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신臣 제파르. 왕께서 내리신 특명을 수행하고 왔습니다."
마계, 판데모니엄.
오만의 궁전으로 들어간 제파르가 바닥에 부복했다.
"수고했노라. 물건은 챙겨왔는가."
"옛."
왕의 물음에 고개를 든 제파르.
왕좌를 향해 조용히 다가간 그가, 품 속에서 거대한 뿔을 꺼내어 두 손으로 공손히 받쳐들었다.
"흠. 아름다운 뿔이로고. 베리알 그 친구가 미적 감각 하나는 뛰어났지."
친우의 죽음에도, 왕은 아무런 감흥이 없는 기색이었다.
"······."
"가서 그릇에게 심어주거라."
"예, 왕이시여. 하지만 이번에는 그릇이 버티지 못할 가능성이 있나이다."
제파르가 깊숙이 고개를 숙이며 아뢰었다.
이전에 그릇에게 왕의 뿔을 심어 주었을 때도, 조금은 벅차 보였으니까.
그러자 왕이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제파르를 통째로 가릴 만큼, 하얗고 거대한 날개였다.
"이걸로 중화시키면 그릇은 안전할 것이다."
"이건······?"
"대전쟁에서 죽은 대천사, 메타트론의 날개니라."
"······!"
왕의 말에, 제파르가 눈을 번쩍 떴다.
< 229화. 숙성 시간(4) > 끝
< 230화. 숙성 시간(5) >
'후우······.'
24시간 내내, 한 번을 놓지 않았던 검이 오늘따라 무겁게 느껴진다.
방패를 쥐고 있는 손이 잘게 떨렸다.
'할 수 있어.'
눈을 감은 채 가볍게 숨을 돌린 오현석이 스스로를 다독였다.
띠링!
[경기 : 하위 리그-블러드나이트302의 6 경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유형 : 개인 서바이벌(개인 PvP)]
[게임명 : 깊은 수렁의 혈향]
[맵 : 에덴 대초원(중)]
[관객 수 : 86,294 명]
문득, 그동안 진행해 왔던 훈련들이 떠올랐다.
주창범 님과 함께 진행했던 검방술.
회복 물약을 풀어둔 욕조에서 독을 먹고, 고통 속에서 까무러치기를 반복했던 시간들.
거기다 방패 하나에 의존한 채, 자신을 죽이기 위해 악착같이 달려들던 팀원들을 상대하던 것까지.
'유격 훈련이랑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끔찍했지.'
오현석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띠링!
[승리 조건 : 경기 종료 시점에서 생존해 있는 자]
[대초원을 넘어서는 순간 자동으로 탈락 처리됩니다.]
[탈락 처리가 되면 사망합니다.]
[현재 생존자 수 : 5,000 명]
[보너스 포인트 조건이 있습니다.]
[많은 플레이어를 죽일수록 보너스가 상승합니다!]
[킬 수 현황 ― 없음]
[경기 종료까지 남은 시간 : 72:00:00]
[3초 후 경기가 시작합니다.]
팀 투지에 처음 들어왔을 때 진행했던 훈련 커리큘럼도 무척 힘들었지만, 최근 3주간 진행된 스케줄은 지옥을 연상케 할 정도였다.
지옥 같은 시간의 시작은 딱 한마디에서 비롯되었다.
―흐음, 창범이랑 하는 훈련이 너무 편했나? 성장세가 너무 느리군.
안우진 님의 가벼운 한마디.
하지만 이어진 결과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안우진 님이 전담으로 맡는다고 하시더니, 그 뒤로는 매일 열 번 이상 까무러치기 시작한 것이다.
[2초 후 경기가 시작합니다.]
'어떻게 이런 훈련을 매일 해오신 거지?'
안우진 님이 분명 그랬다.
자신이 매일 해왔던 훈련이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이전보다 강해지는 것만큼은 확실하다고.
그리고 결과적으로, 정말 많이 강해졌다.
이제는 하위 리그에서 경기를 뛰는 팀원들에겐 쉽게 거리를 내주지 않을 정도였으니까.
'나도 안우진 님처럼 되고 말겠어.'
사실상 팀의 그 어느 누구도 안우진 님을 터치하지 않는다.
'천사님들마저도 오히려 지시를 받을 정도였지.'
집무실에 갔을 때, 안우진 님은 오현석을 맡아달라며 포르도엘 님에게도 지시를 내렸었다.
그래서 오현석은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안우진 님은 누구의 강요 없이 스스로 이런 훈련을 진행해 왔다는 뜻이었으니까.
[1초 후 경기가 시작합니다.]
'나도 할 수 있어.'
결국 고위 리그에 올라감으로써, 스스로를 증명한 안우진.
타의에 의해서긴 하지만, 오현석 또한 그 위대한 사내가 했던 훈련을 견뎌냈다.
그래서 더더욱 자신감이 넘쳤다.
적어도 이 공간 안에 있는 플레이어 중에선, 그보다 많은 땀방울을 흘린 자가 없을 것이다.
[경기 시작!]
'실리에스, 잘 부탁해.'
상태창이 경기 시작을 알려오자, 오현석은 최상급 바람의 정령을 소환했다.
따로 계약을 맺진 않았지만, 바람의 정령왕과 계약을 맺으면서 소환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우우우우우우웅―
―네에, 저야말로 잘 부탁드려요.
2미터 크기의 최상급 바람의 정령.
흐릿흐릿한 그녀의 형상이 짧게 진동했다.
부스럭― 부스럭―
중심부를 향해 이동하자, 근처에서 수풀을 뒤적이는 소리가 들린다.
점차 커지던 소리는 이내 한 명의 플레이어의 등장과 함께 뚝 끊겼다.
"흐흐, 첫 번째 사냥감은 기사인가. 날 만난 건 운이 좋지 않았다고······ 어?"
뿔 투구를 쓴 채 거대한 도끼를 들고 있던 거한이, 오현석 뒤쪽을 보곤 흠칫했다.
최상급 바람의 정령이 흐릿흐릿한 형상이다 보니, 뒤늦게 그녀의 존재를 눈치챈 것이다.
―죽일까요?
'아니, 그냥 제압해 줘.'
쐐애애애애애액! 푸슈우욱!
오현석의 지시가 떨어지자마자, 한 줄기 바람의 칼날이 거한에게 쇄도한다.
거대한 도끼를 들고 있던 팔이 주변으로 나동그라지고, 잘려 나간 팔꿈치에서 어마어마한 양의 피 분수가 뿜어져 나왔다.
"끄으으으윽! 이, 이게 대체······?"
엉덩방아를 찧은 채, 애처롭게 덜덜 떠는 거한.
시동어도, 영창도 없다.
그저 지시하면 바람 속성을 띤 마법이 날아갈 뿐.
'일단 세이프티 포인트부터 만들라고 하셨지?'
거한에게 다가간 오현석이, 방패로 녀석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띠링!
[플레이어 '프레틱'의 그림자에 표식이 등록되었습니다.]
그러고는 그림자를 밟은 후, 최근에 계약을 맺은 중급 땅의 정령을 소환해 땅속에 파묻었다.
그림자 이동을 사용했을 때 공간이 없으면 땅 위로 소환되기 때문.
숨구멍이 있으니 꽤 오랫동안 죽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땅속에 있어서 찾기 힘들뿐더러, 흙의 압력 때문에라도 쉽게 벗어나지 못할 테고.
챙! 채챙! 챙! 채채챙! 챙! 챙!
중심부로 향하자 수많은 인기척이 느껴졌다.
"크윽. 이 비겁한 자식이 뒤에서······!"
"서바이벌에 비겁하고 말고가 어딨어! 살아남는 놈이 강한 거지!"
"잠깐만. 마법사부터 죽이고 다시 싸우는 건 어때? 영창이 끝나면 다 죽는다고!"
"크하하하, 내 킬 수의 제물이 될 녀석들로 가득하구나! 이라시야아아!"
도착해 보니, 서바이벌 경기답게 많은 숫자의 플레이어들이 뒤엉켜서 싸우고 있었다.
기도가 베였는지, 양손으로 목을 부여잡은 채 피를 뿜고 있는 마법사.
두 다리가 잘려서 비명을 지르고 있는 궁수.
무기를 떨어트려서, 손으로 막다가 걸레짝처럼 난도질 되어 버린 검객.
도저히 눈을 뜨고는 볼 수 없는 잔인한 광경이다.
지구인인 오현석으로서는 적응이 되지 않을 수밖에.
'더 이상 떨리지 않아.'
그 탓에 첫 경기에서는 패닉이 왔었던 오현석.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무섭다라······. 좋습니다. 제가 안 무섭게 해 드리죠.
식사를 하면서도 아무렇지 않을 수 있도록, 안우진이 지긋지긋하게 보여줬으니까.
단검으로 본인 피부를 훼손하던 그 모습은 일견 광기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곁에서 느끼는 게 정말 많았지.'
안우진은 강해지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독을 마셔야 강해진다면 독을 마셨고, 불구덩이에 뛰어들어야 스텟이 오른다면 불구덩이에 뛰어들었다.
그 정도로 이를 악물고 하니까 고위 리그까지 올라갈 수 있었을 것이다.
아무튼 그런 안우진의 노력 덕분에, 현재 오현석은 전투에 집중할 수 있을 정도의 긴장감 만을 느끼는 상황.
'실리에스, 여기에 있는 모든 인간을 죽여줘.'
―알겠습니다!
최상급 바람의 정령에게 지시를 내린 그는, 주저하지 않고 아수라장이 펼쳐진 중심부로 들어갔다.
쐐애애애애애애애애애액!
예리함을 머금은 바람이 숲을 휩쓴다.
"죽어! 죽으라······ 어?"
"끄아아아악!"
"헉, 이게 도대체!"
푸슈우욱! 푸슈우우우욱!
공기 빠지는 소리와 함께 사방이 붉게 물들었다.
'내가······ 이렇게 강하다고?'
과연 긴장하는 게 의미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플레이어들은 오현석의 정령 마법에 속수무책으로 쓰러지고 있었다.
"이런 미친. 어떻게 영창도 없이?"
"네임드가 출전한다는 소식은 없었는데!"
살아남은 소수의 플레이어들이 오현석을 보며 경악했다.
정령왕과 계약했다고 했을 때, 팀 투지의 팀원들이 보였던 것과 비슷한 반응.
그 모습에 오현석의 자신감이 빠르게 치솟았다.
바뀐 생각은 곧, 행동으로 표출됐다.
'더는 쫄지 않아도 돼.'
소리 내지 않도록 조심스럽던 발걸음은 휘적휘적 변했고.
'눈치 볼 필요가 없어.'
주변을 살피느라 빠르게 굴러가던 눈동자는 정면만을 응시했다.
저들에게 있어서 자신은 맹수.
포식자가 몸을 숨기는 건 사냥을 하기 위함이지, 두려워서가 아니다.
그렇기에 오현석은 당당한 모습으로 중심부를 휘젓기 시작했다.
"인간이 이런 고위 정령 마법을 쓸 수 있다니······."
"살고 싶다면 일단 저 괴물부터 죽입시다!"
"옳소! 정령이라곤 하지만 어차피 마법사 아니오?"
암묵적인 동맹을 맺은 플레이어들이 그를 향해 무기를 겨눈다.
조심스럽게 거리를 좁히며, 빠르게 대형을 갖추었다.
방패를 든 탱커가 최전방으로, 창이나 대검을 쥔 플레이어들이 그 뒤에서.
하지만 그들 중 오현석에게 위협이 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다 처리할게요.
쐐애애애애애액!
"바, 방패! 뭐해요, 안 들고! 끄억······."
"으으. 제, 젠장. 이걸 어떻게 막으라는 거야!"
바람의 칼날로 인해, 애초에 접근조차 하지 못했기 때문.
레이드를 위해 다가온 플레이어들이 하나둘 쓰러지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핑! 핑! 핑! 핑! 핑! 타다다다당!
하늘 위에서 내리꽂히던 화살 비가 오현석 앞에 생겨난 얇은 바람막에 튕겨 나간다.
[핏빛 여명의 칼날!]
꽈과과과과과광!
마법이 지상을 폭격했지만, 역시 바람막을 뚫어내지 못했다.
"씨발, 도대체가 어떻게 죽이라고!"
지금 이 순간, 최상급 바람의 정령 뒤에 숨은 오현석은 무적에 가까웠다.
그때였다.
―앗, 위험합니다!
울창한 나무들 사이에서, 바람의 칼날을 뚫고 오현석에게 쇄도하는 한 암살자.
'괜찮으니까 나머지 플레이어들만 정리해 줘.'
오현석은 차분하게 방패를 들어 올렸다.
카아앙! 콰지지직!
"······!"
단검과 방패가 부딪히자, 암살자가 눈을 번쩍 떴다.
그가 막아낼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는지, 당황하는 기색이었다.
'이 순간을 기다렸지.'
검, 창, 단검, 채찍, 도, 그리고 활과 사슬낫까지.
마법을 제외하고, 안우진이 다루지 못하는 무기와 테크닉은 하나도 없었다.
그로 인해 지금까지 무수히 많은 죽음을 경험하며, 상황별 대처 방법을 숙지한 상태랄까.
거기다 주창범과 일대일 과외를 통해 검방술에 대한 이해도가 크게 상승한 상황.
그 덕분에 오현석은 과감하게 방패를 들이밀고 검을 내지를 수 있었다.
"끄윽, 후우. 스읍!"
당혹스러운 와중에도 침착하게 공격을 퍼붓는 암살자.
녀석 또한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것이리라.
여기서 멈췄다간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걸.
'움직임이 전부 예상이 된다는 게 이런 뜻이었구나.'
하지만 그래봤자 소용없었다.
녀석은 결국, 이 자리에서 죽게 될 것이다.
쐐애애애애액! 푸슈우욱―
"끄아아아악!"
주위에선 여전히 바람의 칼날이 날아다니며 적들을 도륙한다.
거기다 오현석 본인은 얼음 속성 스킬까지 익힌 덕분에, 주창범처럼 철벽 수비를 보이고 있다.
심지어 권속을 맺어서 안우진의 스킬까지 사용할 수 있는 상태.
카앙! 콰지지직!
거리를 뚫고 들어왔다고 해서, 암살자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씨발······."
결국 암살자가 작게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 * *
―오현석이 대체 누구야? 팀 '투지'에서 새로운 괴물이 등장했다.
―인간은 고위 정령을 소환할 수 없어! "과연 그럴까?"
―지구 출신 플레이어 '오현석'. 블러드나이트 302에서 퍼오블과 파오블을 모조리 쓸어가다!
└아니 ㅅㅂ 저 팀은 진짜 뭐 있냐? 왜 자꾸 지구 출신 네임드의 대부분이 팀 투지에서 나오는 거냐고 ㅡㅡ
└ㄹㅇ 보는 순간 깜짝 놀람 ㅋㅋㅋㅋㅋ 검이랑 방패 들고 있는 건 사실 훼이크였음 ㅋㅋㅋㅋㅋㅋㅋㅋ 처음에 탱커인 줄 알았자나 ㅋㅋㅋㅋ
└ㄴㄴ 탱커 맞음.. 스킬들 보니까 얼음이랑 뇌전 속성이드라 ㅎ 근접 물리 계열이나 쓰는 스킬을 정령사가 달고 있다? 탱킹도 되는 놈을 키우겠다는 뜻임 ㅅㅂ
└그 무슨 끔찍한 혼종이냐 ㄷㄷ 근원거리 둘 다 깡패네 씹 ㅋㅋㅋㅋㅋ
└다른 팀이었으면 이도 저도 아닌 어중간한 놈 나왔겠구나 할 수 있는데, 하필이면 '그곳'임 ㅋㅋㅋㅋㅋㅋ 플레이어 개 잘 키우기로 유명한 '그곳'..
└또 한동안 엘프들이 방패 들고 설치겠네 ㅁㅊ
'성공적이군.'
집무실 의자에 앉아, 커뮤니티를 보던 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요 근래 진행했던 일들 대부분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고 있다.
8기수 플레이어들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고, 공들여 키우고 있는 오현석은 출전했던 경기를 박살 내버리고 돌아왔다.
심지어 9기수도 슬슬 경기에 투입되고 있는 상황.
'그것 때문에 아주 난리가 났지.'
숫자가 워낙 많다 보니, 최근 개최되는 모든 경기에 팀 투지 소속 플레이어가 서너 명씩 출전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팀 투지에 천사 두 명뿐이라며. 근데 어떻게 저 많은 숫자를 키워낼 수 있는 거냐고 ㅡㅡ
그로 인해 커뮤니티는 또 한 번 난리가 났고.
'신입들은 더 이상 손을 대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굴리는 게 어려울 뿐이지, 한 번 굴러가기 시작하면 관성 때문에라도 계속 굴러갈 수밖에 없다.
거기다 제대로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초반부터 아주 엄격하게 규율을 세워서 이끌었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할 여지도 많이 줄어들었다.
그렇다는 건.
'이제부턴 상위 플레이어들이 활약할 수 있게 해줘야겠지.'
커뮤니티 창을 닫은 나는 포인트 상점에 접속했다.
[남은 포인트 : 5,778,278 P]
베리알이 죽은 절망의 협곡에서 280만 포인트을 벌어들인 지 어느덧 2달이 흘렀다.
그 사이 플레잉 코치로 들어온 포인트가 무려 257만.
거기다 오딘과의 약속으로 인해 한 달에 한 번 기본급이 입금되었다.
'577만 포인트라······.'
그로 인해,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의 포인트가 쌓여 있는 상태였다.
'이 정도면 권속 플레이어들이 오를 스텟도 어마어마하겠군.'
놀랄 권속들의 표정을 상상하며, 피식 웃은 나는.
[근력 스텟이 1 상승합니다.]
[38,000 P를 소모하셨습니다.]
[근력 스텟이 1 상승합니다.]
[38,000 P를 소모하셨습니다.]
[근력 스텟이 1 상승합니다.]
[38,000 P를 소모하셨······.]
보유하고 있는 모든 포인트를, 근민체를 올리는 데에 사용했다.
'상위 리그도 휩쓸어 보자고.'
< 230화. 숙성 시간(5) > 끝
< 231화. 숙성 시간(6) >
[이름 : 안우진(닉네임 : 렌)] [소속 : Team 투지]
[리그 : 고위 리그]
[근력 : 269] [민첩 : 270] [체력 : 268]
[정신 : 181] [지력 : 104] [마력 : 188]
[각성 능력 : <초감각 > <뇌신창 > <뇌살자雷殺者 > <뇌혈雷血 > <특급검술 > <특급단검술 > <고급투척술 > <고급박투술 > <최상급치료술 > <고급궁술 > <고급검방술 > <특급채찍술 > <고급둔기술 > <천독불침 >]
[보유 스킬(6/6) : <천뢰십보 > <뇌정 > <뇌룡의 포효> <마력 갑옷> <그림자 표식> <열반 >]
[업적 특전 : 없음] [차원 특전 : 없음] [종족 특전 : 없음]
온몸에서 힘이 샘솟는다.
근력 스텟에서 44, 민첩이 39, 체력 스텟이 44.
584만 포인트라는 어마어마한 거액을 투자해, 근민체를 127이나 끌어올린 상태.
'미쳤네.'
나는 양손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감탄했다.
불과 6개월 전까지만 해도 모든 특전을 다 활성화시켜야만 나올 수 있었던 수치가, 어느덧 기초 스텟만으로도 나오게 된 것이다.
'권속들도 근민체가 10 정도씩은 올랐겠군.'
한동안 샘솟는 힘을 만끽한 나는, 상태창을 열어서 플레잉 코치 시스템에 접근했다.
그러고는 주창범의 상태창을 열었다.
[이름 : 주창범(닉네임 : 주창범)]
[근력 : 141] [민첩 : 138] [체력 : 139]
[정신 : 99] [지력 : 43] [마력 : 139]
[아세리안 코멘트 : 안우진 님과 같은 지구의 대한민국 출신. 전직 아이돌.]
[피넛엘 코멘트 : 안우진의 뒤를 이어 상위 리그에 오를 기대주. 특히 기본기가 굉장히 탄탄함.]
[포르도엘 코멘트 : 대화 나눠봤는데 재미있음!]
'아주 좋은데?'
초창기에 달았을 법한 코멘트들을 무시한 채, 가장 먼저 녀석의 스텟부터 체크했다.
어느덧 주창범의 근민체 평균이 140에 다다른 상태.
'그러고 보니, 녀석도 베리알을 죽일 때 같이 있었지.'
어쩐지 내가 알던 것보다 평균 스텟이 높다 했는데, 직전 경기에서 보너스를 두둑이 받은 것이다.
거기다 내 덕분에 2차로 스텟이 크게 올랐으니, 저 정도 스텟을 가지고 있는 건 당연할지도.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빨리 스텟을 올리는 건, 다른 상위 플레이어들은 상상도 못 할 일이지.'
마의 구간에 돌입하는 순간부턴 훈련을 통해서는 스텟을 올릴 수가 없다.
오로지 포인트를 통해 스텟을 구매하는 방법뿐.
녀석이 올라온 지 1년도 안 됐다는 걸 감안한다면, 무시무시한 스텟 성장률이라고 할 수 있었다.
'권속 천사의 권능이 보면 볼수록 사기네.'
날개를 얻은 후 내가 올린 스텟이 267 포인트.
거기서 25%의 효율로 스텟을 나눠 가지니까, 내가 주창범에게 올려 준 스텟은 67이다.
한마디로 권속 천사의 권능이 없었다면, 현재 주창범의 근민체 평균 스텟은 119라는 뜻.
'이 정도면 상위 리그에 잘 안착할 수 있겠어.'
상위 리그 안에는 통곡의 벽이라는 구간이 존재한다.
스텟 90에서 120 사이의 플레이어들이 출전하는 하위 넘버링 경기.
그리고 150 이상의 스텟을 가진 플레이어들이 출전하는 상위 넘버링 경기.
'보통 그 구간에서 많이 죽지.'
하위 넘버링과 상위 넘버링 사이에 존재하는 스텟의 간극은 30 포인트.
고작 스텟 30 차이 나는 걸로 죽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퍼센트로 따지면 무려 20%다.
그런 이유로, 내가 올려준 67 포인트가 주창범에게 있어선 구명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상위 넘버링에서만 잘 버티면 돼.'
주창범의 상태창을 닫은 나는, 다른 여덟 명의 상태창도 확인했다.
카이로시아, 모용악, 지그, 수호 등등 모두들 스텟이 안정권에 자리 잡은 상태.
'고위 리그도 충분히 가능성 있겠는데?'
심지어 플레잉 코치 정산금은 앞으로도 계속 들어올 것이다.
결국, 이렇게 스텟을 올려주는 게 일회성이 아니라는 뜻.
그걸 생각하자 기분 좋은 미소가 흘러나왔다.
'모두들 포인트 많이 벌어 오라고.'
그럼 또 스텟을 많이 올려줄 테니까.
* * *
똑― 똑―
"2급 지천사 엠마누엘입니다. 잠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들어오세요."
문 너머로 들려오는 환웅의 목소리에, 집무실로 들어가는 엠마누엘.
그러자 정신 없이 서류를 검토하던 환웅이 고개를 들었다.
"그래, 무슨 일이죠?"
"이것 좀 한 번만 봐주시겠습니까."
엠마누엘이 건넨 건 다섯 페이지 분량의 서류였다.
"흠, 요즘 들어 마계 쪽에서, 마기가 간간이 증폭되고 있다라······."
잠시 서류를 훑어보곤 턱을 쓰다듬는 환웅.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그가 입을 열었다.
"이유는 알아냈습니까?"
"마기가 증폭될 때마다 지옥과 중간계를 살폈지만, 어떠한 변화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마계 내부에서만 발현하고 있다는 뜻이군요."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환웅의 물음에 엠마누엘이 공손히 대답했다.
"뭔가 노리는 게 있는 것 같은데······. 렌이 잠수를 탄 것 때문인가?"
한 손으로 턱을 받친 채 검지로 테이블을 툭툭 두드리는 환웅.
잠시 후, 생각을 정리한 그가 입을 열었다.
"바로 주신회를 소집해 주세요."
"예, 알겠습니다. 안건은 뭐라고 전할까요?"
엠마누엘의 물음에, 자리에서 일어나던 환웅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미뤄 두었던 일을 해야 할 때라고. 비어 있는 주신 자리 세 개를 채울 거라고 전해 주세요."
* * *
절망의 협곡에서 전투가 펼쳐지고 두 달 후.
잠시 멈춰 있던 상위 리그가 정상적으로 진행되었다.
그에 따라 우리 팀에 있는 열여덟의 상위 플레이어들도 경기에 출전하기 시작했다.
'하······.'
나는 기분 좋으면서도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플레잉 코치 '렌'에게 4,620 P가 정산되었습니다.]
[플레잉 코치 '렌'에게 3,360 P가 정산되었습니다.]
[플레잉 코치 '렌'에게 1,680 P가 정산되었습니다.]
[플레잉 코치 '렌'에게 2,730 P가 정산되었습니다.]
[플레잉 코치 '렌'에게 2,100 P가 정산······.]
플레잉 코치로 들어오는 포인트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기 때문.
열여덟 명 모두 무사히 경기를 마치고 온 것도 모자라, 제법 많은 양의 포인트를 벌어온 것이다.
'확실히 상위 리그에 들어가면서부터 포인트가 확 늘어나.'
상위 리그부터는 기본급이 1만 포인트를 넘는다.
거기다 승리 수당으로 x 1을 받고, '파오블'과 '퍼오블' 보너스도 5만 포인트나 된다.
그래서 한 경기만 뛰어도, 벌어들이는 금액이 10만 포인트를 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창범이랑 카이로시아가 정말 잘해줬어.'
그중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성적을 보이는 건, 단연 내 권속 플레이어들.
100% 승리를 챙겨오진 못했지만, 승리를 챙기는 경우엔 보너스를 꼭 타서 돌아왔다.
게다가 주창범과 카이로시아는 두 개의 보너스에 모두 선정되면서 20만 포인트가 넘는 거액을 벌어서 복귀했을 정도.
통곡의 벽을 넘어서면서 상위 넘버링에 안착했기 때문에, 권속들은 더 이상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이번에 또 열두 명 정도가 승급샷을 받았지.'
거기다 상위 리그로 올라오는 팀원의 숫자가 계속해서 늘고 있는 상황.
팀 투지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순조롭게 굴러가고 있었다.
'아쉽네.'
집무실 의자에 앉아, 서류를 내려다보고 있던 나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더 아쉬웠다.
8기수는 크게 손 볼 필요 없을 정도로 잘하고 있고, 9기수도 100일 정도만 더 있으면 확실하게 안정화될 테니까.
'10기수까지는 어떻게든 운영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상위 리그로 올라오는 팀원의 숫자가 늘어남에 따라, 잉여 인력이 조금씩 생겨나고 있는 상태였다.
마의 구간에 돌입하면 더 이상 근·민·체를 올리기 위한 단련을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
그런 이유로 하루 2시간에서 4시간 정도의 시간이 남는 플레이어들을, 나는 교관으로 임명해서 팜의 관리를 맡기고 있었다.
몇 명은 특수 중력 대련장에 상주하면서 대련을 해주는 교관으로.
또 몇 명은 체력 단련실을 돌아다니며, 스텟 단련에 조언을 해주는 교관으로.
그리고 또 몇 명은 내 밑에 소속되어, 6기수와 7기수 플레이어들을 이끄는 중간 관리자로.
'정말 아쉬워.'
곧 있으면 열 명 정도가 추가로 마의 구간에 돌입한다.
그리고 그 숫자는 계속해서 점차 늘어날 것이다.
그들을 교관으로 투입하면, 10기수를 관리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
그럼에도 내가 아쉬워하는 이유는 딱 하나였다.
'자리가 없어.'
10기수로 들어올 플레이어의 숫자는 대략 15만 명.
그들을 받아들이기 위해선 숙소도 필요하고, 식당이나 체력 단련실, 휴식의 방, 대련장 등등 필수 인프라가 훨씬 더 많아져야 한다.
거기다 플레이어의 숫자가 늘어남에 따라, 그들을 케어할 사용인들도 추가로 뽑아야 하는 상황.
하지만 지금도 비좁게 느껴지는 팜에서 추가 인원을 수용할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클로에 님, 잠시 팜 좀 돌아보고 오겠습니다. 급한 일이 생기면 호출용 폭죽을 쏴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집무실 한 켠에 앉아, 부지런히 서류를 정리하는 클로에.
그녀에게 행선지를 알린 나는 곧장 집무실을 나섰다.
'후우, 방법이 없나.'
직경 5킬로미터의 거대한 팜.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울의 도심가를 연상케 할 정도로 각종 건물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다.
'공간이 없는 건 아닌데 말이지.'
물론 마음만 먹으면 공간을 창출하는 건 가능하다.
길을 좁히고, 건물을 더 빼곡하게 세우고, 중간중간 있는 공원들도 없애버리는 등 극단적으로 압축하면 충분할 테니까.
하지만 나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 방법만큼은 안 돼.'
플레이어를 키울 때 가장 중요한 건, 스트레스 관리이다.
언제나 죽음의 압박을 안고 살아가기에 정신적으로 굉장히 예민하기 때문.
그런 이유로 팀 투지는 휴식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계속해서 쥐어짜다가 번아웃이 오거나 정신 질환에 걸려서 맛이 가버리면 오히려 더 큰 손해였으니까.
'지금도 팜이 너무 좁아서 답답하다는 팀원이 있을 정도지.'
그런 상태에서 공간을 더 줄인다?
과욕으로 인해 지금까지 쌓아 올린 탑을 한 번에 무너트리는 것과 같은 일이었다.
'굳이 생각할 필요도 없어.'
스트레스로 인해 폭발하는 팀원들이 우후죽순 생겨날 것이다.
내가 처음 회귀했을 때, 팀 성장의 숙소를 보고 닭장이라며 얼마나 욕했던가.
각종 무기와 피가 난무하는 곳이지만, 이곳 또한 결국 사람 사는 곳.
적어도 사람답게 살 수 있는 환경은 조성해 주어야 한다.
'욕심부리지 말자.'
창공을 날며, 팜을 내려다보던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1년, 아니 이제는 9개월이란 시간.
팜의 관리에 심혈을 기울일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 김에, 10기수까지 도전해 보고 싶었는데.
'지금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아무래도 뜻을 단념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하며 집무실 쪽으로 활강해서 내려올 때였다.
띠링!
[팀 '투지'의 주인 아세리안이 대신大神으로 승격했습니다.]
[팜의 레벨이 5로 상승합니다.]
'어······?'
펄럭! 펄럭! 펄럭!
눈앞에 뜬 알림창에, 나는 황급히 날갯짓하며 창공으로 떠 올랐다.
고신이었던 아세리안이 대신으로 승격했다.
'나이스 타이밍.'
그 말은 즉, 팜의 크기가 더 커질 거라는 뜻.
쿠구구구구구구구구궁―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땅이 잘게 흔들린다.
하늘에 쳐져 있던, 돔형의 파란색 막 높이가 조금씩 높아진다.
그에 따라 외곽을 감싸던 울타리도 점차 뒤로 뻗어나가고 있었다.
'크기가 커지는 것도 규칙성이 있었지.'
직경 기준으로 1레벨 때 100미터, 2레벨은 500미터, 3레벨은 1킬로미터.
그리고 4레벨은 5킬로미터였다.
그렇다면 이번엔 직경 10킬로미터 차례.
'넓이는 네 배나 넓어져.'
단숨에 넓이를 암산한 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됐다.
이 정도면 10기수 플레이어들을 뽑을 수 있다.
'앞으로 3개월 뒤에나 뽑게 되겠지만, 미리 준비해 놔야 해.'
잠시나마 기쁨을 만끽하던 나는 서둘러 아세리안의 집무실이 있는 곳으로 활강했다.
무려 15만 명.
9기수를 뽑는 것도 아수라장이었는데, 10기수는 그 여파가 훨씬 거대할 것이다.
펄럭! 펄럭! 펄럭!
사뿐히 내려앉은 나는, 곧장 집무실의 문을 두드렸다.
"아세리안 님, 안우진입니다."
"네에! 들어오세요."
문을 열고 들어가니, 허공을 응시한 채 무언가를 빠르게 읽어내리고 있는 아세리안이 보였다.
"대신 승급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앗, 축하해주셔서 감사해요. 잠시만요! 1분만!"
축하를 건네자, 한 손을 휘휘 젓는 아세리안.
그녀의 양손이 정신 없이 허공을 두드린다.
뭔가 급한 연락이 온 모양이었다.
그렇게 1분 후.
"휴우, 다 됐다! 제 선물이에요."
기지개를 쭈욱 켠 아세리안이 방긋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선물······?"
그때였다.
띠링!
[플레이어 '렌'과 팀 '투지' 간의 수수료율이 20% → 10%로 변경되었습니다.]
[플레이어 '렌'의 플레잉 코치 정산율이 7% → 10%로 변경되었습니다.]
"플레잉 코치······ 10프로······ 어?"
눈앞에 뜬 알림창에 나는 눈을 번쩍 떴다.
< 231화. 숙성 시간(6) > 끝
< 232화. 숙성 시간(7) >
우여곡절 끝에, 10기수 플레이어들이 들어온 지 어느덧 한 달이란 시간이 흘렀다.
"13번 체력 단련실에 저주셋이 부족한가 봐요. 돌아가면서 쓰다 보니까, 훈련을하다 보면 커리큘럼이 조금씩 늦어진다고 보고가 올라왔어요."
"다른 체력 단련실이랑 똑같이 분배했을 텐데, 왜 13번 체력 단련실만 부족하다는 보고가 올라온 거지?"
"제 생각엔, 몰래 인벤토리에다가 저주셋을 챙기는 신입이 있는 것 같아요. 전력 분석팀에 목격자가 있나 문의는 넣어둔 상태예요."
"따로 공지도 내려. 만약 순순히 원래대로 돌려 놓는다면 잘못을 묻지는 않겠다고. 근데 우리가 먼저 찾아내면 정말 크게 혼낼 거라고 말이야. 창범이 네가 직접 내려."
"알겠어요, 형."
이번에 새로 들어온 신입 플레이어의 숫자는 12만 명.
기존에 계획했던 16만 명보다 25%나 줄어든 숫자였다.
숫자도 어마어마한 데다가, 또다시 빽빽하게 공간을 채울 바에야 차라리 조금 여유롭게 쓰자고 아세리안이 조언했기 때문.
어차피 한 명의 선임 훈육자에게 네 명이 붙을 걸 세 명으로 줄이면 되기 때문에, 시스템적으로 복잡할 건 아무것도 없었다.
"요즘 들어, 외곽에 지어진 19번 특수 중력 대련장에서 신입들끼리 다투는 경우가 잦아졌다고 합니다."
"선임 훈육자들은 뭘 하고 있었습니까?"
"선임 훈육자끼리도 사이가 안 좋아서 누구네 조가 더 강한지를 두고 자존심 싸움을 했다고 하더군요."
"······개판이군요."
제이스의 보고에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16만 명을 받았으면 끔찍했겠군.'
새로 뽑기 전에, 무려 100일 동안 준비 작업을 했다.
9기수들에게, 후임들이 왔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교육하고, 미리 10기수가 쓸 건물들도 지어 놓았다.
거기다 새로 마의 구간에 돌입해, 시간이 남는 23명의 상위 플레이어들을 교관으로 배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달이나 지났는데도 안정화 작업이 쉽지 않았다.
그 이유는······.
"어떻게 처리할까요?"
"제이스 님께 일임하겠습니다. 패서 말을 들을 것 같으면 패고, 그래도 말을 안 들을 것 같으면 죽여서라도 일벌백계하시죠."
"알겠······."
우당탕탕탕!
교관의 역할을 겸하고 있는 상위 플레이어들이 전부 모여, 팜의 관리에 관해 얘기하고 있던 상황.
집무실에 열을 맞춰 앉아 있던 팀원들이 화들짝 놀라며 동시에 일어났다.
"우진이 형, 긴급 호출이 와서요!"
"얼른 다녀오겠습니다!"
그러고는 우르르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또 호출이군.'
이런 식으로 툭하면 교관들이 자리를 비웠기 때문.
그 모습에 나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요즘 들어서 마계의 공세가 엄청 잦아졌어.'
마계가 대규모 공세를 해올 때마다, 상위 리그 이상의 플레이어들은 전부 소집된다.
그 탓에 팜 관리를 도와줄 중간 관리자들이 툭 하면 사라지기 일쑤.
'쉽지 않네.'
마계 쪽에서 왜 도발이 잦아졌는지에 대한 이유에 대해선 대략이나마 짐작할 수 있다.
'내가 필드에 나오길 바라는 거겠지.'
원래대로라면 고위 플레이어인 나 또한 참전하게 될 테니, 나를 납치하기 위해선 적들은 계속해서 도발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 때문.
물론 오딘과의 협상으로 인해 나는 출전하지 않으니, 마계 쪽에선 헛심을 빼고 있을 뿐이었다.
'일단 나 혼자라도 움직여서 급한 불을 꺼야겠어.'
"클로에 님, 혹시 5기수와 6기수 중에서 상위 플레이어들이 부재중일 때만 절 도와줄 사람이 있나 알아봐 주세요."
혼자 덩그러니 남은 나는, 집무실을 나서며 클로에에게 말했다.
"아직 하위 리그인 분들 중에서 모집해야겠네요? 몇 명 뽑아올까요?"
"많으면 많을수록 좋습니다만······. 절대 강요해선 안 됩니다. 자원하는 사람 중에서만 뽑아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내 지시를 빠르게 메모하는 클로에.
그녀를 뒤로하고 공터로 나온 나는 날개를 활짝 폈다.
펄럭! 펄럭!
그러고는 곧장 제이스가 언급한 19번 대련장으로 향했다.
'볼 때마다 적응이 안 되네.'
창공을 날아다니며 아래를 내려다보자, 직경 10킬로미터의 거대한 도시가 보인다.
처음 들어왔을 땐 고작 100미터 크기였던 팀 투지의 팜.
거기다 아무것도 없던 휑한 공터였다.
'그땐 진짜 당황했었는데.'
그랬던 팀 투지가 어느덧 100배나 커졌다.
주창범을 비롯한 사인방, 그리고 사용인 이세연까지.
나를 포함해서 고작 다섯 명이 생활하던 곳이, 어느덧 플레이어의 숫자만 18만 명, 사용인까지 합치면 25만 명이나 되는 거대한 도시가 되어 있었다.
1회차 때라면 꿈도 꾸지 못했을 일.
'사실상 10기수가 한계겠지.'
무척 바쁘고 힘든 나날의 연속이지만, 나는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이게 마지막이야.'
공간의 문제로 인해, 아세리안이 주신으로 올라가지 않는 한 더는 신입을 뽑을 수 없을 테니까.
아니, 주신으로 올라가도 뽑을 계획이 없었다.
이번에 10기수를 뽑으면서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
'11기수는······ 최소 10기수보다는 많이 뽑게 되겠지.'
이제는 나를 비롯한 아세리안과 두 천사가 감당할 수 없는 수준까지 커져 버렸으니까.
선임 훈육자 밑에 한 명만 둬도 10만 명이 넘고, 두 명을 두면 25만, 셋까지 올라가면 37만 명이나 된다.
시스템을 아무리 잘 구축했다고 하더라도, 결국 그 시스템을 관리하는 건 소수의 몇 명뿐.
10기수 이상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펄럭! 펄럭! 펄럭!
'일단 어떤 상황인지 체크해야겠어.'
19번 특수 중력 대련장에 내려앉은 나는 조용히 내부로 입장했다.
띠링!
[맵 : '루테카' 원시림]
하늘을 찌를 듯이 빼곡하게 서 있는 나무들.
나뭇잎에 맺힌 이슬이 똑, 똑 떨어지고, 습한 공기가 엄습한다.
현재 19번 대련장의 맵은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거대한 원시림原始林.
'콜로세움에서 간간이 등장하는 지형이지.'
훈련 겸 대련을 하기엔 안성맞춤의 맵이었다.
나는 곳곳에 엉킨 덤불을 헤치며, 기척을 숨긴 채 조용히 이동했다.
은신 스킬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거리가 가까워지지 않는 이상 나를 발견할 수 있는 팀원은 없을 것이다.
애초에 은신의 원리가 소리 내지 않고, 최대한 은밀하게 몸을 숨기는 거였으니까.
수많은 나무들이 은·엄폐물이 되어 내 몸을 숨겨줄 것이다.
챙! 챙! 카아앙!
"이봐, 왕규림. 내가 분명 하체 움직임에 집중하라고 했지! 지금 네 발이 땅에 붙어 있잖아!"
"크윽. 죄, 죄송합니다."
"힘들다고 그냥 죽어줄 거야? 어? 그러려고 들어왔어?"
"아닙니다."
"네가 생각했을 땐 뭐가 문제인 것 같아?"
"······제 체력이 많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체력 분배도 못 하구요."
"그래. 그걸 알았으니 됐다. 체력 단련 관련해선 내가 커리큘럼을 조정할 수 있냐고 건의해 보지. 일단 오늘은 체력 분배에 신경을 써 보자고."
원시림을 돌아다니자, 여기저기에서 땀방울을 흘리며 단련하는 팀원들의 모습이 보인다.
'다들 열심히 하는데?'
대련을 하는 이유는 전투 경험 습득, 그리고 피드백을 얻기 위함이다.
그런 의미에서 저들은 제대로 훈련을 하고 있는 셈이었다.
'좀 더 외곽으로 나가봐야겠군.'
마치 부대를 시찰하는 사단장처럼, 나는 19번 대련장 곳곳을 돌아다니며 팀원들을 살폈다.
그렇게 30분 정도를 돌아다녀, 대련장의 외곽 깊숙한 곳에 도착했을 때였다.
"뭐라고? 너 지금 뭐라고 했어?"
"어떻게 가르쳤길래, 조원들이 저런 병신들만 있냐고 했다. 뭐! 어쩔 건데!"
"이 개새끼가!"
짙은 안개 너머로, 분노에 찬 고함이 쩌렁쩌렁 울린다.
챙! 채챙! 챙! 챙! 채채챙!
"어어! 저 새끼들이 단체로 알랭 님을······!"
"우리도 껴! 다 죽여 버려!"
뒤이어 거센 쇳소리와 욕설이 뒤섞이며 온갖 소음을 만들어 냈다.
'이 녀석들이었군.'
근처로 다가가 보니, 4대4로 난전이 펼쳐지고 있었다.
"모두 그만."
거친 욕설 속을 파고드는, 마력이 깃든 작은 읊조림.
"오늘 너 죽고 나 죽······!"
"전부터 거들먹거리는 꼴이 보기 싫······!"
"그 뚫린 입을 찢어······!"
눈이 뒤집힌 채 싸우던 플레이어들이 순간 움찔하며,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안색이 창백해졌다.
싸아아아아아아아―
"지금, 뭘, 하고, 있는 겁니까."
나는 녀석들에게 뚜벅, 뚜벅, 아주 천천히 다가가며 찐득찐득한 살기를 뿜어댔다.
그러고는 계속해서 작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묻고 있지 않습니까."
"으으······."
"혹시 제 말이 들리지 않는 겁니까."
하지만 녀석들의 고막은 찢겨나가기 직전일 것이다.
아마 귓속에서 천둥이 지는 기분이겠지.
마력을 한가득 담아서 얘기하고 있었으니까.
"당신, 이름이 뭡니까."
나는 여덟 명의 팀원 중, 가장 강해 보이는 녀석에게 턱짓했다.
"아, 알, 알랭입······니다······. 9기수······."
"당신이 얘기해 보시죠. 지금 이 상황이 어떻게 된 건지."
"저희는 그저 대련을······."
알랭에게서 붉은빛이 흘러나왔다.
거짓말을 할 때 나오는 임팩트.
블라디미르 가면에 딸린 <악마의 눈>은 상대의 거짓말을 간파할 수 있었다.
"딱 한 번만 얘기하도록 하죠. 저는 상대가 거짓말하면 알아챌 수 있는 스킬이 있습니다."
"······."
"다시 묻겠습니다. 지금 이 상황이 어떻게 된 건지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저, 정말로 대련을······."
몸을 벌벌 떨면서도 끝끝내 거짓말을 하는 알랭.
'후우.'
가끔 그런 사람들이 있다.
뻔히 들통날 걸 알면서도, 처음 했던 거짓말 때문에 끝까지 우기는 사람이.
'씁쓸하군.'
"······?"
알랭에게 천천히 다가가, 두 팔을 뻗은 나는.
"으윽, 으으으아아아악!"
녀석의 오른쪽 어깨를 힘으로 뜯어냈다.
그러고는 뒤이어 왼쪽 어깨도 찢어버렸다.
"끄어어억. 솔직, 솔직하게 다시, 끄아아악! 제, 제발!"
거기서 그치지 않고 양다리도 뽑아버렸다.
초록빛으로 가득하던 숲속이, 붉은 선혈로 순식간에 낭자 되었다.
같은 팀원에게 하는 처벌치고는 무척 잔인한 모습.
하지만 이렇게 해야 한다.
일벌백계.
그렇지 않으면 나는 녀석을 죽여야 할 테니까.
'관리하는 게 쉽지 않네.'
경기에 뛰지 않으면 존재 이유가 사라지는 플레이어에게, 교도소 같은 개념의 시설을 통해 처벌할 이유가 없다.
결국 콜로세움에서 처벌할 방법은 두 개뿐.
죽이거나, 아니면 다시는 그러지 못하도록 확실하게 각인시켜 주거나.
"······!"
"으으······."
그런 의미에서 지금 내가 한 방법은 시각적으로도, 그리고 후각적으로도 효과가 좋은 체벌이었다.
산 채로 육신을 찢어버리는 건 굉장히 충격적이기 때문.
털썩―
"끄으으윽······ 끅, 흑흑······."
사지가 찢겨나간 알랭을 바닥에 떨구자, 녀석이 고통에 몸부림치며 남아있는 몸뚱이로 꿈틀댔다.
나는 곁에 있는 또 다른 팀원을 턱짓했다.
"당신, 이름이 뭡니까."
그러자 지목된 사람이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고개를 떨궜다.
"······9기수 제이크입니다."
"당신이 한번 말해보세요. 지금 이게 무슨 상황입니까."
"저랑 알랭이 시비가 붙어서 싸웠고, 그래서 저희 밑으로 들어온 신입들마저도 싸움에 가담하게 되었습니다."
제이크라고 소개한 팀원은 체념한 듯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술술 불었다.
"왜 이런 일이 생긴 겁니까."
"저희 둘은 예전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밑에 조원들도 저희 분위기에 휩쓸려서 서로를 미워하는 지경까지 이르게 된 것 같습니다."
그러고는 들고 있던 검을 바닥에 떨구며, 10기수 플레이어들에게 고개를 숙였다.
"나 때문에 정말 미안하다."
"아, 아닙니다."
"저흰 그저······ 저, 저희가 더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본인과 알랭, 둘 다 처형당할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
'이 정도면 잘 마무리될 수 있겠는데.'
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에게 원한이 있는 것도 아닌데, 굳이 녀석들을 죽일 이유가 없다.
그래서 다음에 같은 실수가 반복되지 않도록 처벌하는 선에서 끝낼 생각이었다.
잠시 후, 특수 중력 대련장의 효과로 인해 사지가 돋아난 알랭.
"알랭, 제이크."
"예, 안우진 님."
"네, 넵!"
"두 사람 숙소가 어딥니까."
"저희 둘 다 19번 숙소입니다."
내 물음에 제이크가 대답했다.
"알랭, 지금 당장 나가서 짐을 싸 7번 숙소로 옮기세요. 밑에 조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아, 알겠습니다."
19번 숙소는 팜의 11시 방향.
반면에 7번 숙소는 정반대 편인 5시에 있다.
팜이 워낙 거대해졌기 때문에, 둘을 떨어트려 놓기만 해도 같은 일이 반복될 가능성이 현저히 낮아질 것이다.
하지만 나는 마지막으로 경고의 메시지를 남겼다.
"다음에 또 이런 일로 나를 마주하게 된다면."
"······."
꿀꺽.
"그땐 이 정도로 끝나지 않을 겁니다. 아시겠습니까."
"예, 명심하겠습니다."
"아, 알겠습니다!"
두 사람에게 확답을 들은 나는, 이만 가 보라고 손짓했다.
그러자 서둘러 무기를 챙기곤 서로의 정반대 방향으로 사라지는 알랭 조와 제이크 조.
'후우.'
펄럭! 펄럭!
가볍게 한숨을 내쉰 나는 19번 특수 중력 대련장을 한 바퀴 돌면서, 또 다른 문제가 없나 살폈다.
그리곤 이내 대련장을 빠져나와 집무실로 향했다.
이런 일들을 처리할 때마다 착잡하다.
나와 일면식도 없는 존재들에게 처벌을 내리는 것이 유쾌할 리가 없었으니까.
'할 일이 너무 많······ 어?'
그렇게, 짙은 피로감을 느끼며 집무실로 향하고 있을 때였다.
"저기 오시네요!"
수백 명이 넘는 사람이 집무실 앞에 서서 내게 손을 흔든다.
모두 5기수와 6기수 플레이어들.
―클로에 님, 혹시 5기수와 6기수 중에서 상위 플레이어들이 부재중일 때만 절 도와줄 사람이 있나 알아봐 주세요.
―많으면 많을수록 좋습니다만······. 절대 강요해선 안 됩니다. 자원하는 사람 중에서만 뽑아 주세요.
"안우진 님! 제가 도와 드리겠습니다!"
"저도 도와 드릴게요. 뭐든 시켜만 주십쇼!"
훈련 때문에 바빠서 지원자가 별로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정말 많은 팀원들이 발 벗고 나서겠다며 찾아온 것이다.
저들을 내려다본 나는.
"······나쁘지 않군."
오랜만에 진심으로 활짝 웃었다.
조금 전까지 느낀 피로감이 싹 사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 232화. 숙성 시간(7) > 끝
< 233화. 비상飛上(1) >
5기수와 6기수 플레이어들이 교관으로 투입된 지 어느덧 2달째.
그들의 도움 덕분에, 팀 투지의 팜은 빠르게 안정을 되찾아 갔다.
10기수를 마지막으로 신입을 뽑지 않겠다는 말에, 모두들 열과 성을 다해서 도와준 것이다.
―마계의 공세. 그로 인해 갈려 나가는 상위 플레이어들. 그 사이에서 선전하는 팀 '투지'.
―하위 리그를 휩쓸고 있는 팀 '투지.' 이젠 상위 리그까지 호시탐탐 넘보고 있다.
―역대 가장 빠른 속도로 하급신에서 대신까지 올라온 팀 투지의 주인. 과연 그녀는 주신의 위를 넘볼 수 있을까?
2달이란 시간 동안, 팀 투지에도 많은 변화가 찾아왔다.
"모두 고생했습니다."
"이게 마지막 안건이었어요, 형?"
"응, 얼른 들어가서 쉬어."
"휴우······."
내 말에 주창범, 카이로시아, 모용악, 당소소가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아세리안과 두 천사는 팜의 외부 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상황.
그 탓에, 팜의 내부 일을 돕기 위해 네 사람이 무척 고생해 주었다.
주창범과 모용악은 내 손발이 되어, 다른 상위 플레이어들을 지휘·감독을.
그리고 당소소는 독 제조, 카이로시아는 곳곳에 마법진 제작을 하며 바쁘게 움직인 것이다.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안우진 님."
"고생 많았습니다, 모용악 님."
"저는 가서 좀 자야겠어요. 형, 또 시키실 일 있으면 불러주세요."
"응, 얼른 쉬어."
"······저는 부르지 마세요."
"마법진이 멀쩡하기만 하다면."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모용악, 주창범, 카이로시아가 비척비척 대며 집무실을 나섰다.
"저도 바쁜 일이 있으면 언제든 불러주세요. 사실 그동안 제일 고생하신 건 안우진 님이었잖아요."
"알아주셔서 감사하군요. 필요하면 꼭 부르겠습니다. 어서 들어가서 쉬세요."
"네, 그럼."
마지막으로 당소소까지 나가고 나서야 집무실에 찾아온 침묵.
'후우, 이번엔 진짜 힘들었어.'
나는 긴 한숨을 내쉬며, 테이블 위에 놓인 서류들을 정리했다.
10기수 플레이어들도 팜에 적응했고, 올라오는 사건·사고의 숫자도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거기다 <악마의 눈>으로 한 명 한 명 체크하며 쓸 만한 사람을 걸러내고, 디테일한 코칭까지 전달한 상황.
이제부턴 내가 크게 신경 써야 할 일이 없을 것이다.
'나도 좀 쉬어야겠군.'
서류 정리를 끝낸 나는 커뮤니티에 접속했다.
└쿠 훌린이랑 예천화, 엔키두 이런 애들 고위 리그 올라가면, 상위 리그에 쓸 만한 애들 없을 줄 알았는데 ㅋㅋㅋㅋ 팀 투지 대박이네 ㅋㅋㅋㅋ
└ㄹㅇ 마르지 않는 샘임; 갑자기 주창범이랑 카이로시아, 모용악 이런 애들이 튀어나와서 빈자리를 차지할 줄이야 ㅋㅋㅋㅋㅋ
└ㄴㄴ 갑툭튀는 아님. 주창범이랑 카이로시아 둘 다 상위 성계 대항전에 참가했자나. 모용악이랑 당소소도 하위 리그에서 나름 선전하던 애들임. 그냥 성장률이 무시무시하게 빠른 것뿐이다.
└지금 팀 투지에 소속된 상위 플레이어 숫자가 몇 명이냐?
└57명.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단일팀에서 57명이나 튀어나오는 걸 내 눈으로 보게 될 날이 올 줄이야 ㅋㅋㅋㅋㅋㅋㅋㅋ 미쳤닼ㅋㅋㅋㅋㅋㅋ
└저번 주에 4명 추가돼서 이제 61명임..
└철벽의 주창범 vs 상위 리그 한정 깡패 아시카가 둘 중에 누구 보냐. 참고로 난 주창범한테 한 표 건다.
└ㅁㅊ 저놈의 누가 더 강하냐 병은 진짜 ㅋㅋㅋㅋ
└ 저 새끼 맨날 저 지랄함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커뮤니티에 접속하자, 주창범과 카이로시아 등등 게시글을 도배하고 있는 팀원들의 닉네임이 보인다.
시도 때도 없이 떨어진 긴급 호출 덕분에, 어느덧 상위 리그 랭커로 불리고 있는 주창범과 카이로시아.
준 랭커급으로 불리며, 상위 넘버링에 안착해서 그 밑을 채우고 있는 당소소, 지그, 모용악, 제이스, 수호 등등 7명의 플레이어들까지.
'다들 잘 커 줘서 다행이야.'
반면에 내 닉네임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초반에는 많이 올라왔지만, 9개월이란 시간이 흐르며 어느새 뜸해진 것이다.
사실,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보이지 않으면 관심도 멀어지는 건, 망각의 축복을 가진 생명체가 가진 공통된 진리니까.
'더 이상 렌 원맨팀이라고 비아냥대는 신들은 없겠지.'
게다가 권속 플레이어들의 활약으로 인해, 그들에게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는 상태였다.
<권속 천사의 권능>으로 인해, 어마어마하게 성장했기 때문.
그중에 특히 나를 놀라게 한 건, 예상외의 존재였다.
'이렇게나 성장할 거라고는 생각 못 했는데.'
정령왕의 계약자.
지구의 네임드로 등극하더니, 단숨에 상위 리그로 올라온 라이징 스타.
'진짜 미친 재능이었구나.'
오현석의 등장은 콜로세움에 거대한 충격을 선사했다.
근거리에선 탱커로서 얼음 속성과 뇌 속성 스킬을 다루고, 원거리에선 정령 마법을 뻥뻥 날려 댄다.
검객, 궁수, 마법사 등등 그 어떤 직업군을 가지고 있는 플레이어라도, 오현석의 털끝 하나 건드릴 수 없을 정도.
'지금껏 존재하던 상식을 뒤엎었지.'
오현석에겐 상성이란 게 존재하지 않는다.
본인의 재능에다가, 주창범의 철벽 수비, 내 스킬 지원, 그리고 팀에서 지원받은 장비까지.
'어지간한 화력이 아니면 오현석을 쓰러트릴 수 있는 사람이 없을 거야.'
내가 생각하는, 녀석의 공략법은 둘 중 하나였다.
카이로시아처럼 더 강한 마법으로 찍어 누르거나, 아니면 쿠 훌린 정도의 근거리 화력을 가지고 있거나.
하지만 둘 모두 해당 사항이 없었다.
한 명은 상위 리그 랭커고, 다른 한 명은 고위 플레이어.
하위 넘버링에서 그 정도의 화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손에 꼽을 테니까.
'경기를 안 뛰니까 조금은 허전하네.'
무려 13년.
콜로세움에 들어와, 사선을 넘나들며 각종 미션들을 수행해 왔다.
그러다 갑자기 경기를 안 뛰니까 몸이 근질근질하다고 느껴졌다.
'얼마 안 남았어.'
9개월이란 긴 시간의 공백.
덕분에 내게 쏟아지던 스포트라이트가 거의 사라졌지만, 개의치 않았다.
다시 필드에 나가는 그날, 커뮤니티엔 내 닉네임으로 가득 찰 테니까.
바뀐 내 모습에 모두들 깜짝 놀랄 것이다.
똑― 똑―
"안우진 님! 아세리안이에요!"
"네, 들어오셔도 됩니다."
집무실 문이 열리며, 그동안 코빼기도 보이지 않던 아세리안이 들어왔다.
"같은 팜에 있는데도 오랜만에 뵙는 것 같네요. 제 빈자리를 대신 채워주셔서 정말 감사드려요."
방긋 웃은 그녀가 우아하게 고개를 숙인다.
대신大神의 위에 오르면서, 천상계 비상 위원회까지 참석하다 보니, 그녀 또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는 상황.
'제법 중후한 느낌도 나는데?'
은은하게 풍기는 신성력으로 인해, 그녀가 평소보다 더 커 보였다.
대신이 되더니, 이제는 제법 위엄이 서린 모습이랄까.
그나저나.
"무슨 일이십니까?"
그녀를 보며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조금은 한가해진 나와 다르게, 그녀는 여전히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을 테니.
"오늘은 기쁜 소식이 있어요!"
"기쁜 소식이요?"
"짜잔!"
내게 종이 한 장을 건네는 아세리안.
종이를 내려다본 나는 눈을 번쩍 떴다.
'기쁜······ 소식이네······.'
요즘 들어 질리도록 봤던 내용이 쓰여 있다.
하지만 단 한 글자.
내 눈을 번쩍 뜨이게 만든 문구가 있었다.
―고위 리그 <로열블러드나이트 88> 오퍼 계약서
―경기 : 3경기 / 니플헤임 엘린 성城 공략
―대상 : 팀 투지 소속 플레이어 '렌'
대상에 적힌 플레이어의 닉네임이, 바로 나라는 것.
'88이면······.'
하위 리그는 1주일에 한 번, 상위 리그는 2주일에 한 번.
그리고 로열블러드나이트라고 불리는 고위 리그는 한 달에 한 번 열린다.
즉, 내가 필드에서 자취를 감춘 지 딱 1년 만에 출전하는 경기라는 뜻.
"기쁜 소식 맞죠?"
내가 멍하니 종이를 보고 있자, 생글생글 미소 짓는 아세리안.
"예, 정말. 정말로 기쁜 소식이군요."
"오랜만에 출전하는 경기네요? 기대해도 되겠죠?"
'기대해도 되냐고?'
그녀의 물음에 나는 피식 웃었다.
지난 9개월, 거의 행정 업무 위주로 처리했다곤 하지만, 그게 내가 가만히 있었다는 뜻은 아니었다.
적응을 마친 9기수 플레이어들이 경기에 출전하기 시작했고, 10기수들도 안정화가 끝났다.
거기다 권속 계약을 맺은 팀원들 또한 상위 리그에서 이름을 날리며 많은 포인트를 벌어다 준 상황.
'플레잉 코치 정산율도 10퍼센트로 올랐지.'
덕분에 나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 스텟이 높아진 상태였다.
이제는 고위 악마들도 상대할 자신이 있달까.
그런 이유로, 나는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얼마든지요."
"후후, 너무 기대되네요. 앗! 전 이만 가볼게요! 오늘도 파이팅!"
시간을 보곤 후다닥 집무실을 나서는 아세리안.
'후우, 엘린 성 공략이라······.'
데뷔전까지 남은 기간은 3개월.
그 시간 동안 내가 해야 할 일은 명확했다.
혈향血香이 풍기는 전장으로 가기 전, 팀원들과의 대련을 통해 실전 감각을 끌어올리는 것과.
'좋은 아이템이 들어오지 않을까 했는데 말이지.'
묵혀 두었던 만뢰석을 사용하는 것.
인벤토리를 열어 영롱한 빛을 내뿜는 돌멩이를 꺼내 든 나는.
띠링!
[<창:신벌神罰 >과 <소모품:만뢰석萬雷石 >을 합성하시겠습니까?]
[한번 합성하면 되돌릴 수 없습니다.]
[Yes(선택) / No]
'당연히 신화 등급이 나오겠지?'
부푼 마음을 안고서, 준신화 등급의 아이템인 신벌에 가져다 댔다.
띠링!
[<창:신벌神罰 >과 <소모품:만뢰석萬雷石 >의 합성을 성공했습니다!]
[<창:성뢰聖雷 >를 획득합니다!]
[<창:성뢰 >]
['간장'과 '막야'가 수천 번의 벼락을 맞은 운철로 제작한 창.]
[벼락을 너무 많이 맞아 새까맣게 변한 창에, 신성력이 담긴 벼락의 힘이 깃들면서 오묘한 빛깔을 띠고 있다.]
[<창:성뢰 >의 주인으로 선택된 존재 외에는 사용할 수 없다.]
[근력 스텟이 +30% 상승합니다.]
[착용 시 마나에 '신성'이 담긴 아주 강한 뇌전의 힘이 깃듭니다.]
[마기를 가진 존재와 상대 시, 30%의 추가 데미지를 입힙니다.]
[비가 올 경우 뇌전의 데미지가 20% 상승합니다.]
[착용 시 <청천벽력 > 능력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착용 시 <전광석화 > 능력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착용 시 <적뢰積雷 > 능력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착용 시 <뇌흡雷噏 > 능력을 각성합니다.]
[<청천벽력 > ― 공격 시 3%의 확률로 하늘에서 강한 벼락이 떨어집니다. 실내에선 발동되지 않습니다.]
[<전광석화 > ― 1분 동안 민첩 스텟이 +40% 상승합니다. (재사용 대기 시간 : 24시간)]
[<적뢰積雷 > ― <청천벽력 > 능력 발동이 누적될 때마다 데미지가 3%씩 상승합니다. (5분 이내에 <청천벽력 > 능력이 발동되지 않으면 누적된 데미지가 초기화됩니다.)]
[<뇌흡雷噏 > ― 뇌 속성 공격에 당할 경우, 데미지에 비례해서 체력이 상승합니다. (뇌 속성 공격의 데미지는 완전히 무시합니다.)]
[등급 : 준초월]
그리고 나타난 기다란 설명창.
'어······.'
빛을 빨아들일 정도로 까맣던 창, 신벌神罰.
창을 이리저리 돌리자, 반사되는 각도에 따라서 새하얗게 빛난다.
'이게······.'
순간적으로 사고가 이어지질 않았다.
'일단 침착하자.'
"스읍― 후우."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쉰 나는, 한결 차분해진 마음으로 다시 설명을 읽어내렸다.
'등급은 준초월.'
기존에 준신화 등급이었던 신벌이, 성뢰로 업그레이드됐다.
'준초월······?'
신화 등급보다 더 높다고?
정말?
나는 거세게 고개를 흔들었다.
'등급이 중요한 게 아니야.'
핵심은 어떤 옵션을 달고 있느냐였다.
종이와 펜을 꺼내든 나는 기존과 달라지거나 추가된 옵션을 적었다.
「근력 스텟이 10%에서 30%로 상승.」
「'강한 뇌전의 힘'이 깃들던 옵션이, '신성이 담긴 아주 강한 뇌전의 힘'으로 강화.」
「마기를 가진 존재. 그러니까 악마랑 싸울 땐 30%의 추가 뇌전 데미지 적용.」
「우천 시엔 뇌전의 데미지 20% 추가 상승.」
「5분 안에 청천벽력이 발동할 때마다 3%씩 추가 데미지.」
「뇌 속성 공격에 당하면 체력 회복. 뇌 속성 데미지는 완전 무시.」
'미쳤네.'
볼펜을 내려놓은 나는 허탈하게 웃었다.
신화 등급 소모품을 썼으니까, 당연히 신화 등급 이상으로 업그레이드될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준초월 등급이 나올 줄이야.'
내 예상을 비웃기라도 하듯, 정말 대단한 아이템이 나와 버렸다.
순간, 오딘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대의 스킬과 아이템이 벼락에 집중되어 있더군. 그거면 차고도 넘칠 것이다.
'차고도 넘친다라······.'
그의 말이 맞았다.
1년이란 시간을 사는 것 치고는, 차고도 넘치는 대가를 받은 것이다.
손에 착 감기는 창대를 꾸욱 쥔 나는.
'3개월 후가 기대되는군.'
활짝 미소 지었다.
< 233화. 비상飛上(1) > 끝
< 234화. 비상飛上(2) >
챙! 챙! 채챙! 챙!
[차가운 염화의 방패!]
"그렇지! 무조건 마법을 쓰려고 하지 말고, 상황에 따라 판단해서 사용해야 하는 거야!"
"여기서 이렇게 들어올 땐 어떻게 합니까?"
"다리는 폼이야? 너도 같이 거리를 벌리면서 마법을 쓰든가, 아니면 다시 검을 들어 올리면 되잖아!"
주창범과 함께 1번 특수 중력 대련장의 터줏대감이라고 할 수 있는 모용악.
그는 주변에서 열심히 비무 중인 팀원들을 보며,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평화로운 일상으로 돌아왔군.'
며칠 전까지만 해도 제법 어수선했던 분위기였다.
기존과 다른 문화에 적응하지 못해서 힘들어 하던 팀원들이 많았기 때문.
거기다 팜의 크기도 커지면서 길을 잃는 미아가 나온다든가, 서로 시비가 붙어서 싸우고, 곳곳에 비치된 공용 아이템을 훔쳐 가는 등 별의별 일이 많았다.
'난리도 아니었지.'
그 기억들을 떠올린 모용악이 한숨을 내쉬었다.
바쁘게 돌아다닌 안우진이 아니었다면, 지금도 혼돈의 도가니 속이었을 테니까.
하지만 대련장의 분위기를 보니, 어느 정도 안정화됐다고 해도 될 것 같았다.
'오랜만에 몸 좀 풀고 싶은데.'
모용악은 목을 이리저리 돌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화륵! 화르륵! 꽈아아아아앙!
1번 대련장에 소환된 맵은 용암 지대.
분화구에서 뿜어져 나온 연기가 하늘을 뒤덮고, 흘러나온 용암이 곳곳을 잠식했다.
그런 열악한 환경 속에서, 팀원들은 정신없이 비무를 하고 있었다.
"죽어! 이 개 같은 자식!"
"어어, 제드 형! 우린 대련 중이라고요!"
"맨날 방패 뒤에 숨어서, 얍삽하게 플레이하는 게 꼴 보기 싫었지! 오늘은 반드시 죽여버리겠어!"
"푸하하! 제드 저 녀석, 실전처럼 한다더니 그냥 주창범 님한테 평소 하고 싶었던 말을 퍼붓고 있는 거잖아?"
캉! 카강! 캉!
팀 투지에서 그를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은 열 손가락에 꼽는다.
그중 한 명인 주창범은 이미 3 대 1로 비무를 나누고 있는 상황.
격렬하게 비무 중인 주창범을 본 모용악은 등을 돌렸다.
'창범이는 안 될 것 같고.'
수비 위주로 싸우는 주창범의 성향상, 한동안 비무가 끝나지 않을 테니까.
모용악은 상위 넘버링 플레이어.
주창범 외로 그의 검을 받아낼 만한 사람은 없지만, 상관없었다.
'조금 많이 양보해 주면 되지.'
저주셋도 있고, 스킬을 사용하지 않거나, 아니면 중력 제어를 걸면 된다.
상대의 수준에 맞춰서 능력치를 낮추면 충분히 검을 나눠 볼 만할 것이다.
화륵! 화르륵!
그때부터 모용악은 뜨거운 열기를 헤치며, 자신과 비무를 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 돌아다녔다.
"엇, 모용악 님. 어디 가십니까?"
그런 모용악을 보며, 말을 건네는 한 사람.
5기수로 팀 투지에 들어온, 그와 같은 무림 출신의 검객 조수하였다.
"비무 상대 구하러. 혹시 지금 시간이 남는다면 나랑 비무를 하겠나?"
"아하하, 5분 후에 데릭이랑 비무를 하기로 해서요. 혹시 2 대 1도 괜찮으십니까?"
"나는 상관없다."
조수하의 제안에 모용악은 고개를 끄덕였다.
데릭과 조수하, 두 사람은 모용악과 같은 상위 리그 플레이어.
하지만 상위 넘버링인 그와 다르게, 두 사람은 아직 하위 넘버링에서 경기를 뛰고 있다.
같은 리그라고는 하지만, 두 간극의 차이는 엄청났다.
괜히 그 가운데를 가르며 통곡의 벽이라고 부르는 게 아니니까.
"엇. 안녕하십니까, 모용악 님. 근데 여긴 어쩐 일로······?"
"이봐, 데릭. 모용악 님께서 2 대 1로 비무를 하자고 하시는데, 괜찮지?"
"모용악 님이라면 오히려 내가 부탁드리고 싶을 정도지!"
"잘 부탁한다, 데릭."
잠시 후 5기수 데릭이 합류하고, 세 사람은 대련장의 외곽으로 향했다.
오늘 1번 대련장의 맵은 용암 지대라 실면적이 무척 좁기 때문.
상위 플레이어인 그들이 비무를 하기엔, 주변에 사람이 너무 많았다.
자칫 잘못했다간, 그들의 비무에 휩쓸려서 훈련을 망칠 수도 있고.
"고작 몇 년 사이에 팀이 휙휙 바뀌는 것 같아요. 우리가 들어올 때만 해도 250명 정도밖에 없었는데······."
"그땐 뭐랄까, 말 그대로 팀의 분위기가 강했지. 근데 지금은 그냥 같은 도시에 살고 있는 지역 주민 같은 느낌이야."
꽈아아아아아앙! 꽈광! 꽈과과과광!
화산이 폭발하고, 분화구에서 거대한 바위들이 주변으로 떨어진다.
꾸덕꾸덕한 용암의 열기가 덮쳐 오는데도, 세 사람은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며 편안하게 그 사이를 거닐었다.
그때였다.
쐐애애애애애애액!
거대한 파공음을 내며, 한 쌍의 날개가 창공을 가른다.
팀 내에서 날개가 있는 존재는 단 셋뿐.
하지만 한 쌍의 날개를 가진 사람은 딱 한 명밖에 없었다.
"안우진 님이네?"
"나도 고위 리그에 올라가서 날개 달고 싶다······."
안우진을 보며 선망의 눈길을 보내는 조수하와 데릭.
'오늘도 순찰 중이신가.'
모용악 또한 두 사람과 다르지 않았다.
그가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었으니까.
'정말 대단해.'
단순히 팀 내에서 가장 강하기 때문에 존경하는 것은 아니었다.
'어떻게 늘 최선을 다해서 살 수 있는 걸까.'
굳이 얘기하자면 태도의 문제.
4기수인 모용악은 안우진이 막 상위 리그에 승급했을 때 들어왔다.
그때까지만 해도 안우진의 스텟이 마의 구간을 넘지 않았던 상황.
간간이 체력 단련실에서 함께 훈련하기도 했었다.
'노력만큼은 어딜 가도 꿀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스텟 단련도, 대련도, 팜을 관리하는 것도.
뭘 하든 언제나 최선을 다했다.
'안우진 님을 보고 타고난 천재라고 하는 사람들은, 안우진 님을 잘 모르니까 그런 소리를 하는 거지.'
그 중 특히 모용악의 뇌리에 강하게 남는 기억이 있었다.
강해지겠다는 일념 하에 살아온 그조차 정신 스텟을 위해 했던, 독 훈련만큼은 진저리를 칠 정도였다.
하지만 안우진은?
'스텟이 많이 올랐다며 오히려 웃으셨지.'
그때 확실히 깨달았다.
자신은 저 사내를 절대 넘어설 수 없을 거라는 걸.
하지만 모용악은 개의치 않았다.
저런 사람이 곁에 있다는 건, 정말 큰 행운이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모두가 한계라고 단정 지을 때, 최선두에서 길을 뚫는 선구자.
'나는 그 길을 따라가기만 해도 전보다 훨씬 더 강해질 수 있어.'
뛰어넘진 못하겠지만, 적어도 뒤떨어져 나가진 않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모용악이 안우진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펄럭! 펄럭! 펄럭!
"여기 계셨군요, 모용악 님."
세 사람이 있는 곳으로 사뿐히 내려앉는 안우진.
그를 보며 모용악은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일이라도 생겼습니까?"
요 근래 안우진이 대련장으로 들어오는 경우는 대련장에 무슨 일이 생겼거나, 아니면 그를 비롯한 중간 관리자급 팀원들을 찾을 때뿐이었으니까.
하지만 이어지는 대답은 뜻밖이었다.
"아뇨, 대련 좀 부탁드리고 싶어서요."
"아······."
긴 시간 창을 내려놓았던 안우진이 다시 창을 들겠다는 것.
'곤란하군.'
그의 말에 모용악이 두 사람을 힐끗했다.
이미 조수하, 데릭과 먼저 비무를 하기로 예정되어 있는 상황.
그렇다고 선약이 있다며, 팀에서 절대적인 입지를 가지고 있는 안우진의 부탁을 거절하기도 곤란했다.
물론 그와의 대련에서 배울 게 훨씬 많기도 했고.
"저흰 괜찮습니다. 원래부터 데릭이랑 일대일로 대련을 하려고 했는 걸요."
"다음에 한 수 알려주십쇼."
그러자 눈이 마주친 두 사람이, 눈치껏 빠지며 그를 배려해 주었다.
난처하지 않도록, 먼저 빠지겠다고 얘기해준 것이다.
'다음에 중개 거래소에서 두 사람이 쓸만한 아이템이 있나 체크해 봐야겠군.'
"음, 그럼 다음에 한 수 알려주도록 하지."
조수하와 데릭에게 고마움을 담아 고개를 끄덕인 모용악이, 안우진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뜻밖의 말을 꺼내는 안우진.
"혹시 두 분도 괜찮으면 같이 대련하시겠습니까?"
"저희도 말씀이십니까?"
"끼워 주시기만 한다면 정말 감사하죠!"
그의 말에 조수하와 데릭이 반색하며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팀에 소속된 플레이어의 숫자가 급증하며, 안우진과 비무를 가질 기회가 예전보다 현저히 줄어들었기 때문.
두 사람도 안우진과의 비무를 통해 배울 점이 많을 것이다.
비무가 끝나면 이것저것 조언도 해줄 것이고.
"그럼 조수하와 데릭의 스텟에 맞춰서 중력을 설정하겠습니다."
고위 플레이어인 안우진, 그리고 상위 리그의 준 랭커인 모용악.
두 사람 간의 스텟도 차이가 많이 나지만, 조수하와 데릭은 그보다 더 낮다.
그래서 조수하와 데릭의 스텟에 맞춰서 중력을 설정하려고 할 때였다.
모용악의 말에 안우진이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저만 조수하 님과 데릭 님의 스텟에 맞추겠습니다. 모용악 님은 그대로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일견 모용악을 무시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법한 발언이었다.
하위 넘버링 수준의 스텟으로도, 그를 상대할 자신이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더 재밌는 비무가 되겠군.'
하지만 모용악은 기쁜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상대는 자신보다 몇 단계 이상의 고수.
스텟의 우위로도 승패를 장담할 수 없다.
그 부분에서 모용악은 자존심이 상할 법도 했지만, 그는 오히려 감사하게 생각했다.
다른 팀의 플레이어들은, 검을 섞어보았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영광스러울 정도의, 대단한 강자와 비무를 나눌 기회는 흔치 않을 테니까.
"준비되면 말씀해 주세요."
모용악이 고개를 끄덕이자, 창을 고쳐 잡는 안우진.
순간 그의 기세가 돌변했다.
"······!"
"······!"
배려심 깊은 선배 플레이어에서, 싸늘한 예기를 뿜는 검으로 바뀐 것이다.
안우진의 눈빛을 받은 조수하와 데릭이 움찔했다.
"저흰 준비됐습니다."
"저도 바로 시작해도 될 것 같군요."
거리를 벌린 세 사람이, 안우진에 검을 겨누며 준비 완료를 알렸다.
그리고.
"그럼, 시작하죠."
안우진이 손뼉을 짝! 하고 치자, 비무가 시작되었다.
'모용악 님이 스나이퍼로 포지션을 잡았으니까, 내가 여기서 끊어내야 해.'
데릭이 검을 휘두르는 대신, 바닥을 박차며 안우진의 후방으로 들어간다.
'데릭이 후방을 점하면, 나는 시선을 끌어야겠군.'
조수하가 검을 휘두르며 안우진의 창을 바깥으로 쳐낸다.
'빈틈!'
그 사이에서 기회를 노리던 모용악이, 두 사람이 만들어 준 간격 사이를 찌르며 들어갔다.
하지만.
"스읍."
챙! 콰지직! 콰직! 채챙! 콰지지직!
짧게 숨을 들이쉰 안우진은, 창을 휘둘러 세 사람의 연계를 간단하게 무력화했다.
모용악의 경로를 방해하고, 조수하와 데릭의 공격을 맞받아치며 단숨에 거리를 벌린 것이다.
'젠장. 이걸 이렇게 쉽게 빠져나가다니.'
'뭐야? 방금 어떻게 움직인 거지? 여기에 공간이 있었나?'
'역시. 이렇게 간단한 수는 안 통하는군.'
그 모습에 세 사람이 내심 감탄했다.
마치 이런 공격이 들어올 줄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움직임이었으니까.
그 순간, 미묘한 감정 변화로 인해 호흡이 바뀌자마자 엇박자로 찌르며 들어오는 안우진.
"헉, 데릭. 조심!"
채애앵! 꽈과광!
"크윽······."
하늘에서 수십 줄기의 벼락이 내리꽂히며, 세 사람의 몸을 두들겼다.
고기 타들어 가는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일단 빠져!"
가까스로 공격을 막아낸 데릭에게 후속타가 들어오지 않도록, 조수하가 앞을 가로막으며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한 번 승기를 잡은 안우진은, 가볍게 조수하를 밀어내며 세 사람 사이를 휘저었다.
'젠장. 도저히 간격을 파고들 수가 없어.'
'아무리 창의 달인達人이라지만, 이게 가능하다고?'
데릭과 조수하는, 수적으로 우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막아내는 데 급급한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질 않았다.
분명 자신들과 비슷한 움직임인데도 거대한 벽을 상대하고 있는 것 같았달까.
반면에 모용악은 침착하게 창의 궤적을 살폈다.
'서둘러선 안 돼.'
안우진의 본 실력을 알고 있는 그는 함부로 창의 간격 안에 들어가지 않았다.
자칫 잘못했다간 어떻게 베였는지도 모르게 죽을 수도 있기 때문.
'아직까진 우리가 우위에 있어.'
안우진의 전략은 명확하다.
스텟이 더 높은 자신은 견제하고, 그 사이에 빈틈을 찾아서 약한 두 사람을 먼저 정리하는 것.
최종적으로는 자신과의 일대일을 노리고 있을 것이다.
'여기서 내가 취할 전략은 하나뿐이지.'
두 사람이 쓰러지기 전에 먼저 끝내든가, 그게 안 된다면 최대한 이득이라도 보든가.
한마디로, 두 사람이 쓰러지기 전에 안우진에게 어떻게든 손해를 강요하게 해야 한다.
채앵! 꽈과과과광!
하지만 비무는 모용악의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크윽······!"
간간이 하늘에서 쉴 새 없이 떨어지는 수십 줄기의 벼락.
안우진은 스킬을 사용하지 않겠다고 했으니, 분명 아이템의 성능일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데미지가 점점 강해지고 있어.'
처음에는 찌릿한 통증만을 주던 벼락이, 어느 순간부터인가 몸을 경직하게 만들 정도로 세지고 있다.
지금까지의 상황으로 미루어 보건대, 벼락의 데미지가 중첩되고 있는 모양.
'장기전은 가망이 없겠군.'
빠르게 판단을 내린 모용악이 더욱 과감하게 움직였다.
괜히 이도 저도 아니게 움직이다가 시간을 끌어봤자 좋을 게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때였다.
쏴아아아아아아아아―
모용악의 주위로 공기가 빨려 들어간다.
그의 검에서 강렬한 빛줄기가 뿜어져 나온다.
그게 뭘 뜻하는지 깨달은 모용악이 진한 미소를 지었다.
'운이 좋군.'
무려 2푼 5리의 확률로 안우진의 능력인 벽력이 발동된 것.
[<섬전 >을 사용합니다.]
꽈앙!
마찬가지로 안우진의 능력인 섬전을 사용한 모용악은, 악귀가 그려진 가면 위로 검을 떨어트렸다.
꽈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솟구치는 빛기둥.
뇌전의 칼날이 주변을 사정없이 난도질한다.
폭발로 인해 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우리가 이겼어.'
모용악은 확신했다.
아무리 안우진이라고 해도 이 공격을 막아낼 순 없을 것이다.
"······?"
"······?"
하지만 예상했던 것과 다르게, 먼지구름 속에서 뻗어 나오는 예리한 창날.
채애앵! 챙! 채챙!
'뭐지?'
그 예기치 못한 공격에 모용악이 눈을 치켜떴다.
다시 모습을 드러낸 안우진의 몸에, 상처가 전혀 없었기 때문.
아니, 오히려 전보다 더 쌩쌩해진 움직임이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지?'
"헉! 조, 조심!"
맹렬하게 날아드는 창날을 어떻게든 막아보려는 조수하와 데릭.
그 둘을 가볍게 뚫어내며 모용악에게 쇄도하는 안우진의 창.
'젠장.'
그 순간 모용악은 깨달았다.
약한 두 사람을 먼저 노릴 거라는 그의 예상과 다르게.
'처음부터 날 노리고 있었어.'
안우진의 타깃은 자신이었던 것이다.
'9개월간 행정 업무만 했던 사람 맞아?'
코앞까지 다가온 안우진의 창날에, 모용악이 쓴웃음을 지었다.
푹!
< 234화. 비상飛上(2) > 끝
< 235화. 비상飛上(3) >
꽈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헉, 허억, 헉. 고생 많으셨습니다, 허억."
바닥에 대자로 털썩 누운 채, 거칠게 숨을 헐떡이는 주창범.
"수고했다, 창범아."
나는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로열블러드나이트 88 오퍼를 받은 지 어느덧 3개월째.
그사이 나는 실전 감각을 끌어올리기 위해 매일 같이 대련을 진행했다.
'팀원들이 고생이 많았지.'
주창범, 카이로시아, 오현석 등등 팀에 있는 상위 플레이어들 전부다 100번씩은 죽인 것 같았다.
덕분에 나는 실전 감각을 많이 되찾을 수 있었고.
"휴우······. 우진이 형, 이전이랑 너무 많이 달라지신 것 같아요."
그때, 바닥에 누운 주창범이 묘한 소리를 했다.
"뭐가 달라졌는데?"
"스타일이요. 아무래도 제가 형이랑 가장 많이 대련을 했잖아요. 그래서 형의 몇몇 패턴들은 머릿속에 있었거든요."
"그런데?"
"다시 대련을 시작하신 뒤로는 그런 패턴들이 다 없어졌어요. 원래는 창을 찌를 때 엇박자로 치고 들어오셨는데, 지금은 정박으로 올지 엇박으로 올지를 모르니까 더 타이밍 맞추기가 어려워요."
'패턴들이 다 없어졌다라······.'
주창범의 말을 들은 나는, 팔짱을 끼며 피식 웃었다.
'제법인데.'
새삼 주창범이 달라 보였다.
나도 사실 내 움직임의 변화를 깨닫고 있었기 때문.
하지만 지금까지 대련을 했던 누구도, 그 미묘한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재능만으로는 창범이보다 더 뛰어난 모용악조차도, 그저 '어? 이렇게 쉽게 뚫린다고?'라는 반응뿐이었달까.
'눈썰미 하나만큼은 타고났네.'
그런데 그 변화를 주창범이 간파해 낸 것이다.
그러니까 철벽이라고 불릴 정도로, 적의 공격을 잘 막아내는 거겠지.
'이 정도면 경기는 문제 없겠는데.'
나는 고개를 내려 손바닥을 쥐었다 폈다.
오퍼를 받고 대련장으로 올 때, 실전 감각이 너무 많이 죽었으면 어떡하나 내심 걱정했었다.
쌓아 올리는 건 어려워도, 무너지는 건 한순간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예상외로 내 실전 감각은 그대로였다.
'아니, 오히려 더 날카롭고 좋아졌지.'
처음엔 그 이유를 몰랐는데, 이제는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9개월이란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대련을 하지 않은 상황.
조금 떨어져 있었던 덕분인지, 내 움직임을 객관화해서 볼 수 있는 능력이 생겼다.
평소라면 습관처럼 움직이고 내질렀을 행동들을, 이제는 의식적으로 생각해서 행동해야 했기 때문.
그런 과정 속에서, 나도 모르게 반복되는 패턴과 군더더기 동작들을 찾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형, 어떻게 움직임을 다듬으신 건지 저도 좀 알려주시면 안 돼요?"
어느새 숨을 다 고른 주창범이, 상체를 일으키며 물었다.
'어떻게 다듬었냐라······.'
녀석의 말에 잠시 고민한 나는 고개를 저었다.
'굳이 알려줘 봤자 도움 될 게 없어.'
본인의 움직임을 객관화할 수 있도록, 잠시 동안 대련을 하지 말라고 할 수 없었기 때문.
혹시 주창범이 나와 같은 방법으로 움직임을 간결하게 다듬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별로 추천하고 싶은 방법은 아니었다.
나야 플레잉 코치로 인해 포인트가 계속 들어오지만, 녀석은 말 그대로 스텟의 성장이 멈춰버릴 테니까.
득실을 계산했을 때, 손해가 더 클 가능성이 높았다.
"나도 잘 모르겠는데."
"흠······. 뭔가 아쉽네요. 저도 요즘 성장이 더딘 느낌이었거든요."
"혹시 이유를 알게 되면 얘기해줄게.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네, 형. 고생 많으셨어요."
깨끗한 수건으로 땀을 닦는 주창범을 뒤로하고, 나는 특수 중력 대련장을 나섰다.
'드디어 내일이네.'
일 년이란 시간.
그사이에 많은 일들이 있었다.
중간계의 99%가 평정되었고, 천계와 마계의 전쟁은 더욱 크게 점화되었다.
그런 어수선한 상황 속에서, 팀원들은 하나둘 자리를 잡은 상태.
'이제 내가 자리를 잡을 차례겠군.'
필드에 나오지 않는 나를, 관객들은 일 년의 공백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모두 깜짝 놀라게 해줘야지.'
침묵 속에서 비바람을 견디며, 묵묵히 가지를 뻗어 나가길 1년.
이제 그 가지에서 어떤 꽃을 피웠나 보여줄 시간이었다.
다음 날 아침.
'컨디션은 나쁘지 않아.'
목과 어깨를 돌리자, 걸리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오늘 몸 상태는 깃털처럼 가벼웠다.
'떨리지도 않고.'
눈을 감은 채 크게 숨을 들이쉬자, 묵직한 박동이 느껴진다.
심장은 평소와 같은 박동으로 고고하게 뛰고 있었다.
'빼먹은 것도 없어.'
손에는 착 감겨 오는 창, 성뢰가.
목에는 칠흑빛의 로브 달의 메아리 아래로, 연한 무게감을 드러내는 영롱한 달빛이.
귀에는 까끌까끌하게 세공된 대천사의 눈물이 만져진다.
무장 상태도 완벽.
'가 볼까.'
상태 체크를 끝낸 나는 조용히 명상실을 나섰다.
[이름 : 안우진(닉네임 : 렌)] [소속 : Team 투지]
[리그 : 고위 리그]
[근력 : 498(+5)(+114)] [민첩 : 386(+5)] [체력 : 385(+5)]
[정신 : 362(+5)(+102)] [지력 : 104] [마력 : 368(+5)]
[각성 능력 : <초감각 > <뇌신창 > <뇌살자雷殺者 > <뇌혈雷血 > <진격박투震擊撲鬪 > <만독불침萬毒不侵 > <특급검술 > <특급단검술 > <특급투척술 > <특급궁술 > <최상급치료술 > <고급검방술 > <특급채찍술 > <고급둔기술 >]
[보유 스킬(6/6) : <천뢰십보 > <뇌정 > <뇌룡의 포효> <마력 갑옷> <그림자 표식> <열반 >]
[업적 특전 : 없음] [차원 특전 : 없음] [종족 특전 : 없음]
"······."
10기수 신입들이 들어온 이후, 언제나 북적거리던 팜이 오늘따라 고요했다.
길거리에는 지나다니는 사람이 한 명도 없고, 곳곳에 있는 건물에서는 인기척만 느껴질 뿐.
'이렇게까지 안 해도 되는데.'
아무래도 내가 집중력을 유지할 수 있도록, 아세리안이 배려해 준 모양이었다.
오랜만에 출전이니, 내가 예민해져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거겠지.
"안우진 님!"
을씨년스러운 분위기 속, 공터로 향하자 한 존재가 날 기다리고 있다.
거대한 공터에 있는 건 딱 한 명.
하얀 원피스를 입은 채 백금발을 배배 꼬고 있는 아세리안이었다.
'옛날 생각이 나는군.'
그녀에게 다가간 나는 피식 웃었다.
"바쁘지 않으십니까? 배웅해 주지 않으셔도 되는데."
내가 멋쩍어하자, 아세리안이 방긋 미소 지었다.
"아무리 바빠도 안우진 님 배웅할 시간은 있어요. 기분이 어때요?"
문득 팀 투지에 들어오고 첫 번째 경기, 붉은 깃발전에 출전할 때가 떠올랐다.
―기분이 어때요?
―나쁘지 않군요.
―가서 증명하고 오세요. 당신이 이 무대의 주인공이라는 걸.
'그때의 그녀도 똑같이 물어봤었지.'
"나쁘지 않군요."
그녀가 의도한 건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장단에 맞춰주었다.
전에 했던 말을 그대로 해준 것이다.
띠링!
[고위 리그-로열블러드나이트 88의 2경기가 끝났습니다.]
[잠시 후 3경기가 시작되오니,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그러자 양팔을 벌리며 다가와, 내 등을 톡톡 두드려 주는 아세리안.
"가서 증명하고 오세요. 이번 또한, 당신이 이 무대의 주인공이라는 걸."
떨어져 서로를 마주 본 우리는, 입가에 진한 미소를 띄웠다.
슈우우우웅-
잠시 후, 마나의 유동과 함께 공터에 하얀색 바탕의 동그란 원이 생겨났다.
경기장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게이트.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나는 검은색 로브를 펄럭이며, 안으로 들어갔다.
'여긴······.'
화륵! 화르륵!
뜨거운 열기가 코끝을 찌르고, 주변에선 불꽃이 넘실거린다.
꽈아아아아아앙! 꽈아아아아아아앙!
주변에 있는 화산에선 끊임없이 폭발음이 울려 온다.
분화구에서 뿜어져 나온 연기가, 하늘을 새까맣게 가리고 있다.
띠링!
[무스펠하임에 입장하셨습니다.]
[<달의 메아리> 가 외부 온도를 차단합니다.]
불꽃의 세계, 무스펠하임.
"오랜만이군, 렌."
"여어, 유명 인사!"
그곳에서 하얀 날개를 편, 많은 숫자의 플레이어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와 ㅋㅋㅋㅋㅋㅋ 렌 ㅈㄴ 오랜만에 보는 듯 ㅋㅋㅋㅋ 한 1년 만인가?
└나는 너무 안 보이길래 어디 가서 비명횡사한 줄 ㅋㅋㅋㅋ
└악마들이 무서워서 출전 안 했다고 합니다.
└무려 군주한테 쫓겼으니 ㄷㄷ 트라우마 남을 수밖에 없음 ㅋㅋ
└렌이 누구임?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윗댓 컨셉이냐? 아니면 진심으로 모르는 거냐?
└에이, 당연히 컨셉이지 ㅋㅋ 렌 모르는 게 말이 되냐?
└아니 ㅅㅂ 렌이 누군데 ㅡㅡ 내가 모르면 안 되는 놈임?
└ㅋㅋㅋㅋㅋㅋㅋ 극한의 컨셉충이네ㅋㅋㅋ
└다른 애들은 몰라도 렌은 말이 안 되지 ㅎ 노잼이니까 그만해라~
└그니까 ㅅㅂ 렌이 누구냐고 ㅡㅡ
└렌 광팬인데, 솔직히 렌이 너무 오래 쉬었음..ㅠ 당시에 제치고 올라왔던 상위 플레이어들이 이미 다 추월해 버렸으니 ㅠ
└ㅇㅇ 자기보다 아래라고 생각한 애들이, 자기보다 강하면 현타 좀 올 듯;
└렌이 누구냐고 !!!!!!
'모두 낯익은 얼굴이네.'
하위 리그에서 상위 리그로.
그리고 상위 리그에서 고위 리그로, 승급할 때마다 플레이어의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든다.
그런 의미에서, 고위 리그는 소속된 플레이어 한 명 한 명의 얼굴을 기억할 수 있을 정도의 숫자.
"모두 오랜만입니다."
록탄 성을 함께 공략했던 고주몽과 일리아.
같은 당직조에 속한 구트룬, 송화경, 스벤, 사브르, 볼티노.
그리고 타락 플레이어들이 발생했을 때, 베리알을 죽일 때 함께 싸웠던 다른 고위 플레이어들.
마지막으로.
"······."
"······."
'커뮤니티를 통해서 승급했다는 건 알고 있었지.'
나와 눈이 마주친 쿠 훌린이 한쪽 입꼬리를 살짝 들어 올린다.
명백한 비웃음.
'날 다시 뛰어넘었다고 생각하나 보군.'
의도는 명확했다.
일 년이란 공백으로 인해, 내가 본인보다 약해졌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내 경쟁 상대는 쿠 훌린이 아닌데.'
정작 나는 녀석에게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러기엔 내가 너무 강해졌다고나 할까.
물론, 녀석이 왜 저러는지는 대충 짐작이 간다.
상위 리그의 최강자로 군림하던 쿠 훌린.
그런데 신입생에 불과했던 내가 단숨에 랭커의 자리에 오른 후, 거기서 그치지 않고 녀석을 크게 상회하며 먼저 승급해 버렸으니까.
최강자라는 자부심이 산산조각났을 것이다.
'이번에도 네가 생각하는 거랑은 많이 다를 거야.'
피식―
뚫어져라 나를 바라보는 녀석에게, 나도 똑같이 돌려주었다.
"······!"
그러자 창을 꾸욱 쥐며 나를 노려보는 쿠 훌린.
나는 녀석을 무시한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띠링!
[경기 : 고위 리그-로열블러드나이트 88의 3경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유형 : 공성(단체 PvP)]
[게임명 : 불의 성역聖域]
[맵 : 삼지옥三地獄(특대)]
[관객 수 : 8,332,009 명]
[미션]
[니플헤임에 있는 모든 영역을 마계에게 빼앗겼습니다.]
[효율적으로 마계를 공략하기 위해선, 니플헤임에 영역이 필요합니다.]
[니플헤임에 천상계의 영역을 만드세요.]
[목표는 '절망의 협곡'에서 가장 가까운 성, 엘린 입니다.]
[생존 플레이어 수 : 120 명]
[보너스 포인트 조건]
[악마 킬 수에 따라 보너스가 달라집니다.]
[킬 수 계산 방식]
[하급 악마 : 0킬 / 중급 악마 : 1킬 / 상급 악마 : 2킬 / 최상급 악마 : 3킬 / 고위 악마 : 5킬]
[킬 수 현황]
[1위. - ]
'고위 리그라고 해서 크게 다를 건 없네.'
미션창을 쭈욱 읽어 내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승급 이후 참가했던 경기들 전부, 긴급 미션과 동일한 성격이었다.
정식 경기라고 할 수 있는 건 오늘이 처음.
그런데 미션 내용을 보니, 고위 리그라고 해서 하위 리그나 상위 리그와 다를 건 없어 보였다.
띠링!
[안녕하세염, 여러분! 고위 게임 메이커입니닷 ~_~]
[며칠 전에 뵌 분도 있고, 오랜만에 나온 분도 계시네용!]
[ (๑˃́ꇴ˂̀๑) ]
[오늘 경기는 상황의 특수성에 따라, 연합 파티장을 지정해 드리고자 합니당.]
[이건 강요가 아닌, 여러분을 위한 배려라고 생각해 주시면 감사하겠어욧!]
[연합 파티장 : 플레이어 '고담덕']
[그럼 오늘 경기도 파이팅이에요오오!]
[ (づ ̄ ▽ ̄)づ ]
"······."
이어지는 알림창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볼수록 적응이 안 되네.'
아마, 고위 게임 메이커인 가브리엘을 직접 만나 봤기 때문에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실제로 인사를 나누는 건 처음이군요. 고위 게임 메이커, 가브리엘이라고 합니다.
―흐음, 의외로군요. 그대가 지금껏 보여온 통찰력이라면, 제가 누군지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녀의 절도 있고 딱딱한 모습과 알림창의 말투가 전혀 매칭이 안 됐으니까.
그나저나.
'고담덕이라······.'
"모두 주목."
알림창이 사라지자, 두 쌍의 날개를 가진 한 플레이어가 앞으로 나섰다.
"지금부터 24명씩, 5개 파티로 나누겠다."
갑주를 입은 채 손에는 검을 들고, 등에는 활이 매달려 있는 30대 청년.
"목표는 엘린. 내 지시를 잘 따라준다면, 이번 미션을 성공적으로 끝낼 수 있을 거라고 자신할 수 있다."
당당한 목소리에는 위엄이 흘러넘친다.
'고위 리그에 졸본 출신이 많네.'
고주몽과 마찬가지로, 고담덕 또한 졸본 출신.
"내가 왜 공성의 제왕이라고 불리는지 보여주도록 하지."
고담덕이 플레이어들을 쓸어보며 말했다.
< 235화. 비상飛上(3) > 끝
< 236화. 비상飛上(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