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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장. 건드리지 말라고 (7)

덫에 걸려든 이가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기 조금 전.

꽤 나른한 햇살이 가득 드는 창가에 기대 선 드미레아가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 찌이익!

손에 들려 있던 편지가 경쾌한 소리와 함께 종잇조각으로 바뀌었다.

벌써 네 통째.

에반 브리센 후작으로부터 전해진 반 협박성 편지였다.

무슨 내용이 있을지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때문에 드미레아는 그의 편지를 그냥 봉투 째 찢어버린 참이었다. 어차피 이쯤되면 보낸 쪽에서도 내용을 읽으리라 기대하지 않을 테니까.

그러다 조각 나버린 편지지에 씌인 '조부' 라는 단어를 보게 된 드미레아가 인상을 찌푸렸다. 플란츠의 조부로서 혈육에 대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니 이제 그만 플란츠를 보내달라 뭐 그런 내용이 적혀있던 듯 했기 때문이다.

"웃기고 있네."

조부라니.

브리센 후작이 자신의 혈육들을 어떻게 여기는지는 드미레아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심기가 매우 불편해보이는 목소리에, 드미레아의 서재에 함께 들어와 책을 읽고 있던 히나가 고개를 들었다.

- 또, 거기예요?

"네. 정말, 강아지 오라버니보다 못한 사람입니다."

강아지 오라버니란 당연히 지그프리드 영지에 있는 강아지 얀을 이름하는 것이다. 슬레이만이나 세리에, 심지어 새끼코끼리 얀조차 아무렇지 않게 강아지 이름을 불렀으나 드미레아는 그럴 수가 없었으니까. 얼결에 강아지 오빠를 하나 더 두게 된 셈이었다.

아무튼 드미레아의 말은 에반이 개만도 못하다는 소리였다.

대단한 욕설에는 어울리지 않을 귀여운 표현에 히나가 잠시 웃었다. 그것을 본 드미레아가 같이 실소했다. 강아지 오라버니라는 말 때문임을 알아서였다.

"아버지 성격이 아무리 자유분방하시다지만 이름을 왜 그렇게 지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드미레아가 강아지 이름을 지어준 슬레이만을 떠올리며 말했다. 그러다 얼마 전 체르밀에서 본 하얀 고양이가 생각났는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도 칼리안 왕자님보단 아버지가 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왕자님께서는 아예 고양이 이름을 지어주지 않았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드미레아의 말을 들은 히나가 눈을 동그랗게 떠보이더니 고개를 도리도리 가로저었다.

- 일부러, 안 지어주시는 거예요.

그리고는 세상의 누구도 지어보이지 못할 맑은 미소를 그리며 다시 손을 움직였다.

- 이름이 생기면, 제가 고양이를, 부르기, 어려우니까.

이름이 생기면 이름 철자를 손으로 만들어내며 불러야 하니 그냥 '고양이'라고만 불러도 되도록 이름을 안지었다는 소리였다.

물론 칼리안이 제 입으로 고양이 이름을 짓지 않는 이유를 말한 적은 없었다. 그저 다들 칼리안이 세심하지 못한 탓이라 했고 히나는 자신이 생각이 맞을 것이라 여기고 있었다.

덕분에 엄청나게 길어진 고양이의 독특한 이름을 떠올린 히나가 다시 웃었다.

* * *

왜 플란츠를 믿었는지 굳이 말하지 않았다.

왜 자신을 믿었는지 굳이 묻지도 않았다.

- 그런 말을 나눌 만큼 우애 좋은 형제 사이는 아니지 않나.

실상이야 어떻든 똑같이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던 탓이다.

아무튼 플란츠가 알아서 해줄 것이라 믿은 칼리안이 플란츠를 불렀고 플란츠는 알아서 칼리안의 덫을 대신 놨다.

그 덫에 드디어 짐승이 걸려들었다.

"이 저택과 브리센 후작가 인근을 살펴보고 돌아가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드미레아가 전해 온 말을 들은 플란츠가 살짝 고개만 끄덕여 보였다. 방 안을 훑어 본 드미레아가 물었다.

"3왕자님은 어디 가셨습니까?"

"말 보러."

칼리안이 있어야 할 침실에 칼리안은 없고 플란츠가 앉아 있었기 때문에 묻는 말이었다. 플란츠는 마굿간에 있을 칼리안을 떠올리며 짧게 답한 뒤 다시 입을 열었다.

"내 아우님에게는 내가."

칼리안이 오면 자신이 말을 전달하겠다 하려던 플란츠가 입을 다물었다. 멀리서 걸어오는 칼리안을 봤기 때문이다. 따라서 플란츠는 더 이상의 말 없이 손을 들어 칼리안 쪽을 가리켜보인 뒤 방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그런 플란츠의 뒷모습을 보며 피식 웃은 드미레아가 칼리안에게 같은 말을 한번 더 했다.

모르긴 몰라도 얀보다 더 많이 놀랐을 레이븐을 살피고 올라온 칼리안이 드미레아의 말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고생 많았어."

그리고는 눈을 내리 뜬 채 잠시동안 생각에 빠져들었다.

"놈들이 동료들의 시신을 치워가면서 칼리안 왕자님의 흔적을 쫓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왕자님께서 찾아오셨을 당시 지그프리드 저택 인근에서 수상한 이가 발견되지 않았다 하니 말입니다."

"응. 세크리티아의 세작들 역시 그들을 마주치지 않았다고 했으니 그랬겠지. 물론 내 흔적을 따라 내가 여기 있다는 걸 알고는 있지만 접근하지 못하고 있었을 가능성도 있고."

"만약 그랬다면 이번에 일부러 모습을 드러냈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래. 여기서 나를 꺼내려는 함정일 수도 있지. 아무튼 나는 놈들을 다시 만나는 것이 중요하니까 그것이 놈들이 만든 함정이든 아니면 내 덫에 놈들이 걸려든 것이든 상관없어. 게다가 이번에는 혼자 찾아가지도 않을 생각이고."

칼리안은 놈들이 있을 곳에 동행해 줄 믿음직한 마법사를 지그프리드 저택으로 불렀다.

"이번에 입궁하시면 두 왕자님 모두 란델 왕자님과 오붓한 시간 보내게 되시는 줄만 아시면 됩니다."

그리고 그 마법사는 칼리안을 보자마자 이런 무시무시한 소리를 했다.

둘 다 왕궁 안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라는 말.

란델처럼 체르밀 안에서만 머물러야 할 정도는 아니겠지만 아무튼 당분간 밖에 나오는 것은 절대로 허락되지 않을 터였다.

칼리안이야 당연한 일이었고 이유야 어찌됐건 시종에게도 알리지 않고 거의 무단으로 궁을 빠져나온 플란츠도 마찬가지였다.

괜한 피해만 입게 된 플란츠를 떠올린 칼리안이 슬쩍 웃었다. 미안한 마음이 왜 없겠냐만은 플란츠라면 그리 상관하지 않으리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어차피 칼리안이 끌고 나가지 않는 이상 플란츠가 혼자 왕궁 밖으로 나갈 일도 없었으니 말이다.

때문에 칼리안은 플란츠에 대한 미안함을 잠시 접어두고 잔뜩 화가 나 있는 앨런을 향해 말했다.

앨런의 화를 어떻게 풀어줘야 하는지는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스승님 뵈니까 좋네요."

그 말에 칼리안을 잠깐 쳐다본 앨런이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여쁜 제자가 헤실헤실 웃고 있었다.

그것을 보고 양 쪽으로 올라가는 입꼬리를 어떻게 더 숨긴단 말인가?

"······그래요. 무사하니 되었습니다."

그러니 결국 화가 풀린 앨런이 밖에 나갈 것이 분명해보이는 옷차림을 한 칼리안을 보며 물었다.

"같이 가시려는 겁니까?"

"스승님 혼자 가시려고 하셨습니까?"

당연한 것이 아니냐는 듯 이렇게 대꾸한 칼리안이 옆에 서 있던 드미레아를 쳐다봤다.

앨런에게 어리광 비슷한 것을 부리는 3왕자의 모습을 직면한 드미레아의 정신적인 충격에는 신경을 써주지 못한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내 형님 의외로 되게 약하시니 잘 부탁해. 지그프리드 공이 곧 오겠지만."

"알겠습니다."

소드마스터의 입장에서 약하다는 것이 어느정도일지는 가늠이 어려웠으나 드미레아는 일단 걱정 말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곧 칼리안이 검은 후드를 푹 뒤집어 썼다.

어느새 날이 져서 밖이 어두웠다. 그리고 이제는 사람들의 눈에 다시 띄어도 크게 문제 될 것이 없었으니 이 정도면 충분할 터였다.

앨런의 얼굴에는 부상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것을 염려하는 표정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칼리안이 플란츠를 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앨런의 입장에서 보면 지금의 칼리안도 그냥 칼 좀 쓰는 소년일 뿐이 아닌가.

칼리안이 그런 앨런을 보며 입을 열었다.

"스승님이 알아서 지켜 주시겠죠. 가만히 앉아서 두고 보기는 싫습니다."

"대놓고 짐덩이 노릇을 하겠다는 소리입니까?"

"네. 맞습니다. 저는 따라가서 구경만 하려고요."

앨런이 기분좋게 미소지으며 답했다.

"그리하시지요."

* * *

에우리아의 마법사들은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체이스의 새들은 조용히 움직였다.

때문에 '그'는 앨런 마나실이 건물 앞에 갑작스럽게 나타난 뒤에야 비로소 일이 틀어졌음을 깨달았다.

앨런이 직접 움직일 것을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앨런의 움직임이 그의 눈과 귀에서 벗어났을 뿐이었다.

"상대하지 못한다."

'그'는 에반 브리센 후작과 달랐다.

앨런이 지닌 서클의 힘이 그저 숫자 6에 1을 더한 것이 아니라는 점은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그'는 아주 빠르게 움직였다.

지극히 평온한 표정의 앨런이 작은 건물의 문에 손을 올렸을 때 아홉을 도망시켰다. 그들을 비밀 통로로 내보낸 뒤에는 통로를 완전히 파괴시키는 것에도 성공했다.

- 딸랑.

그가 제자리로 돌아옴과 동시에 은적색의 긴 머리를 느슨하게 묶어내린 날카로운 눈의 마법사가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 저벅, 저벅.

그는 천천히 다가오는 저 발소리가 생의 마지막을 알리는 소리임을 알아들었다. 따라서 검을 뽑아드는 대신 외눈 안경을 고쳐썼다.

그리고는,

"찾는 책이 있으시오?"

하고 물었다.

* * *

앨런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앨런이 가게 문을 닫고 한 발자국 더 걸어 들어오자 가게 안의 창문과 문 벽과 천장이 한꺼번에 울리기 시작했다.

가게에 장치해 두었던 모든 차단막이 저절로 움직였다.

문이 잠기고 덧창이 내려지고 천장의 유리 창문이 가로막혔다.

그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가 한 일이 아니었다.

가게 전체를 그를 가둘 새장으로 만든 것은, 당연하겠지만 물론 앨런이었다.

그와 어느정도 떨어진 앞에 서있던 앨런이 한 발을 더 내딛었고 사라졌다. 그 직후에 그의 등 뒤에서 여유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책은 아니고 물을 것이 있네."

손이 떨려왔다.

그것은 공포였다.

심장을 얼릴 듯 옥죄는 공포를 버텨내자 앨런의 몸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의 앞에 다시 나타났다.

"데블란이 뱀 같기는 해도 제 아들은 지극히 아낀다 들었네. 하나 뿐인 아들 놈이 왕궁에 있는데 이런 짓을 할 리 없지."

그렇게 말한 앨런이 그의 눈을 응시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앨런의 말을 듣던 그가 짧게 호흡했다.

입 속의 독을 씹으려는 것이었다.

동시에 앨런의 손에서 딱!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에게 가해지는 중력이 순간적으로 증가했다.

그의 움직임이 멈췄다.

근육 하나하나가 땅으로 꺼질 것 같은 느낌에 그 어떤 것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가 간신히 눈을 돌려 앨런을 쳐다봤다.

앨런의 손 위에 사람의 눈알만한 붉은 공이 하나 생성됐다. 마치 흐르는 용암을 유리 구슬 안에 가두어 둔 듯한 모양새였다.

그는 그것이 무엇인지 아주 잘 알았다.

상상도 못할 힘의 화염을 압축시킨 불의 힘.

스치기만 해도 사람의 몸을 숙주 삼아 타올라 심장을 녹이기 전까지 절대로 꺼지지 않는 불의 힘. 이 세상에서 오로지 앨런 마나실만이 사용할 수 있는 그것은, 7서클의 플레임 스피어였다.

앨런이 그것을 가게 바닥 아래로 내려보냈다. 구체는 바닥을 뚫지도 않고 그대로 통과하여 사라졌다.

앨런의 고요한 목소리가 그의 귀를 울렸다.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것이 아니면서 내 앞에서 독을 쓰려고 드는가."

독이라면 그것이 무엇이든 질색인 앨런의 손 위에 두 번째 플레임 스피어가 떠올랐다.

먼 곳에서 끔찍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눈에 핏줄이 섰다.

그것을 본 앨런이 여전히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한 명 죽었네. 고작 한 명이니 지금이라도 잘 따져보게."

그는 대답 없이 앨런을 노려봤다.

독을 뱉어낼 기색이 없었고 그것은 곧 앨런이 궁금한 것을 알려주지 않겠다는 말과 같았다.

앨런은 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앨런의 손에서 두 번째 플레임 스피어가 떨어져 내려갔다. 그리고 앨런은 그 어느때보다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다시 말했다.

"나는 내 제자만큼 무르지 않으니."

또 한번의 비명이 뒤를 이었다.

세 번째 플레임 스피어가 떠올랐다.

"······ 하얀 수리."

앨런이 그의 눈을 쳐다보며 한 때 그의 것이었던 이름을 불렀다.

제22장. 건드리지 말라고 (8)

하얀 수리.

세크리티아 세작들의 근거지를 관리하던 이였다. 1년 전 칼리안에게 독과 지도를 팔았던 이였기도 했다.

"세작이라는 것이 참 아이러니하지 않겠나. 자국에 충성하기 위해 다른 나라에 숨어들어 그들을 속여가며 정보를 얻어내는 이들인데, 그런 이들이 마음을 바꾼 것을 배신이라 보아야 하는가, 아니면 늘 하던 것을 했을 뿐이라 여겨야 하는가. 알 수 없는 일이지."

혼잣말인듯 아닌듯한 말을 꺼낸 앨런이 잠시 웃었다.

"어찌됐건 자네가 이제 더 이상 세크리티아의 세작이 아닌 것은 분명하겠지. 주인에게 변절하고 새장에서 스스로 빠져나갔으니."

'진짜 이름이 뭐였는지 생각나질 않네요.'

오래 전 언젠가 앨런과 함께 차를 마시다 문득 그를 떠올려보던 칼리안은 이렇게 말했었다.

몇 번인가 사적인 대화도 나눠보았던 푸른 솔새와 달리 하얀 수리와는 그리 가깝게 지내질 못했다고.

외눈 안경을 즐겨 쓰는 점잖은 인상의 중년 남자. 그러나 사실은 누구와 견주어도 지지 않을 잔악함을 숨긴 자.

칼리안은 그 정도로만 기억을 하고 있었다.

본래 하얀 수리가 누구였는지는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다고 그렇게 얘기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베른으로서의 생을 마감할 때까지 그는 충직한 하얀 수리였으니까.

"그만하시오."

앨런의 손에 떠오른 세 번째의 플레임 스피어를 보고 있던 하얀 수리가 입을 열었다.

그리고는 입 속에 숨겨두었던 독을 뱉어냈다. 그런 하얀 수리를 응시하던 앨런이 손가락을 한 번 튕겼다.

- 달칵.

앨런이 잠궈두었던 가게 문이 잠시 열렸다. 이 곳에 누군가를 더 들여보내도 괜찮으리라 판단한 까닭이었다.

딸랑, 하고 문에 달린 종 소리가 다시 한번 울리며 누군가가 더 들어왔다.

- 저벅, 저벅.

조용하지만 주저하지 않는 발소리.

그 주인의 성격을 꼭 닮은 걸음 소리가 뒤를 이었다.

- 저벅.

소리가 멈춘 뒤에는 한동안의 침묵이 찾아왔다.

하얀 수리도 앨런도 입을 열지 않았다.

"네르드."

정적을 깨뜨리는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보랏빛의 고요한 시선이 하얀 수리였던 이에게 닿았다.

* * *

그것은 칼리안의 생각이었다.

앨런과 함께 지그프리드의 저택 대문을 나서기 직전 서둘러 움직이던 레이븐의 발이 우뚝 멈췄다. 그것을 본 앨런도 말을 멈춰 세웠다.

"그러고보니 좀 이상합니다."

칼리안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문득 떠오른 의심이 하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엇이 이상하다는 말씀이신지요?"

"수상한 이들이 지그프리드 공작과 브리센 후작의 집을 살피고 돌아갔다는 정보. 너무 명확한 정보가 갑자기 전해졌지 않습니까."

칼리안은 그들이 언제 어디로 향했는지 확인이 되자마자 앨런을 불러왔고, 그들이 있다 알려진 곳으로 곧장 찾아가려던 참이었다.

"숨어들려는 이들은 의외로 사람이 적은 곳을 꺼립니다. 눈에 더욱 잘 띄니까요. 그런데 그들이 숨었다 전해진 곳은 인적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혹시 그들이 만든 함정일지를 걱정하시는 겁니까."

"함정일 수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함정이어도 상관 없다 여겼고요. 저를 불러내기 위한 거짓 정보라 해도 상관 없이 그들을 제대로 상대하고 배후를 파악하면 되니까요."

"갑자기 명확히 전해진 정보가 거짓인지에 대한 부분이 아니라면, 무엇이 이상하다 여기셨는지요."

레이븐의 안장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스승님. 혹시 그 동안 새들의 정보와 마법사의 정보가 일치했습니까."

질문을 하고는 있었지만 사실을 이미 다 파악했다는 듯 확신이 어린 목소리였다. 앨런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정확히 일치했습니다."

"그럼. 확실히 이상하네요. 정보가 완벽하게 일치한다는 것은 말이 안됩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스승님께서는 세크리티아의 세작에 대해 많이 알지 못하시겠지만 저는 아니니까요."

앨런이 말 없이 칼리안을 쳐다봤다.

한 번 더 생각을 정리한 칼리안의 입이 가만히 열렸다.

"협회장이 저를 도와 이런 저런 정보들을 모아다 주고 있다고는 해도, 협회의 마법사들은 정보원이 아닙니다. 그에 비해 새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시기의 카이리시스에 얼마나 많은 세작이 얼마나 활발히 활동했는지는 칼리안이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정보가 똑같은 건 말이 안돼요. 세크리티아에서 알아낸 정보가 더 많았어야 합니다. 그런데 정보가 똑같았다는 것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생각하는 것을 그대로 입 밖으로 꺼내놓는 것인지, 칼리안의 말이 빠른 속도로 이어졌다.

"그 외진 곳에서 카이리시스에 떠도는 소문을 접하고 대응책을 세우려면 왕복하는 이들이 있었어야 합니다. 새들은 그들의 움직임을 놓쳤을 리 없습니다. 그러니 아무래도······."

세크리티아의 세작들이 얼마나 능력있는지를 설명하는 카이리스 3왕자의 말에도 앨런은 웃지 않았다. 칼리안이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짐작한 까닭이다.

"체이스······ 왕세자께서."

칼리안은 자연스럽게 붙어 나오려던 '형님'이라는 단어를 가까스로 집어넣었다. 고삐를 쥐고 있던 주먹에 잠시 힘을 준 칼리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

"스승님께 전하지 않은 말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

"체이스가 무언가를 알아냈지만 저에게 전달하지 않았다는 말씀이십니까."

"네. 그런 것 같습니다. 전달하지 않았다기보다는 전달하지 못했다 해야겠죠."

"저나 왕자님에게, 혹은 카이리스에 전하지 못할 내용을 알게 되어 전달하지 못했다고 보아야 할는지요."

"네. 상황을 보면 저를 습격한 것과 세크리티아의 누군가가 관련이 있는 것으로 확인됐을 수 있습니다. 카이리스에서 저를 습격한 이들과 관련이 있을만한 세크리티아의 인물이라면······."

칼리안이 조용히 읊조렸다.

"새."

가장 유력한 것은 세작이다.

"저 역시 세크리티아에서 마음을 돌렸던 푸른 솔새를 이미 만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그런 이들이 더 있지 말라는 법 없습니다. 새장에서 나간 새가 또 있었고 그 누군가가 이번 일에 연관되어 있을 것 같습니다. 세크리티아의 왕세자께서 그것을 알게 되신 듯 하고요."

앨런의 눈꼬리가 가늘게 좁혀졌다.

"체이스가 세크리티아의 세작들 중 변절자가 있으리라는 사실을 숨기고 협회장과 똑같은 정보만 추려내어 앨런에게 전달했을 것이라는 말씀이신데. 굳이 그럴 이유가 있었겠습니까."

"혹시 이 곳에 오시기 전에 체이스 왕세자님을 만나보셨습니까."

"아닙니다. 만나지 못했습니다."

언제나 체이스는 앨런을 직접 찾아왔다. 다만 오늘만은 체이스가 보낸 사람을 통해 내용을 들었다.

앨런은 그것이 돌아가는 상황을 주시하기 위해 자리를 비우기 어려웠던 탓이리라 생각하고 넘겼었다. 위치를 확인하자마자 칼리안을 만나러 왔기 때문에 그것이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을 시간도 없었다.

앨런의 답을 들은 칼리안이 파리한 웃음을 지었다. 재미가 있어서 웃는 것이 아니었다.

"세크리티아의 새들이 제가 습격당한 것과 관련되었음을 아셨고 새들을 직접 만나보려고 마음을 바꾸신 것 같습니다. 자리를 비우지 못해서가 아니라 비워야 하기 때문에 스승님에게 사람을 통해 내용을 전한 것 아니겠습니까."

체이스는 지금 칼리안을 속이려는 것이 아니었다. 세크리티아의 왕세자로서 이번 일을 카이리스에 알리지 못한다는 것을 알 뿐이다.

대신 칼리안을 위해 따로 움직이기로 했을 것이다.

베른의 형으로서.

체이스는 베른과 비슷했다. 겁이 없었다.

무턱대고 혼자서 그리고 직접 움직이는 것을 좋아했다. 데블란이 베른을 바다에 빠뜨렸을 때 겁도 없이 그 깊은 물 속으로 뛰어들었던 체이스다. 플란츠까지 우려 섞인 생각을 했을 만큼 제멋대로 왕궁을 활보하던 이가 아니던가.

그러니 이번에도 직접 움직인 것이다.

변절한 세작들에 대한 일을 알아보기 위해서.

"변절한 새가 있는 곳. 그 곳으로 따로 가셨을 겁니다."

마법사들과 새들이 알려준 위치는 칼리안을 잡기 위한 함정이 맞을 것이다. 그 쪽으로 칼리안이 가면 습격자들의 공격이 있을 터였다.

"체이스 왕세자님만 알고 있을 놈들의 본거지가 다른 곳에 또 있을 테니 그 쪽으로 혼자 가셨겠네요. 놈들의 공격이 저에게 집중된 틈을 타서, 공격에 가담하지 않고 자리를 지키고 있을 변절한 세작들을 만나러요."

체이스가.

세작들은 칼리안을 직접 상대할 만큼의 무력이 되지 못했다. 그러니 칼리안을 기다릴 놈들은 대사막의 전사들일 것이고 변절한 세작들이 본거지에서 상황을 지켜볼 터였다. 때문에 앨런은 질린 얼굴을 한 칼리안을 달래듯이 말을 꺼냈다.

"체이스가 따로 움직인다 해도 카스트린 경이 있을 터이니 걱정은······."

"마나실 백작."

칼리안의 단호한 목소리가 앨런의 말을 잘랐다.

"궁으로 가세요. 마법사들이 행적을 파악했을 겁니다. 그 분께서 가신 쪽으로 따라가세요."

제자로서 스승에게 부탁하는 것이 아니었다.

카이리스 3왕자가 백작 앨런 마나실에게 명령하는 것이었다.

앨런은 놈들에게 행적을 들키지 않기 위해 궁의 입구에서 지그프리드의 저택까지 워프했다.

그 후로 지금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소요되지 않았다. 그러니 앨런이 빠르게 움직이면 말을 타고 가는 체이스를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다.

앨런이라면 가능하다.

"분명히 다른 호위기사들만 데리고 가셨을 겁니다."

세크리티아 왕궁의 탑 꼭대기에 서면 내성을 이루는 성벽이 고스란히 내려다보였다.

그날.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베른은 홀로 성문 앞을 지켰다. 내성을 등지고 선 이는 단 한 명 베른 뿐이었다. 먼 곳에 있던 체이스가 베른을 알아보기는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성벽을 등지고 선 베른이 죽어가는 모습을 고스란히 지켜보았을 것이 분명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 지켜보았으리라.

"카스트린 경은 제가 가야 할 곳으로 올 테니."

체이스는.

같은 일을 또 겪고 싶지 않아 할 것이다.

* * *

하얀 수리, 아니.

네르드라 불린 이를 부른 체이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용히 선 채로 그 어떤 말보다 더 많은 것을 묻는 눈으로 네르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 변절했는지.

왜 전사들을 돕고 있는지. 전사들의 뒤에 누가 있는 것인지. 전사들은 칼리안의 목숨을 왜 노렸는지.

"이 곳까지 오셨는데, 제가 내어 드릴 것이 없습니다."

그 수많은 질문에 네르드는 이렇게 대답했다.

정보를 사러 찾아온 칼리안에게 물을 내어놓았던 그였다. 그는 언제나 찾아온 이들에게 무언가를 꼭 건네주었다. 하지만 그의 주인이었던 이에게만은 줄 것이 없었다.

그것이 한 잔의 물이든.

혹은 정보든.

"죄송합니다, 저하."

체이스가 올 것은 네르드 역시 예상하고 있었다.

이 곳으로 향하는 체이스와 호위기사들에 대한 소식을 이미 전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예상하지 못한 것은 단 한 사람.

가게 문 바로 앞으로 워프하여 이 곳을 찾아온 앨런 뿐이었다.

네르드는 웃지도, 화내지도, 결연한 표정을 짓지도 않았다. 시간을 끌어서 도망친 이들이 비밀통로를 빠져나가게 할 생각만 하고 있었다.

"알겠다."

체이스는 이렇게만 대답했다. 분노하지 않았다.

체이스는 분노하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체이스의 시선이 앨런에게로 가 닿았다.

그리고 조용히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앨런이 함께 왔으니 우선 앨런이 하는대로 지켜보겠다는 뜻이었다.

앨런이 그의 방식대로 정보를 알아내면 체이스는 자신의 방식대로 네르드를 처분하면 될 일이다.

"나는 내 제자만큼 무르지도 않지만, 여기 이 세자 저하처럼 차분한 성격도 되질 못한다네."

체이스가 물러서자 앨런이 다시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자신에 대해 조금 더 길어진 설명을 덧붙이며 웃었다. 그 모습을 본 네르드가 마주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내가 아는 것이 너무 없어서 실망할텐데. 괜찮겠소?"

"그것은 자네가 걱정할 일이 아니네."

앨런의 손에서 세 번째 플레임 스피어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런 개 같은!"

체이스를 대할 때와는 달랐다.

네르드의 입에서 욕지거리가 터져나왔다.

"새장에서 나간 새끼 새가 여섯 남았네."

다시 한번 비명이 들려왔다.

다만 이번에는 이전처럼 긴 비명이 들리지 않았다. 아마도 함께 있던 이들이 마법에 당한 이의 목숨을 끊어낸 듯 했다.

앨런의 손에 여섯 개의 플레임 스피어가 한꺼번에 떠올랐다.

"하나만 묻지. 자네들이 도와준 전사들의 뒤에 텐실이 있는가?"

네르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앨런은 이번에도 주저 없이 손을 아래로 내렸다. 붉은 구체가 스르륵 움직이는 것을 본 네르드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들은 국가에 소속되지 않았다."

그리고 이렇게, 입을 열었다.

제22장. 건드리지 말라고 (9)

앨런의 손에 들려 있던 플레임 스피어가 다시 위로 올라왔다. 그것을 본 네르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 푸른 솔새가 처형되고 얼마 되지 않아 그들이 찾아왔소. 푸른 솔새가 단순한 암살자가 아니라 세작임을 이미 알고 있었지. 그녀가 하던 일을 대신 해줄 이들을 찾아달라며 많은 돈을 줬고."

"누가 들으면 세크리티아가 엄청 가난한 줄 알겠는데."

조용히 뒤에서 지켜보던 체이스가 설핏 웃고 말했다.

과거의 지금 시기 고작 열 일곱이었을 베른.

데블란은 베른이 검술을 배우기 시작함과 동시에 세작에 대한 일을 베른에게 맡길 생각을 했다. 따라서 베른은 일찍부터 세작의 관리를 도왔다.

그리고 현재 세작에 대한 데블란의 대우는 결코 나쁘지 않았다. 과거와 다르지도 않았다. 그러니 지금 체이스의 목소리에 자조가 가득한 것은 이런 일련의 내용들이 알려주는 하나의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모든 것이 과거와 같지만 단 하나가 다르지 않나.

베른의 부재.

그것이 원인이 된 것이다.

앨런은 체이스의 기분을 짐짓 모르는 척 하며 물었다.

"국가에 소속되지 않았다는 것은 당연한 말이 아닌가. 대사막의 전사들은 어차피 국가라는 것을 지니지 않았으니."

"비단 우리만 있는 것이 아니라 리베른의 마법사도 보았고 텐실의 사제도 섞여 있소."

"세크리티아의 새들이나 대사막의 전사 뿐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소리인가."

"맞소. 다만 이 이상은 나도 아는 바가 없소. 그들이 무슨 이름으로 활동하는지도 모르니까."

여러 나라의 이들이 모여 만들어진 하나의 조직.

네르드를 찬찬히 살핀 앨런이 체이스를 쳐다보자 체이스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더 숨긴 것이 없으리라는 것에 둘 모두 동의하는 눈빛을 한 채였다.

곧 앨런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체이스를 향해 말했다.

"아주 대단하지 않습니까. 다른 새들을 이리도 아끼는 듯 하니."

남은 이들을 전부 죽이겠다 하는 말에 곧바로 입을 연 네르드에 대한 평가였다. 지금 앨런이 어떤 대답을 원해서 한 말이 아님을 알았으므로 체이스는 침묵을 지켰다.

앨런이 다시 네르드에게로 시선을 돌려 부드러운 눈웃음을 지었다.

"······ 그런데 자네. 도망치는 세작들의 이름은 알고 그리 구는가?"

네르드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손속이 무자비함에 대한 분노를 드리운 채 앨런을 노려보던 얼굴 그대로였다.

언뜻 보면 부하 혹은 동료들을 살리기 위해 입을 연 것처럼 보였다. 한 명에게 플레임 스피어를 보냈을 때 곧바로 붉어진 그 눈이 그것을 증명하는 듯 했다.

"카이리스에 와서 없던 친분이 생겼을까. 그렇게 친해진 10명이 나란히 손 잡고 변절을 한 것일까."

그러나 본래 세작들은 서로의 정체조차 몰랐다. 네르드 역시 마찬가지다. 칼리안이 그것을 이용해서 정보를 얻어내는 것이 가능했을 만큼 세작들은 서로간의 친분이 전혀 없었다.

"그럴 리 없는 것을 아니 속이려 들지 말게."

사람 비꼬는 것만큼이나 사람 속 읽어내는 것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 앨런 아니던가.

변절을 하도록 꾀어낸 이가 있으리라고 그리하여 열 명 모두 제각각 변절하여 이 곳에 온 것이리라고 앨런은 그렇게 생각했다. 대부분의 변절자는 그렇게 생겨나지 않던가.

앨런이 담담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내가 이리 보여도 거짓 얼굴에 속지 않을 만큼은 살았으니."

물론 앨런이 직감만으로 네르드의 거짓을 파악한 것은 아니었다. 네르드의 행동이 거짓임을 확신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하얀 수리'는 세크리티아에 아주 충직한 세작이었다.

그렇다 하여 그것이 다른 세작에 대한 그의 애정이 깊다는 뜻이 되지는 않았다.

과거 칼리안은 정보를 밝히지 않으려는 푸른 솔새에게 '하얀 수리로 하여금 취조를 시키겠다' 말했던 적이 있었다. 그 말에 푸른 솔새의 입이 즉각 열렸다. 네르드의 잔혹함을 겁냈기 때문이었다.

그런 푸른 솔새 역시 세작이 아니던가.

세작들을 정말 아낀다면 변절에 대해 분노할 수는 있겠지만 '취조가 끝난 시신을 본 체이스가 사흘 동안 밥을 먹지 못했을 만큼' 잔혹하게 보복하지는 못한다. 칼리안이 그러했듯이.

"게다가 자네 행동이 참으로 모순되지 않은가. 자네는 아홉을 빼돌렸네. 그런데 내 앞에서 독을 먹으려 했고 둘을 죽였을 때 입 속의 독을 뱉었네. 그 후에 내가 질문을 했으나 자네는 말하지 않았지. 때문에 하나를 더 죽였고, 남은 여섯을 모두 죽이겠다 했을 때 입을 열었네."

네르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정녕 저들을 살리고 싶었다면 독을 깨물려 할 것이 아니라 발악을 했어야지. 그것이라도 해보고 죽을 생각을 하는 것이 진짜가 아닌가. 다 버리고 먼저 죽을 것처럼 굴 때는 언제고 저들이 하나씩 죽어나가자 분노한다는 것은 완벽한 모순이니."

네르드는 검을 들어 앨런을 공격하지 않았다.

굳이 숨소리를 드러내가며 독을 쓰려 하고 있음을 티냈다. 앨런이 막을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취한 행동이라는 뜻이다. 그것조차 시간을 끌기 위한 일이었으리라.

게다가 네르드는 시간을 벌어야 하는 이유도 알려 준 셈이었다. 남은 여섯을 다 죽이겠다 했을 때 즉각 입을 열었지 않나.

"하나라도 살아서 도망쳐야 전사들을 이 곳으로 다시 부를 터이니 그리 굴었겠지."

네르드의 표정이 아주 미세하게 바뀌었다.

앨런은 그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기대하지 말게. 아무도 오지 않는다네."

여섯 개의 플레임 스피어가 바닥으로 떨구어졌다.

* * *

두 개의 알약.

네르드와 마주 앉은 체이스는 앨런이 지켜보는 가운데 두 개의 알약을 테이블에 올려놨다. 그리고는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무엇인지 알고 있을 것 같은데, 설명해야 할까?"

생과 사.

두 개의 길을 내어 줄 약을 보던 네르드가 대답했다. 세작들이 필요로 하는 모든 물건을 취급했던 네르드였으므로 그 정도의 약은 충분히 구분할 수 있었다.

"알고 있습니다, 저하."

"그래."

체이스의 입가에 미소가 드리워졌다.

"다만 선택지를 주기는 어렵겠구나."

그렇게 말한 체이스가 둘 중 하나의 약을 집어 바닥에 버렸다. 버려진 것은 죽음을 가져다 줄 독이었다. 그것이 네르드에게는 한 줄기 희망이었다.

그의 눈과 입과 귀를 앗아갈 평생토록 보고 듣고 말하지 못하는 생을 안겨 줄 독이 남았다.

고요한 숲 같던 미소와는 결코 어울릴 수 없을, 마치 카이리스의 혹독한 겨울을 옮겨놓은 듯한 목소리가 다시 흘러나왔다.

"건드리지 말아야 할 것을 건드렸으니."

"······ 저하."

체이스의 손짓에 따라 그의 주변에 서 있던 기사들이 네르드의 입을 움켜잡았다. 그리고 남은 약을 그 입에 털어 넣었다. 네르드는 저항했으나 약을 뱉어내지는 못했다.

"절망 속을 후회로 거닐며 살아보거라."

그 말을 끝으로 체이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걸어나갔다. 들어올 때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발걸음 소리가 조금씩 멀어졌다.

그것이 네르드가 마지막으로 보고 듣고 불러세우려 한 이의 모습이었다.

* * *

당연하겠지만 테일란의 검은 강했다.

무려 사흘이다.

이끌고 나간 세크리티아의 기사단이 전멸한 상황.

발칸의 마법사들이 도착하기 전까지 테일란은 카이리스의 기사단을 홀로 막았다. 세크리티아가 마지막 전열을 재정비 할 수 있도록 사흘을 홀로 버텼다. 세크리티아 왕궁으로 향하는 유일한 길목을 그렇게 막아내던 이가 바로 테일란이었다.

아직 그 날로부터 9년이 앞서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테일란은 테일란이었다.

- 서걱!

앞을 막아선 이의 팔을 잘라낸 테일란의 검이 놈의 심장을 반으로 가른 뒤 멈췄다. 검을 회수하는 그의 뒤로 한 명의 전사가 달려들었다. 테일란이 검을 들어 붉은 오러가 맺힌 그 검을 막으려 할 때.

- 콰직!

뼈가 꿰뚫리는 소리와 함께 테일란을 공격하려던 전사의 몸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널브러진 시신의 목에는 팔뚝만한 구멍이 나 있었다. 바람의 화살이 뚫고 지나간 자리였다.

칼리안의 것이었다.

곧 또 다른 곳에서 날아오는 검을 막아낸 테일란이 그의 목을 벴다. 그리고 칼리안에게 향하는 두 명의 전사 중 한 명의 다리를 잘라냈다. 남은 한 명은 심장에 구멍이 뚫린 채 쓰러졌다. 이번에는 바람의 창이었다.

- 화르륵!

멈추지 않겠다는 듯 무언가 타오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동시에 놈들의 마법사가 만든 거대한 불덩이가 테일란에게로 쇄도했다.

그것을 막기 위해 테일란의 검이 한층 푸르게 빛난 순간.

[실드]

나지막한 목소리와 함께 칼리안이 테일란의 앞에 섰다. 그리고 오러의 방패에 덧씌워진 실드로 화염구를 받아냈다.

- 콰앙!

엄청난 폭발음이 들림과 동시에 사방으로 크기를 늘린 방패가 한 차례의 열폭풍을 막았다. 그와 함께 칼리안은 입 속의 비릿한 무언가를 삼켜냈다.

그런 상태를 테일란이 모를 리 없었다. 테일란이 미간을 찌푸리며 칼리안에게 말했다.

"물러나 계십시오. 아직 몸이 회복되지 않은 것을 압니다."

테일란의 말을 들은 칼리안이 잠시 멈칫했다.

테일란이야 알지 못했지만 참 오랜만에 옛 스승의 존대를 들은 까닭이었다. 앨런은 사제의 연을 맺은 이후에도 칼리안에게 계속하여 존대를 했지만 테일란은 그러지 않았으니까.

여전히 살기 가득한 여섯의 전사를 앞에 두고, 그리고 아직 회복되지 않은 몸을 한 채로, 칼리안이 여유롭게 웃으며 대답했다.

"짐이 되는 것은 질색이라서."

그리고는 다시 한번 바람의 화살을 만들어 달려드는 전사의 미간을 꿰뚫었다.

테일란이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으며 검을 털어낸 뒤 붉은 오러를 만들어내며 달려드는 기사의 목을 벴다. 놈들은 테일란을 오래 상대하려하지 않았다. 마지막 한 놈까지 모두 집요할만큼 칼리안을 노렸다.

하아.

테일란이 세 명의 기사를 베어내는 사이 다시 한번 화염구가 날아들었다. 짧은 한숨을 뱉은 칼리안이 방패를 들어 그것을 막아냄과 동시에 마나를 운용했다.

- 콰앙!

- 쌔애액!

칼리안의 방패에 화염이 막혀 폭발음을 낸 그 순간 바람의 창이 대기를 찢었다.

- 콰직!

잠시 후 한참 뒤에 선 채 화염구를 보낸 마법사의 가슴에 거대한 구멍이 생겨났다.

무슨 일을 당한 것인지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자신의 상처를 내려다보던 마법사의 몸뚱이가 스르르 무너져내렸다.

- 쿵!

그것을 끝으로 칼리안에게 덤벼들었던 열 여섯의 전사가 모두 죽었다. 하나 하나의 무력은 처음 칼리안을 공격했던 다섯의 전사에 비해 현저히 낮았다. 하지만 까다로운 이들이 열 여섯이나 되니 테일란 혼자 놈들을 상대하게 둘 수가 없었다.

다행인 것은 지금껏 칼리안이 검을 꺼내지 않은 것에 대해 테일란이 큰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칼리안은 테일란에게 검술을 배웠다.

아니, 지금의 칼리안이 사용하는 검술은 오히려 테일란보다 나은 면이 있었다. 앞으로 10년 동안 더 다듬어질 기술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혹시라도 테일란에게 나쁜 영향을 줄까 하는 마음에 검을 쓰지 않았다.

그 이유를 단순히 몸 상태 때문이라 생각하고 넘긴 테일란이 입을 열었다.

"살려두지 않아도 괜찮은 겁니까."

"왜 공격했는지 알게 되었으니 괜찮습니다."

칼리안이 새하얗게 질려있는 얼굴로 웃었다.

그 손에 들려있는 검은 조약돌을, 테일란은 보지 못했다.

* * *

플란츠가 인상을 찌푸렸다.

신 향기가 맞은 편에 앉아있던 플란츠에게까지 닿은 까닭이다.

잠들듯이 쓰러진 것인지 혹은 쓰러지듯 잠든 것인지.

아무튼 칼리안은 왕궁으로 돌아오기가 무섭게 하루를 침대 위에서 보냈다. 얀이 걱정하는 소리가 플란츠의 방까지 울렸다.

자리를 털고 일어난 칼리안에게 앨런이 잠시 다녀갔다. 그 뒤 칼리안은 귤이 담긴 바구니를 들고 비척비척 4층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그것을 까먹기 시작했다.

"······ 무슨 짓이지."

라고 벌써 네 번을 물었다.

배고프니까 잠깐만 기다려달라 답했던 칼리안은 플란츠의 방에 신 귤 냄새가 가득 찬 뒤에야 입을 열었다.

"브리센을 완전히 조각내면 안 될 것 같습니다."

"왜."

뜬금 없는 소리였으므로 플란츠가 되물었다. 그리고 칼리안은 주머니 속의 돌을 꺼내 테이블에 올려두며 말했다.

"놈들이 굳이 저를 노릴만한 이유는 이것뿐입니다. 말씀드렸지만 카이리시스에서 특별히 나쁜 짓을 하지 않았으니까요."

이렇게 말하며 작은 소리로 웃은 칼리안이 말을 이었다.

"놈들이 이 돌과 비슷한 기운이 느껴지는 힘을 쓰고 있기도 했고요. 그래서 처음에는 제가 이 돌을 얻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부터 저를 노리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저를 노리기는 했지만 왕자의 신분이니 쉽게 공격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언제든 공격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고요. 거기까지 생각을 하니까 문제가 풀렸습니다."

"그러니까. 뭔데."

"텐실과 대사막이 손을 잡았다는 정보도 새들이 전했습니다. 그 정보를 받기가 무섭게 저를 공격했고요. 그러니 제가 아니었다면, 형님이나 체이스 왕세자님이 아니었다면, 누구든 이번 공격이 텐실의 짓일 것이라 생각했을 겁니다. 브리센 후작이 그리했던 것처럼요."

그러니 이 얼마나 좋은 기회란 말인가.

공격은 공격대로 가하고 책임은 텐실에 전가할 수 있으니 말이다.

"저를 공격할 시기를 보던 중에 대사막과 텐실이 손잡으리라는 것을 알게 됐고, 이 때다 싶어 들이닥친겁니다. 전하께서 이번 일의 배후가 텐실의 짓일 것이라 생각하시게 하기 위해서요."

칼리안은 조금 전 꺼내 둔 돌을 가리켜보이며 말했다.

"그렇게 눈가림을 만들어 둔 뒤 제가 이 힘을 쓸 줄 아는지를 확인해보려던 것 같습니다. 확인하는 김에 그냥 죽여버릴 생각을 했을 수도 있고."

돌을 빼앗을 목적 혹은 칼리안을 죽일 목적은 아니리라 생각했다. 같은 것을 가진 시아가 멀쩡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시아를 굳이 공격하지 않았다.

반면 칼리안은 오러를 쓸 줄 알았다. 그것도 어느 순간 갑자기 드러나게 된 힘이었다. 그러니 의심한 것이다.

"제가 이 돌의 힘이 무엇인지 알아낸 것은 아닌지, 그래서 그 힘으로 검의 길에 오른 것은 아닌지. 그 점을 확인해보려 한 것 같습니다."

그것이 칼리안의 결론이었다.

테일란과 함께 놈들을 상대했을 때 놈들의 붉은 오러가 빛날 때마다 함께 반응하던 조약돌을 떠올리던 칼리안이 그렇게 말했다.

"놈들의 힘과 이 돌은 분명 관련이 있습니다. 다만 제 힘은 그런 가짜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 겁니다. 게다가 여러모로 저를 더이상 건드리지 말라고 경고한 셈이 되었으니, 당분간은 공격하지 않을 듯 합니다만."

잠시 말을 멈춘 칼리안이 시스파니안을 떠올렸다.

"끝은 아닐 것 같습니다. 저를 건드려 볼 만큼 중요한 비밀이 얽혀있다는 말이기도 하니까요."

플란츠가 가만히 눈을 감았고 칼리안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어차피 왕이 되실 생각도 없고 왕궁에 머무실 생각도 없다면, 브리센에 가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브리센이라니."

"란델 형님과의 일이 해결되면 브리센은 고스란히 살려서 형님께 드리겠습니다. 놈들 힘이 보통이 아닌 것 같으니 브리센도 있어야 될 것 같습니다."

무언가를 준비하듯 계속 힘을 키워왔던 칼리안이다. 그런데 이제는 브리센의 힘도 있어야 할 것 같다는 말을 하고 있었다.

"······ 내 아우님이 나를 참 귀찮게 하시는군."

칼리안이 생글생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브리센에서 고양이 키우십시오. 수도 떠나지 않으셔도 되도록, 방법은 제가 찾을 테니."

제22장. 건드리지 말라고 (10)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수증기.

바위를 뚫고 솟아오르는 따뜻한 물.

체온보다 조금 높은 그 물에 온 몸을 담그고 살며시 눈을 감는 것을 싫어할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카이리시스에서 동쪽으로 이틀을 더 가면 온천으로 유명한 슈린츠 지방에 도착할 수 있다. 카이리스 왕실의 별궁이 있는 곳이기도 했다.

가깝다면 가깝고 멀다면 먼 거리겠지만 기실 귀족들에게 있어 이틀 거리는 그리 부담스러운 걸음이 아니었다. 어차피 일 년에 한 두번은 멀고 먼 자신의 영지까지 다녀오는 이들이 대다수였으니까.

때문에 카이리시스에 거주하는 많은 귀족들이 관광 혹은 요양을 위해 종종 슈린츠를 찾곤 했다. 하지만.

"걱정은 안하셨습니까."

이렇게 입을 연 드미레아의 얼굴에는 온갖 감정이 다 드러나 있었다. 그리고 그 수많은 표정 중 가장 큰 것을 해석해보자면 '아버지 당신이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 있어' 정도가 될 것이었다.

그래, 물론.

제 핏줄이라고는 해도 도저히 이해해줄 수 없는 것이 꼭 한 두 가지는 있게 마련이다.

그 살기등등한 왕자를 보며 꽃 같다 말하는 얀도 당최 이해하기 어려운 족속이지만 차라리 그 쪽은 그래. 꽃 같이 생기기라도 했으니까.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 줄 수는 있다.

"내가 설마 내새끼 걱정을 안했겠느냐?"

"걱정하셨다기엔 피부가 너무."

매끈매끈 윤기나는 슬레이만의 얼굴을 보며 드미레아가 이렇게 대꾸했다.

르메인을 찾아가 드미레아가 문을 닫아 잠근 이유를 들은 슬레이만은 가타부타 다른 말 없이 르메인에게 돈이나 좀 빌려달라 말했다.

그리고 그 돈으로 세리에와 함께 온천에 갔다.

드미레아가 그랬지 않나 며칠 더 쉬다 오라고. 그래서 갔다는 것이다. 수도에서 이틀 떨어진 거리에 있는 슈린츠에.

저 태평함을 이해할 수가 없다. 그것을 이해하기엔 드미레아의 이성이 너무 건강했다.

"아주 잘 쉬고 오신 것 같네요."

두 왕자를 사이에 두고 지그프리드와 브리센이 대립하는 상황에 지그프리드의 가주인 슬레이만이 어정쩡한 곳에 있으면 오히려 독이 된다. 그러니 그냥 멀찍이 떨어지는 것으로 드미레아를 도운 것임을 알고는 있다.

그런데 저 얼굴 좀 보란 말이다.

딸 걱정 집안 걱정 나라 걱정이라고는 공기중에 퍼진 먼지만큼도 안하고 정말로 아주 그냥 푹 쉬기만 한 저 얼굴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느냔 말이다.

그것이 고스란히 얼굴 밖으로 나왔으므로 슬레이만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는 장난기를 지운 채 웃음만 남긴 얼굴로 말했다.

"세리에가 걱정하지 말라 했고, 나도 그리 생각했다."

슬레이만이 허락한 '방패'의 의미를 멋대로 확장시켰다. 보호와 옹립의 뜻을 교묘하게 달리 해석하여 칼리안을 돕는 것이 자신들의 신념에 반하는 것이 아니라는 눈속임까지 하고 있었다.

그런 드미레아를 걱정하지 않았다.

혼내기는 커녕 믿었단다.

그렇게 말한 슬레이만이 드미레아를 보며 입을 열었다.

"하나만 물어보마."

"네."

"이유가 무엇인지 내가 그것이 참 궁금했다."

"무슨 이유 말씀이십니까."

슬레이만은 들고 있던 투명한 와인을 한 모금 마신 뒤 말했다.

"너는 얀이 아니지 않느냐. 그런데 왜 그렇게까지 해 가며 3왕자를 도왔는지, 그걸 모르겠다. 고작해야 3왕자가 지그프리드 공작령에 방문했던 그 며칠동안 본 것으로 이렇게까지 나서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지 궁금하였다. 3왕자의 무엇을 보고 마음을 정했는지."

드미레아는 얀만큼 칼리안을 많이 겪어보지 않았고 만나보지도 않았다. 그렇다 해서 슬레이만처럼 칼리안의 진짜 모습을 파악한 것도 아니었다. 허나 아무리 생각을 해보아도 이유를 알기가 어려웠다.

슬레이만의 물음에, 드미레아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입을 열었다.

"오라버니가 웃잖아요."

하늘 아래 온갖 불행은 다 내꺼라는 얼굴을 하고 살았던 얀이 '묵은 똥 싼 얼굴'을 하더니 칼리안과 잠시 손을 잡아달라는 말을 하러 찾아왔을 땐 웃고 있었다.

"그렇게 만들어 준 사람이니 원하는 걸 해보도록 도와줘도 좋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그 정도의 결정에 대한 결과는 제가 감당할 수 있으니까요."

드미레아다운 담백한 이유였다.

그 말을 들은 슬레이만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큼지막하게 웃는 얼굴을 한 슬레이만이 고개를 끄덕끄덕 해보이더니 입을 열었다.

"나 내일 내려간다. 우리 세리에랑 둘이 가마."

"지그프리드 공작령으로 가신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지금 그 곳에 아무도 없으니 오래 비워두기도 어렵지 않겠느냐. 여기 일은 전부 다 네 마음대로 해보거라."

드미레아는 수도에 와서 한 일이라고는 앨런과 함께 르메인을 놀리고 앨런과 술 마시고 테일란에게 시비걸었다 죽을뻔하고 집에서 쫓겨나 온천에 다녀온 것이 전부인 슬레이만을 보며 대답했다.

"네."

수도에 드미레아만 두고 가겠단다.

칼리안을 어떻게 돕든 알아서 결정하고 행동하라는 소리였다. 자신이 내려감으로서 드미레아에게 그만큼의 권한을 넘기겠다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감사합니다."

자신의 결정과 행동을 믿겠다는 아버지를 보며 드미레아가 살짝 웃었다.

* * *

여행을 마친 슬레이만이 집에 들어가고 칼리안이 플란츠에게 고양이 키우기를 권하고 있던 그 시간.

시종장 라울에게 엘프 사신단과의 만남을 미루라 한 르메인이 창 밖으로 보이는 거대한 정원을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텐실이 얽힌 증거가 나왔다는 말이더냐."

르메인의 뒤에 서 있던 렌이 대답했다.

"네 전하. 네르드라는 자가 있던 서점에서 텐실의 왕실과 주고 받은 서신이 다수 발견됐습니다. 3왕자님께 해를 입힌 일을 계획한 것에 대해서도 모두 기재되어 있었습니다."

"텐실 외에 다른 이들이 관련되었다는 내용은 없었고."

"네. 그렇습니다. 텐실에 대한 내용만 확인되었습니다."

꼼꼼한 렌과 카에라가 직접 나서서 수색을 진행했으니 놓친 증거는 없을 것이다.

칼리안이 사라졌을 때 가장 큰 이득을 볼 것은 란델이었다. 란델이 왕위에 올랐을 때 이득을 보는 것은 당연히 텐실이다. 그러니 습격을 한 이유 역시 너무나 명백했다.

증거도 정황도 모두가 텐실을 가리키고 있었다.

"전부 태우거라."

때문에 르메인은 이렇게 명했다. 이번 일의 배후에 대해 앨런에게 전해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르메인은 그들 중 죽은 이가 세크리티아의 세작임을 알지 못했다. 이번 일에 크게 나서 준 체이스에 대한 앨런의 배려였다.

"훗날을 대비해 보관해두지 않으셔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어차피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거짓 배후라 하니 그대로 둘 이유가 없지 않느냐. 훗날에 다른 문제가 있다 해도 거짓 증거를 이용할 일은 없을 테니 태워 없애도록 하거라."

렌은 반박하지 않았다.

지그프리드의 기사 로난시테 체이스의 기사 테일란 그리고 키리에가 그러하듯이.

"알겠습니다. 그렇게 처리하겠습니다, 전하."

고개 숙여 예를 보인 렌이 밖으로 나간 뒤 르메인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두 왕자와 소공작에 대한 처벌이 있어야겠지."

칼리안이 습격당한 것을 세상은 모른다.

연회장에서 멋대로 나간 란델을 체르밀 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했으면서 멋대로 근 일주일간 실종되었던 칼리안을 그대로 둘 수는 없다. 한밤에 왕궁 밖으로 나갔던 플란츠 역시 마찬가지, 그리고 그런 플란츠를 억류한 지그프리드 역시 빠뜨릴 수 없었다.

물론 드미레아는 지그프리드에 대한 처벌도 자신이 받겠다고 마음을 먹고 있었다. 다만 드미레아가 몰랐던 것이 하나 있었다. 벌을 내릴 르메인이 어떤 사람인지는 드미레아보다 슬레이만이 조금 더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지그프리드 공이 내일 수도를 떠난다더군요."

어떤 벌을 내려야 할지 고민하는 르메인을 돕기 위해 앨런이 지나가는 말투로 이렇게 말했다.

그 말을 들은 르메인이 피식 웃었다.

아무리 르메인이라지만 이런 시기에 굳이 수도를 떠나겠다는 슬레이만의 의도를 모를 만큼 눈치가 없지는 않았다.

곧 르메인이 시종장 라울을 불렀다.

그리고 몇 가지 내용을 전달했다.

"수도에 혼란을 일으킨 지그프리드 공작을 내일 당장 카이리시스 밖으로 내보내고 해가 가기 전까지는 카이리시스 입성을 금지한다."

드미레아를 대신해 슬레이만이 처벌을 받는다.

칼리안의 방패가 되는 것이 드미레아의 몫이었다면 드미레아의 방패가 되는 것이 슬레이만의 몫이니까.

"그리고 2왕자와 3왕자 모두 왕궁 밖 출입을 금지시키겠다. 허락이 있기 전까지는 외부 행사에도 참여하지 못할 것이다."

꽤 강한 처벌이었으나 앨런이 보기에 그것은 '보호' 였다. 카이리스에서 시스파니안의 손길이 어린 이 왕궁만큼 안전한 곳은 없을 테니까.

"딱 좋은 처벌입니다."

그 마음을 모를 리 없을 앨런이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그래.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이 왕궁 안에 갇혀 있는 순간 순간이 생의 마지막이 될 것처럼 숨이 차올라서 그리 말했다.

왕이 되고 싶지 않다고.

살고 싶다고.

칼리안은 플란츠가 그런 말을 한 이유를 모르지 않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더 잘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왕의 아들로, 그리고 왕의 동생으로 플란츠보다 훨씬 더 오랜 시간을 왕궁에서 보냈을 테니. 때문에 플란츠의 말에 공감하고 고개를 끄덕였을 수도 있다.

그래도.

그렇다고 해도.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플란츠가 지그프리드의 저택에서 혼잣말처럼 꺼냈던 말을 다시 내보냈다.

"내 아우님이 나를 너무 믿으시는데."

설마했지만 브리센을 넘기겠다니.

태연한 얼굴로 귤 껍질을 까며 할 만한 이야기라 하기에는 너무 크고 무겁지 않은가.

플란츠는 그렇게 생각했다.

"겁을 잃으신 건지. 자신이 넘치시는 건지."

처음 칼리안의 방을 찾았을 때부터, 그리고 지금까지. 칼리안은 단 한번도 플란츠를 의심하지 않았다.

손에 쥔 것이 없으면 죽는다며 발칸을 빌려주더니 브리센까지 쥐어주려 하는 칼리안을 보며 플란츠가 그렇게 말했다.

대체 뭘 믿고 이러느냐고.

내가 당장 마음을 바꿔먹으면 어찌하려고.

"그러다 내가 또."

이렇게 말하던 플란츠가 입을 다물었다.

말을 멈춘 것을 느낀 칼리안의 움직임도 잠시 멈췄다.

플란츠가 무엇을 되삼켰는지 칼리안도 느낀 탓이다.

그렇게 아주 잠시 정적이 흘렀다.

"내 형님께서는 어찌나 눈치가 빠르신지."

칼리안의 입에서 짧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리고는 신 귤의 껍질을 다시 벗겨내기 시작했다. 붉은 두 눈이 연두색 귤 껍질에서 벗어나지 않은 채였다.

"거기까지만 생각하십시오."

시디 신 귤의 향이 코 끝을 맴돌았다.

그 끝에 한 사람이 자꾸 떠올라서 혼자 먹질 못하고 굳이 여기까지 왔는데.

떠올리지 말아야 할 것을 알게 된 사람이 앞에도 있었다.

"넘겨짚는 것 까지만, 하십시오. 확신하지 말고."

전쟁이 있었다는 말도, 그 안에서 자신이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한 설명도, 그것이 누가 일으킨 전쟁이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도. 해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칼리안 혼자 겪은 과거의 일이다.

체이스가 기억해주고 있다지만 결국 아무 의미 없는 일이 아닌가. 지금에 와서는 일어나지도 않은 그 일을 왜 혼자 알아내서는 저러고 있느냔 말이다.

"······ 플란츠."

살짝 눈을 감았다 뜬 칼리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과는 상관 없는 일이었으니까."

지금의 플란츠와 아무 관련 없는 일이니까.

그 일은 절대로 되풀이되지 않을 테니까.

내가, 그렇게 만들 거니까.

플란츠는 대답하지 않았고 다시 한번 눈을 감았다 뜬 칼리안은 귤을 한 조각 떼어내어 입에 넣었다. 유난히 신 맛에 저도 모르게 쓴웃음이 났다.

한참을 오물거리며 귤을 씹어 삼킨 칼리안이 말을 이었다.

"형님께서는 스스로 왕이 되는 것이 결단코 싫다 하셨고, 란델 형님께서 왕위에 오르셔서 형님과 저를 나란히 탑에 가둬두는 것은 더 싫으실 것 아닙니까. 그러니 믿는 겁니다."

나도 무턱대고 너를 믿어줄 만큼 좋은 사람은 아니라고. 그러니 쓸데없는 생각이나 하며 미련 떨지 말라고.

"혹시라도 마음이 바뀌어서 세자위가 필요해지면 그냥 달라고 하세요. 생각해 볼 테니까."

남의 것 탐내본 적 없는 플란츠에게 칼리안이 그렇게 말했다. 그 꼴을 본 플란츠의 한쪽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버릇없는 새끼."

칼리안이 양쪽 입꼬리를 들어올리며 웃어보였다.

그리고는 마지막 남은 귤을 들어 플란츠에게 내보였다.

"형님 드시겠습니까."

플란츠가 작은 소리를 내며 실소했다.

그리고 칼리안의 손에 들린 귤을 건네받았다.

시고 시고 또 셔서 머릿속에 든 생각이 싹 사라져버린다.

그러니 어쩌겠나.

쓸데없는 생각 말고 고양이나 키워야지. 브리센에서.

제22장. 건드리지 말라고 (11)

히나가 웃었다.

그동안 단 한번도 보여준 적 없던 수어를 하며 생긋 웃었는데, 아무래도 그건 욕이 아니었을까.

그것이 무슨 말인지 물었을 때 키리에는 칼리안의 눈을 피했다. 그래서 칼리안은 히나의 손 모양을 고스란히 외워뒀다.

'드미레아한테 물어봐야지.'

드미레아라면 그것이 욕이든 아니든 무슨 뜻인지는 알려줄테니까.

아무튼 매우 좋지 않은 뜻임에는 틀림 없다.

칼리안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그다지 좋은 말을 할 상황은 아니었다.

기껏 살려놨더니 다 낫지도 않은 몸으로 닷새만에 밖에 나갔다. 앨런이 같이 가니까 괜찮을 줄 알았는데 따로따로 움직였단다. 그래서 또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그걸 다시 고쳐놓다 잠시 쉬는 사이에 제멋대로 4층에 가서는 다 낫지도 않은 속을 한 채로 그 많은 신 귤을 다 까먹었다.

거기서 끝났으면 다행이다.

- 왕자님의 고양이도, 왕자님보다는, 말을 잘 들어요.

칼리안은 플란츠와의 대화가 끝나기 무섭게 수련장에 갔다. 꼬박 일주일을 누워있어도 모자랄 판에 도무지 가만히 있지를 않는 것이다.

결국 수련장에 있는 것을 히나에게 들켰고 혼이 났다. 축복의 힘이나 히나의 치유가 부족한 피를 채워주지는 못하니까.

- 오빠도 나빠. 말렸어야지.

키리에도 같이 혼났다.

잠시 본가에 간 얀을 대신해 칼리안을 말려야 했음에도 나란히 수련장에 있었으니 혼이 날 만도 했다.

"걱정 마. 이번에는 진짜 무리 안 할게. 키리에 수련하는 것만 조금 봐 주고 올라갈게."

- 또 다쳐도, 안 고쳐줄 거예요. 보는 것만, 하세요.

어울리지도 않는 엄한 얼굴로 히나가 이렇게 말했다.

결국 칼리안은 작은 웃음을 터뜨렸다. 몇 번을 다쳤더니 전부 다 얀이 되어 버렸다. 르메인은 물론이고 앨런과 히나까지.

"고맙지만, 히나. 얀이 해주는 걱정이면 충분해. 그러니 걱정 그만하고 들어가 있어. 감기걸릴라."

지금 누가 누굴 걱정하는 것인지.

칼리안은 히나가 밖에만 나오면 감기에 걸리는 줄 아나보다.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되려 자신을 걱정해주는 칼리안을 못미더운 눈으로 쳐다본 히나가 발을 돌려 돌아갔다. 히나가 멀어지는 것을 보던 키리에가 조용히 물었다.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움직이시기 어려운 상태로 보입니다."

분명 히나에게는 걱정하지 말라 했던 칼리안이지만 어디 고분고분 가만히 있을 사람이던가. 그랬다면 애초에 수련장으로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키리에의 생각이 맞았다는 듯, 키리에를 향해 웃고 있는 칼리안의 손에는 검이 들려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내가 너 하나를 상대 못해줄까."

그러더니 이렇게 꽤나 뼈아픈 말로 키리에를 자극했다.

키리에가 살짝 웃더니 묵빛의 검을 들어 그대로 칼리안에게 내질렀다. 칼리안 역시 재빠르게 팔을 들어 그것을 막아냈다.

- 카앙!

실컷 내려다보는 말을 들어도 기분이 상하지 않는 것은 칼리안의 상태를 걱정한 키리에가 제대로 싸우려들지 않을까봐 하는 소리임을 알기 때문이다. 따라서 키리에는 최선을 다해 검을 움직였다.

여유로운 얼굴로 검을 받아 넘기던 칼리안은 놀란 표정이 드러나지 않도록 신경을 쓰고 있었다.

'생각보다 더 많이 강해졌는데.'

스스로의 검술과 마법, 그리고 주변 상황에 몰두하느라 꽤 오랫동안 키리에를 보아주지 못했다. 그리고 키리에는 그 사이에 엄청난 속도로 성장해 있었다.

- 카강, 캉! 카아앙!

연타를 방어한 칼리안의 검이 키리에의 심장을 노리며 뻗어나갔다. 그것을 어렵지 않게 막아낸 키리에가 다시 공격을 해왔다.

즐거운 마음이 든다.

확실히 키리에는 노력하는 천재다.

'괜한 걱정을 한 것일지도.'

대사막 전사들의 습격이 있던 날, 에우리아를 만나고 궁에 돌아온 뒤 봐주려던 것이 바로 키리에의 검이었다. 플란츠와 수련장 앞에 앉아 이야기를 나눴던 날 키리에가 '벽'을 마주하고 있음을 느낀 까닭이었다.

마법사가 깨달음을 얻어 다음 서클을 완성하듯이 검술 역시 스스로의 한계를 넘고 다음 단계로 성장하게 되는 때가 있다. 지금의 키리에가 바로 그 시기를 겪고 있었다.

수련장 한 가운데에서 검을 내려놓고 앉은 채 깊은 생각에 빠져있기에 수련장에 들어가려던 플란츠를 붙들어 앉혔지 않나.

다만 지금까지는 칼리안이 알려준 검술을 수련했다면 이제는 스스로가 깨우쳐 나가야 할 일이라 생각했으므로 그저 지켜봤다. 그러다 아무래도 조금쯤은 도움을 줘야 할 것 같아서 궁에 들어오면 키리에부터 보아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던 차에 일이 꼬였었다.

- 카강! 카아앙!

날카로운 쇳소리가 수련장 전체를 끊임없이 흔들어댔다. 대부분의 공격은 키리에가 했고 칼리안은 간혹 반격하며 키리에의 반응을 살폈다.

"느려."

그리고 이렇게 한계를 파악하기 위한 말로 계속해서 키리에를 몰아세웠다.

키리에의 움직임이 끝을 모르고 빨라졌다.

그 때마다 칼리안은 대단할 것 없다는 듯한 얼굴로 그것을 받아냈다.

이 정도라면 슬레이만의 기사 유란과 견주어도 승패를 알 수 없으리라. 문득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을 때 키리에의 검이 칼리안의 미간을 노리고 쏘아져 나왔다.

칼리안이 알려 준 공격 방식이 아니었다.

칼리안의 입이 긴 호선을 그렸다.

- 카앙!

그것을 막아낸 칼리안의 모습이 키리에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뻗어낸 검을 즉각 회수한 키리에가 본능적인 움직임으로 상체를 숙였다.

- 쉬익!

조금 전까지 키리에의 머리가 있던 곳으로 칼리안의 검이 지나갔다. 그것을 느끼며 몸을 돌려세운 키리에의 귀에 아주 미세하게 바닥을 스치는 칼리안의 발소리가 들렸다.

키리에는 주저하지 않았다.

곧바로 소리가 들린 곳을 향해 검을 뻗어냈다.

"말했잖아."

그리고 또 다른 곳에서 칼리안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느리다고."

실로 어마어마한 속도의 움직임이다.

곧 쓰러질 것처럼 비척비척 이 곳으로 걸어온 사람이 과연 맞을까 싶다.

뻗어낸 검을 다시 한번 회수한 키리에가 바닥을 박찼다. 그와 함께 키리에의 신형도 사라졌다.

- 카아앙! 캉! 카앙!

흐릿한 그림자가 서로 얽히며 다시 한번 맞붙었다. 칼리안이 자신의 공격에 절대로 당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확신한 키리에는 온 힘을 다해 검을 다뤘다.

그렇게 수십 차례의 공방이 다시 오갔을 때.

- 피잉······!

키리에의 눈빛이 깊이 가라앉았다.

수련장이 아닌 오로지 칼리안과 키리에만이 존재하는 그런 공간에 들어선 듯한 느낌을 받았다. 키리에는 지금껏 가져보지 못한 그 이질적인 느낌에 아주 깊이 빠져들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엄청난 변화가 찾아들었다.

칼리안의 움직임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바닥을 디디는 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칼리안이 어디로 움직일지 예측할 수 있게 되었다.

이유는 몰랐다. 그저 알게 되었다.

- 쌔애액!

주저할 시간이 없었다.

알았으니, 공격할 뿐.

예리한 파공음이 대기를 갈랐다. 키리에의 검이 당장이라도 칼리안의 심장을 꿰뚫을 기세로 뻗어나갔다.

그리고 칼리안은,

[실드]

아주 치사했다.

* * *

오러로 만들어진 실드는 그 자체로 위협적이다.

칼리안의 실드는 당장이라도 키리에의 검을 조각낼 기세였다. 물론 칼리안의 의지가 그것을 원하지 않았으므로 그런 일이 벌어지지는 않았다.

무엇이든 조각낼 기세의 '실드'라니.

참으로 모순된 힘이 아닌가.

마치 파열된 유리조각을 다시 모아둔 듯한 형상의 실드 안에서 칼리안이 씩 웃었다.

"미안. 죽을 것 같아서."

그러더니 변명을 했다.

실드에 가로막힌 정확히 칼리안의 심장 앞에서 멈춘 자신의 검 끝을 보던 키리에가 어리둥절한 얼굴이 됐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탓이었다. 그것을 본 칼리안이 기특한 손주를 보듯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내가 졌어."

그 말을 듣고도 키리에는 한동안 가만히 서있었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에야 깨달았다.

- 이겼······ 다.

이겼다.

칼리안을 이겼다.

한 순간에 검의 이치를 깨닫거나 오러를 방출하는 기적이 생기지는 않았다. 그것은 정말 말 그대로 기적에 가까운 일일 뿐이다. 키리에는 그런 것을 믿는 사람이 아니었다.

지금 키리에는 감각을 확장시키는 법을 깨달았다.

뛰어난 청력을 이용해 싸우는 것과는 다른 것이었다. 타인의 기운을 느끼고 동화하며 오직 상대와 나만이 존재하는 상태로 검을 나누게 되는 능력이었다.

"감사합니다."

그리 크게 기뻐하지 않는 목소리였으나 키리에의 얼굴을 쳐다본 칼리안이 웃었다. 그 얼굴 속에 숨겨진 감격스러운 웃음을 읽어내지 못할 리가 있겠나.

'어쩌면 이번 생에서는 키리에도 검의 길에 오를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렇게 흐뭇한 기분으로 한 발을 내딛던 칼리안의 걸음이 휘청였다.

깜짝 놀라 부축해오는 키리에를 보며 칼리안이 웃었다.

"배고파서 그래."

키리에가 낮은 한숨을 쉬었다.

체이스가 온 뒤로 제 속은 썩어가면서, 얀을 다독이고 플란츠의 짐을 덜어주고 히나를 걱정하더니 키리에까지 신경을 쓰고 있다. 그 고집을 어떻게 이기냐 싶어 검을 꺼내 대련에 응했지만 당장 걷지도 못하는 것을 보니 원망스러운 마음이 든다.

곧 죽어도 아프다는 말을 안 하는 것이다.

이유를 모르지는 않지만 그래도 한 번쯤은 말해줘도 좋지 않을까.

지금 너무 힘드니까 조금만 미뤄달라고.

이런 상태로 찾아와서 도와주면 고마울 줄 아느냐고. 오히려 미안하기만 하지 않느냐고.

그런 말을 하는 대신 키리에는 그냥 고개를 숙여 보였다. 잠깐 실례할 테니 이해하라는 뜻이었다.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걸어갈 수 있겠냐는 말을 해봤자 소용이 없을 테니, 키리에는 그냥 덤덤한 말투로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칼리안을 냅다 들춰 업었다. 어차피 저대로 걸어갈 수 있을 것 같은 모양새도 아니었다.

의외로 칼리안은 얌전히 키리에의 등에 업혔다. 그러더니 그 등에 머리를 기댄 채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를 냈다.

"아, 오랜만이다."

분명히 웃고 있는데 그 말 끝이 아프다.

그것이 무엇 때문일지 알아들은 키리에가 짧게 물었다.

"제가 업어드린 적이 있습니까."

"응."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열 다섯 살의 입에서 나오지 말아야 할 이야기가 이어졌다.

"내가 취했을 때. 많이."

키리에.

칼리안이 유일하게 마음 놓고 붙잡을 수 있는 과거의 끈이 아니던가.

"술 좋아하셨습니까."

"나보다는 네가 더 좋아했어."

기분이 참 묘하다.

과거의 일일텐데도 과거가 아니니 이것을 어찌 받아들일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칼리안이 잠겨드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가 사실 다 안 나았어. 움직이는 것도 내 맘 같지 않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더 열심히 해. 다음엔 안 져."

"네."

그렇게 답한 키리에가 피식 웃었다.

과거의 일이야 어찌됐건 키리에는 그저 들어주면 될 일이다. 가끔씩 이렇게 약한 소리가 나올 때마다 고개만 끄덕여주면 될 일이니 어려울 것이 있을까.

지그프리드 덕에 당분간 란델도 얌전히 있을 테고 란델에 대한 처벌로 텐실에도 경고를 했으니 또 기사를 보내는 식의 어리석은 행동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브리센은 플란츠가 막고 서 있으니 그도 괜찮다. 습격자들도 일단 물러났다.

"걱정 말고 쉬십시오."

"응."

그러니 우선은 다 내려놓고 쉬시라고.

그렇게 말했고, 그렇게 알아들었다.

제23장. 그런 날이 온다면 (1)

칼리안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이틀간 얌전히 자리를 지켰다. 언제까지가 될지 기약도 없는 외출 금지령도 잘 이해하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런데 이건 좀 너무 과하지 않나.

"호위기사라니."

르메인이 세 왕자에게 호위기사를 보냈다. 왕자들에게는 호위기사를 붙이지 않는다는 왕실의 규율을 깨버린 것이다.

물론 그것을 과한 행동이라 보기는 어려웠다.

자식들이 연중행사인 양 번갈아가며 피를 쏟고 있으니 카에라의 기사를 차출하여 보낸 정도면 르메인도 꽤 많이 자제한 것이라 볼 수 있을 터였다. 솔직히 앨런은 체르밀 궁의 기사들을 전부 빼버리고 그들을 모조리 카에라 단원들로 채우지는 않을까 걱정했었으니까.

그에 대해 브리센은 생각 외로 조용했다. 란델이 한번 브리센을 노렸다 실패한 뒤 혹여 플란츠에게 칼 끝을 돌리는 것은 아닐지 우려한 탓이리라.

문제는 칼리안에게 있어 그들이 '방문 잠금장치' 그 이상도 이하도 되지 못한다는 점에 있었다.

'잠깐 산책만 갈 거라니까.'

'불가합니다 왕자님.'

발칸의 훈련 모습도 보고 아르센도 좀 만나야 하는데 이 우직한 기사들은 절대로 내보내주지 않았다. 히나가 권고한 '7일'을 정확히 채우지 않는 이상은 결코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리라는 것이 그들의 설명이었다.

"붙어보자고 해볼까."

저 기사 나부랭이들이 나를 이기면 말 듣겠다고.

결국 칼리안이 눈을 빛내며 이렇게 무서운 말을 꺼내들었고 옆에 서 있던 얀이 깜짝 놀라면서 작은 목소리로 칼리안을 달랬다.

"그러다 또 다치시면 어떡하시려고요."

누가, 누구에게?

칼리안이 딱 이런 눈이 되어 얀을 쳐다봤다.

아무튼 얀은 한결같은 얀이었다.

"쉬셔야 합니다. 또 키리에에게 업혀 오시면 안되잖아요. 헤르츠 경은 제가 불러올게요."

결국 칼리안은 깊은 한숨을 쉬며 테라스로 향했다.

순간 얀은 칼리안이 그대로 테라스를 넘어 도망가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으나 다행히 칼리안은 테라스의 의자에 얌전히 앉았다.

"안 갈 테니까 차나 한 잔 가져다 줘."

"네, 왕자님. 금방 가져다 드릴게요."

나가기를 포기했음을 안 얀이 웃으며 얼른 밖으로 나갔다. 방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 있던 칼리안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너무 답답한데. 해야 할 일이 태산인데 이렇게 안에 처박혀 있으니."

심지어 앨런도 오지 않았다.

앨런이 오면 분명 일거리를 만들어낼 것을 알아서 이 참에 아주 그냥 푹 쉬라는 의미로 아예 발도 들이질 않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런다 해서 일거리를 만들지 않을 칼리안은 아니었다. 이렇게 무료하기만 해서야 사는 낙이 있다고 할 수 있나 따위의 생각이나 하는 사람이 아니던가.

'일단 헤르츠 경을 만난 뒤에 드미레아를 불러서 잠깐 얘기를 좀 하고. 그 후에는······.'

따라서 칼리안이 테이블을 손 끝으로 톡톡 두드리며 방에 갇혀 할 수 있을 만한 일을 정리하고 있을 때.

"니아앙!"

칼리안의 무료함을 떨쳐 줄 고양이 한 마리가 테라스 밖에서 날아들어왔다.

* * *

라즈베리 잼을 넣고 구운 오트밀 쿠키에서 달큰한 향이 났다.

쿠키 하나를 통째로 입에 넣고 씹던 앨런은 딱 그만큼 달큰한 이야기를 전해듣고 있었다.

- 카이리스의 3왕자와 지그프리드 소공작의 관계 칼리안과 드미레아가 정혼한 사이일 것이라는, 만약 정혼이 아니더라도 일반적인 사이는 아니리라는 소문이 돌고 있다는 것이다.

앨런은 입에 든 것을 다 넘긴 뒤 커피 한 모금을 마시고는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그런 소문이 날 만 하지 않겠습니까?"

함께 무도회에 입장한 것으로 모자라, 무도회가 진행되는 내내 둘이 따로 앉아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거기에 더해 드미레아는 칼리안이 사라졌다며 플란츠를 붙들어두고 브리센에 항의를 하기도 했다. 그 신분과 능력만 따져보더라도 서로만한 배필을 찾기 어려울 정도인데 심지어 나이도 똑같았다.

그러니 말 만들어내기 좋아하는 귀족들 사이에 그런 말이 안 생기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가.

"나는 해명하지 않고 그대로 둘까 하는데."

"두 분이 정혼한 것처럼 소문을 그대로 두고 그냥 묵인할 생각이십니까."

왕실에서 그에 대해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으면 귀족들은 그것을 기정 사실로 믿을 것이 분명했다.

"내 생각은 그러하네. 다만 그 전에 칼리안의 의견을 물어야 하겠지만."

"칼리안 왕자님에게는 제가 한 번 다녀오지요. 그런데 그것은 전하의 욕심입니까 아니면 왕자님을 위함입니까."

르메인의 말에 앨런이 슬그머니 웃으며 이런 말을 했다.

"또 떠보는 소리를 하는군. 이런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나를 꼭 칼리안의 경쟁자 보듯 하면서."

"지그프리드 공작가를 사돈으로 두어 전하의 힘을 늘리려는 것인지, 아니면 칼리안 왕자님의 입지를 단단히 만들어주려는 생각인지가 궁금해지니 그렇습니다."

르메인은 별다른 반응 없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나를 위해 지그프리드를 쓸 생각 없으니 걱정 말게."

곧 르메인은 쓰고 있던 안경을 벗어 테이블에 올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그 소문 덕에 칼리안이 사라졌던 일에 대한 쓸데없는 이야기가 줄어들었지 않았나. 브리센 후작이 가만히 있질 않아서 피곤한 와중에 차라리 다행한 일이지."

이 말에 앨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오트밀 쿠키 하나를 하나 더 씹어 삼킨 뒤 대답했다.

"브리센 후작이 원하는대로 '왕자의 직무에 부담을 느낀 칼리안이 수도 밖으로 도망갔다 잡혀 들어온' 것으로 이야기가 굳어진다면 추후 칼리안 왕자님에게 굉장히 큰 결점이 될 수는 있겠습니다."

"그러니 차라리 귀족들이 그 일에 대한 관심 자체를 가지지 않도록 했으면 하는데. 왕자의 위신이 깎이는 것보다는 정혼설이 나을 테니."

드미레아에게 제대로 놀아난 에반은 그 일을 어떻게든 부풀리기 위해 안달이 난 상태였다. 그 날에 있었던 일의 진상을 제대로 밝혀 브리센의 실추된 명예를 회복시키고 칼리안이 왕자로서의 자질이 있는 것이 맞는지를 정확히 알려달라는 이야기였다.

"그러다 정말 국혼으로 이어져도 나쁠 것 없고."

덧붙여진 르메인의 말에 앨런의 미소가 짙게 변했다.

드미레아와의 실제 나이 차이를 의식할 것이 분명한 칼리안도 칼리안이지만, 드미레아가 공작위 버리고 왕궁에 들어 올 위인이 아니지 않나.

"그럴 일은 없을 터이니 염두에 두지 마시지요. 소공작은 지그프리드 버리고 왕자비나 왕비 노릇이나 하겠다고 나설 사람이 아니니. 그것이 아니라 전하의 셋째 아드님을 코끼리 땅으로 보내시겠다는 생각이라면 국혼을 기대하셔도 나쁘지는 않겠습니다."

"······ 되었네."

"란델 왕자님에 대한 혼담은 오가는 것이 없습니까?"

칼리안이나 플란츠는 아직 그만한 나이가 되지 않았다지만 란델은 이제 곧 있으면 19세가 되니 슬슬 정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가 아니던가.

"없을 리가. 안그래도 이제 생각을 해보려는데. 텐실과 대사막이 손을 잡았다는 소식이 전해진 뒤로 유난히 많아졌군."

르메인이 고개를 돌려 책상 위 두루마리 뭉치를 가리켜보였다. 순간 앨런은 그들의 명단을 알려달라는 말을 꺼낼 뻔한 것을 간신히 참았다.

타국의 왕족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왕자는 무조건 자국 내 사람과 혼인하도록 법으로 정해져 있었다. 다시 말해 텐실의 핏줄이기도 한 란델은 다시 텐실의 사람과 결혼할 수 없다는 소리였다. 그렇게 되면 이 나라가 텐실의 손아귀에 들어갈 것이 분명하니 말이다.

그 말인즉슨 저 두루마리에 적힌 이들은 모두 란델을 지지하는 카이리스의 귀족들이라는 소리이기도 했으니, 앨런이 이참에 그들이 누구인지 정확히 확인하고 싶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것을 눈치챈 르메인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안 되네."

"압니다."

왕자비 간택에 대한 내용은 국왕과 왕비의 고유 권한이다.

불필요한 권력 싸움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왕비가 없었으므로 오로지 르메인이 혼자 확인하고 결정하게 될 사안이니 앨런이 끼어들 일은 아니었다.

따라서 명단 역시 보여줄 수 없다는 말에, 앨런은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오트밀 쿠키를 하나 더 집어 먹었다.

"대신 지난번에 얘기했던 것 기사단 얘기 말인데. 지그프리드의 저택에 에이프린 백작의 기사단을 숨겨두는 것 허락하겠네."

"네. 칼리안 왕자님에게 소공작과의 정혼설을 그냥 둘지 물어보는 김에 함께 전해주고 오겠습니다."

"항시 궁금했었는데."

르메인이 앨런을 보며 다소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연 뒤 한동안 앨런을 쳐다봤다. 얘기 해보라는 듯 가만히 앉아있는 앨런에게 르메인의 질문이 이어졌다.

"시스파니안을 닮은 왕자가 마법을 쓸 줄 알면 재미가 있지 않겠느냐고. 그렇게 말했었지."

"처음 제가 왕궁에 찾아왔을 때 말씀이십니까."

"그래. 칼리안의 마법 스승이 되겠다며 했던 말인데. 기억이 나나."

"그것을 설마 잊었겠습니까."

"······ 그렇다면 나는 자네를 어디까지 믿어도 되겠나."

그 말에 앨런의 표정이 묘하게 바뀌었다.

"그것 참 빨리도 물으십니다. 전하 모가지 허전해지면 칼리안 왕자님 데리고 피신해달라는 부탁을 하실 때는 언제고 이제와서 그런 것을 물으시는지."

"그때는 사제간의 정이 끈끈하다고만 생각했지."

이렇게 말한 르메인이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달칵 하는 찻잔 소리가 집무실을 잠시 울렸다.

"세크리티아의 세작까지 써가며 왕자의 일을 도울 만큼인 줄은 몰랐으니까."

칼리안의 일에 세크리티아의 세작들이 도움을 줬음을 알게 된 모양이었다. 모르는 것인지 아니면 알면서도 말하지 않는 것인지, 칼리안을 습격했던 이들 중에도 세작이 있다는 것까지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것을 어찌 아셨습니까."

"나라고 듣는 귀가 없는 것은 아니네. 물론 칼리안을 돕기 위해 나서준 것이었으니 세크리티아의 왕세자에게 다른 해가 가게 하지는 않겠네만. 나는 그대가 그 정도로 수단 방법 안 가리고 나설 만큼 칼리안을 돕는 진짜 이유를 알고 싶네. 어디까지 믿어도 좋을지."

"어딜 보아도 어여쁘고 안쓰럽기만 한 제자인데 수단 방법 안가리고 돕는 다른 이유가 있겠습니까. 늙은이가 핏줄처럼 생각하고 키우는 중이니 염려 마시지요."

그렇게 말한 앨런이 웃음기 어린 얼굴을 했다. 그리고는 한결같이 마음에 담고 있던 말을 꺼내놓았다.

"전하께서 칼리안 왕자님 앞길 막으려 들 때 제가 전하의 숨통을 막을 일은 있겠으나 제가 왕자님을 마주보고 설 일은 없을 터이니."

"······ 그래. 다행이군."

이제는 앞에 앉아있는 마법사에게까지 목숨을 위협받은 르메인이 세상에서 제일 믿음직한 말을 들었다는 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 * *

무료한 인생이 싫다고는 했다.

하늘에서 고양이가 떨어지는 기막힌 꼴이 보고싶다는 생각을 한 적은 없었다.

"그러니까······."

뜬금없는 고양이 세례를 받은 칼리안이, 품에 안긴 '나는 플란츠 왕자님을 더 좋아하는 칼리안 왕자님의 고양이입니다.' 고양이를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고양이는······ 왜······?"

플란츠가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플란츠는 칼리안의 방에 오려던 것이 맞기는 했다. 다만 고양이까지 데려올 생각은 없었다. 그럴 성격도 아니었을 뿐더러 고양이를 안고 조심조심 아랫층에 방문할 만큼 여유롭지도 않았다. 대낮이니까.

테라스 아래에서 칼리안이 내는 소리를 들었을 때 안고 있던 고양이를 내려놨고, 테라스 문을 열고 뛰어 내렸다.

그리고 고양이가 같이 뛰었다.

그리 어렵지 않은 움직임으로 고양이를 잡아챈 칼리안을 향해 일련의 상황을 떠올리던 플란츠가, 그 상황을 잘 설명해줄 수 있을 대답을 내놨다.

"어쩌다보니."

저 불친절한 대답을 그냥 '일부러 데려오려던 것은 아니지만 부득이한 사정으로 같이 오게 됐다' 정도로 생각하고 넘긴 칼리안은 조용히 고개만 끄덕여보였다.

"알겠습니다. 앉으십시오."

고개를 끄덕인 플란츠가 자리에 앉자, 분명 칼리안의 고양이인 플란츠를 더 좋아하는 고양이가 플란츠의 무릎 위로 올라갔다. 자연스럽게 고양이 위에 손을 올리는 플란츠를 보며 칼리안이 웃음을 참느라 얼마나 힘들어했는지는 아무도 모를 것이다.

"그럼, 고양이 말고 형님은 왜 오셨습니까. 그것도 또 창문으로."

멀쩡한 대낮에 테라스로 온 이유야 뻔했다. 르메인의 호위기사를 피해야 했다는 것 외에는 다른 이유가 없었다. 그렇다는 것은 호위기사를 통해 르메인이 알지 못해야 할 말이 있다는 뜻일 터였다.

플란츠의 연두색 눈이 사일런트를 발현한 칼리안에게 향했다.

"혹시 조만간 기사단이 들어올 예정인가."

"무슨 기사단 말씀이십니까."

"내가 빌헬름 관에 불러들인 그 백작. 아우님이 쓰실 기사단을 만들고 있는 것 같았는데."

칼리안의 눈이 길게 구부러졌다.

지난 가을의 사냥대회에서 아이즌을 포함한 기사 가문의 이들을 만날 것이라는 이야기는 칼리안이 플란츠에게 직접 했었다. 그 이야기 후 시간도 꽤 지났고, 그 뒤로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알려 준 적 없었다.

플란츠의 말마따나 르메인의 탄신일 축제 기간 중 플란츠가 칼리안과 아이즌이 만날 자리를 마련해줬던 일이 있었을 뿐이었다.

"역시 형님은 참 똑똑하십니다."

"짖지는 말고."

칼리안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조만간 에이프린 백작의 기사단을 수도에 들일 생각입니다. 카렌과 라온을 견제하려면 그들을 왕궁 안에 두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요. 그것은 왜 물으십니까."

"카렌, 라온. 내가 쥐려고."

왕실의 두 기사단, 카렌과 라온.

그들을 떠올리며 잠시 입 속으로 말을 고르던 플란츠가 입을 열었다.

"그렇게 되면 굳이 새 기사단을 왕궁에 묶어 둘 필요 없는 것 아닌가."

"형님께서 두 기사단을 제대로 통제하실 수 있다면 그렇겠네요."

"할 테니까. 새 기사단은 아우님이 가졌으면 하는데."

칼리안의 눈이 이채를 띄었다.

카렌과 라온의 칼이 르메인을 향할 것을 대비한다며 힘들게 모은 기사단을 왕궁 안에 묶어두지 말고 그냥 아이즌의 기사단을 칼리안의 것으로 만들라는 소리였기 때문이다.

"브리센에서 고양이 키울 준비를 벌써 하시는 겁니까. 브리센을 드리겠다 말씀은 드렸지만 이렇게까지 나서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내 아우님께서 고양이나 키우라고 하시니."

"발칸을 드린 것에 대한 대가로 제 기사단을 선물받은 셈이네요. 알겠습니다. 저도 지그프리드와의 동맹 말고 손에 직접 쥔 것이 있는 편이 좋으니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렇게 말한 칼리안이 씩 웃으며 물었다.

"말씀드릴까요?"

"필요없어."

그리고 이번에도 고맙다는 말은 생략됐다.

제23장. 그런 날이 온다면 (2)

사라졌다.

분명히 방 안에 있었는데 플란츠가 사라졌다.

밖에 있는 호위기사들이 들을세라 크게 놀라지도 못하고 안절부절하던 플란츠의 시종 레릭이 어느 순간 헉 하는 소리를 냈다. 테라스 바깥쪽에서 플란츠가 턱 하고 나타난 까닭이다.

"왕자님, 어딜 다녀 오십니까."

이렇게 말을 꺼낸 레릭은 상당히 혼란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문으로 들어왔으면 다녀왔다고 할 일이 맞을 텐데.

그랬으면 잘 다녀오셨냐고도 덧붙여 볼 텐데.

이런 생각 때문에 지금 이것이 어딜 다녀왔냐고 물어도 될 일일까 하는 고민이 생긴 까닭이다.

"뭐가."

그리고 플란츠는 이렇게 대답했다.

무슨 소리냐는 말인 것도 같고, 뭐가 잘못됐느냐는 말인 것도 같고, 뭘 봤느냐는 말인 것도 같다.

"아닙니다, 왕자님."

정확한 뜻이 무엇이건간에 저 태연한 대꾸는 그냥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행동하라는 의미일 거다. 그간의 숙련된 눈치로 플란츠의 짧디 짧은 말을 이해한 레릭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왜."

살짝 고개만 끄덕인 플란츠가 물었다.

이럴 때면 상냥한 3왕자를 모시는 얀이 얼마나 부러운지 모른다. 그래도 항시 냉기가 흐르는 1왕자보다는 플란츠가 나으니까. 그런 생각으로 스스로를 위로한 레릭이 입을 열었다.

"점심 식사를 어찌할지 여쭈려고 했습니다."

"됐어."

플란츠는 끼니를 제때 챙기질 않았다.

그에 대해 걱정스러운 말을 하려는데 플란츠가 저벅저벅 걸어가 문을 열어젖혔다. 그러더니 기사들이 따라오든 말든 신경쓰지 않겠다는 듯 발을 옮겼다.

굳이 아랫층 어딘가에서 테라스로 올라와 방에 도착해놓고 문으로 나가는 것이다. 다시 혼란스러운 얼굴을 한 레릭이 빠른 걸음으로 플란츠의 뒤를 따랐다.

* * *

예상치 못한 손님의 방문은 또 있었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고양이와 그 고양이 주인의 윗방 사는 사람이 다녀간 뒤의 일이었다.

조금 전 할 말 끝낸 플란츠가 테라스 난간을 디디고서 가벼운 몸놀림으로 다시 올라갔다. 그러자 고양이가 쪼르르 방문 밖으로 나갔다.

"진짜 더 좋아하네."

성격인지, 이름 때문인지.

정말로 플란츠를 더 좋아하는 고양이에게 서운함을 느낄 겨를도 없이 메를린이 들어왔다. 손에는 두 잔의 차가 들려 있었다. 하나는 얀의 것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나저나 얀이 나간 이후 플란츠가 와서 대화를 나누고 갔으니 차를 가져온다 하기에는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터였다. 그런데 방에 들어온 것이 얀이 아닌 메를린이다.

"얀은 어디 갔어?"

"아무래도 아르센 경을 빨리 불러와야 할 것 같다면서 차는 저에게 맡기고 빌헬름 관에 갔습니다. 왕자님께서 답답해 하시니 말 상대라도 해드리게 해야 되겠다면서요."

"아······ 굳이 그럴 것 까지는 없는데."

괜스레 미안해하는 칼리안을 본 메를린이 빠르게 다음 말을 전했다.

"히나는 조금 전에 키리에 님과 함께 나갔습니다. 돌아오면 말씀드리도록 전해두었습니다."

시아와 히나를 만나게 해주기로 약속해놓고서는 시일이 미뤄졌다. 때문에 이제야 약속을 다시 잡고 둘을 내보낸 터였다.

곧 메를린이 자신의 손에 들린 차를 보며 입을 열었다.

"그리고 밖에 마나실 백작이 와 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칼리안의 눈에 반가운 기색이 가득 차올랐다. 그 모습에 소리 없이 웃은 메를린이 테이블에 차를 내려놓은 뒤 가벼운 인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갔다. 그 후 방문이 다시 열리며 앨런이 들어왔다.

"스승님!"

칼리안의 목소리가 잔뜩 들떠 있었다.

날을 채워 방문이 열리기 전까지는 절대 만나지 못할 것 같던 앨런이 왔으니까.

때문에 칼리안은 또 헤실헤실 웃었다.

물론 지난번처럼 다른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라 정말 반가워서 짓는 웃음이었다. 그것을 본 앨런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강제로 방 안에 발이 묶여있는 것이 그리 싫으시면 앞으로는 몸을 좀 조심히 다루시지요. 밖에 있는 저 친구들 베어 버릴 생각도 하시면 안됩니다. 전하께서 보내신 이들이니."

그리고는 이렇게 칼리안의 속을 훤히 들여다 본 것처럼 주의부터 주었다.

"아, 안 그래도 이삼일 뒤 쯤 대련을 청해볼까 날을 재고 있었는데. 안 그럴게요."

"때려 눕히셔도 안 됩니다."

"······ 네. 노력해볼게요."

"다행입니다. 그나마 노력이라도 하겠다 하시니."

칼리안이 얼마나 거짓말을 못하는지 세상에서 가장 잘 알고 있을 앨런이 만족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메를린이 내려놓은 다디단 밀크티를 홀짝홀짝 마시기 시작했다.

그동안 앨런이 자리에 앉아서 저렇게 오랫동안 차만 마시던 적이 없었다. 때문에 칼리안이 조금 불안한 듯한 얼굴을 하며 물었다.

"꺼내시기 어려운 얘기입니까?"

왕궁 밖에 못 나가고 방에 갇히고 감시인인지 호위인지 모를 방문 잠금장치 두 명이 생긴 것으로 모자라 또 무슨 처벌이 있는지를 걱정하는 것이었다.

시간을 끄는 바람에 괜한 불안감을 만든 셈이 된 앨런이 말했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걱정 마시지요."

그저 밀크티가 입맛에 맞았을 뿐이라는 말을 꺼내기가 어쩐지 민망했던 탓에, 앨런이 장난기 짙은 웃음을 지어보이며 용건을 꺼냈다.

"축하드립니다. 일찌감치 정혼자가 생기셨으니."

그렇게 말한 앨런이 다시 한번 밀크티를 목으로 넘겼다. 그 사이 앨런의 말 뜻을 파악한 칼리안이 물었다.

"혹시 드미레아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맞습니다. 할 일 없이 배부른 입들이니 전해지는 말이 참 많기도 합니다."

그제야 드미레아와 자신 사이에 의도하지 않은 소문이 생겼음을 안 칼리안이 웃음을 터뜨렸다.

"괜한 수고가 줄었네요."

앨런의 말을 괜히 빨리 알아들은 것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소문이 안 났다면 소문을 낼 생각이라도 했다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네. 그럴 생각을 했습니다. 사실 시기가 그렇지 않습니까. 브리센 후작은 어떻게든 이번 일을 되갚아주려 할 텐데, 그것을 무마하려면 더 큰 소문이 나야 하니까요."

그렇게 말한 칼리안이 앨런과 동시에 밀크티를 한 입 마셨다. 달달한 소문에 딱 걸맞을 법한 단 맛이 확 느껴졌다.

"안그래도 드미레아만 괜찮다면 한번 더 지그프리드 이름을 빌려볼까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소공작이 과연 이 일을 달가워 할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좋아할 겁니다."

"어찌하여 그리 보십니까."

장래 지그프리드의 주인이 되기에 더할 나위 없는 드미레아를 떠올려 보던 칼리안이 말을 이었다.

"드미레아가 수도에 왔고 저와 함께 무도회에 참석을 했으니, 이것이 귀족들에게는 지그프리드가 이제 정치에도 관심을 둔 것으로 여겨지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소공작과 자신의 자녀를 어떻게든 연결시켜 보려는 이들이 줄을 이어 나타날 텐데 드미레아는 그런 것을 반겨할 리 없으니까요."

그러니 칼리안은 칼리안대로 자신의 소문을 가라앉히고, 드미레아는 드미레아대로 밀려드는 관심에서 벗어나기 위해 둘의 '정혼설'을 한번 내보는 것이 어떨지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참이었다.

"드미레아만 괜찮다면 해명하지 않고 싶은데, 전하께서는 어떻게 하신다고 합니까?"

"당황하고 놀라는 것을 기대했는데 재미가 사라졌습니다. 어찌보면 국혼이 걸려있을지도 모를 소문을 이용하겠다며 그렇게나 태연하게 말씀을 하십니까."

앨런이 단박에 재미가 사라진 얼굴로 이렇게 툴툴거렸다.

"어디 가서 그리 굴지 마시지요. 제 나이로 안 보입니다."

그 말을 들은 칼리안의 고개가 위로 휙 치켜올라갔다. 천장을 올려다보는 채로 말하는 탓에 조금 웅얼거리는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체르밀에 그런 분이 둘이나 더 계시는데요. 이 건물 4층이랑 5층에 한 분씩 있습니다."

특히 4층에 사시는 분이요.

고양이 키우랬더니 왕실의 기사단을 장악해 주겠다 하고 가셨는데요.

······ 저는 뭐.

"그리고 지그프리드 저택에도 한 명 있네요. 드미레아는 정혼자가 있는지에 대한 첫 질문을 받자마자 저를 떠올릴 테니 말입니다."

그것이 이번에 세워 준 방패 값이든 내어 준 바나나 값이든. 그 값으로 칼리안의 이름을 내놓으라고 할 것이 뻔했다.

"그것이 또 참으로 궁금할 일입니다."

앨런이 짧은 웃음을 터뜨리다 이렇게 말했다.

"전하의 아들들이나 슬레이만 따위의 딸이 도무지 범상치 않으니. 이것을 신기하다 하여도 좋을는지."

천재 마법사 앨런 마나실의 손녀인 베로니카는 아주 평범한 소녀이자 마법사였다. 자식들이 하나같이 부모를 안닮았으니 이를 두고 어떻게 신기하지 않다 하겠나.

"아무튼 그 일은 전하께서도 그대로 두는 것이 낫겠다 하셨으니 그리 알고 계시지요."

"아, 이미 그렇게 말씀하셨습니까. 다행이네요."

"네. 그리고······."

한가지 더 전해야 할 이야기를 꺼낸 앨런이 사일런트를 발현한 뒤 말을 이었다.

"전하께서 에이프린 백작의 기사단 체류를 허락하셨습니다."

"아, 그럼 마침 잘 됐네요."

칼리안이 의미심장한 얼굴을 했다.

"무엇이 또 잘 되었다는 말씀이십니까."

의아해하며 쳐다보는 앨런을 향해 칼리안이 조금 전 플란츠와 나눈 대화를 전했다.

"플란츠 왕자가 그렇게 나서준다 하였습니까."

"네. 생각보다 적극적으로 움직이는게 신기할 정도입니다."

"나쁘지 않겠지요. 그런 일을 겪었으면 이제 다른 곳에 신경을 좀 쓰는 것도 필요할 터이니."

실리케의 일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 일을 치른 왕궁에서 계속 살고 있으니 다른 곳에라도 눈을 두어야 하지 않겠나.

"네. 말씀하신대로 나쁘지 않은 일입니다. 아무튼 저는 날을 보아서 백작의 기사들을 조금씩 수도로 들여보내겠습니다. 그러려면 오늘 드미레아를 한번 만나기는 해야겠네요."

"하루도 지체하지 않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지체할 이유가 없으니까요. 시간이 아깝기도 하고요."

당근을 썰다 베인 상처가 아니었다.

칼리안은 정말 죽을 뻔했다. 여전히 얼굴이 창백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쉬질 않았다.

시간이 아깝다 말하는 그만큼, 칼리안은 자신을 혹사하고 있었다.

- 달칵.

방금 내려놓은 찻잔을 가만히 응시하던 앨런이 입을 열었다.

"왕자님."

"네, 스승님."

불러놓고 한동안 말이 없다.

불투명한 찻물이 잠시 잔 속에서 흔들리다 가라앉을 때가 되어서야 다음 말이 나왔다.

"카밀론에는 왜 가려 하십니까."

"그야 당연히······."

시간을 돌려야 했을 일.

그것이 무엇인지 아직도 다 드러나지 않았으니까요. 그러니 그것이 무슨 일이었든 관계 없이 대응할 수 있으려면 제가 힘을 가지고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미 했던 그 말을 다시 꺼내는 대신, 혹은 개를 키우러 가겠다는 농담 대신, 칼리안은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닐 테니까.

칼리안의 반응을 본 앨런이 이렇게 다시 물어왔다.

"왕자님께서는 무엇을 하고자 하십니까."

막고자 하는 일에 필요하다면 왕좌에라도 오르겠다고.

앨런을 처음 본 날 칼리안은 그리 말했다.

하지만 그것은 칼리안을 위한 계획이 아니었다.

"원하시는대로 모든 것을 다 지켜낸 이후의 왕자님을 생각해 보신 적 있으신지요."

칼리안이 부드럽게 웃었다.

대답은 이어지지 않았다.

* * *

"이 곳은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체이스가 예상하지 못한 사람이 불쑥 찾아온 것에 꽤 의외라는 얼굴을 했다. 그리고 언젠가 플란츠가 했던 것을 따라하는 것이 분명한 말을 덧붙였다.

"내 동생의 현재 형님께서."

장난이나 치고 놀 만큼 친해진 사이는 아니지 않나.

이런 생각에 플란츠가 짜증난다는 얼굴을 감추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얘기 좀."

"네. 들어와요."

체이스가 손을 내밀어 안쪽을 가리켜보였다.

저벅저벅 안으로 들어간 플란츠가 창가에 놓인 의자에 가 다리를 꼬고 앉았다. 그리고 맞은편에 체이스가 앉자마자 입을 열었다.

"마법사들로만 구성된 군대는 만들고 운영하는 것은 가능할지 몰라도 제대로 된 공격을 감행하기 어렵다. 그래서 우리가 생각한 해결 방법은······."

나른한 목소리.

키우는 고양이가 어떻게 생겼는지를 설명하는 것 같은 말투. 하지만 그 안에 든 내용은 그리 가볍지 않았다.

"날씨 얘기 정도는 하고 나서 본론을 꺼내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플란츠 왕자."

"듣기나 해."

말을 한다는 것도 귀찮은데 날씨 얘기라니.

평생토록 그런짓을 해본 적 없는 플란츠는 체이스의 당혹스러움을 싹 무시해버렸다. 그리고 지금까지 자신이 파악한 발칸의 구성과 훈련 방법을 포함한 여러 정보를 줄줄이 알려주기 시작했다.

상세한 설명은 없었다.

그런 것을 말하지 않더라도 체이스라면 충분히 알아 들으리라는 것이 플란츠의 생각이었다.

혹은 이미 알고 있을 수도 있고.

"······ 그렇게 하면 마법사가 적은 세크리티아에서도 충분히 쓸만한 군대가 나올 것 같은데."

반 년치 할 말을 한꺼번에 다 꺼내놓는 것 같은 플란츠를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고 있던 체이스가 말이 끝난 뒤 입을 열었다.

"기밀일텐데 그런 이야기를 나에게 해줘도 괜찮습니까."

지금 무슨 말을 한 것인지는 아느냐는 얼굴을 본 플란츠가 한쪽 입꼬리를 틀어 올리며 대꾸했다.

"상관없어."

"갑자기 왜 이런 얘기를 해주는지 모르겠지만 괜한 일을 했습니다. 이미 내 의견은 전했을텐데요. 내가 기억하는 모든 것은 칼리안 왕자가 쥐어야 할 힘이라 생각하고 있다고."

플란츠를 찾아왔던 날, 체이스는 분명 미래는 아무것도 바꾸지 않겠다고 말했었다. 칼리안이 알고 있는 일들에 기반한 모든 것은 오로지 칼리안만이 가져야 할 힘이라고 말했었다.

"카이리스의 마법사단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해. 당신도."

플란츠의 눈에 서늘한 달빛과도 같은 예리함이 담겼다.

"나는, 별 것 아닌 이유로 전쟁을 벌일 사람이 아니야."

그러니 알고 있는 것이 있으면 같이 움직이라고.

플란츠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제23장. 그런 날이 온다면 (3)

마흔 아홉의 국왕 친위대와 한 명의 왕제.

그렇게 쉰 명이 성문 앞에 섰다.

- 마흔 아홉 명.

- 마흔 여덟 명.

처음에는 수를 줄어들게 하는 이들을 원망했다.

그 뒤에는 줄어드는 수를 착실히도 세어내는 두 눈을 원망했다.

그렇게 하면 원망 받을 이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으니까.

- 열 다섯 명.

바라건대

혹여 어디엔가 계신다면

이제 모두 되었다

그리하시며 멈춰주실 수는 없겠느냐고.

- 다섯 명.

태어나 처음으로, 그리고 죽기 전 마지막으로.

세렌티를 찾았다.

- 두 명.

'······ 키리에.'

잠든 신은 대답하지 않았다.

한······

명.

차마 보지 못하여 눈을 감고자 하였으나 그조차 담아내야 함에 감지 못하였다.

············ 아···.

망국의 왕이 해야만 했던 마지막 일은, 지키다 죽는 이를 지켜보며 오롯이 홀로 남는 것이었다.

* * *

별관 앞 정원에 설치된 분수에서 물줄기가 뻗어나갔다. 부질없이 솟아오르다 하릴없이 떨어져내리는 물방울에 햇빛이 깃든다. 의미 없는 움직임이 끝없이 이어지며 만들어낸 그 소리가 유난히도 소슬하게 들려왔다.

체이스는 무의미하고 쓸쓸하기 짝이 없는 물소리를 감상하듯 가만히 앉아 있었다. 고요한 두 눈이 잠시 감겨들었다.

"······ 플란츠 왕자."

플란츠가 체이스의 얼굴을 응시했다.

아픈 것을 뱉는 듯 혹은 삼키는 듯한 말이 흘러나왔다.

"어디부터 어디까지. 알고 있습니까."

그 말을 들은 플란츠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전혀."

플란츠는 그저 넘겨짚기만 했다. 어떤 것도 확신하지 않았다. 그러니 플란츠는 과거에 대해 조금도 알지 못하는 것이 맞았다.

겪지도 않은 과거의 일이 보내오는 상념에서 간신히 벗어난 체이스가 마른 입을 열었다.

"내 말만 듣고 알아낸 겁니까."

"비슷해."

혹시라도 같은 일이 반복될까 하는 마음에 건넨 말.

고작 그것만으로 플란츠는 여기까지 따라왔다.

따라와서는 대비하기를 종용하고 있었다.

"내가 괜한 걱정을 해서 괜한 말을 한 셈이 됐군요."

"아니야."

그것은 체이스가 사과를 해야 할 일도 아니었고 플란츠가 사과를 받아야 할 일도 아니었다.

게다가 어차피 출발점은 칼리안이었다.

들키는 것 잘 하는 칼리안이 플란츠를 처음 보았을 때, 채 갈무리하지 못한 그 수많은 감정이 담긴 눈빛을 알아보는 바람에 시작된 의문이었지 않나.

그러니 누구의 말 혹은 누구의 실수 때문에 플란츠가 이 자리에 찾아왔는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내 생각에 당신은 그때도 손 놓고 있었을 것 같은데."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 맞습니까."

"이번에도 또 지켜볼 생각인가."

체이스가 웃었다.

그리고 한참이 지난 뒤 조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년 2월입니다."

그때부터 준비를 시작하겠다는 것인지, 그때까지 준비를 마치겠다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말인지.

수수께끼 같은 말을 꺼내놓은 뒤 한동안 플란츠를 깊이 응시하던 체이스의 손가락이 플란츠를 향했다. 의자에 기댄 채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 모습을 가리켜보인 것이다.

"그 때가 되면 플란츠 왕자는 더 이상 나를 앞에 두고 그렇게 앉아있지 못할 겁니다. 말을 낮추지도 못할 테고."

왕자 플란츠, 그리고 왕세자 체이스.

플란츠는 이미 체이스에게 예를 지키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만약 그보다 더 큰 격차가 생긴다면 그때는 플란츠도 지금처럼 체이스를 대하지는 못할 터였다.

국왕 체이스 듀라한 세크리티아.

그를 앞에 두고서는 말이다.

"당신 아버지가 얌전히 왕관을 넘겨줄만큼 욕심 없는 사람은 아닐텐데."

"네. 제대로 봤습니다."

"······ 하."

지금 체이스는 데블란의 죽음, 그리고 자신의 즉위가 이루어질 날을 저렇게 차분한 얼굴로 꺼내놓고 있었다. 플란츠가 짧은 바람 소리를 냈다.

"혹시 내가 친부의 죽음을 너무 담담하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까봐 덧붙이자면, 막을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니 오해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데블란의 사인은 의혹의 여지 없는 병사였다.

이미 아주 오래 전부터 데블란의 건강은 좋지 않았다.

"알았어."

"막을 수 있는 일은 그때부터 준비하겠습니다. 당장은 플란츠 왕자가 이야기한 것을 시행할 수 없겠지만, 나 스스로가 왕위에 오른 이후부터는 준비할 수 있을 테니까."

언제부터가 됐든 이제 가만히 두고 보는 입장에서는 벗어나겠다는 뜻이었으니 그것으로 족했다.

"그래."

"하나만 묻겠습니다."

때문에 짧게 답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체이스의 말이 플란츠를 붙들었다.

"나는 플란츠 왕자와 같은 나라에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내가 나서는 것이 이 나라에 어떤 영향을 줄지에 대해 불안해하지 않을 자신 있습니까. 본격적으로 힘을 기르겠다 마음 먹은 나의 세크리티아가 어떻게 될지, 세크리티아가 카이리스에 해를 입히지는 않을지. 그에 대한 걱정은 전혀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당신이 힘을 키우든 말든, 나와는 상관없어."

플란츠가 체이스의 오해를 짚었다.

"내 아우의 옛 형님이 마음을 바꾸면 불안해해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내 아우님인데."

"설마, 칼리안 왕자가 직접 왕위에 오를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당신이 아니라."

플란츠는 대답하지 않는 것으로 긍정했고 체이스는 조금 놀란 듯한 얼굴을 했다.

체이스는 칼리안이 왕위에 오르려 한다는 것과 플란츠가 왕위에 관심이 없음을 모르고 있었다. 새들이 전해오는 정보에 왕자들의 속내까지 들어있지는 않았으니까.

"······ 의외로군요. 이번에도 플란츠 왕자를 왕위에 올린 뒤 옆에서 도우리라는 생각은 했지만 직접 그 자리에 오를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내 앞에서 단 한 번도 왕위에 대한 관심을 보인 적 없었던 탓에."

"관심 없어. 지금도."

한동안 플란츠를 바라보던 체이스가 분수대의 물방울처럼 곧 사라질 듯한 목소리를 냈다.

"그렇습니까."

"······ 그러니까 당신까지 떠넘기지 말라고."

플란츠가 나지막이 말했다.

"안그래도 내 짐이었던 것을 대신 끌어안고 있으니까."

그 말을 끝으로 플란츠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자신은 할 말을 다 전했고 체이스도 대답을 한 셈이니 이제 정말로 해야 할 말이 없었다.

* * *

앨런은 한참동안 칼리안을 응시했다.

대답이 이어지기를 계속 기다리고 있었다.

생각해본 적 없었던 이야기를 이제와서 만들어 낼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때문에 칼리안은 다시 한번 웃었다.

"······ 그리 하지 마시지요."

칼리안의 웃음을 본 앨런은 이렇게 말했다.

그에 대해 무슨 답을 줘야 할지 잘 모르겠어서 칼리안은 그냥 고개만 끄덕이며 대답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요즘 이 말을 제일 많이 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 입맛이 썼다. 때문에 다시 달달한 밀크티를 한 모금 마신 뒤 입을 열었다.

"제가 세이렌 경에게 부탁해 둔 일이 있습니다."

본래부터 전하려 했던 말이기도 하고 화제를 돌리기 위한 말이기도 했다. 속아주는 기분으로 칼리안을 쳐다보는 앨런을 향해 칼리안이 말을 이었다.

"협회장 세이렌 경에게 검은 조약돌에 대해 알아봐달라는 부탁을 했었습니다. 헌데 이제는 제가 직접 갈 수가 없으니 혹시 조금이라도 확인된 것이 있는지 종종 물어봐주셨으면 합니다."

바쁜 에우리아를 계속 왕궁으로 불러들일 수도 없으니 조금 더 바쁘지만 더 능력 있는 앨런에게 부탁을 하기로 했다.

이미 화제가 바뀐 이상 다시 말을 꺼내봐야 소용없는 일이다. 씁쓸한 마음을 잠시 접어 둔 앨런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리하지요. 헌데 왜 갑자기 그 돌에 대해 알아보려 하십니까?"

"사실 제가 그동안 스승님께 말씀드리지 못했던 것들이 꽤 있습니다. 특히 란델 형님에 대해서요."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조금 많이 있었습니다."

앨런은 이미 더할 나위 없이 칼리안을 걱정하고 있었으니, 앨런에게 불필요한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다는 욕심은 조금 전에 버렸다. 그러니 까짓거 걱정하는 김에 조금 더 하시라는 마음이 된 칼리안이 오랜 시간에 걸쳐 그간의 이야기를 전했다.

대사막의 전사들이 붉은 빛의 힘을 썼고, 그들이 힘을 사용할 때마다 조약돌이 붉게 빛났던 것. 란델이 피웠던 장미에 조약돌이 반응했던 것. 장미 정원에서 칼리안을 앞에 둔 란델이 사용했던 힘에 대해서.

"안됩니다, 스승님."

그리고는 지금 당장 5층으로 워프할 것 같은 앨런을 뜯어말렸다.

도대체 마법사들은 왜 이렇게 하나같이 호전적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단 말이지.

피식 웃으며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4서클의 바람 마법사를 향해 앨런이 물었다.

"란델 왕자의 그 못돼먹은 짓을 그냥 두셨습니까?"

딱 친구들과 싸우다 다치고 온 손자에게 말하는 할아버지가 건네는 것 같은 핀잔이었다.

"궁금해서요. 란델 형님이 왜 그렇게 구시는지. 이유를 알게 되면 이해를 해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고요."

어쩐지 르메인이 벌인 일을 자신이 다 감당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애써 지우며 칼리안이 그렇게 대답했다.

"그래서, 이 방에서 나가도 된다 하실 때 란델 형님을 한번 만나볼까 합니다. 분명 같은 건물에 있는데 도무지 만나지를 못하니 따로 찾아뵙기라도 해야죠."

"다시 만나보셔도 문제가 없을는지요."

"그냥 둘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이해의 초석이 되든, 혹은 틀어짐의 연속이 되든. 뭐든 해보기는 해야죠."

"그래요. 아무튼 오지랖 넓으신 분의 아량이니 제가 무엇인들 반대하겠습니까."

더없이 다정한 표정을 지어 보인 앨런이 따뜻한 목소리를 꺼냈다.

"대신, 뭘 하시든 그때 가서 하시지요."

그리고 손가락을 튕겼다.

- 딱!

칼리안의 눈이 스르륵 감겨들었다.

어여쁜 제자가 푸르딩딩한 낯으로 계속 일을 하시겠다 하니 아주 그냥 푹 재워드리는 것이 스승의 도리 아니겠는가.

아르센이야 헛걸음을 하든지 말든지.

* * *

시종 레릭이 얼른 방문을 열었다.

저벅 저벅 들어간 플란츠는 별 말 없이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혼자 있겠다는 소리였으므로 레릭은 코앞에서 닫힌 문을 잠시 쳐다보다가 돌아섰다.

그리고 깜짝 놀란 얼굴을 했다.

바로 뒤에 누가 서있던 탓이다.

고개를 숙이니 은색 머리의 정수리가 보였다.

히나였다.

"고양이 데리러 왔느냐?"

이렇게 물어오는 레릭의 말에 히나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시아를 만나고 돌아온 뒤 밥을 먹일 때가 되어 찾아온 참이었다. 레릭이 다시 한번 난처한 얼굴을 했다. 분명히 플란츠는 혼자 있고 싶다는 의사 표현을 했으니까.

- 달칵.

그때 작은 소리와 함께 방문이 다시 열렸다. 그리고 잠시 뒤 방문 안쪽에서 플란츠의 목소리가 들렸다.

"데려가."

언젠가와 같은 순서였다.

플란츠의 말을 들은 레릭이 고개를 끄덕였고 히나가 살짝 인사한 뒤 플란츠의 방으로 들어갔다.

입구 쪽에 서있으려니 플란츠가 고양이 있는 곳을 가리켜 보였다. 들어가서 데리고 가라는 뜻이었다.

생긋 웃은 히나가 플란츠를 보며 손을 움직였다.

- 감사합니다. 좋은, 왕자님.

매번 뭐가 그렇게 감사한지.

그리고 '감사합니다'와 '왕자님' 사이에 있는 그 말은 대체 뭔지.

그것을 묻는 대신 플란츠는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 왕자님은, 식사, 하셨어요?

그리고 히나가 이렇게 물어왔다.

레릭이 오기 전까지 칼리안의 시녀들이 플란츠를 같이 챙겼었으니 히나 역시 플란츠가 끼니를 잘 거르는 것을 알고 있었다.

"생각없어."

히나의 표정이 엄하게 변했다.

- 드세요. 자꾸 거르시면······.

그리고 칼리안이 이해하지 못해 고스란히 외워뒀던 말을 플란츠에게도 똑같이 했다.

- 맴매 할 거야.

물론 플란츠도 못알아봤다.

[외전] 아브턴던트

아픈 것 잊는 마법을 뭐하러 익히느냐?

네가 있는데.

* * *

태평.

아니, 태만.

그래. 굳이 고르자면 그것은 태만이다. 리베른 놈들은 대체로 태만하다.

카이리스 놈들은 계산적이며 사치하고, 세크리티아 놈들은 지독하기가 이를 데 없으며, 텐실의 놈들은 믿음을 가장한 허울 투성이다.

그리고 대사막의 전사들은 의뭉스럽거나 잔혹하다.

대사막 너머, 혹은 해룡 아르나이젤이 지킨다는 대해 건너 어딘가에 다른 대륙이 있다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멀고 먼 길을 떠나보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냥 남쪽 나라 가서 남은 여생이나 보낼까보다."

"아버지 불러주는 곳이 그렇게 없을 줄 몰랐습니다."

잠시 지냈던 텐실을 떠나 이제는 리베른에 가겠다는 앨런의 선언에 곁에 서 있던 로닐이 싱긋 웃으며 말을 받았다.

시시껄렁한 농담이었다.

카이리스와 세크리티아에서 보낸 초대장이 불쏘시개로 변해 사라진 지 오래였음을 로닐도 잘 알았다.

세상 떠난 앨런의 아내가 물려주고 간 감청색 머리카락이 바람에 넘실넘실 휘날리는 꼬락서니가 앨런이 보기에도 꽤 근사했다. 로닐은 앨런의 얼굴을 빼다 박았으니까.

"카이리스에는 왜 안가세요? 지그프리드 공과 친하시잖아요."

"재미 없어 안 간다."

만약 슬레이만이 '첫째 아들이 아프니 치료 방법이 있을지 함께 찾아주면 안되겠느냐'는 말을 했다면 고민도 않고 당장에 갔을 터였다. 로닐은 꽤 쓸만한 약제사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때 슬레이만은 그 말은 쏙 빼고 그냥 와서 잠시 지내보면 어떻겠냐는 말만 했었다. 때문에 거절했고, 그 일은 그 첫째 아들이 결국 세상을 떠난 뒤에야 알게 되었다.

어찌됐건 그때는 그런 속내를 몰랐었으니 7서클이 목전인데 뭐 좋다고 시골 구석에 들어가 술이나 퍼먹겠나 하는 생각 때문에 카이리스로는 가지 않았다.

그래서 정한 곳이 리베른이었다.

"너도 같이 갈테냐?"

텐실은 약제사가 지내기에 그리 좋은 곳이 아니었다.

치유사가 있는 나라였고 치유사를 찾지 못할 이들은 약을 살 돈도 없었으니 돈벌이가 될 리 만무했다.

물론 그것은 로닐의 아내인 레이첼도 마찬가지였다. 능력있는 마법사 앨런이 아닌 다른 마법사에게 있어 신성왕국은 지내기 어려운 곳이었다. 때문에 식견을 넓히겠다며 앨런을 따라 텐실까지 왔던 레이첼은 괜한 고생을 하고 있었다.

"저희도 갈게요."

그렇게 앨런은, 아들 부부와 손녀 베로니카를 데리고 텐실을 떠났다. 리베른으로 갔다.

* * *

안 드실 거예요?

아, 이거 단 맛 나는 술이에요?

저 주세요. 아버지 단 것 질색하시니까.

집에 가서,

제가.

마실게요.

* * *

리베른의 국왕 엘린느는 항상 놀았다.

"아니야. 당장 안 할거니까 내버려 둬."

"그럼 이것들은 다 어떻게 할 생각이십니까?"

"급하면 그대가 하면 되겠네."

앨런은 리베른에 도착한지 얼마 되지 않아 7서클을 달성했다. 그 일을 감격에 겨워 하기도 전에 서류에 도장을 찍어대는 일에 귀한 노동력을 착취당하기 시작했다.

어쩐지 오자마자 이것 저것 다 지원해주겠다며 10년짜리 계약서에 도장을 찍어라 마라 하더니 마법의 '마'자만 들어간 서류만 보이면 죄 앨런에게 떠넘기고 저는 놀았다.

"대관절 저를 왜 불러다 앉히셨습니까?"

"나이는 많은데 젊고 잘생긴 대마법사가 옆에 있으면, 내가 일을 안해도 아무도 말을 못할 거 아냐."

어떤 미친놈이 너한테 안 좋은 말을 하겠냐고.

딱 그 소리가 나오려는 것을 되삼켰다.

엘린느는.

게으르고 말이 험하고 항상 조금 돌아있는 강력한 군주였다. 그리고 그 권력을 넘보는 한 놈을 견제하려 앨런을 불러왔다.

국서 테이안.

엘린느의 남편이었다.

그러니 테이안의 편에 선 귀족들과 관련된 업무를 죄 미뤄놓고 팽글팽글 놀고 있는 것이다.

"괜찮아. 그놈들이 처리해달라는 일은 전부 테이안에게 득이 되는 것들이니까."

이런 말을 하루에도 수십 번은 했다.

그러면서 자신에게 득이 될 일은 또 귀신같이 찾아서 했다. 결국 부부간 권력 다툼에 끼어든 형국이 된 앨런만 죽어났다.

처음 2년은 참았다.

그 후 3년은 엘린느와의 친분을 빌미로 버텼다.

6년이 되던 해 기어코 폭발했다.

"계약 파기 해주시지요. 더는 참지 못하겠으니."

테이안이 국왕과 대마법사의 사이를 의심하고 있었다. 한시를 떨어져 있지 않았으니 의심을 이제껏 미뤄왔으면 많이 참은 셈이라 해야 할까.

결국 테이안은, 권력과 아내를 제 손에 쥐겠다는 욕심에 해서는 안 될 일을 벌이고 말았다.

그는 앨런에게 독이 든 술을 보냈고.

앨런은 마시지 않았고.

로닐이 그것을.

* * *

무력하고 무력하고 또 무력하여.

[······ 아브턴던트]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 * *

리베른의 작은 땅.

그 작은 땅보다 더 작은 심장에 하나 뿐인 아들을 묻었다.

사고는 사건이 되고 사건은 마무리됐다.

리베른을 떠나지 않았다.

모두가 떠나리라 예상했다.

하지만 앨런은 리베른을 떠날 수가 없었다.

엘린느는 사죄했다.

테이안은 사형됐다.

앨런이 채 용서를 하기도 전에.

앨런이 채 용서를 구하기도 전에.

모든 것이 그렇게 끝났다.

용서를 하지도 못했고 구하지도 못하여서.

하지 못한 것이 그리 많아서.

리베른을 쉬이 떠날 수가 없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처음 2년은 참았다. 그 후 3년은 엘린느와의 친분을 빌미로 버텼다.

이미 잃었으니 두 번 다시 같은 일을 겪지는 않으리라고. 그 사실 하나로 스스로를 위로해가며 버텼다.

그렇게 다 묻었다고 여겨졌을 때.

비로소 리베른을 떠났다.

그리고, 만났다.

* * *

그렇게 만났다.

비로소 만났다.

그리하여 기꺼이 다짐하였다.

"칼리안 레인 카이리스."

이 앨런 마나실이,

너를.

"스승님께 인사드립니다."

살려주겠노라고.

제23장. 그런 날이 온다면 (4)

칼리안을 찾아왔던 아르센이 되돌아가고 앨런이 재워버린 칼리안이 꿈 꾸지 않을 단잠에 빠진 시간.

"애오옹."

어느새 빵빵해진 배를 한 '나는 플란츠 왕자님을 더 좋아하는 칼리안 왕자님의 고양이입니다.' 고양이가 낑낑거리며 닫힌 문 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그리고 테이블 앞에 앉은 플란츠의 무릎 위로 폴짝 올라왔다.

옆에서 그 모습을 본 히나가 말했다.

- 제가, 데리고 있을게요.

몸을 둥글게 말고 헤설프게 애옹거리던 고양이는 잠을 자기라도 할 것인지 꼼짝 않고 얌전히 있었다. 고양이의 따끈따끈한 체온이 전해졌다.

"둬."

짧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한 플란츠가 무표정한 얼굴로 샐러드를 집어 들었다.

그러니까 지금 히나는 플란츠에게 기어코 밥을 먹이고 있었다. 집요하게 샐러드만 주워먹고 있다지만 히나와 함께 서 있던 플란츠의 시종 레릭은 일단 그 정도로도 만족해하고 있었다. 아예 손 대지 않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억지로 먹고 있다는 티를 팍팍 내던 플란츠가 히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왜 안가는데."

레릭이 서 있는 것이야 항상 그래왔으니 이해하겠는데 플란츠의 시녀도 아닌 히나가 서 있으니 하는 소리였다.

칼리안은 새근새근 잘 자고 있을 테고 이 시간엔 할 일도 없었다. 그래서 히나는 신경쓰지 말라는 듯한 얼굴을 해 보이며 대답했다.

- 다 드시는 것, 보고, 가려고요.

저 말이 무슨 뜻인지 완전히는 아니지만 그래도 적당히 이해한 플란츠가 짜증난다는 얼굴을 했다.

"참견은 싫은데."

- 참견이 아니라, 걱정하는, 거예요.

히나는 곧장 이렇게 대답했고 플란츠는 알아보지 못한 척 했다. 달리 대꾸할 필요를 느끼지 못해서였다.

그런 것을 눈치 챘는지는 몰라도 히나가 생긋 웃었다.

본래 이 곳에서 플란츠를 어려워하지 않는 것은 칼리안이나 앨런 정도였다. 그 란델도 플란츠와는 되도록 말을 섞지 않으려 했으니까.

그런데 둘이 늘었다.

아르센, 그리고 히나. 거기에 고양이까지 포함하면 셋이나 된다.

전부 다 동생 놈 때문에 늘어난 이들이 아닌가.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플란츠가 낮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별 수 없다는 듯 샐러드 접시에 다시 손을 가져갔다.

길어진 오후의 햇살이 창을 통해 길게 들어와 햇빛이 테이블에 반사된다.

둘의 대화에서 완전히 배제되어 있던 탓에 아무래도 얀에게 수어를 배워봐야 하겠다는 생각이나 하며 창 밖을 보던 레릭이 입을 열었다.

"커튼을 내려드리겠습니다, 왕자님."

이 말에, 히나가 아주 조금 미간을 찌푸리며 레릭의 팔을 붙든 채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냥 두라는 듯한 티를 내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한 레릭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플란츠 쪽에서 답이 들렸다.

"건드리지 마."

'둬', '놔둬', '그냥 둬' 보다 훨씬 강경한 말.

그 뒤 플란츠는 잠시동안 손을 멈춘 채 가만히 앉아 있었다.

- 탁!

그리고 결국 들고 있던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고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방석 삼아 베고 누워있던 무릎이 움직이자 깜짝 놀란 고양이가 바닥으로 내려왔다.

"나가."

그렇게 말한 플란츠가 등을 돌려 침실 쪽으로 걸어가버렸다.

갑자기 변한 태도에 놀란 레릭이 채 반도 비워지지 않은 접시를 보고 있자 함께 서 있던 히나가 손가락으로 창 밖 어딘가를 가리켜보였다.

'왜 이렇게 생각이 짧아요?'

이런 얼굴을 한 채로.

'아······.'

손 끝이 가리키는 곳과 히나의 얼굴을 본 뒤에야 그 방향의 커튼이 내려졌던 적이 한 번도 없었음을 깨달은 레릭이 자신을 책망하는 얼굴을 했다.

멋대로 생각한 것이다.

시간이 지났고 티를 내지 않으니 이제는 괜찮지 않을까, 라고.

시간이 지나고 티를 내지 않는다는 것이 괜찮다는 뜻은 아닐텐데도.

도도도도, 하고 플란츠를 따라간 고양이가 안아달라 조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