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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 * *

"크, 좋아. 한잔 더 따라봐."

"아침부터 너무 무리하시는 것 아닌가요? 저는 백작님의 건강이 걱정됩니다."

"저도 그래요. 이따 저녁에 힘을 쓰시려면, 술은 조금 줄이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반라의 두 여성이 백작의 잔에 술을 따르며 교태를 부렸다. 백작은 자신의 남자다움을 자랑이라도 하듯, 잔에 든 투명한 술을 단숨에 비우며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이 정도 술은 술도 아니지! 걱정 마라! 지금 당장이라도 힘은 넘치니까! 여차!"

그리고는 왼쪽에 있는 여자를 다짜고짜 번쩍 안아들었다. 여자는 어지러운 듯 순간 얼굴이 일그러졌지만, 역시 접대의 프로답게 순식간에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꺄아! 백작님은 역시 장사시라니까? 어떻게 이렇게 힘이 좋으세요?"

"내가 또 좋다는 건 남김없이 구해 먹지 않느냐? 어젯밤에는 그 좋다는 백광숲 사슴의 뿔을 잔뜩 달여 마셨지!"

"어머, 그거 무척 비싸다던데, 엠퍼로드에서 제일 잘나가는 영약도 댈 게 아니라면서요? 역시 백작님은 돈도 많으셔!"

"당연하지! 이 망할 촌구석에 틀어박혀 있으니, 돈이라도 많이 긁어내야 하지 않겠느냐! 너희 같은 엠퍼로드 최고의 가희들을 여기까지 데려올 수 있는 것도 다 돈의 힘이지!"

베리트의 영주인 탈리스만 백작은 비대한 살집을 자랑하는 마흔 살의 남자였다. 후, 끔찍해라. 나는 백작의 망언과 출렁이는 뱃살을 더는 지켜볼 수 없어 곧바로 은신을 풀었다.

"아침부터 여자 끼고 술판이냐? 형편도 좋구나. 탈리스만 백작."

"으... 응? 넌 누구야! 어디로 들어왔어! 아무도 내 방에 들어오지 말라고 했을 텐데!"

탈리스만이 술이 덜 깬 눈으로 삿대질 했다. 나는 인사 대신 조그만 불덩어리를 날려주며 웃었다.

"창문이 열려 있더라고."

"크악!"

녀석은 작은 폭발과 함께 얼굴을 감싸 쥐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나는 비명을 지르며 흩어지는 여자들을 향해 경고했다.

"후딱 나가."

"꺄, 꺄악!"

"여기 있다가 죽어도 책임 안져."

"으, 아, 네! 네!"

그 와중에도 벗어놓은 옷을 챙겨서는 부리나케 문 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전에 방문이 먼저 열리며 마갑으로 무장한 기사들이 방안으로 진입했다.

"영주님! 방금 폭음이!"

"영주님! 무슨 일입니까!"

"리버스 그래비티."

나는 다짜고짜 녀석들을 하늘 높이 날려버렸다.

쾅!

한순간 천장이 박살나며 기사들의 몸이 성 밖으로 튀어 나간다.

백작의 방은 성의 최상층이었기 때문에 거칠 것 없이 하늘을 날아올랐다. 그리고 내가 마법을 거둔 순간 상승 동력을 잃으며 성을 향해 도로 추락했다.

"으, 으아아아아아아악!"

기사들이 천장을 다시 뚫고 내려와 바닥에 충돌한 순간.

콰광!

한순간 복도 쪽 바닥 전체가 무너지며 성 아래층까지 내려 꽂혔다.

앗, 계산 미스.

마갑의 무게가 생각보다 무거웠나? 그래도 이 정도론 안 죽겠지? 영주는 쓰레기지만 고용된 기사들 나름 한 가닥 했던 거 같으니.

"히, 히익!"

모든 걸 지켜본 탈리스만 백작이 뒷걸음치며 반대편 창문으로 도망쳤다.

하지만 이곳은 성의 5층.

창밖으로 몸을 던지면 비대한 백작의 몸이 떨어뜨린 튀김 반죽처럼 넓게 흩어질 것이다. 물론 그것도 나름 괜찮은 결말이긴 하지만....

"뭐해? 한번 뛰어내려 보시던가?"

"큭! 네, 네놈은 누구냐! 어떤 놈이 날 암살하러 보냈어! 노튼 후작이냐? 아니면 분가 쪽 놈들이냐?"

창문에 기댄 탈리스만이 자신의 적들을 쭉 늘어놓기 시작했다. 난 검게 탄 백작의 얼굴을 보며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난 클로드야."

"클로드?"

"그래. 어디서 들어본 적 없어?"

"클로드라니.... 아니, 제국에 클로드란 이름을 가진 사람은...."

페이우드 제국에서 황족에게 붙은 이름은, 그가 죽을 때까지 다른 누구도 사용할 수 없다.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탈리스만이 삿대질을 하며 소리쳤다.

"클로드 황자! 마, 말도 안 돼! 네놈이 클로드 황자일 리가 없어! 아니 잠깐. 그 쬐끄만 몸에 병에 걸린 것 같은 창백한 피부는...."

"...뭐?"

나는 다짜고짜 바람 마법을 발동, 녀석을 창문 밖으로 밀쳐 날렸다.

"끄아아아악!"

돼지 멱따는 비명이 점점 멀어지는구만. 나는 비행마법으로 추락하는 백작을 따라잡은 다음, 녀석이 충돌하려는 지면에 새로운 바람 마법으로 쿠션을 만들어 주었다.

다만 대충 만든 쿠션이라 충격을 완벽히 흡수해 주진 못했다.

"컥!"

쿠션에 한번 튕긴 백작이 2미터쯤 튕겨 올라 다시 바닥에 추락했다. 동시에 다리가 부러진 듯 바닥을 뒹굴며 소리를 질렀다.

"으아아아악! 내 다리! 으아아악!"

지금 다리가 대수냐? 맘 같아선 온몸의 뼈를 으스러뜨려도 속이 안 시원할 것 같은데.

하지만 여기서 이놈을 죽이면 안 된다.

죽여 봤자 나중에 책임질 일만 더 늘어난다. 무엇보다 그냥 깔끔하게 죽여서는 이놈이 저지른 대가를 제대로 치르게 할 수 없고.

"영주님!"

"백작님!"

"주군!"

그때 병사와 기사들이 성의 정원으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적이다! 암살자다!"

"백작님을 보호해! 네놈은 누구냐!"

나는 손바닥에 휘몰아치는 바람의 기류를 만들며 대답했다.

"제국의 6황자, 클로드."

"뭐?"

일순간 모두가 경직되었다. 그중에 기사 한 명이 앞으로 나서며 당황한 얼굴로 버벅거렸다.

"크, 클로드 전하? 아, 아니, 황족이 갑자기 이런 데 나타날 리가 없잖아!"

"이 자식이 어디서 황자님을 사칭하고 있어!"

"모두 공격! 영주님을 구해내야 한다!"

당연히 모두가 내 말을 안 믿고 창을 내민 채 돌진했다. 나는 손바닥에 만든 바람의 기류를 바닥에 내던지며 중얼거렸다.

"템페스트."

그 순간, 태풍 같은 돌풍이 사방으로 번지며 주변의 모든 것을 날려버렸다.

이것이 바로 모든 원소마법의 맨 꼭대기에 있는 템페스트급 마법이다.

이름 하여 윈드 오브 템페스트(wind of tempest). 일단 마법이 발동된 이상, 이곳에서 안전한 것은 나와 탈리스만 백작뿐이었다.

물론 최대한 힘을 억제했다. 평범하게 사용하면 여기 있는 모두가 믹서에 갈린 사과주스처럼 바뀔 테니까.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과했다.

콰앙!

몰려오던 수십 명의 남자들이 날카로운 바람의 기류에 튕겨 정원의 벽에 처박혔다.

동시에 벽이 무너져 내렸다. 병사들은 바위 무더기에 깔린 채 비명을 질렀고, 기사들은 어떻게든 안간힘을 쓰며 자신의 힘으로 무너진 벽에서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바로 그 기사들을 보며 소리쳤다.

"뭐 하나! 기어 나왔으면 당장 깔린 병사들부터 구하지 않고!"

"아, 아니...."

"명령이다! 네놈들이 믿건 말건 난 제국의 황자인 클로드야! 지금부터 이 베리트 성은 내가 접수한다! 거역할 놈은 다시 창 들고 덤벼! 이번에는 제대로 조져줄 테니까!"

"으.... 으아아아악!"

그러자 유일하게 중급 마갑을 입은 기사가 비명을 지르며 다시 한번 달려들었다. 여기 나이트 익스퍼트도 있었어? 방금 그 꼴을 겪고서도 용기가 대단하구만.

"리버스 그래비티."

나는 녀석을 다시 한번 하늘 높이 떠올린 다음 가차 없이 지면에 내리꽂았다.

쿠궁!

강한 진동과 함께 지면에 반쯤 처박힌 기사가 경련을 일으켰다. 나는 자욱한 먼지에 손사래를 치며 주위의 다른 기사들에게 물었다.

"자, 다음은 누구?"

모두가 침묵했다. 녀석들은 내가 노려본 순서대로 몸을 돌리며 뒤쪽에 깔린 병사들을 구조하기 시작했다.

"부상이 심한 병사는 나중에 치료해 줄 테니 한군데 모아 놔! 그리고 백작?"

"리, 리버스 그래비티.... 요튼 만에서.... 설마 진짜 클로드 황자?"

백작도 요튼 만에서 내가 벌인 소문을 들은 모양이다. 나는 녀석의 귀를 움켜쥐고는 다짜고짜 성 쪽으로 끌고 가기 시작했다.

"으아아악! 이거 놔! 아니 놓아주십시오 황자님! 귀 찢어집니다! 으아아악!"

백작은 부러진 다리를 힘겹게 끌며 비명을 질렀다. 그러자 백작의 말을 들은 기사들이 목소리를 낮추며 수군대기 시작했다.

"야, 방금 들었어? 영주님이 저 꼬맹이.... 아니, 저분을 직접 황자님이라고 불렀다고!"

"그럼 진짜 저게 황자 전하야?"

"제국 6황자 클로드? 그 망나니 황자?"

"소문에는 개차반이라던데... 요즘 뭔가 기적이 일어나서 신성마법을 쓸 수 있게 됐다고 했던가?"

"멍청한 놈! 저분이 혼자서 사령군을 막았잖아!"

"근데 방금 그냥 마법도 쓰지 않았나? 그것도 엄청난 거?"

"요즘은 정신 차리고 이곳저곳에서 공을 세웠다고 칭송이 자자하던데, 다시 머리가 돌아버렸나? 왜 이런 짓을 한대?"

"이건 아무리 황족이라도 미친 짓인데...."

"잠깐, 지금 그게 문제냐? 우리 지금 진짜 황자님한테 창을 겨눴다고! 저분이 잘못했건 말건 우리 모두 극형에 처할 수도 있어!"

순간 모두가 무기를 바닥에 던지며 무릎을 꿇었다. 나는 백작의 귀를 계속 잡아끌며 녀석들에게 명령했다.

"깔린 병사들 다 구했으면 당장 성의 창고를 전부 열어서 식량을 꺼내! 그리고 베리트의 전 지역에 배급을 시작한다! 지금 당장! 이 시간 이후로 베리트에서 누가 굶어 죽었다는 이야기가 들리면 네놈들도 감옥에 처박아 넣고 똑같이 굶겨 죽일거야! 그러니 죽고 싶지 않으면 빨리 움직여! 빨리!"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31화

9장 미친 황자 루트

베리트 성의 지하 감옥에는, 백작의 착취에 반발했던 영민들이 비참한 몰골로 갇혀 있었다.

제국 형법상 다섯 명 이상 가둬놓을 수 없는 감옥에 수십 명을 몰아넣은 것만 해도 끔찍한데, 하물며 식사도 제대로 지급하지 않아 대부분이 절망적인 기아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 모두를 풀어주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회복마법으로 고쳐주고, 곡물가루로 죽을 쒀서 한 그릇씩 먹이는 데만 반나절이 소요됐다.

결과적으로 210명의 수감자들 중 172명을 살릴 수 있었다.

명을 다한 38명은 내가 오기 전에 이미 죽어있거나, 혹은 천하의 아크 프리스트라도 손을 쓸 수 없을 만큼 기력이 쇠한 자들.

나는 바삐 움직이는 병사들에게 죽은 영주민들의 시체를 수습, 곧바로 가족들에게 돌려주라 명령을 내렸다.

"이렇게 빨리 왔는데도 다 살리는 건 안 되는구나."

들것에 실려 가는 시체를 보자 한숨이 새어나왔다. 이 '미친 황자 루트'를 회귀 첫해에 실행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긴 한데....

그래도 불필요한 희생을 최대한 줄였다는 것에 만족 할 수 밖에.

전에는 회귀 4년차에 이 루트를 진행한 적이 있었는데 , 그때는 감옥에서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게 문제가 아니라 베리트의 6만 영주민이 절반 이하로 줄어 든 상태였다.

덕분에 미쳐 날뛰기 시작한 제국 최강의 기사를 내 손으로 제압해야 했는데.... 휴, 상상만 해도 식은땀이 난다. 아예 생각을 말아야지.

"넌 대체 무슨 생각이냐?"

200명도 넘게 차 있던 지하 감옥에는 이제 오직 한 사람만 갇혀 있었다. 나는 창살 너머에 웅크리고 있는 탈리스만 백작을 노려보며 물었다.

"지하 감옥에 사람을 시루떡처럼 쌓아 놓고는 밤에 잠이 오냐? 왜 이딴 짓을 해? 죽일 거면 차라리 깨끗하게 목을 베던가."

"시루... 시루떡이 뭡니까?"

"지금 그게 궁금해? 정신머리 하고는. 암튼 넌 도를 넘었어. 탈리스만 백작. 그냥은 안 넘어 갈 테니까 각오해."

"각오해야 할 건... 당신입니다."

백작은 부러진 다리가 고통스러운 듯, 오만상을 찌푸리며 소리쳤다.

"아무리 황자님이라도 이 일은 그냥 넘어가지 못합니다! 저는 황제께서 직접 임명한 베리트의 영주입니다. 그러니 이 일은 황제 폐하의 명을 거역한 반역행위입니다!"

"아직 기운이 넘치는구만."

나는 이 녀석의 사흘 뒤 모습을 상상하며 미소를 지었다.

"근데 어쩐다? 내가 반역을 저질렀든 말았든, 지금 넌 그걸 걱정할 때가 아니야."

"네?"

"엠퍼로드에서 이 사실을 알고 사람을 보낼 때까지 얼마나 걸릴까? 닷새? 열흘? 근데 넌 며칠이나 버틸 수 있을 것 같아? 내가 왜 널 안 죽이고 여기 넣어 놨겠어?"

"설마...."

백작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몸을 비틀었다.

"절 고문하실 생각입니까?"

"내가 뭐가 즐겁다고 널 고문해? 넌 그냥 자기가 한 일을 고대로 돌려받을 뿐이야. 지하 감옥의 수감자도 그렇고, 다른 베리트 영주민들도 아주 그냥 쫄쫄 굶고 있더라고."

"그게 어쨌단 말입니까?"

백작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혹시 모르시는 겁니까? 베리트란 땅의 목적을? 여긴 영주민들을 착취하고 힘을 빼 놓는 게 목적입니다."

"나도 알아. 하지만 그건 100년 전의 제도야."

"그렇다고 지금에 와서 달라질 건...."

"지금부턴 모든 게 달라질 거야."

달라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랬다간 앞으로 10년 뒤, 아니 대략 9년하고도 6개월 뒤에 있을 이계의 공격에 또다시 세계가 멸망할 테니까.

"암튼 다른 건 다 필요 없어. 문제는 내가 열 받았다는 거야. 그러니 너도 저 영주민들과 똑같이 대접해줄게."

"그게 무슨...."

"너, 이름 뭐냐?"

나는 간수를 맡기기 위해 밖에서 새로 데려온 병사에게 물었다. 병사는 경례를 붙이며 빠릿빠릿하게 대답했다.

"저는 베리트 성의 경비를 맡고 있는 병사 라빈입니다!"

"좋아 라빈. 너는 지금부터 여기서 탈리스만 백작을 관리한다. 백작이 무슨 말을 해도 무시하고 절대 탈출하지 못하게 해. 그리고 하루 세 끼 물을 줘."

"알겠습니다! 그런데 물이라 하심은...."

"물. 그냥 물 말이야. 마시는 물 몰라?"

"네? 하지만...."

"사람은 물만 있어도 50일 정도는 버틸 수 있다고 하더라.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알겠지?"

병사는 순간 눈을 크게 뜨며 동문서답했다.

"저는 영주님이 외지에서 데려온 병사가 아닌, 이곳 베리트의 북부에 있는 슈르트 마을 출신입니다!"

"응? 그런데?"

"슈트르 마을은 올해만 벌써 세 명이 굶어 죽었습니다! 그냥 그렇다고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아, 그렇구만.

동문서답이 아니라 결의에 찬 완벽한 대답이었다. 나는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이며 지하 감옥을 빠져나왔다.

* * *

"오는 동안 첫 번째 마을도 지나기 전에 가져온 영약을 전부 다 써버렸습니다."

해가 저물고 나서야 영주의 성에 도착한 메르데스가 늦은 이유를 설명했다.

"그래서 일단 저택에 돌아가 말이 버틸 수 있는 만큼 다시 영약을 싣고 왔습니다. 하지만 두 번째 들린 마을에서 다시 영약을 전부 써버렸습니다. 다시 또 저택에 돌아가면 오늘 안에 베리트 성에 도착할 수 없을 것 같아, 이후로는 무시하고 여기까지 달려왔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빈털터리입니다."

"수고했어. 백작의 개인 창고에 첨보는 것들이 많던데, 혹시 그걸로 뭔가 만들 수 없을까?"

나는 메르데스를 백작의 방에 숨겨진 개인 창고로 데려갔다. 메르데스는 넓은 창고에 가득한 물건들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은화가 아주 많군요. 전부 베리트 영주민을 수탈해서 모은 걸까요?"

"아마도. 하지만 돈을 건드리진 않을 거야. 돈 때문에 이 짓을 벌인 건 아니니까."

"그리고 이건 백광숲의 사슴뿔입니다. 고가의 영약재료지만, 이 자체만으로도 강한 효과를 가지고 있습니다."

메르데스는 창고에 놓인 자루에서 하얀 뿔 조각을 꺼내들었다. 나는 전부 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질문했다.

"그래? 무슨 효과가 있는데?"

"그러니까 이건... 남자에게 좋습니다."

"남자? 남자 어디에 좋은데?"

"남자의 그.... 원초적인.... 자, 자양강장에 효과가 있습니다."

"자양강장? 그럼 굶어서 비실거리는 베리트의 영민들한테 먹이면 딱이겠네?"

"그건 안 됩니다!"

메르데스는 순간 자루의 입구를 확 닫으며 소리쳤다.

"몸이 허약해진 영주민들에게 이걸 먹이면 큰일 납니다! 마침 이곳에 다양한 영약재료가 있으니, 제가 어떻게든 조합해서 체력의 영약을, 아니 체력의 영약 비슷한 효과를 낼 수 있는걸 만들어 보겠습니다."

"알았어. 부탁할게."

나는 손을 흔들며 백작의 비밀창고를 빠져나왔다.

물론 이곳에 있는 재료만으로 6만 명에 달하는 베리트의 영주민을 모두 챙길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도 심하게 몸이 상한 사람을 상대로 급한 불을 끄는 정도는 가능하겠지? 나는 챙겨온 설탕바를 입안에 넣으며 백작의 푹신한 침대에 몸을 던졌다.

* * *

다음날 아침, 지하 감옥의 비명이 성의 정원까지 울려 퍼졌다.

"제발! 제발 음식을 줘!"

"클로드 황자님을 불러다오! 내가 잘못했다! 내가 잘못했어!"

"사람 살려! 이놈들이 날 굶겨 죽이려 한다!"

"주, 주방장! 주방장은 어디 있나! 내가 돈을 얼마나 주고 널 데려왔는데! 어서 향초 고기찜을! 아니, 장미 시럽케이크를!"

나는 지하 감옥 입구까지 내려갔다가 백작의 외침을 듣고 다시 밖으로 걸어 나왔다.

"케이크 어쩌고 하는 거 보니 아직 배가 덜 꺼졌구만."

남을 굶주리게 만든 놈에게 내릴 형별은 오직 똑같이 굶기는 것뿐이다. 저놈도 며칠 굶어봐야 자기가 저지른 짓이 얼마나 끔찍했는지 알게 되겠지?

"황자님이 마음 가는 대로 일을 벌인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만...."

베리트 성의 정문으로 나오자, 막 도착한 수십 대의 마차와 함께 짐을 점검하고 있는 카일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번 일은 그중에도 정말 충격적이었습니다. 어제 소식을 듣고 제가 얼마나 놀랐는지 아십니까?"

카일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나는 짐으로 가득 찬 마차를 손으로 두드리며 웃었다.

"뭘 이런 걸 가지고 놀라고 그래. 아니면 너도 베리트를 돕는게 맘에 안 들어? 이쪽 동네 별로 안 좋아하나?"

"저는 베리트에 대해 특별한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카일은 동요 없이 고개를 저었다.

"다만 이번 일로 황자님께서 입으실 피해와 주변의 평판이 두려울 뿐입니다. 베리트가 워낙 폐쇄적인 지역이라 당분간은 버티겠지만, 길어봐야 앞으로 사나흘 안에 온 제국에 소문이 퍼질 겁니다."

"그 문제는 내가 알아서 할게. 소문 퍼지기 전에 자진출두할 거야."

"자진출두라니, 황궁에 돌아가 자수하시겠다는 말씀입니까?"

"응. 오늘 저녁에 엠퍼로드로 돌아갈 거야."

나는 고개를 돌려 멀리 남서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대신 네가 여기 남아 일을 해줘. 일단 식량을 풀어 베리트의 영주민을 구호해야 해."

"쉬운 일은 아닙니다. 구스프 상회에서 챙겨온 식량만으로 베리트의 모든 영주민을 먹여 살릴 수는 없습니다."

"저택에서 가져온 것도 있잖아?"

"그건 양이 더 적습니다."

"베리트 성의 창고에도 먹을 게 쌓여 있어. 어제만 해도 병사들 시켜서 2할 정도는 풀었는데, 이놈들이 제대로 관리하는지 믿음이 안 간다니까?"

"성에 남은 식량이 얼마나 됩니까?"

"이것저것 다 합쳐서 3천 포대 정도?"

"그 정도라면...."

빠르게 머리를 굴린 카일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전부 다 합치면 당분간은 버틸 수 있을 겁니다. 보름, 아니 열흘 이상은 힘들겠습니다만."

"그 정도면 충분해. 그 뒤엔 내가 알아서 할게."

"알겠습니다. 그럼 두 번째 명령은 무엇입니까?"

"두 번째는 지하에 가둬놓은 탈리스만 백작을 최대한 오래 굶기면서 살려 놓는 거야."

"...네?"

카일의 한쪽 눈이 순간적으로 일그러졌다. 나는 환청처럼 희미하게 울리는 백작의 절규를 들으며 웃었다.

"어제부터 탈리스만 백작을 지하 감옥에 가둬 놓고 굶기고 있어. 맘 같아선 육편으로 만들어서 오우거한테 먹으라고 보내고 싶긴 한데.... 그랬다간 오우거들한테 실례겠네. 암튼 죽여 버렸다간 나중에 뒷수습이 힘들 테니까."

"그건 잘 하셨습니다. 탈리스만 백작은 개국공신 출신의 문벌귀족입니다. 엄청난 재력과 영향력을 가진 존재죠. 함부로 죽였다간 엄청난 파장이 생길 겁니다."

"그렇다고 쉽게 풀어줄 생각은 없어. 앞으로 사흘에서 닷새 안에 백작네 가문 사람들이 올 거야. 제국군이나 정규 기사단보다도 더 빨리."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럼 저는 여기서 그때까지만 버티면 됩니까?"

"아니, 그쪽 가문 사람들은 무시해."

나는 손가락 두 개로 X자를 그렸다.

"황자의 명령을 받았기 때문에, 최소한 황자 본인이나 제국 정부의 명령이 아니면 절대 풀어 줄 수 없다고 버텨."

"그것은... 까다로운 임무군요."

카일은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했다.

"만약 백작가에서 무력을 동원하면 어떻게 합니까? 강력한 용병기사라도 고용해서 데려오면 이곳의 병력으로는 막을 수 없습니다. 애당초 제게 이곳의 병력을 동원할 권한도 없고 말입니다."

"그때는 메르데스에게 맡겨. 메르데스도 두고 갈 테니까."

"메르데스? 키 큰 시녀 말입니까? 항상 영약을 챙겨들고 다니는?"

"메르데스는 정령을 소환할 수 있어. 이름은 조약돌 정령이지만 덩치는 오우거만 하니까, 어지간한 기사는 물리칠 수 있을 거야."

"그건 또 무슨.... 아니,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전혀 납득이 안 간 표정이지만 일단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미소와 함께 카일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만약에 메르데스도 힘들어 보이면 너무 버티지 말고 그냥 넘겨줘도 돼. 백작 굶기는 게 너희들 목숨보다 중요하진 않으니까."

"황공하신 말씀입니다. 명심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구스프 상회에 부탁해서 소문을 퍼뜨려. 여기서 내가 저지른 짓, 내가 탈리스만 백작에게 어떤 형벌을 내렸는지 같은걸 몽땅."

"정보조작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니, 조작하지 말고 있는 사실을 그대로."

"그렇게 하면 정말로 악명이 빠르게 퍼질 겁니다만."

"상관없어."

나는 눈을 치켜뜨며 고개를 저었다.

"이걸 악행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라면 얼마든지 그렇게 생각하라고 해. 그러니 내가 한 일을 전부 있는 그대로 퍼뜨려. 알겠지?"

"흠. 적과 아군을 가르시려는 겁니까?"

역시 얘는 눈치가 빨라서 좋다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메르데스가 일하고 있는 백작의 방을 향해 몸을 돌렸다.

하지만 이 경우에 적은 아무래도 상관없다.

어디까지나 아군이 될 사람들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주는 게 진짜 목표니까. 특히 지금 이 순간에도 속이 까맣게 타고 있을 제국 최강의 기사, 바로 '나이트 다비'의 마음을 풀어주는 게 다른 무엇보다 중요했다.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32화

10장 각성한 자들

"미친 것이냐 클로드!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거냐!"

제스가 경악한 얼굴로 소리를 질렀다. 스스로 황궁에 출두한 나는, 제국의 방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린 채 일의 경과를 전부 설명했다.

"모든 일은 그날 새벽에 시작됐습니다. 베리트를 탈출해 온 어린 소녀가, 제 저택에 도착하여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자신의 가족과 마을 사람들을 살려 달라 말입니다."

"그게 뭐 어쨌다고! 베리트의 영주민이 영지를 탈출하는 것은 중죄다! 그냥 치안청에 신고하면 끝날 일을!"

"저는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극도로 흥분한 제스와 달리, 나는 지극히 차분한 목소리로 변론했다.

"부족하지만 신의 축복으로 성자의 칭호를 받은 몸입니다. 그런 제가 영주의 착취로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을 어찌 그냥 두고 넘길 수 있겠습니까?"

"외부인은 베리트의 정책에 관여할 수 없다! 이는 100년 전부터 내려오는 제국의 관습이란 말이다!"

"제게 있어 모든 제국은 오직 하나의 제국일 뿐입니다."

그 순간 주변의 대신들이 크게 술렁였다. 다들 머리로는 알고 있으면서, 차마 입 밖으로 꺼내기 힘들었던 말을 내가 공개적으로 선언한 효과였다.

"사령군의 침공으로 신음하던 엘스톤 백작령의 영주민도, 시 서펜트의 출몰로 생업이 막혀 고통 받던 요튼의 주민도, 영주의 착취로 굶어 죽어가는 베리트의 영주민도 제겐 모두 같은 황제 폐하의 신민일 뿐입니다."

"이 미치광이 같으니!"

제스는 대리옥좌를 박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좌우에 있는 대신들의 반응은 그렇지 않았다.

-과연.... 클로드 황자님의 눈에는 그들 모두가 똑같은 신민으로 보였던 게로군.

-기특하신 말씀일세. 다만 베리트란 땅이 워낙 특수해서....

-어차피 이제 와서는 아무 의미도 없지 않습니까? 기껏해야 영주로 임명된 자의 배를 채워주는 용도로 악용될 뿐.

오, 이건 예상보다도 반응이 더 좋은데?

지난 아홉 번의 회귀를 돌아보면, 애초에 상당수의 대신들이 저마다의 이유로 베리트의 정책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

만약 모두가 하나같이 베리트를 착취하길 원했다면 처음부터 이런 짓을 벌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물론 제스는 처음부터 생각이 달랐겠지만.

"이놈이 미쳐도 단단히 미쳤구나! 애초에 베리트의 절반을 영지로 내려준다 할 때는 거절하더니! 이제 와서 황제폐하께서 임명한 영주를 맘대로 끌어 내리고 무단으로 감금을 해? 그리고는 잘했다고 지금 내게 대드는 거냐?"

흥분한 제스가 삿대질까지 하며 소리를 질렀다.

흠, 뭔가 좀 이상한데?

얘가 전에도 이렇게까지 격렬하게 반응했던가? 어째 내 기억보다 상태가 훨씬 안 좋아 보이는데?

"다른 무엇보다 황자가 사욕으로 군대를 움직여 영지를 점령한 것! 이것만으로도 씻을 수 없는 중죄다!"

"저는 군대를 동원하지 않았습니다."

"헛소리 마라! 얼마 전에 기사단까지 새로 만들지 않았느냐!"

"정원이 아직 다섯 명도 안 찬 기사단입니다. 그리고 베리트 성을 점령하고 영주의 횡포를 막은 것은 저 혼자입니다."

"네 녀석 혼자서 벌였다고? 하! 그럼 요튼 만에서 시 서펜트를 잡은 것처럼 베리트 성의 모든 병력을 신성마법으로 쳐 죽인 거냐?"

"저는 아무도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신 신성마법, 리버스 그래비티 말고도 추가로 원소마법을 사용했습니다."

나는 계획대로 있는 사실을 그대로 솔직하게 털어 놓았다. 순간 표정이 일그러진 제스가 멍청한 말투로 되물었다.

"원소마법? 네 녀석이 어떻게?"

"전에 오우거와 협정을 이끌어 냈을 당시, 오우거의 마을에 초대받아 잠시 연회를 즐겼습니다. 그때 오우거의 수호신인 바위의 정령 룩카르와 잠시 교감을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뭐라? 정령?"

"그때 바위의 정령이 제게 보답이라며 마법의 힘을 깨워주었습니다. 처음에는 익숙하지 않아 잠자코 있었습니다만, 그날 아침에 탈출한 소녀의 이야기를 듣고 흥분한 순간... 마법의 힘에 완전히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손바닥 위에 작은 불꽃을 만들어 위로 띄워 내 말을 증명해 보였다.

화륵!

"전하!"

순간 제스의 호위기사인 파이렌이 대리옥좌의 앞으로 나서며 제스의 앞을 가로막았다.

하지만 주변의 대신들의 반응은 달랐다. 그들은 마법에 위협을 느끼는 대신, 다들 내 손바닥 위를 바라보며 감탄하기 시작했다.

-오오, 정말로 원소 마법....

-세상에, 그럼 클로드 황자님은 신성마법에 원소마법까지 모두 사용하실 수 있다는 말씀 아니오?

-이건 제국 역사에 길이 남을 일이군. 영웅시대 이후로 처음 있는 일 아닌가?

-제국에 경사가 났어. 자고로 결이 다른 두 마법을 동시에 사용하는 자는 제국을 지키는 영웅이 된다고 하던데....

평판 최대로!

대충 들어도 대신들의 분위기가 확 살아난게 느껴진다.

이것도 스타트로 원소마법과 신성마법을 선택했을 때 얻을 수 있는 장점 중 하나다. 그래서 공개 시점을 아끼고 아꼈다가 미친 짓을 저지른 바로 지금에 와서 극적으로 터뜨린 것이고.

"이런...."

제스라고 눈이 없고 귀가 없는 게 아니다. 대신들의 분위기가 이상해진 것을 감지한 녀석은, 순간 표정을 싸늘하게 바꾸며 근엄한 목소리로 꾸짖었다.

"네가 가진 능력 따윈 아무래도 상관없다. 중요한 건 황제폐하께서 임명한 제국의 영주를 네 마음대로 짓밟은 것. 이는 황명을 거역한, 즉 제국에 대한 반역행위에 다르지 않다!"

"섭정 전하. 고정해 주십시오."

그러자 군사대신 홉스 백작이 앞으로 나섰다.

"클로드 황자님의 행위가 비록 과격하였다 하나, 어디까지나 제국의 백성을 위해 나선 것에 불과합니다. 일의 전후 경과를 따져봤을 때, 적어도 황자님께 반역죄를 묻는 건 과한 처사라 여겨집니다."

"홉스 백작! 지금 그대는 클로드에게 죄가 없다고 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이번 일은 군사대신인 저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반란이나 반역의 영역이라기보다는 감정에 휩쓸린 황족의 가벼운 일탈로 치부하는 편이 옳다고 여겨집니다. 무엇보다 일을 저지르고 난 이후, 이렇게 곧장 황궁에 출두해 자초지종을 알리지 않았습니까?"

"큭...."

-맞소. 이를 반역이라 보긴 어렵지.

-반역을 꾀한 자가 직접 황궁에 와서 자신의 죄를 고백할까?

-그보다 탈리스만 백작.... 요즘 소문이 안 좋지 않았습니까?

-최근이 아니라 옛날부터 뒤가 더러웠지. 그 양반, 젊었을 때부터 자기 물건 간수를 제대로 못해서....

-몇 년 전에 탈리스만 백작이 베리트에 들어간 것도, 결국 해먹다가 들킨 게 있어 자숙하러 간 거 아니었나?

-자숙은 무슨. 소문이 잠잠해질 때까지 몸을 숨긴 거지. 난 오히려 일이 이렇게 된 게 속이 다 시원하군.

대신들의 여론은 한눈에 봐도 명백했다. 제스는 이대로라면 제대로 된 벌을 내리기 어렵다고 판단했는지, 급히 손을 휘저으며 목소리를 높였다.

"모두 정숙! 이 일은 지금 당장 판결을 내리지 않겠다. 베리트에서 실제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조사단의 조사 결과가 나오면 그때 가서 판단하도록 하겠다!"

그리고는 마치 부모의 원수라도 보는 듯한 눈으로 날 노려보았다. 근데 미안하지만 너랑 나랑 부모가 같거든? 물론 정확히 따지면 아버지만 같고 어머니는 다르지만.

"그동안 제국의 6황자인 클로드에겐 연금을 선고한다. 조사 결과가 나올 때까지 황궁의 별궁인 청사자궁에서 들어가 자숙하도록!"

* * *

클로드가 엠퍼로드로 돌아간 지 사흘 뒤. 소식을 접한 탈리스만 가문이 백단위의 사병을 이끌고 베리트 성에 도착했다.

"나는 제국 최고의 명문가인 탈리스만 가문을 대표해서 이곳에 온 란텔 남작이다! 당장 가문의 주인이신 탈리스만 백작을 석방하고 이쪽으로 넘겨라!"

'란텔이라면 탈리스만 백작의 조카던가?'

성문에 버티고 선 카일은 눈살을 찌푸리며 상대를 바라보았다.

화려한 마갑을 입은 젊은 남작은 오히려 경계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가 확인한 정보로는 탈리스만 백작의 친척 중 제대로 된 기사는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았다. 대신 남작의 주변을 둘러싼 회색 갑옷의 기사들이 문제였다.

'저 투박한 모양의 마갑... 바란 용병기사단이다.'

돈만 주면 그 어떤 더러운 일이라도 도맡아 해주는 걸로 유명한 기사단이다. 물론 갑옷만 가지고는 기사단의 정체만 밝혀낼 뿐, 기사의 실제 역량까지 파악하는 건 불가능했다.

'국가 기사단은 마갑에 등급을 표시하니 구분하기 쉬운데, 용병들은 그게 안되니까 실력을 재는게 까다롭다.'

다만 이제 겨우 최하급 마갑을 다루는 입장에선 상대가 누구라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다. 카일은 직접 싸우는 걸 깨끗이 포기하고 한발 뒤로 물러났다.

"그럼 부탁드립니다. 메르데스 님."

"계속 말씀드렸지만 존칭은 부담스럽습니다. 제가 나이도 더 어린데."

옆에 있던 메르데스가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카일은 순간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

"나보다 나이가 어리다고?"

"저는 올해로 16살입니다. 카일 경이 저보다 두 살 많다고 들었습니다."

"어.... 그럼.... 아무튼 잘 부탁해."

메르데스의 키는 카일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고, 얼굴도 16살이라고는 상상도 못할 만큼 성숙했다.

덕분에 신분도 직위도 성별도 상관없이, 오직 연상이라 생각하며 존대를 해왔다. 그런데 실상은 오히려 자신보다 어렸을 줄이야.

'아직 16살밖에 안 됐는데 저렇게 담이 크다니.... 과연 싸움은 어떨까?'

메르데스의 정령마법이 얼마나 강한지는 아직 모른다. 반면 상대는 기사만 총 일곱 명이니, 어떻게든 자극하지 말고 조금 씩 끌어들여 각개격파 하는 게 좋을 것 같다.

하지만 메르데스는 몰려온 적들을 향해 대놓고 경고했다.

"모두 물러나십시오. 황자님께서는 본인의 지시나 제국정부의 명령 없이는 아무도 성에 들여보내지 말라 명령하셨습니다."

"넌 또 뭐야! 옷을 보니 어디 시녀 같은데. 감히 여기가 어느 안전이라고 나서서는 거냐! 지금 당장 숙부님을 돌려받도록 하겠다! 저리 꺼져!"

란텔 남작이 눈을 부라리며 칼을 뽑았다. 하지만 메르데스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대답했다.

"저는 클로드 황자님의 시녀인 메르데스입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여러분들은 절대 이곳을 지나갈 수 없습니다."

"비키라 했다! 죽고 싶지 않으면!"

"저는 비킬 수 없습니다."

"이 건방진 년이.... 뭐 하고 있나! 힘으로 뚫어! 상대가 황자라도 시녀 한둘쯤은 죽여도 상관 없겠지!"

"네!"

순간 남작의 앞에 있던 두 기사가 메르데스를 향해 돌진했다. 하지만 메르데스는 그보다 한 템포 빠르게 반응했다.

"크발."

계약한 정령의 이름을 말한 순간, 정면의 공간이 일그러지며 온몸이 바위로 이뤄진 거인이 몸을 일으켰다.

"...!"

어찌나 비현실적인 광경인지, 돌진하던 기사들의 몸이 순간 얼어붙었다.

반면 소환된 정령은 덩치에 걸맞지 않게 민첩하게 움직였다. 녀석은 주춤거리는 기사들을 향해 한순간 몸을 날리고는.

쿵!

경쾌하고 직선적인 움직임으로 단숨에 주먹을 내리꽂았다.

콰직!

순간 빈 깡통이 찌그러지는 듯 한 소리와 함께, 두 기사 모두 물수제비처럼 지면을 튕기며 뒤로 날아갔다.

"아니...."

란텔 남작은 순식간에 원래 자리까지 튕겨 돌아온 기사를 보며 경악했다.

"뭐야 저거! 저 돌덩이는 대체 뭔데! 갑자기 어디서 나타났어!"

'이름이 조약돌 정령이라 해서 얼마나 아기자기한 정령이 나오나 했더니....'

반대편에서 지켜보던 카일도 혀를 내둘렀다. 덩치가 오우거만한 돌덩이가 어지간한 기사보다 민첩하게 움직이는 게 믿겨지지 않을 정도였다.

그 사이, 정령은 거대한 다리를 들어 올려 지면을 내리 찍었다.

콰앙!

그리고는 마치 덤벼보라는 듯, 남작의 무리를 향해 손끝을 까닥거리기 시작했다.

"저 돌덩이가 감히 도발을! 정체가 뭐야! 무슨 거인이 돌로 만든 마갑을 뒤집어쓴 건가?"

"아마도 정령마법.... 남작님. 가문의 병사들과 함께 뒤로 물러나 주십시오. 이곳은 저희가 맡겠습니다."

용병기사의 리더가 남은 기사들에게 손짓으로 명령을 내리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남작은 불안한 눈으로 기사들을 노려보며 경고했다.

"고작 열 명도 안 되는 네놈들을 급하게 고용하느라 금화를 3백 개나 썼다! 클레임 당하기 싫으면 돈값을 제대로 해!"

"...."

리더는 고개를 끄덕이며 검을 뽑아 테스트 하듯 휘둘렀다.

촥!

순간 칼날에 풍압이 일어나며 지면이 깊이 파였다. 그러자 멀리서 보던 카일이 헉 소리를 내며 긴장했다.

'풍압검? 용병기사인데 나이트 익스퍼트라고?'

기사의 등급은 착용 가능한 마갑의 성능이나, 혹은 특정한 기술을 다룰 수 있게 되는 것으로 구분된다.

그 중에도 기사의 세 번째 등급인 '나이트 익스퍼트'가 되기 위해서는 칼날에 풍압을 일으켜 적을 공격하는 기술, 바로 풍압검을 쓸 수 있어야 한다.

혹은 중급 마갑을 착용하거나.

물론 최고등급인 '나이트 마스터'나, 그 아래의 '나이트 커맨더'에 비할 바는 아니다. 하지만 일반인의 기준에선 이 정도만 해도 상식을 초월한 존재임에 틀림없었다.

"메르데스! 상대는 나이트 익스퍼트야! 풍압을 조심해!"

물론 이렇게 말해봐야 기사에 대해 전혀 모르는 일개 시녀가 이해할 리 없겠지만.

반면 메르데스 입장에서 걱정되는 건 오직 시간뿐이었다. 일단 정령을 소환한 이상, 적들이 덤비지 않고 시간을 끄는 게 훨씬 위험했다.

'앞으로 8분. 그 사이에 적을 모두 물리쳐야 해.'

메르데스는 무표정 속에 초조함을 감췄다. 그동안 틈틈이 숲에 나가 테스트를 해본 결과, 조약돌 정령의 소환 시간은 최대 9분이 한계였다.

시간제한이 끝나면 정령은 무조건 사라지며, 이후 최소 3시간 동안은 무슨 일을 해도 다시 소환되지 않는다.

'하지만 크발은 강해. 나이트 익스퍼트가 뭔진 모르지만 이번에도 전부 물리쳐 줄 거야.'

하지만 이번에는 적들의 수법이 좀 더 교묘했다.

적의 리더는 남은 네 명의 기사를 넓게 퍼뜨린 다음, 사방에서 천천히 조이며 정령의 주의를 분산시켰다.

뭔가 있어 보이는데 그게 뭔지는 알 수 없다. 경험이 적은 메르데스가 정령에게 내릴 수 있는 지시는 오직 공격뿐이었다.

'싸워! 크발!'

쿠오!

조약돌 정령이 기다렸다는 듯 포효했다. 그리고는 자신의 왼편에 있는 기사를 향해 몸을 날리며 단숨에 주먹을 휘둘렀다.

콰앙!

기사는 갑작스런 공격에 반응조차 못하며 뒤로 날아갔다.

그 사이, 다른 세 기사가 일제히 달려들며 정령을 향해 공격을 퍼부었다.

채앵!

하지만 단단한 바위에 고작해야 생채기를 남기는 게 전부였다. 크발은 적의 공격에 아랑곳없이 양팔을 풍차처럼 휘두르기 시작했다.

부웅!

"피해!"

달라붙은 기사들이 급하게 거리를 벌렸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쩍!

마구 휘두르던 크발의 굵은 팔뚝에 한순간 금이 벌어졌다.

균열을 만든 것은 멀리서 리더가 날린 풍압이었다. 먼저 보낸 기사들로 시선을 끌며 마지막까지 기회를 엿보던 리더는, 적에게 균열을 만들고는 곧바로 고속으로 뛰어들며 직접 검을 휘둘렀다.

콰직!

그 일격에 크발의 오른팔이 잘려 날아갔다. 메르데스는 마치 자신의 팔이 잘린 것처럼 팔뚝을 움켜쥐며 소리쳤다.

"크발!"

쿠오!

정령은 상관없다는 듯 남아 있는 왼팔을 마구 휘둘렀다.

하지만 리더는 이미 목표를 달성했다는 듯, 뒤쪽으로 몸을 날리며 순식간에 정령과의 거리를 벌렸다.

"다시 포위 태세로! 이번엔 왼쪽 팔을 날린다!"

그리고는 움직일 수 있는 부하들에게 다시 명령을 내렸다. 동시에 세 명의 기사가 재빨리 흩어졌고, 크발은 반사적으로 몸을 회전하며 사방의 적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쿠오! 쿠오!

'방금 뭐지? 어떻게 칼로 바위를 자를 수 있어? 크발의 몸은 그냥 평범한 바위도 아닌데?'

기사에 대해 잘 모르는 메르데스는 그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카일 역시 초조한 눈으로 전황을 살피며 고민했다.

'포위 태세.... 소수의 적을 상대하는 기사들의 기본 전술이다. 하지만 대처가 전혀 안 되고 있어. 어떻게 하지? 일단 나라도 가세해서 흐름을 끊어야 하나? 아니면 이쯤에서 그냥 물러나야 하나?'

클로드는 위험해질 것 같으면 그냥 백작을 넘겨줘도 된다고 말했다. 다만 판단은 어디까지나 카일의 몫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잠시만요. 잠시만요. 죄송합니다. 잠시만 비켜주세요. 앞으로 좀 나가겠습니다. 죄송합니다. 길 좀 비켜주세요."

얼굴에 수염이 가득한 소속불명의 병사가 란텔 남작의 군대를 비집고 지나가며 성문 앞에 도착했다.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33화

10장 각성한 자들

"넌 또 뭐야!"

남작은 무심하게 옆을 지나가는 병사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병사는 개의치 않고 용병기사와 대치중인 조약돌 정령을 잠시 바라본 다음, 멀리 성문에 서 있는 메르데스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여기가 클로드 황자님이 계신다는 베리트 성이 맞습니까!"

"나는 황자님을 모시는 나이트 카일이다! 그쪽은 누구인가!"

카일이 대신 말을 받으며 소리쳤다. 병사는 거적으로 감싼 큼지막한 등짐을 바닥에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저는 리넨이라 합니다! 엘스톤 백작령에 있는 돌턴이라는 요새마을에서 수습병사로 근무했습니다!"

"...돌턴?"

"마을이 사령군에 침공을 받아 다 죽게 생겼을 때, 갑자기 황자님이 나타서 죽어가던 저를 구해주셨습니다! 그 뒤로 어떻게든 황자님께 은혜를 갚기 위해 물어물어 여기까지 찾아왔습니다! 황자님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일이라도 목숨 바쳐 열심히 하겠습니다! 제발 병사로, 아니 하인이라도 좋으니 받아주십시오!"

"아니...."

너무 뜬금없는 상황이라, 명석한 카일조차 순간적으로 뇌정지가 올 지경이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뭐라는 거야? 저 사람은 눈도 없나? 지금 싸우는 거 안 보여?'

물론 클로드에게 목숨을 바치겠다고 찾아온 사람이 생긴 게 나쁜 일은 아니지만.

하지만 급박하기 그지없는 이 순간, 외딴 변경의 일개 병사가 합류한다고 전황에 무슨 변화가 생기겠는가?

하지만 란텔 남작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클로드! 클로드! 클로드! 그 망할 클로드 황자! 그럼 네놈도 우리 가문의 적이구나! 모조리 다 죽여! 어차피 보는 눈도 없으니 수하들의 씨를 말려 버려라!"

"네!"

뒤쪽에 대기 중인 백여 명의 병사가 곧바로 무기를 세워 들었다. 그러자 리넨은 수염이 난 턱을 벅벅 긁으며 내려놓은 거적을 풀기 시작했다.

"잘은 모르겠지만... 암튼 당신들이 황자님의 적이라 이거지?"

거적에 쌓여 있던 건 길이가 1미터쯤 되는 가느다란 창의 묶음.

리넨은 열 개쯤 되는 묶음에서 아무거나 하나를 골라 집었다. 그 순간 움켜쥔 손에서 빛이 번쩍였지만, 워낙 환한 대낮이라 모두가 태양빛이 반사된 걸로 착각했다.

"내 힘은 오직 클로드 황자님을 위해...."

리넨은 기도라도 하듯 짧게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움켜쥔 창을 몰려오는 병사들을 향해 냅다 집어 던졌다.

"방패!"

전열의 병사들이 동시에 반응하며 방패를 치켜세웠다. 기사도 아닌 일반 병사가 집어던진 창 따위는 방패로 막으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그 창은 그냥 창이 아니었다.

번쩍!

전열의 방패에 충돌 하는 순간, 번쩍하는 섬광이 마치 폭발처럼 사방으로 퍼졌다.

그것은 깨진 유리조각처럼 날카로운 빛의 파편이었다.

"크아아악!"

수십 개의 파편이 꽂힌 병사들이 비명을 지르며 몸을 웅크렸다. 덩달아 뒤쪽에 있던 란텔 남작도 조그만 파편 몇 개를 뒤집어쓰고는 죽을 것처럼 절규하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아아아악! 이거 뭐야! 아파! 너무 아프다고!"

"남작님!"

덕분에 정령과 대치중이던 리더가 포위망을 풀고 몸을 돌렸다. 그 사이 한 무더기의 창을 옆구리에 끼고 있던 리넨이 한 자루를 뽑아 창대에 빛을 주입하기 시작했다.

"이게 기사인가? 엄청 빠르네?"

그리고는 달려오는 적을 향해 침착하게 창을 투척했다. 하지만 마갑의 효과도 받지 않은 일반인이 던진 창이, 평범한 기사도 아닌 무려 나이트 익스퍼트의 몸을 맞춘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

"어딜!"

리더는 스텝을 밟으며 날아오는 창을 가볍게 피했다. 하지만 회피한 순간 창날이 빛을 발하며 기다렸다는 듯 사방으로 파편을 뿌리기 시작했다.

"엇?"

그것은 빛의 폭발이었다.

혼자서 파편을 뒤집어 쓴 리더는 몇 발 더 달리지 못하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크윽.... 모, 몸이...."

"어휴, 하마터면 타이밍 못 맞추는 줄 알았네."

그사이, 또다시 새로운 창에 빛을 주입한 리넨이 쓰러진 기사의 머리통을 향해 가차 없이 새 창을 집어 던졌다.

"큭!"

리더는 고꾸라진 상황에서도 가까스로 몸을 비틀며 날아오는 창을 피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소용없는 짓이었다.

번쩍!

머리통 대신 지면에 꽂힌 창이 빛의 폭발을 일으키며 리더의 몸을 난도질했다.

물론 겉으로 보면 그저 번쩍거리기만 할 뿐, 별다른 위력은 없어 보였다.

하지만 리더는 눈을 하얗게 까뒤집은 채 입에 거품을 물고 경련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

기사와 병사는 물론이고, 심지어 팔 하나가 날아간 정령까지 모두가 숨을 죽이며 리넨을 지켜보았다.

반면 리넨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세 번째 창을 준비하며 창대에 빛을 주입했다.

"평민이 기사를 죽이면 기본이 사형이라던데.... 아냐. 황자님의 적이라면 누구든 상관없어."

"잠깐!"

모두가 꼼짝도 못하던 상황에서, 유일하게 냉정을 지키고 있던 카일이 소리를 지르며 리넨에게 달려왔다.

"그만! 이제 됐으니 죽이지 마! 황자님은 불필요한 살생을 원하지 않으신다!"

"앗! 그렇습니까?"

리넨은 화들짝 놀라며 치켜든 창을 아래로 내렸다. 카일은 리넨의 팔을 잡아끌며 자신이 있던 성문 쪽으로 이끌기 시작했다.

"이름이 리넨이라 했지? 일단 이쪽으로 와."

"알겠습니다. 기사님. 요전에 소문으로 황자님이 기사단을 이끌게 되셨다고 들었는데.... 기사님이 바로 그곳에 소속된 영광스런 분이신가 보군요?"

리넨은 카일을 향해 동경의 시선을 보냈다. 반면 카일은 엄청난 부담을 느끼며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그런데 엘스톤 백작령의 병사라고? 지금 정확한 소속이 어떻게 되지?"

"소속은 없습니다. 엘스톤을 떠나기 전에 잠시 영주님을 만나 뵐 기회가 있었는데, 사정을 설명하니 영주님도 기뻐하시며 소속을 풀어주셨습니다."

클로드는 엘스톤 백작의 은인이다. 당연히 이런 뛰어난 인재가 클로드를 돕겠다는데 쌍수를 들고 환영했을 것이다.

"그럼 지금은 군인이 아니라 그냥 일반인?"

"그런 셈입니다."

"그렇군요. 그렇다면 제가 함부로 하대할 수 없습니다.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황자님의 밑으로 오신다니 환영합니다."

"어휴. 기사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니 부담됩니다. 그냥 편하게 말씀하셔도 되는데."

"아닙니다. 그런데 방금 그 기술은 대체.... 뭘 어떻게 하신 겁니까? 창에서 빛이 폭발하고, 빛을 뒤집어 쓴 사람들이 꼼짝도 못하는데?"

카일은 정령과 대치하던 기사들이 뒤로 빠지는 걸 주시하며 질문했다. 리넨은 부끄럽다는 듯 뒷머리를 긁었다.

"실은 저도 잘 모릅니다. 그저 황자님의 은혜로 죽다 살아난 다음에 생긴 힘인데.... 아, 영주님은 이 힘이 '홀리 랜스(holy lance)'라고 하셨습니다."

"홀리 랜스?"

"그분도 정확히는 모르지만, 오래전에 이런 힘을 다루던 사람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셨다고 합니다. 대신전을 찾아가면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거라 하던데...."

"네, 네놈들! 어디 가냐! 감히 고용주인 날 두고!"

그때 정신을 차린 란텔 남작이 펄펄 뛰며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용병기사들이 쓰러진 리더를 부축해 수습하더니, 다짜고짜 뒤로 물러나며 몸을 빼기 시작한 것이다.

"이놈들! 도망치지 마! 거기 서! 거기 서라고! 감히 탈리스만 가문과 척을 질 셈이냐! 그딴 식으로 엠퍼로드에서 계속 장사할 수 있을 것 같아! 제발 돌아오라고오오오!"

용병기사들은 남작의 절규에 움찔거리며 다급히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새 카일과 상의를 마친 리넨은, 남작의 몸에 닿지 않을 정도의 위치에 창을 집어 던지며 폭발을 일으켰다.

번쩍!

"으아아아아아악! 안 돼! 저리 꺼져!"

남작은 빛의 파편이 닿지도 않았는데도 기겁하며 뒤로 빠졌다. 그리고는 여전히 성문 밖에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조약돌 정령을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빌어먹을 클로드의 종자 놈들! 다음에 보자! 탈리스만 가문은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내 반드시 다시 돌아와서 숙부님을 구하고 말겠다! 모두 퇴각! 돌아간다!"

그리고는 말머리를 돌려 부리나케 달아나기 시작했다. 혹시 몰라 새 창을 준비하던 리넨이 순간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탈리스만이라면 이 지역 영주님 이름 아닙니까? 엄청 높으신 귀족가문이라던데? 이거 큰일 난 거 같은데요?"

"...."

카일은 그것도 모르고 싸웠냐는 눈으로 리넨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옆에 있던 메르데스가 고개를 저으며 반박했다.

"큰일 날 거 없습니다. 신분으로 따지면 클로드 황자님이 탈리스만 백작보다 훨씬 높으니까요."

"오, 과연. 확실히 그렇긴 하지요."

리넨이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반면 카일은 놀랄 만큼 뇌가 순수한 이들에게,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황자라도 이번 일은 그냥 넘어가기 힘들어. 이번 일로 제국에 영향력이 큰 탈리스만 가문과 완전히 척을 지게 되었으니.... 아니, 클로드 황자님은 언제나 계획을 가지고 행동하는 분이다. 이번에도 분명 내가 모르는 믿을 구석을 숨겨 놓고 계실 거야.'

지금은 그렇게 믿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어쨌든 당장은 예상 못한 리넨의 합류로 인해 '탈리스만 백작을 최대한 오래 굶긴다'는 명령을 계속 이어 나갈 수 있다는 것에 만족할 뿐.

'그런데 백작을 오래 굶긴다고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지? 혹시 백작이 마음을 고쳐먹고 정상적인 인물로 변하기라도 하나?'

* * *

-이번 일은 감히 '미쳤다', 라는 표현을 해도 할 말이 없을 만큼의 충격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만 제국을 생각하는 클로드 황자의 뜻이 가상하고, 일의 전후를 따졌을 때 반역과는 상관없는 사건이 확실하니, 부디 처분에 관해서는 섭정 전하의 관대함을 보여 주시는 게 옳다고 생각됩니다.

-전하께서도 내심 클로드 전하를 아끼며 어여뻐 여기시는 것을 모두가 잘 알고 있습니다.

정례회의 때 보여주신 불같은 모습으로 모두에게 본을 세우셨으니, 이쯤에서 클로드 황자님을 용서하시고 연금에서 풀어주심이 어떠하신지요?

"어여뻐하기는 개뿔이!"

제스는 테이블에 쌓인 상소문을 옆으로 밀쳐 날렸다.

"그 망할 녀석을 청사자궁에 집어넣은 지 이틀밖에 안 됐어! 고작 이틀이라고!"

마음 같아서는 내란죄라도 적용시켜 목을 잘라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대신들의 여론이 클로드 쪽으로 기운 바람에 함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제스는 주먹에 피가 날 때까지 테이블을 마구 내리쳤다.

황궁에 있는 집무실이었다면 옆에 있던 파이렌이 말려주기라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자신이 거처하는 별궁의 밀실. 때문에 밖으로 소리가 샐 염려가 없었다.

치익!

순간 주먹에서 튄 피가 테이블에 닿으며 하얀 연기를 뿜었다. 정신을 차린 제스는 손수건을 꺼내 상처를 틀어막았다.

"안 돼지. 안 돼. 이건 한 방울도 낭비할 수 없어...."

제스는 붉게 물드는 손수건을 노려보았다.

피.

바로 이 피야말로, 클로드는 물론이고 황제와 황태자를 몰락시킨 독의 원액이다.

물론 제스라고 처음부터 이런 특별한 혈액을 가지고 태어난 건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평범한 축에 속했다. 그나마 머리는 좋은 편이었지만 천재 소리 들을 정도는 아니었고. 유독 허약한 몸은 건강한 형제들 사이에서 소외감을 느끼기 충분했다.

덕분에 제스는 어린 시절부터 열등감에 시달렸다.

특히 다방면으로 유능한 황태자와 항상 비교 당하는 게 문제였다.

어떻게든 눈에 띄기 위해 필사적으로 공부를 하고 지식을 쌓았지만, 황제는 성에 안 차는지 그런 자신을 조금도 봐주지 않았다.

심지어 시간이 지나자 황제는 새로 태어난 배다른 막내 황자, 바로 클로드에게 애정을 퍼붓기 시작했다.

제스의 입장에선 눈이 뒤집힐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몸이 허약한 그는 1년에 절반 이상을 침대에 누워 허송세월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제스에게, 어느 날 모든 것을 바꾼 운명의 날이 찾아왔다.

"콜록...."

그날도 한밤중에 열이 심해 잠에서 깨어났다.

목이 말라 물을 마시고 싶었다. 하지만 머리가 아프고 몸이 무거워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무, 물...."

하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아무것도 없었다.

한밤중이라 그럴까? 아니면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밖에 있는 시종들이 듣지 못한 걸까?

뭐가 어쨌든, 그것은 공포였다.

세상 그 누구도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는 공포. 심지어 자신은 가장 고귀한 신분인 황자인데도 불구하고....

-목이 마르십니까?

바로 그 순간, 처음 보는 차림의 시종이 소리 없이 다가와 물을 건네주었다.

물을 마시자 겨우 몸이 움직였다. 가까스로 침대에 걸터앉은 제스는 기묘한 차림의 시종을 보며 물었다.

-넌 누구지? 보아하니 시종은 아닌데…. 왜 그런 꼴을 하고 다니는 건가?

-저는 후원자입니다.

-후원자?

-그렇습니다. 황자님을 만나 뵙기 위해 아주 먼 곳에서 여기까지 찾아왔습니다.

자신을 후원자라 밝힌 남자는 온몸에 빈틈없이 붕대를 두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무려 '다른 차원'에서 넘어온 존재라 소개하며, 갑자기 제스의 얼굴을 손가락을 훑은 다음 자신의 입으로 가져가 핥기 시작했다.

-음. 예상대로 훌륭한 맛이군요.

-무례한.... 이게 뭐 하는 짓이지?

-실례했습니다. 일단 확인이 필요해서 말이죠.

-확인? 무슨 확인?

-그런 게 있습니다. 중요한 건 바로 지금부터입니다.

그리고는 제스가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달콤한 제안을 제시했다.

-제가 차원을 넘어 이곳에 온 이유는, 바로 황자님의 소원을 들어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소원?

-그렇습니다. 지금부터 아무 대가 없이 황자님이 원하시는 소원 세 가지를 들어드리겠습니다. 황자님은 무엇을 원하십니까?

수상하기 짝이 없었다. 세상에 대가 없는 소원이라니.

하지만 당장 고열로 머리가 깨질 것 같은 상황에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제스는 고통에 찌든 얼굴로 자신의 오랜 소원을 털어놓았다.

-내가 원하는 건 건강이다.

-그럴 거라 생각했습니다. 잠시 따끔하겠지만 참아주십시오.

후원자는 기다렸다는 듯 붕대 사이에서 투명한 관을 꺼내 들었다.

관 끝에는 날카로운 바늘이 달려 있었다. 혹시 이 자는 암살자인가? 순간 저항하려던 제스는 그냥 눈을 감고 포기해 버렸다.

이런 고통 속에서 사느니, 차라리 그냥 죽어버리는 게 좋을 지도 모른다.