들은 고위 플레이어들이 어디로 향할지를 알 수가 없죠. 네 개 파티가 막고 고담덕 파티가 성 공략을 진행하면, 적들은 고담덕 파티에 붙을 수도 없습니다. 남은 네 개 파티 중에서 다른 성을 공략할 수도 있으니까요.

'전략 자체는 나쁘지 않아.'

해설신들의 해설을 들은 로키는 고개를 끄덕였다.

니플헤임에 있는 마계의 거점 근처로 주신과 초월 플레이어들이 어그로를 끌고 있어서, 고급 전력을 투입하기가 쉽지 않은 상황.

연합 파티장인 고담덕은 적들이 먼저 고급 전력을 꺼내기 전까지 소모전만 펼치며 간을 보겠다는 뜻이었다.

어차피 천계 입장에서는 손해 볼 것 없고, 마계는 시간이 지날수록 피해가 강요되고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어서 나와라.'

로키는 인내심을 가지고 경기를 관람했다.

악마들이 고위 플레이어들을 쫓지 않으면, 마법으로 성문을 두들긴다.

거기에 녀석들이 반응하면 바로 도망치면서 다른 파티와 합류, 쫓아온 악마들을 사살한다.

그리고 또다시 성문을 두들긴다.

그런 식으로 흘러가다 보니, 어느새 다섯 개 성의 성문이 사라져 버린 상황.

그때였다.

―어어! 드디어 나타났습니다! 타락 천사이자, 마계의 고위 악마이기도 한 푸르카스! 그가 다수의 악마를 끌고 고위 플레이어들을 쫓고 있습니다!

―오오, 경이로운 편대 비행이군요. 푸르카스가 대군단을 끌고 나타나자마자 다섯 개의 파티가 흩어지고 있네요. 고담덕 파티가 엘린 성으로 향하고, 나머지 파티는 시선을 끄는 것 같은데요!

―자, 관객 여러분, 집중해 주십시오! 과연 고위 플레이어들이 엘린 성을 공략할 수 있을 것인지!

'드디어 나왔군.'

홀로그램 화면을 까맣게 메우는 마계 대군단의 출현.

그와 동시에 다섯 개 파티가 뿔뿔이 흩어지며 각자의 역할을 수행한다.

'어떤 모습을 보여줄 것이냐, 렌.'

집무실 의자를 바싹 당겨 앉은 로키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 236화. 비상飛上(4) > 끝

< 237화. 비상飛上(5) >

띠링!

[보름달이 떴습니다.]

[<로브:달의 메아리>가 달의 힘을 빌려와 모든 스텟이 5% 상승합니다.]

[<목걸이:영롱한 달빛>이 달의 힘을 빌려와 모든 스텟이 30% 상승합니다.]

[<스킬:열반 >이 활성화됩니다.]

[정신 스텟이 +30% 상승합니다.]

[정신 이상 기운 상쇄율 : 90%]

쉬지 않고 니플헤임을 폭격하는 120명의 고위 플레이어들.

'이러려고 파티를 다섯 개로 나눴군.'

구트룬을 바짝 쫓으며 주변을 경계하던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애초에 성 공략은 관심도 없다는 듯, 창공을 날며 마법사들이 쉴 새 없이 마법을 퍼붓는다.

적 악마들이 우리에게 붙으면 바로 회피 기동.

이후 뒤로 빠지면서 녀석들을 유인하면, 어느새 합류한 고담덕의 파티와 함께 적들을 학살한다.

그리고 또다시 뿔뿔이 흩어져 마법을 퍼붓는다.

'전투기 군단이 실제로 전투를 펼쳤다면 이런 느낌이겠는데.'

그 탓에, 영역을 지켜야 하는 악마들은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고 있는 상황.

치고 빠지며 수십 번을 반복하자, 눈으로 뒤덮인 니플헤임의 곳곳에서 먼지구름이 피어올랐다.

[킬 수 현황]

[1위. '일리아' 1,794킬]

[2위. '루시덴' 1,602킬]

[3위. '이멘드라' 1,555킬]

[4위. '에델린' 1,398킬]

[5위. '마브릭스' 1,393킬]

.

.

[93위. '렌' 388킬]

'마법사들이 상위권을 다 차지하고 있군.'

폭격하는 건 마법들뿐.

근접 물리 계열 플레이어들은 사실상 마법사를 호위하고 있는 형국이다.

그러다 보니, 대부분의 킬을 마법사들이 가져갈 수밖에 없었다.

오죽했으면 피의 강화 특전도 아직까지 활성화되지 않을 정도.

'뭘 노리고 있는 걸까.'

처음 다섯 개 파티로 나뉘어 폭격을 하기 시작했을 때, 내가 떠올린 건 성동격서였다.

동쪽에서 먼저 소란을 피운 다음 서쪽을 공격한다는 뜻으로, 네 개 파티가 니플헤임 곳곳을 뒤흔드는 동안, 한 개 파티가 엘린을 공략하지 않을까 싶었던 것.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엘린 성을 공략하러 가는 파티가 없었다.

다섯 개 모두 니플헤임에 있는 여러 성의 성문을 공략하거나, 마법 폭격을 넣는 것에 집중할 뿐.

'결국 이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든, 뭔가를 기다리고 있다는 건 분명한데.'

마계에 계속해서 피해를 강요하고는 있지만, 유의미한 수준은 아니다.

거기다 우리는 단순히 악마를 죽이러 온 게 아닌, 수행해야 할 명확한 미션을 부여받은 존재들.

그런 의미에서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는 게 확실했다.

그때였다.

찌릿!

어디선가 살을 에는 듯한 강렬한 마기가 느껴진다.

"······!"

고개를 돌려 보니, 헬하임 쪽 방향에서 엄청난 숫자의 악마들이 접근하고 있었다.

'몇천은 그냥 넘겠군.'

대부분이 두 쌍, 혹은 세 쌍의 날개를 가지고 있는 상급·최상급 악마들.

'제대로 칼을 갈아서 나왔는데?'

간간이 네 쌍 이상의 날개를 가진 고위 악마들도 있었고, 개중에는 일곱 쌍의 날개를 가지고 있는 타락 천사도 있었다.

마계에서 드디어 칼을 빼든 것이다.

―구트룬, 고주몽, 레온, 헤드리그!

끄덕.

―건투를 빌겠다!

대군단의 출현에, 고담덕이 이끄는 3파티가 대열을 이탈했다.

날아가는 방향은 엘린 쪽.

'고위 악마들이 나타나길 기다리고 있었던 거였어.'

그제야 나는 고담덕이 어떤 전략을 사용하려 한 건지 알 수 있었다.

성을 공략하기 위해선, 성문을 뚫고 내부로 진입해야 한다.

하지만 고위 악마가 버티고 있으면 피해가 클 터.

'여기서 우리가 붙잡고 있는 동안 엘린을 탈환하려고 했군.'

돌아가는 상황으로 보아, 마계 입장에선 외통수에 걸린 셈이었다.

알츠카인, 엘린, 일라이저 등등 총 아홉 개의 성문을 미리 부숴놓은 상황.

녀석들이 만약 고담덕을 쫓는다면, 여기 있는 네 파티가 다른 성을 공략하면 된다.

마계 쪽에서 당연히 일부의 전력을 남겨놨겠지만, 결국 녀석들은 이도 저도 하지 못할 것이다.

펄럭! 펄럭! 펄럭!

고담덕 파티가 빠져나가자, 크게 날갯짓하며 시선을 끄는 구트룬.

"모두 집합."

그의 지시에, 1파티에 속한 플레이어들이 일사불란하게 모여들었다.

"우리의 목표는 저들의 저지가 아니다. 아니, 정정하지. 만약 저들이 3파티를 뒤쫓으면, 우리는 그냥 무시할 것이다."

"······."

구트룬이 7시 방향을 가리켰다.

그러고는 23명의 파티원들을 쓸어보며 입을 열었다.

"목표는 하나. 적들이 3파티를 뒤쫓으면 우린 바로 일라이저 성을 탈환할 것이다."

"애초부터 엘린 성만 노리는 게 아니었군요."

"그렇다. 단순히 엘린 성 하나만 차지하고 끝내기엔, 그동안 우리가 당한 게 너무 많지."

구트룬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리는 파티원들.

"이번 기회에 니플헤임도 싹 장악해 버리죠."

"흐흐, 처음엔 성 하나 탈환하는 것으로 120명이나 투입이라니 너무 많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우리 파티장은 다 생각이 있었구려."

"다섯 개 파티니까, 다섯 개 점령하고 끝내면 딱이겠군!"

모두들 한마디씩 뱉으며, 마력을 내뿜는다.

다가올 전투에 대비해, 전의를 끌어올리고 있는 것이었다.

'굉장하네.'

고담덕의 전략을 곰곰이 되새겨보던 나는 내심 감탄했다.

공성의 제왕이라는, 그의 전략에서 배울 게 없나 끊임없이 주변을 관찰하고 있던 상황.

그래서 이 전략이 통할 거라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온갖 성문이란 성문은 다 부수고, 수비를 위해 대기 중이던 병력들도 착실하게 줄여 주었으니까.

지금껏 시간을 끌며 간을 보던 마계 입장에선, 뼈 아픈 손실을 입게 될 것이다.

"모두 명심하라. 결국 악마들이 3파티를 뒤쫓게 될 경우에나 일라이저로 향하는 것이다."

"만약 악마들이 3파티를 안 쫓으면 어떻게 하죠? 성 하나 내주고 우릴 쓸어버릴 수도 있잖아요."

1파티에 소속된 셀틱스 조, 마법사 루시가 물었다.

다른 플레이어들도 그 부분에서 그녀의 의견에 동의하는 듯, 구트룬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그럼 처음 계획대로 하면 된다."

"처음······ 계획대로······?"

루시가 말끝을 흐리자, 구트룬이 악마 군단을 가리켰다.

"우리가 여기서 싸우는 동안, 고담덕 님이 이끄는 파티가 엘린 성을 공략하겠지."

"아······."

"앞으로의 작전은 여기까지다. 모두 준비하도록."

적들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개뿐이다.

우릴 처치하거나, 아니면 성을 공략하러 간 3파티를 뒤쫓거나.

'아주 좋은데.'

하지만 녀석들이 뭘 선택하든 우리에게 유리한 상황.

'처음부터 이겨 놓고 싸운 거랑 다름없어.'

이게 손자병법에서 말하는 선승이후구전先勝而後求戰인 모양이었다.

그리고 마계 측의 선택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적들이 이쪽으로 옵니다!"

―모두 전투 준비!

5시 방향으로 향하는 3파티를 무시한 채, 우리한테 똑바로 날아오는 악마들.

나는 준초월 등급의 창, 성뢰를 고쳐잡으며 씨익 미소 지었다.

'차라리 잘 됐어.'

지난 일 년간의 성과를, 이제야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드디어 전투 시작이넼ㅋㅋㅋ

└폭격하는 것도 시원시원하드만 뭘 ㅎ 가끔씩은 이런 학살극도 나쁘지 않지.

└그건 ㅇㅈ하는데 뭔가 부족한 느낌이었음 ㅋㅋ 고주몽 가즈아아아앙!

└일단 엘린 성 탈환은 확정 아님? ㅎ

└ㅈㄴ 오래 기다렸따 휴우ㅜㅜㅜ 이제야 렌 실력 좀 볼 수 있겠네 ㅅㅂ

└아니 그니까 렌이 누구냐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쟤 아직도 저러고 있네 ㅉㅉ

챙! 채챙! 꽈아아아앙!

"루시웬, 내 백업 좀!"

[흩날려라, 열화의 꽃잎이여!]

"날개 조심! 이봐, 솔라리! 뒤!"

"우릴 잡으려고 나선 것 치고 별것 아니군!"

서걱! 서걱! 채앵! 서걱!

"모두들 상급이랑 최상급 악마들부터 먼저 노려라!"

[삭풍강타朔風强打!]

꽈아아아아아아아아앙!

쇄도하는 악마들의 날개에, 앞이 새까맣게 가려진다.

휘몰아치는 눈보라 사이로 붉은 선혈이 흩뿌려지고, 마법이 터지면서 거대한 충격파를 발산했다.

쏟아지는 각종 무기들 속에서 나는 회피 기동에 집중하고 있는 상황.

'여기 있는 전력을 정리하려던 게 아니었군.'

악마 군단이 노리는 건 명확했다.

이래도 저래도 손해를 피할 수 없다면, 차라리 나를 납치하겠다는 것.

즉, 뼈를 주고 살을 취하겠다는 전략이었다.

"렌! 걱정 마라, 우리가 지켜 주마!"

"이까짓 놈들쯤이야, 흥!"

그걸 나만 느낀 건 아니었는지, 근처로 다가와 악마들을 정리하는 조원들.

구트룬과 송화경, 스벤이 뒤쪽을 정리하고, 사브로 볼티노가 양 사이드에서 내게 몰려오는 악마들을 막아낸다.

덕분에 나는 전방만 집중하면 되는 구조.

'날 납치하겠다는 그 선택, 후회하게 만들어주지.'

또다시 시작된 마계의 납치 시도에도, 나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아니, 사실은 내심 나를 노리기를 바라고 있었다는 게 정확할 것이다.

가면 아래 드러난 입꼬리가 슬쩍 위로 올라갔다.

'내가 얼마나 많이 달라졌는지 보여줘야겠군.'

띠링!

[<신화업적:역천자 >를 적용합니다.]

[<차원 특전:최강의 성계>를 적용합니다.]

[<스킬:천뢰십보踐雷十步 >를 활성화합니다.]

[<스킬:뇌룡의 포효><스킬:뇌신 강림>으로 각성합니다.]

[<창:성뢰聖雷 > <스킬:뇌신 강림> <스킬:천뢰십보 > <스킬:뇌정 >에 깃든 뇌전의 기운이 하나로······.]

[<스킬:뇌정 ><스킬:폭뢰(爆雷) >로 각성······.]

콰지지지지지지지지지직!

지금껏 꺼두었던 모든 특전과 스킬을 활성화시키자, 검붉은 뇌전이 뿜어져 나온다.

"······!"

"······!"

뇌전의 스파크가 터지며 발산하는 굉음에, 귀가 얼얼할 정도.

플레이어·악마 할 것 없이 모여드는 시선 속에서, 나는 손바닥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정말 매력적이야.'

지금껏 경험해 보지 못한 어마어마한 힘.

묘한 카타르시스가 느껴졌다.

어째서 모든 인간이 힘을 갈망하는지 알 것 같았달까.

'더 이상 날 납치할 엄두도 못 내게 해주지.'

창을 고쳐 잡은 나는, 곧장 적들 사이를 파고들었다.

번쩍!

"헉, 모두 조······!"

"뭐야! 갑자기 움······!"

"이게 고위 플······!"

서걱! 서걱! 서걱!

마치 한 줄기 벼락이 이동하는 느낌이 들었다.

갑자기 빨라진 내 움직임에 반응할 수 있는 악마가 단 한 명도 없을 정도.

꽈아아아아아아아앙!

창을 크게 내려치자, 파도가 치는 것처럼 주변의 공기가 크게 출렁인다.

고막이 찢길 듯한 굉음과 함께, 거센 충격파가 사방을 휩쓸었다.

"이게 무슨······?"

"일 년이나 출전하지 않은 녀석 맞아?"

"렌이 이렇게나 강했다니······!"

바뀐 내 움직임에, 오죽했으면 같은 플레이어들조차 넋을 놓은 채 바라보고 있었다.

―모두 집중! 이 자리에서 악마들을 모조리 쓸어 버려야 한다!

가장 먼저 정신 차린 구트룬이 크게 포효했다.

어마어마한 수준으로 각성한 내 모습에, 아예 싸그리 밀어버리겠다고 판단한 모양.

'나쁘지 않은 판단이군.'

그 사이, 나는 악마 군단 사이를 종횡무진 파고들며 창을 휘둘렀다.

띠링!

[<피의 각성>이 1포인트 상승합니다. (30/100)]

[<피의 강화> 능력으로 모든 스텟이 1% 상승합니다. (30/30)]

[<피의 강화>로 상승한 스텟이 30분간 유지됩니다.]

최상급 악마 다섯을 단숨에 도륙하자, 활성화된 피의 강화 특전.

내 움직임이 더욱 예리해지고, 창에 훨씬 강대한 힘이 깃들었다.

[이름 : 안우진(닉네임 : 렌)] [소속 : Team 투지]

[리그 : 고위 리그]

[근력 : 1036(+5)(+652)] [민첩 : 1049(+5)(+663)] [체력 : 773(+5)(+388)]

[정신 : 699(+5)(+439)] [지력 : 210(+106)] [마력 : 738(+5)(+370)]

[적용 특전]

[성뢰聖雷 : 근력 +30%] [뇌신 강림 : 근·민 +40%] [피의 강화 : 모든 스텟 +30%]

[역천자 : 모든 스텟 +20%] [최강의 성계 : 모든 스텟 +17%]

[달의 메아리 : 모든 스텟 +5%] [영롱한 달빛 : 모든 스텟 +30%]

[천뢰십보 : 민첩 +30%] [열반 : 정신 +30%] [대천사의 눈물 : 정신 +40%]

'미쳤네.'

이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어마어마한 스텟.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내가 렌을 상대하겠다! 모두 걸리적거리니까 비······!

꽈아아아아아아아아앙!

네 쌍의 날개를 가진 고위 악마가 단숨에 녹아내린다.

'상대를 잘 보고 덤벼야지.'

지금 이 순간만큼은 초월 플레이어들이라고 해도 상대할 자신이 있었다.

문득, 들어오기 직전에 아세리안과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가서 증명하고 오세요. 이번 또한, 당신이 이 무대의 주인공이라는 걸.

꽈광! 꽈아아앙! 꽈과과광!

준초월 등급의 창, 성뢰에 열두 줄기의 벼락이 내리꽂힌다.

뇌전의 칼날이 주변을 난도질했다.

'내가 이 무대의 주인공이야.'

때마침 눈이 마주친 일곱 쌍의 날개를 가진 타락 천사에게.

"······!"

나는 전력을 다해 창을 내리쳤다.

띠링!

[<벽력 >이 발동합니다.]

꽈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 237화. 비상飛上(5) > 끝

< 238화. 비상飛上(6) >

현재 나는 근력 스텟이 천을 넘는 상태.

벽력이 발동되면서 기초 근력이 추가로 50% 상승했다.

'성뢰의 효과도 빼놓을 수 없지.'

거기다 뇌전에 신성이 담기면서, 악마에게는 30%의 추가 데미지를 입히는 상황.

그런 의미에서 눈앞의 타락 천사가.

'어디 한번 막아보라고.'

벽력이 발동된 내 공격을 막아낼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꽈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콰지지지지직!

빛이 번쩍이고, 뇌전의 플라즈마가 사방을 뒤흔들었다.

벽력의 임팩트가 얼마나 셌는지, 주변에 있던 악마들이 충격파로 인해 몸을 휘청일 정도.

"크윽······."

벼락을 동반한 내 공격에, 일곱 쌍의 날개를 가진 타락 천사의 오른팔이 통째로 사라졌다.

뿐만 아니라 온몸에도 상처가 가득하고 날개도 다섯 짝이나 찢겨 나간 상태.

'몰골이 말이 아니군.'

광역으로 뻗어 나간 뇌전의 폭발에 난도질당한 것이었다.

"모, 모두들 녀석을 막······."

비척비척 날갯짓하며 도주하려는 타락 천사.

'어딜 도망가려고.'

펄럭! 펄럭! 서걱!

창이 한 번 번뜩하자, 목과 머리가 분리된 고깃덩이가 지상으로 추락했다.

띠링!

[3급 좌천사 '푸르카스' 를 처치했습니다.]

[고위 악마 '푸르카스' 를 처치했습니다.]

[<피의 각성> 이 1 포인트 상승합니다. (92/100)]

[<피의 흡수> 능력으로 극소량의 체력 스텟을 흡수합니다.]

[체력 스텟이 1 상승합니다.]

[체력 스텟이 1 상승합니다.]

타락 천사, 푸르카스의 사망을 알리는 알림창.

'제법 스텟이 높은 녀석이었나 본데.'

체력 스텟이 2 포인트나 상승했다는 알림에, 나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기초 스텟이 높아짐에 따라, 아무리 악마들을 죽여도 스텟이 오르지 않던 상황.

그런데 고작 타락 천사 한 명 죽였을 뿐인데, 피의 흡수로 스텟이 두 개나 상승한 것이다.

'피의 각성도 슬슬 발동시켜 볼까.'

"말도 안 돼! 고작 일격에······!"

"이, 이럴 리가 없는데······? 푸르카스 님이 이렇게 허망하게······!"

현재 피의 각성 스택은 92.

창을 고쳐 잡은 나는, 주변에서 입을 벌린 채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악마들에게 달려들었다.

굳이 벽력이 발동되지 않아도, 창을 휘두를 때마다 공기 터지는 소리가 났다.

꽈아아아아앙! 꽈아아아아아아앙! 꽈아아아아아앙!

띠링!

[<피의 각성> 이 1 포인트 상승합니다. (100/100)]

[<피의 각성><벽력 >을 강화시켰습니다.]

[지금부터 24시간 동안 <벽력 > 능력의 데미지가 200% 증가합니다.]

스택을 모두 채우면서 발동된 피의 각성.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

몸에서 살기가 살짝 새어 나오고 있었고, 주변에 존재하는 악마들을 서둘러 죽여버리고 싶었다.

―더 강한 힘을 원하는가.

'아주 좋네.'

하지만 이곳은 전장.

지금까지 피를 뿌려가며 싸워온 악마들에게 그런 감정이 드는 건 당연하다.

즉, 피의 각성으로 인한 부작용이 거의 없다는 뜻.

'이젠 리스크 없이 사용할 수 있겠어.'

심지어 정신 스텟이 하락한다는 알림도 존재하지 않는다.

정신 스텟이 700 가까이 되면서, 드디어 피의 각성을 완벽하게 제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각성된 능력도 딱 내가 원했던 거군.'

이번에 피의 각성으로 강화된 능력은 벽력.

각성 되면서 데미지가 2배 상승했다.

흠칫!

눈이 마주치자, 몸을 벌벌 떠는 악마들에게.

'얼마나 강해졌나 볼까.'

나는 힘차게 달려들었다.

"······!"

"씨발!"

* * *

└와 진짜 개 미쳤······.

└1년 동안 필드에 안 나왔는데 어떻게······.

└플레잉 코치 계약이 돼 있더라도 저게 가능······.

└그래서 렌이 누군데······.

└내가 분명히 말······.

└소리 질······.

커뮤니티 댓글 창이 폭주했다.

너무 빨리 올라가서 제대로 읽을 수조차 없을 정도.

'됐어! 젠장, 빌어먹을! 이건 고민조차 할 필요가 없었어!'

경기를 관람하던 로키의 양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악귀 가면을 쓴 채 악마들에게 공격을 퍼붓고 있는 렌.

강렬한 빛이 번쩍! 하고, 그가 지나간 자리에선 악마들이 우수수 떨어져 내린다.

[1위. '렌' 3,982킬]

[2위. '루시덴' 2,837킬]

수직 상승하는 킬 수만 봐도, 렌이 얼마나 압도적인 학살극을 벌이고 있는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반드시 계약을 체결해야 해.'

지금 렌이 보이고 있는 무위는 고위 리그의 플레이어들을 아득히 상회한 수준.

창을 휘두를 때마다 발산하는 거대한 충격파가, 주변에 휘몰아치는 눈보라를 밀어내고 있다.

'분명 초월 리그까지 올라가겠지.'

초월 리그.

몇십억 아니, 죽은 사람까지 합치면 몇백억 중에서 단 120명 만이 올라갈 수 있는 아득한 경지.

들어올 때부터 평균 스텟이 100을 넘는 네임드들.

그중에서 온갖 특전과 스킬, 장비까지 모두 갖추고 있어야 하고, 그럼에도 수백 번 이상의 경기를 펼치며 살아남은 괴물 중의 괴물만이 올라갈 수 있는 인외의 리그.

필드에 안 나온 1년 사이에, 렌은 어느새 초월 리그에 맞닿아 있었다.

―이야······. 말문이 막히게 만드는 움직임이네요. 도대체 1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추측이야 가능하죠. 몇 개월 전에 팀 투지의 주인이 대신大神으로 승격하지 않았습니까? 그때 플레잉 코치 정산율을 렌에게······ 어어! 어어어!

―마, 말씀드리는 순간! 거점 부근에 있던 초월 플레이어들도 전투를 시작합니다! 베론 님, 갑자기 마계가 왜 저런 무리수를 두는 겁니까!

―이대로 두다간 니플헤임에서 피해가 크다는 걸 깨달은 거죠! 렌으로 인한 도미노 효과······.

'가지고 있는 모든 걸 베팅하겠어.'

로키가 집무실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홀로그램을 종료한 후, 곧장 발할라에 있는 천상계 관리 위원회로 향했다.

다른 팀에 직접 방문할 수 없는 콜로세움의 특성상, 급한 연락을 해야 할 경우엔 천상계 관리 위원회가 중계를 해주기 때문이었다.

"누구······ 앗! 4급 주천사, 유르엘이 로키 님을 뵙습니다."

"음."

"천상계 관리 위원회는 어쩐 일이십니까?"

"팀 투지에 연락할 게 있노라."

천상계 관리 위원회.

입구를 지키고 있던 천사의 물음에 로키가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바로 접객실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이다엘?"

"네! 제가 모시겠습니다, 로키 님!"

천상계 관리 위원회 건물로 들어가던 로키는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일이 생겼나?'

평소보다 훨씬 간소화된 절차만으로도 그를 입장시켜 주었기 때문.

하지만 그 의문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풀렸다.

"로키······."

"쯧, 계속해서 한 명씩 오는군. 이번엔 로키인가."

"토르? 헌원? 풍백이랑 아테나까지······."

접객실로 들어가자, 로키와 같은 대신大神들이 열한 명이나 있었던 것이다.

'모두들 여기 있다는 건······.'

로키와 다르게, 접객실에 있는 열한 명의 대신들은 고위 플레이어들을 보유하고 있다.

한창 고위 리그가 진행 중인 상황에서, 그들이 이곳에 있을 만한 이유는 딱 하나뿐.

'나처럼 아세리안과 직접적으로 협상을 하려는 거겠지.'

설마하니 다른 팀들 또한 팀 투지의 육성법을 노리고 있었을 줄이야.

'빌어먹을.'

로키가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경쟁자가 많을수록, 협상이 난항을 겪게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사실.

'지금 8천만 포인트 정도 가지고 있고, 골드는······ 젠장! 4억 골드밖에 없는데. 아이템은 뭐가 있지?'

그 순간 로키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경쟁자들을 제치고 그가 육성법을 낙찰받기 위해선, 가지고 있는 모든 걸 쏟아부어야 할 것 같았으니까.

물론, 접객실 안에 있는 열한 명의 대신들 또한, 로키와 크게 다르지 않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테나 하나만 해도 머리가 아픈데······ 쯧. 로키 녀석도 발등에 불 떨어진 상황이라 쉽지 않겠어.'

'그냥 골드나 포인트를 내밀어선 협상의 우위를 점하기가 힘들지. 팀 투지가 필요한 게 뭐가 있을까······.'

'후후, 다들 머리 굴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걸?'

팀 투지의 육성법만 있으면, 팀에서 보유 중인 고위 플레이어를 초월 리그로 올릴 수 있다.

그런 확신이 있었기에, 모두들 가지고 있는 가장 비싼 금액을 베팅하려고 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탁탁탁탁탁탁! 쾅!

급하게 달려온 천사 하나가 접객실 문을 거칠게 열었다.

"비, 비상입니다! 천상계 비상 위원회의 소집령이 떨어졌습니다!"

"뭐? 갑자기 왜!"

"니플헤임의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간다고 합니다!"

"······."

접객실에 모여, 천상계 관리 위원회 소속 전령천사傳令天使를 기다리고 있던 상황.

"젠장!"

서로의 눈치를 보던 열두 명의 대신이 벌떡 일어나, 다급하게 접객실을 나섰다.

* * *

꽈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콰지지지지지지직!

"······."

한 번의 폭발음.

그리고 뒤이어 흩어지는 뇌전의 플라즈마를 마지막으로, 전장에 정적이 흘렀다.

'후우, 좀 아쉬운데.'

[1위. '렌' 7,463킬]

2차 피의 각성까지 활성화되며, 벽력의 발동 확률이 크게 상승했다.

그 덕분에, 몰려왔던 악마 대군단을 순식간에 정리할 수 있었다.

이걸로 킬 수 1위는 확정.

주변을 둘러보자, 나를 바라보며 입을 멍하니 벌리고 있는 플레이어들이 보인다.

"······."

"······."

'오랜만에 받아 보는 시선이군.'

내가 보인 위용에 모두들 깜짝 놀란 표정.

나 스스로도 그럴 정도였으니, 저들은 더욱 경악했을 것이다.

그때였다.

펄럭! 펄럭! 펄럭!

"모두 정신 차려라! 이대로 천금 같은 기회를 날릴 생각인가!"

거칠게 날갯짓하며 일갈을 내뱉는 고주몽.

그 순간 화들짝 놀란 각 파티의 파티장들이 서둘러 지시를 내렸다.

"4파티는 모두 이쪽으로!"

"5파티! 어서 모여라!"

순식간에 파티 별로 정렬한 고위 플레이어들.

그러자 고주몽이 세 명의 파티장을 불러놓고 추가 지시를 내렸다.

"미리 각자에게 배정된 성을 함락하고, 계속해서 움직여라. 이곳에서 대승을 거뒀으니, 주변 성들이나 요새도 충분히 집어삼킬 수 있을 터."

"예, 알겠습니다."

"특히, 구트룬. 자네 파티는 고생 좀 부탁한다. 무슨 말인지는 얘기하지 않아도 알겠지."

"물론입니다."

"그럼 모두 해산. 건투를 빌겠다!"

펄럭! 펄럭! 펄럭!

파티장들 간의 짧은 작전 타임이 끝나고, 곧장 7시 쪽으로 방향을 잡는 구트룬.

"모두 출발한다!"

펄럭! 펄럭!

그러자 나를 포함한 스물세 명의 파티원들이 그의 뒤로 따라붙었다.

그렇게 시작된 편대 비행.

적의 정예 군단을 한 번 정리했기에, 일라이저 성城을 점령하는 건 확정적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스물네 명이나 되는데 고결한 수정을 챙길 수 있으려나.'

그렇다면 고결한 수정 또한 챙길 수 있다는 뜻.

물론 이제 플래티넘 등급 스킬로 꽉 채운 나한테는 필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얻을 수만 있다면 굉장히 좋은 아이템이었다.

주창범이나 카이로시아한테 지원을 해주면, 고위 리그로 승급할 가능성이 더 높아질 테니까.

'어쩔 수 없지. 부지런히 움직이는 수밖에.'

보통 이런 경우엔 공헌도를 기준으로 분배하니까, 지금의 내 수준이면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펄럭! 펄럭!

"모두 주목!"

편대 비행 진형을 갖춘 채 일라이저 성으로 향하는데, 구트룬이 크게 외쳤다.

"일라이저 성을 점령한 후, 근처에 있는 5개 성도 모두 차지할 것이다!"

"다, 다섯 개나······?"

"뿐만 아니라 근처 요새들도 모두 쓸어버릴 것이다. 렌! 그대에게 선두를 부탁하겠다!"

'이번 기회에 아예 싹 쓸어버릴 생각이었군.'

구트룬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성 하나당 고결한 수정 두 개로 잡으면, 총 열 개.

거기다 근처에는 요새가 여덟 곳이나 된다.

그곳까지 다 쓸어버리면, 최소 열여덟 개는 나올 것이다.

'세 개는 내가 가져가야 해.'

좁은 성문을 넘어서야 하는 공성 특성상, 길을 뚫는 플레이어의 공헌도가 가장 높을 테니까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펄럭! 펄럭! 펄럭!

그때 저 멀리 보이는, 설원의 한복판에 우뚝 솟아 있는 일라이저 성.

"지금부터 각자 역할을 부여하겠다! 사브르, 아스카, 송화경, 에밀리오, 카스퍼가 렌을 따라 지하 공동으로 침투한다."

"알겠습니다!"

"옛!"

"스벤, 스타인, 시하라딩, 아네리스, 볼티노가 나를 따라 지상을 정리한다!"

"알겠소, 조장! 아니, 파티장!"

"네르칼, 베이너······."

구트룬이 스물네 명으로 이루어진 1파티를 네 개 조로 나누었다.

나와 같이 지하 공동을 공략하는 플레이어는 여섯.

그리고 지상을 소거하는 역할에 열둘.

나머지 여섯은 성 바깥에서, 적의 지원 병력을 막는 역할이었다.

"오늘, 니플헤임의 영역을 많이 점령하면 큰 보너스가 내려올 것이다!"

"오, 보너스! 아주 좋지!"

"그러니 모두 건투를 빈다!"

구트룬의 말을 끝으로.

'시작해 볼까.'

쐐애애애애애애애액!

나는 박살 나 있는 일라이저 성의 한복판을 향해 돌진했다.

꽈아아아아아아앙! 콰지지지지직!

< 238화. 비상飛上(6) > 끝

< 239화. 비상飛上(7) >

―더 강한 힘을 원하는가.

분주하게 니플헤임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성 공략을 시작한 1파티.

성을 공략하는 건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이미 한 차례 우릴 막으려고 출격한 마계 정예 군단을 싹쓸이해 버린 데다가, 피의 각성이 2차까지 발동되며 데미지와 확률 모두 크게 상승한 상태였으니까.

"날 넘어서지 않는 한 이 성을 공략하는 건 어림도······!"

띠링!

[<벽력 >이 발동합니다.]

꽈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헉, 세이도 님이······?"

"뭣들 하는 게냐! 어서 성문을 틀어막아!"

서걱! 서걱! 서걱!

고위 악마들이 성문의 입구를 틀어막고 있었으나, 내가 선두에서 싸우니 순식간에 녹아 내렸다.

'벽력 각성이 완전 사기네.'

일격의 데미지가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하는 벽력.

소수의 강자를 상대하기에 이만한 능력이 없었다.

게임으로 치자면 필살기 수준이었달까.

'이번엔 내가 고결한 수정을 챙길 차례군.'

그리고 우려했던 고결한 수정 소유권에 대한 문제도 말끔히 해결됐다.

―렌에게 25퍼센트의 공헌도를 인정해 주고자 한다. 혹, 불만 있는 자 있다면 미리 나서라.

구트룬이 나서서 미리 교통정리를 해 준 덕분이었다.

공헌도 25%.

즉, 고결한 수정 네 개당 한 개를 나에게 주겠다는 뜻.

'생각보다 많이 챙겨 주네.'

내가 압도적인 위용을 보인 덕분에 성 공략을 수월하게 진행할 수 있게 되었다고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높게 인정해 준 것이다.

내가 25%를 챙기면, 나머지 스물세 명의 평균 공헌도는 3.26%.

나 혼자 여덟 명분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선언한 것과 같달까.

―구트룬 님. 배려는 감사드리지만, 너무 과한 대우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모두에게 한 개씩 돌아갈 수 있도록 더 분발해다오.

욕심을 부린다는 인상을 줘서, 괜한 적을 만들진 않을까 우려하는 내 물음을 깔끔하게 정리하는 구트룬.

카앙! 카앙! 카앙! 쨍그랑!

"오, 이번엔 고결한 수정이 세 개나 나왔군!"

"네오발드르 성 공략도 수고했습니다, 렌 님. 일단 한 개 챙기시죠."

"감사합니다. 바로 다음 성으로 가겠습니다."

그로 인해 나는 한숨 돌릴 새 없이 부지런하게 돌아다녀야 했다.

오죽했으면.

띠링!

[<달빛의 가호>를 사용합니다.]

[모든 체력을 100%로 회복합니다!]

[다시 <달빛의 가호>를 사용하기 위해선, 달빛의 정기를 채워야 합니다.]

[현재 <달빛의 정기> (0/100)]

신화 등급으로 상승하며 얻게 된, 영롱한 달빛 목걸이에 달린 달빛의 가호까지 사용했을 정도.

펄럭! 펄럭! 챙! 채챙! 서걱! 펄럭!

"렌, 벌써 공략이 끝났나?"

지하 공동의 입구를 빠져나오자, 지상의 악마들을 정리하던 볼티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예, 바로 퀘시안느 성으로 가겠습니다."

"지상의 찌끄래기들을 상대하면서 지하 공략보다 오래 걸리다니, 부끄럽군. 이봐, 사브르! 더 서둘러!"

성의 구조적 특성상, 지하 공동에 있는 악마들이 더 강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상의 악마들은 여전히 정리되지 않은 상황.

'내 스텟이 어마어마하게 오르긴 했나 보네.'

펄럭! 펄럭!

발등에 불이라도 떨어진 듯 분주하게 움직이는 열두 명의 플레이어들을 뒤로하고, 나는 곧장 11시 방향에 있는 퀘시안느 성으로 향했다.

―더 강한 힘을 원하는가.

꽈아아아아아아앙! 꽈아아아아아아아아앙! 꽈과과과과과과과과광!

저 멀리에서 형형색색의 마법들이 지상을 폭격한다.

거대한 굉음이 울려 퍼지고, 잠시 후 눈보라를 동반한 충격파가 나를 덮쳐 왔다.

'타이밍도 아주 좋아.'

우리가 니플헤임에 있는 성들을 공략하는 동안, 니플헤임의 거점 쪽에서도 전투가 펼쳐지고 있었다.

그쪽은 다수의 군주 vs 다수의 주신들이 싸우고 있는 상황.

그로 인해 성들을 수비해야 할 악마들이 모두 거점 쪽으로 몰려가서, 이쪽은 텅텅 비어 있었다.

물론 천계 쪽에서도 비상소집을 내려, 거점에 많은 병력을 투입했고.

'빈집 털이는 우리한테 맡기겠다는 거겠지.'

하지만 고위 리그를 진행 중인 120명의 플레이어들은 계속해서 성을 공략하라는 지시가 떨어진 상태.

덕분에 벌써 6개의 성과 11개의 요새를 공략할 수 있었다.

'이번에 퀘시안느 성까지 공략하면, 파티원들에게 각 한 개씩 돌아가겠군.'

펄럭! 펄럭!

잠시 거점 쪽을 응시하던 나는, 더욱 힘차게 날갯짓했다.

어느덧 우리 파티가 얻은 고결한 수정만 29개.

그중 7개를 내가 챙겼다.

그리고 퀘시안느 성에서 나올 고결한 수정 중 한 개도 내 몫으로 떨어질 것이다.

* * *

마계, 판데모니엄.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고 있는데도 가만히 있어야 하다니!"

"이대로면 천계의 위선자들이 지옥을 다 쓸어가겠군!"

"도대체 왕께서는 어찌하여 우리를 출전시키지 않으시는가!"

한자리에 모인 악마들이 분통을 터트렸다.

모두들 가슴을 치며 답답한 속내를 숨기지 않고 있었다.

"이봐, 제파르! 그대는 왕을 알현했으니 이유를 알겠지. 말해 보게! 왜 우릴 출전시키지 않는 것인지!"

"······."

서열 27위의 악마, 로노베의 물음에 제파르는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그 또한 궁금했으니까.

지금 같은 비상시국에, 도대체 왜 자신들을 출전시키지 않는 것인지.

왜 가장 날카로운 검들을 마계라는 검집 안에만 넣어두는 것인지.

'이유라도 알면 이렇게 답답하지는 않을 텐데.'

입을 꾹 닫은 채 침묵을 유지하는 제파르를, 로노베는 계속해서 몰아붙였다.

"프레미어에서 릴리스 님이 전사하셨다고 하더군. 자네 지금 내 얘기 듣고 있나? 일곱 분이나 계시던 군주께서 이제는 네 분밖에 안 남았다는 뜻이란 말일세!"

"대신에 천계는 주신 두 명과 대신 세 명이 죽었다고······."

쾅!

제파르가 작게 항변하자, 로노베가 테이블을 거칠게 내려쳤다.

"흥! 우리까지 출전했다면 그보다 몇 배는 더 죽였을 건데, 그걸 지금 말이라고!"

"······."

"아직 늦지 않았어! 어서 왕께 간청드려 주게. 지금이라도 우리에게 지옥 출정 명령을 내려달라고······."

분노를 토로하다가, 마지막에 가선 숫제 부탁하듯 얘기하는 로노베.

'어쩔 수 없지.'

그 모습에 제파르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마찬가지로 그 또한 마계의 앞날을 걱정하고 있었으니까.

천계의 광대들에게 유린당하는 니플헤임.

또 한 명의 군주, 색욕의 악마 릴리스의 전사.

이대로 흘러가다간 삼지옥三地獄 모두 천계의 손에 떨어질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부디 윤허해 주셔야 할 텐데······.'

그런 생각을 하며 오만의 궁전에 도착한 제파르.

"서열 16위, 제파르 경이 알현하옵니다."

―들라 하라.

"들어가시지요."

수문 악마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제파르가, 대전大殿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마주하게 된 왕.

'이게 무슨······.'

거대한 마기가 그를 짓누른다.

진득진득한 마기에 숨이 턱, 하고 막혀왔다.

감히 고개를 들 엄두가 나질 않았다.

'조심해야 해.'

오늘따라 굉장히 기분이 나빠 보이는 왕.

등줄기로 흐르는 식은땀을 느끼며, 제파르가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허공을 응시하고 있는 걸 보니, 왕께선 오늘도 콜로세움 시스템에 접근해 지옥의 경기를 관람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버지께서 알아차리신 모양이군. 마지막 성서가 너무 허무하게 날아갔어."

'마지막 성서? 아버지? 도대체 무슨 말이지?'

숨죽인 채 왕이 하문하길 기다리던 제파르는, 작게 읊조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갸웃했다.

군주를 제외하고, 악마들 중에선 그나마 왕과의 독대가 잦은 제파르.

하지만 그조차도 왕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계획을 갖고 있는지 알고 있는 게 없었다.

평소에 왕은 그릇에 관련된 일로만 그를 불렀을 뿐.

"······."

작은 읊조림을 마지막으로, 싸늘한 침묵이 흐르는 대전.

그 정적이 깨진 건 5분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 때였다.

흠칫!

왕의 시선이 느껴지자 제파르가 몸을 잘게 떨었다.

마치 그를 꿰뚫어 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휘하 악마들이 분노하여 찾아왔는가."

"······그, 그게 아니오라."

허를 찔린 듯 제파르가 말을 더듬었다.

왕좌에서 벗어나지 않음에도, 세상 모든 걸 꿰뚫어 보는 듯한 모습.

그러자 왕이 말을 돌렸다.

"이번에 릴리스가 죽었다더군."

"······예. 주신 누아다와 자이로스를 죽이고 전사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년의 뿔도 수습해 와서 그릇에 담거라. 그리고 이것도."

왕이 팔을 뻗자, 공간의 뒤틀림이 일어났다.

아공간을 생성한 것.

"이, 이건?"

왕이 꺼내 든 것은 어떤 가면 조각이었다.

온 세상의 모든 빛을 빨아들일 만큼 까만 조각.

"마몬, 그 친구의 힘의 정수가 담긴 조각이지. 녀석의 힘은 이걸로 만족해야겠군."

"숙주는 포기하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제파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왕이 그동안 이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과 자원을 쏟아부었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

"아버지께서 알아차린 이상 놈을 취하기란 요원한 일. 그것들을 그릇에 담아두거라. 그리고 준비가 완료되면······."

뿌드드득―

왕이 왕좌에서 일어나자, 잘려 나간 그의 날개들이 눈에 띄었다.

왕관 아래 얼핏, 그의 잘려 나간 뿔이 보였다.

"내가 그릇을 취하겠노라."

"······!"

순간 제파르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레비아탄의 신물, 베리알의 뿔, 거기다 이번에 죽은 릴리스의 힘.

'이걸 계획하느라, 마계에 있는 악마들을 아껴두셨던 거였어.'

마지막으로, 왕이 넘겨준 마몬의 정수까지.

그 모든 걸 취했을 때의 왕이 떠올라 전율한 것이다.

왕이 보기 드물게, 씨익 미소 지었다.

"이제 이 몸뚱이를 벗어날 때가 되었노라."

장엄하게 깔리는 그의 목소리가 대전을 울렸다.

* * *

지하 공동에 자줏빛을 흩뿌리는 거대한 크리스탈.

카앙! 카앙! 카앙! 쨍그랑!

마성석을 부수자, 영롱한 오색 빛이 뿜어져 나오는 작은 구슬 세 개가 보인다.

'운이 좋은데.'

띠링!

[<소모품:고결한 수정> 을 획득하셨습니다.]

퀘시안느 성에 이어, 노아 성에서도 고결한 수정이 세 개나 나온 것이다.

"후우, 모두 고생 많았다. 특히 렌. 그대가 정말 애써 주었다."

"구트룬 님 덕분입니다. 모두 고생 많으셨습니다."

니플헤임을 9등분 했을 때, 내가 소속된 1파티가 맡은 영역은 7시와 9시 구역.

"이만 나가 보도록 하지."

구역 내에 있는 모든 성과 요새를 점령한 덕분인지, 구트룬이 만족스러워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구천을 떠도는 원한의 울림!]

챙! 서걱! 서걱! 꽈과과과과광!

파티장인 구트룬을 위시해 지상으로 나오자, 지상을 정리 중인 파티원들이 보였다.

이게 우리가 처리해야 할 마지막 성이라서 그런지, 모두들 여유롭게 학살극을 벌이고 있었다.

꽈아아아아아아아아앙! 꽈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여전히 거점 쪽에서는 충격파가 뻗어져 나오는 상황.

'다른 파티들은 어떻게 됐나 볼까.'

나는 킬 수 현황창을 열어서, 순위를 확인했다.

[킬 수 현황]

[1위. '렌' 9,998킬]

[2위. '고담덕' 5,507킬]

[3위. '솔라리' 5,334킬]

[4위. '구트룬' 5,202킬]

[5위. '고주몽' 5,002킬]

[6위. '루시덴' 4,947킬]

역시나 가장 위에 있는 건 내 닉네임.

압도적인 킬 수로, 2위를 기록 중인 고담덕과 두 배 가까이 차이가 벌어져 있었다.

'모두들 점령이 끝났나 보군.'

랭킹에 등록된 플레이어들의 킬 수가 더 이상 오르지 않는 걸 보니, 다른 파티들도 우리처럼 마무리 중인 모양.

펄럭! 펄럭! 펄럭!

그때, 하늘에서 무수한 숫자의 날갯짓 소리가 들려왔다.

"구트룬!"

"고담덕 님, 고주몽 님."

고개를 들어 보니, 2파티부터 5파티까지, 96명의 플레이어가 노아 성으로 내려앉고 있었다.

"정말 고생 많았다. 진행 상황을 보고받고자 한다."

고담덕의 물음에, 구트룬이 품속에서 지도 한 장을 꺼내 바닥에 펼쳤다.

그러고는 지도 한 켠에 크게 동그라미를 쳤다.

"저흰 여기부터 여기까지, 이 안에 있는 모든 성을 쓸어버렸습니다."

"오······!"

구트룬의 대답에 술렁이는 다른 파티원들.

엄청난 성과에 만족한 듯, 고담덕이 구트룬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대 파티가 가장 큰 전공을 세웠군. 정말 고생 많았다."

"파티원들이 잘 따라준 덕분입니다."

"이걸로 니플헤임의 7할을 우리가 차지했군."

'다른 파티들도 많이 먹었네.'

어깨 너머로 힐끔, 지도를 살핀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최외곽 몇 군데와 헬하임 쪽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영역을 공략해 낸 것이다.

"저쪽도 슬슬 끝난 것 같군."

곁에서 팔짱을 낀 채, 거점 쪽을 바라보며 중얼거리는 고주몽.

'그러고 보니.'

어느 새부터인가 거점 쪽에서 날아오던 굉음이 뚝 끊겨 있었다.

그때였다.

"어! 저기 좀 보십쇼!"

"오······!"

한 플레이어의 손짓에 위를 쳐다보니, 하늘을 수놓는 엄청난 숫자의 천사들이 보였다.

'이 정도면 경기가 끝났다고 봐도 되겠군.'

아마 신성석을 설치하기 위해 날아오는 천사들일 것이다.

그리고 잠시 후.

띠링!

[승리 조건 : 니플헤임에 천상계의 영역을 만들어라.]

[목표 : '절망의 협곡'에서 가장 가까운 성, 엘린.]

[조건을 충족하였습니다.]

[기본급 x 1의 승리 수당이 지급됩니다.]

예상했던 것처럼, 경기 종료 콜이 떴다.

< 239화. 비상飛上(7) > 끝

< 240화. 점화點火(1) >

[목표 : '절망의 협곡'에서 가장 가까운 성, 엘린.]

[조건을 충족하였습니다.]

[기본급 x 1의 승리 수당이 지급됩니다.]

띠링!

[추가로 17개의 성城과, 24개의 요새를 탈환했습니다.]

[대애애애애박! 정말 초대박!! 꺄아아아아악! 정말 최고예요!]

[ ദ്ദി ᵔ∇ᵔ )♡ ]

[기대를 아득히 상회하는 성과를 이뤄냈습니다.]

[기본급 x 5 의 추가 보너스를 지급받게 됩니다.]

'기본급의 5배면······ 100만 포인트를 받는군.'

알림창을 본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보너스.

전에 군주 중 한 명인 베리알을 죽였을 때 x 3의 보너스를 받았다.

하지만 그때는 직접적으로 군주 처치에 가담하지 않은, 전투에 참가한 모든 플레이어에게 보너스를 뿌렸던 것.

'나쁘지 않네.'

곰곰이 생각해 보면, 18배나 더 많은 성과를 이뤄낸 것이었으니 x 5 정도는 충분히 받을 법한 보너스였다.

'킬 수 보너스는 얼마나 들어오려나.'

나는 이어질 알림창을 기다렸다.

[킬 수 현황]

[1위. '렌' 9,998킬]

[2위. '고담덕' 5,507킬]

[3위. '솔라리' 5,334킬]

[4위. '구트룬' 5,202킬]

[5위. '고주몽' 5,002킬]

[6위. '루시덴' 4,947킬]

[놀라운 업적!]

[압도적인 킬 수를 기록하셨습니다!]

[추가 보너스를 받습니다.]

[9,998 킬을 달성하셨기 때문에 기본급 x 3의 보너스를 지급받게 됩니다.]

[압도적으로 킬 수 1위를 달성하셨기 때문에 200,000 P 보너스를 추가로 지급받게 됩니다.]

'킬 수 보너스도 나쁘지 않군.'

이어진 알림창에 나는 진한 미소를 지었다.

포인트는 포인트대로 챙겼고, 고결한 수정도 다수 얻었다.

이 정도면 일 년 만에 복귀한 복귀전으로는 아주 만족스러운 결과.

"모두 고생 많았다. 특히 내 지휘를 따라 준, 각 파티의 파티장들에게 고마움을 표하고 싶군."

"잘 이끌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고담덕 님."

"팜에서 다시 보자고."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고위 리그-로열블러드나이트 88의 3경기를 종료합니다.]

[파이트 머니로 1,980,000 P 를 지급받았습니다. (팀 '투지' 수수료 220,000 P 차감)]

[기본급 +200,000 P / 승리 수당 +200,000 P / 추가 보너스 +1,000,000 P / 킬 수 보너스 +800,000 P / 수수료 -220,000 P]

[다음 경기부터는 기본급을 300,000 P 로 책정합니다.]

[소속된 팀의 팜으로 이동합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하얀 빛무리가 내 주위로 모여들었다.

팜으로 이동하기 위한 임팩트.

"모두들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 속에서 나는, 모두에게 고개를 숙였다.

파바밧!

"모두들 어서 오세요. 정말 고생 많았어요."

띠링!

[모든 상태를 100%로 회복합니다.]

팜으로 돌아가자, 내 주변으로 계속해서 공간이 일렁이고 있었다.

'팀원들도 같이 복귀했네.'

내가 고위 리그 경기를 진행하고 있던 당시, 니플헤임의 거점 주변에서도 대규모 전투가 펼쳐졌다.

그로 인해 긴급 미션으로 투입된 팀원들이 함께 복귀한 것이다.

"후우, 살았다······.

"크으으윽······."

"다녀왔습니다······."

팀원들의 상태를 본 나는 눈을 번쩍 떴다.

팔 하나가 잘려 나갔거나, 이마에서 피를 흘리는 등 다들 상태가 말이 아니었기 때문.

'전투가 엄청 치열했던 모양인데.'

다행히 팜으로 돌아오면서 상처들이 빠르게 회복되고는 있지만, 조금만 늦었어도 위험했을 법한 상처를 입은 팀원들도 간간이 보일 정도였다.

'하나, 둘, 셋, 넷······.'

나는 일단 팀원들의 숫자부터 셌다.

긴급 미션은 상위 플레이어 이상부터 출전한다.

'예순둘······.'

그래서 팀에 소속된 상위 플레이어의 숫자를 파악하고 있으면 사상자가 있는지 바로 체크할 수 있다.

'한 명이 부족해.'

그리고 끝까지 숫자를 셌을 때, 나는 심장이 철렁했다.

팀 투지에 소속된 상위 플레이어의 숫자는 63명.

하지만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봐도 공터에 존재하는 플레이어는 62명뿐이었다.

즉, 이번 전투에서 한 명이 사망했다는 뜻.

누가 죽었는지는 금세 파악할 수 있었다.

"모용악 님, 데릭 못 보셨습니까?"

"······."

얼마 전에 나와 대련을 했던, 5기수로 들어온 조수하.

그가 두리번거리며 자신의 단짝 친구를 찾고 있었다.

좁은 공터.

예순 명 조금 넘는 사람들 사이에서, 누군가를 찾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보이지 않는다는 건 딱 하나뿐.

"······."

순간 숨 막히는 정적이 공터를 찍어 눌렀다.

모두들 벌이라도 받는 것처럼 고개를 떨군 채,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조수하의 시선을 외면하고 있었다.

'쯧.'

정말 최악이다.

보통 이런 경우엔 일부러라도 웃으면서 분위기를 띄우려고 한다.

이곳은 콜로세움이니까.

서로에게 무기를 겨누고, 피를 뿌리며 죽고 죽이는.

죽음과 가장 가까이에 있는 세상이었으니까.

누군가의 죽음은 사실, 이곳에서는 굉장히 흔한 일이었다.

'이런 분위기는 곤란한데.'

그럼에도 분위기가 축 가라앉은 이유는 딱 하나였다.

'다들 너무 지쳤어.'

방금 전까지 격렬한 전투를 펼치고 온 탓에, 모두들 기력이 떨어진 상태였으니까.

공포는 전염된다.

그리고 한 번 스며든 공포는 진한 얼룩으로 남아, 계속해서 따라다닌다.

그걸 가장 잘 알고 있는 아세리안이 방긋 웃으며 앞으로 나섰다.

"모두들 고생 많았어요! 탱커 중에선 창범 씨 밖에 안 보이더라구요. 아, 모용악 씨도 정말 멋졌어요!"

그러고는 밝은 목소리로 한 명 한 명을 격려했다.

"······."

"오늘도 여러분을 위해 파티를 준비했답니다! 내일이 없다는 마음으로 먹고 마시죠!"

"······예."

"파티를······ 시작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숨이 턱 막히는 정적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죽했으면 파이팅 넘치게 나섰던 아세리안이 말끝을 흐릴 정도.

'내가 어떻게든 해봐야겠군.'

작게 한숨을 내쉰 나는 마력을 끌어올렸다.

"모두 주목."

낮게 울리는 목소리에 팀원들의 시선이 집중된다.

나는 인벤토리를 열어, 직전 경기에서 얻었던 고결한 수정을 꺼내 들었다.

"이번에 제가 고결한 수정을 얻었습니다."

"······!"

그러고는 팀원들의 눈에 잘 보이게, 눈높이에서 이리저리 흔들었다.

'갖고 싶지?'

순간, 방금 전까지 거무죽죽하게 죽어가던 팀원들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상위 플레이어들이라면.

아니, 누구라도 얻기를 간절히 원하는 아이템.

플래티넘 등급 스킬의 위용을 알고 있는 플레이어들이라면, 본능적으로 시선이 갈 수밖에 없는 고귀한 보석.

'생존율을 올리기엔 좋은 스킬 만한 게 없지.'

피식 웃은 나는 고결한 수정을 손가락으로 튕겼다 받았다 하며, 팀원들을 쓸어 보았다.

"이 고결한 수정은, 최근 저를 많이 도와주신 모용악 님께 드리겠습니다. 모용악 님? 나와서 받으시죠."

"아, 정말 감사합니다."

나는 교탁에서 상장을 건네는 선생님처럼, 모용악에게 고결한 수정을 넘겨주었다.

짝짝짝짝짝짝!

그러자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도, 기립 박수를 치며 모용악을 축하해 주는 팀원들.

유심히 지켜보던 나는, 그들 안에 담긴 아쉬움이란 감정을 읽어낼 수 있었다.

'고작 이 정도로 분위기를 띄울 수 있을 거라곤 생각도 안 했어.'

나는 인벤토리에서 고결한 수정 한 개를 추가로 꺼내 들었다.

"······!"

"자, 다음 고결한 수정은······. 루치아노 님. 박수를 제일 열심히 쳐 준 루치아노 님께 드리겠습니다."

"오오오오······."

짝짝짝짝짝!

팀원들이 아쉬움과 감탄이 반반 섞인 환호성을 냈다.

그리고 내가 또 한 개의 수정을 꺼내 들자.

"오오오오오오!"

환호성이 더욱 커졌다.

"이번엔 가장 큰 환호성을 낸 수호 님께 드리겠습니다. 수호 님?"

"우와아아아아아아아!"

짝짝짝짝짝짝짝짝짝!

네 번째 고결한 수정까지 꺼내 들자, 환호성이 공터를 쩌렁쩌렁 울렸다.

이제는 휘파람까지 불며 시선을 끌려고 하는 팀원까지 나올 정도였다.

그 사이에서, 조용하게 손을 드는 주창범.

"형, 혹시 고결한 수정 몇 개나 가지고 계신 거예요?"

그의 질문에 나는 잠시 고민하는 척 뜸을 들인 후, 손가락을 폈다.

"음······. 아직 이렇게 남아 있습니다."

"우와! 그럼 도대체 몇 개를 얻으신 거지?"

"네 개를 주셨는데도 아직 다섯 개가 남았다는 뜻이니까······. 아홉 개!"

방금 전까지 죽상이었던 팀원들이 눈을 빛낸다.

아직 다섯 개나 남은 상황.

자신들에게도 하나쯤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 눈동자가 이글이글 불타오르고 있었다.

'후우, 분위기 올리는 건 성공했군.'

원래는 따로 조용하게 불러서 건네줄 생각이었다.

왜냐하면, 이미 주려고 마음먹었던 팀원들이 내정되어 있었기 때문.

'상위 넘버링 플레이어들 위주로 주려고 했는데.'

주창범과 모용악, 카이로시아 등등.

상위 넘버링에 있는 팀원들에게 고결한 수정을 주면, 고위 리그로 올라올 확률이 더욱 높아진다.

다른 팀원들은 차별이라고 느끼겠지만, 그들에겐 이후 또 얻었을 때 챙겨주면 된다.

지금 내 수준으로 봤을 때, 이후에도 고결한 수정을 챙길 상황이 나올 거라고 판단한 것이다.

'우리 팀은 아직 자리를 잡아가는 중이야.'

하지만 나는 과감하게 그 생각을 접고, 무작위로 팀원들에게 고결한 수정을 뿌렸다.

한 번 삐끗하는 순간, 이전의 분위기로 돌아가는 건 불가능할 거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계속해서 지금처럼 나아가는 건 어렵겠지만, 노력 여하에 따라 적어도 1년에서 2년 정도는 현 상태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나머지는 파티에 가장 열정적으로 참여하는 다섯 분께, 아세리안 님이 직접 선정해서 드릴 겁니다. 아세리안 님?"

짝!

"자, 이제 파티를 시작하죠! 제가 꼼꼼히 여러분을 살필 거예요. 누가 가장 이 밤을 불태우고 있나!"

바통을 넘기자, 빠르게 치고 들어오며 분위기를 끌어 올리는 아세리안.

확실히 눈치 하나만큼은 그녀를 따라갈 존재가 없을 것이다.

"오오, 파티 준비하자, 파티!"

"의자 가지고 와! 내가 테이블을 세팅하지!"

파티 준비를 위해 일사불란하게 돌아다니는 플레이어들.

그 속에서 아세리안이 조용히 다가와 속삭였다.

'정말 고마워요, 안우진 님.'

'아닙니다.'

굳이 얘기하지 않아도, 이제는 그녀와 손발이 척척 맞았다.

다음 날 아침.

'정신이 없네.'

집무실 의자에 앉아 커뮤니티를 열어보니, 한바탕 난리가 나 있었다.

―다섯 군주 중 하나, 색욕의 악마 릴리스 처치. 하지만 뼈 아픈 손실.

―주신 누아다와 자이로스 전사. 프레미어 공성전에 참가한 모든 존재가 눈보라 속 추모. "아버지 품에서 평온하길."

―천상계에 이어진 애도의 물결. 게임 메이커들 "1달간 초월·고위·상위·하위 리그 진행은 없을 것."

원래 일곱이었던 마계의 군주가, 이제는 넷밖에 남지 않았다.

니플헤임에 있는 마계의 거점 프레미어에서, 색욕의 악마라고 불리는 릴리스를 처치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생각보다 우리 쪽 피해가 크네.'

하지만 그로 인해 천계에서는 두 명의 주신과 세 명의 대신이 죽었다.

거기다 수많은 플레이어와 천사들의 손실까지 생각하면, 오히려 '상처 뿐인 승리'라는 표현이 적당할 것 같았다.

물론 커뮤니티에 난리가 난 건, 프레미어에서의 전투 때문이 아니었다.

└와.. 경기 보다가 지릴 뻔했다..

└렌은 곧 있으면 초월 리그 갈 듯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쿠 훌린 표정 나만 봤냐? ㅋㅋㅋㅋ ㅈㄴ 허탈해하던데 ㅋㅋㅋㅋㅋㅋㅋㅋ 지도 느낀 거지 ㅋㅋㅋㅋㅋㅋ 애초에 비빌 수가 없는 상대였다는 걸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좀 적당히 써라; ㅋ무새냐?

└ㅅㅂ 저게 어떻게 가능한 거냐고ㅡㅡ 알고 보니까 1년 동안 쉬는 대가로 오딘 님께서 천문학적인 포인트를 준 거 아님?

└윗댓 / 조금만 생각이란 걸 하고 살아라 ㅉㅉ 주신님들이 그렇게 생각이 없어 보이냐? 딱 보니까 팀 투지에서 렌한테 포인트 몰아준 거구만 ㅋㅋㅋㅋ

└어쩐지 아세리안이 대출받아서까지 대신에 오르려고 하더만.. 플레잉 코치 정산율 10% 땡겨주면 충분히 가능..

└??? 그거야 당연히 예상 가능한 건데, 문제는 팀 투지로 들어오는 포인트가 그렇게 많을 줄 몰랐던 거지 ㅋㅋㅋㅋ 도대체 팀 투지 소속 플레이어가 몇 명임?

└상위 리그만 봐도 팀 투지 애들 심심치 않게 보임 ㅇㅇ 하위 리그는 안 봐서 모르겠음 ㅎ

└하위 리그에서 팀 투지 별명이 수도꼭지입니다. 틀면 나와서요~

└팀 투지에서 운영하는 팜 꼭 한 번만 방문해 보고 싶다 ㅠㅠ 도대체 어떻게 관리하고 있길래 저게 가능한 건지 궁금해 미치겠다 ㅠㅠㅠ

'역시 내 닉네임으로 도배가 됐군.'

지구 출신으로선 최초로 상위 리그에 도달했다는 것.

하위 리그와 상위 리그의 성계 대항전을 씹어 먹었다는 것.

거기서 그치지 않고 고위 리그까지 뚫어냈다는 것 등등.

그런 타이틀들이 있었기에, 이전에도 내게는 과분한 관심이 쏟아졌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궤를 달리할 정도였다.

'군주를 죽인 것보다, 내 닉네임이 더 많이 올라오네.'

커뮤니티를 이용하는 신들의 절대다수가 콜로세움의 관객.

거기다 한 팀의 주인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보여준 움직임에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 조금만 더 있으면 초월 리그에 올라갈 수 있겠군.'

딱 100명.

아니, 이제는 120명밖에 소속되어 있지 않은 초월자들의 리그.

그곳에 들어간다는 건 임팩트 자체가 다를 테니까.

'그러려면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지.'

의자에서 일어난 나는 집무실을 나섰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

'오늘부터 제대로 굴려줘 볼까.'

그 격언에 따라, 대련장에서 주창범과 카이로시아를 단련시켜 줄 생각이었다.

< 240화. 점화點火(1) > 끝

< 241화. 점화點火(2) >

―팀 투지의 계속되는 선전. 그들의 한계는 어디인가.

―하위 리그를 넘어 상위 리그로. 그리고 이제는 고위 리그까지.

―주신 환웅, "팀 투지는 역사상 최고의 팀."

―상위 리그 탑10 안에 팀 '투지'만 세 명. 이제는 인정해야 할 때.

└나는 하위 리그부터 팀 투지를 눈여겨 봐왔는데 저 팀은 도저히 무너질 것 같지가 않음.

└솔직히 팀 투지 별로 안 좋아해서 명문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도 싫어하는데, 이제는 인정을 안 할 수가 없다 ㅅㅂ

└ㄹㅇ ㅋㅋㅋㅋ 하위 리그 씹어 먹을 때만 해도 상위 리그는 다를 거라 했는데.. 결국 상위 리그도 똑같죠? 당시에 투지 까던 애들 다 수치사 했죠? 이제는 말 바꿔서 고위 리그는 다를 거라고 게거품 물면서 헛소리하고 있죠?

└ㅋㅋㅋㅋㅋㅋ 죠죠죠 거리네 저 ㅅㄲ 한 대 후려 쳐주고 싶다 ㅋㅋㅋ

└고위 리그는 다를 거라는 놈들한테 한마디 해주고 싶음. 렌을 보세요. 결국 고위 리그에서도 똑같을 거랍니다~

발할라, 천상계 관리 위원회.

딸깍―

"어머, 모두 와 계셨군요. 늦어서 죄송해요."

접객실 문을 열고 들어온 아세리안.

그녀는 내부에 있는 열두 명의 신들을 쓸어 보며, 우아하게 고개를 숙였다.

"어서 오시오, 아세리안."

"팜을 관리하다 보면 그럴 수 있죠. 거기다 팀 투지는 콜로세움의 최고 명문 팀이잖아요. 그런 팀을 운영하시는 분이라면 바쁠 수밖에 없죠."

"우리도 온 지 얼마 안 됐소이다. 이렇게 시간을 내주어 감사하오."

그러자 열두 명의 대신大神들이 앞다퉈 아세리안에게 인사를 건넸다.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맞이하는 게, 마치 몇 년 떨어진 지기를 만난 것 같은 모습.

"그럼 실례할게요."

그 광경을 보며 여유로운 미소를 짓던 아세리안이, 자연스럽게 상석에 착석했다.

그러고는 한 명 한 명 쓸어보며 입을 열었다.

"천상계 관리 위원회를 통해 저와의 만남을 요청하셨다고요."

"그렇소이다."

"그런데 같은 날 같은 시간에 요청이 들어왔다고 해서, 부득이하게 한 자리에서 만남을 갖게 되었어요. 모두 같은 용건이신 것 같아서요. 혹시 다른 용건을 갖고 계신 분 있으신가요?"

아세리안이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하지만 그녀의 말에 손을 드는 신은 한 명도 없었다.

용건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얘기하지 않았지만, 이들이 아세리안에게 만남을 요청할 만한 이유는 딱 하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천사에서 신으로 승격한 지 얼마 안 됐는데도 능구렁이가 따로 없군.'

'이렇게 우리를 모은 건 경쟁을 붙여서 더 비싼 가격을 받아내려는 거겠지. 욕심만 가득해서는.'

'후우, 싸게 후려치는 건 불가능하겠는데.'

그 이유를 빤히 알고 있는 대신들은, 속으로 그녀를 씹으면서도 입가에 환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같은 용건이오. 오히려 이렇게나마 아세리안 님의 귀한 시간을 지킬 수 있게 되어 영광이라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보통은 구매자가 갑이지만 지금처럼 경쟁자가 많아지는 순간, 그 관계가 반대로 뒤바뀐다.

아세리안이 자신들보다 까마득한 후배임에도 불구하고, 억지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하지만 그들 중 두 명만큼은 생각이 달랐다.

'이 자리에 나왔으니 팔 의향이 있다는 뜻이겠지.'

'좋았어. 경쟁이라는 건 결국, 육성법의 구매자는 단 한 명이 될 거란 이야기야.'

팀 절망의 주인 로키와 팀 용기의 주인 아테나.

두 대신은 다른 신들과 달리,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팔아주기만 한다면, 경쟁으로 인해 가격이 상승하는 건 크게 상관하지 않았으니까.

로키와 아테나는 얼마가 됐든, 투자한 금액 이상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럼 같은 용건이신 걸로 알고 여쭙겠습니다. 제게 하실 제안이라는 게 뭘까요?"

아세리안의 물음에, 로키가 대표로 나섰다.

"이전에 그대가 판매한 육성법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소. 우리는 팀 투지가 공개하지 않은 나머지 육성법을 구입하고 싶소만."

"나머지 육성법이요?"

"그렇소.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다."

로키의 말을 들은 아세리안이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여기 있는 누구 중에도, 그게 의도적인 감정 표현이라는 걸 모르는 이는 없었다.

"요청하신 건 저희가 가진 정수, 팀 투지의 모든 것이라고 할 수 있어요. 팔 생각도 없지만, 만약 팔게 된다면 헐값은 아닐 거예요."

"물론 헐값을 제시할 생각은 전혀 없소. 이번에 대신의 위位에 오르기 위해 막대한 빚을 졌다고 들었소만?"

"음······. 낯부끄러운 소문이 퍼졌군요. 맞아요, 이번에 무리 좀 했죠. 1억 포인트 정도를 대출받았어요."

아세리안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였다.

"만약 제게 그 육성법의 정수를 주신다면, 전액을 대리 상환해 드리겠습니다."

한쪽 옆에 앉아 로키와 아세리안의 대화를 듣고 있다가, 그들 사이에 끼어들며 툭 하고 내뱉는 토르.

그를 시작으로 다른 신들이 앞다퉈 조건을 제시했다.

"나는 빚 전액 대리 상환에 추가로 2억 골드를 드리겠소."

"저는 거기서 2억 골드 더요!"

"대리 상환이야 당연한 거고, 나는 10억 골드를 추가로 주겠습니다!"

"난 거기서 2억 골드 더!"

"받고 플래티넘 등급 스킬북 하나 얹어요."

"신화 등급! 신화 등급 아이템 세 개를 더 주겠소!"

점잖은 분위기였던 접객실이 순식간에 시끌벅적해졌다.

하지만 이 사달의 원흉이었던 아세리안은 조용히 듣고만 있을 뿐.

"전액 대리 상환. 10억 골드. 플래티넘 등급 스킬북 세 개, 신화 등급 아이템 세 개, 그리고 고결한 수정 두 개."

"······!"

"······!"

그런 분위기 속에서 지금껏 가만히 앉아 있던 로키.

그는 시작부터, 준비한 최대치의 금액을 던졌다.

'여기서 나보다 더 비싼 금액을 부를 수 있는 신은 없어.'

그보다 더 비싼 금액을 부를 신은 존재하지 않을 거라는 자신이 있었으니까.

제시한 금액은 로키가 가지고 있는 전부라고 할 수 있다.

한마디로 올인을 한 거라고나 할까.

'난 팀 투지의 육성법이 아니면 안 돼.'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는 그와 다르게, 다른 신들은 고위 플레이어들을 다수 보유하고 있다.

협상에 임한 마음가짐부터 다를 테니, 그보다 비싼 금액을 베팅할 수 있는 신은 없을 것이다.

"······."

시장통을 연상케 하던 접객실이 순식간에 침묵에 휩싸였다.

앞다퉈 더 높은 금액을 제시하던 신들은 로키를 바라보며 경악할 뿐, 누구 하나 입을 열지 못했다.

오죽했으면 로키의 가격 제시에, 차분하던 아세리안의 눈빛마저 잠시 흔들렸을 정도.

'됐어. 팀 투지의 육성법은 내 거야.'

그 모습에 로키가 원탁 아래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

바쁘게 머리를 굴리던 신들이, 이내 하나둘 고개를 내저었다.

"흐음······. 로키 님께서 굉장히 흥미로운 금액을 제시해 주셨네요. 그 정도라면 저희 팀의 육성법을 전부 공개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아주 현명한 선택이오."

"혹시 로키 님보다 더 비싼 금액을 제시하실 분이 계실까요?"

테이블에 앉은 대신 한 명 한 명과 눈을 맞추는 아세리안.

로키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마 없을 것이오. 자, 그럼 나와 계약을 합······."

그때였다.

"제가 그것보다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하겠습니다."

테이블 한쪽 끝에서 나온 고운 목소리.

'뭐, 뭐라고?'

로키가 고개를 휙! 하고 돌렸다.

"1억 포인트. 추가로 10억 골드. 고결한 수정 다섯 개. 그리고······."

그곳엔, 지금까지 한 번도 입을 떼지 않았던 아테나가, 여유롭게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이걸 드리도록 하죠."

그녀가 손바닥 위, 영롱한 빛깔을 내는 구슬을 내밀었다.

"그, 그건······!"

* * *

니플헤임에서 펼쳐진 대전투가 끝나고 한 달 후.

전사자를 추모하기 위해 중단되었던 경기가 재개되며, 팀 투지도 평소의 일상으로 돌아왔다.

그 말은 즉, 팀원들이 경기에 출전하기 시작했다는 뜻.

다행히, 상위 플레이어 중에선 추가 사망자가 나오지 않았다.

'순조롭게 잘 흘러가고 있어.'

―상위 리그 탑10 안에 팀 '투지'만 세 명. 이제는 인정해야 할 때.

집무실 의자에 앉아, 커뮤니티에서 게시글을 읽던 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주창범과 카이로시아 이후, 또 다른 랭커가 팀 투지 소속에서 나왔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모용악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내 예상과 달리, 새로운 랭커는 다름 아닌 당소소.

그녀가 최근 경기에서, 기존의 랭커였던 아시카가를 쓰러트리며 새롭게 랭커로 등극한 것이다.

'왜 무림인들이 사천당가를 그렇게 두려워했는지 알 것 같군.'

사천당가는 독과 암기에 특화되어 있는 무가武家.

그곳의 적장녀인 당소소는 가문의 비전을 모두 이어받아, 독과 암기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수준이다.

'본인 만의 특출난 무기를 가지고 있지.'

내가 사준 부채와 복면이 그녀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리면서, 이제는 그녀와 대련할 때 독에 중독되지 않는 건 불가능할 정도.

독을 잘 다루는 플레이어가 워낙 드물다 보니, 웬만해서는 그녀의 독공에 쩔쩔맬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른 장점들도 많고.'

무림 출신답게 기본기도 뛰어나서 수비가 무척 좋다.

게다가 권각술 또한 특급의 경지.

날아드는 암기들을 뚫고 거리를 좁혀도, 예상하지 못한 방향에서 주먹과 발차기가 뿜어져 나오니 상대하기가 까다로울 수밖에 없었다.

'조금만 더 보완되면 될 것 같은데.'

물론 그런 강점만큼 약점 또한 존재했다.

바로, 약한 다수와의 싸움에선 한계가 뚜렷하다는 것.

독은 적아를 가리지 않으니까, 다수 대 다수의 싸움에선 활용하기가 어렵다.

또한 소모품과 같은 개념이기에, 쓰다 보면 언젠가는 바닥을 드러낼 수밖에 없는 데다가, 가격 또한 비싸다.

그런 이유로 당소소가 독을 주력으로 사용하는 한, 소수의 강자와 싸우는 데에 특화될 수밖에 없었다.

'쓸만한 스킬이라도 구해봐야겠군.'

사실 당소소에게 청혼을 받은 이후, 의도적으로 그녀를 멀리하고 있었다.

굳이 얘기하자면, 여지를 남겨주고 싶지 않았달까.

그래서 다른 팀원들과 달리, 당소소에게는 아이템 이후 무언가를 일절 지원해 주지 않았다.

'이제는 인정해야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자력으로 상위 리그의 랭커 자리를 차지했다.

여기서 내 지원까지 들어간다면, 충분히 경쟁력을 갖출 수 있을 것이다.

"클로에 님."

"예, 안우진 님."

내 부름에, 집무실 한쪽에서 서류를 정리하고 있던 클로에가 수첩과 볼펜을 들고 다가왔다.

"당소소 님께 스킬과 장비를 좀 지원할까 합니다."

"어떤 걸로 추리면 될까요?"

"체력 회복 계열이나, 아니면 다수의 적을 상대할 때 좋을 만한 것들로요. 둘 중에 체력 회복 계열을 우선해주시면 좋겠군요."

당소소는 나와 권속 계약을 맺은 상태.

내 스킬들이 있으니까, 유틸리티 스킬은 충분하다.

그리고 다수의 적을 상대할 때 있어서, 체력은 무척 중요한 능력치.

체력만 뒤받쳐 준다면, 굳이 광역기로 다수를 학살할 필요가 없었다.

"스킬은 대부분이 1티어 급이고, 장비는 전설 등급 이상을 구하기 어려울 것 같은데 괜찮겠습니까?"

"어쩔 수 없죠. 그래도 없는 것보단 나을 테니."

"알겠습니다."

당소소는 상위 리그의 랭커.

1티어나 스킬이나, 전설 등급 장비로는 뚜렷한 전력 상승을 보이기가 어렵다.

하지만 플래티넘 등급 스킬이나 전설 등급 이상의 아이템은 매물이 없는 상태.

일단은 쓸 만한 걸 구해 놓고, 이후에 고결한 수정이나 시간의 각성을 얻어다 주는 방향으로 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부터라도 잘 챙겨야겠군.'

자리로 돌아가는 클로에를 뒤로하고, 나는 팔짱을 낀 채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때였다.

또각― 또각― 또각― 또각―

집무실 문 너머로 들려오는, 누군가의 익숙한 발소리.

'아세리안이군.'

벌컥!

"안우진 님!"

"······?"

집무실을 다급하게 들어오는 아세리안.

빨갛게 상기되어 있는 그녀의 얼굴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일이 있었나?'

사용인을 통해, 그녀가 아침 일찍 팜을 나섰다는 얘기는 들었다.

발할라에 다녀온다고 그랬는데, 뭔가 좋은 일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이, 이거 한 번 보시겠어요?"

얼마나 흥분했는지, 그녀의 목소리가 잘게 떨릴 정도.

"이게 뭡니까?"

그녀가 내민 건 영롱한 빛깔을 내는 구슬이었다.

'고결한 수정? 아니, 그것보단 좀 더 큰데?'

나는 무의식적으로 그녀가 건네는 구슬을 받아들었다.

띠링!

[<소모품:생명의 근원>]

[신성력, 마기, 마력, 생기生氣, 사기死氣 등 다양한 기운들이 오랜 시간 집약되어 만들어진 결정체.]

[섭취 시 보유하고 있는 스킬 중 한 가지를 선택하여 강화할 수 있습니다.]

[등급 : 준초월]

'어······ 고결한 수정이랑 뭐가 다른 거지?'

다양한 기운이 집약되어 만들어진 결정체라는 것.

섭취 시 보유하고 있는 스킬 중 한 가지를 선택하여 강화할 수 있다는 것.

고결한 수정의 설명과 똑같았다.

다른 게 있다면 딱 하나, 등급뿐.

'준초월······?'

어?

어??????????

그 순간, 나는 눈을 번쩍 떴다.

< 241화. 점화點火(2) > 끝

< 242화. 점화點火(3) >

'설마 이거······?'

나는 손바닥 위에 놓인 구슬을 보며, 몸을 잘게 떨었다.

스킬을 한 등급 올려주는 아이템이라는 것.

그런데도 준신화 등급인 고결한 수정보다 두 단계나 높다는 것.

그 두 가지 조건을 합치면, 한 가지 결론으로 귀결되기 때문이었다.

'다이아몬드 등급으로 업그레이드시켜 주는 아이템인 건가?'

"제, 제가 생각하는 그 아이템이 마, 맞습니까?"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아세리안에게 물었다.

보통 예상외의 선물을 받았을 때 더 감격하기 마련.

그리고 그 선물의 가치가 본인을 예상을 뛰어넘을 때, 더 크게 감격한다.

그런 의미에서, 온몸에 차오르는 희열감에 목덜미가 쭈뼛했다.

그 감각이 얼마나 큰지, 전율을 느꼈을 정도.

"안우진 님이 생각하시는 게 뭔데요?"

"다이아몬드······ 등급······?"

내 물음에 백금발 머리를 배배 꼬는 아세리안.

순식간에 우리 둘의 반응이 정반대로 뒤바뀌었다.

나는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고, 그녀는 그런 나를 보며 장난스럽게 눈웃음을 짓는다.

그런 그녀가 이내, 내가 기다리고 기대하던 대답을 해 주었다.

"헤헤, 맞아요. 한 번에 알아보셨네요?"

"진짭니까?"

'다이아몬드 등급이라니!'

순간 눈이 번쩍 뜨였다.

내가 가지고 있는 다이아몬드 등급의 스킬은 딱 하나, 폭뢰 뿐.

그마저도 특별한 조건들을 충족해야만 활성화시킬 수 있으며, 마력에 벽력의 기운이 깃드는 효과를 가지고 있다.

'폭뢰 같은 스킬을 하나 더 얻을 수 있어.'

단지 마력을 끌어 올려 공격을 하는 것 만으로도, 벽력이 발동한 것과 비슷한 위력을 보이는 폭뢰.

그 스킬 하나만으로 내가 얼마나 강해졌는지를 생각하면, 지금 손바닥 위에 있는 이 구슬의 가치를 감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였다.

"거점을 공략했을 때만 얻을 수 있는 결정이에요. 고결한 수정처럼 마기와 신성력, 마력이 동시에 존재하는 지옥에서만 얻을 수 있죠."

아세리안이 턱을 치켜들며 말했다.

"극소량만 얻을 수 있어서 쉽게 얻을 수 없는 아이템이랍니다. 오죽했으면 한때 이게 없어서 거점을 장악하지 못했던 적도 있을 정도예요."

"도대체 이걸 어떻게 구하신 겁니까?"

"헤헤, 그게 사실은요······."

그때부터 아세리안이 생명의 근원을 얻은 경위를 설명해 주었다.

내가 치렀던 고위 리그 경기가 끝난 후, 열두 명의 대신에게 독대 요청을 받은 아세리안.

무슨 이유로 요청한 건지 간파한 그녀는 열두 대신을 한 자리에 모아, 팀 투지가 공개하지 않은 훈련법에 대한 경매를 했다.

그리고 얻게 된 게 바로 이, 생명의 근원이라는 것.

"그래서 팀 용기를 운영하고 있는 아테나 님께 우리의 훈련법을 전부 알려주기로 했어요. 단, 다른 곳에 퍼트리지 않는 조건으로요."

'괜찮은데?'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게 된 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훈련법을 공개함으로써 팀 용기라는 경쟁자가 생겨나겠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이 정도 아이템이라면 충분히 거래할 가치가 있었다.

그런 내 모습을 보며 아세리안이 말을 이었다.

"모두들 잘못 알고 있더라구요. 팀 투지의 정수는 그런 훈련법이 아닌데."

"그럼 뭐가 팀 투지의 정수입니까?"

아세리안이 말갛게 웃으며 나를 가리켰다.

"안우진 님이요."

"저······ 말씀이십니까?"

"팀을 개설하고, 그동안 있었던 일을 아무리 쭉 돌이켜 봐도 제 대답은 같더라구요. 안우진 님이 없었다면 팀 투지는 지금처럼 크지 못했다는 걸요."

"······."

"팀 용기는 이전보다 더 강해질 거예요. 하지만 절대 우리 팀을 따라오진 못할걸요? 거기엔 안우진 님이 안 계시니까요."

아세리안의 칭찬에 멋쩍어진 나는 코끝을 쓸었다.

'민망하네.'

오늘처럼 팜이 거대해지기까지 내 역할이 크긴 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직접적으로 날 극찬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참 많은 일이 있었군.'

어느새 3년이 넘는 시간을 아세리안과 함께했다.

나와 단둘이서 지냈던 그녀.

이후 주창범을 비롯한 사인방이 들어오고, 그들을 훈련시켰다.

그리고 점차 숫자를 늘려가며 많은 숫자의 플레이어들을 뽑았다.

'안정화를 위해 금주령까지 내렸었지.'

이후 준네임드 급 이상의 플레이어들을 팀에 적응시켰고, 흔들리던 주창범도 잡아주었으며, 몇 달 전에는 고결한 수정을 뿌려서 공포를 잠재웠다.

돌이켜 보니, 하루하루가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던 날의 연속이었다.

"그걸 받으실 자격은 충분해요. 아니, 다시 얘기하죠."

아세리안이 휙휙 고개를 저었다.

"차고도 넘쳐요. 그동안 많이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안우진 님.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주신 12명, 대신 144명.

천상계 서열 156위 안에 들어가는 대신大神 아세리안이, 한 손으로 가슴께를 가리며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지금껏 했던 말이 모두 진심이었음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잘······ 부탁한다라······.'

그리고 지금 또한 그녀의 진심이 담긴 인사였다.

"정말 고맙습니다. 저도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그래서 나 또한 진심으로 대답했다.

* * *

"테사라엘, 그대만 믿겠어요."

"예, 여신님. 반드시 임무를 완수하고 오겠습니다."

팀 용기를 총괄하는 2급 지천사 테사라엘.

그녀는 아테나 여신의 배웅을 받으며 비프로스트를 타고 발할라로 이동했다.

'후우······ 괜찮아. 잘할 수 있어. 그렇지, 테사라엘?'

사실, 그녀는 현재 무척 긴장한 상태였다.

"천상계 관리 위원회 소속 3급 좌천사 주르엘입니다. 팀 투지의 팜으로 가시는 테사라엘 님 맞으십니까?"

"네, 맞아요."

"그럼 바로 이동하실 수 있도록 도와드리겠습니다."

천상계에서 최고의 명문 팀이라고 명성이 자자한 팀 투지.

그런데도 투지가 어떤 팀인지 알려져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팀 투지의 육성법을 하나부터 열까지 낱낱이 가져오는 거야.'

테사라엘은 지금, 그 미지의 팀에 방문하기 직전인 것이다.

"모쪼록 편안한 여행 되시길."

빛무리로 가득한 비프로스트 너머로 테사라엘이 힘차게 발걸음을 옮겼다.

파바바바밧!

'여기가 팀 투지······.'

그리고 보이는 네 존재.

'앗!'

"빛을 수호하라. 2급 지천사 테사라엘이 대신大神 아세리안 님을 뵙습니다."

눈앞의 존재가 누군지 깨달은 그녀가 얼른 예를 표했다.

"어서 오세요, 팀 투지의 팜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이곳의 주인 아세리안입니다."

하얀 원피스에, 그보다 더 흰 피부.

반짝거리는 백금발의 머리카락 아래에, 고양이처럼 큰 눈동자에는 미소가 담겨 있다.

'정말 아름다우신 분이야.'

테사라엘은 저 미소가 무척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가워요, 3급 좌천사 포르도엘이에요!"

아세리안의 옆에 선, 하나로 땋은 금발의 머리칼에 일곱 쌍의 날개를 가진 천사.

'너무 귀여워.'

입가에 걸린 개구쟁이 같은 미소는, 보는 사람의 마음을 포근하게 해 주는 마성의 매력이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5급 역천사 피넛엘입니다."

귀여움을 뿜뿜 풍기는 여인 옆에 서 있는 또 다른 천사.

절도 있게 예를 표하는 모습엔 군더더기라곤 존재하지 않는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갈색 긴 생머리와, 일자로 굳어 있는 입매.

'완전 멋있어.'

그 모습에서, 그녀가 원리원칙을 중시하는 성격이란 걸 알 수 있었다.

'세 분이 자매라고 그랬지?'

피가 이어진 자매임에도, 세 여인은 완전히 다른 개성을 뽐냈다.

그리고 마지막 한 존재.

"플레이어 렌, 테사라엘 님께 인사드립니다."

과하지도, 그렇다고 덜하지도 않은 인사.

'이 자가······.'

악귀가 그려진 가면에, 무뚝뚝한 목소리.

흔들림 없는 눈동자, 일자로 굳은 입매.

천상계에 초신성처럼 등장한 존재.

'플레이어 렌.'

그에게선 묘한 분위기가 흘러나왔다.

'엄청 무덤덤하네.'

들어온지 고작 3년 밖에 안 된 플레이어 치고는, 감정의 마모가 무척 큰 것 같았다.

"저와 아테나 님 간에 어떤 거래가 오갔는지는 알죠?"

서로 간의 인사가 끝나자 한 걸음 앞으로 나서는 아세리안.

"예, 말씀 전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청하게 되었어요. 혹시나 가르쳐 주지 않는 게 있을 수도 있다고 할 수 있으니까요."

그녀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앞으로 한 달간 제집처럼 편하게 지내세요. 렌 님을 따라다니면서 배우고 느낀 모든 것들을 기록하셔도 좋아요. 물론 궁금한 게 있다면 뭐든지 물어보시구요."

"여신님의 배려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테사라엘은 떨리는 마음을 숨기며 고개를 숙였다.

'드디어 이 팀이 어떻게 운영되는지 알 수 있어.'

천상계의 모든 존재가 궁금해하는, 베일에 싸여진 팀 투지의 팜.

앞으로 한 달 동안 이곳을 마음껏 돌아다니며 볼 수 있다는 생각에, 그녀는 벌써부터 가슴이 설레는 것 같았다.

"와······."

팀 투지의 팜을 둘러보던 테사라엘은 감탄을 숨길 수 없었다.

'여긴 정말 하나의 도시라고 해도 믿겠어.'

첫인상은 팜이 무척 거대하다는 것이었다.

물론 크기 자체는 팀 용기와 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팀 투지의 팜은 뭐랄까, 공터가 거의 없이 각종 건물로 꽉 차 있어서, 훨씬 거대하다는 인상을 주고 있었다.

'건물들도 굉장히 체계적으로 세워져 있네.'

거대한 팜 안에, 크고 작은 또 다른 여러 개의 팜이 합쳐져 있는 느낌.

동선을 최소화하기 위해서인지, 훈련에 필요한 건물들이 대부분 한곳에 모여 있다.

그렇게 모여 있는 훈련용 건물은 여기저기 세워져 있어서, 플레이어 한 명당 최소 네다섯 군데의 건물을 이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 모였군. 오늘도 힘차게 훈련해 보자고!"

'이건 또 굉장히 특이해.'

플레이어들 모두, 누군가를 쫓아다니고 있다.

그들을 인솔하는 사람 또한 누군가를 쫓아다니며 교육을 받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굉장히 체계적으로 이루어져 있다 보니, 플레이어의 숫자가 많음에도 별로 복잡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훈련은 몇 시부터 몇 시까지 시키시나요?"

"기상 시간은 6시입니다만, 훈련 자체는 9시부터 18시까지 하고 있습니다."

"중간에 점심시간이 있을 텐데요?"

"11시 30분부터 12시 30분까지 1시간 동안 점심시간입니다. 훈련 시간만 따지자면 8시간 정도 된다고 할 수 있겠군요."

"8시간밖에 훈련을 안 한다고요?"

함께 팜을 거닐던 렌의 설명에 테사라엘은 깜짝 놀랐다.

'난 또 팀 투지 정도면 하루 종일 훈련만 시킬 줄 알았는데.'

다른 팀들보다 더 월등한 효율을 내기 위해서, 많은 시간을 들이는 건 필수다.

하지만 팀 투지의 훈련 시간은 다른 팀들과 별반 다를 게 없는 수준.

그 말은 즉, 훈련법이 몇 배나 더 효율적이란 뜻이었다.

그게 아니고서야, 소속된 모든 플레이어들이 다른 팀을 압도할 수 없을 테니까.

'우리 팀도 단숨에 도약할 수 있어.'

테사라엘은 본인에게 맡겨진 임무가 새삼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18시 이후에는 각자 자유롭게 휴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술을 마셔도 되고, 휴양지를 이용해도 되죠. 카드를 치거나 보드게임을 하는 사람도 있고요."

"정말 굉장하네요."

테사라엘은 감탄을 숨기지 않았다.

'기본적인 것들에도 굉장히 투자를 많이 했네.'

간혹, 효율을 뽑아내기 위해 무작정 플레이어들을 굴리기만 하는 팀들이 있다.

단기적으로는 성장이 빠르겠지만, 테사라엘은 그동안의 경험을 통해 그게 좋지 않은 방법이란 걸 알고 있었다.

플레이어들 또한 사고를 하고 감정을 갖고 있는 지적 생명체.

적절한 휴식이 따라주지 않는다면 망가지는 건 당연한 거였다.

'인정하자. 여긴 진짜로 천상계 최고의 명문 팀이 맞아.'

그런 의미에서 팀 투지는 훈련과 휴식을 조율할 수 있도록, 많은 노력을 쏟아붓고 있었다.

테사라엘이 수첩과 볼펜을 꺼내 들었다.

"랜덤 뽑기로 처음 들어온 플레이어들을 어떻게 관리하시나요?"

그러고는 팀 투지에 오기 전, 미리 정리해 두었던 질문을 했다.

'팀 투지에 렌이 관여하는 비율이 생각보다 높아.'

사실 이 질문은 아세리안이나 두 천사에게 할 생각이었다.

직접 훈련을 하니, 훈련법이야 렌에게 들을 수 있겠지만 팜의 관리는 아예 다른 영역이기 때문.

그러자 테사라엘의 예상대로, 렌은 막힘 없이 술술 대답했다.

"21일간 팜에 적응부터 시킵니다. 이곳은 전혀 새로운 세상에, 기존과는 완전히 다른 법과 문화를 가지고 있죠. 같은 인간이라고는 해도 어느 성계에서 왔느냐에 따라 조금씩 다르고요."

"21일이면 너무 긴 거 아닌가요? 왜 그렇게 적응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시는 건가요?"

"이곳도 사람 사는 곳이라는 걸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

"인간은 인간 때문에 기쁘고, 슬프고, 싸우고, 웃습니다. 그 관계를 처음부터 제대로 정립시켜주는 것만으로도 사건·사고가 크게 줄어들거든요."

"아······."

테사라엘이 고개를 주억였다.

렌의 말에 지극히 동감한 것이다.

"그 21일이 지난 후에 처음으로 무기를 잡습니다. 찌르고, 베고, 막고, 피하는 기본적인 훈련을 하죠."

"기본적인 것들이요?"

"예. 팀 투지에서 하는 훈련의 핵심은 하나입니다. 한 번 제대로 휘두르기 위해, 100번 넘게 찔리고 베인다."

"한 번 제대로 휘두르기 위해······ 100번이나······."

"제대로 된 한 번의 공격을 넣는 것보다, 100번을 잘 막는 게 중요하다는 거죠. 수비는 기초 중의 기초니까요."

"와······. 정말 대단하네요."

테사라엘은 연신 감탄했다.

'기초가 중요하다는 걸 알고 있지만, 대부분은 그걸 망각하지.'

강팀의 조건은 다른 게 아니었다.

기초가 완벽한 팀.

팀 투지는 그걸 몸소 실천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자, 그럼 이제 실제로 훈련하는 모습을 보러 가시죠."

"아, 네!"

앞서 나가며 방향을 잡는 렌을 테사라엘이 얼른 뒤따랐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하아······. 쉽지 않겠어.'

훈련법을 완벽하게 익혀서 갈 자신은 있다.

문제는 딱 하나.

'다들 눈빛부터가 달라.'

팀 투지의 원동력은 단순히 훈련법만이 아니라는 것.

애초에 용기와 투지는 분위기가 다르다.

'단순히 훈련법만 배워간다고 해서, 용기가 강팀이 될 수 있을까?'

그녀는 회의적이었다.

그렇다면 결국, 팀 투지의 시스템이라든가 인사·관리, 건물 배치 등 모든 걸 배워가야 한다.

그런데 이걸 과연 어디서부터 어떻게 적용을 해야 투지처럼 될 수 있을지 감도 오지 않았다.

'어쩔 수 없지. 최대한 많이 배워가는 수밖에.'

< 242화. 점화點火(3) > 끝

< 243화. 점화點火(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